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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7/21 (04:07) from 80.139.185.135' of 80.139.185.135' Article Number :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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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간과 타인의 시간
         

         내 시간과 타인의 시간(My Time and the Time of the Other)

                                                                  Rudolf Bernet


시간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어렵다. 예전의 수사학 교수였던 아우구스티누스조차 절망적인 탄식으로 시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시작한다. “시간은 정말로 무엇인가? 나에게 아무도 묻지 않을지라도 나는 안다. 내가 질문자에게 설명하고자 한다면, 나는 알지 못한다.” 이러한 어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첫째, 시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시간적이기 때문이다. 즉 시간을 전제하고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을 추상적인 연구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을 초월하여 문제를 제기할 수 없고, 영원성이라는 관점 아래서 시간을 관찰 수 있었던 곳으로부터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제기하는 두 번째 어려움은 시간과 망각 사이의 필연적인 연관성과 관계가 있다. 시간은 지나가고 사라지며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 것에 비하여, 안다는 것은 기억력과 인지를 전제한다. 정말로 시간의 경과는 우리의 이전의 경험을 망각하게 할 뿐 아니라, 시간이 또한 우리에게 시간 자체를 망각하게 한다. 우리가 과거로부터 어떤 것을 기억하는데 성공할 때도 우리는 시간을 지속적으로 망각하고 있다. 우리가 시간을 파악하여, 시간을 우리 행동과 인생의 목표에 관계시키며, 그래서 시간을 인간적인 이야기가 되게 할 때조차도, 시간은 우리로부터 사라진다.

시간에 대한 앎의 어려움이나 불가능성에 대한 관찰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탄식의 깊은 이유에 아직 도달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파악할 수 없고, 적어도 우리가 약간이라도 이성적인 한에 있어서 우리는 계속 평화롭게 살기 위하여 방치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슬프게 탄식을 하고 있다. 그가 바로 알지 못했던 것, 즉 그가 회심하기 이전에 신의 사랑이 그와 죄 많은 그의 삶을 돌보아 주고 있었다는 점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내적인 눈을 지난 과거의 삶으로 한번 더 되돌리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이 무엇인가를 왜 알아야만 하는가? 예를 들면 우리는 세기가 바뀔 때 공통적인 미래에 대해 함께 성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시간의 본질에 대한 가장 어려운 문제를 즉시 이해하지 않고서 20세기로부터 21세기로의 전환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 논할 수 없다. 현재의 시간에 대한 것이 너무나 특별해서 그러한 성찰을 하도록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미래의 시간에 있을 어떤 것을 배울 수 있는가? 한 시대로부터 다른 시대로의 전환이 지속인가 아니면 단절인가? 더 이상 나에게 속하지 않는 미래, 즉 나의 죽음 이후에 일어날 미래에 있어서 책임의 시간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유용한 짧은 시간에 우리는 이런 질문들 중 어떤 것도 전혀 다룰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의 시간을 경험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집중하고자 한다. 우리의 삶의 중요성은 단지 우리 자신에 의존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다른 사람이 우리의 삶을 함께 결정하고, 그래서 우리의 삶의 시간을 변화시키는가를 탐구해야만 한다. 이는 적어도 두 가지 방식으로 발생한다. 첫째, 여러 세대를 함께 묶여 있고 우리의 생애가 역사적인 시간으로 변화되는 공동체의 삶으로 우리의 삶이 들어 갈 때 발생한다. 둘째, 우리의 삶의 시간이 윤리적 시간으로 되는 타인에 대한 윤리적 책임감을 우리의 삶에 부여할 때 발생한다. 우리가 하는 성찰 끝 부분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20세기로부터 21세기로의 전환과 좀더 특별히 역사적인 의미를 제외하고 이러한 전환이 본질적으로 윤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자연적 시간으로부터 나의 삶의 시간으로의 전환, 나의 삶의 시간으로부터 역사적이고 세대를 가로지르는 공동체시간으로의 전환, 역사적 시간으로부터 타인과 이방인에 대한 윤리적 책임의 시간으로의 전환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몇 번이고 전환으로서 시간과 관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전환으로서 시간이 어떤 시간으로부터 다른 시간으로의 전환에 있어서만 명확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1. 내 삶의 시간
베르그송이나 후설과 같은 철학자들은 생애를 살았던 시간으로 본다. 그 결과 그들은 생애를 심리적이나 정신적인 시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내 삶의 시간과 물리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사물들에 발생하는 시간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들에 따르면 물리적인 시간과 다리 심리적인 시간은 공간적인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지 않고, 모든 공간적인 개념과 이야기할 수 있는 형식을 제거한 것이다. 디지털이 아닌 시계는 그러한 공간적인 개념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심리적 시간은 그러한 시계로 측정될 수 없다. 그렇다면 디지털 시계의 시간 범위를 확대하여 이용하면 어떨까?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도 숫자와 계산을 하고 있는 심리적인 활동은 시간적인 움직임에 대한 실제적인 측정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만약 베르그송이나 후설이 우리가 사용하는 디지털 시계들을 알았더라도 그 들은 그 시계들이 그들의 코트 주머니에 넣어둔 금시계처럼 심리적인 시간을 결정하기에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한 여지가 없다. 왜냐고? 왜냐하면 심리적인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과 달리 불연속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디지털 시계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에 적용할 수 있고, 서로가 그들에게 붙여진 숫자에 의해서 만이 구별될 수 있는 무한대의 점으로 나뉘어질 수 있는 시간을 측정한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있는 디지털 시계의 이러한 객관적 시간은 우리의 삶의 시간을 경험하는 방법에 적용할 수 없다. 행복과 슬픔은 지속되는 기간이 있지만, 그 지속의 방식은 어떤 시계로도 측정될 수 없다.

