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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에서의 대응원리: 그 역사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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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한철학회  논문집
철학논총 제33집 2003․제3권




양자역학에서의 대응원리: 그 역사와 의미

고  인  석(전북대 과학문화연구센터 전임연구원)


[한글 요약]

닐스 보어(Niels Bohr)가 정식화한 대응원리(correspondence principle)는 20세기 초의 물리학이 양자역학 이전의 고전적 기반으로부터 양자역학을 포함하는 새로운 물리학으로 전이해 가는 과정에서 불가결한 교량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응원리의 의미와 역할은 시종 일정했다기보다 이론의 발달 단계, 그리고 고전물리학과 양자역학간의 위상 관계 변화에 따라 변해갔다. 첫 단계에서 그것은 당시 물리학자들로부터 일종의 거부반응을 포함하는 다양한 반응을 유발하고 있던 새 이론적 구조물이 얼토당토않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줌으로써 그것의 새로움으로 인한 충격과 반감을 완화시키는 데 기여했고, 다음으로 종종 막다른 골목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새 이론의 구축 과정에서 발견술(heuristics)로서의 기능과 더불어 효율적인 검산 장치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새 이론인 양자역학이 고전 물리학 이론의 완결성과 비견되는 고도의 완결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길잡이 구실을 했다.


주제분야:과학철학, 인식론
주 제 어:대응원리, 양자이론, 발견술, 이론변동에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20세기 초 양자역학의 출현과 발달은 현대과학의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가장 급격하면서도 근본적인 변혁의 사례에 해당한다. 결과를 놓고 볼 때 분명 이 예는 ‘혁명’이라는 표현이 아주 잘 어울리는, 선후 이론간의 뚜렷한 불연속을 내포한 이론 변동의 사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혁명’이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지적 폭압의 형태가 아니라 합리적인 방식으로 수행되고 또 과학자 집단에 그렇게 수용되기 위해서는, 비록 이미 한계를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긴 세월동안 그 유효성을 폭넓게 인정받아 온 기존 이론―고전 물리학―의 토대에 대한 새 이론의 어떤 연속성 관계가 조명되고 인식될 필요가 있었다. 닐스 보어(Niels Bohr)에 의해 정식화되었던 대응원리(correspondence principle)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상이한 두 패러다임에 귀착한 고전 물리학과 양자이론을 연결하는 교량의 역할을 했다. 이 논문은 이와 같은 대응원리의 역사와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대응원리는 양자역학 이론이 이나 와 같은 극한에서 고전 물리학 이론과 점근적으로(asymptotically) 일치한다는 것을 천명하는 원리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서술은 또 그 자체로 적절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수행되는 역사적 고찰을 통해 우리는 대응원리의 의미와 역할이 이론 변동의 과정 속에서 시종 일정했다기보다 새 이론의 발달 단계와 선후 이론간의 위상 관계 변화에 따라 변해갔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1. 논의의 역사적 배경과 일반적인 교훈

사물들 즉 우리가 경험하는 물리적 대상들은 그것의 부분들로 쪼갤 수 있으며, 다시 그 부분들을 더 작은 부분들로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나눠지지 않는 데까지 분할해 들어감으로써 대상의 본질적 면모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비단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자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견해는 아니다. 그런 생각은 물질에 관한 탐구 일반에 있어 오늘날까지도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전제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의 물리학은 그 때까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부분으로 인정되어 온 원자(原子)의 내적 구조를 규명하는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전자(電子)의 발견은 물리과학이 고대 희랍적인 원자론의 테두리를 넘어 새로이 물질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에 관심을 돌리게 되던 이 시기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존재였던 원자(atom)가 내적(內的) 구조 즉 스스로의 부분을 갖게 된 것이다.
1870년대 말부터 크룩스(W. Crookes) 등에 의해 수행되었던 음극선관(cathode ray tube) 실험을 통해 음의 전하(電荷)를 띤 미립자(微粒子)의 존재가 밝혀지고 1897년 톰슨(J.J. Thomson)이 이 미립자의 전하량 대 질량의 비(比) 를 실험적으로 결정하는데 성공하면서 전자는 물리학에서 확고한 존재의 지위를 얻었다. 전자의 전하량은 1909년 밀리컨(R.A. Millikan)의 기름방울 실험을 통해 확정되었는데, 이는 보어의 수소원자모델이 나오기 4년 전의 일이었다. 1909년에서 1911년에 이르는 동안 맨체스터(Manchester)에서 러더포드(Ernest Rutherford)가 주도하는 연구자 그룹이 원자의 구조에 대해 밝혀낸 연구 결과들은 물리학의 근본적인 혁신을 종용하고 있었다. 주로 마르스덴(E. Marsden)에 의해 수행된 알파입자 투사실험의 결과를 바탕으로 러더포드는 결국 중심에 양의 전기를 띠고 원자의 질량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질량을 지닌 핵과, 그 주위를 회전운동 하는, 음으로 하전된 전자―또는 표면에 전하가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는 구(球)―로 구성된 원자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와 같은 러더포드의 원자모형은 고전 전자기학 이론의 기본적 요소와 충돌하는 것이었지만, 보어가 그것을 지적해내기 전까지 그것의 정확한 물리적 의미와 문제점은 드러나지 않았다. 1913년 보어는 수소원자의 구조에 관한 그의 3부작 논문 “On the Constitution of Atoms and Molecules”을 Philosophical Magazine에 발표한다. 거기서 그는 러더포드 원자모형의 토대 위에서 출발한, 그러나 그것의 결정적인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이 구성한 자신의 수소원자 모델을 내놓았다.
새로운 과학 이론이 창안되고 제시되는 과정은 기존 이론의 테두리 안에서 이미 가시화된 문제 상황―그리하여 기존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는 충분히 설명하거나 적절히 다룰 수 없다고 인식된 상황―의 맥락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는 이전 이론에 견주어 근본적인 혁신을 함축하고 있는 이론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새 이론은 그 발생 단계에서 반드시 기존 이론의 틀과 접촉하게 된다. 예를 들어 새 이론은 그 구성 단계에서 이전 이론들에 포함된 개념들, 수식, 그리고 각종 상수값 등으로부터 상당한 만큼의 부분을 자연스럽게 차용하면서 출발하게 된다. 그러나 기존 이론이 새 이론의 발생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출발점 혹은 토대의 구실을 한다고 해도, 이는 기존 이론과 새 이론이 서로 양립가능한가 아니면 양자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이론에 귀착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독립적이다. 두 맥락간의 이러한 독립성은, 상호 양립불가능한 신․구 이론 간에도 어떤 연속성이 성립할 수 있는 가능성의 토대가 된다.
2. 보어의 수소원자모델

