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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6/22 (08:43) from 80.139.186.189' of 80.139.186.189' Article Number :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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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영성
저항의 영성(Spirituality of Resistance)



By Rev. Dr. Konrad Raiser-2003. 9.12 / 제네바

옮긴이: 이미화·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 왜 이 상황에서 영성을 거론하는가?



 이 장의 제목은 좀 더 기술적인 여타의 주제들보다 다소 도드라져 보인다. 그래서 여러분은 자문했을 지도 모른다. 왜 이러한 문맥 속으로 ‘영성’을 끌고 들어오는가? 도대체 영성이 부의 창출과 경제적 세계화, 또는 공공재화의 상품화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라고.



 물론, 어떤 점에서는, 영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가치의 문제를 논의하기에는 교회 사람들, 특히 신학자들이 적임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런 분야에서는 그들이 전문가라고 한다면, 경제와 금융 시스템의 역학관계와 그 작동방식에 관해서는 경제학자들이 가장 정통하다고 할 수 있다. 영적 지도자들이 그들의 전문 영역에 머무르면서 영성에 관해 논의하는 한, 그들의 역할은 명백하다. 영성이 사람들의 개인적이고 가장 내밀한 신념과 욕구에 관해 말한다면, 경제는 수리적 공식들과 모델들로 표현되는 객관적 법칙들을 따른다. 경제는 인간의 삶의 물질적 측면들을 다루며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과 분배를 취급한다. 물론, 사람들은 -적어도 어느 부류의 사람들은- 자아충족을 위해 영성과 종교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은 경제의 영역 밖의 일로 치부되고 있으며, 따라서 통상적으로 경제 분석과 경제적 계산에 속하는 기본 가정들에서는 무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왜 기업인들과 은행가들과 정치인들과 국제금융기구의 대표들은 종교적 영적 지도자들과 대화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왜 세계은행 총재는 전 캔터베리 대주교와 함께 ‘세계종교 발전 대화’(World Faith Development Dialogue) 모임의 개최를 주도해야만 하는가? 왜 세계경제 포럼 회장 클라우스 슈와브(Klaus Scwab)는 종교적 영적 지도자들이 그 포럼의 행사에 참여하도록 자문회의를 구성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일까?



 이러한 주도적 움직임들은 종교와 영성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 영향이 사람들의 개인적 삶에 미칠 뿐만 아니라 경제와 금융 시스템을 포함하여 공공의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40년간에 걸친 이러한 진전의 결과로, 어떻게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행동하는 지에 대한 일면적인 이해에 근거하여 세계의 지배적인 정책들이 수립되었다는 것, 따라서 그러한 정책들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백해지고 있다. 여러 문화들에서는, 사회적 상호작용(social interactions)을 형성함에 있어서 종교와 영성이 여전히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여러 서방 사회들에서 종교의 탈국가화(the privatization of religion)를 불러온 세속화의 과정은 다른 문화권 속으로 기대했던 만큼은 파급되지 못했다. 사실, 우리는 오늘날 영적 정신적 힘으로서 만이 아니라 정치적 힘(force)으로서, 그중에서도 특히 세계화가 미친 영향에 응답하는 상황에서, 종교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경제와 금융시스템의 기능(functioning)은 내면화된 가치관, 사고방식, 동기부여 등을 통해 유지되고 있는 사회적 기본틀(a social fabric)을 필요조건으로 하며 또한 그것들에 의존하고 있는데, 바로 그 가치관과 사고방식과 동기부여는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고 영성을 통해 쇄신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뢰와 성실, 상호의존성(mutuality), 연대(solidarity)등과 같은 덕목들에 반영되어 있는 이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은, 전통적으로 경제 분석에서는 당연시되어왔으며 따라서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 경제 금융 거래에 관한 전통적 용어들이 그 토대가 되는 ‘사회적 자본’에 관한 언급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니 말이다. “신용”(trust), “대출”(credit), “출혈판매”(sacrifice), 그리고 “상환”(redemption)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그 어떤 경제도 금융시스템도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오늘날, 국제금융기구들을 통해 지구적인 정당성(global validity)을 부여받아온 주도적 경제-금융 정책들이, 여러 세대와 여러 세기에 걸쳐 축적되어온 ‘사회적 자본’을, 재충전하지도 않고 마구 써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그러한 경제와 금융 정책들이 장려해온 가치들은, 인간의 조건들을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관점에서 보는 환원주의적 입장을 반영하는 것인데, 사회적 기본 틀을 계속해서 약화시키고 침식해가고 있다. 그런데 그 기본 틀이 없으면 경제 그 자체가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고 경제적 수단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국제금융기구들의 책임자들을 포함해서 경제적 정치적 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종교적 가치들의 문제에 점점 더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것을 보게 된다. ‘지구윤리 프로젝트’(The Global Ethic Pro-ject)를 추진하고 있는 한스 큉 박사는 이러한 관심들에 응답하고 있으며, 굴지의 은행가들로부터도 지지를 받고 있다.



