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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3/02 (18:29) from 80.139.182.233' of 80.139.182.233' Article Number :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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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학에서 육체학(somatics)으로?--상승인가 추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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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학에서 육체학(somatics)으로?--상승인가 추락인가?

이정희




0.
내가 신학하는 태도는 한마디로 건성이다. 어디 새것 있는가 눈을 반짝이고, 대충 훑고, 후미진 데서 두리번 거리고, 비틀고 빈정대고 패러디하고, 당연한 것을 기괴한 것으로 과장하고. 그래서 내 뇌는 정리되지 않은 쓰레기통이다. 글을 쓰고 보면 그 쓰레기통을 뒤집어 쓰레기를 늘어놓는 것 같다. 정치하지 못하고 가닥도 없고 감정적이고 반논리적이다. 나의 이 따위 공부(?)와 글쓰기 아비투스는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벗어나지 못하는가? 부끄럽지만, 박사학위 없는 데도 잘난 채 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나의 심장 맥박이 빨라지고, 그러니 얼굴은 화끈거리는데 살갗에는 소름이 돋는다. 나의 글쓰기는 손가락과 눈을 매개로 뇌에 기억된 데이터를 꺼내면서 가닥을 잡아 종합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소위 박사학위는 사회적 상징 자본일 뿐이다. 그런데 왜 부끄러운가? 그것은 글쓰기가 일어나고 유통되는 사회적 장의 문법(율법)을 거스르고 있다는 자기 검열 의식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내면 의식이 왜 몸으로 표현되는가? 글쓰기 위해 꺼내는 데이터가 손과 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눈과 다른 감각을 통하지 않은 데이터의 기억은 없다. 뇌세포를 분해해 본들 기억된 데이터가 추출되는 것도 아니고, 뇌세포 없이 데이터가 기억되는 것도 아니다. 나의 현상학적인 정체는 우선 우주의 역사 에서 오직 하나 뿐인 나의 몸으로 드러나고, 내가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은 나의 뇌에 기억된 데이터를 통해서이며, 나와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나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데이터를 통해서다. <공각기동대>는 이런 정체성에 대해 묻는다. 나의 뇌에 기록된 데이터를 그대로 다른 몸에 카피한다면 그의 정체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아니, 유기체적 물질에 의해, 사회 공간과 사회적 장의 아비투스에 의해 규율된 내 몸은 누구인가(ꡐ무엇인가ꡑ가 아니라)? ꡐ영성ꡑ은 이러한 내 몸을 초월한 무엇인가? 그렇다면 신은? ꡒ신체 밖에서 생명과 경험 현상의 근거를 주려는 미신, 말하자면 독립된 초자연적 매체, 정신 또는 영혼이 신체와 그 행동에 영향을 주고 일부나마 통제한다는 미신....정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기계론자나 유물론자의 미신...ꡓ(베이트슨, 74)...... ꡒ유물론이라는 스킬라(Scylla)와 낭만적 초자연주의라는 카리브디스(Charybdis) 사이 어느 지점에 종교의 자리가...ꡓ(90). 그곳은 어디인가? 물질적 뇌세포 없이는 불가능한, 논리적[이성적] 글쓰기에 돋는 소름, 그 어디에 영성 혹은 신의 자리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도대체 오늘 몸-신학의 자리는 어디인가? 신학은 육체 밖에서 육체에 ꡐ대해서ꡑ 할 말이 있는가? 아니, 오늘의 몸-담론에 개입할 수 있는가? 그 토대는? 신학은 몸으로부터 신을 말할 수 있는가?
성서의 이야기 하나를 패러디해보자: ꡒ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게 ꡐ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ꡑ 하고 물었다. 예수게서 대답하셨다. ꡐ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ꡑꡓ(요한 9:1-4).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장님이었다. 낙심할 부모와 장애인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 안타까워 의사는 아이의 체세포에서 건강한 것 하나를 축출하여 속성으로 성장시켰다.(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이든가?) 눈먼 아이는? 의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했다. ꡒ인간에게 은총으로 베푸신 놀라운 의료 능력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드러나게 하셨습니다.ꡓ 이 패러디는, 오늘 성행하고 있는 성형수술을 받은 오십 넘은 한 여신도가, 성형수술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의료 능력이라고 말하는, 한 텔레비전의 현장취재 방송을 보면서 생각한 것이다. 생명 복제는 몸의 복제다. 신학은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그러나 이 글의 관심은 신학적 몸 담론을 조망하려는 것이 아니라 육체[담론]의 신학적 성찰을 민중신학으로 포월하려는 작업의 일부다.

1.

ꡒ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무시될 수 있으며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루어지고, 삼인칭으로 이야기되곤 한다ꡓ(존 헐, 61).

몸(육체)을 글쓰면서 육체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나는 유잉(William A. Ewing)의 사진집 『몸』(The Body: Photographys of Human Body)을 끊입없이 뒤적이고 있다. 기술적으로, 예술적으로 메타모르포시스되지 않은 사진들에 가능한 초점을 맞추어 본다. 중절당해 포르말린 액에 담긴 아기 몸, 육탈해버린 시체마냥 말라 비틀어진 한 가족, 찢기고 뚫린 채 구덩이에 처박혀 있는 군인들, 쾌락을 자극하는 에로티시즘, 단련되어 균형잡힌 육체, 비만으로 살이 고깃덩이처럼 부풀어 침대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는 몸, 박덩이처럼 부푼 임신부의 배, 늙은 할머니의 누름지고 늘어진 젖가슴과 음부, 요가의 자세처럼 등허리를 뒤로 완전히 구부려 원을 만든 서커스단의 소녀, 피부병이 뒤덮고 있는 몸, 성교하는 남녀 등등. 몸은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내 이웃을 사랑하라』 제목 속에서, 인간이 망가지고 부패하면, 인간이 인간의 육체에 가할 수 있는 폭력이 무엇인지, 그 폭력에 부서진 육체가 어떤 것인가를, 인간은 그러한 육체에 대해서조차 얼마나 무관심할 수 있는가를 보스니아 내전을 통해 기록하고 있는 처철한 책을 읽는다. 저자는 ꡒ20세기 말에 인간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가?ꡓ 하고 반문하면서, 한 보고서를 인용한다.

ꡒ사진을 갖고 있던 군인이 제일 먼저 그녀(19살 여학생)를 강간했다. 여학생은 저항하며 그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그는 그녀를 물어뜯고 얼굴을 때렸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그가 총대로 그녀의 뺨을 세게 내리쳐 엄청나게 아팠다. 또 다른 군인은 피부를 벗겨내겠다는 듯이 칼로 그녀의 젖가슴을 가로 그어피가 흐르는 생채기를 남겼다. 그 후 기절할 때까지 그녀는 여덟 명의 군인들에게 더 강간을 당했다ꡓ(피터 마스, 95).

ꡒ증인은 코자크라 출신으로 스즈키 오토바이를 소유하고 있던 한 젊은 무슬림 남자가 다른 죄수들 앞에서 고문 당했다고 진술했다. 경비들은 그의 전신을 심하게 구타하고 이빨이 다 빠질 정도로 두둘겨 팼다. 그런 다음 경비들은 전선 한 끝을 그의 고환에 단단히 묶고 다른 한쪽은 그의 오토바이에 묶은 다음 경비 한 사람이 오토바이를 몰고 갔다ꡓ(상동, 89).

전쟁이 육체에 가하는 폭력의 잔혹성, 잔인한 고문의 나열과 서술 그리고 고발이 전쟁과 고문을 억제하거나 제거할 수 있었다면, 인류의 역사에 그러한 것들은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지구상의 종교의 신앙적 실천과 신앙 이론으로서의 종교 담론이 그러한 것들을 억제하거나 제거해 왔는가? 낯간지럽고 허탈한 물음일 뿐이다. 더욱이 현대의 발달된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전쟁에서는 인간의 육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ꡒ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무시될 수 있으며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루어지고, 삼인칭으로 이야기되곤 한다ꡓ(존 헐, 61). 이 말은 비단 장애인의 상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거리 미사일의 표적은 지도상의 좌표일 뿐이다. 물론 그 좌표에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의식하겠지만, 보이지 않기에 인간의 ꡐ육체ꡑ는 없다. 전쟁은 인간의 육체가 극단적으로 분명하게 소거되고 제거되는 사건이다.
한 마리 나비의 날개짓이 태풍을 몰고 온다. 이 역설적 메타포는 육체-담론에 부정적으로도 긍정적으로도 환유될 수 있다. 이 나비가 제국의 자본가인가 가난한 사람인가에 따라 태풍의 성격이 달라진다. 부자 나비의 날개짓은 전쟁을 일으키고 가난한 나비의 날개짓을 혁명과 개벽을 불러일으킨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 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 하며,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들려오는 창녀의 흐느낌은
늙은 영국의 壽衣를 짤 것이다.(<순수의 전조>)

물론 한 마리 나비의 날개짓은 온 생명 현상의 우주적․지구적인 횡단적 연계성(transversality)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류 모듬살이 역사에서 인간의 육체가 폭력적으로 제거된 것은 언제 어디서나 가난한 사람들의 육체였다. 후기 산업사회의 포스트 패러다임에서 육체 담론은, 비록 육체가 소비 사회의 주체이면서 대상으로 전장(戰場)이기는 하지만, 육체의 배제와 박탈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담론의 초점은 소거/제거되고 망가진 육에 있지 않다. 정화열의 육체 담론은 그 한 예를 드러내고 있다:

ꡒ신체 해석학은 몸의 실천적인 삶을 강조하면서 근대성의 제한된 한계를 뛰어넘는 해석의 철학적 학문이다. 몸의 정치는 살로서의 몸에 유념하기 때문에 육체적이다. 더욱이 몸의 정치를 읽는 것 자체가 말을 살로 만드는 육체적 행위이기 때문에 육체적이다. 신체의 해석학은 실천의 무한한 광장으로서의 몸과 함께, 몸을 통해서, 그리고 몸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한다. 몸의 정치는 침뭄과 몸짓에서부터 언어에 이르기가지, 웃음에서 카니발리즘과 폭력에까지, 문신에서 고문까지(William T. Cavanaugh, Torture and Eucharist--Theology, Politics, and the Body of Christ, Blackwell 1998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고문과 살해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황해도 신천의 학살, 광주학살은 언제 어떻게 신학적으로 성찰될 것인가?), 병원에서 감옥까지, 먹는 것과 다이어트에서 말하기가지, 나체에서 의복까지, 보디빌딩에서 탈취제와 화장까지, 할레에서 전족까지, 아라비아의 배꼽춤에서 일본의 게이샤까지, 가라데에서 참선까지, 권투에서 페미니즘과 해방신학까지, 장애자에서 인종차별까지, 에로틱에서 죄책감까지, 건강유지에서 불멸성까지, 또한 이 이상에까지 이르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ꡓ(비코, 100).

