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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와 원효의 화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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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한철학회 논문집
철학논총 제31집 2003․제1권
종교다원주의와 원효의 화쟁


최  유  진


종교다원주의와 원효의 화쟁* * 본 연구는 2002학년도 경남대학교 학술논문게재연구비 지원으로 이루어졌음.


** 경남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최  유  진(경남대)**


[한글요약]

초기불교는 논쟁의 초월을 지향하고 있고 이를 이어받은 대승의 중관파도 진리에 대한 무집착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초기 불교나 중관파의 태도도 종교 간의 쟁론의 화해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원효의 화쟁은 더욱 적극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원효의 화쟁의 입장에서는 각각의 이론들이 그 자체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가치가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원효의 궁극적인 목적은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쟁론을 화해시키려 한 것도 쟁론하는 것 자체가 부처의 이상에서 멀어지는 것이고 궁극적인 이상 실현을 할 수 없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다양한 이론들이 부처의 이상의 실현을 위해 집착 없이 나아가고 있다면 그것들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다 가치가 인정이 된다. 종교 간의 갈등의 문제도 마찬가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다양한 종교가 각자 종교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모두 가치가 인정이 된다. 그 종교적 이상을 절대화시키지 않는다면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원효의 화쟁에서 가장 특징적인 방법은 긍정과 부정의 자재의 방법이다. 이 방법에서 우리는 자신의 종교 전통을 절대화하지 않으면서 자기 종교의 궁극적인 이상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배울 수 있고 타종교 전통에서 가르치는 종교적 진리나 이상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종교적 이상 실현의 폭을 확대시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주제 분야 : 불교, 한국불교, 원효
주 제 어 : 종교다원주의, 중관파, 긍정과 부정의 자재, 원효, 화쟁
1. 서 론

현재 우리나라 종교의 상황을 보면 다양한 종교가 경쟁하고 있고 종교 간의 갈등도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른바 다원적 종교의 사회인 것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종교다원사회라 해도 주도적인 종교가 있고 그 외에 소수파인 다른 종교들이 있어서 다원적인 양상으로 전개되는 데 반하여 현재 우리나라는 동양종교와 서양종교가 거의 비슷한 정도로 분포하고 있어서 어느 하나가 주도적인 종교가 아니다. 동양과 서양의 주요 종교 전통들이 이렇게 철저한 경쟁적 상황에 공존하고 있는 것은 세계에서 오직 한국뿐이라 할 수 있고 한국적 종교다원주의는 단순히 표피적 사회현상이 아니라 개인의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심층적 현상이라 한다. 김종서, 「현대종교다원주의와 그 한국적 독특성 연구」, ꡔ종교학연구ꡕ 19집(서울대학교 종교학연구회, 2000), pp. 43-44 참조.

종교다원의 사회라고 할 때 우리의 전통사회도 다종교적인 상황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도 현대만큼은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제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다원주의라는 문제는 단순히 외부에서 논의하니까 우리도 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커다란 도전 가운데의 하나가 종교다원주의 현상인 것이다. 종교적 갈등이 다른 갈등보다도 심각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각각의 종교가 모두 절대적인 진리임을 주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궁극적인 것과 연결되는 것이 종교적 관심이므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양보하기 어렵고 다른 종교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절대적인 종교적 믿음을 훼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고 또 종교에 따라서는 다른 종교를 그대로 보고 놓아두는 것은 자신의 신앙이 약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종교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긴요한 사회적 요구이다. 중요한 것은 만남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종교전통에 대한 헌신을 잃지 않으면서 진리에 대한 자기 종교전통의 비전을 확대하느냐”하는 데에 있다. 한인철, ꡔ종교다원주의의 유형ꡕ(한국기독교연구소 2000), p. 93. (Smith, Towards a World Theology, p. 89의 인용)

종교다원주의 논의는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시작되어 많은 논의가 있어 왔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전개되어온 종교전통 간의 대화의 시도들은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라는 유형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다. (한인철, 위의 책, pp. 17-57 참조.)
종교다원의 사회적 현상은 우리나라가 가장 대표적이라고도 할 수 있으므로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논의가 서구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일어난 논의이므로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이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종교다원사회에 대한 이해와 다른 종교에 대한 열린 자세는 비기독교 종교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종교다원주의에서 종교 간의 대화를 주장한다고 할 때 기독교적인 입장만 내세우는 대화는 실질적인 성과가 있는 대화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스스로의 입장을 버린다고 말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의 논의에는 다양한 종교 전통에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그 문제의 해답을 모색할 때 바람직한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먼저 종교다원사회에 대한 이해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에 대해 정진홍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상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대의 종교적 상황이 펼쳐가고 있는 문제는 종교 간의 문제, 더 현실적으로 종교 간의 대화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각 종교가 종교다원현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그 인식의 문제이다. 따라서 종교다원현상에 대한 인식을 결한 채 전개되는 종교 간의 대화는 개념과 사실의 얽힘을 풀지 못하고 진행됨으로써 그 理想이 언제나 그 스스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정진홍, 「종교다원현상과 구원론의 전개」, ꡔ한국종교문화의 전개ꡕ, p. 416.)
불교계의 활발한 논의 참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종교 상황에서 불교적 입장 특히 원효의 화쟁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종교다원주의의 문제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가가 본 논문의 주제이다. 원효는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사상가로서 특히 그의 사상은 화해와 조화를 강조하는 화쟁이 그 중요한 특색이므로 화쟁을 통해서 바람직한 종교다원주의의 이론틀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 문제를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원효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초기불교 및 중관파에서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2. 초기불교 및 중관파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

