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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5/08 (08:08) from 80.139.168.169' of 80.139.168.169' Article Number :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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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명(proper names)'에 관한 러셀과 프레게 이론의 비교
'고유명(proper names)'에 관한 러셀과 프레게 이론의 비교

남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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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고유명에 관한 러셀과 프레게 철학의 비교를 목적으로 한다. 우리는 언어로 세계를 기술하고 사태들을 설명한다. 이때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 사태들을 나타내기 위해서 고유명을 사용한다. 오랜동안 많은 철학자들은 고유명을 언어와 대상세계의 연결 통로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사실 고유명에 대해 정의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고유명(proper names)'은 명제 속에서 오직 주어로만 역할 할 수 있는 명사들이라 정의해야 한다. 즉, 그것들은 개별자를 가리키는데, 개별자란 진술에 관여하거나, 또는 진술 속에서 주장된 술어나 관계가 주장되는 주체이다. 예를 들어 '스코트', '엘리자베스 윈저', '버트란드 러셀' 등은 모두 단순 기호이고 따라서 이름이다. 또한 개별자처럼 보이는 어떤 사물들은 실제로는 그 이상으로 분석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러셀은 개별자같이 보이는 사물은 진정하게 개별자로, 그리고 고유명같이 보이는 약간의 것들을 진정하게 고유명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논문의 제 Ⅱ장은 일반적인 고유명에 관한 고찰이다. 이 장에서는 고유명이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하는 입장과 지시대상만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다루고 있다. 전자는 고유명의 의미를 확정기술들과 밀접하게 관련시키고 있고, 후자는 고유명과 확정기술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제 Ⅲ장에서는 고유명이 순수하게 지시하는 이름이라는 견해와 그것이 기술로 동화된 이름이라는 견해를 고찰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크맆키와 칲, 그리고 버그와 데이비슨의 이론을 다룬다. 이 논문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제Ⅳ장에서는 러셀과 프레게의 이론을 다룬다. 프레게와 러셀의 이론은 고유명에 관한 수수께끼들을 다루는 방법이 표면적으로 유사하게 보이기 때문에 종종 동일시되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견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본문은 그들의 차이점에 관해 상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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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야 : 분석철학
주 제 어 : 기술이론, 고유명, 러셀, 프레게

Ⅰ. 서 론


우리는 언어로 세계를 기술하고 사태들을 설명한다. 이때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 사태들을 나타내기 위해서 고유명을 사용한다. 오랜동안 많은 철학자들은 고유명을 언어와 대상세계의 연결 통로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사실 고유명에 대해 정의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러셀은 이름을 단순한 것이든지 또는 단순한 것으로 취급되어야 하는 기호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개별자(indivisuals)나 특수자(particulars)를 고유명으로 이름될 수 있는 대상으로 정의해야 한다. 또한 '고유명(proper names)'은 명제 속에서 오직 주어로만 역할 할 수 있는 명사들이라 정의해야 한다. 즉, 그것들은 개별자를 가리키는데, 개별자란 진술에 관여하거나, 또는 진술 속에서 주장된 술어나 관계(relation)가 주장되는 주체이다. 예를 들어 '스코트', '엘리자베스 윈저', '버트란드 러셀' 등은 모두 단순 기호이고 따라서 이름이다. 또한 개별자처럼 보이는 어떤 사물들은 실제로는 그 이상으로 분석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러셀은 개별자같이 보이는 사물은 진정하게 개별자로, 그리고 고유명같이 보이는 약간의 것들을 진정하게 고유명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 논문은 러셀과 프레게의 고유명에 관한 견해를 비교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제Ⅱ장에서는 고유명의 일반적인 고찰을 하겠고, 제Ⅲ장은 러셀과 프레게의 비교, 제Ⅳ장은 다른 철학자들의 견해에 관해서, 그리고 제Ⅴ장 결론으로 끝맺으려 한다.


Ⅱ. 고유명에 관한 일반적 고찰


전통이론에서는 고유명은 확정기술과 밀접하게 관련 맺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고유명의 의미는 확정기술의 의미와 동일시된다. 고유명의 자격은 플라톤 이후 많은 철학자들에게 문제가 되어왔다. 낱말의 의미는 우리가 발견해내는 자연적 속성이 아니고, 어떤 낱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도록 하자고 동의하는 사람들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다.

낱말은 일반적으로 두 측면을 가지는데 내포와 외연이다. 한 낱말의 내포는, 어떤 대상이 그 낱말의 외연에 속하기 위해 반드시 지녀야하는 성질들이며, 그 낱말의 외연은 그 낱말이 적용되는 사물의 집합이다. 예를 들어, '빨강'과 같은 형용사와 '책상'과 같은 보통명사들은 의미(sense or meaning)를 가진다. 그리고 그런 형용사나 보통명사는 '그(the) 빨간 꽃'이나 '그(the) 책상'과 같은 확정기술에 적용될 수 있고, 그런 확정기술 역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나 '서울'과 같은 고유명들은 어떨까? 즉, 고유명도 형용사나 보통 명사 그리고 확정 기술이 의미를 가지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미를 가질까? 철학사에서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은 낱말들이 세계와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가하는 일반적 물음에 대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고유명이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유명의 의미를 확정기술과 밀접하게 관련시킨다. 그러나 고유명이 지시대상만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유명과 확정기술을 엄격히 구분한다. 이때 고유명과 확정기술을 구분하여 고유명이 지시대상만을 가진다고 주장한다면, 고유명은 어떤 방식으로 지시대상을 갖는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러셀과 콰인은 고유명이 어떤 확정기술의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그래서 고유명과 확정기술의 차이점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데, 일상적으로는 그 구별이 어렵지 않으나 때에 따라서는 어느 쪽에 속하는지 분명치 않은 표현도 있다. 이같은 문제점을 고찰하기에 앞서 고유명과 확정기술의 차이점을 간단히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 '아리스토텔레스'는 고유명이다. 그리고 '웨이벨리의 저자'나 '그 책상 위의 책'등은 확정기술이다. 그렇다면 '영국 은행(the Bank of England)'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것은 확정기술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고유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국에 있는 은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 은행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유명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한편, 단일 명사는 보통 자연 언어에서의 고유명에 형식적으로 대응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변수의 적용 범위에 있는 각각의 구체적인 개별자가 단일 명사의 형식적인 해석이 되며 자연 언어에서는 각 개별적인 사람을 대변하는 고유명이 단일 명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게된다.

