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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1999/10/05 (01:21)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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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으로서 메타물리학
학문으로서 메타물리학[1]
(철학연구 제66집, 김명석, 최상돈)





I. 들어가는 말

사람은 많은 물음을 가지고 있다. 자연에 관한 물음에서부터 삶에 관한 물음까지 그 물음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다. 어떤 종류의 물음은 이미 대답되었지만 다른 종류의 물음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으며 그래서 끊임없이 제기된다. 물음에 대한 모범적 답안은 학문 또는 과학(science)[2]에서 제시된다. 자신의 물음에 대해 언제나 딱 부러진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학문은 대체적으로 성공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성공을 "기적"[3]이라고 한다. 물음에 대한 효율적인 접근을 위해서는 학문이 전문화되고 분과화될 수밖에 없는데, 학문의 성공은 다양한 분과학을 양산했다.

 그런데 몇몇 물음에 대해서 학문은 그 어떤 대답도 낼 수 없었다. 학문은 "사람은 왜 사는가?"에 대해 답할 수 없었고 "세계는 영원히 존재하는가?"라든지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답할 수 없었다. 한때 철학이 이러한 소위 '형이상학적' 물음에 답하려 노력했지만 철학은 실패하였다. 철학이 이런 물음에 답을 내지 못하자 어떤 이들은 철학은 학문이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철학자들은 이런 비판에 대응해 학문이 될 수 없는 것은 바로 형이상학이나 신학이고, 철학이란 곧 이러한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리학이 학문의 꽃으로 자리잡고 있을 때, 그 학문성을 의심받고 있던 철학은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형이상학[4]의 비판·부정·극복에서 찾았다[5]. 형이상학 부정론자들은 만일 어떤 물음이 "진정한" 물음이라면 그것은 대답될 수 있고, 만일 대답될 수 없다면 그것은 물음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언표될 수 없는 대답에 대해서는 물음도 역시 언표될 수 없"기 때문에 풀리지 않는 물음, 즉 "수수께끼는 존재하지 않는다"[6]. "어떤 물음이 좌우간 제기될 수 있다면, 그 물음은 또한 대답될 수도 있다"[7].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하라!" 이것은 형이상학 부정을 표현한 가장 아름다운 경구이다.

 그러나 삶의 바닥으로부터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경구가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한 슬픈 이야기: 사랑하는 아들이 뇌염모기에 물려 죽게 되어 세상에 홀로 남게된 어머니에게 의사는 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의학적인 설명을 하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흐느끼면서 의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 왜 그 뇌염모기가 우리 아이를 물었죠?" 그러자 의사는 아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부인, 그건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오, 의학이 얼마나 무기력한가! 그러나 부인의 물음은 결코 무의미한 질문이 아니다. 우리는 뇌염모기가 관념이나 말에 의해 "구성된 세계"[8] 속에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런 뇌염모기를 결코 구성할 수 없다. 엄연히 실재하는 그 뇌염모기가 실제로 사람을 물어 죽게 한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면 그건 삶과 세상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뇌염모기뿐인가! 연간 5만 명의 어린이가 '굶어서' 죽어가는 현실이나 아우슈비츠의 대학살, 또는 '사람의 땅' 아래에 매설된 수십 억 개의 지뢰에 대한 그 어떠한 질문도 무의미할 수 없다.

 물음을 금지하는 것은 사실상 폭력이다. 링 라드너(Ring Lardner)의 어떤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9].

"아빠, 왜 우리는 거기에 다시 가는 거야?"
"입 닥치고 있어."
하고 그의 아버지는 설명했다(explained).
그러나 그건 설명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질문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 침묵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해명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물음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물음이다. 따라서 수수께끼가 정말로 있을 수 없다면, 우리 삶에 '중요한' 물음은 언젠가 대답될 수 있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진정으로 묻는 질문이라면 그 질문은 유의미한 질문이다. "사람에겐 왜 고통이 있는가?", "사람은 왜 죽는가?"라는 질문이 사람의 삶에 실로 중요하다면 그것은 대답되어야하고 대답될 수 있다. 학문은 이 물음에 앞에서 진지해야 한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물음은 결코 무의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형이상학 극복론자들의 처방에 만족할 수 없다. 그들의 전략에는 학문(science)이 삶의 문제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인문학을 물리적 학문, 즉 자연과학과 차별화하고,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이 삶의 문제의 주범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학문은 그것이 실증과학적인 모습을 지닐 때만 학문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인문학으로 하여금 자연과학화하도록 압력을 가하거나, 아니면 자연과학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도록 강요한 셈이 되었다. 인문과학적 문화와 자연과학적 문화 사이의 분열과 주도권 다툼이 문화의 전분야에 걸쳐 심화될 때, 급기야 사람의 삶 자체는 사분오열되고 말 것이다. 학문이 통합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학문은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형이상학 극복에서 철학의 정체성을 찾는 이들은 생생한 삶에 관심을 두고 삶의 이해에만 종사하려 하면서도, 자연과학을 삶의 문제와 무관한 것으로 파문시킴으로써 철학의 통합적 임무를 포기하고 만다. 형이상학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의 삶과 함께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학문이다.




