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cle Bank

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8/18 (07:06) from 217.95.21.102' of 217.95.21.102' Article Number : 349
Delete Modify . Access : 24158 , Lines : 2028
동서철학
Download : philosopy.HWP (488 Kbytes)




동서철학



제1부
서양철학














제1장 고대철학
제2장 중세철학
제3장 근세철학
제4장 현대철학













 제1부 서양철학
제1장 고대철학  

제1장  고대철학


서양철학은 기원전 600년 경 그리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통상 말해진다.  고대철학은 이 시대로부터 기원 후 5~6세기까지의 철학을 말하는데, 고대철학은 대체로 3시기로 구분된다.
제1시기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으로서 기원전 6세기에서부터 5세기 중엽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철학은 주로 자연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어서 자연철학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이 용어는 완전히 정당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철학사가 히르쉬베르거에 따르면 “이 사람들의 사고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서 출발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관심을 품고 있었던 것은 존재일반, 그것의 고유한 본질과 독자의 법칙이었고 따라서 형이상학이었고, 신학이었기 때문이다.”
제2시기는 5세기 후반에서 4세기 후반까지의 시기로서 고대 철학의 최전성기였을 뿐만 아니라, 전철학사에 걸쳐서 가장 주목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소크라테스에 의해 인간학적 전회와 뒤이은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체계화의 시기였다.  제1시기의 철학의 중심무대는 그리스 식민도시였는데, 이 시기의 철학의 중심지는 아테네였다.
제3시기는 헬레니즘-로마시대의 철학의 시기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이후부터 고대철학이 끝나는 시기 즉 플라톤이 설립하였던 아카데미아가 동로마의 유스티아누스 황제에 의해서 폐교된 시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의 철학은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구함으로써 윤리적․종교적 색채를 나타내고 있다.



제1절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1. 철학의 태동

1) 신화와 철학

최초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주로 이오니아의 여러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주로 우주 혹은 자연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는데, 이러한 관심은 미숙하기는 하지만 철학적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에 그리스인들은 이미 다양한 형식의 독자적인 우주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철학자라 불려질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의 관심이 주로 신화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우주관의 신화적인 표출방식에 관한 기록은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詩)에서 나타난다.  그들의 시에서 나타나는 내용은 세계의 발생에 관한 이론(Cosmogony)이다.  예컨대 호메로스의 신화해석에 의하면 모든 발생의 원인은 바다의 신인 오케아노스와 테티스 및 물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神統記 : Theogony)는 혼돈(Chaos)과 에로스(Eros)를 만물발생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이 밖에도 우주의 시원을 황소와 사자 이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용으로 보는 설명이 주어지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의 신화가 탄생되었다.
이러한 신화적 설명방식이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고 철학적 사고의 맹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증명을 제시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즉 철학자들에 의해서 취해질 견해는 아니었다.  최초의 철학자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견지하면서 자연을 고찰해 보고자 했다는 의미에서 전통적인 신화적 설명방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즉 그들의 사고를 지배했던 것은 뮈토스가 아니라 로고스였다.  초기의 철학자들은 정신적 미성숙 내지는 지식의 깊이에서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만족할 만한 형태의 이론은 제시하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무비판적인 신화적 사고방식은 그들을 더 이상 만족시킬 수 없었다.

2) 철학이 태동한 배경

철학의 발상지가 이오니아였다는 사실 때문에 철학의 발생과 이오니아 지방의 지리적 위치간에 모종의 연관성이 있다는 주장들이 일반적으로 제시되었다.  소아시아의 서쪽 변두리인 이오니아 지방은 동방과 서방이 만나는 장소에 위치하고 있고, 따라서 그리스 철학이 바빌로니아 또는 이집트로부터 건너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 특히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국가들은 동방의 여러 국가들과 상업적 교류뿐 아니라 이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문화적 교류를 빈번하게 가졌던 터였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그리스 철학이 발생하게 된 기원을 동방쪽 국가에 돌리는 주장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이나 바빌로니아인들의 사고방식이 상인들에 의해 그리스인들에게 전달되었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철학의 태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전혀 확정적 전거를 가지지 못하고 다만 개연적 추측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려될 수 없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한걸음 물러나서 그리스철학이 수학, 천문학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집트에서 수학이, 바빌로니아에서 천문학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이집트와 바빌로니아가 그리스 철학의 탄생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주장은 가능할 것 같다.  확실히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범람 이후에 들판을 새로 구획해야 하고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축조물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여러가지 기하학적 지식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집트의 기하학이 경험적이며 실용적인 유형의 것이었는 데 반해서 그리스인의 수학은 보다 학문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은 사실상 천문학이라기보다는 점성술이었다는 점에서 그리스인들의 천문학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고려해 볼 때, 이집트의 수학과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이 그리스의 그것과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가진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 하더라도, 그리스인의 과학적 사고는 그리스인들 자신에게 돌려져야 하지 이집트인이나 바빌로니아인들에게 돌려질 수 없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방식에 있어서 그리스인들이 가지는 이러한 독창성이 그리스 철학의 태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철학이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이라고 할 때, 그리스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성격은 그리스인으로 하여금 이러한 사고방식을 갖게 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스인들은 고대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성직자 계급의 강한 전통고수와 비합리적 사고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학문활동에 봉사할 수 있었고, 이것이 철학의 태동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진술은 그리스인들에게 종교가 없었다거나 혹은 종교가 그들의 사고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거나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유로운 학문적 사고를 방해할 만큼의 강력한 성직자 계급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어쨌든 철학은 이오니아 지방에서 태동하였고, 그 중에서도 밀레토스(Miletos)지방이 이오니아 철학의 요람이 되었다.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탈레스(Thales)가 활동하였던 곳이 곧 밀레토스였기 때문이다.  일찍이 이오니아의 철학자들은 변화의 사실에 즉 탄생과 성장, 파멸과 죽음의 사실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계절의 변화, 인간 생활에 있어서 어린 시절과 노년, 존재하게 됨과 사라지게 됨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우주의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우주의 이러한 변화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일차적인 어떤 것, 지속하면서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겪는 그 무엇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일차적인 것 혹은 모든 사물의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물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 철학이 과학적 사고와 착종되어 있다는 사실이 부인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으로 살펴볼 때 그들의 탐구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라고 규정될 수 있겠다.  그들의 탐구는 물질적인 것에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감각적․현상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며,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까지 나아갔다.  그들은 실험적 탐구를 통하여 자신의 결론을 도출한 것이 아니라 사변적 이성을 통하여 결론을 도출하고자 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눈에 보이는 다양한 현상이 아니라 그러한 다양한 현상에 있어서의 통일의 개념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 개념의 성격을 보다 강하게 띠고 있다.


2. 질료와 형상

1) 밀레토스 학파

밀레토스 출신인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는 생애가 부분적으로 겹칠 뿐 아니라 그들이 서로 사상의 연계성을 지니기 때문에 하나의 학파에 속하는 것으로 기술되곤 한다.  이들의 눈에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것으로 비쳐졌다.  자연 속에 있는 다양한 사물들은 한시도 쉼이 없이 성장하고 쇠퇴하고 있으며 지속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감각에 비쳐진 모습을 받아들이는 데 만족하지 않았고 이런 변화를 꿰뚫고 지나가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들은 이 영속적인 것을, 세계를 궁극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요소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들의 물음은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일체의 변화를 꿰뚫고 지나가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영속적인 근본물질(arche)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들의 탐구대상이었다.
(1) 탈레스(Thales: 640~550 B.C.)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혹은 만들어져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탈레스는 물 또는 습기라고 대답하였다.  탈레스가 왜 이런 대답을 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이러한 진술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다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물은 증기증발이라는 현상을 통하여 기체로 될 수 있으며 또한 결빙 현상을 통하여 고체로 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물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게되는 모든 물질 중 사물의 변화를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물질로서 등장한 것 같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추측한 것처럼 “탈레스가 이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모든 것의 양분에 수분이 있는 데서, 그리고 열 자체가 물기 있는 것에 의해서 생길 뿐 아니라 또한 그런 것에 의해서 살아있게 됨을 보고, 그리고 또 모든 생물의 씨가 물기를 지니고 있으며, 물이 모든 물기 있는 것들의 본성의 기원이라고 본 데서 비롯되었다.”
두번째 이유는 탈레스의 또 하나의 명제 즉 ‘만물은 신(神)들로 가득찼다’는 명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탈레스는 세계의 기본물질이 곧 생명의 기본물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때 물은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하나의 물질로서 등장한다.  따라서 위의 명제에서 이야기하는 신은 우주의 근원적 존재로서의 신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적 존재 혹은 생명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탈레스가 들고 있는 예는 자석인데,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는 이 자석은 생명을 가지고 있어서 쇠를 끌어당긴다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활론적(物活論的) 사고방식은 인간정신의 발달사에서 비교적 초기의 사고방식으로 물질과 정신의 분화가 의식되지 않은 시대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만물은 물이 존재하는 다양한 방식일 뿐만 아니라 물은 생명의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수분은 먹을 것과 씨의 필수적인 부분이며, 생명의 열 즉 살아있는 신체의 온기는 언제나 축축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했다고 보았을 때, 탈레스는 유물론자(materialist)로 간주되었음직하나, 그의 사고는 물질과 정신이 구별되기 이전의 미숙한 단계였으므로 그를 유물론자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개의 선언지가 주어지고 전자가 취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유물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물활론적 사고단계에 있는 철학자에게 유물론자란 명칭을 붙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설명은 밀레토스 학파에 속하는 다른 철학자에게도 해당된다.  밀레토스 학파에 속하는 세명의 철학자는 모두 물활론적 사고방식을 견지했기 때문에, 그들이 탐구한 근본물질은 한결같이 만물의 구성물질이면서 동시에 생명의 원리인 것이다.
우리는 탈레스가 물활론적 사고방식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의 대답이 유치하다는 것 때문에 그의 업적을 낮추어 평가해서는 안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지칭했듯이 그는 철학의 아버지라 기릴만한 충분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은 ‘세계의 궁극적 본성은 무엇인가’ 혹은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제기했다는 사실에 놓여 있는 것이지, 그가 실제로 제시했던 대답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이전 사람들과는 달리 자연의 원리를 신화적인 접근태도로부터 추구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2)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610~540 B.C.)
아낙시만드로스도 탈레스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물의 궁극적인 원리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골몰하였다.  그러나 그는 탈레스의 입장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물은 특수한 종류의 물질로서, 변화와 대립의 근저에 놓여 있는 물질이라기보다는 그 자체 대립하는 물질 중 하나이다.  즉 여러 물질들은 물이 존재하는 여러 방식이 아니라, 물과 서로 대립해 있는 여러 존재인 것이다.  예컨대 물은 불을 생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없애는 것이다.  따라서 만물의 근본물질은 물과 같은 어떤 특수한 물질에서 찾아질 수 없다.
물이 다른 물질과 ‘대립’된다는 사실에서부터 물은 다른 물질에 의해서 양적으로 제한될 뿐만 아니라 성질적으로 구별된다는 사실이 도출되어 나온다.  이러한 설명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에도 타당하다.  그러므로 일체의 대립을 넘어서 있는 만물의 근본물질은 양적 제한을 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물질과 성질상 구별되는 물질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러한 물질에 ‘아페이론’(apeiron)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아페이론은 공간적 의미에서 무한정하고(Boundless) 내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Indeterminate)이다.  대립자들 또는 규정되어 있는 것들은 바로 이 무한정한 무규정자로부터 생겨나서, 그것에로 사라지기 때문에, 이 무한정한 무규정자는 대립자들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세계를 대립하는 성질들 즉 온-냉과 건-습이 서로 다투는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하나의 요소가 다른 요소를 잠식하는 것을 부정(不正)으로 표현한다.  예컨대 온은 여름에 부정을 범하고 냉은 겨울에 부정을 범한다.  규정되어 있는 것들은 무한정한 무규정자 즉 아페이론에로 흡수됨으로써 자신들의 부정을 보상한다.  이것은 법칙개념을 인간생활로부터 우주론에로 확대한 예라 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규정되어 있는 것들이 이 아페이론으로부터 어떻게 분리되어 나와서 이 세계가 형성되었는가를 설명한다.  그는 선회운동에 의해서 이것을 설명한다.  선회운동에 의해서 냉하고 습한 요소가 차츰 하나의 습한 흙덩어리로 되어 중심부에 위치하게 되고 건조한 불은 주변에 놓여 있게 되며, 공기는 그 사이에 위치한다.  그런데 주변에 위치해 있는 불의 영향 때문에 지구의 여러부분들은 말라버리기 시작하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처음으로 생물이 따뜻한 진창 내지 진흙 속에서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난 다음 이들 생물로부터 인간을 포함한 여러 육지동물이 진화되어 나왔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사고는 만물의 근본물질을 눈에 보이는 어떤 물질 중에서 취한 것이 아니라 보다 추상적 사고를 통해 찾아보려는 점에서 탈레스에 비해 보다 깊은 사고의 일면을 보인다.  더 나아가서 그는 또한 자신의 독특한 우주 진화론을 통해서 세계가 이러한 근본물질로부터 어떻게 생성되어 나왔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대답하고자 노력했다.

(3)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88~525 B.C.경)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본물질을 공기로 보고 있다.  그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용어에 따라 규정되어 있는 물질을 선택하여 탈레스적 길을 따름으로써 아낙시만드로스의 견해보다 후퇴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그가 공기를 채택한 데에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사람은 숨을 쉬는 한 생명을 유지하고 숨을 쉬는 것은 곧 공기의 들이쉼과 내뿜음이기 때문에 공기는 생명의 원리인 것처럼 보인다.  물활론적 사고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초기 희랍 철학자로서는 이 세계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공기라고 생각했음직 한다.
그러나 아낙시메네스의 이론이 가지는 보다 큰 설득력은 만물이 어떻게 해서 공기로부터 생겨 나오게 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를 그가 독창적인 방식으로 설명한 데에 있다.  여러가지 구체적인 물질들이 아르케인 공기로부터 어떻게 형성되느냐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농축과 희박이라는 개념을 끌어온다.  공기가 희박해지면 불이 되고, 농축되면 바람, 구름, 물, 흙, 돌로 된다.  버네트에 의하면 이러한 이론은 밀레토스학파의 우주론을 일관성있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단일한 원질의 형식으로 설명하는 이론은 일체의 차별을 양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공기의 농축과 희박은 일정한 공간에 있어서 공기의 양과 밀접한 관련을 맺을 것이다.

2) 피타고라스 학파

피타고라스(Pythagoras: 580~500 B.C.경)를 정점으로 해서 형성된 피타고라스 학파는 복잡한 계보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짧은 역사와 단순한 계보를 가진 밀레토스 학파와는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한 피타고라스 학파는 오직 학문 그 자체를 위해서 만들어진 학파라기보다는 종교적 신념, 생활방식, 정치적 신념, 학문적 방향 등등 여러가지 점에서도 동일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는 학파라는 점에서 밀레토스학파와는 구별된다.  피타고라스 자신은 원래 이오니아 지방의 사모스 섬 출신이지만 그가 활약한 곳은 남부 이태리의 크로톤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적 성향은 이오니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이태리적인 것이라 여겨진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이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관한 논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들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사상은 영혼윤회사상이다.  즉 우리의 영혼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이 세계로부터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육체, 경우에 따라서는 동물의 육체에 깃들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이들의 표현법에 따르면 육체 속에 갇혀서 살아가는 것이다.  영혼이 육체에의 갇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속죄와 보다 각별한 노력이 요구된다.  그들에 의하면 이런 속죄 및 각고의 노력이 없으며 육체의 단순한 변경으로 인간 윤회의 인고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믿음은 당시 이미 상당히 유포되고 있었던 신비주의적 종파 특히 오르페우스교의 믿음과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윤회적 인고의 벗어남에 관한 방식에 관해서 차이를 나타낸다.  오르페우스교와 같은 기존의 종교는 단순한 종교적 의식 및 시체를 피하는 것과 같은 금기사항을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에 의해서 윤회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는 데 반해서, 피타고라스학파는 비록 이런 유의 많은 것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와 더불어 보다 합리적인 철학의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이들은 영혼을 정화하는 것만이 윤회를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혼을 정화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금기사항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여러가지 정신적 작업 특히 철학과 수학, 음악, 체조 등에 몰두했다.  따라서 피타고라스 학도들의 여러 활동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교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중 수학에 관한 깊은 연구결과 그들은 이 세계에 있어서 수가 가지는 중요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만물은 수로 세어질 수 있으며 두 사물 사이의 관계 또한 수적 비율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특히 감명을 주었던 것은 리라로 연주되는 악보의 음정들이 수적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는 사실이었다.  음의 고저는 길이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수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음계 또한 수적 비율에 따라서 표현될 수 있다.  음악에서의 조화가 수에 의존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주의 조화도 수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했음직하다.  그들의 사고는 음악에 있어서의 수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전 우주에 있어서 수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는 깨달음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들은 이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골몰했다.  예컨대 ‘책상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라고 물어 보았을 때 우리는 ‘나무’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마도 피타고라스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 나무가 어떤 방식으로 재단되고 모양을 갖추지 않으면 책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즉 나무라는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지 않은 것에 어떤 제한을 부여함으로써 책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밀레토스학파는 질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데 반하여 피타고라스 학파는 형상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아낙시만드로스를 사로잡았던 개념이 제한되어 있지 않은 것 혹은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라면 피타고라스의 사고를 맴돌았던 개념은 제한되어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질료의 개념은 자연스럽게 아페이론의 개념에 연결되는 반면에 형상의 개념은 페라스(peras)의 개념에 연결된다.
그런데 이러한 형상 혹은 제한의 개념은 항상 수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에 대한 가장 좋은 예는 음악에서 보여진다.  소리 그 자체는 높고 낮은 반대 방향으로 뻗어가는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지 않은 것인데, 여기에다가 어떤 일정한 비율로 제한을 가함으로써(리라를 연주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름다운 음악이 탄생하게 된다.  이런 예에서 볼 때 ‘아름다움’(음악적 조화)은 형상의 개념과, 그리고 수적 제한의 개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은 이러한 예를 우주에까지 확대시켰는데, 따라서 그들에 있어서 우주는 조화로운 우주, 질서있는 우주이며, 이 우주를 조화롭고 질서있게 만드는 것은 수적 조화 이외에 다름이 아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학적 개념을 물질적인 사물의 질서에다 전이시켰다.  그리하여 여러 점들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수학자의 학자적인 상상력에서가 아니라 바깥에 있는 사물 속에서 선이 산출된다.  동일한 방식으로 면은 여러 선들을 나란히 함으로써 산출되고, 마지막으로 물체는 여러 면들을 결합시킴으로써 산출된다.  따라서 점, 선, 면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를 구성하고 있는 실제적인 단위들이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물체들은 수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이 밀레토스인들과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다른 사고유형을 보여 준다는 의미에서 흥미를 유발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로 하여금 탐구의 계기가 되도록 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것이지만, 그들은 이를 훨씬 넘어서 자신들의 사고영역을 수학적 형이상학에까지 확대시켰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밀레토스적인 우주관으로부터 벗어나서 우주를 다른 방식으로 보는 색다른 시각을 제공해 주었다.  플라톤은 여러가지 점에서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입었지만 그 중에서도 그에게 가장 큰 감명을 주었던 것은 이 학파에서 보여준 수학적 사변이었다.  ‘불변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라는 플라톤적 사고는 수학적 인식에 대한 그의 이해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3. 운동의 문제

1)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530~470 B.C.)

헤라클레이토스는 앞에서 다루어졌던 철학자들과는 다소 달리 새로운 문제 즉 변화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중요명제 중 하나는 ‘만물은 유전(流轉)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당신은 동일한 강물에 두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새로운 물이 계속 당신에게 밀어닥치기 때문이다’라는 진술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진술에도 불구하고 헤라클레이토스가 변화를 겪는 그 무엇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거나 변화의 흐름 속에 있는 어떤 동일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변화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이 어떤 것을 ‘불’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불은 밀레토스 학파에서 원질로서 논의되었던 물이니 공기니 불이니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이다.  말하자면 헤라클레이토스에 있어서 불은 변화를 설명해주는 개념으로서 도입되었다.  우리의 감각에 의하면 불은 항상 무엇인가를 섭취하면서 그것을 태워버린다.  불은 많은 대상으로부터 발생함으로써 그런 대상을 자신으로 변화시키며, 따라서 재료를 공급하지 않고서는 불은 죽어버린다.  이처럼 헤라클레이토스가 불을 선택했을 때, 그는 변화하는 물질을 고려했을 뿐 아니라, 변화의 원리 그 자체를 고려한 것이었다.  따라서 만물이 유전한다는 말은 세계가 하나의 ‘영원히 타는 불’(ever-living fire)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러한 운동은 ‘타는 정도와 연소되는 정도’에 의해서 보증된다.  이 ‘정도’는 타는 것과 연소되는 것 간의 일종의 균형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은 경제적 비유로써 쉽게 이해된다.  ‘만물이 불의 교환물이고, 불은 만물의 교환물이다.  이는 상품이 금의, 금이 상품의 교환물인 것과 같다.’이 교환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사물은 계속 변화하되 궁극적으로 잃는 것도 얻는 것도 없다는 점이다.  불이 만물을 태워서 자신으로 변형시킴으로써 만물로부터 그 무엇을 받는다면, 받는 만큼 준다.  그리하여 각 종류의 물체가 변화하는 반면에 집합량은 항상 동일한 채로 남아 있다.
헤라이클레이토스에 의하면 불의 변화과정은 두 가지 길 즉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로 구분된다.  그는 변화를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로 설명하고 우주는 이것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다.  불이 응축할 때 습기가 되고, 압축 하에서 물로 된다.  응결되어진 물은 흙으로 변화하고, 이것을 그는 내려가는 길이라 부른다.  또한 흙은 그자체 용해되고 그로부터 물이 되며 그로부터 모든 다른 것이 나온다.  이것이 올라가는 길이다.
이상에서도 이미 드러났지만 헤라클레이토스에 있어서 불은 변화과정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싸움을 설명해 주는 상징이었다.  불은 다른 것을 태워서 죽임으로써만 스스로 살아날 수 있다.  이것은 불과 태워지는 물질 사이의 투쟁을 상징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위에서 설명한 변화라고 하는 것은 투쟁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요, 다툼은 정의이다.’ 만물을 이처럼 투쟁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고 이러한 투쟁을 통해서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입장은 변증법적 사고의 일면을 보여줌으로써 후세 독일의 철학자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변화와 투쟁의 과정은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로고스(Logos)에 따른 운동이다.  그런데 이 로고스의 개념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종교적 신념 즉 만물 중 가장 실재적인 것은 영혼이며 그 영혼의 가장 판명하고 중요한 속성은 지혜 혹은 사유라는 그의 신념에서 출발했다.  그는 만물의 변화과정에서 신성한 법칙을 파악했던 것이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로고스를 자연의 문제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그들 자신의 본질 속에 신적인 어떤 것 혹은 불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보편법칙을 분유한다.  그래서 그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로고스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있어서 로고스는 자연의 보편법칙인 동시에 인간사회의 법칙이며, 인간의 행위의 법칙인 것이다.

2)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520~440 B.C.)

파르메니데스는 통상 헤라클레이토스와 정반대의 견해를 품었던 철학자로 평가되어 왔다.  즉 헤라클레이토스가 변화의 측면을 강조한 데 반해서 파르메니데스는 변화의 개념은 논리적으로 볼 때 불가능한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파르메니데스는 변화를 인정하는 주장들은 모순을 범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모순된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만약 변화의 개념이 이해될 수 없는 개념이라면 우리는 변화의 사실에 대해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  변화는 환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계를 불변적인 어떤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에 호소하지 않고 이성에 호소하게 될 때 이러한 결론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변화하는 세계는 우리의 감각 때문에 생기는 가상(假象)에 불과하다.  따라서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견해는 속견(俗見)에 불과하다.  우리는 더 이상 속견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진리의 길’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진리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이성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몇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첫째 ‘존재하는 것’은 오직 존재할 뿐이요, 그 외의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만이 존재한다.
둘째, 변화 즉 생성-소멸은 없다.  만약 어떤 것이 존재하게 된다면 즉 생성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만약 그것이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존재하게 되는 것(생성)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같은 것인데, 우리는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변화의 개념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존재하는 것이 그것으로부터 나올 수 있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으로부터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도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하게 되는 것(생성)이 아니다.  다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성은 없으며 소멸도 없다.
셋째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분적(不可分的)이다.  만약 그것이 분할된다고 한다면 존재하는 것에 의해 분할되든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의해 분할되어야 한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에 의해 분할된다는 것은 분할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에 의해서 분할된다는 것은 양자가 동질적으로 연속해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며, 결국 분할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의해서 분할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전혀 분할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의해서 분할된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분리될 수 없다면 존재는 일자(一者)요, 유일자(唯一者)라고 할 수밖에 없다.
파르메니데스는 이 세계는 거대한 하나의 물질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졌다.  파르메니데스는 생성의 의미에서의 변화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운동의 의미에서의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운동 또한 있는 것이 그것 아닌 것으로 됨을 의미하는데 이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파르메니데스가 의미하는 것은 빈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빈 공간은 존재가 아닌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실재의 세계는 거대한 하나의 물질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은 영원하고 변화없는 정지 속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3)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444 B.C.경)

엠페도클레스는 새로운 철학을 창출했다기보다는 이전의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을 결합시키거나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던 철학자였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이런 존재는 물질적인 어떤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엠페도클레스는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의 기본사상 즉 존재하는 것은 무(無)로부터 나올 수도 무화(無化) 될 수도 없기 때문에 존재는 생겨날 수도 사라질 수도 없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지금까지는 엠페도클레스와 파르메니데스의 견해는 완전히 일치한다.  그럼에도 엠페도클레스는 변화는 곧 환상에 불과하다는 파르메니데스의 견해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엠페도클레스는 존재는 사라지지도 생성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변화는 있다는 입장을 개진하고자 했다.
탈레스가 모든 사물의 궁극적인 원리를 물로, 아낙시메네스는 공기인 것으로 믿었음에도, 그들은 적어도 물이 흙이 되고, 공기가 물이 된다는 의미에서 한 종류의 물질이 다른 종류의 물질로 변화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엠페도클레스는 하나의 물질은 다른 물질로 변화될 수 없고, 만물의 기본이 되는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원소를 4종류, 즉 흙, 공기, 불, 물이 있다고 생각했다.  엠페도클레스는 이 4원소를 ‘만물의 뿌리’라고 부르고 있다.  이들은 만물의 뿌리이기 때문에 흙이 공기로 되거나 물이 불로 되는 일은 없다.  4종류의 물질은 변화될 수 없고, 이 4요소가 혼합해서 세계의 구체적 대상들이 형성된다.  예컨대 뼈는 흙2, 물2, 불4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대상들은 원소들의 혼합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고, 분리를 통해서 존재하기를 멈춘다.  그러나 원소들 그 자체는 존재하게 되거나 사라지게 되지 않고 항상 불변인 채로 남아 있게 된다.  엠페도클레스가 일원론자가 아니라 다원론자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파르메니데스의 견해와 변화의 사실 즉 감각의 분명한 사실을 조화시키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은 아낙시만드로스나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철학자들에게도 타당하다.  따라서 이들의 다원론적 입장은 이들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였다.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들은 자연의 변화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예컨대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원질이 공기라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다양한 물질이 존재할 수 있는가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다만 아낙시메네스는 공기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힘에 의해서 다른 물질로 변화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엠페도클레스는 능동적 힘이 요청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힘을 사랑과 미움 혹은 조화와 부조화에서 발견했다.  사랑․미움은 정신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엠페도클레스는 이 힘을 물리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사랑은 4원소의 입자들을 함께 모으는 힘 즉 인력이고, 미움은 입자들을 분리시키며 대상의 존재를 해체하는 힘 즉 척력(斥力)이다.
엠페도클레스에 따르면 세계의 변화과정은 순환적이다.  순환이 시작할 때 이 세계는 사랑의 힘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원소들은 함께 결합해 있었다.  그러나 미움의 힘이 침투하기 시작했으며 분리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미움의 힘이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 물의 입자들은 물의 입자대로, 불의 입자들은 불의 입자대로 함께 모여있게 된다.  그러나 사랑은 다시 힘을 발휘하게 되고 여러가지 혼합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순환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세계는 분리와 결합의 중간단계에 있는 세계이다.
운동에 대한 엠페도클레스의 설명은 비록 마음의 상태를 설명하는 개념을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끊임없는 순환과정을 거쳐가면서 발생한다.  이러한 혼합과 분리는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서 일어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운동에 관한 엠페도클레스의 설명은 기계론적 색체를 띠게 된다.


4)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440 B.C.경)

아낙사고라스는 엠페도클레스와 마찬가지로, 존재는 존재하게 되지도 않으며 또한 사라지지도 않으며, 따라서 변화될 수 없다는 파르메니데스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또한 존재 혹은 원소적 입자들이 변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연 내의 변화는 존재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혼합과 분리의 개념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아낙사고라스와 엠페도클레스의 견해는 일치한다.  그러나 엠페도클레스가 만물을 구성하는 원소를 4종류로 본 데 반해서 아낙사고라스는 원소의 종류가 무수하게 많다고 보고 있다.  아낙사고라스에 따르면 우주 내의 대상들은 무수해서 4가지 원소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다.  그래서 그는 대상들은 무수한 수의 원소 즉 ‘씨앗’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으며, 이러한 씨앗의 여러가지 결합방식에 의해서 대상들의 생성이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낙사고라스는 여러가지 결합방식에 의해 대상들의 생성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물음을 던진다.  ‘어떻게 해서 머리카락이 아닌 것에서부터 머리카락이 생겨 나오고, 고기가 아닌 것으로부터 고기가 생겨나는가?’ 예컨대 송아지는 풀을 먹는데 고기가 커진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아낙사고라스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원소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나타난다.  이러한 모든 종류의 입자크기가 무한히 작다는 사실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렇지만 모든 종류의 원소들이 동일한 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이 그런 유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숫자상 우세한 힘을 가진 원소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따라서 풀로부터 고기가 나오는 것은 풀의 원소가 수에 있어서 우세했다가 고기의 원소가 우세하게 된 것 이외에 다름 아니라고 설명될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는 바로 이러한 설명이 자신을 엠페도클레스와 구별시켜 주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낙사고라스의 이러한 설명에서 특별히 가치있는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상 그의 공헌은 정신(Nous)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아낙사고라스는 만약 세계변화 과정이 어떤 유형의 지성적인 힘에 의해서 방향지워지지 않는다면 원소입자들의 상호혼합은 무한히 혼돈스런 결합을 낳을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가 ‘Nous’의 개념을 도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점은 아낙사고라스 이전의 철학자들과 아낙사고라스를 가장 뚜렷하게 구별시켜 주는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세계 내에 내재해 있는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서 지성적인 마음이 요구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누스는 존재했던, 존재하고 있는, 존재하게 될 모든 사물에 질서를 부여한다.  아낙사고라스는 태초에 거대한 질료덩어리가 이미 다양한 원소들의 혼합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질료덩어리가 정신의 힘에 의해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즉 원은 회전운동을 일으켜서 질료덩어리가 포함하고 있는 다양한 원소들을 분리시키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발생할 모든 운동도 누스가 지배한다.  따라서 누스는 자연의 운동을 지배하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낙사고라스가 누스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여 술 취한 사람들 중에 끼어있는 유일하게 맨정신인 사람이라 칭찬했다.  그렇다면 누스의 발견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의미를 가지는가?  첫째 아낙사고라스는 비록 희미하게나마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기 시작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물론 그가 정신과 물질 사이를 날카롭게 구별하고 2원론적 입장을 견지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구별을 가능케 한 특징을 우리는 아낙사고라스의 사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둘째 세계의 운동을 지성적 존재의 산물로 봄으로써 목적론적 사고방식의 태동을 예고케 했다.  물론 그는 자연을 목적론적으로 설명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누스가 물리적 사물에 작용하는 방식에 관한 설명은 기계론적 성격을 짙게 깔고 있다.  누스는 타자존재를 움직이게 할 뿐만아니라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누스에 관한 아낙사고라스의 설명은 목적론적 사고방식을 가능케 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가 누스에게 절대적인 힘을 부여한 것은 아니다.  아낙사고라스에 따르면 누스는 사물을 창조한 존재가 아니라 다만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5)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460~360 B.C.)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가 원소론자로 불려질 수 있는 철학자들이라면 레우키포스(Leukippos)와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론자라고 불려질 수 있는 철학자이다.  그런데 레우키포스는 원자론의 창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데모크리토스의 빛나는 업적 때문에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압데라 출신인 데모크리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비교될 정도로 방대하고도 다양한 저술활동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몇몇 단편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적 입장은 파르메니데스에 의해 주도된 엘레아 학파의 공간부정론에 대한 반발로서 제시되었다.  파르메니데스의 견해에 따르면 존재는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서 텅빈 공간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가 아니다  존재가 아닌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요, 따라서 빈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견해였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그러나 만약 공간이 없다면 운동과 변화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며, 변화와 운동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이론이었다.  그래서 데모크리토스는 운동을 설명하기 위하여 존재가 움직이는 터 즉 공간에 대해 고려했다.  존재가 운동하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 즉 텅빈 공간도 역시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언어적 차원 혹은 논리적 차원에서만 고려한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사실의 측면에서 보면 즉 운동을 고려하기 위해서는 존재가 아닌 것 즉 공간이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데모크리토스의 입장이 파르메니데스의 그것과 정반대되는 것은 아니었다.  파르메니데스 이후에 나온 철학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을 받고 있다.  데모크리토스는 존재를 ‘원자’(atom)로 이해하고 있는데, ‘원자’는 희랍어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이란 의미를 가지는 낱말로서, 이처럼 그것이 쪼개질 수도 없고, 따라서 무화(無化)될 수도 없고 다른 어떤 것에서 생겨나지도 않는 즉 변화할 수 없는 것의 개념이라면 그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와 다를 바 없다.  이런 점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의 개념은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의 원소의 개념과 유사하다.  그러나 물질적 존재의 기본요소이며 그 자체 변화하지 않는 존재란 측면에서만, 그리고 그것의 다수성이 인정된다는 점에서만 원소와 원자가 유사할 뿐 그 이외의 점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원소론자들은 자연 내의 질적으로 다양한 사물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질적으로 다른 여러가지 종류의 원소를 생각해 내었다.  엠페도클레스는 4가지 종류의 원소의 다양한 결합방식에 따라서 다양한 사물들이 생성된다고 주장한다.  아낙사고라스는 물질의 종류의 수만큼 원소의 종류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원자론자들에 따르면 원자들은 모두 같기 때문에 질적인 차이는 없다.  다만 원자들 간에는 양적 차이 즉 형태, 크기 등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원자론자들은 원소론자들과는 달리 자연 내의 물체들의 다양성을 원자들의 양적 차이에 의해서 설명한다.  예컨대 나무토막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을 수 없는 데 반해 물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을 수 있는 까닭은 물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이 나무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에 비해 훨씬 엉성하게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춧가루가 매운 것은 고춧가루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은 뾰족한 것이어서 혀를 찌르기 때문이요, 설탕이 달콤한 것은 설탕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은 매끄러운 것이어서 부드럽게 혀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모양의 원자라도 배열에 따라서 다른 물질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와 공간 이외에 어떠한 존재도 부인하기 때문에 영혼에 대해서도 동일한 설명을 줄 수밖에 없다.  영혼도 원자들의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다른 물체에 비해 특이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는 가장 미세한 까닭으로 운동이 가장 민활한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뿐이다.  일반물체와 영혼과의 차이도 결국 원자들의 양차이에 불과하다.  영혼을 구성하는 원자를 불의 성질을 띤 원자 즉 화성(火性) 원자라고 한다.  화성원자가 곧 영성(靈性) 원자이다.  이 종류의 원자가 우주 내에 골고루 흩어져 있으므로, 어떤 물체이고 간에 다소간 이것을 포함 아니한 것은 없다.  다시 말해서 모든 만물이 약간씩의 영성을 띠고 있으나 인간의 육체에는 그것이 비교적 다량으로 포함되어 있으므로 다른 물체에 비하여 영성이 현저하게 나타난 것뿐이다.  결국 데모크리토스는 인간의 정신현상까지도 그의 원자론에 입각해서 설명했다.  즉 정신도 어떤 물체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사후에는 정신을 구성했던 원자도 흩어져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런 까닭에 데모크리토스를 엄격한 의미에서 최초의 유물론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데모크리토스가 운동을 설명하기 위하여 공간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데모크리토스는 운동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원자론자들은 엠페도클레스의 사랑과 미움의 힘도, 아낙사고라스의 누스도 가정하지 않았다.  어떠한 외부의 힘도 최초의 운동을 위해 필요한 원인으로 가정되지 않았다.  단지 원자들의 외적 운동만으로 충분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만일에 무한한 빈 공간과 그 안에 자유로운 상태로 무한한 수의 원자들이 주어져 있다면 원자들은 필연적으로 운동을 할 것이며, 목적없이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일 것이라고 그들이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이 원자들은 서로 부딪쳐 튕겨져 나가기도 하며 그런 가운데 서로 맞물려 결합되기도 한다.  원자론자들은 운동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주지 않았다.  원자와 빈 공간이 있다는 설명만으로 충분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 양자가 주어지면 운동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원자론자들의 이러한 입장은 인과적이고 기계론적인 자연관을 표방한 것이었다.


제2절  아테네기의 철학


기원전 6세기 내지 5세기는 각기 다른 그리스 생활권마다 거의 동시에 갖가지 철학사상이 발흥하면서,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정신적인 대단원을 펼쳐보이게 된다.  자연현상 그 자체 속에서 세계의 근원까지도 찾아낼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니, 그리스와 서양에 있어서의 모든 철학적 방향도 바로 이것을 연원으로 삼고 있는가 하면 또한 많은 철학사상가들이 바로 여기서 철학의 보금자리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러나 페르샤전쟁 후 철학에도 전환의 시기가 도래한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이르러 종래의 철학은 자연을 대상으로 한 자연학이었는데 지금은 인간의 문제, 특히 그 정신생활의 문제가 철학의 중심문제가 된다.  자연에 골몰하던 인간의 정신이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려 자신을 살펴본다.  소피스트들에 의하여 시작된 이 새로운 경향의 철학은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확고한 토대가 놓여지고, 다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장엄한 체계로 전개되었으니, 이 시기는 그리스 철학의 전성기이다.
당시 페르샤전쟁의 승리로 아테네의 세력은 절정에 다다랐는데, 얼마 안가서 펠로폰네소스의 패전으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패권을 빼앗겼고, 스파르타도 또한 그것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였으니 아테네, 스파르타, 테에베와 같은 도시국가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어 민족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북방의 마케도니아의 세력은 점점 강대하여 338년 카리오네이아의 전쟁에서 그리스가 항복한 후 그 정치적 자유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의 문화는 여전히 번영하였고, 특히 아테네는 그리스 전체의 문화중심지였다.  소피스트들을 비롯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이 시기의 철학은 아테네를 무대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철학적 정신은 처음에 소피스트의 계몽정신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외면적 권위를 배격하고 내면적 자유를 강조한다.  그들의 철학원리는 감각주의, 회의주의, 상대주의이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에 의하여 무너진 권위의 빈 터전에 다시 확고부동한 보편적 윤리의 기준을 바로 잡아 세우려고 힘쓴다.  그러나 아직 객관적 내용을 갖추기에 이르지 못한다.  플라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철학은 이데아란 객관적 존재에 그 근거를 잡는다.  그러나 그의 이데아는 현실에서 유리된 고답적 이상에 불과하였다.  이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현실의 발전과정 속에 실현되는 본질로서 파악한다.


1. 소피스트

페르샤전쟁(기원전 500~449년)을 통하여 자유를 위한 그리스인의 투쟁이 승리로 끝나자 그리스의 본토, 특히 그 중에서도 바야흐로 문화적 내지 정치적 중심지로 도약한 아테네는 풍요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부와 사치에 이어서 이제는 고도의 교양을 쌓고자 하는 욕망도 또한 팽배해지기에 이르렀다.  이 밖에도 또 나라의 민주적 헌법은 웅변술이 지니는 의미를 더욱 고양시켜 줌으로써 국민의회나 재판소에서도 이제는 자기의 논지를 가장 정확하게 그리고 누구에게도 못지 않은 유창한 형식으로 공표할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출세를 꿈꾸는 사람이면 누구나가-물론 시민 누구에게나 원칙적으로 입신출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졌던 까닭에-정치가며 동시에 웅변가로서의 철저한 훈련을 쌓아야만 했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욕구에 부응할 수 있었던 것이 소피스트들이었다.  ‘지혜의 스승’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의 ‘소피스타이’(Sophistai)라는 말이 실제로는 오직 이와 같은 뜻으로만 사용되어 왔었다.  이들 소피스트들은 마치 방랑자와도 같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떠돌아다니면서 일정한 보수를 받고서 갖가지의 기술이나 능력을 가르쳐 주었던 바, 그 중에서도 특히 대화술을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은 본래의 의미에서는 철학자가 아닌 실천가였던 까닭에, 그밖의 모든 실천가들이 그러하듯이 이들도 역시 이론적 인식에는 별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더욱이 전술한 바와 같이 철학의 전반적 상황에 곁들인 이들 소피스트의 처신으로 말미암아서, 결국 그들 자신은 대부분이 객관적 인식이란 도대체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게끔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 가지 가세한 것이 있다면 교양수준이 점증함에 따라서 광범위한 계층까지도 타민족이나 그들의 관습 및 종교에 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짐으로서 그 때까지만 해도 확고부동한 상태를 유지하던 선입견마저도 동요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약 여기서와 같이 실제로 어떤 특정한 문제에 있어서 과연 어느 편이 ‘옳은가’하는 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하등의 객관적 기준도 없다고 한다면 이제 남는 문제란 다만 어느 편이 옳다고 ‘자처하는가?’ 다시 말해서 어느 편이 더욱 재치있게 자기의 입장을 관철시킬 줄 아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그런데 일단은 이와같이 이론적 회의에 불과했던 것이 어느덧 도덕적 영역에까지 비화하면서, 이제 그들은 이론적 대결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종국에 가서는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도 역시 어느 편이 좀 더 다대한 성과를 올리는가 하는 데에 모든 문제의 관건이 달려 있다고 주창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소피스트적 입장에서 볼 때는 웅변술이란 것도 역시 설득이라기보다는 한낱 설복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졌는가 하면, 윤리적 측면에 있어서도 또한 그들은 일체를 규제하는 객관적인 법이란 존재하지도 않고 다만 강자의 권리만이 인정될 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진리와 정의에 대한 객관적 가치기준을 부인했다는 사실 이외에도 이들 소피스트들은 자기들이 제공하는 학습의 대가로서 적지 않은 보수를 받아왔다는 점(그리스에서는 원래 수입을 올리기 위한 노력제공은 옳지 못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까닭에), 그리고 다시 플라톤이 주도했던 그들에 대한 투쟁의 결과로서 이들은 결국 오늘날까지 사용되어 오고 있는 어딘지 탐탁치 못한 뒷맛을 남기는, 궤변가라는 의미의 소피스트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1)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480~410 B.C.경)

프로타고라스는 압데라 출신으로서 자신을 소피스트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이른바 ‘인간척도론’의 제창자로서 유명하다.  그의 사상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는 진술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있다는, 없는 것에 대해서는 없다고 하는 척도이다”이다.  이 진술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모든 인식은 개인에 따라 상대적이다.  모든 사람들에 있어서, 모든 시대에 있어서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는 보편적인 진리는 없다.  따라서 개인이 참된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재는 자이다.
교육은 그 시대의 실제적인 문제와 관련되어야 한다.  우주는 하나인가 다수인가, 변화하는가 변화하지 않는가, 기계적인가 목적적인가 등의 인간경험의 범위를 넘어서 있는 어떤 것을 탐구하는 것은 시간 및 에너지 낭비이다.
윤리학의 분야에서 옳고 그름은 순수하게 상대적인 개념없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문제는 개인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개인의 결정이 따라야 하는 객관적인 기준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할 도덕적 책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관습을 따르는 것이 통상 편리하다.
지각도 이성도 사물의 궁극적 본성에 관해 어떤 것을 진술하는 데 적절하지 않다.  모든 인식은 인식하는 주관에 의해서 제약되어 있고 사물이 현상하는 방식 이외에 어떤 것도 밝히지 못한다.
프로타고라스의 견해가 객관적인 기준을 배제시키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인의 모험에서의 성공과 인생에 있어서의 행복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회의 관습과 인습에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2) 고르기아스(Gorgias: 483~374 B.C.)

고르기아스는 시실리아섬의 레온티니에서 출생하여 기원전 427년경 아테네에 가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의 견해는 많은 점에서 프로타고라스에 의해서 주장된 것과 유사하다.  비록 고르기아스가 보다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천명하였지만, 프로타고라스가 개인이 진리의 척도라고 주장한 것에 비해 고르기아스는 진리와 같은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부했다  그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세 개의 명제 속에서 드러난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주장하기를 이는 제논이 오래 전에 지적했던 사실 즉 세계는 자기모순을 포함하지 않고는 하나일 수도 다수일 수도 없다는 사실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다.  엘레아 학파는 세계를 공간과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고르기아스는 공간 안에도 있지 않고 시간 안에도 있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세계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아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마음을 떠나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로부터 도출되어 나온다.  우리는 각각 자신의 의식상태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우리가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가진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그 인식을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자신의 의식은 사적(私的)인 것이고, 따라서 다른 사람의 관념이 우리 자신의 것과 같은지 어떤지를 확인할 수 없다.

3) 소피스트사상의 철학사적 의의

철학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소피스트학파가 지니는 가치를 우리는 그것이 창안해 낸 어떤 개개의 학설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업적에 담겨 있다고 보아야만 하겠다.  즉, 적어도 희랍철학에 있어서 그들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관심을 처음으로 ‘인간’의 문제로 전환시켰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그들에 와서 처음으로 ‘사유’자체가 곧 사유의 대상으로 등장함으로써 다름아닌 인식의 조건과 가능성, 그리고 그 한계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셋째로 그들은 ‘윤리적’인 가치척도까지도 전적으로 합리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윤리학 자체를 과학적으로 고구하면서 동시에 이를 논리정연하게 철학적 체계 속에 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제시하였다.  이 밖에 또 이들 소피스트들은 문장론과 웅변술에 대한 상세한 논구를 바탕으로 하여 언어학과 문법론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결국 소피스트학파가 하나의 과도기적 현상으로 나타났던 것만은 사실이되 그러면서도 그 뒤로 이어지는 아테네철학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소피스트학파를 반드시 고려해야만 할 정도로 그들이 차지하는 의의는 크다고 하겠다.


2. 소크라테스

모든 시대의 가장 위대한 스승 중의 하나로 간주되는 소크라테스(Sokrates: 469~399 B.C.)는 아테네시 출신으로서, 여기서 그의 전 생애를 보냈다.  그는 신의 명령이라고 그가 믿었던 것에 입각해서 지혜를 탐구하는 데 그의 시간과 정열을 기울였다.  문답법(dialektic)이라 불려지는 그의 방법은 대화(dialogue)의 방법인데, 그것의 목표는 여러 다른 견해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밝히고, 그것의 잘못을 폭로하는 일이다.  그는 날카로운 지적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동시에 고결한 도덕감을 소유한 사람이었기에 아테네의 많은 지도인사들의 우정과 존경을 얻게 되었다.  그는 결코 저서를 남기지 않았지만 이어지는 철학전통에 대한 그의 개인적 영향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는 타락한 사회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자였기 때문에 그는 강한 반대에 직면했으며 결국 그는 순교자적 죽음을 맞게 되었다.  우리는 주로 플라톤의 「대화편」과 크세노폰의 「회고록」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를 알게 된다.  그에 대한 플라톤의 찬사는 그의 대화편 「파이돈」의 말미에 잘 표현되어 있다.  “에케락테스, 그것이 우리 친구의 마지막이었어, 나는 진실로 그렇게 부르고 싶은데, 그는 내가 지금까지 알게 되었던 사람 중 가장 현명하고, 가장 정의롭고, 가장 멋진 사람이었어.” 플라톤의 사상과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아주 정확하게 구별짓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이하의 내용들은 통상 소크라테스의 사상으로 인정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신들에 대한 통속적인 개념과 이들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섭리가 세계의 창조와 관계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신의 섭리가 추구하는 바는 인간의 측면에서 선한 생활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계의 물리적 측면에 대한 연구는 인간의 도덕적 측면과의 관련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믿어졌다.  인간의 정신을 차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신적 본성이고 그것에 도달될 수 있는 방법 등이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개별적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하는 프로타고라스의 견해와는 정반대로 인간일반이 곧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했다.  소피스트들은 개별자에만 실재를 인정한 반면에 소크라테스에 있어서는 보편자가 곧 실재였다.  개별자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반면에 보편자는 항상적(恒常的)이고 개별자가 사라진 후에도 지속할 것이다.  따라서 보편자가 실재한다는 것이 인식을 가능하게 만든다.  만약 모든 것이 초기의 몇몇 철학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계속해서 변화한다면 회의주의는 불가피한 결과로 나타날 것이겠지만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지각은 개별자에 관계하지만 우리는 이성에 의해서 보편자 및 보편자들이 개별자들에 관계하는 방식을 알게 된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인식을 추구하는 일은 사물에 대한 정의를 탐구하는 일을 포함한다.  정의란 항상 어떤 부류의 대상의 모든 구성원에 공통적인 요소 혹은 보편자를 진술한다.  어떤 사물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부류의 사물에 속하는가를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답법은 소크라테스가 정의에 대해 탐구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진술들은 그들이 함축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서 검토될 것이고, 그리고 난 다음 이들 진술들은 관찰된 사실과 비교될 것이다.  원진술 속에 포함된 잘못이 밝혀질 때 올바른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새로운 시도가 감행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만족스런 진술이 만들어질 때까지 반복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도덕철학에 대해 말한다면 한마디로 ‘덕은 곧 앎이다’라고 짤막하게 표현될 수 있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덕을 획득하는 일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덕을 획득하려면 그는 자신의 존재목적을 수행해야 한다.  인간의 경우에 이것은 그의 전 본성이 조화롭게 발전되어 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요, 이것은 현순간 혹은 바로 뒤의 순간보다는 전체로서의 인생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덕만이 영혼에 만족스러움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이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것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무엇이 지속적인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감각적 쾌락·물질적인 부·공적인 존경 등등 이와 유사한 목적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가장 큰 양의 만족을 가져다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목적이 도달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된다.  따라서 영혼으로 하여금 진·선·미를 사랑하게끔 영혼을 계발함으로써만 인생의 참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어떤 사람도 자신에게 악한 것 혹은 해로운 것이라고 그 자신 알고 있는 것을 추구하는 법은 없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항상 그가 알고 있는 최선의 것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스스로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쁜 짓을 가끔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따르면 나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그런 행위를 할 때 다른 행위를 했을 때보다도 더 큰 만족을 얻게 된다고 믿고서 그런 행위를 한다.  그들의 잘못은 바로 이점에 있다.  악한 행위를 할 때 나타나는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악한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무지가 유일한 악이고 앎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날게 하는 날개이다.”
선한 생활의 의미에 관한 앎은 선한 결정을 하는데 요구되는 전제조건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치를 비판했다.  그가 믿기로 이러한 형태의 정부에서는 전체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그러한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무지하고 무능한 자도 현명하고 유능한 자와 똑같은 기회를 얻게 된다.  현명한 자와 선한 도덕적 성격을 갖춘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일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깊은 확신이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그는 이러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그가 비난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고발과 죽임을 당했다.
정부 못지 않게 교육도 개혁할 필요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과거의 믿음과 관습이 대대로 이어지는 대신에 각자가 스스로 생각하도록 훈련하는 것이 교사의 참다운 기능이라고 믿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각과 믿음을 검토하는 기술을 배워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런 생각과 믿음이 충분한 증거에 기초하고 있는지 그리고 사실과 완전히 조화되는지를 알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이 따라야 할 좋은 예를 제시하고 있다.  즉 그는 가끔 아테네의 산파라고 불려졌다.  그래서 그의 기능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기자신의 생각을 탄생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산파가 산모로 하여금 자신의 아이를 탄생하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3. 플 라 톤

플라톤(Platon)은 427 B.C.에 태어났다.  그는 오랫동안 아테네 시의 지도층의 역할을 해왔던 귀족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아리스토클레스(Aristocles)였는데 그의 넓은 어깨와 높은 이마와 운동선수로서의 성공 때문에 ‘플라톤’이란 별명이 붙여졌다.
어릴 때 그의 교육은 잘 선택된 가정교사가 담당했는데, 그는 체육, 음악, 읽기, 쓰기, 수학 등 기본학과를 배웠다.  18세가 된 직후에 그는 2년간 군사훈련을 받았다.  또한 그는 그 당시에 특출나게 활동했던 저명한 소피스트들에게도 배움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소크라테스의 학도로서 여러해를 보냈는데, 플라톤의 사상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았을 때 플라톤은 병이 들어 있었고, 그 때문에 소크라테스와 친한 사람들이 감옥으로 그를 방문했을 때 참석치 못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정부 하에서 죽임을 당했고, 플라톤은 그의 가장 열렬한 학도중 하나로 알려졌기 때문에, 잠시동안 아테네를 떠나는 것이 좋다고 느꼈다.  그는 처음에 메가라로 가서 유클리드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그는 이집트, 키레네, 크레테, 남부 이태리 등 긴 여행을 떠났고, 그런 여행을 하면서 피타고라스 학파, 헤라클레이토스 학파 엘레아 학파의 철학자들과 직접 접촉을 했다.
약 390 B.C., 플라톤이 거의 40살이 되었을 때, 정치적 포부를 실현시키려는 시도에 착수했다.  그는 젊을 때부터 항상 정치적인 일에 관심을 쏟고 있었고, 여러가지 관찰을 통해서 잘 교육받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통치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시실리섬 해변에 위치한 국가인 시라쿠스 왕의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이것을 기연으로 해서 플라톤은 자기의 정치이론을 현실적 조건하에서 현실화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왕인 디오니시우스는 유능한 학생이 아니었고, 플라톤이 그의 무능함을 나무랐을 때, 그 독재자는 플라톤을 사슬로 묶고 사형을 언도했다.  그러나 곧 그는 감형을 받아 노예로 되었고, 어니세리스가 돈으로 그의 자유를 산 후 곧 아테네로 귀환되는 것이 허용되었다.
아테네로 돌아온 이후에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라는 학교를 하나 세웠다.  그는 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대화편을 저술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시라쿠스의 왕이 죽은 이후에 두번이나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시도를 했는데, 이때마다 강의와 저술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결국 두번 다 실패로 끝났으며, 끝내 아테네로 돌아와 그의 생애의 마지막을 강의와 저술에 바쳤다.  그는 347 B.C에 죽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사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대화의 형식으로 글을 썼다.  대화의 목적은 독단적 방식으로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독창적인 생각을 가지도록 고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표현형식은 특히 플라톤이 생각했던 목적에 적절한 것이었다. 이러한 표현형식에 의해서 논의하는 주제에 대해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제시된 견해와 대조되는 점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방법은 제기된 문제점들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실망을 주지만, 주어진 주체들에 대해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도록 하는 힘을 부여할 것이다.  플라톤 자신의 이름은 전 대화편에서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그 자신의 견해는 주로 소크라테스의 진술에서 나타난다.  대화편의 많은 등장인물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피스트들이다.

1) 이데아론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는 세계의 모습에 관해 완전히 상반되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 학파에 따르면 시간·공간의 세계에 있어서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 대해 참된 인식을 가진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인식은 조금 전의 인식과 다른데, 우리는 그렇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인식을 참된 인식 혹은 학적 인식이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인식이란 불변적인 인식일 것이다.  여기에 반해 파르메니데스는 세계를 불변하는 실재로 보고 있으며 이런 세계는 우리의 감각에 의해서 포착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영향하에서 플라톤은 우리의 참된 인식 혹은 학적 인식은 불변하는 존재 즉 실재에 대한 인식이라고 믿었으며, 이러한 실재는 우리의 감각에 의해서는 포착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개념에 대한 그의 고찰과 쉽게 연결된다.
일반적인 주제에 관한 모든 논의는 궁극적으로는 일반개념에 의거해 있다.  예컨대 ‘사랑은 좋은 것이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많은 종류의 사랑과 좋은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논의하는 ‘사랑’과 ‘좋음’은 일반개념이다.  이 명제에 대해서 두 사람의 견해가 일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때 비록 두 사람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만약 그들이 사랑과 좋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한다면 그들의 의견이 불일치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그들의 논쟁은 그들이 다루고 있는 개념에 대한 정의를 요구할 것이다.  이때 도덕적 개념이라든가 기하학의 개념들이 기준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좋음에 대해 정의를 내렸을 때 그 정의가 올바르냐 그르냐 하는 것을 평가하는 것은 절대적 좋음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그 좋음에 따라서 평가할 때만 가능하다.  그래야만 논쟁자체가 가능하다.  또한 유크리드 기하학에서 다루고 있는 절대적 직선의 개념은 연필로 그려진 직선의 정확성을 평가하는 기준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좋음이나 직선 그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 것들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많은 것들은 변화한다.  예컨대 가을이 되면서 나뭇잎은 단풍으로 물들게 된다.  그러나 변화는 푸른 잎으로부터 붉은 잎으로의 변화인 것이지 푸름 그 자체가 붉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때 푸름 그 자체나 붉은 그 자체, 그리고 우리가 내린 정의의 올바름과 그름의 평가기준으로 삼아졌던 일반개념은 시간에 따라서 변화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초시간적인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초시간적인 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포착될 것인가?  구체적인 사물들과 그것의 변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우리의 감각에 의존한다.  그러나 감각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부정확하며 때로는 잘못되기조차 한다.  여기에 반해서 일반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우리의 감각적 능력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적인 능력에 의거한다.  예컨대 수학자들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 직각과 같다’고 하는 것을 증명할 때, 그들은 우리들의 감각에 의해서 보여진 구체적인 삼각형의 측량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그들이 다루고 있는 삼각형은 구체적인 삼각형이 아니라 일반적인 대상으로서의 삼각형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삼각형을 다룰 때 감각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에 의거하는 것이다.  기하학자는 위치는 갖지만 크기를 갖지 않는 점, 길이는 갖되 넓이는 갖지 않는 선, 길이와 넓이는 갖되 부피를 갖지 않는 표면과 같은 대상의 증명에 관심을 가지는데, 이런 대상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는 만나질 수가 없다.  예컨대 기하학자는 이런 경우에 혹은 저런 경우에 존재하는 원이나 삼각형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크기나 모양의 차이와는 상관없는 원이나 삼각형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러한 문제를 인식론적 측면에서만 접근한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일반개념이 불변하고 초시간적이며 지성적으로만 포착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감각에 의해서 마주치게 되는 대상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실재에다 형상(eidos)혹은 이데아(idea)라는 용어를 부여한다.  만약 이러한 이데아들이 감각적 사물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감각에 의해서 만나게 되는 세계 즉 감각계 혹은 현상계 혹은 가시계는 일상적인 개별물들 예컨대 나무, 산, 강, 사람, 별 등등으로 이루어진 세계이고 이데아계 혹은 초감각계는 개념대상 즉 이데아들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이다.  전자는 감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세계인 반면에 후자는 우리의 지성에 의해서 인식되는 세계이다.  이때 당연히 나타나는 문제는 이 양세계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와 감각계의 개별물들 간의 관계를 모방과 분유(分有)에 의해서 설명한다.  이데아는 본성상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이고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일체의 물질적 사물들은 이데아에 비해 열등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물과 이데아간에는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즉 개별물들은 이데아를 모방하고 있다.  그런데 개별물들은 정신적인 요소 뿐 아니라 물질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한에서 그 모방은 완전한 것이 될 수 없으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분유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이것은 이데아가 개별물 속에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은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동굴의 비유’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이데아와 개별물 간의 관계는 사물과 그것의 그림자에 비유되고 있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개별물들이 이데아에 비해 열등하다는 사실로부터 플라톤은 자연의 변화를 목적론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현상적 세계의 존재자들 즉 개별물들은 불완전한 존재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해지기 위해서 완전한 존재자인 이데아를 보다 닮으려고 노력한다.  즉 개별물들은 이데아를 목표로 해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즉 현상의 세계는 목적인 이데아를 향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에 의하면 현상적 존재자들은 이데아와는 영원히 구별된다.  왜냐하면 감각계의 존재는 그자체 감각적인 것이고 감각적인 것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으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적인 변화하는 세계와 파르메니데스적인 변화하지 않는 세계를 함께 논의하고 양자의 견해를 종합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데아들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물을 수 있다.  이데아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이해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들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가능하다.  왜냐하면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들이 일반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에 상관하는 개념대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일반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전적으로 독립적인 개념대상 즉 이데아에 의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현상세계란 전적으로 이데아의 세계의 질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말’이라는 일반개념을 고찰해 보자.  이때 말이라는 개념은 동물이라는 개념의 하위개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동물의 형상은 말의 형상에 나타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 형상은 다른 형상을 분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개념들 간에 위계질서가 있듯이 형상들 상호 간에도 위계질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러한 위계질서에서 가장 우두머리에 있는 것이 바로 선(善)의 이데아이며, 바로 이러한 선의 이데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목적과 방향을 부여한다.

2) 윤 리 학

플라톤의 이데아이론은 윤리학에 관한 그의 이론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플라톤은 2원론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우리에 의해서 포착되는 세계요, 다른 하나는 우리의 지성 혹은 이성에 의해서 포착되는 세계이다.  우리의 이성에 의해서 이데아가 포착된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이 이데아의 세계와 어떤 연관관계가 있음을 입증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은 육체와 결합되기 이전에 이미 이데아들과 친숙했고, 인간이 지성에 의해서 이데아를 인식한다는 것은 이데아들에 대한 망각을 다시 되살리는 것에 불과하다(想起說).  그렇지만 인간은 또한 감각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또한 감성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플라톤은 인간의 이러한 감성적 부분을 감각적·육체적 욕구 내지 욕망을 느끼는 욕정과 이성의 명령에 따라서 욕정을 제어하는 기개(氣慨)로 나누고 있다.  이것이 소위 플라톤의 영혼의 삼분법이다.
플라톤의 윤리학은 바로 인간의 이러한 현실구조 속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성의 제기능은 육체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은 어느 정도 육체의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서 선택의 자유를 갖게 되고, 그런 자유 때문에 악하게도 되고 선하게도 된다.  인간은 본성상 자신에게 좋은 것(선)을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은 그 선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는 물질적 부나 좋은 평판,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힘이나 이기적인 쾌락 등등을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일단 획득되었을 때 그는 이들이 자신을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은 선보다 악을 산출하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잘못을 고려하여 현명하게 선택하기를 원하며 이것을 위해 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악은 무지 혹은 잘못된 지식에서 생기는 것이며 우리가 선하기 위해서는 혹은 도덕적이 되기 위해서는 참된 지식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인간의 도덕적 발전은 지적 상승과 일치한다.  이점은 바로 ‘지는 곧 덕이다’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를 생각케 한다.  그러나 이 명제는 덕이 단순히 진리의 목록에 대한 지식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플라톤에 있어서 덕이란 하나의 독특한 기능의 완전한 실현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를 내포한다.
플라톤에 있어서 윤리학은 행복주의적인 성격에 입각해 있다.  윤리학이 선을 지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 할 때, 플라톤에 따르면 행복은 선에서 찾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의 윤리학에서는 선이란 무엇인가 하는 과제가 주어지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데아에 대한 이성의 지식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데아에 대한 앎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처한 현실적 상황은 그 이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육체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데아에 대한 앎과 함께 우리 인간의 여러 기능들이 이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덕의 실현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기능의 실현이요, 인간에 있어서 선이란 이러한 기능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 즉 여러 덕들의 조화를 의미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세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영혼의 세 부분은 각각의 기능들을 가진다고 한다.  만약 희랍적 의미에서 덕이 기능의 실현이라면, 각각의 영혼에 대응하는 덕이 있을 것이요, 이 세 영혼으로 구성된 인간 그 자체에 요구되는 덕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선한 삶을 위해서 요구되는 덕은 네 가지가 될 것이다.  네 가지의 덕은 다음과 같다.
절제는 인간의 동물적 측면에 관계한다.  그것은 인간의 욕정적 측면의 고유한 기능이다  이 기능에 요구되는 덕은 육체의 욕구가 이성적 요소에 의해서 부과된 요구와 조절에 따라서 충족될 때 나타난다.  욕정은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영혼의 다른 부분에 속하는 기능들을 탈취하지 않는 한에서만 선하다.
용기는 인간의 기개적 부분에 관계하는 덕이다.  인간의 기개적 부분은 인간의 활동에 관심과 추진력과 의욕을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기개 또한 욕정과 같이 자신에 주어진 활동을 잘 수행하려면 이성적 부분에 의해서 지도받고 통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지혜는 인간의 이성적 부분에 해당하는 덕이다.  이 부분은 앞의 두 부분을 통제하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이런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선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는 것이 이 부분에 요구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인간과 우주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포함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획득되었을 때 어떤 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의는 이들 세 부분들의 기능이 조화를 이룸으로써 도달될 수 있는 덕이다.  정의가 일차적으로는 한 개인과 그들 동료간의 관계와 연결을 맺는 사회적 덕임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정의로운 사회 뿐 아니라 정의로운 개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개인이 자신의 욕정이나 기개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면 그는 정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국가는 무지의 대중들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면 정의로운 국가가 될 수 없다.
하나 주의할 것은 플라톤에 있어서 선과 행복이 상관개념이라 하더라도 그는 쾌락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 있어서 어떤 개인의 행복의 양이 그 개인의 선한 생활을 측정하는 평가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의 일원으로서만 최고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안녕에 기여할 수 있음으로써만 보다 훌륭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정치철학

플라톤에 있어서 한 개인이 최고의 훌륭한 삶을 사는 일이 한 사회 혹은 국가의 일원으로서만 가능하다면, 그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는 국가를 ‘큰 글씨로 쓰여진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은 인간의 구조와 국가의 구조가 본질적으로 같으며 다만 그 크기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인 속에서 나타나는 세부분들이 국가내에서 좀더 큰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부분의 영혼이 개인에 속하듯이 그것에 대응하는 세부분의 계급이 한 국가에 속해 있다.  영혼의 각 부분에 어떤 기능이 고유해 있듯이 각 계급은 자신들의 독특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한 국가에서 요구되는 세 부류의 계급은 통치자 계급, 수호자 계급, 생산자 계급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이 어떤 계급에 속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계급에 속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그 계급에 속해 있다는 것 자체가 불만의 요소로 등장할 수도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플라톤은 여러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개인이 속해야 할 계급의 결정은 세습, 경제적 지위, 사회적 인기 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 부여되어 있는 특별한 능력에 의해서 결정된다.  개인의 이러한 능력은 국가의 감독하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체계에 의해서 드러난다.
한 국가를 통치하기에 적절한 사람을 선택하는 일은 교육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다.  철학자가 왕(혹은 통치자) 이어야 하고, 왕이 곧 철학자이어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확신이었다.  이것은 한 국가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에 의해서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통치자의 교육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 요구되는 것보다도 더 긴 시간의 교육과 엄격한 훈련을 요구한다.  지적이고 도덕적인 위업에 요구되는 높은 기준에 적절한 사람만이 통치자계급이 될 수 있다.  교육과정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서 자격이 부여된 사람은 자동적으로 국가의 통치자가 되는 것이다.
통치자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국가의 이익에 봉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개인이익을 위해 권력이 사용되지 않도록 예방조치가 있어야만 하겠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플라톤은 통치자의 공산주의 체제를 요청했다.  그들에게는 사유재산이 허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가족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들의 개인적인 이익에 봉사하려는 자격을 박탈함으로써 그들은 국가의 복지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물론 통치자가 어린아이를 가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린아이들은 부모를 알 수 없고 부모들은 자신들의 아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장치를 만들뿐이다.  통치자의 아이들은 국가에 귀속될 것이며 공공비용으로 양육되고 교육받는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는 생산자계급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생산자계급에는 가족과 사유재산을 가지는 일이 허용된다.
지혜를 가진 사람 즉 철학자가 통치자계급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나머지 계급들에게도 일정한 덕이 요구된다.  욕망의 요소를 경험하는 생산자계급에게 요구되는 덕은 절제의 덕이다.  그러나 절제는 낮은 계급이 높은 계급의 지배를 승인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사실 절제는 생산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계급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최하의 계급인 생산자 계급은 통치자와 수호자 두 계급에 복종해야 하는 관계로 절제는 특히 생산자 계급에 관계를 맺게 된다.  국가를 수호해야 하는 계급들에게 요구되는 덕은 용기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용기란 두려워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생산자 계급보다 더 많은 교육이 요구되는 것이다.  만약 생산자나 수호자가 자신들의 직업에 종사하기를 원하지 않고 보다 높은 계급으로 상승하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그들에게 부여된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된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도 월권은 용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국가의 덕 즉 정의의 덕이 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궁극적으로 표방한 덕은 정의의 덕이었다.  이 정의의 덕은 다른 여러 덕들이 존재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다른 덕보다 높은 데에 위치한다.  이 덕이 없으면 다른 덕이 있을 필요가 없으며, 다른 덕들이 모여서 정의의 덕을 이루는 것이다.  즉 정의의 덕은 절제와 용기와 지혜의 조화에서부터 생기는 것이다.  개인이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서 혹은 정의로와지기 위해서 세 가지 덕이 필요한 것처럼, 한 국가가 정의로와지기 위해서 세 계급간의 조화가 필요하다.  따라서 개인의 욕정이나 기개가 이성의 지배를 따르지 않을 경우 훌륭한 삶이 깨어지듯이, 생산자나 수호자가 통치자에 따르지 않고 통치자의 계급을 넘볼 경우 플라톤이 지향한 이상국가는 깨어져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이것이 생산자계급이나 수호자계급에게 전혀 지혜의 덕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자계급이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만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통치자계급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고, 수호자계급이 지혜를 가져야만 무엇이 참된 용기인지를 알게 된다.  다만 통치자계급에 요구되는 지혜는 선의 이데아에 대한 가능한 가까운 지식일 뿐이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제시한 이론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사회를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플라톤은 자신이 제시한 유형의 국가관을 세우고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요구된다는 것을 의식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법률」에서 그의 이론을 수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의 기본은 「국가론」에 있다.  그자신 그가 서술했던 그런 국가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거의 존재할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그러한 국가는 하나의 이상국가로서 매우 큰 중요성을 지닌다.


4.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384 B.C.에 트라키아의 북부해변에 있는 스티기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마케도니아 왕인 아민타스 2세의 주치의였다.  아마 18세쯤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서 교육을 받을 목적으로 아테네로 갔다.  그는 약 18년 동안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이 학교에 남아 있었다.
아카데메이아의 새로운 지도자에 실망을 느낀 나머지 아테네를 떠나서 소아시아와 레스보스 섬에서 몇년간을 보냈다.  이 동안에 그는 먼저 온 아카데메이아 출신의 학도들과 교류했으며, 초기 저서 중 몇몇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의 초청에 응해서 알렉산더 왕자의 개인교수가 되었다.  여기서 삼년 동안 알렉산더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필립 왕이 암살당하고 알렉산더가 왕위를 계승한 다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돌아왔고, 리케이온이라는 자신의 학교를 세웠다.  아테네 시는 마케도니아의 통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알렉산더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매우 기뻐했다.  아테네의 많은 지도급 인사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의 교분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이때 그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서 아테네를 떠났으며, 칼키스에 은둔했다가 그곳에서 일년 뒤 322 B.C.에 죽었다.

1) 형이상학

(1) 제1 철학
형이상학은 존재 그 자체의 본성을 다루기 때문에 제1철학이라고 불린다.  과학적 탐구들은 특수한 사물들의 존재나 그런 사물의 부류(部類)의 존재를 다루는 반면, 제1철학은 사물일반 혹은 존재자 그 자체의 보편적이고도 궁극적 근거를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또한 동시에 형이상학이 제1철학이라고 불려지는 까닭은 특수한 과학들이 형이상학의 원리들을 전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형이상학의 원리를 근거로 해서만 그 과학들의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원리들은 일체의 다른 학문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 혹은 근거의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제1철학이 존재하는 것 그자체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했을 때 ‘존재’라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다.  즉 여러가지 존재양태가 있다.  말·소 등의 ‘실체’, ‘푸르다’·‘달다’와 같은 ‘실체의 속성’, 건축이나 살인 등의 행위처럼 실체를 산출하거나 파괴하는 과정 등은 각각 다른 존재양태를 가진다.  제1철학은 이 모든 존재양태의 일반적 성격에 관심을 가지지만 특히 실체에 속하는 존재양태에 관심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것이 모든 존재양태 중 가장 일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철학의 중심문제는 실체개념을 분석하고 실체존재의 원인들을 보여주는 일이다.

(2) 형상과 질료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어려움은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이데아와 감각계에 존재하는 질료가 어떤 식으로 결합되는가 하는 문제를 만족스럽게 설명하는 일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어떤 무규정적인 질료 속에 이데아가 현현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사물이 존재하게 된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존재를 ‘개’라고 부르고 ‘사과’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사과의 이데아가 아니라 개의 이데아가 어떤 무규정적인 질료 속에 현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데아는 분명히 2중적으로 사용된다.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이데아와 개별물 속에 현현하는 이데아 바로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독립적 실재로 보는 것은 필요없는 중복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 남는 것은 개별적 사물이며 이는 실체라 불린다.  그렇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이데아 혹은 형상이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그에 의하면 개별물로서의 실체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에 의해서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과학자는 ‘말’과‘소’의 구성조직이 같다고 말한다.  가죽, 뼈, 피, 살 등등 구성조직에 관해서만 말한다면 소와 말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은 소가 아니고 소는 말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이 양자를 구별한다.  그래서 우리는 말과 소의 구성조직이 아닌 다른 요소가 이러한 구별을 가능케 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이런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자 속에서 두 가지 요소를 구별했다.  하나는 그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이고 다른 하나는 구조적인 형성 혹은 배열법칙이다.  전자는 소와 말의 경우에서처럼 동일할 수도 있지만, 후자 때문에 소와 말이 구별된다.  개별적 사물 속에서 이 두 요소는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적 사물 속에 두 측면 중 전자를 질료(hyle), 후자를 형상(eidos)이라 부른다.  그리하여 개별자는 일정한 구조원리 즉 형상에 따라서 조직화된 질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의 분석을, 개별적 실체의 범위를 넘어서서 유추의 방법에 의해서 우리가 비교적 무규정적인 ‘그무엇’과 그것에 규정을 부여하는 배열법칙을 구별할 수 있는 모든 것에 확장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가 어린아이에 비해 비교적 고정화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어른에 대해 고찰한다면, 이러한 성격은 가공화되지 않은 성벽으로부터 형성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고난 성벽을 성격이 만들어지는 재료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교육이란 어른이 좋은 국가의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서 요구되는 형상을 이러한 질료에 정확하게 각인시키는 훈련체계를 고안하는 일이다.  사람의 성격은 실체가 아니므로 방금 설명했던 것은 실체의 범주를 넘어서서 질료와 형상의 개념을 확장한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질료란 물질과 혼동되어서는 안 되고, 구조적 법칙 혹은 형상에 의해서 보다 완전한 규정을 받아들이는 상대적으로 무규정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질료와 형상이 엄격한 상관관계에 놓여 있음을 보게 된다.  질료란 그것에 그 이상의 규정을 부여하는 형상과 비교해서만 질료라 불린다.  형상이란 개별물로 하여금 그것의 완전한 성격을 획득토록하는 마지막 규정을 의미하고 질료는 이 마지막 규정을 아직 받아들여야 할 어떤 것이다.  그리하여 구리공의 경우에 구형의 모습은 그것의 형상이고, 질료는 그것의 재료이다.  인간의 육체의 경우 질료는 여러가지의 조직, 근육, 뼈, 살 등등이다.  그러나 구리는 원소가 아니라 원소들의 특수한 결합이며, 이러한 점은 보다 복잡한 생물체의 조직에도 해당된다.  그리하여 공이나 생물체에 비교했을 때 질료인 바의 것은 그 질료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이미 형상에 의해서 규정된 질료인 것이다.  소위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 즉 물, 공기, 흙, 불이 모든 합성체의 질료이다.  그리고 그런 합성체의 형상은 그것의 특수한 구성법칙이다.  이 점은 좀더 복잡한 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생물체의 조직에도 타당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아갈 경우 결국 모든 개별적 사물의 궁극적 질료는 우주전체에 걸쳐서 동일하며 어떠한 일정한 구조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질료 즉 순수질료는 결코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순수질료는 우리의 사고의 산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난점을 피하고 있다.  실제로 질료가 발견되는 가장 조잡한 형상은 4원소이다.  그러나 이론적인 측면에서만 볼 때 이들 원소보다도 더 궁극적인 질료가 있을 것이다.

(3) 가능태와 현실태
지금까지 우리는 개별적 사물을 정적으로 분석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동일한 것을, 만듦과 성장의 과정에 대해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역동적으로 고찰할 수 있다.  이러한 성장과 만듦의 과정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 된다.  그래서 질료와 형상의 대비가 가능태와 현실태의 대비로 전환된다.  이러한 대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쉽게 파악된다.  예컨대 식물의 싹이 주어졌을 때 그것이 어떤 식물의 것인지를 확실하게 알기는 힘들다.  그러나 구별할 수 없는 싹 중 하나는 참나무가 되고 다른 하나는 느릅나무가 된다.  우리가 그 두 개의 싹을 아무리 구별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이들은 자신 안에 상이한 잠재적 생장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주어진 싹에 대해서 “이것이 현실적으로는 참 나무가 아니라 하더라고, 가능적으로는 참나무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그 싹이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제때에 참나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어떤 방해를 받더라도 그것은 느릅나무나 너도밤나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변화의 과정이란 가능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토리는 현실적인 참나무가 되고, 아기는 현실적으로 어른이 되며, 구리는 현실적 그릇으로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질료와 형상에 대해, 질료는 지속적이며 바탕이 되는 기체이며, 이런 기체 속에서 형상의 발전이 일어난다고 혹은 개별자는 형상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규정될 때 현실태이고 발전되지 않은 질료는 그 현실태의 가능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실체들의 현실상태와 이들 실체가 유리한 사정만 마련되었을 경우 도달하게 되었을 보다 완전한 실재와는 다르다.  이 완전한 실재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전태(entelechy)라고 부른다.  도토리의 완전태는 참나무가 되는데 있고, 소년의 완전태는 성인이 되는 것이며, 성인의 완전태는 행복에 있다.  따라서 완전태란 어떤 사물이 가지고 있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4) 4원인설
형상과 질료의 대립, 가능태와 현실태의 대립으로 설명되던 세계의 개념은 소위 4원인설에 의해서 보다 완벽한 설명을 얻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이론은 그리스철학의 중심문제가 되었던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책이라고 본다.  ‘현재 그러그러한 상태로 사물이 존재하게 된 원인을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의 4가지 측면에서 물어 볼 수 있다고 한다.  i) 그것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ii) 그것은 무엇인가?  iii) 그것은 무엇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iv) 그것은 어떤 목적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이러한 질문은 사람이 만든 물건에 대해서는 i) 질료인 ii) 형상인 iii) 작용인 iv) 목적인에 대한 질문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i) 대리석으로 ii) 입상(入像) iii) 조각에 의해 iv) 장식을 위해 라고 대답할 수 있다.  또한 자연 내 유기체의 발전에 대해서는 i) 참나무의 잠재적 가능성이었던 싹 ii) 이러한 싹을 참나무로 되게 하는 일정한 성장법칙 iii) 참나무의 싹은 어느 곳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어버이 참나무에서 성장했다.  어버이 참나무와 도토리를 배태하는 어버이나무의 활동이 바로 현 참나무의 작용인이다.  vi) 성장의 전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가 있으며, 이 단계에서는 새로운 도토리를 배태하고 있는 장성한 참나무가 존재한다.  이 단계가 과정의 마지막(목적)이다.

(5) 부동의 원동자(不動의 原動者)
자연의 모든 사물들은 4원인, 가능태와 현실태로 설명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운동의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가능태와 현실태에 관한 그의 설명에 이런 점은 특히 드러난다.  만일 만물이 변화와 생성소멸의 과정 속에 있다면 만물은 가능태를 함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현실태가 있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나아간다면 순수한 현실태로서의 최고존재의 개념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형상의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순수형상의 개념이 될 것이다.  이러한 순수형상 혹은 순수한 현실태는 어떠한 가능태도 포함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운동 혹은 변화는 가능태가 현실태로 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태를 전혀 포함하지 않는 현실태는 전혀 운동하는 존재가 아닐 것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원동자라는 개념을 생각해 내었던 것이다.
부동의 원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신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 의미에서의 창조자는 아니었다.  즉 인간의 활동들을 알고 배려하는 그런 신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운동이나 변화의 발생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것이 가능적인 것에 논리적으로 선행해야 한다.  변화는 최종적으로 가능태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현실태를 전제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부동의 원동자는 힘을 발휘한다는 의미에서의 작용인도 의지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가능태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동의 원동자는 세계에 대해 사유하거나 세계에 목적을 부여하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운동을 설명해 주려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어떤 종류의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은 개개의 완성태를 실현하려는 노력으로 가득 차 있다.  만물은 각기 자신들의 가능성들의 실현을 지향한다.  그 ‘목적’은 완전한 나무가 되는 것일 수도 있고, 완전한 선한 인간이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목적에 대한 이러한 지향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세계질서의 과정이며, 이러한 과정 및 운동은 영원한 것이며, 이러한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러한 운동의 궁극원리는 어떤 가능태도 내포하지 않은 현실태, 어떠한 질료도 내포하지 않는 형상 즉 부동의 원동자이다.
부동의 원동자는 매력의 힘에 의해서만 우주에 작용하는 최고의 실재이다.  비유컨대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됨으로써만 즉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매력에 의해서만 사랑하는 사람을 움직이다.  그것은 전 존재자가 그것을 향해 움직이는 최종목적이다.  이러한 존재자는 때때로 제1동자(第一動者), 제1원인, 형상 중의 형상이라고도 불린다.

2) 윤 리 학

플라톤에서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도 윤리학에 관한 주제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윤리학이 난해하고 복잡한 주제이고 따라서 성숙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적절한 주제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  윤리학에 관한 그의 입장이 가장 잘 드러난 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이 저서가 윤리학사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큰 것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현대 윤리학자의 견해 사이에 많은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 주제에 관해서 쓰여졌던 가장 중요한 저서 중 하나라고 간주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인간을 포함하여 자연 속에 존재하는 만물에게는 성취하려는 목적이나 수행하려는 기능이 존재한다는 그의 신념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처럼 만물이 목적으로 삼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선(goodness)이라고 부른다.  자연의 모든 변화 뿐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는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했는데, 인간이 지향하는 목적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 도구적 목적으로서, 이는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행해지며, 다른 하나는 본래적 목적으로서, 이는 그것 자체를 위해 수행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행위들은 어떤 목적을 지향하지만, 그것들이 완성되어 있을 때는 그것은 결국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예컨대 목공의 목적은 책상을 만드는 것이지만, 이 책상은 어떤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책상이 만들어지면 목공의 기능은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목공과 그에 의해서 만들어진 책상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아니라 도구적인 것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선’이라는 개념은 어떤 사물이 가지고 있는 기능과 연결된다.  예컨대 어떤 망치가 선하다고(좋다고)하는 것은 사람들이 망치에 기대하는 수행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은 바로 기능의 실현이며, 이 기능의 실현은 그 자체 목적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윤리학은 선한 인간의 문제에 관계하는 학문인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선한 인간이란 다름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윤리학의 목적은 인간의 기능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으로 전환된다.  우리의 신체는 각각 어떤 기능을 수행한다.  눈은 보는 기능을, 귀는 듣는 기능을 수행한다.  또한 직업인으로서의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독특한 기능을 실현시키려 한다.  그렇다면 목공이거나 교사이거나 요리사이거나 선장이거나에 관계없이 그들이 인간으로서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은 없는 것인가?  이런 물음에 대답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성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을 크게 세 가지고 나누어진다.  첫째 영양과 생식의 기능, 둘째 감각과 욕망의 기능, 셋째 이성의 기능이다.  이들 중 앞의 두 기능은 비이성적인 것으로서 이성적인 원리에 대항하거나 방해한다.  그런데 비이성적인 것 중 첫 번째 것은 식물로 가지고 있는 기능이요, 둘째 것은 동물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고유한 기능은 이성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인간의 선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의 기능을 수행하는 행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셈이 된다.
바로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행동들이 목적과 수단의 고리에 의해서 연결된다고 진술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자연의 목적체계들을 규명하는 형이상학이 궁극적으로 다루는 것이 제1형상이라면, 윤리학은 궁극적으로 인생의 궁극목적 즉 최고선을 다루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궁극목적은 자족적이며 최종적인 것이어서 그것은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의해서 도달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야말로 명칭의 관점에서 볼 때 인생의 궁극목적 혹은 최고선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 명예, 여가 등등은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복으로 간주될 만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다른 그 무엇에 도달하기 이한 수단으로서만 추구된다.  최고선은 수단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목적 자체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행복이 실현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는 영혼의 이성적 부분이 비이성적 부분을 통제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영혼의 비이성적 부분으로서의 욕망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것들, 즉 대상들이나 다른 인간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에 따르는 행위 즉 도덕적 행위는 결코 자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덕’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습관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습관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천성이 아니다.  따라서 도덕은 습관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즉 도덕은 올바르게 사유하는 습관, 올바르게 선택하는 습관, 올바르게 행동하는 습관의 발전과 관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도덕적 덕과 지적 덕으로 나눈다.  도덕적 덕은 다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지적인 덕은 목적 자체이다.  후자의 덕은 이들이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되지 않을 때조차도 적극적 가치를 가진다.  예를 들어 보면 절제는 도덕적 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건강한 육체와 마음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미에 대한 인식과 감상은 지적 덕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스스로 가치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중용이론에서 발견된다.  이 이론은 과도와 부족이라는 양 극단 사이의 중간으로 정의되는 도덕적 덕에 관계한다.  예컨대 용기의 덕은 만용과 비겁의 중간이요, 만용과 비겁은 악덕이다.  절약은 인색과 낭비의 중간에 놓여 있는 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방식으로 중용에 관한 긴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중용은 만인에게 동일하지도 않으며 모든 행동에 대한 하나의 중용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각의 중용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각각의 인간에게 상대적이다.  식사의 경우에 있어 성인운동가와 어린 소녀에 알맞은 식사량은 다르다.  그러나 그 양자에 있어서도 적절한 중용이 존재하는 바 그것은 절제이다.  여기서의 양 극단 즉 포식과 절식은 악덕이다.  어쨌든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중용은 산술적 중간이 아니라 가치론적인 의미에서 정점인 일점이다.  이러한 중용의 행위는 환경에 따라 변화할 것이지만, 감정이나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의 구사에 의해서 결정된다.