 이러한 관심사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실제로, 여러 종교적 영적 지도자들은 이러한 사안에 함께 관심하면서 흔쾌히 응답해오고 있다. 하지만, 상실된 사회적 자본을 재생시키는데 있어서 종교와 영성이 중요하다고는 할지라도, 경제가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처럼 그렇게는, 종교와 영성이 사회적 자본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만약 자신들의 파트너들인 정치적 경제적 지도자들과 함께 지배적인 경제적 패러다임의 기조를 이루는 인간조건에 대한 환원주의적 입장에 대해 비판적인 재검토작업을 회피한다면, 종교와 영성은 결코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종교와 영성이, 그들 자신의 판단기준에 따라서도 정당성을 얻지 못한 경제와 금융 시스템에게 정당성을 빌려주는데 사용되도록 스스로를 허용한다면, 더더구나 실패할 것이다.



 러시아의 사회철학자인 니콜라이 베르쟈예프(Nikolai Berdiaev)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자주 인용된다. “나 자신의 일용할 빵은 물질의 문제이지만, 내 이웃의 빵의 문제는 영적인 문제이다.” 그런 뜻에서, 영성은 진정으로 상황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는 문제라 하겠다. 다른 한편으로, 영성은 한 개인의 이기심을 추구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복지에 기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지배적인 경제논리에 대해 도전할 것이며, 마땅히 도전해야한다. 영성은, 인간의 생명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이 그 안에서 살아움직이고 삶을 지탱받고 있는, 그리고 단지 물질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만으로는 길러질 수 없는 내적 관계들의 생동하는 네트워크와 관련된다.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경제의 언어로 해석한다는 것은, “공익”(common good)을 개인적인 이기심의 충족보다 상위에 놓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경제적 삶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주된 추동력으로서 경쟁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협력과 상호의존성을 결정적인 요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2.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관해 논해야 할까?1)



 나는 이 글의 도입부 성찰의 장에서, 매우 일반적인 관점의 “영성”과 “종교”에 대해 논했다. 영성은, 사회적 삶에 있어서 목적의식과 가치관을 생성시키고 재생시키며, 그리하여 사회 조직(social fabric)을 길러내는 에너지의 근원을 말해준다고 했다. 이와 관련하여 영성이 새로운 관심을 끌기 시작한 최근의 대중적 담론의 진전 상황을 살펴보았다. 점점 다원화되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영성의 다른 형태들과 실천들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들은 심지어 사람들의 영적인 요구를 채워주기 위한 시장까지 개발되고 있는 양상을 목격하게 된다. 영적 지도를 제공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현대기업의 모습으로까지 나타날 수 있게 되었으며, 특히 물질적인 욕구가 충족되고도 남는 사람들 가운데 더욱 그러한 현상을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의와 인간의 존엄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영성에 대한 새로운 추구를 보게 되는데, 이들에게 있어서 영성이란 바로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지탱해주는 에너지를 의미한다. 좌절된 경험과 장기간의 억압뿐 아니라 이따금 얻게 된 승리와 해방의 순간들이, 민중운동에 참가하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영적인 전통의 가치들을 새롭게 적용시키도록 이끌어왔던 것이다.



 이러한 개괄적 징후들로 미루어 볼 때, 영성이 비교적 느슨한 윤곽을 갖는 개념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보다 책임 있는 담론을 펼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 무엇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는 지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영성”은 기도와 묵상의 삶을 나타내며, 예배의식과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를 의미한다. 여러 전통들을 보면, 영성은 일상의 삶으로부터, 그리고 그 삶의 서로 상반되는 요구들로부터 스스로를 의식적으로 분리시켜온 수도공동체들의 금욕적인 삶과 연관시켜 생각되어 왔다. 수세기동안 영성에 대한 이런 금욕주의적 전통은 청빈과 순결, 순종의 서약에 따른 삶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기도와 명상을 위하여 특별한 소명의식을 지닌 자들에 의해 유지되어왔다. 이는 이따금씩 주어지는 묵상기간이나 피정, 순례여행, 정해진 금식기간을 제외하면, 보통사람들로서는 영적인 삶의 요구사항들을 따를 수 없는 것들로 인식되어왔다.



