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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정식 이름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 of Kingston Russell, Viscount Amberley of Amberley and of Ardsalla.

1872∼1970. 영국의 논리학자·철학자.


수리논리학 분야의 저작들과 평화운동, 핵무장 반대운동을 비롯한 사회정치운동으로 유명하다.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초기생애

앰벌리 자작과 앨더리 가문의 스탠리 남작 2세의 딸 캐서린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앰벌리 경은 총리를 2번 역임하고 러셀 백작 1세가 되었던 존 러셀 경의 셋째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1874년 디프테리아로 병사했으며, 18개월 뒤 아버지도 죽었다. 원래 러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우 진보적인 사람들로 무신론자였던 친구들을 러셀과 당시 10세였던 형 프랭크의 후견인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러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당시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별 어려움 없이 아들의 유언을 뒤엎고 이들의 법적 후견인이 되었으며, 러셀과 형은 결국 할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할머니는 독실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청교도였으며 엄격한 개인적 양심과 정확한 원칙을 가진 사람이었다. 러셀은 혼자 교육받았기 때문에 또래 아이들과 사귈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는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담긴 이상주의적 정서와 형이상학적 깊이(나중에 그는 이것이 부분적으로는 승화된 성욕의 산물이었다고 설명했음)로 가득 찬 치열한 내면적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11세 때 이미 종교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가정교육에 대해서도 회의했고 정치를 제외한 모든 문제에서 가족들과 견해가 달랐다. 그러나 그는 경험적 문제들 속에서는 논리적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11세 때 형을 통해 수학의 확실성을 알고 기뻐했으나 그와 동시에 기하학의 공리(公理)가 증명할 수는 없고 믿어야만 하는 것임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

이러한 상황은 러셀의 철학활동의 전형이 되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지식에 대한 사람들의 허식에 대해서도, 지식의 토대나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근거없는 가정(假定)에도 현혹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므로 그의 1차적 목표의 하나는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어느 정도의 확실성이나 불확실성을 가지고서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회의적이고 꼼꼼한 태도로 탐구하는 데 있었다.

1890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가자마자 뛰어난 지적 능력을 인정받았고, 곧 외부인들이 ' 사도회'(The Apostles)라고 부르던 배타적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1893년 수학 졸업시험(우등시험)에서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전공을 철학으로 바꾸었다. 이후 케임브리지대학교 형이상학자 J. M. E. 맥태거트의 영향으로 몇 년 동안 관념론자가 되었다. 1894년 윤리학 학위를 우등으로 취득했다.

같은 해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로건 피어솔 스미스(<트리비아 Trivia>의 저자)의 동생이자 진보적 사상을 가진 필라델피아 출신의 퀘이커교도 앨리스와 결혼했다. 다음 2년 동안 미국에서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치기도 하고, 독일로 건너가 경제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처음 배웠으며 그결과 런던 정치경제 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의 수석강사로 임명되었다. 처음 출간한 책은 정통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쓴 <독일 사회민주주의 German Social Democracy>(1896)였다. 1914년에 노동당에 가입할 때까지는 자유주의 입장에 서 있었다. <기하학의 토대에 관한 소론 An Essay on the Foundations of Geometry>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가 되었다.

초기 철학저작

1898년 당시 트리니티의 대표적 철학자였던 G. E. 무어와 함께 관념론에 반기를 들었으며, 넓은 의미의 경험주의자·실증주의자가 되었다. 철학자로서의 나머지 생애 동안은 철학자들이 보통 물리적 실재론자라고 부르는 태도(일상적인 문제에서는 보통 유물론자라고 부르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의 학문적 생애는 '과학적인 세계관이 대체로 옳은 견해'라는 기본 전제를 바탕으로 3가지 주요목표를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이며 잘 알려진 첫째 목표는 인간지식의 겉치레들을 최소한으로, 그리고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이 목표는 <의미와 진리에 관한 탐구 An Inquiry into Meaning and Truth>(1940)와 마지막 주요저서 <인간의 지식, 그 범위와 한계 Human Knowledge, Its Scope and Limits>(1948)와 같은 저서들에 나타나 있다. 특히 <인간의 지식, 그 범위와 한계>는 첫째 목표를 분명하게 개관하려 한 책이다. 2번째 목표는 논리학과 수학을 연결하는 것이었고, 이 목표는 수학이 매우 적은 수의 논리적 원리들로부터 연역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쓴 첫번째 저서인 <수학의 원리 The Principles of Mathematics>(1903)에 잘 나타나 있다. 3번째 목표는 논리적 분석이었다. 세계를 정확하게 기술하는 언어로부터 세계에 대한 무엇인가를 추론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기술적 표현(예를 들어 '지금의 프랑스 왕')이 지시하는 대상의 존재를 쓸데없이 가정하지 않도록 언어를 최소한의 필수요소 즉 원자적 사실로 분석했다. 이 3번째 목표는 이른바 '기술이론'과 ' 논리적 원자론' 철학에, 그리고 <물질분석 The Analysis of Matter>(1927)· <정신분석 The Analysis of Mind>(1921)과 같은 저서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저서들의 주제는 정신과 물질은 같은 '중성적' 요소들의 서로 다른 '구조화'라는 것에 있다.

