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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5/04/19 (18:36) from 129.206.196.127' of 129.206.196.127' Article Number :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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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문화: 인류학에서 본 인간




* 아래의 글은 <대우재단 공동연구: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결과로 단행본 {인간이란 무엇인가?}(장회익외 공저, 민음사, 1991)에 실려 있는 것을 옮긴 것임.(이문웅)  

<인간과 문화: 인류학에서 본 인간>

 -- 이 문웅 (서울대: 인류학)    

목 차

1. 인류학적인 시각
2. "인간"의 개념
 (1) 단순한 동물로서의 인간
 (2) 문화를 가진 동물로서의 인간
 (3) 인간이 지닌 문화특성들의 꾸러미
3. "문화"의 개념
 (1) 초유기체론적인 시각
 (2) 관념론적인 시각
     가) 인지체계로서의 문화
     나) 구조체계로서의 문화
4. 인간과 문화와의 관계
 (1) 인간일반과 문화일반간의 관계
 (2) 특정 인간과 특정 문화간의 관계  
     가) 문화의 다양성
    나) 문화의 상대성
    다) 문화의 초유기체성
5. 인간의 행위에 대한 과학적인 해석
 (1) 주체적인 행위자로서의 인간
 (2) 촉매자로서의 인간
6. 인류의 미래: 문화적인 전망
 (1) 적응기제로서의 인간
 (2)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류의 문명
<참고문헌>

1. 인류학적인 시각

 본 연구는 인류학적인 시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가능한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지드라도 이에 대한 대답은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다루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이 시각이 대답의 성격을 어느 정도 규정하기도 한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할 것이다.

 우리의 접근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류학이 어떤 성격의 학문분야인지를 개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 논문에서 던져진 질문에 대한 대답의 성격을 어느정도 규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의 다른 학문 분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류학은 사회 문화 현상을 다루고, 문화과정에서 연구를 위한 생자료를 얻는다. 그러나 인류학은 사회문화현상이 왜 그런식으로, 그 시기에, 그 장소에서 우리가 관찰하는 바 데로 일어났는지를 해명하고, 또한 그것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예측함에 있어서, 기술, 경제, 사회조직, 정치, 종교 등 사회문화체계의 다른 영역들과 관련지워서 총체론적(holistic approach)으로 해명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는 인류학 특유의 접근방식을 엿볼 수 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는 인류학은 "인간(또는 인류)에 관한 과학적인 연구" (science of man/mankind)라고 하겠지만, 이 말은 어떤 성격의 인간을 지칭한 것인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인류학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는 인간은 단지 생물학적인 유기체로서의 인간, 즉 영장류에 속하는 한 종(species)의 동물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가진 동물로서의 인간(human being)을 말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주로 생물학적인 연구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유기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일차적으로는 문화와 관계짓지 않고서도 연구대상이 된다.

 그러나 인류학에서는 생물학적인 접근과는 달리 인간고유의 능력인 "상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독특한 생활양식을 가진 동물로서의 인간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이것은 인류학의 2대 연구분야인 "體質人類學"(physical anthropology)과 "文化人類學"(cultural anthropology) 중 후자에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체질인류학에서도 문화는 여전히 중심적인 개념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문화인류학이 인간의 문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는 점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사회문화현상들이 왜 그런식으로 나타났는지를, 그리고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는 어떤 구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문화는 왜 변하고, 또 어떤 식으로 변해가고 있는지를 파악함으로서 인류의 생존전략에 지침서를 정립하려는 노력에 토대를 마련해주려고 한다.

 다른 한편, 체질인류학은 인류의 기원과 진화과정, 그리고 인류의 체질적인 다양성을 다루고 있다. 인류가 초기의 화석인류에서부터 현대인류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진화과정을 거쳐 나오는 데에는 문화 또는 문화적인 수단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인류는 언제 어디에서 살았든 간에 문화적인 수단과 함께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체질적인 특성들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현생인류의 체질적인 차이를 해명하는 데에는 그들이 접한 문화적인 전통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이와같이 체질인류학은 특정의 문화적인 전통에서 살아온 인간 또는 인류의 체질적인 특성들에 관심을 두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런 특성들은 그들의 문화와 관련짖지 않고는 적절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문화는 체질인류학 분야에서도 여전히 핵심적인 개념으로 남아있다.

 이와같이 "문화"는 문화인류학과 체질인류학 양자를 모두 포함한 인류학 전반에 걸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문화를 가진 유일한 동물"로서의 인간에 논의의 촛점을 맞출 것이다. 인류학이 인간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은 동물계에서 "인간 동물" (human animal)을 "인간"(human being)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계기가 바로 "문화"라는 점에서 인류학은 곧 "문화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a scientific study of culture)로 규정하고 있는 인류학자도 있다. 사실 인류학자 레스리 화이트 (Leslie A. White 1949b)가 인류학은 아예 "文化學"(culturology)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할 것이다.

 문화를 고려하지 않은 인간이란 단지 생물학적인 유기체로서의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의 생물학적인 유기체는 오늘날의 용어를 빌린다면 하드웨어(hardware)로 간주될 수 있겠고, 바로 그 인간이 무었을 생각하고 또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가의 문제는 소프트웨어(software)에 비유될 수 있겠다. 소프트웨어 없는 하드웨어란 아무 쓸모없는 기계덩어리에 불과하다. 거기에 어떤 식으로든지의 프로그람을 주입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않는다. 물론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가 가진 능력에 기초하여 고안되는 것이지만 양자간에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즉 하드웨어가 어떤 기능을 수행할 것인지의 문제는 전적으로 어떤 소프트웨어를 접하느냐에 달려있다.

 이와 같이 문화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시해주는 소프트웨어라고 하겠다. 바꾸어 말한다면 인간은 하드웨어로서의 "유기체"와 소프트웨어로서의 "문화"를 가지고 있기에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공동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다. 소프트웨어인 문화를 갖지 않은 인간을 생각할 수 있을가? 아마도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정신질환자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는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는 단지 사람의 형체를 가진 유기체일 뿐이다.

 인류학의 연구주제로서의 인간은 이와 같이 하드웨어(유기체)와 소프트웨어(문화)가 복합되어있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지만, 사실 사회에 따라서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은 각양각색이다. 이것은 하드웨어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소프트웨어' 즉 어떤 '문화'를 접했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이와같이 우리가 생활양식으로서의 소프트웨어를 문제삼는다면 순수한 유기체 자체만으로서의 하드웨어와는 상관없는 문화적인 측면에 우리의 관심은 국한된다. 이것이 바로 "문화를 가진 인간"을 연구하는 인류학이 "문화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science of culture)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사회문화현상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일어난다. "생활양식" 으로서의 문화는 정의 그데로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표현된다. 관념적인 측면도 사회구성원의 행위나 말 또는 문자와 같은 문화적인 수단을 통하여 밖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결코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사회문화현상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자칫하면 이것은 "인간은 행위의 주체"이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은 사회문화현상의 결정자(determinant)"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우리가 어떤 사회문화현상을 해명하려고 할 때, 그것이 누구에 의해 이루어 졌는가라는 질문은 지극히 사실적인 질문이다. 이것은 과학자의 해답을 기다릴 것도 없고 여기에 과학자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을 것도 없다. 만약 이런 의미에서의 행위의 "주체"를 찾는 일은 과학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것은 또한 사회문화현상의 해명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어떤 사람(A)이 몸이 아파 병원으로 찾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인류학이 주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병원을 찾아간 사람이 A씨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왜 우선 약방을 찾거나, 또는 점쟁이나 무당을 찾지 않고 병원을 찾아갔는가?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은 무었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에 인류학자들은 더 많은 주의를 집중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과 그의 행동의 준거기준이 되는 문화 (culture 또는 cultural grammer) 간의 관계를 설정하게 되고, 인류학은 바로 후자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우리면서 해답을 찾아나선다.

 이런 인류학적인 시각에서 우리는 "인간이란 무었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찾는데 있어서 우선 인간을 어떤 맥락에 두고 볼 것인지를 명확히 해야하고, 또한 인간의 성격을 밝히는 데에는 문화의 개념을 먼저 논의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 "인간"의 개념

 흔히 우리는 일상 용어로나 학술적인 용어로서의 "인간"이라는 용어를 쓸 때 그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뚜fut한 구분 없이 쓰고있는 것이 보통이다. 즉 인간을 어떤 측면에서 볼 것인지, 또는 인간을 어떤 맥락에 두고 볼 것인지에 따라 우리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인간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연구대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각이나 맥락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논의를 계속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개념의 혼란을 반복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인간의 성격을 파악하는 기초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단순한 동물(mere animal)로서의 인간

 인간은 영장류에 속하는 한 종(species)의 동물임이 틀림없다. 생물학자들이 다른 종의 동물과 구분되는 바의 인간유기체(human organism)를 다룰 때 그들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의 인간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단순한 인구통계에서 잡히고 있는 인간도 바로 이런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통계가 좀더 전문화되어 어떤 사회학적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의 수로 잡히는 것이라면 이는 단순한 동물(mere animal) 이상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측면에서의 인간은 그가 어떤 문화를 가졌거나 운반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지칭되는 인간을 말한다.

