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cle Bank

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12/06 (22:29) from 80.139.171.1' of 80.139.171.1' Article Number : 366
Delete Modify 폴 틸리히 Access : 6350 , Lines : 293
경계선에서




경계선에서(On the boundary)

폴 틸리히(Paul Tillich:1886-1965)


내용

두 기질 사이에서
도시와 시골 사이에서
사회계급들 사이에서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타율과 자율 사이에서
신학과 철학 사이에서
교회와 사회 사이에서
종교와 문화 사이에서
루터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관념론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고국과 타국 사이에서
회고 : 경계선과 한계

"종교의 실현(Religiöse Verwirklichung)"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경계선은 앎을 얻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다." 나의 생각들이 나의 삶에서 전개되어 나온 과정을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마다 나는 경계선의 개념이야말로 나의 인간적, 지적 발전의 전체를 보여주는 적절한 상징이라 생각했다. 거의 모든 순간마다 나는 실존의 두 갈래 가능성 사이에 서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어느 하나에 안착할 수도 없었고 또 그 어느 하나에 순전히 반대입장을 취할 수도 없었다. 생각한다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런 입장은 사고를 위해서는 생산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삶에 있어서 어렵고도 위험한 것이며 끊임없이 결단을 요구하고 그리하여 두 갈래의 기로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이 입장과 그에 따른 긴장이 나의 운명과 나의 행적을 결정해 왔다.



두 기질 사이에서


아이의 성격 형성에 있어서 그 부모의 성격에 너무 큰 비중을 두어서 설명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훨씬 충격적으로 되살아나고 때로는 그들 내면에서 깊은 갈등을 유발시키는 부모와 조상의 기질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보다 유전적인 것인지 혹은 유년기에 받은 영향에 의한 것인지는 아무래도 좋다. 그렇지만 나는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사람인 아버지와 라인란트(Rhineland) 사람인 어머니의 결합이 나에게 동부독일과 서부독일 사이의 긴장을 심어주었다는 사실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동부 독일에는 우울함과 뒤섞인 사색적 경향과 의무와 개인적 죄에 대한 높은 의식, 그리고 권위와 봉건적 전통에 대한 강한 존중이 여전히 살아 있다. 서부독일은 삶에 대한 정열, 즉 구체성, 융통성, 합리성 그리고 민주주의 등에 대한 사랑으로 특징지어진다. 비록 어느 쪽 특성도 다른 쪽에 대해 배타적인 자질은 아니었지만 이 상충하는 특색들이 나의 내적, 외적 삶의 과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부모를 통해서였다. 그 같은 부모의 유산이 가진 중요성은 그것이 어느 누구의 삶의 과정을 결정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망을 마련해 주고 비판적 결정이 태어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는 데에 있다.

이 두 유산을 생각하지 않으면 나의 경계선적 위치는 이해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나의 아버지의 영향은 얼마만큼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이유 때문에 더 지배적이었다. 그 결과 나의 어머니의 세계의 특성은 나의 아버지의 그것과 부단하고도 깊은 투쟁을 거친 후에야 발현되곤 했다. 나의 체질 중 어머니의 측면이 스스로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파격이, 때로는 아주 극심한 파격이 필요했다. 고전적 체계와 조화는 나의 유산에는 없었다. 이 점이 왜 괴테의 고전적 특색이 내게는 낯선 것이었는지 그리고 왜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 고전시대보다 고전 이전과 고전 이후 시대가 내게는 더 흡수력이 강했는지 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이 긴장은 또한 나의 역사해석의 바닥에 깔려 있는 어떤 전제에 대해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해 주는 바가 있다. 곧 자기폐쇄적 순환구조라는 고전적 전제보다는 앞으로 향해서,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노선을 택한 것이라든가 또 두 대립하는 원리들 사이의 투쟁이 역사의 내용을 구성한다는 생각, 그리고 진리는 플라톤이 가르친 바와 같이 불변의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과 운명의 한가운데에서 발견된다는 역동적 진리관 등이 그것이다.



도시와 시골 사이에서


네 살에서 열 네 살 나던 해까지 나는 엘베강에서 가까운 한 조그마한 읍에서 살았는데 나의 아버지는 그 곳 교구의 주임목사이자 감독이었다. 독일의 여러 지역의 소읍들에 있어서 전형적인 주민은 영농주민(farmer-burgher) - 읍에 거주하면서 제법 큰 농토를 경영하는 대체로 부유한 읍민 - 이었다. 이런 류의 소읍들은 순전한 시골 풍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집들은 딸린 마당과 곳간, 정원을 가지고 있으며 들까지는 얼마 떨어지지 않았다. 가축과 양들은 아침저녁으로 거리를 떼지어 지나가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중세시대와 마찬가지로 낡은 시민적 권리와 전통을 가진 순수한 소읍이었다. 마을 성문은 집과 상점이 빽빽이 늘어선 좁은 도로를 향하여 열려 있었다. 밤의 숲이라든가 침묵에 잠긴 들판, 그리고 졸린 듯한 마을이 주는 무서운 느낌에 대조적으로 분주하고 소란한 가운데 어딘가 칩거적이고 방어적인 마을 생리가 나의 어린 시절의 영상 중에서 가장 이르고도 인상적인 것의 하나다. 베를린을 방문하자 철로 자체가 내게는 반쯤 신화적이 것처럼 충격적이었는데 그 방문은 그 기억을 생생히 해 주었고 또 나로 하여금 때때로 큰 도시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동경을 갖게 하였다. 그것은 그 후 여러 가지로 내게 영향을 주었는데 그 영향은 나의 글 "기술의 합리성과 신화성(Logos und Mythos der Technik)" 및 "상징으로서의 기술도시(Die technische Stadt als Symbol)"에 철학적으로 표현되었다.

도시에 대한 이 같은 끌림은 나로 하여금 기술 문명에 대한 낭만적 배척에 빠지지 않게 하였으며 지적, 예술적 삶의 비판적 측면의 발달에 있어서 도시가 가지는 중요성을 깨우쳐 주었다. 그 후에 나는 대도시에서만 가능한 움직임이었던 보헤미안주의에 대해 생동적이며 동정적인 이해에 도달했다. 나는 또한 도시의 환상적인 내적 활동성과 물리적 크기 양자를 심미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배웠다. 결국 나는 대도시에 집중된 정치적 운동과 사회적 운동에 대한 직접적 지식을 얻었다. 이 체험과 내게 있어서 이 체험이 가지는 지속적 효력 - 말하자면 도시의 신화 - 는 나의 책 "종교적 상황"이 널리 읽히게 된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골에 대한 나의 인연은 여전히 강했다. 나의 생애의 거의 모든 큼직한 기억과 동경은 풍경과 흙과 기후와 가을의 논밭과 감자 냄새, 구름의 모양 그리고 바람, 꽃, 나무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후에 내가 독일과 남부 유럽, 서부 유럽을 여행 다니는 중에서도 땅에 대한 인상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내가 자연의 아름다움에 둘러싸인 채 감명 깊게 읽은 쉘링의 자연철학은 나의 자연에 대한 감정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 되었다.

내가 여덟 살 되던 때부터 몇 주일씩(후에는 몇 달씩) 바닷가에서 지냈던 것은 나의 생애와 활동에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유한의 위에 무한이 접경해 있는 경험은 경계선적 상황에 대한 나의 성향에 부합되었고 또 그것은 나의 사고에는 창조성을, 나의 감정에는 기반을 주는 한 상징을 나의 상상력에 가져다주었다. 이 같은 체험이 없었다면 "종교의 실현"에서 표현된 바와 같은 인간의 경계선적 상황에 대한 이론은 제대로 전개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다에 대한 관조에서는 또 하나의 요소가 발견된다. 땅의 고요한 부동(不動)에 대조적인 바다의 다이내믹한 침노와 그 질풍과 파도의 열광이 그것이다. "대중과 정신(Masse und Geist)"이라는 글에서 "역동적 대중"에 대한 이론은 거친 바다의 직접적 영향 아래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바다는 또한 역동적 진리의 바탕이자 심연으로서의 절대적인 것에 대한 교리와 유한한 것에 무한한 것이 뛰어드는 것으로서의 종교의 본질에 대한 교리에 필요한 상상적 요소를 가져다준다. 니이체는 어떠한 사상도 그것이 노천(open air)에서 생각된 것이 아닌 한 참이 아니라고 말했다. 나의 사상 중에서 많은 것들은 노천에서 배태된 것이며 나의 저작의 많은 부분은 숲 사이나 바닷가에서 이루어졌다. 도시의 요소와 시골의 요소 사이를 규칙적으로 갈마드는 것은 항상 내가 나의 삶에 있어서 없을 수 없으며 침범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한 부분으로 있어 왔고 또 지금도 남아 있다.



사회계급들 사이에서


소읍 생활의 특수한 성격은 어린 시절부터 내가 뚜렷이 볼 수 있었던 사회계급들 사이의 경계선을 마련해 주었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동무들을 사귀었는데 나는 나의 부모와 시장, 의사, 약사, 몇몇 상인들 등의 아이들에 의해 대표되는 상류계급에 대해 그들이 가지는 적의를 함께 하였다. 비록 나는 이 몇몇 선택된 부류의 아이들과 라틴어 개인교습을 받고 그리고 나중에는 그들과 함께 가까운 도시의 김나지움에 다녔지만 나의 실제 동무들은 초등학교의 소년들이었다. 그것은 나와 비슷한 사회적 수준을 가진 아이들과 상당한 알력을 빚게 하였고 우리는 우리의 학창시절을 통하여 외톨이들로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특권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매우 일찍부터 훗날 나의 활동에 매우 중요하게 된 사회적 죄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상류계급의 아이가 보다 낮은 계급의 아이들과 일찍부터 친밀한 만남을 갖게 될 때 거기에는 가능한 두 결과만이 있는 듯하다. 그 하나는 사회적 죄의식의 계발이요 다른 하나는 낮은 계급 아이들의 공격적 원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계급증오다. 나는 자주 그 두 유형에 직면해왔다.

그러나 사회문제와 관련된 나의 경계선적 상황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아버지의 교구에는 토지를 가진 오랜 귀족사회의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교회의 후원자들이었기 때문에 나의 부모는 그들과 직업적, 사회적 접촉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장원(莊園)의 집들을 방문하고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놀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이런 가문의 한 후손이자 드문 지적 능력을 가졌던 한 사람은 나의 평생 동안의 친구가 되었다. 이 접경적 상황의 한 결과로 부르주아 계급(나 자신의 계급이기도 한)에 대한 나의 훗날의 반대는 사회주의가 가끔 그렇게 되었듯이 또 하나의 부르주아 계급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는 사회주의 속에 사회주의적 노선과 내적 연관성을 가진 봉건전통의 요소를 합류시키고자 시도했다. 내가 "종교 사회주의의 노선(Grundlinien des religiösen Sozialismus)"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사회주의적 결단"에서 전개한 바 있는 종교사회주의의 특수한 윤곽은 나의 그 같은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내가 독일 사회민주당만큼이나 부르주아적이 되어버린 한 정당에 가담할 수 있었던 것은 고심스러운 결정이었고 단지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나의 젊은 시절의 이 같은 체험을 다룬 글 "힘의 문제 : 철학적 근본확립에 대한 고찰(Das problem der Macht : Versuch einer philosophischen Grundlegung)"은 나의 몇몇 친구들에 의해서까지도 오해되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의 부르주아적 평화주의가 이 특수한 경계선적 상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기서 다른 어느 곳보다 독일에서 그 자체의 특유한 전통을 가지고 별개의 집단을 이루고 있는 공직자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야겠다. 좁은 의미에서 보면 나 또한 학교 직원인 목사의 아들로서, 또 프러시아 대학의 전직 교수로서 이에 속한다. 프러시아 관료주의가 뜻하는 것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앞선 의무 개념의 우선성, 최고의 규범으로 평가되는 법과 질서, 국가권력의 중앙집권화 경향, 군사적 행정적 권위에의 복종, 그리고 "조직적 전체"에 대한 개인의 종속을 고집한다. 독일 철학이 철학적 이론에서나 정치적 실제에 있어서 고도로 개발된 체계를 좋아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이데올로기의 탓이라고 하는 것은 극히 정당한 말이다. 이 프러시아적 이데올로기는 나의 생애와 활동의 여러 군데에서 반영되었는데 예를 들면 "지식체계에 관한 개설(Entwurt einer Systems der Wissenschaften)"에서나 또 내가 전시나 평시나 기꺼이 군사적, 행정적 권위에 복종할 뜻이 있었다는 점에서나 또 결정적인 것으로서 내가 그 정책을 광범위하게 반대하는 정당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데에서 그러했다. 확실히 나는 이 태도의 한계를 의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나의 양심에 무서운 짐을 지웠으므로 결과적으로 개인적인 결단을 가져왔고 또 전통이라는 새롭고 예기치 않았던 것의 출현 앞에서의 망설임이라든가 개인적 선택의 위기를 줄이기 위해 모든 것을 싸잡는(all-embracing) 질서를 열망하는 따위를 파기하게 했다.

