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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11/26 (01:22) from 129.206.196.100' of 129.206.196.100' Article Number :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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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화의 이해




    러시아 문화의 이해


   지은이 : 김수희
   출판사 : 신아사


 서문

 문화의 개념만큼  다양한 의미와 폭으로  사용되는 용어도 드물  것이다.
개념사용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무리없이 의사소통이 되고 있음은 막연성과
부정확성의 보편화로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국가 및  민족간의 빈번한 교류 속에서  상호이해 및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상호간의 교제형식인 국제교류를  원만하
게 유지하고  심도 깊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문화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문화의 이해없이 상호 공감대를 지속적으로 형성하고 넓혀갈 수 없기 때문
이다. 다시 말해  문화는 최상의 교양을 갖춘 행동규범을 의미하기  때문에
문화인과 야만인과의  인간관계는 교제의 지속성을  상실하 수 밖에  없다.
아울러, 민족이 보유한 독특한 문화유형은 교제에 있어  상호이해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런 이해 속에서 깊은 관계형성이 가능할  뿐 아니라 부적절하
고 피상적인 상대방에 대한 이해로 인해 생기는 손실을 예방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러시아 문화의 소개 및 이해목적으로 이미 대학에서 "러시아 문화"를 정
규 교과목으로 다루어  온지 오래다. 그리고 다양한 외국서적을 통해  이를
습득해 왔다. 필자도  이 교과목을 10여년간 담당해 오면서 경험적으로  느
끼고 체득한 사실은 올바른 개념에 입각하여 개발된 이론 틀을 적용함으써
체계화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단편적 지식을 종합하고, 분
석적 지식을 얻고, 유형의 생성 배경과 원인을 통한 본질파악, 그리고 이에
더하여 향후 심도 깊은 연구활동 자극 및 유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
이다.
 이같은 집필동기와 목적의식 속에서  제1장에서는 문화의 개념소개와 발
달과정을 정리함으로써 개념의 이해를 높였다. 이에 더하여  20세기이래 개
발된 방법론적 시각을 넓혀줌으로써  다양한 접근방법의 실행 필요성 제고
및 연구를 자극하도록 하였다. 끝으로 본 저서 분석에  요구되는 이론을 소
개하였다. 이를  통해 체계적 문화연구의  기틀을 잡는데 다소나마  기여될
것으로 확신한다.  제2장에서는 러시아의 문화유형을 구체화하는데  할애했
다. 유형(pattern)을 규명하는데  중추적으로 고려된 사항은 러시아  민족이
어떠한 조건의 환경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처 생활해 왔으며, 이러한  생활
과정의 결과로 생성된 자기보존 및 번영방법을 정리하는 형식을 택했다.
 러시아 문화유형을 규명함에 있어 선택된 연구대상에 대해서는 유용성과
이해의 중요성을 고려하였다. 이에 따라 지리적 유형, 건국조건하의 초기에
형성된 유형, 외세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 유형, 정치적 유형, 종교적 유형,
사회구조적 유형, 지적 활동으로 형성된 유형, 예술적 유형으로 분류 및 나
열하였다.
 러시아어 표기에  있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소개된 영어식발음 방법이
아닌 러시아어 본래의 발음에 충실토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어를 모
르는 일반독자들을  위해 러시아어음가는 영어  표기식으로 로마나이즈 했
다.
 집필과정에서 학기에 맞춰야하는 시간의 촉박함으로 인해 공사치하의 문
화연구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보완하여  러시아학도들과 러시
아에 관심 있는  분들의 욕구에 부응하도록 하겠다. 끝으로 자료와  원고내
용 검토에 형제적 도움을 아끼지 않은 조선대학교 러시아어학과 소속 임흥
수교수님, 컴퓨터상의 화상처리에  아낌없는 도움을 주신 조선대학교  전자
계산소 유성진선생님(석사과정)과 광주의  영상스튜디오 "가람"을 운영하시
는 최형동(비오)형제님의 화상처리, 그리고 막바지 작업과정에서 타자로 자
원봉사를 해준  제자 이승미선생과 류정안학생,  사랑하는 아내의 내조  및
기도, 그리고 소중한 우리집  공주님 영미의 신세대 감각에 의한 문장정리,
본인이 몸담고있는 조선대학교의  집필후원, 끝으로 출판을 쾌히  승낙하여
주신 신아사의 정현걸 사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1998년 2월 김수희

 1.문화의 개념과 이론

 1.문화개념의 생성 및 발달

 문화의 개념은 복합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문화에 관한 보편적
개념을 얻기 위해서 이의 기원 및 어원을 살피는 것은 뜻있는 절차라고 판
단된다.
 문화의 어원인  "cultura"는 고대 라틴어로써 "토지의  경작"을 의미했다.
그후 "cultura"는  키케로(Cicero)의 저서에서  "cultura animi"란  표현으로
확대되어 "가공 및  경작, 정신의 완성", 이란 의미로  변했다. 최근에는 로
마 및  다른 언어들에서 "문화"라는 말은  다양한 유사의미로 사용되고 있
다. 즉, "교양",  "교육", "수완", "존중", "발전"  등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근대  용어들 속에서는 문화는 통상 다음과 같
이 이해되고 있다. 첫째, 어떤 민족의 제성취 및 창조와 총화, 둘째, 일정한
역사, 지리적 그리고 기회적 요인에 의한 인간의 일치(구석기 문화, 봉건문
화, 그리스-마케도니아 문화,  프랑스 및 한국문화, 심지어 나쁜 문화도  포
함), 셋째, 어떤 인간활동 영역에서의  완성수준(언어문화, 노동문화, 행동문
화 등), 넷째, 어떤 농작물의 형태(참외류, 곡초류, 감귤류 등)이다.
 이렇게 다소 폭넓은 의미를 띠고 있는 원인은 문화라는 용어사용에 있어
서 장구한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에 의해서만 인식시도가 이루어졌
다는 사실과  함께 개념정리에 있어서도  일치성이 결여되어 온  결과이다.
따라서 문화의 근대적  개념정리 및 이해의 심화를  위해 과거 철학자들에
의해 시도된 문화인식을 사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중세이후 인간과 인간의 이성이 핵심가치로 선언되었던 계몽기에 프랑스
계몽주의자인    볼테르(Voltaire,     1694-1778)와    콘보르세(Konborse,
1743-1794)는 문화-역사적 맥락에서 문화를 인간이성의 발전  속으로 보고,
"야만성"의 투쟁과 "문명화"로 집약시켰다.
 자연주의자인 루소(Rousseau, 1712-78)는  부르죠아지 문화의 출현에 대
한 반응으로써 자연인의 성격기준으로 부르죠아지 문화를 "야만인"의 이상
화란 표현으로 비판하였다. 아울러 루소는 인간본성에 대한  개선에 있어서
학문과 예술의 역할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원시발전단계에  존재했던
풍습의 순수성과 청결성을 문명적 민족의 타락과 도덕적 방탕에 비유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Kant,  1724-1804)는 우주의 기반으로 이상의  3단계
인 "진리", "선", "미"를 인식하기도 했지만,  더나아가 "문화"개념의 도덕적
인식이란 전기를 마련했다.  문화에 대한 그의 교안적 인식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나에게 두개의  신비가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위의  유성적 하
늘과 우리 내부의 도덕적 법칙이 있다"면서,  도덕적 생활양식의 측면을 강
조했다. 또한, 문화를 재능으로써의  인간적인 신으로 간주하고, "동물적"이
며, 육감적인 상태에서  높은 도덕적 존재로 향상시키기 위하여 선을  지향
한 내부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시인인 후레드릭 쉴러(Shiller, 1759-1805)는 "자연적", "육감적"인
것을 한 측면으로 하고, 도덕적인 것을 다른 측면으로  한 칸트적 상호모순
을 벗기려 노력했다. 쉴러의 문환느 인간의 육신과 도덕적  본성의 조정 및
타협으로 구성하고 있다. 즉,  "문화는 양자에게 공정성을 부여해야만 한다
는 것이다. - 육감에  반한 인간의 이지적 동기를 하나로 만들뿐만  아니라
육감에 반한 도덕도  정당성을 부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두  문화
의 과제는 첫째로  자유 찬탈로부터 감성보호, 그리고 둘째로 감성적  역량
으로부터 인격보호이다. 무엇보다도  보호는 감각능력 보호에 도달하고, 차
후에 이성의 발전에 도달한다."는 주장이다.
 문화의 본질을 칸트는 이성의 힘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도덕
의 힘에 의해  인간내에 있는 야만적이고 육감적인  본질의 극복으로 보고
있었다면, 쉴레르는 육감적,  합리적-윤리적 본질의 타협에 귀결되었다.  그
러나, 쉘링(Shelling, 1775-1829)등은  문화의미학적 인식을 제1위에 올리고
있다. 즉 인간내부의 야성적 본질과 윤리적 본질의  신학적 극복수단으로써
인간의 예술적 활동이  문화의 핵심내용으로 선포된 것이다. 그는 그의  저
서 "예술철학"에서 인간의 모든 창작활동 중에서 예술적 창작의 상대적 우
위를 보여주려 노력했으며, 도덕 및 학문위에 예술을 위치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예술은-마치 세계정신의 완성이다.-라고 기술하고, 그 이유는 예술내
에 주관과 직관적,  정신과 자연, 내연과 외연적,  의식과 비의식, 필연성과
자유를 끝없는 형식  속에서 통일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술은  절
대자의 자기관조가 있다."는 논리다.
 독일의 철학가 헤겔(Hegel,  1770-1831)은 문화의 계몽적 해석과  낭만적
해석의 화해를 시도함으로써 인류문화 진보에 공헌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
의 초기 저서인 "정신의 현상학"(1807)에서  법칙적 발전으로써의 인간밖에
존재하는 창조적 역량의  점진적 발휘가 가능한, 신과  동일시되는 "세계적
이성"을 제기했다. 따라서 헤겔은 문화의 본질을  인간 내에 있는 생물학적
근거의 극복이 아닌, 뛰어난 개성의 창조적 환상도 아닌, 자신에 자연도 역
사도 포함하고 있는  세계적 총체에 개인의 정신적 참여로 정의하고  있다.
근거는 이 총체가  "세계적 이성", "세계적 정신",  "절대적 이상"의 산물이
며, 이들에 개인의  참여가 오직 세계의 최대이해 및 최대인식  형태에서만
가능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의 절대적  가치가
사고의 전체발전을 이루고 있다."고 헤겔은 기술하고 있다.
 독일의 탐미주의자이며, 언어 및 철학자인  흄볼트(Humboidt, 1767-1835)
는 주로 개별 민족문화에 헤겔의  "정신"개념을 적용시킨 사람으로써, 문헌
학과 언어학분야 전문가들에게 남다른 관심을 유발시켰다. 그는  개별 민족
문화를 되풀이 될 수 없는 문화적, 정신적 유일 무이성으로 식별했다. 그는
"인간 언어구조의 차이와  그의 인종발전에 미친 영향에 관한"저서에서 민
족정신의 표현형태로써 언어의  창조적 본성을 강조하면서, 민족의  문화적
습성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를 연구했다. 흄볼트에 있어 언어는  도구
일 뿐 아니라 바로 "정신"의 활동이었다.  언어의 구조 속에는 이미 고유의
주변세계 지각과 틀에  박힌 양식의 행동들이 부설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는 언어철학의 창시자로서 향후 언어와 문화간에 유기체적 관계 연구에 상
당한 향을 미쳤다.
 19세기 중엽부터  문화에 대한 일반적  의미부여로부터 구체적인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발현경향이 다른 학자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문화
학적 견해에 있어 맑스주의의 동시대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엥
겔스(Fredrich  Engels)의  걸작품  "가족 및  개인의  재산과  국가의  기
원"(1884)에도  현저한  영향을  미친  미국의  인종학자  모르간(Morgan,
Lewis Henry, 1818-1881)의 업적은  지대했다. 그는 원시사화사 연구에 기
초를 놓은 사람으로서, 문화적 진보의 주원동력을 물질적  생산의 발전에서
찾았다. 따라서, 그는 일정한  요소의 발전 수준에 맞는 물질문화의 개별단
위로써 "미개", "야만", "문명"으로 폭넓게 시기를 구분시킨 사람이다. 모르
간의 주요 업적은 맑스주의의 관점에 서서 사유재산의 일시적 성격에 관한
이론, 인류사회발전의 단일방도에 관한 이론, 종족조직의 일반성에 관한 이
론을 형성한 것이다. 그의 도식에 따라, 제결혼관계가 원시시대의 난혼으로
부터 집단적 결혼을 거쳐,  일부일처제로 변천했다. 그는 인류역사 발전 초
기단계에서의 모권적 풍토 존재에 관한 사상에도 기초를  놓았다. 문화문제
에 몰두한 19세기의 다른 걸출한 학자는  영국의 테일러(Tylor, Edward B,
1832-1917)이다. 그는 문화에 관한 학문을 개혁에  관한 학문이라고 주장하
면서, 문화를 끊임없는  진보적 발전과정으로 간주했다. 그는 "원시문화"연
구(1817)에서 다음과 같이  일반적 문화를 정의했다. 즉, 폭넓은 인종적  의
미로 "문화나 문명화는  대체로 사회성원으로서 인간에 의해  습득된 신앙,
예술, 도덕, 법, 관습 및 소수의 다른  능력과 습성으로 구성된다"고 정의했
다. 즉,  문화를 "이념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도덕, 역량 및  행복의 발전에
동시적 협력목표를 가진  개량으로" 보았다. 더욱이 테일러는  문화를 인간
의 사상과 노동결과의 끊임없는 목표로 보았다. 즉, 보다 덜 개량된 제품에
서 의무적 계승 및  보존성격을 띤 보다 더 개량된 제품으로,  물질과 정신
적 가치의 끊임없는 목표로 보았다. 따라서, 모든 문제와 이상은 연달아 발
전되고 있다는 견지를 보임으로써 진화론적 접근을 하였다.  단순에서 복잡
으로, 보다 덜 개선에서 보다 더 개선된 것으로의  끊임없는 전환방법이 모
든 인간적 이상, 학설, 법칙 및 예술작품과 다는 정신문화를 발휘해가고 있
다는 것이다.
 테일러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소위 "종교기원의  물활설"(만물에는 모두
영이 있다는)의  창조였다. 테일러가 "종교의 최소"로  명명하고 있는 온갖
종교는 예날부터 "영혼"의 재능으로 "정신"이 신체로부터  분리되는 "철인-
야만인"의 신앙에서  유래했다는 확신이  이 이론의 핵이다.  원시조상들을
위해 그들이 관찰해  온 꿈, 환각, 가사상태, 및 현재  초심리학에 몰두하고
있는 기타 설명되지 못하는 현상과  같은 사실들이 이 이론의 확고한 증명
이였다.
 고대 그리스 및 로마문화로부터 19세기말까지의 문화론적 사고의 발전을
요약하면, 첫째, 본래 인간내부에 존재하는  자연적이며 육감적(감성적)근원
의 극복을  이성의 역량으로, 또는  내적인 윤리적 법칙의  역량으로(칸트),
또는 미학적, 예술-창조적  활동(쉘링), 또는 "절대적 이상",  "세계정신"(헤
겔)의 구현도구로 문화를  이해했다. 둘째, 진화와 진보의 일반법칙에 예속
되고, 끊임없이 상승선이 발전되는,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 인류문
화라는 관념에  예속되었다. 셋째, 모르간과 테일러를  제외한 맑스 이전의
문화개념상 특징은 물질적 기반을 무시 내지 과소평가했다는  점이다. 모두
들 문화를 신에 의한 섬광에 귀결시켰으며, 이 개념에  단지 정신적인 발휘
와 인간의 업적, 다시  말해 과학, 도덕, 예술, 철학, 법  등만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19세기말까지 "문화"의 개념은 철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
나, 20세기 이후 과학문명의 급진적 발달결과로 야기된  학문적 분화현상이
문화부분에도 파급되어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17세기이래  보다
더 실험적이며, 물질적  생활과 밀접히 관계된 수많은 새로운 과학이  태동
하기 시작하여 활발히 발전됐다.  이들은 인류학, 인종학, 사회학, 사회심리
학, 인종심리학, 인구통계학, 정신분석학, 증후학, 정보학 등으로, 이들이 바
로 인간현상을 연구하기 위한  새롭고 다양한 형태의 자세로부터 문화개념
을 풍부하게 살찌우는  창조적 기여자들이 된 것이다. 지금부터 이들이  어
떠한 형태로 문화학 발전을 촉진시켰는지에 대해 구체화한다.
 인류학은 인간의 출처와 진화 및 인종형성에 관한  학문으로써, 문화발생
과 생물학적 근거에서 문화를 해부해왔다. 인류의 근원  및 원시사회연구에
몰두하면서, 문화학(테일러, 모르간  등)에서의 경향은 다양한 민족의  신화
학 및 인종학들에 의한  인류의 본성과 전지구상에서 원시사고의 동일성을
확인한 후, 출토된 인류의 물적 기념비 및 다양한  민족의 신화학과 민속학
들이 유사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결론도출은  결국
인종차별주의, 민족주의,  식민주의, 그리고  문화의 이상에 적대된  사회적
사고경향에 대항한 투쟁기반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게 되었다.
 인종학은 세계종족, 인종집단 및 인민, 그리고 이들의  혈통 및 이주문제,
문화/역사적 상관관계, 생활관습과 문화적  특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써 과
거와 현재 문화의 엄청난 다양성과  풍부한 인식 및 정신적 존재로써의 인
류의 물질적/정신적 제성과와 그리고  이와 별도로 크고 작은 모든 인종과
관계를 맺도록 이해성과 존경심을 가진 사람들을 가르쳐 왔다.
 만일 다양한  면에서 인류학과 인종학이  자연과학처럼 인류의 생물학적
징후에 의존하면서  문화로 "나아간다"면, 통일적 체계로써의  사회에 관한
학문인 사회학은 생물학과 관계하지 않는다. 사회학은 국가, 계급, 계층, 사
회계층, 상당규모의  사회집단과 같은 인류의  단일구성요소를 연구하지만,
인종학적 규범에 의한  연구가 아닌, 근대사회에서 그들의 지위에 따른  역
학관계를 연구한다. 구소련에서 사회학은 상당기간  거짓학문으로 간주되었
을 뿐만 아니라  사적유물주의에 대립되었다. 사회학과 문화학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사회학이 사회속성상 사회적 비단일성에 따른 정신 및 문화적 출
현의 사회적 전단계를 정확히  이해하도록 문화학을 돕는 역할을 한다. 즉,
귀족문화, 프롤레타리아문화, 대중문화  등과 같은 이러한 문화적 개념들이
사회학과 관계하고 있다.
 매사회집단에 속해  있는 구성원의 행동법칙과  활동을 연구하는 학문인
사회심리학은 그의 증거자료들을 통해  무화학적 연구에 지대한 역할을 하
고 있다. 사회성원의 행동법칙 및 활동의 문화적 발현이  일정한 심리적 음
조로 채색되기 때문에 문화연구도 이에 숙고 없이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농촌거주자의먹거리가  제공되는 토지와 자연과의 특수관계, 그
리고 특수한 농촌심리학의 지식과  이해 없이 농민문화의 특수성을 설명하
기란 불가능하다. 특히  민족문화 연구를 위해 타종족학 자료의 이용은  특
히 유용ㅎ.
 인종심리학은 개별인종, 종족  및 국민의 심리적 기질이 갖는 독창성  및
어떤 민족이 되풀이할 수  없는 "영혼"에 관해 납득하면서, 헤겔, 굼볼리트
등이 철학적  구조로 제고시켰다. 러시아  인민의 문화-심리적  성격묘사의
모형은 베르쟈예프가  제공하였다. 인종심리학적  연구는 어떤  민족문화와
민족문화 창시자의 심리적 특수성에서 나오는 독창성의 설명을  돕고 있다.
예를 들면,  흑인음악, 알젠틴의 탱고(tango),  폴투갈의 파도(fado), 한국의
창등은 이들 인민의 민족적 성격에 대한 숙고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다.
 인구통계학은 주민과 사회적 요인에  따른 주민의 발전법칙에 관한 학문
으로써, 이 역시 문화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사실 신체적으로 퇴화
하는 유전인자를  지닌 인종집단이나 민족은  잘못된 사회조직과 불합리한
관리 및 경영의 결과로 파탄형태의 문화몰락을 겪을 수  있다. 소수 인민문
화와 마야,  잉카와 같은 모든  고대문명의 사멸은 식민지화, 전쟁,  지나친
착취, 자연적 재난, 전염병, 알콜 등에 의해 초래된 결과이다.
 정신분석학(프로이드 학설)은 유능한 오스트리아의 의사이며  심리학자인
프로이드(S. Freud) 및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창조된 심리적 학설로써  근
대 문화학 형성에  특별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프로이드학자들의 주된  관
심은 무엇보다도 예술작품의 기본적 메카니즘을 구성하고 있는 무의식적인
정신적 과정과 동기이다.  사회 및 철학-인류학적 학설로서의 프로이드  학
설은 문학과  조형예술에서, 특히 초현실주의의  다수 근대 예술적  학파의
이론적 확증을 위해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증후학 내지 기호론은 20세기초 문화이론을 살찌운 제학문의 성격묘사를
간략히 하면서, 증후의 본성과 체계, 주로 자연 및 인위적 언어의 제본성을
연구함에 있어 증후학에  의존해야만 했다. 이 최신학문은 때때로 모든  것
을 이해하는 귀결권을 주장하면서 극히 급진적으로 문화학에  개입했다. 증
후학적 접근은  언어학, 영어, 연극이론 및  다른 예술형태에서 사회과학에
보급되었다. 증후학(기호학)적 접근은  언어학, 문학, 영화, 연극이론 및  타
예술형태에서 사회과학에 보급되었다. 따라서 정보와  인공두뇌학은 증후학
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정보와 인공두뇌학은 근대 문명화의 주요  원동력
중에 하나가  되고 있는 정보의 구성,  특성, 접수의 일반법칙,  보존, 전송,
가공 및 보급에 관하나 최신식의 일개 부문이다.

 2. 20세기의 제학파

 문화학파들의 출현과  이들의 경향은 새로운  과학으로 등장한 경험과학
(empirical science)의  방법으로서 전통적인 제성과로 충족된  이전의 지식
기반 위에서 형성됐다.  이같은 일반 풍토속에서 학자들은 문화의 가장  내
밀한 기초를  찾으려 노력했으며, 문화의 본질정의,  가장 일반적인 문화의
발전법칙을 밝히려 노력하였을 뿐아니라 이들은 문화이론 및 학자자신들의
고유한 문화학의 일반이론 창조에 대한 권리소유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따
라서 전문적 연구관심 반영과 일정한 학문적 "특성"을 지닌 다양한 학파들
이 출현하게 되었다.
 인류가 창조한  모든 물질적, 정신적  세계의 풍요를 흡수한  문화개념의
다양한 측면과 복잡성을 반영하는 문화에 대한 시각의 다양성이 문화의 일
반이론 창조 및 독자적  학문으로써의 문화학 창조과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과제가 최초로  저명한
미국의 문화학자 화이트(Leslie A.  White, 1900-1975)에 의해 보편적 이론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그는 1940년대에 이미 형식화된  지식 부분에 필연
성 근거를 부여함으로써  일부 학문의 보편성 이론의 기반을 놓은  것이다.
화이트는 문화학이 다른  사회과학보다도 질적으로 월등한 인간성취단계를
제시하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그는 어떤 통일적 문화를 물질과 정신적  요
소의 자동조절장치로 보았으며,  문화발전의 지대한 의의를 증후학  응집력
의 영향하에서 얻은  제상징에 돌렸다. 화이트는 단순한 기술 및  에너지측
면에서의 문명화와 마찬가지로 문화발전의 일반법칙을 거의 이같은 물질적
공식으로부터 형식화하고 있다. 즉, 문화는 주민의 정신에 질적으로 억제된
에너지를 증대시키듯이 또는 에너지  관리 수단 속에서 효율성이나 절약을
증대시키는 방도를 따르던지 아니면 다른  것과 함께 한 방도를 따라 앞으
로 전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견해 속에서 화이트는 문화를  미래지
향적 학문으로 보다 더 폭넓게 구별하였다.
 20세기 중엽에 출현한 문화학적 학파를 거시적으로 분류하면 4개로 집약
된다. 이를 구체화하면 다음과 같다.

 1) 사회-역사적 학파

 가장 오랜 고전적 전통을 지니 사회-역사적 학파는 칸트, 헤겔, 굼볼리트
와 같은 역사 및  철학자들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이 학파의  대표적 인
물들은 서구의 스펭글러, 토인비,  러시아의 다닐롑스끼(Danilevskii N. Ya)
이다.
 스펭글러(Oswail Spengler, 1880-1936)는 독일 철학자이며, 문화사학자로
써 "유럽의 종말"(1921-1923년, 2권)의 저작가이다. 이  책에서 그는 문화의
대체물로 역사를 꼽고 있으며, 문화로 된 모든 역사는  내부적 통일로 굳게
결합된 어떤 유기체의 모습으로써 다른 것과 특수하거나 유사한 유기체 형
태로 제시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인류 전체적 계승문화의  생존
을 부정하고 있다.  그가 인류사에서 분류한 문화의 구분은 총  8종인 에집
트, 인도, 바빌론, 중국, 그리스-로마, 비잔틴-이스람, 서유럽, 마야문화이다.
그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약  1천년 기간중 온갖 문화적 유기체가 쇠퇴했으
며, 문화 유기체들간의 온갖 깊고 풍부했던 상호협력이  불가능해졌다고 지
적하고 있다. 모든 문화가 문명화로 퇴화중인데 이는  창조적 충동으로부터
불임으로, 발전으로부터  정체로, 정신으로부터 지성으로, 영웅적  활동으로
부터 실용적 작업으로 이전하고 있다. 이러한 이전은  그리스-로마문화에서
그리스 찬미기(모방기,  기원전 3-1세기)로의 이전,  또한 지난  과거세기의
서유럽문화를 위한 이전이다.  이어서 문명화의 도래와 더불어  대중문호가
유세하기 시작했으며, 예술적이며  문학적인 창작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
게 되었고,  비정신적 기술과 스포츠에 지위를  양보하명서 이전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사멸에 대한 유추에 따라, 그의  묵시록에서 밝힌 20세기 "유럽
의 몰락"예측에서처럼  문화가 새로운  야만인들인 나치에 의해  사멸됐다.
스펭글러의 다소 보수-민족적 이상이 독일 파시스트 관념론자들에 의해 폭
넓게 이용되었음도 증명되고 있다.
 토인비(Arnoli Toynbee, 1889-1961)는  영국의 사학자이며, 사회주의자로
써 12권의 "역사연구"(1934-1951)를  저작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스펭글러
의 영향없이 동일하게 문명사회라는 용어를 "문화"의 동의어로 사용하면서
문명사회의 끊임없는 변화 사고  속에서 인류발전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
력했다. 토인비는 처음에 유전적으로 상호 관련성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균
형적이며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문명사회"의  총체로써 역사를  식별했다.
그러나 모든  문명사회는 고양된 상태로부터 의기소침,  붕괴, 파멸로 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 후  그는 세계적인 종교(기독교, 이스람교, 불교 등)에
의해 양육된 제분화는  일개의 인류사가지의 본체라는 것이다. 이 모든  문
화는 통일경향을 가지므로 개별문화는 통일의 작은 조각이다.  따라서 범세
계적인 역사발전은 지방문화의  일치로부터 단일공동 인류문화로의 전진형
태 속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8개 문명사회로 분리시킨  스펭글러와는
달리, 보다 더  폭넓고 근대적인 연구에 의존한 토인비는 20개에서  자중에
가장 완전무결한 발전을 이룩한 13개에서 멈추었으나 30개까지로 문명사회
를 계산했다.
 그리고 신적인  "예견"과는 별도로, 토인비는 개별적으로  특출한 개인과
"창의적 소수"를  역사의 원동력으로 간주했다. 창의적  소수는 외부세계와
정신적 필요성에 의해 해당문화에 투입되는  "부름"에 응하고 있으며, 그의
결과로 어느 사회든  진보적 발전을 보장하고 있다. 이때  "창의적 소수"는
자신을 위해, 그리고  훌륭한 지도자들의 고려로 충원되어 그의 조력에  의
존하고 있는  수동적 다수를 인도할 것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창의적 소
수"가 자신의 신비적  "생활을 위한 충동"을 실생활로 구현하는데 있어  무
능력이 확인될 때,  그리고 역사적 소명에 응답할  수 있는 무능력 확인시,
창의적 소수는 권위적이  아니, 무력으로 자신의 권력을  부착하는 "국가엘
리트"로 탈바꿈한다. 따라서  소외된 국민다수는 결국 외부  적과 공동으로
이 문명사회를 파괴하는  대내적 프롤레타리아트가 된다는 논리다.  토인비
는 인류의 점진적 발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무엇보다도 정신적 완성에서,
향후 단일  공동 인류적 종교가 될  종교에서 발전의 근원을 찾았다.  그는
저서를 통해  인종차별주의와 "유럽  중심주의"를 객관적으로  논박하면서,
민족해방운동에 공감을 표시하고, 모든 인민들간의  상호협력과 상호이해를
지지했다.

 2)자연주의적 학파

 자연주의 학파의 특징은 문화를  상당히 과장하면서 문화의 생물학적 구
비조건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이 경향은 원칙적으로 발전을 과소평가  하
면서, 인간의 심리학적 본질로부터 거리를 두고 문화를  설명하려 노력하는
의사, 심리학자, 생물학자들을 연합시키고 있다.  이들에게 문화는 동물세계
에서의 순응성과 동일하게 인간의 주변환경 적응으로 생각하고  있다. 생물
학자들 이회에 자연주의학파 형성에 프로이드학설(정신분석학)과  인성학이
현저한 역할을 했으며, 말리노프스끼(B. Malinovskii)가  창조한 "문화의 기
능론"도 자연주의에 합류했다.  보다 구체화된 이해의 목적에서  인간에 대
한 생물학적 견해로 연합된 이 학자들의 개념을 숙고한다.
 프로이드(Sigmond Freud, 1856-1939)는 오스트리아의 신경병리학자이며,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로서 정신분석학과 프로이드학설의 창시자이다. 프로
이드학설은 문화현상과, 창조적인  과정의, 그리고 전체적인 사회발전의 통
일을 위한 심리학적 개념들을 적용하며 노력하는 학문적  경향이다. 프로이
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심리분석을  민속학, 역사, 종교 및 위대한 활동가의
경력영역으로 옮기면서, 사회적  스크린에 개인적 심리의 투영으로  문화를
분별하고있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문화가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 첫째,  자연의 제역량
획득 및 인간의 필요물 충족을  위한 자연의 분리취득을 위해 인간에게 허
용되고 있는 인간에 의해 축적된 모든 지식과 재능이다. 둘째로, 인간적 상
호관계 정리를 위한, 특히 획득되고 있는 복리의 분배를  위한 모든 도구들
이다. 이 정의에서 제생물학적  동기가 우세하다는 것을 쉽게 말하고 있다.
즉, 필요물 충족을  위한 자연의 복리를 획득하는 것과 생존의  제이해에서
복리를 나누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신념이 강한 무신론자였으며, 집단 노이
로제의 "특수형태"로써 종교를 주시하면서 종교를 반대하였다.
 다른 측면에서 프로이드는 문화는 자연적인 욕망의 만족으로부터 창조적
거부로, 개인의 자유로운 내부세계에 대한 사회적 억압의  독특한 메카니즘
으로 보았다. 유사하다...모든 문화는  갈망의 강요와 금지 속에서 이룩되기
를 강요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강요의 폐지이후 인간적 다수가 생활복리의
자연적 취득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노동의 집약성을 지원할 태세를 갖추게
될지 여부는 더 이상 알지 못한다. 무자각적 갈망과  현실의 요구간에 불가
피한 타협결과로써 문화에 대한 유사시각이  박식한 사람들 및 "이성", "정
신"과 "신"에 의한 인간의 생활근거 극복으로써 문화를 사려한 칸트 및 기
타 과거의 철학들을 상기케하고 있다.
 무자각적 애착 중에 종족보존 본능과  성본능이 모든 사람의 기본 및 통
일적 사항이 된  인류의 원동력을 프로이드는 "리비도"(libido)로 표현했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리비도"는 인간적 행동의  주 지도력이며, "리비도"는
출구를 찾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교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소위 "승화"방도
로 주의를 바꾸면서 개혁된  형태에서 사회활동과 문화창조를 지향해 가고
있다는 견해이다.
 프로이드 학설은 자주 다른 문명사회발현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이용되고
있다. 즉 이는  "리비도"가 제기록으로 변형되는 스포트 및  성적 에너지는
ㅈ은이들에게 무엇보다도 행위의 혁명적 특성에서 출구를 찾고있는 제정책
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집단적 승화행위로 간주할 수 있는 경우의  예를
들면, 1968년 프랑스에서 "신좌파"의  출현, 20-30대 연령층에 의해 수행된
쿠바 및 라틴아메리카적  혁명이다. 근래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이  테러행위
를 통해 자신의  "리비도"를 실현시키고 있는 경우도 자주  목격되고 있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한마디로 생물학적 기반을 갖고 잇는  개별인간들의 오
랜 심리갈등이 사회적  무대에 왜곡되면서 아주 다양한  문화적 측면(윤리,
예술, 종교, 국가, 법 등)의 주요 원인 및 내용이 되고 있다. 한편, "배제"는
심리적 추이와 정반대의  승화형태이다. 적극적인 유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심리의 방어적  메카니즘인 "배제"는 훈육과 자제 속에서 자기표현을
찾아내고 있다.  이 세계에서 많은  위대한 예술가, 배우들, 시인들의  삶이
통상 "승화"속에서의 외적  표현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빈번히  석방, 방종,
허례로 부양시키려는 특색을 이루어 왔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프로이드학설은 맑시즘을 가장 진지한 이념적 경쟁관계로 보고  있다. 실
로 맑스주의자들이 인간을 사회주의적 현상으로  취급한다면, 프로이드학파
는 다수의  관점에서 인간을 생물학적  현상으로 다루고 있다.  프로이드는
유물론자, 무신론자, 어떤 이념적 신화의  반대자로서 맑스주의에 관계했다.
존경과 비판의 갈림길에서 프로이드는 결국 결별했다. 이에  대해 프로이드
는 "맑시즘의 역량은 아마 그의 역사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미래예보에
근거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지적이며,  윤리적, 미학적 목표
에 인간의 경제적 제관계가 미치고  있는 불가피한 영향의 명백한 증거 속
에서 명백하다"고 단언했다. 이에 더하여  포르이드는 "경제적 제동기가 사
회에서 인간의 행위를 유일하게 규명하고 있다고 예측해서는  안된다. 동일
한 경제 조건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 인종들, 인민들이 저마다 자신을 이끌
고, 경제적 제동기의 독재를 배제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의심의 여지가 없
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원시욕구, 자신의 자기보존본능,  자신의
도전노력, 애정욕구 게임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으며, 자신의 희망이 채워
지지 않을 수 없고, 불만족을 회피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맑시즘 비
판 속에서 프로이드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뜻밖에 발견된 샘과
같이 "맑스의 저술들은 보다  오래된 경전들보다 제모순 및 어두운 곳으로
부터 보다 덜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성서와 코란의 위치를 점령했
다"고 비판했다.
 프로이드의 문화개념들이  너무나 융통성이  없고 직선적이며,  과도하게
성욕에 찬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따라서, 비중 있는 프로이드 추종
자로써, 스위스의 심리학자이며, 문화이론가인  융(Karl Jung, 1875-1961)은
그의 저서  "제 변형과 제상징"에서 프로이드학설적  범섹스를 비난하면서,
통상 심리적 에너지로써의 개념으로 "리비도"를  해석하고 있다. 융은 개인
적 무의식심리를 제외한, 인간의 심리 속에는 집단적  무의식층이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과거 세대의 경험을 반영하여 뇌의 구조에  형성화
된 집단적 무의식ㅌ을 말한다. 아울러 과거세대의  경험은 소위 "문화적 원
형(archetype)"들 속에 보존되고  있는데, 이들은 세계에 관한 오랜 옛날부
터 꾼, 문학작품들, 그리고  인간정신생활의 다른 다수 영역에서 자신의 표
현을 찾고있는 세계에 관한 오랜 과거부터의 관념들이다.
 프로이드와 융이 문화의 제근원을 인간심리에서 찾으려 한  것과는 달리,
동물세계에 주의를 돌려 보다 심도 깊게 연구를 한  생물학자들이 있다. 오
스트리아 동물학자  로렌츠(Konrad Rorents)외 1903년에  네델란드학자 찐
베르겐(Tinbergen. N), 독일학자 후리쉬(Karl  Von Frish, 1886-1982)가 공
동으로 저작한 자연 조건 속에서 "풍습과 동물들의 심리"는 인성학에 의한
인류에 대한 축적된 관찰로 연구방향을 돌리면서 "인류문화의 본능적인 기
반이론을 연구한 것이다. 동물들의  확고한(동요 없는)행위 속에 반영된 동
물들의 제본능은 인류문화의자연적 원천을 강조하고 있는 인성학자들에 의
해 동일시되고 있다. 로렌츠에 의하면, 동물행위의 낡은 관행들은 자연적인
도태결과로 만들어진  문화적 제의전과 인간의  제규범이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성학자들 중에서 후리쉬는 동물과 곤충의 개별모습에  의한 정보
이전방법에 상당한  주의력을 쏟아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겼다. 즉,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그들의  "언어"를 연구한 것이다. 동물적 근원을  지닌 인류
문화의 직접적인  관계가 바로 이것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진화론의
거두 다윈 역시 인간행위의 일정학  제특성 및 특질이 동물 선조로부터 계
승되고 있다고 보았으며,  엥겔스도 이에 동의했다. 다시 말해,  "동물계 출
생의 인류기원사실이 동물본래의 특성으로부터 결코 완전히 해방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문제는 크거나  적은 등급 속에
이들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여부에 관해서만 말이  될 수 있다." 특히 인성
학은 이 상황을  확인하는 다수 자료를 축적했다. 동물과 인간계를  결합하
고 잇는 문화의 어떤 노선을 믿기 어려운 만큼,  동물계와 복잡한 인간계간
의 분열이  크고 깊다. 때문에 동물에게는  자신의 종개념 문화를 완성  및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결하고 있으며, 세대간에 문화를  창조적으
로 이전할 수 있는 능력을 결핍하고 있다.
 폴란드  출생의 영국학자  말리노프스끼(Bronislav Kasper  Marinovskii,
1884-1942)는 소위 인종학내의  기능적 학파의 창시자로서 "원시적"종족들
을 연구한 사람이다. 말리노프스끼의 기본적 주이념은 문화가  처음에 최소
한도의 생물학적 인간의 요구에 응답함으로써 생겨났다는 것이다.  예를 들
면, 음식물, 주거, 종족지속과  같은 요구이다. 근대적 문명사회가 말리노프
스끼에게  역사적으로  복잡한  조직  및 사회생활의  조절형태인  사회적
institute의 복잡한 조직체계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institute는 생
리 및 심리적  요구와 같은 일차적 요구와  같이 2차적으로도 특히 정신적
요구의 만족에 따라 정확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말리노프스끼의
주장은 문화의 주요 과제 중  하나가 사회적 경험의 총화로 이루어진 바로
2차적 요구들을 강화, 발전시켜 후손들에게 이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리고 문화간의 차이는 바로 이  제 2차적 요구들의 만족 방법들 속에서 차
이가 생기는 것이란 주장과 함께, 생리 및 심리적  제요구는 모든 사람들에
게 동일한 것으로써 문화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말리노프스끼는 인류문명사회  생존의 기본조건으로써  사회생활 조직화
공식의 "균형" 및 institute의 조화를  중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institute
개념을 연구한 최초 인물 중 한사람일뿐만 아니라 인류학과 사회학에서 공
히 성공적 업적을 남겼다. 총체적으로 말리노프스끼가 제기한  단일적 자체
조절 오르가니즘(유기체)을  통한 문화의 이해는 문호학내의  자연주의학파
와 하기에서 검토될 사회학적 학파를 접속케하고 있다.

