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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1999/10/05 (01:19)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37
Delete Modify 신규탁 Access : 8511 , Lines : 40
시간, 역사, 그리고 종말 - 동양의 시간인식과 역사의식
시간, 역사, 그리고 종말 - ② 동양의 시간인식과 역사의식

순환의식으로 나타난 삶과 죽음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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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 연세춘추에는 ‘서양의 시간인식과 역사의식’이란 주제를 가지고 박순영 교수가 쓴 글이 실렸다. 동양과 서양이 시간을 각각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그 글 속에선 이렇게 쓰고 있다. “서양의 시간의식은 종교적인 의미를 함축하면서 역사의식과 역사철학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러나 비서양권의 시간의식은 이와는 유를 달리한다. 동양의 자연관은 순환적인 구조에서 발전적이거나 목적론적―종말론적 시간이해를 산출해주지 않는다. 인간의 끝은 자연이고 자연의 끝은 인간이라는 발상에서는 서양의 시간 이해와는 다른 사고를 창출하게 되었다”.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동양 문화권과 서양 문화권에서 시간을 각각 어떻게 이해하고 보아왔는지에 대한 총괄적인 이해를 할 수 있다. 이번 호에서 나는 동양의 순환론적 시간 이해가 무엇을 말하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줌으로써 바로 앞 글의 총괄적 이해를 돕고자 한다. 나아가 문화의 맥락에 따라 다양한 시간관이 존재한다는 앞 글의 설명을 바탕으로, 동양의 순환적 시간관과 서양의 그리스적·과학적 시간관을 강건너 불보듯이 떨어져 구경했으면 한다. 그리하여 시간 이해에 대한 일방통행을 지양하고 문화의 맥락에서 그리고 역사의 맥락에서 시간을 보았으면 한다. 동북아시아에서의 20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고단한 시절이었다. 중국에서의 아편전쟁, 명치유신, 일본 식민지, 미 군정, 6·25 전쟁….
앞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양의 시간이해는 다분히 ‘순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이고도 많이 알려진 실례로 우리는 윤회사상을 들 수 있다. 생명을 가진 어떤 존재를 생각해 보자. 현실이라는 한 단위의 시간 속에서 보면 모든 생명체는 생성에서 소멸로 향하는 변화의 과정에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상적인 고찰일 뿐이지 근원적인 고찰을 해보면 생명체는 순환적 틀에서 영원히 자기 모습을 간직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는 기원전 1천5백여년 전에 형성된 고대 인도 사람들의 시간관으로 베다(veda)문헌에 기록되어 오늘에 전한다. 모든 생명체는 어느 한 상태를 기준으로 보면 무상하지만, 순환적인 구조에서 보면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런 고대 인도 사람들의 사유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동북 아시아에도 들어와 이 지역 사람들의 시간 이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 생명의 운명이 순환적인 구조 속에서 돌고돈다는 생각이 확장되어 한 왕조나 세상의 운명도 그렇게 돌고 돈다는 데에 까지 확산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이 세상에 만들어진 모든 것은 생(生)·주(住)·이(異)·멸(滅)이라는 과정을 겪는다고 한다.
이러한 시간 인식은 사회제도에까지 깊숙히 간여했다. 고대 인도의 카스트제도에서는 한 개인의 신분을 넷으로 나누어 각자의 계급에 충실하도록 한다. 이런 사상은 고대 인도인의 업(karma) 사상과 결부되어 사회윤리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현재 노예 계급으로 태어난 것은 과거 세상에서 그럴만한 짓을 해서 현재 그렇게 된 것이므로 누구를 원망해도 안되고 그렇다고 그것을 버리려고 해도 안된다. 다만 현재의 계급에 요구되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여 다음 세상에 좋은 계급에 태어나기를 기약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과거·현재·미래를 단위로 하는 인과론적 사유도 큰 몫을 했다.
그런데 순환적인 구조로 시간을 보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의 유형이 있다. 하나는 이 세상을 살다가 죽고나서 그 뒤에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했던 유형이 있고, 다른 하나는 자연에서 와서 이 세상을 살다가 죽으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유형이다. 전자가 인도의 특징이라면 후자는 동북아시아의 특징이다. 다음에 예로 드는 두 시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첫째>
삶과 죽음을 알려고 하는가
저 얼음과 물을 들어 비유하련다.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
죽으면 반드시 태어나며
나면 다시 죽는다.
얼음과 물은 서로를 해치지 않고
삶과 죽음은 둘 다 좋은거다.