보어가 러더포드의 원자 모형에서 본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가 그리고 있는 바 원자핵과 운동하는 전자로 구성된 계(system)로서의 원자가 결코 안정성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가속된 운동 등속 직선 운동 ―여기에는 정지도 포함된다― 이외의 모든 운동이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원 운동이나 타원 운동 등은 ―각속도가 일정하다고 해도― 모두 가속된 운동이다.
을 하는 전자는 고전전자기학의 이론에 따라 전자기적 복사(electromagnetic radiation)를 방출하게 되며 따라서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잃어버리면서 결국 유한한 시간 안에 원자핵으로 떨어져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보어가 1913년의 원자모델을 구성하는 데 바탕이 되었던 문제의식은 바로 고전 물리학으로부터 추론되는 이런 결론과 이 세계의 물리적 구조를 지탱하는 ‘원자의 안정성’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보어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회상하고 있다. “나에게 출발점이 된 것은 물질의 안정성이었다. 이 안정성은 이제까지의 물리학의 견지에서 볼 때는 단지 기적이라고 해야 할 그런 것이다. 안정성이라는 말로 내가 뜻하는 바는, 동일한 물질들(원소들)이 언제나 동일한 성질을 드러낸다는 것, 언제나 동일한 결정이 형성된다는 것, 또 언제나 동일한 화학결합이 이루어진다는 것 등이다. 그것은 하나의 철원자가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받아가면서 많은 변화를 겪은 뒤에도, 결국 또다시 똑같은 성질들을 지닌 철 원자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Heisenberg (1969), 60.

이런 문제상황 속에서 1913년의 보어가 택한 길은, 수소원자모델 논문에서 그가 뼈대로 삼았던 다음과 같은 두 근본 가정들 속에 드러나 있다:

(1) 안정상태(stationary state)에 있어서 계의 동역학적 평형은 일반적인 역학[즉 고전역학]을 써서 논의 가능한 반면, 계가 상이한 안정상태들 사이를 오가는 것은 이러한 [즉 고전 물리학의] 기반 위에서 취급될 수 없다.
(2) [상이한 안정상태들 간의 전이]에는 단일한 파장을 지닌 복사파의 방출이 수반되는데, 이 복사파의 진동수와 방출된 에너지의 관계는 플랑크의 [복사]이론에 의해 주어진다. (ΔE = hν)

위의 논문에서 보어는 첫 번째의 가정이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seems to present itself)고 말한다. 안정상태에서의 동역학적인 평형상태에 있는 전자의 운동이 고전역학으로써 기술될 수 있음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 보어는 두 번째 가정을 일상적인(ordinary) 생각과 명백히 상충하는 것이라고 본다. 유의할 점은, 1913년의 이 글에서 ‘ordinary’라는 표현이 ‘고전 물리학에 근거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수소원자의 선스펙트럼에 나타난 경험적 자료들을 수소원자의 내부 구조와 결부시켜서 설명하고자 할 때 이 두 번째 가정은 필수적인 요소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어가 자명한 것으로 간주한 첫 번째 가정은 과연 얼만큼이나 자명한가? 예를 들어 한 안정상태에서 전자가 과연 동역학적 평형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도 있는데, 이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고전 전자기학에 따르자면 하전된 입자인 전자의 가속된 운동에는 에너지 손실을 수반하는 전자기파의 방출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만일 보어가 수소원자모델 논문에서 전제로 놓고있는 위의 두 가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면 새로운 이론은 어느 단계까지 어려움 없이 구성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앞의 물음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전제들은 고전적 전자기학의 테두리 속에서는 인정될 수 없는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안정상태와 그들간의 전이(transition)라는 요소를 도입한 보어의 1913년 수소원자 모델은 스펙트럼 분석(spectroscopy)과 원자구조에 대한 탐구를 동일한 문맥 속에 결합시키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적어도 하나의 심각한 난점을 안고 있는데, 그것은 이 모델이 전자의 운동(motion)―전이가 아니라―이라는 측면을 개념적으로 포섭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먼저 우리는 에너지 준위들간의 전이라는 요소가 일반적인 운동의 개념과는 잘 들어맞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보어의 1913년의 이론틀을 놓고 보자면, 전자가 한 에너지 상태로부터 다른 에너지 상태로 전이할 때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것은 오로지 전이 이전과 이후의 상태뿐이다. Δt라는 시간에 걸친 운동은 다시 임의의 부분들로 분석될 수 있는데, 운동의 개념은 연속성의 개념을 함의하고 있어서, 운동의 시점 t0에서 종점 (t0+Δt)에 이르는 시간 Δt를 n개의 시각들 a1, a2, ..., an (t0 < ak < t0+Δt)로써 (n+1)개의 구간으로 분할했을 때 임의의 k에 대해

