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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1999/10/05 (01:10)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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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니카의 기독론
파니카의 기독론
                                                                                                                                        김  진

1 기독론은 종교간의 대화의 걸림돌인가?

기독론은 기독교가 이웃종교와의 대화로 나아가려 할 때 가장 큰 걸림돌로 여기지는 신학적 주제이다.
이웃종교와의 대화를 추진하려 할 때 전통적인 기독교의 기독론, 즉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라
는 주장은 극복 혹은 재해석되 어야할  과제이다. 왜냐하면 이 전통적인 기독론은 문자 그래로 받아 드리
면 다른 종교가 말하는 구원이해, 구원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시키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독교 신학
이 종교학의 학문적 성과들을 받아드려 이웃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을 수용한다 하더
라도 그 종교들 스스로 말하는 자신들의 구원의 방법과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
와의 대화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이웃종교에 구원이 '있다' 혹은 '없다' 라고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 종교인들의 구원경험에 대한 고백을 선험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동안 이웃종교와의
대화에 그나마 포괄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던 사람들은 결과적으로는 종교간의 대화를 방해하고 오히려
"고양이와 쥐와 대화"로 만들어 버렸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통적인 기독론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고, 단일한(einzig und allein), 그리고 궁극적인 표준이라는 주장을 포기하
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간의 대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기독교 신앙고백을 무장해제
(Abruestung)시키거나 비절대화(De-Absolutierung)하는 것이 능사인가? 종교간의 대화에서 성서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다시말해 그리스도 사건의


정언성(Definitivheit), 긍극성(Finalitaet), 그리고 규범성(Normalitaet)을 어떻게 재해석 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논할 때 제기되는 딜레마는 그리스도의 보편성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그리
스도는 유일한 구원자, 중개자요,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기독교적인 자기이해의 결정적인 본질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기독교 신앙에도 부합되면서 동시에 배타적인 기독론을 극복하
는 보다 새롭고, 구체적인 기독론의 전개이다. 이러한 새로운 기독론은 '그리스도인의 유일성과 보편성
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 이해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재해석과 관련하여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걸맞는 기독론 형성을 위해서는 "기독론(Christologie) = 구원론(Soteriologie)"이
라는 논리으로 해방 되어야 한다. 성서를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 기독론이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사건을
다루지만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다 포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위에서 제기한 상황과 과제를 파니카는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를 다음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2. 파니카의 "그리스도 현현론"(Christophanie) 으로서의 기독론

파니카는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 걸 맞는 "참된 보편적 그리스도론"이 요구되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자신
의 그리스도론을 전개시킨다. 그는 기존의 그리스도론에 대해 다음과 비판한다: "이 지식 (그리스도에 관
한 지식; 요 17; 3)을 소유한 자에게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오늘날의 그리스도
론이 그러한 열매를 생산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그의 이러한 의문 속에는 그리스도론이 본래적인 의
미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져다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폐쇄적인 이론으로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담겨져 있다. 전통적인 기독론은 다른 신학적인 이론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삶의 정황'의 산물이
며, 따라서 '순수한' 기독론은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기독론이 본질적으로 폐쇄적이고 정형화된 신학
적 이론체계로 성림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파니카는 기독론이 이웃종교, 타문화의 교류
와 대화 속에서 계속 발전될 수 있는 개방적인 영역임을 강조한다. 이 새로운 그리스도론의 개방성을 근거
로 파니카는 자신의 그리스도론을 전개시켜 나간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론이라는 용어 대신에 "그리스도
현현"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그것의 이유는 자신의 기독론과 지금까지 전개 되어온 전통적인 그리스도
론과의 일정한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동시에 이 표현 안에 자신의 기독론의 내용적 특성을 함축하고 있다
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 현현론"의 두 가지 전제
파니카는 자신의 그리스도 현현론의 다음의 두 가지 출발점(Provios)을 제시한다.
첫째로, 이 그리스도 현현론은 보편적인 이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은 새로운 기독교의 제국
주의를 시도하기 위한 기독론의 보편적인 파라다임을 창출하려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서구에
서 정립된 기독론은 기독교의 신앙과는 유리된 채 서구의 지배적이고 우월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합리화
하는 무기로 오용되곤 했다. 특히 이웃종교와 접촉할 때 그 위력은 유감없이 발휘되곤 했다. 파니카의
"그리스도 현현론"으로서의 그리스도론은 이와는 반대로 단순히 "에규메니칼적이고 개방적이며 인내하는
온전한 기독교인, 그래서 자신들의 '기독교성'(christianess)를 희석화 시킬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되기
원하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상응하는 그리스도의 신뢰할만 모습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현현"이라는 용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단어 자체가 '예수의
현현'이라는 기독교 초기의 "현현설"을 상기시키키는 것이 사실이다. 파니카는 그러나 이 단어의 의미를
오히려 "진리의 가시적이고, 명확하고, 그리고 공적인 선포"의 의미로 사용한다. 즉 "그리스도의 현현이라
는 말은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이 포착하는 그리스도의 출현과 그것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나타내
는 말이다. 결국 이 단어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비주의적인 측면에서의 그리스도론을 언급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사건, 또는 진리의 실제적 나타남을 총제적으로 이해하고 숙고한다는 의미에