II. 메타물리학

형이상학(metaphysics)[10]은 기원전 1세기경 안드로니코스[11]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정리하면서 논의의 전개 순서상 <자연학>(physika) 다음에 놓여야할 일련의 논문들을 <자연학 뒤에 놓여진 책>(ta meta ta physika biblia)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12]. 형이상학의 학문적 성격은 아리스토텔레스 사후에 붙여진 이 논문집의 내용에 의해 특징지워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메타자연학>은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추구한다"[13]라는 구절로 시작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본성상 어떤 학문을 '추구'하게 된다. 그는 이 학문을 <메타자연학>, 제1권, 제2권, 제10권 등에서 "추구하고 있는 학문" 또는 "찾고 있는 학문"으로 부르고 있다[14]. 그가 "찾고 있는 학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제일철학(prote philosophisa)[15]이었다. 그가 <메타자연학>에서 '찾고 있는 학문'이라는 표현을 자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찾고 있는 학문'이 단순한 수사학적 변형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데, 따라서 '찾고 있는 학문'은 제일철학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16]. 그렇다면 제일철학이란 무엇을 다루는 학문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메타자연학>에서 제일철학을 이중적으로 규정한다. 아래의 진술은 제일철학을 존재자론(ontologik)[17]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학문이 있는데, 이 학문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그리고 처음부터 존재자 그 자체의 관점에서 그 존재자에 어울리는 그 무엇으로서 고찰한다. 이 학문은 존재자에 대해 부분적으로 진술하는 그 어떤 학문과도 동일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여타의 학문도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보편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수학과 같이 존재자로부터 떼어낸 일부분에 대한 규정을 고찰하기 때문이다[18].
위의 진술에 의하면 제일철학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보편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아래의 진술은 제일철학이 신론(theologike)[19]임을 암시한다.
가장 격이 탁월한 학문은 가장 격이 탁월한 유(類)를 고찰한다[20].
[우리가] 찾고 있는 학문은 제신(諸神)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제신은 제일원리에 속하기 때문이며, 다음으로는 오직 제신만이 이 학문에 어울리거나 아니면 [제신이야말로] 가장 이 학문에 어울리기 때문이다[21].
위의 진술에서 제일철학은 제일원리 또는 제일원인을 다루는 학문이다. 제일원인은 "가장 탁월한 유"로서 신성한 존재자[22]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메타자연학』에서 엿볼 수 있는 제일철학으로서 형이상학의 학문적 성격은 존재자론과 신론이라는 이중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존재자론의 대상은 "존재자로서 존재자" 즉 '존재하는 것 모두', '존재자 일반'이고 신론의 대상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제일원인으로서 신이다. 이 신은 다른 존재자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초월된 존재이다. 만일 보편적 존재자와 초월자가 현실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라면[23], 형이상학이 그 대상을 무엇으로 택하는냐에 따라 이 학문의 성격이 달라질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이 자연학 '다음에'(meta)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를 형이상학의 주제들이 "감각과 거리가 멀고", "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24]이라고 설명하곤 하였다. 중세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을 "초자연적인 것, 즉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며 자연학보다 더 본질적인 실체와 가치를 가지는 것에 관한 연구"[25]로 취급하였다. 이것은 메타를 '넘어서'로 새롭게 해석하는 것인데, '넘어서'는 희랍어에 없었던 의미이다. 형이상학은 점차 자연적인 것을 '넘어서는' 비물질적인 것,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에 대한 학문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을 오직 신론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만일 학문(science)이 오직 관찰될 수 있는 현상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국한되어야 한다면 초자연적인 것에 관한 학문으로서 형이상학은 더 이상 학문이 될 수 없다[26].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경험적이 않으면서 그렇다고 연역적이지도 않은 형이상학은 점차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말장난을 가리키는 경멸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27]가 강조하였듯이, 인간 이성의 초자연적인 것에 관한 부단한 애착은 결코 제거될 수 없기 때문에 형이상학의 신론적 관심은 결코 '환상'인 것으로만 여겨질 수 없었다.

 형이상학이 인간이 가 닿을 수 없는 환상이 아니라, 보편성과 엄밀성을 가진 학문이 되려 한다면, 형이상학은 어떤 식으로든 자연적인 것과 접촉하여야 한다[28]. 만일 물리학이 학문이고 형이상학도 학문이라면, 이 두 학문 사이에 접촉점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앎을 분열시키는 학문은 학문일 수 없기 때문이다[29]. 우리는 먼저 존재하는 것들에 관해 논의하고 그 다음에 존재하는 것들 일반에 관한 논의로, 그리고 그 다음에 존재의 원인에 대해 논의해야 할 것이다. 즉 처음엔 자연학을 하고, 그 다음엔 그것과 연속성을 유지하며 우주론으로서 존재자론을 한 뒤 그 다음에 존재론으로서 신론을 해야할 것이다[30].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형이상학을 자연학 또는 물리학을 '초월한' 어떤 것에 관한 학문으로 보지 않고 단지 물리학 '다음에' 탐구해야할 학문을 일컫는 이름으로 취급해야 할 것이다. 형이상학은 감각적인 것밖에 놓여 있는 것에 관한 앎, 즉 초감각적인 것에 관련된 학문이 아니라 여전히 '자연'(physis)에 관한 논의이다. 여전히 자연에 관한 것으로서 'metaphysics'는 형이상학이 아니라, 그냥 메타자연학 또는 메타물리학(meta-physics)이다[31].




III. 존재하는 것과 그 속성

자료(data)란 '주어진 것'을 뜻하는 라틴어 datum의 복수이다. 따라서 자료란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말한다[32]. 자료는 '우리 밖에 있는 것'으로부터 우리에게로 주어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우리가 받는 것을 관찰이라 하고 주어진 자료를 해석하는 것을 경험, 또는 인식이라고 한다. 자료는 인식의 재료이다. '우리'는 인식 행위의 주체이다. 인식 주체에 의해 인식되는 것은 객체 또는 대상(object)이다. 대상이란 인식하는 주체와 '대립하여' 인식되는 것이다. 인식이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는 사유한다. 따라서 대상이란 사유하는 행위와 대립해 사유되는 것이다. '우리밖에 있는 것'이 대상이 된다. 대상이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우리 밖에' 또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사유하기 위해 그것을 우리 '앞으로 던진다'(ob-ject). '앞으로 던져진 것'이 대상이다. 만일 '우리 밖', 또는 '우리 앞'을 '시공간 안'으로 표현하고 인식 주체를 마음이라고 부른다면, 논의의 여지가 있겠지만, '시공간 안'이란 '마음 밖'을 뜻한다. 따라서 대상이란 '시공간 안에 던져진 것', 그래서 '시공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33].

