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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21 (04:11) from 80.139.185.135' of 80.139.185.135' Article Number :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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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공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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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공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From Biogenetics to Psychoanalysis


Slavoj Zizek



‘유전공학의 윤리적 결과’를 둘러싼 오늘날의 논의에서 잘못된 것은 그것이 독일 사람들이 ‘빈데슈트리히-윤리’(Bindestrich-Ethik), 즉 ‘하이픈-윤리’라고 부르는 것으로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술-윤리’, ‘환경-윤리’ 같은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윤리는 나름의 역할, 즉 데카르트가 󰡔방법서설󰡕 도입부에서 언급하는 [다음과 같은] “잠정적 윤리”의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우리가 위험과 파괴적인 새로운 통찰력으로 가득 차있는 새로운 길을 갈 때,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 삶을 위한 실제적 지침으로서 오래된, 확립된 규칙들에 매달릴 필요가 있다. 비록 새로운 통찰력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전체적인 윤리적 건축물을 위한 신선한 기반을 제시하도록 강요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데카르트의 경우 이러한 새로운 근거는 칸트에 의해 주체적 자율성의 윤리로서 제공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꼭 같은 곤경에 처해있다. “잠정적 윤리”가 출현하고 있는 새로운 것에 대한 완전한 성찰에 대한 필요성을 대신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여기에서, 즉 하이픈-윤리에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윤리 그 자체(ethics as such)이다. 즉 문제는 보편적 윤리가 특수한 주제들 속에서 약화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오랜 휴머니즘적 ‘가치’가 특수한 과학적 진전들과 직접적으로 대결하게 된다는 것이다.(예를 들면 유전공학이 [인간의] 존엄과 자율성에 관해 우리가 견지해 온 의미체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즉 우리는 전형적으로 포스트모던적인 과묵한 자세를 취하거나(끝까지 가지는 말자. 과학적 사물(Thing)에 대해 적당한 거리를 취하자. 이 사물이 모든 우리의 도덕적 인간적 개념들을 파괴하는 블랙홀로 우리를 이끌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혹은 용감하게 “부정적인 것에 머물러야”(Verweilen beim Negativen) 할 것이다. 즉 ‘우리의 정신은 게놈이다’라는 판단이 또한 무한 판단으로서 기능 한다는 도박과 더불어, 과학적 현대성(scientific modernity)의 결과들을 전적으로 용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유전공학에서의 과학적 약진이 초래한 주된 결과는 바로 자연의 종말이다. 우리가 그것[자연]의 구성규칙들을 알게 되자마자 자연적 유기체는 조작 가능한 대상들로 변화한다. 그리하여 자연은 ―그것이 인간적인 것이든 비인간적인 것이든 간에― ‘탈실체화(desubstantialized)하며, 자신의 침투 불가능한 밀도를, 하이데거가 “대지”(Erde)라고 부른 것을 박탈당한다. 따라서 인간의 심리 그 자체를 기술적인 조작의 대상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유전공학은 하이데거가 현대 기술에 내재하고 있는 “위험”으로 감지한 것을 실제적으로 현실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interdependence)이다. 속성을 조작할 수 있는 하나의 다른 자연적 대상으로 인간을 환원시킴으로써 우리가 상실하는 것은 단지 인간성(humanity)만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옳다. 즉 인간성 그 자체는, 우리가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서의 “인간적 자연”이라는 개념, 즉 우리가 그[침투 불가능한 차원] 속으로 태어난/던져진 우리 자신 속의/의(in/of ourselves) 침투 불가능한 차원이라는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설적인 것은 비인간적인 침투 불가능한 자연(하이데거의 “땅”)이 있는 한에서만 인간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위협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잘 알려진 헌팅톤의 병(Huntington's Disease) 사례를 상기해보자. 그 병에 직접 책임이 있는 유전자가 있으며, 우리 모두는 우리가 헌팅톤의 병에 걸릴 것인지의 여부뿐만 아니라, [만약 병에 걸리게 된다면] 언제 걸릴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그것은 유전자의 전사(轉寫, transcription, DNA에서 전령 RNA가 만들어지는 과정) 오류, 즉 이 유전자의 중앙에 있는 “단어”인 캑(CAG)의 더듬거리는 반복에 달려 있다. 광기가 나타나게 될 나이는 정확히, 그리고 오차 없이 이 유전자의 한 곳에 있는 캑의 반복 횟수에 달려 있다.(만약 40회의 반복이 있으면, 당신에게 59세에 최초로 증상이 나타날 것이며, 41회의 반복이 있으면 54세에, 50회의 반복이 있으면 27세에...) 안락한 생활, 육체적 건강, 최고의 약품, 건강 음식, 그리고 가족의 사랑과 지지도 이것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 감소될 수 없는 순수한 숙명이다.” Matt Ridley, Genome, New York: Perenial 2000, p.64.
아직 치료 책은 없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검사를 받고 만일 병증 소유자라는 진단을 받는다면 언제 우리가 미쳐서 죽게 될지를 정확히 말해주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환상을 가로지르기”(traversing the fantasy)[의 상황], 그리고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우연성이라는 전적으로 무의미한 실재와의 대면의 상황에 대한 예로서 [헌팅턴의 병 보다] 더 명백한 상황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을까? (이 유전자를 판독한 과학자들을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지를 택할 것이라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 무지는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지라는 빈곳(void)이 환상을 위한 공간을 열기 때문이다....더욱이 게놈에 대한 접근에 의해 열려진 유전 공학적 개입의 전망과 더불어 종(species)은 자신을, 자신의 좌표를 변화/재정의한다는 사실은 유한한 종의 제약으로부터 “이기적인 유전자”에의 예속으로부터 인류를 효과적으로 해방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마르부르크에서 있었던 한 대담에서 하버마스는 인간에 대한 유전 공학적 조작에 대한 자신의 경고를 반복했다.

“인간의 유전자적 유산(inheritance)에 대한 개입을 통한 자연에 대한 지배는 자신에 대한 통제행위로 역전한다. 이는 우리의 일반적인, 윤리적인 자기이해를 변화시키며, 자율적인 생활방식을 위한 조건들과 도덕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교란할 수 있다.” Jantscheck , “Ein ausgezehrter Hase", 『짜이트』(Zeit)지, 2001년 6월 5일, p.26에서 재인용.


