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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5/06/28 (17:17) from 129.206.196.76' of 129.206.196.76' Article Number :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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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김교빈 외 13인



        차례

   제1장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자연을 왜 신성하다 했는가--김교빈
 인간과 자연은 하나로 볼 수 있는가--전호근
 동양에는 왜 유일신의 종교가 없는가--김성기

   제2장 인간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인가--이해영
 영혼의 문제는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이현구
 동양철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김수중

   제3장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
 욕망 추구는 참된 인격의 형성을 방해하는가--김세서리아
 지식을 택할 것인가, 지혜를 택할 것인가--황희경
 예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가--조남호
 개인과 사회의 갈등은 해결할 수 있는가--이상익

   제4장 인류의 미래는 발전 가능한가
 점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가--김홍경
 유교 전통과 자본주의는 화해할 수 있는가--유동환
 생태주의는 환경문제의 대안인가--안은수
 문명위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최종덕
@ff
   서문

 동양철학을 강의하다 보면 동양철학은 처음 대하는 학생들로부터 몇 가지 벽을
느끼게 된다. 첫째는 동양철학의 내용이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좋기는 하지만 대부분 고리타분한 도덕, 윤리뿐이어서 들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점이나 사주, 관상 같은 신비적인 것으로 이해하면서
오로지 그런 것들에만 귀를 솔깃하는 경우이며, 셋째는 전근대적인 낡은 사상이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는 맞지 않는다고 보고 처음부터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경우이다. 왜 갓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들의 대부분이 이런 눈으로 동양철학을 보는
것일까? 이런 잘못의 책임은 무어보다도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서구지향의 삶을 부추기는 우리 사회 전체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부모와 자식이 모여 살고, 친구와 사귀고
지내면서도 우리 조상들이 인간과 사회에 대해 이야기했던 도덕, 윤리를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부정해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일까? 전근대적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소중한
전통 철학은 박물관에나 넣어 두어야 할 낡은 것일까?
 아마도 젊은 학생들이 동양철학에 대해 오해를 갖는 이유는 쉬운 말로 된 동양철학
관련 책이 드물었기 때문이며, 동양철학의 주제들은 현실과의 연관 속에서 생각해
보는 시도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전통이란 낡은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래된 것을 의미한다. 오래된 것과 낡은 것은 다르다. 낡은 것에서는 힘이
나오지 않지만 오래된 것은 그만큼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오래된 만큼 고민의
과정도 길었을 것이며, 그런 과정을 거쳐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사유체계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더구나 각 사상들은 긴 역사 속에서 다양한
사회적 실천들을 통해 적인 힘을 보여 왔다. 다만 서구 중심으로 세계가 재편되어
동양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 힘을 잃었으며, 그 과정에서 앞에서 본 오해들이 자리잡은
것이다.
 하지만 사유체계에서 본다면 동서의 문제는 문화적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차이의
문제일 뿐이다. 당연하면서도 다행스러운 것은 근래에 이르러 인류가 처한 환경
위기와 관련하여 동양적 사유에 많은 관심들이 모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관심들이 일회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좀더 많은 노력과 함께 다양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 책은 이러한 입장에서 청소년과 대학 1, 2학년생을 위해 만든 교양 교재로서
쟁점이 될 만한 주제들을 뽑아 동양철학사상을 통해 서술하였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지은이들이 지향하는 것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기보다는 다양한 다른 입장들을 소개하고
토론거리를 제시함으로써 읽는 사람들이 스스로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철학이 단순히 지식의 전수가 아니며 더욱이 과거 사상들에 대한 암기나
회상이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집필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3__40대에 해당하는 젊은 학자들이며, 그
가운데 대부분이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같이 활동해 오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가지고 있던 관심에 따라 책임을 나누어
맡으면서도 어느 정도 통일된 관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작은 결실에 지나지 않지만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세상을 더욱 폭넓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이를 바탕으로 '온고지신'하는 삶을 살기 바란다.

 1998년 겨울
 지은이들을 대표해서 김교빈
@ff
   제1장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자연을 왜 신성하다 했는가
 *인간과 자연은 하나로 볼 수 있는가
 *동양에는 왜 유일신의 종교가 없는가
@ff
   자연을 왜 신성하다 했는가

 동양에서의 자연은 이상적인 존재이자 인간이 닮아 가야 할 최종목표이다. 즉
인간이 자연을 닮아감으로써 하나를 지향하는 일체관계로 자연은 파악되는 것이다.
 김교빈(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호서대 교수)

 동양사람들에게 자연은 무엇일까? 자연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다'거나 '저절로
그러하다'는 뜻으로서 인간을 포함한 천지만물의 변화 과정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자연에서 노닌다'든가 '자연을 벗삼는다'고 할 때에는 내 밖에 대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주변 세계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동양에서
쓰는 자연이란 말 속에는 위에서 예를 든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들어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더 중요한 개념으로 쓰여 온
것은 후자의 의미였다. 그렇다면 '저절로' 또는 '스스로 그러하다'는 말에 담긴 의미

무엇인가?
 이것은 자연 밖에 무엇인가 자연을 그렇게 만들어 가는 주재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 속에 스스로 또는 저절로 그렇게 되는 원인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 점이
서양의 사고와 매우 다른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부분이다.
 서양의 자연 개념은 어떠한가? 서양에서 자연을 뜻하는 영어 단어 'nature' 속에는
동양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다'거나 '타고난 그대로'라는 뜻이 들어 있다. 하지만 다

한편에는 아직 진화하지 못한 원시나 미개 상태를 가리키는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하다.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한 뒤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무시한 채 신대륙이라고
불렀던 것이나, 유럽 중심의 제국주의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바라보던 시각도 바로
이러한 관점이었다. 따라서 원주민처럼 타고난 그대로의 불완전한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 순화되어야 하는 것이고, 자연 또한 인간의 손길이 닿음으로써 완전해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의 손으로 다듬어진 경우를 비로소
문화라고 부른다.
 서양에서 이 같은 사고의 원형을 잘 보여 주는 것은 구약 성서 첫머리에 천지창조의
과정을 서술한 '창세기'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신은 6일 동안 인간뿐 아니라 모든
만물을 창조하고 7일째 되는 날 쉬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인간이나 자연은 똑같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면서도 둘 사이의 관계를 본다면 자연은 인간을 위해 창조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세계 밖에는 그 세계를 창조하고 주재하는 신이
존재하며 세계 안에 담긴 자연은 철저히 인간을 위한 이용 대상이거나 인간이 밟고
넘어가야 할 극복 대상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자체로는 완전하지
못하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며,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완전하게 만드는 역할이
인간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서양에서 말하는 자연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동양의 사유체계에 나타난 자연은 서양과 달리 가장 이상적인 존재인 동시에
인간이 닮아가야 할 최종 목표이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서로 맞서는
대립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자연을 닮아감으로써 언제나 하나를 지향하는
일체관계로 파악된다. 웅장한 산과 냇물을 먼저 그리고 그 한구석에 사람들을 그려
넣는 동양 산수화의 구도가 이런 생각을 잘 보여 준다. 서양처럼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인간이 불완전한 자연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을 내 속에
깨닫고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의 한계인 불완전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에서는 자연의 반대 개념이 문화가 아니라 부자연이며 부자연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뜻이 된다. 선수들을 시합에 내보내면서 감독이나 코치가 하는
말은 연습할 때처럼 자연스럽게 하라는 것이다. 만일 박찬호나 박세리 선수가 더 잘
해 보겠다는 마음이 앞서서 팔이나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면 자연스러움은 깨지고
만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동양의 자연은 말 그대로 더 이상의 꾸밈이 필요없는 가장
최고의 경지인 셈이다.

   자연을 보는 두 관점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인류는 자신들의 삶의 경험을 통해 자연속에 신적인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엄청난 자연의 위력 앞에서 자신들의 능력이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자연의 신비와 그 속에 담긴 절대적인 힘을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인류의 지혜가 아직 깨지 못한 상태에서는 많은 자연 현상들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고, 따라서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일찍이 큰 강
주변에 모여 살면서 문명의 싹을 틔운 동양의 경우는 자연 환경에 많은 부분을 맡길
수밖에 없던 농경 중심의 상황에서 자연의 변화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이런 경험은 자연히 비와 바람을 내는 하늘을 정점으로 삼아 자연에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중국의 전설적 제왕 순임금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해와 달과
다섯 별의 움직임이 바른지를 살피고 산과 들의 뭇 신들에게 제사지내는 것이었다는
"서경"의 기록을 보면, 바로 자연의 힘을 헤아리고 이를 바탕으로 자연에 적응해
가려는 소박한 노력으로서의 종교적인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행위를
통해 자연 존재 각각에 신적인 무엇인가가 담겨 있다고 보는 다신교적 이해와 함께 그
자연신들 사이에 위계 질서가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고대 조상들의
생각을 잘 나타낸 대표적 신화인 단군신화를 통해서도 조상들이 태양 숭배, 산악 숭
배,
호랑이토템(Totem)이나 곰 토템 같은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기원전 1000년 이전 인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자연신들을 노래하는 것으로 쓰인
베다(Veda) 또한 다양한 자연신에 대한 숭배 모습을 잘 드러낸다.
 물론 자연에 강력한 신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생각은 인류의 지각 능력이
발달하면서 점점 깨져나가기도 하였다. 2600여 년 전인 춘추 시대 초기에도 이미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거나 지진이 일어났을 때 이 같은 현상들에 대해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두 강의 물줄기가 합쳐지면서
이상한 소용돌이 현상이 생기는 것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비적으로 해석하려
하였지만, 그러한 생각에 맞서서 음양의 조화가 어그러져 생기는 단순한 조화라고
설명한 예들도 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의 변화를 인간 사회의 변화와
연결하여 이해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앞에서 본 이러한 생각들은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에 각기 다른 법칙이 있다고 본 매우 과학적인 생각의 싹이었다.
 이 같은 생각은 자연의 변화를 자연 나름대로의 기계적인 법칙으로 해석한
순자에게서 더욱 발달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순자는 이해하기 힘든 자연 현상이
나타나면 이는 곧 하늘의 의지가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당시 사람들을 향해
"별을 떨어지거나 나무가 소리내어 울면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르지만,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천지의 변화이며 음양의 조화이고 어쩌다
한 번씩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비과학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비판하여 "기우제를 지냈더니 비가 오는 것은
어쩐 일인가? 별 것 아니다. 그것은 기우제를 안 지냈는데도 비가 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고 안 지내기도 하는 인간의 행위와 비가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하는 자연의 변화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은 물론 인간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이 다르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지만,
궁극에는 인간을 자연과 대등한 존재로 파악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인간이 자연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

   다신--일신--다신으로의 변화

 하지만 동양적 사고의 주된 흐름은 한편으로는 자연을 극복해 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속에 궁극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켰다. 특히
이런 사고는 중국 고대 춘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자리잡는다. 중국의 경우
부족연합국가였던 은나라는 자신들의 조상신으로 제를 섬겼다. 갑골문이나 청동기에
나타난 제의 고대 글자는 삼각형을 뒤집어 놓은 모양이다. 이것은 꽃이 지고 난 뒤
꽃받침이 오그라든 모양을 따 온 것으로서 바로 여기에 열매가 맺는다는 점에서
수확을 상징하는 글자였다. 그러한 상징성 속에는 많은 수확을 바라는 농경사회의
염원이 담겨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은나라는 자신들의 조상신인 제가 자신들이
다스리는 다른 부족의 조상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용어가
상제였다. 상제는 은부족의 조상신인 제가 신의 세계에서 다른 부족의 신들을
지배하는 가장 높은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그 뒤를
이은 주나라는 자신들의 조상신인 천으로 상제 개념을 대체해 버렸다. 그리고 은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신이라고 내세웠던 상제가 사실은 천이고, 은나라 사람들은
상제가 은나라 사람들만을 보호한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잘못이며, 천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상제가 은나라 부족과 나아가서는 은나라
임금만을 보증해 준다는 선민의식을 극복하고 천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존재임을
부각시켰다. 또한 그 천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덕이 많은 사람을 뽑아 임금을
시키는데, 그 사람이 덕이 많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백성들이 따르는지 안 따르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여 마침내는 민심이 천심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생각은 가장 궁극의 절대자가 모든 사람들 속에 들어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사고를 철학적으로 보편화시킨 것이 성리학이었다. 송대에
나오는 성리학은 만물의 근원을 태극이라고 보면서도 절대 존재인 태극이 모든 만물
속에 들어있다고 함으로써 현상 세계의 모든 존재들 속에 절대 보편의 궁극자가 들어
있다는 생각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만물은 각각 특수한 법칙을 갖지만 그
이면에는 모든 사물에 통하는 보편 원리가 담겨 있다고 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신
개념의 변화 과정을 가리켜 다신--일신--다신의 변화 과정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절대 궁극의 존재가 현상의 모든 개별 존재 속에 들어 있다는 생각은 노장철학이나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먼저 노장철학의 경우를 보면 "장자"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만물의 근원자이며 원리인 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제자에게
장자는 하찮은 벌레나 벼 옆에 자라는 쓸모없는 피 속에 들어 있다고 한다. 답을 듣고
의아해진 제자가 도시 도가 어디 있는지를 묻자 이번에는 깨진 기왓장 속에 있다고
대답한다. 더욱 놀란 제자가 다시 묻자 마침내 장자는 똥이나 오줌 속에도 도가 들어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도가 모든 만물 속에 똑같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만물

똑같다는 생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불교의 경우를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근원을 마음으로 보고 그 마음 속에 불성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이때의
마음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데,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끝없이 윤회한다는
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 속에 불성이 들어 있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같은 생각은 서양의 사유체계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인다. 서양문명의 중심인
기독교에는 열 가지 중요한 계율이 있으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율이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이 계율을 통해 당시의 상황이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다신교적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러한 신들을
부정하고 절대 유일의 하나님을 내세운 것이며, 로마를 통해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되면서 서양문명의 오직 일신으로 끝이 나고 만다. 따라서 동양이 다신--일신--다신의
과정을 겪었다면 서양은 다신--일신의 과정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의 신성은 무엇인가

 만물 모두에 신적인 존재가 들어 있다는 사고는 문화적으로 다양한 제사 양식을
성립시켰다. 동양에서는 천지 자연의 정점인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제뿐 아니라
토지신에 제사지내는 사직제, 산에 지내는 산제 등 다양한 모습의 제사가 자리잡았다.
이러한 자연 숭배는 중국과 우리 나라 모두에서 가장 보편적인 일이었다. 그 밖에도
한 해의 농사 시작을 알리는 선농단의 제사나 서울근교에서 지내는 교제들도 모두
여기에 속하며, 이런 제사들은 모두 국가가 행하는 자연 숭배 양식이었다. 하지만 일

민속에도 산골 마을의 산제, 바닷가의 풍어제 같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 대한 숭배
양식이 다양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처럼 많은 제사들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신성한
무엇에 대한 숭배였으며 이를 통해 복을 바라는 생각이 그 속에 깔려 있다.
 자연 속에 신성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은 자연을 인격체처럼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연을 신성하게 보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연이 인간처럼 좋고 나쁨을 느낄
뿐만 아니라 즐거움이나 분노를 드러내기도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아울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판단능력까지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과 교류한다는 것이다. 서양에도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를 빌려와 자연 속에
생명이 있으며 이러한 생명력이 인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있었고,
현대에 들어와 이런 생각을 현대 인류문명의 위기인 환경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한
학자들도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연에 신성한 무엇이 들어 있다는 생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미신적 관점에서 자연의 신성한 힘을 통해 개인 또는 집단의
복을 바라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신성함에 대한 인정이 환경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세계관으로 자리잡는 경우이다.
 미신적 관점은 그 적용에서 신성한 힘에 의지하여 복을 빌거나 재앙을 피하려는
것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지극히 현세지향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현세지향

곧 지금 여기만을 풍요롭게 장식하는 물신숭배로 이어지고, 모든 것을 신령스러운
무엇인가의 조작에 맡겨 버림으로써 인간의 사회적 실천이나 의지를 불신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미래지향적인 요소가 없기 때문에 이성적인 윤리의식의 부족으로
귀결되며, 오직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만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사회성이 결여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또 다른 관점인 세계관적 지향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러한 사고는 자연을
생명력 없는 죽은 존재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 봄으로써 생명의 존중이라는
차원에서 자연을 높이고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결과 자연을 단순한
이용대상이나 극복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내 생명과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로 이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자신이나 자신의 집단만을 생각하는 분할적 사고에 기초한
이기주의를 넘어서서 자연과 인간을 통일적으로 보는 전체론적 사고를 갖게 한다. 그
결과 이러한 세계관은 환경친화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며 아울러 생태계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 단위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차이는 자연의 신성에 대한 기대를 나라는 개체의 이익과
결부된 작은 관점에서 보느냐, 아니면 생명 단위로 확장시킨 큰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연의 신성성에 대한 이해는 인류의 발생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문제이며, 인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자연의 신성성을
보느냐에 따라 질적인 결과의 차이를 가져오는 문제가 된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풀이나 나무 한 포기까지도 소홀히 보지 않았던 행동 속에는 위에서 본 자연관이 담겨
있는 것이다. 집을 지을 때에도 주변 자연과의 조화를 먼저 생각하였고 자연을 인간의
방식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자연의 방식에 맞추려 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많은 자연이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훼손된 것과 비교하면
자연에서 신성을 읽던 동양인들의 마음가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한 관점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ff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창민과 석규, 진실이가 함께 등산을 가면서 주고받은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우리 생각을 정리해 보자.

 창민:오랜만에 산에 오르니까 발 아래 세상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게 마치 속세를
떠난 기분인걸.
 석규:나도 그래. 앞으로 산에 더 자주 와야겠어. 산에 오면 호연지기가 저절로
느껴지는 것 같아.
 진실: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호호호. 너희들 얘기를 들으니까 정말 산의 정기

듬뿍 받은 사람들 같다 얘.
 석규:그래 맞아. 요즘 삼림욕이 좋다고들 하는데 산이 분명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 같아. 그러니까 산에만 오면 기분도 좋아지고 정신도 맑아지고 하는 것
아니겠어?
 창민:산에 오면 기분이 좋아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건 일상
생활을 벗어났기 때문에 느끼는 것일 뿐이지, 산이 사람처럼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야. 네 말처럼 한다면 산에 어떤 생명력이라도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산에 있는 나무나 새가 생물이기는 하지만 그건 단지
개체보존의 생물학적 능력 정도에 지나지 않는 거 아냐?
 석규:내가 전에 강의시간에 들은 얘기 가운데 생각나는 게 있는데 "주역"에서는 온
세상에서 가장 큰 덕은 생명력이라고 했어. 나는 그런 생명력이 단순히 새나 나무
같은 생물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이나 바다 같은 무생물에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오늘날 환경오염 문제만 해도 단순히 생물체의 문제만이 아니라 바다나 흙
같은 것도 문제가 되는 거 아냐? 그러니까 나는 자연 자체에 무엇인가 신비한 어떤
힘이 있다고 생각해.
 진실:어머, 너 또 사이비 동양철학 시작하는 거 아냐?
 창민:그래 맞다. 사이비 동양철학이다. 그러니까 생명문제를 말하다가 금방 자연의
신성 이야기로 넘어가지.
 진실:창민이 너, 그래 봐. 석교야, 미안해. 나는 농담으로 했던 이야긴데.... 나도
석규
너와 비슷한 생각이야. 자연에는 무엇인가 신성한 힘이 있는 것 같아. 다만 우리가
인간중심의 사고를 못 벗어나서 그런 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거야. 내가 전에
들으니까 옛날 사람들은 옹이가 박혀서 조금 구부러진 나무를 쓸모없다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 구부러진 구조가 가진 힘을 그대로 이용했대. 사실 예전 우리 선조들은
대부분 자연의 힘을 그대로 믿고 의지하면서 그 속에 담긴 원리를 이용하여
살아갔다고 봐.
 창민:내가 자연의 힘을 부정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나는 자연에 어떤 신성한 힘이
있다는 생각에는 반대야. 자연에 신성이 있다는 생각은 원시시대에나 어울릴 미신이
야.
인류가 이만큼 발전한 것도 바로 그런 미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
아니겠어?
 석규:나도 그런 미신에 찬성하는 건 아냐. 하지만 나는 자연에 신성성이 있다고
여기면서 산이나 강 등에 제사지내던 우리 조상들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네가 조금 전에 인류의 발전을 이야기했지만 그 대신 우리는 그 대가를 받고 있잖아.
나는 미신으로서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말하는 것이야.
 진실:너희 두 사람의 이야기는 마치 동양적 자연관과 서양적 자연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구나. 꼭 이렇게 나눌 수는 없겠지만 내 생각에는 대체로
동양적 자연관이 자연과 하나됨을 주장했다면 서양적 자연관은 자연과 인간의 분리를
주장했던 것 같은데.
 석규:그래. 동양적 자연관은 만물 모두에 신성이 들어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자연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 보고 자연과
하나되기를 바랐던 것이지. 나는 그런 생각을 소박하게 표현한 것이 과거 조상들의
자연에 대한 숭배였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런 자세가 오늘날 과학기술문명의 문제점을
넘어설 수 있는 중요한 관점이라고 보거든.
 창민:과학기술문명이 문제를 가져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과학기술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 인간의 마음가짐이 문제일 거야. 나는 과학이 만든 문제도 과학의
발전이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봐. 자연을 이기고 극복해 온 것이 인류문명의
발전이었는데 석규 네 생각처럼 자연의 신성을 이야기하다 보면 오히려 과학의 발전은
없었을 거야.
 진실:너희 두 사람은 자기가 하는 전공답게 말하는 것 같구나. 동양철학자인 석규와
자연과학자인 창민이의 대결? 호호호. 지금은 이만 그치는 것이 어때. 어차피 우리는
산 속에 있고 너희 두 사람의 논쟁 때문에 산에 온 맛을 잃고 싶지 않단 말이야.
논쟁은 이따가 내려가서 술 한잔 하면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잖아?
 창민:그래 자연을 보면서 생각을 더 깊이 있게 한 후에 다시 얘기하자.
 진실:오늘 산에 오길 정말 잘했는걸. 지금은 산을 즐기고 이따가는 토론을 즐기고,
호호호.
 창민, 석규:그래 맞아. 하하하.
@ff
   토론해 봅시다

 1. 동양에서 자연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2. 동양의 자연관과 서양의 자연관은 어떻게 다른가?
 3. 자연을 보는 미신적 관점과 세계관적 관점의 차이는 무엇인가?
 4.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
 5. 과학적 관점에서 자연에 대한 이해는 어떤 한계가 있는가?

   주요 개념

 자연, 절대, 보편, 궁극자, 신성, 미신, 세계관, 현세지향, 미래지향, 유기체

   참고 문헌

 장회익, "삶과 온생명", 솔.
 주강현,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한겨레신문사.
 한국불교환경교육원, "동양사상과 환경문제", 모색.
@ff
   인간과 자연은 하나로 볼 수 있는가

 인간과 자연이 같은가 다른가를 묻는 질문은 어쩌면 어리석은 것일 수도 있다. 왜냐
하면 편견과 오만을 버리고 자연을 바라본다면 인간도 수많은 자연 생물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전호근(성균관대 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 강사)

 동양철학에서 나타나는 세계관은 서양의 그것 못지 않게 다양하다. 하지만 예외에
속하는 몇몇 철학자들을 제외하며 그 속에는 일관된 흐름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천인합일로 표현되는,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사유 형태의 전개이다. 멀리는 신화

세계관에서 시작하여 고대의 제자백가사상, 중세적 질서의 정당성을 대변했던
주자학은 물론이고, 가까이로는 근세의 양명학에 이르기까지 동양사상의 기저에는
자연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의식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른바 동양의
사상가라면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자연과 인간을
아우를 수 있는 통일적인 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태도야말로 동양적 세계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 이와 같은 사유가 일반화될 수 있었던 원인은 동양인들이
마주했던 자연과 서양인들의 그것이 구체적으로 뚜렷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무시할 수 없다.
 이를테면 서양문명의 발상지라 할 나일 강은 주기적으로 범람함으로써 일정 기간
동안은 비옥한 토지를 제공해 준다. 또 그리스 문명을 탄생시켰던 지중해의 기후는
온난할 뿐만 아니라 극심한 변화도 드물었다. 하지만 중국 문명의 발상지인 황하의
범람은 일정한 주기가 없다. 더욱이 대륙의 내부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은 모든 것을
황색으로 물들이고 수시로 한발이라는 대재앙을 몰고 온다. 곧 서양인들이 마주한
자연은 인간이 쉽게 대처하고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온순했던 반면, 동양의 자연은
인간의 저항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변화가 심했기 때문에 자연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거나 자연을 이용하려는 의지보다는 오히려 거부할 수 없는 섭리로 인식하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인간 중심적
사고보다 자연 중심적 사고가 일반화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곧 동양에서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식의 오만함 따위는 보편화되기 어려운 명제일 수밖에 없
다.

   인간과 자연은 어떤 점에서 같은가

 '인간과 자연이 같은가 다른가' 하는 질문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을 묻는
정말 어리석은 질문일 수도 있다. 왜냐 하면 위가 모든 편견과 오만을 버리고 자연과
인간을 바라본다면 인간이란 수많은 자연 사물 속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간은
자연 속의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생성, 유지, 소멸이라는 필연적인 과정을
동일하게 거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짐승들처럼 생리적인 대사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며 일정한 수명을 가진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자연 속에 부속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연이
제공하는 각종 재화를 이용해서 생존하는 존재인 것이다. 곧 인간은 자연에 의존하는
존재이다. 자연 속의 사물들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다. 만약
그런 사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잠시도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차이는 크지 않다. 오히려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작용은 자연 속에서도 일어난다. 따라서 인간을 자연과
구분되는 대등한 존재로 인식하거나 우주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이상한 관점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런 입장은 노자와 장자를 비롯한 도가의 철학자들에게서 가장 적절히 드러난다.
그들은 자연을 완전한 존재로, 인간을 불완전하며 자연 속에 부속된 존재로
생각했으며 일체의 인위적인 행위를 배제하는 무위자연의 태도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유가의 철학자들도 이와 비슷한 입자이다. 유가의 경전인
"맹자"나 "중용"에서는 '성실한 것은 자연의 본질이고 인간은 성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또 "주역"에서도 "자연의 운행은 건실하다. 군자는 이것을 보고
자신의 도덕성을 끊임없이 연마한다."고 했다. 자연의 운행은 어김이 없다는 점에서
성실하며 인간은 그런 자연의 성실성을 본받아 자신의 도덕성을 밝혀 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맹자"에서는 '인간의 내면 속에는 완전 무결한 본성이 있고 그 본성은
자연이 부여한 것'이라고 논의를 펼치고 있다. 자연의 본질이 인간에게도 갖추어져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유가의 철학자들은 자연을 인간 도덕의 근거로 보며 인간은
자연과 대등한 존재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근거는
인간과 자연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동일성을 선험적으로 규정한 명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도가와 유가의 철학자들이 동일한 관점에서 자연을 완전한 존재라고 여긴 것은
아니다. 유가의 철학자들은 자연 속에서 일정한 운행법칙을 찾아내고 그 부분에
가치를 둔다. 이를테면, "음을 억누르고 양을 선양시킨다."는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 위협으로 작용하는 객관적인 자연현상은 자연의 실조현상으로
여겨지고 부자연으로 규정된다. 곧 유가는 인간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자연의 도덕적
완전성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다. 따라서 유가의 경우는 완전한 자연주의는 아니며
인간 중심주의가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도가의 경우는 모든 인간적 가치를 배제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을 기준으로
자연의 비인격성을 재단하지 않는다. 자연의 비인격성을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인 셈이다. "천지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만물을 지푸라기로
여긴다."는 노자의 말에서처럼 자연은 인간에게 특별히 우호적이지 않다는 명제를
제기함으로써 개 한 마리 죽는 것이나 사람 죽는 것이나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입장은 송대에 형성된 주자학적 사유에 의해서 거의 완전하게
통합된다.

   인간과 자연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행위한다. 이는 자연
속의 다른 존재들과는 다르다. 그 중에서도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노동을 통해서
자연의 사물을 변형시키는 점은 다른 동물이나 사물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인간만의
특징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과 대립된 존재이면서 자연을 자신의 욕망에 적절한
방향으로 변형하는 적극적인 존재이다. 이를테면 인간은 농작물을 재배하고 짐승을
길들임으로써 자연이 제한적으로 제공하는 물질적 풍요를 증진시킨다. 또 의료기술을
발전시킴으로서 자연이 제한한 수명을 넘어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고 각종 질병을
극복하기도 한다.
 동양의 철학자 중에서 이러한 점을 충분히 강조했던 사람은 묵자와 순자였다.
묵자는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파악한다. 곧 자연 속의 다른 동물들은 자연상태
그대로의 음식물을 먹으면서 자신의 존재로 보존할 수 있지만 인간만은 자연을 변형,
가공함으로써 생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묵자의 이러한 입장은 자연의
완전성을 부정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에게 자연은 여전히 경이와 외경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자에 이르면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일신된다. 순자는 무엇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의 힘은 소만 못하고 빠르기는 말에 미치지
못하는데 도리어 소와 말이 인간에게 부림을 당하는 것은 인간이 사회조직을 구성하여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고 정복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파악된다. 예를 들어 인간은 댐을 쌓아 물길을
바꾸기도 하며 사막을 농경지로 개간하기도 한다. 이것은 자연 속에 원래부터 주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물리적인 수단을 개발하고 조직적으로 대처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아울러 그는 인간과 자연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이며 양자간에는 어떤 유기적
연관도 없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행위의 도덕적 정당성 여부도 따라 자연이
변화하는 일은 없다고 주장한다. 자연의 운행은 일정한 법칙을 따른다. 따라서
요임금이 성군이라는 이유로 정상적으로 운행되거나 걸임금이 폭군이라고 해서 그릇된
방향으로 운행되는 일은 없다. 그는 그 근거로 요임금 때에도 7년 동안의 홍수가
있었고 걸임금 때에도 8년 동안의 풍년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은 더 이상 신성하거나 외경의 대상이 아닐 뿐더러 인간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 줄 수 있는 의지적 존재도 아니다. 따라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해서 비가
오는 일은 결코 없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기우제를 지냈더니 비가 왔다."고 하자
그는 "그것은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는데 비가 온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인간이 비가 오길 바라든 바리지 않든 비는 올 때가 되면 온다고 본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추운 겨울이나 뜨거운 여름을 싫어한다고 해서 자연이 계절의 순환을 바꾸는
일도 없다. 따라서 추운 것이 싫다면 옷을 두껍게 입거나 불을 피울 일이지 자연을
대상으로 기도하는 일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울러 순자는 인간이 자연의
운행법칙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정상에서 벗어나는 자연의 변화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자연의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입장은 한 대의 철학자 왕충에 의해서 "착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벌을 내린다."는 복선화음론을
거부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하든 자연이 인간의 행위를 기준으로
자신의 운행을 바꾸지 않는다는 점에서 순자의 사상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들은 인간이 자연의 변화를 두려워하며 기도하는 것보다는 재화를
충분히 축적해서 자연이 가해오는 각종 재해에 대처하는 것이 훨씬 올바른 태도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가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을 정복해야 한다는 제천명, 용천과 같은
명제를 제기한 것은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순자나 왕충은 천인합일이 아니라
천인분리를 오히려 인간에게 유익한 태도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자연과 인간은
서로 일치되는 면보다는 오히려 서로 배치되는 측면이 많다고 보고 자연과 인간을
대립적인 존재로 파악한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와 같은 관념은 동양철학의 주된 흐름으로
정착되지는 못했다. 동양철학의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는 유가나 도가, 또 불교에서도
한결같이 인간과 자연의 일치를 추구하며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보는 관점과 삶의 태도

 자연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은 결국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는 질문과 같다. 또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대한
논의이기도 하며 아울러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바람직한 삶의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는가는
결국 어떤 태도로 자연을 바라보느냐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연의 법칙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느냐보다는 도리어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얼마나 올바르냐이다. 곧 사실 여부를 정확하게 구명하는 것보다 추구하는 가치의
정당성 여부가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을 차별적으로 인식하는 입장에 서는 이들은 인류의 문명을 인간이
자연의 도전에 응전해 나가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자연의 힘과 인간의 힘을 모순,
충돌하는 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인간은 자연 속의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힘의 우위에 따라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옳다는 인간 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지닌다. 이 같은 목적을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객관적인 자연의 법칙을 탐구함으로써 자연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효율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사고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식의 합리주의와
뉴턴의 물리학으로 구체화되고 증기기관의 발명과 산업혁명을 통해 극대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과학기술문명은 이와 같은 인간 중심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자연을 개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은 초고속 정보통신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을 수 있게 했으며 새로운 형태의 주거지를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식량을 생산함으로써 인류를 기근에서 탈출시켰다. 이와 같은 이점은 분명 인간과
자연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자연 지배의 정당성을 의심치 않는 자연관을 토대로 발전한
과학기술문명이 가져다 준 혜택이다.
 반면에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을 강조하고 인간을 자연 속에 부속된 존재라고
파악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인간을 자연의 주인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은
영원하고 인간은 잠시 왔다 가는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고 파악한다. 그 때문에 자연을
사적 소유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으며 인간의 욕망에 맞게 함부로 자연을 개조하지도
않는다. 자연과 인간을 모순, 대립하는 관계로 보지 않고 공존, 공생하는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을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고 여겼던 이들의 입장이
논리적인 근거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입증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연과 화해하고
공존하려는 태도가 지니고 있는 장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거리를 달리는 수많은 자동차의 행렬, 자고 일어나면 새롭게 들어서는 각종 건물들,
산을 깎아내리는 불도저와 수천만 평의 새로운 농경지를 만들어 내는 간척사업,
심지어 우주로 발을 내딛거나 불치의 병을 차례차례 정복해 나가는 의료기술의 발전
등 인류는 과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이는 것은
틀림없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자연의 횡포에 굴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인간은 자연을 넘어서는 존재라는 점에서, 또 인간도 자연 속의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존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입장은 어느 정도 정당성을 지닌다. 만약 지금 당장 과학기술을 포기한다면 인간은
생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존 유지 차원의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과도한 욕망 충족은 자연에 대한
착취 정도를 넘어서 파괴에 가까운 결과를 낳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런 자연의
파괴가 인간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각종 공해물질로 오염된 공기는 당장 숨쉬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안겨주고 썩은
물을 마실 수밖에 없으며 다이옥신을 비롯한 환경호르몬이 인류의 존립을 뿌리째
위협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각종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아마존 유역의 삼림을
개발함에 따라 지구의 허파가 파괴되는 비극적 현실에 직면해 있다.
 물론 이 결과에 대해 모두 인간 중심주의적 발생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위협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재앙이라는 점에서 이전까지
자연이 인간에게 끼친 위협과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따라서 인간을 위해서라도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발전시킨 과학기술문명을 볼 때 인간이라는 동물이 다른 동물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힙을 가진 존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힘은 단지 지적 우월성에 지나지 않고
그런 지적 우월성은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우연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도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입증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ff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동양적 자연관에 대해 비판적인 재훈과 동양적 자연관을 옹호하는 난영의 대화를
들어 보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자

