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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26 (10:59) from 80.139.162.31' of 80.139.162.31' Article Number :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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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인가, 세계사회인가 -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
2000.05.01.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콜로키움
발표자: 천선영


                          세계화인가, 세계사회인가
                  -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을 중심으로
            

1. 문제제기: ‘사회’에 대해 다시 묻는다

지구상 곳곳에서 ‘세계화’ 논쟁이 한창이다.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논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그 논의의 수준과 함의는 대단히 다양하다. 세계화는 가히 ‘세기의 단어’라 불리울만 하다. 오늘의 전체사회수준에서의 변화를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세계화라는 용어 안에는 보통 - 이론적 입장에 따라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 끊임없이 팽창하는 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약화되는 단위(민족)국가들의 정치적 자율성 그리고 (민족)국가들의 영토적 경계를 넘어서는 정치적 공간의 형성, 국제적인 인적, 물적 교류의 증가, 실생활체험에 있어서의 동시성 그리고 동공간성의 급격한 증가 등 다양한 차원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세계화라는 현상자체과 그 심화는 - 세계화가 어떤 맥락에서 이해되든지간에 -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과 밀접히 연관되는 그 전(全)사회적 결과에 대해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교차한다. 세계화는 한쪽에서는 더 이상 통제되어질 수 없는 위협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무한한 가능성으로 여겨진다. 어찌되었든, 세계화개념과 그를 둘러싼 논쟁은 마치 자석과 같아서 모든 가능한 영역의 사회적 논의들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 설사 우리가 서로 다른 개념적 정의에서 그 단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 오늘날의 사회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거의 모든 다른 보편적 성격을 지닌 개념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세계화라는 말의 개념적 엄밀성도 쉽게 보장되어질 수 없다. 더구나 세계화라는 용어는 마술사의 주문과도 유사하게 우리의 눈을 현혹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세계화라는 개념을 통해 모든 것이 말해지며, 그래서 어떤 것도 정확히 말해지지 못한다.          

이 글은 그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화논의들을 요약정리하거나, 어떤 특정한 입장을 전면적으로 옹호 혹은 비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 논쟁과 관련된 문제를 보는 혹은 그 논쟁을 관찰하는 하나의 사회학이론적 시각(eine soziologische Sichtweise)의 가능성과 유용성을 시론적으로 타진해보고 그 사회이론적 함의를 재고해보는 데 있다. 필자는 작금의 세계화와 관련된 다양한 논의들이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사회체계이론에 비추어본다면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재조명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이 이론은 우리를 대상(Gegenstand)적 논의수준에서 관찰(Beobachtung)의 논의수준으로 이끌어간다.

본 글에서는 진행중에 있는 세계화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기본적으로 근대의 민족국가(Nationalstaat) 이 글에서는 민족국가, 국민국가 혹은 근대국가등의 용어들이 의미상 대동소이하게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단위의 사회를 거의 선성찰적으로 전제하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앤터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말에 따라 우리가 세계화를 전지구적으로 상호의존성의 관계가 심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 그가 사회학이 여전히 한정적으로 규정되는 체계와 관련된 사회개념을 갖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그 논의의 주체는 여전히 최종적으로는 ‘아직도’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고, 자기충족적인 민족국가단위사회이다. 그렇다면 이 때 말해지는 세계화된 근대(Globalisierte Moderne)의 상태는 로날드 로버트슨(Ronald Robertson)의 “국가사회의 세계체계”(world system of national societies)에 상응한다 하겠다(vgl. Nassehi 1998b:153).  

이런 맥락에서의 세계화 논의는 근대에 형성된 비교적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민족국가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사회’(Staatgesellschaft)개념을 암묵간에 상정하고 그 약화 혹은 확대에 대해 묻는다. 그런데, 어떠한 논의에서 ‘무엇’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당연시되는 전제안에 무엇이 다음으로 연결되어 질문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이미 내포되어있기 때문이다. 루만의 표현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우리가 채택한 이론과 개념은 우리의 문제의식과 관찰시각을 규정하며, 특정한 관찰을 가능 혹은 불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볼 수 있는 것만을 볼 수 있으며, 질문되어질 수 있는 것만을 질문할 수 있다.(Man kann nur sehen, was man sehen kann. Man kann nicht sehen, was man nicht sehen kann. Man kann nur fragen, was man in Frage stellen kann.) 이를 세계화 논의와 관련시켜 다시 말하면, 우리는 (민족)국가 단위의 사회를 그 논리적 전제로 해서만이 그 국가사회간의 (어느 차원에서든지) 증대되는 관계들을 관찰할 수 있으며, 더 이상 (민족)국가 스스로 (어떤 의미에서든지) 자족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하게된다. 나아가 우리는 민족국가의 경계가 여러 차원에서 느슨해지는 과정을, 그 국가사회간의 상호의존성이 증가하는 즉, ‘세계화’의 과정을 관찰하게 된다.

