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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0/05 (01:18)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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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과 하느님 나라
민중신학과 하느님 나라

자본의 효율성에 맞서 인간의 삶을 생각하며*




최 형 묵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연구실장 / 천안교회 목사





1. 하느님의 나라, 민중의 나라


"하느님의 나라는 곧 민중의 나라"라는 명제는 민중신학이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고 있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궁극적 목적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적 사신이라 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라는 그 말 자체로는 자명하지 않아 보인다.

물론 하느님 나라의 실체가 자명한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이냐 하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하느님 나라가 어떤 맥락에서 제기되느냐에 따라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 대해 일찍이 안병무는 "예수가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건, 그것이 당시의 사람들에겐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1)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본질적 사신으로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은 혼란을 느끼고 있지만,2) 예수 자신 그리고 당시의 민중들에게는 너무나 자명하였기에 굳이 설명이 필요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민중들에게는 자명한 것인데, 오히려 지식인이면 지식인일수록, 이 땅에 안주할 자리가 분명하면 분명할수록 그 의미가 점점 희미해지고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그런 것이 하느님 나라"3)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 나라는 곧 민중의 나라"라는 명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로서, 하느님 나라 이해를 둘러싼 예수 당시의 상황을 말해 줄 뿐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들의 상황까지도 설명해 주고 있다.

'한편에게는 자명한데 또다른 한편에게는 자명하지 않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갈등의 상황을 전제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하느님 나라 사상이 예수 시대에 비로서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 형태와 강조점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구약시대부터 오랜 전승의 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구약의 전승을 이어받은 예수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라는 표상 자체가 결코 낯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실체가 뭐냐 하는 점에서 사람들은 이해하는 바가 달랐다. 우리는 역시 안병무가 강력히 제기한 마르코복음서에서의 제자비판 동기가 그 정황을 설명해 주고 있다고 본다. 특별히 예루살렘 도상에서 만난 부자 청년과의 대화(마르 10: 17-27)에 나타난 부자청년의 반응과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의 선언에 당혹해 하는 제자들의 태도는 적어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갈등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또한 예수의 하느님 나라 비유로서의 잔치의 비유(루가 14: 12-24)는 이와 같은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전한다. 이 하느님 나라가 갈등관계 안에 놓여 있는 점은 오늘의 상황에서도 다르지 않다. 오늘 우리는 이 하느님 나라를 내면의 세계 혹은 피안의 세계로서 이해하고 있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현실 변혁의 긍극적 잣대로서 이해하고 있는 입장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공존하며 갈등하고 있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상황을 단순히 하느님 나라 이해 유형의 차이로만 보지 않고, 사회적 관계의 차원에서 이해한다. 분명하느냐 분명하지 않느냐, 그리고 그것이 현실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위치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갖거나, 혹은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추상화하고 내면화하는 경향은 현실에서의 '안주할 자리'가 분명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곧 현실에서 안주할 자리가 분명한 사람들에게는, 삶의 현실적 기반을 뒤흔드는 도전으로서의 하느님 나라는 하나의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평안한 삶을 파괴하는"4) 그 어떤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현실의 삶을 뒤흔들지 않는 한에서의' 하느님 나라의 추상화, 개인화, 내면화의 왜곡이 일어난다.5) 반면에 현실에서 안주할 자리를 누리지 못한 이들에게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인 하느님 나라는 곧바로 열망의 대상이 된다. 안병무는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사상이기 이전에 이스라엘 민족사를 통해 수난을 당하던 민중들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갈망, 우리식으로 이야기하면 민중의 한(恨)이었다"고 말한다.6) 여기에서는 그것을 추상화할 여유나 내면의 동기와 일치 여부를 확인할 겨를 없이 곧바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운동에 참여하는 결단이 이루어진다.7) 하느님 나라가 민중들에게는 자명하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민중의 '인식론적 특권'을 말한 셈이다. 이 사회와 역사를 민중의 눈에서 곧 '아래로부터' 보고자 하는 민중신학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주장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새삼스럽게 정의할 필요조차 없"이8) 당시 민중들에게 자명했던 하느님 나라의 요체는 과연 무엇일까? 안병무는 예수의 삶 자체가 곧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라고 하면서 그 하느님 나라의 요체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으로 주기도문을 말한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앙고백으로서 주기도문은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을 가장 먼저 내세운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에 이어 자연스럽게 그 주권이 실현되는 나라에 대한 소망을 표현한다. 그런데 그 나라는 구체적으로 '일용할 양식'이 해결되는 나라이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이 기도는 우선 하느님 나라가 물질 세계 안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소망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단순히 물질의 생산과 축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을 둘러싼 삶의 관계의 변화를 의도한다. 흔히 우리말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내용 가운데 '죄'는 '빚'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빚을 탕감해 달라는 이 기도는 그러기에 삶의 관계의 변혁을 의도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지 않는 삶, 서로가 서로를 속박하지 않는 삶의 관계로의 변혁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민중에게는 자명한 것이었으며,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는 곧 민중의 나라라는 민중신학의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주기도문의 성격에서 하느님 나라 운동의 정치경제학적 함의를 발견한다.


