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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5/11 (14:41) from 80.139.165.116' of 80.139.165.116' Article Number :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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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체철학에서 조망한 미래의 대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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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체철학에서 조망한 미래의 대학상

전 병기(대구가톨릭대학교)


차례

I. 학문/대학 현실에 대한 조망
II. 화이트헤드의 교육철학
III. 환경의 위상 변화
   1. 자연과학과 환경의 관계
   2. 환경의 역사적 변화
   3. 환경과 교육
IV, “현환경”의 배경으로서 특수과학의 방법론
V. 결론



 미래의 대학 교육은 인간에게 연어의 회귀본능과 같은 일반성으로의 회귀본능을 일깨워주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어떠한 명목과 그 어떠한 수단으로도, 한 개인의 유기체적 속성인 환경과의 관계에서 창출해 내고 있는 학문에 대한 현실적 선택을 박탈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사악한 종으로 분류된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그러한 선택은 그들 개인의 삶이며 그 들 개인의 현재이며 그들이 책임질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신성한 장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이고 미래이기 때문이다. AE 3.
     


I. 학문/대학 현실에 대한 조망
 
 이상은 언제나 빗나가기 마련이다. 이상은, 심지어 한낱 희망 사항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을 목표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이상은 현실 속에 있고 현실은 이상 속에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한쪽을 돌아보면 이상의 불빛이 명멸하는 어둠으로 장식되고, 다시 다른 한쪽을 돌아보면 그 모든 현실들이 어둠 속에서 이상을 향해 촉수를 뻗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은 “살기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 더 잘 살기 위해서”라는 본능이 미래에 대해 취하는 반작용이다. 따라서 학자로 하여금  그 아득히 먼 이상이 철학적 연구의 원동력을 충성의 상징물로 바칠 때 CN 2.
배척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육 또한 우리의 이상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러한 이상은 학문과 교육을 빙자하여 대학에 몸담고 있는 자로 하여금 대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하게 한다. 현실적으로 볼 때 우리의 대학은 마치 폐점직전의 상가를 방불케 한다.
 입에 담기 어려운 문제를 정제된 언어로서 표현해보자면 그것은 “기초학문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 혹은 “이공계학문의 위기”라는 고상한 용어로 대변된다. 과연 기초학문의 위기인가? 기초학문의 위기라고 하는 ‘피상적인 징후’는 기초학문을 공부하려는 학생의 수가 “상대적”으로 감소한다는 것이다. 이 피상적인 징후를 냉철하게 표현한다면 팽창의 관성과 수축의 관성이 한자리에서 충돌하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대학의 팽창이 과거에 있어서 사회생활의 한 특징이라는 사실 AE 91.
즉, 시설물의 숫자에서, 그 규모에서, 조직의 내적 복합성에서의 대학들이 갖는 이와 같은 성장은, 대학이 국가에 봉사해야한다는 기본적인 기능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결여됨으로서 대학들의 유용성이라는 바로 그 원천을 파괴하는 어떤 위험을 노출한다. AE 91.
우리의 현 상황이 화이트헤드의 언급을 예증하고 있다. 그것은, 화이트헤드의 언급에 대한 실증을 넘어서서, 대학의 역사에 대한 의식을 위험으로 물들이기에 충분하다.      
 성장과 팽창이라는 장미 빛이 위기의 암갈색으로 변색되는 토양은 이미 칼 야스퍼스가 언급한 학문의 공장 Jaspers K. 이수동역, 대학의 이념, 학지사, 2002, 34.
에서 배출된 오염물로 퇴적되었다는 것 이상은 아니다. 그것은 비단 우리만의 역사가 아니라 대학의 역사이기도하고, 삶의 역사이기도 하다. 2차 산업에서 3차 산업으로의 발전이라는 슬로건 하에 ‘학문 공장’은 ‘논문 공장’으로 개조되었고, 이 논문 공장은 획일성의 복음the Gospel of Uniformity SMW 297.
으로 보호되고 있다. 이 복음은, 진정한 지적 생활의 섬광을 상실하지 않은 소수 천재들의 은닉처를 제공하고 새로운 지적 정신의 본거지 몬로 P., 조종인 역, 교육사 개설, 교육과학사, 1999, 158.
를 말살 시키고 있음은 물론이고, 인류가 감사해야하지만 그 감사를 잊을 수밖에 없는 무수한 은인들을 추방한다. AE 99.