내가 명백히 부르주아적인 삶에 대해 느꼈던 뿌리깊은 혐오감은 "보헤미아"라고 불리던 조그마한 사회적 집단에 대한 나의 애착에서 드러났다. 예술가, 배우, 신문인, 작가 등이 매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이 집단은 지적 열정을 순전한 비부르주아적 외관과 결합시켰다. 신학자이자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다시 한 번 경계선 위에 서게 되었다. 이 집단의 성격은 사고와 행동에 있어서 그 어떤 부르주아적 인습도 명백히 없었다는 점, 그리고 지적 급진주의 및 아이러니컬한 자기비판에 대한 놀라운 능력 등으로 특징지어져 있었다. 보헤미안들은 중산계급의 발길이 드문 카페나 아뜨리에나 유원지에서 만났다. 그들은 급진적인 정치적 비판에 기울어져 있었고 그들과 같은 계급의 회원들에게보다는 공산주의 운동가들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국제적인 예술가 운동이나 문예운동을 추구했다. 그들은 회의주의적(懷疑主義的)이었고 종교적으로는 급진적이었으며 또 낭만적이었다. 그들은 반군국주의적(反軍國主義的)이었고 니이체와 표현주의와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봉건질서층이나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의 회원들은 아무도 "보헤미아"회에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언제나 보헤미아회에 가입할 수 있었다. 회원으로 가입하는 대가로 그들은 보헤미안들에게 사회적 경제적 특권을 제공했다. 반대는 선입견과 암암리의 요구를 지니고 지적, 특히 예술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며 안정을 바라고 지식인을 불신하는 하층 중산계급인 소부르주아 계급(petit bourgeoise)에서 나왔다. 내가 한 번도 소부르주아 계급의 삶에 포함되어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그 계급 출신의 많은 사람들처럼 명백한 오만함(만약 반의식적이었다면)으로써 그것을 물리쳤다는 사실은 나의 지적 운명과 인간적 운명을 틀잡는 것이었다. 지적으로 볼 때 소부르주아의 옹졸함을 극복하려는 투쟁은 끊임없이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었는데 그것은 이번에는 나로 하여금 지적이거나 사회적인 안주처를 찾는 데에 어려움을 주었다. 나는 중산계급의 반동적 혁명으로 말미암아 개인적으로 곤경을 겪기도 하였는데 그 반동적 혁명은 지식층을 강타하여 결국 파멸시키고 말았다. 낭만적인 중산계급 이데올로기(나찌즘)의 대표자들에 의해 지식인들이 악의에 찬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지식인들의 반쯤은 정당하게 중산계급을 배척한 데에 따른 반응이었다.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현실과 타협하는 데에 있어서 내가 경험한 어려움은 일찍부터 나를 공상의 세계로 인도했다. 열 네 살부터 열 일곱 살 사이에 나는 바깥 세계보다 더 진실해 보이는 상상의 세계에 곧잘 빠져들곤 했다. 때가 되자 그 낭만적 상상은 철학적 상상으로 변모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철학적 상상은 그 때부터 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에게 범주들을 결합할 능력을 주고 구체적 용어 속에 든 추상적 개념을 파악할 능력을 주고 광범위에 걸친 개념적 가능성들을 시험해 볼 능력을 준 점에서 그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상상적 능력이 상상의 산물을 현실로 착각하거나 체험과 이성적 비판을 소홀히 하거나 대화 가운데에서라기보다 독백 가운데에서 생각하거나 상부상조하는 학문적 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하는 등의 위험을 가지는 한에 있어서는 의심스러운 가치였다. 다행이었든 불행이었든 간에 이 상상적 경향은 다른 몇몇 조건과 함께 내가 통속적 의미의 학자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20세기의 지성인들 가운데에는 "숙련자"라는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의 학자에 대한 일종의 혐오감이 있었다.

상상은 다른 여러 방식들 중에서도 놀이의 즐거움에 있어서 스스로를 나타낸다. 이 즐거움은 나의 전 생애에 걸쳐서 게임에서나 스포츠(나는 그것을 놀이 이상으로 취급한 것은 없다)에서나 오락에서나 그리고 생산적 시간을 가져오면서 그것들을 인간 자유의 최고 형태의 표현으로 만드는 유희적 감정에서 내게 수반되었다. 놀이에 대한 낭만적 이론이나 니이체가 "장엄의 정신"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놀이를 좋아한 것이나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심미적 영역"이나 신화학에 있어서의 상상적 요소 따위는 내게 있어서 늘 매혹적인 것이면서도 위험한 것이었다. 아마 내가 더욱 더 예언자적 종교의 타협을 모르는 엄숙성에로 치닫게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위험을 자각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적 결단"에서 내가 신화학적 의식에 대해 언급한 것은 국가주의적 이교주의가 심각성을 궁극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겨냥한 항의였던 것이 아니라 동시에 내 자신 속의 정복되지 못한 신화적-낭만적 요소를 겨냥한 항의이기도 했다.

예술은 놀이의 최고 형태이자 상상의 순전히 창작적인 영역이다. 비록 나는 창작예술의 분야에서 아무 것도 내놓을 것도 없지만 예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나의 신학적, 철학적 활동에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가정에서 나의 아버지는 복음적 목사직과 어울린 음악적 전통을 유지했다. 그는 몸소 작곡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 개신교도들처럼 그는 건축이나 미술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나는 예술적 체질이 아니었는데다가 나중에서야 시각예술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나의 예술 동경은 문학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것은 김나지움 교육의 인본주의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슈레겔이 고전독어로 번역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특히 내게는 중요했다. 나는 거의 위험할 정도로 나와 햄릿같은 등장인물들을 동일시했다. 실존주의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오늘날 내가 본능적 공감을 갖는 것은 이 위대한 문학작품에 대한 실존적 이해에 얼마간 맥락이 닿아 있는 것이다. 괴테나 또스또예프스키도 내게 이와 맞먹을 영향을 갖지는 못했다. 괴테의 작품은 키에르케고르적 의미의 경계선적 상황을 거의 보여주지 못하는 듯했다. 비록 어른이 되어서 그 판단을 바꾸기는 하였지만 당시에 그것은 충분히 실존적인 것 같지 않았다. 한동안 계속되었던 햄릿에 대한 나의 매혹이 지나간 후에도 나는 다른 시적 공상의 산물과 나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능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나의 생애의 어떤 수주일이나 수개월을 뒤덮고 있던 특수한 무드, 말하자면 그 빛깔은 어느 한 문학작품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곤 했다. 나중에 이것은 특별히 소설에서 입증되었는데 소설은 내가 자주 읽는 것은 아니었지만 열정적으로 읽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순수한 예술적 관조에 대한 갈망을 시원하게 채워주기에는 너무 많은 철학을 담고 있었다. 미술을 발견한 것은 내게 있어서는 결정적인 체험이었다. 그것은 일차대전 중에 전쟁의 공포와 추악과 파괴성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군대 책방에서 구입할 수 있었던 보잘것없는 복사판에서마저도 갖게 되는 나의 기쁨은 미술사에 대한 체계적 연구에로까지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 연구로부터 예술 체험이 발생하였다. 나는 전시의 마지막 휴가기간 동안 베를린에서 있었던 보티첼리의 그림과의 첫 만남 - 그것은 거의 계시였다 - 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체험에 부수된 철학적, 신학적, 성찰로부터 나는 종교와 문화에 대한 철학의 몇몇 기본 범주들, 곧 형식과 내용을 계발하였다. 예술작품의 내용이 어떻게 형식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또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창조적 열광에 눈뜨게 해준 것은 표현주의의 양식이었는데 그것은 금세기 첫 10년 동안 독일에서 출현한 것으로서 전쟁과 몰이해한 하층 중산계급 취미와의 쓰라린 투쟁을 치르고 나서야 겨우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나의 계시이론의 골자를 이루고 있는 "깨고 나감(breakthrough)"이라는 개념은 이 성찰을 활용한 한 예이다.

후에 표현주의가 사라지고 새로운 사실주의가 대두했을 때 나는 그 새 양식의 연구로부터 "믿음 있는 사실주의(belief-ful realism)"라는 개념을 전개했다. "믿음 있는 사실주의"라는 생각은 나의 책 "종교적 상황"의 중심개념인데 그 책은 그런 이유로 인해 한 예술가 친구에게 헌정되고 있다. 서구 미술에 있어서 개인과 집단이 보여준 갖가지에 대한 나의 감명은 "대중과 인간성(Masse und Persönlichkeit)"라는 강의에 영감과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 내가 고대교회의 해결책을 점차 좋아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의 초기 기독교 예술이 준 깊은 감명에 의해서 촉진된 것이었다. 고대 로마 바실리카의 모자이크 작품은 교회사를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알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조형예술의 양식과 소재(Stil und Stoff in der bildenden Kunst)"라는 항목에서, 또 1930년에 있었던 베를린 종교미술 전시회의 개막연설에서, "대상과 방법에 대한 학문의 체계(Das System der Wissenschaften nach Gegenständen und Methoden)"의 관련항목에서, 나의 종교철학(Religionsphilosophie)"에서, 그리고 "종교적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현대 회화에 대한 이러한 생동적 체험은 또한 호프만슈탈(Hoffmannsthal), 게오르게(George), 릴케(Rilke), 그리고 베르펠(Werfel)에 의해 대표되는 현대 독일문학을 이해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나는 릴케의 후기 시편들에 의해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심원한 정신분석적 사실주의라든가 풍부한 신비성 그리고 형이상학적 내용으로 충만한 시의 형식 등은 이 시편들이 내가 종교철학의 개념들을 통하여 추상적으로만 다룰 수 있었던 성찰에 이르는 구체적 수단이 되게 하였다. 내 자신에게 있어서나 내게 시를 소개해 준 나의 아내에게 있어서나 이 시들은 거듭거듭 읽는 한 권의 기도서가 되었다.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나는 내 자신이 실무적인 일보다는 지적인 일에 헌신해 온 생애를 살아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다른 어느 누구도 그 같이 생각할 것이다. 내가 무한한 것에 대한 생각과 처음 씨름한 것은 8살쯤이었다. 학교에서나 전(前)견신례 학습에서나 나는 그리스도교 교의학에 심취했다. 나는 철학에 관한 인기 있는 책들에 몰두했다. 내가 인본주의 전통에서 교육받았다는 사실과 그리스어 및 그리스 문학에 열중했던 것은 이론적인 것에 대한 이 같은 기질을 강화해 주었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나타낸 바와 같이 순수한 명상만이 순수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논점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했다. 전통적인 종교의 진실과 내가 내적 투쟁을 겪었던 것은 또한 나로 하여금 관조적 영역에 머무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삶에 있어서 명상은 존재에 대한 철학적 암시 이상의 무엇을 뜻한다. 종교적 진실에서 인간의 실존 그 자체는 백척간두 위에 있다. 그 물음은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이다. 종교적 진실은 실존적 진실로서 거기서는 이미 그것이 실천과 별개의 것일 수가 없다. 종교적 진실은 요한복음이 말하듯이 행동되어진다(acted).

그러나 명상에 대한 편중적 몰두는 내가 문학적 공상 속으로 달아나던 것과 마찬가지의 현실 도피에 근거해 있다는 것이 곧 밝혀지게 되었다. 내가 이 위험을 깨닫고 실천적인 일과 직면하자마자 나는 아주 열심히 그 일에 뛰어들었는데 그것은 나의 지적 추구에 있어서는 일면으로는 유익했고 일면으로는 유해했다. 나날의 업무에 이 같이 뛰어든 첫 번째 사례는 빈골프(Wingolf)라고 불리던 한 학생단체에 직접 참여한 것이었다. 그 단체가 가진 그리스도교적 노선과 현대의 자유주의적 이상 및 실천 사이에서 빚어지는 긴장은 그 단체의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기꺼이 불타오르던 그 개인적 긴장과 마찬가지로 실제적 정책에 관한 많은 문제를 야기했는데 그것은 특히 내가 그 단체의 회장으로 있던 동안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스도교적 공동사회의 원리에 대한 문제는 그 단체에서 너무나도 철저히 논의되어서 행동적 투쟁을 벌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 크게 도움을 받았다. 그 기간 동안에 나는 종파적 신조와 같이 객관적으로 표방되는 성명의 가치를 이해하게 되었다. 만약 한 공동체가 주관적인 신념이나 회의를 넘어선 의미의 신앙고백적 기반을 가지면서 그것을 광범위하게 인정하게 된다면 그 공동체는 회의와 비판과 불확실에의 경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뭉치게 될 것이다.

나의 대학 친구들은 2년간의 교구 과정과 4년간의 서부전선 야전 군목 과정을 밟았다. 전후에 나는 교회 행정사무를 잠시 동안 맡아보았다. 실무적인 일을 하던 이 몇 년 동안 나의 이론적 연구는 비록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 문제에 뛰어든 이 기간은 이론적 삶을 향한 나의 근본적 몰두를 뒤흔들어 놓지는 않았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긴장은 혁명의 돌발로 더욱 고양되었다. 처음 얼마동안 나는 정치적 상황에 매우 민감하게 되었다. 1914년 이전의 모든 독일 지성인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정치에는 무관심한 편이었다. 사회적 죄악에 대한 우리들의 의식은 정치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다. 독일 제국의 몰락과 1차 대전 마지막 해의 혁명을 맞아서야 나는 그 전쟁의 정치적 배후가 되는 문제들, 곧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상관관계, 부르주아 사회의 위기, 계급간 갈등 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몰고온 어마어마한 힘은 신의 관념을 뒤흔들고 그 관념에 악마적 색칠까지 할만큼 위협적이었는데 그것은 전쟁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인간사회를 다시 뜯어고치고자 하는 소망을 통해 그 출구를 찾게 되었다. 종교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요청이 메아리치자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또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우리는 "종교와 사회주의"에 관한 이론적 문제만을 다루었다. 내가 속해 있던 써클은 메니케(Mennike), 하이만(Heimann), 뢰브(Löw) 및 명백히 이론과 관련된 교수들의 집단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적은 정치적이었으며 우리는 이론적 입장과 때로는 마찰을 일으키는 실제적 정치의 문제와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었다. 이 마찰은 종교사회주의가 교회나 정당이나 (또 우리가 교수들이라는 점에서) 대학에 대해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는 가운데에 반영되었다.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종교사회주의자들의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그들의 목적은 교회정책의 변화와 이론적 토론을 통하여 교회와 사회민주당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론적 바탕이 적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단체로부터 떨어져 있었으며 (변명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리하여 교회정책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 때에 이론과 실제 사이에 있었던 긴장은 이론 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비록 이로운 것은 아니었을지언정 완전히 해결되었다.