2. 하느님의 주권과 민중의 주권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민중의 나라라는 이해는 그것이 곧 민중들이 염원을 집약한 것이라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루어나가는 주체 역시 민중이라는 점과도 관련되어 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다."라는 예수의 선언은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주체로서 민중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느님 나라 실현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이해는 그 주권이 민중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민중의 주권이 실현된 나라가 곧 하느님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 민중신학의 하느님 나라 이해는 해결해야 할 신학적 과제를 안고 있다.9) 여기에서 '하느님의 주권'은 곧 '민중의 주권'과 동일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신학 비판자들이 즐겨 지적하는 '민중메시아론'의 문제가 바로 이 대목에서 제기된다. 우리는 민중과 메시아, 민중과 예수가 동일시되는 것은 바로 '사건론'의 전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여러 기회를 통해 분명히 한 바 있다.10) 곧 민중해방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하느님의 일과 민중의 일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주권과 민중의 주권이 동일시되는 것은 그러한 한계 안에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더 진지하게 이와 관련된 문제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일찍이 서남동은 바로 이와 관련된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11) 서남동은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와 '메시아 왕국' 혹은 '천년왕국'이 구별되는 두 가지 상징으로 역할하게 된 데에는 그 연원이 있다고 본다. "'하느님의 나라'란 원래 역사의 목표였는데 2천 년 역사를 통해서 나타난 것을 보면 '타계적(他界的)인 것'으로 흘러버렸"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 이외에 역사의 마지막 단계와 그 목표로서 '메시아 왕국' 곧 다른 말로 하면 천년왕국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고 한다. 물론 서구 역사에서 이 천년왕국마저 환상적인 것으로 배척되기도 하였지만, "역사 안에 설정한 구체적 목표"로서의 "메시아왕국은 사회참여를 주로 하는 민중신학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교리로서 재생.복권해야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서남동은 궁극적 목표로서의 하느님 나라를 역사 안에서의 구체적 목표인 메시아 왕국으로 단순히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서남동은 "그리스도교가 양도할 수 없는 자기동일성을 구하는 자리는 역시 하느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그렇지만 오늘의 역사적 상황을 중시하는 민중신학은 그 동안 망각되어 온 '메시아왕국'의 사상을 중심교리로서 대두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서학자인 안병무가 성서 안에 나타난 하느님 나라 사상의 이중성12)에 주목하였다면, 그리스도교 사상을 다룬 조직신학자인 서남동은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 나타난 역사의 목표에 관한 두 가지 상징에 주목함으로써 그에 대해 각기 다른 의의를 부여한 셈이다.13)

어쨌든 서남동의 이와 같은 주장은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체제와 양자의 관련성을 해명하는 대목에서 보다 분명한 의도를 드러낸다. 서남동은 "봉건주의 체제이든, 자본주의 체제이든, 사회주의 체제이든 그 어떤 체제도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동거리"이며 "어떤 체제는 더 가깝고, 어떤 체제는 덜 가깝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메시아 왕국'을 기점으로 한다면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적인 체제가 다소 가깝다"고 한다.14) 메시아 왕국이라 해도 곧바로 현실의 어떤 체제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다만 완곡하게 말해 '가까울' 따름이다. 그러나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하느님 나라가 역사 밖의 실재로 남아 있는 한 오늘 이 땅을 사는 민중과 하느님은 서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을 가질 수 없기에 양자 사이에 만날 수 있는 거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양자를 관계짓는 매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오늘 이 땅의 민중의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이다. 그 매개 지점을 통하여 땅의 현실을 하느님의 주권하에 두려는 의지와 땅의 현실에서 자기의 정당한 주권을 회복하려는 민중의 의도는 일치를 이룬다.

이와 같이 성립된 하느님의 나라와 민중의 나라, 그리고 하느님의 주권과 민중의 주권의 등식관계는, 하느님의 편에서는 '역사개입'의 과정이요15) 이 땅의 민중의 편에서는 잘못된 현실을 진정한 의미에서 '초월'하는 과정에 해당한다. 그런데 민중의 편에서 주어진 역사 현실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현실 관계를 변혁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목표를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의 역사차안적 성격(서남동이 '메시아 왕국'으로 주목한)이 '맞닿는' 혹은 '구현되는' 인간의 기획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체제의 선택 문제이다. '체제'라는 말이 부적절하다면 '대안사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16) 어쨌든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는 일이다.


3. 중간공리로서 '공'(公)


서남동이 '메시아 왕국' 표상으로 접근하고자 했던 하느님 나라의 구체성, 곧 역사 차안적 성격은 안병무의 '공' 개념에 의해 보다 더 현실적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현실적 의의를 지닌다는 것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집단에게 자명했던 궁극적 목적의 표상, 곧 '하느님 나라'에 내장된 원리를 재정의함으로써 특정한 시공간을 뛰어넘어 적용 가능한 일반 원리로 이끌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월러스틴은,17) 막스 베버가 '형식적 합리성'(formal rationality)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제기한 '실질적 합리성'(substantive rationality) 개념을 끌어 와, 그가 말하는 '유토피스틱스'(Utopistics)18)로서의 '가능한 역사적 대안 찾기'의 중심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월러스틴의 이와 같은 설정은 우리가 말하는 신학적 차원에서의 하느님 나라의 현실화를 모색하는 데 매우 유용하며, 사실상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19) 하느님의 나라를 민중의 나라로 이해한다는 것은 곧 하늘의 주제를 땅의 주제로 이끌어내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민중신학의 개념상 장치가 바로 '공'에 해당한다. 나는, 월러스틴이 말하는 '실질적 합리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민중신학에서는 곧 이 '공'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런데 월러스틴은, 역시 막스 베버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여 그 개념이 "불명확성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런 종류의 함리성에 대해 가능한 가치판단의 잣대는 무한대로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막스 베버는 "'실질적'이란 개념은 ... 추상적이며 총칭적인 개념"이라 덧붙이고 있음 또한 확인한다. 그래서 월러스틴은 결국 도덕적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문제는 서로 다른 전제들과 그에 따른 서로 다른 이해들 사이의 갈등을 유발하는 '정치투쟁'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고 지적한다.20)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신학적 혹은 도덕적 차원에서의 '궁극적 가치'에 의한 선택의 문제가 어떤 하나의 원리에 의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민중신학에서의 '공' 개념 역시 바로 그와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구체화를 위해 꼭 거쳐야 하는 하나의 장치이지만, 그 자체로 구체화의 원리가 완전하게 충족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땅의 사람들'에 의해 또다시 달리 이해될 수밖에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러한 문제점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중간공리'에 해당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그야말로 막연하기 그지 없는 '하느님 나라'라는 표상이 갖는 의미를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재정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체성을 띠지만, 그것은 또다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 의의가 재정의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는 모호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하느님의 주권과 민중의 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중간공리로서의 '공'의 이중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는 모호성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이는 하느님 나라를 구체화할 수 있는 중간 다리를 하나 건넜다고 해서 안도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어쩌면 이 다리를 찾기까지보다도 더 지루하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할 판이다. 계속해서 월러스틴의 표현을 빌리면, 과연 "무엇이 실질적 합리성을 구성하는가에 관한 투쟁"21)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 민중신학은 이를 위한 분명한 하나의 입지점을 확보하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 민중의 나라', '하느님의 주권, 민중의 주권'이라는 말 자체가 함축하고 있듯이 '민중의 자리'가 그것이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땅의 현실에서 새로운 대안을 찾지 않으면 삶의 안정을 누릴 수 없는 민중의 입장에서 그 문제를 숙고하여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의 세계 현실과 민중의 처지를 이해하기 위한, 그리고 나아가 민중들이 지지하는 대안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사회적 지식' 곧 과학의 도움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재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궁극적 목표로서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앙을 그저 강조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땅의 현실에서 구체화하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한 '사회적 세계의 작동방식'에 관한 이해는 꼭 필요한 일이다.22) 이 과정은 실현가능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실질적 의미와 더불어, 잘못된 억측과 그로 인한 잘못된 대안의 실행이 낳을 박탈과 배제 그리고 환멸을 최소화하여야 한다는 방어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사회 현실과 유리된 타계지향적 신앙 혹은 근본주의적 구호만이 환멸을 낳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회혁명의 과정 혹은 제도적 변화의 과정에서도, 그 동기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숱한 오류로 인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실질적 박탈 현상과 환멸이 야기된 역사의 교훈을 깊이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4.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오늘 현실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


