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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5/06/14 (23:55) from 129.206.196.125' of 129.206.196.125' Article Number :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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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길 - 종교와 종교의 만남





  2002년 봄(4호)



▶현대와 기독교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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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길 - 종교와 종교의 만남



오강남(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 교수)



들어가는 말



현대 사회를 일컬어 다원주의 사회라 한다. 하나의 문화, 하나의 가치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문화와 가치관이 어울려 공존하고 있는 사회라는 뜻이다. 특히 우리는 현재 다양한 종교들이 서로 어깨를 비비며 이웃하고 있는 종교적 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종교적 다원주의 사회에서 자칫 잘못하면 서로 다른 종교들끼리 쓸데없는 오해나 긴장, 갈등이 야기될 수도 있다.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막기 위해서, 나아가 조화롭고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의 종교뿐 아니라 남의 종교를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불가피하다. 사실 남의 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나의 종교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이제 이런 종교적 다원주의 사회에서 종교들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기본 패러다임은 옛날처럼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 누가 낫고 누가 못하냐, 누가 좋고 누가 나쁘냐, 무엇이 계시의 종교이고 무엇이 그렇지 못하냐 하는 식의 진위, 우열, 선악, 계시의 유무 등의 이분법적 범주의 잣대로 판가름하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 서로 도와 가며 어떻게 함께 생각하고 함께 일하는 상호 협력 관계를 이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 넘어가야 한다.



신학자 폴 닛터(Paul Knitter)의 말처럼, 종교간의 관계는 이제 적자 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의 관계가 아니라 협력자 생존(the survival of the most cooperative)의 관계로 넘어 왔다. 정치적 불의와 억압, 경제적 불공평, 생태계 파괴 등 인류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위기 앞에서 각 종교가 서로 자기만 옳다는 독선적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종교는 온 인류와 함께 공멸의 길을 달릴 뿐이다. 이에 각 종교는 서로 협력하여 이런 난국을 함께 대처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대되어야만 한다. 이 짧은 글에서는 현재 기독교에서 타종교들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가,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타종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 하는 등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에 관한 문제를 좀 포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문제는 여러 가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이라면 언젠가는 한 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여 다루어 보려고 한다.



1. 동서양의 만남



이제 20세기는 끝났다. 20세기에 생긴 일들 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일이 무엇일까? 인공 위성이나 컴퓨터 같은 과학 기술의 혁명일까? 공산주의의 등장이나 몰락과 같은 정치 사회의 변동일까?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에 의하면, 후세 사가(史家)들이 20세기를 논할 때 무엇보다도 동서양의 문명, 특히 기독교와 동양 종교가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사건을 지적할 것이라고 하였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서양은 역사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세월을 기독교라는 단일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고립적으로 안주해 온 셈이다. 물론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계속 주변에 공존하고 있긴 했지만, 문화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살 필요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와서 교통 통신 수단의 발달로 세계가 좁아지고, 인류학 역사학 종교학 등의 연구 성과로 다른 문화에 대한 지식이 증가하고, 서로 다른 인종이나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접촉하거나 섞여 사는 일이 많아지면서 세상에는 기독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도 있다고 하는 다(多)종교 현상이 새로운 현실로 심각하게 다가 온 것이다.



이렇게 타종교의 존재 사실이 간과되거나 경시할 수 없는 새로운 사실로 육박해 옴에 따라, 지금까지 별다른 성찰 없이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라고 당연히 믿어 오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위협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의 말을 빌리면, 이런 다종교 현상은 다른 종교보다도 기독교에 대해 더 큰 위협과 더 큰 불안의 원인이 되고 있다. 다른 어느 종교도 심지어 이슬람마저도, 자기들의 종교가 살아 계신 한 분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 바로 그 종교라고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심각한 도전 앞에서 기독교 신학자들은 뭔가 의미 있는 신학적 해답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버드 대학 세계종교연구소 소장이었던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 Cantwell Smith) 교수는 이런 사정을 다음과 같은 말로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인간들의 종교적 다양성이라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거의 악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해명하는 문제만큼이나 중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자들은 다종교 현상보다는 악의 문제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부터 기독교 신앙에 대한 어떤 심각한 지적 진술도 그것으로 사람들이 소기의 목적을 수행하게 하려면, 타종교에 대한 모종의 신학적 해명을 수반하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은하수가 존재하는 이유를 창조론으로 설명하지만 힌두교 경전『바가바드기타』가 존재하는 이유를 무엇으로 해명해야 하는가?