육체의 현상학적 성찰이 육체 문제에 기여하는 바를 간과할 수 없지만, 문제는 고통받는 육체의 중심에서부터 육체를 성찰하는 데 있다. 민중의 고난은 바로 고통당하는 민중의 육체다. 고통받는 민중의 육체에, 민중의 육체적 고통에 신학은 할 말이 있는가? 고통받는 육체의 중심에서 정화열의 말하는 ꡒ실천의 무한한 광장ꡓ을 성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따지는 일, 이 글은 그것을 겨냥한다.

2

ꡒ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아담이 자신의 성기를 무화과 잎으로 가리는 그 유명한 몸짓은 아담이 성기가 있음을 부끄러워한다는 단순한 사실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성기가 자신의 동의없이 꿈틀거린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발기한 자지란 신에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통제되지 않는 성을 신에 대한 아담의 관계 즉, 반역자의 관계로 동일시하는 것이다.ꡓ(미쉘 푸코)

다음 진술은 정당한가?: ꡒ1960년대는 육체 해방의 시대였다. 2000년도 더 전부터 유대-기독교의 전통은 머리로 인지하는 세계와 마음으로 감지하는 세계를, ꡐ관념ꡑ의 미와 본능의 추를, 정신과 물질을, 영혼과 육체를 서로 대립시켜 왔다ꡓ(뤽 페리, 163)
한마디로 현대 기독교/신학은 몸에 대해서는 관음증 환자다. 쾌락(오르가즘 혹은 엑스타시)이 수반되지 않는 성교를 통해서만 자식을 번식하라는 성윤리가 지배하는 교회 사회에서 몸이란 달팽이 집 같은 갑각류의 껍질일 수 있다. ꡒ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된 사람도 있다ꡓ(마태 19:12)는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고 믿은 오리게네스는 스스로 거세하고 말았는데, 말년에 웃기는 말 한 토막 남겼다고 한다: ꡒ만일 ꡐ죽이는 글자, 살리는 영ꡑ이라는 경구를 적용해야 하는 다른 구절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특별히 이 구절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ꡓ(클레브노, 172). 자승자박, 자업자득이었는가? 몸-담론의 서두에는 대부분 반성과 비판이 자리잡는다. 한마디로 육체가 악마가 아니라 기독교가 육체의 악마, 원수다:

ꡒ우리(유럽인)에게는 아직 익숙지 않은 종교나 수행을 통해서 병을 고치거나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조금 생소한 지혜를 추구하고 그것을 적용하려는 분위기도 그와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지난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성서 해석이 몸에 대해서 적대적이었음을 감안할 때,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여성들은, 우리의 전통이 몸과 관련된 영성의 영역에서 얼마나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는지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역사적 경험은 일반화되고, 구체적인 사건이 알레고리화되고, 물질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 되고, 땅의 것은 하늘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예컨대, 이 과정에서 인간의 목구멍이 영혼으로 돌변했다. 이제 우리는 그 영혼을 목구멍으로 되돌려 놓으려 한다.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몸에 대한 존중은 모든 인간의 권리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ꡓ(Silvia Schroer/Thomas Staubli, xiii)

몸에 대해 성서가 적대적이었는가, 성서 해석이 적대적이었는가? 해석자는 누구이고, 왜 적대적이었는가? 이 물음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서는 서구 신학사 전체를 뒤지고 뒤집어야 할 것이다. 서구 근세에 이르기까지 이단심문과 마녀사냥에 이르기까지, 식민 제국의 건설을 기독교 제국의 확장으로 정당화하면서 감행한 제노사이드까지, 그들은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성서 구절을 몰랐을까? 물론 그 몸은 그리스도인의 몸에만(특히 남성 도그마크라트들의 몸에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는 말이었을 것이다.

ꡒ사멸한 예수의 육체에서 영혼이 부활한다고 믿었던 중세의 기독교 전통은 정신을 세계와 자연의 일부분으로 ꡐ영원한 것ꡑ으로 간주한 반면, 육체는 ꡐ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ꡑ으로 간주하였다ꡓ(장미경, 188).

이러한 진술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인접학문의 통념인가?

ꡒ2천년 동안 플라톤 철학을 보급하고, 『파이드로스』를 그리스도교화하여 읽은 결과 육체를 도구가 아니라 인식의 방해물로 보도록 하였고, 실제적인 인식의 특수성을 무시하게 만들었다. 이 특수성은 인식의 단순한 장애물이거나 초기 학문으로 취급된 것이다ꡓ(부르디외, PM, 199)

누가, 신학이 철학이, 그 둘 모두, 공모하여? 플라톤 철학에서, 그리고 신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맥에서 육체는 왜 그렇게 인식되었는가?

ꡒ플라톤주의, 신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ꡐ안경ꡑ을 끼고 성서를 읽다보니 여성에 대한 성서의 가부장적 입장이 강화되었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의 신플라톤주의는 긍정적인 여성상을 허용했으나, 그것은 예외에 불과했다.ꡓ(엘리자벳 괴스만)

ꡒ플라톤주의, 신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ꡐ안경ꡑꡓ을 벗으면 우리는 육체를 올바르게 볼 수 있는가? 그런 안경을 쓴 사람들은 누구이고, 왜 그런 안경을 써야 했는가? 안경을 벗기만 하면 육체는 되살아나는 것인가?
서양 사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ꡒ몸은 늘 철학의 담론에서 고아였다. 주류 서양 사상은 신체를 어두운 석굴 혹은 어두운 대륙이라고 주장했고, 신체를 벗어난 불멸을 옹호하면서 신체를 덧없고 소멸하는 상품이라고 매질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다. 희랍 사상만이 아니라 기독교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엄격하고 금욕적인 기독교인이자 신학자였으며 스스로 자신의 성기를 거세했던 오리게네스는--거세는 그 당시 흔한 일이었다--신체를, 더욱 구체적으로는 성을 순간적인 현상으로 묘사했으며, 육으로부터 영혼을 정화시킨다는 종말론적인 희망을 암시한 적이 있다ꡓ(정화열, 240)(보충 참고문헌 목록 1)
ꡒ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몸에 대한 존중은 모든 인간의 권리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ꡓ고 말한다. 누구의 몸을 말하는가? 기독교인의 육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타종교인, 불신자의 몸도 그러한가?  ꡒ[예수의] 육화는 모든 죄를 없애기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막중한, 적어도 보편적인, 다시 말해 모든 인간에게 퍼져 있는 원죄(peccatum originale)를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한 것이다(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III, 1.4, 381). ꡒ막중한, 보편적인 인간의 원죄ꡓ는 누가 누구를 향해 발언할 수 있는가? 이 발언의 효과는 무엇인가? 인간 현실에 대한 보편 담론이라고 오늘도 기독교-신학은 주장할 수 있는가? 아니, 강제할 수 있는가?
기독교-신학은 스피노자, 포이에르바하, 니체, 맑스를 통해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성찰하지 않고 아나테마해버렸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인간에 대한 성찰도 반신적 적대자로 규정했다. 미학과 문예학, 예술의 인간에 대한 고통스러운 통찰과 재현도 이방인의 담론일 뿐이었다. 기독교-신학은 결국 게토화된 사유․언어․담론으로 담을 쌓았다. 어쩌면 신학은 그렇게 자기 정체성․동일성을 확대 재생산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학문 체계일 수도 있다. 학문적 횡단성의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종교학의 새로운 성찰적 자리매김을 바깥에서부터 요구해옴에도 신학은 오불관언이다.
오늘의 [인문] 학문이 경계 확장과 세분화에 따른 갈등과 위기를 넘어 참으로 ꡒ현실의 산 힘ꡓ이기 위한 설자리와 길 찾기를 모색하고 있는 조동일은 종교학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조동일은 지금까지의 종교학은 특정 종교에 치우거나 편파적이지 않으려고 종교를 종교답지 않게 다루는가 하면, 학문의 객관성과 논리적 타당성을 갖추는 대가로 종교문제의 심각성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기에 각 종교가 다른 종교들과 함께 주체성을 가질 수 있는 관계의 논리를 찾아내고 투쟁과 화합이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밝혀야 근대 학문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주체성 때문에 남의 주체성을 부인한다는 것도, 서로 공존하기 위해 다른 점은 덮어두고 공통점만 부각시키커나 투쟁은 그만두고 화합하는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도 부당하다고 본다.

ꡒ투쟁이 화합이고 화합이 투쟁이고, 생성이 극복이고 극복이 생성임을 방법과 실천에서 밝혀 논하는 생극론(生克論)으로 그 두 가지 잘못을 한꺼번에 시정해야 한다....새로운 종교학을 일으키면서 종교학의 연구대상을 엄밀하게 규정하고, 종교학이 다른 학문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영역을 분명하게 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독자적인 연구방법을 갖추어 숭상하는 것은 더욱 경계할 일이다. 종교는 문화의 다른 영역과 서로 구별될 수 없게 얽혀 있고,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사회적인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 연구할 수 있다. 종교학이 곧 역사학이고, 종교학이 곧 정치학이어야 한다. 인문학문의 종교학이 사회학문의 종교학으로 바뀌어야 한다ꡓ(<<인문학문의 사명>>,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270-272).