다른 종교에 대한 불교의 태도는 비판적 관용이라고 평가받아 왔다. H. 카워드 지음, 한국종교연구회 옮김, ꡔ종교다원주의와 세계종교ꡕ(서광사 1990), p. 175.
초기불교에서부터 심각한 갈등 상황에 놓여서 종교전쟁 등의 상황이 벌어졌던 적은 없었다. 관용을 보여주는 것이 불교의 정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비판적인 인정이었던 것은 아니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만남에 있어서는 관용, 자비, 지혜의 세 요소가 작용한다고 설명하는 학자도 있다. 같은 책, pp. 176-197 참조.
어쨌든 불교는 쓸데없는 논쟁은 하지 말 것을 가르치면서 해탈이라는 구체적인 목적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만이 참된 가르침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불교의 입장 자체가 논쟁의 초월을 지향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초기 경전인 ꡔ숫타니파타ꡕ ꡔ숫타니파타ꡕ의 인용은 석지현 번역본(민족사 2001)으로 한다.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자신의 견해(先入見)를 모두 버렸으므로 학식에도 특별히 의존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갖가지 다른 견해로 나눠져 있지만 그러나 그는 어느 당파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견해라도 그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800)

진정한 수행자는 다른 사람에게 이끌려 가지 않는다. 또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단정을 내려 고집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논쟁을 초월해 있으며 그리고 다른 여러 가르침을 특별히 우러러보지도 않는다.(907)

논쟁을 초월하고 쓸데없는 다툼을 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논쟁의 초월이야말로 초기불교의 중요한 특색 중의 하나로 보인다. 선입관을 버리고 쓸데없는 논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타종교와의 대화도 필요 없다고 보는 것인가가 문제겠다. 잘못하면 무관심의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 이 태도에 포함되어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무관심 내지 방관이라면 이것은 현대의 종교다원사회에서의 바람직한 해결 방안이 되지 못할 것이다. 타종교와의 만남을 통해 진리에 대한 자기 종교 전통의 비전을 확대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초기불교에서는 대화의 필요성을 부정한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떠한 이론이라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한 가지 견해에 매달리는 것을 경계했을 뿐이고 대화 자체가 필요 없다는 입장은 아니었다. 다만 대화는 궁극적인 이상의 실현을 위한 것이어야 했고 그렇지 않은 형이상학적 문제 등에 대한 논란은 거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화살의 비유를 들어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 종교적 실천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논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유명하다. ꡔ중아함경ꡕ 제60권 「箭喩經」 참조.

실천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 가르침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 부처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부처의 가르침은 자주 뗏목에 비유되었다. 中村元 저, 양정규 역, ꡔ원시불교ꡕ(비봉출판사 1981), pp. 69-71 참조.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가게 해주는 뗏목이 강을 건널 때는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건너고 나서는 필요 없듯이 가르침도 그러하다는 것이 부처의 입장이다. 교설의 실천적 성격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가르침을 절대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여기에 함께 들어 있다.
논쟁의 초월을 주장하는 한편으로 다른 종교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에 있어서는 관용적이고 포용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않았던 것이다. 구체적인 태도에 있어서 예를 들자면 다른 종교로부터 새롭게 개종해 들어온 제자에게 자신의 기존의 종교에 대해서도 존경심을 표할 것을 가르쳐서 그 제자가 아주 기뻐하는 모습을 그린 경전이 있다. 위의 책, pp. 68-69 참조.
이제까지는 초기 경전을 통해서 논쟁이나 타종교에 대한 불교의 태도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는 중관파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불교에서는 종교다원주의 논쟁에 대해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반야․중관학적으로 해명한 연구에 의하면 어떤 특정한 진리를 고집하지 않는 것이 반야중관학에 입각한 불교의 입장이므로 오히려 모든 것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반야중관학사상은 어떤 진리, 어떤 실재의 관념도 버릴 것을 가르쳤다. 진리에 대한 무집착이야말로 참된 진리에 향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여래가 설한 법설까지도 절대 진리로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다원화 상황에 대처하는 불교의 입장은 이와 같이 독특한 점이 있다. 여러 종교는 서로 다른 문화적․역사적 기원과 배경을 갖고 있으므로 그들을 하나의 원리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종교다원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각 종교에서 추구하는 구원방식의 다양성과 진리의 상대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김용표, 「통일적 종교다원주의에서의 공동본질 문제에 대한 중관학적 해명」, ꡔ불교학보ꡕ 32집(1995), p. 238.


