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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클라스 루만의 ‘체계이론’과 그 교육학적 수용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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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철학 제29집


The Korean Journal of Philosophy of Education.
Feb., 2003, Vol.29, pp.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이론’과 그 교육학적 수용의 문제*


최 재 정(연세대 교육연구소 전문연구원)



I. 들어가는 말

1998년 71세의 나이로 타계한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과 그의 ‘체계이론’(Systemtheorie)은 그것이 학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던 70년대부터 독일의 사회학계를 중심으로 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이래로 명실공히 이른바 ‘초이론’(超理論, Supertheorie)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논문은 2001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KRF-2002-043-C00037)
루만은 1984년 그의 대표적 저서인 ‘사회 체계들’(Soziale Systeme)에서 그의 체계이론을 스스로 사회에 대한 ‘초이론’(Supertheorie)이라고 명했다. Luhmann, N(1983), Soziale Systeme. Grundriß einer allgemeinen Theorie, Frankfurt am Main, S.33.
루만은 무엇보다도 이미 그 당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제 2 세대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던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와 학술논쟁을 벌이면서 학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버마스와의 논쟁이 어떠한 배경에서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Horster, D.(1997), Niklas Luhmann, München, 39ff; Reese-Schäfer, W.(2001), Niklas Luhmann zur Einführung, Hamburg, S.133-144. 하버마스와 루만의 논쟁은 1971년 두 사람의 공저로 출판되었다. Habermas, J. & Luhmann, N.(1971), Theorie der Gesellschaft oder Sozialtechnologie - Was leistet die Systemforschung? Frankfurt am Main.
특히 루만은 그의 체계이론에 터하여 매우 다양한 학문분야들에 대해 거의 각 분야에 있어서 그 해당 분야의 학자들에 버금가는 학문적 전문성과 권위를 가지고 신랄한 비판을 가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 루만의 체계이론이 가지고 있는 특성상 ‘규범적’(normativ)이거나 ‘목적론적’(teleologisch)인 성격을 강하게 지닌 학문 분야, 예컨대 법학이나 신학에 대한 그의 개입은 거의 그 학문 자체의 ‘정체성의 위기’를 불러올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루만은 1979년 그의 동료인 쇼어(Karl Eberhard Schorr)와 함께 교육학 분야에 있어서의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체계에 있어서의 성찰의 문제’(Reflexionstprobleme in Erziehungssystem) Luhmann, N. & Schorr, K. E.(1979), Reflexionsprobleme im Erziehungssystem, Stuttgart.
를 저술했고, 그 이후로 교육학 분야에서도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루만과 쇼어는 독일 교육학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학술지라고 할 수 있는 ‘교육학지’(Zeitschrift für Pädagogik)에 동일한 논지의 논문들을 발표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서 베너(Dietrich Benner)를 비롯한 많은 교육학자들이 반기를 들고일어나면서 일종의 지상논쟁이 벌어졌다. 루만, 쇼어가 1970년대 말 교육학계에 몰고 온 논쟁의 물결은 당시의 독일 교육학계 일반에 한 마디로 ‘버릇없는 도발’(freche Provokation)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가장 긍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 이 논쟁은 그 때까지 이어져 내려오던 전통적인 교육학, 즉 정신과학에 기반을 둔 ‘일반 교육학’(Allgemeine Pädagogik)을 당시 독일 내에서 차츰 자리잡기 시작한 사회과학의 한 분과로서의 ‘교육과학’(Erziehungswissenschaft)으로 승격시키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상기한 바 독일의 ‘교육학지’를 중심으로 하여 벌어진 지상논쟁 이후 기존의 교육학자들 중 루만의 체계이론을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시각에서 수용한 시도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특히 아래 두 문헌을 참조할 것. Schäfer, A.(1983), Systemtheorie und Pädagogik : Konstitutionsprobleme von Erziehungstheorien, Königstein ; Oelkers, J. u. Tenorth, H.-E.(Hrsg.)(1987), Pädagogik, Erziehungswissenschaft und Systemtheorie, Weinheim & Basel. 이 두 저서에서 필자들은 루만의 이론을 교육학에 수용하여 교육학을 교육과학의 차원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노력과 관련하여 일정하게 비판적인 거리감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루만의 이론을 통하여 적어도 그 이전까지 200년 이상의 기간동안 이른바 ‘과학성’(Wissenschaftlichkeit)의 차원에서 엄밀성을 확보하지 못해온 일반교육학이 루만의 ‘쓸모있는 도발’을 통해 연구대상에 대한 보다 명료하고 체계화된 접근을 가능토록 하는 시각의 틀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 위의 필자들 중 특히 욀커스의 경우 교육사의 서술에 있어서 같은 연구대상을 다루더라도 학술적 용어 내지는 방법론에 있어서 루만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 대상에 대해 그 이전까지 이루어지던 일반적인 해석들에 대하여 도발적인 논쟁을 일으킬만한 매우 비판적이며 독특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 예들을 볼 수 있다. 그 구체적인 한 예를 보기 위해서는 아래 문헌 참조할 것. Oelkers, J.(1989), Reformpädagogik. Eine kritische Dogmengeschichte, Weinheim & München. 이 문헌이 발간된 이후 ‘개혁교육학’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있어서 학자들 간에 욀커스의 논의가 매우 중요한 논점으로서 각인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루만과 쇼어의 ‘교육체계에 있어서의 성찰의 문제’가 저술된 이후 이미 20여 년의 시간이 지났으나, 그가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교육학계 일반에 끼쳤던 반향의 자취는 아직도 남아있다. 물론 현재의 교육학계에서 당시 ‘교육학지’를 중심으로 해서 벌어졌던 바와 같은 치열한 학술논쟁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만의 체계이론이 교육학계에 남긴 흔적은 매우 뚜렷하다. 루만이 1993년 퇴임할 때까지 25년간 재직해 온 독일의 빌레펠트 대학을 중심으로 해서 교육학 전반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일단의 교육학자들이 그들 나름의 교육이론을 전개하고 있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빌레펠트 대학을 중심으로 하여 루만의 체계이론을 교육학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또 다른 시도의 대표적인 예로는 다음의 문헌을 참조할 것. Hurrelmann, K.(1978). Erziehungssystem und Gesellschaft. Reinbek bei Hamburg. 이 문헌에서 후렐만은 사회의 하부체계로서의 교육체계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당시 독일의 학계에 소개되어 있던 사회학 이론들을 두루 적용하여 설명하는 가운데 루만의 이론으로 대변되는 최신의 체계이론을 주요한 이론으로서 수용하고 있는 예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루만은 그의 ‘교육체계에 있어서의 성찰의 문제’를 1988년에 다시 출판했는데, 이 때 그는 책의 내용을 전혀 수정하지 않은 채 단지 자신의 저자후기(Nachwort)만을 첨부한 채 출판했다. 바로 이 시기는 이 책이 처음 출간된 때인 1979년으로부터 9년이 지난 때이자, 동시에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사회 체계들’(Soziale Systeme)이 출간된 1984년으로부터도 4 년이 지난 시기였다. 이와 같은 사실로부터 우리는 위 저서의 출판 당시 루만이 교육학계 전반에 대해 취하고 있던 입장이 어떠했는지를 감히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그의 시각에서 볼 때에는 1970년대 말과 80년대 초 교육학자들과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고, 또 그 이후에도 산발적으로 여러 교육학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신랄하게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70년대 말 그가 교육계 전반과 학문으로서의 교육학에 대해 가한 비판 내지 도전에 상응한 것으로서 교육학계에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대응적 반응 내지는 대답이 여전히 매우 미흡하다고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1988년의 재판 이후 루만은 그가 사망한 1998년에 이르기까지 위 저서의 수정판을 다시 내지 않았으며, 이와 같은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루만이 교육학계에 던진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바탕을 두고, 본 논문에서는 루만의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한 논의들 중에서도 특히 그가 그의 ‘체계이론’에 터하여 교육학 전반에 걸쳐 취한 입장들이 과연 어떤 것들이었는지 살펴본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첫째, 루만이 그의 ‘체계이론’ 속에서 과연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루만의 ‘체계이론’ 일반에 대하여 서술한다. 이 때 루만의 매우 광범위하고 복잡한 이론 가운데 그가 특히 교육학에 대하여 전개했던 논점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핵심적인 개념들을 중심으로 하여 간략한 설명이 이루어진다.
둘째, 루만의 ‘체계이론’과 교육학과의 관련성에 대하여 두 가지 차원에서 서술한다. 제일 먼저 루만이 그의 저서 ‘교육체계에 있어서의 성찰의 문제’에서 교육학 일반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한 점들이 과연 어떤 점들이었는지 대표적인 논점들을 짚어본다. 그 다음 그러한 비판점들에 대해서 기존의 교육학자들이 어떠한 차원에서 이의를 제기했는지 서술한다.
셋째, 교육학계 내에서 이루어졌던 루만의 체계이론을 둘러싼 논쟁에 있어서 우리가 현재 교육현실 속에서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어떻게 조명될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모두에서 살펴본다.



