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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5/07/26 (17:33) from 129.206.196.63' of 129.206.196.63' Article Number :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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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각·부버·본회퍼









현각·부버·본회퍼

- '나-너' 관계를 통한 "누구?"의 고찰을 중심으로 -


조익표

                                                                

1. 현각(玄覺)은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벽안(碧眼)의 선승이다. 그는 미국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나고 자라서 가톨릭 신학을 하바드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러했던 그가 멀리 한국 수유리에 있는 화계사의 스님으로 있는 것이다. 그에게 "어떤 이유로 개종했는가?"라고 물으면 그는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나는 개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때문에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2.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표면이다. 마찬가지로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표면이다. 현각에게 물었다. "당신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물음과는 무엇이 다릅니까?" 현각은 답하였다. "그 둘은 똑 같습니다."

3. 부버는 말한다, 근원어 '나-그것'은 경험의 세계를 세우며 '나-너'라는 근원어는 관계의 세계를 세운다고.
근원어 '나-너'를 통해서 세워지는 부버의 관계의 세계는 세가지 영역이 있다. 첫째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관계는 아직 어둠속에 흔들리며,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둘째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관계는 명백해지고, 언어의 형태를 취한다. 셋째는 정신적 존재들과 영원히 사는 삶이다. 여기서 관계는 구름에 덮여 있으나, 스스로 나타나고 말없이 말을 낳고 있다.(ID 9-10.)
근원어 '나-너'는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할 수 있다. 근원어 '나-그것'은 결코 온 존재를 기울여서 말할 수 없다. '나', 그 자체란 없으며 오직 근원어 '나-너'의 '나'와 근원어 '나-그것'의 '나'가 있을 뿐이다. 근원어가 말해짐으로써 하나의 존재가 세워지는 것이다.(ID 6.)
부버의 근원어 '나-너'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너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지시하며, "너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지시함을 보여준다. 부버의 근원어 '나-너'는 그 물음위에 세워져 있다. 온 존재가 기울여진 그 물음 속에서 하나의 존재가 세워진다.

4. 본회퍼는 그리스도에 관한 타당한 질문은 오직 "당신은 누구요(who)?"라는 물음 뿐이라고 말한다.(CH 38.) "어떻게(how)?"나 "무엇(what)?"을 묻는 질문은 신-인(God-man)과 마주한 질문으로는 부적합하다. 오직 "누구(who)?"라는 질문만이 가능하다. "당신은 어떻게(how) 가능합니까?"라는 질문은 뱀의 질문이다.(CH 38.) 직책을 묻는 "당신은 무엇하는(what) 분이요?"라는 질문은 "어떻게?"라는 질문의 변형이다.(CH 47-48.)

5. 본회퍼가 서양철학의 오래된 전통인 '주-객' 도식의 철학에서 벗어나 '나-너'라는 관계의 철학을 자신의 신학의 출발점에서부터 사용하고 있음은 본회퍼의 글에서 쉽게 발견된다.
본회퍼는 '창조와 타락'에서 인간의 한계선은 자기 현존의 한 가운데 있으며, 그 한계선이 지식의 나무인데 그 곳에 생명나무가 있음에 주목한다. 이러한 점에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고 한 금지명령은 은혜이다.(SF 76-78.)
마찬가지로 인간 아담에게 주신 하와역시 인간의 한계선이며 현존의 중심이다. 이러한 점에서 하와는 아담에게 은혜가 된다. 타인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식하는 것. 타인을 철저히 타인으로, 나의 곁에 서 있는 자로, 나를 제한하는 자로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나의 생명이 타인에서 유래된 것을 아는 것. 그래서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이 나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에게서 사랑받는것. 이것이 아담에게는 한계선의 육체적인 현재화였다. 한계선과 생명은 손으로 접촉할 수가 없는 것이고, 접근할 수 없는 낙원의 한가운데로서 그 주변을 아담의 생명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중심점이 형태를 입고 나타나서 하나님의 창조에 의하여 아담의 협조자가 되었던 것이다. (SF 88-91.)

6. 현각이나 부버나 본회퍼, 그리고 나는 모두 자신의 온 존재를 기울여 "누구?"라는 물음을 문제삼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 물음을 안고 살아간다. 인간의 모든 질문의 중심에는 바로 그 물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 물음이 인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한, 그 물음은 인간의 현존의 중심점을 이룬다. 그 물음이 인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한, 그 물음은 인간의 온 존재와 직면하여 던져진다. 그리고 그 물음의 끝에서 자신의 한계를 만난다. 그리고 그 경계에서 인간은 초월자와 마주친다. 그것이 하나님이든, 진여(眞如)이든.

7. 인간은 끊임없이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자신의 생(生)을 살아간다. 인간의 문제는 이것이다. 자신의 생(生)으로 그 물음에 답하지 않는 것. 다시말해 자신의 전 존재를 그 물음에 던지지 않는 것.

8. 잘못된 답변은 '나'를 대상화 시키는 것이다. 대상은 대상일 뿐이며 결코 자신이 될수 없다. 대상화를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려는 시도는 결코 결코 자신에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답변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잘못 던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지지 않는 방식으로 그 물음을 물었기 때문이다. 그 잘못된 방식 속에서 "누구?"는 "어떻게?"나 "무엇?"으로 변형된다.

9. 인간의 인간다움은 자신을 대상화할(objectify)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인간은 '반성(reflection)'의 능력이 있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반성은 자신을 대상화할 능력속에서만 이루어진다. 바로 이 능력이 인간의 인간다움의 한 근거이자 비극의 씨앗이다. 바로 그 능력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암울한 숙명(宿命)과 마주친다. 인간이 자신을 대상화 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대상들'이 필요하다. 대상화는 자신과 타자를 분리시킴으로써 수행된다. 자신을 대상화시키는 것은 타자를 대상화 시키는 것과 동시에 수행된다. 인간이 자신을 대상화 할 때부터 그는 자아(ego)를 가진다. 자아는 대상화된 인간의 또다른 이름이다. 자아를 가질 때부터 인간은 자신의 눈이 밝아짐을 인식한다. 자아를 가지기 전의 인간은 어두움의 상태에 놓여있다. 성철(性徹)은 자아를 가지기 전의 어두움의 상태를 불교의 유식론에서 말하는 '무명(無明)'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다른 대상을 지배(control)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 때부터 지식은 시작된다. 인간이 말하는 지식이란 대상을 지배(control)한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지식은 분리하는 힘이며, 분리는 지배의 원리이다. 불교는 이 지식을 분별지(分別知)라고 한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지식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아담의 눈이 밝아졌다고 말한다. 불교는 인간의 고통을 분별지에서 찾고, 분별지를 넘어서는 것에서 열반(涅槃)을 발견한다. 기독교는 인간의 타락을 지식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일에서 찾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발견한다.

