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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3/07 (05:08) from 80.139.170.129' of 80.139.170.129' Article Number :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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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인 문화를 위하여 - 로티와 김우창의 대담
문학적인 문화를 위하여





리처드 로티와 김우창 교수의 대담





문학과 사회 - 2001(가을)


리처드 로티 Richard Rorty : 미국 스탠퍼드대 비교문학과 석좌교수.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전통 철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형태의 실용주의로 ‘신실용주의’를 제창하였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허물고 ‘문학 비평’을 통한 탈철학 시대의 철학을 주장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이론은 철학계를 포함하여 인문?사회과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김우창 :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심미적 이성’으로 대표되는 그의 문학적 사유는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폭넓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70년대 『궁핍한 시대의 시인』, 1980년대 『지상의 척도』 등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이 시대의 지성을 이끌었으며, 이후 『이성적 사회를 위하여』 『심미적 이성의 탐구』 『정치와 삶의 세계』 등의 저서를 펴내며 폭넓은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석학연속강좌 특별 강연회가 지난 6월 11~12일에 한국학술협의회?조선일보사?대우재단 주최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이 강연회에 연사로 초청된 세계적인 철학자 리처드 로티 박사(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석좌교수)를 고려대학교 김우창 교수가 강연회 전(6월 10일)에 만나 대담을 나눴다. 이 대담의 전체 내용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철학자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



김우창 : 한국에 오시기 전에 한동안 여행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방문하셨던 곳과 방문 목적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인상 깊게 느끼신 장면들에 대해서도.

로티 : 한국에 오는 길에 저는 5~6일 동안 루마니아의 바비시불리아 대학과 브라솝이라는 도시에 들렸습니다. 지독하게 전제적인 공산주의 독재자의 통치를 받았고 해방된 지 겨우 11년쯤 됩니다. 그런데 저는 루마니아의 교육 행정 담당자들이 그야말로 무(無)로부터 국제적인 대학을 건립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깊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동유럽의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엄청난 정열과 좋은 목적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열심히 자유로운 제도들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도 갔었는데, 그곳은 제가 늘 가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하지만 군부 측이 돈벌이를 하느라 나무들을 잘라내고 민둥산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전쟁을 겨우 벗어나자마자 상상하기도 어려운 생태학적인 재난 속에 놓인 것이지요. 그리고 일본에도 방문했는데요. 저는 교토의 불교 대학인 오타니 대학에서 다섯 번의 강연회를 가졌습니다.

김우창 : 약간 우스운 말 같지만, 철학자에게 여행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요? 저서들을 보면 선생님은 민속지 ethnograpy적인 연구에 특별한 애착을 갖고 계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로티 : 저는 지역 유토피아를 구축하는 일에 지적 코스모폴리터니즘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여행하는 지성인들은 특권을 누리는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그게 사실입니다. 그 반면에 이런 식으로 교수들과 작가들을 교환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상한 행동들을 이해하게 해서 고국의 사람을 계몽할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여행하고 글쓰고 하는 일이 코스모폴리턴적인 범(凡)지구적 지성을 창조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범지구적 지성은 사회적으로 유용합니다. 대단한 도움이 되지요. 미국 정부조차도, 계몽되었을 때, 교수들을 다른 나라에 파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희망에 대하여