 생물학적인 유기체를 다루는 의학에서는 문제가 좀 다르다. 즉 분명히 말해서 의사들은 인간의 신체를 다루고 있다. 그가 다루는 것이 곧 인간의 생물학적인 유기체라는 점에서 흔히 우리는 의사들에게는 유기체만 보이고 "문화"의 개념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의사가 다루는 환자의 신체는 단순한 동물'로서의 인간 이상의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않된다. 인간의 유기체에는 그의 행위양식 또는 그가 함께 살아온 생활양식이 그데로 반영되어 있다.

 즉 문화라는 수단을 통해서 환경, 특히 자연환경에 적응해오는 과정에서 인간의 유기체(신체)는 독특한 방향으로 적응적인 변모를 거듭해왔고, 현재 그가 지닌 체질형은 바로 그런 적응과정의 결과라는 점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의사는 환자를 치료할 수가 없을 것이다. 환자가 어떤 생활환경에 살고있는지, 어떤 식생활을 하고 있는지, 어떤 계층에 속하고, 어떤 직업을 갖고있는지 등의 생활배경에 대한 지식 없이 단순히 '의학적인 측면'에서만 치료한다는 것은 실패를 자초할 뿐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전혀 문화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 없이 단지 '외과적인' 수술에 의해서만 치료가 가능한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인간의 질병 그 자체가 '생활양식'이라는 문화적인 변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접했을 때 우선 그의 생활배경을 주시하는 것과, 치과의사가 치아상태만으로도 (비록 외모로는 구분하기 어렵지만) 환자의 사회적 배경이나 심지어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것 등은 모두 인간의 체질적인 특성이 단순히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생물학적인 특성으로서의 하드웨어만의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의 소프트웨어와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의 결과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여기서 논하고 있는 '단순한 동물'로서의 인간의 전형적인 예가 갇 태어난 신생아의 경우라고 하겠다. 이는 분명히 출생, 사망 등을 포함하는 인구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人口動態統計(vital statistics)에 잡히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 신생아가 앞으로 어떤 국적을 가지고 어떤 사회계층에 속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는 결코 생득적인 것이 아니다. 귀족의 지위나 카스트 사회에서와 같이 사회적인 지위가 생득적으로 규정되는 사회가 이의 예외적인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와 같은 폐쇄된 계급제도(closed class system) 그 자체가 문화적인 변인이라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할 것이다. 이런 사회의 부모에게 태어난 신생아가 뜻하지 않은 상황에 접어들어 전혀 다른 문화권의 양부모 가정에서 성장하게 되었다면, 그는 생물적인 부모의 것과는 전혀 다른 인간형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2) 문화를 가진 동물로서의 인간(human being)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도대체 무엇일가? 인간은 생물 분류학상 분명히 영장류에 속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인간은 독특한 동물이고, 사실상 영장류계, 또는 넓게는 생물계의 지배자(master)가 되었다. 이것은 무었 때문일까? 어느 방향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각가지의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불을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은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더 높은 지능을 가졌기 때문이다." 대답은 얼마든지 더 길어질 수가 있을 것이다.

 다른 동물의 행동은 본능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같은 종(species) 안에서의 행위의 차이란 극히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런 행위의 차이는 환경에 체질적으로 적응하는 과정에서 얻은 변용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나 인간사회에서는 집단에 따라 생활양식에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라마다는 물론이요, 같은 나라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사회계층에 따라, 도시와 농촌에 따라, 민족집단별로 상이한 생활양식을 보이고 있는 것은 무었때문일까? 이것은 본능적인 것도, 생득적인 것도 이니요, 후천적으로 사회화과정에서 학습에 의해 얻은 것들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이고, 다른 동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고유의 것이다. 즉 다른 동물의 경우에는 단지 본능에 의거하여 행동하고 자연환경의 제약성에 부닥칠 때에는 생물학적인 적응으로 이에 대처한다.

 한가지의 예를 일본 토착의 짧은꼬리 원숭이(Japanese macaque)에서 들어보자. 이 동물은 원래 더운 지역에 잘 적응한 종이었지만, 먹이를 찾아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일본 북부의 혹한지역에까지 도달하였다. 아마도 열대지역의 원숭이를 갑짝이 혹한지역에 떨어뜨려 놓는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북부의 혹한지역끼지 도달한 일본의 짧은꼬리 원숭이들은 이런 자연환경에 생물학적으로 적응하면서 추위를 견뎌낼 수 있도록 긴털을 가진 형태로 변용되었고 눈속에서도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면서 현재의 시식지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는 물론 자연환경에 체질적으로 적응하는 점도 없지는 않겠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생활과정에서 당면하는 문제들을 문화적인 수단에 의해 해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추우면 불을 피거나, 옷으로 추위를 막고, 추위를 이겨내는 데에 유리한 방식의 주거를 개발하여 환경의 제약성을 극복한다. 혹시 자연적인 또는 기후풍토적인 조건이 변하여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지역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동물의 경우에서와 같이 쉽게 다른 곳으로 물러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한 온갖 지혜를 짜내어서 생활터전을 개선해 나간다. 이런 과정에서 인간의 생활양식은 변해나가고, 더욱 정교화(elaboration)된다.

 이런 지혜는 어디에 근거한 것일가? 이것은 바로 인간의 경우 지식의 축적(accumulation of knowledge)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고유의 능력이다. 이런 상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독특한 생활양식, 즉 문화를 가진 동물로서의 인간(human being), 인간의 이런 특징이 바로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구분짓는 근본적인 차이를 제공해주고 있다.(L.A.White 1949b: 제II장 참조)


(3) 인간이 지닌 문화특성들의 꾸러미(capture of culture)

 때로는 '인간'이라는 용어가 생물학적인 유기체 그 자체를 지칭하기보다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화특성들의 뭉치 또는 집합체를 가르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단순한 동물'로서의 인간은 아무런 문화도 갖지않은 채의 생물학적인 실체(biological entity)만으로서의 인간이였으나, 여기에서는 그의 생물학적인 유기체와는 상관없이 개인이 가지고 있는, 또는 개인이 운반하고 있는 문화특성들(culture traits)만을 가르킬 때 사용되는 개념이다. 개인의 '역할'과 '지위'는 이의 좋은 예가 되겠다. 여기에는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백인이냐 흑인이냐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어떤 식성을 가졌는지의 생리적, 심리적 특성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고,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맥락에서의 인간을 말한다.

 물론 모든 개인은 그의 생물학적인 유기체와 그가 습득한 문화특성의 복합임이 틀림없다.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또는 흑인인지 백인인지는 그가 습득해서 운반하고 있는 문화특성들의 성격을 좌우할만지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맥락에서는 그가 지니고 있는 문화특성만을 지칭할 때도 있다. 여기서 논하고 있는 인간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의 인간을 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인구동태통계(vital statistics)에 잡히는 인간은 '단순한 동물로서의 인간'이라는 점을 밝혀놓았다. 그러나 많은 경우의 통계조사에 잡히는 인간은 '단순한 동물' 이상의 인간이다. 즉 어떤 개인의 존재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닌 문화특성만을 문제삼는 것이다. 즉 그가 기혼인가 미혼인가, 그의 직업은, 그의 교육적인 배경은, 그가 소속한 계층 등만을 문제삼아 통계적인 목적으로 문화특성을을 파악하려 했을 때에는 생물학적인 유기체를 일단 고려하지 않은 채의 '인간' 또는 그가 운반하고 있는, 지니고 있는 문화특성들만이 이런 통계에 잡히게 된다. 사실상 체질적으로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고, 외모로 봐서 거의 구분이 되지않는 일본인과 한국인(재일교포)이 섞여살고 있는 일본사회에서 "한국사람은 어떻고, 일본사람을 어떻다"는 말을 했을 때의 '사람'은 사실상 문화적인 측면에서만 말하는 것이지 그들의 생물학적인, 체질적인 특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본다면 이상의 세가지 종류의 인간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문화를 고려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첫번째 형('단순한 동물')은 두번째 형('문화를 가진 인간')과 세번째 형('문화특성들의 꾸러미로서의 인간')으로 부터 구분되고, 다시 문화를 가진 '인간일반'(두번째 형)과 '특정 개인'을 가르키는 의미에서의 인간(세번째 형) 등 두가지로 구분될 수가 있다. 이 중에서 인류학은 바로 사람(man)을 인간(human being)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계기가 "문화"라는 관점에서 문화를 갖지 않은 채의 단순한 생물학적인 실체로서의 인간에는 관심이 없다.


3. "문화"의 개념

 아래에서 우리는 문화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좀 더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인간이란 무었인가"라는 질문은 "문화란 무었인가"라는 질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서 후자에 대한 해명이 전자에 대한 해답을 얻는 데에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나 학술적인 용어로 "문화"라는 어휘를 많이 쓰지만, 대체로 분명한 개념규정이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가장 넓은 의미로서 우리가 흔히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인간사회의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culture as a way of life)이다. 더러는 사전적인 의미에서 문화를 "인간의 지적인 활동의 총집합체"로 풀이하기도 한다. 이는 의식주를 비롯하여 기술, 학문, 예술, 도덕, 종교 등을 포함하여 인간이 학습에 의하여 사회로부터 습득한 생활양식(way of life 또는 lifeway)에 대한 총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초기의 인류학자 타일러(E.B.Tylor 1871)가 이제는 인류학의 고전이 되어버린 그의 저서 <원시문화>의 제1장을 열면서 "문화는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 관습, 그리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해 습득된 다른 모든 능력과 습관을 포함하는 복합총체(complex whole)이다"라고 규정한 문화의 정의는 여전히 거의 대부분의 인류학 교과서에서 인용되고 있다.

