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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3/12/21 (21:59) from 80.139.169.75' of 80.139.169.75' Article Number :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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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間)문화적 세계관을 향한 조망



간(間)문화적 세계관을 향한 조망


윤철호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신학박사 장로회신학대학 교수


영문요약

Toward A Cross-cultural Vision of Reality
Collected Papers on Christian Language Culture, This essay is aimed at pursuing the fusion of horizon through a cross-cultural dialogue in order that Christian faith in and thought about God and God's relation to the world may be deepened and expanded on the horizon of the universal world in this contemporary global age. For this cross-cultural communication and fusion of horizon, it will be presented that Whitehead's process philosophy and Korean ‘Han’ thought provide excellent mediation concepts and insights for the cross-cultural dialogue, by which a vision for the new communication of the meaning of our universal God-relationality will be investigated and stimulated. (Presbyterian College and Theological Sem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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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머리말
이 글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과,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성에 대한 우리의 신앙과 사고를 오늘날 지구촌시대의 보편적 세계의 지평에서 더욱 새롭게 확장ㆍ심화시키기 위하여 간 문화적인 대화에 의한 지평융합을 시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쓰여졌다. 그리고 이러한 간 문화적 의사소통과 지평융합을 위하여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과 한국의 ‘한’ 사상이 통전적인 세계관을 위한 탁월한 간 문화적 매개의 개념과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이를 통하여 우리의 보편적인 하나님-관계성(God-relationality)의 의미를 새롭게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조망하고자 한다.

적어도 서구의 사상 속에서 주체-객체의 구조는 실재의 조망을 위한 기본적인 인식론적 틀이다. 현대의 서구문화에서는 자아의 주관적인 측면이 실재의 경험을 위하여 더욱 결정적인 것으로 중요시되었다. 그러나 주체와 객체, 주체와 주체 사이에 서양과 같이 분명한 자아의 경계를 설정하지 않는 전통적인 아시아의 공동체적 문화에서는 이러한 자아 중심적인 태도 자체가 문제시된다. 특별히, 불교에서는 그러한 견고한 자아경계선이 바로 세계ㆍ실재, 또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직관을 한정하고 방해하는 요인으로 여겨진다.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른 삶의 세계와 실존의 구조 속에서 상이한 존재론적 전망과 인식론적 패러다임을 발전시켜 왔다. 이것은 인간의 실존과 이해의 역사적 유한성과 상대성에 기인하며 또한 그것을 잘 보여준다. 만일에 우리가 종교인으로서 우리의 역사적 한계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우리의 종교적 신앙을 인간의 공통적 삶의 경험의 전체성을 위하여 명료화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지속적인 변증법적인 대화의 과정에 참여하여야 한다. 이러한 바람은 한 사회가 자신의 문화와 종교를 향하여 갖는 “우상”에 의해 또는 생소한 문화와 종교를 갖는 다른 사회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에 의해 종종 좌절된다. 예를 들면, 민족적 유신론을 믿는 일본의 신도(神道)는 침략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국가주의를 정당화해 왔으며, 유럽과 북미의 유대-기독교적 문화종교 역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기능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족적ㆍ국가적 우상을 치료하기 위한 자원은 시내산 전통에서 뿐만 아니라 “불교와 유교의 탁월하게 심미적이고 공동체적인 삶”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존재들을 향한 공감적인 동료 감정(compassionate fellow-feeling)”에서도 발견되어진다1) . 소위 지구화시대라고 불리는 오늘에 있어서 분리되고 충돌하는 우리의 세계를 화해시키고 조화시키기 위한 변증법적인 종합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점증하고 있다.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상호보완적인 통합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그 좋은 예이다. 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양육한 자신의 문화적ㆍ종교적전통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종교인들은 자신을 형성한 전통 안에 설 뿐만 아니라 그 전통 밖에 동시에 섬으로써 오늘날의 간 문화적ㆍ간 종교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종교적 신앙과 세계관을 서로 의미있게 의사소통할 수는 없을까? 이것이 이 글에서 탐구하려고 하는 중심주제이다.

2.가다머의 해석학
가다머의 해석착적 통찰력은 이러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중요한 도움을 제공해 준다. 그에 따르면 만일 해방적인 숙고(emancipatory reflection)가 궁극적이고 자유롭고 합리적인 자기소유를 성취하기 위하여 지속적인 해방의 과정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완결적인 숙고(completed reflection)의 관념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공허하고 비변증법적이 될 것이라고 한다. 여지서 지속적인 해방의 과정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끈으로부터 풀려나서 새롭게 형성되는 정당성에 자신을 결속시키는 과정을 말한다2) . 그가 말한 대로 우리의 유한하고 역사적으로 조건되어진 정신에 있어서 완결적 숙고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전통의 안과 그 너머에서의 변증법적인 대화의 과정 안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전통을 절대화하려는 시도를 포기할 수 있게 해 주는, 우리 자신의 전통에 대한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전통은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 온 것에 대한 변호가 아니라 도덕적ㆍ영적 삶의 지속적 창조이다3) .” 오늘날의 지구촌시대에 이러한 지속적인 창조는 다양한 전통들 사이의 대화의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서구전통의 형성적(formative) 힘을 일관되게 강조하였던 가다머가 이러한 사고를 표명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해란 무엇보다도 전통의 사건 안에의 참여라고 강조하였다4) . 해석이란 전통의 운동과 해석자의 운동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그러나 해석자는 이미 자신이 해석하는 전통에 의해 조건 지워진다. 아무도 자신의 형성적인 전통과 상호작용을 함에 있어서 완결적인 자기지식을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완전하게 자기 의식적인 초월적 자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적이 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지식이 결코 완결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자기지식은 역사적으로 미리 주어진 것으로부터 생겨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주관적인 의도와 행동의 밑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전통을 이해하기 위한 모든 가능성을 선 규정하고 한정하기 때문이다5) .

잘 알려진 가다머의 “지평융합”으로서의 이해에 대한 정의는 전통의 형성적 힘과 해석자의 유한한 자유로운 창조성 둘 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왔다. “지평”이란 사고가 그 속에 묶여 있는 유한한 결정성의 방식을 나타내며, 동시에 전망의 시계(視界)가 점차적으로 확장되어지는 방식을 성격 짓는다. 해석학의 역사적 과제는 그것〈과거의 지평〉으로부터 전통 안의 텍스트가 말하는 과거의 지평을 탐구하되, 완결적인 자기지식의 닫혀 있는 〈닫혀 있다고 여겨지는〉 동시대적인 지평을 향하여 텍스트가 무엇인가 참된 것을 말한다는 주장을 부인하지 않고 탐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전통을 객관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객관화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닫혀져 있는 지평 안에서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역사적 계몽주의의 꿈은 불가능하다.