그리고 이와 같은 무집착을 통해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진정한 다원주의로 나갈 수가 있다고 한다. 즉 “반야공의 무한한 열림의 교설은 어떠한 형태의 폐쇄된 교리나 전통도 깨뜨려 줄 수 있는 역동성이 있다. 불교는 진리의 상대성, 경전언어의 방편성, 진리에 대한 무집착을 가르친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불교도는 자기 종교에 대한 확신과 타종교에 대한 관용과 개방의 태도를 확실히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논문, p. 241.
반야공의 입장에서 종교다원주의를 바라보았을 때 이렇게 판단할 수 있다면 원효의 화쟁의 입장에서는 어떤 결론이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음으로 논의해 보도록 하자. 이희재는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불교적 가르침으로 ①인도의 관용적 문화의 계승 ②大慈大悲의 정신 ③空과 무집착 ④화쟁의 논리를 들고 있다. 여기에서도 화쟁의 논리를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불교적 가르침 중의 한 가지로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희재, 「불교에서 보는 종교다원주의」, ꡔ불교평론ꡕ 2002년 봄(통권 10호), pp. 69-76 참조).
원효가 직접 화쟁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불교 내의 여러 이론적인 갈등이었고 또 시대와 상황이 다르므로 그것을 그대로 우리 현실에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 화해의 정신이 다종교 사회인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종교적 갈등을 해소시키는 데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원효의 화쟁

원효의 사상 가운데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쟁론을 화해시키는 화쟁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다양한 이론 사이의 다툼을 화해시켜서 붓다의 올바른 진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和諍이니 百家의 異諍을 화해시켜 一味인 一心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함이다. 和諍은 그의 저술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ꡔ涅槃宗要ꡕ에서는 ꡔ열반경ꡕ을 “여러 경전의 부분을 통합해서 온갖 흐름을 一味로 돌아가게 하고 부처의 뜻의 지극히 공정함을 열어서 百家의 異諍을 화해시킨다.” “統衆典之部分 歸萬流之一味 開佛意之至公 和百家之異諍.”(ꡔ涅槃宗要ꡕ, ꡔ韓國佛敎全書ꡕ 第一冊, p. 524.)(이하 韓佛로 略稱)
하여 和諍의 경전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ꡔ起信論別記ꡕ에서는 ꡔ起信論ꡕ을, “모든 論의 祖宗이고 群諍의 評主” “諸論之祖宗 群諍之評主.”(ꡔ起信論別記ꡕ, 韓佛Ⅰ. 733b.)
라하고 있다. 원효가 ꡔ열반경ꡕ과 ꡔ起信論ꡕ을 훌륭한 경론이라고 본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和諍의 경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몇몇 예만 보아도 그의 전 사상체계가 和諍의 정신으로 일관되고 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한 분야의 이론만을 주장하지 않고 모든 분야를 아우르며 그것들 각각에 중요성을 부여하여 조화시켜서 보고자 하는 것이 원효의 和諍의 정신이다. 그의 다방면에 걸친 저술과 그 저술에 흐르는 화해의 정신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는 불교의 가르침은 깨달음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불교의 근본진리를 깨닫게 해서 一心의 근원에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가르침이라면 모두 다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특정한 종류의 경전만이 유일하게 옳은 것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종파적 편견에서보다는 깨달음의 도구로서의 상대적인 유용성을 위해 여러 경전에서 인용하곤 하였다. 一心의 원천에로 돌아가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一心을 기본으로 해서 이론을 전개하되, 구체적으로는 현실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이론들을 조화시켜 나가는 것이 원효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은 종파적인 것을 떠나 조화와 화해를 강조하는 데에 있다고 주장하여 왔는데 원효는 그런 전통의 선구자이다.
불교의 근본 성격 자체가 논쟁의 초월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도 원효의 사상적 특색을 특히 화쟁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원효가 당시의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한 종파에만 매달리지 않고, 자신의 견해에 빠져서 다른 이론을 비난하는 것은 부처의 본래 뜻을 잃어버리는 것이라 하며 일심에 근거하여 다양한 이론들 사이의 다툼을 해소시키려 하였기 때문에 그 자신의 특색 있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효의 화쟁은 초기 불교에서의 쟁론에 대한 태도와는 약간 차이를 보여주는데 논쟁의 초월을 말하면서 논쟁 자체의 무의미함을 강조하는 초기불교의 태도와는 조금 다른 것이 원효의 화쟁에는 있다. 즉 그는 다양한 여러 이론들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입장을 보이는 것이다.
화쟁을 함에 있어서는 먼저 언어의 본성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언어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집착하고 논쟁하기 때문이다. 원효는 진리는 말을 끊는 것도 끊지 않는 것도 아니라 한다. 언어는 진리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왜곡시키기도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가르침의 말을 절대화하지 말고 집착을 버리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언어관에서 주장하는 바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런 언어에 대한 견해에서 출발한 원효의 화쟁의 방법으로는 첫째로 집착을 버리고 극단을 떠나게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둘째로는 긍정과 부정을 자재로 하면서 긍정과 부정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화쟁의 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경전 내용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세 번째 화쟁의 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 최유진, ꡔ원효사상연구ꡕ(경남대학교출판부 1998), pp. 59-109 참조.
원효는 일심의 근거에서 언어에 대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논쟁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4. 종교다원주의와 화쟁