사회민주당에 대한 나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론적 바탕에 대한 노력에 이바지함으로써 그 당에 영향을 주기 위해 입당하였다. 이런 목적 아래에서 나는 "사회주의의 새 장(Neue Blätter für den Sozialismus)"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기 위해 종교사회주의 단체의 친구들과 규합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독일 사회주의의 굳어버린 신학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종교적 철학적 관점에서 그것을 다시 짜만들고자 희망했다. 나 자신은 실제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았지만 동료들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잡지는 당시의 정치상황의 문제들에 휘말리고 말았다. 물론 나는 특별한 임무에 대해서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이론적 작업은 정치의 목적에 이바지하고 정치운동의 개념적 표현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에 또 한 번 손상을 받아가며 그들의 편을 들지는 않았다. 한편 실제 정치와의 그 비교적 드문 접촉마저도 나의 전문작업이 그토록 절실하게 요청하는 정신집중을 방해했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긴장은 전후 독일 대학을 다시 조직하는 데 대한 논의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19세기 때에는 고전주의의 낡은 인본주의적 이상이 학문의 전문화와 직업적 훈련에 대한 점증하는 질적 양적 요구에 의해 침식되었다. 학생들이 엄청나게 밀려들었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두루 전능한(well-rounded)" 인간이라는 고전적 이상을 치켜드는 척조차도 할 수 없었다. 궁색한 타협안들이 이상과 현실의 엄연한 괴리를 은폐시키고자 고안되었다. 1931년 11월 22일자 프랑크푸르트 신문에 실린 나의 글에서 나는 이원적 교육계획안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빗발 같은 찬반양론을 일으켰다. 나는 한편으로는 전문학교의 설립을 주장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에 대한 옛 개념을 대변하는 전문적 훈련에 메이지 않는 교양담당 교수 제도를 주장했다. 양자는 상호 관련되어 있었지만 목적과 방법에 있어서는 달랐다. 교양과목 교수는 로고서(Logos)로서 인간 실존의 문제를 조명하는 임무를 띤 철학정신을 갖추도록 되어 있었다.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충성을 돌아보지 않는 철저한 질문도 있어야 했다. 동시에 교수의 교육철학은 당시 생활의 정신적, 사회적 문제들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어떠한 위대한 창조적 철학도 이 같은 요청을 기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19세기에 있어서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철학이 학교와 "철학과 교수"의 도구로 나날이 전락해 가고 있었을 때에 그 나약성의 징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금세기가 정치적 수단으로 근본적인 질문을 억누르고 정치적 세계관을 강요하려고 애쓸 때마다 그것은 철학을 적지 아니 파괴한다. 오늘날의 "정치적 대학"은 실제를 위해 이론을 희생시킨다. 이것이 그 반대 유형과 마찬가지로 대학의 두 유형 모두에게 숙명이 되어 있다. 현금에 와서 이론과 실제 사이의 경계선은 미래 대학의 운명과 함께 문명세계의 인본주의 문화의 운명이 결정될 전쟁터가 되었다.



타율과 자율 사이에서


나는 심각한 투쟁 후에야 지적, 도덕적 자율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나의 아버지의 권위는 개성적이고도 지적이었으며 또 교회에 있어서의 그의 지위 때문에 나는 그것을 구원의 종교적 권위와 동일시하였는데 그 권위는 자율적 사고로써 행하는 모든 시도를 종교적 불손행위로 만들고 권위에 대한 비판을 죄의식과 연결시켰다. 새로운 지식은 단지 금기를 깨뜨림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으며 모든 자율적 사고는 죄의 인식을 동반하게 된다는 인류의 오랜 경험은 나 자신의 생애의 근본경험이기도 하다. 그 결과 모든 신학적, 윤리적, 정치적 비판은 내적인 장애에 부딪쳤는데 그것은 단지 오랜 투쟁이 있고서야 극복되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그같은 내성의 중요성과 심각성과 무게를 높이 사게 해주었다. 일반적인 지성들에게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공동의 터전이 되어 있던 결론에 내가 뒤늦게서야 도달했을 때에도 그것은 여전히 내게는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의미로 가득 찬 듯이 보였다. 자유 일변도의 지성은 내게는 의심스러웠다. 오로지 자율적이기만 한 사고의 창조적 힘에 대해 나는 별로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런 심정 하에서 나는 특히 지난날과 오늘날의 자율적 사고의 비극적 파탄을 다루는 일련의 대학 강의를 했는데 예를 들면 그리스 철학의 전개로써 이성적 자율의 출현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것이 회의주의와 개연론으로 기울어지면서 고대 후기의 새로운 복고주의에로 되돌아가는 과정 등이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자율적 이성이 저 홀로는 참다운 내용을 가진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역사의 결론적 자명성을 구성케 하였다. 중세철학 강의에서, 또 프로테스탄티즘의 지성적 역사에 관한 강의에서, 그리고 나의 책 "종교적 상황"에서 나는 서구사상의 역사에 이 생각을 적용했으며 그것으로부터 신율(神律:theonomy)의 필요성을 이끌어 내었는데 신율이란 종교적 근본으로 채워진 자율이다.

단순한 자율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타율에의 길을 용이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신적이거나 세속적인 권위에의 복종, 즉 타율은 정확히 말해서 내가 배척해온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그것에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유럽 사태의 현존하는 경향이 낡은 혹은 새로운 타율에로 되돌아가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비록 내가 그 경향의 동기를 깊이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나는 정열적으로 저항할 수 있을 뿐이다. 참담한 투쟁 속에서 쟁취된 자율은 당연지사로 항상 받아들여져 온 자율처럼 그리 쉽게 굴복되지 않는다. 사람이 한 번 가장 거룩한 권위들의 금기와 관계를 끊으면 그는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또 다른 타율에 굴종할 수는 없게 된다. 우리들의 시대에 있어서 그같은 굴종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일어나기 쉬워졌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전통적 권위를 둘러싸고 있는 공허와 회의주의의 당연한 귀결이다. 싸움을 통해서 얻어지지 않은 자유, 희생을 치르지 않은 자유는 쉽게 버려지고 만다. 그것은 우리가 유럽 청년들 사이에서 새로운 속박에의 갈망 - 사회적 요인들은 제쳐놓고 - 을 이해할 수 있기에 그러하다.

나는 가장 두드러지게 타율적인 종교체계인 로마 카톨릭에 오랫동안 반대해 왔다. 이 저항은 프로테스탄트적이면서도 자율적이었다. 이 저항은 신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체계 안에서의 교리적 가치나 예전적(禮典的) 형식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리적 권위에 대한 굴종이 표면적일 뿐일 때에도 그 교리적 권위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카톨릭의 타율적 성격을 겨냥한 것이었다. 꼭 한 번 나는 어떤 심각성을 가지고 카톨릭이 된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이 나치즘의 취지에로 동조하여 일어나기 전인 1933년에 나는 로마 교회냐 프로테스탄트로 위장한 국가주의적 세속주의냐 하는 두 가지의 가능성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 타율의 사이에서 결단을 내림에 있어서 나는 차라리 카톨릭을 택해야만 했었다. 나는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이 그 기독교적 연원을 되돌아보았기 때문에 그같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자율과 타율 사이의 투쟁은 프로테스탄티즘의 또 다른 지평에서 다시 등장한다. 그것은 정확히 자율에로의 나의 길을 발견했던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 - 비록 온화한 19세기적 형태였지만 - 에 대한 나의 저항을 통해서였다. 이런 이유로 나의 근본적인 신학적 문제가 신이라는 관념 속에 내포된 절대적인 것의 관계를 인간이 만든 종교의 상대성에 적용하는 가운데에서 발생되었다. 역사적 종교가 신적인 것의 무조건적 정당성을 표방할 때, 그리고 한 권의 책이나 인물, 공동체, 제도, 원칙 등이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면서 다른 모든 현실로 하여금 그에 복종할 것을 요구할 때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와 소위 변증법적 신학이라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추세를 포함한 종교적 교조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주장들도 신적인 것의 무조건적 주장의 바깥에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이 유한, 곧 역사적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일 수 있다는 것은 모든 타율과 모든 악마주의의 뿌리이다. 악마적인 것은 영원한 것의 모습을 한 유한하고 제한된 그 무엇이다. 그것의 악마적 성격은 또 다른 유한한 실재가 그것에 반대하면서 마찬가지로 무한함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인간의 의식이 그 양자 사이에서 찢기어질 때 분명히 드러난다.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타율에 대한 나의 부정적 태도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내가 악마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종교재판장(또스또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소묘된 것 같은)을 상대로 싸우는 식이라고 했다. 나는 독일 고백교회의 말기의 전개 양상이야말로 그 같은 싸움이 아직도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종교재판장은 바르트파의 초자연주의라는 뻣뻣하고도 몸에 꼭 끼는 갑옷을 입고 고백교회로 들어가고 있다. 바르트파의 극도로 편협한 입장은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을 구제하지만 동시에 내가 프로테스탄트 원리의 부인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타율, 곧 반자율적이고 반인본주의적 태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왜냐하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자기자신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일체의 것에 대한 저항이 안에 살아 있는 한 카톨릭주의의 약화된 변형 이상의 그 무엇으로 변함없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프로테스탄트의 저항은 이성적 비판이 아니라 예언자적 심판이다. 그것은 자율이 아니라 신율이며 왕왕 그렇게 되듯이 그것이 합리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형태를 띄고 나타날 때도 그러하다. 자율과 타율 사이의 모순은 신율적이고 예언자적인 발언 속에서 극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저항과 예언자적 비판이 프로테스탄티즘의 필연적인 요소라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경배와 설교 및 가르침은 전달 가능한 실체적인 것의 표명을 전제로 한다. 제도상의 교회는 물론 예언자적 발언까지도 실제화될 수 있는 성육(成肉)된 생명인 예전적 기반을 필요로 한다. 생명은 경계선상에만 서 있을 수는 없으며 그것은 또한 반드시 그 자신의 광막함으로부터 나와서 스스로의 가장자리에 살아야 한다. 비판과 저항의 프로테스탄트적 원칙은 어쩔 수 없이 다른 것을 바루는 것이며 그 자체가 자기확립적인 것은 아니다. 다른 것과의 이 같은 공동(共動)에 있어서, 나는 "비판과 자기확립으로서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 als Kritik und Gestaltung)"이라는 책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자기실현 문제를 다루는 한 글을 썼다. 나의 첫 번째 큼직한 신학적 저작의 제목인 "종교의 자기실현"은 바로 이 문제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예전적인 것과 예언자적인 것, 및 자기확립적인 것과 타자시정적인 것과의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아 있어야만 한다. 만약 이 요소들이 서로 분리된다면 전자는 타율적이 되고 후자는 공허해지고 말 것이다. 상징으로서 그리고 실제로서의 그들 양자의 통합은 내가 보기에 신약성서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상에 잘 부각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거기에는 가장 높은 인간적 종교의 가능성이 성취되면서 동시에 희생되어 있다.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의 마지막 몇 해에 걸쳐 일어난 사태와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신세속주의의 출현은 종교적 자율과 타율의 문제에 새로운 중대성을 가져왔다. 오늘날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대한 궁극적 판단기준의 문제는 로마 세속주의와 초기 기독교 사이의 싸움 이래 전에 없이 날카로워져 있다. 인간의 모든 창조적 활동의 판단기준으로서의 십자가를 나찌가 공격한 것은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는 바를 새롭게 해 주었다. 타율과 자율에 대한 물음은 인간실존의 궁극적 판단기준에 대한 물음이 되었다. 이 싸움 속에서, 독일 기독교계와 독일 자체 그리고 전 기독교 문화권 국가들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다.

모든 정치체제는 권위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무력수단을 소유하는 식으로만이 아니라 인민이 묵시적이거나 명시적으로 동의하는 식으로도 이루어진다. 그 같은 동의는 실권을 지닌 집단이 모두에게 강력하고 요긴한 이념을 내세울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정치의 영역에는 "대망과 임무수행으로서의 국가(Der Staat als Erwartung und Aufgabe)"라는 글에서 내가 다음과 같이 특징지었던 권위와 자율간의 상관성이라는 것이 있다. "모든 정치체제는 힘을 전제하며 결과적으로 힘있는 집단을 전제로 한다. 한 힘의 집단은 다른 관심체에 대립하는 또 하나의 관심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시정을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권위의 남용에 대해서 시정을 동참시키는 체제인 한 정당하고도 필요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권력집단의 출현을 막게 된다며 민주주의는 유지될 수 없다. 이런 예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야기되었는데 바이마르 공화국의 특수한 민주주의적 형태는 권력을 얻으려는 어떤 집단에 대해서도 애초부터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다른 한편 권력집단에 의한 권위의 남용을 통박하는 시정적 입장은 통솔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는 전체 국가의 노예화와 지배계층의 붕괴이다." 1차대전이 일어나기 수년 전 내가 처음으로 정치적 결정을 내린 이래 나는 정치적 좌파의 입장에 서 왔으며 매우 강한 보수적 전통에 맞서오기까지 했다. 이는 내가 그 이전에 종교적 타율에 대해 가졌던 저항이 나로 하여금 자유주의 신학의 편을 들게 했던 것처럼 정치적 타율에 대한 나의 저항이었다.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잇따른 나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서는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한 흔해빠진 폄하에 동조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나는 자율의 위대하고 참으로 인간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원칙을 무시한 점에 있어서보다는 차라리 "자유주의적(liberalistic)"이 된 점에 있어서 비난되는 편이 나을듯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열된 대중들을 다시 통일시키는 것이 우리들의 가장 어려운 정치적 문제이었던 시기에 걸쳐서 정치권력의 문제는 여전히 절실한 채로 남아 있었다. 나는 이 문제를 "전체주의 국가와 교회의 주장"이라는 글에서 독일 역사에 있어서의 최근의 사태와 관련하여 다루었다. 거기에서 나는 대중이 온갖 의미로운 존립을 박탈당할 때 그들이 권위주의적으로 빠져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쟁 직후에 나온 나의 책 "대중과 정신(Masse und Geist)"에는 이 문제에 대한 중요한 고찰이 있다. 그 중 "대중과 인격"이라는 장에서 나는 오직 전문화된 비의적(秘義的) 집단만이 자율적 입장을 위해 노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의적 자율에로의 후퇴는 나에게는 현재 속에서 움직이는 역사의 힘에 의해서 요청되는 듯이 보였는데 그것은 고대 후기의 경우와 얼추 비견할만한 것이다. 이 같은 후퇴가 진리와 정의를 너무 엄청나게 희생시키지 않고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미래 세대의 전략적 문제이다. 나는 원칙에 있어서 그리고 사실에 있어서 자율과 타율의 경계선 위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다가오는 역사적 시간이 타율의 세력 아래에 떨어지고 말지라도 이 경계선상에 머물러 있고자 한다.