서 사용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전제를 기반으로 이 그리스도 현현론은 내용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첫째로, 그리스도 현현론은 지난 2000년 동안 전개된 전통적 그리스도론을 폐기시키거나 무시하지 않는
다. 변화를 가져오되 전통적 기독론과 내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현현론 역시 그리스
도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 현현론은 그리스도의 과거 역사적 모습과 또 현존하는 그리
스도의 모습을 모두 포괄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진다. 즉 성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해석이나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라고 정당하게 불리는
실재의 현현에 대한 내용도 기술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 현현론은 기독교내에서만 연구되고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전통과의 교류와 반성속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현현론은 우리
자신의 전통을 해석하는 만큼이나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의 열매이다." 이것의 근거는 다른 종교 전통속
에도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의 '그리스도'와 "동형론적으로 상응하는"(homeomorphic equivalent) 종교
적 실재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파니카 새로운 그리스도론으로서의 그리스도 현현론은 이웃종교
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들 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건, 신비'를 발견하고, 비교 연구하면서 자신의 내
용을 보다 풍부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도 현현론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누구
인가?

3.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파니카의 질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어떻
게 지중해 세계를 거쳐 당시의 이해의 지평을 넘어서면서 그의 이름을 이해 할 수 있는가? 또한 그것과
더불어 어떻게 하나의 구체적 사건이 보편적 효력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파니카의 질문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 자체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문제와도 직결된 질문이
다. 파니카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크게 세 범주속에서 풀어보려고 한다. 첫 번째 가능성은 우선 이 질문
을 셈-헬레니즘적인 이해지평에서 해답을 찾아 내려는 시도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예수에 관한 보도를
교리적으로 채색된 예수이해를 배제한채 당시의 사고의 지평에서 이해해보려는 노력이다. 두 번째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가능성
은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은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이지(ontologish) 않고, 기능적(funktional)
이어야 한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세 범주속에서 펼처지는 파니카의 그리스도 현현론을 필자
는 다섯가지로 분류해서 분석 하고자 한다.