3) 정 치 학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 즉 사회적 내지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모름지기 스스로의 생을 보존하고 또한 이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타자와의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플라톤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법률과 도덕을 바탕으로 한 선을 지향하는 국가의 시민들로 구성된 윤리적 공동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도 가장 고귀한 인륜의 본래적 형식인 것이다.  따라서 덕에 관해 고찰한다는 것이 윤리학의 예비단계이며 동시에 그 이론적 부분이라고 한다면 국가론은 실천적으로 응용하게 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기존의 국헌을 비판하는 가운데 이상적인 국가체제에 대해서도 논술하고 있다.  역시 관례적 방법에 따라서 각종 헌법을 구별하였던 그는 통치자의 수를 중심으로 하여 군주제는 일인지배로 보았고 귀족주의는 소수지배체제로 보았는가 하면 또한 민주주의는 다수가 지배하는 체제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형태에 맞추어서 그의 변종으로서 나타난 것이 전제정치, 과두정치 및 우민정치이긴 하되, 그는 이들 세 가지 형태 중의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우위를 인정하지 않은 채 다만 헌법이란 해당국가의 국민과 그 시대의 구체적 욕구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점만을 강조하였다.  결국 이렇게 볼 때 대개의 경우는 이상과 같은 제형태를 이상적으로 혼합한 것이 등장하게 되는 바, 그 중에서 특히 귀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양 요소가 혼합되어, 다름아닌 ‘중간계급’이 국체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가장 바람직스럽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함으로써 지속성도 보장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극단성을 배제하는 데도 가장 알맞는 방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스스로 이상국가론을 완성하지 못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도 역시 어디까지나 공간적으로 한정된 그리스 도시국가라는 테두리 속에서 이상 국가를 실현시켜 보려고 한 점에서 플라톤과 같은 견해를 나타냈을 뿐, 그의 염두에는 그 밖의 여하한 상태도 떠오른 것이라곤 없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볼 때 아마도 그는 대제국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려던 바로 그 시대의 징후를 이해하지 못하였음은 물론, 비록 마케도니아 국왕들을 흠모하면서도 역시 은연중에 과거로부터 존속되어 온 그리스적 국가 형태에 연연하였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다른 모든 그리스인의 경우에서와 같이 그로서도 역시 노예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또한 부부생활이나 가정 및 공동체에 대해서도 이를 극히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부부관계와 사유재산을 모두 다 국가에 바쳐야만 한다고 본 플라톤의 요구는 실행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국가를 한낱 개개의 인간으로 구성된 어떤 통일적 체제라고 보는 플라톤의 입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서, 사실에 있어서 국가적인 공동체란 소단위의 공동체로 ‘구분된’ 하나의 전체자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3절  헬레니즘․로마시대의 철학


그리스 철학에 있어서 최고 전성기는 아테네기의 철학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철학의 새로운 전환이 모색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전환은 플라톤, 아리스토델레스를 거쳐서 방대한 체계가 수립되었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은 더 이상 독창적인 철학을 가지지 못하고 종래의 철학을 약간씩 변경시킨, 말하자면 아류의 철학에 불과하다.
이처럼 이 시대의 철학이 그 전 시대에 비해 독창성을 가지지 못하게 된 까닭은 이 시대의 철학이 주로 실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론적인 측면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 이후의 그리스 철학은 실천적인 문제에 궁극적인 관심을 두었지만, 이 경우에는 이런 실천적인 문제를 기초지우기 위한 이론에 대한 심도있는 탐구를 시도하였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은 주로 개인윤리 즉 어떻게 하면 안심입명(安心立命)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더 이상 체계적인 이론이 요구되지 않았고, 다만 안심입명만 구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체계적인 이론 따위는 불필요한 것이고, 다만 자기의 실천에 편리한 이론을 전통 철학 중에서 그때 그때 빌려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이처럼 이 시대의 철학사상이 이런 방향으로 흘러갔던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존해 있을 때,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에 합병되었고, 알렉산더가 죽고 난 다음에 그리스는 종종 전란의 도가니로 화하였다.  그 이후 그리스는 강력한 군사국가인 로마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불행한 정세 하에서 그리고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폴리스의 붕괴로 인해서 나타나는 허무감, 고향상실감 등 때문에 철학자들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철학에 몰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급적 국가적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직 개인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그리스적 전통은 로마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해 갔다.  그래서 로마시대의 철학조차도 그리스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스토아 학파

스토아 학파의 사상은 한 사람, 한 시대의 소산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오랜 시일에 걸쳐서 형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상의 세밀한 점에서는 여러가지 차이가 있으나, 그 근간에 있어서 조류를 같이하는 사상을 통틀어서 스토아 학파의 철학이라고 한다.  이 학파의 창시자는 그리스 사람이 아니고 패니키아 사람으로 짐작되는 키티움의 제논(Zenon of Citium)으로서 그는 기원전 316년경 아테네에 와서 스토아․포이키레(채색한 전당)에 학교를 창설하고, 오랫동안 교수하였다.  스토아 학파란 명칭은 이에 기원한 것이다.  클레안테스(Kleanthes)가 그의 뒤를 이었고, 또 크루싶포스(Khrusippos)에 이르러 아테네 학계에서 군림하게 되었고, 파나이티오스(Panaitios)에 의하여 로마에 전파되었다.  로마에서는 대체로 통속적이고 절충적인 도덕설로 되었는데, 이 시대에 유명했던 스토아 학자로서는 벌률가요 또 정치가이며 폭군 네로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세네카(Seneca), 에피크테토스(Epiktetos), 또 명군 안토니누스(Antoninus, Marcus Aurelius) 황제 등이다.
스토아 학파의 사상은 학설로서도 큰 세력을 폈지만 그 시대의식에도 적합하여 마음의 수양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특히 로마에 전파된 후에는 무(武)를 숭상하는 로마인들의 기풍에 맞아 수도에서 성행되었다.  스토아 학파는 철학․논리․물리․윤리를 구분했다.  그러나 그 중심은 어디까지나 윤리에 있었고, 논리와 물리는 윤리의 기초과목에 해당하였다.
스토아 학파는 사물에 공통되는 보편적 성질을 실재라고 보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그런 보편은 우리 주관이 생각해서 언어로 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식은 감관을 통해 지각함으로써 성립된다는 것이다.  지식은 감각에서 시작하여 이 감각을 통해 성립되는 지각이 후에 남아서 기억이 되고, 기억이 쌓여서 경험이 되고 경험을 바탕으로 추론하여 보편적 관념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지식은 외물의 인상을 통해서 성립되므로 우리의 관념이 진리냐 아니냐 하는 점은 그 관념이 대상과 일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른다.  그런데 이 일치․불일치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참된 관념은 그 관념이 직접 진리임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진리가 스스로 진리임을 나타내고, 다른 것이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님은, 마치 빛이 다른 것에 의해서 비추어지지 않고,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스토아 학파의 형이상학은 유물론이다.  실재하는 모든 것, 인간의 영혼이나 신은 물론이요 사물의 성질 그리고 덕이나 정욕까지도 물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물체는 물질과 힘으로 양분된다.  양분되면서도 하나의 것이다.  물질 그 자체에는 아무런 성질이 없으며, 거기에 힘이 가해져 운동하게 됨으로써 여러가지 성질이 나타나게 된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이 힘의 근원을 헤라클레이토스를 따라 로고스라고 하였고, 또 만물의 근본원소도 불(火)이라고 했다.  이 불이, 곧 신이요 로고스이다.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형이상학은 범신론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즉 로고스요 신인 불의 일원론을 주장했으나 이 불은 일면 물질이면서 다른 면에서는 힘이요, 또한 정신이기 때문에, 불을 근본 원소로 하는 이 우주는 이성적인 것이어서, 거기에는 질서․조화․목적과 미가 있다.  인간의 영혼은 우주의 신화의 일부분을 받은 것으로 인간에서 가장 존귀한 이성은 우주의 이성인 로고스가 깃들어 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이성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성은 또한 이 우주․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다운 생활, 인간의 본성에 맞는 생활은 자연에 순응하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스토아 학파의 모토(motto)는 ‘자연에 순응하여 생활하라’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천리와 인도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덕․부덕의 구별은 외형상으로 나타난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태도에 있다.  정신적 태도가 도리에 어긋남이 없고 이성에 맞으면 덕행은 스스로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덕과 부덕과의 중간 단계는 없다.  인간에는 다만 유덕한 사람(즉 현인)과 부덕한 사람(즉 어리석은 자)이 있을 따름이다.  소크라테스나 알렉산더같은 성현은 모두 덕을 갖추어, 그 행하는 바 모든 일이 도리에 어긋남이 없고, 그 외에는 모두가 어리석은 자들뿐이다.  이러한 엄격주의는 후에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되어 양자의 중간에 정진(精進)하는 계급을 두게 되었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인간이 갖추고 있는 덕성은 선한 것이고 부덕은 악한 것이라 하고 기타 여하한 것에도 선악의 구별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부귀․공명․쾌락․생사 등은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닌 아디아포라(adiaphora), 즉 중립적인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아디아포라적인 것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것이, 곧 부덕의 근원이요, 또 그것이 곧 번뇌이다.  이성에 따른 생활, 즉 유덕한 생활이란 소극적인 면에서 보자면 그러한 번뇌에서부터 해탈된 생활이다.  스토아 학파의 윤리설은 유덕한 생활을 주로 이 소극적인 면에서 보려고 하였다.  수양이란 아디아포라적인 사물에 대해서 완전히 무관심할 수 있는 아파테이아(apatheia)(不動心)를 얻는 데 있다.  이 부동심으로써만 우리는 안심입명(安心立命)할 수가 있는 것이다.  부동심을 존중하고 생사까지도 가벼이 생각함으로, 스토아 철학자들 중에는 의지력에 의해서, 호흡을 멈추어서 자살한 자가 많다고 한다.  이 학파의 창시자 제논과 클레안테스 또 세네카 같은 사람들도 자살하였다.  살아 남아서 아디아포라적인 것에 의해서 지배되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아 이 학파에서는 자살을 시인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윤리사상은 개인주의적 경향에 흘렀으나, 스토아학파만은 도덕의 사회성을 중요시했다.  그들은 가정과 국가에 대한 의무를 중요시하였고, 나아가서는 모든 인간은 이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민족이나 혈통의 구별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곧 이 학파의 세계주의이다.  이리하여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명백하게 박애의 덕을 강조하게 되었다.  또 이 세계주의는 여러 이민족을 통합한 로마대제국의 성립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스토아 학파는 우주의 이법(理法)인 로고스가 곧 신이라고 보아 범신론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우주의 이법인 신의 섭리는 필연적인 것으로, 의지가 있는 인간이나 의지가 없는 기타 만물을 막론하고 이 필연적인 섭리, 다시 말하면 천명에 따라야 한다.  ‘천명을 욕구하는 자는 이를 선도하고, 욕구하지 않는 자는 이를 이끌고 간다’라고 스토아 학파에서는 말한다.  이 말을 자연에 순응해서 생활하라는 그들의 모토(motto)와 견주어 볼 때에 당시와 같은 세태에서도 자연과 천명에 순진스럽게 자신을 내맡기려는 낙천적인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자포자기하는 태도는 아니다.  그것은 부동심을 말하는 그들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스토아 학파는 안심입명을 구한 것은 당시의 세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되며, 그러면서도 자력을 강조하기를 잊지 않은 것은 로마적 기운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2.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와 동시대에 걸쳐 있으며, 또 동일한 문제를 대하면서도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 선 것이 에피쿠로스 학파이다.  이 학파의 개조는 에피쿠로스(Epikuros: 341~270 B.C.)로서, 그는 사모아섬에서 출생하여 후에 아테네에 와서 그곳에서 교수하였다.  그 인물이 온후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또 그의 철학은 실용을 위주로 하고, 교수방법이 학술적 수련이 없는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부녀자들까지도 그 문하에 모여 들었다고 한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스토아 학파와는 달리, 그 학설이 창시자에 의하여 완성되고, 그의 학도들은 다만 창시자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그쳤다.  로마의 유명한 시인 루크레티우스(Lucretius 96~55 B.C.)도 이 학파에 속하였고, 그의 시는 당시 로마 사회를 크게 계몽시켰다.
에피쿠로스는 철학을 개인의 쾌락, 즉 행복을 찾는 수단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처세술이라는 것이다.  그는 학문이건 도덕이건 모두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쾌락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했다.  쾌락을 지상으로 삼는 그는 쾌락이란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적극적인 쾌락이 있기는 하지만, 쾌락이 생애의 지상과업이 될 때에는 다소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현명한 쾌락주의자는 무작정 모든 쾌락을 취하여 도리어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고통에 빠지지 않고 지각에 의해서 쾌락과 고통을 비교·선택하여, 영속적인 쾌락을 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쾌락은 일시적인 환락에 취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욕망을 끊음으로써 불만이 없는 생활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쾌락주의자의 궁극적 목적은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적극적 쾌락을 취하는 것보다, 오히려 마음이 안정된 무욕의 상태에 있다고 하겠다.  마음의 이러한 상태를 에피쿠로스는 아타락시아(ataraxia․平靜心)라고 불렀다.
이와같이 진정한 쾌락은 오로지 내면적인 마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쾌락은 다만 현재만 있을 따름이므로 일시적인 것이나, 정신적 쾌락에는 과거와 미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강도(强度) 또한 육체적 쾌락보다 강하다.  또 육체적 고통은 정신력으로써 억압할 수도 있다.  에피쿠로스는 ‘나에게 빵과 물만 있다면 나의 행복은 신의 그것과 겨누리라’고 말했다.  현자는 아타락시아를 얻기 위해서 외물에 대해 욕망을 품지 않고 따라서 외물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한 점은 스토아 학파의 유덕한 현인과 마찬가지라 하겠으나,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철저한 개인주의여서, 스토아 학파에서와 같은 의무감이나 책임감 또 보편적 법칙에 대한 존중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에피쿠로스는 학문이나 도덕할 것 없이 개인의 쾌락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한, 무용의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자연계에 대한 연구는 헛된 망상과 미신을 타파함으로써 헛된 공포와 번뇌를 없애주는 한에 있어서만 유용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에서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물리설 즉 원자론이 그러한 목적에 적합한 것으로 보아 이를 채택하였다.  존재는 오직 허공(공간)과 그 속에서 운동하는 원자뿐이고 만물은 예외없이 원자가 뭉쳤다 흩어졌다 하는 데 따라서 생성·소멸되기 때문에 세계에는 불가사의한 요괴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에피쿠로스 학파가 원자론을 취함으로써 철저한 기계론을 주장한 점은 스토아 학파가 유물론을 주장하면서도 정신적 원리를 허용하여 목적론을 주장한 것과는 반대된다.
인간의 영혼은 매끈매끈하고 작아서 움직이기 쉬운 불의 원자로 되어 있는 뜨거운 숨결(호흡)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이란 이 원자가 흩어져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가 죽은 뒤에도 영혼은 남아 내세에서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후에 어떤 벌을 받을까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죽음과 전연 관계가 없다.  우리는 죽음과 부딪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음은 없는 것이며, 또 죽음이 올 때에는 이미 우리는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에서는 신이 있기는 하나, 그 신은 ‘신주단지 뚜껑을 떼어서 멀리 골짜기 아래 내던지고, 그 술통 옆에 잔뜩 누워 있어, 인간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고, 광택있는 세계에 둘러싸인 신의 황금의 궁전 위에는 잔 비늘구름이 떠 있다’고 했고, 또 신은 창조주가 아니고, 인간과 같은 자연의 소산으로서 지상의 행복을 누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를 예배할 필요는 전연 없다고 했다.
지각은 외물의 형상(eidola)이 감관을 통해 들어와 영혼의 원자에 부딪쳐 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일어난다.  상상 또한 지각과 마찬가지의 것으로 외물과 관계없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기억은 전에 일어났던 영혼원자의 운동이 다시 일어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또 관념은 감각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기억에 의해서 축적된 것을 우리가 이름을 붙여 부르곤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리의 표준은 감각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감각적 경험론은 스토아 학파의 그것보다 단순하고 명료하다.
에피쿠로스는 의지란 영혼원자의 운동이 신체에 전달될 때에 일어난다고 했다.  이렇듯 에피쿠로스는 모든 심리작용을 유물론적으로 설명하였으나, 의지의 자유만은 철저히 주장했다.  이것은 에피쿠로스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약간 수정해서 원자들이 허공 속에서 수직으로 하락운동을 할 때에 그 속도에는 차이가 없을 터인즉 원자간에는 충돌이 일어날 리 없다고 보아, 충돌이 일어나기 위해서 각 원자는 제멋대로 조금씩 가속할 수 있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점과 관련이 있다.


3. 회의 학파

퀴니코스 학파의 사상이 스토아 학파에 의해 재생되고, 퀴레네 학파의 사상이 에피쿠로스 학파에 의하여 재생되었음은 이미 본 바와 같거니와, 퀴니코스, 퀴레네 양 학파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소피스트의 사상은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회의학파에 의해서 재생되었다.  이 시대의 회의학파의 거두는 퓌론(Pyrrhon, 360~270 B.C.)이다.  그는 저서가 없으므로 그의 수제자 티몬(Timon, 320~230 B.C.)의 철학자를 비웃는 「실롤리」(Silloi)라는 시를 통하여 퓌론의 사상을 알 수 있다.
퓌론의 회의론은 앞서 본 프로타고라스의 그것과 같이, 그 핵심은 우리의 지각이 외물의 진상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있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승인하지 않을 수 없는 진리, 즉 보편타당한 진리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여하한 사물에 대해서도 이렇다 저렇다라고 단언할 수 없고, 다만 우리에게는 이러이러하게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전제 밑에서 그들은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행복의 추구는 스토아 학파나 에피쿠로스 학파 또 이 회의학파를 막론하고, 이 시대 철학에 공통되는 중심 과제였다.  그런데 회의학파에서는
① 사물의 진리
② 사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
③ 또 그 태도의 결과
를 명백히 알아야만 행복할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물의 진상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사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서는 사물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판단을 내리지 않는 태도를 취함이 옳을 것임은 물론이다.  즉 일체의 판단을 중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판단을 중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소득은 무엇인가?  우리는 사물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내리게 될 때 그 사물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하여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게 한다.  이와는 달리 일체의 판단을 중지해 버리면 모든 사물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가 있다.  이때 모든 사물은 스토아 학파에서 말하는 아디아포라적인 것이 되어 에피쿠로스 학파의 소위 아타락시아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판단중지를 주장한 퓌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그가 젊었을 때 어느 날 오후에 산책을 하다가 자기 선생님이 개천 속에 거꾸로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더라는 것이다.  그 광경을 보자 퓌론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 노인을 구출해 주는 것이 좋을지 어떨지를 판단할 수가 없다고 생각이 되어, 그냥 지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 꼴을 본 사람들이 퓌론의 냉혹한 처사를 분개하면서 달려와 그 선생을 구해 냈더니, 선생은 퓌론이 자기의 가르침을 충실하여 행동에까지 나타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이러한 퓌론의 회의설이 카르네아데스(Karneades)에 이르러서는 신이나 진리에 관해서 확정적인 이론을 내세워 논쟁을 일삼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무용한 일이나 실제로 생존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아마 그럴 것이다 하는 정도의 판단 즉 개연적 판단은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또 아이네시데모스(Ainesidemos)는 모든 판단은 물론, 자기 자신은 무지하다는 판단조차도 중지하되 세상을 살아가는 데 행동이 없을 수 없으니 그런 경우에는 관습에 따라 또 자기의 생각과 욕망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위 「회의십개 조목」이라고 해서 퓌론의 회의설을 10개 조목으로 요약해 발표했다고 하는데, 그 10개 조목이 후에 5개 조목으로 다시 요약되었다.  그 요점은 다음 세 가지에 귀착한다.  즉
① 지각이란 상대적인 것이며.
② 사람에 따라서 그 의견이 다르고
③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는 논증은 불가능하다는 데 귀착된다.


4. 알렉산드리아 학파

Alexandria 학파의 대표적 철학자는 필론(Philon 25 B.C.~50 A.D.)이다.  필론은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유대인으로서 플라톤과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아, 유대교의 경신사상을 중심으로 일종의 헬레니즘적 경건을 강조한 사람이다.
필론철학의 중심사상은 신이다.  그의 신은 세계의 창조주요, 생명의 원인으로서 절대적이요, 초월적인 존재이니, 우리는 이 절대자․초월자에 관해서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는 있으나, 신이 어떻다는 것은 알 수도 또 형용할 수도 없다.  이 신이 곧 여호와 신이다.  그런데 여호와는 세계를 초월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이 세계 만물의 근원이다.  그러면 세계를 초월하고 있는 신이 어떻게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필론은 매개자를 내세워, 그것은 곧 신적인 힘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신적인 힘 전체를 자기 안에서 통일시키는 것이 로고스다.  그런즉 영적인 신과 물질세계와의 매개자는 로고스인 것이다.  필론은 로고스를 신의 대표자, 신의 사자, 신의 지혜, 창조의 기관, 신의 장자, 또는 제2의 신이라고 불렀다.  지극히 선하고 초월자인 신은 로고스를 매개로 하여, 이 세계를 창조하였는데 그러면 아름다운 신이 창조한 세계에 추악한 것이 있음은 어찌된 일인가?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필론은 신과 대립되는 물질을 내세웠다.  신은 로고스를 통해 혼탁한 상태에 있던 물질로서 천지만물을 창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에는 시초는 있으나 종말은 없다.  그리고 이 세계에 악하고 추한 것이 있음은 신에게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물질에서 온 것이다.  필론은 이 세계를 신과 물질이란 두 가지 원리에 의해서 설명하여 이원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신과 물질의 대립은 인간에게서는 영과 육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영혼은 타락하여 육체에 깃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다.  육체를 사랑하는 것이 곧 죄악이요, 인간은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죄악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육신의 욕망을 떠나서 정결한 생활을 하는 것이 인간의 이성인데 그것을 위해서는 신에 대한 신앙이 필요하다.  신앙은 지혜를 낳고 지혜는 덕을 낳는 것이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상태는 육신을 초월하여 영혼이 직접 신과 합일하는 데 있다.  우리가 진리를 인식하고 덕을 닦고 정결한 생활을 하는 것도 좋은 일이긴 하나 그 모두가 이 상태에 비하면 그 전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필론은 이렇게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신과 접하는 것을 엑스타시스(Ekstasis)라고 불렀다.
5. 신플라톤 학파

이 학파는 그리스 철학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종교적 철학의 체계를 세우려고 했다.  인도사상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그리스 철학은 종교와는 대립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철학의 융성과 종교의 쇠퇴는 일치했다.  신플라톤 학파는 철학적 기반에 선 종교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플로티노스(Plotinos, 204~269 A.D.)는 신플라톤 학파의 대표자이다.  그는 애급에서 출생하여 학문과 종교에 관해 연구하기 위하여 동방에서 유학하고 후에 로마에 자리잡고 교육에 종사했다.  그는 플라톤을 매우 존경하여 그의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철학은 플라톤과 또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학파의 영향도 받아 마치 그리스 철학 전부를 종합한 것 같은 감이 있다.  박학과 독창을 겸비한 점에 있어서 플로티노스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다음 간다고 한다.
플로티노스는 필론의 문제를 계승하여 만물을 초월한 신으로부터 어떻게 이 세계가 생성되는가 하는 점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또 신피타고라스 학파나 필론에게서 볼 수 있는 이원론을 피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신을 태원(太原) 또는 일자(一者)라고 불렀다.  이 일자로부터 만물이 어떻게 생성되는가를 구명하는 동시에 또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이 일자에게로 되돌아 가서 그와 합일함으로써 최고로 행복한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그의 철학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유출설(流出說): 만물의 태원인 신, 즉 일자는 무한하고 형태가 없고 여하한 성질도 붙일 수 없어 모든 대립과 차별을 초월한 유일 절대의 실존이다.  세계 만물은 마치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터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오듯, 또 영원히 빛을 발하는 태양에서 광선이 흘러나오듯이 일자로부터 유출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존재와 자기충족의 창조자인’ 일자가 감소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일자는 변함없이 일자로서 원만하고 증감이 없고 늘 충족한 채로 있는 것이다.
일자로부터의 유출은 3단계로 나누어진다.  일자로부터 제일 먼저 유출되는 것이 누스(정신․사유)이다.  정신이요 사유인 이 누스(Nous)에서 벌써 주관과 객관 즉 사유와 존재로 나누어지는데 그러면서도 양자는 하나로서 누스의 사유대상은 그 자신과 또 그의 근원인 일자, 또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계이다.
다음에 일자로부터 유출되는 것은 프쉬케(Psyche, 영혼)이다.  플로티노스는 이 프쉬케를 상위의 프쉬케와 하위의 프쉬케로 나누었는데, 상위의 것은 자각이 있고 이성이 있어 활동하는 것이고, 하위의 것은 형체적인 것과 결부되어 그것에 속박되어 있다.  그는 또한 우주 전체에 편재하고 있는 프쉬케가 있다고 보아, 이것을 「세계영혼」이라고 불렀다.  하위의 세계영혼 즉 형체와 결부된 세계영혼이 곧 자연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상위의 영혼은 육체와 결부되지 않은 불멸의 것이고, 하위의 것은 육체의 생기(生氣)이다.
누스와 프쉬케까지는 아직 형이상학적인 것이나, 다음 마지막 단계로 유출되는 것은 형이하학적인 물질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플로티노스는 이원론을 피하고자 하여 물질은 유출의 극한으로서 소극적인 비실재라고 보고 일자와 대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마치 빛이 태양으로부터 유출되어 점차 멀어지는 면은 어두워가다가 드디어는 빛과 반사되는 암흑으로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렇게 플로티노스는 일자로부터 유출에 정연한 단계를 둠으로써 일원론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윤리설: 악의 근원은 물질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물질, 즉 육체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 합일되는 상태, 즉 엑스타시스(Ekstasis)에 이르는 것이 최고 목표이다.  플로티노스는 이 엑스타시스에 이르는 4단계를 구별했다.  즉 ① 5관의 지각 ② 논리적 사고 ③ 미에 대한 사랑 ④ 미에 나타난 이상을 추구하여 형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단계이다.  그러므로 플로티노스는 모든 문화활동은 영혼의 정결에 기여하여 엑스타시스에 이르게 하는 종교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플로티노스 자신도 여러번 엑스타시스의 경지를 체험했다고 하며 서양 신비주의의 시조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플로티노스는 물질이 악의 근원이라고 보기는 하였으나, 그리스인인 그는 물질계 즉 자연계를 전적으로 악한 것으로 보아 넘기지는 않았다.  물질계는 비실재계로서 이상의 실현을 방해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속에 이상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자연은 아름답다는 것이다.  즉 그는 미란 이상이 감각의 대상인 자연계에 깃들어 있음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리하여 플로티노스는 세계의 불완전성과 추악성을 역설하면서도 자연미와 예술미를 깊이 이해한 최초의 사상가로 지목되고 그의 미학이론은 르네상스 예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제1부 서양철학
제2장 중세철학  

제2장  중세철학


제1절  개   요


인간 영혼의 정화와 개인의 안심입명에 대한 희구는 신플라톤 학파와 같은 종교적 철학으로 나타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자의 지성적 종교이었다.  그러나 동방의 히브리민족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죄지은 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주만물을 창조한 신에 의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서, 민중과 사랑의 종교이었다.  중세철학은 바로 이 그리스도교적 철학이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이성적 인간이 어떻게 이해하고 옹호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에서 싹트고 전개된 것이 곧 중세철학이다.
예수가 설파한 종교는 전통적인 유대교 위에 성립하는 것이었다.  즉 그는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을 이어 받아, 스스로 신으로부터 파견된 메시아(구세주․그리스도)라는 확신에서, 하늘나라가 가까워져 오고 있음을 알리고, 사람들에게 회개하여 신의 뜻에 따를 것을 권고했던 것이다.  그것은 원래 인간 이성에 의해 산출된 체계화된 철학도 아니고, 단지 단순히 유대인의 마음 속 깊이 놓여 있었던 전통적인 종교적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이 유대교의 가르침과 다른 점은, 후자가 율법(특히 모세의 율법)을 신성한 것으로 보고 이것을 중시한 데 대해서, 전자는 이러한 것을 넘어서서 다만 사랑이라는 것을 그의 가르침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율법이란 유대인의 풍속․습관 위에 성립하는 여러가지 법규․의식들이고, 따라서 율법을 중시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유대교를 어디까지나 유대인의 종교로 그치게 하고 결코 다른 민족의 종교로 될 수 없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이러한 외형적인 것들을 배격하고 다만 자기 마음으로부터 신을 사랑하고 또 모든 사람을 사랑할 것을 설파했던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전통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도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종교로 될 수 있는 까닭이 있다.  나아가서,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교에 있어서는 이 율법이 극히 복잡했기 때문에, 그것은 종교적 전문가에게만 완전히 실행될 수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 종교는 특정한 계급의 사람들의 종교이지 결코 민중의 종교로 될 수 없었던 데 대해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계급의 구별없이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만인의 종교로 될 수 있는 바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가 그 당시 세상에서 활동하던 때에는 그의 새로운 종교를 다만 유대인들 가운데 다소의 신자 또는 추종자를 얻었던 데 불과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은 천대받던 노예와 부녀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으로서 벌판의 불처럼 번져 나갔는 데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일시에 그 기세가 꺾이는 듯 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과 그것에 대한 신앙에서 다시 힘을 얻어 친히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 그와 같은 삶을 체험한 사도들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는 우선 유대인에게 전도되고, 그런 뒤에 성․바울(St. Paul)에 의하여 널리 다른 민족들에게도 전파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야 말로 그리스도교를 진정한 세계종교로 되게 한 사람이었다.  그뒤 많은 순교자를 내면서 마침내 민중 속에 깊이 뿌리를 박아 도도한 세력을 이루었고, 드디어 313년 그 당시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기에 이르고, 나아가서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는 로마 국교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가 겨우 수백년 동안에 모든 이교(異敎)를 극복해버렸다고 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생각될 수 있겠다.   로마에 의해 세계제국이 형성되었다는 정치적 사정 그리고 헬레니즘 문화권 내부에서 그리스어가 공통어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등의 여러가지 사정들이 그리스교의 전파를 빠르게 하였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카이사르의 것은 카아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 하여, 정치적 욕망을 떠나 순수히 인간의 내면성만을 중요시하는 듯한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정치력과 크게 충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세계제국의 통치를 위해 유용하기조차 했다고 하는 것이 커다란 원인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리스도교는 그 시초에 있어서는 전혀 철학을 가지는 것이 아니었고, 또 거기에 커다란 장점이 있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세력이 증대하여 교회조직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그 교리(dogma)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동시에 다른 종교에 대해 그리스도교를 변호할 필요도 생겼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이 생겨 나왔다.
예수의 가르침을 바울이 어느 정도 체계화해 놓은 바탕 위에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확립한 사람들은 교부(patres ecckesiae)들이었다.  그들에 의한 철학이 교부철학이다.  교부철학 시기는 대체로 2세기경서 8세기 말경까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5세기 전반의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서 그 정점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부철학은 시대적으로는 고대철학 말기의 종교철학과 거의 같은 시기를 차지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대체로 고대사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지반 위에 서있고 스콜라 철학의 성립에 기초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세철학의 테두리 안에 속하게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중세철학은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이다.  스콜라 철학은 9세기 이후에서 중세말까지 이르는 동안 교회에 소속된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던 교사들의 철학인데, 이 경우 교부철학에 의해 이미 확립되어 있는 교리를 어떻게 논증하고 해명하여 체계화할까 하는 것이 그 주요한 과제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조리있게 밝히기 위한 도구나 수단이 된다.  어쨌든 중세철학의 근본 문제는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 속에 들어 있다.

제2절  교부철학


교부철학은 시기적으로는 그리스 말기에 속하므로, 본래의 중세철학, 스콜라철학과는 거리가 있고 비그리스도교적인 헬레니즘 철학과도 상이한 점을 지닌다.  교부철학은 원시(또는 초기)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 철학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철학보다는 오히려 신학의 측면에서 풍부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원시 그리스도교는 그 바탕을 유대교에 두고 있어서 다분히 초이성적이고 계시적인 종교이었지만 그리스 철학과의 연관성으로 인하여 헬레니즘적인 그리스도교로 변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는 성․바울에 의해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이 새로운 종교는 선민 사상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온 인류에 대한 구원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또한 지식층에 호소하기 위하여 합리적인 교리를 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다른 무엇보다 더 강조하여 주장하였다.  유대교의 율법은 특수한 민족을 위한 도덕적인 사회규범이었다.  이 점에서 바울의 주장은 유대교와의 절연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바울은 역사적 인물인 예수와 메시아 예수를 하나로 보았다.  이 점은 종교적 원천에서 오는 계시와 권능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리스 철학의 합리주의적인 경향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대체로 교부철학 시대는 바울과 성․아우구스티누스 사이로서 이 시대는 철학적 의의보다는 신학적 의의가 더 큰 시기였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교리 확립을 위하여 그리스 철학이 이용된 시기였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리를 중심으로 한 대립은 세 파 사이에 일어났으니 그것은 곧 그노시스파(Gnosistic), 호교파(Apoloigist),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교(Alexandrian Catechetical School)이었다.
그노시스파는 지식(gnosis)이 신앙보다 앞선다고 주장하였다.  초월적인 신과 직접 하나가 될 때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이 지식은 신비한 직관이어서 영적인 존재만이 계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신은 선(善)의 원리이고 물질은 악의 원리라는 이원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육신을 가진 예수는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성스러운 신이 육신화하는 것은 모순이며 나아가서 신의 아들이 태어나서 십자가에 못 박힘은 신답지 못한 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노시스파의 이와 같은 반그리스도교적 교리는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이 파의 대표자로서는 바실리데스(Basilides: 2세기 초)와 바렌티누스(Valentinus: 2세기 초) 등이 있다.
호교파는 이단으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를 옹호하려는 입장에서 교리를 전개하였다.  유스티누스(Justinus: 100~164)는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logos)와 그리스도교 교리를 화해시키고자 하여 로고스는 신의 말씀이고, 이 로고스가 예수란 몸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3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사라지고, 그리스도교 본래의 신앙만을 순수하게 지니려는 노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0)는 “아테네와 예루살렘, 아카데미아와 교회, 이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에 무슨 통함이 있느냐”고 반문한 뒤, 철학을 이단의 모태라 주장하면서, 그리스도교가 이성에 배반됨으로 오히려 참되다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었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므로 나는 그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아들은 죽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므로 절대로 믿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확실하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라는 명제는 위에서 나온 것으로 그의 정신을 정확히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테르툴리아누스는 철학을 전적으로 배척함으로써 일찍부터 그리스도교가 초이성적인 종교임을 시사하였다.  이런 그의 생각은 뒷날 여러 그리스도교 사상가에게 영향을 준다.
3세기의 교부들의 호교활동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못 벗어나고 있었지만 3세기가 지나면서 신플라톤 철학에 의해서 교리를 체계화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이 일어난 것은 아프리카 북부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학교(Catechetical School)이며 이 학교를 대표하는 사람은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이었다.  오리게네스는 플로티누스의 일자(to hen)와 같은 개념으로 그리스도교의 신을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은 모든 존재를 초월한 영원 불변하는 존재이며 순수한 정신적 존재이다.
그러나 신과 예수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확립된 교리가 필요하였으므로 여러 차례에 걸친 종교 회의가 소집되었다.  325년 니케아(Nicaea) 종교 회의에서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예수의 인간성을 중시하는 아리우스(Arius)파에 반대하여, 신과 예수가 하나임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의 동질론이 옳은 교리로 채택되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 종교 회의에서는 성부․성자․성신이 하나라는 삼위일체설이 확립되었다.  또한 예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는 문제에 있어서, 431년과 449년 두 차례에 걸쳐 열린 에페소스(Ephesos) 종교 회의와 451년 칼케돈(Calcedon) 종교 회의를 통하여 예수는 신인 동시에 사람이라는 신인설이 교리로 확정되었다.  이렇듯 그리스도교의 중심되는 교리는 여러 교부들의 노력과 종교 회의를 통하여 확립되고 있었다.
교부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
tinus, 354~430)이다.  그는 원죄설로써 그리스도교 교리를 완성시킨 사람이다.  그는 악이란 선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결핍(privatio substantiae)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신이 창조한 피조물은 신과 성질이 같기는 해도, 그것은 없음으로부터 생긴(creatio ex nihilo)것이기 때문에 불완전하며 잘 변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지에 의해서 신의 주권과 권능에 반대한다.  인간은 자유 의지에 의해서 신의 주권과 권능에 반대한다.  인간은 자유 의지에 의한 신의 뜻을 거역하였으므로, 인간이 그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인간의 구원은 오직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원죄를 범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구원을 요구할 수 없으며, 구원은 오직 신의 뜻에 의하여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생각하는 내면적 의식 현상만이 확실한 것을 말하며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sum)고 하였다.  의심하거나 오류를 범하는 것은 그럴 수 있는 근거로서의 정신적 존재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 내면적 정신에서 인간은 신의 계시에 의해서 비추어지는 영원한 진리를 파지할 수 있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근세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의 선구가 된다.  이와 같은 내면적 정신적 탐구와 더불어 그에게 있어서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시간론이다.  이우구스티누스는 지나간 것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가 있어서, 그 각각은 기억과 시각과 기대에 존재한다고 말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신앙이 이성에 앞선 것이었으며, 이성은 신앙을 위하여 필요할 뿐이고, 또한 신의 인식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한에서 존중되었을 따름이다.  신의 계시는 우리를 신앙으로 초청하고 있으며 그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영원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뿌리인 셈이다.  그런데 그는 신의 계시와 뜻이 펼쳐지는 곳은 지상이고 그 지상에서 실현되는 과정을 역사로써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역사의 의의는 신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 데 있다.  세계의 역사는 지상국과 신국(神國)의 투쟁 과정으로서 지상국은 파멸되어야 할 국가이고 신국은 영원히 올 국가이다.  신의 최후 심판에 의하여 세계사가 끝나고 신의 긍정이 성립하여 신국이 이루어진다.  그러면 인간의 저주받은 자유 의지가 부정되고 선한 신의 자유 의지가 보장받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세계를 지상국으로 보고, 그것에서 시간성을 부여했고 신국은 참다운 국가로 보아 그곳에서는 영원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제3절  스콜라 철학


그리스도교가 조직적 교회를 통하여 기본적 교리를 확립한 이후에는 교리에 대한 철학적 구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교 교리를 체계화하고 증명하며 나아가서는 그리스도교적인 바탕 위에서 세계관과 인생관을 확립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스콜라 철학을 형성한 사상가들은 그들의 교리에 있어서 교부철학자들이 구성한 그리스도교 교리를 이어받았지만 그것을 그리스 철학의 방법과 개념에 의해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근본적인 의도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연과 우주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였고, 종교와는 상관없이 과학적인 정신으로써 모든 것을 탐구하였다.  반면에 스콜라 철학자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점이 바로 양자의 근본적인 차이인 것이다.  스콜라 철학가들은 그리스도교 교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교리를 위하여 그들은 그리스 철학과 논리학의 체계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철학은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확립된 그리스도교 교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에 인간의 정신이 모순되지 않는 동안에는, 인간의 이성이 그에 따를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신학적 속박의 한계를 의식하고 제한된 교리를 탈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교리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철학적 체계를 구성하려는 의도가 싹트게 되었다.  또 다른 한면에서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교회의 권위에 대항하여 성경 자체를 중시하고 그와 더불어 인간의 내면적 양심에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종교 개혁(Reformation)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므로 이로부터 근세 철학에로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우리는 위에서 스콜라 철학의 일반적인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아래에서는 스콜라 철학을 초기․전성기 및 말기로 구분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1. 초기 스콜라 철학

초기에는 보편적 개념이 사물의 참다운 본질이며 이것은 개별적 사물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신앙과 지식 또는 신학과 철학이 일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며,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 및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이 많이 미치었다.  에리우게나(Eriugena, 810~877 쯤)는 플라톤적인 실재론의 입장에서 신앙과 이성의 일치를 주장하면서 권위보다도 이성의 우위를 피력하였다.  신앙과 이성은 모두 신의 지혜에서 나타난 것이지만 참다운 권위는 이성의 힘에 의하여 발전된 진리라고 하였다.  또한 그에 의하면, 신은 만물의 본질이며 근원이다.  신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신에 의하여 만물이 나타나며, 만물은 신의 현상이라 하였다.  에리우게나에 있어서 신은 곧 보편적 개념인 것이며 개념만이 유일한 실재이고 모든 개별적 사물들은 여기서 산출된다고 함으로써 보편논쟁의 실마리를 마련하였다.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는 스콜라 철학의 정신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신앙이 지식에 의해서 보증될 수 있음을 말하였다.  그도 에리우게나와 같은 플라톤적 실재론의 입장에서 개별적 존재인 사물은 거짓된 존재이고,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신의 존재만이 참다운 존재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하여 하였다.  신은 가장 완전한 존재이므로 실재성이 결핍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신은 존재한다는 것이 안셀무스의 신 증명에 대한 골자이다.  이것은 신이라는 개념에서 그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인데 그 아래에는 모든 개념에는 그 대상이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후세에 와서 칸트(Kant)는 이와 같은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을 본체론적 또는 존재론적 증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안셀무스 당시에 벌써 가우닐로(Gaunilo, ?~1083)같은 이는, 안셀무스의 논법에 의하면, 아틀란티스(Atlantis, 행복의 섬)는 가장 완전한 섬이기 때문에 그것이 실재한다는 이론이 성립하지만, 그 섬은 단지 상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안셀무스의 주장도 옳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보편에 관한 안셀무스의 이론은 보편이 개별적 사물에 앞선다(universalia anterem)는 것이다.  그르스도교 교리에 있어서는 인간은 보편성이 전제되어야만 인간의 원죄 및 예수에 의한 구원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주장이다.  그러나 보편이란 오직 이름(nomina)이거나 아니면 소리나는 바람(flatus vocis)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명론(nominalism) 즉 개별적 사물만이 존재하고 보편은 개별적 사물보다 뒤에 있다(universalia post rem)는 입장이 대립되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은 로스켈리누스(Roscelinus, 1050~1120)이다.  그의 주장의 요점은 보편이란 개별적 사물이 있은 후에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신이란 한낱 명칭일 뿐이고 존재하는 것은 성부․성자․성신으로서 그것은 각각 독립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삼위일체설에 대한 하나의 반박이다.
스콜라 철학은 결국 실재론과 유명론의 투쟁 과정 속에 성립하는데, 앞에서의 극단적인 두 경향의 대립에 있어서, 그 가운데 서서 양자를 조정하려는 입장이 생기게 되었다.  아벨라르두스(Abaelardus, 1079~1142)는 보편적 사물의 본질로서 그 안에 있다(universalia in re)는 주장을 함으로써 실재론과 유명론 두 입장 모두를 물리치고 중간적 입장을 취하였다.  아벨라르두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 같으며, 플라톤 주의적인 영향으로부터 스콜라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시기로 넘어가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중세의 보편논쟁이란 앞에서 말한 세 입장 사이의 논쟁을 가리킨다.



2. 전성기 스콜라 철학

12, 13세기는 법왕권과 군주권의 충돌이 반복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노센트(Innocent) 3세에 의하여 군주권에 대한 교권의 우위가 확립되었으므로 교회는 세속적인 문제에까지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또한 십자군 원정에 의하여 지리상의 새로운 견문이 열리게 되었다.  이 두 가지와 더불어 동방에서 수입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사상계의 전환에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었다.  그 동안 교회는 플라톤 철학만을 이용하여 왔으나, 초월적인 신의 창조적 원인만을 존중하고 자연과 현실을 무시한 이러한 사상은 새로운 시대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이상을 현실에서 찾으려 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응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슬람교를 신봉하면서 코란(Koran)에서 신앙의 마음을 길러온 아라비아의 학자 아비센나(Avicenna, 980~1037)와 아베로에스(Averroes, 1126~1198)가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미친 중요한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심취하면서 그것을 전성기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소개하여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다.  아베로에스는 철학과 신학 또는 이성과 신앙 그 둘은 서로 혼합되거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중진리(duplex veritas)라고 본다.  이것은 어떤 것이 철학에서는 진리인데 신학에는 거짓이라거나 신학에는 진리인 것이 철학에서는 거짓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진리 혹은 같은 진리가 철학에서는 이론적으로 명백히 이해되고 신학에서는 비유적으로 표현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종교에서는 코란을 그림 등의 방법으로 일반인 또는 학문에 별로 조예가 없는 사람들을 알아듣도록 가르치는 데, 철학자는 비유를 버리고 표상에서 자유로와져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이렇듯 신앙이 받아들이는 진리․이성이 받아들이는 진리, 진리에 대한 이중설은 그 뒤 스콜라 철학에게 영향을 미치었다.  그러나 사상적인 발전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수도원 운동으로부터 생긴 프란체스코 교단(1209년 성립)과 도미니코 교단(1215년 성립) 사이의 대립이었다.
프란체스코 교단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설을 지켜 아리스토텔레스와의 이론적 종합을 환영하지 않았다.  이 교단은 주지적이기보다는 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도미니코 교단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채용하여 이것을 그리스도교화하였으니, 그 결과 그리스도교 신학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가져다 주게 되었다.  프란체스코 교단과는 달리 도미니코 교단은 주지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다.  알베르투스․마그누스(Albertus Magnus, 1193~1280)와 그의 제자 토마스․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는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사람들인데, 특히 토마스․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리스도교화하였으며, 그의 신학은 오늘날 카톨릭의 공인철학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이성이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긴 해도 신의 본질을 파악할 수는 없는 것으로서, 자연의 빛으로서의 이성은 논리적 추론에 의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뿐 신의 본질을 알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본다.  신의 본질을 아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아무런 보상없이 거져 주신 은총의 빛에 의해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이성에 의해 신을 알려는 것은 이성의 권한을 넘어서는 행위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인간 이성을 논리적 추론에 의해 신의 존재를 어느 정도 증명할 수는 있다.  이런 증명은 신의 존재를 확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존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성적 짐작일 것이다.  토마스․아퀴나스는 모든 존재의 제일 원인으로서의 신의 존재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방법으로 증명하였다.  ① 운동의 원인으로서의 신: 자연의 모든 운동은 그 원인으로서 부동(不動)의 원동자를 가져야 한다.  ② 우연적 존재의 원인으로서의 신: 현실의 사물은 우연적인 것으로서 우연적인 존재에 대한 현실적이며 필연적인 존재가 있어야 한다.   ③ 모든 존재의 선과 참다움 및 완전성의 원인으러서의 신: 모든 사물에는 참되거나 선하거나 고상함에 있어서 계층적 구조를 가지는 데 이러한 구조에 있어서 최상의 가장 완전한 존재가 있어야 한다.  ④ 모든 존재의 목적으로서의 신: 인과 계열의 맨 위에는 모든 작용의 궁극 원인이 된다.  토마스․아퀴나스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은 자연의 빛으로서 창조주인 신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보았다.
토마스․아퀴나스는 보편과 특수의 관계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관계를 이용하였다.  개별적 사물은 신의 지혜에 의해서 주어지는 형상이 질료에 가해져서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질료도 신에 의해 창조된다고 한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차이가 난다.  어쨌든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전 사상에 걸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융화를 꾀하였다.  그의 철학은 도미니코 교단의 공인 철학이 되었다.  그러나 점차로 프란체스코 교단과 신비주의자들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 이론에 반기를 들게 되었으니, 말기의 스콜라 철학은 그와 같은 움직임이 겉으로 나타난 것이다.


3. 말기 스콜라 철학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70~1380)는 프란체스코 교단의 일원으로 토마스 철학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주지적인 토마스 철학에 반대하고 종교를 주의적이라고 보아 신앙과 지식을 분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신학과 철학은 각기 다른 원리를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미 둔스 스코투스에 의하여, 신앙과 지식의 일치를 주장하는 스콜라 철학의 근본 정신이 흔들리게 되었고 다시금 유명론이 일어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옥캄(William of Ockham, 1280~1349)은 보편은 기호나 명칭에 지나지 않고 실재하는 것은 오직 개별적 존재밖에 없다고 하였다.  오캄에 의하면 경험적 지식이 있어야 추상적 지식도 성립할 수 있기 때문에, 지식은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와 성질은 이성에 의해서는 증명되지 못하며, 만일 증명된다 하여도 그것은 유추에 의하여 개연적으로 나타나는 데 불과하기 때문에 교리는 증명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필요한 것은 다만 신앙과 믿고자 하는 의지뿐이라고 하였다.  오캄은 그 자신 신학자이면서도, 신학은 이성적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학문이 아니라고 하며, 신학과 찰학과를 구별했던 것이다.  여하튼 오캄은 보편적 존재는 깎아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후에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론 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14세기에 들어서자 반토미즘(Anti-Thomism)의 물결에 따라서 신비주의적 경향이 세력을 가지고 스콜라 철학을 무너뜨리는 데 한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교회에 의한 신앙의 외형화 내지 형식화에 대하여 신앙을 내면화하고 순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움직임의 대표자는 마이스트․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이었다.  그는 정신력을 외부로부터 내면으로 돌려서 신과 합일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후에 니콜라우스․쿠자누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쿠자누스는 신을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로 보았다.  오성에서는 구별에서부터 통일성을 파악하나 이성을 구별 안에서 통일성을 직관하는 것이다.  무한자인 신은 온갖 사물을 포섭하는 가장 큰 것이며, 온갖 사물에 스며들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신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성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한편 그 당시는 십자군 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상공업이 활발해지고, 도시가 이곳 저곳에서 발달함에 따라 중세의 봉건제도는 서서히 몰락해 가기 시작하였다.  중세 말기의 자치 도시의 발전과 국가주의 내지 민족주의의 발흥은 근대사회와 근대정신의 모체가 되었다.  여기서 또한 봉건 지배층의 철학이었던 스콜라 철학은 무너지고, 도시가 특히 발달했던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13세기부터 새로운 세계관적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나 감각적 사물을 신과는 상관없이 생각하려는 태도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르네상스 운동이다.  이렇듯 신앙과 지식, 신학과 철학의 분리 내지 구별은 한편에서는 신앙의 그윽한 세계로 나아가는 실마리를 마련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앙과 관계없이 인간의 자유롭고 독창적인 이성의 능력에 의한 철학, 나아가 과학의 재생과 발흥, 성립의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제1부 서양철학
제3장 근세철학  

제3장  근세철학


중세로부터 근세에로의 이행은 커다란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십자군원정의 실패는 법왕권의 쇠퇴를 가져왔고, 나아가서는 기사계급의 몰락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중세봉건사회를 그 밑뿌리부터 흔들어 놓았다.  그 결과 도시를 중심으로 한 상공인 계층의 시민계급이 형성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시민계급의 정치적 의식이 향상되었으며 정치사상과 법률사상이 새롭게 나타났다.  교권에 대한 왕권의 정립이라는 정치권력상의 새로운 역학관계가 정립되고, 민족국가의 형성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철학도 이러한 시대사조에 부응해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포기하고 인간과 자연을 그 근원에서부터 새롭게 해석하려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르네상스 운동은 중세적 세계관에 반대한다는 근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적인 신앙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장구한 전통을 지닌 신 중심의 중세적 세계관이 일시에 소멸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초월적이었던 신을 새로운 세계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신을 세계 내적인 존재로 전환시킨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절  배   경


1. 인문주의

중세철학의 구속으로부터 인간사유의 독립성을 쟁취하도록 자극을 준 것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르네상스이다.  로마인의 자손임을 자처하는 이탈리아의 지성인들은 5세기 중엽부터 그리스문예의 보고를 캐내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고전적인 고대문화를 재발견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고대 그리스문화의 이상은 자유로운 인간성을 추구하는 데 있었고, 카톨릭교회의 생활태도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서 이탈한 내세지향적인 것이었다.  인문주의의 이상은 현세에 입각한 활동으로써 모범적인 인간성을 발휘하는 데 있었다.  인문주의의 이러한 이상을 당시의 분위기가 영합되어 더욱더 확대되었다.  이처럼 새로이 각성된 근대인들의 국민의식은,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브루노 등으로 하여금 새로운 인간이해를 시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피코 같은 사람은 ꡔ인간의 존엄성에 관하여ꡕ라는 책에서 “자비로운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선택한 것을 갖도록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되도록 허락하셨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만으로는 그리스 사상이 주었던 높은 정신적 내용, 즉 ‘자유로운 근원적인 인간성’의 완전한 부활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심지어 이 운동이 가진 도덕성이 의심스러웠던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가 기울인 진지한 노력은 근세의 과학적 욕구의 근본형식을 선구적으로 규정했다.  ‘근대자연과학은 휴머니즘의 딸이다’라는 표어는 이를 잘 말해 준다.


2. 종교개혁

16세기 신교의 종교개혁운동은 몇가지 점에서 문예부흥과 그 영향이 비슷했으나,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문예부흥과는 상반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기본적인 의미에서 종교개혁운동의 본령은 종교적, 신학적, 교회사적인 것이었으며, 그 특징은 윤리적, 종교적 관심에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문예부흥의 개인주의를 조장하는 동시에, 사회의 제반사항에 대해서 르네상스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루터는 ꡔ기독교인의 자유ꡕ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군왕이요, 어느 누구의 신하도 아니다.  그는 만인의 가장 충성된 하인이요,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다.”  개인은 종교적 신앙의 기본적 문제를 자기의 양심에 비추어서 해결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은 교회가 절대적으로 권위를 가진다는 교리가 아니라, 양심에 입각한 자기책임감이다.  이것이 도덕적 신생과 회심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루터는 교회가 권위적으로 요구했던 신앙에의 복종에 반대했고, 신앙의 경건, 즉 양심의 순수성과 내면성을 강조했다.
종교개혁운동은 세속적인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 문예부흥운동과 비슷하다.  루터는 사람을 의롭게하는 것은 신앙이요, 의식이 아니라는 교리를 신봉했지만, 아울러서 “참된 신앙은 이웃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봉사의 실천을 통해서 가장 생생하게 그리고 틀림없이 표현된다”는 사도 바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신교도들은 카톨릭에 못지않게 신과 영혼의 불멸을 확신하지만, 관상생활이나 수도원 식의 계율에 입각한 은퇴생활은 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에 대한 신심으로 세속적인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한다.  칼빈의 경우는 루터처럼 사회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신앙생활의 현실에 대한 참여도는 훨씬 깊었다고 할 수 있다.
신교의 윤리관은 현세생활의 종교성에 있다.  즐거운 인생, 귀중한 인간관계, 사회, 경제, 정치적 현실이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신교도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이처럼 신교의 개인주의와 현세에 대한 관심은 문예부흥의 비슷한 사조와 아울러 근세철학에로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신교의 그 밖의 특색은 근세철학과는 상관없거나 상반되는 성질의 것이다.

3. 자연과학의 발달

근세철학에로의 추이과정에서 문예부흥과 종교개혁보다도 더욱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16~17세기의 천문학자와 물리학자들이 이룩한 업적들이었을 것이다.  이들 과학자들이 도달한 결론과 연구 방법은 철학적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ꡔ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ꡕ가 출간된 이후 이 저서가 미친 영향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외에 케플러와 갈릴레이 등에 의해서 발전된 모든 과학적 발견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학의 근거를 파괴해 버리는 것이었다.  양의 분석과 수학에 입각한 새로운 방법론은 실증적 근대과학에로의 길을 분명하게 하였다.  특히 이태리의 위대한 자연과학자 갈릴레이에 의해서 확립된 실험을 중시하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갈릴레이의 영향을 받아 영국이나 프랑스의 철학자들은 학문이 설립할 수 있는 일반적인 근거 및 방법론적인 연구를 중시하였으며,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함께 새로운 내용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 내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노력의 특색은 인식론적이며, 방법론적인 것이었다.  진리는 계시되어 있으므로 그 진리를 논증하는 일이 중세철학자의 관심사였다면, 근세철학의 문제는 진리가 무엇이며, 그 진리를 어떻게 발견하느냐가 주목의 대상이었다.
근세철학의 역사에서 과학혁명은 두 가지 점에서 이 다음에 전개될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 하나는 지식을 획득함에 있어서 감각과 이성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며, 다른 하나는 자연의 실재와 인간의 경험에 대한 관계의 변화이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의식 밖에   있는 외적 세계를 어떻게 내적 세계로서의 의식이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주관과 객관의 문제로 환원되었으며, 어떠한 방식에 의하여 진리가 인식되는가 하는 방법론의 문제와 어떠한 지식이 진리인가 하는 진리기준의 문제로 나누어졌다.  이와 같은 문제를 둘러싸고 근세철학은 점차 두 갈래의 방향으로 형성된다.  그 하나는 자연과학의 기계론적 자연관을 보다 근원적이며 궁극적인 제1원리로부터 연역해내려는 합리론이요, 다른 하나는 경험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자연법칙에 준하여 정신적인 것을 설명하려는 경험론이다.


제2절  대륙의 합리론


근세철학은 17세기 대륙의 합리론자로부터 시작된다.  르네상스를 거치며 새롭게 인식된 인간의 자기정신은 이제 인간 자신의 힘에 의해서 확인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자각된 인간의 힘은 감각을 통한 경험의 힘이거나 순수사유를 통한 이성의 힘이다.  
합리론이란 원래 이성을 존중하는 입장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이 지향하는 인식의 목표는 사유에 있어서의 필연성과 보편성 즉 합리성이다.  그러므로 합리론자들은 수학을 학문의 전형으로 보고 수학적 방법론을 학문 연구방법의 모범으로 삼았다.  이는 자연현상을 양화한 갈릴레이의 전통을 이어받은 데카르트가 해석기하학의 원리를 제시했고, 스피노자가 기하학적 방법에 따라서 자기의 철학을 서술했으며 라이프니쯔가 미적분학의 선구적 존재였다는 사실에서 시사된다.
합리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실체인데, 실체에 대한 기본입장에 따라서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쯔의 철학이 달라진다.  실체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는 데카르트가 내렸는데, 그는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 자기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이하에서 실체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합리론의 발전과정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1. 데카르트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는 프랑스 귀족출신으로서 제수잇학원에서 스콜라철학을 공부하였으며, 수학에 조예가 깊었다.  부친 별세 후 조용한 곳을 찾아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저술은 ꡔ방법서설ꡕ, ꡔ제일철학의 성찰ꡕ, ꡔ철학원리ꡕ 등이다.

1) 철학의 방법

데카르트는 모든 확실하고 명증적인 인식은 어떠한 개연성이나 애매성도 허용하지 않는 확실한 학문적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학문적 방법을 수학적 방법으로 생각했으며, 따라서 철학을 수학적 방법으로 체계화하려고 시도했다.  수학은 거짓되고 단순히 개연적인 것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가장 확실하고 보편적으로 인정된 증명에 의해 결론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그는 수학에서 정초된 명증성이나 확실성과 같은 종류의 명제들만 학문적 진리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철학적 추리가 모든 수학적 추리의 특징들을 포괄해야 된다는 입장을 견지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당시 수학적 방법의 논리적 체계만을 수용하려 했다.  수학적 체계는 가장 확실한 공리로부터 출발해서 정의 등에로 연역해 가는 엄밀한 확실성의 체계이다.  따라서 철학 역시 모든 철학적 인식이 근거하고 있는 제1원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수학과 같이 확실한 체계를 갖춘 학이 되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이 제1원리를 발견하는 방법이 분석이고, 이 분석에 의해 발견된 제1원리를 근거로 계속되는 과정을 종합적 논증이나 연역이라고 한다.  그리고 분석적 방법을 통하여 근본적인 제1원리를 발견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직관이다.  그리고 이 직관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연역 역시 직관적 과정이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확실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우리가 참된 인식에로 이르게 될 수 있는 것은 직관과 연역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직관이란 어떤 의심도 없이 명석하고 판명하게 명증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이다.  연역도 그 자체가 명증적인 것은 아니지만 직관적 연역의 과정이 지속된다면, 역시 확실한 인식이 된다.  데카르트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인식은 직관의 명증성에서 가능하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직관을 통해 어떻게 철학적 인식의 제1원리에 도달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 철학의 제1원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는 이 원리를 발견하기 위해 소위 그의 방법적 회의를 철학적 사색의 출발로 삼는다.

2) 방법적 회의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해, 일련의 방법적 절차를 요구한다.  그것은 바로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에 대해 철저히 의심해 보는 과정이다.  가장 확실한, 그것도 나에게 가장 확실한 주체적인 진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부터 하나하나 의심해 보고, 만약 그래도 의심하지 못할 사실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가장 확실한 진리가 될 수 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의심될 수 있는 그런 것에서부터 의심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철저히 의심하기 시작한다.  만약 데카르트의 의심이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한, 즉 단순히 의심을 위한 의심이 아니라는 점에서, 방법적 회의라면, 이것은 고대 소피스트나 회의학파의 소극적인 회의와는 다르다.  그리고 만약 보다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한 방법적 회의라고 한다면, 이 의심의 과정이 보다 철저하면 할수록, 그 과정을 통해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 발견된 것은 보다 더 확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매우 과장된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먼저 그는 감각의 확실성에 대해 의심한다.  감각은 나에게 확실성을 부여하지만 전적으로 기만의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한다.  내가 지금 외투를 입고 난로가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만약 내가 꿈속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을 환상적으로 그릴 수 있다면, 과연 감각의 확실성을 환상과 구분할 근거는 어디 있는가?
그리고 외적 감각뿐만 아니라 상상이나 기억도 우리를 속인다.  따라서 의심은 상상적 구성과 기억이 사용되어야 하는 복잡한 추리에 의존하는 2+2=4라는 수학적 명제에까지 확대되어 적용된다.  예컨대 악령이 나를 2+2=4로 믿게끔 뒤에서 조종하는 농간을 부릴지도 모른다.
이 방법적 회의가 물론 꿈이나 악령을 끌어들이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의심한다는 점에서 너무 과장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속견을 진리로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저지하려는 데카르트의 전략이다.  또한 이 회의는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자유로운 인간의 유일한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이 방법적 회의를 통해 과연 의심하지 못할 확실한 진리를 발견했는가?

3) 제1 원리로서의 코기토의 확실성

데카르트가 일련의 철저한 회의를 통해 그가 추호도 의심하지 못할 사실로 발견한 것은 바로 내가 지금 무엇에 관해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지금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너무 확실한 것이었고, 이것은 바로 내가 존재하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원리는 그것에 대해 의심한다는 사실자체가 터무니없을 만큼 자명한 절대적인 확실성의 원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 원리는 논리적 추리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직관에 의해 명증적으로 획득된 것이다.  이 코기토는 의심한다는 좁은 의미로서가 아니라 이해하고, 긍정하며 의지하고 지각하고 상상하는 의식활동일반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술어이다.  데카르트가 가장 확실한 원리로 발견한 이 ‘Cogito ergo sum’은 그가 수학적 공리와 같이 자명한 것으로 발견한 그의 철학의 아르키메데스적 기점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 확실성을 신이나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심하는 자신, 즉 사유하는 자신으로부터 보증하려고 했다.
내가 나의 존재를 직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자아는 사유하는 실체임이 분명해진다.  실로 자아는 직접 인식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것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최초의 존재일 뿐만아니라,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확실성을 위한 두 번째 단계는 신의 존재증명이다.  데카르트는 이성이 다른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권위에 대한 보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의 존재 안에서 그것을 발견하려고 하였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데카르트는 관념의 종류를 먼저 검토한다.  그에 의하면 관념은 세 가지 종류의 것이 있다.  외래관념, 인위관념, 본유관념이 그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내 마음 속에 외계의 사물에서 온 것(외래관념)도 아니요, 내 의지의 결정을 따라 생긴 것(인위관념)도 아닌 바, 오로지 나의 생각하는 능력에 유래하는 관념이 있음을 관찰했을 때, 이 관념을 나는 본유관념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러한 본유관념으로서 사유하는 자아, 수학적 원리나 도덕적 원리, 그리고 신의 관념을 든다.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이러한 본유관념과 관련시켜 논증하고 있다.  즉 본유관념으로서의 신의 관념 안에는 유한자로부터 온 것이 아닌 여러가지 것들이 있다.  ‘무한, 영원, 전지전능’ 등의 개념은 유한자로부터 온 것들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무한개념들을 유한자 속에 집어넣어 준 또다른 존재가 있어야 한다.  유한자 안에 신의 관념을 가져다 준 원인의 구실을 한 그 존재는 그 결과로서 유한자가 가지고 있는 신의 관념에 못잖은 완전성을 구비해야 한다.  다른 유한자의 관념은 나 자신이 만들어 내었을지도 모른다.  인간 또한 유한하고 생명을 가진 실체이므로, 신의 관념은 그 관념 속에 내포된 바와 같은 완전성을 가진 존재로부터 와야 한다.  이와 같은 존재는 바로 신뿐이다.  그러므로 신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 자신은 신에 대한 자기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만약 그 관념이 진실로 무한한 실체로부터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나 자신은 유한자이므로 무한한 실체에 관한 관념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성의 최초 단계가 이성적 존재로서의 자아개념을 확립한데 있다면, 2단계의 신의 존재증명은 이성으로써 신의 존재를 논증한 것이된다.  결과로부터 원인에로의 추론이 이성적인 것이라면, 유한자가 가진 신의 관념으로부터 신의 존재이론의 추론도 이성적이다.
데카르트의 세 번째 단계는, 물체의 존재를 확인하는 단계인데, 이는 자연계를 구성하는 존재에 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마음의 권리와 능력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 권리와 능력은 방법론적인 회의를 목표로 한 최초의 단계에서는 부정된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그 권리와 능력이 회복되었다고 믿었다.  즉,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에게는 속임이나 거짓이 불가능하므로 그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이성의 능력도 역시 불완전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이성에 유래하는 것은 거짓일 수가 없다.  문제는 이 이성을 어떻게 올바로 사용하느냐에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명석하고 판명하게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경우에 판단을 보류한다면 인간은 결코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성으로써 우리는 외적대상의 존재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우리의 정신밖에 ‘연장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명석판명한 이성적 인식이라고 주장하여 물체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4) 형이상학적 체계

데카르트가 회의를 통해 그 확실성을 문제로 삼았던 것은 정신, 신, 물체였다.  그리고 그는 이 세 가지의 존재를 차례로 확실히 그리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세 가지를 각각 실체로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실체란 자신이 존재하기 위하여 자신이외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를 의미한다.  즉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자신이 갖고있는 존재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만이 실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만이 엄격한 의미에서 자기자신 속에 자기근거를 가진 자기 원인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정신과 물체는 상호 독립되어 의지하지 않는다고는 하더라도 신의 피조물로서 신에게 의존한다.  그리하여 신을 무한실체라고 한다면 정신과 물체는 비록 실체이기는 하지만 신에 근거하므로 유한실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데카르트에 따르면 유한실체로서의 정신과 물체는 사유하는 자와 연장하는 것으로서 상호 독립적인 존재로 철저히 구별된다.  정신의 속성은 사유함이요 물체의 속성은 연장함이다.  결국 세계는 비연장적 존재인 정신과 비사유적 존재인 물체로 구별됨으로써 이원론적으로 파악되게 된다.  그리고 그에 비하면 물체는 기계론적인 운동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제 연장적 존재인 자연은 더 이상 목적활동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죽어있는 거대한 기계덩어리가 되어버린다.  이는 근대 자연과학의 요구에 부합되는 주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근대의 자연과학은 중세의 목적론적 자연관과는 달리 기계론적 자연관 위에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의 실체사상은 다음의 도식으로 나타내질 수 있을 것이다.


1> 무한실체 :             신
2> 유한실체 : 정신                   물체
3> 속    성 : 사유                   연장
4> 양    태 : 의심, 판단, 상상        위치, 운동, 수, 모양
             의욕 등등              행태 등등



5) 몸­마음의 관계

자연과학에 대해 크게 공헌을 한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자연관이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연 안에서의 인간을 논하면서부터이다.  인간이 아닌 동물의 경우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자동기계로써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고 정신과 신체를 동시에 가진 인간의 경우는 그의 이원론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특별히 정신과 육체라는 상호 이질적인 실체가 붙어있는 존재이다(심신이원론).  뿐만아니라 이 두 실체는 송과선이라는 기관을 통해 상호 직접 영향을 주고받는다(심신상호작용론).  이는 정신적인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육체에 있을 수 있고 또한 육체적인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정신적인 사건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마치 부끄러운 생각이 직접 얼굴을 빨개지게 했고, 손을 때린 사건이 직접 아프다는 생각을 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에 관한 그의 이론은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상호독립적인 실체가 왜 그리고 어떻게 함께 존재하는가?  하물며 상호 독립적인 실체가 어떻게 상호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정신과 육체는 자신의 존재근거(원인)를 자신이 갖지 않는 것이 되어버림으로써 실체로서의 독립성이 파괴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육체가 아닌 정신이 물체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은 자연의 기계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여러 문제를 야기한다.  
이러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겔링크스나 말브랑슈와 같은 철학자는 신을 매개로 한 상호작용을 인정하는 기회원인론을 주장하였으나 이는 문제의 해결이라기보다는 문제의 은폐 혹은 문제의 회피에 지나지 않는 주장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이원론의 문제가 스피노자에게서 어떻게 극복되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자.
2. 스피노자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의 문제를 극복하는 길은 두 가지이다.  즉 실체의 수를 하나로 제한하든가 혹은 실체의 수를 무한히 늘리든가이다.  전자의 길을 택한 철학자가 스피노자요 후자의 길을 택한 철학자가 라이프니쯔이다.  이제 스피노자가 어떻게 데카르트의 문제점을 극복하는지 살펴보자.

1) 범신론적 일원론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체 혹은 육체를 비록 유한하기는 하지만 실체로 봄으로써 이원론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정신과 물체를 무한실체인 신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생각한 것은 이미 신만이 엄격한 의미에서 실체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일원론적인 체계로 전환시킨다.
스피노자 역시 실체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그는 실체를 ‘그 자체에 의해 이해되는 것’ 즉 ‘자기원인(causa sui)’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실체란 신밖에 없다.  정신과 물체는 더 이상 데카르트에 있어서처럼 실체일 수 없다.  그것들은 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속성 중의 두 가지가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신은 무한히 많은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즉 사유와 연장만이 알려진다.  연장은 물체로 드러나고 사유는 정신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해서 정신과 물체는 데카르트에서 처럼 더 이상 실체인 것이 아니라 유일한 실체인 신의 두 가지 모습 즉 양태로 된다.
스피노자에 있어서 이 세계의 모든 정신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은 신의 속성인 사유와 연장의 표현인 양태이다.  이 정신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들은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이것은 단독 실체인 신의 속성의 표현인 만큼 신의 본질과 필연적 연관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스피노자에 있어서는 정신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은 신의 속성을 나타내는 양면이며, 신은 바로 자연이라는 범신론적 사상이 가능하게 된다.  신은 자연과 결코 분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이란 바로 신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신은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이고 물리적 세계는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일 뿐이다.  결국 신은 원인으로서의 자연이고 자연은 결과로서의 신일 뿐이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실체에 관한 견해를 철저화함으로써 결국 「신 즉 자연」이라는 범신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스피노자는 정신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을 동일한 실체인 신을 다른 측면에서 본데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데카르트에 있어서 문제가 되었던 정신과 육체 사이의 상호관계가 전혀 문제거리로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이제 정신적인 존재만도 아니고, 육체적인 존재만도 아니며, 그렇다고 정신적인 실체와 물체적인 실체가 함께 있는 존재도 아니다.  인간은 실체의 측면에서 보면 정신도 물체도 아닌 그 무엇이다.  이 어떤 것은 연장과 사유라는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연장을 통해서는 육체로 사유를 통해서는 정신으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육체적인 사건과 정신적인 사건은 별개의 두 가지 사건이 아니라 동일한 어떤 사건이 두 가지 측면에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는 동일한 시간이 가되 위에서는 그 시간의 흐름이 바늘의 움직임에 의해 드러나고 밑에서는 추의 운동으로 드러나는 괘종시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부끄럽다는 생각과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동일한 어떤 사건의 두 가지 측면일 뿐이다.  따라서 정신적 사건과 육체적 사건 사이에는 필연적인 평행적 대응관계가 존재하게 된다.  
이상에서 설명한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적 체계는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도식화될 수 있을 것이다.



1> 단독실체(무한한 속성을 지닌) :               신
2> 두 개의 알려진 속성들       : 사유                   연장
3> 일반적 무한 양태들
  a) 직접적인 무한양태        : 무한지성            운동과 정지
  b) 간접적인 무한양태         : 전 우주의 유형
4> 특수 유한 양태들            : 정신들                물체들

이상의 스피노자의 사상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범신론적 일원론으로 극복하긴 했지만, 그는 무한실체인 능산적 자연으로서의 신으로부터 소산적 자연으로서의 유한한 사물이 실제로 어떻게 생겨나오는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난점을 지닌다.  즉 그는 신과 세계사이의 논리적 필연성만을 강조했을 뿐이지 실질적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실체사상은 들어가는 발자국은 많지만 나오는 발자국은 없는 사자의 동굴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예를 들어 삼각형은 여러 성질을 가지지만 그 성질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실제로 그려진 삼각형은 결국 세변으로 둘러싸인 평면도형으로써 다 동일한 모습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이, 개체적이고 개별적인 것들은 자신의 존재근거를 자신이 가지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그들은 개체성 혹은 개별성의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즉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은 신의 손짓이나 발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이제 이러한 난점을 라이프니쯔는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자.  


3. 라이프니쯔

1) 단자론적 형이상학

앞서도 말했듯이 대륙합리론의 중심 문제인 실체문제에 있어서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갖는 문제점을 극복하는 길은 두 가지가 가능할 것이다.  그 하나는 스피노자에서와 같이 실체의 수를 하나로 줄이든가 아니면 아예 실체의 수를 여러개로 하든가 하는 길이다.  라이프니쯔는 후자의 길을 택한 철학자이다.  이와 같은 그의 방향전회는 고대자연철학에서 일원론의 딜레마를 극복하려는 다원론자들의 사상, 그 중에서도 원자론의 사상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이프니쯔는 스피노자가 유한적 존재들을 그들을 초월하는 무한실체에 의해 설명하려는 데 반해, 오히려 일체의 유한적 존재들이 각각 실체라고 주장한다.  이제 그에 의하면 개별적인 다양한 것들이 모두 자신들의 존재근거를 자신들이 소유한 실체인 것이다.  라이프니쯔는 이러한 실체들을 단자(monad)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나드로서의 실체들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아톰과 같이 각각 모양과 크기가 다른 연장적인 것들인가?  라이프니쯔는 모나드를 원자와 엄격히 구별한다.  원자로는 물론 개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리 미세하다고 하더라도 연장적인 이상 기계론적인 운동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당시의 과학의 신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인간을 설명하는 데 문제점이 생긴다.  이에 따르면 인간도 움직여지는 기계덩어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라이프니쯔는 실체로서의 모나드는 원자와 같이 연장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연장적인 것, 즉 정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의 모나드는 결국 데카르트의 res cogitans 인가?  물론 그것이 비연장적이란 측면에서는 그와 유사하지만 단순히 정신적인 것만은 아니다.  라이프니쯔는 종전의 입장에서 벗어나 실체에 힘, 혹은 작용이라는 역동성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역동성이 부여된 개별적 실체인 모나드는 어떤 정적인 주체가 아니라 힘의 중심이다.  따라서 모나드는 단순히 사유하는 자(res cogitans)인 것이 아니라 이제 활동하는 자(res agens)로 바뀌어야 한다.
라이프니쯔에 있어서 실체는 모나드로서 그 모나드는 개별적인 것이고, 또한 비연장적인 것이며, 그 자체 힘이고 작용이다.  그러면 모나드는 각기 어떤 작용을 하는가?  각각의 모나드는 항상 시간적인 경험을 구성하는 모든 관념이나 표상을 자발적으로 산출한다.  각각의 모나드는 능동적으로 여러 의식상태의 내용을 표현하려는 힘과 충동을 가진다.  그러면 모양과 크기가 다른 원자와는 달리 비연장적인 존재로서의 모나드는 어떻게 그 개별성이 보장되는가?  그것은 각각의 모나드가 상호독립적인 것으로서 스스로 자기자신을 나름대로 표현 혹은 표상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는 각각의 모나드가 어떤 외부의 영향도 받지 않는 것으로서 독립적이고 자기완결적 혹은 자기폐쇄적일 때에만 가능하다.  라이프니쯔는 이러한 모나드의 성격을 단자는 창을 갖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한다.  이것이 단자무창론이다.  이처럼 자기완결적 존재로서의 각각의 모나드는 자신의 세계를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나름대로 표상한다.  따라서 각각의 모나드 하나하나는 모든 우주를 자신 속에 표현하고 있는 우주의 거울이요, 소우주이다.
그런데 각각의 모나드가 서로 교제할 수 있는 창을 갖지 않은채 자기 세계를 자기 방식대로 표현하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서로 다른 모나드에게 빛을 비추어 주듯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말하자면 각각 모나드적인 고립적 세계를 가지면서도 상호 공동의 유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라이프니쯔는 이것을 신에 의해 이미 예정된 조화로 설명한다.  이것이 이른바 그의 예정조화설이다.
라이프니쯔는 정신과 육체간의 관계도 예정조화설로 설명한다.  예컨대 처음부터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조금도 틀림이 없는 두 개의 시계가 같은 시각을 가리키는 것처럼, 정신과 육체도 각기 고유한 법칙에 따르면서도, 항상 완전히 일치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2)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

라이프니쯔는 데카르트나 스피노자보다 더 수학적 체계를 철학에 끌어들이는데 기여했다.  그는 모든 개념을 수학적 기호를 사용해서 가장 단순한 진리에서 일체의 진리를 수학적으로 연역하는 보편학을 확립하려 했다.  이처럼 라이프니쯔는 합리적 인식을 존중하였다.  그러나 그는 순수이성에 의해 발견되는 이 합리적 인식으로서의 이성의 진리 혹은 영원의 진리와 함께 어떠한 논리적 추리에 의해서도 얻어질 수 없고 단지 경험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사실의 진리 혹은 우연의 진리를 구별했다.  그는 전자를 논리적 필연성을 가진 절대적인 확실성으로서 규정하는데 반해 후자를 논리적으로 연역될 수 없고 사실에 근거한 우연적 진리로 규정한다.  물론 라이프니쯔는 이성적 인식을 궁극적 진리로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합리론을 따르고 있지만, 이것과 구별해서 사실의 진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가 경험의 확실성 자체를 강조하고 있다는 새로운 의미를 고려할 수 있다.  그는 비록 감각적 경험을 인식의 충분한 조건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우연적 사실의 진리를 근거 지우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감각과 이성적 사유는 그 종류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고 명석성과 판명성의 정도에 있어서만 다를 뿐이라고 한다.  라이프니쯔가 이와 같이 사실의 진리를 이성의 진리와 구별하고 있는 것은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의 합리론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다른 한편 그 독단성을 지적하고 동시에 경험론적 지반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제3절  영국의 경험론


17세기 갈릴레이에 의해서 시작된 자연과학 연구의 방법론적인 변혁은 뉴턴의 역학적 자연과학으로 집대성되었다.  역학적 자연과학의 이러한 성공은 철학의 방법론에 반성을 촉구하였다.  자연과학적 방법론에서 수학의 성과에 착안한 사람들이 합리론자들이라면, 자연에 대해서 신학적, 철학적 선입견을 버리고 직접적으로 감각경험과 관찰실험에 호소한 사람들은 경험론자들이었다.
합리론이 인식의 형식적 측면, 즉 사유필연성과 보편타당성이라는 인식의 이상을 추구한 데 반하여, 경험론은 인식의 내용적인 측면, 즉 사태의 특수적, 개별적인 것에 주목하여, 인식의 현실을 강조한다.  
현실적 인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특징은 감각기관을 통해서만 사물에 대한 지식이 획득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모든 현실적인 지식은 감각경험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이며, ‘이미 감각 속에 없는 것은, 지성 속에도 없다’는 중세 이래의 경험론의 전통같이, 감각적인 인식이 본질적인 것 같이 보인다.
인간의 지식이 감각적인 경험에서부터 온다고 하는 이러한 사상의 기원은 이미 소피스트,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중세의 유명론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러한 경험론의 체계적 구성은 로크에서 비롯되어, 버클리, 흄에로 계승되었다.
그런데 로크는 모든 인식의 기원을 경험에 두었다는 점에서는 경험론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철학체계 속에는 아직 합리주의적인 요소들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곳곳에서 합리론자로서의 측면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로크는 형식적인 의미의 경험론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로크의 입장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을 제기하고 실질적인 의미의 경험론자로서 등장한 사람이 버클리이다.  그리고 버클리보다 더 경험론적 측면을 더욱 계승해 나간 마지막 경험론자가 바로 흄이다.  우리는 이들 세 사람을 영국 경험론의 전통적 흐름으로 간주한다.  이제 영국 경험론의 핵을 이루는 로크, 버클리, 흄의 인식론을 하나하나 다루어 보자.



1. 로   크

1) 경험론적 입장과 생득원리에 대한 반박

로크는 데카르트적인 독단성을 비판하면서 이성에 대한 적절한 한계를 그으려고 한다.  따라서 그는 모든 인식의 기원을 경험에 두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경험으로부터 어떻게 인식이 성립되는지를 해명함으로써 데카르트의 스콜라적 전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로크가 그의 주저인 ꡔ인간오성론ꡕ에서 논의한 문제는 인간 자신의 인식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지성이 어떻게, 무엇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느냐 하는 지식의 기원, 범위, 타당성을 문제로 삼았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작업은 먼저 데카르트주의자들이 모든 일반적인 법칙이나 원리의 진리성을 생득적 기원에 호소해서 보증하려는 데 대한 반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생득원리에 대해서 비판한다고 해서 그가 확실한 인식을 거부하는 회의론적 입장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는 단지 인식의 확실성이 생득적인 것에 기인한다는 데 대해 반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합리론자들은 생득원리의 예로서 모순률이나 동일률 같은 자명한 논리적 원리나, ‘도둑질하지 말아라’와 같은 실천원리를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신에 대한 관념을 대표적인 것으로 들고 있다.  합리론자들은 이러한 생득원리나 관념은 모든 인간들에게 제기되자마자 보편적으로 동의되는 원리들이며, 따라서 선천적이고 보편성을 지닌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로크는 이 원리들이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동의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생득원리의 보편성에 대한 반박을 여러 실증적인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구체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로크는 어떠한 인식도 경험에 근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생득원리에 대한 반박을 통해 주장한다.  이 반박의 요지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된다.
우선, 보편적으로 동의를 얻기 때문에 생득적이라는 사실은 이 보편적 동의에 대해 다른 설명이 주어질 수 없을 때에만 정당하다.  즉 보편적 동의에 대한 다른 가능한 설명이 주어질 수 있다면 그들의 주장은 정당하지 못한 것이 된다.  그런데 로크는 생득원리에 관한 가설을 전제함이 없이도 보편적 동의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둘째 모든 인간들이­어린이, 백치 등을 포함한­보편적으로 동의하는 원리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득원리론은 무용지물이다.  즉 동일률이나 모순율과 같이 자명한 논리적 원리라 하더라도 어린이나 백치는 이에 관한 관념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반증을 제시함으로써, 그리고 실천원리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달랐다는 역사적인 반증을 제시함으로써, 그리고 신에 관한 관념만 하더라도 신을 부정하는 사례가 많은 것을 보면, 신의 관념이 본유관념이라는 주장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2) 관념의 기원과 종류

이렇게 생득관념에 대한 반박을 통해, 로크는 인간은 태어날 때 아무 관념이나 원리도 지니지 않고, 하얀 백지(tabula rasa)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단지 정신능력만 생득적으로 지니고 태어날 뿐, 모든 관념 혹은 인식은 후천적으로 경험을 통해 획득된다.  이 경험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외적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경험이며, 이 두 경험은 우리가 인식을 가지게 되는 통로이다.  외적 경험인 감각경험은 우리 밖의 외적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관념을 제공한다.  내적경험인 반성은 우리 내부세계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 관념들을 제공한다.  감각경험은 감각적 성질들, 예컨대 노랑, 더움, 부드러움, 달콤함 등과 같은 성질들을 우리의 정신 속에 각인시켜주고 이것들의 활동이나 상태에 대해 반성하는 정신은, 지각, 사유, 의심, 믿음, 추리, 의지 등에 의해 두 번째 계열의 관념들을 받아들인다.  정신은 감각경험을 먼저 받아들이고 난 후에, 이런 반성과 이 반성의 내적인 감각작용에 관계된 관념들을 가질 수 있다.
감각이나 내성을 통해 얻어지는 모든 관념은 개별적으로 마음에 나타난다.  이 개별적으로 마음에 나타나는 관념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로크는 이들 관념을 단순관념이라고 부른다.  단순관념도 그는 네 가지 종류로 나누었다.  첫째 색, 음, 미, 향, 촉각 등과 같이 하나의 감관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 둘째, 공간, 연장, 형상, 정지, 운동 등의 관념처럼 둘 이상의 감관으로부터 얻어지는 것, 셋째, 기억, 식별, 추리, 판단 진정한 지식, 소신, 등과 같이 지성과 의지에서 오는 반성에서 얻어지는 것, 넷째, 쾌감, 고통, 힘, 존재, 단일 등의 관념처럼 감각과 내성의 양자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으로 나누고 있다.
단순개념이 결합, 대조, 추상됨으로써 무한히 다양한 복합개념이 형성된다.  로크는 복합관념을 망라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이를 망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합관념 중에서도 그 기원이 예외라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관념들에 대해서는 이를 다시 재검토하였다.  지속, 연장, 무한, 신, 실체, 인과성, 도덕적 관계, 자유와 필연, 물질과 정신 등의 개념이 여기에 속한다.  로크에 있어서는 신도 일종의 복합관념인데, 이것은 존재, 시간, 지식, 힘 등의 단순 개념들이 반복, 중첩, 확대되어 무한의 관념에까지 도달된 것이다.  이러한 로크의 입장은 복합관념을 감각의 자료로 환원함으로써 유명론자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복합관념에는 양태, 관계, 실체의 관념이 있다.

3) 제1성질과 제2성질

로크는 정신이 관념을 획득하는 통로에 대한 설명을 하고 난 이후, 관념과 그 관념이 지시하는 대상과의 관계를 규정하는데로 나아간다.  그는 이 관념과 대상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대상의 성질을 1차적 성질(primary quality)과 2차적 성질(secondary quality)로 구분한다.  제1차적 성질은 대상자체와 분리할 수 없는, 즉 실지로 대상자체에 속하는 성질로서 대상과 유사한 성질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1차적 성질을 경험할 때는 우리의 관념은 그 성질자체에 대한 복사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단단함, 연장, 형태, 운동, 정지 등과 같은 것들이다.  반면에 2차적 성질은 대상자체의 고유한 성질이 아니고 우리가 대상과 관계함으로써 구성하는 성질이다.  예를들면, 색, 맛, 소리 등이다.  결국 2차적 성질에 대한 관념은 실질적 대상과 전혀 유사하지 않다.  예컨대 ‘흑판’이 실지로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만(1 성질), 우리가 시각을 통해 그 검은 것을 보기 때문에 검은 색으로(2 성질) 보여질 뿐이다.

4) 지식의 등급

로크에 있어서 지식은 우리의 관념의 일치 혹은 불일치에 대한 지각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로크는 관념의 일치 혹은 불일치를 지각하는 방법에 따라 직관적지식(intuitive knowledge), 논증적(demonstrative)지식, 감각적(sensitive)지식으로 나눈다.  직관적 지식은 우리의 정신이 관념의 일치 혹은 불일치를 다른 관념의 개입이 없이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흰 것은 검지 않다”, “원은 삼각형이 아니다”, “3은 2보다 크고 1+2와 같다”등과 같은 지식들이다.  이 지식은 가장 명백하고 확실한 지식으로서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과 같이 직관적으로 주어진 지식이다.  다음 단계의 지식은 정신이 두 관념의 일치 혹은 불일치를 다른 관념들의 중재를 통해 지각하는 경우인데, 이것을 논증적 지식이라고 부른다.  이 지식은 비록 확실하긴 하지만, 그렇게 쉽게 획득되지 않는다.  그 지식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요구된다.  논증의 각 단계가 직관적인 명증성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일치에 관한 명증적인 지각이 없이는 어떤 새로운 지식도 산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각적 지식은 단지 명목상 지식이란 이름을 가질 뿐 직관적 지식과 논증적 지식에 비하면 그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는 지식이다.  개별적인 외적 대상에 관한 감각적 지식은 상대적이고 우연적인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감각적 지식은 진정한 의미의 지식이 아니다.

5) 로크의 합리론적 요소

로크가 모든 인식이나 신념이 경험으로부터 생겨난다고 지적한 점에서는 경험론자임에는 틀림이 없고 또한 인식론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은 그의 공적이다.  그러나 사실 그는 실질적인 인식론을 제공하지도 못했고, 또한 실질적인 의미의 경험론자도 아니다.  말하자면 로크는 모든 인식의 기원이 경험이라고만 주장했을 뿐, 실지로 경험으로부터 인식이 생겨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데카르트적인 전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질적인 의미의 경험론자가 되기 위해서 로크는 ‘경험이 바로 인식’이라는 주장을 철저하게 고수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런 입장을 고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상 경험론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다.  로크의 이런 입장은 다음의 몇몇 사실들에서 나타난다.  첫째, 로크는 경험을 외적 경험인 감각과 내적 경험인 반성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반성을 인식과정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감각경험이 바로 인식이라는 철두철미한 경험론자로서의 면모를 상실하고 있다.  둘째, 로크가 물질의 제1성질과 제2성질을 구분하는 것은 이미 경험론자로서의 입장을 떠나고 있다.  우리의 경험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제1성질들의 미지의 담지자는 인정되지 말아야 한다.  셋째, 로크가 지식의 등급을 나누면서 직관적 지식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보고, 감각적 지식을 우연적이고 불확실한 지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미 경험론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이와 같은 로크의 불충분한 경험론적 입장을 실질적인 의미의 경험론으로 끌고 가려고 한 사람이 버클리이다.



2. 버 클 리

1) 존재는 지각됨이다

버클리의 경험론적 입장은 로크가 구분한 물체의 제1성질을 제2성질로 환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로크는 물체의 제1성질을 인정함으로써 그 물체가 우리의 경험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런 입장은 진정한 경험론의 토대 위에서는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왜냐하면 진정한 경험론의 입장에서는 어떤 물질적 세계도 나에게 경험되지 않는 한, 어떤 독립적 존재성격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크의 입장은 이런 의미에서 보면 데카르트의 전통 속에 머무르고 있다.  로크에 있어서 색, 맛, 냄새 같은 제2성질은 지각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모양, 크기와 같은 제1성질은 지각됨이 없이, 그와 무관하게 물체자체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버클리는 물체의 모든 성질은 모두 나에게 지각됨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  말하자면 물체의 제1성질과 제2성질을 구분하는 자체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지각된 물체의 모양이나 지각된 물체의 색이 같은 성질의 것이며 서로 분리되어 설명될 수도 없다.  따라서 버클리에 있어서 물체는 한갓 허구(fiction)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이 나에 관계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말하자면 물체는 지각하는 주체인 정신에 의해 지각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버클리는 ‘존재는 지각됨이다’(esse est percipii)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버클리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버클리가 물질세계의 존재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물체가 나에게 지각 혹은 경험되지 않고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경험되지 않은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독단론이나 로크의 소박한 경험론이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물체도 그것이 나에게 지각되어 나의 관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한,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며, 이것을 우리는 ‘주관적 관념론’(subjective idealism)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지각의 다발로서의 관념

개체와 보편관계에 대한 영국 경험론의 공통적 입장은 유명론이다.  이것은 중세의 오캄에서부터 로크에 이르기까지 지탱된 입장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입장이 버클리에 와서는 더욱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떤 추상적인 관념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 속의 모든 것의 본질은­지각의 주체인 인간이나 신을 제외하고는­그것이 지각되는 것 속에서 구성된다.  예를 들어 하나의 ‘꽃’이란 관념은 그 꽃에 대해 지각된 내용의 다발에 한갓 ‘꽃’이란 이름을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꽃’이란 관념은 꽃에 대한 지각내용인 여러 감각자료들의 총체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버클리는 감각내용과 관념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우리가 개별적 감각내용에 주의력을 기울이는가 아니면 관념에로 주의력을 기울이는가 하는데에 따라 구별할 수 있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이처럼 어떤 추상적인 관념도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감각내용들에로 환원될 수 있다는 유명론적 입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모든 인식은 결국 감각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경험 이외의 다른 인식작용을 매개로 인식이 구성된다고 생각하기를 철저히 거부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로크가 내적 경험으로 부른 반성이란 인식작용은 버클리에 있어서는 한갓 필요없는 과정이다.

3) 버클리의 딜레마

버클리는 물체의 제1성질을 모두 제2성질로 환원시키고, 물체가 나의 정신에 의해 지각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물질 세계의 존재가 나의 정신에 의존하고 있다는 이런 입장은 유아론(solipsism)의 입장에 빠지게 된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체(육체)를 서로 무관한 것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정신과 육체사이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버클리 역시 로크의 소박한 입장을 극복하려 했던 입장이 결국 스스로 유아론에 빠지게 되는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버클리는 스스로 유아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람 그리고 신을 끌어들이고 있다.  말하자면 나에게 지각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 지각됨으로써 존재하고, 나와 다른 사람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 것은 무한존재인 신에 의해 지속적으로 지각됨으로써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험론적 입장에서 출발한 버클리의 철학은 결국 물질적 존재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정신적 존재의 실재성만 인정하는 형이상학적 유심론(spiritualism)으로 귀착한다.  그리고 물질적 존재의 실재성을 주관적 관념의 실재성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는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을 띤다.  또한 버클리는 소위 유아론(solipsism)적 입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성직자로서 신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버클리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끌어들인 신이란 개념은 결코 중세적인 의미의, 즉 창조주 혹은 구세주로서의 신이란 개념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버클리의 신은 자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요청된 철학적 전제라는 성격이 짙다.


3. 흄

1) 인상과 관념

로크, 버클리를 이어 보다 경험론적 측면을 더욱 계승시켜 나간 사람이 흄(D. Hume, 1711~76)이다.  흄이 로크나 버클리보다 더욱 경험론적 측면을 강하게 띠고 있는 것은 그가 모든 인식의 기원을 인상(impression)에 두고 있는 점이다.  이 인상이란 의미하거나 모호한 지각이 아니라 매우 강렬하고 뚜렷한 지각을 의미한다.  즉 흄은 우리의 모든 인식은 어떤 희미한 경험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뚜렷하게 경험될 때 비로소 형성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 인상이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정신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관념(idea)이다.  이 인상과 관념은 항상 서로 상응한다.  이 인상과 관념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강도(force)나 선명도(vivicity)의 차이일 뿐, 다른 점에서는 유사하다.  말하자면 인상이 매우 강렬한 것인데 반해 관념은 인상에 비해, 그 강도가 약하다는 차이 외에는 어떤 다른 점도 없다.  이처럼 흄 역시 로크나 버클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추상적인 관념은 결국 개별적인 감각 내용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명론적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흄은 로크나 버클리의 경우보다 더 강한 경험론적 경향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사실을 통해서 드러난다.

2) 회의론적 입장

모든 인식은 관념과 관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예를들어 ‘이 꽃은 붉다’라는 인식은 ‘꽃’이라는 관념과 ‘붉음’이라는 관념이 결합된 것이다.  그런데 흄은 이 관념과 관념의 결합이 로크의 경우처럼 오성의 능동적 작용(반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수동적인 연상작용에 의해 설명한다.  흄은 그 당시에 유행했던 연상심리학을 끌어들여 인식의 과정을 설명하려고 한다.  흄은 철저한 경험론자로서, 즉 경험=인식이라고 믿는 자로서, 경험에서 인식이 구성되는 과정 속에 어떤 경험 외적인 작용을 개입하기를 철저히 거부한다.  따라서 관념과 관념의 결합도 경험심리학의 관점에서 연상작용에 의해 설명한다.
흄은 관념의 결합법칙을 유사성(resemblance), 시간 혹은 공간에 있어서의 근접성(contiguity), 원인과 결과(cause and effect)라는 인과성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그는 인식이 어떤 논리적 필연성에 의해 구성되는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심리적 연상, 즉 반복적 경험에 의한 기대나 누적된 기억에서 파생된 신념(belief) 혹은 습관(habit)에 의해 결합된 우연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흄은 로크와 마찬가지로 복합관념을 관계, 양상, 실체로 구분하지만, 이것이 로크에서처럼 어떤 오성적 작용에 의해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연상적 작용에 의해 결합된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관계’라는 복합관념, 특히 인과관계 역시 일종의 신념적 결합의 유형이다.  우리가 불이 붙고 연기가 나는 것을 공간적으로 근접해서 그리고 시간상 계기적으로 여러번 반복해서 경험한다.  이런 반복된 경험을 토대로 우리는 습관적으로 ‘불이나면, 연기가 난다’는 식으로 마치 불이 원인이고 연기가 결과인 것처럼 결합한다.  그러므로 이 불과 연기 사이에 어떤 필연적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이고 개연적인 연관성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흄은 인과관계를 근거로 이루어진 모든 인식은 어떤 객관적 근거도 가질 수 없다는 회의론적 입장에 이르게 된다.
또한 양상이나 실체도 단순관념의 우연적인 결합물에 지나지 않는다.  흄은 특히 모든 실체라는 복합관념은 개별적 감각경험의 다발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물리적 실체뿐만 아니라 정신적 실체 역시 지각의 다발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흄은 인상에 대응하지 않는 어떠한 단순 혹은 복합관념도 그 실재성을 가질 수 없다는 철저한 경험론자로서, 결국 버클리가 부정한 물질의 실재성뿐만 아니라, 정신의 실재성마저 부정하는 데까지 이른다.
지금까지의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에 대한 논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대륙의 합리론자들은 인식의 엄밀한 체계성만을 독단적으로 강조하는 독단론에 빠지고 만데 반해, 영국 경험론자들은 인식의 내용만을 과대 평가함으로써 결국 회의론적 상대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 양 입장은 모두 극단적인 것으로서 지양되어야 함이 시사되고 있다.  라이프니쯔는 ‘이성의 진리’ 못지 않게 ‘사실의 진리’를 중요시하고 경험의 확실성과 실증성을 요구하였으며, 흄 역시 경험이 바로 인식일 수 없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칸트는 이 양 극단을 지양하는 입장에서 출발하게 된다.  인식의 형식적 체계성만을 강조하는 합리론자들이 거미와 같고, 인식의 내용만을 과대평가하는 경험론자들이 개미와 같다면, 칸트는 꿀벌과 같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칸트를 통해 인식이라는 하나의 빵아 어떤 일련의 구체적인 공정을 통해 비로소 만들어지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제4절 칸트의 비판철학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론은 회의론으로, 그리고 수학적 방법으로서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론은 독단론으로 빠지고 말았다.  칸트는 이러한 경험론과 합리론의 문제점을 제거하고 감성과 오성을 결합함으로써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하려고 했다.  이제 양자의 모순이 제거되고 진정한 인식이 성립할 수 있는가?  즉 감각만으로도, 또한 이성만으로도 진정한 인식이 성립될 수 없다면 과연 양자의 종합에 의해서는 가능한가?  그렇다면 이 양자는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며 각각은 어떠한 기능을 수행하는가?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참된 인식이 가능한가?  더 나아가 이러한 인식의 과정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설사 정당화된다고 하더라도 대상 그 자체를 알 수 있는가?  또는 그 대상이 어떻게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를 중심으로 이제 칸트의 철학을 이해해 보도록 하자.