 그렇지만, 에큐메니컬 운동은 영성의 또 다른 측면을 재발견, 재확인 하는데 기여했다. 즉 영성의 다른 한 측면은 교회의 삶 가운데 언제나 살아있었으며, 더구나 수도원적인 규율 속에서는 그러했다는 것이다. 초기 베네딕트회의 모토인 ora et labora(기도와 노동)로부터 떼제 공동체(Taiz Community)에 의한 투쟁과 명상의 실용적인 결합에 이르기까지, 단순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선교사역(복음전도)의 영성으로부터 정교회에서 보여주는 성찬식과 성찬식 다음의 의식(liturgy after the liturgy)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투쟁의 삶 가운데 영성의 삶을 살기 위한 수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져왔던 것이다.



 1975년 나이로비에서 열린 WCC총회에서, 중앙위원회 의장인 토마스(M. M. Thomas) 박사는 이렇게 새롭게 발견된 영성의 차원을 “투쟁을 위한 영성”(spirituality for combat)이라는 이름으로 부각시켰다.2) 그는 정치적 투쟁을 영적으로 고양시키자고 제안한 것도 아니었고, 투쟁을 위한 도덕적 준비로서 영성을 제도화하는 데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정의와 인간의 존엄을 위한 투쟁에는 그 자체의 고유한 영적 차원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 권력(power) 그 자체는 그것이 정치적 파워이건 경제적 또는 금융상의 파워이건 간에, 희생과 신뢰와 신실한 충성을 요구하면서 그들 나름의 영성을 계발하려는 경향이 있다. 정의를 위한 투쟁은 많은 경우 참된 영성과 거짓된 영성에 대한 투쟁이며, 참된 예배와 그릇된 예배에 대한 투쟁이며, 하나님을 섬기느냐 우상을 섬기느냐에 대한 투쟁이다.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부언했다: “우리의 투쟁은 단지 타자와의 투쟁이 만이 아닌 우리 자신들과의 투쟁이며, 살과 피에 대한 투쟁만이 아니라, 인종과 국가와 계급이라는 우상, 그리고 잔인성과 억압의 집단적 체제를 강화시키는 이상(ideals)이라는 독선과 그 우상의 거짓 영성들에 대한 투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3)



 영성에 대한 성찰을 오늘의 투쟁의 상황 속에 설정하도록 촉구한 토마스의 이 충격적인 도전은, WCC의 잇따른 총회들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하나의 토론을 낳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고의 흐름을 쫏아 밴쿠버 총회는, “교회의 영적투쟁은 가난하고, 억압받고, 소외되고, 추방당한 자들의 투쟁에서 그러한 논의를 반드시 포함시켜야한다. 성령(Spirit)은 투쟁하는 민중들 가운데 있다.”고 확언했다.4) 그리고 총회는 다음과 같은 권고안을 덧붙였다: “개 교회들은 정의와 인간의 존엄을 위한 투쟁 속에서 기독교적 영성이 어떠한 형태로 표현되는가를 탐구해야한다.”5)



 WCC의 밴쿠버 총회(1983년)와 캔버라 총회(1991년) 사이의 기간에는 “우리시대를 위한 영성”(a spirituality for our times)을 위한 탐구가 집중적인 에큐메니컬적 대화와 성찰의 중심을 차지했다. “성령이여, 우리를 변화시켜 거룩하게 하소서!”(Holy Spirit - transform and sanctify!)란 표제로 열린 캔버라 총회의 제4 세션 보고서는 이러한 대화활동들을 통해 분출된 에큐메니컬 영성에 관한 선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영성은 -각양각색의 형태로서- 생명을 위한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정화되고, 영감을 받으며, 해방되는 것이며, 그리고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시대를 위한 에큐메니컬 영성은, 지금 여기에서 성육신하고 생명을 부여받으며, 성서에 뿌리를 내리고, 기도로 자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에큐메니컬 영성은, 성만찬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예배와 증언으로 표현되며 믿음과 신념으로 축하하는 자리에서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는 불가피하게 고난의 삶으로 인도할 것이며, 기쁨과 희망에 차서, 광활한 오이쿠메네(oikoumene)의 세상을 향해 열려있을 것이다. 그 근원과 지침은 바로 성령의 행동이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 타자를 위하여 존속되고 추구된다. 그것은 지금 형성되어가고 있는 제자도(discipleship)의 과정이다.”6)



