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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7/21 (04:14) from 80.139.185.135' of 80.139.185.135' Article Number :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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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에의 접근
무의식에의 접근 - 칼 구스타프 융


꿈의 중요성

인간의 언어는 상징으로 가득 차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호나 이미지는 상징이 아니다. 상징이란 특정한 함축성과 관습적이면서도 명백한 의미를 지니고, 모호하지만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감추어진 무엇을 내포한다. 이러한 상징성은 정확하게 정의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무의식적 측면’을 지닌다. 수레바퀴의 형상을 ‘신성한’ 태양에 관련시키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이성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측면인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인간이해의 범주를 넘는 것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완전히 정의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개념들은 끊임없이 상징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의식적 측면에서의 상징 사용과는 반대로 무의식적이고 자연발생적인 형태로 꿈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상징을 만들어낸다. 이런 측면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의식적인 지각에서조차 무엇을 완전히 안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지하면 결국 인간의 지식이 부딪히는 한계, 인간의 지식이 통과할 수 없는 영역은 반드시 있는 법이다.
더욱이 우리의 현실지각에는 무의식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감각이 현실에 반응할 때조차 현실의 현상은 ‘심적 사상’으로 변하는데, 이것의 궁극적인 ‘심적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든 구상적 대상은 어떤 의미에서 불가지적인 것이다. 게다가 우리들이 의식할 수 없는 종류의 사상도 존재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의식의 문턱에 있는 사상’은 기존에 있었던 경험이기는 하나 이미 잠재의식에 동화되어 있는 사상을 말한다. 직관과 깊은 사색은 이를 의식화시키는 작업 중의 하나이며, 일반적으로는 꿈을 통해 상징적인 이미지로 분출된다.
꿈의 연구를 통해 심리학자는 의식이 지닌 심적 사상의 무의식적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에 반대하는 많은 학자들은 무의식으로 인한 두 개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격의 분리 현상은 병적인 징후가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른다고 해서 그 사람을 신경증적 환자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지극히 일반적인 무의식적 징후이며 인류공통의 유산이다. 물론, ‘마음’을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며 어떤 노릇을 하고 있는가의 연구는 가능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미지의 부분이라는 개념에 저항해온 데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미개인들은 인간 자신의 영혼뿐만이 아닌 다른 영혼도 깃들어 있는 것으로 믿는다. 개인이 다른 사람이나 동물을 자기와 심리적으로 동일시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심리학적 사실이다. 미개인들의 믿음에서, 개인의 마음이라는 것은 안전한 결합상태를 이루지 않고 억제할 수 없는 역동성 앞에 쉽게 허물어질 수 있음을 본다.
이런 현상은 진보된 문화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들 역시 정신의 해리를 통해 정체성을 상실하고, 분위기에 따라 이성을 잃기도 한다. 오히려 자기 통제라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일종의 덕성으로까지 분류된다. 따라서 최근에 성립한 ‘의식’이라는 개념은 무척 취약해 보이는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자기 마음 일부를 고립시킬 수 있는 것도 대단한 능력에 속한다. 그러나 이를 의식적으로 결심하는 것은 문명의 소산이지만, 무의식적으로 결심하는 것은 신경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의식의 통합이 이루어진 상태도 자신을 다스린다는 관점에서는 유익하지만, 다양하고 다채로운 인간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불안을 내포한다.
이런 배경에서, 의식의 무의식적 측면에 최초로 경험적 탐구를 시작한 선구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그는 꿈이 의식적인 생각이나 문제와 연관이 있다는 일반적 가정 아래 연구를 진행했다. 프로이트와 브로이어는 신경증의 증상이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는데 동의했고, 이들에 따르면, 신경증의 증상은 꿈의 그것처럼 무의식이 그 자체를 표명하는 상징적 방법이다.
