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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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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대중을 위한 세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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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교육출판사] 청년대중을 위한 세계의 역사











중국 인민교육출판사 편
연변 교육출판사 政史地편집실 옮김

차 례



고대편



제1장 원시 사회

인류 역사의 시작
/씨족 공동체의 발생과 모계 씨족의 번영
/부계 씨족 공동체와 원시 사회의 해체



제2장 고대 아시아, 아프리카의 노예제 국가

제1절 이집트

노예제 국가의 형성
/노예와 농민들에 대한 노예주들의 가혹한 착취
/노예와 빈민들의 대봉기
/이집트 군사제국의 건립과 그의 쇠퇴
/고대 이집트의 문화

제2절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흥성
/함무라비 법전
/고대 양강유역의 문화
/페르시아 제국

제3절 인도

인더스강 유역의 고대 문명
/통일된 노예제 국가의 형성
/인도의 신분 제도
/불교의 흥성
/고대 인도의 문화



제3장 고대 그리이스, 로마 노예제 국가

제1절 그리이스

그리이스 노예제 도시 국가의 발생
/스파르타와 아테네
/그리이스-페르시아 전쟁
/그리이스 노예제 경제의 번영
/그리이스의 쇠퇴
/고대 그리이스의 문화

제2절 로마

로마 공화국의 형성과 확장
/노예 제도의 고도의 발전
/노예 봉기
/로마제국
/기독교
/서로마제국의 멸망
/로마의 문화



제4장 서유럽 봉건 제도의 형성과 발전

제1절 서유럽 봉건 제도의 형성과 발전

프랑크 왕국
/봉건 제도의 형성
/봉건적 신분 제도와 서유럽의 봉건 장원
/기독교회
/서유럽 주요 봉건 국가의 형성
/도시의 재흥성
/봉건 영주를 반대한 도시 주민들의 투쟁 및 도시 내부의 계급 투쟁

제2절 영국-프랑스 백년 전쟁과 농민 봉기

백년 전쟁의 시작
/프랑스 농민 봉기
/영국 농민 봉기
/백년 전쟁의 종말



제5장 아시아의 봉건 국가들

제1절 조선

신라의 조선 통일
/고려 왕조와 이조의 건립
/일본 침략자를 반대한 투쟁
/중국과 조선의 문화 교류

제2절 일본

일본의 통일
/다이까 개신
/중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

제3절 아랍 국가

6, 7세기 아랍의 사회 정황
/이슬람교의 발생과 아랍 국가의 통일
/아랍제국
/아랍제국의 분열
/아랍 문화

제4절 오스만 터어키제국

오스만 터어키의 흥성
/동로마제국의 쇠퇴
/오스만 터어키의 대외 팽창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오스만 터어키의 쇠퇴와 그의 정복 전쟁의 결과



제6장 고대 아프리카

동부 아프리카
/서부 아프리카
/중부 아프리카와 남부 아프리카
/중국과 아프리카간의 친선 교류



제7장 고대 아메리카

아메리카, 인디안인의 고향
/마야인의 문화
/아즈텍 문화
/잉카 문화



제8장 서유럽 봉건제도의 해체와 자본주의의 흥성

이탈리아 자본주의 생산의 최초의 맹아
/새 항로의 개척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의 식민지 팽창
/독일의 종교 개혁과 농민 전쟁
/영국 자본주의 발전의 개시
/자산계급문화의 흥성




근대편



제1장 영국 자산 계급

스튜어트 왕조의 전제와 사회 모순의 격화
/혁명 전쟁
/크롬웰의 독재 통치
/영국에서의 자산 계급과 신귀족 통치 지위의 확립



제2장 17~18세기의 러시아

봉건 농노제 러시아의 흥성
/짜르 러시아의 침략 팽창
/쁘가쵸브 봉기



제3장 식민지 패권 쟁탈을 위한 서유럽 식민주의 국가들의 투쟁

네덜란드의 흥성과 식민지 팽창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 팽창과 그들의 충돌
/식민주의의 죄악



제4장 미국 독립 전쟁

독립 전쟁이 일어난 원인
/독립 전쟁의 시작
/≪독립 선언≫의 발표와 독립 전쟁의 승리
/미국 연방 정부 건립



제5장 프랑스자산 계급 혁명

제1절 자산 계급 혁명의 폭발

봉건 전제 제도의 위기
/자산 계급 혁명의 폭발

제2절 혁명 전쟁과 왕위의 전복

대자산 계급의 집권
/혁명 전쟁의 폭발과 왕위의 전복

제3절 지롱드파의 통치와 자코뱅파의 독재

지롱드파의 통치
/자코뱅파의 독재
/자코뱅파의 분열과 테르미도르 정변

제4절 1794-1814년의 프랑스

대외 전쟁과 나폴레옹의 등장
/프랑스 제1 제국의 흥성과 멸망



제6장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혁명

에스파니아와 포루투갈의 식민지 통치
/아이티 혁명
/라틴아메리카 독립 운동의 시작과 그 실패
/라틴아메리카 독립 전쟁의 승리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침략 야심의 폭로



제7장 영국의 산업 혁명

산업 혁명의 전제와 조건
/산업 혁명
/산업 혁명의 결과



제8장 과학적 공산주의의 탄생

공상적 사회주의
/산업 무산 계급이 역사 발전의 가장 위대한 동력으로 되었다
/과학적 공산주의의 창시를 위해 투쟁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첫번째의 전투 강령-≪공산당 선언≫



제9장 1848년 유럽 혁명

유럽 대륙을 휩쓴 혁명의 열화
/프랑스 혁명
/동남 유럽 민족 해방 운동을 탄압한 짜르 러시아
/마르크스, 엥겔스와 1848년 혁명



제10장 농노 제도의 폐지와 짜르 러시아의 침략 팽창

1861년 개혁
/19세기 짜르 러시아의 침략 팽창



제11장 미국 내전

미국의 확장
/두 가지 경제 제도간의 모순
/미국 내전



제12장 아시아의 혁명 폭풍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감행한 서방 식민주의자들
/아시아의 혁명 폭풍
/인도 민족 봉기(1857~1859년)



제13장 일본의 메이지 유신

19세기 중기 일본의 사회 상황
/무력으로 타도되는 바꾸후
/메이지 유신



제14장 독일, 이탈리아 통일

독일의 통일
/이탈리아의 통일



제15장 제1인터내셔날과 빠리 꼼뮨

제1인터내셔날의 창립
/기회주의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투쟁
/빠리 꼼뮨의 창립
/빠리 꼼뮨의 혁명적 조치
/꼼뮨 보위전
/빠리 꼼뮨 후의 제1인터내셔날



제16장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선 자본주의

제1절 과학 기술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추세

과학 기술의 발전
/독점 조직의 형성

제2절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제3절 제국주의간의 모순

세계의 재분할 투쟁과 제국주의의 2대 군사 침략 집단의 형성
/군비 경쟁과 전쟁 위기



제17장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민족 - 민주주의 운동

제1절 아시아의 각성

조선 인민의 반일 투쟁
/인도 민족 운동의 앙양(1905 ~ 1908년)

제2절 아프리카 인민의 반제 투쟁

제국주의에 의한 아프리카의 분할
/이집트와 수단에서의 항영 투쟁
/이탈리아의 침략에 반항하여 싸운 이디오피아 인민들의 위대한 승리

제3절 라틴아메리카 인민의 반제 ․ 반봉건 투쟁

독립 혁명 후의 라틴아메리카
/멕시코 자산 계급 혁명(1910~1917년)



제18장 제2인터내셔날

제2인터내셔날의 창립
/기회주의를 반대하여 싸운 엥겔스의 투쟁
/수정주의의 범람
/제2인터내셔날 수정주의를 반대하여 진행한 레닌의 투쟁



제19장 제1차 세계대전

대전의 폭발과 대전의 성격
/전쟁의 과정
/10월 혁명의 승리와 대전의 종말



제20장 근대 유럽과 아메리카의 과학과 문학 예술

근대 자연 과학의 발전
/유럽, 아메리카 근대 문학의 발전
/근대 음악과 회화의 발전




현대편



제1장 위대한 사회주의 10월 혁명

제1절 위대한 사회주의 10월 혁명

사회주의 혁명 노선의 제정
/볼셰비키당의 무장 봉기를 위한 준비
/뻬뜨로그라드 무장 봉기의 승리
/무산 계급 독재 국가의 건립

제2절 제국주의 무장 간섭과 국내 반혁명 반란을 반대한 소비에트 인민의 투쟁

외국의 무장 간섭과 국내 전쟁의 시작
/협상국의 세 차례의 진공과 그 실패
/위대한 10월 혁명 승리의 역사적 의의



제2장 제국주의의 베르사이유 - 워싱톤 체계

빠리 강화 회의
/대전 후에 새로 일어선 나라들
/국제 연맹
/워싱톤 회의



제3장 전후 세계 혁명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

제1절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혁명 운동

독일의 11월 혁명
/바이마르 공화국의 창건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제2절 아시아, 아프리카에서의 민족 해방 운동

조선의 3․1운동
/인도 민족 해방 운동의 앙양
/터어키 자산 계급 혁명
/이집트의 독립 운동

제3절 국제 공산당

국제 공산당의 창건
/국제 공산당의 초기 활동



제4장 대전 후의 주요 자본주의 국가

제1절 대전 후 초기의 주요 자본주의 국가

대전 후 초기의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혁명 사건과 파쇼의 대두
/전후 초기의 미국과 일본

제2절 20년대의 국제 관계

배상금 문제
/로카르노 공약
/불가침 협정과 국제 군비 축소 대회



제5장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신경제정책의 실시
/소련의 창건
/레닌의 서거
/
레닌주의를 수호하고 트로츠키주의를 반대하여 싸운 스탈린의 투쟁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위대한 승리



제6장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 공황과 정치 위기

1929년~1933년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 공황
/루즈벨트 뉴딜
/유럽에서의 전쟁 진원지의 형성
/아시아에서의 전쟁 진원지의 형성



제7장 30년대의 민족 해방 운동과 반파쇼 투쟁

국제 공산당 제7차 대표 대회
/중국의 항일 민족 혁명 전쟁
/조선 인민들의 항일 무장 투쟁
/이탈리아의 침략을 반대하여 싸운 이디오피아의 민족 해방 전쟁
/에스파니아의 반파쇼 민족 해방 전쟁



제8장 제2차 세계대전

제1절 제2차 세계대전 전야의 유럽

뮨헨 음모
/양보 정책의 파산

제2절 제2차 세계대전의 폭발과 그 첫 단계

폴란드에 대한 파쇼 독일의 불의의 습격
/프랑스의 패배
/브리튼 전장
/북아프리카 전선의 개척과 독일군의 동남 유럽 점령

제3절 제2차 세계대전의 새로운 단계

소련 조국 보위 전쟁의 개시
/태평양 전쟁의 폭발
/세계 반파쇼 동맹의 형성
/스탈린그라드 방어전

제4절 세계 인민의 반파쇼 전쟁의 위대한 승리

각국 인민들의 영웅적 반파쇼 투쟁
/파쇼 침략 집단의 와해
/유럽 제2전장의 개척
/파쇼 독일의 궤멸. 일본 제국주의의 항복



제9장 인민 민주 역량의 확대, 미국의 패권 정책

인민 민주 역량의 확대
/미국의 패권 지위의 확립과 미국의 [냉전] 정책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침략



제10장 3개 세계의 형성과 발전 변화

제3세계의 흥성
/전후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 정황
/사회주의 국가 개혁 조류의 흥성
/미국과 소련의 패권 쟁탈



제11장 현대 과학과 문화 예술의 발전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
/소련, 동유럽의 문학과 예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현대 문학 예술의 발전
/유럽과 아메리카 현대 문학 예술의 발전









고대편







제1장 원시 사회


인류 역사의 시작
인류는 머나먼 옛날부터 지구에서 생활하며 노동하였다. 근 100년래에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일부 지방들에서 초기인류의 화석들이 발견되었다. 1968년에 동아프리카의 케냐의 지층에서 타제한 석기들을 발굴하였다. 또 1972년에는 석기가 묻혀 있는 지층 밑에서 한 사람의 두골 화석 조각들을 발굴하였다. 이 조각들을 모아 놓았더니 대체적으로 완전한 두골 형상이 이루어졌다. 감정한 결과, 이러한 석기와 두골들은 모두 200여 만 년 전의 유물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2,3백만 년 이전에 벌써 지구에 인류가 나타났다고 미루어 판단할 수 있다.
인류가 있은 때로부터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인류 사회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원시 사회는 제1단계이다. 세계 각 민족 인민들은 모두 서로 다른 역사 시기와 서로 다른 조건에서 원시 사회 단계를 거쳤다. 원시 사회에서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계와 힘겹게 투쟁하였다. 장기간의 노동 실천 속아서 인간은 단련되고 개조되었으며, 사람들의 투쟁 경험이 풍부화되고 투쟁 능력이 제고되었다. 사람들은 부단히 도구와 무기를 개진해 가면서 점차적으로 생활 조건을 개선하였다.
최초에 사람들은 자연을 인식하고 지배하는 능력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던 데다가 생활 환경마저 아주 험난하였다. 그러므로 살아나가기 위하여 사람들은 몇십 명씩 무리를 지퍼 강변이거나 호수가, 그리고 삼림수변을 따라다니면서 유동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몽둥이나 거친 석기로 야수의 습격을 방어하고 야수를 사냥하였다. 이들이 사용한 석기는 돌로 돌을 깨어 만든 석기이다.
이러한 석기를 구석기라고 하며 구석기를 사용한 시대를 구석기 시대라고 한다. 또 4, 5십만 년 이전에 중국에서 생활한 북경인은 불로 몸을 덥히고 음식물을 익혀 먹을 줄 알았다. 초기 인류들이 불을 사용한 흔적은 유럽에서도 발견되었다.





씨족 공동체의 발생과 모계 씨족의 번영
또 몇 십만 년이 지나갔다. 인류는 완만하게나마 여러 면에서 부단히 발전하여 나갔다. 그들이 타제한 석기의 종수는 늘어났고 그 제작에서도 보다 정밀하여졌다. 후에 와서는 석기와 목기 이외에 또 골기를 대량으로 사용하였으며 작살과 뿌리는 무기도 발명하였다. 사람들은 동굴이나 움집에서 집단적으로 생활하였다. 집단내에서는 성별과 연령에 따라 일이 분담되었는데, 남자들은 집단적으로 사냥을 하고 부녀자들은 야생 식물을 채집하였으며 노인들은 어린애들을 보살폈다. 사람들은 혈연적 관계에 의하여 보다 고정된 집단을 이루고 하나하나의 씨족 공동체 조직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서로 사돈 관계를 가진 씨족들이 종족을 이루었다.
당시 씨족 공동체는 사회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였다. 공동체의 성원들은 함께 거주하면서 집단적으로 노동하고 그 성과를 고루 분배하였다. 그들은 착취가 없고 계급이 없는 평등한 생활을 하였다. 씨족 성원들의 관계는 어머니의 계통에 따라 유지되었고, 여자들은 채집 노동에 종사하는 외에 씨족 내부의 사무를 관리하였으므로 보편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이때의 씨족 공동체를 모계 씨족 공동체라고 한다. 모계 씨족 공동체시기에 5대주에는 모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약 1만 년 전부터 도구와 무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기술이 새로운 단계로 제고되었다. 그들은 석기를 반들반들하게 갈고 거기에 구멍을 뚫고 나무자루를 맞추어 돌도끼, 돌호미, 끝이 뽀족한 돌창을 만들었다. 이렇게 마제한 석기를 신석기라고 하며 신석기를 사용한 시대를 신석기 시대라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또 낚시와 그물을 발명하였으며, 진흙으로 질을 만들고 그것을 구워서 질그룻을 만들었다. 도구를 개간하면서부터 황무지를 개간하고 벌목을 하고 사냥을 하고 고기잡이를 하는 일이 용이해졌고, 인류의 생활 조건도 크게 개선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사냥하는 노동 실천 속에서 일부 동물을 길들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개, 산양을 길들였고, 후에는 돼지, 소, 나귀, 말을 길들이게 되었다. 이로부터 원시적 목축업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장기적인 채집 노동 실천 속에서 일부식물들의 생장 법칙을 알고 재배하는 방법을 더듬어 내었다. 이로부터 원시적 농업이 나타났다.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모두 농업촌락이 나타났다. 이보다 좀 늦게 유럽에서도 농업이 출현하였다.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들은 밀, 보리, 벼, 목화를 재배하였고, 유럽인들도 밀을 재배하였으며, 아메리카의 인디안인들은 옥수수, 고구마, 감자를 재배하였다. 원시적인 농업과 목축업이 출현하면서부터 사람들은 더는 대자연의 혜택에만 의거하지 않고 자기의 노동으로 동물을 키우고 식물을 재배하는데 의거하여 생활을 해결하였다. 이로부터 생활조건이 더욱 담보되었고 인구도 부단히 늘어났다. 사람들은 보다 정착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모계 씨족 공동체는 번영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약 6, 7천 년 전부터 서아시아의 주민들은 동(銅)을 제련하는 기술을 장악하였고, 석기와 동기를 병용하는 시대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구리 호미, 구리 삽 등의 도구가 나타났다. 처음에 사람들은 순동을 제련하였고, 후에 동과 석(錫)을 섞어 녹여서 청동을 만들었다. 금속도구는 잘 견디고 오래 쓸 수 있어 사람들의 노동 능률을 가일층 높였다. 또, 농업은 뙈기밭을 부치던 국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하천 유역의 충적 평원과 농업에 적당한 곳에서는 농업이 점차 주요한 생산 부문으로 되었다. 그리고 초원지대에서는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목축업에 종사하였다. 이것이 제1차 사회적 대분업이었다. 농업과 목축업이 발전됨에 따라 수공업도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도기를 만드는 돌림틀, 천을 짜는 방직기가 나타났으며, 야금, 기름짜기, 술빗는 일들이 점차 전문적인 업종으로 되었다. 그리하여 수공업은 농업과 목축업에서 갈라져 나왔다. 이것이 제2차 사회적 대분업이었다. 이때로부터 잉여 생산물이 있게 되었다. 제1차 사회적 대분업이 나타난 후부터 종족과 종족 사이에, 씨족과 씨족 사이에 생산물 교환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씨족의 우두머리들은 교환의 집행자로 되어 흔히 직권을 이용하여 씨족의 재산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후에 와서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생산물 교환이 진행되었다.

부계 씨족 공동체와 원시 사회의 해체
생산이 발전됨에 따라 밭갈이와 같은 힘겨운 노동은 남자들이 담당하였다. 남자들의 노동 지위가 개변됨에 따라 씨족내에서 남성이 여성을 대신하여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모계 씨족 공동체는 점차 부계 씨족 공동체로 전변하였다. 부계 씨족 공동체에는 선조가 같은 몇몇 가정이 포괄되었다. 그리고 씨족장은 성년 남자가 담당하였다.
생산력이 제고됨에 따라 생산 노동은 더 이상 전체 씨족 성원들의 공동 노동을 요구하지 않게 되었으며, 소수의 사람들로도 밭을 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씨족은 여러 개의 가정으로 분화되었다. 이때도 토지는 여전히 씨족의 소유였으며 정기적으로 각각의 가정에 나누어주어 다루게 하였다. 그러나 노동 생산물은 각각의 가정에서 소유하였다. 그리하여 가정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 되었다. 생산이 개체화되고 잉여생산물이 늘어나 교환이 발전됨에 따라 씨족과 종족의 우두머리들이 직권을 이용하여 더욱더 많은 옥토를 독점하고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아 씨족 귀족으로 되었다. 그리고 재산을 빼앗긴 씨족의 성원들은 빈민으로 되었다. 씨족 내부에서는 빈부의 분화가 갈수록 심해졌다. 가난한 씨족 성원들은 본 씨족을 떠나 다른 곳에 가서 살 길을 찾게 되었으며, 혈연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혈연적인 관계는 멀어졌고 한곳에 사는 사람이라 하여 꼭같은 씨족 성원인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이 일정한 지역내에서 살며 친족 관계가 아닌 가정들로 이루어진 조직을 농촌 공동체(촌락 공동체)라고 한다. 농촌 공동체가 점차≫씨족 공동체를 교체하였다.
사회에 빈부의 분화가 생기면서 노예가 출현하였다. 지난날에는 종족간의 충돌에서 붙잡은 포로들의 대다수를 죽여 버렸다. 후에 생산력이 제고되자 한 사람의 노동 생산물에는 한 사람이 쓰고도 좀 나머지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씨족 귀족들은 더는 포로를 죽이지 않고 노예로 남겨두고 그들에게 이러저러한 고생스런 일들을 시켰다. 가난에 쪼들리다가 파산한 씨족 성원들도 노예로 전락되어 씨족 귀족과 부자들의 착취와 예속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에 노예와 노예주가 나타났다. 이때로부터 사회 집단이 더는 씨족에 의하여 구분되지 않고 계급으로 나뉘어지게 되었으며, 노예와 노예주 사이, 빈민과 귀족 사이의 투쟁은 부단히 격화되었다. 따라서 원시 사회는 종국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노예와 빈민들에 대한 착취와 탄압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예주 계급은 폭력적 통치 기구 즉 국가를 건립하였다. ≪국가는 피압박 계급을 착취하는 도구이다.≫(레닌) 역사상에서 가장 일찍 나타난 국가가 노예제 국가였다. 노예제 국가의 출현은 계급이 없고 착취가 없는 원시 사회의 종말을 의미한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원시 사회로부터 노예 사회에 들어선 나라로는 고대의 이집트, 바빌로니아, 인도, 중국이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이 네 개 고대 문명국을 세계 문명의 요람이라고 한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모계 씨족 공동체란 무엇인가? 모계 씨족 공동체 시기에 인류는 생산 활동가운데서 어떠한 발전을 가져왔는가?
2. 부계 씨족 공동체는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원시 사회의 해체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설명해 보자.