이런 논리에 대해 신학을 종교학 내지 역사학이나 사회학, 정치학으로 환원하려는 것이냐, 내 경계 안의 것에 네가 무슨 전문가라도 되느냐 네 것이나 잘 지켜라 성토할 수 있다. 그러한 경계 지키기를 방관하거나 강화할 때 신학은 ꡒ현실의 산 힘ꡓ으로 동능화(動能化; energizing)할 수 없다. 오늘 신학의 한계는 ꡐ역사적 상상력ꡑ의 결핍에 따른 것이다. 결핍의 원인은 기독교사 혹은 교회사를 울타리 쳐버리거나 온 세계를 선교 이데올로기로 기독교화(타자를 부정하는 자기 동일성 확대재생산) 하는 데만 몰두함으로써, 현실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걸어 온 살림의 힘 혹은 죽임의 마성적 권력을 투명하게 바라보기를 거부한 데 있다. 예를들면,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오랫동안 금서로 규정한 로마 교황청이나, 그것을 영화화한 마틴 스콜세즈의 영화에 대한 기독교의 거부감은 결국 오늘날 학문의 횡단적 연계성에 대한 기독교-신학의 배타적 자기 동일성이 얼마나 반시대적(?)인가를 드러낼 뿐이다.
이러한 기독교-신학의 아비투스는 어쩌면 전통적인 기독교의 인간 이해, 신학적 인간학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서구 철학사와의 연관 속에서 전개되어 온 신학적 인간학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ꡒ성서적 인간학이라는 거대한 분야에 비하면, 지금부터 우리가 접근하려고 하는 몸과 육체성이라는 테마는 하나의 단면에 불과하다ꡓ(Silvia Schroer/Thomas Staubli, Die K쉚ersymbolik der Bibel, xiii)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육체 담론은 인간학의 하부구조처럼 이해된다.  그런가 하면 판넨베르크는 『신학적 인간학』(Anthropologie in theologische Perspektive. 이 연구는 철저히, 그리고 진솔하게 서구적이다; 분도출판사, 1996)에서, ꡒ비신학적 인간학의 연구와 그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과제는, 창조론에서 아담의 원초 상태와 타락을 가르치는 전통적 교의신학에서의 인간 이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유념할 것은 이 두 가지 주제를 원초상태와 타락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이론과 동일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ꡓ(19)라고 말한다. 적어도 기독교 세계인 서구에서조차 더이상 신학적 인간학의 큰 범주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인간의 피조성과 타락(죄) 그리고 구원이라는 틀 속에서 교리적으로 인간에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그는 생리학, 심리학, 사회학, 역사학, 문화인류학을 횡단한다).
신학이 인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근거와 그 말의 타당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우리는 불트만 신학 영향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없다: ꡒ[바울 신학은] 신의 본질 자체를 다루지 않고 오로지 신이 인간과 그의 책임, 그의 구원을 위해 중요한 만큼 신을 다룬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세계와 인간도 그것들이 있는 대로를 독립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신학은 항상 신과의 관련에서 세계와 인간을 본다. 신에 관한 명제는 모두 동시에 인간에 관한 것이고 인간에 관한 것은 모두 신에 관한 것이다. 그 까닭에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신학은 동시에 인간학이다.>ꡓ(불트만, 186)  그런데 이 인간학은 다름 아닌 죄론이다.

ꡒ이  신앙은 실로 우리에게 행해진 신의 행위에 대한 긍정, 우리를 향한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일 수 있을 뿐이다. 신앙에서의 우리의 실존 파악이 문제된다면, 우리의 실존이 신에 근거한 것이고 신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실존을 파악하는 일은 곧 신을 파악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이 어떤 보편적으로 타당한 법칙, 원리, 소여성이 아니라면 분명히 우리는 신이 우리에게 말하는 행위한 것에서만 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향한 신의 말과 행위로부터 우리가 말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그로부터 말할 수 있다... ꡐ우리는 신으로부터 그가 우리에게 행하는 것만을 말할 수 있다ꡑ... 인간적인 것이 아니면 우리가 무엇을 행할 수 있으며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를 신과 유리시키는 저주로부터 우리의 모든 행위와 말을 풀어 주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한 것인 한 계속 죄이다. 그러나 바로 유죄한 자로서 그는 의로워졌고, 다시 말하면 은혜에 의해 의롭게 된 것이다. 우리는 신을 알지 못하며, 우리 자신의 현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 둘을 다만 신의 은혜를 믿는 것에서만 소유한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그것으로부터 세계를 급변시켜 죄의 세계로부터 신의 세계로 변하게 하는 알키메데스적인 지렛대인가? 그렇다 이것이 신앙의 소식이다.ꡓ(불트만, ꡒ신으로부터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ꡓ)

이 진술은 교리적인 것인가, 아니면 인간 실존 그 자체가 죄의 지평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인 것인가? 그렇다면 교리적이 아닌 ꡐ죄ꡑ를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문제는, ꡐ신으로부터 말한다ꡑ는 이 명제가 적어도 그 신이 기독교의 신을 자명하게 전제한다고 해도 기독교 바깥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서구 기독교 사회-문화 제국에서는 이의가 제기될 수 없겠지만, 다원적인 비서구의 사회-문화 세계에서는 여전히 이질적인 언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ꡐ몸ꡑ으로서의 ꡐ인간ꡑ(homo-soma/몸)이라는 에피스테메(언표-장)의 전화에 따른 새로운 ꡐ죄론ꡑ, 게토화된 신학담론으로서의 죄론이 아니라 ꡐ객관적 선험ꡑ(이정우,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기초한 인간의 죄/마성을, 그것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신학적 윤리(학)의 모색은 가능할 것인가를 묻게 된다. 아니, 인간의 창조와 타락이라는 창세기의 인간 담론을 역사화하면 기독교-신학 내지 신학적 인간학은 설 자리를 잃게 되는가? 그것이 기독교-신학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지탱하는 절대적인 토대인가?

<보론 1>
바울에게서 인간 존재를 특징짓는 포괄적인 개념 소마로 이것은 어떤 형식이나 형태가 아니라 인간=몸이다. 문제는 사륵스와 프뉴마인데,  이것은 바울 담론의 역사적 사상적 맥락 전체를 놓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유대교와 대결하면서, 그레꼬-로마 세계를 향해 자신의 신앙 체계를 말해야 한다. 육과 율법에 대한 비판은 결국 할례의 문제이며, 이것은 당시의 이방 민족 뿐 아니라 여자들까지도 배제하는 메카니즘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그레꼬-로마 세계를 향해서는 예수가 신의 한 매개자가 아니라 그가 바로 신임을 변증해야 한다.
문제는 유대교와 그리스 철학 속에서 생산된 바울 담론을 그대로 오늘 복사할 것인가, 현대 육체학의 틀로 새롭게 성찰할 것인가이다. 다니엘 보야린의 연구는 바울의 인간학을 정치적 담론의 지평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Daniel Boyarin, Carnal Israel--Reading Sex in Talmudic Culture; Daniel Boyarin, A Radical Jew--Paul and the Politics of Identity).
불트만과는 다른 접근(물질주의적 접근)을 통해 신학은 인간학임을 주장한 포이에르바하는 오늘의 육체학의 지평에서 새롭게 성찰되어야 할 것이다. 포이에르바하에게는 자연의 배후에 신이 존재하지 않듯이 육체의 배후에 신비로운 다른 존재(영혼)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신의 이념은 인간성의 투영에 불과하기 때문에 신학은 곧 인간학이다. 나아가인간학은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감각적 인간에 관한 이론으로 영혼이나 ꡐ정신ꡑ의 존재는 부정된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을 물질적으로 접근했다기보다는 ꡐ유기론ꡑ적으로, 살아 있으면서 동료 인간과 구체적인 관계에서 존재하는 자로 보았으며, 그렇게 타인과 더불어 존재함이 바로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임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육체성은 인간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표지이다. 종교는 인간이 육체적으로 관계맺는 존재임을 구체화한다.

