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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1/26 (10:56) from 80.139.162.31' of 80.139.162.31' Article Number :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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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넘어서 현대를 따라잡기 ― 루만의 현대를 다시 쓰기
현대를 넘어서 현대를 따라잡기
―루만의 ‘현대를 다시 쓰기’에 대하여




박영도   






리오타르는 탈현대의 본질적(?) 문제의식이 현대를 시간의 뒷방으로 밀쳐넣는 것이 아니라 “현대를 다시 쓰는 것”이라고 다소 겸손하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굳이 베버의 현대의 다신론 테제를 들추지 않더라도 현대를 다시 쓰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고, 사실 탈현대 논쟁이라는 것도 이 차이를 둘러싼 논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리오타르, 데리다, 푸코 등의 탈현대주의자들이 현대의 미학적 통찰을 급진화시켜 현대를 다시 쓰려고 한다면, 현대의 미완의 기획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려는 하버마스는 현대의 규범적 내용을 다시 쓰는 작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 이 두 주역이 탈현대 논쟁의 무대를 뜨겁게 달구었지만 뭔가 미진하고 허전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이 느낌은 또하나의 주역, 그러니까 지금까지 쓰여진 현대의 주된 필자로 간주되었고 또 그 때문에 오늘날 비판의 초점이 되고 있는 현대과학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주인공이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 무대는 허전하기 이전에 공평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등장하면 그는 어떤 역할을 어떻게 보여줄까?

이 궁금증을 풀어줄 제3의 주인공 역할을 맡을 만한 유력한 인물 중의 하나가 일반 독자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학계에서는 하버마스와 함께 사회이론의 슈퍼스타로 인정받고 있는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다. 루만은 생물학, 인지과학, 열역학 등등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복잡한 체계, 이차 관찰, 자기산출 등등의 이름으로 등장하여 새로운 과학혁명으로 각광받고 있는 일련의 과학적 통찰들을 사회이론 영역으로 번역하여, 50∼60년대 현대성 이해를 주도했던 구조 기능주의적 체계이론의 전통을 혁신시키고, 이를 발판으로 데카르트로부터 후설까지 현대의 의미론을 주도했던 주체중심적 사유를 사회이론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해체구성하려는 야심만만한 기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초인적인 생산성으로 이미 오래 전에 만 페이지 분량을 넘어선 그의 방대하면서도 치밀한 지적 세계의 전모를 여기서 보여준다는 것은 이론적 폭력을 감행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고, 또 그것이 우리의 목적도 아니다. 여기서는 그의 사회체계 이론이 ‘현대를 다시 쓰기’라는 제목의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어떻게 연기하는지를 약간의 비평을 곁들여 살펴보고자 한다.


1. 현대를 넘어서기 : 기능적 분화와 의미론적 지체


탈현대 논쟁의 무대에 들어서면서 루만은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힌다. “탈현대라는 것을 세계에 대한 통일적 기술의 부재로, 모든 사람을 묶어주는 이성 혹은 세계와 사회에 대한 공통된 타당한 태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현대 사회가 산출한 구조적 조건의 결과에 불과하다. 현대 사회는 어떠한 최종적 사상도 운반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사회 속에서 사회를 구속력 있게 기술할 수 있는 입장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성으로의 해방이 아니라 이성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이 해방은 앞으로 추구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완수되었다.”(Luhmann, 1992b : p. 42) 여기서 루만은 지금까지의 두 주역을 (인용문의 전반부는 탈현대주의자를, 후반부는 하버마스를) 한꺼번에 비판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 그것을 ‘현대를 넘어서 현대를 따라잡기’라고 이름 붙여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이 역설적 명명이 주는 의아스러움부터 풀어야 할 것 같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체로 역설을 해소하는 길은 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상이한 것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베버 이래 현대성의 규정과 그 비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회적 현대와 문화적 현대의 구별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루만 자신도 현대의 사회구조와 의미론이라는 이름으로 이 구별을 사용하면서 오늘의 상황을 사회구조적 연속성과 의미론적 불연속성으로 특징짓는다.(Luhmann, 1992b : pp. 17∼18) 여기서 루만은 사회적 현대성을 독립변수로 두고 의미론적 현대성을 종속변수로 두는 입장을 보여주는데, 여기에서 현대를 다시 쓰려는 그의 전략을 읽을 수 있다. 특징적인 점은 루만에게서 현대의 고전적 의미론은 사회적 현대를 따라잡지 못하는 일종의 의미론적 지체의 산물이며, 이 지체현상을 깨면서 등장하는 새로운 의미론은 사회적 현대에 조응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의 전략은 현대를 넘어서 현대를 따라잡기라는 모습을 취한다.

