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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1999/10/05 (01:11)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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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와 영성
구약성서와 영성(The Spirituality in the Old Testament)


김이곤



1."하나님 이름이 없어요"

하나님 앞에, 하나님 없이(Vor Gott, Ohne Gott)

'영'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루아흐'라고 씁니다. 희랍어로는 이것을 '프뉴마' 라고 합니다. 저는 '영'을 '루아흐'와 '프뉴마' 라는 어떤 실체로 이해하기보다 '영적이다' 라는 그런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또 '영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 우리는  사람이 안 보는 데서는 하나님이 안 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그러나 하나님 없이 산다는데 그것이 어디서 사는 것입니까? 너무 당연한 질문이었죠.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계 속에서 살면서 때때로 "아유, 더러운 세상" 이라고 말합니다. 잘못된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신 세계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거죠.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세속 세계'라 합니다. 두 개로 나누어진 세계를 왔다갔다하는 긴장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한 분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근본적인 것인데 가끔 놓칩니다. 우리는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속 세계, 이 세상 속에 살고 있는데 영성의 삶을 산다라고하는 것은 뭘 말하느냐?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 없이 살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럴 때 삶의 전체를 포괄적으로 '영성'이라고 저는 표현합니다.

모성적 하나님(maternal God)
우리는 세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두고 아버지, 아들, 영이라 표현했습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면서, 또 아들로서의 하나님을 만나면서, 성령으로서의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를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들, 영의 활동 영역 안에서 살면서 우리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늘 만나는데 그 분은 아들function을 가지고서 일하십니다. 아들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분의 은혜, 대속적인 은혜라고 하는 하나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의 표상을 끌어올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경험밖에는 모르니까 항상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아버지라는 표상을 가져왔지만 사실 더 성서적인 표현은 어머니라고 저는 봅니다. paternal한 분이 아니라 maternal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표상을 우리는 가부장제의 전통 아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찾지만 사실, 성서의 세계, 아버지의 세계에 들어가 막 헤매다보면 어머니의 이미지만 만납니다. 끝도 없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가끔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본질만은 maternal, maternity이에요.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면, 특히 이사야 40장 이후 부분을 볼 때 어머니를 만난 것 같습니다.

포착하기 어려운 하나님
제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은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 손에 포착된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성서 영성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Elusive Presence'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33장 19절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도착해서 "하나님이여, 당신의 영광을 제게 보여 주십시오."라고 외치니까,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네 앞으로 지나가마." 하고 지나가셨는데 아마 광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지나가셨을 겁니다. 포착이 안되도록 빠르게 지나가셔서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본 자는 죽는다고 했어요. 구약에서부터 신약에까지 그들이 줄기차게 말한 신앙의 세계 속에서 신학적으로 정리해야 할 부분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라는 겁니다. 또한 하나님을 보면 죽어요. 구약에서 신약까지 계속되는 가르침은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의 고대 신앙세계에서는 가나안 종교나 헷 종교, 앗수르, 시리아, 바빌론, 에집트, 소아시아, 희랍, 로마 등 모든 종교들이 하나님, 신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정치, 사회 등 모든 것이 종교적으로 해석되는, 철저히 종교적인 고대 중동 세계 속에서 모든 종교가 신을 가시화, 형상화하고 그래야 그 신의 권위가 인정받는다고 했던 그러한 종교 세계 속에서 오직 손바닥만한 땅덩어리 이스라엘 민족만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형상화해서는 안돼는 분이라는 출발을 하고 있어요.


고대 언어 - 바빌론 언어, 앗수르 언어 - 를 분석하고 비교해보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름이 없어요.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어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 그것은 우상입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만든 종교 - 사람이 종교성을 가지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들어낸 종교 - 는 우상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게 아니예요. 구약에서부터 신약에까지 하나님 이름을 말한 곳이 '야훼' 란 이름 하나예요. 그래서 제가 이 '야훼' 라는 이름을 밝히려고 그럽니다. 정말 이름이었을까요, 이스라엘 종교가 시작된 후 그 이름이 됐어요. 불가피하게 이름이 됐지만 그들은 신앙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full name으로 부른 바가 없어요. 그래서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 이름을 정확히 어떻게 부르는 지 모르게 됐죠. '야'로 시작하는 것은 확실해요. 그래서 그들이 찬양할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말할 때는 하나님의 initial을 써서 "야를 찬양하라", "할렐루야"처럼 '야'를 썼어요. 그러나 '야' 다음에는 안 썼죠. 그러니까 읽지를 못 해요. 랍비들보고 읽으라고 하면 '아도나이' 주님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후손들이 히브리말 성서를 읽을 때 이 이름자가 나오면 '아도나이'로 읽으면서 지시를 하기 위해서 국문학자들이 점으로 된 모음기호를 찍었어요. 그런데 그런 문맥을 모르는 한국 사람, 미국 사람, 독일 사람들이 그대로 읽어버리니까 '여호와'라고 읽게 됐어요. 하여간 훼,'야'로 시작하는 그 이름이 어떻게 그들에게 고요한 신앙과 찬양, 기도의 대상으로써 쓰여져 왔을까요?

