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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1999/10/05 (01:13)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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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의 현대 생태신학자들 -그들의 성서해석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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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생태신학자들 -그들의 성서해석을 중심으로-

이정배

1974년 나이로비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 모임을 통해서 환경신학, 생태학적 신학이 태동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60년대초 인류의 진보신앙에 의구심을 품었던 로마클럽의 경고를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세계교회가 받아들인 것이다.

폰 라드의 제자였던 붸스터만의 창세기 주석서는 성서를 생태학적 관점에서 읽어갈 수 있는 눈을 갖게 하였다. 종래의 구속사 중심의 신학이 역사만을 하나님의 계시지평으로 이해하고 창조를 역사해석의 도구로 사용했다면, 생태학적 성서읽기는 자연을 하나님 이해의 원지평으로 삼았으며 그로써 자연 없는 창조의 신학적 한계를 지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독일을 비롯한 영미 신학계에서는 생태학적 신학 및 윤리 를 주제로 한 엄청난 연구물들을 쏟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생태학적 신학 및 성서읽기가 동일한 방향성만을 띤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천년 신학 전통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오늘의 당면 생태계 위기 상황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또는 생태계 위기의 원인을 기독교 종교 속에 내포된 인간중심주의로 보느냐 아니면 타락된 인간의 본성에서 찾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위기의 극복을 위해 인간중심적 세계관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과 인간의 청지기성 회복을 대안으로 하는 주장, 그리고 오늘날의 기술과학을 남성 원리의 산물로 보고 오로지 자연과 여성의 동(同)근원성을 말하는 생태학적 여성학의 시각에서만 자연의 치유가 가능하다는 주장이 공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뿐 아니라 성서전통을 가부장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보는 극단의 여성신학자들은 기독교 전통밖에서 고대 및 동양적 전통에서 새로운 영성이 발원될 수 있음을 믿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창조의 보전을 무로부터 창조교리와 삼위일체 구조 속에서 생각하려는 몰트만과, 이 두 교리를 포기해야만 전 생명체를 존속케 하는 자연신학이 가능하다고 보는 미국내 과정신학자들이 있으며, 인간의 청지기성만 회복하면 생태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카톨릭 신학자 지틀러가 있는가 하면, 전 우주만물은 하나님 몸으로써 세계관적으로 새롭게 이해해야만 된다고 보는 여성신학자 멕훼이그가 있다. 또한 종래의 종혁신학이 계시를 성서(문자)에만 한정시킴으로 해서 전 자연이 하나님의 영역임을 망각했다고 비판하며 자연이야말로 원은총임을 말하는 매튜 폭스, 그리고 자연을 하느님의 녹색은총으로 보며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인 적색은총은 녹색의 의미가 사라질 때 공허하다고 보는 맥 다니엘 등의 신학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원죄를 교만으로서가 아니라 세계 내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즉 필요 이상의 물질을 쓰고 살아가는 인간의 태도에서 기독교 자연신학을 창출해내려는 여성신학자 로즈마리 류터 등이 생태학적 신학의 선구자들이다.

물론 이들의 새로운 성서읽기, 곧 생태학적 성서해석이 상호 다르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은 모두 자연을 지배해 왔던 인간을 탈중심화 시키고 자연의 치유를 위한 존재로서 인간을 재중심화 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생태신학자들간의 차이점을 부각시켜 그들의 핵심요지를 분명히 드러나게 하는 일은 중요하다. 앞으로 몇번에 걸쳐 이들 신학자들의 생태학적 성서해석을 소개하고 비판해 보려고 한다.♣


http://www.peacenet.or.kr/kcems/98-2-차례-fr.htm






로즈마리 류터 - '가이아 속의 하느님'을 중심으로


이 정 배

부설 (사)한국교회환경연구소장, 감신대 교수


로즈마리 류터는 가톨릭 신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여성 생태학자로서 시카고지역 에반스톤에 위치한 게렛 감리교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여성 생태신학자들중에는 자연의 해방과 여성해방을 위해서 기독교 전통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사람도 있으나 류터는 가톨릭신학자답게 자신의 전통을 중시하고 재해석을 통해 여성생태학적 모티브를 찾고자 한다.