10. 인간은 지식을 필요로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지식을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 물음에 대한 답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호기심은 근본 물음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것은 인간의 근본에 위치하고 있다. 그 어떤 호기심이라도 그것이 근본 물음에 대한 대답에의 욕구라는 점에서 하찮은 것은 없다.

11. 인간이 근본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마련한 지식의 체계는 이제 사뭇 방대하여져서 그 체계가 한 개인의 시야에는 잘 잡히지 않는 정도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제 인간은 그 방대한 지식이 마치 근본 물음에 대한 대답인 양 착각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많은 인간들은 저 근본 물음을 인간의 역사가 축적한 지식에 의존하며, 그 지식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방대한 지식의 체계가 과연 저 근본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데 있다. 지식의 체계는 그것이 아무리 방대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대상화된 지식인 이상 결코 근본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12. 예를 들어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 물음은 현대인에게 진화론이라는 생물학적 신념체계로 흔히 대체되고 있다. "여기-지금-살아 있는-정신"이 "저기-과거에 놓여 있는-죽은-물질"로 대체된다. 진화론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의 근본 물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생물학이 인간의 근본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나'를 대상화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며, 대상화된 '나'속에는 '누구(who)?'라는 질문은 들어 있지 않다. 나를 대상화하는 질문은 '누구(who)'를 '어떻게(how)'나 '지위(what)'로 대체하는 것이다.
부버는 이러한 대상화를 또 하나의 근원어인 '나-그것'에서 찾는다. 그러나 대상의 영역인 '나-그것'은 '나'와 '세계'가 맞닿아 있음을 지시할 뿐이다.(ID 7.) 다양한 대상으로 둘러싸인 '나'에게는 과거가 있을 뿐이며 현재가 없다. 대상의 본질은 '있었다'고 하는 데 있는 것이다.(ID 18.)
세계의 기원을 묻는 모든 질문도 또한 '나'를 거슬러 올라가서 근본 물음에 대답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세계의 기원에 관한 질문이 세계를 대상화할 때에는 잘못된 대답을 산출한다. 모든 자연과학이, 또한 인간의 경험을 문제삼는 철학이 그러하다. 모든 자연과학은 대상의 세계를 파악함으로써 '나'에 관한 답변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며, 철학 역시 인간과 세계를 구명(究明)하려는 한 '나'에 관한 답변을 시도하는 것이다. 싸이언스(science:학문)의 정당성은 '나'에 관한 답변을 시도한다는 데에 있다. 문제는 어떻게 대상화 하지 않고, '누구(who)'라는 질문을 바꿔치기하지 않고, 답하는가에 있다.

13. 유치환은 이러한 인간 지식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나의 독한 知識(지식)이 삶의 懷疑(회의)를 求(구)치 못할 때/ …… / 너는 저 아라비아 砂漠(사막)으로 가라" 삶의 회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 물음에 대한 모든 답변의 시도가 실패로 끝날 때 얻는 것이다. 아라비아 사막은 모든 것을 태우는 불타는 태양이 작렬하는 곳이며, 해골이 뒹구는 바로 그 곳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대면한다. 인간은 그곳에서 다시금 "나는 누구인가?"라는 저 근본 물음과 맞부딪치는 것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전 존재를 걸고 근본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

14. 인간은 많은 사물들로 둘러싸여있다. 인간은 세계와 맞닿아 있다. 이것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사물을 대상화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닌가? 왜 사물을 대상화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사물을 대상화하지 않는다면 어떤 다른 방법(way)이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놓고 현각도 부버도 본회퍼도 고민했을 것이다. 나도 이러한 질문을 놓고 오랫동안 고민했었다. 그리고 부버도 본회퍼도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마련했고 그 길(way)로 자신의 삶을 매진했을 것이다. 현각도 그리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리하고 있다. 나는 아직 현각에게는 그 길을 묻지않았으므로 그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같은 길을 걸었던 선승(禪僧) 성철에게서 현각의 대답에 갈음할 어떤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부버나 본회퍼에서는 그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자, 이제부터 그 대답을 따라가 보자.

15. 관계성으로 세계를 파악하려는 모든 시도는 관계성 속에 사라져가는 주체(subject)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주-객 이원론의 도식속에서 제기되는 문제이다. 주체의 이름은 '나'이고 객체의 이름은 '그것(대상)'이다. 주-객 이원론은 대상화의 정당성과 맞물려 있기 마련이다. 문제제기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의 형식으로 주어진다.
주체는 사물의 대상화를 통해서만 성립한다.
사물을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주체는 성립해야 한다.
따라서, 주체는 성립하지 않거나, 사물을 대상화하거나 이다.
현각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나-너' 관계속에서 묻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똑같은 질문이라면, '나-너'의 관계성 속으로 주체로서의 '나'가 사라진다는 문제를 해명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누구(who)'를 찾아 나섰는데, 바로 그 목적인 '누구(who)'가 사라진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대상으로서만 취급하는 데 반대하는 논의는 주체의 상실이라는 문제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 부버도, 본회퍼도,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한 아주 흔한 잘못된 대답이 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단순한 하나됨을 말하는 것이다. 단순한 하나됨은 여전히 주-객 도식의 범위 안에서 머물러 버리는 함정이다. 단순한 하나됨이 결과하는 것은 '나(주체)'의 상실이다.

16. 불교에 관한 흔한 오해는 모든 것이 부처이고 따라서 모든 것의 개체적 동일성이 상실된다고 보는 오해이다. 그러나 불교의 유식설을 간단히 살펴보아도 반드시 개체적 동일성이 상실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식설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근본 무명인 제8식(藏識)을 가지고 있다. 근본 무명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기반일 수 있다. 그러나 제7식(末那識)으로 제6식(意識)으로 전5식(前五識: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등의 다섯가지 識)으로 이어지는 것은 개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열반이란 근본 무명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덟가지 식이 모두 청정(淸淨)한 자성(自性)임을 깨닫는 것이며 여덟가지 식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므로, 개체적 동일성을 상실하는 것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백일上 271-275)