김우창 : 다른 질문으로 넘어갈까 합니다. 철학은 일반성?보편성, 그리고 추상적인 것들을 다루지만, 선생님은 우리의 생각과 사고의 기본적인 축으로서 특수자들을 강조하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정한 정치적 견해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려는 철학적 특권을 거부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사회민주주의 또는 사회적 관심, 잔인성에 대한 혐오, 고통을 당하는 자들과의 연대성을 포함하는 ― 사회적 희망 social hope’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된 ― 자유주의적인 정치철학적 입장을 옹호하고 계십니다. 자유주의와 사회적 희망에 관한 선생님의 생각을 한국 독자들에게 간략하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로티 : 미국에는 듀이적 실용주의의 전통이 있습니다. 듀이는 정치를 실험의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론의 역할을 상당히 작게 보았습니다. 이를테면 플라톤적인 기획들(무엇이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체제인가)이나 마르크스의 기획(자본주의는 무너질 것이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다)과 같은 이론들을 크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칼 포퍼가 사회 체제들을 생각할 때 그러했던 것처럼 플라톤과 마르크스를 믿지 않았습니다. 듀이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유럽과 북미의 국가들이 미국과 프랑스 혁명 후 지난 200년 동안 과거의 정치?사회 제도들보다 더 많은 인간적 행복을 창출하는 데에 대체로 성공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사회의 본질이나 인간의 본성 같은 것에 관해 철학적 발견을 이룩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다양한 제도들에 의해 시도되고 종합된 시행착오들의 결과일 뿐입니다. 다양한 제도와 시행착오의 과정들이 실제로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키는 기능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200년이 지난 뒤에 자유 사회의 시민들이 자유를 갖지 않은 사회의 시민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듀이의 관점에서 볼 때, 자유의 정의를 내리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것보다 이것을 할 때 어떻게 되는가, 제도들이 저런 식으로보다는 이런 식으로 변화될 때 역사에는 어떤 일이 생기는가, 변화를 초래하는 원인들은 무엇인가 등과 같은 문제들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철학은 사회?정치적 역사가 전개되는 방식에 대한 일종의 믿음입니다. 사회 발전을 위해 지성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느 특정한 정치적 제안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실험들을 회고하면서 사회 개혁을 위한 새로운 사회 실험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김우창 : 말씀하신 내용은 자유주의에 대한 실용주의적 접근입니다. 흔히 자유주의는 사회적 계획 social program을 갖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사회적 희망 ― 잔인성에 대한 혐오, 사회적 계획, 사회적 발전 ― 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선생님의 사회적 희망의 기획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됩니까?

로티 : 그렇습니다. 방금 언급하신 용어들에는 약간의 난점들이 있습니다. 유럽에서 사용되는 ‘자유주의자 liberal’라는 말은 미국에서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미국인들이 ‘자유주의자 liberalist’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유럽인들이 말하는 ‘사회민주주의’입니다. 유럽적인 의미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자유 시장 체제보다 우선하는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미국에서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많은 것들이 자유 시장 체제보다 우선합니다. 제가 말하는 사회적 희망에는 널리 알려져 있는 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의 이상들이 모두 포함됩니다. 부유층과 빈곤층 간의 간격의 축소, 더 많은 기회 균등, 특히 교육받을 기회의 균등 같은 것입니다. 지금은 좀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되었지만, 미국에서 오랫동안 흑인 아동들은 교육받을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습니다. 제가 ‘사회적 희망’이라 부르는 것의 중심 주제는 바로 아동들을 위한 기회 균등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우창 : 사회적 희망에 대해 한 가지 더 묻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적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사회의 다른 자원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로티 : 가난한 자들이 가진 자들에게 억압당하지 않고 싶어하는 것, 그런 것이 인간의 본성이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사회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적어도 지난 200년 동안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지성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하향적 사회 개혁 운동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인간이 형제라는 기독교적 교의는 자유와 평등의 나라로서 미국의 전통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지성인들이 큰 공헌을 했다고 봅니다.

김우창 : 지성인들의 역할이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로티 : 결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상황은 더 나빠질 수도 있었습니다.

김우창 : 선생님의 사회적 희망은 다분히 발전의 개념에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에서도 그렇고 마르크스주의에서도 그러하지만, 산업의 발달이 결국 모든 사람을 잘살 수 있게 할 것이라는 발전의 개념이 있는데, 선생님도 여기에 많은 것을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술과 산업의 발전은 한계에 부딪칠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환경과 생태의 문제는 이미 그러한 것들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로티 : 그것은 사실입니다. 생태적 재난이 목전에 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 또는 소속감의 토대