II. 루만 ‘체계이론’의 핵심적인 논의들

1. 루만 ‘체계이론’의 형성과정

루만은 그의 ‘체계이론’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실로 다양한 사상적 조류들과 이론들, 학문 분야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 범위는 순수 철학, 사회학을 포함하여 그의 전공분야라고 할 수 있는 사회과학 전반으로부터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다. 그 모든 내용을 여기에 서술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며, 본 논문의 구체적인 주제와 관련지을 때 무의미하기도 하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루만 ‘체계이론’의 이론적 형성에 있어서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두 차원에 대해서만 서술하기로 한다.
첫 번째로 다루어져야 할 내용은 루만의 일반 사회학과의 관련성이다. 루만은 원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고, 이후 법률행정가로 근무한 경험이 있으나, 60년대 초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한 이래 사회학에로 그의 학문적 관심영역을 확장했다. Horster, D. A.a.O., S.31-34.
유학 기간 동안 루만은 바로 그 시기에 미국을 시발점으로 하여 거의 전 세계의 사회학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파슨스(Talcott Parsons)의 제자가 되면서 스승의 학문세계를 충실하게 계승했다. 물론 루만은 파슨스의 이론을 대폭 수정하여 그만의 독특한 ‘체계이론’을 구성했다. 루만이 스승의 체계이론을 수용하고 재구성한 과정을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구조-기능적(strukturell-funktional) 체계이론’으로부터 ‘기능-구조적(funktional-strukturell) 체계이론’에로의 변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전환은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볼 때 ‘행위이론’(Handlungstheorie)으로부터 ‘의사소통이론’(Kommunikationstheorie)에로의 방향전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루만에 의하면 파슨스는 지나치게 개개 ‘행위’(Handlung)들을 결정하는 구성요소로서의 ‘가치’, ‘규범’, ‘목적’ 등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슨스의 체계이론 속에서의 사회란 그 ‘가치의 보존'과 ‘사회적 통합’ 및 ‘사회구조의 안정’, 그리고 ‘목적 달성’, ‘전체사회 질서에의 적응’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Parsons, T(1951), The Social System, Glencoe, S.9.
이처럼 질서의 유지와 안정이 강조되는 파슨스의 이론 속에서 ‘일탈’이나 ‘규범파괴’와 같은 소위 정해진 틀을 벗어나는, ‘비정상적’인 행위들이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루만은 이처럼 매우 ‘규범고착적’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조’(Struktur) 중심적이라고 파악되는 파슨스의 체계이론으로부터 벗어나 ‘기능’(Funktion)에로 관심의 초점을 돌린다. Kneer, G. & Nassehi, A.(2000), Niklas Luhmanns Theorie sozialer Systeme, München, S.35f.
이로써 루만은 파슨스의 체계이론에서 매우 강조되는 바 전체 사회의 ‘자족성’(Autarkie)에 대응하는 점으로서 ‘하부체계’(Subsystem)들의 ‘자율성’(Autonomie)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루만은 또한 현대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복잡성’(Komplexität)의 문제와 관련하여 일상적 행위들이 나타내고 있는 다양성 내지는 변형(Variation)들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를 설명해낼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였다.
루만은 특히 ‘일탈’을 설명해 내기 위해 ‘일상세계에서의 경험’(alltagsweltliches Erleben)에로 시선을 돌린다. 루만에 의할 때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경험들의 과정을 잘 관찰해 보면 구조적으로 이미 주어져 있는 행동규범 외에도 구조 자체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대안적인 행위’의 가능성이 항상 배태되어 있다는 것이다. 루만은 행동을 규제하는 구조모형이 각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단지 동전의 한 면에 불과하다고 한다. 동전의 다른 한 면을 구성하는 부분은 아주 구체적이며 역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상적 상호작용, 즉 ‘의사소통’(Kommunikation)의 과정에서 비롯되는 바 우연한 ‘사건’(Geschehen)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서 변형과 선택을 가능케 하는 ‘살아 움직이는’ 메카니즘이다. 이와 같은 논리에 따를 때 파슨스 이론에서의 사회가 ‘위로부터’ - 즉, 이미 주어져 있는 문화적 규범으로부터 - 구성되는 체계라면, 루만에게 있어서의 사회는 ‘아래로부터’ - 즉, 일상세계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사건들로부터 - 구성되어 올라가는 체계이다. 이에 근거하여 루만은 파슨스의 ‘인과적 기능주의’(Kausalfunktionalismus)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등가적 기능주의’(Äquivalenzfunktionalismus)를 제안한다. Ebd. S.39f.
즉, 파슨스의 이론에서와는 달리 사회적 사실들은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원인과 결과로서의 고정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등가적’(äquivalent)인 것, 즉 다른 것으로 대체가능한(ersetzbar) 것으로 파악되고, 그에 따라 서로 비교와 선택이 가능한 대상들로 탈바꿈하게 된다.  
루만의 ‘체계이론’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두 번째 부분에 대한 서술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바 그가 이룩한 ‘이론적 전환’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다. 키스(Gabor Kiss)에 의하면 루만의 체계이론이 1960년대 중반 출발한 이후 점진적으로 발전해온 과정을 볼 때 특히 1980년대 전후를 중심으로 하여 그 이론 내에서 ‘자생성에로의 전환’(autopoietische Wende)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Kiss, G.(1990), Grundzüge und Entwicklung der Luhmannschen Systemtheorie, Stuttgart.
다시 말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루만 ‘체계이론’은 바로 이 시점을 중심으로 하여 파슨스 이론을 넘어서는 가운데 이론적 차원에서의 자아정체성을 정립했다고 할 수 있다. 키스에 의하면 그의 이론적 전환의 싹은 이미 1960년대 초기에 쓰여진 논문들에서부터 간헐적으로 발견되고 있으므로 사실상 1980년대에 이루어진 이론적 전환은 이미 스스로의 이론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가능성들이 ‘자생성’(自生性, Autopoiesis)이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서 단지 루만에게 보다 명료하게 의식화되어간 과정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생성’의 개념은 원래 사회학 분야 내에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다. 이 개념은 1960년대에 칠레의 신경물리학자인 마투라나(Humberto R. Maturana)와 바렐라(Francisco J. Varela)가 그들의 이론 속에서 생물학적 ‘진화'(Evolution)를 설명하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한 생물학의 개념이다. 마투라나에 의하면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자생적 체계’(autopoietisches System)란 다양한 종류의 체계들 중 어떤 특정한 부류에 속하는 체계로서 스스로를 생성할 줄 하는 능력을 지니는 체계이다. 이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루만은 마치 자연계에서 흔히 관찰되는 바 이와 같은 특정 유기체(Organismus)들의 예에서 나타나듯이 사회체계는 일정하게 ‘자생성’, 즉 ‘자아회귀성’(Selbstreferenz)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즉, 사회체계와 그 안에 형성되어 있는 각각의 하부체계들은 한 편으로는 규범적으로 전체 사회체계, 그리고 다른 하부체계들과 일정하게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각 체계 자체가 자생력을 지니고 있어서 상당히 자율적으로 스스로를 구성해 나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루만의 이와 같은 이론적 전환과 관련하여 잊어서는 안될 점은 그것이 그의 스승인 파슨스의 체계이론의 본질 전체를 부정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루만의 이론은 단지 파슨스의 이론 속에서 충분히 설명될 수 없었던 현대 사회체계의 복잡성을 보다 설득력있게, 그리고 유연하게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루만은 매우 ‘정체적’(statistisch)이며 지나치게 ‘구조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늘 받아오던 스승의 체계이론을 매우 ‘역동적’(dynamisch)이며 ‘과정중심적’(prozeßzentriert)인 것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체계이론의 계승 및 발전에 있어 매우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셈이다.

2. 루만 ‘체계이론’의 주요 개념들

루만은 사망하기 바로 직전까지 매우 빠른 속도로 실로 방대한 분량의 학술적 성과를 낸 학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그러한 과정 속에서 수많은 개념, 용어들을 새로이 만들어 내거나 혹은 종래 사용되는 개념들이라고 하더라도 상당히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결국 루만 이론의 학문적 의미와 성과를 제대로 가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가 사용한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양적, 질적 범위가 워낙 방대하고 관련성의 차원에서도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루만이 사용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을 정리하는 일 자체가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이 논문의 구체적인 주제와 관련하여 의미있는 개념들 몇 개만을 선택하여 간략하게 다룬다.

가. ‘불확실성’ / ‘복잡성’
그는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특성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불확실성‘(Kontingenz)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루만은 다음과 같이 ’불확실성‘을 설명한다. “불확실성이란 경험들의 겉으로 드러난 가능성들이 (실제로는) 기대한 것과 다르게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부에 드러난 것은 따라서 기만일 수 있다.” Luhmann, N.(1983), Rechtssoziologie, Opladen, S.31.
는 것이다. 이 설명에 따를 때 루만에게 있어서 ’불확실성‘의 개념은 인간행동이 근본적으로 ’예상불가능‘(unberechenbar)하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예상불가능성은 ’이중구조‘(Doppelstruktur)를 가지고 있다. 루만은 ’불확실성‘이 지니고 있는 이중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은 적어도 두 파트너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 두 파트너를 타자(Alter)와 자아(Ego)라고 부르자. 이 둘은 서로 우연적인, 즉 불확실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니까 이 둘은 다양한 행동의 가능성들을 각자의 재량권 하에 가지고 있으며 그렇다는 사실을 서로 알고 있다. 둘 중 누구든지 이렇게 할 수도 있고, 또한 다르게도 할 수 있다. 둘 중 누구나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권고되는 방식에 따를 수도 있으나, 또한 그 방식으로부터 벗어나는 행동을 할 수도 있다. 대개의 경우에는 손에 쥐어진 것을 (그대로) 취하여 그것을 그대로 행동에 옮긴다. 그러나 또한 (손에 쥐어진) 그것을 저버릴 수도 있다. 이 모형에 속해 있는 타자도 또한 자아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 우연적으로 행위하며 이에 대하여 서로 알고 있으며 심지어는 서로가 그것에 대하여 알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알고 있다. Luhmann, N.(1975), Soziologische Aufklärung 2, Opladen, S.68.


여기에서 기술된 이중성을 루만은 ‘이중적 불확실성‘(Doppelte Kontingenz)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한다. 루만은 이중적 우연성이 가능하게 되는 상황을 간단히 두 개의 검은 상자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태로 설명한다. Luhmann, N.(1984), A.a.O., S.156.
불확실성의 세계, 특히 이중적인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세계에 접하면서 인간 개개인은 한 편으로 위기와 불안을 경험하게 되며 다른 한 편으로 이 세계 속에 행동 내지 행위의 가능성들이 수도 없이 널려 있다는 점에서 세계를 지극히 ‘복잡한’(komplex) 것으로 의식한다. 루만은 “너무나 많은 요소들이 함께 집결되어 있어서 그 요소들이 (요소들의 종류에 의해 제한된 구조과정의 가능성들에 있어서) 더 이상은 개개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 서로 연결시킬 수 없게 된 그런 체제를" 복잡하다고 표현한다. Ebd., S.46.
즉, 루만에게 있어서 ‘복잡성’(Komplexität)은 사회의 진화와 발맞추어 증가되어온 행위의 수많은 가능성들이 이루고 있는 다양성 전체를 의미한다. Kiss, G., A.a.O., S.11f.
 