 우리의 성찰을 위해 각별히 중요한 이런 견해들은 영성을 생명을 위한 에너지로 이해한 것이며, 지금 여기(here and now) 인간의 삶과 투쟁의 현장에 성육신하고 뿌리내린 것으로서 영성을 이해한 것이며, 공동체를 향한 방향성(orientation)과 더 넓은 오이쿠메네로의 개방성으로서 영성을 이해한 것이다.



 밴쿠버 총회 이후, 이러한 에큐메니컬 대화의 고무자였던 구웬 카슈모르(Gwen Cashmore)와 조앤 펄스(Joan Pulse)는 자신들의 에큐메니컬적 영성 개념을 개방성, 연관성, 그리고 세상성을 중심으로 정립했다.7) 개방성(Openness)은 자신과 자신의 사고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타자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려는 의지이며, 성령의 행동에 자신을 열어두려는 의지이다. 이는 겸허함의 표명이며, 자기의 옮음을 주장하지 않으려는 자세이자 상처입기 쉬운 약자의 위치에 자신을 세우려는 자세이며, 타자와의 만남(encounter)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태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연관성(Connectedness)은 모든 생명이 공동체적 결속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인식이다.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된 오묘한 거미줄 망에 얽혀있으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나는 에너지의 흐름에 참여하고 있다. 영성의 한 특성인 연관성은 이기심과 경쟁심에 기초한 문화를 넘어서서 협력과 상호의존과 호혜관계에 대한 인식과 실천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끝으로, 세상성(Earthedness)은 에큐메니컬 영성을 주어진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일상의 삶의 조건들과 연결시킨다. 세상화된 영성(an earthed spirituality)은 자체의 유한성과 한계를 인식하면서, 그리고 자신의 문화와 사회적 환경과 더불어 한결같은 대화를 지속하는 가운데서, 거짓 신을 경배하려는 유혹에 대하여 진지한 경각심을 갖는다. 세상화된 영성은 ‘영을 분별하는’(discerning the Spirit) 과제를 받아들이며, 저항을 위한 능력을 기르며, 이 세상의 권세와 지배권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한 투쟁 가운데서 참고 견디며 힘을 유지시키는 능력을 기른다. (에베소서 6:10-13 참조)



 아시아의 관점에서 마사오 타케나카(Masao Takenaka)는, 지역의 문화에 뿌리내린 이미지들과 상징들이 영적 상상의 힘을 양성시킬 수 있고 또 인간의 책임감을 북돋울 수 방법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밥입니다”라는 제목의 아시아 영성에 관한 에세이에서, 그는 한국의 기독교 시인인 김지하의 “하늘은 밥입니다”라는 시를 해석했는데, 이는 아시아의 민중을 위한 일용할 양식으로서 쌀이 갖는 매우 상징적인 특성을 묵상한 것이다. “평화를 뜻하는 중국어 철자인 와(wa)는 문자적으로 조화(harmony)를 의미한다. 이는 두개의 단어에서 유래됐는데, 즉 하나는 쌀에서, 다른 하나는 입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는 우리가 모든 백성들과 쌀을 함께 나누지 않으면, 결코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전세계의 모든 입들이 일용할 양식으로 채워질 때, 그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평화를 가질 수 있다.”8) 여기에는 두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은 밥이라고 말할 때, 이는 우리가 밥을 경배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은 밥이며, 밥이 전 창조세계의 상징적 원천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자연을 정복과 착취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우리의 동반자로 인정한다면, 생태적 이슈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9)