김우창 : 선생님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설명할 때, 어떤 철학적 근거 위에서 정당화하기보다는, 삶을 형성한 특수한 상황들에 의해 ―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과 개인적인 배경에 의해 ― 설명하는 것을 선호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괜찮으시면 개인적인 배경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로티 : 제 부모님은 대공황이 시작되던 1930년대 초반에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그 시대는 많은 좌익 지성인들이 자본주의가 실패했다고 믿었던 때였습니다. 대공황은 자본주의가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지요. 1932년에 제 부친은 공산당을 탈퇴했는데, 공산당이 스탈린의 병기일 뿐이고 모스크바에서 조종하는 또 하나의 정당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미국의 많은 전(前) 공산주의자들이 그런 것처럼, 제 부친도 점차 우측으로 옮겨갔습니다. 저는 좌가 유일하게 타당한 정치적 입장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을 갖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인권 운동과 존슨의 복지 국가 정책 등에 열광했습니다. 미국에서 저와 비슷하게 성장한 많은 사람들에게 레이건과 부시의 경우는 일종의 재난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우창 : 선생님은 지금도 미국의 정치 스펙트럼에서 좌편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로티 :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칸디나비아 같은 나라에서라면 극히 상식적인 입장에 불과합니다. 특별히 급진적인 것은 아닙니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미국에서 따라잡고 있는 셈이지요.

김우창 : 선생님은 유대나 공동체를 중요하게 봅니다. ‘공동체’나 ‘국가’는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생님의 삶을 결정한 미국의 경우, 공동체를 말한다면, 미국이라는 나라를 말합니까, 또는 주류 문화의 미국인을 말합니까? 흑인, 토착 아메리카인, 아시아계 미국인에게 공동체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요?

로티 : 저는 그것에 대해 정확한 정의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그 용어를 느슨하게 사용합니다. 공동체의 기초는 종교 단체?시민권?이념?애착을 갖는 특별한 장소, 공산당 같은 이데올로기 집단 등 어떤 것이든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다른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때때로 한 공동체에 대한 그들의 책무가 다른 공동체에 대한 책무와 마찰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공동체의 본성에 대해서는 어떤 일반적인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김우창 : 공동체의 개념과 연관하여, 국가에 대해 한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국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생님의 소속감의 토대는 무엇입니까?

로티 : 저는 결국 우리 문명이 살아남는다면, 국가 같은 것이 없어질 것이고 커다란 세계 연방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 공동체의 시민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때까지 당분간 우리는 우리 국가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유일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자아 창조?고급 문화?대학의 기능



김우창 :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자아 창조 self-creation’의 개념을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개인의 삶의 기획은 그 실현을 위해서 사회적 공간을 가져야 합니다. 개인의 독특한 삶의 기획은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사회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서구 민주주의, 특히 자유주의적 이념의 한 측면입니다. 서구 민주주의 밖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자아 창조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한 사회가 이러한 관용성을 사회 질서의 합법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어떤 조건들이 필요할까요?

로티 : 자아 창조 또는 자아 계발은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의식적인 목표로서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유럽의 낭만주의 운동, 니체와 같은 인물, 실존주의, 그리고 후기 니체적인 철학 운동 등과 연관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지난 수세기의 서구 지성인들의 목표를 서술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아 창조가 인간의 삶의 이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저절로 생겨납니다. 봉건적인 교사?제도?사회에 대해 저항하고 세상을 계속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지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방가르드를 형성하며, 사회적으로도 유용합니다. 그들 자신의 자아 개념은 흔히 완전히 개인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이고 자아 창조적인 개인들의 존재는 사회적 이익을 가져옵니다.

김우창 : 자아 창조는 다수자보다는 소수에 해당되는 개념이군요. 하여튼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다른 조건들은 무엇입니까? 한국에서는 관용 tolerance의 폭이 좁습니다.
로티 : 그 질문에 대해 저는 만족스러울 정도의 심오한 답변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돈이 더 많을수록 사회는 더 많은 안정을 갖게 되고, 사람들에게 더 많은 여유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밖에는.

김우창 : 다시 자아 창조에 관해서입니다. 어떻게 해야 자아를 창조할 수 있습니까? 자아 창조 기획이 공적 영역의 참여에 대해 갖는 기능은 무엇입니까? 유교적인 자아 계발 개념에서는 또 대체로 개인의 형성 과정에 관한 전통적인 개념들에 의하면, 자아 창조는 개인적인 필요와 사회적 책무들을 융합시키는 성숙한 개인적 정체성을 갖는 것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독일어의 ‘Bildung’ 개념에도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적어도 사회적인 소명 앞에서는 개인적인 것은 양보해야 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에서 ‘체념’은 중요한 모티프의 하나로 지적되어왔습니다. 어쨌든 이용 가능한 사회에서 제공되는 물질적 수단과 문화적 자원들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서는 자아 창조가 가능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닙니다.

