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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5/06 (07:32) from 217.95.27.227' of 217.95.27.227' Article Number :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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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위한 삶 -  삶을 위한 신학


신학을 위한 삶- 삶을 위한 신학

에벨링 / 정병식 역


Ein Leben fuer die Theologie - eine Theologie fuer das Leben

von Gerhard Ebeling



본인에게 수여되는 이 특별한 영광과 나를 부끄럽게 하는 내 삶의 노고에 대한 과찬의 말씀 및 1947년 10월 9일 이곳에 교수로 부임한 후 거의 정확히 50년이 지난 오늘 이곳 튀빙겐 강단에서 한 번 더 고별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I

'신학자란 존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즉 "신학을 위한 삶 - 삶을 위한 신학"이라는 말로 답하고 싶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것은 만약 신학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선택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인도인가? 누가 이것을 결정할 수 있는가?)이 결정적이었다면, 이 과제를 위해 -내가 그만두지 않는 한 - 나 자신의 삶을 헌신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곧 '신학을 위한 삶'(ein Leben fuer die Theologie)이다. 이렇게 산다는 것은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전 생애를 거기에 투자해야만 한다. 추상적이고, 무미건조하고 생명 없는 이론이 아닌, 삶이 필요로 하는 그 무엇인가를 관철시키고, 성취한다면 이러한 시도는 확실히 다행스러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이 곧 '삶을 위한 신학'(eine Theologie fuer das Leben)인 것이다.

내 자신이 걸어온 삶을 간단히 서술하자면, 베를린-스테글리츠(Berlin-Steglitz)에 있는 인문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는 엔지니어가 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어 평범하게 신학을 택하게 되었다. 부모의 영향이 없었던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학교에서 히브리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첫 학문지로서 마브룩(Marburg) 대학을 선택한 것은 그곳에 종교학자였던 프리드리히 하일러(Friedrich Heiler)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강의를 듣긴 했으나, 그 첫 학기에 이미 다른 두 개의 과목은 내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첫째는 불트만(Rudolf Bultmann)의 바울해석이었다. 그는 한 학기에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다루었고, 신학사전(불트만은 학기수가 높은 학생들에게만 수강을 허용했으나, 나는 그의 경고를 개의치 않고 수강했다)을 읽었다. 둘째는 그 당시 젊은 사강사요 목사였던 빌헬름 마우러(Wilhelm Maurer)가 농민전쟁에 대한 루터의 저서를 다룬 교회사 초급세미나였다. 여기서 나는 주어진 과제인 "루터의 제1계명 해석 논쟁"(Der Streit um Luthers Auslegung des ersten Gebots)을 특별히 상세히 다룰 수 있었다.

1930년 여름부터 시작된 '신학을 위한 내 삶'은 세 개의 주요 국면으로 나눌 수 있다. 전쟁이 끝나는 1945년까지의 첫15년은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해야만 했다. 마브룩(Marburg), 쮜리히(Zuerich), 그리고 베를린(Berlin)에서 공부를 했고, 1935년 고백교회가 주관하는 시험으로 마무리를 짓고, 크로센(Crossen an der Oder)과 페어벨린의 릭 귄터 하르더(Lic. Guenther Harder)에서 전도사로 사역했다. 본인의 뜻에 따라서 할 수 있는 설교세미나는 핑켄발데(Finkenwalde)에서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에게 배울 수 있었다. 그의 격려와 베를린-브란덴부르크 형제회의 강력한 권고로 쮜리히에서 박사과정을 했다. 그로 인하여 브란덴부르크 형제회에서 전임연구원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베를린 북부의 난민교회의 목사로서 목회를 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 헤름스도르프(Hermsdorf)에서는 이웃 동네 프로나우(Frohnau)에 있는 고백교회의 신자를 함께 돌봐주어야만 했다. 칼 바르트(Karl Barth)에게서는 배우지 못했지만, 그러나 첫 방학때 로마서에 대한 그의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내가 처음 그를 직접 대면하고 그의 강의를 듣게 된 것은 1933년 10월 30일 베를린의 싱아카데미(Singakademie)에서 "종교개혁 - 중대한 결정"(Reformation als Entscheidung)이라는 제하에 행한 그의 긴급한 강연에서였다. 쮜리히에 있을 당시인 1937년과 1938년 나는 두 번이나 바젤에 있는 그를 방문했고 그와 개인적으로 만남을 가졌다. 전쟁 중 베를린에 주둔한 군에서 4년 이상을 복무했고, 제대를 앞두고, 일시적이긴 했으나, 1945년 4월 20일 부대가 소련군의 점령과 적기의 공습으로 거의 불에 타버린 도시를 떠나 쉬레스빅-홀스타인(Schleswig- Holstein)으로 이전하기까지 계속해서 교회를 보살필 수 있는 기회도 허용되었다. 그곳에서 전쟁은 끝이 났고, 기적과도 같은 인도하심으로 튀빙겐(Tuebingen)에 가게 되었다.