 재훈:동양적 자연관은 말만 그럴 듯하지 현대인들에게는 설득력이 없어. 왜냐 하면
현실적인 한계가 너무나 분명하거든.
 난영:어째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나는 동양적 자연관이야말로 물질문명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삶의 지침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재훈:생각해 보라고.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한다면 자연 속의 다른 사물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파리나 해충을
없애는 일도 부당한 일이 될 수밖에 없잖아. 떠 인간은 각종 동식물을 섭취하면서
생존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동식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한다면
인간은 결국 굶어 죽어야 한다는 얘기 아냐? 자연과 공존을 도모하는 것은 물론
좋지만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대가를 치르면서 그런 사상을 삶의 지침으로 삼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
 난영:하긴 그래, 아무도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자연을 보호하려고 하지는 않을 거
야.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인간이 파리나 해충을 없애는 것은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욕망충족이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두고 자연의 섭리를 어기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또 다른 동식물을 음식물로 섭취하는 것도 마치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다고 해서 호랑이를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자연과의 공생을
추구하는 이념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 따라서 인간이 생존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든지 동양적 자연관을 삶의 지침으로 삼을 수 있다는 얘기지. 또
무엇보다 현대 사회에서 인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것은 과학기술의 지나친 남용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의 이기적 발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동양적
자연관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재훈:음, 그런 식으로 보면 현실적으로 동양적 자연관이 그렇게 극단적인 것은
아니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현대 사회가 과거의 사회보다 못하다는 주장에는
찬성할 수 없어. 통계를 참고하면 인간의 수명은 과거보다 늘어났고 인류는 훨씬 더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잖아. 아마 현대 사회의 평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과거의
진시황이나 나폴레옹보다 훨씬 편리하고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을 거야. 그런 혜택은
모두 과학기술로 자연을 적극적으로 개발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니겠어?
 난영:아니 얘는? 넌 눈도 없고 귀도 없니? 최근에 발표되는 환경오염 문제를 마치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말하는데 너무 심하다. 우선 각종 공해를 생각해 보라구. 당장
숨쉬기에도 고통스러울 정도로 공기가 오염되어 있잖아. 또 수돗물을 그냥 마시는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적어도 과거의 사람들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어,
또 환경호르몬이 장래 기형아를 출산하거나 인간의 생식능력을 저하시킬 것이라는
보도도 못 들어 봤어? 인류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지도 모르는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으니 넌 정말 답답한 애야.
 재훈:아니, 왜 갑자기 소릴 지르고 그래? 또 내가 환경호르몬을 만들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왜 날 갖고 그래. 정말 짜증나네.
 난영:그런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면서 슬쩍 꽁무니를 빼는 것은 논리적인 태도라고
할 수 없지. 물론 내가 언성을 높인 것은 잘못이야. 또 네가 환경호르몬을 만든 것도
아니지. 하지만 너처럼 그런 문제에 둔감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환경호르몬이나
각종 공해가 방치되는 거란 말이야.
@ff
   토론해 봅시다

 1. 동양적 자연관은 최근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학적 자연관과 유시한
점이 많다. 생태학적 자연관이란 인간이 질서를 교란시키면 안된다는 입장이 골간이
다.
이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
 2.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자연적인 능력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물을 지배할
수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또 그런 지배가 생물학이나 존재론적 차원에서 볼 때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3. 인간의 자연 정복을 당연시하는 서양의 합리주의는 과학기술문명을 낳았고
과학기술문명은 인류의 물질적 풍요를 증대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환경운동이 일어나면서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다. 비판의 근거는
무엇인가? 또 그런 비판이 정당하다면 과학기술을 포기해야 하는가?
 4. 동양인들은 자연을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사회에서는 오히려 서양보다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는 자연 훼손이 더욱
심각하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5. 대부분의 저개발 국가들은 우선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자연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자연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그들에게는 배부른
자의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국가에서
일어나는 자연 훼손을 막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6. 인간에 의한 자연 개발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은 지난 반 세기 동안 지구의 녹지는
오히려 그 이전보다 넓어졌고 인간의 수명도 연장되었기 때문에 과학기술문명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는 주장은 지나친 과장이라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각종 공해나 쓰레기 문제 등도 과학기술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 허점은 없는가?
 7.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경제적 가치는 33조 달러에 달한다는 보고가 있다.
이는 인간이 경제활동을 통해서 만들어 내는 생산량의 2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경제활동을 중단하고 자연상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주요 개념

 천인합일, 천인분리, 억음부양, 복선화음론, 제천명, 용천

   참고 문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삶과 철학", 동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삶, 사회, 과학",동녘.
 김영식, "중국 전통문화와 과학", 창작사.
 F.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범양사 출판부.
 이시카와 미쓰오, "동양적 사고로 돌아오는 현대 과학", 인간사.
 김용운, 김용국, "동양의 과학과 사상", 일지사.
 안병주 외, "동양철학의 자연과 인간", 아세아 문화사.
 박이문, "문명의 위기와 문화의 전환--생태학적 세계관을 위하여",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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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에는 왜 유일신의 종교가 없는가

 동양인들은 동시에 유교, 불교, 도교의 신자라고 한다. 이 말은 동양의 사상들이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격을 같이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이다.
 김성기(중국문화대학 철학연구소 졸(문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 유학, 동양학부
조교수)

 얼마 전 첨단 정보기기 회사 기공식에서 한복을 차려입은 외국인이 고사를 지내는
모습이 보도된 적이 있다. 한국의 종교적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장면이다. 한국과
동양에서는 유일신이 없다고들 한다. 절에 가면 부처님께 열심히 절하고 불공도 드려
합격을 기원하는가 하면 집에 가서는 조상신을 극진히 모시고 집안의 복을 빌기도
한다. 기독교 신자, 불교 신자도 점을 치고 사주와 관상을 보거나 각종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새로 건물을 짓거나 신규 사업을 벌일 때
터줏대감에게 큰절을 올리며 고사를 지낸다.
 이처럼 한국인은 무수한 신을 잡다하게 섬긴다. 따라서 동양에서 절대신이나
유일신이 없다는 말은 설득력을 갖는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의 종교를 비교할 때
서양의 종교는 유일신 신앙으로, 동양의 종교는 자연신론이나 범신론으로 분류한다.
 동양인들은 유교의 신자인 동시에 불교, 도교의 신자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이에서
모순이나 충돌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유학의 관모를 쓰
고,
도교의 옷을 입고, 불교의 신발을 신었다."라는 말을 한다. 또 삼교는 "동일한 목적지

향해 가는 세 개의 길"이고, '꽃, 잎, 씨와 같이 모두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또 "도교의 단법, 불교의 유물 그리고 유교의 윤리는 궤를 같이한다."

한다. 이런 말들은 모두 동양의 사상들이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격을 같이하고 있다는 말이며, 그 특징은 공통적으로 천지 자연에 신성함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세 신앙이라고 불리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셈(Sem)족의
자손들로써 몇 가지 공통점으로 가지고 있다. 가장 독특한 점은 동일한 하느님을
섬기고 있는데 그 신의 속성은 유일한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 자신 이외의
모든 존재를  창조한 하느님이다. 이 하느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으며 피조물이 창조주가 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동양에는 왜 유일신의 종교가 없을까?'
 이 물음에는 동서양의 사유 형태에 대한 매우 중요한 차이가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동서양의 사유 차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 물음의 의미를 명확히 밝혀 둘
필요가 있다.

   유일신의 종교는 과연 없었는가

 '왜 없었는가'란 물음은 우선 '없었다'는 사실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 그 물음
속에는 가치판단의 의미도 동시에 함축되어 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서양의 종교학자. 심지어 철학자들도 종교에는 우열의 구분이
있다고 믿었다.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교리를 비교해 보면 종교의 우열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도교는 인간 이상의 힘을 믿기는 하지만 인간성
자체에 대한 윤리적인 존경심이 없기 때문에 유교보다 열등하고, 유교는 내세관이
없기 때문에 불교보다 열등하고, 불교는 창세주관이 없기 때문에 힌두교보다 열등하
고,
힌두교는 인격신관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보다 열등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일신이자 인격적 신을 전제로 하는 셈족의 세 형제 종교, 곧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양에는 왜 유일신의 종교가 없었는가?'
 이런 식의 질문은 흔히 서양의 입장에서 동양의 가치들을 평가할 때 즐겨 쓰는
질문의 방식이다. 예를 들면 '동양에서는 왜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는가?'
'동양에서는 왜 논리가 없었는가?' 심지어 20세기 중반까지도 논의된 '동양에는 왜
철학이 없었는가?'라는 질문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들은
모두 사실의 판단과 가치의 영역에서 서구 중심주의의 입장에서 나온 질문이거나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자기비하적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과연 동양에는 유일신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는가

 동양에는 인격성을 갖춘 유일신이 없었다는 것이 사실일까? 보편적인 종교사의
관점에서 볼 때 동양에서도 서양과 거의 같은 개념의 유일신 관념이 있었다는 견해가
있고, 반대로 동양에는 유일신의 개념이 없었다는 입장이 있다.
 특히 중국 상고대의 왕조인 하, 은, 주의 경우에는 서양과 거의 유사한 보편적
종교사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주장이 최근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하나라의 종교는 토테미즘,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의 자연신론적 다신교의 형태였고,
은나라와 주나라의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인격신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갑골문, 금문, 시경, 서경 등의 자료에 의하면 은나라의 숭배대상이었던 신은 제
또는 상제라고 하였고, 은나라 다음 왕조인 주나라의 신은 천이었다. 이 '제'와 '천'

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로 길흉화복을 주재하는 유일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은나라의 상제는 그 권위가 막강한 인격신인데, 그가 통괄하는 범위는 비, 바람,
구름, 우뢰와 도시건설, 전쟁, 인간사의 길흉, 군왕의 길흉, 농경과 수확 등 모든 것

미칠 정도였다. 당시 상제에게 점을 칠 때에는 거북의 등에 점칠 내용을 새겼다고
하는데 이것이 갑골문이다. 갑골 복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문의하기를, 왕이 파나라를 정복하려는데 상제께서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파나라를 정복하지 말까요?"
 "8월, 7일째 되는 날 점을 쳐서 다음과 같이 문의하기를, 왕이 이곳에다 읍을
만들려고 하는데 상제께서 윤허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여기에 도읍을 세우지 말아야
할까요?"
 "1월, 45일째 되는 날 점을 쳐서 쟁이라는 사람이 묻기를, 상제께서 내게 가뭄을
내리시겠습니까, 내리지 않으시겠습니까?"
 또 은나라 다음의 왕조인 주나라 초기의 사료로서는 그 역사적 가치가 고증된
"서경"의 제편과 "시경"의 내용을 들 수 있다. 이 두 자료에 나타난 당시의 천과 상제
관념 역시 여전히 인격천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주초의 경전에 따르면 천은 모든
백성을 낳고, 천명을 내려 정권의 흥망을 결정하고, 죄악을 징벌하는 인격신이며
주재자적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유일신에 가까운 성격을
지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양적 사유에서 유일신이 아예 없었다는 것은 옳은
사실에 입각한 결론이 아니다. 보편적 종교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동양의 경우도
샤머니즘과 애니미즘 그리고 토테미즘의 초기 종교 형태를 공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후 은나라와 주나라의 중기까지는 서양과 같은 유일신의 개념이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일신'에서 '자연신'으로 전환의 길

 동양의 사유에도 종교사적 의미에서 유일신에 가까운 상제나 천이 있었다는 사실은
'없었다'가 아니라 차라리 전환되었다는 것을 뜻함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환되었던 것인가?
 중국 역사상 최고의 격동기로 기록되는 춘추 시대에는 온갖 사상가들이 일어나
상고대의 사상을 재해석하는데, 이를 제자 백가 사상의 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기에는
상고대의 상제, 천, 신 등의 인격적, 초월적 존재 위주의 사유에서 벗어나 인간을
위주로 하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난다. 백성이 신의 주인이라는 사상이 나오는가 하면,
요괴스런 일은 인간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사상, 길흉은 사람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지 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상, 그리고 제사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사상
등을 제시한 여러 개혁가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자산은 드디어 "하늘의 도는 멀고
사람의 도는 가깝다."는 혁신적 사상을 탄생시킨다. 이러한 서주 말 동주 초에 걸친
사상의 동요는 '하늘을 원망하는 시'라는 장르까지 나올 정도로 천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극에 달하게 한다.
 공자에게도 천명과 천의 초월적, 인격적 성격은 점차 약해지고 각 인간의 내면적
덕이 중요시 된다. 인간은 점차 가치의 근원으로서 천, 상제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도가의 경우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천, 제를 해석하여 새로운 '천지'란 범주를 만든
다.
노자에 의해서 천은 이제 지의 상대적 개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종래의 상제나 천
대신에 도, 자연, 천지의 개념으로 전환된 것이다. 노자는 "무는 천지의 시작에 대한
이름이요, 유는 만물의 어미네 대한 이름이다. 천하만물은 유에서 생기고, 유는 무에

생긴다."고 하였다.
 순자는 장자를 "자연에 가려서 인간을 알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그에게서도
'천지'는 철학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천지는 무한하므로 무한한 천지의 관점에서 볼
때 우주는 시작도 없는 끝도 없다고 한다. 장자에서도 상제 등 인격적 조물주의
관념은 소멸되었고, 그 자리에는 천지가 대신 자리잡게 된다. 장자 철학의 핵심은
자연, 천지에 있다. 천지는 시작도 끝도 없고, 공간적으로는 무한하다. 조물주는 상제

아니라 도이며, 만물은 스스로 변화하고 무목적의 성질을 가진다.
 공자의 뒤를 이어 "맹자"와 "역전"과 "중용"이 성립되는 전국시대(일부분은 한초)에
이르면 유가에서도 '천'이라는 고대 인격신의 의미가 자연이란 의미의 천지라는 용어

된다.
 "주역"은 동양적 사유의 특색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경전으로 늘 첫손에 꼽혀 왔
다.
"주역"은 점을 치기 위한 용도로 쓰인 '경'과 훗날 철학적 해석이 가해진 '전', 즉
'십익'으로 구성되어 있다. 춘추 시대까지 역은 주로 점서의 용도로 쓰였고, 전국
말기에 이르기까지 유가의 대표적 철학 사상서였다. 그런데 이 '십익'은 유가
사상가들이 당대의 사상적 도전을 수용하여 이를 융합해 낸 결과로 본다. 즉 전국
후기에 제자백가들은 서로 영향을 미치고 하나의 사상적 융합을 꾀하게 되는데,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유가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 바로 이 '십익'이라는 것이다.
 이 "역전"의 천 관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천'이 '지'의 상대적 개념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즉 천이 주재적, 인격적 신의 의미에서 전환하여 천지 우주를 뜻하

된다. '계사전'을 비롯한 십익의 곳곳에서는 천과 지가 주역의 주요한 두 범주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역의 의미는 천지와 동일하다." "역의 원리는 천지와 서로
유사하다." "역의 상징은 천지보다 더 큰 것이 없다."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주역에서

천지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며, 만물의 생명이 이 천지의 교감에 따라 생성되고
발육, 성장하는 것이다.
 "중용"에서도 대체로 '천도' '천지의 도' '천' '지' 등의 개념으로 표현되는 천지
자연을 강조한다. 이것 역시 이전의 이분법적인 천, 제 등의 상제 개념이 우주 자연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도가의 노자나 장자는 말할 것도 없고 선진 유가의 "중용"과 "역전"에
이르면 '천'은 이전의 인격적 의미의 신 개념을 떠나 '지'의 상대적 개념으로
자리잡으면서 우주를 해석하는 주요한 두 범주로 등장하게 된다. 이리하여 동양적
사유는 천지 속의 모든 만물, 즉 산, 강, 비바람, 초목, 심지어는 돌과 물까지도
포함되는 자연의 신비로움에서 초월의 의미를 찾아내는 자연신론적 특징을 갖게 된다.
이 사상은 훗날 천인합일 또는 물아일체의 사상으로 발전되는데 종적으로 보면 하늘과
인간이 합일되어 있고, 횡적으로 보면 주체와 객체를 이루는 대상세계와 주체가
하나이다. 따라서 동양인의 사고에는 신이라는 일신론적 개념이 근본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우주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운동과
변화라는 자연적인 법칙을 따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초자연적 지배자나
창조주라는 개념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왕양명은 천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인은 천지만물을 일체로 여기는 자이니, 그는 천하를 한집안 같이 생각하고
중국을 한 사람같이 본다. 만약 형체 때문에 간격이 생겨 너와 나를 분리시키는 것은
소인이다. 사람의 양지는 풀, 나무, 기와, 돌의 양지이니, 만약 풀, 나무, 기와, 돌이
사람의 영지가 없다면 풀, 나무, 기와, 돌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천지만물을 일체로 여기는 사상을 니담은 그의 책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유기체적 세계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특징을 '제정자가 없이 질서잡힌 의지들의
조화'라고 하였다. 이는 창조주로서 유일신을 전제하지 않는 동양의 자연관이 지닌
특징을 잘 지적한 말이다.
 결론적으로 동아시아적 사유에서는 상제나 천의 인격적 의미는 점차 전환되어
자연이란 범주로 귀속되어 갔다. 그리고 자연(천)과 인간을 하나의 화해적, 유기적
통일체로 파악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은 하나'라는 천인합일의 사상이 나오게 된다.

   초월 상실의 시대는 무슨 의미인가

 그렇다면 자연신을 섬기는 동양의 종교와 유일신을 섬기는 서양의 계시종교를
비교하는 것은 아직도 유효한 것일까? 여기에는 여전히 유일신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입장과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입장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특히 무의미하다는
입장은, 위의 두 신관의 모형이 제출된 배경에는 헤겔 이래로 형성된 19세기의
동아시아관, 특히 '초월의 부재' '유일신의 부재'란 동양 종교에 대한 평가가 깔려
있으므로, 유일신을 기반으로 하는 계시종교의 우위를 전제로 한 비교의 틀이라 볼 수
있다면 2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날에는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혀 다른 문명의 새 패러다임의 등장에 유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오늘날
서양의 종교계가 대면하고 있는 문제상황을 직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후현대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오늘날 서양의 '유일신'과 '초월
 '에 대응하는 동양적 사유의 의미를 물을 것이 아니라 서양의 '탈초월', 즉
유일신관이 의미를 상실해 가는 데 대한 동양적 사유의 참 의미를 묻는 것이
시의적절한 비교의 시각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오늘날 서양의 종교계가 맞고 있는 시대적 상황어는 한마디로 '신의 부재'와 '초월

상실'그리고 '세속화'이다.
 오늘날 서양에서 탈초월의 징후는 철학, 종교계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서양

종교, 신학에서 신이나 초월적 관념이 급격한 해체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빚어진 문화적 충격은 서양의 문화에 다방면으로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럴 수 가 있을까? 이때의 시대적 상징어는 '신의
부재'였다. 이에 따라 몇몇 선구적 기독교 신학자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시대적
상황어가 되어 버린 '신의 부재'에 대한 답변과 함께, 그래도 인간은 신의 보호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설득하려 하였다. 더구나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서양인의
정신적 공황은 극도에 달하게 된다. 유명한 철학자인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모든 문화는 그 비판까지도 포함해서 한낱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서양문명에
대해 극도의 비판을 하였다. 이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형성된 문화적
기후, 즉 전통적인 기독교는 세계대전을 사전에 막지도 못했으며, 전후시대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지도 못했다고 평가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에 일군의 신학자 등은
하느님의 초월성이나 불안, 절망, 죄와 같은 종래의 주제가 전후의 세계상황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신학적 관심을 저 세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에서
이 세상의 일이나 사건으로 전환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시대가 초월이나 유일신의 지위가 흔들리는 시대임을 알아
보았다. 이러한 시대상황은 1920년대 변증신학, 위기신학 이후 불트만(R.Bultmann)의
'성서의 비신화화론', 본회퍼(D.Bonhoeffer)의 '기독교의 비종교화' '기독교의 비종교

해석'등에서 선구적 '탈초월의 조짐'을 드러냈고, 1960년대 이후 이들의 업적은 '신의
죽음의 신학' '종교의 세속화론' 등의 토론으로 이어짐으로써 서양의 종교사상과 문화
전반에 걸쳐 커다란 충격을 전해 주게 되었다. 이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만병통치약으로서의 신이나 작업가설로서의 신 등 서양적 유일신 개념의 무의미함을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서양에 종교상황은 한마디로 '세속화(secularization)와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로 요약할 수 있다. 동서양의 종교를 비교할 때 우열

잣대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던 '유일신'은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서양에서 세속화의 결과 유일신의 지위만 흔들린 것이 아니라
자연마저도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연에서 신성성을
앗아갔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늘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으며 자연을 고향으로 삼아
거기서 인간의 체취를 느끼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하면서 살아왔다. 특히
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연을 신성시하였으며, 자연의 배후에서 경외감과 숭배감을
자아내는 어떤 성스러운 힘과 생명력을 감지하곤 했던 것이다. 인간의 생존과 삶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하늘과 땅, 태양과 달, 물과 대지, 동물과 식물, 산과 강
등이 모두 그들에게는 신비한 생명력으로 충만해 있는 살아 있는 존재로 느껴졌으며,
자연은 어머니요 스승이요 신을 만나고 체험하는 신성한 곳이었다. 그들은 자연을
향해 열려 있었으며 자연은 그들의 삶에 깊이 관여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자연을 탈성화하고 자연에서 거룩함을 제거하였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인간과 자연, 인간과 만물의 격리와 파멸의 전주곡이 된 '탈성화'는 어디

비롯되었는가? 도대체 이런 신성함과 경외로움과 숭배의 대상이었던 자연을 누가
탈성화하고 거룩함을 제거하였는가?
 자연의 탈성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 문명에 의해서이고
산업화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결부되어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문제인
환경위기를 산출하게 된 것이다. 이 환경위기를 야기한 근본적인 원흉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문명이 이념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기계론적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이 새삼
확인되고 강화된 것은 근대의 뉴턴과 데카르트에 의해서였다. 뉴턴은 우주를
정태적이고 폐쇄적인 동력학 체계로 보고 요소요소로 환원될 수 있는 하나의 커다란
기계로 파악했다. 자연을 죽은 대상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자연을 대하는 서양인들의
태도는 대단히 공격적이고 정복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종교는 신을 잃고 자연을 잃었다는 것이다. 현대가 탈종교상황이라는 것도
결국 종교적 신관과 자연관이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과 삶에서 찾는 신성의 동양적 특성

 근대 이후 서양의 종교적 상황은 초월의 부재, 신의 부재, 유일신의 의미 상실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연에서조차 신성을 빼앗았다.
 이러한 종교적 상황 아래서 종교학자나 신학자들은 바람직한 새 종교형태를
모색하게 되었다.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대안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연역적 대안, 둘째는 환원적 대안, 셋째는 귀납적 대안이다.
 연역적 대안은 현대적 상황어인 '세속화'와의 대결에서 종교전통의 권위를
재규명하는 것이다. 서양의 종교로 말하면 다시 '하느님의 말씀'의 위대한 권위를
회복하고 유일신인 하느님의 말씀과 그 전파가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환원적 대안은 세속화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신의 말씀이나 권위를 더욱
세속화하여 하느님의 말씀 대신에 현대적 가치, 즉 인간들의 말로 대치함으로써
세속적 상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귀납적 대안은 종교적 발언들의 출발을 경험에 두자는 것이다. 이것은 세속화
시대에 종교의 의미를 완전히 무시하자는 환원적 방법도 거부하고 하느님의 말씀의
권위를 강화하자는 대안 또는 거부하는 태도이다.
 연역적 대안은 권위를 다시 강조해 확고한 신앙심을 심어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현대인들에게 갈수록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환원적 방법은 세속성의
수용이란 점에서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은 강할지 모르지만 약점은 종교의 의미 전부를
폐기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피터 버거는 제3의 대안, 즉 초월의 귀납적 접근만이 궁극적으로 타당할 뿐만
아니라 유일한 대안이란 결론을 내린다. 이런 논의는 종교의 의미를 유일신, 초월,
계시 등에서 찾지 않고 삶과 삶,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속에서 새롭게 찾아보려는
시도이다.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바른 이론이나 교리체계보다는 바른 실천임을
자각하자는 종교 다원주의의 기본 취지도 이와 맥락을 같이하다.
 동양사상은 본래 유일신이나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고
천지자연의 운행과 하나가 되려는 수행의 과정을 중시하여 궁극적으로는 천인합일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헌대 종교학자인 피터 버거가 말하는 초월의
귀납적 모델과 가장 잘 부하보디는 것인지도 모르며, 이것이 현대 종교사적 전환기에
동양의 사유가 대안으로 떠오르는 이유이다.
 '동양에는 왜 유일신의 종교가 없는가?'
 이제 이 질문은 '신의 일식'이라고도 불리는 현대의 종교적 상황에서 동양의 종교가
갖는 의미를 차분히 되돌아보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ff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지호, 일석, 기주 세 사람이 오늘날 종교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토론하고 있다.

 지호:일석아, 기주야! 벌써 가을이다. 시작인가 했더니 기말이라, , , , , . 너희들

많이 자란 것 같구나. 참, 이번 학기에 재미있는 강의를 듣고 있어. '현대 사회와
종교'란 제목인데 현대 사회 속의 종교상황을 깨우쳐 주더라.
 일석:현대 사회와 종교, 그래, 참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지난 주일에
이문동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갔었거든. 그 친구가 마침 교회 갈 시간이라고 같이
가자더군.
 지호:그래? 그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겠군. 넌 원래 종교에 별 관심이 없잖아.
 일석:물론 그렇긴 하지. 그런데 친구가 솔깃한 소릴 하는 거야. 자기 교회는 젊은
세대인 우리를 위한 특별 서비스를 한다고 말야.
 기주:한창 뜬다는 가수라도 출현한대?
 일석:아니, 그건 아니고, 하여간 가 봤더니 화려한 조명에 최신 레이저쇼에 율동,
하여간 끝내주더라. 오죽하면 무신론자이자 신세대인 나까지 다음 주에 또 나가고
싶더라니까. 그 친구 말에 따르면 기독교가 몇 년 전부터 신자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것이야. 그런데 자기 교회는 불황을 모른다고 얼마나 뻐기는지.
 지호:어험, 그게 소위 현대 종교사회학에서 가장 관심거리가 되고 있는
'세속화'현상이라는 것이야. 그리고, 그런 시도는 1960년대에 이미 미국의 하비콕스란
학자가 "세속도시"란 책에서 예견하고 직접 시도한 것이란다. 더 이상 신이 필요하지
않은 현대인들을 위한 고육책이라는 것이지. 세속화란 신이나 종교가 점점 필요치
않게 된 현대인들의 종교적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까? 오죽하면 1966년
4월에 나온 "타임"지의 특집기사 제목이 "Is God dead?"였다는 거 아냐.
 기주:오, 마이 갓!
 일석:종교가 위기에 처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아. 그래서 한국에서 오늘
정교의 신 못지 않은 힘을 가진 것이 물신이라잖아.
 기주:그래서 한국에는 종교적 광신과 물신, 이 두 가지 신만이 존재한다고 혹평도
하더라.
 일석:과연 종교가 없어지는 시대가 올까?
 기주:글쎄, 난 불교 신자의 입장에서 종교 자체가 쇠퇴한다든가 무의미하다고는
생각지 않아. 비록 지난 4월 초파일날 할머니 따라 1년 만에 한번 절에 가긴 했지만.
 지호:그래서 교수님께 여쭤 보았지. 미래의 종교 전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기주:뭐라시든? 나처럼 종교 무용론자시지?
 지호:너하고 수준이 같은 줄 알아? 교수님은 '세속화' 현상에 대한 반응을 두 가지

정리, 소개해 주셨어. 하나는 그래도 종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종교
불멸론'이고, 하나는 종교는 쇠퇴하고야 말 것이라는 '종교 쇠퇴론'이라고 말이야.
토마스 루크만은 불멸론의 대표이고, 브라이언 윌슨이란 학자는 쇠퇴론의 대표에
해당된대. 어흠.
 기주:오늘 괜히 폼잡네. 야! 요즘 종교들 꼴 보고 아무나 해먹는구나 싶어 나도
교주나 한번 해먹을 까 했더니 종교장사도 전망 없다는 것 아니야? 종교 쇠퇴론이라니
말이야.
 일석:정말 종교가 사라지는 시대가 올까?
 지호:그런데 교수님이 재미있는 이론을 하나 소개해 주셨어. 윌슨의 '종교
무역론'이라는 건데, 동서양의 종교가 희한하게도 무역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거야.
서양의 종교는 동양과 제3세계에 구원을 가져다 주고 동양의 종교는 서양에 새로운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균형 말이야.
 일석:기독교가 우리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이해가 가지만 동양의 종교가 서양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이해가 안 가는데.
 기주:아참,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네. 지난 번 미국에 어학연수 갔을 때 같은
기숙사 미국 친구가 나에게 참선이나 불교이론, 유교에 대해서 자꾸 묻잖아. 뭘 알아

대답하지.
 일석: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니?
 지호:뻔하지 뭐, 쟤 수준에. 모른다, 중요한 거 아니다, 우리도 별로 신경 안 쓰니
너도 신경 쓰지 말아라...했겠지. 맞지?
 기주:야, 어떻게 알았지? 아닌게 아니라 창피해서 혼났어. 나중에는 내가 하도
모르니까 그 파란 눈을 빤히 뜨고 쳐다보는데 마치 '너 동양사람 맞니?'하는
눈빛이더라니까? 아니, 창피해서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이 말이 나왔지
?
 지호:그래, 그럴 거야. 예상외로 미국에서는 동양의 종교가 선풍을 일으킨다는 거
야.
명상, 요가, 참선, 주역...이런 것들이 다 인기 상종가래.
 기주:아, 내 교주의 꿈이 아직은 사라지지 않았구나. 그런데 아, 슬픈 내 영어여.
영어가 못 따라 주는구나.
 일석:그럼 미래의 종교는 어떻게 될까?
 지호:과거의 초경험적, 초자연적, 신화론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종교가
과학기술문명의 발전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이 떨어졌다는 거겠지. 그리고 어느
신학대 교수님이셨던 분의 고백이 재미있어. 구분이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성격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성경시간에 선생님은 시간마다 칠판에 성지를 그려 놓고
가르치셨대. 그게 갈릴리 호, 오단 강, 사해, 거기다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등이었는

중학교 2학년쯤 되어 그 성지가 지구 위에 있는 땅이라는 것을 알고는 충격이
엄청났다는 거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인들이 종교에 대해 알아가는 한 과정을
보는 것 같지 않아? 지구촌 시대에는 종교의 전도가 일생 어려워지는 것이 아닐까?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잖아.
 일석:흠. 그러면, 유일신을 바탕으로 하는 계시종교보다는 동양종교의 미래가 더
희망적이겠네?
 지호:글쎄, 하여간 이전처럼 교리가 더 정교하다든가, 신이라 하나님이 더 세다든
가,
초월적 개념이 더 정교하다든가 하는 종교의 우열 판정은 점점 의미가 상실되겠지.
 기주 듣고 보니 나도 하나 기억 나는 게 있어. 헤겔은 그의 역사철학강의에서
중국의 공자의 저작들이 번역이 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했다는 거야. 왜냐 하면
거기에는 초월적 이성적 논리도 형이상학의 체계도 없고, 범속한 윤리 정도의 이론만
있다는 거지.
 지호:그게 요즘 소위 말하는 서구 중심주의잖아.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도 하고, 그런 이론에 의하면 동양인은 누군가에 의하여
경영되어져야 할 구제의 대상으로 표현되곤 하지.
 일석:그래. 헤겔이 지나치군, 그런데, 이왕 유교이야기가 나왔으니 물어보자. 지호
야,
유교 이야기도 나왔니?
 지호:아, 그래. 다종교 사회에서의 유교의 의미, 그래 우리 지난 주의 주제였는데.
우선, 우리 나라에서 유교는 종교전쟁이나 분쟁을 중간에서 완충역할을 한다는 거야.
기독교와 같은 계시종교와 불교 등의 종교간에는 반드시 종교간의 다툼이 생기는데
무려 500여 개에 달하는 다종교 사회의 한국에서 별 소란 없이 평화공존체제를
유지하는데 유교가 완충역할을 한다는 거야.
 일석:그래, 어떤 통계에 보니까 기독교인의 90퍼센트 이상이 생활의 예절이나 관습

유교적이라고 동의했고, 성직자들도 80퍼센트 이상이 생활관습은 유교적이라는 데
동의한다는 거야.
 지호:바로 그거야. 유교는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종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거
지.
마치 서구인들에게 기독교처럼 말이야.
 기주:그런 깊은 뜻이. 삶의 방식으로서의 유교라...생활 속의 유교라.
 일석:다른 하나는 뭘까?
 지호:먼저, 오늘날 종교의 문제점을 생각해 봐. 과학 기술 문명의 영향으로 '세속
화'
현상이 보편화된 것이잖아. 세속화는 신의 자리를 뺏어갔지. 그뿐 아니라 자연에서마

거룩함이나 신비로움을 뺏어가 버린 거야. 자연은 더 이상 신성하지도 거룩하지도
않다는 거야. 정복의 대상일 따름이야.
 기주:그래, 어릴 때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가면 마당에서 모깃불 피워 놓고
바라보는 하늘이 왠지 신비로웠잖아. 별하나 나하나 별둘 나둘 별셋 나셋... 난 벌써
21세기를 내다봤다구.
 석규:그러고 보니 우리 자연에서 고향 같은 걸 느끼잖아? 마음의 고향. 자연으로
떠나고 싶다.
 지호:너도 동양적이구나. 유교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만물이 하나라는 우주관이지.
이것이 바로 유기체적 자연관이라는 건데, 이것이 후현대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거야. 생명의 그물망, 생명으로 촘촘히 짜인 것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라는
거지. 하여간 자연 속에서 새로운 초월의 신호를 발견해 낸 조상들의 지혜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결론이야.
 일석:자연 속의 유기체, 감응하는 우리들, 그게 바로 나비 효과하는 것이군. 내가
여기서 하품을 한 번 하면 지구 반대편에서는 폭풍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 말이야.
 기주:신이 떠난 시대에 자연이 대안으로 떠오른다. 풀 한 포기, 돌 하나도 의미로운
세상. 아, 지호야!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줄 테니 너는 나에게 와서 의미가 되어다
오.
이 쪼르륵 소리 들리지?
 지호:미안하지만 아직 고려사항이 아니네. 밥이나 먹고 보자.
 일석:그래, 가자.
@ff
   토론해 봅시다

 1. 유일신의 유무는 아직도 종교의 우열을 가리는 판단기준이 될 수 있는지 토론해
보자.
 2. 서양 중심주의에는 서양의 인종, 토지 사유형태의 발전, 문자의 발전단계 등 모

측면에서 유럽을 우수한 것으로 보고 동양을 저급한 단계로 보는 동양정체사관이 들어
있다. 서양 중심주의의 문제점을 종교적 측면에서 토론해 보자.
 3. 동양의 자연관과 서양의 자연관의 차이점을 토론해 보자.
 4.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한 시대적 상징어가 된 '신의 부재'란 문화적 분위기와
이것이 끼친 종교적, 사상적 의미를 토론해 보자.
 5. 세속화 시대에 유교의 종교적 역할에 대하여 토론해 보자.

   주요 개념

 유일신, 범신론, 동양의 자연관, 서양 중심주의, 오리엔탈리즘, 세속화, 자연신,
귀납적 초월

   참고 문헌

 한국불교환경교육원 엮음, "동양사상과 환경문제", 모색, 1996.
 이정복 편저, "현대 철학과 신학", 종로서적, 1987.
 폴 F. 니터,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한국신학연구소, 1994.
 길희성 외, "환경과 종교", 민음사, 1997.
@ff
   제2장 인간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인가
 *영혼의 문제는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동양철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ff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인가

 동양사상은 인간중심의 사상이며 인간에 대한 기본적 관점이기도 하다. 인, 겸애,
자비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의미하고 있다.
 이해영(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안동대 교수)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누구나 머릿속으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이며 이를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 사랑의
내용과 실천방법 문제에 이르면,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인지 막연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보기 위해 우리는 옛 사람들의 생각을 되새겨 봄직도 하다.
 동양사상은 '인간중심'의 사상이며 그래서 인간의 본질이나 인간의 삶에 관한 내용

많다. 그런데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 하는 것에
대한 동양사상의 여러 견해들을 꿰뚫고 있는 기본적 관점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사상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유가의 인, 묵가의 겸애, 불가의 자비를
통하여 검토해 보자.

