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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5/31 (18:31) from 217.95.31.195' of 217.95.31.195' Article Number :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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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현실성에 대한 신학과 융(C.G.Jung)심리학의 대화


악의 현실성에 대한 신학과 융(C.G.Jung)심리학의 대화


정석환

4-570-0201-10



들어가는 말
헤롤드 쿠스너의「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 라는 책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조그만 도시의 랍비로서 쿠스너는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상담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세 살 박이 아들 아론이 희귀한 병으로 인해 십대 초반에 죽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비로소 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끔찍한 질문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왜 불행한 일들이 선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1)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창조 안에 존재하는 악(惡)이라는 실재에 대해 설명해 내야 한다는 압박감과 부담감을 느껴 왔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고 있다. 행여나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의심하지 아니하고 그 모든 부당하고 불공평하며 억울한 일을 당한 책임을 오히려 스스로에게 돌리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현실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우리의 이러한 순수한 신앙심은 여기저기서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매일매일 매스컴을 통해서 낮모르는 사람들의 애절하고 억울한 고통의 사연들을 대할때마다, "하나님 없음"에 대한 생각이 슬며시 찾아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진지한 답변의 시도들을 포기한 채 삶과 고통의 문제를 단순히 개개인의 신앙적 문제로만 취급하고 묻어 둔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유 없는 고통으로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켜 내지 못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기독교신학의 역사는 지금까지 악이라는 현실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및 선하심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논리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보여 왔다. 많은 변증가들이 그들의 신학적 숙고 속에서 하나님의 '악 없음'을 지켜 내려 했으며, 한편으로 마주친 사상의 적들에게 알맞은 언어가 채집되지 않았을 때는 몹시 당황해 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악의 문제는 언어의 정확성보다는 좀더 깊은 삶의 현실성과 구체성을 따지는 문제라고 여겨진다. 이점에서 본 소고는 융(Carl G.Jung)의 종교심리학적 입장에서 기독교의 신정론의 이론과 악의 현실성에 대해 살펴보고 그 의미와 통찰을 목회 상담적 실천의 장에 접목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악의 문제에 대해 기독교 변증가들이 신정론이란 방패를 통해 어떻게 변호하고 있는지를 먼저 간단히 살펴보고, 그 다음에는 기독교 변증가들과의 화해를 거부하는 악에 대한 융의 독자적 이론에 대해 살펴보고, 동시에 현대의 과정 철학에서 보는 악의 개념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적 작품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 나타나는 악의 문제의 해결 방향의 통찰에 대해서도 숙고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매일매일 목회상담의 현장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악의 문제와 고통의 문제를 안고 씨름하는 내담자들과, 그들과 함께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함께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목회상담가 들에게 삶의 고난과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절망적인 틈을 조금이나마 이어 보려 한다.

1.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신정론(神正論)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과 악, 죄, 그리고 고통이라는 현실을 화해시켜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 역사에서 언제나 부담스러운 신학적 과제였다. 그것이 부담스러운 것은 우리의 신앙이 지적인 논리의 유희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디 알렌(Woody Allen)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인한 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사랑하시지만 불행하게도 능력이 부족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전능성을 그 중심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만약 이런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신앙인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성만을 다루는 철학의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에게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한 우디 알렌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우디 알렌이 옳다면 기독교가 그르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 되어 버린다. 같은 이치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도 부인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창조주가 전능하기는 하되 선하지는 않다면 악의 존재는 모순적인 것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신정론이 던져 주는 논리적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인한다면 이는 단순한 논리상의 문제를 실존적인 위기로 바꿔 버리는 격이 될 것이다. 또한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부인하지 못한다. 물론 지적인 사고를 통해 악의 존재를 부인하기만 하면 선정론의 어려움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시다면 창조세계에 악이 없다는 것은 전혀 모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현장속에서는 여전히 악이 목격되고 또한 그 악의 사실성이 경험되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정론이라는 난제를 일으키는 위의 전제들, 곧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 그리고 악의 문제 가운데 어느것 하나도 부인할 수가 없었기에 기독교 신학자들은 여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적 시도를 해야만 했다. 다음에서 대표적인 선정론 변증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A. 어거스틴의 신정론
어거스틴의 신정론은 악, 죄, 고통을 미학적으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악은 언제나 창조 세계 전체의 완전성을 위해 나름대로 기여를 하므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시각으로 볼 때 창조는 결국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된다.2)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악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완전히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하나의 아름다운 집을 그린 그림이 있다. 그런데 그 그림 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집 뒤편에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그 어두운 부분들은 전체 그림을 더 아름답게 하는 역할을 할뿐이지 그 어두움 자체가 그림을 파괴하거나 망치지 않는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창조적 "큰 그림"속에서 보여지는 악의 그림자는 창조 세계의 선함을 최고조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변증이다. "모든 것을 아시는 당신에게 우발적인 사건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은 당신이 그것을 아시고 계신다는 결과로 인하여 존재하게 됩니다"3)