 그러나 여기서 인식 주체로서 마음과 인식 대상으로서 마음밖에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선 철학자들에게 항상 자명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자료, 마음, 대상 따위의 개념들이 어떤 근거 위에서 가능한 개념이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개념들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선 먼저 '있다'(esse)라는 개념의 내용·성격·의미 등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있다' 또는 '존재'라는 개념은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개념이고 다른 모든 규정에 앞서는 가장 근본적인 규정이다[34]. 만일 우리나,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없다'면 자료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자료, 주어진 것, 들어오는 것, 자극[35] 따위들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따라서 '무엇'이 있긴 있다. 이 무엇이 나타나고 보인다. 즉 어떤 무엇이 '현상'된다. 현상이란 무엇이 우리 앞에 또는 시공간 속에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무엇과 현상을 어떻게 관련지울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현상을 무엇에 '의하여' 나타난 것으로 해석한다면, 현상이란 그 '무엇으로부터' 온 것이다. 여기서, 인식 주체인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든 하지 않든 존재하는 것, 사유하는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바로 사물(thing)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있다고 '믿어' 보자[36]. 만일 인간의 마음이 인간이 그것을 사유하든 않든 존재한다면 마음 또한 사물이 된다. 따라서 우리 밖의 것이 참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제 사물로 부를 수 있다. 사물이 바로 인식의 대상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단지 사물로부터 현상된 것일 뿐이라면 우리가 사물 자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사물이 우리에게 드러내는 것만 인식할 수 있다. 사물로부터 나타난 것은 겉모습 또는 외양(apprearance)이다. 외양은 사물의 표면에 불과하다. 현상되는 것은 사물의 외양이다. 우리는 현상된 사물의 외양을 통하여 사물 또는 대상을 '표상'한다. 표상(representation)은 우리가 그린 사물에 관한 그림이다. 표상은 마음에 '생긴' 사물의 이미지이다. 표상은 사물에 대한 심상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오직 사물의 외양뿐인가? 현상론은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현상론은 '사물은 어떠하다'라는 표현 대신 '그 사물은 무엇처럼 보인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현상론에서 인식이란 단지 관찰할 수 있는 현상과 일치하는 설명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외양을 가능하게 하는 것, 사물의 표면 '아래에 있는 것'(sub-stance)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체(substance)는 외양의 근저를 이룬다. 실체는 외양의 항구적인 바탕이다. 실체는 현상된 것 아래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표상과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다. 실체는 존재하기 위해 자신 이외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물이 나타내는 현상이 외양 아래에 있는 실체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그 사물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참된 존재, 즉 실재(reality)[37]이다. 그렇다면 실재하는 것으로서 사물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외양은 수정되고 소멸할 수 있는 사물의 특징이다. 그것은 우연적인 것이다. 외양은 사물의 우유성(accident)이다. 우유성은 현상된 것이고 표상된 것이다. 그것은 사물을 사물 그대로 알게 할 수 없다. 한 사물은 다른 사물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 되게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본질(essence)[38]이다. 사물의 본질적인 성질은 사물이 자신 '가지고 있는 것'(property)이다.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사물'에게 돌릴'(attribute) 수 있다. 본질이 그러그러한 것을 우리는 사물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속성(property, attribute)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성질이다. 사물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사물에다 그대로 '귀속시킬' 수 있다. 속성은 사물을 정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따라서 속성은 하나의 사물을 정의해 주는 것으로서의 본질과 동의어이다. 본질로서 속성은 우유성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만일 본질을 사물의 항구적인 본성을 구성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본질은 실체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실체, 본질, 속성은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다. 실체는 사물의 속성을 통해 드러나고, 속성은 그 사물의 본질이며 사물의 본질이 곧 실체이다[39].

 속성은 '우리에게 알려진 어떤 것을 사물 자체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그것이 그 사물'에게' 본질적이고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물 자체에게' 귀속시킨다. 그것이 사물 자체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성질이고 우유성일 뿐이다. 만일 본질이 인간에게 '알려질'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속성이라 부른다[40]. 사물의 속성은 알려질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속성이라는 개념엔 이미 그것이 앎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다. 존재하는 것의 본질은 알려질 수 있고 그것은 존재하는 것의 속성을 통해서 그리할 수 있다. 우리가 사물의 속성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물의 본성이다. 우리는 사물의 속성을 통해 실체에 접근한다. 우리가 사물의 속성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연의 본질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사물의 속성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세계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IV. 물질적인 것의 속성

데카르트에 의하면 물질은 연장과 동의어이다[41]. 물질적인 것이란 시공간 속에 장소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경험의 '대상'은 시공간 속에 '던져질'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이다. 물리학은 물질적인 것들에 관한 학문이다. 물리학은 물질적 세계를 기술한다. 물질적 세계에 관하여 기술 가능한 모든 것은 원칙상 물리학의 대상이 된다. 물리학의 기본적인 방법은 세계를 부분들의 합으로 간주한 후, 먼저 그 부분을 묘사한다[42]. 물체(body) 또는 입자(particle)는 세계의 부분이다[43]. 물리주의적 입장에 의하면 오직 입자나 물체만이 사물(thing)이 된다[44].

 어떤 한 시점에 '한' 사물의 상태(state)는 그 시점에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가능한 속성들의 총합이다[45]. 상태는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따라서 사물은 역사(history)를 가진다. 사물의 역사는 상태묘사자(state descriptor)에 의해 기술된다. 물리학은 최소한의 정보(예를 들어 한 순간의 사물의 상태)로부터 상태묘사자를 계산해 내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 상태묘사자를 결정하는 물리학 법칙을 운동방정식(equation of motion) 또는 운동법칙(law of motion)이라고 한다. 고전물리학에서 사물의 상태는 그 사물이 공간에서 점하고 있는 장소(위치)이다. 사물을 구성하는 각 입자들의 공간 속에서의 위치가 결정되면 그 사물의 상태는 완전히 결정된다. 뉴턴의 운동방정식은 각 시간마다의 사물의 위치를 계산해 낸다. 고전물리학에서 사물의 역사는 사물의 궤적(trojectory)이다. 사물의 궤적은 뉴턴의 운동법칙을 준수한다.

