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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5 (12:48) from 80.139.174.83' of 80.139.174.83' Article Number :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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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현대물리학





불교와 현대물리학


                                                                    박 광 서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1. 머리말

종교가 정신과 의식 나아가서 초월적인 것을 다루고 있는 반면에, 자연과학은 물질과 그들 간의 상호작용을 감각에 의지한 실험적 검증을 통해 분석적으로 다룬다.  이 양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특히 불교와 물리학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과학시대를 사는 우리 인류의 큰 관심사 중의 하나이다.
현대과학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산업화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끼치는 영향이 구체적이고 압도적인 상황이 되면서, 물신주의(物神主義)의 팽배, 가공할 무기의 생산, 물질문명의 찌꺼기인 공해와 인간소외 등으로 인류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과학에 대한 인간의 맹신과 지나친 집착은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관련된 과거·현재·미래와 원자세계·일상생활·우주에 대한 정보까지 과학 만큼 신뢰할 만한 지식을 제공해 주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현대인에게 과학은 사물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이며 언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물질과 우주의 생성 및 그것들의 상호작용 방식, 그리고 생명과 의식의 본질 등을 철저하게 추구하던 현대과학은 기존의 전통적 세계관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던 인식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전혀 새로운 해석을 내림으로써 인간의 사고체계에도 대전환을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과학은 일부 종교에서 가지고 있던 부분적 편협과 독선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결코 종교와 과학이 언제까지나 만날 수 없는 평행선만 달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접점에서 만나게 되리라는 가능성도 보여주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과학이 없는 종교는 장님이며,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다”라고 한 말은 종교와 과학의 상호보완성을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서양문화가 이원론적·분석적·미래지향적이라면 동양문화는 전일적·직관적·현세관조적이라고 할 수 있고, 서양이 자연과 인간의 문제를 부분적·대립적 개념을 토대로 변증법적 해결을 부단히 시도해왔다면 동양은 전체적·조화적 개념을 토대로 연기론적 해소를 끊임없이 추구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방법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세에 들어 고도로 발달한 제반 과학과 동서양의 광범하고도 활발한 접촉으로 서로의 자연관 및 인간관이 상호보완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고, 그러한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서양문명의 중심축인 과학과 동양문화의 제반 핵심사상들을 연결지으려는 시도는 196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활발해졌다.  따라서 불교와 과학과의 만남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과 자연과학의 개념들은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추구하고 있는 분야 중의 하나인데, 그것은 불교가 인간이 얽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모든 현상들을 파악하는 데 과학적인 방법들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현대물리학의 확립에 크게 기여한 물리학자들이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현대과학에 결여된 부분을 메꾸어 주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교이다”라고 한 말이나, 보어(Niels Bohr, 1885-1962)가 “원자이론의 가르침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나 노자(老子)와 같은 사상가들이 일찌기 부딪쳤던 인식론적 문제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한 점, 그리고 하이젠베르그(Werner Heisenberg, 1901-1976)가 “일본이 기여한 이론물리학에의 공헌은 극동의 전통 속에 담긴 철학적 이념과 양자이론의 철학적 본질 사이에 어떤 관계를 시사한 점일 것이다”라는 언급 등.
그러나 자연과학의 어떤 구체적인 발견이 불교철학의 어떤 특정한 부분을 입증하는 것으로 성급하게 결론짓는 것은 삼가해야 하며, 또 불교가 과학적이라는 사실에 스스로 우월감을 가지거나 안주해서도 안된다.  다만 아무런 관련성이 없어 보이던 양자가 서로 만나기 시작했고 그러기에 더욱 서로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점과, 불교사상의 전체적 흐름이 과학사상의 흐름을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호보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과학은 불교철학이 시사하는 깊은 의미를 늘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고, 불교 또한 분석적 과정을 소홀히 한 직관만으로는 본질의 파악에 미흡하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서 문명사적 전환기인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불교적 세계관이 서구과학문명의 모순과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고 인류의 미래를 함께 열어갈 수 있을까에 대한 진지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본고는 우선 과학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종교 영역과의 관계를 살펴본 후, 현대물리학이 제시하고 있는 사물 인식에 대한 본질과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을 알아본 다음, 마지막으로 불교와 현대물리학의 유사한 점들을 여러 측면에서 비교ㆍ검토함으로써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한다.