이제 반 정도 그 역설이 해소된 이 따라잡기 전략을 좀더 깊이 이해하려면 그가 상수로 설정한 사회적 현대의 구조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루만은 그 구조적 특징을 기능적 분화원리에서 찾는다. 50∼60년대 구조 기능주의 이래 체계분화가 현대의 구조적 특징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루만은 앞서 언급한 자연과학의 새로운 통찰들을 도입하여 기능적 분화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한다. 새로운 과학적 통찰의 세례로 거듭난 기능적 분화는 자기지시적이고 폐쇄적인 자율적 자기생산 체계들이 다수 등장하였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체계이론의 두번째 패러다임 선회를 대변하는 이 자기생산 체계 개념이 루만의 현대성 이해에서 관건이 되기 때문에 이 개념의 특징을 확인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먼저 자기생산 체계는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스스로 생산하는 체계이며, 요소들을 그 요소들의 연결망 자체를 통하여 생산하는 체계로 정의할 수 있다.(Luhmann, 1990a : pp. 1∼20) 이런 회귀성에 기초한 체계가 폐쇄성을 갖는다는 것은 쉽게 추리할 수 있다. 이 체계는 자신의 요소를 외부로부터 입력받지도 않고 외부로 출력하지도 않는다. 이 체계가 얻는 정보조차도 외부로부터 깨끗하게 포장되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체계 내부에서 구성된다. 이 체계에게는 선물이 없다. 이 체계는 자신이 스스로 산출하지 않은 것은 체계의 요소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체계가 환경에 완전히 닫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환경과의 관계는 이 체계의 자기생산의 가능성 조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체계가 폐쇄성을 갖는 것은 그것이 작동상의 폐쇄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폐쇄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두뇌의 작동양식이다. 두뇌는 전기에 기초한 자기만의 작동언어를 갖는데, 환경세계에는 없는 그 언어를 사용하여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을 통하여 환경으로부터 오는 감각적 자극을 정보로 변형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그 체계는 자급자족적인 것이 아니라 자율적이라는 특성을 갖는데, 이것을 루만은 “우리는 낙원에서 추방된 것처럼 현실로부터 추방되었기 때문에 현실을 인식한다”라는 의미심장한 말로 표현한다.(Luhmann, 1991 : p. 199) 폐쇄에 기초한 개방이라는 발상을 통해 루만은 열린 체계와 닫힌 체계의 대립을 지양한다. 물론 이와 함께 체계이론의 관심도 적응에서 구성으로, 통제에서 자율성으로 전환된다.

둘째, 자기생산 체계는 시간화된 복잡한 체계라는 특징을 갖는데, 이것은 이 체계의 요소들이 사건이라는 지위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사건은 출현 즉시 소멸한다. 이제 체계는 단순히 특정한 구조적 유형의 선택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건들을 사용하여 사건들을 생산하는 식으로 자신을 유지한다. 그러니까 체계는 매순간 존속과 소멸의 기로에 처하며, 자기생산은 매순간 목숨을 건 도약인 셈이다. 이렇게 체계의 구조가 소멸하는 사건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체계의 끊임없는 분해가 곧 체계의 재생산 조건이 된다. 이렇게 현대의 시간 경험을 이론의 핵심으로 끌어들여 정태성과 동태성의 대립을 지양하고 체계의 역동적 안정성이 불가능한 조건 속에서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분석하는 출구를 열었다는 것이 그의 중요한 이론적 업적이다.