프로이트는 환자의 무의식적 문제를 탐구하는 출발점으로 ‘자유연상법’을 통해 꿈을 이용했다. 즉 꿈을 꾼 사람으로 하여금 그 꿈의 이미지나 그 이미지가 마음에 환기시켰던 느낌을 이야기하게 하고, 환자가 말한 것이나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을 통하여 병의 무의식적 배경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환자는 자신이 무엇을 회피하는지, 억압하는지를 알 수 있게되며 그가 위장하는 것 그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 한계 안에서 의사가 궁극적으로 알아내는 것은 그 자신의 예상을 확증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꿈-상징의 원인이 억압과 욕구충족이라는 프로이트 이론에 대해 반박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무의식이 지어내는 풍부한 환상인 꿈을 해석하는데 자유연상법은 부적당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굳이 환자의 콤플렉스를 찾아내기 위해 자유연상의 출발점으로 반드시 꿈을 이용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문자, 물체, 회화, 일상적 대화조차도 꿈과 동일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성 콤플렉스로 말미암은 정서적 충격에서 생기는 꿈이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서 나는 꿈에 특수하면서도 보다 의미 있는 기능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다시 말해 자유연상으로 꿈을 통해 콤플렉스를 찾는 것보다는 꿈이 드러내는 모습과 내용에 더 주의를 기울여보는 생각을 하게된 것이다.
꿈에 대한 태도변환은 쓰는 방법의 변화를 가져왔다. 꿈의 시작과 끝, 시간과 공간 등을 분별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여러 측면 모두를 싸잡아 안을 수 있는 기법을 사용했다. 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이것을 조사해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환자의 콤플렉스를 알아내는 방법은 여럿 있으며 한 개인의 전인격적 심리적인 생활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꿈과 상징적 이미지가 보다 중요한 역할에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가령, 꿈이란 것은 성적인 비유 이외에 다른 정보도 싸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추측하기 시작했다. 성적인 여러 상징들 중 꼭 한 가지 상징이 꿈에 나타난 이유는 전혀 다른 심리적인 문제일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추론은 꿈의 해석에 꿈에 명백하게 나타난 소재만을 사용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유연상법은 꿈을 꾼 사람을 꿈의 내용물로부터 유리시킨다. 내가 쓰는 방법은 꿈의 이미지를 중심에 두고 빙빙 도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내 어떤 환자의 꿈에는 그의 부인으로 생각되는 술에 취해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여자를 본 사람이 있다. 실생활에서의 부인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에 환자는 꿈의 이미지를 받아들이기 거부했다. 여기에 자유연상을 이용하면 꿈과는 전혀 상관없는 콤플렉스로 도달할 것이고 이 특별한 꿈은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고 말 것이다.
생리학자들은 내분비선의 얼개를 바탕으로 모든 인간에게 남성적․여성적 요소가 두루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내가 ‘아니마’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남성이 지닌 여성적 측면이다. 남성에게 아니마는 여성관계에서 일종의 열등한 기능을 나타내며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은폐되어 있다. 그 환자의 꿈은 그의 여성적 측면이 타락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는 도덕적 훈계가 아닌 완벽한 신사라는 허구 속에서 균형을 잃고 있는 그를, 꿈은 의식적인 평행감각을 갖게 한 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의식이라는 것은 무의식적․미지의 것에 저항함을 알 수 있다. 이 ‘쇄신공포증’은 미개인뿐만 아니라 문명인을 포괄하는 모든 역사적 현실에서도 많은 희생제물을 만들어왔다.


무의식에서의 과거와 미래

꿈은 상징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규명할 수 있는 일차적이고 쉬운 소재이다. 꿈을 다루는데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첫째는 꿈을 하나의 사실로서 다루며, 꿈이 의미를 지닌다는 것 이외의 어떤 전제도 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두 번째, 꿈이라는 것은 무의식의 고유한 표현이라는 점이다. 무의식이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꿈이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 가정하고 그것이 인과적인지 목적을 지니는지를 따져보아야 마땅하다.