2. 자연과학의 한계와 종교의 영역

인간의 자연현상에 대한 인식능력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인지할 수 있는가.  그 한계는 무엇일까.  또 그러한 물질세계에 대한 탐구와 이해로써 인간의 문제도 다 해결될 수 있는가.  그 경계선은 어디인가.
인간은 우선 눈·귀·코·혀·살갗(眼耳鼻舌身)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세상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오관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란 생각보다는 훨씬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예를 들면 눈은 넓은 파장영역의 빛(전자기파) 중에서 아주 좁은 파장 구간인 가시광선(可視光線) 영역밖에 볼 수 없다.  그 나머지 파장의 전자기파에 대해서는 눈의 구조적 특성상 아예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혹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전기적 신호로 처리되지 못하여 뇌에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 우주공간에 가득차 있는 전자기파 중 라디오파ㆍTV파ㆍ마이크로파ㆍ적외선 등과 같이 파장이 길거나, 자외선ㆍX선ㆍ감마선 같이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에 대해서는 인간의 눈은 장님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관찰대상의 크기도 무한정 작은 물체까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백분의 1 ㎜ 정도까지 볼 수 있을 뿐이다.  한편 인간의 귀가 들을 수 있는 소리도 고막이 40에서 2만 싸이클의 진동수 영역에서만 반응하므로 40 싸이클 이하의 저주파나 초음파와 같은 고주파에 대해서는 인간은 역시 귀머거리나 다름없다.
그런데 반해 사람과 다른 시각과 청각의 조직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나 곤충의 경우는 사람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파장의 전자기파나 음파를 감지할 수도 있다.  가령 박쥐나 돌고래는 초음파로 사물을 감지하거나 서로 교신을 하는데 인간은 그 대화에 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본능적 지각에 관한 한 만물 중에서 인간이 결코 뛰어나지도 않으며 동물이나 곤충만도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을 일곱 개의 작은 창문(두 눈, 두 귀, 두 콧구멍, 입)을 가진 감옥에 비유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무엇으로 인간을 다른 생물들과 구분 지을 수 있는가?  그 가장 본질적인 두 가지 요소는 아마도 논리적·합리적 사고로 물질세계를 다루는 자연과학의 추구와 행복이나 가치와 같은 정신세계를 다루는 종교적  심성을 지녔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우선 과학적 사고를 통해 인간은 도구와 기계를 고안해 내어 자연과 물질세계에 대한 인식방법과 감지범위를 놀랍도록 확대시켜 놓았다.  예를 들면 전자현미경으로 물체 속의 원자배열 사진을 찍었다고 하자.  원자는 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원자들의 모양과 크기가 어떠하며 물체 속에서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에 대해 마치 눈으로 본 듯이 믿게 되었다.  이러한 초감각 세계로의 진입은 오관의 직접 경험을 넘어서서 분석·종합하여 모형화 할 줄 아는 고도의 인간사고의 결과이다.  이렇게 해서 지난 1세기 동안 인간의 인식범위는 상상하기조차 힘들 만큼 넓어졌다.  물체의 크기만 해도 10-18 m(전자의 크기)에서 1026 m(제일 먼 별까지의 거리)까지 알고 있으며,
시간은 10-43 초(우주폭발 직후 물리법칙이 최초로 적용되는 시간)부터 1039 초(양성자의 수명)까지, 그리고 물질의 양도 10-31 ㎏(전자의 질량)부터 1053 ㎏(우주전체의 질량)까지를 다루고 있다. 흥미롭게도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며 사는 양들은 대체로 인식가능한 양극단의 중간쯤에 있다.
인간의 인식능력은 이렇게 놀라울 만큼 계발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확대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언젠가는 종교의 영역이 사라질 것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종교의 영역이 더 분명해지고 그 역할도 더 중요하게 될 뿐이다.  왜냐하면 종교의 영역은 과학의 한계가 드러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과학은 물질간의 상호작용과 그 변화에 대해서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지 궁극적으로 그것이 왜 생겨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답은 줄 수 없을 뿐더러, 특히 인간의 마음과 의지 또는 가치판단에 대해서는 과학은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꽃을 보고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고 느꼈다고 하자.  과학이란 그 꽃이 어떻게 피고 어떻게 지며 어떤 작용으로 그런 파장의 빛깔을 내는지 밝혀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과 그 파급효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또 현미경을 이용하여 아주 작은 미생물까지 볼 수도 있지만 인간이 현미경과 같은 안경을 끼고 살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손과 얼굴에 득시글거리는 세균들을 보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그런가 하면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여 인위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더 연장시키는 방법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그 삶의 모습이 추하고 모독적일 때에는 그 방법을 포기하고 자연스럽고 인격적인 죽음을 택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이와 같이 과학이 밝혀주는 자연현상과 인간이 받아들이는 행복ㆍ의지, 그리고 가치판단은 전혀 그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있어서는 자연과학의 발달과 무관하게 종교의 고유영역이 항상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공격적이고 보수적인 종교인들이 자연과학의 발달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자신들의 종교영역의 축소를 못마땅해하면서 갈등을 빚는 일은 적지 않다.  이러한 과학분야와의 투쟁은 그들의 아전인수, 그리고 편협과 독선을 드러낼 뿐 인간의 이성과 심성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그 깊이를 품위 있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방법과 사실들에 대해 겸허하고 탄력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점에서 불교는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교리체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현대물리학의 세계관

이미 논의한 바 있는 종교와 과학의 상호보완적 접근 가능성은 단순히 인간의 희망사항인가, 아니면 실제로 현대과학의 발전이 이루어낸 업적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선 현대물리학의 핵심이론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금세기 초 물리학에서는 두 가지의 기념비적인 이론들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바로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과 양자이론(量子理論)이다.  상대성이론이 수백 년간 서구의 과학을 지배해 오던 기계론의 성곽을 골격부터 뒤흔들어 놓은 것이라면, 양자론은 이제 그 성곽이 서 있는 지반 자체를 없애버린 셈이다.  이 두 이론에 의해서 이전의 소위 고전물리학으로 풀지 못하던 문제들의 대부분이 이해되기 시작하였고, 그 깊은 의미는 수십 년이 지난 이제서야 자연과학의 모든 분야는 물론 철학·종교·심리학·사회학 등의 다른 학문분야에서도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공간과 시간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게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소위 4차원의 세계로 다루어야 한다.  또 운동의 상태를 기술하는 기준계에 절대좌표계의 존재가 부정되므로 시공간(時空間)은 관측자의 운동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고 한다.  인간은 보통 시간과 공간에 대해 고정관념을 가지고 산다.  시간이란 인간의 삶이나 자연현상과는 무관하게 이 우주 속에 흘러가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 1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1 시간이며, 1 m라는 길이도 어느 누구에게나 1 m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험적 관측을 통한 인간의 인식에 관한 한 그러한 고정관념은 아무런 근거도 없고 옳지도 않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상대성이론은 원자 또는 그보다 더 작은 기본입자들의 세계에서도 성립할 뿐 아니라 우주 속의 은하계나 행성들의 운동을 논하는 데 있어서도 보편적인 법칙임이 입증되었다.  다만 일상생활이나 뉴턴 역학에서 시공의 짜부러짐을 느끼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운동체의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워낙 작아서 상대론적 효과가 거의 감지될 수 없을 만큼 미미하기 때문이다.
한편 양자이론에서는 모든 활동, 모든 움직임은 그 이하로 더 이상은 나뉘어지지 않는 최소량의 단위인 양자(量子, quantum)의 차원에서 일어난다고 본다.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의심치 않았던 자연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을  예를 들면,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 1646-1716)는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포기하는 것은 혁명적인 사고가 아니고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또한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아인슈타인에 의해 같은 본질의 다른 형태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나아가서 모든 물질은 근본적으로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고전물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점 중의 하나였다.  입자란 돌멩이와 같은 물질의 작은 덩어리이며 파동이란 물의 파도와 같이 흩어져 퍼질 수 있는 비물질적 떨림으로, 이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런데 양자역학적 실험상황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것처럼, 모든 물질의 존재모습은 그 자체로 고유하게 확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환경, 즉 그 존재를 관찰하기 위한 실험상황 또는 인식행위에 따라서 입자로서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 파동으로서의 특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관찰자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가 따로 있다는 고전물리학의 전제가 무너지는 것은 보어가 제시한 이 입자-파동의 이중성(二重性), 즉 ‘상보성 원리(相補性原理)’와 함께 하이젠베르그가 주창한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가령 위치와 운동량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정확히 알면 다른 하나는 오히려 전혀 모르게 된다.  그러므로 관찰자는 이 두 가지 속성 가운데 어느 것을 관찰할 것인가를 먼저 선택해야 하고, 따라서 관찰자 스스로가 관찰대상의 속성을 함께 지어낸다는 뜻이 된다.
뉴턴식 기계론적 인과율은 그 시대의 과학자들이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었던 바이지만,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 나름대로 자연의 질서를 훌륭히 설명해 내는 근사치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양자이론에는 개별 입자에 대한 모든 양들이 집단의 차원에서 통계적인 확률로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고  실제 자연계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많은 입자들의 계가 통계적·확률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손
가락 만한 물체도 실은 1024 개(억의 억의 억 개) 정도의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상기하면 우리들이 사는 세계가 얼마나 많은 입자들간의 관계 또는 상호작용으로 출렁거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 현상을 측정하는 관찰자의 의식이 개입되지 않고는 아무것도 정의될 수도 의미를 가질 수도 없다.  이러한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적 성격’ 역시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 없이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물리학자들은 극미 세계의 지식에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에 대단히 실망을 하
였다. 금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스스로 양자현상인 광전효과를 통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음으로써 양자역학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양자역학은 아주 주목받을 만하다. 그러나 내 예감으로는 그것은 여전히 진실이 아닌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고 씀으로써 오늘날 현대물리학을 주도해 가고 있는 양자물리학의 확률적 해석 또는 비결정론적 성격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여기서 주사위 놀이란 양자역학의 확률이론을 빗대서 한 말임).
물론 시공에 대한 절대성의 부정이나 물질과 의식, 그리고 주체와 객체 등의 통합성은 그러한 개념들이 없어도 상식적인 자연현상들이 근사적으로 설명되므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그 중요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광대한 우주의 문제나 극미한 입자들의 현상에서는 상대론과 양자론의 개념은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것이며, 나아가서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인식행위 전반에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더 이상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파장으로 분석해 내고 우주의 운행을 엄격한 힘의 관계로 낱낱이 분해해 버리는 차디찬 관찰자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제 종교와 철학이 말하던 그 신비로운 영역의 입구까지 와서 알듯말듯한 미소를 짓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