얼마 동안 라이프니츠에 관한 저서 <라이프니츠 철학에 대한 비판적 해설 A Critical Exposition of the Philosophy of Leibniz>(1900)을 저술한 뒤, 논리학과 수학 분야의 저술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수학의 원리>(1903)의 첫번째 초고를 시작으로 10년 뒤 <수학 원리 Principia Mathematica> 전3권의 출간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수학 원리>(1910, 1912, 1913)는 과거 자신의 스승이자 친구인 철학자·수학자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와 공동으로 저술한 것이다. 두 저자는 <수학 원리>를 통해, 자명한 논리적 원리로부터 수학을 도출해내려는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다고 고백했지만, 이 저서는 러셀의 다른 논리학 저작들과 함께 오랫동안 논리학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러셀의 전생애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던 10년의 저술기간 초기에 그는 스스로 '신비스런 계몽'이라고 부르던 일을 체험했다. 이 체험이 있은 지 5분 만에 그는 평화주의자(그리고 남아프리카 보어인과 영국인의 전쟁에서 보어인의 지지자)가 되었으며 '아름다움에 대한 반(半)신비적 느낌'에 휩싸이게 되었다. 1903년 그와 첫 부인 앨리스의 사랑은 갑자기 끝이 났으나 이 부부는 1921년에야 이혼했다. 1910년 저명한 작가 오털라인 모렐 여사와 만났으며 그녀와 오랜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1902년에는 대중적이며, 나중에 그가 느꼈듯이 다소 과장된 수필 <자유인의 기도 The Free Man's Worship>를 출판했다. 1907년 여성의 참정권과 자유무역을 주장하면서 하원의원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으며 1908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후기 정치·철학 저작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평화운동가로서 활동한 일로 인해 1916년 100파운드의 벌금형을 받았고 트리니티 칼리지 강사직에서도 해고되었으며 1918년에는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수리철학 입문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1919)을 썼으며 <정신 분석>을 쓰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1919년 러셀은 도라 블랙을 만나 1920년 그녀와 함께 중국을 방문했고 1921년 그녀를 2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1920년에는 소련을 방문했고 같은 해 <볼셰비즘의 이론과 실천 The Practice and Theory of Bolshevism>을 출간했다. 이 책은 소련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강조하고 후에 스탈린주의라 불린 많은 측면을 예언·비난한 소련정권에 대한 뚜렷한 비판서였다.

<수학 원리>를 출간한 뒤 러셀의 철학연구는 주로 논리적 분석에 관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분석철학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러셀은 뒷날 이 운동에 공감하지 않았다. 논리적 원자론 철학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제자였던 비트겐슈타인(1911년 러셀과 처음 만남)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1922)의 기본학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학설에 따르면, 하나의 명제는 그 명제가 주장하는 사실을 그리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명제는 사실과 동일한 구조를 가져야만 한다. 러셀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줄곧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실제로 <인간의 지식, 그 범위와 한계>에서는 '구조의 유사성' 개념을 기준으로 하여 인과관계를 추론했다. 그러나 러셀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주요저서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1953)와는 의견을 달리했다.

1920년대에 쓴 많은 책은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원자의 ABC The ABC of Atoms>(1923)·<상대성의 ABC The ABC of Relativity>(1925)와 같은 몇몇 저작은 매우 통속적이며, 그밖에도 <내가 믿는 것 What I Believe>(1925)·<결혼과 도덕 Marriage and Morals>(1929)·<과학적 조망 The Scientific Outlook>(1931)·<교육과 사회질서 Education and the Social Order>(1932) 등을 펴냈다. 날카로운 기지와 함께 정치적·도덕적·지적으로 급진좌파적·반(反)수구주의적 관점에서 쓴 그의 저서들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주로 공리주의 관점에서 윤리학과 정치·사회·교육철학 분야의 전문서를 쓰기도 했다.