그러면 원효의 화쟁은 어떻게 해석되었을 때에 현대에 살려질 수 있을 것인가? 종교다원주의와 연관하여 화쟁에 대해 논의해 보도록 하자. 먼저 원효의 화쟁이 노리는 바는 불교의 근본 진리 즉 일심에로 돌아감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갈등 상황은 일단은 불교 내의 다양한 학설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책, pp. 19-22 참조.
물론 원효가 구체적으로 화쟁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불교 내의 다양한 이론적 다툼이었다고 해도 그 정신은 현재의 다종교 상황에서 갈등의 해소와 바람직한 길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과 교의 화해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었던 고려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인 義天과 知訥은 모두 元曉를 높이 평가하고 숭앙한다. 원효가 구체적으로 선과 교의 다툼을 화해시키려 노력한 것은 아니지만 元曉의 사상 특히 和諍사상에서 禪과 敎의 相爭을 화해시킬 수 있는 정신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상황은 불교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와 종교간의 갈등이 문제되는 상황이긴 하지만 역시 조화와 화해를 강조하는 원효의 화쟁은 그 갈등을 해소하고 바람직한 관계를 정립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원효에게 있어서 쟁론을 화해시키려는 목적은 부처의 근본 진리인 一心에로의 돌아감이고 그 근거 또한 평등무차별한 경지인 일심이다. 이것은 종교적 갈등의 상황에도 바로 적용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적 갈등의 해소를 위한 노력은 궁극적인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 그 목적을 두고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단순히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정도의 수준을 넘어설 수 있어야만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갈등 상황에 있다는 것은 바로 근본 진리에서 그만큼 멀리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쟁론을 화해하고자 하는 것은 근본 진리에서 벗어나 있는 상황에서 올바른 진리의 경지로 가고자 함이다. 따라서 쟁론의 화해가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 이상의 실현을 향한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일심은 불교적인 표현이지만 어느 종교에서나 있는 종교적 이상의 경지가 종교적인 갈등의 해소의 목적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종교 상황에서의 화해를 위한 노력은 그저 무관심하게 싸우지만 않는 정도가 아니라 궁극적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될 수가 있는 것이고 스스로의 종교적 이상의 실현을 위한 과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라 하겠다.
원효가 다양한 불교 이론들의 갈등을 해소시키고 화해시킬 때에 가장 중요한 근거는 부처의 진리였다. 부처의 근본 진리 즉 일심의 입장에서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처의 말이라는 것에 의거하여 다양한 주장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경우도 많다. 부처의 말 즉 경전의 말이니까 옳다고 하는 것인데 논쟁이 있을 경우에 그 이론들이 경전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다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것이 그 예이다.
   “이 같은 두 설이 있는 가운데에 어느 것이 과연 더 옳은 것인가? 이것은 다 성전에 의한 것이니 어느 설인들 진실하지 않겠는가?”(問 如是二說 何者爲實 答 皆依聖典 有何不實.) (ꡔ無量壽經宗要ꡕ, 韓佛Ⅰ. 557c.)
   “물음: 여러분의 학설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가? 답: 여러분의 학설이 모두 옳다. 모두 聖典의 말씀이어서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고, 제법의 실상은 모든 희론을 끊고 그런 바도 없고 그렇지 않은 바도 없기 때문이다.”(問諸師所說何者爲實 答諸師說皆實 所以然者皆是聖典不相違故 諸法實相絶諸戱論都無所然無不然故(ꡔ大慧度經宗要ꡕ 韓佛1. 481a)
이러한 화쟁의 방식은 다른 종교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불교의 내부에서 공동으로 승인하는 부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이 기준이기 때문에 타종교에 이 기준을 적용하여 말하기는 곤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의 말이 진리인 이유는 우리를 이상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지 단지 부처의 말이기 때문은 아니다. 바로 이 기준이 원효의 진리의 기준이라면 우리는 이 기준을 확대해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가르침의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 우리를 궁극적인 이상으로 이끄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인정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종교가 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을 나름대로 종교적 이상의 경지로 이끈다면 진리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조건적으로 어느 종교나 옳다고 하기보다는 각각의 종교는 나름대로 종교적 이상의 경지로 이끌기 때문에 진리라고 하는 기준을 우리는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종교적 이상이 무엇이냐에 대한 의견이 다양하므로 그것을 결정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결정할 때 실천적 측면에서 생각하여야 한다는 기준은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것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힉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참고가 될 것이다.
   “종교의 궁극목표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구원/해방에 있는 것이며, 교리와 사상은 이러한 실천적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인간은 교리나 사상의 다양성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성취하고 있으며, 이것이 사실인 한 교리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힉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하여 실천적 이유에서 대답하기를 거부한 불타의 예를 들면서(이른바 14無記) 교리의 수단적, 방편적 성격을 일찍부터 자각한 불교의 지혜를 높이 평가하고, 타종교들도 이 점에서 불타의 지혜를 배울 것을 권한다.”(길희성, 「죤 힉의 철학적 종교다원주의론」, ꡔ종교연구ꡕ 15집(한국종교학회 1998), p. 287)

