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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2/13 (20:23) from 80.139.152.201' of 80.139.152.201' Article Number :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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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익 - 황우석 대담 : 생명복제 무한경쟁 옳은가








편집 2004.01.06(화) 10:33

 
 생명복제 무한경쟁 옳은가 (인터넷 전문)




△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


 

"지금까지 진화 방향 인간이 끌고가진 않았다"

과학의 윤리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유전자공학과 생명 복제 기술이 ‘복사판 인간’을 만들어내는 수준까지 도달하면서 이 문제는 전문가들 사이의 논의 수준을 넘어섰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생명을 조작하는 게 과연 윤리적인가, 이것이 인간을 포함한 자연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생명 조작 기술의 발달을 그냥 놔두어도 좋은 것인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 위해 ‘테마대담’에 두 과학자를 초대했다. 한 사람은 오래전부터 과학철학과 생태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온생명’이라는 관점에서 자연을 볼 것을 주장하는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다. 또 한 사람은 ‘광우병 면역 소’ ‘장기이식용 미니 돼지’ 등 유전자 조작, 생명복제 기술을 이용한 첨단 연구를 벌이고 있는 서울대 수의과대학 황우석 교수다. 과학자 간 공개 토론이 거의 없는 우리 현실에서 어렵사리 성사된 두 사람의 대담은 한국 과학계 전반의 고민과 과제를 드러내준다.


두 사람의 대담은 황 교수가 지난해 12월 공개한 두 가지 연구, 곧 광우병 면역 소와 장기이식용 미니 돼지 연구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19면 상자기사 참고) 설명이 끝나자 장 교수는 현장 연구자로서 황 교수가 실제로 느끼는 고민, 문제점에 대한 진단에서부터 말을 풀어가자고 했다.

장회익=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은 기술적인 문제보다 원론적인 문제를 이야기하죠. 아무래도 작업을 직접 하시니까 이런 기술 문제가 어떤 전망을 가지는지, 동시에 그런 것이 제대로 수행되어 나갈 때 예상되는 문제, 또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 등을 다른 사람보다 깊이 생각하셨을 테니 먼저 의견을 주시면 듣고 함께 얘기를 나누기로 하지요.

황우석=이 실험에 있어서 몇 가지 논의점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런 연구는 소위 유전자 조작이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동시에 생명복제라는 뜨거운 감자가 같이 섞입니다. 지금 전세계에서 논의되는 유전자 조작에 생명복제가 섞이니까 더 뜨거울 수밖에 없죠. 첫째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이런 과정을 통해 산출된 생산물이 인간에게 이용될 수 있도록 안전성이 확보될 수 있을지, 이 점이 큰 문제입니다. 광우병 저항 소는 유전자조작 개체라 안전성을 반드시 검토해야 합니다. 둘째 몸 안의 성분을 과발현하거나 제거시킨 개체가 생태계에 노출됐을 때 기존 생태계의 평형이 깨질 가능성은 없겠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동시에 수천년 동안 진행되어온 진화의 방향을 인위적으로 일부를 조정하는 것이 당위성을 갖느냐, 사회적 필요라는 당위성을 갖느냐가 문제일 것입니다. 기술을 적용시킨 식품을 주식으로 삼는 것에 대한 철학적 문제가 뒤따를 것입니다. 돼지만 하더라도, 사람의 장기가 아닌 동물의 부속물 일부를 사람 몸에 넣고 과연 살아야 할 것인지, 그렇게 하면서까지 사람의 목숨을 연장시킬 가치가 있는지 하는 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저희도 고민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장=아주 정확히 문제를 짚고 있는 것 같아요. 거기에 대해서 잠정적이겠지만 답변을 갖고 계신지요.