하버마스는 여기에서 두 개의 위험이 숨어있다고 본다. 첫째, 그러한 개입은 우리가 만든 것과 저절로 성장한 것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이를 통해 개인의 자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저절로 생긴”(가령 공격적인 혹은 평화적인) 성향이 자신의 유전자 코드에 대한 타인의 의도적인 개입의 결과로 생겨났다는 것을 알게 된 사춘기 소년은 이 사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의 핵심을, 달리 말하면 우리는 교육(Bildung), 즉 우리의 자연적 성향들을 형성해 내는 고통스러운 투쟁을 통해 우리의 도덕적 정체성을 발전시킨다는 관념을 파괴하지 않겠는가? 결국 직접적인 유전 공학적 개입의 전망은 교육의 필요성 그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둘째, 주체들 간의 관계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그러한 유전 공학적 개입은 “저절로” 인간이 된 사람들과 인위적으로 조작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비대칭적 관계를 낳는다. 몇몇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창조자라는 특권의 소유자로 등장할 것이다. 이는 우리의 성적 정체성에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의 성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만이 아니라 성전환수술의 지위가 쟁점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생물학적 성정체성과 심리적 성정체성 사이의 간극을 상기시킴으로써 성전환수술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어떤 생물학적 남자가 자신을 남자의 육체에 갇힌 여자로 경험한다면, 왜 그(녀)는 자신의 생물학적 성을 변화시키고 이를 통해 자신의 성적, 감정적 생활에 균형을 도입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하지만 유전 공학적 조작의 전망은 심리적 정체성 그 자체를 조작할 수 있는, 훨씬 더 극단적인 가능성을 열어준다.
비록 이러한 논변은 간단하면서도 흠잡을 때 없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다. 유전 공학적 개입의 가능성 그 자체가 “자연적” 존재라는 우리의 자기이해를 사후적으로 변화시키지는 않는가? 이제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성향 그 자체를, 단지 직접적으로(immediately) 주어진 것으로서가 아니라, “매개된”(mediated) 어떤 것으로, 즉 원칙적으로 조작 가능한 (그리하여 단순히 우연적인) 어떤 것으로 경험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여기에서 요점은 이전의 순진한 직접성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연적 성향이 유전자의 맹목적인 우연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일단 알게 되면, 이러한 성향에 완고하게 집착하는 것은 현대적 우주의 오랜 “유기체적” 풍속에 집착하는 것만큼이나 허구적이다. 그렇다면 하버마스가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다. 비록 우리는 우리의 성향들이 무의미한 유전자적 우연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존엄성과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마치 이것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자. 여기에서 역설적인 것은, 자율성은 우리를 결정하는 맹목적인 자연적 우연성에로의 접근을 금지함으로써만, 즉 궁극적으로 과학적 개입의 자율성과 자유를 제한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근본적인 차원에서 자율성은 우연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더라도 말이다. 내가 정확히 언제 죽을지를 안다는 것에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과거 1950년대로 돌아가자. 미국에 사형수가 있었다. 그는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재료들(침대의 금속관, 놀이 카드의 색깔로부터 나온 화학물질 등등)을 가지고 총을 만들었고 매일 밤 그는 그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겨누었다. 사형수는 정확히 언제 그 총이 발사해 자신을 죽이게 될지 알지 못하도록 그 총을 고안했다. 만약 총이 발사하게 된다면 사형수는 갑자기, 그리고 자기 손으로 죽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는 자신의 자율성의 최소치를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도덕적 존엄성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 오랜 보수적인 논변에 대한 새로운 판본이 아닌가? 여기에서 우리는 하버마스의 논리를 다시 발견한다. 과학의 결과들은 우리의 자율성과 자유(라는 지배적인 관념)를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을 제한해야 한다. 이러한 해결책을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과학과 윤리 사이의 물신주의적 분열이다.(“나는 과학이 주장하는 바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자율성(의 외양)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마치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기를 선택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진정한 질문에 직면하는 것을 막는다. 어떻게 이러한 새로운 조건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 자율성, 그리고 윤리적 책임성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변형시키고 재창조해야 하도록 강제하는가?
하지만 가톨릭 신자들이 제기할 수 있는 반론은 타당한가? 그들에 따르면 진정한 위험은 비영적인 실체들로 우리가 철저히 환원된다는 것이 아니라, 유전 공학에서 우리들, 인간들은 우리 자신들 그 자체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요점은 우리가 불사의 영혼을 갖고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물론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유전공학에 종사함으로써 우리는 [영혼의] 이러한 지위에 대한 앎을 상실하고 우리 자신을 마치 단지 생물학적 유기체인 것처럼 다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변은 문제를 전치 시킬 뿐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카톨릭 신자들은 오히려 유전 공학적 조작에 완전히 몰두하는 이상적인 주체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인간 존재의 물질적 측면만을 다루고 있지, 인간의 영적 중심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으니 말이다. 요약하면, 그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 초월적인 영적 차원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그들이 인간을 과학적 조작의 대상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막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복수심을 가진 질문이 되돌아온다. 만약 인간이 불사의 영혼 혹은 자율적인 영적 실체를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왜 유전 공학적 개입을 두려워하는가?
더 나올 수 있는 종교적 반론은, 육체(뇌)와 독립한 영혼과 함께 육체는 신에 의해 창조된 도구이다라는 것, 즉 육체는 영혼이 이 세상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의 근본적 구조에 너무 많이 개입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그릇으로서 신에 의해 창조된 정확한 구조를 교란시킬 수도 있으며, 이를 통해 영혼의 표현을 흐리게 한다.(예를 들면 라디오는 전파를 수신하고, 전송된 메시지를 들릴 수 있도록 만드는 도구인데, 우리가 너무 많이 개입하면 전송이 불가능해진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 역시 애매하다. 우리가 도구가 작동하는 방식을 잘 이해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개선하는 것을 금할 이유가 있겠는가?
정신 분석적 관점에서 보자면 문제의 핵심은 상징적 질서의 자율성에 있다. 나는 나의 상징적 우주에서의 해소되지 못한 봉쇄(blockade) 때문에 성행위 불능자(impotent)가 되었으며, 그래서 나는 상징적 장애/억제를 해소하는 작업을 통해 나를 “교육”하는 대신 비아그라를 먹는다고 가정해보자. 문제가 해결된다. 나는 다시 성적으로 능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이 해결책[비아그라]으로 어떻게 상징적 봉쇄 그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해결책이 어떻게 “주체화”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상황은 전적으로 결정 불가능하다. 해결책이 봉쇄에 대한 상징적 돌파(working-through)로 경험되지 않는다. 그 자체로 그것[해결책]은 상징적 장애 그 자체를 탈봉쇄하며(unblock), 나로 하여금 그것[해결책]의 완전한 무의미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혹은 그것은 정신병적 왜곡을 낳는다. 더 근본적인 정신병적 차원에서 장애의 복귀(return of the obstacles)를 야기한다는 것이다.(예를 들면 나는 편집증적(paranoiac) 태도로 내몰려지며, 개입을 통해 내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어떤 지배자의 자의에 내 자신이 노출되어 있음을 경험한다.) 이러한 “노력해서 얻지 않은”(unearned) 해결책에 대해서 치러야 할 상징적 대가가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직접적인 생화학적 혹은 유전 공학적 개입을 통해 범죄와 싸우려는 시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말을 할 수 있다. 범죄자로 하여금 강제로 과도한 공격성을 완화시키는 약을 먹도록 강요하는 식으로, 범죄자를 생화학적 치료에 종속시킴으로써 범죄와 싸울 때, 우리는 개인 속에서 이러한 [범죄적] 가능성을 촉발시킨 사회적 기제를 전혀 문제 삼고 있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신분석학이 제시하는 또 하나의 교훈은, 호기심은 인간에게 타고 난 것이며 생래적이라는 관념(우리들 각각의 깊은 곳에는 앎의 충동(Wissenstrieb), 즉 알고자 하는 충동이 있다)과는 달리 인간의 자연스런(spontaneous) 태도는 “나는 그것에 관해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않는 욕망이 [오히려] 근본적인 욕망이다. 지식에서의 모든 진정한 진보는 우리의 자연스런 성향에 대항하는 고통스러운 투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잠시 헌팅턴의 병으로 되돌아가자. 만일 내 가족 중에 이 병에 걸린 경우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나는 내가 무참히 이 병에 걸리게 될지 그렇지 않게 될지의 여부(그리고 병에 걸린다면 언제 걸릴지)를 말해주는 검사를 받아야 하는가? 만일 내가 언제 죽게 될지를 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다면 가장 (현실적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인) 이상적인 해결책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 혹은 기관에 나를 테스트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고, 그 결과를 나에게는 말하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검사 결과가 양성이라면) 그 치명적인 병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에, 예고 없이, 그리고 고통 없이 내가 자는 동안에 나를 죽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결책의 문제점은 (나의 병에 관한 진리를) 타자(the Other)가 알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안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것을 망친다. 나를 무시무시하고, 마음을 갉아먹는 의심에 휩싸이게 한다. 그렇다면 정반대의 해결이 이상적인 해결인가? 내 아이가 이 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내가 의심한다고 할 때, 나는 아이에게 알리지 않고 그를 검사 받게 만들고, 발병하기 직전에 그를 고통 없이 죽인다. 여기에서 궁극적인 환상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익명의 국가 제도에 관한 환상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그것에 관해(즉 타자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완전한 전체주의로의 길이 열린다. 여기에서 잘못된 것은 저변에 깔려 있는 다음과 같은 전제이다. 즉 타자를 고통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를 무지(알지 못함) 속에 내버려두는 것이 궁극적인 윤리적 의무라는 생각 말이다.
이제 우리의 기본 요점으로 되돌아가자. 유전공학과 더불어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존엄을 상실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는 처음에도 그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경험을 한다. 만일 오늘날 우리가, “우리 스스로 성취한 것과 뇌에 있는 다양한 화학물질의 차원 때문에 우리가 성취한 것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치료술” Francis Fukuyama, Our Posthuman Future, London: Profile Books 2002, p.8.
을 갖고 있다면, 이러한 치료 술의 효력 그 자체가 “우리가 스스로 성취한 것” 역시 “뇌에 있는 다양한 화학물질의” 다른 “차원”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톰 울프(Tom Wolfe)의 유명한 책제목을 인용한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미안해, 하지만 너 영혼은 방금 죽었어”라고 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다. 우리 진정으로 듣는 것은 우리는 처음부터 영혼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전공학의 주장들이 옳다면 오늘날 우리는, 인간적 존엄인가 혹은 “포스트 인간적인” 기술적인 개인 생산인가라는 양자 사이에서 선택을 할 것이 아니라, 존엄이라는 착각에 집착하는 것과 실제로 우리가 무엇인가라는 우리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면,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인정(승인, recognition)에 대한 욕망은 생물학적 기반을 가지며, 그 기반은 뇌에 있는 세로토닌의 차원과 연결되어 있다” Fukuyama, op. cit., p.45.
라고 말할 때,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타자들에 의한 승인으로부터 유래하는 존엄감을 해치지 않는가? 우리는 물신주의적 부인(disavowal)이라는 대가를 치루고서야만 그것[존엄]을 가질 수 있다. “비록 나는 나의 자기존중감이 세로틴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즐기고 있다”. 그 다음 페이지에서 후쿠야마는 자기존중감을 성취하는 세 가지 차원에 대해 쓰고 있다.

“낮은 자기존중감을 극복하는 정상적이고 도덕적으로 받아들일만한 방식은 자신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타자들)과 투쟁하고, 열심히 일하고 고통스러운 희생을 때로는 견딤으로써 마침내 상승[성공]하고,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성공했다]고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이다. 미국의 대중 심리학에서 이해되는 식으로 말하면 자기존중감의 문제는 자격[이 있는 사람], 즉, 모든 사람이 갖기를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이것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간에)이 되는 것에 있다. 이것은 자기존중감의 가치를 저하하며 그것에 대한 추구를 자기 패배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미국의 제약 산업이 등장해 볼로프트(Zoloft)와 프로작(Prozak) 같은 약을 통해 뇌의 세로토닌을 증가시킴으로써 병(bottle) 속에 들어있는 자기존중감을 제공할 수 있다.” Op. cit., p.46.


