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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3/04 (22:20) from 80.139.172.122' of 80.139.172.122' Article Number :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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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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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 최소한의 도덕(미니마 모랄리아)

헌사
『슬픈 학문⌋ - 이 책으로써 나의 친구 호르크하이머에게 그 몇몇 편린들을 바치고자 하는 - 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철학의 본원적인 용무로 인정되었으나 철학이 방법론으로 변질된 이후 지성의 냉대를 받거나 자의적인 경구에 머물다가 끝내는 잊혀지게 된 영역, 즉 ⌈올바른 삶⌋의 이론에 관한 것이다. 예전에 철학자들이 ⌈삶⌋이라 부른 것은 어떤 자율성이나 독자적인 실체도 지니지 않은, 물질적 생산과정의 부속물이 됨으로써 私的 영역이나 단순한 소비의 영역으로 변했다. 직접적인 삶에 대한 진실을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은 삶의 소외된 모습들이나 개별 실존의 가장 내밀한 국면까지를 규정짓는 객관적인 힘들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직접적인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을 하는 것은, 싸구려 장식과 같은 거짓 정열로써 자신의 꼭두각시들을 치장하고 기계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등장인물들을 무엇인가 실제적으로 바꿀 수 있는 주체들인 양 행동시키는 소설가와 같다. ⌈삶⌋을 향한 시선은 ⌈삶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만하는 이데올로기로 넘어갔다.
그러나 ⌈삶⌋을 ⌈생산⌋에 부수된 하루살이 현상으로 격하시킨 삶과 생산과의 관계는 완전히 부조리한 것이다.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것이다. 그러나 수단을 위한 목적이라는 이 어리석은 상황에 대한 예감마저 삶으로부터 완전히 축출된 것은 아니다. 축소되고 퇴화된 본질은 스스로를 피상적인 것으로 변질시키는 ⌈마법화⌋에 집요하게 저항한다. 그렇지만 ⌈생산관계의 변화⌋ 자체도, 생산의 단순한 반영형식이고 진정한 삶의 왜곡된 상에 불과한 것인 소비영역, 즉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이모저모에 달려있는 것이다. 아직 생산의 질서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지는 않은, ⌈생산⌋에 거역하는 힘에 의해서만 인간은 좀더 인간적인 무엇을 이끌어낼 수 있다. ⌈삶의 가상⌋이 완전히 깨어진다면 - 소비영역 자체가 사악한 이유로써 이 가상을 방어하려 하지만 - ⌈절대적 생산⌋이란 괴물이 승리를 구가할 것이다.
그렇지만 삶이 어떻게 가상이 되었는가와 마찬가지로 주체로부터 나온 관찰에는 수많은 허위가 들어 있다. 왜냐하면 현 단계의 역사운동에서 그 운동이 갖는 압도적인 객관성이란 것은 ⌈주체⌋가 완전히 붕괴될 때 - 또한 이 붕괴 속에서 ⌈새로운 주체⌋가 생성되지 않을 때 - 가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개인적인 ⌈경험⌋이란 어쩔 수 없이 저 옛 주체, 역사적으로 이미 유죄선고를 받았으며, 여전히 ⌈대자적이기는 하지만 즉자적이지는 못한 저 주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주체⌋는 자신의 자율성을 여전히 확신하고 있지만 아우슈비츠가 주체에게 보여준 저 절멸성은 이미 주체의 형식 자체에 치명타를 가한다. ⌈주관적인 관찰⌋은 그것이 아무리 예리한 비판을 자신에게 가할지라도 무언지 감상(感傷)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세계행정(行程)⌋에 대해 한탄한다는 것은 그것의 선한 의도야 비난할 수 없지만 한탄하는 주체가 자신이 ⌈그렇게 있는 상태Sosein⌋ 속에서 경직되어버리고 이에 따라 세계행정의 법칙을 다시 한번 완수시킬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의식과 경험⌋의 고유한 상태에 충실하려는 것은, 개인을 넘어서려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실체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는 통찰을 부인하려들게 됨에 따라 항상 불충실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헤겔은 - 『최소한의 도덕』은 헤겔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 주관성의 ⌈단순한 대자존재적 성격Fürsichsein⌋을 매 단계마다 부인하려 들었던 것이다. 어떤 고립된 개별자도 용납하지 않는 변증법적 이론은 잠언적인 글 또한 인정할 수가 없다. 아무리 호의적인 경우에서일지라도 잠언들은 - 『정신현상학』 서문의 표현법을 따르면 - ‘대화 형식Konversation’으로서만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는 끝났다. 『정신현상학』은 사람들이 체계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체계의 총체성 요구를 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 요구에 저항하려들지는 않는다. 헤겔은 다른 곳에서는 열렬히 주장하고 있는 요구, 즉 사물에 충실하며 ⌈사물의 내재적인 내용에 파고드는 대신 그것을 넘어서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요구를 주체에 대해서는 지키지 않고 있다. 오늘날 ⌈주체⌋가 사라져 간다면 우리의 잠언들은 ⌈사라지는 것 자체가 본질적인 것으로 관찰되어야 한다⌋는 헤겔의 원칙을 이행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잠언들은 헤겔의 방법에는 반대되게, 그렇지만 부정성에 대한 그의 생각에는 걸맞게 다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정신의 삶은 정신 스스로가 절대적인 분열 속에 처할 때만 그의 진실을 획득한다. 이러한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정신⌋이 부정성에서 빠져나온 긍정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다. 즉 우리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틀렸다고 말함으로써 그 문제를 마무리짓고 다른 무엇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이러한 힘이 되는 것은 다만 정신이 그 부정성을 직시하고 거기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이다.”
헤겔이 자신의 통찰에 반하게 ⌈개별적인 것Individuelle⌋을 부당하게 다루는 이러한 처리방식은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그가 자유주의적인 사유에 어쩔 수 없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온갖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관철되는 조화로운 총체성을 헤겔이 구상하는 것은, 그가 아무리 ⌈개별화Individuation⌋를 역사나 사유과정을 추진하는 계기로 규정할지라도 전체 구조 속에서는 여기에 저급한 위치밖에는 부여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개별적인 것⌋을 무화시키면서 ⌈객관적인 경향⌋은 인간의 머리 너머에서 관철된다는 관념은, 개념 속에서 구상된 ⌈보편과 특수의 화해⌋가 오늘날까지도 완수될 수 없는 것이라 할 때, 헤겔에게서는 일그러진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지극히 냉정하게 그는 ⌈특수자Besondere⌋를 해소시키는 선택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어느 곳에서도 ⌈전체의 우위⌋는 헤겔에게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 역사에서나 헤겔의 논리에서 고립적인 반성은 총체성의 찬미로 넘어가는 것이 문제성을 드러내는 정도에 비례해서, 기존의 것을 정당화하는 것인 철학은 ⌈객관적 경향⌋이라는 승리의 마차에 열렬히 매달리게 된다. 사회적 ⌈개별화원칙⌋의 전개는 운명적인 것의 승리로 나아간다는 사실은 그러한 철학에 그럴 듯한 동기를 제공한다. 헤겔은 시민사회와 그 근본범주인 ⌈개인⌋을 상정하지만 양자간의 변증법을 제대로 끝까지 밀고나가지는 않는다. 고전경제학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헤겔은 ⌈총체성Totalität⌋ 자체가 구성인자들의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통해 생산되고 재생산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 자체로서의 개인은 순진하게도 ⌈환원불가능한 소여⌋ - 인식론에서는 그것을 더 해부했음에도 불구하고 - 로서 취급된다. 그렇지만 개인주의 사회에서 ⌈보편자⌋는 ⌈개별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실현될 뿐만 아니라 ⌈사회⌋는 근본적으로 ⌈개인⌋의 실체인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에 대한 분석은 헤겔이 용인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개인적 ⌈경험⌋에서 이끌어낼 수 있게 되지만, 거대한 역사적 범주들은 이러한 범주들과 결부된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 볼 때 기만의 의혹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헤겔의 구상이 나온지 150년만에 저항하는 힘에 힘입어 많은 것들이 다시 ⌈개인⌋에게 되돌려졌다. 헤겔이 개인을 다루는 데서 보여준 엄부(嚴父)의 인색함과 비교하면, 개인은 ⌈사회의 사회화⌋에 의해 약화되고 공동화(空洞化)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충일함과 힘을 획득하고 분화되었다. 개인이 몰락하는 시대에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이 겪을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개인의 경험⌋은 은폐되었던 많은 것들을 인식하도록 해주었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개인이 여전히 지배적인 범주로서 긍정적인 무엇으로 간주될 수 있는 한에서이다. ⌈차이⌋를 녹여버리는 것을 곧바로 ⌈의미⌋라고 외쳐대는 전체주의적인totalitär 통일성에 직면해서 사회의 해방적인 힘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잠정적으로 ⌈개별적인 것⌋의 영역으로 모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비판이론⌋은 - ⌈개인⌋을 들먹이는데 찔리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 이 ⌈개인⌋ 속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시도는 공격받을 여지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 책은 대부분 전쟁 기간 동안 사유에 침잠할 수 있을 때 틈틈이 적은 것이다. 나를 추방한 ⌈폭력⌋은 그러나 완전한 인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집단적인 사태에 직면하여 ⌈개인⌋에 관해 말을 하는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공범의식을 아직 고백하지 못했다.
이 책은 세부분으로 나뉘어졌는데 각각은 망명 지식인의 협소한 사적 영역의 체험에서 출발한다. 여기에 사회적·인류학적 부피를 지닌 언급들이 첨가된다. 이 언급들은 심리학, 미학, 그리고 주체와 연관된 한에서의 과학과 관련을 맺고 있다. 각 부분의 결말을 이루는 잠언들은 주제면에서 볼 때는 아무래도 주로 철학에 관계되지만 어떤 분명한 결론을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앞으로 씨름해야 할 ⌈개념⌋들의 이정표를 새기거나 모델들을 제공할 것이다.
집필의 직접적인 계기는 1945년 2월 14일의 막스 호르크하이머 생일이 제공했다. 집필은 우리가 외적 상황에 대한 고려 때문에 우리의 공동작업을 중단해야만 했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중단된 시기에 이루어진 이 책에 대해서 그에게 사의를 표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내적 대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발견될 수 있는 모티브는 모두, 호르크하이머나 아니면 이 시기를 표현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공유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최소한의 도덕』의 특별한 단초 -  즉 두사람 공통의 철학적 계기들을 ⌈주관적인 경험⌋로부터 기술하려는 시도 - 의 전제조건은, 이 책에 담긴 내용들은 이 내용들이 합쳐서 이루게 될 우리 두사람 공동의 철학에 선행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이 책은 느슨하고 자유분방한 형식을 지니게 될 것이며, 분명한 이론적 연관관계에 대해 표명하는 것은 포기할 것이다. 이러한 자제로서 동시에, 우리 두사람에 의해서만 완성될 수 있으며 아직 손을 떼지도 않은 작업을 한사람만이 단독으로 진전시키게 되는 불의를 어느 정도 보상받고 싶다.



1. 마르셀 프루스트를 위하여
재능 때문이든 허약한 체질 때문이든 유복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들이 예술가나 학자 같은 지적인 직업을 갖게되면 그는 동료라는 역겨운 이름을 가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남다른 어려움을 겪게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그의 독립성을 질투한다거나 그의 진지한 의도를 불신한다거나 그를 기득권층이 보낸 밀사로 의심을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불신은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적개심에서 나온다고 보아도 무방하지만 대체로는 그 자체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진정한 적대감은 다른 데 있다. 정신적인 일에 종사하는 것은 그 사이에 그 자체가 실용적인 일, 즉 엄격한 노동분업에 입각해 인원제한을 받는 전문직종이 되었던 것이다. 돈버는 일을 명예롭지 못한 것으로 혐오한 나머지 정신적인 직업을 택한, 물질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벌을 받는 것이다. 그는 프로가 못되며 경쟁자들이 만들고있는 위계질서에서 - 그의 학식이 얼마나 깊은가에 상관없이 - 딜레땅트의 서열을 차지하게 된다. 세상에 나가려들 경우 그는 옹고집을 부리는데 있어서 어떤 완고한 전문가도 능가해야만 한다. 그가 매달리고 있는 노동분업의 지양 - 그의 경제적인 여건이 어느 정도는 그러한 지양을 실현가능할 수 있도록도 해주지만 - 은 특별히 악평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한 노동분업의 지양은 사회가 명령한 일을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혐오감을 누설하는 것으로서 각 분야를 이끄는 가장 경쟁력 있는 세력들은 그러한 이디오진크라지를 결코 용납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의 분화는 사회로부터 위탁받지 않은 일을 행하는 정신을 제거하는 수단이다. 분화된 정신은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를 훨씬 신뢰성 있게 행하는데, 그 이유는 노동분업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일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있는 탁월함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공격당할 수 있는 지점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질서는 이런 식으로 보살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리 살 방도가 없기 때문에 게임에 동참해야 하며 달리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동참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바깥에 있어야만 한다. 독립적인 지식인은 본래 자신이 속해있던 계급에서 도망나왔지만 이 계급은 탈영자들이 피난처를 구한 바로 그 영역에서조차 그들의 요구를 강제적으로 관철시키려듦으로써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7. 그들, 그 사람들
지식인은 대체로 지식인들과 상대한다는 정황은 지식인으로 하여금 지식인 집단을 다른 부류의 사람들보다 비열한 인간으로 간주하도록 유혹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런 유혹을 받는 이유는 아주 수치스럽고 타락한 경쟁관계 속에서 서로를 알게되기 때문에(불충분한 의역)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가장 역겨운 측면들을 내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 특히 단순한 사람들과  - 지식인들은 이들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 지식인의 만남은 단순히 사고파는 역할관계 속에서의 만남이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물건을 파는 사람이 고객에 의해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다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동차수리공이나 술가게의 여점원이 뻔뻔스럽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경우든 위로부터 친절하라는 명령을 받고있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 문맹자가 편지를 써달라고 지식인에게 달려올 경우도 그들은 그런 대로 좋은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사람들이 사회적인 과실에 대한 자신들의 몫을 챙겨야 될 경우가 되면 그들의 질투나 악의는 식자나 지휘자에게서 관찰될 수 있는 비열함을 훨씬 능가한다. 멋진 패배자들을 찬양하는 것은 그들을 그렇게 만든 멋진 체계를 찬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물리적인 노동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죄책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한 죄책감이 ‘전원생활의 우둔함’에 대한 변명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지식인에 관해 글을 쓰는 유일한 사람들인 지식인이 순수성의 이름으로 지식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은 거짓말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헉슬리에게까지 이르는, 반지성주의나 비합리주의의 지배적인 조류 대부분은, 글쟁이들이 지식인들의 경쟁메커니즘을 제대로 꿰뚫어보지도 못하면서 고발하고는 다시 그 메커니즘에 빠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자신만의 가장 고유한 영역에서 그들은 ‘바로 네가 그렇다’는 의식을 스스로에게 차단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인도의 사원으로 달라간다.
9. 얘야, 이것만은 지켜다오 Robert Reinick(1805-52)의 시구; “얘야 이것만은 지켜다오; 성실하고 진실되거라/ 거짓말이 너의 입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거라.”