제2장 고대 아시아, 아프리카의 노예제 국가들






제1절 이집트

노예제 국가의 형성
아프리카의 동북부에는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나일강이 있다. 나일강 양안 지대를 남부 나일강 하곡의 상 이집트와 북부 삼각주 소택 지구의 하 이집트로 나눈다. 해마다 6, 7월이면 나일강 상류에 폭우가 내려 홍수 사태가 나는 바람아 나일강 하곡의 광대한 지역이 물 속에 잠기곤 하였다. 10월말이 되어 우기가 지나가면 강물이 줄어든다. 정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강은 양안의 땅을 적셨고 또한 지면에 비옥한 진흙층을 쌓아 놓아 농업 생산의 발전에 매우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1, 2만 년 이전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강 하곡 양안의 고지에서 채집과 사냥을 하면서 씨족 공동체의 생활을 하였다. 후에 기후가 점차 건조해짐에 따라 이집트인들은 나일강 하곡 지대에 이동하여 와서 살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집단의 힘에 의거하여 물을 빼어 소택지를 말리며 수로를 파고 제방을 쌓는 등 수리 건설을 진행하였고, 비옥한 땅에 보리, 밀, 아마 등 농작물을 재배하였다.
장기간의 힘든 노동을 거치는 가운데 이집트인들은 생산 도구를 개선하고 동기를 발명하여 생산을 발전시켰다. 하이집트에서는 목축업이 발달하였다. 기원전 3500년 경부터 이집트에는 최초의 많은 노예제 소국들이 속속 출현하였다. 이러한 국가들은 노예와 기타 재부를 쟁탈하기 위하여 서로 병합하였다. 기원전 3100년경에 메네스가 초보적 단계의 이집트 통일을 이룩하였다. 이집트에서는 점차 노예주 계급 독재의 국가가 건립되었다. 수도는 멤피스였다.





노예와 농민들에 대한 노예주들의 가흑한 착취
이집트 노예제 국가에서 국왕(이집트의 국왕을 ≪파라오≫라 하였는데, ≪파라오․≫란 ≪궁전≫이라는 뜻이다. 후에 국왕의 존칭으로 되었다.)은 가장 큰 노예주로서 전체 노예주 계급을 대표하여 정치, 경제, 군사 및 사법 등의 면에서 대권을 장악하였다.
국왕은 전국의 토지를 모두 자기의 소유로 인정하고, 많은 땅을 대신들과 사원에 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국왕은 토지, 노예 및 재부를 약탈하기 위하여 늘 전쟁을 도발하였다. 한 차례의 약탈 전쟁에서 한 국왕은 이집트에서 12만 명을 포로하였다고 자랑하였고, 또 한 차례의 약탈 전쟁에서 다른 한 국왕은 남방의 누비아에서 포로 7,000명을 얻고 가축 20만두를 약탈하였다고 하였다. 전쟁이 빈번하였으므로 노예의 수량도 대폭적으로 늘어났다.
국왕과 노예주 계급의 가혹한 착취와 압박 아래에서 노예와 농민들의 처지는 매우 비참하였다. 노예들에게는 아무런 자유도 없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가축 취급을 받았다. 노예주 계급은 노예들을 강요하여 관개 수로를 파고, 수리 건설을 하고, 농사일을 하거나 사원, 궁전, 능묘를 짓는 등 고역에 내몰았다. 노예들은 늘 된매를 맞거나 아니면 팔려가거나 살해당하였다. 농민들은 명목상으로는 자유민이었으나 기실은 노예와 마찬가지로 예속되어 곡식, 채소, 가축, 술 따위의 생산물을 국왕에게 세금으로 바쳐야 했다. 세금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국왕은 늘 사람들을 파견하여 전국의 토지, 인구, 가축과 기타 모든재부를 조사하게 하고, 조사 자료에 근거하여 세금액을 정하였다. 가난한 농민들이 만약 제때에 세금을 바치지 못하면 호된 매를 맞거나 감옥에 갇혔다. 파산한 수많은 농민들은 할 수 없이 노예주들에게 빛을 져야하였는데, 그 빛을 제때에 갚지 못하면 노예주들은 그들을 강박하여 저들의 채무 노예로 만들었다. 국왕은 또 농민들을 늘 각종 부역과 대규모의 건설 공사장으로 내몰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축물들이 바로 노예와 농민들을 가혹하게 부린 역사적 증거물이다.
피라미드는 이집트 국왕이 자기를 위하여 건축한 큰 무덤이다. 피라미드는 정사각추로 되어 사면이 ≪金(금)≫자처럼 보였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금자탑이라고도 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들은 나일강 하류의 서안, 즉 오늘의 카이로에서 서남쪽으로 10여 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분포되어 있다. 이집트에는 70여 개의 크고 작은 피라미드가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피라미드는 국왕 후푸의 무덤이다. 이 피라미드의 높이는 146.5미터이고 밑변의 길이는 각각 230여 미터이다. 이 피라미드는 반듯하게 다듬은 약 230만 개의 큰 돌로 쌓아 만든 것인데 돌 한 개의 무게가 평균 2톤반씩이나 된다. 외관이 웅장하고 내부에 구조가 복잡한 묘실(墓室)이 있는 이 피라미드는 세계 건축사에서 기적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집트국왕은 무수한 노예와 농민들을 강제로 끌어다 윤번으로 일을 시켰는데, 한번에 10만 명씩 3개월간 일을 시켰다. 석재를 운반하는 길을 닦는데만도 10년이 걸렸고, 탑을 쌓는 데 또 20년이 걸렸다. 이렇게 전후로 30년을 거쳐서야 이 피라미드가 준공되었다. 근로 인민들은 감독의 채찍과 쨍쨍 내리쬐는 불볕 밑에서 고역에 시달렸고 무수한 사람들이 지쳐서 죽었다.





노예와 빈민들의 대봉기
가혹한 압박과 착취로 인해 빚어진 무수한 재난은 피라미드마냥 근로 안민들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노예주 계급의 포악한 통치는 부단히 노예 봉기를 야기시켰다. 국왕은 사후에 자기시체를 잘 안장시키기 위하여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축하였지만 어떤 국왕의 시체는 분노한 봉기자들에 의하여 피라미드 속에서 끌려나와 곤죽이 되고 말았다. 기원전 2100년 전후에 노예, 농민, 수공업자 등 빈곤한 근로 인민들이 전국 각지에서 노예와 빈민 대봉기를 일으켰다. 봉기자들은 서울을 점령하고, 왕궁을 태워 버리고, 국왕을 사로잡고, 귀족을 내쫓고, 수많은 관리들을 처단하고, 문건, 보관 서류와 조세 장부를 태워버리고, 국왕 창고의 식량을 나누어 가졌다. 어떤 노예주는 징벌을 받았고, 어떤 노예주는 처단되었고, 어떤 노예주는 도망쳤다. 노예와 빈민들의 피땀을 짜내어 모은 노예주들의 재부도 근로 인민들의 손에 되돌아왔다. 고대 이집트의 한 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재산이 없던 사람들이 재부의 소유자로 되고‥‥‥재부의 소유자는 재산이 없는 사람으로 변하였으며≫, ≪대지는 돌림틀처럼 돌아갔다.≫ 이 봉기는 마지막에 탄압되기는 하였지만, 봉기자들은 노예주의 통치를 여지없히 타격하였고 인민 대중의 위대한 역량을 과시하였다.
후에 노예주 계급은 또 통일된 국가를 건립하고 티베스에 서울을 정하였다.





이집트 군사 제국의 건립과 그의 쇠퇴
기원전 16세기 중엽에 이집트는 전례없이 강성한 시기에 들어섰다. 국왕들은 여러 차례 지중해 동안지구와 누비아에 원정하였다. 기원전 15세기에 투트모스3세는 전후로 17차례나 수리아와 팔레스티나에 쳐들어가 그곳에 통치권을 세우고, 또 서쪽으로 리비아, 남쪽으로 누비아에 쳐들어가 나일강의 제4폭포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출정한 때마다 많은 노예와 가축 그리고 기타 재물들을 약탈하여 왔다. 그 결과 노예의 수량은 대폭적으로 늘어났고 노예제경제는 가일층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집트는 노예제 군사제국으로 되었다.
이 시기에는 청동기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철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농업과 수공업도 비교적 크게 발전하여 이집트는 소아시아, 홍해남안, 그리이스 및 에게해 도서들과 무역을 하였다.
강성한 제국은 200년 가량 유지되었다. 기원전 13세기로부터 이집트는 다시 쇠퇴의 길에 들어섰다. 약탈 전쟁과 계급적 압박은 근로 인민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재난을 가져다 주었다. 이집트에서는 여러 차례 노예와 빈민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장인들이 파업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이집트에 정복당한 지구들에서도 부단히 반항 투쟁을 벌여 이집트의 통제에서 하나하나 벗어났다. 동시에 이집트 노예주 계급 내부의 권력 쟁탈전도 갈수록 심해져 국가는 마침내 분열 상태에 빠졌다.
기원전 525년에 고대 이집트는 아시아에서 새로 일어난 국가인 페르시아에 의하여 멸망되고 국가의 독립을 상실하였다.





고대 이집트의 문화
과학 지식은 생산 투쟁의 수요와 실천에 의하여 발생된다. 고대 이집트의 문화는 노예와 근로 인민들의 고생스런 노동에 기초하여 탄생하였다.
기원전 3000여 년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상형문자를 사용하였다. 상형문자는 일정한 그림 형태의 부호로 일정한 사물이나 개념을 표시하였다.
예를 들면 파도 모양의 3개선으로는 물을 표시하고 골짜기 양쪽에 있는 산봉우리로는 산을 표시하였다. 후에 와서 이런 부호는 일정한 개념을 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정한 음절도 표시하였다. 예를 들면 이집트인은 부엉이를 ≪무≫라고 불렀는데, 부엉이의 그림 부호는 부엉이를 표시할 뿐만아니라 ≪무≫ 소리도 표시하였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여러 가지 부호로 이루어진 문자가 나타났다. 이러한 문자는 후에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그 외형이 점차 정형화되었다. 상형문자는 후에 자모문자의 기초로 되었다.(기원전 2000년대에 지중해 동안의 페니키아인들은 주로 이리저리 둘러맞추는 이집트 문자의 영향을 받아 22개의 표음 자모를 만들어 내었다. 고대 그리이스인들은 또 페니키아 자모에 기초하여 그리이스 자모를 만들어 냈다. 후에 그리이스 자모의 기초에서 로마와 그 주위 지구의 라틴인의 라틴 자모가 형성되었다. 그리이스 자모와 라틴 자모는 또 서방 국가들의 자모 기초로 되었다. 이밖에 인도 자모나 아라비아 자모들도 페니키아 자모를 이리저리 맞추어서 발전시킨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풍부한 천문 지식을 축적하였다. 농업 생산을 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퍽 오래 전부터 강물이 늘고 주는 것과 천체 현상과의 관계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졌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일찍 태양력을 제정하였다. 그들은 매년 나일강이 범람하기 시작하는 때를 1년의 시작으로 정하였다. 1년을 12개월로 나누고 한 달을 30일로 하였으며, 1년의 마지막에 5일의 명절 날짜를 더 가하여 1년을 355일로 정하였다. 그들은 또 나일강이 늘고 주는 것과 농작물의 생장 정황에 근거하여 1년을 세 개 계절, 즉 범람 계절, 파종 계절, 수확 계절로 나누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수학 지식도 매우 많이 장악하고 있었다. 토지면적을 측량하고 밭지경을 정하고 수리 건설을 하고 건축을 하기 위하여 10진법의 계산 방법을 응용하였으며, 간단한 산술 4칙 응용 문제를 계산하였으며, 한 개의 미지수가 있는 방정식을 풀었으며, 또 장방형, 삼각형, 제형과 원의 면적 계산법을 알았다. 그들은 또 원주율을 3.14로 정확하게 추산하였다. 피라미드 건축 설계의 엄밀성과 계산의 정확성은 수학, 특히는 기하학에서 고대 이집트인들의 성과를 충분히 설명해 준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매우 오래 전부터 일부 국왕과 대신들의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어 보존하였다. 이것은 의약면에서 그들에게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건축면에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 이외에 많은 궁전과 신전을 건축하였다. 티베스 부근의 아몬 신전(아몬은 원래 티베스의 비호신이다. 후에 와서 일신(日神)으로 떠받들리면서 나라의 최고신으로 되었다. 아몬 신전의 건축물들은 오늘의 카르나크촌에 소재하였다.)은 방대한 건축물로서 오늘까지 그 유적이 남아 있다. 아몬 신전의 몸체가 차지한 면적은 약 50,00평방미터에 달한다. 신전내에는 도합 134개의 등근 기등이 서 있다. 중간의 가장 높은 12개의 기둥은 그 높이가 21미터인데, 개화상을 한 기등 꼭대기에는 100여 명이 설 수 있으며, 기등에는 상형문자와 도형이 새겨져있고, 벽에는 벽화와 조각이 장식되어 있어 매우 보기 좋다.
고대 이집트 문화의 중대한 성과는 근로 인민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것이며 근로 인민들의 지혜의 결정체이다. 그러나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근로 인민들은 학습할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문화 지식은 노예주 계급들에게 독점되었고 그들이 근로 인민들을 압박하고 착취하는 도구로 되었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고대 이집트의 노예와 농민들은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가?
2. 이집트 노예제 군사 제국의 흥성과 쇠퇴 정황에 대해 설명해 보자.
3, 고대 이집트인들은 문화면에서 어떤 주요한 성과를 달성하였는가?






제2절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흥성
아시아 서부에서 디쥘라강(티그리스강)과 푸라트강(유프라테스강)이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페르시아만에 들어간다. 해마다 봄이면 이 양강 상류 산구에 쌓인 눈이 녹아내려 강물이 범람하면서 자연스럽게 중․하류 일대에 감탕을 쌓아 놓아 땅이 비옥해졌다.
기원전 5000년경에 이 양강 유역의 남루에는 주로 슈메르인들이 살았다. 슈메르인들은 씨족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보리, 밀, 채소를 재배하였고, 또 면양, 돼지, 소, 나귀 등 가축도 사육하였다. 슈메르인들은 농업 생산을 하기 위하여 집단의 힘으로 관개수로를 파서 밭에 물을 대었으며 제방을 쌓아 흥수를 막았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슈메르인들은 전후로 몇 개 노예제 도시 국가를 건립하였다. 이런 국가들은 모두 도시를 충심으로 하고 그 주위의 일부지방들로 이루어졌는데, 인구는 4 5만 명에 불과하였다. 노예와 토지 및 하천과 관개 수로에 대한 지배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각 도시 국가들 상호간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전쟁은 장기간 계속되었다.
그때 슈메르인들이 세운 국가 북쪽에는 수리아 초원(수리아 초원은 대체로 오늘의 수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 등 지구를 포괄한다. 이 유목종족은 기원전 3000년대에 이동하여 왔다.)에서 이동하여 온 유목 종족이 살았다. 슈메르 도시 국가가 출현한 후 얼마 안 가서 그들도 아카드 등 몇 개 노예제 도시 국가를 건립하였다. 그후 몇백 년간 그들과 슈메르인들이 계속 싸워 왔기에 양강 유역의 남부는 때로는 통일되고 때로는 분열되었다.
기원전 l894년에 수리아 초원에서 온 다른 한 갈래의 유목 종족이 바빌론시를 점령하고 바빌로니아 도시 국가를 건립하였다. 이 국가를 역사에서는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이라고 한다. 바빌론시는 푸라트강중류에 위치하고 있어 무역과 교통의 요지였다. 또 땅이 비옥하고 관개조건이 좋아 경제 발전에 매우 유리하였다. 때문에 바빌로니아의 농업과 상업은 모두 발달하였으며, 국가는 나날이 강대하여졌다. 국왕 함무라비는 재위 시기(약 기원전 1792~1750년)에 여러 나라들이 서로 싸워 약화된 기회를 타서 여러 해 동안의 전쟁을 거쳐 양강 유역을 통일하고 바빌론시를 수도로 한 강대한 중앙 집권적 노예제 국가를 건립하였다.





함무라비 법전
함무라비의 재위 시기에 노예제 경제가 일정한 발전을 가져 왔다. 국왕과 사원에서는 토지에 예속된 많은 노예를 갖고 있었다. 일반적인 중․소 노예주들도 4, 5명 내지 10여 명의 노예를 갖고있었단. 노예주 계급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함무라비는 법전을 제정하고 그것을 검은 색의 큰 돌기등에 새기게 하였다.
함무라비 법전은 노예주 계급의 사유 재산을 엄격하게 보호하였다. 법전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즉 왕궁과 사원의 재산을 훔친 자에 대하여서는 사형에 처하며, 남의 집을 침범한 자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서 불 속에 넣어 죽인다고 규정하였다. 법전은 또 노예에 대한 노예주의 소유권을 엄격히 보호하였다. 법전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즉 남의 노예를 유인하여 데려가는 자와 도망한 노예를 숨겨둔 자에 대해서는 사형에 처하며, 노예의 머리에 있는 노예 표식을 깎아준 자에 대해서는 손가락을 자르며, 노예로서 자유인의 귀쌈을 때리거나 주인에게 ≪너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라고 말한 자에 대해서는 귀를 자른다고 규정하였다. 법전은 또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즉 노예는 노예주의 사유 재산으로서 노예주는 노예를 마음대로 매매할 수 있고 노예로 빛을 갚을 수도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노예에게는 아무런 인신 자유도 없게 되었으며, 아무런 생명 보장도 없게 되었다. 법전에 의하면 자유인의 눈을 멀게한 노예에 대해서는 눈을 멀게 해야 하며, 자유인을 때려 이빨을 상하게한 노예에 대해서는 이빨을 뽑게 하였다. 그러나 노예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남의 노예의 눈을 멀게 한 사람은 그 주인에게 노예의 매매 가격 절반을 물면 되고, 납의 노예를 때려 죽인 사람은 그 주인에게 노예의 평균 가격만 물면 되었다. 이런 규정은, 노예주는 근본적으로 노예를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납의 노예를 해치는 것을 그 노예주의 재산에 손해를 끼친 것으로 인정하고 적당히 배상하기만 하면 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해 준다.
법전은 농민들에 대한 노예주의 착취를 보호하였다. 법전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즉 농민이 과수원을 소작하면 수확고의 3분의 2를 노예주에게 바쳐야 하며, 밭을 소작하면 수확고의 3분의 1이나 2분의 1을 바쳐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만약 수확고가 감소되면 노예주는 농민들이 ≪힘써 농사를 짓지 않았다≫는 구실을 대면서 강제로 농민들에게 손실을 부담시켜 여전히 그 부근 지구의 수확고 표준에 따라 소작료를 바치게 하였다.
상업이 발달한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상인과 고리대금업자는 매우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곡식과 돈으로 고리대금을 놓아 가난한 근로 인민들을 착취하였다. 법전은 상인과 고리대금업자의 이익을 보호하였다. 법전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즉 고리대금으로 착취하는 이자에 대하여 곡식으로 변을 놓을 때에는 3분의 1의 이자를 받을 수 있고, 돈으로 변을 놓을 때에는 5분의 1이 이자를 받을 수 있으며, 채권자는 채무자의 가족을 저당품으로 가두어두었다가 만약 채무자가 빛을 갚지못할 경우에는 그의 가족까지 ≪채무 노예≫로 만들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채무 노예를 착취하는 현상이 보편화되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사회 정황을 비교적 전면적으로 반영하였으며,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노예주 독재의 본질을 설명하고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지금까지 발견된,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비교적 완전하게 성문화된 법전이다.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은 온갖 방법을 다하여 노예와 광범한 근로 인민에 대한 노예주의 통치를 강화하였지만, 그 강대성은 오래갈 수 없었다. 노예주와 대상인들이 층층으로 착취하였기 때문에 무수한 농민과 수공업자들이 파산을 당하였다. 계급 모순이 나날이 첨예화됨에 따라 고대바빌로니아의 국력은 대대적으로 약화되었다. 함무라비가 죽은 후에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은 점차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양강 유역은 다시금 분열 상태에 처하였다. 기원전 1595년에 고대 바빌로니아는 외족의 침입을 받아 멸망되었다. 그후부터 양강 유역은 주위에 있는 외족들의 침입과 통치를 여러번 받게 되었다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는 바빌로니아를 점령하였다.