종교다원사회에서 갈등이 해소되려면 각자 자기 자신만이 옳다는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열린 자세로 타종교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각 종교의 주장 내용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취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언어에 대한 원효의 지적을 경청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러 종교들은 절대적 진리를 말한다. 그러나 여러 종교가 영구불변한 절대적인 진리를 갖고 있음을 일단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종교적인 진리에 대한 표현과 설명은 역사적 사회적인 특수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므로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라 해도 언어적 표현의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언어와 진리의 관계는 고정적이고 불변적인 관계는 아니다. 언어와 진리는 상호의존적이다. 언어가 없다면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언어가 없으면 진리도 없다. 결국 고정적인 불변의 진리가 먼저 있고, 다음에 그것에 의지해서 언어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언어와 진리가 동일한 것도 아니다. 언어는 전달의 편의를 위해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진리를 전달하는 측면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진리를 왜곡시킨다. 그것을 원효는, “진리는 말을 끊는 것도 아니고 끊지 않는 것도 아니다.” “理非絶言 非不絶言 以是義故 理亦絶言 亦不言絶.”
   ꡔ起信論疏ꡕ 韓佛 I. 743a.
라고 표현한다. 진리라고 하는 표현도 그 자체가 언어적인 표현의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해서, 그 언어적 표현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따라서 말로 표현 가능한가, 표현 불가능한가 하는 “離言”과 “依言”의 문제가 제기된다.
원효에 의하면 진리는 언어에 의해 전달 가능한 측면[依言]과 전달 불가능한 측면[離言]이 있다. 그러나 말에 의해 표현 불가능하다[離言]고 말해도 그것도 결국은 말에 의한[依言] 표현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언어적 표현의 한계이다. 원효는 언어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언어적 표현으로는 부정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말에 의해 말을 버린다.” “因言遣言”
   ꡔ大乘起信論別記ꡕ, 韓佛 I. 680c.
고 하는 표현과 “결국 모두가 올바르지 않다는 말과 말대로 취하면 안 된다고 하는 말이 다른 것이 아니다.” “遂言俱非 不如言取 二說無二”
   ꡔ法華宗要ꡕ, 韓佛 I. 491a.
등의 표현이 그 예이다. 결론적으로 언어가 분별의 소산임을 알아 집착을 버리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원효의 언어관이다. 여러 종교의 다양한 주장을 이런 언어관에서 본다면 그런 이론들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고 볼 수 있다. 언어가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면에서 본다면 여러 다양한 학설들의 그 나름대로의 의의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옳다는 입장이라면 틀린 것이 된다. 언어는 진리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가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언어가 진리 자체는 아님을 알아서 집착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언어를 갖고 집착하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써서 논의를 진행시키는가? 元曉는 먼저 어떤 표현이든지 상대적으로 성립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元曉는 개념들이 상대적으로 성립함을 지적해서, 한쪽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면서 또 다른 극단도 버리도록 한다. 이렇게 언어의 한계를 널리 지적하면서 부정을 통해서 집착을 버리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우선적인 和諍의 방법이다. 극단을 떠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정만을 한다고 해서 집착이 없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부정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부정에도 집착하지 말라 하여 부정의 부정으로 나아가게 된다. 부정과 그것의 부정(즉 부정의 부정)이 있을 때는 양변의 극단에 빠지지 말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므로 긍정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부정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부정에 대해 또 부정하는 것은, 부정을 하면 그것의 반대편 극단으로 가 버리는 것이 우리들이므로 그것을 경계하여 부정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곧 非然이면 非不然이다. 긍정이 아니면 부정도 아니라는 것이다. 널리 부정을 하면서 집착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여래가 설한 가르침까지도 절대 진리로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뗏목의 비유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부처의 가르침은 방편이고 수단이므로 그것을 절대 진리로 생각하여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르침에 집착하는 것은 강을 건너고 난 다음에도 뗏목을 지고 가려고 하는 어리석음과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화쟁의 방법은 집착을 버리게 하는 데 그 근본 목적이 있는데 현대의 종교 간의 갈등을 화해시키는 방법으로 그것을 이해한다면 각각의 종교적 경전에 표현되어 있는 종교적 진리가 설령 궁극적인 진리라 해도 그것이 표현될 때는 언어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여 언어 그 자체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언어의 한계를 널리 지적하여 말 그대로를 진리로 생각하는 문자주의에서 벗어나 집착을 버리고 받아들여야만 그 진실한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적인 면에서의 접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부정 일변도로 나간다고 하여 집착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정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긍정과 부정의 자재가 필요하다. 이것을 두 번째의 화쟁의 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긍정적으로 전환되는 계기에 유의하여야 한다. 元曉의 논리는 부정의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시키는 데에 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원효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긍정과 부정을 자재로 하는 이 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원효는 단순히 부정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시킨다. 즉 非不然(부정의 부정)이므로 然(긍정)이라 한다. 아닌 것이 아니면 인 것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非不然이 然으로 된다면 그 然은 非不然의 然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긍정으로 나타난다 하여도 그것은 결정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고 집착하지 않고 보아야 하는 긍정인 것이다. 언어의 긍정적 표현 자체가 극단에 빠지지 말아야 함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부정을 통해서 집착을 버리게 함은 불교의 중요한 특징이다. 논쟁을 초월하고자 하는 것이다. 초기 경전과 중관파에서 그렇게 주장하고 있음은 이미 살펴 본 바와 같다. 원효도 사람들이 논쟁하는 것은 번뇌에 빠져 있기 때문에 단정을 하게 되고 자신의 견해에 사로잡혀서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싸우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ꡔ열반경ꡕ을 인용하여 부처는 번뇌가 없으므로 단정하는 바도 없어서 諍訟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최유진, ꡔ원효사상연구ꡕ(경남대학교출판부 1998), p. 87 참조.
그러나 원효의 원효다운 특색은 바로 긍정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데 있다. 다양한 여러 이론들이 서로 다르게 주장되고 있는 상황에서 초기 경전에서는 논쟁의 초월을 주장하고 다양한 이론들이 쓸모없다는 입장인 데 비해서 원효는 다양한 학설들의 긍정적인 면도 인정하는 입장이다. 초기 경전의 하나인 ꡔ우다나ꡕ에서의 장님과 코끼리에 대한 비유를 원효의 입장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초기 불전인 ꡔ우다나ꡕ에서는 부처가 장님과 코끼리의 비유를 들어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서로 자기가 옳다고 싸운다는 얘기를 한 끝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이여! 마치 그와 같으니 외도에 속한 유행자들은 눈이 없어 앞을 보지 못하여 참다운 뜻을 알지 못하고 그릇된 견해를 깨닫지 못하며, 올바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바르지 않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도 저 맹인들처럼 ‘이러한 것이 법이며, 이러한 것이 법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법이 아니며, 이러한 것은 법이다.’라고 입씨름하며 논전을 벌이고 논란을 거듭하는 가운데 말의 창을 서로 겨누고 있는 것이다. 사쿠라베 하지메 편, 이미령 역, ꡔ기쁨의 언어 진리의 언어ꡕ(마음으로 읽는 불전 2), (민족사, 1991), p. 121.