가 성립한다. 여기서 X(t)는 전자의 위치나 속도 같은 어떤 구체적인 물리량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여기에 이른바 “양자 도약”(quantum jump)이라고 불리는 전자의 전이 과정을 끌어다 놓으면 문제가 드러난다. 양자 도약이 시작된 시각을 t0, 그리고 그것이 종결된 시각을 (t0+Δt)이라고 할 때 예를 들어 t1=라는 시점을 상정하면, 보어의 모델에 있어 t1에 대해서는 위 등식의 세 항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물리적으로 잘 정의된(well-defined) 의미를 갖지 못한다. 1913년의 수소원자모델에 나타난 두 근본 가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면, 한 안정상태를 떠나 다른 에너지 준위의 안정상태로 옮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전자에 대해 물리적 상태를 확정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이번에는 이 사태를 방출되는 전자기 복사라는 측면에서 고찰하자. 전자의 전이에는 균질한 복사, 즉 단일한 파장을 가진 전자파의 방출이 수반된다. 이 복사파의 파장은 λ=로 주어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복사파의 파장이 결정되는 시점은 정확히 언제인가? 전자의 전이와 복사파의 방출은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시점에 파장 λ의 복사파가 방출되기 시작했다면 그 순간 이 전자는 이미 이전의 에너지 준위를 떠난 것이 되고 동시에 아직 종착점인 에너지 준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텐데 그렇다면 “전자는 전이를 시작할 때 어떻게 이미 전이의 종착점을 알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소시켜 버릴 수 있는 한 가지 길은 양자적 전이라는 과정 전체를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하나의 단위현상으로 놓는 것인데, 이는 실제로 보어 자신이 취하고 있는 입장이기도 하다. Meyer-Abich(1965)의 분석을 참조.

1913년의 보어 모델에서 운동의 개념이 문제성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비단 에너지 준위들간의 전자의 전이와 관련해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한 에너지 준위에 존재하고 있는 전자의 운동은 과연 어떤 규칙성을 따르며, 어떤 법칙들을 통해 기술될 수 있는가? 안정상태의 존재와 전자의 전이 및 그에 수반하는 복사파 형태의 에너지 방출(또는 흡수)에 대한 보어의 두 근본 가정에 있어 한 안정상태 내의 전자가 고전역학적 법칙에 따라 운동한다는 보어의 설명은 분명 애드혹(ad hoc)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 이는 물론 보어 모델의 기반이 된 전 단계로서 원자핵 주위를 (타)원궤도로 회전운동하는 전자를 그리고 있는 러더포드의 모델을 놓으면 자연스런 일로 보아질 수도 있다. 러더포드의 모델에서 전자의 운동은 쿨롱 힘(Coulomb force)과 전자의 원심력간의 평형으로 규정되고 있었다. 보어는 이러한 러더포드의 모델이 결정적인 난점 곧 원자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안정상태의 개념을 끌어들여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지만, 전자의 원자 내의 운동이라는 문제 앞에서 그는 어쩔 수 없이 고전이론에 의거한 전자의 운동을 새 모델 속에 수용하고 있다.
이는 대응원리가 잠재적으로는 이미 수소원자모델에 관한 보어의 1913년 논문 속에도 형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1913년 이전의 물리학이 수소원자의 선스펙트럼에 드러나는 복사선들을 설명하는 방식은,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궤도를 따라 운동하며, 이렇게 주기 운동을 하는 전자가 제 운동의 주기와 동일한 주기의 복사파를 낸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설명은 고전이론의 테두리 안에서 합리적인 설명이었다. 그런데 보어는 이제 안정상태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전자가 하나의 안정상태 속에 있는 한 복사파의 방출이나 흡수는 일어나지 않고 상이한 두 안정상태 사이를 전이할 때에만 그 에너지 준위의 차이만큼의 에너지가 방출 또는 흡수된다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안정상태 속의 전자의 운동을 고전이론에 의해 기술되는 현상으로 ―보어의 해결방식을 좇아― 간주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헷갈릴 수 없는 사항은 스펙트럼 선으로 나타난 복사파는 보어의 새 이론에서 볼 때 한 가지 안정상태와 결부시켜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 절에 들여다보겠지만 1920년의 대응원리는 스펙트럼선(의 진동수)을 ―물론 ‘특정한 경계조건 하에서’라는 단서가 붙지만― 하나의 안정상태와 연결하고 있다.
러더포드는 1913년 3월에 보어의 원자모델 3부작 논문 가운데 첫 부분을 읽고서 보어에게 다음과 같은 구절이 담긴 편지를 보낸다: “수소의 스펙트럼의 근원이 어떤 것인가 하는데 대한 당신의 생각은 아주 창의적일 뿐만 아니라 잘 돌아갈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플랑크의 생각이 고전역학과 뒤범벅되어, 그 바탕에 깔린 물리적인 아이디어가 어떤 것인지 그려내기가 어렵군요.”(1913년 3월 20일자) 이와 같은 불만을 공유하고 있는 과학철학자 가운데 라카토슈(Imre Lakatos)가 있다. 라카토슈는 “Falsification and the Methodology of Scientific Research Programmes”(1970)에서, 1913년 수소원자모델 속에서 보어가 뚜렷이 애드혹(ad hoc)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리하여 그는 보어의 1913년 원자모델 그리고 대응원리에 기초한 보어의 원자이론 전체를, 옛 이론에다가 그것과 논리적으로 부정합(不整合)의 관계에 있는 새 이론을 접합한 것(graft)이라고 비판한다. Lakatos(1970), 140ff.
결국 보어의 프로그램이 논리적 관점에서 볼 때 부정합의 바탕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라카토슈는 대응원리가, 보어가 이러한 부정합의 결함을 눈가림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장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판의 이 마지막 부분은 라카토슈의 경솔한 해석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는 보어가 이러한 부정합의 면모를 얼마나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고 또 그것을 얼마나 자주 명시적으로 표현했었는지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고전적 전자기 이론과 양자이론 1925년 이전까지는 “양자역학(Quantenmechanik; quantum mechanics)”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았다. 그 이전에 사용된 개념은 “양자이론(Quantentheorie; quantum theory)”이었다.
의 가설들 사이에 근본적인 불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보어의 글들 속에서 거듭 정식화되었다. 그러나 보어는 이런 불연속성을 근본적인 사실로 파악하면서도 단순히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하나의 문제상황으로 파악하였다. 보어는 1920년에 발표된 논문 Bohr(1920).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양자이론적] 학설과 종래의 [즉 고전적] 역학적 및 전자기학적 입장(Vorstellung)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펙트럼에 드러나는 증거들(Zeugnisse)을 전술(前述)된 바 원자구조에 관한 이해(Anschauung)와 결부시켜서 합리적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보게될 것이다. 즉 [고전]역학이 안정상태들 간의 전이를 기술하는 데는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태들에 대해서 하나의 수미상응하는 이론(eine in sich zusammenhängende Theorie)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426-7, 필자의 강조 첨부). 대응원리는 이처럼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두 이론으로부터 하나의 수미상응하는 이론을 구성해내고자 하는 개념적 산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13년 12월 코펜하겐에서 행한 강연 “Om Brintspektret”(수소의 스펙트럼에 관하여) Bohr(1914).
에서 보어는, 느린 진동의 영역에 대해서는 양자이론과 고전이론이 복사의 진동수에 관해 서로 일치하는 값을 산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는, 원자로부터 방출되는 ―그리하여 스펙트럼 선으로 나타나는― 복사파에 대해 고전이론을 적용하여 그 성질들을 근사적으로 계산해낼 수 있다는, 1920년 판 대응원리의 기본적인 생각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고전이론에 근거한 근사적 계산 가능성은 대응원리가 양자역학의 발달 초기 단계에 있어서 중요한 발견술적 원리로 채택되어 쓰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 강연 속에 나오는 보어의 다음과 같은 말은 대응원리의 의미를 파악하게끔 해 주는 단서가 된다: “여러분은 내가, 일반적으로 ‘설명’이라고 불릴 만한 어떤 것을 제공하려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복사파가 어떻게, 그리고 왜 방출되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는 일상적인 [즉, 고전적인] 개념들과의 어떤 연결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즉 그것은 느린 전자기적 진동에 의한 방사(emission)를 고전적 전자기학의 바탕 위에서 계산해 낼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어가 ‘설명’과 ‘계산’을 구분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 원자의 복사(輻射)라는 현상에 대한 이해의 문제를 중심으로 출발한 양자이론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발견의 원리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대응원리의 모습이 여기 이미 드러나고 있지만, 대응원리가 명시적으로 정식화되기까지는 아직 몇 해가 더 흘러야 했다.