1) 상징(Symbol)으로서의 그리스도
이것은 그리스도의 이름(Name)의 본래적 의미를 추구할 때 이해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우선 파니
카는 성서의 증언대로 그리스도라는 이름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 이름안에 구원이
있다. 그 이름으로 기적이 행해졌고, 그 이름으로 악령이 쫓겨갔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이름의 의미"이고,
그래서 파니카는 이 이름이 나타내는 의미를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파니카에게 있어서 "이름"은 단지 어떤 표식이나 상표가 아니라 하나의 참 "상징"이다. 그는 이름을 상
징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또한 이름은 여기 이름되어진것(named)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으며, 이때 그 이름은 단순히 명목적인(nominalistic) 표식이 아니라, 그렇게 이름되어진 '것'의 참다운
상징이다."
그렇다면 파니카가 말하는 상징의 구체적인 의미를 좀더 살펴보자. 그는 상징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징이란 다른말로 말하자면 우리의 경험의 세계에 나타나는 하나의 '사물'과 같은 것이다. 상징
은 그 '사물'을 나타낸다. 그렇게 나타나 보이는 것이 사물이지만 그렇게 나타내 보여지는 것은 그것의
적절한 표출(manifestation)이다. 그래서 상징은 사물이 걸친것을 벗겨 그것을 드러내게하고, 그것을 표현
하게 한다. 존재하는 것 중에 벌거벗은 것은 없다. 존재(Existenz)는 존재하는 것(existing)의 같은 행위속
에서 늘 상징적이다.(...) 이름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렇다고 상징이 상징되는 것을 대체할 수 없
으며, 상징은 그 사물 자체가

아니다. 그리고 상징은 인식론적인 표식이 아니라, 상징되는 것 속에 있는,
일종의 신비적으로 존재하는 실재(Wirklichkeit)를 드러낸다.
이런 상징에 대한 이해 속에서 파니카는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종교적 경험속에서 발견되는 이 실재의
한 상징이라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는 실재를 들어내는 상징이다. 그리고 이 실재는 각자의 신앙경험과
신앙고백 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의 이름이며 살아있는 상징이다. 그리스도는 실재에 "대
한"(ueber) 상징이 아니라, 신적이고, 인간적이며 우주적인 실재의 전체성(Totalitaet) "의" (소유격 der)
상징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는 "우리는 신께로 인도하는 상징이 아니라 우리를 신과 연결
시키고, 연합하게 하는 상징"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이 그리스도는 "기독교인들이 명명하는 초월
하고, 동시에 인간적으로 내재하는 비밀(Geheimnisses)의 상징"이며 동시에 기독교외에서도 존재하는
실재의 상징이다.
이러한 상징으로서의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가 기독교내에서만 존재할 수 없는 존재라는 그의 주장을
뒷 바침한다.  파티카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재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독점물이 아니다. 진실로 그리스도는 형태와 이름을 달리하면서 진정한 모든 종교 속에서 현존하고 있으
며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우주-신-인론적 원리로서의 그리스도
상징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또한 신적인것, 인간적인 것, 우주적인 것을 연결시켜주는 우주-신-인론적
원리이다. 그리스도는 창조된 것과 창조되지 않은 것, 시간과 영원, 땅과 하늘,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을 잇는 유일한 끈이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가 세계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총체적이면서 유일한 중재
자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중재권(Mittlerschaft)은 어떤 한 종교에 종속되지 않으며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갈 수 없다. 그리스도는 "시간의 중심으로 3가지 차원(과거, 현재, 미래: 역자 주)를 하나로 연결시키며,
태초와 최후사이에, 그리고 모든 존재의 영역, 즉 신적인, 영적인 것, 인간적인 것,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것의 중심에 적절한 방법으로 존재한다. 그리스도가 현존하지 않는다면 실재의 (존재) 방법은 없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할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이 우주-신-인론적 신비를 기독교적인 의미에
서 그리스도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하나의 실재가 각기 다른 관점에서 다양한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이름은 우주-신-인론적 사실(Tatsache)이다. 각 이름은 새로운 우주-신-인론적 원
리에 한 측면이기 때문에 실재가 많은 이름을 가졌다는(hat) 말이 아니라 "많은 이름"이다.(ist) 각 이름은
우주-신-인론적 실재의 새로운 표현이며 각 이름은 분리되지 않은 신비를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
교인들이 그리스도라 부르는 것은 나타나는 신비의 상징이지만

