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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5/06/17 (23:07) from 129.206.196.130' of 129.206.196.130' Article Number : 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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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은 복제되지 않는다




영혼은 복제되지 않는다




최재천 박사(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확고한 모태신앙으로 중무장한 여인을 아내로 맞은 덕에 나는 벌써 20년 넘게 교회의 문턱을 드나들었다. 지방 대학의 교수가 되어 우리 부부가 이른바 주말부부로 지내야 했던 지난 5년간을 빼고는 아내는 나와 결혼한 후 거의 쉼 없이 교회에 봉사하며 살아왔다. 미국 유학 시절에도 아내는 종종 성가대 지휘, 오르간 반주, 성경 공부 등 정작 전공 공부보다도 교회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 아내에게 나는 우리가 미국에 온 목적이 학위를 하기 위함이지 교회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며 종교 탄압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주일마다 성가대 연습을 시켜야 하는 아내를 별 불평 없이 예배시간보다 훨씬 먼저 교회에 데려다 주었다. 나는 음정도 불안하고 목소리조차 신통치 않은지라 성가대에 낄 수도 없고 하여 연습 내내 하릴없이 교회 청소도 하고 의자도 줄을 맞춰 정리하곤 했다. 아직 우리 아이는 없었지만 워낙 아이들을 좋아한 나머지 영아실 담당을 자원하기도 했다. 한 번에 대여섯 명의 아기들에게 우유도 먹이고, 업어주거나 재우는 일을 도맡아 엄마들로 하여금 예배당 안에서 편안히 예배드릴 수 있게 해 주기도 했다. 교인도 아닌 주제에 나 역시 나름대로 교회 봉사를 적지 않게 한 셈이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 느닷없이 목사님께서 우리 집에 들이닥치시더니 다짜고짜로 날더러 성경책에 손을 얹으라고 하셨다. “아니 교회 봉사는 그 어느 교인 못지 않게 하면서 세례는 받지 않는다니 말이 되느냐?” 하시며 당장 세례를 주시겠다며 재촉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창세기를 핑계로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목사님은 내게 가지고 오신 성경책을 펴 보이셨다. 창세기를 가지런히 접어두신 것이었다. “다 좋은데 전공을 잘못 택해서 말이야” 하시며 일단 세례부터 받은 다음 창세기 문제는 차차 풀도록 하자고 하셨다. 언젠가 강원용 목사님께서도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최 교수는 진화론자인데 어떻게 교회에 나올 수 있는 건가?” 나는 “독실한 운전기사로 다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다행히 목사님은 날 나무라지 않으셨다. 나는 주일마다 교회는 덜렁덜렁 나오지만 아직도 세례를 받지 않은 사이비 교인이다.


1. 생명의 주체

양지바른 앞뜰에 닭들이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가끔 꼬꼬댁거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모이도 쪼아먹고 짝짓기도 하며 알도 낳는 걸 보면 분명 닭이 닭이라는 생명의 주체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버드대학의 생물학자 윌슨(Edward O. Wilson)은 영국 작가 버틀러(Samuel Butler)의 표현을 빌려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매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나는 몇 년 전 출간한 내 에세이집의 제목을 “알이 닭을 낳는다”로 붙인 바 있다. 같은 뜻을 더욱 간략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알은 곧 ‘유전자’를 의미한다. 인간을 비롯하여 이 세상 모든 생명체들은 다 잠시 이승에 태어나 일정 기간의 삶을 살다가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덧없는 존재들이다. 그에 비하면 태초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명맥을 유지해온 DNA야말로 생명의 궁극적인 주체이다. 적어도 이 지구라는 행성의 생명에게는 그렇다. 그래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의 저자이자 옥스퍼드대학의 생물학자인 도킨스(Richard Dawkins)는 DNA를 가리켜 “불멸의 나선”(immortal coil)이라 부르고 생명체는 그저 “생존기계”(survival machine)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알이 닭을 낳는다.
‘생명’, 즉 ‘life’라는 단어를 두툼한 성인용 사전에서 뒤져보면 수십 가지의 정의들이 적혀 있다. 그러나 초등학생용 옥스퍼드 영어사전(The Oxford Junior Dictionary)을 찾아보면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기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에게 생명의 개념을 설명하는 목적에는 ‘살아 있다’는 의미의 시간적 정의를 선택한 것이다. 죽지 않으려고 온 세상에 신하들을 풀어 불로초를 찾게 했던 진시황이나 손바닥의 생명선을 칼로 그어 연장하려 했던 나폴레옹도 죄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생명의 가장 보편적인 속성은 죽음, 즉 한계성(ephemerality)이다. 이 지구의 생명체는 누구나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죽음만큼 모든 생명체에게 다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없다.
종교에서도 대체로 우리에게 일단 한계성 생명을 부여한 다음 믿음과 의식을 통해 영원불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를 창조하신 영원불멸의 존재를 믿고 그를 거역하여 지은 원죄를 인정하면 내세에 이르러 영원히 생존할 수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생명이 한계성을 지니되 그것을 담아줄 그릇, 즉 육체를 바꿔가며 윤회한다고 가르친다. 한계성을 전제로 했지만 영생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생명의 개념이다.