3. 대응원리의 정식화

1920년 4월 독일 물리학회에서 행한 강연 이 강연의 내용은 Bohr(1920)로 발표되었다.
에서 보어는 처음으로 양자이론과 고전역학 및 전자기학 이론 사이에 성립하는 대응의 관계를 언급함으로써 대응원리를 도입한다. 강연에서 거론된 주제는 수소의 선스펙트럼에 대한 분석이었으며 대응원리는 이 스펙트럼에 관한 양자이론적 해석이라는 맥락 속에서 도입되었다.
스펙트럼 분석은 이미 1880년대의 키르히호프(G.R. Kirchhoff)와 분젠(R.W. Bunsen)등의 작업 이래로 물질에 대한 탐구에 있어 이미 정착된 그리고 중요한 방법으로서 화학의 한 분야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물질들의 정체를 밝히는데 대단히 유용한 도구였다. 즉 스펙트럼 분석은 극소량의 시료만 있어도 대상의 정체를 정확히 밝혀내게 해 주었는데 그것은 모든 원소들이 제각기 고유한 띠들의 배열을 스펙트럼에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한가, 즉 어떻게 해서 물질들은 각각 스펙트럼에 나타나는 선들의 파장, 강도(intensity) 그리고 편광성(polarization)에 있어서 고유한 패턴을 가지는가 하는 물음은 20세기에 들어서서도 여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었다. 스펙트럼 분석이 원자의 구조에 대한 탐구와 연결된 것은 20세기가 밝아올 무렵이었으며, 톰슨과 러더포드가 이끈 그룹들은 선구적인 작업을 통해서, 선스펙트럼으로 가시화되는 원자로부터의 복사를 원자의 내부구조와 결부시켜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연결은 보어의 1913년 논문 속에서야 비로소 성공적인 첫걸음을 내디뎠다. 여기서 상기해야 할 만한 사실은, 1885년에 스위스의 한 수학교사였던 발머(J.J. Balmer)에 의해 제안된 식― 이른바 “발머의 식”(Balmer's formular)―이 수소원자의 스펙트럼 분석에 드러나는 선들의 파장이 어떤 규칙성을 가지는가에 관해 이미 성공적인 일반화를 제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대응원리가 Bohr(1920)에서 어떻게 도입되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Bohr(1920)은 대응원리가 명시적으로 거론된 첫 문헌이지만, 보어의 논문이 대응원리 자체를 주제로 했던 것은 아니며 대응원리의 도입 또한 체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응원리”라는 표현이 최초로 등장한 문맥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제 방출된 스펙트럼[선]과 안정상태에 있어서의 [전자의] 운동을 간단히 비교함으로써 어떻게 그러한 결정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이려 한다. 이는 동시에 우리를 앞서 언급한 대응원리로 이끄는 비교다.”(Bohr(1920), 429. 강조는 필자의 것)
이 문장을 보자면 대응원리는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어야만 한다. 그러나 주어진 문맥의 앞쪽 어느 곳에서도 대응원리는 명시적으로 언급된 바 없고, 보어가 가리키는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다. 굳이 한 군데를 짚어낸다면 다음과 같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안정]상태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능한 전이들의 다양한 유형과, [전자로 이루어진] 계(系)의 운동을 분석해볼 수 있는 여러 조화 성분(harmonic component)들 사이에는 광범위한 대응이 성립한다는 것이 드러났다”(Bohr(1920), 427). 보어는 다음과 같은 관계식 속에서 이런 대응의 관계를 읽는다.

