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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5/10 (06:32) from 80.139.162.53' of 80.139.162.53' Article Number :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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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이라는 개념에 대한 반성
                                                           
과학적'이라는 개념에 대한 반성  (1993년 3월 29일)



                                            최종덕(상지대 교수. 동과연 편집부장)


머릿글

우리는 일상 언어 속에서 과학적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현대에 끼친 자연과학의 막대한 영향력 때문에 과학적이라는 수식어를 통한 문화 환경이 또 하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었다. 과학의 실제 내용과 관계없이 과학이라는 외형 범주가 자본주의 사회의 발달과 함께 카리스마를 갖게 되었고 이렇게 도그마로 변신된 개념이 내용을 지배해 버리는 풍조가 만연된 듯하다. 새로운 과학의 신화가 탄생된 것이다. 과학의 개념이 기득권 세력 구조에 의해 도구화되고 수단화되어 가는 상황을 지식인조차도 간과해 버리는 상황을 신화화된 과학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과학과 비과학의 구분 기준이 너무나도 아전인수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과학의 신화화는 분명히 누구엔가는 이득이 되고 있으며 누구에게는 불이익이 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과학이 과학 외적인 요소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그냥 넘겨 버리고 말일인지 다시금 반성할 필요가 있다.
자연과학적 세계관은 정신 이념적 세계관 혹은 문화사적 맥락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어서, 과학이 당시의 철학적 정신의 잉태물이라든가 아니면 철학이 과학의 시녀라는 일방향적 관계로 보는 시각은 반성되어야 한다. 우리는 과학과 시대 혹은 역사를 하나의 문화사회학적 총체 아래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은 한의사들이 만드는 잡지에 실리는 것이다. 필자는 한의학의 일방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한의학이 아닌 타 분야에서 한의학이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에 대하여 한의학 스스로 타당한 답변 혹은 대안 제시를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주목하면서 "과학적"이라는 개념에 대한 반성적 이해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 글이 직접적인 해답을 준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단지 단계적 발전을 위한 작은 시안일 뿐이다. 이 글은 이러한 인식 아래서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의 변천사를 통해서 과학에 대한 통상적인 오해를 반성하려는 의도에서 씌어진 것이다. 기존의 여러 글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자연과 인간이 하나인가 아니면 분리된 것인가를 논의한 순수 형이상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고전 물리학에서 현대 물리학으로 넘어가는 일선 과학의 변모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자연관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이다.