 만일 우리가 뉴턴 물리학의 진정성을 '믿는다면',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통해 계산된 사물의 궤적은 사물의 진정한 역사가 된다. 사물의 역사는 법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물에 대해 측정을 수행할 필요없이 사물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만일 어느 한 시점의 사물의 속성을 '안다면' 그 이후의 사물의 속성은 관찰에 관계없이 확정적으로 예측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 행위로서 측정은 사물을 교란시키지 않는다. 여기서 측정 또는 관찰이란 사물에 관련된 어떤 내용을 인식 주체가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사물의 속성은 법칙에 의해 예측된 속성과 동일하기 때문에 뉴튼 운동법칙의 진정성을 '받아들이는' 고전물리학에서의 측정은 사물이 측정 전에 '가지고 있던' 내용을 그대로, 충실하게(faithfully) 드러내 준다. 즉 관측된 내용은 곧 측정 이전에 사물이 가지고 있던 내용이다. 다시 말해 고전물리학에서 측정된 성질은 원래 성질(preexisting quality)과 동일하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인식행위와 관련하여 아무 문제도 발생되지 않는다. 따라서 고전물리학의 진정성은 사물이 잘 정의된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함축한다.

 양자물리학[46]에서 상태묘사자는 슈뢰딩거 방정식에 의해 계산된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통해 계산된 상태묘사자를 상태함수(state function)[47]라고 부른다. 상태함수는 사물의 궤적이 아니라 사물의 성질을 측정할 때 얻을 수 있는 측정결과들의 확률분포를 결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전물리학이 예측하는 것과 양자물리학이 예측하는 것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차이는 결국 상태에 대한 개념의 차이를 낳게 하고, 양자물리학의 상태 개념은 측정문제를 야기시킨다. 측정문제는 사물의 속성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양자물리학에서 측정문제는 제거될 수 없다. 이것은 인식과 존재의 문제[48]가 철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물리학의 근본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49]. 아래의 두 진술은 철학자들의 유서깊은 '형이상학'이 아니다.

양자적 세계란 없고 오직 추상적 양자물리적 기술만 있다. 물리학의 임무가 자연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리학은 자연에 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에 상관한다[50].
양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어떻게 관측하는가를 결정하는 데 달려 있다. 세계는 우리가 관측하는 데 관계없이 '거기에' 없다. '거기에'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보기를 선택하는 데 달려 있다. 실체는 부분적으로 관측자에 의해 형성된다[51].
우리의 문제는 이런 진술들이 물리학자들의 단순한 '사견'이 아니라 양자물리학의 '결론'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이런 결론을 이끌어 내는 논증은 물리학을 한 '다음에' 해야할 논증이기 때문에 따라서 메타물리학이 된다.
 슈뢰딩거 방정식에 의해서 계산되는 상태함수는 사물의 외양을 관측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성질들[52]의 개연성을 결정한다. 즉 양자물리학은 측정 후에 얻을 수 있는 결과의 확률만 예측할 수 있다. 이것은 사물이 소유하고 있는 속성을 예측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만일 사물의 속성은 알 수 없고 사물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측정 행위를 통해서만 알려진 사물의 성질 뿐이라면, 이제 우리는 사물이 관측 전에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현상 이면에 현상을 결정하는 사물의 속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물 자체 즉 사물의 속성이 존재한다면 관찰된 성질과 속성은 같은가? 인식 또는 측정은 어떤 과정을 거쳐 속성을 우연적 성질로 변질시키는가? 사물에 대한 인지자의 앎이 도대체 어떻게 사물의 속성을 변하게 할 수 있는가? 이런 물음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속성에 대한 해석으로서 가능하다[53].

현상론: 사물의 속성에 대한 언급은 무의미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인식결과에 의해서 드러나는 우유성밖에 없다.
성향론: 속성은 단지 가능성으로 남아있다가 인식 행위 후에 현실화된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것은 성향이다.
실재론: 속성을 알 수는 없지만, 사물은 그의 속성을 인식행위에 관계 없이 항상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세 입장들은 낯선 것이 아니다. 속성에 대한 이런 입장들은 철학사에 늘 있어왔던 입장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형이상학을 하고 있는가 물리학을 하고 있는가?




VI. 맺는말

단지 외양일 뿐인 경험적 자료 중에는 속성에 대해서 언급할 만한 결정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에, 감각경험을 통해서는 속성에 대해 여러 해석들 중 어떤 하나를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양자물리학에 의해 이런 해석들 중 틀린 것을 가려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양자물리학이 제기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하여, 이런 문제들에 도전하는 학문으로서 양자메타물리학[54]을 제안한다. 양자메타물리학은 '양자물리학 다음에 해야할 학문'이다. 이것은 속성에 대한 옳은 해석을 결정하는 데 종사한다. 이제, 현상 이면에서 현상을 결정하는 사물의 속성에 대한 물음은 더 이상 무의미하지 않다[55].

 형이상학(metaphysics)의 현대적인 기능은 모호한 개념을 해설하거나 그릇된 생각을 수정하고 교정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56]. 만학의 여왕이었던 형이상학이 이처럼 고작 해설하고 치료하는 '활동'으로 축소된 것은 재래의 형이상학이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철학 외부적 비난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은 학문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는 철학 내부의 비판 내지 부정의 결과이다. 철학 또한 과학으로 풀 수 없는 물음으로서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하여 그 물음이 무의미한 물음임을 깨우치는 일종의 활동으로 기능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물음 해소의 활동이 철학의 학문적 본질이라는 데 반대하고, 해답을 제공하는데 종사하는 학문적인 형이상학을 제안하려 했다. 우리는 그것을 메타물리학(meta-physics)이라 불렀다. 특히 양자메타물리학은 물리학과 메타물리학 사이에 다리를 놓는 학문이다. 우리는 한때 무의미한 것이라고 비난받았던 질문에 대해 대답하려고 애쓴다[57].