심리적 시간이 가지는 두 가지로 대표되는 속성들, 즉 심리적 시간이 가지고 있는 지속성이나 중단되지 않는 특성과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인 본질을 잠시 생각해보자.

내 삶의 심리적 시간의 지속성에 관한 한, 이것은 곧 내가 내 삶을 사는 방식에만 관계되는 것으로 인지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의미는 뭔가 아주 사소한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누군가에 의해서 경험되지 않는 심리적 시간은 부조리한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혹은 그 의미는 이러한 지속성이 내가 내 삶의 시간을 사는 방식의 뜻을 담고 있어 어떤 다른 삶이 내 삶에 끼여들어 내 생애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방식은 담고 있지 않다. 또한 내가 다른 사람의 생애를 경험하는 방식은 반드시 지속성에 의해서 특정 지어지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거론하고 먼저 내가 연속되는 내 삶을 사는 방식에 대해서만 다루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이 연속되는 내 삶을 사는가? 무엇과 무엇간의 지속성인가? 후자의 대답은 아주 분명하다. 즉 이것은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 사이의 지속성의 문제다. 이러한 지속성에 관하여 베르그송, 후설, 하이데거,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지금 현재의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설에 동의한다. 예를 들면 지금 내가 하는 것은 내가 어제 했던 것의 계속으로서 나에게 나타나며 내가 내일 할 것에 대한 준비로서 나에게 나타난다. 다른 말로 말하면, 내 현재 삶의 의미는 과거와 미래의 삶의 의미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상호 얽혀진 (따라서 의존적인) 것으로 나에게 보인다. 분명히 그 어떤 방법으로도 내 삶에 지속성의 경험은 내가 항상 똑같은 것을 경험하는 것으로 생각나게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내가 어제 했던 일에 갈등을 겪고 있는 어떤 일을 할 때조차도 나의 현재 시간은 여전히 나의 과거 시간에 얽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일생의 경험에서 주장되는 지속성은 반드시 내 삶이 가진 내용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용 없는 시간도 없고, 지금 경험되는 어떤 것이 없이 현재의 경험도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는 시각 그 자체는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어떤 것이 아니라 현재로 보이는 어떤 것을 허용하는 일시적인 범주에 속한다. 시간은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시간은 그 자체가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경험에 내용과 함께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칸트는 시간을 주체가 내용에 귀속되는 한 형태라고 주장한다. 반면 하이데거는 시간이 하나의 존재자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라고 하면서 존재와 시간을 일치시키고 있다.

시간의 존재가 가지는 양상이 어떻든지 내 생애의 현재 경험에서 나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나의 현재 삶, 과거 삶, 미래 삶을 함께 항상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서도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현재, 과거 삶, 미래 삶을 함께 항상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서도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외와 같은 현재, 과거, 미래 시간의 상호 얽힘은 나의 삶에 지속성이 주는 나의 경험에서 초래되고 있다. 지속성과 나의 삶이 가지는 시간의 총체에서 오는 생활이 특히 강하게 부각되는 기억과 기대와 경험의 본질을 천착함으로써 이 모든 것들은 분명해진다.