1. 순수이성비판

칸트는 처음에는 라이프니쯔와 볼프의 영향을 받아 합리론적 입장에서 있었지만, 그 자신 흄에 의하여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술회하고 있다.  칸트는 우선 일차적으로는 철저하게 경험론의 입장에서 출발한다.  「모든 인식은 경험에서 시작되며 경험의 범위 내에 머문다」.  그러나 그는 흄처럼 「모든 인식은 경험에 의한다」고 하여 자연과학의 확실성을 의심할 수도 없었으며 또한 모든 형이상학의 설립을 단념할 수도 없었다.  자연과학적 인식의 확실성은 이미 뉴턴의 물리학에 의하여 사실로서 확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칸트의 비판철학의 근본의도는 수학이나 자연과학과 같이 이미 사실로서 확립되어 있는 학적인식의 근거를 밝힘으로써 자연과학적 인식의 보편타당성을 정초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연과학처럼 하나의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설립여부를 밝혀 보자는 데 있었다.  그래서 칸트는 ① 「순수수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② 「순수자연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③ 「어떻게 형이상학 일반은 가능한가」 ④ 「어떻게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가능한가」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들이 곧바로 ꡔ순수이성비판ꡕ을 구성한다.  ①은 「선험적 감성론」에서 ②는 「선험적 분석론」에서 ③은 「선험적 변증론」에서 ④는 「선험적 방법론」에서 각각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칸트는 앞선 두 문제제기를 다시 「어떻게 선천적 종합판단은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바꾸어 제기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즉 그는 모든 판단을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으로 나눈다.  분석판단이란 술어개념이 주어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는 판단으로서 한편 「설명판단」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판단은 주로 해명적 역할밖에는 못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인식은 조금도 확장시켜 주지 못한다.  그러나 종합판단이란 주어개념에다 주어개념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술어개념을 첨가해 주는 판단이다.  그러므로 이 판단은 「확장판단」이라고도 하며 특히 학문적 인식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만약에 이때 종합판단이 경험판단이라면 그 판단은 결코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 종합판단이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기 위해서는 선천적 종합판단이 아니면 안된다.
한편, 수학과 자연과학의 제명제를 살펴 볼 때, 「7+5=12」라고 하는 수학적 명제, 「직선은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이다」라고 하는 기하학적 명제, 또는 「물체적인 모든 변화에 있어서 물질의 양은 일정불변이다」라고 하는 자연과학적 명제는 모두가 종합판단이면서도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지기 때문에 선천적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선천적 종합판단이다.
이와같이 해서 수학적, 자연과학적 여러 명제가 곧 바로 선천적 종합판단이 되니까, 「순수 수학이나 순수 자연과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은 당연히 「선천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칸트는 순수수학이나 순수자연과학의 가능근거의 해명은 결국 선천적 종합판단의 가능근거의 해명에 달려 있다고 보고 이 물음을 「순수이성의 일반적 과제」로서 제시했다.

1) 선험적 감성론

우리의 모든 인식은 경험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경험은 대상이 우리의 심성을 촉발함으로써 비롯된다.  이때의 촉발체는 물자체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경험적 질료로서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능력 즉 감수성을 감성(Sinnlichkeit)이라고 한다.  이 감성이 대상에 의해서 촉발될 때 거기에 다양한 감각적 표상이 생기게 된다.  이와 같이 감각적 표상이 일정한 현상(Phänomenon)으로서 성립되기 위해서는 이 잡다한 무규정적 소재를 규정할 수 있는 형식을 우리의 감성이 이미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이 형식이 공간과 시간이다.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은 현상일반의 순수한 직관형식이다.  더군다나 공간은 대상이 현상할 수 있는 지평으로서의 외적경험 즉 외감형식이고, 시간은 모든 표상을 우리의 의식 내에서 질서있게 통일하는 내적경험 즉 내감형식이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대상은 항상 일정한 공간과 시간에 있어서 주어진다.  우리의 모든 감각적 표상이 성립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공간, 시간의 표상이 대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마련되어 있다.  만일 그렇지 않고, 공간, 시간이 경험적 후천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대상을 공간과 시간은 제거하고도 표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시간, 공간은 우리 직관의 선천적이고 필연적인 형식이 아닐 수 없다.
칸트는 여기에서 동시에 「수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설명하고 있다.  수학은 경험주의 입장에서는 확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수학적 진리는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져야 하는데 만약에 수학이 실증적 경험에서 도출된다면 그의 타당성은 경험적 상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경험보다 앞서 선천적 공간과 시간이 직관형식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에 기하학은 선천적 형식으로서의 공간이 가지는 성질 즉 장소적 병존을 선천적 종합적으로 한정하고 구성하는 「학」으로서 성립하는 것이며, 또한 수학이나 역학은 시간이 가지는 계기 다시 말해서 운동이나 변화를 선천적 종합적으로 구성하는 「학」으로서 성립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간과 시간의 선천적 형식에서 비로소 선천적 종합명제로서의 순수수학이 가능하다.

2) 선험적 분석론

공간과 시간이라고 하는 직관형식에 의하여 잡다한 감각적 표상이 질서있는 현상으로 성립된다고 해도 아직 직관에는 감각적 다양성이 남아 있으므로 그것은 참된 인식이 될 수 없다.  인식으로서의 경험은 대상을 단지 직관이라고 하는 감성적 수용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오성에 의해서 그 대상일반을 자발적으로 사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그 대상을 하나의 개념에로 종합통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개념의 능력이 곧 오성(Verstand)이다  칸트는 이 오성의 선천적 형식을 순수오성개념 또는 범주(Kategorie)라고 했다.  그리하여 결국 학적 인식 즉 자연과학, 다시 말해서 선천적 종합판단은 감성이 공간, 시간이라고 하는 그의 선천적 형식을 통하여 받아들인 직관의 다양성을 다시 오성이 그의 선천적 형식인 범주에 의하여 종합통일하는 데서 성립한다.
칸트는 범주를 12판단형식에 따라 1)양의 범주(단일성, 수다성, 총체성) 2)질의 범주(실재성, 부정성, 제한성) 3)관계의 범주(가능성, 현실성, 필연성)로 나누었다.  이 범주는 감성이 우리에게 준 인상의 잡다를 규정하고 통일하여 사유된 대상으로 구성하는 규칙이다.  그래서 인식이란 감성적 직관과 그 직관에 의하여 수용된 것을 개념화하는 오성적 사유와의 종합이다.  따라서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며, 직관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개념과 직관, 즉 오성과 감성은 어떻게 상호 관계하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양자가 전혀 별개의 것이라면 어떻게 개념이 객관적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칸트는 8년간의 고생 끝에 이 범주의 선험적 연역을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감성과 오성 사이에는 「나는 생각한다」(Ich denke)는 표상을 생기게 하는 통일적 자아 즉 자기의식으로서의 통각(Apperzeption)이 있다.  다시말해서 오성의 기능은 판단이요, 이 판단은 대상에 대한 판단이요, 이 판단의 형식이 범주인데, 이때 이 범주에 의해서 대상으로서 구성될 수 있는 통일된 감각적 소재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통각이다.  즉 통각의 성립은 대상이 될 수 있는 내용이 성립하는 것이며, 이때 이 통각의 내용이 대상으로 구성될 수 있도록 매개하는 것이 범주다.  그러니까 범주는 이 통각에 의해서 비로소 대상의 내용을 얻어 올 수 있으며, 또한 범주는 이들 대상을 구성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들에 의하여 비로소 대상들을 개념적 인식의 대상으로 구성할 수가 있다.  
그러나 과연, 구체적 현실적으로 어떻게 해서 감성의 선천적 형식이 직관의 다양을 종합하며, 또 이 통각의 내용을 범주가 다시 개념적 인식의 대상이 되게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의 구상력(Einbildungskraft)이다.  그리고 이 구상력에는 감성적 각지(覺知)의 종합과 오성적 개념사이에 있는 재현의 종합으로서의 협의의 구상력과, 통각작용으로서의 산출적 구상력이 있다.  바로 이 산출적 구상력의 소산이 도식(Schematismus)이다.  
범주 그 자체는 대상일반에 대해서 순수한 사유형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감성적 소여의 다양을 포섭하지 않으면, 즉 통각에 의존하지 않으면, 공허한 무내용에 빠지게 되며, 특정한 경험적 대상을 인식(구성)할 수가 없다.  범주는 이와 같은 실현을 위하여 감성적인 대상 즉 현상에의 적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편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범주가 감성의 선천적 형식(시간, 공간)적 조건에 제약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그 조건이 선험적 도식이다.  도식이란 한편은 감성적인 조건이기 때문에 직관은 비록 그 자체는 형식으로서 다양의 결합은 하지 않지만, 이 도식에 의하여 오성에 제약되고 또한 개념인 범주는 감성에 제약된다.  그런데 이 도식은 구상력의 소산이다.  결국 직관은 구상력을 통해 개념화되고 또한 반대로 범주는 이 구상력을 통해서 직관화된다.
그런데 특수를 보편에 포섭하는 능력이 판단력이기 때문에 결국 구상력의 소산인 도식을 통해서 감성과 오성을 구체적으로 종합하는 것은 판단력이다.  즉 어떤 규준에 따라 범주를 현상에 적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판단력이다.  그리고 또 이 적용의 선천적 원칙을 밝힌 「원칙론」이 다름아닌 판단력의 선험적 이론이다.  그러므로 이 원칙론의 근본은 다음과 같은 최고원칙에 있다.  「모든 대상은 가능적 경험에 있어서의 다양한 직관의 종합통일의 필연적 제약에 속한다.」  이는 모든 경험의 근저에는 이 경험을 필연적으로 제약하고 또한 현상 즉 직관의 다양을 종합통일하는 규칙이 있음을 말한다.  이 규칙에 의해 비로소 대상인식이 가능하게 되며 또한 이 인식에 의하여 대상이 구성되기 때문에 그 인식은 그 대상에 대해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선천적 종합판단이 성립하게 된다.
칸트는 이와 같이 해서 「선천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수학이나 자연과학을 범례로 삼아, 인식과 대상과의 관계를 종래와는 달리 생각하는 이른가 「사고방식의 변혁」에 의해 해결했다.  즉 우리의 모든 인식이 대상을 받아들이거나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바로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Kopernikanische Wendung)에 비유했다.

3) 선험적 변증론

오성의 선천적 형식이 범주의, 즉 판단에 의한 규칙의 능력인 오성의 작용을 근본적으로 그의 원리에서 통제하는 능력이 또한 오성의 배후에 있다.  그것은 이성이다.  이 이성은 오성이 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도록 통제한다.  그러나 이성에는 오성을 통제하는 제약적 역할 이외에 무제약자를 대상으로 추리하여 가상체(可想體)를 향하는 구성적 역할도 한다.  그러나 가상체는 어디까지나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이념(Idee)으로 밖에 파악될 수 없다.  이 이념은 무제약적 주체다.  칸트는 이러한 이념으로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가 사유하는 주체의 절대적 통일로서의 마음, 둘째가 현상적 세계의 절대적 통일의 이념 즉 세계, 셋째가 이와 같은 주체 및 세계의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신의 이념이다.  그러나 이들은 감성과 오성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서 다만 이론이성에 부과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을 추구하면 현상과 경험의 범위를 넘어선 가상(Schein)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이성은 오류추리나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
첫번째의 마음이나 자아는 본래가 주체적인 것으로서 인식의 제약으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과거의 형이상학은 이것을 사변적 객체 즉 하나의 실체로서 파악했다.  실체란 사실 주체가 아니라, 생각되고 파악된 자기 즉 하나의 인식대상에 불과하다.  여기에 하나의 혼동이 있다.  칸트는 이것을 추론의 오류에서 오는 순수이성의 잘못으로 돌렸다.
두번째의 무제약적 전체통일의 이념을 세계에 적용할 때에도 여전히 모순이 생긴다.  왜냐하면 현상은 본래가 유한하며 세계는 인과계열에 제약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이 이것을 무제약자로 통일하려고 하면 거기에 유한과 무한이라고 하는 상반된 규정이 동시에 나타나게 되어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
특히 칸트는 범주표에 의해 네개의 이율배반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은 양립의 모순은 결국 공간과 시간 중에 존재하는 세계를 주관의 인식능력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자체의 세계로 잘못 생각하는 데서 생기게 된다.  세계는 인식주관의 통일과 종합에 의한 구성에서 성립된다.  그러나 주관의 세계구성은 세계전체의 구성이 아니다.  세계전체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전체를 구성하고 인식할 수 있다고 전제함으로써 우리의 이성은 이율배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이 신의 이념이다.  칸트는 이 최고의 이념을 이성의 이념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신존재 증명의 대표적인 것을 셋으로 분류하여 이들 논증을 하나 하나 비판했다.  즉 존재론적 신증명은 논리와 실재를 혼동한 것으로 우주론적 신증명은 감성계에만 적용되어야할 인과의 범주를 예지계에까지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자연의 합목적성에서 신을 증명하려는 자연신학적 증명도 또한 위와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결국 이성은 통제적이어야만 하지 결코 구성적일 수는 없다고 하여 칸트는 이론이성의 모든 이념을 끝내 유보시키고 말았다.


2. 실천이성비판

칸트의 형이상학에의 탐구는 ꡔ순수이성비판ꡕ에서 그치지 않았다.  거기에서는 이론이성의 능력과 한계가 밝혀졌을 뿐, 아직도 실천이성의 세계가 남아 있다.  자유, 영혼, 신과 같은 초경험적 이론을 다루어 온 전통적 형이상학은 적어도 이론적 인식으로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칸트는 다시 실천적 관점에서 이 과제에 대한 적극적인 해답을 찾았다.  물자체도 이론이성의 대상으로서는 다만 부과된 이념에 그치고 말았지만 아직도 인간이성이 실천적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해결해야할 일이 남아 있다.  「신앙에 자리를 주기 위해 나는 지식을 지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 칸트의 말대로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도덕 및 종교의 세계가 아직도 남아 있다.  
도덕 및 종교의 세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선험적 자유에서 실천적 자유에로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자유란 본래가 인과율이 지배하는 현상계가 아니라 주체적인 자아에 있다.  이 주체적 자아의 본질은 자발적으로 자기를 결정하여 실천적 주체성을 확립하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 자유는 우선 스스로 즉 자발적으로 사건의 계열을 시작하기 위해 모든 시간규정으로부터 초월해야 하고, 다음으로 어떤 시간에 임의로 작용하여 현상계 즉 현실에 자기행위의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실천적 자유다.  여기서 이성은 이론적 사용에서와 같이 통제적 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성적 원리가 되어 대상에 대하여 스스로의 인과성을 가진다.  즉 자기법칙의 내용을 스스로 결정한다.  이것은 시간에 제약된 인과율과는 다른 이성의 명령(Imperativ)이요 당위이다.
이렇게 해서 자유는 도덕률의 제약 즉 그의 존재근거가 된다.  도덕률을 위해서는 자유뿐만 아니라 신과 영혼의 불멸성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론이성의 범위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도덕률을 위해 요청(Postulat)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이나 불사성의 이념은 도덕률에 규정된 의지에 주어지는 대상의 제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인간은 자유를 직관할 수 없다.  소극적 개념인 선험적 자유에서 적극적인 실천적 자유에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그 자유의 인식근거가 필요하다.  바로 이 자유의 인식근거가 도덕률이다.  즉 도덕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의 존재근거로서의 자유가 있어야 하고 자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식근거인 도덕률을 알아야 한다.
칸트의 도덕률은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펀적인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라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바꾸어 말하면, 「너의 인격과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의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고, 결코 다만 수단으로서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하라」는 것이 된다.  이들은 실천이성의 근본법칙이다.  그런데 이 도덕률은 자유없이는 결코 성립될 수 없으며 자유는 또한 이 자율적 주체적인 도덕률 없이는 인식될 수가 없다.
과거의 실천윤리는 행복을 그의 주내용과 목적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행복의 원리는 대상이 주관에게 가져다주는 쾌, 불쾌의 감정을 의지의 규정원리로 삼기 때문에 질료적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은 사람들 각자의 주관에 따라 상이한 경험적인 것이어서 결코 보편타당적인 실천법칙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각개인의 본능이나 경향성과 같은 저급한 욕구능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타율에 그치고 만다.  이와는 반대로 도덕률이란 모든 이성적 존재가 지니는 선천적, 보편적, 필연적인 것으로서 주체적 이성이 어떤 구체적 내용에 구애됨이 없이 다만 형식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정립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이것은 감성적 실천적 내용에 구애됨이 없는 순수의지, 자유의지요 자기에게 법칙을 부여하는 자율적 의지다.  이것은 순수이성의 유일한 사실이며 만인에게 타당한 보편적 법칙 또는 입법으로 모든 상대적인 실질적 주관적 준칙(Maxime)과는 구별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언적 명법(hypothetischer Imperativ)이 아니라 정언적 명법(kategorischer Imperativ)이다.
이와 같은 정언명법으로서의 도덕률은 당연히 행위의 객관적인 강제로서 당위의 형식을 띠게 된다.  유한한 인간은 이성을 의지의 유일한 규정원리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의 의지는 책임과 의무에 종속하게 된다.  그러나 도덕률, 당위, 책임, 의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역시 자율이, 그리고 이들이 수행되기 위해서는 자유가 요청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현실세계에 있어서 덕과 행복의 불일치는 내세 즉 영혼의 불사성과 절대자인 신의 존재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


3. 판단력 비판

지금까지 살펴 본 칸트의 두 비판서는 결국에 가서는 다시 또 극단적인 대립을 가져오고 말았다.  현상과 물자체 즉 감성적 세계와 초감성적 세계, 필연과 자유 즉 자연의 영역과 도덕의 영역, 자연계와 예지계, 인식의 세계와 실천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칸트는 이 대립된 두세계를 자연의 합목적성으로 설명한다.  ꡔ순수이성비판ꡕ에 있어서의 판단력이란 특수를 보편에 포섭하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범주를 통각의 내용이나 심지어는 감성의 세계에까지 적용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범주와 같은 규칙, 원리, 법칙이 보편으로서 미리 주어져 있기 때문에 판단력은 이들 특수를 다만 한정하기만 하면 된다.  이와 같은 한정적 판단력은 독자적인 원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수만이 주어져 있고 그것을 포섭할 수 있는 보편이 주어져 있지 않을 때, 그 보편을 발견하는 것이 반성적 판단력이다.  그러니까 반성적 판단력은 자기의 원리를 스스로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서 자연현상은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많은 경험적 법칙이 성립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와 같은 경험적 법칙을 통일하여 체계지울 수 있는 보다 높은 원리가 선험적으로 요구된다.  이것을 찾아내는 것이 반성적 판단력이다.  이 반성적 판단력에 의해서 발견된 것이 자연의 합목적성이다.  그러나 이 선천적 원리는 반성적 판단력이 발견해서 사용하는 원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자연의 합목적성이란 어디까지나 반성하는 주관에 있어서만 성립된다.
자연의 합목적성을 나타내는 첫번째의 것은 미의 대상이다.  미란 자연이 판단력의 원리에 합치할 때 수반되는 쾌감이다.  그러므로 미는 하나의 자연적 대상에 대한 주관적 형식적 합목적성이며 현상에 있어서의 자유이다.  여기서는 대상의 존재에 대해 욕구하거나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대상의 표상에 관한 판단력자체의 조화의 쾌감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미란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도 보편적인 쾌감과 만족을 줄 수 있는 주관적 보편성이다.  더군다나 미는 어떤 의지가 특정의 목적을 가진 흥미나 관심이 아니기 때문에 이때의 합목적이란 목적 즉 특정한 의도가 없는 합목적성이다.
자연의 합목적성을 나타내는 두번째의 것은 자연에 있어서의 유기적 생명이다.  미는 어디까지나 주관적 감정적 합목적성이지만 유기적 생명은 객관적 내용적으로 파악된 합목적성이다.  모든 생물은 자연 목적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전체는 각부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성립되는 동시에 역으로 전체가 각부분의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관계이다.  생물은 바로 이런 존재이다.  그러나 자연의 모든 합목적성도 그 사실에 있어서는 우연한 유기적 조직체에 불과하다.  다만 반성적 판단의 원리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합목적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의 유기적 인과성과 합목적성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인간이성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스스로가 원인이고 결과인 유기체나 심지어는 모든 자연현상까지를 유기적 인과성으로도 볼 수 있고 합목적성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하튼 주관적 합목적성인 미나 객관적인 유기체 즉 자연목적을 우리는 보다 높은 자연의 목적으로 통일하여, 전우주 곧 전자연을 수단으로 체계화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의 입법자요 도덕의 주체로서의 우리 인간이 끝내 주관적으로 정립하는 궁극목적 아래에서 이러한 관계화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칸트에 있어서 필연과 자유의 근원적 통일이 원리적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끝내 필연과 자유의 근원적인 통일을 확립하고자 하는 시도는 피히테, 셀링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관념론으로 전개된다.



제5절  독일의 관념철학


칸트철학은 한편으로는 경험과학의 방법적 원리를 확립하여 회의론과 낡은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방법적 원리의 자기한정에 의하여 경험과학을 초월하는 영역에서 인간의 실천의 근거를 확립함으로써 근세적 인간이성의 합리적 자각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면 칸트철학의 결점은 인간의 두 사실적 세계 즉, 자연계와 도덕계, 감성계와 초감성계를 다만 병렬적으로 정립했을 뿐이지 이들 사이에 하등의 통일적 연관을 찾아내지 못한데 있다.  칸트 자신이 이 점을 분명히 자각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판단력 비판』에서 자연계와 도덕계, 필연과 자유의 왕국을 종합, 통일하려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종합도 결국에 가서는 참된 종합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이 두세계 사이에 목적의 왕국이라고 하는 제3의 세계를 설정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피히테, 셀링,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관념론 철학자들은 이 감성계와 초감성계 즉, 필연과 자유의 세계를 통일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피히테는 이론이성과 실천이성 위에 이 둘을 결합하고 통일하는 주체로서 절대적 자아를 유일한 실체로 정립하고 세계를 자아의 도덕적 활동의 소재(素材)로 보는 주관적 관념론을 수립했다.  그리고 셀링은 다시 피히테에서 출발하는 ‘절대적 자아’는 어디까지나 ‘절대자’인 만큼 자아와 비아,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는 무차별자(Indifferenz)라야 된다고 했다.  그리고는 예술적 활동이야말로 절대자의 참다운 계시(Offenbarung)라 하여 객관적 관념론을 수립했다.  다시 또 헤겔은 셀링 비판에서 출발하여 상대자와 대립되는 절대자를 상대적 절대자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참 절대자는 모든 차별과 대립을 심지어는 모든 상대자를 자기 안에 포괄하여 자기발전, 자기완성의 변증법적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절대자 즉 절대정신이라고 하는 절대적 관념론의 체계를 완성하였다.
1. 피히테(J. G. Fichte)

1) 지 식 학

피히테는 ꡔ지식학에의 제일서론ꡕ에서 “나의 철학체계는 칸트의 체계 이외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어서는 그는 “칸트는 어디에서도 모든 철학의 기초를 다루지 않고 ꡔ순수이성비판ꡕ에서는 다만 이론철학을… 그리고 ꡔ실천이성비판ꡕ에서는 다만 실천철학은 다룬 데 불과하다.” 고 말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피히테의 지식학의 의도는 근본적으로 칸트철학을 계승하면서 다만 칸트가 이루지 못한 모든 철학, 즉 학문의 기초를 탐구함으로써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통일하려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피히테는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체계의 구성을 ‘이론의 실천에의 종속’ 즉, 이론적 자아의 실천적 자아에의 종속에서 찾았고, 이 체계의 바탕이 될 수 있는 모든 학문의 기초는 지식학의 제일 원칙으로 정립된 ‘절대적 자아’에서 찾았다.
피히테의 절대적 자아의 철학은 주관적 관념론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자신의 철학은<지식학(Wissenschaftlehre)>라고 규정하였다.  지식학이란 모든 학문의 학문 즉 학문 일반의 학문으로서 바로 철학을 가리킨다.
학문을 구성하는 지식은 주관과 객관의 두 요소로 성립된다.  피히테에 의하면 객관을 지식의 근거로 삼는 것은 독단론이고 주관을 지식의 근거로 삼는 것이 관념론이라 한다.  독단론에는 큰 결함이 있다.  독단론은 자아를 사물에 종속시키려 하는데 물 자체(Ding-an-sich)는 의식 속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것은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사물은 어디까지나 사물이며 나의 표상이 될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관념론에 있어서는 외적 대상이 자아를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아는 자아의 의식 밑에 일체를 통일하고 체계화, 법칙화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은 모든 것을 자아를 원리로 하여 자아에서 도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지식학은 모든 명제를 자아라고 하는 최고 원리에서 도출하게 된다.
지식학의 제일 근거가 되는 명제는 “자아는 근원적으로, 단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최고원칙은 근본 명제이기에 다른 것을 통하여 증명이나 규정될 수 없는 명제이다.  그것은 경험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가능케 하는 근거이다.  이 명제는 일반적으로 논리학의 동일률에서 도출된다.  동일률 즉 ‘A는 B다’라는 명제는 경험과 관계없는 의식의 사실로서 보편적으로 승인된다.  즉 ‘나는 나다’라는 명제는 자아가 자아 내에서 자아를 스스로 정립한다는 것으로서 자아의 주체적 능동성을 표명한 제일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이 때의 자아는 사실(Tat)인 동시에 활동(Handlung)이다.  다시 말해서 자아는 활동의 주체인 동시에 활동의 소산이기도 한 것이다.  피히테는 이러한 자아의 사실성과 활동성을 종합하여 사행(事行 Tathandlung)이라 부른다.
지식학의 제이 근거가 되는 근본 명제는 “자아에 대하여 단적으로 비아가 반정립된다”는 것이다.  1의 명제와 마찬가지로 2의 명제도 그 내용을 제거하면 ‘비A는 A가 아니다’라는 논리적 명제가 성립된다.  전자에서 실재성의 범주가 도출된다면 후자에서는 부정성의 범주가 도출된다.  이와 같이 정립(These)과 반정립(Antithese)은 종합(Synthese)으로 전개된다.
제일과 제이의 명제를 종합한 제삼의 명제는 “자아는 자아 속에 가분적(可分的) 자아에 대하여 가분적 비자아를 반정립한다”는 명제이다.  이 명제의 내용을 제거하고 형식만 취한다면 ‘A는 일부분은 A이고 일부분은 비A이다’라는 논리적 명제가 도출된다.  여기선 한정성의 범주를 얻게 되며 아울러 이러한 정립-반정립-종합의 모델은 헤겔에게 이르러 변증법의 모티브가 되는 것이다.
피히테는 대상(Gegenstand)을 어떤 주체적 활동에 ‘거역하면서 대항해서 서 있는 것‘이라 해석한다.  그러므로 자아의 활동이 전제되지 않은 대상은 불가능한 것이다.  자아의 활동이 대상의 가능성의 근거이다.  그러므로 실천적 자아가 이론적 자아의 근거가 된다.  피히테는 칸트의 이론이성에 대한 실천이성의 우위사상을 철저히 밀고 가서 이론적 자아가 가지는 제약을 넘어서서 비아를 자아 속으로 다시 흡수해 버린다.  즉 그는 칸트의 물자체를 비아로서 내면화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피히테는 이론과 실천의 칸트적 분열을 극복하고 절대적 자아의 사행 속에서 양자를 통일했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
자아는 그것이 실천적 자아가 되기 위해서 비아의 세계를 극복하려 하지만 그 노력은 항상 새로운 대상 즉 비아의 세계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세계는 절대적 자아의 이상계와 유한적 자아의 현실계로 다시 분열하게 된다.  그래서 피히테는 자아가 한편으로는 무한한 절대적 자아가 되지 않으면 안되지만 또 다른 하편으로는 유한적 자아로서 비아에 의존하게 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실천적 자아의 개념 속에 절대적 자아를 이념으로 도입하여 자아의 실천이 비아의 세계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사명을 부가시켰다.  즉 절대적 자아가 되려는 노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취가 불가능한 모순 속에서 오히려 그는 이 최고의 명령적인 법칙을 “당신은 단적으로 행하여야만 한다”는 명제로 표현하였다.

2) 지식학 이후

피히테의 실천철학은 지식학을 바탕으로 윤리, 법, 국가, 종교, 교육, 역사의 분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관심은 언제나 인간의 윤리적 실천에 집중되고 있다.  특히 지식학의 원리를 실생활에 적용시키려는 저술로서는 ꡔ자연법의 기초ꡕ ꡔ지식학의 원리ꡕ에 의한 윤리학의 체계』가 있다.  전자는 법률론이고 후자는 도덕론이다.  이들의 내용은 모두가 지식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자유로운 인격과 양심에 관하여 쓴 것들이다.
1789년 이후의 피히테에게 주요한 변화가 발견된다.  그는<신의 세계 통치에 대한 우리 신앙의 근거에 대하여>라는 글로 예나 대학을 쫓겨나와 베를린으로 갔는데 그 글에서 피히테는 신이란 세계의 도덕적 질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특별한 실체로서 신이란 이성에 있어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배척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우리의 신앙은 세계 질서에의 신앙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도덕적 의무의 수행만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그러나 베를린에 간 이후 그는 도덕과 종교를 더욱 분리시켜 도덕은 자아의 엄격한 당위 즉 의무에 관한 행위를 요구하는 반면에 종교는 오히려 관용, 생명, 사랑, 복지를 그 내용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지복한 삶에의 지침』이란 종교론을 썼다.  여기에서 신은 도덕적 차원을 넘어서서 계시 존재가 된다.  인간의 최고의 과제는 실천으로 다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 귀의해야 함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 관념론에서 객관적 범신론으로 옮겨간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상은 이미 셀링과 상당한 유사성을 갖는다.  피히테는 이제 주관적 관념론의 한계를 느끼면서 셀링의 자연철학과 객관적 관념론의 저항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2. 셀링(F. W. J. Schelling)

1) 자연철학

피히테는 칸트의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절대적 자아 아래에 체계적으로 통일하여 자아가 일체라고 하는 입장에서 비아로서 자연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셀링은 칸트의『판단력 비판』에 등장하는 합목적성의 입장을 기초로 하여 자연의 존재를 긍정하는 데서 자신의 철학을 출발한다.  그것이『자연철학체계의 최초의 구상』이란 저서이다.  여기에서 자연은 피히테처럼 자아에 의해 정립된 수단이 아니라 정신의 전(前)단계이다.  
정신의 전단계인 자연을 셀링은 무기적 자연, 유기적 자연, 보편적 자연으로 구분한다.  무기적 자연과 유기적 자연을 결합시키는 자연이 곧 보편적 자연 또는 구성적 자연이다.  이 보편적 자연은 무기적 자연과 유기적 자연에 혼을 부여하는 세계령(世界靈)으로서 거기에는 또한 세계의 전상(展相)이 있다.  이러한 전상에 따라 자연은 물질, 힘, 생명이라는 계기로 나타나며 다시 힘은 자기, 전기, 화학 그리고 생명은 재생작용, 감응성, 감각성의 과정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합목적성을 바탕으로 하는 셀링의 자연관이다.

2) 초월론적 관념론

셀링에 의하면 철학에는 두 가지 방향 즉 자연철학과 초월론적 철학의 방향이 있다고 한다.  자연철학은 객관(자연)에서 출발하여 자아(정신)를 찾으려는 것이고 초월론적 철학은 주관(정신)에서 출발하여 객관(자연)을 구성하려는 방향이다.  후자를 다룬 것이 ꡔ초월론적 관념론의 체계ꡕ다.  여기서 셀링은 자아의 자각적인 부분을 이론적으로 연역한다.  자아는 수동적으로 자아를 발견하는 ‘감각’에서 출발하여 무의식적이며 생산적인 ‘직관’의 단계를 거쳐 이 직관의 작용을 추상하여 구별하는 ‘반성’으로 나아가며 마지막으로 절대적인 ‘의지’의 세계에 이른다.  이것이 순수한 자기의식의 발전사이다.  이러한 발전사 내에는 무제한적으로 작용하는 관념적인 힘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실제적인 힘이 있다.  그러나 결국 자아가 자기 의식적 행위에 의하여 표상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지작용이 생기게 되며 여기에서 이론의 실천에로의 전환이 마련된다.
의지의 실천도 세 가지 단계로 전개된다.  우선 의지는 자연충동이다.  이때의 충동이란 의지가 외적 객관을 바꾸기 위해서 충동은 자연법칙에 따라야 하며 의지의 자유는 포기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의지가 다시 자유로워지려고 할 때 순수한 자아의 요구로서 도덕법칙과 개인적 자아의 자기요구로서의 자연충동 사이에 분열이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의지는 도덕적 행위와 충동적 행위 사이에서 이들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자의로 나타난다.  이때 자의란 의지가 자아에 현상한 것으로 사실은 의지가 아니며 거기에는 명령도 충동도 없는 임의의 상태이다.  거기에는 모든 행위가 자기 본성의 내면적 필연성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자유도 넘어선다.  그러나 자유를 넘어서기 때문에 더욱 절대적으로 자유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셀링은 자유와 필연, 주관과 객관, 의식과 무의식이 어떻게 동일한 것인가를 설명해야만 하며, 그런 연유에서 칸트의 합목적성의 원리를 차용한다.  예술가의 창작과정을 통하여 나타난 작품에는 의식과 무의식, 자유와 필연이 통일되어 있다.  즉 작품 속에서는 무한이 유한으로 구현되기에 양자의 구별도 해소된다  셀링에 있어서 예술은 철학의 최고 단계이며 모든 비밀의 계시였다.  셀링의 철학을 심미적 관념론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3) 동일철학

피히테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셀링이 자신의 철학을 동일성의 체계로 분명히 천명하고 있는 저술이 곧 ꡔ나의 철학체계의 서술ꡕ이다.  여기서 그는 주관과 객관의 전적인 무차별자로서 절대적 이성을 주장한다.  이성은 유일한 것이며 또한 절대자이다.  모든 존재는 본질적으로 이성과 동일하다.  그리고 존재의 최고의 법칙은 이성의 최고의 법칙인 자기동일성을 의미하는 ‘A=A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 명제에 있어서 주어와 술어는 동일한 A이기에 대립은 없다.  다만 동일한 것이 어떤 경우에는 주관이 되고 다른 경우에는 객관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개체의 인식에 있어서 주객의 구별은 질적 차별이 아니라 양적 차별에 불과하다.
이러한 절대적 동일성의 사상은 ꡔ부르노 혹은 자연의 원리와 신적 원리에 대해서ꡕ란 저서에서 보여지고 있다.  여기서 절대자란 이제 단순한 대립의 통일이 아니라 대립과 통일의 통일이 된다.  그리고 더욱이 절대자란 유한에 대한 무한이 아니라 유한과 무한의 동일성 즉 영원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된 인식은 영원의 인식이어야 한다.  시간 속에 생산적 자연이 있다면 영원 속에는 자연의 원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원상의 인식이 곧 진리이다.  예술에 있어서도 미적 대상이나 작품은 시간에 제약을 받지만 예술적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미는 만물의 원상이며 본체이다.  여기에 바로 미와 진리의 근원적 합일이 있다.
또한 그는 ꡔ대학의 연구 방법에 대한 강의ꡕ란 저서에서 성서적 내지 공교적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참된 종교는 철학과 시가 융합되어 있는 신비적 기독교라고 하였다.  이러한 신비적 사고를 발전시켜 ꡔ철학과 종교ꡕ란 저서에서는 절대자와 우주의 근원적 동일성이란 사상을 넘어서 절대자와 세계의 단절이라는 사고에 도달한다.  여기서는 유한자에서 절대자에 이르는 어떠한 가교도 없는 것으로 사고된다.  양자는 타락으로 단절되어 있다.  그리고 역사의 궁극목적은 이 타락을 속죄하는 것이라 한다.  이렇듯 그는 고대 희랍의 밀의 종교를 높이 평가하면서 신비주의적 사상으로 넘어갔다.

4) 후기 철학

동일철학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접하면서 셀링은 자신의 철학을 변호하기 위하여 악의 사실과 그 근거로서 자유를 구명하기에 이르렀다.  헤겔은 모든 것이 근원적으로 동일하다면 현실적 자연에 많은 차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개체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가 없다고 논박하였다.  더욱이 시간을 넘어서 ‘영원의 상’ 하에서 근원적 절대동일자를 예술적으로 직관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차별과 대립 그리고 사물의 발전 등은 전혀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셀링은 이러한 논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후기 철학을 전개한다.
셀링에 의하면 자유의 뿌리는 자연이다.  그리고 자연은 동시에 신의 실존의 근거이다.  신은 미리 예정되고 통일되어 있는 자가 아니라 다만 모든 것의 근거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은 순수한 무차별이요 원근저(Urgrund)이며 무근저(Ungrund)이다.  따라서 신은 자신의 실존의 근거를 자기 내에 가지지 않을 수 없으며 바로 이 근거가 신에 있어서 자연이다.
이리하여 신과 자연의 이원성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자연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자유이다.  이 자유는 무의식적 충동이며 자신을 생산하려는 어두운 동경이며 또한 맹목적 의지이다.  자연은 곧 자유이며 의지이기 때문에 자유란 선이다.  도덕법칙에 따르는 자유만이 아니라 악과 죄도 인간의 자유가 된다.  그러나 신은 이 자기 안에 있는 자연을 로고스와 사랑 즉 보편의지에 의하여 통일하고 완성한다.  자연과 자유에 뿌리박고 있는 모든 대립 즉 선과 악, 도덕법칙과 아집의 두 원리는 신에 있어서 비로소 통일된다.  그래서 역사는 결국 맹목적 의지 또는 악이 로고스 내지 사랑에 정복되어 존재의 근거와 신의 존재가 동일성으로 고양되는데 있다.
이러한 자유론에 나타난 신적 역사의 이념은 헤겔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인 것이다.  셀링은 종교 특히 기독교의 역사를 신의 지속적 계시로 보았다.  더욱이 그는 고대의 신화와 기독교적 계시를 파고들면서 비합리적인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절대자를 추구하던 자신의 동일철학을 ‘소극철학’이라 하고 종교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매개적으로 도출한 후기의 철학은 ‘적극철학’이라 불렀다.



3. 헤  겔(G. W. F. Hegel)

1) 절 대 자

헤겔의 철학은 피히테가 칸트에서 출발하고 셀링이 피히테에서 출발한 것과 같이 셀링의 철학에서 출발을 하지만 점차 셀링을 비판, 극복하면서 독자적 철학을 완성하였다.  셀링에 있어서 절대자란 무차별적 동일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떤 유한자도 생길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절대자는 유한자의 근저에 있고 또한 유한자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셀링은 피히테의 절대적 자아의 개념을 더욱 철저화시켜 절대자를 자연과 정신의 근저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절대자와 유한자 사이의 절대적 단절은 여전히 해소될 수 없었다.
그러나 헤겔은 유한자를 초월하여 유한자로부터 단절된 절대자란 참다운 의미의 절대자일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절대자는 유한자를 자신의 외부에 가지는 바, 그렇게 되면 이 절대자는 유한자와 대립되기에 참된 절대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참된 절대자란 따라서 유한자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자를 자기 안에 포괄하는 것이라야 한다.  헤겔은 이것을 악무한(惡蕪限)과 진무한(眞蕪限)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악무한이란 유한자와 대립되는 무한이며 진무한이란 유한자를 포괄하는 무한자이다.
진무한이란 무한자와 유한자의 대립을 넘어서 이 양자를 자신의 계기로 포괄한다.  진무한이란 악무한과 유한자의 종합이며 통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유한자가 진무한 안에서 그의 구체적 내용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유한자를 제거한 후에 남는 것은 진무한이 아니라 공허한 악무한에 불과하게 된다.
다음으로 헤겔은 절대자를 실체로서가 아니라 주체로서 파악한다.  실체란 모든 규정이 그의 술어로 부가되지만 그러나 어떠한 규정도 그것의 본질을 나타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실체란 모든 규정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실체로 생각된 절대자란 모든 규정의 근저에 단지 자기 동일자로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에게서는 어떤 규정도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규정은 그것이 규정인 한에 있어서 유한자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체란 모든 규정을 제거해도 그 뒤에 남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나 규정성을 결여한 실체는 공허한 추상물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주체로서 절대자에게는 모든 규정성이 그의 본질을 형성한다.  모든 규정은 절대자 자신의 자기규정, 자기운동, 자기실현이다.  따라서 그것은 유한자에서 추상된 무한자가 아니라 유한자를 자신 속에 포괄하는 무한자이며 유한자와 무한자의 종합이다.  왜냐하면 주체란 그것이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며, 자기정립이란 ‘자기가 타자가 되는 것을 통하여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체란 분열이며 대립이며 이중화며 부정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시 회복되는 동일성이며 타재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의 반성이며 그래서 결국 절대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헤겔의 주체로서의 절대자는 유한자의 변화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발전해 간다.  절대자는 유한자와 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절대자의 구체적 내용은 유한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유한자는 절대자의 자기실현이다.  그러므로 절대자는 유한자의 변화를 매개로 해서 비로소 자기의 변화적 발전적 자기 동일성을 지니게 된다.  이와 같은 주체로서의 절대자를 헤겔은 정신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주체적 정신은 변증법적으로 자신을 전개, 완성해 간다.

2) 변 증 법

헤겔은 이러한 주체적 절대자의 자기운동성을 변증법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것을 논리적 형식으로 나눈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추상적 혹은 오성적 측면이고 둘째는 변증법적 또는 부정적-이성적 측면이며 셋째는 사변적 혹은 긍정적-이성적 측면이다.  이는 세계의 본질인 절대자의 운동법칙일 뿐만 아니라 사고하는 인간의 사유법칙이기도 하다.  즉 변증법이란 존재의 법칙이자 동시에 인식의 법칙인 것이다.  
모든 인간의 정신적 사고나 논리적 전개는 먼저 추상적, 오성적 사유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오성적 사유는 하나의 규정만을 고집한다.  그리고 이 규정을 다른 규정들과 분리하여 사물을 하나의 규정으로만 고찰해 간다.  그러기에 이 사유는 곧 대립적 규정에 부딪히게 된다.  여기에 반대 혹은 모순규정이 생성된다.  이것이 부정적, 이성적 사유이다.  이러한 대립과 모순을 통일하는 것이 제삼의 사유 즉 긍정적, 이성적 사유이다.  긍정적 사유는 이러한 모순을 해소하기 위하여 대립되는 규정들을 폐기, 보존, 발전을 통하여 보다 높은 단계의 새로운 규정으로 이행시킨다.  이 이행을 헤겔은 지양(aufheben)이라 한다.  이제 여기서의 통일성은 오성적 사유에서의 추상적이고 공허한 통일성이 아니라 모순과 대립을 지양한 구체적인 통일성이다.
그리고 헤겔은 변증법적 계기의 첫번째 단계를 즉자적(an-sich), 두번째 단계를 대자적(für-sich) 그리고 세번째 단계를 즉자대자적(an und für sich)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피히테 식으로 정립, 반정립, 종합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변증법적 과정은 우선 절대자의 자기전개, 자기발전, 자기운동의 과정이며 또한 절대자는 인간의 정신을 통하여 현상하기에 인간의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인류적 정신의 발전단계이기도 한 것이다.

3) 정신현상학

여기서 우리는 주체로서의 정신이 변증법적 방법에 의해서 자기를 자각적으로 전개하고 실현해 나가는 과정을 헤겔이 최초로 서술한 ꡔ정신현상학ꡕ이란 저서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보자.  정신현상학이란 정신의 현상을 서술한 것인데 정신이 현상한다는 것은 절대자의 발전과정이 인간의 의식경험에 비추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식의 경험이 변증법적인 방식을 통하여 절대적인 의식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은 곧 절대자가 스스로를 현상시키는 과정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정신의 현상과 의식의 경험은 우선 가장 소박한 자연적 의식 즉 직접적 의식으로 출발한다.  이 단순한 의식은 (1)감각적 확신이다.  여기서는 단지 무엇이 있다는 사실만을 확신하는 무규정적 의식의 단계이다.  이 단순한 존재확신이 존재의 내용과 대상의 성질을 규정하고 인지하게 될 때 (2)지각이 된다.  그리고 대상의 성질들을 넘어선 대상의 본질을 인식하게 될 때 의식은 (3)오성이 된다.  이 오성은 다시 현상과 본질을 분리하고 본질의 법칙을 개념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한다.  개념은 알고 보면 의식의 소산이다.  따라서 의식은 대상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의식은 (4)자기의식이 된다.
자기의식은 다시 대립된 두 가지 개인적 자기의식으로 분열하며 여기서 주인의 의식과 노예의 의식으로 분열한다.  주인은 노예를 통하여 향락을 누리며 노예는 주인을 위하여 노동을 한다.  노예는 자신의 존재를 위하여 자연과 투쟁하게 되며 여기서 자립적 자기의식을 다시금 획득한다.  그러나 주인은 오히려 노예의 노동에 의존하게 되며 결국 비자립적 자기의식으로 떨어지게 된다.  결국 양자는 서로를 인정하게 되는 상호인정의 과정을 거쳐 보편적 자기의식의 과정으로 발전하며 여기서 우리라는 초개인적인 보편적 자아가 자각된다.  이 보편적 자아가 곧 (5)이성이다.
이성은 다시 자연을 관찰하여 법칙화하려고 하지만 유기적 생명의 내성은 외적으로 관찰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내적으로 성찰하여 심리적 법칙을 발견하려고 하지만 법칙에 의해서는 개체의 개체성을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성적 자기 의식을 자기자신에 의해 실현하려 하지만 이것도 주관적 목적과 객관적 현실 즉 개인과 사회의 대립으로 상충된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목적과 현실의 통일을 모색한다.  이 통일을 실제로 구체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 나와 너의 사회성에서 비롯되는 인륜이다.  인륜을 본질로 하는 것이 바로 (6)정신이다.
이 정신은 직접적으로는 민족정신으로 나타나며 민족정신은 다시 세계사를 담당한 각 민족의 인륜적 생활로 나타난다.  이 민족정신이 바로 역사적 주체이다.  정신은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의 가족국가에서 로마의 법치국가에로 또한 기독교적 세계로부터 근대의 계몽주의와 시민사회에로 더 나아가서는 프랑스 혁명과 칸트의 윤리학에서부터 낭만주의의 아름다운 혼을 발휘하는 발전된 사회로 진보한다.  이렇게 볼 때 정신현상학은 논리화된 역사, 역사화된 논리하고 볼 수 도 있겠다.  그리고 아름다운 혼의 세계는 다시 자기의 죄와 도덕적 무력의 자각으로 인해 유화(宥和)의 입장 즉 (7)종교의 세계로 이행한다.  
그러나 종교에 있어서 개체와 절대의 합일은 여전히 직관적이다.  따라서 여기서 절대자는 표상으로 파악된다.  절대자는 개념으로 사유되어야 하며 이러한 단계가 정신의 최종 목적이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한 상태가 바로 (8)절대지의 단계이다.  이것은 정신의 자기 자각이 최고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며 동시에 인간의 의식이 절대적 의식으로 도야된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정신현상학은 주체로서 절대자가 자기 내의 유한자를 통하여 자신을 변증법적으로 전개시켜 자신의 본성인 정신을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4) 철학체계

헤겔의 철학체계는 정신현상학에서의 절대적 입장을 다시 전체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서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전 철학체계는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으로 전개된다.  우선 논리학은 다시 존재, 본질, 개념의 3부로 구성이 되어있다.  그리고 존재는 다시 유, 무, 생성의 변증법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자연철학은 논리학에서의 개념의 객관화인 기계적 관계, 화학적 관계, 목적 관계에 상응하여 역학, 물리학, 유기체학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현실적인 것은 이념적인 것이며 자연의 이법도 사유의 범주와 동일하다는 절대적 사유에 기인하는 것이다.  일단 자연으로 외화(外化)된 이념은 다시 자기를 회복하여 정신으로 복귀한다.
정신철학은 주관적 정신, 객관적 정신, 절대적 정신으로 나누어진다.  주관적 정신은 다시 인간학과 정신현상학 그리고 심리학으로 전개되며 여기서 심리학은 이론적 정신, 실천적 정신, 자유의 정신으로 발전한다.  자유정신이란 자유를 객관적으로 실현하는 객관적 정신으로 이행한다.  객관적 정신을 더 구체적으로 저술한 저서가 ꡔ철학체계ꡕ보다 뒤에 나온  ꡔ법철학강요ꡕ란 저서이다.
법철학은 추상법, 도덕, 인륜의 단계로 전개된다.  추상법이란 자유의지의 주체인 인격을 전제로 시작된다.  법의 목적은 인격을 회복하고 존중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법의 문제는 인격 자체 즉 인격의 내재적 측면인 도덕의 문제로 이행하게 된다.  도덕은 자율적이다.  이 자율적 주관성은 법의 외면성을 부정하고 자기 자신만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도덕 내에서 생기는 현실과 양심, 행복과 선의 대립을 통일하기 위하여 인륜의 단계로 정신은 이행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륜은 관습에서 시작된다.  관습이란 자유가 무의식적으로 객관화되어 공동사회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것을 기초로 한 인륜적 공동체는 가정이다.  그리고 가정에서 성장한 개인들의 자유의지를 통일한 것이 곧 시민사회이다.  여기서 생기는 것이 분업과 계급이며 또한 사법과 경찰 등 많은 법인단체이다.  이들을 통일한 것이 국가이다.  그러나 이 국가도 국제교류와 경쟁을 통하여 세계사로 나아간다.  국가를 재판하는 것이 바로 세계사인 것이다.  세계사는 자유를 본질로 하는 정신의 자기실현의 장이며 따라서 역사는 자유의식의 진보이다.  아울러 이러한 정신을 자각하는 단계는 바로 절대적 정신이다.
절대적 정신은 예술, 종교, 철학의 단계로 발전한다.  절대적 정신이란 주관적 정신과 객관적 정신을 통일해서 자기에게로 복귀한 정신으로서 완전히 자유로우며 개념과 실재, 유한과 무한의 자각적인 자기동일이다.  그리고 절대적이고 무한한 자기를 대상으로 하는 한, 절대적 정신은 역사를 넘어선 영원을 자기의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영원한 내용은 시간적 과정을 통해서 전개되기에 영원은 현재가 되고 체계는 역사가 되며 논리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절대적 정신은 다시금 주관적 측면인 예술과 객관적 측면인 종교 그리고 양자를 통일한 진정한 절대적 입장에 도달한 철학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예술이 절대적 정신의 직관이었고 종교가 절대적 정신의 표상이었다면 철학은 절대적 정신의 완전한 자각이고 사유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진리가 자기에 있어서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다시 철학사가 되고 철학사는 다시 철학의 현실화요, 완성이 된다.  철학사를 통하여 절대자는 자기를 자각적으로 인식해 나가며 인간도 이러한 정신을 실현하여 나간다.  이리하여 헤겔 철학은 과거의 모든 철학적 원리를 자기완성의 계기로 지양하고 통일하는 최종의 철학이 되는 것이다.


제4장 현대철학  

제4장  현대철학


1831년 헤겔의 죽음은 한 철학자의 개인적 삶의 완성이며 종말인 동시에 철학을 확실한 토대 위에 거대한 체계를 갖춘 구조물로 종합적으로 구축하려고 한 근대철학의 완성이자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스콜라 정신에 의해 그 자체의 확실한 토대를 상실하고 말았던 철학은 데카르트와 칸트를 거쳐 헤겔로 이르면서 자기완결적 체계의 구축이라는 근대철학의 시대정신이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특히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은 그야말로 철학 전체를 완벽한 체계 속에서 전체화시키고 종합화시키는 작업의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헤겔의 관념론을 떠받치고 있는 형식적 체계성은 이제 새로운 경험을 하기 시작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구체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다.  철학이 하나의 완벽한 체계로만 남아 있기를 고집하는 한, 철학은 한갓 체계 속에 갇혀 있는 수인일 뿐이다.  현대인들은 철학이 이제 더 이상 형식적으로 아름답게 구축된 학적 체계가 아니라 정형화된 틀을 끊임없이 허물어가는 활동이기를 원한다.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은 그 형식적 체계성은 화려하게 걸치고 있지만 그 내용적인 면에서는 구체적 경험을 토해 내어버린 초라한 모습을 지닌다.  그리고 그 방법적인 면에서는 전체적 통일을 향한 끊임없는 진화론적인 전진과 전체성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열망으로 일관되어 있다.  우리는 헤겔의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전체주의적 도식 속에서 근대철학의 완성과 종말을 함께 읽어야 한다.  근대철학의 종말을 재촉한 “전체는 진리이다”는 방법적 도그마는 부분들의 구체성과 다양성을 전체화의 부품으로 희생할 수밖에 없는 영원한 원죄를 짊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는 명제로부터 출발한 관념론적 열망은 모든 구체적인 현실을 의식의 현실로 추상화하여 버리는 오류를 범한다.  근대인들에게 절대적 권위를 가졌던 이성은 “현대”라는 거대한 지평 앞에서는 무기력한 난쟁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학적인 체계만 잘 갖추면 그만이라는 헤겔 철학의 거만함은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현대인들에게는 오히려 사유의 장애물로 등장한다.  절대이성의 관념론으로 체계적으로 완성하려는 근대인들의 열망의 이면에는 경험의 풍만성과 현실의 구체성 그리고 부분들의 다양성을 논리적으로 사상(捨象)해버리는 방법론적 이데올로기가 은폐되어 있다.  절대이성의 주도권이 지배하는 헤겔의 관념론적 패권주의는 그 외양의 장엄함과는 달리 그 내부로부터 이미 해체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헤겔의 철학 속에 갇혀 있던 철학의 생생한 문제들이 그의 죽음을 기다리기나 한듯이 그의 죽음과 함께 여러 방향으로 봇물터지듯이 분출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헤겔 이후의 철학을 “현대철학”이라는 용어로 포괄적으로 지칭한다면, 현대철학의 얼굴을 단적으로 읽어내기를 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대철학은 폐쇄적인 체계를 갖추기를 거부하고 그때그때 생생한 문제들을 여러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풍부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철학의 근본적인 성향을 몇 가지로 간추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근대철학을 지배해 온 주관성의 철학을 포기하고 객관적 실재 자체에로 방향을 취한다.  실재적인 것을 주관성의 구성적 산물로 생각하려는 근대 철학으로부터 방향을 돌려 실재,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해명하려는 실재론적 경향을 취한다.  둘째, 사유하는 이성적 주관 대신에 생동하는 구체적인 주관으로 돌아간다.  추상적으로 사유하는 주관 대신에 의지하고 활동하고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주관이 등장한다.  셋째, 방법적인 면에서 전체성을 위한 종합 대신에 분석적 방법을 취한다.  논리적 통일을 위한 종합적 추상 대신에 구체적 사실성을 확인하기 위한 분석적 검증이 등장한다.  헤겔의 형이상학적 체계가 아무리 완벽하고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기념비적 철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모래나 진흙 위에 세워진 기념비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제 언어와 논리에 대한 철저한 분석적 검증이 철학의 중요한 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상과 같은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여러 방향으로 전개되는 현대철학의 흐름을 우리는 편의상 다음과 같이 3시기 나누어 다루고자 한다.  초기는 헤겔 이후 등장한 유물론과 실증주의 그리고 비합리주의 등의 흐름이 등장한 19세기이다.  중기는 19세기 말을 포함하여 20세기 중엽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삶의 철학, 현상학, 실존철학, 분석철학, 실용주의 등 다양한 흐름들이 등장한다.  후기는 20세기 중엽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비판이론, 후기 분석철학, 포스터구조주의, 해석학, 신실용주의 등의 흐름이 등장한다.


제1절  초기 현대철학


우리가 현대철학의 ‘초기’라고 부르는 시기의 특징을 말한다면, 그것은 19세기의 전반까지를 지배했던 헤겔의 관념론이 와해되는 사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독일 관념론의 와해는 새로운 경험에 직면하게 된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지적 체험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이를 몇 가지로 요약하여 보면, 첫번째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헤겔의 죽음은 근대철학을 주도해 왔던 물자체나 실체 혹은 절대정신이 모든 존재자의 본질과 근원에 대한 설명원리가 될 수 없다는 비판을 가능하게 했다.  인간을 궁극적 원리로 규정하는 근대철학은 결국 인간 정신의 실체화에 지나지 않으며, 구체적인 인간이 철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  헤겔의 관념론적 체계 속에 매몰되어 있던 인간과 역사의 구체적 토대를 다시 회복하려는 인간학적-유물론적 운동이 등장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철학 역시 인간중심적 견해를 취한다는 점에서는 근대철학과 공통점을 가지지만 근대철학의 인간은 사유하는 추상적 인간이었던데 반해, 현대철학의 인간은 구체적이고 생동하는 인간, 즉 느끼고 노동하고 의욕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다르다.  두번째는 주체로부터 객체, 즉 구체적 사실에로 전환하는 사실중심적 실증주의가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겔의 합리주의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낭만주의에 뿌리를 둔 비합리주의가 등장한다.  즉 절대정신 대신에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의지가 구체적인 절대자로서 등장한다.  우리는 이 새로운 철학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개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유 물 론

1)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적 유물론

(1) 헤겔좌파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철학은 보수적인 면과 혁명적인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최종적인 것으로 보았는데, 당시 일어나기 시작한 사회의 변동에 비추어 볼 때 하나의 정지상태를 표현한 것이었다.  헤겔 자신의 철학이 이제 새로이 나타나는 사회적·정치적 갈등과 자연과학의 발전에 의해 지양(止揚)될 운명에 처하였다.  헤겔 이후의 철학은 헤겔의 철학체계에 대한 반발에서 모두 그 시발점을 찾았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헤겔은 결국 두 갈래로 나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서로 다른 두 입장에서 헤겔 철학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그 하나는 헤겔 우파라 불리어지는데, 법학자 사비니(Savigny)와 역사학자 랑케(Ranke)가 중심이 된 역사학파와 낭만주의자들에 의한 보수적 성격을 띤 반발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헤겔은 모든 역사적인 것을 단순히 세계발전의 부수현상으로만 간주하고 신과의 연결성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헤겔 철학에 반기를 든 또 다른 하나는 소위 헤겔 좌파라 불리어지는데, 헤겔이 소홀히 했던 자연과학을 강조하고 동시에 오히려 헤겔 철학에 신학의 잔재로 남아 있는 종교적·사변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려 함으로써 철저한 실증주의적·유물론적 입장을 고수한다.  헤겔 좌파 중에서 중요한 두 사람은 슈트라우스(D. F. Strauß)와 포이에르바하(L. Feuerbach)이다.  두 사람 모두 헤겔에서 출발했으나 후에 헤겔 철학과 결별한다.  두 사람의 저서는 당시 헤겔 철학에 젖어 있던 독일에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물론 그들의 중심 과제 중의 하나인 종교비판은 이미 18세기에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Voltaire)가 시도한 것과 유사점이 많다.  차이가 있다면 보수적인 독일에서 시민혁명이 늦게 일어났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뒤늦게 표현되었다는 것이며, 또 그 사이 발전된 자연과학의 결과로 비판이 날카로워지고 객관적으로 된 점이다.  슈트라우스는 신학자였는데 그의 저서 ꡔ예수전ꡕ(1835)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여기서는 주로 교회신앙이 역사적 비판이라는 안목에서 공격되었다.  즉 복음이란 결코 역사적 현실성을 갖지 못한 신화, 혹은 상징적 의미만을 갖는 창작이다.  그의 후기 저서 ꡔ옛 신앙과 새 신앙ꡕ(1872)에서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색체가 두드러진다.  그는 “아직도 우리는 기독교인인가?”라 묻고 확고하게 “아니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종교를 갖고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긍정적으로 답한다.  그가 말하는 종교는 진보와 문화를 신봉하는 낙관적인 현세종교이다.  여기서는 신 대신에 우주가 들어선다.
포이에르바하는 칸트가 죽은 1804년에 독일의 도시 란츠후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학자 가문의 법률가였다.  포이에르바하는 처음에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신학적 합리주의를 표방한 다우브와 파울우스에게 신학강의를 들은 후 실망하고, 1824년 헤겔의 강의를 듣기 위해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갔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며 신학을 포기하고 철학으로 넘어간 것은 헤겔의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는 점차 헤겔 철학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헤겔 철학은 철학을 위장한 신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이란 인간이 자기의 소원과 이상을 객관세계로 투사하여 마치 그것이 독립한 실재인 것처럼 상상한 것에 불과하다.  상상에서 만족을 채우려는 인간의 행복추구, 이것이 바로 신의 정체인 것이다.  헤겔 철학은 종교와 학문과의 용납할 수 없는 야함이며, 논리의 겉치레를 한 신학이다.  헤겔의 이른바 절대정신은 실상은 망령에 불과하다.  포이에르바하는 「철학의 개혁을 위한 제언」에서 헤겔 철학을 폐기하지 않는 자는 신학을 폐기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와같이 포이에르바하는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자신의 출발점을 찾는다.

(2) 감각주의와 인간학
독일 시민계급의 시대적·정치적 의식은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적 시도에서 그 윤곽을 얻는다.  그의 철학은 다른 헤겔 좌파들의 주장과는 달리 관념적인 헤겔 비판을 넘어서서 새로운 존재론적 기초를 정립하려 한 점에서 고전적 독일철학의 종말로서 지칭된다.  그는 철학 자체 속에 머물지 않고 철학 외부에서, 즉 과학, 산업, 정치 등을 고려하면서 전통적인 형이상학이나 신학을 비판하는 점에서 18세기의 기계론적 유물론자와 구별된다.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은 다른 말로 하면 인간중심적인 원리이고 자연주의적이고 감각주의적이며, 이런 점에서 휴머니즘적이라고도 표현된다  그의 저술 속에 나타나는 근본 테마의 하나는 물론 종교, 신학에 대한 비판이지만 그의 무신론은 헤겔 철학의 비판이 깃들어 있는 철학적인 것이다.  그의 종교 비판이 결국 인간학에 기인함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무신론자라는 것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나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신이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 즉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의 논쟁은 17, 8세기의 것이지 19세기에 속하지 않는다.  신을 부정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인간의 부정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을 인간 자체로 고찰하고 현실적인 인간을 철학의 중심에 두어야 하는 인간학을 헤겔의 추상적 관념론과 대체한다.
포이에르바하가 이성이나 관념의 추상성 대신에 감각과 자연의 구체성을 철학의 기초로 둔다는 점에서 일종의 유물론적 성향을 띤다.  그의 인간학적 유물론은 두 가지의 면에서 종래의 철학과 논쟁한다.  한편으로는 관념론과 신학의 비판에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 자체에 대한 비판에서이다.  전자를 철학 속에서의 비판이라 한다면 후자는 철학 밖에서의 철학에 대한 비판이다.  일반적으로 철학의 본령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감성을 출발점으로 그는 ꡔ예비명제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은 그러므로 그 자체와 더불어서가 아니라 그것의 부정인 비철학과 더불어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 속에 있는 이러한 사유와 구분되는 비철학적인, 절대적으로 반(反)스콜라적인 본질이 감각주의 원칙이다“, 논리적 사유로서의 철학에 대한 거부는 인간 외부에서가 아니라 인간 자체 속에서 규명된다.  인간을 자연의 도구로 보고 물질에서 인간으로 나아갔던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자들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두 요소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그 어느 것에도 우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 영국 경험론자들이 주장하는 감각주의와 어떻게 다른가?  물론 포이에르바하는 이들처럼 주관적 관념론자가 아니다.  그 이유는 그가 실제적인 것을 관념의 다발이나 복합체로 환원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실제적인 것이 인간의 사유나 지각의 밖에 존재하고 대상이 사유에서 유출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유가 대상에서 유출된다  그러므로 그의 감각주의 원칙은 실재론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실재성과 연관되는 것이 감각이고 따라서 감각만이 유일한 인식의 근거이다.  감각은 직접적인 지식의 비밀이다.  감각주의 원칙이란 그러나 결코 고정된 사실만을 수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감성은 사유되거나 고안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것의 통일이다.  감성은 이 두 가지의 모순을 동시에 내포하고 감성 속에서 그것은 중재되어 나타난다.
헤겔의 사변철학(思辨哲學)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진 자연이 오히려 사유의 주체로서 인정되어야 하고, 또한 자연은 그 자체 속에 근거를 갖고 있으므로 결코 헤겔에서처럼 정신의 외화현상(外化現象)이 아니다.  물론 포이에르바하는 감각, 자연, 인간 등의 존재를 독단적으로 전제하고 거기에서 정신을 도출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정신에 의해 정립된 것이고 정신은 또한 자연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헤겔의 자연철학은 가장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자연은 논리학으로부터 유출되는 범논리주의의 산물이 아니다.  논리학이 자연을 통찰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사고하는 주체가 논리학의 밖에서 직접적인 존재, 즉 자연을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발견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직접 인식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없다면 순결한 처녀와 같은 논리학은 아무 것도 산출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을 논리적으로 연역해 낸다는 것은 환상이다.  헤겔 철학은 현실의 추상화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의 철학은 구체적인 인간을 소외시킨다.  헤겔에 있어서는 자연의 본질을 자연 밖에, 인간의 본질을 인간 밖에 그리고 사유의 본질을 사유 밖에 갖다 놓음으로써 직접적인 통일성이 결여되었고 확신도 없어졌다.  헤겔의 추상으로부터 구체성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은 이론에 불과하고 참된 객관적 실재성은 이론적으로 도려내어진 것이 아니다.  자연과 실재성이 이념에 의해 정립된다는 이론은 자연이 신에 의해 정립된다는 신학이론의 합리적 표현에 불과하다.  결국 포이에르바하는 관념론의 폐허에서 새로운 철학, 즉 이론을 지양하는 실천철학을 구상하였다.

2) 맑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1) 소외론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소외의 제 양태를 분석하고 그 해결방안을 찾는 데서 그의 철학을 출발시키고 있다.  맑스의 소외론은 직접적으로는 헤겔 철학에서 유래한다.  헤겔은 세계의 본질을 절대정신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절대정신은 자기소외와 자기복귀의 이중성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논리적으로 실현시켜 나간다.  절대정신의 공간적 소외 또는 외화(Enttäußerung)가 자연이며 시간적 소외가 역사이다.  절대정신의 자연화, 역사화는 절대정신의 본성인 자기활동성에 기인한다.  따라서 자연이나 역사는 절대정신이라는 실재의 외양에 지나지 않으며, 자연이나 역사에의 소외의 극복도 절대정신의 관념적 자기 극복일 뿐이다.  이러한 극복은 헤겔은 지양(Aufheben)이라 불렀으며, 그 결과는 자유라는 것이다.
헤겔의 소외개념에 대한 맑스의 핵심적 비판은 실재의 정신성, 소외의 추상성, 지양의 사변성에 관한 것이다.  맑스는 실재는 물질적인 것이며, 소외는 구체적인 것이며, 아울러 지양은 실천적인 것이라야 한다.  즉 세계의 본성은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며, 소외도 정신적 관계의 추상적 양태가 아니라 물질적 관계의 구체적 양상이며, 지양도 사변적 해소가 아니라 실천적 변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맑스는 헤겔 철학의 관념성, 추상성, 사변성을 물질성, 구체성, 실천성의 철학으로 전도시킨다.
초기 저술에서 맑스는 소외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논의하고 있다.  맑스는 <종교적 소외>에서 출발하여 <철학적 소외>, <정치적 소외>를 거쳐 <경제적 소외>로 이르는 다양한 유형을 검토하면서 그 중에서도 경제적 소외를 소외의 근본 양태로 간주하였다.  종교현상은 인간의 자기소외가 반영된 사회현상이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 비판을 차용하고 철저화한다.  신은 인간의 자기의식의 투사이며 신학은 인간학이다.  종교는 현세의 억압받는 인간의 욕망구조를 내세에 해방된 인간의 환상구조로 대치시키는 역할을 한다.  종교는 인간의 소외를 지속시키는 이데올로기로서 인민의 아편이다.  따라서 종교의 철폐는 인간해방의 선결조건이라는 것이다.  
철학도 인간의 소외를 반영한 이데올로기이다.  철학, 특히 헤겔의 사변철학은 종교의 신 대신에 추상적 정신을 대체함으로써 인간정신의 계몽화를 꾀하나 세속화된 신학 이외의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변철학 역시 소외된 인간의식의 투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사변철학의 폐기는 인간의 철학적 소외를 극복하여 그 철학적 이념을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맑스는 동일한 분석을 정치적 소외에도 적용시킨다.  국가제도, 특히 브르조와 국가제도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실현하는 기회를 부여함과 동시에 그 기회를 박탈한다.  일자의 기회획득은 타자의 기회상실이라는 모순구조를 국가제도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계급대립을 영속화시키며 인간의 정치적 소외를 야기시킨다.  따라서 국가는 폐지, 소멸되어야 한다.
맑스는 소외의 근본양상으로서 경제적 소외의 4가지 양태를 고찰한다.  1. 생산품으로부터의 소외, 2. 생산활동으로부터의 소외, 3. 사회생활로부터의 소외, 4.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 등이다.  맑스는 이러한 소외는 노동자 계급에 가장 잘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계층에 공통적인 현상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경제구조가 가지는 모순이기에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일어나는 소외현상이라는 것이다.

(2) 사적 유물론
맑스의 유물론적 역사 이해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독일 관념론이고, 두번째는 프랑스 사회주의 그리고 세번째는 영국 고전 경제학이다.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칸트는 실천이성의 이론이성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며, 이성의 실천성과 능동성에 기인한 역사의 합리적 진보에 관해 이야기한다.  피히테 역시 인류의 역사를 합리적으로 보았으며, 헤겔은 역사를 자유의식의 진보로 정의하였다.  절대정신의 자기전개로서의 역사는 절대정신의 본성인 자유의식을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이며, 이 과정은 논리적으로 볼 때 변증법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가 보기에 헤겔의 변증법은 거꾸로 서 있는 변증법이며, 이런 전도된 관념 변증법을 유물 변증법으로 재전도시킨 것이 사적 유물론이다.
프랑스 사회주의에서 생 시몽(Saint Simon)은 공업중심주의와 정치경제이론을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를, 푸리에(Fourier)는 합리적 윤리적 사회주의를, 프루동(Prouhdon)은 평화적 개혁을 통한 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  맑스는 이들의 사회주의 사상 중 경제가 중심이 되는 정책은 인정하였으나, 이들의 방안을 이상에 그치는 실현성이 없는 ‘공상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그는 자신의 사회주의를 이와 대비해서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영국 고전경제학에서 아담 스미스(Smith)는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어떻게 운용되는가를 설명하였고, 리카르도(Ricardo)는 노동가치설을 수립하였는데, 맑스는 이 이론들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사회 내의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 의해 착취당하는 과정을 증명할 수 있었다.  자본증식의 경제학에 내재한 노동착취의 구조를 폭로하는 것이 사적 유물론의 또 다른 과제인 것이다.
그러나 ‘사적 유물론’이라는 용어는 맑스 자신에 의해 사용된 적이 없는 개념이다.  그는 오히려 ‘유물론적 역사이해’ 또는 ‘유물론적 생산조건’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사적 유물론을 충분히 발전된 이론 체계라기보다는 하나의 방법이나 수단으로 간주하였다.  그의 유물론적 역사이해의 핵심은 “사회변화의 관건은 인류가 생활을 공동으로 생산하는 방식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산활동이 기본적이고 이런 생산활동을 해석하고 조직하는 이념체계, 즉 정치, 철학, 종교, 예술 등은 부차적인 것이다.  전자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로서 ‘하부구조’에 해당하고, 후자는 이 하부구조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정치·법률적 구조와 그것이 관념적으로 반영된 이데올로기적 구조로서 ‘상부구조’에 해당한다.  역사에 있어서 궁극적인 결정요인은 생산관계의 총화이며, 이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형성하고 이러한 현실적 기초 위에 법적·정치적 상부구조가 구축되며, 이에 대응하여 일정한 형식의 사회의식이 생겨난다.  역사 변천의 원동력은 사회의 경제적 요인이며, 이는 필연적 법칙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맑스는 경제적 요인의 역사 결정론과 더불어 혁명적 주체의 역사 변혁론을 함께 논구하고 있는데, 이는 자유와 필연의 통합이라는 서구의 형이상학적 과제를 사적 유물론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역사적 현실에서의 그런 과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맑스 철학의 특성이며 동시에 한계이다.

(3) 노동이론
맑스에 의하면 노동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이 함께 참여하는 과정인데,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발적으로 인간과 자연 간의 물질적 반응을 조정, 규제, 통제한다.  맑스는 헤겔이 노동의 본성을 파악하고 객관적인 인간, 진정한 인간, 현실적 인간을 그 자신의 노동의 결과로 이해하고 있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그는 헤겔이 노동의 긍정적인 면만 보고 그 부정적인 면은 간과하고 있다고 한다.  노동은 자신을 소외시키는 가운데서 자신을 실현하는 수단이며, 소외된 인간으로 자신을 실현하는 수단이다.  즉 노동은 인간성의 소외라는 부정적 측면과 인간성의 실현이라는 긍정적 측면을 공유하는 것이다.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에 대하여 맑스는 아담 스미스와 푸리에의 두 극단적인 입장 사이의 중도적 입장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아담 스미스에 의하면 노동은 필연적으로 부담이요, 희생일 뿐 인간의 쾌적한 상태는 휴식이라 하였다.  이에 반하여 푸리에는 이상적인 미래를 예견하면서 노동을 오락이나 유희와 동일시하였다.  아담 스미스의 입장에 반대하여 맑스는 정상적인 작업량은 모든 인간 존재에게 필수적인 것이고 정상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진 노동의 결과는 자기 실현이요, 주체의 객관화이며 따라서 진정한 자유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푸리에에 반대하여 진정으로 자유로운 노동은 동시에 너무 진지한 것이며 최대한의 노력을 요하는 것이라 하였다.  물질 생산에 관여하는 노동은 사회적 본성에서 비롯되고 과학적 성격을 띠고 있을 때만 이러한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맑스는 노동의 성격이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근본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는 심지어 ‘노동의 철폐’에 관해 언급하기도 했다.  노동은 모든 문화 국가에서 자유로우며,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노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철폐하는 것이라 한다.  즉 자유노동은 소외노동을 야기시키므로 자본주의적 노동을 철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노동분화의 소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있는데,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노동분화의 소멸은 육체 노동과 정신노동의 구분도 해소시킬 것이라 한다.  이리하여 마침내 사람들은 “오전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며, 저녁에는 비판에 종사하는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다분히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맑스의 묘사는 그의 이론이 과학적 가능성보다는 미학적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4) 혁명론
혁명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사적 유물론의 결과이다.  사회의 발전은 경제적 토대,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에 의해 규정된다.  한 사회에서의 생산이 가지는 물질적 힘은 그 발전의 어떤 단계에서 기존의 생산관계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이와 같이 생산력의 발전에 생산관계가 장애물로 변모한다.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에는 모순이 생긴다.  이런 상황이 전개되면 이제 사회혁명의 시기가 임박해 온다.
맑스는 프랑스 혁명을 연구한 끝에 이를 ‘정치혁명’을 규정한다.  이어서 그는 시민 혁명으로서의 정치혁명이 가지는 모순을 계급착취라는 도식으로 설명한다.  정치혁명을 통해서 누구나 브루조와지가 됨으로써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자유경쟁을 통한 일자의 계급상승은 타자의 계급하락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혁명은 새로운 계급대립, 즉 브루조와지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을 야기하며, 이러한 새로운 모순은 새로운 혁명을 발생시키고, 이 혁명의 근본성격은 ‘사회적’이라는 데 있다.
맑스는 새로운 혁명, 즉 ‘사회혁명’으로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만인의 추상적인 정치적 자유를 선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의 실제적인 경제적 평등을 성취할 것이라 한다.  그리고 혁명은 프롤레타리아가 수행할 임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교육수단이기도 하다.  혁명을 하면서 프롤레타리아는 스스로를 변혁시킨다.  왜냐하면 혁명은 그 자체의 요원들을 대대적으로 변혁시킬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맑스는 이러한 혁명이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성취되어야 하며, 그러한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의 구호는 ‘영구혁명’이라 한다.  따라서 공산혁명은 세계혁명이며 그 후의 세계는 국가가 소멸되고 공산주의 사회만 존재하는 이상적인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측을 그는 ‘과학적’이라 불렀다.


2. 꽁트의 실증주의

꽁트(Auguste Comte, 1789~1857)는 몽펠리에에서 가톨릭 계통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14세 때 자신은 더 이상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고 선언하고는 이때부터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1814년 그는 에꼴 폴리테크닉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저명한 과학자들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그의 과학주의적 정신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특히 1817년부터 7년 동안 생시몽(Saint-Simon)의 조수생활을 한 것이 그의 과학적 정신을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1826년 그는 실증주의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면서 1833년 7월부터 ꡔ실증철학강의ꡕ(Cours de philosophie positive)를 계속 여섯 권으로 출판했다.  그후에도 이 책을 보완하기 위해『실증주의 정신에 관한 강론』(Discours sur l'esprit positif)(1844)과 ꡔ실증주의 전반에 관한 강론ꡕ(Discours sur l'ensemble du positivisme)(1848)을 출간했다.  1851~1854년 사이에 ꡔ실증정치 체계ꡕ(Systeme de politique positive)를 네권으로 출판하고 ꡔ실증주의 교리문답ꡕ(Catechisme positiviste)도 1852년에 출판했다.
꽁트 철학의 최대목표는 사회체계를 재조직하는 것이었다.  1830년을 전후하여 프랑스는 정치․경제적으로 큰 혼란기였고, 이에 대한 철학사상들도 여러 대안으로 난무하였던 시기이다.  이에 꽁트는 사회학을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와 철학 모두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의 실증주의는 단순한 하나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그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과학적 해결방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증주의는 사물의 본질이나 형이상학적 실체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이 사실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과학적 방법으로 인식하려는 태도이다.  이것은 구체적 사실을 추상적인 의식의 경험으로 환원하였던 헤겔의 사변적 형이상학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프랑스 철학이 갖고 있는 데카르트적인 명석성과 판명성을 철학의 기준으로 삼아 왔던 것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명석하지 않은 것은 프랑스적이 아니다는 말처럼 꽁트의 철학은 헤겔의 관념적 추상성에 식상한 그 당시의 프랑스 지성인들에게 요구된 것이다.
꽁트는 부질없이 사변을 희롱하여 현상의 배후에 그 어떤 형이상학적 근거를 탐구하는 따위를 일체 배제하고 오로지 현상을 관찰하는 데서 그 속에서 법칙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의 스승 생시몽의 영향을 받아 무엇보다도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학을 수립하여 사회의 개혁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정한 원칙 아래에 다양한 과학들을 정돈하고 종합하는 데서 실증철학의 체계를 세웠으니, 인류의 지식발달의 3단계와 단순한 대상에서 복잡한 대상에로 나아가는 과학발달의 순서와 같은 것이 곧 그러한 원칙이다.
꽁트에 의하면 우리의 지식은 3단계를 취하여 발달하는 것이다.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실증적 단계가 그것이다.  신학적 단계에서는 인간은 극히 제한된 관찰을 기초로 한 위에 상상력을 움직여서 초자연적 신을 생각하고, 모든 현상을 신의 의지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형이상학적 단계에서는 본질적으로 신학적 단계와 다를 것이 없으나, 다만 신이라는 인격적 존재 대신에 개별적 궁극 원리를 세우고, 상상력 대신에 사면적 추리가 행해진다.  실증적 단계에서는 어디까지나 경험적 사실에 입각하여 사실들 상호간의 불변적 관계를 탐구하는 것으로써 만족한다.  현상을 초월한 궁극 원인과 같은 것을 구하지 않고 다만 현상 속에 지배하는 법칙을 탐구할 뿐이다.  이리하여 법칙을 인식하면, 우리는 현상의 생기(生起)를 예견할 수 있다.  예견하기 위하여 관찰한다는 것, 장래를 위하여 현재를 연구한다는 것이 실증적 단계에서의 인식의 목적이다.  그는 14세기 이후 발달한 과학의 성과를 종합의 정신으로써 조직화하는 실증철학이 완성되면, 그 때야 비로소 허물어진 정신적 권위가 재정립되고 형이상학적 단계에서 발생한 사회적 혼란도 극복된다고 말한다.
그는 실증주의의 원리에 입각하여 실증철학을 수립함에 있어서 먼저 지식의 보편성의 감소로부터 복합성의 증가로, 또는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간다고 파악했다.  다시 말해 그는 모든 과학은 대상의 단순성과 보편성에 따라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실증철학으로 나누어 이것들의 서열을 다음처럼 작성하였다.

1. 수  학











2. 천문학


천체물리 현상










무기체 현상



3. 물리학












지구물리 현상





자연 현상
4. 화  학


















5. 생물학


생물 현상


유기체 현상










6. 실증철학(사회학)



사회물리 현상











이러한 서열에서 꽁트는 보편성과 구체성으로 나아가는 흐름을 발견했다.  상위의 것은 단순성과 보편성이 가장 큰 것이고, 하위의 것은 상위의 것에 종속되는 것으로 복합성과 구체성을 지닌 것들이다.  이 도식에서는 수학이 가장 먼저 발달한 학문이다.  그러나 수학은 특정한 연구대상이 없고 천문학 이하 다섯 가지 과학에 대해 그 기초를 제공하는 하나의 방법과학이므로 나머지 과학들은 모두 수학을 기초로 이루어진 것이다.  수학을 제외한 나머지 과학들은 서로 모자 관계를 맺고 전자에서 후자가 생겨나며, 후자는 전자에 의존한다.  수학이 보편량을 취급한다면, 천문학은 질량과 힘과 중력의 요소를 여기에 첨가시킨다.  또한 물리학은 중력과 빛과 열을 취급 할 때 여러 형태의 힘들을 구분해 주고 화학은 물질들에 대해 양적인 분석과 질적인 분석을 동시에 하며, 생물학은 그 물질적 질서에다 유기체의 구조를 첨가시킨다.  끝으로 모든 과학의 발달에 있어서 정점은 사회물리학이다.  왜냐하면 사회 물리학은 제반 과학의 여왕이며, 이전의 모든 지식을 활용하며 평화롭고 질서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그것들을 통합한 종합과학이기 때문이다.  실증철학인 사회학인 사회학은 완성은 바로 지적 무정부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3. 비합리주의

1)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1788~1866)는 세계가 이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헤겔의 이성주의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세계의 본질을 의지로서 파악한다.  그의 주저 ꡔ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ꡕ에서 살려는 맹목적 의지가 세계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세계의 본질이 맹목적인 비합리적 의지라는 것은 어떻게 파악되는가?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우리는 세계를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인과율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으로 본다.  시간과 공간은 칸트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선천적 직관형식이고, 인과율은 오성범주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을 통하여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경험적 세계는 한갓 표상(Vorstellung)의 세계일 따름이지, 물자체(Ding an sich)의 세계는 아니다.  이 점은 칸트의 견해와 같으나 범주를 인과율 하나 뿐이라고 보는 점이 다르다.  그러면 물자체를 파악할 길은 전혀 없는가?  칸트는 이 길을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서 구하였지만,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신체를 통하여 이것을 파악할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자 신체를 가지고 있다.  경험적 인식에 대해서 신체는 물론 하나의 표상에 불과하고 인과율에 의하여 규정되는 하나의 객관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체는 동시에 우리 자신 속에 의지가 있다는 것을 직접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의지는 신체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살려는 맹목적 의지이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 운동과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무의식적 의지이다.  의지작용과 신체운동은 인과관계에 의하여 결부된 두 개의 객관적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의지작용은 필연적으로 신체의 운동이라는 관계에 있다.  이 양자는 동일한 것이 두 가지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즉 하나는 직접적으로 또 하나는 간접적이고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리하여 신체를 통하여 표상세계 이면의 물자체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데, 한번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면, 여기서 우리는 신체 이외의 다른 객관적 사물 속에서도 그 본질로서 의지가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잡다한 표상세계는 본래 시간과 공간에 의하여 개별화된 세계이다.  시간과 공간은 말하자면 개별화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에 의하여 개별화되기 이전의 물자체의 세계는 아무 것도 없는 잡다한 하나의 근원적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체를 통하여 물자체가 의지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모든 객관적 사물의 본질 역시 의지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렇게 쇼펜하우어는 인간 자신의 경우에서 유추하여 비단 동물과 식물뿐 아니라, 무기물에 이르기까지도 그 근저에 의지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의지는 일정한 목표가 없는 무의식적이고 맹목적인 충동에서 움직인다.  따라서 의지의 활동은 결코 쉬지 않고 만족할 줄을 모른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살려고 애를 쓸 뿐이다.  언제나 무엇인가를 구하여 움직이는데, 그것을 얻자마자 다시 또 다른 무엇인가를 욕구한다.  그것은 영원히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고뇌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살려는 부단한 욕망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필연적으로 고해(苦海)로 된다.  이 고해에서 해탈할 길은 없을까.  의지를 버리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이 길은 우선 예술적 관조에 있어서 달성된다.  예술적 관조에 있어서 우리는 자신의 개인적 주관을 버리고 무의지, 무고통, 무시간의 순수한 주관으로 높여진다.  엑스타시스, 즉 탈아(脫我)란 이러한 주관의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세계의 고뇌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심미적 해탈로서 결국 일시적 해탈에 불과하다.  그러면 영속적 해탈은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이것은 윤리적 해탈에서 가능하다.  즉 도덕에서 비로소 달성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도덕은 동정(Mitleid)에서 성립한다.  동정은 우리가 자기를 버리고 타인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서 동감하는 동고(同苦)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동고의 도덕에 의해서도 결국 궁극적 해탈을 얻지 못한다.  동정은 자기의 개성을 버리고 인간 상호간의 공통한 고통을 동감하는 데서 인간의 고뇌를 덜어 주기는 하나, 살려는 맹목적 의지를 긍정하고 있는 이상 고뇌로부터의 완전한 해탈일 수는 없다.  유정․무정의 일체가 고해이고, 이 고해의 근원이 의지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차라리 이 의지 자체를 근절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금욕과 무의지에 있어서 비로소 진정한 해탈이 가능하다고 본다.  진정한 해탈을 구하는 자는 공허한 무로 몰입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해탈한 자의 눈에는 세계란 그것이 본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쇼펜하우어는 염세적 허무주의에 도달했다.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불교적 요소로 뚜렷하게 채색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 니   체

니체는 삭센지방 뢰켄의 목사 아들로 태어나, 본(Bonn)대학과 라이프찌히대학에서 문헌학을 연구하고, 그의 스승 릿첼의 추천으로 25세의 약관으로서 바젤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1889년 이탈리아 트리노에서 착란증을 일으킨 이후 정신의 정상상태를 회복하지 못한채 1900년 8월 25일 사망하였다.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는 한편으로 유한자와 생성이 가치없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낮추어지는가 하면, 다른 편으로 모든 유한자를 삼켜서 자기 속에 포함한 무한자 즉 절대자 혹은 이른바 참된 존재는 공허한 도식에 불과한 것으로 된다.  이러한 경향에 항거하여 니체는 유한자, 생성, 유동하는 생명, 특히 인간의 생명에 대한 열렬한 변호자가 된다.
니체에 의하면 현실의 세계를 초월한 피안의 무한자, 절대자, 신과 같은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부단히 유동 생성하는 모든 유한자와 인간의 생명과 이 놀라운 현실, 즉 초현실적 절대자 앞에 너무나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이 현실을, 저 허구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어 참다운 문제로 삼으려는 것이 니체의 관심사였다.
이리하여 니체는 절대자를 그 초세계성에서 세계내재성으로 돌이키고 무한자의 모든 속성을 유한자에게 귀속시킨다.  그럴 적에 초세계적인 무한자는 벌써 무의미한 중복에 불과한 것으로 된다.  여기에서 초인간적인 것은 인간 속으로 옮겨 놓여져서 초인(超人, Übermensch)으로 되고, 영원성은 시간 속으로 옮겨져서 영겁회귀(ewige Wiederkehr)가 되고, 존재는 생성 속으로 옮겨 놓여져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된다.  이리하여 니체는 인간을 초인으로, 시간을 영원으로, 생성을 존재로 높인다.  그러나 이렇게 높여진 존재는 어디까지나 생성 속에, 영원은 어디까지나 시간 속에, 초인은 어디까지나 인간 속에 머문다.  초월하되 어디까지나 인간 속에 머무는 초인, 시간을 초월하되 어디까지나 시간 속에서 되풀이되는 영겁회귀, 생성을 넘어 있으되 어디까지나 생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디오니소스적 생성, 이와 같이 초월과 내재와의 모순을 지양한 동일성에 그의 이른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가 있다.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고, 그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니체의 이른바 힘에의 의지는 쇼펜하우어의 맹목적 의지를 수정한 개념이다.  니체에 있어서도 쇼펜하우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본질은 의지이다.  그러나 이 의지는 맹목적 의지가 아니라, 오히려 부단히 보다 더 큰 힘을 추구하는 의지이고, 부단히 성장하고 강화되려는 의지이다.  힘의 성장에는 물론 파괴가 수반한다.  우리는 힘의 성장에서 환희를 느끼고, 힘의 파괴에서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세계에 있어서 힘의 총량은 불변이다.  힘의 총량은 유한한 일정량이지만, 그 작용은 무한하다.  이 세계는 발단도 종말도 없는 힘의 괴물이다.  그것은 전체로서 증감도 없고 생멸도 없으나 부단히 유동․변화한다.  이 세계는 온갖 힘과 힘과의 물결의 출렁거림으로서, 여기에 쌓이는가 하면 저기서는 줄어들어, 영원히 스스로 창조하고 스스로 파괴하는 디오니소스적 생성이다.  세계는 확실히 모순에 차있고, 모순에 차 있는 세계에 있어서의 인생은 비극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의 총량은 쾌락의 총량을 능가한다고 봄으로써 생을 부정하고 의지를 근절하려고 하는 약한 염세관을 니체는 취하지 않는다.  창조의 반면에 파괴가 따르는 자기 모순적인 디오니소스적 생성, 언제나 같은 것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영겁회귀의 세계, 그것은 확실히 허무한 세계임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허무한 세계를 허무한 그대로 받아 들여, 이런 것이 인생이더냐, 좋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이렇게 크게 생을 긍정하고 나서는 운명애(運命愛)의 태도, 이것이야말로 도래한 인간인 초인이 지녀야 할 태도라고 니체는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허무주의를 극복한 유럽 최초의 긍정적인 혹은 적극적인 완전한 허무주의자로 자처한다.



