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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1/25 (22:22) from 80.139.171.150' of 80.139.171.150' Article Number :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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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내재적 문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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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내재적 문예론


유  형  식(중앙대)


1. 문학작품의 평가문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Poetik』에서부터 르네상스와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문학이란 무엇이며, 또 어떤 문학이 가치 있는 문학이냐 하는 문제를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척도에 의해서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척도를 차자내기 위해 소위 규칙미학(Regelästhetik)이 문학세계를 지배해왔다. 규칙만 알고있으면 소설도, 드라마도, 시도 쓸 수 있으며, 또 규칙에 들어맞는 소설, 드라마, 시만이 가치 있는 소설, 가치 있는 드라마, 가치 있는 시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18세기에 등장하는 독창성(Originalität)과 천재성(Genialität) 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그리고 19세기에 등장하는 취미론(Geschmackslehre)에 의해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척도를 주장하는 규칙미학은 붕괴되어진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척도를 주장하는 규칙미학을 붕괴시키는데 공헌을 한 철학자는 우선 칸트이다. 칸트는 미학적 판단을 객관적으로는 할 수 없고 따라서 주관적으로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아름다우냐 하는 취미판단의 문제는 객관적인 개념에 의해서 규정할 수 없으며, 그리고 이 취미판단의 원천은 미학적(ästhetisch)이라는 것이, 다시 말해 취미판단의 원천은 인간이라는 주관의 감성(Gefühl)이지 객관적인 대상에 대한 인식(Erkennen)은 아니라는 것이 칸트 미학의 내용이다. 예를 들어 “장미꽃은 아름답다”라는 판단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취미판단이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인식의 판단은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 미학의 주관성을 확대 과장하여 적용하자면 (칸트 미학의 주관성을 확대 과장한다는 말은 칸트 미학은 주관성뿐만이 아니라 객관성도 내포하고있기 때문에) 하나의 문학작품이 예술작품이냐 아니면 비 예술작품이냐 하는 판단은 역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문제라는 결론이 된다. 칸트 철학 외에도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척도를 주장하는 규칙미학을 붕괴시키는데 박차를 가한 철학들로 헤겔(Hegel) 이래의 현상학, 객관성을 아예 제거하려는 니이체(Nietzsche) 철학을 언급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문예학이라는 학술이 객관적인 척도와 규칙을 가져야하느냐 아니면 가져서는 안 되느냐 하는 논쟁 중에 자연과학에서 독립하려는 정신과학은 척도와 규칙이 전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으로 선회하게 된다. 정신과학의 핵심과제인 따라서 문예학의 핵심과제인 이해(Verstehen)라는 과제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척도와 규칙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정한 가치평가의 기준은 가져야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하게 된다. 20세기 전반에 독일문학에서 문학작품의 가치평가론(Wertungstheorie)이 논의되게된 배경은 일체의 주관을 배제하려는 실증주의와 가치의 상대성을 주장하려는 역사주의를, 극단적인 객관주의와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인간의 주관을 일체 배제하고 극단적인 객관성만 주장하려는 실증주의와 반대로 모든 문화는 그들 자신의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있어 모든 문화가 다 가치 있다는 극단적인 상대주의, 그 상대주의를 더 확대 과장하여 “객관적인 가치”라는 개념 자체를 아예 제거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관주의, 이들 중간에서 위상을 찾으려는 가치평가론은 헤겔부터 시작하는 현상학(Phänomenologie)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문학의 가치평가론에 행사한 현상학의 영향을 헤겔의 현상학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문학작품은 내 눈앞에 서있는 나무와 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물이다.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이 존재물을 헤겔(Hegel)은 감관적 확실성(sinnliche Gewißheit)이라고 부른다. 이 감관적 확실성은 그러나 단순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것으로 주관과 객관 양자로 되어있다는 것이 헤겔의 현상학이다. 내 눈앞에 서있는 나무는 어느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나무라는 객체이고 객관인 듯 보이나 사실은 그 나무는 나의 나무, 나만의 나무, 나를 위한 나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헤겔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나의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의 눈앞에는 나무가 아니라 집이 서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내가 보고있는 나무라는 객관 속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어 나를 제외하고는 불가능한 객관이라는 것이 헤겔의 설명이다.  
감관적 확실성은 복합적인 것으로  주관과 객관 양자를 자체 내에 포함하고있는데, 이 양자는 모두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중개된(vermittelt) 것이라고 헤겔은 계속하여 설명한다. 주관은 객관에 의해 중개되고, 또 객관은 주관에 의해 중개된다는 말이다. 주관은 객관 없이는 주관이 될 수 없고, 반대로 객관도 주관 없이는 더 이상 객관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내 눈앞에 서있는 나무라는 객관은 나라는 주관 없이는 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나와 나무는, 주관과 객관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헤겔의 현상학은 문학작품이라는 하나의 대상이 (하나의 객관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 양자로 복합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칫솔이나 치약과 같이 배낭에 넣어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휄더린의 시집이라는 객관적인 존재물 속에는 나라는 주관이 포함되어있어 주관과 객관, 양자가 서로를 중개한다는 사실을 현상학이 인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문학작품이 주관과 객관, 양자로 복합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식시킨 현상학이 작품평가론에 행사한 영향을 3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문학작품은 주관과 객관의 복합체이므로 하나의 총체성(Totalität)이 된다는 인식이다. 총체성이란 주관과 객관의 합을 의미하고, 또 총체성은 희랍어 표현으로 코스모스(Kosmos)라고 또는 독일어 표현으로 세계(Welt)라고 표현된다. “코스모스”나 “세계”라는 개념은 모든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다 들어있어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표현이다. 철학에서는 “코스모스”나 “세계”를 “창문 없는 단자”(fensterlose Monade)라고도 표현한다. 하나의 문학작품을 이와 같이 하나의 총체성으로 본다는 말은 문학작품을 완전한 세계, 완전한 코스모스라는 의미로 “둥그런 코스모스”(runder Kosmos), “창문 없는 단자”로 본다는 말이다. 하나의 문학작품은 외부세계의 도움 없이, 다시 말해 인간사회의 도움 없이, 외부 인간사회로부터 단절되어 홀로 자급자족하는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존재라는 말이 된다. 문학작품을 이와 같이 하나의 총체성으로 보는 이론을 작품내재적 이론(werkimmanente Theorie)라고 부른다. 그리고 작품내재적 이론은 예술철학에서는 자율성미학(Autonomieästhetik)이라고 불리어진다. 자율성미학이 탄생된 배경은 현상학이며 현상학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미학이다. 문학작품이 주관과 객관, 양자로 복합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식시킨 현상학이 작품평가론에 행사한 두 번째 영향은 문학작품은 역시 하나의 총체성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하나 이 출발점이 문학작품이라는 대상이라 보기보다는 대상을 감상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피히테, 헤겔, 쉘링 등 독일 전통철학에 의하면 “나는 나를 생각한다”라는 표현에 나타나는 봐와 같이, 나는 단순히 주관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대상도 될 수 있다는 것이, 나라는 인간은 주관인 동시에 대상이라는 것이, 주관인 동시에 객관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인간은 단순히 나라는 주관으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객관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독일 관념론 철학의 정설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주관과 객과, 양자의 복합이라는 것이 독일 전통철학이다. 