과거의 지평은 언제나 움직이며 역사적 의식 안에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역사적 의식이 향하는 우리 자신의 과거와 다른 사람의 과거는 이 움직이는 지평…, 언제나 그 지평으로부터 인간의 삶이 존재하며 유산과 전통으로서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지평을 형성하는 것을 돕는다6) .” 우리의 현재의 지평은 우리가 우리의 “편견”을 검증함에 따라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과정 안에 있다. 가다머는 편견에 대한 계몽주의의 태도 자체가 편견이라고 본다7) . 우리는 우리의 어느 현재에 있어서 과거로부터 부여받은 선 판단들인 태도ㆍ가치, 그리고 위임없이 단순히 우리의 현재적 지평을 형성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현채의 역사적 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편견을 검증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우리의 과거로부터 구별하게 해 주며 우리로 하여금 부분적으로 우리의 과거를 초월하도록 허용한다. 따라서 어느 현재의 역사적으로 영향을 받은 의식〈영향사 의식〉 안에서 우리가 도달하는 이해는 “과거와 현재의 지평융합”이라고 표현되어 질 수 있다8) .

하이데거는 오늘날의 서구인들에게 존재의 시간과의 현상학적 관계성을 자세하게 설명함으로써 그들의 유한성과 역사성을 인식하게 해 주었으며 따라서 주체에로의 전환의 문제점을 인식하도록 해 주었다9) .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의해 조명되어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데카르트적인 “인식 자아”(cogito)나 칸트척인 “선험적 자아”(transcendental ego)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현존재”(dasein, 거기에 있음, 실존)의 사실성 안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존재와 존재들 사이를 구별짓는 “거기”(da)가 있기 때문에 이해의 가능성을 갖는다. 가다머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훗셀의 현상학의 “실증주의”에서 “미해결된 형이상학의 문제” 즉, 사변적인 관념론에 의해 인식 되어진 정신 또는 영의 개념을 보았다. “사실성의 해석학”(hermeneutics of facticity)을 정초함에 있어서 그는 고전적인 관념론에 의해 발전된 정신의 개념과 현상학적 환원에 의해 순수하게 되어진 선험적 의식의 명제를 넘어섰다10) .

역사적인 조건 지워진 자신의 유한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종교인에게 있어서 미해결된 형이상학의 문제는 어떻게 우리와 하나님의 관련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의미를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의 상대적이고 역사적인 경험 속에서 보편적인 하나님의 관계성의 의미를 이해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길이 있는가? 18세기 이래로 서구에서의 주체에로의 전환은 간 문화적인, 특히 아시아 문화와의 의미의 소통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가다머는 우리의 유한하고 역사적으로 조건 지워진 정신에게는 완결적 숙고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하였다. 만일 유한한 주체로서의 우리에게 완결적 숙고가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주체성을 재인식하여 우리와 보편적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명료화하는 변증법적ㆍ대화적 과정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숙고의 합리적 근거로 남아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숙고의 능력을 제한하고 초월하는 실재로서 인식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합리성을 지지할 수 있는 종교적 희망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보편적인 관계성을 전망하는 간 문화적 실재의 조망에 있어서는 인간과 문화의 개별성은 극복되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포함되어져야 한다.

3.아시아의 종교와 문화의 지평: 미분화된 심미적 연속체 경험
노스롭(F. S. C. Northrop)은 아시아 문화의 간 문화적이고 간 종교적인 성격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인상 깊은 시도를 한 서구의 학자이다. 그에 따르면, 서구에서 문법적인 구문(構文)에 의해 조직되어지고 문자적으로 지시된 함축적인 관계는 직접적인 경험에 최소한도로 의존하면서 이론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반대로, “동양의 천재성은 오직 경험되어짐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사물의 본성의 부분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집중시키는 인식유형의 발견에 있다11) .” 그에 따르면, 중국과 일본언어의 표의(表意)문자는 대체로 직접적으로 경험되어지는 것을 표시하며 그 구문은 표의적 상징들을 그것들이 직접적인 경험 안에서 연상되어지는 방식으로 구조화한다. 이러한 까닭에 동양에서는 단지 어떤 사람에 의해 말해진 언술이나 출판된 작품을 듣거나 연구함을 통해서는 그가 말하고 있거나 기록하는 바를 결코 이해할 수 없으며, 우리는 이와 더불어 직접적으로 이해하고 경험하여야 하며, 그리고 그것들이 말하는 바를 묵상하기 위하여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12) .

유교에서 인격적으로 경험되는 심미적 관계성은 세 가지 덕목으로 이루어지는데, 지(智; 지혜), 인(仁; 자비ㆍ인정), 그리고 용(勇; 용기)이 그것이다. 인 또는 자비, 인정은 다른 덕들에 앞서 요청되는 중심적인 덕이다. 인은 우선적으로 가족의 관계 안에서 실현되어지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본성 자체 안에 있는 요소이다.

도교에서는 인이 보편적 존재론적으로 인식된다. 인으로 표현되는 관계적 존재의 실재는 인간에게서 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 안에서 발견된다.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인은 또한 도(道)이다. 도는 인간과 자연 모두를 포함하는 전체를 포괄하는 존재의 모습이다13) .

그러나 도는 서구의 경험주의자들의 경우처럼 어느 특정한 감각경험에 집중함으로써 인식론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도는 서구의 지배적인 경험과 사고의 형태와는 대조적으로 노스롭이 표현한 바와 같이 “미분화된 심미적 연속체”(undifferentiated aesthetic continuum)의 형태로 직접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인식된 심미적 연속체를 서구의 과학과 철학에 의해 가정된 외적인 공간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심미적으로 주어진 자아와 심미적으로 주어진 자연대상 사이에는 상이성과 더불어 동일성 또는 하나 됨이 있다. 그것들은 단지 서로 다른 것일 뿐 아니라, 하나의 전체 포괄적인, 직접적으로 인식된 심미적 연속체의 분화(分化)이기도 하다14) .