1996년 가을학기 게렛신학교 교환교수로 머물면서 필자는 류터 교수의 강의를 듣고 그와 대화를 나눈 경험이 있다. 60대 중반을 넘기고 있는 그녀는 무척 수수한 모습이었고 강의는 열정적이었으며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아랍정치학을 강의하는 남편과 금술 좋게 살고 있다는 소식도 주변 학생들로부터 들었다.

1992년 출간된 그의 책 {Gaia and God: An Ecofeminist theology of Earth Healing}은 러브록과 마굴리스에 의해 사용된 가이아이론, 곧 전 지구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고, 그 속의 모든 개체들에게 고유한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지구라는 유기체가 존속된다. 이 이론 속에서는 인간중심주의를 말해온 기독교 특유의 입장이 자리할 수 없게 된다. 인간 역시 다른 생명체와 공존하는 자신의 제한적 역할을 감당하는 지구생명체의 일부라고 보기 때문이다. 가이아 이론에 의하면 지난 4억만년 이래로 대기중의 산소비율이 21%로 고정될 수 있었던 것은 밀림지역에 살고 있는 흰개미들의 덕분이라고 한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생겨난 이래로 지구를 향한 태양열이 30-50% 정도 늘어났으며 그로인한 지구상의 산소량 역시 증가하게 되었는데, - 산소가 1% 증가하는 경우 화재발생률이 60% 이상 높아지게 된다. - 이 증가된 산소량을 소비시킨 것이 바로 흰개미들에 의해 방출된 메탄이라고 한다.

이처럼 류터는 전통적 기독교가 자연을 얼마나 대상화하였으며 지배의 논리(자연지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종에 대한 주인의 지배)를 정당화해왔는가를 지적한다.

그는 지배문화 일체를 남성적 단일신론의 결과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독교 문화와 성서전통에 대해 전적으로 부정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하는데 류터의 중요성이 있다. 그가 'Gaia'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과학적 세계관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문화에 대한 새로운 의식, 곧 종교적 비전으로서의 생태학적 영성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기독교전통에서 강조해온 초월적 남성적 신 개념은 여성적 내재적 신성으로 대치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오히려 류터는 생태학적 여성의 빛에서 기독교 전통을 새롭게 조망하기 시작한다. 종래의 가부장적 전통속에서 해석의 정당성을 얻지 못했던 본문을 새롭게 읽어 보려는 것이다.

그는 지구를 구원하기 위하여, 즉 생태학적 영성과 신학을 위하여 성서내의 계약전통과 성례전 전통을 전면에 내세운다. 물론 이 두 전통은 상호보완적인 것으로서 전자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 자연에 대한 윤리적 책임성을 말하며 후자는 전 우주 자연속에서 신적 현실처를 경험할 수 있다는 지혜문학적인 내용을 지시한다. 류터는 가부장적 구조로부터 이 두 이념들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기독교에 미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성서는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 죄를 범했을 때 전 자연이 인간을 토해내고, 역시 인간이 하느님에게로 돌아올 때 대머리 산에서 강이 흐른다고 하는 설명을 하고 있으며 또한 역사적 지평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었을 때 하늘을 보면서 자신들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계약전통과 성례전 전통을 상호보완적으로 이해하는 류터의 입장은 인간중심주의를 새롭게 해석하는데 있어서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즉 생태학적 치유의식을 갖기 위해 인간중심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일반적 주장도 류터의 입장에서 볼 때 옳으면서 틀리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문제를 말하는 한 기독교는 인간의 우위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전통은 성례전 전통을 통하여 자연과의 신비적 합일을 말하고 있음으로 해서 탈인간중심주의를 표방하고 있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류터는 가부장주의 내에서 인간을 탈중심화시키고 자연과의 일체감을 지닌 형태로 인간을 재중심화 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류터는 생태학적 의식을 위해 아시아적 종교와의 만남, 그로부터 배움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단지 자신이 그러한 전통과 관계 맺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을 섣부르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류터는 아시아적 영성, 생태의식을 누구보다 많이 배우고 있다. 그가 최근 편집한 책은 이런 노력을 담아내고 있다(Ecofeminist theology in Context of Asia & Africa 1996). 로즈마리 류터는 제레미 리프킨의 {생명권정치학(Biosphere Politics)}과 생명권의식을 거론하며 이를 기초로 인간 개인과 사회가 새롭게 형성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은 무척 흥미 있다.♣

http://www.peacenet.or.kr/kcems/98-4-차례-fr.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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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폭스 (Mattew Fox) - 원은총과 창조영성의 사상