 과연 대학이 고민하고 있는 것이 국가의 미래와 대학의 본래 기능에 대한 고민인가? 아니면 학생의 감소로 인한 손익분기점에 대한 계산에 대한 고민인가? 과연 교수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이 국가의 미래와 학문의 미래에 대한 고민인가? 아니면 나 자신을 포함해서 자신들의 衣食住의 질적 저하에 대한 고민인가? 이러한 고민과 행위의 실천 자체가 교육적 환경을 조성한다는 사실을 당국자와 교수 개인들은 어느 정도 심각하게 마음에 새기고 있는가? 이 문제에 이미 실천이성과 사변이성의 강력한 충돌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어떤 경우든 충돌은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시대적 상황이 양자택일을 허용하지 않을 때, 그 충돌은 시간 축 위에서 조정을 거쳐야한다. 이러한 조정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뛰어넘어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대중은 바람처럼 날려 다닌다. 그 바람은 다름 아닌 환경에 대한 대중들의 일차적 반작용이다. 이 반작용은 환경에 대한 순응과 가치평가 후에 이루어지는 개인의 행위의 경향이다. 이미 그들만의 비전이 형성된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외래적인 것으로서 파생적으로 느껴지는 다수의 느낌들은, 사적인 것으로 직접 느껴지는 감성적 평가의 통일성으로 전환된다. 이는 욕구의 도래를 의미하며, 이것이 더욱 고도로 예증되고 있을 때 우리는 이를 비전이라고 부른다. 물리학의 용어로 말한다면, 이 단계에서는 스칼라 형식이 시원적인 벡터 형식을 압도한다. 시원적인 것들은 개체적 경험에 종속되기에 이른다. 벡터 형식은 상실되지는 않지만 스칼라적 상부구조의 기초로서 매몰된다.” PR 212.
그 상부구조는 이미 하나의 거대한 현상으로, 현실이라는 하늘에 먹구름으로 솟아오른다.    
 “우리”의 사변이성은 이러한 현실의 먹구름을 걷어내도록 강요한다. 그것은 현실이라는 진리 속에서 사악한 종의 선과 선한 종의 선을 선별하는 작업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선별은 현실이라는 유적 진리가 용납하지 않는다. 한여름의 먹구름은 비로 내려 대지를 적실뿐이다. 다만 그것은 미래에 대한 조망으로 어렴풋이 드러날 뿐이다. 여기서 사변 이성의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서 출발하는 상상을 기초로 한다. 사변 이성은 현실의 기존 방법을 초월하는 것이고 실천이성은 현실의 환경을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비도덕적이라고 할 만큼 간악하고 사악한 것일 수도 있다.
 “실천적 이해의 발견은 사변적 이성의 성공을 위해서는 필연적인 미숙의 재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두 기능 사이의 상호작용에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어떤 외부의 지배적 관심사의 목적에 의해 지배되는 이성의 작용과 그 스스로에서 발생하는 직접적인 만족에 의해 지배되는 이성의 작용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잔존하게 된다.” FR 39, 밑줄은 필자에 의한 것임.
이 차이는 종의 차이이다. 그러나 이 종들은 현실이라는 진리로 나타나며, 사변 이성에서 제외될 수 없는 중요한 요인들이 된다.
 이 두 종의 진리는 대학 현실에도 적용된다. 대학이 그 기능을 다하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학생들의 고민과 대학의 본래 고민이 상충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 내면의 숨겨진 목적이 무엇이라고 해도, 그 결과는 동일한 결과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서 ‘기초학문의 기피 현상’과 ‘대학의 위기의식’은 일대일 대응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며, 필요에 따라서 그 양자는 상호간에 상징과 의미의 역할을 교대로 해낸다.   
 ‘기초 학문에 대한 기피 현상’은 기초학문이라는 환경에 대한 무공격적 공격으로 대변되고, ‘대학의 위기의식’은 환경변화에 대한 의식으로 나타난다. 다만 前者는 이미 무게중심을 자신의 경험으로 가져간데 비해서 後者는 그 무게 중심을 아직 외부의 환경에 두고 있을 뿐이다. “환경에 대한 이 공격적 행동은 i. 살기 위한, ii. 잘 살기 위한,  iii. 더 잘 살기 위한 것 이라고 하는  삼중의 충동으로 설명된다는 논제이다. 사실상 삶의 기술이라는 것은 먼저 살아가야 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세 번째로 만족의 증진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성의 원초적 기능은 공격의 방향을 환경으로 하는 것이다. FR 8.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기술(이공계학문)은, 삶의 기술이라는 명목으로, 근 100여 년 동안 과거 수 만년의 환경 변화에 버금가는 변화를 환경에 부가했다. 이것은 새로운 환경의 탄생을 의미한다. 과학 기술의 환경이 탄생한 것이다. 이 새로운 환경이 자연 환경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 결과를 단순하게 수자로 표현한다면 년 평균온도를 몇도 상승시켰다는 것이 된다. 이 2-3도의 온도 변화가 가지고 있는 상징은 과학기술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 온도의 상승이 의미하는 것은 부의 축적과 소모라는 삶의 기본을 구성하는 에너지의 소산에 불과하다. 또한 삼중의 충동에 대한 보상이며, 새로운 환경을 운용한 비용이다. 이것은 거시적인 입장의 환경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이야기 한 것이다.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새롭게 탄생한 과학기술환경과 개인의 관계를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기반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 자연과학이라는 기초학문이라고 할 때, 우리의 시야는 좁혀지고 학생과 그 학문을 감당하고 있는 대학이라는 양자의 상호작용 구도가 성립되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의 운용은 새로운 특성을 발현시킨다. “지식의 전문화가 성공을 거둔 결과로, 오늘날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주목할 만한 점이 두 가지 나타났다. 첫째로, 진보의 속도가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평균 수명을 누리는 개인이 때때로 그가 과거에 접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곤 한다. 고정된 일에 고정된 사람이라는 사실이 과거의 사회에서는 신이 내려준 선물이었지만 미래의 사회에서는 공공연한 해악이 될 것이다. 둘째로 현대에 있어서 지식의 전문화는 지적 영역에 관한 한 역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현대의 화학자는 동물학에 약한 경향이 있고,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에 대한 일반적 지식에는 더욱 약하며, 영시(英詩) 작법상의 운율의 원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흔히 있다.” SMW 282.
이러한 결과는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나” ‘살기 위해서’라고 하는 충동을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충동으로 변질시키게 한다. 이 충동은 체계의 정체성이 갖는 ‘힘의 복음’에 충성을 맹서한다. 개인의 시원적 벡터성은 자신의 비전을 상실하고 단지 체계의 ‘복음’이라는 비전속으로 매몰되어간다.
 알맞은 토양과 기후 및 씨앗이 거기 있어서 숲이 생겨났다. SMW 23.
개인의 반작용은 싹을 틔운다. 그 전체의 비전이 개인의 경험 속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올 때 개인은 체계의 기능 방법에 대한 반작용을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숲을 이룬 반작용으로 대학과 기초학문이 인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반작용을 자신의 사변 이성의 주기 속으로 침몰시킬 구도에 대한 고민을 요구한다.
 대학에는 사변 이성의 자유로운 섬광은 없고, 太古적 電子가 살아남기 위해서 자유를 포기한 것처럼, 살아남기 위한 속박의 충성만이 있을 뿐이다. 한편 이 환경을 무공격으로 공격하고 있는 환경들은 학문의 삼차산업화를 급속하게 증진시키고 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삼차학문으로 그 개체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학과 그 당국자가 학문의 본질과 그 주기성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무엇을 공격해야하는지 알 것이다. 그들에게 감성적이고 도덕적인 호소는 무용지물이다. 물리적으로 살아남는 데는 도덕과 감성이 가장 해로운 독약이라는 것을 그들의 몸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II. 화이트헤드의 교육철학
 