기독교인들이 파악하는 그리스도가 그 신
비 전체를 포괄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인식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를 완전하게 인식했다면 누구도 볼 수 없는 "아버지"를 본 것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3) 개체(Individuum)가 아닌 인격(Person)으로서 그리스도
파니카의 기독론의 중요한 인식 방법론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를 개체가 아닌 인격으로 보는 것이다.
즉 인간은 그리스도를 개체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존재로 경험할 수 있다. 이 주장은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개별화의 원리"(The Principle of Individuation)가 적용
되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 개별화의 원리는 어떤 사물의 본질을 다른 기타의 사물과의 차별
과 반대 속에서 찾으려는 방법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한 질문에도 적용되었다. 즉 지금까
지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할 때 그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
문이었다. 이러한 개별화의 원리는 인식론적으로 두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다. 즉 단수성
(Singularity)과 개체성(Individuality)의 원리가 그것이다. 다른 사물과 구별을 시킬 때 이 두 원리들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차원이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단수성의 원리는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구별하려 할 때 외적인 요소에 근거하고, 개체성의 원리는 자기 정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내적 구성
에 근거한다." 이 원리를 가지고 예수라는 역사적 실체와 그의 정체성에 관해 질문을 할 수 있다. 첫
번째 질문은 예수를 한 종(種)의 구성원으로서 단수성과 관련하여서 개별적 존재인지를 묻는다. 전통적으
로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를 역사적 개인의 의미에서 단일한 개체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인성을 가지신
분이었지만 인간적인 인격이 아

니라, 신격을 가진, 즉 삼위일체중 이(二)격의 위치를 차지하는 분이시다
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사람(man)이나 한(one) 사람이나, 단일 개체가 아니라 신격이 화육하신것이
며, 한 신격이 인성과 본질적으로 연합된 분이다." 그렇기 단일성의 원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파악할 수
없다. 단일성의 원리가 불합리한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경험하거나 만나는 그리스도는 단일성 의미에서
의 만남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서적 표현으로 말하면 기독교인은 살아있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나
는 것이며 이는 단일성의 의미를 갖을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개체성의 의미를 적용할 필요가 있는가하는 것이다. 파니카는
마태복음 24장 23절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아니 여기있다'하더라도
믿지 말아라"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정체성(who)는 개체적으로 결코 대답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무엇(what)만을 전달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개체성을 구하는 것은 자체가 "그가 누구
인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그 자체로 다른것과 배타적으로 구분짓는 내용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의 "who"로서 정체성을 물을 때는 그것은 살아있는 인격(Person)을 요구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
가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정확한 역사적 정보나 심리학적 현상의 분석이나, 그의 말씀과 가르침
의 철학적 연구를 통해서 파악 가능한 것이 아니며, 어떤 객관적인 자료의 검증의 결과가 아닌 인격의
만남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여기서 파니카는 "예수"라는 단어에 두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의

미가 있
음을 지적한다. 하나는 역사적 범주(historical category)에 속하는 것으로 역사적 신분(historical
Identification)으로서 예수에 관해 말하거나 그안에서, 그를 통한 기독교인의 신앙을 말할 수 있다. 다른
범주는 인격적 범주(prsonal categoriy)에서 파악되는 인격적 정체성(personal Identity)이다. 인격적 정
체성으로 그를 이해하는 것은 그를 우리의 한 부분을 가지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적 존재속
에 있는 축(pole)과 교류를 통한 경험을 의미한다.
인격(Person)은 양적인 차원이 아닌 실재의 존재론적 관계를 역는 그물추와 같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
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인격적 정체성이며 이 인격적 정체성은 그와의 살아 있는 관계속으로 들어갈 때
참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인격적인 관계성속에서 그의 인격의 정체성은 발견될수 있다.  