B. 이레니우스의 신정론
죤 힉에 따르면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에서는 악이 하나님이 설정하신 "창조의 목표"를 이루는데 있어 필요한 것으로서 규정된다.4) 이 체계에 따르면 창조에는 시간이 걸리며 악, 죄, 그리고 고통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과 그 뜻이 아직 완결되지 않은 현상태 사이의 일시적인 거리 차로 인해 생겨나는 불가피한 부산물이다. 예를 들면,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이 미성숙한 상태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는 현재의 미성숙한 모습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처음부터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실 수는 없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피조물들은 필연적으로 창조주 보다 열등한 존재이어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머니라면 그 어머니가 낳은 아이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완전하지 않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한 어머니가 있는데 그녀는 자신의 아기에게 단단한 음식을 줄 능력이 충분히 있지만 아이가 어려서 아직까지는 더 단단한 음식물을 받아먹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을 처음부터 완전하게 만드실 수 있었지만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따라서 그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 겪는 악의 고통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실 목표, 곧 많은 영혼이 하나님께로 나아 오게 하는 것을 위해 적합한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목적이 완성되면 악은 제거될 것으로 이레니우스는 본다. 그날이 올 때까지 악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5)

어거스틴의 신정론과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은 단순한 과거의 유물은 아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악에 부딪칠 때면 이들 중 한 가지 유형에 의지하여 현실을 이겨내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큰 그림"만 볼 수 있다면, 혹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모든 고통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은 신정론이 제기하는 지적인 난제들에 대한 신앙적인 답변에 불과하다. 신앙적인 접근은 오히려 악이라는 현실이 제기하는 어려움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으며 우리를 맹목적으로 만드는 오류를 만들 수도 있다.

이런 딜레마 속에 허덕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폭풍처럼 나타난 사람이 바로 칼 융(Carl Jung)이다. 융의 사상은 기독교의 신정론을 풀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한 동시에 기독교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사상의 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칼 융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 역사 이래로 가장 무서운 이단자가 될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융의 악이해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융의 악 이해: 삼위일체Trinity에 악을 더한 사위 일체Quaternity
융만큼 종교에 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진 현대의 심리학자도 없다. 융은 서양 기독교뿐만 아니라 동양 종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의 관심을 보였다. 그에게 종교란 필요한 심리학적 기능이었다. 그래서 종교를 무시하거나 무신론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이단이 될지언정 종교인으로 남길 원했다.6)

융은 종교의 역할은 무엇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융은 자신이 비록 이단적일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으며 치료를 할 때에도 환자들에게 각자의 종교적인 전통으로 다시 돌아감으로써 행복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으라고 역설했다. 융은 스위스 개혁 교회의 목사 집안에서 성장했으며,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양면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여하튼 강력한 종교적인 감정들을 가지고 있었다.

융은 인간에게서 종교성은 본능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이미지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표출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융에게서 인간은 종교적인 존재(homo religiosus)인 것이다.7) 융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있는데 그것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이 이미지가 사람들의 정신 속에 마치 인쇄된 것처럼 찍혀져서 사람들의 삶에 무한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생각할 수 있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내면에 그려진 하나님의 이미지 덕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융은 이 이미지를 사람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불씨라고 부른다.8)

그런데 융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기독교 교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사위일체적인 특성을 지닌 하나님 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 개념에는 어떤 한 요소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전일성(wholeness)이 손상되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전일성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기독교의 삼위에 또 다른 요소 즉 악의 요소가 덧붙여진 사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융은 선과 악이 하나님안에서 혼연일체를 이루는 신개념을 꿈꾸는 것이다.

그는 정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완전한 것, 전체적인 것은 언제나 4나 원이라는 상징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그 예로서 사람들은 첫날부터 사계절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누어 시간을 사등분했으며, 방위 (方位)도 동, 서, 남, 북 등 넷으로 나누어 공간을 사등분 하였다. 사람들은 이렇게 시간이나 공간을 넷으로 나누어 생각할 필연적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삼등분이나 칠등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을 넷으로 나누어야 가장 잘 나눌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등분했던 것이다. 이처럼 4라는 숫자는 사람들에게 온전성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9)

융은 "하나님의 이미지"에는 악의 원리가 본래부터 담겨 있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사탄(Satan)이 하나님의 또 하나의 아들(one of God's sons)이 아니라면, 즉 악이 하나님의 실존에서 제외된다면 그것은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10) 실제로 성서에서 그려지는 하나님의 모습은 상당히 양면적이다. 구약성서의 하나님과 신약성서의 하나님을 비교해 보면,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이며, 징계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어느 정도 어두운 부분이 담겨 있는 이미지인데 반해서, 신약성서의 하나님은 선하기만 한 하나님으로서 그 온전한 모습이 훼손된 이미지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하나님의 이미지는 선과 악이라는 대극의 절대적인 통합을 이룬 이미지라고 융은 주장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과 정의를 격찬하는 찬미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만을 보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하나님 속에는 대극들이 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식이 분화된 사람들이 하니님을 선하신 아버지로서만 사랑하기는 매우 어려워진다. 그들은 하나님의 예측할 수 없는 분노와 격분 등을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이다'11)