불교와 현대과학 사이의 관련성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인간과 사물의 존재방식,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 즉 고통의 뿌리에 대한 불교적 관점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불교의 핵심사상인 연기론적 세계관에 대해 대략적이나마 살펴보자.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근본원인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인과론(因果論)은 모든 과학의 기본입장 - 물론 현대물리학에서는 종래의 개별적이고 엄격한 인과율보다 집단적이고 확률적인 인과율을 말하고 있지만 - 과 궤를 같이 하고 있으며, 적어도 불교의 업보사상이나 윤회사상은 바로 이 인과론의 개체적 내지 사회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불교의 존재론이나 인식론에 의하면, 어떤 사물이나 인간도 완전히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다만 다른 사물들이나 인간들과의 상호작용이나 관계로서만이 존재하고 인식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이면 누구나 애지중지 끌고 다니는 ‘나(我)’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나’라고 할 때 나를 ‘나 자체’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상식적으로 ‘나 그 자체’는 아니라고 믿어온 것들, 또는 그런 것들과의 관계로서만이 나를 특징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름ㆍ몸ㆍ성별ㆍ생김새ㆍ신분ㆍ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즉 부자ㆍ부부ㆍ친구ㆍ선후배 등, 이 모든 것들은 나의 본질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나를 기술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내가 가지는 생각이나 사상 같은 추상적 개념들까지도 다른 개인이나 사회 내지는 자연과의 부단한 상호작용 속에서 생기고 변화해 갈 뿐이지, 결코 나 개인으로부터 독자적으로 나오고 지켜지는 것은 없다.
이와 같이 ‘나’라는 것은 처음부터 인식과정을 떠나서는 실재(實在)하지 않고 필연적으로 상호작용 또는 관계를 거쳐야만 인식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나’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써 파악될 수 없고, 이런 관점에서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를 주체가 없다고 한다(諸法無我). 이 점은 비단 인격체인 나에 대해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인식하는 유형ㆍ무형의 모든 삼라만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모든 존재의 실체가 없으므로 모든 현상 또한 한 순간도 정지해 있지 않고 쉴 새 없는 상호작용 속에 변해가고 있으며(諸行無常), 인간의 모든 고통과 문제들은 바로 이러한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의 원리를 체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생기는 탐욕ㆍ집착ㆍ무지에 연유한다고 한다(一切皆苦).
무아와 무상의 도리를 철저히 자각한 상태는 어떠한 것인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으며, 이 우주 안의 그 어느 하나도 서로 연관성이 없는 것은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가 본질에 있어서는 다른 존재들의 결합이라는 확신이 자각의 실체이며 불교의 이른바 연기론적 입장이다.  유형의 모든 사물들은 물론 무형의 모든 정신작용들도 그물코와 같이 서로 얽혀 있어서 그 중 어느 하나가 움직여도 다른 모든 것에게 영향을 주게 되고, 따라서 이 우주 안의 모든 것을 한 덩어리, 한 생명체인 유기적 공동체로서 파악하여야 한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인간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하고 심지어는 ‘한 티끌도 전 우주를 포함한다(一徵塵中含十方)’고 말한다.
이러한 연기론적 관점을 잘 표현한 것 중에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가 있다.  그 첫 귀절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로 시작되는데, 가을에 피는 국화꽃과 봄의 소쩍새 울음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 같으나 불교의 연기론적 입장에서는 서로 충분한 연관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그 자체로서 존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ㆍ땅ㆍ바다ㆍ태양ㆍ공기ㆍ습기ㆍ나비ㆍ벌, 그리고 무수히 많은 하찮은 미생물까지 함께 어우러져 있음으로 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상의상존적(相依相存的) 관계와 동체적(同體的) 질서를 자각한 자만이 우주적 생명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화엄경에서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인드라(Indra)의 진주 그물  제석천에 있는 보배 그물로서 인타라망(因陀羅網) 또는 제망(帝網)이라고도 함. 낱낱 그물코마다
보주(寶珠)를 달았고, 그 보주 한 개 한 개마다 각각 다른 낱낱 보주의 영상을 나타내고, 그 한 보주의 안에 나타나는 일체 보주의 영상마다 또다른 일체 보주의 영상이 나타나서, 일(一)과 다(多)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화엄경(華嚴經)>의 중중무진법계연기(重重無盡法界緣起)를 잘 표현하고 있다.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인드라의 하늘에는 하나만 보아도 나머지 전체 보석의 영상이 모두 보이게 되어 있는 진주 그물이 있나니, 이것은 세계 속의 어떤 물체라도 그 자체로써 독립되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머지 모든 물체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 물체가 곧 다른 모든 물체임을 뜻한다”.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로 파악된 ‘나’는 무아(無我)가 아니라 우주적인 전아(全我)로서 자아개념의 무한한 확대를 의미하고, 유한이 아닌 무한한 확대란 오히려 그 전아라는 관념마저도 부정하는 철저한 초월을 말하며 자연과의 합일(合一)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부단히 변화하는 모든 상대적 현상 그 자체가 바로 절대적 실상(實相)임을 확신함으로써, 있는 그대로 완전한 자유 즉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한편 무아의 경지 또는 절대적 자유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개체로서의 한 인간의 행위는 상당 부분 그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르며 그 책임 또한 철저하게 그 개인이 자각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원론적으로 볼 때 어디까지가 ‘나’인지가 분명하지는 않겠지만 나 개인을 떠난 전체 또한 있을 수 없고 모든 개체들이 우주적 질서에 평등하게 참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은 단지 그 행위가 무아적 또는 전아적 입장에서 취해졌는지 아니면 아직 자각되지 않은 소아적 입장에서 취해졌는지 하는 기준밖에 있을 수 없다.  전자의 경우가 소위 업(業)을 녹이는 행위가 될 것이요, 후자의 경우가 업을 쌓아 가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분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무명(無明)이라 하여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우리 모두가 고도로 통합되고 상호연결된 한 조직체의 구성원이라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전체적이고 조화로운 세계관을 체득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하고 있다.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여래를 본다’는 부처님 말씀은 불교의 핵심을 한 마디로 드러내 보여주는 가르침이다.