캐나다 종교학자 해롤드 카워드(Harold Coward) 교수도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학이 계속적으로 다른 종교들과 무관하게 고립적으로 정립될 수 없다고 하는 것, 그리고 장차 기독교 신학의 발전은 타종교와의 심각한 대화의 직접적 결과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2. 세 가지 반응



이처럼 새롭게 부각된 다종교 현상에 대해 현재 기독교에서 나타내고 있는 반응을 종합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태도로 대별될 수 있다.



1) 배타주의(exclusivism)의 태도



기독교만이 유일한 절대 종교요, 다른 모든 종교는 신에 이르려는 인간들의 헛된 노력이라는 지금까지의 믿음을 재확인하고 이를 더욱 굳게 지키자는 태도이다. 이런 태도가 극명하게 드러난 예로 197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복음주의 교단들이 모여 채택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있다. 여기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나 세계관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거짓 가르침을 단호히 배격한다고 선언했다. 타종교와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창녀처럼 복음을 팔아먹는 복음에 대한 모독일 뿐이므로 혹시 대화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타종교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킨다는 뚜렷한 목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못 박았다. 이와 같은 우월주의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는 그 후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 복음주의 성회에서 재 천명되었다. 여기서도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그리

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하고, 어떤 종류의 절충주의나 대화도 배격하며 타종교와의 유일한 관계란 그들 종교의 허구성을 밝혀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작업뿐이라고 하였다.



이런 근본주의자들 내지 복음주의자들의 주장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는 대표적 신학자는 스위스 바젤 대학 교수로 있던 칼 바르트(Karl Barth)였다. 바르트는 인간이란 본래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뿐이므로 그리스도와 복음을 모르는 모든 종교들은 결국 인간들의 헛된 노력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2) 포용주의(inclusivism)의 태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 모든 종교에는 계시도 있고 구원도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태도이다.



이런 입장은 1962 65년 제2 바티칸공의회 이후 카톨릭 신학자들이 취하는 태도로서 그 대표적 신학자는 칼 라너이다. 라너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인류 전체가 구원받기를 원하실 것이고, 그렇게 원하신다면 마땅히 거기에 따라 행동하셨을 거라는 점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류 모두에게 한결같이 은혜를 내려 주셨을 것이고, 실제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속에 내재하는 초월적 계시를 체험하게 되는데, 그것도 바로 이 은혜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구원받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라너는 타종교 신자들이 그들 나름대로 자기들 종교에서 자기들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 왔지만 사실 그들은 익명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산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고 그들의 종교는 결국 익명의 기독교(anonymous Christianity)였다는 주장이다. 이런 종교들이 그리스도를 모를 때까지는 일종의 복음의 준비 과정으로서 훌륭한 역할을 했지만 이제 인류의 궁극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나타난 이상 모두 그에게로 나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로 귀의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일견 관용주의적인 자세로 보이기도 하지만,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필요불가결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점에서 결국 앞에서 본 배타주의적 태도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은 없는 셈이다. 한스 큉 같은 신학자는 라너의 이런 생각을 교회 중심주의라고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 그래도 포용주의가 배타주의보다는 훨씬 유연성을 가진 입장인 것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3) 다원주의(pluralism)의 태도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그 동안 세계 종교들을 연구하고 이들 종교들을 비교하는 종교학자들의 계속적인 연구 성과에 힘입어 이웃 종교, 특히 동양 종교들의 깊이에 접한 많은 신학자들 중에서, 이제 기독교만이라는 고집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기독교만이라는 고집에서 벗어나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뿐 아니라 이런 고집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믿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 배타주의의 선봉 대장 칼 바르트가 죽고 그 후임으로 바젤 대학 신학 교수로 임명된 하인리히 오트(Ott)마저도 얼마 전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가진 한 인터뷰에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에 대한 개방성 그리고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데 대한 탐구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모든 종교 전통들의 공헌을 감안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라고 했다. 그는 그 후 불교와 기독교와의 대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방면의 연구를 위해 많은 시간과 정력을 바치고 있다.



