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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7/21 (01:08) from 80.139.185.135' of 80.139.185.135' Article Number :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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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화이트헤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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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화이트헤드인가?
                        Why Whitehead?

존 B. 캅
김상일번역


6년 전 미국에서 열었던 제3차 화이트헤드 국제학술대회에서 데이비드 그리핀 교수는 21세기는 화이트헤드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매우 환상적인 발언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발언같이 들릴지 몰라도 그리핀교수는 매우 심각한 어조로 말했었다. 나는 그리핀교수의 이 말이 아직까지는 환상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최근 우리 주변에 전개되는 형편을 살펴볼 때에 6년전 보다는 지금이 훨씬 더 환상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징후들을 발견하게 된다.

1. 별 볼일 없는 듯한 ‘화이트헤드’
20세기의 많은 사상가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화이트헤드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실로 이상할만한 일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보통 ‘화이트헤드 철학’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대부분의 유럽 그리고 북 미주 대학의 철학과에서는 거의 화이트헤드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영어권 세계에서 그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가뭄에 콩나기 정도이다. 학위 논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 왜 화이트헤드가 주류 철학계로부터 이렇게 외면당하고 있는가?
이에 대하여 그의 철학이 수학 혹은 수학적 물리학이 경도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수학사에서 볼 때 주 달기 정도에 불과하다. 수학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견주어 볼 때에 엄격한 경험적 실험을 치른데 있어서 실격이다.
그렇다면 화이트헤드의 수학이나 물리학의 주된 이론들이 지금 철학과 물리학의 영역에서 실격 판정을 받은 마당에 그의 사상을 연구하거나 전개 시키려 하는 시도가 자칫 공염불이 되지나 않을지 모른다.
물론 이에 대해 나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우리 화이트헤디언들은 서구 제도권에서 학문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지성계의 주류에 자리 잡고 있다고 우리들 자신을 자리매김을 하지는 않는다. 내가 50년 전에 화이트헤디언이 되었을 때에도 주류 학계에 속해 있지는 않았다. 오늘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오늘의 주류 문화계나 대학이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결코 그의 사상에 대한 나의 신념을 약화시킨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왜 21세기에는 화이트헤드 사상이 독보적으로 그것도 심각하게 중요시 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여기서 나는 매우 간략하게 나의 개인적 생각을 서슴없이 피력하도록 하겠다.

2. 위대하다는 전통들의 실패와 종합적인 것의 필요성
과거의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 인물이 이 세계가 필요로 하는 무엇을 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만약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할 인물이 있다면, 그 인물이야 말로 우리가 선택해도 별 하자가 없어 보이는 인물일 것이다. 세계는 지금 조각난 지식의 파편들을 모아 하나의 일관된 끈으로 묶을 종합적이며 보편적 지식에 대한 필요를 긴급하게 요청받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 ‘종교적’이라는 말을 새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라틴어의 ‘religio'란 원래 ‘함께 묵기’란 뜻이다. ‘종교’라는 세계의 모든 지역의 전통들은 사상과 실천, 개인과 공동체, 과거와 현재를 이 세계 속에 일관되게 종합적으로 묶어 내려고 했었다. 그러나 최근의 모든 종교 전통들은 종교가 본래 뜻하는바 원래 뜻을 모두 포기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살아남기 위해 파편 조각을 주워 모으기에 혈안이다. 그래서 종교 원래 의미대로의 종교는 더 이상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이슬람만은 종교 본래의 뜻을 묶어내려 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슬람이 그렇게 하려 하면 할수록 현대 세계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이익으로부터는 차단되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 이슬람은 종종 광적으로 되기도 한다. 나는 이슬람이 성취하려는 노력에 존경을 보이기는 하지만 최근에 이슬람이 이룩해 내려고 하는 종교의 종합적인 꿈이 중세기에 이슬람이 그러했던 바에 비교해 볼 때에 미흡함이 있다고 본다.
20세기 이전, 대부분의 철학은 종교 본래의 목적에 걸맞게 ‘종교적’이였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종교가 제의적 성격을 띤 경우를 제외하고는 종교와 철학이 구별되지 않았으며 구별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았었다. 철학은 교회가 가르치는 교훈들로부터 철학자체를 분리해 생각하고 있으며, 이성의 이름으로 신학이 다루던 주제들을 제 나름대로 다루어 내려하고 있다. 철학은 이성의 이름으로 종교가 하려던 ‘한데 묶어내기’를 더 잘 해낼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행하게도 데카르트는 이원론에 치우쳐 통전적 종합이라는 질문을 끄집어내려 했었다. 그의 물질과 정신 이원론은 현대의 상식이 되고 말았다.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그 결과는 종합적이 되기는커녕 환원주의에 빠지고 만다. 물질/정신의 이원론에서 하나를 어느 다른 하나에 흡수시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 물질세계를 인간 정신세계 속에서 생겨난 피조물 정도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통전을 추구하는 계획은 좌절되었고, 지식의 파편화는 이원론이란 흐름 속에 휘말리고 말았다.