마지막으로, 루만에서 기능적 분화란 경제, 정치, 법, 가족, 과학, 교육 등등의 주요 사회적 소통의 영역들이 제각기 고유한 코드를 가진 자기생산 체계로서 등장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는 무중심 다극적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루만에서는 이 사회구조가 오늘날 탈현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고전적 의미론의 붕괴의 원인이고, 또 새로운 사회의미론의 출발점이다.

고전적인 주체의 의미론이 무너진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 속에서 사회를 독점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위치가 현대에 오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신분적 계층화의 원리에 따라 위계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고 사회 속에서 사회를 기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귀족과 같은 위계상의 정점에 있는 위치라든가 도시와 같은 중심적 위치는 사회가 통일적인 자기기술을 발전시키고 유통시킬 수 있는 독점적 기회를 누렸다. 그러나 현대 사회로 이행하면서 그런 독점적 위치도 통일적 자기기술도 불가능해진다. “기능적 체계들은 그 어느 것도 특권적 위치를 주장할 수 없다. 각 체계는 자신의 기능이 우선적이라는 생각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를 기술한다. 그러나, 어떤 체계도 자신의 기술을 다른 체계에 강요할 수 없다.”(Luhmann, 1990a : pp. 125) 그러니까 자연적 재현의 상실, 사회 속에서 사회를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 현대성의 구성적 특징이다. 이제 현대 사회에서는 사회의 총체성은 결코 완전히 재현될 수 없으며, 또하나의 총체성으로 실현될 수 없다. 요컨대 메타 이야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루만의 이러한 관점의 밑바탕에는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에서 출발해야 하며, 단일 맥락적 사유에서 다맥락적 사유로 이행해야 한다는 방법론적 원리가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루만은 탈현대의 의미론에 동의하고, 데리다가 직접성의 철학을 깬 유일한 인물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사실 데리다의 차연(此延, diffe′rance)과 마찬가지로 루만의 자기생산 체계도 객관적, 시간적, 사회적 차원에서의 차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단 루만은 데리다에게 없는 사회적 차원을 도입하며, 또 차연을 통한 해체보다는 그러한 끝없는 해체의 조건 위에서 어떤 형태의 관계와 질서가 가능한가에 주목한다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루만의 시각에서 볼 때 탈현대주의자들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그들은 주체의 의미론이 기능적 분화라는 사회적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 무능력에서 비롯하는 과도기적 의미론으로서 전통적 의미론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해체했다고 자부하는 주체의 의미론은 기실 현대의 의미론이 아니라 현대에 뒤처진 의미론이었던 것이다. 둘째, 탈현대주의자들은 그들의 의미론이 사회적 현대가 구조적으로 산출하는 의미론적 효과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탈현대의 의미론은 사실은 현대를 넘어선 의미론이 아니라 사회적 현대의 구조가 산출하는 의미론적 효과를 때늦게 인정한 것뿐이고, 또 그러다보니 때늦음을 때이름으로 한달음에 부풀려 보충하려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불가능성의 조건하에서 가능성을 추구하는 루만으로서는 사회의 독점적 자기재현의 불가능성을 재현의 근본적 위기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체계의 자기관찰과 자기기술의 형식에 대한 성찰의 끝이 아니라 출발을 의미한다.”(Luhmann, 1992b : p. 7) 그러나 이 출발은 현대의 사회구조에 합당한 의미론의 출발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루만이 구상하는 사회적 의미론은 현대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현대를 따라잡는 의미론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이제 ‘현대를 넘어서 현대를 따라잡기’라는 말의 뜻이 해명된 셈이다. 그럼 현대를 따라잡는 루만의 새로운 의미론은 어떤 모습인가? 현대의 의미론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반성 개념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검토해보자.