주관과 객관, 양자의 복합으로 되어있는 인간은 하나의 총체성으로,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둥그런 코스모스”, “창문 없는 단자”라는 것이 독일 전통철학이며, 인문학의 전통이다. 하나의 인간은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둥그런” 인격체라는 말이다. 이상에서 논한 봐와 같이 문학작품도 하나의 총체성이며 인간도 하나의 총체성이므로, 문학작품도 그리고 인간도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존재이므로 예술작품과 인간은 동형을 이룬다는 결론이 된다. 문학작품이라는 대상에서 출발했던 작품내재적 이론과는 달리, 대상을 감상하는 인간에서 출발하는 가치평가론의 두 번째 방향이 생기는데 이것을 넓은 의미의 철학적 이론이라고 한다. 넓은 의미의 철학적 이론들에는 형이상학적 방법론, 현상학적 방법론, 실존주의적 방법론, 해석학적 방법론 등이 있다. 작품내재적 이론도 그리고 철학적 이론도 주관과 객관의 합이라는 총체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양자 사이를 구분하기는 어려우나, 작품내재적 이론은 문학작품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철학적 이론은 인간과 인간세계를 대상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전자가 예술적이라면 후자는 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내재적 이론이 문학작품 자체의 실재를 대상으로 한다면, 철학적 이론은 인간과 인간사회의 실재를 대상으로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작품내재적 이론은 예술작품을 유일한 목표로 한다면, 철학적 이론은 예술작품을 자신의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할 수 있다. 문학작품을 외부세계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홀로 자급자족하는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존재물로 보는 작품내재적 이론과는 달리, 철학적 이론은 문학작품이 철학에 의존한다고 보기 때문에 철학적 이론은 자연히 자율성미학이 아니라 타율성미학(Heteronomieästhetik)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현대철학의 현상학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가치평가론의 세 번째 방향은 작품초월적 이론(werktraszendente Theorie)이다. 현대의 다양한 작품초월적 이론들을 합하여 수용미학(Rezeptionsästhetik)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된다. 현대의 수용미학은 현상학을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는 양면작전의 미학이라고 보아야 한다. 작품내재적 이론은 문학작품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자율성미학인 반면에, 작품초월적 이론은 문학작품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미학이다. 그러나 작품초월적 이론도 주관과 객관 사이의 관계는 인정하므로 현상학의 영향이 잔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작품초월적 이론이 인정하는 주관과 객관의 관계는 주관과 객관의 합을 전제로 하는 관계가 아니라, 반대로 주관과 객과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관계이다. 작품초월적 이론에 내재한 주관과 객관의 관계는 독자인 수용자라는 주관과 문학작품이라는 대상인 객관 사이의 관계가 된다. 현대의 다양한 작품초월적 이론들을 대표하는 수용미학은 문학작품이라는 대상과 그 대상을 감상하는 수용자를 서로 독립된 존재물들로 보기 때문에 대상과 수용자, 객관과 주관의 합이라기보다는 객관과 주관의, 주관과 객관의 분열이라 보는 것이 옳다. 주관과 객관의 합을 전제로 하는 자율성미학에서 주관과 객관의 분열을 전제로 하는 수용미학으로 가치평가론이 전향하는 이유는 문학작품의 기능(Funktion)과 영향(Wirkung)을 강조하는데서 온다. 문학작품은 인간사회 그리고 사회현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이론인데, 문학작품은 인간사회와 사회현실을 위해 어떤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는 말이다. 수용미학은 인간사회라는 사회성(soziale Tatsache)과 사회현실이라는 역사성(historische Tatsache)을 자체 내에 포함하고있는 미학이다. 그리고 수용미학은 수용자와 문학작품의 분열을, 주관과 객관의 분열을 주장하므로, 다시 말해 문학작품이라는 대상의 총체성을 부정하므로 자율성미학이 아니라 타율성미학(Heteronomieästhetik)이라고 보아야 한다. 문학작품은 사회성과 역사성의 대변자로 사회와 역사에 의존하기 때문에 타율성미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타율성미학인 현대의 수용미학은 문학작품을 초월하여 인간사회와 사회현실 속으로 이주하기 때문에 작품초월적 이론(werktranszendente Theorie)이라고 불리어진다. 주관과 객관, 문학작품과 수용자의 분열을 전제로 하는 수용미학은 그러나 (상과 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양자 중 어느 것을 상으로 하고 어느 것을 하로 하느냐에 따라서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문학작품을  상으로 하고 수용자를 하로 하는 경우와 반대로 수용자를 상으로 하고 문학작품을 하로 하는 경우로 가치평가론은 분열하게 된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를, 수용자를 상으로 하고 문학작품을 하로 하는 경우를 극단화시키면 수용자가 전부이고 반면에 문학작품은 전무라는 경우가 되는데, 이 경우 가치평가론은 극단론으로 기울게되어 문학작품을, 하나의 텍스트를 백지 또는 공허지로 보는 이론으로, 다시 말해 문학작품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론으로 변모하게된다. 문학작품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리고 문학작품을 상으로 하는 경우, 문학작품의 존재를 인정하나 그러나 하로 하는 경우, 반대로 수용자만 인정하면서 문학작품을 백지 또는 공허지로 보는, 다시 말해 문학작품의 존재를 부정하는 경우 등 문학작품의 가치평가론은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이상에서 논한 문학작품의 가치평가론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미학(Ästhetik)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표현하면, 20세기 전반에 독일문학에서 시작하는 문학작품의 가치평가론은 자율성미학과 타율성미학으로 분리된다. 문학작품의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자율성을 인정하는 작품내재적 이론은 자율성미학에 속하고, 문학작품의 자율성을 부정하고 문학은 사회적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작품초월적 이론은 타율성미학에 속한다. 그러나 문학작품의 총체성을 인정하면서도 문학작품은 철학에 의존한다고 보는 여러 가지 철학적 이론들은 역시 타율성미학에 속한다고 보아야하나 자율성미학에서 타율성미학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작품내재적 이론, 철학적 이론, 작품초월적 이론 등을 종합하면, 작품내재적 이론과 철학적 이론은 전통적 고전미학을 의미하고, 작품초월적 이론은 현대의 수용미학을 의미한다. 문학작품에 관한 다양한 가치평가론들을 종합하는 두 번째 결론은 현대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는 현상학과 관련하여 표현한다면, 작품내재적 이론은 현상학의 도입이라 할 수 있고, 철힉적 이론은 현상학의 집행 아니면 철학 자체라고 할 수 있으며, 작품초월적 이론은 현상학의 종말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문학작품이 칫솔이나 치약과 같이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의 복합체라는 것은 철학이지 문학이 아니기 때문에 철학의 도입, 현상학의 도입이라 보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그리고 문학작품을 철학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여러 가지 철학적 이론들은 문학작품이 아니라 철학이 목표이기 때문에 현상의 집행이라고 아니면 철학 자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작품초월적 이론은 주관과 객관의 관계 자체는 인정하여 현상학이 잔재해있다고 볼 수 있으나, 주관과 객과의 합이 아니라 그 양자의 분리를 주장하므로 현상학의 종말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세 번째 결론은 현대의 다양한 작품초월적 이론들을 대변하는 수용미학은 문학작품을 상으로 하고 수용자를 하로 하는 경우, 반대로 수용자를 상으로 하고 문학작품을 하로 하는 경우, 수용자를 전부로 하고 문학작품을 전무로 하는 경우 등 크게 3가지 방향으로 분리된다. 문학작품을 상으로 하고 수용자를 하로 하는 경우는 문학작품 속에는 규정된 아니면 불규정된 의미가 내재해 있어 수용자는 그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는 입장이고, 반대로 수용자를 상으로 하고 문학작품을 하로 하는 경우는 수용자가 의미가 전무한 다시 말해 백지와 같은 문학작품 속에다 자신의 의미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입장이며, 끝으로 수용자를 전부로 그리고 문학작품을 전무로 보는 경우는 문학의 영역을 탈피하여 일반철학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파리의 에펠탑이 하나의 기호이듯이 문학작품도 하나의 기호라는, 다시 말해 문학작품이나 에펠탑은 동등한 기호라는 구조주의 또는 탈구조주의 이론들로 변모하게 된다. 작품내재적 이론, 철학적 이론, 작품초월적 이론 등을 구체적으로 논하는 것이 순서가 되어야 한다. 본 논문에서는 작품내재적 이론만 논하고 여러 가지 철학적 이론들과 작품초월적 이론들은 차후로 미루기로 한다.