 이렇게 사람들(people)의 문화 속에, 특히 ‘제3세계’의 민중문화에 뿌리내리고 있는 영성에의 접근은 1992년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3세계 에큐메니컬 신학자 협의회(EATWOT) 총회 보고서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아브라함(K.C. Abraham)은 자신의 서두해설에서 EATWOT 신학위원회가 작성한 준비선언문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선언은 김지하 시인의 동일한 시를 인용한 것인데,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제3세계의 울부짖음은 목숨을 위한 울부짖음이다. 이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이루는 자유와 존엄을 위한 울부짖음이다. 그것은 생명을 지탱해 주는 쌀과 빵을 찾는 부르짖음이며, 무리와 함께 먹는 쌀과 빵을 상징하고 또 그 쌀과 빵으로부터 자라나는 공동체를 갈구하는 울부짖음이다. 한 사람만을 위한 양식은 이기적인 것으로 될 수 있기 때문에 영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니콜라이 베르자예프의 말처럼, 나 자신만을 위한 양식은 영적문제가 아니지만 나의 굶주린 형제자매들을 위한 양식은 영적문제이다. 따라서 생명을 위한 우리의 울부짖음은 생명의 양식을 위한 울부짖음이며, 양식을 생산하고 함께 나누는 행위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 모든 행동들과 과정들과 관계들의 영성을 위한 울부짖음이다. 우리의 울부짖음은 생명의 영성을 위한 울부짖음이며, 생명을 위한 울부짖음이다.”10)



 “생명을 위한 울부짖음”(A Cry for Life)이란 제목으로 붙여진 이 협의회 총회의 최종선언은, 특히 생태운동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여성, 흑인, 원주민, 히스패닉 민중들의 울부짖음을 다루고 있다. 이 선언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생명을 위한 울부짖음과 하나님을 위한 울부짖음에 대하여 창조적인 응답으로서 우리의 영성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응답으로 함께 움직이기 위하여 공동체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면서 영/정신(spirit)에 활력을 불어넣는 행위를 보여주는 노래들, 의례들, 상징들로써 우리의 영성을 축하한다…. 여기에는 영성을 낭만화하려는 여지는 발붙일 틈이 없다. 이는 생명을 위한 절규이며, 죽음과 죽음의 힘에 맞서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구하는 울부짖음이다. 영성은 투쟁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므로, 이는 전진하게 하는 힘으로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그 무엇에 우리가 붙이는 이름이다.”11) 그리고 이 선언은 이 영성을, 해방의 하나님과 생명의 하나님께로의 근본적 전향(radical conversion)에 뿌리내린, 그리하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 대안을 찾을 수 있도록 고무 격려하는 ‘투신의 영성’(spirituality of commitment)으로 묘사한다.



3. 영성과 저항이 양립할 수 있을까?



 앞 장의 목적은 현 경제시스템과 금융시스템의 책임을 지고 있는 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방향성을 제공하는 영성의 이해를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지난 30년간 발전논쟁과 정의와 인간의 존엄을 위한 투쟁에 집중적으로 관여해온 에큐메니컬 논의는 정치적 참여의 영성(politically engaged spirituality)으로, 즉 동양의 명상 형태들로부터 영적 자아실현의 현대 프로그램들에 이르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종교적인 영적 실천행위의 일반화된 개념 아래 단순히 포함시킬 수 없는, 정치적 참여의 영성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특히, 이렇게 이해되는 영성은 삶의 물질적 조건들에 대한 개인적이고 닫쳐진 지평을 초월한다. 이 영성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나누어지고 있을 때에만 유지되는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거룩한 은사인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실천행위(praxis)이다. 마찬가지로, 영성은, 생명을 위한 충만한 에너지로서, 생명을 약화시키고 부인하거나 파괴하는 모든 세력과 권력과 체제에 맞서 저항하기 위한 참여를 의미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Lead Us Not into Temptation)란 제목의 문헌은 국제금융기구들의 정책들에 대한 교회들의 대응을 지원하기 위해 WCC가 마련한 것인데, 앞에서 서술한 영성 이해와 같은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오랜 기독교적 영성의 전통이 있다. 이 전통은 교회 세력까지도 포함하여 기존의 세력들(powers)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해왔다. 이 전통은 제도와 기구들, 이데올로기들과 체제들에 대한 충성심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에 더 깊이 근거하고 있다. 이 영성은 힘없는 자들에게는 힘을 주고,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에게 반대할 용기를 부여해왔다.”12) 이 전통은, 영성이 삶의 모든 차원을 포함하고 있으며 사회·문화·환경·역사적인 사회의 제반 조건들과 그 가치체계들에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영성의 이러한 관계적 개념 속에서 하나님이나 초월자, 개별적 인간, 인류공동체, 그리고 자연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져 있다. “이것은 영성이 오직 개인에 대해서만 말하거나 또는 개인이 영성을 위한 유일한 근거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공동체의 삶을 지배적인 서구문화에서 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여러 사회적·문화적·종교적 전통들에서 그러하듯이, 모든 차원들을 동등하게 평가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러 교회전통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의 삶의 영성을, 그리고 죽음의 세력에 맞서 악과 싸우는 영성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비단 그것이 경제적인 것이거나 정치적인 것이거나 사회·문화적인 것이거나 간에, 인간을 부정하고 그 밖의 창조세계를 부정하며 영적인 삶을 살아갈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는 온갖 세력들에 대항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과 자연의 협력관계의 기본 성격 자체를 파괴하는 제도와 체제들 역시 반드시 폭로하고 반대해야한다는 것이다.”13)



