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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3/02 (18:20) from 80.139.182.233' of 80.139.182.233' Article Number :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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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문제와 활력이 넘치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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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청논문 (번역)

노동 문제와 활력이 넘치는 민주주의 :
확장된 자아의 지평을 향하여** 이 글은 Douglas Sturm의 논문 “The Labor Question and Energetic Democracy: On Moving toward a Larger Selfhood”를 완역한 것이다. 이 논문은 본래 1999년 국제학술지 Soundings: An Interdisciplinary Journal 82, No.3-4 (1999), pp.417-435에 영문으로 수록되었으며, 그보다 앞서 1998년 8월 미국 클레어몬트 소재 과정사상연구센터(Center for Process Studies) 주관으로 개최된 제3차 화이트헤드 국제학술대회에서 초청강연으로 발표된 바 있다. ꡔ화이트헤드 연구ꡕ 편집진은 이 논문이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실제 사회현상이라는 영역에 적용한 훌륭한 응용연구의 사례라고 평가하여, 회원들과 국내 독자에게 소개한다는 의미에서 번역․게재키로 결정하였다. 편집진은 논문의 번역과 재간행을 흔쾌히 허락해준 저자 D. Sturm과 학술지 Soundings측에 심심한 감사를 표하며, 저자와의 교신 및 논문번역을 맡아 수고한 이현휘 박사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노동문제와 활력이 넘치는 민주주의/더글러스 스텀   

더글러스 스텀(Douglas Sturm)**
** 저자 스텀(Douglas Sturm)은 1959년 시카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59년부터 1995년까지 미국 버크넬대학교(Bucknell University)에 재직하면서 주로 종교학 및 정치학을 강의하였다. 주요 저서로『공동체와 소외』(Community and Alienation, 1988), 『연대와 고난』(Solidarity and Suffering, 1998)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공존』(Belong Together, 2003)을 펴낸 바 있다. 그의 주요논문 목록(Selected Bibliography of Douglas Sturm)은 학술지 Journal of Law and Religion, Vol. XIII, No. 1 [1996-98], pp. 255-261에 수록되어 있다.



Ⅰ. 노동 문제
Ⅱ. 노동의 의미
Ⅲ. 사회성의 원리





현재의 시점에서 인간 공동체의 번창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세계의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이 그동안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고, 또 앞으로는 어떠한 모습으로 개선되어야만 하는 지에 대해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노동계급이라고 하는 변수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판단할 때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에 시작된 산업혁명 이후 점차 확산되기 시작한 독특한 사회적 조건 하에서 형성된 일군의 사람들에게 주목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지어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사회적 조건은 근대 프로젝트의 약속과는 달리 그동안 노동계급의 삶의 질을 고양시켜주지 못하였다.
이렇게 역설적인 주제를 연구하는 동안 나는 과정사상(process thought)의 전통에서 성립한 두 종류의 논점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첫 번째 논점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뛰어난 역사적 식견으로부터 얻은 것이었는데, 그는 19세기 영국 사회를 강타한 산업혁명의 충격을 다음과 같이 통찰하고 있었다. “자유, 개인주의, 경쟁 등과 같은 단순한 독트린들이 사회의 기층에서 연명하는 산업사회의 노예와 매우 유사한 그 무엇을 다시 부활시키고 있었다.” Alfred North Whitehead, Adventure of Ideas (New York: Free Press, 1961) 34.
즉 근대의 개막과 함께 탄생한 인간 해방의 약속이 역사상의 변증법적 왜곡을 거치는 가운데 수많은 노동자들의 복속으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일반적인 수준에서 제기한 윤리적 고발과 더불어 나는 버나드 밀랜드가 관계 중심의 형이상학(metaphysics of relationalism)으로부터 도출해 낸, 인간 삶의 근본적인 특성과 역동성에 관한 주장에 주목하였다.  
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각 개개인의 경험을 진정으로 대체하는 것이고, 따라서 개개인의 독립된 자아를 소외시키거나 소원하게 할 위험을 제공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궁극적인 자아를 체험할 수 있는 삶의 기회를 각 개인들에게 열어주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자아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우리의 확장된 자아와 우리의 커다란 자유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이로 인해 우리와 타자는 생명력의 정수(a goodness of spirit)를 함께 경험하게 된다. 이런 생명력은 우리와 타자 어느 한 쪽도 혼자서는 결코 이해할 수도 체험할 수도 없는 것이다. Bernard Eugene Meland, Realities of Faith (New York: Oxford UP, 1962) 206.
 

여기서 내가 주장하려는 바는 이런 것이다. 즉, 산업혁명이 계속되는 동안 노동계급을 복속시켜 왔던 일반적인 노동조건 내에서 노동계급은 확장된 자아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꾸준히 박탈당하여 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확장된 자아에 내재된 윤리적 함축을 진지하게 고려하고자 한다면, 기존의 노동조건을 적극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형태로 개혁시켜만 한다는 것이다. 이 주제를 진전시키기 위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장을 집중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 첫째, 19세기 산업자본주의의 조건 하에서 노동자가 처한 곤경에 대응하기 위해 제기된 “노동문제”는 설혹 압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의 피지배 경험에 주목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작금의 노동조건의 어떤 수준에선 세계적 규모의 변혁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도 여전히 적실성을 유지하고 있다.

• 둘째, 모든 종류의 노동은 설혹 그것이 가장 비참한 환경에서 수행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원칙적으로는 단순히 돈을 버는 행위라거나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인간은 바로 이 노동이라고 하는 변혁 행위를 통해서 인간 자신과 세계 모두를 꾸준히 창조하고 또 창조하기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 셋째, 인간의 협력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은 그곳에 내재된 깊은 의미에서 판단할 때 행위의 규범적 동기가 매우 민주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사회성의 원리(logic of sociality)를 준수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다름 아닌 그 이유 때문에 노동조건은 근본적으로 활력이 치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부응하는 형태로 변혁되어야만 한다.