따라서 양화 기호의 경우에는 그것의 가장 적절한 형식적 해석이 무엇일지가 주 논쟁점이지만 단일 명사의 경우에는 그것의 자연 언어적 '유사물'에 대한 이해가 주요 문제가 된다. 순전히 지시적인 언어에 있어서 고유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견해가 다르면 전적으로 지시적인 것만은 아닌, 예를 들어 양상적인 논리에서는 단일 명사가 형식적으로 어떻게 해석될 것인지에 대한 문제도 달라진다. 정확히 고유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표현이 진정한 고유명일까? 예를 들어 '페가수스', '홍길동'과 같은 신화적이거나 허구적인 것에 대한 이름도 고유명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러한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non-denoting)'이름을 포함한 문장의 진리치는 어떻게 되는가? 특히 '페가수스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부정적인 존재 문장은 직관적으로는 참인데 이 점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만일 이름의 역할이 순수하게, 그리고 단순히 어떤 개별자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참인 동일 명제가 어떻게 새로운 정보를 줄 수가 있으며, 또 어떤 이름을 그것이 지시하는 동일한 이름을 지시하는 다른 이름으로 바꾸면 그 문장의 진리치가 변할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왜 그런가?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고유명의 지시대상뿐만 아니라 의미도 가지는가에 관해서이고, 또 만일 가진다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에 관해서이다.

한편, 고유명에 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그 하나는 고유명이 순수하게 지시하는 이름이라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기술로 동화된 이름이라는 견해이다. 다음 장에서는 그 두 가지를 차례로 논의하려 한다.



Ⅲ. 순수하게 지시하는 이름과 기술로 동화된 이름


우리가 먼저 고찰할 것은 고유명이 순수하게 지시하는 이름이라는 견해이다. 이것은 고유명이 확정기술과는 달리 단순한 부호(label)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인데, 이 견해에 의하면 고유명은 단순히 사람이나 장소 또는 사물을 지시할 뿐이다. 그러나 칲(Ziff)은 고유명에는 의미가 없고 이런 뜻에서 언어의 일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고유명은 '고정 지시사(rigid designator)', 즉 모든 가능 세계에서 동일한 것을 지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가능 세계에서 동일한 개별자를 지시하지만, 그러나 '플라톤의 제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 세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시하지만 다른 가능 세계에서는 다른 개별자를 지시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고유명은 단순히 어떤 개별자만을 지시한다. 고유명은 개별자를 기술하지 않기 때문에 그 개별자가 이러저러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바로 그 개별자라는 사실만으로 지시된다. 따라서 고유명이 지시하는 개별자가 현실적인 그 개별자와 다르다 할지라도, 그 고유명은 여전히 그 개별자를 지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바로 고유명이 모든 가능 세계에서 동일한 개별자를 지시한다는 크맆키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크맆키는 고유명의 지시대상은 확정기술에 의하여 고정 될 수 있다는 점, 즉 이 세계에서 어떤 확정기술에 해당되는 지시대상을 지시하기 위하여 이름이 도입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확정기술이 이름의 의미가 된다는 점에 는 부정적이다. 예를 들어 'Fido'라는 이름의 지시대상이 선원이 된 최초의 개라고 고정될 수는 있지만 실제로 Fido가 최초로 선원이 된 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가능 세계에서는 '최초로 선원이 된 개'는 다른 개를 지시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Fido'는 여전히 , 즉 이 세계에서 최초로 선원이 된 개를 지시한다.

그런데 '페인만(Feynman)'에 관해서는 어떨까? 예를 들어, 페인만(Feynman)이 물리학자라는 기술을 모른다면 어떻게 그 이름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을까? 크맆키에 의하면 이름의 사용과 최초의 '세례'에서 그 이름이 주어진 개별자를 연결시켜주는 적합한 전달체계가 있을 때 그 이름은 바르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유아가 태어나서 그의 부모로부터 이름을 받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물리학자가 되어 이런저런 글도 쓰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글을 읽고 그에 관하여 쓰기도 하고 말하기도 한다. 이럴 때 '페인만'은 바르게 사용되며 이러한 바른 사용은 페인만 자신에게로 소급되는 전달체계에 적합한 방식으로 인과적으로 연결되게 된다. 물론 문자 그대로의 최초의 세례가 꼭 있을 필요는 없다. 또 전달 체계가 '줄리어스 시이저'의 경우와 같이 매우 긴 것일 수도 있다. 크맆키도 잘 알고 있듯이, 적합한 방식으로 인과적으로 연결된다는 말은 더 충분히 설명되어야 한다. 그는 이에 대하여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인과적 설명에 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기로 한다.

크맆키의 설명에서 어용론적 요소와 의미론적 요소간의 연관성은, 이름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그의 기준이 지시된 개별자에 관한 지식이나 믿음과는 상관없이, 이름의 사용이 개별자와 적절한 방식으로 인과적으로 연결되기만을 요구한다. 이 점에서 이름은 대상을 지시할 뿐 기술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론적 요소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크맆키는 만일 이름의 지시대상이 확정기술에 의해서도 고정될 수 있다면 의미론적 설명과 어용론적 설명간에는 틈이 생긴다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어떤 고유명의 지시대상을 모른다 하더라도 실제로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 확정기술에 의하여 고정된다면, 여기에서는 이름의 사용과 이름의 담지자 사이에 적합한 인과적 연쇄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유명이 고정 지시사이기 때문에 'a=b'의 형식을 가진 참인 모든 동일명제는 필연적이다. 만일 'a'와 'b'가 이름이고, 'a=b'가 참이라면, 그래서 'a'와 'b'가 현실 세계에서 동일한 개별자를 지시한다면, 두 이름이 모두 고정 지시사여서 모든 가능 세계에서 동일한 개별자를 지시하므로 'a=b'는 모든 가능 세계에서 참이다. 즉 필연적으로 참이 된다.1)

다음으로 고찰할 것은 고유명이 기술과 동화된 이름이라는 견해이다. 프레게가 의미와 지시대상을 구별하여 고유명이 지시대상뿐만 아니라 의미도 가진다고 논의한 것은 바로 이 동일명제의 문제 때문이었다. 만일 a가 b라면 어떻게 'a=b'가 인식적인 측면에서 'a=a'와 다를 수 있을까? 만일 a가 b라면 'a'의 지시대상은 'b'의 지시대상과 동일하지만 'a'의 의미와 'b'의 의미는 다르기 때문에 'a=b'와 'a=a'는 인식의 측면에서는 서로 다른 것이다.2)

프레게는 'a=b'라는 형식의 진술이 우리에게 어떤 정보를 줄 수 있다는 것은 'a'와 'b'의 의미의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름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참인 모든 동일 명제는 필연적이라고 보는 크맆키는 이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a=b'형식의 진술이 필연적이라 할지라도, 모든 필연적인 진술이 모두 선험적(a priori)으로 알려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저녁에 관찰된 어떤 별을 '저녁 별'라 이름짓고, 또 아침에 관찰된 어떤 별을 '아침 별'이라 이름짓는다면 두 이름은 모두 동일한 행성인 금성을 지시하는 고정 지시사이다. 그러나 천문학자들은 두 이름이 동일한 행성을 지시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지 선험적으로 안 것은 아니다. 크맆키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명제에 대해서 만일 그것이 참이면 필연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말로 참인지를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프레게는 고유명이 지시대상뿐만 아니라 의미도 가진다고 주장한다. '고유명'은 일상적인 이름을 의미하기도 하고 확정기술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오딧세이'와 같이 현실적인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 이름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름이란 일정한 대상을 지시하는 표현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일상적 이름의 의미를 그 이름에 해당되는 대상을 지시하는 확정기술의 의미와 동일한 것으로 보았고, 또한 어떤 표현의 의미와 그 표현에 연관되어 가지는 우리의 관념(idea)을 동일시하는 것을 비판한다.