나. ‘선별’ / ‘의미’
‘불확실성’, ‘복잡성’이란 결국 경험과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의미하는데, 바로 이 상황 자체가 그 가능성들을 ‘축소’(Reduktion) 혹은 ‘선별’(Selektion)하는 과정을 거치도록 강요한다. Ebd.
이 축소 내지 선별의 과정은 무엇보다 체계들이 계속 건전하게 존재할 수 있기 위해 요구되는 필수적인 전략이며, 이 때 강조되는 점은 그 과정이 얼마나 잘 ‘구조화’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별은 어떤 자의적인 선별이 아니라 곧 ‘구조적 선별’(strukturelle Selektion)을 의미하게 된다. 이 구조적 선별에 따른 구조화는 구체적으로는 ‘구성요소들 간의 관계화’(Relationieren)를 통해 가능하게 되며 수많은 관계화의 가능성들 가운데 아주 적은 수의 몇 가지 ‘의미있는’ 가능성들이 선택되어 그에 따라 구조가 이루어지게 된다. Ebd., S.13.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의미있는’ 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선별’을 위한 선택의 기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다름 아닌 ‘의미’(Sinn)이기 때문이다. 루만에게 있어서의 ‘의미’ 개념은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과 베버(Max Weber)의 사회과학적 방법론의 영향을 받은 가운데 형성되었다. 루만이 후설의 철학과 베버 사회학의 영향을 받은 점과 관련하여 루만이 언급한 인터뷰 내용은 Horster, D., A.a.O., S. 34참조.
루만은 특히 베버에게 있어서의 ‘의미’ 개념을 그의 이론 속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Kiss, G., A.a.O., S.14.
루만에 의하면 “의미현상은 경험과 행위의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한 지시들이 지나치게 넘쳐흐르는 형식에 있어서 드러난다. 어떤 것들은 시야에, 그리고 의도의 중심에 들어오며, 다른 것들은 경험과 행위에 있어서 기타 등등(Und-so-weiter)의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서 주변적(marginal)인 것으로 암시된다.” Luhmann, N.(1984), A.a.O., S.93.
즉, 의미구조에 의거하여 체계는 어떤 특정한 요소들은 ‘연관가능성들’(Anschlußmöglichkeiten)로 파악하며, 다른 것들은 ‘확실치 않은’(unwahrscheinlich), 혹은 ‘어려운’(schwierig), 혹은 ‘지나치게 광범위한’(weitläufig) 것으로서 분류해 내거나 배제시킨다. Ebd., S.94.
이 때 주변적으로 처리되거나 배제되는 가능성들은 그 즉시 체계의 관심 영역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Latenz)으로서 잠재된(potentialisiert) 채 계속 남아 있게 된다. 여기에서 어떤 가능성이 전면에 드러나고 어떤 가능성이 잠재되어야 하느냐 하는 결정은 그 때 그 때마다 이루어지는 경험의 ‘현재성’(Aktualität)의 정도에 달려 있다.
루만에 의할 때 ‘의미화의 과정'(Prozessieren von Sinn)은 ‘구분'(Differenz)으로부터 시작된다. 구분의 제일 첫 번째 단계는 대상으로 주어진 정보들을 경험적으로 ’방금 주어진 것’(aktuell Gegebenes)과 '가능한 것'(Mögliches), 즉 또 다른 가능성들에 대한 일련의 지시들로 나누는 일이다. 이 기본적인 구분에 이어서 '의미'는 열려있는, 혹은 잠재되어 있던 가능성들을 ‘재구분’(redifferenzieren)한다. 즉, 그것들을 ‘파악’(erfassen), ‘유형화’(typisieren,  schematisieren)하여 그 다음에 이루어지는 구분을 위한 정보로 만든다. Ebd., S.111f.
이런 식으로 ‘의미’는 주변에 널려져 있는 정보를 체계를 위하여 의미로운 것으로 처리해 나가며 계속적인 선별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의미’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복합성’을 점점 제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상태를 끊임없이 ‘재생성’(regenerieren)한다. 결국 ‘의미’를 통해 세계를 수축(schrumpfen)시킬 수는 없는 것이며, 다만 “우리는 세계 내에서 가능한 구조들로부터 어떤 것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를 하나의 체계로 세우는 법을 배울 수 있을 뿐이다.” Ebd., S.94.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사소한 의미도 결코 그 자체로서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어떠한 ‘의미지움의 의도’(Sinnintention)이건 간에 그것은 반드시 지시들의 구조화가 진행되는 장으로서의 특정한 네트워크를 필요로 한다. 이 네트워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자생성’ 개념을 살펴보아야 한다.

다. ‘자생성’ / ‘자아회귀성’
마투라나는 자연계에서 관찰되는 ‘자생적 체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 부류에 속하는 모든 요소들은 역동적인 체계들이다. 이 체계들은 스스로에 속해 있는 구성 부분들을 생산하는 과정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네트워크(Netzwerk)라고 정의된다. 이 때 이 구성 부분들은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생성(Erzeugung)의 과정과 이미 그 스스로를 생산한 네트워크 그 자체를 실현(Verwirklichung)하는 과정에 있어서 회귀적(rekursiv)인 방식으로 작용한다. 다른 한 편으로 구성 부분들은 어떤 공간, 즉 그 구성 부분들에 의해 그것의 경계선이 만들어짐으로써 정의되는 어떤 공간 속에서의 통일체(Einheit)로서 그 구성요소들의 생산 과정의 네트워크를 구성한다. Maturana, H. R.(1985), Erkennen. Die Organisation und Verkörperung von Wirklichkeit, Braunschweig-Wiesbaden, S.280.


마투라나가 서술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루만에게 있어서의 ‘자생성’ 개념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엿볼 수 있다. 이 정의 속에서 드러나는 ‘자생적 체계’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자생적 체계’는 스스로를 생성할 줄 하는 능력을 지닌 체계이다. 이는 ‘자생성’(Autopoiesis)이라고 하는 말 그 자체의 그리이스어적 어원을 살펴볼 때 보다 자명하게 드러난다. 그리이스어에 있어서 ‘auto’란 ‘스스로’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poiein’이란 ‘만든다’는 의미이다. 즉, 자생적 체계란 그 스스로를 어떠한 요소들로 구성해낼 것인지, 그리고 이 요소들이 어디에 어떻게 속하도록 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체계인 것이다.
둘째, 자생적 체계는 ‘역동적’이다. 즉, 자생적 체계란 파슨스의 틀 속에서 지극히 추상적으로 분류 가능한 죽은 체계와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는, 늘 움직이는 가운데 살아서 존재하는 ‘실재하는 체계’(reales System)이다. 따라서 자생적 체계는 학문적인 차원에서 볼 때 정해진 틀에 따라 천편일률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 늘 그것의 ‘변화’와 ‘과정’을 염두에 두고 늘 관찰되어야 하는 그런 대상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는 자생적 체계는 그것의 생성 및 형성과정 속에서 늘 스스로에게 ‘회귀적’(rekursiv)으로 돌아가는 특징을 지닌다. 이 특징은 Autopoiesis의 독일어 번역인 ‘자아회귀성’(Selbstreferenz)이라는 용어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즉, 체계는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한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에게 돌아가 스스로를 ‘참조’(Referenz)한다는 것이다. 루만은 체계 자체가 스스로를 결정해 나가는 방식들에 따라 ‘자아회귀’의 종류와 형태를 셋으로 구분한다. 첫째, ‘기본적인 자아회귀’(basale Selbstreferenz), 둘째, ‘성찰성’(Reflexivität),  셋째, ‘성찰’(Reflexion)이 그것이다. 이 세 종류 중 특히 루만의 교육학과의 관련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성을 지니는 ‘성찰’ 개념에 대해 조금 더 서술할 필요가 있다.
‘성찰’에 있어서는 ‘기본적인 자아회귀’에서 요구되는 바와 같이 요소와 관계를 단순히 구분하는 일이 중요성을 띠지 않는다. 성찰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체계의 환경과의 구분’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루만의 표현을 빌면, “이 경우에 있어서 자아란 자아회귀적인 조작을 할 수 있는 체계를 의미한다. 그것(성찰)은 체계가 그것이 환경과 구분되는 가운데 그 스스로를 명명함으로써 실현된다. 즉, 성찰은 예컨대 한 체계가 스스로에 대해 다양한 형태로 ‘자기표현’(Selbstdarstellung)을 하는 가운데 가능해진다.” Ebd., S.601f.
루만의 표현에 따를 때  ‘성찰’이란 한 체계가 자생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일정하게 ‘자아관찰’(Selbstbeobachtung)의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자기를 자기의 외부에 있는 다른 체계 혹은 환경과의 구분이라는 차원에서 스스로에 대해 ‘서술’(Beschreibung)하는 과정을 말한다. 주체의 자아서술, 내지는 자아관찰의 차원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루만의 유고작인 아래 문헌의 제 7 장을 참조할 것. Luhmann, N.(2002), Das Erziehungssystem der Gesellschaft, Frankfurt am Main, S.168-203.

한 체계의 ‘자생성’ 내지는 ‘자아회귀’의 문제는 더 나아가 각각의 체계가 가지고 있는 자체의 ‘합리성’과 그것에 귀속되어 있는 ‘테크놀로지 문제’와 결부된다. 루만에 의하면 모든 사회적 체계는 그것이 하나의 체계로서 ‘자생성’을 충분히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 자체에 갖추어져 있는 ‘체계합리성’(Systemrationalität)에 따라야 하는데, 이 때 ‘체계합리성’과 함께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테크놀로지’이다. 즉, 모든 체계는 그것이 다른 체계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가운데 하나의 체계로서 통일성 내지 정체성을 확고히 구축하기 위해 그것의 ‘체계합리성’에 터하여 마련된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잘 짜여진 구조를 구성해야 한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볼 때 테크놀로지란 ‘어떠한 체계가 그것이 작용하는 대상을 일정하게 구조화된 작업의 과정에 따라 목표지향적인 차원에서 조작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결국 이와 같은 의미에서의 테크놀로지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체계가 있다면 그 체계는 이른바 ’테크놀로지결여‘(Technologiedefizit)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체계, 즉 ’자생성‘이 결핍된 체계로 평가받게 되는 것이다.

라. ‘의사소통’
위에 제시한 개념들을 통하여 드러난 바 사회의 ‘복잡성’과 그 상태를 가능하게 하는 ‘불확실성’, 그리고 그 ‘불확실성‘ 속에서 ‘의미’있는 ‘선별’을 통하여 ‘자생적’으로 스스로를 구조화해 나가는 체계 등 이 모든 현상들은 결국 일상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늘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의 구체적 과정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루만에게 있어서의 의사소통이 종래의 의미, 즉 어떤 ‘정보’들을 특정한 ‘상징체계’를 매개로 하여 어떤 한 ‘발송자’(Absender)로부터 ‘수신자’(Empfänger)에게로 이전하는 과정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즉, 루만에게 있어서의 ‘의사소통’은 단순히 언어성(Sprachlichkeit)의 차원에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개념이다.
루만에게 있어서 ‘의사소통’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오히려 사회학 이론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인 ‘행위’(Handlung)와 밀접한 관련하에 있다. 루만은 종래에 이해되던 ‘행위’를 단지 ‘의사소통’이 단순화된 형태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렇게 설명할 때 ‘행위’는 ‘의사소통’보다 큰 장점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루만에 의할 때 ‘행위’들은 직접적인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의사소통’보다 쉽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Ebd., S.232.
‘행위’는 개개의 인간들에게로 귀속가능하며 그럼으로써 명백한 책임추구가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기억하고 넘어갈 점은, 루만에게 있어서 의사소통은 절대로 어떤 ‘내재적 엔텔레히’(immanente Entelechie), 즉 어떤 이미 내정된 ‘목적’(telos)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의사소통에 있어서 ‘목적지향적인 에피소드들’(zweckorientierte Episoden)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루만에게 있어서의 의사소통은 그 과정에 참여한 이들의 의식에 동반하여 ‘자기 스스로를 위하여‘(für sich), 즉 ’자생적‘, ’자아회귀적‘으로 기능한다.