17. 부버는 이렇게 말한다.
근원어 '나-그것'의 '나'는 독자적(獨自的) 존재(Eingewesen: 개적(個的) 존재)로서 나타나서 자기를 (사물을 경험하고 이용하는) 주체(Subjekt)로서 의식한다. 그러나 근원어 '나-너'의 '나'는 인격(person)으로 나타나고 자기를 (소유격이 없는) 주체성(Subjektivit t)으로 의식한다. 독자적 존재는 다른 여러 독자적 존재에 대하여 자기를 분리시킴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격은 다른 여러 인격과의 관계에 들어섬으로써 나타난다. 한쪽은 자연적인 분립의 정신적 형태이고, 다른 쪽은 자연적인 결합의 정신적 형태이다. 자기 분리의 목적은 경험과 이용이며, 경험과 이용의 목적은 인생의 전기간에 걸친 죽음이다. 관계의 목적은 관계 자체, 곧 '너'와의 접촉이다. 왜냐하면 모든 '너'와의 접촉에 의하여 '너'의 숨결, 곧 영원한 삶의 입김이 우리를 스치기 때문이다.(ID 83.) 모든 것에서 우리는 '영원한 너'의 나부낌을 느끼며, 모든 '너'라는 말에서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영원한 너'를 부른다.(ID 134.) 뭇 관계의 연장선은 '영원한 너' 안에서 서로 만난다.(ID 97.)
인격은 자기 존재의 특수성을 포기해버린다는 말이 아니다. 이 특수성이 인격에게는 다만 그가 의거할 시점(視點)이 아니라는 것 뿐이다. 개적(個的) 존재가 자신의 특수성에 탐닉하는 것과는 달리, 인격에게 있어 특수성이란 다만 거기에 있어서 존재의 틀을 이루고 있는 필요하고도 뜻깊은 것일 뿐이다.(ID 85.)

18. 본회퍼에게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나-너' 관계이다.
하와는 아담의 한계선이며, 현존의 중심이다. 낙원의 중심에 한계선으로서의 지식의 나무와 생명으로서의 생명나무가 나란히 서있다. 이 두 나무는 만져질 수 없다. 생명을 손대는 자는 죽게 되어 있다. 하와는 이 중심이 형태를 입고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중심은 인간의 협조자가 되었다. '너(타인)'는 하나님이 '나'에게 설정해 놓은 한계선이다. 나는 그 한계선을 사랑하고, 그 한계선을 사랑하기에 내가 넘어가지 않을 선이었다. '너(하와)'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나(아담)'과 관련된 존재이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홀로가 아니고 서로이다. 그들은 하나이고, 그러면서도 둘이다. 그래서 서로다. 그들은 원천에서부터 하나가 되었으며, 하나가 될 때 비로소 그들은 다시 원천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가 되는 것은 결코 둘을 혼합시키는 것도 아니고 개인으로서의 그들의 피조성을 폐지시키는 것도 아니다. 서로 소속된 관계를 가능한 한에서 궁극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그들의 상호 소속된 관계는 그들의 서로 다른 존재위에 바로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SF 89-90.)

19. 16항, 17항, 18항의 논의는 관계 속으로 와해되는 주체의 문제를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논의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위의 논의들은 모두 관계성으로 와해되는 주체를 해명하는데 다른 어떤 것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성(自性)'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한 너'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각각 표현되고 있다. 위의 논의들은 새로이 등장한 이러한 이름들에 대하여 해명해야 한다. 다시말해 이러한 이름들의 현실성에 관하여 해명해야 한다.

20. 서양의 철학은 '존재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언명에 그 주류를 두고 있다. 여기서 '존재한다' 는 말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동한다'라는 말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유동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이 유동하는 현실세계의 배후의 형상을 존재로 본 것은 존재는 정지해 있다는 파르메니데스의 개념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사고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거치면서 서양철학사를 관통한다. 다시말해 서양의 철학은 존재론적(ontological)이다. 화이트헤드의 말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이다"는 서양철학의 존재론적 경향을 시사한다. 유동의 세계를 다루는 헤라클레이토스는 서양철학에 있어서는 비주류였다. 기독교 신학은 어거스틴 이래로 신 플라톤 철학에 근거한 중세 스콜라철학에 힘입어 발전하는데, 비록 신 플라톤 철학이 플라톤 철학과는 다르다고 할 지라도 그 존재론적인 경향에 있어서는 같은 맥락에 속한다. 이러한점에서 서양의 기독교 신학은 존재론적 역사를 견지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존재론적 전통속에서 실체란 의존적이지 않은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상호의존적인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나-너'관계의 도식은 전통적인 '주-객' 도식의 서양철학의 주요 흐름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21. 불교는 그 근본을 상호의존설(interdependent theory: 然起說)에 두고 있다. 모든 존재는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너'관계의 도식은 불교에서는 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었고 아주 오랫동안 탐구되어온 것이다. '나-너' 관계의 도식이나 그에 따르는 문제점을 파악하는 데에는 불교의 관계성의 개념들을 살펴보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된다. 따라서 불교의 개념들을 상세히 살펴봄으로서 '나-너' 관계와 그에 대한 서양철학의 반론인 '관계속으로 와해되는 주체'의 문제에 관한 계속되는 해명에 접근해보기로 하자. 지금,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자성(自性)'이란 무엇인가?