아시아의 경험에 있어서 전체 포괄적인 연속체 또는 복합체는 직접적인 경험 안에 있는 분화일 뿐 아니라, 그 경험의 본성의 내용이기도 하다. 모든 관계성 안에서의 자비, 또는 인의 기초가 되고, 또 모든 인간관계 안에서의 인정의 기초가 되는 것은 이러한 경험 안에 주어진 하나 됨의 경험이다. 이것은 단어와 언어의 이론적인 구성을 통하여서가 아니라, 오직 그 직접성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서만 올바로 인식된다. 따라서 주어-술어의 구문형태를 통해서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가 적절히 표현되어질 수 없다. 그것은 전체를 포괄하는 연속성 안에서 경험되어야 한다. 여기에 왜 심미적 경험이 유교와 도교의 종교적 도덕적 삶의 기초여야 하는가 하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일반적으로 심지적 연속체를 미분화적인 것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적어도 부분적으로 분화된 것으로 경험한다. 그런데 인간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경험의 형태 속에서의 분화는 언제나 시간적인 것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사멸하는 것이다. 오직 연속체만이 상존한다. 우리가 시간적인 관계성 안에서 심미적ㆍ감정적으로 사랑스러운 것,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경험하게 될 때, 비분화적인 심미적 연속체의 인식을 계발하는 일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비결정적인 직접성을 열반(涅槃)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서구인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단순한 무(無)가 아니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적ㆍ심미적으로 가장 풍요한 경험을 의미한다. 그것은 생멸(生滅)하는 사건과 관계의 일시성 안에서 경험되는 시간이 단지 무라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존재론과 인식론은 평온하고 잔잔한 호수 위의 물결의 비유에 의해 잘 표현된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심미적으로 아름다운 전경의 분화 안에서 경험되는 것과 같은, 물결과 같이 생멸하는 현상세계의 사건과 관계성은 단지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들은 일시적일 뿐이다. 이 일시성의 비극은 이러한 불가피하게 일시적이고 시간적인 현상들을 붙잡거나 지배하려는 우리의 소유욕에 있다. 불교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고통의 근원은 욕(慾)에 있으며, 이 욕의 인식론적ㆍ존재론적 근원은 영속적이고 고정적 실체로서의 자아관념과 그 자아중심적인 관점에서의 대상에 대한 집착 또는 배척에 있다15) .

아시아의 현자들은 객관적인 감각ㆍ지각 안에 떠 오르는 분화를 제거하고 욕을 감소시키는 노력을 통하여 고통과 비극으로부터 벗어나는 지복을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유형의 경험은 외적인 대상과의 관계에서 욕의 근원인 자아중심적인 관심의 초점을 감소ㆍ제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무제한적이고 미분화된 연속체의 직접성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이 무아의 실현을 통한 열반이다.

4.아시아와 서구의 지평융합
이와 같은 아시아의 전통과 유사한 종교적 경험의 형태가 서구전통에서 전혀 없지는 않다. 샤르뎅(Pierre Teilhard de Chardin)이 이와 유사한 인식론적 경험과 존재론적 숙고를 하였던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피상적인 방식의 밑을 들여다 보면, 의식 안에 좀처럼 출현하지 않고 제대로 의식되지 않는 익명의 존재(Unknown One)를 감지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자신의 그늘진 밑바닥을 들여다 보면, 이 익명의 존재의 형체가 세계의 얼굴과 융해되는 것처럼 보인다. 샤르뎅은 자신의 개별적 자아와 우주와의 “접촉의 격렬함과 사로잡는 힘”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종교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우리 안에 나타나는 것이 위대한 우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16) .

하지만 샤르뎅의 경험의 서구적인 특징은 활동에 대한 그의 관심과 강조에 있다. 이것은 활동적으로 표현을 향하여 움직여 가는 보편적인 실재에 대한 감지이다. 이것은 노스롭이 말하는 “미분화적인 심미적 연속체”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분화를 향하여 움직여 가는 우주, 다시 말하면 더욱 큰 복합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 가운데 있는 우주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실재를 경험하는 깊은 의식의 차원에는 우리가 우주와 인간성 안에 참여한다는 느낌이 있다. 그리고 우리 인격을 사로잡으며 인격을 통하여 활동하는 내면의 창조성이 있다.

이러한 샤르뎅의 종교적 경험에는 창조된 질서 또는 우주의 질서화에 대한 전통적인 서구의 선입견과 우주 안에서의 진화적인 과정에 대한 최근의 과학적 선입견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러한 우주에 대한 감각과 경험과 아시아의 문화와 종교의 그것 사이에는 유사성과 상이성이 함께 있다. 샤르뎅도 아시아인들처럼 우주에의 참여의 무기력함과 흥분, 고뇌와 황홀을 모두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그는 자신이 인격적으로 더욱 연약하고 상처받기 쉽다고 느낄수록 우주는 더욱 활동적이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더욱 의식할수록 하나님은 더욱 더 우리를 통하여 활동하신다... 이제 나의 인격의 베일이 얇아지기 시작할 때(왜냐하면 내가 그처럼 연약하다고 느껴지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로잡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17) .

하지만 노스롭은 활동성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동양과 서양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아시아인들이 경험하는 바와 같은 “비분화적인 심미적 연속체”는 인간의 자유를 위한 진정한 기초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동양의 사고에 있어서 자유는 사물과 인간의 미결정적인 본성의 부분에 근거하고 있으며 따라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결정성을 위한 잠재성에 근거하고 있다. 일찍이 동양의 현자가 본 바와 같이, 그리고 자유를 결정화된 실체로부터 이끌어 내려는 시도가 실패한 후에 서구인들이 입증한 바와 같이, 만일 모든 실제가 결정화되어 있다면 우리는 인간의 자유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아시아의 현자의 주장에 따르면 만일 우리가 오직 분화되고 특수하게 감지되고 결정화된 우리 자신과 사물의 부분만을 표현한다면 우리는 무자비한 운명의 수레 안에 갇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증할 때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다. 즉, 오직 자신의 본성의 비결정적이고 전체포괄적인 영역으로서의 요소를 인식함에 의해서만, 그리고 그것이 허용하는 창조성을 표현함에 의해서만, 인간이 자유를 획득한다는 것이며, 그러나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아와 다른 사물들의 일시적이고 분화적인 부분의 오고-감(생멸)에 관련하여서도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18) .