5. 불교와 현대물리학의 유사성

앞에서 개략적으로 살펴 본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과 현대과학의 사고체계를 하나씩 비교해 가면서 그 함축된 의미나 철학성을 밝혀 보기로 하자.

1) 사물의 존재와 인식

모든 사물과 현상은 어떻게 인식되는가.  모든 사물은 상의상존적(相依相存的)으로 존재하고 그에 대한 인식은 상호의존적 관계로서만이 가능하며 그 관계 속에는 인식행위인 마음이 반드시 작용한다.  불교의 연기론적 입장에서는 모든 존재는 절대적으로 독립된 실체가 없으므로 물질과 의식, 주체와 객체까지도 엄밀하게 분리시킬 수 없다.  또 인식에 관한 한, ‘모든 현상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  마음은 주인이며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一切唯心造)’라고 말하며, <화엄경>에서도 “주(心)와 객(境)이 하나로 합하여 법계(法界)를 두루 통한다”고 설하고 있다.
과학에서도 역시 사물들 간의 상호작용이나 측정될 수 있는 양(量)들 간의 관계만을 다룬다.  즉 ‘무엇’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으며 그 무엇이 ‘어떻게’ 행동하고 그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인 힘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를 밝혀내고자 한다.  물리학에서 다루는 대표적인 몇 가지 힘(중력, 전자기력, 핵력 등)과 보존법칙(에너지, 운동량, 전하량 등)은 바로 ‘무엇’이라기보다 ‘어떻게’라는 관계를 말한다.
서양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에서는 모양ㆍ크기ㆍ위치 등은 순전히 물리적 대상 자체에 귀속되는 객관적 성질이고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 등은 인간 고유의 주관적 성질로 보아 철저히 분리해 왔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에서는 바로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던 위치라든가, 크기, 시간, 속도, 에너지와 같은 모든 구체적인 단위들은 이제는 그것을 혼자 떼어서는 정의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마저도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우주 규모의 현상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들을 분리시켜 생각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1960년대 이후 나온 구두끈(bootstrap) 이론과 같은 학설은 물질세계 전체를 상호연결된 관계의
역동적 그물로 보는 사상의 절정을 이루는 것으로서, 입자물리에서 아직까지도 찾고 있는 물질의 최소단위라는 생각부터 깰 뿐 아니라 어떠한 근본 실체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현대물리학도 불교철학의 수준까지 승화시키고 있으며, 어쩌면 이러한 이론 자체가 불교의 상의상관적(相依相關的) 연기론에 대한 물리학적 유추로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이 우주의 한 모퉁이에서 펼쳐지는 조그마한 사건도 우주 전체의 관계에서 만들어지고 다시 또 우주 전체로 파급되는 것이 연기론적 실재이다.  중국 양자강에서 노니는 나비 한 마리의 날개짓이 수천만 리 떨어진 뉴욕에 폭풍우를 몰고 올 수 있다는 소위 ‘나비효과(butterfly effect)’  1962년 MIT의 기상학과 교수 로렌츠(Lorentz)가 초보적인 컴퓨터를 사용하여 공기의 대류운동을
나타내는 비선형식을 계산하던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된 사실로, 간단한 비선형계에서조차 종래의 선형적 산물인 결정론적 근사방식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혼동(chaos)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예를 보임으로써 우연성의 과학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도 그 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그리고 부분적인 성질이 전체적인 성질을 지배하고 나타낸다는 현대 통계물리의 Fractal 이론도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화엄사상과 상통하고 있다.
또한 소립자들의 세계인 극미현상에서는 불확정성원리에 의해 물질과 물질간의 상호작용 뿐 아니라 관찰행위 자체도 자연현상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것은 바로 인식이란 행위가 물질적인 상호작용을 빌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인식의 한계 때문에 생긴다고도 볼 수 있다.  물리학계에서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물질의 이중성, 즉 물질의 본질이 입자냐 파동이냐 하는 문제에서도 역시 인식행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자나 빛은 인간이 만들어낸 그 두 개념을 동시에 갖고 있으면서 우리가 입자의 성질을 보기 위한 실험을 행하면 입자의 얼굴을 보여주고 파동의 특성을 보려는 실험상황에서는 파동의 얼굴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종래 입자라고만 생각되어 왔던 전자는 파동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여겨졌던 간섭현상
이나 회절현상을 나타내고,  또 전자기파인 빛도 그 간섭과 회절 현상이 파동의 개념으로 잘 설명이 되지만, 금속에 빛을 쪼였을 때 마치 입자로 때려 준 것처럼 금속 표면으로부터 전자를 떼어 내는 현상(광전효과)은 파동의 개념으로는 전혀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물질현상은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출렁거리는 상호작용과 관계만이 존재하며 인간의 인식행위도 필연적으로 그 관계 속에 개입된다는 현대물리학의 기본 철학은, 그러한 관계 또는 인식과정을 떠난 주체 즉 자아(自我)라는 것이 본래 없다는 불교의 연기론적 입장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절대성의 부정