황=저희들은 모범답안이 없습니다. 다만 이것을 대신할 수 있는 과학적 대안이 있느냐, 우리 앞에 놓인 여러 가지 의문과 고민거리를 우회할 수 있고 동시에 부딪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과학적 대안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험하는 입장에선 이것을 능가할 대안이 지금으로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더 좋은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이거라도 일단 해서 적용 상태나 가능성이나 범위 등을 정하자는 것이지요. 이런 점은 과학도 혼자서만 정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과학철학, 윤리, 법률, 종교 등 사회적 측면에서 논의를 거쳐 해답을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과학도들은 이 해답을 구하는 과정 중에 과학적 내용에 관한 질문이 나왔을 때 답변해주는 수준에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사회가 도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현대 문명의 흐름으로 봤을 때, 과학이 지나치게 기술 위주로 가고 있지 않은가 걱정됩니다. 지금 활용 가능성 높은 기술들을 많이 발견하고 있는데, 우리가 과연 그런 걸 활용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하는 점에 대한 질문이 깊이 고려되고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한 과학의 바탕은 아직 약하지 않으냐 하는 게 가장 걱정되는 점입니다. 그런데, 많은 부분은 과학의 문제거든요. 좀더 들어가면 철학의 문제겠지만. 일단 과학의 문제로 봤을 때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답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내가 봤을 때 기술과 이러한 진단 사이에 균형이 깨진다는 겁니다. 기술은 좀 앞서 있고, 그것이 줄 수 있는 영향이라든가, 문제를 파악하는 기본 능력 면에선 과학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걱정입니다. 그럴 때에 염려한 대로 여러 미지수들이 있고, 그 중에서 한두가지라도 잘못 될 때 무슨 결과가 나타날지 걱정스럽다는 거지요. 원론적으로 볼 때,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다는 건 나쁠 게 없어요. 쓰느냐 아니냐 할 때 그때부터 문제가 되지만, 일단 저는 그 결과에 대한 지식도 갖춰야 할거라고 봅니다. 문제는 그것이 야기할 수 있는 현상에 대한 신뢰할 만한 과학, 이것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그런 쪽에 대해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느냐, 이에 대한 반성이 우선 따릅니다. 그 다음에 철학적인 문제, 윤리적인 문제와도 연결되는데, 지금 이런 상황에 대한 철학적인, 윤리적인 판단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기존의 우리가 갖고 있는 철학적 이해나 윤리적 기준을 넘어서는 뭔가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그것이 어떻게 넘어서야 하느냐 하면, 이제는 좀더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철학적인 사유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까지 과학이 주로 개별 사실에 대한 이해, 그리고 사실을 통한 활용가능성에 치중했는데, 과학이라 하는 것은 자연이면 자연에 대해 충분히 그리고 폭넓게 알자는 거죠. 앎은 통합적인 시야를 열어주는 측면이 있는 거고, 그런 측면이 현대과학의 발전상황과 연결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걸 보여주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철학과 윤리가 나오고 그래서 의미 있는 결론으로 가는, 이 과정이 많이 뒤처져 있습니다. 기술을 탐구하는 선생님은 상당히 앞서가고 있는데, 후자에 관심 갖고 있는 사람들은 뒤처져 있지 않느냐는 걱정이 들어요. 그런데 우선 그런 것에 대한 인식이 안 되어있다는 것, 일반대중들의 과학인식은 물론이고 과학자, 과학을 포함한 일반지성 층에서도 제가 말한 그런 쪽의 중요성, 가능성에 대한 인식 자체가 떨어지고,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가 적고, 응당 있어야 할 진전도 안보이지 않느냐, 그게 걱정되는 거에요. 그래서 앞서가고 있는 쪽이 잠시 멈춰 서서 이쪽의 진전상황을 봐가면서 보조를 맞추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거든요. 이런 점에서 선생님처럼 일선에 계신 분들도 이 연구를 해놨을 때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활용할 만한 지적인, 사회적인 토대가 연약할 때 잘못될 가능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같이 고민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황 교수는 “과학계의 대선배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리로 여긴다”며 ‘공손한’ 자세로 대담에 임했지만, 이 대목에서는 처지에 따른 차이를 드러냈다. 한국의 과학기술 진보를 위해 연구를 늦추는 건 곤란하다는 주장을 보이자, 장 교수는 “오늘은 이해가 상충되어도 괜찮은 자리”라며 이젠 세계를 좀더 넓은 시각으로 볼 것을 주문했다.

황=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좀 달리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장=오늘은 이해가 상충되어도 괜찮은 자립니다.