거짓이 부도덕한 이유는 신성한 진리를 침훼했기 때문이 아니다. 진리에 호소할 수 있는 권한은 궁극적으로는 사회가 쥐고있다. 사회는 그 구성원으로 하여금 할 수 있는 말은 몽땅 쏟아내도록 부추기는데 그것은 사회를 벗어날 수 없는 구성원들을 좀더 확실하게 포획하기 위한 것이다. 부분적 진리에 대한 주장이 - 이로써 보편적 허위를 곧장 그 반대의 것으로 뒤집어놓기는 하지만 - 보편적 허위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에는 역겨움이 붙어다닌다. 사람들은 해묵은 채찍에 의해 그러한 역겨움을 의식하도록 강요당하지만 그러한 의식은 또한 채찍을 휘두르는 형리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치게 해준다. 잘못은 과도한 정직성에 있다. 거짓말하는 자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거짓말할 때마다 그는 매번 살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면서도 ‘성실하고 정직해라’고 노래해대는 한심한 세상의 메커니즘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끄러움은 교묘하게 짜여진 세상 메커니즘의 허위성을 폭로하고 무력화시킨다. 거짓말은 들통이 날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 비로소 거짓말은 타인에 대한 부도덕이 된다. 그러한 부도덕은 타인을 바보로 만들고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타인을 멸시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노회한 실천가들에게서조차 거짓말은 사실을 은폐하여 아름다운 환영을 만들어내는 본래의 명예로운 기능을 잃어버렸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믿지 않으며 모든 사람은 빠삭하게 알고있다. 거짓말은 오직, 타인에게 다음의 사실, 즉 그는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그가 자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행해진다. 거짓말, 언젠가는 의사소통을 위한 자유주의적인 수단이었던 거짓말은 뻔뻔스러움을 위한 테크닉이 되었다. 이러한 테크닉을 구사함으로써 모든 개인은 자신의 주변을 냉기로 두르고는 그 보호막 속에서 번창하고 있는 것이다.
10. 분리와 결합
결혼, 결혼에 대한 인간의 권리가 그 토대를 상실한 시대에 치사한 패러디가 되어 아직 존속하고 있는 결혼은 오늘날 대체로 자기유지의 트릭으로 작용한다. 이 트릭이란 진실에 있어서는 우울한 늪 속에서 함께 살아가지만 결혼식장에서 굳은 서약을 한 당사자들은 자신이 범한 모든 악에 대한 책임을 밖으로, 상대편에게 전가하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결혼생활이란 아마도 두사람이 각자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경제적으로 강요된 이해공동체에서 연유하는 뒤엉킴 없이 자발적으로 서로에 대한 상호 책임을 떠맡는 생활일 것이다. 이해공동체로서의 결혼은 어쩔 수 없이 이해에 관계된 상대방의 굴복을 의미한다. 설사 당사자가 그런 상황을 잘 알고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굴복시키는 관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 세계체제의 사악함이다. 혹자는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품을지 모른다. 이익추구에서 해방된 사람들, 즉 부자들에게는 치욕스럽지 않은 결혼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 가능성은 지극히 형식적인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특권을 가진 자들이란 바로 이익추구가 2차적인 천성이 되어버린 사람들로 그렇지 않고는 달리 자신의 특권을 주장할 수 없게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1. 책상과 침대
사람들이 이혼을 하게 되면, 착하고 친절하고 교양있는 사람일지라도,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켜 자기 주변의 모든 것들을 먼지로 뒤집어씌우고 똥칠을 하곤 한다. 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던 공동생활의 신뢰 기반인 친밀감의 영역은 그 토대인 결혼관계가 파경에 이르자마자 사악한 독소로 변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들 사이의 친근감이란 배려하고 인내하는 마음으로 독가시를 감싸주는 보호막이다. 친밀감이 일그러진 형태로 나타나면 그 안에 숨어있던 단점들이 노출되는데 이혼의 경우 그러한 단점들이 겉으로 터져나오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이혼은 친밀감이라는 창고 속에 들어있던 모든 것들을 강탈해가버린다. 예전에는 애정어린 배려의 표시였고 화해의 형상들이었던 물건들은 갑자기 독자적인 가치를 획득하면서 차갑고 사악하며 유독한 마각을 드러낸다. 이혼한 어떤 교수들은 부인의 집에 침입하여 책상 속에 들어있던 물건들을 빼내오기도 하고, 많은 위자료를 받은 부인들은 남편을 세금포탈 혐의로 고발한다. 결혼이 비인간적이 된 보편자 속에서 인간적인 것이 아직 남아있는 고립된 섬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을 제공한다면 결혼이 깨지면서 보편자는 복수를 시작하는 것이다. 보편자는 냉혹한 사회의 원칙에서 예외를 이루고 있던 것처럼 보이던 것을 다시 자신의 손아귀 안에 넣어 법과 소유라는 소외된 질서 밑에 굴복시키며 그런 것들로부터 자신은 안전하다고 꿈꾸던 사람들을 비웃는다. 보호받고 있던 것은 (곰팡이가 볕에 쬐이듯) 잔인한 무방비상태에 노출된다. 부부가 본래는 서로에게 더욱더 관대했을수록, 또한 소유나 의무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것이 없을수록 이혼과 함께 품위가 파괴되어가는 과정은 더욱 가증스러워진다. 왜냐하면 이해당사자들의 끝모르는 싸움과 상호비방과 갈등이 펼쳐지는 영역은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지탱하는 토대를 이루는 어두운 영역, 즉 남편이 부인의 재산과 노동을 야만적으로 관장하는 것, 잠자리의 기쁨을 제공한 여자를 위해 평생동안 책임을 떠맡을 것을 남자에게 요구하는, 앞의 것 못지 않게 야만적인 성적 억압, 가정이 파괴되면 이 모든 것들이 지하에서 기어나와 햇볕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이다. 제한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울타리 안에서 선한 보편자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이제 사회에 의해 서로를 파렴치한으로 간주하도록 강요당하면서 그들 또한 무제한적인 비열성을 드러내는 바깥 세상의 보편자와 다를 바가 없음을 경험하게 된다. 이혼 속에서 보편자는 특수자에 찍힌 치욕의 상흔임이 드러나는데 그 이유는 특수자인 결혼은 이 사회에서 진정한 보편성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13. 보호, 도움, 그리고 충고
망명 지식인은 모두 예외없이 상처받은 사람이다. 이 사실을 자존심이라는 굳게 닫힌 문 뒤에서 씁쓸하게 깨닫기보다는 차라리 깨끗이 자인하는 것이 속 편하다. 그가 노동조합이나 자동차산업 등의 문제에 대해 아무리 정통하다 하더라도 그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미로 속을 헤매게 된다. 대중문화의 독점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에서 자신의 삶을 재생산하는 것과 엄정하고 책임있는 노동 사이에는 화해불가능한 단절이 지배한다. 그는 언어를 몰수당하며, 인식력의 샘인 역사적 차원은 매장되어버린다. 망명 지식인의 고립감은, 질서가 잘 잡힌 단단한 그룹들이 형성되어 있고, 소속원에 대한 불신이 깊고, 낙인찍힌 타자에 대한 적대감이 클수록 더욱 커진다. 사회적인 생산물 중 이방인에게 할당되는 몫은 충분할 수가 없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일반적인 경쟁과는 별도로 자기들끼리 치르는 제2의 경쟁을 아무런 희망도 없이 벌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개개의 망명지식인에게 상흔을 남겨놓는다. 나치의 획일화 통제(Gleichschaltung)의 치욕을 피해 망명의 길을 택한 사람들은 이러한 뿌리뽑힘을 특별한 표식으로 달고다니며, 사회적인 삶의 과정 속에서 비현실적이고 헛개비 같은 생존을 영위하게 된다. 망명객들 간의 관계는 토착민들 사이의 관계보다 훨씬 독이 배어있다. 시각은 왜곡되며 비중두기는 허위적이 된다. 사적인 것이 부당하고 조급하게, 마치 흡혈귀처럼 표면으로 밀고 나오는데, 그 이유는 이제는 차마 존재한다고조차 말할 수 없게 된 사생활이 발작적으로 건재를 과시하려 들기 때문이다. 공적인 삶은 헌정질서에 대한 암묵적인 서약을 확인하는 일이 된다. 광기에 물든 차가운 시선은 포착해서 집어삼킬 무엇인가를 찾아헤맨다. 기댈 곳이란 오로지 자신과 타자에 대한 단호하고도 냉철한 진단, 그리고 숙명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 깃든 눈먼 폭력, 끔찍한 폭력에 얻어맞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는 것 말고는 없다. 극도의 주의가 요구되는 것은 특히 사적인 관계를 잘 선별하는 것 - 그러한 선택 자체가 가능한지조차 모르지만 - 이다. 무엇보다도 삼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강자를 찾는 행위이다. 득을 좀 취해보려는 흑심은 인간적인 관계를 만드는데 치명적인 해가 된다. 상호신뢰나 연대감은 인간적인 관계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것이지 눈앞의 목적을 이루려는 흑심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특히 경계해야 할 대상은 권력자에게 비굴하게 아첨하고 구걸하는 주구(走狗)들인데, 까마득한 옛날부터 망명지 같은 경제적인 영점 지대에서는 의례 독버섯처럼 번성하는 이런 무리는 처지가 보다 나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그들의 세계에 편입되고 싶어한다. 그들은 보호자에게 작은 이득을 가져다줄지 모르지만 그런 이득에 혹해서 그들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당장 그를 자신들의 세계로 끌어내린다. 보호자 자신도 낯선 땅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막막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런 유혹에 몸을 맡기고 싶은 충동을 부단히 느끼게 마련이다.
유럽에서 언어적인 표현을 거부하는 비의적인 제스처는 단지 인간 마음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똬리를 틀고있는 이기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austérité 극도의 삼감, 내핍, 간소함, 절제(에너지 관리나 생활, 언어에 있어서 모두)를 의미한다고 본다. 단식자의 생활이나 마음가짐을 상상하면 가장 근접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라는 개념은 - 아직 형태를 못 갖춘 취약한 개념이지만 - 망명생활에서는 가장 신뢰할 만한 구명정으로 보인다. 물론 이 구명정은 고도의 세심한 집중력으로 배를 몰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다. 그 배에 탑승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굶주림과 광기이다.
17. 잠정관리 원제 Eigentumsvorbehalt는 팔아넘긴 유동재산을 대금완불시까지 잠정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 글의 문맥에서 유동재산은 인간의 권리나 생명을 뜻한다고 보인다.

예전에는 시장관계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통해 투명한 삶의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오늘날은 그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더 이상 투명하게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은, 가장 강한 자까지도, 객체이다. 심지어는 장군이라는 직업조차 충분한 보호장치를 제공하지 못한다. 어떤 약정도 사령부를 폭격기의 공격으로부터 면제해줄 충분한 구속력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조심성으로 행동한 지휘관들도 히틀러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지고 장개석에 의해 단두대로 보내졌다. 이로부터 초래되는 직접적인 결과는, 살아남고자 하는 자는 - 그런데 생존 자체는 세계 종말에 동참한 다음 종말 이후 땅구멍에서 기어나온다는 꿈만큼이나 황당무계해 보이는 상황에서 - 매순간 자신의 삶을 끝낼 수 있다는 각오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자유로운 죽음에 관한 짜라투스트라의 격앙된 가르침에서 나오는 슬픈 진리이다. 자유는 순수한 부정성으로 응축되어버린 것이다. 유겐트 양식 시대에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불리던 것은, 죽음보다도 더 두려워해야 할 고약한 무엇이 있는 세상에서는 현존재의 무한한 굴복이나 죽음의 무한한 고통을 줄이려는 소망으로 쭈그러든다. 휴머니티의 객관적인 종말은 동일한 상황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개인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대표하는 개별자로서 인류 전체를 구현할 수 있다는 자율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18. 집 없는 사람을 위한 수용소
오늘날 사적인 삶이 어떠한가는 그 현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제대로된 의미에서의 거주는 이제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성장한 전통적인 주거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이유는 그러한 주거 안에 있는 안락함의 자취는 모두 인식에 대한 배반(安住)으로, 단란함의 흔적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가족공동체로 매도된다. 백지상태로부터 만들어진 기능적인 현대주거들은 무식쟁이를 위해 전문가들이 만들어놓은 주거상자이며, 어쩌다 소비영역에 흘러들어온, 거주자와는 무관한 공장이다. 이러한 주거들은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독립적인 삶에 대한 동경마저 추방해버린다. 현대인은 이해 안되는 비유 생략 (직역; 동물처럼 땅바닥 가까이에서 자기를 원하며, 예언적 마조키즘으로 히틀러 앞에 독일 잡지를 공표하며,)
침대와 함께 깨어있음과 꿈의 경계를 없애버렸다. 그렇게 밤을 보낸 자들은 항상, 무슨 일을 위해서든, 아무런 저항 없이 출동준비상태에 있으며 눈은 반짝반짝거리지만 아무런 의식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근사하지만 공동구매한 초현대식 주택으로 기어들어간 사람들은 자신을 산 채로 미라로 만든다. 호텔이나 가구 딸린 아파트로 이사감으로써 거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드는 것은 이민자의 강제조건을 처세를 위한 규범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어디서나 가장 혹독한 시련은 선택할 것이 없는 자에게 돌아간다. 그들은 슬럼이 아니라면 방갈로에서 지내게 되는데 그 방갈로는 내일은 나뭇잎으로 이은 오두막이나 트레일러, 자동차, 천막이 되거나 아니면 노숙일 수도 있다. 집은 과거지사가 되었다. 유럽 도시들의 폭격, 노동수용소나 아우슈비츠 같은 집단수용소는 기술의 내적 발전이 오래 전에 집들에 대해 내린 판결을 연장 적용시킨 것에 불과하다. 집들은 이제 낡은 통조림 캔처럼 버려지기 위해 쓸모가 있는 것이다. 거주의 가능성은 사회주의 사회의 가능성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회의 가능성은 실종되어버린 후에는 부르주아적인 삶의 밑둥치만 갉아먹어치워 버리게 된다. 어느 개인도 여기에 대항할 수가 없다. 난삽한 비유가 전개되는 두세 문장 생략
최상의 태도는 언제라도 버릴 각오가 되어있는 태도일 것이다. “집소유주가 아니라는 점은 나의 행복”이라고 이미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썼었는데 오늘날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자기 집에 있으면서도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지 않는 것이 도덕적이다. 여기에, 개인이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 갖게되는 - 그가 아직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다면 - 곤혹스러운 관계가 약간이나마 드러난다. 사유재산은, 소비재는 잠재적으로 너무나 넘쳐흐르기 때문에 어떤 개인도 소비재를 제한하는 원칙을 고수할 권리를 갖고있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한 개인에게 속할 수가 없으며, 그렇지만 고통스러운 종속관계 - 이러한 종속관계는 소유관계의 맹목적인 존속에 유리하게 작용하는데 - 에 빠지지 않으려면 재산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모순을 분명히 자각하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된다.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소유를 버리자는 명제는 파괴로, 즉 아무런 애정 없이 사물들을 멸시하는 태도로 나아가며 이러한 멸시는 필연적으로 인간들에 대해서도 등을 돌리도록 만든다. 반면 소유를 인정하는 안티테제는 입으로 내뱉는 순간 이미 검은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소유를 지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되고만다. 거짓된 삶 속에 올바른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19. 노크하지 마시오
기술화는 제스처를 정확하고 거칠게 만듦으로써 결국에는 인간까지 그렇게 만들었다. 기술화는 우리의 행동거지에서 망설임이나 신중함, 예절 같은 것은 몽땅 추방해버린다. 기술화는 그런 것을 어떠한 역사도 화해도 모르는 사물의 속성에 굴복시켜버린다. 이리하여 조용히,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확실하게 문을 닫는 좋은 습관은 사라진다. 자동차나 냉장고 문은 꽝 닫아야만 하며, 어떤 문들은 저절로 닫혀버림으로써 들어갈 실내를 살피면서 등뒤를 돌아볼 틈을 주지 않는 실례를 범하도록 방문객을 강요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접하는 주변의 사물이 가장 내밀한 신경조직에까지 미치는 영향을 자각하지 못할 경우 새로운 인간형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여닫이 창틀이 없이 미닫이 창틀만이 있고 부드러운 손잡이 대신 돌리는 단추자물통만이 존재하며, 거리를 향한 현관이나 문지방,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담 등이 없다는 것이 도대체 주체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운전사가 과연 엔진의 힘으로 거리의 하찮은 동물이나 보행자, 어린이, 자전거를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을 받지 않겠는가? 기계들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운동에는 이미 파시스트의 난폭성과 비슷한 거친 폭력성과 과격성이 들어있다. 경험의 고사(枯死)에 대한 적지 않은 책임은, 수단-목적 관계에 완전히 종속되어버린 사물들은 그 취급을 오로지 작동에만 제한시키는 형식을 갖게되면서, 행동이 끝나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잔영이나 잉여 - 행동의 자유에서든, 사물의 자율성에서든 - 를 남겨놓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경험의 핵심은 바로 이렇게 살아남은 잔영일 터인데...
20. 더벅머리 페터
영국신사들에게서 ‘순수철학이라는 악평을 얻은 인식론적 명상을 흄이 세인들에 맞서 옹호하고 들었을 때 그가 사용한 논거는 “정확성은 항상 미에 도움이 되며, 올바른 사고는 부드러운 감정에 유익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거 자체도 실용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실천정신에 대한 진리 전체가 은연중 부정적으로 제시된다. 인간에게 유익한 체 하는 삶의 실천적인 질서는 이윤경제 하에서는 인간적인 것을 위축시키며 그런 경제체제가 확장될수록 점점 더 모든 부드러움을 제거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들 간의 부드러움이란 목적에 사로잡혀있는 인간들을 위로의 손길로 어루만져주는 탈목적적인 관계에 대한 의식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특권 없는 관계를 약속해주는 옛 특권의 유산이다. 시민적 이성은 이러한 특권을 폐기함으로써 결국에는 그러한 약속 또한 폐기한다. 시간이 돈이라면 시간 - 무엇보다도 자신의 시간 - 의 절약은 도덕적으로 보이게 되며 사람들은 그러한 시간절약을 타인에 대한 배려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사람들은 직선적이 된다. 사람들간의 왕래에 끼여있는 외피들은 모두 기계적인 메커니즘 -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장치에 편입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그 장치와 동일시한다 - 의 작동을 방해하는 요소로 느껴진다. 모자를 벗는 대신 별 생각없이 익숙한 인사말 한마디로 인사를 나누는 행태나, 편지 대신 인사말이나 서명을 생략한 공문을 주고받는 행태는 인간관계가 병들어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의 한 예일 것이다. 소외는 바로 사람들 간의 거리가 소멸되는 데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인간은 서로 주고받고, 토론하고 그 결과를 실행하고, 통제를 하고 그 통제의 틀 안에서 역할을 행하고 하는, 즉 몸과 몸이 부딪치는 관계 속에서만 그들간을 함께 묶는 정교한 그물망을 위한 공간이 생겨나는 것이며 한 인간에게 있어 그러한 바깥이 있을 때에만 안도 여무는 것이기 때문이다. 융의 추종자들 같은 반동적인 인물들도 이 사실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이어의 논문 ⌈에라노스⌋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있다. “어떤 주제에 직설적으로 접근하거나 곧장 언급조차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문명화된 틀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독특한 습관이다. 대화는 그 대신 본래의 대상 주위를 나선형 모양으로 맴돌 수밖에 없다.” 이와는 반대로 오늘날 두 사람 사이를 최단 거리로 결합시켜주는 것은 그들이 마치 점들이나 되는 양 그 점들을 연결하는 직선이 된다. 오늘날은 건물 바닥에 시멘트를 부어 한 덩어리로 만들 듯이 인간들 사이를 메워주는 접착제는 그들을 함께 묶는 압박으로 대체된다. 다름은 더 이상 이해되지 않는다. 점심을 먹으면서 사업상의 대화를 열기 위해 부인의 건강과 안부를 묻는 몇마디 말들처럼 목적의 질서를 벗어나 있는 것들도 이 질서 속에 편입된다. 사업 얘기만 주책 없이 늘어놓아서는 안된다는 터부와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무능력은 사실은 같은 것이다. 교수형 당한 사람의 집에서 그 밧줄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은 장사이기 때문에 장사라는 것을 굳이 들먹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소위 민주라는 이름으로 허례허식이나 구식 예절, 쓸모없는 대화(쓸데없는 잡담이라고 의심받는 것이 아주 부당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를 없애버리는 행위나 분명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용인하지 않는 인간관계의 투명성 뒤에는 벌거벗은 야만성이 도사리고 있다. 아무런 반성이나 망설임 없이 타인의 면전에 바로 대놓고 하는 말에는 이미 파시즘 하에서 벙어리가 침묵하는 자들에게 행하는 명령 인도자(Führer; 히틀러)의 인도에 따라 모두 함께 같은 길을 달려가자는 듯이 보이는, 팔 전체를 앞으로 내미는 나치의 인사법을 연상케한다.
의 형식과 울림이 들어있다. 인간들 사이에 있던 이데올로기적인 군더더기를 쓸어내고는 그들 사이에 사실만을 남겨놓으려는 요청은 그 자체가 이미 인간들을 물건 취급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되고만 것이다.
22. 목욕물과 함께 갓난아이를 버리는...  
문화비판의 중심 모티브는 예로부터 허위의 모티브이다. 즉 문화라 있지도 않는 인간다운 사회의 환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또한 문화는 모든 인간적인 것의 토대인 물적 조건을 은폐하면서, 온갖 위로와 구슬르기를 통해 생존의 나쁜 경제적 결정성을 지탱시켜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를 이데올로기로 보는 사유로서 시민적 폭력론과 그 반대편에 있던 니체와 마르크스가 공유하고 있던 생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은, 거짓말에 대해 호통치는 행위가 대개 그렇듯이, 그 자체 이데올로기가 되지는 않는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이것은 사적인 영역에서 입증해볼 수 있다. 돈이나 돈으로부터 비롯된 온갖 갈등들에 대한 사유는 가장 부드러운 에로틱한 관계나 가장 고상한 정신적인 관계에까지 확장된다. 그 때문에 진리에 대한 열정과 논리의 수미일관성을 추구하는 문화비판은 제반관계를 물적 토대로 철저히 환원하고 당사자들의 이해상황에 따라 적나라하게 재구성해야할 것을 요구한다. 그 근거는 의미란 발생과 무관하지 않으며, 물질적인 것을 은폐하거나 매개해주는 것에서는 모두 부정직성이나 감상의 흔적,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두 배의 독성을 지닌 감추어진 이해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을 끝까지 밀고나갈 경우 거짓된 것과 함께 참된 것도 모두 뿌리뽑아버릴지도 모른다. 즉 아무리 무력할지라도 보편적인 실천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애쓰는 모든 것, 백일몽에 불과할지는 모르지만 좀더 고귀한 상태를 미리 구상해보는 것 등도 함께 뿌리뽑아버리고는 야만상태 - 이 야만상태는 문화에 의해 매개된 것이라고 비난하지만 - 로 곧장 넘어갈 것이다. 니체 이후의 문화비평에는 이러한 역전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중 슈펭글러는 가장 열광적으로 그러한 야만성으로의 역전에 가담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 또한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문화적인 진보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 믿음에서 깨어나 점점 커져가는 야만성에 직면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객관적인 경향’에 대한 관심 속에서 끊임없이 그러한 야만성의 증대를 옹호하고 싶은 유혹을 받고있다. 그들은 절망에 빠진 나머지 불구대천의 원수에 의한 치유를 기대하는데, 파시즘이라는 안티테제는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경로를 거쳐 종국에는 좋은 결말을 가져다주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것이다. 거짓말인 정신에 대항해서 물질적 요소를 강조하는 것은, 경찰과 암흑가가 맺는 상호양해와 유사한 방식으로, 정치적 경제와의 의심쩍은 친화관계 - 내재적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 를 만들어낸다. 유토피아를 몰아낸 후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요청되면서 사람들은 너무나 실천적이 되어버렸다. 이론의 무기력에 대한 두려움은 전능한 생산과정에 굴복하고는 이론의 무기력을 완전히 인정하는 구실을 제공한다. 음흉스러운 경향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의 언어에서도 종종 발견되기는 하지만 오늘날은 사업정신과 냉철한 비판적 판단 사이의 유사성이나 속류 유물론과 다른 종류의 유물론 사이의 유사성이 점점 커져가게 되면서 주체와 객체를 제대로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사태가 종종 벌어진다. 문화를 허위와 곧장 동일화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가장 불행한 사태인데 그 이유는 실제로 전자가 후자에 의해 완전히 접수당하게 되면서 그러한 동일화는 어떤 저항적인 사유도 깨끗하지 못함을 입증하는데 안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 현실을 교환가치의 세계라고 부르고 문화에 대해서는 그런 교환가치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기존의 상태가 존속하는 한 그러한 거부는 가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자유롭고 정직한 교환이란 그 자체가 허위라 할 때 그러한 교환을 부정하는 것은 진리의 편에 서게 된다. 상품세계의 허위와 마주서게 되면서 문화라는 허위는 앞의 허위를 탄핵하는 교정자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문화는 실패해왔다는 사실이 그런 실패를 부추기는 행위에 대한 정당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 (비유 생략)
함께 속해있는 인간들은 그들의 물질적인 이해를 숨겨서도, 아니면 그것만이 전부인 듯 행동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물적인 이해를 총체적인 인간관계 속으로 끌어들여 성찰하면서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23. 복수형으로만 쓰이는 명사
현대의 이론이 가르치듯, 사회가 정말 패거리 사회라면 이러한 사회의 가장 충실한 모델은 집단과 반대되는 바로 그것, 즉 단자로서의 개인일 것이다. 그때그때의 개인이 어떻게 절대적으로 파편화된 이해를 추구하는가를 통해 잘못된 사회에서 집단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가장 정확하게 연구될 수 있으며, 난마처럼 얽힌 충동들의 조직을 현실원칙에 충실한 자아라는 절대 명제 아래서, 지도자와 추종자, 온갖 의식(儀式)들, 의리의 맹세와 파기, 이해 갈등과 음모 등등을 내면화한 갱단으로 파악하는 것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만, 주변 세계에 대해 정력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개인이 드러내는 반응들, 예컨대 분노 같은 것을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화내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무의식에 대해 명령을 내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갱단 두목이 되려 하며, 그의 눈에서는 다수를 대변한다는--사실은 자기 자신인데--만족감이 번뜩인다. 공격의 목표를 자기 자신으로 삼을수록 그는 사회의 억압원리를 더욱 더 완전하게 대변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의미에서 아마 가장 개인적인 것은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는 명제는 타당성을 지닐 것이다.