한편 러셀은 <논리적 고유명(logically proper name)>이라는 특수 범주를 구분한다. 그는 고유명을 일상적 고유명과 논리적 고유명으로 구분하는데, 논리적 고유명이란 단순대상을 순수하게 지시하지만 그 지시된 대상이 그 의미가 되는 표현을 말한다. 그의 논리적 원자론에 따르면 '단순 대상'이란 '직접지의 대상(objects of acquaintance)'이다. 그러므로 논리적 고유명도 직접지의 대상을 지시한다. 우리는 일상적인 대상을 직접 알 수는 없고 다만 감각 소여(sense-data)만을 직접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논리적 고유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this)'과 '저것(that)', 그리고 '나(I)'뿐이다. 일상적 고유명은 논리적 고유명과 구분되는데 그것은 직접지의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다. 러셀은 우리가 때로 실제로 만났고 방문했던 사람과 장소, 그리고 듣기만 한 사람과 장소를 구분하면서 '직접지'를 매우 상식적인 차원에서 사용한다. 그리고 이때 이런 상식적인 의미에서 직접 알고있는 사람과 장소의 이름도 논리적 고유명으로 취급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직접지'를 너무 느슨하게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에 대해서 비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프레게와 러셀이 모두 인정하는, 고유명의 의미가 확정기술의 의미와 동일하다는 견해는 이름의 의미가 사람에 따라 변한다는 결과를 수반하게 된다. 이러한 난점은 이름의 의미를 그 이름이 지시하는 대상에 대하여 참이 되는 모든 기술의 집합과 동일시함으로써 극복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한 'a'가 고유명인 경우 'a는 어떠어떠한 사람이다'라는 형식을 가진 참이 되는 모든 진술은 분석적이고, 또 그러한 형식으로된 거짓인 모든 진술은 모순적이라는 결과가 초래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a'는 바로 '어떠어떠한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에는 이러한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이름은 고정되고 확정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집합과 느슨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모세'는 성경에서 이야기되는 이러저러한 일들을 한 사람을 의미하겠지만, 그러나 그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어느 만큼이 거짓일지에 대해서는 그러한 사람이 실제하지 않는다는 것이 참이 된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확정될 수 없다. 이와 비슷한 생각이 썰(Searle)에 의해서도 제시되었는데, a에 관하여 이미 알려진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 중에서 어느 것도 a에 대해 필연적으로 참일 필요는 없고, 반면에 그러한 사실을 선언으로 묶으면 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모세가 소 외양간에서 발견되었음이나 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구출시킴, 그 밖의 그에 관한 그 어느 것도 분석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외양간에서 발견되었다거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구출시켰다거나 어떤 일을 했다는 사실은 분석적이다.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썰도 얼마나 많은 선언지가 거짓인지는 a가 실제하지 않는다는 것이 참이기 전에는 확정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고유명에 대한 또 다른 견해는 버그(Burge)와 데이비슨(Davidson)에 의해 주장된다. 이들은 고유명이 생략된 확정기술이라기보다는 술어라는 것이다. 버그는 고유명이 단 하나의 대상을 가리키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보통은 복수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정관사나 부정관사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이름의 은유적인 사용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사용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 예를 들어 '잭은 키가 크다'라는 문장은 일종의 열린 문장과 같아서 이때 '잭'은 지시사에 의하여 조종되는 하나의 술어와 같다. 즉 '저 잭은 키가 크다'와 같고, 이때 '잭'이 지시하는 대상은 문맥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잭'이 술어로 간주되기 때문에, '잭'이 어떤 대상에 대하여 참이 될 수 있는 경우는 바로 그 대상이 잭이 될 경우뿐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이름 'a'의 의미가 '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는 니일(Kneale)의 견해와도 일맥 상통한다. 크맆키는 니일의 제안이 악순환(vicious circle)에 빠진다고 반대하고 있지만, 그러나 버그는 고유명을 술어로 보는 견해가 어떤 대상이 잭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할 이론이 있다면, 그러한 이론에 의해 보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3)

다음으로는 지금까지 고찰한 고유명에 관한 이론을 더한층 심화시켜 러셀과 프레게의 철학을 중점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4)



Ⅳ. 러셀과 프레게 이론의 비교


프레게와 러셀은 고유명(proper names)에 관한 수수께끼들을 다루는 방법이 표면적으로 유사하게 보이기 때문에 종종 동일시된다. 고유명과 관련해서 우리는 프레게와 러셀 둘 다를 기술론자(descriptivists)라고 부르지만,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차이점은 우선, 담지자(bearer)가 없는 이름들의 수수께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밀에 의하면 고유명은 외연만을 가질 뿐 내포는 갖지 않는다. 즉 이름에는 의미가 없다. 또한 고유명의 기능은, 일반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들이 논의의 주어가 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며, 이름은 대상 자체에 붙여지고, 또한 대상의 어떤 속성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의사소통에 있어 우리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사람, 장소, 혹은 사물이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고, 한 사람의 어떤 것에 관한 개념도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또 그것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잘못될 수도 있고, 같은 것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개념이 서로 다를 수도 있다. 하나의 대상을 생각하거나 언급할 때,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기술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단순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름의 역할이 단지 그 담지자를 언급하는 것이라면, 담지자가 없는 이름은 의미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흐(Kent Bach)는 "담지자가 없는 이름들도 완벽하게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이고, 또 담지자가 없는 이름이 나타나는 문장들도 명제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5)"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산타클로스는 실재하지 않는다(Santa Claus does not exist)'와 같은 문장이 유의미할 뿐만 아니라 참일 수 있는가 ?의 문제가 제기된다. '프레게-러셀 견해(Frege-Russell view)'라 불리는 고유명에 관한 기술론(Descriptivism)은 이 문제를 해결한다. 바흐는 프레게의 견해를 "의미(sense)" 기술론, 그리고 러셀의 견해를 "축약(abbreviational)" 기술론6)으로 부른다.