신학을 위한 내 삶의 두 번째 국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비록 10년의 세월이었지만, 그것은 정말 중요한 연결부분이 되었다. 지나치게 다양하고 복잡하다고 해서 지나온 과거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듯 하다. 이 모든 것은 신학을 위해 희생해야 할 삶을 위한 기초석을 놓는데 상호간에 큰 기여를 했다. 거기에는 결코 학업과 박사과정만이 아니라, 고백교회의 투쟁과 목회, 전쟁과 재난을 초래한 잘못된 정부하에서의 여러 가지 모순되는 상황들도 속한다. 나의 생애에 일어난 전환은 두 가지 점에서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나는 학업을 위해서 결코 목회를 그만두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인에 의하여 상황은 그렇게 변하여 갔고, 나는 어쩔 수 없이 허용해야만 했다. 또 하나는 신학의 정도에 도달키 위해서는 역사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조직신학에 대한 매력을 물리치고 교회사로 결정하게된 것이다. 차후에 학과를 바꿀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나는 숙고하지 않았다.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가 자신의 후임교수자리를 맡아 달라고 학과를 통해 나에게 요청했을 때, 그로 인하여 나에게 지워질 부담을 알기에 약간은 주저하듯이 응답하였다. 교리신학(Dogmatische Theologie)이라는 새로운 땅에 들어간 직후 곧 튀빙겐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국면은 나에게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그의 파장에 대하여 나는 정말로 튀빙겐에 감사한다.