이 우주에는 과연 절대적 존재 또는 기준이 존재하는가.  불교와 자연과학의 관점에서는 어떤 존재에도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만일 있다면 우주 전체와 우주 법칙 그 자체만이 절대적이며, 삼라만상의 모든 개체들은 다 연관성이 있고 각각 대등한 존재로서 그 어떤 사물이나 인격체도 완전히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없다.  따라서 신(神)도 부처도 절대자일 수 없다.  이 차원에서는 불교의 절대평등의 경지를 말하고 있으며, 부처는 단지 비밀스런 법(法)의 경계를 먼저 열어 보인 스승일 따름이고 그러기에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라(殺佛殺祖)’는 가르침도 성립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물리학의 상대성이론에서 절대좌표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리와 같다.  예를 들어, 다리 위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거나 잔디밭에 누워 떠가는 구름을 볼 때 사실은 강물이나 구름이 흘러가는지 내가 흘러가는지 알 수 없고, 또 나란히 서있던 두 차 중 어느 하나가 움직일 때 옆 차가 움직이는지 내 차가 움직이는지 모를 때가 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절대좌표계가 없기 때문에 어느 것이 움직이고 어느 것이 정지해 있다고 말할 수는 없고 다만 두 물체는 상대적으로 움직인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모든 물리법칙, 즉 물리량들의 관계식은 두 계에서 동등하게 성립되므로 어떤 실험으로도 두 좌표계의 우위를 판별할 방법은 없으며, 결국 두 계는 상대적으로 동등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고방법은 모든 물체의 운동에 대하여 참고하고 비교하여 이것은 움직인다, 저것은 정지해 있다고 말해 줄 절대좌표계가 우주 어디엔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싶은 인간의 집착에 커다란 변화를 강요하게 된다.  실제로 19세기 후반까지 물리학자들은 에테르(ether)라는 가상의 물질이 이 우주공간에 꽉 차있다고 가정하여 절대 고정좌표계로 삼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여러 가지 실험적 사실은 에테르라는 물질이 대기 또는 진공 중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고 해석될 수밖에 없는 결과가 나왔다.  따라서 그러한 절대좌표계는 미련 없이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20세기 말에 절대성의 부정에 근거를 둔 상대성이론을 의심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
현대물리학에서 모든 자연현상에 대한 상대성의 인식과 절대좌표계의 포기는 실로 인간사고의 혁신적인 진전이며, 고정불변의 실체를 부정하고 무상한 상대성 그 자체를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불교의 연기론과 기본적으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불교가 여러 민족, 다양한 문화 속에 전파되면서도 비교적 갈등을 야기시키지 않고 융화될 수 있었으며,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가 지적했던 “세계적인 종교 중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워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던 종교는 불교 뿐이다”라는 사실은 불교의 삼라만상에 대한 절대성ㆍ영원성의 부정이 그 깊은 뿌리였다고 볼 수 있다.

3) 시공간의 상대성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양인가.  불교와 현대물리학에서는 모두 시공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있다.  즉, 시간과 공간은 고정된 척도가 아니라 계(系)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시간과 공간은 개인이 처해 있는 상황이나 세계에 따라 그 크기를 달리 느낄 수 있는 양이며, 그 자체로서는 절대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연기론적 해석이다.  예를 들어, <현우경(賢愚經)>에서 ‘천상(天上)에서의 수명은 4천 년’이라고 하고 ‘도솔천(도率天)의 하루는 지구에서의 4백 년’에 해당된다고 하며, 또 <화엄경>의 <초발심공덕품(初發心功德品)>에서도 “긴 겁(劫)이 짧은 겁과 평등하고 짧은 겁이 긴 겁과 평등하며 일 겁이 무수한 겁과 평등하고 무수한 겁이 일 겁과 평등하며… ”라고 하여 시간 개념의 상대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시공의 개념은 인간이 인간세계에서 따로 따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뿐, 있다면 끊임없이 생멸(生滅)하는 현상만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관점은, 시공간을 분리하지 않고 4차원으로 다루어야 하며 그 크기도 관측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측정될 수 있다는 상대성이론과도 아주 유사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두 관측자는 자기 것보다 상대방의 시계는 느리고 길이는 짧게 느끼는데, 이미 논의했던 바와 같이 절대좌표계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두 관측자들의 주장은 모두 옳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이와 같은 ‘시간지연’ 또는 ‘길이축소’를 쉽게 느낄 수 없는 이유는 측정대상이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 때만이 비로소 상대론적 효과가 크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투수가 가장 빠르게 야구공을 던진다고 해도 초속 150 m 정도인데, 이것은 1 초에 지
구둘레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도는 초속 30만 km인 광속의 2백만 분의 1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운동은 광속에 비해 무시될 만큼 느리고, 따라서 시간지연이나 길이축소는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다.  그러나 아주 빠르게 운동하는 소립자의 미시세계 예를 들면, 상공 15 ㎞ 지점에서 생성된 수명이 10-6 초인 뮤온이란 소립자는 그냥 광속도에 시간
을 곱하면 300 m밖에 움직일 수 없으므로 지구까지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뮤온은 지구표면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은 뮤온의 입장에서는 거리가 50분의 1로 짧게(길이축소) 보이는 반면, 지구의 입장에서는 뮤온의 수명이 50 배나 길게(시간지연) 보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각각의 시공간은 다를지라도 사건 또는 현상은 언제나 상대론적으로 정확히 설명된다.에서는 물론 거시세계 고속으로 회전하는 원반의 중심과 가장자리에 원자시계를 고정시켜 놓으면 가장자리에 있는 시계
가 느리다는 사실이 관측되었고(1958 년, 뫼스바우어), 또 최근에는 비행기로 서로 반대방향으로 날면서 시간을 측정한 결과 시간지연 효과가 1% 이내의 오차로 정밀하게 확인되었다.에서도 상대론적 시공간은 어김없이 확인되고 있다.
그렇지만 시공간이 짜부러질 수 있다고 해서 사건의 순서마저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가령 비행기가 뜨기도 전에 목적지에 닿는다거나 어머니보다 자식이 먼저 태어난다거나 하는 일이 있다면 이 세상은 대혼란이 초래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없다. 상대성이론에서는 사건의 시공간적 치밀도가 달라질 뿐, 인과론의 근본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한편 사건의 동시성(同時性)이나 존재의 시초(始初)에 관한 논란도 냉철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 관측하고 있는 별빛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는 동시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별들의 거리에 따라 각각 다른 시간에 떠난 정보이므로 실제로는 시간적 깊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우주가 대폭발(big bang) 이후 2백억 년이나 팽창했으므로 시초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언젠가 종말로 올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 단순하고 선형적인 사고의 산물이다.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공간은 극도로 휘어질 수 있고, 만일 4차원의 시공간이 시간축 쪽을 향해 닫혀져 있다면 우주는 수백억 년의 주기로 현재와 같은 시간이 반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흔들이 우주론(oscillating universe)’의 가능성은 오히려 동양적 성주괴공(成主壞空)의 반복 또는 불교의 윤회전생설(輪廻轉生說)을 뒷받침하고 있어서 창조론자들의 아전인수격 주장보다 ‘시작도 끝도 없다(無始無終)’는 우주의 운명에 대한 불교적 해석에 오히려 무리가 없다고 보여진다.