마. ‘체계’/‘환경’
이제까지 다루어진 개념들을 통하여 사회체계란 철저히 ‘자아회귀적인 체계’, 즉 그것에 속한 구성요소들과 구조들을 ‘스스로 생산하는’ 체계라는 점이 서술되었다. 이와 같은 서술에 의하면 사회적인 체계의 내재적인 측면이 주로 강조된 셈인데, 이에 따를 때 마치 사회체계들이 완전히 폐쇄된 체계로 파악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했듯이 사회체계들은 절대로 유아독존적(soliptistisch)이거나 자폐적(autisch)인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그를 둘러싼 환경과 관계하는 존재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항에서는 체계의 ‘환경’과의 연관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선 ‘환경’(Umwelt)이란 어떤 한 체계를 둘러싸고 있는, 그러면서 체계에 의해 지어진 경계선의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체계, 즉 그것이 유기적인 체계이든 심리적인 체계이든, 혹은 여타의 사회적인 체계이든 간에 위에 상정한 체계에 속하지 않는 모든 체계들을 의미한다. 이 ‘환경’으로서의 체계들은 그것 자체로서는 작용의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그것을 ‘환경’으로 삼고 있는 체계의 측면에서 볼 때 그저 다양한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주변적인 체계들이다. 그런데 이 ‘환경’으로서의 체계들은 늘 주체가 되는 체계보다 훨씬 더 복잡한(komplex) 성질을 지니고 있다. 루만의 표현을 직접 빌면, “...근본적으로 체계와 환경은 복잡성의 차이(Komplexitätsgefälle)에 의해 서로 구분된다.  환경은 항상 체계보다 복잡하다.” Luhmann, N.(1976), Soziologische Aufklärung 2, Opladen, S.28.
바로 이와 같은 복잡성의 차이로 인하여 체계와 환경의 관계들은 늘 불균형적(asymmetrisch)일 수밖에 없으며, 그에 따라 체계들은 늘 이루어지는 체계 자체의 조작과정에 있어서 그때 그때마다 항상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들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삼아 조직, 혹은 재조직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루만의 ‘환경’에 대한 파악이 위에 이미 제시한 바 있는 소위 ‘자생성적 전환’ 전후로 확연히 구별된다는 점이다. 자생성적 전환 이전의 루만에게 있어서 사회적 체계들의 기능(Funktion)은 무엇보다 복잡성을 줄이는 과정에 있어 늘 ‘환경’을 최우선적인 조건으로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만은 다음과 같이 환경과 체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사회적 체계들은 다른 모든 체계들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가능성들은 고정시키고 다른 나머지 것들은 배제시키는 구조화된 관계의 구조물로서 파악될 수 있다. 이 때 그것들이 사회적 행위들, 즉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대한 어떤 의미관련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행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있어서 특수성을 보여준다. 그러한 의미의 관계들은 사회적인 체계를 통하여, 극도로 복잡하며 총체적인 관망이 불가능하며, 또한 통제불가능한 환경 내에서 상대적으로 단순한 형태를 띤 가운데 큰 변화없이 그대로 유지된다. 이로써 사회적인 체계는 그를 둘러싼 환경이 띠고 있는 극도의 복잡성을 어떤 특정한 혹은 결정가능한, 그리고 선발된 행위의 가능성에로 축소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인간상호간의 행위는 의미있게 방향을 잡을 수 있다. Luhmann, N.(1969). Gesellschaftliche Organisation, in : Ellwein, Th. & Groothoff, M.(Hrsg.), Erziehungswissenschaftliches Handbuch Bd. 2, Berlin, S.392.


그러니까 초기의 루만에게 있어서 사회체계는 곧 파슨스에게 있어서처럼 인간의 행위들(Handlungen)로 구성되어 있는 비교적 변화없는(invariabel) 존재로 파악되었으며, 또한 체계의 기능에 있어서 근본적인 중요성을 띠는 점으로서, 바로 이 방법을 통하여 체계들은 ‘환경’이 요구하는 것들에 적응(Anpassung)해야 하며, 이에 따라 체계의 목적은 곧 ‘환경’의 변화에 따라가는 일이라는 것이다. 즉, 체계 그 자체보다는 ‘환경’에 강조점이 주어져 있었다. 여기에서 체계의 기능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덧붙이자면, ‘환경’에 대하여 체계가 그 복잡성을 축소하는 기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으로 구분된다 : 첫째, 환경과 체계의 구분, 둘째, 환경에 대하여 경계선을 긋는 전략, 셋째, 행동기대(Verhaltenserwartung)의 ‘일반화 내지 자동화'(Generalisierung bzw. Autorisierung)가 그것이다. Kiss, G., A.a.O., S.32.

이러한 시각은 1980년대 이후의 ‘자생성적 전환’ 이후 달라진다. 루만은 사회체계가 ‘환경’을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서 ‘환경’에 근거를 둔 복합성의 축소기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체계내부적인 구성요소들이 지닌, 상대적으로 ‘환경’으로부터 독립적인 자기조직(Selbstorganisation) 능력, 즉 ‘환경’에 대한 ‘선별적인 관계’(selektive Verhältnis)가 보다 결정적으로 중요성을 띠는 것으로 파악한다. 루만은 1984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모든 자아회귀적인 체계는 단지 환경과의 접촉을 가질 뿐이지.... 환경 그 자체를 가지지 않는다.” Luhmann, N.(1984), A.a.O., S.146.

여기에서 말하는 ‘환경과의 접촉’(Umweltkontakt)이란 결국 어떤 폐쇄적인 체계가 그래도 완전히 닫혀있지는 않고 개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루만이 그의 이론 형성에 있어서 후반기로 올수록 체계 자체가 지닌 ‘자생성’/‘자아회귀성’에 차츰 중점을 기울여가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즉, 체계란 “오로지 그 자신에게 속해 있는 구조로부터 주어진 기준에 따라 환경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반응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3. ‘진화이론’으로서의 ‘체계이론’

루만의 체계이론이 지니고 있는 이론적인 특징을 그 스스로가 분류하듯이 ‘체계이론’, ‘의사소통이론’, 그리고 ‘진화이론’(Evolutionstheorie)으로 나누어 볼 때 Luhmann, N.(1976), Systemtheorie, Evolutionstheorie und Kommunikationstheorie, in : Ders., Soziologische Aufklärung 2, Opladen, S.193-202.
, 위에 다루어진 개념들의 설명을 통하여 앞의 두 특징들은 부족하나마 설명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루만의 ‘체계이론‘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부분으로서 그의 체계이론 내에서의 진화이론적 특성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루만의 ‘체계이론’에 따를 때 세계는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한 편으로 사회체계가 그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질서에 따라 어느 방향이든 간에 잘 굴러가고 있는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 다시 말해 사회체계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자생성’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해 가는 성질을 그 안에 가지고 있으며, 바로 이러한 과정을 루만은 ‘진화’(Evolution)라고 부른다. 루만은 사회의 ‘진화’ 과정을 인류가 이룩해온 사회체계의 역사적인 변천 속에서 찾아내고 있다. Treml, A. K.(1981), Erziehung und Evolution. Zur Kritik der Gesellschaft- und Erziehungstheorie von Niklas Luhmann, in : Bildung und Erziehung, Jg. 34, S.435.
 
루만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사회체계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사회는 역사를 통하여 모두 세 단계를 거치면서 진화해 왔다고 서술한다. 그 첫 번째는 ‘분절적 사회’(Segmentäre Gesellschaft)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사회는 ‘원초적’(archaisch, primitiv)인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구조적으로 서로 비슷비슷하거나 같은 종류에 속하는 하위체제들이 서로 관련성 없이 분절적으로 존재한다. 두 번째로 ‘계층적 사회’(stratifikatorische Gesellschaft)의 단계를 들 수 있는데, 이 단계의 사회는 불평등하며 계급적인 ‘계층화’의 힘을 빌어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모든 형태의 고급 문화들 또한 계층적으로 분류되어 있다.
마지막 단계의 사회는 ‘기능에 따라 분화된 사회’(funktional differenzierte Gesellschaft)이다. 루만은 그와 같은 사회의 형태를 구체적인 인간의 역사 중, 특히 서구 유럽으로부터 연원하는 ‘근대 사회'(moderne Gesellschaft)에서 발견한다. 루만에 의하면 현대 사회의 제 현상들을 대변하는 이 마지막 단계의 사회 형태는 결국 지구상에서 가장 발달된 사회형태로서 모든 다른 사회는 이 모형에 따라 진화되어가고 있다고 파악된다. 루만은 이 사회 단계에 서 나타나는 중심적인 특징을 ‘기능적 분화’에서 찾고 있는데, 이에 따를 때 현대 사회에서는 그 사회에 속한 개개인들이 더 이상 ‘출생’에 따른 계층적 차원에서 구분되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일차적(primär)이거나 보상적(komplementär)인 특정 ‘역할’ 내지 ‘기능’들에 따라 구분된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전체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노동분업적(arbeitsteilig)으로 구분되어 있는 하부체계들의 비교적 자율적인 기능이 강조되며, 이 각각의 하부체계들의 자율적인 활동과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개개의 하부체계들 간의 동시적인 협조를 통하여 전체 사회체계 차원에서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게 된다. 이 같은 사회 체계 속에서는 더 이상 한 인간존재로서의 개개인이 중요시되지 않고 그가 지니고 있는 ‘기능’이 중요시되므로, 단지 그가 습득한 바 ‘기능’으로부터 요구되는 점들을 채워주기만 하면 그 ‘기능’을 담당하던 체계들은 언제든지 다른 체계로 교환이 가능하다. 이 때 개개의 인간은 ‘심리적 체계’(psychisches System), 즉 하나의 단위 체계로 파악된다.
루만의 ‘체계이론‘이 지니고 있는 진화론적 요소는 그에게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인 ‘의미구조'(Semantik)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루만에 의하면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진화의 과정, 즉 계층적인 사회의 단계로부터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 다시 말해 현대 사회로 변화되어가는 가운데 함께 변화한 것이 바로 ‘의미구조'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미구조'란 인간 에게 있어서의 ’이념’ 내지는 ‘개념’의 세계이며, 따라서 사회의 변천과정을 의미구조적 차원에서 서술한다는 것은 곧 역사의 진화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사유방식’(Mentalität)이나 ‘감성’(Affekt)의 세계가 어떻게 함께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Horster, D., A.a.O., S.175f.