제2절  중기 현대철학


초기 현대철학이 헤겔의 관념론에 대한 직접적인 반동으로 나타났다고 한다면, 중기 현대철학은 초기의 입장을 지양적으로 계승·발전시킨다.  인간과 역사에 대한 실증주의적 해석은 그 나름의 의의를 가지지만 동시에 소박한 사실숭상주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헤겔의 관념론의 와해와 함께 등장한 유물론과 실증주의적 사고는 일종의 과학적 제국주의의 모습을 등장한다.  이와 같은 것은 헉슬리나 스펜서가 그 전형을 보여준다.  이 진화론에 근거한 실증주의는 인간의 삶과 역사를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인 패러다임으로 체계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삶과 역사가 지닌 고유성을 설명하는 데는 실패했다.  또한 이들의 기계론적 사고를 지탱시켜 준 뉴튼 물리학이 더 이상 절대적 권위를 갖지 못한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론의 형성 등과 같은 물리학의 혁명은 근대철학의 방법론적 토대가 되었던 뉴튼 물리학을 위기에 몰아 넣게 되었다.  이 물리학의 위기는 결국 소박한 실증주의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했으며, 삶과 역사 및 이념의 타당성을 철학적으로 옹호하려는 경향이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특수 경험과학인 심리학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호전적인 심리학주의는 인간의 정신영역까지도 과학적으로 설명하여 한다.  베르그송이나 딜타이의 생철학과 후설의 현상학은 바로 이런 심리학주의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정신과학의 영역을 자연과학과 다른 방식으로 정초하려고 한다.  이 생철학과 현상학을 이어 실존철학이 현대철학의 중요한 흐름으로 등장한다.  이와 동시에 물리학과 함께 근대철학을 그 절정에 도달하게 했던 수학 역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칸토르(G. Cantor, 1845~1918)의 집합론의 발견은 수학의 확실성에 대해 의심을 품게 하였다.  이 수학의 위기와 관련하여 형식논리학이 논리계산이나 수학적 논리학의 형태를 띤 논리적 실증주의가 신실증주의란 이름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방면에서는 드 모르간과 부울 그리고 프레게 등에 의해 체계가 형성되면서 20세기의 러셀과 무어를 통해 분석철학을 발전시키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물리학적 및 수학적 이성의 위기와 더불어 직접적인 경험의 확실성에로 다시 돌아가려는 운동이 등장한다.  전통적인 경험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경험의 생생한 영역에로 다시 돌아가려는 일종의 생기론적인 혹은 비기계론적인 경향이 윌리암 제임스를 통해 발전하게 된다.  이를 우리는 실용주의란 이름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1. 현 상 학

헤겔에 대한 직접적이 반동으로 시작한 실증주의는 모든 학문의 모델로 쉽게 받아들여졌다.  특수과학들의 반전과 일반 대중사회에서 얻은 그 특수과학들의 성공으로 인하여 철학이 스스로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실증주의에 힘입고 등장한 과학적 제국주의(Szientismus)는 철학의 학문성까지 포기하도록 강요한다.  이에 맞서 철학의 독특한 주장들을 재정립해야 할 과제가 에드문드 후설(E. Husserl)에게 부과되었다.  그러므로 후설은 특수 경험과학에 의해 철학의 영역이 침탈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일종의 세계관에 지나지 않는 천박한 외양에서 탈피해 철학을 엄밀한 학으로 재정립해야 할 과제를 떠맡게 되었다.  특히 19세기와 20세기 초를 지배했던 심리학주의는 철학의 영역을 자연과학적으로 변조시켰다.  후설 역시 헤겔의 관념적 추상성을 철학에서 배제시키려는 실증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그는 현실을 어떤 특정한 형이상학적 선입견이나 전제에 의해 굴절시키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그것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입장을 취한다.  즉 현실을 그 원본적인 명증성 속에서 파악하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현상, 즉 스스로 나타나는 것(Phänomenon)에 관한 학은 ‘사태 자체에로’(zu den Sachen selbst) 돌아가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꽁트와 같이 본질을 심리적 여건이나 물리적 사건으로 환원해 버리는 소박한 실증주의자와는 구분된다.  왜냐하면 소박한 실증주의자들은 본질 자체를 물리적 사실로 환원하려는 자연과학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이들에게는 현실이 단지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후설은 소박한 실증주의와 구분하여 자신을 진정한 실증주의자로 칭한다.  이 현상학적 실증주의자는 모든 실증적 학들이 의미토대로 전제하고 있는 생활세계를 해명함으로써 근대 실증주의에 의해 초래된 학문의 위기를 극복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학문적 대상들이 의식의 활동과 무관하게 즉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소박한 태도는 실증주의가 남긴 유산이다.  이 유산은 대상과 의식활동의 엄밀한 상관관계, 즉 대상은 이것을 구성하는 의식활동에 의해 성취된 산물이라는 선험적 반성을 통해 비로소 폐기된다.  그러므로 현상학의 길은 일차적으로 모든 대상구성의 영역인 의식에로 돌아가야 하며, 이를 통해 의식과 대상사이의 상관관계를 드러내어야 한다.

1) 심리학주의와의 논쟁

후설 역시 초기 단계에서는 심리학의 영향하에 있었다.  원래 수학자였던 후설은 수의 발생적 기원을 심리학적으로 정초하는 데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의 스승인 브렌타노(F. Brentano)에 의해 철학으로 안내를 받은 후 차츰 심리학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ꡔ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ꡕ(1913)에서 선험적인 방법을 끌어들여 심리학주의적 잔재를 걷어 치운다.  이 선험적 방법이란 대상을 구성하는 의식으로 돌아가되, 이 의식은 영혼과 같은 심리학적 개념과 구분되는 것이다.  경험-심리학적 잔재를 걷어치운 잔여로서 남는 선험적 의식은 현상학적 환원의 산물이다.  이 선험적 의식으로의 환원이 필요한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굴절없이 파악하기 위해 의식의 명증성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의식의 명증성이 확보되지 않은 채 대상과 현실을 명증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현실을 포착하는 렌즈이기 때문에 이 렌즈가 투명성을 갖지 못하면 현실 자체가 있는 그대로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태도변화를 의미한다.  실증주의자들처럼 자연과학적 편견을 가지고 현실을 왜곡시키지 말고 현실을 아무런 전제나 가설없이 단적으로 직관하려는 선험적 태도로의 전환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이와같이 태도변화는 현실을 의식의 단순한 켤레로 생각하여 대상에 대한 의식의 주도권을 천명했던 근대철학으로부터 의식의 절대적 상관자인 현실을 그 자체로 건져 올리려는 실재론적 경향의 표현이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현대철학의 근본특징 중의 하나로 언급했던 것이다.  우리가 현상학적 환원을 실증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적 절차라고 한다면, 이 환원은 모든 본질을 감각적 소여로 단적으로 환원시켜버리는 소박한 실증주의적 환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현상학적 환원은 자연과학적 태도에 의해 매몰되어버린 우리의 생활세계를 이념의 옷을 벗겨 그 본래 모습대로 드러내려는 의식의 인위적인 태도변경이다.  자연과학주의에 깊이 물든 근대 과학은 대상의 존재를 의식에 대한 존재로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학문적 인식과 삶의 고리를 단절시켜버렸다.  이 단절된 관계의 회복을 위해 자연스런 사고방식에 혁명적 전환을 수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스런 태도에서 의식과 무관한 것으로 추정된 객관적으로 그 자체 존재하는 대상들의 존재를 우리의 의식에 주어진 상관자, 즉 주관의 상관적 켤레로서-후설의 용어로 노에시스의 상관자인 노에마로서-확인하기 위한 사고의 혁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스런 태도 속에서 보여진 세계와 현상학적으로 환원된 세계가 다른 세계는 아니다.  단지 동일한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의식의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두 세계일 뿐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현상학적 눈을 가지는가 아니면 특정한 방법론에 묶어 세계를 굴절시켜 보는 자연과학자의 눈을 가지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가 어떻게 보든 산은 산이고 물을 물이다.  단지 우리의 태도가 문제일 따름이다.
우리가 현상학을 실증주의를 극복하는 현대철학의 대안으로 규정할 때, 그의 지향성 개념은 우리에게 매우 친절한 안내를 해줄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ät), 즉 의식은 이미 ‘무엇에 관한 의식’이기 때문에 의식과 대상을 이원적으로 구분하는 실증주의적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길을 간다.  모든 학문적 대상이 우리의 의식활동의 켤레라는 사실에서 학문과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실증주의자들이 학문의 가치중립성이나 몰가치성(Wertfreiheit)을 주장하는 것은 학문의 위기를 절정에 달하게 한다.

2) 생활세계와 학문

후설은 그의 마지막 유고로 남긴 저서 ꡔ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ꡕ(1936)에서 근대학문, 즉 근대과학의 위기를 고발한다.  후설은 근대과학의 의미토대인 생활세계, 즉 우리의 일상적인 관습을 통해 익숙하고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알려진 세계를 다시 부활하려는 과제를 가진다.  근대의 실증주의적 낙관론은 과학적 활동과 이에 앞서는 실행적 생활세계와의 연관성을 의식적으로 차단하였다.  근대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갈릴레이와 데카르트는 다같이 물리학주의의 성과를 등에 업고 생활세계를 단순한 물리적 공간으로 추상화하였다.  근대의 수학적 자연과학의 발달을 촉진시킨 갈릴레이는 발견자인 동시에 은폐자라고 후설은 비난한다.  갈릴레이의 물리학은 시·공간적 형태를 수학화함으로써 자연을 수학적 우주로 설계하였다.  이 수학화의 과정을 통해 생활세계는 그 의미를 상실하고 이념의 옷으로 위장되어 버렸다.  우리의 직관의 대상인 확실한 경험의 세계가 비직관적인 이념화에 의해 그 의미가 추상화된다.
근대의 물리학적 객관주의는 모든 이념화의 전제가 되는 직접적으로 주어진 세계를 방법적으로 추상함으로써 직관적인 생활세계 대신에 비직관적인 과학의 세계가 들어선다.  과학의 소박한 명증성이 생활 세계의 근원적 명증성을 대신하여 과학의 탈세계화가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경험되는 자연공간은 기하학적 공리체계에 의하여 일종의 수학적 집합과 같은 형태로 변형되었다.  이와같이 현실을 수학화하는 물리학적 객관주의가 초래한 근대과학의 위기를 데카르트는 선험철학을 통해 치유하려 한다.  그러나 객관주의와 자연주의에 끊임없이 저항하였던 데카르트에서 헤겔까지의 철학 역시 이 생활세계에로 돌아가는 데는 실패하였다.  후설은 선험적 현상학을 통해 이 길을 열어 간다.
모든 과학적 활동과 개별적 학문들은 과학적 활동 이전의 경험, 즉 직접적으로 체험되는 생활세계라는 보편적인 신념토대에로 돌아가서 다시 되물어져야 한다.  이 생활세계는 우리가 언제나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식작업과 학문적 규정에 토대를 부여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물리학적 공간개념으로 추상화될 수 없는 지각의 세계이며 우리와 친숙한 세계이다.  근대의 정밀과학은 이 세계에 입혀진 하나의 옷일 뿐이다.  학문의 모든 성과는 이 직접적 경험세계에 자신의 기반을 갖는다.  이 기반을 상실한 근대 물리학주의는 이 세계의 구체적 의미를 이념화하고 형식화함으로써 학문을 삶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후설은 이와 같이 현대 자연과학적 인식의 고향상실, 의미가 공동화된 소외현상을 밝힘으로써 현대인들이 처한 위기를 철학적으로 치유하려 한다.  근대 이후의 물리학적 객관주의가 자신의 의미기반인 생활세계뿐만 아니라 선험적 주관성까지도 망각하였기 때문에 학문과 인간성의 위기가 발생하였다.  이는 바로 철학의 위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성과 학문의 위기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 즉 인간과 자연의 근원적인 공생관계를 회복하려는 생태학적 진단과도 연결된다.


2. 삶의 철학

1) 딜 타 이

헤겔의 범논리주의와 신칸트주의자들 그리고 실증주의자들에 있어서 철학은 다만 논리적 체계성을 지닌 철학이었고 동시에 강단의 철학이었다.  이들 철학은 인간의 구체적 삶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어떻게 체계적 완전성과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는가에 더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이제 대중들의 관심은 삶의 철학으로 모아지기 시작하였다.  이 삶의 철학은 20세기초를 지배했던 기계론적 사고, 도식화하는 사고, 표면에만 붙어 있는 사고, 수학적-합리주의적 사고, 정적인 사고에 반대하고, 오히려 비합리적인 것, 일회적인 것, 내면적인 것, 영혼적인 것, 체험적 인 것, 역동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다.  이제 이들에게 중심이 되는 개념은 이념이나 논리나 사유작용이 아니라 바로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삶 자체이다.
딜타이(W. Dilthey, 1833~1911)는 이미 낡은 시기에 속하지만 그의 영향은 제 1차 대전 후에 전개되었다.  그 역시 역사가로서 그 당시를 지배했던 실증주의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칸트의 선험적 계기도 받아 들인다.  삶의 현상들을 자연과학적 방식으로 도식화하고 객관화하려 했던 실증주의적 사고는 결국 삶 자체를 무역사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고, 정신과학이 자연과학에 대해 가지는 고유성을 차단시켜 버리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딜타이가 그 이후의 역사철학이나 정신과학에 남겨 준 유산은 바로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방법론은 ‘설명’과 ‘이해’의 방법으로 이원화하였다는 점이다.
딜타이의 중심 문제는 삶과 삶의 이해(Verstehen)이다.  삶은 그에 있어서 목적론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자기완결적 통일체이다.  이것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Erklären)하려는 실증주의적 태도는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심리학에서 ‘이해’라는 단어를 받아 들인다.  그는 ‘설명하는’ 심리학에 반대했다.  이 심리학은 자연과학과 그 보편화해 나가는 도식적인 방법에 바탕하고 있어, 바로 살아 있는 영혼에 고유한 것, 즉 삶의 일회성을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삶은 그 자체가 자기완결적 통일체이고 그 고유한 개성을 지닌 개별적 대상으로서 자연과학적 방식에 의해 보편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딜타이는 기계적 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연상심리학을 반대하고 심리적 사실을 꿰뚫고 있는 구조연관, 즉 심리적 사실을 받아들이는 체험연관에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비로소 인간의 정신적인 것에 관한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역사가로서의 딜타이는 객관적 역사적 사실 자체를 맹목적으로 보편화하려는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거부하고 역사의 문제를 삶의 이해의 문제와 연결하여 해석하려 한다는 점에서 해석학(Hermeneutik)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정신과학의 역사에서 이런 구조에 들어 맞는 것은 정신사적인 ‘유형’ (Typus)이다.  언어, 종교, 국가 등은 비교를 하는 방법에 의해, 변화의 유형, 발전의 방향, 규칙 등을 알려주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세계관에 있어서도 이와 똑 같은 것이 제시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신사(精神史)의 여러 현상들 역시 일정한 유형, 즉 삶의 형식으로서 모든 개별적 삶의 현상들을 꿰뚫고 흐르는 보편적 형식들에 바탕하여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개별적 삶의 하나의 일정한 형식 하에서 작용을 하기 때문에 역사적 보편성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딜타이가 헤겔 이후 기계론과 결정론적 사고에 의해 매몰되어 버린 인간의 구체적 삶과 역사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다시 꺼집어 내려는 노력을 하였다는 점에서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정신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알려고 했지만, 그가 발견해낸 것은 개별적 유형들과 다양한 입장들 뿐이었다.  헤겔에게는 하나의 절대자가 있었지만, 딜타이에게는 상대주의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딜타이가 역사적 상대주의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을 버리진 못했지만, 정신과학적인 이해의 방법을 자연과학적인 설명의 방법과 구분하여 실증주의의 유령을 역사 속에서 몰아내려 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런 점은 이후의 역사철학이나 학문의 방법론적 논의에 있어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베르그송

딜타이와 함께 베르그송 역시 삶을 과학적 방식으로 다루는 것을 거부한다.  20세기초를 지배한 실증주의와 결정론 그리고 진화론은 마치도 일종의 종교와도 같이 그 시대의 정신을 사로 잡았었다.  베르그송 역시 과학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과학을 통한 천년왕국의 꿈을 꾸었던 그 당시의 지적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스펜서(H. Spencer)의 진화론을 수없이 읽은 후에야 비로소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삶의 현상을 과학적인 방식으로 파악하려는 한 그 당시의 과학주의를 철저히 거부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앙리 베르그송(Henry Bergson, 1859~1941)은 1859년 10월 18일 파리에서 4남 3년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꽁도르세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그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프랑스의 일류 고등학교를 옮겨 다니면서 철학을 가르쳤다.  특히 그는 스펜서에 심취하였고 스펜서식의 과학철학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간문제에 대한 스펜스의 취급방식에 실망을 느끼면서 그 당시의 기계론적 사고방식에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가 시간을 과학적인 방식으로 다루었던 스펜서에 염증을 느끼면서 시간을 일종의 지속으로 규정하기 위한 기회를 마련하게 된다.  그는 시간을 의식의 본질과 지속(duree)으로 파악하고 직관을 통한 지속의 파악이라는 자신의 핵심적인 철학을 형성하게 됨으로써 그 당시 프랑스의 지적 분위기를 지배한 과학주의에서부터 벗어나 삶의 철학을 특유한 방식으로 형성하게 된다.

(1) 지성과 직관
베르그송에 의하면 어떤 사물을 인식하는 데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즉 지성과 직관이다.  이것은 바로 딜타이가 구분한 설명과 이해의 방식과 유사한 것이다.  지성은 우리가 대상의 주변을 맴돌면서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이고, 직관은 우리가 대상안으로 들어가서 대상을 직접 인식하는 방식이다.  지성은 우리가 대상을 관찰할 수 있는 장점을 갖지만 관찰자에 따라 다른 상대적 지식을 제공해 준다.  분석적 방식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지성은 특정한 관점에서 대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대상을 그 전체로서 파악하는 데는 실패한다.  이 지성은 과학적 추론에는 적합한 능력이긴 하지만, 이것은 결국 분석적 작업이기 때문에 대상의 본질을 왜곡시킨다.  분석은 대상을 이미 알고 있는 요소로 환원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대상의 본질을 역동적이고 생동적으로 파악하는 데는 실패한다.  대상의 본질은 본래 역동적이고, 생동적이며 연속적인 존재, 즉 지속이기 때문에 분석은 이 지속을 방해하고 삶과 운동을 정지시킨다.  과학적 분석의 일상적 기능은 바로 대상을 정태적인 여러 부분으로 쪼개는 일이며, 자아를 파악하는 방식 역시 심리학적 방식으로서 자아를 여러 심리상태로 분리해서 연구하는 방식이다.  베르그송은 바로 이런 과학적 분석의 일을 담당하는 지성에 대상을 직접 파악하는 직관을 대체시킨다.
베르그송은 자아를 파악하는 방법이 직관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들의 누구나 내부로부터, 즉 분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관에 의해서 파악하는 실재가 적어도 하나 있다.  그것은 시간을 통해서 흘러가고 있는, 즉 지속하는 우리의 자아이다”.  이것은 자아의 주위를 맴돌면서 자아의 여러 형태들을 분석하여 개념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아 안으로 파고 들어가 자아와 하나가 되는 방법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은 직관을 일종의 ‘지적 공감’이라 부른다.  그에 의하면 직관으로 사유하는 것은 곧 지속 안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지성은 비운동적인 것에서 시작하는 데 반해 직관은 운동에서 시작한다.  이처럼 베르그송은 그의 모든 관심을 사물 내에 있는 지속이라 불리는 과정에 쏟는다.  그가 고대 여러 철학들을 비판하는 것도 그들이 지속, 또는 생성을 심각하게 다루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이다.  전통적인 철학은 항상 정태성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지적과 함께 베르그송은 운동, 생성, 지속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  특히 그의 시간개념에 대한 분석은 그의 철학의 핵심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논고」에서 수학적-물리학적 동질적 시간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  시계에 의해 측정되는 시간은 시간의 공간화에 불과한 것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시간이 아님을 강조한다.  물리학적으로 측정가능한 시간은 순수한 의식의 흐름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단순히 시계 자판 위에 공간적으로 표현된 시간일 뿐이다.  이것을 베르그송은 “의식의 그림자를 떠도는 공간의 환영”이라고 불렀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우리가 만일 공간화된 용어로 시간과 운동을 사유하게 된다면, 우리도 역시 제논이 쳐 놓은 그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제논은 날아가는 화살은 사실상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화살은 매순간 공간상의 한 점을 점유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순간 화살이 정지해 있음을 의미한다.  베르그송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제논의 가정이 옳다면 제논의 논거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논은 시간이란 공간 속에 실재하는 위치에 있으며, 시간의 불연속적인 단위구간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오류를 범하고 있다.  시간이 일정한 단위구간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성의 분석적 활동에 의해 비롯된 억측일 뿐이다.  시간은 결코 불연속의 파편들이 아니다.  음악의 멜로디가 분할될 수 없는 지속적인 흐름이듯이 시간 역시 지속이다.  이 지속을 마치 일정 구간을 지닌 파편들로 생각하는 것은 지성이 인위적으로 공간화하는 작업 때문이다.  
멜로디나 제논의 화살의 경우에서 보듯이, 지성이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정태적인 부분들을 파악하는 일일뿐, 운동이나 지속을 파악하지는 못한다.  삶의 본질을 형성하는 시간은 마치 두루마기가 풀리고 감기는 것 같은 연속적 흐름이다.  이 연속적 흐름이 바로 의식적 삶의 본질이기 때문에 지성의 분석적 추론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  이상과 같은 베르그송의 입장은 기계론적인 사고인 진화론에 대해 가졌던 그 당시의 지배적인 성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태도와 연결된 것이다.  특히 삶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려 한 그 당시의 실증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을 구 주요한 과제로 삼았다.  이것은 그의 주요 저서인 ꡔ창조적 진화ꡕ에서 두드러진다.

(2) 창조적 진화
베르그송은 모든 사물이 넘쳐흐르는 폭발적이면서도 여전히 보완적이며, 오직 하나의 방향을 고수하는 여러 힘들이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직관을 통해 파악한 순수지속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약동하는 생명의 흐름이다.  인간의 삶의 본질을 형성하는 시간은 단순한 지속이 아니라 동시에 창조적인 생명의 약동이다.  지속을 약동하는 생명의 흐름으로 파악한 베르그송은 과학이 어떻게 지속과 생성을 성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그의 관심을 옮긴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ꡔ창조적 진화ꡕ의 서두에서 기존의 진화론을 검토한 후, 그런 과학이론들 가운데 어느 것도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은 내린다.  그는 기계론이든, 목적론이든 생기론이든 어떤 진화론도 생명의 약동의 과정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 당시의 진화론은 모든 생명의 약동을 단순히 기계론적인 틀 속에서 고정된 모습으로 이해하였을 뿐, 생명의 창조적 진화의 과정을 확실하게 설명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베르그송은 과학적 진화론 대신에 생명일반의 진화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열쇠를 인간의 내적 생명에 대한 고찰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열쇠는 다름 아닌 ‘삶의 약동’(elan vital)이다.  약동이란 진화의 선들로 분할되면서도 애초의 힘을 지니며, 적어도 규칙적으로 유전되고, 스스로 축적되어서 신종을 창조하는 변이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삶의 약동은 모든 사물의 동기가 되며, 그것은 곧 근본적인 실재이다.  그것은 모든 생물의 근본적인 내적 요소이며, 모든 사물을 통해 깨어지지 않는 연속성 속에서 운동하는 ‘창조력’이다.  이 삶의 약동의 과정은 직관에 의해 직접적으로 파악된다.  과학적 추론을 일삼는 지성에 의해서는 이 약동의 과정이 파악될 수 없다.  지성은 연속적인 창조의 동작을 정지된 모습으로 찍어놓은 일련의 사진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으로는 새롭고 예측불가능한 것의 창조를 그려낼 수 없다.  지성이 생명을 파악한다는 것은 관성에 의해 생명을 번역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지성은 진화도 측정가능한 단계들을 거쳐 상향하는 단일하고 점진적인 경향이라고 기술할 수밖에 없다.  삶의 창조적인 진화과정은 과학적 추론에 의해 개념화되고 범주화될 수 없는 약동의 과정이기 때문에, 기계론적인 인과론이나 목적론은 이 과정에 대한 충분한 번역이 될 수 없다.

(3) 도덕과 종교
ꡔ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ꡕ에서 베르그송은 지성과 직관의 기준을 도덕과 종교에도 그대로 적용시킨다.  직관이 적용되는 곳은 운동이고, 지성이 적용되는 곳은 부동성이다.  개방된 도덕은 운동을 함축하고, 폐쇄적 도덕은 부동성을 함축한다.  운동과 부동성은 사실상 그가 주장하는 도덕의 두 원천이다.  사회적 결속을 위해 폐쇄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의무의 감정이 부동성을 토대로 한다면, 운동은 위대한 도덕적 인물들의 모범에 의해 작용하는 개방된 사회의 창조적 감성의 토대가 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의무의 감정은 사회적 억압의 감정이다.  의무의 목소리는 신비로운 것이 아니며 그 사회 밖에서 들려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목소리이다.  사회적 명령들은 각 개인에게 관계하기 때문에 각 개인은 의무감을 느낀다.  이렇듯 의무를 폐쇄사회가 그 구성원에게 부과하는 억압이다.  사회적 결속을 위해 요구되는 의무는 그 기원을 지성에 둔다.  이에 반해 개방된 동적인 도덕은 초이성적 기원을 갖는다.  개방된 도덕은 위대한 도덕적 이상주의자들이나 예언자들의 삶을 기원으로 한다.  이들의 삶은 기원으로 하여 도덕에 있어서 비약이 이루어진다.
지성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규율을 부과한다.  지성은 도덕을 폐쇄사회에 한정하려 한다.  그러나 공감과 감정의 폭을 이루는 직관은 폐쇄사회를 넘어 적용되는 도덕을 발전시킬 수 있다.  즉 신비주의자이건 성인이건 위대한 도덕적 삶의 영웅들이 나타나야 비로소 의도적 진보가 일어날 수 있다.  그들은 인간성을 새로운 문명으로 고양시키며, 그들의 마음의 눈으로 새로운 사회의 분위기를 보고 그 분위기 안에서 삶에 가치를 더욱 더해 준다.  지성이 제아무리 법을 체계화시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체계적인 억압수단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도덕가의 직관은 감정의 더욱 풍부한 원천을 개방시키며, 그로 인해 새로운 삶의 양식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열망을 유발시키고 그러한 창조력을 제공해 준다.
베르그송은 도덕의 두 가지 유형과 관련해서 종교도 두 가지 유형, 즉 정태적 종교와 역동적 종교로 나눈다.  두 가지 유형의 도덕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두 가지 종교에서도 그것들의 기원은 부동적인 지성과 역동적인 초지성, 즉 직관이다.  물론 정태적 종교라 할지라도 그것 역시 삶의 특정한 근본적인 요구를 해결해 주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종교란 본질적으로 안전과 확신, 그리고 공포에 대한 위안을 구하기 위해 인간이 요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은 인간에 의해 그리고 사회에 의해 곧 제도화되며, 그것들은 비판적인 이성으로부터 보호되기 위하여 믿음으로 전환되고 의식과 계율에 의해 보호되며, 결국은 사회의 구조 속에 끼여들어 간다.  이것이 바로 정태적 종교이다.  그러므로 정태적 종교는 지성의 표상에 대항하는 자연의 방어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  이에 반해 역동적 종교는 신비주의를 본질로 하며, 그것의 궁극적 목적은 창조적 노력, 즉 신적 노력과의 접촉이다.
이 때 신비주의가 신화형성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신비주의는 개개의 존재를 삶의 약동, 또는 참된 존재와 연관시키는 것으로서 매우 보기 드문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신비주의를 행할 수 있는 몇몇 안되는 예외적인 사람들의 힘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면, 인류의 삶은 달라지고 사람들은 인류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신비주의자는 신의 도움을 통해 신의 창조를 완결시키는 자이다.  신을 통해서 그는 신적 사상으로 모든 인류를 사랑한다.
세계의 모든 신앙도 신비주의자들로부터 나왔다.  그것은 사막이나 심산유곡에서 명상이나 신비적인 경험을 통해 나온 결과이다.  대부분의 동양의 신비주의가 그렇다.  불교는 이성의 세계를 넘어 모든 생물에 대한 절대적 외경(畏敬) 그리고 무념, 무상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가르친다.  기독교 역시 신비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신비주의는 기존의 교회나 경직된 종교를 넘어 흐르는 작렬하는 불꽃이요, 용암이다.  그것은 기존의 교회와 종교를 밝히고 그들의 문을 열어 놓지만, 그들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의 사도로서 초대교회의 활기에 찬 임무에로 복귀시키려 하는 것이다.  신비주의와 기독교는 서로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그 어느 하나도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신비주의자들은 예수를 계승하고, 참된 존재에의 몰입 또는 접촉을 수행한다.  그들은 언제나 인간의 영혼 속에 뜨거운 생명력을 자신의 행위를 통해 불어넣어 준다.


3. 실존철학

1) 실존철학의 발단

실존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철학사조는 1930년대에 독일에서 형성되었고, 그 이후 여러 유럽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 실존철학은 그 뿌리를 삶의 철학에 두고 있다.  헤겔의 추상적인 관념론에 반대하고 정신이나 이성이란 낡은 개념 대신에 구체적인 삶을 철학적 주제로 다루기 시작한 삶의 철학이 보다 철저화된 모습으로 실존철학은 등장하였다.  공허한 형이상학적 명상을 거부하고 삶을 그 자체로 이해하려고 한 삶의 철학의 운동은 실존철학의 사상적 뿌리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삶의 철학이 문제시하는 ‘삶’(Leben)이란 개념이 철저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삶의 현상들을 유형화하는 상대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선 실존철학은 이와 같은 상대주의적 요소를 거부하고 하나의 절대적인 삶의 철학을 형성하려는 데서 출발한다.
물론 이 실존철학은 1차 대전 이후 독일을 지배한 정신적 상황, 즉 전쟁이 가져다 주는 극한적 상황은 이제 더 이상 대상적인 것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없게 하였고, 나의 구체적인 삶과 유리된 객관적인 진리에 대해 미련을 가질 수 없게 하였다.  이 시대에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것, 즉 더 이상 대상화할 수 없고 객관화할 수 없는 최종적인 삶의 문제에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지 않으려고 도망치다가 할 수 없이 절벽에 뛰어 내렸고, 다행히 절벽 한 가운데 나뭇가지에 걸려 목숨은 건졌지만, 아래는 시퍼런 바다 속에 악어가 입을 벌리고 서 있다.  그리고 내가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는 거의 썩어 부러질 정도가 되었는데, 그 남은 부분마저 생쥐가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다.  이런 한계 상황에서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성이나 정신 혹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 남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에 대한 불안은 그 시대 전쟁을 겪은 독일인들에게 만연되어 있었다.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무너지게 되었고, 역사는 반드시 진보할 것이라는 신앙이 뿌리째 흔들리면서, 인간은 불안이라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가장 적나라한 모습으로 세상에 내던져졌고, 아무런 대상이 없는데도 하염없이 현기증과 불안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전쟁이 가져다 준 죽음의 문제를 바로 자신의 문제로 싸안아야만 했고, 죽음에 이르는 절망적인 존재임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자신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을 가속화한 것은 그 당시의 산업화나 기계화가 안겨다 준 인간의 소외 현상이다.  이것은 군중과 집단에 휩싸여 자신의 삶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왜소한 인간 그리고 기계화에 의해 단지 부품으로 전락한 바퀴벌레 같은 인간으로 변신한 현대인들은 이제 삶이란 문제를 철저하게 해명하고 한계상황을 극복하려는 철학적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이란 개념은 인간 속에 있는 어떤 아주 명확하고 결정적인 체험 능력을 사상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이 실존이란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삶을 표현하는 생계와 같은 외면적인 실존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를들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계를 잃는다’거나 ‘잘산다’ 혹은 ‘죽지 못해 산다’는 등의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외면적인 삶의 양식인 경제적 부나 육체적 건강 혹은 지적 풍요로움에서 오는 상대적인 실존경험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핵심, 즉 마지막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삶의 체험을 지칭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경제적 부나 건강이 비록 인간의 삶의 외면적 치장을 해줄 수 있을지라도,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사건, 예를들어 죽음이나 불안과 같은 것들 앞에서는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체험하는 실존이란 사건은 인간의 외면적인 삶의 내용들이나 형편들을 초월한다.
실존은 Existenz의 번역어인데, 이 말은 existentia라는 중세의 용어에서 연유한다.  이 말은 중세의 본질(essentia) 개념과 짝을 이루는 것이다.  이 본질은 “어떤 무엇이 바로 그것인 바”, 즉 나무가 나무인 소이를 일컫는다.  즉 어떤 것의 우연적인 속성들을 제거하고 남는 보편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이래 전통철학은 존재자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 왔다.  말하자면 본질철학이다.  예를들어 ‘망치’란 대상의 본질은 망치를 못이나 책상 등과 구분하여 주는 보편적 속성, 즉 ‘못을 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실존을 의미하는 existentia는 영원불변한 실재로서의 본질이 아니라, 현실적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개개의 현실존재, 즉 현존(Dasein)을 의미한다.  여러 내용적인 규정들을 다 제거하고 남아있는 오직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런데 실존철학에서는 이 현존이란 개념의 외연이 좁아진다.  즉 인간의 현존을 특히 실존으로 부른다.  인간을 제외한 여러 존재자, 예컨대 산이나 나무, 신과 고양이 등은 존재하지만, 인간은 실존한다.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를 부채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에 있어서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신에게는 존재가 문제될 필요가 없고, 동물에게는 문제화할 능력이 없는데 반해, 인간은 마치 달팽이가 자신의 껍질을 평생 짊어지고 살듯이, 자신의 삶을 항상 문젯거리로서 짊어지고 산다.  이와 같은 인간의 특이한 존재방식은 실존이라고 칭한다.  이런 맥락에서 샤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전통철학에서는 본질이 실존에 항상 앞선다.  플라톤에 있어서 개체는 보편자인 이데아를 모방으로 하여 제작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데아란 본질이 먼저 주어져 있고 이를 모방으로 비로소 개체의 존재가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중세철학에서도 실존은 본질에 대한 보충물이나 우연적 속성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실존철학의 형성과 더불어 인간의 구체적 현존을 실존으로 지칭하게 되었고, 이 실존을 본질에 앞서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다.  인간과 사물은 똑 같은 현실존재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개별성과 주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현존이 본질에 대한 단순한 부가물로서 생각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망치는 못쓰게 되면 ‘저’ 망치로 대체될 수 있지만, ‘이’ 인간은 ‘저’ 인간으로 대체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인가”하는 전통적인 물음은 인간의 개별성과 주체성을 제거한 이후 개념적으로 본질을 규정하려는 물음이다.  사물과 신은 단지 거기에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항상 자기의 문제로 끌어 안아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본질이라는 추상적인 껍질에서 튀어져나와 각자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와 씨름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어떻게 사는가가 일차적인 문제이다.  인간에게는 현실적 존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본질이 정해진다.  이것을 샤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철학의 근본명제로 정식화했다.

(2) 실존은 주체적 결단이다
전통철학이 논리적 체계를 구축하는 일에 몰두하는 가운데 인간의 실존에 대한 자각은 뒷켠으로 물러나 있었다.  헤겔의 범논리주의는 논리적-객관적 체계를 이론적으로 구축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을 뿐 인간의 현실존재에 대한 주체적 반성은 결여되어 있었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확보하기에 급급했던 전통철학은 인간의 개체적이고 주체적인 진리를 한갓 체계의 부산물로 여기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골(Kierkegaard)은 실존철학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나는 “문장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감탄사” 또는 “줄 사이에 거꾸로 인쇄된 활자”라는 키에르케골의 말은 거대한 논리적 체계만 갖추면 철학은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내었다는 헤겔 철학의 거만함을 꼬집는 말이다.  객관성과 보편성이란 이름으로 거대한 논리적 체계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의 구체적 실존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거대한 궁전을 지어 놓고서 그 자신은 오두막에 살아가야 하는 가련한 모습이 될 것이다.  키에르케골은 젊은 시절의 일기에서 아무리 빈틈없는 체계를 세웠다 하더라도, 내가 그 속에 살고 있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외친다.  그는 어떤 종교강연에서 한 저술가의 예를 들고 있다.  그는 ꡔ하나님의 사랑ꡕ이란 저술 때문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그 저자가 불행한 고난의 시련에 허덕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민 끝에 어떤 목사를 찾아가서 충고를 구했는데, 그 목사는 찾아온 사람의 하소연을 다 들은 후 “그 누가 지은 ꡔ하나님의 사랑ꡕ이란 책을 읽어보시오.  그 책을 읽으시고도 만일 구원을 얻을 수 없다면, 당신은 구원될 길이 없는가 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진리는 어느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타당할지는 몰라도, 그 보편타당성이 나의 구체적 실존을 확인시켜주는 주체적 진리는 되지 못한다.  이 주체는 근대 이성주의에서의 추상적인 주관이나 인식론적 주관을 의미하지 않고 예외자, 단독자로서의 주체를 말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결단하며 살아가는 실존하는 주체이다.  그러므로 주체적 진리가 논리적 명제에 국한하여 생각해서는 안된다.  진리를 명제에 국한되어 생각하는 한, 진리는 한갓 논리적 추론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적 진리는 자신의 삶에 성실함을 의미하며 자신의 본래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주체적 결단을 의미한다.  그것은 육체를 가지고 원죄에 허덕이는 존재로서, 그러기에 부단히 자기 자신의 존재방식에 관심을 쏟고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적 실존의 양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실존적인 의미의 진리는 한갓 명제적 진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성실한 것을 뜻한다.
키에르케골은 개인이 자신의 개별실존을 성취하는 바로 거기에 자신의 진리에 도달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다.  그는 개별 실존이 보편으로 약분되어 버릴 수 없음을 강조한다.  헤겔의 전체주의는 인간 개별 실존을 사변의 추상물로 환원하여 버림으로써, 개별 인간의 주체적 실존이 진리의 장이 되어야 함을 간과하였다.  키에르케골은 이 실존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설명한다.  첫째는 감성적 실존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감성적 욕구의 충족, 즉 향락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이 단계는 결국 인간을 쾌락의 노예로 전락시켜 버린다.  이 단계에서는 자신의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기회도 가질 수 없다.  이제 두번째의 단계인 윤리적 실존으로 비약하게 된다.  이 단계는 양심을 가지고 윤리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윤리적 사명을 다 할려고 하면 할수록 항상 한계에 부딪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윤리적 단계로부터 종교적 실존의 단계로 비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과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인간의 참된 실존이 가능하게 된다.  신 앞의 단독자로서의 실존체험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실존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2) 야스퍼스

(1) 존재 물음
만약 실존철학이 본질이 아닌 실존 즉 존재의 양식에 대한 물음이라면, 우리는 야스퍼스로부터 존재물음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함의 모든 길은 모든 현상 속에 한없이 많은 부분 부분들과 수없이 분산된 것들을 샅샅이 살피며 존재 자체를 찾는다”는 야스퍼스의 말은 존재물음을 철학함의 궁극적인 문제로 삼아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 존재 자체는 모든 변화 속에 존속하고 있는 하나이자 전체인 것으로 추구되고 있으며, 그것은 신성(Gottheit)으로서의 근원적인 근거이다.  그러나 야스퍼스에 따르면, 이 물음 자체는 단순히 이론적 의도나 보편적인 존재론적 의도에서 또는 단순히 방법적인 회의에서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균열에 직면하여 가능한 실존이 당황하고 파산된 상태에서 제기된다.  이 존재 자체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적 물음과는 달리 실존적 결단에 의해 비사유의 방식으로 경험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존재 자체는 오성의 추론적 방식을 통해 개시되어져야 할 대상적 규정성이 아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방식으로 존재에로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존재 자체를 은폐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존재 자체는 모든 개별적 존재자를 넘어서 단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무규정적 대상이다.  그러므로 존재 물음은 그 자체가 초월이다.  이 존재는 모든 개별적인, 즉 대상적인 존재자들을 그 고유한 존재가능성에로 이끌어 주는 무대상적 근거이기 때문에 이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은 전통적인 대상적 물음과는 다른 그 자체 초월적 물음이다.
그러므로 만약 존재 물음이 개별적인 존재자에서 시작한다면 이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를 지시할 것이고 따라서 항상 존재 전체를 단적으로 지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존재는 개별자의 존재를 자신 속에 포괄하고있기 때문에 모든 개별적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지평이요 포괄자(Umgreifende)이다.  이 전체로서의 존재는 모든 대상성의 비대상적 근거이고 모든 것들을 자신 속에 포괄하는 근원적인 존재이다.  이것은 주체도 객체도 아닌 오히려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보다 근원적인 지평이다.  이 근원 지평은 주객이 분리되는 가운데서 그 형체를 취하여 나타나게 된다.  말하자면 존재 자체는 주객의 분리를 통해 비로소 형태를 취하고 표현되지만, 이를 통해 존재 자체는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  이와 같은 존재의 균열이라는 존재 의미의 근본 방식들을 야스퍼스는 그의 독특한 “포괄자 존재론”(Periechontoiogie)으로 설명한다.
(2) 포괄자
모든 개별적인 존재자들을 포괄하는 존재 자체는 그 존재방식이 이중적이다.  즉 한편으로는 개별적 존재자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전체로서 현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적 존재자에게 규정된 형태를 취하면서 나타나는 방식으로 현존한다. 이것은 바로 존재가 우리에게 나타나면서도 동시에 사라진다는 이중적 존재방식을 가진다.  말하자면 존재 자체는 우리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우리 자신을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특이한 성질을 가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포괄적 존재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이것은 다른 모든 존재는 항상 우리 인간에 대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존재 자체는 인간 존재를 통해서 비로소 형태를 취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은 존재 자체인 포괄자를 드러내는 포괄적 존재가 된다.  이 포괄적 존재의 존재방식들에 대해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한다.
먼저 우리 자신으로서의 포괄자인 현존재가 첫번째의 것이다.  존재 물음으로 중재되는 첫번째 근본 경험은 “나는 거기에 있다”는 말로 표현된다.  나는 시간의 한계 내에서 현존과 권력의 관심에 이끌려 살고 있는 존재인 포괄자이다.  그러나 이 포괄자인 현존재는 시공간적으로 규정된 대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포괄자로서의 현존재는, 어느 것이든 나에게 현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들어가야 할 현실의 장이다.  나의 존재는 모든 대상성이 근거를 두고 있는 바탕으로서 그 자체는 비대상적이고, 단순히 시간과 공간에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존재는 결코 그 자체가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로서의 현재성인 것이다.  그러나 이 현존재는 항상 죽음에 직면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만족할 수 없다.  따라서 현존재는 더 이상의 근원적인 포괄자를 지시하지 않을 수 없다.
두번째의 포괄자는 의식 일반이다.  개인적이고 사실적인 의식으로서의 나는 나의 현존재를 체험적으로 이해하는 반면에, 나는 의식 일반으로서 보편타당한 오성의 사유와 “나는 사유한다”의 확실성에 참여한다.  이 의식 일반의 범주들은 대상의 사유를 위한 필연적 사유형식으로서 우리에게 모든 대상의 존재 조건이 된다.  따라서 의식 일반을 모든 대상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포괄자이다.  그러나 이 의식 일반 역시 절대적인 보편성과 그리고 사유할 수 없는 것에 직면할 때 한계를 갖는다.
세번째의 포괄자는 정신이다.  무시간적 의식 일반의 추상성과 살아있는 현존재의 구체성과는 달리 정신은 나의 앎에 대해 자신 안에 폐쇄된 대상이 되지 않고 이념으로 남아 있게 되는 이해가능한 사유와 행위 및 느낌의 전체성이다.  이 이념은 모든 개별적 연구에 전제된 것이고 그 연구를 개별적 제약들과 인식들의 완결될 수 없는 계열에로 이끌어 가는 무제약적 전체이다.  이 이념은 또한 현존재의 우연성을 간직한 보편타당한 오성적 앎의 통일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식의 보편 타당성의 필연적 조건인 오성의 단순한 형식적 통일성과는 달리 정신은 역사적 통일성과 시간적인 사건으로서 현실적인 것이다.  정신은 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때마다 언제나 역사적이며 직업, 이념, 문화 이념, 민중 이념 등에서 전제되며 장소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그 때문에 이념의 현실성인 정신의 통일성은 역사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형태이며, 이것을 받아들이느냐 혹은 거부하느냐가 한 시대의 모습을 새겨 놓는다.  세계와 시대의 역사적인 변동과 붕괴는 바로 이념의 좌초와 정신의 한계를 드러내 준다.
네번째의 것은 세계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오성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근원적인 사실인 세계와 마주하고 있다.  세계는 비록 우리 존재에 대해 마주 서 있긴 하지만, 객체화될 수 있는 대상 또는 세계 내부의 존재로서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계는 우리가 세계 존재에 접근 할 수 있게 되는 모든 현상들이 우리와 만나는 근거이다.  세계는 대상으로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안에서 직관의 형식들과 사유 형식들에 의해 개개의 대상성이 구성되는 곳이다.  세계는 우리의 대상적 사유에 의해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  모든 추정적인 세계 인식은 무너지게 된다.  세계는 우리의 유한한 인식에 대해 결코 개방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이다.
다섯번째는 실존이다.  실존으로서의 자기 존재인 포괄자는 앞의 다른 포괄자들과는 달리, 나 자신과의 관계 맺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존을 자신의 결의에서 나온 결단에 의해 존재에로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실존은 자신과의 관계를 맺게 하는 가능한 경험으로서 야스퍼스가 말한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비약을 준비하는 단계이다.  실존은 모든 포괄자들의 근거가 되는 포괄자로서 “나는 스스로가 될 수 있다”는 경험에서 나온다.  실존은 스스로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모든 다른 포괄자들의 의미를 드러낸다.  실존은 자유를 통한 자기 존재이므로 파악될 수 없는 근원이다.  실존은 대치될 수 없는 역사적 절대성을 가지며 해석될 수 없는 방식으로 갑자기 현실이 되는 존재가능성이다.  실존은 세계를 향한 자유이며 그 완성은 나 자신의 역사적 제약성인 현존재의 현실을 자유롭게 떠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때 실존은 객관적 역사 전체에 내가 현사실적으로 결속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를 수행하는 실존이 개별자의 독백적 행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실존은 ‘실존적 교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실존은 초월과의 연관성에서만 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실존은 초월자와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월자와 연관되지 않은 실존은 존재의 확신을 결여하기 때문에 비본래적인 삶에 빠진다.  이처럼 실존은 초월자에 의해 선사된 것이다.  따라서 야스퍼스는 “실존은 자기 자신과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의 초월과 관계하는 그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내가 나 자신이 되도록 하는 힘인 초월에 대한 앎과의 일치 속에서만 오직 실존일 뿐이다”.  초월은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며, 실존은 초월과 그때그때 역사적으로 일치하는 장소이다.  야스퍼스는 실존이 초월과 분가분리의 관계를 맺는 방식을 “철학적 믿음”이라 부른다.  
여섯번째는 초월이다.  초월은 우리의 철학적 믿음 속에서 현전하게 된다.  이때 이 현전은 그때그때 대변될 수 없는 한계상황의 경험과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초월하는 사유에 의해 만회될 수도 혹은 보편 타당하게 발언될 수도 없다.  말해질 수 잇는 것이란 무규정적인 이름들인 “존재”, “현실”, “신성”, “신” 등이다.  이것들은 그 자체상 내용이 텅빈 것이며 실존적인 경험 속에서 비로소 그 내용이 충만해 진다.  그것들은 대상적인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초월이 그 안에서 역사적 결단에 의해 접촉되고 느껴질 수 있는 경험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하나인 인격적 신에로의 약진인 존재의 접촉은 직접적이지 않고 “암호”의 상징적 존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암호는 어떤 저 세상의 신을 지시하는 기호가 아니라, 하나인 무한한 신이 유한하게 실존하는 인간에게 세계적 존재자 안에서 감각적으로 현재하는 방식이다.  이 현재하는 방식은 그 자체가 역사적인 것이다.  초월은 역사적으로 자신을 수행하는 실존에게만 암호 속에서 현전적일 수 있기 때문에 초월의 나타남도 역시 실존에게는 역사적이 되어야 한다.
끝으로 이성이다.  초월로서의 일자와 결단 속에서 무조건적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포괄자의 보든 방식에 관통하는 자기 자신이 되는 운동은, 일자에 의해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이 관계되도록 내맡길 수 있음을 전제한다.  이러한 처신이 비로소 개별 존재자들 및 포괄자의 모든 방식들을 초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고 동시에 그것들의 일치도 가능하게 해 준다.  이 실존의 진리를 가능하게 하는 운동을 야스퍼스는 이성으로 파악한다.  이 이성은 모든 포괄자들의 “연결매듭”이다.  이성은 어떤 것도 산출해 내재하지 않으면서 모든 불일치를 일치시키려는 전체적 교제의 의지이다.  이성은 일치에로의 의지와 비역사적 절대적 일자에로의 의지로서 오성의 모든 고정과 논리를 넘어서는 사유이다.  이성은 일자를 탐구하는 철학함의 추진력이며 그 스스로 초월을 수행한다.


3) 사르트르

(1) 즉자와 대자
샤르트르는 그의 저서 ꡔ존재와 무ꡕ에서 존재를 즉자(卽者)와 대자(對者)로 구분한다.  즉자란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 자신의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아서 다른 의식의 대상이 되는 존재이다.  마치 돌맹이가 존재하는 방식과 다름없는 존재이다.  이에 반해 대자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며 자기 의식을 떠나서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모든 의식은 어떤 것에(대한) 의식이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의식이다.  이 경우에 그것은 존재와는 다른 것, 즉 비존재이어야 한다.  그것은 본래 존재의 부정이나 무화(無化)를 통해 생겨나야 한다.  즉자는 어떤 무도 품고 있지 않다.  이에 반해 대자, 즉 의식은 존재를 무화하는 활동이며 의식은 무로 인해 존재와 거리를 두거나 분리되어 있다.  의식 자체가 비존재이면서 무화의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의식은 자유이며 돌맹이인 즉자 존재와는 다른 존재의 양식을 갖는다.  인간은 다른 즉자 존재와 같이 이미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 항상 무화의 활동을 자유로이 수행한다.  그러므로 의식은 결핍과 공허와 무를 자신의 중심부에 전제하는데 무란 의식이 즉자가 아님을 나타낸다.  의식은 무를 창조한다.  존재 자체는 일종의 무이다.  이 존재로서의 즉자를 무화하는 과정에서 대자는 발생한다.
의식이 결여된 채 응결된 즉자는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존재와 분리되어 있는 대자(의식)는 즉자에 의해 결정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다.  샤르트르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은 자유이다.  그것은 의식적 존재의 구조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항상 가능성이지 완결된 기성품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는 어떤 외부의 것으로부터 예컨대 신으로부터도 규정되지 않는 그 자체 무이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실존의 공허를 매꾸어 가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자유란 바로 인간의 존재이며, 바로 인간 존재의 무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만큼은 본질이 실종을 규정하는 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하며, 그런 한에서 실존은 가능성이다.

(2)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샤르트르가 야스퍼스나 마르셀과 달리 인간 실존을 무로 규정하고 어떤 신적인 존재로부터 규정될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이다.  실존을 가능성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간 실존의 개방성과 자유를 선언하려고 한다.  신의 도덕률, 선천적인 가치, 형이상학적 본질 등을 통해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려는 것을 거부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실존을 형성하고 창조해 가는 존재이다.  버려진 채 세계 안에서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고 그의 실존에 대해 홀로 책임을 지고 자기 자신을 선택하고 선악을 스스로 결정한다.  스스로 인간은 자신의 삶의 입법자이다.  자신 이외에는 다른 입법자도 있을 수 없고 스스로 선택하고 실존을 매꾸어 간다는 점에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또한 그의 실존주의는 인간을 탈자적(脫自的) 존재로 간주하는 휴머니즘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 밖에 있다.  인간은 자신을 외부로 기투하며 스스로를 초월하면서 실존한다.  이 경우 초월의 주체는 바로 인간 자신이다.  왜냐하면 탈자적 인간이 신으로부터 탈락한데 치러야 할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실존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저주받았다.  이 선택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의 존재와 동일한 것이다.  이 선택은 바로 인간 존재가 자유임을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유와 선택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  인간은 무에 의해 침투되어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무한히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이 자유는 무한히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인의 자유와 마추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미 타인의 시선에 붙들여 있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는 하나의 대상이 된다.  나의 상황이 다른 상황이 되고 여기서 나의 자유는 제한을 받는다.  타인은 나의 가능성을 마비시켜 버린다.  타인의 시선은 메두사의 눈처럼 나를 하나의 가능성에 고정시키고, 그에 의해 내게서 다른 가능성들이 거부된다.  나는 나의 자유의 한계 속에서 타인의 자유를 경험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타인의 자유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  그러므로 샤르트르에 있어서 자유와 선택 그리고 책임은 분리될 수 없다.  스스로 자신의 실존을 실현해 가는 가운데 인간의 본래적 실존이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인간 이외의 어떤 초월적 존재도 인간의 실존에 개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실존은 휴머니즘적이다.

4) 하이데거

(1) 현존재로서의 인간
하이데거는 그의 ꡔ존재와 시간ꡕ에서 역시 존재문제를 중심으로 다룬다.  존재자의 존재가 전통철학 속에서는 문제되지 않은 채 존재자만이 문제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존재자와 존재를 혼동하여 그 차이점을 간과한 전통철학을 해체시키고 존재 자체를 중심적인 문제로 다룬다.  모든 존재자가 그 안에 서 있는 존재의 사건을 시간의 지평 속에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존재의 물음은 존재자를 통로로 하여서만 탐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존재는 존재자의 존재이며, 존재의 물음을 던지는 존재자에 대한 물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 존재물음을 던지고 있는 존재자는 이미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존재자를 실마리로 해서 그의 존재 구조를 밝히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이 존재자는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나름대로 이미 이 물음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과 관련을 맺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이란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에 비해 탁월한 존재이해를 가진다.  말하자면 인간 존재는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항상 자신의 존재를 부채로 짊어지고 살며 항상 이 존재의 지평 속에 던져져 있다.  이 인간 존재를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라 부른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물음은 바로 이 특이한 존재방식을 가진 현존재 분석에서 시작한다.  이 현존재는 바로 존재이해를 위한 기초가 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현존재 분석은 바로 기초존재론이다.  하이데거는 이 현존재의 특이한 존재방식을 “실존”으로 부른다.  현존재는 그 존재함에 있어 존재함 자체가 문제가 되는 존재이다.  오직 인간만이 실존한다.  오직 인간만이 그 자신으로 존재하든지 안하든지 식의 자기 자신의 가능성으로 실존한다.  현존재는 처음에는 주체의 극으로 존재하여 그 뒤 그 자신이 될 수 있는가 혹은 될 수 없는가 하는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는 단지 자기 자신의 근본 가능성들의 이행으로만 존재하고 있으며, 이 가능성들로부터 자신을 이해하고 그 가능성들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각자 그 자신의 가능성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의 본질은 그 자신의 존재에 의해서 그 자신의 실존을 파악할 뿐, 어떤 고정된 본질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  현존재의 본질은 바로 그 실존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현존재의 분석은 「사실 자체에로」라는 현상학적 방법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의 방법과는 달라야 한다.  선험적 방법에 의해 현존재는 더 이상 개시되지 않는다.  생활세계의 역사 안에서 현사실적으로 존재하는 현존재의 분석은 현존재의 이해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 자체가 해석학적인 존재자인 현존재는 현상학적 기술이 방법적으로 해석으로 이해될 때에만 합당하게 기술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에 대한 현상학은 오직 해석학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은 하이데거에 의해 해석학적 현상학으로 대치된다.  이 해석학적 현상학은 현존재의 근본구조들, 즉 실존성의 해석을 통해 존재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현존재의 실존성은 존재일반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방법적 실마리가 되며, 현존재의 근본구조인 실존범주들을 해석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 실존범주는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의 존재규정인 범주와는 구별된 개념이다.  이제 이 실존범주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된다.
(2) 세계 내 존재
현존재는 거기(Da), 즉 이미 세계에 처해 있는 존재이다.  현존재는 이미 세계에 묶여 있는 존재이다.  이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란 술어를 마치 ‘공간적으로 안에 있음’이란 식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잉크 병 속에 잉크가 들어 있듯이 그렇게 세계 내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는 세계와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친숙해져 있고 세계에 던져져 있음을 말한다.  이 세계는 사유하는 존재와 동떨어져 있는 연장적 실체(res extensa)로서의 존재자의 총체가 아니라, 현존재 자체의 구성적 실존범주이다.  따라서 세계 내 존재는 우성 주위 세계를 이해하고, 주위 세계와 친숙해 있음을 말하며, 이 때의 이해 방식은 곧 존재자를 다루고 사용하며 존재자에 관심을 쏟는 그런 왕래이며, 존재자는 이런 배려 속에서 “도구”로 만나게 된다.  도구는 봉사 가능성, 사용 가능성 등과 같은 자신의 “무엇을 위함”(Um-zu)에 의해 특징지워지고 그것은 이미 나름대로 도구 전체 속에, 다시 말해 하나의 지시 연관 속에 있다.  이 지시연관은 현존재에 최종적인 근거를 둔다.  예를들어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해 있고, 못은 시계를 고정시키기 위해 있으며, 이 시계는 현존재의 시간 계획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이 도구의 존재성격은 이론적 관찰에서가 아니라 오직 도구를 다루는 교섭 속에서만 드러난다.  도구적 존재는 바로 하이데거에 의하면 “손안에 존재”(Zuhandensein)이다.  이것은 바로 이론적 관찰에 의해 도구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둘러보며 관심을 쏟고 배려하는 것(Besorge)을 통해서만 발견된다.  이 도구는 손안에서 존재를 잃어버렸을 때, 즉 예컨대 망치가 망가졌거나 잃어버렸을 때 지시연관성이 드러난다.  이 지시연관성은 바로 현존재가 자신이 세계 내 존재임을 발견하게 해 준다.  현존재는 이 세계 안에서 만나는 존재자를 통해 임 세계와 친숙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현존재는 도구 존재와는 다른 존재인 타인과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인은 도구처럼 배려될 수 없고 심려(Fürsorge) 속에서 만난다.  이 타인은 바로 대중(Das Mann)이다.  이 대중들은 모든 존재 가능성들을 평균화시켜 버리고 일상적으로 누구라도 대신할 수 있는 그런 보통의 타인으로서 대중이다.  현존재는 이 대중 속에 몰입함으로서 실존의 본래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 대중들은 비본래적인 실존의 양상이며, 이 양상 안에서 현존재는 자신을 바로 자기 자신의 가능성들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가능성들로부터 자신을 풀어 주어 그것에 대해 결단을 내려야 할 짐을 없애준다.  그러나 이 대중의 비본래성 역시 현존재의 본래성과 함께 실존을 구성하는 범주이다.

(3) 처해 있음과 이해
현존재는 이미 대중의 익명성 속으로 던져져 있는 존재이다.  현 존재는 이미 자신도 모르는 기분에 휩싸여 있다.  이 기분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는 없으며, 명백한 것은 단지 기분이 있다는 사실이다.  현존재는 이미 내던져져 있으며 세계에 내맡겨져 있다.  현존재의 내던져져 있음(Geworfenheit)이란 현존재가 바로 세계 내 존재로서 실존함을 이해하게 되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실존함을 이해하며 자신의 존재 가능이 어떻게 처해 있는지를 알고 있다.  내던져져 있음은 바로 현존재로 하여금 자신을 기획투사하여(entworfen)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드러나도록 하게 하는 근거이다.  그러므로 기획투사와 이해는 기분에 의해 열려진 영역에로 되돌려 지시됨을 말한다.  기분에 의해 젖어 있는 방식으로 현존재는 그 방식에 의해 그가 존재하고 있는 그 가능성들을 본다.  그러한 가능성들을 기획투사하여 밝혀내는 가운데 그는 나름대로 이미 기분에 젖어 있다.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의 기획투사는 자신의 거기에로 내던져져 있는 그 현사실성에 떠 맡겨져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내던져진 기획투사이다.

(4) 염려와 죽음
현존재의 실존범주로서의 염려(Sorge)는 걱정이나 근심과 같은 것과는 다른 것이다.  현존재의 존재로서의 염려는 자신을 실존가능적 존재로 앞질러 이해하고(실존성) 세계 내에 이미 존재함(현사실성)과 세계 내부에서 만나는 존재자들에 머물러 있음(퇴락)을 포괄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그에게 세계 내 존재로서 그 자신의 존재가 문제가 되는 한,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로서의 염려의 탁월한 방식을 불안으로 설명한다.  현존재는 근본적으로 불안이라는 기분에 젖어 있으며 이 불안 속에서 그 자신의 가능성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공포와는 다른 불안은 현존재를 향상 주위세계로부터 단절된 혼자 있는 상황으로 몰아 넣는다.  그런데 이 불안을 통해 현존재는 그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로 던져 준다.  이 불안을 통해 현존재는 자유롭게 자신의 실존가능성을 선택하게 된다.  실존의 본래성을 선택하는 것은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에서 가능해진다.  이 양심의 부름을 현존재가 듣는다는 것은 어떤 사실적인 역사적 과오나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함을 경험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무력감에서 비롯되는 실존범주이다.  현존재가 이 양심의 부름을 올바로 듣는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에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부름은 현존재가 이미 부채를 떠맡고 있는 무력한 존재임을 자신의 고유한 실존의 가능성으로 받아 들이도록 한다.
이와같이 현존재가 자신의 무력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존재라면, 죽음이야말로 현존재를 가장 무력하게 만든다.  그런데 만약 이 죽음이 현존재의 실존의 끝을 의미하거나 생물학적인 혹은 물리학적인 의미에서 삶의 줄이 끊어진다는 사망이란 개념이 아니라면, 이 죽음은 인간을 가장 무력하게 만들어 동시에 이 죽음은 인간을 가장 고유한 실존의 가능성에로 들어서게 한다.  이 죽음은 단지 종말이 아니라, 현존재의 가장 극단적인 가능성으로서 현존재 안에 항상 깊이 파고들어 와 있다.  현존재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에 드리워져 있으며, 지금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이 현존재가 종말의 사건으로 연장하거나 피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존재의 실존에 깊이 관여해 있다면, 죽음은 바로 현존재를 가장 본래적인 실존가능성에로 옮겨 주는 적극적인 범주가 된다.
현존재에 있어서 죽음은 그 자신의 가능성에로 미리 달려감(Vorlaufen)이다.  이 미리 달려간다는 것은 죽음을 가장 고유하고 확실한, 그리고 규정되어 있지 않고 건너 뛸 수 없는 현존재의 가능성으로 내보이고, 이해하며 다가가는 것을 뜻한다.  죽음을 향상 존재는 불안에 직면하고 이 불안은 현존재를 고유한 본래적인 실존의 장으로 이끌어 준다.  그러므로 죽음에로 미리 앞질러 가 본다는 것은 현존재를 불안에 몰아 놓는다.  하지만 이 불안은 바로 현존재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실존적 결단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범주이다.

(5) 현존재의 시간성
현존재가 죽음을 앞질러 갈 수 있다는 사실은 현존재가 그 가능성을 자신에로 다가올 수 있다는 데서 가능하다.  이 다가옴(Zukunft)의 현상에 의해 현존재는 미리 앞질러 감이 가능해 진다.  이 앞질러 감이 가능한 것은 바로 현존재가 이미 내던져져 존재해 왔음이란 현사실성에서 유래한다.  이 존재해 왔음은 지나쳐 버린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으로서 주어져 있다.  그렇게 존재해 왔음과 미리 앞질러 감은 모두 현재화에 의해 현전한다.  하이데거는 존재해 오고 현재화하는 미래로서의 단일성을 시간성(Temporalität)이라 부른다.  현존재의 존재를 시간성이란 범주로 설명하는 것은 현존재를 인격이나 주체 혹은 이성과 정신 등과 같은 무시간적이고 초시간적인 것에서 규정함으로써 현존재의 존재시간성을 잘못 파악한 전통적 시간이해에 대한 부정이다.  그리고 인간을 시간적 존재로 파악했다 하더라도, 이 시간은 단지 물리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는 시간적이다.  현존재의 실존적 시간성을 탄생과 죽음이란 시작과 끝의 시간계열에 묶여 있음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물리학적 시간계열에서 벗어나는 탈자적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라는 통상적인 시간지평은 한갓 현존재의 실존적 시간성에 의해 시간화된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  현존재는 본래가 염려의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존재해 왔음에서부터 미리 실존의 가능성인 죽음을 앞질러 경험한다는 시간성을 자신의 실존범주로 가진다.


4. 분석철학

현대철학은 헤겔의 관념론에 대한 반동이다는 말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물론 크로체와 같은 대표적인 헤겔주의자들도 있긴 하지만, 거의가 탈헤겔적 경향을 보인다.  그 중에서도 다른 철학적 흐름은 헤겔에 대한 향수를 품고 있지만 거의 완벽하고 총체적으로 헤겔로부터 빠져 나오기를 시도한 것은 영미의 분석철학이다.  분석철학은 현상학과 함께 현대철학의 두 흐름을 구성한다.  이들은 다 같이 헤겔철학의 극단적인 사변성에 식상하여 철학을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토대 위에 다시 구축하려는 방법론적 모색과 함께 등장하였다.  이들은 포괄적인 철학을 새로 만들려 하지 않고 철학과 과학에 대한 방법론적 반성을 그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이 두 흐름은 이후의 현대철학의 큰 두 조류를 각각 형성할 정도로 매우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보다 잘라서 말한다면 현대철학은 이 두 방법론간의 논쟁의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현상학을 방법적 모델로 하여 발전한 해석학과 분석철학을 토대로 발전한 신실증주의간의 학문의 방법에 관한 논쟁으로 현대철학은 채워진다.  대륙의 현상학이나 영국을 중심으로 발생한 분석철학은 그 지적 분위기가 다른 데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후의 현대철학을 두 진영으로 갈라 놓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후기 현대철학에로 들어서면서 이 두 진영사이의 경계점을 쉽게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만남의 지평이 확대된다.  특히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의 책이, 비록 해설을 곁들인 주해가 붙어 있긴 하지만, 독일에 소개된 이후부터 이 두 철학적 방법의 만남은 급속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분석철학과 현상학은 다같이 주어져 있는 현상에 관심을 가진다.  이것은 헤겔철학이 남겨 놓은 치명적인 상처를 치유하려는 방법론적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현상학은 직접 주어진 사태, 즉 언어 이전의 의식적 삶의 영역을 반성의 대상으로 삼는 반면에 분석철학은 언어적 현상 자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인 상이점을 나타낸다.  이들은 다같이 꽁트의 실증주의의 영향하에 있지만 현상학이 실증주의의 원리를 의식에 직접 주어진 사실에 적용하는 반면에, 분석철학은 실증주의가 중시하던 실증적 소여를 언어적 구조로 대치하였다는 점에서 그 출발점이 다르다.  그러므로 분석철학은 ‘언어분석’이란 다소 한정된 개념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분석의 대상은 사물이나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이것들을 지칭하는 언어이며, 분석의 방법은 현상적 혹은 실험적 방법이 아니라 논리에 의한 언어분석적 방법이다.  그러므로 분석철학은 언어가 세계의 그림이라는 명제 아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채널을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분석을 시도한다는 뜻이지 단순히 언어의 구조 자체를 분석하는 문법학은 아니다.
분석철학자들은 일차적으로 언어의 의미를 언어 이전의 선험적 차원으로 환원하여 다루는 현상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을 가진다.  그러나 후기 분석철학은 이와는 달리 언어의 문제를 언어의 틀을 벗어나서 선험적 차원에서 혹은 행위연관 속에서 다루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즉 언어의 문제를 삶의 문제와 동떨어진 단순한 기호로 생각하던 초기 분석철학과는 방향을 달리 한다.  우리는 분석철학의 이와 같은 흐름을 비트겐슈타인의 전·후기 사상의 흐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의 흐름은 바로 분석철학 전체의 흐름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영향은 지대하다.  젊은 시절의 비트겐슈타인을 포함하여 초기 분석철학자들은 자연과학 혹은 수학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그들의 언어이론도 언어와 사물간의 관계를 일대일의 대응관계로 생각하는 고정되고 기계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림이론’ 혹은 ‘의미지시설’로 불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언어이론은 바로 이런 입장을 대변한다.  그리고 후기로 오면서 언어는 단순히 세계에 대한 그림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나 언어와 세계간의 관계를 신축적이고 다양하게 파악하려는 경향, 즉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이상언어나 인공언어로써 기계적으로 다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입장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가지는데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언어이론이 ‘쓰임새 이론’ 혹은 ‘의미용도설’로 불리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이하에서 분석철학 전체의 흐름을 비트겐슈타인을 기점으로 하여 전·후로 다루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먼저 분석철학의 형성과 논리실증주의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 그리고 후기사상으로의 전회와 함께 이루어진 일상언어학파의 형성 등으로 구분하여 다룬다.

1) 분석철학의 발생배경

현대철학의 특징을 헤겔적 관념론에서 실재론에로, 거대한 체계확립보다는 엄밀한 철학적 분석에로 그리고 관념의 추상성에서부터 구체적 사실에로의 전환으로 규정한다면, 분석철학 역시 이와 같은 시대정신을 가지고 발생한다.  우리는 분석철학의 철학사적 기원을 통상 무어(G. E. Moore, 1873~1958)와 러셀(B. Russell, 1872~1970)로 삼는다.  이들은 캠브리지 대학 재학 중 헤겔주의자였던 매타가아트(McTaggart)와 브래들리(Bradley)의 영향은 받는다.  그러나 이들은 곧 관념의 의미는 정신과 전적으로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실재론적 착상을 하게 되었고 마이농(Meinong)이나 프레게(Frege)와 같은 독일철학자들의 후원을 얻음으로써 실재론적인 전회를 이룩하였다.  무어와 러셀은 실재론의 입장에서 세계 전체를 포괄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철학의 임무로 생각하였다.  이들의 관심은 세계 전체를 기술하는 실재론적인 형이상학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때 이미 철학의 유일한 과업은 진술의 의미를 분석하는 일이지 세계 전체에 관하여 사색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하여 주고 있었다.  사실의 세계에 대한 기술로부터 개념의 분석에로 옮겨가기 위한 토대를 이미 마련하고 있었다.  세계를 거대하게 기술하는 일보다는 세계의 그림인 언어의 의미를 분석하는 일에 철학이 전념해야 한다는 분석철학의 임무를 일찍이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이들은 분석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옛 실재론의 동지들과 결별하게 된다.  바로 이 분석적 관심이 카르납이나 비트겐슈타인의 업적과 연결되는 고리이다.
이들은 다 같이 언어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지만 그들이 대상으로 하는 언어는 차이점을 갖는다.  러셀은 무어에 비해 수학과 논리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러셀을 장래가 촉망되는 수학자로 일찍 칭찬하였다.  러셀은 무어에게 화이트헤드로부터 수학 개인교습을 받으라고 충고할 정도로 무어는 러셀에 비해 수학적 재능이 모자랐다.  그러나 무어는 이 충고를 받지 않았고 그 자신이 고백하듯이 이 충고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러셀과 다른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게 된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러셀은 수학적 훈련을 삼으면서 언어를 수학적 기호와 같은 인공언어로 구성하는 데 익숙한 재능을 보인다.  그는 일상언어에는 무관심하고 단지 사유체계를 수학적 부호로 논리화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바로 논리실증주의자들과 초기의 비트겐슈타인에게 유산으로 남겨진다.  이에 반해 무어는 언어의 기호화 내지는 논리화에 대한 상식의 철학의 입장에서 반대한다.  무어에 있어서 분석은 일상언어에 대한 충실한 번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공동으로 지은 ꡔ수학원리ꡕ(Principia Mathematica)는 무어에게는 일상성과 상식성을 벗어난 한갓 기호의 체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무어의 일상언어에 대한 관심은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오스틴을 통해 일상언어학파를 형성하는 데로 이어진다.

2) 무   어

무어는 처음에는 브래들리나 맥타가트의 형이상학적 영향하에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 자신 비록 관념론에서부터 실재론으로 옮겨 왔지만, 역시 형이상학에 기울어 있었다.  물론 헤겔과 같은 관념론적이고 일원론적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실재론적이고 다원론적 형이상학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전통적인 플라톤적 형이상학에서부터 이탈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관념론 논박」이란 논문을 발표하고 나면서부터 차츰 무어의 관심은 거대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구성하는 일에서 멀어지게 된다.  무어는 궁극적 실재를 탐구하거나 철학을 하나의 거대한 체계로 각색해내는 일에 식상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관심은 거대한 체계를 구성하는 도구인 언어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분석에로 모아졌다.  세계를 하나의 체계로 몰아 넣기 위해 사용된 허황하고 애매한 말들을 하나 하나 분석하는 일을 자신의 철학의 과제로 삼는다.  그는 그의 ꡔ자서전ꡕ에서 “나는 세계나 과학이 나에게 철학적 문제를 암시해 줬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게 철학적 문제를 암시해 준 것은 다른 철학자들이 세계와 과학에 관해 말한 것들이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어떤 특정한 철학자가 말한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진실로 명백히 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한 철학자가 의미하는 것이 참 혹은 거짓이라고 생각할 어떤 진실로 만족스러운 이유가 있는가를 발견하는 일이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철학의 동기가 언어에 대한 분석적 반성에 있음을 표현한다.
예를들어 “신은 자비하다”나 “실체는 관념이다” 혹은 “이데아는 영원하다”는 등의 형이상학적 진술은 마치 “토요일이 침대에 잔다”와 같이 허황하고 무의미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무어는 철학의 과제가 일차적으로 개념이나 의미의 분석에 있다는 사실은 그후의 분석철학자들에게 크다란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모든 존재의 궁극적 실재를 찾고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확인하려는 돈키호테적인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철학은 스스로 작지만 매우 중요한 일, 즉 의미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자신의 철학의 일차적 과제로 삼는다.  대륙의 철학이 상식을 경시하고 주어진 것을 관념의 산물로 추상하였던 데 대해, 무어는 상식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철저하게 반박한다.  만약 철학이 관념과 언어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면 철학자는 현실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창백한 관념론자에 지나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헤겔의 추상적 관념론에 반대하여, 현실을 주어져 있는대로 기술하려는 현상학과 무관하지 않는다.  단지 현상학과 달리 무어를 통해 형성된 분석철학은 그들의 관심을 사실에 대한 기술에서 개념과 언어에 대한 분석에로 방향을 정했다는 사실에서 갈라지게 되었다.  무어가 이와 같은 방향으로 자신의 철학을 몰고 나가게 된 사상적인 추진력은 그의 「관념론 논박」과 상식의 철학 때문이다.
신실재론의 운동은 무어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1903년 그의 유명한 「관념론논박」에서 당시 영국 철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관념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전통적인 관념론은 다음과 같은 명제들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정신 안에 있는 관념들 외에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모든 실재는 정신적인 것이다.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됨이다.

이와 같은 진술은 진실로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외부에 물질적 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잠시도 믿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어는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나 “모든 실재는 정신적이다.”는 추상적 진술에 회의를 품게 되었고, 이 진술들을 ‘이’ 연필 혹은 ‘저’ 책상 등과 같은 개별적 대상을 포함하는 팽창되지 않은 진술로 환원하려고 한다.  어느 날 유명한 관념론자가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한 강의를 하고 있을 때, 청중의 한 사람이었던 무어가 강단 앞으로 나가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강의탁상을 손으로 화를 내면서 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처럼 무어는 상식을 대변하여 철학을 건전한 상식에 토대한 철학으로 재구성하려고 하였다.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어떤 의심도 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간에 감각소재(sense-data)가 우리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무어가 이처럼 보편적 개념이나 궁극적 실체를 감각소재로 환원하는 것은 영국의 유명론(唯名論)적 전통에 따른 것이며, 건전한 상식에 근거한 실재론을 토대로 관념론자들의 오류를 분석하는 일과 연결된다.  무어는 전통적인 관념론의 범례인 버클리의 관념론은 논박한다.  이 논박을 통해 무어는 버클리의 관념론은 우리의 의식 외부에 이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세계를 부정하는 모순을 범한다고 반박한다.  감각소재가 우리의 정신에 관계는 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정신에 의존적인 것은 아니다.  감각소재는 우리에게 지각되지 않고서도 그 자체로 존재한다.
무어는 이와 같은 관념론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우리의 정신 외부에 있는 대상과 이 대상에 대한 지각사이에는 논리적 거리가 있음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대상이 우리의 의식에 의해 지각된다는 사실 때문에 대상이 의식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여 대상을 정신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을 한다.  관념론자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대상과 지각을 혼동하여 모든 존재가 정신적인 것이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관념론자들은 존재를 의식 혹은 감각 속에 잘못 흡수시킨 것이다.  
그러면 감각이나 지각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을 우리의 의식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채널이 아니라 단지 외부에 있는 대상을 단순히 경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지각은 항상 의식의 외부에 대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일어나는 인식작용이다.  그러므로 관념론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우리들의 의식과 독립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 세계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이 버클리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관념론자들에게는 고려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객관적 세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무어의 답변은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의 상식에 호소하여 증명할 수밖에 없다.
무어는 철학적으로는 매우 순진한 것처럼 보이는 물음을 묻는 데 관심을 가진다.  즉 관념론자들처럼 고상하지도 휘황찬란하지도 않지만 가장 건전한 태도로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감히 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보았고 또한 본 것을 용감하게 “황제는 옷을 입지 않았다”고 말한 소녀처럼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그 당시 영국사회를 지배했던 전통적인 관념론에 대한 논박을 통해, 대상이 우리들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식에 호소해서 증명한다.  전통적으로 상식은 보편화되지 않은 단편적인 지식으로 경시되어 왔지만 무어에 있어서 우리 모두에게 갖추어져 있는 건전한 양식(良識)인 것이다.
무어는 그의 논문 「상식의 옹호」(A Defence of Common Sense)에서 그가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일련의 상식적 신념을 나열함으로써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물질이 존재한다거나 정신이 존재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나의 신체가 존재한다는 확실한 사실에서부터 자신의 논의를 전개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독자들에게 독자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기를 요구한다.  감각적으로 주어져 있는 손을 지각한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지식은 있을 수 없다.  물론 똑바른 막대기가 물 속에서는 휘어져 보이고, 달리는 기차는 바퀴가 없는 것으로 지각되지만, 어떤 상황하에서든 감각소재만큼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이 감각소재의 객관적 존재를 관념으로 추상화하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엉뚱한 생각이다.
무어가 상식을 옹호하는 예를 하나 더 들면,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적 주장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만약 이 명제가 참이라면, 우리가 점심을 먹기 전에 아침을 먹었다는 사실을 수정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반문한다.  무어가 상식을 옹호하면서 전통적인 철학에 반기를 드는 것은 철학자들이 상식과는 정반대로 논리의 조작을 수행한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지식과 하나의 지식을 논리적으로 잘못 연결하는 데서 혼란을 일으킨다.  사실과 사실을 논리적으로 잘못 연결함으로써 사유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무어의 철학의 관심은 논리적 착각에서 비롯된 엉뚱한 결론은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그 혼란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이와 같은 관심은 그가 러셀이란 동지를 만남으로써 더욱 가속화되었다.
우리가 무어를 분석철학에 토대를 마련한 사람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의 철학적 태도일 것이다.  그는 철학적인 문제에 하나의 완전한 답을 내리기를 거부하고, 단지 논리적인 착각으로부터 초래할 수 있는 사유의 혼란을 지적함으로써 그릇된 언어사용이나 논리적 조작에 의해 병든 지성을 치유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이런 그의 철학적 태도는 그 당시 우리의 사고를 지배했던 전통적인 관념론에 날카로운 분석의 매스를 가함으로써 어떤 형이상학적 독단으로부터도 자유스러워지려는 그의 철학적 스타일에서 비롯된 분석철학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3) 러   셀

버틀랜드 러셀(B. Russell, 1872~1970)은 오늘날까지 서방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영국의 철학자이다.  특히 1차대전 이후 러셀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주원인은 그가 한때 옥고를 치를 정도로 철저한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영국인 특유의 비타협성을 가진 러셀은 지배적인 견해나 선입견에 끝까지 항거하는 자세를 말년까지 고수하였다.  그는 많은 저술활동을 했으며, 철학 이외의 정치적인 문제나 그 밖의 여러 방면으로도 그의 영향은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러셀은 무어와 함께 분석철학에 기초를 마련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특히 그는 수학자로서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고,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1861~1947)와 함께 저술한 ꡔ수학원리ꡕ는 수학을 학문적으로 정초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러셀의 사상은 크게 전·후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수학연구에 몰두했던 청년 러셀 역시 무어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 브래들리로 대표되는 영국 관념론에 심취하여 있었다.  그는 플라톤 주의자로서 수학을 연구했다.  그는 경험적 현실밖에 관념이나 보편자가 존재한다는 입장을 굳게 견지하였다.  그의 ꡔ수학원리ꡕ는 바로 철학을 경험으로부터 독립한 연역적 학문으로 생각한 그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는 저서이다.  이처럼 러셀은 그 당시의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그리 이탈하지 않고 수학을 관념적 실재를 다루는 학으로 규정하는 브래들리나 화이트헤드와 같은 플라톤주의자의 모습을 지녔다.
그러나 말년의 러셀의 모습은 실증주의자의 모습으로 차츰 변한다.  ꡔ수학원리ꡕ의 공동 집필자의 화이트헤드가 형이상학에 깊이 빠져 들어 소위 하르트만(N. Hartmann)과 함께 신형이상학에로 방향을 정한 반면에, 러셀은 논리 실증주의자와 연결되는 실증주의자로-꽁트의 고전적 실증주의에 대해 신실증주의자로서-변신을 한다.  보편자의 문제는 이제 그에게는 구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고 형이상학은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철학은 이미 연역적 학문이 아니라 영국 전통의 경험론을 잇는다.  수학은 이제 과학은 연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는 자연과학적 방법만이 인식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과학주의자가 된다.  러셀은 확고한 체계를 수립하는 형이상학자들의 일에는 싫증을 느낀다.  자연과학만이 제대로의 기능을 다 할 수 있는 인식수단이다.  철학은 자연과학을 통해서만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철학이 도덕이나 종교의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지만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차차 실증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된다.
이와 같이 러셀의 실증주의적 경향은 그가 관념론에 철저하게 반대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는 개체와 개체간의 본질적인 내적 관계가 있고 이 관계를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브래들리의 관념론에 반대한다.  러셀은 존재하는 것은 감각소재(sense-data)뿐이며 무수한 개체들만이 실재임을 주장함으로써 다원론적 입장을 취한다.  또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나의 세계는 덜 무성한 것이 되었다.  오캄의 면도날은 점차 보다 깔끔한 실재의 그림을 나에게 제공하였다.”라고 말하는 데서 그가 전통적인 영국 경험론의 맥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세계를 개체로 분석하여 오류를 피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러셀의 입장은 그의 기술이론(theory of description)과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에서 체계화된다.
그는 ꡔ기술이론ꡕ에서 한 낱말은 그 낱말이 지시하는 대상을 가질 경우에만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즉 한 문장은 실제로는 어떤 것을 지시하거나 주장하지도 않으면서 마치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들어 “한국의 현재 왕은 대머리이다”와 같은 문장은 이 문장이 지시하는 어떤 대상도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한 사이비문장이다.  어떤 종류의 진술에 있어서 이름같이 보일지라도 사실은 이름이 아니고 위장된 기술(記述)이다.  한 문장의 의미를 그 문장을 구성하는 낱말의 의미가 있고 없음에 따라 결정된다는 명제함수개념을 소개하였다.  예를들어 “나는 한 일각수를 만났다”란 문장은 그 자체로는 문법적 구조를 가지긴 하지만 ‘일각수’란 낱말은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하다.  따라서 그 문장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러셀은 의미분석이라는 철학의 과제를 기초하였으며, 언어분석이란 과제를 철학으로 끌어 온다.
이름과 그 이름이 지시하는 대상사이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확인한 러셀의 기술이론은 그의 논리적 원자론에서 더욱 드러난다.  언어와 세계사이에는 논리적 대응관계가 있다는 러셀의 확신은 세계를 수학적·논리적 구조로 환원하려는 입장과 연결된다.  언어는 세계에 대한 그림이라는 그림이론은 그의 친구면서 제자인 비트겐슈타인의 초기의 입장이었는데 아마 러셀은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러셀은 세계가 수학적 논리적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것을 이상언어 혹은 인공언어인 수학적 부호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그가 “나는 항상 가능한 가장 작은 수의 장치를 가지고 철학을 진행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오류의 위험을 감소하기 때문이다.”고 말하는 데서도 나타나듯이, 논리분석에 의해 관념론이 범한 오류를 방법적으로 차단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화이트헤드와 공저한 ꡔ수학원리ꡕ는 기호논리학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와 같은 러셀의 입장은 상식과 일상언어를 중시했던 무어와는 다른 점이다.
러셀은 우리가 이상언어를 구성할 수 있다면 그 언어는 실재의 구조와 동일하다는 신념을 가진다.  우리는 그 언어를 가지고 세계의 진정한 구조를 적절하게 기술할 것이라는 확신에서 논리적 원자론이 형성된다.  이상언어는 일상언어처럼 모호하거나 애매한 것이 아닌 정확한 언어이다.  우리의 일상언어는 세계의 논리적 구조를 표현하기에는 너무 다의적이고 복합적이다.  그러므로 이상언어를 통해 논리적 구조가 충분히 표현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모든 복합명제는 러셀이 ‘원자적 사실’이라 칭하는 요소명제로 그리고 이 원자적 사실은 그것의 관계항인 개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은 고유명사로 표현된다.  이 사이의 논리적 구조는 다름아닌 세계의 다원적인 구조와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다음에 살펴 볼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입장과 거의 유사하다.  이와같이 하나의 개체라는 블록(block)으로 쪼개는 논리적 원자론은 쓸데없는 관념론적 유희를 철학에서 배제하려는 실증주의의 원칙과 그 정신을 공유한다.

4) 논리실증주의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는 종종 분석철학과 혼용되어 왔다.  왜냐하면 그 정신이나 목적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조들에 있어서도 구분이 잘 되지 않을 정도로 공통점을 가진다.  러셀과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저술은 이들에게 매우 영향을 미쳤지만, 논리실증주의는 보다 급진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이들의 관계를 모든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분석철학자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철학자들이 논리실증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식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논리실증주의는 과학자들이거나 과학적 훈련을 받은 일군의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운동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에 시대적 분위기에 힘입어 쉽게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 운동 자체는 비엔나 학파(Vienna Circle)라 불리는 일군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1922년 비엔나 대학의 철학교수 모리츠 슐릭(M. Schlick)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중심이었다.  여기에는 바이스만(F. Weismann), 노이라트(O. Neurath), 파이글(H. Feigle), 카르납(R. Carnap), 괴델(K. Gödel)등이 속해 있었다.  이들은 근처에 있는 비트겐슈타인과 접촉을 가지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들은 나치에 의해 쫓겨나 영국이나 미국으로 명하였고 2차 대전이 끝난 후 상당한 기간이 지나서야 독일로 다시 돌아 왔다.  이들이 나치에 의해 독일에서 추방당하였지만 이것은 오히려 다른 지역에로까지 이들의 입장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실증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검증가능하고 과학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유의미한 것과 다른 편으로는 검증가능하지 않고 비과학적이며 따라서 무의미한(nonsense)것 사이에 논리적 쐐기를 박고자 한다.  형이상학을 배제하는 일이 그들의 일차적 관심이다.  물론 형이상학을 부정, 극복 비판해 온 것은 고대 희랍에서부터의 일이다.  그러나 이 실증주의자들이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은 흄(D. Hume)에게서이다.  철저한 경험론자로서의 흄은 철학에서부터 형이상학을 영원히 추방하려는 극단적인 태도를 가졌었다.  만약 어떤 책이 “성질이나 수에 관한 추론도 아니고 사시로가 존재에 관한 실험적 추론도 아니라면, 다 불태워 버려라.”는 흄의 태도는 신학이나 강단 형이상학의 죽음을 선언하였다.  참과 거짓을 검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진술은 무의미한 것이다.  예를들어 ‘2+2=4’라는 진술이나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성이다’는 진술은 그 형식상 항상 참임을 증명할 수 있다.  ‘북한은 핵시설을 가지고 있다’ 혹은 ‘코끼리는 비스킷을 좋아한다’는 진술은 경험적 사실을 토대로 참이거나 거짓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라는 진술은 마치 ‘둥근 사각형은 네모난 삼각형보다 각이 많다’라는 진술만큼이나 무의미한 진술, 즉 사이비진술이다.
그러므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어떤 진술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의미충적적인 조건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진술의 구조가 필연적으로 참일 수밖에 없는 진술, 즉 칸트식으로 말하면 분석적 진술이다.  이것은 그 진술을 부정하면 모순이 되는 진술을 말한다.  위의 예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성이다’는 진술은 그 구조상으로 필연적으로 참일 수밖에 없는 진술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진술의 참과 거짓이 경험적 사실에 의해 검증가능한, 즉 종합적 진술이다.  ‘코끼리는 비스킷을 좋아한다’는 진술은 경험을 통해 확인되어야 한다.  만약 이 두 조건을 결여한다면 검증가능성을 결여하고 따라서 무의미한 진술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실증주의가 말 그대로의 형이상학 자체를 부정한다고 해석해서 안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단지 말할 수 잇는 것만을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자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초월적 실재가 있다 없다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일 뿐, 궁극적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형이상학자는 그의 느낌이나 정서 또는 매우 심오한 진지함을 표현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명제(proposition)일 수 없는 단지 무의미한 언술일 뿐이다.  실증주의자는 문제 자체가 설립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쓸데없는 형이상학적 논쟁을 일삼는 것을 거부한다.  “단지 주어져 있는 것만이 있다”(Es gibt nur das Gegebene)는 슐릭의 선언은 실증주의를 대변하는 기본적인 강령이다.
이와 같은 실증주의의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하고 생산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바로 카르납(R. Carnap, 1891~1970)이다.  카르납도 다른 비엔나학파의 회원들처럼 소위 통일과학(unified science)의 이념을 선언하였다.  모든 진술은 물리학적 언어로 환원되어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리학주의를 철학의 영역에 적용시킨 대표적인 사람인 카르납은 원래 철학과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러셀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카르납은 수학은 물론이고 물리학적 방법에 의해 철학을 새롭게 정초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카르납은 러셀이 수학적 논리학에 관심을 가지는 반면에 이것을 경험론적 전통과 결합하는 일에 보다 관심을 가진다.  우리가 카르납을 ‘논리적 경험론자’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들을 소박한 꽁트의 실증주의와 구분하기 위해 ‘신실증주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카르납은 분석적 진술보다는 경험적 진술이 유의미하다는 신념을 보다 구체화시킴으로써 자연과학의 위엄을 더 높였다.  카르납은 그의 논문 「심리학과 물리언어」에서 심리학의 모든 문장은 물리언어로 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신적 대상을 표현하는 심리학도 물리언어로 환원될 수 있다.  ‘물리언어는 보편언어이다.’는 그의 말은 어떤 진술이든 관찰가능한 물리언어로 환원될 수 없으면 무의미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표현한다.  예를들어 ‘무가 무화한다’는 하이데거의 말은 물리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사이비 문장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는 전혀 부정적인  것 또는 무엇인가가 현존하지 않는 것인데, 이 단어를 활동과 행위의 주체로 삼거나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처럼 카르납은 사회과학이나 정신과학까지도 자연과학의 법치하에 포섭시키려 한 통일과학의 이념을 그 절정에까지 실현시킨다.
그런데 검증가능성의 원리는 근본적 몇가지 문제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차츰 이 실증주의자들의 견해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첫번째, 검증원리는 근본적으로 감각경험에 호소한다.  그런데 이 감각경험이 만일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라면, 결국은 유아론을 낳을 것이며, 경험의 객관성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관찰이 단순히 사적인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면, 관찰명제의 보편성의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두번째는 검증의 원리가 과학적 예측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과연 이 예측 자체가 보편성을 갖는가 하는 문제이다.  과학적 명제 자체도 검증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모든 물은 정상적인 상황하에서는 100℃에 끓는다”는 과학적 명제는 검증가능하지만, “움직이는 물체는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명제는 완전한 검증이 가능하지 않다.  세번째 검증원리 자체가 검증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든 현상은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뿐, 과학적 제국주의의 식민이 될 수 없는 또 다른 현상들이 있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말았다.  예컨대 사랑하는 애인이 흘린 눈물을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물리적 언어로 번역될 수 없는 의미는 과연 무의미한 것일까?  오히려 이것이 바로 그 눈물의 진실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상과 같은 몇가지의 문제점들을 노출할 수밖에 없는 논리실증주의는 자폐증에 걸린 사람처럼 결국은 시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검증원리를 약한 의미로 수정하여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한다.  바로 칼 포퍼의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의 원리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기 현대철학에서 다시 언급된 비판적 합리주의를 통해 다시 보충될 것이다.

