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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11 (14:36) from 80.139.165.116' of 80.139.165.116' Article Number :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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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 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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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 방법론

                                                    김 영진(영남대)


I. 들어가는 말
 
 서구의 철학사는 일종의 방법론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뛰어난 철학자들은 각각의 방법론과 함께 자신들의 작업에 착수한다. 근대 철학의 창시자인 데카르트는 연역적 방법으로 학문의 기초를 세운다. 이것은 수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그리고 경험론 철학을 대표하는 로크, 흄은 실험과 관찰에 근거한 귀납적 방법을 통해서 인식의 근거를 확립한다. 이후의 철학자들인 칸트, 헤겔, 막스, 훗설 등도 자신들만의 철학적 방법론을 통해서 사유를 전개한다. 예를 들어 분석적 방법의 중심에는 연역법, 귀납법 등이 있고, 비분석적 방법에는 해석학적 방법, 현상학적 방법, 변증법적 방법, 선험적 방법 등이 H. Seiffert, 『학의 방법론 입문』I, II 전영삼 역.
있다. 어쩌면 철학은 앞에 놓인 대상을 바라보는 방법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양의 철학은 방법론을 중심으로 구별할 수 있다.
 분석적 방법은 자연 과학에 토대를 두고 지식을 탐구하는 방법론이다. 이것은 관찰, 실험, 증거, 검증가능한 개념을 중요하다. 비분석적 방법은 자연 과학의 연구에서 객관성을 결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역사, 해석, 상상 등을 중요하게 본다. 자연 과학의 방법론은 인문, 사회 과학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흄이나 실증주의자들을 들 수 있다. 반면에 인문, 사회 과학에는 자연과학과는 다른 독특한 방법론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대체적으로 이것은 반주지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니이체, 베르그송, 듀이와 같은 사상가들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추상적인 형식이나 패턴은 실재를 오독하는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이 볼 때 분석적 방법은 객관성과 확실성을 지식의 근거로 삼고서, 수학과 같은 추상적 언어로 정확히 표현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면에, 비분석적 방법은 실재의 구체성(사건)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것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것들은 모두 실재의 어떤 측면을 간과하기가 쉽다.
 자연과학과 인문 및 사회 과학을 구별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시점에서, 두 학문을 모두 연구한 화이트헤드는 어떤 방법론을 통해서 자신의 학문을 탐구했을까? 그는 자연과학을 탐구한 시기에는 연역법이나 귀납법을 사용하고, 형이상학의 시기에는 해석, 이해를 사용한 것일까? 필자는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해서, 화이트헤드의 방법론에 어떤 일관성 혹은 연속성은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있다면, 도대체 어떤 방법론을 사용했을까? 이 논문에서 필자가 던지는 최초의 질문이다. 두 번째로는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형이상학’이 생산적인 학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생산적이라는 것은 기존의 연구에서 벗어나서 어떤 새로운 것을 전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언급도 방법론에 관한 화이트헤드의 고찰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필자는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 논문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II  연역주의와 귀납주의에서 드러난 문제점

 대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근거한 스콜라 철학이 17세기에 대두된 자연과학의 발전을 소화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새로운 탐구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갈릴레이, 케플러, 데카르트, 호이겐스, 뉴턴에 의해 전개된 자연과학에 대한 엄청난 신뢰는 명석성과 확실한 탐구 방법에 있다. 즉 자연과학에 대한 신뢰는 그 방법론적 우월성에 연루되어 있다. 과학만이 진리의 발견에 확실한 토대라는 것은 과학적 방법의 ‘합리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파이아벤트(P. Feyerabend)는 과학만이 모든 주관적인 왜곡에서 벗어난 객관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지고 있으며, 그 방법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실제적 ‘결과’들이 있다는 것이다. Feyerabend 1952: viii
과학, 합리성, 과학적 방법의 결합은 확고한 진리의 근거로서 묶여진다. 자연 과학의 성공이 합리적인 방법론 때문이라면, 합리성이란 과학적 방법의 사용 및 그 개념과 동일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확립하는 것이 논리실증주의 이래로 과학철학의 주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의 정당성의 확보가 방법론에 있다면, 그것은 연역주의(deductivism)와 귀납주의(inductivism)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현대 철학에서 귀납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카르납, 헴펠이 있으며, 연역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포퍼가 있다.
이 두 방법론에서 과학적 지식에 합리성을 부여하는 두 요소는 관찰된 경험적 사실과 형식 논리(연역과 귀납)이다. 따라서 이들 방법론에서 주장하는 논리는 유클리드에서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형식’(form)적이며, “본질적으로 무시간적이다.” Hacking 1983: 6
과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방법론이 형식적 합리성이라면, 그것의 밑바닥에는 ‘수학주의’가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관찰된 경험적 사실 역시 무시간적인 ‘단순정위’로 해석한다. 우리는 뉴턴의 모범을 따라 경험적 사실을 감각인상으로 규정한 흄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시도에는 ‘수학’주의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필자는 이로부터 화이트헤드를 통해서 수학적 정의와 추론이 사상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관찰이라는 경험적 사실이 귀납주의와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설명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유럽의 역사에서 수학이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은 두 차례가 있었다. 한 편은 그리스 시대에 플라톤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수학을 철학의 발전요소로서 거부한 후에 사상의 발전에 거의 기여하지 못하였다. 다른 한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철학 및 물리학에 미치는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수학은 17세기 사상에 절대적인 힘을 행사한다. 이때 수학은 고대에 누린 지위를 다시 확보한다. 17세기의 물리학자와 철학자들 다수는 수학자들이었다. 예를 들어서,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를 들 수 있다.그리하여 수학은 이 시기에 “철학적 관념을 형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SMW 66).  
 대다수의 철학자나 수학자 및 물리학자들은 수학은 무조건적으로 확실하다고 가정한다. 수학은 확실하고 필연적인 전제들에서 출발하며, 보편타당한 추론의 법칙들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참된 결론들을 도출한다. 이점에서 과학이 수학적 용어들로 표현될 때, 참된 진리, 정확하고 필연적인 지식을 제공한다고 주장된다. 그리하여 수학은 17세기 사상가들에게 자연과 지식을 탐구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는다. 우리는 갈릴레이의 그 유명한 문장을 통해서 확연히 이해할 수 있다.

“참된 철학은 우리 눈 앞에 열려져 있는 저 위대한 자연의 책으로 쓰여졌으나, 쓰여진 언어의 특성을 먼저 배우기 전에는 그것을 결코 읽을 수 없다. 그것은 수학적 언어로 쓰여졌으며, 그 특성은 삼각형, 원, 여러 가지 기하학적 도형들이다” “Saggiatore"(Opere, p. 232)


 갈릴레오의 공리는 현대에도 암암리에 절대적 척도로 자리잡고 있다. 현대 물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수학적 기호 및 언어는 필수적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보어 및 하이젠베르거의 양자역학은 수학을 모르고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수학이 과학의 이해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물리적 세계에 수학이 적용될 때, 수학의 용어에서 사용되는 ‘필수적’, ‘정확한’ 이라는 형용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수학을 통해서 드러난 물리 세계가 진정한 세계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질서’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을 먼저 제기해야 한다. 만약 수학적 언어로만 실재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17세기 우주론이 저지른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신에서 ‘자아’ 중심으로 전환된 17세기 사상에서도 수학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질송이 정확히 지적한 바와 같이 데카르트 철학의 가장 깊은 뿌리가 있다면, 그것은 수학주의이다. Etienne Gilson, The unity of Philosophical Experience, p. 133.
데카르트는 모든 참된 지식은 필연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수학적 지식은 필연성을 갖춘다. 따라서 모든 참된 지식은 수학적 지식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모든 문제가 바르게 이해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보편적 방법인 수학적 방법에 의해 다루어진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수학주의적 방법을 여러 주제들에 적용해 감으로써 완전한 학문의 체계를 확립한다. 보편수학의 방법에 입각한 자연 현상의 탐구는 직관과 연역이라는 두 가지 단계로 구성된다. 직관이란 명료하고 주의깊은 정신에 의해서 의심할 수 없는 공리적 전제를 발견하는 것이며, 연역이란 직관적으로 알려진 전제들로부터 자연의 광범위한 국면을 추론해 내는 과정을 말한다.
 이와 같은 전통은 화이트헤드의 제자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인 콰인(Quine)에게도 이어진다.  콰인은 철학을 과학적인 길로 인도하려고 노력한다. 그 이유는 과학의 길이 진리에 이르는 최고의 방식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과학이 진리에 가까이 이르려면 수학적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발전의 정도에 비례해서, 과학적 논의가 이러한 이상으로 향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모호성, 국소적, 시대적 편견이 줄어든다. 특히 시간은 사차원적 시공간으로 제시된다”  W. V. Quine,『The Ways of Paradox』, p. 232.