기억하는 일에 있어서도 나는 다시 한번 현재에서 내 과거 삶에서의 일을 경험한다. 이것은 나의 과거 삶에서의 특별한 경험으로 기억하는 일에서 내가 경험하는 것은 현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속하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뭔가를 기억해 냈을 때 나는 그것을 정말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 경험은 더 이상 거기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과거에 속한 것으로서 내가 현재로서 경험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엄밀하게 말해서 나는 현재 그것을 이미 끝나버린 어떤 것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억하는 일은 복잡한 과정이어서 기억력을 고등동물만이 가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동물들이 기억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의심하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기억하는 일을 그처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시간으로서 시간을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의 이전의 경험 내용과 똑같은 것을 현재에 기억한 내용, 그 차이는 현재와 과거시간에 속하는 것에 관계할 뿐이다. 더구나 기억하는 일은 시간 경험이라는 아주 복잡한 형태이다. 왜냐하면 기억하는 일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경험이 단순히 한 지평의 형식 속에서 과거를 포함하는 일반적인 경험과는 달리, 기억하는 일은 그 자체가 명백히 과거를 가리키고 있어서 그것이 지나간 것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현재가 된다.

이리하여 기억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과거, 미래와 얽혀진 현재시간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지나가고 있는 움직임으로서의 시간도 경험한다. 이러한 시간의 일시성이 가지는 아주 복잡하고 향수 어린 색다른 경험이 주는 커다란 매력은 어쩌다가 기억을 해낸 사람이 시간은 생각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구체화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기억하는 일에는 내 생애의 지속성뿐만 아니라 그 시간을 통한 나의 정체성도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 두 경험들은 너무 얽혀 있어서 그 지속성이 나의 개인적인 정체성에 기인한 것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를 결정하기 어렵고, 또한 개인적인 정체성이 이미 내 생애의 지속성이 가지는 경험에서 추정되었는지도 결정하기 어렵다. 어느 경우에서든 일시적인 시간의 경험으로서의 기억하는 일은 과거의 잃어버린 시간이 현재의 시간에서 현재로 다시 한번 만들어진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준다. 프르스트의 걸작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기억의 문제에 전적으로 전념하고 있는데, 이 책은 ‘발견한 시간’이라는 제목을 가진 장으로 의미심장하게 끝을 맺고 있다. 내 생애의 지속성과 이러한 시간을 통한 내 인격적인 정체성에 대한 경험은 기억하는 일이 현재의 관점으로부터 과거의 시간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관점으로부터 미래의 시간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프르스트의 작품이 한번 더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사람은 항상 미래의 눈으로 기억한다. 마르셀이 그의 과거 삶을 잃어버린 시간으로 기억했을 때,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의 책 쓰기를 시작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렇게 해서 과거에는 그가 단지 꿈으로만 꾸어 왔던 존재의 작가가 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보다 더 좋은 미래의 문으로 과거를 현재로 다시 한번 만드는 일로서 기억하는 일, 즉 프르스트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삶의 지속성과 자신의 인성의 정체성에 대한 경험으로서 기억하는 일이 그처럼 행복한 시간의 경험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는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있다. 이러한 행복은 극복하는 일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극복하는 일이 있는 곳에는 항상 위협이 따르기 마련이다. 기억하는 일은 사실 손실과 과거의 잊어버림에 대한 극복이며 따라서 생애와 인격적인 정체성을 붕괴시키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기억하는 일은 단순히 시간과 우리 자신에 대한 이미 명백한 현재의 앎에 대한 확신 이상의 것으로 기억하는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과거의 망각과 자아 상실에 대한 우월성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터이기도 하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시간은 기억과 망각이 가지는 문제와 같은 것으로 망각을 극복하는 일과 같은 기억하는 일은 망각의 새로운 형태임을 의미한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과거로부터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으며 기억된 과거는 본래의 현재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때의 그 시간은 비록 그 시간이 우리의 삶을 가장 강하게 결정짓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코 완전히 그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없고, 결코 그것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낯선 것으로 남는다.