할말이 있었는데 막상 생각나지 않는다든지, 무엇을 가지러 들어갔는데 무엇을 가지러 들어갔는지를 잊어버린 경우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내용물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신경증 환자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가 행동을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낼 수 있다. 이런 환자들은 허구를 만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단순히 거짓말인 것은 아니다. 이런 환자들의 경우, 무의식의 간섭으로 의식이 장애를 일으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정신상태가 행동을 불확실하게 하는 것이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마비증세로 인해 감각상실 상태에 이른 환자는 그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무의식적으로만 인지한다. 이 상태에서 최면을 걸면 환자가 감각상실 상태에 있을 때의 일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신경증적 현상은 정상적인 일이 병적으로 확대된 것에 지나지 않고, 확대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정상적인 상태보다 명료하게 보이는 것뿐이다.
일상적인 건망증에서는 주의 집중이 이동한다는 정상적인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의식은 극히 작은 이미지만을 파악하고 그것마저 사라져버릴 때 그림자로 남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에 사라진 것은 잠재적 상태에 계속해서 존재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발생적으로 소생한다. 반면에 우리의 의식이 닿지 않는 곳도 무의식은 놓치지 않고 기록한다. 문득 떠오른 기억이 누군가의 대화를 방해하고 있을 때, 그 기억은 무의식이 보관하는 인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 같은 실마리, 혹은 방아쇠 효과는 신경증 증상의 발단을 설명할 때도 적용될 수 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급격히 일어나는 두통은 불행한 기억을 떠올리는 매개체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떠올려지는 것이다.
이외에도 프로이트는 가능하다면 잊고 싶은 기억의 망각과 관련된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불쾌감과 견딜 수 없음 때문에 의식적인 재생이 불가능한 상태로 만든 기억을 심리학자들은 ‘억압된 내용’이라 부른다. 이런 내용은 자아인격의 다른 한 측면인 마음의 어떤 상태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마음 속의 의도적인 내용과 비의도적인 내용을 세심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망각된 것들이 마음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많은 양상들 중에서 ‘잠재기억’, 혹은 ‘숨겨진 기억’의 예는 흥미롭다. 책을 쓰는 사람이 계획을 세워 줄거리를 전개시켜 나감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새로운 생각이 떠올라 이야기가 뒤바뀌는 경우가 그렇다. 니체의 경우처럼 쓰는 내용이 다른 사람의 작품과 놀랄 만큼 비슷한 때도 있다. 이와 비슷하게 본인에게 의식되지는 않지만 무의식에 기억되는 ‘순수기억’이 있다. 음악가들은 어린 시절 들었던 노래 따위를 자신의 작곡 테마로 떠올리는 경우가 있다. 생각이나 이미지가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무의식의 대체적인 스케치는 그 잠재적인 내용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잠재적인 내용물들은 부분적으로나 일시적으로나 영속적인 무의식의 형태를 취한다. 이 같은 내용이 의식을 벗어나 무의식으로 잠재의식화하는 것은 의식의 흥미나 관심을 끌기에는 미흡하므로 우리가 의도적으로 의식 밖에 밀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을 망각하는 것은 잡다한 경험으로 인한 의식차원의 혼란을 비켜나가는 정상적이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내용물이 무의식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경우도 있다. 나는 무의식이란 단순히 과거경험의 창고뿐만 아니라 미래의 심적 상황을 어림해서 폭넓은 사고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는 전적으로 새로운 생각과 창조적인 관념을 드러낼 수 있게 한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무의식에서 솟아오르는 영감을 통하여 놀랄만한 업적을 이루어내는 수가 있었다. 이 풍부한 소재의 광맥을 효과적으로 번역하는 능력은 어떤 사람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증거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소재를 산출하는 인간의 마음은 대단히 중요하다. 나는 꿈이 싸안고 있는 이미지나 관념을 기억이라는 말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경우를 여러 번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때 꿈의 이미지는 우리 의식의 문턱에서는 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생각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꿈의 기능

꿈은 많은 상징이 싹트고 자라는 토양이다. 꿈속에서는 서로 모순되거나 우스꽝스러운 이미지가 꿈꾸는 사람에게 쇄도한다. 무의식은 깨어있을 때와는 다른 방법으로 내용물들을 엮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어있을 때의 관념의 의미라는 것이 정확하고 잘 통제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경험한 무엇이든 곧잘 잠재의식화하기 때문에 의식의 영역조차도 무의식적 바탕색깔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잠재적 의미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며 그것이 어떻게 일상적 의미와 관련 있는지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물론 이 같은 심리적 바탕색깔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인 개념은 문화적 배경이 같은 사람들에게도 약간씩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며 더구나 사람들의 체험이 서로 다를 때는 의미의 차이가 더욱 커진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대체로 잠재적인 것이지 쉽게 인지되는 정도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의식의 가장 현실적 내용물에서도 벌써 주위의 불확실한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명쾌하게 정의될 수 없는 이 그림자가 바로 ‘심리적 사상’이다. 의식 속의 모든 개념은 그 자체로 심리적 연상을 지니며 무의식적 레벨에서는 개념이 전혀 다른 것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 잠재적 측면이야말로 의식적 사고의 보이지 않는 뿌리이기 때문에 꿈의 분석에서는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하다.