24. 터프 베이비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남성적임을 드러내는 특별한 제스처는 불신을 받아야 한다. 그러한 제스처는 독립성, 단호한 명령권, 남자들 사이의 말없는 맹세를 표현한다. 예전에는 이것을 마음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주인’의 변덕으로 경원했지만, 오늘날은 민주화되어 영화의 주인공이 말단의 은행원도 그런 제스처를 어떻게 하는지 보여준다. 그 전형은 그럴 듯한 외모의 남자가 밤늦게 담배를 피우면서 자신의 독신자 아파트에 들어가 간접조명을 키고는 위스키와 소다수를 섞는 모습이다. 조심스럽게 녹음하여 재생된 소다수 소리는 거만한 입이 무엇을 침묵하고 있는지 말해준다. 그 침묵 속에 담겨 있는 것은 담배 연기, 가죽, 면도 크림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이나 여자들을 경멸한다는 것, 이 여자들은 바로 그 냄새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달아났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인간관계의 이상이란 매우 사려깊게 보이지만 그 알맹이는 아무것도 없는 정중함이 가득찬 경마장인 사교클럽이다. 이런 남자들 또는 이런 모델들--영화에서 제시된 모델이 실제의 살아있는 인간들과 꼭 같지는 않은데 그 이유는 실제 인간은 그들의 문화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의 기쁨 속에는 온통 잠재적인 폭력의 냄새가 난다. 그런 폭력은 다른 사람을 향한 폭력으로 보이지만 안락의자에 자신을 파묻고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한 폭력의 진실은 예전에 자기 자신에게 가해졌던 폭력이다. 쾌락이란 모두 예전의 불쾌를 자신 안에서 지양시키는 것이라면 여기서는 불쾌가, 그것을 견뎌내는 자부심으로서, 매개되지도 않은 채, 결코 변화될 수 없는 판에 박힌 모습으로, 쾌락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포도주와는 달리 위스키 잔에는, 또한 내뿜는 시가 연기에는 그런 강렬한 자극에 길들여지기 위해 유기체가 지불해야 했던 역겨움이 묻어 나오는데 이것만이 쾌락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영화 줄거리가 보통 그렇듯 남자들이란 본래의 체질상 마조히스트일지 모른다. 거짓은 그들의 사디즘 안에 숨어 있는데 강한 척하는 위선 속에서 그들은 정말 사디스트가, 억압의 대리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허위는 억압된 동성연애가 유일하게 인정된 이성간의 성생활로 나타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옥스퍼드에서는 학생들을 두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하나는 터프 가이 타입이고 다른 하나는 지성인 타입이다. 후자는 이러한 대립설정에 의해 곧바로 여성화된 남자와 동일시된다. 여러 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독재로 나가는 도정 위에서 지배 계층은 이러한 양극단으로 수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탈통합화가 통합의, 즉 행복의 부재 속에 있는 하나됨의 비밀이다. 결국 터프 가이들이야말로 여성화된 자들인데, 이들은 자신들이 연약한 자들과 같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연약한 사람들을 제물로서 필요로 하는 것이다. 총체성과 동성연애는 한 통속이다. 주체가 파멸하면서 주체는 자신과 같지 않은 모든 것을 부정한다. 강한 남자와 순종적인 청년의 대립은 지배라는 남성적 원칙이 유일하게 관철되는 질서 속에서 희석된다. 이러한 원칙이 어떤 예외도 없이 모두를, 주체라고 생각하는 자들마저 자신의 객체로 만들게 됨에 따라 그것은 완전한 수동성이나 여성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25. 그들을 기억해서는 안된다.
잘 알다시피 망명자들의 과거 삶은 없었던 것으로 취급된다. 예전에는 그것이 지명수배서로 쓰였다면 오늘날은 전혀 이해불가능한 낯선 종류의 정신적 경험으로 선언된다. 물화되지 않은 것, 셀 수 없는 것, 측정될 수 없는 것은 누락시켜버린다. 그렇지만 이로써 물화가 그 반대의 것, 즉 직접적으로 현재화될 수 없는 삶에까지 확장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삶은 언제나 사유와 회상으로서만 계속 살아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성, 나이, 직업 등을 묻는 설문지의 부록으로 ‘배경’이라는 별도 항목이 만들어진다. 모욕당한 삶은 미국 통계학자의 개선마차에 실려 끌려다니게 되면서, 과거조차 현재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게 된다. 이 현재는 과거를 상기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과거에 망각의 은총을 내리는 것이다.
26. 영어로 말하기
어렸을 때 나는 부모님과 알고지내던 영국 부인들로부터 종종 책을 선물로 받았다. 그 중에는 삽화가 많이 들어있는 청소년 잡지와 고급 모로코 가죽으로 된 푸른색의 작은 성경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선물을 준 사람들의 언어로 씌어있었다. 내가 과연 그것들을 읽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 책들은 현란한 그림들이나 제목들, 장식들로 내게 덮쳐왔지만 그 문구들은 해독 불가능했었는데, 이런 책들의 접근불능성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종류의 책들은 제대로 된 책들이 아니라 삼촌이 런던의 공장에서 만드는 기계들 같은 것을 선전하는 광고물이겠지라고... 내가 영어권 나라에 살면서 영어를 이해하게 된 이래로도 이러한 의식은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었다. 하이제의 시를 가사로 한 브람스의 “소녀의 노래”라는 곡이 있는데 그 곡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있다. “오, 마음의 고통이여, 영원한 그대여, 함께 있음만이 축복일지라” 이 구절은 널리 보급된 영어판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있다. “오 고통이여, 영원함이여! 그러나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황홀할지니” 고풍스럽지만 열정적인 원전의 중심단어들이 히트송을 선전하기 위한 선전문구로 전락한 것이다. 네온사인 속에서 빛나는 이러한 문구들처럼 문화는 자신의 선전적 성격을 과시한다.
27. 프랑스어로 말하기
외국어로 포르노 책을 읽는 사람은 섹스와 언어가 얼마나 내밀하게 서로 교차하고 있는지 배우게 된다. 사드의 소설을 원서로 읽는 데는 사전이 필요없다. 집이나 학교, 또는 문학적 경험 중 어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요상한 외설스러운 표현들은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마치 어렸을 적에 섹스에 관계된 이상한 표현이나 장면목격이 생생한 그림으로 結晶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그런 단어들을 밖으로 들먹이기만 해도 갇혀있던 열정이 억압의 울타리를 찢고, 또한 눈먼 언어의 울타리마저 찢고 나와 오금을 못 쓰는 가장 깊숙한 감각세포 - 그 자체 그러한 열정을 닮은 - 속으로 파고드는 것과 같다.  
28. 풍경
미국 경치에서 부족한 점은 낭만적 환상이 원하는 역사적 기억의 부재라기보다는 인간의 손이 만들어놓은 어떤 흔적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애써 경작해놓은 밭 대신 낮은 키의 무질서한 잡목 숲만 널려있다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지만 우선은 무엇보다 도로와 관계된 이야기다. 미국의 도로는 주변 풍경과의 아무런 매개 없이 다만 그것을 파괴하면서 뚫고나간다. 도로가 크고 시원하게 뚫려있을수록 번드르한 도로는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주변 숲, 즉 제멋대로 자란 원시림에 폭력을 휘두르는 듯하다. 도로에는 표정이 없다. 어떤 보행 흔적이나 바퀴의 흔적도, 주변의 밭들로 통하는 부드러운 흙길도 없으며, 계곡으로 내려가는 샛길도 없는 도로에는, 인간의 손이나 손의 직접적인 도구들이 사물에 가했던 부드럽고 온화하고 모나지 않은 느낌 같은 것이 빠져있다. 마치 어떤 인간의 손도 풍경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본 적이 없는 듯 싶다. 아무런 위로도 받아보지 못한 도로는 살벌한 느낌을 준다. 풍경을 지각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왜냐하면 서두르는 눈은 자신이 차안에서밖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붙잡아놓을 수는 없으며, 그 눈앞에서 풍경의 흔적들이 허무하게 지나가버리듯 그 눈 또한 흔적 없이 가라앉고 말기 때문이다.
29. 쭉정이 과일
프루스트의 독자는 자신이 작가보다 더 영리하다고 여길 때 느끼는 당황감을 면제시켜 주는데 이 점이 프루스트적인 예절일 것이다.

19세기에 독일인들은 그들의 꿈을 그렸는데 그 그림에는 어김없이 채소만이 나왔다. 프랑스인들은 채소만을 그리기만 하면 됐는데 그래도 그것은 이미 하나의 꿈이 되었다.

영어권 나라에서는 창녀들이 죄와 함께 지옥의 형벌도 제공하는 듯이 보인다.

미국 풍경의 아름다움; 가장 작은 조각에도 나라 전체의 광대함이 표현되어 있다.

망명자의 기억 속에서 모든 독일인은 자신들에게서 사냥꾼의 총에 잡힌 노루고기구이 맛이 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신분석에는 과장 이외에는 아무런 진실성이 없다.

행복한 사람이건 불행한 사람이건 누구나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다. 불행한 사람은 바람소리를 집이 부서질 것 같은 경고로 들으며 잠을 설치고 악몽에 시달리면서 그 소리를 쫓는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바람소리가 편안한 보금자리를 확인시켜주는 노래소리로 들린다. 포효하는 윙윙 소리는 자신에게 어떠한 힘도 행사할 수 없다는 표현으로 들리는 것이다.

예로부터 꿈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해 있던 소리없는 소음이 이제는 잠에서 깨어나면 신문의 큰 제목들에서 울려나온다.

신화적인 흉보가 라디오와 함께 부활하고 있다. 위엄있는 목소리로 공표되는 중요한 사건들은 항상 재앙에 관한 것이다. 영어 단어 solemn은 장엄하고 위협적이라는 뜻을 갖는다. 말하는 사람의 뒤에 있는 사회의 권력은 자연스럽게 듣는 사람에게 등을 돌린다.

가장 최근의 과거사는 항상 카타스트로프에 의해 파괴된 것인 양 나타난다.

사물들 안에 새겨져있는 역사의 표현은 오직 지나간 고통일 따름이다.

헤겔에게서 자의식이란 스스로에 대해 확신하는 진리, 정신현상학의 어투에 따르면 ‘진리의 고유 영역’이었다. 시민계급이 이런 것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되었을 때조차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부에 대한 긍지 속에서는 최소한 자의식적이었다. 오늘날 자의식이라는 개념에 대한 성찰은 어찌할 바 모르는 당황감이나 무기력에 대한 자각으로 자아를 파악하는 것,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서 이미 ‘나’라고 말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눈엣가시가 최상의 확대경이다.

가장 별볼일 없는 인간도 가장 중요한 인물의 단점을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가장 어리석은 자도 가장 현명한 사람의 생각 속에 들어있는 결함을 인식할 수 있다.

성윤리학의 첫 번째이자 궁극적인 기본명제는 고소인은 항상 잘못이라는 것이다.

