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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8/08 (05:04) from 80.139.161.48' of 80.139.161.48' Article Number :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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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신학 함’이란 무엇인가
이 땅에서 ‘신학 함’이란 무엇인가
손규태  

교회사적 회상
“이 땅에서 신학 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좀더 정확히 도식화한다면 “오늘날 이 땅에서 신학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이 될 것 같다. ‘신학 함’이란 말은 어원학적으로 보면 신 혹은 신적인 것들에 관해서 말하는 것(qeo-logija), 신들과 그들의 세계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학 하는 것은 서양의 고대 세계, 많은 신들을 가졌던 그리스나 로마 세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여기서는 신들의 탄생이나 계보 그리고 역할이 주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것은 오늘 우리의 과제가 아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 땅에서 기독교 신학 함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에서 신학 함의 의미를 정확히 찾기 위해서 과거 역사 안에서 신학 함의 의미를 간단히 살피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과거의 회상과 반성 그리고 미래의 전망과 예견 가운데서만 ‘오늘’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학 함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세계교회사를 네 단계의 발전과정으로 나누고 각 단계마다 신학 함의 의미를 간략히 살펴보자.
첫 단계는 동방교회로서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헬레니즘 문화 지역에서 시작되고 성장한 초대교회 시대를 들 수 있다. 이 시대의 신학은 선교를 목표로 한 ‘변증신학’이 중심이었다. 로마인들의 정치적 박해와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공세에서 기독교는 반로마적 종교가 아니라는 것과 참된 철학적 진리는 기독교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특히 유스티누스 같은 변증신학자는 그리스 철학에서 예시된 진리가 그리스도 사건에서 참되게 드러났다고 주장하고,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지도적 신학자들인 클레멘스나 오리게네스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도 모세와 같이 그리스도를 예증하던 사람들로서 그들도 기독교인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까지 했다. 당시 서방 지역의 신학자들도 예를 들면 리용의 이레네우스, 로마의 히폴리투스,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등도 그리스 철학, 동방의 신비주의 등과 결합된 이원론적 기독교 영지주의와 대결하면서 신학을 전개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도 변증론을 통한 선교 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단계는 서방교회로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교회 시대, 즉 중세기 교회 시대를 들 수 있다. 5세기에 등장한 이슬람 세력이 동방교회 지역을 점령하고 북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장악함으로써 기독교의 중심 축이 서방, 즉 로마 교구로 옮겨지게 된다.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서방교회는 민족적으로 로마와 게르만 민족의 교회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된 역사적 상황에서 교회는 이전의 그리스 철학과 헬레니즘 사상과의 대결에서 등장한 변증신학이나 선교신학보다는 교회의 제도와 체제, 즉 교황제를 정점으로 성직 계급제도를 강화하는 방향에서 발전하였다. 이러한 제도적 발전에는 로마와 게르만의 법제도들이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13세기 이후에 등장한 스콜라주의 신학은 ‘자연과 은총의 종합’이라는 도식을 통해서 인간의 공로주의를 구원론에 도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교회를 이탈시켰다.
셋째 단계는 16세기 로마의 정치적 보편주의와 가톨릭 교회의 종교적 보편주의의 제반 모순들을 해체시키고 등장한 북방교회, 즉 종교개혁 운동으로 등장한 개신교이다. 루터는 1517년 95개 조의 논제와 1520년의 종교개혁 문서들(독일 개신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 교회의 바빌론 포로, 기독교인의 자유)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교황제, 즉 교황의 교회 수장권, 교황의 성서해석 독점권, 교황의 공의회 소집권을 문제삼는다.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고 그리스도이며, 교황만이 바른 성서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고, 공의회는 처음 니케아 공의회처럼 황제나 영주들이 소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 가톨릭 교회의 일곱 성사 가운데 성서가 제시하는 세례와 성만찬만이 참되다는 것이다. 세 번째 인간의 구원은 면죄부와 같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은총론’이 종교개혁 신학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종교개혁 신학의 중심 주제는 ‘의인론’이었다.
넷째 단계는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 물결을 타고 선교된 아프리카, 남미 그리고 아시아의 교회들, 남방교회들이다. 우선 이들 세 대륙의 역사적 배경들을 살펴보자. 첫째, 이들은 서구 기독교 국가들에 의해서 식민지화 됐고 지금도 신식민지적 지배를 받고 있다. 둘째, 이들은 산업에서 후진국이며 경제적으로 빈곤하다. 셋째, 이들 대륙의 국가들은 사회적으로 계급차별과 성차별의 지배를 받고 있다. 넷째, 이 대륙들은 종교적으로 다양한 고등종교들을 가지고 있지만 문화적으로 정체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 대륙에서는 식민지적 경험과 정치적 억압을 배경으로 하고 ‘해방신학’, 경제적 불의와 빈곤을 배경으로 한 ‘민중신학’, 인종차별과 계급차별 그리고 성차별에 맞선 흑인신학과 여성신학, 다양한 고등종교와의 대결에서 종교와의 대화나 종교신학 혹은 문화신학 등이 등장했다. 따라서 남방교회들의 공통의 경험에서 나온 신학 운동들은 해방신학, 민중신학, 종교신학, 여성신학 등으로 대별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1970년대 전세계적 관심을 얻은 우리 나라의 민중신학은 우리의 역사적 현실과 경험, 즉 우리 시간과 우리 땅에서 출현한 기독교의 독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신학 함이란 동시대의 사상과 역사적 현실과의 대결을 통한 선교적 활동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곧 선교학이고 신학 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선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바르트의 말처럼 신학은 곧 설교학이요 따라서 선교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시대의 사상적 조류들과 역사적 현실을 무시한 신학이나 설교는 울리는 꽹과리같이 공허한 것이 된다.