러셀은 이름에 의해 지시되었거나 이름된 개별자가 그 이름의 의미가 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개별자를 가리키거나 지시하지 않는, 이름같이 보이는 어떤 낱말도 이름이 될 수 없다. 이런 경우 그것은 이름이 아니고 위장된 기술이다. 뿐만 아니라, 개별자에 관하여 그 실재를 주장 또는 부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개체를 이름하지 않는 한 이름이 아니며, 또 그렇게 이름할 때는 그 개체는 실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개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고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만일 단군 왕검이 실제로 존재하였다면 '단군'은 하나의 이름이다. 그러나 단군신화에 기술된 단군 왕검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단군'은 이름이 아니고 '누군가가 쓴 단군 신화에서 언급된 사람'을 대신하는 축약된 기술일 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러셀은 고유명을 논리적 고유명과 일상적 고유명으로 구분한다. 프레게도 마찬가지로 일상적 고유명의 의미를 고유명과 관련된 확정 기술의 의미와 동일시하였다. 그러나 러셀은 프레게의 의미와 지시대상의 차이를 거부하고, 고유명의 의미를 지시대상(denotation)과 동일시한다. 따라서 러셀은 논리적 고유명이라는 특별한 범주를 설정하고 있다. 논리적 고유명이란 단일한 대상을 지칭하는데 지칭된 대상이 곧 그 의미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때 의미와 지시대상은 동일한 것이다.

예를 들어 '빌 클린턴(Bill Clinton)'과 '산타클로스' 같은 것들은 "일상적(ordinary)"고유명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들은 "논리적 고유(logically proper)"명, 즉 형식 논리학의 개체 상수(individual constants)와 대비될 수 있다. 러셀은 일상언어에서의 유일한 논리적 고유명은 한 사람의 현재의 감각 자료(sense data)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지시사 '이(this)'와 '그(that)', 그리고 대명사 '나(I)'뿐이라고 생각했다. 일상적 고유명은 실제로 "축약된(abbreviated)" 혹은 "위장된(disguised)" 확정 기술이다. 따라서 러셀의 기술 이론에 따르면, 확정 기술은 지시 표현(referring expressions)이 아니라, 양화 구(quantificational phrases)로써 기능 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러셀의 "지시구(denoting phrases)"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의 지시는 의미론적으로 비활성(inert property)이기 때문이다.7) 즉, 기술이 발생하는 문장에 의해서 표현되는 명제는 그 기술이 지시대상을 가지느냐 가지지 않으냐에 상관없이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기술의 지시대상은 그 명제의 요소가 되지 못한다.

바흐를 인용해 본다면, "예를 들어 '실리 푸티의 발명자는 부자가 되었다(The inventor of silly putty got rich)'와 같은 확정 기술을 포함하는 문장에서 우리는 문법 형식(grammatical form)을 논리 형식(logical form)으로 오해하기 쉽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주어-술어 형식이지만 논리적으로는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는 실리 푸티의 발명자에 관한 것이 아니다"8)라는 것이다. 러셀의 기술 이론에 따르면, '그 F는 G이다' 라는 형식의 간단한 주어-술어 문장은 'a는 G이다'인 주어-술어 형식의, 하나의 단일 명제가 아닌 "유일 명제(uniqueness proposition)"로 부를 수 있는, 존재 명제이다. 그러한 명제의 양화 구조는 확정 기술이 해체되어(broken up), 현대 기호법으로 '(Ex)((y)(Fy_y=x) & Gx)' 형식으로 만든 후에나 밝혀진다. 러셀에 따르면, 고유명이 하나의 위장된 기술이라면, 즉 'George Kistiakowski'가 '실리 푸티의 발명자'의 생략된 표현이라면, 그 이름의 담지자는 그 이름이 출현하는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된 명제의 일부가 되지는 않는다. 바흐는 "이것은 그 이름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확정기술을 축약하기 때문9)"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지시구가 의미를 나타내고 지시대상을 지시한다 말한다면, 우리는 지시대상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경우들을 보게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영국의 왕은 대머리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영국의 왕'이라는 복잡한 의미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그 의미로 지시되는 현실적인 사람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이다'는 어떤가? 이것도 역시 '프랑스의 왕'이란 구의 지시대상에 관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영국의 왕'이 의미를 갖는 것과는 달리, '프랑스의 왕'은 확실히 지시대상을 갖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프랑스의 현재 왕은 대머리이다'라는 명제는 거짓이라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무의미하지는 않다.10)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지시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예를 보자. '웨이벨리의 저자'가 출현하는 모든 명제는 이상과 같이 설명되어 왔으며, '스코트는 웨이벨리의 저자였다'(예를 들어, 스코트는 웨이벨리의 저자와 동일하다)라는 명제는 '오직 하나뿐인 존재자가 웨이벨리를 썼고 스코트는 그 하나와 동일했다'가 된다. 이는 'x가 웨이벨리를 썼다는 것이 x에 관해 항상 거짓이 아니고, 만일 y가 웨이벨리를 썼다면, y 는 x와 동일하고 스코트는 x와 동일하다는 것은 y에 관해서 항상 참이다'로 번역된다. 따라서 만일 'C'가 지시구라면, 'x는 C와 동일하다'라는 명제가 참이 되는 하나의 존재자 x가 있다는 사실이 발생될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그때 존재자 x가 'C'라는 구의 지시대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스코트는 '웨이벨리의 저자'에 관한 지시대상이다. 'C'라는 구는 의미라 불릴 수 있는 무엇이 아닌 단지 수일 것이다. per se라는 구는, 그것이 출현하는 어떤 명제 안에서 파괴되었던 그 구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오지 4세의 호기심에 관한 수수께끼는 이제 아주 단순한 해답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스코트는 웨이벨리의 저자였다'라는 명제는, 우리가 '스코트'를 대치할만한 '웨이벨리의 저자'라는 어떤 구성요소도 포함하지 않는다. 우리가 '조오지 4세는 그러그러한지 어떤지를 알고싶어했다' 또는 우리가 '그러그러한 것은 놀랍다' 또는 '그러그러한 것은 참이다'등 등을 말할 때, 그 '그러그러한 것'은 하나의 명제임에 틀림없다. 이제 '그러그러한'이 지시구를 포함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아마도 종속명제 '그러그러한 것'으로부터 이러한 지시구를 제거하든지 '그러그러한'이 단순한 구성요소인 전체 명제로부터 이 지시구를 제거하든지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요트가 실제 크기보다 크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하는 손님과 '아뇨, 내 요트는 실제 크기보다 더 크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주인의 대화를 살펴보자. 손님이 의미했던 것은, 내가 생각했던 당신 요트의 크기는 실제 당신 요트의 크기보다 크다는 것이었고 그 주인에게 귀속되는 의미는 '내가 생각했던 당신 요트의 크기는 실제 당신 요트의 크기보다 컸다'이다.

다시 조오지 4세와 웨이벨리로 돌아가 보면, 우리가 '조오지 4세는 스코트가 웨이벨리의 저자인지 아닌지를 알고싶어 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보통 '조오지 4세는 어떤 한 사람이고, 오직 한사람이 웨이벨리를 썼고 스코트가 그 사람이었는지 어떤지를 알고 싶어한다'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오직 하나뿐인 어떤 사람이 웨이벨리를 썼고, 그리고 조오지 4세는 스코트가 그 사람이었는지 어떤지 알고 싶어한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후자를 우리는 '웨이벨리의 저자'의 일차적 출현이라 부르고 전자는 이차적 출현이라 부른다. 후자는, '실제로 웨이벨리를 쓴 사람이 스코트인지 아닌지에 관해 조오지 4세는 알고 싶어했다'로써 표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일 조오지 4세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스코트를 보았고 그리고 '저게 스코트인가 ?'라고 물었다면, 그것은 참일 것이다.11)

또한 '비스마르크(Bismark)'라는 이름에 관해 러셀이 말한 것을 보면 그의 입장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고유명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그 고유명을 기술로 대치시킬 때에만 명백하게 표현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그는 '게르만 제국의 초대 재상(the first Chancellor of the German Empire)'이라는 기술을 보자. 여기서 고유명은 그 대상을 기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어떤 하나의 대상을 나타냄으로써 직접적 사용을 갖는다.