신학과 철학 사이에서


내가 나의 생애와 사상을 설명하려 하는 원천인 경계선적 상황은 이 문제에서 가장 분명히 보여진다. 중등교육의 막바지 때부터 나는 철학자가 되고 싶었다. 나는 여가만 있으면 우연한 기회로 입수하는 철학책들을 읽곤 했다. 나는 시골 전도사의 먼지 덮인 책꽂이 구석에서 슈벵글러(Schwengler)의 "철학사(Geschichte der Philosophie)"를 발견했으며 베를린 길거리의 수레에 실은 책더미 꼭데기에서 피히테의 "학문론(Wissenschaftslehre)"을 발견했다. 또 소년다운 감격 상태 속에서 책방으로부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50센트라는 엄청난 값으로 사기도 했다. 이런 저서들, 특히 피히테의 그 책은 독일철학의 가장 어려운 면모들을 내게 소개해 주었다. 학생들에 대한 목사자격 시험을 주관하는 위원회의 철학담당 시험관이었던 나의 아버지와의 토론은 나로 하여금 대학생활의 초반부터 나이 많은 학생들이며 젊은 강사들과 더불어 관념론과 실제론, 자유와 결정론, 신과 세계 등에 관해 토론할 능력을 갖추어 주었다. 할레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쮜리히에서 철학교수로 있었던 프리츠 메디어스(Fritz Medius)가 나의 철학 선생이었다. 피히테에 관한 그의 저술은 세기가 바뀔 무렵에 있었던 피히테 철학의 재발견을 촉발시켰는데 그것은 결국 독일 관념론의 전반적인 부흥을 일으켰다. 한켠으로는 싸구려 판매 사태로, 다른 한켠으로는 그의 저작에 대한 속마음의 끌림으로 나는 쉘링의 영향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여러 번 그의 선집들을 읽어치우면서 결국 그의 저작을 나의 철학 박사 및 신학사 학위논문의 주제로 삼기로 했다. 신학사 논문은 "쉘링의 철학적 전개에 있어서 신비와 죄에 대한 의식"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 동안에 나는 또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공부했으며 그렇게 공부한 끝에 구 프러시아 연합교회의 여러 교구에서 일하는 조목사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신학선생 두 분은 마르틴 캘러(Martin Kähler)와 빌헬름 뤼트게어트(Wilhelm Lütgert)였는데 두 분 다 할레에 계셨다. 캘러 선생은 지적 능력과 도덕적, 종교적 영향력이 압도적인 사람이었다. 선생으로서도, 문필가로서도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여러 면에서 그는 19세기 중재신학(theology of mediation)의 가장 심오하고 현대적인 대변자였다. 그는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의 반대자였고 옳다함(義認:justification)에 대한 신학적 교리의 반대자였는가 하면 스스로의 이지적 원천이었기도 한 관념론과 인본주의의 비판자였다.

옳다함에 대한 바울-루터적 생각의 일체함용적 성격을 내가 살필 수 있었던 것은 특히 그의 덕분이다. 옳다함의 교리는 한편으로는 신 앞에서의 인간의 모든 권리를 부인하고 신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모든 것을 부인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인간 실존의 소외화와 그 죄많음, 그리고 신 앞에서는 죄지은 자라도 옳게 된다는 역설적 심판을 통해 절망이 극복됨을 선언한다. 나의 그리스도론과 교리론은 세계에 대한 신의 심판이 구체화되고 명백해지는 역사 속의 사건인 십자가의 사건을 설명하는 데서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내게 있어서 나의 신학과 칼 바르트의 신학을 연결짓는 것이라든가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덱거에 의해 이루어진 인간 실존의 분석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역사적 예수와 바꿔치기하거나 옳다함의 역설을 도덕적 범주들로 해소시키는 따위의 자유주의적 교리와 나의 생각과를 화해시키기는 어려웠고 또 불가능하기까지 했다.

자유주의적 교리에 대한 나의 부정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유주의 운동의 역사적 성과를 깊이 인식하고 있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 할레의 신학자들과 곧 헤어졌으며 그리고 지난 200년 사이의 학문적 업적을 돌아보지 않음으로써 종교개혁의 교리원칙을 되살려 보고자 하는 바르트파의 신초자연주의(neo-supranaturalism)와 나 자신이 얼마나 일치점이 적은 지를 알게 되었다. 벨하우센(Wellhausen)과 군켈(Gunkel)에 의해 전개된 이른바 종교사적(religionsgeschichtliche) 방법이라고 하는 구약성서의 역사적 해석은 나의 흥미를 끌었으며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는 물론 인류를 위한 구약성서의 근본적 중요성을 이해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구약성서에 대한 열정은 나를 떠나지 않았으며 나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그것의 관계를 통하여 그것은 나의 생애와 사상을 결정적으로 틀잡아 주었다.

신약성서에 대한 나의 역사적 성찰은 근본적으로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의 문제" 그리고 불트만의 "공관복음적 전통"의 덕택이다. 내가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의 저작을 읽었을 때 나는 드디어 중재신학과 그 변명학에 대한 관심의 마지막 찌꺼기를 떨쳐버렸으며 교회역사와 역사적 비판주의의 문제에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 같은 태도변화의 남겨진 증거는 1911년에 내가 신학하는 동료들의 모임에 내었던 일련의 제안이다. 나는 역사적 예수가 실존하지 않았다는 것이 있음직한 얘기라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원칙이 이해될 수 있는가하고 물었으며 나의 그 같은 물음에 스스로 답하고자 했다. 지금까지도 나는 내가 그 당시에 마주쳤고 지금은 에밀 부룬너(Emil Brunner)가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타협에로 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그같은 물음을 강력하게 일으키는 쪽을 주장하는 바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바탕은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적 모습이지 역사적 예수는 아니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의 기준은 교회의 믿음과 인간의 체험에 근거한 것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이지 역사적 탐구를 둘러맞추고 교묘히 구성한 것에 근거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아니다. 내가 이 같은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나를 바르트주의자라고 부르는가 하면 독일에서는 급진적 신학자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바르트주의자의 역설, 곧 옳다함(義認)의 비의에 동의하는 것은 바르트주의자의 초자연주의에 동의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며 또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이바지에 동의하는 것은 자유주의적 교리에 동의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나 전문가로서나 내게 가장 중요했던 옳다함의 관념해석을 전개함으로써 옳다함의 교리와 급진적 역사적 비판주의와를 화해시키고자 했다. 나는 옳다함의 교리를 인간사고의 영역에 적용했다. 인간의 행위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고까지도 신적인 "아니다(No)" 가운데에 있다. 어느 누구도 사랑을 가지고 있노라고 자랑할 수 없듯이, 믿는 자와 교회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참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할 수 없다. 정통은 지적인 바리새주의다. 의심하는 이의 옳다함은 죄지은 이의 옳다함과 서로 통한다. 계시는 실로 죄의 용서만큼이나 역설적인 것이다. 그 어느 것도 가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이 같은 생각을 "옳다함과 의심" 및 "계시의 이념"이란 글에서 전개했다.

이 같은 기초적 신학개념들을 나의 철학적 전개에로 연결시키는 데에 도움을 준 것은 쉘링의 저작이었으며 특히 그의 후기사상이었다.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대한 쉘링의 철학적 해석은 신학과 철학의 통일에로 이르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가 헤겔의 인본주의적 본질의 철학에 반대해서 그리스도교적 실존의 철학을 전개한 것이라든가 구세사(救世史)로서 역사를 해석한 것 등은 똑같은 방향에서 움직였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날까지도 나는 다른 어떤 독일 관념론자에게서보다도 쉘링에게서 신율적 철학을 더 많이 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쉘링마저도 신학과 철학의 통일을 이룩할 수는 없었다. 일차대전은 일반적으로 관념론적 철학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쉘링의 철학은 마찬가지로 이 참극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 그가 보았다가 곧 덮어버렸던 갈라진 틈이 다시 새롭게 스스로를 나타내었다. 4년간의 전쟁의 경험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의 시대에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심연을 드러내어 주었다. 만약 신학과 철학의 재결합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들의 삶의 심연에 대한 이 같은 체험을 참답게 다루는 그 어떤 종합명제(synthesis) 속에서만 이루어질 것이다. 나의 종교철학은 이 요구를 마주 대하고자 시도하였다. 나의 종교철학은 의식적으로 신학과 철학 사이의 경계선 위에 머물었으며 그 하나를 다른 하나 가운데로 잃어버리지 않고자 애를 썼다. 나의 종교철학은 심연에 대한 체험을 철학개념들로 나타내고자 하며 철학의 한계로서의 옳다함(義認)의 이념 속에서 나타내고자 한다. 베르린의 칸트학회에서 나는 "종교철학에 있어서의 종교개념의 제거"라는 강의를 행했었는데 그 것은 제목에서도 뚜렷하듯이 이 같은 역설적 시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철학은 종교적 실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철학적 개념들에 의해서도 형성되어 있다. 나 자신의 철학적 입장은 신칸트주의, 가치철학, 현상학 등과의 비판적 대화 속에서 발전되었다. 나는 그들이 일반적으로 실증주의를 배척한 것을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특히 종교철학의 영역 안에서 실증주의가 꾸민 심리학적 가장에 있어서였다. 심리학주의를 가장 거세게 배척한 훗셀의 "논리학 연구(Logische Untersuchungen)"는 내가 칸트와 훗셀에게서 배운 바를 확신시켜 주었다. 그러나 나는 세 가지 입장의 그 어느 편에도 붙을 수 없었다. 신칸트학파는 그 범논리주의적(panlogistical) 경향 때문에 심연과 역설의 체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가치철학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그 까닭은 그들도 역시 신칸트학파적이었고 또 그들이 종교를 가치의 영역에서 이해하려 한 것은 심연의 체험 가운데에 깃들어 있는 가치초월성과는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현상학은 역동성이란 요소를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대부분의 주창자들의 생애에서 볼 수 있듯이 카톨릭적 보수주의의 경향을 추구하고 있다.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읽기 시작한 니이체는 나에게 충격적인 감명을 안겨주었다. 니이체적 생동주의는 신칸트주의나 가치철학이나 현상학보다는 훨씬 선명하게 심연의 체험을 보여준다. 전쟁 동안의 죽음과 배고픔에 대한 반동으로서 전후에 그토록 지배적이었던 실존에 대한 열렬한 확신은 니이체적인 삶의 확신을 더 없이 매력적이게 하였다. 적어도 그것이 어느 만큼은 역사적으로 쉘링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탓으로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방향에서 유대적이고 카톨릭적인 주제들 대신에 세속적인 요소들과 협조하면서 나의 철학을 전개해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1918년의 독일 혁명에 대한 경험은 나의 관심을 결정적으로 사회학적 바탕을 지니면서 정치적 맥락을 지닌 역사철학에로 되돌려 놓고 말았다. 나의 트뢸취 연구는 이 같은 방향전환에의 길을 열어주었다. 나는 그가 베르린에서 행한 첫 번째 역사철학 강의에서 헤겔이 죽은 뒤 이 같은 주제를 철학적으로 다루는 것은 그의 강의가 처음이라고 주장하던 말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우리는 그 가운데에 포함된 문제들에 대해 대체로 뜻을 같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관념론적 입장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트뢸취는 그의 관념론을 가지고서는 그가 이른바 역사주의라고 부르면서 싸웠던 그 역사주의를 넘어설 수 없었다. 역사주의는 오직 근본적인 역사적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 세대에 의해서만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를 정정당당하게 맞이해야 한다는 필연성 - 그리스도교에 바탕하고 있으면서 또 그것에 의해 제한되어 있는 요구 - 의 빛 아래에서 나는 종교적 사회주의의 철학도 될 수 있는 역사철학을 전개할 것을 모색하였다.

신학과 철학의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그 양자 사이의 논리적 관계에 대한 뚜렷한 개념을 반드시 개발해야만 한다. 나는 나의 책 "학문의 체계(Das System der Wissenschaften)"에서 그 같은 것을 시도했다. 나의 궁극적인 관심에는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 있었다. 신학은 어떻게 하면 지식(Wissenschaft)이란 의미에서 학문(science)이 될 수 있는가? 신학의 여러 강령(discipline)들은 어떻게 다른 학문과 이어져 있는가? 무엇이 신학적 방법에 있어서의 유별난 점인가?