 양자물리학이 묻고 양자메타물리학이 도전하는 문제들은 바로 철학사에서 끊임없이 되묻는 문제들 중 일부이다. 문제의 공유는 필연적으로 논의의 공유를 가져온다. 따라서 우리가 제안하는 양자메타물리학은 철학자들의 메타물리학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철학의 영역에 진입하는 메타물리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양자메타물리학이 가능하다면 이것은 자연화된(naturalized) 메타물리학이고, 학문적(scientific) 메타물리학이다. 그러나 여기서 개괄된 양자메타물리학의 초안은 학문적 메타물리학의 한갓 첫걸음에 불과하다.





Note

[1] 이 연구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1997년도 학제간연구비지원에 의해 수행되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에 감사드린다.
[2] "science"는 과학으로 번역되지만, 과학이란 곧 참된 학문을 뜻한다.
[3] 조인래, "과학적 실재론: 그 전개와 현황", <과학과 철학>, 제6집, 과학사상연구회편, 1995, 9쪽
[4] 이때의 형이상학(metaphysics)은 초(超)물리학을 의미하는 형이상학이다.
[5] 신오현, <철학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1988, 162-180쪽. "서양 철학의 역사는 형이상학의 역사이기도 하며, 철학과 형이상학의 역사는 다름아닌 철학과 형이상학의 정체를 밝히는 자기 해명의 과정이었다 해도 무리가 아니겠다. [...] 형이상학으로서 시작된 서양철학은 대대적인 자기 반성에서 인식론적 기조를 띠는 근세철학을 낳았고, 전래의 형이상학은 물론 이러한 형이상학의 자기반성인 근세의 인식론까지 포함하여 모든 형이상학을 완전히 부정하는 데서 현대의 영미분석철학이 파생되었으며, 단순히 전통적 형이상학을 파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극복하여 철학의 원형을 회복하려는 모색이 다름아닌 현상학적 탐구 활동이다"(162쪽).
[6] L.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6.5(이영철 옮김, 천지, 1991).
[7] L. Wittgenstein, 같은 곳. "진정한 물음이라면 원리상 답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카르납에게서도 들을 수 있다(R. Carnap, Der logische Aufbau der Welt, 225).
[8] N. Goodman, Ways of Worldmaking(Hackett, 1978).
[9] R. Abel, Man is the Measure(박정순 옮김, 고려원, 1995, 151쪽)에서 재인용.
[10]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는 번역은 <주역>의 "계사" 중에 "형이상자를 도(道)라 하고 형이하자를 기(器)라 한다"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11] R. Hancock, metaphysics(in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ed. P. Edwards).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분류하고 목록을 작성한 다수의 편집자들이나 주석가들.
[12] I. During, Aristoteles, Heidelberg, 1966, 29ff., 591ff; 신창석, "제일철학의 아포리아", <철학연구> 제58집, 177쪽. <자연학 뒤에 놓여진 책>에는 자연에 대한 탐구를 벗어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문들이 담겨 있다. 따라서 "metaphysics"라는 것은 처음엔 편집 과정에서 붙여진 편집명칭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명칭은 자연에 대한 학문을 터득한 "다음에"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도록 하는 근본원리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마땅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 우리는 <자연학 뒤에 놓여진 책>(ta meta ta physika)을 <메타자연학>이라 쓰겠다.
[13] <형이상학>, 제1권, 2장, 980a 21. 여기서 "본성적으로"(phusei)는 다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연학』, 제2권 제1장, 192b 8-9에서는 무엇인가가 "자연에 의해서"(phusei) 존재하게 된다는 표현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의중을 따른다면『형이상학』의 첫구절은 "인간은 자연에 의해서 알기를 추구한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연적으로, 자연에 의해서, 자연으로 인하여 알고 싶어한다. 다시말해 자연이 우리를 알도록 촉구하고,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는 세계는 "본질적으로 이해가능한" 세계, 즉 알 수 있는 세계이다.(J. Lear, Aristotle: the desire to understa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p. 41) 자연은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질서와 구조가 잡혀 있다. 세계는 '의미깊음(purposefulness)으로 충만해 있다. 그런데 사람의 '자연'은 세계의 질서를 탐구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자연은 사람 속에서 자연 그 자신을 알리고 알려지게 한다. 자연의 본성은 인간 속에서 가동되고 추진된다. 세계는 이미 정신과 비슷한(mind-like) 측면이 있다. 세계는 우리 인간의 마음 위로 "의미깊고, 이해가능하며, 정신적인 본성"(Lear, 같은 곳)을 투사한다. 세계 정신 스스로가 인간 속으로 다가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가 이해가능하도록 하는 어떤 것을 형상이라고 했다. 형상은 우리가 세계를 연구할 때 우리의 정신 위에 그 자신을 투영시킨다. 인간 지성이 개념을 통해 사물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개념들이 자연계 안에 실제로 들어 있기 때문"(Lear, p. 42)이다. 우리는 "세계를 둘러보면서 형상들을 만남으로써" 세계에 대한 개념을 익힌다. '세계 속에 있는 형상'이 인간에게 개념을 제공한다. 이것은 칸트가 물었던 '개념처럼 정신 비슷한 실재가 어떻게 자연 안에서 인과적 영향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될 수 있다.
[14] 신창석, 177쪽.
[15] <메타자연학>, 제5권, 1장, 1026a 24.
[16] 신창석, 178쪽. "그는 이 표현을 통하여 제일철학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완성되지도 않은 이론이요, 그야말로 그 자신이 여기서 찾고자 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17] 신창석, 179쪽. "존재자에 관한 가르침"으로서 존재자론(ontologik)은 "존재에 대한 가르침"이라할 수 있는 존재론(ontologia)과 구별된다. 존재론은 고클레니우스의 "Lexicon Philolosophicum"(Frankfurt, 1636)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18] <메타자연학>, 제7권, 1장, 1003 21-26(신창석, 178쪽에서 재인용).