실상 사회학이 태동된 이후 (민족)국가단위를 모델로 하는 사회의 개념은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사회학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고려하면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동안 사회과학은 문화적으로 동질적이고 독립적인 하나의 사회로서의 국민국가를 분석단위로 설정해왔다. ... 사실 근대사회과학의 발전은 19-20세기의 위대한 민족주의시대를 거치면서 진행되었음을 감안할 때 사회란 기본적으로 국민국가를 지칭하는 학문적 경도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개별 국민국가가 하나의 독립적이고 완결된 체계로서 그 영토내의 모든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일관되고 체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에는 사회를 국민국가와 동일시하고 이를 사회학 논의의 중심대상이자 분석단위로 설정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박길성 1996:198-199).     

사회는 곧 국가사회를, 사회질서는 곧 국가질서를 의미했다. 그러나 사회를 국민국가와 동일시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오늘에는 사회과학, 특히 ‘사회’를 그 주요분석대상으로 하는 사회학은 자신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중요한 질문앞에 ‘다시’ 서 있다: “국가사회시대 후(後)에 사회적인 것의 분석단위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 논의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Ulrich Beck의 “Was ist
  Globalisierung?” 53쪽이하에 있다.


나아가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회란 무엇인가’하는 것이 다시 질문되어야 한다. 사실 이 중요하고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의 등장은 바로 사회학의 태동근거이기도 했다. 지식사회학적으로 볼 때 특정 학문의 등장은 이전의 지식(형태)으로는 더 이상 잘 해결되어질 수 없는 (새로운 혹은 새롭게 떠오른) 사회적 문제상황과 그 문제해결요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새로운 학문의 등장은 이 요구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자체’(Die Gesellschaft selbst)가 문제의 지평으로 떠오른 것은 역사적으로 보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것은 근대화과정과 그 맥을 함께 한다. 비교적 사회의 변화속도가 늦고, 그 구성원리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을 효과적으로 배제시킬 수 있었던 전근대사회에서와 달리 ‘사회적 대변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근대화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전의 종교, 혹은 다른 전통들을 통해 보장되던 세대를 넘어서는 사회의 통합성과 안정성이 상실되어 이제 - 근본적으로는 - ‘모든 것’이 가변적인 것으로, 나아가 측정, 통제 그리고 계획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전체로서의 ‘사회자체’도 더 이상은 그냥 선험적으로, 불변적으로 주어져 있는 공동의 삶의 공간으로 인식될 수 없었다. 아예 의식의 지평에 속하지 않았던, 그래서 질문되어질 수도, 의심되어질 수도 없었던 ‘사회자체’, 그 사회의 구성원리와 요소에 대한 질문의 대두는 궁극적으로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탄생을 낳았다(vgl. Nassehi 1998a:115ff).  

당시의 화두는 단연 ‘통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전통적인 방법으로의 통합이 전면적으로 의문시되었기 때문에, 즉 이전에 그러하였음으로 오늘에도 유효하고, 따라서 앞으로도 유효하리라는 설명 혹은 모든 것을 신의 의도로 환원하는 종교적 설명등을 통한 사회적 통합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면서, 그렇다면 이제 어떠한 기제를 통해 사회적 해체를 막고 (가치적) 통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라는 것이 시대적 과제로 떠올랐다. 이 통합은 민족의식, 동일한 인종, 언어 혹은 역사에 대한 기억들을 ‘매개’로 영토국가단위로 - 일차적으로 정치적인 차원에서 - 이루어졌다. 민족의식의 창출은 근대(민족)국가건설의 한 핵심적 관건이었다. 서로가 공유하는 기억들을 지나간 역사에서 직접적으로 끌어낼 수 없는 경우에, 그 기억들은 ‘창조’되어야 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단위국가의 약 1/3정도만이 비교적 동질적인 인종/민족적 바탕에 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국가가 기본적으로 여전히 민족국가로 간주되는 것과 현재 세계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작은 분쟁들에 ‘인종청소’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근대민족국가이념의 ‘성공’을 반증한다. 덧붙여, ‘표준어의 제정’이 (민족)국가단위의 공동체의식형성에 미친 큰 영향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제 국가는 새로운 총체적 통합의 주체로서 그 구성원들의 전적인 ‘충성’을 보장받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그 시대의 산물인 사회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문화적으로 동일하고 (동일한 것으로 스스로를 표상하는), ‘독립적인’, 그리고 스스로 통합의 주체를 자임하는 국민국가가 사회와 동일시되었고 이 때 ‘통합의 기능’은 사회의 존재가능성을 규정하는 필수불가결한 기본요소로 인식되었다.