두 번째 해결책과 세 번째 해결책 사이의 차이는 처음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음험해(uncanny)해 보인다. 그것들은 같은 방식으로 “허위적”이지 않다. 내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사회가 동의하고 내 동료들의 인정을 제공하기 때문에 내가 자기존중감을 얻을 때 이것은 정말로 자기 패배적인, 수행적 모순(performatory paradox)이다. 하지만 내가 약을 통해서 그것을 얻을 때, 나는 “실재적 사물”을 얻는다. 다음의 시나리오를 상상해보자. 나는 퀴즈 대회에 참가한다. 공부라는 어려운 과정 대신 나는 약을 먹고 기억력을 증진시킨다. 그러나 경쟁에서 이김으로써 내가 얻는 자기존중감은 여전히 실재적 성취에 근거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나는 퀴즈의 주제들에 관해 적절한 자료들을 모두 암기하려고 수많은 밤을 보낸 내 동료들보다 나는 실재적으로 잘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직관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명백한 반론은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나의 경쟁자뿐이다. 왜냐하면 그의 결과는 열심히 공부하고 고통스럽게 노력한 성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는 무언가 내적으로 우리에게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잘난척하는 어떤 것이 있지 않는가? 가령 [힘들게] 성공적으로 격언들을 암기한 정신 장애자에게 “너는 네가 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더욱이 엄청난 노래 재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자신의 공연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때, 비록 우리는 그의 노래가 노력이나 훈련보다는 재능에 더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자부심을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이는 해묵은 모차르트-살리에리 문제이기도 하다. 너무나 쉽게 작곡하는 모차르트가 뼈를 깎는 노력과 헌신을 하는 살리에리보다 훨씬 우수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고 살리에리는 질투한다.) 하지만 약을 통해 내가 나의 노래 실력을 개선한다면 나는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내가 그러한 약을 발명하고 그것을 내 자신에게 실험해보는 노력을 한 경우는 예외이다.) 그렇다면 노력과 투쟁 대 약의 도움의 대립의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요점은 자연적 재능과 노력 둘 다 “나의 부분”, 나 자신의 부분으로 간주된다는 것에 있다. 반면 약을 통한 향상은 외적 조작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한번 같은 문제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나의 “자연적 재능”이 나의 뇌에 있는 어떤 화학물질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 내가 그것을 “외부에서” 얻어왔는가 아니면 자연적으로 타고 났는 가라는 문제가 도덕적으로 그렇게 정말로 중요한가? 다음의 질문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내적 투쟁, 훈련, 노력에 참여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가 어떤 화학물질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퀴즈 대회에서 승리하기 위해 내가 내 기억력을 증진시키는 약을 직접 먹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결심과 노력을 강화시키는 약만 먹는다면? 그것도 여전히 “속임수”인가? 그리고 마지막(하지만 중요한) 질문으로, “실재적” 성취를 통해 내가 획득한 자기존중감은 정말로 선천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단순히 사회적인 부정의 때문만이 아니라) 실재적 성취의 차원과 그것에 대한 상징적이고, 공적인 의식(ritual)에서의 승인 사이의 간극이 있기 때문에 승인이 “실재적 수행”에 무언가를 덧붙이는 것은 아닌가? 오래 전에 라캉은, 우리가 어떻게 점수를 매기는지를 알고 있다 해도 이러한 객관적인 지식과 우리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그것의 수행적 선포 사이에 왜 최소한의 간극이 있는지를 강조해 설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약의 문제는 단순히 약이, 가질 자격이 없는 자기존중감, 즉 “실재적 성취”에 근거하지 않은 자기존중감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아니라, 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약은 상호 주관적인 상징적 의식에 의해 제공되는 만족을 우리로부터 빼앗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후쿠야마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 종말적 방어로부터 두뇌과학이 던지는 위협으로 나아갔는가? 언뜻 보기에 이에 대한 대답은 쉬워 보인다. 즉 유전 공학적 위협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기초 자체를 파손하는 “역사의 종말”에 관한 새롭고, 훨씬 철저한 판본이다. 새로운 과학적 기술적 발달은 자유롭고 자율적인 자유 민주적 주체들을 잠재적으로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두뇌과학으로 후쿠야마가 선회한 것에는 더 깊은 이유, 즉 그의 정치적 전망과 직접 관련되는 이유가 있다. 마치 유전 공학적 조작이 후쿠야마로 하여금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관한 그의 이상화된 이미지의 어두운 이면을 주목하도록 강요한 것 같다는 것이다. 갑자기 유전 공학적 위협과 관련해 그는 그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유토피아에서 마술처럼 사라진 것들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유전공학과 다른 형태의 두뇌 조작의 전망은, 사람들을 조작하고 무시무시한 의학적 실험에 관여하기 위해 자유 시장을 남용하는 기업들의 어두운 계획, 그리고 자기의 자손들을 우수한 정신적 신체적 능력을 가진 특수한 종족으로 키우려는(그리하여 새로운 계급 전쟁을 부추키는) 부자들의 어두운 계획, 그리고 이와 유사한 악몽과도 같은 시나리오의 실현을 위한 가능성을 열어 준다. 명백히 후쿠야마에게 이러한 위험을 제한하는 유일한 길은 시장에 대한 강력한 국가의 통제를 다시 도입하고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인 정치 의지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동의하지만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싶다. 우리는 유전 공학적 위협과는 독립적으로, 다름 아닌 세계화된 시장 경제의 잠재적 위협을 통제하기 위해 이 모든 조치들을 역시 필요로 하지 않는가? 아마도 문제는 유전공학 그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것은 유전공학이 그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권력관계라는 사회적 틀일 것이다. 유전공학을 위험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유전공학의 사용이 기업적 자본의 이해관계와 국민에 대한 통제를 증가시키기 위해 유전공학을 이용하고자 하는 국가 기관들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궁극적으로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이다. 후쿠야마의 난관은 따라서 이중적이다. 그의 주장은 너무 추상적이며 동시에 너무 구체적라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두뇌과학과 이와 관련된 기술의 완전한 철학적 의미에 대해 질문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과학과 기술을 적대적인(antagonistic) 사회․경제적 맥락에 위치시키지 못한다. (진정한 헤겔주의자라면 파악했어야 마땅하지만) 후쿠야마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두 개의 “역사의 종말” 사이의 필연적인 연결, 즉 하나의 종말에서 다른 종말로의 필연적인 이행이다. “역사의” 자유민주주의적 “종말”은 직접적으로 그것의 반대물로 이행한다. 왜냐하면 그것의 승리의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은 자신의 근거 자체, 자유 민주적 주체 그 자체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게놈(genome) 프로젝트와 유전 공학적 개입에 대해 헤겔이라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그의 반응이 무엇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헤겔은 모험보다는 무지를 선호하면서, 두려움으로부터 슬쩍 도망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고유한 헤겔적 시각에서 말하자면, 우리는 이러한 완전한 자기 객관화(self-objectivation) 사이를 뚫고 지나가야(go through)한다. 왜냐하면 단지 그것을 통해서[뚫고 나가서]만 순수한 형식(form)으로서의 주체―주체의 순수한 형식―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그 점]으로부터(from which) “그것이 나”(That's me)라는 저 유전 공학적 공식을 두려움을 가지고 파악하는 점(point)으로서의 주체 말이다. 간단히 말하면, 헤겔은 “당신은 게놈이다”라는 말에 대해, 그러니까 “정신은 뼈이다”, 그리고 “나는 돈이다”라는 일련의 표현들을 완성하는 무한 판단인 “당신은 그것이다”라는 표현에 대한 파괴적인 새로운 판본[당신은 게놈이다]에 대해 기뻐하지 않았을까? 게놈이라는 무의미한 실재와의 대면은, 그것[환상의 스크린]을 통해 내가 현실을 지각하는 환상의 스크린을 제거한다. 게놈 공식에서 나는 직접적으로 실재에 접근한다. 하버마스와 반대로 우리는 게놈적 객관화를 완전하게 취해야 할 윤리적 필요성을 주장해야만 한다. 나의 실체적 존재를 무의미한 게놈 공식으로 이렇게 환원시키는 것은 자아의 환상적인 재료(fantasmatic étoffe du moi), 즉 그것[재료]으로부터 우리의 자아가 만들어지는 재료를 말살하고, 이를 통해 나를 순수한 주체로 환원시킨다는 것이다. 게놈을 마주보고 있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아무 것도 아님, 바로 그것이 주체 자신이다.
“탈주술화(Entzauberung, disenchantment)의 한계”를 공식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후기 세속적”(postsecular) 노력은 계몽의 내적 논리는 인간의 과학적 자기 객관화로 끝난다는, 즉 인간을 과학적 조작의 대상으로 변형시키는 것으로 끝난다는 전제를 너무나도 빨리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종교적 유산을 현대적 관용구로 번역함으로써 그것[종교적 유산]을 구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유혹에 대항해 우리는 계몽의 기획의 목표를 고수할 것을 주장한다. 계몽은 끝(목표)까지 밀고 가야할 “미완성의 기획”(ein unvollendetes Projekt)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이 목표는 완전한 과학적인 자기 객관화가 아니라 우리가 과학의 논리를 끝까지 따라갔을 때 도래하게 될 새로운 형태의 자유이다. 우리는 이 도박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 정신에 대한 신경과학적 이미지와 정신분석학의 간극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동물의 짝짓기 행동을 조절하는 좌표는 자연적 본능에 체현되어 있는 반면 인간은 자연적 본능을 결여하고 있고 따라서 그들에게 자신의 좌표를 제공해주는 “제2의 자연”, 상징적 제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있지 않다. 상징적 질서라는 좌표는 여기에서 우리로 하여금 타자의 욕망이라는 막다른 골목(impasse)에 직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문제는 상징적 질서는 궁극적으로 실패한다는 것이다. 장 라플랑슈(Jean Laplanche)가 지적했듯이 “원초적 장면”의 외상적 충격, 타자의 욕망의 기표라는 수수께끼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결코 완전히 “지양”될(aufgehoben, sublated) 수 없는 잉여(excess)를 산출한다. 인간이라는 동물에 내재하는 악명 높은 “결여”는 단지 부정적인 것, 즉 본능적 좌표의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잉여, 외상적인 잉여적 현존과 관련되어 있는 결여이다. Jean Laplanche, New Foundation for Psychoanalysis, Oxford: Basil Blackwell 1989 참조.
역설적인 것은 정확히 잉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에로틱한 매혹과 애착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의미의 가능성의 조건은 불가능성의 조건이다. 인간의 지능의 과도한(잉여적인) 발달의 최후의 동력은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Che vuoi?), 즉 타자의 욕망의 수수께끼의 심연을 해독하려는 노력이 아니겠는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풀려고,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을 답하려고 집착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겠는가? 형이상학과 성욕(혹은 정확히 인간의 에로티시즘) 사이의 연결은 정말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궁극적으로, 의미의 무의미한 지탱자로서 이 외상적인, 소화할 수 없는 중핵은 근본적 환상(fundamental fantasy) 그 자체가 아닌가? 잘 알려져 있듯이 바그너의 음악적 증오는, 그에게 허위적이고 상업적인 유태적 음악의 대변자인 마이어베어(Meyerbeer)를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절망의 최저점에서(1840년 5월 3일) 바그너가 자존감의 최후의 흔적마저 상실한, 낯선 굴종적인 아첨을 마이어베어에게 보이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마이어베어이며, 마이어베어 뿐입니다. 내게 모든 것인, 모든 것을 의미하는 사람에 대해 내가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가장 깊은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을 흘린다고 내가 당신에게 말했을 때 당신을 즉시 나를 이해할 것입니다....언젠가 당신에 대한 나의 감사를 말해야하게 될 나의 작품을 위한 양식이며 힘을 발견하기 위해, 나는 당신의 종, 육체, 그리고 영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충성스럽고 정직한 종이 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종으로 태어났음 공개적으로 인정합니다. 나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꺼리김 없이, 그리고 맹목적인 신뢰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무한한 기쁨을 줍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당신만을 위해 일하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 노력과 수고가 더욱더 즐겁고 가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주인님, 나를 사십시오. 그것은 결코 무가치한 구입이 아닙니다....당신의 소유물, 리하르트 바그너.” Bryan Magee, The Tristan Chord, New York: Owl Books 2001, p.345-346에서 인용.