 3)사회학적 학파

 사회학적 학파는 자연발생적 또는  신에 근거한 인류정신 발전사의 시가
에서 문화의 출처를 찾고 설명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물학
적 과거사와 심리에서도 문화를 근거를 찾고 설명하려 하지  않고, 단지 인
류의 사회적 본질과 구조에서 문화의 근거를 찾고 설명하는 학자군을 말한
다.  따라서 이들의  문화론적 관심의  핵심에는  바로 사회구조와  사회적
institution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호가파의  대표적 인물중 하나인  에리오트(T. S Eliot, 1888-1965)는
영,  미시인이며,  데카당스적  경향의  비평가로써  "문화정의를 위한  소
고"(1948)를 저술한 분이다. 그는 "문화 밑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류
학의 용모 속에 소지하고 있는  것을 기억한다. 다시 말해, 한 장소에 살고
있는 해당 인민의 생활모습이다. 우리는 그이 예술 속에서  이 문화의 발휘
를, 그의 사회적 체계속에서 이 문화의 종교를 봅니다. 그러나 함께 포착한
이 사물들은 비록 우리가 편의상  장소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
지만 문화를 구성하지  않는다. 부분에 지나지 않는 이 사물들을  해부실에
있는 인체처럼 문화가  절단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신
체의 다양한 구성부분들의 수집보다 더 큰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것과 동
일하게 문화도 예술, 관심  및 종교적 신앙의 수집보다 더 큰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20세기 중엽 유럽문화의 몰락을 확인하면서, 옛도덕 및  지적으로 풍부한
문화의 상실을 확인하면서  문화에 의한 보편적 표준화  및 협소한 실용적
생화로의 접근결과로  이룬 것들이 독특한 근대  "대중문화"의 제특색이다.
엘리오트는 인류의 건설적인 에너지  소진을 문화적 엘리트의 제협력 방도
로 극복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플라톤(BC 427-347)으로 거슬러 올라
가는 엘리트이론(무엇보다도 정치적인)은  그후 이태리의 마키아벨리, 영국
의 카르렐리(T. Karlel'),  독일의 니체 등과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발전됐
다. 20세기 엘리트이론의 최고 옹호자는 이태리사람 팔레토(Vilfredo Paleti,
1848-1923)이다. 그는 역사를  권력지향 엘리트의 항시적 투쟁의  투기장으
로 식별하였다. 그는 엘리트에 속해있는 공적을 정치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영역에서도 강조했다. 엘리오트는 토인비와 유사하게  사회를 정신적인
엘리트와 무지한 대중으로  분리했으며, 더욱이 엘리트만이 문화창조에  유
능하다는 입장이다. 엘리오트에 의하면, 창의적 엘리트는 절대로 어떤 일정
한 계층에 속하지 않고 있으며,  사회적인 "바닥계층"으로부터 항시 보충되
어야 한다. 그러나  창조적 엘리트의 생성을 위해 부유층과 특권층에  소속
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렇게 재능 있는 타계층 대표들이 이같은  형태로
문화적 과정을 움직이면서 항시적으로 엘리트들에게 새로운 창조적 에너지
를 불어넣고 있다는 것이다.
 사화학파의 거물중의 한사람으로서  러시아계 미국인 사회학자이며 역사
가인 쏘로낀(Pitirim Aleksangrovich  Sorokin, 1889-1968)은 과거 우경  사
회혁명당원으로서 꼐롄스끼의 비서 및 빼뜨로그라드대학 교수를 거쳐 국외
로 추방당한 후 미국의  하버드대학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사회학 권위
자가 된 사람이다. 쏘로낀은 사회의 제지도 역량으로서의  정신적 엘리트이
론을 다루면서, 문화발전을 지닌 전사회적 과정의 변함없는  관계를 강조했
다. 그의 수많은  논문중에서 "사회와 문화의 역학"(1937-1941)등은 인류사
를 일정한 단일 가치와 의미로  결합된 통일적 사회 문화적 초체계의 다양
한 단계 내에서의 교체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역사적  과정을 직선의 전진
운동이 아닌, "주기적 순환성의 변동",  즉, 상대의 문화유형으로 흐르는 규
칙적인 순환에 의해 진행되는 교체로 보았다. 아울러 문화유형  중 모든 유
형은 현실 및 현실인식방법과의 고유관계를 근저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쏘로낀이 분리한 문화유형은  첫째, 감각적 문화로써, 특히  현실적이며, 쾌
락적 관점을 지닌  현실의 경험적, 감각적 지각의 평가가 우세하다는  것으
로, 어떤 절대자인 신에게 숭배, 즉, "신앙의 진실"과 자기단념(자기거부)의
진실이 우세하다. 셋째, 어떤  감각과 관념적 유형의 통함을 대표하는 관념
적 문화로써, 여기서 감각은  직관으로 균형을 잡고 있으며, 신념은 학문으
로, 경험적 지각은 직관으로  균형을 잡고 있다. 이는 "인간의 지혜에 의해
이성의 진리가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같은 문화유
형의 독특함이 법, 예술, 철학, 과학, 종교,  사회적 관계의 구조에서 구체화
되고 있으며, 급진개혁과  급진개혁의 교체가 위기, 전쟁,  혁명을 수반한다
는 것이다. 그는 유럽문화와 예술사를 상세하게 분석하면서, 통계적 방법에
의한 제도를 포함하여,  기원전 3세기부터 붕괴 및 몰락기인  AD4세기까지
의 희랍-그리스문명사회의 "감각적 문화"개화기와  관련시켰다. 그후 5세기
부흥기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서구문화도 동일하게 연관시켰다. 즉, 서구
그리스도의 중세초기 문화는  이상론적 유형과 관련시켰고, 부흥기의  문화
는 "관념론적" 유형과  관련시켰다. 그는 절대적 이상, 즉  신을 상실한, 감
각적 쾌락과 소비를 향한 근대문화의 위기를 물질적 이데올로기 발전과 관
련시켰다. 근대문화의 위기  지적과 함께 그가 간파한 탈출구는 절대적  종
교관념들이 지닌 "이상론적"문화이다.
 사회학자로서 쏘로낀은  "사회적 이동성"과 "사회적 형성층"이론을  창설
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회적 이동성"을 동의, 사회에서는 한
계층에서 다른 계층으로, 사회적  수준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그리고
거꾸로 개별적 운동이 항시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이 경우 "상승" 또는 "하
향적"수직 이동성과 수평적 이동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즉, 아주 동일한 사
회적 수준으로 개체의 이동(주거장소 및 작업성격의 교체시), "국제적 세대
간의 민족적"이동 및 "대내적 세대간의 민족적" 이동성도 감지했다. 사회적
이동성의 개념은  어떤 사회의  "개방성"과 "폐쇄성"단계를 특징짓고  있을
뿐 아니라 자유와 민주수준의 지표라는 입장이다.
 사회적 형성층 이론이 다루고 있는 것은 엄격한 적대적  계급이 아님, 교
육, 심리, 보장, 일상생활의 양상 등의 인식에 따라 분리되고, 적대상황에서
가 아닌 상호협력의 상태에 있는 사회계층의 동태적 체계를 식별하는 것이
다. 따라서 사회이동성 원리와 같이 사회형성층 이론은 본질적으로, 근대사
회에서 야기되고 있는 맑스주의적  과정이해에 대립되고 있기 때문에 사적
유물론에 의해 격렬히 거부당하고 있다.
 베버(Alfred Veber, 1868-1958)는 독일 경제학자이며 사학자로서 "역사문
화의 사회학"(1927)을 통해 역사분열의 고유이론을 제기했다. 그는 이 이론
을 사회적(사회적 기관의 형성), 문명사회적(진취적인 학문, 기술발전, 문명
의 통일로 이끌고  있는), 그리고 문화적(창작, 예술,  종교, 철학)경로의 다
양한 법칙에 따른 상호 관련된 결과로 설명하고 있다.  베버의 논리에 따라
실례를 든다면, 미국에서는 근래 2세기간 문화적 손실속에  사회 및 문명적
과정이 우세했으나, 역으로  19세기 러시아에서는 사회적 보수주의와  과학
기술적 후진성의 배경 위에 러시아문화의 황금기가 출현했다.  또한 유럽국
가들은 3과정간의 일정한 "균형"을  유지했으나,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국가
들은 경제 발전적 결과 속에서  고작 2차대전 이후에야 전례 없는 빠른 문
명적 과정의 발전을  이룩했다. 베버는 어떤 국가의 경우를 막론하고  시대
의 특수한 외모를  본질적으로 국제화된 사회적 또는  문명적 요인이 아닌
문화적 요인과 연계시켰으며, 제문화운동의 창조자가  불합리하지만 정신적
인 지적 엘리트들이라는 것이다.
 파슨스(Talcott Parsons, 1902-1979)는 미국의  사학자로서, 사회학부문에
서 소위 구조-기능적 유파를  창조한 사람중 한 사람이다. 간결한 그의  문
화이론은 다음과 같이 귀결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문화"개념으로 통일시
키고 있는 사람들의 모든 정신  및 물질적 획득물은 사회와 고유 문화적 2
체계의 수준에서 사회적으로 조화된 행위의 결과이다. 이들중  사회적 체계
와 더 낮은 사회적 기저에는 일정한 사회적 환경 조건 속에서 자신의 생물
학적 자기보존 목표들을 지향해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활동이 자리
잡고 있다. 첫째로, 목표에 적응하려는 노력, 둘째로, 자신에게 제시된 과제
에 도달하려는 노력,  셋째로, 통합하려는 노력, 즉  다른 개체들과의 통일,
넷째로, 이미 찾은  사회적 구조의 재생산 노력, 다섯째로, 야기된  모든 신
경 및 신체적 긴장제거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파슨스에 따르면, 사회에서
이들 모든 목표는  역사적으로 조성된 사회적 institution들과  일치하고 있
다. 즉, 경제적 적응의 일치,  정치적 목표달성의 일치, 합법적 institution들
과 관습의 통합에서의 일치, 신앙체계의 도덕과 사회화  기관들의 긴장해소
를 위한 휴식산업구조의  재생산상의 일치이다. 두번째로, 생물학적 전제조
건을 이미 상실한 보다 상위의 문화체계를 위해 사회체계의 기능적인 속성
으로 인한 언어와  같은 메카니즘의 존재인 상징성, 그리고 다른  상징체계
들 즉, 보편적으로 인정된 가치 및 규범에 인간이 의존하는 규범성, 그리고
결국, 주의성이나 또는  주변환경의 강압으로부터 초래된 인간행위의  불합
리성 및 독립성이 사회와의 관계에 따라 조정 및  조절기능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문화는 인간에 의해 이들의 완성방향으로 항시 교체되고 있는 상징
및 규범의 복잡한 체계로 제기되고 있다.

 4) 상징적 학파

 상징학파는 아마 대중정보수단의  눈부신 발전결과로 생긴 근대학파중에
가장 "새롭고" 가장  영향력 있는 학파일 것이다. 일부  철학자와 사회학자
의 견해에 따르면, 이같은 결과는 근세 과학기술혁명으로의  변화에 기인한
"정보혁명"의 도래로 보고 있다.
 실로, 인간재능의 관점에서 문화를  관찰한다면, 언어적 상징 및 다른 제
신호형태로써 표현하기 위한, 적절하게 제시간에 그리고 여러  지역에 과학
및 예술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문화적 위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원시인은
말로(상징체계로)써 단지 가장  원시적인 단순사고를 표현할 수 있었을  뿐
만 아니라 목소리 도달거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역에서만 표현을 이
전할 수 있었을 뿐이다. 더욱이 음각회화의 출현이전까지  원시인은 자신의
정신 활동상을  영원히 후세에 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말의  발달과
표현예술 및 필기의 태동이 급기야 인간의 가능성을  막대하게 증대시켰다.
더욱이 교통수단과 인쇄술의 발달이  인간의 제가능성을 보다 더 확대시켰
다. 그러나,  20세기에 전신, 전화, 라디오,  영화, TV, 비디오 등을  폭넓게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사상과  정보의 이전능력은 실로 끝없는 상태
가 되었다.  신속한 전달체계의 급격한  변화와 상징적 사물의  전달형태의
풍요가 구두 언어적 전달에서  출판물, 육안, 시청각, 흑백, 유색, 스테레오,
음향기, 팩스, 천연 복사기와  같은 최첨단 기기에 이르기까지 급격히 변화
를 가져왔다. 음과 색깔기구 및 양적 지각 움직임의  풍요 속에서 전자수단
에 의한 세계적 형의 재생산  완성기를 눈앞에 둔 상태에서 사람들의 물질
적 독자성이 "제2의 현실적이며,  실용적인"측면이 강조되는 가운데 상실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있다.
 이같은 방식의 제진전이 결국  학자들을 사상적 측면의 혼란에 빠뜨리게
했다. 즉, 인류문화의 기원에는 오직 인간에게만 "지식"과  "상징"들을 창조
하는, 그리고 이를 인간의 시간과 공간에 전달하는 타고  난 고유의 재능이
있다. 아울러 위에서 열거한 과학문명과 최신과학의 발전도  이같은 견해를
부추겼다. 예를 들어  정보완성의 일반법칙들, 정보이전의 일반법칙들을 연
구하는 증후학, 정보학,  인공두뇌학의 발달이 이것이다. 이같은  문화학 부
문들의 발전을 통해,  과학은 마치 인문과화과 같이  전자계산기와 "예술적
지성"창조영역에서 실제적인 적응방도를 찾았으며,  기술세계에서도 직접적
인 출구를 획득했다.
 상징주의학파의 대표로는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그리고  대중매체 분야에
서 종사하고 있는 카시러와 레비-스트라우스를 꼽을 수 있다.
 카시러(Ernst Kassirer,  1874-1945)는 독일 철학가로써,  "상징적 제형태
철학"의 저자이다. 그의  문화개념 기조내에는 어떤 언어에  의한 대중적이
며 체계적인  부단한 상징화의 인간적  재능이 부각되어 있으며,  증후학의
우세한 견지  속에서 문화에 접근하고  있다. 그는 문화의제근원을  칸트나
헤겔처럼 어떤 신적 영혼의 깊은 곳에서가 아닌,  프로이드나 인성학들처럼
인간의 본능에서도 아닌,  말리노프스기처럼 인간의 필요에서도 아닌, 파슨
스처럼 인간의 사회적 조직화에서도 아닌, 일정한 상징들로  현실을 기술하
면서, 우리세계를 에워싸는  어떤 인위적 세계 "창조"를 위한  인간의 재능
속에서 문화의 근원을 찾고  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말, 과학,  예술, 종
교, 신화 등은 인간이  생활하며 고생하고 있는 상징적 영역(사회)구성체의
본질이다. 동물과 달리  인간이 주변에 그의 상징적 체계를 소유하고  있다
는 이  상황이 바로 인간생활의 특성을  이루고 있다. 인간은 다른  생물과
비교하여, 마치 현실의 새로운 차원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으며, 단순히 육
체 속에서 생활하지  않고, 상징적인 우주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 같다. 언
어, 신화, 예술,  종교 등의 모든 인간의 정신적인 발현은  우주의 일부분이
다. 이들은 실과같이  빽빽한 상징적 그물(망)속에서 엉켜 있다. 그물이  비
록 인간의 경험을 축적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현실을 차단한다. 따라서 사
고 및 경험에서 우리의  모든 정신적 진보는 단지 자연인의 "상식"을 위해
보다 더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이 망을 만드는  것에 봉사하고 있다. 인
간의 상징적 활동은 인간을 위한 물질적 현실성이 증대하는만큼 제 2의 무
대로 부상하고 있다.  세계적 범주에서 지각의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고  있
지만, 문명화된 인간은 이미  물건을 직접 소지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
으며, 인위적 수단,  언어형태, 예술적 형상들, 신화적 상징들,  종교적 의식
들의 도움과 같은 것들과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카시러는
인간을 "사고하는 동물"이  아니라 "상징적 동물"로 부르자고 제안하고  있
다.
 레비-스트라우스(Claude Levi-Straus)는 프랑스의 민속학자 및 사학자로
서 구조적 인류학의 창시자이다. 구조적 인류학의 기조에는  원시종족의 문
화 및 사회적 구조의 분석시 구조저인 언어학과 정보학의 일부방법 이용이
밑에 깔려 있다. 베리-스트라우스는  수많은 "제3세계"국가들내에서 민속학
적 연구를  수행하면서, 유럽중심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거부하고, 야만인
개념의 모든 허위성을  제시하려고 노력했으며, 신석기 시대에 기술 및  공
업적 진보의 기반을  세운 "원시적"인간 사고의 독특함과 역량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레비-스트라우스는 "원시적  인민이 인민들에 의한 자신의  발전
에 뒤쳐지거나 정체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어떤
영역에서 문명화된 인민의 업적을  훨씬 능가하고 있는 발명열이 생활에서
의 발명품 구현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강변하였다. 그는 근대문명화
에 의해 상실된 감성적이며, 합리적인 원리의 통일 및  부흥의 필연성에 관
한 사고를 발전시키면서, 로수의 정신속에 있는 원시사회의  도덕적 기반도
이상화했다. 원시사화에 대한 향수  속에, 진보에 의해 압박을 가하고 있는
과학-기술에 관해 말하면서, 그는  "쪼개진 종은, 시대의 파괴적인 일을 혼
자 체험한 종으로써, 결코  과거에 냈던 그 조화로운 화음을 내지  못할 것
이다"라는 표현으로 아쉬워했다.
 문명화된 사람의  행동에서 자연적인 행동과  사회적인 행동의 전반적인
균형 평가시, 레비-스트라우스는 카시러를  뒤따라, 모든 institution을 생성
하는 언어, 의식,  전통, 상징적 형태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들
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형식주의와 사회적  관례(제약성)는 상당한  역할을
하고있음을 인정했다. 따라서,  레비-스트라우스, 그리고 그와 견해를  달리
하고 있는 인류학자들의 사상은  어쨌든, 우리 모두가 사회적 관례(제약)와
현실생활에서 우리를 줄곧 떨어지게 하는 신화에 의해 살고 있다는데 귀결
되고 있다.
 집단의식의 내용 및  제약적인 사회구조 기반으로서 "신화"에 대한 그의
해석은 레비-스트라우스의  구조적 인류학의 주요 요소이다.  프랑스학자들
에 의해 정의되고  있는 신화의 문화 형성적 특성은 다음과  같다. "신화는
대등한 발전단계에서 과거처럼 현재 및 미래도 설명하고 있다. .....무엇도정
치적 이념처럼  신화학을 닮지 않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화학과
이념은 동의어이다. 단지 신화학이  집단의식을 양육함에 다라, 원시 및 고
대사람들은 문화를 양육했다.  그러나 이념(이데올로기)은 우리들의 교육을
고양시키고, 보다 정확히  근대인들의 추상적 개념 속에 침몰된 문화를  양
육하고 있다. 실로, 원시인의  신화창조와 구별되지 않는 원리 속에서 바로
근대신화가 아닌 다른 산물이다. 20세기에 이들 신화는  파시스트적 독일인
의 "일천년"에 관한 히틀러적 신화,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적 역할에 관한
신화, "세계혁명"의 불가피성에 관한  신화, 또는 미래 공산주의에 관한 신
화, 정확히 인간과 유사한 신의 존재에 관한 가장  폭넓게 확산된 고대신화
와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고대 신화적 속성에 학설을 겸비한  근대이념이
문명화된 인간에 의해 문화유산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20세기이래 문화에 대한 시각의 폭 확대와 변화된 환경에 의한
분석방향의 이전 및  다양한 방법론의 발전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같
이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인식에도 불구하고 개별  민족에 대한 구별적이며
일반적 특성을 밝히려는 본 저서의 목적상 인류학적 견지에서 문화학적 접
근을 시도한다. 이에  따라 다음절에서는 러시아 민족문화 발생 및  발달에
관한 분석의 토대마련을 위한 인류학적이론을 살핀다.

 3. 인류학적 문화이론

 테일러(Edsard B. Tylor)는 폭넓은 민족지학적 감각을 가지고 문화의 인
류학적 개념을 정의했다. 즉,  "문화 또는 문명화는 사회성원으로서의 구성
원에 의해 획득한 지식, 신념, 예술, 제도덕, 법률,  관습 및 그밖에 다른 제
능력과  습관이다. 이같은  테일러의 일반  문화개념은 사회조직과  사회적
institution를 구별하지 않고 있다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같이 문화개념의 포괄적 의미로의 사용은 보아스(Franz Boas),  말리노
프스끼(Bronisslaw Malinovskii)및  기타 인류학자들에 의해서도 지속됐다.
그 후 테일러와는 달리 다른  관점에서 제 지방문화의 다원성을 새롭게 강
조하고, 구별적인 제관습 및 institution의 장기적 진화에 관한 관심의  상실
속에 문화개념이 사용되었다.  이같은 시각으로 인해 19세기 인류학의  3개
원리였던 - 인류의  정신적 통일, 인류사의 통일, 문화의  통일이 - 사라지
기 시작했다. 만일 이들 통일체가 상존했다면 많은 구별적  사회 및 문화의
비교적이고 집중적인 연구가 어려웠을 것이다.
 "보아스(Franz Boas)혁명"의 산물로 일컬어지고 있는 다원적이며 상대적
인 문화의  개념은 약 50년간  적어도 일반적 이론에 대한  관심이 재개된
1950년대 초까지 인류학적 사고를 특징지웠다. 이 시기에  라드클리폐-브라
운(A. R. Radcliffe-Brown)의 지도하에  사회적 인류학이 발달했는데, 이는
"사회적 구조", "민족학"및 비교  또는 사적으로 문화를 연구한 "문화적 인
류학"을 비교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구별의  기원은 인류학에서의
유형적인 혈연체계와 서술적인  혈연체계간의 모르간(L. H. Morgan)적  구
별의 적절성 여부  해석을 통해 라드클리폐-브라운의 스승인  리버스(L. H
Rivers)와 크로에벌(A. L. Kroeber)간의 유명한  논쟁에서 최초로 극화되었
다. 결국 혈연체계의 성격에 관한 논쟁을 지속하고 있다. 아울러 이 경쟁관
계가 근대 인류학과 사회학에서 주요 분파를 조직케 했다.  그 결과 영국에
서는 말리노프스끼와 그의 추종자들을  문화 및 문화적 인류학도로써 간주
하였으며, 동시에 라드클리폐-브라운과 그의 추종자들을 사회구조 및  사회
인류학도로써 간주하였다. 미국에서는 문화 및 사회적 구조간의  대조가 인
류학자들과  사회학자들간의 제도적인(institutional)  경쟁관계를 상징했다.
그러나 1958년까지 미국 인류학자들 중에서 고참신문이 아니었던 크로에벌
(A. L. Kroeber)과 고참인  탈코트 파슨스(Talcott Parsons)는 이미 인정된
문화와 사회인류학 양자간의  비공격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상호존중의 차원
으로 발전했다.
 문화연구에 있어 국가적 분류는  사라지고 있다. 즉, 영국인 라드클리폐-
브라운이 모르간 및 프랑스 사회학파의 저서에서 유래됐으며,  동시에 미국
의 문화적 인류학자들은 독일의 보아스를 거쳐 테일러에게서 유래된 후 국
가적 상표의 의미는  상실하였다. 말리노프스끼는 1931년에 출판된  사회과
학 대백과사전의 문화란에 "문화와 사회인류학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인간
조직의 제  필요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조성한 환경 및 자연적  환경의
관계 속에서 institution의 성분으로  분석되어야만 하는 활발하고 효율적으
로  잘 조직된  통일체 기능으로써  문화"를 강조했다.  이 문화의  개념은
1930년대와  1940년대  미국 인류학자들의  "상식"이  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영국의 많은 사회적  인류학이 미국 인류학계 젊은 세대에게
상식이 되었다. 문제는  경쟁관계 배후에 지적 현안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특정 사실을 해석하고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일반적인 이론 틀이 결정적
인  분류기준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대표적인  이론   틀인  "문화패
턴"(culture pattern)론과 "사회적  구조"(social structure)론은 민족문화 분
석을 위한 방법의 이해목적에서 지대한 의미를 갖는다.

 1) 문화의 유형론(the pattern theory of culture)

 유형이론은 수많은 문화개념 정의에 대한 크로에벌(A. L. Kroeber)과 클
루크혼(Clyde Kluckhohn)의 사적이며 비판적인 평가이다. 이들의 영웅적인
노력은 대다수 사회과학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범주내에서 요약적으로 공
식화되었다. 즉, "문화란 인간집단이  만든 가공품속에 구현된 것들을 포함
하여 독특한 성과로 이루어지는 제 상징에 의해 획득 및 이전된 행태를 위
한 명백하고 함축적인 유형이다.  다시 말해, 문화의 본질적 핵심에는 역사
적으로 유해 및 선택된 전통적인 사상과 특히 이들에 부착된 제 가치가 존
재한다. 즉, 제 문화체계는 행태의 산물들로 간주될 수  있으며, 또 다른 측
면에서는, 향후 행태의 필요조건이 되는 제 요소를 간주될 수 있다."
 이는 적어도 1940년대와 50년대  미국 인류학자들의 상당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서, 1920년대와 1950년대의  "문화는 당시 아주 만족스런  것으로 여
겨지는 행태를  배우는 것이다"라는 공식보다 훨씬  풍부하고 적절한 것이
다. 크로에벌과 클루크혼이  관찰한 문화의 논리적 구조는 행태 및  행태적
제 산물의 연구에 기초된 것이며, 명료한 행태를 만드는데  기반을 두고 있
다. "문화는  모든 문화의 구체적 완성상태에  있는 행태가 아니며, 행태의
조사도 아니다. 문화의  부분은 모범적 행태나 모범적 행태의 조사도  아니
다. 문화의 부분은  모범적 행태나 모범적 행태를 위한 규범으로  이루어진
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어떤 선택한 행동방식들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
는 이데올로기들  속에서 다른 부분도  존재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문화는
문화의 내용이 극도로 변한 지역에서 행태의, 형태를 위한, 행태에 관한 유
형들이 일반화를 축소할 수 있다는 견지에서 광범한 일반적 선택과 배열원
칙들을 내포하고 있다.
 문화연구에 학문적  이론을 적용한 최초의 인물  중 한사람인 할로웰(A.
Irving Hallowell)은 행태적 진화에서 개성, 문화, 사회를 논의함에 따라  다
소 근래에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 "문화적 적응은 비록  강조하는 필
연적 조건들  중에 하나이지만, 학습된  형태나 사회적으로 이전된  행태와
같을 수는 없다. 행태적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것을 학습했으
며, 심리적인 제  능력과 동물의 전반적인 생활적응과 관련하여 무엇을  학
습했느냐"라는 말과  통한다. 문제는  "크로에벌과 클루크혼의  문화개념을
받아들일지라도 그들 스스로  언급했듯이, 개념은 중요한 것이지만  이론을
성립시키는 것은 아니다...  인류학에서 현재 우리는 많은 정의들을  가지고
있지만 너무나 적은 이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의 일반이론에 대한 어렴풋한 윤곽은 보아스(1911), 사피르(1927), 베
네딕트(1934), 린튼(1936), 클루크혼(1941), 클로에벌(1948), 화이트(1949), 오
플러(1945, 1946, 1959)등의 저서들에 나타나 있다. 아울러 이들 일반이론이
본질적으로 강조한 것은 추상적인 문화의 특성 및 내용보다 문화에서의 유
형, 형태, 구조, 조직연구이다. 생물학적 유추에 의해 영향을 받은 유형이론
역시 19세기 독일의 문화사학파 및 형태심리학(gestalt psychology)파와 제
휴했다. 문화를  유형화하는 것은 생태적이며  자연적인 환경의 제  한계를
초월하는 인간의 창의성을 "부상"시키는 것이다.
 다른 사회생활의 제 영역은 민감한 감정에서 유형화를  구별케하지만, 문
화의 제  유형은 의식 및 복합성의  수준과 질에서 구별된다. 아주  단순한
유형들은 의상, 음식,  작업, 인사법의 습관들과 인공물들에서  표출된 명백
하고, 다소 실제적인 행태 유형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사회, 정치, 경제조직
및 종교, 언어, 법률,  철학, 과학, 예술체계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보다 복
합적인 유형이 있다. 이들 가운데 클로에벌은 알파벳,  경작, 일신론과 같은
기능적 가치를 가진 일치적  속성의 조직으로서 수천년동안 지속된 문화와
상이한 분야에서 이  "기본적" 또는 "체계적"유형들과 그리고 상당한  다양
성 및 불안상태에  예속되는 공식적인 사회조직 및 사고체계의 "부차적"유
형을 구별했다. 이들  모든 문화유형과 또다른 것은 구별적  "편향"을 제공
하는 문화조직의 질들이다. 이같은 것은 은연중에 암시되는 것으로서, 베네
딕트(Ruth Benedit)가 그의  저서 "문화의 제 유형"(19340에서 묘사했으며,
크로에벌이 이들 형태를  문체상의통합을 이룬 이들 문화에서의 "유형중의
유형"으로 본바와 같이  무의식적인 형태이다. 그들이 개성의  제 속성에서
심리적 상호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클로에벌은 문화 및 역사
적 용어로 이 전체 문화적 유형들을 분석하길 좋아했다.
 인간문화의 전체성은 개별문화들에  일반적인 틀을 제공하고, 문화의  구
체적 역사형태로서 분리된 이들  문화에 역사적인 가산을 나타내는 유형화
요소를 담고 있다. 인간사의 "일반유형"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체
계적이고 부차적인 원시 및 문명적, 모든 문화에서의 형태적 유형의  비교-
역사적 연구를 통해 점차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유형은 문화내용을 보는  태도변화에도 불구하고 관습의 조직체로써
존속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적 특징의 변화는 문화유형과 일치된 선택  및
거부로써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유형 역시 스스로 변화를 당한다. 여기에
는 "적어도  일부 문화변화의 방향이 환경적인  압력과 개인적인 가변성에
의해 야기되기보다는 문화의 초기형태에  의해 보다 선결되는 문화적 정향
진화가 있다." 사피르(Sapir)는 이를 "문화적 표류"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언제나 인간의 마음은 집단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일했을 때 인간의 마음은
독특한 형태를 위해 분투하며, 또 이로 인해 자주 독특한 형태에 도달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형태의 진화가 한 방향에서 표류하며, 균형을 찾고, 평
형을 찾았을 때 조용히 정지해 있다는 것이다."
 문화적 지속성과  변화연구를 "문화적 표류"와 관련짓는  것은 타당하다.
에갈(Eggar)은 1963년 필리핀에서 문화적 변화분석에 이를 적용시켰다.  그
리고 레드휠드(Redfield)와 신겔(Singer)은 문화적  변화에서 도시의 역할이
"정향진화적"이며 "자연발생적"과정의 산물로서 해석될 수 있는  방도를 제
시했다. 유형변화의  중요본질은 크로에벌에  의해 자신의 저서  "문화성장
형태들"에서 분석됐다.  크로에벌은 문명의  진보와 쇠퇴는 문체적  형태의
성장과 실현 속에 있는 단계로 볼 수 있음을  표명했다. 한정된 시간대내에
서 모든 문명 속에 있는 문화적 절정기의 창의적 군생은 문화성장 및 혁신
과정 속에서 결정적 "원숙"기라는 중요사실을 제시했다.
 유형이론은 문화가 개인 및 집단에  의해 그리고 그들 상호간의 접촉 및
환경과의 접촉에 의해 창조된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생리, 심리,
지리의 상호작용이 문화적 성장을 위한 조건을 제공하며 출발점이 되고 있
으나 문화성장의 결정요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형이론은  문화적
성장과정을 역사적  과정으로서 보고 있으며,  보아스가 강조한 바와  같이
역사적 과정에서 제휴된 다른  출처로부터 생성된 문화내용의 끊임없는 제
성분의 성장으로 보고 있다. 주워진 어느 시간대에, 이 역사적 과정의 최종
결과는 바로 특정 집단역사의 제휴된 유형의 틀이며, 이  특정 집단의 과거
선택 및 의식, 무의식사의 침전물이다. 문화는 이를 "현 개성내에서 촉진하
고 있으며, 제 사건 및  타인의 인지를 형태화하고, 생리 및 환경적 압력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한계상황을 인지하는 형태이다.  문화는 인간
'유기체'와 '환경'간의  화해변수이다. 이는 "인간집단의 말,  행동, 가공품들
내에서의 균일성 지향추세의 추상적 표현이다."
 문화유형이론은  문화수용  연구에서도  역시  사용되어  왔으며(Spicer,
1962)개성구조에 문화유형들을  연계시키려 노력한 연구에서(Singer, 1961)
또는 환경 및 인구학에서의 제 변화에서 사용되어 왔다(Steward).
 유형이론의 적용은 인과적 가설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유는 문화가
특별한 문화형태의 외적  근거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또 결정적  법
칙 및 교차-문화적인  통계적 상관관계 속에서, 지침(point)이 없듯이 너무
나 복잡하게 얽혔으며,  다각적이고 누적적이기 때문이다. 유형론자들의 기
본적인 연구책무는 문화유형의 윤곽을 그리는 것이며, 이를  넘어 유형형태
를 비교 및  분류하며, 부차적이며 변하기 쉬운 것들로부터 가장  기초적이
며 지속적인 유형을 구별하는 것이다.