Ⅰ. 노동 문제

19세기 말경 교황 레오 13세는 ꡔ레룸 노바룸ꡕ(Rerum Novarum)*이라는 유명한 회칙을 통해서 노동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바 있는데, 이후 그것은 로마 가톨릭 공동체의 사회사상을 대표하는 하나의 수준점(benchmark)으로 기능해 왔다. 미사의 사회자들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마그나 카르타라고 별칭되기도 했던 이 회칙은 “노동계급의 삶의 조건”을 명시적으로 문제시하고 있었다.* “새로운 사태”라는 뜻으로 1891년 5월 15일 로마 교황 레오 13세가 발표한 사회문제에 관한 회칙의 서두에 등장하는 말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사태란 산업사회의 진전과 함께 나타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심화, 노동자들의 전투적 노동운동, 자본가와 노동자의 윤리적 타락 등과 같은 사회적 갈등을 의미한다. 한편, 회칙이란 로마 교황이 전 세계 가톨릭 신자 또는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를 의미하는데, 통상 서두의 두 세 단어를 따서 회칙의 명칭으로 사용한다. ‘노동헌장’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이 회칙은 사회주의 방식의 사회개혁을 비판하고, 사유재산을 자연권으로 간주하면서 옹호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 질서를 인정함과 동시에 노동자의 단결권 등을 제창함으로써 이후 가톨릭계 노동조합과 정당 결성을 촉구하는 주요한 지침이 되었다. 이 회칙의 전문을 우리말로 번역한 내용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홈페이지(http://www. caritasseoul.or.kr)의 정의평화위원회 사회교리학교 메뉴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역자주).
Etienne Gilson, ed., The Church Speaks to the Modern World: The Social Teachings of Leo XIII (Garden City, NY: Doubleday Image, 1954) 206.
물론 교황 레오 13세가 이 문제에 처음 착안했던 것은 아니다. 노동문제는 19세기 초반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사회적 갈등에 대해서 종교 공동체 안팎의 여러 단체들이 꾸준히 목소리를 높여온 하나의 반응이었다.
1848년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그들의 유명한 ꡔ공산당 선언ꡕ에서 당대의 사회갈등의 문제를 대단히 명료하게 진단한 바 있다.  

자본가 계급의 시대라고 단정할 수 있는 우리 시대는 … 다음과 같은 분명한 특징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이 시대가 계급간의 적대감을 단순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전반을 점차 두 개의 커다란 적대진영으로, 즉 서로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두 개의 커다란 계급으로 분할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간의 분할이 바로 그것이다. Robert C. Tucker, ed., The Marx-Engels Reader, 2nd ed. (New York: Norton, 1978) 474.   


노동자 계급이 상품화되고 또 궁핍화되어 가는 모습을 그린 ꡔ공산당 선언ꡕ은 급진적인 사회의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특히 사적 소유권의 원칙을 심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또한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수 있는 하나의 청사진을 설계하고 있었는데, 그 시대가 도래하면 “인간은 각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들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공동체에서 살 수 있게 된다.” Tucker 491.  
  
그러나 사회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 가톨릭 전통 내에서 ꡔ레룸 노바룸ꡕ의 사상적 기원을 추적한 바 있는 마이클 쉐퍼스는 산업 자본주의의 귀결에 주목했던 일군의 가톨릭 사회 이론가들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사회의 유기체적 성격과 상충하고, 노동자들을 상품의 지위로 전락시키며, 사회를 피라미드 구조로 만들어서 노동자 계급을 사실상 생활이 불가능한 맨 밑바닥에 복속시켜 버렸던 공장 제도를 심하게 비판하고 있다. 예컨대 쉐퍼스는 프라이부르크 출신의 가톨릭 법률가인 프란츠 요셉 부스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는 1837년에 당대의 공장 제도를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고소하고 있다. 즉 공장 제도는 “새로운 종류의 농노제도를 만들어 내고 있다. … 공장 노동자들은 공장 소유주의 농노나 마찬가지이다. 공장 소유주는 노동자들을 단지 생산에 유용한 도구로만 사용하고 있으며, 사용가치가 떨어지면 미련 없이 버려버린다.” Michael Schaefers, “Rerum Novarum―The Result of Christian Social Movements ‘From Below'”, Rerum Novarum: A Hundred Years of Catholic Social Teaching, eds. John Coleman and Gregory Baum (Concilium 1991/5, London: SCM Press, 1991) 3-17. 이 문장을 인용할 때 나는 역사적 기록을 존중하기 위해 남녀평등의 용어를 삽입하고 싶은 강한 유혹을 억제하면서 원문에 있는 남성중심주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자신의 이해에 기초해서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한 자본주의의 대안을 거부하고 사적 소유권의 원칙을 지지하고 있었지만 (이는 어떤 의미에서 토미스트의 전통을 표현한 것이긴 하지만―자본가 계급을 옹호하는 의미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것임), 교황의 입장은 보편적으로 정착한 자본주의 경제 체제 내에서 노동자 계급을 속박하고 있는 비인간적 삶의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구조적인 사회변혁의 필요성을 깊이 있게 공감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대다수의 노동자 계급에게 부당하게 강제되고 있는 고난과 불행을 시의 적절하게 해소할 수 있는 어떤 처방책이 신속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 노동자들은 고용주들의 냉혹함과 무한 경쟁체제의 탐욕 앞에 노출되어 있고, 고립되어 있으며, 무력한 상태에 처해있다. … 뿐만 아니라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권한과 무역을 할 수 있는 권한이 비교적 소수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이 아울러 고려되어야 한다. 그로 인해 매우 부유한 소수의 몇몇 사람들이 대다수의 가난한 노동자들(라틴어의 원어로 표기하면 “프롤레타리오룸”)에게 노예의 굴레와 다름없는 멍에를 부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Gilson 206-07.  