이런 주장에 근거에서 융은 우리가 풀어야 할 신정론의 문제에 대해 조심스럽게 악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며, 하나님 자신이 악의 어두운 그림자를 소유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어두운 측면을 깨닫지 못하는 한, 이 측면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우리는 손상된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고 융은 본 것이다. 그런 이미지를 가진 인간의 삶은 또한 심한 손상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직면하는 악과 고통에 대한 하니님의 온전한 이미지를 인간이 왜곡되게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융은 하나님의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이 우리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도덕적인 문제라고 강조한다.12) 하지만 현대인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이 세상에서 악이 기승을 부리고, 전세계는 파괴되어 간다는 것이다.

3. 악의 현상학
융은 악을 경험적인 입장에서 연구하였다. 그는 다만 무엇을 악이라고 할 것인가, 악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현상학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지, 악의 본질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악의 실재에 관해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는 악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악이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 증오, 질투 등을 불러일으키고, 때때로 유혹으로 다가와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악의 존재를 우리 곁에서 너무 나도 많이 목도하고 있으며, 신경증이나 정신병으로 나타나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 집단적인 차원으로 나타나서 범죄를 일으키며, 사회악을 조성하고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들을 무의미한 살육으로 몰고가는 악의 현상을 많이 발견하고 있다. 이런 악의 실재성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악에 어떤 본질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융은 어거스틴의 신정론과 정면으로 부딪친다. 융은 이 세상에 악이 실제로 존재하여 여러 가지 어두운 문제들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악에 어떤 본질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악이라는 현상이 결과적으로 생겨나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기고, 고통이 찾아오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13) 왜냐하면 악에 어떤 본질이 있다면, 우리 삶에서 악이 주도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악은 언제나 주도적으로 작용하지 않고, 이차적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융은 어거스틴이 말한 "천의 결핍으로서의 악"을 비판한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악이란 선의 결핍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악의 본질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가 악을 선이 결핍되어 있는 어떤 것이라고 주장하는 순간에 그는 이미 선이 결핍되어 있는 선과는 다른 본질로서의 악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이다.

융은 악이란 선의 그림자라고 주장한다. 즉, 악이란 그 자체로서 어떤 본질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이라고 생각되는 것 때문에 빛을 받지 못하고 어둠 속에 남아 있는 그림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융은 우리 삶에서 악의 현상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서 사람들의 삶을 왜곡시키고 있지만 악의 본질을 인정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14)

융은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악이나 그림자(shadow)를 우리가 억압하는 방식으로 악이 하나님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억압에 왔다고 본다. 융은 우리가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신 분'이라고 정의하며 그런 하나님의 이미지만을 고정시키려는 유혹을 받아왔으며,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우리 인간과는 다른 어떤 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15)

4. 욥에의 대답(Answer to Job)
기독교에 대한 연구로서 융이 가장 심혈을 기울려 쓴 글이 1952년 "욥에의 대답"이다. 이 책은 그의 저술 가운데 가장 논쟁의 소지가 많은 글로 평가되고 있다.16) 융은 여기서 의도적으로 학술적인 고증의 논리적 형식을 버리고 자유로운 문체로 그의 주관적 감정을 섞어 가며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이행하는 신의 상의 변모를 살펴 나갔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처음에 모호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지 존재였다가, 가부장제 사회의 족장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되고, 그 다음에 한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왕이나 사제, 그리고 전쟁의 지휘관 같은 모습을 지니는 등 전형적인 남성상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하나님의 이미지에 여성적인 특성이 첨가될 것이 요청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격가운데서 여성적인 특성이 부여될 수 있는 성령이 때로는 위로자(consolator)로, 때로는 지혜 등의 여성 이미지를 띠게 되었던 것이다.17)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도 악이 하나님을 이루는 한 요소로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이미지에서 악의 측면은 언제나 억압되어 왔다. 그래서 선한 하나님만 부각되어 온 것이다. 융은 유대-기독교의 전통을 shadow의 억압에 대한 생산으로 봄으로서 그것을 비판하고 있다. 융은 "현대인은 빛과 어둠, 선과 악, 그리고 건강과 병듦이 함께 존재하는 그러한 하나님과 대면해야 한다"고 말한다.18)

융은 야웨신이 어찌하여 사탄과 짜서 선한 욥의 심신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시험하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융은 하나님의 어두운 면에 대한 그의 이론을 정립시키면서 가장 날카롭게 기독교에 도전했다. 특히 그는 초대교회의 교부중 클레맨트의 가설에서 확장하여 그의 이론을 전개했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하나님은 오른팔과 왼팔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가르쳤는데 오른팔은 그리스도이고 왼팔은 사탄이다"라고 융은 기록했다. 대극들이 한 분 하나님 안에서 통일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클레멘트의 견해는 틀림없이 유일신론적이다. 그러나 나중에 기독교는 이원론적으로 되었다고 융은 주장한다. 그것은 대극의 한쪽, 곧 사탄으로서 인격화 된 부분이 분열되어 나간 것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하기만 하다는 기독교의 고전적 주장을 그의 말년에 "욥에의 대답"이라는 책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수정함으로 기독교 공동체에 도전장을 내던진 것이다.