칸트철학이 현대철학에 이룩한 업적은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서 해낼 수 있는 것이란 보잘 것 없는 것임을 보여준 것이다. 경험주의자들은 합리주의자들의 업적을 평가 절하했다. 흄은 경험주의적 방법론을 엄격하게 적용했으며, 이러한 초기 경험주의적 태도는 점차 정당성을 잃고 말았다. 니체나 포이엘바하는 칸트의 업적을 더 진전시켰다. 그 결과로 철학 전반의 성격이 종합적이라기보다는 분석적이었고 피상적이 되어 버렸다. 철학의 에너지는 현실에서 매김 하기 보다는 물려받은 철학적 사고 틀에 점점 얽매이게 되었다. 그 결과 20세기 후기 철학은 포스트-모던적이 되었으며 해체주의로 더 나아가게 되었다.
개신교교인들은 다른 종교들 보다 더 재빠르게 현대사상에 적응해 왔다. 우리들은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을 수용했으며 우리의 관심을 바로 인간 자체에 기울이게 되었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사회학과 심리학 가운데서 인간의 파편을 주워 모으기에 분주했었다. 우리에게 지금 남아 있는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물으면 허탈감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내세 구원주의에 경도되기도 했다. 또 가정의 가치에 경도되기도 했다. 또 사회 개혁에 관심을 쏟기도 했다.
오늘에 와서 우리는 좀 더 포괄적인 무엇이 없는가 기웃거리기도 했다. 생태위기는 자연에 대한 그동안 무관심을 갖도록 했다. 이런 차제에 화이트헤드의 과정 신학은 뭔가 대답을 줄 수 있지나 하고 대두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개신교회 분위기에서는 잠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교회는 개신교회와는 달리 뭔가 희망을 주지나 않을가 관심을 갖게 한다. 가톨릭의 어원인 ‘가족적’이란 말의 의미가 곧 우주가 내 집이란 뜻이 아닌가? 가톨릭은 세계 구석구석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신자들이 뛰어들도록 함으로 어떤 범 우주적인 관심을 갖도록 했다. 각 방면의 지식을 취합해 제기되는 주요한 질문들에 어떤 대답을 하도록 했다. 그야말로 가톨릭은 종교 본래의 취지대로 ‘한데 묶어’내려 했었다. 가톨릭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 거기로부터 무언가 배우려고 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일련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우주적이고도 포괄적이라는 의미에서 스스로 ‘가톨릭’이라고 자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의 견해에 의하면 이런 의미로서 ‘가톨릭’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막상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별 볼일 없었다. 가톨릭 교회는  파편적인 부스러기 신세를 면하기 위해서 어떤 이념들을 하나로 묶으려 하기는커녕, 교회는 중앙 집중화된 교권을 더 유지 강화 시켜 내려고 했었다. 집중화된 교권을 교회 밖을 향해 설득력 있는 대안을 내놓으려 하지는 않고 고리타분하고 고루한 전통에 사로잡혀갔었다. 드디어 교회는 그들의 교권으로 도덕과 지성적 권위들을 갈아 치웠다. 제2바티칸 공회이후 잠시잠깐동안 영광스럽던 시간이 잠시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그것도 잠시이고 자기 방어에 급급하게 되었다.
인도와 동아시아의 종교들은 역사적으로 사물들을 하나로 묶어내려 했었다. 그것도 잠시뿐 동아시아에서 종교들이 서로 만나면서 종교의 이러한 본래의 중대한 꿈을 접어 버리기 시작했다. 상호간의 관용이 동아시아 종교의 큰 업적이긴 하지만, 어느 한 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더 포괄적이라는 아집을 대가로 지불하고서나 그것이 가능해졌다. 나의 생각으로는 동아시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에 의해서 라기 보다는 그들의 민족문화에 의해 더 잘 하나로 묶여져 나가는 것 같다. 나는 대부분 일본인들의 참된 종교는 ‘일본적’이 되는데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불교, 신도, 유교적이 된다는 것이 곧 사물들을 제 나름대로 종합적인 하나로 묶어내는데 안성맞춤이라는 사실을 자처하곤 한다. 17세기 기독교는 이런 점에서 즉 인간들을 종합적으로 묶어내는 데 있어서 부적합했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 일본의 종교는 일본사회를 종합화 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내가 생각키로는 중국이나 한국도 별 차이가 없다고 본다. 중국적으로나 한국적이 되는데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이렇게 하나로 묶어내는데 있어서 종교가 현대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서양이 지금 파편화 현상으로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동양에 지금 수입되고 있는 것 같으나 그것이 그렇게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는 보지는 않는다. 이렇게 볼 때에 아무튼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적’이라는 것이 그렇게 인류 보편적 가치를 묶어내는데 성공적이지는 못한 것 같다.

