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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11 (14:42) from 80.139.165.116' of 80.139.165.116' Article Number :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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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의 교육론과 유기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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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의 교육론과 유기체 철학

오 영 환 (연세대 명예교수)


“There is only subject-matter for education,
and that is Life in all its manifestations …”
Alfred North Whitehead, The Aims of Education, pp.6-7

“You may not divide the seamless coat of learning. What education has to
impart is an intimate sense for the power of ideas , for the beauty of ideas,
and for the structure of ideas, together with a particular body of knowledge
which has peculiar reference to the life of the being possessing it …”
Alfred North Whitehead, The Aims of Education, pp.11-12


머리말

 화이트헤드의 수많은 학문적 업적 가운데서, 그의 교육에 관한 강연집으로 유명한 『교육의 목적』(1929)에 담긴 교육론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화이트헤드 자신이 그 책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 책에 수록한 장(章)들을 지난날의 나의 저작들에 대한 어떤 주석 같은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진실은 도리어 그것과 반대되는 관계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AE pp.v-vi). 이 말은 비단 이 책의 독자에게 뿐만 아니라 화이트헤드를 진지하게 연구하려는 이들에게도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언급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화이트헤드의 교육론은 그의 유기체 철학과 별개의 것이 아닌, 서로 긴밀히 연관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밝혀보려고 한다.


『교육의 목적』에 대하여

 저자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책 전체에 공통된 주제는 교육의 지적 측면(intellectual side)에 관한 것이다. 하나의 중심적 사고(main idea)가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그 중심적 사고란 간단히 말하면, 학생들은 활기찬 삶을 살아간다....... 교육의 목적은 그러한 학생들의 자기 발전(self-development)을 북돋아주고 이끌어주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전제로부터 자연스럽게 유도되는 결과로서 교사들 또한 생명력 있는 사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 책 전체는 죽은 지식에 반대하는, 달리 말하면 생기 없는 관념(innate ideas)에 반대하는 항의라고 할 수 있다”(AE p.v).
학교 교육이 무너졌다는 것은 이 나라의 상식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이다. 이런 교육으로는 나라의 미래가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우리의 현실에서 이 책의 어느 장을 보더라도 우리에게 교육의 원점을 깨우쳐 주고 그곳으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깊은 철학이 들어 있다. 대체 교육이란 무엇인가.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교육이란 “지식 활용의 방법을 체득케 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비판받아야 할 교사의 유형은 활용되지 않은 채 사장되는 유의 지식을 대량적으로 주입시켜 자기만족에 도취하는, 현학적 인간이라고 보았다. 이는 정보범람의 시대에 사는 현대의 교육 종사자들에게 던지는 엄중한 경고라고 볼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교육의 요체로서 구체적으로 두 가지 점을 들고 있다. 그 첫째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며, 둘째로는 “가르쳐야 할 것은 철저히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가. 그것은 사색이나 생활에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서 널리 활용될 기본 관념과 그 응용이며, 이를 해낼 수 있는 교사를 좋은 교사라고 평가하였다. 저자 화이트헤드는 수리논리학자, 과학철학자, 그리고 형이상학자로서 여러 분야에 걸쳐 경탄할 만한 업적을 남긴 석학이지만, 그의 풍성하고 정밀한 학문적 업적의 근저에는 온화한 인간성과 함께 이런 기본 원칙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1910년 대 영국의 수학자이자 교육자로서 오늘날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교육 풍토 속에서 진실하고 확고부동한 교육관을 가지고 실천하면서 그로부터 확신에 찬 예지의 교육론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배경에는 그의 “유기체 철학” 사상이 있었고 그것이 그의 교육론의 근간을 이루면서 침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그의 생애의 후기에 미국에서 교육자로서 그리고 철학자로서 존 듀이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화이트헤드의 철학에는 존 듀이에게서 볼 수 없는 사변적인 깊이와 우주론적 힘이 치솟고 있다. 그리고 듀이에게 없는 화이트헤드의 일반 교육론에서도 그의 진수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의 추상성과 사변철학