 2)사회적 구조론(social structure as theory of culture)

 사회구조 이론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라드클리페-브라운이 작성한 일
련의 논문들에서  최초로 개발되어 그  후 상당히 확대되어 왔다.  "사회적
구조"는 영속적인 사회집단과 분화된 사회계급 및 사회적 역할을 내포하는
사회의 조직망 또는 체계로써 라드클리폐-브라운에 의해 정의됐다.  라드클
리폐-브라운의 이론공식에는 아주 밀접한 유기적 공통점이 뒤따르고  있다.
다시 말해 생물학적  유기체간의 비교 사회적 형태학이  다른 사회적 구조
및 사회적  형태학의 유형을 연구하고  분류하는 행위와 관련짓고  있으며,
사회적 구조기능의 특정유형을 어떻게 연구하는 지와 연계시키고  있다. 이
는 모든 구조적 체계가 자신의  생존 및 지속을 위한 조화방법으로써 모든
구성부문이 기여하는 기능적  통일체라는 작업가설을 가정하는 것이다.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모든 종류의  사회현상은-도덕, 법률, 예절, 종교, 정
부, 경제, 교육,  언어로-"분리 또는 고립되지 않고,  인간 및 인간집단간의
사회적 관계에 의존 또는 영향을  미치는 방도에 관한 사회적 구조에 모든
사회적 현상의 직접, 간접적인 관계가 연구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구조의 특정유형이 어떻게 사회구조이론의  제 3의 가지격인 새로운
구조적 유형형태로  변화하는지의 연구로 방향을  바꾼다. 이 연구는  특정
구조적 유형의 형성 및 전환의  실제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 역사와 고고학
의 도움이 요구되고 있다. 라드클리폐-브라운은 "사회적 구조의  광범한 체
계가 협소한 체계로 성숙 내지 교체됨에 따른 과정으로서"정의되어야만 하
는 그럴듯한 내용의 사회 진보적 가설을 제시했다.
 라드클리폐-브라운의 사회구조론의  공식화는 일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즉, 모든 종류의 사회 및 장소와 시간에 적용시키려  시도된 것이다. 즉, 모
든 종류의 사회 및 장소와 시간에 적용시키려 시도된  것이다. 실제로 라드
클리페-브라운은 우선  사회인류학을 사회구조의 비교연구와  현대의 무지
및 단순사회의 사회생리학에  한정시켰다. 원시사회가 역사나 역사적  기록
을 갖지 못한다고  간주된 이래, 구조적 변화연구 역시 문명사회와  접촉된
경우로 제한되었다. 이들  제한이 소규모, 무지한 공동체,  또는 원시적으로
고립된 구조적  체계의 집중적 연구를  가능케하여, 결국 사회적  인류학의
정의를 이끌었다.
 사회 인류학의 발전은  이 제한들이 완화된 이래 진척됐으며, 원시적  단
수사회의 구조적 변화연구가 구조-기능적 분석을 통한 역사와 고고학을 결
합하기 위한 목적에서(Eggan, Evans-Pritchard,  M. G. Smith의 저서들)또
는 상이한 시대에 동일  사회를 재연구하기 위해(Redfield, Firth 등)착수됐
다. 다시 말해 단순사회에서의 구조적인 갈등연구가 시작됐으나, 안정의 가
정은 사라졌다는 말이다(Leach, Gluckman, Fallers).아울러 농촌 사회와  근
대적  공동체  및  문명화의  사회적  제  구조연구도   시작됐다(Redfield,
Warner, Greet, Firth, Schneider, M. Freedman, E. Wolf 등).
 이러한 발전이 사회적  인류학의 영역을 확장시켰으며, 사회적  구조이론
의 초기적 한계가  이들 발전과 밀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농촌사회와  근
대적 공동체, 그리고 문명화의 거시구조적 연구를 포함시키려는  사회적 인
류학의 확장은 사회적  생리학에서보다는 비교사회적 형태학에서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유는 명백했다. 이같은 거시구조적 체계가 어떻게 기능하고 통
합단위를 이루는 지에 대해  논증하기보다 대규모 사회에서 사회관계의 조
직망, 사회계급,  사회집단들을 추적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기능단위의  존재논증은 경제학,  정치학, 문예연구, 예술사와  같은
것들이 개별적으로 자신의 다소 전문화된 측면이나 전체사회의 하부체계를
만들기 때문에 상이한 접근결과의 고려도 요구되기 때문이다.  한편 구조적
제 변화 역시 보다 더 오랜  시간을 조망해야 하지만 역사 및 고고학적 연
구로 제공된 자료라는 점에서 이  정도에서 추적하는 것이 보다 더 용이하
다는 현실이다.
 사회 인류학이 원시적 고립에서 벗어날 때 문제가 된 것은 연구단위체의
경계설정과 동질성문제였다. 예를  들면 대영제국은 사회인지 아니면  사회
들의 집합체인지? 중국의 촌락은 사회인지  또는 중국 공화정의 일개 부분
에 지나지 않는지? 실용적인 측면에서  적절한 규모의 어떤 편리한 장소를
취할 수 있다면,  상이한 지역에서 출현하고 잇는 구조적인 체계연구를  용
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의 적절하고  편리한 단위체 발견
이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비교, 분리, 분류, 일반화 과정을 거치는
집약적인 현지 연구로써만 구조적  유형형태 속에 나타나는 자연적인 단위
체를 규명할 수 있었고, 구조분석을  위한 보다 적절한 "자연적"사회단위체
가 없었다.
 라드클리폐-브라운과  사회구조론의 다른  지지자들은 1930년대초  이후
"문화"용어사용을 회피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같은  회피는 사회적
인류학이 사회구조를 연구하는 것이지  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
장에 기초된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 사회구조론
은  명백하고 내포적으로  문화개념을 합체하고  있다.  예를 들면  포티스
(Fortes)는 사회구조 및 사회조직이 "문화의  측면만이 아니라 부여된 인간
의 전체문화는 이론의  특수 골격내에서 다루어진 것이라고  기술했다." 포
티스는 클로에벌과 클루크혼과  같이 거의 정확한 동일감각 속에서 "문화"
를 사용하고 있다. 이 골격내에서  "관습적 - 행하고, 알고, 생각하고, 느끼
는 - 제 사실은 부여된  시간에서 부여된 인간집단내에서 일반적으로 의무
적이며 또한  가치를 부여한 제 사실은"  그때부터 "사회관계를 상징 또는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이론의 특별한 골격은 라드클리폐-브라운의 사회적 생리학이다.  라드
클리폐-브라운은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사회체계를 "사회적인
관례내에서 나타나는 구조이며,  사회적인 관례위에서 사회적 관습의  지속
적 생존이 달려있는  사회적인 총계를 의미하는 사회의 전체구조로써"정의
했을 때 이 개념을  인정했다. 이 사회적 관례들은 도덕, 법률,  예절, 종교,
정부, 교육, 그리고  "복합적인 메카니즘의 일부분이며, 또 이에  의해 사회
적인 구조가 존재  및 지속되는 모든 종류의 사회환경을 내포시키고  있다.
사회적 생리학은, 다른  말로 문화의 모든 측면과 연계시키려는 이론의  골
격이며, 테일러의 감각으로는,  사회적 관계의 조직망으로써 사회구조에 연
계시키려는 이론의 골격이다.
 사회 구조론에서 명백한 그 문화개념은 사회 인류학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관계를 다루고, 이러한 추상개념을 문화와 같이 다루지  않는다는 관념
으로 인해 통상  소홀이 다루어지고 있다. 이같은 사고에도 불구하고  라드
클리폐-브라운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는 추출과 일반화를 거쳐 연
역된 사회적인 구조로써 실로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그후 사회적 구조는 무언가 직접적으로 관찰되지 않으나 관찰될 수 있는
실제 존재하는 제 관계로부터의 구조적인 형태의  추출이다. 이 추출된 "구
조적 형태"나 "사회적  제 관계의 표준적 형태"는 문화와의 관계없이  기술
될 수도 없고, 이해될 수도 없다. 즉, "사회적  제 관계는 인간이 관계된 상
호행위의 준거(참고사항)에 의해 단지 관찰될 뿐이며, 단지 기술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회구조의  형태는 개인 및 집단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에서 순응하기 위해 행태패턴에 의해 기술되는 것을 소지한다."
 사회구조론의 핵심에서 우리는 제 규율의 틀로써, 명백한  행태와 사고의
표준화된 양상의 문화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문화개념은  사람들간의 상호
이해조정으로써의 라드클리폐-브라운적 "사회관계"의  정의에서 역시 명백
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주체가  객체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가지는 것을 말
할 때는 언제나 객체가 주체를  위해 어떤 가치를 갖는다는 사실을 말함으
로써 동일한 사실을 언급할 수 있다. 이해와 가치는  불균형 관계의 쌍방을
언급하는 상호연관된 말이다.
 미국의 철학자 폐리(R. B. Perry)로부터 기원한 이  어떤 이해의 어떤 대
상으로서 가치의 개념은 라드클리폐-브라운에 의해 공동이해의 대상으로서
"사회가지"의 정의로 확대됐다.  이것이 라드클리폐-브라운의 제 가치가  -
상호연계된 제 이해 - 사회적 관계의 결정요소이며, 따라서 사회구조의  결
정요소라는 것이다. 사회적 구조이론의 기반은 이와 같이 만질  수 없는 사
회적 가치와 심리적 이해들이다.
 이제 사회적 구조이론이 왜 "문화"라는 말을 불필요하게 할 수 있는지를
명백히 하고 있다. 즉, 이는 사회적 구조이론이 단순히 사회적 관계를 다루
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성원들이 준수하려는 외연적이며 내연적인 법
규 속에 사회적으로  인정된 정상적인 형태를 소지한  사람들의 제도화 및
표준화된 행태와 사고의 양태로서  이론의 핵심에 문화의 개념이 병합되어
있다. 따라서 사회구조론에  대해 사회적 가치가 내재된 사회적 관계의  표
준적 행태 및  사고양태를 구조, 기능적 구조내에서 문화적 실체를  파악하
고 규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문화연구에 있어 특히 요구되는 자세는 정적(static)인  개념이해 및 연구
방법을 탈피하고, 동적(dynamic)인 연구자세를 갖추는 일이다. 이는 적극적
인 사고로 복합적인 요인의 과학화 및 체계화를 의미한다.

 2.러시아의 문화

 1.접근방법

 문화유형론과 사회구조론은 대조적이며  상대적 속성을 담고 있다.  문화
유형론이 환경과의 적응 내지 극복과정에서 얻은 결과를 역사적 맥락과 결
부시켜 패턴(pattern)화하고 있다면,  사회구조론은 사회의 구조, 기능적 통
일체 존속에 필연적인  사회적 제가치와 심리적 제이해를  행태 및 사고의
양태 속에서 파악하려는 접근방법이다. 유형론은 인간 및  인간집단의 가공
품속에 구현된 석과의 상징적 행태로써,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이 행태적 가
치의 출처를 찾고, 문화의 특성 및 내용연구와 함께  이의 유형, 형태, 구조
로 연구를 심화시키려는 것이  기본적인 연구방향 및 자세이다. 즉, 생태적
이며, 자연적인 환경의 제한계를 초월하여 이룩한 인간의  제성과를 유형화
하고, 비교적인  시각에서 이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하고
구별화한다. 한편 사회구조론은 사회구조상의 생물학적  유기체라는 공통점
과 더불어 모든 종류의 사회적 현상이 사회적 관계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
을 미친다는 전제하에 사회적 구조의 생존 및 지속을 위한 조화방법으로써
의 기능적 통일체  조성의 핵심요인을 찾고 이를 유형화하고 있다.  따라서
양자는 접근방법상에 대조 및 구별적 속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문화의 속
성을 찾는  활동과 또  발견한 유형화 결과는  유사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유사"하다는 용어의 사용은  문화 적용대상의 발전수준에 따라 문화의 실
체 규명이 용이하고  용이치 못한 점에서의 차이, 그리고 문화유형  결과에
대한 검증 여부에서 명백한 질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양이론의 상이성과  유사성이 갖는 속성의 적합성을 감안하여
분석대상을 선택한다. 즉  러시아에서 구조분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시기적
상황을 고려할 때 유형론의 적용이 불가피하며, 뾰뜨르대제  이후 사회구조
가 다소  다원화되고 있지만 사회구조론  적용의 한계가 있음을  밝혀둔다.
따라서 러시아의 문화연구는 유형론에 치중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과 함께
보완적 관계에의 복합적인 사회관계에  대한 미시적 분석 대상으로서의 집
착보다는 포괄적 성격의  구조, 기능적 통일체 형성 및 유지에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요소중심으로 사회구조론을 적용하고 분석한다.
 이같은 맥락에서 문화생성 및 성장을 위한 제조건 설정과 함께 이들간의
상호작용을 역사적 요인과 결부시켜 통합 및 제휴된 결과를 유형화하고 해
석하는 연구절차를 밟는다.  아울러 사회구조론적 접근방법에 따라  이질적
사회집단 및 구별적 계급구조, 그리고 이들 간의 사회적  역할 조정역을 담
당하고 있는 문화규명을 위해 다음과 같은 척도를 사용한다. 즉, 이는 사회
생학적 토대위에서 형성된  사회적 관례들인 도덕, 법률, 예절,  종교, 정부,
교육, 사회환경을 핵심 분석기준으로 삼으며, 아울러 모범적인 행태와 표준
화된 사고를 유발케하는 제규율의 틀을 중심으로 사회적 가치와 심리적 이
해와 상호조정 양상을 살핀다.

 2.러시아의 제조건과 문화적 유형화

 1)지리적 조건하의 문화유형

 제정러시아와 구소련을 계승한  '러시아 연방"(또는 러시아)은 근세에 가
장 의미 있는 지리적 현상을 소지한 국가이다. 러시아는  영토가 넓은 어느
다른 국가보다 2배이상의 광활한 지역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다른
국가보다도 더 많은 세계적 경관 및 문화지대를 담고  있다. 아울러 러시아
의 상당한 지역이  기후조건 및 이주민의 속성측면에서  보면 세계의 어느
지역보다 충만한  "개척정신과 자원 및 잠재력을  가진 인구가 희박하다는
점에서 북미대륙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는 과거  제국주의정책 추
진결과로 얻은  영토의 광활성과 다수민족이  공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 시각에서 볼 때 지배적인  영향력과 출생 및 토지 이용방법에 있어
서 유럽국가이다. 즉, 우랄산맥  이동을 가피키는 구러시아 지역에 인구 및
산업시설이 집중되어 있으며, 우랄산맥 이서를  가리키는 시베리아지역에는
유럽태생의 이주민들이 거주해  있고, 경작방법에 있어서도 집약농법이  아
닌 유럽식의 윤작법을 사용하고 있는 접에서 유럽지역에 속한다.

 (1) 크기와 위치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 17,075,400㎢에 달하는  영토의 크
기는 미국과 캐나다영토를 합친 크기에 해당한다. 인구는  1995년의 통계를
기준으로 147,938,000명으로써 미국의  약 260,000,000명과는 상대적으로 적
다.  러시아는  위도상으로  거의  캐나다와  맞먹는  위치에  있다.  인구
8,717,000명을 보유한 러시아의 수도  모스끄바는 캐나다의 주요 도시들 중
에 하나인  에딘부르끄(Edinbrugh)만을 제외하고  에드몬톤(Edmonton), 알
베르타(Alberta)보다 훨씬 더 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시에 쌍뜨 빼쩨르부
르끄(구례닌그라드)는   쉬틀랜드(Shetland)와   알라스카    남부(southern
Alaska)위도와 동일한 위치상에  있다. 따라서 겨울에 러시아의 모든  해안
은 결빙되고, 대부분의 영토가 경작에 아주 부적합한 면을 보이고 있다.
 글로벌(global)시각과 인구집중 현상에서 볼 때 러시아는 영토의 4분의 3
이 아시아에  위치하며, 아시아의 다수  국가들과 국경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인구의 대다수가 우랄산맥  이서지역인 유럽에 밀집되어
있음에 따라 유럽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2)지형조건

 러시아 영토의  광활성과 거대함은 과거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침공시에
"시간을 벌기 위해  공간을 할애"한 사례에서 보았듯이 국가방어에 중요성
을 제공하고 있다. 러시아 영토의 거의 반은 유순하고  경사가 완만한 대평
원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유라시아 평원(Eurasian Plain)으로 호칭하고  있
다.  유라시아 대평원은  프랑스의 파리에서  러시아의 모스끄바까지  표고
1000피트를 넘는 산과 같은 장애물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이 대평
원은 러시아의  유럽지역 전체를 포함하여  동쪽으로 시베리아 중부지역에
위치한 예니쎄이(Yenisei)강까지 뻗어있다.
 유라시아 대평원은 농부나 여행자들에게  교통의 용이성을 제공할 수 있
지만, 자연적 장애물이  없다는 사실이 많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
다. 첫번째로 지적될  수 있는 문제점은 북극에서 남쪽으로 몰아치는  차가
운 바람을 막아주고  완화시켜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겨
울은 강풍을 동반하는  혹독한 추위가 이어지고 있다. 둘째로 유라시아  대
평원의 동,서방향 공히  방벽과 같은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수많은  침략군
들의 통로로 활용되어 왔다. 아시아로부터 따따르족(Tatars),  유럽으로부터
폴란드족(Poles), 리투아니아족(Lithuanians),  스웨덴족(swedes), 프랑스 및
독일이 러시아 종복 목적으로 이 지역에 침략해 왔다.  이같은 피침사가 러
시아인들에게 외국인에 대한 불신 및 심지어 외국인 공포증(xenophobia)을
야기시켰으며,  러시아들로 하여금  "완충지대"(buffer zone)갈망의  원인을
제공했다. 한편 거대한  영토는 러시아인들에게 관대한 사고방식도  형성케
했다.
 우랄산맥과 예니쎄이강 사이의 유라시아 평원 북부지역은 늪지대가 형성
되어 있다. 원인은  예니쎄이강물이 북빙해쪽으로 흐르는데 추위가  북쪽으
로부터 남쪽으로 남하하는 과정에서  북쪽에 위치한 강물이 먼저 결빙하여
결국 남쪽에서 흐르는 강물이  범람함으로써 늪지대와 수렁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지역은  여행이 용이치 못할 뿐 아니라 경작도  불가능한
지역이다.
 대평원과는 대조적으로 러시아의 북부 시베리아 지역의 극동지방은 다소
높은 산맥들이  존재한다. 이중  대표적인 산맥이  체르스끼 산맥(Chersky
Mountains)으로써 10,000피트에 달하는 고도를 지니고  있다. 이 지역은 가
혹한 추위와 산악지대로 인해 극소수의 사람만이 생활하고 있을 뿐이다.
 우랄산맥은 유라시아 대평원을 아시아와 유럽대륙으로 나누는 역할을 하
고 있다. 우랄산맥의 평균고도는 1500피트에 지나지 않으며, 최고봉도 5500
피트를 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우랄산맥은 효과적인 방어수단이  되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가장 높은  산맥은 남부 국경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대
에 위치한 코카사스(Coucasus)산맥은 터키와 이란과의 국경을 형성하고 있
다. 이 산맥의  최고봉은 17,000피트에 달하는 쉬까라(shkara)와 디흐  따우
(Kashtan Tau),  그리고 16,000피트에 달하는  까쉬딴 따우(Kashtan Tau),
드장기 따우(Dzhangi Tau),  까즈베흐(Kazbeu)가 있으며, 유럽에서 최고봉
인 약 18,481피트에 달하는 엘브르스(Elbrus)산이 있다.
 아프카니스탄 및 이란과  국경을 이룬 빠미르(Pamir)산맥은 과거 소련방
에서 분리  독립한 뚜르끄멘(Turkmen)에 위치하고  있으나 러시아의 기후
및 강우량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곳에서 최고의 정상은 24,590
피트 높이의 커뮤니즘(Communism)산이다.  카페디안(Carpathan)산맥은 백
러시아 및 우끄라이나와 발칸국가들  사이에 위치한 산맥으로 높이나 규모
면에서의 중요성보다도  슬라브족의 기원과 연루된  인류학적 의미를 지닌
산맥이다. 이밖에 시베리아  남부에 짼 샨(Tien Shan)산맥과 알따이(Altai)
산맥이 있으며,  이들은 러시아와  아시아국가들간에 효과적인  방벽구실을
하고 있다.
 이상에서 열거한 산맥들을 외세침략에  대한 방어수단과 연결시켜 볼 때
시베리아 북부지역의 체르스끼산맥은 동토대로 인한 인간부재로 논의의 대
상에서 제외되며, 남부의 흑해와 가스삐해 사이의 코카사스산맥, 그리고 중
동지역을 구획하는 빠미르산맥, 중국 및 몽고의 일부지역을  차단하고 있는
짼 샨산맥과 알따이산맥은 효과적인 방벽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유라시아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동,  서방향은 거칠 것 없는 지평선의 연장일  뿐이라
는 사실이다. 따라서 동,  서방향에 위치한 강대국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이러한 결과가 러시아로 하여금 국방을  최우선정책으로 하
는 관행을 낳게 했다.

 (3) 기후 조건

 러시아 남부국경지대의 산맥들이  이미 희말라야 (Himalaya)산맥에 의해
방해받은 인도양으로부터의 열대풍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상황엣 유
라시아 대평원은 북빙해로 부터 개방된 상태에 놓여 있다.  이에 따라 러시
아의 기후는 일반적으로 3개의 특징을 갖고 있다. 즉, 대륙성, 균일성, 건조
함이다.
 여름과 겨울간 온도의  폭에 의해 측정된 대륙성  기후의 속성은 바다와
같은 수분공급이 용이치 못한 순수 토지의 양적 과다현상과 위치상으로 북
반구에 놓여진 결과로  조성된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태평양으로부터  영향
을 받지 않고, 서쪽에서 불어오는 대서양 기류가 남-서방향에서 흐르며  대
륙을 횡단함에 따라  대륙성 기후가 강화되었다. 대륙성 기후의 특색은  겨
울에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으로써 태평양에서 불과 483km 떨어진
오이먀꼰(Oymyakon)의 1월중  평균기온이 섭씨 -16℃에  이르는 "극한"상
태에 이르고 있다. 러시아에서 겨울은 위압적인 계절이다. 따라서 러시아인
들은 가혹한 장애극복을 위하여 곰으로부터 지식을 얻어왔다.  러시아 영토
의 절반이상이 1년중  절반이상 눈으로 덮여있다. 주로 동시베리아에  위치
한 이 거대한  영구동토대는 수백피트 깊숙이 결빙되어 있다. 따라서  건설
과 농업에 심대한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기후의 균일성은 한여름에 러시아 전역이 셔스차림으로 지낼  수 있으며,
한겨울에는 북빙해에서 까스삐해까지 강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있고, 쌍뜨
ㅃ쩨르부르끈에서 블라지보스똑까지 썰매를 탈  수 있는 사실이 이를 예증
하고 있다.
 기후의 측면에서 소홀이  다루어질 수 있는 건조문제는  다른 요소 못지
않게 높은 비중을  갖는 문제이다. 영국전체와 미국의 절반이상은 매년  최
소 508mm의 강우량을 보이고  있으나, 러시아는 이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27mm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더하여 특히 변두리 지역은 숲이 우거진 열
대지대에 있으나 현재 거의 우크라이나에 귀속된 상태이다.
 열과 습기가 부족한 농산물  성장기의 온도와 증발요인을 감안한 효과적
습도를 고려할  때 북미대륙과 적절히  비교된다. 가장 효과적인  농경지는
우끄라이나 인접지역으로써 미국의  겨울밀 재배지에 해당하며, 이의  변두
리 지역은 네브라스카나  미네소타주의 옥수수 재배지에 해당한다.  동시에
서시베리아지역의 처녀지는 모스끄바 지역의 옛 농토가 그러했듯이 캐나다
의 목초지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들  지역의 북부지역에 해당하는  러시아
영토의 절반은 경작에  충분한 열량과 적절한 성장기를 갖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가혹한 기후적 조건이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이내와  겸손의 특성을,
토양과 수목의 상태는 심원성과 평화를 조장하고 있다.
 러시아의 기후에서 비국적인 현상은 열량이 부족한 북부지역에서 강우량
의 과잉현상이 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아졔싸(Odessa)에서 끄라스
노야르스끄(Krasnoyarsk)에 이르는 선상의 남부는 양질의 토양에도 불구하
고 강우량이 부족하여  농업에 제한을 받고 있다. 아울러 열량과  강우량이
적절하고 믿을 만한 지역에는  '수목이 우거진 초지'를 소지한 협소한 지역
이다.

 (4) 식물대

 습기와 열은 토양의  특성을 결정하는 요소이다. 우선 토양의 모체인  바
위를 부수고, 그  다음 특수형 식물의 적절한 성장조건을 제공하기  때문이
다. 이렇게 제공된  기후조건에 따라 토양과 식물의 구별적 현상이  나타나
고 있다. 우끄라이나 서부로부터 예니쎄이강의  끄라스노야르스끄 인접지역
까지, 그리고 북부지역은 적절한 강우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열량이 부족하
고, 토양은  담수가 스며든 산성이며,  수목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리고
상기 선상에서  남부지역까지는 열량이 충분하지만  강우량이 충분치 못하
고, 토양은 상당량의 염수가  공급되는 실정이다. 동시에 이곳에 목초와 건
조한 곳에 자생하는 관목이 경관을 이루고 있다.
 러시아는 7개의 식물대로 구별된다. 첫째로, '수목이 우거진 초지'는 열과
습기 및 목초와  나무가 최대로 어우러진 지역으로써  가장 인구가 밀집된
농업지역이다. 이곳에서 북쪽방향으로 점차  춥고, 습한 3개 지역이 뻗어있
으며, 또 이곳에서 남쪽으로는 보다 덥고, 건조한 3개 지역이 있다.
 동토대(tundra)는 러시아의 전북영해를 따라 형성된 길쭉한 조각이다. 이
지역은 가장 긴 겨울과 영구적 동토 및 수분증발이 완만한 특징을 띠고 있
다. 아울러 토지는 물에 잠겨, 형태를 알 수 없으며, 산성으로써 이끼, 지의
류, 외소한 관목을 지원하고  있다. 이곳에는 여름에 곤충과 조류가 밀집되
며, 많은 모피동물, 원칙적으로는 순록(reindeer)이 살고 있다.
침엽수립지대(Tayga)는 러시아 영토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가장
넓은 지역으로 가시모양의 나뭇잎을 가진 침엽수림이 자라는  지역이다. 이
지대는 길고 혹독한 겨울이 있지만, 비교적 높은 여름  기온으로 인해 나무
성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겨울눈으로 인한 지나친 습기가 영구동토 및  솔
잎과 솔방울이 부식한  흙이 빈약하고, 심하게 스며든 산성의 염분이  있는
석회질 토양(acid  pozol soil)과  결합된 경반층(hardpan  layers)으로 인해
땅속으로 깊이 스며드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따라서 경작을 위해서는  특
별한 물질적 자극책이나 보조금이 요구되는 지역이다. 아울러  이곳에는 인
간을 유인해 온 작은 모피동물들이 살고 있다.
 다소 유순한  겨울날씨를 지닌 구러시아지역인  모스끄바 주변과 발틱해
인근지역에는 북부지역에 자생하는  침엽수와 혼합되어 발틱해 인근지역에
는 북부지역에 자생하는 침엽수와  혼합되어 쐐기형 낙엽수의 침투를 허용
했다. 잎이 많은 활엽수가  자생하게된 근거는 여름철이 길고, 갈색토가 형
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토양은 상대적으로 비옥하지 못하고  산
성이지만, 침엽수림지대와는 달리 경작이 가능한 온기가 있어  초기 슬라브
족의 정착지가 되었다.  혼합수림지역(mixed forest)으로 호칭되고 있는 이
곳에는 북에서 남으로 압도적 증가를 보이고 있는 낙엽수들이 이전적 전형
을 이루고 있다.  아울러 앞에서 이미 언급한 '수목이 우거진  초지(wooded
steppe)'는 주로 오크(oaks)나무를  집단 서식처로 하여 잔디나 초지조각을
점재시킨  가운데 편성되어  있다. 수목이  우거진  초지의 토양은  흑토대
(black-earth)이며, 차후에 언급될 초원지대 보다는 훨씬 많은  성장에 효과
적인 강우량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믿을만한 경작지가 조성되고 있다.
 초원지대(the steppe)는 기름진 흑토를  토대로 함에 따라 세계에서 가장
생산적인 토양중에 하나로  꼽히고 있다. 아울러 러시아는 세계 어느  나라
보다도 많은 초원지대를  확보중인 상태이며, 현재 경작면적의  절반이상이
초원지대내에 있다. 흑토는 부엽토의 풍부한 비중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세
기에 걸친 키가  큰 풀의 지속적 부식과 함께  석회와 다른 토대를 이루고
있는 암석성분과  결합되어 보존 및  농축과정으로 형성된 것이다.  여기서
위기적 요인은 지표에서 점진적으로  영양분의 소멸이 침전을 초과하고 있
는 것이다. 더욱이  문제는 기후가 충분한 강우를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함에 따라 이용이 제한적이다.
 볼가강(Volga)과 시베리아 중앙지역간의  주로 '처녀지'(Virgin land)지역
이 있는 남부 초원지대는 강우조건의 변덕으로 인해 경작에 있어 투기심이
요구되는 지역이다. 기후가 까스삐-아랄(Caspian-Aral)해  쪽으로 내려가면
서 보다 더 건조해짐에 따라 흑토와  풀이 밤색 토양 및 준 사막의 가시덤
불로 변하여 유혹의 손길을 멎게 하고 있다.
 종합적으로 북미와  비교해 때, 규모면에서  러시아는 북미보다 더  많은
툰드라 및 침엽수림대,  그리고 다소 많은 흑토의 초원지대 및  건조지대를
갖고 있다. 모스끄바-발틱지역의  '혼합적 수림지대'도 미국의 북-동지역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강우량과 일조량에 의한  열량면에서 러시아가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다. 아울러 지역과 기후의 다양성으로 인한  이질적
식물대 형성이 사고의  개방성과 타고난 적응력의 근거가 되고 있다.  한편
부정적인 측면에서 애매모호성과 독단성의 원인도 제공되고 있다.

 (5) 이동조건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긴 해안선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유용한  해안선
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북부의 수로 대부분은 결빙과  협소 그리고 짙은
안개로 인해  이용이 제한된 실정이다.  북극해안에서 유일하게 일년  내내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는 유일한 항구는 무르만스끄(Murmansk)뿐이다. 무
르만스끄는 북극권에서 남으로 321.8km 떨어진  도시이지만 대서양의 만류
(gulf current)가 항구의 개방을 가능케 하고 있다. 러시아는 영하의 겨울날
씨에 항해목적으로 특수 제작된  원자력 쇄빙선을 북빙해에서 이용해 오고
있다.
 태평양 연안도 역시 연중 상당기간 얼음에 갇히는  실정이다. 블라지보스
똑(Vladivostok)항은 미국의 뉴욕과 위도상으로  거의 동일선상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겨울에  쇄빙선의 도움으로 항구를 열고 있다. 이에  더
하여 블라지보스똑은 모스끄바로부터 약 8,045km  떨어져 있어 항구로써의
기능이 제한적이였으나, 근래 태평양 연안국들의 국제 및  경제력 상승으로
인한 역할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러시아가 접하고 있는 바다는 북서부에 있는 발틱해(Baltic  Sea), 유럽국
들과의 남서부 국경을  이루고 있는 흑해(Black Sea), 북부에  있는 북극해
(Arctic), 동부의 태평양(Pacific Ocean)이다.  이밖에 중동의 이란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까스삐해(Caspian Sea)가 있다.
 이용측면에서 볼 때 발틱해와 흑해는 겨울에 결빙되지 않는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들로부터의  출입이 북부에 위치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
의해, 그리고 남부에서는 터키에  의해 통제 당하고 있어 제한적이다. 발틱
해에서의 주요 러시아  항구는 쌍뜨 ㅃ쩨르부르끄이다. 이 항구로 오는  선
박은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이 장악하고 있는 해로를  거쳐야만 한다. 흑
해에는 아졔싸(Odessa)를  비롯하여 여러 부동항이 있지만  사실상 내해에
지나지 않는다. 이유는 선박의 출입에 있어 터키(Turkey)영토내에 속해 있
는 극히 비좁은 다다넬스(Dardanelles)해협을 통화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과거 수세기동안  유럽과의 경제, 문화적 결속목적으로  교통이
용이한 해로확보에 고심해왔다. 따라서 18세기 뾰뜨르대제 이래  부동항 확
보는 대외정책의 주요목표가  되고 있다. 근래에는 당사국들과의  입출허용
을 위한  협정체결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나, 군사적 용도의  해로이용은
북대서양 조약(NATO)국들에  의해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렇게 해로를 통한 국제교류의  차단효과가 선진문화와 기술의 도입은 물
론, 상업적 협력마저 불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비합리
적이며 독단성을 조장하는 데에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이동 및 교통수단으로써의 강의 역할은 특히 러시아에서  지대했다. 러시
아에 존재하는 강의 수는 약 100,000개에 이르며, 이의 특징은 거의 급류나
폭포가 없어 활용도가 높다는 점이며, 더욱이 평원을 가로지르며   흐를 뿐
아니라 강폭이 넓어 교통에 이상적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는 교역, 인
구이동, 영토확장 목적에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구러시아에 산재해 있는 많은 강들은 북으로 흘러 북빙해로 들어가고 있
다. 문제는 북빙해가  거의 일년내내 결빙되어 이용가치가 적을 뿐  아니라
상업적인 활동기회도 극소수로 제공되고 있을  뿐이다. 드비나(Dvina)와 녜
바(Neva)와 같은 일부의 강은  서부로 흘러 발틱해로 흘러들고 있다. 아울
러  남쪽으로 흐르고  있는 다른  주요 강들은  2,285km 길이의  드녜쁘르
(Dnieper)강, 까스삐해로 흘러들고 있는 3,685km 길이의 돈(Don)강이 있다.
이들은 교역과 상업에서 대동맥 역할을 해오고 있다.
 시베리아에는 4개의  핵심적인 주요 강이 있다.  5,567km에 달하는 오비
(Ob)와  이의 지류인  이르쯔끄(Irty나), 3,347km길이의  예니ㅆ이(Yenisei),
4,312km에 달하는 레나(Lena)강들은 모두  북쪽으로 흘러 북빙해로 흘러들
고 있다. 따라서 동부로의 교역 및 상업활동을 위해서는  방향을 거슬러 가
야하는 이용의  불편으로 제약되어 왔다.  그러나 광범위한 망을  형성하고
있는 지류들이 수륙교통망을 제공함에 따라 시베리아 정복과정에서 군사적
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자원적 측면에서도  이들 강은 거대한  수력발전에
활용되고 있다. 네번째로  시베리아에서 중요한 강은 4,344km에 달하는 북
동쪽으로 흐르고 있는 아므르(Amur)강으로써 시베리아와 만주(Manchuria)
를 구획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호수 역시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구 소련방 당시  호수의
수는 250,000개 정도였으며, 규모가  적은 호수는 여행 및 상업용도에 제한
적이였다. 그러나 규모가  큰 호수는 상대적 용도를 갖고 있었는데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로 230,962㎦ 용량의  까스삐해, 18,954㎦규모의 바이
깔호(Lake Baikal),  10,812㎦ 용량의 발하쉬(Lake Balkhash), 10,998㎦용량
의 라도가(Lake Ladoga)호가 있다. 이밖에  북쪽과 남쪽의 동부 지역에 수
많은 소규모 호수들이 있다.
 러시아는 이미 바다와 강들을  연결하여 교통망을 조성하기 위한 운하체
계를 전국적 범위로  조성시켜 놓고 이용중에 있다. 이들중 대표적인  운하
가 101km에 달하는 돈강과 볼가강을  연결한 운하이다. 구러시아에는 발틱
해, 백해(White), 까스삐해, 아조프해(Azov),  흑해를 연결하는 다른 운하들
이 건설되어 있다.
 이들 수로는 러시아의  주요 교통망을 제공하고 있다. 교역 및  상업활동
에 사용되고,  주요 도시 및 깊은  오지에 위치한 도시들을 연결하고  있는
내수로는 약  128,720kn(소련 통치시)에 달한다.  바다에서 수배  km떨어진
모스끄바는 광범위한 운하와 강들의 교통망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모스끄바는 5대양(백해, 발틱해,  흑해, 까스삐해, 아조프해)의 항구로  호칭
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수로를 이용한 교통망의 형성조건이  특히 시베리
아로의 영토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6) 민족적 조건

 민족성이란 혈연관계에서의 공통된 출처와 공통 언어, 전통, 습관에 의해
통일된 인간집단을 말한다.  러시아는 국가명칭이 말해주고 있듯이  다민족
으로 조직 및 구성된 연방국가이다. 연방주의 원칙은  이미 구소련체제로부
터 물려받은 유산으로써  이의 구조적 특징은 일개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연방의 단위  내지 주체들이 지역적, 경제적,  역사적 구별보다는 민족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연방적 주체들은 민족단위를 의미해  왔
다. 그러나 소련방  해체이후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즉,  러시아연방내에서
러시아인의 비율이 과거와는 달리  압도적으로 많은 82%를 차지하는 상황
에서 민족적  요소존중과 함께 지역적  관리중심으로 행정단위를 구획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주체들은 현행 헌법에 의하면 공화국규모
의 수준에 21개,  지방수준에 6개, 주수준에 49개,  연방적 시수준에 2개(모
스끄바, 쌍뜨  ㅃ쩨르부르끄), 자치주수준에 1개,  자치관구수준에 10개로써
총 89개이다.(헌법 65조 참조). 이들중 슬라브족에 기초한  연방적 성격의 2
개 시 및 모스끄바주등  일부 중복된 주체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을 배제할 때 약 80여개 민족을 공식 구성원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구성된 민족도 상당수에 이루고 있다.  즉, 고려인, 게
르만인, 그리스인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구성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요인을 감안하여  러시아정부가 공식집계
하고 있는 민족은  131개, 그리고 극소수 성원으로 인해 기카  민족으로 분
류하고 있는  민족을 모두 포함시킨다면  구소련통치시의 통계수치와 같은
175개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러시아는 다수  민족이 공존하며, 미국과  같이 민족을 일개  미국인으로
통합시키려는 노력,  즉 합중국(United States)의  성격과는 달리 러시아는
연방(Soviet Union  or Russian  Federation)을 표방하고 민족적  독자성과
개성 및 자율성을 보장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짐에 따라 다민족 국가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러시아가  다민족을 보유하게된 발단은 유라시아  대평원의
지형적 조건에 따른 민족이동의 용이성 결과, 따따르족의  침략시에 폴란드
지주들에 의한 남서부(현재  우끄라이나 주변)지방의 유린 결과로 인한  동
슬라브족의 이질화와,  로마노프(Romanov)왕조의 제국주의 정책의  결과로
얻은 영토에 기인했다. 그 후 집권한 쏘비예뜨 정권은  세계공산화 목표 속
에 민족해방투쟁지원을 표방함에 따라 소련내에 거주하는 제민족들을 강압
적으로 러시아화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따라서  이민족들에게
기본적으로 최고 입법기관으로써의  "민족 쏘비예뜨"를 창설하고 이민족의
의사 구현을 제도화시켜  주었고, 또한 이민족의 대표성 허용이란 명분  속
에 민족집단  성격의 가맹  "공화국"으로부터 밑으로는 "민족관구"에  이들
행정단위를 창설시켰다. 이러한 정책의 기본 목표는 공산사회  발전에 있어
모스끄바의  중앙 통제하에  이민족을 통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Union에서 Fedsration으로의 조직원칙을  바꾼 것은 중앙집권적 통제성 완
화 및 자율성 신장의지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아울러 양원제  채택과 함
께 상원을 두고 있는 것도 구체제의 "쏘비예뜨"  및 "민족 쏘비예뜨"제도와
근본 원리를 같이  하고 있다. 문제는 옐친정부가 시대정신을 반영하여  민
족적 화합 및 조화노력을 보이고 있으나, 체첸공화국의  분리독립이 전쟁으
로 비화된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난제중의 난제이다. 고르바쵸프  집권기
에 본격 해체 내지 분열현상을 보이게 된 러시아의 민족문제는 중앙정부의
통제력 정도에 따라 표면화 여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갈등의 구
조적 측면에서 이를 다룬다.
 러시아 연방의 주도 세력은 역사와 인구비례에 의거 논의의 여지가 없이
러시아민족이다. 러시아민족의 뿌리는  동슬라브족(동슬라브족에는 현재 러
시아인으로 호칭되고  있는 대러시아인,  우끄라이나인으로 불리우고  있는
소러시아인, 벨로루시로 불리우는  백러시아인이 이에 속하며 이들은  거의
유사한 언어를  갖고있으나, 역사와 문화면에서  상호 이질성을 지니고  있
다)이다. 동슬라브족은 소련방 체제하에서 전체 인구의 약 75%로 지형적으
로 가장  생활조건이 좋은 유라시아  평원에 거주하면서 국가를  주도했다.
그러나 1980년대말 동슬라브족의 일원이었던 우끄라이나공화국과 백러시아
공화국이 분리 독립함에 다라  82%의 압도적 인구비례에 의해 러시아연방
의 주도권을 러시아인이 단독으로 수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따
라서 민족적 구성인원과 비율을  1989년 기준의 통계자료에 의거하여 공식
적인 통계대상이 된 민족으로써 10만명을 넘는 민족만을  열거하였다. 민족
구성에 관한 국가 통계위원회의  자료중 최신자료가 1989년 자료이므로 불
가피하게 이를 인용했으나  1989년의 총인구 147,022천명과 1995년의  총인
구 147,938천명과 비교할 때 약 900천명 증가했을 뿐이다. 따라서 민족구성
비율에도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학신한다.