새로운 세계 질서의 출현과
새로운 신학 운동
1990년대에 와서 구소련의 해체와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동서 냉전체제가 붕괴된다. 그 결과 자본주의의 종주국 미국을 정점으로 새로운 자본주의적 세계 질서가 등장함으로써 동서 냉전은 남북 열전으로 대치된다. 그 결과 부한 국가는 더 부해지고 가난한 국가는 더 가난해져 이들 사이의 괴리가 더 깊어졌다. 오늘의 형편은 더욱 악화되어 세계 전체 인구의 0.1%가 세계 전체 부의 40%를 소유하게 되었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세계 인구 중 약 2억 명이 하루에 1달러(1,100원) 이하로 살아간다.
한국의 현실도 차이가 없다. 경제인구 1,200만 명, 약 600만 명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지 못하고 있다. 600만 명 이상이 빚을 지고 있고 그중 350만 명이 신용불량자이다.
500년 전 경건한 가톨릭 신자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함으로써 처음 시작된 ‘새로운 질서’는 500년 뒤인 1990년 조지 부시(아버지)에 의해서 선포된 ‘새로운 세계 질서’로 완결된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통치하실 것이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를 외우며 스페인을 출발한 콜럼버스의 세계화의 꿈은 이 세계를 하나님이 아니라 맘몬, 그리스도가 아니라 달러가 지배하는 세계로 만든 것이다. 맘몬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세계 질서가 선이며 여기에서 이탈된 것은 모두 악이다. 이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나라들은 악의 축이나 테러 국가로 지목되어 미국의 국가적 테러에 직면해야 한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략과 이라크 침공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적 새로운 세계 질서에 통합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새로운 자본주의적 세계 질서를 향한 세계화의 추세에서 신학 함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바알의 물신숭배가 전 인류를 노예화하고 몰록신들이 도처에서 인간의 생명 특히 어린 생명들을 제물로 요구하는 오늘날의 세계 질서에서 우리는 어떻게 신학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인가?

성서와 복음으로의 복귀
성서적 회상 규율에 따르면 민중들의 고통이 신학 함의 출발점이고 귀결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민중이 고통당할 때와 장소에서 만나 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젓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려고 한다”(출 3:7-8). 율법 가운데 사회법은 하나같이 민중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것을 중심적 관심으로 삼고 있다. 8세기 사회적 예언자들 역시 이러한 율법의 사회법 정신을 계승하여 민중을 돌보는 것을 최대의 관심사로 삼았다. “나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종교 행사로 모이는 것도 기쁘지 않다. 번제와 곡식제, 화목제도 귀찮다. 내 앞에서 벌이는 성가 잔치도 집어치워라.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암 5:21-24).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한 온갖 종류의 종교 행사, 정치 행사, 스포츠 행사를 다 집어치우라는 것이다.
예수는 어떤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5)는 설교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한다. 그는 베들레헴 마구간에 태어났고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천사들은 그의 탄생의 의미가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땅에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평화에 있다고 노래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찬가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사람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했다”(빌 2:7-8). 예수는 이 세상의 지배자인 헤롯에 의해서 박해를 당하고 로마 제국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예수의 시간과 장소는 고통당하는 사람들, 즉 민중의 시간과 장소였다. 따라서 예수의 성육신의 장소인 교회의 시간과 장소도 사람들의 고통의 시간과 장소가 되어야 한다. 신학 함의 시간과 장소도 고통받는 사람들의 장소와 시간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진정한 기독교 신학이 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위대한 신들의 출생이나 이들의 계보를 다루는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기초한 신학이나 위대한 왕들이나 황제들의 수호자로서의 신들을 다루는 아시리아, 바빌론, 이집트의 신학들과 기독교 신학은 구별된다. 오늘날 신학은 기독교의 헬라화를 시도하던 초대교회의 신학이나, 중세기 봉건사회 체제의 정치적·종교적 지배 계급을 위한 로마 가톨릭 신학이나,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서구의 부르주아적인 자본주의 계급들의 경제적·사회적 토대를 위한 자유주의적 신학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신학, 아니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 함은 인간들의 고통이 있는 곳, 즉 하나님의 현현과 성육신한 때와 장소가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정의의 실현으로서 신학 하기
그러면 한국신학의 출발점은 어디에 있는가? 지난날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이 있던 이집트의 광야는 어디이며 그리스도의 탄생의 소식을 듣던 목자들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노숙자들이 괴로운 삶을 이어가는 서울 지하철역이고 안산과 성남 그리고 부천 등에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며 중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며, 항구 도시 부산에서 몸을 팔고 살아가는 러시아, 필리핀 등지에서 온 외국인 여성들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곳이다. 이들은 앞서 말한 세계화를 통해서 전세계를 지배하는 금융 자본, 즉 맘몬에 의해서 희생된 인간들이다.
그런데 정치가들은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수백 억의 돈을 차떼기로 도둑질하고, 기업가들은 30대 젊은 아들에게 수천억 원의 재산을 불법으로 상속하고, 은행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꾸어 주고 이자를 짜내기에 혈안이 돼 있다. 이것이 우리의 신학적 현실이다. 자본주의적 맘몬 숭배의 세계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로 돌려놓은 것이 신학의 일차적 과제이다.

