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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30 (01:39) from 80.139.150.45' of 80.139.150.45' Article Number :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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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화이트헤드의 자연관에 대한 연구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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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화이트헤드의 자연관에 대한 연구시론


이태호(대구가톨릭대)

 

 노자와 화이트헤드의 자연관은 둘 다 현대 환경론자에게 유용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노자는 2,500여 년 전 동양에서 자연에 따른 삶을 강조했고, 화이트헤드는 현대 서양에서 자연과 인간 사이에 유기적 관련을 강조했다.
 그런데 근대과학의 근저에는 과학적 유물론이 있다. 이 과학적 유물론은 기계론적 유물론이라고도 하는 데 기계론적 자연관을 갖고 있다. 이 자연관은 자연을 단순한 물질로만 규정하고, 자연에 대한 인위적 지배를 정당화시켰다. 그 결과 과학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발전의 밝은 햇빛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로서의 환경파괴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자연관에 대한 반성적 사고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그 원인에 대한 분석과정에서 과학적 유물론의 문제도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문제의 대처방안으로 여러 학설이 등장하고 있지만, 논자는 노자와 화이트헤드의 자연관을 분석하면서 이들이 환경파괴를 막을 수 있는 대안이론으로 성립가능한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것을 검토하는 중에 이 작업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쏟을 만한 작업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만한 여력이 없기 때문에 본격적인 연구는 다음에 하도록 하고 이번에는 시론으로서만 다루고자 한다.
 



자연을 단순한 물질로만 보아서는 지금 같이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화이트헤드는 17세기 이래 서구 사회를 지배해 온 자연관을 기계론적 자연관이라고 하면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계란 질료나 물질의 순간적인 배치구조들의 계기” 『과학과 근대세계』, A.N.화이트헤드 저, 오영환 역, 서광사, 1991, p.82, 이하 『과근』으로 생략함.   
이다. “이것이 바로 17세기 이래 줄곧 최고의 지배권을 행사해 왔던 저 유명한 기계론적 자연관이다.”(과근 82)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이 자연관을 유물론적 기계론이라고 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유물론적 기계론의 여러 난점들은 오래지 않아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과근 83)
질료나 물질의 순간적인 배치구조를 베르그송은 공간화에 기인하는 자연의 왜곡이라고 비판했고, 화이트헤드는 단순정위의 오류와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라고 지적하고 있다.(과근 83-84 참조)
단순정위는 물질이 공간에 단순히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사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나타나면서 현대물리학에서도 오류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상대성 이론이란 달리 말하면 관계성 이론이라고 할 수 있고, 관계성 이론이란 관계를 가지는 두 항이 서로 영향을 주어 쌍방 간에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만약에 영향이 미치지 않은 항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성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절대자라고 하면 어떠한 상대에 대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자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라 단순정위는 물질에게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절대공간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오류인 것이다.  
은 물질이 공간에 단순히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내었기 때문이다.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는 화이트헤드가 여러 저서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이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 유기체 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기존의 실체철학의 잘못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체철학은 실재를 실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실체라는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실재로 오해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구체적인 실재는 타자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부단하게 관계해서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체이다. 그러면 자연을 유기체로 보는 유기체적 자연관은 자연을 물질로만 보는 기계론적 자연관과는 달리 과연 자연을 소중하게 여겨 환경파괴를 근원적으로 막을 수 있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아야겠다. 이것이 밝혀지면 화이트헤드의 자연관은 환경파괴를 막아낼 수 있는 대안적 이론으로 성립가능 할 것이다.