3. 현금의 상황
20세기에 대한 이러한 진단을 하는 이유는 건강하고, 포괄적이며, 종합적인 삶을 희구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고 도리어 외톨박이가 되어가고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18세기 말엽에는 사람들이 교회와 대학을 동시에 주목했었다. 지성인들도 과학, 사회, 도덕, 영적인 삶 같은 것을 추구했었다.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은 넓은 영역에 만연된 가치관이었다. 해야 될 일들은 점차로 어려워져가고, 안건들은 다양하고 의문스러워져 갔다. 그러나 이러한 노고들에 대한 요구 그 자체는 아직까지도 무시될 지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 두 세기 동안 이러한 노고 자체가 깡그리 포기되기 시작 했으며 특히 많이 앞서 나가는 서양사회일수록 그러했다. 사회 일각에서 어떤 종합화를 추구한다는 것이 주류 사상계 일수록 마치 강 건너 불보는 듯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경향이 결코 종합화의 꿈을 접지는 못했다고 본다. 종합화란 실존적이며, 심리적이며, 사회적이며, 정치적이며, 문화적이며, 윤리적이며,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믿기로는 인류가 앞으로 종합화를 획책해 나가는 꿈을 져버리게 된다면 우리 사회가 큰 재앙을 맞을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서 앞으로 우리가 생태계 문제와 경제문제를 하나로 종합화 시켜내지 못한다면, 이 지구는 지구상의 인구들을 더 이상 먹여 살려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지엽적 복지를 초월하는 가치에 합의를 만들지 못한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는 침몰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인류의 기계 기술이 인간의 본래적 이해에 접근하지 못하면 우리의 아이들은 다음 세대에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지 못할 것이다. 좀더 이점에 대해 얘기를 해보자.
나의 이런 주장은 경제학자와 생태계학자, 기계기술자와 심리학자가 상호 학제적 연구를 서로 해 나가야 함을 강조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목적에 부합해야 함을 의미한다. 아직은 미흡하나 양쪽을 넘나드는 종합화 작업이 이루어져 그것이 한갓 산발적인 일과성이 아닌 지속적인 것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4. 해답자로서의 화이트헤드
어떤 뛰어난 한 전문가가 우리들 대학 안에 있어서 이 지구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수 있다고 자처한다면, 내가 던지는 “왜 화이트헤드이냐”라는 주제가 설득력을 잃고 말 것이다. 내가 화이트헤드를 20세기 대표적인 사상가로 선정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 세기의 그 누구보다도 통전적인 이상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하는 종합화의 이상은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이상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도 이런 이상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시대의 학문적 그리고 지성적 분위기에서 그에 대한 사상이 폄하되면 될 수록 나에게 그에 대한 중요성은 더욱 절박했던 것이다.
내가 여기서 단정적으로 내리는 두 가지 판단은 첫째로 세계는 지금 종합적 사고를 하는 것이 점차 불투명해져가고 있다는 것과, 둘째로 화이트헤드가 금세기의 가장 종합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사상가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판단은 첫 번째 것보다 더 논쟁적이다. 만약에 어느 누군가가 20세기에 종합적인 사상가를 찾기로 작심한다면 상상 밖으로 그런 사상가가 매우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화이트헤드의 업적들은 금세기에 갑자기 돋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이런 저런 화이트헤드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말하는데 별 흥미가 없다. 나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해 즐겁게 받아드리려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제 나름대로의 업적을 성취했다면 그것마저도 큰 성과로 보려고 한다. 나는 어떤 사상이 상대적으로 괄목한 성과를 거두었다면 그것마저 기쁘게 여기는 바이다.
물론 어떤 사상가는 눈여겨 볼만한 자료들을 종합화시키는 데 성공한 경우도 있다. 그런 가운데 한 분이 바로 데이야르 샤르댕이다. 그는 폭넓은 생물학적인 자료를 모아 자기 사상을 재구성했다. 그는 진화과정 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이전의 생물학적 자료들을 가톨릭 철학과 신학에 종합화 시켰다. 그의 「인간 현상학」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가톨릭교회는 그를 그의 생존동안에는 경원시 했지만, 바티칸 제Ⅱ공회는 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었다. 토마스베리와 브라이언 스윔의 「우주이야기 The Universl Story」는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Mary Everly Tucker와 John Grim에 의해 인도된 생태학술 대회 씨리즈는 이 분야에 있어서 큰 영향을 주었다. 지금 대헌장에 이룰만한 샤르댕의 저작들은 화이트헤드 연구가들에게 매우 인상 깊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화이트헤드와 샤르댕의 관계는 서로 경쟁적 혹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다. 샤르댕이 생물학과 신학을 연결시키려던 노작은 화이트헤드의 노작과 매우 비슷하다. “과정신학”이라는 책 제목이 샤르댕 학자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그 내용 속에는 화이트헤드와 샤르댕을 관계 시키는 것들이 있다. 다가오는 2005년 2月 에 두 진영의 연구 학자들이 클레어몬트에서 처음으로 만나 서로 공동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모색해 볼 것이다. 이와 같이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종합적인 데 있으며 같은 관심사를 갖는 분야와 연계해 나갈 것이다.
여기에 나는 한 가지 반론도 펴보려고 한다. 화이트헤드가 아무리 종합적인 것을 지향한다고 하더라고 이 말이 결코 화이트헤드 사상이 만능이라고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되는 것을 스스로 거부했었다. 나는 그의 기본 개념에 있어서도 미해결의 문제가 있음을 지적해 말 할 수 있다. 그는 어떤 부분에 있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역시 시대의 제약 속에 살았으며 그는 빅토리아 사회 중류층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존경하는 나 자신이 오늘날 시각에서 볼 때에 시대 제약적인 것이 눈에 띠는 것이 사실이다. 그를 따른다고 해서 그에 대한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현재적 통찰과 입장은 바로 다음 세대를 향해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 이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고전적 인물에 대해서 눈길을 돌려서는 안 되는 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사는 금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 종합적인 것에 끌려들어가야 한다고 한다면 철학자나 신학자들은 더 그러했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사상가들은 종합화를 위해 화이트헤드 보다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던, 토마스, 데카르트 같은 사상가들에 끌려가고 있는 실정이다. 19세기 종합적 사상가는 헤켈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한 사상가 보다는 종합적 사상가들 전반에 걸쳐 연구해 보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나의 답은 이렇다. 우리가 오늘날 진정으로 원하는바 ‘종합적’인 것은 결코 전통 어느 사상가들이 말하던 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종합’이라는 말의 의미는 색다르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이점에 대해서 심각하게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던져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과연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의 발전 과정에서 전개된 이론들이 화이트헤드의 개념들을 무효화 시킬 것이냐이다. 화이트헤드는 물론 이들 이론들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다만 그의 초기 사상에서 일부 이들 이론들을 거론했을 뿐이다.
