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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10/15 (00:39) from 217.95.19.203' of 217.95.19.203' Article Number : 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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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아제에 표하는 경의




장 피아제에 표하는 경의 (1896-1980)



Ernst von Glasersfeld

Scientific Reasoning Research Institute
Hasbrouck Laboratory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 MA 01003 USA



번역: 살클리



쟝 피아제는1896년 8월 뇌샤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작년, 서구 세계 수많은 곳에서 축하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관심을 끈 근본 까닭은, 피아제가 바로 인간 마음의 신비들을 해명하려는 심리학 분과의 창립자였다는 의심할 바 없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인간 마음은 어떻게 성장하며, 그 마음은 어떻게 알기에 이르는가?  

심리학자들한테, 그 새로운 분과는 발달 심리학과 인지 심리학이라는 두 가지 표제에 편입되었습니다.

아카데미와 의료직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한테, 어떤 뜻으로든, 이것들은 거의 구별되고 있지 않습니다. 발달은, 물론, 성장 그리고 유년기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피아제는 '아동 심리학자'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인지에 관한 한, 피아제가 공표하기 전까지는, 그 인지발달 연구가 심리학자들이 앞서 추구했던 것들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에 대한 분명한 상은,  아카데미의 박식한 서클들 안에서조차, 단지 몇 사람만 갖고 있었을 뿐입니다.

발달은 성장 그리고 유년기와 관계가 있기에, 피아제가 1940년쯤 미국에 처음 알려졌을 때, 그는 아동 심리학자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는, 20년 후, 지능 발달에 4단계를 설정한 이론의 저자로서 다시 한번 알려졌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1980년대, 구성론의 창시자로서 다시 알려졌습니다. 그 이후로, 구성론은 유행하는, 특히 교육 영역에서, 인기 있는 이론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필자들이 자신들을 구성론자로 불렀지만, 피아제 이론이 갖고 있는 혁명적 측면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어지는 바들에서 나는 나의 해석을 제시할 것입니다.



인지 발달에 대한 이론 모델

용어 '심리학'은, 분명히, 내 낡은 그리스 사전에 영어로 "사람의 넋(魂), 또는 정신(精神)", 그리고 "마음, 이성, 이해하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psyche에서 온 것입니다.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수많은 사상가들은 이러한 것들을 깊이 그리고 철저하게 숙고했습니다. 넋(魂)에 대한 연구는 짧게 잡아도 성 아우구스티누스까지, 정신에 대한 연구는 연금술사들한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마음, 이성, 이해하기에 대한 연구는 데카르트이래로 철학이 흔들림없이 초점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피아제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바로 마지막 세 주제며, 그 까닭은, 그것들이 우리의 지식 구상에 중심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그것들에 접근했습니다.

인지발달에 대한 구상은 심리학에서는 중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세기가 시작된 몇 십년 동안, 관찰 가능한 것들에만 전적으로 <나는 '광적(狂的)으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관심을 두었던 실험 심리학이 부흥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실험들에서, 보다 바람직스런 정화(淨化)된 실험실 환경에서, 실제로 볼 수 없고 측정될 수 없는 것들은, 더 이상 과학으로 간주될 수 없었고, 그래서 무시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이러한 발전은 1930년대 스키너 교수와 그의 '급진적 행동주의'에서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심리학은 이제 '행동 과학'으로 정의되었고, 급진적 행동주의자들한테, 마음<개념, 의미, 목적, 의도, 그리고 바로 지식들>의 전체 세계는 한 다발의 전과학적, 심리주의적 미신들로 여겨져 폐기되었습니다.       

피아제의 접근은,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잘 확립된 관념들과 맞섰습니다. 대다수 철학자들은 지식을 정적인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들한테, 지식이란 그곳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개체들은 지식을 생성할 수 있으며 그 산출에 수반된 과정들은 명확히 기술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통적 패턴에 들어맞는 착상이 아니었습니다. 무언가가 생겨나는, 그리고 그것이 있게 또는 존재하게 되는 방식은 정당화될 수 없는 또는 유효한 설명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철학자들은 '발생적 오류'라는 금지조항을 공식화 시켰습니다.

그렇지만, 피아제는 처음부터 발달에 관심을 가졌고, 생물 유기체에 대한 몇몇 연구들을 거쳐, 관심을 지식 발달 쪽으로 바꿨습니다. 10대에 이미 그는 생물학적 적응 과정들에 대한 연구로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했습니다. 그는 연체동물들을 호수에서 흐르는 물로, 그리고 그 역으로 이식시켜가면서 그 연구를 진행했으며, 그는 연체동물들이 그들 환경의 동역학에 적응한 결과로 발달시키는 상이한 모양의 껍질들을 관찰했습니다.     