이 논의를 전개시키기 위해서 환경문제와 관련된 기계론적 자연관과 유기체적 자연관의 차이점을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차이점 때문에 기계론적 자연관이 환경파괴를 일으킨 원인이 되었으며, 유기체적 자연관이 환경파괴를 막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환경문제와 관련된 차이점을 두 가지로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에 있어서의 차이이다. 둘째는 자연의 정신성과 주체성에 대한 인정여부의 차이이다. 이러한 두 가지 차이를 밝히는 것은 결국 인간과 자연의 지위에 대한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첫째,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있어서의 차이는 존재론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다. 기계론적 자연관의 바탕에는 실체론적 존재론이 있으며, 유기체적 자연관의 바탕에는 유기체적 존재론이 있다. 실체론적 존재론에서 관계는 부수적인 문제가 되고, 유기체적 존재론에서는 관계가 중심적인 문제가 된다.
“실체란 존재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 이외의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자라고 밖에 달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라는 데카르트의 실체에 대한 정의” 『과정과 실재』, A.N. 화이트헤드 저, 오영환 역, 민음사, 1991, p.129, 이하 『과실』로 생략함.
에 나와 있듯이, 실체란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정의는 정확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즉 제1실체는 어떠한 주체에 대해서도 술어가 되지 않으며, 다른 어떠한 주체 속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에서 파생된 것이다.”(과실 129)
데카르트의 실체에 대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실체에 대한 정의에서 나온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실체는 개별자이다. 예를 들면 인간일반인 보편자가 아니고,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인 개별자를 말한다. 이 개별자인 실체는 보편자인 술어가 되지 않으며, 다른 어떤 실체에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1실체인 개별자와 관계하는 것은 술어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속성 실체-속성이론을 참조할 것
인 보편자일 뿐 다른 실체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실체를 부정하는 유기체론은 각각의 개별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모든 다른 개별자들을 수용해야만 한다. 이러한 수용을 화이트헤드는 파악이라고 한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를 보편적 상대성 원리라고 명명하고 있다.

보편적 상대성 원리는 <실체는 다른 주체에 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명을 정면에서 파기한다. 그와는 반대로 이 원리에 따르면 현실적 존재는 다른 현실적 존재에 내재한다. 사실 우리가 다양한 정도의 관련성 및 무시할 수 있는 관련성을 참작한다면 모든 현실적 존재는 다른 모든 현실적 존재에 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유기체 철학은 <다른 존재에 내재한다>는 관념을 명확하게 밝히려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과정과 실재』, p.131.


유기체 철학에서 구체적인 개별자는 현실적 존재이다. 그런데 실체철학과 달리 이 개별자가 다른 개별자에 내재한다. 여기에 바로 핵심이 있다. 이것을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적응하면,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둘러 싼 환경으로서의 자연이 인간에 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안에 자연이 존재한다는 말은 자연과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둘이면서 둘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둘이라는 것은 각자가 주체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둘이 아니라는 것은 각자가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것이 인간에게 수용되어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자연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음식물을 통해서 자연물 중 고체와 액체를 흡수하고, 호흡을 통해서 기체를 흡수한다. 그리고 피부를 통해서도 빛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흡수한 것들을 소화시키고 모아서 몸을 형성시켜가며, 필요 없는 부분을 배출한다. 배출된 것은 자연이 흡수해서 자신의 몸을 형성시켜 간다.   
  