황=실제 현미경을 보면서 달려가는 현장의 자연과학은 계속 속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과학자들은 이 기술이 가져올 사회적 영향이나 기술 자체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철학이나 과학사회학과 같은 분야가 자연과학과 함께 맞춰 나가야 하겠지요. 국가가 정책 의지를 갖고 과학철학, 과학사회학 등 관련 학문을 진작시키는 노력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을 맡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직접 하기도 했습니다. 관심의 불균형에 의해서 과학의 방향과 사회적 인식이 왜곡될 우려가 있다는 겁니다. 대안으로는 과학철학과 과학사회학 하는 분들과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정책적으로 강제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과학의 양대 축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노력을 해야한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이것이 미약하고 출발선에서 머뭇거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험과 연구를 잠깐 중지해야 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못합니다. 과학기술은 피를 말리는 경쟁입니다. 저는 잠을 몇 시간 못 자는 생활을 10년 넘게 계속하는데도, 외국의 물량공세에 따라갈 재간이 없습니다. 온 힘으로 달려도 같은 선에 서기가 벅찬데, 중단하자는 건 좀 곤란합니다. 우리가 쉴 때에도 외국은 치고 나가지요. 6개월이 뒤떨어지면 영원히 못 따라갑니다. 대안으로 과학사회학 분야에 정책적 애정을 집중시켜 단시간내에 출발할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시켜주는 노력을 하는 게 국가 전체적으로는 옳지 않나 생각합니다.

장=그런데 거기서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황 선생님은 잠깐 멈칫하는 동안에 외국이 치고 나간다고 하셨는데, 외국에서 보면 한국에서 치고 나간다고 생각할 거 아니겠어요. 저도 우리가 나가는 거야 좋지만, 밖에서 보면 한국이 지금까지 꿈틀거리고 있다가 … 농담으로 받으셔도 좋고 … 지금까지 뒤처져 왔는데 이제는 앞서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린 뒤처져 있다는 강박감이라고 할까 조급함을 체질적으로 가지고 있죠. 그 점에서 우리는 좀더 성숙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이라는 걸로 규정할 것이 아니라 인류·세계의 일원이라는 것으로 나가야될 것 같아요. 더구나 그 분야에서 앞선 사람은 세계의 학자죠. 한국과 바깥 세계의 경쟁관계로 볼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인류를 놓고 봐야 한다는 거죠. 과학계는 초를 다투는 경쟁을 하는데, 과연 인류전체 역사에서 큰 뜻을 가지느냐를, 지적인 불균형을 유지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냐를 생각해야 될 것 같습니다. 역사적 상황, 인류 문명사적 상황에서 보면, 최근까지는 원하는 것은 분명히 있는데 그걸 해낼 능력이 없어 고민해 왔습니다. 조금이라도 능력을 키우면 중요한 성취라고 생각했죠. 황 교수님의 업적이 그런 선에 서 있는데 … 이제는 능력은 가지고 있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불분명한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해야하느냐 아니냐가 더 어려운 문제가 됩니다. 상황이 바뀌고 있는 겁니다. 이런 때에, 그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같이 나가자는 황 교수님의 생각은 고맙고 중요한 일인데 … 과연 그 정도가지고 되겠느냐 하는 거죠. 연구자뿐이 아니라 대부분의 국민·지식인·정책입안자도 기존 문명의 흐름 위에 서 있고, 새로 닥치는 것에 대한 목표설정 문제에 대한 관심은 적어요. 바로 여기에 우리가 고민을 해서 답을 찾아야 할 문제가 있죠. 황 교수님은 제일 앞에 서 있으니까 또 다른 책임이 있습니다. 물론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만약 가져가는 것이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적절하지 않은 일이라면, 그런데도 최일선의 분이 그걸 가져가기로 선택한다면, 그에 대해서는 역사적 책임이 있는 겁니다. 물론 “엄청난 경쟁에 휩싸여 있는데 어떻게 뻔히 갈 수 있는 것을 놓고 다른 쪽으로 바꾸느냐”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지요. 모든 과학자가 압력을 받고 있는 줄 압니다.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앞으로만 가야하거든요. 그러나 조금 더 적극적으로 과학자가 어떻게 운신해야 하는지, 과학자가 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는지도 고민해야 합니다.