회고컨데, 그가 과학자로 족히 60년 이상을 일하고 나서, 그의 가장 중요한 영어 저작선집 서문에서 쓰기를:

나의 중심 목표는, 언제나, 생물학적 적응 메커니즘들에 대한 탐구, 그리고 적응의 더 높은 형식을 과학적 사고로 명백히 드러내는 그 형식에 대한 분석과 인식론적 해석에 대한 탐구였다. (피아제, 1977a, p.XI)

이로써 혁명적 태도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과학은 이제는 더 이상 실재하는 세계에 대한 '참된' 이해로 가는 길이 아니라, 적응을 위한 도구로 보일 뿐입니다.

피아제가 추구했던 방식은 전적으로 생물학적 생각하기 방식이었음에도, 그는 그 방식으로 현대 물리학자들의 생각하기 방식과 완벽히 양립할 수 있는 알기 이론에 이르렀습니다. 생물학자들과 물리학자들 양쪽 모두 인정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지식'이라 간주하는 개념 구조들은 능동적 알기 주체들, 말인즉, 경험한 제한, 제약들에 들어맞는 자신들의 생각하기를 빚어내는 그 주체들의 산물들입니다.

아인슈타인은, 1938년, 인상적 은유를 써서 이를 설명했습니다:

물리학 개념들은 인간 마음의 자유로운 창조물들이며, 외부 세계로 인해 결정되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것들이 아니다. 실재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그 때, 우리는 완전히 밀폐된 시계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는 사람과 다소 비슷하다. 그는 문자판과 움직이는 침들을 보며, 그 톡탁거리는 소리까지 듣지만, 그가 그 상자를 열어볼 방도는 없다. 독창적인 사람이라면, 그가 관찰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해낼 수 있는 메커니즘의 상(像) 하나를 형성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상이 그의 관찰들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는 결코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의 상을 실재하는 메커니즘과 결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러한 가능성 또는 그러한 비교가 뜻하는 바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 & 인펠트, 1967, p.31)    



실재를 대신하는 경험 세계

과학자들은 관찰을 행할 때, 자신들의 관찰 결과들을 그들이 이전 경험에 바탕해 형성했던 개념들에 들어맞춤으로써 그 관찰 결과들을 범주화시킵니다. 이들 개념들은 부여된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각자가 보는 또는 납득하는 방식에서 상상력을 동원해 추상된 결과들입니다. 이러한 보는 또는 납득하는 방식들은 개별 과학자들의 방식들입니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설명을 할 때, 사물들을 다른 것과 관계시키는 방식으로 행합니다 - 재차 강조하는 바로, 그들이 쓰는 관계들은 부여된 것들이 아니라, 그들이 보았던 또는 납득했던 것들을 결합시킬 목적으로 이행했던 심적 조작들에서 그들 자신이 추상한 결과들입니다.    .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은유적 설명 후반부에서, 과학자는 그 또는 그녀가 발명한 메커니즘을 독립된 실재와 비교할 수 있는 방식은 결단코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오늘날 평균 수준의 과학자보다는 훨씬 앞서 있습니다. 여하튼, 위대한 물리학자들은 자신들의 모델들이 인간 경험에서 추상된 것들임을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방식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들 추상들이 정말이지 얼마나 개인적인 것들인가 하는 점은, 위대한 물리학자들이 각기 서로의 혁명적 관념들에 대해 가끔씩 언급했던 주석들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파동 메커니즘에 관한 슈뢰딩거의 최초 논문을 읽었을 때, 그는 보른한테 쓴 편지에서 그것을 믿을 수 없다고 했으며, 하이젠베르크는 그 논문을 "역겨운"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Holton, 1988, p.169).

따라서, 피아제와 일류 물리학자들 모두 인정하고 있었던 것은, 관찰자들은 자신들의 발명물인 개념들에 입각해서 자신들의 관찰하기와 설명하기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심리학에서 이러한 관념을 방법론으로 채택하여, 우리 관념들은 개체의 창조물들이라는(그리고 그 관념들이 그밖에 사람들의 관념들과 호상간 양립가능성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거쳐야 한다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나아간 사람은 피아제가 최초였습니다.

마음의 없어선 안될 기능들로는 이해하기와 발명하기, 달리 말해, 실재에 구조를 부여함으로써 구조들 쌓아올리기가 있다. (피아제, 1971, p.27)

그의 책들 가운데 'To understand is to invent<이해하는 것은 발명하는 것이다>' (1973)라는 제목으로 표현된 책은,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고 격렬히 비판받았습니다. 대다수 비판가들은 아인슈타인이 정확히 그와 똑같은 말을 했음을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물리학자들이 과학적 관찰에서 차지하는 관찰자의 결정적 역할을 알아차리고 있는 사이 피아제가 La naissance de l'intelligence chez l'enfant (1936)와 La construction du reel chez l'enfant (1937)를 출판했음에 주목하는 것은, 중요한 역사적 관심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의 인지 역사의 토대를 이루는 것들을 담고 있는 그 두 권의 책들에서 제공하고 있는 것은, 과학자든 평범한 사람이든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세계에 대한 상대적으로 일관된 그림 또는 상(像)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모델입니다.