22. 성철은 자성(自性)이 곧 법성(法性)이며 불성(佛性)이며 진여본성(眞如本性)인데 그것은 중도(中道)를 말한다고 한다.(백일下 366.) 그렇다면 중도(中道)란 무엇인가?
중도(中道)란 쌍차쌍조(雙遮雙照)라는 말로 대표할 수 있다. 현실세계란 전체가 상대모순(相對矛盾)으로 되어있는데 있음과 없음, 옳음과 그름, 선과 악, 너와 나, 괴로움과 즐거움 등등이다. 현실세계는 이 양변(兩邊)의 모순과 대립, 투쟁의 세계이므로 참다운 평화의 세계를 이루려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양변을 버려야 한다. 이렇게 양변을 버리는 것을 쌍차(雙遮)라 한다. 또 양변을 다 버리게 되면 두 세계를 다 비추게 되는데 이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세계는 유무(有無), 시비(是非), 선악(善惡), 아타(我他), 고락(苦樂)이 상통(相通)하는 세계이며, 불이(不二)의 세계인 것이다. 이렇게 양변을 다 비추는 것을 쌍조(雙照)라 한다. 그러나, 중도를 무슨 양변의 가운데를 취하는 것으로 본다면 큰 오해이다. 중도사상을 통해서 '양변의 가운데로서의 중도'를 말해 본다면 '양변의 가운데도 양변도 버리고(쌍차), 양변도 양변의 가운데도 다 비춘다(쌍조)'가 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석가의 말씀으로 알려진 초전법륜(初轉法輪)에서도 "출가자(出家者)는 이변(二邊)에 친근치 말지니 고(苦)와 락(樂)이니라"로 함으로 중도(中道)사상을 천명하였다.  부처란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을 말한다. 불교의 근본이치는 중도사상에 있는 것이다. (백일上 51-84.)
중도(中道)사상은 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사성제와 연기설과의 관련속에서 밝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무명(無明) 내지 노사(老死)의 12연기(然起)를 순관하여 생(生)하므로 생(生)한다에 도달하는 것이 사성제중에 집(集)제이고, 12연기를 역관하여 멸(滅)하므로 멸(滅)한다에 도달하는 것이 멸(滅)제에 해당한다. 무명 내지 노사가 있으니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여 있으므로 무명 내지 노사에 이르는 하나 하나의 개체는 없는 것이 되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세계의 근본을 관계(關係)에서 찾을 것인가 실체(實體)에서 찾을 것인가라는 대립항은 변견(邊見)에 사로잡힌 견해라 아니할 수 없다. 중도사상은 세상의 상호의존성(相互依存性)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중도의 근본을 이루는 무명 내지 노사에 이르는 12연기는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12인연은 서로 의존되고 있으므로 순서대로 하나가 있음으로서 다음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므로 있음(有)이요, 반대로 하나가 없음으로서 다음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므로 없음(無)이니 있음(有)에 집착해서도 없음(無)에 집착해서도 안되고,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니'지만 '있음(有)이면서 없음(無)'이라 할것이다. 이것이 비유비무(非有非無) 역유역무(亦有易無)의 중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연기자체는 불생불멸하므로 '항상 그러한 것(眞如本體)'이다. (백일上 87-126.)
공(空)사상 역시 중도사상의 맥락속에 있는 것으로서, 공(空)이란 있는 것이 없어짐으로써 생기는 공(空)이 아니다. 그러한 공(空)은 단멸공(斷滅空)이라 하여 중도사상과는 전혀 반대가 되는 것이다. 중도사상에서 본 공(空)은 그 본성이 공한 자성공(自性空)으로서 차조동시(遮照同時)의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다. 화엄종의 현수(賢首)는 진공과 묘유를 각각 4가지의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진공(眞空)에 관한 네가지 뜻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색(色)이 드러나고 공(空)이 숨어버리는 것인데, 공(空) 이대로가 전체적으로 색(色)이기 때문이다. 둘째, 색(色)이 다하면 공(空)이 드러난다는 것으로, 색(色) 이대로가 전체적으로 공(空)이기 때문이다. 셋째, 공(空)과 색(色)이 둘 다 존재하는 것으로, 쌍조(雙照)라는 측면에서 보면 공(空)과 색(色)이 서로 막히지 않고 통해 있기 때문이다. 넷째, 색(色)과 공(空)이 함께 사라진다는 것으로, 쌍민(雙泯)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색(色)이 공(空)이므로 색(色)이라 할 수 없고 공(空)이 색(色)이므로 공(空)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묘유(妙有)에 관한 네가지 뜻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공(空)이 드러나고 색(色)은 없어지는 것이고, 둘째는 색(色)이 드러나고 공(空)은 없어지는 것이며, 셋째의 구존(具存)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으로 색(色)과 공(空)이 분명하기 때문이요, 넷째의 구민(具泯)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으로 색(色)이라 해도 안되고 공(空)이라 해도 안되기 때문이다. 결국 진공묘유의 내용은 전체가 구존과 구민으로 쌍차쌍조이며 진공이라 해도 쌍차쌍조가 되고 묘유라 해도 쌍차쌍조가 되는 것이다. (백일下 98-102.)

23. 중도사상의 맥락 속에서 자아(自我)와 그에 대립되는 여여한 법(法)에 관한 견해를 화엄종(華嚴宗)의 십종교판(十宗敎判)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화엄십종판은 현수가 석가의 49년 설법을 다모아서 중도와 가깝고 멀고에 따라 열가지 종(宗)으로 나누어 교리의 깊고 얕음을 논한 것이다.(백일下 156-157.) 그 열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아와 법이 다 있다는 견해. 둘째, 법은 있고 자아는 없다는 견해. 셋째, 법은 과거와 미래에는 없다는 견해. 넷째, 법은 현재에만 있는데, 실(實)과 가(假)가 있다는 견해. 다섯째, 세속법(世俗法)은 허망한 것이고, 출세간법(出世間法)은 진실하다는 견해. 여섯째, 모든 법은 단지 이름 뿐이라는 견해. 일곱째, 삼성(三性)이 공(空)하거나 유(有)하다는 견해. 여덟째, 참으로 공(空)하여 모습을 끊었다는 견해인데, 마음과 경계의 양쪽이 사라짐이 바로 실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라는 견해. 아홉째, 공과 유가 장애가 없다는 견해인데, 서로 원융(圓融)하여 쌍으로 단절되었으면서 양쪽이 존재함을 가로막지 않아 진여가 인연을 따라 갠지스강의 모래같은 덕을 구비하기 때문이라는 견해. 열째, 원융하여 덕을 구비한 견해로서, 말하자면 사사무애(事事無碍)하고 주체와 객체가 구족(具足)되어 끝없는 연기가 자재무애하다는 견해. 위의 열가지 견해중에서 화엄종은 여덟째의 돈교(頓敎)와 아홉째의 종교(終敎)를 융합하여 이 바탕위에서 열째의 화엄원교(華嚴圓敎)를 성립시킨다.(백일下 156-163.)

24. 중도사상을 근거로 '나-너' 관계를 살펴보면 '나'도 없고 '너'도 없으며(쌍차), 또한 '나'도 있고 '너'도 있다는(쌍조) 견해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서 '나'와 '너'를 분리하는 것이나 '나'와 '너'를 하나로 통합해 버리는 것은 변견에 사로잡힌 견해이다. '나'와 '너'가 진공(眞空)이면서도 묘유(妙有)인 그러한 '나-너'인 것이다. 중도로서의 '나-너'는 주체(나)와 객체(너)가 구족(具足)되어 진공묘유하고 원융무애한 '나-너'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모든 것이 공(空)으로 빠져 주체성이 상실된다고 말하는 것은 오해라고 할 수 있다. 주체성이 상실된다고 할 때의 그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그 자체가 미망(迷妄)이다. 자성(自性)이란 주체와 객체가 진공묘유 속에서 구족되며 원융무애한 중도 그 자체인 것이다.