2. 현대를 따라잡기 : 체계이론적 반성 개념과 합리성 개념


푸코는 현대적 에피스테메의 입체구조를 묘사하면서 수학, 물리학의 축과 경험과학의 축과 함께 그 입체적 공간을 구성하는 철학적 반성의 축을 의식의 축과 동일시한 적이 있다. 그러나 푸코가 주목하지 못했지만 헤겔 이후 이 구도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첫째, 철학적 반성은 의식의 축을 벗어나 푸코가 경험적 인간을 구성하는 것으로 여겼던 노동, 언어, 생명에 대한 경험과학적 축으로 이동하였다. 둘째, 경험과학의 축으로 이동한 새로운 반성 개념은 종래 상실되었던 사회적 차원을 복구하는 가운데 재구성되었다. 셋째, 이것은 반성이 더이상 의식의 전유물이 아니라 실재 속으로도 들어갔다는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노동의 범주에서 출발하여 반성의 논리를 자본의 위기적 자기증식이라는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이러한 변화의 출발점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마르크스를 모델로 하버마스는 언어현상에서 출발하여 ‘합리적 재구성’이라는 모습으로 반성의 상호주관적이고 역사적인 구조를 제시하였다. 이제 루만은 생명현상에서 출발하여 자기생산적 체계 이론의 틀 속에서 반성 개념을 환골탈퇴시켜 의미론적 만회의 중심 무기로 설정한다. 이 재구성의 출발점이 신사이버네틱스의 이차 관찰 개념, 조지 스펜서 브라운의 구별의 논리학, 마투라나의 자기산출 개념 등을 종합하는 체계의 자기지시 개념이다.

루만에게서 ‘지시하다’는 ‘구별하다’와 ‘표기하다’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작동이다. 다시 말해서 그 무엇을 지시한다는 것은 “그 무엇과 그것의 타자 사이의 (항상 작동적으로 도입된) 구별이라는 맥락 속에서 그 무엇을 표기하는 것이다.”(Luhmann, 1984 : p. 596) 그리고 표기되어지는 것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이 구별이 사용될 때 지시는 관찰이 된다. 이 정의를 원용하면 자기지시는 지시를 포함하고 있는 그 무엇을 구별의 맥락 속에서 표기하는 것이다. 이때 지시에 사용되는 구별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3종류의 자기지시가 있다. 요소와 관계의 구별이 사용될 때 기초적 자기지시이고, 과정의 선후 차이가 사용되는 경우가 반성성(Reflexivita··t)이고, 체계와 환경의 차이가 자기지시의 조건으로 전제되는 경우가 바로 반성이다.(Luhmann, 1984 : pp. 600∼601)

반성은 체계의 정체성을 지향하는 자기지시이다. 체계는 작동의 재귀적인 망을 통하여 항상 자신의 통일성을 생산하지만 그것은 이를테면 즉자적 통일성이지 체계가 의식하고 있는 대자적 통일성은 아니다. 그러나 작동 속에서 존재하는 통일성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의미론을 산출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대자적 통일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복잡성의 감소를 통한 체계의 유지과정이 엄밀하게 자기생산이라는 뜻을 갖기 어렵고, 또 체계의 복잡성 감소의 작동도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지시(관찰)는 자기생산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이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체계 속에서 체계를 관찰하고 기술하는 것이 곧 반성이다.

이 체계이론적 반성 개념은 체계가 환경과 관계할 때 자기와의 관계를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이때 실천적 자기관계가 자기생산이라면 이론적 자기관계가 자기관찰로서의 반성인 셈이다. 이러한 구상은 주체가 자기관계 없이는 객체와 관계 맺지 못한다는 주체철학적 사유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루만은 그 사유를 변형시킨다.

첫번째 변형은 반성의 경험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체계에 대한 반성이 체계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명제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체계에 대한 반성을 위해서는 체계 밖의 선험적 장소와 같은 특권적 장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체계의 자기산출이 일어나는 바로 그 경험적 맥락에서 반성이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반성이 인식론이 아니라 과학이론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한 가지 사례라고 하겠다. 이렇게 경험화된 반성은 결코 ‘나는 나다’와 같은 순수한 동어반복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칸트는 타자와의 관계에 항상 자기관계가 수반된다는 통찰을 사용하여 자기의식의 순수한 동일성을 형식적 원리로 제시하였다. 헤겔은 그것을 역사화시켰지만 그것은 이미 전제되어 있는 순수한 자기지시의 빈 공간을 점차 채워가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었다. 이 때문에 헤겔은 자기로의 회귀과정에 종착점을 설정한다. 이에 비하여 루만의 반성 개념은 체계의 환경의 차이를 철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차이는 반성의 가능성 조건이다. 지시 혹은 관찰이 언제나 구별을 사용하여 그 무엇을 표기하는 것이라면, 사실 순수한 자기지시는 정의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루만에서 반성은 체계와 환경의 차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체계 속에 재도입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반성이 추구하는 동일성은 차이를 내장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우연성에 열려 있다. 자기관찰을 포함하여 모든 관찰은 다시 관찰될 수 있기 때문이다.(Luhmann, 1992a : pp. 68∼121)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루만의 방법론적 원리의 효과가 반성의 경험화를 통해 나타나는 셈이다.