4)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
구원과 관련하여 파니카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구체성을 약화시킴없이 보편 타당한 방법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길이 있는가? 우리가 정신적으로 셈족이 되지 않고도 예수를 온전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이 가능
한가?(...) 우리는 예수를 단지 사회적 구조로서의 기독교(Christendom)안에서 인지하지 않고도 에수를
믿을 수 있는가?" 자문한다. 이것은 결국 지금까지 예수에게 둘러처진 셈족, 그리스적, 혹은 서구적인
문화와 종교의 실타래를 풀어 버리면서도 그리스도의 구원성을 말할 수 있는 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한 긍정적인 해답을 위해 우선 다음과 같은 두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첫째 가설은 "그리스
도는 구원자이다. 그러나 단지 그  혼자만이 아니다."(Christ ist saviour but not the only one)니다. 두
번째 가설은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자이다."(Christ is the unique saviour)이다.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첫 번째 가설이 간접적이고 포괄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두 번째 가설을
배타적인, 독점적인 방법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우선 첫 번째 가설이 말하는바를 풀어쓰면, 이 가설은 "이미 많은 구원자들이 있고 그 중에 그리스도가
하나의 구원자"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가설을 기독교인이 수용할 겨우 전통적인 기독교가 주장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보편성을 적절하게 해명해야 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보편성에 대한 재고를
위해 파니카는 세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1)역사적-우주

적 관점, 2)심리적-인류학적 관점, 3)논리적-인식
론적 관점이 그것이다. 이 첫 번째 요소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공간은 특정한 문화적, 지리적, 역사적
환경안에서 살아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이 한계적 상황속에서 자신의 세계가 전체 세계를 의미할 수밖
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보편성은 중동이라는 당시 역
사적, 지리적 경험공간에 한정되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것은 보편성의 의미를 무시하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보편성의 형식을 통해서 그들이 말하려고 했던 내용이 무엇인지를 적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 심리적 -인류학적 관점에서 이 보편성은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성 속에서 이해되어야함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를 가장 최선의, 최고의 구원자로 발견하고
그와의 신앙의 관계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자식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언급 자체의 진실 속에서 형성된 살아
있고, 사랑하는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심리학적이고 인류학적인 요소를 감안할 때 그리스도
에 대한 고백의 보편성의 의미는 타자의 보편성을 선험적으로 배격하지 않는다. 세 번째 범주인 논리적이
고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보편성의 재해석은 당시 셈족의 톡특한 사고방식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사고의 특징은 존재의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 사용하는 "비 반대"(non-contradiction)의 논리"
이다. 이 사고방식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구원자이다"라는 표현은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구원자가 없다"
라는 동등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사고방식이 그 내용을 사실로 결정한다면
첫 가설이 설자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가 구원자이다"라는 표현이 다른곳에 구원이 "있
다" "없다"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주장이 내포하는 내용에 초점을 마추어야 한다. 만약 이 문장
이 다른 곳에 구원이 없음을 말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단지 그렇게 말하고 이해한 그 사람들에 한정되어
주장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해 보편 그리스도의 보편성은 다른 곳에 구원자가 없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이러한 보편성에 대한 재해석에도 불구하고 파니카는 첫 번째 가설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
약 많은 구원자가 존재한다면 이때 구원에 대한 개념은 각기 다른 구체적인 구원자에 의해서 그 구원의
내용이 채워질 수 밖에 없는 하나의 형식적인(formal) 이고 빈(empty)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니
카는 위에서 언급한 보편성에 대한 세 가지 요소의 비판적 검토를 수용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보편성의 새
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즉 그리스도의 보편성은 그의 개체론적 보편성에서 츨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구원 역사의 보편성으로 출발한다. 그리스도는 보편적 구원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만약 그가 역사적 지
리적 실존으로 머무른다면 이 보편적 구원역사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지역적, 역사적 한
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 때문이다. 예수가 약속했던 그의 영이 그리스도의 실존을
증거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파니카는 "그(그리스도)는