프리드리히 고가르텐(Friedrich Gogarten)의 후임자로서 괴팅겐(Goettingen) 대학으로의 부임은 학문적 환경의 변화가 전공변경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점에 대하여 숙고하게 해주었다. 하노버에서의 힘든 시절 후, 놀라우리만치 빠르게 쮜리히 대학이 나를 요청했다. 비록 차후에 재차 튀빙겐에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1965-1968년까지 임시직 전임교수로 결국 그곳에서 활동했다. 이곳 저곳으로의 잣은 임지변경을 여기서 언급한 것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튀빙겐과의 인연을 그것이 강조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나는 뛰어난 학자들, 특별히 한스 뤼커트(Hans Rueckert), 에른스트 푹스(Ernst Fuchs), 에른스트 쾨제만(Ernst Kaesemann), 그리고 학창시절부터 알게된 베르너 예터(Werner Jetter)와 깊은 교분을 나눌 수 있었고, 더 나아가서 튀빙겐에 소재한 마틴 루터 전집 출판위원회에 회원가입과 1947년 이후로 깊은 연관을 맺은 출판사 모어 지벡(Mohr-Siebeck)과의 인연 덕택에 그 후 곧 책임자가 되었다. 정년퇴임 후에도 1979/80년 겨울학기에 튀빙겐에서 초청세미나를 개설해 주었고, 본인과의 좋은 이러한 관계에 대하여, 만약 이렇게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고향대학'(Heimatuniversitaet)이라고 부르고 싶다. 쮜리히(Z rich)로의 부임은 60년대 말 학생혁명을 통해 약화된 요구들과 교수로서 나에게 부여된 의무수업시간의 감소 때문에 내가 기대를 건 좋은 연구조건이 결정적 동기였다. 쮜리히에서 나는 튀빙겐에서 시작한 것들을 가능한 한 좀 더 상세히 다루는 작업을 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교의학'(Dogmatik des christlichen Glaubens)이다. 네학기 동안의 강의가 모두 유감스럽게도 근본신학(die Fundamental- theologie)에 관한 것이었으며, 윤리는 첫 부분에만 약간 들어 있을 뿐이다. 루터 연구에 관한 한, 그의 인간론(De homine) 비평과 말년에 병고 가운데서 목회상담적인 관점에서 쓴 그의 서신에 대한 책을 썼다.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어쨌든 읽혀지겠지만, 대부분은 먼지가 쑤북히 쌓인 채 책장을 메울 책의 모양으로 나온 저작들, 이것들이 신학을 위한 삶의 척도인가? 한 신학자의 삶이 그가 지은 저술들로부터 평가받는 것이 정말 타당한가?! 이 문제의 중심개념을 우리는 이제 좀 더 상세히 고찰해보아야 한다. 도대체 '신학'(Theologie)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학을 위한 삶'(Leben fuer die Theologie)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삶을 위한 신학'(Theologie fuer das Leben)과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II

먼저, '신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은 '신학자'와 '신학적'이라는 파생어와 더불어 성서적 근원을 가진 말은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 이교문화에서 파생되었으며 신비적이고 제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하여 비판적인 논쟁에서 가끔 철학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리고 희랍교부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기독교적 언어 구조내에 도입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러한 단어들의 인문학적인 활용은 철학 및 철학적 특징과의 구분을 위한 전적으로 기독교적인 요청에 의한 것이며 라틴적인 스콜라전성기의 작품이다. 가장 현저한 이 어휘의 발전은 16세기에 이루어졌다.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신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해가 불신에 빠졌다. 쯔빙글리(Zwingli)나 칼빈(Calvin)도 이러한 개념과 그 파생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신학이라는 말 대신에 어거스틴이 사용한 '기독교 교리'(doctrina christiana)가 사용되거나 또는 '주석'(commentarius) 또는 '강요'(institutio)와 같은 중립적이면서도 문학적인 용어가 '종교'(Religion)라는 일반개념과 결합되어 쓰이기고 했지만, '기독교적'(christlich)이라는 부가어를 통해 또는 참된 혹은 거짓된 종교(religio vera et falsa)라는 반제를 통해 정체를 표시했다(identifiziert). 그렇지만 이러한 쓰임들은 그리 놀라운 것이 되지 못한다. 경탄은 오히려 루터의 구분에 있다. 신학(theologia), 신학자(theologus), 그리고 신학적(theologicus)이라는 전통적 어휘에 대한 그의 단호한 태도는 급진적인 새해석으로 이어져서 철학적 환경에서 벗어나 깊은 성서적 사고에 도달하게 된다. 1509년 인문학도로서 신학의 본 수업을 시작하기 위해 에어푸르트(Erfurt)에서 잠시 비텐베르그로 옮겼을 때, 한 편지에서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확 털어놓고 있다. 그는 철학수업의 강제성을 한탄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것을 신학으로 바꾸었다면 가장 좋았을텐데. 물론 이것은 좀 더 편한 것을 택하기 위함이 아니요, 신학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철학공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촉진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호두의 핵에 도달하고, 밀의 중심과 골심에 도달하는데 그로인하여 방해를 받는다. 이 말은 본시 살아있으며, 생명을 주고, 그 안에 양식을 주는 자에게 진정으로 도달하는데 어렵게 된다는 뜻이다. 종교개혁 신학의 첫 흔적이 알려지기 전, 참된 신학에 대한 갈급함이 루터에게 나타났다. 신학, 신학자, 신학적이라는 일련의 단어들은 이제 성서적 진리 인식의 담지자가 되었고, 루터전후의 역사에서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그에 의해 집중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형용사적인, 최상급적인, 그리고 부사적인 많은 사용들이다. 1518년 멜란히톤(Melanchton)이 비텐베르그(Wittenberg)에 왔을 때 새로운 신학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전투는 이미 끝났다. 그의 학술적 단계(학교경력)에 의하면 멜란히톤은 완전한 신학자는 아니었다. 그 역시 결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완전한 신학자였다. 그에 의하면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신학자이며, 게다가 멜란히톤처럼 기독교 신앙의 기본진리들을 분명하고 간략하게 진술할 수 있다면 더욱 그렇다. '신학'에 대한 단순한 언급이 한 사람을 신학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어휘들을 피했던 멜란히톤과 그 어휘에 충실했던 루터 사이에 극단적인 이러한 차이는 그들 사이에 깊은 차이점을 추측케 하지만, 이 논고에서 나는 그것을 다룰 수는 없다. 우리가 제기한 문제에 충실해서 루터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를 주로 생각하고자 한다.