두번째 변화는 반성의 시간화이다. 주체철학이 선험적 형태로든 변증법적 형태로든 순수 자기지시를 상정한 것은 자기지시의 역설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세계 속에서 세계를 반성한다는 것은 세계 속에 있으면서 세계 밖에 있다는 역설을 가져온다. 선험적 동일성은 역설을 피하기 위한 일환으로 요구되었다. 그러나 동어반복이 공허하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동어반복 역시 실은 숨겨진 역설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무엇을 다른 것과 구별시켜놓고선 다시 같다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반성을 경험화한 루만으로서는 반성의 순환성을 피하기 위하여 선험적 동일성을 상정하는 비대칭화 전략을 사용할 수는 없었고, 따라서 시간적 비대칭화를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루만은 자기지시의 순환성을 시간차원에서 펼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을 부정하지 않고 변화의 창조적 추진력으로 긍정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루만은 반성의 기능을 최종적 정초를 마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체계의 역동성을 산출하는 데에서 찾는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성을 내장하는 체계는 자신을 급속한 구조적 변동에 노출시킨다.”(Luhmann, 1992a : p. 483) 이 점에서 루만은 모순을 운동의 추진력으로 삼는 헤겔을 뒤따른다. 그러나 동일성에서 출발하지 않고 차이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즉 차이와 동일성의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와 동일성의 차이를 출발점으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헤겔과 갈라진다. 루만에서 반성은 절대지 앞에서 멈추어서지 않으며, 단순히 역사를 이성화하기 위한 목적론적 기획의 수단이 아닌 것이다.

셋째, 차이이론적 접근방법은 반성의 다극화를 가져온다. 루만에서 반성은 체계 속에서 체계를 주제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체 사회에 대한 반성도 사회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가 중심이나 정점이 없는 사회로서 복수의 자기산출적 체계들로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있다면, 전체 사회에 대한 주제화도 하나의 중심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다양한 중심으로 다극화되지 않을 수 없다. 각 하위체계들은 각기 자신의 기능적 관점에서 사회를 주제화하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 사회를 독점적으로 재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회의 자기기술이 어떤 형태로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루만의 대답이 여기에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차이에서 출발한 체계이론적 반성 개념은 합리성에 대한 루만의 태도가 어떠할지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말해준다. 합리성 문제에 대한 루만의 기본입장은 “현대 사회의 분화원리는 합리성 문제를 시급한 문제로 만드는 동시에 해결 불가능한 문제로 만든다”(Luhmann, 1984 : p. 643)는 명제로 요약된다. 한편으로 루만은 “이성으로부터의 해방은 이미 실현되었다”는 명제로 고전적 합리성 개념의 붕괴를 선언한다. 고전적 합리성은 사회의 한 부분이 전체를 재현할 수 있을 때 가능한데, 현대 사회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루만은 탈현대론의 이성 비판에 동의한다. 하지만 루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이론적 체계 합리성”을 말할 수 있다고 본다. 이 합리성은 체계와 환경의 차이의 통일성을 체계 속에서 반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체계는 환경에 미치는 자신의 영향을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환경의 반작용을 고려하여 통제할 때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제 사회 전체가 아니라 기능적 체계들이 현대 사회의 합리성의 운반자이기 때문에 차이이론적 합리성은 하위체계들의 부분적 합리성으로서만 존재한다. “무중심적 사회는 자체의 합리성을 주장할 수 없고, 기능체계들의 부분적 체계 합리성들에 의존해야 한다.”(Luhmann, 1989a : p. 134) 하지만 오늘날 생태계 문제와 같은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어 전체 사회체계와 환경 간의 관계에 대한 주제화가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 여기서 불가능한 사회적 합리성이 시급히 요청된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루만은 이 역설을 현대 사회가 안고 살아야 할 운명으로 여기는 듯하다. 유토피아를 상정하는 것도 그것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전제 위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으니, 그것 역시 역설에서 벗어나긴 어렵다는 것이다.