 ㅇ 1989년 러시아의 민족구성  (단위 : 천명)

 인구   비율  인구  비율
전체인구   147,022   
러시아  119,866  82%  다르긴  353  0.2%
따따르  522  4%  꼬미  336  0.2%
우끄라이나   4,363   3%  아제르바이쟌  336  0.2%
추바쉬   1,774   1%  꾸미끄  277  0.2%
바쉬끼르  1,345  0.9%  례즈긴   257  0.2%
벨로루시  1,206  0.8%  인구쉬   215  0.1%
모르드바  1,073  0.7%  뚜빈  206  0.1%
체첸  899  0.6%  북부인민들  199  0.1%
녜몌쯔(독일)  842  0.6%  몰다비아  173
우드무르뜨  714  0.5%  깔뮈끄  166
마리쯔  644  0.4%  ㅉ간  153
까자흐  636  0.4%  까라차예프  150
아바례쯔  544  0.4%  꼬미-ㅃ르먀끄  147
예브례이  537  0.4%  그루진  131
아르마녜  532  0.4%  우즈벡  127
부랴뜨  417  0.3%  꺄ㄹ  125
아쎄찐  402  0.3%  아듸계이  123
까바르진  386  0.3%  까례이(고려인)  107
싸하(야꾸뜨)  380  0.3%  라끄  106
러시아연방은 상기한 민족비율로 예지할 수 있듯이 과거 소련방 당시와는
비교할 수도 없게  민족문제를 용이하게 처리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게
되었다. 이는  과거와는 달리 민족집단에  절대 의존한 행정적  관할체계로
분리되어있지 않다.  이는 러시아인들이 수적으로  절대우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각한 민족문제 발생가능성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을  결코 아니다.
단지 과거에 비해  비교우위의 입장에 있을 분이다. 특히 민족분규의  우려
지역은 민족규모 보다는  일정지역에 밀집되어 살고있는 지역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적 이해의 불일치  및 불평등, 그리고 심리적 가치문제로 언제든
지 충돌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2) 국가생성 및 전개조건하의 문화유형
 (1) 건국 이전기의 주거환경

 건국이전 오늘날의  유라시아 지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생황의
흔적은 신석기시대(the early  Stone age)이다. 이같은 흔적이 발견된  지역
은 끼예프(Kiev),  크리미아(Crimea), 돈(Don)강 유역이다.  후석기시대에는
인류가 개를 동반한  흔적이 발견됐으며, 보다 더 북쪽으로 진출하여  오까
(Oka)강, 라도가(Ladoga)호수  주변, 그리고 심지아 북빙해상의  현재 아르
한겔리(Archangel)가지 진출하였다. 당시  이들이 사용한 생활용구로 보아,
이들의 문화수준은 인접 북부 유럽지역에서 널리 사용된 것들과 유사한 점
에서 동일수준으로 짐작된다.
 이어진 청동기시대의 용구들은 서구에서 발견된 것보다 디자인에서 열등
한 면을 보였다.  B.C 7세기 이후, 후철기시대의 유물들은  당시 동구에 살
고있던 사람들의 발명품으로  볼 수 없는 독자적인 작품들이다. 당시  이들
은 교역활동을 통해 장인들이 만들지 못하는 제품을 보충 받았다.
 교역지역은 다뉴브(Danube),  지중해(Mediterrnean), 이란(Peria),  이라크
(Bablyon), 이집트(Egypt)였다. 아울러 모피,  말, 그리고 흑해 북부해안 지
대의 일부 농산물과 타국의 포도주, 직물류, 그리고 지중해 주변의 고도 문
명화 결과로 생산된 제품들이 교류되었다.
 이 지역에 살고있던 사람들의  역사적 근거는 후철기시대부터 보다 명확
성을 띠기 시작했다. 흑해 북부지역 주민들이 연속적으로  조우한 민족들은
씨메리안족(Cimmerians),  스키디안족(Scythians), 살마티안족(Sarmatians),
그리고 초기 기독교 시대에 이곳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알란족(Alans)이다.
이들은 땅을  갈고, 농사를 지음으로써  토착민들의 일손을 보충한  것으로
보이지만, 거의 대다수가 사냥을 하고, 고기를 낚으며,  전투를 하는 유목민
들이였다. 당시 스키디안족이  전투장비와 가정용구 제작에 흥미를  보였으
나, 이들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의 눈에  조잡한 "야만인들"로 보였을 뿐이
다. 이들의 관습은 원시적이였으며, 이들은 비정착 생활을  했다. 이들에 대
한 아시아적 영향은  예상보다 강했지만, 그리스 이주민을 통해 들어온  그
리스 사상의 침투  역시 이들의 문화적 발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
다.
 흑해 북부지역에 아직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이민현상은 빈
번했다. 이중 이 지역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시킨 게르만족이 A.D 1세기와
2세기에 도착했다.  이들은 고크족(Goaths)에게 밀려나 이곳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였다. 이주한  게르만인들은 게르만식의 지역행정체계를  도입시켰
으며, 군사적 재조직 및 개선책을 독려했다. 끼예프(Kiev)는 이들의 주도하
에 4세기에 번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후에  러시아가 받아들인 기독
교의 최초 신자들이다.  선진 게르만족의 제업적은 4세기에 이들을  몰아낸
훈족(Huns)에 의해 파괴됐다.  훈족은 6세기에 아발족(Avars)에 의해 대체
됐으며, 이들은 또  마캬르족(Magyars)이 도착하여, 볼가강 하구주변과  원
거리의 서부에 정착하였다.  하자르족의 상부계급은 유태교를 믿고  있었으
며, 하부계층은 모하메드교도(Mohammedan)들이였으나 일부는 기독교인이
되기도 했다.
 하자르족의 이동은  아리안 언어(Aryan language)를  사용하며, 이 지역
동부와 북부에 흩어져  살고있는 슬라브인들(Slavic peoples)과 조우함으로
써  정지됐다.  발틱해 인근지역에서  슬라브족은  토착민인  리투아니안족
(Lithuanians)을 급습했으며, 핀족(Fins)이  침투하고 있었던 먼거리의 동쪽
으로 진출했다. 8세기에 하자르족과 맞설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슬라브족의
최초정착지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일부 학자들은 현재의  우끄
라이나로  보고   있으나,  또다른  학자군은   카페디안  산맥(Carpathian
Mountains)으로 보고  있다. 이밖에 다뉴브(Danube)하륙지역으로  보는 사
람들도 있다. 분명한 것은 타종족들과 마찬가지로 동쪽으로 배회했으며, 반
복적인 아시아인들의 침략으로 인해 서쪽으로 밀려났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슬라브족은 3개 집단으로 구별되고 있는 바와 같이 분리되었
다. 즉, 현재 북부  및 유라시아에 중심을 두고 있는 대러시아인(the  Great
Russians), 우끄라이나에 살고있는  소러시아인(The Little Russians), 우끄
라이나  북부지역과  폴란드  동부에  살고  있는  백러시아인(the  White
Russians)이다. 기타 슬라브종족들은 서부지역을 장악한  웬드족(Weds), 체
코족(Czechs), 폴족(Poles),  슬로바크족(Slovaks)이 있다. 이외의  슬라브족
들은  세르비아(Serbia), 불가리아(Bulgaria),  루마니아(Rumania)에 정착했
다.
 결과적으로 흑해 북부지역에 거주하게된 동슬라브족은 지형적 이동의 용
이성과 자연적 생활조건의 풍요  속에서 이민자들 또는 침입자들과의 연속
적인 관계설정이 불가피했다. 이에 따라 인종적 혼혈현상뿐만  아니라 문화
적 영향이 뒤따랐다. 그리스인이나 게르만족과 같은 서구  선진민족들은 발
달된 문명을 전달했음에  반해, 아시아 및 중동에서 침입한 민족들은  문명
의 파괴 및  야만적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4세기 이후의  수탈피해는 이지
역 거주민들로 하여금 건국의 필요성을 절감케했다.

   (2) 건국기 슬라브족의 제성과

 9세기에 발생한 두 사건이 러시아사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즉, 비잔
틴(Byzantium)에서  선교목적으로  파견된  선교사  끼릴(Cyril)과  메호지
(Methodius)의 슬라브  알파벳 제작과  보급,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태생의
북부인(Northmen) 또는 바란진족(Varangians)의 통치가 시작된 사건이다.
 낄리과 메호지가 활동하던  시기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기독
교는 일개 통일된  카톨릭교회의 일개 부분으로써 형성되어 있었다. 두  선
교사는 자신들의 책무를 수행하기  위해 서슬라브 언어용 알파벳을 만들었
다. 869년에 사망한  끼릴은 기독교 신앙전파에 성공한  크리미아(crimia)와
뜨무도로깐(Tmutorokan)에까지 진출하며,  다양한 슬라브족들에게  선교활
동을 전개했다. 메호지는  서부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는 독일군주가 파견한
바바리안(Bavarian)목사들에 의해 시작된  선교활동과 경쟁하기 위해 로마
교황에 의해 보내졌으며, 체코중부지방인 모라비아(Moravia)에서 활동했다.
885년에 사망한 메호지는 모라비아에서  기독교를 폐지시키려 침입한 마갸
르족에 대해 괄목할만한  업적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이들이  달성한
업적의 중요성은 알파벳 도입과 동시에 자국어로된 복음서 편찬을 통해 슬
라브인들을 연계시켰다는 데에 있다.
 러시아의 옛 연대기는 바란진족(Varangians)의 러시아 통치에 관해 기술
하고 있다. 즉,  슬라브 종족들은 분열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평화,
질서, 번영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강력한 외국인에게 자발적으로  통치해줄
것을  부탁한   사실에  대해  기술하고  잇다.   녜스또르  연대기(Nestor
Chronicle)가 제공한 이  사건묘사는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부인
할 수도 없는  것은 러시아에서 슬라브족들이 분열되어 있었고, 이들의  생
존이 외부침입자들에 의해 위협받았으며, 더욱이 불리한 지리  및 경제조건
에 의해서도 위협받았다.  교역요건도 폭넓은 접촉이 필연적이였지만  소규
모 집단의 독립성이  허용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펼쳐
진 평원과 긴 수로들이 안전보장속에  교역에 활용될 수 있도록 통일이 제
기된 것이다. 고고학적 근거로 밝혀진 사실은 7세기초와  8세기에 슬라브족
은 요세화된 도시, 상당한 수준의 자인들, 상당 규모의 교역뿐만 아니라 국
가발전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정치적 조직을 다양한 지역에 소지하고 있었
다. 따라서 바란진족이 통치한 "러시아  최초의 국가"는 과거 제경험으로부
터 완전히 이탈된 것이 아닌 당시 추세의 논리적 지속에 불과한 것으로 평
가할 수 있다.
 바란진족이  슬라브족과 접촉하게  된  시기는 8세기로,  이들은  라도가
(Ladoga)호수를 따라 남하했으며, 볼가강을 따라 까스삐해로의 침투 및  돈
강과 드녜쁘르(Dnieper)강을 따라 흑해로  침투했다. 이들은 유럽에서 이미
증명된 바와 같이 용맹스런 전사였으며, 뛰어난 항해술,  영리한 상인, 유능
한 조직  및 행정가들이였다. 따라서  이들은 러시아에 침투하여  평화로운
접촉 및  군사적 동맹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러시아에 침투한  바란진족의
지도자는 류릭(Rurik)이다. 류릭은 노브고로뜨(Novgorod)에 머물며, 쁘스꼬
프(Pskov), 로스또프(Rostov) 및  기타 북부 촌락들을 자신의  친척들이 관
리하도록 했다. 아울러  전략적으로 수림지대와 초원지대의 경계선상에  위
치해 있으며, 북부와  남부 수로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문명도시인  콘스탄
티노플에 쉽게 도달하기 위해 기예프 장악에 나섰다. 이를  위해 자신의 동
료 아스꼴드(Askold)와  디르(Dir)를 끼예프에  보냈다. 그러나 아스꼴드와
디르는 끼예프의 중요성을 깨달은 류릭의 후계자 알레그(Oleg)에 의해 882
년 살해당했다. 북부와 남부지역을 통합한 알레그는 그후  본격적으로 기대
한 과업들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인구면에서나 교역을  위한
전략적 측면에서 긴요한 끼예프를 병합시킴으로써 명실공히 러시아의 건국
자로 간주되고 있다.

   (3) 최초국가의 건립과 활동

 국가명칭인 "러시아"(Russia)어원은 다소 불투명하다. 어근은 그리스인에
게서, 남부 러시아에  살았던 종족의 이름에서, 독일인  마을에서, 핀란드어
루오찌(ruosi)에서, 또는  독일어 루데레르(Ruderer)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
정된다. 본래 "루씨의  끼예프인 법률"(the law of Kievan  Rus')에서 루씨
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국가전체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사람을
언급하고 잇는 루씨(Rus')라는 말은 슬라브 선조의 러시아인들에게 적용되
었을 뿐아니라 러시아에서 생활하며 통치하고 있던 바란진인들에게 적용된
말이다. 다시 말해 "루씨"에  기초한 "러시아"란 말은 슬라브족을 구성원으
로한 영토를 바란진족이 통치하는 국가라는 의미가 된다.
 스칸디나비아에 거주한 바란진족은 자신의 능력과 역할에 기초하여 국가
및 사회의 상부구조를 형성했으나 수적 열세로 인해 슬라브족에 곧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장구한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일반구조에
흡수되고 말았다.
 알레끄(Oleg)는 노브고로뜨로부터 끼예프로 정치역량을 옮긴후 흑해상의
초원지대에 침입한 아시아종족들을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드녜쁘르강 하구
를 장악하고 콘스탄티노플 및 볼가지역과의 교역로를 열었다.  이로써 향후
3세기동안 "끼예프공국"형태로 유지된  대내적 통합, 교역 및  영토의 확장
으로 요약되는 주요 책무수행이 본격화된 것이다.
 통합책무 수행은  발틱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다양한 슬라브족의 결속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당시  이의  최대  걸림돌은   침입자  드례블랴녜
(Drevlyane)와 동부  인접지역에 살고 있던  ㅃ쳬녜끄족(Pechenegs)이였다.
그러나 이들의 위협은 결과적으로  슬라브족들로 하여금 세력을 규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더욱이 전쟁과 조약을 반복하며  이룩한 콘스탄
티노플과의 성공적 관계형성과 함께 대내분규를 종결하고 정치적 통합과제
를 이룩하였다.
 교역의 확장은 슬라브족과  바란진족 공히 일치된 이해문제였다.  대내교
역은 도시들의 성장과  더불어, 도시의 장인들이 제작한 산품과 교외의  산
품이 확대 교류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중요성을 띠지 못했
다. 당시 대내교역의 핵심은 남부의 농산물과 북부의 임산물간의 교류였다.
한편 수출입과 수송을 기본사업으로  하는 대외교역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당시 교역은  본질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지향한 남부방향과  까스
삐해 지역을 겨냥한 남동쪽으로 이루어졌다.
 영토확장은 교역방향과 일치되어 이루어졌으나, 미미한  성과를 거두웠을
뿐이다. 무수한 군사적  원정이 까스삐해안 방면으로 이루어졌지만, 콘스탄
티노플을 관장하고  있는 동로마제국으로도  빈번히 이루어졌다.  수천명이
동원된 동로마제국으로의 원정은 860년, 907년,  940년에 수행되었으며, 940
년에는 해상공격을 감행하여 콘스탄티노풀을 위기에 몰아넣는 성과를 보이
기까지 했다.  그리고 모든 원정의 결과로  무역협정이 체결되었는데, 특히
911년의 협정은 러시아에  유리한 상태로 체결됐다. 이렇게 러시아와  콘스
탄티노플간의 활발한  교역과정에서 부수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침투할 수
있었고, 코카서스지역 아랍세계와의  접촉이 마호멧 사상을 침투케했다. 동
로마제국과의 상호관계 진전 속에서  러시아가 받은 문화적 영향은 엄청나
다. 종교부문에서 사상, 문자, 지식, 관습,  의상, 건축, 음악, 회화, 의식행사
등등 생활전반에 부수적  영향을 미쳤으며,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관리
체제, 일사불란한 동양적 전제주의 문화유형을 답습하게 되었다.
 알레그가 건국한 러시아  최초의 국가는 "끼예프공국"(Kieven Rus')으로
호칭된다.  알레그가  세우고  기틀을   잡은  끼예프공국은  이고리(Igor',
912-945) , 이고리의  처 올가(Olga), 타고난 용맹성을 바탕으로 남서부  다
뉴브지역까지  원정에   나섰던  올가의  아들   스뱌또슬라프(Svyatoslav,
960-972), 희랍정교를  국교로 정하고  선진문화도입에 공헌한  블라지미르
(Vladimir, 980-1015), 러시아 최초의 법전 편찬과 더불어  끼예프공국의 번
영을 절정기로 끌어올린 야로슬라프(Yaroslav, 1019-1054)가 계승했다.

   (4) 끼예프공국의 제구조

 정치 구조적인 면에서  끼예프공국은 민족국가라기보다는 상업적 연합국
(동맹국)이였다. 개별 동맹집단은 주요  도시와 외각 소도시들을 지닌 주로
세분화된 구조적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공(Grand Duke)은 임명
제 지사를 통해 이들 주를 장악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통치했다. 당시 공국
의 주요 주는 북부에 뽈로쯔끄(Polot나), 노브고로뜨(Novgorod),  로스또프-
수즈달(Rostov-Suzdal)이  있었으며,  남부에는  끼예프(Kiev), 쳬르니고프
(Chernigov), 볼흐이니아(Volhynia), 갈리씨아(Galicia)가 있었다. 개개의  공
은  드르즈이나(druzhina)로 호칭된  사적인 군을  갖고  있었으며, 바야르
(boyar)로 호칭된 귀족들이 협의체로써 의회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두
마(duma)를 소지하고 있었다. 아울러  하부구조인 도시(town)에는 통상 협
의체 기능을 수행하는 베쳬(veche)가 있었다.
 끼예프공국의 통치 및 정치구조는 시대적 상황에서 볼 때 상당수준의 민
주제도였음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귀족소유의 두마와 일반시민이  참여하
는 베쳬간에 권력투쟁이 빈번했으며, 블라지미르(Vladimir)와 갈리씨아에서
는 전권을 수행하는 공이 귀족들에게서 배출되었음에 대조적으로 노브고로
뜨에서는 베쳬에서 공이 나왔다. 즉, 베쳬가 자신의  공과 주교를 선출했다.
이는 민주적 운영실태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끼예프공국의 민주제도는 폭넓은 시민의 의사를 반영했다는 사실로 긍정
적 평가를 받고있다. 그러나 국력결집을 통한 외침에  효율적으로 대처함에
있어 극히 취약한  면모를 보였다. 특히 최고통치자의 통수권 확립의  어려
움과 함께, 결국  한계상황에 부딪치고 말았다. 권력승계시의  가혹한 투쟁,
공들간의 첨예한  이해싸음이 무질서를 야기했고  결국 국가분열을 초래했
다. 주민이 합세한 지역간의 이해분기 양상은 노브고로뜨를  포함한 발틱지
역 서부지역, 볼가강 상부유역을  포함하는 북동지역(뒤늦게 서서히 부상했
음)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확대된 분열이 국력약화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
용했다.
 끼예프공국의 경제적 기반은 대내적으로  농업과 임업 및 목축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대외적으론  교역이였다. 특히 교역활동의 결과로 얻은
부 덕분에 끼예프와 노브고로뜨의  경제적 생활수준은 선진 서구도시와 대
등한 상태였다. 기예프공국의 수출품은 농산물, 목재,  모피, 아마, 꿀이였으
며 수입품은 직물률,  술, 향료와 같은 사치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
같은 교역활동과 품목을  통해 우리는 당시 교역이  차지한 경제적 비중과
함께 도시생활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끼예프공국은 사회적  계층화가 발달한  나라였다.
이같은 원인은 정치적으로 쇠퇴된 통합결과와 무역을 통한 경제적 부흥 속
에서 정치적 예속을 벗어난 시민의 수가 증가된 것이다.
 계층의 구조는 수많은 지배가문의  후손으로 형성된 귀족과 귀족의 신변
보호를 목적으로 고용된 귀족의 동료들이 한집단을 이루며 형성된 소위 바
야르(boyar)로 불리운  귀족계급, 소지주 출신으로써  충원된 하위층  귀족,
그리고 도시의 중산계급시민, 이렇게 네 계층으로 나뉘어있었다. 농민은 그
들내에서 더욱 세분화되었는데 이는 일부 소수의 자유농민,  계약서로 약정
된 신문의 반자유농민, 노예에 가까운 상태의 농민이었다. 특히 반노예신분
의 농민이 점차  수적 증가추세를 보였으며, 소규모 농장들이 공의  토지로
변모하기도 하였다.
 통치계급인 류릭(Rurik)의 가문은 11-12세기 기간중 가문의 분열에도 불
구하고 다양한 지역에서  자신들의 왕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통치자로써의
지위는  처음과 달리 상당히 손상된 상태에 있었다.  그들의 통치권은 그들
이 지휘하는  군의 지도력에서 생성되었으며,  그들의 동료 및  신변보호자
(druzhina)의 지원에서 나왔다.  문제는 이러한 요인에 의해 생성된 통치권
이 권력투쟁으로  인해, 그리고 끼예프의  경제적 상황쇠퇴로 인해  약화된
것이다. 이같은 결과로  자율적인 귀족계급이 그들의 협의체인 두마(duma)
를 통해 공이  누린 특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안정적 토지,  군사 지휘권,
독립적 사법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통치권 약화 추세 속에 슬라브혈통을 지닌 소규모 토지소유 귀족들의 수
중에 독립성과 권력증대  현상이 야기됐다. 과거에 그들은 공에 대한  행정
내지 군사적 봉사의  대가로 토지를 얻었으며, 마찬가지의 결과로 고위  귀
족이 되어 세습적으로  토지를 소유하였다. 보뜨치나(votchina)로 호칭되는
이 세습토지는 특별한  봉사책무를 지고 있지는 않았다. 공이 왕권을  잃게
되면 하위 귀족들은 자신들의 봉사책무를 벗게 되었으며,  하사받은 토지는
보뜨치나로 전환되어 부담없이 소유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소유지내에
서 살고 있는 농민에  대한 사법권도 관장할 수 있었다. 이에  더하여 귀족
들의 영향력은 사업활동을 통해 더욱 증대되었다. 러시아의  귀족들은 그들
소유의 토지관리뿐만  아니라 교역이나 은행활동과  같은 상업에도 몰두했
다.
 농민들은 토지를 세부분으로 나눈 후 한부분씩 번갈아 농사를 짓는 윤작
제도(three-field system)를 도입한 후 상당한 개선결과를 얻었음에도  불구
하고 점차 과거의 지위를 잃어갔다. 중앙정부의 강력한  보호결핍속에 농민
들은 사유 내지 공동재산권을 침해받게 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토지경작권
이 완전히 소유권으로 점차 대체됨으로써 침해받게된 것이다.  세금은 무거
웠다. 따라서 부채가 빈번히 자유를 상실당하는 결과를 초래시켰다.
 도시민들의 지위에도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끼예프공국은 오랜  기간
도시를 골간으로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때문에 인구가  집중된 도시에서
자유시민들은 장인활동(craftsmanship)내지 산업활동으로 부를  얻을 수 있
었다. 끼예프공국의 번영기반은  대내외무역과 경유무역 그리고 농업, 목축
업뿐만이 아니라 이에 더하여  채광, 금속 및 목재가공, 방직공업도 포함된
다.  도시에서의 화폐는  대내외적으로  사용된 은전(silver  coins)과 모피
(kuna)가 사용되었다.
 대공 블라지미르 2세(1113-25)사망이후 야기된 정치적 혼란이 도시의 생
활조건을 위협했다. 그러나 여전히 교외의 시골보다는 우월한  질서유지 속
에서 도시민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보존하고 있었다. 도시민들은  모든 도시
자유민들의 집회인 베체(Vieche)를 통해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과
적으로 시민들의 의지를  공에게 부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도시와  교외의
생활이 다소 대조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농촌 교외의 생활도 당시 서구제국
과 비교할 때  결코 뒤떨어진 수준은 아니었다. 끝으로 끼예프공국은  교역
과 상공업의 발달결과로 분화된 사회구조를 갖추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민
주적 정치문화를 구축하였다.

   3) 외세적 문화유형

 지도세력간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빚은 분열과 무질서가 급기야 국가몰락
으로 이어졌다. 끼예프공국의  몰락원인을 구체화하면 첫째, 탐욕스런 외국
인들의  내습으로써,  특히  끼예프의  무역업자들을   약탈한  뽈로브쯔이
(Polovtzy)인들이었다. 둘째, 경쟁관계에 있는  공들의 분쟁대상이 끼예프를
연루시킨 내전으로 비화되어 파괴와  기아 및 약탈을 초래시켰다. 셋째, 전
쟁의 결과로 인한,  그리고 쇠퇴된 경기로 인한 주민들의 이탈,  넷째, 끼예
프의 보호와 부를 박탈시키고  있는 산림의 황폐화, 다섯째, 교역 파트너이
며 문화적  지원역할을 담당해온 콘스탄티노플의  쇠퇴로 인한 교역방향의
재설정 및 서구 교역센터의 부상이었다.

   (1) 따따르의 침공

 몰락과정에서 치명적 결과를 미친 사건은 몽고인종인 따따르족의 침입이
다. 1223년 따따르족은 아시아에서의 통치영역을 확장한 후  서부로 방향을
돌리기 시작하여 유럽에 진입했으나, 사실상 유라시아 평원에  국한된 침입
이었다. 이들이 유라시아  평원으로의 진입과정에서 일차적으로 조우한  민
족은 러시아에 자주  침투하고 있었던 뽈로브쯔이인들이었다. 이들은  러시
아의 입장에서 볼  때 효과적인 완충지대(Buffer)역할을 수행함에  따라 러
시아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와 뽈로브쯔인간의 연합군이 아조프(Azov)해
북부 깔까(Kalka)강에서 1224년에 벌인 전투는  따따르족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따따르족은 깔까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후퇴하여 아시아로 돌아
갔다. 하지만 계속해서 러시아의  위험은 상존해 있었으며, 이에 대한 준비
와 대내적 통일을 간청한 교회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징기스 간(Genghis khan)이 사망한 후 12년  뒤 따따르의 재침공이 징기
스  간의  손자  바투  간(Batu  khan)에  의해  이루어졌다.  블라지미르
(Vladimir), ㅃ례슬라블리(Pereslavl), 쳬미고프(Chemigov)가 1238년에 함락
됐으며, 1240년에 끼예프(Kiev)가 함락 당했다.  이어서 갈리씨아(Galicia)를
장악한 따따르족은 폴라드에  진입했으며, 실례씨아(Silesia)를 거쳐 독일을
침략했다. 이 와중에서 유일하게 노브고로뜨는 북부의 울창한  숲과 늪지대
로 인한 진입의 효과적  방해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에  따른 노브
고로뜨의 지속적 성장과 발전이 나중에 러시아 부흥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
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따르족의 러시아지배는 1240년부터 1480년까지  약 240년간 장구히 이
어졌다. 이들이 조공에 국한된 관심 속에 자율권을  인정하고 간접통치했으
며, 종교의 자유도 허용했지만  러시아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예를 들어
동양적 전제주의 , 세금징수에 필요한 장부기입법과 행정, 세금징수의 효율
성 제고방법이었으며  농촌공동체(mir), 전투방법, 두루마기와 같은  길이가
긴 의상, 수염, 국물이  많은 수프, 순대, 만두, 동양식 소주와  흡사한 보뜨
까, 여성의 사회활동 금지와 가내 운둔생활을 조장하는 풍습 등이다.

   (2) 서부로부터의 침공

 서부로부터 1240년에 스웨덴의  침공이 있었다. 이때 노브고로뜨의  알렉
싼드르 녜프스끼(Alexander Nevsky)공이 녜바(Neva)강변에서 가까스로 돌
려보낸 침공사건이 발생했다.  그후 2년뒤에는 리보니아(Livonia)에 정착해
있던 독일계통의 튜톤 기사들(Teutonic Knight)이 자신들의 통치영역을 확
대할 목적으로  러시아에 침입했다.  이때도 노브고로뜨의  알렉싼드르공이
뻬이쁘스(Peipus)호수에서 이들을 타격하고 돌려보냈다. 1243년부터 1245년
까지 리투아니아인(Lithuanians)들도 노브고로뜨 영토에 군대를 반복적으로
파견하였다. 이같은 결과로  노브고로뜨는 극심한 자원난에 시달리게  되었
고, 결국 더이상의  전쟁을 피할 목적에서 따따르의 주권을 인정해야만  했
다. 따라서 스웨덴과  튜톤족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이들로 인해  따따르
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국력쇠약시 찾아드는 외세의 물결은  끼예프가 몰락한 후 모스끄바가 주
축이 되어 러시아인들을 재규합  및 통합한 모스끄바공국기에도 동일한 패
턴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패턴은 모스끄바공국을 확고한 전제주의  체제로
전환한 후 강력한 전제권을  행사해온 이반 4세(Ivan Ⅳ, 1530-1584)사망후
재현되었다. 이반 4세가 사망하자 바리스 가두노프(Boris Godunov)가 간질
병과 병약한 이반 4세의 아들 효도르(Feodor,  1584-1598)를 대신하여 섭정
정치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왕권에  대한 가두노프의 탐욕으로  저질러진
향후  계승권자인  이반  4세의  일곱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드미뜨리
(Dimitry)살해는 정통성 시비를  발생시켰다. 그리고 1601-.603까지 지속된
한발이 빚은 극심한 기아현상 속에서 러시아는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바로
이 시기에 서부로부터 폴란드와  스웨덴이 러시아에 침공하는 사건이 발생
한 것이다. 당시 폴란드는 모스끄바까지 진주하여 괴뢰정부를  세우는 성과
를 올리기까지 하였다.
 폴란드의 왕 씨기스문드(Sigismund)는 혼란기에 자신의 가족에게 러시아
왕권을 넘겨주기  위해 전통적인 영토확장  정책을 추진했다. 여기에  그는
가톨릭과의 재통합  논리를 적용했다. 이같은  구상과 논리 속에  1904년에
가두노프의  왕권찬탈을 노리고  등장한 "가짜  드미뜨리"(falsedimitri)에게
군사지원을 한 것이다.  지원대가는 영토, 종교, 정치적  약속을 비공식으로
하고 있었다. 결국 1605-1606년간 가짜 드미뜨리는 왕권을 장악한 후  폴란
드에게 편애정책을 통한 이익을 제공하였고, 폴란드는 러시아의  관습과 예
절을 경멸한  가톨릭 여신도와의 계략적  결혼을 통해 왕권찬탈을  노렸다.
이에 더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자극한 총대주교 모욕행위와 결부되어 마침
내 귀족들의 반발과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제  1차 가짜 드미뜨
리는 몰락했다. 그후  1608년에 재발된 제 2차  "가짜 드미뜨리"사건에서도
폴란드는 군사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모스그바 탈환시도 및  약탈도 서슴
지 않았다. 결구  제 2차 "가짜 드미뜨리"가 사적  불화로 살해당했지만 폴
란드의 야심은 포기되지 않았다. 폴란드는 사치와 허영심  많은 하위귀족들
을 적극지원하며, 목적달성을 노렸다. 모스끄바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교외
주택가에 불을 질렀을 뿐만 아니라 끄레믈리 장악은 물로 창대주교가 머물
렀던 유명한  삼위일체 수도원(Trinity  Monastery)을 1년반동안 포위하며
배교를 강요하였다.  국가와 교회의 위기가  결국 국민적 결속을  유도하여
1612년 모스끄바와 끄레믈리를 탈환함으로써 러시아사의 최대 위기로 기록
되었다. 따라서 이 침공사건을 계기로 정교회가 국가의  중추적 지위확보와
역할 행자로써의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뾰뜨르대제  집권시에는  스웨덴과 21년간에  걸친  소위  대북전쟁(The
Great Northern war)을 벌였으며,  터키와의 전쟁도 뽀뜨르대제 이래 예까
쩨리나 2세 집권시 활성화됐으나 이들은 모두 러시아의 영토확장과 서구제
국과의 문물교류에 필요한 해상 접근로 학보를 위해 러시아가 펼친 공세의
전쟁이였다. 19세기초 엄청난  피해와 파장을 불러온 대러시아  침략전쟁은
나폴레옹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다. 프랑스가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
으로 국제적 대륙체계(Continental  System)를 구축하고 이에 러시아를  끌
어들이는데 성공하였으나, 나중에  프랑스가 러시아 이익에 반한  정책표출
과 경제적 득실계산에 따른  러시아의 정책전환으로 결국 침공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즉, 프랑스가 장악한  폴란드에서 로만 가톨릭 부활 조치 는 러
시아정교에 대한 도전이였으며,  러시아가 원한 콘스탄티노플 병합이  프랑
스에 의해 거부됨으로써 흑해를 통한 지중해진출의 좌절,  경제적 측면에서
러시아와 프랑스는 공히 농업부문에  비중이 큰 상태에서 기대할만한 교역
상의 이익이 없는 반면에 영국은 러시아 경쟁의 기반이 되어온 목재, 아마,
철, 곡물의 수입국으로써의 절실한 경제협력이 작용했다. 특히 러시아 귀족
들은 나폴레옹의  대륙체계가 러시아 번영을  침해하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1812년 6월에  개시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650,000
명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전쟁이였으나 실제로는 지형적으로 알프스산
맥 뒤편의 완만한 대평원이 전쟁수행을 용이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지형적
요인이 전쟁선택도 용이하게 이끌었다.
 나폴레옹과의 전쟁결과는 전쟁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진 프
랑스의 발전상을 목격하고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엄청난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나폴레옹의 패배와 이들을  쫓기
위해 프랑스 파리가지 진군했던 많은 교육받은 젊은 장교들에게 특히 충격
을 주었고, 이들이 귀국시 수집하여 들여온 인본주의 및  공화정에 관한 서
적들은 향후  러시아 정치, 사회에  심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즉,  프랑스에
대한 승리의 결과를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업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함
으로서 국가를 통치자의 소유몰로  간주되어 온 전통적 사고에서 공동소유
물로, 다시 말해 인민의 국가개념으로 바뀔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4) 정치적 문화유형

 근대개념의 정치는 사회적 제집단간의 이해조정과 조화를 통한 전구성원
의 복리추구를 주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시각에 서 모스끄바공국 이래  러
시아에 과연 정치가 존재했는지?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국민복리 활
동과 구성원 상호간의 이해조정 업무를 등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으
로 국가의 안보 및 진로개척에  남다른 관심과 정렬을 쏟았다는 점에서 러
시아정치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정치의 유형학적(typological)근거는 환경적 영향과  국가적 목표추
진 과정에서 유래됐다.  우선 끼예프공국의 몰락이 제공한 역사적 교훈  속
에 지도층 내의 권력투쟁을 배제하기 위한 제도가  등장하였다. 모스끄바공
국의 장자상속법이 이를 반영한 것이며, 보다 강력한  포괄수단으로서의 국
가통합제도인 전제주의(despotism)가 보편성을 띠게 되었다. 전제주의가 러
시아의 고유상표로 정착하게된 데에는 러시아적 조건이 작용하였다.