4) 결정론적 세계관의 퇴조

인간의 자유의지는 인정되는가.  물질은 물론 정신 영역까지도 이미 정해진 역학관계에 의해 펼쳐지는 운명은 아닌가.  그러나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은 불교가 인과론과 함께 자유의지에도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자연과학의 입장은 어떠한가.  금세기 이전의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믿어왔던 기계론적 세계관이나 엄격한 인과론에 의하면, 지나치게 개체들의 인과율에 집착한 나머지 오히려 자유의지마저도 부정되는 경향을 보여온 게 사실이다.
기계론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우선 정신과 육체 또는 물질은 분명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고 보았으며 또 개개의 입자들도 서로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면서 물질세계는 그 입자들의 단순한 집합체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 구성요소들의 움직임과 인과적인 연결만 정확히 관찰하여 기술하면 완벽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데카르트가 추론해 낸 이와 같은 분석적이고 기계론적인 발상은 물질세계를 다루는데 대단히 편리한 방법으로 근대과학의 기초가 되었다.  뉴턴 역학 역시 기계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물질세계의 이해이며 우주의 운명에 대한 결정론(決定論)적 사고를 낳게 한 배경이 되었다.  19세기 정상급 물리학자였던 켈빈(Lord Kelvin, 1824-1907)은 “이제 물리학에는 그저 ‘소숫점 아래’를 다듬는 정도의 사소한 문제밖에 남아있지 않다”고까지 자신만만하게 말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우주의 모든 현상들이 이미 사전에 역학적으로 결정되어 있고 단지 그대로 진행되고 있을 뿐이라는 결정론이나 모든 우주의 운행과 개체들의 행위까지도 우리들의 권한 밖의 어떤 초월적인 힘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는 운명론은,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인간의 심성이나 주변상황을 개선해보고자 하는 종교적 노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왔다.  한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것은 예정된 대로 흘러갈 것이며, 혹 변화의 선택 가능성이나 자유의지를 말하더라도 그것조차도 이미 결정되어 있던 사항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결정론이나 운명론에 강한 의심과 불안을 품고 있던 인간들에게 자유의지가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준 것은 소위 ‘불확정성원리’와 ‘상보성원리’이다.(3장 참조)  불확정성원리에 의하면 개개의 입자들로 볼 때는 원인 없는 사건들이 있을 수 있으며 바로 - 여기에 자유의지가 끼어들 수 있다고 본다 - 그래서 엄격한 인과율보다는 많은 수의 입자들에 대해서만 확률적 인과율이 적용되어 현상화한다고 본다.  또 상보성원리는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 데는 그 물질 자체의 고유성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찰하는 의식주체의 선택의지도 포함되어 함께 만들어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양자론적인 물리세계에서는 하나의 원인과 그의 결과로 딱 떼어낼 수 있는 그렇게 단순하고 직선적인 인과관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점은 정확한 개체적 인과율을 믿고 싶은 인간에게 커다란 갈등의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생명현상을 수없이 많은 개체들의 집단적 총체적 현상이라고 보면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도 확률적 인과율을 따를 것이며,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많은 것들과의 관계를 가장 편하게 또는 자유롭게 하는 절제된 ‘의지’라는 점에서, 무상이란 실상 속에서 연기적 자아의 확대를 꾀하는 불교의 공업(共業)에 바탕을 둔 자유의지 개념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윤회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어떤 행위를 하면 무엇이 된다든지 하는 식의 결정론적 인과응보 해석은 벗어나야 한다.