 전통적 영성 이해는 필자가 발표한 이 글의 제목마저 문제 삼았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영성과 저항은 정면으로 대립되는 실천의 양식들을 표방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 배경 문건이 세 번 째 장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성서적 전통은 비폭력적인 저항의 행동을 포함하여 대중적 참여의 영성을 지지하는 증거들로 가득차있다. 특히, 히브리의 예언자들은 불의한 제도와 구조들에 도전하며 권력의 남용을 폭로하는 영성 프락시스(a praxis of spirituality)의 실례를 보여준다. 예수의 선포와 행동을 설명하는 복음서의 기록들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시험에 대한 이야기는 저항의 영성에 대한 하나의 모델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을 묘사하기 위하여 종종 투쟁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육신에 거스르는 싸움이거나 죽음과 파괴의 요인이 되는 무기로써 하는 싸움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맞서고 현재의 우주적 어둠의 세력들에 대항하며, 천상의 처소에서 악한 영적 힘들과 싸우는” 투쟁이다. 이것은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진리와 의로움과 믿음을 무기로 삼아 싸우는 싸움이다. (에베소서 6장 10-17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저항의 영성”을 논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며, 하나님과 인류공동체 앞에서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힘을 행사하는 모든 형태의 세력들과의 영적인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영성은 인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권세가 현존함을 나타낸다. 이 하나님의 권세는 모두의 삶을 고양시키며, 소외된 자, 가난한 자, 이방인, 그리고 버림받거나 추방된 자들을 옹호한다. 따라서 영성은 스스로 절대자로 군림하는 세력들과 공동의 선을 행함으로써 합법으로 인정되지 아니한 세력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고 있든, 예언자적으로 도전해야만 할 것이다. 영성은 권력의 거짓 주장을 폭로해야만 하며, 다수의 기본적 필요와 삶을 위한 권리를 무시하면서 소수의 부와 권력을 확대시키도록 복무하는 정책들과 시행방침들을 반대하며 저항할 수 있는 방안을 추구해야만 할 것이다.



 저항은 직접적인 정치적 개입행위로부터 기도, 금식, 대중적인 예배의식, 보이콧 등과 같은 상징적 행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들을 취할 수 있다. 영성의 한 형태인 저항은 이해득실을 따지고 효과적인 변화를 노리는 따위의 정치적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저항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적 증언의 한 형태이며,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민족적(ethnic)이든 문화적이든 간에 권력과 권위의 모든 다른 주장들에 대해 반대하면서 궁극적인 삶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바치는 충성과 순종의 선언이다.



 이는 또한 선과 악의 독선적인 이분법에도 대항하고, 어떤 대안이나 이견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 주장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영적인 저항을 의미한다. 민중의 삶과 생각을 지배하는 권력 행사의 숨겨진 방법들 중의 하나는, 공산주의제도의 몰락 이후, 자연의 법칙을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지배적 경제 패러다임에 대해서는 그것을 대체할 그 어떤 대안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대한 어떤 반대의견이라도 오도된 것으로, 비이성적이거나 잠재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따라서 억압받아야만 했다. 이렇게 특정한 경제적 패러다임을 절대화하는 경향은 정치적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대중들 속에 숙명주의와 두려움과 방어적인 자세를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 영성은 체제의 닫힌 지평을 희망과 사랑으로 뛰어넘으며, 따라서 숙명주의와 체념과 공포에 맞서는 저항의 운동이 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저항의 영성은 독선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해야만 한다. 즉 완전한 도덕적 영적 권위를 주장하면서,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악마로 간주하고 사악한 의도들을 그들에게 떠넘기는 따위의 독선 말이다. 예언자들과 함께 예수가 죄의 구조들을 폭로하고 비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는 더 나아가 죄인들을 기꺼이 맞이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새 생명을 주셨다.