화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30 내지 40억 년 전 지구의 표면을 덮고 있던 원시 바다 속에 떠다니던 각종 유기물들이 태양으로부터 내리쬐는 자외선 등의 에너지에 의해 점점 더 커다란 분자들로 합성되던 중 우연히 자신의 복사체들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지닌 분자, 즉 DNA가 탄생하면서 이 지구상에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최근에는 지구 생명의 시작이 과연 DNA였나, DNA의 합성 정보를 담고 있는 RNA였나, 아니면 아예 DNA가 만들어내는 것으로 알고 있는 단백질인가를 놓고 적지 않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흥미롭게도 RNA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완전한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일단 지금까지 믿어왔던 대로 DNA라고 해두자.
세월이 흐르며 DNA는 자기 복제를 더욱더 효과적으로 수행해 줄 근육, 심장, 눈 등의 생존기계들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태초에는 보잘것없는 단순한 화학물질에 지나지 않았지만 단세포생물을 거쳐 급기야는 인간을 비롯한 복잡한 다세포생물들이 분화되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제가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모든 생물체들 속에 태초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존재는 바로 다름 아닌 불멸의 나선 DNA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의 역사는 결국 태초부터 지금까지 여러 생존기계들의 몸을 빌려 살아온 DNA의 일대기이다. 생명체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한계성을 지니는 것이 생명의 모습이지만 유전자의 눈높이에서 다시 바라보면 생명은 홀연 영속성(perpetuity)을 지닌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끊어지지 않고 생명을 유지해왔다.
DNA의 기본구조는 현재까지 확인된 모든 생명체에서 동일하다. 다윈(Charles Darwin)이 주장한 대로 오늘날 이처럼 다양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은 모두 태초에 우연히 생성된 그 어느 성공적인 복제자로부터 분화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다윈은 DNA의 존재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유전물질에 대해서도 엉뚱하게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특유의 논리적인 사고로 이 세상 모든 생명체들이 최초의 한 생명체로부터 분화되어 나왔다고 결론지었다.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제가끔 더욱 효율적인 복제를 위하여 다른 생존기계들 안에 들어앉아 있지만, 지구의 생명체들 모두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모두 하나의 조상을 모시는 한 집안 식구들이다. 이처럼 생명은 무수히 많은 가지를 뻗었으나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연속성(continuity)을 지닌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언을 남긴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Descartes)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그는 뇌조직의 일부인 송과체(pineal body)가 인간의 뇌에서만 발견되었던 당시의 미흡한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송과체가 바로 인간만이 유일하게 갖고 있는 혼(soul)이 담겨있는 곳이라는 사뭇 성급한 결정을 내렸다. 그 후 송과체는 데카르트가 사망하기도 전에 다른 많은 척추동물들의 뇌에서 발견되었고 그 기능도 대부분 혼의 존재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밝혀졌다. 데카르트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어쨌든 데카르트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사고력을 지닌 생명체라고 믿고, 따라서 인간은 그렇지 못한 다른 모든 짐승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데카르트의 이원론(dualism)은 기독교적 관념론과 더불어 서양의 인본주의를 철저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창세기 1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적혀 있다. 기독교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겠지만, 이 얼마나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인 오만인가? 이 방대한 우주 전체를 만드신 분이 어찌하여 이 넓은 우주에 떠있는 그 많은 소우주들 중에 하필이면 변방에 있는 태양계까지 오셔서 태양 주위를 맴도는 행성들 가운데 그리 대수롭지도 않은 지구를 찾아오셔서 손수 만드신 수많은 생물들 중 유독 우리만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셨다는 것인가? 지구에 살아온 다른 모든 생명체들은 모두 자연의 선택을 받는 동안 어찌 우리 인간만 유일하게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우길 수 있는가 말이다. 다윈은 서양의 오랜 믿음이었던 이원론의 허구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여 일원론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 지구의 생명은 일원성(monism)을 지닌다.
생명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단세포생물들로부터 더욱 복잡한 다세포생물들이 분화되어 나온 것은 사실이나, 모든 단순한 생물들의 구조가 다 복잡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보다 복잡한 생물들도 등장한 것이지 모든 생물들이 더 복잡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세포생물 중에서도 태초에서 지금까지 이렇다 할 변화를 겪지 않고 살아남은 것들도 있고 비교적 최근에 분화된 것들도 있다. 문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풀기 위해 구조가 언제나 복잡해져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보된 제트엔진 비행기가 구조적으로는 프로펠러 비행기보다 훨씬 단순하지 않은가?