[19] '테오로기케' 즉 신론은 유일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으로서 그리스도적 신학(theologia)과 구별된다(신창석, 179쪽). 헬라어 '테오로기아'에서 "테오"는 문법적으로 소유격인데 주격과 목적격의 의미로 동시에 사용될 수 있다. 테오로기아는 "하나님이 말한다"와 "하나님을 말한다"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신학이란 "하나님에 관한 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말'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말"일 때 의미를 지닌다(H. Ott, "Theologie als Gebet und als Wissenschaft", Theologische Zeitschrift, Vol. 14/1, 1958, 124).
[20] <메타자연학>, 제5권, 1장, 1026a 21f(신창석, 178쪽에서 재인용).
[21] <메타자연학>, 제1권, 2장, 983a 5ff(신창석, 179쪽에서 재인용).
[22]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일철학을 영원한 것이나 움직여진 적이 없는 것(불변적인 것), 분리된 것과 같은 특정의 존재자를 고찰하는 학문, 결국 제신과 같은 것들을 고찰하는 학문으로 다시 규정한다"(신창석, 179쪽).
[23] '존재자로서 존재자'는 존재자 일반이지만 초월자로서 '제신'은 "특정의 존재자나 일종의 존재자"이기 때문에 존재자론의 대상과 신론의 대상은 동일할 수 없다(신창석, 181쪽). 나토르프(P. Natorp)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철학에서 나타난 이중적 이념"을 처음으로(1888) "철학적으로" 문제 삼았다. 그에 의하면 <메타자연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찾고 있는 학문은 존재자론이고, 신론이라고 말하는 몇 구절들은 편집자의 무의식적인 삽입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찾고 있는 학문은 여러 "복합적인 의미에서" 여전히 신적이다(신창석, 182쪽). 예거(B. Jaeger)는 <메타자연학>이 특수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고 판단하고 이러한 이중적 이념을 발생사적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예거에 의하면 <메타자연학>은 "원래부터 어떤 통일성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고 "수년 동안 재구성되어, 차후에 비로소 주제별로 통일되었"으며 "상이한 시기에 걸쳐 기록되었다"고 한다(신창석, 183쪽). 예거는 문헌정보학적 연구결과에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떠나는 점적적이고도 직선적인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고 보고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조직적 전개를 탈플라톤의 다양한 단계와 시기로 일괄 정리"했다(신창석, 184쪽). 즉 <메타자연학>의 신론적 측면은 "플라톤적" 유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진정한 존재자"는 처음엔 "절대적 존재자" 또는 "존재자 중의 존재자"를 가리켰다가 나중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칠 때 플라톤은 이미 사상적 전환을 겪고 있었고(M. Wundt), 제일철학의 이중성은 전기의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에서도 발견되고 있다(신창석, 186쪽). 반면 오벵끄(P. Aubenque)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철학의 이중적 이념을 제일철학의 난제(aporia) 그 자체로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제일철학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 존재자의 출발점에서 제일원인 또는 제일원리를 묻는 신론적 차원과 이와 동시에 결론점으로서 존재자들의 통일성을 묻는 존재자론적 차원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찾고자 했던 것을 찾아 나섰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했"던 것처럼, 이 "두가지 물음은 결국 대답될 수 없"고 "이 불가능성이야말로 적극적으로 가르쳐야 하며, 동시에 철학적 탐구의 진정한 현실"이다(신창석, 187쪽). 그리고 루틸라(L. Routila)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선에 따라 만일 개별 존재자(on)가 자신의 실체(ousia)에 의해 존재하는 것의 한 일원이 된다면, 존재자 일반에 관한 물음은 실체에 관한 물음으로 승화된다. 여기서 실체는 에이도스(eidos)이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형상(forma)이다(신창석, 189쪽). 존재자의 전영역에 관한 학문으로서 존재자론 또는 우주론은 결국 "일의적으로 언급되는 존재자"에 관한 신론 또는 존재론으로 나아간다. 루틸라는 형이상학의 두 이념의 문제를 "존재자론적 관점과 제신론적 관점을 상호환원시"킴으로써 해결하려 했고 "이 둘 중의 어느 한 관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철학을 위해 제거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신창석, 190쪽).
[24] R. Hancock, 같은 곳.
[25] R. Hancock, 같은 곳.
[26] 철학사적으로 볼 때 철학자들의 이런 논의는 철학이 곧 형이상학 비판으로 기능하는 단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신오현, <철학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1988, 166-169쪽). "영국 경험론은 흄에 이르러 모든 실체가 부정되는 현상론으로 환원되고 만다. 물질적 실체는 물론이요 정신적 실체인 마음·영혼·이성까지도 실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각된 현상들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제 현상의 배후에 현상의 인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식되어야 할 아무런 초현상적·초경험적 존재도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형이상학은 성립될 수 없다"(신오현, 위의 책, 169쪽).
[27] 칸트 이후에 형이상학은 "과학적 관찰과 실험에 의해서 해결될 수 없는 물음들에 관한 선험적 사색"을 의미하게 되었지만(Hancock), 칸트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은 여전히 가능한 학문이자 최고차원의 학문이었다.
[28] 어떤 것이 학문인 한 그것은 자연학을 '넘어서' 논의될 수 없다. 다시말해 어떤 논의가 자연학의 진정성을 부정하는 것을 자신의 학문성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자기논박적이다. 그리고 어떤 논의가 학문인 한 그것은 자연학과 무관할 수 없다. 그것이 말 그대로 자연학과 무관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것만이 자연학과 무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학문이 물리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물리학주의 또는 물리주의와는 입장을 달리한다. 물리학주의는 물리학을 제외한 여타의 모든 학문이 결국엔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29] 이런 주장은 "분석성"의 폐기의 결과물로 얻은 방법론적 일원론과 구별되어야 한다. 학문간의 연속성은 사람의 삶에 봉사해야 하는 학문 자체의 정의로부터 얻을 수 있는 학문의 조건이다. 만일 학문이 불가피하게 앎을 분열시킬 수밖에 없다면 학문은 삶 또한 사분오열시키고 말 것이다.
