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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5/08 (08:34) from 80.139.168.169' of 80.139.168.169' Article Number : 311
Delete Modify 남경태 Access : 10545 , Lines : 81
스노우의 두문화

두 문화
C.P. 스노우 (지은이), 오영환 (옮긴이)


과학혁명이 증폭시킨 두 문화의 갈등

인문계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문과와 이과로 나뉜다는 점이다. 이때부터는 대개 "이제 좋은 시절은 다 끝났구나."하고 새삼 실감하게 된다. 앞으로 2년 동안 흔히 지옥이라 부르는 대학 입시 준비 과정을 거칠 것이기 때문이다.

문과와 이과의 구분은 대학의 학제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보통 문과는 장차 대학에 가서 어문학, 인문학, 사회과학 등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이 선택하고, 이과는 자연과학, 공학, 의학 등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이 선택한다. 물론 성적에 맞추어 대학과 학과를 선택하는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은 논외다.

그러면 문과와 이과는 어떻게 결정할까? 더러 자신의 장래 희망에 무리하게 뜯어맞추려는 친구들도 있긴 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적성에 따라 결정한다. 이를테면 혜미는 영어나 사회 과목을 좋아하니까 문과, 상현이는 수학이나 과학 과목을 좋아하니까 이과, 대체로 이런 구분이 적성을 고려한 결과다.

그런데 원래 적성이란 그리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서 자기 적성을 잘 몰라 문과와 이과 중 어느 것을 택할지 영 자신이 없을 경우도 많다. 그래서인지 별다른 고민 없이 선택하는 친구들도 꽤 있다.

그러나 사실 문과와 이과의 차이는 그냥 넘길 정도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의 문과와 이과는 일부 과목의 차이 정도지만, 실상 대학에 가 보면 학문과 논리의 구성도 상당히 다르고 교육 과정도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대학에서는 문과와 이과의 차이가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예컨대 역사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의학보다는 철학이 훨씬 친숙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비슷한 계통의 학문에 친숙하게 여기는 것은 괜찮겠지만 두 계통 간에 서로 관심조차 없다면 어떨까? 한 집안의 형제들이 문과 출신과 이과 출신으로 갈려 서로 대화도 통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스노(Charles Percy Snow, 1905-1980)가 이미 1950년대에 우려했던 게 바로 그 점이다.

물리학과 소설과 정치
스노는 독특하면서도 다채로운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영국의 기술자 집안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특별 연구원을 지냈는가 하면, 정부의 과학기술성 정무 차관이라는 고위 공직에서 일하기도 했다. 상복도 많아서 2차 대전 중 과학자들의 징집과 배치를 감독한 성과로 제국 훈장을 받았고, 1964년에는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이것만 해도 화려한 경력이지만, 그는 정식 소설가이기도 하다. 이십대 시절인 1932년에는 <항해 중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발표했으며, 1934년에는 대학 연구원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연구>를 썼다. 그 후 그는 1940년부터 1970년까지 30년에 걸쳐 현대 영국의 사회, 학문, 산업, 교육 등을 주제로 12권짜리 방대한 대하 소설을 쓰기도 했다.

물리학자, 소설가, 공직자라는 그의 세 가지 신분이 절묘하게 조합되어 이 책 <두 문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두 문화>는 문학과 과학을 두루 거친 지은이가 영국의 편중된 교육 정책을 비판하는 책이므로 세 가지 신분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이 책은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두 문화>는 1959년에 5월 7일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전통적인 연례 리드 강연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당시 스노의 강연 제목은 <두 문화와 과학 혁명>이었다. 이 강연의 내용을 1부로 싣고, 2부는 4년 뒤인 1963년의 시점에서 앞의 강연과 관련하여 그때까지 제출된 논평과 반응, 비판들을 지은이가 직접 정리하고 해명하고 추가한 글을 실었다. 또 마지막 3부에는 90년대의 시점에서 스노의 강연을 바라본 스테판 콜리니의 해제가 실려 있다.