2. 문학작품의 실재

1930년대부터 활발히 진행되는 문학작품의 가치평가론에 관한 논쟁 중에서 작품내재적 이론을 대표하는 이론가들은 카이저, 쉬타이거, 쿤 등이다. 이상 3명의 이론가들은 문학작품에다 하나의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자율성(Autonomie)과 자족성(Autarkie)을 부여하려는 이론을 주장하는데 다음과 같다. 카이저(Wolfgang Kayser)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1930년대 이래로 논의되어온 가치평가의 여러 가지 척도들을 비판하는데 대개 3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시간(時間), 인간의 실재(實在), 사실성이라는 3개의 개념들이 당시 가치평가론의 핵심을 형성하는데 이에 대해 카이저는 비판을 한다. 첫째로 시간과 관련하여 하나의 문학작품이 시간적으로 50년간 지속했다면 그 문학작품의 가치가 증명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이 카이저의 비판이다. 예를 들어 강호퍼(Ludwig Ganghofer)의 『후베르투스 성』은 50년을 훨씬 넘었으며, 수 백년을 지속해온 민속문학과 민속동화들이 있는데 이들 작품들이 모두 문학적으로 객관적인 가치를 소유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카이저의 질문이고, 또 50년이라는 시간을 고수한다면 현재 출판된 작품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50년을 기다려야 하지 안느냐 하는 것이 카이저의 반문이다. 다음에 시간 개념과 관련하여 하나의 문학작품이 한 시대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느냐 하는 작품의 영향사(Wirkungsgeschichte)를 문학작품의 가치척도로 하려는 주장도 있는데, 이 역시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이 카이저의 비판이다. 19세기 구라파 시문학에 대단한 영향을 행사했던 포우(E. A. Poe)의 <갈가마귀 The Raven>라는 시는 포우의 시중에서도 최고의 시도 되지 못하며 또 많은 결함이 있는 시라는 엘리옽(Eliot)의 비판을 카이저는 예로 들고 있다. 시간 개념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예술작품은 한 시대의 예술적 사상적 표현”이라는 발쎌(Oskar Walzel)의 주장이 있는데 이 주장은 예술작품 자체가 아니라, 문학작품 자체가 아니라 하나의 시대를 테마로 하기 때문에 역시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이 카이저의 비판이다. 종합하여 일정한 시간의 길이라든가 또 한 시대에 영향을 준 정도라든가 한 시대 자체가 테마가 되어서는 안되고 예술작품 자체가, 문학작품 자체가 테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카이저의 주장이다. 문학작품의 가치평가 문제는 시간과 시간성에 대해서가 아니라 문학작품 자체에 대해서 방향설정을 해야한다는 것이 카이저의 생각이다.  
카이저가 비판하는 두 번째 카테고리는 인간실재(das Sein des Menschen)이다. 오펠(Horst Oppel)은 1947년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 『형태론적 문예론』에서 “문학작품의 가치는 문학작품이 인간의 실재를 적중하여 표현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있다”고 말하는데 이 주장 역시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이 카이저의 비판이다. 오펠을 위시하여 많은 이론가들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기초로 하여 문학작품이 인간의 현존재(Dasein), 죽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인간 존재의 유한성 등을 잘 표현하느냐 못하느냐 하는데 가치평가의 척도를 두는데, 이는 인간의 실재 문제에 테마를 두는 것이지 문학작품 자체에 테마를 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카이저의 주장이다. 또 인간실재의 허무를 주장하는 허무주의와 관련하여 문학작품을 평가하려는 가치평가론 들도 있는데 이 허무주의 가치평가론 들은 예를 들어 사랑을 테마로 하는 중세의 연가(Minnesang)나 페트라르카의 사랑의 문학은 가치가 없다고 제외시키게 되어 역시 잘못된 이론들이라는 비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로이트(Freud)의 정신분석학을 기초로 하는 이론들은 프로이트가 도스토예브스키의 소설을 통해서 작가인 도스토예브스키 자신의 병을 진단해 냈듯이 역시 문학작품 자체가 아니라 작가의 실재에 관심을 가지고있기 때문에 잘못된 관심이라는 비판을 카이저는 한다. 종합적으로 인간실재라는 카테고리와 관련하여 문학작품의 가치평가는 문학작품 자체가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실재나 특수한 인간의 실재가 평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카이저의 주장이다.
카이저가 비판하는 세 번째 카테고리는 사실성이다. 사실성의 개념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언급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짜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하나는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Macbeth』에 마녀의 장면이 등장하는데 셰익스피어가 마녀의 존재를 믿었다는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고 논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예로 가정하여 말하자면) 『맥베스』라는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진짜 작품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다. 이상의 두 가지 논쟁은 모두 문학작품 자체를 테마로 하지 않고 하나는 셰익스피어가 미신을 믿는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셰익스피어라는 실재에 관한 논쟁으로 변모하고, 다른 하나는 『맥베스』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냐 아니면 다른 작가의 작품이냐 하는 문헌학으로 변모한다는 것이 카이저의 주장이다. 사실성이라는 개념을 가치평가의 척도로 삼는 이론들은 역시 원래의 테마를 벗어나는 이론들로 옳지 못한 이론들이라는 것이 카이저의 비판이다. 카이저의 비판을 종합하년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시간 개념을 가치평가의 척도로 하는 이론들은 문학작품 자체를 초월하는 이론들로 이에 대한 카이저의 비판은 작품초월적 이론들에 대한 비판이 된다. 둘째로 인간의 실재를 가치평가의 척도로 하는 이론들은 역시 문학작품 자체를 초월하고 인간실재에 방향설정을 하기 때문에 철학적 이론들에 대한 비판이 된다. 셋째로 사실성의 개념을 척도로 하는 이론들은 문학작품 자체에서 출발은 하나 잘못된 출발로 잘못된 작품내재적 이론들에 대한 비판이 된다. 카이저는 문학작품 자체에 대한 “특별한 방향설정”을 요구한다.
문학작품 자체에 대한, 그것도 오직 문학작품 자체에 대한 특별한 방향설정을 요구하는 카이저가 자신의 이론을 위해 사용하는 개념들은 총체성, 일치성, 유기성 등이다.
총체성(Ganzheit)은 문학작품을 하나의 “창문 없는 단자”, “둥그런 코스모스”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의 문학작품은 외부세계의 도움 없이 홀로 충족하며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자율성(Autonomie)이고 자족성(Autarkie) 이라는 의미를 총체성은 나타낸다. 문학작품은 완전한 세계,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세계이므로 모든 문제는 문학작품 내에서 그리고 문학작품 내에 존재해있는 요소들에 의해서 해결해야지 문학작품 외부의 요소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총체성은 의미한다. 다음에 일치성(Einstimmigkeit)은 문학작품을 구성하고있는 제 요소들은 서로 조화 일치하여 전체적인 화음(Ensemble)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육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이라 비유한다면, 머리, 팔, 다리 등 일체의 구성요소들이 서로 일치 조화하여 전체로서는 하나의 완전하고 균형 있는 예술작품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머리는 머리대로, 팔은 팔대로 독립하여 제 갈 길을 간다면, 다시 말해 머리는 머리의 권리를 주장하고 팔은 팔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이는 현대 연극론에서 말하는 소위 소외기법(Verfremdungstechnik)으로 카이저가 주장하는 일치성에는 어긋나는 주장이 된다. 전체적인 일치조화를, 전체적인 앙상블을 이루어야 하는 문학작품을 구성하는 제 요소들의 존재이유는 “전체” 하에서만, “전체”를 위해서만 가능한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는 것을 일치성의 개념은 나타낸다. 총체성과 일치성의 종합으로 유기성(Organismus)이라는 개념은 문학작품은 하나의 유기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살아있는 식물도, 살아있는 동물도, 살아있는 인간도 유기체인 것과 같이 하나의 문학작품도 살아서 움직이는 유기체라는 설명이다. 하나의 문학작품을 총체성, 일치성, 유기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카이저의 주장을 달리 표현하면, 문학작품을 하나의 완전하고 모든 구성요소들이 일치조화 되어있으며 살아서 움직이는 인간과 같이 보아야 한다는 설명이 된다. 문학작품 자체에 대해서 “특별한 방향설정”을 하라는 카이저의 요구는 하나의 문학작품을 하나의 완전하고 모든 구성요소들이 일치조화 되어있으며 살아서 움직이는 인간으로 보라는 요구이다. 한 인간의 실재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과 같이 문학작품의 실재(das Sein)도 인정하고 존중하라는 요구다.
문학작품을 하나의 살아서 움직이는 유기체로 보라는 요구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시간, 인간실재, 사실성이라는 3가지 개념들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카이저는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한다. 우선 시간개념과 관련하여 “예술작품은 시간과 시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표현한다”라는 발언을 카이저는 한다. 예술작품이 시간과 시대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은 예술작품 자체가 변하는 모습이지 시간과 시대의 반영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음에 18세기의 소위 규칙미학과 관련된 발언으로 그리고 인간실재라는 개념과 관련된 발언으로 “예술작품이 우리 인간의 의사에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 인간이 예술작품의 의사에 따라야 한다”라고 카이저는 말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규칙이나 인간의사에 예술작품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은 자율성과 자족성의 소유자로 자신의 의사와 의지에 따라 태어나서 생존하다가 사망한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사실성이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다시 말해 『맥베스』라는 작품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마녀의 존재를 믿은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라든가, 또 『맥베스』라는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진짜 작품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작품이라는 실재”라고 카이저는 말한다. 『맥베스』라는 문학작품 자체에서 출발하는 것은 좋으나 부수적인 문제들을 테마로 하지말고 『맥베스』라는 문학작품 자체를 테마로 하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한 어린아이의 신체 일부를 문제삼거나 또 그가 사생아냐 아니냐 하는 논쟁을 문제삼지 말고 실제로 실재해있는 그 어린아이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고 테마로 하라는 말이다. 문학작품은 실제로 존재해있는 실재물이라는 사실을, 문학작품은 실제로 살아서 움직이는 인간과 같은 실재자라는 사실을 카이저의 발언은 의미한다. 예술작품은 시간이나 어느 일정한 시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표현한다는 발언, 예술작품이 우리 인간의 의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 인간이 예술작품의 의사에 따라야 한다는 발언, 그리고 하나의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려야 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예술작품도 있는 그대로 그의 실재를 받아드려야 한다는 발언, 모두가 엄청난 발언들임에 틀림  없다. 교육학의 전인(全人)이라는 개념이 인간을 하나의 자율성과 자족성의 소유자로 보라는, 다시 말해 인간을 “완전한 세계”, “창문 없는 단자”, “둥그런 우주”로 보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카이저가 생각하는 예술작품은 교육학이 말하는 전인의 개념을 초월한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간과 시대의 산물로 시간과 시대의 영향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며, 또 인간의 의사와 의지는 항상 관철되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억압당하는 것이 현실이어서, 인간의 위상이 카이저가 생각하는 예술작품의 위상에 미치기 못하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위상을 인간의 위상 보다 높은 위치에 상정한다는 사실이 엄청난 사실이다.