이제, 사회학은 생성기의 질문 앞에 다시 서 있다: “사회란 무엇인가?” 사실 작금의 세계화 논쟁은 사회학에 특히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 자신의 거의 선성찰적으로 전제되던 연구대상, 즉 ‘사회’를 다시금 문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은 자신의 존재근거인 이 질문으로부터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한 번 형성된 (정치적인 조직 모델인 민족국가개념과 동일시되는) 사회의 개념은 마치 철옹성과 같이 단단해서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사회자체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사회학적 논의안에서도 한동안 무의미한 것으로, 혹은 불필요한 것으로, 아니 질문되어져서는 안될 어떤 ‘도그마’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작금의 ‘세계화’ 논의에서조차도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숨겨져 있는) 본질적 질문보다는 (그저) 유용한 분석단위의 선택 또는 조정이라는 문제가 보다 더 심각하게 고려되고 있는 듯한 인상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학이 사회, 그 구성과 가능성의 조건들에 질문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는 세계화 논쟁을 보다 더 이론적인 차원에 천착해 진행시켜야 할 것이다.
                           
본 글에서는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이론을 근거로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무모한(?) 질문을 다시금 던지고자 한다. ‘세계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가 사회학적인 대답을 하려고 한다면, 이러한 - 언뜻 무모해보이기까지 하는 - 질문은 실상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루만의 이론은 그 추상화 정도가 높고, 그 이론 자체가 거대한 복합체이며 기존의 사회학 이론들과 기본적 전제를 공유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아서 이해에 어려운 점들이 많고 대중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아래의 짧은 논의에서는 루만의 이론이 지극히 제한적, 그리고 선택적으로 소개 혹은 정리될 수 있을 뿐이어서 부당한 오해를 낳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러한 여러 난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의도 중 중요한 것의 하나는 현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특히 사회학적 논의가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까지 천착하게 되기를 바라는 기대에서이다. 나아가서는 루만이라는 ‘이론적 안경’을 끼고 현 사회 그리고 사회변화를 바라보는 것의 타당성과 유용성에 대한 논의가 조금은 더 활성화되기를 바란다.

본 글에서는 간략하게나마 루만의 사회체계이론을 그 이론적 근거로 해서 어떤 관점에서 우리가 세계사회를 상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논의가 가지는 사회학적 함의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세계사회인가?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사회는 ‘이론적으로’ 세계사회(Weltgesellschaft) John W. Burton도 Luhmann과 비슷한 시기에 “world society”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다. 오직 하나의 유일한 사회체계만이 존재할 뿐이다(vgl. Luhmann 1984:585). 그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전지구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각 부분사회체계의 기능적 코드의 전문화에 따라 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 근본적으로는 - 영토적으로, 국지적으로 한정될 수 있지 않다. 오늘날의 사회가 지역국가들의 경계를 통해 관찰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정치적인 의미에서만 한정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기능적으로 분화되어있는 부분사회체계들의 경계 그리고 사회체계의 (전체적) 경계는 정치적인 의미의 그것으로 환원되어질 수 없다. 부르통(Burton)도 루만의 이러한 입장과 아주 유사한 언명을 하고 있다.  
“State boundaries are significant, but they are just one type of boundary which affects the behaviour of world society”(Burton 1972:20, in: Nassehi 1998b:154)

이 때 세계개념은 루만에 따르면 “체계와 환경차이의 통일성”(Einheit der Differenz von System und Umwelt)이다. 모든 (사회)체계들이 스스로와 자신의 환경을 구분하는 것을 그 성립근거로 하므로, 세계는 각각의 체계들에게 자신의 체계/환경 구분의 상관물(Korrelat)로 인지된다. 전체로서의 세계는 따라서 체계/환경차이의 단위통일체(Einheit)이다. 이러한 이론적 구성은 모든 특수한 것들 위에 혹은 그것들을 넘어서 있는, 그리고 그 특수한 것들의 다양성을 연결시켜주는 어떤 존재론적인 통일체로서의 세계개념을 거부한다. 루만에 있어서 세계는 체계상대적(systemrelativ)인 개념이다. 각각의 체계/환경차이는 그들이 스스로 체계와 (체계상대적인) 환경을 설정하기 때문에 각자 자신들의 세계개념을 갖게된다. 이러한 다중심적인 세계개념은 체계이론적 사유의 관점주의적(perspektivisch)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급진적이기조차한 관점주의와 체계상대적인 관찰(Beobachtung)의 입장들로부터 하나의 통일체적인 세계사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한가?

