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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5/08 (17:33) from 80.139.168.169' of 80.139.168.169' Article Number :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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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진보교회 사회참여의 신학적 기반


1970년대 진보교회 사회참여의 신학적 기반


채 수 일*



1. 들어가는 말


한국 현대사에서 1970년대를 어느 기간으로, 또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에 대한 사학계의 일치된 의견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1970년대를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동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사건에서 시작하여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에 이르는 기간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1970년대는 당시 22세였던 한 젊은 노동자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한 절대 권력자의 죽음에서 막을 내린 '죽음의 시대'였다. 정치적으로는 이른바 '유신체제'의 시대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장기집권욕이 구체화된 시기였고, 경제적으로는 소수 재벌중심의 수출지향적인 고도성장정책과 노동탄압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유신정권의 정보부 정치, 반공주의와 남북관계의 정략적 이용, 긴급조치와 계엄령, 국가보안법에 의한 언론통제, 노동과 인권탄압, 빈부의 양극화, 이에 대한 학생, 재야 세력의 민주화 투쟁과 인권운동이 70년대 사회적 상황을 포괄적으로 규정한다.

한국 개신교 내부 상황도 양극화되었다. 이른바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이, 복음화와 인간화, 영혼구원과 사회구원 등의 신학적 담론을 중심으로만이 아니라, 국가권력에 대한 태도에서도 양분되어 있었다. 보수적 복음주의 진영은 근대화 정책과 도시의 팽창, 농어촌의 붕괴에 따른 사회적 불안과 정치적 불안정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수용하면서, 대규모 복음화 대회 등을 통해 급성장할 수 있었다. 1973년 5월의 빌리 그래함 한국 전도대회, 1974년 대학생선교회가 주관한 '엑스플로 74' 등은 한편으로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 잠재력과 보수진영의 세력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진보진영을 용공으로 매도하면서 탄압했던 유신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했다.

1970년대 한국교회의 이른바 진보진영을 교파나 교단별, 혹은 교회별로 분류하기보다는 오히려 '에큐메니칼 운동권'으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교파나 교단 안에서도 서로 다른 성향의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시기에는 도시산업선교, 도시빈민선교, 기독학생운동, 인권운동, 재야 민주화운동 등을 중심으로 개신교 진보진영이 초교파적으로 연대했고 또 조직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운동의 배경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있었기 때문에 진보진영 운동이 에큐메니칼 운동과, 진보진영이 곧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동일시될 수 있었다. 70년대 한국 개신교 진보진영의 사회참여는 도시빈민, 노동자, 학생, 재야 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인권운동'과 유신체제에 대항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과 민주화'를 내용으로 하는 70년대 개신교 진보진영의 사회적 참여의 신학적 기반은 무엇이었을까?



2. 개신교 진보진영의 사회참여와 신학적 기반


2-1. 한국교회의 사회참여는 에큐메니칼 운동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고 그 역사는 1925년으로 소급될 수 있다. 1925년 당시 국제선교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의 회장인 존 모트(John R. Mott)의 방한을 계기로, 장로교, 감리교, YMCA, YWCA가 중심이 되어 조직된 '조선 기독교 대표자 회의'가 IMC 가입을 논의, 마침내 1926년에 IMC에 가입하게 된다. '조선 기독교 대표자 회의'는 1928년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세계선교대회에 5명의 대표단을 파송한다. 이 대회에 참석했던 신흥우(당시 한국 YMCA 총무)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회적 구속 사업에 있어서 사실 그대로 증인이 될 수 있다.……만약 교회가 이에 실패하여 농민들이 그리스도에게 기대하는바 사회적 구원과 민족적 구원이 제거된다면 교회는 전적으로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농촌사회에 대한 관심, 사회적 구원과 민족적 구원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선교 초기부터 한국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의 사회참여가 처음부터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1970년대 진보진영 사회참여 역시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중요한 점은 농촌계몽운동으로 시작되었고, 개인구원적 전도, 시혜적이고 개량주의적인 디아코니아 형태로 전개되었던 초기의 사회참여 형태가 이 시기에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신학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한편에서는 '수입신학'과 '에큐메니칼 논의의 수평적 전이'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보수와 진보 진영 사이의 신학적 갈등과 교회의 분열을 '서구 신학의 대리전'으로 볼 수 있는 근거도 물론 있다. '하느님의 선교 신학', '세속화 신학', '토착화 신학', '정치신학', '해방신학' 등 서구 진보신학운동의 중심이었던 세계교회협의회와 정교분리와 영혼구원, 복음전도를 초점으로 한 복음주의 진영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한국에서 재현되었다는 점에서 그런 혐의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서구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쟁과 갈등의 대리전에 어느 진영이 더 충실했는지는 이미 드러난 결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70년대 진보운동의 신학적 전거로서 '민중신학'이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한국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면, 한국교회 진보진영이 단순한 서구 진보신학의 대리전을 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당시 한국사회가 이른바 제3세계 국가들이 일반적으로 직면하고 있었던 문제점들을 넓은 의미에서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예속적 근대화의 과정에 함께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에큐메니칼 운동, 특히 제3세계의 문제와 대화했던 에큐메니칼 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신학적 대화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 아니 오히려 서구 신학이 제3세계 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에큐메니칼 대화가 얼마나 신학을 풍요롭게 하는지를, 가장 콘택스츄얼한 신학이 가장 보편적인 신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시기가 바로 70년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70년대 한국 개신교 진보진영이 세계 에큐메니칼 신학운동을 수동적으로만 수용한 것이 아닌 것은 1972년 12월 29일부터 1973년 1월 12일까지 태국의 방콕에서 세계교회협의회 '세계선교와 복음화 위원회'(CWME)가 '오늘의 구원'을 주제로 개최한 국제협의회 이후, 같은 주제의 협의회를 한국에서 다시 열어(1973년 4월) 대회에 대한 보고와 함께 한국적 상황에서 '오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검토한데서 드러난다. 인간을 몸과 영혼으로 가르고, 구원의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사이의 긴장관계를 해소하려는 것을 비판하면서 구원을 통전적으로 이해하는데 기여한 '오늘의 구원' 대회는 결과적으로 보수적 복음주의자들과의 긴장을 가져왔지만, 구원을 사회적, 정치적 정의 속에서 드러나는 과정으로 이해한 진보진영의 사회참여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했던 것이다.