III. 루만의 ‘체계이론’과 교육, 교육학

루만의 ‘체계이론’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을 통해서 과연 루만이 사회, 특히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대의 사회가 보여주는 제 특성들과 그 사회 안에 소속되어 있는 인간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서술들을 교육 내지는 교육학과 연결시키고자 할 때 우리는 단지 인상적인 수준에서만 보더라도 루만의 ‘체계이론’이 매우 흥미로운 설명틀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여러 측면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루만의 체계이론은 ‘교육’의 현상 그 자체, 특히 일반적으로 ‘행위’(Handlung)로서 이해되는 교육의 개념과, 그 교육행위에 있어서 중심에 서 있는 ‘인간’, 즉 ‘개인’(Individuum) 내지는 ‘주체’(Subjekt)의 개념을 종래의 교육학 이론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보도록 해 준다. 자연히 루만의 ‘체계이론’에 터할 때 교육을 학문적인 대상으로 삼는 ‘교육학’ 전반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지적했듯이 루만의 교육, 교육학에 대한 문제제기들은 1970년대 말 이후 독일의 교육학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때 그 반향은 두 가지 방향에서 나타났다. 그 중 첫 번째는 루만의 문제제기에 대한 심한 반발의 현상으로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른바 루만과 지상논쟁을 벌였던 학자들의 루만 이론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쓰여진 글들은 다음과 같다. Benner, D.(1972), Pädagogisches Experiment zwischen Technologie und Praxeologie. Wissenschaftstheoretische Überlegungen zum Erfahrungsbegriff in der Pädagogik, in : Päd. Rundschau, Jg. 26., S.25-53 ; Benner, D.(1979),  Läßt sich das Technologieproblem durch eine Technologieersatztechnologie lösen? Eine Auseinandersetzung mit den Thesen von N. Luhmann und K. E. Schorr, in : Z.f.Päd., 25. Jg. Nr. 3, S.367-375 ; Benner, D.(1975), Ist etwas, wenn man es durch sich selbst ersetzt, nicht mehr dasselbe? Bemerkungen zur Replik von N. Luhmann und K. E. Schorr, in : Z.f.Päd., 25. Jg. Nr. 5, S.803-805 ; Fauser, P. & Schweitzer, F.(1981), Pädagogische Vernunft als Systemrationalität. Eine Auseinandersetzung mit dem Buch von N. Luhmann und K. E. Schorr, in : Z.f.Päd., 27. Jg. Nr. 5, S.795-809 ; Hof, Ch.(1991), Systemtheorie als Provokation für die Pädagogik? in : Päd. Rundschau, Jg. 45, S.23-39 ; Meinberg, E.(1983), Systemtheorie - Herausforderung an die moderne Erziehungswissenschaft? Zu einigen Rezeptionsproblemen einer systemtheoretisch orientierten Erziehungswissenschaft, in : Päd. Rundschau, Jg. 37, S.481-499 ; Meyer-Drawe, K.(1995), Von der Marionette bis zum autopoietischen System. Maschinenbilder in der Pädagogik, in : Vierteljahr. f. Wissenschaft. Päd., 71. Jg., S.358-373 ; Treml, A. K.(1981), Erziehung und Evolution. Zur Kritik der Gesellschafts- und Erziehungstheorie von Niklas Luhmann, in : Bildung und Erziehung, Jg. 34, Nr. 4, S.434-445.
이러한 논쟁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루만이론 비판가는 베너(Dietrich Benner)로서 이 방향에 서 있는 학자들의 입장을 대표할 만한 논의를 전개한다. 베너는 바로 루만이 교육학 내에서 거부하고자 했던 ‘전통적인' 교육학의 시각, 즉 ‘구 서구적’(alteuropäisch)이며 ‘인본주의적’(humanistisch)인 시각, 또한 그러한 차원에서 철저히 하버마스의 이론적인 입장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시각에서 루만을 공격하고 있다.
반면 매우 긍정적인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반향으로서 루만의 ‘체계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루만이 교육, 교육학의 제 문제들을 보는 바로 그 시각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교육, 교육학과 관련된 테마들을 해결해 보고자 시도하는 교육학자의 그룹이 형성되어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방향에서의 학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들인지, 그리고 루만의 ‘체계이론‘을 수용하는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논의들을 전개하고 있는지를 대강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문헌을 참고할 것. Luhmann, N. & Schorr, K. E.(Hrsg.)(1986), Zwischen Intransparenz und Verstehen. Fragen an die Pädagogik, Frankfurt am Main ; Oelkers, J. & Tenorth, H.-E.(Hrsg.)(1987), A.a.O..
이들 중 특히 욀커스(Jürgen Oelkers)와 테노르트(Heinz-Elmar Tenorth)의 공동작업이 가장 눈에 띈다. 이들은 루만의 교육, 교육학에 대한 관여 내지는 개입을 ‘쓸모있는 도전‘(Eine nützliche Provokation)으로 파악하면서, 바로 루만의 이론적 관점에서 교육, 교육학의 분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분석해 낸다. 또 다른 학자 집단은 루만이 25 년간 사회학 분야 교수로 재직해 있던 빌레펠트 대학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후렐만(Klaus Hurrelmann)을 중심으로 해서 그의 이론을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교육학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 빌레펠트 대학의 후렐만 교수를 중심으로 한 루만 이론의 수용에 대해서는 본고의 각주 5)를 참조할 것.

루만의 ‘체계이론‘이 교육, 교육학에 있어서 과거 과연 어떻게 수용되어 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수용되어야 하는지를 전반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바로 위에 제시한 두 방향 모두에서의 논점들을 다 언급하고 논의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러한 연구의 필요성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으며, 단지 이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논쟁적인 차원들만을 다룬다. 이를 통해 무엇보다 루만의 '체계이론'을 교육학에 수용하고자 할 때 과연 어떠한 문제들이 야기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결국 이 글에서는 위에 제시한 바 루만의 이론에 대한 두 가지 방향에서의 반향들 가운데 첫 번째의 방향에 서 있는 학자들의 문제제기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첫째, 루만이 종래의 교육, 교육학을 과연 어떻게 파악하고 있으며, 또한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점들에 있어서 비판하고 있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이 때 논의의 초점이 루만, 쇼어의 저서인 ‘교육체계에서의 성찰의 문제'에서 다루어진 쟁점들에 맞추어진다.
둘째, 루만의 ‘체계이론'의 시각에서 교육, 교육학을 바라볼 때 야기될 수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서 다룬다. 이 때 논의의 중심을 루만이 그의 이론에 대한 비판가들과 벌인 논쟁에 두며, 그 논쟁에 있어서 핵심을 이루는 몇 가지 주제들을 중점적으로 서술한다.

1. 루만의 교육, 교육학에 대한 문제제기

이 글의 도입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루만은 1979년 그의 동료인 쇼어와 함께 교육학에 분야의 대표작인 ‘교육체계에 있어서의 성찰의 문제’를 출간했다. 이 저서에서 루만은 그의 ‘체계이론’에 근거하여 종래의 교육학, 즉 ‘일반교육학’(Allgemeine Pädagogik) 분야 전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비판을 가하였다. 첫째, 교육, 교육학에 있어서의 ‘성찰‘(Reflexion)의 문제, 둘째, 교육학이 가지고 있는 ‘테크놀로지결여‘(Technologiedefizit)의 문제, 즉 하부체계로서의 교육체계가 나타내고 있는 비기능성(Dysfunktionalität)의 문제, 셋째, 교육, 교육학이 내포하고 있는 ‘환상‘(Ilusion) 내지는 딜레마로서 ‘기회균등의 가정’(Gleichheitspostulat)의 허구성의 문제가 그것이다. 아래에서는 바로 이 세 가지 문제들을 차례로 서술한다.

가. ‘성찰‘(Reflexion)의 문제
‘교육체계에 있어서의 성찰의 문제’에서 루만과 쇼어는 무엇보다 먼저 전체 사회체계 내에서의 ‘하위- 내지 부분체계’(Sub- und Teilsystem)인 교육체계(Erziehungssystem)에 ‘성찰’(Reflexion)의 차원이 결여되어 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부분의 서술과 관련하여 루만의 유고 중 최근 발간된 아래의 문헌 중 특히 7 장을 참조할 것. Luhmann, N.(2002), A.a.O, S.168-203.
여기에서 ‘성찰’의 문제는 위에서 언급했던 바 ‘자생성’ 및 ‘자아회귀’(Selbstreferenz)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루만의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개념의 차원에서 볼 때 결국 교육은 하나의 하위체계로서 충분히 ‘성찰’, 즉 ‘자아회귀‘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비판은 무엇보다 종래의 교육학이 학문으로서의 전문성, 독자성을 결여하고 있는 점을 문제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Oelkers, J. & Tenorth, K.-E., A.a.O., S.28.

루만의 시각에서 보면 하나의 체계로서의 교육, 즉 ‘교육체계’가 그것이 전체 사회의 차원에서의 체계 속에서 다른 하위체계들과 뚜렷하게 스스로를 구별하도록 하는 ‘자율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자생성’ 내지 ‘자아회귀’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이 때 ‘자아회귀’의 기능은 구체적으로는 교육체계가 이른바 ‘자아관찰’(Selbstbeobachtung)의 차원에서 얼마나 스스로를 관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가 하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떠한 형태를 지니든 간에 체계란 충분히 ‘스스로에 대해 서술’하는 가운데 그 스스로 통일성과 자아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루만의 시각에서 볼 때 교육체계의 ‘자아관찰’이란 교육체계를 대상으로 한 교육학의 내용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루만에 의하면 바로 이런 차원에서 볼 때 교육학은 ‘자아관찰’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 루만은 당시의 ‘일반교육학’이 제공하는 지식의 수준을 조망하면서 그것은 ‘교육 내지는 도야의 실제’를 충분히 ‘자아회귀적’으로 분석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Ebd., S.19.
이와 같은 현실은 루만에 의할 때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교육학이 교육체계의 역사를 그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구조’의 변천 내지는 ‘진화’의 차원에서 충분히 서술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비롯된다. 종래 교육학 내지 교육체계가 안고 있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점을 비판하는 가운데 루만은 스스로 교육, 교육학의 역사를 ‘의미구조’의 차원에서 서술하는 한 예를 보여준다.
루만에 의하면 교육체계의 하위체계로서의 분화는 바로 전체 사회가 ‘계층적’인 사회에서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로 변천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Hof, Ch., A.a.O., S.24ff.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개개의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개인들이 ‘시민’(Bürger) 내지는 ‘국민’(Staatsbürger)으로 양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바로 이러한 양성과정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 ‘교육체계’라는 것이다. 이 때 이러한 교육체계의 다른 체계와의 구별은 교육체계가 그 스스로의 고유한 활동영역으로서 ‘학교’와 ‘수업’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해졌다. 루만에 의하면, ‘교육체계‘의 바로 이와 같은 역사적 차원에서의 진화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교육학’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를 때 교육학이란, 곧 교육체계의 ‘자기표현’(Selbstdarstellung), ‘자아서술’(Selbstbeschreibung), ‘자기주제화’(Selbstthematisierung)의 내용이 체계적으로 정리, 기록된 결과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루만은 교육사 내지는 교육학사 속에서 교육학이 본격적으로 교육체계를 자기주제화의 차원에서 서술하기 시작한 움직임을 박애주의(Philanthropismus) 교육운동에서 찾고 있다. 루만에 따르면 박애주의 교육운동은 그 이전까지 가정에서 이루어지던 교육과 제로도서의 ‘수업’을 하나의 틀 속에 묶어 다루고자 하는 가운데 이른바 ‘학교교육학’(Schulpädagogik)이라고 하는 새로운 학문체계를 구성하였다. 이 때 교육은 ‘교육적 수업’(erziehender Unterricht)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즉, 박애주의자들의 파악에 따를 때 인간이란 ‘윤리성’(Sittlichkeit)에 도달해야 하는 존재인데, 이 도달의 과정은 ‘교육체계’를 통해서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박애주의자들의 교육학은 상당부분 ‘자아회귀적’인 기본적 요구를 충족시켜 주고 있다. 박애주의 운동 속에서는 윤리성의 도달이라고 하는 목적보다는 ‘교육의 과정 그 자체’가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이어 교육, 교육학의 역사 속에서 신인문주의(Neuhumanismus) 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 운동 속에서 교육학은 ‘과정’으로서의 교육을 중요시하기보다는 교육학의 학문으로서의 ‘이론적 기초’를 확고부동하게 세우는데 주력했다. 루만은 이와 같은 시도에 따라 신인문주의자들이 특히 칸트(Immanuel Kant)의 철학으로부터 ‘도덕’(Moral)의 개념을 도출하여 교육학의 기본 전제로 삼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결국 신인문주의적 차원에서 이해되는 교육학에 있어서는 인간의 되어감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차원에서의 교육활동 그 자체에 대한 ‘자아회귀적 성찰’보다는 교육학의 학문적 구조를 세우는 일이 일차적인 관심이 되었던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칸트 철학에 종속된 ‘규범적’ 학문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교육학의 역사에 대한 이와 같은 ‘의미구조적’(semantisch) 차원에서의 분석의 예들을 통해서 루만은 궁극적으로 교육학이 늘 고질적으로 겪고 있는 증후적 문제로서 학문으로서의 결핍성을 지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루만에 의하면 결국 교육학은 오늘날에도 학문적인 체계를 그 자체로서 ‘자아회귀적’으로 구성해내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도입해 들여오고 있다는 것이다. Luhmann, N.(1986), A.a.O., S.145.
이와 같은 지적에 따를 때 교육학은 그것이 대학 내에서 형식적으로는 독자적인 분과와 교수진을 갖추고 있고, 또한 이 분야 내에서 수없이 많은 문헌들이 출판되고 학술대회들이 열리고 있으나 결국 ‘철학, 심리학, 사회학으로부터 수입된 것들에 기초한’ 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bd., S.51.