마조히즘적 향유(enjoyment)에 대한 이보다 더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은 없었다. 이러한 완전하고 적나라한 복종의 자세가 바그너의 “근본적 환상”, 즉 남성적인 반유태주의의 가식 아래에서 부정되어야 하는 그의 주체적 정체성의 중핵이 아니겠는가? 강간에 관한 환상(그리고/또는 그것을 지탱해주고 있는 마조히즘적 환상)과 같은 환상의 지위는 정확히 정신분석학과 페미니즘의 화해할 수 없는 차이를 보여주는 최후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적어도 표준적인 페미니즘에게 강간은 외부에서 부과된 폭력이라는 것은 선천적인 공리이다. 심지어 여자가 강간당하는 환상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녀가 남성적 태도를 내면화했다는 개탄할만한 사실을 입증할 뿐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순수한 공황적인 반응을 보인다. 여자가 강간당하는 혹은 적어도 심하게 추행 당하는 환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어떤 사람이 언급하는 순간에 그는 커다란 고함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마치 유대인이 수용소에서 가스에 질식사 당하는 환상을 갖고 있다고 말하거나, 아프리카 출신 미국인이 린치를 당하는 환상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야!”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분열된 히스테리적 입장(position)(그것[성적 추행과 착취]을 욕망하고 남자로 하여금 자기를 유혹하도록 부추키면서 성적으로 추행을 당하고 착취당하는 것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부차적일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트에게 그것[히스테리적 입장]은 주체성을 구성하는 원초적인 것이다. 프로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강간의 문제는, 그것이 잔인한 외적 폭력의 사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희생자 자신 속에서 부인된 어떤 것을 건들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토록 외상적인 충격을 준다. 프로이트가 “주체가 자신의 환상 속에서 매우 강렬하게 갈망하는 것이 그들에게 현실로 나타난다면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도피할 것이다” S. Freud, Dora: An Analysis of a Case of Hysteria, New York: Macmillan 1963, p.101.
라고 썼을 때, 그의 요점은 단순히 검열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환상의 핵을 우리는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환상의 원래적 위치는 부모의 성행위를 지켜보거나 목격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위치이다. 강렬한 속삭임, 침실에서 나오는 이상한 소리 등등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 어린아이는 이러한 이상하게 강렬한 단편들을 설명해주는 장면을 환상하고 있는 것이다. 데이빗 린치의 <블루 벨벳>의 가장 유명한 장면을 상기해보자. 벽장에 숨어 있는 카일 매클라클란은 이사벨라 로셀리니와 데니스 호퍼 사이의 괴이한 성행위를 목격한다. 그가 보는 것은 그가 듣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명확한 환상적 보완물이다. 호퍼가 가면을 쓰고, 그 가면을 통해 숨을 쉬는 장면은 성행위에 동반되는 강렬한 호흡을 설명해주는 상상된 장면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환상에 내재해있는 근본적인 역설은, 주체가 결코 “그래 이젠 됐어. 나는 완전히 이해했어. 내 부모님이 섹스를 하고 있어. 나는 이제 더 이상 환상을 가질 필요가 없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바로 이것이 라캉이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의미했던 것이다. 모든 의미는 어떤 무의미한 환상적 틀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됐어. 이제 이해해”라고 말할 때 이것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이제 나는 그것을 내 환상의 틀 안에 위치시켰어”이다. 혹은 오래된 데리다적 뒤틀음(twist)에 다시 의존한다면, 불가능성의 조건, 의미의 한계, 무의미한 중핵으로서의 환상은 동시에 의미 가능성의 환원 불가능한 조건이다.
환상 개념이 갖고 있는 존재론적 스캔들은, 그것이 “주관적” 그리고 “객관적”(“주체의 지각과 독립해 존재한다”라는 평이한 의미)이라는 표준적인 대립을 전복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주관적”(주체가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직관들로 환원된다는 의미)이지 않다. 환상은 “객관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라는 괴상한 범주”―“사물들이 비록 당신에게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현실적으로, 객관적으로 당신에게 보이는 방식” Daniel C. Denett, Consciousness Explained, New York: Little, Brown and Company 1991, p.132. (물론 데닛은 여기에서 이 개념을 순수하게 부정적인 방식으로, 즉 무의미한 형용모순의 예로서 제시하고 있다.)
―에 속한다. 예를 들면 의식적으로는 유태인에게 호의적인 어떤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깊은 반유태적 편견을 품고 있다고 우리가 주장할 때, 이 때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편견은 유대인이 진짜로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그에게 유태인이 보이는 방식[그가 유태인을 어떤 식으로 보는가 하는 방식]을 제시하는 한에서) 그는, 유태인이 그에게 정말로 어떻게 보이는가하는 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아닌가? 상품 물신성과 관련해 맑스는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외양”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어떤 비판적인 맑스주의자가 상품 물신성에 매몰되어 있는 부르주아 주체를 만날 때, 그에 대한 맑스주의적 비난은, “당신에게 상품은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마법적인 대상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상품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의 물화된 표현이다”라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맑스주의자의 비난은 다음과 같다. “상품은 당신에게 사회적 관계의 단순한 체현으로 나타난다고 당신은 생각할 수 있다.(예를 들면 돈은 당신으로 하여금 사회적 생산물의 일부를 구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증서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물들이 당신에게 실재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이 아니다. 당신의 사회적 현실에서 사회적 교환 행위에의 참여를 통해서 당신은, 상품은 특수한 능력을 가진 마법적인 대상으로 당신에게 실재적으로 나타난다는 음험한(uncanny) 사실을 당신은 증명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서로에게 말하기 시작하는 상품들에 관한 유명한 그[맑스]의 우화에서 맑스가 목표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상품들이 말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의 사용 가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하지만 그것은 대상으로서의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대상으로서의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이다. 상품으로서 우리 자신의 교류(intercourse)가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단지 교환가치로서만 서로에 대해 관계를 맺고 있다.” Karl Marx, Capital, Vol. One,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90, p.176-7.


맑스는 여기에서 셰익스피어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둘러싼 소동』에 나오는, 독베리가 시코울에게 하는 충고를 반어적으로 인용함으로써 『자본론』의 제 1장을 결론짓는다. “외모가 출중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운명의 선물이다. 하지만 읽고 쓰는 것은 자연에 의해서 주어진다.” 이러한 역전은 주관적인 착각이라는 의미에서 허구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의 지위는 객관적이다. 그것은 “객관적 외양”의 지위를 가지며, “사물로 나에게 정말로 어떻게 보이는가”라는 문제로서, 이는 사물들이 직접적으로 나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라는 것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이다. 부르주아 경제학의 범주들은

“역사적으로 결정된 사회적 생산, 즉 상품생산에 속하는 생산관계들을 위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따라서 객관적인 사고의 형식들이다.” Karl Marx, op. cit., p. 169.