노동문제에 관한 교황의 어투는 아주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이 단호한 것이었다. 즉 그는 공적 영역(“레스푸블리카”)에서 임금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인간을 단순히 돈버는 도구로서만 사용하는 탐욕스런 인간들의 무자비함으로부터 불행한 노동자들을 구하기 위한 노력을 각별히 경주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그들의 근력을 탕진시켜버릴 정도로 과도한 노동을 통해서 인간을 학대하는 노동조건이란 결코 정의롭거나 인간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뜻. 이 회칙 또한 우리말로 번역한 내용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홈페이지의 정의평화위원회 사회교리학교 메뉴 참조 (역자주).
Gilson 227-28.
국가가 규율하는 공적 영역은 특히 근로시간의 한계를 규정해야 하고, 여가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또한 어린이와 여성들의 특별한 요구를 충족해 주어야 하며, 생활에 필요한 최저임금을 규정하고, 노동조합의 결성을 권장해야만 하는데, 이러한 모든 요건들은 사회 정의의 문제로서 간주되어야만 한다.
ꡔ레룸 노바룸ꡕ이 공표된 이래 약 90년이 지난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에 처음 발표한 그의 회칙, ꡔ라보렘 엑세르센스ꡕ(Laborem Exercens)*의 제 11절에서 계급투쟁에 대한 맑시스트의 해석을 특별히 비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 1세기 동안 끈질기게 지속되어 온 사회의 뿌리 깊은 분화과정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 시대 전체를 망라해서―물론 이 시대가 아직 종결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노동문제는 … “자본”과 “노동” 간의 … 커다란 갈등의 기초 위에서 자리를 잡아왔다. 여기에서 “자본”과 “노동”의 갈등이란 생산수단을 소유하거나 임대함으로써 고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소수의 기업가 집단과 생산수단을 보유하지 못하고 오로지 노동만을 통해서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광범위한 대중과의 대립을 의미한다. 이 대립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자본가들의 처분에 맡긴 반면, 이 자본가들은 최대 이윤의 원칙에 따라 노동자들이 수행한 노동에 대해서 가능한 한 최저임금을 주려고 한 데서 시작되었다. Pope John Paul II, Laborem Exercens, in Gregory Baum, The Priority of Labor: A Commentary on Laborem Exercens, Encyclical Letter of Pope John Paul II (New York: Paulist Press, 1982) Section 11, 115. 앞으로 이 텍스트에서 인용하는 내용은 섹션 넘버와 페이지 넘버를 통해서 표시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산업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삶을 영위하는 노동자들의 운명에 주목해 온 가톨릭계의 노동문제는 그 자체가 본질적인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보다 포괄적인 사회문제와 상호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실상 노동문제가 “사회문제의 열쇠 그 자체다” Pope John Paul, Section 3, 99 (강조가 추가됨).
라고 분명하게 공표했다. 다시 말해서 노동계급의 삶의 조건에 관한 문제는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삶의 전반적인 수준, 즉 존재와 당위 사이의 긴장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하지만 노동문제의 이면에 숨어있는 도덕적 원칙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 내야만 하는 것인가? 노동문제는 흔히 분배적 정의의 문제로 간주되어 왔다. 이 경우 노동문제는 결국 사회체제의 수익(과 부담)을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할당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제기되는 가장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는 임금문제와 노동조건에 관한 문제, 즉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산 활동의 결과에 대해서 공정한 몫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작업환경이 안전하고 위생적으로 조성되어 있는지 등을 따지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임금문제를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 즉 “미국의 전체 노동인력 중에서 80%에 해당하는 임금 노동자들은 1973년부터 1995년에 걸쳐 자신들의 실질 주급이 평균 18% 삭감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Kim Moody, Workers in a Lean World (London: Verso, 1997) 188.
그러나 “1960년에서 1991년 사이에 세계 인구의 상위 20%에 돌아간 세계의 수익률은 30%에서 60%로 두 배에 달하는 증가율을 보였다.” Moody, Workers in a Lean World 134.
이러한 데이터의 중요성에 대한 평가는 어떤 공정성의 원칙에 입각하여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분배적 정의에 해당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으며, 노동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주제라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분배적 정의의 문제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 노동문제의 심층 차원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분배적 정의에서 다루는 주제만을 놓고 보면 거기에선 인간 개개인을 각각 분리된 존재로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간 개개인을 서로 비교하고 대비시키면서 잠재적인 “상품의 소유자와 소비자”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Iris Marion Young, 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 (Princeton: Princeton UP, 1990) 16. 이 책의 제 2장과 제 3장에서 담고 있는 영의 예리한 분석으로부터 나의 논지 전개에 필요한 핵심개념을 차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영의 분석 내용은 나의 논의의 맥락 속에서 재배열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지평에서 인간 개개인은 서로 외적으로만 관계를 맺게 된다(externally related). 즉, 인간 개개인은 그들을 운명 공동체의 성원으로 묶어주는 어떤 관계의 특성보다 각자에게 고유한 사적인 삶 그 자체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공동체가 건실하게 유지되고 또 더욱 발전하는 데 필요한 공동의 노력을 적극적으로 경주하는 대신 자기 자신들의 욕구충족에 필요한 가시적인 상품과 용역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들은 각자의 자기개발을 통해서 타자의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데 기여하기 보다는 그들의 사적인 취미생활을 유지하거나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금전적 수단의 확보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분배적 정의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특히 이 세계의 소외된 사람들에겐 대단히 중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노동문제를 아주 깊이 있게 다루기에는 불충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연대성을 요체로 하는 정의(justice as solidarity)에 관한 구상, 즉 재산의 축적보다 인간의 상호작용에 내재한 독특한 특성에 더욱 많은 관심을 경주하는 새로운 구상을 진지하게 제기하고자 한다. 이 정의는 인간이 보유한 타자에 대한 통제력보다 인간이 보유한 능력, 즉 당면한 과제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재능과 힘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주체의 능력에 더욱 주목한다. 연대성을 요체로 하는 정의를 수용할 경우 현존하는 공동체의 맥락에서 구성원 모두의 자존심을 증진시키는 일이 가능하게 될 것이며, 또 그러한 자존심을 지원하는 각종의 시설과 기회를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노동문제는 일차적으로 산업 자본주의가 진전된 지난 2세기 동안 노동계급에게 강제되었던 것, 즉 현저하게 왜곡된 소득 및 부의 분배구조에 주목하고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주요한 정책과 생산과정의 관행을 구체화하는 활동과 의사결정 회의에서 노동계급의 효과적인 참여를 분명하게 제한하거나 배제하고 있는 제도적 장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아이리스 마리온 영은 그러한 제도적 장치에 내재된 특성과 그것의 영향력을 지배(domination)와 학대(oppression)라는 두 단어로 축약하고 있다. 지배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나 그 행위의 조건들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금지하는 제도적 장치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나 단체들이 일방적으로 그들의 행위의 조건들을 직접 결정하거나 그들 행위의 구조적 결과를 통제하여 간접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될 때 지배의 구조 내에서 살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학대는 “어떤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공인된 환경에서 만족스럽고 유망한 기술을 배우거나 사용하지 못하도록 체계적으로 방해하는 제도화 과정 속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러한 과정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나 다른 사람들이 경청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회생활에 관한 그들의 시각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억제한다.” Young 38.
학대는 공공연한 착취로부터 사회적으로 무시하기 및 무력화시키기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태를 취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지배와 학대에 내재한 속성은―이들은 산업 자본주의의 지배 및 통제 구조 속에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교활하게 스며있는데― 연대성을 요체로 하는 정의와 상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속성은 밀랜드가 간절하게 호소했던 확장된 자아의 등장 기회를 방해한다. 지배와 학대에 내재한 속성이 확장된 자아가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에 점차 침투함으로써 우리가 우리들 자신의 삶의 깊은 의미와 교감할 수 있는 형태의 상호작용 기회를 방해하게 된다. 바로 이 점이 노동문제에 내재된 아주 심각한 장애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세계 각국의 노동조건은 근본적인 변혁을 체험하고 있는 중에 있다. 우리가 후기 산업사회에 진입하고 있는지 예컨대 다음 자료를 참조하라. Kathryn Marie Dudley, The End of the Line: Lost Jobs, New Lives in Postindustrial America (Chicago: U of Chicago P, 1994).    
, 아니면 제 3차 산업혁명을 시작하고 있는지 예컨대 다음 자료를 참조하라. Jeremy Rifkin, The End of Work: The Decline of the Global Labor Force and the Dawn of the Post-Market Era (New York: Putnam's, 1995).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노동자들이 노동의 방법, 노동의 장소, 노동의 시간, 노동의 목적 등과 같은 영역에서 광범위한 변화의 물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수많은 요소들이 수렴되면서 이러한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근대세계에서 태동한 이래 꾸준히 세계성을 지향해 왔고, 또 어느 정도는 그러한 목표를 달성해 왔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초국가 기업들이 번창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의 세계성을 보다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추세는 원거리 통신과 정보기술 분야에서 발생한 혁명, 그리고 국경을 넘나드는 거대기업들의 합병 등으로 인해서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경제적 자본주의는 로베르트 라이히가 지적했던 것처럼 비록 대중들의 담론 영역에선 “퇴색한 사유” (vestigial thought)의 양태로 여전히 존속하고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론 종언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Robert B. Reich, The Work of Nations: Preparing Ourselves for 21st Century Capitalism (New York: Knopf, 1991).   
영토국가와 제휴하고 있던 낡은 하향식 기업구조는 새로운 형태의 통제와 운영체제라고 할 수 있는 “지구적 규모의 그물망”(global web)으로 대체되었는데, 이 그물망을 기술적으로 직조하고 있는 가느다란 실들은 컨설턴트, 전문가, 그리고 소규모의 전문가 그룹들을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세계의 경제동향 내에서 서로 엮어주고 있다. 과거의 공장체제는 “상징 분석가들”(symbolic analysts)로 구성된 복잡한 네트워크체제로 새롭게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기업들은 이러한 경제동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 기업의 효율성을 증진시키고 투자이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 다운사이징, 아웃소싱, 하청계약, 리엔지니어링, 투자 중단 및 사업청산, 기업합병 등이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다음 책에 수록되어 있는 논문들을 참조하라. David Clutterbuck, ed., New Patterns of Work (New York: St. Martin's, 1985).  
최근 기업들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더욱 요구하고 있고, 더욱 값싼 노동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생산단위를 이리 저리 이동시키고 있다. 또한 모든 종류의 생산과 용역을 자동화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새로운 기업경영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는 이러한 모든 방법들을 지칭하기 위해서 종종 “경량생산”(lean production)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다음 자료를 참조하라. Kim Moody, “The Rise and Limits of Lean Production”, New Patterns of Work, ed. David Clutterbuck (New York: St. Martin's, 1985) ch. 5; 그리고 Jeremy Rifkin, “Post-Fordism”, New Patterns of Work, ed. David Clutterbuck (New York: St. Martin's, 1985) ch. 7.  