2-2. 70년대 진보적 사회참여의 신학적 전거를 검토하기 위해서 우리는 60년대의 상황과 신학운동을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는 4·19 학생혁명과 5·16 박정희 군사 쿠데타, 한일협정,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월남전 파병 등 국내적으로는 근대화와 개발독재, 수출지향적 경제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결과적으로 농어촌의 이농과 농가부채의 증가, 도시빈민형성, 인권과 언론자유의 제약 등이 뒤따랐다. 세계적으로는 쿠바 혁명, 중국의 문화혁명, 베트남 전쟁, 가톨릭 교회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냉전체제의 강화, 맑스주의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기술문명의 급진적 발전 등 제3세계의 종속적 발전과 구조적 빈곤, 인종주의, 혁명 등이 신학적 담론으로 등장했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교회 진보진영의 사회참여를 위한 신학적 담론은 거의 동시적으로 등장했다고 보여진다. YMCA의 '책임사회론',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인간화와 중간집단 교육',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론', 도시산업선교 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들 운동들은 대부분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학의 영향을 받았는데, '세속화 신학', '혁명의 신학', '해방신학' 등이 대표적인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독일 고백교회의 '바르멘 신학선언', 디트리히 본회퍼(D. Bonhoeffer) 신학 등이 소개되었고, 브라이덴슈타인(Breidenstein), 위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 1975년 방한), 구스타포 구띠에레츠(G. Gutierrez), 제임스 콘(James Cone, 1979년 5월 방한), 대만 출신 신학자 송(C. S. Song, 1972년 4월 방한) 등의 신학자들이 한국교회 진보진영의 사회참여의 신학화에 자극을 주었다. 특히 브라이덴슈타인은 당시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의 도시선교위원회를 중심으로 기독학생운동(KSCF)에 큰 신학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하비 콕스의 '세속화 신학', 리처드 쇼울의 '혁명의 신학',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본회퍼의 신학 등을 소개하는 동시에 산업사회의 근로자, 도시 빈민을 돕기 위한 구체적인 접근방법 및 전략 등을 지도하였다. 그의 책, '학생운동과 사회정의'는 판금되었고 그도 결국 정부로부터 추방당한다. 대만 신학자 송(C. S. Song)의 방한과 그의 아시아 해방신학은 민중의 삶을 이야기 신학으로 형상화하고 한국 민중의 고난을 아시아의 틀에서 해석할 수 있는 상상력을 주었다. '희망의 신학'으로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위르겐 몰트만은 1975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 '민중의 투쟁 속에 있는 희망'이라는 제목의 강연 등을 통하여 당시 고난받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민중의 운명과 자유와 통일을 위해 투쟁하면서 민중신학을 막 탄생시키고 있던 한국의 신학자들은 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1979년 5월에는 흑인 해방신학자 제임스 콘(J. Cone)이 방한, 흑인 체험과 흑인 영가의 해방신학적 가능성을 강연했고, 흑인 해방신학은 한국 민중문화의 신학적 가능성을 더욱 확인하게 했다.