그들이 만났던 그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해주는,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어요. 그것을 체험해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체험한 사람들이 있다 이겁니다. 성서의 인물들이 그렇습니다. 역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죠.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시니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난 거예요. 그럼 어떻게 나타나셨나? 하나님은 우리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사건으로서 나타나셨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본 바가 없어요. 또 볼 수도 없구요. 그런데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 이거예요. 이것이 기독교 성서의 영성이예요. 그래서 제가 신앙 생활하면서 성서보고, 공부하고,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면서, 지금까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과정을 통해서 야훼라는 이름이 구약 성서에 현존하고 있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궁금하게 생각했어요. 손댈 수 없는 거룩한 네 개의 자음 -'테트라그라마톤'이라고 하는 이 글자 - 으로 된, 이스라엘이 처음 하나님을 체험했을 때 이분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게 한 그분, 그분이 누군가, 그분이 어떤 분이길래 이 네 개의 자음으로 표시할 수 있나? 이것은 무한한 학문적 연구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야' 라고 하는 것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유대인들은 그 글자를 알고는 있지만 부르지는 않죠.


성서적으로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그것이 처음 표현됐다고 봅니다. 모세가 가시덤불, 타지 않는 불꽃떨기를 보았을 때 그게 너무도 놀라움입니다, 불은 붙었는데 가시가 타지 않는다고 하는 역설적인 사건입니다. 도대체 저 신비가 뭘까. 그래서 가까이 가니까 하나님이 그 가운데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모세가 신학적인 리비도가 충동해서 물었어요. "이름이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분의 실재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무언가, 그 분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모세가 알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모세 이전에 이스라엘의 대표적 선조인 야곱도 창세기 32장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주여,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네가 왜 내 이름을 물어?" 하고 끝냈단 말이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 대답을 안 했어요. 또 좀 후대인 사사시대에 가면 삼손의 아버지가 하나님의 사자를 붙들고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그 때 뭐라고 했는가 하면 "나는 비밀이다." 그랬어요. 개역 성경에는 '나는 기묘다.', 공동번역에는 '나는 비밀이다.' 그랬어요. 대답을 안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출애굽기 3장 13절에서 불꽃떨기 앞에서 물은 것까지 포함해서 구약에서 딱 세 번이거든요.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내는 엄청난 일로 지금 보냄을 받아야 할 판인데 그냥 아무렇게나 갈 수 있나요. 적어도 보내신 분이 누구냐? 하는 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누구의 권위를 가지고 말해야 합니까? 보내신 분을 누구라고 해야 합니까?
아주 굉장히 중요한 찬스를 이용해서 모세가 던진 질문입니다. 이런 충동이 성서에서 모세의 입을 통해서 제기된 것입니다. 그런데 대답이 지금 여기서 수수께끼 같고 미스테리같은 부분입니다. 제대로 번역된 성서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나다."라는 번역이 가장 본문 자체에 근접한 번역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 개역 성경은 그렇게 번역 안하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구약 성서에 매우 철학적인 '나는 자존자다'라는 뜻이 있다고 해석을 했는데 그것은 맞지 않은 해석입니다. 그렇게 번역한 것은 상당히 철학적인 냄새가 납니다.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희랍 사람들에 의해 희랍말로 번역된 구약 성서가 그런 냄새를 풍겼습니다. 스스로 있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스스로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예요. 끊임없이 고난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으로 들어와 그들과 더불어 구원의 행위, 또는 구원의 사건을 보여주신 분이죠. 'God who acts', 끊임없이 행동하는 분입니다.
그냥 'God who is'가 아닙니다. 시편 121편에 나오듯 낮의 해와 밤의 달이 너를 상치 아니하도록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키시며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바이거든요. '스스로 존재한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것은 하나의 매우 철학적이고 인위적인 해석이다 이겁니다.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할까, 그 분을 설명할 수 있는, 그분을 묘사할 수 있는 단정적이고 아주 집약적인 표현이 '야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 성서를 공부하는 학자들에게는 거의 상식화되어 있지만 - 동사입니다, 문장입니다. 이름이 동사고 문장이라는 거죠. '그가 무엇 무엇을 하신다.' 이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그가 ∼이다' 가 아니라 '그가 ∼있게 한다' 이런 개념입니다. '그가 있게 한다' '있게 한다' 는 것이 뭘까, 없는 것을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바꾸면
'하나님은 창조하신다.' 이 말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야훼'란 말이 창조라는 말을 갖고 있다는 학설이 물론 일치된 견해는 아니지만 이 분야를 계속해서 연구하고 고고학적인 자료를 대비하면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견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존재하시는 분, 존재론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있게 하시는 분, 창조하시는 분, 쉬지 않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끊임없이 활동하는, 창조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는다'고 하는 것이 처음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분이다, 창조주시다, 이것이 인간에게 나타나셔서 역사적인 행위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본질적인 것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때 가장 집약된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존재하시는 분이라고 한다면 매우 불안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끊임없이 창조하고 계십니다. 태초에 한 번 천지를 창조하고 가만히 쉬면서 부채 부치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러셨어요.