나. ‘테크놀로지결여’의 문제
위에서 언급했듯이 루만에 의하면 모든 사회적 체계는 그것이 하나의 체계로서 ‘자생성'을 충분히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른 체계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가운데 그것의 체계합리성에서 비롯된 ’테크놀로지‘에 따라 꽉 짜여진 구조를 구성해야 한다. Ebd., S.118f.
루만에 따를 때 교육학은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의 ’테크놀로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테크놀로지결여‘의 문제는 교육 내지 교육학의 기본적인 학문적 전제 그 자체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예컨대 체계 속에서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는 자연과학적인 연구 속에서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다. 자연의 어떤 현상을 탐구하기 위한 자연과학적 실험의 과정에서 연구자는 특정한 가설에 따른 실험을 수행하는 가운데 실험의 어떤 단계가 실패할 경우 그 실험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은 바로 자연과학적 연구라고 하는 체계가 ‘자생성’을 갖추기 위하여 ‘체계합리성’ 차원에 터하여 마련하는 ‘테크놀로지’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나 교육학에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의 ‘테크놀로지’가 도저히 적용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루만에 의할 때 교육, 내지 교육학에서는 ‘인간’의 ‘유일회성’(Einmaligkeit)과 그에 터한 ‘존엄성’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자연과학의 분야에서는 가능한 것과 같은 ‘테크놀로지’를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교육학은 어떠한 실험에 있어서 실패할 경우 그 실험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Ebd., S.211.
이와 같은 문제는 예를 들어 ‘교원양성'의 차원에서도 발생하는 문제이다. 교육대학 내지는 사범대학에서 장차 교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학생들의 경우 그들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그들이 교육학적 차원에서의 능력, 즉 교사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의 여부, 그리고 그들의 교육적 활동이 궁극적으로 성공할 것인가의 여부는 그 교육이 끝난 이후 교육현장에서 실제로 교육활동을 벌이는 가운데 평생 교직생활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밝혀지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결여’의 문제는 또 다른 하나 교육, 교육학의 근본적인 전제와 관련된다. 그것은 바로 ‘학생’을 어떠한 존재로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결국 루만이 그의 ‘체계이론’ 속에서 ‘인간’, ‘개인’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의 문제와 결부된다. 루만에게 있어서 인간은 하나의 ‘체계’이다. 즉, 그 자체로서 ‘자생성’과 ‘자아회귀성’을 지니고 있는 가운데 스스로의 정체성과 통일성을 이루는 동시에, ‘의사소통’을 통해서 다른 체계들과 끊임없이 관련을 맺는 체계이다. 물론 체계로서의 인간은 일반적인 사회의 체계와는 달리 ‘심리적인 체계’(psychisches System)로 파악된다. 즉, 교육체계는 이와 같은 인간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독자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 하위체계인 셈이다. 결국 교육체계 속에서는 그러한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그 자체의 ‘체계합리성’에 따라 최대한 그 체계에 귀속되어 있는 ‘테크놀로지’를 구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체계가 그 체계의 테크놀로지를 가장 합리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일상적 기계’(Trivialmaschine)로 취급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루만이 칭하는 ‘일상적 기계’란 어떠한 정보가 입력(Input)된 결과가 그 체계에서 원하는 방식 그대로 출력(Output)되는 소규모의 하위체계를 의미한다. 결국 교육체계 속에서 그 체계가 과연 효율적으로 기능했는가 하는 여부는 그에 속한 하위체계들이 그 체계가 예상한 결과를 과연 실제로 출력했는가 하는 결과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러한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이 ‘일상적 기계’로 파악될 경우 가장 긍정적인 결과가 창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루만은 문제를 발견한다. 루만에 의할 때 인간이란 한 편으로는 바로 위에서 서술한 바대로 ‘자생적’인 존재로서, 사실상 ‘비일상적 기계’(Nichttrivialmaschine)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그것의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늘 ‘성찰’(Reflexion)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에 따를 때 인간은 그것의 체계로서의 본질적인 특성상 스스로에게 입력되는 정보들을 그대로 수용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에 따라 교육체계가 예상하는 바 그대로 출력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체계로서의 인간은 그에게 입력되는 정보를 늘 그에게 ‘의미있는’ 코드로서 각기 다르게 ‘이해’하며, 그에 따라 각자의 인간으로부터 출력되는 내용 또한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반면 교육체계라고 하는 특수한 하위체계의 차원에서는 늘 그것의 ‘체계합리성’에 따라 그 출력 내용을 통제할 필요가 있으므로 개개의 인간이라고 하는 체계가 출력한 내용을 ‘좋은/안 좋은‘(gut/schlecht) 결과라고 하는 틀에 비추어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교육체계 속에서 인간은 한 편으로는 여전히 ‘비일상적 기계’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필연적으로 ‘일상적 기계’로 취급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이다.

다. ‘기회균등’ 이념의 허구성
루만은 교육, 교육학의 역사 속에서 교육체계가 하위체계로서 그 자체의 자생성과 자아회귀성을 획득한 가장 큰 사건을 학교의 제도적 조직에서 보고 있다. Ebd., S.220.
잘 알려져 있듯이 서구에서는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학교교육의 측면에 국가가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전국적 규모의 교육제도가 성립되었다. 이 때 학교교육 속에서 한 국가에 귀속되어 있는 모든 어린이에게 법적인 차원에서 교육의 의무를 지움으로써 달성하고자 한 교육이념은 바로 ‘평등’(Gleichheit), 즉 ‘기회균등’의 이념이다. 즉, 한 국가 안에 대규모의 학교교육 제도를 세움으로써 그 나라에 국민으로 태어난 그 누구든지 국가가 베푸는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루만은 바로 이와 같은 교육제도의 국가적 차원에서의 구성과 그 과정에서 강조되기 시작한 ‘기회균등’의 이념이 실제로는 얼마나 허구인가를 밝혀내고 있다.
루만에 의하면 교육체계는 그것이 하나의 체계로서 ‘자생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일정하게 ‘선별'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이 때 교육체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선별은 다시금 전체 사회 체계가 자생적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하급 단위의 한 과정이다. 결국 하위 및 부분체계로서의 교육체계는 표면적으로 드러내건 아니건 간에 늘상 ‘선별’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교육체계에 있어서의 선별과정은 구체적으로는 각각의 개인들이 장차 사회에서 서로 다른 기능들을 수행하기 위해 ‘서로 다른’ 교육내용을 습득할 것을 전제로 한다. 반면 교육체계는 그것이 제도로서 구성되는 순간부터 그것이 추구하는 고유한 이념으로서 ‘기회균등’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에 따를 때 교육체계 속에서 교육받는 자들, 즉 학생에게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균등하게 주기 위해 학교는 학생들에게 ‘같은’ 교육내용을 가지고 교육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루만의 시각에서 볼 때 교육체계는 한 편으로는 ‘기회균등’의 이념을 강조하고 실제로 그에 따라 일반교육의 차원에서 교육을 수행함으로써 학생들에게 그 이념이 진정한 의미에서 잘 실현되고 있다는 ‘환상’(Illusion)을 가지게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암암리에 ‘선별’의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표면적으로 주장하는 ‘기회균등’의 이념을 스스로 위배하고 있다. 루만에 따를 때 학교는 실제로 아동 및 청소년이 “미래에 가지게 될 사회적인 지위를 결정지워주는 조정의 장소”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Ebd., S.253.
결국 교육체계는 그것이 체계로서의 ‘자생성’을 갖추기 위해 구조적으로 선별의 기능을 실제로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상정하고 있는 기회균등의 이념을 달성해야 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별기능을 제대로 이룰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교육체계는 그것의 프로그램으로서는 기회균등을 지향하지만, 그 내부에서 통용되는 코드는 결국 ‘좋은/안 좋은‘(gut/schlecht)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체계이론적인 표현으로 바꿔 서술하면, 교육체계에 있어서는 하나의 사회체계가 구성되는데 있어서 중요한 조직원리인 ‘프로그래밍’(Programmierung)의 차원과 ‘코드화’(Codierung)의 차원이 서로 일치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교육체계는 이와 같은 몇 가지 차원에서 볼 때 사회 내의 다른 하위체계, 즉 경제나 자연과학.. 등의 체계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하나의 체계로서 꽉 짜여진 조직성이나 효율성을 갖추기 힘든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체계이다.