   (1) 비잔틴과 따따르의 영향

 러시아가 선진문화권인 비잔틴제국과의  교역을 매개로 시작하게된 폭넓
은 영향 중 정치적 영향은 지대했다. 비잔틴 제국은  우선 지형적으로 서구
중심에서 볼때  동양에 위치 해있다. 따라서,  자연적 내지 전쟁수행결과로
맺게된 교류를 통해 동양적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둘째로는 제국주의 수행목적상 획일적이고 일사불란한 지휘체계의 유지 및
관리가 불가피했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현실적 제사실이 동양적  전제주의
를 이상화하게 되었다.  비잔틴제국의 전제주의 현실은 교회권  운영체계에
도 반영되어 서구와는 대조적으로  황제에게 교권이 예속되는 양상을 띠었
다. 아울러 황제의 권위는 동양과 마찬가지로 마치 용과  같은 최상의 위치
에 있었다. 더욱이 인위적 통제권 강화목적으로 호칭, 주거, 의복, 의전절차
등에서 권위제고 방도를 총동원하기까지 하였다.
 따따르족은 본래 동양에서 거주해온  민족으로써 항시 말을 타고 이동과
정복을 반복적으로 일삼아온 집단이다. 따라서 전투적 기질과  규율이 존중
되었고 상하의 종속체계가 엄격한  사회구조 속에서 전제주의는 이들의 전
통적 가치였다.  문제는 따따르족의 전제주의  문화가 좋고 나쁘다는  평가
및 선택이전에 지배자에게 호감을 보여야만 했고, 또한  그들의 지배체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익숙과정을 거쳐 동화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
이다.
 전제주의는 끼예프공국 몰락이래 효율적인 국가통합목표 실현방법으로써
충분한 타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첫째, 이는 따따르의 피침으로 흩어
진 민족을 규합하는 데에 있어서도 과거에 형성되어 온 도시국가형태가 본
래 독자적 발전을 인정해왔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순리적 논리로 설득될 리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자적 노력으로 민주적 번영과 부를 축적한  노
브고로뜨의 경우 모스그바의  통합조치에 완강히 반발하고 나섰으며,  따따
르 침공이래  폴란드-리뚜아니아의 지배를 받아온  우끄라이나 서부지역의
까작그(cossack)들도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이렇게 과거의 전통을 바꾸는
데 겪어야했던 진통이 필연적 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내륙지방
에서는 순조롭게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 이는 따따르족이 러시아의  모스
끄바공에게 허락한 대규모 영역에 대한 조공징수권 부여 덕분이였다.
 둘째, 1480년 이반  3세(Ivan Ⅲ, 1462-1505)에 의해 조공납부를 공식  거
부한 이래 모스끄바공국은 따따르족 축출목적과 병행하여 영토확장에 본격
돌입하게 되었다. 당시  정벌지역은 불가강하류에 밀집되어 정착했던  까잔
(Kazan), 이스뜨라하니(Astrakhan')를  시작으로 결국 우랄산맥을 넘어  시
베리아지역으로 확대됐다.  시베리아지역 정벌은 상인들과  까작끄무리들에
의해 수행됐으나, 까잔, 이스뜨라하니 정벌은 정부주도의 대규모 전투를 통
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전쟁에 필수적인 인적,  물적자원을 동원함에 있어
전제주의는 효율적일 수 밖에 없었다. 아울러 국가방어  차원에서도 타당성
을 찾을 수 있었다.
 셋째, 전제주의는 비찬틴제국과 따따르족이 이미 채택해 온  제도로써 후
진 및  피지배상황에서 비잔틴의 영향이  자연스럽게 파고들 수  있었으며,
또한 따따르족의 문화유산이 거부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알게 모르게 흡
수되었다.
 넷째, 관리방식으로써 러시아  영토의 거대성과 광활함이 중앙집권적  관
리방식의 효율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전제주의  체제와의 조화에도 무리가
없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비잔틴제국의 고유상표인  중앙집권적 관리방식이
러시아에 쉽게  전수될 수 있었으며,  상부로부터의 일원적 명령과  지시가
하부로 하달되고, 이의 이행여부가 확인, 감독되는 관리상의 속성으로 인해
전제주의를 보강할 수 있었다.
 다섯째, 러시아의 근대화  조건에서도 전제주의는 속도와 효율면에서  초
기에 정당성을 인정받을만한  요인이 충분했다. 러시아의 근대화  필요성은
희랍정교와 로만카톨릭간의 분열로 인한 제반분야에서의 교류차단 및 고립
의 결과가 핵심요인이 된 것으로써 전반적 영역에서 근대화가 요구된 것이
다. 따라서 백성의  무지로 인해 "위로부터의 전제적 개혁"이  타당성을 얻
을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전제주의는 사회구조적  이해관계를 전적으로 무시한 이기적이
며, 독선적  유형을 창출했다.  농민 대다수를 노예화했고,  고위귀족들마저
일방적으로 종속됨에 따라 궁중 쿠테타가 빈발해 온 사료들이 말해 주듯이
대등한 사회구조를  갖지 못했다. 오로지  통치자가 단독으로 국가의  모든
자원을 독점적으로 소유 및 관장해 온 가산제국가로써 황제의 이익과 영광
만이 주어졌을 뿐이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가  자연스럽게 뿌리내려 현재까지  확고한 사상 및
제도로써 자리잡게 된  배경도 외세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따따르족은  피
지배지역에서 주민들과 최대한 마찰을 줄이면서 최대의 조공을 거둬들이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었다. 이에 따라 피지배지역에 이식시킨  제도가 동양적
농촌공동체(mir)였다. 미르는  공동으로 경작하여 공동으로 분배하고,  마을
의 공동관심사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준자율적 결사체이다. 따따르족의  입
장에서 미르는 러시아인들로부터  누락없이 세금을 거둬들이는데 효과적이
었다. 한편 러시아인들은 미르제도에 익숙해짐에 따라 토지의  공개념과 분
배의 평등사고를 자신들의 뇌리에 정착시킬 수 있었다.

   (2) 서구의 영향

 러시아가 종교적 원인으로 인해  서구세계와 분열 내지 차단된 상황에서
도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 이루어진 대규모 인적교류는  이반 3세의 처 죠
(Zo e)-러시아 이름으로  쏘피아(Sophia)-가 1492년 이반 3세와 결혼한 후
이후 이태리의  르네상스 건축가들을 대거  초청하여 모스끄바의 끄레믈리
(Kremline)를 재건했을 때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교육받은 귀족과 중산
층이 없어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지는 못했다.
 이반 4세 통치기에도 서구의 다양한 기술전문가들이  상당수 초청되었다.
이들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황제와 귀족들의 주거시설 건축 및 치장에 활용
됐으나, 이반 3세 통치기와의 차이점은 군사적으로 도움을  받기 위한 목적
에서 초빙된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변화현상은  당시 따따르
족의 잔재소탕작전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따따르족  소탕작전에서 결
정적 승인이 노브고로뜨 상인들이 제공한 화약과 총기 및 화포였다는 사실
이다.  당시  노브고로뜨  상인들은  뤼데크(Lubeck)및  기타   한자마을들
(Hanseatic towns)의 독일인들과 행해진  활발한 상거래를 통해 화약류 병
기의 우수성을 알게된 것이다. 따라서 서구 선진 병기의  효율성 인정과 더
불어 이 분야 관계기술자들이 초빙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 엔지니어에
불과했을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적어서 정치적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서구문명이 대규모로  물밀듯이 들어온 시기는  뾰뜨르(Peter 1)통치기이
다. 그러나 주고 군의 근대화 목적에 부합된 물질적  문물 위주로 서구화가
진행됨에 따라  직접적인 정치효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후진성 인식에 따른 서구문명의 우위 인정과 함께 극복수단으로 제시된 국
가에 대한 전국민적 봉사책무 강요  및 서구문명의 합리성 존중 속에서 긍
정적 영향을 미쳤다.
 예까쩨리나 2세(Catherin 2, 1762-1796)는 계몽군주라는 별칭이 말해주듯
이 문예적 개방을 통해 인도주의 사상을 비롯하여 폭넓은 서구의 선진사상
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 아울러 프랑스 문물의 대거도입과  교류 속에서
뾰뜨르대제 이래 서구적 교육 혜택을 받은 귀족층을 일깨우는데 촉진제 제
공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통치말년인 1789년에 발생한 프랑스  혁
명이 자신의 황제권 포기압박으로 작용될 수 있음을 직감하고 검열을 강화
하였으나, 결국 교육자체를  차단할 수 없는 국제적 지위상승과 이로  인해
제공되는 상황전개하에서 서구의 영향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었다.
 알렉싼드르 1세(Alexander 1, 1801-1825)통치기에 겪게된  1812년의 나폴
레옹의 침략사건은 직접, 간접적으로 러시아 정치에 획기적 영향을 미쳤다.
1825년 12월 젊은 장교  및 전문직업인들을 중심으로 모반사건-일명 "제까
브리스뜨 난"(The  Dekabrist Revolt)-이 일어났다. 이들은  전쟁의 와중에
서 파리 목격을 통해 견문을  넓힌 사람들과 서적을 통해 낭만주의적 사고
를 갖고있던  교수, 학생, 시인,  이상적 관료들로써 인민에 대한  책무간에
빠져있던 귀족들이였다. 이들은 미국, 프랑스, 스페인 헌법을  모델로 한 급
진개혁안을 갖추고 있었다.  아울러 이들의 개혁목표는 왕정과  군사독제폐
지, 농노해방, 토지의  공동소유, 목사의 축소였다. 이들  중 일부는 상비군
제도폐지, 상업을 포함한  직업권 보장, 종족의 자치권  보장이었다. 제까브
리스뜨 난은 비록 실패했으나 민주주의, 인도주의, 법치주의 사상의 필요성
을 거론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으며, 러시아 인ㅉ리겐찌야형성을  촉진시키
는데 크게 기여했다.
 알렉싼드로 2세(Alexander 2, 1855-1881)기에 이르러  서구의 보편사상이
러시아에 구체화되어 실현되었다. 1861년에 농노가 해방되었으며, 1862년에
는 재무성과 국영은행의 창설 및 정규 예산제도가 도입된 사실을 핵심내용
으로 한 재정적  개혁이 단행되었다. 그후 1863년 교육개혁을 통해  대중교
육의 시대를 열었으며,  여성에게 고등교육기관 입학이 허용되었고, 대학에
상당한 자치를 부여한 결과를 낳았다. 1864년에는 사법개혁이  단행되어 과
거에 농노들에게 행사했던 지주들의 사법권 폐지, 비밀심문 폐지, 배심원제
도 도입, 농민을  위한 특별읍법원과 경미한 죄를 다루는 치안판사  법원의
설립을 통해 "법앞에 만인의 평등사상"을  구현했다. 이어서 1864년에는 젬
스뜨보 체제(Zemstvo system)를  제도화하여 지방자치를 허용한 행정개혁
의, 1865년에는 칙령을 통한 검열축소조치가 단행됐다. 이밖에 1870년 도시
의회(duma)체제  창설과 함께  세금납세자  전원에게 투표권을  허용했고,
1874년에 일반 군복무제도가 도입됐으며, 복무기간 축소, 병사를 위한 교육
체계 제도화,  군조직내에 존재해 온  불평등과 권력남용 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개혁을  뒤따랐다. 그러나 문제는  이같은 다양한 개혁조치  단행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권한을 제한하고, 주권제민 사상을 구현할  의사가 없었다
는 점이다.
 민주화로 요약되는 개혁은  니꼴라이 2세(Nicholas 2, 1894-1917) 통치기
노-일전쟁 후에  발생한 1905년의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사건으로
실마리를 찾았다. 평화적 시위자들에 대한 동궁(Winter Palace)친위대의 발
포로 인해 1월 22일에 야기된 사회적 마비사태가 10월 30일 황제의 의회승
인을 핵심내용을 한 "10월 선언"(The  October Manifesto)을 통해 겨우 사
태를 수습한  사건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10월 선언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결의사항을 황제가 거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제한적 민주주의를 허용함에 따라 정치적 혼란은 지속됐다.

   (3) 정치문화

 러시아 정치문화의  특징은 "분열"로 대표되고 있다.  모스끄바공국의 출
현 이후 농업에  의존한 사회구조적 재편 속에  전제주의 체제가 확립되었
다. 이렇게 일원적인 체제 구축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관여한 상부구조내의
분열상이 끊임없는 극렬한  양상을 보여왔다. 러시아의 분열상은  끼예프공
국기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권력승계시에  벌어지
는 형제들간의 치열한 싸움을 동반한 분열현상이 일반적이다.
 이같은 분열의 원인은 지리적  악조건과 외세의 빈번한 수탈경험 속에서
형성된 안보의식의 산물이며, 교육결핍 속에 형성된 본능적  행태의 결과로
보인다. 더욱이 분열현상이  향후 러시아사에서도 지속되고 따라서  러시아
에서 강력한 통합능력을 갖춘 군주는 공통적으로 힘에 바탕을 둔 폭군들이
었다. 때문에  지도력에 틈과 취약점이  보이면 귀족들간에 암투를  동반한
권력투쟁의 노골화 현상이 관례화 되어왔다.
 모스끄바공국기는 전제주의로 인한 대공 내지 짜리(황제)의  권한이 강화
된 시대였다. 전제주의는 분명  외세의 영향이다. 그러나 이를 러시아에 정
착시키는데는 상당한  진통이 뒤따랐다. 원인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분열이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세배격이 국가적  최대 과업
인 상황에서 불가피했던 통합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에 의존한 토지제
도 개편에 착수했다. 즉, 끼예프공국시부터 분열의 온상이었으며 세습적 사
유지인 보뜨취나(votchina)를  폐지하고 국가에 봉사하는  대가의 봉급형식
으로 배분되는  빠예스찌예(pomestie)방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구귀족들의
반발도 컸기 때문에 결국  이반 4세가 오쁘리치니나(Oprichina)라는 황제의
특수한 군사적 경찰력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분열세력을 제제하고 통합을
이룬 것이다.
 로마노프왕조기에서도 대표적인 경우를  뾰뜨르대제 통치시 볼 수  있다.
그는 근대화 과제를 최상목표로 정한  뒤 우선 귀족을 포함한 모든 국민의
헌신적 국가봉사를 통해 개인의 부를 증진시킬 수 있다는 논리의 국가개념
정의로 강권을 휘둘렀다. 다시 말해 근대적 발전수준을  인정하면서도 힘에
바탕을 둔 통합을 통해  명실공히 러시아를 유럽세력으로 부상시키는데 성
공하였던 것이다.
 분열의 구체적 실체 속에는  이기적 양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즉, 짜리의
정상적인 체제유지기에는 비굴하고 절대 굴종적인 귀족들의 모습이 일반적
이었다. 그러나 절대군주 사후에 반복적으로 발생한 귀족들의  권력투쟁 양
상은 공동이익을 저버린 극히 사적 이해추구에 집착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절대권을  행사한 이반 4세의 아들 효도르(Fedor)를 법
적으로 계승했으나 그가 간질병자이며  병약하여 그의 형 바리스 가두노프
(Boris Godunov)에게  넘어갔다. 그후 왕권에 대한  정통성 시비에 휘말려
야기된 가짜 드미뜨리(Dimitry)사건으로  폴란드에 주권을 상실 당할  위기
에 빠지기까지 했다. 그후 폴란드의 사주를 받고 있던  가짜 드미뜨리를 몰
아내고 집권한  바실리 슈이스끼(Nasily Shuisky, 1606-1610)는  이반 볼로
뜨니꼬프(Ivan Bolotnikov)가  주도한 농민, 농노의  난을 진압할 목적으로
1608년 스웨덴에 구원요청을 함으로써 외세의 개입을 자초했다.  결국 스웨
덴인들이 1609년 스몰렌스끄(Smolen나)를 포위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1610년 모스끄바에서 또 다른 난이 발생하여 바실 슈이스끼를 폐위시
킨 후  ,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던 정부가  폴란드의 황태자  라디슬라우스
(Ladixlaus)에게 자신들의  조력과 동의하에 통치하는 조건을  붙여 러시아
짜리(황제)자리를 제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러시아에서 발생한 권
력투쟁은 민족 공동 운명체의식마저 저버린 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알렉쎄이 1세(Alexis 1,  1645-1676)사후 신체가 허약하고 반신불수 상태
의 효도르 3세(fedor  3, 1676-1682)가 총주교의 선동에 힘입어 서자출신인
뾰뜨르 1세(Peter  1, 1682-1725)와 공동짜리로 승계했다.  그러나 승계당시
뾰뜨르의 나이도 10세밖에 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효도르 3세 손위의 누
이인 쏘피아(Sophia)가 친위병들의 도움을  받아 섭정정치를 했다. 이때 알
렉쎄이 1세의  첫째부인이며 효도르 3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밀로슬랍스끼
(Maria Miloslavsky)와 둘째부인이며  뾰뜨르의 어머니인 나딸리아 나루쉬
낀(Natalia Naryshkin)가족간에  벌어진 권력투쟁은 지도력 분열의  대표적
관행이었다. 뾰뜨르가 단독짜르에 오른 것은 권력투쟁 양상인  궁중 쿠테타
의 결과였다. 이같은  정치문화의 이해와 상황 속에서 뾰뜨르는 힘으로  전
제권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적 정치문화속성 중  또다른 산물은 사회주의이다. 사회주의가  러
시아적 전유물로 부각되기  시작한 시기는 19세기초부터이다. 당시  러시아
지성들이 러시아의 진로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 과정에서 "슬라브주
의자들"(Slavophils)과 "서구주의자들"(Westernzers)공히 러시아에  대한 애
정과 러시아농민의 이상화 및 농촌공동체(mir)를 옹호한 사실이다. 특히 농
촌공동체를 제도적 측면에서 러시아사회의 건전한 기반으로 보고,  이를 사
회건설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지성들의 농촌 및  미르
의 예찬은 바로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것으로써 농촌에서 미르가 보여준 토
지의 공동소유, 공동관리,  공동배분, 공동납세방식이며, 더욱이 자율적으로
무리 없이 협동적으로 관리되어온 점을 높이 사고있는 것이다.
 다른측면에서 러시아의 사회주의 발전요인은 정부의 인민에 대한 탄압과
수탈 및 대다수 농민의 농노화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으로써 양식 있는 행
태적 이행은  1870년대에 행해진 "인민으로의 운동"(vnarod)으로  표출됐으
며, 이는 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이어진  인쨀리겐찌야운동의 핵
심사상을 이루고 있었다.

   5) 종교적 문화 유형

   (1) 신비주의

 988년 희랍정교(the Greek  Orthodox Church)를 국교로 채택하게 된 동
기중에는 대공의 숨겨진  계산이 있었다. 정교는 로만 가톨릭과 달리  군주
가 교권의  상부위치에서 교권에 대하여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군주가 교황 내지 총주교를 예속시킬 수 있는  조건을 확인한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교리중심 보다 외적인 경건, 우아함, 신비성에 사로잡
혀 맹종적 기복신앙에  치우친 것이다. 더욱이 전례상의 오류로 인해  말씀
의 전례가 부재했으며, 성서의  오역, 교구 본당 성직자들의 문맹현상이 올
바른 신앙생활을 방해했고,  서구로만 가톨릭권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비이
성적 내지 신비주의적 종교문화를 태동시켰다.
 끼예프공국기 국교가 된 정교는  국가의 진흥정책에 힘입어 대대적인 수
도원 및 교회건축은  말할 것도 없었고, 전국민적 영세강요와 귀족들의  허
세적 추종으로 시작되었다.  점차 기독교 문헌 및 교리서가 보급됐으나  극
소수의 고위성직자와 귀족만이 혜택을 보았을 뿐이다. 교리서  보급에 있어
가장 큰 장애요인은  해독 능력의 부재에 있었다. 더욱이 대다수  서민들은
기독교 교리 이해능력 및 시간적 여유에 있어 귀족들과 비교될 수 없는 악
조건에 있었다. 이에  따라 성서의 주요내용을 목판에 회화형식을 빌려  상
징적으로 처리한 이꼰(icon)이  보편적 전교 수단이 되었다. 이렇게 무지로
인한 지적 판단능력의  부족뿐만 아니라 미신숭배(pagan)에 빠진 사람들이
국가강요에 의해 신봉하게됨으로써,  그리고 선진종교가 갖는 지위에  힘입
어 맹목적인 숭배와  섬김 속에서 신비주의적 신앙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
다.
 인간의 의식을 초월하여 이성적 인식이 이룰 수 없는 불가지한 영적존재
로써 신을 의식하는 것,  더나아가 직접적, 내면적 경험이나 직관에 의해서
만 신을 포착할 수 있다는 종교적 경향 및  사고방식이 신비주의이다. 문제
는 신이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실존적 현실로 변화시
키려는데 있다.  정교가 로만 가톨릭에  비해 초대교회의 원리에  충실하고
응용을 배격함에 따라 로만 가톨릭보다 더 신비스런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신비주의 적용으로 해결하려할 때
이성은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신앙은 마음의 양식이며, 정의, 질서, 평
화의 원동력으로써 최상의 것을  추구하고 닮으려 노력함으로써 영생을 얻
게 되는 대상이다.
 러시아의 종교적 신비주의는 결국 현실적 합리성을 상실함으로써 서구와
다른 이질적 사회를 창조했다.  즉, 서구사회가 주변의 생활환경을 극복 및
개선하기 위해 현실적 접근을  함으로써 신의 영역으로 간주되어온 한계영
역을 과감히 침범하고, 과학문명과 인간중심사상을 발전시켜 가고 있을 때,
러시아 사회는  신비주의에 빠져 비이성적  생활을 일관하고 있었다.  물론
러시아의 종교적 신비주의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자연적이며, 순수하
고 인간적인 면에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무지의 국면을 벗어나지  못했다
는데 현실적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2) 민족주의

 신앙을 전교 및 관리해야 할 위치에 있었던 하위성직자들의 저질적 자질
도한 러시아의 정교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문화 발전에도 치명적인 저
해요인으로 작용되었다.  1652년 로마노프(Romanov)옹조기에  니꼰(Nikon)
총주교가 단행한 종교개혁과 그 결과가 우리에게 이같은 원인에 의해 조성
된 러시아적 이질  신앙을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줄 것으로  확신한다.
니곤의 개혁은 사실상 경미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써 희랍정교 교리
와 다른 제원리들을 바로잡는데 한정되어 있었다. 이는  신학적으로는 다소
새로운 의식적 세부사항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두손가락으로 십
자성호를 긋는 것은  세손가락으로 긋는다던지, 동쪽방향으로 행렬을  갖춘
행군, 수염기르는 행위 금지, "예수"(Jesus)의 러시아어 철자  정정, "할렐루
야"(hallelujah)용어의 성가 부르기, 그리고 성서의 오역 바로잡기였다. 니꼰
의 개혁은 16세기중 서구에서  행해진 인도주의자들의 개혁과는 성격을 달
리하고 있었다. 즉,  니꼰의 개혁은 원초적 성서에 기초한 개혁이  아닌, 그
리스의 총주교(patriarchate)에 의해 도입된 이후  조성된 전통을 참작한 개
혁이였을 뿐이다. 개혁중에  가장 비중 있는 내용은 전례에 성가도입과  대
부분의 러시아 목사들의 무식한  자질적 결함으로 수행하기 어려웠던 설교
를 도입한 것이다. 개혁의  결과는 대소동과 격렬한 반대를 낳았다.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교구목사를  비롯한 대다수의 신도들이였다. 아울러  격렬
히 반대한 사람들은 러시아 성직자들로써 그 원인은 니꼰 총주교가 개혁을
추진하는데 있어 그의 이상에 동조했던 그리스인들을 교회관료로 임명함에
따른 부수적 결과였다. 즉,  당시 출세를 탐냈던 러시아 성직자들이 반발한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성직자들과 합세한 러시아인들의 반발이  종교에
서의 "민족주의"를 태동시켰다는 데에 있다.
 종교적 민족주의의 발단은 그리스정교의  메카(Mecca)였던 콘스탄티노플
이 이미 1453년에 터키수중에 들어갔으며, 그후 이반  3세가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과 결혼한 이래 그녀의 요구에 따라 러시아는 콘스탄
티노플의 종주권을 행사하기 시작함에 있었다. 이는 황제의  전제권 강화목
적에서 황제를 호칭하는 권위적인 용어인  "짜리"가 도입된 시기였으며, 끼
에프공국 멸망 이후 교권은 비잔틴제국에 독립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끼
예프와 분리되어 있었던  러시아정교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458년 모스끄바에 주교청(metropolitan)이  인가됐으며, 이태리
예술가들이 대거 초청되어 모스끄바  단장에 나섬으로써 명실공히 "제 3의
로마"로 모스끄바를 격상시켰다. 그후 바리스  가두노프가 자신의 계승으로
발생한   정통성   문제를   해소할  목적으로   1590년대에   총대주교청
(patriarchate)을 유치함에  따라 "제3의 로마"건립과제를 완성하였다.  이렇
게 비잔틴제국의  패망과 모스끄바공국의 몰락이  몰고온 과정에서 종교적
계승과 종주권을 획득한 이후의 과제는 그리스사람인 니꼰총주교의 종교개
혁과정에서 제기됐다.
 러시아정교의 민족주의는 교회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분열을 초래했
으며, 이  결과 교권이 세속군주에  완전히 압도내지 종속당하는  러시아적
특성을 보였다.  뾰뜨르대제(Peter, 1682-1725)통치기에 교회 및  목사는 국
가와  완전히  동질화된  것이다.  1721년에  뾰뜨르는   총대주교  아바꾼
(Avvakum)사후 21년간 총대주교를  공석으로 비워둔 후 마침내  총대주교
직 폐지와 함께 신성종무회의(Holy Synod)라는 명칭의  위원회를 태동시켜
대체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과거 로마노프왕조를  태동시킨 미하
일 로마노프(Michael Romanov)의 아버지인 필라레뜨(Pilaret)및  니꼰과 같
은 총대주교가 누렸던 정치적인 영향력은 상실되었다. 오히려  교회의 재산
과 토지를 몰수당한 채 국가의 감도하에 들게 되었다.  위원회는 황제가 임
명하는 사람들로써  성직자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다수 참여하여 교회를
관리토록 했다.  이렇게 변화된 이후  그리스 정교가 러시아정교로  명칭과
내용이 탈바꿈된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종교적 민족주의는  전제주의의
일개 구성성분이 되었다.
 러시아에서 교회는 서구에서와 같이 러시아인들의 생활에서도 중요한 위
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에 비해 너무 대조적으로 독립성을  유
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에 비해 너무나 대조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국가에  예속됨에 따라 일원주의를 조장시켰다. 특히 독립을  위한
기본요소인 경제권확립에서도 국가의 통제와 예속은  강화되었다. 러시아의
초기교회, 특히 수도원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제한적인지만  교회와 관
련된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황제는 교회재산
의 세속화로 인한  자신의 권위 침해 가능성에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뾰뜨르대제가 "신성  종무회의"에 교회관련 행정을  접수한 이유도 사실은
재산권 감독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에도 교회는 재산권행사를  통
한 사회적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 상태였다. 단지 권위  손상과 정치적 영향
력이 약화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예까쩨리나 2세 집권시인 1762년  교회재
산이 거의 몰수당하는 형국으로 갔다. 즉, 국가 예산에 의거 교회가 유지되
는 상태로 바뀜에  따라 교회는 정부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 단서체계에
빠져들고 말았다.
 18세기 하위직에 머물러있던 교구성직자들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는 고위
성직자들과 너무나 대조적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교구목사들은  농민과 같
이 귀족들의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었다. 이들에 대한 교육은 빈약하기  이
를 데  없었다. 나폴레옹이 침략하기  이전까지 신학교육에 관한  규정조차
없었다. 따라서  이들이 교리를 가르치고 설교  및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처지도 못 되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이들에게 맡겨진  업무는
포교활동보다는 국가의  유용한 도구로써 봉사(때로는 경찰업무에  종사)하
는 것이었다.  이들은 1738년 이후부터  인두세를 면제받는 국가적  배려를
받았으나 1796년까지 체벌과 매질을 당하는 수모를 받기까지 하였다.
 러시아정교의 완전한  국가예속 및 수단화  그리고 교구목사들의 가혹한
수모상황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진실은 정교자체의 권위손상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등지고 배교하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단지 농노들이 받은  탄
압이 교구목사들에게도 가해진  결과로 인해 공동운명체로서의 공감대형성
을 통한 민족신앙의  토대를 굳건히 하는데 기여했을 뿐이다. 정교에  대한
국민적 신뢰는 1905년에  발생한 "피의 일요일"사건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
작할 수 있다.
 니꼰의 종교개혁이 몰고  온 또 다른 결과는 교회권의 분열이었으며,  나
아가 사회적  분열로 이어졌다. 니꼰의  개혁은 1666-67년의  교회위원회에
의해 본질적으로 지지됐지만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교회의  광범위한 개
혁안이 교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유서 깊은  러시아전
통에 매달린 라스꼴리니끼(Raskol' niki)또는 구교도들(Old Believers)로 호
칭되는 반대자들이 니꼰을 반그리스도교도로 몰아붙였을 뿐만 아니라 반정
부를 부르짖으며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라스꼴리니끼는 개혁가들에 의해 분쇄된 자신의 사도직을 계승할 목적으
로  새로운  종파들을  만들었다.  이는  무승파(Bespopovtsi),  성령부정파
(Dukhobors)등으로 스스로 종교적 합법성을 부여받기  위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겠다.
 라스꼴리니끼들의 반정부 폭동 선동과 종교적 분파활동은 정부의 탄압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상당수의 라스꼴리니끼들이 박해를 피해  이
민했으며,   국외의   다뉴브(Danuebe)지역,  합스부르그   제국(Hapsbueg
empire)에서 수백년동안  살아야 했다. 이들은  국가적 노동력확충목적에서
단행된 예까째리나 2세 통치기에  가서야 평온한 생활보장을 약속 받고 귀
국했으며, 국가가 제공한  불가(Volga)동부지역에 정착했다. 그러나 19세기
에 성령부정파(Dukhobors)에  대한 새로운  박해사건으로 이 종파의  다수
신도가 캐나다로 이민하는  사태가 재발했다. 이렇게 19세기 중반중  5백만
명에서 1천만명 정도로 추산되어온  라스꼴리니끼는 1917년 임시정부 출현
기까지 완전한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로 살아야했다.
 니꼰의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회 및 사회적 분열현상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와 사회간의 구조적 동질화가 급기야는 종교적 민족주의로 발전하였음
을 보여주고 있다. 이성적 판단에 앞선 맹목적 억지가  결국 러시아 정교도
들로 하여금  러시아적 독자성을 띠고  이질적 문화유형을 창조한  것이다.
정부의 힘으로도 결국 이를  바로잡는데 실패한 라스꼴리니끼 문제는 러시
아 정교의 취약점을 노출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

   6) 사회적 문화유형

   (1) 토지제도

 러시아에서 토지가 사회 전분야에서  중추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시기는
모스끄바공국시 부터이다. 끼예프공국시에도 토지의 중요성이  무시된 것은
아니지만 교역과 상공업의 상대적  발전으로 인해 토지의존도 역시 상대적
으로 낮았다. 그러나 토지를 근거로 국가체제를 수립했으며, 교역과 상공업
도 토지에 기초했을 뿐만 아니라 상호 보완관계에 있었으므로 중요성이 상
실된 것은 결코 아니다.
 러시아  최초의 토지제도는  보뜨치나(votchina)로써 국가창설과  더불어
대공이 자신의 관할권내에 있는 통치지역을 분할하여, 자신의  자손이나 동
료들로 배치함에 따라  생성된 세습적 성격을 띤 토지제도를 말한다.  보뜨
치나 체제의 문제점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분할된 통치지역에서의 계승
세대가 늘어남에 따라 보뜨치나의 위력이 빛을 발한 결과로 중앙집권적 권
력행사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는데 있다. 통치권의 누수현상  및 분열양상은
외세침공시에   두드러졌다.   즉,   러시아  남동쪽으로부터   ㅃ쳬네끄족
(Pechenegs)이 11-13세기  기간중 지속적으로 침략함에 따라  대공이 지역
별로 병력파견을 요청하고 연합군을 편성할 때 거의 절반에 달하는 도시들
이 불참한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보뜨치나  체제하에서 국가조직자
들이 점차 대공의 통치력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기주의의 난무로 인
해 심지어 중앙에 도전하는 사태까지 빚게 되었다.  끼예프공국의 분열양상
은 결국 몰락을 초래했고, 이같은 몰락이 제공한 값진  교훈이 결국 모스끄
바공국기에 와서 제도개편을 단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개편된 토지제도는  뽀몌스찌예 체제(pomestie system)로써  이반 3세가
도입했다. 이반 3세는 따따르족의 멍에로부터 러시아를  구원하고 전제주의
체제를 확립한 군주이다. 뽀몌스찌예 제도는 왕족의 특권과  품위유지 성격
을 띤, 과거의 보뜨치나제도와는 달리 현직에 복무하는  군인이나 행정관료
들에게 복무기간동안만 봉사댓가로 하사하는 토지제도이다. 이반  3세는 농
업에 전적으로 의존된 경제구조 속에서 이 토지제도를 전제주의 확립 수단
으로 삼았다. 그러나 뽀몌스찌예 확립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수백년동안 지
속되어 온 상태에서 이미 관례화됐고, 또한 이들은 자신들을  방어 및 보호
받을 목적에서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시행상의 어려움 속에 이  제도
확립과제는 결국 이반  4세의 몫으로 넘어갔으며, 이반 4세가 황제  직속으
로 특수 조직한 오브리치니나(Oprichnina)라는 경찰군을  동원하여 이 제도
를 확립시켰다.
 보뜨치나와는 대조적으로 소유와 봉사를 결합한 토지소유패텬이 향후 수
세기동안 러시아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황제들은 귀족들에  대한
황제권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반  4세는 뽀몌스찌예 체제확립을
통해 강력한 전제주의 통치권을 구축할 수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사회구조
는 일원적으로 단순화되었고 활기  없는 역학관계 조성으로 창의력을 상실
함에 따라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뽀몌스찌예 체제가
농노제도를 확대시킨  동인으로 작용되어 러시아를  어둠의 수렁으로 몰고
갔다.