1. 과학의 변천과 문제 제기

뉴턴 과학의 역학적 배경은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의 존재 설정에 있다. 수학적으로 볼 때 그 역학적 체계는 미분방정식을 통해 완전히 기술되어 지는 과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러한 역학 체계의 특성은 그 초기 조건만 정확히 주어진다면 미래의 모든 사건의 양상을 완전하게 결정할 수 있다는데 있다. 이러한 고전 역학의 결정론적 체계는 다음의 몇 가지 가정 위에서 성립되었다. 첫째 관찰 대상은 그것을 관찰하는 관찰자와는 독립되어 영향을 입지 않는다. 둘째 이 (물리적)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시계이다. 따라서 제작자는 원칙적으로 그 시계를 분해할 수도 있고 다시 조립할 수도 있다. 셋째 뉴턴 역학은 시간 방향에 있어서 대칭성을 갖는다. 과거를 알 수 있듯이 미래를 과거와 같이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은 등질적이다. 넷째, 뉴턴 역학은 질점(質點) 역학이다. 즉 뉴턴적 대상 기술은 한 대상이 그 대상이 되기 위한 두 가지 필요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대상의 위치와 운동량이다. 이는 고전 역학의 환산 질량(reduced mass) 개념의 기본 정의이다.  
오늘날 자연과학은 그 어느 때보다 놀랄 만한 속도로 발전해 가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전통의 자연과학은 대상론적으로나 방법론적으로 물질을 끝까지 분석하려는  "끝까지 가 보려는" 탐구를 시도한다. 끝까지 가 보려는 탐구 태도는 그것의 성패 여부와 관계없이 자연과학의 기본 정신이며 이는 곧 환원주의와 직접 연관된다. 대상을 분해하여 분해된 개별 조각을 다시 조립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설명하려는 것이 바로 고전적인 자연과학의 환원주의적 태도이다.
이러한 기계론적 결정론과 환원주의가 바로 "과학적"이라는 수식어의 핵심 내용이 된다. 그러한 고전 과학의 입장은 경험적 대상을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것만으로 보고 따라서 과학의 대상은 인간의 현재 인식 능력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을 인정한다. 검증되는 것은 과학이고 검증되지 않는 것은 비과학이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검증의 의미 혹은 검증의 영역은 매우 제한된 범위였다. 다시 말해서 검증될 수 있는 것만을 검증 가능한 영역으로 제한시켰다는 말이다. 이 점은 인간 이성의 근원적 한계에 대한 자기 불만족에서 온 서구 이성의 독단일 뿐이다.
이 점은 필자 자신의 개인적 아집이 아님을 밝혀 둔다. 1960년 대 이후 발전된 카오스 이론은 그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카오스 이론이 등장되면서 (최종덕, [혼동되어서는 안되는 혼돈 이론], {시대와 철학} 93년 여름호 참조) 겉보기의 무질서 체계가 다시 질서 체계로 전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카오스 이론은 인간 인식이 세계에 대하여 자연과학이라는 이론 체계로 법칙화할 수 있었던 것만을 과학 법칙으로 보고, 동시에 인식 능력의 부족으로 법칙화할 수 없었던 자연현상을 모두 과학적 대상에서 배제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즉 질서화할 수 있는 것만을 질서라고 보았으며 질서화시킬 수 없는 것은 모두 혼돈의 현상이라고 치부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주변의 자연현상은 대부분이 무질서이며 카오스의 세계이다. 카오스 이론은 인간 인식의 능력 부족으로 인한 카오스를 그렇게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밑에 깔려 있다. 결국 자연 세계를 인간의 고정된 오성 범주 안에 가두어서는 안됨을 함의한다.
과학은 열려 있어야 한다. 검증 혹은 증명 가능성의 폭을 기존의 의도된 기준에 맞추어 스스로를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지금 참으로 검증 가능했던 사실도 추후에 거짓으로 판명될 수 있다. 과학은 그 점을 두려워하는 폐쇄된 것이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뉴턴의 고전 과학은 폐쇄성의 세계관을 제공할 수 있는 전형적인 과학의 패러다임이였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뉴턴 역학은 더 이상 물리학의 주역이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전 패러다임 속에서 과학을 이해하고 있다. 즉 현대 과학의 자연관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데카르트와 뉴턴에 의해 정립된 고전적인 의미의 환원주의와 기계론적 결정론을 통해서 과학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마땅히 비판되어야 한다.
이쯤에서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일이 있다. 이 글은 단순히 고전 과학의 정신을 무작정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는 고전 과학의 세계관이 문제라기 보다는, 고전 과학이 기득권 세력에 의해 카리스마화되는 그런 부당 이용의 요소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주시해야 한다.
      