초역사적 존재이다. 이러한 예수 이해가 기독교인
들이 믿는 예수의 영의 구원하는 능력이 구체화 된것으로서의 많은 구원자를을 인정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배타적으로 입장을 가질 필요는 없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구원역사의 보편성과 구원자의 보편성
과는 구별되어 이해해야 한다. 즉, 다수의 구원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구원 역사를 일으키는 한
예수의 영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니카는 다시 기독교의 포괄주의로 돌아서는 것인가? 기독교의 우월
주의적 포괄주의가 아니라면 이 논리를 어떻게 받아 드릴 수 있는가?

5) 보편적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의 구별
파니카는 앞에서 제시한 가설중 두 번째 가능성인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이다"라는 주장을 받아
드린다. 이때 그리스도는 이미 어떤 역사적 실존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인격과 관련속에서 파악되는 존재
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구체적인 역사적 이름이다.  그러나 구원자인 그리
스도는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 실존의 모습에 한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역사적 실존을 보지도 만지
지도 못한 사람도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니카는 "예수는 그리스도 그러나 그리스
도는 예수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이시다'라는
문장은 그리스도 신앙고백의 핵심이지만 그 역은 성립될 수 없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기독교의 고백은
하나의 추상적인 발언 이상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은 '그리스도가 예수다'라는 말과 동일시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주이시다'라는 발언도 단순히 뒤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주
장의 신학적 근거는 부활한 예수가 나사렛 예수와 같을 수 없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구원자 우주적 그리
스도가 역사적 인물에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이 새로운 것이 결코 아니며, 더우기
바울서신에 나타난 그리스도 이해와 기독교의 성만찬 전통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말할 때 이미 기독교
인들은 이 사실을 받아 드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요, 그리스도가 예
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잘못된 학문적 사고의 오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는

학문적 사고의
희생자들 입니다. 우리가 칠판에 A=B라고 써놓고 B=A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는 A 가 아니고, 그리
스도가 B가 아닙니다. 우리는 A=B 그러므로 B=A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실재(Wirklichkeit)의 영역에
서 아주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가 오직 예수안에서 구체화되었다는 주장을 거부
하고 다른 역사적 모습속에서 나타난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또한 이 말은 역사적 실재가 초월하는 신적
실재와 동일시 될 수 없고, 또 그렇게 동일시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한계적인
것들이 절대적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파니카는 기독교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를 너무 강하게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이와같은 위험을 발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예수의
순수한 역사적 행동으로 대체하려는 오류의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와 그리스도와의 구별은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기독교가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과 이웃종교에 관한 연구가 기독교 신앙의 자기이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결론을 가져오게 한
다. 그러나 구별이 예수를 반대하거나 그 의미를 약화시키고, 평가절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파니카에 있어서 예수는 그리스도의 참되고 구체적인 표현이며, 우주-신-인론적 원리의 기독교적 상징
이다. 이 예수는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실재의 형상이다. "나는 예수의 역사적 모습을
우연으로 만들려하지 않는다. 인류의 발전의 과정속에서 충만을 향한 보다 깊은 이유가 있다. 시간속에서
이 여정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를