그런데 실체철학에서 실체는 다른 주체에 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자연은 인간에 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자연은 인간 바깥에만 있고, 인간에 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되면 자연은 인간이 존재하는데 부수적인 존재에 불과하게 된다. 즉 인간이 존재하는데 자연은 부수적으로만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체철학은 인간이 위대하고 자연은 열등하다는 잘못된 지위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사고는 자연을 함부로 다루어도 된다는 그릇된 의식을 심는데 기여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의식은 자연을 손쉽게 접할 수 있어서 자연과학의 발달을 가져왔지만, 심각한 자연파괴도 동시에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실체철학만으로 자연이 가볍게 보여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서구에서도 고대와 중세에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외심마저 급속히 줄어들게 된 것은 과학적 유물론 즉 유물론적 기계론이 등장하면서부터 이다. 이 이론은 자연관에도 변화를 불러와서 기계론적 자연관을 가져왔다.
둘째, 자연이 정신성과 주체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는지 그렇지 않는지의 여부이다.  이 자연관은 “자연은 오직 물질뿐이며” 『자연의 개념』, A.N. 화이트헤드 저, 안형관, 전병기, 이태호, 김영진 역, 이문출판사, 1998, p.91, 이하 『자개』로 생략함.
, “물질은 진화할 수 없다. 이 물질은 본질적으로 궁극적인 실체인 것이다. 유물론에 따를 때 진화한 물질의 각 부분 사이의 외적관계의 변화를 기술하기 위한 또 하나의 말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외적관계들의 한 집합은 외적 관계들의 다른 모든 집합들과 매한가지이기 때문에 진화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과근 167)
기계론적 유물론에서 볼 때 자연은 진화하지 못한다고 한다. 즉 자연은 생물과 달리 자신을 스스로 변화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스스로 변화해 갈 수 없는가? 그것은 자연에는 외부를 받아들여서 자신을 주체적으로 변화시켜 갈 정신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서 유기체론에서는 자연도 정신성이 있어서 주체적인 변화를 하여 스스로 진화해 갈 수 있다고 본다. 화이트헤드는 물리적 환경을 이야기하면서 “모든 감수성의 증대는 적응을 위한 진화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과실 312 참조)
유기체론에서는 어떤 현실적 존재도(물론 가능적 존재는 제외됨) 물리적 극과 정신적 극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외부 대상을 파악하여 외부에서 주어진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모든 현실적 존재가 자신의 정신성을 갖고 주체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유기체론이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기체적 자연관은 자연을 외부의 명령에 따라 무조건 순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자신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사고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지위를 동등하게 놓게되며, 따라서 자연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여 환경파괴를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유기체적 자연관은 첫째,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서로간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필요로 하는 존재론적 관계를 갖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에 자연을 부수적인 관계로 보는 기계론적 자연관과 달리 자연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근거로서의 관점이 된다. 이러한 관점의 바탕에는 실재를 실체로 보는 관점을 부정하고, 유기체로 보는 관점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둘째, 자연을 오직 외부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물질로만 보는 과학적 유물론과 달리 자연이 정신성을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주체성 있는 존재로 본다. 자연을 이렇게 보는 유기체적 자연관은 자연의 지위를 인간과 평등하게 끌어올려서 인간이 자연을 함부로 대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유기체적 자연관이 환경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관점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이제는 노자의 자연관은 어떤지 살펴보고 환경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시사점을 주는지 살펴보자.

어떤 물건이 혼돈(混沌)히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의 생성보다도 앞서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형체도 없지만 홀로 존재하며 변화하지도 않고 모든 것에 두루 행하여지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니, 천하의 모체(母體)라 할만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그것을 도(道)라고 이름 지었고, 억지로 그것을 대(大)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대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간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은 멀리 극도에까지 이른다. 멀리 극도에 다다르면 제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도란 위대한 것이다. 하늘도 위대하고, 땅도 위대하고, 왕도 역시 위대하다. 세상에는 이 네 가지 위대한 것이 있는데, 왕도 그 중의 하나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땅을 법도로 삼고, 땅은 하늘을 법도로 삼고, 하늘은 도를 법도로 삼으며, 도는 자연을 법도로 삼고 있는 것이다.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 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 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신완역 『노자』, 김학규 역해, 명문당, 1992, p.103, 이하 『노자』로 생략함.