여기서 ν는 전자가 상이한 에너지 준위들간을 전이하는데 수반되는 복사파의 진동수이고 ω는 전자의 궤도운동을 특징짓는 (즉 궤도운동을 단진동으로 파악했을 때) 진동수이다. 보어는 위의 논문에서, 일반화된 발머의 식으로부터 ν를, 그리고 전자의 궤도운동을 쿨롱 힘과 전자의 운동에 의한 원심력의 평형이라는 고전적 관점에서 ω를 계산하면서, 이라는 조건 하에서 두 값이 일치하는 것을 보인다. 이 일치 관계는 대응원리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의 사실상 유일한 토대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안정상태들 사이의 전이와 전자의 궤도운동이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보어의 원자모델에 있어서 원칙적으로 독립적인 요소들임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는 ν가 계산되기 위해서 한 쌍의 상이한 안정상태가 여건으로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데 반해 ω는 단 하나의 안정상태에 부수되는 물리량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뚜렷이 드러난다. 이렇게 본다면 두 종류의 이질적인 진동수 ν와 ω를 연관짓는 것은 애초에 그 물리적인 함축이 의심스런 일이다.
더구나 예를 들어 n=10인 상태로부터 n=9인 상태로의 전이에 대한 ν와 ω의 오차 오차=. 과학교과서에서 보어 원자모형의 에너지 준위와 관련한 논의에 등장하는 양자수 n은 기껏해야 6이나 7 정도다.
를 계산할 경우 14%, 그리고 ―물리적으로는 전혀 실질적인 의미를 갖지 않을― n=1000에서 n=999로의 전이를 상정할 때에야 비로소 0.15% 정도의 “경미한” 오차 범위로 두 값이 근사하게 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러한 “일치”가 실제로 어떤 의의를 갖는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Bohr(1920)의 다음 문장은 우리를 더욱 의아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입증된(nachgewiesen) 바 대응의 더 깊은 의미를 캐어보면, 우리는 첫째로 이 대응이, 스펙트럼 선들에 대해 두 [즉 고전적인 그리고 양자이론적인] 방법이 산출한 진동수가 서로 일치한다는 의미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 선들의] 강도(intensity)에 관해서도 유효성을 갖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게 된다.”(Bohr(1920), 431)
우선 의아스런 점은, 보어가 대응원리를 기껏해야 “이라는 조건 하에서 일치하는 ν와 ω의 값”이라는 데에 정초하면서 “입증된 대응[관계]”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가 과연 어떤 의미에서 “대응의 더 깊은 의미”를 캐어간다고 말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1920년의 텍스트 속에서 이 “대응의 더 깊은 의미”를 직접 규명해 주는 구절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한 대답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은 고려 속에서 발견한다.
보어는 1918년에 발표된 논문 “On the Quantum Theory of Line-Spectra”에서 “[고전이론에 따른] 복사파의 방출과 결부된 전자기력의 [즉, 전자가 에너지를 상실하면서 원자핵으로 떨어지게 하는] 효과는 하전된 입자들 간에 쿨롱의 법칙을 따라 나타나는 전기적 끌어당김 혹은 밀침의 효과에 비하여 아주 작다. (…)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 단지 후자의 [즉, 쿨롱의 법칙에 의한] 효과만을 고려하여 [전자의] 안정상태에 있어서의 운동을 근사적으로 기술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자연스런 가정”(98-99)이라고 말한다. 보어의 이러한 기술에 의존한다면, 원자내의 전자의 운동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에는 전기동력학적인 요소를 무시하고서도 기술(記述) 가능하다.
이렇게 해서 ω의 의미는 보어의 모델 안에서도 일단 유지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로 남는 것은 ν와 ω의 연결, 즉 두 가지의 이질적인 물리량들의 연관성이다. 물론 첫째로 우리는 여기서, 당시의 물리학 즉 양자역학이 정착하기 이전의 고전 전자기학적 토대에서 볼 때, 전자가 방출하는 복사파의 진동수는 그것의 주기운동이 지니는 진동수와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 극히 자연스런 생각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원자의 스펙트럼 분석(spectroscopy)과 원자의 구조라는 문제를 연결한 것이 러더포드의 공헌이었다면, 보어의 1913년 원자모델은 여기에 또 하나의 요소 즉 플랑크의 작용양자(quantum of action)가 추가된 물리학 이론의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인데, 보어 모델의 토대가 된 이론 가운데 하나인 플랑크의 복사이론에서도 ‘복사의 진동수 ν = 주기운동의 진동수 ω’라는 관계식은 기본적인 가정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흑체복사(blackbody radiation)의 문제에 있어서 고전적 가정들에 기초한 레일레이(J.W.S. Rayleigh)와 진스(J.H. Jeans)의 식이 낮은 진동수의 영역에 걸친 경험적 자료들과 성공적으로 부합하는 결과를 산출했다는 점 역시 보어의 대응원리를 낳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우리는 다음 구절에서 이런 관계를 읽어낼 수 있다. “온도복사(temperature-radiation)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느린 진동의 극한 영역에서는 고전적인 역학과 전자기학으로 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이 [온도복사의] 현상을 관찰의 결과들과 부합하게끔 기술할 수 있는 어떤 이론이든 고전적 복사이론의 어떤 자연스런 일반화라는 형태로 구성되리라는 기대를 갖게된다.”(99) 옛 이론이 어떤 한계를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역에서 여전히 뚜렷한 유효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 영역을 포함하는 더 넓은 영역에서의 유효성을 주장하는 새 이론은 어떤 방식으로든 옛 이론의 일반화라는 성격을 지니게 되리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고전이론과 양자이론의 관계에 대해 논할 때 보어가 말하는 “일반화”란, 대부분의 논리경험주의자들이나 혹은 포퍼가 생각하는 것처럼 한 이론이 그 이론을 논리적으로 함축하는 새 이론에 의해 대체되는 과정 포퍼의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1968), Section 85 참조.
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의 논의에서 볼 때, 대응원리의 바탕이 되는 생각들, 즉 원자의 복사와 전자의 운동을 관련짓는 것이나 또는 한계를 드러낸 고전이론이 어떤 극한 영역에서는 새 이론과 일치하는 결과를 산출한다는 생각은 이미 보어의 1918년의 논문에서, 뿐만 아니라 1913년의 수소원자모델 논문 속에서도 발견된다. 그렇다면 1920년의 정식화가 가지는 의의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다시 한 번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수미 상응하는’ 혹은 ‘앞뒤가 맞는’ 이론이라는 표현이다. 1920년의 논문에서 보어는 안정상태들 간의 전자의 전이에 대해서는 고전적인 전자기학 이론이 적용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특정한 안정상태 속에 있는 전자의 운동은 고전적인 방식으로 기술 가능하다는 가정 위에 이 상태들에 대한 하나의 ‘앞뒤가 맞는 이론’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1920년의 대응원리는 이런 이론을 구축하려는 프로그램에 있어 구체적인 구성원리로서 제안되었다.