   (2) 농노제도

 토지의 소유와 봉사책무를 결합한  제도 속에서 심각한 문제는 토지관리
에 있었다. 즉,  왕권의 수중에 있던 사법  및 행정기능이 착취적인 지주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이다.  아울러 대내외적인 요인에 의한  체제확립목적에
서 제기된 토지의  지속적 필요성이 대공으로 하여금  전쟁과 정복의 길을
택하도록 독려하는 결과를  낳았다. 뽀몌스찌예 체제가 기본적으로  침해한
사회계층은 자유농민층이었다. 과거의 보뜨치나 체제에서  비록 자유농민들
이 자신의 토지를 소유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들이  누렸던 토지 활용
권은 특별한 부담이 강요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뽀몌스찌예체제 도입이
후 활용권리가 축소되어 자유농민들은  곡물과 노동력의 일부 몫을 강요당
하는 상태로 바뀐  것이다. 따라서 자유농민들은 새로운 지주가 강요한  부
담을 피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한적한 지역으로  피신하는 방법을 택했으
며, 뽀몌스찌예체제 도입초기에는 이 방법이 법적으로 가능했다. 그러나 시
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북부지역에 더 이상의 자유
농민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더욱이 지주들은  농민이탈
로 인해 경작의 어려움을 호소함에 따라 농민들의 이탈로에 장애물을 설치
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하여 일년중 가을에 2주일간을  제외한 어떠한 이동
도 허용치 않는 법적조치를 강구하게 되었다. 재정적 부담  역시 이동을 방
해하는 요소였다. 즉,  갚아야 할 부채로 인해 이동이 용이치  못했다. 더군
다나 빚을 얻어 다소 비옥한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는 처지도 못되었다.
 농촌공동체인 미르(mir)역시 농민의 이주를  막는 장애요소 역할을 했다.
미르는 따따르족의 유물로써 경작지의  공동관리 방식을 통한 노동력과 세
금의 효율적 확립책이었다. 따따르족이 물러난 이후에도 러시아의  많은 지
역에서 미르가 존속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농민들은 미르의  공동운영방식
으로 인해 도피성  이주를 사실상 자율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이주가  차
단된 상태에서 미르생활의  고통은 세금부담에서 야기됐다. 토지의  생산성
에 준하여 부과된 세금이 과중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수확량이 적은 해
에도 농민들은 납부능력을 초과하여 세금을 납부해야만 했다.  따라서 속박
및 자유를  위협할 수 있는 계절성  대여를 물색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미르의 농민들은 명기된 수의 군 충원 책무를 지고  있었다. 이같은 부담과
제요구에 대한 법적 개인  보호장치가 부재한 무방비상태에서 농민들은 수
탈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의 과중한 부담과 희생을 강요한 제도적 모순이 결국 시대의 흐름과
함께 대다수 농민을 농노로 만드는 민족적 누를 범하고  만 것이다. 유라시
아의 비옥한  모든 땅은 국가,  국가봉사 귀족, 수동원이 소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소작인으로 변모한 농민의 수가
약 1천 6백만명에  달했다. 단지 극소수의 농민만이 예외로 외딴  시베리아
나 새로 점령한 땅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았을 뿐이다.
 농노의 지위는 지역에 따라 속박형태와 신분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이루
고 있었다. 속박형태는 공유지  농노와 사유지 농노, 그리고 가사노예로 대
별할 수 있다. 공유지는 국가, 수도원, 황제개인소유의 영토를 말한다. 공유
지에 속박되어 있던 농노들은  사유지에 속박되어 있던 농노보다 상대적으
로 나은 생활을 하였다.  원인은 관료들이 대신 토지를 관리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법적으로도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다. 즉, 토지
소유주의 이익추구만을 노린 자의적  의지가 배제된 토지에 관한 제법률이
적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유지에 소속된 농노들은  사용권이 부
여된 영역에서  제한되어 살아야 했으며,  거친 관료들에 시달리는  경우도
빈번했고, 당시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던  공장으로 내몰릴 가능성  속에서
항상 심리적 압박을 받으며 살았다.
 농노의 대다수가 사유지에 소속된  농노들로써 이들은 절망적 상태에 맡
겨진 신분이었다. 지주는  이들의 생활을 통제하고, 결혼을  조정하며, 이들
에 대한 사법권 행사, 처벌 및 추방, 심지어 개인적 소유물을 통제하기조차
했다. 이들은 정부의 조건개선을 위한 제규정이 이행되지  못하는 사각지대
에서 가혹한 생활로  살아야 했다. 사유지에 소속된 농노들은 그들의  노력
봉사 및 소작료 지불방식에 의거 다음과 같이 구별된  신분을 갖고 있었다.
세습적인   신분의  농노는   소작료(Obrok)를   지불하는  농노와   부역
(Barshchina)봉사 농노로 구분됐다. 이중 소작료지불 농노가 18세기 기간중
다수를 차지했다. 특히  이들은 토양과 기후가 부적절하여 소득이 적은  북
부지방에 많이  살았다. 따라서 소작료  지불 농노들은 일반적으로  기술과
장비부족, 가족부양에 미치지 못하는 소규모 토지경작, 소작료의 지속적 상
승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들은 절대적으로 부업이 필요한  상태에서 농한기
에는 머나먼 도시의 공장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생활을
했다. 부역봉사 농노 역시 악화일로의  생활을 했다. 이들은 주당 3일을 주
인이 요구한 봉사에 응해야 했기 때문에 수입증대 목적으로 도시에 위치한
공장에 갈 수 있는 자유조차 없었다. 특히 수확기에는  지주의 지나친 노동
강요로 자신의 경작물 수확기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세습적 농노들의  예속형태 및 생활실태로써 제  3의 방식은 농촌공동체
(mir)생활이다. 이는  소작료 방식과 부역봉사 방식의  보완적 성격을 띠고
있다. 사유지내에서 야기된  비참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 협동이 강조된  상
태에서 공동기업 형태로 토지를 운영하는 제도이다. 미르는  지주에게 책임
지는 관료를 선출하여  운영 및 대표성을 띠게 했으며, 국가세금과  소작료
지불은 미르의 이름으로  관료가 처리했다. 환자보호와 교육후원도  미르에
의해 행해졌다. 이렇게 공동체 의식과 사회적 의식 강화  속에 개선된 생활
을 할 수 있었으나 이들의 생활이 결코 만족한 수준에 도달한 것은 아니였
으며 단지 소작료  및 부역농노에 비해 상대적이었을 뿐이다. 이들의  소망
은 자신의 사유지를 갖는 것이었다. 토지에서 노동을 하지  않고 지주의 집
안일을 도우며 봉사하는  신분의 가사노예는 보모역, 특별교육후에는  가사
지원(방직, 바느질,  음악, 가정교사  등)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중에는  특별
공교육을 받은 저명한  작가, 예술가, 과학자들이 있었다.  가사노예중 성공
한 사람은 사회적 신분도 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평가에서 의미를 지닐 수 없다.

   (3) 사회적 재편

 전제체제확립 목적의 뽀몌스찌예제제하에서  형성된 사회적 구조는 18세
기초 다음과 같은  형태를 이루었다. 상부구조순으로 첫번째에는  귀족층이
자리잡게 되었다. 과거에 귀족층이 정치력을 행사해 온  귀족회의인 젬스끼
싸보르(Zemsky Sobor:이반 4세 사후 야기된 혼란기 속에 폴란드가 주축이
된 외세를 배격하고 다시  국권을 확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가 폐지
됐다. 그리고 모든 귀족은  무위도식을 금하고 봉사책무를 지게 됐다. 이는
전제군주의 독주를 의미하며,  단일구조적 체제하에 예속의 완성을  의미한
다. 통치자의 자비에  의해 특별한 기능으로 국가에 봉사토록 창조된  하위
귀족에 지나지 않았던 당시의  귀족층은 과거의 세습귀족과 맞먹는 토대를
마련했다. 즉, 이들  봉사귀족이 국가내의 주도적 지도역량이 되었다.  따라
서 이들에게 토지가 보상책으로 하사됐으며, 아울러 토지  소유도 세습형태
로 바꾸었다.
 둘째로 군사적 계층으로써  육군, 해군 및 전체 군사요원들이 개혁과  근
대화과정을 거쳐 강화됐다.  뽀뜨르는 포대 증강과 해군 건설에 특별한  관
심을 쏟았다. 과거에 위력을 발했던 러시아 최초 소총과  같은 화기로 무장
한 상비군(Streltsi)을 폐지하고 서구방식의 연대들로  충당했다.  군의 충원
은 전계층과 전지역에서  이루어졌으며, 과거 출신성분에 의거한  계급제도
를 1662년에  철폐하고 능력에 따른  승진과 새로운 계급서열이  도입됐다.
이같은 개혁제도는 군사 및 행정관료들에게 적용됐으며, 이로  인해 전체제
의 능률제고에 기여했다. 총체적  측면에서 볼 때, 이같은 개편과 근대화가
군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이들  중 직업군인과 행정
관료에 대한 봉급형태의  토지보상도 이루어졌다. 이들은 사회구조적  측면
에서 중상위의 계층으로 체제관리 및 수호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승려계층으로써 러시아적 특징은  교회와 성직자들이 완전히
국가와 동질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정렬은 과거에  존재했던 밀접한
관계로 인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1721년 총대주
교직이 폐지된 후 대체된 신성종무회의(Holy Synod)는  과거의 총주교들이
누렸던 정치적 영향력을 거의  다 상실한 상태로 추락했다. 교회재산 관리,
특히 수도원들의 토지가  국가감독하에 들게 됐으며, 성직자들의  교육훈련
개선 및 수도원의 성장억제, 그리고 기강회복이 이루어졌다. 이외에 교회의
사법권이 거의 다 박탈했으며, 유태교와 구교도(라스꼬리니끼)를 제외한 여
러 비정교도들에 대한 관용도 신장됐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교
권의 비정치화  및 완전 국가예속결과로  사회를 일원화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네 번째로 상인계층은 정부의  배려로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켜줌에 따라
성장한 계층이다. 상인들은 다른 자유인 계층과 균등화할  목적으로 군인들
처럼 계급이 부여됐다.  자치수단을 가진 동업조합(guild)이 상인신분  부여
와 상인들의  활동을 통제할 목적으로,  또 상인들과 국가간의  연계형성을
위해 재건되었다. 외국인들도 생산증대와 자원개발을 목적으로 초빙되었다.
러시아의 상업적 특징은 이익추구를 목표로 한 자유로운 사적 활동에 기초
한 서구모델과는 달리 공적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사적 부문에 있어서
의 발전배제결과가 국가의 발전은  물론 속성을 결정짓는 주요근거를 제공
했다는 데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상인계층도  전제국가의 제도권내
에서 수족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다섯째는 농민계층으로서 봉사귀족이 국가를 위해 일했듯이 농민도 봉사
계층으로 간주되었다. 알렉쎄이통치 이후 농민에 대한 지주의  사법권이 더
욱 신장됐다. 특히  속박수단이 지금까지의 자유영역으로 확대됐다. 아울러
도주한 농노들에 대해 사법권이 엄격히 집행됐으며,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한 모든 제안은 뾰뜨르에 의해 거부됐다. 더욱이 군의  새로운 충원체제 및
나이나 노동능력을  무시한 모든 남성농노들에게  부과시킨 인두세로 인해
농민의 부담은 가중됐다. 이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수만명의  농노들이 변
방 내지 까작끄(Cossack)지역으로 도망가서 경작생활을 했다.  이들의 경작
및 목축지는 급속도로 확장추세를 보였다.
 농업문제는 가장 다루기 힘든 난제중의 하나였다. 획기적  업적중의 하나
인 농노해방은 어떤면에서  상황을 악화시키기까지 했다. 일반적으로  농민
들은 비옥하지  못한 토박한 땅을  불하받았으며, 과거 지주에게  지불되는
대가도 상당한 부담으로  남아있었다. 아울러 농민들은 농촌공동체  선임지
도자 책임하에  농민의 인두세가 징수됐으며,  공동체를 떠날 때  요구되는
여권을 발급 받았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재배할  곡물의 종류를 선택하
는 일이었다. 아울러 일정기간 주기적으로 행해진 공동체  토지배분시 다소
공평치 못한점도 있었으나, 적어도 개인적 부양가족을 감안한  배분이 이루
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관행이  사회적 평등주의를 구현시킬 수 있었다. 그
러나 경제적 견지에서 이는 총체적 비효율성과 연계되는  문제였으며, 농민
들 자신의 토지를 농민 스스로 개선하려는 의지를 퇴색시키는 원인이 되었
다.
 지방에서의 빈곤현상은 보다  효과적인 농업구조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
고 지속됐다. 고도로 후퇴한 과세체계가 농민의 부담을  예외적으로 압박했
다. 아울러  다시 19세기말 인구증가율이 국가의  경제적 능력을 앞질렀다.
따라서   1865-1900년  기간중   농민의  생활수준은   사실상   하락했다.
1891-1892년의 기아현상은 수시로 겪어온 상황중 최악의 경우가 되었다.
 1905년 혁명 후  정부는 보다 더한 급진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이에
따라 농촌공동체를 파괴하고 사유지 확대를 위한 일련의 새로운 조치가 발
해졌다. 이  계획을 추진한 사람은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스똘르이삔(Pyotr
A. Stolypin)이었다.  1907년에서 1915년 사이에 구러시아  거주 농민중 약
200만 내지 150만명이 자신의 명의로 된 토지를 갖게  되었다. 아울러 정부
보조금 지원에 의해 아시아  지역으로 이주를 유도하고 그곳에서 사유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괄목할만한 생산성 증대효과를  얻을 수 있
었다.
 여섯째는 공장노동자들로써 산업화와 더불어 확대된  계층이다. 산업진흥
정책에 의거 공장주는 속박된 농민을 구입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됐다. 따
라서 농노들은  탄광이나 공장에 투입될  수 있었고, 이들은  공장노동법에
의거하여 공장에 배정됐는데,  이는 병역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부역체계에서 노력봉사책무를 면제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농노들이 자발적으로 공장을 찾았다. 아울러 사회의  부랑아와 범법자
들도 국영기업과 사기업에 충원시켰다.
 이같은 총체적 조치로 인해 공장노동자층의 수적 증대와 함께 사회적 역
할도 증대했다. 그러나  국민 총생산량과 비중에서 볼 때 산업화의  진척이
미진한 상태에서 사회적 영향력은 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상황이 바뀌었는데 특히  이들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효과
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정보 및 지식전달이 용이하고 통치권
과 근접한 도시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산업부문에서의 변화도  두드러졌다. 뾰뜨르에  의해 기원한  서부지역에
밀집된 산업시설이 점차  내륙지방으로 확대되었다. 아울러 서구에서  장인
출신성분으로 형성된 부르죠아지들에 의한 기업소유 형태와는 달리 러시아
의 기업주는 엘리트집단에서  유래한 점이 다르다. 그리고 이들의 수  역시
서구에 비해 너무나 적은 상태를 지속한 점이다.
 산업화와 속도는 1860년경에  급속히 진행되었다. 대규모 외국자본이  투
입됐으며, 새로이 개발될 수  있는 자원들이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
운 기업들이 창설되었다.  1890년에서 1900년 사이 러시아의  공업성장률은
년평균 약 8%를  기록함으로써 많은 서구제국을 앞질렀다.  침체기간도 있
었지만 1905년에서 1914년  평균성장률은 약 6%를 유지했다.  1913년에 러
시아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의 공업대국으로 부상했다.
 러시아 기업의 외형적  특징은 규모가 크고, 소수 대도시에 집중  배치되
어 있는 점이다.  이로 인해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더 자의적으로  프롤레타
리아트 의식을  급속히 확장할 수  있었다. 아울러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은
서구보다 훨씬 열악한 상태로 인해 무산자 의식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이
에 대한 정부의 대응조치는  노동자집단에 스파이 투입, 경찰력 배치, 소요
시에는 무자비로 악명 높은 까작끄(cossacks)를 투입하기까지 하여  탄압했
다. 이같은 적대적  관계의 상승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불온성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야기된 소외현상과 맞물려 결국 황제체제를 전복시
키는 결과를 낳았다.
 일곱 번째는 여성층으로써 과거  따따르족의 문화적 영향으로 인해 사회
적 활동이 제한되어 왔으나 뽀뜨르의 근대화 정책속에서 이들은 사회적 지
위 변화에 특별한  배려를 받게 되었다. 이는 뾰뜨르의 수줍음과  난교에도
불구하고 외국 여성들이 누린 자유와 활동을 목격한데서 미친 영향의 결과
였다. 저택에서 감금생활을  하다시피한 쩨ㄹ(terem)이 폐지되었고, 부분적
으로 제반  제약이 해제되었다. 특히  모든 영역에서의 활동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궁중잔치와 무도회에  여성들을 초청하였다. 이같은 조치에도  불구
하고 관행을 깨는데는  상당시간이 필요했다. 여성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
었던 시기는 1863년  알렉싼드르 2세 통치기였으며, 실제적 기회균등이  이
루어진 시기는 볼셰빅집권 이후기였다.
 이상과 같이 러시아에서의 사회적  구조는 군주를 지원하는 체계로 구축
되었으며 계층 상호간의 관계도 자율성이 배제된 일개의 관료체계 속에 모
든 계층을 포괄하는 중앙집권적 전제주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7) 지적 문화유형

 러시아는 본래 비잔틴제국에서 유래한 기독교를 기초를 지적구조를 형성
했다. 가치체계,  사회적인 법과 질서의식, 사고방식,  의사전달방법, 생활방
법, 예절  및 의식 등 다양한  지적 유산들은 주로 그리스정교와의  조화적
산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근본사상과 원칙을  중시하는 정교에 충
실한 결과 융통성과 현실적 조화에 기민한 로만 가톨릭세계에 비해 현실적
발전수준에 있어  현격한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이다. 러시아가 정치,  사회,
경제 , 군사, 문화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 등 전반적인 부문에
서 비교할  수 없는 후진상태임을  깨닫고, 세계최초로 계획적인  서구화를
추진한 시기는 18세기 초 뾰뜨르에 의해서였다. 서구식  교육제도가 도입되
었고, 전국민의 봉사책무 의무화를  통한 효율적 관료체제 정비, 군의 개편
및 근대화, 하부구조  건설사업, 중상주의 추진, 정보의  신속, 정확한 제작
및 배포(신문 등), 생산적인  의복착용, 위생적인 생활환경 개선, 여성의 자
유부여와 사회활동 유도 등의 사업을 대대적으로 서두르게  되었다. 서구화
내지 근대화로 표명된 이같은  사업추진이 지속된지 약 1세기 후 러시아에
는 자생적 지적 집단이 형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본격화하기에 이르렀다.

   (1) 인ㅉ리곈찌야 운동

 러시아 인쩨리곈찌야  운동(Intelligentsia Movement)은 지적활동이 다이
네믹하게 행태화된데서 특징을  찾고 있다. 인ㅉ리겐찌야는 전문직업인  계
급과 다수의 귀족출신으로서 도시와  대학교육이 낳은 강한 사회의식을 지
닌 남성과 여성이다. 이들은 프랑스의 계몽철학자들처럼 종교적  정신과 교
회를 통한 종교정신의 표현을 과소평가했다. 아울러 이들은  사회주의로 편
향되었으며, 물질적 필요물,  개인적 복리, 전반적인 안보에  몰두하는 특징
을 보였다.
 지적활동의  시발은  19세기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슬라브주의자들
(Slavophils)과 서구주의자들(Westernizers)간의  이상적 국가 및  사회건설
방법과 방향설정에 관한  논쟁이었다. 이념적인 측면에서 두집단은  이름이
지적하고 있듯이 러시아 구원을  위한 방법론에 있어 한쪽은 '슬라브 정신'
을, 다른 한쪽은 서구의  제방법을 지향한데서 서로 상반되었다. 그러나 상
반된 상태에서도 상호 영향을 미쳐, 중도적 입장을  취한 슬라브주의자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슬라브주의자나 서구주의자들은 공히 유럽의 이름난 철학가들의 영향 및
의존상태에 있었다.  이들은 흄(David Hume),  볼테르(F. M. A. Voltaire),
쌩시몽(Count C. Saint-Simon),  푸르동(P. J. Proudhon)이며, 유명한  독일
철학자인  칸트(E. Kant),  괴테(J. W.  von Goethe),  쉴러(Schiller), 쉘링
(Schelling), 헤겔(G.  W. F.  Hegel), 훠에르바하(Feuerbach),  스티르너(M.
Stirner), 칼  맑스(Karl Marx)등이다.  이들의 사상은 인도주의,  평등주의,
사회발전론 제시, 그리고 국가의 구조 및 기능적 문제점  제시를 통한 민주
주의 및 사회주의  옹호로 요약된다. 러시아 지성들은 이같은 서구  대가들
의 견해를 수용 또는 반대적  입장 정리단계를 거쳐 구체적 요구를 제시하
였다.
 슬라브주의자와 서구주의자간의 공통점은  첫째, 러시아 조국에 대한  지
대한 애정, 둘째, 현행정부의  무능에 대한 우려, 셋째, 러시아 농민을 이상
화했으며, 미르(mir)를  옹호했을 뿐 아니라 특히  미르를 제도적 측면에서
건전한 기반 및 사회를  위한 바람직한 기초로 보았다. 넷째, '러시아 속성'
과의 지속적인 조화를 희망했고, 분별없는 개인주의를 지닌  자유 브루죠아
사회에 적대시했고,  다섯째, 문명화에 의해 야기된  공업과 농업간의 보다
나은 균형, 여섯째, 양집단의 저서들이 과거를 재평가하고,  새로운 사고 자
극을 통해 가치 있는 새로운 역사 및 법적 연구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자는 사고의 토대, 국가관, 사상 및 정치적 목표에
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구체적으로 차이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슬라브주의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비정치적 활동가로 간주하고, 후에  다
수가 보수주의자가 됐음에 반해, 서구주의자들은  공공연한 급진주의들로써
일부는 계급투쟁의 필요성을  신념화하고 있는 점이다. 둘째, 슬라브주의자
들은 샤토부리앙(F.  R. Chateaubriand)의 기독교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아
러시아인의 정신개혁을 위해  일했음에 반해, 서구주의자들은 국가의  실체
를 도덕적인 아닌 개인의 안녕을 위해 기능하는 순수 정치기관으로 간주하
고 있는 점이다. 셋째, 슬라브주의자들은  정교도들이었으며, 신앙이 그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교적 의지와 영원한  진리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주의자들은  무신론자들로써 그들의 체계에 종교적  공
간을 갖지 못한 채, 개인의 제권리를 신앙한 것이다. 이들의 무법적 사상의
자유가 개인주의를 초래할 수  밖에 없다는 이유로 슬라브주의자들은 이를
반대한 것이다. 넷째, 뾰뜨르의 업적평가에서 슬라브주의자들은 뾰뜨르대제
이전의 러시아식 방도를 극찬하고, 뾰뜨르의 개혁이 건강하고  자연적인 발
전을 저해했을 뿐 아니라 뾰뜨르의 사업이 '신성한 사명거부'로 채워졌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더욱이 교육받은 민중의 구획으로 인해 계층간의  장
벽을 창조했다는 견해였다. 이에 반해 서구주의자들은 러시아를  유럽의 일
부로써 간주하고 뾰뜨르의 사업을 높이 평가했다.
 발전목표 구상에 있어서의 차이점은 슬라브주의자들이  서구의 산업발전,
관료체제, 도시화의 특성을 지닌 서구를 사악하고 독소적인  것으로 간주한
데 반해, 서구주의자들은 서구의 장점을 과대평가 및 이상화 한 점이다. 따
라서 슬라브주의자들은 서구주의자들이 정신적 깊이가 결여되어 있다는 지
적과 함께, 특히 서구의  법률체계와 연계시켜 서구의 법률을 '정복자의 법
률'로 간주하고  나섰다. 즉, 서구법률은  강자와 부자를 이롭게 하기  위해
만들었음에 반해  러시아 법률은 평화적이며  화해적인 사람들의 본성에서
우러났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전형적으로 단순하고,  겸손하며, 근면한 러시
아인들로 하여금 서구주의자들이  외부에서 위안을 찾고, 천박한  사치추구
와 야심을 조장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슬라브주의자들과 서구주의자들 간의 논쟁과 반목현상은 결국 정부의 입
장표명 후 단행된  탄압으로 직접적 결과를 맺지는 못했다. 정부는  서구주
의자들의 혁명적 경향을 비난했으며, 슬라브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사상적으
로 못마땅한 입장을 나타냈다. 이유는 제국내의 비정교도들에  대한 러시아
화 정책을 방해할 가능성과 국가적 실체의 해체유도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양집단의 충격적 주장과 논쟁은 양심적이며  사명감에 차있
던 지성들을 행동으로 러시아를  사회개혁 및 발전대열에 참여시키는데 지
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지적활동은 1861년의 농노해방과  그 후 지속적으로 이어진 일련
의 개혁조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정부의  입장에서도 뾰뜨르
대제 이래 변화된 환경 소개서 보다 효율적 발전방법을 찾아야하는 입장을
고려할 때 지식인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황제의 권
한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이루어진 개혁이라는 점에서 인ㅉ리곈찌야
운동은 개혁 가능성의 확신 속에 더욱 활기차게 진행되었다.
 인ㅉ리곈찌야는 다양한 집단과  써클로 나눠졌다. 써클중의 일부는  프랑
스 혁명전에 혁명적 이상이  이론적으로 토론되었던 '살롱'과 다를 것이 없
었다. 그러나 이들 다수는 실제적 지식과 경험에 의해  열매를 맺었을 뿐이
다. 이들의 대중이해에 결핍에 대한 각성은 인민과의 접촉  및 생활 나눔을
통해 현재에 필요한 사상을 얻으려 노력하는 데서 나타났다. 바꾸닌(M. A.
Bakunin)과 라브로브(P.  L. Lavrov)의 교시하에  이들은 혁명적 열정으로
인민을 고무시키려 노력했다. 이 인민운동이 브 나로드(V narod)로 알려졌
으며, 제물랴 이 볼래(Zemlya i  Volya, 1878-79)와 같은 비밀 인민주의 집
단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상주의적 사고를 시대의 실제적 요구와
조화시키려 노력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이들의 운동결과는  사회주의를
잉태한 나로드나야 볼래(Narodnaya Volya, 1879-84)조직으로 부상했다.
 인쨀리곈찌야중 실제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유물론과 회의론에 빠진 사람
들은 본질적으로 무정부주의를  지향한 집단을 형성시켰다. 이들은 '허무주
의자'로 알려진 사람들로써 이들은 가족, 국가, 교회에  의해 그들에게 부과
된 책무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고, 테러를 통한 현존사회의  기반파괴를 목
표로 삼고 있었다. 이들은 대중의 지위향상을 위한  필수조건으로써 헌법적
개혁에 대한 관심유도가 시급함을 깨닫고 모든 선전수단들을 동원하였음에
도 이들의 가장 중요한 무기는 테러였다.
 허무주의자들의 비호하에 일련의 폭력행위가 죄책감 없이 자행된 사건들
이 발생했다. 1878년 터키와의 전쟁에 실패한 후 정부에  대한 일반적 불만
이 표출된 상황에서 비밀경찰  총수가 살해당한 최초의 테러사건이 발생했
다. 1879년에는 하르꼬프(Kharkov)총독이 피살됐으며,  같은 해에 황제암살
미수사건이 2회 발생했다. 1881년에는 황제의 최고권력자로써  유능한 진보
적 정치가였던  로리스-ㅁ리꼬프(Loris-Melikov)가 음모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인민의 대표들인 젬스뜨보(Zemstvos)만을 협력대상으르 삼고, 과격집
단의 영향력을 축소시켜 자유주의적 개혁을 구상하고 점진적으로 헌법체계
를 창조해 나갔던  사람이다. 그의 헌법적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는  과정에
서 1881년 3월 황제 알렉싼드르 2세가 폭탄에 의해  살해됐다. 황제가 혁명
세력에 의해 희생된 것은 전제체제가 뾰뜨르 이래 실제적 개혁을 추진했으
면서도 그 개혁의  소산으로 탄생 및 육성되었으며  그 개혁을 주도해야할
비판적 지식인들을 수용하고 참여시킬 아량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렉싼드르 2세의 아들 알렉싼드르 3세(Alexander 3,  1881-94)는 헌법작
업을 멈추고, 전제주의 부활, 완고한 검열재개, 보수  및 반동주의자 각료들
을  포진시켰다.  이같은  결과속에  자치정부의  기반을   갖춘  ㅈ스뜨보
(Zemstvo)가 대의적 성격을  박탈당했으나, 토지소유 대귀족들은 농촌에서
농민문제에 대한 행정감독을 맡은 '토지 대실업가'협회를 통해 상실된 영향
력을 회복했다. 교회를 통한 영향력이 학교 교과과정에 행사됐으며, 경찰이
대부분의 지적활동을  감독했다. 아울러 슬라브  확대주의자(pan-Slavist)들
의 계획하에 러시아화가 국경지역, 폴란드, 핀란드, 발틱 3국에서 후원됐다.
그리고 유태인에  대해서는 주거제한,  일정한 직업제한, 부동산  구입금지,
학교 입학에 있어 약간명만 허용, 계획적인 대량학살로 박해했다.
 알렉싼드르 3세의  정치적 보수주의 통치 및  경제적 진보, 그리고  다수
국민의 지속적인 고통이 인ㅉ리곈찌야들로 하여금 다양한 입지변화를 요구
하게 했다. 즉, 분산된 이상주의자들의 제운동을 보다 현실적인 정당활동으
로 결집시킬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인민주의자, 허무주의자, 무정부주의
자들이 사라지고, 자유주의자와  맑스주의자들의 출현과 더불어 이들은  후
에 사회혁명당(Social Revolutionary party)으로 발전했으며, 지방의회의 자
유주의자들은  입헌민주당(Konstiitutional Democrats)으로  부상했다. 이들
정당은 과거 급진적 집단과 대조적으로 진보적이었으며, 주로  평화적 선전
과 법적  수단을 이용한 개혁노선을 택했다.  이들은 계급차별을 철폐하고,
언론 및 출판의 자유, 평등한 법 집행, 헌법제정,  사회적 조건 향상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특히 사회혁명당은 사회주의 감각에서 사회주의  전환을 위
한 농촌생활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으며, 입헌민주당은 서구모델에  따른
정부, 의회건립문제에 주력했다.

   (2) 사회주의 운동

 19세기 기간중 실시된 일련의  개혁확보 어려움과 대중불만을 치유할 수
있는 제도적 경로의 결핍이  지식인들로 하여금 혁명운동을 본격화하게 했
다. 혁명운동의 발단은  농민에 대한 애정으로 출발한  인민주의운동으로써
인민주의자들 대다수는 서구의 초기자본주의에서 발생하고 있던 병폐를 피
해 보다 진보된 독특한  러시아 사회발전방법을 모색하여 받아들이고 있었
다. 이에 대한  합의점이 게르ㅉ(Herzen), 체르느이ㅆ스끼(Chernyshevsky),
뜨까쳬프(Tkachev), 라브로프(Layvov)등의  사상에 힘입어  형성된 다음과
같은 행동지침 및 신념으로 나타났다. 이는 첫째,  혁명지식인(엘리트)의 노
력을 통해서만 농민대중의 우둔성을  극복하고 이상사회를 실현시킬 수 있
으며, 둘째,  농민대중에 대한 후진성 인식교육과  사회주의 신념화 교육을
통해 농민을 해방토록 강요해야 하고, 셋째, 러시아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전통적인 농촌공동체인 미르(Mir)를  통해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이다.
 1870년대초 젊은 인민주의자들은 농민에 대한 의식교육과 미래사회의 기
반인 농촌공동체 사용목적으로  대거 농촌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농민대중
의 지나친 무지로 인한 이해부족과 관계당국에의 고발로 완전 실패하고 말
았다. 실패 이후 이들 다수는 인민이 할 수 없는  것을 혁명 엘리트가 기필
코 실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정치적  암살과 테러활동으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이에 따른  결과로 알ㄹ싼드르 2세를 암살하는데 성공했으나  혁명
의 실마리를 찾기는커녕 반동정치  강화로 인한 인민주의자들의 희생을 증
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좌절과 신념 속에서도 인민주의자들  다수는 과거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테러리즘에 대체될 수  있는 새로운 행동방향과 혁명  및 역사변화 이론을
모색했다. 이에 따라 마르크스저서를 통해 많은 것을 포착할  수 있었던 인
민주의자들은 쁠례하노프(Plekhanov)를  주축으로 해외에서 1883년 마르크
스저서에 기초한 러시아 사회주의조직인 "노동자  해방"(The Emancipation
of Labor)집단을  조직했다. 그후 1898년 민스끄(Minsk)에서  러시아사회민
주당(Russia's Social Democratic party)을 창당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지방의회의 염원, 그리고 인민집단이  열망한 법앞에
평등실현, 출판의 자유와 시민의  자유,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 노동시간
축소 등의 정치, 경제적  목표에 집중했다. 이들은 인민주의자들과 적은 공
감대를 형성하고 비계몽된  농민의 유용성에도 적은 신뢰를 보인 반면,  도
시에 거주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미래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러시
아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은 산업노동자들의  수적 열세와 혁신에 대한 농민
의 혐오로 고통을 받았다. 이들의 폭력시위 조직은 성과  없이 강제진압 당
했다. 결국 쁠례하노프집단은 시위실패, 지나친  소심, 기회주의적 정책으로
인해 분열되었다.
 분열과정에서 러시아적  환경과 문화를  접목시켜 러시아마르크스주의를
태동시킨 사람이 바로 레닌이다. 레린도 혁명운동을 시작한  초기에는 인민
주의자였다. 그러나 이에 환멸감을 맛본 후 그도  마르크스주의로 전환하였
다. 그는 1895년 사회주의 선동죄로 체포되어 3년여  기간의 시베리아 유형
을 마친 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본격적인 혁명사업에  투신한 결과 최후의
전제체제 전복 및  탈권에 성공한 것이다. 그의 성공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를 배격하고 러시아적 전략전술 적용 및 정확한 현실파악 속에서 이루어진
민심유인과 쏘비예뜨 조직활용의  결과였다. 이상의 역사적 맥락에서  확인
할 수 있는 사실은  마르크스주의와 러사아의 인민주의간에 상당한 이질적
요소와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1870년대의 인민주의운동에서 표출된  사회
주의는 농촌을  중추적 활동무대로 시행되어  온 전통적 관행의  결과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는 산업사화와 도시를 근간으로 한
사회적 모순의 분출결과로 출현한  체제의 인위적 사회구조라는 점에서 현
격한 차이를 이루고  있다. 러시아의 사회구조적 문화 속에는 분명  사회주
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탈권을 목적으로 인용 및 이용된 마르크스적  사회
주의는 러시아적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수용과정에서 엄청난 희생과 억지
및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그리고 힘에 의한 강제적  통제력이 사라지자 송
두리째 붕괴되고 마는 취약성을 보았다. 그러나 붕괴 속에서도  더 이상 무
너짐이 없이  최소의 유형이 지속적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바로 이 지속성을 지닌 사회주의 유형이 러시아적인 것이다.

   8) 예술적 문화유형

 어느나라에서나 자국의 생활과 제조건은  물질 및 비물질적 매체에 의해
표현된다. 즉,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그들의 여가 선용을 통해,  그들이 살
고있는 환경에서  만들어진 예술작품을 통해,  그들의 문 예속에서  표현된
사상을 통해, 생활조건의 관습, 춤, 음악, 연극을  통해 표현된다. 인간은 이
러한 활동의  서술없이 만족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활동은 기재나  서술
보다 높이 보이고, 듣고, 느껴야만 하는 그들 자신의 고유 표현수단을 가지
고 있다.
 러시아 문화에서 예술적 감각표현의  구체적 최초 형태는 건축에서 이루
어졌다. 러시아의  초기 건축은 서방에서와  같이 기독교가 감동적  충격을
주었으며, 북부러시아를 제외한  전역이 비잔틴의 우세한 영향력하에  있었
다.