확실히 기능주의적 사유의 세례를 받은 반성 개념은 사회적 현대의 기능적 분화원리에 부합하는 의미론의 면모를 갖고 있으며, 사회적 현대와 사회적 의미론 사이의 비대칭을 해소하고 현대의 의미론적 지체현상을 극복하려는 루만의 의도를 충족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현대를 다시 쓰려는 다양한 몸짓들 뒤에 깔려 있는 비판적 모티프까지 모두 충족시켜주는가? 과연 그 비판적 충동은 사회구조적 현대성을 의미론의 차원에서 만회하는 형태로 만족스럽게 충족될 수 있는가? 그리고 정말 우리는 루만의 합리성의 역설을 운명으로 여겨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두 현대 사이의 분리를 극복하기 위하여 루만이 선택한 이론적 결단과 이와 연관된 개념적 융합과 분리의 복잡한 연결고리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3. 현대를 방어하기 : 반성과 비판의 분리


현대를 다시 쓰는 전략으로서 ‘현대성의 의미론적 만회’는 단순히 두 개의 현대 사이에 역사적으로 등장한 비대칭을 해소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함축을 갖는 이론적 결단을 배경에 깔고 있다. 문화적 현대가 사회적 현대를 따라가야 하고, 사회의 의미론이 사회구조를 추수하는 식으로 양자의 관계가 설정되어야 한다는 결단이 그것이다. 이미 이 결단은 사회적 현대에 대한 비판을 봉쇄한다는 함의를 갖는다. 다시 말해서 ‘현대를 넘어서 현대를 따라잡기’는 궁극에는 사회적 현대의 방어로 끝난다. 이것을 반성과 비판의 분리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자.