앞에서 밝혔듯이 러셀 이론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특정 종류의 진술에 있어 이름같이 보이는 것이 사실은 이름이 아니고 위장된 기술이라는 원리이다. 만일 이와 같은 진술이 재 서술되고, 또 그 재 서술된 진술이 모든 가정을 들추어내고, 그러면서 지시구를 사용하지 않고 원래의 진술이 함축적으로 말한 것을 명백히 말하게 될 수 있다면, 그때 원래의 진술 속에 있던 사이비 이름에 대응하는 어떤 존재자도 없다는 것이 명백할 것이다. 러셀은 이와 같은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기술구를 분석을 시작한다.12)예를 들어,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났다(I met a man)'


라는 명제를 보자. 이 명제 속에서 실제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 "나는 x를 만났고 x는 인간이다"는 항상 거짓이 아니다'


이다. 또한 '모든 사람은 죽는다(all men are mortal)'라는 명제는, 만일 무엇인가가 어떤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죽는다라고 진술한다. 즉 그것은 만일 x가 어떤 사람이라면, x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x는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x는 인간이다(x is human)' 대신에 'x는 어떤 사람이다(x is a man)'로 대치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것은 ' "만일 x가 인간이라면, 그 x는 죽는다"는 항상 참이다'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13)

'어떤 한 사람(a man)'과 같은 어떤 불완전 기술에 관해, 러셀은 '나는 어떤 한 사람을 만났다'를 예로 들어 '어떤 한 사람'이라는 불완전 기술을 제거하려는 분석으로 나아간다. 이 경우 어떤 사람이 '나는 어떤 한 사람을 만났다'라고 진술하였더라도, 누구도 그 만난 '어떤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려고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며, 그를 어떤 형이상학적 세계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각수나 황금 산에 관해서는 어떨까? 이 점이 마이농적인 세계를 출현시킨다. 사람이란 특정 성질을 가진 특정 대상이다. 이 점은 변수 'x'와 인간임이라는 성질을 나타내는 희랍문자 'Φ'를 사용함으로써 기호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Φx'는 'x는 인간이다'를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고자 한 것은 '내가 만난 어떤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나는 만났다'를 'Ψx'로 표현하면, '나는 한 사람을 만났다'의 완전한 번역은, '"Φx"와 "Ψx"의 연합된 주장이 언제나 거짓은 아니다'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x를 만났다"와 "x는 사람이다"의 연합된 주장은 언제나 거짓이 아니다'이다.

한편 일각수, 황금 산 및 둥근 사각형 등은 어떤 값에 의해서도 결코 만족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명제함수를 위해 제거된다. 러셀은 일각수, 황금의 산 및 수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 않고, 단지 그들이 존재한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할 뿐이지만, 그러나 그는 어떤 기호가 불완전 기호인지를 증명하는 것이나 또는 지시구가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사실상 그 기호나 기술에 대응하는 존재자(entity)가 없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14)러셀은 확정기술의 분석으로 전환한다. 이들 역시 따로 떨어져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고 오직 명제의 문맥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그것들 역시 불완전 기호이다. 예를 들어,


'스코트는 웨이벨리의 저자이다(Scott is the author of waverley)'


에서 '스코트'는 이름이고 '웨이벨리의 저자'는 기술이라고 주장한다. 위의 명제는 이름과 기술이 동일한 인물에 적용됨을 주장한다. 이름은 단순 기호로서, 그 의미인 개별자를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그리하여 이 의미를 그 자체의 자격으로 소유하며, 기술은 여러 개의 낱말로 구성되어 있고, 이 낱말들의 의미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리하여 기술의 '의미'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 그것은 낱말의 의미로부터 귀결된다.

그러나 한편, 이름과 기술은 서로 다른 것들이다. 만일 하나가 다른 것에 대입되면, 이름과 기술이 동일한 대상에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원래의 것과는 다른 것을 얻게된다. 즉 '스코트는 웨이벨리의 저자이다'라는 위의 명제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그것은 문학사상의 하나의 우연한 사실을 표현한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사람이 웨이벨리를 썼을 수도 있고, 아니면 웨이벨리라고 불리는 소설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스코트'를 '제임스 조이스'로 대치시킨다면 그 명제는 거짓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스코트는 스코트이다'


라는 명제를 고찰해 보자. 위의 명제는 스코트가 웨이벨리를 썼든 쓰지 않았든 관계없이, 그리고 실제로 그와 같은 소설이 존재했든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참이다. 만일 이때 '제임스 조이스'를 '스코트'에 대치시켜보면 그 결과는 여전히 참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위의 명제를


'스코트는 월터 경이다'


와 동일한 형식의 명제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러셀은 위의 명제가 실제로는, ' '스코트'라고 이름된 사람은 '월터 경'이라고 이름된 사람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때 표면상의 이름은 위장된 기술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호머'는 어떤 개별자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위장된 기술이며, 그것은, '오딧세이와 일리어드를 쓴 누군가'를 의미한다고 주장할 것이다.15)

다음으로 고찰할 것은 명제 안에서의 기술구나 지시구의 일차적 출현과 이차적 출현의 구분이다.


'프랑스의 현재 왕은 대머리이다'


를 예로 들면, 여기서 '프랑스의 현재 왕'이란 지시구는 일차적 출현을 하고 있고 그리하여 아무 것도 지시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 명제 전체는 거짓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현재 왕은 대머리가 아니다'

라는 명제는 어떤가? 이것은,


a) '프랑스의 현재 왕이 대머리라는 것은 거짓이다'나,

b) '프랑스의 현재 왕은 대머리가 아니다'


이 둘 중 하나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a)의 기술구는 이차적 출현을 하고 있고 그리고 그 명제는 참이며, b)의 명제는 거짓이고 그리고 기술구는 일차적 출현을 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a)의 부정은 진술 전체에 해당되고, 현재 프랑스에는 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프랑스를 통치하고 있다는 것은 거짓이고 따라서 그가 대머리라는 것도 거짓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b)의 부정은 오직 대머리인 것에만 적용되고, 따라서 프랑스에 현재 왕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아무 것도 기술하지 않는 기술구가 이차적 출현을 하고 있는 모든 명제는 거짓이다.16)

러셀은 그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차적 출현과 이차적 출현 사이의 구별은 또한 우리가 프랑스의 현재 왕이 대머리인지 아닌지의 문제와 일반적으로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 지시구의 논리적 지위를 다룰 수 있게 해준다."17) 따라서 '프랑스의 현재 왕은 대머리가 아니다'는 것은 '지금 프랑스의 왕이고 대머리가 아닌 어떤 존재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거짓이겠지만, 그러나 '지금 프랑스의 왕이며 대머리인 어떤 하나의 존재자가 있다는 것은 거짓이다'를 의미한다면 참이다. 즉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가 아니다'는 '프랑스의 왕'의 출현이 일차적이라면 거짓이고 이차적이라면 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의 왕'이 일차적 출현을 갖는 모든 명제는 거짓이고 그러한 명제의 부정은 참이지만 그것들 안에서 '프랑스의 왕'은 이차적 발생을 갖는다. 따라서 우리는 프랑스의 왕이 가발을 썼다는 결론으로 빠져나게 될 것이다.