그의 지식 이론의 핵심은 피아제가 Jean-Claude Bringuier와 나눈 대화 속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모든 구조들은 구성되며 그 토대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구성의 추이에 다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몇몇 극한의 점들, 그밖에 다른 모든 것들의 바탕이 되는 그 점들을 제외하고, 출발시 주어지는 것은 없다. 구조들은 인간 마음에서든 외부 세계에서든, 우리가 그 세계를 지각 또는 조직하는 바와 같이, 미리 주어져 있지 않다. (피아제, 1977b, p.63).   



적응 개념

피아제가 이러한 결론에 이른 것은, 물리학자나 심리학자로서가 아니라 생물학자로서 였습니다. 그는 진화론에 쓰는 적응 개념을 인지 이론으로 끌여들였습니다.

이러한 인식론적 전환을 힘닿는 데까지 파악(把握)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적응'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적응이란 생명 유기체들이 환경이 자신들을 압박해 들어올 때 이행하는 활동이라는 만연한 관념이 있습니다. 연체동물의 경우를 사례로 들 수 있습니다. 자라는 연체동물은 자기 주변의 물이 빨리 흐르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고 그렇기에 저항을 덜 받도록 자신이 짓고 있는 껍질을 반반하게 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진화의 관점에서, 그와 같은 관념은 라마르크의 이설(異說)보다도 더 형편없는 것입니다.

피아제가 의도했던 것은, 연체동물의 껍질짓기가 하나의 기능으로서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기능의 산출물은 그 주변환경의 특정 제약들에 의존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연체동물은 자신을 둘러싸 압박하는 제약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껍질을 짓는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유기체는 들어맞아야, 말인즉, 그 주변환경의 제약들 사이에서 살클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들어맞았다는 것은 적응된 바를 뜻합니다 - 여기서, '적응된' 상태란, 피아제가 명확히 말한 바와 같이, 살아남는 능력에 다름아닙니다. (피아제,1976,p.18)

이러한 조망은, 말한 것과 함께, 중요한 통찰력 하나를 가져다줍니다. 생명체가 환경의 제약들을 여하튼 피해갈 수 있다면, 피하는 방식은 단 하나만이 아니라,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수많은 방식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적응된 상태가 그 환경의 구조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진술의 이유입니다 - 적응된 상태란 그저 그 환경의 구조와 치명적 충돌을 일으키지 않은 하나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지 문제들에 대한 피아제의 접근을 특징짓는 원리입니다. 그는 전적으로 생물학적 생각하기 방식에 따랐음에도, 그 방식은 그를 현대 물리학의 생각하기 방식과 완벽히 양립할 수 있는 알기 이론으로 이끌었습니다. 두 방식 모두 우리가 '지식'이라고 간주하는 개념 구조들이란 능동적 알기 주체들, 말인즉, 경험한 제한, 제약들에 들어맞는 자신들의 생각하기를 빚어내는 그 주체들의 산물들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실험들이 실재에 접근할 특권을 제공할 수 없음에, 그 실험들이란 그저 경험들을 빈틈없이 계획 기도하며 제어할 뿐임에 주목하십시오.)

피아제의 인지 이론에서는 두 가지 적응 수준들이 있습니다. 생존이라는 실제 수준에서, 인지란 환경이 유기체의 진로에 배치한 장애들과 요동들을 피하거나 모면하는 행위 Scheme들을 고안하는 일입니다. 이론과 설명들이라는 개념 수준에서, 인지란 내적 모순들을 피하는 일관된 균형을 획득하는 일입니다.



철학적 전통과 절연

지식에 대한, 특히 과학적 지식에 대한, 이러한 관점에 맞서는 엄청난 저항이 있었습니다. 철학적 전통은 인간 지식을 실재하는 세계의 거의 '진짜'(또는 참된) 재현으로 여기는 관념을 2500년 이상 넘게 지속시켜 왔다. 이러한 견해는 단연 지배적인 것이었기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망을 바꾸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피아제가 우리 지식은 그 자체로 있을 수 있는 바로서 세계에 대한 상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는 점을 자주 반복했음에도, 그의 이론은 그의 강조와는 무관하게 실재에 대한 하나의 기술로서 취급되고 있습니다. 이는 어마어마한 왜곡이며, 해결될 수 없는 모순 또는 충돌들을 야기시켰습니다.