이제는 기대에 고유한 시간 경험의 문제로 넘어가자.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두드러진 사실은 기대가 기억의 경우와 아주 비슷하다는 점이다. 미래의 존재를 미래 적인 것으로 현재로 이끌어들여 올 때에도 우리는 우리 삶의 지속성과 우리 인격의 동일성을 경험한다.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앞에서 과거에 대한 기억이 또한 우리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역으로 이 미래에 대한 기대는 나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전제한다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21세기가 우리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를 숙고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공동의 과거에 대한 기억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종종 철학자들에게는 기대를 반대 방향의 기억 또는 “미래에 대한 기억”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 미래가 내 과거와 동일한 방식으로 나에게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내 과거의 삶이 애초에는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었지만 이제는 전적으로 내 소유물이 된 것과는 달리, 내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단적으로 나에게 달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기억은 우선 역시 내 의식 혹은 나의 사밀(私密)한 삶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무엇이다. 그에 반해 기대는 내 자신에 대한 앎을 능가한다. 기대는 다른 삶 또는 타인의 삶, 즉 “외부”에 관계한다.

이렇게 숙고하는 가운데 기대와 기억의 차이점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어떤 전환점에 도달한다. 그 전환점이란 말하자면 내 시간에서 타인의 시간으로서의 전환이다. 내 시간은 그것이 나에게 속한 한 내 삶의 시간이다. 그것은 중단 없는 지속을 통하여 내 인격의 동일성 확인시켜 주는 시간이요, 다른 말로 하자면 주관적일 뿐 아니라 심리적인 시간이다.

그러나 내 시간의 주관적인 성격은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내 시간이 주관적이라는 말은 나는 내 삶의 시간을 내 의식을 통하여 표상할 수 있음을 뜻할 수 있다. 아니면 그 말은 내 삶의 방식이나 내가 내 삶의 시간에 실존적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서 나는 시간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이든 어쨌든 현재 시점에서 나는 현재의 삶뿐 아니라 내 과거 및 미래의 삶에도 관계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 (과거와 미래로) 확장되어 흐르는 시간에 대한 경험의 주관적인 성격은 그 시간이 내 삶의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시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타인은 누구도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에 관계해야 한다. 만일 내 삶의 지속성을 위협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서 나온다면, 즉 과거에 대한 나의 망각과 미래에 대한 나의 불확신에서 나온다면 이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내가 홀로 내 삶의 시간을 지배한다. 그러나 나를 다른 사람에게서 독립시켜 주는 이 지배권은 또한 나를 내 삶에 제한시킨다. 내 가 내 삶의 시간의 의미를 결정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면 마찬가지로 나는 이 삶의 무게를 홀로 감당해야만 한다. 달리 말하자면 내 삶의 시간의 의미를 결정하는 일에 타인이 끼어든다면, 그 결과 나를 타인에게 의존하게 되지만 그것은 동시에 하나의 해방이 된다. 내가 내 삶에 대한 고독한 지배권을 멀리 할 때 내 삶의 시간은 내가 나 자신의 것으로부터 안출해 낼 수 있는 것, 혹은 내가 내 삶에서 만들어 내기를 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된다.