장님들은 올바른 이치를 알지 못하여 자신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자기만 옳다고 쓸데없는 논쟁을 한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장님들의 견해는 버려야만 될 견해이고 논쟁은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각각의 견해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견해를 논파하는 측면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장님과 코끼리의 비유가 ꡔ열반경ꡕ에서는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ꡔ열반경ꡕ에서 부처는 장님과 코끼리의 비유를 든 다음 “소경들이 코끼리의 몸 전체를 말하지 못하였으나 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만일 그 여러 모양이 모두 코끼리가 아니라면 그것을 떠나서는 따로 코끼리가 없다.” “如彼衆盲不說象體亦非不說. 若是衆相悉非象者. 離是之外更無別象”.
   ꡔ大般涅槃經ꡕ(36권본) 권30, 「獅子吼菩薩品」, ꡔ大正新修大藏經ꡕ(이하 大正) 12. 802a.
라고 말한다. 그리고 佛性에 대한 6가지의 학설(佛性이 각각 色, 受, 想, 行, 識, 我임을 주장하는 학설)을 말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남자여, 저 소경들이 제각기 코끼리를 말하는 것이, 비록 코끼리의 실상을 얻지 못하였으나, 코끼리를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닌 것처럼, 불성을 말하는 이도 그와 같아서, 여섯 가지 법 그대로는 아니지만, 여섯 가지 법을 떠난 것도 아니다. 善男子. 如彼盲人各各說象, 雖不得實非不說象. 說佛性者亦復如是. 非卽六法不離六法.
   ꡔ大般涅槃經ꡕ(36권본) 권30, 「獅子吼菩薩品」, 大正 12. 802b-c.