피아제의 모델에서, 지식은 우리가 경험하는 바로서 세계에서 우리가 살며 전진할 수 있도록 하는 한 무더기의 행위 scheme들과 생각하기 모델들로 보여야 합니다.   

지식을 산출하는 과학과 인지과정들에 대한 두 가지 견해는 양립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한편에는, 실재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한테 과학의 정수(精髓)는 '객관적' 데이터 수집하기에 있으며, 그 데이터들은 스스로 변호하며, 즉 자명한 것들로, 자동적으로 참된 설명들을 제공하고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피아제의 구성론이 있습니다; 이들한테 모든 과학은 생각하기 마음의 개념화 과정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조망에서, 지식은 독립된 실재를 재현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는 있는 바로서 그 세계에 들어맞고 있는 한 무더기의 발명품들입니다.

이러한 이분법은, 물론, 우리 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B.C. 5, 6 세기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까지 거슬로 올라갑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사고와 존재는 하나이자 똑같은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 그리고 나서 그는 생각하기 주체 없이 세계가 그 자체로 실존할 수 있는 방식을 설명할 수 있는 형이상학을 고안하는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서양 철학 전체는 그의 지도를 따랐습니다.  

플라톤에서 화이트헤드 그리고 당대의 대다수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토대 문제는 이중으로 접혀 있었습니다: 한편에서, 과제는 실재하는 세계에 대한 합리적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에서, 과제는 우리가 그러한 지식에 이를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회의론자들이, 전혀 반박할 수 없도록, 감관들이란 오류를 저지르기 쉬운 것임을 입증했음에도, 철학적 전통은 그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관찰에 기대는 맹신은 계속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은 여러분이 그것을 보기 이전에 이미 거기 있었어야 하는 것이기에, 말인즉, 실존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기에, 보는 것은 변함없이 믿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방식을 써서,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으로 도피했습니다. 탁월한 사례가 데카르트인데, 그는, 그의 모든 의심하기의 막바지에, 하나님은 우리한테 신뢰할 수 없는 감관들을 장착시킬 정도로 짓꿎은 분일 수 없다고 그만 단언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물리학자들조차도 형이상학으로 개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간략한 신앙 기도를 올림으로써 그리했습니다: "하나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으신다". 이는 유일신은 합리적이며 그의 이성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믿음을 재밌게 진술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당연시 할 수 있는 것은 유일신이 인간 마음이 실제 자연법칙이라 판명될 수 있는 법칙을 발명할 수 있도록 자신의 창조물을 그리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몇몇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형이상학으로 전향을 더 정교하게 가다듬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일이 <특히, 그것을 솔직하게 하나의 추측으로 제시할 때>, 남을 따르게 하는 짓 또는 귀염받는 짓임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일랜드 철학자 조지 버클리는 그가 합리적 사고로 파악(把握)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형식은 그의 감관들이 반복될 수 있는 징후로 확증할 수 있는 것임을 아주 명백히 진술했습니다. 인간 관찰자 없이 그 자체로 '실존'하기 위해서, 그 세계가 요구했던 것은 신성한 지각으로 그 세계를 일정하게 지속시킬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버클리의 논리는 일반적으로 잘못 이해되었고, 그렇게 그의 형이상학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상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실재와 비슷하다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그는 그저 하나님의 세계를 인간 마음이 그 자신을 구성하도록 허용된 독립된 기판(基板)으로 설정했을 뿐입니다.

합리적 생각하기와 (신비적 직관들의 영역으로서) 형이상학을 고의로 분리하는 것은 버클리 당대 사람들한테도 그의 만년의 독자들한테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많은 문헌들에서, 그는 '버클리 주교'로 <그가 종교에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철학과는 무관한 인물인 것처럼> 생색내주기 식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형이상학에서 이탈

버클리의 첫번째 주요 저작 발간과, Giambattista 비코가 이와 비슷한 결론들에 도달했던 인식론에 대한 테제를 출판했던 것이 1710년 한 해에 일어난 것은 기묘한 일입니다. 합리적 지식은, 비코가 했던 말로, 실재하는 세계에 실존하는 무엇과는 관련이 없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우리가 만드는 방식에 대한 지식입니다. 실재가 무엇과 같은 지는 오직 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이 그것을 창조했었을 것이기에.