2003년 3월 도널드 럼스펠드는 알려진 것[알고 있는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알지 못하는 것]의 관계에 관한 아마추어적인 철학적 사유를 조금 해 보았다. “알려진 알려진 것(known knowns)이 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알려진 알려지지 않은 것(known unknowns)이 있다. 즉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또한 알려지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것(unknown unknowns)이 있다. 즉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럼스펠드는 여기에 중요한 네 번째 항목인 알려져 있지 않은 알려진 것(unknown knowns)을 첨가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즉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들 말이다. 바로 이것이 정확히, 라캉이 말하듯이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지식”, 즉 프로이트적 의미의 무의식이다. 만일 럼스펠드가 이라크와 전쟁할 때의 가장 큰 위험은 “알지 못하는 알지 못하는 것(unknown unknowns)”, 즉 우리가 그것이 무엇이라고 상상조차 못하는, 사담 후세인으로부터 오는 위협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에 대해 우리는, 오히려 이와 반대로 가장 큰 위험은 ‘알려져 있지 않은 알려진 것’(unknown knowns), 즉 우리 자신이 그것들[믿음과 가정]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조차 하지 못하는, 부인된(disavowed) 믿음과 가정들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각오해야 하는 위험은, 이 몽상적인(fantasmatic) ‘알려지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1920년대의 서머셋 몸(Somerset Maugham)의 한 단편 소설에서 한 40대의 영국인은 수 십년 동안 식민지인 상하이에서 일했고 마침내, 런던으로 돌아가 거기에서 독신으로 안락한 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돈을 벌었다. 그러나 런던에서 몇 주 지낸 후 그는 너무 따분해졌고 의기소침해졌다. 그래서 그는 상하이에서 다시 살기 위해 그 곳으로 출발한다. 그는 중국으로 가는 배에 올라탔지만, 상하이로 돌아가는 긴 여행길에서 배가 하노이에서 잠시 멈춘 동안에 배를 떠나 하노이에 영구히 머물렀다. 인생의 꿈의 실현에 의해 실망한 후 그는 자신이 더 이상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영원히 중국 가까이에 머무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상하이에서의 삶이 얼마나 멋졌는지를 영원히 꿈꾸면서 말이다. 바로 이것이 라캉이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는 것(compromising one's desire), 즉 ‘환상의 현실화를 위험에 처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주체의 구성적인 “탈중심화”에 관한 라캉의 주장의 의미를 정확히 설명하는 방식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것의 요점은 나의 주관적인 경험이 나의 자기 경험과 관련해 볼 때 탈중심화되어 있는 [무의식적인 객관적 기제들], 그리하여 그 자체로 나의 통제를 벗어나는(모든 유물론자들이 이 점을 주장한다) 무의식적인 객관적 기제들에 의해 규제된다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더욱 우리를 당황케 하는 무엇이 있다. 나는 심지어 나의 가장 내밀한 “주관적” 경험, “사물들이 내게 드러나는 방식”, 나의 존재의 핵심을 구성하고 보증하는 근본적인 환상 마저 박탈당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결코 의식적으로 경험하고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표준적인 견해에 의하면 주체성을 구성하는 차원은 현상적인 (자기)경험의 차원이다. 나는 내가 나 자신에게, “내가 알지 못하는 기제가 나의 행위와 지각, 사유를 지배한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나로부터 지금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을 빼앗아갈 수 없다”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주체이다. 가령 내가 사랑에 빠져있다고, 한 생화학자가 나의 모든 강렬한 감정들은 내 육체 속의 생화학적 가정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내게 정보를 준다고 할 때, 나는 외관(appearance)에 매달림으로써 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도 내가 지금 느끼는 열정의 강렬함을 나로부터 빼앗아갈 수 없다.” 하지만 라캉의 요점은 정신분석가는, 정확히 이것을 주체로부터 빼앗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가의 최종 목표는 주체의 (자기)경험의 우주를 규제하는 근본적인 환상 그 자체를 주체로부터 빼앗는 것이다.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주체”는, 주체의 현상적인 (자기)경험(그의 “근본적 환상”)이 그에게 접근 불가능하게 될 때(즉 “원초적으로 억압될” 때)에만 등장한다. 가장 급진적으로 말하자면 무의식이란 접근 불가능한 현상이지, 나의 현상적 경험을 규제하는 객관적인 기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한 실체가 “내적 생활”(inner life)(즉 외적 행동으로 환원될 수 없는 환상적인 자기 경험)의 징후를 보여주는 순간 우리는 주체를 다루고 있다라는 일반화된 견해에 반대해, 인간의 고유한 주체성의 특징은 오히려 그 둘을 분리하는 간극에 있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환상은 주체에게 접근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주체를 “빈(공허한, empty)”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접근불가능성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내적 생활”을 경유해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주체라는 표준적인 개념을 전적으로 전복시킬 수 있는 관계를 획득했다. 공허한, 비현상적인 주체와 주체에게 접근 불가능한 현상 사이의 “불가능한” 관계 말이다. 달리 말하면, 정신분석학(그리고 들뢰즈)은 우리로 하여금 주체 없는 역설적인 현상학을 정식화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다. 주체의 현상이 아닌, [하지만] 주체에게 현상하는 현상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주체가 여기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히 배제(exclusion)라는 방식으로 즉 이러한 현상들을 취할 수 없는 부정적인 기관(agency)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환상의 기능은 라캉이 상징적 거세라고 부르는 것의 간극을 말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징적 거세, 그리고 그것[상징적 거세]의 기표로서의 팰러스(남근)란 무엇인가?
우리는 팰러스는 기표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전통적인 직위 수여식으로부터, 우리는 단지 권력을 “상징(화)하는” 것뿐이 아니라, 그것들을[대상들] 획득하는 주체로 하여금 정말로 권력을 행사하도록 해주는 대상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만일 왕이 손에 홀을 들고 있고 왕관을 쓰고 있으면 그의 말은 왕의 말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한 표식은 외적이지 나의 본성의 부분이 아니다. 나는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것을 입고 있다. 그 자체로 그것들은 나를 “거세한다.” 그것들은 직접적인[있는 그대로의] 나와 내가 행사하는 기능 사이에 간극을 도입한다.(내가 그 기능을 완전히 수행해 낼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것이 저 악명 높은 “상징적 거세”가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징적인 것으로서의 거세, 혹은 단지 상징적으로 집행되었다는 의미에서의 거세”(내가 어떤 것을 박탈당하면 나는 “상징적으로 거세되었다”라고 말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내가 상징적 질서에 사로잡혀 있고, 따라서 상징적 위임(symbolic mandate)을 받았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서 발생하는 거세이다. 거세란 직접적인 나와 나에게 어떤 “권위”를 부여하는 상징적 위임 사이의 간극이다. 이러한 정확한 의미에서 권력의 정반대이기는커녕 그것은 권력과 동의어이다. 그것은 나에게 권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나의 존재의 생명적(vital) 힘, 나의 남성성 등등을 표현하는 기관이 아니라, 정확히 하나의 표식으로, 즉 왕 혹은 재판관이 자신의 표식을 부착하고 있듯이 내가 쓰고 있는 가면으로서 우리는 팰러스를 생각해야 한다. 팰러스는 내가 부착하고 있는 “육체 없는 기관”이다. 그것은 영원히 나의 육체의 “유기체적 부분”이 됨이 없이 나의 육체에 매달려 있다. 그것은 나의 육체의 비일관적인, 잉여적인 보충물로서 튀어나와 있다.
당신은 이 “무한 판단”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2001년 5월 7일 <뉴스위크>지의 커버 스토리(“종교와 뇌”)는 강렬한 종교적 경험에 동반되는 뇌의 과정을 판독한 “신경신학자”의 가장 최근의 성공 사례에 대해 보도한다. 가령, 어떤 주체가 자신을, 자신의 자아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우주의 무시간적이고 무한한 부분이라고 경험할 때, 시간, 공간에 관한 정보[를 작업해 내는 뇌의 장소] 그리고 공간에서 육체의 방향 잡기(orientation of the body in space)를 작업해 내는 뇌의 장소는 “어두워진다.(goes dark)” 강한 명상적 집중 동안에 감각 재료의 입력(sensory inputs)이 봉쇄될 때, 뇌는 자신을 모든 사람, 모든 사물과 밀접하게 엮어진 무한한 존재로 자신을 지각할 수밖에 없다. 시각(visions)도 마찬가지다. 시각은 측두엽(側頭葉, temporal lobes)에서 일어나는 전자파의 비정상적 분출에 명확히 상응한다. 잡지 기사는 보다 열린 결말로 끝을 맺는다. 물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또한 신경적 활동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이 인과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사과를 먹을 때, 우리는 또한 뉴런의 활동으로서의 그것의 맛을 즐긴다. 하지만 이것이, 사과가 정말로 바깥 저기에 있고 우리의 활동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에 결코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뇌의 주름부분이 신(에 대한 경험)을 창조하는지 아니면 신이 우리의 뇌의 주름부분을 창조했는지 라는 문제는 결정 불가능하다하다. 더욱이 종교는 심리 내적인(신비적 혹은 그 밖의 무엇이든 간에)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또한 어떤 (명제적) 진리에 대한 믿음, 우리의 윤리적 자세와 실천적 활동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유태인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을 따르는 것이지 당신이 율법을 따르고 있을 때 당신이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손쉬운 해결책은 더 깊은 딜레마를 감추고 있다. 인과성의 문제는 해결하기가 상대적으로 더 쉬워 보인다. 우리(실험자인 박사)가 직접 뇌의 적당한 부분에 개입해서 문제가 되고 있는 그 행동을 산출해 낸다면? 만일 우리가 그러한 활동을 하는 동안에 주체가 “신적 차원”을 경험한다면, 이것은 결론적인 대답을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두 번째의 반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만일 우리가 어떤 주체에게 종교적 교리를 마구 제시하고, 적당한 전자적 혹은 화학적 자극을 가함으로써 깊은 종교심을 가진 사람으로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으로 만든다면, 이것 역시 딜레마를 해결해 주지 않는가? 더욱이 사과와의 비교는 오래 전에 헤겔이 칸트를 비판했던 것과 꼭 같은 이유로 부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을 비웃으면서 칸트는 100달러라는 개념은 우리의 주머니에 있는 실제적인 100달러와 같지 않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요점은 정확히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현실 외부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무한한 실체인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사과나 달러[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맥긴(McGinn)이 올바로 지적하고 있듯이 의식을 안다는 것은 뇌와 정신의 교차(intersection)를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직접적으로 사유/앎인(is) 물리적/생물학적 과정(“우리가 생각하는 동안에 뇌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 즉 정신의 육체적 대응물이 아니라는 것임)과 직접적으로 물리적 과정인(is) 사유(“H2O는 물이다”라는 의미)의 교차를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뇌로부터 출현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는, 뇌의 알려져 있지 않은 속성들은 의식이 뇌 속에 체현될 수 있도록 허용해 주는, 의식의 감추어진 측면들과 중첩한다. 출현(emergence)의 원칙과 체현(embodiment)의 원칙은 일치한다... 의식을 설명하는, 뇌의 알려져 있지 않은 속성들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는, 의식의 속성들이다. 이 두 무지(ignorance)의 영역은 서로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은 무지의 같은 영역이다.” Colin McGinn, The Mysterious Flame, New York: Basic Books 1999, p.155-156.



인지적 폐쇄(cognitve closure)라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 앎(awareness) 그 자체가 그것[앎]의 육체적 대응물에 대한 거리라고 정의된다면?(즉 주체는 이다. 주체는 대상으로서의 주체를 벗어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육체로서의 나를 직접적으로, 객관적인 현실로서, “사유하는 사물”(칸트)로서 알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의미로서의) 인간적 의미에서 사유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현실 그 자체는 더 이상 현실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폐쇄(closure)는 단지 인지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사유-앎-의식을 구성한다. 이러한 역설은 인지 과학에서의 악명 높은 좀비(zombie) 문제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것은 아마도, 의식 자체가 대상의 지위를 갖는다는 라캉의 주장에 대한 최종적 증명이 될 것이다.

“...좀비는 완전하게 자연적이고 기민하며, 수다스럽고 생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는 인간이거나 혹은 인간이려고 한다. 하지만 사실 좀비는 전혀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일종의 기계일 뿐이다. 좀비에 대한 철학자의 관념의 전체 요점은, 당신은 외적인 행동을 검토함으로써는 결코 좀비를 정상적인 사람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친구들과 이웃들을 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당신들의 가장 친한 친구들 중 몇몇은 좀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Daniel C. Dennett, Consciousness Explained, New York: Little, Brown and Company 1991, p.73.