우리가 '공'을 하느님 나라의 구체화를 위한 하나의 준거로 삼을 때,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이 갖는 이중성의 한 측면 곧 사회적 관계에서 부딪히는 모호성을 극복할 수 있는 보다 더 구체적인 규준들이 필요하다. 실질적 합리성을 구성하는 내용이자 동시에, 사회의 여러 관계 속에서 우리가 선택한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대안의 구체적 방향이다. 애초 '공' 개념이 제시될 때부터 그 단초들은 사실 제시되어 왔다. 그것은 물질과 권력을 본래의 생산자에게 돌림으로써 민주주의적 제도와 공유제를 발전시키고, 나아가 인간과 자연이 공존 공영하는 생태학적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전망으로 집약된다.23) 이러한 전망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근거에서 비롯된 것이며, 더불어 이 세계를 창조한 하느님이 그 동반자로 '일하는' 인간을 선택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24) 다시 말해,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분명한 고백에서 비롯된 것이자 동시에 그 하느님의 주권은 민중의 주권으로 구체화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주권이 구체화하는 형태인 민중의 주권이 이루어지는 자리에 대한 탐색을 시도하여야 한다. 바로 오늘 민중의 자리를 문제시하여야 하는 것이다. 마땅히 '공'이 되어야 할 민중의 삶의 터전은 그 본래의 주인인 민중에게 귀속되지 않고 특정한 집단의 손아귀에 유린된지 오래이다.

특별히 오늘의 전지구적 시장경제 체제는 삶의 왜곡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끊임없는 자본의 축적을 위하여 내달리고 있는 오늘의 체제는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하고 제도화하여, 다시 끊임없는 욕망의 재생산을 유도한다. 그것은 경쟁과 효율의 논리로 무장되어 있으며, 그 이면은 '시장의 신화'로 치장되어 있다. 이 '신화'는 자본과 부의 축적을 위한 개인의 욕망이 한 사회의 전체적 부를 증가시켜 만인에게 그 혜택을 돌려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믿음을 유포시킨다. 그 혜택, 곧 고른 분배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자유로운 경쟁과 조절이 적절하게 보장되는 시장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의 위력이다. 그러나 이 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신화가 아니라 바로 현재의 인간이 성취한 명백한 현실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성 있는 성과들을 내세움으로써 이 체제가 최상의 체제라고 여기는 것이다. 흔히 이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덕목이 주로 제시된다. 곧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 자유민주주의적인 정치구조, 그리고 평균수명의 연장이 그것이다.25)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진정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그 성과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성과들은 분명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들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오늘 이 체제 안의 대다수를 점하는 민중들의 입장에서 과연 '현실'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인식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오늘 이 땅에서 구체화하여 새로운 역사적 대안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로 존재하는 체제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가 이룩한 이상의 성과들에 대해 우리는 양극화의 경계선에서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성취가 어느 한편에게는 분명한 '현실'이자 동시에 불변의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에게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환상' 곧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은 소수에게만 집중되어 왔으며, 자유 민주주의는 대다수 민중의 참여를 실질적으로 배제해 왔다. 또한 인간 수명의 연장은, 굳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제3세계의 현실을 반증으로 삼지 않더라도, 소위 발전된 국가에서의 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그 의의가 반감된다. 더욱이 '비용의 외부화' 메커니즘에 의한 무한정한 자연의 수탈로 발생한 인류의 생존조건 자체의 위기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할 것 같으면, 특정한 국면에서의 인간 수명의 연장이라는 성취는 허구적 성격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이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원리에 의해 이룩된 성과로 찬양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는 국면에 따라 궤도수정의 길을 걸어 왔다. 엄밀히 말해 본래 정치체제로서 자유주의와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구별된다.26) 그런데 자유주의와 결합한 자본주의는 두 가지 신화를 신봉하여 왔다. 이른바 '자유방임과 야경국가의 신화', 그리고 '시장의 효율성 신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국가의 개입이 없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거니와, 실제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는 사회적 통제를 벗어난 '자율적 시장경제'의 결과로 파시즘과 세계대전, 공황 등 세계사적 위기를 맞이하면서 국가독점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한다. 그러나 다시 국가개입주의와 국가독점 자본주의 체제가 1970년대 들어 위기에 처하면서 시장주의적 처방이 제시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이다. '시장의 실패'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사'로서의 국가가 다시 '문제'시되면서 국가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인 시장이 다시 '해결사'로 복귀한 것이다.27)

'생산의 지구화'와 '금융자본의 세계화' 현상과 맞물린 오늘의 신자유주의는 흔히 '국가의 축소'와 대폭적인 '시장의 확대'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본래의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동일할 수는 없지만, 자유주의에서 국가개입주의로, 다시 신자유주의로의 전화 과정은 마치 '국가'와 '시장'이 그 역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곡예를 벌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자본주의의 자기전화 과정이 이와 같이 '국가'와 '시장'의 역할의 상호교체의 반복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만일 그와 같이 이해된다면 그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우리는 1980년대 영국의 대처정부와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대표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최근 IMF 관리체제 이후 멕시코와 한국 등 제삼세계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체가 무엇인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28) 복지 축소, 자본소득에 대한 세금 축소, 그리고 특히 노동시장 유연화를 목표로 한 노동조합 정책의 약화로 집약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한 영국과 미국의 경우에 '작은 정부'는 이데올로기였을 뿐, 오히려 두 나라 정부는 대외통상 및 군사정책에서 강력하고 공세적인 '강한 국가' 정책을 고수했다.29) 국내적으로는 친자본-반노동적 경제.사회 정책을 기조로 하고, 대외관계에서는 강력한 국가주의 정책을 추구한 것이다.