폴 틸리히도 죽기 바로 전에 행한 조직신학에 대한 종교사의 의미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그가 시카고 대학에서 종교학의 거장 엘리아데(Mircea Eliade)와 함께 가졌던 2년 간의 종교사 및 조직신학 공동 세미나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깨달았던가 하는 것을 밝히고, 시간만 허락된다면 그의『조직신학』을 세계 종교사의 빛 아래서 다시 쓸 용의가 있다고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실례는 엘리아데가 오래 전에 발표한 그의 글에서  '우리는 지금 하나의 지구권 문화에 접근하고 있으므로 머지 않아 아무리 국지주의적인 역사가, 철학자, 신학자라 하더라도 타 대륙의 동료들이나 타종교 신도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기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 자기의 신조를 형성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한 말을 입증해 주는 셈이다.



그러면 종교 다원주의란 무엇인가? 학자들에 따라 약간씩 다른 견해를 보이지만 그 핵심은 영국 신학자 알랜 레이스(Alan Race)가 지적한 대로, 신에 대한 지식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있어 어쩔 수 없이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서로 다른 종교들은 신에 대한 좀더 완전한 진리가 인류에게 제공되도록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 기본 골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들처럼 서로 자기들이 만진 대로의 코끼리를 전부인 양, 그것이 코끼리의 실상인 양 자기들의 소견을 절대화하지 말고, 서로 한 자리에 앉아 각자 자기들이 만진 대로의 코끼리 상을 이야기하고 서로 의견들을 교환함으로써 좀 더 실체에 가까운 코끼리 상을 가질 수 있도록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자는 태도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느 한 종교가 진리에 대해 전매특허를 가지고 있을 수 없으므로 각 종교는 궁극적 실재를 체험하는 일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 서로 대화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존 힉(John Hick)은 천문학의 용어를 써서, 해와 달과 모든 볕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듯, 타종교들이 나의 종교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던 천동설의 프톨레미식 시각(Ptolemaic perspective)을 청산하고, 지구가 다른 행성들과 마찬가지로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처럼, 나의 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가 진리의 태양을 중심으로 운행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지동설의 코페르니쿠스적 시각(Copernican perspective)을 채택해야 한다 라고 하였는데 재미있는 표현이다. 같은 생각을 정치적 용어를 써서 표현하면, 제국주의를 청산하고 공존과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입장이라 할수 있다. 이제 어느 나라가 다른 모든 나라들보다 절대적으로 뛰어나므로 그 나라가 다른 모든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들을 종속시켜야 한다고 믿던 정치적 제국주의는 적어도 지각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진 지 오래이다. 문화적 제국주의나 경제적 제국주의도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제 종교적 제국주의도 말끔히 청산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말처럼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제국주의도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한스 큉도 "종교간의 대화 없이 종교간의 평화가 있을 수 없고, 종교간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가 있을 수 없으며, 세계 윤리 없이 인류의 생존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3. 다원주의에 따르는 몇 가지 문제점