5) 사물의 본질은 자유

자연현상이나 생명현상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이나 현대과학에서 이해하고 있는 물질현상의 근본은 ‘자유’라고 볼 수 있다.
불교의 연기론에서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탐욕·집착·무지로부터의 해탈 즉 완전한 자유를 얻는 데 있고, 전 우주가 한 생명체라는 확신이 곧 깨달음이며 온 중생이 추구해야 할 공동선(共同善)이다.  깨달음의 실체를 불교에서는 불(佛)·법(法) 또는 마음(心)이라 하고, 도교에서는 도(道)라고 했으며, 인도철학에서는 범(梵)이라 불렀고, 다른 종교에서는 신(神)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러한 관념에서조차도 자유로워야 한다고 해서 살불살조(殺佛殺祖)를 <열반경(涅槃經)>이나 <금강경(金剛經)> 등에서 누누이 역설하고 있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물리학에서는 모든 자연현상은 엄밀하게 말하면 일방적인 방향으로 일어나는 비가역적(非可逆的) 과정이라고 본다.  더운 물과 찬 물을 섞으면 미지근한 물이 되고, 잉크방울이 물에 떨어지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물 속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역으로 미지근한 물이 더운 물과 찬 물로 저절로 나뉘어진다든가 확산된 미세한 잉크분자들이 다시 모여 잉크방울로 튀어오르는 일 따위는 절대 발생하지 않는다.  또 운동하는 물체의 운동에너지는 마찰에 의해 열에너지로 바뀌면서 정지하게 되는데 이 때 거꾸로 정지해 있는 물체에 열을 가한다고 해서 본래 방향으로 물체가 다시 움직이지는 않는다.  이 현상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공통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모든 자연현상들이 단순하고 조직적인 상태로부터 복잡하고 무질서한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구속된 상태에서 좀더 자유스런 상태로 변화가 이루어진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이 소위 ‘엔트로피(entropy) 증가법칙’인데 바로 이 엔트로피의 증가 현상으로써 ‘자연스런’ 과정을 정의하기도 한다.  따라서 엔트로피를 그 계(系)가 가지는 ‘자유도(degree of freedom)’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통계역학적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외부와 단절된, 즉 독립된 한 계(系)에서 일어나는 물리현상은 그 구성원인 모든 개체들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상태 또는 상황 - 위치나 운동량 등으로 정의되겠지만 - 의 수, 즉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엔트로피의 증가, 즉 자유도의 증가가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 의미는 어떤 독립계에서도 그 구성원들의 선택의 폭이 가장 넓고 다양한 쪽으로 진행하며, 자유도가 극대화되면 더 이상 자체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안정된 평형상태를 이룬다.  따라서 만일 역사의 발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인류가 더 자유로워지고 인류문화가 더욱 다양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목표로 하는 해탈, 즉 ‘완전한 자유’는 엔트로피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인간 교육의 목적도 엔트로피의 증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자연현상과는 달리 생명현상은 대단히 무질서한 자연계의 무기물로부터 조직적이고 목적적인 유기물을 만들어내므로 엔트로피가 감소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을 근거로 창조론자들은 이렇게 고도로 복잡한 조직과 엄청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는 엔트로피 증가라는 자연법칙과 어긋나므로 신(神)이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단순하고 편리한 사고방식은 그들의 성급한 희망 때문에 빚어진 오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엔트로피의 증가법칙은 완전히 고립된 계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고, 상호작용하는 여러 계에 있어서는 국소적으로 어느 한 계의 엔트로피는 감소할 수 있으며 그런 경우에도 전체 계의 엔트로피의 합은 역시 증가한다는 사실 예를 들어 뜨거운 물과 찬물을 섞을 때, 찬물을 생각하면 엔트로피의 증가가 될 것이고 뜨거운 물
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엔트로피의 감소가 틀림없지만, 그러면서도 미지근한 물 전체의 결과적인 엔트로피는 역시 증가한다는 것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명체는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영향을 주는 우주 전체가 함께 해야만 존속되는 열린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주위환경과 부단히 상호작용하는 생명체의 엔트로피가 감소한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게 없고, 주위환경을 포함한 우주적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하므로 엔트로피의 감소를 핑계로 생명현상에 신이 개입할 근거는 찾을 수가 없다.
한편, 물질현상 측면에서만 볼 때 생명활동이란 엔트로피를 감소시킴으로써 자연현상을 거스를 뿐만 아니라 대단히 강한 자기복제성, 자기중심성 및 배타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생명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무자비하게도 다른 생명을 죽이게 되며 주위환경도 더럽히고 무질서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그 추악하고 보잘 것 없는 생명체의 한계를 알아차린 인간은 자기존재의 합리화를 위해 더 고상한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애를 쓰지만, 육신을 보전하기 위한 생명활동만은 일반 동식물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생명은 무조건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하고 그 자체로 귀중하고 목적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에는 무아(無我)의 행위를 방해하는 강력한 장치가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개체유지 또는 종족보존의 본능을 발휘하는 무시겁래의 업장(業障)인데, 이것이 우리를 나 중심의 생각, 인간 중심의 아집(我執)에 가두어 무아적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생명체들의 목적적 행위 󰠏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 는 두꺼운 업장의 집착력에 의해 일어나는 엔트로피 감소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단순한 물질적 생명활동과 그 인과관계를 뛰어넘는 정신적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탐욕과 자기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을 분명한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불교의 존재이유는 없으며, 불교적 생명운동의 뿌리도 단순히 생물체를 살리기보다 ‘함께 깨달음의 길로’ 향하는 데에 두어야 한다.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다겁생래의 업식(業識)이 접혀 축적되어 있는 육신을 보전하기 위해 ‘약으로 알아’ 음식을 받아먹는 것이며, 업장이 더 두꺼운 동식물보다 그래도 인간의 모습일 때 필사코 깨치고자 인간의 몸 받아나기 어렵다는 것을 맹구우목(盲龜遇木)에 비유하여 스스로의 채찍질로 삼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필경 그러한 업장을 녹여서 해탈에 이르면 그 곳이 바로 엔트로피가 극대화된 평형상태, 즉 열반적정(涅槃寂靜)이요, 〈아함경(阿含經)〉에서 “집착할 것이 없으면 스스로 열반을 얻어, 생(生)은 이미 다하고 범행(梵行)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스스로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고 한 것도 생명의 집착성에 대한 경계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6) 양자적인 세계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는 근본적으로 연속적인가 불연속적인가.  물질의 양은 임의의 값을 가질 수 있는가, 또 깨달음도 조금씩 조금씩 다가갈 수 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현대물리학에서는 사물의 본질을 불연속적으로 보며, 불교에서의 깨침도 어느 순간 때가 되어 한꺼번에 홀연히 얻어지는 것이지 조금씩 깨우치는 연속적인 발전이 아니라고 답한다.  그것은 깨달음의 속성상 차원을 달리 하는 눈뜸(開眼)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물리학의 양자개념에 의하면 중요한 물리량들은 본질적으로 양자적인, 즉 덩어리진 불연속적인 값만을 가질 수 있다. 수소원자 속의 전자도 특정한 값의 불연속적인 에너지 준위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 준위 사이를
오르내릴 때 연속적인 파장이 아닌 몇 개의 불연속적인 파장의 전자기파만을 방출하게 된다.   미시적으로 볼 때는 사물의 본질이 이렇게 양자적이지만 거시적이고 근사적인 물질이나 일상생활에서는 그 불연속성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차원(次元)이 달라서 말이 안 통한다’라는 말을 곧잘 한다.  차원이 다를 때 고차원의 틀에서는 저차원의 현상이 무엇이든지 이해되지만, 역으로 고차원의 현상은 근본적으로 특성이 달라지므로 저차원의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고차원의 세계는 단순히 1차원을 여러 개 합쳐 놓은 것이 아니고 전혀 다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1차원의 세계는 내 앞뒤만을 생각하는 3인의 세계요, 2차원의 세계는 앞뒤ㆍ좌우 개념이 있어서 비로소 곡선이 이해되고 넓직한지 좁은지를 구분할 수는 있으나, 역시 위아래 개념은 없으므로 3차원 운동, 즉 골프와 같은 운동은 도저히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2차원의 세계에 사는 존재에게는 골프공이 날아간 순간 그 세계에서 없어진 것이고, 얼마 후에 다른 지점에 떨어진 순간 그 공은 그 세계에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 사이에는 골프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마치 외계인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고 할 것이다.  인간은 물리적으로는 3차원 공간에 시간을 넣어서 시공의 4차원 세계에 산다고 할 수 있는데, 깨달음의 경지는 몇 차원이나 있으며 부처님은 과연 어떤 불가사의한 세계에 살고 있는가.
한편 불교계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돈오돈수(頓悟頓修)냐 돈오점수(頓悟漸修)냐의 논란도 깨달음과 수행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극미 차원의 문제가 아닐까.  북신수(北神秀)가 수행과정을 상식적으로 표현한 점수돈오도 있으나, 달마 이래 선가(禪家)에서는 돈오돈수를, 불일보조(佛日普照)는 돈오점수를 내세웠다.  그러나 깨달음에 관한 한, 양자적으로 차원을 달리해서 몰록 깨닫는 돈오에는 아무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수행에 있어서 점수와 돈수의 두 관점이 팽팽한데, 점수의 입장은 아무리 깨달았어도 그 동안 무시이래의 업장과 습을 털어내어 오(悟)의 경지를 확인·실천하는 닦음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돈수의 입장은 본래부처라는 것을 몰록 깨쳐 밝은 덩어리가 불쑥 솟아오른 이상 어두움은 사라졌고 티끌도 이미 의미가 없어져 더이상 더렵혀질 바 없으므로 닦을 것조차 없다는 관념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6. 맺는말