1927년에 아내 도라와 함께 피터즈필드 근처 '텔레그래프 하우스'에서 실험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도라에 의해 계속 운영되었다(두 사람은 1935년에 이혼함). 이런 자유방임에 의한 교육방식은 당시에는 진보적인 것이었지만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지나치게 과장된 점도 있다. 1931년 형 프랭크가 죽자 러셀은 백작작위를 이어받아 러셀 백작 3세가 되었다. 1934년 <자유와 조직 1814~1914 Freedom and Organization 1814~1914>, 1937년에는 <앰벌리 페이퍼스 The Amberley Papers>를 출판했다. 이 2권의 책은 연구보조원이었던 퍼트리샤 스펜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그녀는 1936년 러셀의 3번째 부인이 되었다.

러셀은 평화주의자로서 1938년 뮌헨 조약에서 독일에게 영토를 양도하기로 한 영국의 정책을 지지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좋은 것을 위한 불가피한 서막'으로서 히틀러를 물리쳐야 한다고 말했다. 1938~39년 미국에서 강의한 뒤 뉴욕에 있는 시립대학 교수로 임명되었지만 성적 부도덕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법원에 의해 취소되었다(폴 에드워즈가 편집한 <왜 나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닌가 Why I Am Not a Christian>(1927)의 부록 참조).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반즈 재단'과 5년 동안 강의 계약을 맺음으로써 잠시 동안 가난에서 벗어났으나 1943년 이 계약마저 취소되었다. 이때의 강의내용을 토대로 <서양철학사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1945)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곧 영국과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오랫동안 그의 주수입원이 되었다. 1944년 영국으로 돌아왔고, 곧 트리니티 칼리지의 강사 겸 펠로로 임명되었다. 그후 15년 동안 러셀은 빠르게 명성과 존경을 얻었다. BBC 방송의 <브레인스 트러스트>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1949년에는 BBC <리스 강좌>의 첫번째 강연자가 되었으며, 같은 해 메리트 훈장을 받고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다졌다.

정치활동

1948년 <인간의 지식, 그 범위와 한계>가 출판되었을 때 이 책은 높은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큰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인식론이 시대에 뒤떨어진 주제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러셀의 사상이 인기를 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반응에 러셀은 크게 실망했지만 당시 유행하던 언어분석철학에 공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뒤 <나의 철학적 성장 My Philosophical Development>(1959)과 몇 개의 논평을 제외하고는 철학에서 국제정치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퍼트리샤 스펜스와 이혼하고 미국인 이디스 핀치와 결혼한 1952년경부터 러셀은 점차 기성 권위층의 미움을 산 반면 전세계의 젊은층과 좌익계열에게는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1960년대 후반기 동안 그는 매년 1,000장 이상의 크리스마스 카드와 메시지를 받았으며 그중 많은 수가 극동지방에서 온 것이었음). 1954년 BBC 방송을 통해 '인간의 위험'이란 제목의 유명한 강연을 해 비키니 섬에서 있었던 수소폭탄 실험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 방송강연은 핵무장에 반대하는 노벨상 수상 과학자들의 '러셀-아이슈타인 성명', 동서양 과학자들의 퍼그워시 회의(1957년 1차 회의에서 러셀은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음)로서, 마침내는 1958년에 시작된 핵무장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러셀은 핵무장 반대운동의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1960년 사임하고 더욱 투쟁적인 ' 100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모임은 대규모의 시민불복종 운동을 일으킨다는 공식목표를 내걸었고, 1961년 러셀은 아내와 함께 직접 대규모 연좌농성을 이끌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2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1주일로 감형되었다.

1962년에는 9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쿠바 위기와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에 개입하여 당시 유엔 사무총장 우 탄트와 각국 수뇌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낼 정도로 여전히 왕성한 정력과 의지력을 가지고 있었다. 1963년 워런 보고서가 발표되자 '케네디 암살진상조사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또 자신의 평화 노력을 체계화하기 위해 '버트런드 러셀 평화재단'과 '애틀랜틱 트러스트'를 설립했다. 이후 1966년까지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맹렬히 공격했으며,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 유고슬라비아의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데디예르, 폴란드의 작가 이사크 도이처 등의 도움을 받아 국제전범재판소를 소집하기도 했다. 1967~69년 러셀의 가장 훌륭한 저서 가운데 하나로서 재치있고 솔직하면서 흥미진진하고 화려한 문체로 쓴 <자서전 Autobiography>을 3권으로 출간했다.