이 정 배

부설 (사)한국교회환경연구소장, 감신대 교수

매튜 폭스(M. Fox)는 기독교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 학문 분야에도 널리 알려진 카톨릭 신학자로서 도미니칸 수도회 소속의 신부이다. 마이스트 엑카르트(M. Eckhart)를 비롯한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 대한 연구가로 알려져 있으며 영성공동체를 직접 이끌어 가는 실천적인 교회 지도자이기도 하다. 또한 '창조영성(Creation Spirituality)'이란 기독교 영성잡지의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그는 자기 자신을 후기 종파시대의 탈교파적(Post-denominational) 사제로 명명하며 제도 과학과 메커니즘 종교의 한계를 넘어 과학과 영성을 결합하는 새로운 비전이 2000년 시대를 맞는 기독교에게 필수불가결하게 요청된다고 말한다.

매튜 폭스의 주요저서로는 'Break-through : Meister Eckhart's Creation Spirituality(1980)' 'Original Blessing(1982)' 'The Coming of the Cosmic Christ(1988)' 등이 있고 최근에는 생물학 분야의 신과학자 루퍼트 셀드레이크(R. Sheldrake)와 공동저술한 [Natural Grace(1996)] 등이 있다.

폭스의 생태신학적 특성은 한마디로 전 자연을 거룩성의 표시(sign)로 이해하는 성례전적 전통에 근거하여 우주론적 창조신학을 정립하려는 데서 나타난다. 상기의 저술들 속에서 폭스는 기독교의 진정한 영성이란 인간을 포함한 사물의 근원적인 선(Original goodness)을 인정하는 일이며, 이 때의 선이란 생명을 주고 받는 모든 사물들간의 근본적 관계성을 지시한다고 이해한다.

이 점에서 근원적 은총은 사물들의 내적 본성 그 자체로서 설명될 수 있다. 이렇듯 신비주의 전통 속에 있는 폭스에게 있어서 전통 기독교가 강조하는 원죄론은 원은총(근원적 선)의 강조로 인해 신학의 중심자리에 차지할 수 없게 된다. 원은총에 대한 자각과 깨달음이 있을 때  그로부터 멀어져 있는, 그것을 망각하고 살아온 인간의 죄성이 더욱 두드러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대 하에서 폭스의 책 'The Coming of Cosmic Christ'는 우주적 기독교 전통을 회복시켜 내고 있다. 즉 그리스도란 역사적 예수에게로 제한되거나 인간 존재와 관계하는 분만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관계적인 삶의 우주적 원리로서 전 피조물 속에 현재하고 있는 하느님의 내재적 지혜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적 그리스도는 모든 사물들 속에 현재하는 내재적 신성만이 아니라 전 창조가 추구해 나가는 목적(telos) 곧 우주의 역동적인 성취방향이기도 하다.

이는그리스도안에 진화하는 우주에 합당한 목적(오메가포인트)이계시되어있다고 역설한 샤르뎅신부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다.또한 폭스에게 있어서 우주적지혜(CosmicChrist)는 심층적인 에큐메니칼 차원(deep-ecumenism)에서 지금까지 이교신앙이라 무시되었던 동양및토착종교들과도 연대가 가능해진다.예수가 우주적 지혜 내지는 근원적 선의 구체화된 역사적 출현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종교간의 대화가 생태학적 감수성을 중심하여 진행될 수 있다는 신학적 언명이라 하겠다. 결국 성례전 전통에 입각한 폭스의 생태학적 신학의 본질은 다음의 말속에서 요약되어진다. "우주는 150억년동안 축복이요 은총이었다.