2.  양자역학의 등장        

양자역학의 차원에서는 뉴턴 역학과 전혀 다른 상황을 낳는다. 양자론은 미시적 세계를 다루고 있으며, 그 미시적 과정의 기본 성격인 확률의 파동 함수로서 양자현상이 기술되어 진다. 이점은 물리적 실재에 대한 이해를 토대에서부터 바꾸어 놓은 것이다. 양자론에 있어서 물리적 실재에 대한 이해 방식의 변화 요구는 인식론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물리학의 형이상학적 태도까지 변화가 요구되었다.
닐즈 보어(Niels Bohr)를 따르는 양자역학의 표준 해석에 의하면, 미래의 완전한 예측을 위하여 현재를 아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현재의 모든 이론적 방법과 실험적 도구를 동원한다 해도 양자계의 미래 상태를 예측할 수가 없다. 그들에 의하면 물리적 실재의 내적 본성이 원래 그런 것이어서, 동일한 시간에 실재에 대한 수많은 측면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으며 단지 관찰자가 측정을 원하는 측면만을 선택해야 한다. 양자론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의 핵심은 측정 과정에서 나타나는 파동 함수의 붕괴(Koalas)이다. 여기서 위상 공간(Konfigurationsraum)위에 놓여 있는 확률파의 파동 방정식이 과연 개별 입자의 상태를 실제적으로 완전하게 기술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 즉 미시 물리적 대상이 단지 현상적 과정일 뿐인가 아니면 실제적 실재인가의 문제가 분명해져야 한다. 일상 언어에서는 실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경험적 관찰에 의해 구성되는 일상적 대상들의 성질은 일정 의미론을 인정한다. 고전 물리학의 의미론은 물론 고전 물리학적 사태를 기술하는데 적용될 수 있다. 고전 물리학의 실재에 대한 존재론적 전제는 그의 의미론으로 형성된 실재의 구조에서 생긴다. 그러나 이런 고전 의미론은 양자 물리학의 영역에서 특히 닐즈 보어를 따르는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야머(Max Jammer)에 의하면 보어의 입장은 관계성(Relationalit t)과 전체성(Ganzheit)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고 한다. 우선 보어의 관계성의 개념에 대해 말한다. 보어는 양자 현상이 독립적 실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확신하였다. 양자역학적 결과는 측정 장치와 대상의 관계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양자 대상과 측정 장치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포크의 인용을 보자: "파동 함수로 표현된 확률은 미시 대상과 측정기구간의 상호작용의 어떤 결과의 확률이다. 파동 함수는 그 자체로 미시 대상이 다양한 형태의 측정 기구와의 상호작용에 대한 포텐셜 확률로서 해석될 수 있다. 파동 함수를 통해서 본 대상의 양자역학적 기술은 관찰 수단과 관계된 상대주의적 요청에 따른다."  
측정 장치와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그 장치와 양자 대상은 비가역적 방식으로 하나의 특수한 상태로 진입된다. 그 과정에 있어서 측정 결과는 측정자와의 대화하는 결과치이다. 이 상황은 보어에 의해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 개념인 상보성 개념에 의해 서술되었다. 그의 상보성 개념은 "물리적 실재에 대한 우리의 사유 방식을 전격적으로 전회시킨 자연 철학의 새로운 길"이라고 한다.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에 의해 정초된 양자론의 코펜하겐 해석은 오랫동안 물리학자의 사유를 흔들어 왔다. 코펜하겐 해석 이후 양자역학적 현상에 대한 기술은 양자 대상과 그것의 성질에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 체계의 조건, 측정 과정, 결과치를 얻어내는 방법 등에도 관여된다. 보어는 다음과 같이 논쟁하였다. 피관찰 대상과 그 측정에 사용된 장치는 하나의 비분화적인 통일을 이룬다. 그 통일성은 양자 역학적 차원에 있어서 분리된 개별 입자의 결과를 고립시켜 볼 수 없는 하나의 체계를 의미한다. 주어진 개별 입자와 임의의 실험 장치와의 결합은 근본적으로 그 같은 개별 입자와 다른 실험 장치와의 결합과는 구분된다. 전체계의 상태 기술은 개별 입자와 모든 주어진 측정 장치 사이의 관계로서 표현된다.
이것이 야머가 말한 세계를 보는 관계성과 통일성의 입장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물리언어적으로 즉 우리의 일상 언어로 당장 말할 수 없다. 이 점은 코펜하겐학파의 가장 큰 난제였다. 상보성의 개념은 서로 대립되는 두 가정들의 종합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의도를 이루어 내기 위하여 물리적 실재에 대한 상세한 이해가 요구된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실재의 기술은 개체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달려 있다. 즉 실재의 올바른 기술은 관측 장치와의 관계 안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양자 물리학에서 실재에 대한 직관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양자역학적 현상이 거시적 언어를 통해서 기술되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인 일상 언어를 통해서만은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어려움이 생긴다. 그러나 여전히 물리학은 불립문자가 아니며 인간의 경험 언어를 써야 한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양자역학을 인식론만으로 해결할 수 없고 존재론이 개입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낳게 하였다. 존재론도 기존의 실체론적이고 환원주의적 존재론이 아니라 관계론적 존재론이다. 따라서 양자역학은 새로운 자연관을 요청하게 되었다.
양자역학이 새로이 요청하는 자연관은 세계를 전체적 통일성으로 본다. 그 세계관은 서구 사상을 2000여년 이상 지배해 온 플라톤적 세계관과는 다른 양상을 갖는다. 즉 이원론적 세계관 혹은 요소 환원주의적 기계론이 더 이상 성립될 수 없는 자연관을 양자역학은 보여준다. 여기서 플라톤적 존재론과 구분하면서 양자론이 함의하는 세계관을 필자는 유기체적 자연관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3. 유기체적 자연관