융은 Answer to Job을 저술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여태까지의 형이상학적 논술들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오도하기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선하시기만 한 존재라고 하는 생각은 현대인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융은 생각했다. 따라서 이런 본래적인 '불가능성'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어린아이(하나님의 실재성)를 목욕물(하나님이 선하기만 하다고 보는 전통적 개념)밖으로 내쫓는 격이 된다고 융은 주장했다.19) 하나님을 이렇게 유기 시켜 버린 결과 이 땅에 불행한 고통이 많이 파생된 것이다. 악(惡)의 문제에 대해 융이 기독교 공동체에 도전을 제기한 것은 이 세상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악의 신비 문제에 그가 어떤 명확한 답변을 하고자 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답변은 교회의 신도들이나 그에게 찾아오는 환자등 보통 평범한 사람들에게조차 복잡한 기독교의 신정론의 문제에 대한 쉬운 이해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방치하고 계시는가?"라는 현대인의 질문에 대한 융의 답변은 하나님은 4분의 3만이 선한 존재라고 하는 입장이다. 이 답변은 그렇게 경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일생 동안 그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환자들의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얻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융은 "삼위 일체에서는 사람의 힘보다는 훨씬 더 큰 악의 힘이 하나님의 전일성속으로 함입되고 만다. 그 악의 세력들은 창세기에서부터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힘인 것이다"20) 라고 주장한다. 결국 사람이 유혹자인 뱀을 창조하지는 않은 것이라고 융은 말한다. 융은 만약에 우리가 모든 선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된다고 주장하면서 우리 자신을 악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악마적인 교만심을,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열등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반면에 우리가 그 대극들의 무한한 힘을 하나님에 의한 것으로 돌려버리면, 그 때 우리는 우리의 올바른 자리를 찾게 된다고 보았다.

"욥에의 대답"은 기독교의 선의 결여설에 대한 비판이자 융 그 자신의 고뇌와 진리에의 추구의 역정을 묘사한 것이기도 하다. 폰 프란츠에 의하면 융은 노년에 자기의 다른 저서는 모두 다시 쓰겠지만 "욥에의 대답"만은 그대로 두겠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는 고열을 앓은 뒤 병중에 무서운 정열로 이 글을 썼는데 다 쓰고 나자 병도 나았다고 한다. 폰 프란츠에 의하면 이 책은 결코 신학적인 저술일 수 없고, 그것은 융 자신이 그의 논문에서 지적했듯이 "기독교의 교육을 받은 현대를 사는 지식인이 구약의 '욥기' 에 나타난 어둠에 찬 신의 세계와 어떻게 마주서서 그의 생각을 다듬어 가는가"를 제시한 것이다. "욥에의 대답"은 융 자신의 내면적인 종교적 사색의 역정이자 그때까지 융의 가설을 곡해했던 몇몇 신학자에 대한 대답인 동시에 신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는 많은 지성인들에게 주는 해갈의 편지라고 할 수 있다.21)

5. 예수에 대한 융의 새로운 해석
융은 예수를 자아에 대한 가장 중심된 원형(the most central archetype)으로 보았다. 그는 온전성(wholeness)과 전체성(totality)이 결여되는 존재로 예수를 보았다. 즉 융에게 예수는 그 완전성과 전체성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요소인 '악'의 요소가 빠져 있는 존재였다.22)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드러난 하나님의 이중적 모습으로 혼돈된 우리의 사고 체계 속에서 예수에 대한 칼융의 새로운 접근은 그 이해의 혼잡을 바로잡는데 중요한 키(key)역할을 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다만 나타난 것뿐이라는 성경의 말씀에 근거해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융에게서 왜 필요했을까? 그것은 융에게는 대극의 화해를 이룰 수 있는 또 다른 자아의 원형이 필요했던 것이다. 불완전한 존재를 창조하여 그 피조물들이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자 격노하게 된 지각없는 하나님을 달래기 위하여 예수를 그 희생 제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기독교 전통의 "대속" (atonement)의 개념을 이어받아 인간과의 새로운 화해를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다. 융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양옆의 두강도의 모습과 십자가 모양은 온전성 회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라고 주장한다.23)