25. 부버에게 있어서 '나'라는 것은 두가지 근원어로서 이해된다. 하나는 '나-너(Ich-Du)'이며, 또 하나는 '나-그것(Ich-Es)'이다. 주-객 도식에 의한 '나'는 '나-그것'의 범주에 속하며, '나-그것'이 근원적인 것이다. 그러나 부버의 '나'에서 근원적인 것은 '나-너'이다. '나-그것'은 자기를 '나'로 인식함으로써, 즉 '나'의 분리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나 '나-너'는 자기를 '나'로 인식하기도 전에 말하여진다. '나-그것'은 '나'와 '그것'의 합이다. 그러나 '나-너'는 '나'와 '너'의 합이 아니다.(ID 32.)
부버는 태아로부터 유아에 이르는 단계를 고찰하면서 관계의 아프리오리를 말한다. '나-너'는 아프리오리적 관계를 포함한다. 태초(太初: 처음)에 관계가 있다. 관계는 존재의 범주, 준비, 파악의 형식, 혼(魂)의 주형(鑄形)이다. 그것은 '생득적(生得的) 너(das eigeborene Du)'이다.(ID 35-40.) 결국 관계의 아프리오리, '생득적 너'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삶은 자신의 관계체험을 기억함으로써 사물을 공간과 시간 안에서의 인과적 연관속에 두게 되며, '그것'을 말하게 된다. 오직 그것만이 질서있게 배열될 수 있다는 것은 인간 세계의 근본 진리의 하나이다.(ID 42-43.) 이러한 고찰을 통해서 부버는 다음의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의 세계는 공간과 시간 안에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너'의 세계는 공간과 시간 안에서 아무 연관도 없다. 낱낱의 '너'는 관계 사건이 끝나면 하나의 '그것'이 될 '수 밖에 없다.' 낱낱의 '그것'은 관계 사건 속에 들어섬으로써 하나의 '너'가 될 '수 있다.'(ID 47.)
부버의 근원어 '나-너(Ich-Du)'는 이 세계에서는 또다른 근원어 '나-그것(Ich-Es)'로의 변환이라는 운명에 놓여있다. 왜냐하면 부버는 우리의 세계가 '나-너'와 '나-그것'의 이중성 속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계는 모든 '너'가 '그것'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 지닌 숭고한 우수(憂愁)이다.(ID 24.) '그것(Es)'은 영원한 번데기요, '너(Du)'는 영원한 나비이다. 다만 이 둘은 언제나 서로 명확하게 분리되는 상태가 아니라 때로는 깊은 이중성 가운데서 어지러이 뒤얽혀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ID 25. 밑줄은 필자) 그렇지만 부버에게 보다 근본적인 것은 '너'이다.
"인간은 순전한 현재 속에서는 살지 못한다. 순전한 현재를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극복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현재는 사람을 마멸시키고 말 것이다. 그러나 순전한 과거 속에서는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 과거에 있어서만 삶은 정리될 수 있다. 사람은 다만 모든 순간을 경험과 이용으로 채우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러면, 순간은 (결코) 다시는 타오르지 않는다. 그리하여 진리의 모든 진지함으로 말하노니, 그대여, 사람은 '그것'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ID 48. 괄호 안은 필자.)"

26. 부버의 '나-너'는 위와 같은 운명적인 이중성 속에 놓여짐으로써 세계와의 관계속에 사는 삶속에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부버의 '나-너' 관계속에서는 '나'의 완성이란 없으며, 궁극적으로 '나'의 없음으로 몰락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여기서 부버는 영원한 삶의 숨결을 주는 '영원한 너'를 통해서 '나-너'의 완성을 말한다.
뭇 관계의 연장선은 '영원한 너' 안에서 서로 만난다. 모든 낱낱의 '너'는 '영원한 너'를 들여다보는 틈바구니다. 낱낱의 '너'를 통하여 저 근본어는 '영원한 너'에게 말을 건다. '영원한 너'는 본질적으로 '그것'이 될 수 없는 '너'이다. '생득적 너'는 오로지 본질적으로 '그것'이 될 수 없는 저 '너'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에 있어서만 완성된다.(ID 97.)
여기서 '생득적 너'는 모든 관계의 아프리오리이며, 나와 대면하고 있는 사람인 '너'보다 앞서는 근원적인 '너'인데, 부버는 바로 이 '생득적 너'가 '영원한 너'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이 '영원한 너'는 다양한 이름을 가져왔고, 또 가질 수 있지만 부버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한다.(ID 97-99.) 부버에 의하면 인간은 이 '영원한 너'라는 근원적 관계를 통해서 '나'를 완성하는 것이다. '영원한 너'는 '완전한 타자'이며, 동시에 '완전한 자기'이다. 그는 나타나고 압도하는 두려운 신비이며, 또한 '나'의 '나'보다도 나에게 가까이 있는 자명한 것의 비밀이다.(ID 103.) '영원한 너'는 우리에게 직접 그리고 우선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마주 서 있는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너'는 정당하게는 오직 부를 수 있을 뿐, 진술될 수 없는 것이다.(ID 106. 밑줄은 필자.)

27. 그렇다면, 부버는 '영원한 너'를 끌어들임으로써 '나'를 '영원한 너'에게 의존하려는 것은 아닌가? 또, 신비주의로 도망치는 것은 아닌가? 부버는 이러한 순수한 관계를 의존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관계를 비실재화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신적인 것의 합일로 몰입되는 것도 관계의 실재성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너요, 너는 나다'라고 하는 신비주의도 비실재화라고 한다. 부버에게 비이원성(非二元性)이 반드시 일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참된 관계는 개별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개별화는 관계의 기쁨이다. 왜냐하면 오직 개별화되어 있음으로 해서 다른 자를 서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별화는 관계의 한계이다. 왜냐하면 개별화되어 있음으로 해서 타자를 완전히 인식하는 일도 인식되는 일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한 관계에 있어서 나의 '너'는 나의 '자기'로 존재하지 않으면서 나의 '자기'를 품으며, 나의 제한된 인식은 무제한으로 인식되는 경지로 승화된다.(ID 131-133.) 참된 관계속에서 '영원한 너'는 현실이 된다.