이 구절은 노자 도덕경 25장 상원편(象元篇)에 나오는 글이다. 상원은 ‘근본을 본 뜬다’는 뜻을 지닌 단어이다. 노자는 천하의 모체를 도라고 하고, 그 도는 자연을 법도로 삼는다고 함으로써 자연을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노자는 자연을 사람보다 더 높이 평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땅, 하늘, 도보다도 더 높이 평가하였다. 이렇게 높이 평가하는 노자의 자연관은 자연에 대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어떤 무엇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자연을 땅이나 하늘 물론 이 때의 하늘은 오늘날의 과학적 유물론에서 보는 단순한 물질로서의 하늘이 아니라 통제자로서의 정신성을 지닌 존재이다.  
정도로 생각지 않았다는 것은 물질성 이상의 정신성을 지닌 존재로 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자연은 한자 풀이 자연(自然)의 한자 뜻은 스스로 自와 그러할 然이 합쳐진 말로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에서도 나타나듯이 타자의 통제를 받는 자가 아니다. 즉 주체적으로 움직이면서 모든 것을 통제하는 자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통제하는 것을 모르게 한다. 그것을 임금의 행위에 비유하여 노자는 17장 순풍(淳風)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훌륭한 사람이 임금으로 있으면, 아랫사람들은 그가 있음을 알 따름이다. 그보다 못한 임이면 백성들은 그를 친근하게 여기고 그를 기린다. 그보다 더 못한 임금이면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한다. 그보다 더 못한 임금이면 백성들이 그를 업신여긴다. 성신(誠信)이 부족해서 신용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임금은 유연(悠然)히 말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면 공이 이룩되고 일이 잘 이루어졌을 때 백성들은 모두가 우리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太上下知有之. 其次親之譽之. 其次畏之. 其次侮之. 信不足焉, 有不信. 悠兮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노자』, p.92.
    

이 순풍편은 최고 통치자는 순박한 기풍으로 다스린다는 것을 나타내는 곳이다. 이 때의 최고 통치자는 인간세상에서의 임금을 나타내지만, 그 근원으로 들어가면 자연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연의 존재에 대해 평상시는 그냥 있음을 알뿐이고, 인용문 중에 “아랫사람들은 그가 있음을 알 따름이다.”에 대응된다.
자연재해가 생기고 하면 자연을 두려워하기도 하며 인용문 중에 “그를 두려워한다.”에 대응된다.
, 또 재해를 경험하고 나면 자연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되어 자연을 노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용문 중에 “그를 친근하게 여기고 그를 기린다.”에 대응된다.
더군다나 백성들은 일이 잘 되었을 때 ‘자신들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으로 여기도록 두기 때문에 자연이다.     
자연은 만물을 거느리는 최고 통치자답게 만물을 생성케 하는 도를 거느리며, 만물을 길러주는 덕도 거느리고 있다. 이 도와 덕을 시켜 만물을 낳고 기르도록 하면서도 소유하지 않고, 공을 뽐내지 않으며 지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도는 생성하고 덕은 길러주어, 만물은 형체를 지니게 되고, 형세를 따라 그 특성이 이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도를 소중히 하고 덕을 귀중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도가 소중하고 덕이 귀중한 것은 어느 누구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고 언제나 자연스럽게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생성하고 덕은 길러주며, 생장케 하고 생육케 하고 생성케 하고 성숙케 하고 보양해주고 보호해주는 것이다. 생성케 하되 소유하지는 않으며, 그렇게 해주되 그 공을 믿지 않으며, 생장케 하되 지배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것을 현묘한 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 是以萬物莫不尊道而貴德. 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而常自然. 故道生之, 德畜之, 長之育之亨之 毒之, 養之覆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노자』, p.140-141.
  

위의 구절은 51장 양덕(養德)편의 글이다. 양덕은 올바른 덕을 기른다는 뜻인데, 만물을 길러주는 자연의 덕을 말한다. 만물은 자기를 낳아서 길러주는 도와 덕을 귀중하게 여기지만 그 도와 덕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는 자연에 대해서는 고마워할 줄 모른다. 만물로 하여금 당연히 그렇게 하는 줄 알도록 둔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은 도와 덕으로써 세상을 다스리지만 말이 거의 없다. 도를 따르는 자에게는 도를, 덕을 따르는 자에게는 덕을, 잘못을 저지르는 자에게도 마주 대하면서 즐긴다. 이렇게 말이 거의 없어서 들리지 않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이 너무 근원적이라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남에게 들리지 않은 말이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하루아침을 넘기지 못하고, 소낙비는 하루도 계속되지 못한다. 누가 이런 현상을 일어나게 하는가? 그것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조차도 그런 것을 오래가게 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어떠하겠는가? 그러므로 도에 따라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를 터득한 사람을 대하면 똑같이 도를 따르고, 덕 있는 사람을 대하면 똑같이 덕을 따르며,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대하면 똑같이 잘못을 따른다. 똑같이 도를 따르면 도를 터득한 사람도 그를 만난 것을 즐거워할 것이다. 똑같이 덕을 따르면 덕 있는 사람도 그를 만난 것을 즐거워할 것이다. 똑같이 잘못을 따르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도 그를 만난 것을 즐거워할 것이다. 상대를 따르는 신실(信實)함이 부족하면 거기엔 불신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希言自然.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 天地. 天地尙不能久, 而況于人乎. 故從事於道者, 道者同于道. 德者同于德. 失者同于失. 同于道者, 道亦樂得之. 同于德者, 德亦樂得之. 同于失者, 失亦樂得之. 信不足, 有不信, 『노자』p.101.
   