융은 예수를 인간들을 위해 나타나서 인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즉 구원을 베푸는 신인 동신에 인간이기도 한 신-인 (God-man)이라는 원형으로 보았다. 이러한 인물상은 고대 인도, 이란, 이집트, 그리고 신비 종교들에서 유래한 것이다. 융은 일찍이 무지막지하고 탈 도덕적인 야웨에게 실망한 이스라엘이 점점 더 이와 같은 중보자를 바라게 되었다고 보았다. 심지어 욥은 '변호자'가 되어 스스로를 변호해 보시라고 하나님께 항의하기까지 했으며 백성들은 변덕스러운 야웨를 상대하는 자신들을 도와주고 종래에는 야웨의 진노를 달래 주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인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하였다. "실제로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이 되었고 그리스도가 되었다. 이것이 욥에게 행했던 불의(injustice)를 만회하기 위한 것이었다"24) 라고 융은 말한다.

그러나 융은 곧바로 자신의 견해에서 후퇴한다. 그는 예수는 자아의 완전한 현실화(the full actualization)이기도 하며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는 역설적인 선언을 했다. 여기서 자아란 좋은 것뿐만 아니라 나쁜 것, 빛뿐만 아니라 어둠까지도 포함하는, 즉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는 포괄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리스도는 죄없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으며 (virgin-born), 복음서에 나타난 것처럼 빛으로 가득한 분으로서25) 하나님의 선함만을 확증해 주시는 분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일면성(one-side)으로 치우쳐 버렸다는 것이 융의 주장이다.26)

역사적으로는 예수가 광야에서의 시험에서 승리하고 자신의 어두운 측면을 몰아냈을 때부터 이같은 불균형이 시작되었다. 그 승리에는 무서운 대가가 따랐다.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도덕적으로 완벽해졌지만 그리스도자신은 심리학적으로 대극을 포괄하지 못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 예수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Therefore, you are to be perfec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27) 라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예수는 융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대극의 온전성 가운데 그 한편을 포기했다. 광야에서 악을 몰아내어 온전함을 얻으려는 자신의 의도에 반대되게,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대극의 상실로 인한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다. 융은 "그리스도라는 상징(symbol)은 사물의 어두운 측면을 포괄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사탄(Luciferian)이라는 대항자의 형태로 배제시키고 있으므로 현대 심리학적인 의미에서 볼 때 포괄성(wholeness)을 결여하고 있다"28) 고 말한다.

악을 버리려는 행위로 인해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크다. 사도바울도 로마서에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으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1)라고 말하며 고통받고 있다. 우리 개인들이 바울과 같은 고뇌를 겪는 것도 이같은 사실 때문이라고 융은 말한다. 융은 우리가 악을 버리려고만 하지 말고 내 안의 것으로 인정하면 고통을 자연이 없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버림을 받은 어두운 측면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디인가 기생한다. 이것은 예수의 광야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화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분열되어 버린 자아의 원형은 우주적인 상대자, 즉 사탄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택하신 것은 "두 번의 성육신(Two Incarnations)"이었다. 곧 한 번은 예수로, 또 한 번은 사탄으로 성육신 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의 본성을 계시하시고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한정된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그분 안에 있는 대극들은 산산이 흩어져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한 대극은 이리로, 악한 대극은 저리로 흩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29) 예수가 하나성 안에 있는 대극들을 분리해 버리자 그때로부터 적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대적자가 생겨나서 세계가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사이의 이 천년에 걸친 투쟁의 장으로 접어들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러한 신화적인 재해석은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 융은 기존의 세 가지 신성을 네 가지로 개정하였다. 즉 사위 일체론, 아버지, 아들/악마, 성령이 된 것이다. 그런데 왜 4라는 숫자인가? 이 대답은 이미 앞에서 일부 지적했으나 좀더 첨가한다면, 4라는 숫자가 나온 주된 이유는 그 자선의 임상치료경험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있다. 융은 오랜 세월에 걸친 치료의 경험을 통해서 4라는 숫자는 만다라(mandala)30) 및 꿈 속에서 보이는 무수한 숫자들이 말해주듯이 포괄성을 뜻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융은 만다라를 온전성(wholeness)과 개인의 통합의 징표로 본 것이다.31)

또다른 이유로는 교회가 끊임없이 실존의 어두운 측면을 무시한 탓이기도 하다. 특히 삼위일체와 기독론에서 어두운 측면이 현저히 무시되어 왔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리하여 융은 신(神)의 삼위일체에 누락되었던 네 번째 요소를 추가함으로써 인류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확대하고 완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융의 이러한 시각은 이단적인가? 라고 물어야 한다. 오늘날의 상황과 융의 이런 주장은 전혀 어울릴 수 없는 것인가? 라고 물어야 한다. 이점에서 오늘날 현대 신학의 흐름을 대변하는 과정 신학의 거두 화이트 헤드는 어떻게 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클라크는 그의 논문에서 융의 이런 하나님 이해가 포스터 모더니즘적인 과정 철학(process philosophy)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본다.32) 여기에 대해 화이트 헤드의 신 이해를 살펴본다면 클라크의 주장에 우리 역시 찬, 반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화이트 헤드에 의하면 모든 현실 존재는 본질적으로 물리적이며 정신적이라는 상반된 두 극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어떠한 현실 존재도 이 양극 가운데 어느 하나를 결여하고 있을 수 없다.33) 따라서 현실 존재인 하나님도 다른 현실 존재와 마찬가지로 유비적으로 양극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화이트 헤드가 신 존재를 다른 존재들로부터 구별하거나 특유한 독자적 존재로 분석시키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34)