 화이트헤드 교육철학의 기본적인 골격은 이미 출간된 본인의 저서 “物禮之學” 전 병기, 物禮之學:과학, 소학, 리듬, 동과서, 2003.
에서 논한 바 있다. 화이트헤드 교육철학의 기본 골격은 리듬이라고 하는 주기적 운동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주기적 운동은 또한 화이트헤드의 파악이론이라는 과정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파악 이론이란, 경험의 무게의 중심을 외부에서 자신의 내부로 이동시킬 때, 상호작용의 위상들과 양태들을 요소로 추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게의 중심 이동은 자신의 계기를 구성하는 과정이며 자신의 형상을 구축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외부환경과의 유기적 기능을 보존하는 방법인 동시에 삶의 기술을 터득하는 과정이다.
 “삶은 본질적으로 주기적이다. 거기에는 매일 매일의 주기가 있으며 일한다든가 노는 시간 그리고 활동하고 수면하는 시간이 교대 교대로 얽혀있다. 그리고 또 계절적인 주기가 있어서 우리들의 학기나 휴가를 규정하고 있다. 게다가 또 뚜렷한 연차적인 주기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그 누구도 소홀히 할 수 없는 크고 명백한 주기다. 지능의 발달에도 미묘한 주기가 있다. 그것은 주기적인 순환이며 그리고 각 주기 속에는 종속적인 단계가 있으며 한 주기로부터 다음 주기에로 이행함에 따라서 항상 다르다.” AE 17.

 이 주기는 자신을 드러내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기도하다. 이 주기라는 용어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있어서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현실적인 것이 갖는 특성이다. 그것은 가장 작은 물리적 입자에서부터 인간을 포함하는 전체 우주에 통용되고, 그의 사상을 일관하는 용어이다. 그리고 주기에서 주기로 이행함에 항상 다르다고 한 것은 이행의 과정에서 항상 새로움이라고 하는 창조성이 개입되고 있음을 말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기성이 반복성을 엄밀하게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주기의 리듬은 사회와 상호 전제되는 말이다. 주기적인 리듬이 없다면 사회도 없고 사회가 없다면 주기적인 리듬도 사라지게 된다.” 전 병기, 物禮之學:과학, 소학, 리듬, 동과서, 2003, 95.
   
 화이트헤드는 교육에서의 지적인 성장에 존재하는 리듬의 주기를 세 단계, 즉 로맨스, 정확, 일반화의 단계로 구별하고 있다. AE 17.
이 세 단계에 대한 小學과의 비교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도표 1)을 얻었었다.

本能
실천이성의
도약
知性
사변이성의
도약
智慧
社會
宇宙
유아,
초등 저학년
초등 고학년, 고등
大學
개인
로맨스
정확
一般化
自由
訓練
自由



여건
과정
결과
현실적 존재자
도표 1. 도약의 의미 전 병기, 物禮之學:과학, 소학, 리듬, 동과서, 2003, 244.


이 도표는 한 개인의 지적 성장의 주기를 화이트헤드의 교육에서의 주기와 소학의 교육과정에서 나타나는 주기를 비교한 결과이다. 이 결과로부터 본 논문이 지향하는 미래 대학의 설계를 기초하는데, ‘대학’과 ‘일반화’ 그리고 인간의 환경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실천이성’과 ‘사변이성’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여기서 환경이라는 것을 대학의 학문/기초학문이라는 것으로 제한한다. 이러한 제한 속에서 우리는 기초학문에 대한 기피현상을 환경과 그 환경에 대한 반작용으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 환경에 대한 기피 현상은 이 환경을 공격해서 얻을 수 있는 삶의 유익함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판단이 아무리 하찮은 개인의 판단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와 개인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의 시원적 벡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회가 수용할 수 없는 개인의 욕구일 수도 있다. 전체학문의 철학적 이상과 사회의 변화에 따른 현실적 요구 간에는 항상 갈등이 있어 왔다. Jaspers K. 이 수 동역, 대학의 이념, 학지사. 2002, 166.
이러한 갈등의 원인을 학문이라는 환경과 그 환경이 작동하는 방법에서 찾아보려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학문의 철학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대학의 미래상을 그려보는 것이 된다.
 화이트헤드는 대학을 일반화를 추구하는 장으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화란 그 무엇인가의 구체적인 사실들이 있어야한다. 공허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일반화란 특수과학들을 하나의 정합적인 체계로 묶어내는 것이다. 이 정합적인 하나의 체계는 삶에 적용되는 기술의 정당성을 확보해준다.  
 “사변적 비상에 대한 최고 증명은 잘 증명된 목적을 위한 실천적 기술의 확립에 귀속되는 것이고, 사변적 체계는 그 기술을 해명함으로서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유로부터 실행으로의 진보가 있게 되며 실행으로부터 동일한 사유에로의 귀환이 있게 된다. 사유와 실천의 이 상호작용이 최고의 권위이다.” FR 81-82.
대학은 이러한 최고의 권좌를 회복해야한다. 대학의 임무는 상상력과 경험을 함께 융합하는 것이다. AE 93.
이러한 권자는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그러한 명예가 실추된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은 고민은 특수학문들의 주기성이 시공 속에서 요동치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 시킨다. 그 주기성이란 바로 특수과학의 고유한 방법의 적용범위와 한계라고 하는 생명성의 숨소리이다.     


III. 환경의 위상변화

1. 자연과학과 환경의 관계
 현대의 자연과학은 유물론을 그 기저로 하고 있다. 19세기를 상식이 세련된 시기라고 한다면, 20세기는 상식을 뛰어넘는 시대였다. 21세기인 지금은 미래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상식 속에서 머물러있다. 다른 말로하면, 아직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19세기 세련된 상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뉴턴역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고전역학의 사상으로 이 세상이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사고의 패턴은 좀처럼 뛰어넘기 힘이 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문명사회의 미적 요구에 대해서 과학이 끼친 영향은 지금까지 불행스러운 것이었다. 과학의 유물주의적 기반은 가치에 대립되는 사물에만 주목하게끔 해왔다. 이 대립은 구체적인 지평에서 보자면 그릇된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사유의 추상적 지평에서 본다면 타당한 것이다. 이처럼 사물에만 주목하는 그릇된 관점이 경제학의 추상 관념들과 결합하게 되었는데, 사실 이들 추상 관념은 상업상의 임무를 수행할 때 사용되는 추상 관념이었다. 그래서 사회 조직에 관련된 모든 사상은 물질적 사물과 자본이라는 것에 의해 표현되었다. 궁극적인 여러 가치는 거기서 제외되었다.” SMW 291, 밑줄은 저자에 의한 것임.