 우리가 문화를 "학습된 생활양식"으로만 규정한다면, 문화가 과연 인간 고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인간이외의 다른 동물중에서도 지능이 비교적 높은 영장류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원숭이(monkey)나 유인원(ape)의 사회에도 "문화" 또는 "원문화"(proto- culture)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과 다른 동물과의 차이가 단순한 정도의 문제(a matter of degree)일가, 아니면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a matter of kind)일가? 사실 챨스 다윈(C.Darwin 1904: Chaps. 3,18 참조)도 정신적인 능력 (mental faculties)의 측면에서 인간과 다른 고등 포유동물간의 차이는 근본적인 차이가 아니라, 단지 더 높은 지능을 가졌다는 의미에서의 '정도의 문제'라고 진술한 바도 있지만, 그렇다면 인간과 다른 동물간의 차이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타일러는 그의 문화의 정의에서 문화를 '인간 고유의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였다. 사실 다른 동물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의 예로 우리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형제와 사촌간을 구분하고, 일요일과 월요일 등으로 요일을 구분할줄 알고, 비록 그것이 인간이 소화시킬 수 있는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어서는 안되는 음식으로 구분하는 등의 식생활에 나타나는 터부의 개념, 어떤 물건의 가격에 대한 개념 등은 다른 동물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종교 및 신앙의 분야는 거의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주술적인 기법에 의해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심지어는 살해하기도 하고, 성수(holy water)와 같이 어떤 것이 "성스러운 것"(the sacred)인지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갖고 있지만, 다른 동물의 경우에는 이런 능력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차이가 어디에 연유한 것인가? 적어도 그 차이가 정도의 문제가 아니고, 근본적인 차이라는 점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간과 다른 동물간의 차이를 여러가지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겠지만, 인간 고유의 "문화"의 개념과 관련하여 우리는 여기서 인류학자 레스리 화이트(Leslie A.White 1949b & 1959)의 "상징"(symbol 또는 symboling)에 관한 논의에 잠간 귀를 기우려 보기로 하자.

 화이트는 인간행위의 기초를 상징에서 찾고 있다.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인위적으로 의미를 창조하여 이를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부여하고, 또한 그런 의미를 포착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중시하고, 이것을 그는 "상징을 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symbol)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수"가 이의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이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액체이지만 여기에 인간이 '성쓰러운 것'이라는 의미 또는 가치를 창조하여 그 액체에 부여한 것으로, 그 의미나 가치는 결코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포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비감각적인 수단에 의해 의미를 창조하여, 부여하고, 또한 그런 의미를 포착하는 '상징행위'(symboling)를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줄뿐만 아니라, 상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형태로 화이트는 '뜻을 분명히 전할 수 있는 말'(articulate speech)을 들고 있다. 이런 능력은 인간 고유의 것이고, 이것이 곧 인간의 행위를 다른 동물의 행위로부터 구분짓는 근본적인 바탕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동물의 경우에도 집단의 구성원들간에 의사소통을 원활히 한다. 외부의 적이 접근해오는 것을 알려서 피하게 하고, 기쁨을 표시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인위적인 의미를 창조, 부착, 포착하는 행위"가 아니라, 단지 "하나가 다른 어떤 것을 가르키는" 의미에서의 "기호"(sign)행위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감각기관으로 포착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보아서, 만져봐서, 냄새로, 맛으로 포착될 수 있는 의미에 속한다. 인간의 경우에는 이런 기호행위의 범위를 넘어서 비감각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포착될 수 있는 의미까지도 상징행위에 의해 다른 사람으로 부터 습득한다.

 이것이 바로 다른 동물의 행위에서는 '지식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반면에 인간의 경우에는 시간을 통해 부단한 지식의 축적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다른 동물의 경우에도 생활과정에서 새로히 터득한 사실적인 지식들이 있다. 또한 이것은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이 직접 보고 배워서 집단 전체에 퍼지기도 한다. 이런 예로 유명한 것이 일본의 짧은꼬리 원숭이들이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먹는 생활방식이다. 먹이로 던져준 고구마를 움켜쥐고 달아나다가 우연히 바닷물에 떨어뜨리게 되면서 흙과 알고구마를 분리시킬 수 있는 방식을 한두마리의 원숭이가 터득한다. 이것은 원숭이들이 시행착오에 의해 터득한 사실적인 지식((matter-of-fact knowledge)이고, 집단내의 다른 원숭이들이 삽시간 내에 이를 보고 배우게 되면서 새로운 행위양식은 곧 집단전체에 퍼진다. 그러나 이런 '지능이 높은' 원숭이들도 행위현장을 보지않고는 결코 그런 행위양식을 전할 수는 없고 새로운 시행착오의 챗바퀴를 다시 돌아야만 꼭같은 사실적인 지식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에서는 현장을 보여주지 않고도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특정의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가 있다. 이것은 바로 뜻을 분명하게 전할 수 있는 말(상징행위)이 있기 때문이고, 그러기에 인간의 행위에서는 지식의 축적이 가능하며, 시간을 통해서 보면 인간의 행위양식(문화)에 변화가 있는 것은 바로 지식의 축적이 가능하기 때문인 것이다.

 인류학사에 등장한 다양한 문화이론들을 살펴보는 것은 문화의 개념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에 효과적일 것 같다. 문화이론은 문화를 보는 시각의 문제이지만, 사실 문화를 보는 시각에 초점을 맞춘다고 하드라도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결국 우리는 여기에서 문화이론의 현재 상황을 개괄적으로 파악하는 의미에서 편의상 개인과 문화간의 관계를 보는 시각에 주목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문화과정에서 개인과 문화간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파악하느냐의 문제인데, 크게는 (1)초유기체론적인 시각과 (2)관념론적인 시각의 두가지로 구분될 수 있겠다. 간단히 말한다면 전자가 문화를 "초유기체적인 전통"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반하여, 후자는 공시적인 시각에서 문화를 인간의 행위를 유도하고, 그에 지침이 되는 규칙이나, 표준, 모델 등의 에믹 (emic)의 성격을 띤 관념체계로 파악하고 있다. 이 두가지의 시각은 "문화가 무엇이냐"(What is culture?)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문화라고 부르느냐"(What is called 'culture'?)라는 관점에서 오는 차이이지만, 바로 그런 차이만으로도 각 켐프의 인류학적인 연구작업에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왔다.

 사실 문화이론의 구분은 이를 다룬 학자들마다 관점과 기준이 달라서 극히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서 이를 종합하기는 힘들지만, 우리는 여기서 키징((R.M.Keesing 1974)의 구분을 많이 참조하였다. 키징은 문화이론을 "적응체계로서의 문화" (cultures as adaptive systems)와 "관념체계로서의 문화"(cultures as systems of ideas)로 구분하고 있으나, 사실 그의 분류 중 그가 "문화 적응론자"(cultural adaptationists)라고 부르고 있는 전자의 문화이론이 공유하고 있는 "초유기체론적인"(the superorganic) 시각에 주목하여 아래와 같이 두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초유기체론적인 시각

 간단히 말하여, 문화를 초유기체적인 전통(extrasomatic tradition)으로 파악하고, 문화와 인간간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을 정수로, 그리고 문화를 변수로 파악하는 것이 초유기체론적인 시각의 기본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문화의 존재론적인 실체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화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연구전략의 하나이다.

 사실 해리스에 의하여 "문화유물론"(cultural materialism)으로 알려진 연구전략의 기본적인 틀은 화이트의 "문화결정론"(cultural determinism), 그리고 이에 앞서서 크로버, 뒤르껭, 스펜서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화의 초유기체론적인(superorganic) 개념에 기초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것이 어떤 연구전략인지를 알기위하여 우리는 화이트의 문화결정론에서 인간과 문화간의 관계의 성격을 간단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회문화현상은 개인의 행위를 통해서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문화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수많은 구성요소들간의 상호작용은 개인의 행위를 통해서 표현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개인의 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사회문화현상이 개인의 행위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문화과정이 과연 개인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관련해서 화이트(L.A.White 1949b)는 각 개인이 출생하기 이전에 문화는 이미 존재했고, 그는 이 문화에 노출되는 과정에서 그 문화의 방식을 학습할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문화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각 문화특성들은 그 자체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행동을 통해서 이런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결국 개인은 문화과정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문화과정의 표현수단이지 원인(cause)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과학기술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어떤 중요한 발명 또는 발견 중 한가지를 생각해 보자. 분명히 이것은 발명자 또는 발견자 개인의 행위를 통해 햇볕을 보게되었다. 또한 그것은 문화과정에서 일어난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혁신(innovation)을 설명하는 데에 그 발명자 또는 발견자 개인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화이트를 비롯한 문화결정론자들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개인과 문화(또는 문화과정)간에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 것일가? 개인은 문화과정을 가능케하고, 요소들간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친다. 특정의 발명이 그런 발명을 한 개인의 신경조직체계에서 그런 종합 (synthesis)이 일어났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개인은 특정 셋트의 문화적인 자극들에 반응했을 뿐이며, 그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문화전통은 바로 그 개인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그는 그런 전통 속으로 태어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개인유기체는 외계로부터 전해받은 문화적인 재료에 하나의 촉매자(catalytic agent)로 작용하는 것으로, 단순한 영장류적인 행위와는 구분되는 인간의 " 문화적 행위" 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고, 그 대신에 문화적인 요인들만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어떤 한 문화적인 전통으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게 되며, 또 다른 문화에 자극을 받으면 거기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로 표현되는 문화현상에 대한 설명을 끌어내기 위한 적절한 연구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문화 그 자체, 다시 말해서 문화과정에서 상호작용하는 요소들에로 돌려져야 한다는 것이 문화결정론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이와같이 인간과 문화간의 관계에 대한 문화결정론적인 모델에 의하면 문화과정에 등장한 발명 및 발견과 같은 사건들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는 개인 유기체에 주의를 돌릴 필요가 없고, 개인은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요, 문화과정의 수단일뿐이고, 그것의 원인(cause)이나 결정인자(determinant)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화이트의 문화결정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White 1949a:9)