출애굽기 3장 14절로 다시 돌아갑시다. 목동 모세가 감히 용기를 내어 애굽으로 갑니다. 세계 초강대국 에집트 제국이 이스라엘 민족 전부를 볼모로 잡아 노예로 부리고 있는 그 속에 뛰어들어, 그 손아귀에서 민족을 건져내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에 의한 기적적인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마수에서 해방되는 사건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건져주셨다, 해방시켜주셨다'는 체험입니다. 그런데 그 체험을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체험한 것인데, 하나님을 만난 것인데 후손들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을 빌려서 말을 했는데 그것이 출애굽기 14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이스라엘 백성을 감싸서, 홍해를 마른 땅처럼 지나가게 했다. 놀라운 경험이죠. 역사적으로 재건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이 겪은 것, 누구도 변경시킬 수 없는 확신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간증할 때 자신이 경험한 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이면서 간증해보신 분 계세요? 하나님 만난 경험 아무도 그렇게 못 합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고백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원하시는 분은 여기서 만나십시오. 여기 이외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면, 하나님의 모양을 그리려고 하면 다 우상이 됩니다. 우상에 빠지면 그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끕니다. 지금의 거품 경제와 거품 신앙이 바로 죽음이 가까이 온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발전
하는 것이 아니라 망할 것이라는 징조입니다. 공룡을 만들어 놓았더니 공룡한테 잡아먹히는, '쥬라기 공원' 은 현대 문명을 풍자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비대해집니다. 비대해지는 것만을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크다, 하나님은 힘이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 나온다. 그런 식으로 막 몰고 갔습니다. 성서가 뭐라 하는지 상관하지 않고 막 몰고 갔어요. 그래서 막 일으켜 놓았습니다. 이게 거품이죠. 성서로 돌아와야 되요. 그래서 앞으로 우리 과제는 정말 거듭나서  모두가 성서로 돌아오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서로 돌아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문자화된 말씀을 들여다보면서 여기서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울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생명을 얻게 하는 말씀,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이 신명기 정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꽃 속에서 나타나시고 화염 속에서 나타나시지만 하나님을 아무도 본 바가 없다. 정말 두렵건대, 조심하라, 하나님을 얼굴로 보지 마라. 하나님은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만난다. 이것입니다.