이런 종교 다원주의에 일반적으로 따르는 몇 가지 오해와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오해 몇 가지를 지적하면, 그것이 종교적 상대주의나 혼합주의에 불과하다는 비난이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첫째,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그것이 그것이라는 상대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를 무분별하게 마구 섞자는 혼합주의도 아니다. 셋째, 종교들이 다르면 어떻고 같으면 어떠냐 하는 식으로 종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무관심주의나 값싼 관용주의도 아니라는 것이다. 넷째,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다 같다거나 만일 같지 않으면 같은 규격품으로 만들자는 획일주의도 아니다. 다섯째, 모든 종교에서 가장 좋은 부분만 뽑아내 가장 이상적인 보편 종교를 창출해 내자는 낭만주의도 아니다. 여섯째, 모든 구체적인 것은 걸러 내고 보편적인 것만 나누어 갖자는 추상적 보편주의도 물론 아니다. 같게 하거나, 섞거나, 거르거나, 하나로 만들거나 무시하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특히 각 종교에 나타난 구체적이고 특수한 표현 양식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특수적인 것 없이는 보편적인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니다, 아니다 하는 말만을 했지만 이제 좀 적극적인 표현을 써서 말하면, 종교 다원주의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안목의 제약성을 겸허하게 인정하며, 상대방의 안목에서 배울 것은 배워 나의 안목을 더욱 깊이 하고, 또 내가 가진 것으로 상대방의 안목을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그것으로 상대방에게 공헌하자는 것이다. 종교간의 대화라고 해서 반드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앉아 이야기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하든, 글을 통하든, 그들과 생활을 같이 하든, 상대방의 생각 깊이에 들어감으로써 내 속에서 이루어지는 내면적 변증법을 통해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일이다. 대화는 상대방을 모방하거나 상대방 생각에 무조건 동의하거나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의 생각에 접하여 내 속에 있는 무엇을 일깨움이다. 이것은 미국의 종교 철학자 존 던(John S. Dunne)이 말하는 변증법적 넘어가 봄(passing over)과 되돌아 옴(coming back)의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던은 오늘날 우리가 감행해야 할 정신적 모험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한 생활 양식에서 다른 생활 양식으로,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넘어가 봄을 통해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문화, 자기 자신의 생활 양식, 자기 자신의 종교로 되돌아 옴이라고 했다. 이것은 물론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고 거기서 다시 개종하는 등 분주한 형식적, 외형적 넘나듦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 태도가 경직된 옹고집에서 해방되어 다른 사고 방식, 다른 종교적 입장과 내면적 대화를 감행함으로써 계속적으로 더욱 깊은 정신적 차원으로 들어가는 변증법적 전진을 의미한다.



종교학의 창시자 맥스 뮬러는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알지 못한다."(He who knows one, knows none.)고 했다. 남의 종교를 아는 것은 나 자신의 종교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는 길이라는 뜻이다. 한스 큉의 경우, 남의 종교를 아는 것은 상대방 종교의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종교들의 접촉은 이런 철저한 자기 비판을 가능하도록 한다는 이야기이다. 종교 다원주의에 수반되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기독교인들이 제기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서 가장 자주 논의되는 것 한 가지만 예거하면, 이런 다원주의적 태도가 성경 말씀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 4:12)고 한 베드로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런 말씀 때문에 이웃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믿거나 그들에게서 무엇을 배우겠다고 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버드 대학 신학대학 학장이던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이 지적한 대로, 베드로의 이와 같은 진술은 고백적 언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불교나 유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믿음과 감사의 경험에서 우러난 자연스런 고백이요, 병을 고치는 일 등 모든 것을 자기들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만 한다는 것을 자각한 사도들의 겸손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이 구절뿐만 아니라 성경 여기 저기서 발견되는 비슷한 구절들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언어로서, 그 일차적 목적이 객관적 사실을 진술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나의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나의 어머니에 대한 역사적, 실증적, 미학적,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실 등을 진술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실존적 체험을 주체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가 세상에서 최고의 어머니라 고백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자기 어머니가 최고의 어머니라고 하는 고백과 상충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둘 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명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독특한 입장에서 독특하게 체험한 실존적 절대성, 인격적 독특성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접촉을 통한 변화