루만의 세계사회개념은 사실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이론의 개념구성으로부터 유래하는 ‘이론적’인 것이다. 그의 이론에서 사회는 (사회적) 행위 (혹은 행위자)의 총계가 아니며 그 행위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규범적 통합이 사회(적 질서)의 불가피한 근거인 것도 아니다. 우리가 어떤 전체를 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는 커뮤니케이션적인 연결성의 가능성(Kommunikative Erreichbarkeit)에 있고, 사회는 모든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체계)의 총합으로 이해된다. 사회가 루만의 말처럼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포함하는, (재)생산해내는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경계를 규정하는 총체라면, 근대사회에서 (각각의 기능적으로 분화된 커뮤니케이션체계들과 그 체계들의 환경들을 포함하는) 사회체계와 그 환경차이의 의미의 통일체는 필연적으로 전체로서의 세계사회일 수 밖에 없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다 똑같은 중요성으로 관찰되는 것은 아니라하더라도, 전 지구적 범위에서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있는 사회체계들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잠재적으로’ 세계적으로 관찰가능하기 때문이다(vgl. Richter 1997:62). 이 때 세계사회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총합이라기보다는 전지구적으로 뻗쳐있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관찰결과의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 사회의 기본단위: 커뮤니케이션

1) 사회(적인 것)의 쪼갤 수 없는 최소단위는 (인격도, 역할도, 행위 내지 행위자의 의도, 의지/계획도 아닌) 독자적 자동생산적/자동창조적(autopoiesisch) 동작의 기본형식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이 때 커뮤니케이션의 주체는 체계(System)이다.

2) 이 때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한 정보 혹은 소식의 통지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커뮤니케이션은 무엇이 전달되어야 할 정보로 선택되는가와 관련된 정보선택구조, 선택된 정보가 어떻게 전달되는 지와 관련된 정보전달구조, 그리고 전달된 정보가 어떻게 이해되는지 (그리고 그 결과로 다음 커뮤니케이션으로 연결되는지, 그리고 그렇다면 어떻게 연결되는지의) 여부와 연관된 정보이해 내지 연결구조라는 3단계 선택과정의 통합물이다.

3) 정보의 선택, 정보의 전달방법, 그리고 정보의 이해와 그에 따른 연계 커뮤니케이션은 개인의 의식체계(Bewusstseinssystem)로 환원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어떤 정보가 선택되었는가 하는 것이 그 정보전달자의 의식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다. 즉, 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각 개인의 의식속에 있는 생각들이 논리적으로 유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직접적인 생각, 의식의 교환이 아니다.       

4) 정보의 선택, 정보의 전달방법, 그리고 정보의 이해와 그에 따른 연계 커뮤니케이션은 모두 다양한 가능성의 지평안에서 선택된다. 그러나 그 지평은 무한한 것은 아니며, 각 체계의 체계준거(Systemreferenz), 즉 각 체계의 커뮤니케이션의 코드를 통해 제한된다.



5) 따라서 커뮤니케이션 과정은 아주 우연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필연적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하에서 커뮤니케이션은 꼭 합의를 이루어야하거나 혹은 합의로 나아가야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데 그치는 커뮤니케이션 혹은 커뮤니케이션의 비연결성은 그 자체로 유의미하다. 커뮤니케이션의 과정 그리고 그 결과는 (가능성의 지평과 현실의 차이를 표현하는) 비필연성/우연성(Kontingenz) - 그 과정 혹은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 으로 이해되며, 각 체계들은 이 비필연성의 정도를 낮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루만은 체계가 복합적이고 고도의 분화정도를 보이는 근대사회에서는 이 비필연성의 정도가 급도로 증가한다고 말하며 이를 적정수준으로 낮추는 유용한 사회분화형식으로 ‘기능적 분화’가 선택된 것으로 이해한다.    

6) 커뮤니케이션은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만)을 재생산한다.

근대사회는 서로 다른 특정 기능들을 수행하는 기능영역들로 분화되어 있다: 정치, 경제, 종교, 법, 교육, 의료 등. ‘자연적 범주’나 ‘귀속적 범주’들은 더 이상 사회구성의 기본/중심원리로 작용하지 못한다. 기능적으로 분화된 현대사회의 부분체계들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지위질서들, 독자적인 가능성의 지평들, 그 나름의 체계경계를 가진 커뮤니케이션체계들”(Luhmann SA 1:139f)이다. 각 부분체계들은 자기준거적이고 자동생산적인, 즉 스스로를 조절하고 조직할 능력을 가진다. 근대사회의 이러한 기능적 분화는 세계를 서로 대체될 수 없는, 혹은 위계질서적 상호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세계들로 분해한다. 이 말이 근대사회의 기능적으로 분화된 다양한 사회체계들이 서로 더이상 아무런 관계가 없다거나, 상호의존적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작적으로 닫혀있는 기능체계들은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서로 융합될 수 없는 방식으로 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긴밀히 상관하며, 서로를 ‘관찰’한다. 각 부분세계들은 그들의 관점, 입장들의 구조적인 차이의 상호적인 관찰들을 통해 서로에게 지각되어야 한다. 그리고 각 부분기능체계들은 그들이 전문화되어있는 만큼 다른 부분체계에 의존되어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각 부분체계들이 다른 체계들의 기능을 ‘대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분화형식은 따라서 한편으로는 부분체계들의 자율성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의존성이 동시에 증가, 확대됨을 의미한다. 각각의 분화된 정치적, 경제적, 학문적, 법적 관점들이 더 이상 문제없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불가능해진 기능적인 자체논리들로 분해된 세계속의 이 부분세계들은 위에 언급한 이유로 지속적으로 상호관련되어 있고, 서로를 제한, 간섭, 교란 혹은 강화하지만 각각의 기능적 논리를 넘어서는 어떤 규범적인 조정(Ausgleich)은 ‘원천적으로’ 배제한다. 사회의 질서는 이 부분체계들간의 이러한 다양한 경험적 과정들의 역동적 결과이며, 기능적으로 분화된 세계는 따라서 정의적으로 다중심적인 사회(multizentrische Gesellschaft)이다.  