 화이트헤드의 사상에는 양면성이 들어있다. 그 하나는 일반 독자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로 표현된 전문적인 우주론과 또 한편으로는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현대적 삶과 문명의 중요성에 관한 비전을 보여주는 양면성이다. 예를 들면 그의 “연장적 추상화의 방법”이라는 이론은, 직접적인 구체적 경험과 자연과학적 추상개념과의 연결고리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법을 전개한 것인데, 매우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이론이다. 그에 반해 그의 『종교와 그 형성』, 『관념의 모험』, 그리고 『교육의 목적』과 같은 저작은 중요하고도 직접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괄목할 만큼 평이한 문장으로 서술되어 있다. 간혹 해독하기 어려운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저작들은 일반 독자들에게 유익하게 읽혀지고 이해될 수 있는 저작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면성 사이에는 긴밀한 결합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화이트헤드의 교육관, 현대세계에서의 과학의 위치, 경험 속에서의 미학의 역할, 그리고 문명의 의미 등에 관한 견해는 모두 그의 유기체 철학을 형성하고 있는 학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쉽게 이해되지만, 후자의 경우는 전문가의 해석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이 두 양상은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예를 들면, 교육에서 상호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부문으로 나누는, 이른바 구획화(區劃化, compartmentalization)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비판 근거는 그의 추상화의 이론에서 직접 나온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정한 경험에 관한 연구를 할 적에 추상화에 기초해서 주의해 보아야 할 하나의 초점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 때에 이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밖의 경험적 요소는 배제 내지 사상(捨象)해야 한다. 정밀 지식이란 항상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략된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당초의 직접 경험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경험의 전일성(the integrity of experience)이라는 관점에서는 이러한 배타적인 추상화를 거부하라고 요구한다. 또 하나의 적절한 예로는, 화이트헤드의 문명의 개념이다. 문명은 전진하든가, 아니면 쇠퇴하든가 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실재(實在 reality)를 항상 과정(process)에 있다고 보는 그의 형이상학 원리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적 전진(creative advance)이란 모험으로 학문의 정통파를 뛰어 넘어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며, 새로운 이상의 관점에서 현재의 문제와 씨름하는 것이다. 지난날의 성공을 영속화하는 데 만족하고, 이미 충분히 시도된 바 있는 방법을 안전하게 반복하기만 하면서 과감한 새로운 모험을 거부할 때 쇠퇴의 길은 시작된다.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틀림없이 21세기의 문화생활에 갈수록 큰 영향을 줄 것이다. 그 영향은 여러 경험의 국면에 미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철학적 시야를 총체적으로 추적한다는 것은 전 우주를 상세히 논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과제는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의 철학에는 하나의 중심적인 특색이 있다. 그것은 모든 정밀 사상은 추상적이라는 것이며, 모든 과학적 설명 체계는 형이상학적 배경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학설이다. 이 학설은 화이트헤드로 하여금 근대 과학의 한계를 드러내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변적 사고(speculative thinking)가 불가피하게 요구된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화이트헤드는 실제로 근대 과학 사상에 형이상학적 카테고리와 원리가 들어 있다는 것을 지적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것을 포함시키는 것 자체가 바로 인간 이성의 기능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만일 명석한 사상이 정밀한 것이기도 하다면 그것은 주어진, 일정한 상황에 대한 사고 선상의 특색만을 선택했다는 의미에서 추상적이라고 그는 논했다. 예를 들면, 찰스 다윈 시대 이전에는 종(種)의 분류 문제는 전적으로 종의 배열이 어떻게 생기느냐의 문제와는 분리된 문제로 다루어져 왔었다. 종 발달의 문제는 분류학의 목적과 연관시켜 고찰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무시되어 왔던 것이다. 이처럼 선택은 불가피하게 생략을 의미하고, 배경의 은폐는 일견 선택된 주제와 관계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반성적 질문을 던진다. 즉, 선택한 것에 대한 이해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생략된 것에 비추어 수정되어야 하느냐라는 것이다. 사실상 화이트헤드의 복잡한 철학적 도식의 많은 부분이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시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생략을 깨닫기 전까지는 문제 제기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대답이다. 그러나 일단 그런 문제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의 과제는 억압, 배제된 배경을 회복하는 것이 되겠다. 우리는 가능한 한, 전체적인 일반적 특색과 연관시켜 보도록 해야 한다. 결국 과학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사물의 가장 광범위한 카테고리와 일반 원리의 발견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우주론과 사변철학을 필요로 한다.