 콰인이 언급하는 시간은 수학적 연속체와 물리적 시간 사이의 일 대 일 대응을 가정하는 것이다. 이는 진리와 비시간성 사이의 밀접한 관련을 언급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과학에서 수학적 방법의 성공을 분명하게 밝히는 일이다. 그러나 사차원 연속체의 비시간적 추상성이 변화와 과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가? 과연 수학적 추상으로 설명하는 것이 진리를 구축하는 방식인가? 만약 과학에서의 진리가 수학적 추상성의 비시간성과 관련이 된다면, 이는 화이트헤드가 말한 것처럼 과학에서 진리에 대한 의미는 실재하는 어떤 부분을 사상하는 것이다. 따라서 콰인의 진리에 대한 이해 방식은 갈릴레이와 뉴턴의 관점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수학의 확실성에 대한 가정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정신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절대적인 출발점인 점에서 시작되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는 수학 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산한다. 불변하는 전제를 설정하는 것이나, 연역적 방법을 통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방식은 서양 지식의 역사에서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라카토스에 따르면, 인식론적 탐구를 구성하는 세가지 유형이 있다. 1) 유클리드적 프로그램, 2) 경험적 프로그램, 3) 귀납적 프로그램 I. Lakatos 『Mathematics, Science and Epistemology』. pp 155-158.
이다. 그러나 라카토스는 각각이 차이점을 기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프로그램의 특성에서 인식을 구성할 때, 논리-연역적인 방법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결국 대다수의 인식론적 탐구의 대다수는 유클리드의 정신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형식적 합리성을 진리의 척도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수학에는 ‘선천적 확실성’은 없다고 한다(SMW 45). 그는 수학을 ‘순수 수학’과 ‘응용 수학’으로 구별한다. 순수 수학에서는 1+1= 2라는 사실은 명확하다. 이것은 ‘추상적 일반성’에 의존한다. 하지만 응용 수학에서처럼 구체적인 물리적 대상에 적용될 때는 어떤 한계 속에 놓인다. 어떤 계산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관찰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양자론에서는 더 이상 대상들을 관찰자에 고립해서 폐쇄된 체계로 관찰하지 못한다. 즉 수학을 물리 대상에 적용할 때 어떤 한계가 발생한다. 따라서 응용 수학의 입장에서는 수학을 물리 대상에 적용할 때는 어느 정도 제한적인 것으로 본다.
 
“사람들은 수학의 확실성이 물리적 우주 공간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하학적 지식의 확실한 근거하고 보통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철학적 사색을 크게 손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상댱한 손상을 입히고 있는 하나의 잘못된 생각이다”(SMW 44)

 따라서 ‘수학’에 대한 확실성을 통해서 물리 대상의 탐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한계를 갖는다.  ‘무시간적인’ 수학적 특성이 ‘시간적인’ 구체적 대상에 무조건적인 합리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화이트헤드는 확실한 전제들로부터 필연적으로 추론되는 연역주의는 ‘기하학적 조건’에 근거해서만 합리성을 부여할 수 있다. 기하학적 조건이란, 우리가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지각을 통해 관찰하는 사물들 간의 특정한 기하학적 관계에 잘 들어맞는다고 믿는 있는 조건들과 유사한 경우이다. 관찰은 어떤 조건 속에서만 보이는데, 그 조건은 우리 눈에 정밀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관찰된 조건을 앞서 존재하는 ‘기하학적 조건’과의 대응을 시켜서, 하치시킨다. 이 경우에 추상과학이 구체적 대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예를 들어, 케플러의 행성의 타원 이론, 뉴턴의 만유인력 등을 들 수 있다.(SMW 44 참조)

 또한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수학의 확실성과 연역적 논증의 필연성에 근거한 플라톤 철학이나 17세기 철학들이 이러한 사유 방식의 절대적인 영향력에 놓이게 됨으로써 엄청난 오해를 받아왔다고 한다.  

“과잉 주장의 또다른 형태는 확실성과 전제들의 관점에서 논리적 절차의 잘못된 평가에 있다. 철학은 그 방법이 독단적으로 각각 명확하고, 분명하고, 확실한 전제들을 지시하고, 그 전제들로부터 연역적인 사유의 체계를 세워야 된다는 불행한 개념으로 고통을 당한다”.(PR 8)

 이것은 수학을 철학에 잘못 적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귀류법’의 남용이다. 화이트헤드는 철학적 추론은 연역적 추론에 확실성을 제공하는 귀류법의 남용으로 손상되어 왔음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PR 8).  다시 말해서 대다수의 철학 저서들이 이러한 ‘귀류법적 논증’에 빠져있다. 이승종에 따르면, 철학사는 정초주의자와 전체주의자의 견해로 크게 나누어지며, 이 양 견해는 귀류법적 논증에 걸려있다고 한다. 정초주의자란 지식에 기본적인 원소가 있으며, 이것은 자기 외에 다른 어떤 것을 통해 알려지지 않는 지식이 있다는 것이다. 전체주의자란 모든 것은 상호 관련되어 있으며, 그 어떠한 부분도 특권이나 우선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자는 연역적 논증, 즉 귀류법적 논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결국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양 견해를 귀류법적 논증으로 구성할 수 있다. 정초주의자들은 만약 어떠한 자명한 지식도 없다고 가정하면, 어떠한 정당화도 완결될 수 없으며 전체로서의 어떠한 체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경우에 우리가 모든 것을 알기 전까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우리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아무리 그것에 동의하기 힘들다 해도 기본적 명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도출된다. 대표적인 인물로 데카르트, 스피노자, 프레게, 괴델, 로크, 러셀, 후설 등을 들 수 있다.
 전체주의자들은 만약 전체에 의해 조건지어지지 않는 무제약적 지식의 원소가 있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따라서 알려질 수 없다. 달리 말해서 인식론적으로 기본적인 명제는 모두 다른 기본적인 명제로부터 독립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그 명제들은 우리의 지식 체계의 일부일 수 없다. 그로부터 지식의 영역에서 단 하나의 무제약적 지식이 있을 수 있으며, 이는 체계의 어떠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의 체계 그 자체여야 한다는 점이 도출된다. 대표적인 인물로 헤겔, 브래들리, 콰인, 데이빗슨, 로티, 하이데거, 가다머 등을 들 수 있다. 뉴턴 가버, 이승종,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 p. 274. 이승종은 비트겐슈타인이 이러한 귀류법적 논증에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귀류법적 논증을 탈피한 구성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의 철학은 어떤 도식의 구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과연 철학은 의사처럼 치료자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과학자, 예술가처럼 철학도 어떤 것을 구성하는 능력이 있는 것인가? 화이트헤드는 후자를 선호하는 듯 하다. 이런 점에서 화이트헤드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에 대한 정의와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철학사에서 뛰어난 철학적 인물들은 자신들의 체계들에 건전함과 합리성을 제공하기 위해서 암암리에 귀류법적 논증을 사용한다. 따라서 수학의 확실성 및 연역적 추론 과정은 더 이상 명석, 판명한 지식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이와 같은 귀류법적 논증으로 전개된 도식에 대한 피해망상증으로 어떤 체계를 체우는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것은 분석철학 및 논리실증주의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니체, 베르그송, 듀이, 데리다와 같은 사상가들에게도 동일한 입장에 서게 한다.
 그렇다면 물리적 세계의 인식과 철학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연역적인 추론 방식을 제외한다면, 어떤 방법이 있는가? 우리는 연역법을 제외하고 과학적 방법론이라고 한다면, 귀납법을 연상한다. 근대 과학은 실험과 귀납적 추리를 통해서 구성된 것으로 보통 알려져 있다. 이 실험적 방법은 “원리에로 환원시킬 수 없고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에 대한 주의와 일반 법칙을 이끌어 내는 귀납법”(SMW 72)에 근거해 있다. 즉 귀납법은 어떤 선험적인 가정도 없이 오직 순수한 사실들만을 모아서, 수집된 사실들로부터 이론을 끌어내는 작업이다. 화이트헤드 역시 이 추론법은 “사례들을 수집할 때 충분한 주의만 기울인다면 일반 법칙은 저절로 나타나게 된다는 신념”(SMW 73)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베이컨(F. Bacon)이래 과학자들은 귀납법을 과학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합리적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근대 과학의 완성자로 알려진 뉴턴 자신도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는 유명한 공리로 귀납법의 정당성을 설명한다. 뉴턴은 『프린키피아』(1687)의 출판을 통해서 데카르트의 연역적 방법을 비판한다. 뉴턴은 이 책에서 주장하기를, “이 철학에서는 개별적인 명제가 현상으로부터 추론되며, 다시 귀납에 의해서 일반화된다. 이것이 중력의 법칙을 발견하게 된 방식이다.” 뉴턴 1687: 400
이것은 개별적인 관찰에서 일반적인 법칙의 추론을 정당화하는 문장이다. 과학에 대한 정당성을 귀납법에서 추구하는 과학자들의 욕망은 당시의 철학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흄은 『인간오성론』서문에서 뉴턴의 사유 방법과 동일하게 자신의 저서를 구성하고자 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관찰만을 통해서는 ‘과학 법칙’은 결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귀납법의 정당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이미 흄이 행한 비판을 통해서 잘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서 순수한 귀납적 입장에서 볼 때, 물리학의 근간이 되는 인과성에 심각한 손상을 야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보통 귀납법에서는 관찰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확실함을 입증하고자 한다. 철학자나 과학자들은 관찰이란 인간이 눈을 열고 보는 것이며, 사실이란 단순히 발생하는 어떤 것이며, 견고하고 완벽하며, 명백하고 꾸며지지 않은 것이다. 필자는 흄이나 다른 여타의 과학자나 철학자들이 말하는 ‘관찰’이 기억이나 시간을 배제한 무시간적인 ‘단순 정위’의 방식으로 서술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필자는 헨슨이 설명하는 ‘관찰’에 대한 예를 통해서 귀납법에서 말하는 ‘관찰’이 단순히 비시간적인 관찰이 아님을 설명하고자 한다. 케플러와 티코가 해돋이를 관찰할 때, 그 물리적 과정은 다음과 같다.