이것은 23장 허무(虛無)편이다. 자연은 너무 자신을 들어내지 않기 때문에 텅 비어서 없는 것 같다는 말이다. 김학규 선생은 마지막 대목을 ‘상대를 따르는 신실함이 부족하면 거기엔 불신이 존재하게 된다’고 했는데, 이 때의 상대는 자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연이 워낙 말이 없으니 자연을 불신해서 따르지 않게 될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런데 실로 어리석은 인류는 자연을 불신해서 인위적인 문화를 일으켰으며, 그 결과 오늘의 환경파괴 등 많은 문제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가 생길 것을 경계한 노자는 원천적으로 문제가 생기게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 만약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해결하는 시기가 빠를 수록 좋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원천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는 방법은 무위이다. 즉 인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조짐을 빨리 알아차리고 근본인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노자는 주장하고 있다.   

일이란 평안한 상태로서 유지하기가 쉽고 문제의 조짐이 드러나기 전에 도모하기가 쉬운 것이다. 문제가 취약할 때는 그것을 깨쳐버리기 쉽고, 그것이 미세할 적에는 흩어버리기 쉬운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기 전에 처리하고, 혼란해지기 전에 다스려야만 한다. 한 아름의 큰 나무도 터럭 끝만 한 싹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고, 9층의 높은 누대도 한줌의 흙을 쌓는 데서부터 세워진 것이며, 천리 길도 한 발자국을 내딛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행하는 자는 일이 실패케 되고, 너무 집착하는 자는 그것을 잃게 된다. 성인은 무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실패가 없는 것이다. 그는 집착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잃는 일이 없는 것이다. 백성들이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언제나 거의 성공할 단계에서 실패를 한다. 끝머리를 신중히 하기를 시작할 때와 같이하면 곧 일에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성인들은 욕구를 갖지 않으려 하며,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다. 공부하지 않는 것을 학문하는 것으로 삼으며, 여러 사람들이 지나쳐버리는 근본으로 되돌아간다. 그럼으로써 만물의 자연스러운 존속을 돕고, 감히 인위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다. 其安易持, 其未兆易謀, 其脆易泮, 其微易散, 爲之於未有, 治之於未亂, 合抱之木, 生於毫末, 九層之臺, 起於累土, 千里之行, 始於足下, 爲者敗之, 執者失之, 是以聖人無爲故無敗, 無執故無失, 民之從事, 常於幾成而敗之, 愼終如始, 則無敗事, 是以聖人欲不欲, 不貴難得之貨, 學不學, 復衆 人之所過, 以輔萬物之自然而不敢爲, 『노자』, p.159-160.