2. 하나님의 속성 "어머니의 자궁(matemal womb)"

긍휼하신 하나님(El-rahum, maternal womb)

'El yahweh- El rahum- El sadday'의 'El'이라는 말은,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왔다갔다하는 중동 세계의 셈족들이 하나님하고 불렀던,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세계의 유일한 주인이신 하나님을 일컫던 일반적인 칭호로써 이름이 아닙니다. 그것의 발음이 El입니다. 그러면 '야훼' 라는 말이 뭐냐? 구약 성서 안에 이 말은 없어요. 다만 야훼 엘로힘이라는 말은 있지요. 이상하게도 창세기 2장, 3장에 그 말이 나오거든요. 그 이후로는 나오지 않구요, 그 다음에 '엘'을 붙여 가지고 출애굽기 33장 19절, 34장 6절 등에 나오는 말은 'El rahum' 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과 평행 되는 말은, -우리는 '긍휼의 하나님' 이라고 번역했는데 - '은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rahum', '긍휼'이라는 말입니다. 이 'rahum'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묘사하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여성신학계에서 이 말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밝
혀주었고, Albright학파 계열에서는 'rahum'이라는 말이 형용사입니다. 긍휼,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생각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사랑' 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이 말은 '어머니의 자궁(렉켐)'이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그것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언어를 총동원해서 하나님의 nature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아보니까 그 말이 '어머니의 자궁' 이었습니다.

여러분,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말하는 그런 대목이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야, 너는 오래 사는 것도 구하지 않고 말이야, 원수를 보복하는 것을 구하지도 않고 넌 어떻게 해서 그렇게 나한테 지혜로운 마음을 구하느냐?" 하시면서 지혜를 주셨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당장 솔로몬은 매우 어려운, 인간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재판을 하게 됩니다. 창녀 두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시에 애기를 낳았는데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았어요. 그래서 살아있는아이 하나를 놓고서 서로 자기 아이라고 하게 되었죠. 여기서 솔로몬이 지혜로운 마음을 발동시킵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마음'이란 말은 원어 그대로 따져들어가면 '듣는 마음'입니다. 왕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지만 낮고 천한 백성들의 모든 소리를 듣고 수렴하는 마음입니다. 듣는 마음 '랩 쇼메아' 그랬거든요. 듣는 마음입니다. 솔로몬이 들은 것입니다. 영화와 영광을 상징하는 대왕이 낮고 천한 두 창녀가 와서 애비가 누군 지도 모르는 애 하나를 놓고 서로 자기가 친 엄마라고 싸우는 시시한 것을 듣는 거예요. '아, 참어머니의 소리를 들어야 되겠다.' 이것이 솔로몬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어요. "칼을 가지고 오너라." 살아있는 애기 하나를 가지고 "정확히 반으로 잘라서 엄격하게 나누어주마." 그런데 한 어머니가 "아, 그러지, 마십시오, 임금님. 그 애기 저 여인에게 주십시오. 그 애기 죽이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한단 말이예요. 반면에 한 어머니는 "아닙니다. 정확하게 반을 딱 가르십시오" 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어머니 말이 뭔가 들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가 그것을 뭐라고 표현 했냐면, '표준 새번역'은 '모성애가 넘쳐서'라고 했고  원문을 보면 '그녀의 자궁이 꿈틀거려서'라고 나옵니다. 거기서부터 어머니의 소리가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솔로몬은 "저 엄마다. 저 여인이다. 저에게 주어라." 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요나는 선택된 백성이라는 것을 자부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이었습니다. 요나하고 하나님하고 한 판 붙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백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해라. 회개의 복을 전해라." 그랬더니 요나는 싫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따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 아닙니까? 정의로우신 분 아닙니까? 하나님, 니느웨 백성이 저질러 놓은 죄를 보십시오. 용서받으면 당신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당신의 공의가 완전히 무너집니다." 그래서 '3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됩니다.' - 히브리 글자로 4개밖에 안됩니다. - 하루종일 돌아다니면서 그 말밖에 안 했어요. 왜냐하면 마음속으로는 니느웨가 회개하고 구원받지 않기를 바랬거든요. 그래서 혹시 내 말듣고 회개하고 구원받을까 싶어 그 말만 한거죠. 하나님의 정의가 살기 위해서는 망해야한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던 신념이예요. 요나의 심정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어요. 네 마디 말밖에 안
했는데, 그 말을 니느웨 백성들이 다 알아듣고 임금으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마구간의 짐승들까지 다 회개를 해버렸어요. 철저한 거국적인 회개를 한 것이죠. 요나는 아무리 니느웨 백성이 회개를 해도 그들이 지은 죄를 생각해서 일벌백계로 니느웨 백성을 다 치셔야 그게 하나님이지 회개한다고 용서하는 그런 하나님은 싫다고 저항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 앞에서 뻗대서 어떤 저항을 했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자살하겠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했습니다. 자식이 부모 앞에서 자살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 정도까지 요나가 항복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서 4장 1절부터 내린 성서 기자의 결론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El rahum', 어머니의 자궁 속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유입니다. 하나님을 묘사할 길이 없으니까요. 어머니가 자궁에서 자기를, 차라리 자기를 십자가에 달아서 죽이는 것이 낫지 인간들을 낮추고 무시해서 "네가 이러니, 나도 이런다." 이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고 신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El rahum입니다. 그것을 고대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 민족들이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 엘, 엘로힘 그렇게 말할 때의 그들은 그 이미지가 머리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강하신 분인데 이 분이 내 어머니라고 하면 이보다 더 큰 빽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그런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절대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키시고 양육하시고 길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El sadday'라 그랬어요. 그런데 이 말을 희랍어로 판토크라톤이라는 말로 옮겼는데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구약성경, 우리말 번역 은 다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옮겼어요. 그런데 'sadday'라는 말이 고대 히브리인에게 의미하는 것은 '어머니의 젖가슴', 두 개의 젖가슴입니다. 젖가슴은 사랑과 희생입니다. 젖가슴은 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에너지를 주는 것입니다. 생명의 모든 기운을 자식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함없은 하나님 사랑의 본질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세 가지 표상,  El-yahweh, El-rahum, El-sadday는 돌이나 나무로 새겨진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잡히지 않습니다. 예언자들은 더 고상한 표상들을 썼습니다. 아모스는 '정의'라는 말을 썼습니다. 하나님, 정의가 어디 있습니까? 잡히지 않습니다. 호세아가 말한 '사랑'도 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진 믿음, 이사야가 말한 믿음, 손에 잡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형상화해서 눈에 보이는 사물로 만들면 죽음이라는 것,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시고, 정의이시며, 자식을 사랑하시되 자궁의 진통을 통해서 끊임없이 생명을 창조하시는 아파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구약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입니다.