비코가 사회학과 역사 철학의 창시자로서 재발견되었지만, 그의 지식 이론은 줄기차게 무시되어져 왔습니다. 그럼에도, 구성론적 방향의 최초 명시적 표현으로서, 그 이론은 피아제의 발생론적 인식론의 논의와 직접적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한, 피아제는 비코를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관념들과 나폴리 철학자의 관념들 사이에는 눈에 띠도록 맞아떨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근본에서 공유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지식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구성의 결과라는 관념에 있습니다. 차이는, 두 사상가들이 지식과 실재하는 세계 사이 관계를 보는 방식에 있습니다. 비코한테, 직관적 대응은 실재하는 세계와 인간 마음은 모두 유일신의 창조물이라는 사실로 보증되는 것이었습니다. 피아제한테는, 그 어떤 상 혹은 기호 사이 대응도 없지만, 지식은 진화를 성취하는 하나의 적응이기에 기능할 수 있으면 실재하는 세계에 맞아들어가는 것입니다.   

피아제는 이러한 점을 수없이 반복했지만, 그것은 여전히 그의 이론 가운데 가장 완벽히 잘못 이해된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독자들과 해석자들은, '적응'에는 유기체가 적응했던 구조들의 복제가 수반되지 않는다는 간단한 사실을 영원히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적응은, 사실, 부정적 개념입니다. 적응은 정말 실존하는 무엇에 대한 여하한 지식도 필요치 않습니다 - 그것이 그저 함의하고 있는 것은, 기능하는 바에서 성공한 것이면 어떤 것이든 살아갈 것이며 그 자신을 증식할 것이라는 점 뿐입니다. 유기체가 '적응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은 단지 그 유기체가 살고 있는 세계와 맞서는 방식을 그 유기체가 발견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 그 사실이, 개별 생명체가 지각하고 구상하는 세계가 그 세계가 있기 전 무엇과 같은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초점은, 이제, 유기체가 외적 요동들과 내적 모순(충돌)들을 피하는 데 쓸 수 있는 적응의 도구로서 지식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지식은 그렇게 평형을 추구하는 도구로 바뀌며, 그것의 목적은 이제는 더 이상 '실재하는' 세계의 재현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피아제의 '발생론적 인식론'과 최근 유행했던 '진화론적 인식론'의 주요한 차이입니다. 두 학파 모두 Kant의 관념, 우리의 공간과 시간 개념들은 인간 마음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타고난 것이라는 관념을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피아제한테, 그 개념들은 매우 어릴 적, 즉 유아기 인지 발달 최초 2년 동안 그가 '순환 반작용'이라 불렀던 과정에서 쌓아올리기 시작하는 구성물들입니다. 공간, 시간 개념들은 대상영속, 인과성 개념들과 결합되어 생겨나는데, 피아제는 적어도 이들 개념들이 쌓여올려질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근접 모델 하나를 제공했습니다 (피아제, 1937).

콘라트 로렌츠와 Gerhard Vollmer 같은 진화론적 인식론자들한테, "주어진 환경 여건들에 적응한다는 것은 그 주어진 여건들에 관한 정보를 획득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Lorenz, 1979, p.167). 그렇기에,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시공(時空) 상이 월등하게 성공적인 적응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입증되었다는 사실은 공간과 시간이 '실재'의 속성들이라는 증거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말한 적응에 대한 피아제의 견해에서 볼 때, 우리가 공간, 시간 개념들을 갖고 거두었던 성공이란 실재하는 세계에 관한 어떤 결론도 보증하는 것이 아님을, 그 성공이란 그저 그 개념들이 우리 경험을 조직화 하는 데에 극히 유용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임을 명확히 해야만 합니다.    

일찍이, 나는 우리의 수천년 철학적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 말한 바 있습니다. 비코와 피아제 모두 이러한 어려움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 비판자에 대해 응답하는 가운데, 비코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점 하나를 확립시키는 데에 그 어떤 노고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구성하는 사물들과 원인들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단지 그 자신이 쓰일 수 있다는 바로써만 입증될 수 있을 뿐이라고 그의 논문에서 주장한 바를 보건데, 그러한 지식이, 인습적 또는 통용되는 의미로, '참'이다는 증명을 요청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짓이다.  

피아제의 지식 이론을 발판으로 삼았던 오늘날 구성론자들은 그의 이론이 처했던 바와 아주 똑같은 처지에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가 그 세계에 대한 참된 상이 아니라 경험을 조직하는 방식을 제공하는 것임을 장황하게 반복한다해서 처지가 나아지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일종의 형이상학을 제출하기나 한 것처럼, 그들은 판단되고 이윽고 칭찬 또는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이 지식 개념을 바꾸려 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시되고 있으며 그들의 견해는 인습 또는 전통을 따르는 인식론적 견해에 동화되고 있습니다.     