“동일한 광자들이 태양에서 방출되고 이것들은 태양계의 공간을 가로질러 지구 대기권을 통과한다. 그리고 두 천문학자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광자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각자의 각막과 수양액과 홍체 그리고 유리체를 거쳐 망막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동일한 전기-화학적 변화들이 각각의 셀렌 세포에서 일어난다”.

 이 점에서 케플러와 티코는 동일한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태양을 본다는 것은 망막에 맺힌 태양의 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가지는 망막의 상은 네 개의 거꾸로 맺힌 작은 것이다. 헨슨은 망막의 반응은 물리적 상태, 즉 광화학적 여기 상태일 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케플러는 태양은 고정되어 있고, 지구는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톨레미와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티코는 지구는 고정되어 있고, 나머지 모든 전체가 이 지구 주위를 회전한다고 생각한다. 보통의 철학자들은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동일한 물체를 보고 있다. 그들은 동일한 관찰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일한 시각 정보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동일한 증거를 다른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G. Berkeley,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in Works, vol. 1, London, T Nelson, 1948-1956), pp. 51 이하.   J. Mill 1869:97, B Russell 1913: 76, von Hartman 1931: 7-8, W. James 1890: 221 등이 이와 동일한 입장에 관찰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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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그림을 ‘태양’, ‘전구’, ‘등대’, ‘대머리’ 등의 표현으로 다양하게 볼 수 있다. 모두 동일한 것을 보고 다르게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아마도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모든 관찰자가 공통적으로 본 것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이 그림에 대한 망막의 반응은 동일하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각 자료도 동일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 그림은 동일한 내용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에 있어서의 차이는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이러한 차이는 보고 있는 대상에 우리가 부여하는 해석으로부터 기인한다”. Hanson 15.


 우리는 광학적 요소와 해석적 요소를 결합해 놓고, 광학적 패턴을 뽑아내고, 다음에 해석을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헨슨은 이론과 해석은 처음부터 보는 행위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 예로 ‘형태(Gestalt) 심리학’ 혹은 게슈탈트 심리학을 찾는다. 우리는 어떤 그림을 젊은 여자로 보기도 하고, 노파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하나의 경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노파로 보기도 하고, 처녀로 보기도 하는 것은 왜 일어나는가? 광학적인 또는 감각적인 것은 바뀌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헨슨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것을 본다. 사람들이 보는 것의 조직화가 변하는 것이다. 이때 조직화(organization)란 그림의 선이나 색깔처럼 그 자체로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조직화는 그 자체가 선이나 형태 또는 색깔이 아니다. 조직화란 시각 영역 안의 어떤 한 요소가 아니라 그 요소들이 인식되는 방식이다. 즉 선과 형태에 하나의 패턴을 부여하는 것이다.”  Hanson 27.


 그는 이러한 조직화 남제주군 대정읍 안덕면 바닷가에서 발견된 흔적을 보고, 구석기 인류의 발자국이라고 추정하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추론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발자국을 조직화시키는 능력이 없다면,  그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고고학에서의 관찰은 이미 이론의존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가 없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선들의 배열뿐일 것이다. 우리는 물리학자나 음악가처럼 대상이나 음악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각 영역 요소들이 물리학자의 시각 영역 요소들과 동일하더라도, 그 요소들의 조직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리학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적인 문제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는 대상을 보거나, 계산을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어떤 결합된 패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본다는 것은 ‘이론 의존적’인 작업이다. 즉 x에 대한 관찰은 x에 대한 선지식을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케플러의 시각적 영역은 티코와는 다른 개념적 조직화를 가진다. 케플러가 본 해돋이를 그린다면 티코가 본 것을 그린 것과 일치할 수 있으며 동일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케플러는 수평선이 깊어지면서, 하늘에 고정된 태양으로부터 멀어진다고 볼 것이다. 태양이 뜬다는 것에서 수평선이 이동한다는 것으로의 전이는 이미 논의하였던 그림이 바뀌어 보이는 현상과 유사하다. 그는 본다는 것, 즉 사실을 관찰한다는 것이 이론 의존적인 사실임을 지적한다.
 본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특정한 종류의 바라봄이다. 따라서 경험론이나 귀납법에서 관찰이라고 할 때는, 이미 이론에 근거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화이트헤드는 귀납법에서 설명하는 관찰, 특히 흄이 지적하는 관찰에서는 어떤 기억도 미래나 과거의 계기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없다고 한다.(SMW 74) 화이트헤드 역시 관찰은 어떤 도식에 근거한 점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관찰한다는 것은 사실의 어떤 측면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주 넓은 범위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추상화의 도식을 초월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SMW 38)

 따라서 과학에서 물리에 대한 새로운 개념적 도식이 드러나는 것은 이론에 대한 새로운 가설적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관찰은 이미 과거에 파악된 여건에 대한 개념적 이해에 근거한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명확한 이론 없이 생산적 사고의 모험을 감행한다는 것은 할아버지대에서 유래한 학설에 안주하는 것”(AI 348)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티코에서 케플러로의 과학적 이론의 전개는 관찰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작업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 연역주의와 귀납주의로는 과학적 합리성을 주장하는데 어떤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합리성을 주장할 다른 근거나 방법이 있는가? 필자는 그것을 귀추법(retroduction) abduction, retroduction을 귀추법이나 가추법으로 번역한다. 귀추는 ‘가설 유도의 추리’라고도 번역이 된다. 귀추는 어떤 구체적 사실이 하나의 예증이 되게 하는 가설을 유도해 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소흥렬1991: 139
에서 찾고자 한다. 귀추법은 합리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모든 새로운 과학적 발견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된다.


III. 과학적 방법으로서 귀추법  

 물리 이론이 귀납이나 연역적인 추리 과정으로는 ‘합리성’을 획득할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합리성을 추구하는가? 필자는 화이트헤드가 언급한 “상상적 합리화”의 방식을 이전과는 다른 합리적 방법의 추구라고 본다. 필자는 화이트헤드의 그 방법을 ‘귀추법’의 전형으로 본다. 우선적으로 이 절에서 과학에서 사용되는 귀추법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헨슨, 퍼어스, 에코 등을 통해서 살펴볼 것이다.
 우리가 물리의 법칙이라고 하는 운동의 법칙, 중력의 법칙, 열역학 법칙, 전자기학 법칙, 고전 물리학과 양자 역학의 법칙 등은 단순 나열에 의한 귀납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N. R. 한슨, 『과학적 발견의 패턴』, 송진웅, 조숙경 역. p, 117.
헨슨에 의하면, 뉴턴의 공리[가설을 만들지 않는다]와는 대조적으로 과학적 전제들은 ‘사변적’, ‘창조적’인 구성의 결과물이다. 헨슨은 그러한 추론의 방식을 “귀추법”(retroduction)이라고 한다. Hanson 138.
그는 이 추론법이 과학에서 새로운 개념적 도약이 일어날 때마다 사용된 추론방식이라고 한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퍼어스 역시 귀추법 혹은 가추법(abduction) 이 추론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분석론 후서』(II, 69a, 15이하)에서 아파고게(apagoge)에 대한 논의로 진행을 시켰다. 이 추론은 첫 번째(대전제) 항이 중간(소전제) 항에 적용되고, 중간 항이 마지막(결론) 항에 적용되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결론 자체보다 그럴 듯 하게 보이는 경우이다.(에코 참조) 그러고 퍼어스는 이 추론법을 가추법, 귀추법, 가설법이라는 다양한 단어로 표현한다.
이라는 형태로 연역법과 귀납법 외에도 또하나의 추론 과정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퍼어스의 가추법에 대한 연구는 국내에서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김성도, 이두원, 김주환, 한은경, 소흥렬 등이 있다.