만약에 그가 상당히 관심을 쏟았던 상대성 이론의 실패가 그의 기본 개념들을 무효화 시켰더라면, 그의 종합화에 대한 꿈은 많이 약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화이트헤드는 본질적인 데 있어서 그가 주장하는 철학의 기본개념들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들과 같다는데 인식을 같이했었다. 물론 화이트헤드의 수학적 형식들을 뒷받침하는 수학이나 우주관에 있어서는 아인슈타인과 상당히 다른 것도 있었다. 여기에서 지금 내가 단정해 말할 수 있는 것은 화이트헤드의 개념들과 아인슈타인의 이론들 사이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양자역학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화이트헤드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현대 물리학자들과 초기 철학자들 사이에 서로 맞을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서로 반목하게 하는 것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종합적’이라는 관점에서 말 할 때에는 그들이 화이트헤드와는 비교가 서로 되지 않는다.

5. 과학과 가치들의 세계
여기서 ‘종합적’이라는 말의 핵심은 다름 아닌 물리적 세계와 그리고 인간의 세계, 그리고 그것들의 가치들과 의미들의 세계를 서로 어울리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과학들 사이에 통일을 이루는 것도 그 자체로서 하나의 큰 과제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모색하는 가치란 그러한 가치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 세계는 인간적 가치들과 그 의미에 있어서 서로 통전이 되어야 한다. 즉, 서로 간에는 결코 큰 차별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종교 Religion'라는 말은 이런 인간 세계를 두고 하는 말인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인간적인 가치의 세계 혹은 주관적 세계를 물리적 혹은 객관적 세계와 통전시키려 했었다. 만약에 그가 추구하려 했던 ‘종교’가 근본적으로 이 점에 있어서 빗나가는 것이라면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며, 나는 그가 아닌 다른 곳에서 종교의 이상을 찾았을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수리물리학 분야에서 보이는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는 차라리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판단으로는 그의 통찰력에 있어서는 비상하게 걸출한 면모가 있었다는 것이다. 전통신관에 대한 그의 수정된 견해는 그의 고유한 종교적 감성에서 내려 받은 면도 있지만, 물리학과 인간세계에 대한 그의 지식과 신관 사이를 잘 융해시킨 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제안한 제 이론들은 두 세기 동안이나 검증받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 그가 제안한 신학적인 견해들이 자기 시대에는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신이 이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신관 말이다.
나는 최근에 화이트헤드 신약성서 학자들과 같이 바울의 로마서 주석을 같이 쓰고 있다. 그 결과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수세기동안 잘못 해석되어져왔다는 사실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는 잘못 번역되어져 왔다는 것이다. 생각키로는 화이트헤드의 안경을 통해서만 바울이 바로 그리고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인간은 하나님 안에 서로 참여한다는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는 서로 속에 있는 자신이라는 것을 글로 남겼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믿었었다. 믿는 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고난과 부활 속에 참여한다고 믿었었다. 그의 언어는 인간은 서로 속에 그리고 하나님 속에 서로 내함적(內含的 internal)으로 관계된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이러한 내함적 관계를 잘못 이해하여 외표적(外表的 external)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경우 현실존재 actual entities는 다른 현실적 존재들의 구성원 속에 참여한다. 이러한 내함적 이해는 마치 현대 양자 역학적 세계관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그것은 바로 바울이 이해한바 인간 경험의 주요한 양상인 것이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바 내용의 요점은 과학과 종교에 대한 지식의 증가가 결코 화이트헤드가 종합적으로 어울리려고 했던 개념들을 결코 무효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과는 반대로 모든 분야에서 전개된 그의 사상 내용들이 그의 영향과는 별도로 그의 입장을 지지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희망적인 사실이 21세기에서 더욱 그러하리라고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다시 재삼 생각해야 될 점은 종합을 이루어내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나의 시대에 지배적인 과학이론들이나, 같은 시대의 지배적인 종교적인 이론들이 종합화를 이루어 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즉, 이들은 모두가 서로 상충되는 이념들의 전쟁을 벌려 왔던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해를 거듭할수록 서로간의 상황이 악화일로에 있었다. 과학과 종교 간의 대화는 그들이 기성에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경지원지 하는 존재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그들이 말하는 토대라는 것이 종합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만약에 양자 사이에 종합화를 위한 공분모가 없다면 모든 영역에 걸쳐 이론의 대 수정을 가했어야 할 것이다. 전반적으로 보아서 물리학자들은 다른 어떤 분야에서 보다 더 수정적이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론만이 19세기 여러 가지 가정들을 대량으로 수정하는 토대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시각에서 볼 때에 이들 마저도 아직 19세기적 가정들에 너무나도 뿌리 깊게 매달려 있었다. 그래서 그들 이론들에는 앞뒤가 서로 안 맞는 경우가 있었다. 즉,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자기모순에 노정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생물학의 영역에서도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대수정이 요청되었다. 화이트헤드의 관점에서 볼 때에 신 다윈의 진화론과 인문학적 신념체계 사이에는 어떤 종합적인 관계가  엿보이지 않는다. 진화론의 밑바닥에 기술돼 있는 개념 구조는 근본적으로 환원론적 이었고 결정론적이었다. 진화론은 생물을 한갓 복잡한 구조를 갖는 기계로만 보았을 뿐 진화하는 생물의 내면적 주관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었다. 만약 이런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그리고 인간이 단지 진화적 과정에서 부산물로 등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인간도 기계 같은 세계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인간의 가치나 의미 같은 것이 설 땅은 없어지고 만다. 진화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정된 설명만이 종합화란 꿈을 실현할 수 있다.