나는 모든 방법론적 강령들을 생각과 존재와 문화에 대한 학문으로서 구획지음으로써 그 물음에 대답했으며 모든 학문들의 체제의 바탕은 의미의 철학(Sinnphilosophie)이라는 점을 견지함으로써 대답했다. 또 나는 형이상학이란 이성적 상징을 수단으로 하여 무조건적인 그 무엇을 표현하려하는 것이라고 규정지음으로써 그에 대답했고 신학을 신율적 형이상학이라고 규정지음으로써 그에 대답했다. 이런 방법으로 나는 인간의 일체의 앎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신학의 자리를 얻어내고자 했다. 이 같은 분석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앎의 신율적 성격 자체가 깨달아져야 한다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상이라는 것이 의미의 터전이자 심연인 절대적인 그 무엇(the Absolute)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신학은 모든 지식에 있어서 숨은 전제가 되어 있는 것을 그 자신의 드러난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신학과 철학, 종교와 지식은 서로가 서로를 싸안고 있다. 경계선적 입장이라는 지평에서 이것이야말로 그들 사이의 참다운 관계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실존철학이 독일에 소개되었을 때 나는 신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를 새로이 이해하게 되었다. 마르부르크에서 있었던 하이덱거의 강의라든가 "존재와 시간"의 출판, 그리고 그의 칸트해석까지도 이런 연관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이었다. 실존철학의 지지자들에게나 반대자들에게나 하이덱거의 저작은 훗셀의 "논리학연구(Logische Untersuchungen)"가 나온 이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내가 실존철학을 받아들인 데에는 세 가지 요인이 바탕이 되어 있다. 그 첫째 요인은 헤겔의 본질의 철학에 대한 반응으로서 실존의 철학을 초잡은 쉘링의 마지막 시기에 대해 내가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요인은 실존철학의 사실상의 창시자인 키에르케고르를 제한된 대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마지막 요인은 니이체의 삶의 철학에 대한 나의 정열이었다. 이 세 요소들은 마찬가지로 하이덱거 안에 나타나 있다. 어거스틴주의와 뒤섞인 일종의 신비주의에로 그들이 녹아든 것은 하이덱거 철학의 매혹적인 점을 잘 설명해 준다. 그의 특수용어는 독일 경건주의의 설교문학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인간 실존에 대한 그의 해석은 비록 의도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의 자유와 제약에 관한 하나의 인간교리(doctrine of man)를 담고 있으며 그것을 전개한 것이다. 그의 철학은 인간실존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에 너무나도 가까이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이 무신론임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의 철학을 신율적 철학(Theonomous Philosophy)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확실히 그의 철학은 인간의 한갓됨에 대한 물음에 신학적으로 대답할 것을 전제하면서 단지 그 대답을 철학적 용어로 설명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관념론의 한 변형이자 실존철학에 반대되는 것일 것이다. 실존철학은 신학을 신뢰하는 데에 그 대답이 주어져 있는 그런 물음을 새롭고도 강렬한 방식으로 묻는다.

예일대학 강의에서 내가 전개했던 이 같은 생각들은 그 이전의 나의 종교철학보다 더 날카롭게 신학과 철학 사이의 구별을 짓게 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 양자가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부인한 적은 없었다.

나의 전문인으로서의 생애도 그 두 질서 사이의 경계선 위를 걸어 왔다. 나는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할레에서 신학사 및 나중에는 신학박사 학위(bonoris causa)를 받았다. 나는 베르린에서는 신학강사로 있었으며 드레스덴에서는 종교학 교수로, 라이프찌히에서는 명예 신학교수로, 프랑크푸르트-온-마인에서는 철학예비교수(?Professor Ordinarius)로,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는 철학적 신학을 맡은 교환교수로 있었다. 끊임없이 전공은 바뀌었지만 그러나 근본 문제에 있어서는 아무 바뀜이 없었다! 신학자로서는 나는 철학자이기를 원했고 또 그 반대이기도 했다. 경계선을 팽개치고 그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 보다 손쉬운 일일 것이다. 원래의 나로서는 이 같은 길은 불가능한 길이었다. 다행히 바깥에서 주어진 기회가 맘속의 작은 바램에 발맞추어 준 셈이다.



교회와 사회 사이에서


비록 나는 가끔 교회의 교리와 관습을 비판해 왔지만 교회는 늘 나의 보금자리였다. 그 같은 사실은 새로운 이교적 이념들이 교회로 밀려들어오던 즈음과 내가 나의 정치적이고도 종교적인 보금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지는 않나 하고 두려워하던 즈음에 더욱 뚜렷하게 되었다. 그 위난(危難)으로 나는 내가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느낌은 나의 어렸을 적의 경험 - 프로테스탄트 목사의 집이라는 데서 온 그리스도교적 영향 하며 19세기 막바지의 동부독일의 조그마한 도시가 가질 수 있었던 비교적 잘 이어온 종교적 관습등 - 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교회 건물과 그것의 신비로운 분위기며 예배, 음악, 설교 그리고 어느 해의 며칠 동안, 때로 몇 주 동안의 읍내 생활을 장식했던 그리스도교의 큰 축제들에 대한 나의 사랑은 교회적이고 예전적(禮典的)인 것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감명을 내 마음에 심어 주었다. 또 이런 것들 위에 그리스도교 교리의 신비라든가 그것이 어린아이의 맘속에 끼친 영향, 또 성경에 나오는 말이며 거룩함, 죄, 용서 따위에 대한 가슴 설레던 경험 등이 보태져야 하리라. 이 모든 것은 내가 신학자가 되어 그 길을 걷고자 마음먹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내가 성직을 받고, 목사로서 활동하고, 대학이란 환경에 들어가서까지도 오랫동안 설교와 예배에 대한 관심을 이어온 것은 모두 내가 교회에 속해 있다는 깨달음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나는 경계선 위에 있었다. 일종의 소외감이 교회의 교리와 제도에 대한 나의 커가는 비판을 대동하고 나왔다. 교회 밖의 지식인과 무산계급을 만난 것이 이 점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나는 신학 공부를 끝마친 훨씬 뒤에야 비로소 교회 밖의 지식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에 있어서 나의 태도는 그 때의 접경적 입장에 따라 호교적이었다. 호교적이 된다는 것은 견해에 있어서 통속적 척도를 가진 상대편의 앞에서 스스로를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대 교회의 호교론자들이 공격해 오는 이교주의 앞에서 스스로를 옹호하고 있었을 때, 공통된 척도는 이론적이고도 실천적인 이치인 로고스(Logos)였다. 호교론자들이 그리스도를 로고스와 같이 여기고 신의 명령을 자연의 합리적 법칙과 같이 여겼기 때문에 그들은 이교적인 반대자들 앞에서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실천에 대한 까닭을 변론할 수 있었다. 우리들의 시대에서 그리스도교 옹호론은 현존하는 지적, 도덕적 입장들에 반대하면서 새로운 원리들을 내세우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의 임무는 고개를 드는 상반된 입장들에 맞서서 그리스도교의 원리를 감싸는 일이다. 옛날의 호교론자들에게나 오늘날의 호교론자들에게나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문제는 공통된 척도, 곧 논쟁이 가라앉을 수 있는 재판정의 문제이다.

그 일반적인 척도를 찾는 가운데에서 나는 계몽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오늘날의 사상적 경향은 비록 그것이 교회중심적 그리스도교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교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현대의 사상적 경향은 가끔 그렇게 불리듯이 이교적인 것은 아니다. 이교주의 - 특히 국가주의적 치레를 한 - 는 1차 대전 후에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가 여지없이 붕괴된 것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런 류의 이교주의 앞에서도 호교론 같은 것은 없었다. 유일한 문제는 죽어갈 것인가, 살아남을 것인가였다. 이 문제는 악마적 다신주의에 대항해 싸우던 예언자들의 일신주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대에 있어서 호교론이 가능했던 것은 단지 다신주의가 인본주의로 채워져 있었고 그 인본주의 안에서 그리스도교와 고대가 그들 마음대로 공통척도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대 호교론이 근본적으로 이교적인 인본주의에 부닥쳤던 반면 오늘날의 호교론의 남다른 점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인본주의에 부닥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문제를 나의 글 "렛싱과 인류 육성의 이념(Lessing und die Idee der Erziehung des Menschengeschlechts)"에서 다루었다. 마음속으로 그런 관점을 품고 나는 여러 가지 사적인 일로 베를린에 머무르면서 호교론에 관한 강좌와 토론회를 꾸려나갔다. 이런 모임들의 결과는 복음주의 교회의 지도부에 제출한 보고서로 간추려졌다. 이런 활동은 후에 국내(미국) 전도단에 호교론위원회를 세우는 데로 이어졌다.

전쟁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의 실제와 성격이 내게 아주 친숙해졌다. 노동운동이라든가 소위 반그리스도교적 민중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거기에도 역시 그 인본주의적 성격이 비록 예술과 과학에 의해 오랫동안 불신되어온 유물론적 철학인 것처럼 보여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적 바탕이 인본주의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민중들에 대한 호교적 메시지는 지식인들에게보다 훨씬 더 아쉽고도 어려웠는데 그것은 민중들의 반종교성이 계급적 반목에 의해 드높아졌기 때문이었다. 계급갈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교회가 호교적 메시지를 초잡으려 한 것은 애초부터 실패가 예정된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에서 그리스도교를 방어한다는 것은 계급 갈등 속으로 적극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오직 종교사회주의만이 무산대중에게 호교적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뛰어든 전도(inner mission)"가 아닌 종교사회주의는 노동계급 가운데에서의 그리스도교적 활동과 호교의 필연적인 형식이다. 종교사회주의의 호교적 요소는 자주 그 정치적 모습에 의해 가리어져 왔던 탓으로 교회는 그 자신의 활동에 있어서 종교사회주의의 간접적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점은 사회주의자들 자신이 더 잘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가끔 내게 종교사회주의가 대중을 교회의 그늘 아래에 데리고 가서는 사회주의 정부를 이룩하려는 투쟁으로부터 그들을 떼어놓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비치곤 했다.

교회마저도 종교사회주의를 거절했는데 이는 그런 움직임이 전통적 상징들과 교회적 사고 및 실천의 개념을 버리고 말거나 혹은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의 바닥 다지기를 한 뒤에서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때문이었다. 또 그런 것들을 대중없이 함부로 썼다면 무산계급은 자동적으로 그것을 배척했을 것이다. 종교사회주의의 임무는 노동운동의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 속에 함축된 것과 교회의 아주 다른 예전적 형태 속에 함축된 것이 같은 본질임을 내보이는 일이었다. 많은 젊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에 대한 이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교회 성직자들이 도저히 손잡을 수 없는 자들에게 종교적 감화를 주겠다는 뚜렷한 목적으로 성직이 아닌 자리를, 특히 사회봉사의 영역에 있어서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깝게도 그런 기회들은 몇몇에게만 이용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교회와 인본주의 사회의 문제와 교회와 무산계급의 문제는 바르트 학파의 젊은 신학자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그 틈은 결코 교회에 의해서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분열된 인본주의 사회는 새로운 이교적 경향 아래에 무더기로 희생되고 말았다. 교회는 그같은 경향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더욱 더 반(反)인본주의적인 것처럼 보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산계급은 종교적 소극성의 등뒤로 가라앉았다. 비록 지식인들이 국가주의적 이교주의에 대항해서 교회의 존립을 지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교회 쪽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교회가 수호하는 교의는 그들에게 먹혀들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이런 부류들에게 손을 뻗치기 위해서 교회는 교회적이 아닌 인본주의가 알기 쉬운 언어로 복음을 선포해야만 했다. 교회는 지성인들에게도 대중에게도 복음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신시켰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런 확신은 고백교회의 실랄한 반인본주의적 역설 때문에 주어질 수 없었다. 그같은 역설을 일으키게 한 현실이 먼저 검토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브룬너(Brunner)라든지 고가르텐(Gogarten) 같은 신학자들은 그런 검토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그들은 오히려 인본주의에 얹혀 살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선포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그들의 표현은 그들이 반대하고 있던 것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부인하는 식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노이베르크라이스(Neuwerkkreis)나 나의 오랜 친구이자 이런 노력에 있어서의 동료인 헤르만 샤프트(Hermann Schafft)가 편집한 같은 이름의 잡지에서도 다루었듯이 그리스도교 복음의 언어 문제가 진지하게 거론될 때마다 심각한 문제들이 떠올랐다. 전래적인 종교적 성서용어나 옛 교회의 예배가 다시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언젠가 내게 말했듯이 인류가 종교적인 원형적(原型的) 언어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원형적 언어들은 모든 것을 객체화(客體化)해버리는 우리들 사고의 틀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파악방식에 의해 그 전래적인 힘을 빼앗기고 말았다. 합리적 비판주의는 원형적 언어인 "신"의 의미 앞에서는 아무 힘이 없다. 그러나 무신론은 "객체적으로" 존재하는 신이라는 앞 뒤 막힌 생각에게는 지당한 대답이 된다. 말하는 사람은 그 말을 전래적인 상징적 의미에서 쓰지만 듣는 사람은 그 말을 그 시대의 과학적 의미에서 듣는다면 실로 진풍경이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왜 언젠가 자극시킬 목적으로 교회는 일체의 원형적 언어에 대해 30년 동안의 사용금지령을 내려야 한다는 말을 꺼냈던가 하는 이유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만 한다면 몇몇 경우에서 그러했듯이 교회는 새로운 용어를 개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전적인 예배언어와 성경말을 오늘날의 말투로 너무 심하게 옮기려 하던 노력은 비참한 실패를 하고 말았다. 그러한 시도는 새로운 창조를 가져오지 않고 의미의 손상을 가져왔다. 신비적 용어의 사용마저도, 특히 내가 가끔 시도했던 바와 같이 설교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용어들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모든 본질을 다 담기는 거의 불가능한 그 어떤 다른 내용을 전한다. 유일한 해결책은 그 원형적 종교용어를 그대로 쓰면서 동시에 그것의 그릇된 사용을 거부함으로써 그 전래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우리는 전래적인 원형적 언어를 그 경계선 위에서 되찾기 위해 고전용어와 현대용어의 사이에 서야 한다. 사회의 현존하는 위난은 많은 것들을 종교언어가 다시 그 고유한 의미로 들릴 수 있는 이 경계선으로 몰아왔다. 만약 눈멀고도 오만한 정통파가 이들 용어를 독점함으로써 종교적 실제에 민감한 자들을 놀라게 해서 쫓아버리거나 또는 그들을 몇몇 현대적 이교주의에로 몰아 넣어서 결과적으로 그들을 교회에서 몰아내는 일이 있게 된다면 그것은 통탄할 일일 것이다.