III

루터적인 의미에서 '신학을 위한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글의 서두에 간략한 나의 이력에 대한 전기적 설명은 이것과는 단지 피상적인 관계만를 가지고 있다. 내 자신의 신학적 삶에 대한 주지들은 신학자라는 존재가 마치 부단한 정진과 열심, 아니 오히려 명예에 대한 욕망과 헛된 자기선전으로 되는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다. '무엇이 한 신학자를 (참된) 신학자가 되게 하는가?'라는 질문은 엄격한 정의를 요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신학자가 수행하고 성취하는 일을 통해서 답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진실로 신학자 일 수 있고, 그에 상응해서 살 수 있다는 그 전제가 무엇인가를 통해 답변되는 것이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가?'라는 질문처럼, 이것은 '무엇을 위해 그가 몰두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그가 존재하는가'라는 것과 관계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신학이 구체적인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추상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것은 삶을 신학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이라는 대상을 위해 전심을 다하는 것 이상의 의미이다. 이것은 삶 자체의 희생까지도, 심지어 신학을 위해 죽음까지도 요구할 수 있다. 루터의 삶은 잘 알다시피 이러한 극적인 경우에 가까웠다. 그는 신학 때문에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을 위한 삶'이라는 표어에 절대적으로 잘 어울린다. 이것은 신학을 위해 그가 해낸 측량할 수 없는 수많은 업적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 - 곧 절망과 영적시련과 흑암이 루터의 삶에 결여되지 않았다- 에 까지 이르는 삶 그 자체와 관련해서이다. 이제서야 신학을 위한 삶이 도대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루터 자신도 그것을 '경험이 신학자를 만든다'(experientia facit theologum)라는 공식에 적용했다. 여기서도 우선 생길 수 있는 오해를 막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응답, 감지할 수 있는 위로나 강한 확신같은 내적체험, 소원이나 희망하는 바의 명백한 성취를 통한 믿는 바의 확신과 같은 경건한 경험을 루터가 생각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것도 루터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요, 어느 정도는 연약한 신앙에 대한 용인으로서이다. 경험이 신학자를 만든다는 것은 신앙과 경험의 끊임없는 갈등속에서 모든 경험에 상관없이(contra omnem experientiam) 믿는 것이 중요함을 목표하는 것이다. 신학을 위한 삶은 이렇게 말한다. 즉 우리는 삶이 가져오고, 우리가 취하는 일체의 것에 대하여 깨어 있어야 하며, 모순되게 나타나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우리를 신앙으로 요구하는지 깨어 있어야 한다. 물론 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에게 약속되었으며, 비록 우리가 정말로 인정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많은 적든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이 전제되었다.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해야하는 공명판인 우리 삶이며, 말씀이 없다면 삶은 벙어리로 머물것이다. 잘 알다시피, 하나님은 벙어리가 아니요, 우리가 귀머거리이다. 우리 삶이 우리 자신에게 가까이 있듯이, 공명판도 항상 거기 존재한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우리 삶은 고갈되지 않는 신학의 수원지이다. 이것은 그러나 우리가 좋고 나쁜 우리의 모든 삶의 경험에서 사색하듯 신학을 꾸며낼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실천적인 것을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으로 루터는 우리의 행위와 관련되기는 하나, 밤낮으로 우리에게 일어나고, 우리를 엄습하는 것과 연관하여 삶의 방향제시를 꾀하고 있다. 즉 우리가 행하였거나 포기한 것들로 인해 우리가 겪는 후회, 미래에 대한 염려 그리고 삶과 죽음을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심등이다. 신학은 루터에게 사색적 학문(scientia speculativa)이 아니라, 언급했듯이 삶과 연관된 신학(eine lebenbezogene Theologie), 즉 실천적 신학(theologia practica)이다.