이처럼 제3차 산업혁명이 세계 각국의 노동조건에 가하는 충격의 효과가 극적이고 광범위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노동문제는 여전히 미결상태로 남아있다. 우리는 현재의 경제상황에서 “노동계급이 처한 위기의 실상”을 아래의 논평으로부터 전형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이후 1990년대 전 기간에 걸쳐 세계는 고용의 위기를 경험하였다. 1996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의 약 10억에 달하는 인구가 실직상태에 있거나 불완전한 고용상태에 처해 있다고 국제노동기구는 추정한 바 있다. 전 세계의 개발도상국가에서는 약 3천 4백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실직상태에 처해 있으며, 이들 중 많은 국가의 실업률은 만성적으로 10%를 웃돌고 있다. 반면 미국과 영국의 경우는 심각한 고용문제를 은폐하고 있다. 이들 국가의 공식적인 실업률은 낮지만 “정규직”을 대신한 파트타임과 임시직 고용자의 수는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Moody, Workers in a Lean World 41; 다음 자료도 참고하라. ch. 8, “Crisis of the Working Class”.
   

요컨대 “노동 계급이 처한 위기”는 한편에서 보면 현대의 경제적 조건 하에서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어려운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에선 보면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공동체의 맥락에서 노동의 의미를 확보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Ⅱ. 노동의 의미