슈뢰어/스타우블리는 『성서의 육체상징』이라는 연구에서 구약성서의 인간학 연구를 통해 성서적 인간학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한스 볼프(Hans Walter Wolff)와 성서적 인간론의 의미론적 재구성에 대해 비판한 제임스 바(James Barr)의 연구를 평가하고 오늘의 몸-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집약하고 있다. 이어지는 글은 이 책의 서론을 정리한 것이다.
ꡒ구약성서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었는가?ꡓ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볼프는 인간학적인 언어 이론을 발견하게 되었다. 볼프는 그 언어 이론의 도움으로 ꡒ인간됨ꡓ의 의미를 완전히 갈아엎으려고 했다. 이로써 그는 몸을 적대시했던 해석 전통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또렷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러한 시도는 당시에 많은 주목을 받았다. 히브리어 낱말군에 대한 연구는 하나의 복합적인 심신상관설(psychosomatics)을 찾아냈다. 이것은 밀교적 원칙에서 파생된 체계가 아니라 신체에 대한 관찰과 삶의 경험에 토대한 것으로서, (그리스어와는 달리) 추상적인 개념으로 발전되지 않고 오히려 구체적인 신체성에서 유래했음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하나의 언어 체계에서 나온 개념들이었다.
이러한 귀납적인 방법론을 전개하고 있는 볼프조차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아직도 조직적인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 개신교 신학 교수로서, 그리고 남성으로서 볼프의 이론에는 인간에 대한 명쾌한 통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왜곡을 낳을 수 있는 소지도 있다.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 예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1. 히브리 성서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 신체 부위는 눈(868번), 얼굴(2040번), 손(1617번)이다. 그런데도 볼프는 말씀 중심적인 ꡒ들음ꡓ의 신학에 가로막혀 그것들의 상징성을 더 깊이 연구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눈과 귀가 대등하게 나타날 때가 적지 않으며(잠언 20,12) 야훼의 행적을 인식하는 것은 듣는 것만이 아니라 보는 것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출애 14,13. 31; 신명 29,1-3; 이사 43,8)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ꡒ그러나 눈의 열림은 말씀을 통해 일어난다(출애 14,13-14. 30-31; 이사 43,8-13; 30,20-21). 그러므로 인간의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귀와 언어의 우월성에는 오해의 여지가 없다.ꡓ 성서에는 그러한 우월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성서는 본래 눈의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것을 파악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소득이 될 것이다.
2. 비록 볼프가 인간 존재의 언어적 규명을 시도했다고는 하지만, 그가 관찰한 것은 남성의 실존뿐이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메타포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어머니와 출산의 메타포를 전혀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것이야말로 남성 위주의 학문적 풍토에서 나타나는 결함을 명약관화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 ꡒ사랑의 파괴ꡓ이라는 제목의 장에서는 간음, 음탕한 행위, 강간, 이혼, 독신, 동성애, 남색, 이성모방 등이 하나의 부류로 취급된다. 구약학자였던 볼프는 바로 이 장에서 두 차례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을 이용하여 성서적 가치평가를 강조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을 암시한다. 그는 이스라엘은 정숙하고, 가나안은 음탕하다고 말함으로써, 그 당시 만연해 있던 상투적인 반-가나안주의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반-가나안주의는 그리스도교의 반-유태주의적 편견 못지 않게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 또한 그는 동성애에 대해 그와 관련된 율법 구문(레위 18,22; 20,13)만을 인용하고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은 언급하지 않고 지나침으로써, 최소한 성적인 면에서는 타인의 다른 취향을 존중해 주지 않는 입장을 지지했다.
제임스 바의 책 『성서 주석과 현대 의미론』은 볼프의 사상적 기초와 방법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다. 바는 한 민족의 언어가 그들의 사유 구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토를라이프 보만과 그밖의 다른 학자들이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를 심리학적으로 대치시켜 놓음으로써, 서로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한 텍스트군과 텍스트의 장르와 시기를 비교하려 했다고 비난했다. 바가 보기에, 대략 열 개의 증거 구절에서 의미 영역을 찾아내고 그럼으로써 열한 번째 구절에 그 의미를 부여하는 식으로 한 외국어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의 개념이 등장하는 구체적인 컨텍스트야말로 그 개념의 의미를 밝혀주는 유일한 정보 제공원이다. 비교를 수단으로 하는 통계는 그런 기능을 할 수 없다. 이로써 바는 성서주석 학자들이 만들어낸 사전의 기초와 방법론을 의문시하는 것이다.
볼프에 대한 바의 비판은 중요다. 에를들면, 네페쉬와 같은 개념이 특정한 자료, 혹은 이스라엘의 사유와 인간관을 설명해 주는 열쇠라고 전제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의 연구는 몇 가지 점에서 재고되어야 한다.
1. 한 언어의 구조와 문법과 의미론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유 구조에 대한 통찰을 주지 못하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없다. 물론 개별적인 현상만 가지고 너무나 많은 것을 도출하려는 일은 허용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의 낱말 영역 안에서 어떤 개념이 없다든지, 또는 어떤 개념이 특히 세분화되어 있다든지 하는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유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로, 현대 언어와 고대 언어의 남성중심적 견본에 대한 페미니즘적 문제 제기가 있다. 인간 종족을 나타내는 언어가 문법적으로 남성을 사용하고, 그래서 여성이나 여성적인 것이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는 부수적으로만 나타날 뿐 명백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언어는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그밖에도 페미니스트 성서주석은 히브리어에서 한 단어의 문법적인 성은 사소한 것이 아니며, 예컨대 루아흐에서처럼 여성은 의식적으로 고려되었음을 밝혀냈다.  
2. 바가 순전히 개념의 조직화만 가지고 신학을(심지어는 선포를) 해나가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의 비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신학적으로는 유의미하지만, 낱말 영역은 그렇지 않다.  
3. 그리스사상과 히브리 사상 비교는 재검토를 통해 많은 부분을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식의 극단적인 상반성은 스콜라 철학이 그리스 철학 체계를 경직화한 이래로 아주 빈번하게 등장했다. 그러나, 개념 체계에 대한 논쟁, 그것과 결부된 인간관과 신관, 특히 (서양의 사유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그리스 철학의 인간관과 신관에 대한 논쟁은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 이러한 개념성 때문에 생겨난 폐해, 즉 절대적인 남성중심주의와 이원론적 사고의 폐해를 오래 전부터 지적해 온 이들은 다름 아닌 페미니스트 철학자들, 전문가들이다.
이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슈뢰어/스타우블리는 성서적 인간학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관점을 모색한다. 적어도 성서적 인간학에서 ꡐ인간ꡑ이란 ꡐ성인 남성ꡑ을 가리킨다.
ꡒ남성중심주의(androcentrism)는 가부장제를 위해 조직된 사회의 전형적인 편견 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조건(conditio humana)은 이 구조로 인해 ― 고의적으로 혹은 악의 없이(?) ― 성인 남자의 삶의 조건으로 통폐합된다. 남성의 삶과 경험의 맥락에서 도출된 ꡐ인간ꡑ이라는 말은 남성중심적 사유로 인해 보편적인 유효성을 부여받았다. 한 마디로 남성이 모든 인간적인 것의 척도라는 것이다.ꡓ(Ina Praetorius).  이런 성향이 성서 연구사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지배적인 기독교 신학의 전통은 창세기 2-3장에 대한 해석을 통해, 남자가 모든 인간적인 것의 척도라는 사실을 성서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그 태초의 이야기는 남자야말로 최초의 피조물이며 여자는 최초의 유혹자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님을 역사비평적 주석이 밝혀냈다. 아담은 성별상의 구별이 생겨나기 전의 인간 존재, 흙을 의미한다. 여자(ischah)가 창조된 뒤부터 비로소 남자(isch)는 성적인 정체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도 기존의 주석학을 남성중심주의로부터 보호해 주지 않는다.  예를들면,  창세기 2-3장과 관련하여 ꡒ여기서 인간은 전혀 독립적이지 못하다. 그의 생활 공간, 그의 세계, 그리고 그의 인격적 상대자인 아내, 음식과 의복.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선물이다.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은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다ꡓ고 규정된다(Franz Josef Stendebach). 이렇듯 원칙적으로 인간은 남자-인간이며, 여자는 남자에게 이차적으로 첨가되었다고 이해한다.  남성중심적 세계관에서는 여성이나 여성적인 것이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거나, 아니면 단지 남자들에 의해 정의되고 남자들에게 복속된 ꡒ타자ꡓ로 등장한다. 이러한 상징 체계로 인해 여성중심적인 사고와 언어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성서학자가 ꡒ인간ꡓ에 대해서 뭔가를 말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의심이 먼저 생긴다.
성서학자들의 남성중심적, 환원적 현실 이해는 노동에 대한 개념에도 영향을 끼쳤다. 노동 개념은 오로지 돈벌이 노동의 의미에서 규정되었으며, 죄의 이해는 자기 과시, 권력욕과 같은 전형적인 남성적 과실에 고정되었다. 남성중심적 편견은 여성의 삶을 은폐하며, 여성은 ꡒ인간론ꡓ의 변두리를 떠돌고 있다. 바로 이런 실정에서 한스 볼프가 레헴과 같은 중요한 이미지를 빠뜨리고 지나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서구 철학과 서구 신학의 남성중심주의는 개념의 체계에도 그대로 침윤되었다. 페미니스트 철학은 서구 철학은 근본적인 이원론이 성차별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다음의 개념 쌍에서 남성적인 것은 고급스럽고 우월한 것과, 여성적인 것을 알게 모르게 저급한 것과 결합한다: 영혼/몸, 정신/물질, 오성/욕망, 이성/감정, 문화/자연, 초월/내재, 공공성/개인성, 적극성/수동성, 행위/고난, 고귀함/아름다움, 실체/우연. 이러한 개념의 체계를 훑어보는 것, 아니 심지어는 열어보는 것 자체도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우리의 언어가 왜곡되어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대한 해묵은 거짓말을 유포하고 이 세상의 다면성을 협소화하는 전통적인 사고를 뒷받침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의 인간 이해에는 서구 전통의 남성중심주의를 몇 가지 점에서 폭로할 만한 요소가 내장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사회가 가부장적이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언어와 여러 이미지에 나타난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사유 방식에는 아직 가부장적 문화의 세력이 그리 크지 않았던 시대로 소급되는 지혜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고, 우리로 하여금 고착된 개념 체계와 내면화된 이미지에 대해 저항하도록 부추기는 잠재력도 있기 때문이다.  

ꡒ이러한 전제 하에서 새로운 성서적 인간론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 바벨탑 건축 이야기와 같이 이른바 인간의 죄악과 교만을 주제로 삼고 있는 전통적인 텍스트들은 남성 인간들의 죄와 교만에 대한 텍스트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편타당성을 주장하는 ꡐ인간ꡑ에 대한 진술은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그리고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남성중심주의에 물들지 않은 창조 신학에 바탕한 텍스트와 이미지들은 지금까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오리엔트적, 성서적 사유는 여성의 삶과 노동의 단편적인 것들과 아마도 잘 어울릴 것이다. 흥미롭게도 일부 성서 전통은 그리스적․서구적 논리에 감염되지 않은 채 여성됨의 차원과 연결되어 있다. 셈족의 사고 방식, 히브리인의 언어에 대한 우리의 생소함은 남성 위주로 구조화된 상징의 세계에 나타난 여성에 대한 생소함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Ó