4. “양자이론적 원리”로서의 대응원리의 발전, 그리고 실패

1920년에 도입된 대응원리는 이후 원자이론의 발전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대응원리를 발견술적 원리로 활용하는 것은 긍정적인 방식으로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방식으로도 가능하다. 긍정적 발견의 원리로서의 대응원리는 이제 막 구성되어가고 있는 양자이론의 체계에 대해 고전이론으로부터의 제안들을 가능하게 했으며, 또 부정적 발견의 원리로서의 대응원리는 양자이론의 구성과정에서, 경험적으로 확증된 영역의 고전이론이 함의하는 결과와의 비교를 통하여 새로운 제안들을 배제 혹은 수정하도록 했다. 우리는 여기서 대응원리에 기대어서 새로운 이론인 양자이론을 구축해가는 작업이, 그야말로 無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고전이론의 지평을 떠난 뒤에도 ―즉 그 근본적인 한계가 철저히 인식된 후에도― 고전물리학이 지닌 틀을 하나의 표준으로 삼고서, 새 이론에 있어서 그만큼의 완결성을 확보해가려는 시도의 과정이었음을 확인한다. 이런 점에서 그 결과적 산물로서의 양자역학이 고전물리학과 얼만큼 양립가능 또는 불가능한가하는 문제와 별도로, 양자역학은 적어도 그 생성의 초기단계에 있어서 고전물리학에 의존하고 있었다.
두 이론 즉 고전이론과 양자이론 사이에서 대응원리가 가지는 의미는 후자의 형성단계를 따라 변화를 겪는다. 보어의 1923년 논문 Bohr(1923).
에는 다음과 같은 문단이 들어있다:

“On the Quantum Theory of Line-Spectra”(1918)에서 [대응원리라는] 이 표현은 아직 사용되지 않았고, 다만 그 원리의 내용이 양자이론과 고전이론 간의 형식적인 유비의 관계로서 그려졌다. 하지만 그런 표현 방식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제 보게 되겠지만― 대응원리는 순전히 양자이론적인 법칙으로 간주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양자이론적] 가설들과 [고전적] 전자기 이론의 대비를 약화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142-143, 필자의 강조.)

1923년의 보어는 대응원리가 어떤 조건 하에서 두 이론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1913년과 1923년 사이에 걸친 10년의 간격을 확인할 수 있다. 원자의 구조와 원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현상들을 해명하는 데 있어서 고전이론이 지니는 한계를 인식하고, 고전 물리학의 틀에 기초한 러더포드의 원자모형에다가 플랑크의 작용양자(quantum of action)라는 요소를 끌어들이면서 분명 ‘이질적 요소들의 접합’이라고 평가되어 마땅한 원자구조 모형을 제출하고 있었던 것이 1913년의 상황이었다면, 1923년의 양자이론은 이미 상당히 앞뒤가 맞게 짜여진 이론이었고, 이제는 대응원리를 그 자신의 완결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시키는 이론의 단계에 올라 있었다.
대응원리의 적용은 1924년에 제시된 보어-크라머스-슬레이터 Niels Bohr, Hendrik A. Kramers, John C. Slater.
(이하에서는 BKS로 표기함)의 산란(dispersion) 이론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복사와 물질 알갱이 사이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세 사람의 물리학자가 공동 작업을 통해 제안한 이 이론은 결정적으로 대응원리에 의존하고 있었다. 보른(M. Born)은 1924년 발표된 논문 “Über Quantenmechanik”에서 “이 [BKS] 이론의 결실은 크라머스가 산란에 대한 식을 세우고 또 정당화하는데 성공했다는 데서 드러났는데, 이 식은 양자역학 이론의 모든 요구, 특히 대응원리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379)” 1924년 무렵 양자역학의 형성을 주도하고 있던 과학자들, 특히 코펜하겐과 괴팅겐의 물리학자들에게 대응원리는 이처럼 새 이론이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될 조건이라는 규범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고 쓰고 있으며, BKS 논문 Bohr/Kramers/Slater(1924).
의 본문에서도 이 프로젝트의 토대에 있어서 대응원리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거듭 명시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BKS 논문의 159, 163, 164, 165, 168, 170 쪽 등을 참조.