양자역학의 등장과 함께 기계론적 결정론과 환원주의가 큰 벽에 부딪치면서  유기체론이 그 대안으로 등장되는 것이 인문과학이나 자연과학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상적 조류이다. 유기체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자기 갱신을 꾸준히 하는 자체 조직성(Selbstorganisation)이다. 유기체의 자체 조직성을 마치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파기하는 카르노(carnot)의 열기관처럼 자신의 분비물, 바로 그것만을 먹고사는 유기체로 이해하면 안된다. 한 계의 엔트로피의 변화량 dS는 체계내적 엔트로피 양 dS|i와 외부 환경과 교환되는 엔트로피의 양 dS|e의 합이다.   
카르노의 기관은 외부로부터 오는 교환 엔트로피가 차단된 것이다. 소위 신과학운동에서 말하는 세계관은 고립적 대상 혹은 고립 체계를 부정하고 세계내적 연결성을 강조하면서도 엔트로피 계산에서는 체계내적 엔트로피의 값만을 보는 자기 모순적인 경우가 많다. 그 좋은 예가 최근의 신과학운동의 대표 주자인 가이아 이론이다.
한 유기체의 중요한 특성인 자기 갱신 개념을 갖고 기계론을 비판하는 관점은 환원시킬 수 없는, 부분들의 산술적 합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전체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한 체계의 고립성을 표명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자기 갱신이라는 개념은 다른 체계와의 내적 에너지 교환의 고리를 놓치면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이 둘은 상보적이다.
실은 유기체적 패러다임도 이로부터 나온다. 닐즈 보어의 상보성 이론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가 든 한 예를 보자. 우리가 생체 조직을 검사한다고 하자. 그러면 살아 있는 피부 조직을 떼어서 그 다음 물감을 들인 다음 현미경의 대물렌즈 앞에다 놓아야 한다. 그러나 피부 조직을 떼는 순간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세포일 뿐이다. 우리가 과학을 하는 작업은 결국 고립화와 이상화(idealisation)를 거쳐야만 한다. 이는 과학의 기본작업이였다.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인과율을 어겨야 하고 인과율을 맞추다 보니 설명될 수 없었다. 그러나 상보성 이론에서는 위의 둘은 모순적 관계라기 보다는 상호보완적이고 조화의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는 한 유기체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물론 닐즈 보어의 상보성은 입자성과 파동성, 물질을 정의하는 기본 요소인 위치(x)와 운동량(p), 혹은 시간과 에너지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념의 상보성은 유기체론으로 발전되었으며 나아가 인문학에서 이야기하는 환원주의 비판, 즉 옴살적(holistic) 세계관까지 이어진다.       
고전 과학은 알갱이 입자의 존재를 상정한 패러다임이다. 즉 세계의 구성물, 즉 각 사물은 분리되어 서로 상관성이 없는 고립된 존재라고 본다. 이에 반해서 바로 앞에서 말하는 양자적 세계상의 관계성과 통일성에 의한 유기체적인 옴살적 세계관은 고립적으로 보이는 듯한 사물들이 내적으로 서로 관계 지워져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히도 닐즈 보어의 입장을 상징하는 옴살적 세계관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예를 들어 사물 S1을 오른손이라고 하고 다른 사물 S2를 왼손이라고 하자. 장막을 치고 그 장막에 구멍을 두개만 뚫어 놓자. 장막에 뚫린 두 구멍을 통해 손이 두 개 나와 있다고 하자. 장막밖에 있는 우리는  그 두 손이 한 사람의 손인지 두 사람의 다른 손들인지 알 수 없다. 두 손이 실제로는 한 사람의 양 손인 줄을 모르는 아이가(일반 사람들) 있다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동시적으로 알고 있다는 현상을 그 아이는 신비하게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두 사물이 독립되어 무관한 것으로 아는 것이 실은 우리들의 편견이라는 점을 양자 현상은 보여준다. 양자 현상을 보는 옴살적 이해는, 즉 장막 안쪽의 사람은 S1과 S2의 상관성을 신비하게 보지를 않으며 실제로 신비한 사실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내적으로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상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신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자연의 소이연(所以然)을 포기할 것인가?  
만약 장막 밖에서 머무르고자 하는, 즉 고전 과학의 테두리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을 때, S1과 S2의 상호관계는 전적으로 우연이거나 신비에 속한다. 그러한 입장이라면 그러한 우연을 물리학의 탐구 영역에 집어넣지 않을 것이며 한의학을 신비한 무엇으로 내둥겨 칠 수 있다.  