우주가150억년에 걸쳐 만들어 놓은 혹성, 인간, 다른 모든 종들은 다 은총이요 무제한한 사랑의 결과이다. … 아무도 우리가 여기에 존재할 원리에 대해 증명할 필요가 없다. 창조는 은총이다. … 원은총, 찬양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고통과 악의 투쟁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은총의 느낌이 있어야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다룰 수 있다. 은총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서로를 축복할 수 있는 상황을 제공한다.♣

http://www.peacenet.or.kr/kcems/frame1-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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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B. Macdaniel - 녹색은총의 생태론자



이 정 배

부설 (사)한국교회환경연구소장, 감신대 교수


최근 미국내 생태신학자로서 활동하는 학자로서 우리는 맥다니엘(J.B. Macdaniel) 교수를 주목할 수 있다. 맥다니엘은 과학과 종교간의 간학문적 대화를 목적하여 만들어진 'Zygon' 잡지에 많은 글을 기고하고 있는 학자인 바 "Six Characters of a Postpatriarchal Christianity"라는 논문은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남성신학자로서 탈가부장적 기독교의 등장과 그 성격을 규명했던 저자는 그러한 페미니스트의 마음을 가지고서 자연생태계에 대한 신학적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1996년 [with Roots and Wings]라고 하는 출중한 책을 펴냈다. 본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생태계 위기에 대한 신학적 전망 및 평가를 근거로 종교간의 대화문제를 피력하고 있는데, 매우 시의적절한 견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본 책에서 크게 배울 것은 저자가 녹색은총의 의미를 강조하고 녹색은총의 의미를 간과해 버릴 때 적색은총, 곧 교회공동체에서 핵심으로 고백하고 있는 십자가은총이 공허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물론 녹색은총만으로 인간 삶이 온전해질 수 없는 것이지만 녹색은총과 적색은총이 함께 만나 상호 연결되지 않으면 인류의 삶 속에 미래적 전망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녹색은총이란 인간 삶의 토대를 이루는 자연환경 전체를 지시한다. 이것은 최상의 선물이며 이것 없이는 인간 삶이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자연의 변화를 매일매일 주목하지 못한다면, 예컨대 지난 일년간 자신이 살고있는 지역에서 사라져버린 생명의 종이 무엇이며 자신의 주변환경에 서식하고 있는 풀, 나무, 꽃들의 이름을 명명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나아가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 없고, 자연은 욕망의 대상으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느끼지 못한다면 인간은 녹색은총을 소멸하고 있는 증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 자체는 의미 있으며 거대한 생명체계의 한 구성원인 것을 느끼지 못하는 한 인간은 녹색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녹색은총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녹색은총이 삶의 토대를 이루게 하는 것이라면 적색은총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최상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적색은총을 해석하는 독특한 시각은 단연코 적색은총을 녹색은총의 빛에서 이해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볼 때 우리에게 들려지고 보여지는 것은 고통과 비탄의 소리이며 상처투성이의 자연(피조물의 고통, 생태계의 위기)이다. 인간이 자기중심성을 떠나지 못할 때 우리는 이런 소리도, 이런 모습도 듣고 볼 수 없다.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우리의 눈과 귀를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녹색은총으로부터 이런 고통과 상처받는 모습을 듣고 보게될 때 적색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소리에 귀기울이게 하고 보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고통과 비탄에 참여하도록 촉구한다. 다시 말해 적색은총은 전 자연생태계의 고통에 자신을 개방시켜 그와의 연대를 이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십자가 사건의 해석은 인간중심적, 교회중심적, 남성중심적인 신학전통에서는 감히 생각해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맥다니엘은 여성적 시각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연민 속에 전 자연생태계를 포괄시킴으로써, 생태계의 구원을 희망하고, 실현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자신이야말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준 당사자임을 자각케 하는 것은 십자가 곧 적색은총의 몫이라고 이해한다. 이렇듯 녹색은총과 적색은총을 연결시켜 우주 생태계 구원을 신학, 곧 기독교의 목표로 삼는 맥다니엘은 적색은총의 의미를 기독교 이후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저자에게서 생태계 구원이 종교간의 대화문제에 있어 중심이 되고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향후 그의 학문활동이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

http://www.peacenet.or.kr/kcems/98-6-차례-fr.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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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 링크(ch. Link) - 하느님 나라의 비유로서의 자연