BKS의 프로그램은 원자를 하나의 진동자(oscillator)로 해석하면서 원자의 복사를 원자내 전자의 운동으로부터 계산해낸다는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있었다. 이는 정확히 우리가 1913년의 원자모델 속에서 찾아낼 수 있던 대응원리적인 생각, 즉 새로운 이론에서 빈칸으로 남아있던 전자의 운동이라는 요소를 고전이론으로부터 차용하여 메우는 ―물론 그러면서 새 이론이 나름대로의 구조를 획득해 갈 수정의 여지는 열어놓은 채― 이론구성의 원리로서의 대응원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BKS 이론에서는 이른바 “양자 도약”(quantum jump)과 관련하여 물리적인 인과의 개념이 흔들리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BKS 이론의 관점에서 양자 도약은 에너지의 실제적인 유입이나 유출 없이 일어나는 현상이었고, 이 이론에서 보어를 비롯한 세 사람은 어떤 구체적인 결과에 대해 정확히 그에 상응하는 원인을 결부시키기를 포기하는 식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는 또한 아인슈타인이 1917년의 논문 Einstein(1917).
에서 주장한 바, 원자들간의 에너지 교환이 원자 내 에너지 준위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견해와 상충하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원자들은 서로 광량자(photon)의 형태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이러한 에너지 교환과 양자 도약은 에누리 없이 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BKS와 아인슈타인의 입장 사이에는 경험적인 테스트가 가능한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보테(W. Bothe)와 가이거(H. Geiger)는 BKS 이론인 발표된 바로 그 해에 그것을 실험적으로 테스트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Bothe/Geiger(1924).
다음 해인 1925년 그들의 논문 Bothe/Geiger(1925).
을 통해 발표된 이 실험의 결과는, BKS 이론이 틀렸다는 것이었다.
사실 Einstein(1917)과 BKS 이론 그리고 보테-가이거의 실험에 이르는 일련의 줄거리의 배후에는 빛을 입자로 보는, ‘광량자’라는 아이디어에 대한 보어의 저항이라는 요소가 들어있다. BKS 논문의 서두에서 보어 등은 빛에 대한 파동이론과 입자이론을 대치시키고 있다: “이 [광량자] 가설이 발견술로서 지니는 중대한 가치가 비록 광전효과에 있어서 아인슈타인의 예측이 입증됨으로써 확인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광량자 이론은 빛의 전파라는 현상에 대한 만족스런 해결로 간주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보테-가이거의 실험에 의해 그리고 같은 해인 1925년에 역시 실험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나온 Compton/Simon의 논문도 보테-가이거와 마찬가지의 결론을 도출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보어의 저항은 결정적으로 입지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BKS 이론이 반박된 것은 새로운 원자이론을 고전물리학의 이론에 접목된 이론 체계로 구축하려 했던 시도가 일단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대응원리에 기초한 연구 계획의 부정적 결말을 의미하였다. BKS 이론의 실패는 대응원리에 대한 타격을 뜻하는 것이었고, 실지로 이는 1925년 이후 양자역학의 구축에 있어서 대응원리가 이론 구성의 중심적인 고려 사항에서 배제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BKS 이론의 실패가 반드시 대응원리 자체의 실패 혹은 그것의 무의미함을 함축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대응원리에 바탕을 두고 구현될 수 있는 하나의 가능한 결과일 뿐 결코 대응원리로부터 필연적으로 연역되는 결론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이론의 구성에 사용된 발견의 원리가 그 이론의 몰락과 더불어 포기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BKS 이론에 대한 파울리(Wolfgang Pauli)의 태도는 우리의 흥미를 끈다. 파울리는 BKS 이론이 보테와 가이거의 실험에 의해 반박되기 이전에도 이미 그것에 대한 명백한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그는 보테와 가이거의 실험이 제안되자, “만일 그 실험이 보어 편에 유리한 결과를 낳는다고 해도” BKS 이론은 억지로 짜깁기된 가짜 해(解)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BKS 논문을 하나의 “불행스런 논문”이라고 평가했었다. 그러나 파울리는 결코 대응원리 자체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어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응원리가 다중적인 주기성을 지닌 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원자들에 있어서 어떤 형태로든 유효성을 지니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주기성의 계에 적용될 수 있는 이 원리의 정확한 형태를 아직 모르며, 그것은 이제야 찾아져야 할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 이상의 전자를 가진 원자들과 관련해서 대응원리로부터 어떤 결론을 이끌어낼 때에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파울리가 보어에게 보낸 1924년 12월 12일자 편지)

1925년 즈음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원자내의 ‘전자의 궤도(orbit)’라는 개념이 이미 포기된 상황이었다. 이런 포기는 대응원리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20년의 도입 단계에서 대응원리는 ν와 ω값의 근사적 접근이라는 토대 위에서 정식화되었었다. 그런데 여기서 ω란 전자의 궤도 운동과 결부된 진동수였고, 따라서 궤도라는 개념이 포기된 이후엔 ω라는 물리량 역시 그 의미를 상실했다고 보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25년 이후 대응원리는 물리학자들의 논의로부터 사라져버렸나? 다음 사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5. 보어-크라머스-슬레이터 이론 이후의 대응원리

BKS 이론의 실패가 대응원리의 위상을 두드러지게 약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대응원리는 당시의 물리학자들에게 여전히 양자역학의 구성에 있어서 어떻게든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되는 규범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양자역학의 시대를 연 중요한 논문 가운데 하나인 Born/Heisenberg/Jordan(1926) “Zur Quantenmechanik. II.”, Zeitschrift für Physik 35.
에서 저자들은 “양자이론적 운동학으로부터 고전적인 운동학으로의 대응원리적 이행(Übergang der quantentheoretischen Kinematik in die klassische)” 이들이 말하는 이행의 방향에 주목하라.
에 관해 논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디락의 1926년 논문 Dirac(1926).
에서 발견되는 다음과 같은 구절 역시 흥미롭다:

최근의 한 논문 Heisenberg(1925).
에서 하이젠베르크는 고전역학의 공식들이 어쨌든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옳지 않으며, 다만 그것들로부터 물리적인 결론을 끌어내는 수학적 조작의 방식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폈다. 다시 말해 고전 이론이 제공하는 모든 정보는 새 이론 속에서도 사용 가능하다는 얘기다. (디락의 강조)