여기서 불교인이나 도교인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활동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창조적인 자유의 역동성이 비결정적인 우주 안에의 참여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우주 안에의 직접적인 참여를 경험하고 표현하는 이와 같은 서구와 아시아의 유형들을 비교하고 대조해 보면, 유사성과 상이성이 함께 드러난다. 전체포괄적인 연속체 또는 우주에의 참여의 직관적 직접성과 이에 따르는 분화적이고 경험적이고 합리적인 자아의 경계의 축소 또는 상실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유사하다. 주체성이 전적으로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방식으로 명백하게 고양되는 반면, 주체와 분화된 객체 사이의 분리는 극복된다. 자연 또는 우주와의 하나됨이 경험된다. 이것을 서구의 종교인들은 하나님과의 화해(atonement, at-one-ment)라고 표현한다.

유사성 안의 상이성도 동일하게 중요하다. 서구인들은 이러한 경험을 기술하고 이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좋아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무력해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전통은 사람들이 우주에의 자신들의 참여를 직관할 때 조차도 분화적인 경험에 대한 논증적이고 체계적인 명료화를 가치 있게 여기도록 학습시킨다. 더욱 근본적인 차이점은 활동성에 대한 서구인들의 가치평가와 활동에의 욕망에 있다. 노스롭은 도교의 무위(無爲), 즉 행동 없는 활동을 비결정적이고 전체포괄적인 우주 안에 근거하는 존재로 해석하였다. 이것만이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점은 바로, “아직 비결정적인 것의 결정화를 위한 잠재성”을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였다.

샤르뎅은 자신의 창조자 하나님의 활동에의 참여를 직관함으로써 활동을 향한 자신의 서구적 욕망의 유한한 한계성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발견하였는데, 여기서 창조자 하나님의 활동은 시공 안에서의 과정을 위하여 출현하는 결정화된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다. 자신의 유한함의 일시성에도 불구하고 활동적인 창조, 동역자가 되고자 하는 샤르뎅의 욕망은 우주에 대한 그의 경험 안에서 긍정되어진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없음을 더욱 의식할수록 더욱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 듯하다.” 이것은 명백히 욕망에 대한 불교적인 경험과 가치판단과 대조된다.

노스롭은 미분화적인 심미적 연속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욕망이라는 핵심적인 문제, 특히 불교에 있어서의 욕망과 무욕 사이의 변증법의 문제를 간과하였다. 아시아인에게 있어서 열반은 단지 긍정적인 심미적 경험이 아니라, 욕망이 제거될 때 결과적으로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19) . 석가는 카스트 제도의 굴레와 윤회의 바퀴에 속박된 것으로 자신들을 인식했던 사람들을 위한 구원을 제공하고자 하였다.

석가의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20) 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황홀경으로서의 구원의 방편이다. 그러나 소극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고통의 길인 탐욕과 욕망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따라서 동양의 신비주의는 동양과 서양 사이의 더욱 심오한 차이, 즉 욕망을 배격하는 사람들과 욕망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증후이다21) . 사제는 생의 고통이 오직 그 원인인 욕망의 과정을 단절함으조써만 끝날 수 있다는 명제를 표현한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은 본래 산스크리트어로 본질적으로 “욕망이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부정적인 의미가 그것에 대한 긍정적인 심미적인 의미와의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반드시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마도 석가 당시의 일반적인 절망스러운 가난과 고통의 경험이 열반의 의미의 부정적인 차원을 더욱 강조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동서양의 간 문화적이고 간 종교적인 대화에 있어서 핵심적인 주제는 어떻게 욕망의 의미와 욕망의 충돌을 해석하고 해결할 것인가에 있다. 노스롭은 자신의 서구문화가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그 역사를 고찰하고, 서구의 파괴적인 욕망의 점증하는 횡포를 치유할 수 있는 원리를 동양의 미분화적 경험의 기층에 대한 직관에서 발견했다22) . 노스롭과 다른 많은 서구인들은 서구인의 개인주의적이고 소유적인 욕망에 대한 답변으로서 석가가 제시한 것, 즉 우리는 자기의 욕망의 대상에 의해 만족되어지기를 요구하는 자아를 우리 자신에게서 몰아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한다.

하지만 대안적인 답변은 아브라함의 종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샤르뎅의 사상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이 신앙에서 핵심적인 것은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을 믿는 서구의 전통 안에 기초한 창조성에 대한 이해이다. 문즈(Peter Munz)는 오늘날의 서구문화를 뒤 덮고 있는 탐욕과 충돌에 대한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예언자적인 신앙과 하나님과의 동역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인식에 담겨져 있다. 그것은 말한다. 세상은 매우 끔찍한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개선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협동하여야 한다... 그리고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세상을 창조한 선함은 본유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선함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라도 모든 악과 공포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믿은 신앙이다23) .

문즈는 아시아적 관점에 대한 대안으로서 어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창조성이라고 표현하는 바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중심적인 기독교 경험으로 적절하게 재진술한다. 하나님의 창조성 안에서 예수의 십자가의 비극에 나타난 우리 인간의 역사적인 업보(業報)의 비극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랑에 의해 변혁되어진다. 요한 1서 4:18절의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는 말씀은 기독교의 “심미적” 경험의 중심을 표현한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은 과연 유익이 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그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으며 둘 다 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전통을 적대적으로 단절시킴으로써 아시아로부터 기독교의 하나님 관계성의 의미에 관한 그 무엇을 배운다는 것이 창조자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계 안에 들어 있는 의미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참으로 이 두 지평의 융합은 매우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창조상의 의미에 대한 기독교적인 경험과 이해를 향상시킬 수도 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창조성과 동역하거나 봉사하고자 하는 유대 기독교적인 욕구를, 심지어 때로는 세속화된 형태를 취하는 욕구도 부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자연과 다시 화해하고, 그리고 깊이 분열된 인간성과 다시 화해하려면 자신들의 과도한 욕망을 제한하여야 한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분열의 많은 경우는 서구의 정치적ㆍ경제적 식민주의의 악마적인 소유욕으로 말미암아 초래되었다.