고대 양강 유역의 문화
슈메르인의 문자는 설형문자(楔形文字)이다. 설형문자는 기원전 3000여 년경에 창조된 상형문자에서 기원하였다. 예를 들면 ≋로 물을 표시하고 *로 별을 표시하고 ꂆ로 이삭을 표시하고 ꁅ로 발을 표시함과 같은 것이다. 후에 와서 사람들은 어떤 뜻은 상형부호로 표달하기 어렵기 때문에 한개 부호로 몇 가지 뜻을 표시하였다.
이를 테면 ꁅ는 또 ≪걷다≫, ≪서다≫ 등 발과 관계되는 동작을 표시함과 같은 것이다 또 몇 개 부호를 결합하여 한 가지 뜻을 표시한 것도 있었다. 이를 테면 ≪물≫과 하늘을 대표하는 ≪별≫을 결합하여 비를 표시함과 같은 젓이다. 이밖에 음절을 표시하는 부호도 나타났다. 이런 부호는 뜻을 표시하는 부호와 배합하여 사용되었다. 글을 간편하게 쓰기 위하여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원래의 그림을 직선 도형으로 고쳤다. 슈메르인들은 갈대나 나뭇가지로 진흙판에 글을 새기었다. 이런 글자는 그 새긴선의 한 끝이 뭉툭하고 한 끝이 뽀족해 마치 쐐기 모양 같았기 때문에 설형(쐐기 모양)문자라고 하였다. 설형문자는 후에 와서 아시아 서부와 여러 지방에 전파되었다. 아카드,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 서아시아의 고대인들은 그것을 조금 고쳐서 자기들의 통용 문자로 만들었다.
고대에 양강 유역의 사람들은 매우 오래 전부터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데 주의를 돌리었다. 당시의 관변측 문헌에는 행성, 항성, 혜성, 유성, 일식과 월식에 대한 관측 기록이 기재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미5대 행성과 항성을 구별하였다. 그들은 달이 등글어지고 이즈러지는 법칙에 근거하여 1년을 12개월로 나누고, 6개월은 매 달을 30일로 하고 다른6개월은 매 달을 30일로 하여 1년을 354일로 정하였다. 이렇게 하면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보다 11일 남짓 적기 때문에 그들은 윤달을 두어 보충하였다. 그들은 또 7일간을 1주일로 정하고 일, 월, 화, 수, 목, 금, 토 7개 별의 이름으로 매 요일의 이름을 달았다. 이것이 바로오늘 통용되고 있는 7일을 한 주일로 하는 제도의 내력이다.
고대 양강 유역의 사람들도 산술 4원칙의 운산법을 장악하였다. 여러가지 형태의 토지 면적을 계산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장방형, 삼각형, 제형 등 여러 뙈기로 나누어 계산한 다음 그 합을 구하였다. 그들은 또 평방근과 입방근을 구하였고, 3개의 미지수가 있는 방정식을 풀었다. 그들은 원주율을 3으로 추산해 내었다. 양강 유역의 사람들은 10진법과 60진법을 사용하였다. 이를 테면 60진법으로 시간과 원주를 계산하였는데, 원주를 360도로 나눔과 같은 것이다. 이런 계산법은 줄곧 오늘에 이르기까지 쓰이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
양강 유역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면 광활한 이란 고원이 펼쳐져 있다. 이 고원은 뭇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 중부는 넓은 대사막으로서 드문드문 몇 곳에 오아시스가 있다. 서부와 동부에는 약간의 곡지와 초원이 있다. 일찍부터 이란 고원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유목 생활을 하였거나 목축업과 농업에 종사하면서 생활하였다.
페르시아만에 접근해 있는 이란 고원 서남부 지구에는 페르시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기원전 6세기 초엽에 페르시아인들은 10개 종족으로 나뉘어졌다. 그중 6개 종족은 농업에 종사하였고, 4개 종족은 목축업에 종사하였다. 당시 그들의 원시 공동체 제도는 점차 해체되고 있었다. 후에와서 귀족 출신인 키로스(기원전 559~529년 재위)가 페르시아 각 종족을 통일하고 강대한 노예제 국가인 페르시아 국가를 건립하였다. 더욱 많은 재부를 모으고 더욱 많은 노예를 소유하려는 귀족들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키로스는 침략 전쟁을 도발하였다. 기원전 546년에 키로스는 페르시아 군대를 거느리고 소아시아에 침입하여 에게해 동안까지 쳐들어가 많은 금은 보화를 약탈한 다음, 군대를 돌려 양강 유역을 진공하여 바빌로니아를 점령하였다. 여러 차례의 전쟁을 거쳐 페르시아의 판도는 동쪽 이란 고원으로부터 서쪽 소아시아 연안에 이르는 광대한 지구로 확장되었다. 기원전 529년에 키로스는 또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 국경을 넘어 중앙아시아에 침입하였다. 중앙아시아의 인민들은 일어나 저항하였다. 키로스의 군대는 처음에는 일부 지방을 점령하였으나, 후에 북부초원의 유목 종족과 싸우다가 포위 섬멸당하였다. 페르시아 군대는 패배하고 키로스도 이 싸움에서 죽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이미 건립되었던 것이다.
키로스 이후의 페르시아 국왕도 계속 대외 침략을 감행하였다. 기원전 525년에 캄비세이스가 전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후에 와서 다리우스가 또 인더스강 유역의 일부 지방을 정복한 동시에 세력을 발칸 동남부의 트라비키아에까지 확장하였다. 이리하여 불과 몇십 년 동안에 폐르시아는 강토가 전례없이 광할한 노예제 대제국으로 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은 무력에 의하여 건립된 나라로서 국내 각 지구의 발전이 불균형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의 서부에서는 노예 제도가 일찍 확립되었지만, 제국의 동부에서는 여러 종족들이 이제 원시 공동체 제도가 해체되고 노예 제도가 형성되는 단계에 처해 있었다. 노예주 계급의 독재를 공고히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다리우스는 전 제국을 약 7개 주로 나누고 귀족들을 각 주의 통치자로 파견함으로써 전제통치를 실시하였다. 페르시아 주 이외의 모든 주들에서는 해마다 일정한 수량의 금, 은과 현물을 중앙에 바쳐야 하였다. 수탈한 많은 금은 재부는 끊임없이 페르시아 국왕의 보물고에 흘러들었다. 다리우스는 또 전국의 화폐 제도를 통일하고 사통 팔달한 도로를 닦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긴 한 갈래는 수사로부터 소아시아 해안의 에페스까지 뻗은 ≪왕도≫였다. 이러한 조치는 객관적으로 각 지구간의 경제적 연계와 무역의 발전을 추진시켰다. 그러나 지배 계급의 가렴 잡세와 병력, 무력에 대한 남용은 인민들에게 막대한 재난을 가져다 주었다.
페르시아 제국은 침략적 군사 국가로서 노예주 계급은 강대한 군사력에 의거하여 통치를 실시하면서 각 민족 인민들을 탄압하였다. 기원전 5세기에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이스를 정복하는 원정에서 참패를 당하였으므로 군사적으로 우세하던 지위가 크게 동요되었다. 그리하여 제국내부의 여러 가지 모순은 더욱 뚜렷하게 폭로되었다. 잔혹한 착취와 압박으로 하여 농민들은 나날이 파산되어 갔으며, 페르시아의 군사 원천도 나날이 고갈되어 갔다. 기원전 5세기로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의 기간에 각지에서 독립 투쟁과 봉기가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급속하게 쇠퇴하여진 페르시아 제국은 끝내 기원전 330년에 마케도니아(마케도니아 왕국은 그리이스 북부에 위치하였다. 기원전 4세기 후반기에 그 세력이 날로 강성하여 먼저 그리이스를 통제하고, 이어서 국왕 알렉산더가 동쪽으로 나가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곧바로 인더스강 유역까지 진군하여 방대한 제국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제국은 얼마 못 가서 분열되었다.) 국왕 알렉산더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노예주들의 이익에 관련된 함무라비 법전의 일부 내용으로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 노예주 독재의 본질을 설명해 보자.
2. 고대 양강 유역의 문화에는 어떤 주요한 성과가 있었는가?
3. 페르시아 제국은 어떻게 건립되고 확장되었는가?
4. 다리우스는 어떤 개혁을 실시하였는가? 이러한 개혁들은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제3절 인도

인더스강 유역의 고대 문명
먼 옛날부터 인도(고대 인도의 지리적 개념에는 인도차이나 대륙, 즉 오늘의 인도와 파키스탄이 갈랴지기 이전의 인도와 파키스탄이 포함되며, 방글라데시국이 건립되기 이전의 방글라데시가 소재한 지방이 포괄된다. 이하 같음)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서북부의 인더스강 유역에는 주로 드라비드인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우기에 강물이 불어 개간에 유리하고 경작에 편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인더스강 하곡에 밀, 보리, 참외, 참깨 등 농작물을 재배하였고, 또 세계적으로 가장 일찍 목화를 재배하였으며, 동시에 가축도 기르고 사냥도 하고 고기잡이도 하였다.
인더스강 유역에서는 청동제 도구, 청동제 무기, 보석 및 상아 조각품 등 고대 문물들을 대량으로 발굴하였다. 인더스강 유역에는 많은 도시유적지가 남아 있는데, 이러한 도시들은 기원전 3000년대 중기에 일어서기 시작한 도시들이며, 그중에서 가장 큰 도시로는 하랍파와  모헨죠다로가 있다. 이 두 도시는 배치가 정연하고 가옥도 일반적으로 벽돌로 지었다. 도시에는 두 칸짜리 집이 있었는가 하면 여러 칸으로 된 집도 있었고 이층집도 있었다. 이외에 또 궁전과 같은 건축물도 있었다. 좋은 집들에는 모두 배수 설비가 있어 거리의 지하 배수구와 직통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황은 현저한 빈부의 차이와 계급적 대립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인더스강 유역의 문명이 당시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일대의 문화를 보통 하랍파 문화라고 한다. 하랍파 문화는 후에 인도 문화의 발전에 기초를 닦아 주었다.





통일된 노예제 국가의 형성
기원전 2000년대 중엽에 아리안인이 중앙 아시아 고원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하여 인도 서북부의 산기슭을 따라 인도에 침입하여 인더스강 유역을 점차 정복하였으며, 후에 계속동쪽으로 이동하여 또 갠지스강 유역까지 점차 정복하였다. 원래 원시사회 해체 단계에 처하여 주로 목축업에 종사하면서 생활하던 아리안인들은 인도에 들어온 이훈 점차적으로 정착 생활을 하면서 농업에 종사하였고 농촌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기원전 1000년대 초기에 철기를 사용하면서부터 생산이 가일층 발전하였고 사회의 계급 분화도 부단히 심화되었다. 아리안인은 점차 노예제 사회에로 이행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기원전 6세기 초에 인도에는 16개의 주요한 노예제국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병합하였다고 한다. 갠지스강 중류의 마가드하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생산이 발전되고 경제력이 강하여 패권쟁탈전에서 날로 강대하여졌으며, 선후로 여러 개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3세기에 마가드하국은 갠지스강 유역으로부터 서북쪽은 인더스강 유역에까지, 남쪽은 데칸 고원의 대부분 지구에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아쇼카왕의 재위 시기(약 기원전 273~232년)에 계속 남쪽으로 팽창하여 한때 인도 반도의 남쪽 끝을 제외한 인도 전부를 정복하였다. 이리하여 인도 역사에서 처음으로 통일된 노예제 국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은 공고하지 못하였다. 아쇼카왕이 죽은 후 얼마안 가서 정복당하였던 지구들이 연이어 독립하였고, 인도 반도는 다시금 분열 상태로 되돌아갔다.

인도의 신분 제도
아리안인이 원시 사회로부터 노예제 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에 인도에는 엄격한 신분 제도가 점차 형성되었다. 역사상에서 이를 ≪카스트≫제도라고 한다. 인도에서는 전체 사회 성원들을 네 등급으로 나누었다. 제1등급은 브라만이다. 이들은 승려 귀족들로서 신권(神權)을 장악하고 신에 제를 지내며, 종교 법전을 해석하며, 종교 법전의 집행을 감독하는 등 특권을 독점하였다. 제2등급은 크샤트리아이다. 여기에는 국왕, 무사(군사 귀족)와 관리들이 포괄된다. 이들은 나라의 군사와 행정 대권을 장악하였다. 이 두 등급은 노예주 지배 계급으로서 전적으로 착취에 의거하여 생활하였다. 제3등급은 바이샤이다. 여기에는 농민, 목민, 수공업자와 상인들이 포괄된다. 이들은 국가에 세금을 바쳐야 하고 사원에 ≪보시(布施)≫(낡은 사회에서 절에다 기부하는 돈이나 물건)를 하여야 하였으며,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두 등급을 공양하여야 했다. 제4등급은 수드라이다. 여기에는 정복당한 국가의 주민과 가난으로 하여 파산되었거나 토지를 상실한 사람들이 포괄된다. 이들은 아무런 생산수단도 소유하지 못하였으며, 대부분이 노예들이었고 머슴들도 있었다. 이들은 압박받는 최하층의 근로 인민들로서 일체 권리를 거의 박탈당하고 노예주 계급의 착취와 예속을 당하였다. 고대 인도의 각 등급에는 귀천이 뚜렷하고 경계선이 엄격하였다. 특히 수드라와 위의 세 개 등급간에는 더욱 엄격한 경계선이 있었다.
근로 인민들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고 자기의 특권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하여 노예주 계급은 브라만교를 정신적 무기로 삼았다. 브라만교의 승려들은 사람을 속이기 위하여 교리를 꾸며 해설하면서 신분 제도를 신성화하였다. 그들은, 조물주가 입으로 브라만을 만들고, 손으로 크샤트리아를 만들고, 다리로 바이샤를 만들고, 발로 수드라를 만들었다고 날조하면서, 각 신분의 고저, 귀천은 신의 의지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라고 설교하였다. 노예주 계급은 또 여러 가지 법전을 만들어 각 등급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 의무, 생활 방식들에 대하여 엄격한 규정을 지어 낮은 등급의 사람이 높은 등급의 직업에 종사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엄금하였다. 등급이 다른 사람은 서로 결혼할 수 없으며, 심지어 한 집안에서 자거나 같이 걸어다니거나 음식을 칼이 먹을 수도 없었다. 형사 처분에서도 불평등하였다. 브라만이 수드라를 모욕하였을 때에는 약간의 벌금만 내면 되었지만, 수드라가 다른 세 개 등급의 사람들을 건드리기만 하면 그 혀를 자르거나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입에 밀어넣었다.





불교의 흥성
노예 제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브라만교는 날이 갈수록 반대를 받았다. 근로 인민들은 브라만교가 수호하는 신분 제도에 대하여 몹시 분개하였다. 계급 모순과 계급 투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하였다. 팽창 전쟁에서 세력이 부단히 강화된 크샤트리아도 브라만의 특권적 지위에 대하여 갈수록 불만을 품었다. 이런 상태에서 기원전 6세기에 불교가 탄생하였다.
불교의 창시자는 고다마 싯다르타(약 기원전 566~475년)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오늘의 네팔 남부의 룸비니에서 샤끼야 종족의 왕자로 태어났다. 후에 와서 그를 샤끼야무니는 (석가모니)라고 불렀는데, 샤끼야무니는 ≪샤끼야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그는 29세 때에 집을 떠나서 도를 닦았다. 7년 후에 그는 도를 깨달았다고 자칭하면서 불교를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후부터 그는 인도의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40여 년간 불교를 선전하였으며 많은 신도를 받아들이었다. 신도들은 그를 ≪붓다≫라고 불렀다. ≪붓다≫는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최고의 스승≫이라는 뜻이다.
불교는 영혼면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설교하면서 브라만의 특권적 지위를 반대하고 브라만교의 신도 믿지 않았다. 불교는 브라만이라는 이 특수한 승려 집단을 요구하지 않고 사람마다 스스로 도를 닦아 도를 깨달아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이런 주장이 브라만 통치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환심을 샀기 때문에 불교는 신속히 전파되었다. 당시갠지스강 유역의 마가드하국에서는 불교가 지배적 지위를 차지한 종교로 되었다.
그러나 불교는 노예 제도를 반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노예주에 대한 의무를 여러 가지로 규정하였다. 불교도 역시 국왕의 법령을 위반하는 신도들의 행위에 대하여 용서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근로 인민들이 투쟁을 수단으로 현실 생활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지 않았다. 불교는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다. 즉, 사는 것은 죄를 받는 것이고, 사람이 나고 늙고 앓고 죽는 것들은 모두 고통이며, 고통의 근원은 이러저러한 욕망에 있으므로 모든 욕망을 버리고 도를 닦아야만 앞으로 영혼이 ≪극락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른바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하다≫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소위 ≪극락≫에 가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는 ≪내세(來世)≫가 있다는 거짓말로 인민 대중을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불교는 인내와 순종을 주장하면서 근로 인민은 억압과 예속을 참고 투쟁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불교는 크샤트리아를 가장 높은 지위에 놓았다. 이러한 주장은 국왕을 대표로 한 지배 계급의 이익에 부합되었기 때문에 인도의 여러 국왕들은 불교를 지지하였고 인민을 통치하는 도구로 불교를 이용하였다.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왕은 남부로 팽창하는 한 차례의 전쟁에서 15만 명을 포로로 하고 10만 명을 학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량 약탈과대학살이 있은 후에 그는 불교를 대대적으로 선교하면서 그것을 국교로 정하고, 사람들에게 성실하게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통치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불교도들의 회의를 열고 불교 경전을 정리, 편찬하게 하였으며, 또 인도에 수많은 불교 사원과 불탑을 세웠다. 사원에서는 많은 보시를 받았고 많은 토지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불교는 가일층 발전하였다.
그후 불교는 인도에서 극성 시기에 이르렀다. 아쇼카왕의 통치 시기에 불교는 외국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동남쪽으로는 동남아시아에 전파되었고, 서북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 전파되었다. 기원전후로부터 불교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파되었으며, 후에 다시 중국을 거쳐 조선과 일본에 전파되었다.





고대 인도의 문화
고대 인도인들은 많은 천문 지식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1년을 12개월로 나누고 각각의 달을 30일로 정하였다. 그리고5년에 한 번씩 윤달을 두었다. 또 지구는 등글며 자체의 축을 중심으로하여 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고대 인도인들은 10진법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지금 보편적으로 쓰고있는 셈법을 발명하였으며, ≪0≫을 포함한 10개 숫자의 부호를 창조하여10진법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숫자 부호는 후에 아라비아인들에 의하여 유럽에 전파되었으므로 아라비아 숫자라고 불리우고 있다. 고대 인도의 의학도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의사는 몇백 가지 초약과 명반(明礬) 등 여러 가지 광물질로 병을 치료하였으며, 눈수술과 같은 복잡한 수술도 하였다.
브라만교 및 불교의 관념론적 철학과 투쟁하는 가운데서 소박한 유물론적 철학이 나타났다. 근로 인민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소박한 이 유물론적 철학은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즉 우주 만물은 땅, 불, 물, 바람 이 네 가지 물질적 원소로 구성되었으며, 그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의 육체를 떠난 영혼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종교 미신은 모두 미련한 짓이라고 인정하였다. 유물론적 철학은 인류는 날 때부터 평등하다고 인정하면서 등급 제도를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욕망을 버리는 것으로써 인간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불교의 설교도 반대하였다. 유물론과 관념론간의 이러한 투쟁은 고대 인도의 계급 투쟁이 의식 형태 영역에 반영된 것이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고대 인도에서 네 개 등급들의 사회적 지위, 권리와 의무에는 어떤 구별들이 있는가? 신분 제도의 본질은 무엇인가?
2. 불교가 발생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불교의 교의에는 어떤 주요한 내용들이 들어 있는가? 지배 계급들은 무엇 때문에 불교를 이용하였는가?
3. 고대 이집트, 양강 유역과 인도의 문화 성과와 그것들의 공통점과 차이점, 그리고 각자의 특징을 비교해 보자.






제3장 고대 그리이스, 로마 노예제 국가






제1절 그리이스

그리이스 노예제 도시 국가의 발생
고대 그리이스는 유럽 문명의 발원지이다. 고대 그리이스는 유럽 동남부의 그리이스 반도뿐만 아니라 에게해의 여러 섬들과 소아시아 서부 해안의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그리이스 반도에는 산이 많고 산과 산 사이에 크지 않은 평원들이 하나하나놓여 있어 내지의 교통은 불편하지만 해안이 굴곡적이고 항만이 많아 항해에 유리한 조건을 형성해 주고 있다.
그리이스의 문명은 에게문명에서 발원하였다. 에게문명은 처음에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기원전 2000년대 중기에 한때 빛을 발하였고, 후에는 그리이스 반도 남부의 미케네를 중심으로 약2세기 반 동안 흥성, 발전하였다. 기원전 12세기에 이르러 에게문명은 갑작스레 쇠퇴하여졌고 에게해 지구는 한때 암담해졌다.
고대 그리이스인들은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이 두 서사시는 맹인 시인 호메로스의 저작이라고 하여 호메로스 서사시라고도 한다. 그리고 서사시가 반영하고 있는 그 시대를 호메로스 시대라고 한다. )등 두 편의 서사시를 남기었다.
≪일리아드≫에는 그리 이스인들이 소아시아의 트로아인들과 전쟁을 한 열번째 되는 해의 정경이 서술되었고, <오딧세이≫에는 그리이스인들이 승리한 후 그리이스의 장수 오딧세이우스가 귀국 도상에서 겪은 갖은 고초가 이야기되고 있다. 트로이에 대한 전쟁은 대략 에게문명 말기에 있은 것이지만 서사시에는 기원전 11세기로부터 기원전 9세기 사이의 그리이스 사회 경제 정황을 반영하고있다. 서사시의 재료에는 당시의 주요한 생산 도구로는 청동기만 있은것이 아니라 철기도 있었다는 것이 설명되고 있다. 사람들은 연해의 평원과 분지에서 보리 등 농작물을 재배하였고, 산지에서 감람, 포도를 재배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목축업에 종사하면서 산양, 면양, 돼지와 소를 사육하였다. 수공업이 농업에서 갈라져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사회에는 철공, 와공, 목공, 도공(陶工)과 기타 수공업을 전업으로 하는 장인들이 나타났다. 경제의 발전에 따라 사회는 분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씨족 조직은 날로 와해되어 갔다. 씨족 귀족들은 많은 가축을 강점하고 많은 땅을 독점하였다. 일반 농민들은 작은 뙈기밭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것마저 상실한 자들은 귀족의 소작살이를 하였다. 노예가 출현되기는 하였지만 농업과 수공업에서는 아직 노예 노동을 매우 적게 사용하였다.
기원전 8세기로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는 그리이스 사회가 노예제 형성단계에 들어선 시기였으므로 그리이스에 많은 노예제 도시 국가들이 선후로 형성되었다. 도시 국가에는 서로 대립된 노예와 노예주 계급이 있었으며 또 대량의 자영농과 독립적인 수공업자들도 있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기원전 8세기에 건립된 고대 그리이스의 저명한 도시 국가였다.