물론 사회의 이런 기능적 부분세계들로의 분화는 세계화와 함께라기보다, 근대사회적 분화과정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민족국가수준에서의 근대적 자기진술이 정치담론을 넘어선 일반적 사회담론으로 인정될 수 있었고, 많은 ‘근대의 이상’들이 민족국가들의 맥락에서 구성되었기 때문에, 오랜동안( 즉, 민족국가단위의 사회가 (사실상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통합의 주체’를 자임할 수 있었던 동안) 근대사회는 국가단위의 사회담론에 근거해 논의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사실, 근대사회에 대한 근대적 학문을 자부하는 사회학은 민족국가의 사회적 자족성에 대한 ‘신화’와 사회의 콘테이너 이론 Ulrich Beck은 콘테이너 사회이론(Container-Theorie der Gesellschaft)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간단히 말하자면, 국가라는 영토적으로 구별되는 정치적 단위통일체인 개별사회안에서 모든 수준의, 모든 영역의 사회적 논의, 행위가 수렴되는 것을 표현한다.
형성에 주도적으로 이론적 바탕을 제공했다고 혹은 그 정당화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오늘의 세계화논의는 어떤 실재대상(Gegenstand)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불안정해진 관찰(Beobachtung)의 상태를 반영한다. 근대사회가 (본질적으로) 세계사회라면, 우리가 세계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얻는 대답들은 세계화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실은 세계사회에서의 세계화의 결과(Folge)이고, 세계화의 결과들의 불안정성들로부터 우리는 세계사회로서의 근대사회의 성격에 대해 보다 잘 알게 된다. 경제적, 정치적, 학문적, 종교적, 문화적 상호의존성의 관계의 팽창은 이제 더 이상 이론적 매트릭스(Matrix)로 사용될 수 없다. 그것들은 세계화과정의 결과물일 뿐이다.


3. 세계사회모델의 몇 가지 사회이론적 함의들

3.1. ‘여전히’ 건재한 국가사회에 대한 이론적 설명

우리가 루만을 따라 사회개념을 이해하게 되면, 사회개념과 근대적 역사의 산물인 (민족)국가라는 정치적 개념은 더 이상 혼용될 수 없다. 근대사회는 기능적으로 분화된 부분체계, 커뮤니케이션체계들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경계는 사회의 경계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사회개념에서 아직도 여전히 공고하게 보이는 영토적 분할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세계사회개념은 세계가 아직도 민족/인종적, 문화적으로 (상대적으로 자족적인) 민족단위국가의 사회들로 쪼개져 있다는 ‘아주 당연한’ 현실을 너무 쉽게 간과하는 것은 아닌가? 루만식의 세계사회개념은 현존하는 경계들의 의미를 희석시킨다고 비판받을 수 있다.