3.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


다양한 신학적 배경과 담론들이 이 시기 진보진영의 사회참여의 신학적 근거를 제공했지만, 크게 보아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이 그 근저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선교'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2년 독일 빌링엔(Willingen)에서 개최된 국제선교협의회(IMC) 총회에서였다. '십자가 아래에서의 선교'를 주제로 열린 국제선교대회에 참석했던 당시 바젤 선교회의 회장이었던 칼 하르텐슈타인(Karl Hartenstein)이 독일어 보고서에서 '하느님의 선교'라고 표현한 것이 발단이 된 것이다. 그 후 '하느님의 선교'는 IMC의 핵심적인 신학개념이 되었고 사회참여적 진보진영의 선교신학적 담론이 되었다.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는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서구교회를 지배했던 식민지 선교에 대한 반성과 제3세계 교회의 정치적 독립과 함께 등장했다. '하느님의 선교'는 선교의 방법이 서구화를, 선교의 목적은 비그리스도인의 회개와 세례, 그리고 보이는 교회의 확장을 의미했던 서구교회의 지나치게 유럽 중심적이고 백인 중심적인 사고의 틀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생긴 것이다. '하느님의 선교' 신학은 선교의 주체를 하느님 자신으로 이해하고, 선교의 목적을 모든 피조물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배권을 수립하는데, 곧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두었다. 이로써 선교 영역의 경계와 선교활동의 한계가 동시에 철폐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온 세계, 나아가 온 우주가 하느님의 선교, 곧 하느님의 구원사의 장이 되었고, 하느님의 약속의 빛에서 조명되었다.

'하느님의 선교'가 구체적으로 실현된 1960년대는 세계적으로는 냉전체제가 가속화되고, 라틴 아메리카의 군부독재와 경제적 예속이 심화되었으며, 아시아는 구조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던 시기였다. 국내적으로는 박정희 군부의 쿠데타와 개발독재가 시작되고 있었다.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사회발전과 경제문제, 국제문제에서의 정의와 평화, 세속화와 '책임사회론'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빌링엔 세계선교대회가 끝난 2년 후,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제2차 총회는 '예수 그리스도 - 세상의 희망'을 주제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교회의 선교', 냉전체제, 인종 및 민족분쟁으로 분열된 세계 안에서의 교회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그 후 진행된 세계교회협의회 역대 총회들과 1958년 가나, 1972년 방콕, 1980년 멜버른, 1989년 산 안토니오, 1996년 살바도르 브라질에서 개최된 세계선교대회들을 추적하면 이슈들이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하느님의 선교 이념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느님의 선교' 신학이 한국 교회적 차원에서 최초로 논의된 것은 한국기독교연합회가 1969년 1월 27일 주최한 '제2회 전국 교회 지도자 협의회'에서였다. '오늘의 한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선교'를 주제로 열린 이 협의회는 '근대화에 수반되는 상황의 변화와 선교대상의 변모에 따라 교회의 구조도 변형되어야 하며, 교회의 이념적 개방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결의했다. 1968년 5월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로 취임한 김관석 목사는 자신의 선교신학적 기치를 분명하게 '하느님의 선교'로 정했고, 이는 70년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활동의 신학적 기반이기도 했다. 한국교회 진보진영은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파생하는 도시화와 농촌의 붕괴에 대응하기 위해, '하느님의 선교' 신학을 근거로, 개발독재가 추진한 근대화의 그늘에서 고난받는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을 중심으로 농촌개발과 도시산업선교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을 지향하는 '하느님의 선교' 신학은 선교의 지평을 무한으로 확대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의식과 역사참여를 고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영적 관심을 충족시키는 데는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복음은 인간과 세계를 총체적이고 통전적으로 구원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해방에 대한 앞선 관심이 영혼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구조와 체제의 변혁이 인간성의 변화에 우선한다는 생각은 세계의 구원은 구원받은 인간에 의해 가능하다는 생각과 통합될 수 없었다. 이런 신학적, 사회참여의 급진성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오히려 당시 군부정권의 탄압이 우리 교회의 성장을 위축시켰다고 할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선교'는 급변하는 기술과학 문명의 문제와 더욱 복잡해진 생태계의 파괴 현실, 빈곤의 문제, 다원종교 사회 안에서의 복음화 문제를 극복하기에는 일정한 한계를 가졌다. 또 '하느님의 선교' 신학은 교회 안에서 복음화냐 인간화냐, 영혼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양적 성장이냐 내적 성숙이냐라는 양극화를 불러오기도 했다. 이 시기 한국교회 보수진영의 대규모 복음화 대회들이 정부의 지원하에 조직되었고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하느님의 선교' 신학이 선교의 경계를 타파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경계를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곧 보수와 진보, 복음화와 인간화, 영혼구원과 사회구원 사이의 경계가 그것이다.