로티 : 진공으로부터 자아를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자라난 어떤 배경이든지 그것에 반응함으로써 자아를 창조해야만 합니다. 현재에 대한 반대 명제를 만들어내고 다시 종합하는 일종의 내적 과정이 존재한다고 말한 헤겔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김우창 : 서면으로 쓴 질문의 후반부에서 저는 선생님의 자아 창조 개념을 보다 전통적인
입장들, 예컨대 유교적인 자아 계발이나 독일어의 ‘Bildung’ 같은 것을 대조하려 했습니다. 개인적 성숙, 성실은 단순한 자기 도취보다는 사회적 책무의 수락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로티 : 니체나 하이데거가 그랬듯이, 서구의 지성인들은 전형적으로 자아 창조의 이념에 대단히 엄청난 것을 만들어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고귀한 인간과 사회주의’ 같은 예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경우는 사회적 책임과 니체적인 낭만주의적 야망의 훌륭한 종합이라고 생각됩니다. 낭만주의적이고 자아 창조적인 젊은이들은 저절로 좌파 정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흔합니다. 제가 정치를 떠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저는 정치와 개인적 문화 사이에 별로 큰 긴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우창 : 자기 계발 과정에서 문화 유산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예를 들면, 가다머의 문화 해석학은 전통의 재해석이 내적 삶의 발전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고급 문화는 독일 관념론의 경우 매우 특별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젊은이들의 문화와 달리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로티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국의 경험은 사회 개혁가의 경험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회를 번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고급 문화에 노출된 사람들입니다. 대학은 고급 문화를 가르칩니다. 고급 문화의 획득과 사회적 희망은, 뭐랄까, 학생 세대와 함께 갑니다. 저는 대학이 근본적으로 고급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대학은 저자들과 소설가들을 창출하는 일을 돕습니다. 대학은 좌파와 고급 문화를 위한 지성소입니다. 고급 문화와 사회 개혁은 서로 잘 어울려왔습니다.

김우창 : 고급 문화를 유지하는 데 대학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로티 : 그렇습니다.

김우창 : 그런데 이제 어떤 사람들은 그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티 : 세금을 지불하는 사람들의 돈이 유익한 시민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늘 말하고 있습니다. 대학은 항상 ‘아니다, 우리의 기능은 현재의 제도에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도를 상상해내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러한 생각에 저항해왔습니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계속되고 있는 싸움입니다.

김우창 : 어떤 사람들은 대학이 산업 발전의 기술 제공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고급 문화의 가치들을 보존하는 제도로서의 대학은 지금 그 명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로티 : 미국의 경우는 상황이 좀 나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립과 사립 대학, 그리고 대부분의 나라들에 비해 막강한 힘을 가진 교수들의 특이한 혼합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교수들은 많은 힘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교수들이 총장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면 조만간 그는 자리를 내놓아야 합니다. 우리에겐 교육부 같은 것이 없습니다. 대학 위에 군림하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행정부가 대학에게 가치 있는 어떤 사회적 역할을 요구한다 해도, 미국 대학들은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엄청난 독립성을 갖고 있습니다.

김우창 : 그렇지만 어떤 조정을 해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금을 제공하는 자본은 대학의 독립적인 제도와 기능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로티 :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자금을 제공하는 부자 보수파들은 어떻게 된 셈인지 대학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계속 노력은 해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급 문화는 자신을 보존해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대학은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사치품 같은 것처럼 취급됩니다. 스탠퍼드 같은 대학에서 모든 자금은 과학과 공학 계열에서 나오지만, 그들은 문학?철학?역사학과들을 후원합니다. 그런 종류의 고급 문화를 갖지 못할 경우, 결코 자유로운 대학이라고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얼마나 많은 극좌파와 인문학 학과들이 있든지 간에, 그들은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계속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난 200년 동안은 계속되어왔습니다.