이것은 64장 수미(守微)편의 글이다. 수미란 작은 조짐이 있을 때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인위적인 것을 하여 자연으로부터 멀리가지 전에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앞으로 인류가 만약에 살아남는다면 지금의 선진국이 가장 후진국이 되고, 후진국이 가장 선진국이 될 것이다”는 토인비의 말은 이 대목을 말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노자가 본 자연은 상당히 수준 높은 정신성과 주체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리고 스스로 가장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존재이면서 모든 것을 말없이 통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시당하기 쉽기도 하다. 무시당해도 별 말이 없기 때문에 빨리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연에 위배되었을 때 그 재앙은 그 은덕이 큰 것만큼 크다는 것도 우리는 인식해야 할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에서 나온 유기체적 자연관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가 존재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관계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실체철학에서 나온 기계론적 자연관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존재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기계론적 자연관은 인간이 자연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자연파괴로 이어질 수 있는데 비해서 유기체적 자연관은 인간과 자연의 대등한 관계를 확보하여 자연파괴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었다.   
기계론적 자연관은 기계론적 유물론 또는 과학적 유물론적 시각이다. 이러한 관점은 자연을 오직 물질적인 것으로만 본다. 이 관점에서 보는 물질은 정신성과 주체성이 없다. 오직 외부의 힘에 의해서만 움직일 뿐이다. 따라서 무시해도 좋은 존재가 된다. 그러나 유기체적 자연관의 관점에서 보는 자연은 물질과 정신이 함께 있으며, 자신의 주체적 목적에 따라서 스스로 환경에 적응해간다. 따라서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무시할 수 없다.
노자의 자연관은 화이트헤드의 자연관보다도 더 자연을 우위에 두고 있다. 인간보다 자연이 우위에 있다. 그리고 자연은 정신성과 주체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이며 최고 통제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통제하는 방법도 거의 자신을 들어내지 않고 한다. 도로 하여금 만물을 생성케 하고 덕으로 하여금 만물을 기르게 한다. 그러면서도 소유하지 않는다. 그래서 통제 받는 자로 하여금 자신이 지배받는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 인류는 이러한 자연의 능력을 불신하여 인위적인 삶을 추구했고, 그 결과 자연파괴가 감행되었다. 노자는 이것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무위의 삶을 살 것을 강조했다.     
결국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노자와 화이트헤드의 자연관은 근대의 자연관과 달리 자연의 지위를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은 자연을 함부로 대하지 않게 하며, 경외심을 불러일으켜 인간은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올 것이다.  
논평-김영진(영남대)


“노자와 화이트헤드의 자연관에 대한 연구시론”에
대한 논평


1. 이태호 교수님(이하 필자)의 논문은 노자와 화이트헤드라는 동서양을 대표하는 사상가들의 자연관을 비교하는 것이다. 특히 그들을 통해서 환경 혹은 자연에 대한 서양의 근대적 자연관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시도하는 것이다. 우선 논평자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필자의 논문을 간략하게 재구성한 다음에,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2. 오늘날 환경에 대한 관심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다. 환경 문제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자연 스스로의 자정 능력을 넘어서는 자연에 대한 개발로 인하여 자원 고갈이 되고, 생태계가 파괴되므로써 인간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18세기 이후 성장만을 추구해 온 산업혁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 역시 1960년 대 이후부터 경제 개발을 추구하면서 많은 하천들이 오염되고, 공기와 흙도 그 오염 상태가 심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자동차, 에어콘, 냉장고, 화학 비료, 세제 등을 사용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사용이 우리의 주변 환경을 파괴하고, 결코 단시간 내에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고 있다. 앞에서 예로 든 이러한 물건들은 과학적 이론에 근거해서 공장에서 생산된 것이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이것들은 모두 인간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고, 정복지향적인 사고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여름에 사용하는 에어콘도 내부는 시원하지만, 밖의 온도는 더욱 높이며, 냉장고도 프레온 가스를 배출해서 지구의 환경을 오염시키고, 화학비료도 금방은 생산성이 높지만, 나중에는 땅과 인간의 몸을 동시에 죽이는 경향이 있다. 즉 이것들은 당장에는 인간의 이기로서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하나, 장기적으로 보면, 엄청난 무기로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물도 사먹고, 공기도 팩으로 사먹고, 농산물도 유기농을 원한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파괴의 무의식적인 원인을 우리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필자는 그것을 서구의 실체론적 사고와 물질에 대한 비주체성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이것은  실체론적 사고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빚어진 모든 생산품 역시 그러한 원리에 근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서 노자나 화이트헤드와 같은 관계론적 사고, 유기체적 사고에 근거한다면, 나 혹은 개체의 행위가 타인에게 언제나 영향을 미치고, 받게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필자는 말한다. 그 결과 지구 환경의 파국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으로 여겨진다.