2. 루만 시각에서 본 교육, 교육학의 중심개념들과 그를 둘러싼 논쟁

루만이 그의 동료인 쇼어와 함께 그의 ‘체계이론’에 입각하여 교육, 교육학에 제기한 문제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는 실제로 루만의 시각에서 교육의 문제를 바라볼 때 기존의 교육학이 일견 그의 신랄한 비판을 받을 수 있을 만한 근거를 스스로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루만이 문제로 삼는 주제들은 오늘날 우리가 매우 흔하게 대하는 익숙한 문제들이기 때문에 독창성이 떨어진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만 이전에 교육학의 영역에서 그가 이룬 것과 같은 영향력을 가지고 교육학 자체의 존재의미와 기존의 교육학이 추호의 의심 없이 내거는 교육이념들의 딜레마적 오류들을 이론적인 차원에서 그처럼 치밀하고 투명하게 해부해낸 이론이 있었는가를 돌이켜 볼 때 쉽게 긍정적인 답을 내릴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만이 교육체계, 그리고 교육학에 대해 가한 도전은 교육의 분야에 귀속감을 느끼고 있는 교육이론가들과 교육실천가들 모두에게 루만의 개념의 의미 그대로 진지하고도 깊은 ‘성찰’(Reflexion)의 기회를 마련한 셈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다시금 또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것은 과연 교육체계와 교육학, 특히 기존의 ‘일반교육학’이 루만이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느껴야 할 정도로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은 이 논문의 필자 뿐 아니라 이미 197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베너를 위시한 독일의 여러 교육학자들이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바로 이와 같은 시각에서 이 글에서는 기존의 교육, 교육학이 정초하고 있는 몇 가지 핵심개념들을 중심으로 하여 과연 루만 ‘체계이론’의 시각에서 볼 때 종래의 개념들이 어떻게 새롭게 해석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 이후 서구에서의 일반 교육학의 차원에서 볼 때의 교육이란 ‘계몽사상’에 내포되어 있는 ‘근대성’(Modernität) 개념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히 교육이란 이 때 근대적인 인간 내지는 ‘개인’(Individuum)의 개념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근대적인 인간이란 ‘이성능력’(Vernunft)을 바탕으로 하여 ‘자율성’(Autonomie) 내지는 ‘자기결정성’(Selbstbestimmung)을 지닌 철저히 ‘자유로운’ 존재이다. 이와 같은 인간 개념에 따를 때 교육이란 그 행위의 주체 내지는 대상이 ‘자아실현’(Selbstverwirklichung)의 차원에서 스스로에게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한껏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활동이며, 그 활동의 끝은 인간성의 완성으로서의 ‘윤리성’(Sittlichkeit)의 달성에 있다. 결국 종래의 파악에 따를 때 교육이란 인간의 ‘개별성’(Individualität)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주체중심적’(subjektorientiert)이며 ‘인본주의적’(humanistisch)인 활동이다. 이에 따를 때 교육에 있어서 ‘개인‘ 개념에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사회‘, 즉 ‘국가‘는 매우 제한적인 의미만을 가지게 된다. 특히 훔볼트의 신인문주의 교육사상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바처럼 근대적인 차원에서의 교육 개념에서 ‘인간’은 그 어떤 맥락에서든 ‘시민’(Bürger)에게 주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존재로서 자리하고 있다. 또한 교육은 그것의 궁극적인 도달점을 ‘윤리성‘에서 찾는다는 의미에서 매우 ‘도덕적’이면서 동시에 ‘목적론적’(teleologisch)인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루만의 ‘체계이론'이 내포하고 있는 바와 같은 여러 가지 이론적인 특징들에 터할 때 교육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핵심적인 개념들이 종전과 완전히 다르게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 자명하다. 이 때 가장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들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개념들이며 루만의 시각에서 볼 때 그 개념들이 어떻게 파악되었는지에 대한 서술이 아래에서 보다 상세하게 이루어진다. 첫째, ‘인간‘, ‘개인‘, ‘주체‘, ‘개별성‘의 개념에 대한 파악, 둘째, ‘도덕‘의 문제, 셋째, ‘진보‘의 문제가 그것이다.

가. ‘인간’, ‘개인’, ‘주체’, ‘개별성’
루만에게 있어서의 ‘인간’, ‘개인’, ‘주체’ 개념은 위에서도 암시되었듯이 하나의 ‘체계’라는 차원에서 이해된다. 물론 사회의 일반적인 체계와는 달리 인간은 ‘심리적 체계’로 정의된다.  그러나 루만에 의할 때 그것의 존재기반 내지는 하나의 체계로서의 전략 등의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의 기능은 다른 사회체계와 동일하게 파악된다. 즉, 체계로서의 ‘인간’, ‘개인’, ‘주체’는 ‘의사소통’을 통해 사회의 다른 하위체계와 끊임없이 관련을 맺는 동시에 일정하게 ‘자생성’과 ‘자아회귀성’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하위체계로부터 스스로를 끊임없이 ‘구분’하는 존재이다. 결국 체계로서의 인간은 철저히 사회체계 내에서의 하위체계로서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되는 존재이다. 이와 같은 파악에 따를 때 ‘인간’, ‘개인’, ‘주체’는 종래의 교육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 자체로서의 고유한 ‘자결성’이나 ‘자율성’을 지니고 있는 ‘유일회적’인 존재가 아니라 철저히 사회 내의 한 구성요소로서의 존재의미를 가지는 ‘사회적’ 존재이다.
또한 루만은 사회적 관계를 ‘행위’라고 하는 차원이 아닌 ‘의사소통’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은 ‘의사소통’의 상호작용적 관계 내지는 그 실현과정에 있어서 늘 ‘정보’를 일시적으로 혹은 장기간 보유하고 있는 담지자이다. Gripp-Hagelstange, H.(1987), Niklas Luhmann. Eine erkenntnistheoretische Einführung, München, S.13.
이 때 각자의 인간이 담지하고 있는 정보들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의 과정 속에서 각각의 체계에게 ‘의미있는’ 형태로 이해되고 전달되며, 그러는 가운데 변형된다. 결국 인간은 그가 뭔가 삶의 실천 속에서 작용해 들어갈 때 그 스스로의 내부에 확고부동하게 정초하고 있는 이념 내지는 본질적인 의미내용에 따라 ‘행위’하는 존재가 아니라 쉴새없이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 하나의 체계로서 보유하고 있는 ‘체계합리성’으로부터 비롯되는 ‘테크놀로지’에 근거하여 가장 합리적이며 효율적인, 즉 ‘의미있는’ 행동방식을 창출하는 존재이다.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루만에게 있어서의 ‘개인’, ‘인간’은 사실상 일종의 ‘기계’(Maschiene)이다. 물론 루만은 인간을 ‘자생적’이며 ‘자아회귀적’인 존재로서 파악하여 ‘비일상적 기계’(Nichttrivialmaschiene)라고 칭하고 있지만, 주어진 상황에 따라 필요할 경우 ‘일상적 기계’(Trivialmaschiene)로 취급될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나. ‘도덕’
루만의 ‘체계이론’은 그 자체로서는 사실상 ‘도덕’과 관련하여 거의 언급할만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루만은 그가 처음 파슨스의 체계이론을 받아들일 때부터 ‘규범’의 차원을 그의 이론적 구성에서 배제했으며, 바로 그런 맥락에서 루만의 이론은 ‘행위이론’이 아니라 ‘의사소통이론’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실제로 그 스스로도 시인하고 있듯이 그의 이론의 배후에는 흔히 옳다, 그르다의 판단 혹은 윤리적인 차원에서 볼 때 가치롭다, 아니다, 즉, 선과 악을 구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깔려있지 않으며, 더 나아가 의식적으로 그러한 기준들과 관련된 부분들을 철저히 공백으로 남겨둔다. Horster, D., A.a.O., S.106-110.
그는 그저 현재 우리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복잡한 사회, 즉 여러 가지 가치들이 다중심적으로 함께 공존하는 사회의 모습, 그리고 그러한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일정하게 질서를 유지하며 잘 돌아가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정확하게 분석, 설명해 내려고 했을 뿐 그 사회가 잘 구성되어 있는지, 혹은 잘못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든지 하는 식의 규범적인 서술을 목적으로 삼고 있지 않다. 바로 이런 점에서 루만은 근대 이후 ‘이성주의' 내지는 ‘도덕주의'의 방향에서 인간과 사회의 제 현상을 바라보려고 하는 다른 이론가들과 뚜렷이 구별될 수밖에 없다. 루만은 특히 이 부분에서 하버마스나 베크(Ulrich Beck),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원에 서 있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근대의 도덕주의를 부분적으로나마 계승하려고 하는 몇몇 이론가들로부터 신랄하게 비판받는다.
루만에게 있어서의 ‘도덕’은 무엇보다 ‘의미’(Sinn)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루만에 의할 때 ‘의미’란 결국 삶의 현실로서 우리 눈앞에 실제로 펼쳐져 있는 ‘복잡성’에 처하여 단지 그것을 감소(Reduktion)시키기 위한 생존전략이다. 그런 맥락에서 모든 체계는 사회의 ‘복잡성’으로부터 특별히 그 체계 자체에게 ‘의미있는’ 것들만을 ‘선별’하는 가운데 구성되는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볼 때 ‘도덕’이란 근대적인 계몽사상, 특히 칸트의 철학으로부터 도출되는 바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만한 인간 ‘행위의 최고규준’(Verhaltensmaximen)이 아니라 매우 상대주의적이며, 실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 ‘진보’
루만의 ‘체계이론’ 속에서 교육, 교육학과 관련하여 우리가 또 한 가지 끌어낼 수 있는 문제는 ‘진보’(Fortschritt)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근대 사상 속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전제들에 근거하여 인간의 역사를 바라볼 때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 ‘진보’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이성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존재이지만 미완성적인 형태로서 세상에 태어난다. 결국 인간은 교육과 도야를 통하여 ‘완성성’(Perfektibilität)을 향하여 차츰 형성되어 나가는 존재이다. 인류 전체의 역사 역시 마치 개인의 차원에서처럼 미래의 그 어느 시점에 완벽한 형태의 사회의 단계를 이루게 될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 최종적인 목표를 향해 점진적으로, 또한 일직선적으로(linear) 진보해 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때 진보의 과정은 늘 일정하게 ‘필연성’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므로 ‘목적론’(Teleologie)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그와 동시에 그 목적을 달성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늘 인간의 ‘행위’를 바탕으로 한 ‘실천’이 전제되므로 지극히 ‘인본주의적’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볼 때 더 나아가 인간의 역사 역시 개개의 인간들 모두를 통괄하는 인류 전체에 대한 교육 및 도야를 통해서 점차적으로 진보해 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서술한 내용에서 이미 암시했듯이 루만의 체계이론에서는 바로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은 의미에서의 ‘진보’가 아닌 ‘진화’(Evolution)의 개념을 발견하게 된다. 이 때 ‘진화’란 루만에게 있어서 결코 ‘엔텔레히’(Entelechie)로서의 변천과정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실제로 구성(Konstruktion)되는 것이다. 즉, 루만의 ‘진화’ 개념은 절대로 목적론적으로 파악될 수 없는 개념이다. 결국 ‘진화’ 개념이 자리하고 있는 한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한 ‘교육’ 및 ‘도야’라고 하는 실천이 지니는 중요성도 종전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교육 및 도야는 인간 본질의 어떤 절대적 가치에 근거하고 있는 불변하는 목표들에 따라 개개 인간의 개별성의 실현 및 발전을 위한 이성적 행위가 아니라, 단지 어떤 한 체계의 지속적인 자생적 ‘진화’를 위해 요구되는 바 최대한 효율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체계들을 구성해내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정적이며 테크놀로지적인 기능으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종래 서구의 교육학의 바탕을 이루는 세 가지 개념들을 중심으로 하여 루만의 체계이론 속에서 과연 그것들이 어떻게 파악되는지를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루만의 이론이 종래의 교육학, 특히 서구의 근대사상에 터한 교육학의 전반에 걸쳐 어떠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을지 추측할 수 있다.
무엇보다 독일의 도덕주의적 성격의 철학, 구체적으로는 칸트(Immanuel Kant)와 독일관념론에 터하여 이론을 구성하는 교육학자들, 페스탈로치(Johann H. Pestalozzi),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를 비롯해 우리가 인류의 교육사 속에서 소위 고전으로 여기고 있는 유명한 사상가들의 이론들 모두가 루만의 시각에서 볼 때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의 계열에 서 있는 베너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모두 공히 루만의 체계이론이 지니고 있는 문제, 특히 그의 이론을 교육학에 수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을 지적해 내고 있다.
첫째, 이들은 교육학은 모름지기 인간의 개념에 대한 인간학적(anthropologisch)이며 주체중심적(subjektorientiert)인 파악 없이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성격인데 루만의 이론은 바로 그러한 점에서 ‘인간’, ‘개인’, ‘주체’ 개념과 관련된 종래의 해석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Benner, D.(1979b), A.a.O.