황=선생님 말씀 중에 아주 귀중한 부분이, 한번 들어서면 앞으로 갈 수밖에 없는 외통수라는 말씀입니다. 이 길이 과연 옳으냐는 판단보다 전력질주라는 관성이라고 할까요. 제가 평소에도 하는 말인데,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판단은 과학자들이 스스로 판단하기에는 어렵습니다. 거기에 집착하다가는 앞으로 나가기 어렵습니다. 고민을 하면서 실험에 열중하는 과학자가 진정한 과학자로 평가되는 날이 오겠지요. 지금도 이미 늦었는지 모릅니다. 저희 연구팀은 박사과정까지 끝나면 다른 대학의 현업으로 가거나, 절반은 외국에 나가있습니다. 10여명이 나가있는데, 그들을 통해서 선진 연구그룹의 잠재력과 현주소를 지켜볼 기회를 얻게 됩니다. 지금 이 분야는 다른 사람이 머뭇거려서 저희가 앞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적지 않는 연구팀들이 매진하고 있습니다. 철학적 고민은 그네들도 저처럼 부족할 겁니다. 그들이 달려가고 있는데, 지혜를 얻기 위해 일주일에 하루씩 고민의 시간을 갖는다면 선두그룹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고민이지요. 일단 기술을 개발해 놓고 보자. 국립대학 소속이니까 산업재산권을 출원하면 국가 소속입니다. “권리까지는 선취를 해야겠다”, “다음 단계를 어떻게 할지는 그 때 가서 사회적 중지를 모으면 되는 게 아닌가”, 이것이 저희의 한계입니다. 우주관·역사관까지 실험현장에 투영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총론에서는 인정하지만, 21세기에도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이겠죠. 우리가 개발한 자산과 기술이 뒤처지면 3등 국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장=충분히 이해가 되고 거기서 운신의 폭이 대단히 좁은 걸 압니다. 현재 그쪽에서 예를 들어 황 교수님은 거의 1인 플레이어 정도로 활동하고 계시니까 이것저것 생각할 경황이 없겠지요. 그렇지만 한국 학계에서 그 분야에 비슷한 연구를 하는 이들이 10명, 20명이 된다면, 제가 말한 고민도 진지하게 하는 게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전체적으로는 지장을 받지 않으면서 다른 쪽의 생각도 해볼 수 있을 텐데, 현재는 혼자니까 힘들지요. 이쪽 저쪽 모두를 황 교수님이 혼자 하기에는 벅차겠지요. 그러나 모두가 한 방향으로만 뛰는 절박감을 풀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본인이 못하더라도 이런 쪽의 배려를 해주면 큰 도움이 되겠다 싶습니다.


과학에 대해 반성하는 과학의 중요성에 대해선 두 사람이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지만 대화가 진화 등 다른 문제로 넘어가면서 뜻밖의 지점에서 차이가 나타났다. 장 교수는 과학기술 발전의 미래 문제는 과학자 또는 과학철학자들이 연구를 벌여 시민사회에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황 교수는 기술의 진전 방향에 대한 시민사회의 합의를 중시했다.

장=이번에는 인간이 진화의 방향에 개입하는 문제를 논의해 보면 하는데요. 진화 과정에 인간이 개입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황=제가 그 분야에 대한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고 상식도 궁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억지로 말씀드린다면 진화는 그 시대, 그 환경에 맞게 자연과 어울리기 위해서, 생물이 적응하는 단계로 이해합니다. 진화의 방향을 절대선의 시각에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환경과 시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열성으로 구부러지기도 하고 우성으로 뻗어 나갈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진화는 자연과 환경에만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도 조정되는 시점이 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유전자를 전환시키는 것은 자연적 진화와는 별개의 길이지요. 인위적으로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것도 자연의 한 요소로 생각하면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도록 안내하는 게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인위적인 것은 안 된다는 인식이 우세하면 기술을 개발하되 적용은 못하겠지요. 시민의 합의에 의해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분야에 유전자를 적용해서 해결의 단초가 열릴 수 있다면 이것도 큰 틀에서 진화의 한 요소로 취급할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을 해봅니다.