이렇듯 진화에는 목적성도 없고 방향성도 없다. 도킨스의 표현을 빌면 진화는 자연선택이란 눈먼 시계공(blind watchmaker)에게 맡겨진 시계의 운명과도 같다. 늘 아끼던 시계가 고장이 나서 시계방에 가지고 갔는데 시계를 고쳐 주겠다는 시계공이 시각장애인이었다고 상상해 보라. 그 시계가 제대로 고쳐지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지구에 현존하는 생물들의 엄청난 다양성도 그 동안 이 지구에 살았다가 절멸해버린 모든 종들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화석 증거에 의하면 지구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거나 이미 사라져간 모든 생물들 중 인간은 매우 어린 편이다. 분자유전학적 분석결과에 따르면 인류와 침팬지가 하나의 공동조상으로부터 분화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600만 년 전의 일이다. 600만 년이란 시간은 진화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지구의 역사를 하루에 비유한다면 1분도 채 되지 않는 지극히 짧은 시간이다. 현대 인류가 탄생한 것은 그보다도 훨씬 최근인 15만 내지 23만 년 전의 일이고 보면 인간은 그야말로 순간에 ‘창조’된 동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환경파괴 및 온갖 행동들을 보면 어쩌면 우리는 또 순간에 사라지고 말 동물처럼 보인다. 셰익스피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역사의 무대에 잠깐 등장하여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역할을 하다가 사라진다.” 먼 훗날 이 지구상에 인간에 버금가거나 능가하는 생명체가 탄생하여 지구의 역사를 재정리한다면 과연 우리 인간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우선 그들의 역사책에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을 확률도 매우 높다고 본다. 워낙 짧게 살다가 절멸한 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워낙 저질러놓은 일들이 엄청나 비록 그리 긴 세월을 생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퍽 중요했던 종으로 기록될 가능성 역시 높다.
인간이 진화의 결과로 탄생한 것은 분명하지만 진화가 우리 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과정은 아니다. 우리 인간을 이 세상에 피우기 위해 태초부터 그렇게 소쩍새가 울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우연성(fortuity)의 산물이다. 자연선택은 어떤 목표를 향해 합목적적으로 진행되는 미래지향적 과정도 아니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모든 합리적인 해결방법을 총동원할 수 있는 공학적인 과정도 아니다. 그래서 적자생존의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난 결과는 어쩔 수 없이 완벽한 인간의 등장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생각은 지나친 인본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은 이처럼 지극히 낭비적이고 기계적이며 미래지향적이지도 못하고 다분히 비인간적인 과정에 의해 창조되었다. 하지만 그처럼 부실해 보이는 과정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단계들을 거듭하며 선택의 결과들을 누적시킨 끝에 오늘날 이처럼 정교하고 훌륭한 적응 현상들을 낳은 것이다.


2. 도덕성의 진화와 종교 문화의 형성

인간의 본성, 의식, 문화 등 우리가 특별히 인간적인 특성으로 간주하는 그 모든 면도 다 궁극적으로는 다윈주의적 진화과정에 의한 설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유전자란 도덕이나 윤리의식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복제를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기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선택이 비도덕적(더 정확히 말하면 무도덕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처럼 자연선택은 근본적으로 지극히 단순하고 기계적인 과정이지만 이 엄청난 생명의 다양성을 탄생시킨, ‘자연이 선택한’ 가장 강력한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표현이 자칫 표방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대로 유전자 자체가 이기적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유전자는 이기적인 성향을 띨 수 있는 생명체가 아니다. 다만 유전자는 할 줄 아는 것이 오로지 자신의 복사체를 만드는 일 뿐이며, 그래서 이기적인 결과를 빚는 것이다. 이기적인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진화론적 인간관은 다분히 허무주의적이고 숙명론적이다. 하지만 스스로 철저하게 겸허해지는 경험을 통해 우리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버리라”는 종교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 보인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기적인 유전자가 바로 우리를 ‘도덕적인 동물’로 만들어준 장본인이다. 도덕성(morality)도 진화의 산물이다. 어느 사회에서든 더 도덕적인 개체들이 더 많은 유전자를 후세에 남겼기 때문에 도덕성이 오늘날까지 우리 인간의 본성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성은 비록 이기주의를 기본으로 한 것이지만, ‘현명한 이기주의’ 또는 ‘고상한 이기주의’의 진화는 간단한 게임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생물학에서는 이타성을 자신에게는 해가 될 수 있고 남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종의 자기파괴적 행위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 손익계산은 번식적응도(reproductive fitness), 즉 생산 가능한 자식의 수로 가늠한다.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개체는 남을 도와 그로 하여금 더 많은 자식을 낳아 기를 수 있게 하고 자신은 원래 낳아 기를 수 있는 자식의 수보다 적게 낳게 된다. 생물이란 모름지기 번식을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임을 생각하면 스스로 자신의 번식을 줄이며 남의 번식 적응도를 올려주는 행동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을지 설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이었다. 기본적으로 개체 중심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그의 자연선택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대단히 어려웠던 현상이었다. 실제로 다윈은 훗날 만일 그의 이론이 무너진다면 바로 이타성의 문제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다윈은 끝내 이 문제에 관한 한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1859년부터 무려 한 세기가 지난 1960년대 초반까지도 많은 생물학자들은 자연선택의 단위 또는 수준에 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생물은 모두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이나 종의 보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도록 진화했다고 믿었다. 이 같은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for the good of group) 식의 논리는 스스로 번식을 자제하는 집단조절기능을 가진 종들만이 이 지구상에 남아 있고 그렇지 못한 종들은 지나친 경쟁에 따른 자원고갈로 인해 멸종했다는 이른바 “집단선택설”(group selection)에 입각한 것이다. 이 같은 집단선택설적 자연선택 이론은 다윈의 개체중심적 이론에 어긋나는 것으로 특수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한 실제에 적용되기 어렵다.