   (1) 건축

 건축에 있어 비잔틴의 영향력 구현은 989년에 노브고로뜨에 건립된 최초
의 아주 정교한  목재 대성당이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모방된 이  건축물은
전쟁, 침략, 화재로  인해 파괴됐다. 러시아 최초의 석재  교회건물은 991년
끼예프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들  건축물은 비잔틴의 영향하에 그리스  예술
가들의 도움을 받아  건축된 것이다. 이들 중 대표적인 건물이  11세기초에
건축된 성  쏘피아 대성당이다. 이 건축물의  특징은 여러개의 돔(dome)을
갖추고, 모자이크(mosaic)와 회화(painting)로  치장된 것이 특징이다. 아울
러 성 쏘피아  대성당은 러시아적 요소가 가미된 "강건한 북부의  힘, 신비
적 비잔틴의 경건, 끊임없는 동양성"을 갖춘  미래 건축물의 모델로 기여했
다.
 끼예프 몰락이후 러시아의 국력이 북동으로 이동함으로서 쑤즈달-블라지
미르(Suzdal-Vladimir)지역에 수많은 교회가 건립됐다. 아울러 지역적 환경
변화에 발맞춰 일부교회가 외벽을 사암(sandstone)의 합성물로  사용함으로
써 따뜻하고 아름다우면서  정교성을 증대시킨 변화가 나타났다.  12세기에
는 서구의 장인들에  의해 건축된 일부 교회에서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 접목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구와 근접한 노브고로뜨는  서양의
영향이 두드러졌음에도 미소한  흔적을 남겼을 뿐이다. 끼예프와  마찬가지
로 노브고로뜨는  본질적으로 비잔틴의 건축패턴이  지방의 토착적 산물과
결합되어 나타났으나 여러겹의 경사진  지붕으로 교회를 치장하고 있는 점
이 차이이다. 그후  12, 13, 14세기에 가서 피라밋을 갖춘  반구형의 지붕과
결합된 둥근형의 돔이 개발되어 치장된 것이 특징이다.
 14, 15세기에 모스끄바대공의  세력증대와 더불어 수도를 미화하기  시작
했다. 본래  모스끄바의 건축물은 목재구조물이었다.  석재건물로 축조하기
시작한 시기는 이반 3세  통치기로 로마에서 르네상스 교육을 받은 그리스
인 쏘피아(Sophia)의 절대적 영향의 결과였다. 이후 모스끄바는  이반(Ivan)
이 건축장인들의 기술을 소중히 여기고 후원함에 따라 유명한 휘오라티(A.
Fioraventi), 쏠라리(P. Solari), 알레비씨오 후리이신(Alevisio Friasin)과 같
은 건축예술가들이 당도하여, 예술분야에 선두주자가 되었다.
 러시아전통에 익숙한 유럽건축가들은  그들의 지도하에 있는 러시아인들
과 함께 다양한  석재 대성당 건축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끄례믈리에  성모
승천(Assumption)과 성수태고지(Annunciation)를  포함한 유명한 교회들이
건설됐다. 이같은  건축물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외국인들이
르네상스를 전파한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외국  건축가들은 러시
아스타일과 정교권의 통치에 일치하는 건축물을 축조한 것이다.  그리고 전
통적 스타일의 목재건물 우세상황을 유지시켰다는 점도 르네상스운동의 강
력한 정신을 이질화시킨  결과이다. 16세기 중엽에는 타워와 돔을 갖춘  다
양한 채색의 성 바실(St. Basil)교회가 끄례믈리 외부에 건립됐다.
 17세기말부터 시작하여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제  2의 포괄적 변화가
야기됐다. 뾰뜨르대제의 영향력  하에서 서구의 예술적 개념이  본격적으로
소개됨에 따라 전통으로부터의  이탈현상이 급격히 진행됐다. 과거의  러시
아적 전통이 무시된 채 바로크(baroque)와 로코코(rococo)양식의 건축이 이
분야 전문가들의 초빙으로  새롭게 쌍뜨 ㅃ쩨르부르끄(St. Petersburg)집중
적으로 이루어졌다. 쌍뜨  ㅃ쩨르부르끄시는 독일 패턴에 따라 계획됐으며,
이태리, 독일 특히 프랑스의 감각으로 서방예술가들에 의해 치장됐다. 1758
년 조형예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가 쌍뜨 뻬쩨르부르끄에 설
립되어 러시아의 토착예술가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19세기는 독일의 고전적 건축 스타일이 지배했다. 이같은  경향에도 불구
하고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19세기의 건축양식은 본질적인 요소가 적
었다. 이전의 정신과 창의적 충동이 주로 상업적,  군사적, 자기찬미적 용도
에 기인한 영감으로 보충된 것이 특징이다.
 러시아의 건축양식은 비잔틴으로부터  시작하여 중세에는 서구의 르네상
스, 18세기에는 서구의 바로크와 로코코, 19세기에는 독일의 고전풍에 상업
및 군사적 용도가  가미되어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황제와 귀족들이  머물
렀던 끼예프, 모스끄바, 쌍뜨 ㅃ쩨르부르끄의 세속적 건축물을 대상으로 설
명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건물들은 비잔틴  양식과 전퉁이 합체된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건축양식은 2원화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회화, 조각, 음악, 발레

 회화 : 11세기중 그리스장인들의 프레스코(fresco)를 통해 도입됐다. 끼예
프공국기에 러시아  제자들은 비잔틴의 형식과  스타일을 그대로 준업하게
따랐다. 이들이  제작한 작품들은 정교에서 사용하는  이꼰(icon)이었다. 그
리스도, 동정 마리아, 성인들의  상을 담은 판화인 이꼰은 일반적으로 금바
탕에 고도 형상화 및 상징적 형상으로 처리, 배열된  용모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꼰  이외에 사용된 회화형식으로써  교회내의 벽에 칠한  회반죽이
마르기전에 그리는 수채화법인 프레스코(fresco)조개껍질이나 유색금속가루
등을 부착하여 작품화하는  모자이크(mosaic)가 있었으나 그리스인들이 독
점한 상태에서 제작됐을  뿐이다. 이꼰, 프레스코, 모자이크  속에서 화가의
개성은 규정된 패턴에  묻혀 버렸다. 그래서 작가는 새로운 형태를  고안하
는 대신 자신의  선배들이 정한 양식을 지속하는데서 긍지를 찾았다.  자연
주의가 시각을 현혹하고 명확한 인식으 혼을 박탈해야만 했기 때문에 예술
가는 사실이 아닌  추상적 표현에 특징을 두었다. 아울러 예술가는  그리스
인들의 늘어난 형상을 모방하고, 관례화 되어온 심벌을  사용함으로써 교육
받지 못한 숭배자들조차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예술가는 성스럽고  숭고
함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아울러 관객을  세속적인 영역이 아닌  구원의
길고 노력했다. 순수한 색상과 금색 및 청색을 띤  이꼰은 비범한 아름다움
과 심원성, 단순성,  우아함을 보여주고 있다. 끼예프가  몰락함으로써 이꼰
회화는 비잔틴과 원거리에 위치한 노브고로뜨(Novgorod)와 수즈달(Suzdal)
에서 특히 발달했다. 토착적인 지방전통이 가미된 이꼰은  붉고, 노란, 녹색
이 본래의 금색과  청색을 보충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술은 14세기  노브고
로뜨에 어려서부터 살아온 그리스인 디오파니(Theophanes)와  더불어 절정
에 달했다. 15세기에는 새로운 비잔틴의 영향이 노브고로뜨의  예술에 기여
한 시기로 프레스코의 중요성이  축소된 가운데 주로 이꼰제작이 이루어졌
다.
 모스끄바의 예술은 노브고로뜨와  같은 14세기에 번창했다. 비록  모스끄
바 예술이 다소 뒤늦게 시작됐고, 외국의 지배를 받으며  경제적 불운도 있
었지만 일찍이 문화적  중심이 되었다. 그후 따따르족의 침략과 서방의  영
향에도 불구하고 번창하였으나  15세기와 16세기에는 진보에 실패했다.  15
세기중엽 디오니시우스(Dionysius)와 같은 유명한 화가의  출현에도 불구하
고 인습성과 돈에 집착함에  따라 작품성이 손상되었다. 이에 더하여, 서구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교회가 세속적인  주제의 그림을 반대함에 따라 가일
층의 회화발전을 저해했다.
 17세기에 들어서서 세속적인  주제들이 증가추세를 보였다. 외국인  교사
들의 주도하에 당시 해외에서 유행하고 있던 자연주의 개념을 다수 소개하
였고, 특히 인물묘사 예술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회화기술에 있어서도
조망도입과 배경에  대한 관심으로  기울었다. 18세기 이후에는  "조형예술
아카데미"(the Academy of  Fine Arts)설립으로 탁월한 화가를 배출할  수
있었다. 당시  구 교회예술이 잔존해 있었고,  특히 라스꼴리니끼 화가들의
해외여행 및 공부를 통한 확장된 시야로 세속적인 주제들을 도입했으나 회
화의 본질결여와  프랑스와 이태리화화의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러시아적 독자성을 띤 최초의 명인들은 18세기 중엽에  가서야 출현했다.
1800년 이후 낭만기에  레비쯔스끼(D. Levitsky), 브률로프(K. P. Bryulov),
알렉스 이바노프(Alex Ivanov)가  두드러진 활동을 했으며, 19세기에는  베
녜찌야노프(Alex. Venetianov)와 같은 풍속화가가 러시아  무대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예술발전에 영향력을 갖고 있던  조형예술 아카데미가 독단적 성격을 띠
고 외국의 멋을 모방함에 따라 1863년 반발이 일어났고,  이로써 새롭게 변
모했다. 새로워진 학교는  일상생활에서 영감을 찾았으며, 사회의식에 대한
정신교양을 지향했다.  19세기중엽 이의 추종자들인 가이(N.  Gay), 레핀(I.
Repin), 쑤리꼬프(Surikov)가  당대의 명인들이다. 예술가들의 지속적  사회
설교는 사회를 분노케 하는데 일조하여, 러시아혁명에도 영향을 주었다. 아
울러 이들의 순수 미학적 개념으로의 귀환은 제 1차 세계대전 전반기였다.
 회화도 건축과 마찬가지로 비잔틴의 영향하에 초석을 쌓은 뒤 서구의 영
향과 모방 속에서 19세기 중엽이후에 가서야 독자적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
다. 그러나  쌍뜨 뻬쩨르부르끄의 회화가  러시아인의 미각을 담지  못하고
서구 미각의 색채를 띠고 있음을  볼 때 러시아적 독창성의 미흡함을 시사
받을 수 있다.
 조각 : 그리스 정교는 로만가톨릭과는 달리 입체적 용모를 가진  상을 거
부하고 있다. 따라서 정교국인 러시아에서 인간용모의 조소상  제작이 전통
적으로 거부됨에 따라  조작발전을 이룰 수 없었다. 단지 조각으로  분류한
다면 얕은 양각처리가 된 작품이 있을 뿐이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서구화
추진과 더불어 조각이 시작되어 서구 명인들의 작품수준을 넘는 성과를 보
이게  되었다. 대표적인  작가는  기념비  장르에서 유명한  라스뜨ㄹ리(B.
Rastrelli)와뾰뜨르 상을 제작한 활꼬녜뜨(E. M. Falconet)이다.
 음악 : 러시아음악의 토대는 민속음악이다. 러시아 민속음악은 단순한 가
운데 자연적인 힘이 넘치고,  부드러우면서, 깊은 영감을 지닌 음악적 특성
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의 주제와 리듬이 후기  음악의 걸작품들 속에
반여되었다. 성스런 음악은 비잔틴의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며, 변화도 적
었다. 때문에 장엄한 중세 라틴찬송가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작곡과 같
은 개인적 작품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후 18세기에 이태리로부터  오페라가 도입됐다. 러시아 최초  필하모니
가 바하(Bach),  하이든(Haydn), 모짜르트(Mozart), 베토벤(Beethoven)등이
영감을 불어넣은 결과 1802년에 창설됐다. 그러나 다른  분야보다 신속하게
외국의 영향에서 해방됐다. 러시아인들은 국경을 초월한 의미를  지닌 정신
을 작곡에 불어넣는데  성공하였다. 1857년 "황제를 위한 삶"을  작곡한 글
리까(M. I. Glinka)가  러시아인의 음악시대를 열었다. 민족적인 여망과  사
회적 문제가 예술가들의 감정을  자극했던 해방 및 개혁기에는 모쏘르스끼
(M. P. Mussorgsky, 1839-81)가  "바리스 가두노프"(Boris Godunov)를, 차
이꼽스끼(Peter I. Tchaikovsky, 1840-93)가  심포니 "1812년 서곡"을, 림스
끼-꼴싸꼬프(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가  1888년  교양조곡
"셰혜라자드"(Scheherazade)를 창작했다.  20세기에는 쎄르게이 라치마니노
프(Sergey   Rachmaninoff)와  "근대주의자들"인   알ㄹ싼드르   쉬리아빈
(Alexandr Schriabin), 이고리 쓰뜨라빈스끼(Igor Stravinsky),  쎄르게이 쁘
로꼬피예프(Sergey Prokofiev)등이 러시아인들이 성취한  전통, 다재다능성,
사회적 의식을 지속시켰다.
 발레 :  서방에서 기원하여 뒤늦게  러시아에 도입된 발레가  독자적으로
개발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의 민속춤과 민족전통을 서구의예술적 개념
과 융화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극장예술인 발레의 도입과정은  1672
년 독일  순회공연단의 최초 연극공연으로  시작됐다. 이는 성서적  주제를
다룬것으로서 구약성서의  "에스더기"(Esther)였다. 그런데 이것이  "오르데
우스와 유리디케"(Orpheus and Euyrdice)로, 그리고 다른 성서적  연극 "홀
로페르니와 유디스"(Holofernes  and Judith)로 속계됐다. 알렉쎄이  로마노
프 황제의 사망이후  반동적 흐름 속에서 무대는  사적인 경우에만 허용됐
다. 그후 뾰뜨르에 의해 극장이 되살아남에 따라  외국공연단이 정규적으로
러시아를 찾았다. 러시아  최초의 발레가 상연된 것은 1735년 안나여제  앞
에서 군사아카데미 소속의 춤명인 란데(Lande)에 의한  것이었다. 그후 "여
황폐하의 춤학교"가  설립되어 7세이상의 유년들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발레공연도 곧 유행하게  되었는데, 주제는 주로 외국작품이었으며, 신화적
기원이었다.
 19세기에 가서야 발레는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정부가  춤학교를 감독하고
자금지원을 하게  된 것이다. 농노의 자제들이  주로 춤학교에 등록됐는데,
이들은 10년이 경과하기 이전에 이곳을 떠날 수 없는 규정으로 교육훈련에
전념케 했다. 러시아발레의  특징은 앙상블보다 스타( 주요인물,  거물배우)
가 강조되고,  음악작품, 모방,  판토마임(무언극)이 상당량 증가된  점이다.
러시아발레의 명성을  높이는데 공헌한  사람은 까를  칼 디다이오뜨(Karl
Dideiot)감독과 걸출한 연기자들이었다.
 칼 디다이오뜨  이후 1850년까지는 비효율적 행정,  관례에 의한 인습성,
낮은 교육수준, 도덕적 기준저하로 인해 춤학교가 위협받았다. 1850년에 도
입된 개혁 속에 2명의 프랑스감독과 최고수준의 발레리나들의 도움으로 과
거의 명성을 되찾았다. 이로써 발레는 최상의 창의성과  감화방법으로 각광
을 받게 되었다.  특히 뻬쩨르부르끄 발레는 곡예적인 것에 반해  우아함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과 평가를 받았다.  지속적인 진보, 개혁, 구식  전통에
대한  저항을 뒷받침한  재능의 결과로  세계적  명성을 유지했다.  그리고
1890년대에  러시아  발레는 전성기에  도달했다.  쎄르게이  지아그히례프
(Sergei Diaghilev)와 미하일호끼녜(MichelFokine)는 음악가와 공훈화가, 그
리고  발레구성  훈련에  의해,   위대한  발레리나  안나  빠블로바(Anna
Pavlova), 아돌프 볼므(Adolph Bolm), 바슬라프 니진스끼(vaslav Nijinsky)
등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 발레예술을 새로운 경지에 올려놓았다.

   (3) 문학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는 18세기까지 이태리, 독일,  프랑스, 벨
기에, 룩셈부르그, 스페인  등등의 지역에서 당대에 특징화한  문학적 식견,
다양성, 독특한 예술적 재능을  제공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이러한 이유
는 따따르족의 침략,  정치, 사회적 동요기, 다양한 혁명기와 같은  긴 고충
기에 주요 작품들을 상실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슬라브 자모가 없었던  9세기 이전에 문학이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알파벳 창조이후 초기 작품은 종교적 성격의 외국작품  번역서였다. 최초의
역사문헌인 녜스또르 연대기(Nestor  Chronicle)가 11세기부터 역사적 주요
사실을 기록하기  시작했으며, 그후 노브고로뜨와 쁘스꼬프(Pskov)와  같은
연대기로 이어졌다.  아울러 거의 동시기에 성인들의  "생활"과 교회문헌들
이 편찬됐으며, 12세기에 수즈달(Suzdal)에서 교회문헌이  제작됐다. 동기간
중 중세 러시아문학의 가장 걸출한 작품인  "이고리 왕의 일'이란 서사시가
창작됐다. 러시아 표현예술의  주요 부문은 우화, 민속음악,  서사시로 구성
됐으며, 이들 부문의 작품들은 대부분 세대간 구전으로  이어져, 18, 19세기
까지 수집되어 집필되지 못했다. 15세기말과 16세기에 동, 서교회의 통합을
위한 논의, 그리고 서방과의 접촉증대가 문학활동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16
세기 중엽까지 출판소 도입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또한  향후 200년간 미미
한 역할을 했을 뿐이다.
 니꼰총대주교, 알렉쎄이  황제, 뾰뜨르대제가 외국작품에  상당한 관심을
가짐에  따라  많은  모방과  번역물이  출판될  수   있었다.  엘리자뻬따
(Elizabeth)시에는 토착문학을  지원받게 되었고, 예까쩨리나  2세 통치기에
는 계몽적 활동의  결과로 노비꼬프(Novikov)의 "수벌"(Drone)과 라지셰프
(Rasichev)의 "ㅃ쩨르부르끄에서  모스끄바까지의 여행"(Journey  from St.
Petersburg to Moscow)과 같은 걸출한 문인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
나 쩨르쟈빈(G.  Derzavin)과 같은 당대의 대표적  시인은 유럽 시  수준에
오르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유는 러시아  작가들이 국가의 감독과  검열을
받아야 했고, 또한 쓰고 말하는  매체인 알파벳과  문법의 복잡성으로 인해
상당한 제약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무엇보다 언어연구와  함께 시적 문
학표현을 위한 장애물들을 제거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한 사람들
은 과학아카데미 교수이며 박식한 철학가, 시인, 역사가,  물리 및 화학자였
던 로모노쏘프(M. V.  Lomonosov, 1711-65), 역사가이며 시인이었던  까람
진(Karamzin,  1766-26),   문법과  번역으로  유명했던   쥬꼽프스끼(Alex
Zhukovsky, 1783-1852)였다.
 새로운 문예기반이 조성됨에 따라  재능과 깊이 있는 작가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정신을 담은 문예문제나 환상적인  작품보다는 종교, 철
학, 심리,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러시아 작가들
은 독일의 관념주의와 낭만주의를  상당히 찬미함에 따라 영향을 받았음에
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 폭넓은 호감을  얻지 못했다. 당시의  지배정신은
문예비평가 벨린스끼(Belinsky)와 게르ㅉ(Herzen)이  말한 "사람은 논리(이
치)만을 위해 태어나지 않고,  또한 도덕적 자유와 긍정적 행위의 사회, 역
사적 세계를 위하여 태어난다."로  반영됐다. 이러한 정신과 국가적 인간환
경 속에서  러시아 문학작품은 뿌쉬낀(A.  S. Pushkin, 1799-1837)에  의해
유명한  시들과   "바리스  가두노프"(Boris  Godunov),  "예브계니   아녜
긴"(Eugene   Onegin)같은   작품을    창출했으며,   례르몬또프(M.   Y.
Lermontov)는 "우리시대의 영웅"(A  Hero of Our Time)을,  고골리(N. Y.
Gogol, 1809-52)는  "죽은 혼"(Dead Souls)과  "검찰관"(Inspector General)
을, 뚜르계녜프(I.  S. Thrgenev,  1818-83)는 "아버지와 아들"(fathers  and
Sons)을,   이반   곤차로프(Ivan   Goncharov,    1812-91)는   "오블로모
프"(Oblomov)를, 도스또예프스끼(Feodor M.  Dostotevsky, 1821-81)는 "죄
와  벌"(Crime and  Punishment), "백치"(The  Idiot), "까라마조프의  형제
들"(the Brothers  Karamazov)을, 례오 똘스또이(Leo  Tolstoy, 1825-1910)
는 "안나 까례니나"(Anna Karenina),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이
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 Ilyich)을 창작했다. 이들  작품의 이
야기 배경은 낭만적 환경에서 야기될  수 있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보다 현
실적인 민족주의와  광적 신앙의 상호작용속에  바탕을 둔 것이다.  아울러
이들 작품들은 러시아 인 민속에, 러시아 운명 속에  깊은 신뢰를 표현점이
공통된 점이다.
 이들의   문예적  전통은   다음세대에서  안톤   체홉(Anton   Chekov,
1860-1904), 몌례즈꼬프스끼(D.  Merezhkovsky, 1865-1941), 안드례예프(V.
L. Andreyev,  1871-1919), 그리고 새로운 혁명적  세계를 위한 투사가  된
막심 고리끼(Mazim Gorky, 1868-1936)에 의해 지속됐다.
 러시아는 1812년 프랑스 침략자들을  격퇴한 후 19세기초에 시작된 자유
화 정책이 활발한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대외정책 수행에 있어서도  역시
보수적 행보를 보였다. 이에  따라 혁명운동도 강도 있게 심화됐다. 이같은
추세 속에서 러시아는 크리미아전쟁  패배이후 정부를 개혁의 길로 강요함
에 딸 "상부로부터의 개혁"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농민은 농노로부터 해
방됐으며, 사법.행정적 개혁과  변화가 따랐다. 그러나 개혁은 충분치  못했
다. 이에 따라 농민은 실망했고, 인ㅉ리겐찌아의 성장과  더불어 점차 정치,
사회적 불안이 고조됐다. 산업화는 외국기업가, 기술자, 재정가  및 기타 전
문 숙련기술자들의  도움으로 추진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산업화가  사회적
분열에도 기여했다. 이같은 시대적 격변상황에서 러시아 예술과  문학은 크
나큰 번창을 이루었다.
 문화적 유형의  측면에서 러시아  문학은 현실주의(realism)로  요약된다.
문학은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면을 추구하기보다는 현실을 고발하고,  정교
적 척도로 이를 평가하고 개선토록 유도할 뿐만 아니라  인민이 지닌 국가,
사회적 역량 인정과 함께 이들의  해방 및 권리의 당위성을 일깨우는데 주
력했다.  그리고 러시아  문학의  현실주의는 기독교적  인도주의(christian
humanism)를 기본적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성과 함께 사회발전
수준의 후진성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러시아 문화의 일반유형

 총체적 시각으로 러시아의  일반적 문화유형을 요약하면, 첫째, 전제주의
(despotism), 둘째, 보수주의(Conservatism), 셋째, 민족주의(Nationalism)로
대별할 수 있다.
 러시아는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
다. 더욱이 끼예프공국에 의해 10세기 기독교가 채택됐음에도 불구하고, 근
대 서구제국이  창조한 르네상스, 종교개혁, 특히  근대 과학문명의 도구인
합리적 태도와 같은 문화대운동을 전혀 공유해보지 못했다는 점이 다르다.
 러시아가 이같은  문화대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이유는 다양하다. 이  중
지리적 요인을 먼저 들 수 있다. 러시아를 장악한 슬라브(Slav)hr은 유럽인
이며, 인종적으로 서구 독일계통과 동일한 종류의 사람들이다. 이렇게 인종
적으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서구문화의 중심으로부터 원거리에 위치함에
따라 위대한 로마문화를  직접적으로 접할 수 없었다. 이같은 러시아의  고
립현상은 끼예프공국을  몰락시키고, 수세기동안 서구로부터  동슬라브족을
완전히 갈라놓은 몽고종족에 속하는 따따르족의 침략에 의해 보다 더 가중
됐다. 바로 따따르족의 침략시 서구에서는 초기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있었
다.
 슬라브인들의 공국 재통일은 이반 3세와 이반 4세 통치기인 15-16세기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이  통치자들은 귀족들의 독립성을 격파하고, 모스끄바
공국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타공국들을 예속시켰다. 이에 따라  중앙집권적
전제주의하에 진행된 민족적 통일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모스끄바 통치자들은 그들의 권력을 통합하고 침입자들을 몰아내는데 있
어서 서구와는 전혀  다른 유형(Pattern)을 만들었다. 서구에서의  민족통일
은 "도시화"와 정치적 민주주의  지향을 위해 지대한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중산층 부상에 기초한 "상업사회"의 출현으로 짧은 기간내에 이룩될 수 이
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의 민족통일 유현은 도시화와 상업발전  및 중산층
확대를 억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황제들은 중앙집권주의 및  전제주의 강
화, 국가권력체제하에  교회와 귀족의 예속화, 납세와  징집을 통해 부담을
받고 있는 농민대중의  완전한 속박을 강행했다. 바로 이 시기에  서구에서
는 봉건주의가 봉괴중이었으나  러시아에서는 자유농민들이 농노화됨에 따
라 숫적으로 감소추세에 있었다. 그후 서구의 절대주의가  의회주의 시작으
로 침식되고 있을  때 러시아 황제들은 그들의  준독립적 귀족들을 완전히
파괴하고 있었으며, 가산제형태의 절대주의적 세습체제를 수립중이었다. 황
제들은 뽀몌스찌예(Pomestie)체제를 수립코 국가에 봉사 및 충성하는 귀족
에게만 이들의 대가로  토지를 하사하여 그들로 하여금  관리 및 운영토록
하는  제도를 통해  국가를 관리했다.  따라서  농노제(serfdom), 전제주의
(autocracy), 황제의 세습주의(tsarsi patrimonialism)가 러시아 체제의 핵심
적 특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바로 이것들이 서구 봉건주의(feudalism)와
두드러진 차이점이기도 하다.
 이같은 속성의 러시아 전제체제는 정적인(ststic)면모를 보일  수 밖에 없
었다. 대다수 계급은 특권계급으로 변모될 수 없는 타고난  신분에 의해 계
급이 결정되는 카스트(caste)제도에 묶여있었다.  그러나 당시 16, 17세기중
서구는 다소 향상된 과학 및 기술진보를 이룩해 가고  있었다. 아울러 러시
아 문화는 공식적으로 국교화 된 정교를 상당히 반영하고  있었다. 비록 정
교의 뿌리가 헬리니즘문명에 기초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기독교
와 상당한 이질적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자연에 수동적이며, 정치에 순종
적일 뿐만 아니라  신비성이 강조된 정교는 서구의  칼빈주의(Calvinism)가
형성한 활기차고, 세속적이며, 민주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이같은 체제상의 취약점이 노출된  시기는 19세기 이후 러시아가 유럽세
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전까지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및
시베리아 지역민들 보다 기술과 조직적 측면에서 우월한 입장에 있었기 때
문에 비교적 용이하게 제국주의적 야심을 채울수 있었다.  그러나 1700년에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패한 뾰뜨르(Peter  1)대제가 서구와 경쟁하기  위해
도입한 서구모델에 의한  근대화추진으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뾰뜨르의 근대화 노력을 러시아사의 분수령으로 보고 있다.
 뾰뜨르대제는 군사 및 산업발전 프로그램을  진척시켰으며, 서구제국으로
부터 기술자들과 예술가들을  초빙하여 고용했고, 관료체제에 대한  합리성
도입, 능력에 의한 승진체제  도입, 그리고 전반적으로 서구의 효율적 정부
에 필적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18세기말 예까쩨리나  2세는 뾰뜨르의 사업
을 계승하여 새로운 국면의 발전을 가속화시켰다. 서구의 패션과 기술도입,
서구사상을 유포목적으로  한 서구철학가들 초청,  후진 농업 육성을  위한
효율성과 훈련모델로써  독일 농민들의 이민촉구와  같은 사업을 추진시켰
다.
 이들 근대화 개혁의 한계는 러시아적 농노제도와 독제체제에  있었다. 인
구의 약 3/4을 이루고 있는  농민 대다수가 사적 노예의 신분 내지 국가소
유의 탄광 및  야금공장에서 생활했다. 농노에 대한 지주의 권리는  포괄적
이었다. 지주는  이들을 자신들의 토지에  배치하여 자신의 토지를  경작케
했으며, 이주 금지와 더불어 체벌을 포함한 일방적 사법권을 행사했다.
 서구와의 경쟁측면에서  러시아의 근대화 노선은  상당한 선택적 면모를
보였다. 뾰뜨르와 예까쩨리나하에서  추진된 제한적 산업화는 주로  정부의
후원과 군사적 필요성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미한  노력이 서구에서
경제발전과 결부된 기업적 기술을 제공할 수 있는 도시 중산계층을 태동시
키지 못했다. 뾰뜨르 이래 본격화된 근대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
도시화는 1796년 예까쩨리나 2세  통치기까지 급속도로 이루어지지도 못했
다. 1796년의 농촌거주 인구는 여전히  95.9%를 유지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중산층 결핍현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의미 있는
변화의 충격 내지  활력이 늘 상부구조에서 야기됐다. 그리고 이같은  풍토
속에서 황제와 쏘비예뜨는 그들의 변화주도권에 도전해온 자치집단의 활동
에 두려워하는  문화적 습성을 낳게  되었다. 러시아의 중산층  결여현상은
바로 이같은 풍토 속에서 자행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뾰뜨르와 예까쩨리나치하에서  행해진 동원(mobilization)및 선택적  서구
화에도 불구하고 다소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18세기중 러시아는  스웨
덴과 전쟁승리 결과로  발틱해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아울러  폴란드와
터키를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과거 끼예프의 영토를 재탈환하는데 성공하였
을 뿐만 아니라 유럽과의 교류를 대거 원할히 수행할 수 있는 해상로를 확
보하게 되었다.
 그후 곧 러시아는 서구 선진국들과  비교할 때 기술이나 인적 및 자원동
원 능력에 있어 열등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가공할만한 군사력
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기에 진입중이었으며, 그들의 경제
및 군사적 능력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도시, 교역,  산업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욱이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혁명이 당시 엘리트와 대중에 감염되고 있던
전제주의에 대한 자유와 해방사상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러시아 황제는
새로운 선진사상에 입각한 체제변화  없이 서구국가들과 군사적 경쟁을 벌
였다. 황제의 제국적 야심과  국가 능력간에 형성된 간격을 현저했다. 당시
러시아는 가난에 찌들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농업의 과도한 비중 및 문맹
으로 인한 후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큰 영광스런 군과 복합적인
관료체제, 그리고 유럽에서 호화찬란한 궁전중의 하나를 갖고 있었다.
 황제정권의 중앙집권주의와 절대주의는  국가를 효율적으로 조직하기 위
해 요구되는 역량측면에서 취약성을 보였다. 황제는 자신의  권위를 완전히
위탁한 소수  귀족으로 구성된 관료체제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한 중앙관료체제는 통합된 민족국가를 자유자제로 만들어 내는데 효과적
수단이었다. 영토의 광활성과 특히, 결빙상태의 겨울과 봄의 진흙길로 야기
된 의사소통(communication)의 어려움이 국가정책수행을 방해했다. 더욱이
합리적 조직사업을 강조하는 문화 및 종교적 전통의 결핍이 러시아 절대주
의를 엄청난 비효율적 결과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했다.
 러시아 전제주의는 비잔틴의 정치문화, 따따르족의지배문화, 러시아의 광
활한 지리적 속성에 따른 효율적 국토관리를 위하여,  구지배층인 귀족들의
통제를 위하여, 외세침략에  대비하고 제국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영토확장
을 위하여, 근대화 및  개발을 위하여, 전통적인 정치문화적 분열의 억제를
위하여, 사회적 불만요소 억제를 위하여 사용됨에 따라  문화적 일반유형으
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쏘비예뜨 체제의 이해도 전제주의적  속성에 부가된
전체주의(Totalitarianism)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의 보수주의는 전제주의가  변화를 거부하는 일반속성에 기인하고
있으며, 여기에 정교가 보수주의의 내용을 형성시키고 정당화함에  따라 문
화적 유형으로 고착될  수 있었다. 정교는 로만 가톨릭과는 대조적으로  현
실에 조화되지 못하고 고지식한 면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정교가 낳은 신
비주의의 실생활 지배가 사회  전반적 보수주의 고착에 절대적으로 기여했
다.
 러시아의 보수성은 사회적 직업이동  조건을 조성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
라 암울한  사회조성은 물로, 착취적  노동을 강요하는 비윤리적  상황조성
속에서 절대적 예속관계를 형성시켰다. 따라서 활기 없고, 창의성이 결여된
사회적 분위기 조성은 물론, 민주문화의 토대를 전혀 배우고  훈련할 수 없
었다. 특히 사회적 불만의 한계상황 속에서 야기된 민란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빈번했다.  그 중 스쩨빤 라진(Stenka Razin, 1667-1670)의
난과, 뿌가쵸프(Pugachev, 1772-74)의 난은 러시아사를  얼룩지게한 대표적
전제주의와 보수주의의 결과이다.
 러시아의 민족주의는 불리한 자연 및 지리적 조건하에서 본래 유구한 역
사성을 지닌 산물이다. 특히 러시아가 근세에 접어들어  영토확장을 하면서
나타낸 민족주의적 속성은 과거의  방어적 속성에서 공격적 속성으로 변모
하고 있다. 쏘비예뜨 체제가 보인 프롤레타리아 민족주의는  대내적으로 다
양한 민족세력을 통합시킬  목적에서 강조된 것이며, 세계적으로는  적화를
목적으로 한 민족의  이익이 상당량 내포된 것이다. 러시아 민족주의의  실
상을 극렬하게 보여준 사례는 시베리아 정복과정에서 나타났다.  아시아 피
지배민족에  대한  정교강요와  함께  저질러진 만행이  결국  네르친스끄
(Nerchinsk, 1689)조약을 체결하게된 것이다. 그러나 쏘비예뜨 체제이후 민
족간에 직접적 피해를  주는 사례는 일소되었다. 특히 제 2차  세계대전 과
정과, 그후의 직,간접적 분쟁참여시에  보여준 사례는 과거와 전혀 다른 좋
은 평판을 받았다.
 러시아의 민족주의는 다른  국가들에서와 같이 국력을 집결시키고,  영토
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이용되었다. 특히 근세 인ㅉ리곈찌야들의  반정부
활동이 거세지고, 황제에  대한 민주화요구가 가해졌을 때 결국 황제가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민족주의를  최대 활용하였다.
쏘비예뜨 체제하에서도 특히 제  2차 대전후 조성된 냉전의 상황에서 민족
주의는 상당한 국력 결집의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현  옐친 이후의 정치상
황을 예측함에 있어 러시아  민족주의의 배타적 발전가능성에 우려하는 학
자들이 많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이같은  러시아의  일반유형은  크로에벌(Kroeber,  A.  L)과  클루크혼
(Kluckhohn Clyde)이  대표성을 띠고  있는 "문화의 유형론"(The  Pattern
Theory of  Culture)과 라드클리페-브라운(Radcliffe-Brown, A. R)이  대표
성을 띠고 있는 "사회구조론"(Social Structure as  a Theory of Culture)을
통해 재확인될 것이다.