노동의 의미는 상호 연관된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서 고찰해 볼 수 있다. 교황 바오로 2세는 그 두 가지 측면을 노동의 주관적 의미와 객관적 의미로 각각 지칭한 바 있다. Pope John Paul II, Section 5 and 6, 102-06.   
매츄 팍스의 경우는 이들을 각각 우리들의 “내적 노동”(inner work)과 “외적 노동”(outer work)으로 명명하고 있다. 즉 “내적 노동은 우리의 영혼이나 자아에 내재된 광범위한 세계를 지칭하는 반면, 외적 노동은 우리가 산출한 것이나 우리들 자신의 외적 측면과 교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Matthew Fox, The Reinvention of Work (San Francisco: Harper, 1994) 20.
내가 생각할 때 이러한 노동의 두 가지 측면은 변증법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어느 일방은 반드시 타방에 의존하고 있으며, 어느 쪽도 상대방을 전적으로 규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외적” 의미에 착안할 때, 노동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종사하는 것이 된다. 즉 외적 노동은 통상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여 어떻게든 우리의 생존과 발전을 계도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의 주변 환경을 전유하고 변형시키기 위해 우리들 자신의 에너지를 쓰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외적 노동을 통해서 문화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는 긴밀하게 연결된다. 따라서 문화가 변하고 새로운 기술이 창출되는 추이에 따라 외적 노동의 구조와 그것의 산출물 또한 변화하게 된다.  
그러나 노동이란 경제체제 내에서 소비에 필요한 상품과 용역을 생산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의 과정을 거쳐 우리들 자신의 외부에서 목격할 수 있는 어떠한 종류의 상품이 생산되든 간에 그 노동의 효과는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성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노동은 우리들 자신의 삶 그 자체를 형성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의 에너지를 안내하고 견인한다. 노동은 그 자체가 지금과 같이 지구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복잡한 경제 체제 내에서 자아와 타자간의 상호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삶의 양식이다. 따라서 노동 행위는 노동자들의 성격과 노동자들 상호간의 교류 양식에 실질적으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각인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의 능력, 우리들의 지각, 우리들의 이해, 우리들의 느낌, 우리들의 정체성, 우리들의 성실성 등등은 우리들의 노동 행위를 통해서 심대하게 좌우되고 구체화된다.
요컨대 우리는 노동을 통해서 우리들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행위에 참여하고 있으며, 좀더 넓은 시각에서 말한다면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행위의 궁극적 의미가 역설적으로 인간과 인간 이외의 생물에 대해서 편협하고 심지어는 파괴적인 삶의 양식으로 귀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사회주의 계열의 어휘를 채용하여 표현해 본다면 그러한 역설은 노동 현장에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과 싸우게 하고, 또 여타의 동료들과 서로 싸우게 하는 소외를 의미한다.
산업 자본주의의 조건 하에서 노동의 의미에 내재된 중심 문제는 우리가 외적 노동과 내적 노동이라는 노동의 두 가지 측면이 합류하는 교차점에서 조망할 때 가장 선명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로베르토 망가베이라 웅거의 견해를 좇아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개진하고자 한다. 즉 현재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착수하는 노동행위를 변혁에 대한 소명(a transformative vocation)을 실천하는 행위로서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김무디의 견해를 좇아서) 노동조합의 관심사는 기존의 관례적인 관심사를 넘어서서 (그것을 무시하지는 않더라도) 기본적인 노동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쪽으로 옮겨져만 한다고 본다.
웅거는 그의 거대한 사회 개혁 프로젝트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즉 “노동에 관한 3 가지 기본적인 아이디어가 현대의 세계에서 유효한데”, 명예로운 직업으로서의 노동, 도구적 필요로서의 노동, 변혁에 대한 소명으로서의 노동이 각각 그것이다. Roberto Mangabeira Unger, Social Theory: Its Situation and Task (Cambridge: Cambridge UP, 1987) 26-35.
이러한 3 가지 아이디어를 보면 사회에 대한 대조적인 이해,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가능한 것과 중요한 것에 대한 대조적인 비전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그 각각의 지적 기원과는 상관없이 노동의 의미를 숙고하고자 할 때 선택 가능한 대안의 방향을 우리들 모두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우선 노동을 “사회에서 공인된 명예로운 직업”으로 간주해 볼 수 있다. 예컨대 법률가, 의사, 교사 등은 ―그러나 기계 수리공, 광부, 조립라인 노동자 역시 포함될 수 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사회가 일상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를 진척시키는 형태로 사회를 위해서 필요한 역할을 충족하면서 당대의 사회적 과정에 대단히 중요하게 기여하는 것으로 자임할 수 있다. 그들 각각의 역할은 사회체계 내에서 점하고 있는 일정한 위상으로 인해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소중하게 기억되고 또 애착을 갖게 하는 특별한 종류의 품위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품위는 부정행위나 무능력 등으로 인해서 그 역할의 기대 수준에 부응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한 꾸준히 유지될 수 있다.
존 레인스와 도너 데이 로워는 인간의 노동 동기를 해설하면서 두 개의 하위 유형을 확인하고 있는데, 그 두 유형은 “성취”로서의 노동과 “서비스”로서의 노동이라는 범주로 각각 포섭해 볼 수 있을 것이다. John C. Raines and Donna C. Day-Lower, Modern Work and Human Meaning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6) 96-99.    
전자는 인간이 노력하고 참여함으로써 획득한 신분적 지위를 강조한다. 그러한 지위로 인해서 인간은 대중으로부터 박수갈채와 존경을 받을 수 있게 되고, 때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게 된다. 반면 “서비스”로서의 노동을 지칭하는 후자는 인간이 일을 하는 행위 그 자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수단으로서 그 일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더욱 강조하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선 대중의 인정과 명예 대신 잘 수행된 일에서 만족을 찾으려 한다.
노동 동기가 어느 쪽이 되었든 간에 명예로운 직업으로서의 노동은 안정된 형태로 주어진 사회질서를 전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한 사회질서는 상존하는 일단의 수요를 둘러싸고 조직된 것이었다. 사회질서가 원만하게 유지된다면 그러한 수요에 부응하는 것 자체가 곧 성취해야 할 일단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일들이 효율적으로 성취될 때 사회의 조화라는 결과와 보상이 뒤따르게 된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단체들한테서 노동에 대한 그러한 시각은 이제 구식이 되었다. 명예로운 직업으로서의 노동이란 시각은 도구적 필요에 의한 노동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점차 대체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노동이란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생계를 위해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에서 노동을 한다. 거기엔 일 그 자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쁨도 개인적인 만족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할 수 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시각은 정규직에 취업하고자 할 때 심각한 난관에 직면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른바 “최하층 계급”과 같은 사람들)이나 사회에서 “힘든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갖고 있을 것이다. 다음 책을 참고하라. Michael Walzer, Spheres of Justice: A Defence of Pluralism and Equality (New York: Basic Books, 1983) ch. 6, "Hard Work."
그러나 높은 수준의 급여를 받고 있는 사람들 역시 그러한 시각을 견지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불안정하고 안전성이 결여된 생산구조가 일반화되어 있는 관계로 노동자로서의 무력감과 소외감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욕구 및 공동체의 욕구와는 무관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체계의 하찮은 볼모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 레인스와 데이 로워는 도구적 필요로서의 노동의 범주를 “저주”(curse)로서의 노동과 “상품”(commodity)으로서의 노동이라는 두 개의 하위 유형으로 세분하고 있다. 저주로서의 노동에 대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오늘날 주말에 가서야 겨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시간은 그야말로 고통스런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평일의 저주를 잠시 유예할 수 있을 뿐이다. 힘든 노동의 결과가 가난이나 가난에 근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기쁘거나 수지에 맞지도 않을 것이며, 또 창의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거기에선 사회적 지위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보상의 조짐도 결코 확인해 볼 수 없다. … 그러나 무엇보다도 노동자가 그들 자신의 노동 조건을 변혁시키기엔 너무도 무력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결정적인 모욕이라고 할 수 있다. Raines and Day-Lower 100-01.


그러나 산업 자본주의를 주창하는 이데올로기에선 노동을 저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노동은 상품가치로 환산될 수 있는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데, 여타의 상품처럼 그러한 가치 역시 표면적으로는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그러한 가치는 순수하게 도구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노동자는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잠재적인 고용자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자원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그 고용자가 갖고 있는 주요한 관심사는 노동자를 인간으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조만간 사업에 상당한 이익을 갖다 줄 것으로 기대되는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물론 노동자 역시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은 노동자가 생산과정의 효율성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그 경우에도 노동자는 여전히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관리자의 통제를 받게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노동자들은 생산체제가 아무리 압제적이고 혐오스런 것으로 보인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생활비를 벌고자 한다면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그런 경우에도 노동시장 자체는 종종 불안정하고, 때에 따라서는 어떤 계급의 사람들, 예컨대 여성과 소수민족, 비숙련자와 장애자, 노인과 저학력자들에겐 노동기회가 불리하게 제공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케런 불룸퀴스트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노동 환경 그 자체는 곧 소외의 한 형태인데, 그러한 소외는 노동자가 변화 불가능한 것으로 주어진 그들의 주변 세계에 적응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Karen Bloomquist, The Dream Betrayed: Religious Challenge of the Working Class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0) 31. 블룸퀴스트 여사가 사회주의 전통의 노선에 입각하여 노동자의 소외를 묘사하고 있는 부분으로는 31-34 쪽을 참조하라.    