4. 새로운, 그러나 원래 있었던 자연관의 가능성

개체와 전체간의 상관성을 어떻게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장막밖에 나온 두 손이 어떻게 동시에 서로를 알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혹시 아인쉬타인이 우려한 바와 같이 텔레파시와 같은 초자연적 현상은 아닌가? 그렇다고 하면 한의학의 대부분은 미아리 고개의 동양철학과 같은 수준이 될 뿐이다. 다행히 물리학에서도 개체 입자간의 상관적 영향력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져 가고 있다. 벨(John S. Bell)의 부등식을 통한 상관적 영향력에 대한 탁월한 해석이 1982년 아스펙트(Aspect)에 의해 실험으로 증명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우리의 경험적인 언어로 상관성을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철학적으로 보면 이미 화이트헤드(A. N. Whitehead)가 유기체의 개념을 통해 전체와의 상관성을 언급했지만, 그의 전체 개념은 열려진 전체이기 때문에 이해의 접근이 그리 쉽지 않다. 물론 과학의 대상도 궁극적으로는 열려진 전체이다. 다만 실험실에서 폐쇄된 전체를 임의 만들어 놓을 뿐이다. 또한 자연의 원래 모습도 열려진 전체이다. 인간은 과학을 성립시키기 위해 열려진 전체를 임시적으로 닫혀진 전체로 바꾸어 놓고, 원래 상관적 개체를 고립적 개체로 바꾸어 놓았다. 과학에 있어서 사다리 역할을 하는 개념의 정의는 곧 폐쇄와 고립의 추상화 작업을 의미한다. 과학에서의 추상화 작업은 과학 진보의 결정적 계기가 되는 수가 많다. 한 예를 들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학은 기본적으로 경험적이다. 그러한 사고의 지평선에서 개체 운동의 지속은 외부적 힘이 연속적으로 주어져야 한다(수평 등속운동을 위해서는 계속적인 외부의 힘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더 순리적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저항의 개념은 숨겨진 변수이였었고 따라서 경험적으로는 실제의 현상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릴레이의 추상화 작업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론적 운동학은 깨졌다. 그는 머리 속에서 하나의 실험을 하였는데, 경사면을 올라가는 운동은 감속적이며 내려가는 운동은 가속적이기 때문에 수평면에서의 운동은 등속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리학에서 이와 같은 추상화의 작업은 약속에 의한 초기 조건을 정해 놓고 폐쇠계를 설정해야만 가능하다. 이 작업을 통해 일반화가 성취되면 일단은 좋은 이론으로 평가받는다. 이렇게 추상화된 이론을 통해서 우리는 자연을 보는데, 자연 자체는 결코 추상적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추상화된 이론과 자연을 혼동하는 오류는 잘못된 과학 정신의 소유자인 우리들 속에 이미 깊이 들어와 있어서, 처음의 언급인 자연 전체계와 개체의 상관성에 대한 이해의 첫발은 사다리로서의 추상성을 다시 경험적 사실에 되돌려 놓을 수 있게 하는 진보적 전회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 보충적 이해를 위해, 개체 입자간의 비국소성을 설명하기 위한 벨(J. S. Bell)의 거시적 비유를 들어보자. 이 비유는 앞에서 말한 장막 뒤의 양손과 같은 비유이지만 그 중요성 때문에 다시 이야기한다. `버어틀만이라는 사람은 항상 색깔이 다른 양말만을 신고 다닌다. 이 사실을 아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버어틀만의 오늘의 한쪽 양말이 빨간 색이라면 다른 쪽 양말은 보지 않고도 최소한 빨간 색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반면에 그의 어린 아들은 그에게 어떻게 아버지는 다른 쪽 양말을 보지도 않고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느냐고 감탄적으로 묻는다'. 이 비유는 양자적 개체 입자간의 상관성이 텔레파시나 신비적인 어떤 상호 교류가 아니라, 개체로서의 두 쪽의 양말은 버어틀만이라는 사람의 전체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서 자연의 통일성은 관찰자 즉 인간을 포함한 전 개체들의 통일적 전체를 형성한다고 보는 스텦(H. P. Stapp)이나 후기 보옴(David Bohm)의 이론적 발전이 있다. 이 둘의 주장은 너무 강한 반면, 데스파냐(Bernard d'Espagnat)의 입장은 온건한 전체론(Holism)에 있다. 전체는 개체들로서 구성되어 있지만 개체들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다. 즉 개체들의 연산적 합산의 결과는 전체 값과 차이가 생긴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의 비분리성 혹은 옴살론으로 추론되는 기본적인 사유의 바탕이다. 개체들의 집합과 전체 사이의 양적 혹은 질적 차이( 어떤 차이인지 아직 모른다)가 해명될 수 있다면 이 세계는 완전히 인과적으로 설명 가능해진다. 그 질적 차이의 해명은 양적 차이의 해명보다 우회되어 있고 그 길이 멀지만, 물리 학자에게는 기본적으로 그 길이의 차이일 뿐이다. 과학학이 이 정도에 이르면, 그것은 현시적인 증명의 차원이 아니라 자연의 본질을 묻는 철학적 자연관의 차원이 된다. 이는 질(質)의 양화(量化) 가능성의 문제이며, 환원주의와 비환원주의의 갈등이다. 현대 과학주의의 최대 딜레마이며 여기서 한의학 분쟁의 요인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의 해결이 어렵다고 포기하는 일은 자연의 소이연의 사실을 포기하는 일과 같다.
문제는 한의학이 새로운 의미의 과학이기 위해서는 인과율이 포기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한의학이 당장 해답을 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비과학이라는 오명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포퍼(Karl Popper)의 말대로 과학은 열려진 체계이므로 현시점의 불완전성이 영원한 불완전성으로 남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인과성의 의미도 고전 과학적 개념과 달리 수정되어야 한다. 그 가능성을 타진한다.