1970년대, 유신정권의 장기집권 기획으로 양심적 지식인들이 박해를 받고, 민중이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 진보진영은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참여했다. 수많은 청년 학생, 교역자들이 구속되었고, 지식인들은 해직 당했다. 민중과 더불어 고난받으며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며 함께 희망을 나눈 경험으로부터 '민중신학'이 탄생했다. 민중신학은 세계 에큐메니칼 진영의 주목을 받았으며, 하느님의 선교신학이 한국에서 신학화된 최초의 한국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4. 민중신학


민중신학은 박정희 정권(1961년부터 1979년까지 집권)이 추구했던 한국사회의 개발독재에 의해 희생당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의 고난과 투쟁을 신학적으로 성찰하고 거기에 참여했던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서 탄생한 한국적 해방신학, 혹은 한국적 사회참여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남동·김용복·현영학과는 달리 안병무는 민중신학을 해방신학이나 사회참여 신학의 큰 틀에서 이해하는 것을 거부했고, 의식적으로 해방신학을 읽지 않았다. 그가 '민중신학'이라는 말을 굳이 고집한 것은 에큐메니칼 신학지평에서 민중신학의 고유한 위치를 확보함으로써 한국신학의 세계화에 기여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민중의 현실, 고난경험과 그것의 신학화의 고유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70년대 한국 민중의 현실은 당시 이른바 제3세계 민중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제3세계 신학과의 대화의 단절은 결과적으로 민중신학의 더 풍요로운 발전을 늦춘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물론 서남동·현영학·김용복 등은 라틴 아메리카, 흑인 해방신학 등 제3세계 신학과의 대화에 열린 자세를 보였다. 서남동은 위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 같은 독일 신학자는 물론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띠에레츠(G. Gutierrez), 흑인 해방신학자 제임스 콘(James Cone), 심지어는 일본 신학자 아라이 사사쿠를 읽고 자신의 민중신학을 형성하는데 영향 받았다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민중신학 탄생의 직접적 계기가 된 사건은 1970년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이었다. 전태일의 분신은 60년대의 '민중을 위한 선교'에서 '민중과 함께 하는 선교'로 전환하는 분수령이었다. 교회는 민중이 더 이상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교의 동역자이며 주체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느님은 민중 사건 속에서 민중과 함께 고난 당하고 민중을 해방하시는 분으로 이해되었다. 기독 학생들은 도시빈민지역과 노동현장에 뛰어 들었고, 이들과 함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증언하고 투쟁했던 일부 신학자들과 교수들은 해직되고 투옥되었다. 1세대 민중신학자들로 불리는 이 시기의 신학자들은 안병무·서남동·현영학·문동환·김용복·서광선 등이었다.

민중신학은 본래 민중신학자들이 스스로 이름 붙인 신학운동이 아니었다. 민중신학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김형효(당시 서강대 철학과 교수)와 서남동(1918∼1984, 당시 연세대 신학과 교수)의 논쟁 때문이었다. 민중은 민중신학자들의 추상적인 허구일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중신학의 투쟁적인 열광주의를 경고한 김형효의 글에 대하여 서남동이 '예수, 교회사, 한국교회'라는 논박문에서 '민중신학'이라는 개념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서남동은 성서의 해방전통과 한국 민중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투쟁과 증언이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서로 합류하는 것을 밝히는 데 자신의 민중신학적 관심의 무게를 두었다. 이 과제를 위해 서남동은 '사회사적, 성령론적 통시적 방법론'을 활용했다. 사회사적 방법을 통해 서남동이 시도했던 것은 '계시의 하부구조', 즉 민중의 구체적인 삶의 복판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행동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계시가 역사적 사건으로 일어난다는 그의 성육신적 신앙고백과 다르지 않다. 성령론적 통시적 해석방법론은 예수 사건을 지나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민중사건 속에서 다시 반복되는 사건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안병무는 이런 방법론을 역사의 '맥'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1975년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민주인사들을 환영하는 예배에서 안병무는 '민족·민중·교회'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는데, 여기에서 안병무는 민족개념이 지배계급에 의해 현상유지(status quo)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오용된 역사를 지적하면서 민중을 민족의 실체이며 민족사의 담지자로 파악하였다. 그 후 안병무는 마가복음의 '오클로스'(ochlos) 개념과 '갈릴래아'를 한국의 상황에서 재조명하는 신학적 작업을 전개하면서 민중사건을 예수 사건의 중심에 세웠다. 예수와 12제자의 주변부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오클로스', 곧 민중을 그는 예수 사건 이해의 중심에 세움으로써 서구 신학이 안고 있던 역사적 예수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안병무에게 민중은 예수 사건의 조역이 아니라 주역이며, 예수 사건의 담지자이며 전승자였다. 민중사건은 하느님이 벌이는 선교인 것이다. 그리고 전승의 형식은 '이야기' 혹은 '유언비어'였다.