루만은 근대사회의 기본적 분화형식은 기능적이며, 여전히 존재하는 분절적 혹은 층화적 분화형식들도 기능적 분화의 정착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이 때 (민족)국가는 영토의 확실한 규정와 성원들의 전면적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근대사회에 잔존하는 대표적, 그리고 대단히 성공적인 분절적 분화형태로 설명된다. 즉, 지역적 정치국가는 근대 정치커뮤니케이션 체계의 기능적 구체화의 요건으로서 존재해 왔으며 강력한 힘을 발휘해왔다는 것이다. 국민국가는 글로벌한 (근대)사회에서 더 이상 전통적인 방법으로 채워질 수 없는 통일적 정체성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정체성의 생산자와 수신자(Adressaten)로서 기능했다. 이런 점에서 근대사회의 세계성, 사회적 과정의 세계사회적 맥락에서의 강화와 그 역동성은 공간적 혹은 사회적 경계규정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유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맥락안에서 민족국가개념은 하나의 (성공적인) ‘신화’(Mythos)로 이해된다. 그에 따르면 근대민족국가개념은 사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아니 존재할 수 없는 단일적 통일체(Einheit)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 시뮬레이션(Simulation)을 가능하게 했다. 근대적 국가의 성공은 역사적으로 총체적 소속감을 제공하던 전통(적 연대성), 종교등의 약화로 대두된 공백을 메꾸면서 원칙적으로는, 다시 말해서 사회구조적으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전체적인 통합의 이미지를 - 포함/배제관계의 효과적 구성을 통해 - 재생산해낼 수 있었다는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근대국가는 세계사회에서 관찰되는 고도의 복합성을 지닌 현상들을 조작적으로 다루고, 이해할 수 있게하는 관찰의 효과적 한 방식(Modus)으로 기능했다. 물론 안정된 민족국가시대에는 또한 실제로 경제, 법, 문화적 요소등을 상대적으로 단위국가내에서 재생산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민족국가적 형식의 사회적 통일성을 형성할 수 있었던 때와 달리 '세계화'라는 모토아래 관찰되는 현 사회에서 민족국가단위의 공유된 가치의 자명성(Evidenz)이 의심받고 있고, 그 통합적 힘의 현저한 약화가 관찰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물론 (영토국가적) 경계가 (갑자기)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경계가 더 이상은 ‘당연한 것’으로 주장되어질 수 없다는데에 있다. (본디 사회적 구성물인) 그 경계는 보다 더 강하게 사회적 구성물로 보여지고, 따라서 그것의 비필연성(Kontingenz)이 가시화된다(vgl. Nassehi 1999:188f). 이러한 변화는 자연과 문화의 차이/경계 혹은 성의 차이/경계등을 둘러싼 사회적 담론들에서도 관찰된다.
루만에 따르면 세계사회는 이제 도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관찰되는 세계화의 여러 지표들은 세계사회로서의 근대사회의 존재를 의식하도록 하는, 그 실재성을 가시화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국가개념은 이제 사회학적 담론안에서 이론적으로도, 현실상황적으로도 그 절대적 위치를 상실한다. 세계화와 관련해서도 그 질문의 초점은 더 이상 근대민족국가단위 사회의 경제의 국제화, 약화되는 국가단위사회 통합력에 대한 우려, 나아가서는 그에 대한 대안의 모색 등에 있다기 보다는, 왜, 어떻게 근대국가라는 분절적 분화형태가 - 현대사회의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기능적 분화형태와 반하는 데도 불구하고 - 지금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는지, 이제 어떠한 맥락, 구조적 조건안에서 그 덮개(Folie)가 벗겨지고, 현대사회의 기본적 분화체계가 보다 더 명확하게 가시화되는가를 관찰하고 진술하는 데에 있다.       

3.2. 세계사회수준에서의 통합이 가능한가?: 오늘의 화두는 “차이”(Differenz)다.

‘전지구적 사회통합’의 불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세계사회개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회를 합의나 그와 유사한 동의를 통해 통합되어 있는 형성물 또는 조직(Gebilde)으로 보는 사회학에서의 선가정(Praesupposition)을 재확인하게 된다. 사회라는 개념은 여전히 어떤 동일성, 내적인 결합력등으로 표현되는 사회적, 이념적 통일성이라는 표상과 밀접히 맞물려 있다. 이렇게 보면 세계사회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볼 때) “사회적 특성이 없는 사회”(  Weltgesellschaft ohne Gesellschaftlichkeit, Altvater/Mahnkopf 1997:45ff)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우리가 루만의 이론적 입장을 따른다면, 근대사회는 구조적으로 보아 더 이상 합의나 통합에 (그 생존이) 의존적이지 않다. 사회 각각의 기능부분체계들이 자체적인 체계내적논리를 쫒는 기본적 구조 내지 기본분화형식을 근거로 하는 근대사회에서는 더 이상 명확하고, 중심적인  기본의미론(Grundsemantik/-symbolik)이 존재하지 않으며 (보다 정확히 말하면,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부분체계들을 전체로 묶는다는 의미에서의 ‘통합’은 더 이상 사회적 사실의 일상적 경우(Normalfall)이지 않다. 그렇다고해서 루만이 근대사회가 포스트모던적인 의미에서의 임의성(Beliebigkeit)에 내맡겨져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기능들로 지향된 부분체계들이 서로 자신들의 논리와 의미론(Logik und Semantik)을 근거로 조작적으로 작동하는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로 파악되는 근대사회에서 사회질서와 그 안정성은 전사회적 범위에 적용되는 어떤 에토스(Ethos)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특화적인 부분체계들이 자신의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리고 자기의 가능성(의 지평)을 제한(Limitierung)하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구조적이고 계속적인 과정을 통해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회질서와 그 안정성은 더 이상 (전체체계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부분체계들의 규범적인, 가치지향적인 통합을 통해 보장되지 못한다. 이 가능성은 루만의 논의안에서는 - 무엇보다도 먼저 - 이론적으로 이미 배제된다. 근대사회는 오히려 차이(Differenz)에 근거하며, 오늘날 사회적 질서와 안정성의 문제는 사회적 분화, 그 차이, 그 비통합성(Desintegration)에서 탐색되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분화된 체계들이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각각의 부분체계들의 ‘자기준거’(Selbstreferenz)가 전체사회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통일성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서로의 자기준거에 근거한 ‘차이의 통일성’(Einheit der Differenz)으로만 관찰될 수 있다.