그러나 세계가 우리에게 “변화불가능 한 것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사회란 인간이 창조한 것이라고 웅거는 주장한다. 즉 사회는 구성된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해체될 수 있는 것이며, 다시 재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노동행위를 포함한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전적으로 자유스런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정할 수 있는 것이고, 또 혁신할 수 있는 것이다.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할 때 세계는 미완성된 것이며, 요한 바오로 2세가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의 노동이란 우리가 신의 창조활동에 ―나는 여기에 신의 구원활동을 추가하고 싶다― 동참하는 행위라고 간주할 때 비로소 적절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Pope John Paul II, Section 25, 142-44.
따라서 노동에 대한 세 번째 견해는 변혁에 대한 소명으로서의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과 우리의 이상에 대한 열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면서 변혁에 대한 소명으로서의 노동이라는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우리들의 자아를 확장하고 또 우리들의 삶에서 보다 높은 수준의 만족에 도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열망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열망은 보편적인 사회질서의 한계와 결함 앞에서 매번 제약을 받기 마련이다. 바로 이것이 세계의 다양한 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해방운동의 추진력이라고 할 수 있다. 변혁에 대한 소명을 갖고서 노동에 임한다는 것은 곧 기존의 노동구조의 한계를 밀치고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기존의 체제를 상대로 부단히 전개되는 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경우에 따라선 그러한 투쟁이 심리적인 투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곧 저항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저항은 어디까지나 내가 여기에서 제시한 시각에 입각한 것, 즉 인간의 노동이 완전히 협력적인 방식으로 수행되고, 또 삶의 공동체의 수준을 전반적으로 증진시키는 것이 가능한 세계를 잉태하기 위해서 전개되는 투쟁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사회 변혁의 가능성과 함께 등장하는 온갖 종류의 장애와 유혹의 와중에서도 일관되게 견지되어야만 하는 인간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다. Unger 30-35. 이러한 장애와 유혹에 대한 웅거의 설명은 비록 간략하기는 하지만 자세히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물론 특정한 상황에서 실천되는 투쟁이 얼마만큼 유효한 것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미리 예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러한 투쟁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역사의 진행방향이란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미래는 현재의 개별 행위를 통해서 상이하게 결정될 수 있다는 신념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환영하게 된다.
노동자는 그 자체가 단순한 피고용자, 즉 회사의 지시에 따라 사용되는 자원이 아니라는 전제가―설혹 그렇게 간주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변혁에 대한 소명으로서의 노동개념에 함축되어 있다. 노동자 역시 독자적인 행위의 주체이며, 따라서 그들이 소유한 욕구와 능력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노동자는 회사 경영자의 파트너이며, 따라서 사업의 결과는 순전히 부의 축적정도에 따라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자신을 포함한 인간 전체의 삶의 진보에 얼마만큼 기여했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만 한다.
노동을 이러한 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원대한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세계 각국의 모든 노동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기대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세계 인권 선언의 조항들을 떠받쳐주고 있다. 노동할 수 있는 권리, 적절한 노동 조건에서 일할 수 있는 권리, 자신과 가족을 적절하게 부양하기 위해 표준적인 생활수준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 휴식과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권리, 신체장애자가 사회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 모든 종류의 정당한 이익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는 권리 등등을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 인권 선언은 천명하고 있다.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New York: United Nations, 1948) Articles 22-25.    
현행 산업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관습과는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의미를 갖고 있는 이러한 원칙들은 노동자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적절하게 대변하고 있으며, 변혁에 대한 소명으로서의 노동에 내재된 핵심적인 의미의 중요한 차원을 구성한다.  
뿐만 아니라 변혁에 대한 소명으로서의 노동은 새로운 종류의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만 한다. 이러한 조합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일차적으로 기존의 노동조합에서 견지해 온 주요한 관심사, 예컨대 직업 안전, 임금, 연금, 작업장의 조건 등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모든 인간의 복지와 발전에 가장 최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생산 양식에 관한 의사결정 과정에 어떻게 하면 세계 각국의 노동자들이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를 질문해야만 한다. 이러한 방향전환을 김무디는 “사회 조합주의 운동”(social movement unionism)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Moody, Workers in a Lean World, 4.  
앨런 윌리스는 간결하지만 시사하는 바가 많은 한 요약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기업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노동 장려를 위한 복지제도”의 수혜자에서 고임금을 받고 있지만 통제를 받고 있는 전문직 종사자들에 이르기까지― 고객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국경의 제약을 받지 않는 어느 곳에서도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서는 투자, 무역, 기술, 생산, 고용, 노동의 구조와 조건 등에 관한 의사결정은 물론, 우리의 일상적인 노동활동과 전반적인 사회의 풍경에 (나는 여기에 생태학적 풍경을 추가하고 싶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업체의 모든 의사결정에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거기서는 저임금과 불안정한 고용뿐만 아니라 장시간 노동의 중압감, 권위주의적인 노동규칙, 위계적인 관리체계, 여성들의 “2교대 근무제도” 등도 개선하고자 한다. 요컨대 그것은 단순히 노동조건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운동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권을 요구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은 그 자체로서 경제와 문화를 구분하는 대중들의 불합리한 견해를 넘어서는 것이며, 흑인과 여성, 그리고 동성애자들의 해방운동을 경쟁자나 적대자가 아닌 자연스런 동료의 활동으로 간주한다. Ellen Wills, “We Need a Radical Left”, The Nation 29 June 1998: 20.


내가 이해하는 사회 조합주의 운동은 연대로서의 정의(justice as solidarity)라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강한 의무감을 통해서 규율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가능한 한 생산현장 내에서 노동자들 각자의 자아가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더욱 풍부해 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민주적 협력체제 같은 것을 창출해 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전은 현재 보편화되어 있는 산업 자본주의의 노동조건과 비교할 때 대단히 생소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거기엔 사회성의 원리(logic of sociality)가 함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Ⅲ. 사회성의 원리