가) 인간-문화체계에서 인간은 정수(constant)로, 그리고 문화는 변수 (variable)로 간주되어도 좋겠다.

나) 인간집단들 간의 생물학적인 차이에 의거하여 문화의 다양성을 설명할 수는 없다.

다) 문화는 시간적으로는 한 세대에서 다음세대로,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한 민족이나 지역에서 다른 데로 흘러내리는 초생물학적이고, 초유기체적인 연속체로서의 전통으로 간주되어도 좋겠다.

라) 문화과정은 그 자체의 원리와 법칙에 따라서 진행되는 것이어서, 문화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지, 결코 심리학적으로 또는 생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마) 모든 사람은 각기 아무런 문화를 갖지 않은 채 태어난다.

바) 개인은 특정의 문화적인 전통 속으로 태어나서, 그의 행동의 형식과 내용을 그 전통으로부터 얻게된다.

사) 개인을 원동력(prime-mover)로, 그리고 문화를 창조하고 결정하는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인간중심론적인 환상(anthropocentric illusion)에 불과하다. 그것은 문화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심리학적인 해석에 이르게 하고, 실제적이고 설득력 있는 문화학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흐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

아) 문화체계와 관련해서, 개인은 단지 하나의 촉매자(catalytic agent) 일뿐이어서 그는 문화과정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내용을 결정하지도, 그 전개과정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자) 인간은 문화를 좌지우지하는 초영장류의 동물이 아니라, 다만 문화과정이 전개되는 장소요, 문화가 존재하는 수단일 뿐이다.


 화이트의 이런 문화결정론은 하리스(M.Harris 1980)의 "문화유물론"으로 이어 졌다. 문화결정론자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시간과 공간상 사람들의 존재 그 자체에 주의를 돌린다. 하리스 (Harris 1980:47)의 문화의 정의는 문화결정론의 관점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즉 그는 "사회집단의 구성원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사고와 행위의 학습된 레파터리"를 문화라고 부르고, 또한 "그 레파터리들은 생물학적인 유전과는 독립적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세대로 전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화유물론의 "초유기체론적인" 시각을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즉,특정 사회의 문화적인 레파터리는 그 인구집단의 연속성에 기여하고, 사회생활을 가능케 해주고, 사회구성원의 교체와는 관계없이 연속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사회문화체계는 세가지의 구성부분으로 나누어 진다. 이것은 화이트에 의하여, 기술, 사회조직, 관념의 셋으로 나누어졌고, 해리스(1980:51-54)는 이를 하부구조, 구조, 상부구조의 셋으로 나누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체 분석틀의 구분을 그데로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세개의 구성부분 중 문화결정론자들은 기술 또는 하부구조가 사회문화현상을 결정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요인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2) 관념론적인 시각

 지금까지 우리는 초유기체론적인 시각에 기초하여 문화를 인간의 환경에 대한 적응체계로 파악한 문화이론들을 한덩어리로 파악하였지만, 사실 현재의 인류학계에서는 더 많은 인류학자들이 문화현상을 관념론적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즉 문화를 관념체계(cultures as systems of ideas)로 파악하는 이들은 가시적이고 물적인 것 그 자체를 문화라고 부르기를 거부한다. 그 대신에 그들은 이런 표면적인 구조(surface structure)와 이를 가능케하고 있는 구조적인 요체(structural essence)를 구분짖고, 후자만을 문화로 규정하고 있다. 이리하여 관념론자들은 겉으로 나타나는 가시적인 현상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류학자들은 그 뒤에 숨겨진 구조를 찾아내는 데에 진력해야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또한 관념론자들은 겉으로 나타난 현상은 단지 숨겨진 구조의 환영(illusion) 또는 투사(projection)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가 표면적인 구조에만 집착하다보면 문화를 잘못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문화현상에 대한 관념론적인 시각의 특성은 구드이나프(W.Goodenough)의 인간행위에 대한 구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인간행위와 관련하여 우리는 행위에서 나타나는 유형(행위의 유형; patterns of behavior)과 그런 행위를 가능케 해주는 유형(행위를 위한 유형; patterns for behavior)의 두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는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이것들이 각기 특수성을 지니면서도 어떤 규칙성을 보이고 있어서 이에 기초하여 몇가지의 범주로 구분지울 수 있을때 추출되는 행위유형이고, 후자는 이런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도록 해주는 처방, 디자인, 모델, 원칙, 규칙 등을 말한다.

 예컨데 어떤 운동시합에서 선수들의 운동행위 그 자체는 전자의 행위유형(patterns of behavior)이고 이것은 축구, 배구, 농구 등 스포츠의 종류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각 스포츠의 시합에 적용되는 규칙은 바로 후자의 "행위를 위한 유형"(patterns for behavior)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것이 틀린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게임, 또는 다른 종류의 스포츠를 보게될 것이다. 위의 두가지 행위유형 중에서 관념론자들은 후자, 즉 처방, 디자인, 모델, 규칙 등으로 대변되는 "행위를 위한 유형"만을 구분짖고 이것을 문화로 규정하고 있다. (앞의 초유기체론적인 시각의 이론들에선 이런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실 관념론적인 시각에서 문화현상에 접근하는 사람들도 그들의 연구를 위한 원자료(source materials)는 구체적인 인간의 행위 및 그런 행위의 산물에서 얻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에게는 그 밑에 깔려있는 또는 그런 인간행위를 가능케 해준 구조(underlying structure)만이 실제적인 것이지 표면적인 현상은 단지 그 구조의 표현(또는 환영, illusion)일 뿐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관념론적인 시각에 기초한 문화이론가들은 사실 하나의 켐프로 묶기가 어려울 정도로 구체적으로는 다양한 입장을 취하고 있어서 이중에 대표적인 두가지만을 간단히 소개할가 한다. 여기에서는 키징(R.M.Keesing 1974)의 구분과 요약을 주로 참조하였다.

가) 인지체계로서의 문화 (Cultures as Cognitive Systems): 아마도 관념론적 입장에 선 문화이론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 인지인류학일 것 같다. 문화현상의 표면구조에 비중을 둔 전통적인 인류학이론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신민족지"(New Ethnography)의 중요성을 내세운 인지인류학자들은 주로 언어학적 방법과 모델을 사용하였기에 이 분야는 때로는 언어인류학(linguistic anthropology 또는 anthropological linguistics)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구드이나프는 이 분야의 주도적인 학자이다. 그는 문화를 "지식체계" (systems of knowledge)로 파악하고 있다. 그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한 사회의 문화는 구성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아나가기 위해 알거나 믿어야만 하는 모든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는 물질적인 현상도 아니고, 물건, 사람, 행동, 또는 감정으로 구성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런것들의 조직이요, 사람들이 마음속에 지고 있는 것들의 형태(form)이며, 그것들을 인식하고, 관계지우며, 해석하는 모델이다" (Goodenough 1957:167). 이와같이 인지인류학에서는 인간의 행위 및 그 결과로 이루어진 물적인 현상 그자체가 문화가 아니라, 관찰될 수 있는 사건들의 영역 뒤에 있는 규칙, 기준, 모델 등의 관념체계(ideational codes)를 해명하는 데에 관심을 두어왔었다.


나) 구조체계로서의 문화 (Cultures as Structural Systems): 문화의 구조주의적인 접근은 레비스트로스(C.Levi-Strauss)라는 한사람의 개인과 동일시될 정도로 레비스트로스는 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인류학 이론사에 구조주의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립하는 데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그의 각종 저작들은 구조주의 학자들에서는 일종의 성전이 되어왔었다.