좀비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인간 정신을 행동주의적-환원주의적으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거부하기 위해 제안되었다. 행동주의적-환원주의적 구성은 인간의 모든 현상적 속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직관적으로 “의식” 혹은 “자기의식”으로 파악하는 것을 갖고 있지 않은 한 실체를 구성한다. 물론 문제는 의식을 어떤 특수한, 관찰 가능한 경험적인 속성으로 꼭 집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행동의 두 계열(인간의 행동과 좀비의 행동)은 어떤 실질적인 이유로도 구분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파악하기 힘든 차이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다(그 차이를 설명하는 파악하기 힘든 X는 바로 라캉의 대상 a (objet petit a)이다). 자세히 검토해 보면 “내적 생활”을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인간과 좀비의 대립은 보기보다 훨씬 역설적이다. 좀비는 비록 그것이 무언가를 느끼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할지라도(그럴 것 같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로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우리가 주장할 때, 속임을 당하는 것은 누구인가? 외부적 관찰자인 우리인가? 아니면 좀비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인가? 좀비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그것을 인간의 행동과 구별을 하지 못하는 것은 관찰자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왜 좀비는 마치 자신이 내적 생활을 가지고 있다는 듯이, 관찰자를 위해 행동하면서, 내적 생활을 흉내내야 하는가? 다른 한편 만약 좀비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당신 자신의 현상적 상태의 ‘외양’(seemings)이 그러한 상태에 대한 자기귀속적(self-ascriptive) 판단, 믿음, 사유, 기억, 기대 등등에 의해 구성되는 바에는(상당한 정도로 그러한 외양이 그렇게 구성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신이 좀비가 되자마자 당신은 어떤 진정한 현상적 상태를 갖기를 그칠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내적 생활은 계속 당신에게 같은 것처럼 보일 것(seem)이라 장담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좀비 가설에 따라, 당신은 이제 당신 자신의 현상적 상태를 ‘환각 속에서 만들어 낼’(hallucinating) 것이다.” Guven Guzeldere, "Introduction: The Many Faces of Consciousness", in The Nature of Consciousness, ed. By Ned Block, Owen Flanagan, and Guven Guzeldere, Cambridge(Ma): The MIT Press, 1997, p.44.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외양’(seeming)과 ‘외양의 외양’(seeming of seeming)[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구분할 것인가? 어떤 상태가 나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가?(Can a state seem to me to seem?) 이러한 입장은, ‘사물이 정말로 내게 그렇게 보인다’와 ‘나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구분을 무의미한 구분으로 비판하는 데닛의 비판을 받을 만한 무의미한 입장이 아닌가? 데닛의 결론은 필연적인 결론이 아닌가? 단지 단편적인 이차적인 “외양들”만이 존재하며 너머에 있는 것은 뉴런적 기제인가? 하지만 정반대의 강력한 결론, 즉 모든 외양은 외양의 외양이라는 결론은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다는 것을 결코 확신할 수 없다고 키에르케고르가 주장했듯이, 외양은 그 개념 자체에서 볼 때, 분열된, 반성적인(reflexive) 것이라는 결론은 어떠한가? 결론적으로, 외양의 출현에 의해 도입된 존재론적인 분열은 단순히 외양과 현실사이의 분열이 아니라 항상 외양 그 자체에 내재해 있는 분열이 아닌가? 여기에서 헤겔적 주장은, 사물들이 현상하는 방식은 사물들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것, 현상 그 자체가 본질적이라는 것뿐 아니라, 여기에, 본질 그 자체가 현상에 내재해 있으며, 현상의 분열 속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 진정한 수수께끼는 사물들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에게 정말로 어떻게 보이는가?”라는 것이다. 이는 환상에 대한 라캉의 개념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결론은 명확하고 분명하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좀비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좀비], 자신을 자의식적 존재로 지각하도록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좀비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직접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의식 그 자체에 대한 적절한 이론을 제공하는 데에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표준적인 철학적 비판은 어떤가? 의식과 무의식은, 중간적인 수많은 상태를 가진(예를 들면 혼란스러운 반의식 상태) [양극을], 같은 차원에 있는 두 개의 반대되는 [양극을], 혹은 같은 개념적 장에 내재해 있는 양극(poles)을 지칭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완전히 양립 불가능한(incommensurable) 것이 아닌가? 의식의 차원에서 우리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깊은 “비합리적” 충동이라는 생철학적 “무의식”이다). 그리고 무의식은 의식에 대해 외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무관심하며, 다른 차원에서 기능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점을 너무 급히 인정하기 전에 우리는 의식과 기억의 대립에 관한 프로이트적 견해를, 즉 의식적이 되지 않은 것은 기억의 흔적 속으로 기록된다는 생각을 자세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주장의 결론은, 의식은 근본적으로 방어 형성물(defense-formation), 억압의 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망각하기 위해 그것을 의식한다. 그래서 그것은 기억 속으로 기록되지 않으며 우리를 따라다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과제는 이러한 프로이트의 주장을, 의식의 근본적으로 “환원주의적”인 기능에 대한 인지 과학적인 “헤겔적” 통찰과 연결시키는 일이다. 의식과 복합체(complexity) 사이의 연결은, “사물이 너무 복잡해지면 의식이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의식은 복합체의 철저한 단순화의 매개라는 것을 뜻한다. 의식은 특히 탁월한 “추상화”(abstraction)의 매개, 그것[의식]의 대상을 단순한 특징들의 쌍으로 환원시키는 매개이다.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의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유명한 실험은 같은 방향을 지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들을 흥미로운 실험으로 만드는 것은, 비록 결과는 명쾌하지만, 그 실험들이 무엇을 위한 실험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Benjamin Libet, "Unconsciousness Cerebral Initiative and the Role of Conscious Will in Voluntary Action,", in The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1985, Vo. 8, p.529, 539 참조. 그리고 Benjamin Libet, "Do We Have Free Will?", in Journal of Consciousness Studies, 1999, Vol. 1, p.47-57.
그것들은 어떻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인지를 증명하고 있다고 사람들은 주장할 수 있다. 즉 심지어 우리가 (가령 손가락을 움직이기로) 의식적으로 결정하기 전에, 적당한 뉴런적 과정이 이미 작동하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의 의식적 결정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을 단지 주목하는 것(이미 달성된 것을 의식이 피상적으로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의식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이러한 과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의 저절로 주어지는 결정을 봉쇄할 수 있는 자유는 최소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동적인 결정에 대한 우리의 거부 능력 그 자체가 이미 어떤 “맹목적”인 뉴런적 과정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하지만 세 번째의 더욱 급진적인 대안이 있다. 우리의 의식적인 결정에 앞서 이미 “자동적인” 뉴런적 과정 그 자체를 촉발시킨 무의식적 결정이 있었다면? 프로이트에 앞서 셸링(Schelling)은 우리가 내리는 기본적인 자유스러운 결정은 무의식적이다라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리벳의 실험과 관련해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본다면 근저에 놓여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무의식의 지위의 문제이다. 단지 의식적 사유(손가락을 움직이고자 하는 뒤늦은 의식적 결정)와 “맹목적인” 뉴런적 과정들(이 손가락을 움직이는 뉴런적 행위)만이 존재하는가? 혹은 무의식적 “정신적” 과정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참으로 무의식이 존재한다면 이것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가? 그것은 순수하게 잠재적인 상징적 질서의 지위, 혹은 순수한 논리적 전제(비록 실재적 시간에서 실제적으로 행해지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 결정은 내려졌어야 했다)의 지위가 아닌가?
인지과학자들의 기획이 유물론적 대답을 제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질문들과 관련해서이다. 그것은 그러한 질문들을 부정하거나 “이원론적” 관념론적 입장으로 도피한다. 다니엘 데닛이 거의 강박적으로, “다윈의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가라는 주제를 다양하게 제시할 때, 우리는 그의 주장은 정반대의 두려움을 은폐하고/드러내고 있다는 의심을 제기하고 싶어진다. 만일 다윈의 생각(진화의 철저한 우연성, 의도와 정신은 발생적 변이와 선택이라는 맹목적 과정으로부터 출현)이 평화를 가져다주려고 하는 메시지라면(쉽게 생각해.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나 의무도 없어)? 키에르케고르 식으로 진정한 “위험”, 진정으로 참을 수 없는 외상은, 우리가 진화적 적응의 결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 인지과학을 벗어나는 어떤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인지과학에 관한 가장 간결한 정의는 내면화된 행동주의, 즉 내부의 행동주의(유대인과 반대로 기독교인은 “내적으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라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행동주의적 환원(관찰 가능한 적극적인 과정으로의 환원)을 내적인 과정에 (재)적용하는 것, 즉 정신은 더 이상 블랙 박스가 아니라 컴퓨터 같은 기계라는 것이 아닌가?
(핑커로부터 맥긴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지과학자들이 다음과 같이 주장함으로써, 즉 의식이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없고,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으로서 자신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의식의 속성은 다름 아닌 의식 그 자체, 의식을 구성하는 것의 속성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기)의식의 역설을 설명하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자해적 할례 때문이다.
(핑커는 더욱 과학적인 진화주의적 판본을 제시한다. [핑커에 따르면] 의식은 자신을 이해/설명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다른 진화적 기능을 가지고 출현했다. 반면 맥긴은, 왜 의식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수수께끼인가라는 더욱 순수 이론적인 판본을 제시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보게 되는 것은 형이상학의 출현에 관한 진화론적 생물학적 설명 이외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존재와 시간󰡕의 틀로부터 나오는, 하이데거적인 반대 질문이 즉시 여기에서 떠오른다. 하지만 이는 바로 의식이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선험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수수께끼를 질문한다는 것이 아닌가? (하이데거 자신이 말했듯이 현존재는 자기 자신의 존재에 관해 질문하는 실체이다.) 어떻게 이러한 속성이 진화론의 논리 속에서 출현할 수 있는가? 요점은 단지, 의식의 적응 기능의 정점에서(주변에서 어떻게 길을 찾아나가는가...등등) 의식이 또한 진화적, 적응적 기능(유머, 예술, 형이상학적 질문들)을 가지지 않는 수수께끼에 의해 방해받는다는 사실만은 아니다. (더 나아가) 중요한 요점은, 이러한 무용한 보완물(supplement), 선험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강박적 고착이 사후적으로, 풍부한 생존 가치를 갖는 절차(기술, 통찰력)들의 진정한 폭발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마치, 생존 투쟁에서 다른 생물들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인간이라는 동물은 생존투쟁 그 자체를 포기해야 하고 다른 질문들에 집중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생존 투쟁에서의 승리는 단지 부산물로만 얻어질 수 있다. 직접적으로 생존 투쟁에 집중하면 그것을 상실한다. 불가능한/해결할 수 없는 질문들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존재만이 가능한 지식 속에서 길을 개척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이데거가 말하려고 했듯이 동물의 생존 투쟁과 달리 인간의 투쟁은 이미 “반성적”이며 자신의 존재의 의미의 지평으로서 경험된다. 발전하고 있는 테크놀로지, 권력 투쟁은 직접적인 “생명의 사실”이라기보다는 존재의 어떤 계시 속에서, 계시로서 발생한다.
어떻게 뇌가 의식을 산출하는가 라고 하는 것에는 실제로 아무런 신비스러운 것이 없다(양자 역학을 이해하는 일은 원숭이의 인지적 능력을 벗어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인지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맥긴이 주장할 때, 여기에는 이중의 아이러니가 있다. (양자 역학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원숭이와는 완전히 달리 우리는 의식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가? (원숭이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들도 양자 물리학을 정말로 이해할 수는 없다(그것을 의미의 지평으로 완전히 번역한다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러한 딜레마는 스티븐 핑커의 󰡔정신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Steven Pinker, How the Mind Works?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98.
라는 책의 마지막 장, 즉 예술, 농담하기, 그리고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철학, 종교)처럼 적응적 기능에 아무 기여도 하지 못하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을 시도하고 있는 “생명의 의미”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맥긴을 따라 핑커는, “우리의 정신은 철학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장치를 결여하고 있다” Pinker, op. cit., p.562-563.
고 결론 내리며, 이러한 “인지적 폐쇄”(cognitive closure)에는 아무런 형이상학적인 것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엄격히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하나의 종(species)의 하나의 기관에 관한 관찰이다. 그것은 고양이는 색맹이다 혹은 원숭이는 긴 나눗셈을 배울 수 없다라는 것을 관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종교적 혹은 신비적 신념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것들이 무용한가를 증명한다.” Op. cit., p.563.
진화 과정 속에서 그것[인류]이 등장하는 방식으로 인해 인류는 “자신의 힘을 자신의 구문적(syntactic), 구성적(compositional), 조합적 능력에 빚지고 있다” 그 자체로 인류는, “특히 전체적(holistic)이며 즉시 모든 곳에 있고 아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것” Op. cit., p.564.
인 현상들을 파악하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다. “오랜 세월 동안의 신비들에 우리가 당황해야 하는 것은 아마도, 단어들과 문장들의 세계를 연 조합적 정신(combinational mind)을 위해 우리가 지불한 대가인지도 모른다.” Op. cit., p.565.
핑커는 이러한 현상으로 세 가지 현상, 즉 감각(sentience), “나”, 그리고 지시하기(referring)를 열거한다. 감각은 두뇌의 사건들의 조합 혹은 컴퓨터의 상태들의 조합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이다. “나”는 육체적 부분들 혹은 뇌의 상태들 혹은 정보의 편린들의 조합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의 자기(selfness)의 통일”, 즉 구체적으로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단일한 장소(single locus)이다. 자유의지는 “정의상, 사건들과 상태들의 인과적 연쇄가 아니다.” Op. cit., p.564.
그리고 마찬가지로, 의미의 조합적 성격에 관해서는 많은 설명이 있었지만, “의미의 핵―무언가를 지시하는 단순한 행위―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시되고 있는 사물과 지시하고 있는 사람 사이의 어떤 인과적 관계로부터 이상하리만큼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564-5)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이러한 문제들의 본질 그 자체와, 자연적 선택이 우리를 적응하도록 만들어 준 컴퓨터적 장치 사이의 부조화” Op. cit., p.565.
를 다루고 있다고 우리가 주장한다면, 진정한 수수께끼는 삶의 의미 그 자체가 아니라, 차라리 왜 우리의 정신은 우선적으로 삶의 의미를 집요하게 탐구하는가하는 것이다. 만일 종교와 철학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그것들[종교와 철학]이 해결할 수 있도록 고안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한 정신적 도구들의 적용이라면, 어떻게 이러한 잘못된 적용이 발생했으며, 왜 그 잘못된 적용은 그렇게 집요한가? 이러한 입장의 칸트적 배경에 주목하라. 이미 칸트는, 인간의 정신은 자신이 선험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질문의 짐을 지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질문들은 보류될 수 없다. 그것들은 우리의 본성 그 자체의 일부이다. 핑커는 예술을 다룰 때, 이러한 “잘못된 적용”의 기본 공식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정신의 몇몇 부분은 우리에게 쾌(pleasure)의 감각을 제공함으로써 쾌적함(fitness)의 증가의 달성을 기록한다(register). 다른 부분들은 목표 달성을 위해 원인과 결과에 관한 지식을 이용한다. 그것들을 한꺼번에 모으면 당신은 생물학적으로 무의미한 도전으로 상승하는 정신을 얻는다. 뇌의 쾌락 회로에 어떻게 도달하며, 거친 세계로부터 선의의 쾌적함의 증가를 억지로 빼앗는 불편함 없이 쾌락의 작은 충격을 어떻게 제공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정신 말이다.” Op. cit., p.525.