한편 러셀은 우리의 지식을 '직접지(Knowledge by acquaintance)'와 '기술지(Knowledge by description)'로 나눈다. 직접지는 우리가 감각소여(sense-data)를 직접 앎으로써 얻게되는 지식이다. 우리가 감각소여를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 감각소여를 불러일으키는 물리적 대상은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의 물리적 대상은 '그러그러한 감각자료에 대한 원인이 되는 어떤 것'일 것이다. 이것은 감각소여로써 물리적 대상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물리적 대상에 관한 이와 같은 지식이 바로 '기술지'이다.

러셀은 감각소여만이 직접적으로 알 수 있고 명명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오직 감각 소여만이 이름이 지시하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감각 소여들의 이름을 러셀은 '논리적 고유명'이라 부른다. 따라서 논리적 고유명은 직접지의 대상뿐이다.

한편 일상적 고유명의 예로는 '소크라테스'를 들 수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직접 알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명명할 수 없으며, '소크라테스'는 논리적 의미에서의 이름이 아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라는 일상적 고유명을 사용할 때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사용하는 것일까? 러셀은 그것을 기술로 사용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스코트는 월터 경이다'에서 우리는 '스코트'와 '월터 경'이라는 두 이름이 한 사람에 적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앞은 명제는 실제로는, " '스코트'라고 불리는 사람은 '월터 경'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와 같다. 따라서 위의 이름들은 위장된 확정기술이다. 왜냐하면 위 문장의 '스코트'는 실제로는 " '스코트'라 불리는 사람"이라는 확정기술과 같은 기능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은 어떨까?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소크라테스'로 누구를 지시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플라톤의 스승', '독배를 마신 그리스의 철학자'등 일 것이다. 이때 대답으로 주어진 확정기술들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러셀은 일상적 고유명과 확정 기술의 의미를 동일한 것으로 보았고, 프레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마다 제각기 고유명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프레게는 러셀과는 다른 종류의 기술론자로 불린다. 그는 고유명들이 위장된 기술이 아니며, 지시(references)뿐만 아니라 의미도 가진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이름의 의미는 표현 양태이기도 하고 또한 그 지시대상의 한정사(determinant)이기도 하다. 단어들은 관념이 아니라 사물들에 관해 말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프레게는 러셀과 밀과도 의견을 같이한다. 밀은 단어들이 일상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때,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단어들의 지시라고 말한다. 단어가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한, 그 단어들은 그 생각의 구성요소에 대응해야 한다. 따라서 프레게가 볼 때, 표현의 의미론적(semantic) 중요성과 인식적(cognitive) 중요성은 밀접하게 연관된다. 실제로 어떤 표현은 지시 없이도 의미를 가질 수 있으므로, 생각의 구성요소는 지시가 아니라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프레게는 각 고유명이 어떤 확정기술과 동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가지 종류의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러셀과는 달리 그는 확정기술들을 양화된 구들과 일치시키지 않고 고유명들처럼 의미론적 가치들로, 개별자들을 가질 수 있는 의미론적 단위들로 취급한다. 그러한 표현의 의미는 하나의 개별자가 지시대상이 되기 위해서 만족시켜야 하는 조건을 부여하는 의미론적 역할(semantic role)을 한다. 확정기술처럼 고유명은 어느 개별자가 사실상 그 지시대상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그리고 심지어 그 고유명이 지시대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고도, 그 고유명이 발생하는 어떤 문장의 의미에 그 고유명의 의미를 제공한다. 이것이 의미에 의해 부여되는 조건인, 지시의 한정사가 그것이 한정하는 것과는 무관한 이유이다. 프레게는 '오디세우스'가 지시를 가지든 가지지 않든 그 생각은 같다고 말하는데, 똑같은 대상이 다른 표현 양태 하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표현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떤 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어느 표현 양태에도 전혀 필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의미에 대한 프레게의 개념은 각 고유명이 어떤 확정기술의 의미를 가지거나, 각 고유명의 의미가 어떤 확정기술로 표현할 수 있는 개별적 개념일 필요가 없다. 의미에 대한 그의 개념은 지각 대상(percepts)과 같은, 비-기술적 의미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만일 우리가 지각대상으로써 대상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이러저러하게 보이는 그 사물(the thing that looks thus-and-so)' 이라는 형식의 기술 하에서 그것을 생각는 것과는 동치가 아니다. 그는 고유명에 관해서는 유사한(analogous) 의견을 확실히 말하지 않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각 고유명이 어떤 확정기술과 동치라고 확실히 주장하지도 않았고, 또한 의미와 지시에 대한 그의 전반적 이론은 이러한 동치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표현에 대한 러셀의 개념은 '표현 양태(mode of presentation)'에서 프레게가 '표현(representation)'이라는 말로써 의미한 것과 매우 다르다. 러셀의 경우에는 표현될 수 있는 어떤 대상은 다른 방법으로는 표현될 수 없다. 그의 직접지에 대한 제한적 관념은 하나의 '직접적인 인식 관계'이고, 실제로, '단순히 표현을 구성하는 대상과 주어 관계의 역'이다. 러셀은 공적 대상들(public objects)을 직접지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지시 한정사로서의 의미의 관념은, 러셀의 언어이론이나 사유 이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명제들의 구성요소들은 개별자들이고, 직접지의 원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각각의 명제는 전적으로 우리가 직접 아는 구성요소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프레게의 경우 표현 양태는 사유의 구성요소이지만, 표현 양태가 표현하는 대상은 아니다. 주어와 대상 사이의 관계가 의미로 매개되기(mediated) 때문에, 이 관계는 러셀의 직접지와 달리 간접적이다. 따라서 바흐는, "프레게의 이층 의미론(two-tiered semantics)과 러셀의 단층 의미론(one-tiered semantics)과의 차이는 표현에 대한 그들의 서로 다른 인식론적 견해에 반영된다"고 주장한다.18)