 레비스트로스는 "문화"를 정신(mind)의 축적적인 창조물로서의 "공유된 상징체계(shared symbolic systems)"로 간주하고, 신화, 예술, 친족 등과 같은 문화적인 영역의 구조, 즉 이런 문화현상들을 가능케하는 "정신의 원리들" (principles of mind)을 파악하고자 시도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살고있는 물리적인 세계는 단지 생재료를 제공해줄뿐이고, 인간정신의 보편적인 과정은 비록 본질적으로는 다양성을 보이드라도 형식적으로는 유사한 유형으로 나타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이고 이제는 거의 인류학고전이 되어버린 [친족의 기본구조 The Elementary Structures of Kinship,1949]에서 펼친 "근친상간 금기 incest taboo"에 관한 그의 구조적인 분석을 예로 들어보자. 여기에서 그는 이전에 모스(M.Mauss)가 그의 저서 [선물 The Gift, 1924]에서 펼친 "호혜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reciprocity)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즉 모스는 모든 종류의 선물교환이 순수한 경제적인 동기보다는 한층 더 기본적인 호혜성의 원리에 의해 동기지워지고, 결국 모든 사회적인 응집력(social solidarity)이 바로 이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레비스트로스는 모스의 호혜성의 개념을 일층 확대시켜서 혼인체계에서 교환되는 것이 '여자'라는 점에 주목한다. 즉 모든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문화특성인 "근친상간금기"의 목적은 단순히 여자를 교환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리하여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특성인 친족체계는 그것들이 각기 어떤 형식의 여자교환체계를 보이고 있는지 그리고 상이한 교환방식이 갖는 의미가 무었인가라는 견지에서 연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레비스트로스에게는 문화는 개인 행위자를 초월한 것이고, 심지어 어떤 의이에서는 민족의 경계선을 초월한 것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기때문에 사실 그는 특정문화(a culture)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인류의 문화일반 (culture of mankind)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분야의 학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문화현상에 접근하든 간에 그들은 관념론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에는 예외가 없다. 과연 이 상징인류학적인 접근이 문화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는 학자들간에 논난이 적지 않지만, 문화의 이해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4. 인간과 문화와의 관계

 인간은 문화적인 수단을 통하여 특정의 환경에 적응해 나간다. 그렇다면 인간과 문화의 양자간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우선 두가지의 측면에서 상관관계의 유무를 생각할 수 있겠다.

(1) 인간 일반과 문화 일반간의 관계

 문화 일반(culture in general)과 인간 일반은 긴밀하고도 불가분의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인류의 등장에서부터 현대인에 이르기까지의 인류의 진화과정은 양자간의 상호작용의 산물이었다. 인간은 문화적인 수단에 의해 자연이 제공해준 여러가지 제약을 극복하면서 또는 그런 환경에 적응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문화가 없었다면 인간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인간 없이는 문화도 없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바로 문화의 운반자(carriers)였기 때문에 인간 없이는 문화의 전승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하드웨어와 소프프웨어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하드웨어 없는 소프트웨어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소프트웨어 없이는 하드웨어는 아무런 쓸모없는 기계덩어리에 불과하다. 즉 소프트웨어를 더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는 하드웨어만으로서의 "식물인간"은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의 형체를 가졌음이 틀림없다고 하겠지만 앞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단순한 동물"로서의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이 곧 인간은 단지 생물학적인 유기체 이상의 것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서 양자간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는 하지만, 하드웨어는 어떤 소프트웨어(문화적인 전통, 또는 문화특성)를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 상이한 일을 해낸다는 점을 우리는 또한 중시해야할 것이다. 뒤에서 우리는 특정 인간 또는 인간집단과 특정문화간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의 유무를 논의하겠지만, 인간(human being)은 어떤 내용의 것이든간에 생활양식으로서의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다. 바로 그런 하드웨어를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로서의 문화가 "단순한 동물"로서의 유기체를 "인간"(human being) 으로 전환시키는 근본적인 계기가 된다.


(2) 특정의 인간(또는 인간집단)과 특정 문화간의 관계

 다양한 민족에 대한 인류학적인 비교문화연구의 결과들은 특정 인간 또는 인간집단과 특정 문화간에는 의미있는 상관관계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즉 사람은 처음부터 반드시 이렇게, 또는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특정 생활양식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출생후에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문화를 익히거나, 어떤 소프트웨어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런 식으로도, 또는 저런 식으로도 행동하게 된다. 다음의 세가지 중요한 개념들은 특정 인간집단과 특정 문화간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가) 문화의 다양성 (Cultural Variation): 이 지구상의 어느 두 민족집단 간에도 꼭 같은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찾아볼 수는 없다. 바꾸어 말한다면 각 민족이나 인간집단은 나름데로의 독특한 고유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 물론 수많은 문화특성들 중에는 문화간에 유사한 갓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드라도 기능과 의미, 그리고 형태에 있어서 정확히 동일한 것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문화간에 왜 이런 다양성이 나타나고 있을가? 각 민족이나 인간집단이 생활가정에서 직면하는 문제에 대한 독특한 고유의 해결방식을 갖고있는 이유는 무었인가?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각 집단이 위치하고 있는 자연적 및 사회적인 환경이 다르고(어느 두 집단도 꼭 같은 환경을 나누어 가질 수는 없다), 또한 역사적인 경험이 다르다는 점이다. 또한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는 어느 특정 개인의 고안이 아니라 수많은 (과거의 또는 현재의) 사회구성원들의 지식 또는 지적인 활동의 총합체로, 오랜 세월에 걸쳐서 축적, 수정, 보완된 결과이기 때문에 문화간에 결코 꼭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혹시 인간이 가진 하드웨어의 기본적인 특성으로 인해 유사한 소프트웨어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결코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같은 몽고리안의 인종 그룹에 속하지만,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문화가 현저하게 다르고, 체질적으로는 아무런 의미있는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아메리칸 인디언 제민족간에는 산넘고 물건너면 부족집단에 따라 전혀 다른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등 문화의 다양성은 인류 문화의 속성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생활과정에서 직면하는 문제에 대해 더 좋고, 더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아 끈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문화에 새로운 항목을 추가시키고, 더 이상 쓸모없는 항목을 포기함으로서 결과적으로는 다른 인간집단의 생활양식과는 상이한 생활양식을 형성하게 된다.


나) 문화의 상대성 (Cultural Relativity): 모든 인간사회가 생활과정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에 대해 상이한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아나서는 데에서 사회간에 문화의 다양성이 나타나게 된다. 쉽게 말한다면 나는 이런 식으로 살고 있지만 남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다른 문화에 대해 이해가 깊지 않거나, 다른 사회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보통사람들의 눈으로는 나와는 다른 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때로는 신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상하기도 하고, 또 더러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 내지 몰이해로 인한 비난이나 부정적인 평가는 모든 인간사회가 모두 자기 문화와 같은 것이어야한다는 잘못된 생각(misconception)에서 나온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이해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익숙한 생활양식이 "정당하고도, 옳바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태도가 지나친 경우에는 아예 다른 문화를 "원시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비윤리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외면하게 된다. 이런 관점은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는 바의 특정 인간 또는 인간집단과 특정 문화간에 의미잇는 상관관계를 상정하고 있는 데에는 나온 것이다. 바꾸어서 말한다면 이것은 우리 문화가 "최선의 것"이고, 이와는 다른 방식의 문화는 우리 것보다 못하거나 심지어는 열등한 것이라는 태도로 발전한다.

 식민지 사회의 지배자 측에 이런 태도가 흔히 나타난다. 그들은 피지배자들의 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평가하거나, 또는 "여태 그런 단계의 문화에 머물러 있는" 것을 오히려 딱하게 여기고, 지배문화의 형식으로 "개조 또는 개종"시켜주어야 하는 것을 자기네들의 의무로 착각하기도 한다. 다른 문화에 대한 이와같은 몰이해에 기초하여 피지배문화에 대해 강제적으로 "개발계획"이라는 명목으로 변화를 도입한 결과, 토착민 사회에 예기치 못한 엄청난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 사례는 전세계적으로 무수히 많았다.(Woods 1975: 40-43 참조)

 문화는 마치 씨줄과 날줄이 체계적으로 엮어져서 베가 짜지듯이, 수많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면서 거대한 기관을 작동시키듯이, 하나의 전체(a functioning whole)을 이루고 있어서, 이 전체를 이루고 있는 각 부분들 중 그 어느 것도 갑작스럽게 다른 부속으로 바꾸어놓는다면, 이것은 그 해당 부분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지배문화가 강제적으로 소개한 새로운 요소는 기존의 요소들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경우에 그것이 토착문화의 맥락을 고려하지않은 것이어서 부작용을 유발시키고 더러는 기존체제의 존재 그 자체를 위협하는 사태로 발전하기도 한다.

 자기문화의 관점에서 상대 문화를 평가하려는 태도를 인류학에서는 "자민족중심주의" 또는 "자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라고 한다. 이는 다른 문화를 연구하려는 학자들이 반드시 피해야하는 태도이다. 연구자가 다른 문화에 접근할 때 자기문화를 기준으로 하여 남의 문화를 논의하고, 거기에 자기의 것과 다르다고 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면, 이는 문화의 적절한 이해를 저해하는 태도일 것임이 틀림없다.