이 정 배

부설 (사)한국교회환경연구소장, 감신대 교수

링크 교수는 스위스 베른대학 신학부를 거쳐 지금은 보쿰대학 신학부 조직신학 교수로서 활동하고 있다. 칼빈주의 전통에 서 있으며 칼 바르트를 좋아하고 폰 라드와 C. 붸스트만의 문제점을 보완하며 새로운 의미의 자연신학을 정초하려고 애쓰고 있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데카르트 인식론을 비판하는 내용의 'Subjektiritat und Wahrheit(1978)'이 있고 그의 주저라고 일컬어지는 'Die Welt als Gleichnis : Studien zum Problem der Naturlichen Theologie(1982)'가 있으며 개혁주의 전통에서의 창조신학과 현대의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한 창조신학에 대한 연구를 1991년 출판한 바 있다. 링크의 신학적 성향이 칼빈주의적인 개혁 전통 속에서 형성돼 미국 생태학자들과 비교할 때 교리적 측면을 강조하는 느낌을 받게 되나 자연


에게 신학적 의미와 그 장소성을 부여하려는 그의 새로운 시도에 매료당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1982년에 출간된 '유비로서의 세계 - 자연신학 문제점 연구'를 중심하여 링크의 창조신학을 소개해 볼 것이다.

링크는 먼저 창조 및 자연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신학적인 장소 규정을 위해 구약성서의 창조신앙을 주목하며 폰라드와 붸스트만의 해석학적 차이를 비판적으로 중개하고자 한다. 폰 라드는 야웨 하느님의 세계 창조사건에게 신학적 자존성을 부여하지 않았으며 '창세기 주석서'를 쓴 붸스트만은 원역사로서 창조사건을 이해한 나머지 창조기사를 종교사적 자료로만 인정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폰라드에 의해 자연과 역사의 이원론적 구조가 생겨나게 되었고 붸스트만으로부터 히브리적 신앙 사유의 고유성이 간과되고 자연의 신학적 이해와 자연에 대한 자연과학적 경험을 일치시키는 오류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과 함께 링크는 구약성서내의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본래 신적인 약속, 오늘 우리에게는 미래적인 종말론의 지평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서가 창조의 목적으로서 전우주를 포함하는 종말에 대해 말하고 있는 한 창조로서의 현 세계는 미래적인 하느님나라의 유비, 곧 하느님의 자기표명 공간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종말론의 신약성서적 증언의 빛에서 기독론적인 지평과 연루됨은 당연한 일이다. 창조로서의 세계가 하느님의 미래적 현실성의 유비인 한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복음 1:14의 증언은 전세계가 육화된 하느님 현실성의 지평인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링크는 기독론이란 창조로서의 세계의 회복을 목적하고 섭리과정으로 이해된다.

오늘의 세계는 기독론,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섭리로 인해 본래적 현실성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링크는 현재 창조로서의 세계 내에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섭리의 부재, 곧 기독론적인 비작용성의 문제를 비켜가지 않는다. 다시말해 피조물의 총체적인 고난(롬8:18-25), 생태계 위기 상황 속에서 이와 같은 종말론적 지평(섭리)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겠는가의 물음이다. 주지하듯 현실의 자연세계는 죽음의 장소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오늘날 전 피조물의 고통과 탄식은 이 세계를 창조로서, 종말론적으로 기독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의 종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링크 교수는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자연세계의 고난은 종말론적 신앙의 토대로서 하느님 현실성과 분리됨이 없이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현실적 고통과 아픔이 극복되어야 할 비(非)진리인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링크는 현대철학자들, 과학자들과의 간학문적 대화를 통하여 오늘 우리 시대의 결정적 물음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의 영역을 하느님 현실성의 유비로 볼 수 있는지, 즉 자연 속에서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경험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행동방식은 달라질 것이며 삶과 죽음의 분기점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하느님 인식 지평으로 살기보다는 종말론(기독론)적 지평을 근거로 다가올 하느님 현실성의 유비로서 이해하는 것은 동아시아적 자연관과는 구별되는 부분이며 링크의 말대로라면 히브리적, 기독교적 사유의 특성이 되는 것이다.♣


http://www.peacenet.or.kr/kcems/99-1ho/99-1-fr.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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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창조안에 계신 하느님, 그리고 생명의영