교육의 의미

 과학 시대에 사변적 사색의 필요성을 신선한 눈으로 고찰하도록 이끌어준 것만으로도 화이트헤드는 중요한 공헌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만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서 그의 학설을 동시대의 삶과 문명 영역으로까지 연관시켜 나아갔다. 그는 논제를 특히 교육의 의미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화이트헤드는 한편으로 과학의 불가결성에서 유래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의 일면성과 추상성 비판의 필요성에서 유래되는 교육상의 모험의 중요성을 지적하려고 하였다. 화이트헤드의 『교육의 목적』은 지난 세기에 같은 주제로 쓰여 진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걸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교육구조 일반에 주의를 기울여 살펴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전 교육과정에서 과학교육이 차지하는 위치와 그 이해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런 평가는 합당하다고 본다. 근대 세계에서 과학이 던진 충격을 이해하는 문제는 학교와 대학에서도 다같이 찾아볼 수 있는 문제이다. 교육의 교과과정은 우주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과학이 과연 얼마만큼 인간의 전 경험을 파악하고 또 얼마만큼 간과하고 있는지를 평가하려고 함과 같이, 우리는 전 학습 과정에서 과학이 차지하는 위치와 그 중요성에 대하여 물어보아야 한다. 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화이트헤드는 누구보다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경험과 우주를 모두 포괄하는 이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철학적 비전은 가장 절박한 인간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지도적 대변자의 역할을 하였다.
 “단지 박식함에 그치는 인간은 이 지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이다”(AE p.1)라고 화이트헤드는 적고 있다. 이는 그의 교육탐구의 첫 실마리가 되는 말이다. 따라서 정신은 교실에서 정보공급으로 “충만 되는” 수동적인 것이라는 통념에 그는 반대한다. 이와는 반대로, 그에게 있어 “생기 없는 관념”(innate ideas)은 아무런 값어치가 없다. 교육을 받은 인간은 관념을 반성적으로 음미할 줄 알며 그것을 구체적 상황에서 응용하는 방식을, 그리고 생활과 경험의 많은 영역에서 그것을 연관시켜 볼 줄 아는 인간이다. 교육을 받은 인간은 자기가 배운 것을 단순히 반복하지 않으며, 그는 관념의 재배열로 무엇인가 창조해 낼 수 있는 인간이다. 또한 학교에서 얻은 정보와 관념은 활용되어야 한다. 교육은 이해력의 증진을 지향하면서 젊은이의 지식 활용 기술(the art of utilizing knowledge)을 훈련해야 한다. 젊은이 자신이 교사가 준 것을 본인 스스로의 계획과 목적, 희망과 공포, 욕구와 필요에 적극적으로 연관시켜 보도록 해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지식을 위한 지식”과 같은 가치에는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 대신에 그는 모든 학습은 그가 말하는 이른바 “주의를 강요하는 현재”(the insistent present)로 방향을 돌려야 하고, 학생은 그 속의 살아있는 시대적 주요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논했다.
 우리는 이 보다 더 적절한 현대적 교육개념을 달리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학습에서 오늘의 문제를 지적해 주어야 하며, 관념은 “날카로움”(cutting edge)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과거의 지식은 비록 중요한 것이라도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가치는 어디까지나 현재 속에 있고 현재를 위한 이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과거의 영광을 위해 현재를 과소평가 하는데 대해서도 화이트헤드는 반대한다. 그의 견해로는, 현재는 시간의 “두께”(thickness)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를 함께 포함한다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과 그의 교육상의 관념과의 인상적인 결합관계의 예를 보게 된다. 현재는 단순히 지속이나 폭이 없는 시간의 “지금”, 또는 질점 같은 것이 아니다. 현재는 소멸하는 과거의 첨단 즉,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는 실재(實在)와 성장하는 미래의 첨단 즉, 창조적 실재(creative reality)의 양쪽을 아울러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 속에 이른바 “폭”(spread)을 지니고 있다. 현재는 고대 로마의 양면신(兩面神) 야누스처럼 동시에 두 방향에 직면해 있다. 화이트헤드도 베르그송의 길을 따라 시간적 발전을 단순한 순간의 계기로 보는 어떠한 학설도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시간론에서, 순간은 “폭”을 갖지 않으며 전혀 시간을 나타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무시간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는 부분이 지속이나 구성부분을 표시해 주는 한, 시간은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하나의 현재라는 시간은 단순한 순간일 수 없으며, 그 자신의 폭 속에 과거와 미래의 양 첨단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현재를 이렇게 보는 시간론은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중대한 영향을 준다. ‘현재’는 모든 생명과 사상의 모체이며,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야 할 강요된 시간이며, 또한 모든 사람이 직면해야 할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정지된 실재(實在)가 아니기 때문에 과거의 어떤 얼어붙은 유물처럼 분석해 주기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현재는 역동적 사건이며, 과거와 미래가 합류하는 곳이며, 성장하는 사물의 첨단으로서 항상 변화 속의 와중에 휩쓸리고 있다. 현재의 삶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미래의 쌍방향을 직시해야 한다.