여기에서는 소경들의 견해가 코끼리의 실상을 얻지 못하였으나 코끼리를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소경들의 견해를 떠나서 따로 코끼리가 있는 것도 아니라 하여 어느 정도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초기 불전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여러 학설들이 완전한 것은 아니나 부분적인 가치가 인정되어서 논쟁의 초월만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각각의 학설을 조금은 인정하는 긍정 쪽으로 입장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원효는 바로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각각의 학설이 나름대로 가치가 있음을 긍정하고 있다. 즉 그는 불성의 본체에 대한 여섯 분의 학설을 소개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뜻에서 위의 여섯 분의 주장은 비록 모두가 불성의 실체를 다하지는 못했지만 각기 입장에 따라 설명하여, 각자 그 뜻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나오는 글에서는, ‘마치 저 소경들이 제각기 코끼리를 말하는 것이, 비록 코끼리의 실상을 얻지 못하였으나, 코끼리를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닌 것처럼, 불성을 말하는 이도 그와 같아서, 여섯 가지 법 그대로는 아니지만, 여섯 가지 법을 떠난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의 여섯 분의 주장도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由是義故, 六師所說雖皆未盡佛性實體, 隨門而說各得其義. 故下文說, 如彼盲人各各說象, 雖不得實非不說象. 說佛性者亦復如是, 不卽六法不離六法. 當知此中六說亦爾.”
   ꡔ涅槃宗要ꡕ, 韓佛1. 539a.


원효는 여기에서 여러 학설들이 각기 입장에 따라 설명하여 각자 그 뜻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불성의 실체를 다한 것은 아니라고 제약 조건을 달고는 있지만 각각의 주장에 대하여 긍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긍정적인 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원효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는 김영호 교수도 지적하고 있는 바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廻諍이 뿌리한 空觀이 破邪顯正을 지향한다고 해석하지만 아무래도 破邪가 명시적인 목표라고 볼 때, 화쟁은 顯正을 가리키는 적극적인 개념이다. 공관이 철저히 부정적(via negativa) 사유방식인데 반해서 화쟁은 어디까지나 긍정적(via positiva) 인식방법이다.(김영호, 「원효 화쟁사상의 독특성」, ꡔ철학ꡕ 64집(한국철학회 2000 가을), p. 33.)
이와 같은 긍정적인 방면에서의 접근이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다종교사회에서의 종교적 갈등의 해소에 더욱 훌륭한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긍정과 부정의 자재라는 원효의 화쟁의 방법을 현실에 적용시켜서 생각해 본다면 여러 다양한 종교적인 주장들에 대하여 편견 없이 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종교가 다 진리를 가르치고 있으니 다를 것이 없으므로 모두를 인정하자는 그런 입장은 아니다. 어느 주장이나 다 옳다는 식으로 해서는 진정한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툼이 있을 때에 단순히 양 쪽 다 옳다는 식의 논의로는 그 다툼이 해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원효도 누누이 강조하는 바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였을 때에 그 다툼이 해소될 수 있는가? 원효에 의하면 집착하는 마음이 쟁론을 낳는다. 사람들의 집착하는 태도와 일부만을 알고 그것이 전부인양 아는 것이 잘못이라면 스스로의 신앙도 무조건적으로 옳음을 강조하기보다는 겸허하게 반성하며 자신의 신앙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모두가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려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종교를 적대시한다는 것은 분명 궁극적 구원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종교의 기본 가르침에도 어긋날 것으로 생각된다.
원효가 말하는 또 다른 和諍의 방법은 ‘동의하지도 않고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으면서 說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긍정․부정을 자재로 하는 또 다른 측면으로 볼 수도 있지만 태도의 문제를 중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의하지 않아서 이치(理)에 어긋나지 않고 동의하지 않지 않음으로 해서 情에 어긋나지 않으니 동의와 이의에서 벗어나 말함으로써 이치와 정 모두를 만족시킬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화쟁의 방법도 바로 타종교와의 갈등에도 적용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취하면 모두 허용할 수 없으므로 타종교의 가르침에 대하여 동의를 하지 않고, 또 뜻을 살려 들으면 허용되지 않는 바가 없으므로 동의를 하면 되는 것이다. 이치와 정에 모두 어긋나지 않게 타종교의 가르침을 대해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부정만 하는 것도 아니고 또 무조건 긍정하는 것도 아닌 걸림 없는 자세가 여기에서 긴요하다고 하겠다. 바로 이런 자세로 타종교를 대하여야 할 것이다. 화해를 한다고 하면 무조건적인 긍정만을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안 된다는 것이 여기에서의 원효의 지적이다.
다음으로 원효가 말하는 경전 내용에 대한 폭넓은 이해라는 화쟁의 방법을 현대에 적용시켜 말하면 열린 태도로 타종교의 가르침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몰라서 오해하는 수가 많은 것도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특히 다종교사회인 오늘날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화쟁의 궁극 목적은 원효에 있어서는 올바른 진리의 체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좀더 확대시켜 현대의 상황에서 말한다면, 다종교 상황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긍정하는 종교다원주의의 궁극적 목적은 단순한 공존이어서는 안 되고 궁극적 진리의 실현을 통한 이상세계의 실현이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종교의 가르침을 절대화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자신의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를 궁극적인 차원에까지 체득하고 실천하도록 노력하는 한편 타종교의 가르침에도 열린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서 진리의 궁극적인 실천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각각의 종교에서 모두 이런 실천을 하여 이상적인 세계를 같이 건설하도록 하는 것이 종교다원 사회에서의 우리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공존하고 이상의 실현을 위해 함께 나아가는 종교다원주의를 우리는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원효의 화쟁의 정신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단순한 화해가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 이상의 실현이 문제인 것이다.