비코가, 이러한 용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동화에 대한 최초의 사례를 정식화 했다는 것은 그다운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멀리 있으며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 그 어떤 관념도 형성할 수 없을 때, 그때마다 그것들을 자신들한테 친숙한 그리고 가까이 있는 것들로 판단한다는 점은, 인간 마음의 또 다른 속성이다. (비코, 1744/1961, p.18)

피아제의 인지 이론에서, 이것은 기본 원리 세 가지 가운데 첫째 것입니다. 마음은 우선 동화를 행합니다, 말인즉, 경험을 이미 알려진 항들로 지각하며 분류 또는 범주화 합니다.  이러한 과정의 결과로 걸리적 거리는 것이 나타나고 요동이 생기는 경우에 한하여, 조정으로 인도할 수도 있는 검토가 시작됩니다. 말하자면, 그 검토는 실존하는 구조에 변화를 또는 새로운 구조 형성을 야기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두번째 원리는 배우기(學習)를 위한 메커니즘을 제공하며, 그런 연유로 모든 부류의 가르치는 이들한테 관심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성의 힘 또는 권능

자! 그렇다면, 자주 반복되는 질문으로, 자진해서 배우고자 하는 바를 발생시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분명히,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실제 풀길 원하는 문제를 다루기에 충분치 않다는 깨달음이 으뜸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간단한 그러나 족한 금언으로 생각되지만, 내 경험에서 그것을 지켜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대다수 교실들에서 분위기를 바꿀 것입니다.

피아제의 세번째 원리는 반성수반적 추상입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완벽히 새로운 발명품입니다. 존 로크를 읽은 사람이라면, 그의 에세이 '인간 이해하기(悟性)에 관하여'에서 그가 반성<反映, 反芻>에 관해 말한 바를 억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마음 속 그 자신의 조작들을 궁리해 얻는 바로 그와같은, 그것이 내주는, 관념들 (로크, 1690, Book II, 4)

피아제는 심적 조작들을 바탕으로 하는 반성이라는 관념을 갈고다듬어서, 반성이 추상 그리고 일반화와 결합해서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모델을 제공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우리가 플라톤부터 물려받은 문제, 소위 '배우기 역설'을 성공적으로 해결한 배우기 이론을 제공했습니다. 그 문제는 새로운 지식의 생성과 관련된 것인데, 새로운 지식은 플라톤 이론에서 신이 부여한 것으로 오로지 윤회의 신비적 루트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피아제의 반성수반적 추상은 우발적 추측에, 말인즉, 샤를 퍼스가 추납(abduction)이란 이름으로 논리학의 일부로 편입시킨 일종의 상상력을 동원한 '무엇이라면(what-if)' 가정들에 있는 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추납을 조정을 구성하는 불가결한 부분으로 봅니다. Peirce는 그것을 간략한 과정으로 기술했습니다. 우리가 <유쾌한 놀람이든 불쾌한 놀람이든>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야기시켰던 것을 찾고자 합니다. 우리가 그 상황에서 그 어떤 완전히 새로운 것을 떼어내 격리시킬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지는 규칙 하나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차여차해서 그렇다면, 우린 이 놀라운 결과를 얻는다.  

이러한 추측이 추납에 다름아닌 까닭은, 그 추측은 이전 경험에서 끌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 가설적 규칙을 검사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그것이 확증되면, 우리는 실상 행위 scheme으로 쓸 수 있는 새로운 규칙 하나를 생성시켰기에, 우리는 조정으로 돌입하게 됩니다. 이러한 배우기 형식에는 역설을 만들 그 어떤 것도 없으며, 이러한 형식은 신비적 설명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이 지각한 것과 그 자신의 조작들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능동적 마음입니다. 우리가 그와같은 마음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겠습니다. 어디선지 억기할 수는 없지만 읽었던 유쾌한 일화입니다. 어린 소녀가 걸으면서 공을 가끔씩 차 앞으로 굴리고 있습니다. 언덕 길이 시작되자 그 공은, 그 소녀한테는 놀랍게도, 되돌아 굴러옵니다. 그러자 그 소녀는 "이 공은 내가 어딧는지 어떻게 알까?" 하고 묻습니다.  

그 어린 소녀의 질문은 그 소녀가 자신의 경험을 적어도 어느 정도는 알아차리고 있으며 그것을 반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성하는 마음만이, 혼란스런 경험 세계에 질서를 고대하는 마음만이, 그와같은 질문을 고안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도들과 유지될 수 없는 가정들 이후, 갈릴레이에 버금가는 지구력을 지닌 상상력이 풍부한 사상가로 하여금 '중력'과 같은 설명적 원리를 끌어내게 했던 종류의 질문입니다.