3. 해설과 평가

예술작품이라는 표현대신에 문학작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카이저의 이론대로 인간의 위상과 동등한 아니면 인간의 위상을 초월하는 위상으로 승격된 문학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문학작품의 평가문제는 인간의 평가문제와 동일한 문제, 아니면 더 난해한 문제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 전인(全人)으로서의 인간을 과연 객관적으로 평가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영원한 문제로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이다. “여기 그리고 지금”(hic et nunc)의 인간은 과거에는 다른 인간이었으며 또 미래는 또 다른 인간으로 변할 것이며, 관습과 일정한 윤리관에 의해 인간을 평가한다면 그 관습과 윤리관 자체가 시간이 지나면 변하여 타당성을 상실할 것이고,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해 인간을 평가한다면 역시 그 이데올로기 자체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타당성을 상실할 이데올로기로 영원히 객관성을 보증할 수 있는 척도는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가의 평가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로 보아야 한다. 카이저가 문학작품에 대한 엄청난 발언들에 의해 문학작품의 위상을 인간의 위상 이상으로 승격시킨 결과는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를 불가능한 상태로 몰고 가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론은 가능하며 하나의 시학(Dichtkunst) 내지는 미학(Ästhetik)에 기반을 두고있다고 카이저는 말한다.
문학작품에 관한 평가론을 가능케 해주는 시학 또는 미학을 카이저는 해설(Interpretation)이라고  부른다. 문학작품의 위상을 인간의 위상 이상으로 승격시킨 결과로, 인간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척도가 없다면 문학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척도는 더군다나 없다는 결론이 되어 카이저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는데, 이 자가당착을 해결하기 위한 개념이 “해설”이 된다. 카이저의 자가당착을 달리 표현하면, 이론화할 수 없는 문학작품을 어떻게 이론화하느냐 하는 것이 카이저의 문제성이며 이 문제성을 해결해야 하는 개념이 “해설”이다. 따라서 카이저가 생각하는 “해설”은 이론(理論)이 아닌 이론으로 다음과 같은 특이한 성격들을 가지고 있다.
카이저에 의하면 해설은 첫째로 문학작품을 전체, 즉 총체로 보는 능력이고. 둘째로 해설은 동시에 평가능력이며, 셋째로 해설은 문학작품에서 다시 총체성을 읽어내는 능력이다. 첫째로 해설은 문학작품을 총체로 보는 능력이라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해설은 하나의 문학작품을 가치 있는 작품이냐 아니면 가치 없는 작품이냐 하는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문학작품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하나의 전체기능을 형성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관계를 추적하는 작업이라는 것이 카이저의 생각이다. 하나의 인간을 하나의 예술작품에 비유하여 설명하면, 하나의 인간을 선한 사람 또는 악한 사람 등으로 가치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 팔, 다리 등의 구성요소들이 합하여 조화된 인간이라는 전체기능을 형성하느냐 안 하느냐를 추적하는 작업이 “해설”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머리, 팔, 다리라는 구성요들과 조화된 인간이라는 전체기능, 양자 사이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머리, 팔, 다리라는 구성요소들이 없다면 조화된 인간이라는 전체기능이 있을 수 없고, 그리고 그 반대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양자 중 어느 것이 선이고 어느 것이 후인지를 분간 할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머리, 팔, 다리라는 구성요소들을 추적 할 때는 조화된 전체기능의 관점에서 추적해야하고, 반대로 조화된 전체기능은  머리, 팔, 다리라는 구성요소들의 관점에서 관찰해야 하는 회전관계에 양자는 놓여있다. 이상의 회전관계는 하나의 문학작품에도 적용된다. 문학작품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은 전체기능의 관점에서 그리고 전체기능은 여러 구성요들의 관점에서 추적하는 작업이 해설이라는 개념이 된다. 구성요소들에서 출발해서 전체기능에 도달하는 작업이 그리고 반대로 전체기능에서 출발해서 구성요소들에 도달하는 작업이, 아니면 양자를 동시에 추적하고 관찰하는 작업이, 강조하여 표현하면, (가치의 판단과 평가 작업이 아니라) “추적과 관찰의 작업”만이  해설이라는 개념의 성격이다. 하나의 인간을 선하다 아니면 악하다라고 하거나 또는 아름답다 아니면 추하다라고 단순하게 가치평가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며, 머리, 팔, 다리 등 구성요소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전체효과와 전체기능에 의해서만 인간을 추적하고 관찰해야 한다는 논리와 같이, 문학작품도 그들의 구성요소들과 전체기능을 동시에 추적하고 관찰하는 작업만이 해설이 된다는 설명이다. 해설이라는 개념은 존재론, 본질론, 의미론 등과는 거리가 멀며 단순한 형태론이라고 보아야 한다. “문학작품이라는 실재물에서 본질적인 것은 형태다”라는 것이 카이저의 말이다.  

둘째로 해설(Interpretation)은 동시에 평가(Wertung)라는 설명을 할 차례다. 문학작품의 위상을 인간의 위상 이상으로 승격시킨 결과 문학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 할 수 없다는 결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작품을 평가 할 수 있는 새로운 시학과 미학이 필요하다는 카이저의 자가당착을 언급했다. 평가 할 수 없는 문학작품과 가치평가, 비학술적인 대상과 학술 사이의 모순관계가 카이저가 가지고있는 자가당착이다. 문학작품을 전체 또는 총체로 보라는 해설에 대한 첫째 번 성격에서는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성격을 제외시켰으나, 해설에 대한 두 번째 성격에서는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성격을 포함시켜서 카이저는 설명한다.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평가의 척도로서 카이저는 문학작품을 형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사이의 일치성, 그 여러 가지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긴장성, 그리고 그 여러 가지 요소들 사이에서 탄생되는 요구성, 3가지를 말하고 있다. 일치성과 관련하여 카이저는 이름 없는 작가의 이름 없는 작품 클라우렌스(Claurens)의 『미밀리 Mimili』라는 작품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한 여인의 외모를 묘사하는데 눈으로 볼 수 없는 부분까지도, 여인의 속옷까지도 마치 상세히 보고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논리에도 맞지 않아 일치성이 결여된다는 설명이다. 이상의 일치성이 결여된 묘사는 그 목적이 남자들의 호색감정이나 여자들의 치장욕구만을 자극한데 있는 것으로 문학적으로는 가치 없는 작품이라는 평가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을 묘사할 경우에도 예를 들어 여인의 얼굴을 이름답게 묘사했으면 팔도 이름답게 묘사해야 일치성이 성립하여 가치 있는 작품이 되며, 반대로 (상상외로) 추하고 그로테스크한 의수를 묘사한다면 일치성이 파괴되어 가치 없는 작품이 된다는 논리다. 다음에 긴장성과 관련하여 문학작품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잘 조화되어 일치성을 이룸에도 불구하고 활기 없는 김빠진 작품들이 있는데 이는 긴장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카이저는 말한다. 기술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작품을 잘 구성했으나 그 작품 속에 역동적인 긴장이 결여되면 가치 없는 작품이 된다는 설명이다. 마지막으로 요구성과 관련하여 가치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작품은 역동적인 긴장감을 주는 것 외에도 자신이 바라는 요구(Forderung)를 나타내야 한다는 설명이다. 문학작품을 형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에는 나타나있지 않으나 그들 요소들 하나 하나가 합하여 합창으로 어떤 주장을 하는데, 어떤 요구를 하는데, 그리고 이 주장과 요구를 독자가 인지하고 거기에 방향설정을 해야하는데, 이 주장과 요구가 결여되면 가치를 상실한 작품이 된다는 설명이다. 종합하여 문학작품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사이의 평면적인 일치성, 공간적인 긴장성, 정신적인 요구성, 3자가 성립되면 그 작품은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다는 결론이다. 일치성, 긴장성, 요구성이라는 가치척도에 의해 평가하는 작업 자체가 해설이라는 주장을, 평가가 해설이고 또 해설이 평가라는 주장을, “평가는 해설 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주장을 카이저는 한다.
해설은 셋째로 문학작품에서 다시 총체성을 읽어내는 능력이라는 설명을 할 차례다. 해설에 관한 3개의 설명은 총체성에서 출발해서 총체성으로 복귀하는 것이 카이저의 설명이다. 해설의 첫째 성격이 문학작품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구성요소들이 조화 일치하여 앙상블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면, 둘째 해설의 성격은 그 조화된 구조물에다 활력을 불어넣는 과정이며, 해설의 셋째 성격은 두 가지 성격의 합으로, 기계적인 구성물과 활력의 합으로 문학작품을 움직이고 생동하게 하며 현존재케(dasein) 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문학작품을 이간에 다시 비유하면, 완전하게 조화 일치된 그러나 영혼이 결여된 육체에다 영혼을 불어넣고, 다음에 움직이고 생활하고 실존케 하는 과정이 해설의 셋째 성격이라 할 수 있다. 문학작품에서 총체성을 읽어내라는 해설의 셋째 성격에 의해 표현하면, 문학작품은 살아있는 식물, 살아있는 동물, 살아있는 인간과 같이 하나의 유기체(Organismus)가 된다. 하나의 문학작품은 자신의 현실을,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있다는 설명이 된다.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문학작품을 인간과 다시 비교한다면, 같은 점과 다른 점, 두 가지를 말 할 수 있다. 같은 점은 문학작품도 세계를 가지고 있고, 인간도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가 몇 개냐 하는 질문을 한다면, “세계”는 하나라는 것이 철학의 상식이다. 공간적으로 볼 때 문학작품과 인간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문학작품에서 총체성을 읽어내라는 말은 인간의 총체성을, 인간의 세계를 읽어내라는 말이 된다. 예를 들어 배추가 그려있는 그림에서 김장에 사용할 질 좋은 배추,  값비싼 배추 등 배추만을 읽어낸다면, 이는 총체성인 세계를 읽어내는 것이 못된다는 설명이 된다. 배추가 그려있는 그림을 보고 그 배추를 생산한 인간들의 출산, 고뇌, 사망 등 인간세계를 읽어내는 것이 총체성을 읽어내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문학작품과 인간이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고있다는 논리는 작품내재적 이론을 철학적 이론과 동일한 이론으로 만드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에서 인간존재를, 인간세계를 읽어내라는 요구는 바로 철학적 이론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작품내재적 이론을 고수하는 카이저에게는 따라서 문학작품과 인간 사이의 다른 점이 필요한데 그것이 문학작품과 예술작품의 시간 초월성이다. 문학작품은 자신의 현실, 자신의 운명,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있다는 말은 인간의 그것들과 다른 현실, 운명, 시간을 가지고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문학작품이 가지고있는 시간은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시계의 시간, 달력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라는 설명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으로 분리된 인간의 실용적 시간(pragmatische Zeit)을, 과거, 현재, 미래 등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연속적 시간(sukzessive Zeit)을 문학작품은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문학작품이 가지고있는 시간은 분리도 그리고 연속도 거부하는 시간으로 그 분리와 연속을 특징으로 하는 인간의 시간을, 실용적 시간과 연속적 시간을 초월하는 시간이라는 것이, “문학작품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이 카이저의 생각이다. 한편으로는 문학작품은 인간과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고있기 때문에 문학작품에서 공통적인 “세계”를 읽어내야 한다는 주장과,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작품과 인간은 각각 다른 종류의 시간을 가지고있다는 주장은 카이저 이론에 내재한 자가당착을 다시 한번 나타내는 주장이다.
1930년대부터 진행되었던 가치평가론들이 가치평가의 척도라고 생각했던 시간, 인간실재, 사실성 등에 대해 비평을 가하면서 카이저가 주장하는 총체성, 일치성, 유기성은 또 다른 척도들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문학작품을 객관적인 척도에 의해 평가할 수 있다는 당시의 여러 종류의 가치평가론에 대한 부정으로 카이저는 또 다른 척도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이저의 이론에는 처음부터 자가당착이 내재해 있다. 자가당착이라는 표현대신에 예술철학에서 많이 사용하는 아포리(Aporie)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아포리는 카이저의 이론뿐만 아니라 예술이론 자체에, 문학이론 자체에 내재해있는 것이 아포리라고 할 수 있다. 이론화 할 수 없는 예술작품을 어떻게 이론화하느냐 하는 문제가, 평가척도를 거절하는 문학작품에게 어떻게 평가척도를 강요하느냐 하는 문제가, 어떻게 공간적으로는 작품세계와 인간세계를 동일한 하나의 세계로 인정하면서 시간적으로는 양 세계를 상이한 두 개의 세계로 분리하느냐 하는 문제가 이미 아포리를 의미한다. 카이저는 객관적인 척도를 요구하는 가치평가(Wertung)의 개념에서 (객관적인 척도 없이는 가치평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그 “객관적인 척도”를 제거함에 의해서 “해설”(Interpretation)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객관적인 척도”를 토대로 하는 가치평가에서 바로 그 “객관적인 척도”를 제거한 것이 해설이라면, 하나의 해설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고,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이고,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논리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것이 해설이라고 ebd., S. 161.
카이저는 고백한다. 해설에 관한 카이저의 고백은 예술작품과 문학작품에 내재한 아포리에 대한 자백이라고 보아야 한다. 카이저도 인정하는 예술작품과 문학작품에 내재한 아포리를 3개의 형태로 나누어 표현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술과 학술 사이의 아포리며, 둘째는 예술시간과 현실시간 사이의 아포리고, 셋째는 예술과 인생(인간생활) 사이의 아포리다. 예술과 학술 사이의 아포리는 “준비되고 감수성 있는 해설자는 단순히 감수성만 가지고있는 문외한보다는 더 올바르게 해설하고 평가한다”라는 카이저의 표현에 나타난다. “준비되었다”라는 말은 학술적으로 준비되었다는 말로서 학술성을 거부하는 해설에 약간의 학술성을 강요하려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예술과 학술 사이의 아포리를 카이저는 쉬타이거(Emil Staiger)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우리는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
감동은 비학술적이고 인식은 학술적이며, 감동은 논리적인 오성(Verstand)의 영역을 초월하는 것이고 인식은 바로 그 논리적인 오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자는 배타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다음에 예술시간과 현실시간 사이의 아포리는 시간을 두 가지 종류의 시간으로 분리하려는데 놓여있다. 현상학적 시간론이 내적 시간과 외적 시간, 주관적 시간과 객관적 시간, 체험시간과 세계시간 등으로 분리하는데, 시간에는 과연 두 가지 종류의 시간이 잇느냐 아니면 하나의 종류뿐이냐 하는 문제는 해결 불가능한 영원한 문제다. 카이저가 대표하는 작품내재적 이론이 주장하는 예술시간과 현실시간이라는 두 가지 종류의 시간 역시 해결 불가능한 영원한 문제로 아포리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예술과 인생 사이의 아포리는 작품내재적 이론과 철학적 이론 사이의 아포리를 나타낸다. 예술은 인간에 의해서 그리고 인간을 위해서 생산되고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예술에서 인간과의 관계를 제거하려는 의도는 역시 아포리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술은 인생을 위해 존재해야한다는 것이 철학적 이론이라면, 반대로 인생은 예술을 위해 존재해야한다는 것이 작품내재적 이론이 된다. 문학론과 예술론은 인간관계를 초월할 수 없는 것인데, 그 초월을 감행하려는 것이 아포리다.