 헨슨에 의하면, 귀추법은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발견했을 때, 새로운 가설을 사용하는 것이다. 먼저 기존의 설명 패턴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놀랄만한 여건이 고찰되고, 그 여건을 설명할 새로운 이론을 상상적 추론을 통해서 구성하는 것이다. 그 가설의 추론 형태를 보다 간략하게 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어떤 놀랄만한 현상 P가 관찰된다.
2. 만약 H가 참이면 P가 설명될 것이다.
3. 따라서 H가 참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있다.“ Hanson 140.


 따라서 귀추법에서는 관찰들이 먼저 주어지고 그것들로부터 가설 여기서 ‘가설’이라고 하는 것은 가설 연역적 체계서 말하는 가설은 아니다. 이 추론 과정은 고도의 가설로부터 관찰언명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즉 관찰을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설을 설정한 후에 관찰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설을 설정하는 것 역시 합리성, 혹은 “논리”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심리학적 관점에서 주어진 예감이 아니다. Hanson 119.
을 설정하는 것이다.(119) 헨슨과 퍼어스는 케플러의 화성의 궤도에 대한 설명이 가장 훌륭한 귀추의 사례라고 한다. 케플러는 화성의 궤도가 타원이라는 가설로부터 시작하여 티코의 관찰로 확인된 명제들을 연역해 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관찰들이 먼저 주어지고 그것들로부터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케플러는 관찰로부터 하나의 가설로 그리고 다른 가설들을 거쳐 궁극적으로 타원 궤도의 가설에 도달했다. 이것이 귀추적인 과정이다. Hanson 117-137
하지만 밀(J. S. Mill)과 같은 실증주의자들은 케플러의 이러한 귀추적 과정을 직접적 관찰된 사실에서 나온 귀납적 과정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과학에 대한 철학자의 오독의 전형적인 예라고 한다. Hanson 137
 
 따라서 H의 내용이 2에 포함되지 않으면 H는 결코 귀추적으로 추론될 수 없다. 귀납적 설명은 P의 반복으로부터 H가 출현하기를 기대한다. 가설 연역 체계는 어떤 설명되지 않은 고도의 가설 H로부터 P가 출현하도록 만든다. 이때 H는 P의 증가나 통계학적 과정에서 나온 결과는 아니며, H는 단순히 생각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것들로부터 P가 연역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상에서 패턴을 인식하는 것은 현상들이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핵심이다. 왜 화성은 90도에서와 270도에서 가속되는 것처럼 나타나는가? (P) 왜냐하면 화성의 궤도가 타원이기 때문이다. H를 가정함으로써 여러 가지 현상들 P는 하나의 이해 가능한 패턴 혹은 조직화(Organization) 조직화란 게슈탈트 심리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는 어떤 그림을 처녀로 보기도 하고, 노파고 보기도 한다. 이때 조직화란 시각 영역 안의 어떤 한 요소가 아니라 그 요소들이 인식되는 방식이다. 즉 선과 형태에 하나의 패턴을 부여하는 것이다. 동일한 은하수를 놓고, 물리학자와 시인과 아이는 다르게 조직화한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것처럼 심리학의 문제에 앞서서 논리적인 문제이다.
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P는 H를 통제하지만 그 역은 가능하지 않다. 추론은 데이터로부터 가설과 이론으로 행해지지만 그 반대는 가능하지 않다.
 하나의 이론은 관찰된 현상들로부터 짜맞춰진 것이 아니라, 현상들은 특정한 종류의 것으로 그리고 다른 현상들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론은 현상들을 체계적으로 만든다. 이론은 역으로 형성된다. 즉 귀추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의 이론은 하나의 전제를 찾기 위한 결론들의 집합이다. 물리학자는 자신의 방식으로 현상의 관찰된 특성들로부터 자연스럽게 그것들이 설명될 수 있는 주요 아이디어를 향해 추론한다. 한슨에 따르면, 이러한 귀추적 과정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직 연역과 귀납을 통해서 과학적 추론 과정이 기술된 것으로 본 것으로 추정한다.
 다시 한 번 삼단 논법의 형식으로 이 추론과정의 차이를 분석해 보자.

모든 M은 P이다(보편법칙)
모든 S는 M이다(특별법칙)
모든 S는 P이다(개별현상)

 보편법칙과 특별법칙을 전제로 개별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연역 논리의 형식이다. 귀납 논리는 특별 법칙과 개별 현상에서 보편법칙을 설명한다. 귀추 논리는 보편법칙과 개별현상에서 특별법칙을 드러낸다. 즉 귀추법은 보편법칙과 현상에서 구체적인 법칙을 도출하는 발견의 논리이다. 좀더 구체적인 예를 들면,  컴퓨터를 많이 하면, 눈이 아프다. 귀납법은 사례와 결과로부터 이 규칙을 도출한다. 이를 도식화하면,

귀납법
사례: 그는 컴퓨터를 많이 했다.
결과: 그는 눈이 아프다.
규칙: 컴퓨터를 많이 하면, 눈이 아프다.

 귀납법은 근대 과학의 기본적인 논리 구조이다. 즉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사례와 결과를 발견하여 진리로서의 법칙을 추구한다. 이런 점에서 귀납법은 어느 정도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례와 결과가 있어도 100% 확신으로 규칙을 이야기할 수 없다. 즉 사례와 결과에서 나온 규칙은 언제나 반증가능성이 있다.

연역법
규칙: 컴퓨터를 많이 하면 눈이 아프다.
사례: 그는 컴퓨터를 많이 했다.
결과: 그는 눈이 아프다.

 연역법의 특징은 그 결론이 확실하다는데 있다. 우리가 ‘규칙’이 옳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또 그 ‘사례’를 관찰하게 된다면, 우리는 100%의 확신으로 그 결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연역법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주지 못한다.

귀추법
결과(개별현상): 눈이 아프다.
규칙(보편법칙): 컴퓨터를 많이 하면 눈이 아프다
사례(특별법칙): 그는 컴퓨터를 많이 했다.

 가추법 혹은 귀추법의 특징은 규칙과 결과로부터 사례에 도달하는 것이다. 퍼어스는 가추법이 연역법, 귀납법과 함께 세 가지 기본적인 논증법이라고 보았다. 어떤 남자가 눈이 아프다는 것을 관찰하고, 그가 컴퓨터를 많이 했다고 추측한다. 이것은 컴퓨터를 많이 하면 눈이 아프다는 법칙을 하나의 코드 체계로 삼아서 눈이 아프다는 사실을 해석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눈이 아픈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언제나 개연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다양한 코드체계를 통해서 해석할 수 있다. 즉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각한 것을 ‘파악’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사실은 귀추법은 확실성에서는 연역법이나 귀납법에 비해서 턱없이 모자라나, 생산성은 증가한다는 것이다. “퍼어스에 따르면 과학적 사유의 출발점이 바로 가추법”이다. 그러나 가추법은 논리학자나 과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점이 가추법과 귀납법이 다른 점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귀납법과 연역법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매일 가추를 하며 산다. 얼마 전에 ‘태극기를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보고 나오니, 도로가 빙판이 되었다. 우리는 눈이 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눈이 와서 영하의 날씨가 되면 도로가 언다”는 규칙과 “도로가 얼었다”는 ‘결과’를 통해서 “눈이 왔을 것이다”이라는 사례를 가추해 낸다. 우리는 일상적 삶에서 연역이나 귀납을 통해서 추론하지 않는다. 짠뜩 찌푸린 하늘을 보고 자연스럽게 비가 오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가추이지 연역이나 귀납은 아니다.
 김성도는 이러한 귀추법이 과학적 발견의 과정 및 예술에서 창조적 행위, 일상 생활에서 거의 매순간 실천적인 추론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김성도 371
또한 그는 퍼어스가 제시한 귀추법(가추법)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제외하고 어떤 논리학자도 그 중요성은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퍼어스와 거의 동시대 인물로서, 뛰어난 논리학자인 화이트헤드 역시 귀추법을 중요성을 누구보다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다음 절에서 이 점에 대해서 논해볼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귀추법에서 만들어내는 가실을 위해서는 ‘이성’의 사용이 필수적이라고 한다.(SMW 73) 화이트헤드에게 이성의 사용은 ‘합리주의’, ‘형이상학’, ‘스콜라 철학의 방법’으로 변용되어서도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방법론은 순수한 연역이나 귀납은 아니다. 화이트헤드도 이와는 다른 추론의 형태를 사용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앞에서 말한 헨슨 및 퍼어스가 사용한 귀추법을 화이트헤드도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IV. 수학과 물리학에서 귀추법의 적용

 모든 새로운 과학적 발견의 논리는 귀추법의 적용이다. 특히 현대 물리학에서 현상을 설명할 때, 가장 적절하게 사용되는 추론법이 귀추법이다.  화이트헤드는 경험 과학 뿐만 아니라 수학에서도 귀추법을 적용한다. 그는 수학을 순수 수학과 응용 수학으로 구분한다. 순수 수학은 “단순한 사실 문제의 여러 요소들을, 이들이 예증하고 있는 순수한 추상적인 조건들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완벽한 분석을 향하여 매진하려는 결연한 하나의 시도”(SMW 48)이다. 전반적으로 그것들은 엄밀한 논리적 연역으로서 고정된 전제들로부터 결론으로 나가는 형식적 구성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방법에 있어서 그것들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 화이트헤드는 『Principia Mathematica』를 완성한 직후에 낸 「수학」에 대한 기사에서 귀추법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드러낸다.