 1975년 WCC의 나이로비 총회에서 발표한 M.M.토마스 박사의 보고서를 다시 한번 인용해보기로 하자. 그는 자신의 보고서에서 “죄와 하나님의 용서하심 안에서 인류의 연대에 대한 각성을 가지고 정의를 위하여 투쟁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계속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선(charity)의 개념에서 정의의 개념으로 옮겨감으로써, 결국 우리는 기존의 권력구조를 변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어야 한다. 가난한 자들과 억압당하는 자들에게 인간의 존엄을 회복해 주기 위한 투쟁과 쟁의가, 그리고 대항폭력(counter-violence)으로 제도화된 폭력을 반대하는 힘의 정치(power politics)가,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권세의 영적 틀(spiritual framework)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백성의 화해라는 궁극적인 목적의 틀 안에서 유지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는 호세 보니노(Jos Miguez Bonino)의 말을 인용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이는, ‘우리의 투쟁이, 가장 참되고 진지한 경우일지라도, 오로지 ‘꼴찌에서 두 번째’의 행위(penultimate)로 간주될 수 있다는 인식을 요구한다. 우리의 쟁의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최후의 투쟁은 아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우리의 적들 가운데 그 누구도 최후의 적은 아니며, 궁극적인 악의 세력도 아니다. 우리의 대립양상(contrast)은 결코 검거나 희지 않으며, 언제나 회색이다. 오늘날의 적은 내일 또 다른 차원에서 형제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성취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도록 막아준다.”14)



4. 저항의 영성을 위한 지표들



 저항의 영성은 우리 세계의 권력투쟁들 가운데 주어진 증언의 행위이다. 이 영성은 “영을 분별하는”(discerning the spirits) 노력들 가운데서 끊임없는 깨어있음을 요청한다. 이러한 영적 분별은, 국제금융기구들의 대표들과 대화할 때, 그들이 공식적으로 선포한 목적들과 구체적인 상황에 대응해 작동하는 기능적인 가치들(operational values)과를 구분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하다. 이러한 분별은 이른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지배적인 경제적 패러다임의 논리나 “정치적 현실주의”(political realism)의 지지자들에 의해 내세워진 합리성의 주장에 대해서도 똑같이 필요한 것이다. 하벨(V clav Havel)은 이 확고한 경계의 태도를 “진리로 살아가기”(living in the truth)라고 특징지었다. 1948년 암스테르담 총회의 메시지가 그토록 힘있게 묘사한 바와 같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과 ‘예’라고 말하는 것은 신념에 찬 용기이다.



 저항의 영성을 위한 지표들(signposts)을 밝혀내기 위한 시도는 우리로 하여금 거슬러 올라가 1983년 WCC 밴쿠버총회와 1991년 캔버라총회 사이에 에큐메니컬 공동체가 주력해왔던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JPIC)을 위한 심의과정(conciliar process)을 되새기도록 해준다. 그 과정은 1990년 3월 서울에서 개최된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한 세계대회’(World Convoca-tion on Justice, Peace and the Integrity of Creation)에서 절정에 달했다. JPIC 서울대회의 가장 중요한 산물은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한 10가지 확언들(Ten Affirmations on Justice, Peace and the Integrity of Creation)이다. 이들 확언들은 흠 없이 온전한 생명과 만인을 위한 올바른 관계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들 각각의 확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이 신앙을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둘러싼 구체적인 충돌의 상황에 각기 적용시킨 선언으로 시작한다. 전통적인 신앙의 확언들이 그릇된 믿음과 과오들에 대한 반대나 비난에 의해 보완되었다면, 서울대회의 행동지향적인(action-oriented) 이 확언들은, 차츰 최후의 투신을 위한 다짐에 이르도록 우리를 이끌면서, “우리는 저항할 것이다”(We will resist)라고 선언함에 의해 보강되고 있다.



 이 서울대회는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한 상호의 책임(commitment)과 약속에 대한 예배로써 대미를 장식했다. 이 예배는 저항의 영성을 위한 지표들을 명시해 주는 10가지 확언들을 기초로 하여 구성되었다.