4. 작품내재적 이론의 실천

문학작품의 가치평가론을 자율성미학과 타율성미학 2개의 카테고리로 나눈다면, 작품내재적 이론만이 자율성미학이며 철학적 이론과 작품초월적 이론은 타율성미학에 속한다는 내용을 언급했다. 그리고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의 이론들을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의 이론들은 인간과 인간세계의 실재를 중심 테마로 하기 때문에) “철학적 이론”이라는 대 명제 하에 통합하고, 문학작품과 인간사회 사이의 상관관계를 중심 테마로 하는 수많은 이론들을 “작품초월적 이론”이라는 두 번째 대 명제 하에 다시 통합한다면, 자율성미학인 작품내재적 이론은 거대하고 망망한 바다 위에 떠있는 하나의 작은 조각배와 같이 보인다. 다시 말해 작품내재적 이론은 한때 그것도 잠깐 존재했다가 없어진 이론으로 지금은 거론 할 수도 없고, 거론해서도 안되는 의미를 상실한 이론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때 잠깐 그리고 소수의 이론가들에 의해 주장되었던 작품내재적 이론은 철학적 이론과 그의 수많은 변형들 속에, 그리고 작품초월적 이론과 그의 수많은 변형들 속에 정도와 형태의 차이는 있으나 내재하고 편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작은 조각배와 거대하고 망망한 바다의 관계라는 비유로 표현된 작품내재적 이론과 기타 모든 이론들의 합의 관계를 과장하여 표현한다면, 이번에는 그 양자의 관계를 역으로 뒤집어놓은 관계로, 거대하고 망망한 바다가 작품내재적 이론이고, 철학적 이론과 그의 변형들 그리고 작품초월적 이론과 그들의 변형들, 모두의 합이 하나의 작은 조각배라고 할 정도로 작품내재적 이론은 모든 평가론에 내재하고 편재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예술의 실재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세계의 실재를 중심 테마로 하는 철학적 이론은 자신의 표현과 전달을 위해 예술에 의존하거나 아니면 예술의 자율성을 인정해 결과적으로 작품내재적 이론을 시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또 작품초월적 이론은 바로 그 초월 자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초월의 대상인 작품의 실재를 인정하지 안을 수 없어 결과적으로 작품내재적 이론을 감수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내재적 이론은 문학작품에 관한 모든 가치평가론들의 기초이고 출발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작품내재적 이론을 대표하는 중요한 이론가들 카이저, 쉬타이거, 쿤 등 3자 중에서 카이저 다음으로 쉬타이거와 쿤의 이론들을 간략하게 논하고 논문을 종결하기로 한다.
문학작품의 장르(genre)에는 소설, 드라마, 시 등 3개가 있다는 것이 정설인데, 고대 이래로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수많은 형태로 쓰여졌기 때문에 3개의 장르 소설, 드라마, 시 사이를 구분한다는 것은 현대에 와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에밀 쉬타이거(Emil Staiger)의 생각이다. 따라서 종래의 시학(詩學)이 아니라 새로운 시학인 기초시학(Fundamentalpoetik)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쉬타이거는 한다. 쉬타이거의 기초시학은 소설이 아니라 서사성을, 드라마가 아니라 희곡성을, 시가 아니라 서정성을 테마로 하는 시학이다. 예를 들어 시는 고대 이래로 수많은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시들이 쓰여졌기 때문에 시라는 장르의 본질을 규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므로 본질이 아니라 본성을 규정하는 일이 기초시학이라는 주장이다. 시(Lyrik)라는 개념은 하나의 상자와 같은 것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시들을 집어넣는 그릇이며, 서정성(lyrisch)은 그 여러 가지 형태의 시들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들인 소설, 드라마에도 골고루 편재해있는 하나의 본성이라는 논리를 쉬타이거는 전개한다. 그리고 문학작품을 구성하는 본성에는 3가지가 있는데, 서사성, 희곡성, 서정성이 그 3가지 본성이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3개의 장르인 소설에도, 드라마에도 그리고 시에도 이상 3개의 본성이 모두 내재해있다는 주장이 쉬타이거의 기초시학이다. 3개의 장르 소설, 드라마, 시에 3개의 본성 중 하나라도 결여된다면 소설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니며, 시도 아니라는 설명이다. 다만 소설에는 서사성이, 드라마에는 희곡성이, 시에는 서정성이 강하고 지배적이라는 논리이나, 3개의 장르 모두에 3개의 본성이 내재해있어야 문학작품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쉬타이거는 이상의 기초시학을 인간의 표현수단인 언어 자체에까지 확대하여 적용한다. 예를 들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라는 언어표현이 있다면,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등의 음절은 (의미를 모두 제거하고 남는 순수한 멜로디는) 서정성이고, 평지가 아니라 고개를, 돌아온다가 아니라 넘어간다라는 일정한 의미의 전달은 서사성이며,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까지를 말하면 다음에 일어날 사건으로, 사랑하는 님이 돌아오는지 아니면 넘어가는지 긴장하게 되는데 이 긴장이 희곡성이라고 쉬타이거는 설명한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언어표현에는 서사성, 희곡성, 서정성이 모두 내재해있으며 이 3개의 본성들이 인간언어 자체를 구성하는 구성요소들이라고 쉬타이거는 설명하다. 결론적으로 소설, 드라마, 시 등 3개의 장르 하나 하나 모두가, 그리고 그 3자의 합인 문학작품 자체가, 마지막으로 인간언어 자체가 서사성, 희곡성, 서정성이라는 3개의 구성요소로 구성되었다는 것이 쉬타이거의 기초시학이다.
쉬타이거는 기초시학을 모든 문학의 장르에다 그리고 다음에는 문학작품 자체에다 마지막으로는 인간언어 자체에다 적용하고 확대시킨다는 내용을 언급했는데, 이번에는 그 확대를 다시 한번 확장하여 인간실재 자체에까지 적용한다. 서정성은 인간의 영혼(Seele)과 같은 것이고, 서사성은 인간의 육체(Körper)와 같은 것이며, 희곡성은 인간의 정신(Geist)과 간은 것이라는 논리를 쉬타이거는 전개한다. 영혼, 육체, 정신 중 육체만 있다면 그것은 시체에 불과하고, 정신이 전혀 결여되었다면 바보천치가 되며, 인간의 감성을 의미하는 영혼이 전혀 없다면 로봇과 같은 인조인간이 되는 것과 같이 하나의 문학작품도 3개의 본성 서정성, 서사성, 희곡성을 모두 소유해야 한다는 논리를 쉬타이거는 전개한다.
인간이 영혼, 육체, 정신의 3위 일체인 것과 같이, 문학작품은 서정성, 서사성, 희곡성의 3위 일체라는 주장이다. 쉬타이거에 의하면 한편으로는 인간을 구성하는 3위 일체인 영혼, 육체, 정신과,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작품과 언어 일체를 구성하는 3위 일체인 서정성, 서사성, 희곡성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연결고리는 시간(時間) 이다. 문학작품에 관에서만 말한다면, 문학작품을 구성하는 3개의 구성요소 중 서정성은 회상(Erinnerung)을, 서사성은 표상(Vorstellung)을, 희곡성은 긴장(Spannung)을 의미하여 문학작품은 결국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연속 속에 현존하는 인간과 동일하다는 논리다.
회상은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것으로 과거의 카테고리에, 표상은 현재 눈앞에 있는 대상을 표상하는 것으로 현재의 카테고리에, 긴장은 현재는 없으나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기대로 미래의 카테고리에 속하기 때문이다. 서정성, 서사성, 희곡성으로 구성되어있는 문학작품이나 영혼, 육체, 정신으로 구성되어있는 인간이나 양자 모두 회상, 표상, 긴장의 3위 일체 속에,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의 연속 속에 현존(dasein) 한다는 것이 기초시학의 확대이고 확장이다. 장르 하나 하나에서 인간실재까지의 확대와 확장의 방향을 거꾸로 돌리면, 장르 하나 하나가, 장르의 하위개념인 문학작품 하나 하나가, 인간과 똑같이 회상, 표상, 긴장의 3위 일체 속에,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의 연속 속에 현존한다는 결론이 된다. 현존재(Dasein)라는 말은 철학에서 인간을 의미한다. 현존재인 인간은 “창문 없는 단자”, “둥그런 우주”이기 때문에 모든 문학작품도 그렇다는 말이 된다. 쉬타이거 역시 카이저와 마찬가지로 문학작품의 완전한 자율성을 주장하는 작품내재적 이론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다.  
헬무트 쿤(Helmut Kuhn)은 카이저나 쉬타이거와 같이 예술작품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살아서 움직이는 현존재(Dasein)로 보려는 예술철학자이다. 쿤은 특히 “인간의 생명”을 의미하는 “인생”(das Leben)이라는 개념을 선호하면서 예술과 예술작품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술의 원천지는 공간적으로 이곳 또는 저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원천지는 인생 자체다. ... 인생은 목적(Telos) 달성을 집행완성 하려고 할뿐만 아니라 그 집행완성의 과정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 표현하려고 한다. 인생은 형태, 형상이 되기를 원하며, 따라서 직관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직관의 대상이 되어진 인생은 하나의 특이하고 특수한 대상(Gegenstand sui generis)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특이하고 특수한 대상은 우리 인간에 의해 관찰되어져서 우리 인간의 시선이 그 특이하고 특수한 대상에 유혹되어 머물고 안정과 만족을 얻기도 하지만, 이 특이하고 특수한 대상은 역으로 우리를 관찰하고 주시하기도 한다. 이 특이하고 특수한 대상이 우리 인간을 관찰하고 주시하면, 우리 인간은 그 시선 앞에서 견디어 지탱해야하는 입장에 서게된다.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예술작품인 이 특이하고 특수한 대상은 역으로 인간에게 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