우리는, 즉 너와 나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존재이다. 과정사상의 시각에서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본다면 모든 피조물은 어떤 단순한 방식으로 서로 분명하게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가 어떠한 이유로 그것의 삶을 분리해서 이해해 볼 수는 있다손 치더라도 말이다. 그들의 삶은 어느 일방의 삶의 질이 어느 정도는 타자의 삶의 질에 의해서 결정되는 방식으로 상호 의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삶의 본질적인 특성을 사회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은 과정사상의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니엘 데이 윌리암스는 바로 이러한 삶의 이해에 입각해서 수년 전 “사회성의 원리”에 관한 기본적인 방침들, 즉 그러한 이해에 함축되어 있는 내용의 전반적인 윤곽을 그려낸 바 있다.
우리는 먼저 이러한 원리의 틀 내에서 상호 창조성(mutual creativity)과 상호 침투성(embeddedness)을 인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창조성에 착안할 때 우리는 삶의 부단한 전개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체로서 존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참여과정에 우리의 과거로부터 추출해 내고 또 우리의 미래가 투사되어 있는 일단의 밀집된 복잡한 관계를 결부시킨다. 우리의 정체성이란 바로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었다. 요컨대 우리의 행위는 과거의 경험의 하중과 결코 무시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아우르면서 성립하고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는 재귀적인(reflexive) 성격을 띠고 있다. 우리의 행위의 결과는 다른 사람들의 삶의 조건들, 예컨대 그들이 어떻게 느끼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등에 영향을 줌으로써 그들의 삶 자체에 일정한 충격을 가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는 우리들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반작용의 효과도 갖고 있다. 우리들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들 자신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또한 우리들의 행위는 우리들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윌리암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고용주가 자신의 종업원에게 행하는 행위는 고용주 자신의 품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한편, 삶의 과정이 전개됨에 따라 인간관계의 양상 또한 새롭게 이동하고 변화하면서 새로운 환경,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요구와 의무 등을 창출한다. 이로 인해 특정 시점에서 효과적인 것으로 증명되었던 것이 다른 시점에선 비생산적이고 부적합한 것이 될 수 있다. 새로운 기회는 새로운 의무를 가르쳐준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은 현재 통용되고 있는 모든 종류의 노동 양식과 판단을 창조적인 노동 과정의 매력과 안내에 민감하도록 적응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우리가 사람들 간의 관계의 양상을 확장시키고 심화시킬 때 우리의 삶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우리가 타자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면 취할수록, 그들의 역사와 관심사를 수용하면 수용할수록, 우리들 자신의 것을 보다 많이 제공하면 제공할수록 우리는 그러한 경험들을 우리들 자신의 것으로 더욱 깊이 통합시킬 수 있게 되며, 이로 인해 우리들의 삶 또한 더욱 풍요로워지게 된다. 이러한 형태의 수준 높은 자각은 긴장과 갈등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과 사회 양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꾸준히 확장되는 경험”을 장려하고 진작시키기 위해선 “사회에 새로운 인간과 자유, 그리고 사회 전체의 삶에 새로운 가치를 투영시킬 수 있는 사회구성원들의 자발성이 갖춰져 있어야만 한다”고 윌리암스는 지적한다. Daniel Day Williams, “A Philosophical Outlook”, Essays in Process Theology, ed. Perry LeFevre (1970; Chicago: Exploration Press, 1985) 17.  
뿐만 아니라 우리를 갈라놓기 쉬운 모든 종류의 경계를 넘어서는 상호 존중과 상호 조력의 가치도 함께 요구된다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네 가지 특성들, 즉 과거의 경험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아우르면서 성립하는 행위, 재귀성, 창조성, 상보성 등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아에 고유한 특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우리의 삶이 전개될 때 표출되는 경험적 특징이다. 그러나 거기엔 규범적인 요소도 존재하고 있는데, 이들은 우리들의 삶의 활력이 강화될 수도 있고, 쇠퇴할 수도 있는 시기와 방향을 묘사해 주고 있다. 예컨대 도덕적 충동은 삶의 활력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런데 이것은 앞에서 인용한 버나드 밀랜드의 주장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었다.

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각 개개인의 경험을 진정으로 대체하는 것이고, 따라서 개개인의 독립된 자아를 소외시키거나 소원하게 할 위험을 제공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궁극적인 자아를 체험할 수 있는 삶의 기회를 각 개인들에게 열어주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자아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우리의 확장된 자아와 우리의 커다란 자유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이로 인해 우리와 타자는 생명력의 정수를 함께 경험하게 된다. 이런 생명력은 우리와 타자 어느 한 쪽도 혼자서는 결코 이해할 수도 체험할 수도 없는 것이다. Meland 206.

    
밀랜드는 이렇게 진정한 생명력으로 충만한 관계에서 체험할 수 있는 감수성의 깊이를 우리가 생존, 안전, 복지 등의 분야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관심사를 충족하기 위해 만들어낸 보다 공리적인 형태의 사회성으로부터 조심스럽게 구분해 내고 있다. Meland 233-34.
마치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에서 체험할 수 있는 순간과 주식시장의 거래소에서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을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관심의 수준을 그렇게 양분하고 싶지 않다. 계획의 단계가 되었건 결과의 단계가 되었건 최소한 우리가 만들어낸 공리적인 형태의 사회성을 통해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보다 깊은 형태의 감수성이 저해되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위해 금지의 원칙(no-harm principle)에 명백하게 함축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최소한의 의무사항을 뛰어 넘는 진보를 이룩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서 나는 삶의 정신과 결부된 민감성의 가치가 우리의 삶을 규율하는 원칙 및 영속적인 관심사로서 우리의 일상적인 제도에 광범위하게 침윤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제안하고 싶다.  
밀랜드는 법 앞의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사회성의 본질적인 특성에 “근사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이러한 전망을 다소간 조심스럽게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제대로 이해된 민주주의의 원칙은 그 자체가 사회성의 원리를 명백하게 함축하고 있는 것이며, 밀랜드가 갈구했던 확장된 자아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제안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나는 사회적 원칙으로 정의되는 민주주의와 일단의 정치적 제도로 정의되는 민주주의를 구분했던 존 듀이를 심중에 두고 있다. 사회적 원칙으로 정의되는 민주주의란 바로 “공동체의 삶을 구상하는 것 그 자체” John Dewy, The Public and its Problems (Chicago: Swallow Press, 1954) 148.  
라고 할 수 있다. 듀이는 개인과 단체 양자의 관점에서 이러한 원칙의 윤곽을 다음과 같이 개관하고 있다.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개인이 속한 단체의 활동을 조직하고 지휘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 그리고 단체의 존속에 필요한 가치를 실천하는 것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단체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단체에서 공유하고 있는 이익 및 재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단체의 구성원이 보유한 잠재능력을 해방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 개별 인간은 여러 단체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세부지침은 상이한 단체들이 여타의 단체들과 충분히 유연하게 상호 교류를 할 때에 한해서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Dewy 147. 이 인용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3가지 특징은 애이브러햄 링컨이 개략적으로 정의한 민주적 통치(democratic governance)의 구성요소들과 대단히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i) 효과적인 참여 = 국민에 의한 정부, (ii) 공평한 분배 = 국민을 위한 정부, (iii) 합의에 기반을 둔 정당화 = 국민의 정부. 민주적 사회란 사람들이 그들의 차이점과 갈등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궁극적으론 사회의 공동 구성원이라는 확신을 견지하고, 또 그들의 사회적 정체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끊임없는 삶의 모험과정에서 서로 협동하는 역동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원칙으로 정의되는 민주주의는 ―내가 “활력이 넘치는 민주주의”라고 지칭하는 이것은 개인과 단체의 확고한 참여를 통해서 생명을 유지한다― 현대 미국의 정치적 수사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자유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개념과 두 가지 측면 결정적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그들의 이면에서 자리하고 있는 전제가 상이하다는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는 인간을 상호 분리된 존재로 파악하는 사회적 존재론(a separatist social ontology)에 입각해서 성립한 것이었으며, 이곳의 주요한 관심사는 사적 이익을 최대한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사회적 원칙으로 정의되는 민주주의는 인간을 상호 연관된 존재로 파악하는 사회적 존재론(a relational social ontology)에 입각해서 성립한 것이었으며, 여기서는 사람들 간의 상호관계를 질적으로 향상시키고, 세계의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음 자료를 참조하라. Benjamin Barber, Strong Democracy: Participatory Politics for a New Age (Berkeley: U of California P, 1984). 다음 자료도 참조하라. Carol C. Gould, Rethinking Democracy (Cambridge: Cambridge UP, 1988).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사회적 존재라는 입장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있는 이 두 저자는 듀이 및 이 논문에서 의도한 민주주의 개념과 대단히 유사한 개념을 구성해 내고 있다.