화이트 헤드는 신이 모든 점에서 무한정 하다는 것은 옮지 않다고 했다. 만약 신이 전적인 무한자라면 그는 추상적 개념이요 따라서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신은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 헤드는 신은 자신의 본성속에 악과 고통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지식은 선한 것으로 극복된 상태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나라는 악으로부터 선이 분리된 나라가 아니라 선에 의해 악이 극복된 것을 의미한다. 화이트 헤드의 과정사상을 기독교 교육에 수용한 랜돌프 밀러는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도나 목적에 위배되는 악이라는 실재가 있으며 그 악은 지금도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즉 하나님은 아직도 악이라는 실재의 활동을 허락하고 계시며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악의 활동이나 영향력은 하나님의 결정이나 권한밖에 있다고 본다.35) 이것은 화이트 헤드가 원론적으로 기독교 전통의 신정론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이론들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에 대해서도 큰 손상을 입히는 주장들이다. 비록 화이트헤드가 사위일치를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융의 주장과 비교할 때 그 전체적인 틀에서 그리 어긋남이 없다. 그렇다면 이제 융은 오늘을 사는 우리 기독인 들에게 어디쯤 서있는 존재인가?

6.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제기한 도전
이상에서 기독교의 전통 신정론과 거기에 대한 칼 융과 현대 과정 신학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둘의 충돌은 여전히 큰 여파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해결점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해결점이 없다면 이 둘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될 것인가? 이런 여러 물음들 앞에서 도스토예프기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나오는 이반과 알료샤를 통해 기독교의 신정론과 융의 충돌을 진정시켜 보고자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악과 고통의 사례들을 악명 높은 둘째아들 이반 까라마조프의 입을 통해서 기술하고 있다.36) 갓난아기를 공중에 던지고는 떨어질 때 칼로 아기를 받는 야만적인 유목민의 모습이나, 두 살 난 사내아이로 하여금 권총을 가지고 놀게 하다가 총신을 보고 웃기까지 하는 그 아이의 순진한 얼굴을 향해 죽음의 총알을 발사해 버리는 짐승과도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 세계에는 악이 있다'는 무미건조한 명제를 향해 도스토예프스키가 던져 주는 실존적인 사례들 중 극히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포악 무도한 일들은 이반이라는 인물로 하여금 어거스틴적인 신정론이나 이레니우스적인 신정론과는 결코 화해될 수 없는 시각을 가지고 신정론을 바라보게 만든다. 사랑하는 아들의 웃는 얼굴이 산산조각이 나는 모습을 목격한 어머니에게는 어거스틴의 '큰 그림' 에 대한 지식도 결코 보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이레니우스가 '위대한 계획' 이라고 주장한 것이라도 이같은 비극을 '도구로 사용해야만 한다' 는 것을 정당화 시킬 수는 없다. 어거스틴과 이레니우스는 조화를 약속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조화의 대가치고는 너무나 비싼 값을 치루며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이반의 외침을 들어보자

"나는 용서하고 싶어, 나는 더 이상 인간이 고통 당하는걸 원치 않아. 만일 진리에 대한 대가로 어린이들이 그만한 고통을 당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리 단언해 두겠는데 모든 진리도 그만한 가치는 없어. 그런 대가를 지불할 바에는 개한테 아이를 물어뜯게 한 그 아이의 어머니가 포용하지 말기를 바라겠어‥‥‥나는 조화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아. 게다가 그 조화의 대가가 너무나 비싸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처럼 비싼 입장료를 지불할 수가 없어 그래서 나는 나의 입장권을 급히 반환하려는 거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거야. 알료샤! 나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게 아니야 그저 그 입장권을 가장 정중하게 그분께 돌려보낼 뿐이지"37)