문화의 양극 분화
학문이란 전문화를 기본으로 한다. 그래서 대학에는 학과라는 게 있다. 언어학과에서는 언어학을, 물리학과에서는 물리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다. 언어학에서 우주론이 나올 수 없으며, 물리학에서 형태소와 음소를 논할 수는 없다. 학문들을 크게 가름한 것이 앞서 말한 문과와 이과이다. 같은 계통에 속하는 학문들은 '호환성'이 크지만, 계통이 다르면 학문적으로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다.

예를 들어 언어학에서는 구조주의 철학을 논할 수 있지만, 물리학의 열역학 제2법칙을 다룰 수는 없고 다룰 필요도 없다. 반대로 물리학에서는 화학에서 나온 질량 보존의 법칙을 논할 수 있으나 언어학의 생성문법을 다룰 수는 없고 다룰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문과와 이과는 서로 공통된 관심사가 없다고 해야 할까? 따라서 양측의 연구자와 지식인들은 서로 대화할 필요가 없는 걸까? 결코 아니다. 스노는 오히려 양측이 전문화라는 이름 아래 갈수록 두 개의 극단적인 집단으로 갈라지고 있다는 데서 서구 사회의 지적 문제점을 발견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문과와 이과로 표현했던 용어를 스노는 각각 문학적 지식인(literary intellectuals)과 과학자로 구분한다. 문제는 이 양자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데 있다.

"문학적 지식인과 과학자의 사이는 몰이해, 때로는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적의와 혐오로 틈이 크게 갈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도무지 서로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상 하게도 그들은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 지식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차원에서도 별반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

하나의 사회,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연구하면서도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닌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스노는 '두 문화'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현대 서구 사회에서 이 두 문화 간의 오해와 괴리는 심각하다. 과학자들은 자신들만이 선진적인 첨단 문화에 속하며, 다른 모든 사람들은 후진적인 문화에 속한다고 여긴다. 반면 문학적 지식인들은 과학을 이해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예술과 지적 생활을 저해하는 반문화적인 것이라고 여긴다.

요컨대 과학자들은 문학적 지식에 관해 무관심하며, 문학적 지식인들은 과학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특히 19세기의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과학을 오해하는 정도를 넘어 경멸했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뉴턴의 물리학을 맹렬하게 비난한 것은 유명하다).

과학 혁명이 증폭시킨 두 문화의 갈등
과학과 인문학의 분리는 사실 역사가 오래다. 모든 학문이 신학으로 통합되어 있던 중세 시대가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으로 깨어지면서 근대적 학문 체계가 성립한 이래, 과학과 인문학의 갈등은 내내 심화되어 왔다. 다만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에 와서의 일이었다.

양측이 활발하게 각개약진하던 과거에는 두 문화의 갈등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현대 사회에 들면서 더 이상 그럴 수는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스노는 선진 산업 사회의 경우 두 문화의 구분은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과학 혁명 때문이다.

스노가 말하는 과학 혁명이란 과학의 연구 성과를 산업에 이용하게 된 시기를 가리킨다. 흔히 이 시기를 '물리학을 뒤흔든 30년'이라 불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으로 잡는 사람이 많지만, 스노는 그보다 약간 늦은 1920, 30년대를 과학 혁명의 시기로 잡고 있다.

그 출발점은 원자 입자를 최초로 공업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때이다. 그 이후부터는 과학과 산업이 서로 유기적으로 얽히면서 발전하게 된다. 과학 혁명이 전개되면서 두 문화의 갈등은 본격적으로 문제시된다.

"과학 혁명은 우리 생활의 물질적 기반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살아 가고 있는 사회의 혈액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다. 고등 교육을 받은 비과학적 문화에 속하는 사람들은 기초 과학의 가장 단순한 개념조차 따라가지 못하며, 응용 과학에 대해서는 더 어 둡다... 공업적 생산이란 그것을 모르는 이에게는 일종의 종교 요법과 같은 신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기초 과학과 응용 과학이라는 또 다른 구분이 등장한다. 스노는 심지어 과학자들조차 응용 과학에는 무지하다고 비판한다. 흔히 하는 말로, 영국이 원리를 개발하면 일본은 그것으로 상품을 만들고 미국은 그 상품을 가지고 기업을 경영한다는 얘기가 있다.