전체는 비진리다.(진리는 전체Das Wahre ist das Ganze라는 헤겔 명제를 뒤집어놓은 것)
30. 우리 집을 위하여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그 다음에 온 전쟁에 비하면 평화스럽게 보이는 지난번의 전쟁 동안에 대부분 나라의 오케스트라는 그 시끄러운 입을 닫고 있어야만 했을 때 스트라빈스키는 충격으로 불구상태에 빠진 간소한 실내악 연주곡 ꡔ군인의 역사ꡕ를 썼다. 그의 최고 악보가 된 이 곡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중 유일하게 신뢰할 만한 초현실주의 선언문으로서, 꿈속의 가위눌림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음악은 진리의 부정성을 암시해준다. 이 작품의 전제를 이루는 모티브는 빈곤이다. 이 작품은 공식문화를 격렬하게 해체시키고 있는데 그 근거는 이 곡이 공식문화의 물질적 자원뿐만 아니라 진정한 문화와는 거리가 먼 번드레한 허식을 모두 제거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곡에서 표현되는 공허함조차 꿈꾸지 못했던 파괴의 척도를 1차대전은 그 후의 시대에 남겨놓았지만 세계대전 후에 나온 정신적 산물에 대한 예시 같은 것이 이 작품 속에는 들어있다.
오늘날 진보와 야만은 대중문화 속에 촘촘히 뒤엉켜있다. 그 때문에 오직 대중문화나 매체의 진보에 야만적인 금욕만이 야만적이지 않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떤 예술작품이나 어떤 사유도 거짓된 풍요나 일류의 생산물, 컬러영화나 텔레비전, 수백만부가 팔리는 잡지, 또는 토스카니니를 거부하지 않고는 생존의 기회를 얻을 수가 없다. 대량생산을 염두에 두지 않는 낡은 매체만이 새로운 현재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 것들만이 기업과 기술의 통일전선을 비켜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책이 책 같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책이 아닌 책들만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가 시작될 때 인쇄술의 발명이 있었다면 인쇄활자는 눈에 띄지 않는 전파매체인 등사 활자에 의해 폐지될지도 모른다.
31. 비밀 폭로
사회주의의 행동방식 중 가장 존경할 만한 것인 연대감마저 병들었다. 연대감은 형제애라는 말을 진정으로 실현시키려 했었는데, 이 형제애라는 것은 보편자 속에서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사회주의는 이 관념을 보편자로부터 끄집어내어 당파성을 대변하는 당, 즉 적대적인 세계에서 유일하게 보편성을 대변한다는 당에 그 사용권한을 부여했던 것이다. 함께 생명을 거는 일군의 사람들, 획득가능한 가능성 앞에서 개인의 삶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 그 때문에 어떤 추상적 이념에 얽매이지 않은 상태에서도 아무런 개인적 희망도 없이 서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기유지의 포기를 위한 전제조건은 인식과 결단의 자유였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결여될 경우에는 눈먼 당파적 이해가 금방 다시 재생산된다. 그러나 그 사이 연대감은 ‘당은 천 개의 눈을 가졌다’는 명제에 대한 믿음으로, 더 강한 편이라고 믿는 노동자 대대 - 이 대대는 이미 한참 전부터 제복을 입고 있다 - 에 지원하는 것으로, 그리고는 세계사의 대세를 타고 함께 헤엄쳐나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런 식으로 얼마 동안은 안전을 확보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은 항구화된 불안, 아첨, 앞뒤 눈치를 잘 살피는 처세, 복화술(腹話術)이다. 적을 이기는데 사용되던 힘은 자기네 대장의 심기를 살피는데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가장 깊숙한 내면 속에서는 예전의 적보다 자기네 지도자 앞에서 더 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양쪽 지도자들이 결국 자신들의 굴레 밑에 들어온 부하들의 등뒤에서 상호양해를 행하리라는 것을 희미하게 예감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들간의 조건반사가 감지될 수 있다. 어떤 이념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닌 성골들은 암호처럼 통하는 모종의 은밀한 제스처나 언어(여기에는 거칠고도 순종적인 체념이 들어있다)를 통해 서로를 알아보는데, 미리부터 사람들의 색깔을 나누는 상투적인 방식에 따라 진보주의자로 분류된 사람은 성골들을 결속시키는 매개체로 보이는 상상적인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성골들 또는 그들보다 약간 순도가 떨어지는 진골들은 그에게 다가와서는 연대감을 기대한다. 그들은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진보라는 대의에 투신한 한 편임을 확인하려 든다. 그러나 그가 연대감을 입증하는데 미미한 관심을 보일 경우 그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이 문장은 난삽한 부분을 뺀 축약 번역임.
조직원들은 점잖은 지식인이 그들을 위해 알몸을 내보이기를 원하지만 지식인이 자신을 드러내야만 한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자 그를 자본가로 몰아붙이며 점잖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제는 감상주의나 우둔함이라고 깎아내린다. 연대감은 양극화하는데 그 하나는 퇴로가 막힌 자들의 절망적인 충성이라면 다른 하나는 떼거리에 자신을 내맡기거나 형리들과는 관계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은밀한 협박이다.  
34. 한눈팔이 한스
인식과 권력 사이에는 노예근성의 연관성뿐만 아니라 진리의 연관성도 존재한다. 대부분의 인식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맞을지라도, 힘의 분배에 있어서의 균형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이민 온 의사가 “내가 볼 때 히틀러는 병적인 사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면, 임상학적인 전거를 토대로 그의 진술이 결국에는 확인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편집광의 이름으로 세상에 새겨진 객관적인 불행을 담아내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서 그 때문에 그의 진단은 진단자의 우쭐대는 호기로만 들릴 뿐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히틀러는 즉자적으로는 병적인 사례일지 모르지만 “그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파시즘에 대항한 망명객들의 수많은 선언이 공허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자유롭고, 거리를 취하며, 이해관계를 초월한 듯한 판단형식 속에서 사유하는 사람들은 그런 형식으로는 폭력의 경험을 담아낼 수가 없다. 폭력은 그런 사유를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거의 풀 수 없는 과제겠지만 중요한 것은 타인의 권력에 의해서든 자신의 무력감에 의해서든 자신을 어리석게 만들지 않는 것이다.
36. 죽음을 위한 건강성
오늘날의 전형적인 문화에 대한 심리분석 같은 것이 가능하다면, -절대적인 경제제1주의가 그러한 제1주의에 의해 희생된 제물이 갖고있는 영혼의 상태로부터 현재상태를 설명하는 데 대해 조롱하지만 않고, 또한 심리분석가들이 오래 전부터 기존 상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지만 않았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겠지만 - 그러한 심리분석은 시대의 병은 바로 정상상태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드러낼 것이다. 영혼과 육체 모두가 건강한 개인이 요구하는 리비도적 활동이란 가장 깊은 심층부에서 일어나는 불구화, 즉 내면화된 거세를 통해서만 실현가능한 무엇 - 이에 비하면 아버지와의 동일화라는 해묵은 과제는 충분히 숙달된 아이들 장난일 것이다 - 이다. 정상적이고 평균적인 소년과 소녀들은 그들의 욕망이나 인식을 억압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시대에는 그러한 억압으로부터 초래된 온갖 징후들을 또한 억압해야 한다. 해묵은 불의는 빛, 공기, 위생 같은 것을 대중에게 풍족하게 베풂으로써 바뀌었다기보다, 합리화된 대기업의 현란한 투명성에 의해 은폐되는 것에 불과한 것처럼, 지금의 시대가 갖고있는 내적 건강성이란 병의 원인에 대한 관심은 등한시한 채 병으로의 도주마저 차단하는 것이다. 곤혹스러운 공간낭비로 여겨진 어두운 변소는 제거된 다음 욕실 안으로 옮겨진다. 심리분석이 - 그 자신 이제는 위생학의 일부가 되었지만 - 품었던 변소에 대해 적의는 적절했음이 입증된 것이다. 가장 밝은 곳에서조차 은밀하게 배설물이 넘쳐흐른다. “비참함이 존재하는구나. 옛날 그대로/ 너는 결코 그것을 뿌리뽑을 수 없지/ 그렇지만 너는 그것이 보이지 않게 만든다”는 시구는 넘쳐흐르는 상품이 부단히 증대하는 물질적 차이를 은폐하는 물질의 영역보다 영혼의 영역에 더 타당한 듯하다. 어떤 연구도 기형화   - (삽입구 생략) -
가 일어나는 지옥까지 내려가지는 않는다. 노이로제의 원천인 이러한 기형화는 아동발달의 초기단계로 퇴행한다는 가정은 일리가 있다. 노이로제란 충동이 패배당하도록 만든 갈등의 결과라면 상처받은 사회는 이러한 노이로제와 흡사한데 이러한 사회가 정상적이 된 상황에서 정상적인 상태란 갈등에 이르기도 전에 기세를 꺾어버리는 사전조정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 후의 무갈등상태란 인식에 의한 치유가 아닌 사전 결정상태나 집합적 심급 사회적인 기구나 제도들
의 선험적인 승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고급 일자리에 응모한 후보가 갖추어야 할 필수요건인 차분하고 정중한 태도는 고용주가 입사 후 부과하게 될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의 예고편이다. 건강한 사람에게서 병을 진단해내는 유일한 객관적인 방법은 그들이 실제로 영위하는 합리적인 삶과 가능한 한 이성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삶의 이상 사이의 불일치를 통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병의 흔적은 밖으로 튀어나오고 만다. 건강한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무늬진 발진으로 덮인 피부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든지 무기물을 닮아가려는 듯이 보인다. 별 이상이 없는데도 팔팔한 생동력을 지닌 사람들을 준비된 시체로 간주한 다음 다만 그들의 유감스러운 수명에 대한 보도는 인구정책적인 고려에서 자제한다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지배적인 건강성의 밑바닥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심장이 멎은 후의 반사운동과 흡사하다. 오래 전에 잊혀진 끔찍한 인고(忍苦)의 증거인 이마의 주름살, 유연한 논리를 방해하는 병적인 우둔함 『계몽의 변증법』의 마지막 에세이 ⌈우둔함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참조
또는 무기력한 몸짓만이 사라진 삶의 흔적을 어렵게 간직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에 의해 부과된 희생은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그러한 희생은 개인에게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사회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회는 모든 개인의 병을 떠안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인 안에 묻혀있는 주관적인 불행과 가시적인 객관적 불행이 사회 속에서  - (삽입구 생략) -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위로마저 빼앗아가는 것은, 정상성 속에 있는 병은 그 반대편인 병 속에 있는 건강성 같은 것을 가능케하기보다는 후자 또한 대체로, 방식은 다르지만 비슷한 불행의 도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39. 자아는 무의식이다.
고대에서나 르네상스 이후에서나 사람들은 심리학의 발달을 시민적 개인의 부상과 결부시켜오곤 했다.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될 것은 예전에는 심리학과 시민계급이 공유했지만 오늘날에는 서로를 배척하기에 이르게된 상반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향은 즉 개인의 억압이나 해체를 일컫는데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인식은 재차 인식 주체에 연결되게 되었던 것이다. 프로타고라스의 심리학 이래 모든 심리학은 이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생각을 통해 인간을 치켜세웠다면, 이로써 심리학은 처음부터 인간을 객체로, 분석의 재료로 만들었으며, 인간 자체를 사물들 중의 하나로 만듦으로써 사물들은 무(無)라는 속성을 인간에게도 덮어씌웠던 것이다. 사물을 주체에 종속시킴으로써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에 함축된 의미는 주체 자체의 부정이다. 어떤 척도도 만물의 척도가 되지 못하면서 척도 자체가 우연적인 것으로, 비진리로 변질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의 실제적인 진행과정을 돌이켜 볼 수 있게 해준다. 절대 명제로까지 발전했던 인간 지배의 원리는 절대적인 객체인 인간에게 그 칼끝을 돌리게 되었는데, 심리학은 그 칼끝을 날카롭게 가는데 일조해왔던 것이다. 심리학의 중심 이념이면서 선험적인 대상인 자아는 심리학의 시선을 만나면 (메두사의 눈에 쪼인 듯 - 역자 첨가) 비존재로 변해버린다. 심리학의 존재기반은, 교환사회에서 주체는 주체가 아니라 실상은 그 객체에 불과하다는 원칙 위에 서있기 때문에 심리학은 교환사회에 주체를 비존재로 만들어 자신의 발 밑에 굴복시킬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한다. 인간을 그가 지닌 능력들로 분해하는 것은 노동분업이 소위 주체라는 것들에 투사된 것으로서 주체를 좀더 착취하고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관심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심리기술이란 심리학의 단순한 타락형태가 아니라 심리학의 원칙 안에 이미 내재된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매 문장마다 진정한 휴머니즘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 자아를 선입관들로 격하시킨 흄은 이런 모순 속에서 심리학의 그러한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면에서 흄은 나름대로 진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아가 스스로 자아라고 설정한 것은 실제로는 단순한 선입견에 불과한 것이며 추상적인 지배의 중심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실체화한 것으로서 이러한 정황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개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는 해체되고 남은 잔재를 더욱 손쉽게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이것은 심리분석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심리분석은 개성을 삶을 위한 기만으로 간주하면서 개성이란 개인으로 하여금 충동을 포기하고 현실원칙에 순응하도록 하는 수많은 합리화 기제들을 함께 묶어주는 최상의 합리화 기제로 파악한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 심리분석은 인간이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증명해낸다. 심리분석은 인간에게 스스로에 대해 환멸감을 느끼도록 하고 자아의 통일성이나 자율성을 공격함으로써 인간을 합리화의 메커니즘에 완전히 굴복시켜 순응하도록 만든다. 자아가 스스로에게 행하는 겁 없는 비판은 타자의 자아도 항복해야 한다는 요구로 넘어가게 된다. 심리분석가의 지혜는 궁극에 이르면, 스릴러 잡지의 파시스트적인 무의식이 자아를 취급하는 방식, 즉 고통받는 무기력한 인간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스스로의 목숨에 묶이게 만들어 그들을 명령하고 착취하는 전문가 도당의 테크닉이 되고만다. 암시와 체면은 - 심리분석가들은 이런 것을 장터의 가설무대에서 사기꾼 마술사들이 행하는 비술이라고 거부했지만 - 심리분석이라는 큰 틀 속에 다시 끼여든다. 더 잘 알고있다는 이유로 남을 도와준다는 사람은 유권해석의 특권을 가진 양 남을 지배하는 사람이 된다. 시민의식에 대한 비판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들에 대해 모든 의사들이 보이는 태도는 어깨를 움찔하면서 모르겠다나 관심없다는 제스처를 보이는 것인데, 이러한 제스처는 그들이 죽음과 은밀히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공표하는 제스처인 것이다. 내면성에 불과한 것이 벌이는 바닥모를 기만인 심리학이 인간의 ‘소유’와 관계한다는 것은 괜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닌데, 이러한 심리학에는 시민사회가 외적인 소유에 대해 지금까지 행해온 것이 투영된다. 사회적인 교환의 결과로서 시민사회는 소유를 발전시켜왔지만 모든 시민이 알고있듯이 여기에는 객관적인 유보조항이 붙어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개인은 단지 계급에 의해 소유를 단지 위탁받고 있는 셈인데, 통제권을 가진 자들은 소유의 보편화가 소유의 원리 - 소유란 바로 나누어주지 않고 움켜쥐는 것인데 - 를 위태롭게 할 위험이 보이자마자 소유를 다시 환수할 준비가 되어있다. 심리학은 소유에서 일어난 일을 개인적 특성에서 되풀이한다. 심리학은 개인에게 행복을 나누어주면서 그 대신 개인적인 것을 몰수해간다.
43. 부당한 협박
무엇이 객관적으로 진리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이 어렵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관계에서 우리에게 테러를 가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 첫눈에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기준들이 이런 목적을 위해 이용되곤 한다. 그런 기준 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어떤 주장이 ‘너무나 주관적’이라는 비난이다. 이러한 비난이 통용될 때, 그것도 모든 이성적인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공분하면서 그러한 비난을 내뱉을 때 사람들은 속으로는 자신이 옳다고 믿더라도 잠시 잠자코 있어야 한다. 주관성과 객관성의 개념은 완전히 전도되었다. 객관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현상 속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측면, 아무런 질문 없이 수락된 현상의 인상, 분류된 데이터로 이루어진 현상의 앞면, 즉 본래는 주관적인 것이다. 그 대신 그러한 것을 부수고 사물에 대한 특수한 경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인습적인 판단에서 벗어나는 것, 생각은커녕 보지도 않고 다수결에 의해 대상에 대해 결정을 내리려들기보다는 대상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 즉 객관적인 것은 주관적이라고 불린다. 주관적 상대성이라는 형식적 비난이 얼마나 공허한지는 주관성의 본래 영역인 심미적 판단의 영역에서 잘 드러난다. 예술작품을 정확하게 느낄 수 있는 반응력을 가지고 예술이라는 진지한 영역에 몰입해 예술작품의 내재적 형식법칙이나 필연적 구조에 고분고분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심미적 경험을 단순한 주관적 경험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초라한 가상이라고 일축하고는 고도로 정련된 주관적 신경조직의 도움으로 사물의 내부로 파고드는 발걸음을 힘차게 내디딜 것이다. 이러한 발걸음은 양식 개념 같은, 보다 포괄적이고 검증된 개념보다 훨씬 큰 객관적 힘을 지니는데, 사실 양식 개념이 학문적인 개념으로 정착하는 과정에는 그러한 내밀한 경험이 희생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실증주의나 문화산업 - 이것의 객관성은 이것을 주도하는 주체들에 의해 계산된다 - 의 시대에는 두 배의 진실성을 지닌다. 이런 사태에 직면하게 되자 이성은 이디오진크라지라는 창문도 없는 장벽 뒤로 완전히 은퇴하게 되는데, 권력을 쥔 자는 그러한 은퇴로 인한 자의성을 자의적으로 비난하게 된다. 왜냐하면 권력자들은 그러한 주체들에게서 보존되는 객관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주체들이 무력화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52. 황새는 어디서 어린애들을 물고오는가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맞는 동화의 원형이 있으므로, 우리는 다만 자신에게 어울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찾기만 하면 된다. 어떤 예쁜 여자아이는 백설공주에 나오는 여왕처럼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지 거울에게 물어본다. 입이 삐죽 나온 여자아이는 “나는 배가 불러서 종이가 싫어요, 메... 메...” 하고 우는 염소를 닮아 죽을 때까지 변덕스럽다. 걱정은 많지만 무던한 사람은, 사랑하는 신을 만났지만 그를 알지도 못한 채 도왔기 때문에 식구 모두가 축복을 받는 허리가 굽은 나무꾼 노파를 닮았다. 또 다른 누군가는 혈기왕성한 청년으로 세상에 나가 굉장한 사업들을 벌이지만 결국 한 인간으로 뉴욕에서 죽음을 맞는다. 어떤 여자아이는 빨강모자 아이처럼 도시의 숲을 용감히 헤치고 나가 할머니에게 빵과 포도주를 갖다주고, 어떤 아이는 별 모양의 은전을 든 소녀같이 사랑할 때 아이처럼 부끄럼 없이 옷을 벗는다. 어떤 영리한 인간은 그가 강인한 동물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친구들과 함께 구렁텅이에 빠지는 대신 브레멘의 도시악사 그룹을 만들어서는 그들을 도적들의 소굴로 끌고가 그곳의 사기꾼들을 속여먹고는 집으로 돌아온다. 구제할 길 없는 개구리왕은 동경어린 눈으로 공주를 올려다보면서 그녀가 자신을 구원해주리라는 희망을 단념하지 않는다.