평가

러셀은 20세기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3세대에 걸친 활기찬 생애에서 철학·수학·과학·윤리학·사회학·교육·역사·정치학·논쟁술에 이르는 적어도 40권 이상의 책을 쉬지 않고 출간했다. 러셀의 탁월한 영향력은 자신의 지능을 사용하는 놀라운 능력(그는 하루에 보통 거의 고칠 필요가 없는 3,000 단어 분량의 글을 썼음), 기억력, 귀족 특유의 독립심 때문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의 활동의 원천이었던 심오한 휴머니즘적 감수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러셀의 이러한 감수성은 스스로 자유로운 무정부주의, 좌파, 회의적 무신론의 기질이라고 불렀던 성향을 통해 사회변혁운동에서 일관성있게 표현되었다. 『수학원리』의 철학적 의의

『수학원리』는 화이트헤드와 러셀이 1900년부터 1910년까지 10년 동안 연구한 업적의 결과이다. 이 책에는 수학적인 측면와 철학적인 측면이 있는데, 주로 화이트헤드가 기호법등을 고안하고 채택하는 등 수학적 측면을 맡았고, 철학적 측면은 러셀에게 맏겨졌다.

『수학원리』의 목적은 모든 순수 수학은 순전히 논리적 전제들로부터 도출해 낼 수 있으며 오로지 논리적인 언어만을 가지고 정의할 수 있는 개념만을 사용한다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는 이른바 '러셀의 패러독스'(Russell's Paradox)라고 하는 역리를 발견한 것일텐데, 러셀이 1901년 이 역리를 발견했을 때 화이트헤드는 더 이상 자신감 넘치는 아침을 기뻐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러셀은 수학이 순수하게 논리적인 것에 기초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수 개념을 논리학에 속하는 개념들로부터 도출해내려고 시도했다. 그는 집합 개념을 통해서 수를 정의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수를 집합의 집합으로 보았다. 이를테면, 2라는 수는 한 쌍들의 집합으로 정의할 수 있다. 2는 구성원이 두 개로 이루어지는 모든 집합의 집합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러셀은 이렇게 수를 논리적인 개념에서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모순에 도달하게 된다. 집합은 그 자신이 다른 집합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의 집합은 그 자신의 구성원이 될 수 있을까? 중학생들의 집합은 중학생들을 구성원으로 하겠지만, 그 집합 자체는 중학생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집합들의 집합의 경우는 어떤가? 그러한 집합의 구성원들은 그 자체로 집합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집합을 두 부류로 구별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그 자신을 구성원으로 하는 집합이요, 다른 하나는 그 자신이 구성원이 되지 않는 집합이다. S를 그들 자신이 원소가 아닌 모든 집합의 집합이라 정의하자. 이때 S는 그 자신의 원소일까? 만일 S가 S의 원소라 한다면, S의 정의에 의해서, S는 S의 원소가 아니다. 그러나 만일 S가 S의 원소가 아니라면, (다시, S의 정의에 의해서) S는 S의 원소이다. 바로 이것이 러셀의 역리이다.

러셀은 처음에 자신의 추론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추론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역리를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는 이 사실을 프레게에게 편지로 썼는데, 프레게는 "산수가 비틀거리고 있으며, 자신의 제 5 법칙이 틀렸다"는 회신을 보낸다. 사실 러셀의 발견은 매우 심각한 것이어서, 프레게는 자신의 평생의 노력인 논리로부터 산수를 도출해 내려는 시도가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닫게 된다.



3. 타입의 이론 (Theory of types)

러셀은 타입의 이론을 통해서 역리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 세 종류의 디저트가 나왔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디저트로 케익과 아이스크림 그리고 사과가 나왔다. 당신에게는 하나, 둘 또는 셋 모두를 선택할 기회가 있다. 이때 당신은 얼마다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디저트를 선택할 수 있는가. 물론 하나도 안 먹을 수도 있다. 아니면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즉, 케익을 먹는 경우와 아이스크림을 먹는 경우 그리고 사과를 먹는 각각의 경우이다. (지금까지 4 개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아니면 당신은 셋 중에 두개의 디저트를 선택할 수도 있다. 이 경우도 세가지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6 개의 가능성) 마지막으로 당신은 케익, 아이스크림, 사과를 모두 먹을 수 있다. 따라서 세 개의 디저트를 선택하는데 모두 8개의 옵션이 있는 셈이다.