스노가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 '영국적' 현상이다. 잘 알다시피 영국은 일찍이 뉴턴부터 시작하여 톰슨, 맥스웰, 러더퍼드 등 세계적으로 위대한 과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나라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산업적인 감각을 지니고 거기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없었다.

예를 들어 러더퍼드(그는 스노의 스승이었다)는 기계 설계도를 가지고 엔지니어들이 설계도에 따라 기계를 실제로 제작한 것을 보고도 감탄할 만큼 공학에 무지했으며(공업적 생산은 종교 요법!), 그 자신이 원자핵을 발견한 물리학자이면서도 죽을 때까지 원자력 에너지를 인류가 이용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할 정도였다.

더구나 기초 과학자들은 응용 과학을 2류 두뇌의 소유자에게나 알맞은 직업이라고 경멸해 왔다(스노 자신도 젊은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과학 혁명의 시기에 전통적인 과학자들이 '2류'로 치부했던 응용 과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응용 과학은 일상 생활의 면에서 지극히 중요한 '사회의 혈액'을 형성한다. 그러나 기초 과학자들은 여전히 응용 과학에 무지하고, 비과학적 지식인들은 응용 과학은커녕 기초 과학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과학 내부에서도 갈등이 심각해지는 시점이 되었으니, 이제는 두 문화의 괴리를 본격적으로 문제시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된 것이다.

문제의 원인이자 해법인 교육
두 문화가 생겨나게 된 이유는 뭘까? 그리고 갈수록 그 두 문화가 양극 분해되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은 뭘까?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스노는 한 가지 답을 내놓는다. 그것은 바로 교육이다.

잘못된 교육 제도가 두 문화를 낳은 원인이며,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도 교육에 있는 것이다. 스노는 특히 영국의 과학 교육 제도에서 문제를 찾는다. 영국에서는 학생들이 어린 나이부터 전문화에만 편중된 교육을 받으므로 해당 분야에 관해서는 해박해지지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영국에서 두 문화의 대립을 심화시킨 요인이다. 문제가 교육에서 비롯되었다면 해결책도 교육 제도를 고치는 데서 찾아야 한다. 지나친 전문화가 두 문화의 괴리를 낳았으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균형 잡힌 교육이 필요하다.

즉 과학도에게는 인문 교육을, 비과학도에게는 과학(기초 과학과 응용 과학 모두) 교육을 강화해야 하는 것이다. 하루빨리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제는 위험해질 정도다. 어떤 위험일까?

"의사 소통을 할 수 없는, 또 의사 소통을 하지 않으려는 두 문화의 존재는 위험하다. 특히 과학 이 우리의 운명을 크게 좌우하는, 즉 우리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결정하는 시대에는 위험천만한 일 이 된다. 과학자들은 정책 결정자들에게 잘못된 조언을 하는 수도 있을 것이며, 정책 결정자들은 그것이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2차 대전 중 전쟁 목적을 위해 과학자들을 동원하는 일에 참여했던 그로서는 일종의 자기 고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물리학자들이 개발한 원자력 에너지를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결과는 바로 원자폭탄이었으니까. 이처럼 과학의 성과는 비과학적 지식인(정치인이 포함된다)이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따라 현실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달라진다.

이 연설을 할 당시 스노가 바람직스러운 교육 제도를 가진 것으로 간주한 나라는 미국과 소련이었다. 미국은 개방적인 교육을 통해 전문화에 대한 편중을 억제했으며, 소련은 응용 과학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게 그 이유였다. 오늘날에는 그런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스노가 제기한 '두 문화'의 문제점과 해결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대학 입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기초 과학보다 의학, 공학의 응용과학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우리 나라의 척박한 학문적 풍토에서는, 스노가 지적하는 지나친 전문화보다는 오히려 전문화의 결여라는 문제점이 더 큰 실정이다(심지어 인문 분야에서도 우리 나라는 철학, 역사학, 사회학 등 순수 학문보다 응용 학문인 법학과 경영학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는데, 이러한 불균형은 당장에는 드러나지 않더라도 장기적인 사회 발전에 반드시 저해 요인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 남경태(전문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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