꿈속의 이미지가 보통의 이미지보다 훨씬 회화적이고 생생한 이유는 꿈속의 이미지가 합리적 표현을 초월해있기 때문이다. 가령 ‘너 좋은 대로해’라는 뜻의 관용구인 ‘물에나 풍덩 뛰어들어!’라는 표현이 꿈속에서 실제로 호수에 뛰어드는 이미지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은유적인 방법을 지닌 꿈의 이미지는 상징적이다. 그러나 꿈은 의도적으로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감정이 담긴 회화적인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때문에 현대인들은 원시적 심성의 특질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를 상실하고 공상적․심리적 연상을 모두 무의식에게만 맡기고 산다.
미개인은 무의식적 연상의 후광으로서 사물로부터 심리적 동일성, 혹은 ‘신비한 관여’를 느낀다. 반면에 우리는 이것들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라도 뭔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만다. 하지만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감정의 움직임이 우리에게나 미개인에게나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문명시대의 공포는 모든 것을 악령의 탓으로 돌리는 미개인의 공포보다 더 위협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 문명인의 태도는 신경증보다 한층 위험한 병증인 불안신경증이나 모종의 공포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박’이라는 원시적 현상은 옛날과 다름없이 존재하며 단지 우리에게는 불유쾌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현대인과 미개인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은 상징형성이나 상징표현에서 꿈이 맡는 역할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꿈이 미개인의 사고, 신화, 또는 제의와 유사한 심리적 연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고태의 잔재’라고 불렀지만 이러한 관점은 무의식을 의식의 부속물쯤으로 보는 사람의 관점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의 꿈에서든 이런 종류의 연상과 이미지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역사성이 있는’ 이러한 연상이나 이미지는 합리적인 의식세계와 본능의 세계를 잇는 다리노릇을 한다.
깨어있을 때의 통제된 생각과 꿈속에서 만들어지는 풍부한 이미지 사이의 차이는 우리가 문명화한 생각을 영위하는 동안 제거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태도나 행동에 변화가 일어날 만큼 강한 느낌을 갖게 하자면 ‘꿈의 언어’, 즉 꿈의 상징체제라는 어마어마한 심리적 에너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무의식으로부터 날아오는 메시지는 사람들의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다. 모든 종류의 영향에 노출되어있는 의식적인 삶은 여러 자극으로 인해 우리의 개성과는 상관없는 판단을 내리게 한다. 이런 훼손이 깊어질수록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는 자꾸만 벌어져 신경증적  해리상태에 이르는데, 필경 건강한 본능과 자연과 진실에서 자꾸만 멀어지게 한다.