   유가의 인

 아직도 우리는 유가사상은 봉건적이고 보수적이며 명분에 사로잡힌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가의 근본이념은 바람직한 인간의 삶은 어떠한 것인가,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인가에 있다.
 유가를 창시한 공자 사상의 핵심은 인이다. 공자는 인을 통하여 개인은 도덕적으로
자기완성을 이루고 인간사회는 도덕적으로 완성되어 인간의 바람직한 삶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공자의 관심은 사람, 그 중에서도 인간의 바람직한 삶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용"에서는 인을 '사람'이라 했고, "맹자"에서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으며, "논어"에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다운 사
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인의 본래 뜻인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 하는 것이 공자의 관심이었다면 사람을 사랑하여 사람답게 사는 것은 공자가
생각한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길이었다.
 인은 글자의 뜻으로 보자면 두 이자와 사람인자를 합해 놓은 것이므로 곧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인간의 관계는 서로 믿고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여야
한다. 그런데 인간관계는 상호성을 지니지만 모든 관계는 나와의 관계이므로 자신이
남을 사랑하거나 남에게 사랑받는 일이 모두 바로 자신의 일이다. 내 자신의 일이요,
내가 관계의 중심이 되므로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인은 인간의 도덕적 자각에 기초하고 있다. 인은 바로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며 자신의 삶에 대한 성실함과 경건함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 성실함과 경건함으로 나타난다.
 공자는 인간의 자각과 실천의 자율성을 강조하였지만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의 자각과 실천의 자율성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남과
나의 관계를 통하여 함께 나아갈 길을 구하는 것일 때, 공자가 구하는 사람다움의
길은 바로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된다. 공자는 구도에 대한 정열과
구세에 대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으며 일생을 그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공자가
보기에는 사람다움의 길은 삶의 과정속에서 개개인이 나아가야 할 길이며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나아가야 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유가의 인의 가르침이요,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길이었다.
 구도의 길은 인의 길이며 사람이 가야 할 길이다. 그러나 공자는 인이 무엇이다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논어"에서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효제는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 "얼굴빛을 꾸미고 말을 교묘하게 하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이 적다." 등등 짤막짤막한 말로서 인의 실현양태를 다양하게 묘사하였다.
이는 현실생활 속에서 어떤 행동이 어진 행동인지, 또 어진 사람이란 어떤
인간상인지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인이 무엇이다가 아니라 어진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딱딱한 이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현실생활에서 각성과 실천을 끌어 내는 교훈이었다.
 가장 바람직한 인간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는 부모와 자
식,
형과 아우 등의 가족관계이다. 그래서 공자는 육친에 대한 사랑의 감정, 즉 효제를
지극히 강조하였다. 효제란 인간이 지니는 가장 근원적이고 자연스러운 정감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정감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그 사랑의 실천은
자연스럽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확대되어 모든 사람에 대한 자연스러운 사랑으로
나아갈 때 인이라고 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은 완성되는 것이고 사람다운 사회도
일어지는 것이다. 공자는 그래서 효와 제가 사람을 사랑하는 근본이라고 한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사랑 실천의 확대방법을 공자는 충과 서라고 한다. 충은 글자의 뜻으로 보면
바르다는 의미를 지닌 가운데 중자 아래에 마음 심자를 둔 것이므로 바른 마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충은 내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버려야만 이루어지는
경지이다. 이는 바로 나 자신에 대한 경건한 태도이며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서는
같을 여자 아래에 마음 심자를 쓴 것이다. 즉 남의 마음과 같아지는 것이다. 내가
배고픈데 저 사람은 얼마나 배고플까, 내가 힘든데 저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이처럼
내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내가 바른
마음을 갖고 있을 때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야만 나와 너의 관계가 바로 서고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 즉 사람다움의 실천, 사랑의 실천은 충서의 실천이다. 충서의 실천이

내면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다하는 일이고 밖으로는 남과의 관계에서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적극적 실천방안으로는 자신이 서고 싶으면 먼저 남을
세워 주고 자신이 뜻을 이루고 싶으면 남의 뜻을 이루도록 해 주는 것이다.
 맹자는 공자를 성인으로 숭상하고 인을 인의로 확대 해석하였다. 맹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도덕 실천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인간은 천부적으로 남이
위태롭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량한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선량한 본성은 사랑, 정의
감,
예의, 지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인간의 본질은 선하다는 맹자의 성선설은 공자의 인간에 대한 신뢰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의 선한 행위, 사랑의 행위는 내면의 각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

선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맹자의 주장은 인간의
도덕적 각성 가능성을 이론적 근거로 마련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그 후의
유가들은 맹자가 공자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어받은 것으로 보아 맹자 학설을
계승하였다. 특히 송대의 성리학자들은 맹자의 성선설을 자신들의 인간론으로
받아들여 맹자를 공자의 정통 계승자의 위치에 자리매김하였다. 동시에 공자의 인을
실천적 측면에서만 이해하지 않고 인간이 고유하게 지닌 사랑의 원리요, 마음의
덕이라고 이론적으로 규정하였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누려야 하는 것은 인류의 이상이다. 유가에서 주장하는 인,

인간에 대한 사랑이란 인간다운 삶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고 인간의 관계를
아름답게 맺어 주는 끈이다. 그러므로 인간 사랑에 대한 도덕적 각성과 그 실천은
시대를 초월하여 필요한 것이다.

   묵가의 겸애

 묵가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구호는 겸애교리이다. 겸애교리는 묵가의
기본이념으로 유가의 인과 같은 위상을 지닌다. 묵가 사상의 창시자 묵자는 공자의
학문을 배운 일이 있다고 한다. 묵자는 유가의 인의 근본적인 정신인 인간 사랑을
받아들여 그들 집단의 특성에 맞추어 해석하고 변형하여 겸애교리라고 표현하였다.
묵가가 겸애를 주장한 것은 당시의 사회가 혼란한 원인이 인간이 인간을 이기적이고
차별적으로 대하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묵가는 차별적인 사랑인 별애를
버리고 평등하게 사람을 사랑하는 겸애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묵자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못살게 굴고, 많은
수를 가지고 작은 수를 괴롭히며, 귀한 자리에 있는 자가 천한 자리에 있는 자를
함부로 대하며, 교활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이용해먹는 것은 모두 차별적인 사랑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 모든 것을 겸애로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자는 뜻을 지닌 겸애는 안으로는 정치적인 평등을 요구하는 의미를 지니며 서로
이익을 나누어 갖자는 뜻인 교리는 경제적인 평등을 요구하는 의미를 지닌다. 물론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겸애가 이루어지면 교리는 저절로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묵자의 겸애사상은 그들 집단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묵가 집단은 당시의
신분사회에서 차별받는 낮은 신분에 속하였다. 그들 집단이 주로 했던 일은 약자를
위하여 성을 지켜 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성을 지키는 전쟁에서 어느 한쪽이라도
무너지면 다 같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으로 아끼고 돕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같은 극한 상황에서 동고동락하던 체험을 보편화한 것이
겸애라는 주장이다. 묵자는 겸애란 자기를 위하듯 남을 위하고 내 부모를 위하듯 남의
부모를 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남도 나와 내 부모를 자기를 위하듯 하고,
자기 부모를 위하듯 하여 사랑과 이익으로 보답할 것이라 하였다.
 묵자는 자기를 위하듯 남을 위하고 자기 나라를 위하듯 남의 나라를 위한다면 온
세상이 이로워져서 결국 그 이익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묵가의 겸애를 공리적 사랑이라고 한다. 사실 묵자의 이런 생각은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이성에 호소한 것이다. 본래 인간의 감정은
자기중심적이다. 따라서 감정에 기초한다면 남보다는 나를, 남의 부모보다는 내
부모를, 남의 자식보다는 내 자식을, 남의 나라보다는 내 나라를 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묵자는 그 같은 차별적인 사랑이 스스로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 이기적인 태도는 늘 강자에게만 유리한 조건을 이루어
사회 혼란을 가져오므로 결국에는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묵가는 사랑이란 나와 다른 사람을 바르게 관계지어 주는 것으로 차별 없이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긴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뜻에서
묵가는 겸애를 '남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현존을 바탕으로 남을 이해하는 것이므로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는 것으로 규정되는 유가의 서와 표면적으로 동일한 면이 있
다.
그러나 유가가 내재적 도덕성인 '인'의 전개방법으로서 '서'를 말했다면, 묵가의 겸애

반대급부적인 효과를 예상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한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그 대상에게 이익을 주었다고
해서 그 대상도 반드시 사랑하고 이익을 주는 방법으로 보답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란 원래 자연적인 친애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유가가 효제를 중시하였던 것은
효제가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인의 실천에 기본이 된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가의 겸애교리는 항상 상대방의 보답을 예상하고 기대하므로 결국 겸애의
실제적 대상은 반대급부로서 자기에게 사랑을 베풀거나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되는 어떤 구체적 대상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겸애를 신분적 차별을 뛰어넘는
평등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무조건적이고 무차별적인 사랑이라고 보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묵가는 상호 평등의 사랑인 겸애는 상호 이익 보장인 교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공리적으로 설명한다. 다양한 인간의 상호관계가 이처럼 오직 공리의 관계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묵가 집단의 현실적인 인간관계를 추상화하고
보편화하여 내린 결론일 것이다. 하지만 묵가의 겸애교리가 공리적 타산에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묵가는 겸애, 즉 상호 평등한 사랑을 통하여 사회적 연대를 구상하고
교리를 통하여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구상한다. 묵가는 "힘이 있는 사람은 열심히
남을 도와야 하고 재물이 있는 사람은 힘써 남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고 도가 있는
사람은 가르침을 베풀어야 한다." "함께 노동하고 서로 나누어 갖고 서로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겸애의 구체적 대상은 그 범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겸애는 이상을 같이하는 동지적 결합의 성격을 지닌 집단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그
집단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사랑을 목적으로 남을 사랑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집단의식을 모든
인간관계에 확장하여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당위로서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 하면 '남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나와 남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심정적 차원에서는 부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고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묵가는 하늘의 뜻을 끌어
왔다. 하늘의 뜻이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에 사람들 모두
하늘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묵자가 자신의 겸애교리 사상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고 실현시킬 목적으로 빌려 온 것일
뿐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자비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부처의 사랑을 말한다. 자비는 부처의 사랑이기 때문에
단순히 인간에 대한 사랑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생명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자비는 산스크리트어에서 그 뜻을 찾을 수 있다. '자'는 중생을 자비롭게
사랑하고 아울러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을 말하고, '비'는 중세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중생을 연민으로 대하고 아울러 그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을 말한다.
 자비를 요즈음의 용어로 쉽게 풀어 말하면, '자'는 대가나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는
사랑, 즉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가짐과 같은 것이며 '비'는
다른 사람이 힘들거나 괴로운 것을 보고 연민을 느끼는 감정이다. 연민을 느낄 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현실적으로 도와 주며 또한 그가 바로 서서
살아가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 불쌍한 아이에게 연민을
느껴 그 아이를 입양했다 하자. 그 아이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고 학교를 보내
주고 하는 것으로 자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자비는 그 아이에게 제대로
삶을 살아가도록 삶의 올바른 가치를 알려 주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부처의 본질에는 깨달음의 지혜와 사랑의 실천인 자비 두 요소가 있다. 그러므로
자비는 깨달음과는 다른 성격의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진정한 자비는 깨달음이
수반되어야 한다. 진정한 자비는 추호의 조건도 없고 추호의 의식도 없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맡는 것이다. 그러므로 큰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이 수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비는 추구해야 할 가치가 된다.
 용어 자체로 말하면 불교에서는 사랑을 자비라 표현하지 사랑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사랑을 미움과 마찬가지로 본다. 사랑은 모든 사물에 대한
탐욕스러운 그리움과 집착이다. 사랑은 미움의 또 다른 한 면, 즉 사랑과 미움은
하나의 양 측면인 것이다. 사랑에는 친족에 대한 사랑, 다른 사람에 대한 우정, 특정

사람에 대한 애정 등이 있다. 그런데 인간의 이러한 사랑들은 모두 자기중심적이다.
이러한 사랑들은 고뇌를 낳는다.
 부처는 자비의 마음이 지니는 덕을 닦고 그것을 자주 반복하여 실천함으로써 완전히
몸에 익혀야 한다고 하였다. 자비는 실천이기 때문에 몸에 익혀야 한다고 하였다.
자비는 실천이기 때문에 몸에 익혀 자기 것으로 해야 한다. 사실 자애로운 마음은
쉽고도 어렵다. 자애로운 마음의 토대는 인간의 본성 속에 있다. 내 자식이
사랑스럽다, 내 부모가 소중하다, 형제가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 나 자신도 슬퍼서
눈물이 흐른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그러므로 쉽다. 사랑하고
측은해하는 이 마음이 널리 전 인류에게, 나아가 목숨이 있는 모든 것으로 넓어져
가는 그것이 자비이다. 그런데 자비를 확대해 나가고자 하면 여러 가지 번뇌가 그것을
방해한다. 이기심이 그렇고, 탐욕의 마음이 그렇다. 노여움이나 악의도 그것을 막는
다.
패거리 심리도 그것을 막고, 편협한 애국심도 그것을 막는다. 그래서 어렵다. 이
방해하는 것들을 하나씩 소멸시키면서 스스로를 연마해 나가야 비로소 끝없는 자비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번뇌와 애착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적이나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자비의 마음씀을 가능케 한다. 자비의 실천 안에서는 더
이상 배타적인 경지가 없다.
 자비의 마음가짐은 마치 어머니가 그 외아들을 목숨과 같이 소중히 하듯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무한히 사랑하는 마음가짐이다. 자비는 무한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실천을 모든 존재에게 두루 펴 나가기 위한 노력이다. 모든 존재에게 사랑의 관심을
진지하게 갖는다는 것은 바로 좁은 자기에게서 해방되어 자기 자신을 바르게 인식하는
과정이며 최고의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지름길이다. 자비는 자신과 남을 구별하지
않는다. 자아를 무한히 확장하여 자신을 점점 더 많은 살아 있는 존재와 동일시해
나간다. 사랑의 실천인 자비와 깨달음의 지혜는 동등한 것이다.
@ff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언론에 크게 보도된, 아버지가 보험금을 노려 자식의 손가락을 자른 사건을 두고
진실, 창민, 석규가 나누는 대화이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이기적 욕구와 인간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자.

 진실:얘들아, 최근에 두드러지게 일어나는 이번 사건과 같은 유형의 반인륜적 범죄

인간의 기본관계인 가족사이에 사랑이 부족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개인의 이기적인 욕구는 부모나 자식에 대한 기본적 사랑의 마음보다도 강한 것일까?
 석규:어떤 상황에서는 이기적 욕구보다 부모와 자식에 대한 사랑이 우선되겠지.
하지만 또 다른 상황이 되면 이기적 욕구가 더 강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거야.
 창민:아버지가 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이번 사건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그랬대.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닐 거야.
 진실:아니야. 그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어. 사랑했다면 그렇게 할 수는 없
어.
그 아들은 아버지의 이기적 욕구의 희생자일 뿐이야.
 창민:아들이 아버지의 범죄에 동의한 것은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서일까?
 진실:아이는 효도를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냥 아버지의 뜻에 따랐을 뿐이야.
어린아이잖아.
 석규:효도는 전통적인 대가족 제도에 적합한 덕목이야. 대가족이 무너져 핵가족화
되고 나아가 인간이 개별화 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는 그러한 전통적이고 당위적인
규범은 진정한 사랑의 실천 방법으로는 적합하지 않아. 그물망같이 복잡하게 얽혀
사는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게 대우하고 사랑하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고
사회에 도움도 될 것 같아.
 진실:석규는 묵가의 공리적 사랑인 겸애교리에 가까운 주장을 하네. 하지만 네가
남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가 그 보답으로 너를 반드시 사랑한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니. 오히려 너의 사랑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만 챙기려고 할지도 모르잖아. 부모와
자식 사이는 이해관계가 없으므로 자연스러운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남에게도 자연스레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거야.
 창민:진실이 너의 그러한 생각은 자칫하면 개인 이기주의, 가족 이기주의, 나아가
모든 집단 이기주의의 바탕이 되는 거야. 나와 관계가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하고 점차
사랑의 범위를 넓혀 간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나, 가족 그리고 친한 사람만 사랑하는
차별적 사랑이 될 수밖에 없어. 그것은 바로 이기주의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야. 내가
남을 차별 없이 사랑하고 이익을 주게 되면 남도 반드시 나에게 사랑과 이익으로서
보답하게 되어 있어.
 석규:그래, 창민이의 말이 맞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랑만 내세우고 실제로 나에

돌아오는 이익이 없으면 진정한 사랑의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 같아.
부모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주장하지만 사실 더욱 절실하고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이기적 욕망이야.
 진실:얘들아, 모든 인간이 이기적 욕망만을 추구하면 그것은 결국 인간사이의 갈등

분열의 원인이 돼. 인간이 이기적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면 사랑의 인간관계는
이루어지지 않아. 너희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인간에 대한 사랑은 불가능할 거야.
 석규: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자연스러운 이기적 욕망을 포기하라고 하면 그러한
주장은 결국 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려는 사람만 이익을 보게
되어 있어. 현대의 사랑 방정식은 무조건적인 배려와 헌신보다는 너와 나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적절히 조정하여 충족시키는 데에서 풀어 가야 돼.
 진실:인간이 선한 본성을 지녔다고 믿으면 나의 이기적 욕망을 억제하고 남을
사랑하는 일이 쉽지만, 믿지 않으면 사랑의 실천은 어렵다고 생각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믿어야 해.
 창민:이 험악한 세상에 어떻게 사람을 믿어. 믿는 만큼 배반당한다구.
 진실:기쁨과 슬픔을 같이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게 바로 사랑이야. 네가 남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남이 너를 믿고 사랑하기를 바라니.
 창민:그래, 우리는 서로서로 믿고 사랑하자.
 석규:그래그래, 우리 셋 모두 서로서로 믿고 사랑하자. 하하하.
@ff
   토론해 봅시다

 1.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는 우리의 전통적인 도덕규범이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마치 맞지 않는 옷과 같다고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과연 그런지
토론해 보자.
 2. 인간에게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본성과 동시에 남을 사랑하고 배려하려는
마음도 있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억제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3. 묵가는 "내가 남에게 사랑과 이익을 베풀면 남도 나에게 사랑과 이익으로
보답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찬성과 반대의 입장에서 토론해 보자.

   주요 개념

 인, 충, 서, 인의, 성선설, 겸애, 자비
@ff
   참고 문헌

 "불광대사전", 불광출판사.
 E. 콘즈, "한글세대를 위한 불교", 세계사, 199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
 김교빈, 이현구, "동양철학에세이", 동녘, 1993.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삶과 철학", 동녘.
@ff
   영혼의 문제는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영혼이나 귀신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책이나 방송에서도
전생, 귀신 등은 자주 다루어지는 소재이다. 그럼, 철학에서는 이런 것들이 어떻게
생각되는가.
 이현구(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 강사)

 세계 '안'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자 할 때, 세계 '밖'의 것이 문제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죽음에 대한 연구도 이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죽음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보아 온 현상이다. 그러나 죽음을 알려고 하다 보면 '죽음 뒤엔 어떤 세계가 있을까?'
하는 물음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죽음은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이 사건을
조사하자면 곧잘 죽음 뒤의 세계,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가 아닌 세계를 문제삼게
된다는 말이다. 과연 사람은 죽음 이후를 알 수 있을까? 죽은 뒤에도 어떤 세계가
있을까? 사람은 죽은 뒤에 어떻게 될까? 이런 물음과 깊은 연관이 있는 개념은 '영혼'
또는 '정신'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그 사람의 영혼은 살아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몸이 죽으면 영혼이나 정신도 같이 없어지는 것인가? 영혼은 영원히 존재하는가
아니면 얼마 동안만 존재하다가 결국 사라지는가? 영혼들만이 사는 세계가 어느 곳에
따로 있는가?
 영화 '유혹의 선'(Flatliners)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려고 하는 의과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주인공들은 지금까지 종교, 철학, 과학으로 해결하지 못한 이
문제를 자기들이 직접 사후세계를 찾아가서 알아 내 보자고 나선다. 비밀스런 장소에
실험장치를 하고 전기충격으로 죽음의 세계에 들어간다. 심장이 멈추고 뇌파가 정지한
상태, 곧 죽음으로 들어가서, 처음에는 1분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긴 시간 동안
죽음을 체험하고 다시 전기충격을 이용한 심폐소생술에 의하여 되돌아온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제각기 다른 세계를 보고 오는데, 대개 각
개인의 과거경험과 연관된 체험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의학의 기준으로 죽었다고
판정된 뒤 몇 시간에서 며칠씩 죽음 상태에 있다가 깨어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자료가 이 영화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를 꾸며
본 것일 뿐이고 죽은 뒤에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에 해답을 준 것은 아니다.
'사랑과 영혼'(Ghost)이라는 영화에는 영혼의 존재가 더욱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영혼은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갈 수도 있고 연습을 통하여 물체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기를 수도 있다. 이런 상상력을 계속 확대하면 잡담으로 하는 귀신 이야기들도
모두 사실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들이
아니다. 영혼에 대한 갖가지 잡다한 상상들이고 이야기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이 영혼이나 귀신이란 주제는 사람들에게 계속 관심의 대상이 되어 '전생 이야기'나
미스터리 극장'과 같은 종류의 이야기가 책을 통하여 또는 텔레비전을 통하여 퍼지고
있다. 그렇다면 철학의 역사에서 이 문제들은 어떻게 다루어졌을까?

   영혼 관념의 유래

 20세기 말에 세계는 '지구촌'이라 불리듯이 하나의 마을처럼 가까워졌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이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을 통하여 신속하게
알려지고, 인터넷을 통하여 온갖 정보들이 교환되고 있다. 지구의 어디에도 문명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관념은 아직 곳곳에
남아 있어서 현대의 원시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오지도 있다.
도시인들이 이 사람들과 함께 사냥을 나가서 겪은 일화가 보고되어 있다. 사냥터를
향해 한참을 달리던 원주민들이 갑자기 멈추어 섰다. 아직 더 달릴 수 있는데 쉬는
것이 이상하여 까닭을 물으니, "우리가 너무 빨리 다렸기 때문에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이 저 뒤에 처져 있어서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마음과 몸에
관한 하나의 관점이 들어 있는 이야기이다. 마음과 몸은 서로 떨어질 수 있고, 떨어져
있는 상태가 지나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우리 나라 조선시대 말기에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사진기가 사용되었는데 처음에
사람들은 이 기계를 두려워하였다. 자기의 모습을 신기하게 그대로 찍어내는 이
기계에는 자기의 혼을 뽑아가는 요사스런 귀신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도 몸과 마음에 관한 하나의 관점이 들어가 있다. 몸의 형상을 담은 사진
속에 그 사람의 정신이나 영혼의 일부가 실려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사진을
함부로 구기거나 밟거나 하면 그 사진의 주인공에게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남을 해치려는 주술적 방법으로 어떤 사람의 형상을 인형으로 만들어서 바늘로
찌르거나 함으로써 그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생각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이런 이야기들 속에는 우리의 몸과는 다른 어떤 요소가 우리 안에 있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그것은 마음, 정신, 영혼 등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존재들에 대한 관념은 인간의 원시적 관념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원시인들은 보통
애니미즘이라고 불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생물들 속에는 각 개체에
정령(아니마)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몸과 다른 요소를 인식하는 데에 기여한 여러 가지 경험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꿈의 현상 같은 것이다. 나는 방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 속에서는
산에 올라가 경치를 구경하거나 무서운 짐승에게 쫓기거나 한다. 이처럼 꿈을 우리
마음이 몸을 벗어나 다른 곳에 가서 경험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
몸 속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던 무엇이 몸을 빠져나간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피와 살로 된 내 몸과 다른 정신적인 '나'를 가정하고 그것의
모양이 내 몸과 닮은 것이면서 물리적인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면 벽을 통과한다든지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이다. 도교수련에
대한 책 속에는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어간 사람의 머리 위에 같은 모양의 작은
사람이 떠 있는 그림이 실려 있다. 이러한 것도 내 몸 속의 정신적 존재를 형상화한
것인데 수련가들은 이 정신적인 존재가 진짜 자기라고 보는 것이다.
 영혼이나 정신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바꿔 말하면 오래 살고자 하는 인간의 소망이 반영되어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

속에서 발견되는 미라나 중국의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게 했다는 기록 등은 계속
살기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을 담고 있다. 중국의 연단술은 불로초와 같이 사람을 늙지
않고 병들지 않게 하는 물질을 찾는 노력이 실패하자 그런 물질을 인공으로 만들어
내자는 생각으로 옮겨가면서 나온 기술이다. 연단술사들은 주사와 같은 광물질을
특수하게 정련시키면 그런 물질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다.
그런데 주사의 주성분은 황화 수은으로, 정련하면 마지막에는 치명적인 독극물인
수은이 남게 된다. 결국 사람들이 수은중독으로 생명을 잃게 되자 이 방법은 차츰
내단수련법으로 바뀌어 갔다. 내단수련법은 우리 몸 속에 있는 생명력을 특별한
수련을 통하여 강화시킴으로써 초능력을 가진 신선으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깔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죽지 않은 사람은 없으며, 죽은 뒤에 사람의 몸은 분해되어 오랜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일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존재의 영속성에 희망을 걸어 보는 것이 마지막 방법이었다. 이처럼 개체의
영속성을 정신이나 영혼의 불멸로 연결시킨 생각이 '영혼불멸론'이다. 영혼불멸론을
믿는 입장에서는 개체들은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죽은 뒤에도 영속성이 유지된다고
보는 것이다.

   영혼에 대한 불멸론과 소멸론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고 위진남북조 시기의 혼란기에 불교, 도교와 같은 신비적
성격의 종교가 현실적인 유교보다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불교의
영혼불멸론에 대한 비판과 이 비판에 대한 반론이 시끄러웠던 시기가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범진(대략 445__515)의 '신멸론'과 같은 글들이 나왔다. '신멸론'은
정신은 사후에 반드시 소멸한다는 관점에서 영혼불멸의 이론을 문답형식으로 비판한
글이다.
 물론 불교이론은 매우 복잡하고 여러 유파가 있어 영혼불멸론이 불교의 핵심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혼불멸을 믿는 힌두교를 배경으로 불교이론이
탄생하였고, 종교 전파의 과정에서 대중을 이끌어 내기 위한 방편으로 영혼불멸이나
인과응보와 같은, 좀더 피부에 와 닿는 설명방식이 개발될 여지는 많았다. 눈에 보이

않는 추상적 관념이나 이론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들에게는 지옥의 고통이나 극락의
즐거움을 대비시켜 착한 행동을 많이 하면 죽은 뒤에 극락에 다시 태어나고 나쁜 짓을
많이 하면 독사가 우글거리는 지옥에 간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설득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영혼불멸의 이론은 초기 기독교에서 성립하지 않았고, 중세 기독교에서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여 교리를 체계화하면서 자리잡았다.
 유교이론은 영혼불멸인지 영혼소멸론인지를 확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대체로
영혼소멸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와 귀신의 문제에 대한
토론하는 것을 금기시한 공자의 가르침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제자 자로가 죽음과
귀신 섬기는 법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공자는 "삶을 다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사람도 다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말하겠는가?"라고 답변하였다. 그런

유교의 제사풍습을 보면 귀신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남긴다. 유교의
전통을 가진 우리 나라에는 조상을 제사지내는 풍습이 있다. 제사의 절차를 보면
조상의 신을 모셔와서 술잔을 올리고 음식을 드시게 하고, 돌아가시는 것을 배웅하고
나서 상을 치우고 후손들이 음복을 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제사는 조상의
신이 정말 찾아온다고 믿기 때문에 지내는 것일까?
 유교의 죽음 이후에 대한 설명은 복잡하지 않다.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나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흩어진다고 한다. 혼백은 4세대간 유지되다가
소멸하기 때문에 4대를 제사지낸다고 한다. 그러나 "논어"에서 공자는 죽은 뒤에
사람의 영혼이 있다든가 어떤 세계를 만난다는 말을 남긴 적이 없다. 제사의 풍습은
조상신을 모시는 고대의 풍습을 유교가 흡수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서도 귀신이나
영혼 이론으로 제사의 원리를 설명하는 일은 적극적으로 권장하지 않았던 것이
공자학파의 입장이다. 3년 상의 의미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사람이 태어나서 3년간은
부모의 보살핌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기간이라는 사실을 이유로 삼았다.
 유교의 제사도 인간의 존엄성과 농업 공동체 사회의 질서를 강화하기 위한 현실적
목적에 중점이 있다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죽은 뒤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길이 살아남는다. 가족이나 씨족의 단결과 협동의 매개로서 조상의 신은
작용한다. 유교사상가 가운데는 이 영혼의 문제를 화롯불과 온기의 관계로 설명한
경우가 있다. 곧 불이 우리의 육체라면 혼은 온기에 비길 수 있다는 뜻이다. 화롯불이
꺼지더라도 얼마 동안 방 안에 온기가 남아 있듯이 영혼은 죽음 뒤에 얼마 동안
존재하다가 서서히 사라진다는 비유이다. 이런 관점이라면 영혼불멸론은 아니지만
영혼불멸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영혼불멸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세계, 저승이나
천국과 같은 세계가 있다는 것에 쉽게 동의한다. 그러나 그런 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기 때문에 영혼소멸론자들의 공격을 계속 받을 수밖에 없다.
환담은 육체를 떠나 정신이 따로 존재할 수 없음을 초와 촛불의 관계로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촛불은 초가 다 타 버리면 꺼지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정신도
육체가 죽으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왕충은 불과 불빛의 관계로 정신과
육체를 비유하였다. 불이 꺼지면 빛도 사라지듯이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소멸한다는
설명이다. 왕충은 또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귀신의 모습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귀신을 사람이 죽은 뒤에 남은 '정신'이라고 본다면, 그가 입고 있던 옷은
정신이 없는 것이므로 당연히 귀신은 옷을 입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다고 하였다.
 범진은 '신멸론'에서 실체와 기능의 관계로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육체는 실체이고 정신은 육체의 기능이기 때문에 정신은 육체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이러한 관계를 범진은 '칼'과 '날카로움'의 관계로 비유하였다. 칼날의 예리함을
이용하여 물건을 벨 수 있지만 그 예리함은 칼이 있고 나서야 존재할 수 있다. 칼이
없이는 칼의 베는 작용이 있을 수 없듯이 육체가 없으면 정신의 작용도 존재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영혼불멸론을 비판하는 이런 논증이나 비유들이 설득력이 있다고
보이지만 끝내 이 문제는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영혼불멸론을
믿는 사람들은 계속 존재하고 있다.

   영혼론에 연관된 문제들

 죽은 뒤의 영혼에 관한 견해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인생과 세계를 보는 방식이나
가치판단에 영향을 준다. 소설 "혼불"의 한 대사를 보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두
아들이 죽음에 대하여 서로 다른 관점을 표현한 대목이 있다.
 (동생의 말) "살아 있을 때 온 정신을 다 쏟아 놓은 일이 결국은 그 사람의 죽음
다음을 비춰 주는 게지요.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어찌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지, 죽

버리면 인간은 한낱 물질로 돌아가 썩어서 흙이 되고 물이 되는 것. 그 죽은 시체를
위해 온갖 절차를 갖추고 성대히 상례를 치르는 것은 아마 허위에 불과한 일일 게요.
아니면 살아남은 사람들이 저 자신의 심정을 위로하기 위한 놀이든지."
 (형의 말) "지나치게 재물 공력을 많이 들여 가산이 피폐해질 정도로 장사를 지낸다
하면 그것은 폐습이겠지만, 가령 죽은 개 한 마리 묻는 것이나 한가지로 사람 죽은
몸뚱이를 함부로 내다 버린다면, 그것은 죽은 사람만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산 사람도 그처럼 하찮게 대해 버리고, 거기다가 아무 가책을 느끼지 않는 세상이
되고 말 것이네. 시신을 지극히 공경해서 존엄하게 모시는 것은, 죽음을 헛되이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정신일 것이야."
 두 사람은 모두 유학자들이어서 사후에 영혼이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장례식의 형식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토론하고 있다. 사후에 영혼이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동생은 많은 비용을 들여서 장례식에 공력을 쏟는 일이
의미 없다고 한다. 그러나 형은 이러한 장례식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연관된 문제라고 신중론을 펴고 있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삶의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사후세계가 있다고 확실하게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다. 사이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집단자살하는 사건 보도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은 납득하기 어려워한다.
서양의 문물과 종교가 들어왔을 때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서양의 종교가 부자의 천륜을
끊고 삶보다 죽음을 좋아하는 이단사설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새로운
종교에 대한 대결의식과 불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논쟁의 초점을 천당과
지옥과 같은 사후세계 문제에 맞춘 것이다.
 장자는 '해골과의 대화'라는 우화를 통하여 사람들이 삶에 집착하는 모습을
깨우치려고 하였다. 죽은 뒤에 얼마나 즐거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면서 왜 사람들은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삶이
절대적으로 좋고 죽음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을 되돌아보기 위한 우화였다. '살기
위하여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는가' 하는 삶의 태도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장자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싫은
것이라는 고정된 관념을 깨고자 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사후세계, 저승이나 피안을
말하게 되었다. 실제로 장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후세계에 대하여는 우리가 모른다고
해야 가장 옳은 태도라고 보고 사후세계가 있다고 하거나 없다고 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을 모두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유학자의 입장에서는 장자의 이러한
불가지론적 태도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영혼불멸을 믿거나 그것에 불가지론적
태도를 취하는 입장은 모두 이 세계 밖의 가공의 세계, 거짓 세계, 허무의 세계를
가지고 우둔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비판이다.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분리된 두 실체로 보고 이론을 세웠던 데카르트는 육체와
정신이 통일되어 있는 구체적 인간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세계에는 생각하는 '정신'과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질'이 있고, 그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통합될 수 없다. 만약 술에 만취하여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면 어떤 처벌을 내려야 하는가.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육체가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하여 감옥에 가둔다면 육체만 가둘 수 있을 것인가.
정신에 책임이 있다고 하여 육체를 가둔다면 아무 관계도 없는 놈을 가둬 두는 꼴이
된다.
 영혼불멸을 믿는 사람들은 대개 정신과 육체가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정신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를 구분하고 정신적인 세계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경향을 갖는다. 이러한 생각의 계열을 철학사에서는 관념론이라고 분류한다. 중세
기독교의 영혼론 가운데 존재하는 것들을 세 종류로 분류한 방식이 있다. 물질적인
것들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영혼은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다. 신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모든 것은 신이 창조한 것이고 신의 창조물 가운데 영혼은 신을 닮은
존재로서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는 영속성을 갖는다는 설정이다. 이러한 사례를
통하여 영혼에 관한 문제는 철학의 근본문제와 연관된 하나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ff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범진이란 학자는 '신멸론'이라는 글에서 사후에 정신은 소멸한다는 것을 논증하려
하였다. 다음은 그 문답을 토대로 영혼에 관한 서로 다른 두 입장을 대화로 꾸며
보았다.