그래서 현영학은 민중의 몸의 언어(탈춤)에, 김용복은 민중의 '사회전기'에, 문동환은 '민중교육론'에 그리고 서광선은 '정치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민중신학 형성 초기에 있어던 가톨릭 신학자들의 참여도 간과될 수 없다. 서인석은 구약성서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이스라엘의 법 정신을 조명하였다. 또 가톨릭 시인이었던 김지하는 서남동의 민중신학적 상상력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김지하의 담시, '소리의 내력'(1972년)과 그의 옥중작품 메모인 '장일담'은 서남동으로 하여금 신학의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이야기 신학'을 발전시키고 '한'(恨) 개념을 신학적으로 성찰하게 하였다.



5. 민중신학의 몇 가지 주제들


(1) 민중은 누구인가?

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의 개념을 규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까닭은 개념화가 실체의 생동적인 파악을 오히려 제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중은 자신의 역동적 운동 가운데서 자신을 발전시키고 그러기 때문에 민중은 민중운동에 참여함으로써만 파악되는 것이지 객관적 관찰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민중을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받고, 문화적으로 소외된 집단으로 이해하였다.

1세대 민중신학자들의 이런 태도는 인식론에서 주객도식을 극복하고 신학하는 사람의 역사참여를 설득력 있게 유도할 수는 있었으나, 민중이해의 비과학성과 거기에서 파생하는 변혁대안 제시의 한계 때문에 이른바 2세대 민중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들은 1세대 민중신학자들의 민중이해가 소외론적 관점에 근거하고 있으며, 80년대의 변혁운동에 상응하지 못한다는 현실인식 때문에 맑스주의적 세계관 위에서 민중을 파악했다.

그러나 과학적 민중이해도 차세대 민중신학자들 사이에서 계급적 조건에 대한 판단을 중심으로 다시 분화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민중이 사회 경제적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민중현실, 예를 들면 '민중 가운데 민중'인 여성의 문제는 민중을 보다 탄력적으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개념의 엄밀한 규정과 실체의 정확한 파악이 변혁운동을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만, 민중신학 본래의 입장, 곧 민중의 투쟁과 희망에 참여함으로써 민중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는 이론과 실천의 일치를 지향하는 한 민중신학의 변할 수 없는 전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2) 민중역사주체론

민중신학은 민중을 '역사의 하부구조에서 고난받고 소외당한 생산의 주체로서 역사의 담지자'라고 규정함으로써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의 계급적 해석의 가능성을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의 역사 주체성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파악하기를 거부한다. 까닭은 '지배와 피지배',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틀에서 파악된 역사 주체성이 흔히 두 계급간의 위상변화와 동일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용복은 '고난'에 민중의 역사주체성이 있다고 말한다. 민중의 고난을 통한 자기 초월과 그것의 대속적 성격에서 민중신학은 민중사건과 예수 사건, 하느님의 역사참여 사이의 연속성을 발견한다. 여기에 민중신학의 민중주체론이 신학적인 이유가 있다. 예수 사건에서 드러난 민중역사 주체론은 '선포'되고 '약속된' 주체론이다. 선포된 주체성은 민중으로 하여금 역사구원의 담지자로서의 자의식을 일깨운다. 약속된 주체성은 민중에게 희망 속에서 투쟁하게 한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이 이해하는 민중의 역사주체성은 진보사관에 기초하지 않고, 종말론적 희망 위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 종말론적으로 이해된 역사 주체성은 민중의 자기초월의 전거가 된다. 민중은 이미 자기 자신의 역사의 주체이다. 그것은 지배자가 지배의 역사의 주체인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민중은 역사의 주체인가 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교적 메시아 희망과 민중 메시아니즘

민중신학은 하느님의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예수의 메시아성을 강조함으로써 엘리트적, 영웅적 메시아니즘, 곧 '정치적 메시아니즘'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모든 형태의 폭력에 기초한 억압적 권력을 폭로하고 상대화시킨다. 그러나 문제는 '민중 메시아니즘'과 그리스도교적 메시아 희망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다.

'민중 메시아니즘'은 메시아 희망의 담지자가 민중 자신이라고 본다. 메시아 역시 초월적 존재라기보다 민중 가운데서 육화한다. 민중의 자의식의 진보적인 성숙이 운동 가운데서 기대된다. 민중해방은 민중 자신의 힘에 의해 성취되며, '민중 메시아니즘'의 역사 이해는 '역사 내재적 진보이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민중 메시아니즘'이 그리스도교적 메시아 희망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이다.

메시아니즘이 약속하는 구원이 물질적이냐, 영적인 것이냐, 역사적인 것이냐 초월적인 것이냐는 중요한 구별이 아니다. 또 그리스도교 메시아 희망이 민중을 수동적으로 만들며 혁명적 열정을 약화시킨다는 '민중 메시아니즘'의 비판이나, '민중 메시아니즘'은 민중을 절대화시킴으로써 자기초월의 근거를 상실할 위험이 있다는 그리스도교 메시아 희망의 비판도 중요한 지적이 아니다. '민중 메시아니즘'의 비판은 그리스도교적 메시아 희망이 그리스도인을 변혁을 위한 행동에로 인도하지 못하는 한 정당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메시아 희망은 '민중 메시아니즘'이 역사적 성취를 절대화하여 자기비판력을 상실할 때, 정당한 것이 된다.