따라서 루만식 세계사회의 개념은 어떤 범주적인 조화성 혹은 안정성을 전제로 요구하지 않는다. 초기근대(Erste Moderne)가 병존, 동일하지 않은 것, 타자 그리고 모호성(Ambivalenz)에 대한 계속적인 전쟁이었다면, 이제 명백해진 세계사회적 시각에서는 서로 다른 관점들의 비동일성(Nicht-Identitaet)이 가시화되고, 근대의 명확성, 확실성, 단일성의 요구가 더 이상 관철될 수 없음이 명약관화하게 드러난다. 이제는 오히려 도저히 조화, 조정될 수 없을 것같이 보이는 다양한 부분세계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접속되어지는가하는 것에 대한 관찰이 중요하다: 요컨데, 어떤 조건하에서 - 언뜻보기에는 불가능해보이는 - (일종의) 조화, 관점의 일치, 이해관계의 조절이 가능해지는가?


3.3. 또 하나의 함의: “세계화는 단순한 현실이라기보다는 인지양식/형식이다.”
(Globalisierung ist eher ein kognitives Schema ist als eine schlichte Realitaet.)  

우리가 경제는 경제적으로, 정치는 정치적으로 전지구적일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 이론적 입장을 수용한다면 오늘의 세계화논쟁은 이제 인지양식의 문제가 된다: 어떠한 조건하에서 오늘의 전사회적 변화는 ‘세계화’현상으로 관찰되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사회가 실제적으 로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이 아니고, 사회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체계들이 왜, 어떤 조건하에서 서로의 관련성(Bezogenheit)들을 성찰적으로 인식하게되고 그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되는가 하는 것이다. 세계사회는 이런 의미에서 보면 커뮤니케이션과정에서 세계화 현상이 어떤 ‘실재’로 인정되면서 비로소 열리는 세계의 지평이며, 우리는 이 지평안에서만 특정한 맥락안에서의 구체적 사건들을 세계사회적인 현상들로 해석할 수 있다. 이제 세계사회의 부분들은 서로에 대해 알고, 그리고 서로를 서로의 한 부분으로서만 인지할 수 있다. 세계화로 표현되는 관찰의 형식은 스스로를 다른 맥락들안에서의 한 맥락으로만 인지하는 것을 불가피하게 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관점의 관찰가능성, 서로의 차이에 대한 상호관찰성이 세계의 사회적인 것(Gesellschaftliche)을 규정한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관찰하는,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관찰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Beobachtung zweiter Ordnung)이 일반화된 근대사회의 구조적 조건하에서 더 이상 어떠한 관찰도 배타적, 독점적일 수 없고, 어떤 통일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존재론적인 ‘참’의 세계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그것이 다른 결과 혹은 상태를 낳았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연적이다. 이제 요구되는 것은 즉자적에서 관찰자 관점으로의 전환이며, 관찰의 조건에 대한 보다 설명력있는 서술이다.

서로에게 관찰되는 방식으로 연계되어 있는 세계의 각 부분들은 서로를 ‘낯섬’(Fremdheit)으로 인식한다. 이 ‘낯섬’과 ‘차이’의 인식과 그 구조적 조정이 이 시대 상호의존성의 사회적 형식(die Form der Interdependenz)이다. (이러한 맥락과 관련해서 우리는 (민족)국가간의 차이와 민족내적 동일성 내지 통일성의 이미지의 발전이 경제, 정치, 교육, 학문 그리고 예술등의 국제화 그리고 공간적 이동성의 증가과정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vgl. Nassehi 1999:192). 즉, 세계적 과정에서의 상호관찰성의 증가는 ‘차이’에 대한 인식을 증가시키고 ‘내부적 동일성’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의 증폭을 결과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국가, 민족간 상호접촉의 경험의 증가가 상호이해정도의 증가와 비례할 것이라는 기대는 순진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근대사회의 기본적 성격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방인’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 없을만큼 가까우며, 서로를 의식의 지평에서 몰아내기에는 너무 많은 정보들을 소유하고 있다.