이것은 23 으로 나타낼 수 있다. n개의 사물에 대해서 그것을 어떻게 취하는가의 가능성은 2n 개다. 이를 논리적으로 말하면, n의 구성원을 가지는 집합은 2n의 부분집합을 가진다는 것이 된다. 칸토르가 최대의 기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했을 때, 그 의미는 바로 n이 무한하다고 할 경우에도 2n 이 n 보다 크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러셀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칸토르가 증명한 것을 적용하는 것인데, 세상에 있는 사물의 수보다도 더 많은 수의 집합이 있다. 즉 집합은 사물이 아니다. 러셀은 이제 집합이 편의상 도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집합이란 하나의 표현(expression)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제함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명제함수 Fx의 경우 특정한 x의 범위 안에서만 그 함수가 의미있을 수 (참 또는 거짓) 있다. 만약 Fx를 '아버지의'라는 함수라고 한다면, Fa는 경석의 아버지, Fb는 영남의 아버지 등등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Fa=c (c=찬호) 이고 경석이 영남의 아버지라면, 결과적으로 찬호는 경석의 아버지이고 영남의 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이때 우리는 '찬호는 영남의 할아버지'라고 하는 대신 '찬호는 영남의 아버지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아버지의 아버지'는 함수 F 전체에 대한 함수로서 F와 동일한 차원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러셀은 여러 계층의 타입이 있다고 말한다.


type 0 --- 찬호, 경석, 영남

type 1 --- 아버지의

type 2 --- 아버지의 아버지의



타입 2에 해당하는 속성 (또는 관계)는 타입 1로서는 해결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속성 (또는 관계)가 타입 1의 속성 전체에 대해 언급하기 때문이다. 소위 거짓말장이 역설은 바로 문장 전제에 대한 언급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은 거짓이다"의 경우 그 언급은 바로 그 언급 자체에도 해당하기 때문에 역설이 귀결되었다. 이제 러셀의 제안은 언급들간에 계층을 구분함으로써 난점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4. 기술의 이론 (theory of descriptions)

언어의 주술구조에 의한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는 하나의 문장을 주어와 술어로 구분하여 이해한다. 그래서 주어의 위치에 오는 것은 개별자로서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해야 하는 실체(substance)로 여겼고, 술어에 위치에 오는 것은 보편자로서 주어의 위치에 오는 것의 속성(attribute)으로 여겼다. 다음의 문장을 보자.


(1)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개별자로서 존재하는 실체이지만, '현명하다'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


(2) 이 책상은 갈색이다.


이 문장의 경우 주어의 위치에 오는 '이 책상'의 경우 그것이 지시하는 바가 세계에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형이상학에 따른다 해도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다음의 경우에 문제가 생긴다.


(3) 그의 지각은 나를 화나게 했다.

여기서 '그의 지각'의 지시대상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의 지각'이 지시하는 바에 대해서 쉽게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세계에 '그의 지각' 또는 '지각'이라는 대상이 그 구성원으로 존재하는가의 물음으로 이어진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4) 황금산은 아름답다.

'황금산'은 전설 속에나 나오는 개념이며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에 대한 지시대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이 보여주는 바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표층적 형식이 문제의 본질을 가로막아서 철학적 문제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러셀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를 원했다.


(5) 현재의 프랑스 국왕은 대머리다.(The present King of France is bald.)

현재 프랑스는 왕정이 아니므로 주어 '현재의 프랑스 국왕'이 지칭하는 것은 없다. 마이농은 '황금산'과 같은 경우 구체적 지시대상이 없으므로 존재는 아니지만 존립 (subsisting; bestehen)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존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존재라 할 수도 없으므로 적절한 존재 대우(courtesy existence)를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러셀은 초기에 이러한 마이농의 입장을 수용했으나, 철저하게 과학적 방법을 철학에 도입한다는 입장을 발전시키면서, 진리는 단순하고 경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여, 마이농의 경우 모든 사유대상을 세계의 구성원으로 만든 나머지 '과밀도의 세계'(overpopulated world)를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오캄의 면도날). 결국 러셀은 '현재의 프랑스 국왕'을 존립하지 않으면서도 무의미하지 않은 기술구로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을 내세우게 된다.