장=이해는 되는데 조금 더 생각을 보태봐야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진화는 의식적인 존재가 방향을 잡아가지는 않았죠. 하지만 이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나와서 의식적으로 방향을 끌고 갈 가능성이 생겼고, 또 어떤 조작 기술을 통해서 자연 상태에서는 백만년에 한번 일어날 것을 몇 시간 만에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는데, 이를 어떻게 볼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전체 진화과정은 전체가 하나의 큰 생명이란 의미에서 그 나름의 생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요, 생태계가 조화와 균형을 유지해가면서 말이죠. 저는 이를 ‘온생명’이라는 개념으로 묶어서 보고 있는데요. 온생명은 긴 진화의 과정을 통해 그것의 생리가 형성됐고 이에 맞추어 생존하고 또 당연히 변화해나가죠. 문제는 변화의 시간 규모입니다. 변화가 닥칠 때 생리적으로 무리 없이 적응해 나갈 변화가 있고 너무 급격해서 도저히 적응해낼 수 없는 변화가 있거든요. 지금까지의 진화는 생리적으로 적응해낼 규모와 속도로 이루어져 왔는데, 지금은 엄청나게 급속한 변화가 가해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럴 때에 우리 생태계가 그 생리에 무리 없이 적응하며 생존을 유지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절박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금까지도 급격한 변화가 있었지만 이것들은 대개 사람으로 치자면 외상에 해당하는 것들이 많았어요. 소행성과의 충돌 같은 것이 그것인데, 이 때 큰 변화가 오고 상당한 규모의 멸종이 나타났죠. 하지만 그 안에 있는 특정 생물종이 의식적으로 변화를 유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인간도 자연이고 생태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니까 괜찮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어떤 선택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 없이 인간이 편리한 방식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겁니다. 생태계 자체를 한눈에 보면서 이것이 위험하겠다, 아니다 하는 판단 능력이 갖추어지기 전에 인간 중심으로 끌고 나가는 것은 상당한 위험성과 함께 책임이 따르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몇십억년 간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50억년을 더 살아갈 여건을 지니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조금만 잘못하면 이 모두에 엄청난 재앙을 뿌리게 된다는 것이지요. 선택 방향에 대한 확고한 기준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많은 사람의 동의와 역사적 흐름에 맡기자는 건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닌가 합니다.

황=큰 틀에서 봤을 때, 저도 인위적인 변화 추구가 총체적 인식 없이 인간 위주의 판단을 따르면 위험하다는 걸 인정합니다.

장=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민의 합의에 맞춰서 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저는 그에 앞서서 학문적인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이런 연구가 이루어졌을 때 이를 일반 시민들에게 알려주고 새로 판단하게 해야 한다는 거죠. 일반 시민들은 새로운 상황을 알게되기까지는 기존의 문화에 맞추어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 기존의 문화라는 것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바꾸어나가는 것을 발전이라 보는 것이고 사람들은 이에 딸려가게 마련인데 그건 위험하거든요. 그래서 먼저 전문적인, 그리고 통합 학문적인 시각에서 보고, 이것이 다시 시민에 의해 걸러지고, 정책 입안자와 연결되면서 조심스럽게 진행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한가지는 생명과학의 발전에 따라서 생명에 대한 관점, 즉 생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생명에 대해 고정된 관념을 지녀왔지요. 그런데 생명에 대해서, 우선 기술적으로 변화가 나타나고, 현대과학에 의한 심층적 이해가 가능해지면서 생명을 달리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났어요. 분자생물학적 이해, 생태적 이해 등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관이 달라지게 됐지요. 물론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죠. 그 가운데 하나가, 인간이라는 것과 인간 아닌 생물체 사이에 어떤 절대적인 격차가 있는 것이냐, 아니면 연속적인 것이냐 하는 것이고, 이것은 다시 가치문제와 관련하여 엄청난 함의를 지니게 되는데, 일선의 과학자로서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신가요?

황=처음 시험관 송아지가 막 분만 예비증후가 나타날 때, 대리모에서 나오는 녀석은 무엇일까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소의 모습을 띄었을까, 암소일까 등등. 다리가 나오는 거 보니까 소에요, 머리가 나오는 것까지 보니까 틀림없이 소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말하자면 공부를 하면서 갖게 되는 과학이라는 이름의 호기심, 그리고 짜릿한 전율이 아닐까요. 단순한 시험관 소였는데도 그랬습니다. 복제라는 부분에서는 생명이라는 기존의 정의가 원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생식세포의 결합이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불과 10여년 전이었는데, 생식세포는 없어도 그만일 수 있게 되어, 상당히 혼란스럽죠. 이것이 바로 과학이 가는 길이 아닐까요. 2000년대 초반인 현재는 체세포를 이용한 기술이 논란의 대상이 될지 모르지만, 지금부터 15년, 20년 뒤에는 인공수정과 비슷한 개념으로 바뀌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인공수정이 처음 등장했을 때 심한 논란이 일었다고 합니다.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것인지, 신이 창조한 정자와 난자의 자연스런 만남 없이 인위적으로 세포를 빼서 시험관에서 수정시켜 여성의 몸 속에 넣어서 인간을 탄생시킨다는 것에 대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이었고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체세포 복제가 나오니까 인공수정을 논하는 단계가 지났습니다. 지금은 체세포 복제가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이고 재앙을 불러올지도 모를 인간의 교만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과학이 발전해 맞춤 생명체가 나오는 때가 되면 체세포 복제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저도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 과연 이것이 생명체의 탄생이라는 길과 병존할 수 없는 행위인가, 아니면 큰 틀에서 신이 정해준 범위 안에서 이뤄지는 행위로 봐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신의 울타리를 벗어난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 저도 혼란스럽습니다.