 그와 같은 불행한 영향은 지금까지도 유효하고, 한층 더 심화되었다. 더욱이 학자연하는 몽매주의자들의 편협한 사고는 아직도 19세기 고전역학의 망령에 자신도 모르게 시달리고 있다. 방법에만 몰두할 때 그와 같은 몽매주의자라고 하는 현상에 대한 자각증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중이 구가하는 고전적 사상에 편승하여 자신을 표현하려고 하는 퇴보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자신은 진보라는 위장 속에서 위안을 얻는다. 따라서 이들은 언제나 분잡하고 논리정연하다.
 이 논리 정연함과 사물이 만날 때 그것은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인간의 경험과 개체성에 대한 호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강력한 호소력은 일반성 앞에서는 무력해 지는 것이 특성이다. 이것은 20세기 몽매주의자의 특성이다. 이러한 특성은 개체의 독립적 특성의 존중이라는 미명하에 대학의 팽창에 일조를 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대학위치는 “고대 철학자들이 운영하던 학교는 지혜를 나눠주고자 열망했지만, 현대 대학의 보다 초라한 목적은 학과만을 가르치는 것” AE 29.
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 부분에서만의 진보로 이어지고 가장 발전했다고 하는 한 분야의 학문은 절름발이 진리를 주장하는 몽매주의적인 요소를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19세기의 환경은 20세기의 대중을 길러냈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19세기의 환경은 자신이 길러낸 20세기의 대중들의 반란 속으로 자신의 운명을 밀어 넣고 있다. 과학 환경을 구축한 이론의 일반성으로 물든 자들은 그 환경의 구석구석을 경험하지 못한 자 들이다. 그러나 그 환경에서 태어난 자들은 그 일반성에는 미숙하지만 몸으로 구석구석까지 직접경험한 자들이다. 세계의 비극은 시작되었고, 하나의 주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비극은 상상력이 풍부한 이들은 거의 경험이 부족하고, 경험이 풍부한 이들은 상상력이 빈약하다” AE 93.
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상상력이 빈약하고 경험이 풍부한 이들은 새로운 이론으로 새로운 환경을 조성해 갈 것이다. 이렇게 세계는 주기를 그리면서 부침을 거듭하게 된다.  
 사변 이성은 실천이성과 동시에 작용하지만 그 드러나는 시간은 언제나 실천이성의 작용이 드러나는 시간보다 느리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대중은 현명하다고할 수 있다. 그들은 직접적인 경험을 무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人心朝夕變이라 했던가? 그들은 삶이 가파른 만큼의 변화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 변화의 가치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일반성과 상상의 부재 결과이다. 새로운 방법의 모색과 초월이 요구된다. 19세기의 상식을 넘어서는, 20세기의 관념이 대중의 상식으로 자리 잡는 것은 언제인가? 다음 세기가 될까? 그것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이 세계는 언제나 새로움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2. 환경의 역사적 변화
 그림을 통해서 환경의 역사적 변화를 살펴보자. 현재 우리가 구성하고 있는 환경의 패턴이 前시대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현재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인간은 주기적인 자연을 그 공격의 대상으로 했었다.
                   
 


       
                                                    

        

  
  

  

  

  
 그림 1, 원시사회의 자연과 인간의 관계

 그림 1은 원시 사회의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여기서 은 주기적인 자연을 표현하며, 은 인간 사회를 나타낸다. 그리고 는 인간사회와 자연의 상호작용을 나타낸다. 여기서 인간 사회라고 하지만 현재 와 같은 사회는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생존을 위해 자연적으로 구성된 최소 단위를 표현할 뿐이다. 이러한 형태의 사회는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지금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 은 유기체 이면서 환경이다. 이 환경이 되는 것은 유기체의 특성이다. 이것이 환경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생명체에 필수적인 생존과 양육이라는 본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배치의 위상은 20세기 전후까지 세계를 지배해온 구조로 전환되고,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서 말끔하게 지워지지는 못하고, 가끔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구도로 전환되었다. 그러한 구조는 그림 2의 구조로 표현된다.
 그림 2는 우리의 과거사를 수놓는 그림이다. 국가라고 하는 개념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성립요건인 “국토”와 “국민”과 “주권”이라는 세 개의 관념들을 사이에 두고, 개인과 개인 그리고 국가와 국가의 대립, 전쟁과 화해의 연속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이 세 요소를 상징으로 하는 환경의 부침과 생성소멸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수천 년 역사를 통해서 우리의 주된 관념들이 도출되었던 구도이다.



         
    




    
   그림2, 새로운 환경의 탄생

 이 시기에 자연()이라는 환경은 국토라는 개념으로 전환되었고, 이 분화되어 새로운 환경, 즉 국가 혹은 주권이라는 개념으로 전환되었으며, 라고 하는 국민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의 역사는, 민주주의라고 하는 제도로 주어지는가, 아니면 힘과 권력에 의한 왕권인가 하는 것의 차이의 역사로서, 무수한 투쟁과 혁명과 전쟁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속에서 숨길 수 없이 나타난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 개인의 상호작용인 과  으로서, 이러한 상호작용은 역사적으로  숨길 수 없는 사실에 의한 반작용()으로 출현했다. 이러한 반작용은 자연에 대한 일차적인 탐구의 결과를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작용의 정점은 17세기 소수의 천재들에 대한 역사로 기록된다. 그것은 자연과학의 시작이라는 거대한 진보의 원천을 이룬다. 이러한 사상은 낭만주의의 반동을 거치면서 새로운 위상의 환경 배치를 구성해 냈다. 또한 새로운 주기에 속하는 사변 이성의 출현이라는 서막을 알린다. 또한 현재를 수놓는 거대한 주기의 시작에 불과했다.
 한편 우리는 그 주기의 끝자락에서 본 논문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국가라고 하는 개념과 ‘국토’, ‘주권’, ‘국민’이라는 개념은 사라지지 않고 있지만, 그러한 환경의 위상은 서서히 변하고 있다. 그 위상의 특성은 라고 하는 대중의 마음속에 새로운 가치를 발현시켰다. 이 가치는 자신들의 위치를 의 위치로 상향 조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향 조정은 민주주의 특성인 반면에 그 해악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림 3. 과학 환경의 등장