5)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이 분석철학에서 끼친 영향력은 지대하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을 중심으로 무어, 러셀 그리고 논리실증주의로부터 일상 언어학파로 전환하는 근본적인 계기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논리실증주의로 완성된 과학주의가 스스로 위엄을 포기하고 일상의 철학으로 변신하게 한 분기점을 비트겐슈타인이 마련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사상적 전환과 일치한다.
우리는 통상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전·후기로 나눈다.  전기는 그의 ꡔ논리-철학 논고ꡕ에서 다듬어진 논리적 원자론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 당시에는 러셀과 함께 논리적 원자론을 형성하는 데 관심을 가졌고, 의미문제 역시 의미지시설(referential theory of meaning)의 입장을 나타낸다.  즉 의미있는 문장은 사태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는 명제이다.  의미있는 문장은 사태에 대한 그림이다.  명제는 “실재의 그림”이지만, 어떤 그림도 그 그림이 나타내려는 사태와 일대일의 대응관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러셀의 입장과 같다.  의미있는 문장은 그 문장이 지시하는 사태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지시설은 신비적이고 형이상학적 발언은 무의미한 것으로 규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논리실증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철학이 많은 종류의 사이비 문제를 일으키는 언어적 혼란을 치유하는 과제를 가져야 한다는 언어 분석철학의 정신에 깊이 동조하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이나 논리실증주의자인 카르납과 마찬가지로, 일상언어를 철학적 표현의 운송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불신을 했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부호나 기호보다 훨씬 정확성을 띠고 있는 부호나 기호를 가지는 기호논리학의 언어와 같은 이상적이고 인공적인 언어의 구성을 선호했다.
그러나 1930년대와 40년대를 거치면서 그는 이제 수정같이 맑은 얼음에서부터 거친 땅으로 돌아가기를 선언한다.  이제 이상언어의 정확성을 포기하더라도 우리의 일상적 삶이 이루어지는 마당으로 돌아가자는 태도의 변화를 보인다.  그는 후기 저술인 ꡔ철학적 탐구ꡕ(Philosophical Investigation)에서 이와 같은 자신의 변신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ꡔ논리-철학 논고ꡕ를 완성한 후 자신의 입장에 회의를 품고 철학을 떠났다.  그는 다시 철학에 돌아오면서 자신의 초기 입장과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  물론 전·후기의 사상의 연속성 혹은 불연속성에 관련된 논쟁들이 제기되지만 우리는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의 사상의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초기의 그림이론을 포기한다.  말하자면 표현의 의미는 그것에 대응하는 지시체의 현존에 달려 있다는 입장에서 벗어나 표현의 쓰임새(use)에서 찾으려 한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의 형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점은 이미 무어에 의해 강조되었었고 그 이후 옥스포드학파의 분석철학자들에 의해 강조된 것이다.  언어는 마치 연장이 각각 기능을 가지고 있듯이 그 고유한 쓰임새가 있다.  이 쓰임새가 바로 언어의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다.  즉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의미이다.  이 방법에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유의미한 언어사용이다.  우리가 베개를 가지고 못을 칠 수 없고, 못을 베고 잠을 잘 수 없듯이, 언어는 그 고유한 기능과 쓰임새를 가진다.  이 쓰임새에 맞게 언어게임을 한다.  언어를 수단으로 우리는 한 종류의 담화에서 다른 종류의 담화에로 이동해감에 따라 여러가지 게임을 한다.  ‘언어게임’에서 낱말들은 사람과 사물들을 서술하고 배열하고 지시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인공언어는 일상적인 개념 사용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심각한 왜곡이나 편견을 가지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공언어를 가지고서는 사실을 진술하고 주장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를 노출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우리의 복잡한 삶의 형식을 표현하기 때문에 인공언어를 갖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용도설’(use theory of meaning)로 넘어 간다.  이런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는 1919년 자신을 천재라고 불렀던 러셀과는 단절하고 오히려 무어의 입장을 수용하는 데로 나아간다.  “당신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물음으로써 일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던 명석한 두뇌의 무어도 비트겐슈타인의 강의에 참석한 후, 비트겐슈타인의 방법을 성공적인 방법으로 인정하였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의미용도설을 간추려 보자.
그는 ꡔ논리-철학 논고ꡕ에서 마치 물리학자처럼, 모든 언어는 원자적 진술로 분해될 수 있고, 이 진술은 하나의 사실을 지칭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의미지시설을 견지했었다.  일상언어는 우리에게 애매하고 모호한 의미를 전달해 주기 때문에, 이상언어로 환원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는 머지 않아 초기 자신의 언어관을 인위적이고 언어의 고유성을 왜곡시킨 상상적인 구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결코 획일적인 그물로 싸잡아 넣을 수 없는 다양성과 신축성을 갖는다.  만약 언어의 의미를 언어의 지시체로 규정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많은 언어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폐기된다.  예를들어 “어머나!” 혹은 “아! 아름답다”란 문장은 그 지시체를 갖지 않지만 우리는 사용하면서 의미를 서로 이해하고 전달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초기 그림이론에 대해 스스로 회의를 품게 된 것은 자기 동료인 경제학자 피에르 스파라와의 토론을 벌이던 중이다.  어느 날 비트겐슈타인이 명제는 그것이 묘사하는 사실과 동일한 논리적 형식을 갖는다는 자신의 견해를 옹호하고 있을 때, 스파라는 네아폴리타 사람의 몸짓을 하며 조소하는 듯 비트겐슈타인에게 그 논리적 형식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질문 때문에 초기의 입장을 포기하게 되었음을 회고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사과’라는 단어는 하나의 이름으로서 그 대상을 가지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붉은 사과’란 단어 역시 그렇다.  그리고 ‘하나의 붉은 사과’란 문장도 우리가 그 대상을 확인하여 이해할 수 있는 유의미한 문장이다.  그러나 ‘다섯 개의 붉은 사과’라고 하면 좀 어려워진다.  ‘다섯’이란 단어가 지칭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단어가 어떤 경우에 사용되는가를 익히고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문제가 되진 않지만 말이다.  나는 사과나 붉은 색상을 가리킬 수는 있으나 ‘다섯’이라는 수를 가리킬 수는 없다.  그러면 ‘다섯 개의 붉은 사과’란 문장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되는가?  가령 어떤 사람을 ‘다섯 개의 붉은 사과’라고 쓴 쪽지를 주어 가게에 보냈다고 하자.  그 가게 주인은 ‘사과’라고 표시된 상자로 가서 색상표를 보고 붉은 색을 골라 다섯을 셀 것이다.  그가 만약 ‘넷’이나 ‘여섯’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런 행동을 했다면 그가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한 단어나 문장의 의미는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이는가에 달려 있다.  그 가게 주인은 ‘다섯’이란 단어의 쓰임새를 올바로 알았기 때문에 그 쪽지에 쓰인 것을 이해한 것이다.  예컨대 ‘망치’란 단어가 무엇의 이름인지만을 알고 그 쓰임새를 모르는 사람은 이 단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말하자면 ‘망치’란 단어를 이해하는 것은 그 단어의 용도를 알기 때문이다.  바둑게임의 규칙을 모르는 사람이 바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의미 역시 그 사용규칙을 모를 때는 이해하지 못한다.  게임의 규칙을 알 때 비로소 바둑을 이해하듯이, 언어의 사용규칙을 알 때 비로소 의미를 이해한다.  이런 상황을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language-game)으로 규정한다.
초기의 ꡔ논리-철학 논고ꡕ에서는 단어가 반드시 이름이어야만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ꡔ철학적 탐구ꡕ에서는 단어가 이름이 아니고, 이름으로 쓰일 수 있으나 다른 식으로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  즉 단어의 고정된 의미체계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만약 언어가 더 이상 세계의 그림이 아니라면, 언어를 가지고 하는 놀이는 어떤 고정된 규칙도 없이 일어나는가?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놀이에는 모종의 공통된 속성을 가지듯이, 언어 역시 한정적인 공통된 속성을 가지 않지만 일종의 유사성을 가지고 일어나는 게임이다.  이것은 바로 그가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라 부른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종의 유사성을 가진 것처럼, 언어 역시 모종의 유사성을 가지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가 가진 애매성과 다양성을 회피하여 이상언어에로 돌아가기보다는 일상언어로 되돌아와 이상언어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유의미한 것을 이해하기 위한 변신을 수행한다.  “만세!”, “됐어!”라는 단어는 무엇의 이름이나 그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해한다.
이상과 같은 일상언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은 그의 철학적 입장을 대변해 준다.  말하자면 무수한 일상언어의 수많은 쓰임새를 제시하는 일이 아니라—물론 가능하지도 않지만—철학적 문제를 유발하는 잘못된 언어사용을 지적하는 일이 그의 관심이다.  이것은 마치 파리통에 빠져 있는 파리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릇된 언어사용에서 비롯된 병든 지성을 치료적으로 분석(therapeutic analysis)하는 일과 같다.  이제 일상언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을 더욱 체계적으로 다듬어 가는 일상언어 학파를 만날 것이다.

6) 라   일

근본적으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이론을 계승하면서 분석의 방향을 언어문제로부터 전통적으로 문제가 되어 온 정신개념에로 돌려 하나의 체계를 완성한 사람이 길버트 라일(G. Ryle, 1900~1976)이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ꡔ철학적 탐구ꡕ가 나오기 4년 전인 1949년에 주저인 ꡔ정신의 개념ꡕ(The Concept of Mind)을 출간했다.  이 두 저서가 일상언어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란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지만, 라일은 특히 정신-몸이라는 전통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라일의 관심은 매우 국한되어 있다.  그는 우리가 정신에 관하여 사유하면서 사용하는 개념의 논리적 약도(logical geography)를 교정하는 것 이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바로 전통철학이 정신-몸의 관계에 대해 가졌던 혼란을 치유하는 일이다.  그는 ꡔ정신의 개념ꡕ에서 정신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나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그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의 논리적 약도를 교정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라일은 정신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철학자들이 과오를 범한 것을 분석한다.  특히 데카르트는 정신과 몸이 마치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처럼 이원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범주착오(category mistake)이며, 데카르트의 신화로 지적한다.  이것은 마치 정신이 몸이라는 기계 속에 유령처럼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착오를 범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일은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을 일종의 데카르트적인 교리(doctrine)로 고발하면서 철학적 분석을 일상언어에 호소하여 수행한다.  그는 ꡔ정신의 개념ꡕ에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당신이 대학을 방문하여 안내자로부터 경기장, 운동장, 도서관, 기숙사 등을 안내받고 난 이후, 당신이 나는 “여러 대학의 시설들을 눈여겨 보았소, 그런데 대학은 언제 보여 줄 작정이오?”라고 안내자에게 말한다면, 당신은 바로 범주착오를 범한다.  왜냐하면 마치 대학을 대학의 부속건물들과 동일한 실체로서 가정하기 때문이다.  대학은 대학의 건물과 따로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한 것이다.  대학은 바로 당신이 본 바 있는 모든 것들이 조직되어 있는 그 방식을 따름이다.  이것은 마치 데카르트가 정신을 몸과 다른 실체로 생각한 착오와 동일한 것이다.  라일은 또 하나의 예를 든다.  일개 사단이 행진을 하고 있는 군대 행렬을 보고 있는 어린애의 예를 든다.  그가 각종 대대와 포대와 기병대 등을 보고 나서 사단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똑 같이 범주착오를 범한 것이다.  이 역시 사단이 각종 대대와 같은 어떤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일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공간 내의 물체에 적용되는 갈릴레오의 기계론적 이론은 채택하여 이것이 정신에 적용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정신은 몸과 달리 기계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교리인 것이다.  정신은 비물리적인 데 반해, 몸은 비정신적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렇다면, 정신과 몸은 어떻게 작용을 하는가?  데카르트는 이 둘을 마치 대학과 대학의 건물을 분리하여 생각한 것처럼, 상호 분리시켜 놓고서 어떻게 상호 작용을 설명해야 하는가를 고심하는 큰 실수를 범하였다.  정신과 몸은 전적으로 같은 범주에 속할 수 없는 것인데 이것을 무시하고 동일한 두 실체로 분리하여 놓은 데카르트의 신화를 벗어나기 위해 라일은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한다.
라일은 정신적 개념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분석하여 전통적인 이원론을 제거하려고 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지적인 사람이라고 부를 때, 우리가 그를 그렇게 부르는 근거는 무엇인지를 말해 보자.  물론 그의 머리 속에서 일련의 지적인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교양있는 행위를 하려는 성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를 지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행위가 바로 그를 지적인 사람으로 판단하게 한다.  이 지적인 능력인 지능은 사적이고 은밀한 개인적인 정신현상이 아니라 지적 행위와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행위자가 어떤 행위가 지적인지를 알아야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능이라는 정신적 현상과 지적 행위를 따로 구분하는 착오를 범한다.  지능은 어떤 개인적인 비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공개적 행위를 통해 표현된다.  논리학을 배우고 재치가 있고 글을 잘 쓰며, 바둑을 잘 두는 것은 모두가 지능의 증거이다.  지적인 것은 바로 지적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라일은 이와 같은 사실을 간과하고 정신과 몸을 안과 밖과 같이 이원화하는 것은 데카르트가 저지른 큰 실수임을 지적한다.
라일은 이와 같은 것을 일상언어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다시 분석한다.  예를들어 “그의 행위는 허영심에서 유발되었다”는 문장을 생각해 보자.  그는 마치 사과나무 줄기를 잘랐기 때문에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과가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듯이, 허영심이란 감정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허영심에 찬 물리적 행위가 일어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라고 말한다.  이것은 허영심이란 내부적인 정신적 감정과 그 감정에 의해 유발된 외부적이고 신체적인 행위를 두 개의 독립된 현상으로 설명하는 것은 데카르트적인 범주착오이다.  우리가 정신과 몸이란 두 개의 실재물을 가지고 있고 이 사이에는 신비로운 연결이 있어서, 인과적 상호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라일의 생각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로써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단체정신으로 무장한 야구팀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경우에 데카르트적인 범주착오를 일으키면, 우리는 단체정신이란 것이 선수들의 동작을 야기시키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물이라고 잘못 생각하지, 그 팀의 모든 행동과 형태 속에 나타나는 그 무엇으로 여기지 않는다.
라일의 입장은 정신의 행위를 표현하는 단어들은 정신이 아니라 정신의 행위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인식하고, 지성을 고양시키고, 이해하고, 의지하며, 느끼고, 상상하는 등등의 행위는 모두 육체와 상관없이 정신에 의해 일어나는 결과로 생각한 것이 전통적인 입장이었다.  라일은 이에 반대하여 정신에 관한 모든 주장 속에는 몸의 행위에 관한 사실들이 관련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아낸다는 것은 단지 어떤 종류의 일을 할 수 있고, 또한 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아 보는 것에 불과하다.  정신의 활동은 다름아닌 정신적 행위 자체의 활동이다.  따라서 정신의 작용을 기술하는 것은 바로 정신적 행위들이 일어나는 방식들을 기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7) 오 스 틴

오스틴(J. L. Austin, 1911~1960)은 옥스포드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로서 그의 학문은 2차 대전을 중심으로 초기와 후기의 사상으로 나누어진다.  전쟁 전에는 라이프니쯔와 희랍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관심을 가졌었다.  전쟁 후에 그는 독자적인 철학의 방법을 발전시켰다.  오스틴은 후기에 와서 전통적인 철학의 문제들, 철학적 용어들의 문제들을 뒷전으로 하고, 철학적 이론보다도 일상언어를 명확히 하고 일상언어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오스틴은 무어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상언어에 대한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오스틴은 일상언어 자체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는 그의 일차적인 관심이 되지 않았다.  이것은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에 일차적 관심을 갖고 일상언어의 분석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비트겐슈타인과는 태도가 다르다.
그의 주저인 ꡔHow To Do Things With Wordsꡕ는 일상언어의 문제를 행위의 차원으로 환원하여 설명한다.  말의 수행적(performative) 성격을 강조하면서, 전통적인 언어학의 구분에 따르면 화용론(pragmatics)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우리는 오스틴이 말의 수행적 성격을 분석하고 전통적인 언어관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입장을 “언어수행론” 혹은 “화행론”(話行論)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오스틴은 ‘진술’(statement)만이 진위를 가릴 수 있고, 따라서 진술만이 논리적 명제가 된다는 전통적인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실에 대한 진술만이 진위의 검증이 가능하고 그렇지 못한 문장은 무의미한 사이비진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전통적인 논리실증주의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기록이나 보고가 아닌 사이비진술의 형태인데도 진위를 확인할 수 있고 따라서 객관적인 의미를 갖는 그런 문장들이 있다.  예를들어 결혼식에서 주례가 묻는 말에 대해 “예”라고 대답했을 경우에, 이것은 진술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지만, “예 나는 이 여인을 합법적인 아내로 맞이합니다.”라는 약속을 수행하고 있는 발화(utterance)이다.  이것은 결혼하는 사실을 보고하기보다는 결혼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그 자체가 수행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진술의 형태를 갖추지 않고 있지만 그 자체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오스틴은 이런 종류의 발화를 수행적 발화로 규정하여 보통 진술 혹은 진술적 발화와 구분하였다.
진술적 발화가 진위를 구분할 수 있는데 반해, 수행적 발화는 적절한가 부적절한가로 구분될 수 있다.  오스틴은 수행적 발화는 그것이 적절할 수 있는 조건을 지키면 오발행위나 남용행위가 되지 않고, 성공적인 발화행위가 된다.  사회적 관습이나 약정에 따르는 행위를 수반하는 말은 적절한 수행적 발화가 된다.  이처럼 오스틴은 수행적 발화와 진술적 발화가 근본적으로 차이점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후기에로 가면서 오스틴은 이 구분, 즉 수행문과 진술문의 구분점을 지워버린다.  즉 모든 발화는 그 나름의 진위값을 가지며 동시에 행동을 수행한다는 입장을 가진다.  예를들어 “제발!”이란 말은 명령, 충고, 애원 등으로 모종의 행동에 관여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고, 진술은 단순히 사실에 대한 기록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수행적 요소가 전혀 없는가?  그리고 수행적 발화는 전혀 진위의 구분이 가능하지 않는가?  오스틴은 이 구분 자체가 의미없다고 강조한다.  예를들어 “아마 내일 비가 올 것이라고 예언한다”는 발화는 예언하는 행위에 관련된 것이지만 진위의 구분이 가능하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의 수상은 대머리이다”는 발화는 진술적 발화이지만 수행적 발화가 부적절한 것처럼, 역시 적절하지 못한 발화이다.  왜냐하면 현재 대한민국은 수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스틴은 수행문과 진술문의 전통적인 구분점을 지워버림으로써 모든 발화는 수행적 성격을 가짐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진술도 수행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오스틴은 발화가 다음의 세 가지 행위를 수행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첫째, 발화행위(locutionary act)는 문장의 뜻과 지시를 결정하는 행위이다.  둘째는 발화수반행위(illocutionary act)로서 발화행위에 따르는 진술, 명령, 질문, 약속 등의 행위이다.  그리고 발화효과행위(perlocution-
ary act)로서 발화로 인해 결과적으로 청자를 설득하고 놀라게 하고 바쁘게 하는 등의 효과행위이다.  발화행위는 단순히 어린애가 응얼거리는 것과 같이 단순히 소리를 내는 행위이다.  발화수반행위는 이 발화행위가 구체적인 의미를 가짐으로써 특정한 행위를 수반하는 힘을 가진 행위이다.  발화효과행위는 상대편으로 하여금 모종의 행위를 하도록 하는 강한 힘을 가진 행위이다.  예를들어 제한속도가 시속 80킬로인 거리를 100킬로로 달리는 차안에서 운전석 옆에 앉은 사람이 “이곳은 제한 속도가 80킬로이구만!”하고 새삼 강조를 할 경우에, 아마 이 발호는 단순히 어떤 사실을 진술하거나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속도를 줄여 주기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발화효과행위가 될 것이다.  이처럼 오스틴은 서얼(J. Searle)과 함께 ‘어떤 것을 말한다’는 것은 바로 ‘어떤 것을 행한다’는 소위 언어수행 혹은 언어행위론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5. 실용주의

실용주의는 진리의 의미를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타당성에서 찾지 않고 상대적 효용성에서 찾는다.  즉 진리의 표준을 실용적 가치에 두려는 실용주의(實用主義, Pragmatism)는 하나의 철학적 방법론 또는 인식론상의 진리설로서, 영국계통의 경험론 철학과 다윈의 진화론을 결합시키는 데서 주로 미국과 영국을 지반으로 발달하였다.  이 입장은 미국의 퍼어스에 의하여 주창되고, 윌리암 제임스에 의하여 보급되고, 존 듀이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영국에서는 쉴러 등의 인본주의에서 이 입장이 주장되고 있다
이 입장에서도 물론 철학자에 따라 각기 주장하는 바에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 근본사상은 대체로 경험 또는 생활을 중요시함으로써 지식이란 본래 생활에 유용한 것이라야 한다는 데 있다.  우리의 생활은 환경에 대한 적응에서 성립되는 바, 지식은 이를 가능케 하고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진리를 위한 진리라느니, 영원불변의 진리니 하는 것은 한갓 망상에 불과하다.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진리란 있을 수 없다.  진리는 항상 산진리로서 역사적 현실에 따라 생성·변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실용주의적 사상은 일찍이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설파한 희랍의 저명한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에 있어서도 나타났으나, 그것이 하나의 인식론상의 입장으로 제창된 것은 미국 학계에서 각광을 받아 점차 유럽 각국에까지 전파된 이른바 프라그마티즘이다.
퍼어스(Charles S. Peirce, 1839~1914)는 ‘프라그마티즘’(pragmatism)이란 말을 쓰기 시작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서 우리의 관념을 명료하게 만들 것인가」(How to make our ideas clear?.  1873)라는 논문에서 아래와 같이 논하고 있다.  우리의 관념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용적 의미(practical meaning)를 가진 것, 이를테면 펜이란 관념은 글을 쓰기 위한 것이라는 데에 있다.  여기에서 본질적인 것은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되어 있는가, 어떤 재료로 만들어져 있는가 하는 따위가 아니고 글쓰기 「위한 것」이라는 실용적 의미에 있다.  일반적으로 사물의 「무엇임을 어떤 목적에 적합함」(is=agreeable to any purpose)이다.  관념의 의미는 그것에 따라 행동할 때 행동의 목적이 달성되느냐 안되느냐에 있어서 명료하게 나타난다.  이리하여 실천에 유용한 관념은 진리이고, 그렇기 못한 관념은 거짓이다.  관념의 가치는 행위에 대하여 지니는 바의 유용성 여부에 달려 있다.  이러한 것이 대체로 퍼어스의 의견이었다.  
퍼어스의 체장은 당시에 별로 주목을 끌지 못했으나 20년 후인 1898년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행한 윌리암 제임스(W. James, 1842~1910)의 강연을 계기로 점차 미국 사상계에 큰 세력을 펴게 되었다.  제임스에 의하면 관념은 지각과 같은 직접적인 지식의 대용(代用)이 되는 간접적 지식이다.  관념은 어떻게 해서 지각의 대용이 되는가.  유도(誘導, leading)에 의해서이다.  관념이 어떤 것을 의미한다(mean)는 것은 그것을 지향한다(intend)는 것을, 거기에 이끌어간다(lead)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우리가 숲 속에서 길을 잃고 인가(人家)를 찾아 해매던 끝에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 인가를 찾아 갔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관념의 대용이란 것은 이 경우에 소의 발자국 구실을 하는 것이다.  발자국은 소를 먹이는 인가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관념의 의미는 그러한 유도에 있다.  이 유도의 출발점은 인식주관이고 도달점은 인식대상이니, 반드시 대상과 일치하거나 대상을 그대로 묘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에 대한 관념의 관계는 오히려 서적과 카탈로그와 같은 것이어서, 대상에까지 도달하게 함으로써 그 목적이 달성되고,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관념의 진리성은 그것이 어떠한 실제적 결과에 도달케 하는가 하는 현금가치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러므로 진리는 관념이 지닌바 어떤 영원불변의 성질(이런 것은 있을 수 없다)이 아니라, 관념에 있어서 생성하는 것이다.  진리성은 진리화에 있고 타당성은 타당화에 있다.
제임스보다 더욱 발전적으로 진리의 의미를 설명한 것은 죤 듀이(J. Dewey, 1859~1952)이다.  듀이에 의하면 무반성적 경험이 반성적 경험, 즉 사유작용에 앞선다.  무반성적 경험이란 우리의 일상생활의 경험을 가리킨다.  그것은 동적·발전적이며, 내부로 통일된 경험으로 재구성되어야 하며, 재구성의 수단으로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사유작용이다.  사유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지각이나 관념이 아니라 분열된 경험의 상황이다.  사실이니 여건이니 하는 것은 경험의 상태에 있어서도 비교적 안정된 부분이고, 관념이니 사상인 하는 것은 불안정하고 동요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관념은 여건과 더불어 통일된 경험을 재건함에 있어서 그 도구의 구실을 한다.  그 경우에 재건작업에 성공하면 그 관념은 참된 도구, 즉 진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관념은 진리성은 실제로 개개의 경우에 시험된 실험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듀이의 학설을 도구주의(Instrumentalism) 또는 실험주의(Experimentalism)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쉴러(Schiller, 1814~1987)는 프라그마티즘을 인본주의(Humanism)로서 주장한다.  그는 ‘플라톤이냐 프로타고라스냐’라는 문제를 제출하고, 초개인적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전자를 버리고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하는 후자를 택한다.  절대적 진리란 것은, 가령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전혀 무익한 것이다.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지식은 본래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고, 경험은 각자 자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각 사람에 대하여 상대적이며, 처음에는 다만 진리요구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진리요구가 우리의 실생활에서 검증되었을 때 비로소 타당한 진리로 된다.  진리는 인간이 자기의 생활을 통하여 제작하고 사용하는 데서 진리로 되는 것이다.  진리로 하여금 진리되게 하는 것은 실용이라는 가치에 있다.  진리는 본래 처음에는 진리요구로서 나타나는 바, 그것들 상호 간에 생존경쟁과 같은 것이 일어난다.  그 결과 인간사회에 가장 유익한 것이 가치있는 진리로서 인정된다.  이른바 객관적 진리란 이와같이 사회적 승인을 얻은 진리이며, 그런 한에서 개인적 평가 이상의 것이다.  쉴러는 이러한 인간중심적 견지에서 자기의 프라그마티즘을 특히 휴머니즘이라 부른다.
영·미계통의 경험주의적 지반에서 발생한 실용주의 외에 칸트의 비판주의에서 출발하여 일종의 실용주의적인 철학에 도달한 예가 있는데, 그것은 파이힝거(Vaihinger, 1852~1922)의 의제철학(擬制哲學, Ais-ob- Philosophie)이다.  파이힝거에 의하면, 학문상의 근본개념은 모두 의제(Fiktion)이다.  의제란 그 허위임을 알면서도 설정하는 가설이다.  이를테면 물질, 힘, 원자, 영혼, 자유, 의지, 절대자 같은 것은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편이 실리를 가져오며, 그런 의미에서 진리라고 생각되어도 좋다는 것이다.


제3절  후기 현대철학


우리는 2차대전 이후부터 지금까지를 편의상 ‘후기’ 혹은 ‘당대’의 (contemporary, current) 현대철학으로 부른다.  이 시기의 사상적 발전 역시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몇가지로 간추리는 데는 무리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시기를 흐르는 현대철학의 공통적인 얼굴을 반실증주의적인 태도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학문의 방법론으로서 제기된 1930년대의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쟁들이 이 시대를 특징 지우고 있다.  이 반실증주의적 흐름들을 몇가지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철학을 통해 가다머에 와서 그 체계적 완성을 보게 된 해석학이다.  가다머를 대표로 하여 형성된 현대의 해석학은 분명 이 시기를 특징 지우는 중요한 철학적 조류이다.  두번째는 20세기를 시작하면서 현대철학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등장한 문제는 언어문제이다.  이것은 언어분석철학이란 이름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20세기 전반을 지배했던 언어에 대한 관심을 이제 새로운 지평으로 확장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철학이 오직 언어의 의미분석이라는 좁은 주제에 한정되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을 출발로 하여 언어의 문제를 실천적이고 선험적인 차원과 연결시켜 다루려는 새로운 언어철학의 운동이 확산되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특히 아펠이란 철학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흐름은 영·미철학의 전통에서 발생한 반실증주의적 견해들이다.  아마 여기에는 칼 포퍼를 중심으로 한스 알베르트, 토마스 쿤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비판적 합리주의가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헤겔철학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변증법의 현대적 부활이다.  소위 ‘신맑스주의’로 불리는 일련의 비판이론가들의 등장은 바로 변증법을 철학적 방법으로 다시 부활시킨 현대철학의 새 얼굴이다.  비판적 합리주의와 비판이론가들 사이의 논쟁은 1960년대 후반의 현대철학을 특징 지우는 배경이 된다.  마지막으로 헤겔의 합리주의의 몰락 이후 등장한 비합리주의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포스터모더니즘, 즉 탈현대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한다.  우리는 여기에 구조주의를 포함시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1. 해 석 학

우리가 ‘해석학’ 혹은 ‘해석학적’이라는 비교적 생소한 용어를 현대철학의 후기에 와서 만나게 되지만 사실은 이미 고대 희랍에서부터 그 뿌리를 가지고 발전해 왔다.  후기 현대철학의 한 흐름으로 소개하려는 가다머(H. G. Gadamer)의 해석학은 이미 고대를 거쳐 중세의 성서 해석학(슐라이어마하) 그리고 딜타이의 삶의 해석학을 통해 간추려진 전승물일 뿐이다.
‘해석학’(Hermeneutik)이란 용어는 희랍에서 파생된 17세기 경의 신조의 중의 하나이다.  고대 희랍에서 언급되는 해석학적 기술이란 참과 거짓에 대해서 판단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탁의 의미를 밝혀내는 기술이었다.  즉 신들이 인간에게 전달하려는 불분명한 말에 주석을 붙여 분명하게 하는 기술이었다.  이것이 17세기에 와서 비로소 해석의 기술로서 해석학이란 이름으로 체계화되었다.  단지 신탁의 해석에 국한되지 않고 신학, 문헌학 및 법률학들을 위한 보조학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단지 다른 학문의 보조학으로서의 기능을 가졌던 해석학이 학으로서의 보편성을 갖기를 시작한 것은 슐라이어마하(F. D. E. Schleiermacher)와 딜타이를 통해서이다.  특히 딜타이는 자연과학의 방법인 ‘설명’에 대비하여 정신과학의 방법을 ‘이해의 해석학’으로 규정함으로써 삶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의 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딜타이의 해석학적 방법은—이미 앞의 삶의 철학에서 언급했듯이—그 자체 보편성이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다.  즉 현실은 그 자체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국 설명될 수 없고 단지 이해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에 딜타이는 관심을 가졌을 뿐, 실지로 이해가 보편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심리학적 연관 속에서 경험과학적 방식으로 해결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삶을 추체험(追體驗)할 수 있다고 전제를 하는 것은 이해 자체를 데카르트적인 확실성으로 전제하는 일종의 낭만주의적 해석학에 지나지 않는다.  이 낭만주의의 해석학은 이해의 구조나 정신과학에서 이해가 차지하는 역할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는 가다머의 지적은 해석학의 보편성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이다.
가다머에게 직접적인 공헌을 준 하이데거(M. Heidegger) 역시 해석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이란 이름 하에 전개시킨 새로운 철학적 발상의 토대 위에서 딜타이의 작업을 수행했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을 현존재의 해석학으로 확장시켜 나간다.  딜타이의 심리학적 연관을 배제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해석학을 현존재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보편적 이해의 학으로 체계화한다.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방법을 해석학으로 전환하기 위해 현상(phainomenon)에 관한 학(logos)이란 용어에 대한 분석을 한다.  ‘현상’이란 용어는 스스로를 스스로에 즉응하여 현시하는 것 내지는 개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고스’는 단순히 ‘판단’을 의미하지 않고 개방화 내지는 스스로를 보이게 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이란 다름아닌 스스로를-가려짐이 없이 밖으로- 나타내 보임(aus-legen)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기술의 방법적 의미를 해석(Auslegung)으로 규정한다.  그는 인문과학과 구분하여 해석의 학으로 규정했던 딜타이의 입장을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현존재의 해석학으로 완성시킨다.  말하자면 딜타이가 해석학을 삶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근거하여 규정하는 데 반해, 하이데거는 삶의 구체적 현상, 즉 인간의 구체적 삶인 실존에 대한 해석학으로 철저화한다.  그러므로 하이데거가 자신의 해석학을 ‘해석학적 현상학’이라고 규정할 때 후설의 현상학에서는 그 내용적인 추상성은 배제하고 방법적 절차만을 그리고 딜타이에게서는 삶이란 구체적 역동성을 빌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해석학은 통상적으로 해석에 대한 학문이란 의미를 벗어나 현존재의 존재가 그 스스로 드러나 보이는 실존의 구조에 대한 분석이란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결코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해 대상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시되어 드러날 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이데거는 해석학을 전통적인 판단론, 즉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판단론적인 해석학과 구분하여 존재의 의미를 열어 보이는 학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해석학을 전통적인 판단론적 해석과 구분한다고 할지라도 이 구분은 단지 주제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선입견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해를 명료하게 하는 해석은 그 자체가 “미리 가짐” 속에서 수행되며 “미리 봄”이란 선파악 속에서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해석은 이미 이 선구조의 자명성에 대한 선이해를 통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해석은 이미 순환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소위 해석학적 순환은 이제 더 이상 설명과 이해 혹은 ‘법칙정립적인 것’과 ‘개성기술적인 것’사이의 방법론적 이원론적 분화가 딜타이에서처럼 지탱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학에 의한 방법론적 통합을 이룬 사람이 가다머이다.  방법론적 논쟁은 자기 폐쇄적인 함정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 설명과 이해가 항상 방법상으로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이 은폐되어 온 사실을 가다머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가다머가 ꡔ진리와 방법ꡕ(Wahrheit und Methode, 1960)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방법적인 과학과 이 방법을 초월하는 진리가 상호 어떻게 관계를 갖는가를 해명하는 것이다.  과학 이전의 세계지평과 방법적 관점들 사이의 상호관련성이 어떻게 해명되는가가 중요한 관심거리이다.  하이데거가 해석학적 순환을 미리 가짐, 미리 봄, 선파악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본 것처럼, 가다머는 선이해이론을 선입견이론으로 연결시킨다.  어떤 의미전체의 선이해와 부분의 해석 사이에 작용하는 해석학적 순환은 특수한 해석학적 과정 속에서 영향사(Wirkungsgeschichte)로 나타난다.  한 사건 속에는 여러 시대의 다양한 이해지평이 융합되어 있기 때문에 영향사적 연관을 떠나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특히 가다머의 이와 같은 입장은 역사해석에 있어서 헤겔적인 변증법적인 관계에 동조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역사를 통일하는 내적 연관성이 하나의 ‘전통’으로서 이미 주어져 있음을 가다머는 강조한다.  가다머는 랑케처럼 역사적 경험을 반복가능한 경험으로 단순히 재구성해 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부정과 비판을 통해 새롭게 의미가 인식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이미 딜타이에 의해 언급된 사실이다.  그러나 가다머는 딜타이가 아무리 역사적 경험의 반복불가능성을 부정했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추체험적인 단순재생산이라는 자연과학적인 실증주의적 모델에 종속되어 있음을 비판한다.  가다머는 후설을 통해 역사적 경험에 대한 보편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지반을 발견한다.  소위 후설의 생활세계 개념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가다머에게 유산으로 남겨진다.  그리고 하이데거 역시 이 선험적 기반으로서 세계내존재라는 선구조를 가다머에게 남겨 준다.  이 선구조는 가다머에 있어서 선입견과 전통으로 나타난다.  가다머는 선입견과 전통을 계몽주의자들처럼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지평으로 규정한다.  말하자면 모든 이해나 해석은 언제나 이미 일정한 관점이나 예기 등에서 생기는 선입견 혹은 선판단(Vor-urteil)에 의해 제약당하고 있다.  가다머는 이와같이 해석이 선입견이나 전통에 제약당하고 있음을 ‘영향사’란 개념으로 규정한다.  이 ‘영향사’란 전통에 속해 있는 것들에 대해 전통이 행사하는 영향력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간과한 계몽주의자들은 선입견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가다머의 견해에 대해 맑시즘의 흐름을 따르는 하버마스(J. Habermas)는 가다머가 주장하는 ‘전통’이 그 자체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가진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 이해나 합의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비판한다.  가다머는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경제적 혹은 물질적 요인을 간과함으로써 오히려 전통의 이데올로기적 폭력성을 표출하고 있다.  물론 가다머는 이 사회경제적 요인까지도 전통 속에 함축시키기 때문에 하버마스의 비판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이 논쟁은 상세하게 논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하버마스에 대해서는 비판이론을 다루는 절에서 다시 논할 것이다.
아펠(K. O. Apel) 역시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가다머의 입장이 다분히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닌다고 비판한다.  해석적인 이해만으로 행위와 표현 그리고 세계관 등을 의사소통과 대화를 통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가다머의 생각은 낭만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아펠에 의하면 의사소통을 통해 결코 극복될 수 없는 행위가 있다.  즉 행위자의 행위가 의도적인 범위를 넘어 인과적으로만 설명될 수밖에 없는 영역이 있다.  이 영역에 대한 해석적 이해는 단순히 대화나 의사소통의 과정을 통해서도 극복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아펠은 해석적 이해가 준객관적인 설명과학인 정신분석학에 의해 보완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결코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행위는 정신분석적 설명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정신분석적 방법에 의한 이데올로기 비판이 해석학적 이해에 보완되어야 한다.
해석학적 이해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오염될 수 있다는 아펠의 지적에 대해 하버마스 역시 동조하면서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끌어들인다.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은 정신분석에 의해 비로소 치료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환자와 의사사이의 의사소통과 같은 이상적 담화상황 모델에 의해 합의를 차단하는 이데올로기적 요인들을 비로소 치유 내지 폭로할 수 있다고 주장을 한다.  이에 대한 가다머의 입장은 일체의 선입견과 왜곡의 결과들로부터 자유로운 합리적 합의라는 하버마스의 이상은 충격적일 만큼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하버마스는 이 무제약적 의사소통은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임을 강조하면서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이에 대한 논쟁에도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단지 가다머와 하버마스 사이에는 권위와 전통에 대한 해석학적 인정과 계몽주의적 부정이란 차이점이 있음을 주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선험적 화용론

20세기 후반의 현대철학이 공통된 주제로 삼는 것은 한결같이 언어이다.  얼핏보기에는 모든 철학적 관심이 언어에로 집중되어 있는 것같이 보인다.  소위 우리는 이 시기의 철학적 경향을 언어지상주의(Sprachlo-
gismus)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 관심을 보여왔다.  특히 19세기 후반부터 분석철학이 형성되는 가운데 언어의 문제는 철학의 근본적인 주체가 되어 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언어철학적 관심은 그 방향을 달리한다.  이들은 오직 언어에만 매달리는 철학은 결코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고 자부할 수 없음을 스스로 고백한다.  이 고백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 개념에 자극을 받고 해석학의 영향하에서 성숙된 것이다.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초기의 이상언어이론에서 후기의 언어놀이개념으로 전회를 이룰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인식하면서, 그 속에서 언어를 행위나 삶의 형식 혹은 실천의 문제와 연결시키려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문제를 가족유사성이라는 상호주관적 지평으로 확장하여 다루는 것은 언어철학의 선험적 지반에 대한 반성의 문을 열어 준다.  이를 계승하여 아펠은 언어행위의 실용적 측면의 선험적 요구를 정당화시켜 나간다.
칼 오토 아펠(Karl-Otto Apel)은 2차 대전 후 독일의 본에서 철학과 언어학을 공부하였다.  여기서 그는 해석학의 전통에 서서 정신과학 이론을 계승한 로트하커(E. Rothacker)와 언어 철학자 바이스게베르(L. Weisgerber)의 영향을 받으면서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학이 철학계를 지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아펠은 인식과 언어의 문제를 선험적-해석학적 관점에서 연구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언어 분석철학과 퍼어스의 실용주의 철학을 처음으로 독일에 소개하였다.  특히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와 퍼어스의 기호론(Semiotik)을 연구하였다.  아펠은 러셀과 초기 비트겐슈타인 속에 함축되어 있는 논리적 원자론과 카르납을 통해 이어지는 논리실증주의의 언어에 대한 비실용적 측면을 선험적 차원에서 정당화한다.  아펠은 순수 논리분석에만 치중하는 전통적인 언어철학의 편협함을 선험적으로 보충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아펠이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관심을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과 종합하는 데로 나아가게 한다.  보편적 언어이해를 단순히 논리적 형식이나 순수한 이상언어에 토대하여 정초하려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언어를 인간의 사고와는 독립되어 있는 사실들에 대한 그림으로서 규정함으로서 언어의 실용적인 측면에 대한 선험적 반성의 문제를 고려하지 못했다.  이런 맥락에서 아펠은 칸트로부터 ‘선험적’이라는 술어를 빌어와서 자신의 언어철학을 ‘선험적 화용론’(transz-
endentale Pragmatik)으로 완성해 나간다.
이 때 ‘화용론’이란 단어는 실용주의(Pragmatismus)에서 나온 말인데 단순히 기호의 논리적 관계만을 문제삼지 않고 기호와 사용자간의 관계를 문제삼는 학을 지칭한다.  아펠은 칸트의 선험적 통각 자리에 보편적 언어이해의 선험적 기반으로서 의사소통 공동체라는 개념을 대입한다.  그는 칸트의 범주적-선천적 인식기능에 언어의 역할을 새로 첨가한다.  그 역시 이상적 언어상황을 모든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선험철학의 이념을 자신의 철학적 방법으로 가져온다.  이성의 타당성에 의심을 하기 시작한 현대철학은 철학의 변형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후설에 이르기까지 선험적 주관의 절대적 확실성을 정초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것은 결국 의사소통적 연관을 차단하는 유아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펠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성의 기능을 단순한 반성능력에 국한하지 않고 의사소통과 대화로 확장하려고 한다.  칸트가 수학이나 뉴튼 물리학의 형이상학적 가능근거를 정초하였다면, 아펠을 정신과학의 선험적 가능근거를 확인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물론 논리 실증주의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상호주의적 근거가 전혀 문제시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예를들어 카르납은 보편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를 ‘규약’(conven-
tion)에서 찾는다.  하지만 이 규약이 어떻게 정당성과 합리성을 가질 수 있는가는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 규약의 정당성이 합리적으로 마련되지 못하는 한, 임의적인 가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결국은 물리주의적 통합과학의 이념으로 끌고가는 형식적 과학주의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통합과학적 프로그램의 한계를 극명하게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 점에서 아펠의 선험적 화용론은 논리 실증주의자들에게 간과된 주체에 대한 반성, 즉 보편적 삶의 형식을 구성적 토대로 가져온다.  보편적 담론을 가능하게 하는 합리적인 의사소통 공동체를 그 토대로 가진다.  모든 사적 언어가 가지는 임의성이나 우연성을 배제한 합리적 논증을 근거로 한 합리적 언어놀이와 언어사용이 상호주관적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아펠은 신실증주의자들처럼 형식적 규약에서 보편적 이해의 근거를 찾지 않고 합리적 의사소통이라는 규범적 원리에서 찾는다.  ꡔ해석학과 이데올로기ꡕ란 저서를 1968년 아펠과 공동으로 집필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던 하버마스 역시 합리적 의사소통을 강조하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선험적’이란 술어를 사용하기를 꺼리고 ‘보편적 화용론’으로 지칭한다.  왜냐하면 선험철학이 의식의 한계 내에 머무르는 한, 합리서의 상호주관성이 차단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의 ‘보편적 화용론’에 대해서는 다시 뒤에서 다룰 것이다.


3. 비판적 합리주의

해석학이나 선험적 화용론과 마찬가지로 20세기의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은 과학론의 영역에서 제기된다.  후기 현대철학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한결같이 신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물리학주의에 토대한 카르납의 통일과학의 이념이나 노이라트(Neurath)나 슐릭의 기초명제에 대한 신앙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이 신실증주의는 명제의 논리성을 기준으로 삼고 있지만 기초명제가 경험적 사실과 실지로 어떻게 상관관계를 갖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명제의 논리성을 과학의 유일한 기준으로 설정하는 것은 전통적인 형이상학 못지 않게 독단적이다.  현상에 대한 보편타당한 법칙을 추구하려는 논리실증주의와는 달리, 비판적 합리주의는 인간의 지적 능력과 이성은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항상 오류의 가능성을 지닌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이제 과학적 합리성이 관찰명제나 기초명제의 논리성에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추측과 반박으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탐구의 과정에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과학의 기준을 설정되기에 이른다. ‘명제의 논리’로부터 ‘탐구의 논리’에로의 전환이 시급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소박한 과학적 검증주의는 그 자체가 과학적 제국주의라는 폭력성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검증가능성이라는 소박하고 편협한 기준에서 비판적 검사의 과정을 중시하는 반증주의에로 전환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칼 포퍼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칼 포퍼(K. Popper, 1920~1994)는 역사의 발전과정을 변증법이라는 실증주의적 도식으로 체계화하는 헤겔과 맑스의 역사이해를 역사주의로 고발하면서 열린 사회의 적으로 규정한다.  칼 포퍼는 딜타이의 “우리는 자연을 설명하고 정신생활을 이해한다.”는 방법적 이원론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포퍼는 자연과학적 방법을 사회과학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이해의 논리를 설명의 논리로 전환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방법적 일원론을 주장한다.  헤겔과 맑스의 변증법은 물리학적 방법을 단순히 역사의 발전과정에 적용시킨 과학주의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퍼의 입장을 물리학주의에 물든 소박한 실증주의자로 규정할 수 없다.  그가 비록 과학적 방법으로 일원화한다는 점에서는 실증주의와 견해를 같이 하지만 우리가 그를 ‘비판적 합리주의’로 부르는 것은 그가 반증주의를 들로 있고 “가설-연역적 방법” 내지는 “시행착오”의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귀납주의를 벗어나 과학적 방법을 가설-연역적 방법으로 전환하였으며 관찰의 이론의존성을 주장함으로써 과학과 사이비과학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기준인 검증가능성의 원리를 퇴색하게 만들었다.  특히 그의 상황의 논리는 바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설명과 이해의 방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기 때문에 딜타이의 방법적 이원론이 의미가 없다.  과학은 철학에 뿌리를 박고 있고 철학은 과학의 성과 위에 존립한다는 근본적인 통찰이 포퍼에게는 하나의 신앙으로 남아 있다.  이와같이 해석학과는 달리 이해를 설명하려는 포퍼의 입장은 비판적 합리주의를 주도하는 한스 알베르트(H. Albert)에게로 전수된다.
가설-연역적 방법과 비판적 검사의 이념을 이어받은 한스 알베르트 역시 편협한 실증주의를 넘어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사이의 낡고 오래된 대립을 벗어나고자 한다.  포퍼의 추종자인 알베르트는 자연주의적 설명 모델을 인문사회과학 영역에까지 적용한다  그는 해석학은 일종의 신화이며, 이것은 합리적 설명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해석학은 일종의 이해의 기술에 지나지 않으며, 이해도 과학의 법칙적 모형에 종속되어야 한다.  특히 비판적 합리주의는 사실과 가치의 문제를 불리하여 학문의 몰가치성(Wertfreiheit)과 가치중립성을 주장한다.  이들은 막스 베버(M. Weber)의 영향하에서 학문에서 가치판단의 영역을 제외하려고 한다.  학문은 경험적 대상만을 토대로 해야 하며, 학자는 가치를 설정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베버의 신념은 이들에게 전수된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랑크푸르트학파 즉 비판이론가들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받는다.  비판이론가들은 비판적 합리주의자들에 대해 그들의 가치중립적 “비판적 검사의 이념”은 한갓 망상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의해 인식행위가 결정된다고 맑스적인 입장에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비판이론가들의 견해를 살필 것이다.
이와 같은 비판적 합리주의의 새로운 실증주의적 경향은 문헌학상으로는 포퍼주의자로 불리는 또 다른 한 사람인 토마스 쿤(Th. Kuhn)에 의해 비판을 받는다.  그의 ꡔ과학혁명의 구조ꡕ(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 1962)는 새로운 과학론을 등장시킨다.  주로 분석철학의 영향하에 있었던 포퍼와 알베르트와는 달리, 쿤은 독일철학의 흐름 속에서 해석학적 배경을 가지고서 과학론은 제기한다.  해석학은 과학적 지식은 이미 선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과학은 생활세계의 선과학적 활동에 이미 연루되어 있다는 주장은 학문의 가치중립성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쿤 역시 과학은 과학적 대상이 될 수는 없는 전제조건을 이미 가지고 비로소 성립한다는 과학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과학은 이미 사회와 전통 속에 주어져 있는 일종의 패러다임을 가진다.  그는 과학의 이론의 혁명적 전환구조를 분석하여 과학이론들 사이의 비교불가능성, 불가양립성, 불가공약성(incommensurability)을 강조한다.  그는 포퍼의 입장에 잠재되어 있는 과학의 누적적 진보이념을 실증주의의 유형으로 비판하면서 과학의 발전은 패러다임에서 패러다임으로의 혁명적 변환일 뿐 결코 점진적 진보로 대상화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패러다임은 어떤 과학공동체의 구성원에 의해 공유되는 과학이론, 법칙, 지식, 방법, 가치 심지어는 습관 등과 같은 것을 통틀어 지칭한다.  이것은 정상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전과학(prescience)의 단계이다.  정신과학은 위기에 처하고 다시 혁명의 단계를 거쳐 새로운 정상과학으로 그리고 새로운 위기를 거쳐 새로운 혁명의 단계에로 이른다.  이 과정은 점진적 진보의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 진보이념은 과학주의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쿤은 과학자는 패러다임을 기본으로 하여 새로운 이론들을 수용하고 이론들 사이의 모순을 조정하면서 마치 수수께끼를 풀듯이 비판적으로 수정해 간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을 거쳐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하고 이를 혁명적으로 선택하는 일련의 비판적 조정의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이 비판적 조정의 과정이 합리적 근거를 갖지 못하고 패러다임이 항상 과학의 전제조건으로 늘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다면, 이 패러다임이 과학적 사유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런 관점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경직된 과학을 해방시키려는 노력은 파이어아벤트(P. Feyerabend)에 의해 제기된다  그는 쿤의 패러다임의 변환의 논리를 변증법의 논리와 유사한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밀(Mill)의 정치적 자유주의의 이념을 첨가하여 과학론은 ‘무정부주의적 인식론’으로 규정하였다.  파이어아벤트는 준변증법적 방법을 토대로 하여 포퍼주의자들의 비판적 합리주의에 남아 있는 준실증주의적 잔재를 해체하려 한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아나키즘적 영위이다”는 말로 대변되는 파이어아벤트의 입장은 과학주의적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해체하려는 것이다.  과학의 진보를 맹신하지 않으며 과학이 다른 어떤 지식보다 우월할 수도 없다는 주장이다.  그는 과학에서는 어떠한 방법이라도 다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진다는 다원론적 입장을 가진다.  과학자는 반드시 어떠한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어떠한 방법도 다 좋다는 다원론적 입장은 과학이론들의 불가공약성을 전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어떤 이론이든간에 나름의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과학이 미신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  무궁화 2호 발사를 앞두고 과학자들이 돼지머리 앞에서 고사를 지내는 것이 과학과 미신은 결코 분리된 두 영역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미신이나 주술 등도 어떤 의미에서는 과학에 토대를 마련해 준다.  그리고 그는 과학은 개인적인 자유에 의해 선택되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과학은 스스로 이데올로기적으로 경직된 속박에서 사회를 해방시키는 임무를 가진다.  그는 방법론적 아나키즘을 주장함으로써 과학과 비과학이라는 전통적인 구분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규정한다.  특히 그는 이 과학과 비과학을 어느 한쪽으로 일원화시키지 않고 방법적 다원론을 주장함으로써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는 ‘방법에 대한 쓸데없는 논쟁’을 지양하려고 한다.  변증법의 논리를 끌어들여 비판적 합리주의의 실증주의적 잔재를 해체시키려는 파이어아벤트의 입장은 비판이론, 즉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근본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이제 비판적 합리주의와 소위 실증주의 논쟁을 벌였던 비판이론가들의 입장을 살펴보자.


4. 비판이론

1) 형성배경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은 19세기 독일 민주주의의 발산지이며 한 때 자유도시의 성격을 강력히 지녔던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이 정부의 재정지원없이 1914년에 세운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부설된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연구소는 1923년에 창설되어 나치정권이 들어 선 그 이듬해인 1934년에 스위스, 프랑스를 거쳐 뉴욕으로 옮겨가서 그곳 콜롬비아 대학의 부설기관이 되었다가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옮겨왔다.
우리가 다루려는 ‘비판이론’이란 개념은 막스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에 의해 주조된 것이다.  파시즘에 대한 역사적 경험과 스탈린적 왜곡이 가져다 준 환멸감 그리고 이민의 고립적 상황 등은 호르크하이머를 위시한 비판이론가들은 맑스의 플로레타리아 계급혁명에 식상하고 동시에 헤겔의 긍정 혹은 동일성의 변증법에 환멸을 느낀다.  그러므로 비판이론은 헤겔의 변증법을 부정의 변증법으로 재구성하고 맑스의 교조주의적 성격을 청년 맑스의 인본주의의 얼굴로 다시 읽으려는 지성적인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이다.  호르크하이머는 그의 ꡔ전통이론과 비판이론ꡕ에서 데카르트 이래 비판적 합리주의에까지 이르는 실증주의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스탈린에 의해 왜곡된 맑스주의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전통이론이 이론과 실천을 대립시켜 놓은 것에 대해 비판이론은 이론의 사회적 실천성을 강조하며 이 양자사이를 동태적·변증법적으로 매개한다.
소위 프랑크푸르트학파로 불리는 비판이론은 헤겔의 관념론에 대한 직접적인 반동으로 생성된 실증주의가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헤겔의 변증법을 부활하여 그것을 토대로 해체시키려는 헤겔의 르네상스 운동에 시발점을 두고 있다.  특히 비판적 합리주의가 지닌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이 비판이론가들에 의해 날카롭게 공격을 당한다.  헤겔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맑스의 철학을 정확하게 다시 읽어냄으로써 비판적 합리주의가 만들어 놓은 이론과 실천, 인식과 가치사이의 이원주의를 변증법적 이성의 힘으로 해체하려고 한다.  물론 비판적 합리주의에 의해 비판이론은 교조주의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공격을 받는다는 사실도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 등의 비판이론가들의 입장을 비판적 합리주의와 비교하여 다음의 몇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가치판단을 여과시키는 태도는 학문의 사회적 역할을 분석적으로 인식하려는 작업을 포기한다.  둘째 자연과학의 논리를 사회과학의 논리로 전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학문의 가치판단적 성격을 추출해버리는 것이다.  셋째 현실을 전체로서 파악하지 않고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분리하여 고립적으로 다루는 것은 학문의 몰가치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학문의 계도적 과제를 소홀하게 다룬다.
우리가 비판이론가들에 대해 다루기에 앞서 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루카치(G. Lukács, 1885~1971)와 칼 코르쉬(K. Korsch, 1889 ~1961)의 입장을 간략하게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루카치는 그의 ꡔ역사와 계급의식ꡕ(1923)에서 헤겔 변증법의 르네상스를 부채질한다.  루카치는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맑스의 이론을 굳건하게 다시 다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맑스주의를 다시 굳건하게 다진다는 것은 전통적인 맑시즘이 앓고 있는 필연적인 문제를 오히려 헤겔로 돌아가서 극복하려는 입장으로 나타난다.  그는 단순한 유물론에 반대하면서 헤겔의 관념론을 부활하여 맑시즘의 정통성을 다시 구축하려는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또한 칼 코르쉬는 속물화된 맑스주의를 비판하고 헤겔의 변증법에로 돌아가 유물변증법이나 자연변증법에 의해 실증주의적으로 채색된 요소를 해체하려고 한다.  속물화된 맑스에 의해 지양된 헤겔의 변증법이 지닌 생동력을 부활하려 한다.  이와 같은 경향은 비판이론의 형성배경이 되어 소위 신맑스주의의 태동을 가속화하게 된다.

2) 도구적 이성비판

세계대전 동안에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 1875~1973)와 아도르노가 공동 저술한 ꡔ계몽변증법ꡕ은 비판이론의 이론적 틀을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ꡔ계몽변증법ꡕ에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점자본주의의 나치적 성격을 비판한다.  이들은 이 책속에서 왜 인류는 참으로 인간다운 조건들을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종류의 야만주의에로 침잠하는지를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17, 18세기에 출현한 계몽적 이성이 존재와 비존재, 진리와 허위를 식별하는 능력이었고 한편으로 인간을 부자유와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역할을 했으나 오늘에 와서 그것이 역으로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만들었으며 인간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등장한다.  계몽적 이성의 발달은 자연을 지배하는 기술로서 과학의 발달을 가져왔고 문명의 발달을 촉진했지만, 오히려 계몽적 이성은 인간의 삶을 기술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바뀌었다.  한 때 주체적이고 자주적이었던 이성이 인간의 자기보전이라는 이기적 관심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계몽적 이성은 경제적, 사회적 힘에 반사적으로 순응할 따름이다.  이를 통해 전체주의가 기반을 마련하게 되고 인간을 관리하는 전체주의적 권위체제가 등장하게 된다.
계몽적 이성에 의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합리화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합리화의 과정은 다름이 아니라 계몽적 이성에 의한 통제와 조정에 의한 것이다.  이 기술적 합리화의 과정은 인간을 자본주의 체제의 관리제도에 예속시킨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의한 인간의 통제와 억압구조를 비판한다.  계몽적 이성에 의한 인간의 자연지배 그리고 나아가서 인간 자신의 지배는 계몽이 지닌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통해 가능하다.  이와같이 인간과 자연, 주체와 자연의 근본적인 분리를 선언하는 계몽의 근본특성은 실증주의를 그 절정에로 다다르게 하였다.  도구적 이성이 가장 진보된 단계로 표현된 것이 실증주의이다.  그러나 이 진보된 발전은 가장 퇴보된 단계를 함의하고 있다.  특히 가치와 사실의 분리는 도구적 이성이 얻어 낸 실증주의의 전리품이다.  그러나 도구적 이성은 결국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삶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관리하는 기제로 등장한다.  이와같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실증주의의 등장에 따라 마비된 이성의 사회비판적 기능을 그 본래의 모습으로 되찾으려는 분석을 수행하였다.

3) 아도르노

비판이론은 아도르노(Th. Adorno, 1903~1969)의 ꡔ부정의 변증법ꡕ을 계기로 더욱 그 이론적 토대를 다져 나간다.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의 입장을 고수해 나가면서도 보다 더 세부적인 문제로까지 그 지평을 확대시켜 나간다.  아도르노의 사상에 영향을 준 몇가지를 들어 보자.  첫째는 헤겔에 대한 맑스의 비판적 관점을 수용한다.  특히 헤겔의 변증법이 가진 도구적인 측면을 거부한다.  아도르노는 헤겔의 주관-객관의 동일성이론을 거부하고 헤겔의 부정의 부정개념에서 수반되는 긍정적인 성향들을 변증법에서 제거하여 ‘부정의 변증법’을 강조한다.  아도르노는 헤겔의 긍정의 변증법에 대항하여 부정의 변증법을 강조함으로써 헤겔을 격하시키고 있다.  헤겔은 주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우리의 사고를 전체주의적인 동일성의 틀에 묶어버림으로써 전체주의적 폭력을 일삼는다.  세계를 정신에 의해 통제하고 전체적인 체계로 추상하려는 욕망은 동일성의 사고에 집착한다.  헤겔에 있어서는 전체가 진리로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전체의 진리는 부분들의 진리를 체계의 단순한 부속물로 전환하는 데서 비로소 가능할 뿐이다.  아도르노는 헤겔적인 역사적 낙관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이 모든 개념적인 체계속으로 여과없이 수용될 것이라는 헤겔의 전망과는 달리 아도르노는 객체가 항상 주체와는 다른 비동일적 대상으로 남아 있음을 강조 한다.  물론 객체가 주체에 의해 파악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객체가 주체와 동일한 상관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은 주체와 객체의 비동일성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아도르노는 헤겔에 의해 의식의 동일자로 규정되어버린 칸트의 물자체를 총체적 타자 혹은 비동일자로 부활한다.  헤겔의 동일성의 사고는 일반적 개념하에서 특정한 개체들을 포섭하는 것이 목적인데 반해,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은 객체를 그것이 가진 기준에 따라 주체와는 결코 동일화될 수 없는 구체적인 면들을 정당하게 평가하려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은 “전체는 비진리”라는 근본명제에 근거한다.  전체라는 것은 단지 특정한 기원없이 상호 작용하는 성좌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를 발생학적 중심이나 창조자, 주체로 전제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와 같은 아도르노의 입장은 벤야민(W. Benjamin)으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도르노는 자신의 비판이론을 미학이나 예술,  문학의 영역으로 확대하여 다양하게 정립해 나간다.  벤야민은 그의 ꡔ독일비극의 기원ꡕ에서 개별적 현상이 보편자 속에서 파악된다는 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보편자가 개별자 안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관념들은 구체적인 요소들이 특정하게 구성된 개념들에 의해 표현될 수 있다는 벤야민의 주장은 아도르노에게 그대로 전수된다.  특히 아도르노가 미학에로 이행하여 자신의 비판이론의 토대를 새롭게 다지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벤야민의 영향이다.
이론이 끝나는 곳에서 바로 예술이 시작된다.  1970년에 발간된 아도르노의 ꡔ미학이론ꡕ은 예술을 통해 자본주의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특히 그의 음악미학은 독창적인 필체로 우리들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사회학적 예술이론으로 안내해 준다.  그러나 여기서 그 많은 부분들을 소개하기는 힘들다.  단지 그가 미학적 영역에로 옮겨가게 된 동기만을 언급한다.  이론으로서의 철학이 끝나야 하는 곳에서 예술의 영역에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미학적 가상은 처음부터 어떤 다른 것을 가정하지 않는 까닭에 거짓을 말하지 않는 유일한 가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진리는 예술에 의해서만 기대될 수 있다.  예술은 “행복의 약속”이라는 스탕달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면, 예술은 사회적 모순과 이율배반을 가장 여과없이 반영하는 거울일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속물화된 맑스주의에 의해 은폐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예술비평이라는 맑은 프리즘을 통해서만 노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확신아래 아도르노는 우리에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미학이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4) 마르쿠제

나치에 쫓겨 미국으로 이민가 그곳에서 체류하는 동안 반체제운동의 이론적 선동가로 지적당하면서 비판이론을 미국적 풍토 속에 이식시킨 사람이 마르쿠제(H. Marcuse, 1898~1979)이다.  그는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그리고 20년대에 출현한 신맑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유물사관에 대한 종래의 기계론적 설명을 거부하고 현상학과 실존첨가의 입장에서 새롭게 재해석하였다.  그는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의 역사해석을 사적 유물론과 결합시켜 이른바 ‘변증법적 현상학’을 구상했다.  그는 구체적인 실존이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1932년 맑스가 1884년에 써 놓은 ꡔ경제학, 철학수고ꡕ가 발견되면서 마르쿠제의 관심은 맑스 연구에로 모아졌다.  특히 그는 맑스를 인간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고 초기 맑스의 노동의 소외문제를 인간학적 이론으로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1932년 후설의 소개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를 만남으로써 비판이론의 계열로 들어서게 된다
마르쿠제가 프랑크푸르트학파에 가담한 이래 1930년대에 발전시킨 비판이론은 그가 미국에서 발간한 ꡔ이성과 혁명ꡕ에서 이론적 완성을 보았다.  특히 이 책은 헤겔을 나치와 연결해서 전체주의적 국가주의자로 규정했던 당시 영미철학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헤겔을 혁명이론가로 새롭게 부활시켰다.  여기서 마르쿠제는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보다 헤겔에 더 친숙한 모습을 보인다.  헤겔의 변증법 속에 간직되어 있는 혁명적 요소를 다시 끄집어 내어 해석한다.  특히 이 저서 속에서 마르쿠제가 발견한 헤겔철학의 중요한 계기는 이성의 변증법적 해석이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이 가지는 실천적·혁명적 계기를 강조하면서 변증법적 이성의 부정적 기능을 드러낸다.  1960년도 판 ꡔ이성과 혁명ꡕ의 새 서문에서 마르쿠제는 “사유란 실로 본질상 우리 앞에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부정이다.”는 헤겔의 말에 따라 부정적 사유의 부활을 주장한다.  그러나 부정적 사유의 힘이 자본주의 억압구조를 해체할 만한 사회적 세력을 갖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맑스의 사적 유물론이 미국의 자본주의적 현실을 변혁시킬만한 장치가 될 수도 없는 것이다.  파시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는 더욱 더 전체주의에로 박차를 가했고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에 헤겔의 변증법적 이성이나 맑스의 이념이 동적인 힘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마르쿠제는 1955년 ꡔ에로스와 문명ꡕ을 저술하면서 프로이드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이려고 한다.  그는 정치·사회적 문제를 심리학적인 문제로 환원하여 분석하려고 한다.  그는 개인을 위축하고 개인의 인격을 파괴하는 현존질서에 대한 심리학적 검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류의 문명은 인간본능을 영원히 굴종시키는 데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프로이드의 명제에 따라 마르쿠제는 억압된 사회로부터의 자유로운 해방을 그려내고 있다  마르쿠제는 프로이드의 도식에 따라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의 관계를 설명한다.  인간의 본능인 쾌락원칙이 사회적 규범이나 문명적 제도라는 현실원칙에 의해 억압당하는 구조를 사회비판의 모형으로 인용한다.  이 현실원칙에 의해 억압된 쾌락원칙의 힘은 끊임없이 꿈틀거리면서 남아 있다.  현실원칙 아래에서 본능이 억제되어야 하는 것은 결핍에서 비롯된다. 사회가 인간이 본능구조를 변형함으로써 경제적인 절제와 성적인 절제를 합리화시킨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일은 정력발산을 합리적으로 억압하는 장치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일은 현실원칙을 강요하는 쾌락원칙의 단념을 뜻한다.  이 일은 더 이상 인간의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생산성 향상에 동원하는 억압의 틀이 된다.  산업사회에서 현실원칙이 보다 많은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업적원칙(performance principle)의 형태로 바뀐다.  이에 따른 과잉억압은 경제적 업적에 따라 계급적 분화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며, 노동이 인간을 노예화시키게 된다.  노동은 개인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또한 인간의 성적 욕망은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해방되어야 할 대상이다.  산업자본주의는 이 성적 욕망을 억제하는 가운데 생산성 향상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원활히 이루어 낸다.  산업사회에서의 진정한 인간해방은 성적 충동의 해방을 요건으로 한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나서 5년간 신체의 여러 기관이 성감대였는데 업적원칙에 의해 이 성감대의 탈성화(desexualization)가 이루어져 성욕은 성기에만 집중되고 나머지 신체기관은 노동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탈성화의 현상을 재성화(resexualization)함으로써 비로소 자본주의적 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마르쿠제는 1964년에 쓴 ꡔ일차원적 인간ꡕ에서 역시 산업사회의 위기를 진단한다.  물질적 풍요는 인간으로 하여금 안정성을 추구하고 현존질서에 동화되게 만든다.  어떤 기존질서에 대한 반항의식도 생기지 않고 일차원적 사유에 머무르게 된다.  과학과 기술은 고도의 풍요를 가져다 주었고 이 풍요를 손상당하지 않기 위해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금단의 것으로 거부한다.  기술지배가 이루어지는 일차원적 사유에 비한다면 플라톤의 사유는 이차원적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사유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현실을 부정하는 가치판단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도산업사회에서는 물질의 풍요와 함께 정신의 표준화와 사물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의 복지 정책은 공산주의와 같은 혁명적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이다.  여기에서 노동자는 혁명수행을 위한 연대의식을 강탈당하고 만다.  프롤레타리아가 더 이상 혁명의 실천주체가 될 수 없다.  혁명주체에 대신할 계급은 학생과 같은 지성인들이다.  이들에 의해 혁명의 불이 붙여지고 노동자와 제휴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쿠제는 1960년대 미국 학생운동의 이론적 지원자가 되었고 미국 사회로부터 맑스, 모택동과 함께 3M으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마르쿠제 역시 기술지배의 현상을 문명비판의 형태로 수행한다.  고도산업사회에서 문화의 상황은 기술적 이성의 발달로 탈승화의 과정을 겪는다고 마르쿠제는 주장한다.  문화 자체가 사회현실에 대립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을 마르쿠제는 ‘예술의 소외화’로 특징지운다.  예술은 본래 현실을 초월하여 대항하는 기능을 가지는데 현재의 예술은 저항감을 상실한 체제유지적 수단이 되고 있을 뿐이다.  예술은 위대한 거부이고 현존하는 것에 대한 항거이다.  이런 위대한 거부가 산업자본주의, 특히 미국에서는 거부되고 있다.
5) 하버마스

1929년에 태어나서 나치의 독일 하에 자라난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후기 비판이론을 이론적으로 종합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그는 1971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슈타른베르그에 있는 막스 프랑크 연구소에서 지금까지 활동 중이다.  그는 비판이론이라는 틀을 과감히 벗어나서 과학론, 해석학, 언어철학 등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대가답게 해결해 나간다.  그의 관심은 광범위하다.  그의 목표는 외관상 상충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러 방법적 접근들을 조리있게 통합할 수 있는 체계를 사회과학에 제공하는 것이다.

(1) 변증법적 과학론
후기 현대철학을 특징짓는 사건 중의 하나는 바로 「실증주의 논쟁」이다.  아도르노와 포퍼간에 1961년에 일어난 이 논쟁은 큰 파문을 일으켰고, 그 후에 이들의 제자인 하버마스와 알베르트 사이에 일어난 비판이론과 분석적 이론간의 방법론적 논쟁은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정신과학을 자연과학과 구분하여 이해의 학으로 규정한 딜타이의 입장은 하버마스에 의해 그 명맥이 이어진다.  하버마스는 논리실증주의에 근거한 포퍼와 비판적 합리주의의 자연과학에 토대한 알베르트의 통일과학적 방법론에 대해 날카로운 공격을 한다.  하버마스는 사회과학의 방법을 해석학적 방법으로 규정하면서 과학주의에 대항한다.  하버마스는 비판적 합리주의의 분석적·경험적 방법에 변증법을 대치하고 개별적 사회현상과 전체로서의 사회사이의 변증법적 중재를 강조한다.  그는 전체로서의 사회의 선이해가 부분적 사회현상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분석적·경험적 방법은 역사적 사실이나 자연현상 혹은 사회현상을 동일한 법칙하에서 다룬다.  이에 반해 하버마스는 사회현상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학문 이전의 보편적 경험의 토대로 돌아가서 해석되어야함을 강조한다.  또한 하버마스는 과학과 실천의 분리를 주도하는 분석적·경험적 방법에 대해서도 대항한다.  어떤 과학이론이든지간에 이미 모종의 가치판단에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인식과 가치사이의 변증법적 중재과정은 기본적인 틀이다.  특히 사회과학에 있어서 주체와 객체사이의 변증법적 상호관계는 근본범주로서 기능한다.  하버마스는 그의 변증법을 해석학의 방법 절차와 연결시킨다.  인식객체에 대해 인식주체는 이미 무엇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해석학적 순환에 의해 사회과학에 대한 해석학적 이해의 필연성이 요청된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해석학에 대해 살핀 바 있지만, 하버마스의 이론은 비판이론에서 따로 다루기 위해 남겨 두었던 것이다.
하버마스는 1965년 정교수 취임강연인 ꡔ인식과 관심ꡕ에서 실증주의에 대해 더욱 목소리를 높여 대항한다.  실증주의적인 과학론은 인식주체의 관심이나 사회관련성을 무시하고 가치중립성을 주장하지만, 사실상 자연과학도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술지배의 관심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모든 인식을 주도하는 관심을 3가지로 구분한다.  경험적·분석적 과학은 기술적인 관심을 융합하고, 역사적-해석학적 과학은 실천적 관심을 그리고 비판적으로 방향을 취하는 과학은 해방적 관심을 융합한다.  첫번째가 실증주의의 태도이고 두번째가 정신과학이론인 해석학의 태도이라면, 셋째는 인간을 모든 강압으로부터 해방하고 인간적인 삶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실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비판적 사회과학의 태도이다.  하버마스는 1968년에 같은 제목으로 출판한 ꡔ인식과 관심ꡕ이란 저서에서 이 주제를 더욱 발전시켜 나간다.  특히 헤겔, 맑스, 딜타이, 프로이드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통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경험적·분석적 방법의 한계를 해석학적 접근으로 극복하기 위해 딜타이의 해석학을 맑스적인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특히 가다머의 해석학을 비판이론적 관점에서 받아 들인다.  하버마스와 가다머는 근본적인 점에서는 같은 견해를 보이지만, 특히 전통의 본질에 과한 견해는 의견을 달리한다.  이 양자가 이해는 전통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된 의견을 보이지만, 가다머가 언어적 전통이 모든 비판에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전통의 권위를 비판할 어떤 통로도 인정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는 하버마스가 비판한다.  이것은 의도된 의미와 드러난 의미사이에 모순이 생기더라도 의도된 의미가 주어진 전통의 체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가진다.  그러므로 하버마스는 가다머가 말하는 전통이 만약 거짓된 합의의 산물이라면, 그 자체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대상임을 강조한다.  하버마스는 전통의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가다머와는 달리 권위는 끓임없이 이성에 의해 파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버마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상호소통적 과정 속에 구체화되어 있고 전통 속에 왜곡되고 은폐되어 있는 권력관계들을 드러내는 데 해방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순수하게 해석학적인 접근만으로는 이 이데올로기의 해체가 가능하지 않다.  하버마스는 보다 충분한 대안을 찾는다.  그는 일차적으로 맑스를 통해 실증주의와 해석학을 통합하는 비판이론을 형성하려고 한다.
경험적·분석적 방법이 현실을 기술적 지배의 관심에서 다루고, 해석학이 사회적 행위의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상호주관적 지평을 확립하려는 실천적 관심이 주도한다.  그러나 이 양자는 한계를 가진다.  이 양자는 다같이 자기반성적 계기를 결여한다.  그러므로 하버마스는 일차적으로 맑스로부터 이 반성적 계기를 찾지만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판정한다.  그는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기원을 탐구할 수 있는 틀로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끌어들인다.  프로이드의 이론은 맑스가 간파하지 못한 구조를 제시한다.  사회제도는 의사소통을 왜곡하는 틀이며 문화전통은 무의식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이 맑스에게는 충분히 감지되지 못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정신분석학은 방법적 자기반성을 구체화하는 학문의 유일하고 명백한 예이다.  정신분석학은 비판적 사회이론의 구성을 위한 중요한 지침들과 반성적 과학의 논리를 제공해 준다.  정신분석학의 분석절차는 경험·분석학의 설명과 해석학의 이해의 절차를 통합하는 과정이다.  피분석자에 대한 분석은 인과적 설명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매개된 상호소통적 이해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이런 관점에서 프로이드가 사용했던 과정과 방법들을 ‘심층해석학’으로 부른다.

(2) 의사소통이론
현대의 고도산업사회가 철저하게 관리되어 있는 사회라면, 시민들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공공의 영역은 점차 축소되어 간다.  하버마스의 후기 사상의 주제는 이 축소된 공공성(Offentlichkeit)의 영역을 개방함으로써 이상적인 대화상황이 가능하게 되는 지평을 마련하는 것이다.  후기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인간소외의 문제를 극복하고 여론이 지배하는 열린사회를 지향해 간다.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권력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대중의 탈정치화를 막고 거침없는 의사소통으로 충만된 공공성의 영역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버마스는 1971년 ꡔ의사소통능력의 이론을 위한 서론ꡕ과 1976년 ꡔ보편적 화용론ꡕ에서 이런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다룬다.  의사소통능력이론의 과제는 대화의 참여자가 이상적인 언어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따라야할 규칙체계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상호주관적 제조건을 탐구한다.  이런 조건이 없으면 이상적 의사소통을 할 수 없고 왜곡되기 쉽다.  그는 이상적 대화가 가능하기 위한 규칙을 4가지로 말한다.  첫째, 서로가 알아 들을 수 있게 표현한다.  둘째, 참된 명제를 전달해야 한다.  셋째, 진실되게 표현해야 하며, 마지막으로는 올바르게 표현해야 한다.  하버마스는 이상적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위한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여러 조건들을 밝히고 이들을 재구성하는 분야를 「보편적 화용론」(Universalpragmatik)이라 부른다.  이와 같은 정상적인 대화상황 하에서만 정당화된 합의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담론(Diskurs)을 통한 합의로서의 진리설은 사회이론의 인식론적 근간이 되었다.  
이 보편적 화용론은 촘스키(N. Chomsky)의 언어학과 오스틴(Austin)이나 서얼(Searl)의 언어행위이론에 토대를 둔다.  보편적 화용론은 일반적으로 언어적 상황의 하부구조(언어술에 있어서 문장을 사용하는 규칙들)에 관심을 갖는다.  이 하부구조는 모든 문장이 언술됨을 통해 함축되어 있는 ‘실재와의 관련성’을 검토함으로써 드러낼 수 있다.  특히 오스틴이 주장하는 언어의 행위수행적(illocutionary)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하버마스는 언어행위이론을 모델로 하여 자신의 의사소통능력이론을 형성해 간다.  모든 언술은 화자와 청자가 상호 작용하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  즉 청자는 화자에 의해 의도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 자유로운 언어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일련의 규칙들을 재구성하는 것이 보편적 화용론의 과제이다.  특히 서얼이 자유로운 언어행위를 위해 든 4가지의 유형은 위에서 든 하버마스의 4가지 규칙으로 연결된다.


5. 신실용주의

해석학과 실증주의 그리고 비판적 합리주의와 비판이론사이의 논쟁을 새로운 형태의 실용주의를 통해 마무리 지우려는 시도가 리차드 로티(R. Rorty)에 의해 제시된다.  그는 이 신실용주의를 제창하면서 분석철학이나 정초주의적 인식론에 근거한 전통철학에 대해 탈철학적 태도를 취한다.  근대철학의 인식론 중심주의는 가렵지도 않은 곳을 긁어대는 꼴이 되어 버렸다.  말하자면 인식의 토대를 정초한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인식론은 잘못된 길을 걸어 왔다.  로티는 인식론 자체의 가능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인식론, 아니 철학의 종언을 선언한다.  인식의 주관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내는 거울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야기짓기(narration)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칸트는 정신을 마치 자연의 거울과 같은 것으로 상정하고 정신에 의한 구성적 정초작업을 그릇되게 수행했다.  전통적 인식론은 신(神), 코기토, 감각소여, 프로토콜 문장, 기초문장, 불변적인 원리 등과 같은 것을 확실한 기초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데카르트적인 불안’때문에 확실한 토대를 발견하려는 긴장을 하게 된다.  현대 분석철학 역시 데카르트적-로크적-칸트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재를 인간이 있는 그대로 모사한다는 전통적인 인식론의 모델은 근거를 상실한다.  존재 또는 실재에 관한 지식은 인간이 설정하는 언어 또는 개념이 틀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실재를 인간 지식의 객관적 표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로티의 입장이다.  로티는 잘못 설정된 기초 위에서 서로 이원적으로 갈라져 온 정초주의적 전통을 그의 새로운 언어이해를 근거로 비판한다.  우리는 우리의 피부 밖으로 나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어떤 절대적인 것과 비교할 수도 없다.  정초주의(fundamentalism)는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피부 밖으로 나가 실재와 대면할 수 있을 경우에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로티에 의하면 우리는 언어 밖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 없다.  언어의 체계 안에서만 세계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언어는 생활양식의 일부이다.  이런 언어를 보편적으로 규정지으려는 노력은 인간의 생활세계를 하나의 논리체계로 파악하고, 그 논리 속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모두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분석철학의 정초주의적 발상이다.  인간은 신의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없고 자신의 언어라는 감옥에 얽매여 세계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언어가 세계의 그림이라는 주장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로티는 포스트분석철학의 입장에서 분석철학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이 정초주의적 독단은 이제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해체되어야 한다.  로티를 신실용주의자로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역시 듀이나 제임스와 같은 전통적인 실용주의자들처럼 인식이나 윤리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정초하려 하지 않고 이 문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구성하려는 시도 자체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이다.  그러므로 로티를 상대주의나 주관주의로 비판하는 것은 그 자신의 본래 의도와 어긋나게 되는 셈이다.  물론 실용주의자들이 지식론이나 윤리성에 대해 이론을 세우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그것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의 방법을 사회과학에 적용하는 실증주의의 통합원리나 자연과학을 사회과학과는 다른 논리로 구분짓는 해석학 그리고 비판적 합리주의와 비판이론사이의 논쟁은 각각의 정초주의적 신앙이 빚어낸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구분지어 온 합리성과 비합리성 그리고 과학과 사이비과학, 인식과 억견 등의 분리는 전통적인 유산일 뿐이다.  이 구분은 그때 그때의 상황에서 어느 것이 보다 실용적인 대안인지를 선택한 것에 따른 구분일 뿐이다.  우리는 과학이 미신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합리적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념을 정당화하는 일을 포기하고 실재를 바라보는 단 하나의 방식을 정초지우는 일을 단념하면서 상대방의 대안 역시 또 하나의 바람직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계속하는 일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므로 로티에 있어서 진리는 사회적 실행이다.  진리는 철학적 작업에 의해 그 기초가 마련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과정을 통해 장점과 결점들에 비추어 실용적 견지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진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지 다른 개념보다는 그 개념에 더 친숙하다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티의 실용주의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반본질주의이다.  진리가 본질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거나 실재와의 대응이라는 전통에 따르지 않는다.  진리는 이론화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실천적 행위 자체이기 때문에 진리를 본질화하려는 것은 착각이다.  두번째는 전통적인 이분법에 대한 비판이다.  분석/종합, 이론/관찰, 과학/비과학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하나의 규칙에 의해 인간의사고의 결과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로티는 모든 문제를 규칙에 의존해서 해결하려는 철학적 전통을 플라톤적 신화로 부른다.  자신이 속한 시대의 어휘와 실천에서 벗어나 그들이 기댈 수 있는 비역사적이고 필연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려고 임의적으로 구분지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번째, 인간의 인식능력이 컴퓨터 프로그램과 같은 장치가 아닌 이상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탐구를 행할 수 있다.  인간에게 인식의 구조나 능력이 선천적으로 들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화만이 탐구의 유일한 수단이다.
이처럼 로티는 과학적 객관성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마치 과학을 신적인 것으로 대치하는 실증주의의 독단을 실용주의적으로 해체한 점이 그 특징이다.  1950년대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상대주의적 배경 하에서 로티는 ‘합리성’, ‘객관성’, ‘필연성’ 등과 같은 개념에 현혹되어서도 안되고 ‘비합리성’, ‘주관성’, ‘우연성’ 등과 같은 개념에 의해 위축되지도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로티는 과학적 합리성이란 기준에 의해 그릇되게 진행되어 온 전통적 이원론적 분화현상에 종언을 선언한다는 점이 그의 철학의 특징이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통용되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유대성을 강조하며, 이것이 확보되는 한에서 상대주의를 기꺼이 받아 들인다.  그리고 철학의 임무는 이론적이고 추상적이며 합리적인 체계를 세우는 데 있지 않고, 실천적이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의 지침을 마련하는 일에 있다.  이렇게 될 때 철학은 스스로 자신의 지평을 확대하는 일에 게을리 할 수 없다.  로티에게는 ‘상대주의’가 더 이상 불명예스러운 어휘가 아니다.
이상과 같은 로티의 신실용주의는 진리를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으로 혹은 ‘믿어서 좋은 것’으로 대치하고, 객관성을 ‘상호주관적 유대’나 ‘설득에 의한 합의’로 대체함으로써 정초주의적 전통을 미국적인 실용주의로 재해석한다  이 실용주의적 태도란 정초주의적 아집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합리적인 합의가 가능할 것이라는 낙관론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아르키메데스적 기점을 확보해야 한다는—사실 가능하지도 않지만—맹신에서 벗어나 그때그때 보다 유용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로티의 태도는 미국식의 자유주의를 정당화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 자신은 미국 사회를 특별히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미국식의 자유민주주의 만큼 개방된 사회는 없다는 신념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보다 나은 것이 없다면 실제로 좋은 것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자는 로티의 실용주의는 어떤 현실적 대안도 거부한 채 해체를 선언하는 프랑스의 해체주의자들도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어떤 토대도 전제하지 않은 설득에 의한 자유로운 합의가 상호유대를 통해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실용성과 유용성의 원리가 보편성을 갖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어떤 원리로부터 현실비판의 메카니즘을 찾아야 할 것인가?


6. 포스트구조주의

1960년대에 프랑스 철학은 또 하나의 독특한 흐름을 형성한다.  포스트구조주의는 샤르트르의 실존주의와 매를로 퐁티의 현상학 그리고 이 두 철학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으로 생긴 구조주의를 뒤이어 형성되었다.  우선 우리가 이 흐름을 ‘포스트구조주의’(post-structualism)란 용어로 지칭하는 데는 문제점이 적지 않다는 점을 주시해야 한다.  이 용어와 짝을 이루어 사용되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혹은 ‘해체주의’ 혹은 ‘탈현대’라는 다양한 용어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그 용어들이 어떤 관계성 속에서 사용되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아직 이 용어들의 상호 관련성에 대해 확정된 판정을 내리기에는 성급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포스트구조주의’란 용어를 선택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가 문학이나 예술분야, 가장 넓은 의미로는 20세기 후반의 시대정신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인데 반해, ‘포스트구조주의’는 주로 철학과 사회과학의 분야에 한정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체주의’나 ‘탈현대’란 용어를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은 이 용어들에 대한 타당성 검증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포스트구조주의란 이름 하에서 여기에서는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의 구조주의 이후 1960년대 급부상한 프랑스 철학의 주 흐름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특히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관계에 대한 논의나 포스트구조주의의 사상적 뿌리가 된 구조주의자인 소쉬르(F. de Saussure)의 일반언어학이론이나 레비-스트로스의 문화인류학 혹은 바르트(R. Barthes)의 문학이론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우리에게는 철학적 및 사회학적 문제에 주된 관심을 보이는 포스트구조주의와의 만남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사상 역시 매우 중복적이고 복합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을 주체, 역사, 언어(의미)의 문제로 한정해서 다룰 것이다.  또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거의 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특정한 분야에 중점적인 관심을 보인 몇 사람을 중심으로 다룬다.  주체이론에 대해서는 라깡(J. Lacan)을 , 역사이론은 푸코(M. Foucault)를 그리고 언어이론은 데리다(J. Derrida)그리고 철학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리오타르(J. F. Lyotard)를 다룰 것이다.

1) 데리다의 언어관

언어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견해를 단적으로 대표하는 데리다의 언어이론을 살펴 보자.  데리다는 1967년 ꡔ문자학에 관하여ꡕ, ꡔ말하기와 현상ꡕ, ꡔ글쓰기와 차이ꡕ의 3권을 출판하면서 그의 언어관을 정리한다.  그는 전통적인 언어이론을 반성적으로 해체한다.  그 역시 다른 구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니체로부터 해체적 전략을 빌어 온다.  전통적인 이성중심주의를 해체하려 한 니체와 마찬가지로 데리다는 플라톤에서 후설에 이르기까지의 형이상학적 전통을 ‘현전의 형이상학’(Metaphysik der Präsenz)으로 칭한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항상 로고스, 즉 이성이나 말만이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성과 말만이 의식에 현전적이라는 편견에 사로 잡혀 있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말은 세계와는 무관한 채 독자적으로 언어의 세계를 생산하려는 본질을 가진다고 지적한다.  이성 또는 말로써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헤겔과는 달리 세계가 의식에 주어지는 대로(현전하는 것으로) 말하려 했던 후설의 시도 역시 말, 즉 음성중심의 현전의 형이상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현전의 형이상학은 말에 대한 지나친 신뢰 속에서 형성되었다.  말은 아무리 현전성과 직접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말하는 자와 듣는자 사이에는 단절이 없을 수 없다.  현전성에 대한 성급한 환상이 서구의 형이상학을 음성중심의 형이상학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 전통의 해체는 글쓰기를 통한 의미의 차이와 흔적을 추적하는 문자중심의 문화로 전회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데리다는 강조한다.
그는 언어적 표현과 이 표현이 담지하고 있는 의미를 서로 구분하여 의미를 구성하는 의식의 작용에로 돌아가서 설명하는 후설의 현상학에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말하자면 표현은 그 표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작용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현상학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의미의 동일성, 객관성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해체의 대상이다.  언어적 기호와 독립적인 객관적 의미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소쉬르의 공식으로 말하면 시니피앙(signifiant)—記表 혹은 能記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언어의 기호적 측면을 지칭한다.—과 독립적인 시니피에(signifie)—記意 혹은 所記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언어의 의미적 측면을 지칭한다.—는 없다.  기호와 분리될 수 있는 어떤 의미영역도 있을 수 없다.  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에는 어떤 고정된 구별도 없다.  시니피앙과 구분된 종국적인 혹은 동일하고 객관적인 시니피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들 사이를 이원적으로 구분한 형이상학적 편견에서만 가능한 발상이다.  의미는 쉽사리 하나로 고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마치 이와같이 의미의 객관적인 동일성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추적하는 것은 마치 키메라의 사냥만큼이나 무모한 짓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의미론, 즉 기호의 의미가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을 토대로 하여 객관적인 동일체로 구성될 수 있다고 믿는 후설의 입장은 현전의 형이상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동시에 글보다 말의 직접성에 우위성을 두는 소위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와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에 토대하고 있다는 것이 데리다의 지적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 즉 현전(presence)하는 것을 의미토대로 한다.  이런 입장은 결국 글보다는 말이나 목소리를 더욱 현전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데리다는 글에 비해 말이나 목소리에 의미의 토대가 확실하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전통철학은 음성중심주의의 결과를 초래했다고 강조한다.  서양철학은 목소리나 말이 글에 비해 의식에 보다 현전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문자중심주의 대신 음성중심주의의 모습을 띠어 왔다.  말할 때는 글쓸 때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나 자신과 관계하는 것으로 보인다.  글은 이차적인 전달수단이며 말의 기계적인 모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나의 존재를 빼앗아 가는 것처럼 보인다.  플라톤과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모든 철학적 전통이 글은 단순히 표현의 소외된 양태로서 생명력이 없다고 비난하면서 목소리를 계속 찬양해 왔다.  이와 같은 현전의 형이상학은 다른 한편 기호의 궁극적 의미를 언어 이전의 선험적 기반에 두려는 로고스중심주의와도 연결된다.  의미의 궁극적 기원을 찾으려는 것은 현전과 부재를 대립시키는 형이상학적 편견에서 가능한 것이다.  의미는 어떤 하나의 기호에 완전히 현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전과 부재간의 일종의 끊임없는 교차라 할 수 있다.  데리다는 기호의 구조는 항상 영원히 부재하는 타자의 흔적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기호 자체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다른 기호의 흔적이 이미 깃들어 있다.  내가 어떤 문장을 읽을 때 그 문장의 의미는 항상 어느 정도 연기 내지는 지연된다.  하나의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과 관계하도록 만든다.  각각의 기호에는 그 기호가 그것이 되기 위하여 배척했던 다른 낱말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기호의 의미를 본질이나 형상과 같은 어떤 동일자로 생각하는 것은 동일성에 대한 무모한 열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동일성 속에는 이미 타자의 흔적이 깊숙이 연루되어 있음을 전통적인 형이상학자들은 간과하였다.  데리다는 의미가 현전에 토대를 둔다고 생각하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는 달리 현전과 부재의 이원적 대립을 해체한다.  그리고 의미를 동일성이나 현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부재와 차이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이와 같은 입장은 데리다의 언어관을 단적으로 대변해 주는 ‘차연’(차이+연기)이란 개념에서 잘 추적될 수 있다.  하나의 언어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차이, 즉 그 언어가 다른 언어와 구분된 차이를 가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빨간 신호등의 멈춤의 의미를 갖는 것은 파란불의 의미와 차이를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전의 순간이 아무리 생생하게 체험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지나간 것의 꼬리, 즉 비현전의 계기를 자체 속에 포함하고 있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어떤 독립적인 시니피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전의 시니피앙과 단절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니피에는 영원히 유보된 채 시니피앙만 끝없이 흩어진다.  따라서 데리다는 기호학을 문자학으로 대치한다.  이 끊임없이 흩어지는 과정을 데리다는 ‘차연’이란 개념으로 규정한다.  이 차연(differance)이란 낱말은 공간적으로는 differ를 시간적으로는 defer를 동시에 의미하는 신조어이다.