이제 우리는 타인과 관계에 의해 내 삶의 시간이 변화되는 두 가지 다른 방법에 대한 논의하려고 한다. 그 두 방법이란 역사와 윤리다. 역사의 시간은 내 삶의 시간의 의미를 내 삶의 한계 너머로 확장한다는 것을 함축하며, 윤리의 시간은 내 시간을 다른 사람을 위한 시간으로 만드는 책임을 함축한다. 역사의 시간은 내 삶의 시간을 위협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내 삶의 시간의 경험에 끼어들고 방해한다. 그래서 21세기를 20세기의 연속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단절도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전환을 어떤 역사적 전망 또는 윤리적 전망 속에서 보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2. 역사의 시간
우리는 심리-주관적인 시간이 그 지속성에도 불구하고 간격 또는 어떤 소외의 형태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미래의 시간이 현재의 시간이 되고 현재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이 되지만 한 시간으로부터 다른 시간으로 흘러가면서 전환되는 것은 회복될 수 없는 변화를 함축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변화로 말미암아 내 시간이 타인의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역사는 내 삶의 시간이 타인의 시간 속에 끌려 들어감을 전제한다. 이때 그 타인은 반드시 동시대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사실은 내 삶의 시간과 같은 시간에 일어난 것들의 많은 부분이 역사적인 고려에서 배제된다. 역사에서 한 사람은 그 이전 세대의 삶과 관련하고 종국에는 미래 세대의 삶과 관련한다. 그래서 역사적 시간은 세대간을 묶는(trans-generation) 시간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다른 세대에 속한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 그래서 다른 세대들을 서로 묶어준다. 역사는 소위 세대간의 “간격”에 대해 무엇인가를 한다. 역사를 위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 간격을 넓어진다. 삶의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역사적 의식이 희미해질 때 세대 차이는 아주 넓어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역사의 시간의 특성에 대해 이와 같이 간단하게 살펴보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역사는 인간 공동체의 삶과 관련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 첫째이고 역사는 지금 살고 있는 공동체와 다른 시간에 살았던 공동체들 사이의 지속성과 관련한다는 것이 그 둘째이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일단의 사람들이 삶의 내용이 그들이 어디엔가 함께 속해 있다는 감정에 의해서 결정될 때 그들은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은 “나”라고도 “그들”이라고도 말하지 않고 “우리”라고 말한다.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제외시킴과 포함시킴이라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어떤 사람은 그 공동체의  일원이고 어떤 사람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동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서 동일한 한 공동체에 속한 것은 아니다. 나는 여러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의 동시대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속해 있는 어떤 공동체에도 속해 있지 않다. 나와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들 동시대인들은 나에게는 “낯선 사람”이다. 따라서 역사가 전제하는 것과 같이 서로 다른 세대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다른 시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아우르는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전혀 명백한 사실이 아니다. 그런 공동체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역사적 숙고에 의해서 “제정되는”것이다. 그래서 역사가 이와 같이 세대를 뛰어넘는 공동체를 제정하는 것은 내가 내 세대와 이전 세대의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경험하는 낯섦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는 하지만 역사에 의해서 모든 시대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는 보편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모두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우리가 모두 동일한 역사적 공동체에 속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 역사-시간적으로 함께 속해 있다는 감정을 형성시키기에 충분하지 않다.

역사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적인 공동체는 시간적으로 변화하기 쉬운 공동체이며 인류의 초역사적인 개념에서처럼 본질적인 공동체는 아니다. 역사적인 공동체들은 하나의 공동체 삶의 지속성의 힘으로만의 시간적인 변화들은 거쳐서 존속한다. 하나의 역사적인 공동체의 공통점은 역사를 통해 영속하는 것,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역사의 중요한 개념은 전통이다. 전통 속에서 물려받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전통이 있다는 사실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또한 전통이 일방 통행이 아니라는 것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통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공동체는 다음 세대들에게 어떤 것을 물려줄 일에 흥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이전 세대들의 상속자임을 느낀다. 그것은 그것이 받아왔던 것을 넘겨주며, 그것이 그것을 미래의 세대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그런 상속에 대한 배려와 흥미에서다.

물려주는 것은 그것이 공동의 것이며, 그 외에 우리가 귀속되는 어떤 것이라는 조건하에서 어느 것이라도 될 수 있다. 행동과 의식들, 사고방식들, 확신과 가치들, 언어, 예술과 정치의 전통들이 있다. 이런 전통의 내용들은 세대들을 건너서 이어져오는 그들의 존재뿐만 아니라 또한 한 역사적인 시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특별히 역사적인 의미를 얻는다. 어떤 역사적인 시간인가? 대개는 최초의 사건, 혹은 “모든 시간의 끝에서” 달성되는 하나의 목적의 시간이다. 기독교의 전통은 이천 년 전에 그리스도가 인간이 된 것의 기원에 있으며 막시즘의 전통은 역사의 진보에서 여전히 인식되는 계급 없는 사회의 목적에 있다. 이와 같이 첫 번째의 전통은 하나의 기원을 향하며 역사적 시대의 고고학적인 결정을 전제로 한다. 두 번째 전통은 여전히 목적으로 달성시키는 방향으로 유도되며 역사적 시간의 목적론적인 개념을 함축한다. 역사에 대한 이런 두 가지 개념은 사실 서로 배제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기독교는 그 기원의 중요성과 종말론적인 목적을 연관시키는 “구원의 역사”를 주장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역사의 시간에 대한 이 모든 특징들에서 기억의 시간과 매우 큰 유사성이 있는 듯하고 역사가 흔히 공동의 혹은 집단적인 기억의 형식으로 제시되어왔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개인의 기억이 시간의 방해받지 않는 이동을 통해서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듯이, 역사적인 전통도 역시 세대들의 계승을 통해서 휠씬 더 강해지는 공동체를 만든다. 헤겔이 말했듯이 다양한 세대들을 함께 묶고 그들을 똑같은 역사적인 공동체의 통일로 융합시키는 “신성한 유대”가 있다. 역사적인 전통을 기억하는 것은 시간의 본질과 관계 있는 망각의,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가 무너지는 것의, 공공의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이 소외되는 것의 위협을 극복한다. 개인적인 기억과 달리 역사적인 전통은 타인들에게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와 글쓰기의 언어, 혹은 흔적들과 기념비들의 현존과 같은 외적인 조력자들에 호소한다. 집단적인 기억으로서 역사는 의식적인 재현뿐만 아니라 기록들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며 관습적인 공공의 활동들의 문제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 중 어느 것도 역사가 기억처럼 우리 자신의 것에 그리고 시간에 견디는 것에 호소한다는 사실에서 도망치지는 못한다. 기억하는 것과 역사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보존하는 목적이 있으며 문제그대로의 그리고 비유적인 의미에서 “보수적인” 특징이 있다. 이 보수적인 특징은 망각에 대하 방어일 뿐만 아니라 새롭고 예기치 않은 그리고 기본적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방어이다. 나의 개인적인 삶과 우리의 전통적인 공동체의 지속성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기억과 역사적인 전통에 의해 극복된다.