반면에 멕시코나 한국의 친자본-반노동 정책은 민족주의적 관점 혹은 국민경제의 차원에서 진행되지 않고 있다. 경제위기라는 조건과 세계화의 명분 아래서 대외종속적 방식으로 추진된 것이다. 언뜻 보아 국가의 축소와 시장의 확대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순수하게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과정의 이면은 앞서 말한 '강한 국가' 정책이 도사리고 있다. 곧 제삼세계의 국가가 국민경제를 방어할 수 있는 장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말 그대로 거대한 '초국적 자본'의 위력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보호하고 있는 국가적 영향력의 공모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자간의 자유로운 교역질서를 표방하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아래서도 자국 산업의 보호와 확장을 위해 걸핏하면 <슈퍼 301조>를 거들먹거리는 미국의 정책에서도 그 사실은 충분히 입증된다. 자유로운 세계시장의 형성이라는 논리는 여전히 불평등한 위계적 국가관계 안에서 작동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결국 시장과 국가의 넘나들기는 일종의 환상일 뿐, 어떤 논리로 치장되든 자본의 효율성을 극대화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 오늘 세계 자본주의의 실상이다.

문제는 바로 이 효율성의 원리이다. 효율성 강화의 논리는 언제나 경쟁력 강화의 논리와 결부되어 있다.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는 시장의 원리에 모든 것을 내맡길 때 효율성은 극대화된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은 '자본의 효율성'으로 귀착되는 이 원리가 지금 온통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하느님 나라의 구체화를 모색하는 신학적 관점에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영역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대안을 위하여 구조 혹은 제도의 차원에서 구체적인 정책들을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믿음을 추구하는 것이 열광주의적 환상에 빠지지 아니한다. 그런데 바로 그 구체적인 정책들에 대한 판단에 앞서 우리가 문제해야 할 것이 효율성의 신화이다. 전제부터 문제삼지 않고서는 미시적인 정책들에 대한 판단이 투명하게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특별히 신학적 관점에서 이 문제는, 우리가 추구하는 하느님 나라의 원리와 현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의 차이를 규명하는 의의를 지닌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띠고 있다.

궁극적으로 자본의 효율성에 지나지 않는 이 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운 시장의 원리에 의해 보장되는 효율성 강화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경제 혹은 정치 제도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간 본성 자체에 대한 이해로까지 발전한다.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는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가장 적합한 경제 제도라고 보는 것이다. 이 점에서 경쟁에 입각해 효율을 추구하는 것은 가장 '현실적'이며 또한 '합리적'이라고 옹호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합리적이고 현실적일까? 맹목적 효율성 경쟁과 임금인하를 기초로 진행되는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부유해지는 20%와 불행해지는 80%의 '20대 80의 사회' 혹은 '5분의 1의 사회'를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30)은 이제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결국 전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효율성 경쟁은 불합리성만을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기업의 합리성이 사회의 합리성과, 자본의 합리성이 인간의 합리성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나아가 더 구체적으로 부유한 사람의 합리성과 가난한 사람의 합리성이 결코 합치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을 보게 된다. 한편에서 합리적이고 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이 또 다른 한편에서는 결코 합리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만능열쇠처럼 통용되고 있는, 효율성 강화를 위한 소위 '구조조정'이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도대체 어떻게 합리적이며 현실적일 수 있단 말인가? 말 그대로 '인간 없는' '구조조정'은 자본의 효율성 강화에만 봉사할 뿐이다.

경쟁에 의한 자본의 효율성 강화를 거부한다면 우리가 정말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의 신학적 상상력을 제고시킬 수 있는 하나의 전거로 예수의 "나눔의 기적"을 떠올린다. "오병이어의 기적"(마르 6: 30-44 // 마태 14: 13-21 // 루가 9: 10-17 // 요한 6: 1-14)31) 으로 잘 알려진 예수의 급식 기사는 일용할 양식의 문제를 해결하는 두 가지 방식을 대비하고 있으며, 그 두 가지 방식은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 현실에서의 두 가지 관점으로 비유될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군증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은 제자들의 방식과 예수의 방식으로 비교된다. 먼저 외딴 광야에서 먹을 것이라고는 빵 몇 덩어리와 물고기 몇 마리에 지나지 않는 상황 앞에서 제자들은 당황한다. 제자들에게서, 도대체 이 군중들의 굶주림을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해결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현실적 해결책이란 군증들을 각기 헤쳐 제 각기 음식을 '사' 먹도록 인가로 보내는 방법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이 먹을 빵을 구하기 위해 최소한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급전'을 어디에서든 끌어들여 와서 대신 빵을 '구매'해야 한다. 굶주림의 문제를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원리, 상품교환의 원리에 내맡겨 해결하는 것만이 현실적이라고 여기는 발상이다.32)

이것이 현실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상식이었고, 그 상식으로 해결할 묘안이 찾아지지 않자 제자들은 당황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걱정할 것이 없다는 태도를 보이며 단순한 원리를 제시한다. "가진 것을 나누라"라는 해법이다. '시경제의 원리', '상품교환의 원리'를 뛰어넘는 '나눔의 지혜'가 바로 예수가 제시한 방법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의 해법을 따른 결과 굶주린 군중들이 배불리 먹고도 오히려 남았다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각기 자유로롭게 시장에서 구매하도록 하거나 외자를 들여와서라도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라 믿는 사람들의 상식을 뒤집어엎는 사건이다. 제자들에게는 시장경제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지만, 예수에게는 그 방법이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인' 방법이었다. 그 방법으로는 빈곤의 문제, 실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 방법으로는 오히려 더 많은 가난한 사람, 더 많은 실업자들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것을 예수는 간파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나눔의 방식', 더 정확하게 말해 진정한 의미에서 '나눔'이 아닌 단순히 '상품의 교환'에 불과한 방식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일용할 양식의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여전히 기존의 상식을 뛰어 넘지 못하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먹을 것이 없다고 걱정하는 제자들을 보고 예수는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느냐? 그렇게도 생각이 둔하냐?"고 질타한다(마르 8:17-18).