이러한 내적 자각과 반성의 힘이 우리한테 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압니다. 여러분이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경우, 여러분은 여러분이 듣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한테 말하고 있을 경우,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나는 왜 이 모든 것을 더 간단히 말할 수 없는가?" 하고 나 자신한테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반성할 수 있음을 알지만 어떻게 그리하는 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각 또는 의식이라 부를 수 있으며 그것 앞에 '자아'를 둘 수 있지만, 이를 설명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그와같은 효과를 산출할 수 있는 메커니즘에 대한 그 어떤 모델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피아제는, 그의 작업 내내, 의식의 본성에 관해서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그가 쓴 철학의 통찰력과 환상들(1971)에서, 그는 베르그송, 후설, 사르트르, 그리고 그밖에 철학자들의 의식에 대한 정의들과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음을 논했지만, 그 자신의 설명적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삼가했습니다. 레슬리 스미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의식에로 도달(凝結;着)"로 번역되어야하는 제목, La prise de conscience (1974)에서, 그는 의식이 무조건적인 현상이 아니라 몇 가지 연속적 수준들을 갖고 있다는 증거를 제공했습니다. 최종적으로,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을, 그는 Jean-Claude Bringuier와 대화에서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착할 수 있을 때 그 의식을 포함해서, 행동을 연구하지만, 그것에 도달할 수 없을 때 논할 문제란 있을 수 없다. (피아제, 1977, p.18)

현대 논리학으로부터 우리는, 이론들은, 통상, 자체로는 정당화할 수 없는 가정들을 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내 관점에서, 의식이나 조작적 알아차림은 인지에 대한 모델이라면 어떤 모델이든, 그것의 작동 과정이 설명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어야 한다할지라도, 빼먹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피아제의 반성수반적 추상 개념에 퍼부어진 수많은 비판들은, 그렇기에, 나한테는 다소 공허한 것으로 보입니다 - 적어도 누군가가 피아제가 그 개념을 쓴 것이 실수였음을 보여주는 <의식에 대한 설명>을 제출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피아제가 1930년대 그의 첫 중요 저작들을 출판한 이래,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들로 반응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한편에서, 인습(因襲)을 따르는 심리학자들은 그의 이론을 전통적 관념들에 동화시키려 했으며, 이를 위해 들어맞지 않는 것들은 무엇이든 무시해야 했습니다 - 인습적 견해에 들어맞출 수 없었던 가장 크고 무거운 덩어리는,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상은 우리가 이룩한 것이라는 구성론 원리였습니다. 오늘날 대다수 심리학 교과서들은 피아제에 관해서 몇 페이지씩을 할애하고 있지만, 발생론적 인식론의 구성론 원리를 적절히 진술한 것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피아제 이론은 단지 지식과 관련된 것일 뿐만 아니라 지식의 생성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상호작용

또 다른 한편에서, 지식의 개체 구성 원리를 인정했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가 사회적 상호작용의 역할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영어권 세계에서, 이는 어느 정도는 피아제의 1965년 책 Etudes sociologiques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수 있습니다. 번역본은 단지 최근에야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30년 이상 지체가 상당한 손상을 입혔음이 분명한 것은, 그렇게 지체되는 사이 비코츠키의 저작만이 해당 문제에 답할 수 있는 유일한 출전으로서 광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회학 연구들"에서, 피아제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과정들을, 지식 구성의 개체적 측면보다 사회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던 다른 어떤 저자들보다도 훨씬 더 상세히,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시각 또는 조망에 대한 열정적인 그들의 모든 권고들에서, 그들은 비코츠키가 아래와 같이 썼을 때 했던 것 이상으로는 사회적 영향의 메커니즘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 배우기는, 아이들이 그들 주변의 아이들과 지적 생활을 하게끔 자라도록 하는 특별한 사회적 본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비코츠키, 1978, p.88)

내 구성론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언어의 근본 구조는 타고난 것이라는 촘스키의 선언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 선언은 언어가 언어 공동체에서 태어난 이들에 의해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가 하는 탐구를 완전히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피아제는, 이와 대조적으로, 습득하려면 사회적 상호작용이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지식 유형들의, 그렇지 않은 지식 유형들과는 반대되는, 목록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견해로, 직접 경험의 조직화, 간단한 행위 scheme들로 자신을 현시하는 감각발동 지능, 그리고 어떤 것을 또 다른 것에 대한 상징적 대체물로 간주하는 기본 능력은, 아이가 - 여타 사람들이 함께 쓰는 사회적 관행들은 말할 것도 없고 - 그 사람들에 대한 어떤 구상을 지니기 전에, 그 아이가 갖게 되는 인지 기능들입니다. 다른 한편, 의식적 반성은 피아제한테는 - 인지 생물학의 또 한 명의 창시자, 움베르토 마투라나한테 아주 똑같이 그런 것처럼 - 타자들과 상호작용 또는 협동작업 하는 상황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즉각 일어나지 않지만, 피아제가 말했던 것처럼:

[아이는] 외부의 물리적 환경에 그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회화된다. (피아제, 1965, 264)