꿈의 일반적인 기능은 심적 평형을 회복시키는데 있다. 나는 이것을 심리구조에서의 꿈의 보완적 역할이라고 부른다. 꿈은 비현실적 이상을 가지는 사람에게 현실에서의 인격적 결함을 보상하며 그들의 계획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내린다. 그런데 꿈의 경고가 무시되면 실제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적이나 예언이 아니라 그들이 무언가를 동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을 통해 알았을 뿐이다. 우리는 위험이 거기에 오래 전부터 도사리고 있는 것도 모른 채로 그리로 다가간다. 의식은 이를 깨닫지 못해도 무의식이 깨달아 꿈을 통해 정보를 전해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꿈의 경고를 자비의 손길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꿈은 우리에게 함정을 만드는 수도 있다. 때문에 꿈이라는 것을 섣불리 다루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정신의 특성에 접근하려면 오히려 원시인의 시각을 통하는 편이 더욱 바람직하다. 문명은 인류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으나 그것의 배후에는 그만한 손해가 자리한다. 현대인들은 의식을 본능적인 마음의 심층으로부터 분리시켜왔으나 다행히도 그 기반은 무의식의 일부로서 꿈에 나타난다. 이 본능적 현상은 대단히 상징적이기 때문에 완전한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꿈의 보상적 기능의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꿈-상징은 마음의 본능적인 부분이 합리적인 부분에게 보내는 메시지로서, 이를 해석하면 빈곤한 의식을 풍부히 하고 본능의 언어를 소생시킬 수 있다.
사람들은 꿈-상징을 간과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채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미개인이나 문명인 모두 꿈이 꿈꾼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거나 언짢게 만들 수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러니까 꿈은 이해가 되었으나 잠재적으로 이해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을 해석할 필요를 느끼는 것은 꿈이 특히 인상적이었거나 정기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경우에 한한다. 그러나 이 해석에 따르는 어려움에는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꿈-상징은 당사자와 직결되기 때문에 직접적인 해석은 있을 수 없다. 물론 전형적인 꿈과 단일한 상징(motif)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모티프조차 꿈 자체 문맥의 전후관계가 고려된 상태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되풀이해서 꾸게되는 꿈은 당사자 생활태도의 결함을 경고하는 것이거나 마음의 정신적 외상(trauma)을 체험하는 순간부터 꾸게되는 수도 있다. 나는 모티프가 동일한 꿈을 되풀이해서 꾼 적이 있는데, 꿈속에 펴든 책에서는 지극히 놀라운 상징적인 그림을 보게되었다. 일련의 마지막 꿈을 꾸기 전에 고서점에 주문한 연금술 서적 한 권이 도착했으며 그 책 속의 상징적인 그림들을 보는 순간, 나는 꿈의 그것이 떠올랐다. 내 인격과 관심이 의식했던 연금술 원리의 재발견이라는 새로운 코드로서 나는 되풀이되던 꿈의 모티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인식하고 나서부터는 다시 그 꿈을 꾸지 않았다.


꿈의 분석

상징은 분명하고도 직접적인 의미 이상의 어떤 것을 나타내며 의식적인 사고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꿈속에서는 상징이 저절로 만들어지며, 꿈 자체는 그저 생기는 것이다. 물론 상징은 꿈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심적 표현에서 생겨난다. 시계가 그 임자의 죽음과 때를 같이해서 멎어버리는 것 등의 사례처럼, 상징적 양식의 배열은 무생물과 무의식의 상호협력에서도 나타난다.
상징 중에는 그 성질이나 기원으로 보아 개인적인 것도 있고 집단적인 것도 있다. 집단적 상징은 주로 종교적 심상이며 몇 세기 동안 의식적인 다듬질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기원에 있어서는 무의식적인 ‘집단적 표현’이다. 꿈을 상징적인 것이라 가정하면 꿈의 해석은 무한하게 된다. 상징은 무한한 해석의 여지가 있으므로 신경증 환자의 생각을 분석가가 압도해버리는 경우는 치료적인 의미에서 무척 위험하다.