“‘응용 수학’에서 ‘연역들’은 자연과학의 경험적 증거의 형태에서 주어지며, 그 ‘연역들’이 도출될 수 있는 가설들이 탐구된다. 따라서 소위 응용 수학의 모든 논문들은 그 추론이 착수하는 ‘법칙들’의 비판으로나, 그 실험이 발견하기를 희망하는 제안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만약 그것이 어떤 실험의 결과를 계산하다면, 그것은 실험자가 실험을 하고 있는 확고한 결과들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계산의 기초를 문제삼는 것이다”. M 881


 이것은 주어진 ‘전제’들을 문제삼는다는 것이다. 어떤 물리적 현상에 대해서 이전의 전제들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면, 그 전제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과학과 근대세계』에서 수학의 특성을 논의할 때 다시금 제기된다. 첫째는 수학적 추리 과정을 꼼꼼히 살피는 것, 둘째는 타당한 것으로 전제한 모든 추상적 조건을 살펴보는 것, 셋째는 추상적 공준이 특정의 사례에 적용될 수 있는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SMW 45-47) 우리는 두 번째와 셋번째의 경우를 살펴보자. 두 번째 과정은 불필요한 조건들이 많아서 ‘단순화’를 결여하는 경우를 고려하는 것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자신의 탐구 방법 중의 하나인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이론을 통해서 그 조건들을 고찰하는 것이다. 일찍이 화이트헤드는 「물질 세계에 대한 수학적 개념들에 관해서」라는 논문에서 뉴턴의 물질, 시간, 공간이라는 세 가지 개념은 물질 세계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개념들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이때 “오컴 면도날”이론에 근거해서 뉴턴 이론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위대한 논리학자의 한 사람인 화이트헤드는 최소한의 전제들로부터 ‘물질 세계’를 구성해 보고자 한다. 그는 물질, 공간, 시간이라는 세가지 개념들로 물질 세계를 설명하려는 뉴턴 우주론의 사유를 점적인 개념의 사유로 간주하며, 그것은 가속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파한다. 그는 “오캄의 면도날”이론에 근거해서 통해서 비판한다. Whitehead 1905: 468-469.
그는 관찰을 통해서 드러난 가속도나 변화가 뉴턴, 러셀, 라이프니츠의 개념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음을 지적하며, 새로운 전제들(개념 4, 5, 교점이론)을 통해서 물질 세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코데(Code)는 “오컴의 면도날 이론” 귀추적 방법의 다른 표현이라고 한다. Code 1985: 32
즉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합리적 가설을 설정하고, 그 도식을 새로운 현상에 적용하는 귀추적 과정과 오컴의 면도날 이론의 방식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가 이론에 대한 비판이라면, 세 번째의 경우는 수학 이론을 구체적인 대상에 적용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뉴턴의 이론을 물질 세계에 적용할 때, 가속도에 대한 어떤 설명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뉴턴의 물리이론을 구체적인 대상에 적용했을 때, 그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문제점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이론을 ‘상상적 합리화’를 통해서 구성해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점을 비추어 볼 때, 응용 수학의 방법은 귀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응용 수학은 순수 수학과는 다른 점에서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응용 수학 분야의 뛰어난 저서나 논문을 비판할 때, 처음의 1장, 심지어 처음 첫 페이지의 내용만으로도 커다란 문제거리가 될 때가 흔히 있다. 왜냐하면 논의의 출발선상에서 저자가 설정한 가정들 자체에서 과오가 발견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러한 문제거리는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에 관련되어 있기보다는 그락 말하고 있지 않은 것에 관련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저자가 의식적으로 가정한 것보다도 그가 무의적으로 가정한 것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SMW 47).

 이 단락은 응용 수학의 귀추적 절차를 잘 보여주고 있다. 화이트헤드와 러셀은 『Principia Mathematica』에서 귀추적 방법으로 기본이 되는 논리적 개념들을 탐구하고자 한다. 그들은 수학 원리의 탐구에서 독단적인 탐구 방법을 비판한다.

“수학의 원리들에서 어떤 이론을 옹호하는 주된 이유는 언제나 귀납적이어야 한다. 즉 그것은 문제가 되는 이론이 일반 수학을 도출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수학에서 가장 훌륭한 자명성은 일반적으로 처음에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지난 후에 드러난다. 따라서 연역들이 이러한 시기에 이르기까지, 처음의 연역들은 참된 결론들이 전제들로부터 도출되기 때문에 결과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결론들이 전제들로부터 도출되기 때문에 전제들을 믿는 근거를 제공한다”.

 코데(Code)에 의하면, 이러한 논리학의 프로그램에 적용된 방법은 귀추적 방법이라고 한다. M. Code 31-31.
자연과학에서처럼 논리학에서도 주된 개념들과 전제들은 자명성에 대한 주장이 아니다. 화이트헤드의 논리적 프로그램에 대한 해석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귀추적 관점을 앞에서도 말했듯이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로 표현한다. 이것은 “실체가 필요이상으로 늘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유의 경제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에코(Eco)에 의하면, 퍼어스는 내륙 지방 한 가운데 물고기 화석을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땅을 과거에 바다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고 한다. 이전의 화석화적 전통은 귀추적 가정을 인정하는 듯 하다. 얼마전에 제주도에서 썰물이 들어오는 곳에서 오래 된 발자국 모양을 발견하였다. 학자들은 이 발자국이 구석기나 신석기 시대의 사람이 한반도에 살았다고 추정한다.
에코는 그 물고기 화석을이 여러 가지 사례들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화석화적 설명이 가장 경제적일 것” U. Eco 137
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는 또한 [네 사람의 서명]이라는 코난 도일의 소설에서 나오는 홈즈는 왓슨이 전보를 보내기 위해서 위그모어 가의 우체국에 다녀왔다는 것을 추론한다. 여기서 홈즈는 ‘이성적인 경제 원칙’에 근거해서 귀추적으로 추론을 정당화한다. 앞의 책 160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았을 때, 화이트헤드가 사용하는 오캄의 면도날이론은 귀추적 추론과정을 보여주는 또다른 표현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화이트헤드는 과학 철학에서 제기한 ‘연장적 추상화 방법’의 구성 역시 귀추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화이트헤드는 “연장적 추상화의 방법”은 정확한 사고를 돕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이 방법은 인간 사유의 ‘습관적 경험의 본능적 절차’라고 한다.  

“이 방법은 습관적 경험의 본능적 절차의 체계화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적 삶의 접근 절차는 시공간의 연장에서 충분히 제한된 사건들의 고찰에 의해서 사건들 속의 관계의 단순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이때 사건들은 ‘충분히 작다’. 연장적 추상화 방법의 절차는 그 접근이 성취되고 무한히 연속될 수 있는 법칙을 정식화하는 것이다. 그 완전한 계열은 이때 정의되고, 우리는 ‘접근 루트’을 알게 된다”(PNK 76).

 따라서 화이트헤드가 과학 철학에서 가장 기여한 점이라고 할 수 있는 “연장적 추상화의 방법” 역시 ‘오컴의 면도날’이론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할 때, 그것 역시 귀추법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양자역학에서는 고전 역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 발생한다. 따라서 물리학자들은 새로운 이론 혹은 도식을 설정하여, 그 현상을 설명한다. 화이트헤드도 마찬가지로 화이트헤드도 양자 역학 이론을 자신의 가설을 통해서 설명한다.  ‘주기’ 이론은 16세기 및 17세기의 과학이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개념이다. 그는 “근대 물리학을 주기라고 하는 추상 관념을 다양한 구체적 사례에 적용시킴으로써 탄생하였다”(SMW 59)고 한다. 이 주기 개념이 없었다면, 근대 과학의 탄생도 없었다.

“수학자들이 주기 개념에 얽혀있는 다양한 추상관념들을 미리 추상적으로 정돈해 놓지 않았더라면 근대 과학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SMW 59)

 화이트헤드는 또한 과학자들은 각각의 특수한 현상에 이 주기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법칙을 구성하였다고 본다.

“케플러는 각 유성이 그리는 궤도의 장축을, 그 유성이 자신의 궤도를 그리는 주기와 연결시키는 법칙을 발견하였다. 갈릴레이는 진자의 주기적 진동을 관찰하였다. 뉴턴은 소리를, 응축과 희박의 교차에 의한 주기적인 파동이 공기를 통과하면서 만들어 내는 공기의 교란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호이겐스는 빛을 엷은 에테르의 횡파로 설명하였다. 메르센느는 바이올린 현의 진동 주기를 그 현의 밀도, 장력, 및 길이에 연결시켰다”(SMW 58).