여성 [해방]신학의 이러한 비판은 텍스트와 해석 전통을 새롭게 성찰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ꡒ성서적 인간학이라는 거대한 분야에 비하면, 지금부터 우리가 접근하려고 하는 몸과 육체성이라는 테마는 하나의 단면에 불과하다ꡓ는 그들의 말처럼 육체 담론이 인간학[이것을 ꡐ성서적 패미니스트 인간학ꡑ으로 이름할 수 있을까?)의 하부구조로 기능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배제되고 박탈당한, 왜곡된 여성의 신체의 새로운 성서적 지평을 열 수는 있지만, 그것을 통해 여성 신체의 새로운 위치를 설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오늘의 민중 육체의 고통을 성찰하는 데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고통받는 육체의 관점을 비켜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의 신학적 육체 담론이 초점을 맞추어야 할 사상과 신학 그리고 신앙적 실천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집약하고 있다.
1. ꡒ플라톤주의, 신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ꡐ안경ꡑ을 끼고 성서를 읽다보니 여성에 대한 성서의 가부장적 입장이 강화되었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의 신플라톤주의는 긍정적인 여성상을 허용했으나, 그것은 예외에 불과했다ꡓ는 엘리자벳 괴스만이 여성과 관련하여 진술한 이 말은 ꡐ육체ꡑ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해서는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이 위에서 언급한 예외에 해당한다. 통전적 사유를 전개했던 힐데가르트는 온전한 몸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했다. 물론 이런 예외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더 많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지배자의 철학 및 지배자의 신학이 그들에게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지배의 위치에 있는 이들의 철학과 신학은 근세에 이르러 극도로 염세주의적인 인간 이해에 도달했다. 이러한 인간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현대의 국가 이론과 윤리적 사고는 바로 이러한 인간론에 토대하고 있다. 칸트까지만 해도 몸은 아직 인식의 목적이 될 수 있었다. 조직적인 육체 억압의 절정은 독일 관념론이었다. 관념론자들은 정신, 이념, 그리고 이런 것들을 선전하는 국가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유럽 공장의 프롤레타리아, 식민지의 농장 노동자)의 육체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러한 육체 경시의 풍조는 결국 몸의 남용을 야기했고 또 이것은 자연에 대한 착취로 이어졌다.
2. 구약성서와, 하나님에 대한 구약성서의 육체적 묘사를 향해 과감하게 열어제친 사람은 바로 프란츠 로젠츠바이크(Franz Rosenzweig)다. 그의 『구원의 별』은  가시적인 진리의 이미지 하나를 소개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은 바로 이웃의 얼굴에서, 다시 말해 육체의 제일 윗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로젠츠바이크는 인간의 얼굴에서 구원의 별을 발견해 낸다. 이 별은 수용적 생명의 삼각형과 활동적 생명의 삼각형의 겹침으로 이루어진다. ꡒ기본 바탕은 수용의 기관, 즉 얼굴의 주요 구성 요소라 할 수 있는 이마와 뺨에 따라 배열된다. 두 귀는 뺨에, 코는 이마에 속한다. 귀와 코는 순수한 수용 기관이다. 종교적 언어에서 코는 얼굴 전체를 대신한다. 입술의 움직임이 귀로 전달되듯이 제물의 향기는 코로 전달된다. 첫 번째 삼각형은 얼굴 전체에서 이마의 정중앙을 윗 꼭지점으로 하고, 두 뺨의 중심을 다른 꼭지점으로 하여 만들어진다. 여기에 두 번째 삼각형은, 굳어있는 그 얼굴을 생기있게 만들어 주는 기관, 즉 두 눈과 입을 각각의 꼭지점으로 이을 때 만들어진다 ... 이마가 얼굴의 기본 형태를 이루는 것처럼, 두 눈 주위를 감돌며 그 눈에서 광채를 발하는 생명은 입을 중심으로 모여든다. 입은 얼굴이 할 수 있는 모든 표현을 수행하고 완성하는 부분이다. 인간의 말과, 또 그 말 뒤에 숨어있는 침묵, 그리고 입맞춤 등이 바로 그것이다. 두 눈에는 인간의 영원한 얼굴이 빛나고 있으며, 인간은 말을 하는 그 입으로 먹고 살아간다.ꡓ
3.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로젠츠바이크의 사상을 계승했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그는 나치의 집단 수용소에서 사라져 버린 외면성, 즉  타자성 속에 나타난 타자의 존재를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ꡒ타자는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분리된 존재, 혹은 거룩한 존재, 얼굴로 다가온다.ꡓ 이러한 외면성은 해방 지향적 철학의 주요 범주가 된다. 인간의 외면성, 즉 나를 향한 그의 호소는 그의 진리다. 이 철학은 외면성을 통해서 부르주아적인 ꡒ코기토ꡓ(cogito ergo sum)의 철학과 철저하게 결별한다. 우리는 타자의 말건넴을 통해서 이 외면성을 아주 구체적으로 경험한다. 어떻게 지내시나요? 이러한 특성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외침이 있다. 나 좀 도와줘요! 배가 고파요! 먹을 것 좀 주세요! 한 걸음 더 나아가,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고 존엄성을 상실한 인간의 육체가 이렇게 부르짓는다. 나는 타자요! 나는 하나의 인격체요! 나에게도 권리가 있소! ꡒ본래적 의미의 몸, 육체성, 사회 체제에 의해 밖으로 내몰려 억눌린 사람들의 신체, 그들의 굶주리고 고문당하고 폭력에 시달리는 몸은 법의 전복이며, 그 법을 낯설게 하는 질서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절대의 현현이다. 단순히 하나의 현상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을 통한 신현이다. 가난한 사람의 얼굴, 인간됨, 육체성, 신체(basar)는 해방 지향적 철학을 양산한 원초적 말씀(dabar)이다. 해방의 철학은 말씀만이 아니라 현실에 대해서도 숙고한다.ꡓ
4. 해방신학은 지금 막 언급한 실존론적 통찰을 견지하고, 그것을 예배와 봉사와 선포라는 실천의 장에서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신학의 출발점은 민중에 대한 귀기울임이다. 민중은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익명의 다수가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다. 너무나도 취약한 민중 공동체와 민중 조직에는 그들의 무기력함이 나타나며,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의 몸과 삶에는 고난이 표출되어 있다. 잔뜩 구부러진 허리, 생리 주기에 문제가 생긴 여성의 몸, 상처투성이의 피부, 잘려나간 다리와 비쩍마른 어린이의 팔다리는 각각 열악한 노동 환경, 남성중심적 사회 구조에서 여성이 겪어야만 하는 고통, 지배자의 수족인 공권력의 잔인무도한 폭력, 전쟁이 끝난 뒤에도 땅 속에 숨어 있는 지뢰의 공포, 제3세계에 대한 제1세계의 경제적 횡포에 대한 강렬한 상징이다. 알제리 전쟁으로 인해 처절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현실을 목격했던 흑인 의사 프란츠 파농(Franz Fanon)이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제국주의적 폭력의 상황에 저항하는 해방의 신학을 기획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착취당하는 몸은 악마적인 것의 상징이며, 반대로 온전한 육체는 신적인 임재의 상징, 즉 성사(聖事 sacrament)다. 레오나르도 보프는 이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성사, 즉 신적인 것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일곱 성사는 하나님 은총의 농축이며, 삶의 주요한 매듭이다. 그러나 인간의 몸 또한 중요한 성사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 안에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타자로서 현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교적 명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이미지다. 하나님의 선물인 성만찬 속에서, 생명의 빵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예수는 ꡒ이것이 내 몸ꡓ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례를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모습은 하나님마저 떠나버린 저주받은 인생의 상징이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변용된 몸은 멸망의 세력에 대한 혁명적 승리의 상징이다.
5. 이웃의 몸에 대한 관심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예전적 성찰과 상통한다. 이런 이유에서 라틴아메리카의 교회는 지난 수십 년간 인권을 위한 싸움의 최전방에 서 있었다. 이 싸움은 소외되고 착취당하고 침묵을 강요받았던 타자의 몸을 무대 중앙에 올려놓았으며, 국사범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언론에 양심을 호소함으로써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제 목소리를 찾아주었다. 이러한 일은 신앙의 증언이었으며, 수많은 나라에서는 잔인한 고문마저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때로는 순교, 즉 몸의 소멸이 뒤따르기도 했다. 과거나 지금이나, 부패한 정부에 맞서 민중의 권리를 대변하는 유일한 기관이 교회의 인권 위원회인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인권은 계몽주의, 즉 그 반교회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교회가 오랫동안 적대적인 세력으로 간주해 왔던 계몽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해방신학의 인간론은 절대화된 집단주의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속에서 우상화된 개인주의가 아닌 다른 길, 개인과 공동체를 이어주고 양쪽 모두를 복되게 하는 길을 용감하게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사명이라고 주장한다. 교회 안에서도 타인, 특히 연약한 사람은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약속(고전 5,17)의 출발점이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교회는 떳떳하게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ꡒ공동체 중의 공동체ꡓ로서 권위주의적 구조와 권위주의적 관행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ꡒ정신의 몸을 소유한 사람들ꡓ이 되어야 한다.
6. 브라질의 수녀 이보네 게바라(Ivone Gebara)의 주장에 따르면, 여성이 부활하여 이제껏 여성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마을(영역)들, 그러니까 정치, 노동, 신학과 같은 영역에 가게 될 때 비로소 해방이 시작된다. 자신의 삶이 단순히 남편에게 순종하고 불룩한 배로 이리 저리 뛰어다니고 딸들에게 여성으로서의 고통과 비근한 일상을 물려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여성이야말로 해방의 주체다. 남성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남자와 여자의 상이성과 그 둘의 상호연관성과 역사적 다양성을 올바로 조명하는 인간론에서는 정신이 아니라 육체가 출발점이다. 전통적인 신학은 이제 더 이상 이 새롭게 부상하는 신학을 당해낼 수 없다. 신학이라는 학문은 오늘날까지도 가부장제적인 패권주의의 망령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다. 거기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인간의 몸보다 인간적인 것이며, 신적인 것이기까지 하다. 이런 식의 생각은 성에 따른 위계질서와 무관하지 않다. 거기에 따르면, 남자가 앞서고 여자는 뒤따른다(바르트). 성서 텍스트에 대한 주석을 과제로 삼은 구약성서 주석학 또한 인간의 몸에 대한 불신과 남성 중심적인 신학의 늪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구약] 성서 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ꡐ자기 제어력ꡑ, ꡐ영원한 것, 참되고 선한 것에 대한 감각ꡑ, ꡐ자아 의식, 사고 능력, 불멸성ꡑ, ꡐ이성ꡑ, ꡐ인격성ꡑ, ꡐ정신적 우월성ꡑ, ꡐ정신적 능력과 천부적인 지배자의 고귀함ꡑ, ꡐ하나님의 신하ꡑ 등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형상을 ꡐ신체ꡑ(궁켈)나 ꡐ몸ꡑ(폰 라트)으로 해석한 것은 아주 드문 예였다.
오늘날 여성신학자들, 특히 이보네 게바라와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여성신학자들은 여성의 몸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것은 새로운 사유로 나아가기 위한 중대한 전환이다. 이렇듯 새로운 사유 방식의 굳건한 토대는 다름 아닌 성서 전통이다. 상처 없는 온전한 여성의 몸, 혹은 착취와 억압의 대상인 여성의 몸이 많은 페미니스트 신학의 중심 주제다. 유럽의 페미니스트 신학도 여성에게 가해진 다양한 폭력과 맞서 싸워 왔다. 이렇게 해서 쟁취한 권리는 성서 전통이 담고 있는 심오한 사상과도 상통한다. 여성도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여성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기에, 여성의 통전성을 깨뜨리는 행위는 그 어떠한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과 성전에 대한 모독에 해당한다.
과제는 이러한 성서적․신학적 성찰이 어떻게 육체의 현실과 나아가 육체 담론과 횡단적 연계성을 창출할 수 있는가에 있다. ꡒ여성도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여성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기에, 여성의 통전성을 깨뜨리는 행위는 그 어떠한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과 성전에 대한 모독에 해당한다ꡓ는 언술이 교회에서조차 그 표면효과를 낳지 못하는 현실에서, 사회 공간과 사회적 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다는 것일까?

3.

우리는 슈뢰어/스타우블리의 성찰을 토대 삼아 다시 질문 하게 된다: 오늘 기독교의 몸-담론 지도는 어떻게 그릴 수 있는가? 기독교의 인간 이해로서의 신학적 인간학은 중층적인(이경재) 육체학(somatics)과 어떻게 횡단적 연계성(transversality, 정화열, 210; 가타리, 37-38)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까? 아니, 신학적 육체학은 전통적인 신학적 인간학을 수리(renovation)하려는 것일까, 해체하려(de novo)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육체학을 인간학의 하부구조로 보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학의 패러다임에서 인간을 질문하기 위해, 기존 패러다임을 뒤집기 위해서다.
우리가 지금 따지려고 하는 것은 ꡐ육체/신체성ꡑ(body: carnality; corporeality)이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ꡐ질문하는ꡑ 영장류라는 데 있다. ꡐ질문하는ꡑ 육체가 아니라 ꡐ인간ꡑ! 그런데 어느 날 그 인간이 ꡐ육체ꡑ임을 깨달은 것인가? 그 육체/신체가 ꡒ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법칙화될 수 없는 신체의 가변성, 역동성, 개체성, 주체성, 이런 측면이 강조ꡓ된다(이정우, 시물, 38). 이 가변적인 육체를 축으로 세계에 보편적인 질서를 세울 수 있는가? 그 질서는 누가 누구를 위해 세우는가? 적어도 ꡒ<인식지배epistemocracy> 혹은 코기토를 추구하는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철학의 지배가 물려 준 근대적 유산의 특징은 탈육체화, 자아중심, 시각중심이다. 왜냐하면 이 유산에 의하면 정신은 몸 속에서 내재화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ꡓ(정화열, 241). 논리[이성]중심주의와 인식지배의 해체를 통해 지향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방법은? 장화열은 신체 해석학(carnal hermeneutics)을 입론한다. 그리고 부르디외는 인식의 육체성을 설파한다.