[30] 반면 꽁트에 의하면 인간 지식의 발전은 처음엔 신학적 단계를 거치고, 그 다음엔 형이상학적 단계, 그리고 마지막엔 과학적 실증적 단계로 진화한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신학이나 형이상학은 지나간 시대의 학문일 뿐이다. 우리는 이에 반대한다. 그리고 과학은 단지 수단적 인식일 뿐이고 오직 형이상학만이 참다운 인식이라는 입장(베르그송)에도 우리는 반대한다.
[31] 우리는 여기서 메타자연학이라는 번역보다는 메타물리학이라는 번역을 사용하겠다. 그것은 우리의 논의가 현대 물리학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32] 여기서 '우리'란 '자료'를 처음으로 발견한 이를 가리킨다. '우리'는 발견된 것에 '자료'라는 이름을 지워 주었다. '주어진 것'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카르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지만 주어진 것이 어떤 것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R. Carnap, Der logische Aufbau der Welt, 87쪽) "주어진 것은 주체가 없다."(R. Carnap, 같은 책, 92쪽). 요르겐센의 <논리경험주의: 그 시작과 발전 과정>(한상기 옮김, 서광사) 53쪽에서 재인용.
[33] 대상을 이런 식으로 정의한다면 마음 자체는 대상이 될 수 없다. 대상이 시공간 안에, 즉 마음 밖에 있는 것이라면, 마음이 대상이 되기 위해서 마음 밖에 있어야 한다. 마음을 대상화한다는 것은 마음을 시공간 안으로 던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 밖으로 던질 수 있을까?
[34]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사유와 존재는 같은 것이기 때문에 구별될 수 없다. 다시말해 존재하는 것만이 사유될 수 있고 사유되는 것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데카르트에 의해 철학적 탐구 방향이 대상에서 대상의 존재에 대립되는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로 전환된 이후 등장한 근대 관념론자들은 존재가 주관, 사유, 마음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버클리는 무엇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마음에 의하여 지각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외부 대상은 지각되는 것이며, 그것은 그것을 지각하는 마음 밖에서는 어떤 존재성도 갖지 못한다"(G. Berkeley, 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35] 콰인은 이것을 "input", "firing", "triggering", "nerve hit", "impingement", "impact", "surface irritation", "stimulus", "physical stimulation"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김영남, <콰인의 자연주의 인식론>, 서광사, 1994, 67쪽, 각주).
[36] 사유하는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사물이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입장을 실재주의(realism)이라고 한다. 실재주의라는 단어는 사물을 뜻하는 'res'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사물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다양한 내용의 실재주의가 제안된다.
[37] 만일 우리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현상이나 외양을 넘어선 어떤 것으로 본다면 reality는 '실재'로 번역할 수 있지만, 참된 존재라는 것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이나 외양이라고 한다면 reality는 '현실'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외양이란 '나타난 실재'이고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 reality에 대한 중립적인 번역을 원한다면 '참됨'으로 하는 것이 적절하다. 실재는 사물의 외양을 가능하게 하면서 사물 자체의 존재 기반이 되기 때문에 때때로 실체와 개념상 비슷하다. 그러나 실재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물의 외양과 동일시되기도 하는 반면, 실체는 여전히 여러 종류의 변화를 담지하는 바탕이다.
[38] 본질은 희랍어 "to ti hen einai"의 번역이다. 문자 그대로 옮기면 "the what it is to be"이다.(J. Lear, Aristotle: the desire to understand, p. 28)
[39] 만일 실체의 존재를 거부한다면, 본질이나 속성은 사물의 '정의'나 '개념'이 될 것이다.
[40] 스피노자는 속성을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오성이 지각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실체의 모든 본질적인 특성은 속성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했다.
[41] 데카르트는 물체(body)의 실체를 물질(matter)이라고 했다. 물체의 본질은 기하학적 연장(extension)이다. 연장은 물체의 속성이고 물체의 정의이다. 따라서 물체란 연장된 것이다. 물체의 색깔, 냄새 따위는 우유성일 뿐이다. 물체의 본질적인 성질, 진정한 속성은 연장이다.
[42] 그러나 우리는 이런 분리 자체에 대해 문제 삼을 수 있다. 여기서 이 문제를 다룰 수는 없지만, 현대 물리학의 결론은 세계의 분리불가능성 쪽으로 기울고 있다.
[43] 물리적 기술 대상이 되는 물체를 물리계(system)라고 한다. 물리계는 하나의 입자로 구성될 수 있고 여러 입자들의 집단일 수 있다. 특히 물체는 일종의 여러 입자들의 집단이다. 그리고 물리계에 대한 기술은 이 물체가 처해 있는 물리적 환경의 규정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이 논문에서 물리계라는 용어 대신 사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44] 물리주의에 관한 엄밀한 정의은 생략한다. 물리주의 또는 유물론이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적이고, 또는 물리적이다"(O. Moser, J. Trout, Contemporary Materialism, Routledge, 1995)라고 주장하는 것이지만, '물리적'이나 '물질적'이라는 것이 매우 모호하기 때문에, 물리주의에 대한 엄밀한 정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질을 연장된 것이라고 정의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연장된 것'의 의미하는 바가 모호한 채 남게 된다. 연장이란 '물리적 공간에서의 연장'일 것인데 여기에 다시 '물리적'이 사용된다. 우리의 연구에서 잠정적으로 채택하는 입장은 단순히 물리학의 진정성을 '믿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물리주의가 아니라 물리학을 참된 학문 중 하나로 인정하는 입장에 불과하다.
[45] 사물의 속성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사물 일반의 속성이 아니라 사물 하나의 속성에 관해 논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속성은 사물에 대한 관찰과 측정에 상관없이 사물이 가지고 있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사물에 대한 관측된 자료는 속성과 다를 수 있다. 즉 관측된 자료는 단지 우연적 성질이고 외양이고 현상에 불과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물리량'(physical quantity)이라는 용어는 차라리 '외양'에 가깝다. 속성과 구별하여 측정된 물리량을 사물의 '성질'(quality)이라 하자.