 그런데 고전 역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전자의 불연속적인 존재 방식이 발생한다. 즉 양자론에서 전자의 궤도는 연속적인 선이 아니라 떨어져 있는 위치들의 계열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서 한정된 수의 일정한 궤도들을 구비하고 있는 것으로 주장된다. 어떤 현상이 충돌에 의해 여기된 분자에서 빛의 복사가 나올 때, 빛은 전자장에서 진동하는 파동으로 구성된다.
 이런 경우에 17세기 물리학에의 물질 개념은 폐기된다. 당시의 물질 개념은 외관상 분해되지 않는 안정된 지속과 연속적인 존재방식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시물리에서 드러난 이 현상은 고전역학의 이론으로는 설명해 낼 수 없다. 케플러가 행성의 타원 이론을 구성한 방식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이론적 가설이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다른 현대 물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화이트헤드는 새롭게 드러난 현상의 결과를 설명할 새로운 전제들 혹은 원인들을 탐구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우리는 외관상 분해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물질의 안정된 지속성에다 소리나 빛에 대해서 오늘날 적용하고 있는 원리를 그대로 적용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면 앞서 말한 역리를 설명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귀에 한결같은 것으로 들리는 소리는 공기 진동의 산물로 설명되고, 눈에 안정된 것으로 보이는 빛깔은 진동의 산물로 설명된다. 만약 우리가 바로 이와 동일한 원리에 입각해서 확고한 것으로 보이는 물질의 지속성을 설명한다면, 그때 물질의 근원적 요소 하나하나는 기초가 되는 에너지 곧 활동력의 수축과 팽창으로 이루어지는 진동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각 요소는 일정한 주기를 가질 것이며, 이 주기 속에서 그 에너지 흐름의 결집계는 한 정점의 극대치로부터 다른 정점의 극대치로 움직일 것이다”(SMW 64).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이와 같은 설명이 가능한 것은 추상적인 주기 개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SMW 64) 그는 새로운 이론을 적용해서 양자 역학에서 일어난 불연속적인 존재방식을 설명한다.  그는 물질의 궁극적인 요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의 새로운 가설은 물질의 궁극적인 요소는 그 본질에 있어서 진동하는 존재이다. 이 가설을 양자 역학의 불연속적인 존재 방식에 적용한다면, 존재의 불연속성에 대한 의문이 해결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양자론과 진동을 결합시킬 증거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당화한다.

“양자론 전체는 원자의 복사 에너지를 핵으로 하면서, 복사하는 파동계들의 여러 주기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진동을 본질로 하는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야말로 불연속적인 궤도라는 역리를 가장 그럴 듯 하게 설명하는 방식이다”(SMW 65).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응용 수학 및 양자 역학에 대한 설명은 귀추적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어떤 놀랄만한 현상을 관찰하고, 어떤 가설이 참이라면 그 현상이 설명될 것이다. 따라서 그 가설이 참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양자론에서 발생한 존재의 불연속적인 궤도의 현상은 ‘주기’이론을 통해서 ‘상상적 합리화’로 구성된다. 이와 같은 전개는 귀추적인 설명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에코는 귀추법에서 가정 혹은 가설을 설정할 때, 가설의 정도에 따라서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1. 지나치게 규범화된 가추법, 2 규범화가 덜 된 가추법, 3 창조적 가추법 4, 메타-가추법이다. 이 경우에 창조적 가추법은 과학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경우에 해당한다. 케플러나 뉴턴은 근대 과학의 기초와 완성을 놓는 새로운 과학법칙을 설정하였다. 메타 가추법은 우리가 그려 놓은 가설적 우주가 우리 경험에 의한 우주와 동일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에 관련된다. 이것은 과학의 발견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도 중요하다고 한다. Eco 143.
따라서 메타 가추법은 화이트헤드의 입장에서 본다면, 형이상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과연 귀추법이 형이상학에도 적용이 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V. 형이상학은 과학과 동일한 방법론이 가능한가?

 기존의 이론을 답습하는 것이 철학인가? 아니면 세계가 과정이듯이,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에 직면하기 위해서 새로운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 철학인가? 이 점에서 화이트헤드는 확실성 보다는 생산성을 학문적 탐구의 우선 순위로 본다. 연역법과 귀납법이 갖는 추론 과정에 비해서 확실성을 떨어지나 생산성은 증가하는 귀추적 과정을 통해서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합리적 도식의 검증은 그 일반적인 성공에서 추구해야 하며, 그 최초의 원리들의 특수한 확실성이나 최초의 명료성에서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즉 “철학은 전제들을 위한 탐구이다. 그것은 연역이 아니다. 여기서 추론하는 연역들은 결론의 증거로 출발점을 테스트하는 목적을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는 앞에서 설명한 귀추적인 방법과 동일하다.
 필자는 앞에서 형이상학이 ‘생산적 학’이 될 수 있다는 화이트헤드의 문장을 언급했었다. 그것은 사유의 구성이 순수한 연역법이나 귀납법의 과정을 통해서 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순수한 연역법 역시 과학 및 수학의 탐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나, 철학에 막대한 손상을 끼친다.

“철학의 방법은 수학의 예에 의해서 손상되었다. 수학의 참된 방법은 연역이다. 철학의 주된 방법은 기술적 일반화이다...연역의 참된 자리는 일반화의 규모를 실험하기 위한 검증의 본질적인 부가적인 양태이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연역법과 귀납법으로는 사변철학을 생산적 학으로서 규정지울 수 없다고 한다. 사변철학이 창조적이고 풍부한 생산을 갖기 위해서는 앞의 두 가지 논증과는 다른 방법이 요청된다. 그는 『과정과 실재』의 머리발에서 철학적 구성의 참된 방법은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관념들의 도식을 축조하고, 그 도식에 의거하여 과감하게 경험을 해석해 나가는 것”(PR xiv)이다. 그는 이러한 방법을 “상상적 합리화 방법”(The method of imaginative rationalization) 혹은 “가설연역적방법”(hypothetico-deductive method) 가설 연역적 방법은 가설을 먼저 설정하고, 관찰을 하는 방법이 아니다. 화이트헤드의 가설 연연적 방법은 관찰을 하고, 그 후에 가설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라고 부른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방법을 비행기의 이륙을 비유로 들고 있다. 이 비유는  과학적 추론과정과 마찬가지로 귀추적 과정을 통해서만 철학적 도식은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정한 발견의 방법은 마치 비행기의 비행과 흡사하다. 그것은 개별적인 관찰이라는 대지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상상력에 의한 일반화라는 희박한 대기권을 비행한다. 그리고 나서 합리적 해석으로 예민해지고 새로워진 관찰을 위해서 착륙한다. 이 상상력에 의한 합리적 방법이 성공하는 근거는, 차이의 방법이 실패했을 때 거기에 변함없이 현존하고 있는 요인들이 상상적 사고의 영향 아래에서 관찰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한 사고는 직접적 관찰에서 드러나지 않는 차이를 보완한다. 그것은 심지어 모순까지도 절적히 다룰 수 있다. 그래서 경험에 나타난 일관된 요소, 영속적인 요소들을, 상상 속에서는 그것들과 모순되는 것들과 비교함으로써 그것들을 조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PR 5).

 이 유명한 진술은 세 단계를 거쳐가는 방법적 절차를 보여준다. “개별적 관찰” “합리적 해석을 통한 상상적 일반화”, “날카로워진 새로운 관찰”이 그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화이트헤드가 ‘비행기의 비행’을 예로 든 방법은 앞에서 설명한 귀추법과 거의 동일한 과정을 밟고 있다고 본다.
 필자는 관찰이라는 것이 이미 이론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말했다.  우선 화이트헤드는 인간이 갖는 직접 경험에 주목하는 한편, 물리학이나 수학과 같은 특수 과학에서 사용되는 관념들과 종교, 언어 등에서 사용되는 관념들을 관찰하면서 시작한다. 직접적 경험이나 관념들은 철학의 원초적 여건들이다. 그는 이것들이 본래의 영역의 범위와 배경을 떠나서 적용될 수 있도록 이들을 일반화시킨다. 그리고 그는 이처럼 다양한 경험에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일반적 범주를 추출해내는 일, 이것을 “현실태로부터의 추상”이라 부른다. 이러한 추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상상이 가미된 일반화가 요구된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귀납적 일반화와 대비하여 “기술적 일반화”(descriptive generalization)(PR 10)라 부른다. 기술적 일반화는 모종의 유적 제한 하에서 진행도는 귀납적 일반화와 달리 유적 경계를 넘어 유비적으로 진행된다.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기술적 일반화를 위해서는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벡터라는 개념이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될 때 그 개념은 다른 영역에서의 경험과 관련될 수 있도록 일반화된다. 그는 또한 자신의 이러한 방법을 스콜라 철학의 방법이라고 하며, 우리는 관찰 뿐만 아니라 이성을 사용을 주장한다.