56. 계통연구

입센과 ꡔ더벅머리 페터ꡕ 사이에는 아주 깊은 친화성이 있다. 그것은 19세기 앨범에 흔히 들어 있는 가족 구성원들의 사진이 서로 판에 박은 듯이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 ꡔ유령들ꡕ이 자칭하는 망나니 필립은 정말로 가족드라마가 아닌가? “어머니는 말없이 책상 전체를 둘러본다”는 문장은 은행장 보르크만 씨 부인의 표정을 묘사하는 것인 아닌가? 아우구스투스가 앓고있는 소모성 질환의 원인은 조상들의 죄나 유전된 죄의 기억말고는 어디서 연유하겠는가? 국민의 적 스토크만 박사는 용맹왕 프리드리히에게 효험이 있는 쓴 약을 처방해준 대신 개에게 간으로 만든 소시지를 아낌없이 던져준다. 성냥을 든 춤추는 파울린헨은 당시 어린 힐데방엘의 채색된 사진 - 계모인 바다 부인이 그녀를 혼자 집에 놔둔 모습 - 이며, 교회 첨탑 위로 높이 나는 로버트는 그녀의 건축사이다. 또한 한눈팔이 한스는 태양 이외에 다른 무엇을 갖고싶어 하겠는가? 클라인 아이올프의 쥐소녀 - 가위를 든 재단사 족속 출신인 - 외에 누가 그녀를 물 속으로 유인했겠는가? 그러나 엄격한 시인은 위대한 니콜라스(키 큰 아그리파)처럼 - 그는 현대의 어린이 그림을 그의 큰 잉크병 속에 담갔으며, 그 흔적이 남은 상태에서 허우적거리는 꼭두각시 인형으로 다시 검은 칠을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최후심판을 거행했다 - 행동한다.
59. 그이를 만난 이후

여성적 성격이나 이의 모델이 되는 이상적 여성상은 남성적인 사회의 산물이다. 왜곡이 없다면 왜곡되지 않은 자연이라는 이미지도 없다. 후자는 전자로부터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한 자연이 곧 인간적이라고 내세우지만 실상은 위에서 군림하는 남성사회가 여성들을 통해 자신의 교정역을 육성하는 것이며 그러한 교정역의 한계를 통해 자신이 단호한 주인임을 과시하는 것이다. 여성적 성격은 「지배」의 음화이다. 그 때문에 똑같은 정도로 나쁜 것이다. 시민적인 현혹연관에서 자연이라 불리는 것은 불구화된 사회의 상흔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은 자신의 신체구조를 거세의 결과로 여긴다는 정신분석학의 명제가 맞다면, 여성은 자신의 노이로제 상태 속에서 진리를 예감할지 모른다. 피를 흘릴 때 스스로를 상흔으로 여기는 여성은 남편에게 잘 맞추기 때문에 자신을 꽃으로 여기는 여성보다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 참고 적응하는 곳에 자연은 존재한다는 주장은 거짓이며, 오히려 인간의 문명에서 자연이라고 통용되는 것의 실체는 자연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 스스로 객체가 되는 순수한 과정이다. 본능에 근거한다는 모든 종류의 여성성은 실상에 있어서는 모든 여성이 온갖 폭력 - 남성적인 폭력 - 으로써 스스로에게 강요해야만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 때문에 여성적인 것은 남성적인 것이다. 질투심에 찬 남성은 어떻게 그러한 여성적인 여자가 눈을 깜박이거나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사용하는 등 자신의 여성성을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가 - 지성이 눈치챌 수 없는, 잘 보호받고 있는 무의식과 주변 정황이 잘 어울리도록 하기 위해 - 를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은밀하고도 순수한 그러한 무의식은 자아, 검열, 지성의 활동이며 바로 그 때문에 합리적 질서의 현실원칙과 아무런 갈등 없이 조화를 이룬다. 여성적 자연이란 예외 없이 타협주의자이다. 니체의 통찰이 이 점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즉 여성적 자연이라는 이미지를 세심한 검토 없이 기독교 문명 - 다른 때 같으면 그토록 철저히 불신하는 - 으로부터 구해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니체가 행한 온갖 사유의 노력은 결국에 가서는 시민사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니체는 여성들에 관해 말할 때 ‘여편네’라는 기만에 빠지고 만다. 그 때문에 채찍을 잊지말라는 비열한 충고가 나오게 된다. 그러나 여편네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채찍의 효과인 것이다. 자연의 해방이란 인간 스스로가 설정한 자연 관념을 폐기하는 것이리라. 여성적 성격을 찬미하는 것은 그러한 성격을 지닌 사람 모두에게 굴욕을 가하는 것이다.

60. 도덕을 위한 한마디

니체는 과거의 허위를 공격하기 위해 비도덕주의를 내세웠지만 비도덕주의는 그 자체가 역사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종교가 해체되고 종교가 한줌의 철학들로 세속화되면서 경계를 설정하는 금기들은 본래의 본질과 실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선 물질적인 생산이 충분히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모든 사람을 위해 충분한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가 이런저런 이유로 유포된다. 정치경제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 사람은, 약자를 희생시키면서 부당하게 소유를 만들어가는 희소성의 원리를 고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를 위한 객관적인 전제가 변화되었다. 사회의 비타협주의자뿐 아니라 속좁은 부르주아들마저 잉여의 직접적 가능성에 직면해서는 제약 자체를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살기 위해서는 움켜쥐어야 한다는, 주인의 도덕에 함축된 의미는 그 사이 19세기 목자의 지혜보다 더 초라한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독일에서 소시민들은 바로 금발의 야수였음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면, 그것은 독일이라는 민족적 특수성에서 연유했다기보다는, 날강도 같은 금발의 야수성이 공공연히 만개하면서 그러한 야수성 자체가 시골뜨기, 눈먼 속물, ‘덜 떨어진 놈’-  주인의 도덕이란 사실 이런 것에 저항해서 고안된 것인데 - 의 모습을 띤다는 것이다. 세자르 보르기아가 지금 나타난다면 그는 다비드 프리드리히 쉬트라우스를 닮았거나 아돌프 히틀러라고 불릴 것이다. 비도덕성을 설교하는 것은 니체가 경멸했던 바로 그 다윈주의자들, 생존을 위한 야만적 투쟁을 발작적으로 외쳐대던 - 더 이상 생존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 다윈주의자들의 용무가 되었다. 우수성이라는 덕은 가장 나은 것을 자신이 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취하는 데 신물이 나는 것, 선사하는 덕 - 니체에게서조차 정신화된 관념 속에서만 나타나는 - 을 실제로 행사하는 것이 된 듯 하다. 광기어린 이윤경제에 대항하는 데에 있어서 오늘날 금욕주의의 이상은, 60년전 사회주의적인 쾌락주의가 자유주의들의 억압에 저항했던 것보다 더 단단한 방파제가 되고 있다. 비도덕주의자는 이제, 니체가 당시 그러했던 것처럼, 자비롭고, 부드럽고, 비이기주의적이고, 솔직해져야 할 것이다.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은 저항에 대한 보증으로서 비도덕주의자는 여전히 고독할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규범에 대해 그것이 얼마나 도착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주기 위해 악마의 탈을 들이대던 당시처럼...
64. 도덕과 문체
글쟁이는 보통 더 정확하고 더 양심적이며 사물의 진실에 맞게 표현하려 하면 할수록 그 결과물은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며, 느긋한 마음으로 무책임하게 쓸 경우 상당한 공감을 느꼈다는 칭찬을 듣는 경험을 하게 된다. 또한 온갖 전문어들,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교양층에 대한 암시를 금욕적으로 자제한다고 사정이 별로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엄격하고도 순수한 언어의 피륙짜기는 아무리 단순해도 진공만을 울린다. 골머리를 썩이지 않고 느긋하게 친숙한 말의 바다 속을 헤엄치는 것은 친근감과 접촉을 위한 기호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표현에 있어 의사소통보다는 실상을 주시하는 것은 의심의 눈길을 받는다. 기존의 익숙한 도식에서 따오지 않은 특수한 것은 남을 배려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며, 독선이나 혼란의 징후로 간주된다. 스스로 명료하다고 자부하는 일상의 논리는 사실은 일상어의 범주 속에서 그러한 도착상태를 순진하게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애매한 표현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 자신이 생각한 것만을 대충 상상하는 것을 허용해준다. 반면 엄격한 표현은 분명한 입장이나 개념의 긴장을 강요하며 - 사람들은 그러한 긴장이나 확고한 태도 정립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싶어하는 데도 불구하고 - , 다른 어떤 내용에 앞서 통상적인 판단의 정지, 그리고는 고립을 - 사람들이 온몸으로 거부하는 - 요구한다.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만이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진실로 소외된 말, 상업에 의해 인장이 찍힌 말만이 그들에게 감동을 주며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다. 이런 정황만큼 지식인의 탈도덕화에 기여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탈도덕화에 빠지지 않으려는 사람은 전달에 신경을 써야한다는 충고를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배반임을 꿰뚫어보아야 한다.

65. 허기

문어체에 대한 대안으로 노동자들의 은어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반동적이다. 여가, 또는 심지어 자긍심이나 자만마저 상류층의 언어에 얼마만큼의 독립성과 자기단련을 제공한다. 그 때문에 그러한 언어는 상류층이라는 본래의 사회영역과 대립에 빠지게 된다. 그러한 언어는 명령을 위해 그러한 언어를 오용하는 주인들에게 - 그들의 이해에 봉사하기를 거부하고는 오히려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듦으로써 - 등을 돌리게 된다. 반면 억압받는 계급의 언어에는 지배의 상흔만이 새겨져있다. 불구화되지 않은 자율적인 언어는 사사로운 원한감정 없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불편부당함을 약속해준다면 억압된 계급의 언어는 그러한 불편부당함이나 정의로움을 박탈당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언어는 배고픔에 의해 씌어진다. 가난한 자는 자신의 공복을 채우기 위해 언어를 씹어먹는다. 그는 사회가 거부하는 강력한 자양분을 언어의 객관적 힘에서 기대하는 것이다. 그는 깨물어먹을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입을 언어로 가득 채운다. 그런 식으로 그는 언어에 복수를 하는 것이다. 언어는 가난한 자에게 언어육체를 사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 대가로 가난한 자는 언어육체를 모욕하게 되고 자신에게 가해진 치욕을 무력한 힘으로 되풀이한다. 베를린 북부의 방언이나 런던 사투리의 재치있는 답변술이나 타고난 위트는, 절망스런 상황을 절망하지 않고 견뎌내야 할 필요 때문에 적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웃어넘기고는 세상 돌아가는 꼴을 정당화해야 하기 때문에 병이 들었다. 문어가 계급들의 소외를 기호화한다면 그러한 소외는 구어로 돌아감으로써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객관성을 그 마지막 결론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물고늘어질 때 극복이 가능하다. 문자를 자신의 내부에서 지양하는 언어야말로 인간의 말을, ‘말은 이미 인간적이다’라는 허위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68. 사람들이 너를 보고 있다

이미 범해진 참혹성에 대한 분개는, 그러한 잔혹성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이 일반 독자들과 다를수록, 즉 그들이 가무잡잡하거나 ‘지저분하고’ 스페인인 같을수록 별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것은 잔혹행위를 목격한 사람 못지 않게 잔혹행위 자체에도 해당된다. 반유대주의자들이 세상을 인지하는 도식적인 틀 또한 그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유대인을 도대체 인간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즉 야만적이다, 검둥이 같다, 일본 사람은 짐승(예를 들면 원숭이) 같다는 말들에는 유대인 학살을 위한 열쇠가 들어 있다. 그러한 학살의 가능성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동물의 눈이 인간과 마주치는 순간 단호한 현실로 전환된다. ‘저건 단순한 동물에 불과해’ 라고 인간은 그러한 시선을 뿌리치는데, 그러한 뿌리침은 인간에 대한 잔혹행위 속에서 부단히 되풀이된다. 잔혹한 행위를 범하는 자들은 동물들에게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희생자들 또한 ‘동물에 불과해’라는 것을 항상 되풀이해서 확인할 수밖에 없다. 억압적인 사회에서는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신의 닮은꼴이라는 관념의 패러디이다. ‘병적 투사’의 메커니즘 속에서 작동하는 원리는 칼을 쥐 자들이 인간을 자신의 닮은꼴로만 생각한다는 것 - 인간이란 얼마나 다양한가 하는 것을 자신 속에 투영시키기보다 - 이다. 살인이란 그러한 잘못된 지각작용에서 비롯된 광기를 더 큰 광기에 의해 또다시 이성으로 전환시키는 시도이다. 도저히 인간으로 볼 수 없는 것, 그렇지만 인간은 인간인 것은 사물이 되어버리며, 그처럼 돌이 된 인간은 어떤 자극에도 광기 어린 시선에 맞설 수 없게 된다.
78. 산너머

다른 어떤 동화도 백설공주만큼 우울을 완전하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우울함의 순수한 형상은 백설공주의 어머니인 여왕의 모습이다. 그녀는 눈송이의 생기 없이 생동하는 아름다움, 창틀의 검은 애도와 피가 나는 찔린 상처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딸을 원하지만 딸을 낳으면서 죽는다. 어떤 행복한 결말도 이러한 장면에 배어있는 우울함을 지우지는 못 한다. 소원의 성취가 죽음이듯이, 구원은 가상으로만 남는다. 왜냐하면 좀더 깊이 생각해 볼 경우 유리 관(棺) 속에 잠자는 듯이 누워있는 그녀가 깨어난다는 것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행도중 관이 흔들리면서 목에서 튀어나온 독 묻은 사과조각은 살인수단이라기보다는 그녀가 진정으로 누려보지 못한 허망한 나머지 삶이 아닌가? 이제는 어떤 저승사자도 그녀를 유혹할 수 없을 테니까... “백설공주는 그의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그들은 함께 길을 떠났다”는 말에서 울려나오는 행복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사악함에 대한 사악한 승리로 어찌 행복이 철회되겠는가. 우리가 구원을 희망할 경우 희망은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음성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한순간이나마 숨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은 무기력하기 그지없지만 그러한 희망인 것이다. 모든 명상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울의 이중성을 항상 새로운 모습과 착상 속에서 참을성 있게 추적하여 묘사해나가는 것이다. 진리란 가상의 모습들로부터 언젠가는 가상 없는 구원이 솟아오르리라는 망상과 분리될 수 없다.

80. 진단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욕하듯 나치들은 느슨한 바이마르 공화국을 체계라고 비방한 적이 있지만 그 사이 세계는 정말로 체계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제도와 이 제도의 득을 보는 사람들 사이의 예정조화 속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부당한 지배의 존속에 따른 강압과 제약을 목마르게 갈구하는 인간종자들이 은밀하게 성장하고 있다. 객관적인 사회장치들의 비호를 받고 있는 이 족속들은, 그러한 예정조화에 저항하여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정당한 기능들마저 가로채가 버린다. 수많은 격언들이 폐기처분되었는데 그 중에는 “억압은 저항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억압이 너무나 커져 저항은 사라지게 되었으며, 사회는 긴장이 완전히 제거되면서 엔트로피에 접근하고 있음이 현저하게 두드러진다. 학술활동은 그것을 위해 요구되는 정신자세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즉 학자들은 물 흐르는 대로 자신을 내맡기는 대신 자발적이고 열성적인 조정자로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다. 그들은 확술활동 밖의 영역에서는 인간적이고 이성적으로 처신할지 몰라도 자신의 직업과 연관된 프로로서 사유하는 순간 경직되어 병적인 우둔함을 드러낸다. 사유의 금지 앞에서 그것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섬세한 감수성을 보여주는 대신 그 앞을 얼쩡거리는 대기자들 - 모든 학자는 그러한 대기자들이다 - 은 인식의 초조에 시달리기보다는 느긋함을 즐긴다. 사유란 자신의 입장을 객관화시켜 생산과정 속에서 실현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인 책임을 학자들에게 부과하게 되기 때문에, 학자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그러한 떠안기를 포기하고는 적들의 품으로 달려간다. 사유에 대한 불쾌감으로부터 사유에의 무능력이 즉각 따라나온다. 별 힘 안들이고 지극히 세련되고 정교한 통계자료를 들이댈 수 있는 사람들은 인식행위 자체에 사보타지를 가할 수 있지만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리 간단한 진술도 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사변에 공세를 취하면서 사변 안에 있는 건전한 인간오성을 죽여버린다. 그들 중에 좀더 지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사유능력이 병들어 있음을 예감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병듦은 처음에는 보편적 현상이 아니라 감각기관 - 이를 위한 봉사가 거부된 - 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불안과 수치심 속에서 그들의 결함이 발견되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결함을 도덕적 업적으로 고양시켜서는 학문적인 절제라고  - 실제로는 전혀 절제나 금욕이 아니라 그들의 약점을 은밀히 연장시키는 것에 불과하지만 - 자평한다. 그들의 원한감정은 사회적으로는 ‘사유는 비학문적이다’라는 형태로 합리화된다. 동시에 그들의 정신적 능력은 통제메커니즘에 의해 수많은 차원들로 무한증식된다. 연구기술자들의 집단적인 무능력은 단순히 지적 능력의 부재나 퇴행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진정한 사유를 고갈시키는 사유능력의 번성이다. 젊은 학자들의 마조히스트적인 적의는 그러한 악성질병에서 연유한다.
84. 시간표
지식인은 일과 유흥을 두부 자르듯이 나누려 하지 않는다는 것만큼 지식인에게 어울리는 생활방식을 일반 시민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구별짓는 것은 드물 것이다. 현실적인 것이 되기 위해 후에 다른 사람에게 가해질 온갖 악을 우선적으로 일의 주체에게 가할 필요는 없는 ‘일’은 필사적인 수고를 드릴 경우에조차 기쁨이다. 그러한 일에 따르는 자유는 시민 사회가 오직 여가 시간에만 할애하고는 곧장 거두어가버리는 바로 그 자유이다. 반대로 자유를 아는 자에게는 이 사회에서 용인되는 모든 유흥이 참을 수 없는 것이 되며 자신의 일--이 일에는 시민들이 ‘문화’라는 이름 아래 일이 끝난 후의 여가활동으로 격하시킨 것들도 물론 포함되는데--에서 벗어난 어떤 대체 기쁨에 대해서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일할 때는 일하고 놀 때는 놀아라’는 억압적인 자기단련을 위한 기본 규칙의 하나다. 자식들이 좋은 성적표를 집으로 들고 오는 것을 자신의 명예에 관한 문제로 생각하는 부모들은 밤늦도록 책을 읽거나 자신들이 생각할 때 지나치게 정신을 긴장시키는 것을 결코 달가워 할 수 없다.  그러나 학급의 천재는 자신의 바보스러움을 통해 말을 한다. ‘절제는 이성적인 인간에게 어울리는 덕’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낡아빠진 가르침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분업, 즉 사람들을 서로서로 독립적인 기능에 배치함으로써 서로의 일이 겹쳐져 상대방에게 신경이 뺏기지 않도록 하려는 제도를 확고하게 정당화하려는 노력이다. 그렇지만 니체가 사무실에 앉아--앞방에는 비서가 전화를 챙겨주고--5시까지 책상을 지키고는 낮의 업무를 완수한 다음 골프를 치러 간다는 것을 상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의 압박 하에서는 일과 즐거움이 교묘하게 교차될 때에만 진정한 경험이 열릴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점점 갈수록 용인되지 않는다. 소위 정신적인 직업들마저 비즈니스에 접근하면서 즐거움을 완전히 박탈당했다. 원자화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 속에서도 진행되어 그의 생활영역을 갈기갈기 쪼개 놓는다. 일에는 어떤 충족감도 달라붙어서는 안되며--부분적인 기능에만 머물러야 하는 절제를 잃어버릴지 모르니까--자유시간에는 어떤 번득이는 영감이 떠올라서도 안 된다(이것은 노동의 세계를 날려버리고 불바다로 만들지 모르니까). 구조적으로 일과 유흥이 점점 비슷해짐에 따라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구획선을 그어 둘을 점점 더 엄격히 분리시킨다. 비슷한 정도로 양자로부터 기쁨과 ‘정신’은 추방된다. 여기서나 저기서나 동물적 진지함과 사이비활동성이 날뛰고 있다.
86. 어린 한스