루만에서 반성은 체계의 자기생산을 위해 요구되는 의미론을 제공하는 역할의 기능을 담당한다. 각 기능체계들은 저마다 자기산출을 해석하고, 새롭게 마련된 조합의 공간을 질서지우기 위하여 의미론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이 체계의 자기관찰을 통하여 제공되는 것이다. 이것은 체계의 반성이 자기생산의 계기로 포섭된다는 것을 뜻한다. 반성이 실천과 결합하는 것은 후퇴가 아니라 하나의 진보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보일 수 있기 위해서는 실천과 결합된 반성이 타당성과의 연관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비로소 반성이 현실 속으로 들어가면서도 그 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것이 이를테면 마르크스가 상황 속의 이성 개념으로 의도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루만은 반성 개념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타당성의 문제를 사실성의 문제로 환원시켜버린다. 다시 말해서 반성은 체계의 사실적 자기생산에 봉사하는 기구로 전락해버린다. 진리를 경제체계의 운행매체인 화폐와 마찬가지로 과학체계의 운행매체로서 이해하는 기능주의적 진리 개념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성의 역사화는 타당성 차원의 소멸이 아니라 사실성과 타당성의 긴장관계를 설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마르크스가 사회적 노동 개념을 통하여 그것을 보여주었고, 또 하버마스도 ‘합리적 재구성’ 개념을 통하여 그러한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루만은 이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타당성의 차원을 사실성의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이 환원은 반성과 비판의 분리를 가져온다. 이 분리를 반성과 비판 두 측면에서 살펴보자. 먼저 반성의 측에서 볼 때 이 분리는 재생산적 반성과 비판적 반성의 차이를 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재생산적 반성은 주어진 게임규칙하에서 이루어지는 재생산적 실천에 조응하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주어진 게임규칙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그리고 비판적 반성은 주어진 게임규칙을 넘어서는 혁신적 실천에 조응하는 것으로서 타당성의 차원과 내적 연관을 갖고 있다. 이제 루만에서 반성과 타당성 사이의 연관이 소멸된다는 것은 비판적 반성이 재생산적 반성 속으로 흡수되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비판적 반성이 지녔던 초월과 파괴의 힘은 이제 재생산 과정을 불안정에 기초하는 역동적 재생산 과정으로 만드는 역할로 축소된다. 다시 말해서 루만이 반성 개념에 부여했던 급진적 변동을 산출하는 힘은 자기생산 체계라는 차가운 찻잔 속의 폭풍에 그치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마르크스는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동일한 것을 반복시키는 역동적 안정성을 자본주의 체계의 자기생산적 재생산 과정에서 발견하였다. 사회적 현대성을 자본주의적 현대성이라고 본다고 할 때, 비판과 분리된 루만의 체계이론적 반성 개념은 완강하게 계속되는 자본주의적 체계의 발달논리를 이론적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반성이 자기생산적 재생산 체계의 내적 계기로 포섭되면서 비판은 이제 자신의 창끝을 돌려 그러한 재생산 구조에 부합하지 않는 의미론을 겨눈다. 루만의 이른바 ‘급진적 비판’에 의하여 결함 있는 것으로 공격받는 대상에는 하버마스의 신고전주의적 현대성 이론과 탈현대의 의미론이 망라된다. 문화적 현대의 이성적 잠재력을 재구성하여 사회적 현대를 비판하려는 하버마스의 기획은 사회적 현대를 이해하지 못했던 과도기의 고전적 의미론의 결함을 그대로 상속한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비판받는다. 그리고 탈현대론의 의미론에 급진적 비판의 힘을 심어주던 미학적 통찰은 임의성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그 사회적 실현의 통로도 허락받지 못한 채 기각되고, 비판의 가시를, 시적 언어의 혁명적 힘을 거세당한 탈현대의 차이이론은 신사이버네틱스의 ‘이차 관찰’에 의존하는 창백한 차이이론으로, 재생산적 차이이론으로 변질된다. 루만과 데리다의 외관상의 유사성에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루만이 하버마스와 탈현대주의자들의 기획을 비판하는 궁극의 이유는 그 기획들이 완강하게 계속되고 있는 사회적 현대에 비판의 메스를 대려는 모티프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이 비판의 가시로부터 사회적 현대를 방어하려는 것이 루만의 만회하는 의미론을 이끌어가는 인식관심이다. 여기서 우리는 루만의 의미론이 보여주는 외관상의 이론적 급진성 뒤에 숨어 있는 실천적 보수성을 발견한다.

이 정치적 보수성의 출발점, 즉 의미론이 사회구조를 추수해야 한다는 이론적 결단은 사실 그 근거가 불충분한 것이다. 이 점은 다름아니라 루만이 강조하는 분화원리의 일면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루만은 올바른 의미론의 기초로서 사회의 분화를 강조한다. 그러나 루만은 사회의 분화를 일방적으로 자기생산적 체계들의 분화로만 이해하였다. 그러나 예컨대 하버마스는 현대로의 이행과정은 하위체계들의 분화만이 아니라 상이한 재생산 논리를 갖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화로도 나타난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관료적 행정체계나 시장체계의 등장과 함께 일상적 생활영역의 변화 속에서도 현대화의 궤적을 추적했던 사회학 이론의 역사를 보더라도 수긍할 수 있는 관점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의미론이 기능적 분화로 특징지어지는 사회구조를 추수해야 한다는 루만의 이론적 결단은 사회의 분화에 대한 일면적인 이해에, 아니면 최소한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이해라는 불충분한 근거 위에 서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회적 현대에 대한 루만의 일면적 이해는 그의 합리성 개념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현대로의 이행을 체계분화의 관점에서만 이해한다면 합리성이 부분적 합리성으로만 가능할 뿐 사회 전체적 수준에서는 불가능하며, 또 사회적 합리성은 긴급한 문제인 동시에 해결 불가능한 문제이다라는 역설을 수락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현대의 분화에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화가 포함된다면, 그 역설은 현대의 운명이 아니라 체계분화만을 인정하는 루만의 일면적 이론이 안고 있는 한계의 표현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하버마스가 기획하고 있듯이, 다수의 의견과 의지가 소통되는 느슨한 망으로서의 공론장에서 전체 사회를 주제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볼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 가능성을 놓고 논쟁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이론적 가능성을 미리부터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나름의 방식으로 주체중심적 사유를 극복하는 길을 제공해주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루만에서 부분적 합리성과 전체적 무합리성 사이의 모순이라는 형태로 등장하는 의미상실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리고 루만의 체계이론 속에서 깨끗이 청소된 자유상실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심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루만의 이론에서는 이러한 가능성이 처음부터 배제된다.