   1) 러시아의 생존문화

 문화유형론자들이 설정한  생물학적, 심리적  그리고 지리적  환경요인은
러시아의 역사진화과정에서 지속적인 성격을 띠면서 현저한 영향을 미쳐왔
다. 그리고 이들 환경요인은 개인이나 집단과의 관계에서  기본적인 생활조
건을 형성시켜줄 뿐만  아니라 환경과의 효과적 적응방법 모색과 발달,  그
리고 사회유지 및 일치측면에서 이해배분을 위한 가치를  창조해 나아간다.
이같은 환경과 사회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될 수 있는 침전물을 집약적
으로 "생존문화"로 호칭하고 이들 상호간의 관계를 분석한다.
 첫째 지리적인 조건으로 많은 학자들은 지리가 신체적 환경을 이루고 있
다고 복 있으며 지리적 요인이  마치 신체적 요인과 동의어처럼 다루고 있
다. 더욱이  러시아의 일부 역사가들은  신체적인 환경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성향을 오래전부터 보여주었다. 특히 오늘날 지리적인  문제의 핵
심을 사람과 토지, 그리고  경제적인 요인들의 상호작용에 두고 있다. 따라
서 독자적인 지리적 특성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사람과의 상호작
용에 의미가 있기 때문에 상관적 관계에서 주거환경을 분석한다.
 러시아인들의 핵심  주거지역은 우랄산맥 이서지역으로서  모스끄바지역,
볼가강 유역, 박틱 근해지역,  드네쁘르강 유역 그리고 우랄산맥 이동 남부
지역이다. 이들 지역의  지리적 특징은 산악과 같은 지형지물이 거의  없는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남부 국경을 따라 형성된  높은 산맥식 울타
리형이 인도양으로부터의 열대성 대기를 효과적으로 차단함과 동시에 북부
지역은 북극으로부터  폭넓게 열려진 상태에  있다. 이러한 결과로  기후는
대륙성, 일률성, 건조성과 같은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대륙성 기후는 러시
아의 다수 영토가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서쪽에서  불
어오는 대서양기후가 일반적으로  완화역할을 하면서 러시아 남서방향에서
북동쪽으로 강력한 위력을 가지며 횡단하고 있다. 이같은  상태에서 러시아
의 겨울기온이 급격히 하강하는  원인은 1월평균 기온이 화씨 영하 60도로
내려가는 태평양방면에 위치한  극냉지점 "오미먀꼰"(Oymyakon)지방이 불
과 300마일밖에 떨어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겨울철이 압도적  위치
를 점하고 있는  상태에서 러시아인들은 오랫동안 인내를 배웠다. 한편  기
후의 균일성은 한여름에 거의  모든 러시아인들이 와이샤쓰 차림으로 여름
을 보낼 수 있게 했으며 한겨울에는 북극에서 까스삐해까지 스케이트를 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쌍뜨 ㅃ쩨르부르끄에서 블라지보스똑까지 썰매를 탈
수 있음이 이를 예증하고 있다. 기후 양상으로써 중요성을  띠고 있는 것이
건조성이다. 러시아의 강우량은  연간 5인치 정도로 이는 미국의  절반지역
에 내리고  있는 강우량의 1/4수준이다.  특히 변두리 지역중  습한 지역은
무기력한 열대성지역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한발은 러시아에서  폭넓게
영향을 미치는 난제이다.  이렇게 열과 강우량의 부족으로 인해 인간의  생
존에 필수적인 농작물을  얻는데 있어, 특히 성장기에 집약적 열과  효과적
인 용수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이들에게 투지력 및  인내심
을 생존요건으로 요구해왔다. 특히 빈번한 한발시에는 처절한  강인성을 요
구할 수밖에 없었다.
 주거지역에 형성된  식물대는 침엽수림지대(tayga)와 초원지대(steppe)이
다. 침엽수림지대는 겨울에  몹시 춥지만 여름에 비교적 높은 고온으로  인
해 침엽수의 성장을  가능케하고 있다. 겨울눈에 의한 과도한 강수량은  영
구동토 및 경질층에 의해 깊이  침투되지 못하고 또한 희소한 부식토와 어
우러진 침엽수림지대는 고농도의 산성회백토(podzol  soil)가 토대를 이루고
있어 경작에 특별한  배려가 요구된다. 이 지역은 소규모 모피동물의  서식
처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모스끄바주변과 발틱해변 인근지역은  쐐기형 낙
엽수와 침엽수가 혼합되어  있는 소위 혼합수림지역이다. 따라서  침엽수림
지대와는  달리 토박성과  산성에  있어 형편이  나은 상태임으로  갈색토
(brown-earth)를 형성하고 있고 경작이  용이하여 슬라브족의 초기 정차기
지가 되기도 했다. 아울러 이 혼합수림지대는 남으로  내려가면서 낙엽수가
압도적으로   증가하여   서식함에    따라   나무가   우거진   초원지대
(wooded-steppe)로 호칭되고 있다. 이 지역은  주로 참나무, 떡갈나무와 같
은 관목과 소규모 초지가 산재한 것이 특징이다. 이  지역 대부분의 토양은
초원지대 특유의  모습처럼 흑토대(black-earth)이며, 이밖에  초원지대보다
도 강수량이 많아서 믿을만한 경작조건을 갖추고 있다.
 초원지대는 실로 러시아의 기본적이며 독특한 지역중의 하나인데 흑토대
로 형성되어 있어  세계에서 가장 좋은 경작지중의 하나이다. 검은  토양은
매년 부식되는  다량의 풀들이 수세기에  걸쳐 만들어졌으며, 이것이  석회
및 기타 근원적인 토석성분과  혼합되어 보존된 풍부한 부식토의 퇴적물이
다. 그러나 문제는  기후로 인한 토양상층부의 과도한 증발로 농업에  필요
한 수분공급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다. 유리하지 못한  거주지역의 경작조
건 역시  고달픈 생활조건을 야기했다.  따라서 인성형성에 있어  인내심과
겸손한 자세를 터득하기에  충분했다. 지리적 조건으로 결과한  러시아인의
품성을 정리하면 영토의  광대성이 관대한 조망을 낳게 했으며, 비옥한  토
양과 아름다운  숲의 특성이 깊은 심성과  순수성 및 평화를, 그리고  지역
및 기후의 다양성이 열린 마음과 타고난 적응력을 갖춰  주었다. 그러나 이
를 일반화하기에는 그들의 모호성과 독단성으로 인해 다소 무리가 있다.
 둘째는 생물학적인 환경으로 인해 체득된 사고유형에 초점을  맞춘다. 생
존에 근원적인 식생활문제는 경작조건의 불리함과 불확실성으로 고통을 받
아왔다. 이반 4세 사후 1601-1603년간 지속된 한발로 인해 기아사건 및 정
치, 사회,  경제적 대혼란을 야기한  적도 있다. 더욱이 과학문명의  발달과
정부의 계획적인 집중투자에도 불구하고 근래 쏘비예뜨 정부는 외국으로부
터 막대한 식량을 수입하고 있다. 이러한 근원적 조건의  보조적 결과로 나
타난  현상은   스칸디나비아  식민주의자들인   바란진족(Varangians  or
Vikings)의 도움에 의한 동로마 비잔틴  제국과의 교역이었다. 교역의 경제
적 효과로 끼예프공국 당시 엄청난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교역에 의한 경제기반조성은  러시아사에서 극히 일시적 국면에 지
나지 않는다.  원인은 외침에 의한 교역로  차단 및 피지배로 인한  수탈로
기인됐다.
 지리적으로 외침을  예방하기에 유리한 천연장벽  없이 광활한 초원으로
펼쳐진 지형조건은 러시인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혀 왔다.  1세기에는 알란족
(Alans), 2세기에서 3세기에는  고트족(Goths), 4세기에는 훈족(Huns)과 불
갈족(Bulgars),  6세기에서 8세기에는  아발족(Avars), 9세기에는  하자르족
(Khazars) 및 ㅃ쳬녜끄족(Pechenegs), 13세기에서 15세기에는 몽고의  따따
르족(Tartar), 17세기에는 폴란드와  스웨덴 및 독일의 봉건기사들,  19세기
초에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20세기에는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침략
으로 이뤄졌다. 이밖에 1853-1856년에 있었던 크리미아 전쟁에서의  영국군
에 의한  패배 및 1904-1905년의 노일전쟁  패배기록도 갖고 있다.  이같은
빈번한 피침과 패배가 러시아인들에게  미친 심리적 결과는 외국인 공포증
(Xenophobia)이다. 필자가 근대 러시아에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한, 러수교
이후 급증한 한국인들에 대해 불안심리를 드러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
었다.
 민족국가수립이후 러시아인들이 따따르족에 피침당한 결과는 교역중심사
회에서 농업중심사회로의 변모, 민족의 분열,  국제적 고립현상이 나타났다.
240년에 걸친 기나긴 압박과 수탈의 쓰라린 경험 끝에 얻은 교훈의 결과는
전제주의 통치형태(Autocracy)였다.  이는 분열된 민족을 재결집시키고  국
력을 급속히 신장시키는데  효과적 수단이었다. 아울러 외국과의  전쟁발발
시 조국에 대한 사랑에 근거를 둔 애국주의(Patriotism)가 민족정서를 자극
할 수 있었다. 특히  따따르족의 굴레에서 벗어난 후 적극적인 방어  및 공
격수단의 성격을 띠기도 한  시베리아, 중동, 터키, 폴란드, 스웨덴방면으로
의 진출과 또한 서구라파로의 진출시도 및 서구 정치참여로 인한 열강과의
충돌시에도 애국주의는 효과적  수단이었다. 이에 더하여 러시아는  19세기
중엽 대터키  침공을 시작하면서 발칸지역에  거주하는 슬라브 정교도들을
보호 및 구원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슬라브 확대주의(Pan-Slavism)를 표방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러시아는 피침과 패배의 경험을  민족이익 추구수단
으로 변모시켰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생존과 직결된 제도적 측면에서 농업생활로 방향을 돌린다.  러시아는 볼
셰빅혁명 이전까지 농업중심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17세기 말  뾰뜨르대제
이후 근대화가 추진되고 군인과  상공인계층이 현저히 증가함에 따라 사회
적 분화현상이 가시적 상태로 변모했지만 인구전체의 비중에서 볼 때 농업
에 종사하는 농민이  아직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초기 농민들의  생
활양식은 기본적으로 농촌공동체인 미르(Mir)에 소속되어 공동소유의 토지
를 가족수에 따른 배분과  주기적인 경작지 교체방식으로 운영하며 생활했
다. 그러나 이반 3세(1462-1505)통치이래  중앙집권적 절대주의가 팽배함에
따라 농민의 지위가  약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농민의 지위는 속박의  형태
와 주인의 형태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여왔다. 기본적으로 토지  소유형
태는 공적 토지와 사유지로 구분되었다. 공적인 토지는  국가, 수도원, 황제
개인소유지였다. 그러나 토지사용권자들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토지법에 의
거 관리됨에 따라 소유주의  이익추구를 위한 독단성의 견지에서 사유지보
다는 좋은 환경에 놓여 있었다.
 사유지는 농민다수로 구성된 사적이며 세습적인 농노들에 의해 경작되었
다. 농노들은 토지소유주에  맡겨져 소유물처럼 전반적인 생활을  규제받았
으며, 특히 결혼,  사법적인 처벌, 추방 등의 무자비한 만행을  감당해야 했
다. 당시 지주가  노예상태에서 농노를 해방시켜 준다 할지라도 농노는  농
업봉급자에 지나지 않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세습농노는 농업봉급자에  지
나지 않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세습농노는 원칙적으로 소작료(Obrok)를  지
불하는 농노, 부역(Barshchina)으로 보답하는 농노로 구분되었다.  소작농노
들은 자신들의 경작지가 협소하여 통상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농한기에 공장에  가서 일하고 얻은  급료를 소작료로 보충하며  생활했다.
아울러 부역농노들은 공장에 갈 수 있는 자유마저 허용되지 않아서 일주일
에 통상 3일간  지주가 요구하는 노동을 증가시키면서 수입을  확대시켰다.
수확기에는 가중된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음에도  긴급히 요구된 농노들의
식량은 거부당하는 대우를  받았다. 상기 농노와는 달리 어느 정도의  인권
과 실리가  보장된 농민들로 협동이  강조된 공동기업형태로 마을공동체를
자율적으로 관리한 집단이다. 미르는 농민들로  하여금 토지운영형태로부터
사회적 의식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또한 미르는 미르구성원에게  책임을
지기보다는 지주에게 책임을 진 관료를 선출하여 운영했다.  소수의 경우이
지만 자유농민들이 구성한 미르는  당연히 책임자가 구성원에게 책임을 졌
다. 아울러 국가에 지불해야 할 세금과 지주의 몫인  소작료는 미르가 관장
했다.
 절대다수 농민들의  이같은 비참한 생활은  중앙집권적 절대주의 집행에
따른 관료체제의 강화, 국가사업에 따른 대규모 시설공사, 대외전쟁 수행으
로 더욱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다시 말해 가중된  세금과 부역책무를 지
게 되었고 많은  농민들이 징집되어 전쟁을 수행해야만 했다. 이와는  대조
적으로 귀족은 면세특권을 누렸으며 지방관료들의 착취도 가중되었다.
 농노의 실태는  예까쩨리나 2세(1762-1796)통치기 전체인구의 56%를  차
지한 상태에서 1861년 농노해방 직전에는 약 90%로 증가했다.
 농노제도로 인한 불만과 탈피노력은 변경지방으로 도주하여 자유를 누리
며 약탈을 한  까자끄(Cossacks:일명 자유인)집단의 출현 및  농민반란으로
표출됐다. 대규모 농민반란은  알렉쎄이(Alexis)통치기인 1670년 발생한 스
ㅉ까 라진(Stenka Razin)의  난과 예까쩨리나 2세 통치기인 1773-1775년에
발생한 뿌가쵸프(Pugachev)의 난이다. 규모가 작은 농민반란의 발생건수는
예까쩨리나 2세가 즉위하기 시작한  1762년이래 뿌가쵸프의 난 발생직전까
지 50여건이며, 빠벨(Paul)(1796-1801)통치기에만 약 300건이 발생했다.
 이해의 불일치, 기존사회구조에 대한 불순종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민
란은 귀족 및 국가와의 계급적 갈등문화를 전진적으로 심화시켜 주고 있었
음을 명시하고 있다. 아울러 농촌공동체인 미르의 운영상은  사회주의적 소
유와 배분가치를 체득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셋째  심리적 환경에서  러시아가  절대 의존한  대상은  정교(Orthodox
Church)이다.  비잔틴제국  황제의   딸과  결혼한  끼예프의  블라지미르
(Vladimir)공에 의해 988년 국교가 된 정교는  러시아인들에게 생활의 일부
로써 자리잡게 되었다. 그후 이반  3세(Ivan 3)가 1492년 마지막 비잔틴 제
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계승하여  모스끄바가 "제 3의
로마"로 선언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비잔틴제국에서 유래
한 황제의 권위를  숭상하는데 사용한 다수 문화를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순수 종교적인 면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정교에 대한 농민(서민계층)의  밀착관계는 비이성적이다. 다시말해 절대
선 추구에 있어 복잡한  학문체계를 갖추고 의식적으로 하느님나라를 갈망
한 것이 아니고, 선을 지향하고 악을 벌하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은 것이다.
러시아적 정교의 실태를  우선 신도에 있어 전혀  제도교육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문맹자이며 피압박계층인 농민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러시아
지식인들 중에는 무신론자가 다수임에 반해 농민들이 반주지주의적인 실천
의지로 정교에 빠져든 원인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확인된 무자비하고 처
절한 생활 속에서 찾을 수 있겠다.
 정교의 종주국 자처를 계기로 시작된 신학적 발전은 니꼰(Nikon) 총주교
(Patriarch)에 의해  1652년부터 개혁의 형태로 단행되었다.  개혁의 기초는
서구에서의 인도주의적 측면을 강조한 개혁과는 달리 그리스형식에 입각하
여 교회의 교리와  밀접히 관련된 새로운 전례예배의식 도입에 있었다.  두
손가락 대신 세손가락으로 십자성호를 긋고, 행렬은 동쪽방향으로 하며, 수
염 깎는  것을 금하고,  예수(Jesus)의 러시아  표기정정, 그리고  할렐루야
(Hallelujah)가사의 노래부르기 정정이 그  내용이다. 이밖에 성서의 오역을
바로잡고 수세기 동안 러시아인들에게 파고든 실수들을 박멸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에 따라 교회에 합창대와 강론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불행하
게도 지방의  본당목사들은 다수가 교육받지  못한 문맹자들이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강론도입을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학식 있는  고위
성직자들은 개혁을 찬성했고 무식한  교구 목사들과 서민들은 반대하는 양
상을 띠게 되어 개혁을  빈대한 구교도(Old Believers)또는 라스꼴리니까파
(Raskolniki)들은 엄청난 수가 종교적 박해를 피해 까자끄와 마찬가지로 국
외 다뉴브(Danube)지역과 캐나다(Canada)로 이민을  떠났다. 이에 따른 농
업인력의 상실로 경제적  타격도 대단했다. 예까쩨리나 2세가 이들을  종교
적으로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귀환시킨 후 볼가강 동부지역에 정
착시킨 사건은 매우  인상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러시아 정교는  감상적
이며 본질적인 속성을 띠면서 생활과 분리될 수 없는 절대성을 실증시켜주
었다. 아울러 서민계층이  교구목사들을 따르며 고난의 길을 걷게 된  배경
에는 이들의 "종된모습",  가난, 겸손, 소박한 삶,  자기희생, 온화함이 있었
다.
 러시아 정교는 선, 악의 소재를 분명히 하여 양심의  가치체계를 바로 세
우고 자유의 세계를  지향하는데 절대적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교의보
다는 생활 속에  그리스도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구도적 수단이 되었다.  그
러나 반이성적인 자세로 현실을 신앙으로 타개하려는 기복신앙이 현실사회
발전에 한계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러시아인의 특성"을 집필한  로스끼(Loskii, N. O)에 따르면 러시아인들
에게는 오블로모프쉬나(oblomovshina:수동적이며 게으른 생활태도)의  일면
도 존재한다고 지적하면서 이의 주된 원인을 정교에서 찾고 있다. 즉, 기후
조건에 의해 조성된 강한  의지력과는 대조적으로 게으름과 수동성은 농노
제 하에서 농노에게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농노이외의 상류계
층에게도 화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명은 인간이 본래  이기적
이고 불완전한 본성을 지닌 존재로서 자신이 몰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서는 고통스러운 수단적 과정의 극복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
제는 신앙세계에 목표와  수단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즉 신앙인은  절대
가치와 흥미 있는 것만을 창조하고  또 창조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
문에 창조적 시도 및 독창적 삶이 무가치하고 무시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
서 결국 삶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고 게으름과  무관심에 빠지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교가 미친 반대적  국부는 정치체제에서도 두드러졌다. 왕성한  민족적
신앙심이 황제의 권위숭상에 이용되어 통치의 절대주의를 낳게 한 것이다.
 따따르족의 지배와 비잔틴제국의 영향력이 심리적 환경을 조성하고 사고
유형에 미친 효과도  지대하다. 이의 핵심적 결과만을 요약하면 여성의  활
동영역 제한, 의상 및  건축양식, 식생활에서부터 왕권우위 속에 종교권 예
속으로 결과한 일원주의(Monism)그리고 중앙집권주의이다.

   2) 러시아의 번영문화

 러시아가 서구문명에 눈뜨기  시작한 계기는 노브고로뜨시가 서구제국과
한자(Hansa)동맹을 맺고 상거래를 하여  번영을 누린 후이다. 그후 이반 4
세 통치기 시베리아 정복과정에서  노브고로뜨 상인들이 수입한 서양 총기
류들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데 자극을 받았다. 이반 4세가 사망한  후 계
승과 기아문제로 혼란기를 맞는 과정에서 개입한 폴란드,  스웨덴의 외세가
미친 충격도  지대했으리라 추정된다. 로마노프(Romanov)왕조  탄생후에는
과학문명에 기반을 둔 서구 기술 인력이 대거 고용되어 촌락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서구문물 도입에 있어  뾰뜨르의 역할은 지대했다.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한 서구와 정책은 물질적 측면에서 서구문화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러시
아인들의 의식개혁에 주력하였다.  그는 세속적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사회
전반을 개혁코저  노력했다. 귀족을 포함한  모든 인민이 국가에  봉사토록
의무를 지워주었으며, 생산성제고 목적으로 짧은 옷차림과 면도를  통한 단
정한 용모유지 여성의 사회활동폭  확대, 유럽식 학교, 신문, 과학아카데미,
정규군 제도, 해군 창설,  병원도입을 통해 국력을 신장하고 복리를 증진시
키려 했다.
 뾰드르의 노력은 러시아를 유럽의  일원으로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고 문
화적으로도 서구와  접근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합리주의와
기술문명을 본질로 하는 서구화 추진  개혁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는 문
제가 아니었다. 황제가  주도한 개혁에 서민계층이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
기반을 전혀  갖고 있지 못했다. 즉  정교정신에서 볼 때 뾰뜨르의  귀족에
대한 독려와 강압이  서민들에게는 이교도로 비칠 수 밖에 없었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은 의식은 서구화되었으나 실천의지를 결여한 행동으
로 인해 서민계층과 분리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예까쩨리나 2세의 서구화 노력은  뾰뜨르의 정책결과를 보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합리주의 사고를  보급하는데 공헌했
다. 그러나 그녀의 즉위초기에 관심을 보인 농노문제  해결에서나 프랑스혁
명 발발에 의한 공화정 수립 결과에서 자신과 집권층의 이해보존에만 집착
한 결과가 의식을 갖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도전거리를  제공했다. 러시아
왕정은 상당기간 모순을 지닌 채 표류하였다. 나폴레옹과의  충돌이후 증명
됐듯이 러시아는 유럽질서에 헌병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군사대국으로 부
상하였음에도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후진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농노해방과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한 개혁의 주도권을 사회세력이 장악하
려고  기도한  12월 당원의  난은  총체적  모순의  자화상이었다.  더욱이
1853-1856년에 발생한 크리미아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패배한 사건은
사회구조적인 모순에 기인한  결과였다. 이해의 불평등 배분사회에서  서민
계층이 자기희생정신으로 피를 흘릴 불가피성이 없었기 때문에 자국영토에
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다.
 의식과 행동으로의 실천의지를 갖춘 러시아 특유의 인ㅉ리계찌야들의 사
회통합노력은 새로운 국면을 조성했다. 전문직업인과  귀족출신으로 형성된
인ㅉ리곈찌야들은 도시와 대학에서 성장하였으며 강한 사회의식을 갖고 있
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과 마찬가지고 신앙정신에 적은  가치
를 부여하고  사회주의에 경사됐으며 물질적 빈곤,  개인적인 복지, 전체의
안보에 주력했다. 이들의 주된 활동방향은 서구화에 필요한  문화적 기반을
확대조성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갖춰진  의식을 몸소 적극 실천하는데 두고
있었다.
 인민주의자들에 의한 농촌에서의  실행경험은 이들의 활동방향을 수정토
록 했으며 결국  적대감정과 결부되어 서구화 주도권  쟁탈에 우선 목표를
두었다. 아울러 이들의 서구화 설계와 방법은 당시의  난맥상을 반영하듯이
무정부주의(Anachism), 허무주의(Nihilism),  사회주의(Socialism)로의 이전
과정을 거쳐  볼셰비즘(Bolshevism) 내지  례닌주의(Leninism)로 귀착하게
되었다.
 례닌주의의 핵심은 사회건설 목표를  공산사회에 두고 이를 이루기 위한
과도적 수단으로 혁명엘리트들의 의식적인 지도의 필요성과 거국적인 소요
창조를 위한 방법으로 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민까지도 혁명세력화해야 하고
지속적인 혁명지도를 위한 정당조직은 소수, 정예, 비밀결사원칙에 의해 조
직토록 하는 것이다.
 례닌의 일파인 볼셰비끼들이 1917년  10월에 정권을 장악하게 됨에 따라
결국 러시아의 서구화는  맑스, 례닌주의로 변모되어 공식화하기에  이르렀
다. 이로써 전통적인 정교정신은 말살위기를 맞게 되었고  재산소유 형태의
변화에 따른 배분가치의  재창조가 단행되었다. 특히 목표문화  추진과정을
무산계급 독재론에 따른 전체주의체제로 도입하메 따라 민주주의는 고사되
고 말았다.
 독단과 물리적 강압이  지배한 스딸린의 전체주의체제하에서 러시아문화
는 인위적으로 주도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쏘비예뜨  시민모델로써 제기
된 형상은 새로운 인간상(New Man)이었다. "새로운 인간"주조노력은 대중
매체, 학교, 자시수양  방법을 통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인간"
의 본질은 희생정신과 국가와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폭넓은 공적이
익 제고를 위해 요구된  자기희생정신으로의 무장은 전통적인 미신적 관습
과 지방근성 극복을  강요받게 되었고 씨족, 마을, 지역, 민족에  대한 전통
적 책임감은 국가  및 공산당에 대한 새로운 순종요구로 격하되었다.  한마
디로 "새로운 인간"은 고차원의 공동선을  인정하고, 공산당이 소지한 국가
적 필요물에 눈돌리고 있는  특수 통찰력을 받아들이도록 교육되어지는 것
이다. 서구에서 개발한 시민상과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계서적  규율의 필요
성을 광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점이다. 서구의 시민성은  국가통치로부터 자
율적인 위치에 있으며,  정부와 당직자들이 만든 정책을 수용 및  실행하고
또한 가장 적절한 정책수행  방법을 창의적으로 찾음으로써 혁명사사에 대
한 책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렇게 "새로운  인간"이 시민의
제권리에 연구될 수 있지만 이러한 연루성격 및 방향을 결정하는 관료들의
권한에는 도전할 수 없는 상태이다.
 소련에서는 올바른  시민(Citizenship)상의 구비조건으로써  지방할거주의
적인 연계를 벗고 공동 국가상에  대한 이해와 수용을 촉구하면서 당과 국
가관료들에게 공적인 이익에 대한 정의를 위임토록 요구했다.  따라서 기본
적인 정책결정이 굳게 잠긴 문안에서 이뤄졌다. 정부로부터  사회를 보호할
목적으로 사회내의 제이익간 갈등을 역설하는 자유로운 정책개념과는 달리
소련은 이같은 이해의 갈등을  부인하고 정부주변에 집결토록 모든 시민에
게 요구하였다. 이렇게 정책결정의 공개성보다 결과와 이익에  정당성을 부
여해왔다.
 스딸린주의자들은 공업화와 군사역량의  대중적 추진력을 동원하기 위하
여 사회주의 핵심이념인  평등사상을 약속하면서도 목표량 달성,  불균등배
분, 차등지위, 노동윤리  등을 강조해왔다. 이같은 가치의  창조는 대중적인
문화의 변모에 기여했음이 드러났다. 즉 연구결과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대
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전통적인  가족 및 책무보다도 자녀들이 교육
훈련에서 성공과 개인적인 만족을  이루도록 하는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쏘비예뜨체제 성숙과 지도력  변화에 따라 가치변화도 뒤따랐다.  그러나
근본바탕에 대한  변화보다 공업화와 정권유지  목적의 기술적인 전문화만
변모했을 뿐이다. 당면 국가목표 달성을 위해 개인적인  유인책이 지속적으
로 도입되었다. 당면 국가목표 달성을 위해 개인적인  유인책이 지속적으로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물질숭배문화가 만연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배금
사상을 배격하는 대대적 캠페인을  벌였지만 결국 생산성 향상책으로 1966
년 이후 수정된  리베르만 원리채택에 의해 공식화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지속적으로 물질적 보상의 강화 및 확대 추세를 보였으나 사회주의 이념내
에서 보상의 강화  및 확대 추세를 보였으나  사회주의 이념내에서 보상은
자본가나 기업의 이윤증대 원리와는  별개의 공적 사회이익을 위한 조치에
불과했다.
 총체적 문제해결을 근원적으로 어렵게 하는 것은 체제와의 소외 및 비동
질성 심화이다. 체제는 사회 및 정치적 통제가 견고한  사회질서 파괴를 방
지하는데 필수적이라고 호소하고 있지만 설득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러시아인들 다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실행되고 있는 관대한  습성, 흥
정, 공적인 정치경쟁을 결코  학습하지 못했다. 따라서 서구화의 노정은 아
직도 상당기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3) 러시아의 조화문화

 러시아는 지리적인 속성을 기만으로 역사적 맥락에서 생존 및 심리적 조
건을 체험하면서 얻게  된 진선미적 축척물을 보유하게 되었다. 문화  유형
론에 의거 필자는 이 축적물로써의 문화가 전무한 상태에서 상당기간 일관
성과 지속성을 보이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자생적 토착 및 전통문화로 분
류 및 호칭한다.
 상대적으로 뾰뜨르 대제 이후 도입된 서구문화는 이질적인 선진외래문화
이다. 필자의 관심은  이 이질 문화가 역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제휴되었으
며 또 새로운  문화로써의 제휴된 유형을 밝히는데 있다. 문제는  러시아에
서 서구문화가 변증법적 발전등식으로  볼때 엄청난 갈등과정을 거쳐 제휴
되고 있는 점이다.  다시 말해 순리적이고 자연스럽게 접목되지 못하고  상
부구조의 독선과  압력으로 필요성만 강조된  채 억지로 주입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순리적이고 자연스럽게  접목되지 못하고 상부고조의 독선과 압
력으로 필요성만 강조된 채 억지로 주입시킨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왜곡된 서구화 주입이 주원인이 되어 로마노프왕조를 폐위시키고 공산당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이제 러시아 문화의  본질이 자율적
인 조건 속에서 객관적 제휴유형들을 만들어 나가게 되었다.
 러시아의 사고유형 성장은 전통문화와 서구문화의 갈등구조 속에서 새로
운 제휴형태 생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여기서 전통문화를 이루는  구성요
소는 지리적 특성, 외적의 침입, 정교신앙,  농노제도, 전제주의이다. 갈등구
조의 주체는 서민과 지주 및 지도층이며, 서구문화의  구성요소는 황제주도
하에 추진된 의식개혁과 과학문물도입, 공산정권의 제정책이다.
 갈등구조의 활동방향은 일치(Consensus)지향에  있다. 일치는 사회 신념
체계의 특유상태이다. 일치는 사회의  성인다수가 권위, 지위, 제권리, 부와
수입, 그리고 갈등이 야기될 수 있는 기타 중요하고  희귀한 제가치 결정시
에 발생하며, 결정해야  하는 신념과 합의에서 개인 상호간에 그리고  전체
로서의 사회와 통일감을 갖는 것이다. 일치는 가족이나  친지들에서처럼 직
접적으로 관계하는 사람들간에 그리고 원시시대부터 개인사이에 존재할 수
있다. 즉 일치는  교회나 당 파벌과 같은 카리스마적(Charismatic)공동체에
서나 사회내에서  존재할 수 있다. 아울러  일치의 기능은 첫째 법과  관례
및 제규범의 공동수용,  둘째 법을 반포하고 관계를 적용하는 기관에  대한
애정(부침성), 셋째로  일치와 균등의 관점에서  나타난 제가치를 경험중인
사람들에게서 드러나고 있는  광범위한 일치감이나 통일이다. 그리고  일치
의 형성은 배분의 당위성과 정의로 이루어진다.
 일치의 개념과 기능의 견지에서  전통과 서구 양문화의 제휴유형을 구체
적으로 세분화하여 살핀다.  첫째, 권위에 대한 사고유형이다. 전통문화  속
에서 황제는 신과 같은 존재였으며 그의 권능은 서구사회와 달리 교회권을
압도하는 유일적 권위자였다. 서구 문화에서도 뾰뜨르대제, 예까쩨리나 2세
를 비롯하여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조차도 1905년 "피의 일요일"사건
에서 볼 수 있듯이 절대적 권위자였다. 공산 혁명후에도  당 지도자에 대한
권위는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었다. 아울러 일치를 지향한  제휴유형
은 결정적 침해가 없는 권위유지 속에서 중재자로의 변모현상을 보이고 있
다. 제정통치시에는 양보와  타협이 없는 상태에서 혼란의 결과를 보인  끝
에 붕괴했으나 이 붕괴는 정당성에 입각하여 체제개혁을  시도했을 뿐이다.
아울러 공산체제에서 브레즈네프통치기  이후 효율적인 진보와 사회일치를
위해 서민과  당 사이에 서서 중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권위의
손상이 과거에 비해 엄청난 수준으로 하강됐지만 자유민주체제에서 목격되
는 수준과는 비교될 수 없는 상태이며, 치명적인 권위손상은  상상할 수 없
는 상태이다.
 두번째로는 사회 및  정치적인 주요 지위에 관해 살핀다. 전통문화  속에
서 지위는  세습적인 신분, 상관에  대한 사적 충성심, 그리고  능력이었다.
이중  신분은  거의  절대성을  띠었다.  물론  까자끄   출신의  예르마끄
(Yermak)나 시베리아에서 온  천민출신의 라스뿌찐(Raspotin)이 국가와 개
인적인 충성심, 그리고  영토확정과 황태자의 괴혈병치료라는 능력에  의해
상당한 지위에 오른  경우도 있다. 그러나 농노가 당시 통치능력을  갖추고
충성심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균등이  허용되지 못했다. 서구문화  속에서
농노제도가 폐지되고 자유노동 조건이 점차 호전됨에 따라 교육받을 수 없
는 상태였다. 이유는  학비부담과 시설문제로 인했다. 공산혁명후에도 결과
는 크게 바뀌지 못했다. 확대 교육은 전 지역에서 시행되었다. 이는 이념적
인 노선의 덕이었으며  기회균등의 보장책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프롤레타
리아트 출신성분과 당성이  지위의 필수조건이었다. 체제의 성격변화로  출
신성분의 내용자체는 본질적으로  변했으나 출세조건에서 출신성분과 당에
대한 충성심이 출세의  열쇠였다. 이같은 갈등구조에서 나타난  제휴유형이
능력위주로 변모하고 있음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및 근세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목격되는 수많은 배신과 정치불신이 능력의 영역을 제
한하고 있다. 이같은 결과는 개방사회에서도 불가피한 고려대상이  될 것이
다.
 세번째로 권리에 관한  문제이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권리의  견지에서
인권, 의식주  충족권, 자결권, 참정권으로  집약하여 살핀다. 전통문화에서
러시아는 의무만이  존재할 뿐 권리는  비참하게 찾아보기 힘든  상태였다.
서구화가 도입된 후 끈질긴 투쟁적 갈등을 겪고 나서야 생존, 자결, 참정권
에서의 개선이 있었다. 그 후 바로 이같은 권리  보장과 수호를 정통성으로
삼아 집권한 공산체제는 이전문화로서의 산업화와 영구 집권욕에서 선별적
권리보장 형태를 보였다. 즉  시기마다 그럴듯한 명분제시를 통한 인내, 내
핍강요로 노동력을 국가가 착취했으며, 체제에 도전 및  도전가능세력에 대
해서는 가혹하게  탄압 및 처벌을 가했다.  참정권 역시 당이 선택한  유일
인물에 대해 가부를 묻는 극히 형식만을 취한 형태로  유린했다. 그후 근래
에 복합적인 발전형 사회구조가 낳은 자유화 결과로 제권리가 개선되고 있
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1990년대이래 폭발적인 인플레와  생활난 속
에서 실질적인 인권개선에  의문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사회혼란을 야기할 정도로 불만이 외부로 표출되지 않고 있음은 아이
러니라기보다 과거유산에 의한 문화적  습성이 상당히 작용할 것으로 보아
야 할 것이다.
 네번째로 부와 수입에 관해 분석한다. 전통문화 속에서  부의 소유형태는
사회적이었다. 미르가 바로 공동소유형태이고, 농노해방이후 농민에게 장기
상환조건으로 분배된  토지 역시 미르관할하에  소유와 상황책임이 맡겨진
상태였다. 혁명 후  부의 소유형태는 생산수단이었기 때문에 사회 및  국가
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사회주의자들은  "부"를 사회악의 근원으로 보았
기 때문에  이의 개인적 소유를 금기시하여  왔다. 이에 따라 부의  대상인
토지 및 공장과 같은 생산수단을  모두 사회 및 국가소유의 사회적 공공재
산화하였다. 개방사회로  탈바꿈을 시도중인  옐친정부가 만든  헌법에서도
사회주의를 명백히 표방하고 있다. 따라서 사유화 조치는  국한적인 소규모
범위에서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일개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수입 및 소득에 있어서 양문화가  제한된 기회 속에서 국가시책에 의한 통
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근래 맞고 있는 개방사회가 노점상을 비롯하여  유
통부분의 일부, 그리고  비기간 산업부분에서 기존 소득방법의  탈피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나 사회주의를 고수하는  한 통제적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다.
 다섯번째로 다룰 대상은 기타범주에  속하는 문제로 우선 민주주의에 관
해 살핀다. 과거로부터 최근까지 민주주의의 필요성과 그  가치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은 대단했다. 그러나 대조적인 결과를 초래한데에는  긍정적인 측
면이 있다. 물론 지도자의 개성이 무시될 수도 없었지만  주된 원인은 주변
환경이 열악했던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겠다. 러시아의  교육수준은 세계최
고에 도달했으며, 가치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는 한 급성장할 것이다.
 개성과  관행의  측면에서  러시아   문화의  전통적인  요소인  포용성
(Expansiveness),    폭발성(Volatility),    충동성(Impulsiveness),    온정
(Emotional Warmth), 폭음(Drunkenness)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음을 쉽게
경험 및  관찰할 수 있다. 이같은  개성은 지리적 불만과 제휴과정  속에서
돌출한 동일속성의 상승현상 결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소련공산당 붕괴사건은  러시아에게 새로운 문화창조의 계기
를 마련하고 있다. 심리적 측면에서 확산된 공개, 민주, 자유, 자기책임정신
인 서민대중의 주인의식 함양고 함께 다원적 구조 속에서 명실상부한 제휴
형태로 문화창조를  가능케 하고 있다.  물리적 측면에서도 부의  국가독점
형태를 벗고 확대 배분됨에 따라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
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제공되고 있는 환경이 제휴과정없이  즉각
문화적 가치가 되지 않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전례된  무의식적 잠재의식은
타당성의견지에서 현행가치와 갈등 및  체득과정을 거쳐 새로운 가치로 자
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현행 지도체계와 서민간의  문화창조적 역할에 대한
분석도 변화의  방향과 심도를 가늠케  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지도체제는
사회내의 중심에 서서 전사회구성원을 하나로 묶는 사회화(Socialization)기
능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는 엘리트의 신념이 불가피하게 지대한  영향
을 미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다. 아울러 주요 정당 지도자들을  포함한 현
지도체제의 엘리트들이 전문기능적 속성을  띠고 있어 합리적 사고력을 갖
고 있음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이들이 과거 구체제에서 직, 간접적으로
연루되었던 인물들이라는 사실로 인해  쉽게 권위적 보수성을 탈피하기 어
려울 것이라는 판단이다.
 새로운 문화창조 모색에 있어  결정적 요인은 사회주의 신념들의 재해석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본다. 고르바쵸프  집권이래 떠들썩한 개혁의  함성은
외형을 갖추고  변화의 필요성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70여년동안 수호해온 사회주의 이념은  아직도 러시아 내부 한가운데 자리
잡은 채  복지부동하고 있다. 즉  "인간의 제권리와  자유가 최고가치"라고
헌법 2조에서 밝히고,  제 7조에서 "인간의 가치 있는 삶과  자유로운 발전
을 보장하는 제조건 창조를  사회주의 국가와 정책이 지향하고 있다"고 방
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주의 옹호 움직임은 이미 19세기초 러시아  지
성들에 의해 자본주의의 부도덕한 병폐를 피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필
요성 주장으로부터 연유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감은  뿌리깊은 문
화유산이다. 그러나 현실은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산업민영화
가 추진중에 있으며, 시민들의  부에 대한 집착도 경쟁적이다. 결국 상반된
원칙과 현실간의 갈등에서 승자의 향방에 따라 새로운 핵심 문화가 형성될
것이다.
 러시아는 구소련붕괴 이후 추진되어 온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로의 구
조조정에 낙관적 결과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경제는 1997년을  기선으로 플
러스성장을 기록하고 있으며, 정치의 안정과 함께 민족적  특성과 자존심도
표출되기 시작했다.  문화적 측면에서  1997년 9월에 확정된  비전통종교에
대한 금지조치는 대표적  사례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요  공식행사에
서 러시아 총주교는 대통령  다음서열로 등단하여 연설하는 지위를 회복했
으며, 수도 모스끄바의 대로에 설치된 대형선전탑에는 신비하고  경건한 정
교회건물 그림과 함께 "신성한 모스끄바"를  주지시키고 있다. 대형 교회건
물 복구작업도 시선을  끌고 있다. 이렇게 러시아의 전통문화가 과거  공산
치하의 모진 풍랑을  견뎌내고 다시 부활한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서구
의 거센물결에도 불구하고 서구사회와는 다른 구조적 틀을  형성할 것이다.
자연주의에 입각한 종교적 진선미  추구를 이상철학으로 하는 러시아의 성
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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