<둘째>
때는 정묘년 구월.
하늘은 차갑고 밤이 깊어 바람은 쓸쓸한데
기러기떼 날아가고 초목들도 낙엽되어 떨어진다.
나 연명은 이제 임시로 거처하던 여인숙을 떠나
내 집으로 영원히 돌아가건만,
정든이들이 슬피 울어 오늘밤 송별회를 여는구나.

<첫째> 시는 당나라 한산의 시이고, <둘째> 시는 위진남북조 시인 도연명의 글이다. 한산의 시에서는 삶과 죽음을 순환운동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반영된 시간이란 순환적인 구조를 갖는다. 우리들의 삶은 그런 구조속에서 출몰한다. 태어났다가는 죽고, 죽었다가는 다시 태어나는 이런 순환적인 인생관은 물론 『열자』에도 보인다. 그러나 이 점이 문헌학자들로 하여금 『열자』라는 책의 일부는 불교전래 이후에 형성되었다고 지적하게 하였다. 도연명의 글은 자제문(自祭文)으로 불리는 것으로 자신의 제문을 살아있을 때에 본인이 쓰는 것이다. 이 당시에는 이렇게 자제문을 쓰는 게 유행이었다. 도연명은 죽음을 영원한 안식처로 생각하고, 삶이란 나그네가 하루밤 쉬고 가는 여인숙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죽어서 간 그곳에서의 삶을 말하지는 않는다. 낙엽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듯이 죽음이란 삶의 뿌리로 이해했을 뿐이다.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가는 것이다. 다만 그것일 뿐이다.
동양의 이런 모습은 시간을 발전적이거나 혹은 목적론적으로 보는 서양인의 눈에는 특이하게 보였다. 그 특이함은 마침내 동양사회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연구자들 사이에 이론화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 연구자의 하나가 막스 베버이다. 그가 보기에 동양사회는 끊임없이 왕조사의 순환반복만 되풀이되었지 거기에는 어떤 발전이나 진보가 없었다. 이런 입장은 마침내 동양을 정체된 사회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동양이해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진행된 서양 제국주의의 동양 침략을 거드는 쪽으로 남용되기도 했다. 동양 침략을 세계사적 발전 진보의 확산과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서양근대 문명에 바탕이 되는 그리스적인 시간인식이 깔려있다. 지난 주 연세춘추에서 박순영교수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시간의 축적 과정이 곧 발전이라는 진보 사상으로 이어져서 과거와 현재의 집합은 미래의 더낳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미래는 인간의 노력으로 형성 가능하다는 낙관주의를 낳게 했다”. 여기에 대해 박교수는 “이런 시간 인식에 토대를 둔 서양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20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치지 않았음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다”고 비평을 했다. 나는 이 비평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박교수의 말대로 인간이 시간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는 문화적인 맥락에 따라 달리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우리는 그리스 철학적인 시간인식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였다. 문화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시간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발전적·누적적·직선적 시간 이해가 여타의 것을 잠식하여 거대한 폭력으로 등장하였다.
돌이켜보면, 동북아시아에 있어 20세기는 엄청난 격동의 시기였다. 그 격동의 저변에 순환적인 시간인식과 발전적 시간인식이 전통과 현대라는 갈등구조와 축을 함께하면서 진행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느 한 지역이나 문화권에서 생긴 시간 이해 방식으로 온 천하를 통일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http://chunchu.yonsei.ac.kr/chunchu/view_article.phtml?id=136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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