두 번째로 그들은 응용분야에서도 상이하다. 자유 민주주의의 경우 거의 배타적으로 정부 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정당, 선거, 표현 및 결사의 자유), 사회적 원칙으로 정의되는 민주주의는 가족, 학교, 시민단체, 종교 공동체, 경제 제도 등과 같은 모든 형태의 인간의 결사를 효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이상에 주목한다.
민주주의의 원칙을 좁게 정의된 정치의 영역을 넘어서서 여타의 결사체까지 확장시키는 아이디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17세기 및 18세기의 근대 민주주의 혁명은 특히 정치적 통치 영역에서 통용된 전통적인 지배양식과 싸우면서 발생한 것이었는데, 당시 바로 그곳에선 포악한 행위의 충격을 격렬하게 체험해야만 했었다. 인민에 대한 깊은 관심을 호소했던 민주주의적 아이디어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정치권 밖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이와 관련해서 어네스토 라클라우와 챈털 무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다양한 사회주의적 담론을 통해서 정치적 불평등을 비판하는 대신 경제적 불평등을 비판하는 관심의 전이가 발생하였다. 여기서는 상이한 형태의 인간의 종속을 문제시하였으며, 새로운 종류의 인간의 권리를 요구하였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는 민주적 혁명에 내재한 또 하나의 국면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Ernesto Laclau and Chantal Mouffe, Hegemony & Socialist Strategy: Towards a Radical Democratic Politics (London: Verso, 1985) 156.
 

라클라우와 무페가 제기한 논점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광범위한 영역의 해방운동, 예컨대 노예제도 폐지론과 여성 해방운동, 식민지 반대론과 소수민족 옹호론, 심지어는 평화운동 및 생태운동까지도 모두 동일하게 민주주의 운동, 즉 인간에 대한 지배구조를 반대하고, 인간의 상호관계에서 공동체적 연대감을 더욱 증진시킬 수 있는 운동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당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헨리 왈라스(Henry Wallace)가 제기한 주장을 참고해 보라. “새로운 민주주의, 즉 보통사람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는 권리장전(the Bill of Rights) 뿐만 아니라 경제적 민주주의, 소수민족 민주주의, 교육 민주주의, 남녀를 대우하는 데 있어서의 민주주의(democracy in the treatment of the sexes) 등까지도 포함한다”(qtd. in Martin Carnoy and Derek Shearer, Economic Democracy: The Challenge of the 1980s [Armonk, NY: M.E. Sharpe, 1980] 375).
* 스텀은 민주적 혁명의 구체적인 사례로서 간디(Mohandas Gandhi) 및 킹(Martin Luther King, Jr.) 등이 실천한 바 있는 비폭력 혁명(nonviolent revolution)을 예시하고 있다. 스텀과의 인터뷰(2003. 12. 15). (역자주)
해방운동은 그것을 촉발시키는 동기의 측면에서 볼 때 확실히 저항적인(oppositional) 성격을 띠고 있다. 해방운동은 고압적인 적대자들과 갈등관계에 놓이게 되며, 따라서 그것은 일견 분리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다. 해방운동이란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또 인간을 억압하는 분규의 체계로부터 독립하려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분리주의는 종종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지만 보다 건설적인 형태의 상호의존성을 쟁취하기 위해선 어쩔 수없이 필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민주적 혁명(democratic revolution)*을 추진하는 내적 동기이자 궁극적인 의도이다.
활력이 넘치는 민주주의는 사회성의 원리에 내재된 규범적 함축을 상세하게 풀이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현재의 시점에서 삶의 공동체가 번영할 수 있는 방안을 조금이라도 모색해 보고자 한다면, 활력이 넘치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현행 사회제도의 재구성 방향을 안내하는 지도원칙으로 진지하게 수용해야만 한다. 특히 그것은 세계 각국의 노동조건이 지금과 같이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의 경제제도를 근원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지도원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판단의 배경엔 노동문제의 중요성이 충분히 이해되어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변혁에 대한 소명으로서 실천되는 노동의 의미에 내재된 핵심적인 목표, 즉 노동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은 작금의 근본적인 노동구조를 활력이 넘치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부합하는 형태로 다시 주조해 낼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혹자는 이러한 주조행위를 “경제적 민주주의”(economic democracy) 그동안 경제적 민주주의를 탐사해 온 몇몇 주요한 연구를 예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Carnoy and Shearer, Economic Democracy: The Challenge of the 1980s; Samuel Bowles, David M. Gordon, and Thomas E. Weisskopf, Beyond the Waste Land: A Democratic Alternative to Economic Decline (Garden City, NY: Anchor Press/Doubleday, 1984); Samuel Bowles and Herbert Gintis, Democracy and Capitalism (New York: Basic Books, 1986); Kenneth M. Dolbeare, Democracy at Risk: The Politics of Economic Renewal (Chatham, NJ: Chatham House Publishers, 1984, 1986); Peter Bachrach and Aryeh Botwinick, Power and Empowerment: A Radical Theory of Participatory Democracy (Philadelphia: Temple UP, 1992); Stanley A. Deetz, Democracy in An Age of Corporate Colonization (Albany: State U of New York P, 1992); and Robin Archer, Economic Democracy: The Politics of Feasible Socialism (Oxford: Clarendon, 1995).
 돌비어(Dolbeare)의 설명에 따르면, “경제적 민주주의자들은 경제를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힘의 총체 대신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고 있는 일단의 사회적 관계로 파악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작금의 경제체제에 내재된 낭비적, 소외 지향적, 파괴적 특성을 비판한다. 대신 그들은 인간을 주체적 존재로 격상시키면서 경제 및 사회를 완전히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하고자 노력한다.” (9)
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명칭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이런 것이다. 즉 “타자의 전존재의 의미(a sense of full being)에 기초해서 나의 전존재의 의미를 육성하는 것, 즉 우리의 인간성을 정의하는 특성과 능력이 영합(zero-sum)적이라기보다는 합합(sum-sum)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있어서” Bachrach and Botwinick 31.
지금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작업환경을 우리의 작업장에서 창출해 내는 것이다. 오직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거대한 공동체의 전반적인 경제활동 내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적절한 지위를 복원시켜 줄 수 있다. 오직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만 우리의 노동세계는 우리의 확장된 자아를 역동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개별적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도 체험할 수도 없는 “생명력의 정수를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번역 및 역주: 이현휘 (고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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