 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 우리는 힘을 독점하고 변화를 막는 권위에 저항한다.

· 우리는 가난을 창출하고 영구화하거나 이를 불가피한 것 또는 근절할 수 없는 것 으로 받아들이는 세력에 저항한다.

· 우리는 모든 인종과 민족(ethnic), 계급(cast)이나 토착집단(indigenous groups) 에 속한 인간들의 권리를 부정하는 행위에 저항하며,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착취에 저항한다.

· 우리는 여성들에 대한 폭력을 영구화하는 가부장제적 구조에 저항한다. 이는 교회와 사회에서 여성의 온전한 참여를 배제하는 구조이다.

·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는 정책들과 커뮤니케이션의 힘을 소수의 손에 집중하는 정책들에 저항한다.

· 우리는 국가 안보 이론에 저항하며, 그 이론의 근거가 되는 대량살상무기의 사용, 군사적 침략과 개입, 그리고 점령에 저항한다.

· 우리는 피조세계를 오직 인간을 위한 착취의 자원으로 대하는 방식과 태도에 저항한다.

· 우리는 땅을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시키고, 땅과 사람 사이의 유대관계를 부인하며, 이윤을 위해 땅을 황폐화시키는 모든 인간의 탐욕을 거부하며 저항한다.

· 우리는 어린이와 젊은 세대의 권리를 유린하고, 이들을 악용하거나 착취하는 권력에 저항한다.

· 우리는 인권을 유린하는 모든 구조와 체제들에 저항하며, 특히 고문과 실종, 탈법적 처형, 그리고 사형제도에 저항한다.15)



 저항의 영성을 위한 이 지표들은 JPIC 서울대회가 치러진 지 14년이 경과한 오늘에도 그 타당성이 상실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대안적인 가치 체계를 위한 분명한 증언들로서 변함없이 우뚝 서있으며, 또한 영적 분별의 과정을 위한 구체적인 기준들을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어떤 특정한 행동의 형태를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국제금융기구들의 정책들에 대한 논의과정에 참여하는 자들을 위하여 방향과 지침을 제공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편집자주| 이글은 2003년 10월 28-30일 워싱턴DC에서 WCC와 국제금융기금(IMF)/세계은행 사이에 이루어질 논의구조를 위하여 지난 9월 제네바에서 가졌던 경제와 금융정책을 위한 WCC, 교회들, 관련기관들과 협력단체들의 준비협의회에서 현 WCC총무인 콘라드 라이저 박사가 발표했던 내용입니다.





각 주



1. 이 장은 출판된 필자의 저서 두 권에서 끌어낸 것이다. 1) Life in the Spirit, chapter 6 (pp. 56-61) in: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Holy Spirit, by J. de

Santa Ana, K. Raiser and U. Duchrow, WCC/Geneva 1990, 2) Moral and Spiritual Formation, chapter Ⅲ.2 (pp. 148-159) in: Konrad Raiser, For a

Culture of Life. Transforming Globalization and Violence, WCC/Geneva 2002.



2. Breaking Barriers-Nairobi 1975, ed. by David Paton, WCC/Geneva 1976, p.240



3. Op. cit.,p.240



4. Gathered for Life, ed. by David Gill, WCC/Geneva 1991, p.112



5. Op. cit.,p.89



6. Signs of the Spirit, ed. by Michael Kinnamon, WCC/Geneva 1991, p.112



7. 이 저서를 참고하라. Gwen Cashmore and Joan Pulse, Clearing the Way: En Route to an Ecumenical Spirituality, WCC/Geneva 1990



8. Masao Takenaka, God is Rice: Asian Culture and Christian Faith, WCC/Geneva 1986, p.18f



9. Ibid., p.21f



10. 이 저서를 참고하라. Spirituality of the Third World, ed. by K.C. Abraham and Bernadette Mbuy-Beya, Orbis/Maryknoll NY 1994 p.3f



11. Ibid,.p.197f



12. Lead Us Not Into Temptation, Churches Response to the Policies of International Financial Institutions, WCC/Geneva 2002, p.27



13.  Ibid., p.28



14.  Op. cit., p.239f



15.  Now is the Time, Final Document and other Texts, World Convocation on 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 Seoul 1990, WCC/Geneva 1990, p.48ff


http://www.ncck.or.kr/book1.asp?categoryno=224&datano=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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