5.두 가지의 간 문화적 매개 개념
5.1.화이트헤드의 범재신론적 형이상학
간 문화적인 세계관의 의사소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매개적인 개념들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금세기의 초에 상대성 이론은 서구의 과학 이해를 절대적인 물리학적 실체로서의 세계로부터 감각경험의 구조로서의 세계관으로 전환시켰다. 플랑크의 양자 물리학과 하이젠베르그의 비결정성의 원리는 서구과학으로 하여금 모든 우리의 현상적 경험의 밑에 있는, 표현할 수 없는 에너지 사건 또는 파동의 기층을 인식하도록 해 주었다. 따라서 주체-객체 관계성에 대한 예전의 서구의 관점에서와는 달리 오늘날 서구의 과학과 철학은 자체의 발전을 통하여 동양의 관점과 훨씬 더 가까워졌다. 비록 아직도 서구인은 아시아인들이 생각하기에는 직관보다는 지나치게 개념에 의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간 문화적인 의미의 의사소통을 위한 좋은 개념적인 매개를 제공하고 있는 서구의 대표적인 철학자는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이다. 화이트헤드는 서구의 인식론이 매우 추상적이고 파생적이고 제한된 2차적 순서의 경험(그는 이것을 “현재적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의 형태의 경험”이라고 부른다)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비판하였다. 보다 더 원본적인 경험의 형태는 모호하지만 더욱 기본적인 의식 이전의 또는 의식 하부의 느낌(파악, prehension)이다. 그는 이것을 “인과적 유효성(causal efficacy)의 형태의 경험”이라고 부른다24) . 현재적 직접성의 형태로서의 데카르트적인 선명하고 명백한 관념은 한 주체의 합생(concrescence)에 있어서의 인과적으로 유효한 자료들에 대한 총칭적인 느낌(prehension)으로부터 추상화된 것이다. 인과적 유효성으로서의 경험을 되살리려고 하는 화이트헤드의 노력은 “직접적인 경험”에 접근하지 못하는 서구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현대의 〈서구의〉 철학은 주어와 술어, 본체와 속성, 특수와 보편의 관점에서 세계를 기술하는 난제에 매달려 있다. 결과는 언제나 우리가 우리의 행동ㆍ희망ㆍ공감ㆍ목적 안에 표현하는 직접적 경험, 그리고 그것을 말로 분석하기 위한 관용구가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라 향유하는 직접적 경험에 대한 폭행이다. 정통적 〈서구의〉 철학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우리에게 오직 각기 환영적인 경험을 향유하는 고독한 실체만을 소개해 줄 수 있지만, 우리는 동료 피조물들의 민주주의의 한 가운데에 왁자지껄한 세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25) .

화이트헤드가 우리의 기본적인 경험을 “왁자지껄한”(buzzing) 세계의 파악으로서 성격을 규명할 때, 그는 경험의 ‘분화된’(differentiated) 성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주어진 순간에서의 우리 자신인 에너지사건의 합생을 향하여 무수한 에너지 사건들(양자)이 제공하는 다양한 형태의 결정성의 효력들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 경험은 분화된 ‘연속체’(continuum)이다. 왜냐 하면, 실재는 정신적인 것이든지 물질적인 것이든지 사실체가 아니라 유기체이며, 이 유기체 안에서 각각의 현실적 사실체(actual entity)는 다른 현실적 사실체들의 종합에 의해 구성된다. “한 실체는 다른 주체 안에 현존하지 않는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구(이 사상이 서구철학과 과학의 주체-객체 이원론의 저류이다)와는 대조적으로, 그리고 정신적 실체로서의 인식자아(cogito)와 연장된 실체로서의 세계 사이를 가르는 데카르트의 이원론과는 대조적으로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형이상학을 유기체 철학으로 규정한다. 이 유기체적인 실재의 조망에 있어서 한 존재는 다른 사실체 안에 현존한다. 그리고 “한 현실적 사실체가 구체적인 것은 그것이 우주의 특수한(particular) 합생이기 때문이다26) .” 따라서 인과적 유효성으로서의 주된 형태 안에서의 주체의 경험은 언제나 “특수한 우주의 합생”으로의 “분화된 보편자”에 대한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범재신론적 철학에서 신은 완전하고 구쎄적인 “분화된 보편자”이다. 우리의 우주를 질서화하고 해석하는 형이상학적 원리의 지고의 범례(exemplification)로서 신은 전체우주의 유일한 완전한 합생이다. 다른 모든 유한한 현실적 사실체들은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무수한 에너지들로부터 주관적으로 집중된 결정성의 형태들을 추상화하고 제거(부정적으로 파악)하기를 요구함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한정된 통일체를 종합한다. 따라서 유한한 주체로서 우리는 다른 현실적 사실체들의 주체적 통일성으로부터 추상화함으로써 대상화한다. 오직 신만이 “귀결적 본성”(consequent nature) 안에서 모든 현실적 사실체들의 완전한 합생을 파악한다. 따라서 물리적 극 안에서 신만이 완전하고 구체적인 “분화된 보편자”이다.

그러면 도교와 불교에서 경험하는 “미분화적 보편자”는 어떻게 되는가? 화이트헤드의 용어에 있어서, 이것은 신의 정신적 극 또는 “원초적 본성”(primordial nature)으로서 “절대적인 잠재성의 부요함에 대한 무제한적인 개념적 실현”이다. 여기서 신은 창조성과 신기성의 비결정적인 근거와 원천으로서 “구체화의 원리”이다. 이것은 노스롭이 동양의 관점을 표현하여 “아직 결정화되지 아니 한 것의 결정화를 위한 잠재성으로서의 비결정성”이라고 말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욕망에 대한 확증의 문제이다. 화이트헤드는 신의 개념적 느낌의 주체적 형식이 비결정된 잠재성을 결정화시키는 현실화를 향유하는 일을 포함하는 것으로 조망한다. 따라서 신은,

느낌을 위한 유인이며, 욕망의 영원한 동인(動因)이다. 세상 안에서의 조건 지워진 자신의 관점으로부터 각기의 창조적 행위가 출현할 때, 이것에 대한 신의 특수한 관계성은 각기의 주체적 목적의 시초적 단계를 수립하는 원초적인 ‘욕망의 목적’을 신 안에 구성한다27) .