IV

그렇다면 '삶을 위한 신학'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신학을 위한 삶'에서 '삶을 위한 신학'이라는 순서의 전환은 아마도 삶보다 교리가 우선임에 틀림없다는 의심을 준다. 그렇게 된다면 율법에 삶을 종속시키는 정통주의 신앙의 유령이 다시 위협하는 것이다. 흐트러진 삶은 질서를 유지하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엄격한 율법을 요한다. 그 때문에 종교란 어느면에 있어서는 율법으로 나타나고, 거기에 삶을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신학이 하나의 종교적 교리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율법으로서 삶을 위한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서 루터는 진정으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Unterscheiden-Koennen)이 참으로 신학자가 되게 한다고 강조한다. 어떤 점에서의 분별인가? 스콜라에서 분별(Distinktionen)은 상반되는 것을 해결하는 논리적인 보조수단으로서 혹은 본성과 은총의 구분처럼 단계적인 것에 대한 구분으로서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 루터는 신학을 위해서 정말 중요한 구분들을 가장 먼저 상기시켜야 하며, 현재화 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물(Dingen)과 속성(Eigenschaften), 본체(Substanzen)와 우연(Akzidentien)의 구분이 아니라, 다양한 요청(Instanzen)과 그에 대해 상반되는 판단의 구분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사실 수시로 변하거나 또는 항상 동일한 많은 판단요청에 내맡겨져 있다. 후자에 있어서 두가지 요청은 -협력적이면서 그리고 적대적인- 하나님의 요청과 세상의 요청(Gott und der Welt)이다. 우리의 지각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언제나 이중의 상반성, 이중의 장(Foren)앞에서 산다. 즉 하나님 앞(coram Deo)과 세상 앞(coram Mundo)이다. 그 때문에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분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과 그들의 말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아주 중요하다. 그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며, 누구에게 속해야 하는지 물으면서 인간은 그 사이에 서 있는 것이다. 올바른 분별에 대한 요구는 누가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며, 그러나 누가 신학적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는지를 알게 해준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한, 율법과 복음의 구분이 중요하며, 게다가 경우에 따라서 어떤 상황이 복음을 전해야 할 때이며, 혹은 율법을 전해야 할 때인지의 분별이 중요하다. 확실히 이러한 신학은 경직된 교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올바른 이해와 올바른 사용이며 끊임없는 삶과의 접촉 속에 있고, 삶을 변화시키며, 참회토록 인도하고, 용서의 위로를 얻게 하며, 양심을 떨게하고, 확신을 선사하며, 매고 푸는 것이요, 죽이고 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이 선포와 목회에 그 본래 장소가 있음을 알게 해준다. 비록 학문적으로 시도하는 신학과 복음을 선포하며 이루어진 신학사이에 차이점을 강조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밀접한 연관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둘 다 상처를 피할 수 없다. 비교컨데 의학(Medizen)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을 다룬다는 근본적인 점에서 여기와 거기(hier und dort)의 차이밖에 없다. 의학에서는 한계를 가진 생명의 유지와 한시적인 삶의 연장이 관건이요, 신학에서는 동일한 인간의 이 세상에 현재함과 동시에 영생에의 참여가 관건이다.