이런 갈등은 민중신학이 변혁운동과 대결하는 한 언제든지 새롭게 제기될 문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4) 운동으로서의 신학

1세대 민중신학의 전개는 '민중은 신학에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이런 질문과의 대결에서부터 성서와 교회사에 나타난 민중전통이 재조명되었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파악하게 되었으며, 민중의 현실변혁을 위한 자기초월적 행동에 메시아적 성격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차세대 민중신학은 '신학이 민중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신학의 대안적 현실변혁 가능성이 모색되었고, 맑스주의 세계관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신학운동이 아니라 운동으로서의 신학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래서 운동의 기초인 대중, 혹은 교회대중에 대한 이해가 과학적으로 접근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동으로서의 신학은 신학하는 자의 학문과 삶의 일치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신학이 곧 운동일 수 있어야 한다는 자기의무화를 의미한다. 까닭은 변혁의 대안모색이 구조적 변화와 인간의 삶의 태도의 변화가 상응할 때 실현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운동으로서의 신학인 민중신학은 신앙공동체의 실험적 모색을 요청한다. 특히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의 유일지배가 현실이 되는 오늘의 상황에서 평등과 경제정의를 지향하는 새로운 신앙공동체 운동은 민중신학의 새로운 과제로 남아있다.



6. 민중신학에 대한 평가와 전망


민중신학이 생겨난 지 이제 30년이 되어간다. 민중신학에 대한 평가는 그동안 민중신학 진영 안과 밖에서 있었다. 나는 민중신학을 그 안에서부터 평가하려고 한다. 그것은 민중신학에 대한 고증학이나 주석학적 접근이 아니다. 이른바 민중신학 1세대들이 무엇을 이렇게 말했다느니, 혹은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거나, 그들의 이런 주장은 무슨 뜻인가를 밝히는 것에 나는 관심이 없다. 이런 작업은 이미 많이 있었고, 앞으로도 관심 있는 사람들에 의해 연구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민중신학이 스스로 설정한 두 가지 목적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민중과의 동일화에서의 실패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해방에서의 실패이다.

민중신학은 예수와 민중과의 관계, 곧 예수와 민중의 동일화를 재발견함으로써, 대단히 급진적인 신학적 사고를 전개했다. 제도적 교회에 대한 비판과 탈교회주의(교회의 민중성 회복), 강단신학에 대한 비판과 '방외의 신학', '이야기 신학'의 전개(신학의 민중성 회복) 등이 거기에서 남은 것들이다.

교회의 민중성 회복은 민중교회의 탄생과 활동으로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늘의 민중교회가 교회의 민중성을 얼마나 회복했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와 미래의 전망이 중요한 판단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민중교회 위기론'은 - 교역자의 생활은 물론 최소한의 선교활동을 뒷받침할 수도 없는 열악한 재정난에서부터, 대교회 의존성, 민중해방이냐 민중복지선교냐 하는 방향설정에 대한 논의 등에 이르기까지 - 민중교회의 민중지향성이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되어야 할지 여전히 모색 중인 것처럼 보인다.

'교회의 민중성' 실현에 대한 질문과 함께 우리는 '신학의 민중성'은 얼마나 실현되었는지도 물어야 한다. 신학의 현장인 민중교회 안으로부터 신학적 작업이 없다는 것이 가장 확실한 예증일 것이다. 또한 민중신학이 교실 안에서 훈고적 작업에 매달려 본래의 방외적 성격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도 다른 하나의 예증일 것이다.