5. 생명 과학은 생명 과학적 방법론으로

의학은 기본적으로 생명체를 다루는 학문이다. 따라서 고전 물리학의 대상인 화석화되어 고립된 대상을 다루는 학적 체계와 구분되어야 한다. 생명체의 유기성은 생명체의 단위를 전체로 보는 것이며 그 전체 또한 요소들의 계량적 합으로서의 닫혀진 전체가 아니라 자기 창조적인 열려진 전체 개념이다. 여기서 열려진 전체는 수렴의 전체와 발산의 전체가 있을 수 있다. 수렴의 열려진 전체는 양적으로는 닫혀진 전체와 같고 그 좋은 예는 유기체로서의 한 인간이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열려진 전체의 중요 특징인 엔트로피의 증가 혹은 시간의 비가역성을 공유한다. 발산의 열려진 전체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무한을 향해 열려 있다. 상식적인 의미의 우주가 그 예이다. 그러나 실제의 최근의 천체물리학에서는 무한하지만 끝은 있는 우주 모델을 많이 쫓고 있다. 그 우주는 바로 수렴의 열려진 전체이다. 수렴의 전체와 발산의 전체 사이의 또 하나의 차이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 성립 여부에 있다. 보옴의 기본 전제는 보존 법칙이 성립하는 전체의 설정이다. 따라서 그의 전체는 수렴의 열려진 전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전체 속에서 개체 운동의 인과율적인 의미가 비로소 성립된다. 개체들의 현상은 끝없는 무질서로 나타나는데, 그들 속에는 내재적인 질서가 존재한다고 보옴은 주장한다. 내재적 질서의 경험적 발견이 곧 숨겨진 변수이며, 이로부터 자연의 인과성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인과율은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없으며, 항상 자연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결국 이 이야기는 인과율을 기계적 결정론의 차원 안으로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는 점을 말한다. 한의학이 비과학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그것이 기계론적 인과율을 위반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에 대하여 그 비판의 사유 집단과 동일한 전제에서 대응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허사이며, 한의학 스스로를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격이 된다. 한의학이 과학이 될 수 있는 근거는 이미 첨단의 양자 전기역학 내지는 양자색역학에서 이미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근거는 인과율을 보지 하면서도 그 인과율의 의미는 유기체적 인과율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이해하는 일이다. 어쩌면 따로 이해할 필요도 없다. 동양 전통의 자연관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비난의 싹이 될 수 있는 주관적 직관주의에서 벗어나, 유기체적 인과율을 어떻게 보편성으로 확보할 수 있는가의 숙제가 남아 있다.
자연의 내재적 질서는 객관적 구조를 지닌다고 하여, 보옴은 일체의 주관적 요소를 배제한다. 따라서 보옴은 전체의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양자역학에서도 개체 운동에 대한 불확정성은 수정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의 정확하고, 이성적이고 객관적 기술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열려진 전체를 이해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아마도 열려진 전체는 현재의 사고의 지평선에서는 영원히 과학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서양 과학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임시적인 (ad hoc) 닫혀진 전체(일종의 물리적 체계)를  계속 만들어 가면서 사실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여기서 한의학이 서양 과학의 방법론 범주를 좇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를 함께 하는 한의학이 서구 과학의 조류에 눈감을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한의학은 열려진 전체계를 기반으로 하면서 닫혀진 전체계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그 둘은 모순적이 아니라 상보적이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한 가능성을 다시 두들겨 본다.