둘째, 루만의 이론 속에서는 어차피 도덕개념이라고 하는 자체가 거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지만,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에 대한 루만의 서술에는 ‘내용’이 없다는 지적 또한 이루어지고 있다. Treml, A. K.(1981), A.a.O.
루만의 이론 속에서 인간은 ‘체계’이자 ‘기계’이고, 그렇게 볼 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에게 숨겨져 있는 인간으로서의 ‘내용’, 즉 ‘질’(Qualität)이 아니라 그가 지니고 있는 ‘기능’(Funkton)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 때 그 ‘기능’이 최대한 잘 그 원래의 작용을 수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철저히 기술적 차원에서 이해되는 ‘합리성’에 터하여 ‘효율성’이 극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루만에 의하면 인간은 그가 도덕적으로 어떠한 인격을 지녔든지 간에 사회 내에서의 한 구성요소로서의 기능성을 최대한 채울 때 인정받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터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늘 경험하고 관찰하는 인간의 삶 그 자체는 도저히 이와 같은 일면적인 시각에서만 볼 수 없는, 사실상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되는 다른 차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루만의 시각은 보다 깊고 포괄적인 시각에서 볼 때 역시 지나치게 한 쪽으로 치우쳐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은 차원에서 베너는 특히 하버마스의 논리를 빌어 그가 지나치게 ‘테크놀로지’의 차원을 강조하는 점은 이미 그 이전에 이루어졌던 ‘실증주의논쟁’(Positivismusstreit)에서 이미 비판되었던 바대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Benner, D.(1979a), A.a.O., S.371.

셋째, 인간의 역사를 ‘진보’, 즉 목적론적인 차원에서 파악하지 않고자 하는 루만의 시각은 우선은 상당히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흔히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사실상 절대적이며 일원적인 논리에 따라 전 인류가 지니고 있는 지극히 다채로운 문화와 가치들을 재단하고자 하는 ‘거대담론’은 더 이상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해낼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인간의 ‘행위’가 지니는 규범성, 즉 인간의 ‘이성능력’에 터하여 ‘자결성’과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실천으로서의 ‘행위’의 도덕적 차원을 함께 거부하는 것은 특히 교육, 교육학의 차원에서 볼 때 많은 문제점을 일으킬 수 있음을 예시한다. 아무리 다양하고, 다중심적인 시각들이 함께 공존하는 현대의 상태라고 해도 인간은 역시 각자가 처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현실 속에서 적어도 그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문화 속에서 ‘가치롭다’고 생각되는 기준들에 따라 ‘옳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데서 삶의 진정한 의미와 기쁨을  찾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은 자연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일차원적인 생물들이 단지 환경과 대적하는 가운데 ‘진화’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발전’을 꾀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Treml, A. K., A.a.O., S.435f.


IV. 맺는 말

일반적으로 루만을 제 2 세대 ‘계몽주의자’(Aufklärer)라고 부른다. 루만은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사회의 제 현상들을 매우 다각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가운데 냉정하며 비판적으로, 즉 매우 엄밀하게 검토하고 있는데, 그 때 결국 비판의 대상은 근대 이후 현실로서 나타난 ‘계몽’(Aufklärung) 그 자체의 내용이다. 이 때 그는 근대 이후의 ‘계몽’의 과정에서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스러운 현상들을 새로운 의미에서 계몽하는 일, 즉 ‘명확하게 밝혀내는 일’(Abklärung)을 그의 이론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루만은 이른바 종래의 ‘계몽’ 사상에서 당연한 것으로 이미 전제되어 있는 ‘도덕’의 개념, ‘진보’의 개념까지도 그것을 외부인의 시각에서 면밀하면서도 냉철하게 ‘관찰’(Beobachtung)하고 있다. 그러한 차원에서 볼 때 루만은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징들, 특히 어떤 한 가지의 이론적인 틀로서는 도저히 설명해낼 수 없는 ‘복잡성’을 그 누구보다도 ‘편견없이’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이론가로서의 탁월성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이와 같은 루만의 학자로서의 기본 태도는 전반적으로 볼 때 때로는 냉혹할 정도로 차가운 느낌을 준다. 특히 그가 인간을 ‘체계’로 파악하고 있는 점, 더 나아가 제한된 의미에서이지만 ‘기계’라고 칭하고 있는 점은 그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냉정함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루만의 이론 속에서 우리는 교육학도로서 어떠한 교훈 내지는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대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육의 현실은 실로 수많은 심각한 교육 문제들을 노정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에 직면해서 현재 우리는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는커녕 그 문제의 현상과 그 근원이 되는 원인들조차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다. 종래의 교육학이 제시하고 있는 이론들의 차원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분석하기에는 현재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교육현실 속에는 너무나도 다양하며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가치체계들과 상황적 원인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볼 때 루만의 ‘체계이론’이 우리에게 그러한 현상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유용한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루만의 이론은 그 자체로서 문제점을 많이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을 제대로 적용할 경우 적어도 우리의 교육현실이 전체 사회체계와의 관련성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볼 때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 복잡성의 실체를 투시해볼 수 있을 만한 이론적인 틀을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특히 우리의 교육현실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차원에서 루만의 ‘체계이론’을 수용할 경우,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교육현실의 차원에서 과연 한국에서의 교육체계가 과연 어떠한 ‘의미구조’(Semantik)의 역사를 거쳐왔는지 역사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서술하는 일을 과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에서의 교육학이 현재 도달해 있는 학문으로서의 엄밀성 내지는 자율성의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도록 이제까지 이루어져 온 우리의 교육학적 서술들 전반을 루만 ‘체계이론’의 개념틀을 빌어 비판적인 시각에서 검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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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temtheorie' von N. Luhmann und ihr Rezeptionsproblem im Erziehungssystem


Choi, Jai-jeong

Die 'Systemtheorie', die in dieser Abhandlung den Gegenstand ausmacht, ist eine Denkungsart, die seit den 60er, aber hauptsächlich 70er Jahren von Niklas Luhmann vertreten wurde und vom Geburt an einen großen Wirkungskreis gebildet hat und mittlerweile in der wissenschaftlichen Bereiche den Stellenwert als einer sog. 'Supertheorie' genießt.
N. Luhmann schrieb mit seinem Kollegen Karl-Eberhard Schorr 1979 sein pädagogisches Opus Magnum . Der unveränderte, nur mit einem zusätzlichen Nachwort versehene Nachdruck des Buches 1988 zeigt, daß Luhmann im wesentlichen seine Analyse des Erziehungssystems bis zu diesem Zeitpunkt zutreffend betrachtete. Die Ansicht, die er in seiner Schriften vertreten hatte, führte sie damals zur heftigen Auseinandersetzung mit den Erziehungswissenschaftlern öffentlich in und  auch während einer Tagung. Die Konfrontation der Pädagogik bzw. Erziehungswissenschaft mit der Systemtheorie markiert im positivsten Sinne einen weiteren Schritt auf dem Weg von der 'Allgemeine Pädagogik' zur Sozialwissenschaft. Im großen und ganzen wurde  Luhmanns und Schorrs Position jedoch im erziehungswissenschaftlichen Gebiet andererseits als eine 'freche Provokation' ausgelegt, was darüberhinaus Pädagogik als ein wissenschaftliches Fachgebiet sogar zur schweren Identitätskrise führte.
In dieser Abhandlung ging es um die eben genannten Auseinandersetzungen zwischen N. Luhmann und Wissenschaftlern im Bereich der Erziehung und Pädagogik und die Wirkungsgeschichte Lumannscher Systemtheorie auf dieselben Bereich. Um auf diese Thematik näher einzugehen, wurden drei Gesichtspunkte wie folgt behandelt.
Erstens, wurden der Grundgedanke von Luhmans Systemtheorie dargestellt, indem hauptsächlich die grundlegende Begriffe in seiner Theorie behandelt werden.
Zweitens, wurde das Verhältnis von 'Systemtheorie' und Erziehungswissenschaft in zweierlei Hinsicht geklärt. Einerseits wurden die Kritikpunkte, wo sich Luhmann hinsichtlich der 'Defizite' in der Erziehungswissenschaft befunden hatten, behandelt und ihre Auffassung über Erziehung als ein System in der Gesellschaft, die theoretische Stellungnahme der Erziehungswissenschaft in seiner ganzen Gedanken. Andererseits wurde sich mit der Rezeptionsgeschichte von seiten der Pädagogen befaßt.
Zum Schluß wurden jene Einschränkungen und Mängeln geklärt und kritisiert, die Luhmannsche Systemtheorie unvermeidlich in sich enthalten muß und besonders dann gefährlich werden kann, wenn man sie in die Erziehungswissenschaft, wo es gerade um Bildung und Erziehung des Menschenwesens geht, importieren s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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