여기에 영성의 출발점이 있고 이 기초 위에서 우리가 모든 영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거기서 이탈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시편 50편을 보면 "하나님이 네 우리 속에 있는 양을 탐내시더냐, 하나님이 네 우리 속에 있는 소나 양의 피를 즐겨하시면서 그것을 달라고 하시더냐?"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리고 그가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지켜 가시고 보전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구약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영성적 인간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의 타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과 2장은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가 인간에 대한 모든 사고를 총집중시켜서 말하는 타락하기 이전의 가장 원형적인 인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 좋았다고 생각한 인간. 그 인간이 뭘까요? 우리가 회복해야할 인간, 예언자들이 돌아가자고 외쳤던 돌아가야 할 인간, 그리스도께서 오시자마자 회개하라했던, 회개하고 돌아가야 할 인간, 그 인간이 뭘까요?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두 개의 천지창조 이야기가 적혀 있는데 그 창조의 목표가 간창조입니다. 분명히 창세기 3장에서 인간타락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전조적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는데 인간 이 타락한 것, 포인트가 거기죠. 그러면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뭘까, 창세기 1장에는 아주 과감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이라고 나오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이 뭐냐 이겁니다. 하나님 창조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고, 하나님 창조의 중심주제라고 할 수 있는 타락하기 이전의 원형적인 인간은 뭘까. 그런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영성(Spirituality)입니다. 영성이 무슨 고행을 하고 무릎을 꿇고 피를 흘리면서 계단을 피를 흘리면서 오르는 것이 영성입니까? 아니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의 가장 원형적인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는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 1장 26-28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설명되고 있어요. 창세기 2장에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직결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가 나오는데 율법을 잘 아는 율법 선생이, "어떻게 하면 제가 영원한 생명, 영생을 얻겠습니까?"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교리적으로 설명을 안하십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 있는 말씀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그 말만 하셨어요. 그러니까 이 율법선생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도 가서 그렇게 해라." 그러시고 다른 말씀은 안 하셨어요. 굉장히 복잡한 율법이 구약성서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핵심적인 것을 끌어내니까 레위기 19장 18절이었습니다.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그것이 예수님 선교의 기본 목표이자 핵심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그것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했다, 그러니 너희는 이런 인간이다라고 하는 딱 두 가지의 주제만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출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인간에게 맡기면서 다스리라, 다 네게 위임한다 그랬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 또는 자격이라고 할까, 그런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동안 수세기를 걸쳐서 우리 기독교 복음이 가르쳐졌지만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거의 감춰졌다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 인간에게 주신