언젠가 나는 나의 관심과 인생, 정신의 발달을 요약한 것으로 보이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 꿈을 분석하며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그 꿈을 해석했다. 이처럼 분석자와 피분석자의 개인차가 많은 것을 좌우하기 때문에 주관적인 요인이 심리학적 이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여기서 나의 직관은 의외의 통찰로 이어졌다. 즉 나의 꿈은 전적으로 ‘나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꿈의 분석은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두 인격 사이에 일어나는 변증법적 교감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느 한 편이 우세해지는 ‘최면요법’을 포기했다. 나의 목적은 환자의 권위와 자유를 지키고 보존하여 그가 자신의 뜻에 따라 삶의 길을 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데 있다. 나는 프로이트와의 논쟁에서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을 세우기 전에, 먼저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해 더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개인이야말로 유일한 현실이다. 인류라는 추상적 개념을 향할수록 오류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요즘같이 변화가 급격한 시대에서는 개인에 대한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바른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인간의 과거도 현재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래서 신화나 상징의 이해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유형(類型)의 문제

심리학은 분석가와 환자의 살아 있는 관계에 직면하며 대극성의 조화를 지향한다. 분석가는 자기 삶의 전체성을 동원하여 피분석자의 전인간성을 직면해야 한다. 이처럼 개별적인 연구를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다수의 개인을 분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일반화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개인의 성격이 외향적인지 혹은 내향적인지 비교적 단순한 특징만 보고도 알 수 있다. 분석은 분석자와 피분석자 간의 유형이 같거나 다르거나에 따라 큰 차이가 생긴다. 프로이트는 내향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해 병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석했지만, 스스로 성찰하고 안다는 것은 가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이 두 가지 유형이 특성이라 하기에 지나친 구별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몇 가지 다른 특성을 찾아보기 시작했다[p.60 도표참조]. 이 네 가지 기능의 유형은 의식이 그 경험의 방향에 사용하는 수단에 해당한다. 감각은 어떤 것의 존재 여부를, 사고는 존재하는 것의 정체를, 감정은 존재하는 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직관은 존재하는 것의 유래와 지향을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유형의 문제를 염두해야 특정한 꿈에 가장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인격의 그늘진 측면(shadow)만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까지도 무시하고 억압한다. 또한 꿈은 명확한 정보를 피하고 결정적인 점은 은폐한다. 프로이트는 꿈이 ‘검열’이라는 기능을 갖고 꿈꾸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쾌한 생각으로부터 잠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꿈은 종종 잠을 방해하기 때문에 나는 이 이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잠재의식 상태의 관념이나 이미지는 의식상태보다 긴장감이 훨씬 낮기 때문에 그 근본적인 함의를 지니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이나 이미지는 상대적으로 강한 긴장을 받게 될 때마다 잠재적인데서 풀려나 의식의 경계로 떠오르며, 그 때 비로소 이것들을 정의할 수 있게 된다. 꿈이 우의적인 표현을 취해 난해하게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꿈이 무의식적 소재의 변장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연스러운 모습의 모든 충동이 잠재의식에 보존되기 때문에 꿈의 소재들은 무의식적인 것이다.
꿈-상징은 마음의 유기적인 창조과정을 드러낸다. 이렇게 해서 본능적인 힘은 꿈을 통해 의식의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좋은 영향인지 나쁜 영향인지는 전적으로 그 무의식의 실제 내용에 달려 있다. 의식화되는 것에 비해 무의식이 너무 많은 것을 지니고 있을 경우, 무의식은 자기가 지닌 것의 기능을 왜곡시키거나 한 곳으로 치우치게 한다.
억압하거나 무시함으로써 무의식에 떠넘겨버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심리적으로는 중요한 행동 동기로 나타난다. 때문에 분석가는 정신장애의 원인에 관한 환자 자신의 어느 정도 자의적인 고백을 끌어내고 환자가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바를 파악한 뒤에 비로소 치료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꿈이나 꿈-상징의 해석은 꿈꾼 사람의 개인적인 상황이나 마음의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질 수 있다.