이러한 종합화를 위해 생물학자들이 자기들 지론들을 스스로 수정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문제의 심각성은 더 해 갈 뿐이다. 낡은 물리학에서 나온 어떤 형틀에 기댄다는 것도 바람직스럽지 않다. 만약에 이들 형틀들이 관찰된 제 현상들에 잘 들어맞지 않을 때에는 사태를 바꾸어야 될 이유는 재검증될 수밖에 없다. 현재 지배적인 관학적이 모델로 볼 때에 화이트헤드사상의 한계성을 화이트헤드 사상가들이 고정시키고 나아가 생물학 안에서 더 나은 다른 모델이 있을 수 있는가를 모색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 물리학과도 연관 시켜 보고 인간 경험의 목적과 의미와 함께 할 수 있는 더 큰 종합화 된 시도에 참여해야 한다.
왜 화이트헤드인가? 그 이유는 이 다양한 모든 영역 안에 집어넣어 용광로 같이 주조 시켜 낼 수 있는 능력이 그의 사상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과정의 어려움도 집고 넘어가야 한다. 화이트헤드뿐만 아니라 그 어느 사상가도 제 이론들을 주조시켜 종합화 시켜 내는데 거의 성공적일 수 없다. 이 모든 이론들은 수정받아야만 그런 작업을 해낼 수 있다. 대부분 사계의 전문가들마저 이런 수정에 대항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외자가 이를 제안할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런 종합화에 직면한다는 것은 이 분야의 학자들이나 전문가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들을 그들 전문성 속에 갇히게 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방법이나 도구들만을 사용함으로 그들의 지식을 팽개쳐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종합화를 위한 수정작업은 대학 안에서도 재 걸음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태가 매우 절망적인 것 같으며 우리가 더 화이트헤드 사상적이 될 수록 점점 학계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 실정에 차라리 딴 곳에 가서나 정력을 소모해 버릴까하는 생각마저 갖게 한다. 그러나 아직 그러하기에는 인내가 더 필요하다. 오늘날 대학이라는 것이 고작 찢어진 휴지조각 같은 지식들의 단편들을 끌어 모아 수집해 놓은 휴지들의 하치장 같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점점 험악스러워져 가기만 하고 그 어디에선가 탈출구를 찾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기존 어느 구석에서 이런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화이트헤드에게서 한 가지 희망의 빛줄기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6. 군데군데 나타나는 희망의 징조들
다행히도 오늘날 사람들은 기존의 소위 정통이라는 것에는 모두들 불만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더 깊은 곳에서 지식의 샘을 찾아내려하고 되도록이면 모든 지식들이 통전돼 있기를 바란다. 이런 사람들에게 화이트헤드는 두말할 나의 없이 도움을 줄 것이다. 최근 화이트헤드의 관점에서 씌어진 글들이 다행스럽게도 도서관의 선반위에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은 화이트헤드가 직접 쓴 교육에 관한 것도 포함돼 있다. 교육철학자들 가운데서는 화이트헤드가 이 분야에서도 괄목할만한 인물로 보여 지기 시작한 것이다. APPE(Associate of Process Philosophers of Education)라는 학회가 조직돼 화이트헤드 철학적 관점에서 조망된 교육학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과거 교육은 주입식 교육을 이루었는데, 최근에는 반성적 사고가 고등교육의 성격과 구조를 결정해 나가고 있다. 이점에 관해서는 Marcus Ford 의 「Beyond The Modern University」를 참고 바란다.
다 아는 대로 화이트헤드 자신은 막상 과정 신학자로서 한편의 글도 쓴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신학적 주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어떻게 신학적 작업을 해 나갈까 주선하기도 했었다. 그는 이 분야에 수많은 추종자를 두었으며 그중에 나도 하나이다. 그의 사상에 대한 수정은 거듭 거듭되고 있다. 과정신학이 아직 변방에 있기는 하지만 무대의 전면에 나타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본다.
화이트헤드는 종교를 자연과학에 관련시키는 데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안 바버가 이 분야에 권위자이다. 그는 기포드 강연에서 화이트헤드가 행한 업적을 체계화 시키려 했다. 그러나 최근에 이 분야에 괄목할만한 성과물이 나오고 있다.