지식인, 특히 철학적 성향의 지식인은 물질적 실천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이에 대한 역겨움이 소위 정신적인 일에 몰두하도록 몰고간다. 그러나 물질적 실천은 그 자신의 실존을 위한 전제조건일 뿐 아니라 세상의 토대를 이루며 이에 대한 비판이 바로 그의 본업인 것이다. 토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 그는 허공을 헤매게 된다. 그는 세상에 대한 정보를 사냥하러 나서야 할지 증오 대상에 등을 돌려야 할지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정보를 얻으러 나설 경우 그는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게 된다. 즉 그는 자신의 충동과는 반하게 생각하게 되며, 게다가 자신이 다루는 대상처럼 비열해질 위험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경제란 장난이 아니기 때문에 경제를 이해하려는 자는 자신 또한 ‘경제적으로 사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그는 경제적 현실, 즉 추상적 교환관계를 바탕으로 비로소 설정된 「정신」을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 - 그가 정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제약조건에 대한 음미 속에서임에도 불구하고 - 한다. 정신적인 사람은 실상과 무관한 공허한 그림자로써 실상을 대체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공적인 문화산업에서 정신적인 생산물에 부여된 순진하고도 기만적인 중요성은 적나라한 경제적 토대로부터 인식을 차단하는 장벽에 돌들을 또다시 더 얹게 된다. 정신을 장사와는 무관한 것으로 고립시키는 것은 정신 장사가 안락한 이데올로기가 되는 데 일조한다. 이러한 딜레마는 아주 미묘한 반응방식에 이르기까지 지식인의 행태를 결정한다. 어느 정도 순수성을 유지하는 사람들만이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증오와 신경과 자유와 기민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바로 이 순수성의 환상 때문에 ‘제3의 사나이’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그는 바깥에서뿐만 아니라 사유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까지 세상이 승리하도록 만든다. 세상의 조리를 너무 잘 알고있는 자는 그러나 이런 정황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차이의 능력이 사라지게 되며 문화의 물신주의가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듯, 그 또한 야만성에 떨어질 위험에 처하게 된다. 지식인은 잘못된 사회의 수혜자이지만 동시에 유용성에서 해방된 사회가 성공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지식인의 노동에 달려있다는 사정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부당한 모순이다. 그러한 모순은 사물의 질을 끊임없이 갉아먹는다. 지식인은 사물의 질로써 무언가를 만들어보려 하지만 그의 작업은 허위성을 벗어날 수 없다. 그는 삶의 질문으로서 치욕적인 선택 - 후기자본주의가 은밀하게 모든 구성원에게 제기하고 있는 선택 - 이 요구됨을 격렬하게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그 또한 어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아이로 남을 것인가이다.

89. 공갈협박

백기를 든 채 자신을 찾아온 사람에게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충고를 주고는 도움을 주어야 하는 의무로부터 면책받으면서 그에게 힘을 행사하려는 부르주아는 충고가 먹혀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도울 수도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렇지만 이 말 속에는 적어도 부탁하는 사람과 그것을 거절한 사람 모두가 동일한 것으로 떠올린 이성, 희미하나마 정의를 상기시켜주는 이성에의 호소가 들어 있다. 즉 현명한 충고를 따랐더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출구가 제시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출구는 이미 물건너간 것이다. 그 때문에 도울 수 없는 자는 충고도 해서는 안 된다. 쥐구멍이란 쥐구멍은 모두 틀어막힌 상황에서 단순한 충고는 곧장 저주의 판결이 되고마는 것이다. 그러한 충고는 어쩔 수 없이 눈곱만큼이나마 남아있는 자존심이 사력을 다해 저항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는 것이 된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 지혜가 생긴 청탁자는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충고를 하고싶어 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으며, 자신의 궁리가 다 바닥이 났을 때, 그렇지만 무언가가 일어나기는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찾아오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호전되는 것은 아니다. 충고를 하고자 했지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던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보다는 강도가 약한 사람마저 윽박질러대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며 그러한 태도는 기묘한 연대감을 형성하면서 퍼져나간다. 이런 경향은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특정 유형의 인간에게서 가장 날카롭게 관찰될 수 있는데, 그들은 도움을 요하는 힘없는 친구들을 지켜주는 것 같지만 그의 질투심 속에는 은밀한 협박자의 모습이 들어 있다. 이들의 마지막 덕성인 사심없는 마음은 이중적이다. 그들은 파멸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의 편을 정당하게 들어주지만, ‘너는 다른 사람을 도와야만 해’라는 완강한 태도 뒤에는 집단과 그룹의 우월성에 대한 승인이 암묵적으로 들어 있다. 이러한 대세를 누구도 감히 거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돌처럼 차가운 심장을 지닌 사람들을 눈감아줌으로써 부드러운 심장을 가진 사람조차 냉혹한 사람들의 둘러리가 되고만다.
100. 물위에 누워
해방된 사회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질 경우 사람들은 ‘인간적 가능성의 실현’이나 ‘풍요로운 삶’과 같은 답변을 듣게 된다. 그러한 질문은 불가피하지만 부당하게 느껴진다면 그러한 의기양양한 대답이 역겹게 느껴지는 것 또한 불가피하다. 이러한 대답은 삶을 만끽하려 들었던 1890년대의 수염이 텁수룩한 자연주의자들 같은 사회주의자의 이상형을 연상시킨다. [아무도 더 이상 굶주려서는 안 된다]는 가장 소박한 답변만이 부드럽게 들린다. 다른 답변들은 모두 인간들의 욕구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는 상태나 스스로의 목표를 향해 굴러가는 [생산] 모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간 행태를 상정하고 있다. 자유분방하고,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인간과 같은 소망상에마저, 상품의 물신적 성격이 배어있는데, 시민사회에서 이러한 물신주의에는 제약과 무기력, 항상 똑같은 것이 만드는 불모성 같은 것이 감초처럼 따라다닌다. 시민사회의 <무역사성>의 일부지만 그를 보완해주는 개념인 역동성이라는 개념은 절대적인 위치로 부상되었지만, 이 개념은 생산법칙에 대한 인류학적 반사로서 해방된 사회에서는 그 자체가 욕구와는 비판적으로 대치해야 할 무엇인 것이다. 구속받지 않은 행동, 중단 없는 생산, 포만감을 모르는 빵빵한 배, 신명나는 일거리인 자유 같은 관념은 시민사회의 자연 개념을 먹고사는데, 이 자연 개념은 예로부터 항상 오직 사회적인 폭력을 변경불가능한 것, 한조각의 건강한 영원성으로 선전하는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청사진 - 마르크스는 이에 저항했지만 - 이 야만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 소위 말하는 하향평준화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 이다. 두려워해야 할 사태는 인류가 유복한 생활 속에서 축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자연이라는 가면을 쓴 사회성, 즉 만듦이라는 맹목적 분노로서의 집합성이 살벌하게 확장되는 것이다. 발전경향을 오직 생산의 증대라는 한 방향으로만 헷갈림 없이 물꼬를 트는 것은 그 자체가 저 시민적 전망, 즉 총체성으로 응축된 발전이 질적 차이에 대해 적대적인 양화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에 발전이라는 것을 한 방향으로만 허락하는 시민적 전망의 일환인 것이다. 해방된 사회라는 것을 그러한 총체성으로부터의 해방으로 구상할 경우 소실점들이 시야에 포착되게 되는데, 그러한 소실점들은 생산의 증대나 그러한 증대가 인간에게 투영된 모습은 어떠한가라는 것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을 것이다. 아무런 눌림도 없는 사람들이란 결코 가장 안락한 자도 가장 자유로운 자도 아니라면, 족쇄가 떨어져나간 사회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마도 생산력이란 인간의 궁극적 토대가 아니라 상품생산에 맞게 역사적으로 재단된 인간의 모습을 내놓는다는 것일 것이다. 아마 진실된 사회는 발전을 식상해하면서 무언가에 쫓기듯이 낯선 별을 정복하러 돌진하기보다, 자유로부터 가능성들을 다 쓰지 않은 채 남겨둘 것이다. 더 이상 곤경을 모르는 인류는,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장치, 그렇지만 풍요로움과 함께 곤경을 확대재생산해왔던 그 모든 장치가 미친 짓이었으며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사실에 희미하게나마 생각이 미칠 것이다. 즐김 자체도 이러한 정황에 따라 바뀔 것이다. 그것은 현재 존재하는 즐김의 도식이 바쁘게 쫓아다니기, 계획 만들기, 의지를 세우는 것, 정복하기로부터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짐승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물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 그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더 어떤 규정할 것이나 실현할 것도 없이...>, 이런 상태가 과정이나 행위나 실현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고 본래의 원천으로 들어간다는 변증법적 논리의 약속을 진실로 이행하게 될지 모른다. 추상 개념 가운데 ‘영원한 평화’라는 개념만큼 실현된 유토피아에 가까운 것은 없다. 진보라는 경마장의 담쟁이 너머 구경꾼인 모파상이나 스테른하임은 이러한 의도에 표현을 빌려준다. 그러한 의도가 갖는 부서지기 쉬운 연약성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수줍게...



102. 언제나 천천히 앞으로
도로 위의 질주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질주는 추락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속에 이미 추락하는 희생자를 모방하고 있다. 위로 똑바로 처든 머리는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려는 익사하는 사람의 몸부림이며 긴장된 얼굴모습은 고통에 찬 찡그림과 흡사하다. 그는 실수하지 않으려면 똑바로 앞을 보아야 하며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얼굴만 쳐다보아도 사지가 얼어붙을 것 같은 적의 목덜미 위에 걸터앉아 있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위험으로부터 달아나려 했으며, 질주하는 버스 뒤를 쫓아 달리고 있는 누군가는 자기도 모르는 새 그러한 공포 상황의 목격자가 되고 있다. 교통규칙은 야생동물을 고려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그러한 규칙이 질주를 평화롭게 하지도 않는다.
자동차의 속도는 시민들의 걷기를 낯설게 만든다. 안전은 실종되었으며 우리는 언제나처럼 고삐풀린 생활의 힘들로부터 - 그것이 차량에 불과할지라도 - 벗어나야 한다는 진리는 명백해졌다. 지극히 정상적인 일인 걷기에 사지가 길들여져 있다는 것은 좋았던 옛시절로부터 유래한다. 육체의 탈신화화, 성직자와 같은 발걸음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집 없는 자의 방랑, 숨가쁜 도망 등을 포함하여 걷기는 이동을 위한 시민의 방식이다. 인간의 품위는 걷기의 권리 위에 기초한다. 걷기는 명령이나 공포에 의해 사지를 쥐어짜지 않는 리듬인 것이다. 산책이나 배회는 중세적인 방랑벽에 대한 19세기적 유산으로서 사인들이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자유주의 시대와 함께 걷기마저 실종되어 자동차가 필요 없는 곳에서조차 걸으려 하지 않는다. 걷기가 사라지는 경향을 명백한 마조히즘으로 느낀 유겐트 운동은 부모들의 일요일 소풍에 도전하여 그것을 자발적인 강행군으로 대체했다. 그들은 그러한 강행군을 중세적인 수행이라 명명했지만 얼마 안 가 포드 차들이 그러한 수행에 이용되게 되었다. 스포츠에서처럼 기술적인 속도에 대한 숭배 속에는,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여 해냈다는 자기찬미를 통해, 달리기의 공포를 제어하려는 충동이 숨어 있다. 점점 올라가는 속도계의 승리는 박해당한다는 불안이 완화되는 의식이다. 어떤 사람에게 ‘달려’라고 위쳐질 때 - 깜박 두고온 핸드백을 가지러 2층에 갔다오라는 어머니의 외침을 들은 아이로부터, 살해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감시병에 의해 도망가라는 명령을 받은 죄수에 이르기까지 - 태고의 폭력(보통 때 같으면 아무런 소리 없이 매 발걸음을 움직였을)이 울려나오게 된다.
104. 골든 게이트

처지고 가라앉아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격렬한 고통이 자신의 사지를 타오르게 하는 열꽃과 같은 강렬한 환영이 피어오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알아서도 안 되는 눈먼 사랑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눈 멀 수 없는 그 무엇이 시퍼렇게 살아있음을 자각한다. 그는 부당한 일을 당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권리를 요구하고 동시에 그 권리를 내동댕이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가 원하는 것은 자유로부터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곤경 속에서 내동댕이쳐진 자는 인간이 된다. 사랑이란 어쩔 수 없이 보편자를 특수자에게 팔아넘기는 것이듯 - 보편자란 특수자 속에서만 자신의 정당한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이웃의 자율성인 보편자는 치명적으로 사랑과 대치하게 된다. 보편성이 관철되는 방식인 포기는 그러나 개인에게는 보편성으로부터의 배제로 나타난다. 사랑을 잃은 자는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느끼며 그 때문에 위로마저 경멸하게 된다. 모든 것을 박탈당했다는 허무감 속에서 그는 개인적인 것에 불과한 성취가 얼마나 허위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보편성이란 얼마나 파라독스한 것인가라는 사실에 대한 의식에 이르게 된다. 그러한 파라독스한 보편성이란 사랑하는 자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양도불가능하고 시비걸 수 없는 인간권리이다. 어떤 명목도 근거도 없는 막연한 승낙을 기다리면서 그는 그에게 속하지만 속하지 않는 그 무엇을 은총에 의해 약속해줄 미지의 심급에 호소한다. 사랑 속에 내재해 있는 정의의 비밀은 권리의 지양으로서 사랑이 말없는 몸짓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권리의 지양일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속임수이고 바보짓일 수밖에 없는 것을...”
109. 무익한 아름다움
각별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은 불운에 처한다. 모든 조건이 유리한 사람들, 좋은 출생이나 부, 재능을 겸비한 사람들 또한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인간관계들을 파괴하려는 충동에 쫓긴다. 신탁은 그녀로 하여금 다음의 숙명들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의 미를 성공과 바꾸는 것인데, 이 경우 그녀는 행복의 조건들을 위해 행복을 대가로 지불한다. 그녀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으며, 자신에 대한 사랑에 비소를 섞음으로써 결국 빈손으로 남게 된다. 다른 선택으로 미의 특권은 그녀에게 교환계약을 끊을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을 제공한다. 그녀는 자신 속에 약속된 행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스스로에게 안달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입증하지 않아도 되는 데서 오는 경탄을 누리게 된다. 젊은 날에 그녀는 둘 중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은 그녀를 무분별하게 만든다. 즉 아무것도 확정적이지 않으며 모든 것은 즉각적으로 대체될 수 있다. 아주 어린 날에 그녀는 별 생각 없이 결혼을 하고 그로 인해 단조로운 조건 속에 얽매이게 되어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특권을 빼앗기고는 사람들에게 매이게 된다. 그와 동시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어린 꿈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 비시민적으로 - 자신의 현존재를 내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이 미녀들이 갖는 파괴적 성격의 전형이다. 한 때는 그녀가 경쟁의 바깥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그녀로 하여금 경쟁의 뒷 계단에 놓이게 만들게 되어 그녀는 이제 광적으로 경쟁에 매달리게 된다. 게임은 끝났는데도 질 수 없다는 제스처만이 남게 된다. 마력은 희망을 보여주기보다 가정 안에 안주하자마자 산산조각이 난다. 그녀의 몸부림은 그녀를 희생자로 만든다. 그녀는 언젠가 새장 밖을 훨훨 날라다녔지만 이제는 질서라는 새장 안에 갇히게 된다. 그녀의 너그러움은 벌을 받게 된다. 타락한 여자나 미친 여자는 행복의 순교자들이다. 현실 속에 편입된 미는 현존재의 계산가능한 요소로 전락하며 존재하지 않는 삶에 대한 단순한 대체물 - 그를 넘어서기 위해 용 한번 못 써본 채 - 이 된다. 그녀는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행복에의 약속을 깨버렸다. 그러고도 남아 있는 여자는 불행의 아우라를 지니게 되며 그 자신 불행의식에 시달린다. 이런 면에서 계몽된 세계는 신화의 샘물을 완전히 마셔버렸다. 신들은 죽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질투는 남아 있다.