평화의 실현으로서 신학 하기
한국은 분단 상황에서 전쟁을 치렀고 지금도 막강한 군사력으로 대결하고 있으며, 북한은 자신들의 생존과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 핵무기를 보유하려고까지 한다. 자본주의적 일극 체제를 추구하는 강대국 미국은 반대하는 세력들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유고,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지에서 침략을 감행했고 이제는 이란과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 한반도는 지금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미국의 전략과 요구에 굴복, 국내적으로는 50년 이상 북한과 대립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5,000명 이상의 군대를 이라크에 파병하기로 했다. 이러한 미국의 자본주의와 핵우산 아래서 우리가 얻은 것은 불안한 안보이지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이제는 군사적 안보에서 민족적 평화로 나아갈 때이다. 왜냐하면 군사적 안보는 ‘세상이 주는’(요 14:27) 로마의 평화이지 ‘그리스도의 평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참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 이 땅에서 신학 함의 다음 과제이다. 핵이 우리를 위협하는 현실에서 평화는 삶의 계명이다(바이체커). 핵은 인간을 갈라놓고, 핵분열은 인간의 몸을 산산이 해체시킨다.

교회 갱신으로서 신학 하기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신학은 교회를 봉사하는 학문이다”라고 갈파한 바 있다. 교회 봉사의 학문으로서 신학은 교회의 선포를 감시하는 적극적 봉사와 함께, 교회를 성장하게 하는 소극적 봉사로 구별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교회에 대한 역동적 봉사로서의 신학, 즉 비판적 신학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선포하고 성례전을 바로 집행하는가를 감시하고 감독하는 것을 말한다(루터). 이때 신학은 교회라는 배의 선장과 같아서 교회의 갈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간다. 오늘날 한국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서 이탈된 교회를 향해 짖지 않는 개와 같아서(사 56:10) 교회를 감시, 감독하지 않고 꿈이나 꾸고 배만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미국식 자본주의에 기초한 ‘교회성장론’과 다단계 판매 전략에 기초한 구역 조직 및 제자훈련 프로그램으로 채색된 일부 대형 한국교회들을 ‘성공주의’로 고무 찬양하는 현실에 대해서 한국의 신학자들은 ‘분별력을 잃고 잘 얻어먹고 지내는’ 벙어리개가 된 것은 아닌가? 교회를 집어삼킨 거대한 종교적 레비아단 집단들과 맘몬주의의 파도에 묻혀 신학자들은 침묵함으로써 배불리 얻어먹고 낮잠을 즐기는 것은 아닌가?
언제부턴가 한국교회 안에서는 검은 망토를 휘날리는 파쇼적 성직주의가 지배하여 바른 말 하는 예언자, 신학자들을 추방하고 교권에 아첨하는 소인배 신학자들만을 양산하고 있다. 바빌론의 침공 앞에서 “성전이다, 성전이다, 성전이다”라고 성전이 그들을 보호해 주리라고 외치던 어용종교인들을 향해서 “그들의 말에 속지 말라. 그들에게 의지하지 말라. 너희는 행실을 바르게 하고 이웃에게 정직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무죄한 사라들을 박해하지 않는 것”(렘 7:4-7)이 살길이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길이라고 예레미야는 외친다.
이 땅에서 신학 함이란 순교하는 신학(유스티누스, 본회퍼), 박해받는 신학(칼 바르트, 골비처), 아니 고통받는 민중들의 시간과 장소에 동참하는 신학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여기서 나치의 어두운 역사 한가운데서 자기 몸을 그 제단에 바쳐서 하나님을 증언한(순교한) 본회퍼의 ‘행위’라는 시를 소개함으로써 이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순간의 쾌락에 동요되지 말고, 정의를 단호히 행하고,
가능성에서 동요되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담대히 붙잡으라.
사고의 세계로 도피하지 말라,
오직 행위에만 자유가 존재한다.
두려워 주저하지 말고
인생의 폭풍우 속으로 나아가라.
하나님의 계명과 너의 신앙이 너를 따르며,
자유는 그대의 영혼을 환호하며
맞아주리라.


기독교사상 2004 년 3 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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