신학의 민중성과 관련하여, 민중신학이 '증언의 신학'에 머물렀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것은 민중신학자들이 말만하고 참여는 안 했다는 비판이 아니다. 또 증언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고난을 민중신학자들이 겪지 않았다는 비판도 아니다. 민중신학자들이 민중이냐 아니냐는 논쟁도 한 때 있었지만, 민중신학자들은 스스로 민중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이 비판을 비켜갈 수 있었다. 민중이 아니라고 민중신학을 할 수 없나? 민중은 누구인가라는 해묵은 질문을 다시 제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물론 유감스럽게도 민중은 신학자가 아니고, 신학자는 민중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신학이든, 누구의 신학이든 신학의 위기는 언제나 '정체성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든가! 민중신학을 민중신학답게 하는 것은 신학의 민중성, 신학하는 사람의 민중성, 아니 최소한 민중지향성이 아닐까! 신학과 신학하는 사람의 민중성을 담보하는 것은 '실천'일 것이다. 민중신학의 위기는 우리 시대의 '민중신학적 실천'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중신학의 두 번째 실패는 첫 번째 실패와 무관하지 않은데, '민중이 신학에게 가지는 의미의 재발견'에서 비롯된 '민중신학이 민중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또 있는지'를 지금까지 민중신학이 진지하게 검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중신학이 민중해방과 관련하여 무엇을 남겼나 하는 문제의 제기가 그것이다. 신학이 역사 변혁에 얼마만큼 기여했는지, 민중이 민중신학으로부터 민중해방을 위해 무엇을 배웠는지, 민중 자신의 증언이 무엇인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1970년대 민중신학이 추구한 인권회복, 민주화 등은 상대적으로 실현되었다. 이런 역사의 상대적 성취를 근거로 민중신학 용도폐기론을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거기에 대해 민중을 폭넓게 규정함으로써 민중은 언제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민중신학은 여전히 필요하다는 용도유지론을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민중신학의 미래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오늘의 민중신학이 지향하는 민중해방의 방향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오늘 민중신학이 지향해야 할 민중해방은 권력(정치적, 경제적, 교권적, 가부장적 권력 등 일체의 상하적 인간관계를 뒷받침하는 권력)과의 관계에서 철저히 '탈권위주의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특정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 구체적인 정치적 결단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민중의 힘이 정치적 성취를 가져온 역사적 경험도 중요하다. 또 정치권력이 현실변혁을 위한 최선의 길은 아닐지 몰라도 효과적인 길이라고 생각해서 많은 운동권 인사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정당정치에 참여했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신학의 해방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서도 '권력에 대한 거리와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중신학이 민중해방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해방된 민중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해방된 민중적 삶, - 민중신학은 민중의 자기초월이라고 말한다 - 그것은 곧 자유의 삶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중의 자기초월은 이웃, 혹은 역사를 위한 자기희생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 뒤에 숨어있을 수 있는 위선과 소영웅주의마저 극복되어야 한다. 민중신학은 권력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민중 자신으로부터도 거리와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긴장의 유지는 신학자를 깨어있게 하고, 신학의 자유를 확보한다. 민중신학의 미래는 민중신학자들이 얼마만큼 권력과 지배,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자유한가에 달려 있으며, 역사적 성취에 대한 신학의 비판적 자유를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의 민주화와 시민계급의 등장을 이유로 민중신학 폐기론이 주장된 적이 있었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보는 시각의 문제에 대한 논란(정말 우리 사회가 시민사회로 진입했는지, 중산층이 두터워지면서 자동적으로 민주화되고 민중운동은 소멸하는지 등)과 배타적 민중운동론에 대한 시비(민중연대가 시민연대를 배타적으로 거부하는지 등)는 잠시 접어두더라도, 민중신학은 여전히 고난받는 민중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중신학이 처음부터 자신의 과제로 설정한 분단현실의 평화적 극복과 참여민주주의의 실현, 인권의 신장은 아직도 완전히 성취된 것이 아니다. 특히 민중 가운데 민중인 여성의 신학적 성찰과 해방운동과의 대화는 더 진전되어야 한다. 종교신학, 생명의 신학과의 대화 역시 민중신학을 더 풍성하게 할 것으로 전망한다. 지금 제기되는 가장 중요한 시대적 도전은 경제정의의 문제이다.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과 함께 현실이 된 경제세계화는 부와 빈곤의 문제를 다시 신학적 성찰의 중심에 세운다. 빈곤은 이제 한국 민중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중신학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세계의 민중과 함께 정의로운 경제질서를 모색하는 투쟁과 연대에 참여해야 한다. 특히 대규모로 이동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환경재난에 노출된 가난한 사람들, 세계화와 정보화 시대에 소외된 사람들의 고난을 증언하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갈 신학적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7. 죄책과 신앙고백으로서의 참여

:〈한국그리스도인 선언〉(1973년)과〈한국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1974년)을 중심으로.


1970년대 한국 개신교 진보진영 사회참여의 신학적 전거를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은 1973년 5월 20일에 발표된〈한국그리스도인 선언〉과 1974년의〈한국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이다.

억압적 상황에서 비밀리에 세계교회에 전해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은 당시의 상황을 극명하게 밝히고 있다. 권력집중과 독재의 절대화로서의 유신체제, 힘과 위협에 의한 지배, 양심과 신앙의 자유의 파괴, 대중조작과 기만, 정보통제, 수탈과 부정부패, 집권유지와 강화의 구실로 악용되는 분단상황 등으로 시대를 규정한 '선언'은 '하나님을 향한 죄책 고백'이며, '오늘의 상황 속에서 진리를 말하며 그것에 따라서 행동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복종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언'에 참여한 이들은 '하나님이 눌린 자들, 약한 자들, 가난한 자들을 반드시 의로 보호해 주시는 분이며, 역사에 있어서 악한 세력을 심판하시는 분임을', '메시아이신 예수가 불의한 권력은 무너지고 메시아의 나라가 올 것을 선포하신 것과 이 메시아의 나라가 가난한 자들, 눌린 자들, 멸시받는 자들의 안식처가 될 것임을', '성령이 개인 생명의 부활과 성화를 위하여 활동하실 뿐만 아니라, 역사와 우주의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활동하심을' 믿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고난받고 눌린 자들의 자유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예수 그리스도처럼 눌린 자들, 가난한 자들, 멸시받는 자들과 운명을 같이 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 '세상에서 사회적 정치적 개조를 위하여 싸우라는 성령의 명령' 앞에 서있다고 고백한다.