3. 필자의 논문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자연을 질료나 물질의 순간적인 배치구조로 보는 것이 17세기 이후 서양의 자연관으로 간주하며, 그것은 자연을 왜곡된 모습으로 본 것이라고 한다.
2) 17세기 자연관은 실체론, 혹은 기계적으로 보는 것이며, 화이트헤드의 자연관은 유기체적으로 보는 것이다. 실체론은 나가 있고 그 다음에 타인이 있고, 그 관계는 외적인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유기체는 나가 아니라 나와 타인이 이미 하나이고, 따라서 그 관계는 내적인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17세기 이후 자연관은 자연을 물질로만 간주하고 정신과 주체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며, 유기체론에서는 자연도 정신성을 갖고 있어서 스스로 진화해 간다. 다시 말해서 유물론에서 물질은 단지 순응적인 반면에, 유기체론에서 자연은 능동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3) 필자에 따르면, 노자는 자연에서 정신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이는 자연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무위에 의해서 움직이는 반면에, 인간은 유위(욕망) 혹은 집착에 의해서 행동한 결과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4) 결론적으로 필자는, 자연을 관계론적 사고로 보는 것과, 물질에는 정신성과 주체성이 있는 것으로 보는 화이트헤드와 노자의 사유를 통해서 과학적 유물론의 사유에 근거한 환경 파괴를 막을 수 있는 대안으로 간주한다.

이상과 같이 논평자는 필자의 논문을 간략히 재구성해 보았다. 간략한 요약이 필자의 의도를 간과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다만 논평자가 바라본 측면에서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하겠습니다.

4. 필자는 화이트헤드의 사유와 노자의 사유의 유사함에 근거해서, 비교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환경에 그 사유와의 연관성을 추적하고자 한다. 그런데 화이트헤드의 사유는 근대 과학에 대한 비판에서 정초된 것이고, 노자의 사유는 인위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유가에 대한 비판에서 정초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자에서 나오는 ‘자연’은 인위성에 대한 거부로서 빚어진 은유적인 단어가 아니겠는가? 인간이 만든 문화에 대한 거부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화이트헤드의 사유는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필자의 의견은 어떤지 묻고 싶다.

5. 필자의 화이트헤드에 대한 논의를 보면, 과학적 유물론에 근거한 물질은 정신 혹은 주체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주체성이 없다는 것이 자연의 진화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환경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으로 보고 있다. 논평자가 보기에는, 그것은 화이트헤드의 사유의 다른 측면은 간과할 수 있다고 본다. 화이트헤드는 『과학과 근대 세계』에서 다윈 진화론의 문제점을 언급하고 있다. 우연적이고 적자생존 이론인 다윈의 진화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서구의 제국주의와 자연에 대한 약탈을 합리화한 것으로 본다. 다윈 이후 생물학이 적자생존과 자연 도태, 혹은 경쟁과 정복 등의 공격적 힘의 논리로 진화의 동인을 해석하였다. 이것은 매우 남성적인 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생물학의 한 편에서는 생물체 사이의 협동과 상호 의존 관계가 진화의 주된 동인의 하나로서 보고 있다. 이것은 매우 여성적인 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이론이 전개되기 이전에 그의 과학과 철학에서 이 입장을 개진하였다. 논평자가 보기에는 ‘과학적 유물론’ 보다는 ‘진화론’에 대한 다른 사고를 통해서 환경이나 자연을 보고자 한 화이트헤드를 언급하는 것이 이 논의에서 더 적절한 것이 아닌가 묻고 싶다.