 사회과학의 분야 밖에서는 "자민족중심주의"가 극히 효과적으로 이용되고 있기도 하다. 즉 이는 정치적인 통합기능을 수행하는 강력한 메카니즘으로 효과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즉 우리것이 최고이고, 최선의 방책이라는 의식을 심어줌으로서 자기가 소속한 체계에 대한 긍지를 가져다주는 데에는 자민족중심주의만치 강력한 수단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사회문화현상을 설명하려는 사회과학적인 분석작업에서는 이런 태도가 저해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그 대신에 인류학자들은 다른 문화를 다룸에 있어서 "모든 문화는 그 사회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모든 문화는 하나의 공통된 평가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야할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바 이를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라고 부른다. 이것은 어떤 문화요소나 문화특성이든간에 그 문화의 맥락에서는 의미있는 것이고, 나름데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자문화중심주의"를 피하고 "문화의 상대성"을 존중하는 인류학자들의 이런 접근태도는 1920년대에 들어와서, 이전의 19세기말에 지배적이였던 진화론적인 접근에서 방향을 전환하여 인류학자들이 현지조사를 중시하는 결과로 얻어진 것으로 인류학의 중요한 특성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문니화의 상대성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문화는 각기 그 사회의 맥락에서만 의미있는 것이라는 입장으로 확대되면서 문화간의 비교연구는 무모한 또는 쓸데없는 작업이라는 태도로 발전하여 오랫동안 문화간의 비교연구를 지체시킨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문화상대주의'와 '비교문화 접근방법', 이 두가지는 인류학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으로 남아 있다.

 이상에서 논의한 문화의 상대성에서 우리는 특정 인간 또는 인간집단과 특정 문화간에는 의미있는 상관관계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결국 문화와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어떤 문화로 사회화되느냐가 "어떤 사람을 만드느냐"를 규정하게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 문화의 超有機體性 (The Superorganic): 문화의 상대성은 "문화는 초유기체적인 전통(extrasomatic tradition)이다"라는 또 하나의 특징적인 측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런 문화의 초유기체성은 오랫동안 인류학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고, 또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문화의 성격과 문화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이해하는 데에는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생각되어 여기에 잠간 소개할가 한다.

 개인은 문화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문화적인 전통 속으로 태어나는 것"이 이른바 초유기체론자들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이 점은 구태어 초유기체론자가 아니드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진술이다. 여기에는 인간은 아무런 특정의 문화도 갖지않은 채(cultureless) 태어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사실 어린이는 태어나서 어떤 문화전통에서 성장하느냐에 따라 "그 문화의 사람"이 된다. 혹시 앵글로색슨 어린이가 한국어나 일본어를 거의 모국어마냥 정확히 발음하고, 유창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이런 어린이를 보고 약간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서양사람이 제2외국어로 배운 언어는 어딘가 좀 서툰데가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선입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아무리 인종적인 배경이 달라도 유년기부터 다른 문화에 들어가 토착민과 동일한 생활조건하에서 성장한다면 그 문화의 내용으로 채워질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화와 인간은 일견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인간 유기체와 문화전통은 별개의 평원(level)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다만 인간은 생활과정에서 그런 전통(extrasomatic tradition)에 노출되거나, 그것을 접하게 되면서 자신의 생활양식으로 익히게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생활양식으로서의 소프트웨어는 행위자에게 내면화되어 그가 지니고 다닌다는 의미에서 반드시 유기체 바깥에(extraorganismic) 위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은 의미에서 문화전통은 유기체외적인(extrasomatic)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뿐만 아니라, 행위를 위한 지침(guideline) 으로서의 관념, 태도, 감정, 사상 등은 분명히 문화요소이고, 이것들은 모두 인간의 생물학적인 구조(the biological make-up of man)에 기원한 것이며 또한 거기에 기초하여 나타났고 유지되고 있다. 즉 상징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과 지능이 아니였다면 이 모두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이 일단 등장하여 하나의 문화전통으로 정립되고 난 뒤에는 마치 그것이 '비생물학적인 성격'(non-biological in character)의 것인냥 인간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White 1959:12)

 '효도'라는 문화요소를 예로 들어보자. 이는 분명히 다른 동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것이고, 상징행위에 기초하고 있다. '효도'라는 소프트웨어를 유기체 속에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태도로서의)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자신의 부모에게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효도'는 그가 태어난 후에 자신의 바깥에 있는 외계로부터의 문화전통으로부터 습득한 것이다. 그가 한국이 아닌 서구의 어떤 나라에서 태어나 성장했다면, 부모에 대한 이와는 다른 태도를 습득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런 효도를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효도에 기초한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문화요소는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에로 전해지고, 세대를 따라 전승된다. 이와같이 특정의 문화요소가 어디에 위치하고?있느냐는 사실적인 질문에 촛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분석을 목적으로 왜 어떤 사람이 그런 소프트웨어(문화요소)에 의거하여 그런 식으로 행동하느냐에 촛점을 맞춘다면, 문화는 그것을 운반하고 있는 개인들(human carriers)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문화의 '초유기체성"을 논할 수 있다.

 이와같이 문화특성들은 개인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개인에 의해서 운반되면서 일상생활의 사람들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새로운 조합(combination)과 재조합이 끈임없이 벌어진다. 즉 각 문화특성은 다른 것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서로간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영향을 받게된다. 이때 이루어진 새로운 종합(systheses)이 다행히도 기존의 문화특성보다는 새롭고, 더 효과적인 것으로 사회구성원들에게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발명" 또는 "발견"이라는 형식의 혁신(innovation)으로 문화과정(culture process)에 등장하여 기존의 것을 대체하거나 아니면 하나의 추가적인 문화특성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이렇게 새로히 등장한 문화특성이 다시 문화과정에 이미 존재하는 다른 특성들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 영향을 주고 받을 때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셋트(set)의 문화현상을 접하게 되고, 이것을 우리는 "문화변동"이라고 표현한다.

 다른 한편 모든 사회문화체계는 서로 다른 특정의 환경에 위치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고유의 역사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그 체계 속에 포함되어있는 항목들은 사회마다 상이한 셋트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또한 체계내에서는 부분을 이루고 있는 문화특성들은 각기 그 사회의 맥락에서만은 의미있는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문화의 초유기체성은 곧 "문화의 다양성"과 "문화의 상대성"의 바탕을 제공해 주고 있다.


5. 인간의 행위에 대한 과학적인 해석

 인간의 행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간사회를 연구대상으로 삼고있는 모든 사회과학자들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왔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인간이 도데체 어떤 동물인가?"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접근방법에서 큰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주제인 인간의 성격을 밝히는 문제와 관련하여 두가지의 관점은 논의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1) 주체적인 행위자로서의 인간(Man as an initiator)

 앞에서도 이미 지적되었지만, 모든 문화현상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나타난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 관찰하고 있는바의 구체적인 행위일수도, 또 이미 일어난 행위의 결과인 물적 대상일수도 있는가 하면, 민담이나 전설 등과 같이 상상의 세계에 창조해 놓은 무형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문화적인 항목으로 되기위해서는 비록 무형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누군가에 의해 말로 표현되든가, 영상으로 담든가, 글로 표현되는 등의 인간의 행위를 통해 밖으로 들어내서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게 알려지거나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화적인 항목으로 살아남지 못한 채 원래의 소유자의 사망과 함께 소멸되고 말것이다.

 문화현상이 개인의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의식"을 가진 동물이라고 하여 인간은 마치 자기의 뜻데로 또는 '自由意志'(free-will)에 의거하여 마음데로 행동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쉽다. 즉 이것은 인간행위의 원인이 바로 그 행위자 자신이라는 관점이다. 어떤 행위가 발생했을 때에는 그런 행위에로 유도한 의도(intention)가 있었을 것이고, 이것은 바로 행위자 자신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의 창조자(creator 또는 initiator)로 간주되어, 마 그런 행위가 그 행위자 자신의 의도나 태도, 사상 등에서 비롯된 (originated) 것으로 간주된다.

 이와같이 인간의 행위를 행위자 개인에 촛점을 두어, 원인을 행위자 개인에게서 찾는 것을 "인간중심론"(anthropocentrism)이라고 한다. 이것은 행위자 개인을 중심으로 그가 연출해낸 사회문화현상을 설명하려는 입장이다. 이런 인간중심론적인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추진력을 가진 (self-activating), 자신의 운명을 쓰쓰로 좌우할 수 있는 주체자 (initiator)로 파악한다. 이리하여 사회문화적인 변동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행동 및 그 산물을 그런 행위의 "주체자"인 개인을 중심으로 해석하려는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이문웅 1977a, 1977b 참조)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즉 이런 접근방식은 왜 그 사람이 그때, 그 장소에서 그런 방식으로 행동했는지를 설명하려는 사회과학적인 분석작업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만 하겠다. 사회문화현상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회과학적인 과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행위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라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의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중심론적인 관점은 사회과학에 심각한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프랑스의 선구적인 사회과학자 뒤르껭(E.Durkheim 1938: lviii)은, 이제는 거의 고전이 되어버린, 그의 저서 <사회학 방법의 제 규칙>의 제2판 서문 끝부분에서 이런 고질적인 "인간중심론"이 다른 과학에서는 이미 제거되었지만 사회학에서는 아직 끈질기게 남아있다고 비판하면서, 이런 편견에서 "우리들의 과학을 해방시키는 것만치 더 급선무가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인류학의 분야에서는 이런 "인간중심론적인 환상" (an anthropo- centric illusion)으로부터 인류학을 구하려는 작업을 레스리 화이트 (L.A.White 1949b,1959,1972; 이문웅 1979 참조)는 그의 자신의 학문세계 전반에 걸쳐서 전개했었다.