 그림 3은 과학 환경의 등장을 나타낸다. 사변 이성으로 진작된 실천이성이 구축한, 인간이 역사적으로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환경의 등장이다. 이 환경의 특성은 자연의 환경이 갖는 주기성의 성질을 유전 받은 것이 아니고, 인간의 상향성이라는 비주기적인 성질을 유전 받은 환경이다. 따라서 이 환경의 특성은, 인간의 사변 이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연의 항구성이라는 속성을 닮아있다. 그리고 이 항구성은 상향적 속성이라는 강력한 갑옷으로 무장된다. 물론 인간의 사변이성이 작용하는 시기와 실천이성이 작용하는 시기는 그 대세에 있어서 주기를 형성한다. 아직 우리 인간은 이러한 주기를 맞이한 적이 없다. 이제 그 새로운 주기를 맞이하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주기의 도래는 환경의 위상변화를 수반한다. 이 변화기에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특수한 예로서 대학을 든 것뿐이다.
 이러한 환경 하에서의 고민은 어떤 것인가? 이미 화이트헤드는 우리의 대학들이 몸부림치고 있는 부분을 다음과 같이 예측하고 있다. “상당한 정도로 환경은 고정되었고, 그래서 그만큼 생존 경쟁도 치열해졌다. 그러므로 우주를 장미 빛 안경으로 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고 만다. 우리는 경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누구를 탈락시킬 것이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육자인 한, 이 점에 관해 분명한 생각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에 따라 배출되어야 할 인간형과 가르쳐야 할 실천적 윤리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SMW 295.

 이 그림에서 주목할 것은  라고 하는 자연적 환경에 대한 상호작용 혹은 경험이 약화되고 라고 하는 과학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강화된다는 특성이 있다. 이 특성은 두 가지 현상으로 예증된다. 그 하나는 특수학문에서 방법의 강화로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대중의 방법에 대한 종속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이 방법에 대한 종속은 환경에 대한 공격 패턴으로 나타난다. 이 패턴은 기본적으로 환경을 선택하도록 한다. 공격받지 못하는 환경은 불모의 황무지로 변하게 된다. 황무지라는 환경에서는 그 어떠한 종의 유기체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발견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허공뿐이다. 방법이 강화될 때 이미 대중은 그 방법의 종속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 그 방법이 새로움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방법을 구사하는 환경은 황무지로 변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기초학문은 위기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같은 의미로, 우리의 기초학문의 장은 이미 황무지로 변한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하는 것은 19세기와 20세기를 사이에 두고 과학 환경의 등장이, 대중()이 의 지위를 획득하도록 하고, 화됨으로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교육의 대중화라고 하는 거창한 슬로건 하에 충동된 것으로, 교육의 수요층이 급격하게 팽창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팽창과 대학의 팽창 그리고 과학기술의 혁신적 발전은 서로를 충동적으로 팽창시켰다. 물론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상대적인 팽창”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팽창은 결국에 교육의 수요층의 상대적 고갈과 방법의 상대적 고갈 방법이 적용될 대상의 상대적 고갈을 급격하게 앞당겨놓았다. 이와 같은 상대적 고갈 상태에서 삶을 위한 새로운 충동은 시작되는 것이다. 상대적 고갈 상태에서의 새로운 충동은 신천지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편중이고 치우침이다. 물론 상대적 팽창 또한 편중이었다. 실천이성이 최고도로 작동되는 시기이다. 이때 이 이성은 가치판단을 하고 우선순위를 결정하게 된다. 가장 취하기 쉬운 기술이 무엇인가 하는 느낌에서 오는 본능적 행위이다. 그것은 삶과 가장 밀접한 것이 최우선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이때 대중은 방법이 적용될 대상이 상대적으로 고갈되지 않는 영역으로 몰려들게 된다. 삼차학문의 팽창이다. 아마도 그것은 새로운 주기를 위한 조정기가 될 것이다. 여기에 대학과 교육에 시사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차학문과 삼차학문의 관계를 조사하라는 것이다. 그 관계와 우리가 운용하는 환경과의 관계를 조사하라는 요구이다.        
 이 문제는 현재 우리의 과학적 환경을 구성하는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특수과학들의 방법론에 대한 고찰을 요구한다. 이것은 특수과학과 우리의 환경과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된다. 또한 이 방법론과 더불어 우리의 교육을 고찰하게 하는 것이다.  

3. 환경과 교육 전 병기, 물례지학, 동과서, 2003, 59-77 참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따라온다. 그 하나는 우리의 교육이 정당화되는 물리적 조건으로서, 지식은 경험적으로 전달되는 것이지 유전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롭게 형성된 환경이 안정적이지 못하다(사회가 직시하는 조망)는 것이다. 과학 환경의 안정성(사회의 구성원이 직시하는 조망)과 유전적 조건으로 정당화 되는 교육의 관계는 하나의 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통합체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 통합체는 사변이성을 작동시켜야한다. 그것은 물리적 환경을 수반하는 사회라고 하는 유기체의 생존 특성이다. 우리의 대학은 이러한 특성을 잠시 유기하지 않았는가!  
 여기에는 언제나 사회와 사회를 구성하는 개체들 사이의 갈등이 있게 된다. 개체들에 있어서 실천이성이라는 조명 하에 드러나는 사회는 단지 안정된 환경일 뿐이다. 나의 고민과 자식의 고민 사이에 놓이는 다리는 언제나 시간이라는 폭격으로 성할 날이 없다. 사회는 불안정을 직시하고 개인은 안정을 직시한다. 이것은 이 세계가 안고 있는 불안의 요소이다.
 여기서 교육이 정당화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20세기의 과학이 던져주는 시사에서 찾을 수 있다. 20세기의 과학과 19세기의 과학의 특성은 단순하게 거시과학과 미시과학으로 대변할 수도 있다. 거시과학은 일상적인 경험과 그렇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 교육의 내용은 단순한 지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제도적인 교육의 장을 떠나서도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경험의 세계와 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시과학은 그 성질에서 전혀 우리의 오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들의 집합체가 현재 21세기의 과학 환경을 구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 환경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교육의 문제와 통합된다. 또한 보상받지 못할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한다.  