이러한 단락(短絡, short-circuit)에 대한 핑커의 첫 번째 예는 치명적인 쾌락의 악순환에 사로잡혀있는 쥐이다. “쥐 한 마리가, 그것의 뇌 중앙부에 있는 전뇌(forebrain) 다발에 이식된 전극으로 전자 자극들을 보내는 지렛대에 도달하면, 그 쥐는 탈진해 쓰러질 때까지 지렛대를 격렬하게 누른다. 먹고, 마시고 성행위 하는 기회조차 포기한 채.” Op. cit., p.524.
간단히 말하면, 이 불쌍한 쥐의 뇌가 성교를 한 것이다. 마약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우리의 뇌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작용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순수한” 최음제이다. 우리의 뇌에 쾌락을 제공하는 도구인 우리의 감각들을 자극하는 수단이 아니라, 뇌 자체 속에 있는 쾌락의 중추에 대한 직접적인 자극이다. 더 매개된 다음 단계는, 그것[쾌락회로]이 과거 세대에서 쾌적함(fitness)을 낳았었을 환경에 있을 때, 그 회로를 자극하는 “감각을 경유해” 쾌락 회로에 도달하는 것이다. 과거 세대에서 동물이 자신의 주변에서 자신의 생존 기회(예를 들면 먹이를 발견하거나 위험을 피하는 것)를 증가시켜주는 어떤 패턴을 발견했을 때 말이다. 이제 유기체는 단지 쾌락을 얻기 위해 그러한 패턴을 직접적으로 만들어낸다. 이러한 모형이, 음식, 음료, 그리고 성적 쾌락, 그리고 심지어 예술까지도 설명한다. 미적 경험의 기초는, 원래 우리가 우리의 주변에서 방향을 잘 잡을 수 있도록 해주었던 (예를 들면 대칭적인, 명확한) 감각적 패턴의 재인식이다.
물론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가 생겨난다. 어떻게 이러한 단락(short-circuit)이 발생하는가? 원래는 우리의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목표 지향적 행위의 부산물(예를 들면 목표가 달성되었다는 표식)에 지나지 않았던 쾌락 경험이 어떻게 목적 그 자체로 변화하는가? 여기에서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물론 성(sexuality)이다. 원래 번식의 목표가 달성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성적 쾌락이 목적 그 자체가 된다. 그리하여 인간이라는 동물은 이 목표를 추구하고, 이것을 자세히 계획하고, 심지어 (피임을 통해서) 원래의 목표를 직접적으로 방해하기도 하면서 엄청난 시간을 낭비한다. 카톨릭은, 성을 동물의 교미의 수준으로 질을 낮추는 번식의 목표로만 사용할 것을 허락한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역설은 원래 단순한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자율적인 목표로 승격되었을 때, 바로 그 때 인간의 고유한 차원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더 이상 “반사적”이지 않다. 반면 인간은, 동물에게는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지각한다. 요컨대 “인간화”의 영도(zero-degree)는 동물의 행위를 더욱 “매개하는 것”, 더 높은 총체성(가령 우리는 더 높은 영적 잠재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먹고 번식한다)의 종속된 계기로서 그것[동물의 행위]을 재등록하는 것이 아니라, 초점을 더욱 좁히는 것, 사소한 행위를 목적 그 자체로 승격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몸짓을 반복하고 거기에서 만족을 얻을 때, 즉 폐쇄된, 자기 추진적인 고리에 사로잡혔을 때 “인간”이 된다. 우리 모두는 만화 영화의 전형적인 장면들 중의 하나를 기억한다. 춤추면서 고양이가 공중으로 뛰어 올라가고 자신을 축으로 돌기도 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중력의 법칙에 따라 땅의 표면을 향해 떨어지는 대신, 고양이는 공중에 일정시간 정도 떠 있고, 마치 시간의 고리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매끄러운 자세로 돌며 같은 원환 운동을 반복한다, 등등.(슬랩스틱의 요소들을 사용하는 몇몇 음악 코미디에서 같은 장면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무용수는 공중에서 빙빙 돌면서 약간 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다. 마치 잠시동안 그(녀)가 중력의 법칙을 정지시키는 것에 성공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한 효과가 무용이라는 예술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겠는가?) 그러한 순간에 “정상적인” 사물의 흐름, 물질적 현실이라는 우매한 관성(inertia)에 사로잡히는 “정상적인” 과정이 잠시동안 정지된다. 우리는 정지된 활성화라는 마술적인 영역, 말하자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늪으로부터 자신을 끌어올린 뮌히하우젠(Münchhausen) 남작처럼 공중에 매달려 자신을 지탱하는, 일종의 영묘한 회전과 같은 마술적인 영역에 들어간다. 그[회전 동작] 속에서 시간의 직선적인 진행이 반복적인 고리 속에서 정지하는 회전 동작이야말로 충동의 가장 근본적 속성이다. 이것은 또한 영도차원(zero-level)에 있는 “인간화”이다. 시간의 직선적인 연쇄를 정지/파열시키는 자기 추진적 고리 말이다.
스파이 소설과 영화의 교훈은 여기에서 적절하다. 적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완벽한 “조작”(operation)이 어떻게 해서 실패하게 되는가? 보통은, 더욱 어둡고 더욱 비밀스러운 음모가 그 뒤에 숨어있다는 식으로, 예를 들면 이중 삼중의 스파이가 있다는 식으로 일이 꼬이게 된다. 하지만 더욱 비극적으로 꼬이기도 한다. “인간적 요소”의 예측할 수 없는 역할 말이다. 한 여자를 유혹하고, 이용하고, 그 다음에 희생시키는 역할을 맡은 요원(혹은 이 일에 적합한 남자)이 그녀에게 반하고, 그래서 그녀를 배반하고 희생시킬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상관에게 단지 자기의 희생자를 이용하는 척만 한다. 실제로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다중적 차원의 속임수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복합성이다. 복잡한 음모에서 단지 수단으로서 계획되었던 것이 갑자기 절대적인 목표로, 궁극적인 충성의 대상―나는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날지라도 그것에 매달린다―으로 승격한다.