미국의 만화가 라슨(Gary Larson)은 집단선택설의 모순을 만화 한 컷으로 기막히게 잘 표현했다. 설치류의 동물 레밍(lemming)은 오랫동안 자살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시한 이론은 철저하게 집단선택설적이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너도나도 살려고 하면 모두가 살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일부 숭고한 레밍들이 동료들을 위해 죽어 준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라슨의 만화에서 보듯이 그 숭고한 레밍들 중 어느 날 구명대를 두르고 내려오는 돌연변이 개체가 나타났다고 가정하자. 만일 구명대를 두르고자 하는 이기적 성향이 유전하는 변이라면 이듬해 봄에는 구명대를 두르고 내려오는 레밍이 더 많아질 것이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귀한 유전자들은 숭고한 레밍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말지만 이기적 유전자는 다음 세대에 전달되어 발현되기 때문이다. 집단 수준의 선택은 개체 수준의 선택을 당할 수 없다. 집단선택이 일어나기 어려운 지극히 간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타주의적 행동이 어떻게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개체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진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처음으로 제공한 사람은 영국의 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튼(William Hamilton)이었다. 두 편의 연속 논문으로 발표된 그의 이론이 나온 1964년은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1859년으로부터 무려 100년이 지난 뒤였다. 포괄적응도 이론(inclusive fitness theory) 또는 혈연선택론(kin selection theory)으로 알려진 해밀튼의 이론은 개체 수준에서는 엄연한 이타적 행동이 유전자 수준에서 분석해 보면 사실상 이기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해밀튼의 포괄적응도 이론은 혈연관계에 있는 개체들간에 이타성이 진화하기 쉽다는 걸 설명한 이론이지만 그 설명의 범주가 혈연관계 내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혈연관계도 없고 심지어는 종도 다른 개체들간에 벌어지는 이타적인 행동의 진화를 설명하는 보완적인 이론이 있다. 바로 호혜성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 이론이다. 호혜주의에 입각한 이타성이 진화하려면 혈연관계에 상관없이 평생 한번 이상 만나는 관계이며 그 만남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자주 만나며 과거에 이타적으로 행동하지 않은 얌체 또는 배신자를 색출하고 처벌할 수 있는 능력만 갖추고 있으면 호혜성이타주의가 진화할 수 있다. 이 같은 진화는 비교적 소규모의 집단을 구성하고 사는 동물들에게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영장류는 물론 우리 인간도 그 존재의 역사 대부분을 서로 자주 부딪히고 서로가 서로를 기억할 수 있는 소규모의 집단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혈연선택과 호혜주의에 의해 진화한 이타성이 진정한 이타성인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혈연선택과 호혜주의에 의한 이타주의는 해밀튼의 포괄적응도 이론에 따르면 결국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개체 수준에서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도 유전자 수준에서 다시 보면 홀연 이기적인 행동이 된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분명히 이 두 이론들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수준의 어찌 보면 지나치게 이타적인 행동을 보인다. 입양, 헌혈, 장기기증 등이 좋은 예들이다. 자신의 자식을 낳기보다 남의 자식을 입양하여 길러주는 행동은 번식성공도의 척도로 가늠하면 진정한 이타적 행동이다. 누구의 생명을 구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 몸의 일부를 기꺼이 기증하는 일 역시 진정한 이타주의의 표현이다. 이 같은 진정한 이타주의를 생물학적 이타주의에 대비하여 심리적 이타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요즘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생물학적이란 용어가 실제로는 유전적 또는 유전학적이란 용어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생물학에는 유전학 외에도 유전자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발현되고 선택되는 과정을 연구하는 발생학과 생태학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생물학적 이타주의도 엄밀하게 말하면 유전적 이타주의다.
인간 이타성의 독특한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최근 강한 호혜성(strong reciprocity) 이론이 등장했다. 미국 산타페 연구소의 긴티스(H. Gintis), 스위스 취리히 대학의 페어(E. Fehr),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의 보울즈(S. Bowles) 등의 경제학자들이 주축을 이루어 연구하고 있는 이 이론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좋은 사회적 평판의 이득이 거의 없는 큰 집단 내에서 또다시 만날 확률이 지극히 낮은, 그리고 유전적으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과도 협동하며 산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강한 호혜성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이타적 보상 외에도 이타적 처벌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거나 혹은 약간의 손해가 되더라도 기꺼이 배신자나 얌체를 가려내어 처벌하는 경향이 인간만의 독특한 협동을 진화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들 경제학자들은 또 공익(public goods) 게임, 최후통첩(ultimatum) 게임 등을 통해 이타적 처벌이 매우 흔히 벌어지며 처벌이 허용되지 않은 상황보다 허용되는 상황에서 협동이 더 잘 유지 또는 향상된다는 것을 밝혔다.