  
  
  그림4. 과학 환경의 이중성

 이 문제를 여기서는 과학 환경의 이중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겠다. 그림 4가 이 문제를 나타낸다. 여기서 , , 는 각각 거시과학 환경, 미시과학 환경, 거시과학과 미시과학의 관계를 나타낸다. 이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거시과학 환경()은 그림 3에서 보여주는 과학 환경()과 동일한 것이다. 이 환경은 이미 언급되었듯이 17세기에서 출발하는 기계적 유물론의 물리적 환경을 의미한다. 또한 그 환경의 지배적 주기를 표현한다. 미시과학 환경()은 20세기에 출발하는 양자론을 기반으로 하고 20세기 양대 전쟁을 출발점으로 하는 과학이론에 힘을 받은 기술의 진보로 이루어진 과학 환경이다. 그러나 이 환경은 언제나 거시과학 환경()에 매몰된 상태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미시과학이 다루는 대상이 거시과학이 다루는 대상의 부분이기 때문이며, 물질의 구조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상적 배경은 전적으로 다르다. 후자는 기계론적 유물론과는 거리가 먼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주기의 전성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 같다. 거시과학과 미시과학의 관계()는 아직 분명한 과학적 관계를 성립시키지 못하고 있다. 다만 현상적인 사실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한 가지 주목해야할 사실은 거시적 환경()이, 점차 인간사회의 골격으로 자리잡아간다는 것으로, 의 직접적 환경에서 그 자체로 급속하게 진전되어 간다는 것이다. 특성상 은  에 매몰되는 것으로 이 전 시대의 환경의 역할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과 환경이라는 구도는 그림1에서 보여주는 사변이성 이전의 구도로 돌아가게 된다. 단 다른 것은 의 자리를  가 차지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구도의 결과만을 놓고 볼 때, 물 한 방울, 공기 한 방울 없고, 빛 한 자락 들어오지 않는 혹성에 지구의 현 문명을 영속시키려는 꿈의 실현과 같은 것이다. 그와 같은 구도의 시기는 분명 있게 되며, 그렇게 긴 기간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실패로 끝날 것임이 분명하다. 누가 그 책임을 질 것인가? 세계가 그 책임을 져야하는가? 차라리 길가에 놓인 바위에 그 책임을 물어라! 그 전조가 바로 삼차학문의 성행이다. 그것은 과학의 결과가 자연과 동일하다고 하는 착각으로, 현상과 사태를 혼동하는 무지에서 온 결과이다. 일반화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다. 이러한 착각은 의 안정성과 의 안정성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20세기의 인간은 자신이 삶 속에 미시적 비용이 매몰되어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현대인의 특성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바로 현대 교육의 문제점과 해결점은 이 점에서 찾아야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흐름에 대한 직관 속에서, 그 흐름의 길목을 지키는 것이 대학 교육의 본질이 된다. 본 논문의 요지도 그러한 삼차화의 급속한 전진이야말로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환경의 구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삶의 미덕은 자신의 생멸마저도 직시하는 것이다.  

 
IV. 현환경의 배경으로서 특수과학의 방법론
 
 이 장은 Newton에서 시작되는 근대과학의 경험에 대한 논의로서, ‘현환경’이란 20세기 말의 어린이를 키워낸 환경이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환경이기도하다. 뉴턴으로부터 100여년 후 “1867년에 과학적 및 기술적 제 학과에 크게 치우침과 더불어 학과 선택의 완전한 자유를 기초로 하는 코넬 대학의 설립으로 과학을 일반적으로 고등교육에 도입하려는 운동이 완성되었다. 이윽고 하버드 및 예일 에서는 과학의 전문학부가 설립되게 되었다.” 몬로 P., 조 종인 역, 교육사 개설, 교육과학사, 1999, 382.
그리고 과학이 학문의 자리를 만들어가기 시작한지 200여년이 지났다. 그리고 생물학자 센트죄르지는 자신의 회고록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생명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조직학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으나, 세포의 형태적인 자료가 생명체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시원스럽게 풀어주지 못하므로 다시 생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생리학이 너무 복잡한 학문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약리학을 선택하게 되었으나, 이 학문 역시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세균학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박테리아 역시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얻고서 이번에는 분자 수준까지 내려와 화학과 물리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20년 후 나는 생명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자를 이해하고 파동역학까지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전자는 전자일 뿐이지 생명체가 아니지 않는가? 결국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 대상을 잃고 말았다. 내가 쥐고 있는 사이에 그것은 손가락사이로 나가 버리고 만 셈이다.” 로버트 A. 윌리스, 제럴드 P. 샌더스, 로버트 J. 펄, 이 광웅 외 역, 생물학:생명과학, 을유문화사, 2002, 49에서 재인용.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이 나열은 300여년 과학적 방법의 역사를 단숨에 적은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환원론의 역사이면서 “현환경”의 역사이기도하다.
 이들의 방법은 처음에는 새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모든 대중을 충동하기에 충분했고 그들 중 일부를 흡인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들의 방법은 이미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생물학자인 프란시스코 아야라에 의한 환원론의 종류를 살펴보면 i. 존재론적 환원론, ii. 인식론적 환원론, iii. 방법론적 환원론이 있다. Tipler F. J., The physics of Immortality, Doubleday, 1994, 294.
존재론적 환원론은 실재를 구성하는 재료에 대한 논의로서 철학의 존재 본성에 대한 것이다. 물리학에서 이것은 기본 입자에 대한 추구로 이어진다. “인식론적 환원론이 유지하는 것은 과학의 한 분야에 있어서 이론과 실험법칙은 항상 다른 분야의 과학에서 정식화된 법칙의 특수한 경우인 것으로 보여 진다는 것이다.” 동일한 책 295.
현재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방법론은 “연구자들이 항상 가장 낮은 수준의 이론적인 기술에서의 설명을 탐구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연구 대상이 되는 물체를 구성하는 원자 분자 다른 기본적인 입자들 수준에서의 설명을 탐구한다는 주장이다.” 동일한 책 297.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환경으로서 특수과학의 역할을 다루고 있다. 그 역할이란 다름 아닌 이성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선과 악 그리고 도덕성과 비도덕성을 떠나서, 삶이 요구하는 욕구에 대한 문제와 새로움의 제공 문제로 귀착된다. 단순하게 이러한 입장에서만 본다면 현재의 기초학문에 대한 기피현상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이것을 예증이나 하듯이 현재, 과학의 종말이라는 언급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존 호건, 김 동광 역, 과학의 종말, 까치, 1997, 참고.
그리고 한편에서는 환원론의 근저인 물리학의 완성 Tipler F. J., The physics of Immortality, Doubleday, 1994, 참고.
이라는 소리도 들려온다. 이 두 언급은 책임을 상호전가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움을 갈구한다는 의미에서 한목소리라 할 수 있다. 방법의 새로움과 대상의 새로움이라는 새로운 대립으로 형성된 한 목소리이다.  
 역설적으로 특수학문의 완성과 한계라는 문제는 새로움의 출현이 정지되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대중의 실천적 이성을 충동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환경을 고정시킨 그 방법론은 과거의 새로움의 방법에서 반복적인 방법으로 침몰해버린 것이다. FR 20.
그 어떤 명목 하에서든 우리의 대학 현실은 그렇게 침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침몰의 방지를 위해 대학에 요구되는 것이 사변이성에 의한 새로운 구도의 산출이다. FR 71.