대화는 단순히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건전한 대화는 필연적으로 지평 융합과 같은 변증법적 천이(遷移)를 가져다 주기 마련이다. 과정신학의 거장 존 캅(John Cobb. Jr.)에 의하면, 현재 "기독교 신학은 불교와의 만남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신학계의 변화가 모두 전적으로 동양 종교와의 접촉에 의해서만 촉발되고 추진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장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혹은 어느 분야에서는 상당 부분이 이런 동양 종교들과의 접촉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문제를 여기서 본격적으로 다룰 수는 없지만 뚜렷한 것 몇 가지만 예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신론적 신관이 흔들리는 것이다. 둘째, 동양 종교와의 대화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기독론이므로 전통적인 기독론에 여러 가지 변화가 오고 있다. 셋째, 신과 인간의 존재론적 분리를 강조하는 유신론적 이분법의 신관에 변화가 옴으로써 세계를 통전적(統全的)으로 보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고, 이런 통전적 시각을 기초로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생태학적 신학,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평화신학, 여성신학 등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넷째, 종교 생활에서 교리보다 체험을 중시하게 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최근에 많이 논의되는 영성신학도 이런 일련의 신학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맺는 말



서구 지성계에서 기독교와 동양 종교가 만나 이렇게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눔으로써 지적, 종교적, 사회적, 정신적 지평을 넓히고 안목을 깊이 있게 한다는 것은 고무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한국에서는 이런 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고 오히려 엉뚱한 소리만 들린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사회과학 연구소에서 발표한〈한국종교실태조사연구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인들,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특색 세 가지 중 첫째 가는 것이 종교적 배타성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배타적 태도가 서양의 근본주의 내지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특색이므로 그것이 한국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발견된다고 해서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런 배타주의가 창궐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일뿐만 아니라 어느 면에서 보면 엄청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라고 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는 첫째, 한국은 서양과 달리 역사적으로 다종교 상황 속에서 살아 왔다는 점이다. 둘째, 한국은 상대방의 생각을 나의 생각과 한 가지로 만들려는 획일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에 가장 피해를 많이 본 나라로서 이런 역사적 교훈에서 뭔가 배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 한국은 전통적 사상인 한(韓) 사상이나 원효(元曉)의 화쟁론(和諍論), 화엄(華嚴) 사상과 같이 다원주의 시각을 함양하고 고양하는 정신적 배경을 가지고 살아 왔다는 점이다. 이런 역사적 정신적 배경을 가진 나라에서 서양보다 더 심한 배타주의가 팽배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이제 한국에 있는 종교들도 새로 등장한 다원주의 시대에 걸맞게 다원주의적 시각, 개방적인 태도로 일대 방향 전환을 하여야 하고, 또 그렇게 하리라 믿는다. 누가 말한 대로 아직도 종교간의 대화가 가능한가 혹은 필요한가 하고 묻고 있는 것은 마치 해가 중천에 떠있는데도 아직 해가 뜰 것인가 혹은 뜰 필요가 있는가 하고 묻고 있는 것과 같다. 종교간의 대화는 많은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사치품이 아니라 필연이요 당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제 문명의 전환기에 선 기독교, 특히 한국 기독교의 과제는 인류 공동의 정신적 유산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 자신의 일부이기도 한 동양 종교들과 의미 있는 변증법적 대화를 통해 깊은 내면적 성숙을 이루어 나가는 데 더욱 큰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될 때 한국 기독교는 성숙한 종교인들을 길러 내는 종교, 열린 종교로서의 몫을 다하고, 나아가 한국 사회와 세계에 크게 기여하는 종교로 발돋움하게 되리라 확신한다. 이 일을 이루는 데 뜻있는 그리스도인 모두의 참여와 기여가 요청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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