요약하면 예술과 예술작품의 원천지는 인생 자체며, 인생은 2가지 본성을 가지고있는데 하나는 목적달성을 집행완성 하려는 본성과 다른 하나는 그 집행완성의 과정 속에 처해있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 표현하려는 본성이라는 설명이다. 인생이 가지고있는 이상의 두 가지 본성 중에서 후자가, 다시 말해 목적달성의 집행완성이라는 과정 속에 처해있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 표현하려는 본성이 형태와 형상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예술이고 예술작품이라는 설명이 된다. 따라서 쿤의 예술철학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예술과 예술작품의 원천지는 우리 인간의 인생 자체이고 또 예술과 예술작품은 우리 인생과 같은 2개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생에는 2가지 인생이, 한편으로는 예술과 예술작품이라는 인생과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인간의 인생이 있다는 것이 첫째로 주의할 사실이다. 둘째로 주의할 사실은 예술과 예술작품은 우리 인생과 같이 최종 목적(Telos)에 도달할 수는 없고 (인간은 신과는 달리 인간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이기 때문에 최종목적에 도달하는 일은 영원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그 과정 속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예술과 예술작품에 대한 일회적이고 최종적인 정의 규정과 가치 판단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쿤은 예술과 예술작품의 본질을 일회적이고 최종적으로 규정하려는 전통적인 미학은 잘못이며, 오히려 그 과정 자체만을 묘사하는 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본질의 존재론이 아니라 과정의 존재론이라는 의미로 온토게네세(Ontogenese)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상의 두 가지 주의할 사실 중에서 후자는, 다시 말해 예술과 예술작품은 최종목적에 도달할 수 없고 항상 그 도달과정 속에 붙들려있어 예술과 예술작품에 대한 일회적이고 최종적인 정의규정과 가치판단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예술과 예술작품을 구성하는데는 객관적인 규칙이 있다는 소위 규칙미학과 또 예술과 예술작품에 대한 가치판단의 객관적인 척도를 제시하려는 이론들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이 주장은 제공한다. 다른 하나는 예술과 예술작품을 인간의 인생 차원과 동일한 차원으로 승격시킴에 의해서 이 주장은 예술학 즉 인생학이며, 예술철학 즉 인간철학, 다시 말해 인간 존재론적 철학이라는 쿤의 이론에 근거를 제공해준다. 종합하여 두 가지 주의할 사실 중에서 후자는, 다시 말해 예술과 예술작품은 최종목적에 도달할 수 없고 항상 도달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최종적인 정의규정과 객관적인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전자를 지지하고 보강해주는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최종목적에는 도달할 수 없고 항상 도달과정에 있다는 예술과 예술작품에 관한 말은 바로 인간에 관한 말이며, 또 만약에 최종목적에 도달한다고 가정하면, 더 이상 과정의 존재론이 아니라 본질의 존재론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개의 주의할 사실 중에서 전자에, 다시 말해 인생에는 2가지 인생이 있다는 사실에, (예술과 예술작품이라는 2개의 표현을 예술이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통합하면) 예술의 인생과 인간의 인생이 있다는 사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예술은 또 하나의 인생이다”라는 말이 쿤의 예술철학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예술의 인생과 인간의 인생, 2개의 인생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드러내는 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예술의 인생”이라는 표현이 모순적인 표현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예술은 인간이 아니므로 인간의 생명, 즉 인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논리에 의해서 예술은 독자적인 생명을 가지고있는데, 그 예술의 독자적인 생명이 인간의 생명과 동일한 생명, 인생이라는 설명이 된다. “예술작품의 원천은 총체적인 인간의 생명, 총체적인 인생이다”라는 것이 ebd., S. 110.
쿤 미학의 대 전제이다. 예술작품은 총체적인 인생에서 탄생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쿤은 이 총체적인 인생을 2개의 부분으로 나누는데, 정확히는 이 총체적인 인생의 2가지 모습을 말하는데, 그것이 하나는 프락시스(Praxis)이고 다른 하나는 포이에시스(Poiesis)이다. 프락시스라는 모습으로 볼 때 인간은 전체적이고 총체적이라고 쿤은 말한다. 달리 표현하면 프락시스로서의 인간에게는 그 구성요소 하나 하나에 프락시스가 내재해있다는 말이다. 전체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가 머리, 팔, 다리라고 한다면, 우선 전체 인간에 그리고 그 구성요소들인 머리, 팔, 다리에 모두 동일한 프락시스가 내재해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전체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프락시스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프락시스가 내재해있는 팔은 전체 인간으로부터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평가할 수 없으며, 평가할 때는 반듯이 전체의 입장에서, 다시 말해 전체 인생의 입장에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쿤은 설명한다. 프락시스라는 면으로 볼 때 하나의 구성요소인 팔과 전체 인생과의 관계는 부분은 전체를 구성하는데 이바지하고 전체는 부분을 구성하는데 이바지하는 관계라는, 하나의 구성요소는 전체 인생을 구성하는데 이바지하고 전체 인생은 하나의 구성요소를 구성하는데 이바지하는 관계라는 설명이다. 프락시스라는 개념을 쿤은 마치 니이체가 디오니소스성(das Dionysische)을 설명하는 것과 같이 인생의 총체가 프락시스이며, 그리고 인생을 구성하는 구성요소 하나 하나에 프락시스가 내재해있다고 설명한다. 인생 전체가 하나에서 열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프락시스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쿤의 철학이고 미학이다.
포이에시스(Poiesis)는 어떤 대상을 만들어내는 제조이고 창조라고 쿤은 설명한다. 예술에 관해 말한다면 포이에시스는 예술작품을 제조하고 창조하는 행위 자체라는 설명이다. 예술작품을 제조하고 창조하는 행위 자체인 포이에시스는 마치 병을 치료하는 의사의 기술과 같아, 포이에시스 자체는 선하다 또는 악하다라고 판단 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병을 치료하는 의사와 돈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병을 치료하는 의사 사이는 병을 치료하는 기술의 면에서는 선하다 악하다라고 판단할 수 없고, 두 의사는 서로 동등하고 동일한 의사라는 것과 같다는 논리다. 왜냐하면 두 의사 모두 동일하게 병을 치료할 수 있고 완벽하게 치료하기 때문이다. 포이에시스, 포이에시스가 만들어낸 예술작품 그리고 프락시스 등 3자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쿤은 설명한다. 포이에시스는 자신이 만들어낸 예술작품의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하고 (두 의사는 완치된 환자의 입장에서 판단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예술작품은 총체적인 인생인 프락시스의 입장에서 판단되어야 하는 관계이므로 단계확대(Eskalation)의 순서는 포이에시스, 예술작품, 프락시스가 되어야지 그 반대의 순서가 된다면, 다시 말해 프락시스는 예술작품의 입장에서 그리고 예술작품은 포이에시스의 입장에서 판단된다면, 이는 자연질서에 어긋나는 순서가 된다고 쿤은 말한다.
포이에시스, 예술작품, 프락시스라는 하에서 상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확대되는 3개의 단계는 복잡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포이에시스 자체와 프락시스 자체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다.  포이에시스 자체는 제조와 창조의 능력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고, 프락시스는 인생이라는 총체성 자체이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 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포이에시스가 만들어낸 예술작품뿐이다.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예술작품은 포이에시스가 만들어낸 결과이기 때문에 예술작품은 포이에시스의 자화상 내지는 포이에시스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포이에시스이다”라고 쿤은 말하는데,
예술작품은 포이에시스 자체라는 말이 된다. 결국은 포이에시스, 예술작품, 프락시스라는 3자 관계는 포이에시스와 프락시스라는 2자 관계로 축소되는데, 전자를 공간 조형예술에, 그리고 후자를 시간 조형예술에 쿤은 통합시킨다.
따라서 쿤은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공간 조형예술”은 포이에시스에서, 그리고 음악과 같은 “시간 조형예술”은 프락시스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니이체가 아폴로성(das Apollinische)을 시각적인 조형예술에, 그리고 디오니소스성(das Dionysische)을 청각적인 음악에 통합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쿤은 니이체의 제자라고 보아야 한다.
예술은 다시 말해 “예술작품은 또 하나의 인생이다”라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쿤은 포이에시스와 프락시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포이에시스와 프락시스라는 양자 중에서 후자인 프락시스를 제외하고 본다면, 포이에시스는 탈 인격화된 예술작품이라고 쿤은 말한다. 다시 말해 프락시스를 제외한 예술작품은 기계적인 공산품이지 진정한 예술작품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계적인 공산품이 아니라 진정한 예술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조각가가 돌을 까가 작품을 만들 때는 조각가는 자신의 영혼을, 자신의 일부를 작품 속에 집어넣어  그 작품 속에는 조각가의 영혼이, 조각가 자신의 일부가 실명으로든 아니면 익명으로든 영원히 존재한다는 논리를 쿤은 전개한다. 따라서 조각가 자신의 영혼이, 조각가 자신의 일부가 담겨진 조각작품은 또 하나의 조각가이다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조각가가 만들어낸 조각작품은 조각가 자신의 자화상이 되므로 조각가와 그의 자화상, 2명의 조각가가 존재한다는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각가는 하나의 인생이므로 조각가의 2중화는 인생의 2중화를 의미하게되어, 조각작품은 또 하나의 인생이라는, 예술작품은 또 하나의 인생이라는 쿤의 미학이 성립하게 된다. 포이에시스와 프락시스의 관계로 다시 복귀하면, 프락시스를 제외하면 진정한 포이에시스가, 진정한 예술작품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 그리고 예술작품은 또 하나의 인생이라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진정한 포이에시스는 또 하나의 프락시스다라는 말과 같은  표현이 된다. 잃어버린 엄마를 찾는 어린아이의 가엾은 모습은 모성애가 이유가 되지만, 그 가엾은 모습 자체가 모성애의 표현이라고 쿤은 말하는데,