5. 결 론

이제까지 현대의 다종교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종교적 갈등을 해소하고 바람직한 공존을 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원효의 화쟁의 입장에서 검토해 보았다. 불교의 입장 자체가 논쟁의 초월을 지향하고 있고 가르침의 방편적 성격을 강조하여 부처의 가르침 자체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하여 초기 불교의 이론 자체도 종교 간의 화해와 공존을 위한 이론 구성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원효의 화쟁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더욱 적극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원효의 화쟁은 각각의 이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함을 주장하지만 또 한편으로 집착함이 없다면 그 이론도 의미가 있다 하여 다양한 이론들에 나름대로의 긍정적 가치를 인정하면서 조화와 화해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초기 불교나 중관파의 입장에서는 논쟁의 초월이라는 면만을 강조하여 각 종교 전통의 다양한 이론들을 긍정적인 기여의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에서 바라보게 되는 경향이 있게 되지만, 원효의 화쟁의 입장에서는 각각의 이론들이 그 자체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가치가 있다 하여 각 종교 전통의 긍정적 가치를 확실하게 인정하고 나아갈 수 있다.
원효는 다양한 방법으로 화쟁을 추구해 왔는데 화쟁의 목적은 단순한 화해는 아니다. 궁극적인 이상의 실현이 화쟁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쟁론을 화해해야 하는 이유는 쟁론하는 것 자체가 부처의 이상에서 멀어지는 것이고 궁극적인 이상 실현을 할 수 없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다양한 이론들이 부처의 이상의 실현을 위해 나아가고 있다면 그것들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다 가치가 인정이 된다. 다만 서로 다른 이론들이 자기만이 옳다고 싸우면 그 때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종교 간의 갈등의 문제도 마찬가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다양한 종교가 각자 종교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모두 가치가 인정이 된다. 물론 각각의 종교적 이상이 공통적으로 승인될 수 있는 것이냐는 문제는 남지만 그 종교적 이상을 절대화시키지 않는다면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쟁론도 자기의 이론만을 절대화하는 데에서 온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원효의 화쟁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극단에 치우쳐 집착하지 않아야 하지만 그러나 부정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긍정과 부정의 자재의 방법이다. 이 방법에서 우리는 자신의 종교 전통을 절대화하지 않으면서 자기 종교의 궁극적인 이상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배울 수 있고 타종교 전통에서 가르치는 종교적 진리나 이상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종교적 이상 실현의 폭을 확대시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현대의 상황은 한편으로는 도전이지만 한편으로는 기회다. 종교들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있어서 나름대로 그것을 추구해 왔다. 다양한 방식으로 종교적 진리를 추구하고 실현해 온 것이다. 이제 각자 자신의 좁은 테두리에서 나와 인류 공통의 궁극적 이상의 실현이라는 문제에서 만났을 때 다양한 종교전통의 지혜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나와는 다른 관점이 도움이 된다는 자세가 중요하고 공동의 문제를 향한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다양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독창성을 갖고 종교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또 한편으로 공동의 궁극적 이상 실현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종교다원주의의 양상일 것이다. 원효의 화쟁은 그러한 바람직한 종교다원주의의 근본 원리 구성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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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Religious Pluralism and Wonhyo’s
Harmonizing Disputes

Choi, You-Jin (Kyungnam Univ.)

By emphasizing transcendental attitude and nonattachment to truth, early Buddhism and Madhyamika, which inherits its ideology from early Buddhism, are considered to greatly alleviate disputes between religions. Nonetheless, in terms of harmonizing effects, these are incomparable to Wonhyo's thought that highlights a complete detachment for any religious theory to become truly valuable.
Wonhyo thought of religious disputes as an obstacle to the realization of Buddha's ideal, and argued that Buddha's ideal could only be reached when different theories harmonize with one another without being excessively attached to their own doctrines. By extending this to the disputes between different religions, we obtain the following point: each religion is valuable unless it adheres too excessively to its own ideal.
Free use of denial and confirmation, one characteristics of Wonhyo's harmonizing methods, also teaches us that we should not make our own religious tradition absolute, which will help us achieve the ultimate realization of the ideal of each religion. Only that way can we open our mind to other religions with their true value and ideal, leading to a wide and deep understanding of other religions.


Key Words : religious pluralism, Madhyamika, Wonhyo,
             harmonizing disputes, free use of denial and confi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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