 문  당신은 죽은 뒤에 정신이 소멸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답  정신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육체가 보존되어 있으면 정신도
보존되고, 육체가 스러지면 정신도 소멸한다.
 문  육체와 정신은 서로 다르다. 정신은 생각하고 판단하는 지각활동이 있지만
육체는 없다. 지각이 있고 없는 차이가 있으니 정신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
 답  육체는 정신의 물질적 바탕이고, 정신은 육체의 작용 또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육체와 정신은 분리될 수 없다.
 문  정신과 육체는 이름이 이미 다른데 어떻게 분리되지 않는가?
 답  육체와 정신의 관계는 칼과 날카로움의 관계와 같다. 날카로움은 칼이 아니다.
또 칼은 날카로움이 아니다. 그러나 날카로움을 버리고 칼이 없고 칼을 버리고는
날카로움이 없다. 칼이 없어졌는데 날카로움이 남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어찌 육체가 없어진 뒤에 정신이 있다고 하겠는가.
 문  죽은 사람의 육체는 살았을 때의 육체가 아닌가?
 답  사체와 생체는 이미 완전히 구조가 다른 것이다. 산 사람의 육체가 죽은 시체와
같을 수 없다.
 문  육체와 정신이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것이라면 손에도 과연 정신이 있는가?
 답  정신의 일부분이 손에 있다.
 문  정신은 생각할 수 있는데, 손이 정신의 일부라면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가?
 답  손은 아프고 가려운 것을 느낄 수는 있으나 시비를 판단할 수 없다.
 문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같은가 다른가?
 답  느끼는 것은 생각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다만 느낌은 생각의 얕은
단계이다.
 문  당신 말대로라면 두 단계의 생각이 있다. 생각이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면
정신도 두 종류가 있는가?
 답  인체는 본래 하나이므로 정신도 하나이다.
 문  뛰어난 사람의 육체는 보통 사람의 육체와 다를 바 없지만 그 능력은 다르다.
이는 육체에 깃든 정신이 보통 사람과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답  그렇지 않다. 뛰어난 사람은 몸도 보통 사람과 차이가 있다. 깨끗한 쇠는 빛이
나지만 녹슨 쇠는 빛이 나지 않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뛰어난 사람의
몸은 보통 사람의 몸과 다르다. 보통 사람과 뛰어난 사람의 몸이 같다는 생각은 틀린
것 같다.
 문  뛰어난 사람과 보통 사람의 몸이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렇다면 뛰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생김새가 차이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답  뛰어난 사람들은 능력이 서로 같으면 되지 외모가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말이 털 색깔이 다르더라도 다 잘 달리고, 옥이 색이 다르더라도 더
아름다운 것과 같다.
 문  꿈에서 죽은 사람을 만났다거나 실제로 귀신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이 귀신이 있다고 믿고 있는데 이런 경험들이 영혼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아닌가?
 답  억울하게 죽거나 참혹하게 죽은 사람이 많지만 다 귀신이 되어 나타나지는
않는다. 귀신은 사람의 영혼이 남아서 귀신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는 다른
자연현상일 것이다.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고 귀신이 변신하여 사람이 되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문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정신이 육체와 함께 소멸한다는 것을 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답  미신이 사람들을 혼란시켜 그로 인한 폐단이 그치지를 않는다. 사람들이 미신의
그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건지려고 한다. 재산을 다 털어서 종교에 달려가고,
가족을 돌보지 않고 생활을 멀리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틀림없이 자기 한 몸의
행복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일 것이다. 쌀 한 줌을 가난한 친구에게 주면서는
아까운 기색이 얼굴에 역력해도 천금을 종교에 바칠 때는 기쁜 마음이 머리털까지
나타난다. 종교는 그에 상응하는 많은 보답을 약속하지만, 친구는 벼 한 단도 갚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급히 도와 주여야 할 딱한 사람은 버려 두고
자기에게 덕이 돌아올 일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 아닌가. 또 천국이라는 허황된
이야기에 유혹되고, 고통스런 지옥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이
영혼불멸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영혼불멸론이 삶을 소중히 생각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장애가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ff
   토론해 봅시다

 1. 사람이 죽은 뒤에도 영혼이 살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영혼불멸을 주장하는
증거들로 내세우는 내용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정리해 보자.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비판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2. 영혼불멸이나 영생을 믿는 사람과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현세의 삶의
태도에서 어떤 차이를 보이게 되는지 생각해 보자.
 3. 현대의 과학지식으로 영혼불멸론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정할 수 있을까? 결론을
내릴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주요 개념

 영혼, 사후세계, 마음, 정신, 죽음, 불멸론, 소멸론, 애니미즘, 개체, 영속성, 연단
술,
혼백, 귀신, 제사, 불교, 기독교, 유교, 육체와 정신, 정신적 존재, 몸과 마음

   참고 문헌

 가노우 요시미쓰, "중국의학과 철학", 여강, 1991.
 이현구, 김범춘, 우기동, "박물관에서 꺼내 온 철학이야기", 우리교육, 1995.
 장대년, "중국 유물사상사", 이론과 실천, 1989.
 S. 토카레프, "세계와 종교", 사상사, 1991.
@ff
   동양철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발달된 과학기술은 인간이 부분적으로 환경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인간이 자연과 기후의 영향을 받는 것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유의
방식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김수중(서울대 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경희대 교수)

 어떤 사람들은 철학사상을 이해할 때 그 사상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의 입장과
일치될수록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론의 논리적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다른 사람들은 그 사상을 배태한 지리적, 역사적
배경을 객관적으로 먼저 파악해야 그 사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환경이나 현실과 독립되어 성립하는 사상은 없다는 것이다. 앞의 경우가 '안으로부터

접근'이라면 뒤의 경우는 '밖으로부터의 접근'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어느 측면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불교를 이해할 때 근본불교의 교리로서 사성제나 삼법인 등
석가의 사상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불교를 낳은 인도의 자연과 사회를 파악하는 것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가령 인도의 무더운 기후는 인도에서 발생한 거의 모든 종교와 철학들이 명상을
중시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해 준다. 고대로부터 사제들을 비롯한 지배층은 시원한
나무그늘이나 석굴 속에서 명상을 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이해하는 것은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와 철학들을 고찰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따라서 어떤 철학사상에 접근할 때, "한 발은 안에, 한 발은 밖에 두고 보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안에서만 본다면 우리는 주관적, 관념적으로 흘러서 그 사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또 만일 두 발을 모두 밖에 두고 본다면 우리는 그
사상의 배경만 이해할 뿐 심오한 내용까지는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제 동양철학의 형성 배경과 요인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말하자면 이번 장에서 우리는 동양철학에 대한 '밖으로부터의 접근'을 시도하는
셈이다. 이러한 우리의 태도는 '환경결정론'에 가까운 듯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결정론에 찬동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순한 환경결정론은 다음과 같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즉 문화의 총체적인
발전에서는 수많은 원인들과 결과들이 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원인이고 어떤 것이 결과라는 설명은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철학도 환경을 떠나 진공 중에서 형성된 것은 없다. 오히려 세계에
대한 인간의 사유방식(ways of thinking)은 인간의 생활방식(ways of living)과 긴밀

연관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발달된 과학기술은 인간으로 하여금 의식주와 관련하여 부분적으로 환경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근대 과학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인간이 자연과
기후의 영향을 받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의 지리적 특징:닫힌 세계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는 기본적으로 황하를 중심으로 한 중국 문명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기로 한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닫혀 있었다. 북쪽으로는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
서쪽으로는 히말라야, 텐산, 쿤륜 산맥으로 막혀 있으며, 동남쪽은 바다에 접해 있다.
특히 '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서쪽의 산맥들은 유럽과 아시아를 수천 년 동안
갈라 놓았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문화권은 다른 문화권으로부터 오랜 기간
동안 격리되어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유럽 문명은 한마디로 '지중해의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지중해는 인류가
최초로 항해할 수 있었던 '바다'이다. 지중해에는 조수간만의 차가 거의 없다. 또
때때로 폭풍이나 폭우가 있다 해도 아시아의 태풍이나 카리브 해의 허리케인 등에
비하면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다. 따라서 지중해 연안 지방들에서는 일찍이 무역이
발달하고 여러 지역간의 문물교류가 비교적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서구의 고대문명이 발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에 비하여 중국은 지리적으로 볼 때 광활한 대륙 안에 격리되어 있었다.
한문으로는 세계를 '천하'(하늘 아래) 또는 '사해내'(동서남북의 바다로 둘러싸인
곳)라고 표현하였다. 중국인의 생각에 바다는 곧 세계의 끝이었던 것이다. 서양의
창조신화에서 '물'이 중심 역할을 하는 데 비해, 중국 고대에 형성된 오행사상에서는
땅을 중앙 또는 중심으로 본다.
 위와 같은 지리적 조건은 중국의 철학과 문화가 '중용'이나 '조화'를 중시하는 특징

가져왔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중용이 곧 진리'라고 믿어 왔다. 중국적 사유에서

절대적인 선이나 악은 없으며, 단지 지나침과 모자람이 있을 뿐이다.
 또 중국 사상에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중시하고, 각 개인을 독립적으로
보기보다는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보는 시각이 발달한 점도 위에서 언급한 환경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요컨대 닫힌 세계에서는 주어진 여건들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서
구성요소마다 제 몫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농경문화:대가족주의와 소박실재론

 무엇보다도 중국은 대륙국이다. 이는 그리스--로마가 해양국이었던 점과 대비된다.
중국인들은 광활한 대지에서 주로 농경에 종사해 왔다. 물론 초기 인류의 문화는
농경문화였다. 하지만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유럽 문명에 흡수되고, 인

문명이 서양 문명과 부단히 상호 영향을 끼쳐 온 것과 달리, 황하 문명은 고대의
농경문화를 근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유지해 온 유일한 문명이다.
 농경에 종사하는 농부들은 특별한 기회가 생기지 않는 한 삶의 터전인 토지 주변에
살아야 한다. 그것은 지주인 사대부들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한 지역에 몇 대의
후손들이 모여 살면서 대가족제도를 형성하게 마련이며, 이러한 사회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족질서이다. 여기서 조상숭배의 관념이라든가 효를 비롯한 가족윤리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농경문화는 그리스--로마의 해양문화나, 중동의
유목문화와는 매우 다르다. 가령 미술사에 보자면, 중국의 경우에는 현대에 이르기까

산수화가 주류를 형성한 반면에 서양의 미술은 그리스 시대부터 매우 도회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의 경우, 그들은 지중해를 무대로 한 상업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그들은 도회지에 살면서 상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수학적 계산이
중요하였고 그래서 추상적인 사유가 발달하였다. 도시국가 중심의 그리스 시민들은
가족주의적 관념보다는 민주적인 개인관념을 발달시켰다.
 경제적으로 농업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중국인은 농업을 숭상했다. 전통사회에서
흔히 쓰던 '사농공상'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농부는 생산자 계층에서 가장
우대를 받았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농업을 '본'이라 하고 상업을 '말'이라 한다. 중국

전통사회에서는 언제나 근본이 되는 농업을 중시하고 말단이 되는 상업을 경시해
왔다. 사대부는 토지를 직접 경작하지는 않았지만 지주의 신분으로서 그들의 운명은
농업에 매여 있었다. 또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농부들과 함께 전원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사대부들의 우주관과 인생관은 농부의 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농부들의 생활은 자연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을 숭상하고
이상화하였다. 또 농부들의 생활은 비교적 순박하고 단순하였으며 따라서 자연에 대한
직접 경험을 중시하고 이를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철학에는 '인식론'이
별로 발달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세계관은 소박실재론에 가깝다. 농부들은 계절에 따른
자연의 엄밀한 운행과 대자연의 조화를 찬탄하고, 자연을 인간의 스승으로
이상화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맹자는 "진실 그 자체는 자연의 도이고, 진실하고자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도이다."라고 하였다.

   온화한 기후와 현세주의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는 대체로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이점은 같은
농경문화이지만 인도와 중국의 문화가 왜 다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인도의
기후는 매우 더워서 사람들은 고통을 받는다. 가령 뉴델리의 경우, 6월의 평균기온은
섭씨 34도에 육박한다(서울의 8월 평균기온은 섭씨 25.4도). 여름에는 섭씨 40도를
넘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불교의 사성제는 "모든 것은 괴롭고 무상하다."라는
명제로 시작한다. 인도에 명상문화가 발달한 사실, 대체로 인도의 종교와 사상이
중국에 비하여 염세적이라는 사실 등은 그 기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비옥한 대지와 온화한 기후는 중국인이나 한국인으로 하여금 현세주의적 윤리관을
갖도록 만들었다. 우리 속담에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다. 중국

대표적 종교인 도교에서는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을 추구한다. 중국이나
한국인들은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계시종교'가 성립하지 않았
다.
초월적인 계시종교는 중동 사막지방의 유목문화에서 발달하였다. 사막의 모래바람과
싸우며 계절에 따라 계속 초지를 옮겨 다녀야 하는 열악한 현실이 유목지방 사람들로
하여금 '초월'을 추구하도록 만든 게 아닐까.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집트나 유대교의
전통에서 발견되는 절대적인 '유일신' 개념은 무제한의 권위를 아무 거리낌없이
휘두르는 '파라오'의 이미지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인들에게 대지의 이미지는 오히려 생명의 근원이며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대지는 사람을 먹여 줄 뿐만 아니라 만물을 살리는 위대한 존재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현실긍정적인 입장에서 '원죄 의식'같은 것은 나올 수 없다. 그
대신에 공동체의 유지에 필요한 윤리의식이 발달한다. 따라서 서양문화가 '죄의식의
문화'라면 동양의 문화는 '수치심의 문화'라 표현되곤 한다. 중동 지방에서는 종교가
발달하였고, 동아시아 지방에서는 윤리 도덕이 발전되었다.

   동양과 서양:사유방식의 차이

 니담에 의하면 중국적 세계관의 근본 특징은 그들의 유기체론에 있었으며
라이프니츠 등에서 발견되는 근대 서구에 나타난 유기체론은 중국에 기원을 두고 있을
것으로 파악한다. 고대인의 세계관과 사회관을 살펴보는 데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주역"과 "주례"등에서는 우주와 인간사회에 관한 세계적, 유기적
체계가 큰 특징으로 드러난다. 주역의 체계는 어떤 뜻에서는 지상의 관료제에
대응하는 하늘의 관료제로 볼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탄생시킨 인간문명의 특정한
사회질서를 자연계에 반영시킨 것이라고 니담은 보고 있다.
 한편 서양에서는 '실체'(substance) 개념을 중심으로 존재론을 전개한 데 비하여,
중국에서는 '상관성'(correlation) 개념을 중심으로 세계를 설명해 왔다. 서양인들은
사물을 보면 '그것은 무엇인가?'하고 묻는다. 그에 비하여 중국인들은 '그것은 다른
것들과 어떤 관련을 가지며, 나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하고 묻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감기에 걸렸다고 하자. 서양의학에서는 그 현상(감기)을 일으킨 실체에
관심을 두고 가령 그 본질을 '바이러스균'으로 파악하고 그에 대처할 항생제를 줄
것이다. 그러나 한의학에서는 설사 외부의 나쁜 기에 감염되어 병이 났다 하더라도
그와 맞선 나의 원기가 균형 있게 작용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감기라는 현상이
나왔다고 보고 원기를 북돋을 약을 줄 것이다. 동양에서 보자면 모든 사물은 상생이나
상극의 어떤 관련성의 그물망 속에 있다. 결국 서양의 전통적인 세계관은 '원자론'으

정형화되었고, 중국의 세계관은 '음양오행론'으로 귀결되었다. 서양인이 질점을
중심으로 사물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데 비하여, 중국인은 타자들과의 관련성에
주안점을 두어 그 사물을 이해한다.
 이상에서 고찰해 온 것을 요약하면 다음 페이지의 도표(본문 123p 도표생략)와 같이
될 것이다.

   유기체적 세계관과 그 현대적 의의

 따라서 주역에 표현된 '유기체적 세계관'이야말로 중국사상의 가장 큰 특색이라고

수 있다. 그것은 데모크리토스 이래 발전된 서구의 인과율적, 기계적 세계관과
대비된다. 유기체적 세계관에서 보자면, 우주의 모든 부분들은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며 각 부분들은 모두 스스로 생성하는 생명과정의 요소로서 상호 작용하고
있다. 니담이 '명령자 없는 의지들의 질서 정연한 조화'라 부른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전통적인 농악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지휘자가 없으면서도 각 부분을
담당하는 악기들의 연주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니담은 이렇게 말한다.
 "(중국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주 그 자체가 거대한 유기체이다. 그라네가
말한 것처럼 '질서'의 개념이 중국의 세계상의 기초를 이룬다. 그 기초란 세계에는
아무것도 창조되는 것이 없으며 또 세계 그 자체도 창조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인의 관념에는 '신'도 '법'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유기체를 형성하는 우주의

부분들은 그 자체에 내재한 본성에서 생기는 구속에 의해 자기의 기능을 전체의 순환
속에서 수행한다."
 서양의 변증법에서는 '모순'이라는 개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데 비하여, 중국적
세계관에서는 '중용'과 '조화'가 극히 중요시된다. 전통적인 고전에서 볼 때에도
"주역"과 "중용" 은 상호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중국사상의 본질이자 특징으로 지적되는 이러한 '유기체적 세계관'은 닫혀진
대륙국가로서 중국인들이 전체적인 유기적 조화와 중용을 추구해 온 점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관은 근대의 세계에서는 매우 불리하였으며, 따라서 중국과
한국은 제국주의의 희생이 되었다. 근대의 산업사회에서는 자연을 우리가 이용할
자료의 집합체로 보며, 인간의 관점에서 그 자료를 가공하여 이용한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을 서로 대립항으로 보고,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서구적 사고방식에
적합했다.
 그러나 이제 근대의 문화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근현대 문명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대안적 세계관이 모색되고 있다.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자연을
'개발'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일이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서구
근대세계에서 신봉된 '이성'이 한계를 가지고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동양의
유기체적 세계관은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현대문명이 동양의 전통에서 수용하여 보완해야 할 점들을 몇 가지 들어 보자.
 우선 동양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연은 우리의 가공을 기다리는 죽어 있는
자료의 집합체는 결코 아니다. 전통적인 성리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는 오히려
생명의지를 가진 존재들로 가득 차 있다. 우주는 생명의 경기장이며 나와 우리 인간은
그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은 천지와 혼연일체가 되어 만물을 자기
몸으로 여긴다.
 다음으로 서구 근대의 인간관은 지나치게 인간을 원자화, 개체화한다. 동양의
전통에서 보자면, 인간은 결코 고립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인간'이라는 개념에

보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다. 너와 나를 통한
상호관계 속에서만 우리는 존립한다.
 또 근대 이후 사람들은 지나치게 욕망을 추구해 왔다. 동양의 전통에서 보자면
오히려 인간은 스스로 욕구를 제한하고 절제함으로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점은
동양의 모든 수양론에 기본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근현대 사회에서는 재화의
대량생산이나 사회적 제도개혁에는 성공했지만 오히려 인간의 내적인 개혁은 너무
소홀히 하였다.
 우선 위와 같은 세 가지 점에서 보더라도 동양의 전통은 근현대 문명의 병폐를
바로잡는 데 보완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물론 동양적 전통만이 미래사회의
바람직한 대안이 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수적인
복고주의자들의 헛된 바람일 뿐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근현대 서구문명의 병폐를
바로잡는데 동양적 전통이 '보완적 기능'을 어느 정도 담당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동서 문화가 만나는 한국에서 기대해도 좋다고 본다. 근

이후 아시아인들은 동양의 전통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개방적으로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왔다. 특히 한국은 두 가지 문명이 만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기에
매우 좋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된다.
@ff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토론 주제를 제시하였을 때 양립되는 갑, 을의 의견을 적어
보았다. 여러분도 각자의 입장을 정리해 보기 바란다.

 1. 동양철학의 사유방식에 대하여
 갑:중용과 조화의 사유방식은 전통적으로 개척정신이 결여된 것이어서 보수성과
완고함을 가져온다.
 을:중용과 조화는 서구적 사유 혹은 근대 문명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출구가 될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보완책이 될 수 있다.
 2. 동양적 가족주의가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갑:전통적 가족주의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혈연적 지연적 할거주의와 온정주의의
근원이다.
 을:현대의 문제는 오히려 가족의 해체에 있다. 동양적 가족주의가 새로운
보완책이다.
 3. 종교적 초월과 합리적 현실주의에 대하여
 갑:베버에 의하면 동양에는 '초월'이 없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철학은 세속적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을:서양 계시종교의 '초월성'은 독선적, 배타적, 투쟁을 가져온다. 그래서 기독교나
회교는 수많은 종교전쟁을 일으켰다. 가령 기독교의 십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

말라'로 시작되며, 회교에서는 '코란이 아니면 칼을 받아라'고 말한다. 얼마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가. 이에 비해 농경사회의 종교는 관용적이고 포용적어서
중국사에서 종교전쟁은 찾아볼 수 없다(회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인도에도 종교전쟁이
없었다). 동양에서는 가족중에 할머니는 불교, 아버지는 유교, 어머니는 샤마니즘을
믿어도 큰 탈이 없다. 서양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4. 동양철학의 위치와 역할에 대하여
 갑:동양철학은 농경사회의 사유방식이며, 물질문명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이미 그
유효성이 사려졌다.
 을:근대 '산업사회'에 있어서 동양문화는 사회발전에 큰 장애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미래 사회(가령 정보화 사회)로 접어들면 사정이 다르다.
동양의 유기체론은 오히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기대되기도 한다. 카프라는
한의학에서 그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았다. 기를 중심 개념으로 하는 세계관은 여러
가지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특히 한국은 동서문화가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대해도 될 만한 곳이 아닐까.
@ff
   토론해 봅시다

 1. 유럽의 역사는 몇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해 왔다. 그런데 왜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등에서는 원시적인 사회가 몇천 년간 반복되어 왔을까?
 2. 중국에서는 일찍이 주나라 시절에 이미 고대 봉건제가 나타났다. 그런데 왜
중국에서는 봉건주의 사회가 2000년 이상 계속되었을까?
 3. 중국철학에서는 왜 인식론이 발달하지 못했을까?
 4. 요즘 '풍수'나 '기'에 관한 담론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현대인들이 그
것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5. 동양의 전통은 환경문제 해결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6. 중국문화와 인도문화의 차이점과 그 배경을 말해 보자.

   주요 개념

 관계, 효, 인식론, 공동체, 실체, 상관성, 모순, 중용, 조화

   참고 문헌

 최영진, "동양과 서양". 지식산업사.
 J. 니담, "중국의 과학과 문명"(1. 2. 3.), 을유문화사.
 빙우란, "중국철학사", 형설.
 김관수, "중국문화의 시스템론적 해석", 천지.
 송영배, "중국사회사상사", 사회평론사.
 F. W. 모트, "중국의 철학적 기초", 서광사.
@ff
   제3장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

 *욕망의 추구는 참된 인격의 형성을 방해하는가
 *지식을 택할 것인가, 지혜를 택할 것인가
 *예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가
 *개인과 사회의 갈등은 해결할 수 있는가
@ff
   욕망의 추구는 참된 인격의 형성을 방해하는가

 욕망이란 과연 자기발전을 위한 동력인가 아니면 도덕성찰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욕망을 버린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김세서리아(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 강사)

 어느 마을의 시장에
 사람의 마음을 찍는 사진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유명한 정치가를 찍었더니,
 돈 다발이 찍혔습니다.
 돈 많은 사장님을 찍었더니,
 술과 여자가 찍혀 나왔습니다.
 어떤 남자는 늑대가 찍혀 나오고
 어떤 여자는 여우가 찍혀 나왔습니다.
 --정채봉, '내 가슴 속 램프'중에서
 돈, 술, 성욕....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욕망을 만나며, 그 중 더러는
충족되기도 하고, 또 더러는 좌절되기도 한다. 과거의 많은 성현들은 우리에게 욕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보다는 욕망에 대한 집착은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것으로, 사람은 욕망을 채움으로써가 아니라 욕망을 버림으로써 인간다워질 수 있음을
말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변의 많은 이야기들이 내포하는 '욕망을 과도하게
추구할 경우 벌을 받게 된다.'는 교훈적 메시지가 그리 낯설지 않다. 이는 우리가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욕망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늘
교육받고 또 자기를 억제하는 방식으로 생활하는 것에 잘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우리 모두는 욕망이 자기 몸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는
데 방해가 된다고 인정하는 것에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다. 때문에 인간의 욕망이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다가가면 없어지는 것이며, 그래서 그것을 좇는 삶이란 허망한
삶이라고 하거나 또는 욕망의 추구는 인간이 바람직하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라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 속에서 생활에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는 것, 자기 발전의 추동력이
되는 것 또한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난치병에 걸린 환자에게 삶에
대한 욕망이 없으면 치료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은, 욕망이 꿈이 되고 목적이 됨을
보여 준다. 먹고 싶은 욕망에서 좀더 나은 맛을 개발하게 되고, 알고자 하는 욕망에서
학문의 발전이 이루어진다. 또한 자신을 완전한 주체로 세우고자 하는 욕망에서
욕망의 충족은 오히려 자기 발전의 힘이 된다.
 비록 욕망하는 대상을 얻고 난 후에 여전히 남는 허망함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얻으려는 과정에서 자기 삶을 조금씩 상승시켜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욕망한다는 행위는 끊임없이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낳고 객체에 대립하고 있는 주체를
구성한다. 이는 욕망이 항상 '나는 무엇을 욕망한다.'는 것의 형태를 지니기 때문이
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욕망은 분명 나를 나로 있게 하는, 그리고 인간을 고양시키며
인간을 인간이게 형성시키는 발전적 추동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들 속에서 우리는 욕망이란 것이 과연 자기 발전을 위한 동력인가?
아니면 도덕 성찰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 욕망을 버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등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욕망과 도덕의 관계에 대한 유가철학의 쟁점들

 욕망이 인간다운 삶을 방해하기도 하고 또 자신의 삶을 고양시키는 것이기도 하다는
논의로부터 우리는 단순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욕망을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으로
구분지어 볼 수 있다. 여느 도덕 철학에서와 같이 유가철학에서도 욕망은 도덕적
문제를 거론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이제 유가철학에서 욕망에 관한 담론들을
고찰하는 방법을 통해 욕망과 도덕 간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전체 유가철학사를 통해 볼 때 욕망에 관한 담론은 때로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때로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이해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같은 욕망에 대해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일까? 아니면 욕망의 범주를 서로 다르게 상정하고 있는
것일까? 유가철학에서 욕망에 관한 담론을 구성하는 기준들은 대체로 몸과 마음에
관한 이해, 공과 사의 문제 등과 연관되어 있다. 유가철학에서 몸과 마음의 관계,
그리고 도덕과 욕망의 관계 설정은 시대나 사상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는데, 그것은
크게 다음의 두 범주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마음이 몸을 주재한다는 전통 유가철학의 입장이다. 이러한 관계의 형성은
사에 대한 공의 절대적 우위라는 사고와 연관되어 있었다. 즉 사적인 욕망의 발생은
나의 몸과 연관하여 생겨나며, 때문에 사적인 욕망을 만들어 내는 몸은 공동체의
안녕을 위협하는 악으로 흐를 위험이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사고에서는 대체로 욕망(몸)이 도덕과 대비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도덕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은 되도록 적어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마음이 몸을 주재한다는 유가의 전통적 사고에 동의하면서도 몸의
중요성이 마음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서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주목받게 되고 따라서 개체, 주체에 대한 문제들이 몸과
연관되는 방식으로 설명된다. 이렇게 몸을 긍정하는 이해방식은 몸에서 생겨나는 욕망
그 자체가 악이 되거나 또는 도덕적인 몸을 이루는 것과 대치되지 않는다.

 1)공동체 질서를 위협하는 나쁜 욕망 물리치기: 욕망을 되도록 적게 하는 것이
도덕적 몸을 이루는 방법이다.

 전통 유교사회에서는 개체를 중시하거나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의식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등의 관계가 중요한 문제로 나타나며,
이때에 나의 몸은 개체로서의 존재로 인정되지 않는다. 부모님이 물려 주신 몸을 잘
보존하는 것이 효의 근본이라는 유가적 효의 논리는 나의 몸이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이다.
 따라서 전통적 유가철학의 이념 속에서 사적인 욕망이란 공동체의 삶의 조화를
위협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몸이 지향하는 사욕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기도 하고, 욕망을 되도록 적게 하는 것이 인간의 선한 본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임을 말하기도 한다.
 유가철학에서는 공적 영역을 절대적 우위로 상정하는 속에서도 사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생리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에 대해 전면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욕이나 금욕주의가 아닌 과욕, 절욕을 강조한다. 하지만 더욱 근원적인 본질을
도덕적인 것에 두기 때문에 결국 생리적, 감각적 욕망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인간의 생물학적 몸과 욕망은 '사적인 것'과 연관되면, 따라서 인간의 욕망은 절제해

되거나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몸과 욕망을 좀더 밀접한 관계로 파악하면서 그것을 도덕적인
것과 명확하게 구분하여 설명한다. 따라서 인간의 몸으로 인해 사사로운 욕망이
생기게 되고 그것은 도와 함께 합치하기 어렵다고 하거나, 사람에게 몸이 있음으로써
눈, 코, 귀, 입이 사욕에 연루되어 예에 위배되고 인을 해치게 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렇게 몸과 욕망을 연관짓고, 도와는 대치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에는
몸이 산출하는 욕망을 억압하는 성향이 다분히 내포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성리학적 구도에서는 배고플 때 먹는 것이나 옷 입는 것
자체는 인정하지만 좀더 맛있는 것을 찾는다거나 고운 베옷 또는 고급 털옷을 찾는
것과 같은 일은 인욕(사욕)이 된다. 성욕에 관한 문제에서는 이러한 관념이 더욱
심화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굶어죽는 일보다 절개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나 과부의 재가 금지 등이 주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사회구조가 비교적 단순한 사회에서는 인간의 욕망의 종류도 단순하게 나타나며
따라서 이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점차 사회 발전이 가속화되고 사회가 복잡하게 변해감에 따라 인간의
욕망구조는 다양해지고 주체, 개체에 대한 인식도 싹트게 된다. 이러한 속에서
현실적으로 없앨 수 없는 욕망을 없애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설득력을
확보할 수 없으며, 위선이 될 수밖에 없다.

 2)좋은 욕망 길들이기: 욕망을 인정하는 것은 전체에 매몰된 '나(주체)'를 찾는 길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 잃어버린 나의 얼굴아--"
 우리 안에 매몰되어 있는 나의 존재를 꼬집은, 꽤 오래 전에 유행했던 가요의 한
대목이다. 실제로 우리는 내 부모, 내 형제보다는 우리 부모, 우리 형제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우리라는 '관계 안에서의 나'의 존재가 '개별적인 나'의 존재보다 더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관계 속의 나는 개별적으로 고립된 나를 만들어 내지
않음으로써 원자화된 개인을 창출시키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존재란 있지 않고 그래서 내가 주체적 삶을 살 수 없다는 비극적 결말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이러한 점을 주목하고 인간의 주체성, 개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변화가 유교
안에서 인식됨에 따라 '윤리적 관계'(삼강오륜), '공동체'가 절대적으로 우선시되는
논의로부터 개인적인 욕망, 행복에 관한 논의로의 전이가 서서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사회의 악을 제거하려는 일련의 노력들은 그러한 사회악의 발생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간의 몸, 욕망, 도덕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창출되었다. 따라서 맛있는 것을 추구하고, 좋은 소리를 탐하고, 편안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는 측면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식욕이나 성욕 같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데 일단
동의하면서도 되도록 욕망은 버려야 할 것으로 상정하는 전통적 입장과는 달리, 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자기 몸의 안녕을 위해서 욕망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욕망 추구는 긍정적인 시각에서
검토되었다. 곧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유기적 강령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기는
하지만 몸을 단련하여 도덕적 몸을 이루는 것 이외에 자기 몸을 편안하게 할 것을
말하면서 몸의 생리적 욕망에 대해 적극 인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고 속에서는 욕망의 대상이 어떤 것이든 자기 주체성과 연계되고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자아를 실현하는 욕망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옷 입고 밥
먹는 일 자체가 윤리적인 것이 되기도 하고, 자기 창고에 곡식을 쌓아두는 것이나
자기 학문의 진취를 위해 공부하는 것 등 그 자체가 도덕적이고 인간의 본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 순수한 것이 된다. 때문에 자기의 구체적 상황을 반영하는 욕망의
문제를 떠나 강상, 윤리의식 등에 사로잡히는 것은 오히려 위선이며, 인간의 욕망에서
나오는 것은 생명의 보존과 성장에 관한 일이 아닌 것이 없다. 이러한 속에서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유지하기 위한 제반 노력이 불가피하게
요청되며, 인간의 욕망은 이 같은 노력의 구체적 표현이 된다.

   욕망의 절제와 도덕적 주체 형성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분명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원동력임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때로는 부질없는 것처럼 보여지는 욕망--예컨대 새처럼 날고 싶다거나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등의 욕망--을 통해서 비행기를 발명하기도 하고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생명체의 복제를 가능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갖는 기본적인 욕망에서부터 자아 실현을 위한 좀 더 사회화된 욕망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는 분명 인간의 삶을 고양시키는 그 무엇이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욕망이 도덕적
문제로 설정되는 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 동안에 도덕군자들이
억눌러야 한다고 그리도 절실히 외쳤던 것은 무엇일까?
 식욕이나 성욕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그리고 인류를 번식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것이다. 때문에 도덕철학자들도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은 인정하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단순히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인간 생명과 직결된 욕망 이외에도
명예욕이나 성취욕, 소유욕 같은 욕망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어떤 의미로는 기본적인 식욕, 성욕보다도 더 중요하게 인식된다. 따라서 아무리
배고픈 거지라도 밥통을 발로 차거나 밥을 던져 주는 행위에 대해서는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 이는 욕망이 바로 자의식, 자기 주체성 등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며, 이 때문에 욕망의 문제는 자기를 도덕적 주체로
세우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런데 욕망의 문제가 도덕의 문제로 되는 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들이 성취욕, 명예욕, 소유욕에 편입된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나의
욕망을 충족하는 문제와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인의 욕망을 억압해야 하는 상황, 이 때문에 욕망은 도덕철학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여기에서 욕망은 억압되거나 절제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
 기본적인 욕망으로 우리는 흔히 식욕과 성욕을 거론한다. 그런데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제과점 앞을 지나다 맛있는 빵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유리창을
깨고 그 빵을 꺼내거나 멋지게 차려입은 여성이 지나간다고 해서 그 여자를 성희롱
또는 성폭행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욕망의 과도한 추구가 공동체 삶의 안녕과
조화를 깨뜨리는 위험요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욕망이 타인의
삶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의 삶만을 지향하는 경우를 경계하고, 개인의
욕망을 정당한 것으로 존립시키기 위해서 타인의 삶에 대한 존중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욕망이 경계되어야 하고 절제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생명을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것과도 직접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밥을 잔뜩 먹고 그대로 누워 버리고
싶은 욕망, 당근, 시금치는 먹기 싫고 초콜릿, 아이스크림만 먹고 싶은 아이의 욕망,
이러한 나의 욕망을 무한히 추구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정말 인류가 추구하는
근본적인 유토피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저런 욕망을
조절하지 않은 채 먹고 싶은 대로 먹는다거나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목으로 과음하거나
담배를 많이 피우거나 하는 방식으로는 나의 생명을 결코 건강하게 보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는 자기 욕망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를 통해 자기의 건강을
지키도록 적당한 양의 음식 섭취와 적당한 양의 운동을 하도록 했다.
 공동체의 안녕을 도모하고 나의 삶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개인의 욕망은
적당하게 절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욕망 절제의 필요성이나 욕망을 절제하기 위한
어려움은 자기 내에서의 싸움으로 전개된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문제의 설정은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 선에서 거론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지배하는 선에서
설정된다. 즉 도덕적 몸의 완성은 금욕주의와 같이 욕망을 제거하는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잘 절제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욕망을 절제한다는 것은 즐기지 않는다거나 되도록 적게 즐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욕망의 절제를 배워야 하는 까닭은 적은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이 가지지 못했을 때 적은 것을 가지고도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을 절제한다는 것은 되도록 욕망을 덜 추구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많이 추구하는 속에서 공동체의 삶과의 조화를 생각하는
것이며, 이러한 삶 속에서 나는 주체가 된다.
 욕망을 추구하는 것의 목적은 배부르면 토해 내서 허기를 산출하거나 목마르지
않으면 짠 간장을 먹어서라도 갈증을 만들어 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끝을
모르는 욕망의 추구는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욕망을 통제하는 방식이 일률적으로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것은 절제가 아니라 금욕이며, 자제가 아니라 무능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절제란
자신에 대한 욕망의 작업이며, 인간의 도덕적 삶을 위한 필수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이러한 한에서 욕망을 절제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에 대하 배려'라고 말할 수 있다.