스파르타와 아테네
스파르타는 그리이스 반도 남부의 펠로폰네소스반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스파르타의 주민은 스파르파인(스파르타아르), 페리에크인과 헬로트인 등 세 개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스파르타인은 9,000호 가량으로서 그들은 모두 노예주였으며, 일체 정치 권리를 향수하는 전권 공민이었다. 페리에크인은 변경 지구의 주민들로서 그들은 수공업, 상업,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들에게는 인격 자유는 있었지만 공민의 권리가 없었다. 헬로트인은 정복당한 후 원래의 땅에 남아 있던 주민들로서 그들은 노예와 마찬가지로 스파르타인을 위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스파르타인의 압박에 반항하여 줄곧 봉기를 일으켰다.
스파르타는 소수 노예주 귀족들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스파르타인들은 군사 훈련을 극히 중시하였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장로(長老)의 검사를 거치는데 몸이 허약하거나 병이 있는 아이는 산골에 가져다 버리고 건강한 아이만 기르게 하였다. 남자는 7세부터 한곳에 모여 생활하면서 무기 사용법을 배우고 체육 훈련과 행군을 하였으며, 때로는 간고한 노동을 하면서 고난을 이겨내는 정신을 키웠다. 반항하는 피압박 계급을 탄압하기 위하여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는 전사로 되어 60세까지 병역에 봉사하였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즉시 출전하였다.
스파르타는 부단히 전쟁을 도발하여 인근 지구를 침범하였다. 기원전 500년경에 스파르타는 남부 그리이스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로 되어 펠로폰네소스의 대부분 지구를 통치하였다.
그리이스 동남부의 아티카 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아테네는 수공업, 상업, 항해업으로 이름난 노예제 도시 국가였다.
아테네의 공민은 귀족과 평민 두 부분으로 나뉘었으며, 공민 이외에 또 외국인과 노예가 있었다. 귀족들은 아티카 반도의 가장 좋은 땅들을 독점하고, 노예와 가난한 농민들을 착취하였다. 일부 귀족들은 상업을 경영하면서 고리대금을 놓기도 하였다. 귀족들은 특수한 정치 권리를 향수하고 정기적으로 귀족들 가운데서 집정관을 선출하였는데, 이 집정관이 아테네의 치고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평민 가운데는 농민과 수공업자들이 망라되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작은 뙈기밭만을 가지고 있었다. 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수많은 농민들은 귀족의 채무자로 되었다.
그리고 제 기한에 빚을 갚지 못하면 귀족들에게 땅을 떼웠고 본인과 가족들까지도 채무 노예로 전락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났다. 그러므로 귀족과 평민간의 모순은 아테네의 계급 모순의 한 측면을 이루었다. 신흥 상공업 노예주 계층에는 부유한 상인, 선주(船主), 수공업 제작소의 주인들이 망라되었다. 그들은 평민 중의 상층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권리를 향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도 귀족을 반대하였다. 기원전 7세기말엽부터 기원전 6세기 초엽까지의 기간에 귀족을 반대하는 아테네 평민들의 투쟁은 매우 치열하였고 대규모적인 봉기가 준비되고 있었다. 이런 조건 하에서 집정관 솔론이 개혁을 실시하였다. 솔론(약 기원전 638~559년)은 물락 귀족 가정의 출신으로서 젊었을 때에 상업을 경영한 적이 있어, 경제적 지위를 보면 상공업 노예주 귀족에 속한다. 기원전 594년에 솔론이 집정관으로 당선된 후 계급 모순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취한 첫 개혁 조치는 다음과 같다. 즉 채무를 취소하며, 채무 노예제를 폐지하며, 채무 때문에 평민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다음으로 솔론은 재산의 다소에 따라 아테네의 공민을 4개 등급으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정치 권리를 향수한다고 규정하였다. 재산이 가장 많은 자가 상등 자리를 차지하고 더욱 큰 정치 권리를 향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아테네의 가난한 평민들은 아무런 권리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부유한 상공업 노예주들은 귀족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통치사업에 참가하게 되었으므로 아테네의 노예주 통치 기초는 확대되었다. 그후 계급 투쟁은 계속되었으며 귀족 세력은 부단히 약화되었다. 기원전 6세기 말엽에 아테네는 그리이스의 저명한 노예제 공화국으로 되었다. 대량의 노예와 재부를 가지고 있는 노예주가 이 국가를 통치하였다. 이로부터 아테네 사회의 계급적 대립은 더는 귀족과 평민간의 대립인것이 아니라, 노예와 자유민간의 대립이었다.

그리이스-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 제국은 에게해 지구를 통제하려는 시도로 기원전 49B년부터 기원전 479년 사이에 세 차례나 그리이스에 쳐들어왔다. 제1차는 트라키아 해안에서 해군들이 폭풍에 의하여 궤멸되고 육군들이 흐라키아인들의 습격을 받는 바람에 페르시아 군대는 중도에서 실패하고 돌아갔다. 페르시아의 국왕 다리우스는 이어 그리이스 각국에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흙과 물≫을 강요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리이스인들이 페르시아의 신복으로 되라는 뜻이었다. 그리이스의 일부 나라들에서는 감히 거절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테네의 사람들은 페르시아의 사자를 깊은 골짜기로 쫓아 버렸고, 스파르타의 사람들은 페르시아의 사자를 우물 속에 밀어넣고 스스로 흙과 물을 얻으라고 하였다. 기원전 490년에 페르시아의 전투함은 아테네를 정복할 의도로 에게해를 거쳐 그리이스로 질주하였다. 나중에 아테네와 페르시아의 군대는 마라톤 평원에서 격전을 벌였다. 아테네의 병사들은 용감하게 싸워 적은 군대로 페르시아의 대군을 맞아 전승하였다. 페르시아의 군대는 패배하고 물러갔다. 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의 국왕 크세르크세스는 많은 수륙대군을 거느리고 트라키아를 지나 그리이스로 진격하였다. 스파르타 국왕 리오리다가 거느린 군대는 온천관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막았다. 페르시아군대는 마지막에 간세의 길안내를 받으며 배후로 진공하였다. 리오니다와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은 용감하게 요새를 지키다가 마지막에 전부 장렬하게 희생되었다. 페르시아 군대는 승승장구로 전진하여 아테네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아테네의 해군은 살라미스만에서 격전을 벌여 페르시아의 함대를 완전히 격파하였다. 크세르크세스는 아시아로 철수하였다. 그 이듬해에 남아 있던 페르시아 군대도 구축되었다.
이때로부터 아테네는 공세를 취해 페르시아와 해상에서의 패권 쟁탈을 하였다. 아테네는 에게해의 각 도서들과 소아시아 서해안의 근 200개에 달하는 그리이스의 도시 국가들을 자기의 영도 아래 집결시키고 델로스동맹(처음에 동맹의 금고가 델로스섬에 있었으므로 델로스 동맹이라고 하였다.)을 결성하였다. 델로스 동맹의 해군은 페르시아 해군을 몇 차례 격파하였다. 기원전 449년에 그리이스-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의 실패로 끝났다.





그리이스 노예제 경제의 번영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 아테네 등 그리이스의 여러 중요한 도시 국가들의 많은 생산 부문들에서는 보편적으로 노예 노동을 착취하였다. 노예의 수는 대폭적으로 늘어났고, 노예제도는 높은 발전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이스에서 노예의 주요한 원천은 전쟁 포로였다. 그리이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얻은 수많은 포로들이 노예로 팔렸다. 그리고 해적(海賊)조직들이 상선(商船)을 가로막거나 해안의 마을들을 습격하여 납치한 사람도 노예로 팔았다. 이것도 노예 원천의 하나였다. 그리이스에는 많은 노예 시장이 있었다. 아테네는 당시 가장 큰 노예 시장이었다 노예장사꾼들은 군대들에게서 전쟁 포로를 사거나 해적들에게서 그들이 납치한 사람을 사서 노예 시장에 가져다가 팔았다. 노예를 매매할 때 노예들에게 달리기, 기기, 물건들기를 시켰다. 사는 사람은 이렇게 노예의 건강상황을 살펴보면서 노예 장사꾼과 흥정을 하였다.
노예 노동은 여러 생산 부문에서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상업이 발달하지 못한 스파르타에서는 농업 생산을 전적으로 노예 노동에 의거하여 진행하였다. 상공업이 비교적 발달한 아테네와 같은 도시들에서는 수공업 제작소에서도 보편적으로 노예 노동을 사용하였다. 그리이스에는 도기 제조, 제철, 양주, 조선, 방직, 제혁 등 여러 가지 부문의 제작소가 있었다. 작은 제작소에서는 몇 명 내지 십몇 명의 노예를 사용하였으며 소수의 큰 제작소에서는 몇십 명 내지 몇백 명의 노예를 사용하였다.
아테네와 같은 도시 국가들에서 수출한 정교한 수공업 제품은 모두 노예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광산에서는 매우 많은 노예들을 사용하였는데 그들의 노동은 아주 간고하였다. 아테네의 루리온 은광에서 만여 명의 노예들은 피땀을 흘리면서 어두컴컴한 갱 속에서 광석을 캐어냈다. 그러나 제련한 은은 노예주들의 주머니에 홀러들어갔다. 생산부문에서 일하는 노예 외에 아테네에는 또 일부 국가 노예가 있었다. 이들은 성을 지키거나 문을 지켰으며, 어떤 노예는 필기원으로 되었고, 어떤 노예는 군대내에서 운수와 노역을 담당하였다.
그리이스의 노예주 계급은 노예 노동에 의하여 살쪘지만 그들은 노예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예를 재산으로 간주하거나 ≪산도구≫로 취급하여 사용하면서 노예들에게 아무런 권리도 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들에게서 난 자식들까지도 저들의 재산으로 삼았다. 노예주들은 노예를 마음대로 학대하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리이스 노예제의 번영은 아테네에서 집중적으로 반영되었다. 그리이스-페르시아 전쟁이 있은 후 아테네는 노예 노동에 의거하여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또 델로스 동맹 각국을 통제하면서 자기의 패권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기원전 5세기 중엽, 페리클레스 통치 시기에 아테네는 전례없이 번영하였다. 페리클레스는 귀족 출신으로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장원에서 생산한 대부분의 생산품을 시장에 가져다 팔았으므로 상업 이익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공업 노예주의 대표인물로 되었다. 기원전 443년부터 그는 연속 15년간 아테네의 수석 장군(아테네에는 17명의 장군이 있었는데 본래는 군대의 최고 지휘관이던 것이 후에 와서 권력이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아테네의 최고 통치자로 되었다. 그중에서도 수석 장군의 직권이 제일 컸다)으로 당선되어 아테네의 최고 통치자로 되었다.
페리클레스는 수석 장군으로 취임한 후에 정치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평민들의 권리를 확대하고 모든 공민이 다 국가의 관직을 담당할 자격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민회는 국가의 최고 권력 기관으로서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며 투표로 10명의 장군을 선출하였다.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발전을 가져 왔다. 그러나 공민권을 향수하는 사람은 아테네주민 총수의 10%밖에 안 되었으며, 광범한 노예와 여성들은 정치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그러므로 아테네의 민주 정치는 소수 노예주들의 민주제도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의 아테네는 지중해 지구에서 제일 큰 상업 중심이었다. 동쪽은 소아시아, 서쪽은 오늘의 프랑스 남부, 남쪽은 이집트, 북쪽은 흑해 연안에 이르기까지 아테네 상인들의 발자취가 남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테네의 포도주, 올리브유, 꿀, 도기와 기타 수공업 제품은 대량으로 해외에 수출되었다. 식량, 가축, 어류, 목재, 귀중한 사치품, 그리고 노예가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피레우스는 아테네의 항구로서 항만에는 상선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연안에는 수많은 큰 창고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부두와 거리에서는 여러 지구에서 온 상인과 선원들을 볼 수 있었고 여러 가지서로 다른 언어를 들을 수 있었다. 한 갈래의 곧고 넓은 큰 길은 아테네시와 피레우스 항구를 연결시켰다. 큰길 양쪽에는 ≪장성≫이라고 하는 성벽이 있어 전시(戰時)에 아테네와 해상과의 연계를 보장하였다.





그리이스의 쇠퇴
그리이스 노예제 도시 국가 가운데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그리이스의 패권을 쟁탈하기 위하여 장기적으로 대립하고있었다. 그들은 각기 일부 도시 국가들을 통제하고 있으면서 20여 년간(기원전 431~407년) 전쟁을 하였다. 이 전쟁을 역사상에서 펠로폰네소스전쟁이라고 한다. 이 전쟁에서 아테네가 최후로 승리하였다. 이어서 몇개의 비교적 강대한 도시 국가가 또 그리이스의 패권을 쟁탈하기 위하여 계속 전쟁을 하였다. 기원전 4세기 전반기에 그리이스는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각 도사 국가들이 모두 약화되었다.
그리고 그리이스 각국 내부의 계급 투쟁도 날로 치열하여졌다. 다시말하면 사회의 최하층에 있는 노예와 노예주간의 모순이 더욱 격화되고 투쟁도 갈수록 확대되었다. 기원전 464년에 스파르타의 노예 헬로트인들은 지진이 일어나 노예주들이 혼란에 타진 기회를 타서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광대한 지역을 휩쓸었고 봉기군은 스파르타시로 진군하였다. 피어린 격전 끝에 봉기군은 산으로 철수하여 10여 년간 투쟁을 견지하였다.
이번 봉기는 스파르타 노예주의 통치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이번 봉기가 있은 후 많은 노예들이 국경을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기원전5세기 말엽,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혼전하고 있을 때, 이 두 나라에서 많은 노예들이 도망하였다. 그중 아테네에서 한번에 도망친 노예만 하여도 2만 명이나 되었는데 그 대다수는 기능공들이었다. 그리하여 광산과 수많은 제작소들에서는 문을 닫게 되었고, 아테네의 노예제 경제는 심대한 타격을 받았으며, 아테네의 역량은 약화되었다.
아테네, 스파르타 등 노예제 도시 국가들이 쇠퇴하고 있을 때, 그리이스 북부에 있는 마케도니아국이 흥성하였다. 기원전 338년 이후 그리이스는 마케도니아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고대 그리이스의 문화
고대 그리이스의 문화는 광범한 노예들이 피땀을 흘리고 대량의 재부를 창조한 데 기초하여 발전된 것이다. 그리이스의 문화, 예술, 철학과 자연과학에는 매우 높은 성과가 있었으며, 이러한 성취는 그후 유럽에 매우 늰 영향을 주었다. 그리이스에는 오래 전부터 연극 공연이 있었다. 연극 공연은 명절날의 가무 출연에서 기원하였다. 그리이스는 포도와 포도주가 많이 나는 곳이었다. 해마다 봄에 포도덩굴에 새움이 돋아날 때와 가을에 포도가 무르익을 때 그리이스 인민들은 주신(酒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활동을 하였다. 활동의 중요한 내용은 합창대 출연이었다. 합창대는 노래하면서 춤을 추었는데 노래 가운데 독백을 끼워 넣었다. 그리이스의 희곡은 이런 출연 가운데서 점차적으로 발전된 것이다. 기원전 5세기와 기원전 4세기에 그리이스에서는 유명한 희곡 작가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를테면 비극작가 아이스퀼로스와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와 같은 사람들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저명한 비극 작품으로는 ≪사슬에 얽매인 프로메테우스≫가 있다. 그는 신화에 근거하여 이 각본에서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폭력에 반항하는 영웅적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하였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작품은 생동 활발한 풍자적인 언어로써 그리이스 각국 노예주간의 혼전을 질책하고, 노예주의 민주 정치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빈부의 차이가 심하며 여성들이 무권리한 사회의 불평등 현상을 날카롭게 공격하였으므로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이스에서는 여러 가지 공동 집회, 명절 활동, 체육 경기(기원전8세기부터 그리이스인들이 4년에 한 번씩 올림픽아 지방에서 전 그리이스 체육경기 대회를 연 것이 가장 유명하였다. 지금의 세계 운동 대회를 올림픽이라고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와 연극 공연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리이스인들은 아름답고 웅위로운 많은 공공 건축물, 이를 테면 사원, 노천 극장과 운동장 같은 것들을 건축하였다. 우아한 조각품으로 장식되어 있는 많은 건축물들은 건축과 조각 예술면에서 그리이스인들의 성과를 보여 주었다.
아테네의 한 작은 산에는 그리이스인들이 건축한 아테네 호위성이 있다. 이 호위성은 그리이스의 건축과 조각 예술의 걸출한 대표작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 이름난 아테나(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인데 후에 아테네의 수호신으로 간주되었다.)에게 제사를 지내는 파르테논신전이 있고, 신전에는 아테나신의 조각상이 있다. 이 조각상은 높이가 12미터이고 표면에는 모두 황금과 상아를 박아 만들었는데, 황금으로 만든 옷은 여신이 서 있는 대 위에까지 드리워졌다. 아테네에는 또 1만7천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큰 노천극장도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당시 이름난 희곡 작가들이 쓴 비극과 희극들이 계속적으로 공연되었다. 그리이스인들은 과학에 있어 이집트, 바빌로니아와 기타 아시아 국가들의 과학성과를 섭취하여 더욱 연구하고 발전시켰다. 그리이스의 천문학자들은 1년을 355 5/19일로 측정하였으며, 일식을 예측하였고, 지구가 등글다는 학설을 제기하였다. 그리이스에는 많은 수학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원추체와 구체의 체적 계산법을 알았으며, 무한소(無限小)의 개념을 제기하였다. 수학자 피타고라스(기원전 580~500년)는 ≪피타고라스 정리≫(즉 구고정리이다.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의 제곱은 두 직각변의 평방수의 합과 같다는 정리이다.)를 내놓았고, 저명한 학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7년 ~322년)는 당시의 많은 학과들을 연구하고 총화하여 논리학, 물리학, 식물학과 동물학의 학과 체계를 창립하였다.
고대 그리이스의 여러 철학자들은 소박한 유물론 및 변증법적 사상을 제기하였다. 예를 들면 기원전 6세기 말엽부터 기원전 5세기 초엽까지의 사이에 산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는 신이 창조한 것도 아니고 사람이 창조한 것도 아니며, 세계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덩이로서 법칙에 따라 타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는 사물의 내부에는 모순이 존재하고 대립면의 투쟁이 존재하며. 이러한 대립면의 투쟁으로 하여 사물은 부단히 발전 변화한다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사람은 두 번 다시 같은 강물에 뛰어들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 의미는, 강물은 흐르기 때문에 한 사람이 두 번째로 물에 뛰어 들 때에는 이미 처음에 뛰어들 때의 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사물의 발전 변화를 비유하였다. 또 데모크리토스(약 기원전 460~377년)는 우주의 모든 물질은 극히 작아 더는 나눌 수 없는 ≪원자≫로 이루어진 것이고, 각종 구체적인 ≪사물≫의 발생은 바로 서로 다른 방식에 의한 ≪원자≫의 결합이며 그의 소멸은 ≪원자≫의 분리라고 주장하였다. 당시에 노예주 귀족들은 각종 관념론과 형이상학을 설교하였다. 관념론의 대표 인물은 저명한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년)와 그의 제자 플라톤(기원전 427~347년)이었다. 그들은 관념론을 선전하면서 정신이 1차적이고 물질이 2차적이라고 인정하였다. 플라톤은 또 노예주의 착취와 통치를 수호하기 위하여 귀족 노예주의 통치를 선양하면서, 심지어는 일부 사람을 선천적인 노예라고까지 말하였다. 소박한 유물론, 변증법적 사상과 관념론, 형이상학은 그것이 발생한 때로부터 서로 대립되고 서로 투쟁하였다.
역사학자 헤로도투스(기원전 487~425년)는 서방에서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다. 그는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민간 전설을 취재하고 풍속습관을 시찰하고 나서 ≪역사≫를 썼다. 그는 ≪역사≫에서 그리이스-페르시아 전쟁과 희랍, 인도, 이집트 및 서아시아 국가들의 역사 정황을 서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아주 풍부하다. 다른 역사학자 투키디데스(약 기원전 460~400년)는 일찍 아테네의 장군으로 있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스파르타와 싸운 일이 있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전쟁사≫를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전쟁의 과정과 사건의 전후 관계를 서술하였는데 다 쓰지 못하고 죽었다. ≪역사≫와 ≪펠로폰네소스전쟁사≫는고대 역사에 관한 대작들이며, 특히 그리이스 역사의 재료들이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고대 그리이스에는 어떤 주요한 도시국가들이 있었는가? 그들의 사회정황은 어떠하였는가?
2. 솔론 개혁의 역사적 배경과 내용 및 본질에 대해 토론해 보자.
3. 그리이스-페르시아 전쟁의 경과와 그 결과를 말해 보자.
4 아테네의 실례를 들어 그리이스-페르시아 전쟁 후 희랍의 노예제 경제의 발전을 설명해 보자.
5. 그리이스 노예제 도시 국가는 어떻게 쇠퇴하였는가?
6. 고대 그리이스에는 어떤 중요한 문화 성과들이 있었는가? 몇 명의 저명한 과학자, 철학자, 역사가들을 들어보자.






제2절 로마

로마공화국의 형성과 확장
지중해 중부의 이탈리아 반도는 기후가 온화하고 우량이 충족하며 많은 지구의 토지가 비옥하다. 이곳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고기잡이와 사냥을 하고 동물을 길렀는데, 후에 와서 목축업과 농업에 종사하였다. 기원전 7세기경에 씨족 공동체는 해체되고, 씨족귀족과 가난하고 파산당한 씨족 성원들이 나타났다. 당시 티베르 강변의 7개의 산과 구릉에 자리잡고 있던 촌락들이 연합하였는데, 기원전 6세기에는 이 일대의 주위에다 성벽을 쌓았다. 이것이 바로 로마성이다.
경제가 발전하고 지역이 확장됨에 따라 로마의 주민 가운데는 외부에서 들어온 이주민과 피정복 지구의 주민이 늘어났다. 평민으로 불리운 이들은 자유인이기는 하였지만, 로마 씨족에 들지 못하여 정치적 권리가 없었고 씨족 공유지를 분배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주로 개인 농업 노동에 종사하였으며, 소수 사람들은 수공업과 소상업을 경영하였다. 많은 평민들은 귀족들의 소작살이를 하면서 채무자로 되었는데, 빚을 갚지 못하여 흔히 노예로 전락되곤 하였다.
기원전 509년경에 로마에 공화국이 창건되었다. 선출된 2명의 집정관이 정사를 처리하였으며, 그들의 임기는 1년이었다. 긴급한 정황이 나타났을 때에는 한 집정관이 독재권을 장악하였는데, 그 기한은 반년으로 하였다. 공화국의 모든 대권은 귀족들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집정관의 직무와 모든 고급 직무는 귀족들이 담당하였다. 그때의 로마공화국은 귀족 독재의 노예제 국가였다.
귀족들은 권세를 이용하여 평민을 압박하였다. 채무 노예의 수는 부단히 늘어났다. 기원전 5세기 초에 평민들은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고 땅을 얻으며 채무 노예제를 반대하는 투쟁을 일으켰다. 두 세기에 걸친 투쟁과정에서 평민들은 연속 일정한 권리를 전취하였으며, 평민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호민관(護民官)을 설치하게 되었다. 호민관은 평민들이 담당하였다. 그들은 평민의 이익을 침범하는 귀족 통치 집단의 결정을 부결할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평민들은 로마 공민권을 얻었고 일부분의 토지를 분배받았으며, 또 모든 고급 관직을 담당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고급 관직은 모두 보수가 없었기 때문에 소수 부유한 평민만이 그 관직을 담당할 수 있었다. 그들은 원래의 귀족과 한동아리가 되어 새로운 귀족 지배 계급으로 되었다. 채무 노예 제도는 취소되었다. 노예주는 더는 본국의 자유민을 예속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외족의 노예를 광범하게 착취하는 길로 나아갔다.
로마는 평민과 귀족간의 장기적인 투쟁이 있는 정황에서도 일련의 정복 전쟁을 도발하였다.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초엽까지의 기간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일약 지중해의 강국으로 되었다. 이어서 로마는 또 지중해 연안에서 침략 활동을 감행하여 기원전 2세기에는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다니아 등 섬들과 북부 포강 유역, 에스파니아의 대부분과 발칸 반도의 남부 및 서북부 연안, 소아시아 서부와 북아프리카의 일부분, 지중해의 수많은 기타 섬들을 점령하였다. 이로부터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얻게 되었다.