1. 육체의 해석학
정화열은 <포스트>(모더니즘) 패러다임 안에 존재하는 현상학(몸의 정치, 16)의 철학적 운동의 흐름 속에서(특히 메를로 퐁티) 펠릭스 가타리가 제안하고(분자혁명, 37) 쉬라그(Calvin O. Schrag)가 발전시키고 있는 횡단성(transversality: 횡단적 연계성-->uni/versality)을 축으로 하여 몸-담론을 생산하고 있다. 나아가 반데카르트주의자인 지암바티스타 비코와 미하일 바흐친의 언어 이론, 그로테스크한 신체 담론, 카니발 이론을 성찰한다. 횡단적 연계성은 근대주의자들의 ꡐ동일성ꡑ과 탈근대주의자들의 ꡐ차이ꡑ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상호 연결을 구조화하는 것으로, 학제간의 구분이나 문화적 경계를 초월하여 서로 다른 텍스트를 엮어내고 텍스트 상호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방법 내지 철학의 중심축으로 사용하는 단어다.  ꡒ횡단적 연계성 개념은 현대철학의 유럽중심주의, 특히 칸트로부터 헤겔, 마르크스, 하버마스에 이르는 계몽주의 사고와 논리중심주의의 전통을 넘어선다....  횡단적 연계성은 특수성을 통합하고 다양성을 작동시킴으로써, <차이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촉진시킨다. ... <횡단적 연계성은 순수한 수직과 단순한 수평적 한계를 모두 극복하려는 차원이다. 횡단적 연계성은 서로 다른 차원과 서로 다른 의미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극대화될 때 성취되는 경향이 있다>(가타리)ꡓ(정화열, 몸의 정치, 212)
횡단적 연계성은 <선험주의transcendentalism>의 순수한 수직(Scylla)과 <역사주의historicism)의 단순한 수평(Charybdis) 사이의 차이를 대각선으로 분할할 때 생긴다. 말하자면 횡단적 연계성은 <전체주의적 헤게모니의 공시적 수직과 무정부주의적인 통시적 수평을 모두 우회한다>(212)(원효의 화쟁론은 대각선의 기준 자체를 상대화해버린다. 이것은 급진적 상대주의 혹은 무정부주의로 끌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대상 인식에 들러붙어 있는 상대적 세계를 절대화하려는 끈질긴 業kharma의 깊이를 성찰한 결과이며, 이것으로부터의 해탈/자유를 겨냥한 방법론적 성찰이다). 이러한 성찰을 토대로 정화열은 신체 해석학(carnal hermeneutics)를 제시한다. 정화열은 ꡒ사회적 담론으로서의 몸 글쓰기: 신체 해석학 서론ꡓ(Writing the Body as Social Discourse: Prolegomena to Carnal Hermeneutics) 이후 <<몸의 정치학>>에 실린 여러 논문에서, 그리고 ꡒ비코와 몸의 정치의 비평적 계보ꡓ에서 신체 해석학을 전개하고 있다.

ꡒ신조어인 <신체/육체 해석학>은 <사회적 텍스트인 몸> 혹은 <세계에 등기(登記)(혹은 각인)된 몸>(여기서 ꡐ등기ꡑ란 ꡒ사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순환하고 순환시키는 것이 그 본질인 교환의 장이 아니라, 표시하고mark 표시되는 것이 그 본질인 등기의 사회체socius다 순환은 등기가 그것을 요구하거나 허용할 때만 생긴다ꡓ[앙띠 오이디푸스, 217]고 한 들뢰즈/가타리의 성찰과 관련해서 읽어야 할 것이다)에 대한 해석학 혹은 해석 이론의 ꡐ적용ꡑ이며, 그 몸 읽기 과정이다. 이것에는 언술 행위는 물론 몸짓, 판토마임, 춤 그리고 권투와 같은 몸의 의사소통적 실연이 포함된다. 신체 해석학은 언어와 비언어를 망라한 몸의 <아비투스>(부르디외)와 실천, 몸의 정치와 관련된 모든 측면, 차원, 수준, 회전축, 배치, 그리고 재현과 관련된 개념적 범주들과 합류한다.ꡓ(Stephen Baker ed., Signs of Change, 262)

기독교인의 신체는 적어도 이중/중첩 등기된 몸이다: 사회적 등기와 교회적 등기. 이 이중 등기는 우리의 몸을 고양시키는가, 찢어놓는가? 적어도 이 등기는 이중적인 권력의 각인이다. 에를들면, 사회 공간/사회적 장의 가부장제적 권력 체제는 가부장제적 교회체제를 상호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작동된다. 사목적 권력(미셸 푸코)의 형식으로. 자지가 없기에 할례를 받을 수 없고, 그러기에 구원받을 수 없는 유대교 율법체계의 현대화. 오늘 여성 차별/배제의 교회 체제는 레지스 드브레의 말대로 ꡒ육체로서의 교회가 정신으로서의 복음에 대해 승리ꡓ했음을 입증한다.

ꡒ신체 해석학은 서구의 정신mind 철학, 탈육체화한disembodied 이성 철학의 주류를 위반하고 전복하기 때문에 대항-담론counter discourse이다. 교회의 정신으로부터 너무나 오래 추방당했고, 철학 담론에서 ꡐ불가촉 천민ꡑ으로 버림받은 몸의 저항 담론이다. 몸은 여러 죄의 터가 아니다. 오히려 정신이 철학적 오류의 터다. 몸이 인류 공존human coexistence의 전제된 그루터기요 만물이 몸과 더불어 교합한다는 주장은 결코 합리성과 철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몸에 대한 정신 장애적 시각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경박하고 거짓된 정신적인 것(res cogitans)과 물질적인 것(res extensa)의 양분을 부수고 몸을 물체(res)로 보는 물질적 실체론을 극복하려 한다. 몸(soma)이 정신[영혼]의 죽음(sema)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한, 신체 해석학은 머리자르기headhunting를 찾지 않는다ꡓ(264-265).


2. 인식의 육체성
피에르 부르디외의 육체 담론은 그의 ꡐ사회 공간, ꡐ사회적 장ꡑ 이론과 ꡐ실천감각ꡑ, ꡐ아비투스ꡑ 이론 위에서 전개된다. 따라서 부르디외의 육체론은 강하게 계급적 성격을 띤다. 부르디외는 마르크스의 경제적 기준에 따른 계급분화와 베버의 권력/위신/부에 따른 계급분화를 ꡐ사회 공간ꡑ ꡐ사회적 장ꡑ이라는 개념으로 종합하려 한다. 사회 공간은 자본의 불평등한 분배에 위해 계급화된 공간이다(보네위츠, 63). 나아가 여러 형태의 자본들(경제적 자본, 문화적 자본, 사회적 자본, 상징적 자본)이 사회 공간을 구조화한다. 그러기에 민중 계급은 어떤 형태이든 자본을 거의 소유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되며 ꡐ필수적인 것만을 선택ꡑ할 수밖에 없는 계급이다(보네위, 70). 사회적 장은 계급투쟁이 치러지는 어느정도 자율적인 망 혹은 위치들 사이의 객관적인 관계들의 지형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이것들의 집합이 사회다(보네위, 70-71) ꡒ[예술적 장, 종교적 장 또는 경제적 장 등등] 장은 재화의 생산자와 소비자로 구성된 일종의 <시장>으로 파악될 수 있다....우리는 철학의 장, 정치의 장, 문학의 장 등과 같은 사회 공간의 구조 사이에서 구조적/기능적으로 동질적인 전단계를 관찰할 수 있다. 각각의 장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보존 혹은 전복을 위한 투쟁, 그리고 재생산의 메카니즘이 있다ꡓ(보네위츠, 72-74)
아비투스의 개념은 어떤 방식으로 인간이 사회적 존재가 되는지를 설명하려는 개념이다. 개인은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익히고, 한 사회 혹은 집단의 규범과 가치/신앙에 동화되어가는 사회화 과정을 거친다. 아비투스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개인이 획득하는 영구적인 하나의 성향체계이다. 성향은 각자의 객관적인 생존 조건에 의해 개인에게 내면화된 태도, 지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사고하는 경향으로서의 행동과, 지각/사고의 무의식적 원칙으로 기능한다. 이 내면화는 습득된 행동과 가치를 자명한 것, 자연스러운 것, 거의 본능적인 것으로 여겨짐에 따라 사회화의 핵심적인 메커니즘을 구성한다.(보네위츠, 88-90)
육체와 생물학적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사물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하나의 장소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물리적 공간과 ꡐ사회 공간ꡑ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부르디외, 파스칼적 성찰, 191)

ꡒ세계 속에 포함되는 것은 하나의 육체인데, 이 육체에는 하나의 세계가 있다. 이 육체는 세계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물질적이고 공간적인 단순한 포함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포함 방식에 따라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일뤼지오는 세계에 속하고, 세계에 의해 점유되는 방식이다. 여기서 세계는 행위자로 하여금 매우 멀리 떨어져 있거나 심지어 부재하는 사물, 하지만 그가 참여하는 게임의 성질을 띤 사물에 의해 영향을 받게 하는 세계이다. 육체는 접촉이라는 직접적 관계를 통해 하나의 장소에 연결되는데, 이 관계는 세계와 관계를 맺는 많은 방식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ꡓ(부르디외, 파스칼적 성찰, 196-197).

그러기에 세계가 이해될 수 있고 의미가 부여되는 것은 육체의 감각 기관들과 두뇌 덕분이며, 육체는 육체를 통해 인식을 끌어들이는 행위들 속에서 세계 현상들을 예견하는 성향과 적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물과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말하자면 ꡒ사회적 현실을 구축하는 능력--이 능력 자체가 사회적으로 구축된 것이다--이 초월적 주체의 능력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설정된 어떤 사회적 경험을 하는 동안 사회적으로 구축되고 획득된 조직적 원리들을 실천 속에 투자하는 사회화된 육체의 능력이라는 것이다ꡓ(부르디외, 파스칼적 성찰, 198)
육체가 사회적 세계 속에 있지만, 사회적 세계는 육체 속에 있다. 세계의 구조 자체들이 행위자들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구조들(아니 보다 정확히 인식적 형태들) 속에 현존한다. 따라서 ꡒ행동의 원리는 순수한 인식의 관계 속에서 하나의 대상과 대결하듯이 세상과 대결하는 주체도 아니고, 행위자에게 기계적인 인과율의 형태를 행사하는 ꡐ환경ꡑ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행동의 물질적 또는 상징적 목적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장의 구속 요소들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것의 두 상태 사이의 결탁, 즉 육체가 된 역사와 사물이 된 역사, 아니면 좀더 분명히 말해서 구조들 메카니즘들(사회 공간 또는 장의 메카니즘들)의 형태로 사물들 속에 객관화된 역사와 아비투스의 형태 속에서 육체들 속에 구현된 역사 사이의 결탁에 있는 것이다ꡓ(부르디외, 파스칼적 성찰, 217-218).