수 있는 한 욕망을 통제하고 조절하고 그것들의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나를 주체로 만드는 것이며 나의 참된 인격을 형성하는 길이다.
@ff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민주와 영무가 연예인들이 마약을 하는 것을 두고 욕망과 연결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영무:가끔씩 연예인들이 대마초, 필로폰 등을 복용해서 문제가 되지 않니?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개인의 욕망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어. 이런 문제는 개인의
욕망이 타인의 그것을 지배하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민주:너는 엉뚱한 생각은 잘 한다. 마약을 하는 것은 당장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행위이고 결국은 개인의 건강을 해치게 되니까 나쁜 욕망인 것이지.
 영무:그렇지만 개인의 욕망이 반드시 먹고 입는 것, 오래 사는 것 등의 생물학적이

기본적인 욕망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 인간에게는 자기 삶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분명히 있고, 연예인들이 마약을 하거나 하는 문제도 사실 따지고 부면 이런
욕망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은데.
 민주:하지만 마약을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는 범법행위잖아? 우리가
공동체의 삶을 위해 서로 하지 않기로 한 일종의 약속인데 이를 어기는 것은 분명히
공동체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 될 것이고.
 영무:야, 너는 범생이 같은 소리만 하고 있니? 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봐. 가수들

마약을 하는 것은 음악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얻어 내서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한
것이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노래로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기도 하잖아. 이렇게 보

가수들이 마약을 하는 것은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면서 동시에 전체 사회에
긍정적인 기능을 하는 면도 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개인이 마약 하는 것을
범법행위로 취급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아.
 민주:처음엔 그냥 단순한 문제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니네.
제법인데? 그래도 어쨌든 마약을 통해 환각세계를 체험하거나 함으로써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왜냐 하면 그런 방법은 자기 자신을
주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이기 때문이야. 도덕이나
윤리를 욕망의 문제와 같이 거론하는 것은 욕망이 주체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잖아?
 영무: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뿐 아니라 오히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가 더 많고 그런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많이 느끼기도 하지만
본드나 마약 같은 것의 힘을 빌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결코 자기 자신을 주체로
세우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욕망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을 진정한 주체로 만드는 것일 테니까 말이야.
@ff
   토론해 봅시다

 1. 나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먹을 것, 입을 것 등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기본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두고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IMF 체제
이후 모두들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1억 원을 호가하는 모피 코트를 사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을 두고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똑같은 먹을 것,
입을 것이라도 왜 어느 때는 그것이 정당한 욕망으로 인정되고 어느 때는 비도덕적인
것이 되는 것일까?
 2.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의 먹을 것, 입을 것이 있고 인류를 번식시킬
만큼의 성욕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인간들은 왜 자꾸만 더 맛있는 음식,
더 좋은 옷, 그리고 더 좋은 환경을 찾아서 헤매는 것일까?
 3.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자신을 도덕적 주체로 세우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를
건강한 삶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욕망을 절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절제가 아니라 마음껏 향유하는 방법으로는 나를 도덕적 주체로 세울 수
없을까?

   주요 개념

 주체, 몸, 강상, 자의식, 절제, 금욕주의, 절욕, 과욕, 쾌락, 자리 배려, 공동체,
개인,
나, 타인, 우리, 관계, 생명

   참고 문헌

 M. 푸코, "성의 역사", 나남출판, 1990.
 김교빈, 이현구, "동양철학에세이", 동ㅋ, 1993.
 "시대와 철학", 제15호, 1997.
 이현구 외, "박물관에서 꺼내 온 철학 이야기", 우리교육, 1995.
@ff
   지식을 택할 것인가, 지혜를 택할 것인가

 앎에 대한 동양과 서양의 태도가 어떻게 달랐기에 동양은 과학적 지식을 중시하는
서양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가
 황희경(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 강사)

 우리는 일반적으로 동양의 정신, 서양은 물질을 중시하는 문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오늘날 전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서양문명은 사실 근대 과학혁명 이래 빛나는
과학적 성과에 바탕을 둔 것이고, 과학이란 물질적 대상인 자연 속에서 일정한 법칙을
찾아내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체로 이러한 말에 수긍하곤 한다.
 어떤 학자는 근대 과학혁명 이전에는 동양의 과학수준이 서양보다 오히려 앞섰다고
하면서 동양의 유구한 과학적 전통을 강조한다. 그러나 동양에서 근대 과학이
탄생하지 않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동양의 근대화 과정은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에서 과학을 서양의
상징부호와 같이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물질현상의 법칙을 이해하는 학문인 자연과학이 서양에서 발달했다고 해서
그들이 정신에 대한 탐구를 소홀히 했다거나 상대적으로 '동양은 정신'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사실 이러한 이분법의 이면에는 서양 과학의 충격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동양의 열등감 또는 열등감에서 유래하는 자존자대의 감정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논리학의 용어로 말해서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앎(지식)의 성격과 관련하여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비교하게 될 때에도 마찬가지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비교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비교의 기준을 설정해야 하는데,
우리는 은연 중에 근대 서양을 기준으로 해서 고대 동양의 경우를 불평등하게
비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고대의 서양과 동양의 경우를 비교하는 것은 그다지 현실적
의의가 크지 않고, 근대 이후의 동양은 서양과 분리시켜 따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근대 서양을 기준으로 고대 동양의 경우를 일반화하여 비교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면이 없지 않다. 여기서는 동양사상 가운데 유가와 도가를 중심으로 동양의
앎은 서양의 앎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지식과 지혜

 앎의 성격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서양은 지식을, 동양은 지혜를 추구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지식은 아주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필수적이다. 가령 돌은 어떻게 해야 뾰족하게 만들 수 있다든지 사냥이나 낚시는
어떻게 한다든지 하는 것은 현대인의 눈에는 불필요하다고 생각될 만큼 사소한 앎에
불과하지만 원시인에게는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식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환경과 싸우면서 생존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에서 획득한 지식은 점차 축적되었고
이러한 앎 자체에 대한 반성, 좀 어렵게 말해서 인식론적 탐구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다만 그것이 동양에서는 근대 서양에서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뿐이다.
따라서 앎에 대한 중시 또는 추구는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된
것이었다.
 특히 중국 고대의 유가사상가들이 학문과 교육을 중시한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학문과 교육이란 지식의 축적과 전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지식을
매우 중요시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줄곧 계승되어 왔다.
요사이 아시아 각국이 여러 가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많이
수그러들기는 하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의 눈부신 경제성장의 원인을
교육을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의 전통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논리가 많이 등장하였다.
사실 높은 교육열과 여기서 유래하는 우수한 인적 자원이 아시아의 경제발전에 하나의
추동력으로 작용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중시한 학문이나 지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과학적 지식과는 좀 차이가 있다. 그들은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는 것보다 인간관계를 잘 처리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행동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글을 배워라."라거나 "어진 이를 좋아하기를 이성을 좋아하듯이 하며 부모를
섬기되 온 힘을 다하고 임금을 섬기되 온몸을 다 바치며 친구와 사귀되 말에 신뢰가
있으면 그가 비록 배우지 못했다고 하더라고 나는 반드시 그가 배웠다고 하리라."는
공자의 말은 이 점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들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보다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였지만 그렇다고 지적 유산을 학습하고 전달하는 학문과 교육을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한편 중국 고대의 도가사상가인 노자는 매우 극단적인 어조로 "총명함을 끊어
버려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지식을 부정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장자도 "인생

끝이 있고 지식은 끝이 없다.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 무한한 지식을 추구하면
위태롭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식의 원천인 감각적 지각을 부정하는 듯한 사상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즉 혼돈우화가 그것이다. 남쪽 바다에 살고 있는 '휵'과 북쪽
바다에 살고 있는 '홀'이라는 제왕은 중앙에 살고 있는 제왕인 혼돈에게 자주 놀러
갔는데 혼돈의 대접이 아주 좋았다. 휵과 홀은 혼돈의 대접에 보답할 것을 논의하면
서,
사람에게는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서 보고 듣고 먹고 숨쉴 수 있는데 혼돈만이
이것이 없으니 우리가 뚫어 주자고 했다. 그리하여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었더니
7일 만에 혼돈이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노자나 장자의 이러한 생각은 뒤집어
보면 감각적 지각에서 유래하는 지식을 끝없이 추구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마치 수많은 음악을 들어 본 사람이 고요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사상은 유교이념에 입각해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다가 좌절을 맛본
이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기도 하였다. 따라서 얼핏 보기에 도가사상가들이 지식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것 같지만, 만약 정말로 그들에게 지식이 없었다면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을지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이들 사상을 하나의 근거로
삼아 동양적 앎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중시했다고 말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이처럼 지식과 지혜는 기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지식이 없이
어떻게 지식의 위험성을 반성할 수 있겠는가. 동양에서는 지(알다)와 지(슬기)를 서로
통용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지식에 대한 추구가 그 출발점에서 인간 생존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이미 생존이 확보한 이후에도 점차 이러한 지식에
대한 욕구는 나름대로의 관성을 가지고 끝없이 분출된다는 데에 있다. 지식은
우리들에게 많은 정보를 알려 주고 문명의 이기들을 선사함으로써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고 있지만, 지식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사회적인 경우에도 그렇다. '식자우완'이라거나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
다.
이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됨에 따라 점차 마음의 고통도 가중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성경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악과에 얽힌 얘기는 매우
상징적이다. 이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나 느껴 보았을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지식이 고도로 발달하나 사회로 나아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다.
앞으로 다가올 21세기는 지식산업이 매우 중시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가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사회냐 하면 그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일찍이
노자가 '국토가 작고 백성은 적은'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본 것도 지식의 부정적
측면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지식의 양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것이 곧 지혜는 아니
다.
지식과 지혜에는 여전히 간격이 있다. 여기에는 질적인 비약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과연 지혜로운지가 문제가 된다.
 이제까지 말한 것을 정리해 보면, 일반적으로 서양의 앎이 지식을 중시한 데 반해
동양의 앎은 지혜를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하지만 그것이 일면적임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아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가. 특히 동양에서는 어떤 것을
아는 것을 지혜롭다고 여겼는가. 앎에 대한 태도가 동서양은 어떻게 달랐기에 동양은
근대 이후로 과학적 지식을 중시하는 서양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동양에서는 그침을 아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였다.
유가의 주요 경전의 하나인 "대학"의 첫머리에는 "대인의 학문의 길은 명덕을 밝히는
데에 있고 백성들과 친하게 지내는 데에 있으며 지선에 머무는 데에 있다."고 학문의
길에 대해 강령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그침을 알게된 이후에 안정될
수 있고 안정된 이후에 고요해지고 고요해진 연후에 편안해지고 편안해진 이후에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이후에 얻을 수 있다."고 하면서 '그침을 아는 것'의 효용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압축적인 강령이 없었더라면 "논어"에 나오는 수많

대화가 아무리 주옥과 같은 말들로 이루어졌더라도 하나의 원리로 관통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비단 유가의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장자도 "배움을
중시하는 자는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려고 한다. 행동을 중시하는 자는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려고 한다. 변론을 중시하는 자는 분변할 수 없는 것을 분변하려고 한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데에서 그치는 것을 아는 것이 최고이다."하면서 그침을 아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그친다 또는 머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그 너머에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말하면, 지선에 머문다는 것은 지선의
너머에 지극히 악한 세계가 있거나 선악을 나눌 수 없는 세계 등이 존재할 수 있지만
거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장자의 경우도 그가 알 수
없다고 한 이유가 사물 자체의 성질 때문이지 아니면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거기서 멈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종종 어린아이가 던진 '왜?'라는 질문에
당혹스러워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늘은 왜 파래?"
 "그런 거 묻지 말고 공부나 해."
 "왜 물으며 안 돼?"
 "어린애는 어른 말을 잘 들어야지",
 "왜 어린애는 어른 말을 잘 들어야 돼?"
 "...."
 우리의 지적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지 어린아이의 순진한 질문 속에 폭로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유가의 학문적 이상은 '수기치인'에 있으므로 그들의 목표는 당연히 앎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이를 좀 어렵게 말하면 그들의 관심사는 윤리학이나 정치학에
있었지 지식 자체나 인식론에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괴이하거나 무력을
사용하거나 어지럽고 신기한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또한 죽음이나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그러하였다. 귀신에 관해서는 경원시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현세적이고 실용적이며 정치적인 범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지혜롭다고 본 것이다.
 도가의 경우는 약간 성격을 달리한다. 장자의 경우 그가 부력의 원리를 알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가 있다. "물의 두께가 두껍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 만약 한 잔의 물을 마당에 부어 놓으면 작은 풀은 그 위에 배처럼 띄울 수
있지만 만약 그 위에 잔을 올려놓는다면 그냥 가라앉아 버릴 것이다. 물은 얕고 배가
크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는 아르키메데스처럼 "유레카(찾았다)!"라고 외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물체의 질량이나 중량과 물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정식화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 비유를 통해 붕새가 구만리 창공을 날아 남쪽으로 갈 수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이 큰 사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풍부한 지식이나 지혜, 운수가 '두껍게 쌓여
있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였을 뿐이다. '과학적' 지식의 싹을 가지고 '인생관적
'인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가의 경우도 무한히 솟구치는 앎에 대한
욕구를 유한한 인생에 관한 지혜를 얻는 곳에서 멈추고 있다. 앞에서 잠시 밝혔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위태로움에 빠지지 않는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본 것이다.

   말을 잘 보는 법

 한편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일반적으로 동양철학에는 인식론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서양철학적 의미의 인식론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세상에 백락(말을 잘 보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 있은 후에 천리마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리마는 항상 있지만 백락은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한유(당나라 때의 대문호)의 유명한 말은 인식론적 함축이 농후한 말로 해석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백락(인식 주체)의 인식이 먼저냐 아니면 천리마(인식 대상)의
존재가 먼저냐 하는 인식의 기원과 관련된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근대 서양에서의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서양적
의미의 인식론적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었다.
 백락과 천리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열자"에 나오는 이에 관한 고사를 잠시
소개해 보겠다. 진나라에 목공이라는 임금이 있었는데 그는 천리마를 얻기 위해
백락이라는 인물을 초빙하였다. 그런데 그는 구방고를 자신보다 훨씬 말을 잘 보는
인물이라고 추천하였다. 구방고는 3개월 후에 천리마를 찾았는데 그는 그것이 황색의
암말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말을 데리고 와보니 검은 숫말이었다. 그러자 사람들

구방고가 말의 암수나 색깔도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시험해 보니 과연
하루에 천리를 가는 천하의 천리마였다는 이야기이다. 백락은 구방고의 말 고르는
방법을 두고 그는 '암수나 검고 누런 색깔 바깥에서' 말을 보았으며 "보이는 것을 보

안 보이는 것을 보지 않았다."고 칭찬하였다. 다시 말하면 구방고는 말의 본질을
보았지 표면에 보이는 외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말하는
천리마가 만약 인식론에서 말하는 '참지식'이라고 한다면 구방고가 말의 암수나 색깔

얽매이지 않았다는 말은 우리가 참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감각적 경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보이는 것을 보고 안 보이는 것을 보지
않았다."는 말은 매우 신묘해서 간단히 해석하기가 곤란하다. 아마도 구방고의 '마음

눈'에 보였던 것은 일반 사람들의 눈에 보인 것과 달랐던 듯하다.
 이처럼 인식론적인 함축이 있는 이야기가 동양에서는 다른 측면으로 발전하였다.
예를 든다면 조조에 의해 인재 등용의 원리로 작용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문벌을
중시하지 않고 '보이는' 능력을 중시했던 것이다. 앞서 말한 한유의 말이 명언인
이유도 인식론적인 의미 때문이 아니라(그렇다면 그는 경험론과 합리론 중에 어떤
입장을 지지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한유 자신이 정치 사회적인 의미에서 '백락'임을
에두르면서도 당당히 자부하는 점에 있다.

   동양적 앎의 장단점

 이상에서 말한 것을 정리한다면 동양적 앎의 특징은 '그침을 안다'는 곳에 모아진
다.
그리고 그들이 앎의 욕구를 멈춘 곳은 유가의 경우 인간관계나 도덕적 실천 등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도가의 경우는 정신적 자유나 안신입명(육체적이고
정신적 안정)이었다. 이들의 말은 대개가 선언적이었고 논증을 거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성인으로 높이 받들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대해서 해석하는
것은 옳지만 논박을 하거나 새로이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받아들여졌다.
당연히 이러한 소극적 태도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태도는 치밀한 논증이나 추리
등을 통해 과학적 지식을 획득하는 측면에서는 지혜롭지 못한 단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자연 사물보다 훨씬 복잡한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고 변화무쌍한
인간관계를 잘 처리하고 그 속에서 안정을 찾는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지혜로웠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말을 잘 보는 것을 진리를 획득하는 것에 비유한다면 동양의 경우는 진리를
획득하는 방법이나 과정에 대한 논의가 자세하지 않다. 현실적으로 말을 잘 고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과연 구방고는 어떻게 해서 말을 잘 보게 되었을까에
관해서는 언급이 극히 적다. 이에 비해 서양의 경우는 논리나 추리와 같이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에 주목하여 누구라도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닦았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차이가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동서양 문명의 거대한 차이를
낳은 중요한 씨앗이었던 것이다.
@ff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동양에서의 앎과, 서양에서의 앎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철수와 영희의 의견을
통해 생각해 보자.

 철수:지식과 지혜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동시에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하는데 잘
납득이 되지 않아. 너는 그게 무슨 말인 줄 아니?
 영희:아, 그래? 그러면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줄게. 이 이야기를 듣게 되면 이
말의 의미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예전에 두 사람이 싸우고 있었는데
이유인즉, A라는 사람은 4 곱하기 7이 28이라는 것이고 B라는 사람은 27이라는 거야.
 철수:정말 한심하군!
 영희:그래, 정말 한심하지. 그런데 두 사람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각자자신의 주장

옳다고 하다가 급기야 서로 우격다짐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대. 지나던 사람들이
모여 들고 소란스러워졌지. 결국 그들은 관가에 끌려가서 심판을 받게 되었어.
 철수:정말 안됐군.
 영희:그런데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고을 원님은 A에게 곤장을 다섯 대 치라는 벌을
내렸대.
 철수:그 사람 고을 원님 맞아?
 영희:내 말 끝까지 들어 와! A라는 사람이 억울하지 않았겠어? 그래서 고을
원님에게 따진 거야. 고을 원님이면 4 곱하기 7이 28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 텐데 왜
나에게 벌을 주었느냐고.
 철수:그래, 맞아? 왜 A에게 벌을 내렸대?
 영희:대답이 정말 걸작이야. 4 곱하기 7이 27이라고 우기는 수준의 사람과 싸웠다는
게 죄라는 거야. 알겠니?
 철수:아하! 정말 멋지다.
 영희:멋지지. 만약 고을 원님이 4 곱하기 7이 28이라는 산술적 지식이 없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물론 그런 지혜로운 판결을 내릴 수는 없었겠지. 그러나 그것을
알더라도 모두 그런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안 그래? 이처럼 지식은
원리나 근거를 아는 것이고 지혜는 그것에 대한 응용이라고 말할 수 있지.
 철수:그래, 이제 알겠어. 그런데 말야, 그침을 아는 것을 동양에서는 지혜롭다고
생각했다는데 꼭 그럴까.
 영희:그것은 일률적으로 말하기 힘들지. 경우에 따라 달라.
 철수:무슨 말이야?
 영희:잘 들어 봐. 가령 어떤 사람이 살아가다가 어떤 일을 계기로 도대체 왜 살아야
하지? 인생의 의미는 어디에 있지? 우주의 근원은 뭐지? 이런 거창한 문제에
부닥쳤다고 하자. 그래서 다른 일은 팽개치고 이 의문을 해결하는 데 매달린다고 하
자.
그렇다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일까?
 철수:글쎄, 잘 모르겠는데.
 영희:그래, 맞아. 당연히 잘 모르겠지. 왜냐 하면 지혜로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 앞서 말한 문제들은 이른바 철학적인 문제들이기 때문에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야. 그런 의미에서 철학자들이란 어떤 문제에 미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지만 그가 그런 문제를 깊이 사색하여 일반 사람들이
그냥 스치고 지나간 것 속에서 우주와 인생에 관한 깊은 통찰을 제시해 준다면 우리는
그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철수:그야 물론 그렇지.
 영희:그런데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전체적으로 동양에서는 우주란 원래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잘 던지지 않았지. 서양과 비교해 볼
때 창세 신화가 매우 빈약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 인생의 의미에 관해서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지.
도덕적 실천을 중시했다는 것이 바로 이거야. 도가의 경우도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과학적 통찰의 싹이 있는 사고가 많이 엿보이지만 그런 방면으로는 발전하지 않았지.
 철수:정말 안타깝군.
 영희:정말 그래. 지적 추구를 정치나 윤리의 영역에 그치고 있는 것은 과학의 발전

많은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 결과가 어떠한 윤리적 문제를
야기할 것인지 모두 고려할 수는 없지. 아마 그런 것을 다 고려한다면 그들은 아마
새로운 연구를 할 수 없을 거야. 그러나 장점도 있지.
 철수:그게 뭔데?
 영희:그건 바로 인간관계를 어떻게 처리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정신적 안정을 찾을
수 있느냐 하는 점에 관해서 매우 풍부한 통찰을 던져 주었다는 점이지. 사실 정치나
인간관계보다 더 복잡한 것이 어디 있겠어.
 철수:그건 그래.
@ff
   토론해 봅시다

 1. 지식과 지혜는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가?
 2. 그침을 안다는 것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

   주요 개념

 지식, 정보, 인식, 지혜

   참고 문헌

 성백효 역주, "논어집주", 전통문화연구회.
 안동민 역주, "신역 장자", 현암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우리들의 동양철학", 동녘.
 박정호 엮음, "지식의 세계", 동녘.
@ff
   예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가

 오늘날 기존의 예는 거의 부정되고 있으나 새로운 예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들이 새로운 예를 만들어 가야 한다.
 조남호(서울대 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서울시립대 강사)

 섭공이 공자에게 말하였다. "우리 무리에 몸을 정직하게 행동하는 자가 있으니,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고발하였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무리의 정직한 자는 이와 다르다. 아버지가 자식을 위

숨겨 주고,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 숨겨 주니, 정직함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논
어"
자로편)
 "초나라에 직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치니, 그것을 관리에게
알려 주었다.
 초나라 재상이 말하였다. '그를 죽여라!'
 임금에게 진실하나 아버지에게는 비뚤은 것이라고 여기서 그를 죄주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임금에게 정직한 신하는 아버지의 못된 자식인 셈이다.
 (그러나) 재상이 직궁을 죽이자, 초나라의 불법적인 행위를 군주가 들을 수 없게
되었다."("한비자" 오두편)
 이 두 예문은 아들이 아버지가 양을 훔친 것을 고발한 사건에 대하여 서로 다른
평가를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법률이 중요한가 하는 것이 논쟁점인데, 전자를 가족적인 관계라고 한다면 후자는
사회 또는 국가와의 관계이다. 그리고 전자를 중시하는 쪽이 유가라면 후자를
중시하는 쪽은 법가이다.
 가족관계와 국가관계의 충돌은 과거의 동양 사회 뿐만 아니라, 현재의 서양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현대의 과학을 불신하는 유나버머는 사람이
과학자들에게 폭탄을 배달하자 그의 어머니가 그를 고발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양을 훔친 것보다 더욱 죄가 무거운 사건이다.
 국가 전체로 볼 때, 가족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은 온갖 부조리의 온상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가 자식을 고발할 수 있는 것인가 또한 문제가 된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가족이라는 틀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가족을 굴레로 생각하는 사고도 있다. 가족, 특히 가부장의 권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성을 찾으려는 젊은 세대가 바로 그들인데, 이들은 전적으로 예를 무시한다.
이러한 쪽은 도가이다.
 그리고 가족 관계를 중심으로 개인과 국가에 모두 적용되는 원리를 찾고자 한 것이
유가인데, 이 원리가 바로 예이다. 따라서 예는 개인주의와 국가(법)라는 양 극단을
배제한 채, 그 사이의 스펙트럼 속에 있는 것이다.
 예를 둘러싼 도가, 법가, 유가의 논의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예를 중심으로 비판하는 쪽과 긍정하는 쪽을 살펴보고,
예의 현대적 적용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예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

 1)도가
 예라고 하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전통시대의 예는 자질구레한
것까지 규정하는 측면이 있다. 아무 옷이나 입어서는 안 되고 정장을 입어야 된다든
지,
절을 몇 번 해야 된다든지, 음식을 먹을 때는 조용하게 먹어야 된다든지 하는 측면
등은 예의 까다로운 측면들이다. 특히 남자보다 여자의 경우는 더욱더 예를 불편하게
여긴다. 전통시대에는 여자로서의 권리보다는 의무를 예라고 하는 틀로 규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조신한 여자는 바지보다는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하는 우리
시대의 암묵적인 경향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물론 남자의 경우는 바지만
입게 되어 있는데, 이것도 어찌 보면 남성 차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예 자체가 이미 차별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현상적인 차별을 그대로
옹호하고 있다. 차별화된 세계에 대한 형식적인 표현이 예이다. 차별화된 세계 속에
서,
가장 차별을 덜 받는 사람들이 예를 주창하고 있고, 그 사람들이야말로 예를 옹호할
것이다. 따라서 예를 비판하는 쪽에서 보면, 대체적으로 예는 남성 또는 지배자를
옹호하려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예는 단순한 이데올로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례적인 행동의 규제를 통해서
인간의 신체까지도 구속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푸코가 주장하는 '신체 길들이기'도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했다. 그는 한 사회의 지배질서가 얼마나 효율적인가는
그 질서가 얼마나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가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푸코가 제시한 예는 근대의 군대나 감옥 등이다. 군대나 감옥에서 인간의
일상행동을 감시하고 규격화함으로써 근대가 요구하는 생산적인 능력을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체 길들이기는 근대 뿐만 아니라 전근대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 전통시대 여성들을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말투에서부터
행동거지까지 사회적으로 통제를 받았다. 말은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워야 하는 등등이
그 예이다. 신체의 형식화를 통한 모범의 설정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예를 통한
신체 길들이기는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예를 옹호하려는 사고는 권력지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가가 보기에 유가의 예에 대한 자율성이란 권력지향성을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예를 강조하면 결과적으로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을 요구하게 된다. 차별을 인정하는
체계가 다양성으로 연결되지 않고, 획일화로 연결되는 것이다. 현재에도 교복이라는
유니폼이 바로 이것을 잘 대변하고 있는데,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힘으로써 학생다움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교복은 교사가 학생을 쉽게 지도할 수 있다는 기능적인
면을 드러내고 있지만, 학생측에서 볼 때 교복은 인간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옷에
대한 자유조차고 박탈한 것이다.
 이러한 예의 획일화가 초래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선진시대 노장 사상이
누누이 지적하고 있다. 장자의 "오리 다리가 짧다고 늘리지 말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는 명언은 이것을 잘 말해 준다. 각각의 존재는 자신의 개성에 따라 맞

살아야지, 예라고 하는 틀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이 말의 뜻이다. 도가가
개인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를 부정한다고 해서 예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에는 권력지향적인 성격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생활에서의 절차적인 성격도 있
다.
이러한 성격의 예가 바로 사회의 기준이나 질서이다.
 이 기준이나 질서를 무시한다면 각자는 자신의 생활을 영위할 수는 있지만,
사회라는 조직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곧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2)법가
 요사이 신문을 보면 비리 공직자가 너무나 많다. 부정부패 척결이 매번 정부 시책의
중요한 입버릇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것을 근절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우

사회에 정성과 뇌물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차리는 것이 곧 뇌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뇌물을 준
사람은 촌지나 떡값이라고 주장하지만 촌지나 떡값의 기준이 애매모호하다. 그 기준은
적용하는 사람 마음대로 되기 십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부정부패의 악순환을
끊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미국에는 국회위원에게 10달러 이상의 선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법률이 있다. 선물이라는 예가 법에 의해 제약되는 것이다.
 예는 사람의 신분, 나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따라서 예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 그리고 예는 주로 비강제적, 관습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효율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리고 예를 어긴 사람에 대해 제재할 방법이 없다.
 유가에서는 예에 자율성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법가가 보기에 현실적으로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자율성은 쉽게 무너지고 만다. 따라서 법가는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고 강력한 법의 강제야말로 인간의 욕망을 다스릴 수 있다고
보았다.
 법가에서는 예가 불평등할 뿐만 아니라 기준도 없기 때문에 국가를 다스리는 원리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법가에서는 예의 기능을 완전히 부정하고 법을
내세운다.
 그런데 이러한 법가식의 예에 대한 부정은, 법 만능주의로 빠질 염려가 있다.
교화보다는 처벌이 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법만 정비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법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윤리적 주체성이 없을 때, 그 법은 쓸모없는 제도에
불과하다. 법은 인간의 외면적인 태도만을 문제삼지 인간의 내면적인 측면을 문제삼지
않기 때문이다.

   예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

 예라는 글자는 분석하면, 귀신과 제물이 그릇에 담겨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다.
귀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종교적인 절차로 예를 쓴 듯하다. 그리고 예는 제한된
신분에만 적용되었다. "형벌은 대부 이상 올라가지 않고, 예는 서인 이하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종교적인 절차로서의 예는 점차 시대가 흘러가면서
도덕적인 의미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적용대상도 주로 지배계층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던 것이 인간 일반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치는 규범으로 확장되었다. 예가
보편성을 획득한 것이다.
 핑가레트라는 학자는 예를 단순히 조잡한 행위양식을 가진 사람들을 길들인
관습적인 행위가 아니라, '신비한 힘'(magic power)이라고 말한다. 예는 각각의
사회적인 구성원들로 하여금 사회와 일체감을 갖도록 하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아마도 서양 사회에서는 이러한 능력이 신비하게 보였는가보다. 사실 서양 사회는
법이라고 하는 틀로 각각의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고 있다. 법이 외재적인 구속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 반해서 예, 특히 일상적인 의례는 그것을 수행하는 속에
신명나는 것이 있고, 그 속에서 적극적인 힘이 발휘된다고 하다. 그리하여 예는
단순하게 보수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는 방식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베버가 동양을 '마술의 정원'(magic garden)이라고 규정한
것에서 바로 동양의 '마술'에 대한 재발견이 아닌가 한다. 그는 개인과 사회의
연결이라는 서양 사회의 문제점을 공자의 예에서 풀어 보고자 했던 듯하다.
 예는 감정(내용)과 의식(형식)으로 되어 있다. 감정으로서는 예는 남을 공경하고
남에게 사양하는 마음이며, 의식으로서의 예는 절차를 규정하는 세세한 규정들이다.
공경하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이 정해진 절차를 진행한다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고,
절차 없이 공경하는 마음만 그대로 수행한다면 촌스러움만 있을 것이지만, 예는
매너리즘과 촌스러움의 중용일 것이다.
 예는 개인의 감정과 의식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를 뜻하기도
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동물과의 차별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예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며, 그 기준과 질서야말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이다.
동물에게도 그 집단을 이끄는 질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본능에 불과하다.
전통시대에 예를 어긴 사람은 개돼지만도 못하다는 취급을 받았다. 사람, 아니 동물
이하의 취급을 받은 것이다.
 질서로서의 예는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이상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예에 대해 갑갑해하기보다는 편안히 여겨야 한다. 70세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더라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공자의 말은 바로 그
뜻이다. 공자는 법도, 즉 예가 자유로운 경지임을 알았던 것이다.
 옛날 선비들이 오뉴월에도 대님을 풀지 않고, 비가 오더라도 뛰어가지 않고, 추워도
곁불을 쬐지 않는 것은 지금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전통시대에는 바로
이것이 예에 입각한 행동이었다. 이들에게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편안했으며,
예를 지키는 것이 곧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는 곧 이들에게는
진리였던 것이다. 성경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는 표현이 있는데,
진리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 자유이기 때문이다.
 자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예에서 벗어나는 것도 자유(freedom, 객관적 측면)이지
만,
예를 실천하는 것도 자유(liberty, 주관적 측면)이다. 이들에게 예는 소극적인 자유가
아니라 적극적인 자유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엄격하게 주장하는 예의기준이라고 하는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
근거는 없다. 제자가 3년상에 대해 일년상을 주장하자 공자는 네가 편한대로 하라고
하면서 '자식이 태어나서 3년이 지난 뒤에야 부모의 품을 벗어나게 되기'("논어"
양화편) 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상에 3년상을 해야 된다고 말한다. 공자는 아마도
논리적인 측면보다는 정감적인 측면에서 예의 근거를 설명하는 것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러한 측면은 뇌물과 선물의 차이를 자신의 마음 속에서 찾는 공자의 모습에도 잘
나타나 있다. 공자는 "내가 임금에게 예를 다했는데, 남들은 나를 보고 아첨한다
하더라."("논어" 팔일)라고 했다. 예와 아첨은 곧 남이 보아서는 알 수 없고 자신만이
안다는 것이며, 뇌물과 정성을 다한 선물도 자신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갖느냐에 따라
판가름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정성을 다한 선물과 뇌물의 차이가 엄청나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종이 한 장 차이이다. 공자는 뇌물의 기준을 법적으로 규정하기보다는 뇌물과 정성을
구별할 줄 아는 주체적인 인간상 확립에 목적을 두고 있다. 자기 자신이 확고한
기준에 서 있을 때, 비로소 뇌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좋은
전통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유가의 예는 법가의 법과 도가의 개인주의라는 양 극단 속에 서 있는데, 극단적인
것을 배제하고 중용을 취하는 정신이 예 속에 있다. 그리고 그 예는 각각의 개인이
놓인 정감적인 상황을 중요시 한다. 그러나 유가는 그것의 객관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반성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 예는 그 사회의 질서이기 때문에 그 질서를
지키면 되었지, 그것의 정당성을 문제삼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예를
행하는 것이 일상적인 매너리즘에 빠질 공산이 크며, 매너리즘에 빠진 예는 내용이
없는 형식일 뿐이다. 예의 형식화야말로 그 사회 질서를 고착화시키는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새로운 예의 정립

 최근에 고인이 된 모 그룹 회장이 자신의 유해를 화장시키라고 유언한 것이 엄청난
사회적 감동을 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사건이었는데,
매장이 일반화된 나라에서 화장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문제는
일부 식자들이 제기할 뿐 남의 일로 치부해 버렸다. 이것은 곧 우리 사회에 합리적인
장례 문화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어디 장례 문화뿐이겠는가? 돌잔치나
회갑을 뷔페 식당에서 하고, 결혼식은 결혼식장에서, 장례식은 영안실에서 하고 있다.
이러한 행사장은 어로지 자본의 이윤 추구만이 있을 뿐이고, 인간적인 정은 빠져 있
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불합리한 일들은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너무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곧 우리에게 일상생활을 지도하는 예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예는 거의 부정되고 새로운 예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마련한 관혼상제는 인생의 마디를 넘어갈 때 절차를 통하여 그
마디를 쉽게 넘어가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태어나고 어른이 되고 죽고 제사지냄은
인생의 큰 마디이다. 이 마디마디를 우리 조상들은 바로 개인의 실존적인 고민이라는
형식적인 담론보다는 인간적인 정서를 함께 나누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통이 지금 우리에게는 없고 남아 있는 것은 허례허식일 뿐이다.
허례허식은 내용은 없고 형식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금의 의례가 허례허식임을 자각하지 못한다. 지식인들조차도 문제점은 느끼고
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 하고 있다.
 전통적인 의례를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왜냐
하면 전통적인 의례는 대부분 가사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는 행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사를 가정에서 치른다고 한다면 가사 노동력에 의존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고, 그런 행사를 치를 만한 공간도 넓지 않다. 그런데다 아직 새로운 의례는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의례를 대충 편한 대로 거행하여 넘어가자는
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의례가 나올 때이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의례라고 하는
것이 옛날식의 '가정 의례 준칙'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관 주도로
이루어진데다 실정에도 맞지 않아, 아무도 지키지 않는 준칙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전통시대의 예는 권력에 의한 다스림의 도구라는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예를 다시
재정립하자는 주장을 하면 그것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있다. 이러한 목소리야말로
반성적인 사고를 거부하는 것이며 민주적인 대화를 무시하는 것이다. 민주적인 대화란
바로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새로운 예는 법과 개성의 문제를 아울러 고민해야 한다.
그러한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역사적인 사고이다. 이러한 고려 속에서
우리들이 새로운 예를 만들어 가야하는 것이며, 그 예는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양식을
재정의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예의 실천은 어떻게 보면 국가나 사회의 큰 틀에 따라서 저절로 맞추어지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것을 담당하는 사람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이 없는 이념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ff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남호와 영희가 옷을 입는 문제를 통해 예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이야기와 공무원의
비리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을 들어 보자.