과거 수십 년 동안 물리학자들이 그들의 이론을 수정하려고 할 때에 화이트헤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자 이론에 있어서 특히 그러했었다. 최근 출판된 Timothy Eastman.과 Hank Keeton의 책은 내 말을 입증하는 주요 자료들이 되고도 남는다. 책 제목은 『물리학과 화이트헤드 :양자론, 과정 그리고 경험』이다. 과정 연구소 기관지 Process Studies에는 많은 논문들이 실렸었다. 미셜 에퍼슨은 「양자역학과 A.N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곧 출판할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합생 이론과 양자의 작용관계를 설명할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사상이 최고 물망에 오르는 다른 주제들은 단지 아직 수평선상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심리학자들, 심리치료학자들, 상담학자들 사이에서도 산발적으로 화이트헤드가 거론되고 있다. 최근 Franz Riffert와 Michel Weber가 편집한 책은 상당한 관심의 적이 되고 있다. Precess Studies에 최근 다루어진 적이 있다.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경영학 쪽에서도 화이트헤드가 거론되고 있다. 최근에는 베르그송과 들레즈와 연관되어 화이트헤드가 연구되고 있으며 이에 관해서도 Process Studies에 실린바 있다.
가장 최근까지 생물학과 연관하여 화이트헤드를 연구하고 있는 챨스 버취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내년 2월에 독일 Bielefeld에서 학제적 학술대회가 열린다고 하며 주제는 “현대 생물학에 대한 화이트헤드 사상의 타당성”이다.
나는 여기서 매우 산발적인 방법으로 화이트헤드가 얼마나 학제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서술해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조각난 학문의 단편들을 하나의 바구니 속에 집어넣는 데 화이트헤드가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는 가를 살펴보았다.

7. 경제학과 화이트헤드
이런 글들이 사계에서는 잡학으로 설령 무시당할지 몰라도 어떤 곳에서는 환심을 끌기도 한다. 화이트헤드 프로젝트가 어떤 경우에는 성공적이기도 하다. 내가 여기서 든 예들은 모두 내 자신의 경험에서 든 것으로. 나는 여기서 경제학과 화이트헤드의 관계에 대해 언급해 보려고 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경제학 이론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신학이다. 내가 여기서 신학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신념 체계(System of Belief)를 의미한다. 신념체계란 정치와 인격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종교라고 할 때에 그 말의 의미는 내가 이 강연의 모두에 ‘종교’라고 정의를 내린 것과 연관이 있다. 즉, 종교란 복지를 증진시키는 삶의 질서 같은 것을 의미한다.
경제 이론이란 매우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경제를 공부하고 경제에 관한 더 나은 이론을 제시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이 과제가 바로 화이트헤드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과제에 관해서 더 나은 이론들이 나와야 하겠으며, 또한 이 이론이 여러 분야의 이론들에 폭넓게 연관되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전 세계적인 영향을 주어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화이트헤드 경제학자들과 공동으로 「공동선을 위하여 For the Common Good」라는 책을 썼다. 우리는 현대 경제 이론들의 여러 기본 가정들을 비판하며 대안 이론들을 제시한다. 대안 이론이 나온 것을 토대로 정치의 유형들을 서술해 나가기로 한다.
물론 이 책이 아직 완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전문적인 경제학자들 가운데 이 문제를 놓고 철저하게 생각해 나간다면, 내가 보기로는 우리의 경제 틀을 많이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경제 전문가들로부터 어떤 비판을 받아 이론들을 발전시켜 나간다면 그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러 가지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꽤 성공적이었다. 이 책에 관한 논평을 받았는데 모두가 호의적이었다. 국가금상도 받았다. 출판사는 냉전이후 시대에 알맞도록 우리에게 재수정을 요청했다. 우리는 금융에 관한 제목의 글을 더 실으려고 한다. 이 책은 출판 된지 15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잘 팔리고 있고 나의 대표작으로 손꼽고 싶다. 나와 같이 글을 쓴 허만 데일러는 적어도 두 번이나 국제적인 상을 받았다. 그는 수많은 나라에서 강연자로서 초청을 받고 있다. 그의 건강이 나쁜 것이 매우 유감이다. 그래서 그는 많은 강연 초청을 다 수락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는 최근에 상원에 초청을 받아 자문역학을 권고 받았으며 의회에서 증언까지 했다.
안타까운 것은 막상 경제 전문가들로부터는 어떤 반응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비판한 내용에 대하여 가타부타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 책을 무시하고 말았다. 그들이 생각키로는 우리가 다룬 것이 경제학적이  다룰 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경제학자들이 저질러 놓은 결과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만든 여러 가지 경제학적 가정들에 대하여 던지는 질문들이 그들에게 위협적이다 느껴졌던 것 같다. 허만 데일러를 그들이 볼 때에는 권위 있는 경제학자로 여겨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실로 그는 경제학자 서클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주류 경제학계 안에서도 그리고 대학의 경제학과 밖에서도 소위 ‘생태 경제학’이라는 분야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태 경제학은 국가적 차원에서도 국제적 차원에서도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다. 그들 가운데는 일반 경제학을 생태 경제학에 한번 응용하려는 시도도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서 경제학 그 자체를 재고하는 접근 방법도 있다.