2) 푸코의 역사관

니체는 역사적 사건들이 일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향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확립하거나 역사의 순환을 입증하는 일에서 벗어난다.  그는 체계성을 비판하고 통사(痛史)와 같은 역사해석을 거부한다.  푸코(1926~1984)는 니체의 역사해석의 도식을 빌어서 전통적인 역사주의적 발상을 비판한다.  푸코는 진정한 역사 혹은 쓸모있는 역사는 최초의 원인을 가정하는 전통적인 역사학과는 달리 사건의 불가피성이나 연속성을 거부하며 목적론적이고 변증법적인 역사해석을 거부한다.  전체적 역사는 사건을 거대한 설명체계와 단선적인 과정 속에 해소시켜 큰 계기와 영웅을 찬양함과 아울러 시원점을 확립하고자 한다.  이에 반해 계보학적 분석은 사건들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중요시되어 왔던 사건에서 눈을 돌려 경시되어 왔으며 일정한 역사를 통해 부정되어 왔던 모든 현상들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계보학은 기원을 확립하는 일보다는 역사형식의 가변성 뒤에 숨겨져 있는 복잡한 구조들의 발생과 유래를 추적한다.  푸코의 계보학적 분석은 총체적-전체적-거시적 역사이론에 의해 차단된 국지적 비판을 수행한다.
푸코는 이성이 열정이나 광기에 대해 주도권을 가져 왔던 이성중심의 서양역사를 광기의 역사로 새로 쓴다.  이성이 재배해 온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역사체계 이면에 은폐되어 있는 폭력성을 광기의 구조로 다시 들여다 본다.  그는 ꡔ광기와 비이성ꡕ(1961)에서 광기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중세에는 광기가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고상한 이성의 특수형식으로 파악되었다.  광기는 종종 이성을 넘어서서 용기있는 생각을 나타내었다.  이 시대에는 광인들이 치료나 감금의 대상이 아니었다.  광인들은 뱃사람으로 만들어져서 유랑하도록 했다.  이 시대까지만 해도 광기도 어떤 진리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광인은 정신병원에 감금해야 할 대상으로 되었다.  소위 대감금의 시대인 고전주의 시대가 등장했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한 이성의 시대는 비이성을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감금을 선택한다  푸코의 지적에 따르면, 중세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18세기만 해도 광인들은 어느 정도 자유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나름의 힘을 잃지 않았던 현명한 바보들이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면 이성과 비이성사이의 대화는 단절되고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제 광기는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와 감시와 감금의 대상이 되었다.  푸코는 이성에서 잃고 있는 차원이 광기에도 있을 수 있고 광기에도 지혜가 있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광기는 단지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고 감금의 대상이었을 뿐 치료의 대상일 수 없었다.  이제 치료를 위한 병원 대신에 감금을 위한 수용소가 등장한다.  말로만 치료일 뿐 감금이고 사회질서나 도덕적 질서라는 미명하에 광기는 지배의 대상이 되었다.  정신병 치료는 그 자체가 단지 광기를 신비화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 치료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억압은 광인들뿐아니라 현대의 일상인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이성이란 권위구조가 광기를 억압하는 양태를 분석함으로써 현대 산업사회의 지배구조를 드러내는 데 푸코는 관심을 가진다.
광인은 무지하기 때문에 의사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지는 근대 권력/지식의 공생관계를 푸코는 해명한다.  그는 ꡔ감시와 처벌 : 감옥의 탄생ꡕ에서 18세기에서 현재까지 그리고 육체의 처벌에서 영혼의 처벌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에서 일어난 권력의 역사적 존재방식을 서술한다.  18세기말까지만 해도 범죄와 처벌은 공개적인 고문이었고 정신적이기보다는 육체적 고문이었다.  그러나 인간해방이라는 고상한 이상아래 계몽사상은 이전보다 훨씬 효과적인 처벌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사법적 감금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제 파놉티콘(Panopticon), 즉 원형감옥과 같은 효과적인 감시체제가 합법적으로 등장한다.  이 원형감옥과 같은 전체적 감시체제는 이제 모든 사회구성원들을 일정한 규율하에 관리하게 하는 구조가 되었다.  학교, 군대, 병원, 공장 등이 규율의 거미집인 셈이다.  거미집같은 유폐의 망 속에서 철저하게 감시받는다.
푸코는 ꡔ성의 역사ꡕ(1976년과 1984년)에서 서양 근대문화가 성억압의 문명으로 전개되어 온 과정을 추적한다.  근대인들은 성을 일종의 죄의식과 결부시켜 표현하도록 훈련받았다.  17세기부터 19세기 청교도 시대에 더욱 강화되어 성과 성욕에 대해 억압과 침묵을 강요받아 왔다.  19~20세기에 들어와서 그 침묵이 고백의 강요로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성과 성욕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받는다.  이 성에 대한 죄의식과 성에 대해 알려는 의지가 낳은 성과학 그리고 성에 대한 고백을 강요받는 사회체제는 이제 성을 관리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른바 서양사회의 생체적 권력이 등장한다.  이 권력은 성과 성욕을 지식이라는 감시의 거울망으로 올가미를 채운다.  이 권력과 지식의 연계는 순종적 인간(homo docilis)으로 재교육하기 위해 요구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전략적 메카니즘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관리체제와 무관하지 않다.  침묵을 강요받았던 18세기 이전의 시대에서 성에 대한 고백의 시대에로 이르는 동안 성은 재교육되고 통제되고 관리되고 조정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된다.  이것은 사회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자본주의의 경제논리와 결부된 것이다.  
70년대 이후 푸코가 발전시킨 권력-지식 연계론은 모든 사회에서의 지식형성이 권력작용과 분가분리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근대적 주체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권력의지와 그것의 결과에 관심을 갖는다.  그의 권력/지식론은 거대한 근대적 사유 속에 잉태되어 있는 앎에의 의지에 의해 발생된 권력실체를 미시적으로 해체하기 위한 전략적 지렛대이다.  따라서 권력은 지배계급이나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회에 편재해 있는 관계의 그물이다.  권력은 개인이나 집단의 손에 쥐어지는 실체가 아니라 관계상황이기 때문에 모든 사회의 부분들을 가두는 전략적 그물망이다.  모든 사회의 부분들을 관리하기 위해 편재하는 유폐적 그물망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푸코의 권력-지식 연계론은 국가의 권력이 모든 사회적 관계를 지배한다는 맑스식의 패러다임으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해방의 논리를 생산적으로 창출하는 전략적 메카니즘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맑스는 미세한 통로를 통해 일상생활에까지 운반되어 있는 미시권력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푸코는 통치권의 중심에 있지 않고 주변에 여러가지의 형태로 일상생활에까지 편재해 있는 권력과 지식의 연계상황을 미시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3) 라깡의 자아론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한 근대철학은 자아의 동일성을 기점으로 삼았다.  이것은 칸트의 선험적 통각을 거쳐 후설의 선험적 자아로 변형된 모습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 근대적 주체(의식)중심적 사고로부터 빠져 나오려는 시도는 우리가 ‘포스트구조주의자’로 부르는 자들에게는 공통된 과제이다.  이들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의 영향하에 의식의 이면에 가려져 있는 무의식의 층에로 되돌아 가려는 반전을 감행한다.  특히 라깡(J. Lacan, 1901~1981)은 주체성의 생성과정을 거울의 단계인 상상적 단계와 상징적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아이가 갓 태어나서 24개월 사이에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서 비로소 자기동일성을 확립한다.  아이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타인의 영상으로 지각하다가 차츰 거울 속의 영상이 결국 자신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과정을 통해 자기동일성을 확립한 아이는 자기 바깥의 모습을 통해 가능한 것이며, 자기 자신 속에 내재적인 자아가 거울에 비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거울이라는 타자를 통해 비로소 구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는 자신의 ‘자기’를 ‘자기가 아닌 것’, 즉 타자에서 얻어 온 것이다.  아이의 자기동일성은 거울에 비친 상을 통해 구성된 동일성이다.  그러나 이 거울의 단계인 ‘상상적 단계’에서는 거울 속에 비친 상이 내 자신이 아닌 타자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말하자면 거울 속의 상이 결국은 자기 자신의 상으로 지각하고 그 상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이 단계에서는 자기가 타자이고 타자가 자기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아이가 스스로 거리를 둘 수 있는 타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아이는 자기 자신이 거울 속에 비친 상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상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신에 대한 완벽한 재현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상 ‘쪼개진 주체’, 즉 다른 것에서 자신을 차용해 온 주체로 구성된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상이 자신의 상이라고 상상하는 이 거울의 단계에서는 자신과 거울 속의 자신의 상사이의 이자적(二者的)관계가 이루어지지만 이 사이에 완전한 타자가 들어섬으로써 삼자적(三者的)관계가 형성되어 주체의 분열이 일어난다.  이 단계를 라깡은 ‘상징적 단계’로 부른다.  이 단계에서는 주체는 근본적으로 타자를 통해, 즉 자기 자신과의 분리를 통해 가능한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주체의 심적 상태와 언어활동의 상징적 연쇄사이에 금이 간다.  즉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사이에 입벌림이 일어나며, 후자가 전자를 이기는 단계가 생긴다.  이 입벌림이나 틈에 의해 무의식이 구조화된다.  아이와 어머니사이의 이자적 관계가 형성되는 상상적 단계에서부터 제 3의 타자인 아버지가 들어서는 상징적 단계로 나아간다.  즉 상상적 단계에서는 아이와 어머니가 일치를 이루었지만 아버지라는 절대적 타자의 등장은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이제 서로 종속되어야 할 보편적 질서인 상징적 단계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와 어머니의 이자적 관계로부터 아버지라는 제 삼자가 절대적 타자로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얻고 이름을 통해 가족과 사회의 관계 그물 속에 일정한 자리를 얻게 된다.  절대적 타자로부터 누구의 아들이라고 불려짐으로써 비로소 아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왜냐하면 아이와 어머니 사이의 직접성의 관계만으로는 아이의 전체성이 확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머니의 욕망이 아이를 통해 충족될 수 없고 아이는 어머니의 단순한 부속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외부의 법(아버지의 존재)과 같은 상징적인 질서가 필요하게 된다.  이 상징적 질서는 언어를 통해 짜여진 질서이다.  그러므로 아이는 언어의 질서를 통해 자신의 동일성을 확립한다.  그런데 아이는 이미 타인의 언술의 그물속에 놓여 있다.  이 그물, 즉 언어로 표현되는 금지, 명령, 욕망, 기대, 의무와 가치판단 등의 체계 속에서 자신의 자아동일성을 정립해 간다.  마치 빨강색이 푸름이라는 다른 색깔에 의해 비로소 빨강색으로 규정되듯이, 자아 역시 그 자신이 아닌 타자의 자리에서 비로소 확인된다.  이처럼 라깡은 데카르트이래 당연시되어 온 자아의 확실성에 대해 정신분석학적 매스를 가함으로써 이성중심적인 근대의 이데올로기를 허물어 트린다.

4)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

1970년대 이후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합류한다.  특히 리오타르는 ꡔ포스트모던의 조건ꡕ(La condition postmoderne, 1979)에서 ‘포스트’의 성격을 부각시킨다.  리오타르는 ‘모던’의 성격을 거대한 이야기로 특징짓는다.  이 거대한 이야기란 이성주의 시대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꿈꾸었던 거대한 계획을 말한다.  이들은 객관적인 학문, 보편적 도덕과 법률 그리고 자율적인 예술을 발전시키려는 계획을 말할 뿐 아니라, 과학과 예술의 보편화는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배양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나아가서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아발견, 도덕의 진보, 정의로운 사회와 제도의 실현, 인류의 행복증진이 가능할 것이라는 거대한 계획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 거대한 계획은 파산되었다.  이 거대한 계획은 오히려 일상생활의 가치를 오염시키고 무한한 자기실현의 요구와 과도하게 자극된 감수성을 강조하는 주관주의가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보편성과 총체성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려했던 하드웨어중심의 거대한 이야기는 5~6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사회경제적 질서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리오타르는 헤겔이나 맑스나 휴머니즘 철학과 같은 거대한 이야기를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에 부합하는 소프트웨어 체계의 작은 이야기를 등장시킨다.
새로운 질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난 40년 동안 인공두뇌와 컴퓨터, 정보저장과 자료은행과 단말기 등의 등장은 우리의 지식의 체계를 보편화시켰다.  지식은 이제 더 이상 무엇이 옳은가를 묻지 않고 무엇이 쓸모있으며 어느 만큼 생산성이 있는가가 문제이다.  이제는 인간의 정신적 삶이나 인류의 해방과 같은 거대한 이야기는 말의 치장에 지나지 않는다.  컴퓨터 시대의 지식문제는 이제 정부의 문제 이상의 것이 되었다.  규제와 재생산의 기능이 관료의 손을 떠나 기계로 넘겨졌다.  포스트모던한 사회에서는 정보를 전체적으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보편성에 대한 모던적 신앙은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에서 학문의 목표는 진리가 아니라 수행성(performativity)이다.  즉 가장 이상적인 투입/산출관계를 가져오는 것이다.  과학자, 기술자 그리고 기구는 진리의 발견이 아니라 힘을 증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말하자면 지식의 장사화(mercantilization)가 이루어진다.  교육은 단말기에 의해 이루어지고 선생의 역할을 기계가 부분적으로 대신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필요한 자료의 효율적인 활용이다.  자료은행(data-bank)은 내일의 백과사전이다.
이런 사회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보편성이나 총체성으로 짜여진 권위에 맹종하기보다는 단편화된 작은 이야기의 창조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헤겔의 정신의 변증법이나 맑스의 인간 해방과 의미의 해석학까지 근대 계몽주의 설화의 성격을 지닌 거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리오타르의 작은 이야기 전략은 하버마스에 의해 공격받는다.  이제 포스트구조주의자들까지 하버마스와의 논쟁에 개입한다.  변증법적 전통을 이어가면서 하버마스가 제시한 합리적 의사소통이론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게는 거대한 이야기의 틀이다.  합리적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하더라도 정당성이 결여된다는 것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비판이다.  이에 대해 하버마스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을 안티모더니즘으로 부르면서 그들은 신비적인 방식으로 근대 세계의 밖으로 도피하여 스스로 감정의 영역으로 퇴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신실용주의자인 로티 역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의사소통을 결여한 극단적인 건조성을 지닌다고 지적한다.

















제2부
동양철학














제1장 고대철학
제2장 중세철학
제3장 근세철학
제4장 현대철학













 제2부 동양철학
제1장 고대철학  

제1장  고대철학


제1절  개   요


1. 시대 구분과 사상의 탄생

시대 구분은 역사 일반의 문제로서, 사상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시대 구분은 필요불가결하게 된다.  중국 역사의 시대 구분은 근년에 이르러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데 주로 사회경제사의 관점에서였다.  사상사 시대 구분의 경우 역시 이러한 역사학적인 관점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사상사는 어디까지나 사상의 역사이기 때문에 사상 자체에 중심을 두지 않으면 안된다.  전후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분명히 나눌 수 있는 특색을 가질 때 전후의 사상을 사적(史的)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일단 한 무제(漢 武帝)를 중심으로 하여, 고대와 중세로 나누고자 한다.  고대사상이 꽃피는 춘추전국 시대는, 혼란한 시대 상황에 부응하여, 자유로운 사색에 의한 당시에 있을 수 있는 모든 사상이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고대사상의 특색은 진(秦)의 통일에 의한 시황제(始皇帝)의 사상 통제로 인해 완전히 없어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진(秦)이 법에 의한 너무나 가혹한 정치로 인해 얼마 가지 못하고 멸망하게 되고 사상계는 다시 백가쟁명의 양상을 부활하게 된다.  그후 한(漢)이 천하를 통일하게 되고, 무제 때 유교를 중심으로 한 사상통일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후 유교에 의한 정치체제는 계속 이어져서, 청말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으로는 변함없이 지속됐다.  이러한 점으로부터, 춘추전국시대에서 한 무제 이전까지의 백가쟁명의 양상을 띈 사상의 시기를 고대로 하고, 그 이후를 중세로 함직한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춘추전국에서 한초(漢初)까지를 고대로 한다는 것은, 중국의 사상이 춘추전국시대부터 처음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역사적으로는 은(殷)나라부터 사상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사상이라고 진정으로 이름할 수 있는 것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고대사상사를 춘추전국시대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공자(孔子, 前551~479, 이름은 丘, 字는 仲尼)를 그 최초의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다.  공자를 중국사상에서 최초의 사상가라고 한다면, 공자의 사상은 그 이전 시대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독창적으로 생겨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공자는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주공(周公) 등 먼 옛날의 성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중에서도 주공을 존경하여 몽매에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옛 것을 서술하고 창작하지 않고, 옛 것을 믿고 좋아한다.”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공자의 말로부터 본다면, 공자는 고도(古道)를 계승하여 거기에서 자신의 사상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공자의 사상을 고도(古道)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중국사상의 근원을 공자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으로써 중국사상사의 최초로 삼는 것은, 공자가 처음으로 인간을 중심으로 한 사상의 입장이라든가 방법을 규정하여, 체계지워진 사상을 세웠기 때문이다.  공자 이전의 관념은 인간의 사색을 넘어선 신비적인 힘에 의존하고 있는, 사상 이전의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 다음에 공자의 사상이 생겨나게 된 역사적․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현재 역사적으로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왕조는 은나라부터인데, 은나라는 상제라고 하는 초월적 유일자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던 나라였다.  상제는 유일의 전능자이고, 하늘에 있으며, 제민족의 신들을 통합하여, 은나라의 운영을 감시함과 함께, 천후(天候)를 지배하여 풍작이나 흉년․질병 등의 재해를 내리는 존재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은의 왕은 점이라고 하는 신비적인 수단에 의해서 상제의 의지를 알고, 그에 따라 국가의 행사를 주재하고, 또한 제민족은 왕이 대행하는 상제의 명령에 의해서 왕사(王事)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렇듯이 은나라는 그 당시에 국가전반의 문제를 해결함에, 상제라고 하는 절대자를 내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은나라의 상제숭배는, 후세가 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의 근본을 찾는 데 그 지표가 되고 근거가 되게 된다.  비록 상제와 이름이나 본질은 달리하지만, 바로 유가의 천명(天命)이나 묵가의 천지(天志), 도가의 천도(天道)와 같은 것이 은의 상제숭배 사상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은나라의 뒤를 이은 주나라에서도 여전히 은나라의 상제의 제례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나라의 경우는, 은나라의 종교적인 제례보다도 인륜적 질서에 대한 예제(禮制)의 의식이 한층 더 높아가고 있었다.  인륜질서와 함께 神에의 예속으로부터 점차 해방되어 인간으로서의 의식이 점차 높아지게 됐다.
이러한 주나라가 제후의 세력 증대와 왕조귀족의 부패로 인해서 천하통일의 힘을 잃어버리고 기원전 770년 호경(鎬京)에서 동쪽의 낙읍(洛邑)으로 옮겨가게 된다(이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하고, 그 이전을 서주(西周)라고 부름).  그 후는 불과 일국(一國)으로서의 명맥만 유지하게 되는데, 그와 함께 상제 내지는 천명의 종교적 권위가 거의 힘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군사․경제력이 뛰어난 나라가 맹주(盟主)가 되어 제후와 동맹하여 국제관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소위 춘추패자(春秋覇者)의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제후국은 또한 그 내부가 붕괴되어, 직접적으로 인민․영토의 실권을 장악한 대부가 국명(國命)을 휘어잡고, 반면 제후국의 군주는 권력통치의 유지강화에 광분하던 그런 시대였다.  공자가 세상에 나온 것은 바로 이러한 춘추말기의 시대였다.
상제나 천명의 권위가 실추되고, 그에 따라 구질서가 혼란하게 된 그러한 시대에 즉면한 공자는 어떻게 하면 새로운 인간관을 확립하여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있을까 하는 것에 힘을 쏟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공자가 그 시대로부터 부여받은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 과제를 해결함에 공자는, 주의 뒤를 이어 인간중심적인 측면에서 인륜질서를 추구하고, 인간존재의 근원을 종교적 색채가 없는 천명에서 구하고자 하는, 그러한 틀 속에서 해답을 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공자의 문제해결 방법에서 비로소 사상이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그후 많은 사상가들이 탄생하여 소위 제자백가의 시대라고 이름지워지게 되는데, 모두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부응하여, 나름대로의 방법을 가지고 체계적인 사상을 정리하여 당시의 문제해결에 공헌하고자 하였다.


2. 고대사상의 흐름

제후국이 서로 힘을 겨루며 질서를 혼란하게 하는 상황에서, 천하의 질서․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혼란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공자는 그러한 혼란의 원인을 제거함에 더 이상 상제나 神의 힘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러한 것은 바로 인간에 의해서 인간 사이에 일어난 문제이고 따라서 인간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간주했다.  거기서 생겨난 것이 공자의 인(仁)사상이다.  사회의 혼란은 서로가 사랑하지 않음으로 생겨난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게 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아끼고 사랑한다.  이렇듯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바로 혼란의 원인이 된다.  혼란의 원인이 이러하다면 공자의 인(仁)이라고 하는 것도, 공자의 인(仁)에 대한 사상을 담고 있는 ꡔ논어ꡕ(論語)를 보지 않더라도, 금방 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사욕(私慾)을 누르고 사회질서를 지킨다든가(克己復禮),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愛人),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등을 인(仁)의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이러한 인(仁)을 중심으로 하는 공자의 사상은 공자의 제자를 통해서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게 되지만, 그 중에서도 증자학파(曾子學派)와 자유학파(子遊學派)를 통해서 그 맥이 이어지게 된다.
춘추말기를 지나 전국기(戰國期)에 들어서게 되면, 약육강식의 사회 혼란은 더욱 심화되고, 이러한 경향은 제후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경대부(卿大夫)의 사이에서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사실이 되었다.  사회혼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가족간에까지 파급되어 부자(父子)․형제(兄弟) 간에도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세상을 배경으로 활동한 사상가가 묵자(墨子, 前468~?, 이름은 霍)이다.  묵자는 사회적 배경뿐만 아니라, 출신 역시 공자와 달랐다.  공자가 사(士) 집안의 출신인 데 반해 묵자는 공장계층(工匠階層)이었다.  당시의 계급으로 보면, 공인(工人)은 농민보다 아래로써 하층계급이었다.  이러한 하층계급의 사람인 묵자가 당시의 사회질서를 향해 내놓은 방법은 바로 ‘兼愛’였다.  겸애란 나만이 아닌 또한 나의 집단만이 아닌 상대방까지도 똑같이 사랑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겸애라고 하는 방법은 묵자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그의 출신계급에 기준을 두고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국가․군신․부자․형제 간의 싸움은 결국 서로 자기만 사랑하고 그 상대방에까지 사랑을 미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공자 당시는 성읍국가(城邑國家)를 배경으로 하여 성읍국가만의 평화질서를 이상으로 삼았지만 묵자의 시대는 성읍국가가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성읍국가 안에만 갇혀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공자의 인의(仁義)에 깊은 감명을 받으면서도 묵자는 공자와는 달리 겸애를 주장하게 됐던 것이다.  또 겸애사상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차별마저도 뛰어넘고자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점도 공자와는 그 취지를 달리하고 있는 사실인데, 실상 공자는 만인에 공통의 윤리를 제창하면서도, 사(士) 이상의 계층에 주안점을 두고 군자와 소인을 엄격하게 차별하고 있다.  그러나 묵자는 군자와 소인의 차별에 대한 주장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묵자의 계층이 피지배계급인 소인에 해당한다는 사실로부터 그러한 점을 이해할 수 있겠다.  이렇듯 묵자의 겸애사상은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자신의 출신계층에 바탕하여, 항상 약자의 입장에 서서 내어 놓은 인간상호간의 공동의무로서의 윤리임을 알 수 있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그 인간관 윤리관과 그에 동반한 사상도 모습을 달리하고 또한 달리해야 함은 당연한 사실이 된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그 사회적 배경도 달라지고 또한 인간의 지식도 전반적으로 증가․변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항상 자기가 직면한 사회에서 가장 적합한 윤리관을 추구하게 되는데 그것 또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한계 내에서이다.  이렇듯 인간은,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또한 자신의 지식이 허락하는 한에서, 보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사상의 발전․변화가 이루어져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갈 것이다.  공자와 묵자의 사상을 역사적으로 살펴본다면 역시 이러한 인간의 틀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사상이 역사적으로 이러한 틀만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대나 인간 지식의 변화와 관계없이 과거로부터의 관점을 고수한다면 단순히 시대나 인간 지식의 변화만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공자․묵자가 유가․묵가학파를 개시한 이래 공자․묵자의 문인(門人)들은 시대의 변화야 어떻든간에 유가나 묵가의 관점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공자나 묵자 이후 사상가들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는 이러한 복합적인 관련 속에서 검토해야만 한다.
묵자 이후의 사상가로는 먼저 맹자(孟子, 前372~?, 이름은 軻)를 들 수 있다.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전국시대 중기로써 각 영역국가(領域國家)가 약소국을 침략․병합하면서 사력을 다해 영역을 다투던 시기였다.  따라서 각 국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士)는 물론 서민계층으로부터 널리 인재를 구하게 됐다.  이러한 시기에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중심으로 하여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장하여 천하가 질서를 되찾고 평화로워지기를 원했다.  맹자는 일찍부터 유학을 공부했다.  일반적으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인을 스승으로 했다고 하고 있으나, 맹자 자신은 거기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다.  맹자는 유학의 입장에서 당시 사회의 질서에 필요한 성선설이란 사상을 펼치고 있다.  그렇다면 묵자의 시대에 이미 그 한계점을 드러낸 공자의 사상이 어떻게 해서 맹자의 시대에 다시 인정받게 되었는가.  그것은 공자의 제자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 시세(時勢)에 따라 약간씩 수정하면서 타학파(他學派)에 대립하여 유가의 사상을 견지하였는데, 그러던 중 맹자라는 인물이 나타나서 타학파의 사상을 비판하고 유가의 사상만이 옳다고 하면서 유가의 사상을 그 시대에 맞게 이론화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당시 실정에 맞게 합리화시키는 이론을 전개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선설인 것이다.  맹자의 이러한 이론은 유가의 중심이론을 이루면서, 유가 사상을 오늘에까지 살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 된다.
전국시대의 정세가 한층 심화되고 통일의 예측도 더욱 곤란할 때 유가도 묵가도 아닌 또 한 무리의 사상가들이 배출됐다.  바로 도가(道家)이다.  도가의 대표라고 하면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들 수 있다.  노자(이름은 聃)와 장자(前369~?, 이름은 周)는 맹자보다 약간 뒤지거나 맹자와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다.  그런데 도가는, 유가와 묵가를 부정하면서 특히 유가의 사상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주장이 더욱 옳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노자를 이상화하여 오히려 공자보다도 선배이면서 학문도 뛰어나다고 조작하게 됐다.  또한 그러한 일환으로 유가가 가장 숭배하는 요순에 대해서, 그보다 먼저인 황제를 내세우고 그 가르침을 만들어 그 저작으로서 ꡔ黃帝經ꡕ과 ꡔ道經ꡕ을 편찬했다.  황제와 노자를 결합한 황노(黃老)의 학은 기원전 3세기 후반에는 거의 성립하여 한대 이후에까지 이어졌다.  또 유가의 개조(開祖)인 공자와 맹자․순자에 대해서 노자를 개조로 하여 열자․장자를 내세웠다.  이렇게 해서 도가의 계보가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사실 그대로가 아닌 것은 물론이다.  노자는 당시의 문헌을 통해 볼 경우 맹자와 순자 사이의 사람으로 보아야 하고 따라서 노자는 장자와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 되기 때문에 장자가 노자의 주장을 계승 발전시켰다고 하는 것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로 남게 된다.  도가에서 특히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보면 이전의 유가․묵가를 비롯한 제학파의 사상을 부정하고 나름대로의 관점을 세워서 새로운 세계관․인간관을 제시하고 있다.  사상의 발전에서 본다면 이러한 도가의 태도는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이전의 특히 유가․묵가에 의해서 소외된 문제가 새로운 관점에서 제기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 특징적인 사실이다.
노자는 유가․묵가의 현실 적극적인 것과는 달리, 현실을 진실의 근원에서 떠난 상대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항상 상대적인 현실로부터 진실의 근원으로 돌아가기를 권하고 있다.  노자에 있어서 진실의 근원은 무위자연한 작용을 하는 ‘道’의 세계이다.  장자는 차별적인 현상속에서 그러한 현상을 꿰뚫고 있는 동일성으로서의 절대적인 이법(理法)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만물제동(萬物齊同) 사상이다.  만물을 꿰뚫고 있는 이법 즉 道의 중심에 설 때 비로소 일체가 무차별 무대립이라고 하는 진실의 모습이 분명하게 된다.  장자는 이러한 절대적인 자연(自然)의 도리에 몸을 맡기게 하고 동일성을 떠난 현상의 상대적인 가치 추구를 그만두기를 권하고 있다.
맹자가 이상주의를 제창함에도 불구하고 그 만년(晩年)에는, 진(秦)나라의 제국(諸國)병합의 형세가 급격하게 되어, 세상은 보다 험악하게 되고 제자(諸子)가 활약할 장소도 좁아졌다.  사상계에서는 현세의 의의나 가치를 부정하는 도가의 설이나, 인간의 자주성을 초월한 자연율의 존재를 강조하는 음양가의 설이나, 인간을 국가의 수단으로 하는 법가의 설 등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때 맹자보다 수십년 늦게 세상에 나와서 유가의 설을 전하고 그것을 보다 완비된 학설로 조직화한 사람이 순자(荀子, 前313~?, 이름은 況)이다.
순자도 공자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있는데, 당시의 제가(諸家)의 설을 흡수하여 그 주요한 문제에 대해서 유가의 입장으로부터 독자적인 견해를 전개했다.  이것이 순자를 종합적 조직적 학설의 형성자라고 하고 있는 까닭이다.  특히 순자는 당시의 도가적인 허무관(虛無觀)을 배척하고 현실 사회생활의 의의를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다.  그래서 보다 현실에 주목하여 인간이 욕망을 가진 존재임을 긍정하고 더욱이 인간은 단독으로서가 아니라 ‘群’ 즉 집단체를 이룸에 의해서 살아간다고 규정했다.  게다가 군(群)은 단순한 인간의 집합이 아니고, 일정의 질서 즉 예(禮)가 존재하고, 예(禮)는 각인(各人)의 개별적인 분한(分限)을 규정함과 동시에, 합목적적인 통일적 인륜(人倫)이고, 이것을 실현하는 한에 있어서 무리의 전체적 조화가 있고, 또한 이것을 이행함에 의해서 인간은 사(士)․군자(君子)․성인(聖人)의 진보가 있다고 했다.
인간이 무한한 욕망을 가지고 있고, 또한 예에 의해서 분한이 규정된다고 하면, 인간이 개인인 것과 사회인인 것 사이에는 모순이 있게 된다.  그래서 순자는 인간에 대해서 성악설(性惡說)의 입장을 내세우고, 예와 같은 도리의 지식을 매개로 하여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고 마음을 선으로 향하게 하고자 하고 있다.
진나라가 점차 천하통일로의 길로 나아가고 거기에 따라 전국제후(戰國諸侯)가 점차 멸망에의 길로 향하고 있는 시대에 살면서 전국시대의 막을 내리게 한 사람이 바로 한비(韓非, ?~前233)이다.  한비는 순자에게 사사(師事)하였고, 법가를 종합 집대성하였다.  법가사상은 원래 한비의 조국인 한(韓)에 전통적으로 존재했던 것 같다.  따라서 한비의 법가에의 관심은 이러한 한나라의 정신풍토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한 순자의 예사상은 법가의 법에 한발 더 근접해 있기 때문에 한비가 유가인 순자를 스승으로 하면서도 별다른 저항이 없었지 않았나 한다.
한비는 상앙(商鞅)의 법, 신불해(申不害)의 술(術), 신도(愼到)의 세(勢), 이들 선인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법가의 지배이론을 정립하고 있다.  이러한 한비의 이론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시에 어떻게 하면 국가를 존립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해답이 되겠다.  한비는 그 가장 현실적인 문제로, 군권을 어떻게 해서 중앙에 집중시킬까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비의 조국인 한나라는 이러한 한비의 이론을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진에 의해서 멸망되고, 진은 이 한비의 이론을 실천하여 한나라에 이어 조(趙)․위(魏)․초(楚)․연(燕)․제(齊)를 차례로 병합하여 前221년에 천하통일을 실현하게 된다.
한민족(漢民族)은 前3세기 후반부터 약 100년간에 걸쳐 대동란으로부터 대통일에 이르는 과정을 두 번 경험했다.  처음은 전국말의 동란에서 진의 통일에 이르는 과정이고, 다음은 초한(楚漢)의 항쟁 내지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으로부터 무제(武帝)에 의한 명실상부한 통일완성까지의 과정이다.
이러한 두 과정에 있어서 사상가들은 통일제국을 위해서 각각 다양한 설계도를 준비했다.  거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동향이 있다.  첫째는, 일체의 불순분자를 배제하고 동질의 주장과 수법에 의해서 통일의 완성을 꾀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와는 반대로 이질을 배척하지 않고 다양을 혼합하여 목적을 완수하고자 하는 동향의 두 가지이다.  진의 통일에 있어서는, 첫째의 동향으로 한비의 사상을 주로 사용한 이사(李斯, ?~前208年)의 계획이 있었고, 둘째의 동향으로 ꡔ여씨춘추ꡕ(呂氏春秋)를 편집한 여불위(呂不韋, ?~前234年)의 계획이 있었다.  ꡔ여씨춘추ꡕ는 전국기 제학파의 주장을 거의 절충하고 있기 때문에 잡가(雜家)의 전형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절충적인 통일계획은 선진사상의 표면적 총결산이자 다양의 통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진은 여불위의 생각과는 다르게 방향을 잡고 이사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단기간에 고대제국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잡다를 널리 포용하는 여불위적인 계획보다도,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단호하게 제거하는 이사적 발상이야 말로 불가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제국(秦帝國)이 법가의 사상에 의한 너무나 가혹한 정치로 인해 일찍 멸망하고, 수년간의 동란을 거쳐 前202年에 유방(劉邦)이 천하를 평정하여 한제국이 성립됐다.  한은 진을 표본으로 삼아 너무 급격한 정치나 중앙집권 정책은 오리려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이 불과 12년 정도 걸려서 완성한 체제에의 길을, 한은 60여년이나 들여서 진행했다.  완만한 속도와 많은 곡절이 제학파의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고, 한초의 사상가들은 한의 체제나 그 치하에 있어서의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다양한 발언을 주저하지 않고 했다.  그런데 한초의 사상가들은 주로 여러 학파의 사상을 혼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점 역시 시대의 요구에 응해서 라고 할 수 있는데, 크게 세 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법가를 중심으로 혼합하는 경향, 도가를 중심으로 혼합하는 경향, 유가를 중심으로 혼합하는 경향의 세 부류이다.
법가는 우선 이전의 법가의 사상에 여러가지 필요한 사실들을 추가하여 사상의 체계를 정리하고 또한 그러한 가운데 도가의 사상을 빌어와서 법가사상의 근거로 삼고 있다.  도가의 측에서 다른 학파의 사상을 절충하는 작업으로는 회남왕 유안(淮南王 劉安, 前179?~122年)이 감수 편집한 ꡔ회남자ꡕ(淮南子, 一名 ꡔ淮南鴻烈ꡕ)가 그 대표적 저작이다.  우주와 인생의 백과전서라고 할 수 있는 ꡔ회남자ꡕ는 그 안에 유(儒)․묵(墨)․법(法)․음양오행(陰陽五行)․병(兵)․소설(小說)․명(名)․종횡(縱橫) 등의 주장이 여러가지 비율로 섞여있는데, 그러한 것들을 종합하고 중핵을 이루고 있는 것은 도가사상이었다.
유가에 있어서의 잡가혼일의 기도는 법가나 ꡔ회남자ꡕ와 같은 잡가에 비해서 더욱 큰 규모로 진행됐다.  궁정의례(宮廷儀禮)의 제정에 참여 하는 한편 ꡔ역ꡕ ꡔ서ꡕ ꡔ시ꡕ ꡔ예ꡕ ꡔ악ꡕ ꡔ춘추ꡕ의 6經을 다시 정비하고, 시세(時勢)에 부응하는 주석서의 제작에 여념이 없었다.  주석서의 경우 필요에 따라 타학파의 사상을 널리 흡수하고 있다.  가령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는 법가나 명가의 주장을, 「역전」(易傳)에는 도가나 음양가의 사상을 적지않게 섭취하고 있다.



제2절  인간에 대한 규정


1. 근본존재와 인간

인간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그 곳에서부터 생겨난 최초의 존재자에 대해서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최초의 존재자는 인간일 수는 없다.  인간은 어디에선가 생겨나고 또한 죽어야 될 운명에 처해있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국사상에서는, 절대 유일한 근본존재로써 일찍부터 天을 신봉해 왔으며, 거기에 道를 근본존재로 생각하는 사상이 생겨나서, 그후 天道가 근본존재로서의 자리를 계속 지켜오고 있다.
그런데 중국 고대에 있어서 天․道라고 하는 근본존재는 인간 내면성의 근본으로 설정됐다.  또한 인간의 내면성은 바로 도덕성과 결부시켜졌다.  그러므로 天․道라고 하는 근본존재는 인간의 도덕성의 근거이자 인간사회 윤리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天․道는 인간의 도덕성의 근거로서 요청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춘추전국의 혼란한 시기에 사회의 질서를 위하여 윤리 도덕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윤리 도덕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내면에 도덕성이 없고서는 불가능하다.  중국 고대의 사상가들은, 이러한 도덕성을 인간고유의 성질이고 따라서 인간을 특징지우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도덕성이 바로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고 인간 내면의 전부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러한 발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인간의 근본존재인 天이나 道는 인간 내면성의 근본이자 인간 도덕성의 근본이 되는 존재로 되게 됐다.  이러한 사실은 각 사상가의 사상을 통해 볼 경우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여기서는 ‘僞’라는 글자를 통하여 좀더 이해를 돕고자 한다.
위(僞)는 人과 爲(하다)의 합자(合字)이다.  그 뜻은 글자 그대로 사람이 하는 행위이다.  한나라 허신(許愼)이란 사람이 쓴 ꡔ설문해자ꡕ(說文解字)라는 책을 보면, 僞를 거짓이란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한나라 이전에 僞라는 글자를 거짓이란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묵자나 맹자․노자 등의 책에 쓰여진 僞의 의미를 찾아보면 전부 거짓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사람(人)과 하다(爲)의 합자인 僞의 뜻이 거짓이 된다는 말인데, 사람의 행위가 어떻게 해서 거짓이란 뜻으로 쓰이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天․道라고 하는 묵자․맹자나 노자에서의 근본존재가 인간 도덕성의 근본존재라고 하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僞란 사람이 하는 행위 즉 사람에 기준을 둔 행위이다.  사람에 기준을 둔 행위가 거짓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인간 이전의 근본존재가 도덕적 근거로 설정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와 같이 사람에 기준을 둔 행위를 거짓이라고 하고, 그 반대인 도덕적 근거로서의 진실을 인간세상이 아닌 天이나 道에 돌린 것은,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듯이 인간 현실의 무질서 즉 인간적인 것으로서는 인간의 현실을 도덕에 근거한 질서로 돌릴 수 없다고 하는 자각 때문이었다.  인간적인 현실은 언제나 선․악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선․악이 공존하는, 악이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는, 그러한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본다면 거짓된 기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람에 기준을 둔 행위(人爲)를 거짓(僞)이라고 하게 됐던 것이다.
선․악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인간에 있어서, 선한 도덕성만을 인간의 내적인 본성이라고 하여 그러한 본성의 근본존재로서 天이나 道를 세웠다고 하면 인간의 악한 모습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만약에 인간의 근본존재를 天이나 道 등의 순수한 선만으로 이야기하게 된다면 악의 근본존재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악의 근본존재가 있다고 하면 인간에게 악한 모습이 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 되고 天이나 道는 근본존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天․道의 근본존재는 악의 근본존재에 상대적인 것이 되고, 따라서 인간의 근본존재가 절대적이고 유일한 하나가 아니라 상대적인 둘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 고대의 사상가들은 이러한 악한 모습을, 天이나 道에서 받은 본성의 불완전한 발휘라는 측면에서 찾고 있다.  근본존재에서 받은 본성을 다 발휘하게 되면 언제나 선만이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본성을 다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 선하지 못한 부분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하지 못한 부분을 인간의 악한 모습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 이러한 선한 본성이 다 내재되어 있으면서도 완전하게 발휘할 수 없는 것은, 인간에게 기질(氣質)이 있거나 개체로서의 유한한 주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등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중국 고대에 있어서 근본존재는, 인간의 도덕적인 측면에서 찾아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간다운 모습은 인간 내면의 도덕성이고 이 도덕성은 근본존재에서 부여받은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일찍부터 인간 이전의 근본존재를 믿어왔고, 또한 중국철학이 태동하면서 이렇게 도덕적인 측면에서 도덕성의 근원이라고 하는 성격을 근본존재에 부여함으로 해서, 중국철학에서는 항상 그 이름이야 어떻든간에 근본존재라는 것과 인간과의 관계를 도덕적인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상가들이 이러한 관계에 대한 이론을 완전하게 정립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고대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유가의 맹자나 도가의 노자에 있어서는 이러한 관계가 이론적으로 체계지워져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이전의 묵자의 경우를 보면 아직 이론적으로 완전하다고 할 수 없는 점이 있다.  그런데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순자의 사상에서이다.  순자는 유가이면서도 유가사상에서 근본존재와 인간과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립한 맹자의 사상을 비판하면서 天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자연적 天에 불과하고 인간의 도덕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고 있다.  그래서 도덕의 근거를 성인의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예의나 법도 등에 두고 있다.  그러나 비록 순자가 天을 자연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天에서 도덕적 근거를 제외시켰다고 하지만, 자연적 天에서 태어난 인간을 도덕적인 측면에서 악하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역시 인간과 근본존재와의 관계를 도덕적 측면에서 보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고, 단지 여러가지 상황 아래서 근본존재에 대한 성격을 달리 해석한 데 지나지 않는다.


2. 선한 본성을 가진 인간

1) 유   가

중국고대에 있어서 최초로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규정한 것은 맹자였다.  유가의 시조인 공자는 “인간의 본성은(태어나면서) 서로 비슷하지만, (생후의) 습관에 의해서 서로 멀어지게 된다.  다만 상지(上知)와 하우(下愚)는 (선․악이 일정하여, 습관에 의해서도) 변화하지 않는다.”(ꡔ論語ꡕ「陽貨篇」)라고 하여, 인간의 본성을 상중하로 나누어 이야기할 뿐 더 이상의 설명은 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 공자 문인(門人)들의 사이에서는 점차로 고찰의 대상으로 되게 되고 맹자에 이르러서 성선설을 주장하게 됐다.
공자의 성설은 정확하게 말하면, 상중하성설이고, 맹자의 성설은 성선설이다.  그런데 그 후의 유가들은 공자를 유가의 시조로 생각하면서 성선설을 정통으로 삼고 있다.  여기에는 공자와 성선설을 일관시켜 생각할 만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한다.
공자는 이론 정립이라고 하는 측면보다는 현실의 실천적 측면에서 자신의 생각을 전개해 나갔다고 보아진다.  공자의 중심사상이 되는 ‘인’에 대한 이론만을 보더라도 이러한 공자의 생각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공자는 인을 충서(忠恕)와 같은 뜻으로 보고 있다.  충(忠)이란 자신의 성실한 마음을 다하는 것이고, 서(恕)란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진실되게 표현하는 것을 인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 외에도 공자는 인을 실천적인 덕목과 관계지워서 설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공자의 실천적인 인과 함께 또 한 가지 모든 사람의 마음이 다 같이 선하다는 전제를 읽을 수 있다.  만약 모든 사람의 마음이 선하지 않다면, 충서(忠恕)와 같은 말은 할 수가 없게 된다.  태어날 때부터 악한 마음이나 선하지 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마음을 아무리 성실하게 하더라도 또한 자신의 마음을 아무리 미루더라도 남에게 선한 마음은 나오지 않게 되고 그러한 것은 인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진실되게 표현하는 것을 인이라고 했을 때는 이미 진실된 본래의 나의 마음은 인(仁)의 실천의 근거로서 선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는 실천적․현실적 측면에서 인을 이야기하고 상중하성설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성선설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그후 맹자는 공자의 바로 이 인사상을 이어 받아서 인사상 밑에 깔려 있는 선한 인간의 본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한 모습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자신의 성선설을 수립하게 됐던 것이다.
인간의 본래 모습은 어떻게 해서 선한가.  맹자는 여기에 대해서 ‘사단설’(四端說)로써 이론 정립을 시도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인간에게는 네 가지 종류의 공통된 마음이 있다고 한다.  바로 사람에 대해서 측은해하는 마음(惻隱之心), 불의나 악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 사람에게 양보하는 마음(辭讓之心), 옳고 그름과 선악을 판단하는 마음(是非之心)의 네 가지이다.  이러한 네 가지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네 가지 마음은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이 되겠다.  그런데 맹자는 현실적인 이 네 가지 마음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이 네 가지 마음이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네 가지 마음이 나오는 근원을 맹자는 인(仁)․의(義)․예(禮)․지(智)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인의 예지는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본성이고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하는 주장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인의예지의 본성과 측은․수오․사양․시비의 네 가지 마음과의 관계를 端(실마리, 萌芽)으로써 나타내고 있다.  즉 측은해 하는 마음은 仁의 端이고, 수오의 마음은 義의 端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禮의 端이고, 시비의 마음은 智의 端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端이란 어떠한 일이 밖으로 나타나는 첫머리라는 뜻이다.  인간이 현실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마음 정도뿐인데, 인간 내면에 있는 본래 모습의 선악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로 端이라는 관계를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맹자에 있어서는, 본성은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인간의 본래 모습이고, 마음이란 이러한 본성이 밖으로 표현된 것이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을 규정하고 이러한 마음이 무엇의 端이냐를 찾게 되고, 그 결과 인의예지라는 본성을 찾게 되고 또한 성선설을 성립시키게 됐는데, 맹자의 이러한 사상이 사단설이다.
맹자는 이러한 사단설로써 성선설을 성립시키게 됐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항상 선을 행해야 되는데 어떻게 해서 악이 있을 수 있는가.  그 원인은 인간의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타고난 본성을 항상 지켜 밖으로 나타나게 하지 못함에 있다고 하고 있다.  즉 인간은 비록 본성에 있어서는 선하지만, 현실적으로 선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금방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 수양 공부는 인간에 있어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2) 도   가

여기서는 노자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런데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은 노자와 성선의 관계에 대해서이다.  노자 ꡔ도덕경ꡕ(道德經)에는 성선에 대한 이야기가 한마디도 나오고 있지 않다.  따라서 노자에 있어서 성선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노자 역시 인간의 본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또한 모든 존재뿐만 아니라 윤리의 근원으로서 道․自然 등을 이야기하면서 도나 자연은 절대적 순수성을 지닌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우선 성선이란 주제로써 노자의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노자는 먼저 유가의 인․의․예․지를 상대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상대적인 것은 인간의 근본이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인․의․예․지는 물론 유가에 있어서는 인간의 본성으로서 선한 것이고, 不仁․不義․不禮․不智에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不仁․不義․不禮․不智라는 것은 원래부터 인․의․예․지에 대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존재하는 것은 인․의․예․지뿐인데, 인간이 이 인․의․예․지를 다 발휘하지 못하여 결핍된 부분이 不仁․不義․不禮․不智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는 현실적으로 보면 어쨌든 도덕적인 선악은 존재하고 또한 인의예지는 선의 개념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 인의예지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근원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노자는 인간 및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 절대적인 道를 내세워, 이 道에서 인간의 모습을 규정하고 인간의 윤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도는 모든 것의 근원이면서 무위자연한 실체이기 때문에, 이 도를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써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이 도에 의해서 질서지워져 있다.  그러므로 도라는 것은 그 내용은 어떻게 이야기할 수 없지만 질서롭고 조화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임에 틀림없다.  질서와 조화는 인간의 도덕적인 측면에서 보면 바로 선이 된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절대적인 것이어서 인간의 언어로 표현 불가능하지만, 만약 표현한다면, 절대적 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비록 절대적 선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선이라는 개념은 악에 상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선의 개념으로 도를 규정하는 것은 언젠가는 도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리고 악에 상대적인 존재로 되어버릴 가능성을 염려하여 유한한 인간에 있어서의 도덕적인 선악으로 도를 규정하기를 꺼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렇지만, 인간의 도덕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면, 도라는 존재는 가치의 면에 있어서 절대적인 선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근본은 선하게 되고 또한 인간이 태어나면서 이 도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성선․성악으로 인간의 모습을 논한다면 성선설이 된다.


3.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

1) 순   자

순자가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한 것은 유명한데,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논증하려고 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이고, 저 선이라고 하는 것은 위(僞) 즉 후천적인 작위(作爲)의 결과이다.  지금 생각해보건데, 인간의 본성에는 선천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거기에 따라가기 때문에 타인과 서로 다투고 뺏고 하게 되고, 양보하는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또 선천적으로 질투하거나 미워하는 경향이 있고 거기에 따라가기 때문에 타인을 해롭게 하게 되고, 성심(誠心)의 덕이 없어지는 것이다.  또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거나 듣고 싶어하는 이목의 감각적인 욕망이 있고, 거기에 따라가기 때문에 무절제하게 되고 예의나 조리가 없게 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이나 감정에 맡기게 되면 반드시 다투어 서로 빼앗게 되어 사회적 조리가 깨어지게 되고 마침내는 세계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반드시 교사에 의한 규범의 감화나 예의에 의한 지도가 있고 나서 비로소 타인과 서로 양보하게 되어 사회적 조리도 지켜지게 되고, 마침내는 세계가 평화롭게 다스려진다.  이상의 사실로부터 관찰한다면,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하는 것은 명료하다.  그 선이라고 하는 것은 후천적인 작위(作爲)의 결과이다.”(「性惡篇」)  그런데 순자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하게 태어난 것이고, 天의 규범성은 부정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정의하여 “대개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한 선천적인 것이고, 후천적인 학습이나 노력에 의해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性惡篇」)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최초의 출발점이고, 소박한 소질(素質)이다.”(「禮論篇」)라고 하여, 고자(告子)의 소위 성에 선악없다라고 하는 설과 같은 생각을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는 그의 성악론에 파탄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하겠다.  대체로 그는 선악을 정의하여, “선이라고 하는 것은 정리평치(正理平治) 즉 도리에 딱 맞는 평화적인 것을 말하고, 악이라고 하는 것은 편험패란(偏險悖亂) 즉 치우쳐 도리에 어긋난 난폭을 말한다.”(「性惡篇」)라고 하고 있는데, 앞의 논증에서의 사실을 보면 본성 그 자체가 편험패란(偏險悖亂)하다라고는 인정하기 어렵다.  본성 중에 있는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나 감각적인 욕망 등에 따르는 결과로서 악의 상태가 일어난다는 것이고, 따르는가 어떤가는 그에 의하면 ‘체내의 가장 중심에 있어서 오관을 제어하고 있는 천군(天君) 즉 자연스런 지배자’(「天論篇」)라고 이야기되는 心의 작용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또한 “성인은 그 천군으로서의 心을 청명하게 하여 오관의 작용을 정상적으로 조절하여…… 자연스러운 본래의 감정을 도야한다.”(「天論篇」)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心의 능력 그 자체는 도리어 성선의 증거라고 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또 그는 맹자의 성선설의 급소를 찔러,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것인데, 모두 그 선한 본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악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눈은 사물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는데, 대개 그 사물을 보는 시력(視力)은 눈에서 떠나지 않고, 소리를 듣는 청력(聽力)은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목(耳目)의 총명이 얻어지는 것이다.”(「性惡篇」)라고 하여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잃어버릴 리가 없고 잃어서 악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원래 악하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한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선한 것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을 인정하여 그것이야 말로 성악의 증거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대체로 덕이 적은 자는 많아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못난 사람은 아름답게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주거나 토지가 좁은 자는 넓어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되려고 생각하고, 신분이 천한 자는 고귀하게 되려고 생각하는 것이어서, 만약 자기 자신에게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외부에서 구하는 것이다.”(「性惡篇」)라고 논증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독단이다.
또 그에 의하면 만인이 성을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을 논하여, “저 성천자(聖天子)인 요(堯)나 우(禹)와 폭군인 걸(桀)이나 대도적인 도척도 그 본성은 똑같고, 훌륭한 군자나 변변찮은 소인도 그 본성은 똑같다.  지금 가령 예의나 작위의 집적(集積)이 인간의 선천적인 본성에 구비되어 있는 것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또한 어떻게 해서 성천자인 요나 우를 존중할 이유가 있겠는가.  어찌 군자를 존중할 이유가 있겠는가.  대개 요임금이나 우임금이나 일반의 군자를 존중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선천적인 본성을 변화하여 후천적인 작위를 일으켜 그 작위가 일으켜진 결과로써 예의를 만들 수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性惡篇」)라고 성을 변화시키기를 주장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는 성인이나 군자가 될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어도, 실제로 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발은 세계중을 빠짐없이 돌아다닐 수 있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실제로 세계중을 빠짐없이 돌아다닌 사람은 없다.”(「性惡篇」)고 한다.  그런데 만인 동성(同性)으로서 게다가 악하다고 하면 최초의 예의나 교육을 일으킨 사람은 누구인가, 왜 성인만이 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대답하기 궁하다.  생각컨데, 순자는 天의 권위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성인과 그 작위인 예의를 절대화했는데, 그 결과 볼래 소박한 선악이 없는 소재라고 생각했던 성을 무리하게 악하다고 주장하여 예의에 의한 통제․교화를 기도한 것은 아닐까.  환언하면, 기존의 성인이나 예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논(論)을 세운 것이 아닐까.  “본성이 선한 것이라고 한다면, 성왕은 불필요하게 되어 예의도 무용하게 되는데, 본성이 악한 것이라고 하면 성왕에 따라서 예의를 존중하게 된다.”(「性惡篇」)라고 하는 말은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시사적이다.

2) 한 비 자

한비자는 순자의 성악설을 계승하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연적으로 옷을 입고 먹을 것을 먹고 살아야 할 운명에 처해 있으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리(欲利)의 마음이 있음을 한비자는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욕리(欲利)의 마음이 있음으로 해서, 사람은 편안하고 이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고 위태롭고 해로운 것은 배척하게 된다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는 욕리(欲利)의 마음이 있고 따라서 안리(安利)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 한비자의 인간에 대한 규정이 되겠다.  그런데 이러한 한비자의 인간관은 맹자처럼 인간의 본성을 선으로 본다든가, 순자처럼 인간의 본성을 악으로 본다든가 하는 그런 차원에서의 인간에 대한 규정이 아니다.  ꡔ한비자ꡕ의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본성 운운하면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하면 이상적 인간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곳은 없다.  따라서 한비자의 인간관은 단지 인간의 일차적인 삶의 법칙, 삶의 방식의 측면에서의 인간에 대한 규정이 되겠다.  이러한 한비자의 인간관은 그 이전의 인성론에 비한다면 너무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주관심사가 치국(治國)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꼭 그렇게만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치국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치국에서 그 대상이 되는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고 임금의 다스림에 잘 따라오게 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임금의 다스림대로 되면 그 나라는 평화롭고 그렇지 않으면 어지럽게 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비자는 다스림의 대상인 백성 즉 인간에 대해서 연구하게 되고 그 결과 인간의 본성 속에서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 수 있는 요인을 찾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비자의 관점이 바로 인간의 본성을 도덕적인 측면에서 찾지 않고, 삶이라는 측면에서 찾게 한 이유가 된다.  인간의 삶의 형태는 그 본성에서 보자면 모두 자기 자신의 안리(安利)를 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국을 위해서는 공리(公利)를 중심으로 하여 사리(私利)를 억제할 때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리(私利)를 억제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고 하는 그 나름의 역사관을 제시하고 있다.  한비자는 시대를 상고․중세․당금(當今)으로 나누어 상고는 도덕을 다투고 중세는 지모(智謀)를 다투고 당금(當今)은 기력을 다툰다고 하면서 이러한 현상은 재물의 다소에 따른 이(利)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시대가 바뀌고 이(利)의 관계가 바뀌면 그에 따른 치술의 변화도 필요불가결하게 된다.


제3절 인간과 윤리


1. 유가 묵가 도가의 윤리

1) 유   가

공자가 말한 실천덕목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仁)이다.  이러한 인에 대한 중시는 그의 예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공자는 주의 전통문화에 강한 동경을 품고, 전통문화의 계승․유지를 자기의 사명으로 하고 있었다.  전통문화의 구체적인 현상이 예이다.  그래서 공자는 또한 이 전통적인 예를 지극히 존중했다.  사회의 존재방식이 변화면 사회생활을 규정하는 예도 자연히 변화하게 된다.  옛날의 예는 현실의 생활에 적합하지 않고 존재의의를 잃어버리는 상황이 생겨난다.  그렇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공자는 가능한 한 고래(古來)의 예를 존속시켜 가기를 원하고 있다.
공자에 의하면 이 예는 인(仁)의 자연스런 나타남이며, 동시에 인을 실현하는 질서이다.  물론 예는 천지의 질서이며 동시에 인간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당위의 법칙인 까닭에 예는 우주의 질서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며, 인간이 주체적으로 구현해야 할 행위의 질서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 예의 내용이 되는 인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인은 바로 사랑이다.  그것도 진실한 사랑이다.  이러한 인을 다른 말로 나타내면 충서(忠恕)로 표현할 수도 있다.  이것은 증자가 공자의 도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인데, 충(忠)이란 자기 마음을 성실히 다하는 것이고, 서(恕)란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인 외에 공자가 역시 중요시 여기는 덕목에 지(知)․용(勇)이 있다.  지(知)․인(仁)․용(勇)의 세 가지를 군자가 갖추어야 할 필수덕목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이 지․인․용은 크게 보면 인 한 글자에 모두 포함되는 것이고, 작게 보면 지․인․용 각각 세 가지 덕목으로 된다.  공자는 인을 실천적인 측면에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인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먼저 진정으로 인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앎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또한 실천적 용기가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실천적 측면에서의 인이라고 하는 것은 지와 용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인․용은 인 한 글자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덕목으로 볼 것 같으면 세 가지 덕목이 된다.
이상에서 공자의 인사상을 중심으로 실천덕목을 살펴봤는데, 이러한 실천덕목에 의해서 도달되는 이상적 인간은 바로 군자이다.  이러한 면에서 공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군자가 되기 위한 군자의 교양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맹자의 윤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공자가 인을 중심으로 실천윤리를 이야기한 것은 앞에서 이미 살펴봤는데, 맹자도 인정(人情)의 자연함에 근거하는 측은의 마음을 인(仁)의 근본으로 하여 공자의 학설을 계승하고 있는데, 인심(仁心)이 정치상에 발현되어지는 것을 맹자는 특히 강조한다.  특히 의(義)와 이(利)를 상반되는 가치로 보는 것은 공자에게서도 보이는 것이지만, 의(義)를 인(仁)과 동등의 가치로 인정하여 이것을 병칭하는 것은 맹자에 이르러서 보여지는 것이다.  다만 인과 의를 나란히 하여 열거하고 있는 것은 ꡔ묵자ꡕ 중에도 보여지기 때문에 인의(仁義)의 어원 그 자체는 맹자의 독창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묵자는 의(義)를 이(利)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즉 최대다수의 최대이익이야 말로 의이다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점 맹자와 상반되는 점이다.  또한 의는 예의 형식면과 그 정신인 공경(恭敬)과의 조화의 원리로서도 생각되어졌다.  예는 공자에 있어서도 보여지듯이, 유가가 가장 중시하는 바의 것이었다.  단지 예의 형식이 시대의 변화와 함께 사회의 실정에 합치되지 않게 되었을 때, 공자에 있어서는 가능한 한 전통적 형식을 살려서 그 형식에 새로운 내용을 담아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는 태도가 보여졌다.  그러나 맹자는 예를 존중하면서도 그 형식 자체에도 반성을 더하여 행위가 가장 타당 적절하기 위한 원리로서 의를 강조하여, 의에 적합한 예라고 하는 의미로, 자주 예의(禮義)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공자는 최고의 덕으로서 인을 이야기하는 외에도 많은 덕목을 들어서 인격수양의 목표를 제시했다.  맹자도 효제충신(孝悌忠信) 등 여러가지 덕목을 이야기하면서 특히 인의(仁義) 혹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덕(四德)을 나란히 열거하여 이야기한 것은 덕목론의 체계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사덕(四德)은 앞에서 이미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사덕(四德)의 실천은 방심(放心)을 구하여 본심(本心)을 찾음으로 해서 가능하게 된다.  이 맹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덕설(四德說)은, 한의 동중서에 이르러서 여기에 신(信)의 덕을 더해서 오상(五常)이라고 칭하여 이 이후 길이 유가의 윤리학설의 기본의 하나가 됐다.
다음은 맹자의 오륜설(五倫說)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사덕설(四德說)과 나란히 맹자의 윤리학설의 중요한 것으로서 오륜설(五倫說)이 있다.  오륜이라고 하는 것은 5종의 인륜이라고 하는 것으로, 인생에 있어서의 대인관계를 5종으로 정리하여, 그 사이에 지켜져야 할 서로의 의무를 규정한 것이다.  즉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이 그것이다.  이렇게 다종다양(多種多樣)의 인간관계를 이와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한 것은, 덕목(德目)을 인의예지의 네 가지로 정리한 것과 똑 같이 윤리 학설 사상 획기적인 것이다.  또한 게다가 인륜상호(人倫相互)의 덕목으로서 친의별서신(親義別序信)의 다섯 가지를 이야기한 것도 중요하다.
부자(父子)에 대해서는 종래 부(父)는 자(慈), 자(子)는 효(孝)와 같이 각각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로서 이야기된 것은 있었지만, 부자를 하나의 인륜으로서, 그 사이에 서로 친애의 덕이 의무가 된다고 하는 생각은 강조되지 않았다.  군신에 대해서도 상호적인 의무로서 의(義)를 이야기하면서 신(臣)의 일방적인 충성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쌍방성은 공자도 물론 이야기하고 있듯이 원시유가의 전통사상이지만, 공자에 비해 맹자는 이 쌍방성을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부부의 별(別)이라고 하는 것은, 부부에게 각각 생활상의 임무에 구별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 장유(長幼)의 서(序)는 연장자와 연소자에게는 서열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붕우(朋友)에게 신(信)을 이야기하는 것은 전통적이지만, 공문(孔門)에서는 붕우(朋友)의 사이에 한하지 않고 사회 일반의 도덕으로서 신(信)을 중시하고 있지만, 맹자에 이르러서는 신(信)을 붕우관계에 집약하여 표현했다.

2) 묵   가

공자나 맹자의 경우에는 윤리의 원천을 인간의 내면적인 본성에 두고 있다.  그러나 묵자는 공자나 맹자가 주장하는 인의의 도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천지(天志)에 의지했을 때만 그 도덕성이 인정된다.  묵자에 있어서의 天은 의지가 있는 주재적(主宰的)인 天이며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종교적인 天이다.  이 天은 부도덕한 행위나 죄를 환히 감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뜻은 정의를 원하고 불의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의를 어기면 재앙속에 빠지고 만다.  묵자의 이러한 사상은 도덕적 낙관주의․이상주의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왜 천의(天意)를 어기면서까지 죄악과 혼란에 빠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떻게 선과 복을 향유하며 도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가 등등의 문제에 관한 현실적인 조명이 부족한데도 천의(天意)만을 따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자는 천의(天意)에서 도덕을 연역해내고 있으며 철저한 계급윤리를 내세운다.
묵자에 의하면 천자(天子)․삼공(三公)․제후(諸侯)․사(士)․평민(平民)의 계급적인 윤리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그는 윤리를 정의라고 해석하고 그 정의는 혼란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그는 혼란을 바로잡는 일은 아랫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윗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여 계급윤리를 강조한다.  “평민은 힘을 다해 직업에 종사할 뿐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잡지는 못한다.  이 경우, 바로잡을 권한이 있는 것은 사(士)이다.  또 사(士)도 힘을 다해 직책에 종사할 뿐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잡지는 못한다.  이 경우 바로잡을 권한이 있는 것은 장군과 대부이다.  장군․대부도 힘을 다해 직책에 종사할 뿐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잡지는 못한다.  이 경우 바로잡을 권한이 있는 것은 삼공․제후이다.  삼공․제후도 힘을 다해 맡은 바 정치를 행할 뿐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잡지는 못한다.  이 경우 바로잡을 권한이 있는 것은 천자이다.  천자도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잡지는 못한다.  이 경우 바로잡을 권한이 있는 것은 하늘이다.”(「天志篇」)  묵자는 최고의 통치자인 천자 위에 하늘의 뜻이 있으므로, 그를 존경하고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천의(天意)를 존경하고 따르는 곳에 최고의 도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은 문제는 천의(天意)가 무엇인지 알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묵자에 있어서의 실천윤리가 될 것이다.  그는 천의(天意)를 이렇게 파악한다.  “천의(天意)는 대국(大國)이 소국(小國)을 치는 것을 바라지 않고 큰 집이 작은 집을 어지럽게 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강자가 약자를 위협한다든지, 다수가 소수에 가혹한 짓을 한다든지, 간사한 무리가 어리석은 자를 속인다든지, 귀한 자가 천한 자에게 오만하게 군다든지 하는 따위를 바라지 않는다.”(「天志篇」)  하늘은 침략과 혼란, 약육강식과 다수의 횡포, 기만과 오만을 바라지 않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은 남을 돕는 것, 남을 깨우치는 것,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바란다.  그 뿐만 아니라 하늘은 천하를 차별없이 널리 사랑하여, 만물을 키워 사람을 이롭게 해준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에 보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보답이 도덕행위의 근본이다.
이 천의(天意)에 따르는 것은 겸(兼)이고 겸(兼)의 도(道)는 정의(正義)에 의한 정치에 달려 있으며, 하늘의 뜻을 배반하는 것은 별(別)로서 별(別)의 도(道)는 곧 힘에 의한 정치이다.  묵자 당시의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를 겸(兼)의 부족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천의(天意)를 따라 서로 겸애(兼愛)하지 않고 자기만을 사랑하여(別愛) 서로 싸우고 남을 해롭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천의(天意)라는 도덕적 근원에 바탕하여 묵자는 유가의 별애(別愛)를 신랄하게 비판하여 겸애(兼愛)야 말로 진정한 평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윤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3) 도   가

유가들이 주장하는 윤리도 역시 자연의 대도(大道)에서 비롯된 것이며, 한낱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윤리의 규범은 아니다.  그러나 유가가 중시했던 예의 규범이 비록 자연의 대도에 뿌리를 두었다고 하더라도 예의 규범이 경화(硬化)될 때, 그 뿌리를 상실하기 쉽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노자가 유가의 예의 규범과 그 문화를 비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늘 근본적인 문제, 진리의 문제를 거론하여 경화되는 예문화의 반성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의 순수성, 자연성, 순박성을 되찾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전개하려는 사상의 체계에 있어서 하나의 위대한 명제 ‘復歸於自然’을 근본명제로 제시하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  이 명제는 그의 철학과 사상의 전부이다.  물론 자연(自然)이란 Nature 이상의 개념이다.  낱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이란 저절로 그러함, 이른바 그런 것도 저절로 그러함이요, 그렇지 않은 것도 저절로 그러함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그것을 조작이 없는, 인위가 없는 무위자연이라고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순수와 비순수의 구별에서 파생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문화의 개념이라기보다는 문화를 경화되지 않게 하고 문화를 순수하게 하는 활력소로서의 자연이다.  그런 뜻에서 그는 다시 세 가지 명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인다.  그 하나는 ‘復歸於無極’이란 명제이고, 다른 하나는 ‘復歸於樸’이고 또 하나는 ‘復歸於嬰兒’라는 것이다.
첫째 復歸於無極이란 무극에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무극이란 극단(極端)이 없는 것을 뜻한다.  양극단이 대립하는 세계와 그에 대한 분별적 관념은 그 의식과 세계를 경화(硬化)되게 한다.  한 개인의 의식의 경화, 한 사회의 문화적 경화현상은 모두 이 양극적 분별적 관념으로부터 파생된다.  자연의 위대하고 거대한 조화란 이 양극의 대립과 모순을 초월하고 있으나, 대립과 모순이란 인간의 상대적 분별지에 의해서 파악되고 규정되는 소산일 뿐이다.  극단이 없는 자연의 올바른 인식에서만 개인 의식의 경화현상과 사회의 문화적 경화현상은 극복될 수 있다.  그러므로 노자는 일체의 상대적 관념을 상대성에서 해방되도록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극단이 없는 무극의 세계에로 돌아가자고 한다.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무극의 세계란 대립과 모순이 없는 자연 그 자체이고 인식론적으로 말하면 극단의 무화(無化) 작업이다.
둘째, 復歸於樸이란 뿌리에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소박한 세계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박(樸)이란 나무등걸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어떠한 인위(人爲)도 가미되지 않은 소박성을 가리킨다.  그런 까닭에 허례와 꾸밈, 그리고 기교(技巧)란 거부되어야 마땅하다.  유가의 유위적(有爲的)인 예문화에 대한 반성을 자극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까닭에 노자는 무위(無爲)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작이 없고 꾸밈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위(無爲)에서 위(爲)란 인위적(人爲的)인 것 조작적(造作的)인 것을 뜻함을 알 수 있다.
셋째, 復歸於嬰兒란 천진난만한 어린이와 같이 순수의 세계에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아무런 의식적인 마음도 없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결코 어린이가 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식이 없이 순수하며 억세지 않고 부드러우며, 닫혀있지 않고 열려있는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마음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이상에서 세 가지 명제를 통하여 노자의 윤리에 대해서 살펴봤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復歸於自然이다.  그리고 이 자연은 도(道)의 존재방식 작용방식이기 때문에 復歸於道라는 말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래 모습의 세계이기 때문에 인간 본래성으로 되돌아가자는 윤리상에서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앞의 명제에서 첫째 것은 우리의 인식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인식론적으로 도의 세계 즉 윤리의 근본세계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의 것은 그러한 도의 방식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이다.  그런데 인위에서 벗어나 무위로 돌아가려고 할 때 한 가지 곤란한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인간이 태어나서 산다고 하는 것은 결국 분별지의 사용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분별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노자가 말하는 무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게 된다.  따라서 어떠한 상태가 무위의 상태인가 하는 기준 설정이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어린아이의 마음 상태를 그 표본으로 내세우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아직 분별지가 덜 발달되고 따라서 도의 무위의 상태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2. 윤리에서 인간지배이론으로

1) 순   자

예를 중시하는 것은 공자 이래 유가의 전통이었는데, 자사나 맹자의 일파가 그 정신적 내용을 강조한 것에 대해서 순자는 그 기능적 형식적 방면을 강조하고 여기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여 소위 예지상주의의 이론을 전개했다.
그는 예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욕망을 가지고 있어서,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서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고는 안된다.  추구함에 거기에 정해진 범위의 규칙 분별이 없으면 어쨌든 싸우지 않고는 안된다.  이렇게 해서 서로 싸우면 사회는 혼란하고 결국 꽉 막혀버리게 된다.  선왕은 그 사회적 혼란을 미워하였다.  그래서 예의(禮義) 즉 사회규범을 제정하여 분별지우고, 그것에 의해서 사람들의 욕망을 기르고 사람들의 추구함을 만족시켜서, 대상물을 서로 빼앗아 그 부족 때문에 욕망이 막혀버림이 결코 없고, 욕망을 방임하여 서로 빼앗음으로 인해서 대상물이 없어져버리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여, 욕망과 그 대상물을 서로 평균하여 늘어나게 한 것이다.  이것이 예가 발생한 기원이다.”(「禮論篇」)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욕망을 기른다는 것과 분별하는 것이라고 하는 예의 기능에 대해서이다.  욕망에 대해서는 그는 욕망이 있는 것은 절대적 사실이고, 그것을 항구적으로 충족시키도록 정치는 행해야만 한다고 한다.  그리고 소비재를 그것에 맞추어서 생산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여기에는 “대개 자연계에 있어서의 만물의 생성은 본래 여유가 있어, 사람들의 식량에 충분하고, 마(麻)나 갈(葛)․견사(絹糸)나 조수(鳥獸)의 깃(羽)․털(毛)․치아(齒)․가죽(革) 등도 본래 여유가 있어 사람들의 의류로서 충분하다.”(「富國篇」)고 하는 견해를 세워서, 생산력은 소비를 능가한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이 있음으로 해서 욕망과 소비를 긍정하여 그것을 기르는 것에 정치의 적극적 의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의 기능으로서 욕망의 충족을 인정하는 한편에, 또 한 가지 분별의 기능이 있는 것이 지적된다.  즉 그것은 “귀천의 사이에 등급이 있고, 장유(長幼)의 사이에도 차별이 있고, 빈부나 사회적 신분의 경중(輕重)의 사이에도 모두 각각의 어울리는 것을 가진다.”(「禮論篇」)라고 하는 규정이 있듯이, 신분적, 계급적 질서를 고정하는 것이고, 욕망의 충족도 그 차등의 범위를 넘어서 무제한으로 추구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차등적 질서관에서 본다면 욕망의 긍정은 후퇴하고 자기의 분(分)에 만족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이 도출되게 된다.  천자의 고귀함과 천하를 보유하는 부유함은 인정(人情)으로서 누구라도 구하는 바이다라고 하면서도 그것은 실현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선왕은 귀천․장유․지우(知愚) 등의 정도에 응하여 봉록에 차등을 지웠는데, 이것이야 말로 최상의 공평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단지 이것만이라고 한다면, 하극상의 현실에 대한 단순한 대책으로서 전통적인 신분․계급의 고정화를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지만, 실은 그는 현인을 채용하여 사람의 덕에 맞게 위계를 순서지워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또한 천한 신분으로부터 귀하게 되고, 우자(愚者)에서 지자(知者)가 되고, 빈자(貧者)에서 부자가 될 수 있는 도로써 학문을 들어, 개인의 노력․능력에 의해서 최고의 명예와 부귀가 얻어지는 것도 보증하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예의 내용은 그에 의하면 천지를 제사지내는 의식을 비롯하여 조선(祖先)의 제사, 생사시(生死時)의 의례 등 종교적 의례 외에 일상생활 제반의 규칙에서 군사나 나라의 행정제도에 이르기까지, 무릇 인간생활에 관계되는 모든 것에 관한 규범이고, 요컨대 ‘인도(人道)의 극(極) 즉 표준(標準)’(「禮論篇」)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성악론을 제창하는 그는 맹자와 같이 도덕적 규범을 인간에 내재하는 것으로 할 수가 없고, 사회로 하여금 도리에 맞게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외적 규범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그와 같은 규범의 제정자를 그는 선왕 혹은 성왕이라고 했다.  선왕이나 성왕은 만인과 성을 똑같이 가지면서 훌륭하게 성을 변화시켜 성인이 되어 예를 만들었다라고 하는 그의 이론은 성악론으로서는 궁한 면이 있지만, 예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의 입장으로부터 보면 그 작자(作者)는 성인이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순자는 고금의 시대는 달라도 사회는 똑 같고, 그것을 다스리는 도리도 같은데,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성인뿐이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사회를 완전히 정태적(靜態的)으로 받아들이고 역사적 발전은 생각하지 않았다.  성인이 작위한 예는, 영원히 받아들여져야 할 보편타당성을 이 불변의 사회를 대상으로 하여 확실하게 부여받는 것인데, 오제(五帝) 이래 전하여 진 성왕의 치적을 보는 데는 가장 현대에 가까운 왕에게서 볼 수밖에 없음을 그는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후왕설(後王說)이다.  현대에 가장 가까운 왕은 말할 것도 없이 현재의 왕인데, 순자의 시대에 즉해서 말하면, 주왕조는 거의 멸망했고 그 문화는 유자(儒者)의 군자에 의해서 겨우 전해지고 있다고 그는 보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이 천하를 통일하여 왕이 되야 할 자는 군자가 전하는 예의 실천자이지 않으면 안되고 「유효편」(儒效篇)에 보여지는 것과 같은 유(儒)의 도의 실효성과 당위성의 주장은 여기에 근거가 있다.  어쨌든 후왕(後王)의 권위는 선왕(先王)과 완전히 동등하다고 생각되어, 후왕(後王)에 의해서 새로이 예가 제정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왕(先王)의 예와 동등의 존엄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성왕 작례(作禮)의 이론과 함께 후왕(後王) 작례(作禮)의 정당성을 이론화하는 근거로도 될 수 있는 것이고, 당시의 권력자에 의해서 제정된 법령에 절대의 권위를 부여하는 법가 사상의 대성자 한비자 등이 순자의 문하에서 나온 것도 또한 당연했다.
또한 이러한 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가지고 태어난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외면적인 방법으로 적습(積習)의 방법이고, 또 하나는 내면적인 방법으로 마음(心)을 집중하는 방법이다.  어느 것이든 본성의 질적 변화를 기도하는 것에 있어서는 일치하고 있다.

2) 한 비 자

한비자에서는 윤리가 아닌 인간지배 이론 즉 치국(治國)의 방법만이 이야기되고 있다.  한비자의 치국방법은 법(法)․술(術)․세(勢)이다.  그는 자신의 법․술․세 사상을 전개함에 있어 그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당시의 유력한 치국방법이었던 인의(仁義)에 의한 치국(治國) 방법을 전적으로 부정함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한비자의 진단에 의할 것 같으면 당시는 기력(氣力)을 다투어 서로 이익을 쟁취하려고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전체의 공리(公利)를 추구하고 사리(私利)를 통제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인의의 방법에 의할 것 같으면, 오히려 사리(私利)를 조장하게 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八說篇」) 바로 망국(亡國)의 방법으로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인의 등의 방법은 이미 지나간 시절의 방법으로서 이미 지나간 시절의 방법만을 이야기해서는 현실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함을 이야기하면서 당시의 인의를 이야기하는 유자(儒者)들을 비판하고 있다.(「顯學篇」)  한비자는 이러한 비판과 함께 자신의 법․술․세 사상을 천명하고 있다.
한비자의 법․술․세 사상은 신불해(申不害)의 술, 공손앙 즉 상앙의 법․신도(愼到)의 세의 사상을 자신의 사상으로 비판 수용하고 있다.  먼저 법과 술에 대해서 보면, 법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으로서 신하가 그 법을 스승으로 삼아 운용하고, 술은 뭇 신하를 다스리는 것으로서 임금이 직접 잡고서 운용하는 것이다.  법은 임금에 의해서 직접 만들어진 실정법인데 그 내용은 백성에 대한 형벌의 규정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반해 술은 임금만이 몰래 가지고 신하를 부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보여 주어서는 안되는 통치기술이 되겠다.  이러한 술의 운용방법이 바로 한비자의 형명참동(刑名參同) 사상이다.  형명참동이란 신하의 말과 신하의 행위의 결과와의 일치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임금이 올바른 판단만 가지고 있다면 이 형명참동에 의해서 아무런 하는 일 없이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하가 항상 언행일치하고 자기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한다면 법의 운용 역시 올바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 나라는 다스려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비자는 무위의 정치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면 도의 경지를 알 수 있듯이 임금이 자신의 욕망이나 의지를 나타내지 않으면 신하의 말이나 행위를 올바르게 판단하게 되어 무위무사로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의 무위무사란 임금의 치국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밖으로 나타내어 적극적으로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렇게 되면 신하는 임금의 판단을 흐리게 할 수가 없고 따라서 당연히임금은 신하의 움직임을 정확히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한비자의 무위사상은 노자의 자연철학적 무위를 정치철학에 있어서의 무위로 변용시킨 것이다.
이러한 법․술에 의할 것 같으면 나라 전체의 공리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법을 만든 것은 사람에게 이(利)를 추구하는 본성이 있고 따라서 그것이 사리(私利)만을 추구하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을 만든 기준 역시 그러한 인간의 본성에 근거하여 만들고 있다고 한다.  사람의 인정(人情)에는 좋아하고 싫어함이 있는데 이러한 인정(人情)을 그대로 놔두게 되면 사리(私利)로 흐르게 된다.  그래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인정을 상벌이라는 일정한 틀에 맞추어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법의 작용이 되겠다.  그런데 이 상벌이 정해져 있다고는 해도 백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좋아하는 상을 받고자 하고 벌을 피하고자 한다.  이것 또한 이(利)를 좋아하는 인간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한 사실이 되겠다.  그래서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상을 분명히 하고 형벌을 엄격히 해야 한다.  임금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백성들을 다 잘 살게 하는 것이 공리이고, 다스림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사욕을 행하지 못하게 형벌을 가하는 것은 백성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형벌이라는 것은 백성들을 이롭게 하기 위한 도구이고 형벌의 궁극적 목적은 백성들이 모두 이롭게 되서 형벌이 없어지는 상태(以刑去刑)라고 할 수 있다.
세(勢)라고 하는 것은 권세이다.  한비자는 이것을 수레의 말에 비유하고 있는데, 수레는 말이 이끄는 데로 가기 때문에 임금의 권세 역시 말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권세가 있음으로 해서 나라를 장악하여 신하에게 술을 사용할 수 있고, 법에 권위가 서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권세는 신하에게 양도하거나 신하와 나누어 가지거나 특히 신하에게 잃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하루아침에 임금의 권세는 사라지고 주권자로서의 지위가 위태롭게 된다.
이상에서 법․술․세라고 하는 한비자의 치국방법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이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치국을 기대할 수가 없다.  세를 가지고 법을 공포․실시하고 술에 의해서 신하를 조종할 때 치국은 완성되고 공리가 획득되게 된다.



제2장 중세철학  

제2장  중세철학


제1절  개   요


진(秦)의 뒤를 이어 천하 통일한 한(漢)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진의 전철을 밟지 않고 어떻게든지 확고한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당시 한초(漢初)의 지배권력이 확고한 체제를 위한 이론을 필요로 했을 때 활발히 움직인 것은 유가였다.  그 중에서도 주축이 되는 역할을 한 것은 춘추학자(春秋學者)들이었다.  유교의 국교화(國敎化)를 추진한 동중서(董仲舒, 前176~104) 역시 춘추공양학자(春秋公羊學者)이다.  동중서는 군주(君主)의 통치의 필요성을 인성론적(人性論的)인 측면에서 긍정하고 있다.  즉 인간의 본성은 선도 악도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후천적 교육에 따라서 선으로도 악으로도 될 수 있는 것인데, 선으로 되기 위해서 ‘왕의 교화’가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 이처럼 강대한 군주권을 긍정하면서도 그 횡포나 전단(專斷)을 규제하기 위해 동중서 특유의 재이사상(災異思想)을 만들어냈다.
이 재이사상은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동반하여 설명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상을 이야기함에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기(氣)․음양(陰陽)․오행(五行) 설을 종합하여 天과 人을 설명하게 됐다.  이러한 天․人을 설명함에 기․음양․오행을 사용한 것은 이후 한대(漢代)의 사상 전체에 영향 끼치게 되고, 한대사상의 특징을 이루게 한다.  또한 동중서의 재이사상은 그 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그런데 동중서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이 재이사상은 미래 예언적인 성격을 띄게 되면서 참위(讖緯) 사상을 불러 일으키게 되고, 따라서 사회는 점차 天 중심, 神 중심으로 되면서 인간의 가치는 하락하게 되고 어지러워져 갔다.
이러한 어지러운 사회를 만든 참위설 등을 비판하는 사상이 이때 일어난다는 것은 또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가담한 사상 전체를 비판 철학이라고 일반적으로 부르고 있다.  이 때의 참위사상의 유행에 대해서는 전한(前漢)을 찬탈한 왕망(王莽)이 이 참위설로 무장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판사상가로는 여러 사람이 있지만 가장 대표되는 사람이 왕충(王充, 27~96?, 字는 仲任)이다.  왕충 역시 한(漢)의 경향을 이어받아 천(天)․기(氣)․인(人)으로 자신의 사상을 체계지워 모든 신비적인 요소를 배척하게 되는데, 따라서 똑같은 천․기․인에 의한 해석이지만 동중서와는 다른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시대에 따른 해석의 결과가 아닐까 한다.  어쨌든 왕충은 의지적인 천을 부정하고 그와 함께 모든 신비적인 것을 부정하면서, 노자(老子)의 자연(自然)을 가지고 와서 그 근거로 삼고 이론정립하고 있다.  왕충 이후 왕충의 사상이 점차 사상계에 영향을 끼치면서, 급기야는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에 도가(道家)․도교(道敎) 사상의 유행을 열게 되는 디딤돌 역할을 하게 됐다고 보아진다.
그후, 위진(魏晉) 이후로 되면 점차 도가사상이 유행하게 되고, 그에 힘입어 인도에서 건너온 불교가 세상에 점차 퍼지게 되면서 사상계는 유불도 삼교가 서로 교섭하면서 변화해가는 시기가 된다.
유교는 처음 후한말 경학의 유행을 이어서 문자를 훈고하는 말절(末節)에 치우쳤지만, 이윽고 노장의 철학을 받아들인 새로운 경학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새로 일어난 경학은 진(晉)의 천도와 함께 강남으로 옮겨지고, 북방에는 훈고를 중시하는 옛 경학이 남았기 때문에 이에 남북양조의 분립과 함께 경학도 또한 남학(南學)과 북학(北學)으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수(隋)가 천하를 통일했기 때문에 경학도 자연히 절충적 경향을 가지게 됐는데 결국 남학이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고 마침내 당대(唐代)에 들어가서 ‘오경정의’(五經正義)가 편찬됨에 이르러 남학중심(南學中心)의 경학으로 통일됐다.
다음에 노장의 철학은 새로 들어온 불교사상 중 특히 노장학에 유사한 반야사상에 이해를 도와서 마침내 삼론학(三論學)의 융성을 재촉하고, 삼론학(三論學)은 다시 천태(天台)의 흥기를 재촉했는데, 현장(玄奘)에 의해서 가져와진 유식종(唯識宗)에 의해서 일변되어 마침내 화엄종(華嚴宗)이 성립됐다.  마지막으로 후한말에 일어난 민간의 신앙은 처음 노장의 철학을 채용하고 나중에는 불교의 철학도 받아들여 여기에 도교라고 칭하는 종교를 확립시켰다.


제2절  천(天)․기(氣)․인(人)


1. 동중서(董仲舒)

1) 음양 및 오행설

동중서는 음양가의 음양오행설을 받아들여 실체적 고찰을 더하여, 여기에 조직체계를 부여함에 의해서, 한대유가사상사상(漢代儒家思想史上)에 있어서 음양 및 오행설이 차지하는 비중을 상당히 크게 했다.  동중서의 음양 및 오행설은 ꡔ춘추번로ꡕ(春秋繁露) 중의 「음양위」(陰陽位), 「음양종시」(陰陽終始), 「음양의」(陰陽義), 「음양출입」(陰陽出入), 「양존음비」(陽尊陰卑), 「천지음양」(天地陰陽) 및 「오행대」(五行對), 「오행지의」(五行之義), 「오행상생」(五行相生), 「오행상승」(五行相勝), 「오행순역」(五行順逆), 오행오사(五行五事) 등의 제편에 보인다.  동중서의 天은 우주의 절대자로서의 종교적인 의미도 있지만, 또한 기계론적인 바도 있다.  우주론에 있어서의 天은 그것이다.  동중서는 “천지의 氣가 합하여 하나가 되고, 나뉘어져서 음양이 되고, 나뉘어져서 사시(四時)로 되고, 나뉘어져서 오행(五行)으로 된다.”(ꡔ春秋繁露ꡕ 「五行相生」)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氣), 음양(陰陽), 사시(四時), 오행(五行)을 추축으로 하는 소박한 우주구조론이다.  기는 우주간에 충만한 눈에 보이지 않는 미립자인데, 그는 기의 실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천지의 사이에는 음양의 기가 있어서 항상 사람을 윤택하게 하고 있다. 그것은 물이 항상 고기를 윤택하게 하고 있는 것과 같다.  물과 다른 점은, 물은 눈에 보이지만, 기는 눈으로는 볼 수 없을뿐이다.”(「天地陰陽」)  천지간에 충만한 一氣는 음과 양의 二氣로 나뉘어진다.  음양의 二氣는 서로 상반된 성질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음양 二氣는 일종의 작용을 가지고 있다.  춘하추동의 기후의 변화는 음양활동이 초래한 자연의 결과이다.
이상 설명한 바의 동중서의 음양적 우주론은 상당히 자연적 기계론적인데, 그러나 동중서가 조직한 학문체계, 즉 춘추공양학은 소위 天人의 學이어서 天과 人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그것도 현실의 인간생활을 근본으로 하여 이것을 천도(天道)에 투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도는 물론 인간생활에 있어서의 도덕․정치․교화 모든 것이 음양 및 오행설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이다.  음양 二氣는 그 본래성으로부터 본다면 완전히 상대적 관계에 있는 것이고, 그 사이에 존비우열(尊卑優劣)의 차별이 있을리가 없는 것이다.  단지 양자의 사이에 성질적 차이가 있고, 그 이질적인 두 가지 성질의 협력에 의해서 생성발전이 행하여진다고 보는 것이다.  「역전」에는 다만 양에 능동적 성격을 가지게 하고, 음에 수동적 성격을 가지게 해서 양존음비(陽尊陰卑)의 구별이 약간 보이는데 지나지 않지만, 동중서에 이르러서 양존음비관(陽尊陰卑觀)은 철저하게 추진되었다.  그는 ꡔ춘추번로ꡕ 「양존음비편」에서, 양을 暖․與․仁․寬․愛․生에 짝지우고 음을 寒․奪․戾․急․惡․殺에 짝지우고, 또한 악에 속하는 것을 전부 음이라고 하고, 선에 속하는 것을 전부 양이라고 한다라고 하고 있다.  그는 음양을 도덕적으로 해석하여, 양을 선, 음을 악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양존음비편」(陽尊陰卑篇)에서 덕(德)을 양에 짝지우고 형(刑)을 음에 짝지워, 음양설이 덕교(德敎)를 주(主)로 하고 형벌(刑罰)을 종(從)으로 하는 정치를 주장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로서 이야기되고 있다.
오행설은 木火土金水 다섯 가지의 기(氣)가 우주계에 존재하고 항상 운동하고 있다고 하여 이 다섯 가지 기(氣)의 관계를 이야히하는 것이다.  동중서는 오행의 의의에 대해서 “行이라고 하는 것은 순환한다는 의미이고, 五行 각각의 운동이 똑같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오행이라고 한다”(「五行相生篇」)라고 하고 있다.  또한 오행의 위치에 관해서 그는 “木은 왼쪽에 있고, 金은 오른쪽에 있고, 火는 앞에 있고, 水는 뒤에 있고, 土는 중앙에 있다.”(「五行之義篇」)고 한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춘하추동 사시의 변화는 음양활동이 초래하는 결과인데, 천지의 기(氣)는 음양으로부터 다시 오행으로 분화하는 것이고, 상세히 말하면 춘하추동의 사시(四時)는 음양으로부터 분화(分化)한 오행활동이 나타내는 바의 결과이다.