 그렇다고 여기서 학문으로 하여금 환원론의 대안을 요구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그러한 대안은 우리에게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환경의 안정적 유지 보존이라는 상향적 충동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미 거대한 비용이 지출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 5. 특수과학의 환원적 관계

 센트죄르지의 회고록을 한 장의 그림으로 그린다면 그림 5와 같다. 여기서 , , , 는 각각 물리학, 화학, 생물학, 그리고 삼차학문들을 나타낸다. 이 그림은 특수과학의 환원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들이 현재의 과학 환경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는 기반과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 방법이 그 한계라고 하는 치명적인 진단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육에 도입되는 것은 우리의 물리적 제한 조건 때문이다. 또한 그 교육은 이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그 어떠한 일반화도 정합적인 체계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피교육자로 하여금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V.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기초학문의 기피 현상과 대학의 위기 혹은 기초학문의 위기라고 하는 것을 동일한 문제로 두고 논의해왔다. 본 논문은 그러한 현상의 원인을 새로운 방법의 결핍으로 인한 특수학문들의 피로현상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이러한 피로현상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대학의 일반화를 더욱더 가속시키는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다. 기피현상과 선호 현상을 “물질적 위안이라는 좁은 길을 지향하는 진부한 목적의 산물로 간주하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모독이다. 인류의 개척자적 본능은 물론 무수한 방법을 통해서 그런 거짓이 지닌 오류를 증명” AE 94.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해보면,
1. 대학의 위기의식은 기초학문의 기피현상에 대한 의식,
2. 기초학문을 기피하는 현상은 초입자들의 실천이성의 발동,
3. 환경에 대한 공격으로서 실천이성의 작동은 현실적인 것.
4. 그 환경은 자연과학의 특수학문들이 배경,
5. 그 환경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볼 때, 안정적,
6. 그 안정성과 이차학문인 자연과학적 방법의 피로 현상,
7. 이 피로현상으로 기피현상을 유발,
8. 이 기피 현상이 삼차학문의 선호,
9. 과학 환경의 배경을 구성하는 학문의 골격은 상식을 벗어나는 것,
10. 안정적 환경의 유지를 위해서 기초학문의 골격을 유지해야한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삼차학문의 선호와 이차 학문의 기피라고 하는 양극단 사이에서 대학이 취할 수 있는 현재의 방법은 그 兩者, 이차 학문과 삼차학문의 관계를 더욱더 확고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각각의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고 지금의 환경을 안정적으로 유지 시키면서, 새로운 일반성이 새로운 교육을 받은 자들 스스로의 경험에서 도출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화이트헤드가 교양과 전문지식인의 양성이라는 언급을 초월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교육제도는 학과목들을 병치시키는 방법으로 교양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병치의 방법은 그 학과목들의 내용이 상식과 일상을 벗어나지 않을 때 가능했다. 그러나 현재 환경을 구성하고 있는 거시 과학에 매몰된 미시과학은 상식을 벗어난다. 그것은 스스로 경험하지 못할 때 그 어떠한 지적인 응용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현대의 교양은 과학에 대한 일반 상식이 아니다. 이것은 일반인들에 해당되는 말이다. 전문 지식인이 가져야 하는 교양은 이들 환경을 구성하는 학문들이 갖는 전문성을 갖는 것이다.
 일반화를 더욱더 가속 시키는 방법으로서 그림 6을 제안한다.이것은  III. 환경의 위상변화에서 고찰한 역사적 당위성에서 도출되는 규제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규제라기보다는 삼차학문의 요구이기도하다. 이 요구는 본능적 회귀본능이다. 이 요구를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이 기초학문의 침몰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대학의 침몰을 방지할 수 있는 길이다. 그림 6은 그림 5를 확대한 것이다. 여기서 과 는 각각 고전과 철학을 나타낸다. 여기서 고전이라 함은 우리의 고전을 말한다. 각 학과는 일반적으로 이 다섯을 기본으로 시작하여 그 환원되는 과정에 따라서 라는 특수 응용학과(삼차학문)로 전환하게 된다. 그 전환 시기는 학년 혹은 학기를 단위로 한다.
 결과로 제안한 것이 너무나 초라한 느낌이 든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일까? 너무 간단해서 일까? 아니면 너무 낯이 설어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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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6. 대학의 일반화를 위한 구도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소중하고 무겁다는 것이다.  한 개인의 욕망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그들의 현실을 다치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양한 과학을 병치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임의의 특수과학을 넘어서까지 일반화시키는 것이며 그렇게 그 상호관련성을 표현하는 해석적 체계를 제공하게 된다.” FR 86.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하는 것은 특수과학이 가지고 있는 방법에 대한 무게 중심을 교육적으로 한 개인에 옮겨놓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으로 하여금 직접 경험하게 함으로서 나름의 무게 중심을 만들어 가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현실에서 각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잡식성으로 스스로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이들의 관심사를 자연과학, 윤리학, 수학, 정치철학, 형이상학, 신학, 미학, 그리고 그 자신들의 호기심이 이끌리는 모든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다. 이것은 이러한 주제들을 엄밀하게 분리된 것으로 다루지 못하게 하면서 이들 관념들의 정합적인 하나의 체계로 결합하는 자유를 주는 것이다. FR 83.
이 자유야 말로 일반성의 밑거름이다. 그리고 여기서 제안한 규제가 자유의 덕목이 될 때, 우리의 교육은 바로 서게 될 것이고, 분잡하지 않고 정연하지는 않은 논리를 직관과 느낌으로 보상하는 낭만적인 모험가는 탄생할 것이다.     