도스토예프스키는 악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기존의 신정론에 대항하기 위해 이반이란 인물을 내세우지만 악이라는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셋째 아들 알료샤를 내세운다. 알료샤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주인공이면서도 주인공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처음에는 사건의 주변만을 맴도는 관찰자로 나타나다가 사랑하는 조시마 장로의 죽음 이후 그의 행동이 바뀐다. 조시마 장로는 성인으로 추앙받아왔는데 전승에 따르자면 죽은 성인의 시신에서 썩고 부패한 냄새가 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38)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시마 장로의 시신은 그가 죽은지 몇 시간만에 썩은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무언가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했던 수도사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슬쩍 넘겨 버린다. 그러나 얄료샤는 "도대체 하나님의 손길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왜 자신의 손길을 숨기시고 맹목적이고 말없는 무자비한 자연의 법칙에 스스로 굴복하려는 듯한 태도를 취했을까"39) 라고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나 결국 알료샤는 이런 허무주의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악의 궁극성을 부인하게 된다. 이반이 세계의 악한 모습을 보고 위기에 빠진 것과 자신이 사랑했던 장로의 죽음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것은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의 결론으로 택한 선택은 너무나 달랐다. 얄료샤는 이반의 그런 객기를 반역이라고 했다. 이반은 정색하며 말한다. "반역이라구? 너한테 한가지 묻겠는데 솔직히 대답해 다오. 가령 네가 궁극에 가서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또한 평화와 안정을 줄 목적으로 인류의 운명의 탑을 쌓아올린다고 하자. 그런데 이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단 한 명의 보잘것없는 사람을 괴롭혀서 죽게 해야만 한다면 그 사람에게 보상받을 길 없는 눈물을 홀리게 한 다음에야 이 탑을 쌓을 수 있다면 너는 과연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 탑의 건축 기사가 될 수 있겠니?"40) 알료샤는 한 무고한 생명을 괴롭혀야만 건설되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이반에게 말한다. 그리고는 "나는 나의 하나님에 대해서 반역하고 있는 게 아냐 단지 그분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뿐이지"41) 하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문제와 위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것들을 해결하는 방식에 있다. 문제는 그것에 대한 답변이나 해결책을 찾기만 하면 해소된다. 어떤 답변으로 인해 어려움이 해결되면, 그 문제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위기는 답변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답변이라는 것은 문제의 해결 수단이 건재할 때에 그 수단을 이용해서 산출하는 것인데 바로 이 수단을 침식하는 것이 위기이기 때문이다. 위기에 빠진 사람들이 답변을 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이 찾는 답변은 그들의 곤경을 해결하는데 긍정적으로 공헌하지 못한다. 위기에 빠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답변이 아니라 누군가가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우리의 위기 속에서 친구 한두 명이 함께 있어 주는 것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 것인가! 더욱이 목사님일 경우 더욱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해주신다면 정말 큰 힘이 될 것이다.

위기에 빠진 사람에게 논리적이고 교리 적인 답변을 던져 주는 것은 완전히 그릇된 일이다. 여기서 칼융의 한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존재하는 악에 대한 융의 논리는 참으로 훌륭하다. 신정론의 한계를 한 번에 껑충 뛰어넘는 위대한 사상적 논조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선과 악을 항상 대립적으로 생각하는 융의 이런 시각은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무미건조하다. 그런 융의 주장이 악이라는 실존앞에서 한없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이반은 처음부터 답변이라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따라서 우리가 이반이 드러낸 신정론의 어려움을 답변이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해결하려고 한다면 이반은 우리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을 것이다. 같은 이치로 고통받은 위기의 대중에게 우리가 융이 보여준 제 2의 "욥의 해답"을 가지고 간다고 해서 그것으로 우리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함께 있음"이란 수동적으로 '그곳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위기에 처한 사람들 결에서 그들과 함께 고통 당하기를 자원하는 '제자의 도’ 같은 것이다. 몰트만(Moltmann)이 지적한 대로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몰트만은 예수의 고통과 하나님 사이의 연관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즉 그는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고통당하셨고 예수와 함께 죽었으며, 인간의 고통에도 참여하시는 분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은 인류와 함께 계속해서 고난을 함께 나누시고 계시며 이에 대해 인간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의 고통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보았다.42) 이것은 인간이 고통 당하는 아픔과 이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사이의 괴리감을 극복해 주는데 도움이 된다.

나오는 말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허구적인 소설임에도 최근의 역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잔인한 상상력마저도 초월하는 대량 학살의 실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금세기에만 150만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터어키 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6백만 명의 유태인들이 히틀러에 의해 피살되었으며, 2백만 명에 가까운 캄보디아인들이 이유 없이 학살당했다. 자연적인 재앙이나 수많은 전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가해지는 고문들, 제도적인 압제, 인종적인 편견 등을 제외하더라도 이렇게 큰 비극들이 금세기에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사건들 앞에서 침묵하고 있어야만 하는가? 아우슈비츠 앞에서 어거스틴의 '큰 그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우리도 이반처럼 6백만명이 학살되어야 이룰수 있는 더 큰 선은 없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도 이반처럼 현대전에서 벌어지는 대량학살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섭리는 없다고 말해야 한다.

이 모든 악은 그러한 조화의 대가로는 여전히 너무나 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료샤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있어 주심으로 인해서 그러한 조화의 대가가 다 지불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함께 있어 주심은 악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답변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논리를 가지고 우리가 신정론의 어려움을 풀어 가는 것은 아름다운 사랑 속에 숨어 있는 독약을 더듬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신정론이 제기하는 근본적인 어려움은 누군가가 우리와 함께 있어 줄 때 올바른 방향으로 해결된다. 악, 죄, 고통을 다루는 올바른 방법은 철학이나 심리학적 접근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미 그런 끔찍한 일들의 한가운데와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므로 가능하다.