삼위일체론적으로 짜여진 '선언'은 70년대 진보진영의 사회참여가 죄책 고백과 하느님의 명령에 대한 복종에서 비롯된 신앙고백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익명으로 발표한 '선언'과는 달리 66명의 그리스도인이 서명하여 1974년에 발표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은 '하느님의 선교' 신학을 기초로 하여 당시 쟁점이 되었던 구체적인 문제들에 접근한다. '국가와 종교', '인권', '교회의 선교', 세 부분으로 구성된 '성명'은 먼저 권력의 절대화를 우상으로 규정하면서, 정교분리를 주장한 당시의 집권층에 대하여 '정치와 종교 또는 국가와 교회의 분리는 본래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의 야합에서 오는 권력의 절대화와 그것에 따르는 횡포와 부패를 막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특정한 종교에 대한 정치권력의 차별대우를 막기 위한 것이지 종교와 정치의 대상과 영역을 분리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성명'은 '인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오직 그에게 속했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임을 천명하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막 27, 28)는 예수의 말씀이야말로 '억압적인 제도나 법에 대한 첫 인권선언'이라고 말한다. '성명'은 더 나아가 복음의 핵심인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적, 사회 정치적 영역을 포함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며, 영적이라고 표현하는 어떤 부분에 국한한 개인적 타계적인 어떤 특유의 종교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선교는 현대 사회에서 정치적 사회적 활동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고', 구체적으로 '인간의 자유화, 인류의 사회화, 제도의 인간화, 사회정의, 세계평화, 인간과 자연과의 화해에 종사하게 된다'고 한다. '성명'에 서명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일한 진보 그리스도인들이 정작 만든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인간의 나라였을 뿐이라는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의 비판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선교를 '정치적 사회적 행동으로 수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선물로 오는 것이지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때문이거나, 교회의 정치적, 사회적 행동이 단번에 결정적인 이상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구약의 예언자들, 신약의 사도들, 그리스도교 역사상의 증인들과 순교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활동에서 그 삶과 행동의 표본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성명'은 '신학적 성명'이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체적인 신앙고백에 근거한 것임을, 진보진영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지향하면서도 역사 자체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확신하지만 그것이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한다.



8. 마치면서


1970년대 한국 개신교 진보진영 사회참여의 신학적 전거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더 검토해야 할 자료들이 많이 있다.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은 도시산업선교활동, 기독학생운동, 재야 민주화 세력과의 연대활동에 대한 신학적 근거들이다. 이 시기에 있었던 수많은 형태의 협의회와 대책회의 등의 자료에 대한 분석도 진전되어야 한다.

또한 진보적 기독교 운동을 용공으로 매도하기 위하여 제시되었던 책자들, 예를 들면 '기독교 선교에 관한 서울 선언'(1975년), '한국기독교와 공산주의'(1976년 초 한국종교문제연구회라는 단체명의로 발간), 서울 시경 제2부국장이며 예장 영도교회 장로라고 밝힌 김재국의 '한국기독교의 이해'(1976년 발행), 홍지영의 '정치신학의 논리와 행태'(1977년 발행), '공산주의 서방교회 침투와 한국교회내의 활동상'(1979년) 등에 대한 진보진영의 대응도 검토해야 한다. 적대자들의 비판과 그에 대한 대응에서도 정체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면의 한계와 필자의 능력부족으로 진전된 연구는 남겨둘 수밖에 없다. 유신체제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이 시기에 고난받은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의 개인적 증언, 한국 그리스도인들과 연대했던 해외 그리스도인들의 증언도 더 발굴되고 수집되어야 한다.

그러나 잠정적으로나마 우리는 1970년대를 민주주의가 유보되고 인권이 탄압받던 개발독재의 시기로 규정하고, 개신교 진보진영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 인권운동이 죄책고백과 신앙고백 위에서 전개된 시기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신학적 전거를 나는 한국에서 60년대 말에 알려진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선교'와 한국의 민중운동 전통이 합류한 '민중신학'에서 찾았다. 민중신학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적 하느님의 선교 신학이며, 에큐메니칼 신학의 지평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은 최초의 한국 신학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70년대 암울했던 '겨울 공화국'에서 고난받고 투쟁하면서 한국의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근거도 민중신학에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 출처: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와 역사] 18호(2003)

* 원문 : http://user.chollian.net/~ikch0102/nm-18-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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