 다른 한편 사회과학의 영역 바깥에서 이런 인간중심론적인 주장 또는 관점이 효과적이고도 강력한 무기로 이용되고 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가들이 추종자들을 특정의 정치적인 노선에로 동원하는데에, 또는 사회개혁가들이 개혁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열쇠를 쥐고 있다"라든가, "더 밝고 정의로운 사회를 우리 자신이 창조해낼 수 있다"는 등의 인간중심론적인 주장들은 행위자들에게 자신감과 밝은 미래에 대한 확신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효과적인 전략으로서 자주 동원된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 선 사람들은 사회과학의 결정론적인 접근방법이 마치 인간을 개혁을 주도할 주체자로서가 아니라 문화에 의해 지배되는 무력한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는 판단 위에서 일종의 패배주의로 비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인간주의적인 접근"(humanistic approach)로 알려진 것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이는 인간행위자를 사회문화현상을 주도하는 "주체자"로 설정하고, 사회문화과정을 이 주체자를 배제한 채 그 자체로 설명하려는 결정론적인 시각을 비판하면서, 행위자를 배제했다는 의미에서 마치 그것이 "비-인간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데에서 나온 발상인 것 같다.(이문웅 1978 참조) 그러나 우리는 이 "인간주의적인 접근"이라는 것이 사회비평의 차원에서 개혁을 위한 이데올로기적인 전략이지, 결코 사회문화현상의 해석을 위한 분석틀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 촉매자로서의 인간(Man as a catalytic agent)

 인간을 행위의 "추체자"로 파악하여 마치 그는 자신의 행위를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기추진력을 가진 행위자(self-activating actor)로 보는 관점과는 정반대로, 인간을 단지 문화과정에서 요소들간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장소로, 또는 문화과정의 단순한 촉매자에 불과한 존재로 파악하는 관점이 있다. 여기서는 사회문화적인 현상을 인간 행위자에 의해서 주도되는 것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인간은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문화전통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관점은 인간행위에 의거하여 이루어진 사회문화현상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것이 행위자의 "자유의지"(free-will)나 "선택의 자유"(freedom of choice) 에 의거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행위자들이 특정 셋트의 문화적인 자극(cultural stimuli)에 반응한 결과라고 보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두 그룹의 인간집단을 놓고 볼 때, 한 셋트의 문화적인 자극에 반응한 결과로 이렇게 행동하고, 또 다른 셋트의 문화적인 자극에 반응한 결과로 다른 식의 행동이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결과적으로 나타난 두가지의 행동양식의 원인을 해석함에 있어서 두 집단 구성원들의 유전인자를 포함한 생물학적인 특성이나 본능, 그리고 그들의 심리학적인 특성들에 눈을 돌릴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접하는 "유기체외적인 전통"(extra-somatic tradition)으로서의 문화적인 자극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행위자의 심리학적인 특성이나 성향은 행위를 위한 지침으로서 그의 행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에서 위의 관점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행위자의 심리학적인 특성 그 자체도 생득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화과정에서 문화적인 자극에 반응한 결과라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문화적인 상황의 지표는 될 수 있어도, 그것을 문화현상의 원인(cause)으로 간주하는 것은 결국 "결과로 원인을 설명하는" 셈이 된다. 물론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심리학적인 성향으로서의 퍼스낼리티가 인간의 행위를 특정의 행위양식에로 유도하는 데에 지침이 되고 있다는 사실적인 관찰 그 자체를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또는 넓게는 왜 사회문화현상이 그런 식으로 발생했는지를 분석하는 과정에서는 동기를 제공해준 것으로 간주되는 그런 퍼스낼리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퍼스낼리티의 문화적인 배경"을 따져야 할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행위자들이 접한 사회문화적인 전통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회문화현상을 분석하고 설명함에 있어서 행위자인 인간을 하나의 정수(constant)로 보고 그에게 노출된 외부적인 변수(variables) 로서의 문화특성들과의 관련에서 설명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입장을 "문화결정론"(cultural determinism) 또는 "결정론적인 접근방법" (deterministic approach)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분명히 문화의 초유기체론적인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이 입장에 의하면 문화는 개인과는 상이한 레벨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문화과정 속에서의 요소들 또는 부분들간의 상호작용은 촉매자로서의 개인들의 행위를 통해 표현되면서 사회문화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변동은 개인의 행위를 통해 나타났을 뿐이지, 그것은 체계내에서의 부분들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또한 유기체외적인 전통으로서의 문화는 그 자체로서의 생명력을 가진(sui generis) 것으로 파악된다. 즉 문화과정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부분들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끈임없이 새로운 문화요소를 만들어내고, 기존의 체계를 수정, 보완하면서 운영되는 자기 추진력을 가진 체계로 간주된다. 개인은 이런 문화과정의 방향을 좌우할 수 있는 통제자가 아니라 단지 문화과정에서의 요소들간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장소이고, 그 결과가 개인의 행위를 통해 바깥으로 표현될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화결정론이 위의 인간중심론적인 관점과는 완전히 다른 극단에 서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인간이 문명의 경로를 통제할 수 없다면 이는 바로 "패배주의"가 아닌가? 이렇게 통제가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무었 때문에 막대한 자금과 노력, 그리고 귀중한 시간을 소비해 가면서 사회문화체계를 개선하려고 하는가? 인간이 스스로 그것을 개조해 나갈 수가 없다면, "문화" 그 자체가 그 일을 맡아 하도록 내버려두고 인간은 조용히 앉아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보고만 있으면 될 것이 아닌가? 문화인류학이 시도하고 있는 바와 같은 "문화의 이해"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런 류의 질문들이 결정론을 비판하면서 끈임없이 제기되어 왔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은 생활과정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예컨데, 식량은 어떻게 획득할가?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어 남보다 잘 살아볼가? 저쪽까지 더 빨리 가서 이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방도는 없을까? 등등)에 대해 끈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고, 그 결과로 새로운 사실적인 지식들을 터득해내기도 한다. 이런 "시도"가 바로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이때 그가 어떤 식으로 시도하는지는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 문화결정론자들은 인간행위자들의 노력과 시도가 아무 쓸모없는 짓이라는 것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행위자들이 무었을, 어떻게 하며, 그런 행위를 하는 목적이나 목표가 무었인지는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는 관점에서 사회문화현상의 원인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와같이 문화결정론은 사회문화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분석틀이지 실제로 "인간이 곧 文化의 囚人(prisoner of culture)"이라는 말은 아니다. 사회문화현상이 왜 우리가 관찰하는 바데로 그런 식으로 일어나고 있는지를 밝히기 위한 작업에 사용될 분석도구일뿐이다. 마치 천문학자들이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 사용하는 망원경과 같이 사회과학자들의 연구전략이요, 분석틀이지, 사회문화적인 변동을 거부하고 현상유지를 꾀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적인 도구가 아니다.(Service 1968: 405-409 참조) 사실 후자는 사회과학의 영역 바깥의 문제일 뿐이다. 인간을 문화의 "수인"으로, 또는 "꼭둑각씨"로 간주한다는 관점은 인간 행위자 개인을 '정수'로 묶어놓고, 그가 운반하고 있는 또는 그가 접한 문화를 '변수'로 간주함으로서 개인의 행위를 통해 표현되고 있는 사회문화현상의 원인을 해명해 보려는 작업에 불과하다. 이와는 반대로 사회문화현상이 개인 행위자에 의해 좌우된다거나, 그 개인이 바로 원인(cause)이라고 간주한다면 사회문화현상을 해명하여 우리가 처해있는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이에 더욱 적절히 적응하려는 노력 그 자체를 포기하는 셈이 된다.


6. 인류의 미래: 문화적인 전망

 사실 인류는 문화적인 수단과 함께 생물계에서 지배적인 존재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아마도 인류의 이런 '확고한' 위치를 앞으로 다른 종의 동물에게 빼았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것이다. 그러나 사실 인류가 영구적으로 이 지구상에서 현재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두가지의 측면에서 인류의 미래에 던져진 또는 던져지고 있는 먹구름을 생각해 본다. 이는 인간과 문화와의 관계를 밝히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이 어떤 동물인지를 이해하는 데에 열쇠를 제공해줄 것이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인간이 이미 이 지구상의 모든 종(species) 중에서 어느 다른 것에 뒤지지 않는 '주인'(master)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인간은 쓰쓰로 자신의 묘를 파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또한 적지 않다는 점에 우리는 주의를 기우려야 할 것이다. "우리가 도대체 어떤 동물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전략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인간과 문화간의 관계, 특히 문화의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인류의 미래를 조망해 본다.


(1) 적응기제로서의 문화(Culture as adaptive mechanism)

 사실 모든 생물은 자기 종이 영속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어떤 종이 그렇지 않고 자기 종의 파멸 또는 소멸을 자초할만한 행동을 한다거나 그런것이 그 종의 지배적인 생활양식(또는 본능적인 행위)이라고 한다면, 오래전에 벌써 그런 생물 종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니 우리가 여기서 논할 만한 가치조차도 없을 것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의 경우에는 생물학적인 수단에만 의거하여 종의 영속과 생종의 안전을 꾀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에 추가하여 "문화"를 이보다 더 중요한 적응 수단으로 이용해왔다.