이 같은 이타적 처벌의 진화적 메커니즘으로 이들은 이른바 문화적 집단선택 이론을 내세운다. 이미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지극히 낮은 것으로 판명된 기존의 집단선택 이론(이름하여 유전적 집단선택 이론)과 달리 유전자와 문화간의 공진화에 의해 사회적 규범이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설명한다. 한 사회 속에 이타적 처벌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배신자나 얌체들이 색출되어 처벌받을 확률이 높아져 협동이 배신보다 더 큰 이득을 주게 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각종 시민운동을 비롯하여 신문에 사회의 부조리를 꼬집는 글을 투고하는 일, 그리고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면서도 남의 비행에 끊임없이 정의감에 가득 찬 비판을 퍼붓는 일 등이 넓은 의미의 이타적 처벌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 이타성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라 고도의 지능과 의식 수준을 전제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개미나 일벌들의 사회적 감시 행동(worker policing)도 이 이론에 비춰 분석해 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있을 것 같다.
늘 피를 나누어 먹고 사는 흡혈박쥐들의 헌혈 문화가 인간 사회에서는 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나한테서 피를 받아먹은 박쥐는 훗날 내가 굶주릴 때 나를 돕는다는 보장이 있는 것이 박쥐 사회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내 몸을 떠난 피가 돌아오는 것은커녕 누구에게 가는 줄도 모른다. 하지만 헌혈을 한 사람은 유별나게 자신이 헌혈한 사실을 주변에 알리려 한다. 사회적 평판이 중요함은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다. 다른 영장류는 물론 돌고래의 사회에서도 베풀고 갚을 줄 아는 미덕은 더할 수 없이 중요하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종교에 둘러싸여 산다. 신앙은 우리 인류와 최소한 몇 천 년을 함께 해왔고 달력은 물론 정치, 교육, 그리고 도덕과 사회규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도킨스는 종교를 모방자(meme)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의 눈에는 많은 기독교의 믿음들이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것들이다. 더 적응을 잘한 유전자가 성공적으로 많은 복사체를 만들어 퍼져 나가듯이 모방자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영향권을 확장한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거의 속임수에 가까운 온갖 기발한 종교적 믿음들이 처음부터 어느 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 고안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이른바 모방자 선택 과정을 통해 진화해온 것이다. “제3의 침팬지”(The Third Chimpanzee)의 저자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이데올로기와 종교는 옛날 부족국가 시대에 부의 재분배, 통치자의 권위, 전쟁 등의 당위성을 위해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하버드대학의 진화심리학자 핑커(Steven Pinker)는 종교적 믿음에는 한결같이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하며 신앙은 다른 목적으로 진화한 우리 두뇌의 어느 모듈로부터 생겨난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자의 눈에는 종교도 결국 인간 진화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다른 동물들과 인간이 다른 점들 중의 하나가 바로 종교에서 발견된다. 종교를 가진 동물은 우리 인간밖에 없어 보인다.


3. 멋진 신세계를 위한 새로운 윤리

생명과학의 눈부신 발달이 새로운 사회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간 유전체(genome)가 거의 그 전모를 드러냈고 양에서 출발한 체세포 복제가 급기야 원숭이에 이르렀다. 인간 유전체의 염기서열을 밝힌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과학적 개가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유전체에서 어느 유전자가 어디에 앉아 있느냐는 정도의 엉성한 지도를 그린 것에 불과하다. 왜 그 유전자가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 무슨 일에 관여하는지 등을 밝히려면 앞으로도 족히 몇 십 또는 몇 백 년이 더 걸릴 것이다.