꿈-상징에 나타나는 원형

꿈은 대개 꿈꾼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강박적인 꿈, 정동성이 강한 꿈은 개인적인 연상만으로 만족스러운 해석을 내릴 수 없다. 이런 요소를 프로이트는 ‘고태의 잔재’라고 불렀다. 이는 개인 생활을 넘어서는 원초적이고, 내재적이고, 유전적인 인간의 심리 형태인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육체처럼 무의식적인 마음도 긴 진화의 역사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고태의 잔재’를 ‘원형(archetype)', 혹은 ‘원시심상’이라고 부른다. 원형은 신화 이미지나 신화 모티프의 의식적인 표상이 아니다. 원형이라는 것은 하나의 모티프를 어떤 표상으로 형성시키는 경향이다. 원형에는 본능적인 경향성이 있어서 뚜렷한 나름의 충동을 지닌다. 본능은 생리적인 충동으로서 주로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지만 공상 중에서 상징에 의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바로 이 ‘나타남’을 나는 원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소녀의 꿈「p.69~70]은 파괴와 복원, 죽음과 부활, 세계의 기원, 영웅상, 4위성, 인간의 창조, 가치의 상대성 등의 원형적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으로 그 꿈은 소녀 개인의 죽음의 준비에 대한 암시를 보상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상징으로 표현된 개개의 형태는 개인적이지만 이 형태가 보이는 일반적인 패턴은 ‘집단적’이다. 집단적 사고 형태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받아온 것이며 세계 어느 곳에서든 동일하다.
마음과 의식은 동일시할 수 없다. 꿈이나 환상이나 생각 중에는 문득 생겨났을 뿐 아무리 탐색해 보아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 원인은 우리와 너무 멀리 떨어진 옛날에 형성된 본능의 구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반성적 능력은 강렬한 정동의 폭발에서 기인한 고통스러운 결과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원형의 형태는 반성적 능력 이전의 정동적인 것이다.
꿈이 예언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가정에서, 무의식은 의식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실을 검토하고 거기에서 결론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덧붙일 수 있다. 다른 점은, 무의식은 본능적으로 그러한 경향을 산출한다는 점이다. 이 경향은 원형의 문법에 따라 표현되기 때문에 꿈은 시적이다. 원형은 이같이 자체의 주도권과 에너지를 가지기 때문에 의미심장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 점에서 원형은 콤플렉스와 같은 기능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개인의 콤플렉스가 역사를 가지는 것처럼 원형도 범인간적인 것에 특징을 부여하는 신화, 종교, 역사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콤플렉스가 일방적이고 오류에 빠진 의식의 태도를 보상하는 것처럼 신화도 인류 일반의 고뇌와 불안에 대한 일종의 정신적 치유의 방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인 신화의 관념은 유사 이전의 어느 시대에 만들어지고, 믿어져 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에 견주어 권력지향적인 성직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는 원망충족을 위한 사고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이 ‘만든다’라는 말의 어원은 ‘발견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찾는 행위 속에 이미 찾아질 것이라는 예지가 전제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집단적 이미지의 기원에는 도무지 풀리지 않을 듯한 원형 패턴과 닿아 있다. 이 패턴이 반성적 대상이 된 근대 이후, 우리는 이전의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 신화적 상징을 많이 알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상징이라는 의미 자체를 살았고 무의식적인 생명을 고무했다. 인간은 우선 무의식적으로 행했던 것이다.
마음이나 정신은 그 자체가 바로 발명자이며 창조자라고 믿는 사람은 많다. 이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발전해 왔고 지금도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내적인 행동동기는 우리 심층에 있는 심원한 동기에서 비롯된다. 고대인들은 그러한 동기를 마나, 정령, 악마, 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는 이 힘을 스스로 규제하지 못할 경우에 적대하거나, 불행하다거나, 심지어는 병으로 생각한다. 근대인들이 상당한 의지력을 획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이나 악마는 현대인들에게 막연한 불안이나 심리적인 갈등, 약물, 알코올, 담배, 무엇보다도 갖가지 신경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간의 영혼

본능과 의식은 접촉점을 잃고, 본능은 자신을 드러내는 간접적인 방법을 찾는다. 때문에 생리적․심리적인 이상현상이 돌발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요인이 생기는 것은 원형이 자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분열 상태의 노출을 피하기 위해 선을 그으려는 ‘구획심리’를 지닌다. 이는 한 개인뿐만이 아닌 인류 전체의 구획 상태에도 적용된다. 문제는 구획된 양자 중 한편만을 지나치게 인정한다는 점에 있다. 결국 자기 본성의 그늘진 측면을 인식할 수 있어야 이런 구획심리를 어느 정도 와해시킬 수 있다.