김우창 : 흔히 사람들은 미국 실용주의가 고급 문화를 평가절하하고 파괴하는 데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기존의 문화의 중심으로서의 대학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들은 미국에서 이것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로티 :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듀이는 교육에 대해서 나쁜 책들을 썼고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의 교육을 악화시킨 책임도 있습니다. 그 반면에 듀이는 일종의 교수 자유 노조인 미국 대학교수협회 창설자 중 한 사람이었고, 그 기구는 고급 문화의 독립을 위한 매우 강력한 세력이 되어왔습니다. 대학에 직업 양성소의 사명을 준 것을 실용주의 철학과 연결짓는 것은 잘못된 연상에 불과합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하지요. 우리 대학의 새 총장은 실리콘 밸리 천재들 중 한 사람이고, 닌텐도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스탠퍼드를 하버드보다 더 좋은 학교로 만들려고 합니다. 실제로 과학 분야에서는 이미 하버드보다 낫지요. 그런데 향상시키기 어려운 유일한 분야는 고급 문화 관련 영역인 인문학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탠퍼드의 인문학 학과들을 위해 수억 불의 기금을 모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학교의 고급 문화가 그들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이런 것은 전형적으로 미국적인 발상입니다.



문학적인 문화



김우창 : 선생님은 문학적인 문화 literary culture가 종교와 철학의 구원적 기획들을 대체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경우 문학은 아무 종류의 문학이라도 괜찮습니까? 구원적이든 비구원적이든, 사회 기획으로서의 문학에 대해 어떤 규범적 기준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한 문학은 특별한 종류의 문학이어야만 할까요?

로티 : 어떤 종류의 문학이든지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낭만주의 운동 이래로 지식인들은 ‘시인이 세계의 이름 없는 입법자’라고 말했던 셸리에게 동의하면서, 시적 상상력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것이 만화든 TV 시리즈든 셰익스피어든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종교?철학, 또는 과학으로부터 얻게 될 유일한 진리 같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해, 그들은 어떤 존재인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의 운명은 어떠했는가,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말해주는 이야기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종교나 철학과는 대조적으로 ‘문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반드시 규범적인 교회 같은 것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에 관한 어떤 진리가 있다는 종교적 진리나 철학적 관념과는 달리 우리의 희망을 상상력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김우창 : 어떤 종류의 문학은 유익하기보다는 해악을 끼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티 : 아마 그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많은 종교들과 철학을 포함한, 거대한 문화의 선조들은 이로움보다는 해악을 더 많이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김우창 : 문학은 문학 자체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해석 공동체와 연관되어서 존재합니다. 이 공동체는 아무래도 어떤 기준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직접적으로 소통되는 문학도 있겠죠. 선생님이 생각하는 문학은 해석자의 매개가 없는 문학입니까?

로티 :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 사이에는 지속적인 상호 작용이 있어왔다고 생각합니다. 둘 사이에 명확한 경계를 그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만화?텔레비전 그리고 고전에 대해, 두 영역 사이에 어떤 경계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없이 양쪽을 오가며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고급 문화는 지속적으로 대중 문화 안으로 영입되었고, 대중 매체의 참신한 아이디어들은 많은 경우 고급 문화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따라서 대중 매체와 대학 사이의 상호 작용은 민주 사회만큼이나 좋은 것입니다.

김우창 : 해석자로서의 학자들의 공동체,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큰 준거 틀에 통합될 수 있는 이론적 합의들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로티 : 저는 그런 기획에 대해 의심합니다. 같은 이유로 통합적 메커니즘으로서 철학에 대해서도 의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론적 합의가 그 정도로 유익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능은 사물들을 재조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젊은이가 어떤 책에 매료되었을 때, 교수는 그 책에 대해 말해줄 수 있을 뿐입니다. 교수는 ‘그것은 좋은 책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다른 책들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맥락에 대해 여러 가지 제안을 해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김우창 : 훌륭한 안내자는 필요한 것이겠군요.

로티 : 그냥 훌륭한 독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김우창 : 그러면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은 프루스트를 성공적인 자아 창조의 뛰어난 사례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의 생애로 말한다면, 별로 행복한 삶을 산 것도 아니었고, 어떤 전기에 의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매우 비열하게 행동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뛰어난 예술 작품을 창조했을지는 몰라도, 자신을 보다 나은 사람으로 창조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의 창조가 아름다운 삶의 창조와 등가가 될 수 있을까요?

로티 : 프루스트의 경우, 니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작품과 생애는 서로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둘 다 비참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김우창 : 그렇다면 ‘자아 창조’란 잘못된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창조하는 것은 자아가 아니라, 자아 창조의 대체물이라면 몰라도, 작품이니까요.