교회와 사회의 문제는 나로 하여금 "교회와 인본주의 사회(Kirche und humanistische Gesellschaft)"라고 이름한 글에서 "드러난(manifest)" 교회와 "숨은(latent)" 교회 사이에 구별을 짓게 했다. 이것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낡은 프로테스탄트적 구별이 아니라 보이는 교회 안에서의 이중성을 다룬 것이었다. 그 글에서 내가 보여준 것과 같은 식의 구별은 교회의 바깥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직화된 교파들과 전통적인 신조(creeds)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비교회적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한 평생의 반 동안을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오면서 나는 그들 안에 얼마나 많은 숨은 교회가 있는 지를 배웠다. 나는 거기에서 인간실존의 유한성에 대한 체험이며 영원하고 조건 없는 것에 대한 물음이며 정의와 사랑에 대한 절대적 이바지며 이상향의 배후에 놓인 소망이며 그리스도교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며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상호침투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이념적으로 잘못 쓰여지는 것을 아주 예리하게 인식하는 모습 등을 만날 수 있었다. 때때로 내게는 그 "숨은 교회" -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찾아낸 것을 이름지은 것 - 가 조직화된 교파 교회보다 더 참다운 교회인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구성원들이 진리를 가지고 있는 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조건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몇 해는 조직화된 교회만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교적 침략에 맞선 싸움을 끌고 갈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숨은 교회는 이 싸움에 필요한 종교적 무기도 조직의 무기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드러난 교회에서 이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교회와 사회 사이의 틈을 더 크게 벌일 우려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숨은 교회의 개념은 우리들 시대의 수없이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운명적으로 걸어야 할 경계선의 개념이다.



종교와 문화 사이에서


만약 레베나의 모자익 작품이나 시스틴 성당의 천장화나 혹은 만년의 렘브란트가 그린 초상화에 깊은 감명을 받은 사람에게 그 같은 체험이 종교적인 것인지 문화적인 것인지를 묻는다면 그는 대답하기 곤란할 것이다. 그 같은 체험은 형식에 있어서는 문화적이고 내용에 있어서는 종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대답일 것이다. 그것은 특수한 의례적 행위에 딸린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는 문화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것과 인간 실존의 유한성을 다룬다는 이유에서는 종교적이다.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악이나 시, 철학, 과학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이러한 직관과 이해에서 진실이 되어 있던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법률과 관습을 만들어내는 실제적인 일이나 도덕과 교육, 공동체와 국가에 있어서도 진실이 되어 있다. 인간실존이 궁극적인 물음 아래에 종속되어 있고 그리하여 초월되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문화는 종교적이다. 그리고 조건적인 의미만을 가진 일들 속에 무조건적인 의미가 보여지는 곳이라면 거기서도 또한 문화는 종교적이다. 문화가 본질적으로 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가운데에 나는 종교와 문화의 경계선에로 나아갔고 그리고 결코 그 곳을 떠난 적이 없었다. 나의 종교철학은 주로 이 경계선의 이론적 측면에 관계되어 있다.

종교와 문화 사이의 관계는 그 경계선의 양 쪽 측면으로부터 규정되어야만 한다. 종교는 절대적인 것을 포기할 수 없으며 그리하여 신의 개념 속에 표현된 보편적 주장을 버릴 수 없다. 종교는 문화 속의 한 특수한 분야가 되어서는 안 되며 또 문화의 옆자리를 차지해서도 안 된다. 자유주의는 종교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자 해 왔다. 어떤 식으로 하든 종교는 불필요하고 사라져야만 한다. 문화체계가 종교 없이도 완전하고 자기충족적(自己充足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종교에 대하여 문화의 자율성, 곧 문화 그 자체를 포기하지 않고는 굴복할 수 없다는 항변권을 갖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문화는 절대적인 내용을 포함한 모든 내용들이 스스로를 나타낼 형식을 결정하여야 한다. 문화는 진리가 정의와 종교적 절대라는 구실 아래에서 희생되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다. 종교가 문화의 본질이듯이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오직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종교의 뜻하는 바는 본질로서 그것은 무조건적인 원천이자 의미의 심연이며 문화 형식이 그 본질의 상징으로써 봉사한다. 문화가 뜻하는 바는 형식으로서 그것은 조건부 의미를 뜻한다. 무조건적 의미를 뜻하는 본질은 문화가 승인해 준 자율적 형식의 매체를 간접적으로 통해서만 간파될 수 있다. 문화는 인간 실존이 완전하고도 자율적인 형식의 틀 안에서 그 유한성과 영원에 대한 갈구에 있어서 이해될 때 그 최고의 표현을 얻는다. 반대로 종교가 그 최고의 표현을 얻자면 그 자신 안에 자율적 형식, 곧 로고스 - 초대 교회가 그렇게 불렀듯이 - 를 품고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이 종교와 문화에 대한 나의 철학의 기본 원리를 구성했으며 종교적 관점에서 문화사를 이야기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왜 나의 책 "종교적 상황(The Religious Situation)"에는 좁은 의미의 종교적 문제가 적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가까운 지난날의 지적 사회적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고려되고 있는가 하는 이유이다. 나는 그 같이 하는 것이 오늘날의 사실상의 종교적 상황에 맞먹는 일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정치적 사회적 관심은 무수한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에게는 종교적 이상과 정치적 이상이 합치한다는 정도로까지 종교의 힘을 흡수해버렸다. 국가의 신화와 사회정의의 신화는 그리스도교의 원칙과 널리 바꿔치기되고 있으며 그것들이 문화적 형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으로 여겨질 수 있을 만한 효력을 갖게 되었다. 내가 "문화 신학의 이념에 관하여(Über die Idee einer Theologie der Kultur)"라는 강의에서 전개했던 문화에 관한 신학적 분석의 개요는 최근 역사의 흐름을 고찰하고 있다.

그 중 세속주의에 대한 프로테스탄티즘의 관계를 다룬 한 항목에서 나는 이러한 고찰의 신학적 결론을 그려 보였다. 거기에서 나는 만약 프로테스탄티즘이 그 어떤 지배 열망을 갖는다면 그것은 세속적인 것에로 향해서 존재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생각은 카톨릭이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갈라놓는 것을 근본적으로 배척한다. 무조건적인 것(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용어로 하면 신의 주권)의 출현 앞에서는 어떠한 우선권 있는 영역도 있을 수 없다. 거기에는 스스로 거룩한 어떠한 인물도, 경전도, 공동체도, 제도도, 행위도 있을 수 없으며 스스로 세속적인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세속적인 것은 거룩함의 질을 고백할 수 있고 거룩한 것은 세속적이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사제는 평신도이며 평신도는 언제라도 사제가 될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신학적 원칙일 뿐만 아니라 전문인으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지켜온 입장이기도 하다. 성직자로서 또 신학자로서 나는 나의 신학적 고투를 숨길 의향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 도리어 나는 그런 고투가 쉽사리 감추어질 수 있는 영역, 예를 들면 철학교수로서의 나의 활동 등에서 그런 고투를 자랑해 왔다. 그러나 나는 나를 세속적 삶으로부터 떼어놓으면서 나로 하여금 "종교적"이란 꼬리표를 달게 할지도 모르는 신학적 체질에 젖지 않기를 바랐다. 종교는 세속적인 것을 분열시키고 변형시키면서 그것으로부터 뛰쳐나올 때 그 무조건적 성격이 훨씬 더 드러나 보이는 듯이 여겨진다. 또한 나는 어떤 제도나 인격이 스스로 종교적인 듯이 여겨질 때야말로 종교적인 것의 역동적 차원은 배신당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성직자를 직업상의 필요로 신앙을 갖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성모독에 가깝다.

독일 교회의 의식(儀式)을 개혁하려는 노력들에 대한 나의 응답은 이 확신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나는 빌헬름 슈태린(Wilhelm Stählin)과 칼 리터(Karl Ritter)가 이끄는 이른바 베르노이헨(Berneuchen) 운동에 가담했다. 이들은 다른 어떤 개혁집단들보다 더 종교적인 개혁들을 추구했으며 또 의식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무엇보다 먼저 개혁을 위해 선명하게 정의된 신학적 기반을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나는 보람있는 신학적 협력을 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의식적 행사나 형식이나 태도들은 그것들이 만약 원래대로 즉 우리의 전체 실존을 지탱시키고 있는 종교적 본질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특유의 방법인 상징적 형식으로 이해되기만 한다면 "세속적인 것에 대한 열망"과 모순되지 않는다. 의식이나 예전적 행사의 의미는 스스로 거룩한 그런 행사는 아니며 오직 홀로 거룩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없기도 한 무조건적인 것의 상징이다.

베르노이헨회(會)의 위원회에서 행한 "자연과 성례전(Natur und Sakrament)"이란 강의에서 나는 프로테스탄티즘과 인본주의의 비예전적이고 지적인 사고방식과 중세 말기에 사라진 예전적 사고방식의 전래적 의미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고자 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틀 속에서는 이것은 어렵지만 필요한 일이다. 어떠한 교회도 거룩한 것의 성례전적 표현 없이는 불가능하다. 나를 베르노이헨회에 관여케 한 것은 이런 확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 사이의 경계선에 대한 우리들 공동의 관심을 멀리 떠나 예배 형식(때로는 고대 예배 형식)에 대한 배타적 선입견에까지 흘러가게 되자 나는 그들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나는 경계선에 서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루터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칼빈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옮아가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며 특히 칼빈주의의 좀 더 세속화된 형태에 있어서 그러하다. 루터주의의 노선에서는 사회주의로 가기란 매우 어렵다. 나는 출생으로 보나 교육, 종교적 체험 기타 신학적 생각으로 보나 루터주의자다. 나는 한 번도 루터주의와 칼빈주의의 경계선에 섰던 적은 없으며 그것은 내가 루터주의의 사회윤리가 비참한 결과에 이르는 것을 경험하고 사회문제 해결에 있어서 칼빈주의의 신의 나라라는 이념이 갖는 한량없는 가치를 깨달은 뒤에도 여전히 그러했다. 나의 종교적 바탕은 루터주의이고 지금도 그렇다. 루터주의는 실존의 파탄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으며 각종의 사회 이상향(진보주의의 형이상학을 포함한)의 거부, 실존의 비합리적 악마적 성격에 대한 깨달음, 종교에 있어서의 신비적 요소에 대한 인식, 사적 공적 삶에 있어서의 청교도적 율법주의에 대한 거부 등을 갖고 있다. 나의 철학적 사고 또한 이 특유한 내용을 표현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독일 신비주의의 철학적 대변인인 야콥 뵈메(Jacob Boehme)만이 유일하게 루터주의에 대한 특별히 철학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뵈메를 통하여 루터주의의 신비주의는 쉘링과 독일 관념론에 영향을 끼쳤고 쉘링을 통하여 루터주의는 이번에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나타난 비합리주의 및 생기론(生氣論:vitalism)의 철학에 영향을 끼쳤다. 많은 반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비합리주의와 생기론에 기반을 두게 될 만큼 루터주의는 사회주의를 점검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뿐만 아니라 철학을 통해 간접적으로 일해 왔다.

전후 독일 신학의 과정은 종교에서 사회주의에로 옮아가는 것이 루터주의자로 교육된 사람에게는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매우 뚜렷이 보여준다. 루터주의에 속하는 두 신학적 운동이 종교적 사회주의에 대립되었다. 그 하나는 "젊은 루터파" 신학으로 자칭한 종교적 국가주의였다. 그 주된 제창자는 엠마뉴엘 히르쉬(Emmanuel Hirsch)였는데 그는 한 때 나의 동료학생이자 친구였으나 후에는 신학적 정치적 대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변증법적 신학"으로 불리는 바르트주의 신학이었다. 비록 바르트의 신학은 칼빈주의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신의 나라에 대한 그의 강한 초월적 이념은 분명히 루터적이다. 사회문제에 대한 바르트 신학의 무관심과 국가주의에 대한 히르쉬의 신성화는 독일의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전통과 너무나도 일치되어 있어서 종교사회주의로서는 그들을 반대한다는 것이 아무 성과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적 풍토에서 종교사회주의가 가망이 없다는 사실은 종교사회주의가 신학적으로 틀렸다거나 정치적으로 불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종교와 사회주의를 묶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앞으로 언젠가는 독일 역사에 있어서의 비극적 요소로 깨달아질 것이다.

루터주의와 종교사회주의 사이의 경계선에 서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유토피아주의의 문제와 비판적으로 마주설 것을 요구한다. 인간에 대한 루터주의적 원칙은 생기론 속에서 취한 자연주의적 형태에 있어서조차 모든 유토피아주의를 부정한다. 죄, 탐욕, 힘에의 의지, 무의식적 충동 혹은 인간의 상황을 그리기 위해 사용된 용어라면 그 어떤 것들도 인간과 자연의 실존과(물론 그것들의 본질이나 타고난 천성과가 아니라) 너무나도 연관되어 있어서 변질된 현실의 영역 안에서 정의와 평화의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의 나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결코 이룩될 수 없다. 모든 유토피아주의는 형이상학적 실망에로 운명지어져 있다. 아무리 인간의 본성이 바뀔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인 도덕적 시정에 순종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과 환경에 있어서의 개선은 인간의 일반적 윤리수준을 높이고 그 야성의 거칠음을 도야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개선은 인간이 어디까지나 인간인 한 자유에 영향을 미쳐 선과 악을 행하게 하지는 않는다. 인류는 더 나아지지는 않는다. 선악은 단지 더 높은 국면으로 끌어올려질 뿐이다.