                     이 정 배

부설 (사)한국교회환경연구소장, 감신대 교수


독일 튀빙겐 대학의 조직신학자 몰트만 만큼 한국에 널리 알려진 신학자도 드물 것이며 그의 책만큼 한국어로 많이 번역된 사상가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한국 신학계 내에 그로부터 배움을 받은 학자들의 수도 10여명을 넘어서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가 내세우는 에큐메니칼 신학자이기에 우리는 그로부터 많은 신학적 통찰을 얻고 그와 더불어 신학적 비젼을 같이하고 있다. 지금까지 출간된 그의 저서를 보면 '삼위일체와 하느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길', '창조안에 계신 하느님' 그리고 '생명의 영' 등이 있다. 전반기의 몰트만 사상이 정치적 주제와 깊게 연루되어 있었다면 그의 후반기 신학적 실존은 창조 및 생명문제에 뿌리내리고 있다 하겠다. 무엇보다 먼저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을 통하여 몰트만은 전통적인 창조론과 진화론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것을 말하고 있다. 하느님이 전 창조 속에 내주하고 있다는 믿음은 몰트만으로 하여금 진화론을 창조의 빛에서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즉 진화란 하느님의 영이 전 창조의 힘과 생명이 됨으로써 가능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영으로서의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 속에 생명을 주는 원인으로서 세계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이 새로워집니다"(시편 104편 30절). 이처럼 하느님이 자신의 힘을 통하여 그의 힘 속에서 창조하며 그의 영의 임재가 창조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규정한다는 고백을 토대로, 몰트만은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을 '생명의 영'이란 이름 하에 더욱 구체화시켜 주고 있다.

하느님의 영이 전 우주 공간 내에서 창조의 힘과 생명의 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몰트만은 '내재적 초월'이란 개념을 즐겨 쓰게 된다. 내재적 초월이란 초월적 근원인 동시에 모두 살아있는 것들이 삶의 힘으로서 내재하는 하느님의 영, 루아흐가 모든 만물 속에서 언제든지 경험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 경험이 종래와 같이 인격적 역사적 지평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몰트만 신학에서 생태학적 의미와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는 부문도 이 대목에 이르러서이다. 몰트만은 21세기를 위한 신학의 과제로서 유럽중심주의와의 결별, 교파주의로부터 에큐메니칼 의식으로의 이행 그리고 기계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유기체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말했던 바, 마지막에 언급한 유기체적 세계관이란 바로 전 우주 만물 속에서 하느님 영을 체험할 수 있다는 그의 확신과 맥이 닿아 있다. 더 이상 우주 만물이 지배와 정복의 대상, 소유가치근거인 물질이 아니라 하느님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트만은 창조의 힘과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하느님 영의 활동을 그리스도의 활동과 전적으로 대치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몰트만은 생명력 있는 하느님의 영, 구약의 루아흐 그리고 삶의 경험 속에 내재된 하느님의 영 모두는 기독론의 빛에서 상대적 자존성을 가질 뿐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성서의 사건 속에 하느님 영의 현재성이 힘, 호흡 등 비인격적 생명력으로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들은 하느님의 본질 속성이 아니라 그가 인간 역사 내에 나타난 하나의 방식일 뿐이라는 말이다. 하느님 본질은 오히려 비인격적 생명력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및 인간의 역사적 삶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 속에 더 잘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역사적 활동성을 그의 우주 생명력과 구별하려 했던 몰트만에게서 우리는 십자가 중심의 서방신학적 잔재를 인식하게 된다. 그리스도 십자가 없이는 우주적 생명력 그 자체는 범(犯)허무주의에 빠진다고 단정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하느님과 세계는 결코 동일시 될 수 없으며 무로부터의 창조는 하느님의 내재성을 말한다 하더라도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기독교만의 특성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몰트만이 내재적 본질 개념을 통해 전통적 의미의 영성 대신에 영육을 통전하는 생명력 자체의 종교적 의미를 부각시킨 점을 높게 평가한다. 생명력으로서의 종교성이야말로 오늘날 생태학적 신학을 말할 수 있는 근본 모티브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http://www.peacenet.or.kr/kcems/99-3ho/99-3-fr.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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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신학자들의 자연관


