Korean Article Bank

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3/12/17 (09:50) from 80.139.171.122' of 80.139.171.122' Article Number : 256
Delete Modify 김상봉 Access : 4953 , Lines : 37
주체와 주체성의 문제
서로주체성의 이념

                                                                               김상봉

주체와 주체성의 문제

서로주체성이란 주체 또는 주체성에 대한 하나의 전혀 새로운 이념이다. 그것은 주체가 본질적으로 홀로주체가 아니라 오직 서로주체 또는 서로주체성 속에서만 주체로서 존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홀로주체성이란 무엇이며 서로주체성은 또 무엇인가? 이것이 모두 주체와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이론인 한에서 서로주체성의 이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체와 주체성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주체란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생물학적인 의미의 인간 또는 개인이 아니다. 그런 한에서 서로주체성이란 인간이 샴쌍둥이처럼 언제나 두 개체가 하나로 결합해서만 자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주체는 심리학적 의미에서 개별적 의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서로주체성이란 한 사람의 의식이 다른 사람의 의식과 동일한 자기의식 속에서 융합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주체는 하나의 관계 또는 존재방식에 관한 이름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사물이 아니라 활동으로서 존재하는 의식의 관계방식에 관한 이름이다. 그것은 의식의 자기관계를 가리키는 이름인바, 주체는 오직 자기를 자기로서 의식하고 자기를 스스로 규정하며 자기를 스스로 형성함을 통해서만 진정한 의미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자기를 자기의 타자로 의식하고 자기의 타자 속에서 다시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주체의 본질에 속하는 활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성이란 그 자체로서 자기에 대하여 있음이다. 주체가 그 자체로서 자기에 대하여 있다는 것은 그것의 '밖에있음', 곧 자기-밖에-있음을 뜻하는 것이지만, 주체가 남이 아닌 자기에 대하여 있는 한에서, 그것은 또한 '곁에있음', 곧 자기-곁에-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기거리는 곧 자기복귀이다. 자기로부터 멀어짐과 자기에게 되돌아감이 공속한다는 역설 속에서 주체는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의미의 개별적 인간이나 심리학적 의미에서 개별적 의식이 언제나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주어진 사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실현해야 할 하나의 과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는 사물적 존재가 아니라 활동인 것이다.

서양정신의 홀로주체성

그러나 나는 언제 주체로서 존재하게 되는가? 서양철학은 이 물음에 대해 두 가지 방식으로 대답했다. 첫째로 그들은 순수한 자기관계가 주체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즉 주체성의 본질이 자기반성이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독일관념론자들에 의해 극단까지 전개되어 그들은 의식의 자기반성을 신의 절대적인 자기반성으로 고양시켰다. 이처럼 반성이 절대화될 때, 그것은 절대적인 자기관계로 파악될 뿐이다. 여기서 타자는 원칙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 타자는 오직 나 속의 타자, 나에 의해 정립된 내재적인 타자로서만 존립근거를 가진다. 그리하여 나는 오직 나 자신과 반성적으로 관계함을 통해 내가 되고 주체가 된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처럼 오직 순수한 자기관계 속에서 정립되는 주체의 이념을 가리켜 우리는 홀로주체성이라 부른다. 그것은 내가 오직 나 홀로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후설의 현상학은 반성적 자기관계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지향성 속에서 의식과 주체성의 본질을 찾으려 했다. 지향성의 의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의식이 자기 자신에 대한 고립되고 폐쇄적인 관계가 아니라 세계를 향한 개방성 속에서 자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서양철학이 보여주는 주체에 대한 두 번째 이해방식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많은 사람들은 지향성 개념을 통해 근대적 의식철학의 자기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지향성 개념에서 사유되고 있는 타자와 세계란 결코 인격적 타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의식이 오직 타자에 대한 지향성을 통해 자기가 된다는 말은 그것이 인격적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자기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대상과의 관련성 속에서만 의식이 발생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반성을 말하든 지향성을 말하든 서양철학이 이해한 주체는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나와 그것 사이의 인식적 관계에 존립한다는 점에서 타자 없는 홀로주체로 이해되어 있는 것이다. 후설은 이러한 의식이론의 한계를 절감하고 상호주관성(Intersubjektivit t) 의 개념을 도입하기는 하였으나 이 개념은 애당초 현상학의 방법론적 나홀로주의(solipsism)에 대한 비판적 반성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내가 왜 세계 내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체들과 더불어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를 해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내가 언제나 다른 주체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 즉 나와 타자의 같이 있음(Mitsein)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진정한 의미의 서로주체성에는 미치지 못하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서로주체성의 이념

서로주체성이란 내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존재한다는 자명하고도 당연한 상식적 통찰에 철학적 개념의 옷을 입힌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오직 너를 통해 그리고 너와 더불어서만 주체로서의 내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통찰을 위한 개념이다. 오랫동안 주체는 나 또는 자아(ego)와 교환가능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말하자면, 주체가 단수 1인칭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단수로 이해된 주체, 다시 말해 자기 홀로 주체로서 존립하는 낱낱의 개별자가 바로 홀로주체이다.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이렇게 단수 1인칭으로 표현되는 홀로주체가 불가능하며 주체는 오직 내가 너와 함께 이루는 '우리'의 서로주체성 속에서만 발생한다는 것을 지시한다. 철학자들 역시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인 개별자와 심리학적인 의식현상을 주체와 동일시하는 습관에 젖어 있기 때문에, 사물적 존재의 차원에서 인간이 몸과 마음 모두에 있어서 타자와 일심동체가 될 수 없는 구별된 개별자로서 존재한다는 사태로부터 주체 역시 언제나 고립된 홀로주체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왔다. 그러나 주체는 사물적 존재가 아니라 오직 주체성으로서만 발생한다. 주체란 내가 나 자신 및 세계와 맺는 어떤 관계를 표시하는 이름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나 자신은 물론 세계와 주체적으로 관계 맺기 위해,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우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홀로주체인 나는 서로주체인 우리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너와 더불어 우리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내가 되지 못한다. 이것이 서로주체성이 말하려는 가장 근원적인 통찰이다. 생물학이나 심리학의 차원에서는 내가 우리에게 앞서는 토대가 되지만, 주체의 가능근거를 사유하는 선험론적 지평에서는 우리가 나에게 선행한다. 나와 너의 만남이 없는 곳에 내가 사물적으로 먼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내가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가 아니라 언제나 너와 함께 서로주체인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서로주체성의 이념이다.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나는 오직 너와 함께 서로주체성 속에서만 주체인 내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을 해명하는 것은 이후로 서로주체성의 철학이 전개해야 할 과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만 서로주체성의 기본적 의미와 그 이념이 가진 철학적 함의만을 간단히 언급하는데 그쳐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한 번도 온전히 주체로서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고 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서양정신은 본질적으로 타자 없는 나르시스적 자기관계 속에서만 내가 온전히 주체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쳐 왔다. 우리는 주체성 없는 자기상실의 길과 타자 없는 홀로주체성의 길 사이에 서 있다.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이 두 길을 모두 거부한다. 그것은 나와 너의 만남 속에서 나와 네가 더불어 참된 주체가 되는 길을 걸으려는 시도이다. 그것만이 적대적 대립과 파멸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길이라고 우리가 믿기 때문이다.



in [연대대학원신문]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