결론을 내리자.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능력이 “객관적인” 도구로 점진적으로 외화 된다(예를 들면 종이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는 사실이 우리의 인간적 잠재성을 빼앗아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외화의 해방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의 능력이 외부의 기계로 더욱 많이 전치 되면 될수록 더욱 우리는 “순수한” 주체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움(emptying)이야말로 실체 없는 주체성의 등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계”에 완전히 의존할 수 있게 될 때에만 우리는 주체성의 빈곳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2002년 3월 미디어는 런던 출신의 케빈 워윅(Warwick)이 최초의 사이버 인간이 되었다고 보도했다. 옥스퍼드의 한 병원에서 그의 뉴런 시스템은 컴퓨터 네트워크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오감을 거치지 않고 데이터를 직접 주입 받는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인간 정신과 컴퓨터의 결합(후자가 전자를 대신한다기보다는), 이것이 미래이다.
뉴욕 대학의 과학자들이 쥐의 뇌로부터 직접적으로 신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컴퓨터 칩을 부착했다고 보고한 2002년 5월에 우리는 이러한 미래를 다시 한 번 맛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조종 기제를 가지고(원격 조정 장치를 가진 장난감 자동차를 작동시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쥐를 통제할 수 있다(쥐가 달려가는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뇌와 컴퓨터 네트워크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의 최초의 사례는 아니다. 맹인들이 시각적 지각 장치(예를 들면 눈)를 직접 거치지 않고, 자신들의 뇌로 직접 주입되는, 주변 환경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적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러한 연결은 이미 존재한다. 쥐의 경우에서 새로운 것은 살아있는 동물의 “의지”, 그것이 취할 동작에 관한 “자발적인” 결정을 외부의 기계가 내려준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중요한 철학적 질문이 있다. 그 불운한 쥐는 외부에서 결정되는 자신의 동작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쥐는 그것을 자발적인 어떤 것으로 “경험”하는가?(즉 쥐는 자신의 동작이 조정되고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알지 못하는가?) 혹은 쥐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다른 외부적 힘이 자신의 동작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같은 실험(윤리적 문제가 생김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으로 말한다면 쥐의 경우보다 더 복잡하지는 않은)을 하여 동일한 추론을 적용하는 것이다. 사람의 경우에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지만, 쥐의 사례에서는 “경험”이라는 인간의 범주를 쥐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물을 수 있다. 조종 받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동작을 자발적인 어떤 것으로 계속 “경험”하는가? 그는 자신의 동작이 조종 받고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알지 못하게 되는가? 혹은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다른 외부적 힘이 자신의 동작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정확히 질문하면, 어떻게 이러한 “외부적 힘”이 “나의 내부에 있는” 어떤 것, 멈추게 할 수 없는 내적 충동으로 혹은 단순한 외적 강제로 여겨질 것인가? 아마도 상황은 벤자민 리벳의 유명한 실험 Benjamin Libet, “Unconsciousness Cerebral Initiative and the Role of Conscious Will in Vountary Action", in The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1985, Vol. 8, p.529-539, 그리고 Benjamin Libet, "Do We Have Free Will?", in Journal of Consciousness Studies, 1999, Vol. 1, p.47-57 참조.
에서 기술된 것과 같을 것이다. 조종되고 있는 사람은 움직이고자 하는 충동을 자신의 “자발적인” 결정으로 계속해서 경험할 것이다. 하지만 ―유명한 0.5초 지연 덕분에― 그(녀)는 이러한 결정을 봉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과학자들과 보도 기자들이 이러한 기제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언급했다는 것 역시 흥미롭다. 언급한 첫 번째 세부사항들은 인도주의적 도움과 반테러 운동이라는 쌍과 연관되어 있다(돌덩이 밑에 깔린 지진의 희생자들과 접촉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함이 없이 테러리스트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조종 받는 쥐와 다른 동물들을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것은 기계 속으로 직접 통합된 인간 정신에 관한 이러한 음험한(uncanny) 경험은 미래 혹은 어떤 새로운 것에 관한 비젼이 아니라, 항상-이미 진행되고 있는 어떤 것, 여기에 맨 처음부터 있던 어떤 것에 관한 통찰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징적 질서와 같은 실체이기 때문이다. 변한 것은, 기계의 직접적인 물질화, 그것의 직접적인 뉴런적 네트워크로의 통합에 직면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인격(personhood)의 자율성이라는 환상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투석(dialysis)을 필요로 하는 환자는 처음에는 완전한 무기력감을 느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어떤 사람의 생존 그 자체가 내가 내 앞에서 보는 기계적 장치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다. 약간 과장된 용어로 표현하면 우리 모두는 정신적-상징적 투석 장치를 필요로 하고 있다.
컴퓨터 발달은 그것의 불가시성(invisibility)으로 향하는 경향성이 있다. 신비로운 깜박거리는 빛을 가진 거대한 흥얼거리는 기계는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정상적인” 주변 속으로 장착되어 그것을 더 부드럽게 작동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작은 조각들에 의해 점점 더 대체될 것이다. 컴퓨터는 점점 작아질 것이고 따라서 보이지 않을 것이며, 도처에 있을 것이며, 아무 곳에도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무 강력해서 그것들은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다. 요즈음의 자동차를 생각해보기만 해도 이를 알 수 있다. 그 자동차에서 많은 기능들(창문 열기, 난방...)이 우리가 거의 지각하지 못하는 작은 컴퓨터 때문에 부드럽게 작동하고 있다. 가까운 장래에 우리는 부엌, 심지어 옷, 안경, 구두까지도 컴퓨터화하게 될 것이다. 먼 장래의 일이기는커녕 이 불가시성은 이미 여기에 존재한다. 필립스사는 재킷의 천 속으로 짜여 넣어지게 될 전화와 음악 재생기를 시장에 곧 내 놓겠다고 계획하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때와 다름없이(디지털 기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하지 않고) 재킷을 입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세탁할 때에도 전자 하드웨어를 상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감각적(시각적) 경험의 장으로부터의 이러한 사라짐은 겉보기와는 달리 그렇게 무해하지 않다. 필립스 재킷을 (더 이상 귀찮고 잘 부서지는 기계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육체의 장착된 거의 준유기체적인 의족 같은 것으로서) 다루기 쉬운 것으로 만들게 될 바로 그 특징은 전능한, 보이지 않는 주인의 환영 같은(phantom-like) 성격을 그것에 제공할 것이다. 기계적인 부착물은 우리가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외부의 기계이기를 점점 그칠 것이며, 직접적인 유기체로서 우리의 직접적인 자기 경험의 더 많은 부분이 될 것이고, 이로써 우리를 내부로부터 탈중심화할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컴퓨터의 증가하는 불가시성과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사실, 즉 사람들이 무언가를 충분히 잘 배우면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하기를 그친다는 사실 사이에 병행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오도한다. 우리가 언어를 배웠다는 표식은, 우리는 더 이상 언어의 규칙에 집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것을 말한다. 적극적으로 규칙들에 집중하는 것은 심지어 우리가 유창하게 언어를 말하는 것을 방해한다. 하지만, 언어의 경우에는 우리는 이전에 그것을 배웠어야 한다.(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정신 속에 가지고 있다.) 반면 우리 주변의 보이지 않는 컴퓨터는 저기 바깥에 있으며, “자발적으로”가 아니라 맹목적으로 행동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 “정신”의 사회적 성격을 주장하는 데닛에 대한 보 달봄(Bo Dahlbom)의 비판 Bo Dahlbom, "Mind is Artificial", in Dennett and His Critics, ed. Bo Dahlbom, Oxford: Blackwell 1993 참조.
은 정당하다. 즉 정신에 관한 이론은 명백히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의해 조건지어진다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경쟁하는 다양한 설계도에 관한 데닛의 이론은 경쟁, 탈중심화 등등의 동인을 갖고 있는, “포스트 산업적” 후기 자본주의―󰡔설명된 의식󰡕(Consciousness Explained)을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우화로 읽을 것을 제안하는 프레더릭 제임슨(Frederic Jameson)에 의해서 또한 발전된 개념―의 뿌리를 보여주지 않는가?) 훨씬 더 중요한 점은, 어떻게 도구들―인간이 의존하는 외화된 지능―이 인간 정체성의 고유부분들일 수 있는가에 관한 데닛의 주장은 데닛 자신 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가야 할 길을 열어 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래된 훌륭한 맑스주의적용어로 말하자면,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이기 때문이다. 왜 데닛은 다음 단계의 논리적 단계를 취해서 직접적으로 사회적 관계의 이러한 그물망을 분석하지 않는가? “도구들로부터 특히 언어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외화된 지능”의 이 영역은 자기 자신의 영역, 즉 헤겔이 “객관적 정신”이라고 불렀던 영역, 자연적 실체에 대립하는 인공적 실체의 영역을 형성한다. 달봄이 제안하는 정식은 다음과 같다. “정신들의 사회”(민스키, 데닛 및 그 밖의 사람들에 의해 개진되었던)로부터 “사회의 정신들”에로(즉 사회적 관계[의 그물망]와 지능을 “객관화시키는 인공적 기계적 보충물의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만 등장하고 기능할 수 있는 인간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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