보수적이라도, 주관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의 지속성에 대해, 우리 자신의 개인과 공동체의 이러한 견고함에 대한 이런 찬양이 비윤리적일 필요는 없다. 미래 세대들과 더불어 앞선 세대들에 대한 충실성은 오히려 존경과 도덕적인 관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레비나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우리가 여기에서 여전히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감을 다루고 있다고 언급하곤 했다. 그에게 윤리는 첫 번째 경우에서 타인과 이방인에 대한 책임감을 제외하고는 자신에 대한 관심과는 관계가 없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 윤리적 책임감은 게다가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욕구와 고통에 그 기원을 갖는다. 그런 책임감은 기억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이런 기억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과거를 향하지 않고 엄격히 역사적인 기억이 아닌 한 윤리적인 성격을 갖는다.

윤리적인 책임감에서 생소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의 하나의 예는 2차 세계대전 동안에 나치에 의해 자행된 수백만 명의 유태인에 대하 몰살인 “쇼아”에 대한 기념이다. 전쟁후의 독일에서 이른바 “역사가들의 논쟁”에서의 논쟁은 쇼아가 정규적인 역사적인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이다. 당연히 독일인들은 그들의 어두운 과거로 향해야한다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으로 충분하며 그것이 포로수용소의 무죄의 희생자들에 관해서 충분한 책임감을 보여주고 있느냐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국민의 의해 자행된 이 잔학성에 대한 기억은 그들은 더 이해할 수 없게 하며 그들의 죄로부터 독일인들을 구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쇼아에 대한 기념은 독일인들의 공통적인 과거에 대한 역사 의식을 반드시 추월하거나 초월하는 윤리적인 의미가 있다.

레비나스가 옳다면 미래 세대들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감은 역사적인 전통을 통해 이행될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과거의 지속으로서 그리고 역사적인 공동체의 견고함으로서 외에는 달리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묵상 속에는, 시간에서의 단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위한 그리고 우리와 완전히 다른 미래 세대들에 관해서 책임감을 위한 자리가 없다. 간단히 말해서 역사는 미래에 대한 가족주의적인 관점을 갖는다. 그것은 미래 세대들을 아들과 상속자들로 여긴다. 역사는 미래 세대들의 이질성을 보지 못하고, 예기치 않은 욕구들에 무심하며 그들의 새로운 생활방식들을 두려워한다. 미래에 대한 그런 역사적인 접근은 그 모든 것에 대해 무책임하지 않지만 그것의 책임감은 조건적이어서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실제적인 윤리적인 책임감을 입증하지 못한다.