러셀은 일상적 고유명이 축약된 확정 기술이라고 주장했지만, 프레게는 확정 기술이 두 단계의 의미론적 중요성을 가진다는 점을 부인했다. 이것이 "지시에 관하여(On Denoting)"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러셀은 논리학의 개개 상수와 같이 확정 기술과 일상적 고유명을 본래의 "논리적(logically)"고유명과 구별시키는 것이 그것들이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지시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레게의 경우 두 단계의 의미론적 중요성인, 의미와 지시가 있고, 의미가 일차적(primary)이다. 그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레게의 의미 기술론도 러셀의 축약 기술론도 밀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담지자가 없는 이름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양자의 견해에서 볼 때, 고유명은 그것이 어느 것에 속하든 간에 일차적인 의미론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러셀의 경우는 지시대상이 의미론적으로 불활성이기 때문이고, 프레게의 경우에는 지시에서 의미가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유명의 의미는 고유명이 속해 있는 언어나 지시를 잘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이름에 해당하는 대상을 지시하는 확정기술의 의미와 동일할 것이다. 프레게는 지시 대상이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는 한 그런 의미의 변화는 논증적인 과학의 이론적 구조나 완전한 언어에서는 허용되어서는 안되지만 일상언어에서는 허용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의미는 관념과는 달리 고정 불변적이라는 프레게의 주장에 비추어 볼 때, 이런 허용은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프레게의 난점은 이름의 의미를 그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에 대하여 옳은 모든 기술들의 집합과 동일시할 때 극복될 수 있다.19)

프레게는 표현의 의미와 그것이 지시하는 것을 구별한다. 즉 두 개의 표현은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면서도 의미(sense or meaning)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프레게는 '저녁 별'과 '샛별'이라는 표현을 고찰한다.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샛별은 바로 저녁별이다. 만일 그것들이 동일한 것이라면, 그때 '샛별은 저녁별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샛별은 샛별이다'와 똑같은 것일 뿐이고,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천문학자일 필요도 없고 천문학에 관해 알아볼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표현의 의미와 지시와의 구별은 '샛별'과 '저녁 별'이라는 표현이 동일한 대상인 금성을 지시하지만, 각각 서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각각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금성을 지시한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하나는 '아침에 보이는 별'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저녁에 보이는 별'을 의미한다. 그러나 양자는 다같이 동일한 대상인 금성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샛별이 저녁별이라는 발견은 새벽에 보이는 별이 저녁에 보이는 별과 동일한 별이라는 발견이고, 그 발견은 천문학적 관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샛별이 저녁별이다'는 '샛별은 샛별이다'가 제공하지 못하는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또한 프레게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들에 대해 주장한다. '페르디난드가 익사하지 않는다면, 페르디난드는 나의 외아들이다'라는 러셀의 명제를 예로 들어보자. '나의 외아들(my only son)'이란, 내가 정확히 한 명의 아들을 가질 때 오직 그때에만 지시대상을 갖는 지시구이다. 만일 페르디난드가 실제로 익사했다면, 위의 진술은 참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시대상이 결여된 경우에도 그것을 입증해야만 하든지, 또는 지시대상이 지시구를 포함하는 명제들에 관한 것이라는 견해를 포기하든지 해야만 한다. 러셀은 지시대상이 지시구를 포함하는 명제들에 관한 것이라는 견해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낱말들이 현실적으로는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거나 어떤 것도 이름하지 않으면서 이름으로 사용될 때 즉 그것이 아무런 지시대상도 갖지 않을 때,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고 러셀은 지적한다.

여기서 조건적 진술, '만일 페르디난드가 익사하지 않았다면, 페르디난드는 나의 유일한 아들이다'는 페르디난드가 익사하였더라도 참이라는 점, 왜냐하면 모든 조건적 진술은 그 전건을 이루는 절이 거짓일 때는 언제나 참이기 때문이라는 점이 언급되어야만 하겠다. 그것이 바로 조건적 진술이 갖는 성질인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비가 오면, 거리는 젖는다'라는 진술은 비가 오지 않을 때에도 확실히 참인 것이다. 그런데, '만일 페르디난드가 익사하지 않았더라면, 페르디난드는 나의 유일한 아들이다'에 있어서 만일 전건이 거짓이면, 즉 만일 페르디난드가 익사하였더라면, 그 진술 전체는 참이 된다. 그러나 그 경우 지시구인 '나의 유일한 아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일 페르디난드가 익사하였다면 그 화자는 이미 아들이 없고 따라서 이미 유일한 아들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진술 전체는 참이기 때문에 여전히 유의미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유의미한 진술이 어떤 것에 관한 것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전혀 어떤 것에 관한 것도 아닌 구를 포함할 수 있는가? 우리는 마이농처럼, 페르디난드는 이미 존재하지 않지만 유를 가진다고 말함으로써, 외연을 제공하거나 아니면 프레게처럼 어떤 순전히 특별한 외연 또는 순전히 편의적인 외연을 제공하거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러셀은 마이농의 형이상학적 세계가 지나치게 부풀려져서 우리의 실재감각에 거스르는 것이라 하여 거부하고, 프레게의 편의적 지시대상은 순전히 임의적인 것이라하여 거부한다.20)


Ⅴ. 결 론

이와 같이 고유명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다. 앞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프레게와 러셀은 고유명에 관한 수수께끼들을 다루는 방법이 표면적으로 유사하게 보이기 때문에 종종 동일시되지만,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통이론에서는 고유명은 확정기술과 밀접하게 관련맺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즉 고유명의 의미는 확정기술의 의미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어떤 낱말의 의미는 우리가 발견해내는 자연적 속성이 아니고, 어떤 낱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도록 하자고 동의하는 사람들에 의해 부여된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담지자가 없는 이름들도 완벽하게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이고, 또 담지자가 없는 이름이 나타나는 문장들도 명제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프레게-러셀 견해'라 불리는 고유명에 관한 기술론은 이 문제를 해결한다. 바흐는 프레게의 견해를 의미 기술론, 그리고 러셀의 견해를 축약 기술론으로 부르고 있다. 러셀은 고유명을 논리적 고유명과 일상적 고유명으로 구분한다. 프레게도 마찬가지로 일상적 고유명의 의미를 고유명과 관련된 확정 기술의 의미와 동일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러셀은 프레게의 의미와 지시대상의 차이를 거부하고, 고유명의 의미를 지시대상과 동일시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러셀 이론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특정 종류의 진술에 있어 이름같이 보이는 것이 사실은 이름이 아니고 위장된 기술이라는 원리이다. 러셀은 일상적 고유명과 확정 기술의 의미를 동일한 것으로 보았고, 프레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마다 제각기 고유명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러셀과 다른 종류의 기술론자로 불리는 프레게는 고유명들이 위장된 기술이 아니며, 지시뿐만 아니라 의미도 가진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이름의 의미는 표현 양태이기도 하고 또한 그 지시대상의 한정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단어들은 관념이 아니라 사물들에 관해 말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프레게는 러셀과 밀과도 의견을 같이한다. 그는 각 고유명이 어떤 확정기술과 동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가지 종류의 표현이라고 주장하는데, 러셀과는 달리 그는 확정기술들을 양화된 구들과 일치시키지 않고 고유명들처럼 의미론적 가치들로, 개별자들을 가질 수 있는 의미론적 단위들로 취급한다. 그러나 의미에 대한 프레게의 개념은 각 고유명이 어떤 확정기술의 의미를 가지거나, 각 고유명의 의미가 어떤 확정기술로 표현할 수 있는 개별적 개념일 필요가 없다.