통해 계승된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그리스도가 예수 안에서 나타난
알파요, 오메가요 전(全)창조자등으로 인식한다."
이렇게 역사적 예수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그리스도의 이해는 구원자로의 그리스도의 보편성을
주장함과 동시에 기독교의 구원 우월주의를 극복하는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파니카의 기독론의 내용과 의의를 다음과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모든 실재의 상징이다. 즉 그리스도 현현은 실재의 신적이고, 인간적이고, 우주적인 지평
의 신비적 연합의 상징이다.
둘째, 기독교인은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세째, 그리스도의 정체성(Identitaet)과, 그의 신분(Identifikation)을 동일시 할 수 없다. 신학적으로 말해
역사의 예수와 우주적(신앙적) 그리스도에는 긴장이 존재한다.
네째, 교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을 독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들안에서도 구원사건, 즉 그
리스도의 현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이 그리스도의 현현으로서의 기독론은 "예수론"(Jesuslogie)를 극복할 수 있다. 즉 유대사회라는
어떤 민족적인 조건 속에서 형성된 예수이해를 그리스도의 현현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니카의 기독론의 특징은 전통적인 기독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이것을 이웃종교와의 관련성속에
서 재해석하고 적용함에 있다. 그리스도는 이 세계의 유일한 구원자이며 그 그리스도의 구체적 현현은
기독교의 예수 뿐아니라 다른 종교속에서 현현된다. 이때의 "그리스도"라는 명칭 그 자체는 기독교의 용어
를 빌려쓴 것이며 각 종교안에서는 각기 다름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상징으로서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중재권, 즉 신적인것과 인간적인, 우주적인 것을 연결하시키는 원리로서의 역할(그 종교가
무신론적 입장을 갖는다 하더라도)과 신과 인간의 중재라로서의 그리스도의 중재권은 포기할 수 없는 그리
스도론의 내용이다. 예수를 그리스도와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단지 기독교안에서 만 활동하
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들 안에서도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여기서 구원
에 대한 기독교의 독점적 주장은 설자리를 잃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론은 이웃종교와의 대화시 걸림돌이
아니며 오히려 토대이며 만남의 장이 될 수 있다. 이 기독론은 각 종교가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그리스
도의 신비를 이웃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보다 보다 깊이,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파니카의 기독론에 대한 이해는 다음으로 크게 둘로 나누어 진다. 그 하나는 파니카의 기독론을
전통적인 기독론의 흐름중의 하나인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연장으로 보는 견해이다. 실제로 파니카는
이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내용적으로 부인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강조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 우주론적
그리스도론

속에서의 그리스도는 이웃종교속에서 계속 성육화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그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권성이나 내재를 강조하는 것에 머무른다. 이것이 파니카의 기독론과 구별되는 부분
이다.
또 다른 주장은 파니카의 기독론이 신중심주의로의 환원이 아닌가하는 주장이다. 실제로 니터는 자신의
저서 "예수 이름으로 만?"에서  '신 중심주의'라는 항목에  파니카의 기독론을 배치했다. 그러나 파니카는
하나님(아버지)과 그리스도(아들)을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고, 또 각기 사역이 다름을 전통적인 삼위일체론
적 논증을 토대로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이격으로서의 중재자인 그리스도의 역할을 강조
한다. 그러므로 파니카의 기독론에서는 하느님과 그리스도가 대치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필자는
그의 기독론을 "재해석된 그리스도 중심주의"라고 표현한다.

글을 마치며

이상에서 살펴본 파니카의 종교신학과 기독론이 오늘 우리 상황에서 어떤 신학적 정합성을 가질 수 있
는가는 좀더 구체적인 검증을 통해서 살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구제척인 검증을 위한
토대조차 형성되어 있지 못한 것이 우리의 신학적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토대가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종교간의 대화라는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제한성이 늘 존재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현실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순교의 시대'를 살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한국의
토착화 신학, 혹은 문화 신학과 종교 다원주의 신학 사이에 존재하는 구별점들이 명확하게 논의되지 않은
채 종교신학을 '비판', 혹은 '변호'하는 상황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는 결국 두 신학의 경계
선을 모호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필자는 지금 종교 다원주의 신학이 오늘날 한국 신학 발전에 유효
한 신학이라고 확신한다면, 이 신학의 보다 적극적인 전개를 위해서 토착화 신학의 많은 학문적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분명한 그것과 단(斷)을 선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비로서 파니카의 기독론를
비롯한 그의 기독교 신학에 심층적인 재해석이나 이웃종교와의 대화의 실천적 삶은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
되리라 확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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