의식과 독립된 세계를 부정하는 관념론적인 차원이 아니고, 또한 의식과 완전히 독립된 실재 자체의 차원도 아닌 경험 과학의 가능성은 생명체로서의 한 인간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 앞서 말한 상보성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인간의 유전인자 속의 4개로 구성된 핵산의 정보 확산폭(Informationsbandbreit), 즉 정보가능량은 10의 240만 승 곱하기 10억개이다. 우주 시초로 부터 지금까지 존재 가능했던 총 입자의 수는 현 기본 입자 수인 10의 80 승 곱하기 우주의 나이 10의 40 승 해서 10의 120 승이 된다. 이렇게 상상할 수 없는 수의 크기도 인간의 유전 정보가능량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부밖에 안된다. 이 수는 아마도 앞서 논의된 열려진 전체에 해당될 수 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존재하는 인간은 그 중 극소의 일부분의 유전자만 운용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써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존재인 우리는 자기 자신을 한 계기 속에서 총체적으로 체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유기체는 독립된 존재로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개체간의 상관성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 많은 유전자의 경우 수를 고전 과학적인 계량적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전 과학은 주어진 데이터를 갖고 전체를 예측하는 전형적인 귀납론을 갖고 세계를 이해한다. 앞서 말한 기계론적 결정론과 요소 환원주의와 직접 연관되는 귀납 주의를 배경으로 한 고전 과학의 한계는 당장 인간이 아니라 가장 작은 단위의 바이러스 유기체에서도 드러난다. 고전 과학의 세계관에 대한 철학적 핵심으로 들어가면 서구 전통 의학이나 한의학 모두 동일한 난제에 부딪친다. 현대 과학은 유전자 문제에 대하여 종전의 내용 없는 자부심을 이미 버린 상태이다. 결국 과학의 새로운 기준은 계량적 실증성에서 이미 벗어난 상태임을 말하려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의학은 당연히 과학의 새로운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과 그 과학의 기준이 고전적 계량 가능 범위 안에서 다루어져서는 안된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고전 과학에서는 전체로서의 실재는 경직된 "실체"로서 이해되며, 양자론에서는 전체의 실재는 하나의 "관계"이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관계를 실체를 통해 해명하려 했으며, 후자는 실체의 개념을 시스템 전체의 관계망(Netzwerk) 속에서 해명하려 했다. 고립계를 추론하는 "실체"들의 과학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한의학은 영원히 과학일 수 없으며, 당연히 비과학이라는 누명을 벗어날 길 없다. 현실 현대 과학은 이미 "관계"들의 과학으로 전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 과학의 "과학적"이라는 기준이 카리스마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데도 함께 입다물고 있을 필요는 없다. 관계의 과학이 이미 한의학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만연된 고전 과학 방법론에 묻힐 필요는 없는 듯하다. 동시에 이러한 자기 인식은 수단으로서만 철저한 논리 체계를 안고 대응해야 한다고 본다. 앞서 여러 차례 논의되었듯이 당장은 "관계"의 학문이란 자연 철학적인 차원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외형적인 측면에서 엄밀히 보면 전자의 궁극 관심은 양적 분석에, 후자는 질적 종합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논쟁 속에는 풀릴 수 없는 언어의 맴돌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그것은 풀릴 수 없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상보적인 것으로 끌어가는 것이 현대를 이어가는 한의학의 과제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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