인간 실존에 관한 루터적 이해로부터 직접 끌어온 이 같은 고찰을 가지고 나는 사회주의적 사고에 점점 더 중요해져 가는 문제, 그리고 종교사회주의에게는 특별한 관심 영역인 인간 원칙의 문제를 다루어 왔다. 나는 그릇된 인류학이 종교사회주의로부터 그 설득력을 빼앗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인간에 관한 진리(루터의 표현대로 하자면 "인간 안에 있는 것")를 받아들이지 않는 정치가는 성공할 수 없다. 다른 한편 나는 루터주의적 생각 - 특히 그 자연주의적 변형, 곧 생기론과 파시즘의 경우 - 이 인간에 대한 최종적 결어(結語)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예언자적 메시지는 다른 곳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그런 사고방식을 겨냥하게 될 것이다. 예언자적 메시지는 인간 본성이 모든 본질과 함께 변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기적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인간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면서도 그 본성은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는 관점보다는 훨씬 현실적이다. 그런 자들은 유토피아주의자를 뜻하며 예언자적 기다림의 역설을 뜻하지는 않는다.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인류학적 의미가 두드러지게 부각되기 훨씬 이전에 유토피아의 문제는 종교사회주의 운동의 중심문제였다. 우리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 바로 후에 종교와 사회주의를 의논하기 위해 만났다. 그 처음 몇몇 모임에서 우리의 근본문제는 몇 가지 사회적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종교의 관계라는 점이 드러났다. 내가 신약성서의 카이로스(Kairos:때가 참, the fullness of time)의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 그 때였는데 그것은 종교와 사회주의 사이의 경계선적 개념으로서 그 후 독일 종교사회주의의 품질보증서(hallmark)가 되어 왔다. "때가 찼다"는 개념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한 투쟁이 신의 나라라는 관념으로 표현된 류의 성취를 지향할 수는 없으며 신의 나라의 특수한 측면이 우리를 위한 요구와 소망이 되듯이 특수한 때에 특수한 임무가 요구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신의 나라는 늘 초월적인 채로 남아 있을 것이나 그것은 주어진 사회형태 위에 심판으로 나타나며 다가오는 사회를 위해서는 규범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사회가 신의 나라로부터 영 동떨어진 것일지라도 종교사회주의자가 되겠다는 결단은 신의 나라를 위한 결단이 될 것이다. 내가 편집한 『카이로스』에 나는 제1권 "정신의 상황과 정신의 변화에로(Zur Geisteslage und Geistwendung)" 제2권 "비판과 자기확립으로서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us als Kritik und Geistaltung)"의 두 권을 기고했는데 거기에서 카이로스의 개념은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전제들과 의미 가운데에서 고찰되고 있다.

"카이로스"라는 생각에 얽힌 매우 중요한 개념은 악마적이라는 개념이다. 나는 그것을 "악마적인 것에 관하여(On the Demonic)"이란 글에서 논하였다. 이 개념은 루터적 신비주의와 철학적 비합리주의가 놓아준 발판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악마적인 것은 개인적, 사회적 삶 속에 깃든 창조적이면서 동시에 파괴적인 어떤 힘이다. 신약 성서 안에는 귀신들린 자가 정상적인 자보다 예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내적 분열을 맞는 까닭에 그런 깨달음을 자신에 대한 저주로 생각한다. 초대 교회는 로마제국을 스스로 신과 같이 여긴다 하여 악마적이라고 불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황제를 위해 기도하였고 또 그가 보장해주는 도시의 평화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 비슷하게 종교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국가주의가 동시에 파괴적이면서 창조적인 점에서 악마적 세력들임을 보이고자 하며 그들의 가치체계에 신성을 베풀고자 노력한다. 유럽 국가주의와 러시아 공산주의의 과정, 그리고 그들의 거짓 종교적 자기합리화 과정은 이 진단을 넉넉히 확인해 주었다.

종교와 문화,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타율과 자율 등에 관한 나의 이전의 생각들이 종교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성찰에 합류해 들어가서 이제 그 문제가 나의 모든 생각의 초점이 된 것은 놀랄만한 일이 못 된다. 무엇보다 사회주의는 내가 신율적 역사철학을 이끌어내고자 했을 때 이론적 바탕과 추진력을 마련해 주었다. 물리적 시간이나 생물학적 시간과는 구별되는 "역사적" 시간을 분석함으로써 나는 요구되면서도 기다려지는 새로움에로의 움직임을 구성요소로 하는 역사의 개념을 전개시켰다. 역사로 하여금 그리로 움직여 가게 하는 새로움의 본질은 역사의 의미와 목표가 명백해지는 구체적 사건들 속에 나타난다. 나는 그런 사건을 "역사의 중심"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 중심은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나타나심이다. 역사 속에서 서로 투쟁하는 세력들은 그 보여지는 양상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들을 얻을 수 있다. 악마적-신적-인간적, 예전적-예언자적-세속적, 타율적-신율적-자율적 따위로 각각의 가운데에 놓인 말은 양단의 종합명제를 나타내며 그것을 향하여 역사는 때로는 창조적으로, 때로는 파괴적으로 그러나 결코 완성되는 일은 없이 항상 예상되는 완성의 초월적 힘에 의해 치달리며 스스로를 전개해 나간다. 종교사회주의는 새로운 신율에로 움직여 가는 그러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경제체제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현실의 깊이 있는 이해이며 우리가 가진 현재의 카이로스에 의해 요청되고 기다려지는 신율의 형식이다.



관념론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나는 독일 관념론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으며 거기서 배운 것을 과연 잊을 수 있을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무엇보다도 나는 칸트의 지식 비판의 은덕을 입고 있는데 그것은 나에게 경험적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는 대상의 영역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경험에 대한 온갖 분석과 실재에 대한 온갖 체계적 설명은 주관과 객관이 만나는 곳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관념론적 자동률(自同律:principle of identity)을 이해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고찰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식의 근본 성격을 분석하는 원리다. 오늘날까지 관념론에 대한 비판이 없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그 과정이 옳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이 원리를 나의 결별의 입장으로 삼음으로써 나는 형이상학적이거나 자연주의적인 실증주의의 모든 형태들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만약 관념론이 사고와 존재의 합일(identity)을 진리의 원리로서 주장하는 것을 뜻한다면 나는 인식론상으로는 관념론자다. 나아가 자유의 요소는 주관적이고도 객관적인 경험에 가장 잘 부합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관념적으로 개념화하는 가운데에서 그 표현을 얻는 것처럼 내게는 여겨진다. 사람은 질문을 한다는 사실, 사고와 행동에서 절대적 요구(범주적 명령)를 깨닫는 것, (현대 형태심리학 이론에서처럼) 자연과 예술, 사회에서 뜻있는 형식을 인식하는 것 - 이 모든 것들을 인간의 원리가 자유의 철학이어야만 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나는 의미의 개념 속에서 아마 가장 적절하게 표현되었다싶은 인간 정신과 현실과의 사이에 어떤 공명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점이 헤겔로 하여금 절대정신 안에서의 객관정신과 주관정신의 합일을 말하게 하였다. 관념론이 실재의 다양한 영역들에 의미를 주는 범주들을 고안해 낼 때 관념론은 철학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한 그 임무를 완수코자 노력했다.

좀 색다른 문제점이 나를 관념론의 문 앞에로 이끌었다. 관념론자들은 그들의 범주체계가 실재와의 명백하고도 실존적으로 제한된 만남의 표현이라고 하기보다는 전체로서의 실재를 그대로 그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쉘링만이 그의 철학 발전의 제2기에서 관념론적이거나 본질론적인 체계의 한계를 깨닫고 있었다. 그는 실재란 순수한 본질의 표출일 뿐 아니라 그 모순이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인간 실존 그 자체가 그 같은 본질 모순의 한 표현임을 깨달았다. 쉘링은 사고 또한 실존에 매여 있으며 그 본질 모순(반드시 그 자체가 흠 있는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쉘링은 이 경이로운 생각을 펼치지는 못했다. 헤겔처럼 쉘링도 그 자신과 그의 철학은 실존 속의 모순이 극복되고 절대적 관점이 얻어진 역사 발전의 끄트머리에 서 있다고 믿었다. 쉘링의 관념론은 실존적 생각을 향한 그의 내적 노력을 압도했다. 관념론적 본질 철학의 닫힌 체계를 처음으로 깨어 부순 사람은 키에르케고르였다. 삶의 불안과 절망에 대한 그의 불꽃튀기는 해석은 실로 실존주의라고 불릴만한 철학을 창도했다. 전후 독일 신학과 독일 철학에 미친 그의 저작의 중요성은 결코 과대평가가 될 수 없다. 학창시절의 마지막 무렵(1905-1906)에 벌써 나는 그의 파고드는 듯한 변증법의 영향 아래에 들어갔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존재에 대한 관념론적 철학에 대한 반동이 또 다른 방향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헤겔의 불같은 추종자들이면서도 그 선생에 대항해서 나왔으며 "관념론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자들이 관념론의 범주 내에서 이론적 실제적 유물론을 소리높이 외쳤다. 이 부류의 한 사람이었던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그보다도 한 발 더 앞섰다. 그는 관념론의 범주들이나 그것을 유물론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배척했으며(그의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반론"을 보라) 그런 철학에 맞서서 한 입장을 주창했다. 이 새로운 입장은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철학 - 그는 철학을 본질의 철학과 똑같이 여겼다 - 은 실재 속의 모순을 은폐하려 할 뿐 아니라 인간 존재, 곧 세계에서의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사회적 모순에 실제로 중요한 것들을 추상화하고자 한다. 이 모순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회계급간의 투쟁은 관념론이 이데올로기라는 것, 곧 현실의 양의성(ambiguities)을 은폐하는 기능을 가진 개념체계임을 보여준다. (비슷하게 키에르케고르는 본질의 철학이 개인적 실존 속에 있는 양의성을 감추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마르크스의 덕분에 관념론은 물론 종교적, 세속적인 모든 사고체계들이 가진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통찰할 수 있었는데 그 성격이란 힘의 체계(power structure)를 가지게 되면서 오히려 그 때문에 실재의 보다 올바른 조직화가 (무의식적일지라도) 가로막히게 되는 성격을 말한다. 루터가 "제 스스로 만들어낸 신(self-made God)"에 대해 경고했던 것은 철학에 있어서 이데올로기가 갖는 의미에 상응한다.

진리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본질주의의 닫힌 체계를 거부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진리는 그것을 깨닫는 사람의 상황에, 곧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는 개인의 상황에, 그리고 마르크스에 있어서는 사회의 상황에 달려 있는 것이다. 순수한 본질에 대한 앎은 실존 속에 있는 모순이 깨달아지고 극복되는 정도에 따라서 가능한 것이다. 절망(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모든 인간존재의 조건)의 상황에 있어서나, 계급투쟁(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 본성의 역사적 조건)의 상황에 있어서나 닫힌 채로 조화된 모든 체계는 비진리다. 그러므로 키에르케고르와 마르크스 양자는 구체적인 심리적 혹은 사회적 상황에 진리를 관련시키고자 한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의 진리는 주체성으로서 그것은 자신의 절망을 부인하지 않고 본질 세계로부터 쫓겨났음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그 조건 안에서 진리를 뜨겁게 확신한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의 진리의 소재는 계급갈등을 극복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운명을 깨닫게 된 계급, 즉 비이데올로기적 계급의 계급적 관심이다. 두 경우를 통하여 우리는 놀랍게도 -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 비이데올로기적 진리를 얻는 최대의 가능성은 가장 깊은 무의미의 영역에서, 가장 깊은 절망을 통하여, 가장 비참한 본성으로부터의 소외 가운데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배운다. "프로테스탄트 원리와 무산계급의 상황(Das Protestantische Prinzip und die proletarische Situation)"이란 제목의 글에서 나는 이러한 생각을 프로테스탄트 원리와 인간의 경계선적 상황을 다루는 그 교의(敎義)에 관계시켜 보았다. 물론 그런 일은 무산계급이란 표현이 유형학적으로 쓰이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때때로 실제의 무산계급보다는 몇몇 유산계급적 집단 - 예를 들면 자신의 계급적 상황을 넘어서서 무산계급들로 하여금 자기의식을 가지게 할 수 있는 경계선적 상황에까지 나아가는 지식인들 - 이 더 무산계급적 유형에 부합되기도 한다. 우리는 무산대중을 마르크스가 사용한 유형학적 개념의 무산계급과 똑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보통 이해되기로는 마르크스주의란 "경제적 물질주의"를 뜻한다. 그러나 고의든 아니든 이 같은 어휘 구성은 물질주의라는 말의 양의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만약 물질주의가 오직 "형이상학적 물질주의"만을 뜻할 수 있을 뿐이라면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경계선에 설 수 없었을 것이며 또 물질주의와 관념론 둘 다에 대항해 싸웠던 마르크스 자신도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경제적 물질주의가 형이상학이 아니라 역사 분석의 방법임을 기억해야 한다. "경제적"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인간 실존의 모든 측면에 관련된 복합적 요소로서 역사 해석의 유일한 원리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의미한 주장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물질주의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사회적, 지적 형태가 결정지어지고 변동이 엮어져나가는 데에 있어서 경제체제와 경제적 동기들이 갖는 근본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경제적 요인과 무관한 채로 사고와 종교의 역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며 그리하여 관념론이 소홀히 하여 다루지 않았던 신학적 성찰, 곧 인간은 하늘 위에 사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 산다는 사실(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본질의 영역에 사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가운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다.