마지막으로 루만의 만회하는 의미론 깊은 곳에 있는 자기모순을 지적해야겠다. 베버에 의하면 문화적 현대의 특징은 인지적-기술적 가치영역과 규범적 가치영역 그리고 미학적-표현적 가치 영역이 분화되어 독자적 논리를 추구하면서 해결하기 어려운 긴장관계에 빠진다고 한다. 이것이 베버의 유명한 현대의 다신론 테제이다. 이것을 염두에 둘 때 루만의 만회하는 의미론은 인지적-기술적 가치영역의 논리를 총체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준다. 그러나 이것은 분화된 영역 중 어느 것도 자신을 전체화할 수 없다는 그의 견해와 모순된다. 물론 루만은 부분적 체계 합리성들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전체적 사회 합리성은 불가능하다는 명제를 통해 이 모순을 피해가는 듯하다. 그러나 이 새로운 다신론 테제 속에서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는 것은 현대과학이라는 유일신의 명령이다. 다수의 양립되기 어려운 하위체계들이 복수의 합리성을 보여준다는 외양의 이면에는 기능주의적 합리성으로 변모한 과학주의적 합리성이라는 단수의 합리성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데리다에게는 로고스 중심주의의 재현으로, 하버마스에게는 언어적 추상의 대표적 사례로 간주될 것이고, 푸코에게는 현대의 새로운 권력인 생명권력의 화신으로, 현대가 산출한 시각과 지배의 내적 연관의 전형적 사례로 느껴질 것이다. 사실 현대를 다시 쓰려는 탈현대의 무대는 현대의 신들의 새로운 경합장이었다. 루만의 등장은 이것을 좀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제 이 글을 끝내는 우리의 귀에 50∼60년대 구조 기능주의적 현대성 이론의 친숙한 대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당시 구조 기능주의는 기능적 분화라는 구조적 사실에 합당하게 전통적 의미론이 현대적 의미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대사를 현대화론이라는 이름으로 특히 제3세계 관객을 향해 읊었다. 이제 탈현대 논쟁의 맥락에서 루만은 같은 종류의 대사를 ‘현대를 다시 쓰기’라는 제목의 무대에서 서구를 포함한 세계의 관중을 향해 들려준다. 구조 기능주의까지 포함하여 종래 현대의 의미론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실상 구유럽의 전통적 의미론의 변형된 유산에 불과하니 새로운 과학혁명의 세례를 받은 기능적 분화의 원리에 조응하는 진정한 현대적 의미론으로 이행하라고 말이다. 바뀌어야 할 것도 달라졌고 대사를 듣는 관중도 달라졌다. 그러나 대사의 메시지는 동일하다. 사회적 현대를 무엄한 의미론에 의한 비판으로부터 방어하라.



참고 문헌


Luhmann, Niklas, 1984 : Soziale Systeme, Suhrkamp.

1987 : Soziologische Aufkla··rung, Bd. 4, Westdeutscher Verlag.

1989a : Ecological Communication, The Univ. of Chicago Press.

1989b : Gesellschaftsstruktur und Semantik, Bd 3, Suhrkamp.

1990a : Essays on Self-reference, Columbia Univ. Press.

1990b : Soziologische Aufkla··rung, Bd. 5, Westdeutscher Verlag.

1991 : 「현대 독일 사회학의 흐름」, 『체계이론의 최근 동향』, 최재현 엮음, 형성사, 195∼210쪽.

1992a : Die Wissenschaft der Gesellscaft, Suhrkamp.

1992b : Beobachtungen der Moderne, Westdeutscher Verlag.




계간 문학동네 1997년 가을/제4권 제3호/통권12호/모더니티를 넘어서-니클라스 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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