이 이야기는 경제의 목적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 것인가를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인간을 배제한 자본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 경제의 궁극적 목적이다. 오늘 '구조조정'의 결과 일자리를 잃은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과연 어떠한 대안이 '현실적'인지를 판가름하게 해 주는 근거를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발견한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 '구조조정'은 곧 '인력의 감축'과 동일시되고 있다. '불필요한'(?) 인력을 감축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하여 기업의 합리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 안전망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인력감축은 수많은 실업자를 양산하고 나아가 사회적 불안을 증대시킬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나눔의 지혜'가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재삼 깨닫게 된다. 자본의 효율성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질을 먼저 생각하는 경제운용이라면, 당연히 '나눔의 지혜'가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된다. 인력을 감축하기보다는 노동시간을 줄임으로써 보다 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가능한 한 모든 사람에게 고루 일자리를 나누는 것은 그 일을 맡은 이들에게 기본적인 자존심과 존엄성을 보장해 주는 길이다. 아울러 일자리를 골고루 나눔으로써 줄어든 노동시간 이외의 시간을 사람들이 활용할 기회를 갖게 되면 그것은 곧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 것과 직결될 수 있다. 자본의 효율성 추구라는 근본 전제를 뒤집어 인간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것33), 그것이 바로 오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아래서 하느님의 나라를 구체화하려는 그리스도인의 첫 걸음이 되어야 한다.


5. 현실적 대안을 찾아 ― 참여 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자본의 효율성만이 최상의 가치로 여겨지는 오늘의 현실에서 그것을 뛰어넘는 다른 대안을 생각한다는 것은 과연 무모한 환상일까?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는 현재의 지배적인 삶의 방식과 대안적 삶의 방식의 문제가 '현실'과 '환상'의 관계로 치환되지 않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어느 한편의 현실은 또 다른 한편에서는 환상으로 치부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임을 확인하였다. 이 관계는 항상 상극적인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며, 실제의 경우 보다 빈번하게 상보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말하자면 '환상'을 배제한 '현실'을 택해야 한다거나 혹은 '현실'을 뛰어넘는 '환상'을 그려야 한다는 식으로 단순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입장에서나 현실과 환상은 서로를 보완하고 뒷받침한다. 실제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논리는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만 옹호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해 왔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경제가 이룩한 구체적 성과를 내세우고 그것이 장차 더욱 확대되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 일면을 보여 준다. 이 점에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논리 역시 분명하게 유토피아적 전망을 가지고 있다.34)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시점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현실적'이라 단정짓고 그 현실적인 것을 수용하는 것이 '환상'의 무모성과 모호성을 배제한 대안을 찾는 유일한 출발점이라 말할 수 없다. 사실 월러스틴이 말한 '유토피스틱스' 개념의 유용성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우리의 관심사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현실분석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대안을 찾고자 하는 전망과 일치한다. 그것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현실적 대안'이라 생각하며, 앞서 말한 '실질적 합리성'을 충족시켜 나가려는 방향이다.

앞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매개하는 중간공리로서 '공'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전망을 세 가지로 집약하였다. 민주주의적 제도와 공유제의 발전, 그리고 생태학적 공동체의 전망이 그것이다. 자본의 효율성, 곧 자본축적의 우선성을 극복해나가고자 하는 대안은 이러한 전망을 더욱 구체화하는 데서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전망은 물질적 번영과 그와 더불어 끊임없이 상승해 가는 인간의 욕망을 한 순간에 '무위'(無爲)로 돌리고자 하는 '환상'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현재까지 이루어진 물질적.사회적 기초 위에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려는 실제적 노력을 의도한다. 다시 말해 개인적 각성을 통한 '금욕'의 실천을 의도하기보다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약육강식의 무한경쟁 관계를 공존공영의 협동 관계로 바꾸어나가는 것을 의도한다.35) 우리는 그러한 전망을 구체화하는 데는 제도화의 요건이 필요하다고 보며, 그 전망을 제도화하는 틀로 참여 민주주의로 설정해 본다. 참여 민주주의란 논자에 따라 그 강조되는 측면이 다를 수 있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지만36), 여기서는 적어도 앞서 말한 세 가지 전망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그와 같은 전망을 구체화하는 과정으로서 참여 민주주의를 상정하는 것이다.37)