노예 제도의 고도의 발전
장기간의 약탈 전쟁에서 대량의 노예들이 로마에 흘러들었다. 로마는 언제나 정복당한 도시의 남녀 노소를 전부노예로 팔았다. 기원전 17r년에 로마는 반항하는 그리이스 서북부 인민들을 탄압하고 단번에 15만 명을 노예로 팔았다. 노예 장사꾼들은 흔히 군대를 따라가서 당지에서 전쟁 포로를 사들였다. 지중해 각지를 횡행한 해적들은 계속적으로 사람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았다. 도시에는 노예시장이 있었는데, 노예의 수량이 많고 값이 싸기로는 고대 역사상에서 전례가 없었다.
약탈 전쟁은 노예주 귀족들을 살찌웠다. 그들은 전쟁의 기회를 이용하여 소농들의 토지를 겸병하였으며, 또 대면적의 새 토지들을 강점하였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에서 몇백 내지 몇천 유그(1유그는 750평에 해당된다)의 땅을 점한 대장원들이 끊임없이 출현하였다. 장원들에서는 수많은 노예를 부렸다 로마 노예주들은 노예를 도구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수레같은 것은 벙어리 도구로, 소 같은 것은 반벙어리도구로, 노예는 말하는 도구로 인정하였다. 노예는 1년내내 고역에 시달리면서도 헐벗고 굶주리었다. 노예주들은 노예들을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노예들에게 낮에 일을 시킬 때면 족쇄를 채웠고, 밤이면 감방과 같은 우리나 움에 가두었다. 밀가루를 만드는 일을 시킬 때면, 굶주린 노예들이 훔쳐먹는다고 그들의 목에 무거운 큰 나무칼을 씌웠다.
노예들은 계속적으로 매를 맞고 달군 쇠꼬챙이에 지지웠으며,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하였다. 노예주는 노예들의 피땀을 다 짜낸 다음 노예들이 병들거나 늙으면 폐우, 폐철, 부서진 수레와 마찬가지로 내버려 굶어 죽게 하였다.
광산에서도 대량의 노예 노동을 사용하였다. 에스파니아의 한 은광에서는 4만 명의 노예를 사역하였다 노예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광석을 채굴하고 금속을 제련하였다. 노예들은 가혹한 노동과 감독의 채찍 아래서 때때로 메 죽음을 당하였다.
많은 노예들은 노예주의 집에서 문지기, 밥짓기, 마당쓸기, 이발 등등의 일을 하였다. 그리이스나 동방 각지에서 온 문화 소양이 있는 노예들은 노예주의 가수, 악사, 의사 또는 교원으로 채용되었다. 노예주들은 건강한 노예들을 격투사로 훈련시켜 강제적으로 극장에서 전투를 하게하여 서로 죽이게 하였고, 굶주린 범이나 사자와 같은 맹수와 격투하게 하였다. 인간성이란 전혀 엄는 노예주들은 이것을 보고 히히닥거리며 즐기었다.





노예 봉기
굶주림과 박해에 시달린 노예들은 노예주들에 대하여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고 끊임없이 반항하였으며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켰다.
기원전 73년에 고대 역사에서 규모가 가장 큰 한 차례의 노예 봉기 즉 스파르타쿠스봉기가 일어났다.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사람으로서 어느 한 싸움에서 포로가 되어 카푸아의 한 격투 훈련소에 팔려가 훈련을 받았다. 격투사들의 처지는 아주 비참하였다. 그들은 늘 혹형을 당하고 매를 맞았으며, 수시로 격투장에서 비참히 죽을 가능성이 있었다. 200명의 노예들은 참을래야 참을수 없어 도망치려고 밀모하였다. 그 결과 78명이 범의 아가리에서 벗어나 베수비우스 화산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스파르타쿠스를 수령으로 선거하고 봉기의 깃발을 날리며 부근의 대장원들을 끊임없이 습격하였다. 노예와 파산당한 농민들이 앞을 다투어 참가하였기에 봉기 대오는 신속히1만 명으로 확대되었으며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로마군은 베수비우스화산을 포위하였다. 봉기군은 머루덩굴로 꼬아 만든 큰 밧줄을 타고 캄캄한 밤에 벼랑을 내려와 적의 배후를 기습하였다. 로마군은 경황실색하여 뿔뿔이 도망쳤다. 봉기군의 승리는 사면 팔방의 군중을 고무하였으며 대오는 날로 성장하였다. 봉기군은 승승 장구로 전진하였다. 얼마안 가서 이탈리아 남부의 도처에서 투쟁의 불길이 세차게 타올랐다. 투쟁이 연속 승리함에 따라 스파르타쿠스는 기병대를 조직하고, 엄격한 규율을 세워 군대가 재물을 수탈하거나 인민을 해치는 것을 금지하였고, 모든 전리품은 일률로 평균 분배하였으며, 군수품을 징수한 경우에는 값을 쳐서 돈을 물었다.
봉기군 대오는 싸울수록 강대하여져서 기원전 72년에 이르러서는 12만명으로 확대되었다. 이 해에 로마의 두 집정관이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와서 봉기군을 탄압하였다. 스파르타쿠스는 봉기 대군을 거느리고 호호탕탕하게 북쪽으로 진출하여 앞에서 막고 뒤에서 추격하는 로마군을 격멸하고 연전 연승하면서 포강 유역에 이르렀다. 이어서 스파르타쿠스는 다시 군대를 돌려서 승승 장구로 남하하였다. 이탈리아 반도를 파죽지세로 휩쓸고 있는 이 봉기 대군 앞에서 통치 계급은 당황하였다. 그들은 국가가 위급 상태에 처했다고 선포하고 모든 병력을 집중하였으며, 대노예주 크랏수스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봉기군을 진압하게 하였다. 크랏수스는 연전 연패하였다. 스파르파쿠스는 대오를 거느리고 이탈리아 반도 남쪽 끝까지 진격하여 그곳에서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섬에 가서 그곳의 노예들과 함께 싸우려고 하였다. 배가 없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음흉하고 잔인한 크랏수스는 반도의 가장 좁은 곳에 참호를 파고 보루를 쌓고 봉기군의 돌아갈 길을 막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용감하고 지혜로운 봉기군은 눈보라 휘몰아치는 밤에 영웅적으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동해안으로 진출하였다. 이 진군 과정에서 봉기군 대오 내부에 분열이 생겼다. 일부분 봉기군이 주력 부대를 떠났기 때문에 봉기군의 역량은 약화되었다. 기원전 71년에 봉기군과 로마군간에 브린디시항 부근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스파르타쿠스는 크랏수스를 자기 손으로 죽일 결심을 가지고 앞장서서 돌진하였으나 그를 찾지 못하고 2명의 로마 군관을 죽였다. 그는 후에 허벅다리에 중상을 입어 외다리로 절룩거리면서도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었다. 봉기군 6만 명이 모두 싸움터에서 영용히 전사하였다. 살인 백정 크랏수스는 포로 7000명의 노예를 카푸아로부터 로마로 가는 길목에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러나 노예 봉기의 불길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봉기군의 나머지 부대는 계속 10년간이나 투쟁을 견지하였다.
스파르타쿠스 봉기는 고대 피압박 계급의 가장 빛나는 해방 투쟁이었다. 스파르타쿠스는 용감 무쌍한 투쟁 정신과 탁월한 군사 재능을 과시하였다. 스파르타쿠스에 대하여 마르크스는 ≪고상한 품격≫을 갖춘 ≪고대무산 계급의 진정한 대표자≫였다고 칭송하였다. 봉기는 로마 노예주의 통치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노예 제도의 기초를 크게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빛나는 역사적 공훈을 세웠다.





로마제국
부단히 일어난 노예 봉기, 특히는 스파르타쿠스 봉기의 타격으로 로마 노예주 계급은 강력한 정권을 건립하여야만 자기 계급의 통치를 공고히 할 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군대를 통솔하며 실력을 가진 일부 인물들은 대권을 틀어쥐고 노예를 탄압하고 광대한 피정복 지구의인민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군사 독재 제도를 건립하려고 시도하였다. 독재자의 지위를 얻기 위하여 군벌들은 몇십 년 동안 쟁탈전을 벌였다. 기원전 49년에 몰락 귀족 가정 출신이며 당시 갈리아(갈리아 지구는 오늘의 프랑스, 룩셈부르그, 이탈리아 북부 및 독일 연방 공화국의 일부분, 네덜란드의 일부분, 스위스의 일부분을 포괄한다.) 총독이었던 케사르(기원전 101~44년)는 로마에 쳐들어가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였다. 몇 년 동안에 그는 정치상에서의 적수를 물리치고 권력을 자기에게 집중시켰다. 그의 독재 통치는 부분적인 귀족들의 불만을 자아냈다. 기원전 30년에 케사르는 귀족 반대파들에게 암살되었다. 또 치열한 한 차례의 쟁탈전을 거친 후 기원전 30년에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여 로마의 군사 독재자로 되었다. 기원전 2r년에 옥타비아누스는 원수제(元首制)를 건립하였다. 원수는 형식상으로 ≪제1공민≫이라는 뜻이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행정, 군사, 사법과 종교를 종신토록 총괄하는 대권을 장악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실제상 로마제국의 첫번째 황제였다. 이때로부터 노예제 군사 제국이 노예제 공화국을 교체하게 되었다.
기원전 1세기부터 로마는 또다시 여러 차례의 침략 전쟁을 도발하였다. 기원 1세기부터 기원 2세기까지의 시기는 로마제국의 강성 시기였다. 로마제국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대륙에 걸쳐 있는 대제국으로서, 동쪽은 푸라트강 상류에까지 이르고, 남쪽은 아프리카의 사하라 대사막에까지 이르고, 서쪽은 대서양 연안에까지 이르고, 북쪽은 브리튼섬의 중부와 남부, 라인강과 다뉴브강(도나우강), 그 하류 이북 지구에까지 이르러 지중해는 로마의 내호(內湖)로 변하였다.
로마제국은 최초의 약 200년간에 번영하고 있었다. 당시에 내전이 정지되어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었으므로, 농업, 수공업과 상업이 모두 발전하였다. 북아프리카 일대에는 새로운 경작지가 개척되었는데, 이곳은 농산물이 매우 풍부하여 로마제국의 곡창으로 되었다. 이탈리아의 금속 제품과 도기, 소아시아의 정밀한 방직품, 에스파니아의 금, 은, 철 등 광산물들은 모두 외지로 수출되었다. 제국경내에는 넓은 대통로와 편리한 수륙교통이 있어 상업의 발전을 추진하였다. 로마에서는 북유럽, 인도, 중국과 모두 무역 왕래를 하고 있었다. 중국의 비단은 ≪비단 길≫을 통하여 로마에 들어가 상층 사회 계층들이 즐기는 사치품으로 되었다. 지배계급들은 제국 각지에서 대량의 재부를 약탈하여다가 마음대로 써버렸다. 로마성내에는 호화로운 궁전, 별장, 극장, 사원들이 건축되었다. 노예주들은 마음껏 향락을 누리면서 부패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고층건물들 사이에는 가난하고 직업이 없는 빈민들이 살고 있었다. 노예주들의 사치한 생활은 노예와 빈민들의 고통 위에 이루어진 것이다. 광범한 근로 인민들은 고난 속에서 해방의 날을 갈망하였다





기독교
로마제국 통치 아래에 있던 팔레스티나의 유태인들은 로마통치자들의 폭정에 반항하여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으나 모두 탄압되고 말았다. 1세기에 팔레스티나와 소아시아 등지에 선교사들이 나타나 ≪구세주≫가 가난한 인민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설교하였다. 후에 와서 그들은 또 ≪하느님≫의 사자이며 그리스도(즉 ≪구세주≫)인 예수가 사람들에게, 고통을 참아야 하며 고통을 참는 사람만이 죽은 후에 ≪천당≫에 올라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또 예수가 팔레스티나에서 도를 선전하였는데, 후에 유태 귀족들이 로마 총독과 결탁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설교하였다. 기실 예수는 종교 전설에 나오는 인물이다. (지금 통용되고 있는 기원의 기년법은 이른바 ≪예수가 탄생≫했다는 해로부터 계산한 것이다. 이 이전의 연도에 대하여서는 기원전 몇 해라하고 이 해로부터는 기원 몇 해라고 한다. 이런 계산법과, 이른바, ≪예수가 탄생≫했다는 해는 6세기의 기독교의 한 승려인 데안니시가 제시한 것이다. 비록 예수가 종교 전설에 나오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 기년법의 표준은 점차적으로 전 세계에서 통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설교는 사람들에게 환상적인 위안을 주었기 때문에 많은 노예와 가난한 사람들이 신앙하게 되었다. 예수를 신앙하는 신자들은 자그마한 종교 집단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서로 구제하면서 로마의 신과 황제를 숭배하지 않았다. 이런 단체들은 신속히 로마제국의 전국에 퍼졌으며 점차적으로 통일되어 기독교회를 이루었다.
초기에 로마 황제는 기독교의 영향이 두려워 신도들을 박해하고 살해하였다. 후에 와서 교회 자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많은 부유한 상층 인물들도 앞을 다투어 기독교를 믿었다. 그들은 재산을 헌납하여 점차 교회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4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대량의 재부를 소유하였으므로 다시는 원래 피압박자들의 그러한 소단체가 아니었다. 교회는 모든 권력은 ≪하느님≫이 준 것이므로 근로 인민은 응당 고통을 참아야 한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로마 황제는 기독교를 이용하여 자기의 통치를 강화할 수 있다고 느끼고 더는 기독교도들을 박해하지 않았다. 313년에 로마 황제는 기독교의 합법적 지위를 승인하였고 후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기독교는 인민을 압박하고 마취시키는 통치 계급의 도구로 변하였다.





서로마제국의 멸망
표면상으로 번영한 로마제국은 심각한 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노예들은 노예주를 위하여 노동하려 하지 않고 늘 도구를 파괴하고 태업하고 도망하고 반항하며, 심지어 노예주를 죽이기까지 하였다. 노예제 대농장은 갈수록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노예주들은 저들의 이익을 위하여 착취 방식을 개선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대농장의 땅을 노예와 파산된 농민들에게 뙈기로 나누어 주어 부치게 하고, 그들에게서 지대를 받아들이고 노역을 강요하였다. 이런 착취 방식을 콜로누스제도라고 한다. 2세기에 와서 콜로누스 제도가 점차적으로 유행되었다. 콜로누스 제도를 실시한 것은 생산에서 근로자들의 적극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예주들은 노동 인구를 보장하기 위하여 콜로누스들을 뙈기밭에 더욱더 얽매어 놓았다. 4세기에 이르러 로마 황제는 콜로누스를 밭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고 재산을 가지지 못하게 하였다. 콜로누스의 처지는 더욱더 나빠졌고 노동에 대한 그들의 흥취도 점차 상실되었다. 로마의 경제는 쇠퇴되기 시작하였다.
3세기에 로마제국은 이미 전면적인 위기에 들어섰다. 경제가 쇠퇴해지고 도지의 경기가 나빠졌다. 관리들 중에서 탐오가 성행하고 지배 계급의 황위 쟁탈 현상도 매우 엄중하였다. 전반 사회가 동란과 불안에 처하였다. 빈궁에 빠진 근로 인민들은 일어나 반항하였다. 봉기의 불길은 로마제국의 전지역을 휩쓸었다.
3세기 중엽에 갈리아 지구에서, ≪바가우드≫(≪바가우드≫란 갈리아어로 ≪전사≫라는 뜻이다)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에는 노예, 콜로누스, 빈민들이 참가하였다. 그들은 강대한 무장력을 이루었다. 농민은 보병이 되고 목민은 기병이 되어 사면에서 습격하여 수많은 도시들을 점령하고 광대한 농촌을 통제하였으며, 부유한 귀족들을 죽이고 토지와 가축, 재산을 나누었으며, 자기의 정권을 건립하고 로마제국에서 이탈한다고 선포하였다. 후에 로마제국은 대군을 동원해서야 봉기를 잠시나마 탄압할 수 있었다.
4세기 중엽에 북아프리카에서 대규모 ≪아그니스트≫(≪아그니스트≫란 그리이스어로 ≪전사≫, ≪투사≫라는 뜻이다.) 운동이 일어났다. 농민, 노예, 콜로누스들은 모여서 노예주들의 장원을 짓부시고 노예의 명단과 빚문서를 태워버렸다. 운동은 세찬 불길마냥 계속 줄기차게 일어났으며, 몇십 년간 지속되었다. 이때에 갈리아의 바가우드 운동도 다시금 활기를 띠었고 또 갈리아에서 일어난 투쟁의 불길은 에스파니아에까지 파급되었다. 그리하여 로마제국의 최후 붕괴의 시각은 멀지 않게 되었다.
로마 노예주 정권이 뿌리째 뒤흔들리고 있을 때 로마제국경외에 사는 게르만인들이 밀물처럼 로마제국으로 몰려들어왔다. 게르만의 각 종족들은 매우 일찍부터 라인강, 다뉴브강, 웨이스바강과 북해 사이의 광대한 지구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늘 로마 변경을 침습하였으며 로마제국에 들어왔다. 그후 그들의 일부는 노예로 되었고, 일부는 콜로누스로 되었으며, 일부는 제국의 고용군으로 되었다. 346년에 게르만인들 중의 서고트인들이 다뉴브강을 건너 흑해 서안 지구에 이주하였다. 로마 관리들은 그들을 학대하였으며 그들에게 아들딸을 팔아 식량을 바꾸어가도록 강요하였다. 관리들은 마음대로 그들을 붙잡아다 자기 밭을 경작시키거나 노예로 팔았다. 그후 얼마 안 가서 서고트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노예, 콜로누스, 빈민들은 앞을 다투어 봉기 대오에 참가하였다. 378년에 서고트인과 로마 군대는 아드리아노플에서 결전을 벌였다. 로마 군대는 여지없이 참패를 당하였고 로마 황제도 맞아 죽었다. 그리하여 로마제국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로마제국이 내외로 곤궁에 빠진 정황 하에서 지배 계급 내부에는 또 끊임없이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395년에 로마제국은 동, 서 두 부분으로 분열되었다.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정하고 서로마는 여전히 로마를 수도로 정하고 있었다.
5세기 초에 서고트인들이 재차 서로마제국을 진공하였다. 그들은 발칸반도에서 약탈한 후 이탈리아 반도에 쳐들어왔다. 이탈리아 반도의 4만명 노예들이 그에 호응하였다. 410년에 서고트인들이 로마를 포위하였다. 성안의 노예들이 성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서고트인들은 순조롭게 이 로마 노예주들의 통치 중심을 점령하였다. 서고트인들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약탈을 감행한 후 그곳을 떠나 갈리아 남부로부터 에스파니아로 들어갔다. 이 시기에 기타 게르만 종족들도 앞을 다투어 서로마제국에 쳐들어와 각지의 노예, 콜로누스들과 함께 당지의 로마 정권을 짓부시었다. 5세기 중엽에 이르러 서로마 제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였다. 476년에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게르만 고용병 우두머리에게 쫓겨났다. 서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서유럽에서의 노예 제도의 붕괴를 의미한다.





로마의 문화
로마는 건축 기술면에서 매우 높은 성과를 거두었다. 많은 건축물들은 석재로 지은 것인데 아주  보기 좋았다. 로마의 원형대극장은 약 5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 통치시기에 건축하기 시작한 만신전(萬神殿)은 150여 년만에 준공하였는데, 그 규모가 아주 웅대하였다. 제국 시기에 많은 지방들에서는 높은 인수교를 놓고 먼 곳으로부터 샘물을 성내에 끌어들여 주민들에게 공급하였다.
로마인들은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후에 나타난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에스파니아어, 포르투갈어 등은 라틴어에서 온 것들이다. 라틴 자모는 쓰기 간편하여 현재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자모로 되었다.
저명한 시인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19년)는 ≪호메로스 서사시≫를 모방하여 ≪아에네이스≫를 썼는데 여기에는 트로이의 신화적 영웅 아에네이스가 트로이성이 함락된 후 표류하여 이탈리아에 이르고 그의 후예들이 후에 로마를 세웠다는 것이 서술되어 있다. 역사학자 리비우스(기원전 59-기원 17년)는 ≪로마사≫를 썼는데 여기에는 많은 역사 인믈, 중요한 사건과 신화 전설들이 기재되어 있다. 지금, 이 책은 절반 이상 실종되었다. 케사르의 ≪갈리아 전쟁≫과 타키투스(약 55년-120년)의 ≪게르마니아지≫에는 기원전 1세기와 기원 1세기 때의 게르만인의 사회 정황들이 각각 기재되어 있다. 이 책들은 게르만인에 관계되는 중요한 역사 자료들이다.
플리니우스(23-79년)는 박식한 과학자로서 ≪박물학≫을 저술하였다. ≪박물학≫은 천문, 지리, 생물, 야금, 의학 등 여러 방면을 내포하고 있는 백과사전식 저작이다. 플리니우스는 실지 고찰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79년 베수비우스화산이 폭발하였을 때 그는 그곳에 가서 구호 사업을 하고 현지를 고찰하다가 중독 질식하여 사망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로마공화국은 대략 어느 때에 건립되었는가? 로마공화국은 어떤 성격의 국가인가?
2. 로마제국은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가? 제국 초기의 정황은 어떠하였는가?
3. 기독교는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기독교는 어떻게 지배 계급이 인민을 압박하는 도구로 되었는가?
4. 로마제국은 무엇 때문에 쇠퇴하였는가? 서로마제국은 어떻게 멸망하였는가?
5. 문화면에서 로마의 공헌에 대해 토론해 보자.






제4장 서유럽 봉건 제도의 형성과 발전






역사 발전의 과정에서 인류는 노예 사회로부터 더욱 높은 단계 즉 봉건사회에 들어섰다. 고대 세계 문명의 하나인 중국은 일찍 기원전 5세기에 봉건 사회에 들어섰다. 그때로부터 대략 1,000년 후에야 서유럽에서는 서로마 노예제제국의 장송곡 속에서 봉건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세계적 범위에서의 봉건 사회의 형성과 상승 시기에 중국은 줄곧 각국의 최전열에서 나아가고 있었다.