로티 : 좋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아마도 ‘자아 창조’란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프루스트를 자아 창조의 모범 사례로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남긴 작품들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네하마스 Alexander Nehamas는 『니체: 문학으로서의 삶 Nietzsche: Life as Literature』의 첫 페이지에 “나는 그의 비참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짧은 선언을 싣고 있습니다. 그것은 훌륭한 태도처럼 보입니다.

김우창 : 그러한 작품의 창조와 달리, 자신의 삶을 다음 세대를 위한 패러다임으로 만드는 자아의 창조가 있을 수 있을까요?

로티 : 프루스트 소설의 끝에 가보면, 소설의 화자가 우리가 읽고 있던 것과 같은 책을 쓰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해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놀라운 전율을 느끼게 됩니다. ‘정말 그렇군’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루스트는 삶의 성공자입니다.

김우창 : 어떤 사람들은 작품의 창조로써 자신의 삶의 창조를 대체하는 것을 기이하다고 볼 것입니다.

로티 :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김우창 :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고요? 밖으로 보이는 업적이란 점에서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뛰어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로티 : 그러한 사람의 삶은 남을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그들은 훌륭한 보통의 삶을 삽니다. 그것도 좋은 삶이지요. 니체나 프루스트의 삶은 그러한 삶에 비하면 아주 우스꽝스러운 삶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대신 작품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희생에 대해 우리는 고마움을 느낍니다.

김우창 : 어떤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삶과 작품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로티 :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도덕적인 행운 moral luck에 대해 버나드 윌리엄스 Bernard Williams가 쓴 논문이 있습니다. 그는 고갱이 여러 가지 그릇된 일을 많이 했다고 말합니다. 고갱은 모든 책임들을 던져버렸지만, 운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림이 모든 것을 보상해주었던 거지요. 만약 그 그림들이 형편없었다면, 그의 삶은 구제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그림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김우창 : 그것이 불투명한 실존적 현실이긴 하지만, 문학적 또는 학문적 업적들이 실제의 삶보다 너무 크게 평가되는 것 같습니다.
로티 : 그럴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만일 제가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 훌륭한 사람과 프루스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프루스트가 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재서술과 다시 상상하기



김우창 : 비로소 철학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데요. 우리의 개인적 혹은 공동체적 삶을 기술하는 데 사용하는 어휘들을 수정하고 창안하는 재서술 re-description에 대해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사회의 도덕적?정치적, 그리고 과학적 노력들의 중요한 쟁점들이 서술과 재서술의 기획과 관련될 수 있습니까?

로티 : 제가 ‘재서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실재에 관한 진정한 진리를 발견한다는 생각과 그것을 대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문학이 철학을 대체한다고 말하는 한 가지 이유는,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서술을 발견하는 일이 실재나 진리에 이르는 일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그것이 대체하기 때문입니다. 실용주의적 견해는 무엇이 실재인가 현상인가 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특정한 목적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만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철학은 실재와 진리에 대해 주장을 하고자 합니다. 실용주의자는 어떤 책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부모나 배우자, 또는 자녀들과의 관계에 대해,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경우 저는 그것을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는 기획이라기보다는 ‘재서술의 기획’이라고 부릅니다.

김우창 : 모든 것이 하나의 언어 게임의 부분으로 간주된다고 해도, 이 게임은 권력과 부를 가진 국가들이 물질적?사회적 자원에 따라 수행하는 보다 큰 게임의 일부가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을 언어의 게임으로 돌리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하나의 연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언어 게임을 말할 때, 언어 행위는 실제 행위의 게임의 일부라는 시사가 아니겠습니까?

로티 : 어떤 출판사도 돈이나 권력에 관계없이 무엇인가를 재서술하는 책을 출판해주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동물로 재서술했던 다윈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어떤 특별한 비물질적인 실체로부터 산출된 동물로 생각하는 대신에, 점진적으로 여러 가지 것을 누적적으로 가지게 된 동물로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재서술은 온갖 종류의 매우 강력한 결과들을 낳습니다. 지대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것이 19세기 영국 중산층이 가졌던 의지와 힘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김우창 : 이론적인 저작들, 다윈의 『종의 기원』이나 플라톤의 『국가』 등은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념이 정치의 실제적인 상황에서 일어날 때, 문제는, 서술이나 재서술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분배에 관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론적인 저작의 경우에만 재서술은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닐까요?