 현재 속에 살면서 그 문제들과 씨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배경을 알아야 하고, 당면한 문제의 전건(前件)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과거의 비판적 연구는 유리한 점이 있고, 그것이 없으면 우리가 서 있는 현재의 기반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미래도 개입해 들어온다. 변천하는 실재(reality)가 미래로 뛰어 들어가면서 방향이 설정되고, 지금까지 있었던 것은 이제부터 있어야 할 것의 서곡에 지나지 않게 된다. 교육의 한 가지 기초적 과제는 이러한 현재의 유동적 성질을 감촉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깨우쳐 주는 것이며, 미래의 사건과정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지식을 활용할 때의 판단 기술(the art of judgment)을 계발 시켜주는 것이다. 미래에 영향을 준다는 관념은 또 하나의 화이트헤드의 기초적 논제인, 학습의 활용(the utilization of learning)이라는 논제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교육은 지식의 활용 기술 영어의 ‘art’를 여기서 ‘기술’로 옮겼는데, 가장 넓은 사전적 의미로는 단순히 어떤 일을 행하거나 계획하고 수행하는 능력(가장 일반적인 말)을 의미한다.
을 습득하는 것이다”(Education is the acquisition of the art of the utilization of knowledge). 이 말은 화이트헤드의 교육관의 핵심을 간결한 형태로 잘 표현한 말이다. 이를 충분히 해명하자면 이론적 개념과 실제적 응용간의 관계라든지, 학습 과정에서의 수학과 자연과학의 위치라든지, 학습 과정에서의 교사의 역할과 학생의 책무라는, 많은 논제들을 다루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만 기초적 관념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활용”(utilization)이라는 말은 실용주의적인 것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즉, 모든 지식은 도구적이어야 하고 그 효용가치는 문제해결의 기능과 목적달성에 있다는 학설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프래그머티즘의 진영에 안주하기에는 너무나 플라톤주의자였다. 듀이와는 달리 그는 관념을 증명한다는 것과 활용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보았다. 증명은 경험이나 논리 혹은 그 양쪽에 의해 달성되지만, 이와는 달리 활용한다는 것은 당면 문제의 해결 내지 생명을 고양시키려고 할 때 증명되는 관념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속한다. 화이트헤드는 실제적 흥미와 그의 생애의 합리적 과정 사이의 연결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실용주의적 진리관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흥미는 먼저 사상을 자극하고, 최종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계획과 목적의 관계라는 관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합리적 지지의 과정은 그 자체가 전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우리의 흥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관념의 증명은 그것이 고려해 볼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한, 우리는 애써 그런 번거로운 증명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관념에 대한 지적인 지지를 얻어낸 다음에는 그것을 적용해 보려고 하고, 인간생활에서의 중요성을 발견해 보려고 한다. 이처럼 흥미와 활용은 중요한 것이지만 검증과 정당화의 지적 과정은 그 문맥이 구분되고 각기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활용”이라는 말로 화이트헤드가 의미하는 것은 어떤 외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도구적 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창조적 반응 즉 어떤 관념을 다른 관념이나 다른 경험에,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의 삶의 주요 관심사와 연결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활용은 하나의 기술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활용하느냐를 일러줄 수 있는 명확한 공식 같은 것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교사는 학생을 직접 가르쳐주고 학생의 심성을 예민하게 해줄 수 있고, 정보를 주어 지적 작업의 기능(技能)을 계발시켜 줄 수 있다. 그러나 이해와 활용의 기술을 이런 방식으로 주입시켜 주지는 못한다. 이 양자는 다같이 기술(art)의 창조적 영역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기술 달성의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교사와 학생간의 최대한의 협력 여하에 달려 있다.