이는 니이체의 표현이라 보아야 한다. 포이에시스와 프락시스의 관계가 니이체의 아폴로성과 디오니소스성의 관계와 같다는 말을 언급했듯이 쿤은 프락시스의 개념을 고뇌와 비극의 개념에 가까이 정착시키려한다. 프락시스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쿤은 비장한(pathetisch), 고뇌(Erleiden),  비탄의 노래(Trenos)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니이체는 원초충동이고 원초모태인 디오니소스성을 고뇌, 그것도 어두운 심연과 같은 고뇌로 묘사한다. 쿤이 포이에시스와 프락시스의 관계를, 자세히는 포이에시스, 예술작품, 프락시스라는 단계확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무를 까고 돌은 깨는 장인의 작업은 냉정하고 정확한 기계적인 작업이다. 다음에 이 냉정하고 정확한 기계적인 작업 속으로 번뜩하는 섬광이 들어가서 그 작업이 창조물이 되어야하고, 그 창조된 형상이 숨을 쉬어야한다. 정적인 형상물이 동적으로 변해야한다.”
여기까지의 단계가 포이에시스, 예술작품, 프락시스라는 불가분의 3자 관계에서 중간 단계인 예술작품까지의 단계이다. 다음에는 반대 방향에서 시작하여, 다시 말해 프락시스에서 시작하여 역시 중간 단계인 예술작품에 도달하는 과정을 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간 조형예술가는 반대로 고뇌와 정열이라는 동적인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 동적인 고뇌와 정열이 가시적인 형상을 가지기 위해서는 운동을 중지하고 정적으로 되어야 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운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을 얻기 위해서는 운동을 멈추어야 한다.” ebd.
결론적으로 포이에시스, 예술작품, 프락시스라는 불가분의 3자 관계에서 2가지 예술작품이 생기게 되는데, 포이에시스에서 시작해서 예술작품에 도달하는 예술작품은 공간 조형예술(raumbildnerische Kunst)이 되고, 반대로 프락시스에서 시작해서 예술작품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 조형예술(zeitbildnerische Kunst)이 된다는 것이 쿤의 미학이다. 쿤은 이상의 2가지 예술을 종합하여 예술 중의 예술은, 최고의 예술은 축제(Fest)라는 논리를 다음과 같이 전개한다. “2가지 상반된 방향의 예술은 균형을 찾아야한다. 장인의 냉정하고 정확한 기계적인 작업이 너무 드러나도 안되고, 또 반대로 과격한 정열이 너무 드러나도 안 된다. 전자가 너무 드러나면 예술작품은 차고 비진리성을 띠게되고, 후자가 드러나면 예술작품은 너무 뜨거워 표현이 불가능하며 거부감을 주게된다.”
너무 차지도 않고 너무 뜨겁지도 않으며, 진리성과 안정감을 주는 예술작품은, 다시 말해 포이에시스와 프락시스의 이상적인 종합이 축제라는 것이 쿤의 미학이다.
2개의 상반된 방향이, 공간 조형예술로의 방향과 시간 조형예술로의 방향이 한점에서 만나는 것이 축제인데, 축제는 예술의 변화과정과 불변의 존속이, 예술의 변화와 불변이 그것도 인생 속에서 만나는 점이라고 쿤은 말한다. 계속해서 축제는 분리되었던 2개가, 인생 속으로 눈을 뜨는 포이에시스와 정적인 형상 속으로 눈을 감는 프락시스가 만나서 하나가 되는 곳이 축제라고 쿤은 말한다.
쿤은 축제의 개념을 여러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서 상세히 설명하나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축제는 자신의 시간(Zeit)을 가지고있고, 둘째로 축제는 자신의 공간(Raum)을 가지고있으며, 셋째로 축제는 자신의 분위기(Stimmung)를 가지고있다는 것이 그 종합이다. 축제가 자신의 시간, 자신의 공간, 자신의 분위기를 가지고있다는 말은 현실세계인 인간세계의 그것들과는 다른 독립된 시간, 공간, 분위기를 가지고있다는 말이다. 축제는 현실의 인간세계와는 다른 세계라는, 축제는 또 하나의 세계라는 말이 된다. 축제의 시간은 한 시, 두 시, 봄, 여름 하는 달력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며, 축제의 공간은 여기, 저기, 동양, 서양 하는 지도의 공간과는 다른 공간이며, 또 축제의 분위기는 지금 현재 우울한 나의 분위기와는 다른 분위기라는 말이다. 축제는 또 하나의 세계, 현실세계와는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축제는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로부터 분리되어 높이어졌다는 의미로 “고양된 세계”라고 쿤은 설명하다. 이상의 축제라는 고양된 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의 관계는 역시 불가분의 관계로 전자는 후자를 일정한 방향으로 정돈시키고, 후자는 전자에 의해 일상생활의 고뇌로부터 해방되어 정돈된 형상에 도달하는 관계라고 쿤은 말한다. 축제라는 고양된 세계와 고뇌의 현실세계, 양자 사이의 상호관계를 쿤은 3가지 단계로 나누어 살명하는데, 미메시스(Mimesis), 유희(Spiel), 모든 예술의 모체(Matrix)인 동시에 아우라(Aura)의 단계가 그 3가지 단계다.
축제라는 고양된 세계와 고뇌의 현실세계, 표현을 달리 하여 축제와 현실의 인생, 양자 사이의 대단히 모호하고 섬세한 관계를 쿤은 미메시스(Mimesis)라는 개념에 의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축제는 현실인생 위에 고양되어 우뚝 서 있어 현실인생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축제는 또한 고양되어진 현실인생 자체이기도 하다. 축제는 현실인생 자체다. 그것도 독특하고 구체적이며 인간에 의해 실제로 체험된 현실인생, 또 하나의 인생이다. 인생의 전체 의미가 축제 속에서 응축되어 자신을 찬란하게 과시하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여 축제는 미메시스다. 미메시스는 자기 자신을 표출하려는 인생 자체인데, 그것도 남이 보라고 인위적으로 과장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을 위해서만 표출하려는 인생 자체, 표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표출하려는 인생 자체가 미메시스다. Vgl. ebd., S. 120.
미메시스는 인간에게 그리고 인간세계를 형성하는 모든 것에 내재해있는 원초적인 충동이라는 것이 쿤의 생각이다. 쿤에 의하면 축제는 미메시스이므로 축제에서 발생하는 미메시스는, 아니면 반대로 미메시스에서 발생하는 축제는 인위적인 묘사나 복사가 아니라 고양되고 찬란한 인생의 재실현이라고 쿤은 설명한다. 미메시스의 문제는 모형과 모사, 또는 모범과 모방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을 표출하여 형상화하려는 인간에 내재한 원초충동이 미메시스라고 쿤은 설명한다. 축제 역시 인간에 내재한 원초충동, 원초적인 인생, 또 하나의 인생이라는 설명이 된다. 다음에 쿤은 축제와 현실인생 사이의 관계를 점진시켜 유희(Spiel)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설명한다. 축제는 유희이고 가상(Schein)이며, 현실인생은 실재(Sein)라는 설명인데, 유희와 현실인생, 가상과 실재 사이의 관계 역시 모호하고 섬세한 관계다. 예를 들어 축구경기를 하는 축구선수들과 그 축구경기를 관람하는 관중들이 하나가 되어 공의 방향만 주시하는 것과 같이, 공의 방향만 주시한다는 면에서 본다면, 축구경기라는 유희를 하는 유희자와 그 유희의 관람자 사이의 차이점은 제거되어 양자가 하나가된다는 설명이다. 다시 말해 유희자와 관람자, 유희라는 축제와 현실인생 사이의 차이는 제거되어 양자가 하나가 된다는 설명이다. 달리 표현하면 유희자는 가상인물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꼴 키퍼는 실재적으로는 한 가정의 남편이며 아버지이기고 가상적으로만 꼴 키퍼이기 때문에) 가상과 실재 사이의 차이가, 가상인물들인 유희자들과 현실인생의 관중들 사이의 차이가 제거되어, 양자가 하나로 통합된다는 설명이다. 양자의 통합을 달리 표현하면, 유희는 현실인생이고, 현실인생은 유희라는 말이 된다. 가상은 실재이고, 실재는 가상이라는 말이 된다. 축제는 유희이고 가상이기 때문에 다시 축제는 현실인생이고, 현실인생은 축제라는 말이 된다. 마지막으로 모체(Matrix)와 아우라(Aura)라는 개념에 의해서 쿤은 더욱 점진시켜 예술은 인간처럼 항상 변화를 하고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독자적인 생명을 가지고있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축제와 현실인생, 양자 사이의 모호하고 섬세한 차이는 미메시스와 현실인생, 가상의 유희와 실재의 현실인생 사이의 모호하고 섬세한 차이로 설명되었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종합하여 표현하면, 축제가 또 하나의 현실인생이라면 미메시스도 또 하나의 현실인생이며, 또 유희와 가상도 또 하나의 현실인생이라는 설명이 된다. 미메시스이고, 유희와 가상인 축제를 최고의 점진된 표현으로 쿤은 모든 예술의 모체이고, 동시에 모든 예술이 하나로 응축되어 나타나는 아우라라고 말한다. 모든 예술의 모체이며 원천이 축제이며, 모든 예술이 하나로 응축된 모습이 축제라는 말인데, 이 축제는 여러개인 동시에 하나, 하나인 동시에 여러개로 라이프니쓰(Leibniz)가 말하는 단자(Monade)와 같은 것이라고 쿤은 말한다.
라이프니쓰의 단자는 “창문 없는 단자”라고 불리어지며, 완전하고 자급자족하며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세계를 의미하며, “둥그런 우주”라고도 불리어진다. 단자라는 개념은 아우토노미(Autonomie)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예술 중의 예술이, 아니면 모든 예술의 응축과 함축이 축제이며, 그리고 모든 예술은 다시 이 축제에서 파생해 나간다고 하는 것이 쿤의 미학이다. 라이프니쓰의 단자론을 확대하여 적용하면, “둥그런 우주”와 단자와의 관계는 축제와 개별 예술들과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예술작품은, 따라서 모든 문학작품은 하나의 단자이며, 하나의 아우토노미라는 결론이 된다.
문학작품의 가치평가문제를 위해서 작품내재적 이론, 넓은 의미의 철학적 이론, 작품초월적 이론 등 3개의 방향을 상정하고 첫째 방향인 작품내재적 이론을 논헀다. 그리고 작품내재적 이론을 위해서 카이저, 쉬타이거, 쿤 등 3인의 이론들을 논했다. 이상 3인의 이론들은 서로 방향설정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방향설정의 문제는 한편으로는 작품내재적 이론의 핵심인 작품 자체의 실재와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적 이론의 핵심인 인간과 인간세계의 실재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작품 자체와 다른 한편으로는 형이상학적 내지는 일반 철학적 실재 사이에서 3인의 이론가들은 방향설정을 달리 하고 있다. 카이저는 작품 자체에서 출발하여 작품 자체로 귀향하는 방향을 보인다. 작품 자체가 출발점이며 동시에 도달점이라는 것이 카이저의 이론이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철저한 작품내재적 이론을 카이저는 대변하고 있다. 반면에 쉬타이거는 작품 자체와 철학적 인간실재 사이의 중간점이 그의 출발점인 동시에 도달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쉬타이거는 작품 자체와 철학적 인간실재, 양자를 동일하고 동등하게 수용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쿤은 철학적 인간실재에서 출발하여 작품 자체에 도달하려는 방향설정을 보이고 있다. 쿤의 도달점이 작품 자체라는 면에서 볼 때 그의 이론이 작품내재적 이론이라 할 수 있으나, 그의 출발점이 철학적 인간실재라는 면에서 본다면 그의 이론은 인간 존재론적 이론에 (넓은 의미의 철학적 이론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쿤은 헤겔 미학을 하는 철학자이지 문학 이론가는 아니다. 쿤의 이론은 작품내재적 이론과 철학적 이론 중간에 위치한다고 보아야 한다.