이른바 러셀의 기술의 이론에 의하면, 문법적으로 주어의 위치를 차지하는 이름이나 기술구는 진짜로 무엇을 지시하는 표현은 아니다. 우리는 명제의 논리적 형식을 분석함으로써 철학이 만들어 낸 혼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러셀은 (5)의 경우 다음 세 문장의 축약형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5-1) 프랑스의 왕이 있다. (There is a King of France.)

(5-2) 단 한명의 프랑스 왕이 있다. (There is only one King of France.)

(5-3) 프랑스 왕은 그것이 누구이든간에 대머리다. (Whatever is King of France is bald.)

여기서 (1)이 거짓이므로 문장 (3)은 거짓이다.


고유명 버트런드로 주어를 대체해도 같은 방식으로 풀이할 수 있다.

(6) 버트런드는 대머리다.

(6-1) 버트런드인 무엇이 있다. (There is something which is Bertrand.)

(6-2) 단 하나의 그런 것이 있다. (There is only one such thing.)

(6-3) 그것은 대머리다. (That thing is bald.)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온 문법적인 주술구조가 논리적인 분석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버트런드는 대머리다"의 경우 '버트런드'는 주어의 위치에 있으므로 실체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6-1)-(6-3)의 논리적 분석의 결과 '버트런드'는 주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일상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명료한 분석이라 할 수 없고 오도적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러셀은 실제로 가장 정확하고 완전한 언어인 논리적 언어로의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논리적 기호들]

개체 변항: x, y, z, ...

명제 변항: p, q, r, ...

논리적 결합사: &, v, ->, ...

양화기호: ∀, ∃



먼저 양화기호가 없는 일상어의 문장을 기호로 바꾸어 보자.


(7) 테이블은 파란색이거나 초록색이다. (The table is either blue or green.)

(7') Bx v Gx

다음으로 보편양화기호(universal quantifier)가 사용되는 경우를 살펴보자.


(8) 모든 인간은 죽는다. (All humans are mortal.)

여기서도 '모든 인간'이 주어의 위치에 있으므로 실체라고 여길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은 분석을 통해서 사실은 술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힐 수 있다.


(8-1) 모든 x에 대해서, 그것이 인간이면, 그것은 죽는다. (For all x, if x is human, then, x is mortal.)

(8') (x)(Hx->Mx)


다음은 존재양화기호(existental quantifier)가 사용되는 경우이다.


(9) 어떤 사람들은 키가 크다. (Some humans are tall.)

이 문장은 사람이고 키가 큰 무엇이 최소한 하나 이상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풀어 쓸 수 있다.


(9-1) 사람이면서 그리고 키가 큰 그런 x가 있다. (There is an x such that x is human and x is tall.)


(9') (∃x)(Hx&Tx)

이제 양화기호를 이용해서 일상어를 기호언어로 분석하는 방법을 알았으므로, 다시 러셀의 예로 돌아가 논리적 분석을 시도하면 다음과 같다.


(5) 현재의 프랑스 국왕은 대머리다.

(5-4) 어떤 것이 존재하는데, 그 x는 프랑스 왕인 그런 x이다.

(5-5) 다른 모든 y에 대해서, 만약 그 y가 프랑스 왕이라면, y는 x와 동일하다.

(5-6) 그 x는 대머리다.


사실 (5)는 논리적으로 분석할 때, (5-4), (5-5), (5-6)의 세 문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 각각을 기호화하면 다음과 같다.


(5-4') (∃x) Kx

(5-5') (y)(Ky → y=x)

(5-6') Bx


위의 문장들을 연언 접속사인 &로 연결하면 (5)의 기호화가 완성된다.


(5') (∃x)((Kx & (y)(Ky -> y=x)) & Bx)

결국 이 분석을 통해서 러셀은 '현재 프랑스 왕'이 문법적으로는 주어의 위치에 있으나 사실은 술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5. 직접지와 기술지의 구분

러셀에 따르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식을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종류의 지식인데, 러셀은 이것을 직접지(knowledge by acquaintance)라고 불렀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는 못하지만 직접적으로 경험한 바(직접지)로부터 추론(inference)을 통해 논리적으로 구성해 내는 지식으로 기술지(knowldge by descriptions)라 하였다.