마르크스주의는 실재의 감추어진 지평들을 열어 보이는 한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점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는 정신분석학과 비교될 만하다. 열어 젖힌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며 어떤 경우에는 파탄을 초래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왕의 전설과 같은 고대 그리스의 비극은 이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인간은 자기지신의 실제적 본연이 드러나는 것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막는다. 오이디푸스왕처럼 자신의 삶을 유지시켜주고 자기의식을 지탱해 주고 있던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파멸되고 만다. 내가 자주 만나보았던,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에 대한 격렬한 배척은 그들을 파탄시킬지도 모르는 열어 젖힘을 피하고자 하는 개인 및 집단들의 시도였다. 그러나 이 괴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궁극적 의미는 인식될 수 없다. 그러므로 신학자는 실존의 양의성(兩義性)을 얼버무리는 관념론이나 퍼트리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할 수 있는 한 자주 이들 수단을 사용해야만 한다. 그는 경계선이라는 그의 위치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 그는, 나 자신도 애썼던 것처럼, 정신분석학이 부분적으로 녹슨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비판할 수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유토피아적이고 교조적 요소를 물리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과학적 타당성이 없는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사적인 이론들을 거들떠보지 않을 수도 있다. 신학자는 형이상학적 물질주의와 윤리적 물질주의에 대해 그것이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든 아니든 간에 저항할 수 있으며 또 저항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이들 두 움직임이 이데올로기를 퍼뜨리고 인간실존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어 준 데 있어서 보여준 효능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폭로하는(unmasking)" 효과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요구와 기대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은 역사 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쳐왔고 또 앞으로도 끼쳐갈 것이다. 관념론이 동일 원리 속에서 이루어진 한 신비적이고도 예전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는 반면 마르크스주의에는 예언자적 정열이 있다. 나의 책 "사회주의적 결단(Die Socialistische Entscheidung)"의 중심적 부분에서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훨씬 원대한 종교적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다 진지하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나는 또 사회주의적 원리에 대해 그것을 유대교-그리스도교적 예언주의의 교리와 비교함으로써 새로운 이해를 얻고자 노력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나를 관념론적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며 관념론자들은 나의 물질주의를 들어 불평을 늘어놓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실로 그 둘 사이의 경계선에 서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치적 반대자를 비방하는 표어가 되어왔다. 내가 마르크스주의의 경계선에 서 있다고 인정한 것은 종교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관계에 대한 앞에서 말한 바와 정치적으로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것은 나를 그 어떤 정당에 속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약 어느 두 정당 사이에 서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런 "사이"는 이 책의 딴 곳에서 쓰여진 것과 다른 뜻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정당에서는 결코 충분히 표명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에 나는 맘속으로 어떠한 정당에도 속하지 않고 또 결코 속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어떤 정당에도 매이지 않은 한 협력체 - 비록 그것이 다른 정당보다 어느 한 정당에 더 가까운 것일지라도 - 를 열망하며 또 늘 열망해 왔다. 예언자적 정신 속에서 그리고 카이로스의 요구에 부응해서 세워지는 이 단체는 보다 올바른 사회 질서를 위한 선구자가 될 것이다.



고국과 타국 사이에서


타국 땅에서 이 자화상(self-portrait)을 그리는 것도 모든 참다운 운명이 그러하듯이 동시에 자유를 뜻하는 한 운명이다. 고국과 타국 사이의 경계선은 자연과 역사가 그어놓은 단순한 외적 경계선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내적인 두 힘, 인간 실존의 두 가능성 사이의 경계선인 바 그것의 고전적 형식은 저 아브라함이 받은 명령이다. "너의 집 …… 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는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한 약속 때문에 그의 본토와 가족, 종파의 공동체, 그의 백성과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의 본토와 가족, 종파의 공동체, 그의 백성과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의 복종을 요구하는 신은 타국의 신이며 이교적 신들처럼 어느 지역에 매인 신이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을 축복한다는 역사의 신이다. 예언자와 예수의 신이기도 한 이 신은 모든 종교적 민족주의 - 그가 끊임없이 반대한 것이며 이교도들의 것이며 또 아브라함에 대한 명령에서 거부된 것이기도 한 유대 민족주의 - 를 철저하게 좌절시킨다. 어떠한 고백 그리스도교에서도 이 명령의 의미를 논박할 수는 없다. 그는 그 자신의 나라를 떠나 그에게 지시될 땅으로 가야만 한다. 그는 순전히 초월적인 한 약속을 믿어야만 한다.

"본토"의 참 뜻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그의 출생지일 수도 있고 그의 국가공동체일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리적 이민"이 대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나라로부터 떠나라는 명령은 지배적 권위와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양식과 결별하고 그런 것들에 피동적으로든 능동적으로든 저항하라는 요구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로마제국에 대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태도이기도 했던 "정신적 이민"에의 요구다. 타국 땅으로 가는 것은 또한 전적으로 개인적이고 내적인 무엇을 의미하기도 하고 믿고 생각하는 종래의 노선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분명해 보이는 것의 한계선을 넘어서 밀고 나가는 것이나 새롭고도 미지의 길을 열어 젖히는 뜨거운 물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니이체적 표현으로 하자면 그것은 "우리 자녀들의 땅"에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땅"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시간적 이민이며 지리학적 이민이 아니다. 낯선 땅은 미래 가운데에 놓여 있으며 "현재를 넘어선" 나라다. 그리고 우리가 이 낯선 타국 땅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또한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도 친근한 것마저도 낯설음의 요소를 포함한다는 인식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실존주의가 인간 유한성의 표현으로서 채택한 바의 것이기도 한 세계 속에서 오직 홀로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적 체험이다.

여러 가지 의미로 볼 때 나는 항상 고국과 낯선 타국 사이에 서 있다. 나는 결코 외국에 대해 배타적으로 결정한 적은 없었으며 "이민"의 두 양태를 모두 경험했다. 나는 실제로 내가 고국을 떠나기 훨씬 전부터 개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미 한 "이주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산천경계나 언어, 전통, 역사적 운명의 공유성으로 보나 조국의 땅에 내가 뿌리박고 있는 것은 항상 너무나 본능적이어서 나는 왜 그것이 특별한 주목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국민교육에 있어서나 지적 창출에 있어서 문화적 민족주의를 과대하게 강조하는 것은 민족적 단결에 대한 불안정의 한 표현이다. 나는 이 같은 과대강조가 경계선(외적이거나 내적이거나)으로부터 밀려온 개인들과 자기자신과 남들에게 스스로의 애국심을 합리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박적으로 느끼게 개인들 가운데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 또한 경계선에로 되돌아가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면서부터 항상 독일인임을 철저히 느껴왔기 때문에 충분히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처할 수 없었다. 출생과 운명의 조건을 제대로 물어볼 수 없었다. 우리는 대신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주어진 이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이 사회와 정치를 평가하고 지적, 도덕적 수양과 문화적, 사회적 삶을 평가하는 척도인가? 그 환경에 태어난 것은 그런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그 까닭은 물음이 그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전제들이 대답으로 그릇되게 취급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의 악순환 속에 갇혀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인 바, 그 악순환이란 우리의 민족적 본질의 힘에 대한 확신의 결여로 판명되어 언젠가는 민족적 삶의 무서운 공허성으로 끝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민족적 감정으로 칭송되고 있는 그것이다. 나는 그 같은 민족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대를 나의 프랑크푸르트 공개교육 강좌 "사회교육(Socialpädagogik)"에서 발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민족주의의 문제는 주로 경제적 정치적 문제다. 나는 그것에 대해 변화된 태도를 보여왔다. 전체주의 국가와 교회의 요구에 관한 한 항목에서 나는 유럽에 있어서의 군사적 전체주의의 원인과 그것이 자본주의의 붕괴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논하였다. 나의 글 "힘의 문제(Das problem der Macht)"는 힘의 의미와 한계를 그것이 존재에 대한 일반적 물음, 곧 존재론에 관련된 것으로 다루고 있다. "사회주의적 결단"에서 나는 민족주의의 인류학적 뿌리와 정치적 결과를 들춰내어 보이고자 했다. 1차 대전의 경험은 나의 입장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민족적 힘에의 의지가 가진 악마적이고도 파괴적인 성격을 드러내었는데 특히 그들의 민족적 원인을 가진 정의 가운데에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전쟁에 열광적으로 뛰어들었던 자들에게 그러했다. 비록 결과적으로 민족주의가 불가피하다고 느끼고는 있지만 (혹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는 유럽 민족주의를 유럽의 비극적 자기파괴의 도구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통찰이 결코 나를 엄격한 의미의 평화주의자로 만들지는 않았다. 평화주의의 어떤 형태는 그 대표자들의 나약한 성격 때문에 내게는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승리의 개가를 올려서 만족에 빠진 국가들이 제창하는 류의 평화주의는 이데올로기적이고도 위선적인 오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국가들의 평화주의는 정직하기에는 너무 실리적이기 때문이다. 형식적 평화주의는 그 의도와는 반대되는 결과로 끝나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세계에서는 국제평화뿐만 아니라 국내평화까지도 평화를 교란하는 자를 통제하는 힘에 달려있다. 나는 민족적 힘에의 의지를 정당화시키면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 배후에 인류의 자기파멸을 막을 수 있는 힘이 틀림없이 있는, 내적 연관을 가진 그 어떤 세력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오늘날 "인류"라는 이념은 공허한 표현 이상의 무엇이다. 그것은 경제적, 정치적 현실이 되었다. 왜냐하면 세계의 어느 부분의 운명은 다른 어떤 부분의 운명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류 통일에 대한 날로 커가는 인식은 말하자면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이 속하게 되는 신의 나라에 대한 믿음에 담긴 진리를 표출하고 또 고대한다. 인류 통일을 목표로 삼는 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고로 신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가 지금 살고 있고, 미국인의 호의를 입고 있는 이 신대륙의 경계선에서 비극적 자기분할에 빠진 유럽의 영상보다는 하나의 인류라는 영상에 더 가까운 한 이상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행복했다. 그것은 모든 국가와 민족의 대표자들이 그 시민이 되어 살 수 있는 하나의 국가라는 영상이다. 비록 여기에서도 이상과 현실의 간격은 무한히 깊고 그 영상은 때때로 어두운 그늘 속에 가리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것은 "인류"라고 불리는 역사의 최고의 가능성에 대한 일종의 상징이며 또한 그 자체가 현실을 넘어서는 것을 가리키는 무엇 - 신의 나라 - 인 것이다. 그 최고의 가능성 속에서 고국과 타국 사이의 경계선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회고 : 경계선과 제한


정신적 물질적인 인간 실존의 많은 가능한 양태들이 이 책에서 논의되었다. 어떤 것들은 내 전기의 한 부분이면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도 있다. 또 상당한 부분은 나의 생애와 사상의 줄거리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취급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논의한 각각의 가능한 양태를 나는 다른 가능성과의 관계, 즉 그들이 서로 대립되는 길이자 서로 상관될 수 있는 길이기도 한 관계성 속에서 논의해 왔다. 이것이야말로 변증법으로서의 삶의 각각의 가능성들은 저절로 경계선에로 흘러들며 또 그 경계선을 넘어 그 가능성들을 제한하고 있던 무엇과 만나게 되는 곳으로 흘러들게 된다. 많은 경계선 위에 서있는 사람은 동요와 불안정과 갖가지 실존의 내적 제한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평화와 안정과 완성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사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서 왜 내가 열거한 경험과 생각들이 결국 단편적이고 임시적일 뿐인지를 잘 말해준다. 이런 생각들에 명확한 형태를 주고자 한 나의 열망은 내가 신대륙의 풍토 위에 던져졌다는 경계선적 운명에 의해 다시 한 번 꺾어지고 말았다. 그 같은 일을 최선을 다해 완수할 수 있을 것인지는 나이 50이 가까워지자 더욱 불확실한 희망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일이 성취되든 안 되든 인간의 행위의 경계선 - 이제 더 이상 두 가능성 사이의 경계선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인간의 가능성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 곧 영원의 손길에 의해 모든 유한한 것 위에 내려진 제한 - 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영원, 그것의 앞에서는 우리 존재의 한복판마저도 단지 한 변두리이며 우리들의 성취의 최고의 수준까지도 한 조각의 단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역자 후기


20세기가 낳은 세계 최고의 지성,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1886년 독일 브란덴베르그의 슈탈체델에서 태어났으며 베를린 대학, 튀빙겐 대학, 할레 대학 등에서 공부한 후, 베를린 대학, 마르부르그 대학, 푸랑크푸르트 암 마인 대학 등에서 교수로 활약하다가 나찌 정권에 의해 국외로 추방당했다. 1933년 라인홀트 니이버 형제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이민온 그는 유니온 신학교와 콜롬비아 대학을 거쳐 1955년에는 하바드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교수했으며 그로 인하여 하바드 대학 내에 한때 종교부흥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시카고 대학을 마지막으로 1965년 79세의 나이로 별세한 그는 그리스도교적 전통에 서있었지만 한 종교의 폐쇄적 체계에 빠지지 않았으며 그의 철학적 깊이는 서구 정신사를 그 최고봉에 있어서 관철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그의 실제에 걸맞는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아직 그가 생존하고 있던 때부터 그를 주목하는 신학자나 철학자들이 있어 간간이 그의 저서가 번역 소개되었는데 여기에 번역 소개하는 그의 철학적 자서전 "경계선에서(On the Boundary)"는 아직까지 국내에 번역, 출간된 바 없는 것으로 필자가 약 20년 전 대학 졸업 직후 공부삼아 번역했던 것이다. 이번에 낡은 스프링 노오트에서 찾아내어 신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입력, 소개한다. 개인적으로는 틸리히의 온갖 저서들을 젊은 열정으로 탐독하고 번역되지 않은 것들은 원서를 구해 밤을 새워 읽던 시절이 새삼 그립기도 하고 덧없이 흘러간 세월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에 심취했던 주제들에 다시 한번 몸을 담그어 보고 당시에 느끼지 못했던 것을 새로운 깊이로 느껴본 즐거운 시간이 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직역이 많은 셈이라 난삽해 보이거나 얼른 의미가 간취되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부분은 몇 번 되풀이해서 읽으면 곧 의미가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정리하면서 오역을 더러 바로잡기도 했는데 놓친 오역이 역시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틸리히의 정신적 편력을 개관하는 데에는 크게 부족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참고로 국내에 번역된 틸리히의 다른 번역서들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궁극적 관심 : 현대총서

문화의 신학 : 현대총서

(현대의) 종교적 상황 : 전망신서

새로운 존재 : 현대신서

종교란 무엇인가? : 전망사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 한국신학연구소

그리스도교 사상사 : 한국신학연구소

문화와 종교 : 전망사

기독교와 세계종교 : 현대신서

조직신학 : 성광문화사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