작년 가을에 나와 데일러는 캐나다 생태 경제학학회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 수백 명의 청중 가운데 경제학과에서 가르치는 교수는 두서너 명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환경학과나 공공정책 분야에서 가르치는 분들이었다. 또 다른 분들은 정부 기관이나 NGO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젊은 청중들은 무언가의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이었다. 설령 제도권에 들어와 있지 않았지만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그들이 변화를 바라고 있었고 이것이 미래의 새 물결이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정부나 NGO에 속한 어떤 영향력 있는 분은 틀림없이 생태 경제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설령 대학의 권위 있는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이들에게 희망을 건다.
모임에서 나와 데일러는 이 분야의 창설자로 대우를 받았다. 우리의 책은 ‘성경’이라고 까지 불려지게 되었다. 우리는 많은 점수를 거기서 받았으며 이런 대우는 그 어느 곳에서도 받지 못했었다. 그곳에서의 경험은 우리를 매우 고무시켰다. 우리는 생태 경제학을 진작시키기 위해서는 기존뿌리 박혀 있는 경제학의 토대를 뛰어 넘어야 할지도 모른다. 기득권자들의 경제학은 우리에게 지금 무용지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중세기 신학자들이 바늘 끝 위에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춤을 추 수 있는 가를 논한 것을 두고 비웃는다. 우리는 같은 비웃음을 오늘날 대학의 학문세계를 향해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용지물화 되어가는 대학의 학문에 비웃음을 보낼 때에 진정한 새 공동체, 새 기구, 새 일거리들이 생겨날 것이다. 화이트헤드 사상이 기존 사상과 학문세계에는 파격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신천지를 여는 데 공헌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8. 에코-페미니즘
화이트헤드 사상이 미래의 새 시대를 여는데 있어서 에코-페미니즘에 무언가 공헌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괄목하고 인상적이라 할 만큼 전 세계의 여성 자매들은 이 분야에 불굴의 노력을 해왔다. 화이트헤드사상이 에코-페미니즘에 오랜 동안 영향을 미쳐 왔지만, 죽은 백인 앵글로-색션 개신교 남성들이 에코-페미니즘이 덕을 입고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이들 자매들에게 바람직하지는 못하다. WASP로서 나 자신이 이들 여성 자매들에게 과정철학을 공부해야 된다고 말하고 권고하는 것은 현명한 것이라 보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보아서 에코-페미니즘과 과정철학은 같이 나란히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양자가 모두 학문세계의 변방에 있는 신세로서 전통이 가르친 것들을 개혁 수정할 사명을 공감하고 있으며, 이원론, 환원주의, 물질주의, 가부장제,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해야 될 역할을 공유하고 있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양성주의를 극복하려고 하는데 화이트헤드사람들은 이를 적극 지원하는 바이다. 우리가 많은 점에서 공유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나 전반적으로는 각자 따로 이다. 같은 공동분모 상으로만 함께 갈 수 가 있다. 동병상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공동 노력이 접점을 찾아내고 있다. 금년봄에 클레어몬트에서 가르치고 있는 캐롤 크라이스트에 대한 특히 이 점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크라이스트는 에코-페미니스트 여성 운동 분야의 지도자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볼때에는 대부분이 과정 신학자들로 구성된 클레어모트 분위기에서 바람직한 접합 점을 찾기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크라이스트는 위대한 과정사상계의 형이상학자이요 종교철학자인 챨스 핫츠론을 재발견하고 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에코-페미니즘과 평행할 수 있음을 발견했으며 딱딱한 철학적 개념 속에서 그녀의 통찰력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크라이스트, 로즈마리 류터, 매조리 수하키, 케셜린 켈러 등이 북미주 전역에서 클레어몬트에 이르기까지 에코-페미니즘에 관한 회의들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 그렇다고 결코 에코-페미니즘과 화이트헤드의 사상이 지평융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지평을 넓혀가고 있으며 상호 요동치는 운동을 같이 해나가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고 본다. 우리는 서로 또다른 자리매김을 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9. 공산주의 후기 사회와 동아시아
여러분들은 지금 내가 21세기를 말하면서 화이트헤드 사상이 매우 희망적인 사상임을 말하고 있음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화이트헤드 사상을 듣고 있노라면 지난 2세기 동안 거의 사상연구가 주로 철학에 치우쳐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도 주로 대학을 중심하여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서양이 결코 전 세계를 다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의 공산세계도 있고 동양세계도 남반부 세계도 있다. 다른 지역에는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내가 생각하기로는 동양이 종합적인데 서양보다 덜 저항감을 가지고 있는 줄로 안다.
화이트헤드 사상은 토착민들 속에서 더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원주민들과의 이런 친화성 대회를 가졌으며 그 결과는 매우 고무적이었다. 우리는 앞으로 이들 원주민들의 생각을 통해 모던 혹은 포스트 모던 사상을 재발견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들의 사상은 재조명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아직 이러한 때는 아직 오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과거 공산권 세계로 넘어가 생각해 보려고 한다.