직접지에 속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감각소여(sense-data)이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색의 파편과 같은 것, 설탕을 입에 넣었을 때 느끼는 단맛, 귀를 통해 들리는 소리의 파편,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질 때의 느낌 등이 바로 우리의 직접 경험에 주어지는 감각소여들이다. 러셀은 그런 종류의 지식은 확실하며, 그에 대해 참 또는 거짓을 논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이와 달리 특정한 책상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 황금산이나 일각수와 같은 허구적 대상들은 모두 기술지에 속한다. 이들은 분명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은 대상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감각소여를 통해 얻은 직접지들을 토대로 그러한 대상들을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러셀의 직접지와 기술지의 구분은 영국 경험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그가 경험주의자 로크가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을 구분하여 경험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지식을 확보하려고 한 것과 같은 동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경험주의에서는 우리의 모든 지식의 기원을 경험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시해야만 한다. 로크는 그런 대상을 복합관념으로 처리하고, 직접 경험되는 단순관념들의 복합이라고 설명했다. 그와 유사한 방법으로 러셀도 감각소여로부터 출발하여, 직접 경험할 수 없는 모든 대상을 기술에 의하여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단순성과 경제성의 원리를 철저하게 적용하여 직접 경험 가능한 것만을 존재의 목록에 남기고, 나머지 모든 존재는 논리적 구성물로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러셀의 입장에서는 책상과 같은 일상적 대상도 직접지가 아닌 논리적으로 구성된 기술지에 속한다. 눈에 보이는 책상은 물론 실재한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구체적 대상인 책상조차도 광선의 세기와 방향, 그리고 관찰자의 위치 등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함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시시각각 관찰자가 직접 경험한 감각소여로부터 '책상'이라는 기술의 대상으로서 논리적으로 구성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한편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인 원자나 전자 또는 일각수, 만각형, 황금산 등은 기술의 이론을 통해 보다 쉽게 그 존재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외부세계에 실재하지는 않지만 직접경험의 최소단위로부터 논리적으로 구성된 존재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다.

반면 직접경험의 대상은 '이것'(this)과 '저것'(that)등의 논리적 고유명(logically proper name)에 의해서만 표현가능하며, 기술적 지식은 기술구에 의해 표현된다. 사실 하나의 대상은 기술구에 의해 표현될 수도 있고, 논리적 고유명에 의해 표현될 수도 있다. 러셀이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 '나'라고 말할 수도 있고, '버트런드 러셀'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라고 자신을 부를 때, 논리적 고유명을 이용한 것이고, '버트런드 러셀'이라고 부를 때, 기술구를 이용한 것이다. 시간을 나타내는 표현도 두 가지 방법 모두가 사용될 수 있다. '지금'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10시 10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지금'은 논리적 고유명이요, '10시 10분'은 기술구이다. 공간을 나타내는 표현도 그렇다. 고유명을 써서 '여기'라고 할 수도 있고, 기술구를 사용하여 '강의실'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하나의 명제는 "여기는 강의실이다"와 같이 '고유명과 기술구'가 합해져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러셀은 플라톤 이래로 내려온 서양철학의 주술구조에 의존한 거대한 형이상학적 문제를 그의 기술의 이론으로 일시에 해소해 버렸다. 이렇게 볼 때, 보편개념으로의 '선'이 존재하는가와 같은 철학의 많은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우리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오해한데서 온 혼란이라는 것이다.



6. 논리적 원자론

러셀은 1905년에 발표한 "지시에 관하여"(On Denoting)라는 논문에서부터 논리적 원자론을 발전시켰는데, 세부적인 수정을 거쳐 상당 기간동안 그 입장을 유지하였다. 여러 해를 거친 수정을 감안할 때 그의 논리적 원자론의 결정판은 아마도 1918년의 강연을 책으로 펴낸 『논리적 원자론의 철학』(The Philosophy of Logical Atomism)에 나타난 내용일 것이다.

논리적 원자론에서 '원자론'이 의미하는 바는 러셀의 철학이 특정 카테고리에 속하는 아이템들을 기초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한편 논리적 원자론에서 '논리적'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서로 다른 카테고리에 속한 아이템들을 연결하고 구성하는 수단으로써 엄격한 논리적 방법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발견하는 세계의 구성요소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라고 여길 수 있는 아이템을 먼저 확인하고, 그렇게 얻어낸 기초 아이템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세계를 다시 구성해 낸다는 것이 논리적 원자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인 것이다.