[46] 20세기 초에 이루어진 일련에 실험에 의하면 미시세계가 뉴턴 물리학에 의해 묘사될 수 없음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현대 물리학자들은 뉴턴물리학을 포함하면서 미시세계까지 묘사할 수 있는 물리학을 개발하려 했고 그것이 바로 양자(quantum) 물리학이다. 여기서 '양자'의 의미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47] 파동함수(wave function), 또는 상태벡터(state vector)라 하기도 한다.
[48] 만일 양자메타물리학이 제기하는 물음이 관찰과 관찰자의 문제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 물음은 인식론적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주제가 양자물리학의 토대 문제라면 그 역시 인식론적 문제가 될 것이다(문장수, "구성주의적 구조주의의 관점에서 조명된 양자역학의 인식론", <철학연구> 제58집, 대한철학회, 51쪽, 각주).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제기하는 물음은 사물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그것도 "사물의 속성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물의 속성은 존재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자론으로서 메타물리학이다.
[49] 우리가 메타물리학과의 연관 속에서 양자물리학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고전물리학에서 나올 수 있는 메타물리학은 고작해야 인과론 또는 기계론 정도였지만 양자물리학은 자연에 대해 전혀 새로운 빛을 던져 준다. 양자물리학이 관계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풀 수 없는 무의미한 질문으로 취급되었던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취급한다. 예를 들어 양자물리학은 세계가 나눌 수 없는 하나라고 말한다. 양자물리학이 지극히 '자연적인' 것임을 우리의 이성이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자연에 더욱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50] A. Petersen, "The philosophy of Niels Bohr,"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 19, p.12(1963). M. Jammer, The Philosophy of Quantum Mechanics, John Wiley & Sons, Inc.(1974), p.204에서 재인용. Niels Bohr의 말.
[51] H. Pagels, The Cosmic Code: Quantum Physics as the Language of Nature(이호연 옮김, 범양사, 1989, 67쪽).
[52] 양자물리학에서는 원래 성질과 측정된 성질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원래 성질은 속성을 말하나, 그냥 '성질'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측정된 성질, 즉 우연적 성질을 뜻한다. 따라서 성질은 측정된 물리량, 즉 측정값이다.
[53] M. Redhead, Incompleteness, Nonlocality and Realism(Oxford University Press, 1987), p. 45.
[54] 메타양자물리학으로 불러야 하겠으나 메타물리학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양자메타물리학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55] 이에 대한 논의는 주로 실재론이 양자물리학과 양립할 수 없다는 논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논증을 숨은변수없음 정리(no-hidden-variables theorem)라고 한다. 이와 관련한 논증을 여기서 다룰 수 없지만 중요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속성이 존재한다면, 속성은 성질과 동일하지 않다(불충실한 측정). 둘째, 성질은 측정되는 다른 성질과 무관할 수 없다(상황성). 셋째, 이 상황성은 비국소적이다(비국소성). 상황성과 비국소성에 의해 넷째, 세계는 분리불가능하다(분리불가능성). 이처럼 양자메타물리학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문제에 접근한다. 엄밀한 논의는 다음을 참조하라. von Neumann, Mathematical Foundations of Quantum Mechanic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5); A. Gleason,“Measures on the closed subspaces of a Hilbert space,” J. Math. Mech. 6, 885(1957); J. Bell, “On the Einstein-Podolsky-Rosen Paradox,” Physica 1, 195(1964); J. Bell, “On the problem of hidden variables in Quantum Mechanics”, Rev. Mod. Phys. 38, 447(1966); S. Kochen, E. Specker, “The problem of hidden variables in Quantum Mechanics,” J. Math. Mech. 17, 57(1967); J. Bell, “On the impossible Pilot Wave,” Found. Phys. 12, 989(1982); D. Greenberg, M. Horne, and A. Zeilinger, “Going beyond Bell’s Theorem,” in Bell’s Theorem, Quantum Theory, and Conceptions f the Universe (Kluwer Academics Publishers, edited by M. Kafatos, 1989) p73; D. Mermin, “Simple Unified Form for the Major No-Hidden-Variables Theorems,” Phys. Rev. Lett. 65, 3373(1990); A. Peres, “Incompatable results of Quantum Measurements,” Phys. Lett. A151, 107(1990); D. Mermin, “What’s wrong whih These Elements of Reality,” Phys. Today 43(6), 9(1990); D. Mermin, “Hidden variables and two theorems of John Bel,l” Rev. Mod. Phys. 65, 803(1993); 김명석 등, "입자는 측정 전에 물리량을 소유하고 있는가?", <새물리> 38(4), 251 (1998) . 김명석 등, "물리적 속성의 상황의존성", <새물리> 39(3), ?? (1999)
[56] S. Blackburn, The Oxford Dictionary of Philosophy(Oxford Unversity Press, 1994), p. 240.
[57] 질문하는 것은 사람에게 언제나 유의미한 일이고 이에 대답하는 것은 원리상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결코 믿을 수 없고 그래서 사람의 마음은 진리는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진리를 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학문이란 사람들이 믿는 것은 진실로 믿게 하는 것이다. 물리학이란 물리학의 진정성에 대한 물리학자의 믿음을 진실되게 하는 것이다.

http://www.kebi.com/~quantics/chul9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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