악(惡)이란 키워드에 관해 뜨거운 관심을 쏟았던 기독교 변증론자들과 칼융의 대면을 통하여 우리는 그것을 단순한 사변적 전개나 학문과의 충돌로 받아들이지 말고,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반추하고 현실적인 조건에 처해져 있는 인간들의 삶의 모습을 만추함으로서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을 거듭 확인해 가는 과정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만 고통의 현실이란 문제를 숙고함에 있어 현란한 지적 유희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왁자지껄한 언어적 논쟁에서도 그 경계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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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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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 분석심리학, 일조각, 개정증보판, 1998
헤롤드S. 쿠스너, 착한사람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 김쾌상 역, 도서출판 심지,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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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Harold Kushner, 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 서문, 김쾌상 역 1990. 도서출판 심지
2 Arelius Augustine,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선 한용역 대한기독교서회, 1990. p. 201
3 Arelius Augustine, p. 202
4 John Hick. Evil and the God of Love, San Francisco: Harper and Row, 1978. p.214
5 Justo L. Gonwalez, 기독교 사상사(1), 이형기, 차종순 역, 총회 출판국, 1988. p. 197-201
6 David M. Wulff, Psychology of Religion. John Wiley & Sons. INC, New York. 1997. p.414
7 김 성민, 융의 사상과 기독교, 동명사, 1998, p. 168
8 김성민, p. 170
9 김성민, p. 172
10 David M. Wulff, Psychology of Religion, p. 446
11 김성민, p. 174-175
12 김성민, p. 174
13 김성민, p. 142
14 김성민, p 143
15 Jung and Christianity in Dualogue, editors by Robert L. Moore & Daniel J. Meckel, Paulist Press, New York, 1990, p. 242
16 David M. Wulff, Psychology of Religion. John Wiley & Sons. INC New York, p. 449
17 김 성민. p.177 그러나 전통적 기독교나, 유대 전통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에는 여성적인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융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완전하지 않다고 본다. 악의 요소와 여성의 모습의 결여를 어떻게 동시에 볼 것인가는 또 한번의 산고를 치러야 하는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되며, 동시에 나 개인적으로 해결하기에 벅찬 느낌이 없지 않다. 따라서 이 소고에서 사위 일체를 다룸에 있어 하나님의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는 생략하고 악의 문제만을 포함시키고자 한다.
18 Jung and Christianity in Dialogue, editors by Robert L. Moore & Daniel J. Meckel. p. 251
19 Wallace B. Clift, 융의 심리학과 기독교 (Jung and Christianity), 이기춘, 김성민역,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p 180
20 Wallace B. Clift. p.190
21 이부영, 분석 심리학, 일조각, 개정 증보판 1998, p.353
22 David M. Wulff. Psychology of Religion, p. 444
23 Ibid., p. 445
24 Journal of Psychology and Theology. Jung and Christology, by Chapman G. Clarke 1997, Vol 25, p. 417
25 요한복음 1장 v 4, 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26 Journal of Psychology and Theology. p .418
27 New American Standard Bible verson, 1960
28 Journal of Psychology and Theology, p. 418
29 Journal of Psychology and Theology. p .418
30 이것은 '원`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 어이다. 불교에서 우주의 상징으로 쓰인다. 융은 자신의 환 자들이 만다라와 같은 원을 그리는 일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만다라가 의식적인 자아와 무의식을 통합하려는 개체화 시도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만다라는 중심, 목표를 뜻하는 말로 그 의미가 확장되어 쓰이기도 한다. (분석 심리학, 일조각, p.114-115)
31 James W. Jones. Contemporary Psychoanalysis and Religion.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 London, 1991. p. 4
32 2 Journal of Psychology of Theology. p. 425
33 A. N. 화이트 헤드, 과정과 실재. p. 222
34 로버트 B. 맬러트. 과정 신학 입문 Wtat is Process Theology, 홍정수 역. 대한 기독교 서회 1989. p. 62
35 Randolf C. Miller, The Problem of Evil and Religious Education" Religious Education, Vol. 84, No 1(1989), p. 16
36 Fyodor Dostoyevsky, 까라마조프가의 형제(상), 혜원 출판사. 1998 중판. p.338-350
37 Ibid.. p. 351-352
38 Ibid., p. 479
39 Ibid.. p. 489-490
40 Ibid.. p. 352
41 Ibid.. p. 492
42 Jung and Chrstianity in Dialogue, editors by Robert L. Moore & Daniel J. Mecker, Paulist Press, New York. 1990. p. 254




발행자명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학술지명 현대와 신학  
ISSN 1226-3885  
권 27  호   
출판일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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