논리적 원자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러셀이 말하는 원자명제(atomic proposition)에서 시작하자. 원자명제는 고유명(proper name)과 술어(predicate)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고유명과 술어는 모두 단순기호들인데, 단순기호들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대상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단순기호를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단순대상들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단순기호와 단순대상은 무엇인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러셀은 우리가 의자나 책상과 같은 일상적인 사물들을 직접적으로 경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것은 일상적인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인 대상에 대한 지각경험을 통해서 얻게되는 감각소여(sense-data)라고 했다. 감각소여란 영국 경험주의의 전통에서 말해온 제2성질과 유사한 것으로서 색, 맛, 소리, 촉감의 파편들이다. 이러한 감각소여는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지시하는 단어는 일상적인 단어일 수 없다. 내가 감고있던 눈을 떴을 때 내 시각경험에 주어지는 감각의 파편들을 나는 "이것"(this) 또는 "저것"(that)이라는 단어에 의해서 나타낼 수 있는데, 그러한 표현을 러셀은 '논리적 고유명'(logically proper name)이라고 불렀다. 또한 러셀은 술어가 가지는 속성(property)이나 관계(relation)의 이름에 대해서도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원자명제는 감각소여를 나타내는 고유명과 속성이나 관계를 나타내는 술어로 구성되는 것이다. 일례로, "이것은 파랑이다"라는 문장은 원자명제이다. '이것'이라는 고유명이 어떤 감각소여를 나타내고 있으며, '파랑이다'는 술어는 바로 그 감각소여의 속성에 해당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러셀은 원자명제가 참이라면, 그에 대응하는 원자사실에 의해서 참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원자사실은 고유명과 술어가 지칭하는 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원자명제와 원자사실과의 대응은 원자명제를 참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파랑이다"라는 문장이 참이 라면, 그것은 '이것'에 의해 이름 지워지는 파랑이라는 속성을 가진 감각소여로 구성되는 사실에 의해서 참이 된다는 것이다.

원자명제에 대한 러셀의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우리가 원자명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정말로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대상들에 관한 문장들이다. 이러한 문장들로는 논리적 고유명인 '이것', '저것', '나', '여기', '지금' 등과 같은 단어를 포함한 문장들일 것이다. 나머지 문장들은 우리가 직접 경험한 문장인 원자명제들로부터 논리적으로 구성한 것이어야만 한다. 일례로 "소크라테스는 대머리다"라는 문장의 경우 원자명제라 할 수 없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단어를 고유명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것을 단순기호로 생각할 수 있지만, 러셀은 '소크라테스'는 단순기호가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일상어의 문법적 구조가 논리적 구조를 올바르게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소크라테스는 대머리다"라는 문장을 잘 분석해 보면, '소크라테스'가 고유명이 아니라 실은 기술구(description)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기술구란 그 자체로 직접 경험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의 대상을 지칭하는 논리적 고유명으로부터 논리적으로 구성된 일종의 논리적 허구(logical fiction)다. '소크라테스'나 '대머리다'와 같은 단어는 사실은 보다 더 단순하고 기초적인 세계의 구성요소인 논리적 고유명과 술어로 환원될 수 있다.

이러한 원자명제는 다른 원자명제와 결합하여 분자명제(molecular proposition)를 이룬다. 원자명제를 그 안에 다른 명제를 일부로 가지지 않는 명제라고 정의한다면, 분자명제는 그 안에 다른 명제를 일부로 가지는 명제이다. 이때 하나의 원자명제가 다른 원자명제와 결합할 때, 연결고리로 작용하는 것이 이른바 논리적 결합사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고'(and), '또는'(or), '만일 . . .이면, . . .이다'(if . . ., then . . .)와 같은 것이 논리적 결합사에 해당하는데, 러셀은 이들 논리적 결합사들에 대한 순수한 논리적 형식(logical form)을 우리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자명제의 경우 우리가 그 구성요소들을 직접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우리는 원자명제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분자명제가 원자명제들이 논리적 결합사에 의해서 결합된 것이라고 할 때, 러셀은 반드시 우리가 논리적 결합사의 의미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설명해야만 했다. 그는 논리적 결합사들의 순수 형식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의 의미를 쉽게 알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이 아주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러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전체를 가장 확실하고 원초적인 요소인 감각소여로 환원한 뒤, 그러한 확실한 기초로부터 다시 논리적 방법에 의해서 원자명제, 분자명제, 그리고 언어 전체에 이르는 구성을 통하여 세계를 재구성한다는 프로그램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수학원리』에서 수학의 전체계를 논리적으로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몇 개의 자명한 진리로부터 시작하여 순수하게 논리적인 연역을 통해서 설명하려고 했던 그의 철학적 이상을 우리의 존재와 세계 전체에 대한 지식의 영역으로 확대 적용하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내용출처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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