러셀은 일상적 고유명이 축약된 확정 기술이라고 주장했지만, 프레게는 확정 기술이 두 단계의 의미론적 중요성을 가진다는 점을 부인했다. 이것이 "지시에 관하여"의 핵심이다. 그러나 프레게의 경우 두 단계의 의미론적 중요성인, 의미와 지시가 있고, 의미가 일차적이다. 그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레게의 의미 기술론도 러셀의 축약 기술론도 밀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담지자가 없는 이름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양자의 견해에서 볼 때, 고유명은 그것이 어느 것에 속하든 간에 일차적인 의미론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러셀의 경우는 지시대상이 의미론적으로 불활성이기 때문이고, 프레게의 경우에는 지시에서 의미가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프레게는 고유명이 지시대상뿐만 아니라 의미도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의 '고유명'은 일상적인 이름을 의미하기도 하고 확정기술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러셀은 고유명을 일상적 고유명과 논리적 고유명으로 구분하는데, 논리적 고유명이란 단순대상을 순수하게 지시하지만 그 지시된 대상이 그 의미가 되는 표현을 말한다. 그의 논리적 원자론에 따르면 '단순 대상'이란 '직접지의 대상'이다. 러셀은 일상적 고유명과 확정 기술의 의미를 동일한 것으로 보았고, 프레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마다 제각기 고유명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유명'은 명제 안에서 오직 주어역할을 할 수 있는 명사들, 즉 개별자이다. 개별자는 진술에 관여하거나 진술 속에서 주장되는 술어나 관계가 주장되는 주체라고 말했었다. 때로는 개별자처럼 보이는 어떤 사물들은 실제로는 그 이상으로 분석 가능한 것이다. 결국 러셀은 그의 기술이론을 가지고 그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던 형이상학을 제거하는데 사용하였을 뿐 결코 형이상학 자체를 제거하려 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는 개별자같이 보이는 사물은 진정하게 개별자로, 그리고 고유명같이 보이는 약간의 것들을 진정하게 고유명으로 규정하고자 했던 것뿐이다.

참고 문헌


1. 베리 R. 그로스, 『분석철학』, 문정복 옮김, 형설 출판사, 1988.

2. 수잔 하크, 『論理哲學』, 김효명 옮김, 종로서적, 1984.

3. 남순예,「Bertrand Russell의 論理的 原子論에 관한 硏究」, 충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4.

4. 박찬재,「固有名에 關한 硏究」, 전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5.

5. Russell, B., "On Denoting", Logic and Knowledge, 1905.

6. Bach, K., "Comparing Frege and Russell",

http://userwww.sfsu.edu/∼kbach/fregerus.html

7. Douglas, G., "Russell's Theory of Descriptions",

http://www.arts.uwa.edu.au/Philoswww/c20/Descriptions1.html

8. Height, D., "The Background to the Theory of Descriptions",

http://www.arts.uwa.edu.au/Philoswww/c20/Descriptions2.html

9. Kaplan, D., "What is Russell's Theory of Descriptions?", Edited by Irvine, BERTRAND RUSSELL, Routledge, London and New York, 1970.

10. Sainsbury, R. M., RUSSELL, Routledge & Kegan Paul, London, 1979.




[Abstract]

Comparing Russell and Frege about Proper Names



Nam soon-ye (Chungnam National Univ.)

This paper aims to compare Russell's and Frege's philosophies. We describe the world and explain facts by languages. At this time we use proper names in order to present a person, a thing, or a fact. For a long time, many philosophers think a proper name as a passageway between a language and the object world. However, in fact, it is not easy work to define proper names.

'Proper names' must be defined as nouns which is only able to play roles as subjects in propositions. That is, they indicate individuals, and individuals are subjects involved in statements or subjects asserting subjects or relations asserted in statements. For example, 'Scott', 'Elizabeth Windsor', 'Bertrand Russell' are simple labels, that is, names. Moreover, certain objects looking as individuals can be actually analyzed further. Because of this fact, Russell intend to define things looking as individuals as truly individuals, and to define something looking as proper names as truly proper names.

I consider general proper names in chapter II. This chapter treats two different positions, one holding that proper names have meanings and the other holding that proper names only have denotations. The former closely concerns the sense of a proper name with a definite description, and the latter strictly devides proper names and definite descriptions. I consider other two views on proper names in chapter III, one is a view that a proper name is a purely denotative name, and the other is that it is a name assimilated to a description. This chapter treats Kripke's, Ziff's, Burge's, and Davidson's theories. Chapter IV, the main theme of this paper, treats Russell's and Frege's theories. Because of certain superficial similarities in how they handle certain famous puzzles about proper names, Russell's and Frege's views are often assimilated, but actually they are fundamentally different. I explain the difference between them in this chapter.


1) 수잔 하크, 『論理哲學』, 김효명 옮김, 종로서적, 1984. p. 80.

2) Ibid., p. 80.

3) Ibid., pp. 75-85 참조.

4) 러셀과 프레게의 사고 노선을 따라가다 보면 앞에서 언급된 것들과 겹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들의 이론을 강조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쓰여진 것들이다.

5) Bach, K., "Comparing Frege and Russell",

http://userwww.sfsu.edu/∼kbach/fregerus.html, p. 1.

6) Ibid., p. 1.

7) Ibid., p. 2.

8) Ibid., p. 2.

9) Ibid., p. 2.

10) Russell, B., "On Denoting", Logic and Knowledge, 1905, pp. 8-9.

11) Sainsbury, R. M., RUSSELL, Routledge & Kegan Paul, London, 1979, p. 87.

12) 수잔 하크, 『論理哲學』, 김효명 옮김, 종로서적, 1984. pp. 77-85 참조.

13) Russell, B., "On Denoting", Logic and Knowledge, 1905, p. 2.

14) 베리 R. 그로스, 『분석철학』, 문정복 옮김, 형설 출판사, 1988, p. 92.

15) 베리 R. 그로스, 『분석철학』, 문정복 옮김, 형설 출판사, 1988, pp. 94-95.

16) 베리 R. 그로스, 『분석철학』, 문정복 옮김, 형설 출판사, 1988, p. 97.

17) Russell, B., "On Denoting", Logic and Knowledge, 1905, p. 9.

18) Bach, K., "Comparing Frege and Russell",

http://userwww.sfsu.edu/∼kbach/fregerus.html, p. 4.

19) 박찬재,「固有名에 關한 硏究」, 전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5, 참조.

20) 수잔 하크, 『論理哲學』, 김효명 옮김, 종로서적, 1984., pp. 77-8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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