그렇지만 욕망에 대한 서구종교의 긍정은 꼭 “불가피하게 도덕적인 추동력”의 형태를 취할 필요는 없다. 화이트헤드는 “도덕적 에너지의 인격화로서의 신의 이미지”를 거부하고 사랑의 이미지로서의 신을 긍정한다. 신은 비록 도덕적인 추동력으로서 라고 하더라도 “생산적인 힘을 생산적인 힘으로 대적하지” 않는다. 반대로 신은 세계의 시인처럼 진리와 미와 선에 대한 비전에 의해 부드러운 인내로서 세계를 인도한다. 이것은 도교의 “행위 없는 행위(無爲)”를 가능케 하는 “미분화된 그러나 완전한, 하늘과 땅이 있기 이전에 존재하는 것28) ”으로서의 도의 개념과 훨씬 더 밀접하게 통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전체, 즉 구체적으로 감수성이 강하고 대화적이고 상호적인 교호작용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취하는 전체 안에의 감정이입적인 참여의 기초 위에서 활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미분화된 전체는 그러한 활동을 통하여 분화를 향하여 움직여 나아가는 것으로 우리는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화이트헤드의 분화적이고, 관계적이고, 생성적인 보편자의 모델 개념은 기독교의 하나님 관계성의 간 문화적 의미를 위한 인지적인 매개로서 유용하다. 화이트헤드의 범재신론적이고 유기체적인 형이상학은 우리가 창조적으로 참여하는 시공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유기적이고 진화적인 모델을 표현한다. 우주적 통일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통일성은 분화한다. 보편자는 ‘관계적 보편자’이다. 관계적이기 때문에 보편자는 가다머의 용어를 빌면 ‘완결된 숙고’ 안에서 완전히 다 알려질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온전한 현실화에로 들어가고(하나님의 귀결적 본성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현실화를 가져오는(하나님의 원초적 본성과의 관계에서) 대화적인 과정 안에서만 점차적으로 알려질 수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우주 경험의 표적사건 안에서 의미를 식별하거나 또는 우리의 다양한 상징체계의 구문적 관계 안에서 의미를 소통하기 위한 우리의 능력은 이러한 관계적인 보편자에의 참여에 근거한다. 이 관계적인 보편자로서의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ㆍ공간적 과정의 창조적(creative)인 원초적 근거이며 동시에 창조된(created) 귀결적 종말로서 우리 세계와의 관계성 속에서 범재신론적으로 인식되어지는 하나님이다.

5.2.한국의 ‘한’ 사상
간 문화적인 의미의 관계성을 표현하는 적절한 매개 개념은 서구의 과정 사상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고 한국의 사상에도 있다. 한국에서 발견되는 매개는 서구의 과정사상과는 달리, 개념적 매개라기보다는 직관적인 성격이 강하다. 한국의 철학적 신학자인 김상일은 화엄불교를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비교하면서 어떻게 다자(多者)가 일자(一者)와 관계하는지를 분석하였다.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 단어인 ‘한’(韓)은 ‘하나님’ 또는 ‘하느님’이라는 단어의 뿌리라고 한다. 이 우리나라 말의 ‘한’은 어원적ㆍ의미론적으로 우랄알타이 세계에서의 ‘간’(gan), ‘칸’(kan) ‘찬’(chan)과 같은 단어들과 같은 뿌리를 공유한다. 그리고 이 ‘한’이란 용어는 아시아의 거의 모든 원시종교들 안에서 발견되어진다29) . 수메르어에서 ‘안’(an) 또는 ‘칸’(kan)은 세 가지 의미를 뜻한다. 첫째는 전체 또는 많음, 둘째는 들, 셋째는 생산이다. 김상일에 따르면 우리나라 ‘한’은 다섯 가지의 주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一), ‘많음’(多), ‘가운데’(中), ‘같음’(同), 그리고 ‘비결정성’ 또는 ‘대략’(不定)의 다섯 가지이다30) .

김상일에 의하면 합리적 사고ㆍ이성ㆍ정의ㆍ사랑 같은 개념들과 더불어 ‘일’과 ‘다’와 같은 개념들이 분화되고 대조적인 관계성 속에서 인간의 의식의 수면 위에 떠 오른 것은 칼 야스퍼스가 말하는 이른바, 차축시대(BC. 2C-8C)에 이르러서이다. 이 시대 이후 일과 다 사이의 관계는 동서양 모두에게 핵심적인 주제가 되어 왔다. 혜브라이 종교와 문화 속에서는 예레미아ㆍ아모스, 그리고 특히 제2 이사야 같은 차축시대의 예언자들에 의해 유일신론적 신앙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예언자들에 의해 본래는 ‘엘’(El)의 복수형인 ‘엘로힘’(Elohim)으로 불렸던 하나님이 유일신론적인 ‘야웨’(Yahweh) 하나님으로 변화되었다.

고대의 서구의 헬레니즘 문화에서 누구보다도 미분화된 일자(관념)와 분화된 다자(현상세계)를 이원론적으로 대비시킨 철학자는 플라톤이었다. 서구의 주된 관심은(동양의 관심도 마찬가지) 어떻게 일자 또는 누스(nous)와 다자, 보편자와 특수자, 초월과 내재, 또는 하나님과 세상이 서로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서구의 종교와 철학은 이 둘 사이의 양극화를 강화시켜 왔다. 어떤 때는 일자의 측면이 지배적이 되었으며, 따라서 일자의 초월성과 차별성이 강조되었다. 또 다른 때에는 다자의 측면이 지배적이 되었으며, 따라서 일자는 자기 변혁적인 우주와 동일시되었다. 결과적으로 서구사상의 전체역사를 통해서 나타난 결론은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 또는 변증법적인 ‘둘 다’(both/and)의 형태를 취하였다. 일자 또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강조될 때에는 차별성의 원리에 의해 양자 택일이 요구되었으며 다자 또는 세상의 내재성이 지배적이 될 때에는 동일성의 원리에 의해 양자 종합이 강조되었다. 전자를 초월적ㆍ유신론적 입장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내재적ㆍ범신론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대표되며 후자는 스피노자에 의해 대표된다.

물론, 미분화된 일자 또는 하나님과 분화된 다자 또는 세상과의 관계성에 관하여 이 두 입장 사이의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한 사람들도 많이 있어 왔다. 그러나 김상일은 전통적인 서구의 종교와 철학이 일자와 다자,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를 적절하게 종합하고 해결하는데 실패하였다고 비판한다.