 1.
 남호:영희야, 치마가 참 예쁘다.
 영희:예쁘면 뭐하니 불편해 죽겠는데.
 남호:불편해도 예쁘잖아. 근데 왜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어, 불편해도 네가
좋으니까 입고 왔을 거 아냐.
 영희:그랬으면 내가 왜 이렇게 불평하겠니. 난 원래 바지를 좋아한단 말야. 바지가
얼마나 편한지 알아?
 남호:그런데 왜 치마를 입고 왔니, 바지를 입지.
 영희:다 아빠 때문이야. 아빠 왈 "여자는 자고로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거야.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어른들은 너무 고리타분해. 내가 어리니까 말을 듣지
좀더 크면 난 아빠 말 듣고 싶지 않아.
 남호:듣고 보니 너희 아빠가 너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해 버렸구나.
 영희:맞아. 그래서 난 어른들이 하는 말은 정말이지 맘에 안 들어. 이건 이렇게 해
라,
저건 저렇게 해라, 상대방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 하지도 않고 고집만 부리는
말이야. 세대차이란 말이 왜 생기겠어? 다 이러니까 그런 말이 생기지. 언제쯤이나 난
이런 강요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른들은 자신의 원칙들이 마치 불편하는 진리인
양 생각하나 봐. 생각이 틀리면 이거 문제다 하고 난리니 이해할 수가 없어.
 남호:그래, 영희 말이 맞아.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걸 해야 한다고 하잖아. 치마 입

것보다 바지 입는 게 좋으면 바지를 입으면 되는 건데 말이야. 자기가 좋아하고 안
하고가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영희:와, 남호 완전히 캡이다.
 남호:뭐, 나 원래 그렇잖아. 그런데 잠깐 흥분을 가라앉히고, 옷 문제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부모님 세대도 문제이지만, 배꼽티가
유행한다고 해서 모두가 배꼽티를 입는 건 좀 곤란하지 않니?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에
따라 배꼽티를 입으면 되는데, 배꼽티를 입지 않으면 유행에 뒤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라고 봐. 잠재의식 속에 계속 유행하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대중매체의 피해가 심각해. 내 생각에는 옷 입는 것은 자유이지만, 자신만의 유행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너의 생각은?
 영희:그러고 보니까 나는 옷 입는 문제를 단지 기성세대에 대한 부정으로만
생각했는데, 앞으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겠구나. 옷 입는 것에는 무의식적인 요소와
의식적이 요소가 모두 들어 있구나.
 남호:역시 우리 영희가 내 말을 잘 알아듣는구나.
 영희:그런데 남호야, 오늘 나 치마 입었는데 춤 한번 추지 않을래?
 남호:오, 마이 갓!

 2.
 희경:남호야, 오늘 신문 봤어? 고급 관리들이 부정부패로 감옥에 들어가고 하는 거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더라.
 남호:어디 그게 어제 오늘 일이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치러지잖아.
생각해 보면 법이란 참 우스운 거야. 서초동 법원 건물 보면 그야말로 권위로 똘똘
뭉쳤잖아. 어디 겁나서 가까이 가겠어? 그렇게 지었으면 법의 권위를 세울 것이지.
이건 뭐 금방 잡아넣었다가 금방 내보내니 완전히 정치쇼에 법이 휘둘리는 꼴이잖아.
길 가는 사람들 붙들고 물어 봐. 다들 이런 생각들 안 하나. 또 부정부패한 놈들 모두
잡아 가두라고 하잖아. 우리 나라 사람들 속마음이 누구나 할 것 없이 부글거릴 거야.
 희경:근데 말이야. 문제가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 지금 우리 현실이 법을
곧이곧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 나는 의심스럽거든. 정치쇼로 보이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말이지. 지금 부정부패한 사람들 모두에게 법을 곧이곧대로 적용한다면 그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수도 헤아릴 수 없을 거야. 다들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 먹고
살려니까 얽히고 설킨 부패의 그물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고, 한두 해 있다
보니 처음에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상황논리에 빠져서 어쩔 수 없이 물들어갔을 수도
있고 말이지. 부정부패했다고 모두 똑같이 법의 그물망을 적용시키는 것에 억울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
 남호: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어, 내 친구도 윗사람이 뇌물을 받았는데 그 사람
짤리면서 같이 짤렸다고 하더라. 그 친구는 정말 토큰도 없어서 걸어다닐 때도 있는데
말이야. 말은 안 하지만 속이 많이 아팠을 거야, 그러면 도대체 부정부패가 만연한 이
사회를 어떻게 정화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은 그만큼 이 사회가
변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잖아. 정직하게 살면 손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리는데, 그 속에서 깨끗하게 살아 버티는 것이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닐 거라고.
 희경:시간이 천천히 걸리더라도 정직하게 살자, 뇌물을 받지 말자, 이런 정신교육을
얼서부터 해야 할 것 같아. 부정부패가 가문의 수치처럼 생각될 수 있도록 말이지.
그래서 정직한 사람들이 존경받을 수 있도록 말이야. 학교에서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에 대해서 토론해 보고 말이지. 사회에 첫발을 디디는 사람들이 얼마나
정신무장이 되어 있는가가 중요한 것 같아. 물론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어야 하는 일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남호:그래, 지금의 작은 노력들이 하루아침에 그 효력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지금보다 조금씩 더 부정하지 않으려는 노력만 한다면 언젠가는 이 사회도
변화하게 되겠지.
@ff
   토론해 봅시다

 1. 바람직한 돌잔치, 결혼식, 회갑연, 장례식 등은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 논해 보
자.
 2. 법적인 기준과 예의 기준의 적용에 대해 논해 보자.

   주요 개념

 권력지향성, 효율성, 자유(freedom, liberty), 의례

   참고 문헌

 H. 핑가레트, "공자의 철학", 서광사, 1993.
 B. 슈월츠, "중국 고대 사상의 세계", 살림, 1996.
@ff
   개인과 사회의 갈등은 해결할 수 있는가

 공익을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사익을 위해 살 것인가.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을 해
보았을 문제를 도가, 묵가, 유가에서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자.
 이상익(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 강사)

 우리는 개인의 사적 권익과 사회의 공익이나 질서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충돌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크게는 그린 벨트를 해제해서 재산권 행사를
보장하라는 요구나 팔당호와 같은 대규모 상수원을 보호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그린 벨트나 상수원 보호 문제의 가장 좋은 해결책은 기존의
규제정책을 지속하되, 국가가 개인에게 일정한 보상을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만한
재원이 없을 때는 결국 어느 한쪽의 피해가 불가피한 상황인데, 이때 사익을 존중해야
하는가 아니면 공익을 존중해야 하는가?
 좀더 사소한 문제로 눈을 돌려 보자. 나는 남의 이목을 의식함 없이 내가 좋은 것을
추구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남의 이목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 예를 들어,
더운 여름날 비키니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싶은데, 많은 사람들이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눈살을 찌푸린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철학과에 진학하여 인생의
진리를 탐구하고 싶은데, 가족들은 내게 법학과에 진학하여 판검사가 되라고
강권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런저런 학과 수련회의 분위기가 매우
싫은데도, 학과의 성원으로서 학과의 단결을 위해 참여해야 하는가?
 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해결책으로 제시할 수 있는 답변은, 개인의 권익을
우선하는 입장과 사회의 공익을 우선하는 입장, 그리고 양자를 절충하는 입장이라
하겠다. 대체적으로 도가는 개인의 권익을 중시하였으며, 묵가는 철저히 공익을
옹호하였고, 유가는 양자의 중용을 취하고자 하였다.

   도가의 위아주의

 무위자연을 표방하는 도가는 인위를 배격하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추구하였다. '자

그대로의 삶'이란 각종 문명의 이기가 없는 삶이요, 사회의식이나 윤리의식 또는
문화의식 등이 형성되기 이전의 삶이다. 도가는 일체의 문명이나 사회적 관계 및
관념들은 인간의 삶을 쓸데없이 번거롭게 하고, 나아가 참다운 삶의 모습을
왜곡한다고 본다. 도가는 이러한 관점에서 인문, 특히 유가의 인륜을 비판하였다.
도가에 의하면 유가에서 말하는 인륜이란 자연 그대로의 질박한 삶이 훼손된 다음에
생겨난 찌꺼기에 불과하며, 인간이 삶을 평화롭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곡할
뿐이라고 본다. 따라서 도가는 인륜이라는 개념 이전의 소박한 삶을 꿈꾸는데, 그것은
'조그만 나라의 적은 백성'이 평생토록 사로 왕래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가는 시종 개인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적 태도란, 인간은 자신의 귄익을 지키고 자신의 행복을 가꾸는 것에
충실하면 그만이요, 그 밖의 사회문제들에 대해서 가질 필요가 없다는 태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개인의 권익이나 행복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라고 보며, 개인이
자신의 권익과 행복에 충실할 때 사회의 공익도 저절로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도가의 이러한 태도는 춘추 전국이라는 혼란한 시대에 은둔주의와 쾌락주의로
표출되었다. 사회적 현실이야 어떻든 자신은 숨어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도가의 이러한 경향을 가장 극단적으로 주창한 사람은 양주였다. 양주는 "옛 사람은
터럭 하나를 희생하여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도 하지 않았으며, 천하를 희생하여 자기
한 몸을 받드는 것도 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모두 터럭 하나도 손해보지 않고,
사람마다 천하를 이롭게 하지 않을 때, 천하는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만을 위하고, 이른바 천하를 위한다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만 천하는 다스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양주의 위아주의는
이기주의와는 구별된다. 그것은 남을 돕지도 않지만, 이기적 동기에서 남을 해치지도
않는다는 것이 전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양주의 이러한 주장은 개인의 자유를 신장시킨다는 점과 사익을 적극적으로
긍정함으로써 사회적 능률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위아주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제 가운데 하나가 충족될 때에만 우리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으로 승인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도가가 추구했던 바와 같이 실제로
모든 사람이 평생토록 왕래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왕래하면서 자신의 삶과
남의 삶을 비교하게 된다. 이러한 왕래는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본받는 효과를 낳는
데,
도가는 그것이 기교와 위선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질투와 시기를 낳는다고
본다.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의 일반적 능력이 균등하다는 전제이다. 만약 모든 사람

일반적 능력이 균등하다면, 모든 사람의 삶은 서로 비슷한 수준을 유지할 것이요,
따라서 서로 왕래한다 하더라도 특별히 본받거나 질투할 대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두 전제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인간의 사회적 삶에서는 실제로
충족되기가 지극히 곤란하다. 따라서 인간의 사회적 삶에는 빈부가 형성되고, 마침내
갈등과 투쟁이 야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타인의 불행을 외면하고 자기
자신만의 행복을 가꾼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위아주의는 허울만
남은 인륜의 관념이 우리의 삶에 질곡이 되기만 할 뿐 실제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에 그 허구성을 배격한다는 의미는 있겠지만, 우리의 보편적인 삶의 양식으로
승인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묵가의 겸애주의

 도가가 철저히 개인의 권익을 옹호했던 것과는 반대로 묵가는 철저히 공익을
옹호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묵가는 도가의 위아주의는 물론, 유가의 친친주의도
배격하고 겸애주의를 표방한다. 묵적에 따르면, 천하의 모든 혼란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아들은 자기만 아끼므로 아버지를 해쳐서
자기를 이롭게 하고, 아우는 자기만 아끼므로 형을 해쳐서 자기를 이롭게 하며, 신하

자기만 아끼므로 임금을 해쳐서 자기를 이롭게 한다. 묵적은 이러한 이기주의가
혼란의 근원이라고 본다. 또한 묵적은 유가에 대해서 별애주의라며 비판하였다. 별애

자기와 남을 구별하여 자기와 친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말이며, 겸애주의란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묵적은 공익이라는
맥락에서 침략전쟁과 음악,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불필요하게 재물을 낭비할 뿐 공익에는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묵적의 주장대로 완전한 겸애가 실현된다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불평등과
억압이나 착취가 없을 것이여, 그것은 인간의 이상적 낙원에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적 동기를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당위적으로도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이기심은 개인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북돋는 계기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겸애에 의한 공익의 실현은 인간의
일반적인 소망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겸애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나태한 인간들에게는 실존적 긴장을 풀어지게 하는 계기가 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익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공익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비능률과 정체로
이어지기 쉽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의 사람들은, 묵적의 겸애주의는 그 이상은 좋으나 실행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묵적은 자신의 주장이 실행할 수 없는
공상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즉 어떤 사람이
전도를 예측할 수 없는 험난한 길을 떠나야 할 때, 자기의 처자를 겸애주의자에게
맡길 것인가 아니면 별애주의자에게 맡길 것인가? 묵적은 이러한 상황에서는
별애주의자조차도 자가의 처자를 겸애주의자에게 맡길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묵적이 든 예와 반대의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이러저러한 극한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이 오직 한 생명밖에는 구할 수 없다고 한다면, 자기의 자식을 희생시키고
남의 자식을 구할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또한 설령 겸애주의가 타당하다
하더라도, 한국인인 내가 아프리카 어느 구석의 굶주린 아이들과 내 자식을 '똑같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곳의 굶주린 아이의 숫자를
헤아려서 내 자식의 숫자와 더하고, 그 다음 나의 수입을 그 숫자로 나누어 1인당
몫을 계산한 다음 아프리카 어린이의 숫자에 해당되는 만큼을 구호기금으로 보내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아메리카의 부유한 아이는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가?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별애가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묵가의 겸애주의도 역시 현실성이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가의 중용론

 맹자는 양주의 위아설에 대해서는 '무군'이라 비판했고, 묵적의 겸애설에 대해서는
'무부'라 비판했다. '무군'이란 개별의식만 있고 공공의식이 없다는 것이며, '무부'란
공공의식만 있고 개별의식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가는 개별의식과 공공의식을
조화시킬 것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명분론으로 구체화되었다.
 명분론이란 명분과 실제를 합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명이란 각자의 사회적
자위를 의미하며, 분이란 '몫'으로서 명에 따른 권리와 의무 및 욕망의 한계를
의미한다. 명분과 실제를 합치시키기 위해서는 각자의 지위에 부합되는 역할을
완수해야 하는데, 그 역할이 자신의 지위에 넘쳐서도 안 되고 모자라서도 안 된다.
명에 따르는 분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것은 그래야만 전체적인 조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자는 명분과 실제가 합치되는 것을 '정명'이라 하였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군주는 백성이 그에게 기대하는
군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다하고, 신하도 역시 신할서의 기능과 역할을 다하는 것이
정명이다. 한 사회의 다양한 지위에 있는 모든 구성원이 각자에게 부여된 기능과
역할을 다하면서 유기적인 연대를 이룰 때에 그 사회는 안정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명분론의 주장이다. 명분론이란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타인을 구의
본분에 알맞게 대접함으로써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명분의 논리를 구체적인 인간관계에 적용한 것이 이른바 부자유친, 군신유
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이라는 오륜이다. 이 오륜은 더 구체적으로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함', '군주는 신하를 의롭게 대하고 신하는
군주에게 충성함',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함', '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형을 공경함', '벗을 사귀어 어질게 됨'으로 표현되었다. 요컨대
인간은 각각의 경우에 따르는 자신의 '몫'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가는 모든
사람이 각각 자신의 몫을 다할 때 개인의 권익과 공익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유가의 명분론은 봉건적 위계질서를 옹호하기 위한 논리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명분론이 상하의 신분질서를 옹호하는 논리의 기능을 해 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명분론의 본질은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배계급의 억압과 수탈을
정당화하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상하 모든 계층의 욕망을 합리적으로
제한함으로써 사회적 조화를 구현하자는 데 있다. 실제로 "대학"에서는 "처음 대부가
되어 말을 치는 사람은 닭과 돼지를 차지 않으며, 경대부 이상의 얼음을 쳐서 쓰는
집안은 소와 양을 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익의 독점을 제도적으

방지함으로써 각자의 생업을 보장하고, 사회 전체의 조화를 이루자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명분론이 위계질서의 관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위계질서란 동서고금의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인간 사회에서 결코 부정될 수
없는 것 도한 사실이다. 문제는 그 위계질서가 자발적인 예양의 질서냐, 아니면
강제적인 상명하복의 질서냐 하는 것에 있다. 전통적으로 성악설에 입각한 법가는
법치에 의한 상명하복을 강조하였지만, 성선설에 입각한 유가에서는 덕치에 의한
자발적 예양의 질서를 추구하였다.
 유가의 명분론은 공공의식과 개별의식의 조화를 추구한다. 즉 만물이 모두 건곤을
부모로 하므로 '천지만물이 본래 나와 일체'라고 말한다. 공공의식이나 천지만물에
대한 사랑은 천지만물을 나와 일체로 여기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만물이 건곤을
부모로 하여 일체가 평등하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에는 각자의 개성이 있으며 가깝고
먼 차이가 있으므로 획일적으로 평등과 겸애를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이로부터
개별의식이 비롯된다. 개체와 전체, 개별의식과 공공의식을 합일시키고자 하는 것이
명분론의 추지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가는 사랑의 실천에서도 각각의 경우에 따라 그 몫이 다르다고
본다. 맹자는 사랑의 실천을 흐르는 물에 비유한다. 물은 반드시 가까운 웅덩이부터

채운 다음 아래로 흐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실천도 먼저 나에게 가까운
사람부터 배려하고, 그 다음에 차츰 먼 사람에게까지 미쳐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의 어버이를 공경하고 그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의 어버이에게 미치며, 나

어린이를 사랑하고 그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의 어린이에게 미친다는 것이다.
유가는 나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더 먼저, 더 많은' 사랑을 베풀 것을 주장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지만, 가까운 사람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가는 이와 같이 친하게 대접하는 친친의
원칙이야말로 이치에 타당하고 인정에 부합한다고 본다. 그러나 묵적은 이것을
별애라고 규정하고 집중적으로 비판하였다.
 나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더 먼저,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주장은 언뜻
보아 당연한 것 같지만, 공익과 사익이 충돌하는 상황에서는 해결하기 곤란한 문제의
소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순이 천자이고 고요(순의 훌륭한 신하)가 법관

때 만약 고수(순의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맹자

"고요는 공정하게 법을 집행할 뿐이요, 순은 천자의 자리를 미련 없이 버리고 몰래
자기의 아버지를 업고 한적한 바닷가로 도망하여 살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주희는
맹자의 이러한 해법이 천리와 인륜에 지극히 부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해법은 결과적으로 공정한 법집행을 방해한 것으로서, 공익을 해친 결과가
되고 만다. 따라서 오늘날 이러한 해법이 일반적 원칙으로 승인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유가의 중용론은 그것이 왜곡될 때 자의적인 편의주의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유가에서는 어떤 경우엔 멸사봉공을 말하는가 하면, 어떤 경우엔 친친을 말한다. 물론
상황에 따라 멸사봉공의 원칙이 필요할 때도 있고, 친친의 원칙이 필요한 때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원칙들의 선택기준을 좀더 명확히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국가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한 효가 상충하는 경우라면 어떻게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인가?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군에 입대하자니 효도를 할 수 없고,
부모에 대해 효도를 다하자니 군에 입대할 수 없는 경우라면, 바람직하고 정당한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우리는 각각의 의무의 경중이나
상황의 완급을 헤아려서 중하고 급한 것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경중이나 완급에 대한 판단이 말처럼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 따라 각각 판단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남는 문제들

 양주의 논리는 "사익이 바뀌어 공익이 된다."는 주장이고, 묵적의 논리는 "공익
속에서 사익이 실현된다."는 주장이며, 유가의 논리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몫을
다함으로써 "공익과 사익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양주와 묵적의 주장은 사

각각 한쪽으로 치우친 논리요, 따라서 우리에게 보편적인 원칙으로 수용되기는
어렵다고 보인다. 유가의 중용론은 대체적으로는 수용할 수 있겠지만, 그것의
자의적으로 오용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중용적 선택의 기준을 더욱 명료화할 필요가
있다.
 대체적으로 비교하자면, 도가의 위아주의는 서구 근대의 개인주의와 맥락을
같이하고, 묵가의 겸애주의는 공리주의 및 공동체주의와 맥락을 같이한다. 서구 근대

개인주의와 자유경쟁의 논리는 개인과 개인의 경쟁이 역사의 발전을 촉진한다는
믿음의 소산이다. 물론 도가의 위아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였지만, 경쟁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도가는 경쟁의 마음을 버리고, 각자 자신의 기준과 취향에 따라

것을 옹호하였다. 반면에 유가의 명분론은 사람들 사이의 교감과 협동을 통해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인식하고, 그 전제조건으로 모든 사람이 각자 자가의 몫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개인주의적 방법론은 사회체계의 능률을 제고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사회적 갈등의 문제에는 취약하며, 명분론은 사회의 안정적 통합에는 효과적이지만
상대적으로 역동성이 미흡하다. 따라서 이 양자를 지양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 할
것이다.
@ff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비리 공무원에 관한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갑돌, 을순, 병식이 나누는 대화이다. 어

주장과 논거들이 제시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갑돌:정치인들이나 공무원들은 모두 다 도둑놈들이야. 말로는 매일 국민의 종복이니
국리민복이니 하면서, 실제로는 항상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구.
애초에 말이나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차라리 배신감이나 덜 느낄 것을....
 을순:뭐라고? 그러면 정치인들이나 공무원들이 애초부터 '나는 도둑놈이다.'라고
선언해야 한다는 거야? 그렇다면 뭣하러 도둑놈들을 선출하고, 임명하겠어? 다 없애
버리고 말지.
 갑돌:내 말도 바로 그것이야. 다 없애 버리는 것이 최상이라구. 매일 말로는
국리민복이니 정치도의니 정의로운 사회니 해 봤자, 뒷구멍에서는 딴 궁리만 하고
있다구. 무릇 입으로 사회정의니 국가에 대한 충성이니 떠드는 사람들치고 실제로
그렇게 솔선수범하는 사람 하나도 못 봤어. 이제 그런 말 들으면 역겨울 뿐이야.
이제는 솔직하게 말하자구. 인간은 누구나 이기주의자잖아. 그런 사람들에게 공익을
위해서 산다거나 남을 위해서 살라는 말은 애초부터 씨알이 안 먹히는 거야. 괜히
헛된 명목으로 우리 사회만 더 혼란하게 할 뿐이라구. 자아--인간들이여, 우리는 모두
솔직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살지어다!
 을순:너는 방금 모든 인간이 이기주의자라고 했는데, 아마도 그건 네가
이기주의자라서 남들도 그렇게 보이는 것일 거야.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하잖아.
내가 너무 심한 비유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인간을 이기주의자라고 단정하는
것은 네 편견일 가능성이 커. 또 모든 인간이 사실 이기적이라 하더라도 이기적인
삶이 그대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잖아.
 갑돌:아니, 너는 그럼 이타적인 삶을 옹호하는 것이냐? 너 혹시 시대착오자 아니야?
 을순:그래, 내가 반드시 남만을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노력하기도 한다구. 너 나보고 시대착오자라고 했는데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생각에는 나 같은 시대착오자가 있어야 이 이기주의에
찌든 세상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정말이지 우리는 이제 자기보다는 공익을
위해서 사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구.
 갑돌:너는 공익을 위해서 살자고 했는데, 그래 좋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어떻게 사

것이 공익을 위한 삶이냐? 말해 봐. 너희 집이 크고 넓은 것은 너희 식구가 많아서
그렇다고 치자. 너는 공익을 위해서 밍크 코트 입고, 공익을 위해서 자가용 타고,
공익을 위해서 스키장 가냐?
 을순:너 그런 식으로 인신공격성 발언 하지 마. 물론 나의 생활방식에도 반성의
여지가 많이 있을 거야. 하지만 공익을 위한 삶이라는 것이 꼭 묵자식의 겸애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잖아. 공익을 존중하는 사람에게도 개인적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단 말이야.
 갑돌:너는 공익을 위한 삶이란 꼭 묵자식 겸애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
도대체 둘이 어떻게 다른 것이냐?
 을순:글쎄, 꼭 집어서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병식아, 네가 설명을 좀 해 줘.
 병식:묵자의 주장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개인의 사적 자아라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거야. 항상 남을 위해서 살 것을 궁리하고, 제 자식과 남의 자식을 차별하지 않고, 제
부모와 남의 부모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런데 공익을
위한다는 것이 반드시 사적 자아를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 거야.
 갑돌:그래? 그럼 묵자식 겸애주의말고 네가 말하는 공익적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나는 그게 궁금해.
 병식:공익적 삶이라는 것을 나는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 예를 들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각자 자신들이 맡은 책임을 다한다면 그것이 곧 공익을 위한 삶인 거야.
자신의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 꼭 개인적 행복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야. 예를
들어 낮에는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해서는 여가를 가꾸는 것은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는 거잖아.
 갑돌:너는 언제나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는데, 그런 것은 나도 알고 있어. 문제는
말로만 그렇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야.
 병식:실제가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지. 너처럼 "모든
사람들이여 이기주의자가 되라."하고 선동해야겠냐?
@ff
   토론해 봅시다

 1. 위아주의와 겸애주의의 의의와 문제점을 토론해 보자.
 2. 5명이 10개의 빵을 상품으로 걸고 100미터 달리기 시합을 한다고 할 때, 가장
이상적인 상품의 분배방식을 설정하고, 그것이 왜 이상적인지 정당화해 보자.
 3. 자유경쟁론과 명분론의 의의와 문제점을 토론해 보자.

   주요 개념

 위아주의, 겸애주의, 사익, 공익, 명분론

   참고 문헌

 김능근, "중국철학사", 장학출판사, 1978.
 노사광, "중국철학사", 탐구당, 1989.
@ff
   제4장 인류의 미래는 발전 가능한가

 *점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가
 *유교 전통과 자본주의는 화해할 수 있는가
 *생태주의는 환경문제의 대안인가
 *문명위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ff
   점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가

 점술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종교적, 문화적 행위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까지도
점술은 살아 있는 문화로서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김홍경(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가톨릭대 강사)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산명술의 대가인 관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조조는 자신이 거느린 문무 관원들을 불러들여 놓고 물었다.
 "이 사람들은 상이 어떠한가?"
 "모두가 세상을 다스릴 만한 분들입니다."
 관로는 그렇게만 말하고 더 깊은 것은 밝히지 않았다. 조조가 이번에도 거리낌없이
말하라고 두 번 세 번 졸랐으나 관로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조안의 일 뒤에는
가볍게 남의 상을 말했다가 천명을 거스르게 되는 걸 꺼려운 탓이었다.
 "그럼 동오와 서촉의 앞날은 어떠한가?"
 관로가 사람의 상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히는 걸 꺼리자 조조는 나라로 바꾸어
물었다. 그것까지 마다할 수가 없었던지 가만히 점괘를 뽑아 보던 관로가 대답했다.
 "동오는 한 사람의 대장을 잃을 것이요, 서촉은 지금 군사를 내어 천자의 경계를
침범해 오고 있습니다."
 관로는 소설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사 "삼국지"에도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관로는 자가기 태어난 때를 가지고 자신의 단명을 예견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대하면 사람들은 일단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정말 관로와 같은
신통한 예측이 가능한 것일까? 점술은 어떤 역사와 이론구조를 가지고 있을까?
오늘날에도 관로와 같은 사람이 존재하고 있을까? 아무리 이성으로 단단히 무장하여
점술의 비과학성을 질타하는 사람이라도 잠시 이런 의문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점술은 인류의 가장 오래 된 종교적, 문화적 행위 중의 하나이면서도 아직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박물관에서 잠자고 있는 문화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점복행위와 관련된 수많은 관습과 행태가 존재한다.
흥밋거리를 다루는 매체에는 어김없이 '오늘의 운세'가 실리고, 연초에는 한 해의
운수를 알아 보려는 사람들로 점가가 북적대며, 결혼, 출산, 승진, 시험 등 소소한
개인적인 사건에서부터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련된 중대사에 이르기까지 점술가의
견해를 알아 보는 것은 하나의 관례가 되어 있는 듯하다. 정보화 시대를 논하고,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서 생명의 신비를 파헤쳐 가고 있는 대명천지에 아직도 이런
'구태의연한'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아니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왜 사람들은 점을 보려고 하는 것일까? 점술에 대한 의문은 끝도 없이
일어난다. 점술에 관한 의견들은 많지만 우리 공동체는 아무것도 합의해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술의 기원과 역사

 동양의 것이나 서양의 것이나를 막론하고 점술은 삶의 환경 속에 자연적, 초자연적
힘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을 공유한다.
그러한 힘을 이해하고 그것에 순응하려는 것이 점술의 정신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존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만
살아갈 수는 없고, 항상 자기 외적인 힘과의 연관성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오래 살고 싶다고 해서
장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의지가 전적으로 관철되는 존재는 신이고, 전적으로 자

외적인 힘에 지배당하는 것은 기계이다. 인간은 그 사이에 끼여 있는 가운데의
존재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의지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인데, 그 설정을
위해서는 자기 외적인 힘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 외적인 힘을 정확히
이해하여 그것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의지를 조정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점술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서 활동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획득한
문화이며, 그 때문에 구체적 형태에서는 차이가 있더라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점술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점술은 대부분 중국에서 왔다. 기록을 통해서
확인되는 중국의 가장 오래 된 점술은 복서인데, '복'이란 지금은 멸종된 땅거북
아니면 남생이의 배껍질(또는 등껍질)이나 소, 사슴의 어깨뼈를 이용하는 술법으로
미리 그 껍질이나 뼈의 여기저기에 작은 구멍을 뚫어 놓고 그것을 불에 달구어 균열이
생기면 그 균열의 양상을 독해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다. 이 의식에 사용되었던
갑골이 한 100년 전쯤 중국에서 발견되었는데, 대개 기원전 12__기원전 11세기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서'도 비슷한 시기에 사용되었던 방법으로, 특정한 상징이나
암시가 기록된 시초라는 풀의 줄기 다발에서 하나를 뽑아 그것을 두고 점운을
해석하는 일종의 심지뽑기 같은 것이다.
 복서에 뒤이어 서주시대(기원전11__기원전8세기)부터 점성술이 행해졌으며, 서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는 '주역점'도 이 시기부터 시작되어 한나라 때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오늘날 복은 사라졌고, 서는 일부에서 행해지고 있는 산통점에서 그 편린을
찾아볼 수 있다. "주역"은 여전히 애용되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덜 하지만
대만에서는 아직도 점성술이 유행하고 있다. 이 밖에 보통 사주라고 하는 산명술,
관상법의 원형인 골상, 해몽술인 몽점 등 요즈음에도 남아 있는 점술은 대부분 한나라
때 만들어졌다.
 유의할 것은 이러한 점술의 고대적 방법은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가령
"삼국지"는 관로를 소개하고 있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신의 단명을 알게
되었는지는 소개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산명술은 명대에 체계화되었다. 점성술의
방법도 오늘날 알려진 것은 명대의 것이며, 골상법과 몽점도 마찬가지여서 그것들이
한 대 이후 행해졌던 것은 분명하지만 오늘날의 체계가 완성된 것은 각각 14세기와
16세기이다. 또 "주역"을 가지고 점을 치는 정통적인 방법인 본서법은 송나라 때
완성되었다.
 이 밖에도 이름을 분석하여 운명의 길흉을 판단하는 성명학이 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발전한 것이 아니고 아마도 19세기 초 일본에서 고안되었을 것이다.
성명학에서는 복성과 두 글자의 이름을 기본으로 하는데, 중국에는 이러한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지금의 방법과 고대적 방법 사이에 일정한 연관성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더라도 현존하는 점술에 지나치게 역사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러한 방법들과 크게 대별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신력을 빌려 미래를 예측하는
형태이다. 앞에서 자연적, 초자연적 힘을 이해하려는 것이 점술의 정신이라고
하였는데, 위에 열거한 점술 중 "주역", 산명술, 골상 등 체계를 운영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은 일반적으로 자연적 힘을 대상으로 하고, 신력을 사용하는 방법은
초자연적 힘을 대상으로 한다. 이것은 전혀 다른 길이다. 전자가 과학적 활동과 연결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면 후자는 종교적 실천과 연결된다. 또한 전자의 경우에
점술가는 체계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사태에 대해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지혜로워야 하며, 자아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만 신력을 비는 경우에 영매는
반드시 망아상태에 들어야 한다. 자아를 비워 내야 산이 깃들여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점을 치는 행위는 비슷해 보이지만 면밀히 따져 보면 양자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과거에도 체계를 운용하는 점술의 발전은 동양의 전과학의
발전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지만 신력을 이용하는 점술은 그런 면에 별로 기여하지
않았다. 대신 신력을 이용하는 방법은 종교적 감정을 풍요롭게 하였다.