“우리는 직접적 계기를 관찰하여야 하며, 그 계기의 본질에 관한 일반적 기술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이성을 사용해야만 한다. 귀납법은 형이상학을 전제로 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것은 그에 선행하는 하나의 합리주의를 발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SMW 74)

 이것은 앞에서 말한 “오컴의 면도날 이론”을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일반화된 관념들을 상호 제약하에 둠으로써, 실재에 대한 하나의 해석체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이것은 사변철학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정의, 즉 “경험의 모든 요소들이 해석될 수 있는 일반적인 관념들의 정합적이고 논리적이며 필연적인 체계를 구성하려는 노력”(PR 3)을 반영한다. 여기서 정합성은 관념들이 서로 유리될 때 무의미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논리성은 관념들 간의 논리적 충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방법은 여러 유형의 경험에 확고하고 기초를 두고 있는 다양한 추상화의 도식들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들의 요구는 이성이 사용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성에 대한 믿음이란, 사물의 궁극적인 본질들은 독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제하면서 서로 결부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믿음을 말한다....이러한 믿음을 체험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면서 우리 이상의 것임을 인식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그것은, 우리의 경험이 흐릿하고 단편적이긴 하지만 실재의 가장 깊은 곳을 타진한다는 사실, 흩어져 있는 개별적인 것들은 그것들로서 단순히 존재하기 위해서도 한 사물 체계의 부분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SMW 38-39)    

 마지막으로는 해석 도식의 충분성(adequacy)을 검토하기 위해 광범하게 다양한 유형의 경험들을 형이상학적 도식과 대결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 충분성의 기준은 인간이 갖는 한계 때문에 완전히 충족될 수는 없다. 이점이 화이트헤드가 사변철학이 절대적이고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유이다. 이는 이상적인 목표이지, 출발점은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철학은 “어떤 자명한 것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궁극적 일반성에 대한 시론적 정식화인 것이다”(PR 9). 이런 점에서 주어진 사실이나 개별적 개념을 보다 일반적이고 보다 구체적인 원인들로 드러내기 위하여는 어떠한 범주 도식이 요구된다. 화이트헤드는 네 가지 범주들(궁극자의 범주, 현존의 범주, 설명의 범주, 범주적 제약)을 통해서 상대성 원리, 양자 역학, 진화론, 전자장 이론이 지배적인 이 시대를 보다 종합적인 개념으로 구성하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한 형이상학적 해석은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키는데 기여한다.
 과학의 모든 이론들이 귀추적 과정을 통해서 발전되어 온 것이 사실이라면, 철학 역시 귀추적 과정에 의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도식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입장이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문명을 발전시킨 새로운 생산적 사고는, “예술가들의 시적인 직관에 힙입거나, 또는 논리적 전제로 이용할 수 있는 사고의 도식을 상상력으로 정교하게 만들어내는 데에 힘입어 생겨나게 되었다”(PR 11).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방법은 “끊임없이 전진할 뿐 멈추는 법이 없는 하나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지금부터 간단하게 앞에서 설명한 것에 대한 예를 들어볼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17세기 사상을 대표하는 “과학적 유물론”은 뉴턴의 ‘단순 정위’라는 시공간의 이론적 도식에 근거해서 ‘인상’(흄의 독립적인 감각 여건)이라는 관찰을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가지 사실들 앞에 놓여 있다. 언어, 사회제도, 정치제도, 행동,다양한 과학의 발전 등이 있다.(AI 354) 이것은 이전의 이론적 도식에서 파생된 뉴턴 및 흄으로 대표되는 17세기 과학적 유물론의 기초가 되는 ‘감각 여건’에서 벗어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즉 오늘날의 상황은 기존의 이론적 도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현상들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디지털 정보화 시대는 지난 시대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존재론, 인식론적 상황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가 그러한 증거를 거부하는 것은 편협한 이론적 도식에 머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사이버 시대에 맞게 될 새로운 존재론적 이해를 해야할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증거물을 다루는 방법을 “기술적 일반화의 방법”라고 한다.  

“어떠한 경험도 빠뜨릴 수 없다. 취중의 경험과 맑은 정신의 경험, 잠자는 경험과 깨어있는 경험, 꾸벅꾸벅 조는 경험과 완전히 잠이 깬 경험, 자기 의식의 경험과 자기 망각의 경험, ...종교적 경험과 회의적 경험....정상적 경험과 비정상적인 경험, 이 가운데 어느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AI 353)

 이러한 증거 및 관찰은 단순정위에 근거한 감각 경험에서 벗어나서 상호 결합하는 새로운 도식을 구성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를 통해서 그는 새로운 결과들이 나타나는 경우에, 동일하게 그 도식을 통해서 그 사례를 해석할 수 있게 된다. 화이트헤드가 이와 같이 설명하는 근거는 증거가 되는 사회제도, 언어, 행위는 "여러 가지 특성들의 복합체를 예증”하며, “어떠한 사실도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여러 특수성에 뿌리박고 있는 많은 특성들을 동시에 예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컴퓨터를 통한 가상 공간 및 이미지 세계의 확산, 및 정보 전달의 속도의 확장, 전자 전쟁, 민주화운동, 분자 생물학의 급속한 발전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 경험을 이전의 전통적인 이론들로 묶어두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이 사례들은 정보화 및 테크놀러지의 유형으로 묶을 수 있다. 따라서 그 유형에 맞는 새로운 도식이 창출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들이 상호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뉴턴의 우주론의 시공간 이론 및 흄의 경험론에 근거한 관찰은 여전히 하나의 인상에 관한 정보만 제공할 뿐, 다른 인상과의 결합성에 대한 인식은 제공하지 않는다. 즉 뉴턴 우주론에 근거한 단순정위의 가설로는 “상호 결합성에 대한 직접적 증거는 소멸한다”(AI 346). 따라서 생산적 사고의 모험을 감행하기 위해서는 할아버지 시대에 유래한 학설에 벗어날 필요가 발생한다.
 화이트헤드는 흄의 경험론과는 달리 인간의 경험이 상호 결합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경우에 그는 철학적으로 모든 최종적인 객체적 현실태가 경험의 계기들이라는 형이상학적 성격을 갖는다는 새로운 학설 혹은 도식을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은 추론에서 본다면, 하나의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결과를 보고나서, 상상적 합리화를 통해서 어떤 규칙을 설정한다. 그 다음에 그는 다른 여러 가지 사례들 역시 정당한지를 적용해 본다.

“사람의 직접적인 현재적 경험의 계기와 사람의 직접적인 과거 계기와의 결합에 관한 직접적 증거는 자연에 있어서 모든 계기의 결합에 타당한 범주를 시사하는 것으로서 정당하게 사용될 수 있게 된다”(AI 346).

 화이트헤드는 귀추법을 통해서 새로운 가설을 설정하지 않는다면, 철학이나 과학에서 어떤 발전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많은 혼란된 철학적 사고의 발단은 연관된 증거가 이론에 의해서 지시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이론이 무관계한 것으로서 도외시해버린 증거에 의거해서 그 이론을 증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충분한 적용 범위를 수반한 이론을 창출하는데 실패한 모든 과학에 있어서 진보가 필연적으로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AI 347).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형이상학의 저서에서 실재의 근본적 특성을 과정으로 간주한다. 과정 세계는 끊임없이 이행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이 세계의 실재는 다수의 사건들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건이 유동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인식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사물의 유형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화이트헤드가 듀이의 물음에 답한『의미의 분석』에서 밝혀듯이, 우연적인 사건과 그 사건을 결합시키는 어떤 패턴들(이다, 의, 또는, 더하기, 빼기, 보다 많은, 보다 적은 등)이 실재 속에 있다. 즉 우리는 이 유동 속에서 사물들의 패턴이나 구조를 식별할 수 있다. 이 패턴이나 구조는 수학의 추상적 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화이트헤드에게 사건의 유동 속에서 패턴의 규칙성이 실제로 드러난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가 문제로 대두된다. 그는 이 비우연적이고 추상적인 질서의 형식과 과정이라는 구체적 사건을 귀추적 방법으로 탐구한다. 그는 자신의 형이상학에서 추상적 패턴 및 구조와 사건을 설명할 새로운 개념을 설정한다. 즉 ‘영원한 대상’과 ‘현실적 존재자들’ 현실적 존재자라는 개념이 추상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하지만 현대 양자 역학에서 우리는 정확한 한 입장의 개체성의 지적할 수 없다. 실증주의의 지시이론에 근거해서 현실적 존재자를 비판하는 것은 여전히 뉴턴적 세계관에 근거한 것이다.
을 도입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도식을 논리학자가 말하는 “참과 거짓이라는 양자택일적 척도를 적용시킬 경우, 그 대답은 그 도식이 거짓이라는 것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PR 10)고 한다. 그것은 과학이나 철학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러한 도식이 참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조건하에서 참이 된다”(PR 10). 우리는 이 도식으로 논리적인 참을 구성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식으로부터 “특정의 환경에 적용 가능한 참 명제를 이끌어낼 모체가 된다는 것”(PR 10)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모체를 경험 혹은 사실을 설명하는 전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대담하고도 엄밀한 논리를 가지고 그 모체에 의거하여 논의를 밀고 나가야 한다”(PR 10)고 주장한다. 도식의 구성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사유는 에코가 메타 가추법에 대한 사유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근대 철학과 과학이 전제하는 개념들을 통해서 우리의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세계와 새롭게 전개된 자연과학, 수학과 같은 학문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새로운 개념을 구성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와 자연과학적 지식을 정당화하는 것이 요구된다. 화이트헤드가 근대 철학의 물질관과 실체관에 대한 개념을 던져버리고, ‘현실적 존재자’와 ‘영원한 대상’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해서, 우리의 직접적 세계와 마주대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뛰어난 ‘메타 가추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생산적 학문이라는 규정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IV. 맺음말