111. 필로몬과 바우치스

집안의 폭군은 외투를 입는데도 부인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 부인은 열성적으로 사랑의 봉사를 배려하며 ‘그에게 작은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할까, 그는 어쨌든 남자니까’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으로 남편을 바라본다. 이러한 가부장적인 결혼생활은 아내가 행하는 자질구레한 봉사 - 남자란 의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처량한 존재라는 아이러니칼한 한탄이 이러한 봉사에 첨가됨으로써 - 를 통해 남편에게 보복을 가한다. 남자를 우월한 자로 받아들이는 허위 이데올로기 뒤에는, 남자를 열등한 자, 조작과 조종과 기만의 희생자로 깎아내리는 은밀한 - 일말의 진실성이 없지 않은 -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집안에서 아내의 치마폭 밑에 있는 무능한 영웅상은, 밖에서는 적대적인 삶을 감당해야 하는 처지에서 비롯된 동전의 뒷면이다. 부인이 남편을 판단할 때 보여주는 고루하지만 날카로운 감각은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어른을 판단할 때도 그대로 이어진다. 남자가 보여주는 권위적인 태도와 무력감 사이의 불균형 - 사적인 영역에서도 필연적으로 드러나게 마련인 - 속에는 무언가 우스꽝스러운 면이 숨어 있다. 모든 결혼한 커플들은 함께 있을 때 코믹하게 보이는데, 인내심 많은 부인의 이해가 이러한 코믹한 상황을 균형잡아보려 한다. 제법 오랜 기간 동안 결혼생활을 한 부인네치고 남편의 작은 약점들을 쑥덕거리면서 남편을 물먹이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허위에 찬 친밀감은 적개심을 자극하는데, 소비의 영역에서는 물건을 사들이는 자가 더 강자이다. 주인과 노예에 관한 헤겔의 변증법은 가정이라는 해묵은 질서 속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타당한데, 부인이 시대착오적인 것에 집요하게 매달릴수록 그러한 변증법은 더욱 강화된다. 권좌에서 내려온 모권사회의 지배자는 봉사하는 곳에서 바로 주인이 되며 부권사회의 지배자는 오직 희화화되기 위해 지배자로 나타난다.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그러한 시대의 변증법은 개인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이성간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두 적대자 모두 부당하다. 남편의 힘은 그가 돈을 벌어온다는 사실에 기초하는데(월급봉투의 두께에 따라 그의 가치는 결정된다) 그러한 남편을 탈마법화하는 과정에서 부인 또한 결혼 - 이 속에서 그녀는 모든 진리를 추구하는데 - 의 비진리를 드러내게 된다. 사회의 해방 없이 해방은 없다.

115. 진실 고백
어떤 사람이 너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거짓될 수 없는 기준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너에 대해 불친절하거나 적대적인 표명을 하는가이다. 대체로 그러한 말은 지나치는 김에 뱉은 말로서, 호의를 가장할지라도 핑계나 무책임한 악의에 지나지 않는다. 가끔씩 모든 지인들이 타인들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지만 - 그것은 아마 어느 정도는 삭막한 인간관계애 저항하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민감해지며, 은밀하게는 자신은 남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한다. 인간간의 소외만큼이나 그러한 소외를 부수려는 동경 또한 무차별적이고 보편적이다. 이런 풍토에서는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이 번성하게 되는데, 나쁜 소문의 소재들을 풍성하게 갖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정반대의 경험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을지도 모른다.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은 다만, 공동작업 등을 위한 목적으로 신뢰가 요청되는 인물들에 대한 공동의 판단이나 결정이 명백하고 직접적으로 요구되는 경우에만 내놓을 수 있다. 그러한 부정적인 판단의 보고가 흥미롭지 못할수록 고통을 주는 왜곡된 욕망이나 관심은 음울해진다. 말하는 사람이 두 부류를 대치시키면서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내려고 드는 경우는 아직 별 해가 없다. 그렇지만 좀더 빈번히 일어나는 사태는 그가 여론의 지정 대변인으로 등장하여 객관적인 평가를 무심히 전달하는 척하면서 희생자가 굴복해야만 하는 익명의 폭력을 그에게 이해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모욕당한 사람이 그 모욕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는데 공연히 그 사람의 명예를 걱정해주거나 제반관계를 분명히 해주면서 내적 순수성을 걱정해주는 데서 그 허위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난마처럼 얽힌 세계에서 그러한 순수성이 옹호되자마자 그러한 얽힘은 그레거스 베를레 1884년에 간행되고, 다음해에 베르겐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사회의 기둥 The Pillars of Society》 《인형의 집 A Dollꡑs House》 《유령 Ghosts》 등으로 사회의 허위와 부패를 가차 없이 폭로했던 작자가 일변하여, 자기의 내면으로 눈을 돌려 지금까지의 전투적 이상주의를 버리고 복잡한 인간심리의 내부에 파고들어, 일종의 비관적인 상징극으로 향하는 전환점을 이룬 작품이다. 의지가 박약한 아버지 얄마르와 그의 친구인 편협한 정의파 그레겔스와의 사이에서 죽어가는 소녀 헤드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래 더욱 증대된다. 도덕적인 질투 때문에 호의적인 사람은 파괴자가 된다.

117. 주인인 하인
지배문화가 하층계급에게 요구하는 우둔한 활동이 하층계급에게 가능한 것은 오직 항구적인 퇴행 덕분이다. 그들이 제멋대로인 것은 사회적 형식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문화는 자신의 야만적 본질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에 의해 생산된 야만성을 십분 활용한다. 물리적 폭력 위에 서있는 지배는 피지배자에게 위임한다.
118. 아래로 아래로
사람들 사이의 사적 관계는 산업의 병목을 본받아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작은 모임에서조차 수준은 구성원의 맨 밑바닥에 맞추어진다. 예를 들어 대화에서 다만 한 사람이라도 무시하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예의 없는 사람이다. 비인간적인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함께 자리를 하고 있으면 휴머니즘을 위해 대화는 진부하고 맥빠진 이야기나 신변잡기로 국한된다. 세상이 사람들을 벙어리로 만들어버리면서 대화가 끊긴 상태는 오히려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 타개를 위해 그는 다만 우직하게 자신의 관심사나 자신의 개성을 고집하기만 하면 된다. 타인이 관계를 가져볼 목적으로 헛되이 간청하고 구애하는 어조를 띠기만 한다면 그는 약자가 되는 것이다. 병목은 사실이라는 법정이외에는 어떤 심급도 알지 못하므로 - 사유나 말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심급들에 의존하지만 - 지성은 순진성으로 전락하는데 꽉 막힌 자들은 이러한 정황만을 반박할 수 없는 진실로 취급한다. 긍정성에 대한 맹세는 모든 것을 밑으로 끌어내리는 중력으로 작용한다. 그러한 중력은 아니오라고 말하려는 충동과 거래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그러한 충동에 대해 자신이 우월함을 드러낸다. 좀더 생각이 복잡한 사람도 몰락하지 않으려면 이러한 모든 무대뽀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단호하게 처신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더 이상 휴식에 이를 수 없는 온갖 의식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보편적 원리임이 입증된 정신의 허약성은 삶을 위한 힘이 된다. 형식주의적이고 행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 의미상 분리될 수 없는 것을 서랍정리하듯이 분류하는 것, 마땅한 근거가 없을 때 우연한 견해를 완강하게 고집하는 관행, 간단히 말해 실패한 자아완성 과정에서 도출된 온갖 경향을 물화시키고는 진정한 경험의 과정에서 빠져나가는 것, ‘나는 본래 그래’라는 마지막 말을 내뱉는 것은 난공불락의 위치를 차지하는 데 유리하다. 그런 인간들은 그러한 자신의 강점뿐 아니라, 비슷하게 왜곡된, 타인들의 동의를 자신할 수 있다. 자신의 결함에 대한 냉소적인 고집 안에는, 현 단계에서는 객관적 정신이 주관적 정신을 말살시키고 있다는 예감이 살아 숨쉰다. 그들은 뒷다리로 서기 전의 동물학적 조상들처럼 지상에 내려와 있다.
119. 덕의 모델

억압과 도덕은 충동의 포기라는 점에서 연관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도덕적 이념들은 타인들을 억압할 뿐 아니라 억압자의 실존으로부터 직접 파생된다. 호머 이래로 그리스의 언어 습관은 선(善)과 부(富)의 개념을 서로 연결시켰다. 근대의 휴머니스트들에 의해 심미적·도덕적 조화의 모범으로 여겨졌던 칼로카가티아는 항상 ‘소유’를 매우 강조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귀족을 ‘탁월함을 겸비한 세습된 부’라고 규정함으로써 내적 가치와 사회적 지위가 하나임을 공공연히 승인한다. 내적 존재와 외적 존재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즉 개인의 자아라는 것은 개인이 도시 국가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가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그리스 고전 시대의 폴리스 관념은 부(富)에 도덕적 지위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해주는데, 당시에도 그러한 교리는 응분의 의혹을 받을 법하지만 그러한 의혹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기존의 국가에서 행사되는 가시적인 영향력이 한 인간의 척도를 이룬다면 그러한 영향력을 가시적으로 가능케 하는 물질적인 부를 그가 지닌 덕성이나 천성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왜냐하면 그의 도덕적 실체 자체가 - 후에 헤겔 철학에서도 다르지 않지만 - 객관적인 것이나 사회적인 것에의 참여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비로소,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문장에 의해 그러한 동일화를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선택된 가난을 전제하는 이러한 독특한 신학은 보편적인 의식이 얼마나 깊게 소유의 도덕성에 의해 각인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확고한 소유는 모든 규범이 저항하는 유목민적인 무질서와 구별되는 것이다. 선과 소유 gut sein과 Gut haben으로 둘다 gut(영어의 good)이다.
는 처음부터 일치하는 것이다. 선인은 자신의 소유를 지배하듯 자신을 지배하는 자이다. 그가 지닌 자율성이란 물질적인 관장 능력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다. 그 때문에 부자는 부의 부도덕성 때문에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 그러한 비난은 예전부터 정치적 억압의 도구가 되었다 - 그들은 타인에게 도덕을 제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 속에는 소유가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선으로서의 부는 세상의 접착제이다. 부와 선을 동일시하는 집요한 가상은 도덕의 이념과 질서 - 이 안에서 부자들은 정당성을 가진다 - 라는 것이 대치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지만 동시에, 부로부터 파생되지 않는 도덕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다. 나중에 개인과 사회가 이해관계를 둘러싼 경쟁을 통해 더욱 멀어질수록, 또한 개인이 자신의 내부에 칩거하도록 강요당할수록 개인은 부의 도덕적 본질에 집요하게 매달리게 된다. 그는 둘로 갈라진 것의 재통일, 즉 내부와 외부의 재통일을 보증해야만 한다. 이것이 곧 세속적인 금욕의 비밀, 즉 막스 베버가 잘못 설정했던, 신의 위대한 영광을 위한 사업가의 무한한 노력의 비밀이다. 물질적 성공은 개인과 사회를 다시 결합시키는데, 그것은 부자가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편리하지만 그 사이에 의심스러워진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훨씬 근본적인 이유에서이다. 고립적이고 맹목적인 자기 이해가 끝까지 추구되면 그것은 경제적 권력과 함께 사회적 권력으로 넘어가게 되고 그에 따라 보편적 구속력을 지닌 원리의 화신이 된다는 것이다. 부유한 사람 혹은 부를 획득한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자아를 완성한 사람으로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객관적 정신, 즉 피도 눈물도 없는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라는 정말 비합리적인 은총과 선택이 목표하는 바이다. 그런 식으로 부자는 자신을 선인으로 간주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것은 선의 부재뿐이다.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모두 그를 보편적 원리의 실현으로 생각한다. 보편적 원리가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의롭지 못한 자인 부자는 대개 오히려 정의로운 자로 여겨지는데, 그러한 전도된 상황은 단순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돌아가도록 만드는 ‘법칙’의 전능성에 의해 지지된다. 개인의 부는 전사(前史; 메시아가 도래하기 이전의 지상의 역사)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진보’와 분리될 수 없다. 부자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처분권을 갖는다. 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기술의 진보는 일차적으로 ‘그들’의 진보로, 오늘날은 산업의 진보로 기재되며, 포드들은 필연적으로 베푸는 자로 - 기존 생산관계의 틀 안에서는 실제로 그러하듯 - 여겨진다. 그들이 선취한 기득권은 혼자 독식을 해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사용가치를 증가시키기보다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의 일부를 나누어주고 있는 듯하게 보이도록 만들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들이 누리고 있는 축복을 눈곱만큼도 건드리지 않은 채 이익의 일부를 본래의 원천으로 되돌리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도덕의 위계질서가 기만적 성격을 가지게 되는 이유이다. 빈곤은 항상 금욕으로, 즉 윤리성을 의미하는 부의 획득을 위한 사회적 조건으로 찬미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익히 알다시피 ‘사람의 가치’란 그의 은행구좌를 뜻하며, 독일 업계의 은어로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는 그가 지불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돈이 전부라는 국가 이성이 조소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무런 서약을 받지 않아도 개개인의 행동방식 속으로 확장된다. 부자가 누릴 수 있다고 여겨지는 사적 영역에 있어서의 관대함, 그들을 감싸고 있는, 또한 그들에게 접근이 허락된 사람들에게도 콩고물이 떨어지고 있는 축복의 후광, 이런 모든 것들은 베일 속에서 작용한다. 그들은 친절하며 정의로운 사람, 더 나은 족속, 선인이 된다. 부는 직접적인 불의와는 거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시위대를 곤봉으로 패는 것은 경비원들의 역할이라면 공장주의 아들은 이따금씩 진보적인 작가와 위스키를 마셔도 되는 것이다. 사적 영역에서 도덕이란 어떠한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상적 모델을 상상해볼 경우에도, 부자들은 - 부자들만이 그것을 실현할 능력이 있을 터인데 -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보다 항상 나을 것이다. 실제로는 사용되지 않은 그러한 가능성이 그러한 가능성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이데올로기 속에서는 제 역할을 수행한다. 체포된 사기꾼은 - 합법적인 기업총수보다 매력적일 수 있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 그가 멋진 집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 인기를 누리게 되며, 고액의 연봉을 받는 경영인은 호화스런 만찬을 낼 경우 따뜻한 인간으로 대접받는다. 이런 상황들을 염두에 둘 때 오늘날의 ‘성공’이라는 야만적인 종교는 도덕에 반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바로 그러한 종교 속에서 서구는 선조들의 명예로운 전통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기성 사회를 저주하는 규범들조차 이 성공이라는 헛개비 종교의 파생물이다. 모든 도덕은 오늘날까지 부도덕이라는 모델에 따라 주조되어왔으며 매단계 그러한 부도덕을 재생산한다. 노예의 도덕은 실제로 나쁘다. 그들은 항상 여전히 주인의 도덕이다.