 만일 교육의 기본 목적을 생활 속의 지식 활용에 두어야 한다면 우리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하여, 그리고 학습 과정의 주제들을 어떻게 조직하느냐에 대해서도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종류의 실제적 문제에 관해서 화이트헤드의 일반적인 형이상학과 그의 교육 이론 사이에 가장 긴밀한 결합 가능성을 다시 되풀이해서 발견하게 된다. 경험의 전일성에 대한 관심과 모든 정밀 지식은 추상적이고 부분적이라는 그의 학설은, “우리의 현대적 교육과정의 활력을 죽이는 과목들 간의 치명적인 단절”을 제거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생활과 지식이 통합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지식과 교육은 이 통일을 반영시켜야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화이트헤드는 어느 학습 과정에서나 드러나기 쉬운 두 개의 해악을 회피하는 방법을 추구했다. 그 첫째는 아무리 자극적인 것일지라도 공허한 일반화(empty generalization)의 배열은 자칫하면 학생들에게 그 분야의 잘못된 숙달감 같은 것을 주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세부사항에 대한 근시안적 주목에 치중한다면 일정 분야의 전체적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다른 연구 분야와의 관계와 위치에 대한 이해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경험에 관한 일반론이 지시해 주는 전략은 분명하다. 일반화는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목(細目)을 통해서 그리고 세목에 의해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화가 결합시키려는 것이 다름 아닌 바로 세목들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궁극 목적으로서의 이해는 일반적 진리의 발견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진리는 어디까지나 특정한 사실에 뿌리를 박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일종의 정박지(닻내림)가 없다면 일반 진리는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목에 관한 지식은 특수한 사실의 의미가 일반적 진리 그리고 어떤 전 우주상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지 않는 한, 마찬가지로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육의 통일적 특색은 “생명”이다. 생명은 유기체 철학의 기초적 실재이기도 하다. 생명은 통일성과 완전성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를 유지해 가기 위해서는 이 양쪽을 다같이 필요로 한다. 그러나 지식은 복수로 있고, 과목과 과학에도 여럿이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명의 통일성을 반영하고 지식의 적절한 활용을 가능케 하도록 많은 과목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느 과목을 막론하고 저마다 우리의 생명과 세계의 일정한 특징 내지 어떤 양상을 나타낸다. 그래서 과목이 다른 과목과 고립된 채로 방치되어 있다면 그것이 표현하는 일정한 특징이 다른 특징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보여줄 방법이 있을 수 없게 되고, 사물의 많은 점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우리가 살고 있는 하나의 생명을 만들고 우리가 만나는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은 고립의 결과로 학습하는 과목은 각기 자기 충족적인 실체가 되고, 이로부터는 화이트헤드가 말한 바와 같이, “아무 것도 뒤따라 나오는 것이 없다”(nothing follows)는 것이다. 이런 결과가 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먼저 교육과정에서의 과목은 각각 사물의 일면만을 대표한다는 것을 이해해 둘 필요가 있다. 전체의 완전한 그림은 우리의 직접 경험에서 분석된 여러 국면의 상관관계를 필요로 한다. 이는 마치 빛의 한 광선이 분열하여 색깔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처럼, 생명의 통일성도 분석적 이해를 토대로 여러 연구 분야로 나뉠 수 있다. 예컨대, 수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문학, 언어, 철학, 역사 등의 분야로 갈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표준적인 교수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서로 다른 과목들 간의 상관관계성을 보여주는 노력을 통해서 생명과 경험의 통일성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교육은 단지 여러 과목의 퇴적물이어서는 안 되며, 각 과목은 각각 생명의 반영이며 주석이며 스펙트럼이다.
 결국 화이트헤드의 일관된 주장은, 사물의 이론적 지식은 분석과 추상, 선택과 생략으로 달성될 수 있지만, 생명과 경험의 통일은 사변적 사상의 구성적 활동에 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합과 재구성이 있어야 하며, 정밀 사상의 결과는 그 현재 생활과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 교육은 일종의 테스트 케이스이다. 많은 주제를 매개로 생명의 본질과 의미를 젊은이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만일 교수하는 일련의 여러 주제가 분산적으로 그리고 폐쇄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만 제시된다면, 생명과 경험의 전일성은 상실되고 결국 특정의 주제 그 자체도 의미를 잃고 말 것이다. 특정한 주제의 연구는 어떤 뚜렷한 목적 없이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과목이 학습할 가치가 있다고 보는 근거는 항상 그 과목을 넘어서는 곳에 있게 마련이다. 어떤 논제에 대한 헌신적 학습은 사물의 포괄적 도식 내에서 그 주제의 목적과 공헌도에 대한 확신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교육의 비극적인 단편화의 현상은 공통된 초점 내지 연결고리로만 극복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초점을 현재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는 “생명”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이 결론은 교육의 본질에 대한 반성에서 얻어진 것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결론적으로 화이트헤드는 여러 과학과 연구 분야들의 성과를 결국 고립과 추상화의 산물로 보았고, 진정한 교육은 이 모든 추상들이 어떻게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생명과 직접 경험의 근본적인 통일을 반영시켜 줄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중심 사상이다. 이는 또한 그의 학습 과정에 관한 독특한 통찰의 근원이기도 한 것이다. 지식은 부분으로서 오는 것이지만, 교육과 이해는 전체와 연관되어야 한다.