 지금까지 화이트헤드의 방법론이 연속성이 있음을 입증하고자 시도하였다. 또한 철학 역시 ‘생산적 학’의 길을 갈 수 있는가를 알아 보았다.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은 개념의 구성이라는 점에서 과학 및 예술과 동일하게 창조적 학문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필자는 화이트헤드도 거의 동일한 입장에서 철학을 도식의 구성을 통한 창조적인 작업으로 본다고 생각한다.
그는 수학, 과학, 철학에서 동일한 방법론을 사용한다. 이 방법론은 확실성은 연역법이나 귀납법에 비해서는 떨어지나, 생산성은 가장 높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확실성과 형식적인 합리성을 위해서 ‘수학주의’에 천착해왔다. 더 이상 수학의 확실성에 근거한 연역주의나 경험적 사실에 근거한 귀납주의는 철학 및 과학의 탐구에서 새로운 도식의 구성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우리는 확실성을 지식의 합리성을 보장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확실성 보다는 ‘생산성’에 더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철학적 논의에서 진술의 궁극성에 관한 독단적 확실성을 주장하는 가장 적은 암시조차도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이다”(PR xiv)

 우리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 전혀 다른 방법론을 통해서 고찰되는 것으로 보았다. 연역법과 귀납법은 분석적인데 반해서, 현상학, 해석학, 변증법 등은 비분석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밝혀듯이, 화이트헤드는 과학 및 철학을 동일한 방법론을 통해서 생산적 학문의 길을 모색하였다. 필자는 화이트헤드의 이 방법, 즉 귀추법을 통해서 지식이 구성되는 것으로 본다면, 그러한 이분법적 방법론을 통합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화이트헤드의 방법론 논평
                                                          
                                                                 전원섭(연세대학교)


1. 내용 요약

 전체적인 논평을 위해서 개략적인 논리 전개를 따라갈 필요가 있으므로, 먼저 전체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보기로 한다.
 발표자는 이 논문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과학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논리실증주의 이래로 과학철학의 주된 과제”(2쪽 12행; 이하 숫자로만 표시함)가 되어 왔던 방법론으로서, “연역주의와 귀납주의”(2, 15)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핸슨의 주장으로부터 인용된 것으로 보이는, “귀추법”이다.
 이 둘을 대비시키면서, 근대과학의 형성기에 있어서의 수학의 역할을 중심으로 연역주의와 귀납주의의 특성을 “형식과 무시간성”(2, 18)으로 제시하며, 이런 입장을 현대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인 파이아벤트와 콰인의 주장을 인용하여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 뒤 이들 연역과 귀납의 문제점을,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비판을 이용하여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문제점은 대략 “무시간적인 수학적 특성이 시간적인 구체적 대상에 무조건적인 합리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4, 35)는 것과, “관찰만을 통해서는 과학 법칙은 결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6, 23)는 두 가지로 요약해서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III 과학적 방법으로서 귀추법”에서는 연역주의와 귀납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과학의 합리성을 주장할 다른 근거나 방법”(8, 30)으로서, 귀추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귀추법의 개념은, “귀추법은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발견했을 때, 새로운 가설을 사용하는 것”(9, 18)이라는 문장으로 대변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발표자는 귀추법을, 주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쉽게 채택할 것으로 보이는 형식화된 모습을 등장시켜, 연역과 귀납의 그것과 비교하고 있다. 이처럼 비교를 통해 귀추법의 개념을 제시한 뒤, “IV 수학과 물리학에서 귀추법의 적용”에서 “모든 새로운 과학적 발견의 논리는 귀추법의 적용이다”(12, 16)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을 위해 발표자는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Principia Mathematica”와 구체적인 과학사의 예를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위와 같은 논리전개를 통해 얻어진 귀추법의 정당성을 바탕으로, 발표자는 화이트헤드가 초기에 “Principia Mathematica”에서 어떻게 귀추법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IV절에서 제시하고 뒤이어 “확실성보다는 생산성을 학문적 탐구의 우선순위로 보는”(16, 24) 화이트헤드가 후기 형이상학에서 어떻게 귀추법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구체적인 예들을 귀추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제시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발표자는 처음 자신이 제시했던, “화이트헤드의 방법론에 어떤 일관성, 혹은 연속성은 없는가라는 질문”(1, 32)에 대해 “그는 수학, 과학, 철학에서 동일한 방법론을 사용한다”(21, 9)고 답하고 있으며, 동시에 “철학 역시 생산적 학의 길을 갈 수 있다”(21, 8)고 결론짓고 있다.

 

2. 전체적 논평

 방법론은 서양 철학사에 있어 아주 방대한 문제이며, 이런 방대한 문제를 무모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짧은 글에서 대담하게 다루고 있는 것에 대해 논평자로서 놀라움을 표시하고 싶다. 이 놀라움은 일면 무리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갈릴레오와 뉴턴으로부터 데카르트와 흄, 더 나아가 파이아벤트와 콰인으로 종횡무진 이어지는 철학사와 과학사를 총동원한 듯한 방대한 방법론 논의를 큰 무리 없이 소화해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경의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 둔다.
 동시에, 전체 논문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화이트헤드가 수학과 과학 그리고 철학의 연구에 있어 사용한 방법을 귀추법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 역시, 상당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 화이트헤드 연구에 새로운 분야를 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논문의 기본적인 주장에 대해서 반론을 제시할 생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평자라는 입장의 기본적인 의무로서, 이 글에서 발견되는 한두 가지 의문점 내지는 논리적 부정합성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용납해주기 바란다.


3. 비판

 첫째, 앞서 요약해보았듯이, 발표자는 연역과 귀납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귀추법의 우월성을 제시함으로써 화이트헤드가 사용한 방법의 우월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려 시도하고 있는 바, 논평자가 보기에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연역과 귀납에 대비시켜지고 있는 귀추법의, 과학 방법론으로서의 위치가 불분명하다. 구체적으로, 귀추법은 연역과 귀납으로서의 과학에 대해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대안인가? 아니면 기존의 과학 현상에 대한 또 다른 정의 내지는 해석인가? 이 둘 사이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바, 만약 대립되는 관계로 본다면, 화이트헤드가 귀추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동시에 화이트헤드의 방법이 기존의 과학과 대립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둘째, 전체적인 논조로 볼 때, 발표자는 귀추법을 연역과 귀납에 대립되는 방법론의 대안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점은 매우 민감하고 광범위한 문제로서 보다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반면에, 귀추법의 주요 주장자인 핸슨과 퍼어스는 물론이고 화이트헤드조차도, 귀추법을 다양한 과학 활동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논평자의 생각으로는 과학 활동이란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복잡한 현상을 어디에 중점을 주어 보는가에 따라 다양한 주장이 가능한 영역이라고 보고 있다. 실제로 현대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과학에 대해 각각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몇 가지 서로 조금씩은 다른 분석적 결과를 제시 했는바(본 논문 2쪽 각주 3 참조), 핸슨 역시 마찬가지로서 귀추법이 과학 활동을 더 잘 설명해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본문의 예를 하나 지적하면,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퍼어스 역시 귀추법 혹은 가추법이라는 형태로 연역법과 귀납법 외에도 또 하나의 추론 과정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9, 14)고 인용하고 있으며, 뒤 이어 나오는 핸슨의 귀추법에 대한 설명 역시 과학 활동의 일부로서의 발견의 논리로서 귀추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귀추법이 연역과 귀납의 대립항으로 제시될 수는 없지 않을까?
 셋째, 화이트헤드의 방법이 귀추법이라는 것은 화이트헤드 자신의 입장인가, 아니면 핸슨이 주장하는 귀추법의 개념으로 화이트헤드의 방법을 해석해 보겠다는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부분들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져야 논지의 설득력이 제고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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