첫 번째 과제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하나님 뜻에 따라서 다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제를 우리는 잘 못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가서 타락의 이야기를 보면 매우 의문스러운 것이 하나 있을 것입니다. 뱀이 여자를 꾀고 여자가 꾀임을 받아서 남자에게 넘겨주고 남자도 그 꾀임을 받아들이고,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서도 거짓말하고 이러다가 징벌을 받는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저주를 하신 것은 뱀에게 꾀임을 받은 여자도, 여자에게 꾀임을 받은 남자도 아니고 뱀과 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으로 인해서 저주를 받은 것은 땅이다 이겁니다. 굉장히 놀라운 사실이죠. 예언서로 내려가 보면 인간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땅이 회복된다고 했어요. 이것은 생태학적인 문제인데 생태학에 대한 관심이 그 동안 우리 세계에서 별로 없었어요.

두 번째는 이것이 더 근본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입니다만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혼자사는 존재로서 창조되지 않았다는 거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았다는 말의 평행구는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창세기 2장에는 남자에서 여자를 만들어 냈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것입니다. 나와 내 이웃은 내 뼈 중의 뼈, 내 살 중의 살입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는 제일 처음으로 좋지 않은 것을 말했습니다. 악한 것이 뭐냐? 혼자 사는 것이 악이다. 혼자 사는 것이 소위 독신주의를 비난하는 말은 아닙니다. 더불어 살지 않고 나 혼자만 살겠다. 여자도 나 혼자만 살겠다, 남자도 나 혼자만 살겠다. 내 이웃이 죽던지말던지 나는 더불어 살지 않겠다. 이게 나쁜 사람입니다. 나만 생각해요. egoism, ego-centric 한 사고방식 이것이 악이다 이거예요. 내 이웃은 다 누구냐? 다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다. 목사님도, 내 아내도 내 뼈 중의 뼈, 내 살 중의 살. 내 남편도 그렇고 내 자식도 그렇고 삼촌도 그렇고, 나와 같은 직장동료도 그렇죠. 그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모든 율법을 다 장악하고 있는 율법의 대강령인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 속에 신적인 어떤 요소가 있다든가 하는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함께 사는 존재로서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잘 다스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의 영성이라든지 성서에 나타난 영성을 말하려고 할 때 초연하고 초월적이고 좀 비상한 모습을 하고 특유한 삶을 사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성서가 생각하는 영성이라는 개념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 하나님이 모든 것의 기운이다라고 하는 유일신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역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그런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사는 것, 또 자연에 대한 책임과 내 이웃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지켜가면서 사는 것, 이것이 성서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Spirituality - 영성입니다.

질문과대답
문 :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다스 리라'는 말과 함께 '정복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를 '경작하다'로 해석하는 분도 계시던데 …