이 부분에서 장 교수는 평소 주장하던 온생명 개념을 제시하면서 보통 생명을 중시하는 이들과 달리 한 개별적 생명을 너무 강조하는 건 도리어 생명중시 사상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장=그건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과학의 이해 차원에서는, 생태계의 정상적인 형성 차원에서 보면, 오랜 기간의 진화적 시행착오를 거쳐서 나온 건데, 그것과 다른 형식을 집어넣어서 변화시키는 것은 아주 절실한 것이 아닌 한 온생명의 생리를 거스르는 일이라고 보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생명이란 뭔가, 특히 개체 생명을 모두 같은 것으로 보는데, 밑으로 내려가면 어디까지가 생명이고 어디는 아닌지 경계가 흐려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개체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념을 관습적으로 지녀왔는데, 이제는 이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개체 생명만을 생명으로 보고 존중하는 생명관은 이제, 과학적인 이해단계에서도 그렇고 기술적으로도 그렇고. 의의를 상실해간다고 봅니다. 그럼 생명이 없나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체 생명을 중요한 것으로 보고, 개체 생명은 개체 생명으로서 그 역할이나 위치에 맞게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봐요. 그것이 특히 필요한 것은 이렇습니다. 모든 기술적 조작을 합리화하는 주장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한다”고 하죠. 말하자면 가치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개체 생명이고, 그 개체 생명 중에서도 인간의 개체 생명을 신성시하는데, 이것이 지나친 것은 아닌가? 생명의 세계에서 노화가 되면 소멸하고 그 뒤에 새 생명이 나오고, 이런 것을 깰 수는 없거든요.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더라도 몇 백년을 연장시키지는 못하죠. 그냥 불과 몇 년 연장하는 건데, 그렇게 연장해서 얻게된 삶이란 사실 정상적인 삶이 못되는 경우도 있어요. “이것이 생명이다, 생명이니까 함부로 할 수 없다” 이런 생각 때문에 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래서 생명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바꾸는데 함부로 바꾸는 게 아니고 자연질서 속에서 이해한 기준으로 말이죠. 특히 사람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의 문제, 곧 불연속인지 연속인지, 하는 것들 말이지요. 근데 진화적으로 보면 연속선상에 있고, 또는 개체가 출발할 때 하나의 세포에서 출발하는데, 하나 또는 몇 개의 세포를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비롯해 문제들이 산적해 있죠. 그런 문제에 대해서도 좀더 학문적으로 정리를 해서 어디에 어떤 가치를 부여해야겠다 하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또 이것이 공유되어야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판단하고 방향을 설정해 나갈 때 기준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 모든 것을 황 선생님에게 하라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함께 살펴나가야 한다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황=옳은 지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저희 연구결과가 언론에 보도됐을 때 팩스 한장이 왔습니다. 자기 전화번호, 이메일 등 연락처를 명시한 채 동물을 동물답게 살도록 놔두라는 글을 보내주신 분이 있습니다. 저희도 고민을 해봅니다. 각각의 생명은 존재 의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벼는 사람에게 쌀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존재하고, 그래서 보호하고 재배하는 게 아닙니까? 소는 우유와 고기를 위해, 돼지는 고기를 위해 … 돼지 그 자체를 위해 사람의 정성과 그 많은 비용을 들여서 사육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자연을 볼 때 누가 어느 안목으로 보느냐에 따라 존재 의의가 규정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인간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며, 자연적 측면에서 보면 옳지 않을 수도 있죠. 우유가 70㎘ 가량 생산되는 젖소가 있습니다. 이는 부자연의 극치입니다. 소는 송아지를 기를 때만 우유를 분비하는 게 당연한데, 인위적으로 개량이라는, 소로서는 아주 고통스런 길을 걷습니다. 그것이 산업으로 보호받으며 그 상품이 인간의 건강 수명을 연장하는 데 기여하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개체를 만드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 쪽에서 보면 이점이 소나 돼지의 존재 이유이지요, 물론 아주 오만한 판단입니다. 광우병에 걸리지 않는 소, 돼지의 간과 콩팥으로 사람을 살리는 데 그 동물의 권리는 없는가, 인위적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다른 생물이 희생되는 게 괜찮은가, 자연 법칙과 자연의 눈높이로 봤을 때 옳을까 하는 의문들입니다. “너희들은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자리매김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미안함을 가져봅니다.