그것은 '중심에서 벗어나기', 즉 <다른 관점을 알아차리게 되기>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며, 그러한 탈중심화는 사려 깊은 다른 에이전트, 행위자들과 성공적으로 상호작용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이 모든 것들로 피아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기능들이 산출할 수 있는 개념적 결과들이 아니라 기능들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피아제가 사회적 상호작용의 역할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바는 분명합니다. 사실 그는, 이를테면 협동 그리고 강제와 같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몇 가지 작동 패턴들을 상술했으며, 권위와 권력의 역할을 충분히 알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가 또한 분명히 보았던 것은, 인간 개체가 스스로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이 엄청나게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현저히 다른 영역에서 예를 각각 하나씩 들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몇몇 분들은 이러한 이채로운 현상을 목격했을 수도 있습니다: 몇몇 유아들은 <요강에 앉아 있다 재빨리 방 가로지르기>라는 아주 극적인 방법을 고안해냅니다. 그들은 분명 자극받은 적도 어른이 그걸 하는 것을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 말하길, 기막히게 멋진 고립 상태에서 구성된,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성취물입니다.

내가 믿기로, 비슷한 그렇지만 문화적으로 더 중요한 위업은 오래 전 피타고라스가 성취했습니다. 그는 아마 사모스나 메타폰툼 지방에서 테라스에 앉아 타일이 깔린 바닥의 문양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후 플라톤의 Meno에서 소크라테스가 사용했던, 정사각형들에 이등변 삼각형들을 들어맞게 박아넣은 인기 있는 문양이었습니다. 그때 돌연 피타고라스는, 정사각형들이 삼각형의 긴 변 네 개로 이루어져 있음을, 그리고 삼각형의 짧은 변 2개를 한 변으로 한 사각형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를 수천년 동안 유명하게 만들었던 정리에 대한 최초의 착상이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새로운 지식을 조성하는 놀라운 조각, 부품은 바로 독립된 개체의 마음이 구성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나라에서 '사회적 구성론자들'과 얼마간 상호작용했던 경험으로 보아, 그 학파의 열렬한 신봉자라면 이들 일화들이, 요강과 타일깔린 바닥 모두 사회적 인공물이기에, 그들의 주안점을 증명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즉시 되받아치리라는 기대를 나는 하게 됩니다. 내가 이러한 되받아치기가 과녘에서 벗어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그 요강은 위치-이동을 위해 그리고 그 타일들은 기하학을 위해 고안된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보기 방식

모든 지적 진보들에서 그런 것처럼 그와같은 자발적 구성에서도, 새로운 관념은 새로운 보기 방식에서 생겨납니다. 참신함은 물리적 소재 또는 사회적 상황(맥락)에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체가 지각적 그리고 개념적 소재를 새롭게 조직함으로써만 발생되는 것입니다.

나한테는 이것이 바로 조망과 의도에서 근본적 차이를 조성하는 점입니다. 인지에 관해 사회적으로 방향잡힌 연구자들은 인간 유기체를 바깥에서 주시하고 나서 그 유기체의 행위들과 그 유기체가 습득하는 지식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때 그들이 서 있는 관점은 사회와 언어적 소통이 포함되는 환경이 그 유기체에 앞서 실존하는 것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변함없이, 20세기 이전 과학을 지배했던 <관찰 대상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수동적 관찰자에 대한 신앙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피아제를 따르는 구성론자들은 관찰자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고안하고자 하는 것은, 경험하는 가운데 생각하기 이력을 시작하는 지적 유기체들이 어찌어찌해서 타자들에 대한, 그들 자신들에 대한, 그리고 환경에 대한 개념들을 지니게 될 수 있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살만한 관념들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비모순적인 복합체(거대 건축물)에 이를 수 있는 방식 하나를 보여줄 수 있는 모델입니다.

이러한 기획은, 완전과는 거리가 있다할지라도, 불가사의할 정도로 기운을 북돋는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자신들을, 앞서 확립된 우주의 구조들에 의해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까지 결정지어진, 무력하고 수동적인 수신자들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행위들이 우리의 것이라는, 그것들을 생성했던 이는 바로 우리라는,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고 행한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나는 이것이 지적 태도에 의미심장한 변화를 야기시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 그리고 이어, 우리가 언젠가는 세계에 대한 진정한 인간적 구상을 갖게 될 길(經路) 하나를 그가 닦았던 바에 감사하는 것으로 나의 쟝 피아제에 대한 경의를 마감합니다.





참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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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get, J. (1965). Etudes sociologiques. Geneva: Librairie Droz. (Note: my page indication refers to the

              Italian translation by Barbetta,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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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ygotsky, L.S.(1978). Mind in society: The development of higher psychological processes.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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