참여 민주주의는, 사실 인민의 참여를 통한 주권의 실현이라는 민주주의의 대의에 비추어 볼 때 그 말 자체로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민주주의의 정신 자체가 인민의 참여를 기본 요건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참여'라는 수식어를 덧붙여 민주주의를 말하려는 것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존재한 여러 형태의 민주주의가 사실상 참여를 충분하게 보장하지 못해 왔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 참여는 개인의 자기실현으로서의 의의와 더불어 공공의 선을 이루어 가는 과정으로서 의의를 지닌다고 본다. 여러 가지 동기를 가진 개인과 집단들이 이 참여의 과정을 통해 공동의 합리성을 체득하게 됨으로써, 참여의 제도화 곧 참여 민주주의는 실효성을 거두게 된다. 이 점에서 참여 민주주의는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면서도 그것이 보다 상위의 협동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하는 적절한 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참여 민주주의는 종종 그 실효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참여 민주주의 실효성을 의심하는 비판은 대개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인간 곧 개별 참여자의 능력 및 행동원리와 관련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의사결정의 효율성과 관련되어 있다.38) 말하자면 참여자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은 공익이 아닌 사적 이익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참여의 본래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며, 게다가 복잡한 사회에서 여러 집단의 과도한 참여는 의사결정 과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심각한 낭비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제한된 측면에서 타당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참여의 본래적 가치를 부정할 만큼 근본적인 비판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비판의 밑바탕에 깔린 자유주의적 인간관을 문제시하여야 한다. 자유주의적 인간관은, 원자화된 상태에서 개별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시장 주체로서의 인간만을 생각했지 자아실현 또는 공익을 위해 움직이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행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경쟁에 입각한 자본의 효율성만을 앞세우는 논리는 바로 이와 같은 인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관의 극복을 전제로 하는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는 정치.경제 제도상의 효용성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성의 변화, 인간 의식의 변화라는 본질적 차원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하겠다. 물론 제도로서 참여 민주주의가 그것을 저절로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와 같은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으로서 의의는 충분하며 인간 의식 변화의 실현 여부는 삶의 구체적인 장에서의 진정한 참여를 어떻게 이루느냐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참여 민주주의의 구체적 영역과 장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참여 민주주의의 영역 혹은 장은, 계속해서 앞서 말한 세 가지 전망과 대응한다. 곧 정치적 차원에서의 참여를 보장하는 민주적 제도의 구현, 경제적 차원에서의 자본의 우선성에 의해 움직이는 시장경제를 규율하는 방법,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생태학적 공동체를 구현하는 방법이 면면히 모색되어야 한다. 오늘날 이러한 과제가 국가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모색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참여 민주주의는 이와 같은 거시적 지평에서 제도로 구현되는 방식과 더불어 진정한 자아실현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일상생활 영역에서의 생활양식으로 구현되는 측면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그 어떤 측면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이 가운데서 우리는 특별히 경제적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39) 오늘 우리의 삶의 양식과 정치제도가 사실상 자본의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시장경제 체제로부터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참여 민주주의의 핵심요소라 할 수 있는 경제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만으로도 다의적이고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사회적 부의 균등화를 이룰 수 있는 여러 장치를 마련하는 일을 포함하여 노동과 자본의 권력균형을 이룰 수 있는 노동의 단결권 보장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는 것 등이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특별히 참여의 제도화와 관련하여 우리는 '작업장 민주주의'를 새삼 중요한 과제로 인식한다. 이것은 작업공정에서의 노동자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일 뿐 아니라 노동자의 경영 참여하게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경영에 대한 노동자의 의사결정권을 보장하는 것을 포함한다. 노동자의 경영 참여가 곧바로 노동에 의한 자본의 통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과정이 자본의 우선성을 극복하는 길로 이어지는 중요한 요체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작업장 민주주의는 노동의 인간화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노동의 인간화는 작업 환경의 개선이라는 소극적 의미에서 나아가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노동을 통하여 체득된 진정한 자아실현은 인간의 모든 일상생활 영역에서 다시 확산 구현된다는 점에서 진정한 참여 민주주의의 요건을 형성함과 동시에 그 본령을 실현하는 셈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우리는 작업장 민주주의를 포함하는 경제 민주주의를 참여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로 보는 것이다.


6. 다시 묻는 하느님 나라


우리는 지금까지 하느님 나라의 이중성을 전제로 하면서 그 가운데 역사 차안적 성격에 주목하여 그것을 구체화하는 현실적 대안을 모색하였다. 이것은 신학적 차원에서 기본적으로 하느님이 인간이 된 성육신론을 오늘의 상황에서 더욱 구체화하려는 시도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나라를 모호한 영역으로 남겨둠으로써 오는 혼란과 각종 열광주의를 포함한 또 다른 왜곡을 피하려는 진지한 인간적 노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신학적 관점에서 여전히 다음과 같은 서남동의 말을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봉건주의 체제이든, 자본주의 체제이든, 사회주의 체제이든 그 어떤 체제도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동거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체제는 더 가깝고, 어떤 체제는 덜 가깝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메시아 왕국'을 기점으로 한다면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적인 체제가 다소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민주사회주의'를 가장 이상적인 모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라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그것을 교조화시킬 수는 없으니까요.40)


어떤 체제이든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할 수 없다는 뜻의 이 말은, 인간을 혹은 인간의 현실을 영원히 죄인의 상태로 묶어 두려는 '절대타자'로서의 하느님 이해와 상관이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간의 현실과 하느님 나라의 '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학적 개방성을 함축하며, 인간의 진정한 해방을 가능케 하는 요체이다. 어떠한 것이든 절대화함으로써 더 이상 변화의 여지를 두지 않을 때 그것은 인간을 속박하는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의 우선성, 시장의 법칙은 결코 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변화될 수 있고, 타파되어야 한다. 그 대안으로 제시한 참여 민주주의 역시 우리는 그와 같이 열린 전망에서 바라보기를 원한다. 다만 우리는 현재 경험하고 상상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최선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할 따름이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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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1999년 5월 월례정기포럼에서 발제된 글이다.

1)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230쪽.

2) 안병무는 이 주장에 앞서 서구신학에서의 하나님 나라 이해를 둘러싼 논의의 난맥상을 간략히 지적하면서, 사실상 "서구신학에서의 하느님 나라론은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주장하였다. 앞의 책, 230쪽.

3) 앞의 책, 230쪽.

4) 안병무, 앞의 책, 229쪽.

5) 나는 하느님 나라의 '추상화', '개인화', '내면화'라고 표현한 과정을 전적으로 부당하다거나 그 자체로 '왜곡'이라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궁극적 목표로서의 하느님 나라는 어떤 면에서 추상화의 과정을 통해 이해할 수밖에 없는 측면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고, 또한 개인 내면의 동기와 결합하지 않고서는 또 하나의 전체주의적 규율 곧 예수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율법체제와 동일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왜곡의 과정이 되는 것은 현실 삶의 관계 변화를 회피하는 구실로서의 추상화, 개인화, 내면화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라는 것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6) 안병무, 앞의 책, 232쪽.

7)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행동으로 곧바로 자신들의 내면의 동기와 하느님 나라가 합치한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8) 안병무, 앞의 책, 238쪽.