제1절 서유럽 봉건제도의 형성과 발전

프랑크왕국
서로마제국이 멸망된 후에 게르만인은 서로마제국의 폐허 위에 많은 봉건 왕국들을 건립하였다. 이런 국가들 가운데서 가장중요한 나라가 프랑크왕국이었다.
프랑크인은 게르만인의 한 갈래로서 몇 개 종족으로 나뉘어 원래 라인강 하류에서 살다가 후에 점차 남쪽으로 팽창하였다. 서로마제국이 멸망될 때에 프랑크인들은 이미 갈리아 동북부를 점령하고 있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된 후에 프랑크의 한 종족의 우두머리 클로비스(481~511년 재위)는 기타 프랑크 종족의 우두머리들과 연합해 가지고 갈리아의 광대한 땅을 점령하였다. 그후 얼마 안 가서 기독교 교회의 후원을 얻기 위하여 그는 기독교를 접수하였다. 이로부터 클로비스의 팽창은 교회의 전면적인 지지를 받았다. 적지 알은 도시에서 기독교의 승려들은 성문을 열고 크로비스의 군대를 맞아들였다. 그리하여 5세기 초엽에 클로비스는 갈리아의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고 여러 종족들을 통일하여 프랑크왕국을 건립하였다.
프랑크왕국은 부단히 화장되어 칼만(칼대제)의 통치 시기(768~814년)에 와서 전례없이 강성하여졌다. 칼대제는 46년간에 53차례의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더욱 많은 땅을 빼앗고 더욱 많은 농민을 예속시키기 위하여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에 살고 있는 색슨인(색슨인은 게르만인의 한 갈래이다)을 침공하고 살인, 방화, 약탈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색슨인들의 장기적이고도 치열한 반항에 부딪쳐 단속적으로 30여 년간을 싸워서야 겨우 그들을 정복하였다. 칼대제는 또 남쪽으로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의 북부와 에스파니아 동북부의 일부 땅을 점령하였으며, 동쪽으로 다뉴브강 상류와 중류를 정복하였다. 그리하여 이 광대한 지역에 군사적 제국이 건립되었다. 역사상 이를 칼제국(칼만제국)이라고 부른다.





봉건 제도의 형성
장기간의 군사적 정복 과정에서 프랑크인들의 사회 제도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갈리아를 정복하기 전야에 프랑크인은 씨족 공동체 생활을 하였으며, 아직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가 없었다.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 프랑크국왕은 원래 서로마 황제와 수많은 로마 노예주들의 소유지였던 땅을 빼앗고 또 무수한 공지와 황무지를 강점하였다. 국왕은 일부분의 토지와 원래 그 토지에 예속되어 있던 콜로누스와 노예들을 자기의 호위병들과 기독교회에 상으로 나누어주었다. 그리하여 국왕, 귀족, 교회는 대토지 소유자로 되었으며, 원래의 토지에서의 착취 방식까지 답습하였다. 그들은 콜로누스와 아직 남아있는 노예들을 부려서 토지를 경작하였다. 그리하여 일찍 게르만인들과 함께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노예와 콜로누스들은 다시금 새로운 쇠사슬에 얽매이게 되었다.
다른 한 편으로 프랑크인들의 씨족 제도도 정복 전쟁 과정에서 해체되었다. 장기적인 출전, 끊임없는 이동은 원래의 씨족 조직을 서로 혼합되게 하였다. 새 정복지에 정착한 프랑크인들은 더 이상 혈연적 관계에 따라 씨족 공동체를 결성하지 않고 거주 지역에 따라 농촌 공동체를 결성하였다. 처음에 농촌 공동체에서는 토지를 공동 소유로 하고 경작지를 집집에 나누어 주어 세세 대대로 사용하게 하였으나 마음대로 타인에게 넘겨 주지는 못하게 하였다. 6세기 말엽에 경작지는 점차 타인에게 넘겨줄 수 있는 사유 재산으로 되었으며, 목장, 수림과 수원만을 공동체성원들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그때의 농촌 공동체는 프랑크 사회의 기층 조직이었다.
토지가 사유 재산으로 변함에 따라 농촌 공동체 성원들 가운데서는 빈부의 분화가 생겼다. 해마다 연속되는 전란과 재난, 그리고 국가와 교회에서 받아들이는 가중한 세금들은 농민들을 파산시켰다. 대토지 소유자들은 이런 기회를 타서 수탈을 더욱 다그쳤다. 그들은 빈궁한 농민들의 토지를 침점하고 농민들을 자기들에게 예속시켰다. 많은 농민들은 관리와 부호들의 수탈에 견딜 수 없어, 자기의 땅을 부근의 귀족이나 교회에 ≪헌납≫하고 ≪보호≫를 요구하였으며, 그리고는 지대를 바치고 그들의 부역에 종사할 것을 조건부로 그 땅을 자기에게 ≪내주어≫부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때로부터 농민들은 땅도 잃고 인격적 자유도 잃었으며, 토지에 얽매여 지주의 착취를 받는 농노로 전락되었다. 원래의 콜로누스와 노예들은 차츰 농노로 전화되었다.
프랑크인의 군대는 자유 농민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 스스로 무기를 갖추어 가지고 출전하였다. 자유 농민이 감소됨에 따라 출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나라의 병사 원천을 확보하기 위하여 프랑크왕국은 토지를 무조건 상으로 주던 방법을 고쳐 채읍제(采邑制)를 실시하였다. 국왕은 로지를 채읍으로 떼어 (그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까지 포함하여) 가까운 귀족들에게 분봉하였다. 분봉을 받은 귀족들은 국왕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들은 무기와 군마를 자기 스스로 갖추어 가지고 부하들을 거느리고 가서 국왕의 명령에 복종하였다. 후에 와서 채읍은 세습적 영지로 변하였다. 채읍 제도는 가일층 농민을 농노의 처지에 밀어넣었다. 칼대제의 통치시기에 농촌 공동체의 자유 농민은 거의 전부 없어졌다.
봉건적 토지 소유가 늘어나고 자유 농민이 농노화됨에 따라 9세기에 새로운 사회 제도 즉 봉건 제도가 유럽에서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토지소유권과 정치 권력을 장악한 봉건 영주들은 봉건 사회의 지배 계급이었으며, 토지 소유권과 인격적 자유를 박탈당한 농노들은 기본적인 피지배계급이었다.
봉건 제도가 노예 제도를 교체한 것은 한 착취 제도로 다른 한 착취제도를 교체한 데 불과하였다. 그러나 농노는 노예와는 달랐다. 농노들에게는 자기의 간단한 생산 도구가 있었고 얼마간 자기의 가정 재산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노동에 대하여 다소 관심을 가지었다. 그들은 열악한 조건하에서 기술을 발전시켜 사회 생산력을 점차적으로 제고시켰다.





봉건적 신분 제도와 서유럽의 봉건 장원
봉건 제도의 발전에 따라 봉건 영주들은 피라미드식의 신분 제도를 세웠다. 대봉건 영주는 자기에게 일부분의 토지를 남겨 놓고 그 나머지의 토지를 작은 봉건 영주들에게 분봉하여 주었으며, 작은 봉건 영주들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더욱 작은 봉건 영주들에게 토지를 분봉하여 주었다. 이렇게 층층이 내려가면서 분봉을 받았기 때문에 봉건적 등급이 이루어졌다. 매 계층의 상하급 관계는 영주와 부용(附庸)의 관계였다. 영주는 부용자를 부호하여야 하였고, 부용자는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정한 공물을 바쳐야 하였으며, 전쟁이 일어나면 출전하여야 하였다. 그들은 모두 봉건 통치자들이었다. 이런 피라미드식 신분제의 맨 꼭대기에 걸터앉은 것이 국왕이었고,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이 착취받고 예속당하는 농노들이었다.
봉건 제도가 서유럽에서 확립될 때에 크고 작은 봉건 장원들이 서유럽 각지에 가득하였다.
장원의 밭은 두 개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그 한 부분은 봉건 영주가 남겨둔 자기의 경영지로서 마름을 두어 농노들을 감독하여 경작하게 하였으며, 다른 한 부분은 농노들의 가정에다 나누어주어 경작하게 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밭들은 좁고 긴 뙈기를 이루면서 서로 끼어 있었다.
장원내의 농노들은 매주일에 반드시 2, 3일 또는 더 많은 시간을 테내어 봉건 영주를 위하여 자기의 도구를 가지고 가서 무보수 농업 노동을 하여야만 하였다. 그들은 봉건영주를 위하여 나무를 채벌하고, 성을 쌓고, 다리를 놓고, 길을 닦고, 밀가루를 내고, 술을 빚거나 기타 여러 노역에 종사해야만 하였다. 그들은 또 자기의 몫으로 받은 땅에서 나는 일부 생산물과 자기 집에서 생산한 가금, 가금알, 물고기, 술, 배 등을 봉건영주에게 바쳐야 하였다.
농노들은 장원의 수력 방아, 기름짜는 기구, 빵굽는 가마 같은 것을 사용해도 세금을 내야 하였으며, 농노들은 결혼하거나 유산을 계승하거나 배를 타고 강을 건너거나 다리를 건너다니거나 하여도 모두 세금을 바쳐야 했다. 이밖에 농노들은 또 수확물의 약 10분의 1을 교회에 바치었는데, 이것을 ≪10분의 1세≫라고 불렀다. 명목이 잡다한 봉건적 조세와 부역에 의하여 봉건 영주들은 살쪘지만 농노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봉건 영주들의 주택 부근에는 무기, 농구, 말안장을 만들거나 천을 짜는 등의 여러 가지 작업장들이 있었고 거기에서 농노들이 일하였다.
장원에서 쓰는 물건은 식량으로부터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두장원에서 생산하였다. 장원에서 생산할 수 없는 소금, 철 등 필수품과 비단, 보석 등 사치품만을 외래 상인에게서 샀다. 장원에서 생산한 물품도 아주 적게 외부에 팔렸다. 이와 같이 자급 자족하며 상품 교환을 적게 하는 경제를 자연 경제라고 한다. 대봉건 영주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늘 이 장원에서 저 장원으로 놀러 돌아다니면서 먹고 마시며 향락을 누렸다.
농노들은 봉건 영주를 몹시 저주하였고 자주 도망쳤으며, 심지어는 무장 대오를 조직해 가지고 반항하였다. 농노와 봉건 영주간의 모순은 봉건 사회의 주요 모순이었다.





기독교회
교회는 대봉건 영주로서 서유럽에서 대략 3분의 1의 토지를 차지하였다. 교회는 영지의 농노들을 직접 착취하고 또 전체 주민들에게서 10분의 1세를 징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온갖 수단을 다하여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빼앗아 들였다. 교회에서도 교회내의 계층 제도를 세웠다.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자가 로마 교황이고, 그 아래에 대주교, 주교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기 자기의 관할 구역이 있었으며, 마을에도 교회당을 세우고 성직자를 두어 인민을 통치하게 하였다. 당시는 대다수사람들이 글을 몰랐고 승려들이 문화 지식을 독점하고 있었다. 승려들은 성서를 읽으며 신학(神學)의 도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미신 사상을 전파하고 순종, 복종할 것을 선전함으로써 인민들의 투지를 마비시켰다. 교회는 신학에 부합되지 않는 모든 사상을 엄금하였으며 이런 사상을 선전하는 사람을 화형에 처하였다. 이렇게 국왕은 세속적인 권력을 이용하고 교회는 정신적 권력을 이용하면서 양자가 서로 결탁하고 지지하며 공동으로 봉건 제도를 수호하였다.
교회 내부에도 모순이 있었다. 기독교가 흥성한 후 얼마 안 가서 동서두 개 파로 점차 분화되었다. 로마제국이 분열됨에 따라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서부교회와 동부교회의 중심지로 각기 발전하였다. 쌍방의 수뇌인물들은 세력 범위와 최고 통치권을 쟁탈하기 위하여 서로 싸웠다. 1054년에 쌍방은 정식으로 분열되어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부교회를 천주교라 하였고,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부교회를 정교, 또는 그리이스정교라고 하였다.





서유럽 주요 봉건 국가의 형성
군사적 정복에 의거하여 건립된 칼제국은 공고하지 못하였다. 봉건 할거 세력이 늘어남에 따라 칼제국은 신속히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칼대제의 세 손자들은 황제의 자리를 쟁탈하기 위하여 상호 전쟁을 하였다. 873년에 세 손자는 베르덩에서 조약을 체결하고 제국을 3분하여 각기 한 부분씩 차지하였다. 이것이 바로 후일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3국의 추형이었다. 서쪽 부분은 프랑스로 발전하고, 동쪽 부분은 독일로 발전하고 중간의 길게 뻗은 지대의 남부는 이탈리아로 발전하였다.
10세기 중엽에 독일 국왕 오토 1세(975년~973년 재위)가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북부 지구를 점령하였다. 그는 또 로마에 들어가 법왕을 도와 법왕을 반대하는 귀족들을 물리쳤다. 843년에 법왕은 로마에서 오토의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일부가 포괄된 제국을 역사에서 ≪신성로마제국≫이라고 한다. 신성로마제국은 오랫동안 봉건할거 상태에 처하였고 황제는 빈 이름뿐이었다.
게르만인들이 앞을 다투어 서로마제국에 진입할 때, 즉5세기 중엽으로부터 그들 가운데의 앵글로, 색슨 등의 종족들은 유럽 대륙으로부터 브리튼섬에 침입하였다.(기원 1세기 중엽부터 기원 5세기 초엽까지의 기간에 로마는 브리튼의 남부와 중부를 점령하였다. 브리튼에 침입한 앵글로인과 색슨인을 합칭하여 앵글로-색슨인이라고 한다. ) 대략 1세기 반의 기간을 거쳐 그들은 브리튼의 남부와 중부를 정복하고 작은 왕국들을 건립하였다. 유럽 대륙의 정형과 마찬가지로 정복 투쟁 중에서 그들의 씨족 제도는 해체되고 봉건 제도가 점차 건립되었다. 각국이 서로 끊임없이 싸우고 겸병한 결과 9세기 초엽에 통일된 잉글랜드왕국이 형성되었다.





도시의 재흥성
서유럽 봉건 사회 초기에는 각각의 봉건 장원들이 바로 하나의 폐쇄된 경제 단위로서 상업 활동이 매우 적었고 상공업을 중심으로 한 도시는 없었다. 그리고 로마시대의 도시도 그 대부분이 몰락하였다.
농노들은 장기간 부지런히 노동하여 서유럽의 농업 생산을 추진시켰다. 10~11세기에는 이미 쇠보습을 광범히 사용하여 밭을 깊게 갈았고, 경작방법에서 2포제나 3포제(2포제란 경작지와 휴경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윤번으로 경작하는 것이며, 3포제란 밭을 춘기 파종지, 추기 파종지, 휴경지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윤번으로 경작하는 것이다.)를 실시하였으며, 적지 않은 황무지와 삼림들이 개간 이용되었다. 그리하여 경작지 면적이 확대되고, 곡물과 원예 작물의 생산량이 높아졌다. 농촌의 주민들은 일부 잉여농산물이 있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수공업 제품을 교환할 수 있었다. 농산물이 증가됨에 따라 일부 사람들이 농업에서 분리될 수 있었다. 장원에서 일부 농노들은 전문적으로 수공업에 종사하기 시작하여 숙련된 철공, 목공, 무기 제작공, 모방직공들로 되었다. 최초에 그들의 신분은 여전히 농노였다. 그들은 생산품으로 봉건 영주에게 조세를 바쳐야 했다. 후에 와서 그들은 외래의 주문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주문이 많아짐에 따라 그들은 갈수록 봉건 영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경영하는 소상품 생산자로 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 가운데서 일부 사람들은 장원에서 도망쳐 성채, 또는 교회당 부근, 나루터나 또는 교통이 편리한 곳에 모여 살면서 생산을 진행하였다. 이런 치역이 장터로 되었으며 점차 상공업 도시로 발전하였다.
11세기에 도시는 유럽 각지에 분포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제노바, 플로렌스, 프랑스의 빠리, 영국의 런던 등은 모두 이름난 도시였다. 당시의 도시는 규모가 크지 않아 인구가 일반적으로 몇천 명에 불과하였다. 14세기에 런던은 4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를 놓고보면 아주 큰 도시였다.
도시 수공업자들은 자기 도구를 가지고 제작소를 꾸리었는데, 그들을 장인라고 불렀다. 장인 밑에 보통 몇 명의 도제와 직인이 있었고, 그들은 장인을 도와 일하였다. 도제들은 기술을 배우는 한편, 일부 가사 노동도하였다. 도제는 학습 기한이 차면 직인이 되었고, 또 장인을 위하여 일정한 기간을 보조공으로 있다가 시험을 거쳐서야 자기 제작소를 꾸릴 수 있었다.
각기 다른 업종의 수공업자들은 각기 다른 동업 조합을 조직하여 본업종에 대한 관리 기구를 만들었다. 동업 조합은 작업소의 노동자수, 원료 분배, 제품의 규격과 가격에 대하여 엄격한 규정을 짓고 위반하지 못하게 하였다.
최초에 도시 수공업자들은 자기가 만든 제품을 스스로 팔았다. 후에 도시에 상인이 나타났다. 상공업의 발전에 따라 도시 내부에서 빈부의분화가 생겼다. 상인들은 왕왕 투기를 하거나 돈을 교환하고 부쳐주고 저금하고 고리대금을 놓는 것을 통하여 돈을 벌었다. 이런 돈장사꾼들 가운데서 차차 은행가가 나타났다. 그리고 도시에서 또 집세놀이와 땅세놀이를 전업으로 하는 자들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오로지 착취에 의거하여 사는 자들로서 도시의 귀족이 되었다.





봉건 영주를 반대한 도시 주민들의 투쟁 및 도시 내부의 계급 투쟁
봉건사회의 도시는 봉건 영주의 영지나 교회의 영지에 일어선 것이므로 봉건영주가 도시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도시를 자기의 가외 재산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마음대로 도시 주민에게서 세금을 받았고 그들에게 부역을 시켰으며, 심지어는 공개적으로 약탈하기까지 하였다. 도시가 발달할수록 모순은 더욱 첨예하여졌다. 그리하여 도시 주민들은 봉건영주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프랑스 북부에 란이라는 도시가 있었다. 이 도시는 탐욕스러운 주교가 통치하고 있었다. 12세기 초엽에 란의 인민들은 많은 금액을 내고 주교에게서 자치권을 사서 자치 기구인 꼼뮨을 건립하였다. 이 주교는 얼마안 가서 그 돈을 다 써버리고 또 수탈하려고 란의 자치권을 취소하였다. 란의 인민들은 시위 행진을 단행하여 ≪꼼뮨! 꼼뮨! ≫하고 높이 외치면서 주교의 집에 쳐들어가 주교를 죽이고 그 시체를 거리에 내버렸다. 프랑스 국왕과 란 부근의 봉건 영주들은 군대를 란에 파견하여 살인과 약탈을 감행하고 이 도시에서 봉건 통치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란의 인민들은 십몇 년간의 투쟁을 지속하여 끝내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적지 않은 도시들이 투쟁을 거쳐 자치의 꼼뮨을 건립하였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제노바, 플로렌스 등의 도시들은 교외의 농촌까지 통제하는 독립적인 도시 공화국으로 되었다. 그리고 유럽의 일부 도시들에서는 또 수매의 방식으로 자치권을 얻었다.
인민 군중들의 투쟁에 의하여 도시는 자치권을 얻었다. 그러나 승리한 후 도시 귀족들이 재력을 이용하여 도시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수공업자와 근로 인민들에게서 가중한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수공업자들은 동업 조합을 투쟁 조직으로 삼아 가지고 일어나 도시 정권을 탈취하였다. 13~15세기에 동업 조합 투쟁의 물결은 서유럽 각지의 도시들을 휩쓸었다. 수공업이 발달한 어떤 도시들에서는 투쟁에서 승리하였다. 1293년에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의 동업 조합은 정권을 탈취하고, 각 동업 조합에 파견한 대표로 시의회를 조직하고 도시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동업 조합의 수공업자들도 끊임없이 분화되어, 소수가 부유해지고 다수가 날로 빈궁해졌다. 장인들은 각종 규정을 제정해 가지고 도제와 직인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였다. 그들은 마음대로 도제의 학습 연한을 연장하고 직인의 임금을 깎았으며, 갖은 수단을 다하여 직인들의 독립적 생산을 방해하였다. 일반적인 직인과 도제들은 장기적인 고용 노동자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직인들은 자체로 조직되어 일어나 ≪형제회≫ 또는 ≪친선회≫를 결성해 가지고 상호 협조하면서 임금 인상과 노동 시간 단축을 위하여 공동으로 투쟁하였다. 그들은 자주 파업하여 장인들의 착취와 압박에 반항하였다.
자치를 쟁취하고 봉건 영주를 반대하는 도시 주민들의 투쟁, 도시귀족을 반대한 수공업자들의 투쟁, 장인을 반대한 직인과 도제들의 투쟁은 도시의 발전 역사에 관통되고 있다.
도시의 흥성과 상업의 발전은 농촌의 자연 경제를 타격하였다. 봉건영주들은 수공업 제품과 외래의 사치품을 사기 위하여 절박하게 돈을 필요로 하였다. 그들은 농노들에게 부역에 나가거나 현물로 지대를 바치는 대신에 돈으로 지대를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또 농노들에게 많은 금액을 바치고 인격적 자유를 구매할 것을 요구하였다. 돈을 얻으려면 농민들은 먼저 농산물을 팔아야 하였기 때문에, 상인들의 중간 착취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소수의 부유한 농민들은 식량을 저장하였다가 값이 오른 후에 팔아서 부농으로 되었다. 대다수의 농민들은 할 수 없이 식량을 낮은 값으로 팔거나 심지어 고리대금업자의 빛까지 져야하였다. 그런데다가 봉건 지배 계급들은 부단히 지대를 높이고 세금을 올렸다. 농민들의 빈부의 분화는 끊임없이 심해졌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클로비스로부터 칼대제(칼만)통치 시기까지 프랑크의 토지 소유 제도에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가?
2. 서유럽 봉건 제도는 어느 때에 확립되기 시작하였는가? 봉건 장원을 예로들어 서유럽 초기 봉건 사회의 계급 관계와 경제 정황을 설명해 보자.
3. 유럽 봉건 사회의 도시는 어떻게 재흥성하였으며, 도시에서는 무엇 때문에 봉건 영주와 투쟁하였는가, 후에 도시 내부에는 어떤 모순과 투쟁이 존재하였는지에 대해 토론해 보자.