맺는 말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의 형이상학, 혹은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유기체를 모델로 하는 사고법은 비단 전문적인 철학자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교육철학을 비롯하여 ‘신과학’ 영역에서도 논의되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생명체 관찰에 따른 시스템론적(생물학적) 접근법에 있어서는 전체와 부분, 계층성 등 유기적 관계성 개념이 중요시되고 유기체 철학과의 개념 비교가 시도되고 있다. 이처럼 화이트헤드가 철학자로서 널리 주목을 받으며 연구되고 있는 것은 최근의 일이다. 지난날에 유기체 철학은 서양 철학사의 주류가 되지는 않았다. 화이트헤드의 독특한 용어가 낯설고, 내용이 너무나 사변적으로 체계화되어 있다는 것이 그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신과학’의 사고법이 화이트헤드의 착상을 받아들여, 철학의 관심이 다시 존재 전체의 해석으로 옮겨가고 있는 오늘날 이 우주론은 널리 철학 내외에 두루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그 대표적 예로 봄(David Bohm)의 『단편과 전체』(Fragmentation and Wholeness), 『전체성과 내포질서』(Wholeness and the Implicate Order)는, 프리고진(Ilja Prigogine)의 『존재로부터 생성으로』와 함께 기계론적 자연관을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부여하는 우주론으로서 평가되고 있다.
 환경오염, 생태계의 파괴, 인구과잉, 사회불안, 전 세계적 규모의 경제적 혼란이나 정치적 혼란 등 오늘날의 갖가지 위기는 궁극적으로는 현대인의 단편화된 생활양식에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의 위기도, 과학의 모순도, 대증요법적 조치를 분산적으로 시술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대체 현실(reality)이란 무엇인가, 사고와 언어의 함정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근원적으로 묻는, 현대 양자역학의 태두, 데이비드 보옴은 그 무엇보다도 전체성(wholeness)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도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새롭게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교육론과 철학이 이 나라의 교육을 재생시키는 길을 비추어주는 큰 횃불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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