복제 인간의 탄생은 이제 거의 현실로 다가설 것처럼 보인다. 지난 세기말 영국의 윌머트(Ian Wilmut) 박사가 복제 양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세계는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인간 복제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해 왔다. 우리는 바야흐로 우리 자신을 복제할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서울대학의 황우석 교수가 최근 세계 최초로 인간배아 줄기세포의 배양에 성공했다. 그러나 황우석 교수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대로 그가 인간 복제를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 복제는 지금 현재로서는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 기술적으로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충분히 가능할지 모르지만 정작 건강한 복제 인간을 만들어 내기까지에는 앞으로 엄청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선 난자를 얻기 위해서는 여성의 몸에 장기간에 걸쳐 배란을 유도하는 호르몬을 투여해야 한다. 그리고 배란되는 난자를 여성 몸 깊숙이 있는 난소 근처에서 채취해내야 한다. 그 난자 안에 복제하고자 하는 체세포의 핵을 이식한 다음에는 다시 난자를 여성의 자궁 안에 착상할 수 있도록 도로 집어넣어야 한다. 그런 다음 아홉 달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한 사람의 복제 인간이 태어날 수 있다. 한꺼번에 수백 명을 순식간에 찍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복제기술에 의하면 기형을 면하기 어렵다. 점점 더 기술적으로 향상되겠지만 어렵게 착상되어 자라고 있는 복제 태아의 기형을 발견하게 되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낙태를 해야 할 것인가? 기형 발생확률을 거의 완벽하게 영으로 낮추기 전까지는 사실상 윤리적으로 그 누구도 복제 인간을 만들 수 있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기형 발생확률을 거의 영으로 낮춘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복제 인간이 우리 곁에 나타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그 동안 우리 사회는 인간 배아 연구를 허용할 것인가, 허용한다면 어디까지 할 것인가를 놓고 뜨거운 논란을 거듭해왔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생명과학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두 마리 토끼를 쫓아야 하는 어려움은 인정하지만 논쟁에는 많은 웃지 못할 기준들이 등장한다. 그 중 하나가 이른바 수정 후 14일 기준이라는 쟁점이다. 수정이 된 지 14일을 전후하여 인간 배아는 이른바 원시선(primitive streak)이라는 형태를 갖추는데, 이곳으로부터 모든 기관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이전의 세포덩어리와는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과 수정란부터 생명을 지닌 인간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14일 기준에는 사실 이렇다할 과학적인 객관성이 없다. 14일이란 시각도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고 기관이 만들어지는 시각이 가져야 할 중요성이 그리 특별날 이유도 따로 없다. 수정란을 생명체로 간주하는 견해는 더욱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일부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자들은 수정이 되는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이 시작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수정란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수정란도 성체와 똑같이 보호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성을 수반하기 때문에 그 파급영향이 상당하다.
이 같은 결정에는 과학적으로 피할 수 없는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경우 임신의 거의 80%가 이런 저런 이유로 산모의 몸속에서 자연유산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여성들의 절대 다수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생명체를 죽이는 살인자가 되는 셈이다. 수정란이나 초기 배아를 중시하자는 의견들은 다 생명 경시 풍조를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한다. 그렇다면 비록 모르고 저지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많은 인간 여인들은 엄연히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걸 어찌하랴? 그것도 자기 자식의 생명을 죽이는 일이다.
생명의 시작을 얘기하려면 어쩔 수 없이 유전자로 환원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생명체란 유전자가 더 많은 유전자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낸 매개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생명체란 유전자의 정보에 따라 만들어져 이 세상에 태어나 일정한 시간을 보내곤 허무하게 사라지는 존재이지만, 유전자는 세대를 거듭하며 살아 남는다. 생명은 이처럼 한 생명체의 탄생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온 DNA의 표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생명체의 시작은 과연 어디인가? 생명체, 즉 스스로 숨쉬고 번식하는 독립적인 실체의 시작 말이다. 일란성 쌍둥이는 하나의 수정란에서 분화한 세포들이 포도송이처럼 될 때까지는 하나의 덩어리로 있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둘로 갈린 후 완벽하게 정상적인 두 개체로 성장하는 것이다. 하나의 세포 덩어리가 둘로 갈리기 이전의 그들을 과연 두 생명체로 봐야 할지 아니면 아직은 하나의 생명체로 봐야 할지 참 애매한 일이다. 적절한 복제기술을 잘 적용한다면 사실 둘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여러 쌍둥이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아직 덩어리 상태로 붙어 있는 세포들은 각각 장차 무슨 기관을 이루게 될지 그 운명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 있다. 이들이 바로 줄기세포들이다. 아직은 어떤 기관에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배아는 유전자가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중간 과정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유전자가 생명현상을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주고 그 몸이 의식을 얻어야 비로소 하나의 생명체가 탄생한다고 봐야 한다. 인간은 특별히 완전하지 않은 신경계를 가지고 태어나는 동물이다. 그래서 만일 신경계가 자의식을 확립하여 하나의 완벽한 영혼으로 거듭나는 시기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면 어머니의 몸을 빠져 나와서도 한참이 지난 후이다. 이처럼 생명체의 시작을 논한다는 것은 어느 각도에서 보나 지극히 공허한 일이다. 생명은 연속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시작은 DNA의 탄생과 때를 같이 한다. 그 태초의 바다에 떠다니던 많은 화학물질들 중에 어느 날 우연하게도 자기 자신을 복제할 줄 아는 묘한 화학물질인 DNA가 나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십 억 년 동안 다양한 몸들을 만들며 살아온 것이 바로 생명의 역사이다. 따라서 생명의 시작에 대한 논의에 원천적인 결론을 내리기는 불가능하다.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실용적인 기준을 애써 찾고 그에 준하여 실천에 옮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과학이 우리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학의 발전이 우리를 점점 더 엄청난 공포의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느낌 역시 지울 수 없다. 발전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공포의 강도 역시 더 클 수밖에 없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새로운 과학적 지식의 등장은 늘 우리의 사회윤리를 뒤흔들었다. 코페르니쿠스, 뵐러, 다윈, 아인슈타인의 발견들은 한결같이 새로운 윤리체계를 요구했다. 생명과학의 발전은 그 유래를 찾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우리를 엄습하는 도전도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언뜻 보기에는 인간 복제를 비롯한 새로운 생명과학의 지식과 기술들은 기존의 종교적 믿음과 조화를 이루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과학과 종교가 어떤 형태로든 대화를 시작하려면 우선 과학에 대한 좀더 명확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사람들은 마치 금방이라도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이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 온 세상을 쑥밭으로 만들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어디까지나 유전자 복제이지 결코 생명체 복제가 아니다. 아무리 지금 우리가 징기스칸을 복제한다 하더라도 그가 징기스칸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위대한 정복자가 될 약간의 포악한 성격은 타고날지 모르나 세상이 완전히 딴판으로 바뀐 현대에 그가 제2의 징기스칸이 될 확률은 거의 영에 가깝다. 테레사 수녀와 이수현을 아무리 많이 복제한다 해도 그들이 모두 남을 위해 평생을 바치지는 않을 것이다.