제2절 영국 - 프랑스 백년 전쟁과 농민 봉기

백년 전쟁의 시작
칼만제국에서 갈라져 나와 형성된 프랑스도 오랜동안 봉건 할거 상태에 처하여 있었기에 국왕의 권력은 아주 약했다. 1066년에 프랑스의 대봉건 영주 노르만디 공작은 영국을 정복하고 영국의 국왕으로 되었다. 동시에 그는 프랑스왕의 신하의 신분으로 계속 노르만디를 차지하였다. 그의 후손들이 프랑스 봉건 귀족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 영지를 전 프랑스 서부에까지 확충하였다. 이런 국세는 프랑스의 발전에 불리하였다.
프랑스 국왕은 봉건 세력을 타격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13세기 초엽부터 프랑스에서의 영국 국왕의 영지를 속속 수복하였다. 14세기 초엽에 이르러서도 영국 국왕은 프랑스 서남 연해에 있는 한 지방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 국왕은 영국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려고 시도하였지만, 영국국왕은 유럽 대륙에서 물러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한때 점유하고 있던 광대한 지반을 회복하려 하였다. 프랑스 북부의 플랑드르(플랑드르는 당시 한 백작의 관할구였다. 오늘의 벨기에, 프랑스와 네덜란드 경내에 들어 있다.)가 특히 두 나라의 쟁탈목표로 되었다. 플랑드르는 모방직업이 매우 발달하였는데, 양모는 주로 영국에서 가져왔다. 프랑스 국왕은 14세기 초엽에 자기의 통치 세력을 플랑드르까지 확대시켰다. 그러나 방직업을 경영하고 있는 플랑드르의 도시들에서는 도리어 영국을 지지하였다. 프랑스에서의 영국 국왕의 영지와 부유한 플랑드르를 쟁탈하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끝내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단속적으로 100여 년간 진행되었으므로 역사에서 이 전쟁을 ≪백년전쟁≫이라고 한다.
1337년에 영국 군대가 프랑스에 침입하였다. 영국 군대는 군사적 우세를 빌어 1346년에 크레시 싸움에서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다. 1356년에 영국 군대는 또 프와티에 회전에서 대승리하여 프랑스 국왕과 많은 프랑스 귀족들을 생포하고, 그후 프랑스에 대하여 많은 배상금을 강요하였다.





프랑스 농민 봉기
프랑스는 전쟁 초기의 실패로 인하여 상공업이 쇠퇴해지고 도시의 직인들이 실업당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장원들이 전쟁에 의하여 훼손되었고 또 쌍방의 군대가 제멋대로 약탈을 감행하였으므로 토지가 황폐화되었다. 게다가 전시에 가렴 잡세가 부단히 늘어나므로 인민 대중들의 강렬한 불만을 자아내었다.
1358년 5월에 파리 북쪽 보베 지방의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전국의 귀족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없애 버리자≫고 높이 외쳤다. 봉기는 신속히 프랑스의 북부를 휩쓸었다. 많은 수공업자들과 도시 빈민들도 앞을 다투어 이 봉기에 참가하였다. 봉기자들은 귀족들을 때려죽이고 봉건적 의무를 적은 문서들을 태워버렸는데 그 기세야말로 대단하였다. 이에 질겁하여 뿔뿔이 도망친 귀족들은 다급히 힘을 집결시켜 가지고 봉기를 탄압하였다. 봉기군의 영도자 기욤 칼은 우수한 조직자였다. 그는 지세가 유리한 고지에다 진지를 구축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강대한 봉기 대오 앞에서 봉기를 탄압하러 온 봉건 영주들은 감히 달려들지 못하였다. 그들은 음모를 꾸며가지고 칼에게 담판할 것을 요구하였다. 칼이 담판하러 가자 그들은 칼을 붙잡아 목에다 칼을 씌웠다. 봉건 영주들은 이 틈을 타서 봉기군에 달려들어 2만여 명의 봉기자들을 학살하고 칼을 혹형에 처하였다. 8월에 이르러서야 봉건 영주들은 피비린 탄압을 정지하였다.





영국 농민 봉기
전쟁 기간에 영국의 가렴 잡세도 줄곧 늘어났다. 1380년의 인두세액은 1377년의 3배로 늘어났다. 관리들이 세금 징수를 독촉하고 탐오, 협잡하는 일들은 사회의 보편적인 기풍으로 되었다. 1381년 5월에 영국 동남부의 농민들이 과중한 납세를 반대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급속히 발전하여 전국 대부분의 지구에 퍼졌다. 농민들은 장원을 짓부시고 식량과 가축들을 빼앗았으며, 여러 가지 봉건적 의무를 적어둔 문서들을 태워 버렸다. 런던 이남과 런던 동북의 두 갈래 봉기대오는 각기 수도를 향해 진군하였다. 런던 남부의 봉기군은 농촌의 미장공인 워트 타일러의 지도 아래 런던으로 진군하였다. 런던의 빈민들은 성문을 열고 그들을 영접하였다. 봉기자들은 인민들이 저주하는 대신들을 처단하고 법원의 문서들을 태워 버린 다음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지배 계급은 질겁하여 어쩔 바를 몰랐으며, 국왕은 하는 수 없이 봉기자들과 담판하였다. 첫 담판에서 농민들은 농노 제도를 폐지할 것과 낮은 화폐 지대를 규정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국왕은 승인한다고 거짓으로 대답하였다. 일부 농민들은 그 거짓말을 믿고 홑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워트 타일러는 빈궁한 농민들을 거느리고 런던에 머물러 있으면서 국왕에게 다시 담판할 것을 강요하고 수락시킨 다음, 교회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나누어 줄 것과 봉건 영주들의 일체 특권을 취소하고 농노 제도를 폐지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국왕은 이미 음모 계책을 다 꾸며 놓고 있었다. 워트 타일러는 담판할 때에 런던 시장의 칼에 찔려 살해당하였다. 이어서 봉건 영주들은 보복을 감행하여 농민들과 봉기에 참가한 도시 빈민들에게 피비린 학살을 가하였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기세 충천하던 농민 대봉기는 비록 파비린 탄압을 당하기는 했지만, 봉건 제도를 유력하게 타격하였고 농민들이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가속화하였다. 14세기 말엽에 이르러 절대다수의 영국 농민들은 인격적 자유를 얻었다. 봉기에 놀란 프랑스 봉건영주들은 장기간 감히 지대 착취를 과중하게 하지 못하였다.





백년 전쟁의 종말
1415년에 영국은 재차 프랑스를 진공하였다. 영국국왕 헨리 5세는 군대를 거느리고 프랑스 서북부에 상륙하였다. 몇 년내에 영국 군대는 마리를 포함한 프랑스 북부를 점령하였다. 1428년에 영국군대는 남방으로 통하는 문호인 오를 레앙을 포위 공격하였다. 북부 인민들은 유격대를 조직하여 가지고 영국 군대에 저항하였다. 동북 변경에 사는 19세 되는 한 농가의 처녀 쟌다르크(1412~1431년)는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려는 결심을 하고 자진하여 앞장에 섰다. 그는 무진 애를 써서야 겨우 남부에서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왕태자를 만나서 한 갈래의 군대를 얻게 되었다. 군복을 입고 전마를 타고 무기를 든 그는 1429년에 군대를 거느리고 오를 레앙으로 출발하였다. 쟌다르크의 대오는 영국 군대의 포위권을 돌파하고 성내로 쳐들어갔다. 쟌다르크의 이러한 영웅적 행동은 프랑스 인민들의 애국 열정의 상징이었다. 도시 주민들은 떨쳐나와서 그들을 환영하였고 군대의 사기는 드높아졌다. 프랑스 군인들은 오를레앙을 포위한 영국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의 기세로 크고 작은 많은 도시들을 수복하였다. 사람들은 쟌다르크를 ≪오를레앙의 소녀≫라고 친절하게 불렀다. 쟌다르크가 계속 전진하여 국토를 전부 해방하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프랑스의 봉건 영주들은 쟌다르크의 영향력에 대하여 도리어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쟌다르크를 해치려고 꾀하였다. 영국 군대를 물리치는 빠리 동북부 전투에서 그들은 고의적으로 쟌다르크의 귀로를 차단하였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쟌다르크는 영국 군대의 손에 들어갔다. 영국 군대는 그를 교회 법정에 넘겨 심판하게 하였다. 법정에서는 쟌다르크가 ≪요술≫을 피웠다고 모함하였다. 1431년에 여성 영웅 쟌다르크는 화형당하였다.
쟌다르크가 희생된 후에도 프랑스의 군민들은 계속 드높은 애국 열정으로 잃었던 땅을 속속 수복하였다. 1435년에 빠리를 수복하였다. 1453년에 전쟁이 끝날 때 프랑스 북부의 칼레항만은 여전히 영국의 수중에 들어 있었다(칼레항은 1558년에 프랑스에서 회수하였다)
백년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국왕과 영국 국왕은 모두 왕권을 끊임없이 강화하고 있었다. 두 나라는 모두 중앙 집권적 국가로 발전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영국-프랑스 백년전쟁의 배경과 경과에 대해 말해 보자.
2. 프랑스 농민 봉기와 영국 농민 봉기의 정황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제5장 아시아의 봉건 국가들






제1절 조선

신라의 조선 통일
조선 인민은 예로부터 조선반도에서 살고 있었다. 기원전 5세기경에 조선에서는 청동기를 사용하였고, 후에 와서 철기를 사용하였다. 조선 인민은 벼를 재배하고,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면서 생산을 끊임없이 발전시켰다.
기원전후에 조선 반도 북부에 고구려 노예제 국가가 건립되었다. 후에 와서 서남부와 동남부에 전후로 백제, 신라 두 노예제 국가가 건립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반도에는 3국이 정립하는 국면이 나타났다. 이 3국은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7세기 중엽에 신라는 중국의 당조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후에 또 당조 군대의 점령하에 있었던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였다. 676년에 신라는 조선반도를 통일하였다.
분열되었던 국면이 종말되면서 조선은 봉건 사회에 들어섰다. 신라의 국왕은 조선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공신들에게 토지를 식읍으로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고, 통일 이후에는 공신, 귀족, 사원에 토지를 상으로 더 나누어 주었다. 원래 이렇게 나누어 준 식읍은 귀족들이 죽으면 되돌리기로 규정하였는데, 귀족들은 이런 식읍을 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도처에서 농민들의 토지를 침점하여 장원을 세웠다. 이리하여 봉건적대토지 소유제는 끊임없이 발전하였다. 통일된 후 신라에서는 농업과수공업이 비교적 크게 발전하였고, 당조 및 일본과의 무역 왕래도 매우 빈번하였다.





고려 왕조와 이조의 건립
9세기에 신라의 지배 계급 내부에서 권력쟁탈전이 벌어지고 부세가 날로 번중하여졌으므로 많은 지방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10세기 초엽에 조선반도에는 다시금 3국 정립의 국면이 나타났다. 이것을 후3국(後三國)이라고 한다. 후고구려의 장군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왕조가 936년에 다시금 조선반도를 통일하였다.
고려 왕조 때 전시과제도(田柴科制度)를 실시하였는데, 국가에서는 전국의 경작지와 산림을 등록하여 그중 대부분은 국가에서 장악하고, 나머지는 문무 관리들과 지방의 토호 및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국가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여러 등급으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경작지와 산림지를 나누어 주었는데, 등급이 높을수록 더욱 많은 경작지와 산림을 가졌다. 공신들과 귀순한 호족들이 따로 가진 세습지만 남겨두고 그외의 토지는 본인이 죽으면 모두 되돌려 주어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국가에서는 기본적으로 토지와 농민을 통제하고 지방 할거 세력을 제한할 수 있게되었다. 고려 왕조는 중앙의 권력을 대대적으로 강화하였다. 따라서 생산도 복구되고 발전하였다. 그러나 토지를 겸병하는 현상은 제지되지 않았으며, 12세기에 이르러서는 매우 심각해졌다. 그리하여 전시과제도는 파괴되고 농민 봉기는 빈번해졌으며 국가는 쇠퇴하여졌다.
1392년에 고려의 대장 이성계는 이조를 건립하고 수도를 서울에 정하였으며, 국호를 조선이라고 고쳤다.





일본 침략자를 반대한 투쟁
16세기에 조선의 정치는 부패하여 지배계급 내부에서는 장기간의 정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들은 서로 물고뜯고 하면서 여러 번 정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국가의 대외적 방비가늦추어지고 국력이 쇠약해져 인민들은 도탄에 빠졌고, 일본 침략자들에게 틈탈 기회를 주었다. 16세기 말엽에 일본에서는 대봉건 영주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1592년에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전쟁을 도발하여 조선을 강점하고 더 나아가서는 중국을 침략하려고 시도하였다. 일본 침략군은 부산에 상륙한 후 서울, 개성, 평안 등 도시를 침점하였으며, 동북쪽으로는 함경도 북부에 침입하여 곳곳에서 살인, 방화와 야만적 파괴를 감행하였다. 조선 인민들은 의병을 조직해 가지고 용감한 항전을 벌여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수군 대장 이순신은 남부에서 수군을 영솔하여 적과 싸웠는데 광범한 인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군중의 지혜를 이용하여 민활하고 재빠른 거북선을 만들었다. 그는 이 거북선으로 연전 연숭하여 적함 300여척을 격침시키고 대량의 적군을 살상함으로써 수륙으로 병진하려는 침략자의 진공 계획을 파탄시켰다.
이때에 조선의 관병들은 이미 점차적으로 정돈되었고, 중국 명조 정부에서는 또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었다. 1598년 초에 조선, 중국 군대는 일본 주력군을 격파하고 평양을 수복한 후 승승 장구로 적을 추격하여 개성을 수복하였다. 일본 침략군은 군수품 공급이 곤란하여 사기가 저하되고 싸움마다 패전하자 한 수 없이 서울에서 철회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국토의 대부분은 광복되고 일본군은 남부 연해 일대로 퇴각하였다.
1597년에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또 군대를 파견하여 수륙 두 길로 진공하게 하였다. 이듬해에 명조에서도 지원군을 더 파견하여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침략에 저항하였다. 조선 군대와 중국 군대는 바다에서 적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얼마 후에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울화병으로 인해 조선에서 철병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어버렸다. 조선, 중국 군대는 용감하게 추격하여 동남해상 전역에서 일거에 적함 450척을 격침시키고 적군 1만5천 명을 섬멸하였다. 이순신과 명조의 70세 되는 장군 등자룡은 이 전역에서 어깨 걷고 싸우다가 최후에 모두 장렬하게 희생되었다. 7년간의 간고한 전쟁을 거쳐 조선 군민은 끝내 일본 침략군을 몰아내고 조국보위 전쟁의 승리를 달성하였다.





중국과 조선의 문화 교류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은 오래전부터 친밀하게 지내면서 끊임없이 문화를 교류하여 왔다. 당조의 서울 장안에는 많은 조선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840년 한 해만 하여도 당조에 와서 공부하고 조선으로 돌아간 사람이 105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중국 사람들도 조선에 가서 살았다. 조선에서는 오랫 동안 한자를 썼고, 많은 학자들이 한문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다. 당조의 시인 백거이의 시는 조선 인민의 사랑을 받았다. 조선 화가 이녕은 송조 때에 중국에 왔는데, 그의 작품은 중국 인민의 높은 찬양을 받았다. 11세기에 중국에서는 진흙 활자 인쇄술을 발명하였는데, 조선 인민은 13세기에 그것을 개량하여 구리 활자를 발명하였다. 후에 와서 중국에서는 나무 활자를 사용하였고, 조선에서는 납 활자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두 나라는 활자인쇄술을 상호 전파하고 상호 추진하면서 공동으로 세계 문화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 두 나라는 끊임없이 의학 지식을 교류하였다. 17세기초엽에 조선에서 출판된 ≪동의보감≫은 오랫 동안 중국과 일본의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중국 인민은 조선의 먹, 붓, 종이와 정밀한 부채를 즐기었다. 질좋은 종이는 서적을 인쇄하고 글을 쓰는 귀중한 재료로 되었고 질긴 종이는 북방 민간에서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중국의 비단, 도자기, 차 등 특산품도 끊임없이 조선으로 수출되었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7세기 이전에 조선 반도에는 어떤 나라들이 출현하였는가? 이 나라들은 후에 어떻게 통일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2 조선과 중국 군대는 어떻게 일본의 조선 침략을 반대하여 공동으로 투쟁하였는지 설명해 보자.






제2절 일본

일본의 통일
일본의 여러 섬들에는 일찍부터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3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일본에서는 이미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벼농사짓는 방법을 받아들이고 또 청동기, 철기 및 금속주조 기술을 받아들여 생산을 발전시켰다. 기원 2세기에 처음으로 노예제국가가 일본에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3세기에 이르러 혼슈 중부에 비교적 강대한 노예제 국가 ≪야마도≫가 흥성하였다. 야마도는 끊임없이 팽창하여 5세기에 와서는 일본을 통일하였다.
야마도의 최고 통치자를 대왕(大王)이라 하였고 후에는 천황(天皇)이라고 하였다. 팽창 과정에서 노예주 귀족들과 조정에서 대량의 토지를 독점하였다. 그들은 정복당한 씨족들을 강제로 농업이나 수공업 생산에 종사하는 부(部), 이를 테면 전부(田部), 용미부(舂米部) 같은 집단으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씨족 성원은 부민(部民)으로 되었는데, 부민들의 지위는 노예와 비슷하여 그들에게는 인격 자유가 없었다. 노예주들은 비록 부민들을 마음대로 죽이지는 못하였지만 남에게 선사할 수는 있었다. 부민들은 약간의 재물과 도구를 소유하고, 씨족 우두머리들의 통일적인 관할 아래에 노동에 종사하였으며, 노예주들에게 공물을 바치고 노역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노예주 계급의 착취와 예속을 당하였다. 당시에 중국과 조선의 적지 않은 근로 인민들이 본국의 계급적 착취와 전란을 피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들도 강박에 못 이겨 금직부(錦織部), 안부(鞍部) 등 수공업 생산에 종사하는 부나 농업 생산에 종사하는 부에 편입되었다. 그들은 비교적 높은 생산 기술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산 분야에서, 특히는 수공업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부민들이 부지런히 노동한 결과 야마도의 노예제 경제는 발전하였다.
3세기로부터 시작하여 노예주 통치 집단은 부민과 근로 인민들을 강제로 부려서 높고 큰 저들의 능묘를 많이 건조하였다. 무덤 속에 함께 매장한 물건으로는 동경(銅鏡), 옥기(玉器), 칼, 검 그리고 낫, 도끼, 호미, 톱 같은 노동 도구가 있었다. 5세기에 건조한 한 능묘는 길이가 480미터이며 그 둘레에는 세 겹으로 큰 도랑을 팠으며, 능묘 안에는 외지에서 운반해 온 석판을 깔았다. 이렇게 큰 능묘를 건조하자면 많은 인력, 물력과 시간이 들어야 했다. 이것은 근로 인민들에 대한 노예주들의 착취가 날로 심화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해 준다.





다이까 개신
7세기에 일본 노예 사회의 각종 모순은 더욱 첨예하여졌다. 천황과 노예주 귀족들이 근로 인민들을 부민으로 만들어 마음대로 부렸기 때문에 인민들의 극히 큰 분노를 자아냈으며, 따라서 계급 모순이 끊임없이 격화되었다. 황실과 노예주 귀족 상호간에 권력과 토지, 부민을 쟁탈하는 투쟁도 매우 치열하였다. 일본 황실과 중국에 유학한 일부 사람들은 중국의 수조와 당조의 제도를 본받아 중앙 집권제를 건립하려고 생각하였다. 645년에 황실의 족속들과 개혁을 요구하는 일부 귀족들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고 고우도꾸를 천황으로 추대하였다. 646년에 고우도꾸 천황은 정치를 개혁하는 문제에 관한 조서를 발포하였다. 고우도꾸 천황의 연호가 다이까(大化)였기 때문에, 이 개혁을 역사에서는 ≪다이까 개신≫이라고 한다. 개혁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토지와 부민에 대한 귀족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토지를 국유로 하며, 부민을 자유민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속하는 ≪공민≫으로 만들었으며, 수조와 당조의 ≪균전제≫를 본받아 ≪반전수수법≫을 실시하여 국가에서 6년에 한 번씩 인구에 따라 토지를 농민에게 나누어 주되, 그 토지를 매매하지 못하게 하고, 죽은 후에는 국가에 돌려주게 하였다. 부세는 당조의 ≪조-용-조(租庸調)≫제를 본받아 농민들에게 반드시 조(粗)의 의무로 벼를 바치게 하고, 용(庸)의 의무로 부역에 복무하게 하거나 부역대신에 천을 바치게 하고, 조(調)의 의무로 지방 토산물을 바치게 하였다. 국가는 또 귀족의 신분과 관직에 따라 그들에게 일부분의 토지를 나누어주었다. 동시에 행정 제도를 개혁하고 중앙 집권제를 실시하였다. ≪다이까 개신≫은 노예주 귀족들의 세력을 타격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노예주 귀족들의 반항을 받았지만, 중앙 집권제는 끝내 건립되었다. 이 ≪다이까개신≫은 일본이 노예 사회로부터 봉건 사회에로 이행한 표징이다.
≪반전수수법≫의 실시는 생산력에 일정한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농민들의 부담은 더욱 과중해져 8세기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농민들이 파사당하였고, 어떤 사람은 도망을 쳤고, 어떤 사람은 귀족의 토지에 얽매인 예속 농민으로 되었다. 그러나 세력 있는 귀족들은 일상적으로 국가에서 상으로 주는 토지를 받았고, 또 파산당한 농민들을 부리어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농민들의 토지를 겸병하여 장원을 세웠다. ≪다이까 개신≫ 이후의 67년 동안에 그들은 12번이나 땅을 나누어 받았다. 그후 귀족들의 사유지가 증가됨에 따라 반전수수법은 갈수록 더욱 파괴되었다. 10세기 중엽에 이르자 장원은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였으며 반전수수법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각지의 장원주들은 자기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사무라이(武士)≫를 길러냈다. 그리하여 일본에는 ≪사무라이≫라는 특수한 계층이 출현하였다. 봉건적 혼전이 빈번하였으므로 지방에는 점차적으로 강대한 사무라이 집단이 형성되었다. 사무라이 집단의 우두머리들은 일상적으로 황실과 귀족들의 내부 투쟁에 참여하였다. 그중 한 우두머리는 12세기말엽에 바꾸후를 건립하였다. 1192년에 그는 조정(당시의 수도는 교도였다)으로부터 징이 대장군(세이 다이쇼군)의 칭호를 받았다. 이로부터 바꾸후의 우두머리를 장군이라고 불렀는데, 실제에서는 그들이 나라의 대권을 틀어쥐고 봉건적 군사 독재를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천황은 괴뢰로 되었다. 이때로부터 일본은 600여 년간에 걸친 바꾸후 정치 시기에 들어섰다.