4. 맺는 말에 대신하여

앞부분에 언급된 것처럼 사회학의 지적전통에서 (민족)국가라고 하는 정치적 단위가 그대로 사회개념에 차용된 것은 사회학의 태동과 그 역사를 함께하며, 그 역사만큼이나 공고한 것이다. 고전 이론가들이 분석대상이 그들의 분석대상으로 삼았던 사회는 의심할 여지없이 민족국가 단위의 사회였다. 예를 들어 탤코트 파슨스(Talcott Parsons)가 사회통합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그가 전제하는 것은 근대적의미의 민족단위사회이다. 또한 사회학적 사회논의/담론에서 사회개념이 정치적 단위인 (민대민족)국가개념과 이론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거의) 비성찰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은 사회에 대한 문제 혹은 질문들이 곧잘 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져왔다는 것과, 사회학이 스스로를 자주 “계몽자” 혹은 “해방자”로 이해해왔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제 그동안 의심받지 않았던 자신의 기본적 분석단위가 이론적으로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으며, 경험적으로도 그 유용성을 의심받고 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적 대응방법들이 모색되고 있지만 많은 경우 너무 친숙해져 있는 국가단위의 사회개념으로부터 자신을 효과적으로 분리해내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니클라스 루만의 이론은 국지적 혹은 지역적 경계와 그 경계안에서의 규범적 내지 문화적 통합, 공유하는 가치의 지평을 그 가능성의 조건(Bedingung der Moeglichkeit)으로 이해하는 사회에 대한 전통적 사유전통을 넘어서는 데 한 유용한 이론틀을 제공할 수 있다. 그 이론은 지금까지의 많은 사회학적 이론들과 기본적으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며, 그 결과로 지금까지 가능하지 않았던 다른 관찰들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그의 세계사회개념은 기능적인, 지리적인, 문화적 관점들의 차이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포스트모던적인 자의성, 비도덕적인 상대주의, 근대적 전통주의와도 거리를 유지하게 해준다.(vgl. Nassehi 1998) 물론, 루만 자신이 인정하고 있듯이 그 자신의 이론도 역시 스스로의 “보지못하는 영역”(der blinde Fleck)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회이론이 답보상태를 면치못하고 있으며, 다른 학문분야에서 진척된 논의들을 발전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서술’이 아닌 ‘사회에 대한 보다 나은 이론적 진술’을 그 목적으로하는 루만의 일반사회이론은 그 의의가 적지않다 하겠다. 세계사회와 관련된 루만의 논의는 그 자체로 완결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 근본적으로 동의하는 여러 소장사회학자들이 그의 이론에 뿌리를 대고 그 발전을 모색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도움받은 글들

김종길, 1993, 니클라스 루만의 일반체계이론: ‘복합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 한국사회학, 1993 제 27집 여름호, 25-51쪽
..........., 1996, 니클라스 루만: 중심없는 사회, 박길성 외, 현대사회의 구조와 변동, 사회비평사, 69-99쪽
박길성, 1996, 글로벌 사회, 박길성 외, 현대사회의 구조와 변동, 사회비평사, 181-205쪽

Albrow, Martin, 1999, Die Weltgesellschaft "Willkommen im Globalen Zeitalter", in: Pongs, Armin(Hg.), 1999, In welcher Gesellschaft leben wir eigentlich?, Gesellschaftskonzepte im Vergleich, Band 1, Muenchen:Dilemma Verlag, S.27-45    

Beck, Ulrich, 1997, Was ist Globalisierung?, Frankfurt a.M.:Suhrkamp

Chun, Sun Young, 2000, Verstehtbarkeit und Kommunikabilitaet des Todes in der modernen Gesellschaft und Kultur. Ein sinnloser Kampf um einen Sinn des Todes in all seiner Sinnlosigkeit?, Muenchen(Dissertation)

Giddens, Anthony, 1995, Konsequenzen der Moderne, Frankfurt a.M.:Suhrkamp

Kneer, Georg & Armin Nassehi, 1993, Niklas Luhmanns Theorie sozialer Systeme, Muenchen:W. F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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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las Luhmann, 1975, Die Weltgesellschaft, in: Ders., Soziologische Aufklaerung 2, Opladen, S.51-71

................................, 1984, Soziale Systeme, Frankfurt a.M.:Suhrkamp  

................................, 1997,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I und II, Frankfurt a.M.:Suhrkamp  

Nassehi, Armin, 1998a, Was ist Soziologie?, in: Geschichte und Gegenwart, 1998/2, S.112-120   
.............................., 1998b, Die "Welt"-Fremdheit der Globalisierungsdebatte, in: Soziale Welt 49, S.151-166

.............................., 1999, Die funktional differenzierte Gesellschaft "Das buergerliche Privileg der Fremdheit", in: Pongs, Armin(Hg.), 1999, In welcher Gesellschaft leben wir eigentlich?, Gesellschaftskonzepte im Vergleich, Band 1, Muenchen:Dilemma Verlag, S.169-196

Richter, Dirk, 1997a, Weltgesellschaft, in: Kneer, Georg, Armin Nassehi & Markus Schroer, Soziologische Gesellschaftsbegriffe, Muenchen:W. Fink, S.184-204

.........................., 1997b, Die zwei Seiten der Nation, in: Armin Nassehi(Hg.), 1997, Nation, Ethnie, Minderheit, Koeln u.a.:Boehlau Verlag, S.59-83


http://www.korea.ac.kr/%7Eisr/bank/wor.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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