동양에서는 일자와 다자와의 관계가 ‘이’(理)와 ‘사’(事)(화엄불교), 또는 이(理)와 기(氣)(신유교주의)의 관점에서 인식되었다. 석가(BC. 566-486)는 ‘중도’(中道, the middle path)에로의 깨달음(覺)을 통해서 일자와 다자를 동일성(同) 안으로 통합하였다. 용수(龍樹, Nagarjuna)는 석가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일자를 ‘더 높은 진리’(眞諦)로, 그리고 다자를 ‘세속적 진리’(欲諦)로 이해하였으며, 그 ‘중도’로서 ‘무’(無)를 발견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무’를 ‘존재’에 대한 대칭개념으로 이해했던 남방의 소승불교(Theravada Buddhism)와는 다른 견해이다. 김상일에 따르면 도교와 불교는 ‘일자’와 ‘다자’를 ‘중도’ 안에 통합시킴으로써 동일화 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은 성공적인 것은 못되었다고 한다.

김상일에 의하면 실재에 대한 불교의 인식론은 불교가 AD. 4-5세기경 고구려에 전래된 이후 중도의 차원을 넘어서 더욱 궁극적인 차원, 즉 비결정성과 부정성의 차원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의 승랑(僧朗, BC. 5세기)는 그의 제자 지장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을 남겼다. 그는 ‘이제합명설’(二諦合明設)을 발전시켰다.31) 이 이론에 따르면 첫 번째 명제에서는 세속적 진리(欲諦, 다자)와 궁극적 진리(眞諦, 일자)가 각각 전자는 ‘존재’(有)에 후자는 ‘무’(無)에 연결되는 방식으로 대비된다.

두 번째 명제에서는 첫 번째 명제에서의 대비되는 이 두 진리가 종합되어 또, 하나의 세속적 진리인 ‘유무’(有無)를 만들고 이에 대한 부정으로서 더 높은 진리인 ‘비유비무’(非有非無)가 세워진다. 세 번째 명제에서는 두 번째 명제에서의 이 대비되는 두 진리가 다시 종합되어 또 다른 세속적 진리인 ‘유무, 비유비무’(有無, 非有非無)를 만들고 다시 이에 대한 부정으로서 더 높은 진리인 ‘비유무, 비비유비비무’(有非無, 非非有非非無)가 세워진다. ‘무’가 ‘일자’에 상응하고 ‘유’가 ‘다자’에 연결된다고 할 때, 두 번째 명제의 ‘비유비무’(非有非無)는 중도(中道)를 나타낸다.

그러나 승랑은 중도조차도 부정함으로써 넘어선다. 그는 다시 이에 대한 종합으로서의 ‘유무, 비유비무’(有無, 非有非無)와 이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궁극적 진리인 ‘비유무, 비비유비비무’(有非無, 非非有非非無)에로 나아간다. ‘중도’를 부정한 후에 오는 것은 ‘한’(韓)의 다섯 가지 의미 가운데 마지막의 의미로서 비결정성, 또는 부정성이다. 따라서 한국(韓國)의 ‘한’(韓) 철학은 일자와 다자의 정체성과 그들의 관계성을 비결정적인 것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그것들이 자유로운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우리가 김상일의 말을 빌리면 이러한 비결정성의 사상은 일과 다가 언제나 새롭고 창조적인 형태 안에서 합생하는 화이트헤드의 창조성의 원리에 대한 이해와 유사하다32) .

이러한 실재에 대한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양자 물리학이나 불확정성의 원리가 도움이 된다. 이러한 이론들에 의하면 실재의 진리는 ‘일’에 의해서도 ‘다’에 의해서도, 주체에 의해서도 객체에 의해서도 결정되지(determine)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실재의 진리는 일과 다의 종합(中)과 그 종합의 부정(非中, 中道)까지도 관통하여 궁극적으로 비결정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실재의 진리에 있어서 일과 다는 상호 의존적, 상호 침투적이다.

진리는 이 상호의존성과 상호침투성이 온전하게 실현되고 다시 부정됨으로써 드러난다. 화엄불교의 개념을 빌면 이러한 실재의 전망은 절대(理)와 상대(事)의 동일성(事事無碍), 그리고 모든 상대적 현상세계 안의 모든 요소들 사이의 동일성(理事無碍)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33) . 그러나 여기서 일반적으로 동일성이라고 번역되는 ‘애’(碍)는 단순히 동일성(同一性)이라기보다는 비결정성, 또는 자유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이 ‘한’(韓) 사상에 더욱 적절하다. 이것은 자유롭게 부는 성령의 바람(그러나 결코 혼란하거나 무질서하지 않은)과 같은 것이다34) .

아마도 승랑은 자신의 이체합명설의 구조 안에 들어있는 비결정성의 정신을 당시의 고구려인의 내면적인 에토스에서 발견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사상은 ‘일’(眞)과 ‘다’(欲)와 ‘가운데’(中, 非中)를 통합하는 비결정성으로서의 한국인의 한의 에토스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비결정성 또는 불확정성으로서의 한의 최종적 의미는 승랑 이후 원측의 일심론(一心論), 의상의 일문론(一門論), 그리고 원효의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에 의해서 계승되고 발전되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한’의 개념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기독교의 신 이름을 ‘하나님’ 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놀라운 복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별 어려움 없이 미분화된 ‘일자’와 분화된 ‘다자’, 성(聖)과 속(俗), 무(無)와 유(有) 사이의 관계에 관한 양자택일(either/or), 양자 종합(both/and) 또는 그 중도(中道, middle) 사이의 트릴렘마(trilemma)를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초월적 유신론(미분화된 일자, 聖, 無의 강조)과 내재적 범신론(분화된 다자, 俗, 有의 강조),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종합으로서의 중도적 유신론 또는 양자의 부정으로서의 무신론(中道, 非中, 非有非無) 사이의 대립적인 선택은 한 사상에 있어서는 무의미하며 거짓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 사상 안에서 조망되어진 실재는 창조성의 원리에 근거한 일자와 다자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든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인 실재관과 범재신론적 형이상학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 사상과 과정사상 사이에 차이점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한 사상은 개념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며 따라서 과정사상과 같은 형이상학적ㆍ인식론적인 개념적 체계가 부족하다. 그리고 한 사상은 부정(非)의 원리에 의해서 논리가 전개되듯이 부정적이며 비시간적이라면 과정사상은 보다 적극적이며 철저히 시간적인 사고의 틀 안에서 전개된다. 또한 무엇보다도 한 사상은(아시아의 일반적인 사고의 유형적 특징처럼)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보여주는 미분화적 연속체로부터의 분화를 향하여 나아가려는 선호와 이를 위한 추동력을 제공하는 철저한 시간성 속에서의 행동을 위한 욕망을 별로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점들과 또 이 이외에도 있을 수 있는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한 사상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못지 않게 동양과 서양의 간 문화적인 세계관의 의사소통을 위한 매개로서 탁월한 통찰력을 제공해 줌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한 사상을 기독교 신학적 관점에서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논구함에 있어서 더욱 발전시켜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믿는 보편적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의 보편적 관계성의 의미에 대한 간 문화적 대화를 위한 커다란 공헌이 될 것이다.