3. 윤리학의 시간
레비나스가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 윤리적 책임은 기억과 역사의 시간으로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시간의 개념을 의미한다. 윤리의 시간은 내 시간도 우리의 시간도 아닌 타인의 시간이다. 다른 것으로서의 타인의 시간. 이것은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타인에게 나의 시간의식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타인이 나의 시간 의식에 들어와 그것을 변화시키고 다른 의식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을 말한다. 이끌림에 의한 반응으로서 윤리적 책임감은 나로부터가 아닌 타인으로부터 진행된다. 내가 타인에게 갖는 개념과 환원될 수도 없고 우리 사회의 예측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이 타인은 그러므로 항상 이방인이다. 이런 낯선 타인이 강력하게 내 생활에 침투해 들어와서 나를 소외시키고 내 스스로도 낯설고 친숙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어간다. 나는 더 이상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감 속에서 나를 인식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반응적 책임은 내 자의식에서가 아니라 타인의 이끌림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타인이 내게 요구하는 것은 나 자신을 희생하거나 그의 고통과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나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실제적인 윤리적 책임은 타인에 대한 보수적인 혹은 가족주의적 태도와 화합될 수 없다. 윤리학은 모든 형태의 이기적인 자기중심적 관계와 인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키는 개인의 기억과 역사적인 전통과 근본적인 단절을 가정한다.

기억과 전통의 시간과 달리 윤리학의 시간은 지속성이 아니라 중단된 시간이다. 중단된 시간이란 무엇인가? 누가 시간을 중단시켰는가? 후자의 문제는 명백하다.: 그것은 이끌림의 형태로 오는 타인의 개입이다. 타인이 중단시키는 것은 나 자신에게 속한 시간의 소유이다. 중단된 시간은 간섭으로 인해 지나가 버린 시간이다. 미래, 현재, 그리고 과거의 상호 혼합된 것들이 용해되는 시간, 인생의 현재, 미래 과거가 더 이상 단순하고 유일하게 내게 소속되지 않는 시간이다. 내 인생의 중단이라는 일반적인 형태는 죽음이다. 죽음은 내게서 오지 않고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온다. 죽음 내게 속해 있는 않은 채 내 인생의 가장 심오한 부분을 건드린다. 이것이 내가 죽음을 표상할 수 없고 전유할 수도 없는 이유이다. 물론 죽음을 살아있는 의식에서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이 있는 곳에 삶은 없다. 따라서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죽음은 밤의 도둑처럼 온다. 이 말은 도둑은 사람이고 죽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전적으로 옳다고 볼 수 없다. 죽음은 타인이 아닌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온다. 그것은 인식될 수 있는 형태나 모습도 없다. 죽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은 2가지 경우, 즉 살인과 희생의 경우에만 타인과 명백하게 관계한다. 레비나스에 대해 들었던 것을 토대로 보면 죽음에 대한 그의 윤리적인 고려는 특별히 타인의 살인금지 그리고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한 개입이라는 윤리적인 의미인, 타인의 개입이 죽음의 경우보다 더 분명한 또 다른 개입의 형태들이 있다. 이 새로운 형태들은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시간과 관계가 있다. 타인에 의해 내 과거의 윤리적 개입은 용서이다. 용서는 내 과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고독과 때로 견딜 수 없는 죄의식과 실수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킨다. 이런 죄의식에 대한 개입은 내자신의 밖에서 올뿐만 아니라, 타인, 즉 아마도 내가 죄를 짓게 한 사람에 관해서 타인으로부터 온다. 용서는 내가 기대할 수도 없는 선물이며 은혜이다. 용서는 전적으로 타인에게 속하는 것이지만 내 인생의 전체를 변화시킨다. 따라서 나는 과거를 다르게 본다. 내 견해는 나를 용서한 타인의 견해가 되며 내가 보는 것은 내가 원래 내 인생으로 경험했던 인생과는 다른 인생이다.

타인 역시 내가 내 미래의 삶을 바라보고 그럼으로써 이 인생에 다른 윤리적인 의미를 줄 수 있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희망의 경우가 그렇다. 희망은 낙천적인 기대이상의 다른 어떤 것이다. 기대란 미래에서 과거와 현재의 지속성을 전제하고 이 시간의 지속성에 대한 간섭은 전제하지 않는다. 기대란 어떤 의미에서 불확정한 미래와 관련이 있지만 주관적시간은 혹은 역사적 시간과 관계된다. 이와는 달리 희망은 윤리적 개념의 시간과 관계된다. 희망은 내 인생을 변화시키고 이런 변화는 오직 타인으로부터 온다. 나 자신으로부터는 희망을 갖지 못하고 의심과 절망할 이유만 있다. 그러나 나에게 희망을 품게 하는 타인은 내가 불확실한 미래를 치유하기 위해 의지하는 사람은 아니다. 따라서 희망은 용서처럼 내 미래의 삶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타인으로부터 오는 감사의 선물이다. 희망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타인에 대한 분명한 혹은 함축적인 약속을 전제하고 있다. 타인에 대한 신뢰가 없는 곳에 희망은 없다. 내 신뢰는 타인에 대한 약속에 - 이것저것을 내게 준다거나 나를 위해 이일 저일을 해준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도 나와 항상 있어 줄 것이라는 - 근거하고 있다.