비록 마르크스 사상이 더 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효력이 없어 보이지만 아직도 철학으로서의 역할이 다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마르크스 사상은 아직 행동하는 사상으로서 적격인 것은 사실이다. 마르크스 사상이 만들어 낸 결과는 실망스러워, 서양세계에서는 거의 흔적이 사라진 것 같지만 마르크스는 아직도 철학계의 화두로서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화이트헤드는 헝그리, 폴란드 같은 동구권 세계에서 어떻게 마르크스 사상과 조우할 수 있는지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서양사상이 화이트헤드사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화이트헤드로부터 어떤 이해를 구하는 곳이다. 니쉬다 키타로 일본학파는 화이트헤드 사상과 좋은 대화 상대가 되고 있다. 이런 대화는 불교와 기독교 사상 사이에 폭넓은 대화를 하는데 있어서 가교가 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지금 불교와 기독교간의 대화가 서양에서 보다는 더 중요시되는 것이 지적 분위기이다.
이번 대회를 후원하고 있는 최근에 등장한 한국 화이트헤드 학회는 화이트헤드 사상에 좋은 풍토를 마련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기독교가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과정사상이 이곳에 있는 교회들에게 도전이 되기도 하고 교회로 향해 가는 초대장이 되기도 한다. 한반도에 오래전부터 있어온 종교적 전통들과 과정사상이 잘만 만나기라도 한다면, 과정 사상의 가치는 대화를 통해 한결 돋보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아서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동아시아의 문화를 새롭게 재구성하기도 하고 한층 타당성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서양의 과학과 동양 사상의 지혜를 연결 맺어주는 고리 역할을 할 것이다. 칸트의 비판철학과 같은 서양철학이 폭 좁은 채널에다 철학적 토론을 제한시키지는 결코 않았다.
나는 나의 강연을 매우 고무적이고 촉망받을 만한 한 가지 일을 소개함으로 끝내려고 한다. 바로 중국의 경우이다. 중국에 과정사상이 소개된 이후로 오직 한 사람의 공로로 매우 급속하게 그리고 바람직하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바로 그 사람이 지헤 왕이다. 2년 전 북경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왕이 바로 북경 4차 대회를 꾸민 자라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북경대회는 많은 준비를 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오직 대회의 성공은 지헤 왕의 지도력 덕분이었다 우리 과정사상 연구소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을 했었다.
왕은 북경 사회과학원 회원이다. 그는 중국의 미래에 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중국이 현대화해 돼 나감에 있어서 미국을 닮아가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전통 가치가 열악하게 무너져 가는 마당에 가치중립적인 교육이란 결코 국가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현대화라는 것은 결국 명백한 생태계의 파괴를 가져온다는 것을 믿고 있다. 중국의 지성들은 서양의 현대화가 비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가 중국에 결코 긍정적이지 못하다는 것도 지적하고 있다. 왕은 그리핀교수의 수니 씨리즈 『Reenchanxment of Science』라 불리는 재구성주의 포스트모던 사상과 조우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으며 드디어 클레어몬트에 와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면서 과정연구소에서 지금 일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화이트헤드 사상을 중국에 소개하기에 깊이 몰두하고 있으며 경제적 도움 없이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북경대회 이전에 수권의 책을 번역했으며 권위 있는 잡지에 논문을 싣기도 했다. 그는 클레어몬트에 중국학자들을 초청하기도 했었다. 그는 서양학자들을 여러 사람 중국으로 불러 강연을 하기로 했었다. 북경대회 이후에 그는 일년마다 정기적으로 출판도 기획했으며 그는 중국 잡지에 과정사상가들의 글을 싣기도 했다. 그는 중국 대학교에 화이트헤드 과정사상을 연구하는 연구소를 지원도 하고 있다. 그를 돕고 있는 그의 아내는 신문을 발행하기도 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지금 뒷전에 밀려나가고 있는 운동들을 중국에서 지금 새롭게 발돋움을 하고 있다.
내가 생각키로는 왕이 지금 제2의 국제 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줄로 안다. 그 계획은 교육에 관한 것으로서 화이트헤드의 시각에서 새가치 부여의 교육이념을 개발하는 것이다. 지난 11월에 클레어몬트에서 열렸던 그 대회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왕은 중국 대학에서 일하는 대학행정가들을 추동시키려는 그러한 목적으로 대회를 열었다. 그들 가운데 40여명이 미국으로 오려고 비자를 신청했었다. 미국 대사관의 게으름으로 그들 가운데 반밖에 얻지 못했다. 비록 그랬지만 대회는 성공적이었다. 그 결과로 후속적으로 대회를 열 계획이며 중국에서 지속적인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연구소도 늘어날 것으로 본다.

10. 결론
양자역학 이론들은 화이트헤드에게서 흥미를 잃었으며 생태 경제학은 지리멸렬해졌고, 매우 협소한 학문적 공간에서만 다루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에코-페미니즘은 시들거나 과정사상과 연줄을 끊으려 한다. 중국과 동구라파에서 화이트헤드에 대한 관심과 흥미는 잠정적으로 수그러들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징조만이 결코 우리가 선택 가능한 미래라고는 보질 않는다. 오랜 동안 분석만하고 조각만 나던 시절로 곧 끝나고 새로운 종합을 시도하는 시기가 오리라고 본다. 점차로 폭 넓게 화이트헤드 사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실존적으로, 생태학적으로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사상으로 감지돼가고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 사상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게 될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20세기를 장식하는 말미에 서서 그의 사상을 추진시키려는 우리들의 노력이 21세기에는 어떤 배당 몫을 지불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화이트헤드가 던지는 모든 요구 사항들이 우리에게 지금 절실한 것이라면, 그것이 결코 내 개인적 자긍심만은 아닐 것이다. 끝

2004.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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