장=생명은 동등하다는 입장에서 보면 그렇죠. 이건 생명관과 관계되는데. 그러니까 사람의 생명은 너희와 다르다고 보면 해소되는 문제죠. 그런데 지금 이 전체가 함께 살아가는 한 몸이다, 그 몸이 건강해야 한다는 겁니다. 근데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인간이 나머지 생태계 부분을 과잉 조작한 측면이 있다는 문제를 이제는 심각하게 봐야 합니다. 지구 전체가 여러 동물들이 협동해가면서 생태계를 유지하고 살아온 터전인데, 너무 모든 것을 인간 생명 중심으로 봤다는 거죠. 물론 온생명에 인간이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온생명의 건강을 우위에 놓고 나머지는 그것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그걸 생각하지 않고 인간 중심으로 놓고 단일 판단기준으로 봤죠. 인간의 기술적 능력이 별로 크지 않을 때는 이것이 별 문제가 없었지만 인간의 기술적 능력이 엄청난 규모로 커지면서 이런 생각이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되지요. 지금까지는 자연을 이용 가능한 소재로 보고, 과학이라는 것이 나와서 이용할 수 있다는 걸 보이고 이용함으로써 우리가 풍요롭게 되었다고 보았죠. 새로운 것을 했다고 하면 “중요한 성취이고 인류를 위해 커다란 공헌이다” 이렇게 보았고, 거기다가 이것이 금전적으로 환산해볼 때도 엄청난 가치를 지니니까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문제는 장기적인 생존으로 볼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는 것인데, 이 점에 대해 상당히 걱정스러운 신호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구가 한계가 있고 생태계가 한계가 있는데, 지금은 한계를 넘어가는 단계에까지 온 것인데, 대안은 없어요. 다행스럽다고 봐야 하는데, 요즘은 상당히 비판적인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런 목소리들이 “오래 전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과학이 이제는 악이다”, 심지어는 “머리 굴리지 말고 감성에 맡기자”는 반작용들이 나오고 있어요. 그래서 양쪽의 대화가 안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자들이 문제를 정면에서 붙잡고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위험이 있고, 어떤 대안이 있는가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거기서 나온 의견을 가지고 양쪽을 정리해주는 일이 시급하다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이런 작업이 너무 약했죠. 과학자의 99%는 개발 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그런 쪽에 관심이 없단 말이에요. 이것은 1차적으로 과학자 사회가 책임을 가져야 하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한 어떤 선도적인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못했습니다. 쉽지 않지만 해야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황=그 측면에서 선생님과 의견이 일치합니다. 근본적인 요인을 규명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데 기울이는 에너지보다는 과학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손쉬운 방법을 취하는 것이 지금의 과학인 것이 사실이죠. 올바른 방향은 원인을 차단하는 것이겠지만 효율성을 중시하다보니까 원인을 규명해서 차단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효과도 담보가 안되니까, 손쉬운 기술개발에 매달리지요. 이것이 현대 사회의 선인 것처럼 평가해왔습니다. 1%도 안되는 분들의 노력이 고귀한 것임을 인정해야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서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도출하는데 성원을 보내야 한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이론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과학윤리적으로도 옳지만 누가 강제하겠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술개발하지 말고 원인을 밝히는, 멀고 불확실한 방향으로 가라는 것이 민주체제에서 어떻게 강제할 것인가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손쉽게 받아들이는 세태, 또 다른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르는 것, 그런 고민은 같이 해야 합니다. 이공계 기피현상이 세계적인 흐름입니다. 몇 개국을 뺀 세계적인 흐름이고 대한민국이 더 심화되고 있다는 심각성은 있습니다. 이공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것도 강제할 수 없는데, 하물며 과학을 하겠다고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너는 이걸 해라고 강제하기는 어렵습니다. 각자의 선택에 맡기는 상황에서 창의력과 성실성이 구사됩니다. 강제할 수가 없으니 인센티브라는 도구를 활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장=이런 면에서 앞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중요성을 인정하고 정책적으로 유인책이나 장려책을 써서 하도록 해야 되는데. 이 점에서도 역시 우리나라는 소국적인 관념이 잡혀 있습니다. 남보다 뒤처지면 죽는다는 강박감이 강해서, 우리가 인류의 앞길을 선도한다는 생각을 못하는데, 이제는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문명의 문제가 무엇인가, 그걸 진단하고 맞는 처방을 장려해야 된다고 봐요. 우리 문명이 병들었다, 암과 같은 병인데, 겉으로 증상은 나타나는데, 그것만 막으려고 하는 진통제적인 처방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봐요. 이제는 제대로 진단하고 거기에 맞는 원론적인 대응을 찾아내는 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근데 문제의식이 너무 약해요. 첫째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고 두 번째는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합쳐서 통합적인 해결책을 찾고 이것이 정책과 연결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협동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두 사람의 논의가 과학기술의 문제에 대한 과학자 또는 과학철학자들의 고민 필요성에만 집중되는 듯해서, 과학자 일반에 대한 사회적 통제 필요성에 대한 의견을 물어봤다.