木은 동방에 있어서 봄의 기(春氣)를 주관하고, 火는 남방에 있어서 여름의 기(夏氣)를 주관하고, 金은 서방에 있어서 가을의 기(秋氣)를 주관하고, 水는 북방에 있어서 겨울의 기(冬氣)를 주관한다.  따라서 木은 낳음(生)을 주관하고, 金은 죽임(殺)을 주관하고, 火는 더위(暑)를 주관하고, 水는 추위(寒)을 주관한다.(「五行之義篇」)

여기서 木火는 양에 속하고 金水는 음에 속함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土의 위치 및 그 작용이 보이지 않는데, 앞에서 이어지는 문장에 土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있다.  오행을 춘하추동의 네 가지에 배당하는 것은 대체로 무리한 일이지만, 그는 오행 중에서 남은 土를 중앙에 있어서 木火金水에 내통하여 그 작용을 돕게 한다.  木火金水도 土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그 작용을 발휘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렇게 오행중 土에 가장 중요한 작용을 부여하고 있음으로 해서 土를 천윤(天潤) 혹은 天의 고굉(股肱)이라고 하고, 또 오행의 主라고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오행과 음양의 관계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ꡔ춘추번로ꡕ 「천변재인편」에 잘 나타나 있다.  음양과 오행은 상호부조의 관계에 있고, 음양도 오행의 작용에 의해서 왕성하게 되지만, 양이 왕성할 때는 또한 木火를 도와서 춘하로 되게 하고, 음이 왕성할 때는 또한 金水를 도와서 추동으로 되게 하기 때문에 주동적 입장에 있는 것은 역시 음양이다.  木火金水가 소장(消長)활동을 하는 것은 음양이 이것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음양과 오행은 동중서에 있어서 비로소 밀접한 관계가 부여되게 됐다.
오행 상호의 관계에 대해서는 상승(相勝)과 상생(相生)의 두 종류가 있다.  오행상승(五行相勝)은, 木은 土에 이기고, 金은 木에 이기고, 火는 金에 이기고, 水는 火에 이기고, 土는 水에 이긴다.  즉 후자가 전자에 이겨내는 원리이고, 이것은 이미 전국말(戰國末)의 추연(鄒衍)이 이야기한 것으로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이 이것이다.  그후 木은 火를 낳고, 火는 土를 낳고, 土는 金을 낳고, 金은 水를 낳고, 水는 木을 낳는다는, 즉 전자가 후자를 낳는다고 하는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원리가 생각되어졌다.  이것은 오행상승을 보충하는 의미에 있어서 발생한 것이다.  이 두 계통의 오행 관계는 동중서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는데, 동중서는 이것을 병존하게 해서 각각 그 의의를 인정하고, 여기에 대해서 통일적 해석을 부여했다.  ꡔ춘추번로ꡕ 「오행상생편」에 “오행은 오관(五官)이다.  나란하게 서로 낳고, 사이하여 서로 이긴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木火土金水의 계열에 있어서 ‘나란하게 서로 낳는다.’고 하는 것은 첫째가 둘째를 낳고, 둘째가 셋째를 낳고, 셋째가 넷째를 낳고, 넷째가 다섯째를 낳는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또 ‘사이하여 서로 이긴다.’고 하는 것은 木이 하나 떨어진 土에 이기고, 火가 하나 떨어진 金에 이기고, 土가 하나 떨어진 水에 이기고, 金이 하나 떨어진 木에 이기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동중서는 오행관계에 있어서 상승과 상생이 병존하는 입장을 취하여 각각 그 의의를 인정하고 있는데, 상승(相勝)․상생(相生)을 혁명 혹은 선양(禪讓)의 원리로서 사용한 곳은 한 곳도 없다.  그가 추연의 오덕종시설을 이어받아 혁명의 원리를 이야기하고 역사관을 제기하고 있는 것은 그 삼통설(三統說)에 있어서이다.  그러면 그는 오행상승․상생의 원리로써 무엇을 설명하려고 했는가.  그 주안점은 음양설과 똑같이 천도에 근거한 현실의 인간생활에 있어서의 도덕(道德)․정치(政治)․교화(敎化)의 문제였다.  「오행상승편」이나 「오행상생편」에서, 오관(五官)으로서의 오행(五行)의, 木을 사농(司農)에 배당하고, 火를 사마(司馬)에 배당하고, 土를 사영(司營)에 배당하고, 金을 사도(司徒)에 배당하고, 水를 사구(司寇)에 배당하여, 일찍이 그 관(官)에 있었던 인물의 행위로부터 그 상승․상생관계를 기술하고, 게다가 “사람으로 하여금 반드시 그 차례로써 하게 하고, 관인(官人)으로 하여금 반드시 그 능함으로써 하게 했다.  天의 수(數)이다.”(「五行之義篇」)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상승․상생의 원리로써 관직간에 있어서의 질서확립의 법칙으로 한 것이고, 관리로 하여금 각각 그 직무에 충실하게 하여, 군주의 통솔권을 강화하는 것에 그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2) 재이설(災異說)

재이(災異)라고 하는 것은 일식․혜성․폭풍․홍수․한발 혹은 한서(寒暑)의 추이(推移)의 변조(變調) 등 자연계에 일어나는 이변 현상을 말하는데, 재이설(災異說)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 재이가 일어나는 원인을 군주의 악정(惡政)에 대한 천견(天譴)이라고 보는 신비적인 일종의 정치설이고, 동중서는 여기에 천인감응설과 음양설을 결합시켜서 하나의 사상체계를 구성한 것이다.  동중서는 재이의 의의에 관해서, 그 작은 것을 재(災)라고 하고 큰 것을 이(異)라고 하여, 만약 왕에게 악정이 있으면 天은 반드시 재(災)를 내려 이것을 견고(譴告)하고, 그래도 허물을 회개하고 고치지 않을 때는 다시 이(異)를 내려서 이것을 위협한다고 하는 것이다.
동중서의 재이설은 원래 ꡔ춘추ꡕ의 재이(災異)에 대한 해석으로서 구성된 것이지만, 그것은 반드시 「공양전」의 본 뜻은 아니다.  재이를 해석함에 천인감응을 이야기하고 음양오행을 이야기하는 것은, 「공양전」의 발전적 해석이고 그의 독창설이다.  단지 동중서가 재이설에 의해서 재이를 해석할 경우, 재이가 일어나는 이유를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이러한 악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재이가 일어났다고 하는 것이고. 재이의 발생으로써 미래에 있어서의 사회상․정치상의 변사(變事)를 예측하는 것은 아니다.  재이로써 미래의 변사(變事)를 예측하는 것은 소위 예언이고, 참위(讖緯)가 이것이다.  천인감응을 이야기하는 재이설은 신비적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지만, 그는 이러한 형식을 빌어서 왕의 잘못을 고쳐 선에 옮기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고, 그러므로 재이설에서는 유가정치사상에서의 왕의 덕화(德化), 군주의 도덕적 실천이 그 목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동중서는 ꡔ춘추번로ꡕ의 여러 곳에서 천인일원(天人一源)의 이치를 이야기하여 인신(人身)은 하나의 소천지(小天地)임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군주의 악정에 대해서 하늘이 부여하는 경고가 재이인데, 동중서는 군주의 악정에 대해서 하늘이 민감하게 이것에 반응하는 것은, 음양의 기가 이것을 매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 음양설이 재이설 구조상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재이(災異)의 본질을 음양의 기라고 본 것이다.  음양은 천지간에 충만한 기인데, 천인일원(天人一源)의 이치에 의하여 사람에게도 천지와 똑같은 기가 있다.  그리고 인간에 있어서의 음양의 기와 천지에 있어서의 음양의 기는 근원을 같이 하고 유(類)를 같이 하기 때문에, 양자의 활동이 서로 교류 감통(感通)하여 재이의 발생으로 된다.  즉 天人의 기 사이에 일종의 자연감통작용을 발생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천지의 음양의 기와 사람의 음양의 기가 감응할 때 어떻게 해서 재이가 발생하는가?  동중서는 이것을 음양의 기의 부조화에 의한다고 한다.  음양이 조화이면 재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음양의 기의 부조화라고 하는 것은 음기가 강대하고 양기가 약소하게 되는 것이다.
동중서의 음양오행설, 재이설에는 상당히 이지적인 점이 있고 진보적인 의의가 있다.  동중서가 말하는 天은 때로는 의지가 있는 인격신으로 보여지는 점도 있지만, 실제로는 작용의 원리로서의 기이고 인격신은 아니다.  그러나 자연계에 발생하는 자연현상의 이변을 천견(天譴)이라고 하여, 왕의 행정을 규제하려고 하는 그의 정치사상은 비과학적 신비사상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당시에 이와 같은 신비사상이 진지하게 주장되고, 또 사람들 사이에 진지하게 믿어진 것은, 한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연과 인간생활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고, 하늘은 인간생활의 근거이고, 天을 마음의 지주로 하여 일상생활이 영위되고, 天과 사람의 감응이 인간의 감정으로서 밑바닥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와 같은 절실한 사회사상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에는 황당무계라고 생각될 듯한 재이설도 훌륭하게 이지적인 사상체계로서 일반적으로 지지된 것이다.


2. 비판사상 - 왕충(王充) -

1) 천(天)과 기(氣)

(1) 천(天)
당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던 사상에 대한 왕충의 비판은 결국 天의 이해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에 있어서는 天이 바로 최고의 원리이자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에, 당시 일반적 생각을 부정한다는 것은 바로 당시의 天의 이해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시 인격 신으로 간주하던 天에 대해서 왕충은 어떠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天이란 형체가 있고, 그 작용은 무위자연적인 작용을 하는 그러한 것이다’라고 왕충은 결론내리고 있다.  이러한 天에 대한 정의는 물론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은 탓도 있겠지만 자신의 처지와 당시의 사회상에 그 원인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만약 그 당시의, 天을 인격신으로 간주하고 있던 것을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면, 왕충의 비판정신은 정당화되지 못하고, 또한 자신감도 쓸데없는 편견에 지나지 않고, 자기의 자질도 그렇게 훌륭한 것이 되지 못하게 되고 만다.  왜냐하면 왕충은 낮은 관리로 끝났고, 또한 당시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던 인격신으로서의 天은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인간세계를 항상 굽어보고 인간의 자질 및 행위에 따라 정당한 대응을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사회상을 보면, 미신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러한 미신의 배후에는 바로 天 즉 인격신이 있었던 것이다.  의지를 가진 天이기에 그러한 天의 생각을 알려고 노력도 하고 또한 神이기에 인간도 신선이 될 수 있다는 확신 아래 노력하기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비판은 결국 天 즉 인격신에 대한 비판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충에 있어서의 天은 인격도 가지지 않고 神도 아닌 어떤 것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왕충은 결국 天이란 의지를 가지고, 어떠한 행위를 자기의 의지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의지도 가지지 않고 단지 자연적인 작용만 하는 것이고, 또한 神이 아니라 형체를 가진 어떠한 것이라고 정의내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왕충이 天의 작용을 이렇게 정의내린 데는 도가의 무위자연사상에서 상당한 믿음을 얻고 있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무위자연이라는 개념만 빌려왔을 뿐 무위자연의 본체인 도(道) 그 자체를 빌려온 것은 아니다.  왕충은 형체가 있는 天을 그 본체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天이란 형체를 가지고 무위자연적 작용만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내린 왕충 나름대로의 근거를 살펴보기로 하자.
왕충의 그러한 정의는 스스로가 이야기하고 있듯이, 유가의 ‘天地夫婦’(천지는 부부이다.), ‘夫婦法天地’(부부의 도는 천지에 본받는다.)라는 관점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유가와 똑같은 관점에서 출발하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다른 천론(天論)에 도달했는가 하는 것에 의문이 가지만, 그것은 각기 자기의 입장에서의 해석차이에 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 유가의 경우는 인격신으로서의 天을 굳게 믿으면서 ‘天地夫婦’, ‘夫婦法天地’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왕충의 경우는 ‘天地夫婦’, ‘夫婦法天地’만을 굳게 믿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왕충은 당시 유가들에 대해서 “부부의 도가 천지로부터 본받는다는 것을 알면서, 어째서 부부의 도를 미루어서 천지를 논할 줄 모르는가”하고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왕충은 天이나 天의 작용에 대해서 너무 추상적인 해석을 피하고, ‘天地夫婦’, ‘夫婦法天地’라는 관점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현실적으로 해석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 해석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天의 본체에 대해서 보면, ‘天地夫婦’에 의거하여 해석한다.  현실세계의 부부를 보면 그 구조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천지가 부부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구조를 같이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왕충은 ‘地’가 형체가 있으니까 ‘天’도 형체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고 있다.  또 天의 작용의 근본이 되는 天의 성격에 대해서도 地로부터 그 근거를 구하고 있다.  왕충에 의하면 天은 그 당시 유가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무런 의지도 없다고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天에 ‘口目’(입과 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天에 ‘口目’이 없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로 地에 의해서 알 수 있다고 하고 있다.  地라는 것은 흙덩어리뿐이고 ‘口目’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흙덩어리인 地의 夫로서의 天 역시 ‘口目’이 없다는 것은 확연한 사실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 ‘대저 초목은 의지가 없다’(夫草木無欲)에서 볼 수 있듯이 ‘口目의 類’ 외에는 어떠한 것도 ‘欲’(의지)이 없다고 하는 확신을 그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왕충은 ‘천지는 부부이다’라고 하는 관점으로부터, 地가 형체를 갖고 의지가 없으니까.  天 역시 그와 같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天의 형체가 없고 무의지임을 증명하여 그 이전의 天에 대한 생각을 비판하고 있다.
다음은 이러한 형체를 가진 무의지의 天의 작용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미 밝혔듯이 天의 성격은 무의지이니까 그 작용 역시 무의지적인 것 즉 ‘무위자연’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이 天의 작용의 무위자연성을 어떠한 사실에 의거하여 현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가.  바로 앞서 말한 ‘부부의 도는 천지를 본받는다’라는 사실에 의거하고 있다.  부부의 도는 바로 천지의 도의 축소판이기 때문에, 부부의 도를 보면 천지의 도도 알 수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부부의 도란 기(氣)를 합하여 자식을 낳는 것밖에 없으니까.  천지의 도 역시 기(氣)를 합하여 만물을 낳는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부가 기를 합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사람이 기를 베푸는 것은 자식을 낳고자 해서가 아니라 기가 베풀어져서 자식이 저절로 생긴다”라고 하여, 기가 저절로 나와서 합쳐지는 것이지, 자식을 낳아야겠다는 생각에 의해서 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왕충은 인간의 부부가 무위자연적인 움직임에 의해서 자식이 생겨나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천지 역시 무위자연적인 움직임에 의해서, 만물이 생겨난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天의 작용의 무위자연성을 증명하고 있다.

(2) 기(氣)
이상과 같이 天에 대해서 자기나름의 해석을 하여 이전의 인격신적 요소를 전부 배제하고, 형체가 있고 무위자연적 작용을 하는 것으로서 규정지어 놓았다.  그러면 여기서 天의 작용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위에서 살펴봤듯이 天의 작용의 내용은 氣를 베풀어내어서 地의 氣와 합하여 만물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天의 작용이라고 해도 실제로 작용하는 것은 氣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앞의 이야기로부터도 알 수 있는 사실이겠지만, 다음의 왕충의 말로부터 더욱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겠다.  “天의 운행은 氣를 베푸는 것이다.  천체가 움직이면 氣가 나오게 되고 그래서 만물이 생겨난다.  사람이 활동하여 氣를 베푸는 것과 같은데, 신체가 움직이면 氣가 나오게 되고 그래서 자식도 생겨나게 된다”(「自然篇」)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이 몸을 움직임에 따라 氣가 나오고 그러한 氣가 합하여 자식이 생겨나는 것과 똑같이, 天이 움직임(운행함)에 따라 氣가 나오고 그 氣로 인해 만물이 생긴다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 天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天은 그 형체안에 氣를 품고 있고, 그러한 氣는 天의 형체가 움직임에 따라 밖으로 베풀어져 나오고, 밖으로 베풀어져 나온 氣는 天의 무위자연한 성격을 그대로 지닌채 무위자연하게  地氣와 합일되어 만물이 생겨나게 되는 근원이 된다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볼 때 이 우주안의 모든 작용(현상)이 天의 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직접 작용하는 작용자에 대해서 본다면 天의 작용은 그 형체가 움직이는 것뿐이다.  그러한 움직임에 따라 氣가 天 밖으로 나오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氣가 작용자가 되어 직접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天이란 것은 무위자연한 법칙을 제공하는 근원자이고, 氣는 그러한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 작용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天과 氣에 대해서 자기나름대로의 이론적 체계를 지움으로써 자기가 의도했던 대로 인간세계를 포함한 자연현상 모두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무위자연적인 성격을 지닌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발판을 놓게 됐다.

2) 인간세계

그런데 위와 같이 天과 氣에 대해서 이론을 세우고 무위자연적 세계를 기초놓았다 해도 아직 하나의 문제점이 남아있다.  즉 인간세계에 대한 문제이다.  天이 무위자연적 성격을 가지고 氣가 무위자연하게 작용한다고 하면, 당시의 인간세계란 우연한, 아니면 필요에 의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왕충은, 자기의 이론이 당시의 왕에 대한 비판이 아니고 또한 당시의 인간세계의 질서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왕충은 당시의 인간세계의 질서를 인정함으로 해서 그 질서의 근거를 어디엔가에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리 하여 왕충은 별에서 그 근거를 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 역시 ‘天地夫婦’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天과 地는 부부이기 때문에, 땅(地)에 있는 인간사회가 인정된다고 하면 하늘(天)에 있어서도 인간사회와 닮은 어떠한 형태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왕충은 인간세계에 대응하는 세계를 별의 세계에 설정해 두고, 인간세계의 사람의 수만큼 사람에게 해당되는 별이 있고, 그러한 별의 존비대소(尊卑大小)의 위치에 따라 거기에 대응하는 인간의 지위가 정해진다고 하고 있다.  물론 그렇게 대응되는 것은 그러한 별의 氣가 인간에게 부여됨으로 해서이다.  그러한 별의 氣가 인간에게 부여되는 것은, 별의 움직임에 따라 별의 氣가 밖으로 나와서 天의 氣 속에 포함되어 있다가 인간에게 들어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세계는 하늘(天)에 설계된 별의 세계로 인해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해야만 하겠다.

3) 기(氣)와 인간세계

위에서 보듯이 인간의 사회생활에 있어서의 모든 것, 즉 부귀빈천 등 모두가 어떠한 별의 氣를 받는가에 의해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버린다.  인간의 어떠한 힘에 의해서도 바뀌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자질의 현우(賢愚)에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왕충은 인간의 가치를 사회적인 관직이나 빈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선한가에 그 기준을 두고 있다.
왕충은 인간의 사회생활 면뿐만 아니라, 수명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즉 인간이 태어날 때 받은 氣의 양에 의해 그 사람의 수명은 결정되어 버리고 -氣의 양이 많으면 수명이 길고, 氣의 양이 적으면 수명이 짧음-인간의 노력여하와 아무 관계없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은, 무위자연적 氣에 의해서 인간이 형성될 때 이미 필연적으로 정해져 버리는 운명결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회에 있어서의 인간의 필연성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인간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하여 노력하게 되지만, 결과는 필연적으로 결정된 운명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는, 인간사회의 모든 것이 항상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氣의 측면에서 보면 필연적이고, 인간의 의지로부터 보면 항상 우연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氣의 자연한 세계의 일부분으로, 氣의 세계로부터 본다면 자연한 세계로밖에 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氣의 자연스러운 세계 위에 인간의 필연적인 세계가 있고, 그러한 인간의 세계 속에서 인간은 항상 우연성을 맛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무위자연한 天과 氣의 성격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세계의 자연성․필연성․우연성을 이야기한 것은 결국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기의 처지로부터 본 사회의 비합리성, 또한 사회상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인간세계의 정립으로부터 당시 사회상이 전면적으로 부정되었는데, 그러한 부정은 달리 말하면 당시의 가치관에 대한 부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당시로 봐서는 천인감응설이 유행하던 시대였으니까, 부귀가 곧 훌륭한 자질로 연결되고 그것이 곧 가치있는 것이 됐다.  원래 천인감응설은 도덕적 인간을 만들기 위한 도식으로써, 인격신인 天을 내세움으로써 항상 성실한, 즉 명실상부한 인간이 되도록 하였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실(實)은 버려버리고 명(名)에만 급급하게 됐는데, 당시의 세태가 바로 그러하였다.  그래서 왕충은 높은 관직, 장수(長壽) 등의 인간 외적인 것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인간의 정신(心)에 진정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우기 위해서, 인간의 心 이외의 것에는 전부 필연성을 부여하고, 인간의 心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오로지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제3절  삼교교섭(三敎交涉)


1. 유교에서 노장, 불교로의 사상전개

1) 유교에서 노장(老莊)으로

위(魏)나라의 창업주(創業主)인 조조(曹操)의 뒤를 이은 문제(文帝)는 학관(學館)을 일으키고 박사의 인원을 늘려서 유학의 흥륭을 계획한 사람인데, 당시의 학자로 왕숙(王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아버지 왕랑(王郞)은 금문학(今文學: 今文이란 한나라 시대에 통용되던 문자라는 의미인데, 이러한 今文으로 쓰여진 경서에 의해서 이야기되는 경학을 바로 今文學이라고 한다.  이 今文學이란 것에 대해서 古文學이란 것이 있는데, 선진시대의 고문자로 쓰여진 경서에 의해서 이야기되는 경학을 말한다)을 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연 그 아들 왕숙(王肅)도 금문학에 능통했다.  왕숙은 또 가규(賈逵) 마융(馬融)의 학(고문학)을 좋아하여, 금고문을 절충하여 ꡔ서ꡕ(書)․ꡔ시ꡕ(詩)․ꡔ삼례ꡕ(三禮)․ꡔ좌씨전ꡕ(左氏傳)․ꡔ논어ꡕ(論語)의 주(注)를 써서 모두 다 학관에 채용됐다.  그가 금고문을 절충한 태도는 정현(鄭玄)과 같지만, 그는 정현에 반대하여, 정현이 금문에 의거한 것은 그는 고문을 취하고, 정현이 고문을 채용한 것은 금문으로 고쳤다.  그에게 또 ꡔ성증론ꡕ(聖證論) 12권이 있는데, 이 책은 ꡔ공자가어ꡕ(孔子家語)에 의거해서 정현을 논박한 것인데 그가 근거로 한 가어(家語)는 그의 위증(僞增)한 것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일마다 정현에게 반대하고 있는데, 그 의견의 차이점은 주로, 예의 제도와 자구(字句)의 해석으로 대의(大義)에 관한 것이 적다.  그렇게 해서 그후 성증론은 정학(鄭學)과 왕학(王學)의 논쟁의 중심이 되고, 정학(鄭學)을 받드는 마소(馬昭)가 이것을 반박하자 왕학(王學)의 무리 공조(孔晁)가 여기에 답하고, 박사 장융(長融)이 이것을 비판했다.  동시에 손염(孫炎)도 또한 정학(鄭學)을 받들어 ꡔ성증론박ꡕ(聖證論駁)을 저술했는데, 손염(孫炎)은 또한 「이아주」(爾雅注) 6권 및 「이아음」(爾雅音) 1권을 저술하여 문자의 훈고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에 의해서 생각하면 고문학이 일어난 이래 문자의 연구가 중시되어져 점점 작은 문제가 논의되게 됐다고 여겨진다.  이 때의 경학은 주로 문자의 훈고 및 필법이 주요한 문제로 되고 대의(大義)에 관한 것은 없었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유학이 그 근본을 놓아두고 말절(末節)에 치중하게 되자, 그 결과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는 사람은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노장(老莊)의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라 하겠다.
이렇게 해서 당시에 노장사상이 유학을 압도하고 위로 나오게 됐는데, 그 대표자로는 왕필(王弼)과 하안(何晏)을 들 수 있다.  왕필은 그 저술에 「노자주」(老子注) 2권과 「역주」(易注) 6권이 있다.  그의 「노자주」(老子注)는 장자의 사상으로써 노자를 해석한 것이고, 종래의 해석에서 진일보하고 있다.  그의 「역주」(易注)는 「비씨역」(費氏易)에 근거하여 노장의 철학을 빌어서 역을 설명한 것이고, 이 또한 이전에 없는 것이다.  다음에 하안(何晏)도 노장을 좋아하여 노자의 주(注)를 썼는데 나중에 왕필의 노자주를 봄에 이르러, 그 훌륭함에 감복하여 자신의 주(注)를 폐기했다고 이야기되고 있으므로 그 역시 왕필정도의 사람일 것이다.  그에게 또 「논어집해」 2권의 저술이 있다.  「집해」는 그 이전의 논어의 주해를 모아서 부족한 점을 보충한 것이고 그 보충한 부분에는 노장사상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유서(儒書)를 노장사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후한말부터 위초(魏初)에 걸친 고문학의 진전이 문자훈고에만 치우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그러한 반동으로 ꡔ역ꡕ과 ꡔ논어ꡕ에 의해서 유학의 정신을 천명해 보려고 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마침내 노장사상을 빌어와서 ꡔ역ꡕ․ꡔ논어ꡕ의 뜻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후 노장사상의 연구는 날로 번성하여 위(魏)에서 동진(東晉)에 이르는 사이에 무수한 노장주석서가 나왔다.  이와 같은 노장학의 전성은 속사(俗事)를 멀리 하고 청담(淸談)을 귀하게 여기는 일종의 시대사조를 형성했다.

2) 노장에서 불교로

노장학의 전성은 한편에 있어서 단지 청담아론(淸談雅論)을 취하여 마음의 희열만을 즐길려고 하는 일종의 시대사조를 이루었지만, 다른 한편에 있어서 새로 들어온 인도사상 즉 불교의 이해를 도왔다.
불교는 후한초에 중국에 전해지고, 얼마있지 않아 초왕영(楚王英)에게 신봉되어지고 후한말 환제의 대에 이르러 조정에 모셔졌다고 이야기되고 있지만, 정말로 중국인이 불교를 이해하게 된 것은 위진(魏晉) 때부터 일 것이다.  가령 후한에서 양(梁)에 이르기까지의 승려의 전기를 모은 혜교(慧皎)의 ꡔ고승전ꡕ을 펼쳐보면 후한에서 위에 이르기까지의 사이는 단지 불경의 번역에 종사한 역경승(譯經僧)의 전기를 열거할 뿐이고 한사람의 의해승(義解僧)도 나오고 있지 않다.  이것은 아마도 위말(魏末) 이전에 불교는 아직 정말로 중국인에게 이해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고, 중국인이 스스로 나아가서 불교를 이해하려고 시도한 것은 위말(魏末)의 주사행(朱士行)에서 비롯되고 있다.
주사행은 영천(潁川)의 사람으로 일찍부터 높은 이상을 품고 진속(塵俗)을 벗어나 있었는데, 나중에 출가하여 오로지 경전의 연구에만 몰두하여 후한의 축불삭(竺佛朔)이 번역한 ꡔ도행반야경ꡕ(道行般若經)을 애독하여 그 강설을 시도했는데 문장의 뜻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겨 마침내 원본을 찾기 위하여 서역에 가게 됐다.  그후 우전(于闐)에 들어가서 경전을 손에 놓어 제자들을 통해 중국으로 보내게 되지만, 그는 우전(于闐)에서 생을 마쳤다.  이 주사행이 보낸 경전이 바로 ꡔ방광반야경ꡕ(放光般若經)이다.  그후 석도안(釋道安)이 이 반야사상의 선전에 힘을 쏟게 된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고 나서 이 때에 이르기까지 대략 3백 수십년을 경과하고 이 사이에 많은 역경가의 노력에 의하여 무수한 경전이 번역되고 있는데 이들 경전만큼 학자의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 없다.  그리고 이들 반야부의 경전이 중요시되어진 까닭은 반야의 교리와 노장의 사상이 근사한 점이 있고, 노장학의 전성이 이러한 종류의 경전의 이해를 도왔기 때문이다.
반야부경전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諸法皆空’의 이치를 이야기한 것인데, 당시의 학자는 이 공(空) 한자를 해석함에 노장의 무(無)자로써 하고, 그것을 격의(格義)라고 불렀다.  격의라는 것은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데 외전(外典) 즉 노장(老莊)․ꡔ주역ꡕ(周易) 등의 책으로써 한다고 하는 의미이고, 도안(道安)경까지의 학자는 반야의 공을 설명하기 위해서 노장의 설에 의거한 것 같다.  대체적으로 정말로 반야의 교리가 이해된 것은 라습(羅什)이 중국에 와서 대승의 론, 예를 들면 ꡔ中論ꡕ, ꡔ十二門論ꡕ, ꡔ百論ꡕ 등이 번역되 나온 뒤의 일이지만, 라습 이전에도 여기에 근사한 설명이 베풀어지고 있다.  승조(僧肇)의 「不眞空論」이나 가상(嘉祥)의 ꡔ中論疏ꡕ에 의하면 라습이전에 반야의 공을 설명한 학설에 三家의 뜻이 있었다고 한다.  소위 三家의 뜻이란 본무의(本無義)․심무의(心無義)․즉색의(卽色義)의 세 가지이다.
첫째의 本無義는 축법심(竺法深)의 설이다.  本無義란, 가상의 ꡔ中論疏ꡕ에 의하면, 아마도 노자의 천하만물은 有에서 生하고, 有는 無에서 生한다(ꡔ노자ꡕ 40장)라는 사상에 의해서 반야의 空을 설명한 것으로, 이것에 의하면 반야경에 ‘諸法皆空’이라고 설명한 것은 제법, 즉 현상의 본체가 無라고 하는 의미가 된다.
둘째의 心無義는 축법온(竺法蘊)의 설이다.  법온(法蘊)의 心無義는, 반야경전에 ‘一切色法空’이라고 설명한 의미는 일체의 현상이 空無이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고, 나의 마음을 텅비게 하면 색상이 그친다고 하는 의미라고 해석한 듯하다.  이것도 역시 ꡔ노자ꡕ의 「왕필주」에 의거한 해석일 것이다.
셋째의 卽色義라는 것은 지둔(支遁)의 설이다.  지둔은 반야경에 ‘卽色是空’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色(만물)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만물은 실재하고 있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만물의 상(相)이 바로 그 본성이다라고 하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대개 일체의 제법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것이고, 그 일시적인 相으로써 바로 제법의 실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사람은 이 일시적인 相에 집착하지 않고 현허(玄虛)의 경지에 놀아야만 한다고 이야기한 것이 그의 즉색유현론(卽色遊玄論)이고, 같은 생각에서 ꡔ장자ꡕ를 해석한 것이 그의 「소요유편주」(消遙遊篇注)이다.
위의 三家의 뜻에 이어서 도안의 本無義가 나오고 있다.  도안의 本無義는 축법온의 本無와 똑같은 명칭으로 불리어지고 있지만, 그 생각은 상당히 다르다.  대개 도안은 대승경전에 일체의 諸法이 空 혹은 無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은 현상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 아니고, 모든 현상은 인연화합하여 생긴 것이어서, 이 인연화합하여 생긴 만물의 相은 시시각각 변화하여 그치는 곳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만물의 본성이 아니고, 만물의 본성은 변함이 없는 것이고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 것이라고 하는 의미를 제시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도안의 本無義는 지둔의 卽色義와 거의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그래서 가상의 ꡔ中論疏ꡕ에서는 도안의 本無와 지둔의 卽色은 이름은 달라도 내용은 같고, 나중에 나오는 라습 문하의 승조의 不眞空의 설과 같은 뜻이다라고 칭찬하고 있다.  그런데 위에서 서술한 三家의 뜻과 도안의 本無義를 대조하여 고찰하면 축법온의 本無義로부터 心無義에, 心無義에서 卽色義 및 도안의 本無義로 나아감에 따라서 한층더 사상이 진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최초의 本無義는 노자의 철학에 의해서 반야의 空을 설명한 것으로 無를 諸法의 본체로 보고 있고, 다음의 心無義는 왕필의 ꡔ노자주ꡕ에 의해서 空을 단지 인간의 心을 텅비게 하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최후의 지둔과 도안은 空의 의미를 인식론적으로 해석하여, 인간이 인정하는 諸法의 相이 그 眞性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 겨우 반야의 본뜻에 접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노장의 철학이 얼마나 반야의 이해에 공헌하고 있는가를 상상할 수 있음과 동시에, 노장의 사상과 반야의 사상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가도 살필 수가 있다.  요컨대 노장의 無는 대개 본체론적으로 말한 無인데, 반야의 空 혹은 無는 인식론적으로 말한 것으로, 이것이 불교와 노장의 구분이다.  그런데 최초의 학자는 이 구분을 이해하지 않고 바로 노장으로써 불교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지둔․도안이 나옴에 이르러 겨우 여기에 생각이 미쳐서 불교의 정신을 언급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은 후에 라습이 중국에 와서 용수(龍樹)․제파(提婆)의 대승론이 번역됨에 이르러 점점 명료하게 의식됐다.
그럼 여기서 방향을 바꾸어 노장학 자체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위진이래 노장학이 전성기를 이루며 노장의 주석서가 무수히 나온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라습이 중국에 들어오고 난 후가 되면 불교학자에 의해서 쓰여진 노장의 책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는 반야의 사상에 의해서 해석된 것도 있고 三論의 사상에 의해서 해석된 것도 있다.  이러한 것은 그 시대가 불교전성의 시대인 만큼 당연한 결과라고도 하겠다.  반야의 사상은 처음 위진 경에 있어서 노장 철학의 도움으로 겨우 사이비 이해가 부여되어져 있었는데, 동진(東晉) 경이 되면 이해가 진보하여 반야의 사상이 노장과 구별되야 할 점을 의식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육조말(六朝末)이 되면 반대로 반야의 철학에 의해서 노장을 설명하려고 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것에 의해서 육조 때 노장 전성의 사상계가 점차 불교전성의 시대로 변화하고 있는 것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2. 도교(道敎)

후한말에 천하를 시끄럽게 한 황건(黃巾)의 난이 있었는데, 곧 장각(長角)일파의 반란이다.  그 세략은 상당히 컸다고 한다.  장각(長角)의 난은 얼마있지 않아 조조에 의해서 평정되었는데, 거기에 이어서 장수(張脩)도 파군(巴郡)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후 얼마있지 않아 장로(張魯)라는 사람도 또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중 장각과 장수는 우길(于吉)이라는 사람이 동해의 곡양에서 발견한 ꡔ태평청령서ꡕ(太平淸領書)라는 神書에 근거하여 일종의 종교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운동에 대해서는 위문제(魏文帝)의 전략(典略)에 설명되어 있는데, 장각은 태평도(太平道)를 만들고, 장수는 오두미도(五斗米道)를 만들었다.  장로는 패국(沛國)사람으로 그 道는 조부 장릉(張陵)이 촉(蜀)의 학명산(鶴鳴山) 중에서 수업하여 깨달은 바로 그 아들 장형(張衡)이 그것을 전하여 장로에게 가르친 것인데, 「삼국지장로전」(三國志張魯傳)에 의하면 장로의 道도 역시 오두미도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장수와 같은 종교단체였음에 틀림없다.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注)에 의하면 장수는 바로 장로의 아버지 장향의 잘못이다라고 하는데, 혹 그럴런지도 모른다.  요컨대 장각․장수․장로의 道는 老子五千文을 외우고 思過符水에 의해서 병을 치료하는 일종의 종교단체로 이것이 곧 도교의 기원이다.
후한말에 三張의 道 이외에 여기에 유사한 이술(異術)이 여러 곳에서일어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로강(盧江)의 좌자(左慈)에서 갈현(葛玄), 정은(鄭隱), 갈홍(葛洪)으로 이어지는 일파가 있다.  갈홍은 ꡔ포박자ꡕ(抱朴子)의 작자로서 유명하다.  이 좌자에서 갈홍에 이르는 일파는 三張의 道와는 다른 道術을 주장하는데, 전자가 양생법을 중시하여 단약(丹藥)을 만드는 것을 주안점으로 하고 있는 데 반해서, 후자는 기도를 중시하고 부주(符呪)를 존중하고 있다.  그런데 ꡔ포박자ꡕ 「하람편」에 실린 도서(道書)의 목록을 점검하면, 갈홍이 모은 도서(道書)는 대개 291部로 그것을 三類로 나누어, 제1類에는 도교의 교계서(敎誡書) 206部를 열거하고, 제2類에는 符 56部를, 제3類에는 단법(丹法)의 書 29部를 싣고 있고, 그 중에는 우길의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 170권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볼 때, 갈홍의 시기에는 이미 三張의 道와 좌자․갈현의 術이 종합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포박자의 뒤 북위(北魏)에 구겸지(寇謙之)가 나와서 三張의 道를 개혁하여 도교를 확립했다.
그뒤 북제(北齊) 때 현도관목록(玄都觀目錄)이라고 칭하는 道書目錄이 나왔는데, 이 현도관목록에 의하면 도서(道書)의 현재 수가 이천사십권에 달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한 사실로부터 볼 때 진(晉)에서 북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도서(道書)가 증가되었다고 보아진다.  그런데 현도관목록은 道書 이천사십권을 분류하여 三洞으로 나누고 있다고 하고 있는데, 소위 三洞이란, 동현(洞玄)․동진(洞眞)․동신(洞神)의 三部로 현의(玄嶷)의 ꡔ견정론ꡕ(甄正論)에 의하면 洞玄은 說理契眞의 書, 洞眞은 法體實相을 탐구하는 것, 洞神은 符禁章醮의 類를 실은 것이라고 한다.  또 북주(北周) 도안의 이교론(二敎論)에 의하면 洞玄部의 대표로서 상청경(上淸經)을, 동진부(洞眞部)의 대표로서 영보경(靈寶經)을, 동신부(洞神部)의 대표로서 삼황경(三皇經)을 들고 있는데, 상청경(上淸經)이 갈현에 의탁되고, 삼황경(三皇經)이 符禁章醮를 기록하여 三張의 道를 잇고 있는 점을 종합하여 생각하면 동신부(洞神部)는 대개 삼장(三張)의 도교를 잇는 것, 洞玄部는 대개 갈현의 術을 조술하는 것이고, 또 洞玄部 中에는 道家관계의 諸子의 書까지도 포괄하고 있다고 하는 점으로부터, 洞玄․洞神의 二部에서 좌자갈현파와 三張의 派가 종합된 위에 노자․장자 등의 諸子, 즉 도가의 철학적 문헌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洞眞部의 저술은 비교적 새로운 문헌으로 이 중에는 불교의 대승경전 특히 법화․유마 등의 경전이 고쳐져서 편입되고 있는 것 같다.
이상의 사실에서 볼 때, 도교는 처음 장릉에서 장로에 이르는 符呪․기도의 俗信에서 일어나서, 다음에 갈현의 신선양생술을 받아들이고, 또 다음에 위진 당시 일세를 풍미했던 노장의 철학을 흡수하고 마지막으로 불교의 교리로 수식하여 완성된 종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발달은 후한말에서 육조말에 이르는 약 300년간에 성취된 것이다.
도교 발달의 역사에서 생각하면, 그 주장하는 바가 과연 노자에 관계있는가 어떤가가 의문이다.  그러나 이미 도교가 완성된 뒤에 있어서의 도교학자는, 그들이 노자를 조술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노자의 姓이 李이고 당실(唐室)이 또한 李姓이기 때문에 당의 여러 임금은 노자로써 조선(祖先)으로 생각하여 도교를 존중하고 믿었다.  그래서 당태종은 노자로써 석씨(釋氏)보다 위에 위치지우고, 고종은 노자를 존경하여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라고 추호(追號)하고, 현종은 스스로 노자의 주(注)를 써서 諸州의 도관(道觀)에 비(碑)를 세워서 이것을 새기게 했다.  또한 도장(道藏)은 불교의 대장(大藏)에 모방하여 편찬된 것으로 이것을 동진(洞眞)․동현(洞玄)․동신(洞神)의 三洞으로 나눈 것은 석장(釋藏)이 경률론(經律論)의 삼장(三藏)을 구별한 것에 모방한 것이다.  또 三洞이 각각 12부로 나누어 무릇 36부를 구분하고 있는데, 이것도 불교에 12부경을 이야기하는 것에 본받은 것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그리고 당조(唐朝)에 이르러 이와 같이 도장(道藏)이 편찬되고 있는 것은 도교의 지위가 유불 이교(二敎)에 팽팽하게 대립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수당불교(隋唐佛敎)

1) 삼 론 종

삼론이란 나가르주나가 저술한 ꡔ중론ꡕ, ꡔ십이문론ꡕ과 그 제자 제파가 저술한 ꡔ백론ꡕ의 3론서를 가르킨다.  삼론종은 이 3론서의 논지에 따라 불교를 해석한다.  이 삼론종의 중요한 승으로서는 승랑, 승전, 법랑, 길장 등이 있다.
삼론종의 교설은 파사현정(破邪顯正), 진속이제(眞俗二諦), 팔불중도(八不中道)의 3과에 기본하여 구성되어 있다.  삼론종에서는 파사 이외에 따로 현정(顯正)을 인정치 않고, 파사(破邪)가 그대로 현정이라고 말한다.  파사란 모든 분별․정위(情謂)를 버리는 것으로 그렇게 하여 言語不及․意路不到의 무명(無名)의 도에 도달케 하는 것을 파사현정이라 한다.  현정은 중도를 깨치는 것으로 무득(無得)의 정관(正觀)이라 한다.  다음으로 진속이제란 세속제와 승이제를 말하는 것으로 진리는 이 이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중도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팔불중도(八不中道)란 용수의 八不, 즉 不生不滅, 不常不斷, 不一不異, 不來不出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파사현정과 내용이 동일하다.

2) 천 태 종

천태종은 천태산에 살다가 거기서 입적한 지의(智■)를 조사로 해서 성립되었다.  이 천태종은 화엄종과 더불어 중국불교의 정화(精華)라고 말해지고, 그 교학의 조직은 교관이문(敎觀二門)으로 나뉘어진다.  교는 교판과 교리를 포함하며, 특히 교판은 중국불교의 여러 교판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다.
천태종의 교판은 五時八敎이다.  5시란 화엄시, 아함시, 방등시, 반야시, 법화․열반시를 말하고, 8교란 화의(化儀) 4교(돈교, 점교, 비밀교, 부정교)와 화법(化法) 4교(藏敎, 通敎, 別敎, 圓敎)이다.  화의란 교화의 의식이고, 화법이란 교설의 내용에서 나뉘어진 것이다.  천태종에서는 화법 4교가 특히 중요하다.  장교란 삼장교(三藏敎)를 말하며, 통교는 삼승에 공통되는 것으로 대승초문이며, 별교는 대승경 가운데 隔歷次第의 법을 설하는 것으로서 화엄종의 대승돈교에 해당한다.  원교는 사리원용(事理圓融)의 중도실상(中道實相)을 설한 천태종의 가르침이다.
천태종의 교의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설함에 있고, 이 실상을 空, 假, 中의 三諦에 의해서 설명하려 한다.  ꡔ중론ꡕ의 三諦偈에 기초하여 인연소생법인 일체 제법이 그대로 空이고, 가(假)이며, 중(中)이라 본다.  공으로써 본다면 삼제는 모두 공이고, 가로써 본다면 삼제는 모두 가이다.  중으로써 본다면 모두 중이다.  삼제는 卽空, 卽假, 卽中이 되어 원융의 삼제가 된다.  원융의 삼제는 천연의 성덕(性德)이라 하고, 일체제법에 법이 자연히 갖추어져 있는 묘제(妙諦)이므로 일경의 삼제라 한다.
일념삼천(一念三千)은 만유 모두가 서로 융즉(融卽)한 것을 설하는 가르침으로 일념이 삼천을 갖춘 것이다.  3천이란 ꡔ대지도론ꡕ 또는 ꡔ화엄경ꡕ에서 설하는 지옥,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불의 십과와 ꡔ법화경ꡕ에 있는 여시상(如是相), 여시성(性), 여시체(體), 여시력(力), 여시작(作), 여시인(因), 여시연(緣), 여시과(果), 여시보(報), 여시본래구경의 십여시와 ꡔ대지도론ꡕ에서 설하는 오음(五陰), 중생, 국토의 3종 세간에서 유래한 것으로 십계가 각각 십계를 갖추고 일계가 각각 십여시를 갖추었으며, 십여시가 각각 3종 세간을 갖추고 있으므로 합하여 3천이라 한다.  3천은 일체제법이 모두 卽空, 卽假, 卽中의 소법이며, 사사원융(事事圓融)하여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3) 법 상 종

현장이 인도로부터 중국에 전하고 그 제자인 규기가 성립시킨 것이 법상종이다.  즉 법상종은 인도에 있어 세친 이후에 유식학파의 계통을 이어받은 호법의 ꡔ성유식론ꡕ을 역출하고, 이 호법의 학설을 중심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다.
법상종의 교설은 호법의 ꡔ성유식론ꡕ에 근거하여 만법유식(萬法唯識)의 도리를 밝히고 있다.  법상종은 일체법을 오위백법(五位百法)으로 분류한다.  오위란 심법(心法), 심소법(心所法), 색법(色法),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 무위법(無爲法)이다.  심법에서는 8식설을 주장한다.  그리고 심소법 51종, 색법 11종, 불상응행법 24종, 무위법 6종으로 나뉘어진다.  이 오위백법으로 개인과 환경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 오위의 법은 모두 식을 떠난 것이 아닌 유식이다.  즉 심왕은 식의 자상이고, 심소는 식의 작용이며, 색은 식의 소변(所變)이고, 불상응은 식의 분위(分位)이며, 무위는 식의 실성이므로 모두가 유식(唯識)이다.  그리고 8식설에 있어서 제7식은 아집의 근원이 되는 식으로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애(我愛), 아만(我慢)의 4번뇌와 상응한다.  제8아뢰야식은 장식(藏識) 또는 종자식이라 하고 윤회와 해탈의 주체가 되는 식이다.  그러나 법상종에서는 이 8식을 염오식(染汚識)의 측면에서 주로 구명하고 있다.
그리고 법상종에서는 인식설에 있어서 4분설을 주장한다.  4분이란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이다.  또한 유식의 삼성(三性)설에 대해서는, 삼성이란 변계소집성(邊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말한다.  변계소집성이란 망분별에 의하여 우리들의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것을 말하고, 의타기성은 타(인연)에 의해서 생기하는 법이라는 것이며, 원성실성은 원만성취진실의 성으로 이공소현(二空所顯)의 진여이다.  이 삼성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상무자성(相無自性), 생무자성(生無自性),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의 삼무성을 설해 일체가 유식임을 강조한다.
또 법상종에서는 인간의 심성을 다섯으로 나누어 말하고 일체 중생의 성불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오성이란 성문종성(聲聞種性), 독각종성(獨覺種性), 보살종성(菩薩種性), 부정종성(不定種性), 무성유정종성(無性有情種性)이다.  이중 무성종성인은 성불할 수 없다고 하고, 보살종성과 부정종성만 성불을 인정한다.

4) 화 엄 종

화엄종은 지론종, 섭론종을 받아들이고 현장의 유식설에 자극을 받아서 성립되었다.  이 화엄종은 혜광(慧光)에서 시작하여 지정(智正), 두순(杜順), 지엄(智儼), 법장(法藏) 등으로 이어져서 발전했다.
화엄종은 천태종이 제법실상의 법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유심연기를 주장하고, 그리고 천태종이 성구설(性具說)을 주장하는 데 대하여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를 밝히기 위하여 십현연기(十玄緣起)와 육상원융(六相)을 설한다.  십현문은 同時具足相應門, 廣狹自在無碍門, 一多相容不同門, 諦法相卽自在門, 隱密顯了俱成門, 微細相容安立門, 因陀羅網法界門, 託事顯法生解門, 十世隔法異成門, 主伴圓明具德門이다.  이것에 의하면 일체만유가 그대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고, 일체불리(一體不離)하므로 一卽多 多卽一이다.  육상(六相)은 총상(總相), 별상(別相), 동상(同相), 이상(異相), 성상(成相), 괴상(壞相)으로 이 6상은 곧 일상(一相)이 되어 일법(一法)을 들면 모두가 이 6상을 갖추어 있다고 한다.  또한 화엄종에서는 사(事)와 사(事)와의 원융무애를 밝히기 위하여 사법계(四法界)를 설한다.  사법계란 理법계, 事법계, 理事無碍법계, 事事無碍법계이다.
화엄종의 교판은 五敎十宗이다.  오교는 소승교, 대승시교, 대승종교, 대승돈교, 대승원교이다.  소승교는 성문 연각의 소승교, 대승시교는 상(相)시교와 공(空)시교로 나뉘어진다.  상시교는 법상종, 공시교는 삼론종이 이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대승종교는 「기신론」이나 천태종의 교설을 말한다.  대승돈교는 「유마경」의 가르침으로 돈오하는 가르침이다.  대승원교는 중중무진을 설하는 화엄종의 교설이다.  십종은 소승 6종과 대승 4종으로, 我法俱有宗(독자부), 法有我無宗(유부), 法無去來宗(대중부), 現通假實宗(설기부), 俗忘眞實宗(설출세부), 諸法但名宗(일설부), 一切皆空宗(공시교), 眞德不空宗(종교), 相想俱絶宗(돈교), 圓明具德宗(원교)이다.

5) 선   종

선종은 양나라 때에 보리달마가 중국에 처음으로 전한 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 뒤를 이어 2대조 혜가(慧可, 487~593), 3대조 승찬(僧璨, ?~606), 4대조 도신(道信, 580~651), 5대조 홍인(弘忍, 603~675)으로 상속되었다.  홍인 문하에서는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신수(神秀, 606~706)와 혜능(慧能, 638~713)이 유명하다.  신수계통은 북중국에서 교화했기 때문에 북종이라 하고, 혜능은 남중국에서 교화했기 때문에 남종이라 한다.  북종은 단계를 밟아 점진적으로 수학하여 성불하기를 가르친다.  남종은 불립문자를 종지로 하여 성불을 가르치는 돈오를 주장한다.  처음에는 북종이 번성했는데, 나중에는 남종 계통에서 뛰어난 제자가 배출되어 남종의 돈오 선풍이 번성했다.  그래서 그후 선종이라 하면 남종을 가르키게 된다.
이 선종은 중국에서 일어난 하나의 독특한 종파이다.  그래서 가장 중국적인 불교라 할 수 있다.  선(禪)에는 외도선(外道禪), 범부선(凡夫禪), 소승선, 대승선, 최상승선이 있다.  외도선은 인도 일반에서 행해진 선으로 생천(生天)을 목적으로 하며, 범부선은 오계십선(五戒十善)을 행하는 범부들의 선이며, 소승선은 소승법을 사유 수행하는 선이다.  대승선은 보살승이다.  그리고 최상승선은 여래청정선이라고도 하며, 일행삼매(一行三昧) 또는 진여삼매라고도 한다.  이는 달마가 전했다고 한다.  이 최상승선은 후에 조사선(祖師禪)이 되었다.
이 조사선에 의하면, 禪이란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본각진성(本覺眞性)을 깨달아 나타내는 것을 혜(慧)라 하고, 이를 닦아 드러내는 것을 정(定)이라 하며, 이 정혜(定慧)를 일러서 禪이라 한다.  선에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바로 심성에 계합하고 심성 그것을 이루며, 심성의 전체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禪을 닦는 자는 우선 자기의 본성을 철오(徹悟)하고 거기에서 임운무작(任運無作)의 행을 발휘한다.  이러한 자기 철견을 돈오라 하고, 또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도 한다.
달마선은 또한 불립문자, 교외별전(敎外別傳)을 표방한다.  문자는 손가락이 달을 가르키는 데에 있어서 손가락에 지나지 않고 禪은 문자 밖의 소식이기 때문에 교외별전이라는 것이다.  또한 문자에 의하지 않고 곧바로 진심(眞心)에 계합하기 때문에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도 한다.  교외별전은 선종의 교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3장 근세철학  

제3장  근세철학


제1절  유학의 새로운 기풍


1. 종래 유학에 대한 우주론적 해석과 이성의 재발견

공맹유학은 행위의 가능 근거를 탐구한 것이 아니라 행위 자체를 문제로 삼았다.  즉 실천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지 실천의 가능 근거라든가 실천의 원리에 대해서는 정밀한 이론적인 분석이 없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와 수당을 거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 불교와 도교의 정밀한 이론체계는 유학의 입지를 좁혀 놓았다.  따라서 유학도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당 멸망 이후 오대삼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송왕조에 오게되면 당대의 귀족중심의 사회제도와 그 사상적 기반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 및 사상이 요구됨으로써, 유학을 기반으로 하는 과거제도가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사대부 계층의 사회 참여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이념적 무기는 유학이었다.  따라서 공맹의 원시유학의 계승과, 그것이 발전된 형태인 새로운 유학, 즉 신유학은 귀족의 것이 아닌 사대부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공맹유학의 학적 체계를 수용하고, 그것을 우주론적·형이상학적 체계의 바탕위에서 재해석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반불교적·반도교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불가철학의 공(空)이나 도가철학의 무(無)는 현실적 사회 질서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한유(韓愈, 768~824)는 불교가 마음을 다스리는 것만을 추구하여 현실적인 사회 질서를 부정하고 천상(天常)을 없애려 한다고 하고, ꡔ대학ꡕ(大學)에서도 성심(誠心)이나 정의(正意)를 말하지만, 이는 오히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성인의 뜻과 일치한다고 함으로써 반불교적인 입장에서 유학을 옹호하였다.  
유종원(柳宗元, 773~819)과 유우석(劉禹錫, 772~824)은 하늘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인격적인 천관념에 입각한 전통적인 천인관계를 부정하고 인간의 주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한유의 제자인 이고(李翶)는 ꡔ중용ꡕ의 성(誠)에 입각해서 사람의 본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은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칠정(七情)이므로 이러한 정을 억제하면 심중허명(心中虛明)의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때 그가 말하는 성(性)은 일체는 모두 자신의 본질로서의 불성(佛性), 즉 본심을 가지고 있으나 무명번뇌에 의해서 그것이 가려짐으로써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입장과 접근한다.  따라서 이고의 경우는 불가의 학적 체계를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신유학은 한 편으로는 불가나 도가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의 학적 체계 속에 도가와 불가의 사상이 재현됨을 빈번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유학의 이론적 기초를 명실상부하게 정초한 사람은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이다.  그의 ꡔ태극도ꡕ(太極圖)는 신유학의 우주관 및 인생관 해명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2. 신유학의 우주론적 기초

1) ꡔ태극도설ꡕ의 철학사적 의의

ꡔ태극도ꡕ는 수당대의 도사(道士)들의 수련도인 ꡔ태극선천지도ꡕ(太極先天之圖)를 렴계가 ꡔ주역ꡕ의 「계사전」의 이론 체계에 입각해서 그린 것으로서 순수한 유학적 세계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태극도와 설은 크게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과 ‘음양양의’(陰陽兩儀)의 영역으로 나뉘어지며, 이를 통해서 우주와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에 관한 해명을 시도한다.
ꡔ태극도설ꡕ은 “무극이면서 태극”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후 성리학에서의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큰 갈래는 이 말의 해석 여하에 의해서 결정된다.
주자는 ‘무극이태극’을 연장(延長: Extension)을 가지지 않는 원리적인 존재라고 했다.  즉 원리적인 존재로서의 ‘무극이태극’은 비록 연장을 갖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가장 완전한 실재라 하고, 이것을 우주의 궁극적인 존재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명대(明代)의 나흠순(羅欽順)은 이 권역을 명목상의 존재로만 본다.  따라서 실재하는 것은 음양양의(陰陽兩儀)의 권역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면 주기설(主氣說), 혹은 리기일물설(理氣一物說)이 된다.  율곡은 이러한 입장을 긍정한다.
한편 이 권역을 음양이 갈라지기 이전의 원초적인 기로 보면 기철학(氣哲學)의 입장이 된다.  중국의 장재(張載)나 조선의 서경덕(徐敬德)이 이러한 입장을 견지한다.
렴계는 ‘음양양의’권에 대해서 “태극이 동(動)하면 양기(陽氣)가 생겨나고, 동이 극한에 이르면 정(靜)하게 되니, 정하게 되면 음기(陰氣)가 생겨난다.  정함이 극에 이르면 다시 동하게 되니,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함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여 음기와 양기로 갈리어 양의가 나온다”라 하고 있다.  이는 자연계의 모든 변화가 두 극으로 대립하는 음과 양의 상호 이행 과정에서 성립한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이어서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화·목·금·토가 나오며, 이 오행이 차례로 분포됨으로써 자연의 질서가 이루어진다”고 하여 기존의 음양설에 오행설을 배합시키고, 이를 통해서 세계의 다양성과 질서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며, 태극은 본래 무극”이라고 하여, ‘무극이태극’이 모든 존재 사물의 궁극적인 존재 근거가 됨을 말하고 있다.
또 “오행은 생겨나면서부터 각자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게 되며, 무극의 진(眞)과 이오(二五)의 정(精)이 미묘하게 합해져서 응결함으로써 건의 도(乾道)는 남성을 이루고 곤의 도(坤道)는 여성을 이룬다.  두 기운이 서로 감응하여 만물이 생겨나며, 만물이 생겨나고 생겨나서 변화가 무궁하다”고 하여, 만물은 음과 양이라는 두 대립되는 기운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변화 발전한다는 변증법적인 세계관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은 자연의 ‘그러한 까닭’(所以然之故, 즉 자연의 필연법칙)에 대한 설명이다.  렴계는 여기에서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도덕법칙’(所當然之則, 즉 인간의 당위법칙)을 연역해 내고자 한다.  이는 인간의 도덕법칙이 자연의 필연법칙에 의존해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이며, 또한 인간을 도덕적 주체로 보는 도덕적 인간학의 체계를 전개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입장은 신유학의 인간 및 세계에 관한 기본 입장이 된다.
렴계는 “오직 사람만이 가장 빼어나고 신령스러운 기운을 얻었다.  형체가 이미 생겨나고 정신 작용이 나타나게 되면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다.  인간의 다섯 가지 본성(인·의·예·지·신)은 대상에 감응하여 작용할 때, 선과 악이 구분되고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고, 가치판단이 주체이며, 자연에 대한 즉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우주에서의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성인은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존재로서 중정(中正)으로 자신을 규율하고 인의(仁義)로 남은 다스리는 도리를 정하되 주정(主靜)으로써 인극(人極), 즉 사람됨의 지극한 도리를 확립했다고 했다.  이어서 렴계는 “성인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고, 일월과 더불어 그 밝음을 합하며, 사시(四時)와 더불어 그 질서를 합하며,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을 합한다”고 하여 인간의 이상이란 천인합일, 즉 온 우주와 인간의 합일에 있다고 했다.  이는 자연과 인간의 통일적 연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또 렴계는 “성인은 배워서 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서 한당유(漢唐儒)의 “성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성인”이라는 인간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혁명적 선언을 하고 있다.  이러한 렴계의 입장은 신유학에서 학문의 궁극적 목적을 성인에 두는 것과 일치하고, 이는 또 주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강력한 확신의 표출이기도 하다.  
한편 렴계는 성인의 마음을 무욕(無慾)이라 하면서 맹자의 과욕(寡慾)설에 대해서 “마음을 기르는 것을 과욕에 멈추어서는 안되며 무욕에 이르러야 한다”하고, “무욕하게 되면 성실하게 되고 밝게 통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무욕설은 이후 도학자들을 엄격한 금욕주의의 경향으로 흐르게 한 폐단을 가지고 왔다.

2) 리기론적 인간관의 정초

(1) 장재(張載)의 기철학적 인간관
신유학에서 인간은 리(理)와 기(氣)의 결합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때 리는 자연에서는 필연법칙이지만 인간에 내재하게 되면 당위법칙이 된다.  그러므로 신유학에서는 인간의 당위법칙과 자연의 필연법칙이 내속적(內續的)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ꡔ중용ꡕ(中庸)은 “하늘의 명(命)을 성(性)이라 하고, 그 성에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며, 도를 연마하는 것을 교(敎)”라 하여 인간의 본질인 성은 자연법칙이 인간에 내재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리와 기의 결합에 의해서 존재한다.  따라서 성도 기질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리(天理)의 본래 모습으로서의 순수한 성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기질의 성과 본연의 성에 관한 문제가 나오게 된다.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에 대한 논의는 유학에는 횡거(張橫渠, 이름: 載, 1020~1077)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시된다.  물론 횡거의 우주론은 주자학에서처럼 리기이원에 입각한 주리론을 전개한 것은 아니다.
일단 그의 ꡔ정몽ꡕ(正蒙)이라는 글을 통해서 그의 인간 및 세계에 관한 입장을 살펴보자.
그는 렴계의 무극이태극권을 음양이 나누어지기 이전의 기로 파악하고, 이를 태허라고 했다.  그러므로 태허는 음과 양으로 나누어진 기가 아니라 그러한 기의 가능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음과 양으로 나뉘어진 기는 태허에 의존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운동함으로써 개별적인 특수자들의 세계를 산출한다.  따라서 횡거가 ‘태허가 곧 기’라 했어도 이때의 ‘곧’(卽)은 전칭긍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우주론적 바탕 위에서 횡거는 ‘천지의 성’과 ‘기질의 성’을 구분하고 ‘천리를 확립하고 인욕을 없앨 것’을 주장했다.  
천지의 성은 악이 개재되지 않은 순수한 선(善) 자체로서 인간의 본래적인 성이다.  이는 맹자의 성선설과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이후 정주 성리학에서의 인성관의 기초가 된다.  그는 “형체가 생긴 이후 기질의 성이 있게 되었지만, 기질의 성을 잘 극복하면 천지의 성을 보존할 수 있다.”하여, 천지지성은 기질성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본성으로서 순선무악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질성은 기품에 의해서 가려진 후천적인 성으로, 개별적인 사물의 특수한 성질을 말한다.  따라서 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순수지선(純粹至善)의 천지성과는 구별되는 성이다.  그러기에 기질의 성을 잘 극복해야만 천지의 성을 보존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횡거의 입장은 본연성으로서의 천지지성이 기질성과 질적으로 다른 성이라는 점이 전제되었을 때라야만 가능한 논리로서, 그의 성에 관한 입장은 이후 성리학의 인성관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그는 또 ꡔ서명ꡕ(西銘)이라는 논문을 남기고 있는데, 이 글이 철학사적인 측면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횡거는 ꡔ정몽』에서는 태허를 중심으로한 기철학적인 체계를 전개했다.  그러나 ꡔ서명ꡕ에서는 그가 직접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리일분수관’(理一分殊觀)을 주장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이천(伊川)은, ‘ꡔ정몽ꡕ은 잘못된 곳이 많지만 ꡔ서명ꡕ은 리일분수관이 잘 나타나 있는 횡거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서 맹자의 업적에 버금간다’고 극찬한다.
리일분수는 리의 이중 구조를 말하는 것이다.  즉 리는 개별적 현상 세계를 초월하는 무극이태극으로서의 리와, 음양양의권에 내재해서 개별적 사물의 본성을 이루는 분수의 리라고 하는 이중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극이태극은 리일의 리가 되고, 음양양의의 기권에 내재한 리는 분수의 리가 되는 것이 리일분수관의 구조이고, 또 이러한 입장은 이천에서 주자, 그리고 퇴계로 이어진다.
또 그의 ꡔ서명ꡕ에 나타난 ‘민오동포’(民吾同胞)라는 입장은 모든 인간이 리일의 리를 분구하고 있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점을 말한 것으로, 이러한 그의 사상은 양명 좌파(陽明左派)인 하심은(何心隱)에 의해서 재발견된다.

(2)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정호(호: 明道)는 이천의 형으로서 ‘도기일원’(道器一元)을 주장하고, 아우인 정이(호: 伊川)는 ‘도기이원’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이후 성리학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황종희(黃宗羲)는 ꡔ송원학안ꡕ(宋元學案)의 「명도학안」(明道學案)에서 “명도의 학풍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골몰하여 후학들이 실천을 소홀히 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육왕심학 및 선학으로 흘렀으나, 이천의 학문은 주자로 계승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풍우란(馮友蘭)은 이정사상(二程思想)의 특징과 이후의 이정사상의 전개 양상을 “명도의 천리 혹은 리는 구체적인 사물의 자연적인 추세로, 사물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후의 심학파(心學派)는 모두 리가 사물을 떠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명도를 심학의 선구로 삼고 이천을 리학의 선구로 삼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풍우란의 견해는 황종희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황종희와 마찬가지로 풍우란 역시 ‘정주 성리학’으로 지칭되는 주자학에서 이정(二程)을 함께 지칭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즉 이정의 사상은 구별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구별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그리고 이천이 이후의 리학(理學)의 선구가 된다는 사실은 정확한 것이다.  
한편 후외로(候外盧)는 “이정의 정치 사상 및 그들의 철학 사상은 서로 유사하며,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당시 그들의 제자가 스승의 말을 기록함에 있어 결코 분별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이정 형제의 성격이 형 명도는 온화하고 동생 이천은 근엄하다 하여 서로 다르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사상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나누지 아니하였다.  근래 어떤 사람은 명도는 육왕일파의 연원이 되고 이천은 주희 일파의 연원을 열었다고 하지만 이러한 의론은 결코 사실과 부합되는 것이 아니다.”라 하여 명도가 육왕일파의 연원이 되고 이천이 주자학파의 연원이 된다는 풍우란 및 황종희의 견해를 기본적으로 부정하고 이정 양인의 사상을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후외로의 견해는 명백한 오류이다.  당시 이정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을 기록할 때는 기본적으로 양인의 학설을 구별하였다.  ꡔ이정유서ꡕ(二程遺書) 스물 다섯권 가운데서 1권에서 10권까지는 양인의 설을 함께 싣고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누구의 말인가를 밝혀두고 있다.  11권에서 14권까지는 명도는 어록을, 15권에서 25권까지는 이천의 어록을 나누어서 싣고 있다.
주자 역시 이정(二程)을 구분하였다.  특히 ꡔ근사록ꡕ(近思錄)을 편집하면서 ‘정자왈’이라고만 하지 않고 이정 가운데 누구의 말인가를 일일이 명시해 놓고 있다.  뿐만아니라 문인과의 대화에서도 필요에 따라서는 명도와 이천을 구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자의 태도는 이정 사상의 차이점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정의 사상을 구별해야만 하는 것은 그들 사상의 논리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명도는 도가 곧 기이고, 기가 곧 도라고 하는 도기 일원관(道器一元觀)에 입각해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 하지만, 이천은 기 운동의 내재 원리의 원인, 즉 소이(所以 : 까닭 : 원인)의 소이를 세계의 궁극적 존재근거로 설정하고, 이것을 도 혹은 리라고 하는 도기이원의 입장을 전개한다.  따라서 리와 기 가운데서 더 본질적인 것은 리가 되며, 이는 리의 일차성에 대한 긍정으로서 명도의 일원적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를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는 인식론, 심성론, 수양론 뿐만 아니라 철학 체계 전반에서 서로 다른 양상을 전개하게 하였다.  나아가 이후 성리학의 전개 과정에서도 명도의 철학은 명대의 나흠순(羅欽順)이나 조선의 율곡과 같은 내재관적 리기철학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반면에 이천은 주자 및 퇴계의 주리론의 선구가 되었다.  따라서 주자학을 연구함에 있어 양인의 구별 없이 자의적으로 이정의 논설을 인용하면 오류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성리학 발전사에도 흔히 보여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그러한 오류가 종종 나타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주자학의 객관적 이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정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절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명도 철학의 특징은 “형이상을 도(道)라 하고 형이하를 기(器)라 한다.  그러나 표현은 이렇게 하지만 도 역시 기이고 기 역시 도이다.”라고 하는 ‘즉도즉기’(卽道卽氣)의 ‘상즉논리’에 있다.  따라서 명도 철학에는 세계의 바깥에서 세계를 규제하는 어떠한 초월적인 원인이나 힘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즉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 하는데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도는 만물을 생겨나게 하며, 이러한 도를 계승한 것이 선(善)이다.  이처럼 생생불식(生生不息)하는 생명 현상 그 자체를 ‘道’라 하여, 도는 언제나 세계의 내오에 세계의 본질로 존재하며, 이것은 또한 인(仁)이며 생생의 원리로서 도덕적으로는 선이 된다고 했다.  이는 생지위성(生之謂性)에 대한 긍정으로서 고자(告子)의 인성관에 근접하는 것이다.  또 세계는 허망한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의 통일체로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이다.
인식의 문제에서도 명도는 “배우는 자는 먼저 인(仁)을 알아야 한다.  인이라는 것은 혼연(渾然)하여 만물과 더불어 한몸이다.  이러한 이치를 깨달아 성(誠)과 경(敬)으로 그것을 보존할 따름이다.  애써 방검(防檢)하거나 궁색(窮索)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러한 명도의 인식 방법은 이천 및 주자의 이원적 세계관에서 출발하는 인식 방법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천과 주자는 리와 기를 분리하며,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를 거친 다음에 천리를 활연관통(豁然貫通)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명도는 이러한 분개(分開)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세계는 그대로 하나의 살아있는 세계이며, 주․객(主․客)이니 리․기(理․氣) 등으로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명도의 인식론은 격물궁리의 방법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궁리․진성․지어명(窮理․盡性․至於命)의 세 가지 일은 동시에 이루어짐으로, 원래 단계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명도의 주장은 이천과 주자의 격물궁리를 통한 천리의 체득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이처럼 명도에서는 인식 이론 역시 도기일체관(道器一體觀)에 근거, 이천이나 주자에서처럼 격물과 궁리의 단계를 통하여 진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외양망(內外兩忘)을 통한 직관에 의해서 천리를 체득하고자 하는 특징을 보인다.  따라서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먼저 인을 알아야 한다”(學者須先識仁)고 했지만, 그러나 어떻게 인을 이해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명도철학의 근본적인 특징이 도기일원에 있다고 한다면 이천은 분명한 도기이원에 입각해서 자신의 철학을 체계화했다.
이천은 “한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하지만 도가 바로 음양인 것은 아니다.  한 번 음이 되게 하고 한 번 양이 되게 하는 소이(所以)가 도이다.  기의 운동(一闔一闢)은 변(變)일 뿐이다.”라 하였다.
이러한 이천의 논리 구조는 명도가 일음일양의 변화 발전과정을 도라하여 도를 기 운동의 내재적 자기 법칙으로 파악하고, 음양을 떠나서는 도가 있을 수 없다고 한 논리와는 분명히 다르다.  이천은 도가 곧 음양이 아니라 능히 음이 되게 하고 양이 되게 하는 까닭을 도라고 했던 것이다.  즉 기 운동의 내재 법칙이 아니라 기 운동의 내재 법칙의 가능 근거, 다시말해서 기 운동의 소이의 소이가 도인 것이다.  따라서 명도가 도라고 하였던 일음일양의 전개 과정을 이천은 다만 ‘변’(如一闔一闢, 謂之變)이라고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천은 장횡거의 태허(太虛)에 대해서는 ‘리만이 가장 완전한 실재이기 때문에 태허같은 존재는 없다’하고 태허를 리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리는 자신은 움직이지 아니하면서 자신 아래에 종속해 있는 모든 사물들을 움직이게 하는 운동의 원동자라고 했다.(莫之爲而爲, 莫之致而至)
인성의 문제에서도 이천은 명도와 뚜렷이 구별된다.  명도에서의 인성론의 기본 입장은 생지위성(生之謂性)이다.  따라서 즉성즉기(性卽氣 氣卽性)가 된다.  그러므로 선(善) 역시 성(性)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을 성이 아니라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명도의 사상은 성선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맹자뿐만 아니라, 이천 및 주자, 그리고 횡거와도 다르다.
이천은 ‘생지위성’(生之謂性)과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을 하나로 볼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여 생지위성과 천명지위성은 “다같은 성자(性字)이지만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생지위성의 성은 드러난 현상에서 말하는 성이고 천명지위성은 성의 리를 말하는 것이다.... 성의 리로서의 천명지위성은 선하지 않음이 없다.”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심(心) 역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라는 대립되는 양항의 구도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욕을 제거함으로써 천리가 회복된다고 하여 “인심은 사욕이므로 위태하고 도심은 천리이므로 정미하다.  사욕을 없애면 천리가 밝아진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천의 입장은 ‘리일분수관’에 입각한 것으로, 이는 인식론에서는 격물치지를 통한 천리 회복의 가능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천리가 내재되어 있고, 이러한 필연 법칙으로서의 천리가 인간의 본질이므로 성선의 필연성이 확보된다.  그러므로 이천은 현실적인 인간 존재의 불선을 재(才)에서 찾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천의 체계에 입각해 본다면, ‘생지위성’(生之謂性)의 성은 ‘재’에 불과하다.  또 그의 ‘리일분수관’은 그의 인식 문제에도 관철된다.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하는 정주 성리학의 인식방법의 특징은 인식의 문제가 수양의 문제와 통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격물’은 곧 대상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卽物窮理)하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백지’인 인식 주관으로서의 심(心)에 경험적 사실을 써넣는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객관 세계의 원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유추(類推)함으로써 세계와 인간의 존재 원리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격물궁리는 객관 세계의 법칙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아니라, 윤리의 본성을 깨닫고자 하려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주관적 심 혹은 성의 궁격(窮格)이며 윤리적 천리(天理)를 궁격하여 완전한 인간, 즉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격물궁리의 과정은 이미 단순한 인식의 과정이 아니라 수양의 과정이며(‘格物亦須積累涵養’ ꡔ遺書ꡕ卷15), 이렇게 격물궁리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천하의 이치에 통달(脫然貫通)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천의 인식 방법은 경험과 직관의 종합으로서 불교의 점수(漸修)를 통한 돈오(頓悟)와 유사함을 볼 수 있다.  즉 점수의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돈오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천의 인식 방법은 명도의 점수의 측면이 배제된 직관적․돈오적인 인식론과는 궁극적으로 다르다.
유학의 목적은 선을 택해서 실천(擇善而固執之)하는 데 있다.  격물궁리는 ‘택선’의 근거를 찾는 것이다.  즉 당위 법칙의 근거로서의 천명(天命)을 이해해야만 도덕적인 인간 행위의 판단 기준이 세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천의 지행론(知行論)은 ‘선지후행’(先知後行)의 입장에 서있다.  즉 행위의 기준으로서의 당위와 근거를 알아야만 행위가 가능해 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여, “인식이 깊어지면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이르게 된다.  천리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자는 있을 수 없다.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옳게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선하지 않은 것은 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이러한 이천의 인식과 실천에 관한 입장은 주자로 계승된다.
앞에서 이미 정주 성리학의 근본 특징은 인식의 방법과 수양의 방법이 통합되어 있다는 점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인식의 주체는 심(心)이다.  심이 바르지 않으면 천리를 알 수 없다.  그러기에 이천은 “배우는 자는 마음이 어지러워짐을 근심하면서도 편안하고 고요하게 하지 못하는데, 이는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인 병폐이다.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마음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사로운 마음을 제거하여 성(誠)을 보존하는 경(敬)공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천은 과욕(寡慾)을 주장(致知在於所養, 養知莫過於寡欲. ꡔ外書ꡕ, 卷2 )한다.  이러한 이천의 과욕설은 렴계의 무욕에 대한 비판이다.
렴계는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순수하게 해야한다 하고 그 방법을 무욕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과욕만 가지고는 안되고 무욕해야 한다하고, 또 정(靜)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노장 및 불교와의 연관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신유학은 노장과 불학의 안티테제로서 출발한다.  따라서 이천은 유학의 순수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정(靜)만을 말하게 되면 곧바로 석씨(佛家)의 설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정(靜)자를 써야 한다.”라 하고 렴계의 주정(主靜)과 무욕(無欲)을 경(敬)으로 통합시켰다.  주자 역시 무(無)를 말하였지만(今且得寡, 以至於無, ꡔ語類』卷61․71條), 이것이 노장이나 불교의 설과는 다르다는 점을 주장했다.  (周子之說, 只是無欲故靜, 其意大抵以靜爲主) 이러한 정주의 노력은 유학의 순수성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긴 해도 유학이 여타의 사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정의 사상은 그 근본 구조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이의 근본적인 원인은 ‘도기관’에서 찾아진다.  즉 명도의 도기상즉의 일원적 세계관은 인성의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인식의 문제에서도 이천의 이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그것과는 명백한 차이를 보여준다.  명도는 기 운동의 과정 자체가 도였고 기를 떠나서 기의 질서 정연한 운동을 가능하게 해 주는 어떠한 존재도 설정하지 아니하였다.  반면에 이천은 일음일양하는 기 운동의 내재적 ‘소이’(所以)의 ‘소이’를 도라고 하였다.  따라서 명도에서의 도는 이천에서는 변(變)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인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명도는 생지위성에 입각해서 ‘기즉성·성즉기’의 논리를 전개함으로, 선뿐만 아니라 악의 근거도 성(性)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천의 이원적 세계관에서는 명도의 즉성즉기의 생지위성은 다만 기질의 성일 따름이고, 성 자체의 본질은 순수한 천리로서 무불선한 것이 될 수밖에다.  따라서 악의 근거는 일종의 가능 개념인 재(才)에서 찾게 되었다.  이러한 이천의 인성론은 횡거의 ‘천지지성’과 ‘기질지성’의 이분법적 인성론에서 영향받은 것으로서 주자의 인성론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울러 이천은 횡거의 ꡔ서명ꡕ에 나타난 리일분수사상에 입각해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시킨다.  즉 리는 리일의 리와 분수의 리라는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긍정하였다.  따라서 개별물이 모두 하나의 리를 갖추고 있으므로 개별물의 존재 원리를 이해함으로써 리일의 리인 천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천리는 자연의 필연법칙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서는 마땅히 그러해야할 당위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인성의 선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정사상의 차이는 이후 성리학의 전개 양상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형성한다.  풍우란 및 ꡔ송원학안ꡕ에서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이천은 이후 정통 주자학의 선구가 된다.  그러나 명도의 사상은 이후 리기혼륜(理氣渾淪) 혹은 리기일물설(理氣一物說)의 선구가 된다.  즉 명대의 나흠순은 주자학의 수정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데, 그의 리기일물설(理氣一物)의 근거는 명도의 도기상즉의 일원관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명도의 학문이 이후 심학의 전개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심학은 오히려 불학과 접근한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명도의 도기일원관은 리기일물설의 선구가 된다고 하는 편이 정확한 것이다.
이천의 이원론적 경향은 횡거의 태허에 관한 견해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이천은 태허의 허를 리로 파악하여 횡거의 ‘허가 곧 기’라는 설을 재해석하였다.  따라서 이천에서의 태허는 음과 양이 나뉘어 지기 이전의 순수한 기가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리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천의 입장은 조선의 퇴계로 계승된다.  퇴계는 장횡거와 소강절의 사상을 절충, 자신의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확립한 서화담의 기철학에 대해서 리를 기로 삼은 잘못을 범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천이나 퇴계의 입장은 횡거류의 기철학이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긍정한 바탕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말해서 태허가 규정을 받아들일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미 자신은 무규정적 규정자로서의 리에 다름없다는 말이다.
율곡에서도 횡거나 화담의 기철학의 이중 구조에 대한 이해는 퇴계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는 리의 일차성을 부정하고 주기설(主氣說)을 주장한다.  따라서 개별의 기를 초월해 있는 태허를 설정하는 초월관적 입장에는 동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태허에서 음과 양이 나온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여, 퇴계의 주리설 뿐만 아니라 화담의 초월관적 기철학 역시 부정했다.



제2절  주자(朱子)의 학문 체계


1. 주자의 리기론(理氣論)

주자 리기설의 특징은 렴계의 ꡔ태극도ꡕ의 ‘무극이태극’권을 이천의 입장을 가지고 해석하는 데서 찾아진다.  그러므로 주자에서의 리는 무극이태극으로서의 리와 음양양의권에 내재한 중태극으로서의 분수의 리라는 이중의 구조를 가질 것이라는 점을 예상 할 수 있다.
현상 세계는 리와 기의 결합으로 이루어 진다.  따라서 둘 가운데서 어느 한 쪽을 결한다면 리와 기는 모두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주자는 렴계의 “무극(無極)의 진(眞)과 이오(二五)의 정(精)이 묘합(妙合)하여 응한다.”라는 말에서 진을 리, 정을 기로 이해한다.  그리고 “리와 기가 결합한 까닭으로 형체를 가진 존재자들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현상 세계에서는 리 없는 기 없고 기 없는 리도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 기는 작용하는 자이지만 리는 기처럼 스스로 운동하지 않는다.  즉 “기는 운동한다.  그러나 리는 정의(情意)․계탁(計度)․조작(操作)이 없다.  다만 기가 모이는 곳, 바로 그 가운데 리는 존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리는 명목상의 존재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둘은 그 존재 방식을 달리한다.  이점에 대해서 주자는 “천지간에는 리가 없으면 기가 없다.  리는 형이상의 원리로서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근본이 된다.  기는 형이하의 그릇으로서 만물이 생겨나게 되는 도구가 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반드시 이 리를 품부 받은 연후에 자신의 본성이 있게 된다.  성(性)과 형(形)이 비록 연장을 가진 몸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도(道)와 기(器)의 사이는 그 차이가 분명하여 어지럽지 않다”라 하였다.  즉 현상 세계에서는 리와 기가 항상 함께 있다.  그러나 리는 형이상의 법칙으로서 사물을 생겨나게 하는 원리이며, 또 개별자 속에서는 개별자의 각각의 특수성을 유지시켜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즉 형이상의 원리로서의 리는 형이하의 존재인 연장을 가진 기에 내재하게 되는데, 이 경우 리는 개별적 사물의 본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가 리에 의해서 규정되어질 경우에만 다양한 사물의 세계가 전개될 수 있고, 또 개별물은 자신의 본성으로서의 리를 내재하고 있음으로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와 기는 현실적으로는 항상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리기의 구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도기의 분(分)은 분명하다.  주자는 “이른바 리와 기는 분명히 두 가지 서로 다른 존재이다.  다만 사물에서는 둘이 서로 섞여 있어서 나눌 수 없이 각각 한 곳에 있다.  그러나 둘이 각각 서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리의 측면에서 보면 비록 사물이 있지 아니하였으나 사물의 이치는 이미 있었을 것이니 역시 그 이치가 있었을 따름이고 사물은 있지 아니하였다.  무릇 이와 같은 곳을 반드시 분명하게 알고, 또 처음과 끝을 겸해야 비로소 잘못이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
이처럼 리와 기는 결단코 두 가지 존재(決是二物)로서 현상의 세계에서는 동시에 함께 있어서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존재 방식은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리의 측면에서 본다면 사물이 있기 이전에 이미 사물이 있게 한 리가 먼저 있다는, 즉 리선재(理先在)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
아울러 주자는 리와 기의 관계가 ‘재물상간’(在物上看)의 경우와 ‘재리상간’(在理上看)의 경우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리와 기의 관계에 대한 주자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표명한 것으로서, 주자철학 전 체계를 통해서 이러한 자신의 관점은 철저하게 관철된다.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문: 리가 먼저인지 기가 먼저인지 선후로 나룰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주자답: 좋은 질문이다.  리가 먼저라 해서 오늘 리가 있고 내일 기가 있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선후는 있으니, 예를 든다면 만약 세상이 모두 소멸되어 버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리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자에서 ‘리선’(理先)의 ‘선’(先)이 시간적인 선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해 진다.  리선의 선은 개별적 사물 세계의 존재 근거로서 리가 기보다 존재론적으로 선재한다고 하는, 즉 존재론적인 의미에서의 선이다.  이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주자의 주리론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즉 주자에서의 리-이 경우 ‘통체태극’으로서의 리-는 모든 개별적 존재자들의 궁극적 존재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개별물 속에서는 리와 기가 항상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가 흩어지면 개별적 사물도 사라진다.  개물(個物)이 사라진다는 것은 개물의 자기 동일성을 유지시켜 주던 분수리로서의 내재리도 역시 개물과 함께 소멸됨을 의미한다.  즉 “기는 역시 흩어지며, 흩어지면 곧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는 주자의 주리론에서 보이는 기에 대한 관점의 근본적 특징의 일단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주기론자들은 기는 무궁(無窮)하다고 본다.  즉 일기장존(一氣長存)이다.  이는 명대의 나정암, 그리고 조선의 이율곡과 기고봉의 리기관에서 잘 나타난다.  이들은 모두 리와 기는 원래 서로 나뉘어 진 때가 없었다 하고, 기가 무궁하기 때문에 리도 무궁하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리는 기의 자기 질서, 즉 조리(條理)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주리론에서는 일기장존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일기장존을 인정한다면, 이는 리와 기가 시원에서부터 항상 함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리가 일차적․근원적인 존재일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주기론의 성립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주자에서는 이미 흩어진 기는 ‘무’(無)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기는 리에 의해서 그 존재 근거가 설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기는 리의 생멸 원리에 따라서 생멸하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 생멸하는 것은 아니다.  즉 주자의 주리적 입장에서의 리와 기의 관계는 “이 리가 있고 나서야 기가 생겨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비질료적인 기에서 질료적인 리가 인과 생출(因果生出)된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 인과 생출된다면 리는 이미 질료성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는 흩어져 버리면 없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주자에서 리와 기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가?  리는 기를 화생(化生)하게 하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기는 이 리라고 하는 기의 화생의 원리에 따라서 생멸을 거듭한다.  따라서 주자적 주리론의 입장에서는 기에 대한 리의 일차성이 인정되지 않을 수 없고, 기는 리에 의존하는 이차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즉 리는 기보다 ‘선’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가 완전히 소멸되어 버렸을 지라도 무한한 존재로서의 리가 있는 한 세계의 계속성은 확보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세계의 궁극적 존재 근거로서의 리의 독립적 실재성이 인정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논리이다.  따라서 주자에서의 리기 관계는 ‘리선’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때의 ‘선’은 시간적인 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는 리에 의존하는 존재이므로 리의 일차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의 선이다.  주자의 용어를 빌려서 본다면 “그 근원에까지 미루어 올라가면”(推其向上根源), 혹은 “위로 미루어 올라가면”(推上去) 리는 기보다 일차적인 존재, 혹은 ‘리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2. 심(心)의 구조와 기능

리기론(理氣論)은 그 자체가 주자학의 본령일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주자학을 이기론적 인간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자학은 인간이 인간 자신을 전면적으로 문제화하고, 그 해결의 실마리를 이와 기에서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는 주자학에서 인성, 즉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로 표출되며, 따라서 인성의 문제에 관한 해명이야 말로 주자학적 인간학의 출발점이 된다.
인간은 드러난 현상이다.  드러난 현상은 어떤 경우에도 리와 기가 결합(理氣之合)되어 있다.  그리고 성리학에서의 신(身)의 주재자는 심(心)이고 심 역시 이와 기의 합이므로 심에는 리의 측면과 기의 측면이 있게 된다.  리는 작용하게 하는 자이고 기는 작용하는 자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가장 본질적인 것은 심의 리적인 측면이라고 하는 것이 주자학적 주리론의 특색이다.  그리고 이 심의 본질이 바로 성(性)이 된다.
또 심은 성(性)과 정(情)을 통섭하는 존재(心統性情)이다.  따라서 성과 정 역시 리와 기의 양 측면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주자학의 특색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든지 본질적인 것은 리의 측면이다.  이는 주리론의 입장에서 나오는 인간 및 세계에 관한 이해의 당연한 귀결이다.
심통성정설은 장횡거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심(心)이 ‘성과 정을 거느린다’(統性情)면, 성과 정은 모두 심에 의존하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심에도 선악이 있는가?  주자는 이 점에 대해서 “심은 동하게 하는 존재(動底物事)이니 자연 선도 있고 악도 있다.  측은과 같은 것이 선이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고도 측은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것이 곧 악이다.  선이 아니면 곧 악이다.  그렇지만 심의 본체에는 불선(不善)이 있지 않다.”라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자의 입장은 성과 정에서 선악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과 같은 방식을 가지고는 심에서의 선악의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심은 동하게 하는 존재이지 자신이 선이거나 혹은 정처럼 악으로 흐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심은 그 본질이 리이기 때문에 굳이 말한다면 심 자체에 악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리는 스스로 운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심의 리로서의 성은 어떻게 표출될 수 있는가?  그 가능 근거는 바로 심이 리와 기를 합해 있기 때문이다.  즉 동하는 곳은 심이고 이 심을 동하게 하는 원리는 성이며 동하는 것은 심의 기이다.  그리고 성이 심의 기를 타고 구체적인 감정으로 표현된 것이 정이다.  그러므로 심은 성과 정을 주재한다고 했던 것이고, 또 심은 작용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주자에서의 심과 성정은 “성은 심의 리이고 정은 성의 동이고 심은 성정의 주”가 되는 관계를 가진다.
이처럼 성과 정은 심 내의 존재이다.  그리고 성이 동한 것이 정이다.  그러나 성은 자신이 동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성이 심의 기를 타고 동하여 구체적인 감정으로 나타난 것이 정이 된다.  그러나 심과 성정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므로 심과 성은 하나인 것 같으나 둘이고 둘인 것 같으나 하나라고 한다.  즉 동시 공재(同時共在)한다는 점에서는 하나이지만 존재 방식이 다르다는 점에서는 둘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주자는 ‘이 곳을 가장 잘 살피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성이 기를 타고 현상한 것인 정에는 선악이 있지만, 그러나 동하게 하는 원리로서의 성은 완전한 선이라 하였다.  한편 정에 선악이 있다고 한 주자의 말은 ‘연경이출’(緣境而出)한 정과 ‘유중이출’(由中而出)한 정을 구별하고, 사단의 정과 칠정의 정을 구별한 퇴계 사칠설의 근거가 된다.


3. 성정관(性情觀)

성에 관한 문제는 존재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다.  따라서 인성에 관한 논의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논의이며, 인간 자체가 이미 ‘리기지합’(理氣之合)의 존재이기 때문에 기의 측면에 배제되고서는 성이 문제화될 수 없다.  심은 이미 드러난 현상이다.  그러나 심속에는 성이 내제되어 있고, 이는 음양 속에 태극이 내재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이다.  따라서 주자는 성은 태극과 같다고 했으며, 이때 태극은 심 속에 내재된 심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심을 배제하고 성만을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현상계에서 리를 배제하고 기를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은 기 속에 내재한 리로서 개별적 사물의 본성을 규정짓는다.  그러므로 성즉리(性卽理)라는 말은 객관적인 리가 사물에 내재화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리는 인간의 심에서는 성이라 하고, 인간과 대립한 객체로서의 사(事)에서는 리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가 리를 품부받음으로써 개별화가 이루어지게 되고, 이때 개별물의 자기의 동일성을 유지시켜주는 내재적 본질이 성인 것이다.  즉 성은 ‘생지리’(生之理)가 된다.
개별물의 존재 원리로서의 성은 개별물의 당위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성리학에서는 당위(Sollen)와 존재(Sein)의 연속적 통일성이 성립된다.  개물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취하지 않으면 자신의 동일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개물은 마땅히 자신의 본성에 충실해야 된다.  그것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주자는 성을 리라 하고, 또 성을 ‘합당한 것’이라 하였다.  즉 당연과 필연은 일치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아울러 성은 리이기 때문에 순수한 선으로서 악의 조건은 될 수 없다.  따라서 악의 문제는 정(情)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성이 발해서 정이 된다.  그러나 성 자체가 발동하는 것이 아니라, 심의 기를 통해서 현출된다.  그러므로 정은 편(偏)․색(塞)․잡(雜)․박(駁)한 기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자유로울 경우, 즉 순수한 리에 완전히 의존해서 발현될 경우는 선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악으로 흐를 수도 있는 것이다.
성이 발하면 곧 정이 된다.  정에는 선과 악이 있지만 성은 완전한 선이다.  이 점에 대해서 주자는 “성은 무불선(無不善)이지만 심이 발한 바의 정이 되면 간혹 불선이 있게 된다… 심의 본체는 본래 무불선이지만 흘러가면서 불선이 되게 하는 것은 정이 물욕으로 옮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성은 리의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인․의․예․지는 성 가운데 하나의 리이다.  측은․수오․사손․시비는 정이 발한 바의 이름이다.  이 정은 성에서 나온 것”이라 했다.  이러한 주자의 정에 대한 입장은 조선 성리학의 전개 과정에서 퇴계와 율곡 및 고봉의 사단칠정관(四端七情觀)의 차이점을 해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주자는 인의예지의 성에서 발한 정은 순선으로서 사단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악으로 흐를 수 있는 정은 사단의 정이 아닌 다른 정이어야 한다.  즉 주자는 사단의 정과, 이와는 질적으로 다른 정의 영역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퇴계는 정을 ‘유중이발’(由中而發), 즉 심의 리적인 측면에서 발하는 사단의 정과 ‘촉기형이동어중’(觸其形而動於中), 즉 외물(外物)과의 관계에 의해서 발하는 칠정의 정으로 명확히 구분하고, 사단의 정은 순선한 정이요 칠정의 정은 ‘혹유선악’(或有善惡)하는 정이라 규정짓고 있다.  그러나 ‘기발리승일도’(氣發理乘一塗)설을 주장하는 고봉이나 율곡에게서는 ‘유중이발’하는 사단의 독자적 영역은 인정될 수 없다.  다만 ‘기포리’(氣包理), ‘칠정포사단’(七情包四端)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주자는 ‘성발위정’으로서의 인․의․예․지의 성에서 발한 사단의 정은 순선무악이라는 점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주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단의 정에서 악의 근거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사단을 칠정과는 다른 영역의 정으로 보았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은 심의 내재적 본질이다.  그리고 심은 ‘합리기’이다.  따라서 성은 현실적으로는 ‘겸기질’(兼氣質)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객관 세계에서의 초월의 리로서의 무극이태극이 독립적인 존재 영역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도 이중의 구조를 가질 수 있다.  주자는 바로 이러한 입장을 견지한다.