불트만을 다시 읽자. 신의 본질 자체가 아니라 오직 신이 인간과 그의 책임, 그의 구원을 위해 중요한 만큼, 마찬가지로 세계와 인간도 그것들이 있는 대로를 독립적으로 다루지 않고 항상 신과의 관련에서 세계와 인간을 보기에 ꡐ신학은 동시에 인간학이다.ꡑ 신과 인간과 세계(사회) 모두 육체 속에 아비투스의 형태로 각인된다. 육체는 그것들이 각인된 텍스트다. 사회 공간, 사회적 장에서 아비투스가 각인되는 육체는 그러기에 계급적이고 계층적이다. 노동 현장에서 늙은이는 물러나야 하고, 장애인은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아비투스. 여성은 교회에서 사제/목사가 될 수 없다는 아비투스(남성은 물론 여성 자신들의). 외국인 거주 노동자는 착취/차별되어야 한다는 아비투스. 육체의 유한성을 인간의 유한성으로 치환하면서 죄를 각인하고, 그것이 인간을 ꡐ벌레ꡑ로 만드는 아비투스(이청준의 단편 <벌레이야기>에서, 독실한 신자의 아이가 유괴 살해당하고, 살인자가 체포되자 그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번민하던 어머니가 마침내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면회를 간다. 살인자는 감옥에서 하나님을 믿어 의롭게 되었으므로 당신의 용서는 이제 필요없다고 돌려 보낸다. 어머니는 절망하고 자살한다)

4. 전복적 몸-읽기/쓰기의 몇 가지 단초

1. 신의 몸입기로서의 케노시스는 일회적 사건을 넘어 운동이다.이글턴은 케노시스에서 민중의 정치적 역능을 일어낸다:  ꡒ그 유명한 탈중심화된 주체란 너무나도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주체들에게는 실제로 그것이 어떤 걸림돌임이 증명되었다. 또한 그것은 행위자의 본질을 문제화하기보다는 행동 자체가 중요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정치적 좌파를 위축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탈중심화된] 주체는 입에 재갈 물린 사람들, 이름 없는 사람들의 상황에 대해 발언했으며, 힘없음 속에 있는 힘을 판별하고, 케노시스의 가공할 힘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은 배후에 어떻게 실패로부터 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를 아는 고귀한 영적 전통이 있다ꡓ(91)
정화열은 바흐친의 대화적 언어 철학이 육체화 혹은 상호육체성intercorporeality를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성찰하면서 케노시스를 육체적 영성으로 환유하고 있다:  ꡒ케노시는 세계의 물질적 주체로서의 몸 안에서 영성 혹은 거룩함이 합류/구체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리킨다. 의식 그 자체는 기호들의 물질적 구체화 속에서만 살아 있을 수 있는 현실로 일어나고 될 수 있다ꡓ(Sign, 267). 몸 자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우리가 말을 한다. 몸과 마음을 대화하도록 하는 것이 언어이다. 이 점에서 모든 말은 곧 <사회적 텍스트>이자 <생명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몸은 세계를 지어냄으로써authoring 세계에 응답하는 것이다>(몸, 60)
그러기에 케노시스는 신의 카이로스적 역사 개입 사건과 운동에 대한 메타포다. ꡒ한 체제가 위기 속에 있으며 그리하여 어떤 다른 체제로의 이행과정에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 체제의 붕괴가 눈에 보이는 때이다. 이것이 곧 카이로스라는 개념이 뜻하는 그런 ꡐ진정한 시간ꡑ이며, 또한 당연히 ꡐ진정한 장소ꡐ인 것이다. 우리가 신학자들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바는, 근본적인 어떤 것, 드물게 다가오지만 일단 올 때는 도저히 피할 수 없게끔 다가오는 그런 근본적인 도덕적 선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카이로스에 직면해 있는 인류, 이름하여 변혁의 시공간에 직면해 있는 인류는 도덕적 선택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ꡐ진정한ꡑ 시간과 ꡐ진정한ꡑ 장소에서, 그 길이와 너비를 확실히 잴 수도 미리 예측하여 자리매길 수도 없는 그런 질적인 시간과 공간의 한 계기(moment)에서, 인류에게 억지로 떠맡겨진다ꡓ(이매뉴얼 월러스타인,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신의 케노시스, 자기비움으로서의 인간 몸입기-신체되기가 곧 카이로스입을 도스또예프스키는 <대심문관>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몸되어 땅에 온 예수 때문에 야기되는 혼란은 예수가, 그의 도래가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화하는 데 있다. <도그마>에서 신의 몸입기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늙은 할아버지(할머니가 아니다)의 몸을 빈 것이고(문제는 그 노인의 몸에서 빠져나온 후 노인은 어떻게 되는지 불분명하다), 또 하나는 양성을 가진(치마를 입었는데 물구나무 서기를 하자 남성용 팬티를 입고 있다)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 자신이 육화하는 것은 스캔달이다. 땅에서는 그로 인해 카오스가 일어난다. 구체적으로 <도그마>에서처럼 시간이 뒤틀린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 신의 육화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 간다. <백투더퓨처>는 가상시공간 게임이다. 물리적 지구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그레꼬-로마 세계에서 기독교인들을 신의 육화라는 미신을 믿는 사람들(오늘날에는 ꡐ실효현실ꡑ(virtual reality의 김용석의 번역어) 신봉자)로 멸시/박해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신-인으로 개념화되는 ꡐ그리스도ꡑ-예수는 개념적으로 도케티즘에 가깝고, 오늘의 언어로 가상 신체(virtual body)에 가깝다. 메시아는 여전히 신의 현실을 중개/매개할 뿐이다. 여기까지는 참아줄 수 있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요한복음이다. 예수는 구원 사건을 매개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신이기 때문이다.

2. ꡒ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ꡓ(요한 1;14). 이제 그는 기표로 떠돈다. 더 이상 기표로 감추고 왜곡된 기의가 아니다. 그의 육체, 그의 생명, 그의 움직임, 그의 말이 곧 기의다. 물을 마시고 밥을 먹는다. 물론 배설했을 것이다. 비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지를 움직여 들판을 가로지르고 강을 건너며 산을 오르내린다. 그는 더 이상 불변의 텍스트가 아니다. 컨텍스트다. 컨텍스트가 ꡐ된다.ꡑ 그의 기웃거림, 섞임, 끼어듦, 접속이 컨텍스트를 생산하고, 그가 컨텍스트의 일부가 된다. 그 컨텍스트 안에서 새로운 로고스를 생산한다. 그러나 돌판에 불로 구워진 불변의 로고스가 아니라 인간의 말, 역사 언어, 몸-말로서의 로고스가 된다. <물질적 로고스 되기> 이것이 신비다. 물질적 로고스[되기]는 로고스-사건의 표면효과에 의해 그 로고스의 초월성이 증명된다. 말하자면, 물질화된 로고스(문자로 기록된 로고스로서의 요한복음) 자체가 신적 로고스가 아니라, 그것이 일으키는 생명/심판 사건에 의해 신적 로고스가 ꡐ된다ꡑ. 아니면 그것은 시체를 사는 수의일 뿐이다. 그러기에 그 로고스는 로고스를 통해, 로고스 안에서 로고스를 초월한다. 끊임없이 메타모르포시스하고, 자기생산(autopoiesis)한다. 그러나 자기 동일성을 확대재생산하는, 타자를 지우면서 확장하는 나르시스적인 자기생산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자-되기로서의 재귀생산이고 아토노미아이다. 그렇게 하면서 컨텍스트를 변혁하고 새로운 컨텍스트로 물질화된다.

3. ꡒ너희는 이것읗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ꡓ(루가 22:19). ꡒ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ꡓ(고전 11:26). 최후의 만찬을 구원-사건(표면효과)의 지평에서 읽을 것인가, 역사적 기억의 물질성이라는 축으로 읽을 것인가? 왜 살과 피를 매개로 기억을 구체화하는가:

ꡒꡐ기억 속에 남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달구어 찍어야 한다: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ꡑ--이것은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유감스럽게도 가장 오래 지속된) 심리학의 주요 명제다 .... 인간이 스스로 기억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길 때, 피나 고문, 희생 없이 끝난 적은 없었다. 가장 소름끼치는 희생과 저당(첫 아이를 바치는 희생도 여기에 속한다), 가장 혐오스러운 신체 훼손(예를 들면 거세), 모든 종교 의례 가운데 가장 잔인한 의식 형태(모든 종교는 그 가장 깊은 근거에서 잔인성의 체계다)--이 모든 것의 기원은 고통 속에 가장 강력한 기억의 보조 수단이 있음을 알아차린 저 본능에 있다.ꡓ(니체, 400)

찢긴 살과 흘린 피를 통해 한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권력/폭력의 정체를 제 몸에 낙인찍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구원을 매개하는 물질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질서를 희망하고 실천하려는 인간의 육체에 가해지는 폭력을 육체로 체험하는 것은 아닌가? 요한복음은 왜 이 이야기를 삭제하고, 발을 씻는 섬김과 사랑의 담론을 끌어들이는가?

4.  ꡒcredo ... carnis resurrectionem 육체의 부활을 믿으며.ꡓ 부활한 오리게네스의 육체에는 고환이 있을까? 한스 큉은 이 우문(愚問)에 낯을 붉힐까 포복절도할까?: ꡒ그것은 모든 인간, 가장 가난하고 가장 경멸받고 가장 착취당하고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 소집된다는 것이다--마침내 정의가 성취되기 위해ꡓ(한스 큉, 235). 육체의 부활은 종말론적 구원의 지평이 아니라 심판의 지평을 겨냥하고 있다. ꡒ창세 이래 모든 예언자들이 흘린 피(의 대가)가 이 세대에게 요구될 것이다ꡓ(루가 12:50). 개들이 종기를 핥는 데도 부자의 음식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운 라자로와 부자가(루가 16:19-31) 함께 하느님의 심판의 자리에 부활할 것이다.