   점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가

 점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가능하다면 어떠한 메커니즘
때문에 가능한지는 우리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점이라는 것이
미신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혀 준신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점이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비밀스러운 법칙이나 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들어맞데 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어떤 사람은
점이 일종의 경험과학으로서 통계에 기초해 있으므로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일정한
확률로는 들어맞게 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또 자기 주장이 아주 강한 경우가 아니면
점에 대해서 특정한 의견이 없다고 하더라도 불길한 점괘를 꺼리고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금기를 피하려고 하는 것이 보통의 심리적 경향이다.
 사실 미래를 예측 가능하도록 만들려는 것은 과학의 목표이기도 하다. 과학은 운동,
변화를 규정하는 법칙을 전제로 그 법칙의 틀 안에서 주어진 자료를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앞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해 내려고 한다.
 점도 역시 미래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과학은 속도, 위치, 크기, 질량 등 수량화가 가능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대상만을
연구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과정에서 논리적 정합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연구활동을 진행한다. 이에 비해 점이 탐구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일종의 상징, 표상,
조짐과 같은 상이다. 상은 언어를 초월하며, 수학적 기호로 표현될 수 없다. 상에
접근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언어는 상을 완전히 담아 낼 수 없다.
그래서 상을 독해하기 위해서는 직관과 통찰이 필요하다. 직관과 통찰을 통해서
언어가 다 말해 주지 못하는 존재의 비밀스러운 의미를 읽어 내는 것이다. 가령
공자는 죽기 이레 전에 서까래 사이에 앉아 있는 꿈을 꾸고서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았다고 한다. 공자는 은나라의 후예이고, 은나라에서는 서까래 사이에 빈소를 차렸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공자의 꿈이 하나의 상이다. 공자는 상을 통해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았다. 이것은 수령화와 논리적 분석의 합리주의적 인식방법과는 다르다. 곧
점이나 과학은 모두 미래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목표를 지니지만, 탐구의
대상과 방법은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의 진영에서 볼 때 점술은 언제나 비과학 또는 유사과학이다.
서양에서 발달한 근대 과학이 동양을 장악하였을 때 점술을 미신으로 쉽게 낙인찍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면이 있다. 점술을 비판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역시 그것이 비과학이라는 데 있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문명화가 덜
된 지역일수록 점복의 문화와 관습이 강하고, 문명화가 진전된 지역은 그러한 정도가
덜하다는 점도 점술이 근대 과학 그리고 그 기초 위에 서 있는 현대 문명과 양립할 수
없는 체계임을 방증한다.
 하지만 이제 근대 과학은 부동의 진리가 아니다. 현대 물리학은 근대 과학이
부분적으로, 특히 미시적 세계에 관해서 오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인식의 도구가 아님을 밝혀 냈다. 아울러 현대 물리학은
적어도 지금 인류의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인간이 대상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도 고백하고 있다. 물론 현대 물리학이 과학적 방법을 포기한 것은 아니고 대상에
대한 인식의 한계도 단지 측정의 문제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지만, 과거의
과학주의자와 이성주의자의 믿음에 어느 정도 흠집을 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신과학운동론자 같은 현대 물리학의 연구 성과에 대한 일부의 해석가들은
낡아빠진 근대 과학의 방법을 버리고 새롭게 세계를 이해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이 포기하고자 하는 것은 합리주의적 인식방법이고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직관과 통찰이다. 대상의 요소들을 조작해서 그것들을 찢어 붙이는 식으로는 세계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으며, 직관과 통찰을 통해 살아 있는 대상자체에 접근할 때
대상의 본질, 생명을 전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이 옳다면 점술은 적어도 비과학이기 때문에 비판되지는 않는다. 점술
자체가 대안이 될 수는 없지만 점술의 체계속에는 근대 과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무엇이 존재하는 것이다. 과연 합리주의적 인식은 대상을 이해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그것은 보완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폐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직관과
통찰을 통해서 대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그러한 이해는 공유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상이한 답변이 점술을 평가하는 입장의 차이를 낳는
하나의 측면이다.
 위와 같은 문제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갖든 점을 통해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용한
점술가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누구나가 공감할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점은 상을
다루는 것이고 상은 언어를 뛰어넘기 때문에 언어에만 익숙한 일상인이 아닌 상을
읽는 전문가가 필요한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힘의 뜻을 이해하는 자이다. 그가
경험하는 것은 상이지만 그는 상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상을 넘어서, 그 은유를
넘어서 그 가운데 있는 의미를 꿰뚫어본다.
 이러한 능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공부가 필요하다. 체계를 운용하

상을 읽고 상 속에 담긴 의미를 통찰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신력을 빌려 앞날을
예측하는 사람도 공부가 필요하다. 세습무는 입문식을 거치기 전부터 공부를 하고,
강신무도 입문식을 거친 후에는 신들의 계보를 외우고 시간에 망아의 상태로 돌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공부를 해야만 한다. 그 공부에 들인 노력 여하에 따라 공력에
차이가 생긴다. '제대로 잘 보라'는 것이 술수의 학당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하는
말이다.
 고대 문화를 읽어 보면 이러한 능력을 갖춘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잇다.
그 기록의 진위를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약간 포장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뛰어난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아서 기록하고, 그들에 존경을 표시하는 풍토가 과거에는
존재하였고, 그러한 풍토를 형성하는 데 그들 자체가 어느 정도 기여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꼭 '영웅'이 아니더라도 문명의 발달과 반비례하여 고대인들이 현대인들보다 신성,
절대적 존재, 조상의 영혼--이런 것들이 실제 존재하는지 어떤지는 차치하고--과 더
쉽게 합일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문화사적 자료가 증명해 준다. 문명은 영적 능력이
소산이 아니라 이성적 사유의 소산이다. 반면에 점술은 신력을 사용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체계에 의존하는 경우라도 항상 신명을 사용한다. 논리적으로는 체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높은 빌딩이 창공을 갉아먹고 불야성이
어둠을 몰아 내는 삶의 환경에서 영적 활동이 깃들일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이
하나의 역사적 경향이라면 현대 사회에서 고대 문화 속의 영웅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점복의 문화와 관습이 약한 것도, 그러한 사회에는 구조적으로
용한 점술가가 드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 개인이 경험한 점술가의 공력
정도, 나아가 문명사회에서 뛰어난 공력이 점술가가 도대체 존재할 수나 있는
것인가에 관한 생각의 차이가 점술에 대한 평가의 차이를 낳는 또 하나의 측면이
된다.
 어쨌든 점술가는 점을 친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보여 주기 위해서 고객의 과거를
자신 있게 늘어 놓기도 하지만 결국은 미래를 예언한다. 점의 본령은 미래를 예측하는
데 있다. 그런데 미래는 정말로 예측 가능한 것인가.
 미래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보기 위해서는 세계의 모든 운동, 변화가 필연의
소산이어야 한다. 특정한 존재는 반드시 또 다른 어떤 존재와 만나서 결합하게 될
필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주체와 사태 사이에도 필연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미래는 예측 가능하다는 견해의 전제이다. 과학과 점술은 이러한 면에서는
타협한다. 단지 과학에서는 이 필연성을 법칙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점술에서는
운명이 있다는 말로 표현할 뿐이다. 이때의 필연은 물론 단순한 논리적 필연을
넘어선다. 우주의 근본법칙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사태도
근본법칙에 대한 통찰을 전제로 한다면 필연이다. 가령 과학에서는 당장 그 원인과
결과를 해석할 수 없는 현상들도 '숨겨진 변수의 이론'을 내세워 법칙의 테두리안에
있음을 천명하고, 점술에서는 모든 것이 필연성의 표상이되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에
그 표상을 읽지 못할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관로는 "하늘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으니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다. 단지 사람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뿐이다."("삼국지")라고 말하였다. '나라가 장차 흥할 때는 반드시 요망한 조짐이
있는 법'("중용")이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모를 뿐이다. 그것은 골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꿈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사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당연히 우연성은 배제된다. 우연성을 인정하면 점술은 스스로를 한정하게 된다.
우연성은 예측되지 않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의 삶은 필연의 소산인가?
우리는 필연성에 저항할 수 없는가? 찰나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태들의 모든
인과관계를 낱낱이 알 수 없다면 필연이란 허구가 아닌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다른
대답이 점술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또 하나의 측면이다.
 이제 또 체계의 문제가 남는다. 대부분의 점술가들이 상을 읽기 위해서 의존하는
체계는 타당한가? "주역"은 정말로 권위를 부여할 만하며, 간지와 시간이 결합되는
것은 수긍할 만한 일인가? 동양의 경우 점술의 체계는 모두 음양오행설과 결합되어
있는데, 음양오행설은 정말 천지 자연의 뜻을 드러내 주는 상징체계인가? 이에 대한
대답도 점술에 대한 평가를 다르게 하는 하나의 측면이다.
 점을 통해 미래를 알 수 있는가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한 것은 위와 같은 여러
가지 문제가 다양한 견해의 대립을 낳기 때문이다. 지금 단계에서 어떤 하나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다른 주장을 압도하는 견해를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쨌든 점을 통해 미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만족되어야 한다. 세계는 필연의 소산이고, 필연성의 입법자가 올바로 설정되어야
하며, 그 필연성이 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 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있어야 하고, 체계를 운용하는 경우에 그 체계가 거짓된
체계가 아니어야 한다. 아마도 여기에 우리 자신의 문제가 추가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점을 통해 자신의 운명이나 미래를 알려고 하는 강렬하고도 거짓됨 없는 바람이
있는가. 혹시 심실풀이로나 시험삼아 점가를 찾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아무리
훌륭한 술수가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신통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의
상이고, 우리가 보여 주는 상이 거짓된 상이기 때문이다.

   문화로서의 점술

 점을 통해 미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하는 전제가 어떠한
것이든, 그것이 충분히 충족되고 있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오늘도 사람들은 여전히
점가를 찾는다. 그들은 점가를 찾기 전에 점술의 메커니즘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지는 않는다. 이미 점술은 그들 생활의 일부이고 관습이고 문화이기 때문이다.
 점술이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고 관습, 문화가 된 것은 우리에게 그러한 문화적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화적 전통은 과거에 생겼다. 그 과거를 평가할 수도
있고, 영적 체험이 충만한 과거로 평가할 수도 있다. 어쨌든 과거에는 점술이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얻는 주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점가를 자주 찾았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점술문화가 형성되었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우리는 환경 속에 존재하는 외부의 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발달된 학적 체계(과학)를 가지고 있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좋은
수단(기술)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누구도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일식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를 놓고 점을 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현대 과학기술문명은 한계를 가지고
있고, 삶의 모든 것을 해명해 주지 못한다. 생명현상이나 인간관계와 같이 복잡한
연관성을 내포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다른 경로를 통해서라도 얻으려고 하는 염원이 여전히 사람들로 하여금 점가로 발길을
돌리게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우리 사회의 합리화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사람들을 점가로 내모는 하나의
원인이다. 합리적 예측이 불가능한 왜곡된 사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정한 사회, 그것에 비합리성으로 인한 고통을 위안받으려고 하는 자연적인
심리상태가 결합되어 살아 있는 점술의 문화를 형성하기도 할 것이다. 일이 잘
풀려나가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일이 꼬여들어갈 때 사람들이 점가를 찾게 된다는 것은
그에 대한 방증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화되고 삶의 문화로 자리잡으면서 점술이 겪게 된 주요한
변화이다. 원래는 환경 속에 존재하는 자연적, 초자연적 힘을 이해하고 그것을 말하는
수단에 불과하였던 점술이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스스로가 하나의 힘으로 격상된
것이다. 마치 재액을 물리칠 수 잇는 선한 힘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였던 부적이 그
스스로 신적인 힘으로 발전하고, 운동, 변화의 규칙성과 항상성을 상징하였던 주역의
부호가 그 스스로 마술적 기호로 발전한 것과 같다. 사제는 원래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역할을 해 주고 신을 경배하는 의식을 주도하는 자이지만 의식이 강조되면
신과 관련이 없이도 그 스스로가 권위를 가지며, 때로는 신보다도 더한 힘을 갖는다.
 이러한 일들이 점술의 사회화 과정에서도 일어났다. 그래서 그 체계의 진실성이나,
그것이 모시는 입법자의 정당성이나. 심지어는 점술가의 능력과도 상관없이, 점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도 상관없이 점술의 문화는 하나의 힘으로서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게 되며 심령 속에 침투한다. 사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체계나 입법자의 힘을
빌려 자신의 운명과 미래가 예측되는지, 내가 만난 점술가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점을 본다. 물론 그에게는 미래를 알고 싶다는 목적의식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는 미래를 알기 위해서 점을 보는 것이 나리다. 그는
그냥 점을 본다. 자신의 심령 속에서 침투해 있는 힘에 이끌려서 말이다.
@ff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재훈이와 난영이가 점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입장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자.

 재훈:점술을 믿는 사람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어. 아무런 근거도 없는 미신 때문에
때로는 온 나라가 들썩이는 것을 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는 계몽이 덜 된 거야.
 난영:점술을 미신이라고 보는가 본데, 왜 미신이라고 생각하니?
 재훈:신뢰할 만한 근거가 없는 믿음을 잘못된 믿음, 곧 미신이라고 하지. 한마디로
점술에는 객관적 근거가 없는 거야.
 난영:네가 말하는 객관적 근거가 뭔데?
 재훈:우선 점술의 체계는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경우가 많아. 가령 우리와 관련이
있는 점술체계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음양오행설은 내가 좀 공부해 보니까 이야기가
왔다갔다하더라고. 우리는 지금 오행상생이니 오행상극이니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오행상생의 순서나 상극의 순서가 문헌마다 다르다는 걸 아니? 이런 기본적인
원칙에서도 일관성이 없다면 다른 세부적인 것은 말해 무엇 하겠어?
 난영:그렇지만 지금은 오행상생이나 상극의 순서가 혼동되지는 않잖아? 좋아. 여하

그런 문제가 있다고 치고. 또 다른 문제는 없니?
 재훈:그리고 점술에서 말하는 것이 항상 현실 속에서 증거가 발견되는 것은
아니잖아. 좀 유식하게 말하면 현실적합성이 없다는 거지. 또 점술가의 예언도 그렇
고,
점술이론의 서술도 애매모호하기 그지없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이런
식의 서술이어서 어떤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그것들을 대하는가에 따라 해석이
천차만별이거든. 이것을 명료하지 않은 서술이라고 하지.
 난영:그러니까 너는 결국 점술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구나.
논리적 정합성과 현실적합성, 그리고 서술의 명료성이 과학성의 전제조건이니까.
 재훈:바로 그렇지. 너도 좀 아는구나.
 난영:점술이 비과학적이라는 판단은 옳아. 하지만 그때의 과학은 근대과학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은 있니?
 재훈:너 또 현대 물리학 얘기하면서 근대 과학의 한계를 말하려고 하는구나? 근대
과학은 한계가 있고, 그 자체로 절대적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근대 과학의 기준에
어긋난다고 해서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둥....
 난영:히히. 눈치 한번 빠르네.
 재훈:나도 웬만큼은 알지. 하지만 현대 물리학은 근대 과학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
지,
그것에 반하는 사고가 옳다고 말한 것은 아니잖아?
 난영:그렇기는 해. 하지만 근대 과학의 절대성이 붕괴되었다면 여태까지 부정된
내용이 올바른 것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은 항상 열어 놓아야 하지 않을까?
 재훈:글쎄,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니? 그저 혼란을
용인할 수밖에.
 난영:혼란을 조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렇지만 역시 가능성은 열어 놓아야 할

같아. 맞을 수도 있는 것을 틀리다고 단언하는 것도 혼란을 불러일으키니까.
 재훈:그건 그렇고, 이 글의 내용에 따르면 점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도구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여야 할 텐데 실제로 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그렇잖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난영:음, 그렇다면 글이 잘못된 거지 뭐.
 재훈:하하.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글이 맞다고 전제하고 이야기해 보는 건 어때
?
 난영:그럴 경우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우선 점으로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이 엉터리인 경우는 있거든. 왜일까? 운명, 곧 필연성이나
필연성의 입법자, 점술의 체계를 부정해서는 안 될 테고, 그럼 변수는?
 재훈:변수는?
 난영:사람이지 뭐.
 재훈:점술가?
 난영:점술가도 그렇고 장난삼아 점을 보는 우리도 그렇고 여하튼 이놈의 사람이
문제라고 상을 읽을 공력도 없으면서 점판을 벌여 놓은 사람이나 심심풀이 땅콩
식으로 불경스럽게 점술을 대하는 사람이나, 언제나 사람이 문제인 거 아냐?
 재훈:그러고 보니까 TV 같은 데에서 점이 맞나 틀리나를 시험해 볼 때 잘못된
점괘를 내 놓은 사람은 나중에 꼭 '내가 아직 수행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변명을 하
데.
그것도 잘못된 이야기는 아니군.
 난영: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보면 그게 보호막이 되어서 점술 자체에 대한 비판을
면할 수도 있고.
 재훈:그러면 반대의 경우는? 원래는 미래를 알 수 없는데, 종종 맞을 때가 있는
경우.
 난영:간단하지 않겠니? 점술의 행위에 원래의 점술과는 관계없는 다른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 거지.
 재훈:이를테면?
 난영:자꾸 물어 보지 말아. 들통나게끔. 하지만 점술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

하나의 문화로서 살아 있었단 걸 생각해 봐. 점술을 둘러싼 수많은 인간의 경험들. 그
경험들이 무언가를 제공해 주지는 않았을까?
 재훈:아하! 경험과학?
 난영:그래, 점술은 어떤 면에서 경험과학의 측면이 있거든. 이론적으로 옳지 않지만
현상 간의 사실적인 연관을 반영할 수는 있는.... 가령 범죄를 많이 저지른 사람 얼굴

도덕적 자부심이 표현될 수는 없겠지.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사기꾼 하고 폭력범
하고는 또 다르고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어떤 사람의 삶을 독해한다면 거기에는
원래의 골상학과는 다른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 거지.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이론적으로 보면 원래 골상학은 통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재훈:나는 어디에선가 너무나 많은 점술가가 있고, 있어 왔고, 그들 입에서 또
너무나 많은 말들이 쏟아지기 때문에 그 중에 간혹 맞는 말이 있어 그것이
선전됨으로써 점술의 신통력이 과장되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어.
 난영:맞아. 예로부터 그런 비판이 있었지. 좀 유치하기는 하지만 역시 고려되어야

부분일 것 같아. 하지만 괜찮은 점술가가 보통 사람들보다 예민하고, 뭐 영적
능력이랄까 하는 것이 좀더 뛰어난 것은 사실인 것 같아.
 재훈:점술가들이 말하는 걸 보면 세부적이지는 않고, 개괄적이거든. 원래 점이란
길한가 흉한가를 말하는 거 아냐? 그렇게 보면 맞을 수 있는 확률은 반반이네?
 난영: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세부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 나는 물과
관련된 사업을 벌이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물과 관련된 사업, 그게 뭘까?
 재훈:좋은 수가 있다.
 난영:뭔데?
 재훈:그게 뭔지 점을 보러 가자.
 난영:하하.
@ff
   토론해 봅시다

 1. 컴퓨터가 점술가를 대신할 수 있을까?
 2. 점술은 정말로 '동양철학'일까?
 3. 점술로 과거를 알 수 있을까?
 4.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필연적인 것일까?
 5. 오늘날 신통한 점술가를 만나기 힘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주요 개념

 복서, 점성술, 주역, 산명술, 골상, 몽점, 신력,  상, 직관, 점술가, 필연성, 우연
성,
체계, 점술의 사회화

   참고 문헌

 한규성, "주역에 대한 46가지 질문과 대답", 동녘.
 하야시 하지메, "동양의학은 서양과학을 뒤엎을 것인가", 보광재.
 J. 니담, "중국의 과학과 문명 3", 을류문화사.
 시에쏭링, "음양오행이란 무엇인가", 연암출판사.
@ff
   유교 전통과 자본주의는 화해할 수 있는가

 유교와 자본주의는 각 문화 속에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요소가 자랄 수 있었던 환경을 짚어 보는 자세이다.
 유동환(고려대 철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현재 고려대 강사)

 우리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를 보나 역사책을 보나 근대 이전까지는
동양의 문명이 서양보다 훨씬 앞섰다고 배워 왔다. 그런데 어째서 근대 이래로 동양과
서양의 경쟁에서 동양은 언제나 연전연패를 당했던 것일까? 철갑선고 대포와 공장
굴뚝으로 상징되는 서양 자본주의의 위력 앞에 어째서 그렇게까지 무기력할 수밖에
없을까? 서양에서 자본주의가 탄생할 수 있도록 만든 요소는 무엇인가? 또 동양은
어째서 현대 자본주의를 자발적으로 발생시키지 못 했는가? 그리고 최근 동아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은 무엇 때문인가?
 어쨌든 동양의 상한 자존심을 곧추 세워 주는 일들이 현대에 와서 일어나고 있다.
동양이라 그저 손잡고 이끌어서 계몽해야 하거나 지배해도 좋은 대상이라고 생각하던
콧대 높은 서양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바로 일본이라는 큰
용이 앞서 날아오르고, 그 뒤를 따라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라는 네 마리 용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공교롭게도 이들 지역은
모두 과거 중국 문화, 특히 근대화를 가로막은 봉건사상이라고 지탄받아 왔던 유교의
영향력이 무척이나 강했던 지역이다.
 이들 지역의 자본주의 발전은 서양인들이 공공연히 품고 있던 생각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다름 아닌 자신들에게만 고유한 기독교라는 흙 속에서만 싹틀 수 있다고
믿었던 자본주의가 기독교가 아닌 유교라는 흙 속에서도 싹트고 훌륭하게 자라나 열매
맺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오만함을 되돌아보기 시작하였다.
 이제 우리는 제각기 다른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유교와 자본주의가 과연
화해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고 서양의 문화가 동양에 옮겨 심어졌을 때,
두 문화는 어떤 방식으로 적응해 왔는지 보기로 하자.
 먼저 자본주의와 유교의 결혼에 제일 먼저 관심을 표시한 사람들은 경제현상을 직접
분석하던 파란 눈의 서양 경제학자들이었다. 두 가지 입장이 있는데 첫 번째 입장은
이 지역의 두드러진 정치제도나 경제제도 같은 사회 구조적인 특징에서 경제 발전의
직접적인 이유를 찾았던 '구조적 해석' 방법이다. 대표자로 로이 호프하인즈와 캔트
캘더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동아시아의 안정적인 일당 통치체제, 행정관리들의 지도
력,
강한 민족주의와 같은 정치, 경제적 조건들을 발전의 요인으로 꼽고 있다.
 두 번째 입장은 이러한 외적인 정치, 경제 구조가 직접적인 요소가 아니라, 그 구조
깊은 곳에 깔려 있는 특정한 문화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문화적 해석'
방법이다. 대표자인 칸은 동아시아가 대부분 '유가 후기 문화' 지역에 속해 있어
유교적인 교육을 널리 받은 지식인들이 많다는 점을 들고 있다. 또한 버거는
'현대화'란 서양식 현대화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동양식
현대화도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사대부와 관리가 갖고 있던 고상한
윤리로서의 유교가 아닌 일반 백성들의 세속화된 노동윤리로서의 유교를 구분하고,
후자가 높은 노동 생산력을 낳았다고 보았다.
 그런데 바로 두 번째의 '문화적 해석' 방법은 동양 학자들에게 그야말로 복음으로
들려왔다. 지금까지 낡은 봉건사상으로서 근대화 실패의 주범으로 숨죽이고 있었던
유교 전통이 현대 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자 동양의 학자들은 이를 발판으로 한 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환경오염이나 성도덕의 타락 등 현대 서양문명의 병폐를 유교의 부흥을 통해서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제기된 주장이 바로 '유교부흥론'이고
'유교자본주의'이다.
 이제부터 과거, 동양으로 상징되는 유교와 현대, 서양을 대표하는 자본주의가 절대

조화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막스 베버, 두 요소가 잘 조화해서 새로운 문화로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교자본주의자들의 주장을 비교해 보기로 하자.

   유교와 자본주의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

 동양의 유교와 서양의 자본주의는 절대로 조화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를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서양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먼저 발전시켰는가'를 해명하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 경제적, 사회적 요인 뿐만 아니라 문화적 요인도 한몫을 하였다고
보았다.
 그는 대표작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서양 자본주의 문화의
특징으로 전문적인 직업의식과 그러한 직업의식의 배후에서 그 직업노동에 몸바치도록
하는 합리적인 삶의 방식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합리적인 삶의 방식은
포르테스탄티즘, 즉 신교의 윤리 속에 들어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중세의 기독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라고 할 정도로 현세 속의 돈벌기를 매우 비천한
것으로 보았다. 당연히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일이 가장 고귀한 일이었고,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 땀흘리는 것은 천박한 일이었다. 교회는 농사짓는 수많은 농노들에게
불완전하고 천박한 세속의 일보다는 천국의 향해 회개하고 기도하도록 설교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상업이나 공업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캘빈주의자를 비롯한 청교도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노동이란 '신의 영광을 현세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행위'라고 규정하였다. 베버는
캘빈주의를 중심으로 한 금욕적인 신교윤리에서 근대자본주의 정신의 뿌리인 합리성을
이끌어 냈다. 그가 보기에 캘빈주의자를 비롯한 청교도들은 현세 속에서 사회적
노동을 할 때 '신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지향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노동의 신성함을
긍정하고, 이는 돈벌기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다시 말해 신의 이름으로
부자의 죄의식을 벗어나게 되었고 정반대로 부자가 되는 것이 신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 되었다. 자본주의의 장애물이었던 중세 기독교가 근대적인 신교로 바뀌면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논리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설명방법은 앞에서 보았던 '문화적 해석'의 원조를 보는 듯하다. 그는 이렇

신교의 윤리를 통해서 서양 자본주의의 발전을 설명하는 것처럼, 똑같은 방법을
그대로 중국에 적용하였다. 그리하여 '왜 중국에서는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없었는가'를 따지는 문제로 나아갔으며 그 연구의 결과물이 바로 "유교와 도교"였다.
 그가 보기에 중국에서 서양의 신교와 맞설 수 있는 사상을 찾는다면 당연히
유교이다. 베버는 중국이 서양과 다른 지배구조로 매우 일찍이 발전한 제도로서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도를 들고 있다. 중국은 서양의 봉건제처럼 교회와 왕과 기사들이
반독립적인 상태로 있었던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고 보았다. 중국은 진시황 이래로
일찍이 황제를 꼭지점으로 하는 거대한 행정조직을 세웠고, 그 구성원들이 바로
유교를 학습한 사대부 관리들이었다. 이들은 세분화된 직업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교양으로서 유학의 경전을 공부하는 것을 최고로 여겼지, 개별 직업기술을
익히는 것은 천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선비, 농민, 기술자, 장사치라는 '사농공상'의
신분제가 수천 년에 걸쳐 유지되었다. 결국 서양처럼 전문적인 직업관이나 노동관은
나타날 수 없었다.
 또한 유학자들은 근대 서양인들이 가졌던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나 자연과학에 대한
열정보다는 과거시험을 통해서 관료조직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만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사상에는 합리성이나 자연과학적 사유가 결여되었다. 또한 요순
임금이나 공자 등 성인과 같은 인간에 의한 통치에 의존하여 자연법과 형식적인
법률논리가 결여되어 법치가 시행되지 못하였다. 베버는 이러한 문제점들로 인하여
노동과 직업의 전문화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거대한 관료조직은 근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 되었다고 보았다.
 베버는 또 중국의 대표적인 민중종교라고 할 수 있는 도교도 같은 방법으로
분석하였다. 도교에는 자본주의 경제이론의 바탕이 되어 온 자유방임주의와 비슷한
사고방식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도교적 자유방임주의는 자유로운 이윤 추구를
가능하게 해 주는 자유경쟁이나 능동적 직업윤리로 연결되지 못하고 종교적이고
명상적인 신비주의로 빠져 버렸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그는
동양의 기본사상인 유교나 도교에는 자본주의를 뒷받침할 요소가 결코 나타날 수
없다고 단정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베버의 주장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논리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베버는 사실 유교의 사상 내용 자체를 분석하기보다는 유교가 동양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문제삼은 것이다. 둘째, 베버는 자신의 기독교에 대하
이해를 바탕으로 유교를 보았다. 셋째, 베버는 자신이 자본주의와 신교의 분석하던
틀을 그대로 중국에 대입하여 신교의 자리에 유교를 넣어 비교하였다. 이 같은 시각은
앞서 살핀 기독교적 시각의 문제와 함께 베버가 유럽 중심주의의 시각에 서 있음을
보여 주는 점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베버는 자기 학설의 보편성을 얻기 위해서 신교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이라는 구도에 신교 대신 유교를 넣어서 비교한 것이다. 실제로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의 우선적 타도대상으로 전통주의를 꼽는다. 그렇다면 중국에서의 타도대상인
전통주의는 당연히 유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분석에 앞서 이미 결론을 내렸던
셈이다.

  유교와 자본주의는 찰떡궁합이다

 이제 적극적으로 유교와 자본주의의 결혼을 추진했던 사람들을 만나 보자. 흔히
'유교자본주의' 또는 '유교부흥론'으로 구분되는 학자들 가운데 대표자로 중국계인
칭중잉, 뚜웨이밍 등과 일본의 시마다 겐지 그리고 한국의 김일곤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앞에서 설명한 '문화적 해석' 방법은 문화를 일차적인 요소로 보고, 정치와
경제의 구조를 이차적인 요소로 보고 있다. 이에 반해서 유교자본론자들은 유교를
중심으로 하여 문화로 모든 것을 해석해버리는 문화일원론에 치우쳐 있다는 점에서
다른 견해인 것이다. 또한 그들은 유교 전통의 계승과 발전, 더 나아가 완전한 부흥을
공공연히 부르짖는다. 사실의 분석에서 당위의 주장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동안 유교와 자본주의의 결혼을 결사 반대했던 막스 베버가 천하의
원수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봇물 터지듯 쏟아
내었다. 더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환경문제, 성범죄, 인간소외 등 현대 서양문명의
병리현상들을 죄다 서양의 물질문명에 따른 결과로 돌리면서 유교와 동양이라는
처방만이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제 유교자본론자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자. 화교 학자로 하버드 대학 교수인
뚜웨이밍은 지구상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만이 문명의 길이 아니라 동아시아
공업문명이라는 또 하나의 독자적인 길이 있으며 이를 제3공업문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지역의 특징으로 유교적인 사회문화를 들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동안
서양 학자들이 동양의 낙후함을 비판할 때 등장하는 유교와 우리가 살려내야 할
유교는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봉건적이고 정치적인 유교인 '유교 중국'과 유가의
참다운 도덕 정신인 '유가 전통'을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유교
중국은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유가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화교 학자인 칭중잉은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은 과학기술이 발전 때문이
아니라, 유교에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유가
윤리 가운데 화해의 원리인 '인'과 도덕의 원칙인 '의'가 이미 현대 일본의 공업사회
구조에 흡수되어 성공적인 기업 관리제도를 마들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유가 윤리와
공업화 사회가 결합하여 윤리적인 사회를 다시 건설하는 것이 지식인의 신성한
의무라고 보았다.
 일본의 경우 대표적인 유교자본론자인 모리지마는 "영국의 자본주의를 신교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면 일본의 자본주의는 유교자본주의라고 할 만하다."라고
말하였다. 또 시마다 겐지는 "신교와 돈벌이의 결합이 가능하다면 성리학의
금욕주의와 돈벌이도 결합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일본의 경제문화에
등장하는 종신고용제나 노사가 조화된 기업문화 등은 개인주의에 기초한 서양의
자본주의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이는 유교에서 근원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경제학자 김일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개발도상국의 경제 개발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유를 찾다가 그 이유가 바로 각 나라의 문화의 차이에 원인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특히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특징을 경제 발전과 연결하여
설명하면서 유교의 긍정적인 기능을 현대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의 종화의식과 가족에서 출발한 확대가문주의 같은 윤리의식을 기초로
하는 집단문화를 보존하는 동시에 효율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경제문화를
발전시키자고 하였다. 결국 그는 경제문제의 궁극점에는 공동체의식과 같은 문화의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이상에서처럼 유교가 현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는 주장이 현실적인 경제 부흥과 함께 설득력을 얻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개인주의에 기초해서 자유롭게 직장을 바꾸는 서양식 직업의식보다는 공동체윤리에
뿌리내리고 평생토록 한 직장에 충실한 종신고용제와 같은 동양식 직업의식이 훨씬 더
좋은 것이며, 또 자유방임적인 경제문화보다는 정치와 행정이 경제를 앞서 나가면서
이끌어 주는 독점적인 경제문화가 더 긍정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매우 당위적으로 들린다. 어떻게 유교 전통 속에서
자본주의와 맞는 요소들을 찾아 내겠는가? 유교적인 것이라면 아무것이나 부흥하면
되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묵묵부답이다. 다만 전통이란 창고 속에서 꺼내
올 뿐이다. 그러면 어떤 전통이든 현대 속에서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다는 견해가
된다.

   유교와 자본주의, 전통과 현대의 대화를 위하여

 우리는 앞에서 유교와 자본주의의 결혼을 반대하는 입장과 찬성하는 입장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동양을 부정하는 막스 베버의 방법이나 그 논리를
비판하며 동양을 옹호하는 유교자본론자들의 논리나 모두 똑같이 문화를 중심에 놓고
사회, 경제 현상을 분석한다는 점이다. 또한 똑같은 방법을 적용하였는데 막스 베버의
경우에는 유교가 자본주의 발전에 부정적인 기능을 한 것으로 설명된 반면에 '문화적
해석' 방법이나 유교자본론자들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기능을 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차이점은 '신교 윤리'의 대체물로서 베버에 의해 배척당하였던 동양의 문화
요소인 '유교 윤리'가 설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유교자본주의론은 베버 이론에 대한 계승과 확장이라는 측면과 아울러
비판과 반박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곧 유교 윤리와 동아시아 경제 발전 사이의
인과관계를 찾아보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베버의 역사적 가설에 대한 계승과 확장이며,
베버가 부정하였던 유교로부터 근대 자본주의 경제 발전을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비판과 반박이 되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유교자본론자들은 베버를 가지고 베버를 공격한 셈이다. 더 심한 것은
그들 가운데 일부는 막스 베버를 닮아 외눈박이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베버가 문화 이외에 정치, 경제적 조건들도 함께 검토하여 역사 발전을 다양한 원인을
통해서 살펴보려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애써 눈감아 버리고 있다. 그들이 구사한 문화
일원론적인 해석방식은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유학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 문화만이
특수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이며, 또 다른 의미에서 중화민족의 국수주의적
주장이 되기 쉬운 주장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유교와 자본주의가 만날 수 있다. 또는 없다의 결론에 있지
않다. 동양의 전통 속에서 유교를 가져오고, 서양 문화 속에서 자본주의를 가져오기만
하면 문제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유교나 자본주의는 둘 다 동양문화와 서양문화 속의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저마다 그 요소사 자랄 수 있는 역사적, 사회적 환경이
있었다는 점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꽃을 꺾어다가 다른 흙에다가 꽂기만 하면 그대로 꽃이 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 꽃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꽃의 뿌리까지 잘 보살펴야 한다. 또한 원래 있던 토양과
비슷한 토양을 만들기 위해서 흙을 조금씩 바꿔나가야 한다. 또 오랜 시간 기다리면서
기후를 맞춰주고 돌봐 주어야 그 꽃이 성공적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역사와 사회를 배경으로 태어난 문화적 요소를 옮겨다가
성공적으로 화해시키려면 그 둘이 자라 온 환경과 새로운 환경을 맞춰 주는 기나긴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문화의 수입은 일방적인 것이었고,
화해할 시간이나 토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무작정의 강제결혼
과정이었다. 이제는 드러난 경제 발전의 현실에 힘입어 무조건 전통만 부활하면
된다는 유교자본주의의 방식도, 동양에서 무슨 자본주의냐며 무조건 서양문화를
수입하면 된다는 식의 방식도 뛰어넘어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할
차례이다.
@ff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석규와 찬호는 수업시간에 "굴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고사성어를 듣고

말에 대해서 토론해 보았다.

 석규:야! 귤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니까 탱자가 됐다는 말이 대체 무슨
말이니? 귤은 그냥 귤일 뿐인데 말야..., .
 찬호:아마 흙도 다르고 물도 다르고 기후도 다르니까 귤나무의 성질이 바뀌어 버린
것 같아. 그런데 눈을 돌려 보면 식물이나 동물 같은 생물만 그런 게 아니라, 사회나
문화적인 것도 탄생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지면 성질이 변하기도 하지. 뭐가
있더라....
 석규:우리를 괴롭히는 학생부라는 것도 미국에서는 굉장히 잘 시행되는 제도라고
하던데.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꼭 잘 시행되는 것만도 아닌 것 같아. 분명히 똑같은
제도인데도 말이야.
 찬호:그래 맞다. 학생부란 것이 우리들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장점을 관찰하고
시험지 점수 외에 봉사 성적이니 과외활동 같은 것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것인데
우리 학교는 그런 것 같지 않아. 1년 가야 선생님과 정해진 시간에 면담 한 번 하면
그뿐이니 선생님이 나를 얼마나 알겠어. 내가 만화를 잘 그리는지, 시를 잘 짓는지
알겠냐 말이야. 그 봉사 성적이란 것도 그래. 시험공부할 시간 없다고 엄마 아빠가
대신 도장 받아다 주고 또 진짜 하려고 해도 가슴에 와닿는 일을 찾을 수도 없고 참
어렵잖아. 다양하게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는 기관이나 분위기가 마련되어 있지 않잖아.
 석규:그러면 미국으로 이민 가여 되나?
 찬호:바보야, 우리는 우리한테 맞는 옷을 찾아야 되는 거야! 우리가 미국 가면
탱자가 아니라 오리알이 될 거야. 우리에게 업었던 문화를 들여올 때는 여러 가지를
고민해서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야.
 석규:그냥 수입하면 제일 편할 텐데 뭘 고민해야 한다는 거지?
 찬호:꽃을 예로 들어 보자. 여기 아주 예쁜 국화꽃이 있어. 그런데 한 사람은 꽃을
꺾어서 꽃병에 놓았고, 한 사람은 꽃의 뿌리까지 조심조심 다른 화분에 옮겨다 심었
어.
누가 더 오래도록 그 아름다움을 감상했을까?
 석규:물론 화분에 옮겨 심은 사람이겠지!
 찬호:그래, 맞아. 꽃을 꺾어다가 꽂는 방식은 그 꽃이 살 수 있는 토양이나 기후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니까 손쉽지. 그런데 꽃을 뿌리까지 옮겨 심으려면 손에 흙도
묻혀야 되고, 살리기 위해서 시간도 많이 필요한 법이야. 그렇지만 다음 해가 되면 또
싱싱한 꽃을 볼 수 있고 더 노력하면 우리 동네에 적응한 새로운 씨앗이나 뿌리도
얻을 수 있는 거야.
 석규:그런데 그것이 왜 문화의 수입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거야?
 찬호:너 아직도 모르겠니?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로 많은 외래문화가
들어왔잖아. 그런데 그것들마다 모두 우리 땅에 옳게 뿌리를 내렸냐 하면 그렇지
않았다구, 또 잘못 뿌리는 내려서 탱자가 아니라 황소개구리처럼 토종의 씨를 말려
버린 경우도 많았단 말이야. 다른 문화의 구조 속에서 어떤 한 요소를 떼어 오게 되면
그 문화의 토양과 우리 문화의 토양이 맞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거든. 그러면 그
요소가 잘 뿌리내릴 수 있도록 우리의 체질도 잘 개선해야 하고, 또 서둘러서
심어서도 안되는거야. 오랜 시간 동안 적응하게 하면서 나쁜 부분은 과감하게 잘라
내고 꼭 받아들여야 할 좋은 부분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길러 줘야 하는 거라구.
 석규:와! 네가 그렇게까지 넓게 생각할 줄 몰랐다. 아까 말한 학생부도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데도 짧은 시간에 준비 없이 받아들여서 생긴 문제라는 거지? 결국 꽃을
꺾어다 꽃병에 꽂는 방식이나 다름없다는 얘기구나!
 찬호:이제 좀 가르친 보람이 있구나! 하하.
@ff
   토론해 봅시다

 1. 서양의 근대 사회가 만들어 낸 자본주의는 서양 이외의 지역에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그는 서양 신교의 금욕적이고 합리적인
윤리만이 자본주의 윤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양에서는 영원히
자본주의는 나올 수 없는 것인가?
 2. 우리는 흔히 전통과 현대를 말할 때, 동양과 서양을 각각 대입시켜서 혼랍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의 관계를 중심으로 동양문화와
서양문화가 어떻게 접촉할 수 있는지 토론해 보자.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동양과 서양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주장과 공통성을 강조하는 주장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해
보자.
 3. 많은 동양사상 가운데 왜 유독 유교가 동양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평가받고
있는가? 동양에서 유교는 어떤 역할을 하였고 현재에는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아울러 유교라는 전통적 가치 가운데 우리가 비판해야 할 요소와 계승해야 할 요소를
구분해 보자.
 4. 하나의 문화가 또 다른 하나의 문화로 옮겨갈 때 저마다 문화의 토대와 상관없이
어떤 한 요소만 옮겨갈 수 있는가? 아울러 귤이 회수를 건너가면 탱자가 된다는 말의
의미를 새겨 보자. 문화에서 구조와 요소의 관계, 문화 사이의 교섭방식에 대해서
동아시아의 근대사를 예로 삼아 설명해 보자.