린 마굴리스는 “남자들이 물리학적 힘의 법칙으로 진화를 이해하고 설명한데 비해, 나는 생명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조화와 절묘한 변화에 주목했다” 고 주장한다. 우리는 서구 과학의 창시자라고 하는 베이컨의 격언 ‘아는 것이 힘이다’를 대단한 진리로서 여겼다. 여기에는 이성적 사유만이 참된 진리의 길로 여기고, 그것을 통해서 모든 것을 재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것을 모두 배제하는 것이다. 갈릴레오는 이성 혹은 수학적 사유를 통해서 ‘객관적이고 가치 중립적인’ 과학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예술과 과학적 관찰에서는 언제나 주관성이 개입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서구 열강은 총과 대포로서 다른 대륙을 지배하고, 자연을 약탈해서 산업사회 및 정보사회까지 이어져 왔다. 정말로 아는 것이 힘인가? 지금의 지식으로 보면, ‘아는 것이 병’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한지 모르겠다.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해서 얼마나 많은 인명과 자연을 유린하였는가?  
우리는 더 이상 이성을 우선적으로 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다. 이성 보다는 몸, 의식 보다는 무의식이 더 결정적인 것임을 알고 있다. 몸은 다른 말로 물질이다. 이 물질은 필자의 말처럼 죽은 물질이 아니라 활동성을 갖는 물질이다. 필자는 이것을 주체성이나 정신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급한 논의가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필자는 물론 알겠지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가 유기체 철학을 전개할 때 가장 중요하게 설명하는 단어가 ‘느낌’(feeling)이다. 이 느낌은 모든 유기체, 즉 일상적으로 말해서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이 그것을 갖고 있다. 의식은 고차원적인 인간에게만 있지만, 느낌은 모든 물체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 몸 역시 의식이나 정신은 없다. 하지만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그것은 느낌이나 정서로 가득차 있고, 외부의 환경과 상호 작용을 한다. 물도 나무도 동물도 흙도 이러한 느낌과 정서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도시에 있을 때와 시골에 있을 때 외부 환경에 대한 느낌이 다른 것을 종종 느낀다.
 하지만 근대의 과학 기술은 수량화하고, 객관화할 수 있는 것만을 진리의 대상으로 여기고,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것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성이 없는 존재는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해서, 자연 뿐만 아니라 광기를 가진 자도 비인간으로 취급하기 시작하였다.(푸코를 보면, 광인에 대한 인식 변화를 읽을 수 있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자연과 인간의 몸은 동일하게 정서나 느낌이 있다. 물도 인간의 마음에 따라서 분자의 모양이 달라진다고 한다. 식물이나 동물도 이성은 없지만, 모짜르트 음악을 들여주면 훨씬 더 잘 성장한다고 한다. 따라서 지구 환경과 인간이 관계론적으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느낌을 통해서 하나라는 사실을 깨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서남북의 인류와 지구어머니(가이아)가 소통하는 방법은 느낌과 정서를 통해서 관계 맺는 것이다. 논평자의 입장에서, 모든 유기체(자연)에 들어 있는 ‘느낌’을 통해서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21세기에 지구 환경이 파국에 이를 때 인류문명을 구원할 새로운 생명수에 해당하는 개념으로서 간주된다. 하지만 필자의 논의는 어떤 점에서 주체나 정신에 대한 규정이 명확하지 않아서, 자연에서 이성이나 사유가 있다고 보는 헤겔 식의 유기체 이론으로 보여지게 한다. 여기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어떤지?    

6. 도가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유가가 남성 중심주의라면, 그것은 여성적이라는 것이다. 노자의 책 곳곳에서 도에 대한 표현은 매우 여성적이고, 부드럽고, 정서적이라는 것이다. 즉 도에 대한 은유가 양적이라기 보다는 음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을 통해서 보자면, 화이트헤드의 느낌이나 계기도 미적이고 정서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양자를 비교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타자와 자연을 이성이라는 잣대를 통해서 지배하려는 근대 과학적 사유가 지구환경을 회복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존재를 이성의 능동적 활동으로 볼 것이 아니라, 존재를 정서적이고 미적인 능동적 활동으로 볼 때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이 점에서 화이트헤드와 노자의 견해는 근대 과학과 그 생산물이 이성을 통한 경쟁적인 진리의 올림픽에 맞서서 예술가들의 관점에서 자연을 조화롭게 노래하는 경연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견해는 어떠한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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