9) 물론 이 과제는 '하느님의 나라'는 '민중의 나라'라는 명제 자체에서부터 곧바로 제기되지만, 주체를 명시화하는 데서 더욱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에 이 대목에서 검토한다.

10) 김진호, [역사의 예수 연구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및 민중신학의 '사건론적' 전망], 김진호 편, <예수 르네상스―역사의 예수 연구의 새로운 지평>(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6) 특히 261-3쪽; 최형묵, [1990년대 민중신학 논의의 몇 가지 쟁점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편, <시대와 민중신학 5>(서울: 다산글방, 1998) 특히 354-356쪽 참조.

11)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서울: 한길사, 1983) 192-193쪽.

12) 이 '이중성'이라는 말은 다소 혼란의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앞서 인용한 문맥에서처럼 '하느님 나라'의 수용 여부를 지시하는 의미로서 사용될 수도 있는가 하면, 바로 지금의 문맥에서처럼 궁극적 성격과 역사 차안적 성격을 동시에 표현하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안병무는 하느님 나라의 역사 차안적 성격을 다른 개념을 통하여 설명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라는 하나의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성격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특히 안병무에게서 두드러진 '사건론'적 전망에서 적절하게 규명되고 있지만, 하느님 나라라는 표상이 갖는 긍극적 성격은 안병무에게서는 충분히 해명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13) 그러나 서남동이 이와 같은 두 가지 상징의 의의와 역할을 구분해서 보는 것을 고착화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지, 오늘의 상황에서 '하느님 나라'가 역사 차안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해석하는 길이 봉쇄되었다는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병무가 성서에서의 하느님 나라 개념을 곧바로 오늘의 역사변혁을 위한 준거로 제시하고 있고, 또 실제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실변혁 운동을 하느님 나라 운동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잃어버린 하느님 나라 운동의 역사변혁적 성격을 회복하고 있다.

14) 서남동, 앞의 책, 196쪽. 민중신학에서 이 '체제' 혹은 '이데올로기'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최형묵, [민중신학에서의 이데올로기 문제: 민중신학이 제시하는 사회적 이상―서남동과 안병무를 중심으로], 안병무박사고희기념논문집 출판위원회 편, <예수 민중 민족>(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677-710쪽을 참조하라.

15) 우리는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신학적 근거로 '성육신론'을 들 수 있다. 성육신은 "'절대 타자'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하느님 자신의 몸부림"이라는 의미로, 우리는 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16) 이미 역사적으로 존재한 특정 '체제'를 나타내는 의미로 한정된다면, 이는 분명히 부적절할 것이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대안은 역사적으로 존재한 체제와 무관하지는 않지만, 이미 주어진 모형이라는 의미에서의 고착된 체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17) Immanuel Wallertein, Utoptics or Historical Choices of The Twenty-First Century, 1998, 백영경 옮김, <유토피틱스 또는 21세기의 역사적 선택들>, (서울: 창작과비평사, 1999).

18) 본래 토마스 모어가 고안해낸 개념으로서 '유토피아'(Utopia)는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곳'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이승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천상의 꿈'이라는 것을 월러스틴은 지적하면서 그 대체 용어로서 '유토피스틱스'라는 말을 고안해냈다. 월러스틴은 "유토피스틱스는 역사적 대안들에 대한 진지한 평가이며, 가능한 대안적 역사체제의 실질적 합리성에 대한 우리의 판단행위이다"라고 줄여 말한다. I. Wallerstein, 앞의 책, 11-12쪽.

19) 월러스틴은 유토피스틱스는, "과학과 정치학, 도덕의 동시적인 실행"이라고 분명하게 말함으로써, 그의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적어도 우리가 관심하는 한, 그의 문제설정이 우리의 문제설정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0)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월러스틴, 앞의 책, 14-15쪽 참조.

21) I. Wallerstein, 앞의 책, 16쪽.

22) 이 대목에서도 나는 월러스틴의 통찰력에 거의 의존하고 있다. I. Wallerstein, 앞의 책, 15-16쪽 참조.

23) '공'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이와 같은 전망의 의의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한 나의 글, [민중신학에서의 이데올로기 문제: 민중신학이 제시하는 사회적 이상―서남동과 안병무를 중심으로], 앞의 책, 특히 705-708쪽에서 다룬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 더 상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 개념이 함축한 생태학적 공동체의 전망에 관해서는, 본래 안병무에게서나 나의 그 글에서도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았으나, 강원돈에 의해 분명히 지적되었다는 점을 밝혀 둔다(강원돈, [사회주의와 민중신학], 같은 책, 672-673쪽). 이러한 평가는 공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자 동시에 그것이 대안 모색의 한 준거로서 현실적 의의(혹은 '실질적 합리성')를 지니도록 하는 진전이라 생각한다.

24) 우리가 생태학적 전망을 논할 때,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자연을 수탈의 대상으로만 삼아 온 인간 중심적 가치관의 폐해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절박하게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 생태학적 전망 안에서 인간의 지위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인식을 극복하면서도, 의식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의 역할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미 테야르 드 샤르뎅은 인간의 탄생으로 자연계가 "자기를 의식한" 유기체로 생성된 것으로 보았다(Pierre Teilhard de Chardin, Le Phenomene Humain, 양명수 옮김, <인간현상> 서울: 한길사, 1997 참조). 이와 유사하게 '온 생명' 개념을 제창한 장회익은 "온 생명의 의식 주체"로서 인간을 재평가한다(장회익, <삶과 온 생명―새 과학 문화의 모색> 서울: 솔출판사, 1998 참조). 이러한 견해들은 생태학적 전망 자체가 인간의 적극적 역할을 폐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며, 오히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공영을 위한 인간의 책임을 더욱 부각시킨다.

25) I. Wallerstein, 앞의 책, 98쪽.

26) 정치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함의, 그리고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와의 상호관계에 관해서는, 손호철, [한국의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창작과 비평> 103 (1999.봄) 332-351쪽을 참조하라.

27) 손호철, 앞의 글, 337쪽.