   주요 개념

 유교자본주의, 구조적 해석, 문화적 해석, 유가 후기 문화, 프로테스탄티즘, 캘비니
즘,
합리화, 유학부흥론, 유교 중국, 유가 전통, 제3공업문명, 집단문화, 경제문화, 역사
발전,
다인론, 문화일원론

   참고 문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논전사분과, "현대중국의 모색", 동녘, 1992.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논전사분과, "현대신유학연구", 동녘, 1994.
 M.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1988.
 M. 베버, "유교와 도교", 문예출판사, 1990.
 R. 호프하인즈 외, "동아시아의 도전", 을유문화사, 1984.
 김일곤, "유교문화권의 질서와 경제", 한국경제신문사, 1985.
 김필년, "자본주의는 왜 서양문명에서 발전했는가", 범양사, 1993
@ff
   생태주의는 환경문제의 대안인가

 환경문제는 인간의 욕구에 부응한 기술개발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어떤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가.
 안은수(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 강사)

 1998년 한국의 여름을 돌아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폭우로 이어진 긴
장마이다. 이 비는 특히 중부, 경기 지방과 충청 지방에 집중적인 피해를 주었다. 저

9시 TV 뉴스에서는 집이 무너져 순식간에 보금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허탈한 모습,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한 사람들의 얼이 빠진 얼굴, 도로가 침수되고 무너져서
고립된 주민들의 황당한 현실이 속속 보도되었다. TV 화면에서 본 처참한 영상들과
그 와중에도 그치지 않고 쏟아붓는 듯이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 못 이루었던 그
밤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기상관측이 시작된 후 최초라는 설명이 붙은
강우량에 관한 기사와 그 피해사례들이 연일 신문 머리기사로 올랐다. 무섭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이나 동유럽, 미

남부 등에서 들려온 소실들도 우리의 걱정을 더하게 했다. 중국에서는 양쯔 강의
범람을 우려하게 폭우가 사람들을 긴장시켰으며 일본과 방글라데시에서도 홍수피해가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의 보루네오 섬에서는 아직 건기에 해당한다는
8월에 폭우가 내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편 동유럽과 미국 남부지역에서는 섭씨
40도를 웃도는 폭염이 사람들의 생존을 방해하였다. 모두가 정상적인 기상상태에서
벗어난 현상들인 동시에 무서운 피해를 가져온 재해였다. 이제 우리는 또 얼마나
'이상한' 자연현상과 만나게 될지 불안하기 그지 없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기상이변은 지구촌 생태계 파괴가 그
원인이라 한다. 우리는 한 삶도 지구라는 생태계를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지구에는 인간뿐 아니라 동식물, 미생물 등 수많은 생명체가 공존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지구는 수많은 생명체 공동의 환경이라 하겠다.
 오늘날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는 환경문제는 바로 생태계 파괴로 인한 생명체 공동의
환경이 악화되는 현상이다. 환경문제는 생명체의 생명유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람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무엇이 발전인가?

 고대문명의 유적들은 인류의 역사를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원인에 의해 훼손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천
년 이상의 세월 동안 마모되었던 것보다 최근 40년 동안의 훼손이 훨씬 심각하다는
보고이다. 이것은 다양한 측면에서 반성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그런 식으로 훼손되는
것이 유적만은 아닐 것이라는 유추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를 거치며 진행되었던 산업화, 기계화의 물결은 서구에서
출발하였지만 곧 세계적인 추세로 보편화되었다. 이에 따라 지구촌 사람들은 다양한
물질문명의 혜택을 받음으로써 더욱 편리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편리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성향은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에는
지구 생태계의 균형 파괴를 증명하는 기상이변과 그로 인한 자연재해, 오존층 파괴로
대표되는 대기오염, 대량샹산의 수단으로 사용된 농약 등으로 인한 먹거리의 오염 등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점차 그 정도를 더해감에 따라 그것에 대처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강화되고 있다. 편리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욕구에 부응한 기술개발과 그 과정에서 드러난 환경파괴문제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어떤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과제가 대두되었다고 하겠다.
 생태학(ecology)은 집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okios'와 학문을 의미하는 'logy'의
합성어다. 문자 그대로 지구에 공존하는 사람, 동물, 식물, 미생물의 거주지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 하겠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담고 있는 지구라는 환경은 인간에게
생명의 근원이 되는 요소들을 제공한다. 생태학은 지구 생태계 전반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생태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지구환경이
생명체들의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을 경고한다. 여기서는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기 맥락에서 진행되었던 기술개발이 문제가 되는데, 이것이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었다는 긍정적인 기능을 한 동시에 환경파괴, 곧 생태계
균형을 파괴하는 부정적 효과를 산출하여 인간은 물론이고 인간과 공존하는 지구
생태계에 속한 생명체들의 생명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제 어떤 처방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지구의 구성원들은 모두 함께 죽어가는 길로
향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멸망하는 길로 달려가는 것을 진정한 발전이라 볼 수
없다면, 지금까지 발전이라는 덕목을 내세워 추진되었던 무분별한 개발은 중단되어야
한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달을 추진하는 과정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생각(세계관)에
기초한 것이어야 하겠다.

   더불어 사는 지구환경

 서양의 근대 과학은 16__17세기 기독교권의 유럽에서 과학혁명의 결과로 출현한
문화적 산물이다. 과학혁명을 지지하였던 정신은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대표된다. 이
자연관에 기초한 이후의 산업화과정은 전세계적인 추세였고, 자연환경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기여해야 하는 조건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추진된 기술의 발달은
자연훼손과 자원의 고갈을 초래하였고 그 결과는 생태계 균형의 파괴였다. 이 같은
현상은 그 연원이 서양의 근대적 자연관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보편적이며 세계적인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 우리도 서양의 근대 과학이 마련한 토대 위에서 근대화 내지
현대화의 길을 열었다.
 "상황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반전한다."는 생각은 "주역"에서 보인다. 어떤 상황이
한계에 이르렀다면 그 지점은 다른 쪽으로 전화하는 계기가 되고, 전화의 방향이 좋은
쪽인지 그 반대인지는 주체의 의지와 행위에 달렸다고 한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상황을 읽어 내고 그것에 대처하는가에 따라서 다음의 장면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생태계의 균형이 파괴되고 그 결과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생명의 위협이라는 상황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한계상황이다. 다시 말해 이제 우리는 반전의 계기가 되는
지점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에는 어떤 방식으로 이 상황을 전화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무분별한 기술개발의 결과인 생태계의 파괴를 회복하여 건강한 지구 공동체를
지향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대표된다. 하나는 과학기술
낙관론자들의 입장이다. 이들 역시 과학기술의 발달이 현재의 환경문제를 초래했다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그러나 그 처방 역시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 주장의 핵심이다. 더 발달된 기술로서 현재 드러난 문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과학만능주의라고도 한다. 이것과 다른 또 하나의 주장은
현재의 환경문제가 전적으로 과학기술의 발달에서 비롯되었으므로 그것을 부정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이들이 생태주의자들이다.
 생태주의자들은 인간도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법칙에 순리적으로
따름으로써 자신이 그 일부가 되는 전체 생태계와 조화를 이룸으로써 생태계의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을 기본입장으로 내세운다. 이들은 현대의 환경위기가 자연을 단지
대상물로 파악하는 왜곡된 자연관에 기초하여 무분별하게 과학기술의 발전을 추구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바로 환경문제의 해결책이라고 한다.
카머너가 현재의 생산기술을 생태학적 요구에 되도록 가까이 적응하도록 다시 계획할
필요가 있으며 대부분의 현존 농업, 공업, 교통 체계를 이 계획과 조화되도록
재조직해야 한다고 하고, 슈마허가 인간의 얼굴을 가진 대체기술, 적정기술을
채택하면서 생태계 법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경제의 규모를 축소하자고 주장한 것이
그와 같은 맥락에 있다.

   자연에 대한 우리 고유의 생각들

 현재 인류가 처해 있는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되는 두 개의
입장에서 과학낙관주의의 주장은 자연상태를 파괴하지 않는 기술개발이 과연
가능하겠는가를 물었을 때 역시 회의적인 답을 낼 수밖에 없으므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오늘날 부각되는 환경문제의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해답을
줄 수 있는 생각으로 생태주의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소개한 두 개의 주장은
모두 서양에서 정리된 생각의 틀이다. 오늘날의 환경문제를 초래한 사회구조의
형성에도 서양의 근대적 자연관이 개입되어 있으며 그것을 치유하자는 논의 역시
서양에서 수입된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반영하는 하나의 술어이다.
 그런데 인간은 전체 자연계의 한 구성원이며 인간을 포함한 세계는 서로 연관된
하나의 전체라는 생각은 동양 자연관의 핵심이다. 세계를 서로 연관된 것으로
파악하는 사고는 유가, 도가, 불가 등 동양의 사유를 대표하는 사상 안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
 유가의 천인합일적 사유는 자연과 인간을 같은 원리를 가진 존재로 파악하는
생각이다.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는 대자연의 원리가 인간 안에도 똑같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덕이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랑하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마음이란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살려 주려는 마음이며 더 나아가 잘 살도록 해
주고픈 마음이다. 이것은 "주역"에서 "대자연의 핵심원리는 살려 주려는
마음이다."라고 했던 것과 통한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은 어떤 한편이 우위에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들 각각은 같은 원리를 가졌으며 전체가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서로 잘 살도록 해 주는 행위를 통해 전체 세계는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으며, 그 안에 사는 인간도 아름다운 틀 속에서 빛날
수 있는 것이다.
 도가는 노자와 장자의 사상으로 대표되는 사유이다. 노자가 강조했던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이라는 개념은 절대적 가치 아래에 있는 개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 이유를 갖는 개체를 상정한 것이다. 장자가 말한 제물도 모든 존재는 그
나름의 존재 이유와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돈 많고 잘생긴 사람만이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다른 동식물에 우선하는 가치를 가지는 것도 아니며, 세계 안

존재하는 각각의 생명체는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진다는 생각이다. 지구 안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가 방해받지 않고 자기 나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계가 바로 도가에서
말하는 도의 세계이다.
 불가의 승려들은 개미 한 마리의 생명도 무심히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신발 하나 발걸음 하나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를 한다. 인연으로
결과됨 모든 존재는 상호 전화가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모두 연관되어 있다.
불가에서도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과 자연을 연관 속에서 파악하였던 것이다.
 생태주의는 서양의 산물이므로 외면하자는 의견은 과학적 태도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참고해야 할 덕목들이 풍부하게 내장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모색이 자신들의 전통 안에서 유용한 자료를 찾아 내는 맥락에서 동양적 사유를
참고한 요소가 부가되고 있다는 점은 정확히 읽어 내야 한다. 요컨대 자기 정체성을
견지한 대안 제시였다는 말이다. 한국의 환경문제는 전세계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지만 한국이라는 특수상황이 들어 있다. 따라서 문제해결의 방안도 우리 안에서
우리 식으로 모색해 보아야 한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지구환경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환경문제는 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국가간의 대화와 협력이 어떤 문제보다 절실하게 요구된
다.
선진국이 기술개발 과정에서 제3세계 국가를 효율적으로 이용(?)한 사례는 굳이
열거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산업을 자국이 아닌 지역으로
이전하여 일차적인 효과를 보았다 해도 결국 환경오염은 부분적으로 고립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명확하게 이전될 수 없다는 인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모든 국가가 한 테이블에서 대화하고 협력해야 하는 문제라는 데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 국가 안에서도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계층과 더 많은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계층이 나뉘듯이 국가간에도 그와 같은 역학관계가 작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파괴의 문제는 전 지구적인 사안이고 이것은
어느 한 지역의 노력으로 개선될 수 없다는 점이 자명하기 때문에 자국의 이익보다
우선하는 가치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전제를 들어올리지 않을 수 없다.

   동양적 자연관을 반영한 환경교육 프로그램의 개발

 모유를 먹이는 것이 좋지 않다는 최근의 보도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생존 위협의
상황을 상기하게 한다.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지, 무방비 상태로 숨을 쉬어도 되는

불안하다. 인간생활의 편리함을 보장해 준 과학기술이 오늘의 환경문제를 초래한
주범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학기술의 발달을 정지시키거나
이전의 원시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환경문제라는 두 거인의 충돌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산술적으로 계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환경문제를 최소화하여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던져진 당면의
과제이다. 이와 같은 과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생각을 그 대안으로
내놓을 수 있다.
 첫째는 세계관의 문제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기본적이며 중요한 것이다.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추진하는가는 그 사안의 향방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은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근대 자연관에 기초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오늘의 환경문제가 드러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요구된다. 유가나 도가, 불가 등에서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는 생각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도록 할 것이다. 이 세
가지로 대표되는 동양의 자연관은 우리의 전통시상이지만 한동안 잊어버렸던
생각들이다. 인간은 생태계의 한 구성원이며 전체 생태계의 균형이 유지되어야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안녕도 지켜질 수 있다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한 관점이다.
이것과 더불어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은 새로운 세계관의 모색에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세계관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일 텐데, 새로운 자연관에 기초한 환경교육
프로그램의 개발이다. 우리 나라에서 전문 환경운동단체가 조직되어 그 활동을
본격화한 것은 1982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가 설립되면서이다. 그 이후로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1986),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1987) 등이 조직되었으며
통합단체인 '공해추방운동연합'(1988)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한살림 운동'이나 '자연

친구들' 등의 모임이 생기면서 환경운동의 장이 확대되는 추세이다. 소비자보호단체나
경제정의실현연합 등의 시민 단체에서도 환경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시민운동 단체를 포함한 여러 단체들의 역할은 앞으로도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서의 환경교육은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안고 있는 환경문제의 중요함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이 시급하게 추진되어야 한다. 환경교육은 유아교육에서부터
반영되어야 한다. 인류가 공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생태계의 균형 유지는
인간중심의 개발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은 보편적인 상식이 되어야 한다. 공존의
원리를 무시하고 소수의 이익을 추구하는 무분별한 태도에 대해 견제할 수 있는
역량은 어렸을 때부터 축적된 학습에서 키워질 수 있을 것이다. 개인에 대한
환경교육으로 학습된 사람들이 힘을 모을 수 있을 때 잘못된 방향의 개발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건강한 견제세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ff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복제인간에 대해 병윤, 보라, 혜수가 토론하고 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떤지 생각

보자.

 병윤:보라야, 너 '블레이드 러너'라는 영화 봤니?
 보라:물론이지. 난 비디오로 봤지만 지난 가을 축제 때 우리 학교에서도 그 영화
상영했던 거 아니? 그 영화 화제는 화젠가 보다.
 병윤:비로소 너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 넌 그 영화를 보고 생각한 거
없니? '해리슨 포드가 불쌍해!' 그런 거 말고 말이야.
 보라:병윤아, 네가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게 있나 본데 먼저 시작해 보시지 그래.
 혜수:난 그 영화를 보지는 못 했지만, 그래, 좀 들어 보자.
 병윤:어제 철학시간 토론주제가 '우리의 미래와 복제인간'이었거든. 두 시간 내내
답도 없는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느낌이 들더라. 그 시간에 나온 이야기 중에 '블레이

러너'와 '저지 드레드'라는 영화가 들어 있었어. 둘 다 미래세계를 다룬 영화잖아. 특

'블레이드 러너'는 복제인간이 주인공으로 나오기 때문에 우리의 주제와 연관해서 더
많은 거론되기는 했지만 말야.
 보라:본론은 언제 나오니?
 병윤:넌 언제나 그렇게 급하게 굴더라. 어떤 일이든 기초가 중요한 법이야. 넌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보고서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거니?
 보라:그래,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병윤:혜수는 그 영화를 못 봤다니까 말인데 '블레이드 러너'의 중심 내용은 인간의
전쟁이나 노동을 대행하는 임무가 주어진 복제인간들의 이야기야. 그런 복제인간들을
관리하는 책임자인 주인공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복제인간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게 되면서 영화는 다른 국면을 맞게 되고, 그런 주인공
역시 복제인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에 영화는 또 한 번 반전을 하게 되지.
 혜수:와, 숨막히는 장면들이겠구나.
 병윤:물론이지. 그런데 이 영화를 통해서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뭘까?
 보라:글쎄.... 미래사회에도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를 묻는 것은 아닐까?
 병윤:그런 생각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좀더 넓게 보면 첨단의 과학문명에
적응되어 본래의 인간성을 잃어버린 '진짜 인간'들보다 더 인간적인 복제인간을 통해
과학의 발달을 추종하는 인류에게 닥칠 미래사회의 역설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혜수:보라야, 병윤이 대단한 영화평론가 같지 않니?
 병윤:내가 영화평론가 지망생이라는 거 어떻게 알았니? 그건 그렇고, 너희는
인간복제를 포함한 동물복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혜수:난 아무래도 반대쪽에 서야 할 것 같아. 인간이 대자연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

전체 생태계의 조화를 깨뜨리는 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인류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보라: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한번 생각해 봐라. 너희들 가족이나 애인이나 아무

너희에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 불치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가슴아픈
일이겠니. 그런 경우에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
사람을 치료해 주고 싶어할 거야. 그렇지? 그럴 경우에 생명복제기술을 통해 개발된
방식으로 치료하는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고 기쁜 일이겠니. 그래서 내 생각은
인간의 질병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행하는 생명복제는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해. 더
발전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혜수:그건 인간중심의 이기적인 발상이 아닐까? 난 역시 반대야.
 병윤:아무튼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난 어느 쪽에도 설 수 없을 것 같아. 더
많이 고민해야 할 숙제라는 생각이 든다.
 보라:그건 그래.
 병윤:오늘의 첨단과학이 지향하는 장밋빛 미래는 '유토피아'일 것인가. '디스토피
아'일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ff
   토론해 봅시다

 1.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으면 일이 제대로 해결될 수 없다. 마음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분명히 균형잡힌 생각이나 일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마음은
사람의 중심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성리학자들은 마음이 현상과 본질을 매개하는
창(마음은 본성과 현상을 총괄한다)이라고 설명했던가 보다. 어떤 일이나 상황에서도
'중심이 서 있는가'의 문제는 그 일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조건이다. 철학이 없는
정치행위, 철학이 없는 경제행위 등은 모두 중심이 서 있지 않은 사례이다. 세계관과
과학기술개발은 그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들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2.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상당 부분 사실을 반영한 말이다. 이
말은 유아교육의 중요성과도 연관된다. 그런데 요즈음 유아교육에서는 '놀이를 통한
학습' 개념이 많이 적용되고 있다. 음악을 듣고 뛰고 구르고 쉬는 과정에서 유아들은
재미있고 자연스럽게 어떤 학습내용을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좋은 학습 프로그램의
개발은 학습효과를 높이는 것과 직결된다. 유아교육에서 사람과 자연의 상호 연관성과
공존의 문제를 반영한 구체 적 학습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어떤 방식이 가능할지
생각해 보자.
 3. 유전자 조작에 의해 복제된 양'돌리'가 출현했고 복제인간이 출현할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고 한다. 새로운 천년을 눈앞에 둔 오늘날 과학기술발달이 가져올
미래세계에 대하 예측은 공상과 사실의 세계를 혼돈하게 할 지경이다,. 그리고 우리는
멀지 않은 미래에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게 될 지 모른다. 첨단의
과학기술이 반영된 세계로의 진전과 그 안에서의 인간의 위상은 어떻게 예견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지 않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주요 개념

 생태학, 과학낙관주의, 생태주의, 라니냐, 엘리뇨, 천인합일, 제물, 인연

   참고 문헌

 중국철학연구회, "논쟁으로 보는 중국철학", 예문서원.
 김명자, "동서양의 과학전통과 환경운동", 동아출판사.
 야마다 게이지, "주자의 자연학", 통나무.
 한국불교환경교육원 엮음, "동양사상과 환경문제", 모색.
@ff
   문명위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서양과 동양을 과학과 비과학 또는 합리성과 비합리성으로 양분하는 오류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의 마음을 일구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종덕(독일 기센 대학 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상지대 교수)

 고도의 산업문명 속에 사는 우리들은 오늘날 지나친 기계문명과 도덕의 실종에 따른
문명위기 또는 인간의 위기를 커다란 문제로 인식하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
 이 논의의 내용은 이러한 문명의 위기가 어디서부터 왔으며 이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을 포함한다. 그 원인중의 하나를 들 때, 서양과학을 자주
들먹이게 된다. 그런데 과학 자체에 그러한 책임을 지울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은
진지하게 던져야 한다.

   서양의 과학관

 과학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 한마디로 세계의 운동방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과학적 연구가 지닌 특징은 움직이고 변화하는
세계를 고정시켜 움직이거나 변화하지 않는 죽어 있는 세계로 환원시켜야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생체조직을 검사한다고 하자. 그러면 살아 있는
피부조직을 떼어서 물감을 들이고 현미경의 대물 렌즈 앞에다 놓아야 한다. 그러나
피부조직은 떼는 순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세포가 되고, 염색을 하면 원래의
모습이 사라진다. 이렇듯 서양과학의 작업은 관찰하기 위해 더 이상 숨쉴 수 없는
유리병 안에 관찰 대상을 가두어 버린 꼴이다. 이를 두고 과학에서는 고립화 작업,
이상화(idealization) 작업이라고 말한다. 철학에서는 이를 추상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러나 자연 자체는 실상 어떠한가. 항상 변화하고 항

움직이고 있지 않는가. 이와 같은 자연을 고립화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결국 자연을
추상적 대상으로 환원시키게 되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된다.
 과학적 연구과정인 고립화, 이상화 작업의 다른 실례를 들어 보자.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은 두 물체 사이의 인력을 다룬 것이다. 지구와 달 사이의 인력을
관찰하는 경우, 지구와 달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아니다. 지구와 달 이외의
천체 역시 이 두 물체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관찰대상을 지구와 달로 한정시키고
나면 다른 물체는 이 두 물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전제해야만 관찰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은 이런 가정 속에서만 의미 있는 이론인 것이다. 이러한
추상화 작업은 근대 자연과학 혁명의 정신적 뿌리라고 볼 수 있으며, 사실 이로부터
서양의 자연과학은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연현상이나 자연체 모두는
이상화시켜 연구할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서양과학은 이렇게 이상화, 고립화시킬 수
없는 자연현상들을 우연 또는 무질서라고 지칭하며 과학의 탐구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 말하는 '노이즈'(noise)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노이즈는
실험관찰 결과를 방해하거나 정확한 실험치를 저해하는 소음의 요소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그 노이즈는 귀찮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고 노이즈를 발생시키는 물리적
조건들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만약 노이즈를 무시하지 않고
노이즈의 이유를 알고자 했다면 과학의 발전은 아마도 매우 더디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자연의 노이즈를 무시하면서 근대인은 과학혁명을 완성시켰다.

   서양과학이 낳은 문명 위기

 오늘날 첨단 과학문명과 고도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비롯된 사회의 병리현상들이
많이 지적되고 있으며, 오늘의 문명위기의 책임을 과학에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이 문명위기를 일으킨 주범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오늘의
문명위기의 원인은 과학적 환원주의 등이 문제라기보다는 돌, 바람 등과 같이
죽어있는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할 환원주의가 기세등등하게도 살아 있는
자연물까지 설명하는 데 있다. 쉽게 말해서 살아 있는 생물학적 자연을 죽어 있는
물리학적 사유로 재단하는 것이 오늘의 인간위기를 자초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의
인간위기란 도덕의 위기를 말한다.
 과학주의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과학이 산업과 만나고, 그 산업을 상업화시켜
줄 수 있는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과학에 의한 문명위기는 물질만능주의가 낳은
도덕패배주의와 연결되었다. 이러한 도덕패배주의는 환원주의와 원자론이 내포하는
개인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주의는 인간의 고립을 낳았고 무서울 정도로 처절해진
경쟁사회에서 인간의 고립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어 놓았다. 결국 오늘의 인간위기는
과학 그 자체에 책임이 있다기보다는 과학이 사회화되면서 생긴 개인고립주의에
있다고 보인다. 동시에 이러한 개인주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벽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고립을 자초한 물질적 자연관에 기인한다.

   동서양의 생명에 대한 시각 차이

 그러면 이러한 인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살아 있는
자연과 내가 한 몸이라는 이해가 해결되지 않은 오늘의 인간위기에 대하여 우리는
당연히 생물학적 자연의 이해방식이 무엇인지, 자연과 인간이 함께 하는 그런
자연관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이해방식은 다양하다.
현대생물학의 발전을 통해서 과거 기계론에 의존한 물리주의 생물학의 오류를
알게되었다. 기존의 실체주의 철학의 반성을 제시한 '삶의 철학'을 통하여
생물학주의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도 있다. 자연을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방식의 살아 있는 존재로 보는 동양적 자연관에 접근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 중에서 동양적 자연관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 특히 우리 동양인에게는 주요한
접근방식이라고 여겨진다. 왜냐 하면 최근 서양에서 먼저 동양적 자연관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고, 불행하게도 우리는 서양인이 이해하는 동양적 자연관을
중역하여 읽고 있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생물학적 자연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일개미들의 특징을 살펴보자.
 일개미 무리에서는 일개미 모두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일은 일개미의
60퍼센트만 하고 나머지 40퍼센트는 일을 안 하고 있다는 보고서가 있다. 그래서 한
무리의 일개미 가운데 60퍼센트의 일하는 개미와 40퍼센트의 일하지 않는 개미들을
다시 두 집단으로 분리해 보았다. 신기하게도 일을 열심히 하던 일개미만 모여 있는
집단에서 60 대 40으로 일하는 개미와 노는 개미가 생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는
일개미만 모아 놓은 집단에서도 60대 40으로 일하는 개미와 노는 개미가 생긴다. 그들
각각의 무리에서 무슨 이유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렇게 동시에 나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 사이에 어떤 화학물질의 교환이 이루어져 역할분담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추정하고 있다. 이런 개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미시적인 자연의 생태계를 보여 주는 한 실례라면,
거시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자연은 온통 하나로 묶여 있는 생태계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동양의 자연에 대한 해석이다.
 자연과 생명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서양의 자연 이해는 자연을 분석하여 나와 멀리 떨어진 물질로서의 자연을
대상화시키는 작업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자연은 인간이
자연을 대상화시키듯 그렇게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설경이 아름다운 설악산에 올랐다고 하자. 회색빛 하늘과 더불어 펼쳐진 설풍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설악산과 산중턱 어딘가 걷고 있는 사람들과
나무들 모두는 그저 그렇게 하나의 풍경이고, 이를 바라보는 나 역시 그 풍경 속의
하나로 서 있을 뿐이다. 이처럼 어떤 것이 자연이고 어떤 것이 인간인지 구분할 수
없듯이, 인간도 자연인 그런 하나의 모습, 생명체와 무생물체의 구분도 사라진 그 모

자체가 자연인 것이다. 이는 동양의 자연미학의 중요한 지점이다.

   동양의 자연관

 유가의 인물성동이론이 있다. 인간과 사물이 하나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두 개인가
하는 논쟁이다. 인물성동이론의 논쟁핵심에 접근하기 위하여 유가의 '물'에 대한
해석을 보자. 물은 '격물치지'의 만남이다. 격물에는 세포를 대상화하여 대물 렌즈에
놓인 관찰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세포와 사람의 만남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런 만남을 '사물'이라고도 한다. 가령 학생과 선생의 관계를 보자. 학생은 배우는
자요, 선생은 가르치는 자이다. 학생과 선생 사이에 오로지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

남고, 선생은 어떤 학생이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어떤 개성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생각과 꿈을 가지고 있는지를 모르고, 학생은 선생에 대해 이런 관심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남이란 바로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 이상으로 학생과 선생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물 렌즈에 놓인 세포는 관찰대상인 것만은 분명하다. 또 렌즈를 통해 이를
관찰하는 사람은 관찰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서양이 세포와 인간의 관계를 관찰대상과
관찰자로만 놓는다면, 동양은 여기서 더 나아가 세포와 인간의 만남까지 생각한
것이다. 이럴 때 세포는 죽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관찰자인 나와 동격의
자연인 것이다. 결국 유가의 기본적인 생각은 서양처럼 사람과 사물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격리된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은 서로 만나는 (이를
인물화해의 차원이라고 하는데)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만남이란 말에는 또 이런 의미

새겨 볼 수 있다. 만남은 동격에서 이루어진다. 즉 상하관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너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만나는 것이다. 마음과 신체가 따로라는 것, 즉 심과 물이
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나 물과는 다른 차원의
영원적 존재인 신이나 부동의 존재(unmover mover)는 동양사상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맺음말

 우리는 서양과 동양을 과학과 비과학 또는 합리성과 비합리성으로 곧장 등치시켜
버리는 문명적 오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죽어 있는 기계를 다루기 위해서는 과학적
합리성이 강하게 요청되지만, 살아 있는 인간을 다루기 위하여 과학적 합리성의
잣대만을 들이대면 인간의 본직은 결국 파괴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제 동양이냐
아니면 서양이냐의 선택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서양과학은 물질적으로 더할 나위
없는 혜택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져다 준 과학의 병리현상들
때문에 과학을 무조건 거부하거나 동양의 환상을 현실화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동양의 자연관은 분명히 기계에 매몰되어가는 인간의 물질 예속화 현상을 중화시킬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치료효과를 지니고 있다.
 서양과학의 수학적 합리성은 그 자체로 자연에 접근하는 도구로서는 훌륭하지만, 그
도구를 마치 인간의 본질로서 설명하는 일은 본질과 수단을 거꾸로 하는 일과 같다.
이 점 때문에 서양과학은 그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심각해진 문명위기의
주범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과학 자체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과학의 탐구방법론을 갖고 인간을 해부하려는 무모한 모험심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곧 동양철학을 반성없이 수용하고
치장하고 신비화시키는 비뚤어진 동양환상을 스스로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하며, 동시에 동서양을 흑백논리로 구획하는 이분법적인 마음에서 과감히 벗어나
동양을 제대로 소화하려는 다양성의 마음을 계속 일궈 내야 한다.
@ff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수학은 서양의 사유방식이라 볼 수 있다. 우리가 수학에 대해 그릇되게 생각하고
있는 점은 없는지 다음의 문답을 통해 살펴보자.

 문  고등학교 때 문과반이 좋아서가 아니라 수학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싫어서 할 수
없이 문과반에 들었다고 한다. 나도 그런가? 왜 그런가? 그렇다면 자연과학은
수학이면 다 되고 인문사회과학은 수학이 하나도 필요없다는 뜻인가?
 답  고등학교 때 많은 학생들이 문과반이 좋아서가 아니라 수학이 지긋직긋할
정도로 싫어서 할 수 없이 문과반을 선택한다. 그렇다고 자연과학은 수학이면 다 되고
인문사회과학은 수학이 하나도 필요없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서양의 세계관 형성에서 수학은 자연의 세계를 기술하는 하나의 상징적 도구였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들어 수학은 전달매체의 논리적 도구로 쓰였다. 그래서 수학을
형식과학이라고 한다.
 형식과학이라고 하는 뜻은 내용과는 무관한, 내용을 담아 내는 그릇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그릇에는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이 없는
형식이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우리 교육은 내용과 형식을 구분치 못한 채, 내용
없는 형식만을 주입시키는 방법으로 이루어져 왔다. 예를 들어 군것질할 돈이 필요한
아이에게 질문을 한다고 치자. 150+250은 얼마냐 라고 묻지 않고, 150원짜리 빵과
250원짜리 과자를 사면 돈이 모두 얼마나 들겠느냐고 내용 있는 수학으로 물음은 아주
쉽게 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 교육은 형식화의 논리에 빠져 내용을 상실하고 계산기 만들기 교육에
주저 앉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학생들은 수학을 싫어하게 되고 문과와 이과의 구분이
어릴 적부터 정서적으로 나뉘어지게 되어, 과학은 복잡한 수학이라는 잘못된 편견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서양과학 혹은 더 넓게 서양문명에 대한 그릇된
오해를 낳게 하는 작은 이유가 된다. 동시에 서양은 수학적 엄밀성이고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반작용으로서 동양을 보게 되고, 따라서 동양은 수학이 없는 시의 논리라는
흑백논리가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편견과 선입관은 동양을 신비화시키고 서양만을 합리성의 원천으로 보게
하는 원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동양학을 하면 서양은 사유방식인 수학체계를 하나도
몰라도 된다는 흑백논리에 빠지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 반면에 대부분 서양학을
공부하면 사람들은 동양학을 수양의 논리정도로 인식하거나 점치는 논리로만 알게
되는 편견을 낳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를 예술적 재능을 가진 친구와 과학에 많은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한번 해 보면 서로간의 많은 대화의 갈등을 느끼게 될 것이고,
이러한 갈등표출과 함께 의견을 계속 나누다 보면 수학에 대한 선입관도 없어지게 될
것 같다.
@ff
   토론해 봅시다

 1. 동양사상은 인식이 아니라 행위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고귀한 동양의
수양론은 무엇인가?
 2. 종교는 신을 받든다. 신은 최고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은 자연법칙을
찾는 일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러면 혹시 신의 지위와 자연법칙의 지위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토론해 보자.
 3. 나는 최고의 목표를 향해 오늘도 걸어가고 있다. 그 동안 나는 그곳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려는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언젠가는 도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서
말이다. 정말 완전한 그곳, 최고의 그곳에 나는 마침내 도달하였다. 나는 이제 완전한
절대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나는 더 이상 갈 수가 없으며 움직여서도 안 된다. 그래

나, 절대자는 정지해야만 한다. 결국 최고의 진리는 정지성을 지닌다. 이 사실은
서양철학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생각이다. 그러한 초월자는 정지해 있으며
저기 멀리 존재한다. 동양에는 이러한 절대적 존재에 해당하는 존재가 있는가? 혹시
동양적 천과 서양적 신의 차이를 말해 볼 수 있는가?
 4. '서양은 과학, 동양은 정신'이라는 구호가 옳다고 보는지 자신의 현재 삶과
비교하여 생각해 보자.

   주요 개념

 환원주의, 기계론, 개인주의, 문명위기, 인간소외, 물질적 자연관, 동양적 자연관,
인물성동이론, 수학적 합리성, 동양에의 환상.

   참고 문헌

 김교빈 외, "우리들의 동양철학", 동녘.
 최종덕, "부분의 합은 전체인가", 소나무.
 장회익, "삶과 온생명", 솔.
 박동환,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 고려원.
 정재서, "동양적인 것의 슬픔", 살림.
@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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