천지지성에 대한 논의는 리만을 지칭해서 말한 것이고, 기질지성에 대한 논의는 리와 기를 섞어서 성을 말한 것이다.  이 기가 있지 아니하였을 때도 이 성은 이미 있었고, 기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도 성은 도리어 항상 존재한다.  비록 리가 바야흐로 기 가운데 있게 될 때도 기는 스스로 기이고 성은 스스로 성일 따름이지 역시 서로 섞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인간 존재 속에서는 본연성의 독립적 실재성이 확보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본연성은 항상 기질성 속에 내재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즉 “성을 말하면 저절로 이미 기질의 안에 있게 된다.  만약 기질이 없다면 이 성 역시 있을 곳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와 기가 현상 세계에서 항상 동시 공재하지만 리는 리이고 기는 기인 것과 같이 본연과 기질도 마찬가지의 구조를 가진다.  그렇다면 기성(氣性)과 리성(理性)의 구별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성은 다만 理이다.  그러나 天氣․地質이 없다면 성은 있을 곳이 없게 된다.  다만 청명한 기를 얻으면 가려지거나 막힘이 없게 되어 기가 순리대로 나오게 된다.  가려지거나 막힘이 적을 때는 천리가 기를 이기고, 가려지고 막힘이 많으면 사욕이 천리를 이기게 되니 여기에서 본원지성은 불선함이 없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현실적으로 만나게 되는 성은 ‘겸기질’한 것일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성 그 자체는 순수한 리로서 자신의 독자적인 존재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 수양론(修養論)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고, 또 이러한 이해는 실천적 행위로 매개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지행(知行)의 문제가 제기된다.  주자는 앎과 행위는 상수(相須)한다는 전제 아래, 선후를 따진다면 아는 것이 앞서지만 경중(輕重)으로 말한다면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즉 경중, 즉 무엇이 더 가치있는가 하는 점에서는 당연히 행위라 해야겠지만, 그 행위의 가능 근거를 따진다면 행위의 기준이 먼저 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선지후행(先知後行)을 말하는 것으로 주자적 주지주의의 전통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치지(致知)와 함양(涵養)에서도 치지가 먼저 요구된다.
그렇다고 해서 지와 행을 둘로 구분할 수는 없다.  천리는 천리를 체득하려는 실천적인 행위 속에서 얻어진다.  그러므로 궁리의 방법이 거경이고 거경(居敬)의 과정이 궁리(窮理)가 된다.  이렇게 볼 때 천리의 체득 과정, 즉 인식 과정은 그 자체가 행(行)으로서의 실천적 수양이 되고 아울러 행, 즉 실천 속에서 천리의 빛은 인간에게 비추어 지게 된다.  따라서 주자학에서는 인식과 수양이 별개의 것일 수는 없다.  즉 인식의 과정이 수양의 과정이고 수양의 과정은 곧 천리의 체찰(體察) 과정이다.
성리학에서 인간은 도덕의 주체로서, 그 본래 모습은 선 자체이다.  그러나 기욕(嗜慾)에 의해서 인간의 본래 모습, 즉 선은 가리워지게 된다.  즉 “사람이 천리에 어두운 것은 기욕이 천리를 어지럽히기 때문”(人於天理昏者嗜欲亂着他)이다.  그리고 맹자 이래로 인간 존재의 특징은 “만물의 이치는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萬物皆備於我)는 관점이 유지된다.  따라서 기욕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시급한 요청이 된다.
수양의 관건은 천리(天理)를 깨닫는 데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천리를 깨달을 수 있는 근거는 우리 마음이 ‘만가지 이치’(萬理)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을 온전하게 보존한 이후라야 궁리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면 이치를 궁구할 수 없고, 아울러 이치를 궁구하지 않고서는 역시 마음을 보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음의 보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는 기에 의해서 왜곡된 마음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다.  즉 마음을 비우는 것, 다시 말해서 ‘허’(虛)하게 함으로써 사욕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허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마음의 작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마음의 작용을 위해서 사사로운 생각과 주관적 선입견을 배제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궁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있는 마음을 보존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저 학문함에는 반드시 경성(警省)해야 한다.  서암화상(瑞巖和尙)은 날마다 스스로에게 묻기를 ‘주인옹은 성성(惺惺)하신가’라 하고 또 스스로 대답하기를 ‘성성하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의 학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항상 깨어있음’(常惺惺)은 불교적 용어이다.  주자는 이를 심수양의 한 방법으로 채용하고 있다.  불교는 의식 작용의 본래공성(本來空性)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하며, 그들의 수양은 궁극적으로는 심 역시 연기소생으로서의 본래공임을 깨닿게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성을 깨닿기 위한 방편으로서 심의 ‘성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자에서는 의식 작용의 주체로서의 심의 실재성을 확고하게 긍정한다.  따라서 주자가 인용한 ‘항상 깨어있음’은 심의 실재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마음이 있어야만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 몸이 있음을 안다.  사람은 마음이 혼미하게 되면 흡사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자신이 존재함을 알지 못한다.  비록 사람이 깊은 잠에 빠졌더라도 깨어나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심 역시 이와 같다.  어둡고 가리워져 있다가 누군가가 깨우쳐 주면 곧 여기에 있게 되는 것이다.

심의 보존은 항상 깨어있는 마음을 가지고 털끝만한 사욕도 끼어들지 못하게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즉 심의 통일이다.  그리하여 사사로운 욕망의 침투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수렴, 혹은 통일의 방법이 경(敬)이다.  이를 위해서 정좌(靜坐)의 방법이 요구된다.

명도는 사람들에게 정좌하라 했고 연평(延平)선생 역시 정좌하라고 했다.  정신이 안정되지 않으면 도리가 머물 곳이 없게 된다.  또 말하기를 모름지기 정좌해야만 마음을 수렴할 수 있다.

그러나 정좌를 통한 경공부는 심의 작용을 완전히 끊으려는 것은 아니다.  경(敬)공부의 방법이 마음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라면 선학(禪學)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렴계가 주장한 무욕도 주자학에서는 부당한 욕망의 제거를 말한 것으로 이해될 뿐이다.

경(敬)은 좌선입정하여 모든 사려를 단절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마음을 수렴하여 멋대로 할 수 없도록 해서 사려를 쉬게 하면 마음이 깨끗하게 되어 일삼을 것이 없게 되니 저절로 전일하게 되고, 일이 생기게 되더라도 순리에 따라 일에 응하게 될 것이니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경은 올바른 마음을 보존하여 티끌만한 사욕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는 수양의 방법으로서, 모든 생각을 끊어버리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경의 목적은 ‘안으로 망령된 생각을 없게 하고 밖으로는 망령된 행동이 없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정제엄숙(整齊嚴肅)과 주일직내(主一直內)가 강조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공부는 궁극적으로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아 천인합일의 완전한 인간상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5.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

자연의 필연법칙으로서의 리가 개물에 내재한 것이 개물의 성이 된다.  그렇다면 개물은 다양하더라도 그 본성은 동일해야 할 것임에도 왜 다양성이 나타나는가.  주자는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자들의 차이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 생각으로는 성(性)이라는 것은 사람이 천(天)에서 얻은 바의 리이고, 생이라는 것은 사람이 천으로부터 얻은 바의 기이다.  성은 형이상의 존재이고 기는 형이하의 존재이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있어서 이 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고 또 이 기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인․의․례․지를 품부 받음에 어찌 사물이 그 완전한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사람의 성은 불선함이 없어서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고자(告子)는 성이 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기를 성이라 하였으니 한갖 지각하고 운동하며 살아 꿈틀거리는 것만 보고 사람과 사물이 같다하고, 인․의․예․지의 순수함을 알지 못하고 사람과 사물이 같다고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性)은 태극이다.  즉 성은 보편적 동일성을 가진다.  그러나 성을 품부받은 기는 다양하다.  그리고 당위 법칙의 최고 근거로서의 성은 모든 개물의 존재의 근거가 되고, 또 존재의 원리가 된다.  그것이 도덕적 관념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 원리를 따라야 한다.  나무는 뿌리를 위로 하여 자랄 수는 없다.  그것은 자신의 부정이다.  아울러 그것은 생명의 부정이다.  따라서 자신의 본성을 따르지 못하면 세계의 모든 질서는 붕괴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성과 사물의 성은 어떻게 다르며, 다르다면 그 근거는 어디에서 구해질 수 있는가?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다함께 천지의 리를 받아 성으로 삼고 천지의 기를 받아 형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다른 점은 오직 사람만이 그 가운데서 형기의 바른 것을 받아 능히 그 성의 완전함을 보유하게 되어 작은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작은 차이일지라도 인(人)과 물(物)의 분(分)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인간이나 금수가 모두 그 존재 근거는 천지의 리와 기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러나 인간만이 기 가운데서 바른 것을 얻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점은 인간의 천리에 대한 가지성(可知性)의 근거가 된다.
인간은 ‘리기지합’(理氣之合)의 존재이고, 이 점은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동일하다.  따라서 기의 제약에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는 자연의 필연법칙에 종속된, 즉 자유가 없이 단순히 종(種)의 유지를 위한 본능적인 행위를 되풀이하는 기계적인 행위만이 있다.  물론 인간도 그러한 본능적인 행위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선을 가려 고집’(擇善固執)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기의 가장 순수한 것을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천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기의 작용이다.  그러나 리는 항상 그 속에 보존되어 있다.  그러므로 발(發)하여 인․의․예․지․효제․충신의 행위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二氣와 五行은 교감하여 만변한다.  그러므로 인물이 생겨남에 精과 組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인간은 기 가운데서 正하고 通한 것을 받았고 物은 기 가운데서 偏하고 塞한 것을 얻었다.  오직 사람만이 그 기의 정한 것을 얻은 까닭에 막힘이 없다.  물은 편한 기를 받았기 때문에 리가 막혀서 그 존재를 알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주자의 인성관은 렴계의 인간관을 계승한 것으로서 우주에 있어서의 인간의 지위는 다른 존재자들과는 질적인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 질적인 차이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 도덕적 존재라는 것이며, 또 천리에 대한 가지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기의 ‘正’한 것과 ‘通’한 것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주자는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의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의 모양을 닮았기 때문이고 발이 네모진 것은 땅의 모양을 닮았기 때문이다.  평정(平正)하고 단직(端直)하므로 그 천지의 정기(正氣)를 받아서 도리를 알고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사물은 천지의 편기(偏氣)를 받았으니 금수는 기어서 살아가고, 초목은 머리를 아래로 해서 자라며 꼬리를 오히려 위로 한다.  사물들 사이에도 의식 작용이 있는 것이 있기는 하나 다만 한 길만 통하는 데 불과하다.  예컨대 까마귀의 효성과……소가 밭을 갈 수 있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 없고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사람이 사물과 다른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품부받은 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또 혼․명․청․탁의 다름이 있다.  그러므로 상지(上知)와 생지(生知)의 자질을 갖춘 자는 기가 청명하고 순수하여 조금도 혼탁함이 없으니 이른바 生知․安行하게 되며 배우지 않아도 능하게 되는데 요순 같은 이가 바로 그러하다.  그 다음으로는 거의 생지에 가까운 자질을 가진 사람으로 반드시 배운 후에 알게 되며 반드시 행한 후에 이르게 된다.  또 그 다음은 자품(資稟)이 이미 치우쳐 지고, 또 가리워져서 반드시 피나는 공부를……한 연후에 비로소 생지자에 가깝게 되며 진학함을 그치지 않으면 그 결과는 같게 된다.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은 별로 없다고 했으나 사람과 사물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까닭은 다만 이와 같은 몇 가지 점에서이다.  만약 보존하여 얻지 못한면 금수와 차이가 없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근거는 도덕적 본성을 구비하고 있고, 또 그것을 알 수 있으며, 알아서 그것에 따를 수 있다는 데서 찾아진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금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개별적인 차이성은 기의 혼․명․청․탁에서 찾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자의 인간관은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에 대한 총체적인 표현이다.  결국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으로 돌아가 그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자적 인간관은 철두철미 도덕적 인간학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아울러 주자의 인간관은 퇴계의 인간관의 정수가 표현되고 있는 ꡔ천명도설ꡕ(天命圖說)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6. 주자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

주자학은 주렴계․장횡거․정이천․정명도의 사상을 주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한 데서 성립한다.  리는 우주의 본질인 천리이며, 동시에 인간의 내면에 내재하게 되면 인간의 본질인 성이 된다.  즉 인간의 당위법칙은 자연의 필연법칙에 의존해 있다.
인간에 내재한 리는 인․의․예․지라는 순선한 성이 되며, 성의 발현이 정이 된다.  그리고 성은 단순히 개인의 주관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행위를 통하여 가족과 사회 및 국가로 확대시킴으로서 도덕적 지치(至治)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따라서 주자학은 그 자체로서는 인간과 자연과 사회가 혼연일체가 된 하나의 완전한 철학체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자학은 남송 멸망 이후 원․명․청에서도 관학의 지위를 누리게 됨으로써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정착되었다.  따라서 주자학의 권위에 대한 비판은 있을 수 없게 되었고, 이는 사회 발전의 장애 요인이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로 전개된다.
또 인간의 당위법칙을 자연의 필연법칙 속에서 끌어내고자 할 때, 가혹한 도덕적 엄숙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게 된다.  즉 인간의 본래적인 성정과 정당한 물질적 요구마저도 죄악시할 수 있는 것이다.
정이천은 과부가 혼자서 생존을 이어갈 수 없는 지경이 이른다면 재가해도 되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대해서 단호히 거부한다.  두 남편을 섬기기보다는 차라리 굶어 죽으라는 것이다.
이러한 엄격주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 본능마저도 부정한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기에 청대에 오게 되면, ‘주자학이야 말로 리를 가지고 사람을 죽인다’는 비판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제3절 유심주의의 태동과 발전

1. 육상산의 심학(心學)과 그 특색

육상산(陸象山, 1139~1192)은 인간의 마음은 그 자체가 이미 완전한 것으로서 리라고 하였다.  이른바 ‘심즉리’(心卽理)이다.  상산은 일찍이 아호사(鵝湖寺)에서 주자와 격렬한 토론을 하였다.
주자에서는 인간이 리와 기의 결합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심도 리와 기의 결합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심(心)은 성명(性命)의 정(正)에 의존하는 도심(道心)과 형기(形氣)의 사(私)에 의존하는 인심(人心)으로 구별된다.  그러므로 형기의 사사로움을 극복하고 본연의 천리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또 인식의 문제에서도 ‘격물’(格物) 즉 ‘즉물이궁기리’(卽物而窮其理: 객관 대상에 나아가서 그 이치를 궁구함)해야만 ‘치지’(致知: 완전한 인식에 이르게 됨)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상산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해준 것이 곧 이 마음이다.  사람은 모두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 마음 그대로가 리”라 하여 주자에서처럼 심을 리적인 측면과 기적인 측면으로 구별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했다.  다만 내 마음을 알면 그것이 그대로 천지의 리를 아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의 리를 알기 위해서는 객관 대상에 대한 탐구는 필요하지 않고 내 마음 안에 있는 리만을 파악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므로 객관 대상의 이치를 하나 하나 궁구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잡다한 사물에 의해서 마음의 본질을 어지럽히게 될 뿐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는 경서(經書)마저도 ‘내 마음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주자와 상산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전자는 주지적 입장에서 도문학(道問學)을 중시했고 후자는 주의적 입장에서 존덕성(尊德性)을 중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산의 주관 유심주의(主觀唯心主義)적 입장은 ꡔ맹자ꡕ의 ‘만물개비어아’(萬物皆備於我: 모든 사물의 이치는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음)에 입각해 있다.  그리고 그의 인식론은 정명도의 ‘궁리․전성․지명’이 일시에 함께 이루어진다는 직관주의적 입장과 그 얼개가 유사하다.  또 심 자체를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고 심이 심의 본질을 인식한다는 불교적 논리와도 어느 정도 접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선종에서처럼 불립문자(不立文字)만을 제창한다거나 혹은 경서의 효용성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학문은 내 마음을 배우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심학(心學)이기 때문에 경전에 대한 세세한 자구의 해석보다는 내 마음을 근본으로 해서 이해하고 취사선택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상산의 학이 심으로써 심을 이해하는 선불교적인 인식론과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선종에서는 개인의 완성이 중심이 되지만 상산에서는 개인의 완성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평천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점에서는 선불교와는 궁극적으로 다른, 유학적 세계관의 본질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양명(陽明)의 양지학(良知學)

주자의 ‘격물궁리’라는 주지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대는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상산에 의해서 부정되었다.  그리고 명대에 오게 되면 진백사(白沙 陳獻章)와 누일재(一齋 婁諒) 같은 이가 반 주자학적인 노선에 서서 육상산의 학문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이들이 양명학의 선구자이다.
왕양명(陽明 王守仁, 1472~1528)은 누일재를 스승으로 주자학을 배우기도 하고, 또 도교나 불교 및 문장에도 마음이 드나들었다.  그러나 인종 때 환관 유근이 전횡을 일삼자 이를 탄핵함으로써 유근의 미움을 받아 중국 서남의 불모지인 귀주성 용장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생활의 고통은 물론이고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심즉리’를 깨달았다.  이 때가 양명 38세 되던 해로서 이를 ‘용장의 일오’라 하며, 이는 양명철학의 아르키메디안 포인트가 된다.
주자는 심을 리와 기가 결합된 존재로 파악한다.  또 성(性)이나 정(情)도 심에 의존해 있으므로, 심을 인심과 도심으로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성이나 정도 본연성과 기질성, 사단과 칠정으로 나눌 수 있다하고 기질을 극복하고 본연을 회복하는 것이 학문의 목적이라 했다.  이를 위해서 주관적으로는 경(敬)공부가 필요하고 객관적으로는 격물치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양명은 이러한 이원론을 부정한다.
첫째, 양명은 理는 기의 조리(條理)로 본다.  따라서 리와 기는 일체이고, 즉 리즉기(理卽氣)가 된다.  이런 점에서 심학의 리기관은 명도에 의해서 확립된 도기상즉관 및 이를 계승한 나흠순의 리기일물설과 그 논리구조가 일치한다.
둘째, 리과 기가 동일한 것이라면 주자처럼 심과 성 및 정을 리적인 측면과 기적인 측면으로 나눌 필요가 없다.  마음은 어디까지나 하나일 뿐이다.
셋째, 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주자처럼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필요없게 된다.  따라서 양명에서는 ꡔ대학ꡕ의 격물치지가 주자가 말하는 것처럼 객관 대상의 리를 궁구함으로써 치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써 마음의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는 것으로 충분하다.  즉 ‘격’(格)은 ‘즉물’(卽物: 대상에 나아감)이 아니라 마음을 ‘정지’(正之: 바로잡음)하는 것이다.  이러한 양명의 관점은 상산의 ‘육경은 모두 내 마음의 주석’이라는 말과 일치한다.  상산과 양명을 합해서 육왕심학이라 하는 소이는 여기에 있다.
넷째, 주자학에서는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고 나서야 행위가 가능하다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주장한다.  그러나 양명은 지행의 분리에 반대한다.  객관 대상을 통해 얻어진 단순한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참된 지식은 이미 행위와 무매개적으로 매개되어짐으로써 지와 행은 일시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즉 ‘지행합일’을 주장한다.
양명은 만년에 이르러 ‘양지’(良知)를 강조하고 ‘치양지’(致良知)를 주장한다.  양지는 ꡔ맹자ꡕ에 보이는 용어로, 인간이 생득적으로 갖추고 있는 선한 도덕심을 말한다.  양명은 양지에 대한 깨달음 이후 스스로 ‘자신이 올바르다는 것을 마음대로 행하여 조금도 숨김이 없었다.  소위 미친자의 심경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하고 있다.  이는 양지가 이미 인간에 본래적으로 갖추어져 있고, 다른 가공의 공정을 거치지 않아도 완성되어 있는 것, 즉 현성(現成)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 사욕에 은폐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치양지’하는 공부가 필요했다.
이러한 양명의 입장은 현실적인 인간의 마음이 그대로 절대적인 선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욕의 근거에 대해서 양명은 침묵한다.  만약 그것을 인정하면 사욕의 극복을 통한 본연의 회복이라는 주자적 입장의 긍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욕을 인정한 이상 이것을 제거하는 수양의 방법이 필요한 것이고, 이를 위해서 양명은 문인들에게 ‘정좌’(靜坐) 공부를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문인 가운데는 정(靜)만을 중시하여 현실적인 실천을 기피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여기에서 양명은 사상마련(事上磨鍊)을 역설하게 된다.
한편 이러한 양지설은 명도의 ‘만물일체의 인’과 결합된다.  이는 인간의 보편적 평등성을 주장한 말이다.  또 횡거에게도 역시 ‘민오동포’(民吾同胞)라는 인간적 평등성에 대한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송유들에게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인간적 평등성은 그들의 ‘분’(分)의 논리에 의해서 차단되었다.
양명의 양지는 성인이나 천민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지는 만인의 보편적 평등성을 매개해줄 주 있다.  이러한 양명학의 체계는 계급적 대립의 해소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보편적 평등성에 대한 긍정은 공맹이래의 유가사상 속에서도 찾아볼 수는 있다.  다만 그것이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과정에서 본래적인 모습이 현실적 상황 속에서 기능하지 못했을 뿐이다.  어쨌건 양명에서는 모든 사람이 양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배자이든 피지배자이든, 사대부이든 천민이든 인간적인 차별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어느날 제자인 왕심재가 외출하고 돌아오자 양명이 무엇을 보고 왔느냐고 물었다.  심재는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성인인 것을 보고 왔습니다(滿街聖人)”라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서 양명은 “상대방도 그대가 성인인 것을 보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만가성인설’은 양명 좌파의 사람들에 의해서 그대로 실천되었고, 이러한 만인의 평등성에 대한 긍정으로 말미암아 양명의 제자 가운데는 위의 왕심재가 염전 노동자였던 것을 위시하여 상인이나 농민 천민들이 많았다.


3. 양명학의 전개과정

양명 이후 양명학은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누어진다.  온건파를 우파라고 부른다면 급진파는 좌파가 될 것이다.  우파는 이후 주자적 경향으로 경도되므로 양명학의 극단화를 추구한 좌파에 대해서만 살펴본다.
좌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왕용계(王龍溪, 1498~1583)가 있다. 그는 스승의 설에 따라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양지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이 양지는 이미 완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현성양지(現成良知)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속의 양지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되지 이밖에   어떠한 공부도 필요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용계의 양지는 후에 유종주(劉宗周)가 지적하였던 것처럼 선종의 ‘불성’(佛性) 그대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계를  통해서 양명의 선종적인 경향이 극명하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용계의 사상은 태주학파에게 영향을 준다.
태주학파의 시조이자 ‘만가성인’을 주장한 왕심재(1483~1540)는 “도는 노유귀천에 관계없이 배우고자 하면 전한다”하였다.  이는 현실적 계급 질서에 대한 도전이요 파괴행위이다.  따라서 심재의 강론에는 수천의 농공상인들이 몰려 들었고, 특히 농한기에는 장소를 이동하면서 강론하였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다고 한다.  이는 유학의 강론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현상으로, 그의 강론이 이미 종교 집회로서의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심재의 학문은 서파석에서 안산농, 그리고 하심은과 나근계로 이어진다.  하심은(何心隱, 1517~1579)은 북송 횡거의 민포물여(民胞物與)에 공감하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면 살신해서 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인간의 평등성을 주장했다. 또 북송 주렴계의 무욕에 대해서도 무욕 역시 욕이라 하여 어떠한 경우에서도 인간의 욕망은 부정되어질 수 없다고 했다.  물론 그 욕망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어야 함은 만민평등의 사상에 비춰 볼 때 당연한 것이다.
나근계(羅近溪, 1515~1588)는 양지를 ‘갓난 아기의 마음’에 결부시킨다.  이러한 근계의 입장은 이탁오의 동심(童心)설을 준비한 것이다.
이탁오(李卓吾, 1527~1602)는 양명좌파의 자연주의적 경향을 더욱 철저화했다.  양명은 양지설을 주장하면서 ‘치양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양명 좌파의 학문적 경향은 ‘현성양지’를 극단화하여 양지에 수양이나 공부의 가공을 가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했다.  이러한 좌파의 입장을 철저화한 것이 이탁오의 ‘동심’설이다.
탁오는 동심은 진심(眞心)이라 하고, 이 동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진인(眞人)이라고 했다.  인간의 본래 마음은 모두 동심이지만 눈과 귀를 통해서 견문의 지식이 들어감으로써 오히려 이 동심이 없어져버린다.  육경의 말도 동심의 말인 것만은 아니라 했다.  그리고 문학에 대해서도 그것이 동심의 발로라면 경전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 어떤 종류의 글도 지고의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우열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심지어 ꡔ서상기ꡕ나 ꡔ수호전ꡕ 같은 명대의 소설을 ꡔ시경ꡕ에 견주기까지도 하였다.
이러한 탁오의 사상은 이미 유가적인 범주에서 멀리 벗어나서 노장의 자연주의적 입장에 접근해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4절  결론과 전망


염계의 ‘무극이태극’을 어떠한 관점에서 해석하는냐에 따라 이기관 및 인간관에 대한 입장은 다양하게나타난다.
이 권역은 초월의 이로보면 주리설이 된다. 따라서 주리설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적은 기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은 부정되어야 할 존재이고, 이런 점에서 엄숙한 금욕주의의 경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천이나 주자 및 퇴계가 이들이다.
한편 이 권역을 명목상의 존재로 보고 음양양의의 기권만이 실재한다고 보면 이는 기의 자기 질서라는 관점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현실적 욕구에 대해서도 부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욕구가 정당성을 잃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명도에서 시작해서 나정암이나 율곡에게로 연결된다.
또 횡거나 화담은 이 권역을 태허라 하고, 개별기의 존재 근거가 되는 존재로 이해했다.  이들의 입장은 횡거는 주자에 의해서, 화담은 퇴계에 의해서 태허의 허를 이라고 보았으면 잘못이 없을 것이라 한 데서 보여지는 것처럼,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전개한 것이 분명하다.  현대 학자들은 이들을 초월관적 기철학자들로 분류한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의 욕망을 주리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정한다.
왕정상이나 왕부지 같은 사람들은 태허의 권역을 명목상의 존재에 불과하다 하고 기를 스스로 운동하는 존재이며 기의 질서의 근거를기의 외부에서 찾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백한 유물론적 경향을 나타낸다.
이제 청대에 오게 되면 중국은 다시 만주족에게 지배된다.  청대의 학문은 이전의 이천여 년의 중국철학을 역으로 소급하여 전개한 것이라한 양계초의 지적처럼, 청초의 양명학에 대한 수정과 비판은 명나라 심학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지고 왔고, 중국민족의 국가 멸망이라는 엄청난 현실에서 양명학적 심학의 과오를 자각한 학자들은 경세치용(經世致用) 혹은 실용학을 제창하고, 나아가 송학으로부터의 해방이 실현되었으며, 다시 후한고문경학의 연구로 소급하여 고증학(漢學)으로 발전했으나, 후한학 즉 고증학의 한계가 자가됨으로써 다시 전한금문경학으로 소급하여 공양학이 발생했고, 다시 전한이후 유학의 독존에 대한 반성은 周奏諸子學의 연구로 소급했으나 만주왕조의 쇠퇴와 함께 제자학에 대한 한계를 자각하자 공자학연구로 소급되어 강유위의 이학이 되살아나는 현상을 빚기도 하면서 서양의 충격과 이에 바탕한 갈등 속에서 다양한 새로운 사사의 가능성들이 시도된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 속에서 새로운 세계관의 모형으로서의 맑시즘이 도입되고, 이는 단순한 이론에 머문 것이 아니라 모택동에 의해서 혁명적 추동력을 얻게되었다.  그리고 혁명의 성공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나타났고, 이는 사상계도 맑시즘에 의한 통일이라는 상황을 전개하게 되었다.


제5절  청(淸)대 철학사상


중국사상사에 있어서 청대는 흔히 ‘기(氣) 철학시대’ 혹은 ‘자연적․실증적 철학의 시대’로 불린다.  이것은 다분히 송․명대의 철학사조를 의식하는 말들이다.  즉 송․명대의 철학사조의 특징이 ‘합리적․관념론적 이(理) 철학’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먼저 송․명학과 청학의 사상사적 특징을 그 차이점에 주목하여 서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가 그 시대적 배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해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본론에 들어가서는 세부적으로, 청대 기론(氣論)의 특징, 청대 고증학의 발달 등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 보겠다.  우리는 이곳에서, 청대 철학이 비록 많은 한계와 반대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근대적 정신의 탄생을 준비했다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1. 송․명학(宋․明學)과 청학(淸學)의 차이

명(明)대 사회는 만력(萬曆, 1573~1620) 연간부터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토지의 집중, 중소지주층의 몰락, 농민의 빈곤화는 구조적인 문제가 되었고, 대외군사비의 증대를 주된 원인으로 해서 증세가 계속되자 납세능력이 없는 농민들은 점점 더 궁핍해졌다.  한편 조정에서는 환관들까지도 가세한 관료들의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혼란스런 중앙정부는 더욱 사회를 불안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급기야 숭정(崇禎, 1628~1644) 연간에는 농민폭동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고, ‘유적’(流賊)이라는 대규모적인 폭동으로까지 확산되었으며 이것이 곧 명나라의 운명을 마감하게 했다.
이러한 국가의 위난과 사회의 혼란 속에서, 학문은 세상에 실제적으로 역할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자각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동림학파(東林學派)이다.  이러한 ‘경세(經世)의 학’을 주창한 일단의 사람들은 학문적으로 주자학을 신봉했고, 정치적으로는 환관세력에 대항하였다. 이들은 군주에게 충성하고, 환관과 권문세족의 횡포를 꺾어 조정과 민생의 혼란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은 ‘관료=사대부’라는 가장 정통적인 입장에 선 집단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경세의 학문을 주장하고 절의(節義)를 숭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들이 주장한 경세의 학문도 역시 정치나 경제를 연구하는 학문은 아니었으며, 또한 이후 크게 발전․성장하지도 못했다.  다만 이들 학문의 의의는, 다음 세대의 새로운 학문의 주역인 황종희(黃宗羲, 1610~1695), 고염무(顧炎武, 1613~1682),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등에게로 계승되어 그들 학문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명나라는 비록 유적들의 손에 멸망되었지만, 그 때까지 명나라와 대립․전투를 계속하고 있던 만주족이 즉시 북경을 점령함으로써 중국은 결국 청조(淸朝)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한족(漢族)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수모였고, 따라서 강남지방을 중심으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군사활동이 일어났다.  또한 청조가 만주풍속(특히 변발)을 강요한 것은 한족 지식인들로 하여금 맹렬한 반감을 고조시켰고, 이러한 저항에 대한 잔학한 탄압은 다시금 반감을 고조시켰다.  그러나 결국 청조의 강력한 무력 앞에 전 중국은 완전히 제압당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 동안 광범위하고 강렬한 민족사상이 폭발했던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명말청초’부터 형성된 이러한 ‘경세치용의 의식’과 ‘민족사상’은 바로 청대학문의 특징을 이루는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송명시대의 학문과 청대학문의 특징을 한마디로 개괄하면 이학(理學)과 기학(氣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송명이학(宋明理學)의 최대공헌은 도덕적 이성의 자각과 그 확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수립하고자 한 학문의 중심이 대체로 순수사유․순수이론, 즉 추상적인 본체론쪽으로 심하게 치우쳤기 때문에 이로 인한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이(理)에 너무 치중하여 사(事)를 경시한다”거나 “심(心)을 강조하고 물(物)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송명시대의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바로 다른 민족(만주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다른 문화(서구과학문명)의 도전 앞에 무기력한 존재가 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 중요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송명유학자들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한 이분법적 시각, 즉 ‘이는 기에 선행한다’거나 ‘이가 기를 낳는다’고 보는 주종(主從)관계, 그리고 ‘천명의 성’(天命之性)은 순수하여 선하고 ‘기질의 성’(氣質之性)은 잡박(雜駁)하여 악하다고 하는 ‘성정이원’(性情二元)의 문제는 당시 학자들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인간의 본성 속에서 ‘욕망을 제어하고 천리를 회복해야 한다’(存天理, 去人慾)는 수양방법을 택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하분절(上下分截), 중도경기(重道輕器: 정신본체를 중시하고 물질현상을 가벼이 여기는 태도)의 학문태도는 송명유학자들의 가치관에까지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즉 송명이학은 점점 관념적인 ‘하늘의 이치’(天理)만을 중시하고 실제적인 ‘인간의 일들’(人事)에 대해서는 경시하는 실천행위 홀대의 사조로 굳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적 경향성은 급기야 독선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뼈아픈 비판을 받게 된다.
송명이학의 극단에 이르러, 중국철학이 줄기차게 지켜오던 현실 중심의 전통이 무너지고 또한 형이상과 형이하의 연결이 끊어지는, 즉 형이하의 세계를 단절시킨 관념철학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대진(戴震, 1723~1777) 같은 학자는 “송나라 유학자들은 인(仁)․의(義)․예(禮)를 통합하고 있는 것이 이(理)라고 보며, 그리고 이는 하늘이 갖고 있는 덕을 사람이 태어나면서 품부해 온 ‘아무런 조짐없는’(無朕) 형이상적 존재라고 생각하였다”고 하며, 그리고 심지어는 “송나라 유학자들이 이러한 이(理)로써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송명이학과 청학은 우주론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입장과 형식을 취한다.  송명이학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주리론(主理論)으로서 ‘이’를 ‘기’의 위, 그리고 앞에 위치시킨다.  특히 ‘소종래’(所從來: 근원, 이유)를 탐구할 때에는 ‘이’를 더욱 추상화시켜서 결국에는 ‘이’를 근원적인 무형의 세계에 별도로 소속시켜 놓고 이것으로부터 천지만유가 생겨나오는 생성론적 근원과 원리 그리고 그 과정을 설명한다.


2. 중국 전통 기론(氣論)의 형성과 청대 기론의 특징

기(氣)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론이 있어 왔지만 대체로 일반적인 견해는 구름을 만들어내는 기운, 봄에 대지에서 피어나는 아지랭이, 사람이 들이키고 뿜어내는 숨과 같은 원초적 생명관으로 이해되어 왔다.  물론 여기에는 다분히 정령(精靈)적, 주술(呪術)적인 이해방식이 곁들어져 왔다.  역사상 최초로 ‘기’란 글자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은(殷)․주(周)시대의 갑골문과 금문(金文)자료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는 ‘기’자(字)는 후대 기론에서의 ‘기’처럼 나름대로 자기 이론체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나 대지의 단순한 작용을 의미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전국(戰國)시대의 여러 학파에 이르게 되면 기는 곧 생명이나 자연의 근원, 법칙, 질서에 대한 해명요구 속에 많은 발전을 하게 된다.  이때 많은 사상가들이 각기 왕성한 활동을 보임에 따라 기개념 또한 다양한 분화와 전개를 하게 된다. 이에 인간 또는 자연만의 소박한 기론에서 인간과 자연을 유기적(有機的)으로 연결해주는 한 몸체 대자연의 기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즉 기의 의미가 단순한 생명현상으로서가 아니라 가장 근원적, 보편적인 자연철학의 개념으로까지 격상되어 기의 모임과 흩어짐에 의해 만물의 생성을 설명하기에 이른다.  특히 전국시대 말기로부터 음양오행설과의 결합에 의해 특색있는 우주론을 구성하게 되며, 또한 당시 시대사조의 하나였던 중국 고대 예언설의 하나인 참위설(讖緯說)의 영향을 받아 운기론(運氣論)이라는 독특한 영역에까지 나아가게 된다.
한(漢)대 이후, 즉 남북조(南北朝)시대와 수(隋)․당(唐)대에 있어서 기론은 도교와 불교 및 심지어는 중국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한의학 방면과 결합되게 된다.  특히 도교는 천제(天帝), 신선, 불로장생의 양생법(養生法) 등과 같은 신비주의 사상의 영향을 기에 전하게 되며, 불교는 선(禪)의 수양론에 있어서 그 중요부분이 기와 관련하여 발전하게된다.  그리고 한의학에서는 ‘음양이기론’(陰陽二氣論)을 전개하여 인체에다 적용한다. 즉 인체는 기의 두 측면,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고 모든 질병을 음과 양의 균형관계가 무너진 것으로 설명하려 든다.  이러한 음양 이기의 균형관계론(음양이기의 상대적 이원론)은 ꡔ주역ꡕ(周易) 이래 현대 중국의 모택동(毛澤東, 1893~1976)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중국인들의 기본 사고를 이루며 또한 다양한 기론의 공통분모가 된다.
도교의 양생법, 불교의 수양론, 그리고 한의학의 치료법 등은 오늘날까지 기의 실재성을 믿거나 확인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철학적인 면에서 기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게 되는 중요한 시기는 바로 송(宋)․명(明)대이다.  즉 북송의 주돈이(周惇頤, 1017~1073)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로부터 남송의 주희(朱熹, 1130~1200) 등을 거쳐 명대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이 기간에 형성된 이기(理氣)철학에 의해 기론은 체계적인 이론으로 자리잡게 된다.  송대에 있어서 기에 대한 대표적인 이론은 ‘북송의 우주론자’로 불리는 장재(張載, 1020~1077), 주돈이, 소옹(邵雍, 1011~1077) 등의 입장과 또한 현상과 본체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 구조로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시각에서 기론을 전개하게 되는 정이(程頤, 1033~1107), 주희 등의 입장이다.  장재는 기를 태허(太虛), 태극(太極)의 개념과도 통할 수 있는 <인간과 그리고 인간 자신마저도 포함하는 모든 환경,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가장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  명대에 들어섬과 동시에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학자들에 있어서 기(氣)는 이(理)와 더불어 심(心)으로 설명되고, 그리고 이러한 이기개념보다는 오히려 심의 본체인 양지(養知)가 강조된다.
청(淸)대 기론은 중국 전통 기론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청대 기론의 특성은 세 가지 점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종래 중국 전통 기론의 성과를 종합, 정리하였다. 송대 이학(理學)의 기론은 본체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따라 몇 학파로 나뉘어진다.  이 학파들은 서로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각자 서로 다른 측면에서 기론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청나라의 일련의 학자들은 바로 이러한 송, 명대의 다양한 학파를 종합하는 모습을 띠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명, 청 교체기의 유종주(劉宗周, 1578~1645)와 그의 제자 황종희에게서 거의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각 학파의 이론을 자기들의 방대하고 복잡한 철학체계 가운데 받아들임으로써 순수하게 어느 한 학파의 후예로 규정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들의 학문에 대해서 ‘기(氣) 본체론이다, 심(心) 본체론이다’하는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황종희보다 조금 뒤의 인물 왕부지(王夫之, 1619~1692)는 전통적 기본체론의 집대성자이다.  그는 이전 중국 전통 기론의 성과들을 충분히 소화하고 기에 대한 전면적이고도 깊이 있는 설명을 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왕부지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된(1949년) 후 가장 존중받는 전통 철학자가 되었다.  안원(顔元, 1635~1704)과 이공(李塨, 1659~1733) 또한 ‘이와 기가 융합하여 한 덩어리가 된다’는 틀로 기(氣) 본체론과 이(理) 본체론을 종합․정리한다.
둘째, 과거 기론의 오류를 비판하고 기본체론의 권위를 세웠다. 이 시기의 전통사상에 대한 비판, 재정리의 사상조류는 기본적으로 기본체론을 중심으로하여 이루어졌다.  심지어 심학(心學)과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던 유종주와 황종희의 기론 역시도 기본체론의 관점이었다.  이들은 ‘이가 기에 앞서고 이가 기를 생성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이는 기에 대한 주재(主宰)이지만 이 자체는 기에 의해 제한된다고 보았다.  왕부지는 기개념의 중요성을 적극 강조하였고 또한 과거의 다양한 해석을 정리하여 자기 관점을 세웠다.  그는 기본체론의 권위를 세우는 데 있어서 최대의 공로자가 된다.  안원과 이공은 기와 이를 구분하는 것에 대하여 명확한 반대의사를 표시하며, 대진(戴震, 1723~1777) 또한 형이상학적 이본체론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이 시기의 창조성있고 영향력있는 학자들은 대부분 기본체론의 관점을 가졌다.
셋째, 기의 의미에 대한 한걸음 발전된 추상적 개괄을 하고자 애썼다.  전통 기론에 있어서 기는 본체, 시원(始源), 질료(質料) 이 세 가지의 의미로 주로 쓰였다.  그러나 기본체론이 올바로 확립되려면 기개념이 갖는 추상성과 실재성 사이에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방이지(方以智, 1611~1671)와 같은 학자는 기(氣) 대신 불(火)을 주장하게 된다.  즉 불이 변화하고 움직이며 일정한 형태가 없다는 성질을 이용하여 기의 실재성을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불은 기에 비해서 국한성(局限性)이 크므로 이러한 방법은 문제해결의 근본적 방법이 되지 못했다.  왕부지는 기개념의 의미와 그 기능에 대해 전면적으로 고찰한 뒤에 기와 또한 기가 만들어낸다고 하는 온갖 사물의 실재성에 대하여 좀더 발전된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는 우주본체와 현상의 공통 본질로서 실유(實有)개념을 제시하며 전통기론의 문제점들을 완전히 벗어나고자 했으나 여전히 전통 기론의 두터운 기반 위에 뿌리를 깊게 박고 있다.
청대는 비록 중국 전통 기론을 마무리하기는 하였지만 아직 새로운 기론을 제시해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개념은 전통 사유의 틀 속에서 다양하게 발전하여 나갔고, 이러한 옛 사유의 틀로써는 전통적 속박을 깨고 나갈 수 없었다.  기론은 여기에 이르러 다시금 새로운 충격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충격은 청말기 서양 근대과학의 수용에 의해 가능해 진다.  서양 근대과학과의 접목이후 기론은 다시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맞게 된다.  즉 근대서양문화 특히 서양과학의 전래는 중국 전통 기론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이었던 것이다.

3. 청대 고증학의 발달

한당시대를 ‘훈고학의 시대’, 그리고 송명시대를 ‘성리학의 시대’라고 부른다면, 청대는 두 말할 필요없이 ‘고증학의 시대’로 불러야 할 것이다.  즉 청대의 학술계를 풍미했던 가장 대표적 조류가 바로 고증학이었던 것이다.  고증학이란 일종의 문헌학이다.  주로 문헌을 통한 고증으로 문자, 음운, 훈고 등을 연구하고, 다시 그것을 통해 고전을 정비․해명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하필이면 청대에 이르러 이러한 고증학이 발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학자들 사이에 많은 견해가 있지만, 각 학설을 종합해보면 대체로 다음 세 가지 입장으로 요약된다.
첫째, 송명이학(宋明理學)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  이학은 명대에 이르게 되면 이미 그 쇠퇴기에 접어들며, 명말 청초에 이르면 그 주도적  사상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만다.  청초의 학자들은 실제에 응용할 수 있는 학문을 열렬히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송명시대의 공허한 이기론을 배척하게 되며, 다시금 한대의 훈고학적 방법으로 돌아가 고서(古書)를 교감(校勘)하고 실증적인 측면에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둘째, 명말청초의 유학자들의 민족의식과 학구열 때문이다.   청초의 유명한 유학자 고염무(顧炎武, 1613~1682), 황종희, 왕부지 등은 모두 명대 유학자들의 뿌리를 잇고 있으며, 이민족인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워 지배하게 되자 민족의식을 가지고 복명(復明)운동을 벌이다 실패한 이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망국(亡國)의 한을 품고 은둔하여 저술에만 힘쓰게 된다.  이들의 학문은 역사와 지리 및 군사학에 관한 연구를 거쳐 경세(經世)의 학문으로 기울게 되며 결국 고증학의 선구역할을 하게 된다.
셋째, 청조 정부의 사상통제 정책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그들은 한인(漢人)들의 사상에 대한 통제를 가하기 시작하여 ‘문자옥’(文字獄)이 잦았다.  심지어는 ‘학파를 조직하는 것’(結社)과 ‘학문을 강론하는 것’(講學)마저도 금하게 되자 학자들은 시의(時宜)에 따른 현실비판보다는 고증의 방법으로 옛 문물을 연구하여 우회적인 방법으로 제도개선을 요구하게 되었다.
청대의 고증학자들 간에도 그 학문방법은 다양하다.  고증학이라는 큰 울타리 내에서는 모두 그 비슷한 학문적 경향성을 갖고 있지만, 좀더 상세히 들여다 보게 되면 각양각색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청대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개성을 상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들이 이곳에서 주로 살펴보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청대 학술사조 일반의 특징이다.  즉 청대 학자들의 다양한 개성을 개괄하여 그 공통 특징을 추출해 보려는 것이다.  근대 변혁기의 대표적 학자인 양계초(梁啓超, 1873~1929)는 청대 학자들의 공부방법(治學方法)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다음 열 가지 사항은 양계초가 정리하고 있는 청대 학술사상의 공통 특징이다.

∙한 가지 뜻을 정립하게 되면 반드시 그 증거를 확보한다.  증거없이 억측을 부리는 것은 단호히 배척한다.
∙증거를 선택하되 ‘옛 것을 우선한다’[尙古主義].  한당시대의 증거로써 송명시대의 오류를 비판할 수는 있으나, 송명시대의 증거로써 한당시대의 오류를 지적할 수는 없다.
∙불충분한 증거는 정설(定說)이 될 수 없다.  이것을 반증하는 사람이 없으면 임시로 두되, 계속 증거를 제시하여 점차 믿게 해야 하며, 그러한 때라도 유력한 반증이 나타나면 폐기한다.
∙증거를 숨기거나 증거를 곡해하면 부덕(不德)으로 인정된다.
∙같은 종류의 사항(事項)을 나열하기를 좋아하며, 비교연구를 거쳐 ‘공정한 법칙’[公則]을 얻는다.
∙이전 사람의 학설을 채용할 때는 반드시 그 출처를 밝히며, 다른 사람의 학설을 도용(盜用)하는 것을 큰 부덕으로 여긴다.
∙합당치 못한 것을 보게 되면 서로 꾸짖어 비록 제자라도 스승의 잘못을 지적하여 반박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스승도 역시 피할 생각을 하지 않으며, 그러한 경우를 당해도 원망하지 않는다.
∙변론과 힐책은 문제를 근본으로 하여 그 범위로 삼고, 글의 뜻은 독실함과 온후함에 힘써서 비록 자기 의견을 주장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동시에 존중한다.  이를 어기고, 기개만 부리거나 지루하게 간섭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웃는 듯 하는 행동을 보이면 부덕으로 인정받는다.
∙전공을 중시하여 좁고 깊이 연구하기를 좋아한다.
∙문체는 박실(樸實), 간결해야 하며, 말에 가지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청대 고증학의 선구자는 이미 말한 대로 명의 유신(遺臣)들인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 등이다.  이 중 황종희는 특히 역사학에 밝았다.  황종희의 학문은 그와 같은 고향 출신인 절강성(浙江省)의 역사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장학성(章學誠) 등에게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이 학파를 절동학파(浙東學派)라고 부른다.  왕부지는 대진과 함께 청대 최고의 학자로 일컬어지지만 호남지방에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학문이 후대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고염무는 경학과 소학(小學: 문자학을 말함)에 해박하였고, 특히 그의 저서 ꡔ일지록ꡕ(日知錄)과 ꡔ음학오서ꡕ(音學五書)는 고증학의 선구를 이루는 중요한 책이었다.  고염무는 고증학의 정통파로 일컬어지는, 즉 절서학파(浙西學派)의 시조로 존숭받는다.   이러한 절서학파에서 ꡔ상서고문소증ꡕ(尙書古文疏證)을 저술한 염약거(閻若璩, 1636~1704), 그리고 ꡔ역도명변ꡕ(易圖明辨)을 지은 호위(胡渭, 1633~1714) 등 훌륭한 학자들이 잇달아 출현하여 고증학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청대 고증학의 전성기는 대략 옹정(雍正, 1723~1735)과 건륭(乾隆, 1736~1795) 연간이다.  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 학파는 오파(吳派)와 환파(晥派)이다.  ‘오파’의 시조는 혜동(惠棟, 1697~1758)이며, 그의 제자 가운데 고증학의 방법을 역학에까지 도입한 전대흔(錢大昕, 1728~1804)과 왕명성(王鳴盛, 1722~1797)이 배출되었다.  ‘환파’의 학자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이는 바로 청대 최고의 학자로 평가받는 대진이다.  대진은 문자훈고에서 출발하여 경서를 풀이하고, 그리고 여기에서 경서의 진정한 정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고증학의 방법론을 확립했다.  ‘환파’는 특히 경학의 출발점이 되는 소학(문자학) 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대진은 많은 후학을 길러 내었다.  그중 대표적인 학자로는 ꡔ설문해자주ꡕ(說文解字注), ꡔ육서음운표ꡕ(六書音韻表)의 저자 단옥재(段玉裁, 1724~1815) 그리고 ꡔ독서잡지ꡕ(讀書雜誌), ꡔ광아소증ꡕ(廣雅疏證)의 저자 왕념손(王念孫, 1744~1832), ꡔ경의술문ꡕ(經義術聞), ꡔ경전석사ꡕ(經傳釋詞)의 저자 왕인지(王引之, 1766~1834) 등이다.  이들에 의해 고증학은 점점 더 정밀도와 정확도를 더해가게 된다.  환파 이후 고증학은 그 성장의 한계점에 이르게 되며, 전 시대와 같은 주목할 만한 성과는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게 되며, 특히 청말에 고고학의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그 연구성과를 이용하여 실증적인 고대문헌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과학적인 방법이 도입되어 새로운 분야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기억할 만한 학자로는 나진옥(羅振玉, 1866~1940), 왕국유(王國維, 1877~1927) 정도가 있다.
청대 사상은 주관적․관념적․신비적이었던 전 시대의 학풍에 반발하여, 객관적․실증적․합리적인 학풍을 진작시켰다.  이러한 청대학문의 동향은 학문에 있어서 근대화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만큼 중국 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청대의 새로운 학풍은 명대 사회의 변동기인 만력(萬曆, 1573~1620) 연간에 태동하여 청대 사회가 본격적인 근대화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한 건륭(乾隆, 1735~1795), 가경(嘉慶, 1796~1820) 시대에 와서 완성된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고증학은 위로부터의 정치적 압박에 의해 한족(漢族) 출신의 지식인들을 문헌 속으로 침잠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 비판적인 실사구시의 정신은 당시까지 무조건적인 권위를 갖고 있던 경서들까지도 객관적인 고증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고, 또한 그러한 잘못된 권위를 대담하게 부정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청대 고증학이 비록 많은 한계와 반대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근대적 정신의 탄생을 준비했다는 점은 결코 부정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청대 사상은 중국 수 천년의 사상을 중국식으로 마무리짓는 사상이라고 할 만큼 중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마치 청말 서구사상과의 대융합의 현대사를 예견이나 한 듯 그들 특유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정리, 연구하여 하나의 커다란 획을 긋는다. 물론 청대 사상이 그 고유한 특색을 완전히 잃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서구식 학문방법이 차단된 상태로 오천년간 발전해 온 중국사상이 이 시점에서 집대성된 듯한 흔적은 이 당시 사상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제4장 현대철학  

제4장  현대철학


제1절  현대 중국사상


이 단원의 목적은 아편전쟁과 5․4운동 이후의 중국철학을 개관하는 데에 있다. 우리는 먼저, “근대 변혁기에 있어서의 중국사회 및 사상”을 개관한다. 우리는 이 곳에서, 19세기 이후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사상의 유입에 따른 중국 전통사상의 위기의식과 이에대한 중국인들 나름대로의 대응방식에 대해서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나서, 청대철학의 가장 인기있는 주제였던 기(氣) 개념이 서양의 현대사상과 문화를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하고 개조해 내는지에 대해서 살펴본다. 1920년대 이래, 중국철학의 연구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된다. 우선 한 부류는 막시즘을 이념으로 삼아 전통사상을 현대화하려는 학자들이고, 나머지 다른 부류는, 중국공산화 이후 주로 대만․홍콩을 위시한 일련의 서구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활동하게 되는 ‘현대신유학’ 계열의 학자들이다. 우리는 전자의 특징을 제3절에서, 그리고 후자의 특징을 제4절에서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중국 현대철학에 있어서 우리가 가장 주의할 점은, 바로 각양각색의 다양한 이론들 속에서도 그 전체 흐름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의 공통부류롤 묶고 있는 각각의 사상가들 가운데서도 그 부류의 일반적 특징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국 현대철학을 공부할 때는, 세세하고 잡다한 사실에 주목하기보다는 큰 흐름을 놓치지 않고 읽어내는 것이 보다 중요할 것이다.


1. 근대 변혁기에 있어서의 중국 사회 및 사상

중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몽고족이 세운 나리인 원(元)나라의 기록들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으며, 또한 우리나라와도 무관치 않은 17세기 청나라 초기의 일단의 선교사들에 의한 선교활동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 변혁기 이전까지의 기독교의 영향이란 매우 미미하다. 그러나 아편전쟁의 결과 남경조약(1842년)이 체결되자 5개의 항구가 개항되며, 이와 동시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들 도시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에 몰입하게 됨으로써 기독교사상은 이전과는 달리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당시의 기독교가 중국인의 생활에 어떻게,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사실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운동(1850~1864)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태평천국운동이란, 기독교 신자였던 홍수전(洪秀全, 1814~1864)을 중심으로 하여, 기독교의 영향하에서 일어난 민중혁명운동이다. 우리들은 이 혁명의 사상사적 측면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태평천국운동의 이념속에는 기독교사상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몇가지 요소가 있다. 우선 정교(政敎)일치의 정치사상, 남녀평등을 위한 여러가지 제도, 그리고 기독교적 유일신에 대한 신앙 등을 들 수가 있다. 태평천국운동은 1862년에 좌절되고 말지만, 반면 기독교사상은 열성적인 선교사들과 자국내 신자들에 의해 중국사회의 각 계층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된다.
근대 변혁기의 대표적 중국학자인 강유위(康有爲, 1858~1927)와 담사동(譚嗣同, 1866~1898)에게서도 기독교사상의 흔적은 볼 수 있다. 즉 청말(淸末) 강유위 등 공양학파(公羊學派)의 사상운동 속에는 유교를 서양 유럽사회에서 차지하는 기독교의 위치와 대비시켜, 유교를 서양에서의 기독교적 지위에로까지 높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담사동의 주요 저서인 ꡔ인학ꡕ(人學) 속에도 기독교적 영향이 엿보인다. 이러한 사실들은 청말 공양학자들이 서양의 정치사상 및 사회사상의 영향을 받았음과 동시에 기독교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해준다.  그러나 기독교가 일반 민중들에게 적극적 영향을 끼친 것과는 달리, 중국의 지식인들에게는 이후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다만 주목할 만한 점은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진 기독교의 전래사업이 동시에 서양문화의 수용을 동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하며 그 수단으로써 군사학적 과학과 산업 등의 근대화를 요구하였던 양무(洋務)운동과, 그리고 변법유신(變法維新)운동이 연거푸 좌절하게 되자 중국의 관료․지식층은 자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심각한 비판을 가하고자 하였으며, 심지어는 서구문화에 대해서도 보다 깊이 있는 연구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서양사상이 조직적으로 소개되었으며, 그리고 이러한 역할을 최초로 담당한 이가 바로 엄복(嚴復, 1825~1921)이다. 엄복은 중국 최초로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영국에 유학을 하였으며, 귀국 후 영국의 근대사회, 근대정치사상에 관한 번역, 소개에 주력하였다. 그는 헉슬리(Th. H. Huxley, 1825~1895), 아담 스미스(A. Smith, 1723~1790), 스펜서(H. Spencer, 1820~1903), 밀(J. S. Mill, 1806~1873), 몽테스키외(Montesquieu,1689~1755) 등의 경제․법률․사회․윤리․진화론 등을 소개하였으며, 서양사상에 대한 이러한 소개는 당시 중국사상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헉슬리의 ꡔ진화와 윤리ꡕ(Evolution and Ethic, 1893)에 나타나는 사상은 그 영향이 더욱 대단하였다. 생존경쟁(生存競爭), 적자생존(適者生存), 우승열패(優勝劣敗) 등과 같은 글자가 중국 애국지사들의 구호로 사용되었고, 일반인들에게는 이것이 혁명을 선전하는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엄복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왕국유(王國維, 1877~1927)에 의해 칸트(I. Kant, 1724~1804),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 1788~i1860), 니체(F. W. Nietzsche, 1844~1900) 등과 같은 독일 철학자들의 사상이 중국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독일철학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철학계의 중심이 된 것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이후 별달리 유행하지 못하였다.
청조말기의 엄복, 이석증(李石曾. 1881~1973), 왕국유 등에 의한 서양사상의 소개는 당시의 중국사상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5․4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중국 현대사상계의 가장 유명한 인물 가운데 하나인 이택후(李澤厚, 1930~ )는 그의 저서 ꡔ중국현대사상사론ꡕ에서 “모든 것은 5․4로부터 시작된다. 중국 현대사의 기본문제는 모두 5․4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상,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이것은 더욱 더 그러하다”고 하였다.  조금 과장된 느낌을 받기는 하나 이택후의 이러한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즉 중국의 역사와 사상에 있어서 <현대>란 시기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5․4를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5․4운동이란, 1919년 5월 4일, 북경의 학생들이 일본의 침략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이것을 계기로 반제국주의, 반봉건의 애국적 민중운동이 국민 각층에로 확대된 사건을 말한다.  좀더 넓은 의미로는, 이것을 사상적으로 준비하면서 추진된 1915년 이래의 계몽적 문화운동 [신문화운동 또는 5․4문화혁명]을 포함하여 말한다.  5․4신문화운동의 가장 확실한 성공은 백화문(白話文)의 승리이다.  글자의 변혁은 문학의 형식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문화와 심리구조까지도 강력하게 동요시킨다.  실용적인 구어체 중심의 문자개혁은 그 발단에 있어서 근대서양사상에서 큰 힘을 얻으며, 또한 개혁의 결과로써 다시금 서양사상의 수입에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보이지 않는 계기가 된다.
청나라 정부가 붕괴하고 중화민국이 건립되었다하여 중국의 근(현)대화가 갑자기 추진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중화민국 정부수립이 중국의 근(현)대화를 위한 큰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5․4운동의 기간을 통해 서양사상은 중국에서 보다 더 확산, 고조되어갔다.  이 시기 중국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서양사상은 단연 죤 듀이(J. Dewey, 1859~1952)의 실용주의 사상이다.  듀이의 실용주의가 당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이유는 호적(胡適, 1891~19625), 장몽린(蔣夢麟, 1886~1964), 유백명(劉伯明, 1887~1923), 도행지(陶行知, 1891~1946) 등 이른바 미국 유학 출신의 사상가들에 의해 힘입은 바 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듀이 자신이 1919년부터 2년 수개월 동안 중국에 체류하면서 10개 성(省)을 돌며 강연을 행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5․4운동 시기 중국 사상계는 실용주의의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듀이 이외에 5․4운동 당시 중국 사상계에 영향을 끼쳤던 서양사상가로는 베르그송(A. Bergson, 1859~1941)과 러셀(B. Russell, 1875~1972)이 있다.  러셀은 듀이와 마찬가지로 1920년에 중국에 와서 스스로 자신의 사상을 소개했기 때문에 그 영향이 적지 않았다.  베르그송의 사상은 대체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양사상의 영향을 받는 과정에서 소개되었는데 듀이와 러셀에 비해서는 그 영향이 심대하지는 못하였다.
5․4직후 중국 최대의 사상가는 단연 양계초(梁啓超, 1866~1925)와 손문(孫文, 1873~1929)이다.
양계초는 원래 청말 공양학파 사상가 중 한 사람이었으나, 무술정변(戊戌政變)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서양사상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다른 사상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가사상을 지양하고 서양사상의 입장에 섰던 인물로 평가받는 것이다.  이 시기의 양계초 사상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의 ‘신민설’(新民說)이다.  양계초는 신민설 속에서 도덕, 법률, 정치, 국가, 사회 등에 관한 여러가지 문제를 논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으로 서구 근대사상의 입장에 서게 된다.  즉 서구사상의 도덕과 사상 등을 두루 섭렵하여 중국의 봉건적 사회체제를 유지해 온 모든 제도와 사상을 타파하고 새로운 도덕과 사상을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양계초의 신민설은 당시 중국사상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손문사상의 핵심이 삼민주의(三民主義: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에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손문사상의 해석에 있어서는 그 연구자들에 따라 차이가 난다.  대계도(戴季陶, 1891~1949) 같은 이는 손문사상이 중국의 정통적 사상으로서 유교를 정식으로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은 그의 ‘신민주주의론’에서 손문사상을 민생주의가 강조된 삼민주의로 해석한다.  대계도의 해석을 ‘과거지향적’이라고 한다면, 모택동의 해석은 ‘미래지향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손문사상에 대한 해석에서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은 해석자들의 정치적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손문사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손문사상이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에 이르러 중국의 부르조아 민주화 과정에서 나온 하나의 정치사회이론이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그의 사상에는 다소간의 유교적 요소와 약간의 사회주의적 요소가 혼융되어 있는데, 이것이 시기에 따라 사상적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양계초와 손문의 경우에 있어서는 앞에서 서술한 일련의 번역, 소개류의 학자들과는 그 학문경향이 다르다는 점이다.  즉 이들은 서양사상을 독자적인 구상과 표현방식에 의해 나름대로 중국적으로 재구성하여 ‘중국화’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통시적으로 볼 때, 이러한 점은 위대한 중국사상가들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2. 전통 기론(氣論)의 현대화

기론(氣論)의 역사적 변천과정에 있어서, 청(淸) 말에서 민국(民國)초에 이르러 일련의 기간은 중국 전통 기론속에서 서양문화, 특히 서양 근대과학이 접목되는 시기이다.
청대에는 비록 실증적 경향의 기론이 우세하였지만, 송명이학(宋明理學)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아편전쟁의 실패는 이학(理學)뿐만 아니라 중국 전통문화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음을 보여주었다.  서양의 막강한 군사력과 근대 공업문명의 충격은 당시 지식인들을 일깨워 주었다.  그들은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서양의 문화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당시의 기론 또한 시대 고유의 색채를 띠게 된다.  즉 서양 근대과학의 유입에 따라 종래의 생성론적인 기론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대신 서양 근대과학을 수용할 때의 아날로지(Analogy)로서 주목받게 된다.  즉 기(氣)를 빛, 전기, 질점(質點)과 결합시켜 그 운동, 변화하는 기능을 밝혀내고자 하였다.
1916년 이후 ‘민주’와 ‘과학’을 슬로건으로 하여 추진된 신문화 운동은 전제(專制)와 미신의 근원으로서 전통적인 것 일체에 대하여 격렬한 비판을 퍼부었는데, 기론 또한 미신적 관념으로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된다.  진독수(陳獨秀, 1879~1942)는 ꡔ신청년ꡕ(新靑年) 창간 선언문인 ‘삼가 청년에게 고함’이라는 글 속에서,

“중국의 지식인들(士人)은 과학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음양가(陰陽家)의 부서설(符瑞說), 오행설(五行說)을 배워 마치 자기 학설인양 되팔아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지기(地氣)와 풍수설(風水說)에 의하여 죽은 사람의 영혼의 위력을 빌리려 한다.……의사는 과학을 모르기 때문에……오로지 오행(五行)의 상생상극설(相生相克說), 한열음양설(寒熱陰陽說)에다 억지로 끼워 맞춘다.……이러한 공상(空想) 중에서 가장 진기한 것은 기론으로서, 이것은 점성술이나 신선사상과 같다.  시험삼아 우주를 두루 살펴보아도 기가 과연 무엇인지 전연 알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혁명적 이데올로기에 몰두한 지식인들이 중국 전통기론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대표적 견해이다.  5․4운동시의 신문화운동의 주장은 중국사회에 뿌리깊게 자리잡았다.  그후 비록 동서문화(東西文化)논쟁, 인생관(人生觀)논쟁 등에서 전통적 형이상학의 부활을 부르짖는 움직임도 나타났지만 역시 대륙의 전반적인 조류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이후 대륙의 공산화는 ‘기’ 개념을 ‘물질’ 개념으로 고착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중국 근대의 기론은 아편전쟁, 무술변법, 신해(辛亥)혁명을 거치면서 각 시기마다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낸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지식인들은 어떻게해서든 열강(列强)의 군사적, 경제적 침입으로부터 빠져나오고자 애쓴다.  그들은 종래 전통사상의 공허하고 추상적인 이론을 극력 비판하며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도 쏟았다.  이 시기의 대표적 학자로는 위원(魏源, 1794~1857)과 공자진(■自珍, 1792~1841) 등이 있으며 태평천국운동 때 봉기의 리더였던 홍수전 또한 빠뜨릴 수 없다.  이들은 중국 전통사상 중에서 기론이 보다 현실적인 감각을 가졌다하여 기론의 고취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기론의 뼈대는 역시 장재(張載, 1020~1077)를 비롯한 종래 중국 전통 기론에 근거하고 있다.  위원은 기를 만물의 근원으로 삼는 장재의 기본체론적 관점을 이어받아 “태허(太虛)의 정기는 유동(流動)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하며, ……태허는 만물의 참된 거처가 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홍수전은 서양의 기독교 이론을 지도 사상으로 삼았지만 여전히 전통 기론을 이용하여 여러 교의(敎義)를 해석하였다.  그는 영혼불사(靈魂不死)를 논하면서, 사람의 영혼은 모두 “황상제(皇上帝)로부터 받은 일원(一元)의 기로서 생기기도 하고 자라기도 한다.  근본은 같으면서도 만가지로 다르게 흩어지며, 만가지로 다르나 모두 하나의 근본에 귀결한다”고 하였다.  홍수전의 기론 또한 장재 기철학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  우리는 장재 기철학이 이 당시 중국의 가장 인기있는 전통사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편전쟁시기의 중서(中西)문화의 충돌이 표피적인 것이었다면, 무술변법시기의 문화충돌은 중국 전통사상과 문화의 심층을 개척하도록 하는 적극적 계기가 되었다.  수십년의 검토와 분석을 통해서 중국인들은 서양의 강성한 힘의 근원이 물질적 조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제도와 사상문화의 선진성에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이 시기에 중국 지식인들의 고민은 바로 대량의 서양 근대과학의 지식을 어떻게 소화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 문제해결 방안의 하나로서 바로 중국 전통문화 속에서 서양문화와의 동질성을 인식하는 방법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론은 우선 기론에 적용되어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이 시기의 주요 학자로는 강유위, 엄복, 담사동 등을 들 수 가 있다.  강유위는 기본적으로 기론에 입각하여 그의 기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어설프게나마 서양의 과학지식을 받아들여 전통 기론을 새롭게 해석하려 했다.  그는 우주의 기원 문제에서 기가 변화하여 만물을 낳는 과정을 성운설(星雲說)로 해석하였고, 근대물리학과 화학의 업적을 이용하여 종래의 기론에다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였다.  그리고 전기를 철학 개념으로 끌어들여 기 개념과 대체하려고도 하였다.  엄복은 전통철학의 개념, 범주에 대한 정의(定義)의 모호성에 불만을 품고, 중국 근대철학에서 가히 모범적 답안이라고 할 만한 정의를 기에다 내렸다.  “기라는 것은 질점(質點)과 인력(引力), 척력(斥力)이 있는 사물이다.  그 무게를 저울질 할 수 있고 그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완전하게 근대 과학지식이 획득한 인식으로서 기의 내용이 소박하고 직관적인 사변적 산물에서 과학의 물질적 개념으로 바뀌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것은 기론을 새로운 면모로 근대철학 속에 끌어들이고, 과학에 힘입어 기의 물질성을 확정하였으나, 대신 그 철학적인 기능이 점차 엷어짐으로써 장차 철학적 의미를 상실할 운명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담사동의 기론 또한 엄복과 비슷하다.  그는 기를 과학적 개념으로 확정하여, 지구를 감싸고 있는 200리 대기층의 공기, 몽기(朦氣)라고 생각하였으며, 아울러 그것의 물리적인 특성을 분석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를 하늘과 땅 사이를 운행하는 추상적인 존재로 생각하여, 천지만물의 상호작용하고 상호관계하는 원인, 근거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존재의 세계는 이것(에테르)에서 생겼고, 허공은 이것 때문에 세워졌으며, 중생은 이것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며, 에테르를 우주만물의 본질로 삼아 전통의 기본체론을 대신하였다.
신해혁명시기에 기론은 또다시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장병린(章炳麟, 1868~1936)의 사상에도 전통 기론의 의미가 어설프게나마 남아있다.  그는 자연과학 지식을 이용하여 전통 기론을 강화, 확충하였는데, 담사동의 경우처럼 기를 우주에 가득찬 공기, 몽기라 하였다.  그는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원자(原子) 개념을 기 개념으로 대체시켜 우주만물의 근원과 구성요소로 삼았다.  손문의 사상에서, 철학개념으로서의 기는 이미 기본적으로 소멸되어 버렸다.  손문은 전통문화와 서양 근대과학문화의 융합 속에서 만물의 본체와 시원(始原)의 이론에 대해 고도의 추상적 개괄을 하고 종래의 기론 대신 과학적 물질 개념을 분명히 제시함으로써 전통 기론은 더이상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곧 근대 중국의 기론이 과학적 물질 개념으로 바뀌면서 아울러 자신의 본래 기능인 철학적 본체론의 기능을 점차 잃어감을 보여준다.
서양문화의 전래는 기론의 오랜 역사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고 동시에 그것이 철학적 본체론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이 때문에 대륙의 학자들은 기론의 근대적 발전을 “과학성이 끊임없이 강화된 반면 철학성은 끊임없이 묽어지는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강유위의 전기, 엄복의 질점, 인력, 척력, 장병린의 원자, 손문의 물질개념은 곧 기론에 있어서 그 철학적 기능이 끊이지 않고 묽어져 최종적으로는 소실되어간 과정을 반영해 주었다”고 한다.


3.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영향

제정(帝政)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것은 1917년이다.  그리고 약 2년 뒤인 1919년 경부터 중국에도 진독수나 이대조(李大釗, 1889~1927) 등에 의해 맑스주의가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맑스주의는 그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까지 약 30년 동안 중국사회에 있어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1949년 이래로 지금까지는 유일한 체제이데올로기로서 봉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가 중국 근대정치사상에 있어서나 철학사상에서도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이라는 구체적 실천문제를 전후하여 당시 중국의 사상계와 지식인들은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세차례의 사상투쟁, 즉 1919년 이대조와 호적 사이에서 벌어졌던 ‘문제와 주의(主義) 논쟁’, 1920년 진독수와 장동손(章東蓀) 사이에서 벌어졌던 ‘사회주의 논쟁’ 그리고 1920년~1921년 창당 바로 직전 진독수와 구성백(區聲白) 사이에 전개되었던 ‘무정부주의 논쟁’으로 나타났다.  맑스주의에 대한 집중적인 소개와 열띤 사상투쟁은 주로 ꡔ신청년ꡕ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소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젊고 진보적인 학생․지식인들은 맑스주의를 이전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보다 새롭게 접할 수 있었다.  맑스주의의 새로운 혁명사상에 대한 젊은 학생․지식인들의 반향은 대단하였다.  1920년 주로 진독수와 이대조 등이 맑스주의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1921년에는 진독수, 이달(李達), 시존통(施存統) 등에 의해 맑스주의에 관한 논문이 다량으로 소개되었다.  특히 시기적으로 1921년 당시 중국에서는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비판적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에 맑스주의에 대한 계몽운동은 당시 중국 사상계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맑스주의의 영향이 중국 사상계 내에 급속도로 퍼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맑스주의 자체가 갖는 사상적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원인은 당시 중국에서 맑스주의를 수용할 만한 사회․경제적 조건이 갖추어졌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서구 자본주의 세력이 일시적으로 후퇴하게 되면서 중국의 민족적 경공업발달이 촉진되어 공장 노동자들이 비약적으로 급증하게 되였고, 또한 이에 힘입어 계급분화가 촉진됨으로써 노동운동이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운동의 흐름을 타고 진보적 학생․지식인 계층인 계몽운동에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 정권의 수립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본주의국가 세력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맑스의 예언이 러시아에서 완전히 실현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서구 근대문화의 유입이 한창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중국인들은, 독일인이 가지고 있던 산동반도에 대한 권리가 연합국의 승리의 결과로서 당연히 중국에 되돌아 오리라고 기대하였다.  왜냐하면 제1차 세계대전은 바로 전제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1919년에 개최된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의 결과를 지켜보면서 무참히 깨어졌다.  이를 계기로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구사회와 자본주의문화에 대해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이제 다시 중국의 봉건주의와 서구의 자본주의를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찾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맑스주의를 사상적 무기로 한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구원의 횃불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신문화운동의 아성인 북경대학 내에 ‘맑스주의 연구회’가 성립되는 등 맑스주의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단체들이 연이어 만들어졌던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이러한 여건의 형성으로 인하여 당시 지식인계층에게는 맑스주의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도록 하였으며, 노동자․농민들에게는 맑스주의의 기치 아래 사회․정치적으로 결집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들 정치․사회적 배경 및 사상적 배경이 드디어 1921년 중국 공산당의 성립과 더불어 1924년에는 국공합작을 이루어내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1925년부터는 국공합작 세력이 군벌 및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북벌을 감행하게 된다.  중국 공산당은 북벌과정을 통해 노동자․농민세력에게 절대적 신임을 얻게 되며, 또한 정치․사회적 세력을 확고히 굳히게 된다.
초창기 중국 공산당의 최대 이론가는 이대조와 진독수를 들 수가 있다.  이들은 ‘북이남진’(北李南陳)이라는 신조어를 만들 만큼 많은 활동을 하였다.
이대조는 중국 공산당 창립자 가운데 중요한 한 사람으로서, 중국에서 맑스주의의 최초 전파자이기도 하다.  그가 중국사상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맑스주의를 인간의 도덕과 의지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받아들이는 등 이른바 중국적 재구성을 최초로 시도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중국 공산당 이론의 기원을 이루는 것으로서 평가받는다.  이대조의 사상중 농민들의 해방이 중국 전체의 해방이라는 진단 아래 중국의 청년들에게 농촌에 가서 직접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인민주의적 측면은 바로 모택동의 혁명관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러나 이대조의 사상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전의 선배사상들의 객체적․수동적 인민관을 완전히 바꾸어, 중국인 한사람 한사람이 주체적 사상을 갖는 인민총체로서 바로 이들에 의해 역사가 창조된다고 파악했다는 점이다.
진독수는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서구문화를 인식했던 근대 변혁기 중국지식인의 태도에서 급격하게 공산주의자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공산당이 성립되고 난 후에는 초대서기장이 되어 자신의 혁명이론을 펼쳐나갔다.  진독수의 이론은 그의 지도적 위치로 보아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진독수의 혁명이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혁명이론의 본질은 반식민지국가에서의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외국 제국주의 및 군벌에 대한 투쟁에서 부르조아와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의 정치활동은 국공합작․노동운동의 조직화․농민운동의 조직화․농민협회의 조직․반제국주의 운동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진독수의 이러한 혁명이론과 국공합작정책은 북벌의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이 사회적․정치적 세력을 확대하는 데 좋은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동시에 국민당과의 분열을 초래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그 이유는 중국 공산당의 사회․정치적 세력이 너무도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국민당이 두려워할 정도의 막강한 정적(政敵)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진독수의 혁명이론 그 자체에도 오류가 있었던 것같다.  즉, 진독수는 당시 중국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로 인식함에 따라, 혁명의 과정에서 또한 중국의 프로레타리아는 부르조아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후에 확립된 모택동주의와도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북벌과정을 거치면서 중국 공산당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다.  한편 사상계에서도 맑스주의 및 사회주의사상이 점차 보편적으로 되어갔다.  1923~1924년 이후 노동자․농민운동의 격화와 함께 학계에서는 혁명의 현실적 문제를 둘러싸고 혁명이론 및 그 혁명이론을 뒷받침해주는 중국사회사논전 및 유물변증법에 관한 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7년 4․12반공쿠데타로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중국 공산당의 정책도 변화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때, 중국 공산당이 성립된 이후 줄기차게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진독수의 이론과 정책이 구추백(瞿秋白), 이입삼(李立三) 등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입삼은 스탈린(Stalin, 1879~1953)이나 부하린(Bukharin, 1888~1938)의 ‘중국사회이론’에 영향을 받아 진독수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순수한 봉건제도는 생산력의 진보와 상업자본의 발달에 따라 파괴되었지만 통일적 중앙집권 국가조직은 봉건지주와 상업자산계급의 연합이었고, 또한 제국주의 침략이 농민계급의 계급분화를 촉진시켰지만 주요한 착취형식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입삼은 이 이론에 근거하여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성에서의 우선적인 승리가 필요하다”고 하는 이른바 ‘이입삼노선’을 수립하고 그것을 시도했지만 몇 년 못 가서 실패로 끝났다.  그 이유는 이입삼에 의해 통솔된 중국 공산당의 혁명적 행동이 그의 이론과 정책을 과신한 결과 맹동주의(盲動主義)에 빠졌기 때문이다.  진독수와 이입삼의 이론적․정책적 실패의 경험을 교훈삼아 그리고 대장정 중 왕명(王明)을 중심으로 한 노선투쟁을 거쳐 중국 공산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람이 바로 모택동이다.
모택동은 1920년 중국 공산당의 창립 당원으로서 당 활동과 중국 혁명운동에 참가했지만 진독수에서 이입삼의 시대까지 그의 입장은 당 지도층의 행동노선에 수용되지 못했고 그리하여 그는 독립적으로 농민운동을 지도하며 공산주의 운동에 전념했다.  그리고 이 당시부터 그는 일관해서 “조사가 없는 한 발언권은 없다”고 하는 입장에 서서 공산주의의 공식 입장을 취하지 않았으며, 또한 코민테른의 지도에도 맹종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조사와 경험을 토대로 삼아 그 속에서 현실을 지도해가는 이론을 창조하는 방법을 취했다.  따라서 그의 입장은 초기에는 당 지도부로부터 이해받지 못했고 당의 정책에도 반영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지도한 농민운동은 실질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차근차근 성과를 쌓아갔다.  그리하여 모택동이 실천과정에서 산출한 이론과 정책은부동의 위치를 확립하게 되었고 이입삼의 노선이 실패한 이래 드디어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모택동이 확립한 혁명이론을 한마디로 말하면, “중국혁명은 단순한 부르조아 혁명이 아니고 그 주된 본질은 노동자․농민을 핵심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반제국주의․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즉 모택동의 혁명이론은 철저하게 토지혁명을 사회적 내용으로 삼고, 확실하게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전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모택동의 이러한 이론과 그의 혁명적 경험 속에서 생겨난 정책은 점차 확고해져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중국혁명에 대한 확고부동한 지도이론과 정책으로 존숭받게 되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중국 공산당의 혁명이론과 정책을 개관하였다.   이제 이 시기 동안 사상사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점들을 요약해 보도록 하겠다.
중국대륙에서 1920년대는 맑스철학의 전파기로서 사적(史的) 유물론에 대한 소개가 주로 이루어졌고, 1930년대는 주로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인식론 등이 좀더 계통적이고 대중적으로 소개되었다.  특히 1930년대는 맑스주의 철학이론과 혁명실천이 결합된 시기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1920년대 후반에는 구추백(ꡔ현대사회학ꡕ)과 이달 (ꡔ현대사회학ꡕ)에 의해 이전의 사적유물론 사조가 총괄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는 구추백(ꡔ사회철학개론ꡕ)에 의해 중국현대철학사상 최초로 변증법적 유물론이 소개되었다.  이달도 또한 ꡔ사회학대강ꡕ을 지어 이에 가세했다.  그리고 특기할 것은 애사기(艾思奇)의 ꡔ철학강화ꡕ이다.  이 책은 통속적인 필체와 일상적인 회화체를 이용하여 전문적인 이론을 소화함으로써 일반 독자들이 어렵지 않게 맑스철학 원리를 익히도록 하였다.  이 책은 중국현대철학사에 있어서, 철학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4. ‘현대신유가’(現代新儒家) 사상

현재 중국대륙에서는, 사회주의의 초보단계에 있는 중국이 현대화하기 위해서 전통사상이 장애가 될 것인가, 아니면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그리고 그 논쟁의 핵심주체가 바로 유가사상이다.  이러한 논의는 종래 철학사의 기술에 적용되었던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론이라는 전통적 방법론의 문제점을 다시금 문제삼게 된다.  관념론이냐, 아니면 유물론이냐에 따라 찬양과 비난이 엇갈렸던 철학사의 평가기준이 이제는 중국현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실용주의적인 관점으로 전회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현대신유가에 대한 평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현대(당대當代)신유가’란 5․4운동 이후에 형성된 신유가학파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들은 유가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서양근대사상(민주, 과학 등)과 서양철학(칸트, 베르그송, 럿셀, 화이트헤드의 철학사상 등)을 결합하려고 시도한다.  그 대표자로는 현대신유가 제1대인 양수명(梁漱溟, 1893~1988), 장군매(張君勱, 1887~1969), 웅십력(熊十力, 1885~1968), 제2대인 풍우란(馮友蘭, 1895~1990), 하린(賀麟, 1902~), 전목(錢穆, 1895~1990), 그리고 제3대인 모종삼(牟宗三, 1909~1995), 당군의(唐君毅, 1909~1978), 서복관(徐復觀, 1903~1982) 등을 들 수가 있다.
그런데 현대신유가가 일종의 학술사상 유파, 문화사조로서 5․4운동이후에 발생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서양문화의 충격이후 야기된 문화적 충돌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전통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5․4운동은 1919년 5월 4일, 북경의 학생들이 일본의 침략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게 되고,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하여 반제국주의․반봉건의 애국적 민중운동이 국민 각 층에로 확대된 것을 말한다.  넓은 의미로는, 이것을 사상적으로 준비하면서 추진된 1915년 이래의 계몽적 문화운동을 포함하여 5․4운동이라 부른다.
중국현대철학의 최대 과제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즉 맑스주의 철학의 중국화가 그 하나이고, 중국전통철학의 현대화가 다른 하나이다.  이 양자는 결국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이다.  중국전통철학에서 유물론이나 변증법의 전통을 발굴해내는 작업이 전자에 속한다면 현대신유가사상에 대한 연구는 후자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자는 이미 상당한 연구성과를 얻었지만 후자에 대한 연구는 아직 초보단계이다.  또한 전자에 대한 연구가 현실을 정당화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측면이 있다면, 후자에 대한 연구는 전자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곧 현대 중국대륙에서의 전통철학에 대한 연구경향이 유물론이라는 잣대에서 실용주의적인 현대화라는 잣대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79년, 4개 현대화노선이 중국 공산당의 공식입장으로 천명된 이후, 현대화의 진정한 결실을 위해서는 정치․경제에서뿐만 아니라 문화방면에서도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 요구사항이었다.  이러한 과제에 부응하여 제기된, 현대화를 위한 문화방면에서의 여러 모색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한 경향이 있었다.  즉 현대화란 맹목적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한 서구문명의 주체적, 선별적 수용임을 주장하는 전통문화 옹호론자들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에 의해 공자를 위시한 유학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촉발되었음은 당연한 결과이다.
문화토론의 열띤 분위기 아래에서 그 색깔을 분명히 드러낸 전통문화 옹호론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유학부흥론이고 다른 하나는 비판계승론이다.  이들은 전통문화의 위기를 인식하고 전통문화에 대해서 동정심을 갖고 접근했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일치하지만, 역사적․정치적 배경을 달리 하면서 분명한 차이점을 갖는다.  비판계승론자들이 강조하는 ‘중국화된 사회주의’는 민족과 전통이라는 개념에 이미 사회주의가 현실적으로 밀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유학부흥론자들은 전통의 우월성에 보다 역점을 두면서 서구적인 어떤 것도 일단 전통과 차별화시킨 다음 받아들인다.  물론 사회주의에 대하여 이들은 수용보다는 배척이라는 입장을 취하여 왔다.
현대신유가는 위의 두 경향 중 유학부흥론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1984년 결성된 공자기금회(孔子基金會) 그리고 중국문화서원(中國文化書院) 등의 결성은 공자와 중국전통문화의 가치를 새롭게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현대신유가사상의 발전과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서 중국 출신의 유명한 재미(在美)학자 두유명(杜維明), 성중영(成中英) 등이 중국공산화 이후 최초로 중국 대륙의 강단에 올라 강연을 하게 된다.  신세대 현대신유학자로 주목되는 두유명, 성중영 등은 때마침 불어닥친 문화토론의 붐에서 반전통론자들의 ‘서구화’라는 주장에 맞설 수 있는 힘있는 이론을 소개할 수 있었다.  특히 두유명은 ‘현대화’와 ‘전통문화’는 대립도 모순도 아니며 오히려 상보적(相補的_)이라는 ‘유교자본주의론’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유명의 이론은 현대화를 갈망하면서도 서구문명의 전반적 수입으로 실추될 수 있는 민족적 자존심을 우려하던 보수적 중국지식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현대신유가란 아직도 형성과정중에 있는 철학사조이므로 그 성격을 분명히 정의내리기 힘들다.  그러나 현대 중국대륙에서 현대신유가사상 연구팀을 이끌고 있는 방극립(方克立)의 다음 몇 가지 성격 규정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한다.
첫째, 현대신유가는 학맥의 전승관계에서 볼 때 공자와 유학을 존숭하며, 유가의 도통(道統: 진리에도 정통적 계보가 있다는 주장)을 계승하고 유가의 학설을 널리 전파하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로 삼는다.  즉 이들은 유가학파의 일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둘째, 현대신유가는 송명(宋明)유학의 정신을 존숭한다.  이들은 송명유학의 심성론(心性論)이야 말로 중국학술문화의 본원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이를 통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이상경지를 추구한다.
셋째, 그러나 현대신유가는 유가(원시유가), 신유가(송명유학)와 구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현대신유가 학자들은 20세기 중국에서 생활했으며, 서양문화의 도전과 중국이 당면한 긴박한 현대화의 문제를 깊이 감지하며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으로서 유가사상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유가사상을 주체로 하여 서양의 근대사상과 문화를 흡수, 융합, 개조하여 전통중국이 현대화로 향하는 비교적 온건한 길을 모색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서양문화를 유학화(儒化)”, 혹은 “중국화”(華化西洋文化)하는 데 공헌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넷째, 시간적으로 볼 때 20세기 초  5․4신문화운동의 격렬한 반전통에 대한 일종의 보수적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현대신유가는 현대중국의 중요한 학술 유파이며, 단지 일종의 철학사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문화사조이다.
과거 송대의 신유학이 당시 유행사조이던 도교와 불교사상에 대항해서 생겨난 새로운 유학사조라고 한다면, 현대신유가는 ‘과학’이라는 거인 앞에서 새로이 자신을 정립한 중국전통사상, 즉 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과학이 위세를 떨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현실의 긴박한 여러 문제와 관련하여 철학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고, 또한 무엇을 해야만 하느냐 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현대신유학자들은 과학의 위력과 장점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우선 과학의 폐단을 지적한다.  즉 이들은 현대과학의 발전이 예기치 못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주의를 환기시킨다.  첨단과학이 동원된 가공할 만한 전쟁과 생태계의 환경오염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과학의 근본문제는, 과학에 대한 무한한 동경심을 가졌던 현대중국의 지식인들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바로 ‘과학과 현학(玄學: 철학, 형이상학)의 논쟁’ 같은 것이 생겨나게 된다.  현대신유학자들은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인생관의 문제까지도 과학으로 환원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초기 서화론(西化論)자들의 천진난만한 과학지상주의에 대해서 반발하여, “인생관의 문제는 결코 과학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과학과 철학이 근본적으로 그 연구영역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현대신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철학과 과학의 구별을 강조한다.  과학을 연구하는 목적은, 자연을 인식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구체적 지식을 획득하여 자연을 변화시키며, 실제 생활에 이용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증진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그러나 철학을 연구하는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높은 인격을 구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혹은 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한 웅십력, 풍우란, 모종삼 등의 견해는 모두 이러한 기본 입장을 토대로 하고 있다.
현대신유학자들은 대부분 철학의 위상을 형이상학(본체론)에 둔다.  즉 이들은, 철학이 형이상학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기본 생각은 아마 전통적인 ‘체용관’(體用觀)에 있었던 듯 하다.  즉 체(體)는 용(用)의 본체이며, 용은 체의 현상이라는 기본시각을 갖게 될 때, 용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현대 신유학자들은 체용의 논리에서 철학은 체로 그리고 과학은 용으로 보았다.  즉 이들은 본체의 규명에 바로 철학의 사활이 달려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과학이 야기한 문제점들을 치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현대 신유학자들은 철학방법론으로서 직관(直觀, 그들은 흔히 直覺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을 중시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웅십력이다.  웅십력은 ‘이지(理智)적인 앎’(量智)과 ‘직관적인 앎’(性智)을 구분한다.  그는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갖고 있는 두 가지 종류의 인식능력이라고 생각하였다.  전자는 과학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보며, 그리고 후자는 자아의 완성과 인격의 완성을 추구하는 내재적 근거이고 동력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웅십력이 이 둘을 완전대립하는 것으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다만 양지(量智)는 성지(性智)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웅십력이 강조하는 인식은 성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지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직각(直覺)을 강조한다.  웅십력은 체용론의 구조 속에서 나름대로 양지와 성지의 통일을 시도하지만 결국 이 양자는 구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에 입각해서 볼 때 현대신유가의 일반적인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현대신유가는 철학을 객관 사실에 관계하는 학문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도덕(인생)가치에 관계하는 학문으로 파악한다.
둘째, 그러므로 현대신유가는 철학이 형이상학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현대신유가는 그 철학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직관적 사유를 존숭한다.
현대신유가는 오늘날 중국 학술계를 점점 더 깊이 파고들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대륙 내의 현대신유가 학맥의 단절은 이들 사상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망설이게 한다.  이것은 현대신유가의 후기 발전이 주로 대만․홍콩․미국 등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대중국의 역사적 경험․현실적 상황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중국 내에서의 현대신유가는 아직 창조적 작업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호기심어린 조심스러운 탐구 대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사실은, 앞으로 현대신유가에 대한 가장 창조적․주체적 작업은 중국 대륙내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또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제2절  최근(1980년 이후) 중국철학의 동향


우리는 현대 중국, 보다 정확히 말하여 1980년대 이후 중국의 전통철학 연구 태도에 대해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즉 문화혁명 이전과 비교해 볼 때, 그들이 강조하는 ‘전통에 대한 비판적 계승’이 근래에 와서 비판보다는 점점 계승에 무게를 싣는 듯하다.  구 소련과 동구권 공산국들의 몰락 이후 이념보다는 자국(自國)의 이익을 챙기는 국가이기주의가 세계의 추세인데, 이 점 중국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서 종래 모호한 부분이 있다고 하여 비판하던 전통사상마저도 오히려 중국적 특색이라 하여 은근히 옹호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대표적 경우가 바로 기론(氣論)이다.  중국 현대철학자들은 중국 전통 기론에 대해서 도식적인 유물변증법적 시각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종래의 물질개념과는 다른 몇가지 차이점을 부각시키고자 애쓴다.
중국 현대철학자 장입문(張立文)은 서양 전통철학에서 말하는 물질 개념의 특징으로 연장성(延長性), 불가입성(不可入性), 타성(惰性: 慣性) 셋을 든다.  여기에서 말하는 ‘연장성’이란, 물질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형상이나 질량 등의 규정성을 갖는다는 의미이며, ‘불가입성’이란, 물질이 일정한 강도를 갖기 때문에 원자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상호 침투․포용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타성’이란, 물질이 외부의 힘을 전혀 받지 않는다면 원래의 운동 상태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말한다.  장입문은 이 중 연장성만을 기 개념과 유사성으로 받아들이고, 이와는 별도로 가입성(可入性), 포용성(包容性), 삼투성(滲透性)을 기 개념의 특징으로 든다.  이것은 어찌보면 종래 전통 기론에로의 후퇴 혹은 복귀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이후 중국대륙에서의 기론이 여전히 맑스주의의 유물변증법이라는 틀 내에서 어떠한 활로를 찾아낼 것인지, 아니면 그들 전통철학에로 돌아갈지, 그도 저도 아니라면 또다른 제3의 돌파구를 찾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낼지 관심있게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기론의 앞날이 반드시 그 시대적, 사회적 배경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이루어질 것이며, 또한 어떠한 시대, 어떠한 사상이라고 하더라도 전통 사상과의 만남 속에서 그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