타인의 개입이 현재의 시간을 윤리적 의미를 지닌 새로운 시간으로 만든다. 내 인생의 현재의 시간은 특히 주관적인 자기 중심적인 시간이다. 내 현재의 시간은 집과 같은 항구가 된다. 그곳으로부터 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와 미래의 방향으로 과감하게 나아간다. 나는 현재의 이전으로서 과거를 기억하고 이 시점에서 미래의 현재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런 일로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경험하는 것은 내가 전에 바래왔던 것을 성취하는 일이며, 내가 과거에 해왔던 것의 지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외로운 현재에서 변화를 위한, 즉 새롭고 개대하지 않고 기억도 없고 낯선 어떤 일에 대한 작은 공간이 있다.  오직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이 상황에서 무언가 변화될 수 있다. 그는 내게 이전의 생활과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도록 허락하고 심지어 강요하기도 한다. 현재의 생활에서 타인의 이런 개입은 그에 대한 새로운 책임감을 일으키는 선물이며 이끌림이다. 일단 타인이 내 생활에 들어오면 내가 하는 모든 일에 그를 고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나의 자기 중심적인 시간의 지속성을 뚫고 들어와 그것을 윤리적 시간으로 만드는   타인이 나를 타인으로 더 정확히 말하면 타인을 위한 주체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과거의 실수로부터 나를 용서하는 타인은 동시에 내게 미래에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한다. 쇼아의 기념식에서 우리는 희생자들에게 우리의 소리를 내야하거나 그들의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존경으로 침묵을 지키도록 요구받는다. 내 인생에 끼어들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가능성을 주는 타인은 또한 이 새로운 인생에서 나는 그에 대해 그리고 그의 욕구에 대해 민감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요구하고 있다. 그가 내게 영향을 주는 방법은 방어 대신에 민감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윤리적 감수성으로 이끌어져야 한다. 타인에 대한 감사의 선물을 그 근원으로 둔 희망은 그것과 더불어 그에 관한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사람은 희망을 가질 수 없고 동시에 여전히 계산을 한다. 희망은 희생과 자기 희생을 요구한다.

이 세기에 다가오는 전환점은 21세기가 역사적 미래로 고려되느냐 혹은 윤리적 미래로서 고려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 두 가지는 결코 서로를 배타할 수 없다.

역사는 21세기를 20세기의 연장이외의 다른 것으로 볼 수 없다. 이런 태도로 역사는 새로운 도전을 예측한다. 그리고 그 도전들은 분명 역사적인 사회의 확장과 관계가 있다. 오늘날도 존재하는 민족중심주의와 국가주의의 형태들은 문화다원적인 사회의 형태들에 자리를 내주어야한다. 역사적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함께 묶는 공동성은 더 이상 명백하고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에 의해 확립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만일 역사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사상가들이 예언한대로 역사의 종말을 경험할 것이다.

21세기의 미래에 대한 윤리적 비젼은 미래의 세대를 덜 요구하고 우리 자신들을 더 요구한다. 그것은 미래의 세대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 가를 예측하지 않고, 우리는 미래 세대의 다른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제 다르게 산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윤리적 태도가 희망으로 이끌어져야 하고, 이런 희망은 미래 세대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과 우리의 즉각적인 쾌락을 희생시키는 것을 가정한다. 우리는 21세기의 미래 세대가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가, 혹은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단지 어떤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우리의 전 관심과 전체의 삶을 돌려야 한다. 타인을 위한 시간으로서의 윤리적 시간은 우리 자신이 자연스럽게 후손에게 몰두하고 있는 것을 끝내는 곳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삶은 결코 윤리적이거나 자연스럽지 않다. 그 둘 사이의 움직임이다. 우리 삶의 시간은 이런 전환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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