로티 :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나 다른 소설들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그 책들이 정치적 운동을 인도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김우창 : 링컨의 연설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정치였나요 아니면 언어 게임이었습니까?

로티 : 양쪽으로 다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재서술하는 언어 게임으로 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은 미국에 대한 새로운 서술입니다. 미국이 어떤 나라였는지에 대한 그러한 서술이 갖는 수사학적인 힘은 미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데, 그것은 링컨이 대통령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재상상 re-imagine할 수 있는 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언어 사용은 재서술적이 아닙니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게임 안에서 규칙들을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재서술이란 새로운 게임을 제안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링컨은 그런 일을 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수행되었던 게임 안에서 움직였지만, 그는 또한 시적으로 국가에 대해 재서술했던 것입니다. 링컨, 루스벨트, 그리고 제퍼슨은 단순히 어떤 일들을 실행하는 것 이상의 일을 이룩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상상력을 변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김우창 : 다음 질문은 한국 상황에 관해 말씀하신 것에 관한 것입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현대 한국사의 특징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었고, 그것을 위해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었으며, 인명과 수난의 커다란 희생을 치렀습니다. 여러 저서에서 선생님은 민주주의는 우연적이지만 고유한 서구 역사의 발전의 결과로 존재하게 된 정치 체제이며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한국의 투쟁, 또는 서구 밖의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민주주의를 향한 희구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로티 : 가진 자들에 대한 갖지 못한 자들의 투쟁, 강자에 대한 약자의 투쟁은 보편적인 인간사라고 생각합니다. 서구는 그것과 특별한 연관성이 없습니다. 서구 역사와 전통의 우연한 발전이 수행한 유일한 역할은 여러 다른 사람들이 모방하고 싶을 수도 있는 제도들에 대해 암시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국가들이 미국 헌법을 여러 가지로 참조하고 있습니다. 서구가 알고 다른 곳에서는 모르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서구가 특정한 제도적 마련들에 대해 편리한 제안들을 갖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김우창 : 한국의 청중들이나 독자들에게 특별히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로티 : 한 가지를 말씀드리지요. 만일 제가 비-서구 국가에서 태어났고, 서구 세계가 어떤 유익한 일을 했는지 생각해본다면, 저는 우리 철학자들은 별로 유익한 일을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데카르트, 니체, 헤겔로 이어지는 서구 전통이라는 국지적 분파가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흥미로운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철학을 유럽적 사건에 대한 특수한 반응이고 국지적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제가 바깥에서 서구의 역사를 본다면, 그 위험을 모두가 직시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술을 제외할 때, 도대체 서구가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첫째는 입헌민주주의이고, 둘째는 아마도 소설일 것입니다. 서구에서 지난 200년 동안의 소설의 발전은 참으로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고대 세계는 소설을 갖지 못했고 18세기에는 소설이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1,800년이 지난 뒤에야 우리는 이 놀라운 종류의 문학을 갖게 되었고, 프랑스 혁명에 이어 입헌민주주의가 탄생했는데, 소설을 중심으로 한 문학 문화가 프랑스 혁명을 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종류의 문학에 비해, 서구 철학은, 우연히도 제 전문 영역이긴 합니다만, 저의 전문 분야인 철학이 보편적인 인간 관심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김우창 : 비-서구인으로서 한국인들은 헌정(憲政)을 튼튼히 하고 소설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군요.

로티 : 저는 한국인들에게 어떤 것도 제안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다만 제가 추측하기로는, 한 국가나 문화가 자신에 관한 소설을 더 많이 갖게 될 때, 상상력은 보다 풍부해지고 보다 더 자의식적이 될 거라고 봅니다. 이것은 유럽적인 생각의 핵심입니다.

김우창 : 마지막으로 한국 독자들을 위하여 선생님의 저서들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시는지 추천을 해주시겠습니까?

로티 : 제 책에 대해서 말입니까?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입니다. 특히 처음 세 장을 좋아합니다.

김우창 : 수고하셨습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_ 정리: 김혜련(연세대 강사) 김동식(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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