답 : '정복하라'는 말속에는 '짓밟으라'는 강한 의미도 들어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가 자연을 무자비하게 착취한 원인 제공자라고 하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저는 이러한 해석에 오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2장의 창조 이야기는 1장의 창조이야기보다는 200년 앞선 것입니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인데요, 2장의 창조에 관한 기록을 1장을 쓸 때 알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죠. 그런데 2장에 나오는 '다스리라'는 표현은 원어로 아바드인데, 문맥상 '섬기라(serve)', '경작하라(culture)'의 뜻으로 사용해야 옳습니다. 그리고 15절에 '샤마르, 지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에 가서는 '다스리라, 정복하라'는 말로 신학적인 바뀜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창세기 2장을 기록할 때의 역사적인 상황과 창세기 1장을 기록할 때의 역사적인 상황의 차이 때문에 온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기록하던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 포로기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외쳤지만 하나님이 외면하던 시대, 암흑기에 살던 시대에 쓴 글입니다. 여기서 평등이라고 하는 것, 바빌론 사람이든 이스라엘 사람이든 하나님이창조한 피조물이므로 평등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연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별이나 달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 속에서 관리자로서 살아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좌절된 이스라엘 포로민들에게 하나님의 평등, 창조 원리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려고 하는 신학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용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 동산을 인간이 맡아서 할 책임은 정복하고 짓밟는 것이 아니라 2장 15절에 근거를 둔 섬기고 지키는 것, 그러니까
아바드 그리고 샤마르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래적인 과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1장을 따로 떼내서 오늘날의 자연을 무차별적으로 개발하는 이론에 적용시킨다고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성서 해석에서 기인된 오류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문 : 어떻게 보면 지금의 실태가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 의해 초래된 결과가 아닌가 싶은데 교수님께서 하나님 형상에 관한 회복을 말씀하시면서 두 가지 과제로서 '다스리라'는 의미와 섬기라는 원어의 뜻도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중 '더불어 산다'라는 베필로서의 의미를 말씀하실 때에는 인간만을 상정한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창세기 2장에 보면 돕는 베필을 짓는다는 말씀을 하신 후에 우선 생물들을 창조하신 이야기가 나오고 그것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말씀을 읽으면 돕는 베필과 더불어 산다는 의미에 있어서 자연이나 모든 만물에 대한 강조도 담겨있지 않나 생각하는데 교수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답 : 사실 '에쯔'라는 말은 굉장히 강한 의미로서의 '돕는자'입니다. 여자를 창조하기 위해서 돕는 자를 창조한다고 할 때 여성명사인 '에쯔라' 가 아니라 '에쯔'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놀라움입니다. 아마 제가 창세기 연구를 시작하면서 처음 지적 받은 것이 아닌가 싶은데, 시편 121편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할 때 그 도움이 '에쯔'란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이십 몇 회 '에쯔' 란 말이 사용됩니다만 창세기 이 부분에서만 여자 창조에 적용되었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돕는 행위를 나타낼 때 썼습니다.  매우 적극적인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여자를 '내조자'라고 하고 남편이 출근할 때 넥타이 매주고 구두 닦아주는 그런 내조, 그게 아닙니다. 그건 구원자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로프를 던져서 건져내는 것 같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해 내는 것 같이. 지금 질문자가 여자, 남자라는 인간 중심적인 개념
으로만 썼느냐? 그게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질문을 하셨는데, 저도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홀로 있는 것을 좋지 않다 생
각하시고 돕는 배필을 찾기 위해서 제일 처음에 한 것은 다른 생물들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적절하지 않다,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돕는 배필이 될 만하지 못해서 여자를 창조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 속에서 인간은 자연의 한 일부입니다. 그래서 모든 자연의 세계가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 중심적으로, 인간만 살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야 하죠. 생태학적인 과정은 우리에게 성서적으로 제시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창세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장에서만 우연히 발견된 내용이 아니고 예언서나 여러 구약 성서 안에서 많이 강조된 내용입니다. 대표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인간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이웃에 있던 모든 자연이 회복을 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만, 잘 아시는 이사야 11장 같은 것은 회복된 먼 미래의 메시야 왕국의 이상을 그렸습니다. 자꾸 백성들에게 비젼을 제시해 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세계를 이야기할 때 - 미가서 같은데에도 - 매우 신학적으로 정렬된 내용이 나오지만 이사야 11장에서는 서로 상극관계에 있어서 잡아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이 다 풀린다, 그래서 더불어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자와 양과 염소가 놀고, 어린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을 해도 해악이 없다. 이것은 사실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우리에게는 창조신학에 대한 것을 더 깊이 연구해야하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모든 것을 가꾸어주고 쓰다듬어주고 사랑한다라고 하는 것,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제껏 그렇게 못했습니다만 우리가 분명히 해야할 과제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반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좀더 성숙해져야합니다. 인간들끼리의 평등도 유지되어야하고 자연과 더불어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세계를 지향해야 합니다. 성서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에쯔라 크네크도'란 히브리 말 - '그에게 꼭 알맞는 구원자'라는 표현 - 은 꼭 여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쯔라'가 아니고 '에쯔'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해석학적인 과제를 가지고 연구해야할 주제이기도 합니다.♣


김이곤

현 한신대 구약학 교수로서 신학 대학원장직을 맡고 있다. '신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다', '구약성서의 고난신학', '출애굽기 신학', '창세기', '고향이 다른 사람들' 등의 저서가 있다. 홈페이지 http://eekon.org

http://www.peacenet.or.kr/kcems/99spirisym2/kime-old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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