123. 나쁜 동료
제대로 하려면 유년기의 기억으로부터 파시즘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저 먼 변방의 점령군처럼 파시즘은 진군해오기 오래 전에 미리 사신을 파견했던 것이다. 그 사신들은 나의 학급 동료들이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시민계급이 만인에 의한 만인의 박해라는 살벌한 민족공동체의 꿈을 품고 있었다면, 호르스트나 위르겐이라는 이름을, 베르겐로트, 보융가, 에카르트라는 성을 지닌 아이들은, 어른들이 그러한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 정도로 역사적으로 충분히 성숙하기 전에 이미 그것을 실연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공포의 형상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꼈기 때문에 그 후로는 모든 행복이 잠시 빌려온 것, 철회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3제국의 출현은 나의 정치적 판단에서 볼 때는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무의식 속에 있는 불안에의 예감에서 볼 때는 별로 그렇지 않았다. 파국은 언제든지 올 수 있다는 생각이나 그러한 파국을 위한 모든 동기들에 대한 이해는 내게 너무나 친숙했고, 독일인들이 들고일어나리라는 경고등은 내 의식 깊숙이에서 항상 꺼지지 않고 깜박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히틀러 독재가 보여준 제반 경향들 속에서 그 모든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전체주의 국가가 명백히 나를 박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나의 유년시절에는, 아니면 지금까지는 잠정적으로 면제되었던 무엇을 나에게 들이대게 위해 발명된 것이 아닌가라는 바보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한 학급동료를 덮쳐 몰매를 가하고는 그가 선생님께 일러바치자 학급의 배반자라고 비방한 다섯 명의 애국자는, 고문당했다고 말하는 외국인들을 거짓말쟁이라는 죄를 뒤집어씌워 고문하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가? 일등짜리가 실수를 했을 때 끝없이 야유를 보내던 그들은 유대인 죄수가 서투르게 자살을 시도했을 때 얼굴을 찡그리고 비웃으면서 엉거주춤 서있던 사람들이 아닌가? 올바른 문장 하나 만들지 못하면서 내 문장은 너무 길다고 말하던 그들은 독일 문학을 폐기하고는 그 대신 자신들의 문체를 내놓았던 사람들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해군이 없는데도 육지에서 해군이 되기 위해 가슴을 요상한 기장으로 뒤덮었다. 그들은 부당함 속에서 정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돌격대나 친위대의 지휘자로 나섰다. 자유주의 시대에 연줄이 없는 재능있는 조립공들처럼 학급 내에서 성공을 거둘 수 없었던 얼치기 지성인들, 그 때문에 부모의 마음에 드는 목공일에 종사하였거나 긴 긴 오후에 제 멋에 겨워 복잡한 제도판을 오색 잉크로 그리던 사람들은 제3제국의 끔찍이도 유능한 일꾼이 되었으며 그리고는 기만당했다. 언제나 선생님들께 대들었던, -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수업을 방해했던 그들, 대입자격시험 이후 그 선생님들과 같은 탁자에 앉아 같은 맥주를 마시며 의기투합했던 그들은 부름을 받은 충견들로, 흥분하여 책상을 내리치면서 주인들을 숭배하도록 위협하는 폭도들이 되었다. 그들은 진급한 학생들에게 복수를 가함으로써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기 위해 낙제를 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제 관료나 군인이 되어 예전의 악몽에서 걸어나와 나로부터 지나간 삶과 언어를 빼앗아 갔으므로 나는 더 이상 그들을 꿈꿀 필요가 없다. 파시즘에서는 어린 시절의 악몽이 현실로 되었다.
125. 올렛
유럽에는 시민시대 이전의 과거가 개인적 활동이나 호의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 데 대한 수치심 속에 아직 살아 있다. 신대륙은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한다. 노인에게조차 아무도 공짜로 봉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것 자체가 오히려 상처로 느껴진다. 오직 토지의 독점에서 연유하는 고귀함은 이데올로기이기는 하지만 양반다운 고귀함은 구세계인의 성격 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어 시장의 논리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시켜 주었다. 독일의 지배층은 특권이나, 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통하지 않은 돈벌이를 20세기까지도 경멸한다. 학자나 예술가들이 악평에 시달리는 경우는 그들이 돈벌이를 목적으로 할 때였던 바 - 이들 자신도 대개는 돈벌이에 저항을 했지만 - 가정교사였던 횔덜린이나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는 바로 그 면에서 지배적인 의식과 대립되는 경험을 맛보아야 했다. 오늘날까지도 어떤 사람이 상류사회에 속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일차적인 판단은 그가 돈을 받는가 받지 않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따금씩은 비뚫어진 자긍심이 의식적인 비판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유럽 상류층의 아이는 친척으로부터 돈을 직접 선물받을 때 얼굴을 붉혔다. 시민사회의 공리주의가 득세하면서 그러한 반응은 사라졌지만 인간이 오직 교환을 위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남아 있다. 유럽적인 의식에서는 옛것의 잔재가 새로움을 위한 효소였다.
이와는 반대로 미국에서는 부자집 아이가 신문배달로 몇 센트의 돈을 버는 일에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며 이러한 주저없음은 성인들의 습성에 그대로 침전된다. 그 때문에 미국 문화에 별로 익숙지 않은 유럽인은 미국인을 돈 되는 일에만 덤벼드는 품위 없는 족속으로 여기며, 반대로 미국인은 유럽인을 방랑자나 왕자병 환자로 취급한다. 노동은 수치가 아니라는 지극히 자명한 원리, 중세적 의미에서 장사는 고상하지 못하다는 속물 근성의 (별 해는 없는) 부재, 민주화된 생업 원칙은 철저히 반민주적인 것, 경제적 부당성, 인간의 품위 저하가 존속하는 데 기여해 왔다. 교환가치로 표현될 수 없는 활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무에게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것이 주관적 이성이 승리하게 된 실질적인 전제인데, 주관적 이성은 그 자체로서 진실된 것은 사유할 수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진실을 오직 다른 존재자, 교환될 수 있는 것으로 인지한다.
유럽에서는 자부심이 이데올로기였다면 미국에서는 물자 공급이다. 이런 것은 객관 정신의 산물에도 적용된다. 교환의 당사자들이 얻는 직접적인 이득, 즉 지극히 주관적으로 제한된 것은 주체의 표현을 금지한다.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 철저히 시장에 적합한 것만이 생산된다는 선험성은 주관적 욕구, 즉 사물 자체에 대한 욕구를 솟아나게 하지 못한다. 온갖 치장으로 세상에 내놓고 분배되는 문화산업의 생산물들은, 꿰뚫어 볼 수 없는 복잡한 메카니즘을 통해서일지는 몰라도, 손님들의 귀에 그들이 좋아하는 멜로디를 울려주면서 피아노 위에 올려진 돈 접시를 힐끗 보는 레스토랑 악사의 제스처를 되풀이한다. 문화산업의 예산은 수십억에 다다를지 모르지만 그것이 돌아가게 만드는 기본 법칙은 팁이다. 산업화된 문화의 지나친 번쩍거림, 위생적인 청결은, 더 이상 호텔 급사장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귀족들보다 더 우아하게 차려입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호텔 급사장으로 보이게 되는 호텔 매니저의 연미복에서 풍겨나오는 저 수치심의 잔재나 악령을 쫓아버리려는 형상이다.
126. 아이큐
그때그때 가장 진보된 기술 발전수준에 합당한 행동방식은 그런 행동방식이 실제로 요구되는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유는 직업상 어쩔 수 없는 영역에서만 사회의 행동통제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체 메커니즘을 그러한 통제에 동화시킨다. 사유는 지금까지 부여받은 과제의 해결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부여받지 않은 것 또한 과제의 도식에 따라 다루려 한다. 자율성을 상실한 사유는 자신에 대한 신뢰 속에서 자유롭게 현실을 그 자체로서 파악하려들지 못한다. 그런 것은 존경심에 찬 환상을 품고는 최고의 연봉을 받는 사람들에게 위임하며 그 대가로 스스로는 측정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사유는 이미 스스로로부터 자신의 유용성을 부단히 증명하려는 듯 처신하는 경향이 있다. 깨트릴 호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유는 그 어떤 시험에 대비한 연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사유는 자신의 대상들을 단지 뛰어넘어야할 허들로, 자기 형식에 대한 항구적인 시험으로 간주한다. 사실과의 관계를 통해, 그로써 자기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어하는 진정한 사유는, 그것은 공허하고 구름잡는 소리며 비사회적인 자기만족이라는 비판을 불러일으킨다. 신실증주의자들에게는 인식이 축적된 감각적 경험과 형식논리로 분열되듯, 모순이 없는 통일적 학문만을 가슴에 새겨넣고 있는 정신 활동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의 목록과 사유능력의 실험으로 양극화된다. 이들에게 있어 사유란 정보 퀴즈나 재능 퀴즈가 된다. 어딘가에 올바른 대답이 이미 쓰여져 있어야 한다. 최신판 실용주의라 할 수 있는 도구주의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유의 적용보다는 사유 형식 자체의 선험성이 문제였다. 이러한 속박의 틀 안에서 저항적 지식인이 사회의 내용을 달리 모색해 볼지라도 그는 사회의 필요에 따라 이미 주조되어 있는 자신의 의식 형태에 의해 마비당한다. 사유는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림과 동시에 자신에 대한 절대적 시험 기관이 되어버렸다. 사유란 매순간 사람들이 여전히 사유할 수 있는가를 감독하는 것 이상이 아니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론 분야든 예술 분야든 겉보기에는 독립적으로 보이는 모든 정신적 생산은 질식당하게 된다. 꽉 막힌 사회 속에서 정신의 사회화는 사유를 골치 아픈 것으로 여겨 유리병 속에 가두어 놓는다. 사유가 일찍이 외부로부터 명령받은 의무를 내재화했듯이, 포괄적인 장치로 자신이 통합되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정치적·경제적 판결이 자신을 온전히 포획하기도 전에 이미 파멸해버리고 만다.
129. 고객에 대한 봉사
문화산업은 고객을 받들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가상이다. 문화산업은 자신이 주인이라는 관념을 집요하게 거부하면서 그들의 제물을 재판관이라고 외치고 있지만 은폐된 베일 뒤에서 벌어지는, 스스로를 주인으로 내세우는 자기찬미가 어떤 자율적 예술의 도도함도 능가한다. 문화산업은 고객의 반응에 순응한다기보다는 그것을 날조한다. 문화산업은 자기 자신이 고객인 양 행동함으로써 고객에게 날조된 반응을 연습시킨다. 문화산업조차 공손히 복종하고 있다는 총체적인 조정작업이 이데올로기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할지 모른다. 사람들이 지나친 획일화를 통해 또한 사회적인 무기력에 공개적인 서약을 통해, 권력에 참여하려 하고 획일성에서 빠져나가려는 노력에 집착할수록,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나 전체에 자신을 끼워맞추려고 안달한다. ‘음악은 청중을 위해 듣고’, 영화는 기업적인 규모로 어른들의 역겨운 트릭(어른들은 아이들을 꼬시려들 경우 그들의 말투로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들며,  아이들의 관심을 끌어내려는 사탕발림의 표현과 함께 의심스러운 선물을 제공한다)을 시연해보인다. 문화산업은 본래의 속성상 미메시스적인 퇴행을 부추기며 억압되어 있는 모방충동을 조작하려든다. 이를 위해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자신을 모방하는 관중의 모습을 미리 재현시켜 보여주며, 그러한 영향력에 의해 이루어질 관중의 동의를 본래부터 있었던 듯이 나타나도록 한다. 문화산업은, 안정된 체계 속에서 그러한 동의를 실제로 계산해낼 수 있는 경우, 그러한 동의를 실제로 만들어내기보다는 의식처럼 되풀이할 경우, 더 잘 작동한다. 문화산업의 생산물은 어떤 자극제가 전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존재하지 않는 자극에 대한 반응방식의 모델일 뿐이다. 그 때문에 영화관에서는 갈채를 받는 음악 제목이, 덜 떨어지 애들 말투가, 번쩍거리는 대중성이 나타나며, 클로즈업된 시작부는 마치 얼마나 멋진가를 외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식으로 문화기계는 관중에게 공세를 편다. 이러한 공세는 마치 달려오는 급행열차를 정면에서 찍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와 비슷하다. 모든 영화의 톤은, 아이들에게 마법을 걸어 한 입에 집어삼키기 위해 ‘좋은 수프야, 수프가 맛있지? 네 맘에 들거야, 그지!’라고 소름끼치게 중얼거리면서 음식을 건네주는 마녀의 목소리다. 예술에서는 바그너가 이러한 부엌 화덕의 마술을 고안해냈다. 그의 적절한 언어선택이나 음악적인 양념은 여전히 감칠맛이 있으며, 어설프게 대충 넘어가지 못하는 그의 천재적인 감각은 ꡔ니벨룽겐의 반지ꡕ에서 미메가 지그프리트에게 청량음료를 제공하는 장면에서 보듯 전 과정을 펼쳐 보여준다. 그러나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오래 전부터 보리수 밑에 누워있는 괴물의 머리는 누가 잘라올 것인가?
135. 큰 독수리

받아쓰게 하는 것은 편리하고 집중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실질적인 장점도 가지고 있다. 창작의 초기 단계에서 받아쓰게 하는 것은 글쟁이로 하여금 비평가의 위치에 서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가 구술한 것은 잠정적이고 구속력이 없는, 그 후의 작업을 위한 단순한 소재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일단 문자로 전환된 내용은 그에게 낯선 것, 어느 정도는 객관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그는 아직 가변적인 것을 고정시킨다는 두려움을 면제받는데, 그 이유는 받아쓰기한 내용은 연습삼아 써본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엄청난 중압감과 책임감을 수반하지만 그는 이러한 책임감 자체를 가볍게 농 쳐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글로 형상화한다는 엄청난 위험부담 대신, 우선은 가벼운 마음으로 만들어본 기록물, 그렇지만 일단 만들어놓으면 이미 이 세상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물처럼 느껴지는 무해한 형상과 마주서게 되는데, 그 때문에 글쟁이는 자신의 무모함을 자각조차 못하게 된다. 모든 이론적 진술은 절망감을 주는 지독한 난해성을 획득할 때까지 성장해나간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그러한 트릭은 축복이다. 이런 트릭은, 어떤 진술을 만들어내고, 그 다음은 그것을 철회하면서도 붙잡아두는 변증법적 방법을 위한 기술적 보조수단이다. 그러나 감사는 글쟁이가 구술한 것을 받아적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그는 적재적소에서 모순과 아이러니와 신경질과 인내심이나, 존경심의 철회를 통해 글쟁이를 코너에 몰아넣기 때문이다. 받아쓰는 사람은 분노를 자신에게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한 분노는 다른 때 같으면 작가 스스로가 자신의 형상물에 대해 가졌을, 그리고는 좀더 미련스럽게 자신의 신성한(?) 텍스트를 물고늘어지게 만들었을 불만과 양심의 가책들로 채워져 있는 창고로부터 끌어낸 것이다. 감사하는 대신 성가신 보조자에게 향했던 감정은 대상에 대한 관계를 자비롭게 정화시켜준다.

137. 작은 고통, 큰 노래

현대의 대중문화는 역사적 필연성을 갖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삶 전체가 거대 산업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 결과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오늘날 지배적이 된 의식의 표준화와 극단적으로 대치된 것처럼 보이는 심미적 주관화의 결과라는 사실 때문이다. 예술가는 내면으로 향할수록 외부세계의 모방에서 느끼는 유아적 즐거움에 대한 포기를 배워 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영혼에 대한 반성 덕분으로 점점 더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한 기술의 진보 - 그러한 진보는 예술가들에게 보다 큰 자유와 함께 타율성으로부터의 독립을 가져다주었는데 - 는 내향성이라는 것 자체를 물화시키고 기술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예술가의 자기 표현이 탁월해질수록 그만큼 더 그는 그가 표현한 ‘것’과는 다르게 되며, 표현된 것, 즉 주관성의 내용 자체는 생산과정의 단순한 기능으로 전락한다. 이런 것은 니체가 이미 눈치챘었는데, 그는 표현의 조련사인 바그너를 사기꾼이라고 몰아부쳤던 것이다(그렇지만 니체는 문제의 핵심이 심리학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경향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종되지 않은 자극으로부터 길어낸 표현내용을 조종의 대상으로 변질시키는 것은 표현내용 자체를 만질 수 있는 것, 전시될 수 있는 것, 내다팔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하이네에게 있어서 서정적 주관화란 그가 지닌 상업적 경향과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부합될 뿐만 아니라 팔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주관성에 의해 관리되는 주관성인 것이다. ‘수위’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것 - 19세기 이래 연기자들의 특징이지만 - 은 내적인 충동에서 나왔지만, 별다른 변절의 죄의식 없이 저널리즘이나, 스펙터클, 계산으로 넘어간다. 주체 자신에 의해 주체를 지배하고 그로써 대상화하는 것과 흡사한, 예술의 운동법칙은 예술의 몰락을 의미한다. 흥행의 성공을 위해 모든 소재나 감정들을 모니터링하는 영화의 예술적대성은 제2단계의 외향성이라 할 수 있는데, 예술에서 이런 것이 나오게 된 배경은 내적 자연에 대한 지배의 강화를 위한 것이다.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예술가의 쇼맨쉽이나 노출증은 그들 자신을 상품으로 내다팔려는 제스처인 것이다.

144. 마적
계몽과 예술을 단순한 대립관계로 몰아가는 모든 문화보수적 이데올로기는 무엇보다, 미의 발생 속에 있는 계몽의 계기를 간과한다는 점에서 허위이다. 계몽은 모든 질들 - 미는 이것에 결부되는데 - 을 해체하지만 미의 질 자체를 만들어낸다. 칸트에 따르면 예술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이해관계를 벗어난 만족은 모든 심미적 대상 속에서 꿈틀대는 역사적 반명제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해관계를 떠나서 관찰된 것이 만족스러운 이유는 그러한 대상이 극도의 관심을 요구하면서 그에 따라 관찰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관찰은 계몽된 자기단련의 승리이다. 미와 사치가 분리되지 않은 채 느껴질 수 있는 금이나 보석은 신비로운 것으로 경배되어 왔다. 그것들이 반사하는 빛은 그것들 고유의 본질로 간주되었다. 그 빛에 접촉된 모든 것은 그 마법 안에서 고분고분해진다. 초기의 자연지배는 그런 것을 이용했다. 이 당시 보석은 교활하게 매료시키는 힘에 의해 세계사를 굴복시키기 위한 도구로 여겨졌다. 마법은 전능의 가상에서 나온다. 그러한 가상은 전능의 자기계몽에 의해 분쇄되지만 인간 위에 내리쪼이는 사물의 힘으로서 살아남는다. 언젠가 그러한 힘 앞에서 전율했던 인간은 자신을 압도하는 그러한 힘의 정체를 꿰뚫어볼 수 있게된 후에도 그의 눈은 그러한 전율에 사로잡혀 있다. 명상은 물신숭배의 잔재지만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는 단계이다. 빛을 발하는 사물들이 마법을 지니기를 포기할 때, 말하자면 폭력 - 주체가 사물에 부여한 폭력이며 그러한 사물의 도움으로 주체 스스로가 행사하는 폭력 - 을 포기할 때 그러한 사물들은 폭력 없는 형상물, 지연지배로부터 치유된 행복에의 약속으로 전환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예술의 의미로 전환된 사치의 원역사이다. 절대적 무기력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지닌 마법, 즉 미의 마법 안에는, 완전함과 무가 하나가 되어, 전능의 가상이 희망으로 부정적인 방법으로나마 다시금 투영된다. 그것은 모든 힘겨루기에서 빠져나간다. 총체적 무목적성은 지배의 세계 속에 있는 합목적성의 총체를 부정하는데, 이러한 부정 - 이 부정은 자신의 고유한 이성원리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냄으로써 기존 질서를 만들어낸다 - 의 힘에 의해서만 오늘날까지도 기존의 사회는 다른 가능성을 의식한다. 관조의 희열은 탈마법화된 마법 속에 존재한다. 빛을 발하는 것은 신화의 화해이다.
153. 결론
절망에 직면해 있는 철학이 아직도 책임져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물들을 구원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서술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한다. 인식이란 구원으로부터 지상에 비추어지는 빛 이외에는 어떠한 빛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모든 것은 추수적인 재구성에 지나지 않는, 단순한 테크닉에 불과하다. 언젠가 메시아의 빛 속에서 드러날 세상은 궁핍하고 왜곡된 모습일 수밖에 없다면, 그러한 메시아의 관점처럼 세상의 틈과 균열들을 까발겨 그 왜곡되고 낯설어진 모습을 들추어내는 관점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어떤 자의나 폭력도 없이, 오직 전적으로 대상과의 교감으로부터만 나오는 그런 관점을 획득하는 것이 사유의 유일한 관심사이다. 그것은 지극히 간단한 일인데 그 이유는 현 상황이 절대적으로 그러한 인식을 요청하기 때문이며, 또한 일단 시야에 포착된 완전한 부정성은 거울 속의 뒤집힌 상을 그려내듯 그 반대되는 모습을 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존하는 세상의 올가미에서 벗어난 - 눈곱만큼이라도 - 관점을 전제하는데, 모든 가능한 인식은 구속력을 얻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세계로부터 쥐어짜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런 이유로 그 자신이 먼저 자신이 빠져나오려 했던 왜곡과 궁핍의 수렁에 익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유가 제약 없는 것을 위해 자신의 제약성을 열정적으로 부정하려 들면 들수록, 사유는 자신도 모르는 채, 좀더 치명적으로 세상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만다. 사유에 부과된 이러한 요청을 염두에 둔다면 구원의 현실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질문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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