5.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레지스 드브레에 의해 완전히 뒤집힌다: ꡒ육체로서의 교회가 정신으로서의 복음에 대해 거둔 승리, 혹은 영적인 것에서 세속적인 것으로의 불가피한 양도. 칠성사와 물신 숭배는 부적과 주문과 기이한 패물을 걸친 마술사를 추방하려 했던 바로 그 사람들마저도 사로잡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 신체를 붙잡고 혹은 제도화가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계기가 있지 않을까?ꡓ(레지스 드브레, 105). 기독교와 교회의 성공은 수치로 환산되는 육체가 얼마나 많이 한 공간에 모이는가로 측정된다. 그리스에서는 에클레시아가 ꡐ육체정치학ꡑ을 의미했다.(라차드 세넷, 144). 교회는 그레꼬-로마 세계에서의 계급적/계층적 육체정치학에 대립되는 새로운 육체정치학이 실천되는 사회적 장으로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ꡒ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ꡓ(갈라 3:28). 오늘 교회-신학에서 잘 팔리는 상품 하나는 목회상담 혹은 정신치료다. 누가 그 치료를 받으려 하는가? 치료받을 돈이 있는가? 민중인가, 도시 부르주아인가? 정신/심리 이상은 배제/박탈/소외된, 무서진 육체의 한 형식이다. 그러기에 가타리의 통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ꡒ욕망은 항상 영토 외적(extra-territorial)이며, 탈영토화되고 탈영토화하며, 모든 장벽의 아래위로 빠져나가지요. 정신분석이 비록 언어학, 논리학, 인류학의 체를 통해 자신의 관념을 걸러내면서 수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결코 가족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자신의 본래 영토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정신분석은 자본주의에 대체 종교로 기능합니다. 정신분석의 역할은 억압을 정돈하고, 억압을 ꡐ인격화ꡑ(personaliser)하는 것입니다. 조와 고백은 전과 같이 진행하지는 않습니다. 욕망은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ꡓ(가타리, 39).

5.

ꡒ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보다 비방과 굴욕을 당한 집단들이 자신들의 역사와 개성을 복원하기 시작하던 서구의 특정한 시기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이다.ꡓ(이글턴, 219). 포스트 패러다임으로서의 몸-담론 몸 자체에 가해진 비방과 굴욕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지만, 비방과 굴욕의 몸으로 사는 사람들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몸 차별과 배제의 사회 공간 속에서는 물론 사회적 장에서도 몸 차별과 배제 메카니즘의 폭력은 우리를 전율하게 한다. 최옥란의 분신으로 드러나는 몸 차별과 배제, 외국인 노동자 인권 보고서에서 증언되고 있는 폭력, 나이든 몸의 사회적 축출 등에 대해 어떻게 신학적으로 성찰할 것인가?
적어도 포스트 패러다임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네 악마 푸코, 데리다, 라캉, 들뢰즈/가타리의 담론-무덤을 도굴하는 작업에는 굴삭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우리를 미궁 속에서 헤매이게 할지도 모를 개념들과 유렬처럼 출몰하고 있다.(보충 참고문헌 목록 2) ꡒ성스러움의 육체적 체험ꡓ(somatic exrerience of the sacred), ꡒ휘발하는 육체들, 성스러운 공동체들ꡓ(volatile Bodies, Sacred Communities) (Philip A. Mellor/Chris Shilling, Re-rorming the Body, Sage, 1997), 혹은 ꡒ영적 육체성과 정치적 영성ꡓ(Spiritual Corporality and Political Spirituality) 등은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성을 횡단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ꡐ인간ꡑ과 ꡐ육체ꡑ를 횡단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 주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 서구 세계에서 신학이 게토화된 울타리를 열고 현실과 횡단적 연계성을 창출하기 위한 한 단면을 래디칼 오토독시 시리즈를 통해 볼 수 있다.시리즈이면서 논문집이기도 한 『래디칼 오토독시』에는 다음과 같은 주레를 다루고 있다: 지식, 계시, 언어, 니힐리즘, 욕망, 우정, 에로틱스, 육체, 도시, 미학, 지각, 음악.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신학의 틀 속에서 이러한 주제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주제들을 통해 전통 신학 담론을 성찰하고 있다는 것이다.(노동, 경제, 폭력/권력, 육체 파시즘, 생체정치, 탈식민주의 등을 비켜가고 있음이 드러나기도 하다). 이 시리즈 하나는, 하비 콕스의 세속 도시와는 달리 육체와 욕망으로 뒤얽힌 현대 도시 사회를 신학적으로 접근한 Graham Ward의 Cities of God으로 이 연구는 포스트모던 신학담론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신학적] 인간학에서 육체학으로 기우뚱하는 것이 현대 소비 사회에서 생산과 소비의 전장(戰場)이 된 육체를 다시 신학에서도 담론적 소비 상품으로 만들면서 추락시킬 것인가(오늘 보수주의의 종교적 소비상품으로 전락한 영성처럼. 슬라보예  지젝은 ꡒ포스트모던 시대와 소위 그 ꡐ사상ꡑ에서 가장 통탄할 측면의 하나는 다양한 가면을 쓴 종교적 차원의 복귀다: 그것은 다양한 뉴에이지 영성주의를 통해 기독교와 여타 근본주의들로부터 해체주의[소위 ꡐ포스트-세속ꡑ 사상] 안에서 대두하고 있는 종교적 감성에 이르기까지ꡓ라고 비판하면서,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같은 편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신 영성주의의 침략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The fragile Absolute--or why is the christian legacy worth fighting for?, Verso, 2000, 1-2), 아니면 육체의 새로운 신학적 인식으로 이끌 것인가는 두고 볼 일이다. 어쩌면 이 싸움은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 초월적 내재성, 내재적 초월성이라는 2000년 묵은 신학 전쟁이 오늘 인간의 육체 위에서/속에서/통해 새롭게 벌어지는 싸움인지도 모르겠다. 그 싸움이 어떻든, 고통받는 민중 육체의 중심에서 전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대 시뮬레이션게임 이외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ꡒ어떤 낱말들과 구절들의 사용을 강요하고 다른 것들은 금지하는 신학은 아무 것도 더 명료하게 해 주지 않는다(칼 바르트). 그것은 말하자면 말을 가지고 휘두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것을 말하고자 원하면서 그걸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실천이 말에 그 뜻을 준다ꡓ(비트겐슈타인, 180).


<참고문헌>
이정우, 『시뮬라크르의 시대』, 거름, 1999.
이거룡 외,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 한길사, 1999.
테리 이글턴, 김준환 옮김,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 실천문학사, 2000.
한쉬 큉, 이종한 옮김, 『믿나이다: 현대인을 위한 사도신경 해설』, 분도출판사, 1999.
정화열, 『몸의 정치』, 민음사, 1999.
루돌프 불트만, 허혁 옮김, 『신약성서신학』, 성광문화사, 1976.
니체, 김정현 옮김, 『도덕의 계보』(니체전집 14), 책세상, 2002.
파트리스 보네위츠, 문경자 옮김, 『부르디외 사회학 입문』, 동문선, 2000.
펠릭스 가타라, 윤수종 옮김, 『분자혁명』, 푸른숲, 1998.
미셸 끌레브노, 이오갑 옮김, 『그리스도인과 국가권력』, 한국신학연구소, 1994.
그레고리 베이트슨, 홍동선 옮김, 『마음과 물질의 대화』, 고려원, 1993.
존 헐, 강순원 옮김, 『손끝으로 느끼는 세상』, 우리교육, 2001.
장미경, 『페미니즘의 이론과 정치,』 문화과학사, 1999.
G. 달 사쏘/R.꼬지 편찬,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요약,』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3.
니체, 백승영 옮김, 『안티크리스트』(니체전집 15), 책세상, 2002.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문화와 가치』, 1998.
뤽 페리, 우길종 옮김, 『신-인간, 혹은 삶의 의미』, 영림카디널, 1998.
피에르 부르디외, 김응권 옮김, 『파스칼적 명상』, 동문선, 2001.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라, 최명관 옮김, 『앙띠 오이디푸스』, 민음사, 1994

(보충 참고문헌 목록 1)
(우리는 이러한 언술들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다음 자료들은 이 연구에 도움이 된다: 초대 교회에서의 성의 폐기에 대한 고전적인 연구는 Peter Brown, The Body and Society: Men, Women and Sexual Renunciation in Early Christianity, 1988; 고대 후기의 거세에 대한 연구는 Mathew Kuefler, The Manly Eunuch: Masculinity, Gender Ambiguity, and Christian Ideology in Late Antiquity, 2001; 성서 세계의 동성애에 대해서는 Martin Nissinen, Homoeroticism in the Biblical World: A Historical Perspective, 1998; 로마서 1:18-32를 중심으로 초대 교회의 레즈비안에 대한 연구는 Bernadette J. Brooten, Love Between Women: Early Christian Responses to Female Homoeroticism, 1996; 중세의 젠더와 몸 그리고 육체의 부활에 대한 연구는 Caroline Walker Bynun, Fragmentation and Redemption: Essays on Gender and the Human body in Medieval Religion, 1996; 동저자, Ressurection of the Body in Western Christianity, 200-1336, 1995; 중세 문화에서의 음악과 몸 그리고 욕망에 대한 연구는 Bruce W. Holsinger, Music, Body, and Desire in medieval Culture: Hildegard of Bingen to Chaucer, 2001; 포스트 패러다임으로 금욕주의에 대해 접근한 것은(특히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니체, 푸코의 비판) Geoffrey Galt Harpham, The Ascetic Imperative in Culture and Criticism, 1987)

(보충 참고문헌 목록 2)
그들의 종교 담론에 관한 영어권 연구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Michel Foucault, Religion and Culture, selected and edited by Jeremy R. Carrette, 1999; Jeremy R. Carrette, Foucault and Religion: Spiritual Corporality and Political Spirituality, 2000; 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ed., Gil Anidjar, 2002; John D. Caputo, The Prayers and Tears of Jacques Derrida: Religion without Religion, 1997; H. Coward and T. Foshay ed., Derrida and Negative Theology, 1992; Mary Bryden ed., Deleuze and Religion, 2001.
[종교]사회학적으로 육체를 본격적으로 주제화한 것은 브라이언 터너인데, 그는 의료사회학 쪽으로 경사되어 있다(Bryan Turner, 임인숙 옮김, 몸과 사회, 2002). ꡒ거룩한 것의 육체적/감각적 체험ꡓ(somatic/sensual experience of the sacred)과 ꡒ육체적 연대성ꡓ(corporeal solidarity)을 축으로 종교와 몸(예를들면 ꡒ휘발하는 육체와 성스러운 공동체들ꡓvolatile bodies and sacred communities)에 접근한 본격적인 연구는 Philip A. Mellor and Chris Shilling, Re-forming the Body: Religion, Community and Modernity, Sage, 1997이다. 푸코의 권력 이론을 바탕으로 육체를 축으로 권력에 대해 신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은 Kyle A. Pasewark, A Theology of Power: Being Beyond Domination, 1993이 있다. 육체와 욕망으로 뒤얽힌 현대 도시 사회를 신학적으로 접근한 Graham Ward, Cities of God, 2000 포스트모던 신학담론의 백미가 될 것이다. 탈신학(A/theology)전통 신학의 틀에 도전한 Mark C.Taylor는 Disfiguring: Art, Architecture, Religion(Chicago, 1992)는 신미학(theoesthetics)에서 탈신미학(A/theoesthetics)으로 종횡무진 전통신학의 패러다임에 도전하면서, 무한한 상상력의 지평을 열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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