28. 부버가 인간과 세계의 현실로부터 '나-너' 관계에로 또 '나-너' 관계로부터 '영원한 너'인 하나님에게로 접근하고 있는데 반해서 본회퍼는 '하나님'으로부터 성육하신 하나님인 그리스도로 '그리스도'로부터 '나-너'관계에 놓인 인간의 현실로 접근한다. 인간은 궁극적인 것으로서, 새로운 것으로서,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에게서 밖으로 나와야 했다. 인간과 하나님의 본래적인 관계를 상실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는 중요하다.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직접 인간이 알려고 한다는 것은 절망적인 시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만 태초의 인간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도는 절망적인 것이다.(SF 50.) 본회퍼에게 '나-너' 관계는 인간의 피조성의 근거이다. 인간은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본래 복수(남자와 여자)로 (창조) 되어 있다.(SF 53. 괄호 안은 필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위하는 존재'로 자기 자신을 증언하는 하나님인 한에서는 홀로 존재하는 분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점에서 본회퍼에게 '인간은 본래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피조성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인간과 하나님과의 이 유사성은 존재의 유비가 아니고 관계의 유비가 된다.(SF 53.)

29. 부버에게 '나-너'의 관계가 자연까지를 포함함에 반해서 본회퍼에게 '나-너'관계는 자연까지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본회퍼에게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자유라는 개념에 근거한다. 인간이 타인을 위하여 자유롭게 된다는 점에서 타인에 대한 인간의 자유가 성립하는 것과 같이, 다른 피조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자유는 그런 세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곧 인간은 피조된 세계의 주인이며, 그는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SF 54.) 인간에게 이 세계가 굴복된 것은 비록 인간이 이 세계에 결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인이 자기의 종에게 결속되고 농부가 자기의 대지에 결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SF 55.)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통치의 위탁과 능력을 부여받은 자의 위치이다.(SF 54.) "타자를-위하여-자유롭게-되는-것"이 없이는 "무엇으로부터-자유롭게-되는-것"도 없으며, 하나님께 대한 봉사가 없이는 어떠한 통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없고, 형제(너)가 없으면 인간은 대지를 잃는다.(SF 56.) 비록 본회퍼가 '다른 종교의 역사에서는 어디에서도 이렇게 동물에 관하여 깊은 관계를 말하는 곳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라도, 여전히 동물은 인간에게 굴복된 피조물이며 협조자로서의 형제는 아니다. 협조자로서의 피조물은 '하와(너)'인 것이다.(SF 88-89.)

30. 본회퍼에게 하나님의 현실성은 그리스도를 통한 현실성이며, 이는 '나-너' 관계라는 본래적 관계유비의 은총을 통해서 인간에게 현실화된다. 본회퍼에게 타락은 인간이 본래적 은총으로서의 피조성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나-너' 관계를 벗어나 자신의 한계선을 침범한 것이며, 하나님 처럼 된 것이다.(본문 18항 참조) '하나님의 어린양'은 '하나님 처럼 된 인간'의 희생 제물이 되었으며, '하나님 처럼 된 인간'의 거짓된 하나님 존재를 순수한 하나님 존재 속에서 죽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신-인(그리스도)이다.(SF 107.) 그리스도의 십자가 기둥은 낙원의 중심인 생명나무이다.(SF 14.) 바로 그곳에서만 '나-너' 관계가 인간의 본래적 현실이 된다.

31. 19항으로부터 30항까지의 논의는 관계속으로 와해되는 주체의 문제에 관하여 보다 폭넓은 시각 속에서 살펴 본 것이다.
관계의 세계는 생성 속에서만 현실화된다. 관계의 세계는 철처한 현재에 살고 있다. 관계는 생성을 말하는 또다른 방식이어야 한다.
주체와 객체, 존재와 생성, 있음과 없음, 등의 대립항 속에 있는 각각의 전자(前者)들과 후자(後者)들은 관련성을 가지고 설명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 주체-존재-있음 대(對) 객체-생성-없음. 인간의 인식에 재빨리 호소하는 것은 전자(前者)이다. 인간의 인식은 존재에 쉽게 매료된다. 이때에, 비존재의 중요성은 '존재가 없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 생성으로서 세계를 보려고 하는 시도는 존재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는 인간의 인식에 칼을 들이댄다. 이때에, 비존재의 중요성은 그 자체로서 인정된다. 문제는 인간의 경험을 분석할 때, 존재도 생성도 모두 인정해야함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와 생성의 배타적 대립이 해소되는 설명의 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32. 아주 쉽게 다음의 네가지 도식이 얻어진다. 첫째, 존재가 생성에 앞선다는 도식. 둘째, 생성이 존재에 앞선다는 도식. 첫째와 둘째 도식은 비록 존재와 생성 모두를 인정한다 할 지라도, 존재와 생성의 구분성을 강조하는 데서 분화된 것이다. 존재와 생성의 동일함을 강조하는 데서 셋째와 넷째 도식이 분화된다. 셋째, 존재도 생성도 그 동일함 속에서는 그 자체가 아니라는 도식. 넷째, 존재도 생성도 그 동일함 속에서는 있다라는 도식.
성철은 셋째와 넷째의 도식을 중도라고 본다. 존재와 생성이라는 대립항은 더이상 대립으로 남아있지 않다.
부버는 생성이 존재에 앞선다. '처음에 관계가 있다.(ID 39.)' 존재는 생성을 기반으로 한다.
본회퍼는 '나-너' 철학을 사용하므로, 역시 생성이 존재에 앞선다. '관계로서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다.(SF 53.)'

33. 문제는 생성의 현실인 철저한 현재이다. 인간의 경험속에서 거의 포착(捕捉)되지 않는 '현재'를 어떻게 잡아내느냐 하는 것이다.

34. 성철은 마음을 깨치는 것이 부처라고 한다. 견성(見性: 마음을 깨치는 것)이 곧 성불(成佛)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깨치는 것은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철저한 실천이다. 선종(禪宗)은 마음을 깨치는 일을 근본으로 하여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주창한다. 교외별전이란 교리외에 따로 전하는 이론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깨침은 이론으로 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외별전(敎外別傳)은 불립문자(不立文字)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선종은 마음을 깨치는 것이 목표이므로 마음 안으로 들어가야하며, 그 방법이 바로 참선(參禪)이다. 마음을 깨치는 일은 찰나간(頓)에 일어나는 일이다. 깨치는 일은 철저히 찰나에 있다. 다시말해 깨치는 일은 철저한 현재에 속해있는 것이다. 성철은 철저히 돈오(頓悟: 찰나간에 깨우침)를 추구한다. 돈오야 말로 현재를 잡아내어 모든 문제를 잠잠(寂滅)케 하는 길이다. 바로 거기에서 모든 문제들은 원융무애하다. 참선이라는 방법은 마음 안을 향하여 과거와 미래를 끊고 철저한 현재에 살아있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존재를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이다. 자성을 깨치는 것이 마음을 깨치는 것이니, 자신의 모든 존재를 던져 철저한 현재에 살아있는 자성에 접근한다. 그것은 다음의 물음을, 오직 다음의 물음만을, 철저한 현재 속에만 살아 있는 다음의 물음을, 자신의 모든 존재를 모든 집착으로부터 끊어버리고, 자신의 모든 존재를 철저한 현재에 던져 묻는 것이다. 그 물음에 실린 무게는 온 세계요, 온 우주이다. 그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바로 이 물음이 지금도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용맹정진하고 있을 현각(賢覺)이 자기의 모든 무게를 실어 싸우고 있을 바로 그 물음이다. 나는 현각이 그 싸움에서 찰나를 잡아내기를 기원한다.