이러한 매개적 사상과 개념들의 도움으로 열려진 태도를 가지고 상호 비판적이고 변증법적인 과정 속에서 의미의 소통을 적절히 수행함으로써 그리고 간 문화적인 세계관의 지평융합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서양과 동양의 의미경험과 표현 사이의 소외를 감소시키고 극복해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이러한 간 문화적 의사소통이 없다면 우리가 믿는 보편적인 관계성 안에 계신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과 예배와 섬김이 요구하는 그 어떤 문화적 화해와 종교적 평화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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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F. S. C. Northrop, The Meeting of East and West (New York: Macmillan Co., 1946), p. 421.
2) Hans-Georg Gadamer, “후 7l (Afterword),” Trutn and Method, 24 rev. ed. (New York: Crossroad, 1989), p. 579.
3) Ibid., p. 571.
4) Ibid., p. 290.
5) Ibid., p. 302.
6) Ibid., p. 304.
7) 그에 따르면 계몽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편견은 편견자체에 대한 편견으로서 이편견은 전통의 힘을 부인하는 편견이다. Ibid., p. 270.
8) Ibid., p. 306-7.
9) Martin Heidegger, Being and Time (New York and Evanston: Harper & Row, Publishers, 1962).
10) Gadamer, Op. cit, p. 258.
11) Northrop, Op. cit., p. 315.
12) Ibid., p. 320.
13) 도교와 도의 개념에 대한 좋은 소개서로는 John Clark Archer, revised by Carl E. Puriton, Faiths Men Live By, 2d ed. (New York: Ronald Press, 1958), p. 86-97, 125-29; Herrlee G. Greel, What is Taoism?: and Other Studies in Chinese Cultural History(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14) Northrop, Op. cit., p. 331.
15) 불교의 존재론과 인식론에 대해는 이기영, 원효 사상: 1 세계관 (서울: 홍법원, 1967) 특히, 불각(不覺)과 생멸(生滅)의 인식론에 대해서는 p. 175 이하를 참조. 원효에 따르면 무명(無明)은 망념(亡念)을 일으키는 잠재적인 충동력으로서 작용한다(無明業相). 진여(眞如)한 마음에 이 충동력이 나타나면 맨 먼저 주관이 형성된다(能見相). 주관이란 외계의 사물을 비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인간 의식의 가장 심층에 있는 ‘내가’ 또는 ‘나는’ 하는 생각이다. 주관은 객관을 낳는다. 보여진 대상이 나타난다(境界相). 보여진 대상이란 아무리 우리가 대상 그 자체로서 우리의 주관과는 무관한 그 독자적인 것으로 보려고 해도 주관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p. 177.
16) Thomas M. King, Teilhard's Mysticism of Knowing (New York: Seabury Press, 1981), p. 92-93.
17) Pierre Teilhard de Chardin, Letters to Leontine Zanta, tr. Bernard Wall (New York: Harper & Row, 1969), p. 104-5.
18) Northrop, Op. cit., p. 343-4.
19) E. A. Burtt's review, “The Meeting of East and West,” The Philosophical Review 56 (1947): 75 참조.
20) 사제는 고제(苦諦)ㆍ집제(集諦)ㆍ멸제(滅諦)ㆍ도제(道諦) 등으로서 고제와 집제는 인간의 현실계와 또 이 현실계가 고통의 현실계로 되는 원인을 밝히는 것이며, 멸제와 도제는 인간의 이상계와 그 이상계에 이르는 방법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8정도는 4제 중의 도제의 구체적인 방법을 밝힌 것으로서 정견(定見)ㆍ정사(正思)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ㆍ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의 여덟가지의 바른 길, 즉 방법이다. 세계철학대사전 (대구: 고려출판사, 1992), p. 446-447, 1148.
21) Stuart M. Brown, Jr., “The Meeting of East and West,” Ibid., 81.
22) J. p.·Mckinney, “Comment and Discussion: Can East Meet West?” 3-4(October 1953): 257-67.
23) Peter Munz, “Basic Intuitions of East and West,” Philosophy East and West(April 1955), p. 53.
24) A. N. Whitehead, Process and Realty, corrected ed. (New York: Free Press, 1978), part Ⅱ, chap. 8.
25) Ibid., p. 49-50.
26) Ibid., p. 50, 51.
27) Ibid., p. 344.
28) 이 구절들은 Kuang-Sae Lee의 Tao-Te Chins, “A Critique of the Scope and Method of the Northropian Philosophical Anthropology and the Projection of a Hope for a Meeting of East and West,” Journal of Chinese Philosophy 2 (1984): 259의 7장에서 인용.
29) 예를 돌면, 미얀마의 북쪽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친족은 신을 ‘Pat-Han’(팥-한)이라고 하는데, Pat은 아버지란 뜻이고 Han은 하나님이어서 두 낱말이 모여 ‘아버지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하며, 미얀마의 카친족은 신을 ‘Hpan’이라고 유사하게 부른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신을 ‘ke-tu-Han’(커-투-한)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큰 주 하나님’이란 뜻이다. 필리핀 토착어의 ‘Ama-han’, 그리고 타이의 ‘Khwan’ 같은 것은 모두 HAN의 의미로 표현되는 신의 명칭과 유사하다. HAN은 몽고어속에서 보편적인 신개념이다. 이에 관하여는 김상일, 한 사상, (서울: 온누리, 1986), p. 218을 참조.
30) Ibid., p. 91 이하.
31) 이에 판한 자세한 설명은 Ibid., p. 94-95.
32) 김상일, 한과 세계철학 (서울; 전망사, 1989) 참조.
33) 이에 관해서는 Francis H. Cook, Hua-yen Buddhism: The Jewel Net of Indra (University park, Philadelphia: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77), p. 55-72 참조.
34) 한 사상의 관점에서의 이제합명론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김상일, 한사상, P. 95,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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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호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신학박사 장로회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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