황=어느 과학기술이 상궤를 넘었고 시민의 보편타당한 정서와 가치를 벗어났다고 할 때는 법적 구속력, 강제력이 좋습니다. 모든 과학자들이 불편해할 것 같지만, 어느 정도의 합의가 있는 법은 필요합니다. 사회적 지원, 눈에 안 보이는 성원이라는 것도 있고, 그래야 가속이 가능합니다. 한쪽에서는 문제삼고, 한쪽에서는 지지할 때, 제어됩니다. 생명윤리법은, 생명공학자들이 보면 규제가 너무 심하다고 보고, 시민단체들은 너무 느슨하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공청회도 하고 논의도 했고, 프로젝트도 두 군데서 해서 지금의 형태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법의 내용이 담고 있는 내용이 타당한지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조금씩 불만은 있지만 법적 가이드라인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일단은 제정하고 나가야 합니다.


장 교수에 대해서는 온생명에 대해 좀더 설명해주실 것을 부탁했다.

장=이와 관련해 생명에 대해 너무 엄격한 경계를 두는 건 옳지 않습니다, 자연 현상 속에서 볼 때도 그렇고, 인간 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주장하는 건 오히려 위험합니다. 생명존중같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 생명의 존중과 같은 정도로 비인간을 존중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래서 나머지와 인간의 격차가 커지죠. 인간생명에 대해서도 적절한 이해를 해야 되고, 거기에 맞는 가치를 부여해야 하고, 가장 중요하게는 전체 생태계, 내가 말하는 온생명에 대한 가치, 인식을 하고 그 안에서 그것들이 갖는 상대적인 가치와 공통점을 같이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황 교수에 대해서는 약간의 시각 차이는 있는데, 대부분은 같이 가는 것 같습니다. 역할의 차이가 있지만,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함께 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크게 보면 합의할 여지를 도출할 수 있겠다, 적어도 생각하는 방향에서는 그렇겠다, 싶은 거죠. 이런 것이 구체화되어서 이런 방향에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룰 수 있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과학 쪽이지만 저는 철학적인 끝으로 가있고 황 선생님은 활용이라는 다른 극단에 있지만 이 점에서 큰 차이는 없군요.

황=선생님 책은 많이 읽었습니다. 직접 만나뵈니까, 선생님의 철학적 바탕이 저희가 생각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고 공유할 수 있는 사상적 배경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쉬운 방안, 과학이라는 수단을 이용하겠다는 쪽에 몸을 담고 있고 선생님은 좀더 포괄적이고 큰 안목으로 우주, 자연을 보시고 거기서 해결책을 찾으시려는 그 차이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정리 신기섭 김영희 기자 marishi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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