 “마지막 사건에서 그 종은 낡고 지배적인 방법의 범위를 넘어서는 잡다한 경험의 소용돌이 속에 숨어 있는 발생적 방법론을 포착한다. 만약 그 선택이 다행한 것이었다면 진화는 상향적 추세를 취했을 것이고, 불행한 것이었다면 시간의 망각은 사라진 종의 자취를 덮는다.” FR 19.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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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호건, 김 동광역, 과학의 종말, 까치, 1997.












“ 유기체 철학에서 조망한 미래의 대학상”에 관한 논평

                                                        정 연 홍(충남대)

 
 1. 대학은 변혁의 계기에 직면해 있다. 현재 대학은 미래사회에 대한 변화에 대처할 과제를 지니고 있다. 현대사회가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변화됨에 따라 대학교육도 변화가 요구된다. 정보사회에서의 대학은 지식과 기술창조의 전진기지이고 문화의 산실이다. 급격한 정보통신 사회로의 변혁에 따른 교육의 내용과 방식은 야스퍼스(Jas- pers)가 ‘대학의 이념’에서 언급한 대학의 이념조차도 변화시킬 것이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대학에서 가상교육(virtual education)이나 원격교육과 같은 교육방식을 실현하여 전통적인 강의를 가상강의로 개설하거나 또한 기존대학과는 별개로 가상대학을 설립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논자는 변혁기에 직면한 대학 환경을 유기체의 철학의 측면에서 성찰하고 있다. 논자가 현재의 대학 환경을 시간적으로 분석하고 미래의 대학상의 정립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시도한 드물고도 매우 색다른 논문으로서, 논평자는 이것을 통하여 많은 시사를 받았다.

 2. 논자는 먼저 ‘1. 학문/대학 현실에 대한 조망’에서 “현실적으로 볼 때 우리의 대학은 마치 폐점직전의 상가를 방불케 한다”고 전제한다.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것은“‘기초학문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 혹은 ‘이공계 학문의 위기’라는 고상한 용어로 대변된다”고 기술하고 그로 말미암아 “대학이 고민하고 있는 것이 국가의 미래와 대학의 본래 기능에 대한 고민인가? 아니면 학생감소로 인한 손익 분기점에 대한 계산에 대한 고민인가?”하고 자문한다.
 
 3. 다음으로 논자는 화이트헤드의 교육철학의 기본골격을 밝힌다. 논자는 화이트헤드의 교육철학의 기본구조는 리듬이라는 주기적 운동에 기초하고 있다고 한다. 화이트헤드의 교육이론에서 지적 성장에 존재하는 리듬의 주기는 세 단계, 즉 로맨스,  정확성과 일반화의 단계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논자는 “...미래의 대학의 설계를 기초하는데, ‘대학’과 '일반화‘, 그리고 인간의 환경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실천이성’과 ‘사변이성’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4. 논자가 현재 한국의 대학들이 처한 현실을 진단하고 나름대로의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의 이론에서 차용하려는 창의성과 용기에 박수를 보내면서, 평자가 본래의 주제인 유기체의 철학에서 조망한 미래의 대학상이라는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되었다.
 4.1. 논자가 진단한 대학 환경이 현재의 한국이라는 공간성과 시간성에만 한정하여한국의 미래 대학상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전망하였더라면, 평자도 이 논문을 통해 우리나라 대학들이 직면한 현실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 대안을 모색하는데 더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4.2. 비록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난해하고 난삽하다고 할지라도, 논자는 발표문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발표문을 몇 차례 읽은 평자는 발표문의 논지의 비약 탓인지, 개념의 이해도가 상이한 탓인지 아니면 과문한 탓인지 발표문의 논지를  따라 잡기가 쉽지가 않았다.
 4.3. 논자는 “‘기초학문에 대한 기피현상’은 기초학문이라는 환경에 대한 무공격적 공격으로 대변되고, ‘대학의 위기의식’은 환경변화에 대한 의식으로 나타난다. 다만 전자는 이미 무개중심을 자신의 경험으로 가져간데 비해서 후자는 그 무게 중심을 아직 외부의 환경에 두고 있을 뿐”이라고 진단한다. 주지하고 있듯이, 대학은 학문전수라는 일차적기능과 직업전수라는 부차적인 기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사회에 진입함으로써 한국의 대학은 일차적인 기능보다 부차적 기능의 비중이 훨씬 높아지게 되었다. 평자는 이러한 시대적․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추세가 우리사회에 팽배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기초학문의 기피현상과 대학의 위기의식이 초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4.4. 논자는 발표문에서 “이때 대중은 방법이 적용될 대상이 상대적으로 고갈되지 않는 영역으로 몰려들게 된다. 삼차학문의 팽창이다. 아마도 그것은 새로운 주기를 위한 조정기가 될 것이다. 여기에 대학과 교육에 시사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차학문과 삼차학문의 관계를 조사하라는 것이다”.(13쪽)     
 “삼차학문의 선호와 이차학문의 기피라고 하는 양극단 사이에서 대학이 취할수 있는 현재의 방법은 그 양자, 이차학문과 삼차학문의 관계를 더욱더 확고하게 하는 것이다.”(19쪽)
 “... 특수 응용학과(삼차학문)로 전환하게 된다.”(20쪽)와 같이 이차학문과 삼차학문이라는 용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용어들은 명료한 개념이 아니어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구체   적으로 설명어야 할 것이다. 평자가 이해하기로는 (분석)철학에서 학문은 일차학문(first-order discipline)과 이차학문(second-order discipline)으로 구분된다. 일차학문은 경험적으로 포착되는 세계를 탐구대상로 삼고 그것을 설명하고 기술하는 개별과학이다. 이차학문은 일차학문을 통해 얻은 지식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언어의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철학과 같은 학문이다. 논자가 사용하고 있는 이차학문과 삼차학문이라는 용어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철학적인 개념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5. 논자의 ‘유기체철학에서 조망한 미래의 대학상’을 읽고 평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되었다.
 5.1. 논자가 유기체의 철학에서 조망한  미래의 대학상은 주로 대학의 교육환경과 현실적 여건을 분석하여 미래의 교육이념과 교과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이 발표문은 ‘유기체의 철학’의 교육이론에 의거한 미래의 대학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화이트헤드의 교육이론으로 조망한 교육이념이 아닌가?  
 5.2. 논자가 전망하는 정보기술사회에서 대학의 교육의 목표와 교과과정은 어떤 것이어야 하며 그리고 한국에서 대학들의 미래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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