35. 부버는 '나-너'의 만남이 얼마나 순간적인지 잘 알고 있다. '나-너'는 근본적으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아무 연관도 없는 현재이며, 새로움이다. '너'는 언제나 '나'에게 새롭게 나타나는 현재이다.(ID 46.) 정신은 철저한 현재의 순간에서만 살아있다. 정신은 '나'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것이다. 정신은 '나' 안을 돌고 있는 피가 아니라, '나'와 '너'가 함께 호흡하는 공기이다.(ID 52.) 모든 낱낱의 '너'가 얼마나 쉽게 '그것'으로 변하는가. 정신의 태양은 떠오르자마자 져버리며, 빛나는 '너'는 나타나자마자 곧 사라져 버린다. '그것'의 세계의 연속성은 얼마나 강력하며, '너'의 나타남은 (그 연속성에 비해) 또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 '너'를 보고서야 비로소 나는 '나'가 '나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사물중의 하나가 사물로부터 해방되어 말을 거는 시간, 다시말하면 '그것'이 나에게 있어 완전한 '너'가 되는 시간처럼 짧은 것은 없다.(ID 129-130. 밑줄, 괄호 안은 필자.) 부버에게 완전한 '나'가 실현되는 것은 '너'를 만나는 순간일 뿐이다. 그 짧은 순간 이외의 모든 시간들 속에서 완전한 '나'는 오직 가능태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모든 낱낱의 '너'와의 관계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36. 그렇다면 어떻게 그 '순간'이 지속될 수 있는가? 부버는 그것을 '영원한 너'와의 만남을 통해서 풀어간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의 만유를 포괄하는 관계에 있어서만은 가능태도 현실태이기 때문이다.(ID 130. 밑줄은 필자)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본래적인 비유이다.(ID 136.) '영원한 너'는 모든 관계를 꿰뚫고 빛나는 하나의 현재를 '나'에게 준다.(ID 134.) 사람은 그 현재를 받아들인다. 그 현재는 관계의 전적인 충만이며(완성이다), 이미 보증된 삶의 의미의 확증이며, 그 의미는 현재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영원한 숨결의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확증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의미의 확증은 나를 통하여 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고 있다.(ID 145-147. 밑줄, 괄호 안은 필자.) 순수한 관계는 확증될 수 있을 뿐이지 보존될 수는 없다. 순수한 관계는 삶의 전질료(全質料) 속에 자신을 구현시킴으로써 공간적 시간적 항상성(恒常性)을 얻는다. 사람이 자기의 능력에 따라 날마다 새로이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영원한 너')을 실현해 갈 때에, 그가 관여되어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지속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보장이 있다. 비록 '그것'과의 관계가 극복될 수 없다 하더라도, 사람의 삶은 그 때에 관계의 힘에 의하여 두루 침투되어 사람의 삶 속에서 하나의 투명하게 빛나는 항상성을 얻게 된다. 최고의 만남의 순간들은 어둠 속에 빛나는 섬광이 아니라 별이 빛나는 맑은 밤에 떠오르는 달과 같은 것이다.(ID 151-152. 밑줄, 괄호안은 필자.)

37. '영원한 너'와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부버는 세계 안에 머물러 있어도, 세계 밖으로 나가도 신을 만나지 못한다고 한다. 온 존재를 기울여 자신의 '너'에게 나아가고, 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를 자신의 '너'에게 가져가는 사람만이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온 존재를 기울여 묻는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 물음은 온 존재를 기울인 기도이다. 이 물음은 철저한 현재에서만 살아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을 향해 나아가며, '당신'의 응답을 듣는다. 그 응답으로부터 그에게 완전한 현재가 실현되며, 영원이 열린다. 그 응답으로부터 그는 자기를 완성한다. 그는 '당신'이 처음부터 자기를 부르던 분임을 안다. 그 부름은 '당신'이 그에게 주시는 은총이다. 이 만남의 사건은 인간의 삶을 근원으로부터 새롭게 한다. 이제부터 그는 모든 '나-너' 관계를 떠남 없이,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속에서 '당신'의 인격적 말씀을 듣는다.(ID 174.)
지금 이 순간에도 온 존재를 기울여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당신'의 응답을 듣기를 기도한다.

38. 본회퍼는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누구요?"라는 질문은 초월성에 관한 질문이다. "당신은 누구시오?"라는 질문에서 "누구요?"라는 말은 낯섦과 타자성을 표현하는 동시에 바로 탐구자 자신의 존재의 물음의 대상으로 스스로를 계시해 놓은 것이다. 탐구자는 자기자신이라는 존재에 비해 낯선 존재에 대해 탐구하게 되고, 자기 존재의 한계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초월성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는 의문의 대상이 된다. 인간적 로고스가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었다는 답을 갖게 되자, 인간은 자기 존재의 한계에 대항하게 되었다. 그래서 초월성에 대한 질문은 존재에 대한 질문이 되었고, 존재에 대한 질문은 초월성에 대한 질문이 되었다. 신학적 용어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빛속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겨우 알게 되었다.(CH 38-39.) 본회퍼에게 문제는 인간은 타락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본질상 왜곡되어 있다(cor curvum in se. ). 따라서 인간이 "당신은 누구시오?"라고 묻는다 해도 순종적인 아담의 언어로 말은 하지만 실상은 타락한 아담의 언어로 생각하고 있다. 즉 인간은 "당신은 어떻게 그런 분이 될 수 있는냐?"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누구시오?"라는 처음 말의 폐기를 뜻한다.(CH 39-40.)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질문의 대상이 되는 인격체가 먼저 자신을 계시하면서 내재적 로고스(어떻게)를 박멸해 버린 곳에서만 질문될 수 있는 것이다.(CH 40.) 타락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을 때에만 이 질문은 가능하다. 다시말해 처음 창조에서 인간에게 은혜로 주어진 관계유비적 형상인 '나-너'의 본래 모습이 회복되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39. 본회퍼의 논의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부버는 하나님을 찾는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처음부터 계신 하나님('영원한 너')을 이야기함으로써 하나님과의 만남이 실현된다. 그러나 본회퍼에게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 속에 현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본회퍼에게 (부버가 말하는) '완전한 현재를 받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따라서 "인간의 경험속에서 거의 포착(捕捉)되지 않는 '현재'를 어떻게 잡아내느냐"하는 문제는 본회퍼에게 다른 말로 물어져야 한다. 구원자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시는가?
본회퍼는 이렇게 답한다. 전체이시며, 인격자이시며,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한 분이 "나를 위한" 그분의 구조를 통하여 교회안에서 말씀으로, 성례로, 공동체로 현존하고 있다.(CH 63.) 말씀으로 현존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심판과 용서라는 선포되는 말씀으로 현존하고 있다.(CH 69.) 성례로 현존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창조주로서 현존하면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며, 낮아진 피조물로서 성례 가운데 현존하고 있다.(CH 78.) 공동체로 현존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몸이다.(CH 80.)