존 캅(John B. Cobb)의 자연신학을 중심으로


이 정 배
           
부설  (사)한국교회환경연구소장, 감신대교수

존 캅은 미국 클레아몬트 대학교 신학부 조직신학교수로서 활동하다가 지금은 은퇴하여 저술에 몰두하고 있다. 특별히 화이트 헤드의 자연 유기체 철학을 신학에 적용하여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이란 이름하에 세계신학계에 미국적 독자성을 확장시켜나갔다. 캅은 자신의 신학이론을 정치, 교회현실등에 접목시켜 소위 신학의 실학화를 위해 헌신한 학자였던 바, 그의 생애 말기는 생태학적 주제에 대한 과정 신학적 해결을 도모하는 기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태학적 주제를 담고 있는 그의 최근의 책으로는 여성신학자 맥훼이그 등과 공저한 「Liberating Life : Contemporary approaches to ecologi -cal theology, New York, 1990」과 「Sustainability : Economics ecology & Justice, New York, 1992」 등이 있다. 여기서는 그의 과정 사상속에 나타난 자연관만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무엇보다 캅은 유기체 철학자 화이트 헤드를 따라 신학의 범주를 존제가 아니라 생성으로 보며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자연신학"을 정초하려고 했다. 생성의 토대하에서 현실이란 상호 연결된 과정들, 사건들 그리고 경험적 일들로 이루어진 총체적 관계로 이해되는데, 하느님 역시 이런 관계성을 자신의 필연적 본질요소로 삼고있다는 것이다.

부언하자면 일체의 속성은 그 사물이 맺고 있는 제반 관계성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오기에 어떤 존재도 관계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더욱 고양된 생명체일수록 더 많은 다양한 관계들이 모여 한 전체로서 조화롭게 기능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과정신학의 하느님은 자연에게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며 진화의 방향이 끌고 나가는세상만물과 더불어 총체적 관계를 맺는 관계로 서술되고 있다. 이처럼 하느님 실재가 자기 자신을 실현해가는 개체들과의 상호관계성을 통해 실현해 가는 한 전 세계, 곧 우주 자연은 신과 모든 피조물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계속적인 과정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점에서 캅은 '창조주' 또는 '창조'라는 말 대신에 생명 및 자연이란 말을 즐겨 사용하는 바, 인간 외적 실체들이 인간에 의해 어떻게 인식되는지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본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탈 인간중심적 견해를 피력한다. 심지어 그는 원자와 같은 미립자들의 무질서한 운동 안에서도 정신성, 곧 하느님 -원초적 목적(initial aim)이 내재한다고 봄으로써 하느님과 세계라는 전통적 단절방식을 극복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캅과 같은 과정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고백되어온 '무로 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론을 즐겨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교리 속에는 하느님과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보려는 시각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과정신학자들에게는 삼위일체 교리도 무의미해 질 수 있다는 비판이 조심스럽게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캅은 자신의 자연신학이 '무슨 무슨 신학'과 같은 신학의 한 종류가 아니라 오히려 신학 자체의 본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그는 인간이 갖는 특별한 의식과 하층동물들의 지각행위, 곧 관계를 맺는 방식에 있어서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바, 이를 토대로 할 때 캅의 자연신학은 神이 곧 自然임을 말하는 범재신론과는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생성과 관계성을 범주로 하는 그의 자연신학이 전통과 단절되는 만큼 미래를 위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게 된다.♣

http://www.peacenet.or.kr/kcems/99-4ho/99-4-fr.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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