'삶을 위한 신학'은 더 나아가서 죽음이후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것 이상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지금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고 있다는 말씀을 다룬다. 그것은 우리의 가난하고(비록 부유하게 느낀다고 할지라도) 피조된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삶을 위한 신학'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말씀을 다룬다. 이러한 말씀은 의미 없는 문장도, 단지 반복하여 사용하는 하나의 공식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모양으로 가지고 있으며, 흔히 말하듯, 필요할 때마다 내적으로 준비하기 위하여, 외울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해석능력이 있는 말씀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공식처럼 경직되지 않도록 해석이 필요한 말씀도 있다. 다른 말로 적용해보자. 즉 말씀은 우리 삶 안에서 스스로 해석되어지고 이로서 우리 삶의 해석이 된다. 살아있는 말로 생명을 주고 언제나 새롭게 답변되어 진다. 그것은 믿어질 것이며, 당신과 하나가 되고, 당신은 말씀과 하나가 될 것이다. 당신이 믿는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루터는 말한다.

V

주제의 전개가 충분히 진척되지 못했고, 한 강의에 부여된 시간을 고려할 때 몇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맺고자 한다. 나의 스승인 프리츠 블랑케(Fritz Blanke)가 가끔 사용했던 자유가 나에게도 있다. 그는 강의를 이미 늦게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청중가운데 섰고, 준비한 자료를 가지고는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기에 일찍 끝내기도 했다. 그는 본받고 싶도록 신중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이 강연을 들으시는 여러분도 그의 강의에서 내가 느끼는 바와 같은 비슷한 것을 느낄 수도 있다. 주제가 간단하게 들릴수록 그에 대한 숙고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때때로 나는 어느 한 사람이 내가 말하게 될 것에 대하여 내게 물어올 때에는 즉시 답변해야 하는 곤경 속에 빠지기도 한다. 삶과 신학, 신학과 삶 - 이 두 개의 핵심단어가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이 어떻게 상호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는 떠오르는 그 다양한 연관성 때문에 다시금 혼란에 빠지게 된다. 둘 다 '...을 위한'이라는 전치사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면 간단할 듯도 하다. 즉 '신학을 위한 삶', '삶을 위한 신학'. 그러나 만약 삶과 신학이 어떻게 서로를 위해 상호작용하는지 이해하고자 하고 설명하고자 한다면, 비틀거리며 더듬거려야 하는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이제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새로운 논지를 전개하지는 않고자 한다. 이것을 더 상세히 연구 하고자 한다면, 더 많은 것을 캐물어야 하며, 호두의 핵, 성서의 골수로 더 깊이 들어가야만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앙의 시작자요 완성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요,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언급하는 것이다. 역사적이고 교의학적인 다양한 질문들도 허용해야 하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많은 이해의 문제 역시 피해갈 수 없다. 왜냐하면 삶과 신학은 서로를 위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이 어떻게 함께 공명되고 일치될 수 있는지 깊이 숙고했을 때, 나로 하여금 이렇게 기도하게 했다. "주여,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주시고 약속하셨던, 신학을 위해 열려져 있는 삶을, 그리고 삶을 위해 도움이 되는 신학을 선사하소서. 아멘."




이글은 게어하르트 에벨링이 1997년 12월 10일 튀빙겐 대학의 명예교수(Dr.h.c)로 위촉되면서 행한 초청강연이다.

Zeitschrift fuer Theologie und Kirche. 95Jahrgang. Heft 1 Maerz 1998 (Tuebingen: Mohr Siebeck 1998), 158-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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