40.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교회 안에 현존하고 있는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는가? 본회퍼는 인간의 힘으로는 "교회에 나오라"는 권유만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NA 47.) 인간은 구원을 향하여 최소한의 순종은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도 순종치 않는 것은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NA 48.) 교회로 나아간 인간은 교회에 현존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부름을 듣는다. 그 부름은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지기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응답이다. 그리고 그는 그 부름에 단순히 따름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된다. 바로 이 새로운 존재에게 그리스도는 자신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게 된다. 이제 그는 "누구요?"라는 질문을 변질시킴 없이 물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교회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위치를 발견한다. 이제 새롭게 그와의 관계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위치는 그 자신의 한계선이며 중심이다.
"그분은 나를 위해 계신다. 그분은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 그렇지만 있을 수 없는 그곳에 내 대신 계신다. 그분은 나의 실존의 한계선상에 계시고, 또 나의 실존의 한계선 너머에도 계시지만, 그러나 여전히 나를 위해 계신다. 이 한계선은 나와 나 자신 사이, '낡은 나'와 '새로운 나' 사이에 있다. 그리스도는 그곳에 그 중심지역에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나 자신의 한계인 동시에 내가 재발견한 중심, 곧 나와 나 사이와, 나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중심점이다."(CH 81-82.)

41. 그러나 '새로운 나'들의 공동체는 여전히 옛 아담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여전히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죄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 그 존재는 회개 가운데서 인간의 모습으로 머물러 있다.(CH 80.) 그러나 '새로운 나'는 더 이상 '옛 나'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에 계신 그리스도에 직면하여 심판받으며, 그는 자신의 존재의 중심에 계신 그리스도로부터 용서와 생명을 얻는다. 그는 언제나 새롭게 온 존재를 기울여 미리 주어져 있는 대답을 향하여 묻는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 물음은 기독인의 온 존재를 기울인 기도이다. 이 물음 속에서 기독인은 다시금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한계와 중심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지금 이 새벽에도 자신의 한계와 중심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미리 주어져 있는 심판과 용서와 생명이라는 대답을 향하여 이 기도를 던지는 수 많은 기독인들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에게 은혜로 현재화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42. 현각-부버-본회퍼로 이어지는 이 글의 논의는 이제 "나는 누구인가? ―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근본 물음을 중심으로 그럭저럭 하나로 추스려지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 하나의 가능한 대화의 통로를 보여준다.
불교는 세계를 철저히 관계성 속에서 이해하므로, 기독교에서 불교에로의 접근은 세계를 관계성으로 해석할 수 있는 신학을 통해서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관계의 유비'를 말하는 본회퍼의 신학사상은 불교와의 대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기독교와 불교의 근본적인 차이점 때문에 본회퍼의 신학사상을 직접적으로 불교에 대응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런데, 본회퍼가 '관계유비의 신학'을 전개시키는데 사용하고 있는 '나-너-관계'의 철학은 불교와 훨씬 친화력이 있으며 큰 어려움 없이 상응점을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상호 친화력을 따라 '불교'-'나-너-관계'-'관계유비 신학'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있다.
[본회퍼-부버-불교]는 관계성을 말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본회퍼-부버]는 하나님을 말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부버-불교]는 관계가 자연의 영역까지를 포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참다운 관계의 세계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에 반해, [불교]는 인간만으로 참다운 관계의 세계가 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부버]는 피조물들의 관계가 그 너머에 하나님을 지시함으로써 참다운 관계의 세계가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부버]를 중간 거점으로 하여 [본회퍼-부버-불교]로 이어지는 맥락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한 도식으로 [본회퍼-부버-불교]라는 방법이 제시될 수 있다. 다시말해 [관계유비의 신학-'나-너-관계'-연기설]의 도식이 제시될 수 있다. 이 도식은 '나-너' 관계의 철학을 매개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시도는 불교와 기독교를 통폐합하자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물론 기독교와 불교의 넘을 수 없는 벽을 부각시키고자 함도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기독교와 불교의 상대적 위치(정체성)을 이해하고, 각각 상대방의 위치를 알게 됨으로써 이제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가려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점에서 [관계유비의 신학-'나-너-관계'-연기설] 도식은 의미있는 접근 방법이 될 것이다.

43. 자,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온 존재를 던져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이 근본 물음에 이끌려 태평양을 건너 한국땅 수유리 화계사 국제선원까지 온 현각은 바로 이 물음의 동일성 안에 놓여있다. 바로 이 동일성 속에 있는 현각은 결코 '개종한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이 근본 물음에 직면한 인간은 초월과 한계에 직면한 인간이다. 그는 그 질문 속에 "당신은 누구인가?"를 또한 동시에 묻고 있는 것이다. 현각과 부버와 본회퍼는 비록 그들의 종교가 각각 다를지라도 자신의 온 존재를 던져 이 물음을 묻고 있으며, 이 물음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44. 지금은 새벽 미명이 밝아오고 있다. 이제 나는 기도할 시간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약어표

CH           디트리히 본회퍼, 이종성 역, "그리스도론", 대한기독교서회, 1979.
SF           디트리히 본회퍼, 문희석 역, "창조·타락·유혹", 대한기독교서회, 1976.  
NA           디트리히 본회퍼, 허혁 역, "나를따르라", 1965.
하나          박재순,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한울, 1993.
ID            마르틴 부버, 표재명 역, "나와 너", 문예출판사, 1977.
백일上      성철, "백일법문上", 장경각, 1995.
백일下      성철, "백일법문下", 장경각,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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