복제 인간은 출산시간이 좀 많이 벌어진 쌍둥이에 불과하다. 나는 쌍둥이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만일 지금 나를 복제한다면 무슨 이유에선지 어머니의 뱃속에서 몇 십 년을 더 있다가 나온 쌍둥이 동생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몇 분 간격으로 태어난 쌍둥이 형제들이 결코 똑같은 사람으로 자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늦둥이 쌍둥이 동생이 나와 완벽하게 똑같은 인간이 될 리는 절대 없다. 유전자는 나와 완벽하게 같을지라도 그 유전자들이 발현되는 환경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인간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쌍둥이들이 좀 많아진다는 것이 그렇게도 끔찍한 일인가?
솔직히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인간이 영원히 유전자 복제기술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아무리 “아는 게 힘이다”라고 하지만 이 경우에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인 것 같다. 하지만 이젠 너무 늦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지만 호기심이 많기로 우리 인간을 따라올 동물이 또 있을까 싶다. 복제기술에 관한 연구를 멈출 수 있는 단계는 이제 지났다. 우리 나라가 하지 않더라도 다른 어떤 나라가 할 것이다. 이미 생명과학의 특허는 거의 전부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 앞으로 얼마 안 있으면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제가끔 조금씩이라도 움찔할 때마다 미국에 특허세를 바쳐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전 세계가 미국의 경제속국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복제기술을 포함한 생명과학의 연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뚜껑이 열리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을 윤리의식도 없는 무식한 존재들로 몰아세우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조심스레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 있도록 함께 도와야 한다. 이제는 진정 과학과 인문, 그리고 윤리와 종교가 모두 열린 마음을 가지고 토론을 통해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유전자 복제보다 우리가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유전자 조작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복제 인간은 한 둘 만들어보다 시들해질 가능성이 크지만 유전자 조작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마구 뻗어나갈 것이다. 유전자의 기능들이 속속 밝혀지고 내가 가진 결함들이 어떤 유전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인지를 알게 될 때 그 유전자를 더욱 훌륭한 유전자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 왜 일지 않겠는가? 노화의 비밀이 밝혀져 다만 몇 개의 유전자만 갈면 몇 십 년을 더 살 수 있게 된다면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곧 태어날 아기의 유전체 정보 전부가 적혀 있는 차트를 손에 든 의사가 예비 부모와 하는 대화를 상상해 보라. ‘축하합니다. 예쁜 따님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조사한 유전체 정보에 따르면 바로 이 유전자 때문에 사십대 중반쯤 치명적인 질병에 걸릴 확률이 보통 사람들보다 다섯 배는 넘을 것 같습니다. 저희 병원에 그것과 대체시킬 유전자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 세상 어느 부모가 그 소리를 듣고도 모른 체 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눈에는 이미 소문난 유전자 클리닉 앞에 끝없이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이 보인다.
더욱 훌륭한 유전자로 자신의 또는 후손의 유전체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은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다. 그간의 진화의 역사가 줄기차게 해온 일이 바로 그 일이 아니던가. 특히 성(sex)은 정확하게 유전체의 질적 향상을 위해 진화한 생물학적 현상이다. 문제는 우리들이 행할 유전자 치환이 그 동안의 진화에 정확하게 역행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데 있다. 유성생식은 유전자의 다양성을 도모하기 위해 자연이 고안해낸 방법이다. 그런데 사회의 구성원 거의 전부가 똑같은 유전자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정확하게 유전자의 다양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각각의 개인들은 유전적으로 우수해지지만 개체군 전체는 엄청나게 연약하게 변한다는 피할 수 없는 모순이 숨어 있다.