28) 이에 대해서는 임영일, '신자유주의에서 신중도노선으로?', <한겨레신문> 1999년 4월 27일자 10면을 참조하라. 이 짤막한 논단에 이 문제가 함축적으로 제기되어 있다.

29) 손호철 역시 신자유주의가 작은 국가와 국가의 축소를 지향한다는 통념은 신화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손호철, 앞의 글, 338쪽.

30) Hans-Peter Martin & Harald Schumann, Die Globalisierungsfalle, 강수돌 옮김, <세계화의 덫―민주주의와 삶의 질에 대한 공격> (서울: 영림카디널, 1997), 38쪽. 우리 사회에서의 이와 같은 양극화 현상을 진단하고 있는, <한겨레신문>의 창간11돌 특집기사 '당신은 20입니까 80입니까>(1999년 5월 15일, 17-19쪽)를 참조하라.

31) 흔히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알려진 이 기사는 사천 명을 먹인 기사로 마태오 15: 32-39 // 마가 8: 1-10에서 반복된다. 본질상 동일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는 이 두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가 나눔을 실현한 데 있다는 점에서 "나눔의 기적"으로 포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32) 오늘의 상황에서 이와 같은 처방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간주되고 있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립된 기업을 특정 거대자본에 넘겨주어 소비자들로 하여금 과거 공공서비스로 제공되던 것들을 모두 시장에서 구매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은 그와 같은 오늘의 추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김동춘,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와 참여민주주의], 참여사회연구소 편, <참여민주주의와 한국 사회>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7), 82쪽을 참조하라.

33) 월러스틴은 이를 '자본축적의 우선성의 극복'이라는 명제로 집약하고 있다. Wallerstein, 앞의 책 105쪽이하.

34) 더글라스 믹스는, 이러한 근대 자유주의적 시장의 논리는 하느님을 배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자신의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옹호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그 나름의 하느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M. Douglas Meeks, God The Economist: The Doctrine of God and Political Economy, 홍근수.이승무 옮김, <하느님의 정치경제학―신론과 정치경제학> (서울: 도서출판 한울, 1998), 특히 '제3장 하느님과 시장 논리' 부분을 참조하라.

35) 이러한 생각은, 생명의 정의를 새롭게 시도하며 '개체 생명'과 '온 생명'의 관계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장회익의 통찰에 힘입은 바 크다. 장회익은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동위 개체간의 경쟁은 동위 개체들 가운데 보다 우수한 개체를 선택하는 기능을 지니며, 반대로 동위 개체간의 협동은 보다 우수한 상위 개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진화된 하나의 단위 개체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하나의 독립 개체로 기능한다고 느끼는 상황에서는 경쟁 본능이 크게 발현되며, 자신이 상위 개체 내의 한 구성 요소로 기능한다고 느끼는 상황에서는 협동 본능이 발휘되지 않을 수 없다. 즉 한 개체가 주위 개체와 협동을 해야 할 것인가 혹은 경쟁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주어진 상황을 좀더 큰 자신의 대내적 상황으로 의식하는가 혹은 자신의 밖에 놓인 대외적 상황으로 의식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 따라 그는, "인간이 희구하는 자기 실현의 가능성을 넓게 열어놓고 이의 성취를 위한 경쟁적 활동을 최대한 허용하면서도 적어도 물질적 여건에 관한 한 전면적인 협동의 원리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 체제를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장회익, 앞의 책, 특히 263-264쪽.

36) 대개 '참여 민주주주의'란 발전된 서구 국가들에서 '대의 민주제'에 대한 대안 개념으로 제기되었다. 그래서 이 개념은 곧잘 정치제도의 측면을 강조해 이해되는 경향이 있지만, 최근에는 경제 민주주주의를 전제하는 혹은,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생태학적 전망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설정하는 것은 그 개념의 외연을 지나치게 넓히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자유 민주주의와 결합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할 때 환경의 문제, 생태계의 문제는 필수적으로 제기되는 사안인 만큼 단순한 외연의 확장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37) 여기에서 1980년대 이래 제기되어 온 '민중 민주주의'와 '참여 민주주의'의 관계가 해명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민중신학적 전망 안에서 우리 사회의 대안을 '민중 민주주의로' 설정한바 있는데(최형묵, [민중신학에서의이데올로기 문제: 민중신학이 제시하는 사회적 이상―서남동과 안병무를 중심으로] 앞의 책, 특히 699-708쪽; [민중신학적 정치경제 윤리의 모색(1)], <신학사상> 83(1993.겨울) 특히 178-181쪽), 이 양자는 단절적이기보다는 연속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참여' 민주주의가 그 과정을 중시하는 개념이라면 '민중' 민주주의는 그 주체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서로 보완하는 개념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양자를 이처럼 연속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적어도 우리가 논하는 참여 민주주의가 결국은 민중의 주권을 실현해가는 과정이라는 시각을 전제한다.

38) 김대환, [참여의 철학과 참여민주주의], 참여사회연구소 편, 앞의 책, 29쪽.

39) 경제 민주주의를 참여 민주주의의 핵심적 요소로 인식하고 있는 견해에 대해서는, 강원돈, [시장경제의 민주주의적 규율과 복지의 증진―IMF 경제관리 시대에 부치는 사회윤리적 단상],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편, <시대와 민중신학 5> (서울: 다산글방, 1998), 특히 19-28쪽을 참조하라. 또한 김대환, 앞의 글, 특히 37-40쪽을 참조하라.

40) 서남동, 앞의 책, 196쪽.

41) 나는 이 글을 이전의 두 편의 글, 곧 [민중신학에서의 이데올로기 문제: 민중신학이 제시하는 사회적이상―서남동과 안병무를 중심으로], 안병무박사고희기념논문집 편찬위원회 편, <예수 민중 민족>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민중신학적 정치경제 윤리의 모색(1)], <신학사상> 83(1993.겨울)을 통해 피력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다뤘다. 그러므로 이 글은 앞의 두 글의 속편에 해당하는 셈이다. 시간의 간격이 있는 만큼 인식상의 단절 또한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의에 있어서는 그 글들을 쓰면서 지녔던 문제의식을 오늘의 상황에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발전시켜 보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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