그러면서 디락은 고전이론과 새 이론의 대응관계에 대해 “양자이론과 고전이론간의 대응은  이라는 극한에서의 일치보다는 두 이론의 수학적 조작이 많은 경우에 동일한 법칙을 따른다는데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상이한 수학적 조작(mathematical operation)이 동일한 법칙에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디락의 문맥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BKS 이론에 대해선 냉혹한 비판자이던 파울리도 1926년에 나온 논문 Pauli(1926).
에서 대응원리를  이라는 조건의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 양자도약과 관련된 현상 일반에 대한 적용에로 확장하는 가능성을 논의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당시 물리학 분야의 주도적인 학술지들을 통해 발표된 논문들의 추이를 관찰함으로써 분명해지는 것은 1925년 이후 대응원리가 연구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원리로서의 위상을 점차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다음과 같은 Teller et al.(1991)의 서술은 대응원리의 성쇠에 관한 적절한 묘사를 제공한다. “사람들은 점차로 보어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갔다. 사람들은 대응원리와 실험 데이터를 토대로 나아갔다. (…) 대응원리는 고약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 의미는 불명확했고 [개념적으로] 제대로 정의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십여 년 뒤, 수학적으로 정합성을 지닌 해가 발견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응원리에 등을 돌렸다.”(Teller et al.(1991), 141f)
그러나 필자는 이런 변화를 BKS 이론의 실패라는 시각에서만 조명하는 것은 불충분하며, 1925-26년을 지나면서 대응원리를 중심으로 한 연구프로그램의 일차적 목표가 달성된 것, 다시 말해 체계화된 양자역학의 첫 판본이 완성된 점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


6. 대응원리의 의미

이제까지 살펴본 바를 종합해 보자면 대응원리는 양자역학의 성립 과정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대응원리의 의미는 오히려 양자이론의 발달 단계에 따라서 변화하였으며, 이러한 대응원리의 의미의 발달은 다음과 같은 단계들로 분석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 고전 물리학 이론은 결정적인 난점들을 노정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실지로 여전히 유일한 체계적 이론이었다. 이 단계에서 새 이론은 기존 이론의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제안되고 있다. 이와 같은 발생 초기 단계에서 새 이론은 기존 이론에 결정적으로 의존하며 그러나 결과적으로 두 이론이 어떤 상호 관계에 놓이게 될 것인지는 이 단계에서 예견되지 않는다.
, 라카토슈가 비판하는 것처럼 고전 이론에 덧 얹혀진 이론의 모습을 띤다. 즉 이 단계의 양자이론에서 대응원리[적인 아이디어]는 양자 도약이라는 전혀 새로운 요소와 고전적인 운동의 개념을 한데 묶은 그림을 낳았다. 또한 새 이론이 어떤 경계조건 하에서 기존 이론과 일치하는 결과를 산출한다는 사실은 새 이론의 새로움으로부터 연유하는 충격과 그에 대한 반감을 약화시켰고, 결과적으로 그것의 수용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구축되어가고 있는 대상이 기존의 이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혀 새로운 이론이라는 점이 뚜렷이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론구성의 단계에 있어서 새 이론은 대응원리를 발견술적 지침으로 삼아, 그것을 통해 기존 이론으로부터 필요한 요소들을 빌어다가 ―상황에 맞도록 변형시켜 가면서― 쓴다. 파울리가 보어에게 보낸 편지 (1925년 11월 17일자): “에너지 함수 H(p q)의 자리에는 일단 계속해서 고전물리학적인 형태를 집어넣는 것이 가장 간단한 출발일 뿐만 아니라 양자수가 큰 극한의 영역에서 [새 양자이론이] 고전 이론과 점근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대응원리는 구성될 이론의 큼직큼직한 빈칸들을 일단 메워가도록 돕는다.
세 번째 단계에서 대응원리는 그 자체로 완결적인 체계를 목전에 두고있는 새 이론에 있어서 그것이 고전이론의 체계성에 필적하는 체계를 갖추도록 이론 구성을 주도해 간다. 두 번째 단계와 구별되는 점은, 보어의 1923년 논문에서 본 것과 같이 대응원리가 이제는 ‘새 이론의 내적인 구성원리’로 자리매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어에게 있어 양자이론과 고전이론 사이의 관계를 특징짓는 표현은 “확장” 또는 “일반화”였는데, 새 이론을 통한 기존 이론의 확장이라는 구도가 서서히 선행하고 후속하는 두 이론이라는 구도로 바뀌어 감을 볼 수 있다. 고전적인 역학 이론에 대한 후속이론으로서의 그리고 고전이론에 대해 마주놓인 어떤 독립적인 이론으로서의 양자역학이라는 개념은 하이젠베르크의 1925년 논문 (Heisenberg(1925)) 속에서야 비로소 구체화되었다.
이 단계에서 대응원리는 일종의 효율적인 검산 장치의 기능 “양자역학에 얽힌 수학적 원리들은 너무나도 복잡해서 문제 하나에 대한 해를 구하려고 일년 (혹은 심지어 몇 해) 동안 작업을 해야하는 형편입니다. 게다가 문제는 그렇게 풀어놓은 답이 맞는 것인지 확신하기도 어렵다는 점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대응원리를 검산 장치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Teller et al.(1991), 142)
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간과되어 온 이론 내의 빈칸을 인지하고 또 그것을 메울 수 있게 하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실지로 BKS 이론의 실패 이후 수십 년이 지난 뒤에 대응원리가 다시 일군의 물리학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는 계기가 목격되는데, 이는 이른바 ‘양자 카오스’(quantum chaos)에 관한 연구 분야에 있어서다. 1970년대 초부터 물리학과 화학의 영역에서는 ‘카오스’라는 개념으로 포괄되는 현상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Prosen(1994)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양자카오스이론 분야”에 대해 보고하고 있는데, 이 새로운 분야에서는 그것의 고전적 대응자(classical counterpart)가 카오스 현상의 성격을 띠는 양자역학적 계의 통계적 성질에 관해 연구된다고 한다. 이 분야는 “양자카오스학”(Quantum Chaology)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위의 세 단계로써 새 이론의 구성에 있어서 발견술 즉 연구 방법론적 원리로서의 대응원리가 지닌 기능은 모두 포괄되었다. 그러나 과학 이론의 변동에 대한 철학적 재구성이라는 관점에서는 그 다음 국면을 생각할 수 있다. 이제 그것의 발견술적 의미는 소진되었지만, 대응원리는 신구 두 이론간의 관계를 조명하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것은 서로 양립불가능한 두 이론간에 성립할 수 있는 특수한 연속성의 면모를 조명하는 요소로 남는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별도의 공간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Bohr, N. (1913): “On the Constitution of Atoms and Molecules” Part I-III, Philosophical Magazine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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