4. 영혼은 복제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이 DNA는 어떤 방법으로든 계속 복제의 길을 걸을 것이다. DNA가 이룩한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들 중의 하나가 인간의 두뇌일 것이다. 인간의 뇌는 우리 인간을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창세기 22장 17절) 만들어주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그 뇌가 이제 막 섹스 없이도 유전자를 다량으로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DNA의 꿈을 대신 실현하고 있다. DNA는 지금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꿈이 그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는 걸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종교학자 테드 피터스(Ted Peters)는 유전자형(genotype)으로부터 표현형(phenotype)이 만들어지듯 DNA로부터 우리의 영혼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자연과학자인 나는 어쩔 수 없이 물질주의적 환원론에 기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의 생명체로부터 다음 생명체로 전해지는 것은 오로지 DNA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묘한 화학물질 안에 생명의 모든 디자인이 다 들어 있다. 인간의 정신은 결국 물질(the physical)의 형이상학적 표현(metaphysical expression)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영혼을 얻는다. 하지만 생물학자인 나는 영혼도 결국 하나의 생물학적 현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영혼이 DNA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유전적으로 완벽하게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도 절대 똑같은 영혼을 갖지 않는다.
생물학은 유전학이 아니다. 생물학은 유전학 외에도 환경과의 관계를 다루는 생태학도 포함한다. 쌍둥이는 유전적으로 동일할지 모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절대로 동일할 수 없다. 복제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영혼은 절대로 복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영혼이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 위에 세상을 살며 터득한 온갖 지식들이 한데 어울려 엮어진 산물이기 때문이다. 복제 인간도 그 나름의 영혼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가 하느님을 영접한다면 그에게도 영혼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어차피 첫 탄생, 즉 생물학적 탄생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거듭나는 두 번째 탄생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 혹자는 필요에 의해 윤리의 기준을 조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할지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윤리 역시 인간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진화해 온 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도덕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신문만 펼쳐보아도 우리들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비정한 짐승들인가 쉽게 알 수 있지만 굳이 도덕을 버리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도덕을 운운하며 도덕적으로 살기를 열망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도덕적이기를 원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왜 도덕적이기를 원하는가? 도덕적인 사람들이 부도덕한 사람들보다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사람들이 부도덕한 사람들보다 덜 성공적이어서 자식을 많이 남기지 못했다면 우리를 도덕적으로 만들어주는 유전자는 지금 우리 몸속에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만든 유전자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자손을 남기게 해주었기에 도덕유전자가 지금도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윤리란 사회가 있기에 존재하는 인간의 특성이다. 혼자 사는데 윤리가 필요할 리 없다. 도덕과 윤리는 사회적 평판을 가늠하는 척도로 마련된 일종의 규범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아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고 낯선 사람에게는 냉담하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특별히 그런 것 같다. 아는 사람들끼리는 동방예의지국이지만 모르는 이들을 대할 때면 금새 동방무례지국이 된다. 그 옛날 서로 아무개 집 아무개로 알고 지낼 때와는 달리 세상이 점차 익명사회로 변하며 도덕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동물사회에도 우리만큼 복합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기초적인 윤리가 있다. 돌고래나 영장류 사회에는 종종 수컷들끼리 동맹을 맺어 함께 행동한다. 그래야 먹이를 얻는데도 유리하고 짝짓기를 할 암컷도 얻을 수 있다. 함께 협동하여 일을 성사시킨 후 상습적으로 자기만 이득을 취하고 남을 돕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힌다. 일단 좋지 않은 평판을 얻으면 먹을 때 제 몫을 찾기도 힘들어지고 암컷을 취할 기회를 잃는다. 그렇게 되면 그의 몸속에 들어 있는 얌체유전자는 후세에 전달되기 어렵다.
우리는 늘 새로 펼쳐지는 시대를 예전에 비해 비도덕적이라 평가하며 살아왔다. 우리 부모세대가 우리더러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탓했고, 우리가 또 우리 자식세대를 못마땅해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 옛날 이웃 부족이 잠자는 사이 그들을 죽이고 겁탈하던 때가 지금보다 더 도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새 시대에 걸맞는 윤리관이 미처 확립되지 않은 데서 오는 괴리일 뿐이다.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회만 있으면 부도덕해질 수 있고, 남에게는 되도록 도덕적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윤리기준을 마련하는 일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새 포도주는 마땅히 새 병에 담아야 한다. 과학의 발달이 우리에게 너무 갑작스레 많은 숙제들을 던져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지를 앞세운 두려움과 뻔히 보이는 것을 애써 부정하려는 어리석음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제의 과학적 본질을 명확히 이해하는 일이 우선 이루어져야 하고 그에 따라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윤리관을 확립해야 한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그 새로운 규범을 따르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다.
최근 과학의 발달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많은 문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두려움과 어리석음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종교와 과학간의 대화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이다. 세계 어느 문화권이든 공통적으로 윤리는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윤리와 종교도 과학의 범주에 들어왔다. 기독교 시인 오든(W. H. Auden)이 말했듯이 과학 없이는 평등이라는 개념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윤리가 인간적이고 합리적이려면 과학과 종교가 함께 일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미래는 과학과 종교에 고루 달려 있다고 물리학자 다이슨(Freeman Dyson)은 강조한다. 미국 작가 허바드(Elbert Green Hubbard, 1856-1915)는 이런 말을 남겼다. “교회는 죄인들을 구원하지만 과학은 죄인이 만들어지지 않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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