참고문헌

Gadamer, Hans-Georg: Die Aktualität des Schönen, Stuttgart 1979.
Gadamer, Hans-Georg: Kunst als Aussage, Ästhetik und Poetik I, Tübingen 1993.
Hegel, G. W. F. : Phänomenologie des Geistes, Frakfurt/M. 1973.
Kayser, Wolfgang: Literarische Wertung und Interpretation, in: Literaturkritik und Literarische Wertung, hrsg. von Peter Gebhardt, Darmstadt 1980.
Kuhn, Helmut: Die Ontogenese der Kunst, in: Theorien der Kunst, hrsg. von Dieter Henrich und Wolfgang Iser, Frankfurt/M. 1982.
Steiger, Emil: Lyrik und lyrisch, in: Zur Lyrik-Diskussion, hrsg. von Reinhold Grimm, Darmstadt 1966.
Wellek, René: Kritik als Wertung, in: Literaturkritik und literarische Wertung, hrsg. von Peter Gebhardt, Darmstadt 1980, S. 331 - 351.

Zusammenfassung

Werkimmanente Theorie der Literaturwissenschaft

Yu, Hyoung-Shik(Chung-Ang Univ.)

Für die Frage der Wertung der Literatur stehen generell drei Kategorien der Theorie zur Verfügung. Das sind die werkimmanenten Theorien, die allgemein philosophischen Theorien und die werktranszendenten Theorien der Literaturwissenschaft. Von den zu diesen drei Kategorien gehörenden Theorien werden nur die zur ersten Kategorie gehörenden, nämlich die werkimmanenten Theorien in dieser Studie erörtert. Und im Bereich der werkimmanenten Theorien werden nur die Theorien von Wolfgang Kayser, Emil Steiger und Helmut Kuhn behandelt. Die genannten drei Theoretiker sind die drei Hauptvertreter der werkimmanenten Theorie. Diese drei Hauptvertreter unterscheiden sich aber voneinander. Die Differenz, die unter den drei Theoretikern besteht, hängt zusammen mit dem Verhältnis der zwei Arten von Seinsproblemen zueinander. Diese zwei Arten Seinsprobleme sind das Sein der Literatur einerseits und das Sein des Menschen und der menschlichen Gesellschaft andererseits. Kurz formuliert sind das literarische Sein und das menschliche Sein die zwei Arten von Sein. Die drei Hauptvertreter der werkimmanenten Theorie Kayser, Steiger und Kuhn orientieren sich in unterschiedlicher Weise an dem rein künstlerisch literarischen Sein auf der einen Seite und dem philosophisch zu erfassenden allgemein menschlichen Sein auf der anderen Seite. Kaysers Theorie fängt  mit dem literarischen Sein an und geht wieder zu dem literarischen Sein zurück. Er ist reiner Literaturtheoretiker. Steiger pendelt aber zwischen dem literarischen Sein und dem philosophisch menschlichen Sein hin und her. Er will die zwei Arten Sein in eins integrieren. Schließlich läuft die Richtung der Kuhnschen Theorie von dem philosophischen Sein weg und wieder zu dem philosophischen Sein zurück. Kuhn ist eher Philosoph als Literaturtheoretiker.


검색어: 작품내재적 존재의 문제, 문예이론
Schlüsselbegriffe: Werkimmanente Theorie, Seinsproblem, Theorie der
               Literaturwissenschaft
필자 E-Mail: Hyoung 1269@yahoo.co.kr
투고일: 2002.9.29 / 심사완료일: 2002.11.3

출전: 뷔히너와 현대문학, 제19호 (2002년 11월)
학회URL: http://buechner.germ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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