금세기에 들어서서 인간의 자연현상에 대한 지식은 폭발적으로 증가되어 인류문명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에 걸맞은 인간의 자기이해에 대한 깊이는 답보상태이거나 오히려 줄어든 느낌마저 든다.
19세기 말경 역학(力學)이 완전히 자리잡게 되면서 각종 기계의 발명과 공업화로 인해 생활양식 및 사회구조는 급격히 달라졌는데, 그것은 과학에 대한 신뢰감을 바탕으로 인류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현재 인류는 화려한 과학문명의 성과인 풍요와 편리에 묻혀서, 바로 그것이 가져다 준 부정적 요소들을 소홀히 넘겨왔다.  20세기는 전 인류가 함께 절멸할 수도 있는 경쟁적 무기 생산이나 지구적 환경문제와 같은 직접적인 불안요소는 물론, 물질 위주의 사고방식과 생명경시, 그리고 이념적ㆍ지역적 패권주의 때문에 대립과 긴장으로 보낸 한 세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서구과학문명이 지난 수백 년 동안 다져 온 기계론적 세계관 및 환원주의(還元主義) 무엇이든지 쪼개어 보면 궁극적 최소단위까지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신념.  현대과학이 전체적 관
련성을 해명하기보다는 부분적 확실성을 추구해 온 데에는 환원적ㆍ분석적 방법의 채택 못지 않게 용이한 목적달성이라는 동기가 크게 작용하였다.  물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면서 큰 문제를 논의하기보다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진실을 알아내는 길을 나는 따르겠다”고 선언한 것은 서구과학문명의 성격을 잘 대변하는 한 마디라고 할 수 있다.의 팽배로 인해 빚어진 전체성의 상실이 주원인이었다.
그러나 금세기 초 약 30 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현대과학의 기본개념과 물질세계에 대한 사고방식의 극적인 대전환은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길들어 왔던 절대좌표계나 개별입자의 기계론적 인과론 같은 기존의 세계관을 철저히 바꿔 놓았다.  그것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으로 대변되는 현대물리학이 발견해 낸 큰 길이요 업적인데, 이로 인해 데카르트-뉴턴식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더 이상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없게 되었고, 대신 전일적(holistic)이며 생태론적(ecological)인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게 되었다.  우주만물은 기계적이며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유기적이며 역동적인 것으로, 우리는 이미 서로가 얽히고 설킨, 근본적으로는 모두가 다 하나로 이어지는 그러한 세계에 살고 있다.  현대물리학이 보여 주는 이러한 통합적 세계관의 기본요소들은 흥미롭게도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의 핵심에 닿아 있다.  따라서 과학의 발전에 의한 인간 사고의 변화는 불교적 세계관이 더욱 의미 있게 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 예상된다.
한편 불교의 중도연기론(中道緣起論)에서는, 모든 존재의 상대적 존재이유를 인정하면서도 그 어느 대립개념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월적으로 놓아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해소해버리는 지혜를 터득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번뇌를 끊음은 두 번째 방법이요, 번뇌가 일지 않음이 곧 큰 열반이라(斷煩惱 名二乘 煩惱不生 名大涅槃)”는 <선가귀감(禪家龜鑑)>의 한 귀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 해소방법은 현대심리학의 추세이기도 하며 인간문제의 지혜롭고도 근본적인 극복방법일지도 모른다.  분별적이 아니고 중도적인, 해결이 아닌 해소의 연기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악(惡)이란 선(善)이 스스로의 완전성 때문에 짊어진 그림자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사랑해야 할 원수는 없고, 중생은 부처의 씨앗이며, 죽음은 삶의 일부이고, 정신과 물질은 종이의 안팎과 같이 구분할 수 없으며,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함께 살아가야 할 또 하나의 생명체이다.
불교의 이와 같은 통합적이고 연기적인 사고방식은 중도적 문제해소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개인의 안심(安心)은 물론 사회의 화합, 나아가서 인류 평화의 실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현대과학이 불교의 중도연기론적 해소의 철학에 깊숙히 들어와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미래의 과학시대에는 이 양자가 좀더 가까이 만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바로, 다른 종교에서와는 달리 불교의 연기론에서는 이렇게 우주적인 법칙과 도덕적인 질서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물질현상과 정신현상의 괴리가 있을 수 없고 윤리체계의 기반이 확고하여 맹목적이거나 무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교는 다가오는 21세기의 인류의 번영과 사회의 완성을 위한 생활철학으로 새롭게 떠오를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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