몇몇 종교는 이러한 인간의 내적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을 가진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종교는 진실되지 않은 것으로 가정된다. 그런 것이 없이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인간 이해를 초월하는 이런 무의식적 관념을 어차피 검증할 수 없다면, 유용하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적 상징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므로 문명 앞에 스스로  열등한 존재라고 느끼는 현대인들의 의미보다 만족스럽다고 할 수 있다.
신화는 이런 상징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는 후대로 갈수록 믿어지지 않는 것으로 취급되어 일반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과 모습으로 변형된다. 꿈-상징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의 일이 나타난다. 꿈의 의미와 표면적인 꿈의 모습이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꿈이 드러내는 이미지와 상징을 무시하자는 결론에서, 꿈은 양자를 포괄적으로 지닌다는 주장이 대두하게 된다.
나는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꿈의 내용과 형태 모두를 연구하게 되었다. 꿈이 정상적인 자연현상이라면 그 이외의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꿈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은 상징이 다의적이기 때문이다. 상징해석은 논리적인 공식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서나 상징적인 관념을 만드는 생명 자체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당사자의 전체성과 상징의 관계를 주목해야 하고, 상징 해석에 있어서는 지성이 필요하다. 또한 상상력과 직관력도 고려해야 한다.


상징의 역할

상징은 자연적 상징과 문화적 상징으로 구별된다. 자연적 상징은 마음의 무의식적인 내용물에서 파생한 것이고, 문화적 상징은 영원한 진리를 표명하기 위해 여러 종교에서 쓰인다. 문화적 상징은 의식적인 발달 과정을 거쳐 문명사회에 수용되면서 집단적 이미지가 된다. 문화적 상징은 아직도 신성한 힘을 가지기 때문에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를 억압하거나 무시하면 무의식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데, 후에 다시 의식으로 떠오르면 무의식의 상위계층을 변용시키거나 강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있던 ‘그림자’가 일어나 의식과 맞선다. 악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유익할 수 있는 경향도, 일단 억압을 받으면 해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 무의식을 두려워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금세기의 세계가 정신분열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현대 문명의 기저인 합리주의가 신성한 상징을 미신으로 취급하고 여기에서 해방되는 과정에서 인류는 도덕적․정신적 가치를 상실했다. 정신이 인간의 한정된 자아사고로 전락하는 그 순간부터 고스란히 세계적인 규모의 분열과 해리를 대가로 치르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 교감이 끝나는, 이 엄청난 손실을 보상하는 것이 꿈-상징이다. 그러나 자연의 언어로 나타나는 꿈 내용은 현대어로 번역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인간의 내적 세계는 원시성에서 완전하게 해방되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꿈에 원형이 고스란히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탐구하려는 것은 현대인의 혼합된 정신, 바로 그 혼합물이 인간과 그 상징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는 상반되는 다양한 것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형이란 이미지인 동시에 정동이다. 이미지에 정동이 작용하면 심적 에너지가 생기고, 이때부터 상징은 역동성을 지니게 되며 반드시 의미가 산출된다. 그러나 원형이라는 것은 개념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원형은 생명 그 자체의 일부분으로서 관련된 개인의 생활양식의 문맥 안에서만 해석되어야 한다. 원형은 의미가 고려되는 경우에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다.
우리의 분화된 의식은 예전에 전인격이었던 마음의 바탕자리를 버렸다. 그러나 무의식이라는 것은 근원적인 마음의 일부인 원시적 특성을 보존하며 그것들을 되찾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물이 상당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공포를 느끼고, 억압되며, 신경증의 형태로 개인의 전인격 속으로 파고든다.
유아기 기억의 빈틈을 회복하는 것은 원시심성을 회복하는 것과 같다. 때문에 유아기의 기억을 회복하고 마음의 작용을 원형적으로 재현하면 의식의 지평을 넓히고 그 경계를 확장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상징을 해석하는 것 이상으로 원형의 정동적 가치를 염두에 두면 이것은 결국 인격을 변화시킨다.


칼 G.융 외. 『인간과 상징』. 이윤기 역. 서울: 열린책들, 1996. 1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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