 그렇다면 문화의 기능은 무었일가. 우리가 간단히 생각한다면, 문화는 우리의 생명을 영속시켜줄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안전하게 해주며, 결과적으로 인류(human species)의 영속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하겠다. 다른 동물의 경우에는 '기호'의 세계에 머물러있고 생물학적인 수단에 의거하지만, 상징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의 경우에는 이런 수준을 훨씬 넘어서 초유기체적인 전통을 동원하여 환경에의 적응을 더욱 훌륭히 해낸다.

 어떤 점에서는 문화는 인간과 환경을 연결시키는 매개적인 수단이라고도 하겠다. 물론 이때의 환경이란 사회적인 것과 자연환경을 모두 포함한다. 문화는 사람과 사람간을 연결시켜주는 틀을 제공해주며, 홀로 외로히 살아가는 영장류의 동물이 아니라 무리를 이루고 집단이 단합하여 공격과 방어를 효과적으로 조직하여 외부로부터 몰려오는 적에 대응하면서 살아나간다. 또한 인간은 도구, 기술, 신앙 등의 수단을 이용하여 자연환경이 제공해주는 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혹시 생활과정에서 직면하는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자연주의적인"(naturalistic)인 수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는 서슴치않고 종교나 주술 등을 포함하는 "초자연적인"(supernatural) 수단을 동원하여 이에 적절히 대처하였다.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에서 물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면서 농경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은 "자연주의적인" 방식에 의거한 생활이지만, 몇년에 한번씩 심한 가믐이 들어 농사를 망치고 막대한 피해를 입곤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현대적인 과학기술의 힘을 빌어 관계체계를 건설하기 전까지는 거의 예외없이 "기우제"라고 하는 "초자연적인 수단"을 동원하면서 가믐에 "대처"하였다. 분명히 "기우제"는 주술적인 의례행사에 의거하여 기후학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자연주의적인" 수단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의례행사를 통해 농민들은 그들이 비를 내리게 해주는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빌었음으로 틀림없이 비가 올것이라고 믿게됨으로서 비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경험하게되는 불안, 초조감, 긴장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심리적인 안정을 되찾게 된다. 혹시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게 비가 가까운 시일내에 내리지 않아 농사를 영영 망치는 일이 있어도 그들은 초자연적인 존재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의례행사에 임한 자기네들의 정성의 부족으로만 돌리기에 이런 주술적인 생활방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물줄기가 바뀌어지는 등의 자연적인 조건에 큰 변동이 있어 영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불모의 지역으로 바뀐다면 이런 지역에서도 궂이 "'기우제"로 버티면서 농사를 짖겠다는 사람을 없으리라.

 또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문화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 역시 주어진 환경 속에서 생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생활과정 그 자체가 욕구충족을 위한 인간활동으로 구성되어 있기도하다. 사실 인간은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어떤 식으로 충족될 수 있느냐의 측면에서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질 수 있다. 그 하나는 외계에 있는 자원을 끌어들여서 충족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외부적인 자원이 아니라 인간의 유기체 내부에 있는 것만으로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전자에 속하는 먹고 싶고, 추위와 더위를 피하고 싶은 욕구등은 외부적인 자원을 동원함으로서 해결될 수가 있다. 그러나 흔히 우리가 내적인, 정신적인 욕구라고 부르고 있는 욕구들은 위안, 확신감, 신뢰감, 긍지, 용기, 희망, 우정 등 외부적인 자원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충족될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것들이 모두 사회문화체계의 관념적인 구성부분들(ideological compo- nents) 이다. 다른 두 구성부분, 즉 기술적인(technological) 부분 및 사회학적인(sociological) 부분과 함께 관념적인 부분도 역시 환경에 적응하는 기제로서 인간행위자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동원된다. 이와같이 문화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수단이였고, 이런 문화적인 수단 또는 문화가 제공해준 기존의 해경방식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면서 인류는 현재 여기까지 도달하였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흔히 공리주의적인 전망에서만 문화의 기능을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인류를 생존케 했던 바로 그 문화특성들이 이제는 우리에게 역기능을 하고 있는 점도 적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우리면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2)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류의 운명

 사실 문화는 그 자체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파괴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거의 간과해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문화가 우리의 생을 안전하게 해주고, 우리로 하여금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게 해주는 데에 기여한 긍정적인 측면에만 눈을 돌려 왔다. 분명히 말해서 지금 이 순간에는 인류가 지구상의 지배자(master of the earth)임에는 틀림없다고 하겠지만, 지구의 역사에 비한다면 인류의 역사는 눈깜짝할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수백만년에 걸쳐서 문화와 함께 이런 지위를 획득한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가 앞으로 또 2백만년 정도 이런 주도적인 역할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오랫동안 인류의 기원과 진화과정을 추적해온 리키와 레윈(Leakey & Lewin 1977:14-15)은 두가지의 이유로 그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첫째로, 우리가 이른바 문명인의 행위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오만 (arrogance)과 낭비(profligacy)를 계속한다면, 우리는 멀지않아서 우리가 적응할 수 있는 한계를 넘을 정도에까지 환경을 혹사시킬 것이라는 점과, 둘째로는, 이 지구상에서의 인류의 짧은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이 아무리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하드라도, 단일의 고도로 복잡화된 종이 장기간에 걸쳐 안정을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여러가지의 측면에서 인간 고유의 문화는 생물학적인 한계를 극복하게끔 해주었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인류의 미래는 더욱 불확실하고, 현재 수준의 "문화의 힘"(the power of culture)을 염두에 둔다면 앞으로 200만년이 아니라 200년간의 장래마져도 아주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사회과학의 안밖에서 많이 제기되어 왔고, 앞으로도 더 가속화될 조짐이다. 환경오염, 인구폭발, 핵전쟁 등은 인류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주요 위협들이고 이는 모두 현대 과학기술의 산물이기도 하다. 위에서 인용한 데로 인류는 너무나도 "오만"하게 한정된 자원을 겁없이 "낭비"해 왔고, 이런 행동양식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우리들의 생활을 일시적으로는 편하고 안락하게 해주었다고는 하겠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기계들을 대량으로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류가 이용가능한 에너지의 총량은 무한의 것이 아니라, 한정되어 있다.

 또한 기술의 발달과 함께 우리가 먹는 음식은 각종 화학약품에 의해 오염도를 더해가고 있고, 그 정도는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선에까지 더욱 빠른 속도로 육박하고 있다. 이 모두가 우리의 문화이고, 또 앞에서 우리가 보아온데로 이런 문화의 흐름을 외면한 채 벽을 싸하놓고 그 속에 들어앉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기술은 더욱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사회조직은 더욱 복잡화되고, 관료제와 사회조직체 내에서의 비인간화의 경향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제 거대해진 조직체의 신경조직은 고도로 발달한 컴퓨터의 통합적인 기제에 의존한 채 인간은 다시 자신이 쌓아온 문화의 한갖 "수인"으로 전락하고 있다. 인류가 계속적인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현재 직면 하고 있는 이런 중대한 위기에 주의를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지적인 켐페인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엔트로피"(entrophy)이론에 의거한 새로운 세계관, "적은 것이 아름답다"는 식의 지적인 켐페인 등은 사회과학의 역영보다는 사회평론 수준에 머물러있다고는 하지만, 이 단계에서 인류의 장래와 관련하여 심각하게 생각해봐야할 문제임은 틀림없다.

 문화의 기능과 관련하여 인류학자 레스리 화이트(L.A.White 1975:9-13)가 자신이 학문생활 거의 전기간을 통해 지녀왔던 공리주의적인 관점을 말년에 포기한 것은 여기서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즉 화이트는 일찍이 문화는 인류(human species)에게 생명을 안전하게 해주고 지속시켜주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는 식의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 문화체계의 기능을 파악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문화체계가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것은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의 발달에 연유한 것만도 아니다.

 사회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자원에 대해 꼭같은 권리를 가진 문자 이전의 이른바 "원시사회"는 상호부조와 협동, 그리고 평등주의(egalitarianism)에 기초한 사회였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전에 인류 문명사에 등장한 "농업혁명"은 인구의 대다수를 노예의 지위로 몰아넣기도 했었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창출해내었다. 사실 인류 문명사는 피지배계급의 땀으로 유지되었고, 인권과 인류의 복지는 재산권에 종속되었다. 문화는 오염된 음식과 인체에 해로운 약품의 생산을 가속화시켜 왔고, 인류의 문화는 점차 이 지구를 거의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류의 문화사를 돌이켜 본다면, 인간을 이 지구상의 지배자의 위치로 만들어준 것은 바로 우리의 '문화'였지만, 이제는 그것이 인류의 복지, 심지어는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을 검토하면서 화이트는 그의 마지막 저서(1975)에서 지금까지 지켜왔던 자신의 관점을 솔직하게 수정하고 있다.

 현재 단계의 문명에서 인류는 모든 굴레를 벗어 던져버리고 다시 원시상태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는 인류가 쌓아온 문명은 너무 거대하고 복잡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명이 안고있는 문제 그 자체를 외면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무덤을 파고 있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깊히 되세겨 보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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