중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
중국과 일본 두 나라 인민들은 예로부터 친밀하게 내왕하였다. 7세기부터 9세기 말엽까지의 기간에 일본은 전후로 13차례나 ≪견당사(遣唐使)≫를 중국에 보내왔는데 어떤 때에는 그 사절단의 수가 500여 명에 달하였다.
수많은 유학생과 중들도 그들을 따라왔는데 어떤 사람은 중국에 장기간 체류하였다. 가장 저명한 사람들로는 아베 나까마로, 기비노 마끼비와 고승 구우까이 등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의 제도, 법령, 문화 기술을 일본에 전파하였다. 일본 문자 가다가나와 히라가나는 한자를 이용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중국 사람들도 끊임없이 일본에 갔다. 60이 넘은 중 감진은 두 눈을 실명당하고도 일본에 건너가서 불교의 경전과 불교와 관계가 있는 건축 설계, 조각 예술, 의학 지식들을 전파하였다. 중국의 문학, 서법, 미술, 공예는 일본에서 한때 유행되었다. 적지 않은 일본사람들은 중국시를 아주 잘 썼다. 인민들 사이의 이런 친밀한 내왕은 두 나라의 문화 교류에 대하여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일본 다이까 개신의 배경과 주요 내용과 그의 영향을 논해 보자.
2. 중국과 일본 두 나라 인민들의 역사상에서의 친밀한 내왕과 문화 교류에 대하여 논해 보자.






제3절 아랍 국가

6, 7세기 아랍의 사회 정황
아라비아 반도는 대부분이 초원과 사막으로서 기후가 건조하다. 반도의 대부분 지역에서 아랍 종족들은 장기간유목 생활을 하였다.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은 낙타와 산양을 방목하였다. 반도 남단의 예멘으로부터 홍해의 동안을 따라 북쪽으로 한 갈래의 중요한 통상 도로가 뻗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동방과 서방을 연계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중국의 비단, 인도의 향료, 아프리카의 황금과 노예 등이 해상으로부터 예멘에 운반되어 와서는 이곳에서 다시 낙타대에 의하여 이 통상 도로를 따라 지중해 지역에 운반되었다.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의 야자대추, 건포도, 가죽 등 생산품도 이 통상도로를 따라 외지로 운반되어 갔다. 이 통상 도로를 따라 도시가 들어섰는데, 그중 가장 이름난 것이 메타와 메디나였다.
6세기 말엽~7세기 초엽에 아랍의 씨족 제도는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씨족 귀족들은 비옥한 목장과 오아시스를 독점하였다 그들은 가축떼를 점유하고 대량의 노예를 사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유목민과 농민들을 착취하였다. 통상 도로의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던 메카는 계급분화가 더욱 첨예하였다.
메카성내에 있는 한 사원에 검은 운석 하나가 섬돌로 놓여 있었다. 아랍인들은 이 운석을 신기한 물건으로 생각하고, 해마다 겨울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예배를 하였으며 동시에 사원 주위에서 장을 보았다. 아랍인들은 이곳에 가축을 몰고 와서 천, 무기, 수공업품들과 교환하였다. 메카의 귀속들은 이렇게 장을 보는 가운데서 많은 이윤을 얻었다. 그들은 상업을 경영하고 노예 장사를 하였으며, 또 해마다 몇번씩 통상대를 조직해 가지고 지중해 동안에 가서 장사를 하여 맡은 돈을 벌었다. 그들은 긁어모은 돈으로 고리대금을 놓았는데, 그 이자는 흔히 100%였다. 아랍의 광범한 수공업자, 유목민과 농민들은 귀족의 노역과 고리대 착취로 하여 갈수록 가난해져 속속 파산하였다. 빈궁한 근로 인민들과 귀족들간의 모순은 날로 첨예하여졌다. 빈궁한 근로 인민들은 거듭 봉기를 일으켜 귀족들의 장막을 불태우고 강점당한 가축을 도로 빼앗아 왔으며 심지어 귀족을 죽여 버렸다. 근로 인민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며 새로운 토지와 재부를 약탈하기 유하여 아랍 귀족들은 여러 종족을 통일하여 강력한 정권을 건립할 것을 희망하였다. 7세기에 흥성한 이슬람교는 바로 이런 요구의 반영이었다.





이슬람교의 발생과 아랍 국가의 통일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570~632년)는 메카의 한 몰락 귀족 가정의 출신인데, 일찍 통상대를 따라 지중해 동안의 일부 지방에 간 적이 있었다. 7세기 초엽에 그는 메카에서 교를 선전하였다. 그는 우주에는 알라라는 ≪주(主)≫ 하나만 있고 다른 신이란 없다고 설교하면서 여러 종족의 사람들에게 자기 종족의 신을 믿지 말고 ≪주≫(≪이슬람≫이란 아랍어로 ≪순종≫이라는 뜻이다. 이슬람교도를 무슬린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주≫ 알라를 신앙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를 신앙하고 그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여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마호메트는 자기를 ≪주≫의 사자이며 신도의 선각자라고 하면서 모든 이슬람교도는 종족, 씨족을 불문하고 모두 형제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은 아랍의 통일에 유리하였다. 그는 군중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고리대금을 제한하고 빈민을 구제할 것을 주장하였다. 후에 그의 설교를 수집하여 기록한 것이 바로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경≫이다.
하나의 신만 믿어야 한다는 이슬람교의 설교는 메카 귀족들의 반대를 받았다. 그들은 이슬람교도가 신전의 운석에 대한 아랍인들의 예배에 영향을 주고 저들의 정치 권력과 장을 보는 데서 얻는 경제 이익에 손해를 줄까봐 두려워 백방으로 이슬람교도들을 박해하였다. 622년에(후에 이슬람교도들은 이 해를 이슬람교의 기원으로 삼았다.) 마호메트는 소수의 신도를 거느리고 메디나로 갔다. 메디나 사람들은 메카 귀족의 고리대착취를 저주하였기에 수많은 농민들과 수공업자들이 이슬람교를 믿게되었다. 마호메트는 메디나에서 정치와 종교를 합치시킨 국가를 건립하고 당지의 무장력을 이용하여 주위의 지구를 정복한 다음, 메카 통상대를 습격하였다. 630년에 마호메트 군대가 메카성에 이르자 결국 쌍방은 협의를 달성하게 되었다. 메카 귀족들은 이슬람교를 인정하고, 마호메트가 정치와 종교의 수장이라는 것을 승인하였으며, 마호메트도 메카 사원에 있는 운석이 이슬람교의 성물(聖物)이라는 것을 승인하고 메카 사원을 청진사라고 이름을 고쳤다. 이리하여 메카 귀족들의 종교와 경제적 이익이 제한되었다.
이슬람교가 급속히 전파됨과 동시에 아랍의 여러 종족들이 급속히 통일되었다. 632년에 마호메트가 죽을 때에 아라비아 반도는 이미 거의 다 통일되었다.
마호메트가 죽은 후에 그의 계승자를 ≪칼리프≫라고 하였다. ≪칼리프≫는 전국의 종교, 정치와 군사의 최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아랍 칼리프 국가는 급속히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아랍제국
아랍의 지배 계급들은 이슬람교를 이용하여 약탈 전쟁을 일으키고 신도들에게 일치 단결하여 대외로 ≪성전(聖戰)≫을 진행할 것을 호소하였다. 100여 년간에 아랍군은 지중해 동부 지구, 페르시아(고대페르시아제국은 기원전 4세기에 마케도니아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기원전 3세기중엽에 지금 이란의 동북부 일대에서 빠르찌아왕국이 일어났다. 대략 100년동안에 빠르찌아는 이란 고원으로부터 양강 유역까지 팽창되었다. 기원 226년에 사산 왕조의 통치 하에 있었던 페르시아가 여기에서 빠르찌아의 뒤를 이어 일어났다.),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그후 계속 팽창하여 서쪽으로는 아프리카북부를 따라 대서양 연안까지 진격하였고, 거기에서 해협을 건너 에스파니아를 점령하였으며, 동쪽으로는 자깝까즈와 중앙아시아를 점령하였는데, 그 남쪽 끝은 인더스강 동쪽까지 팽창하고 그 북쪽끝은 중국 당조의 변경과 인접하였다. 8세기 중엽에 아랍국가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3대륙을 가로지르는 대제국으로 되었다. 이 아랍제국을 중국 역사책에서는 ≪대식(大食)≫이라고 하였다. 이슬람교도 역시 아랍인들의 정복지를 따라 부단히 전파되었다.
광활한 정복 지역에서 아랍 칼리프는 국가의 명의로 많은 토지를 차지하였으며, 또한 토지를 아랍 귀족들과 이슬람교 사원들에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당지의 봉건적 착취 제도를 답습하여 농민을 부려 농사를 지었다. 지대는 그 수확고의 3분의 1 내지 3분의 2에 달하였다. 농민들이 지대를 바치지 않거나 도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봉건 영주들은 농민들의 목에다 주소를 밝힌 연패쪽을 걸었다.
아랍제국에서는 또 전쟁에서 포로한 수많은 노예들과 아프리카에서 붙잡아 온 흑인 노예들이 있었다. 이들은 농사를 짓거나 광석을 채굴하거나 양강 유역의 바다 어구에서 농토를 개발하는 등 가장 힘든 노동을 하였다.
8세기 중엽으로부터 약 100년 동안은 아랍제국이 가장 번영하고 강성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아람제국은 대외 팽창을 중지하였으므로 국면이 비교적 안정되었고 경제가 발전하였다 농민과 노예들은 피땀을 흘리면서 많은 재부를 창조하였다 나일강 유역과 양강 유역 등지는 관개 시설이 잘 되어 토지가 비옥하고 산물이 풍부한 곡창으로 되었다. 수공업도 매우  발달하였다. 견직물, 유리 제품, 보석 제품과 자수 제품 등 정교한양질의 공예품들이 외국에 수출되었다. 아랍 상인들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을 내왕하면서 각 지방의 산물 교류를 추진하였다. 중국의 광주, 천주, 양주, 장안 등의 지방에는 많은 아랍 상인들이 살고 있었다. 경제의 번영은 칼리프로 하여금 방대한 재부를 축적하게 하였다. 제국의 건립 초기에 칼리프는 디쥘라강 연안에서 새로운 수도 바그다드를 건설하였다. 도시의 중앙에는 화려한 칼리프 황궁이 우뚝 서 있었다. 화려한 휘장을 드리우고 진귀한 양탄자를 간 대청과 금은 보화가 가득차 있는 궁전에서 지배 계급들은 부화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바그다드는 동서 교통의 요로에 자리잡고 있어 수륙 교통 운송이 매우 편리하였다. 바그다드는 상선이 집결되고 무역이 발달한 대도시로 신속히 발전하였다. 도시에는․또 중국의 물건을 전문적으로 내놓고 파는 시장이 있었다.





아랍제국의 분열
아랍제국의 통일된 국면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아랍제국의 건립 초기에 아랍 귀족의 지배를 받던 에스파니아가 756년에 독립을 선포하고, 929년에는 칼리프 국가라고 선포하였으며, 수도를 코르도바에 정하였다. 제국의 기타 지구에서도 바그다드 칼리프의 통치는 이러저러한 모순에 봉착하였다 아랍제국은 비록 한때 번영하고 강성하였지만, 근로 인민들은 무거운 가렴잡세와 노역의 부담으로 하여 매우 빈궁하게 생활하였다. 그리하여 제국경내에서는 늘 인민 봉기가 일어났다. 9세기에 일어난 몇 차례의 봉기는 규모가 매우 컸다. 869년으로부터 883년 사이에 양강 유역 동남부에서 토지를 개간하던 혹인 노예들은 노역과 기아에 시달리다 못하여 대봉기를 일으켰다. 도망친 수많은 노예, 농민과 혹인 병사들이 봉기에 참가하여 그 대오는 20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양강 유역의 하류를 통제하고 수도에까지 접근하였으므로 아랍제국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각 지방의 봉건 영주들의 세력이 점차로 늘어났고, 따라서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그들의 요구도 점차로 높아갔다. 8세기 말엽부터 9세기까지의 사이에, 많은 지방들에서 독립한 봉건 정권이 나타났다. 909년에 튀니지에 신왕조가 건립되었는데, 그 통치자를 역시 칼리프라고 불렀다. 칼리프는 969년에 이집트를 점령하고 얼마 안 가서 수도를 카이로로 옮겼다. 그후 칼리프는 계속 지중해 동안과 홍해 동안 일대를 정복하고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의 강국으로 되었다. 이리하여 원래 아랍제국의 판도내에는 일부 봉건 할거 세력을 제외하고 3개 칼리프 국가가 나타났다.
중국 역사책에서는 바그다드 칼리프 국가를 혹의대식이라하고, 카이로 칼리프 국가를 녹의대식이라 하고, 코르도바칼리프 국가를 백의대식이라고 하였다. 이때에 바그다드 칼리프의 관할 범위는 크게 축소되었다. la58년에 바그다드 칼리프 국가는 서쪽으로 쳐들어온 몽고 군대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아랍문화
아랍제국의 여러 지방은 고대 문화가 발달한 지구였다. 아랍 인민들은 경내 각 민족 인민들의 문화를 섭취하면서 호 여러 민족인민들과 공동으로 문화를 발전시켰다. 아랍 상인들은 먼 바다를 항해하면서 동방과 서방간의 문화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랍제국에는 많은 도서관과 학교가 있었다. 어떤 것은 국가에서 세운것이고, 어떤 것은 청진사에서 부설한 것이었다. 어떤 도서관의 장서는 몇십만 권에 달하였다. 바그다드, 카이로, 코르도바 등의 도시들에는 모두 대학이 있었다. 코르도바 대학은 널리 이름난 대학으로서 유럽,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많은 학생들이 이곳에 와서 공부하였다. 아랍인들은 그리이스의 많은 저작들을 번역하였다. 당시 서유럽은 장기적인 동란을 거친 후여서 고대 문화가 심하게 파괴당하였다. 후에 아랍문으로 번역된 이런 책들이 서유럽에 들어가는 바람에 서유럽의 사람들은 고대학자들의 빛나는 성과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랍 학자들은 많은 나라들의 과학 성과를 열심히 연구하고, 그 기초에서 새로운 성과를 달성하였다. 천문학 방면에서 그들은 천체를 관측하는 비교적 정밀한 계기를 제조해 냈으며, 일부 대도시들이 천문대를 세우고 천체의 현상을 관측하면서 풍부한 자료를 축적하였다. 의학 방면에 있어서 바그다드병원 원장 라치스(855~575년)는 유명한 임상 의사였탈 그는 ≪천연두와 홍역≫, ≪의학전≫ 등 중요한 저작을 써냈다. 저명한 의학자 아비젠나(980~1037년)의 저작 ≪의전(醫典)≫에는 아주 많은 종류의 질병에 대해 해명되어있고, 760여 종의 약물이 기재되어 있어 오랫 동안 유럽 의학계의 권위로 받들리었다. 수학 방면에 있어서 아랍인들은 인도의 10개 숫자로 수를 적는 방법을 도입해 가지고 그것을 유럽에 전하였다. 이를 ≪아라비아숫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또 삼각학의 사인, 코사인, 탄젠트의 개념을 확정함으로써 완벽한 대수학을 창시하였다. 문학 방면에 있어서 아랍인의 저명한 작품 ≪아라비안 나이트≫는 여러 민족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민간 이야기를 수집하여 12세기에 책으로 편찬한 것이다.
아랍 인민과 중국 인민은 광범위하게 문화를 교류하였다. 중국에 온 아랍 상인들은 천문학과 의학 방면의 지식을 중국에 전파하였고, 이슬람교를 중국에 전파하였다. 아랍 칼리프는 중국 당조와 송조에 여러 번 사절을 보내왔으며, 중국의 장인들도 일찍 아랍제국으로 갔다. 중국 인민이 발명한 나침반, 제지술, 인쇄술, 화약과 화약 무기는 모두 아랍인들을 통하여 서방에 전파되었다. 나침반은 아랍과 서방의 항해사업의 발전에 중요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제지술과 인쇄술은 아랍과 서방 국가들이 문화를 발전, 전파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아랍인들은 중국에서 화약을 제조하는 데 쓰는 주요 성분인 초석을 ≪중국눈≫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을 의료 방면과 금, 은의 제련 등의 방면에 사용하였다. 중국의 수학, 화학, 의학 등 지식도 아랍인들을 거쳐 서방에 전파되었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이슬람교의 흥성과 아랍 국가의 통일 경과를 논해 보자.
2. 아랍 국가는 어떻게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는가? 아랍 제국이 가장 강성하던 시기는 어느 때인가?
3. 아랍 국가와 중국의 친선적 왕래에 대하여 말하라.
4. 문화면에서 아랍인들이 이룩한 공헌에 대하여 논해 보자.






제4절 오스만 터어키제국

오스만 터어키의 흥성
6세기 전후에 중앙아시아에는 돌궐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 1000년을 전후하여 부분적인 돌귈인들이 이란 고원을 지나 점차 소아시아 일대에 들어갔다. 13세기에 그리 크지 않은 한 돌궐종족이 소아시아에서 서북쪽에 가까운 한 곳에 거주하였다. 이때에 그들은 이미 이슬람교를 신봉하였다.
13세기 말엽에 이 종족의 족장 오스만이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여 나라를 세웠다. 이 국가를 그의 이름을 따라 오스만 터어키라고 하였고, 이 종족도 그의 이름을 따라서 오스만 터어키인이라고 하였다. (터어키는 돌귈을 음역한 별칭이다. 오스만 터어키인을 오스만 돌귈인이라고도 한다.)
오스만 터어키는 군사 채읍 제도를 실시하였다. 나라에서는 병역에 봉사하는 것을 조건으로 봉건 귀족들에게 토지를 분봉하였다. 봉건 귀족들은 세습 봉지내의 농민과 목축민들에게서 세금을 받아들였다. 군사봉건 귀족들은 약탈에 의거하여 재부의 원천을 확대하였다. 그들은 늘 전쟁을 일으켜 새로운 땅과 전리품을 탈취하였다. 오스만 터어키 국가는 매우 빨리 대외 팽창의 길에 들어섰다. 몇십 년 동안에 오스만 터어키는 소아시아 반도의 기타 돌궐인들을 끊임없이 자기의 통치 아래 귀속시키고, 또 소아시아 반도에 있는 동로마의 나머지 영토를 침점하였다. 그 다음에는 침략의 목표를 바다 건너 동로마제국에 돌렸다.





동로마제국의 쇠퇴
서로마제국이 멸망된 후에도 동로마제국은 계속남아 있었다. 동로마제국에는 발칸 반도, 소아시아, 양강 유역 상류, 지중해 동해안, 북아프리카 동부 등지가 포괄되었다. 동로마에서는 주로 농업 생산에 종사하는 콜로누스에 의거하였다. 또 상당히 많은 자유농민들이 보존되었고, 노예 노동은 보편화되지 않았다. 때문에 동로마에서는 서로마제국이 후기에 겪은 그런 노예제 위기가 나타나지 않았다. 동로마는 국가가 비교적 안정되었고, 상공업이 매우 발달하였으며, 경제가 번영하여 당시 유럽에서 문화가 발달한 지역으로 되었다. 봉건 제도는 7세기로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11세기 말엽에 이르러 동로마는 이미 봉건 사회로 이행하였다. 7세기로부터 동로마의 영토는 부단히 축소되었다. 아랍인들은 지중해 동해안과 북아프리카를 점령하였고, 후에 돌궐인들은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오스만 터어키인들이 또 소아시아에서 동로마를 몰아내었다. 12세기에 원래 동로마제국의 땅이었던 발칸 반도 북부에서는 불가리아가 흥성하였고, 서북부에서는 세르비아 국가가 홍성하였는데, 이들도 늘 발칸 반도에서 팽창 정책을 썼다. 14세기에 와서 동로마는 발칸 반도의 일부분과 에게해 북부의 일부 섬들만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배 계급 내부의 분쟁과 농민 봉기로하여 타격을 받은 동로마제국은, 나라가 사분 오열되었고 경제가 쇠퇴하여졌다. 오스만 터어키가 흥성하고 있을 때 동로마제국은 이미 쇠퇴해졌다.





오스만 터어키의 대외 팽창
14세기 중엽에 오스만 터어키는 다다넬스 해협의 대안에 거점을 정하고, 그곳을 유럽으로 밀고 나가는 기지로 삼았다. 콘스탄티노플은 지세가 험하고 도시 방어가 견고했기 때문에, 터어키인들은 먼저 콘스탄티노플의 서쪽과 북쪽 방향으로 진공하여 1362년에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플과 동로마제국 기타 부분의 육로 연계를 차단하였다. 터어키 군대는 이어서 트라키아의 동부를 점령하였다. 1387년에 터어키 군대가 코소오에서 발칸 반도 각국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세르비아를 정복한 다음, 4년만에 불가리아를 정복하게 되자, 유럽 국가들은 경황 실색하였다.
터어키 세력을 격퇴하기 위하여 유럽 봉건 영주들의 연합군은 1396년에 다뉴브강변에 자리잡은 니꼬뽈 부근에서 터어키 군대와 회전하였는데, 결국은 대 실패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발칸 반도의 대부분은․함락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오스만 터어키 제국의 포위권은 날이 갈수록 죄어들어 마지막에는 도시가 고립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오스만 터어키의 술탄(오스만 터어키 통치자의 칭호)이 콘스탄티노플을 맹공격하였다. 당시 술탄은 직접 15만 대군과 300척의 선박을 거느리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였다. 그때 동로마에서는 임시 끌어모은 약 8,000명의 군대로 터어키 군대에 저항하고 있었다. 4월 초에 터어키 군대는 서쪽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포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에는 매우 견고한 방어 시설이 있고, 성 북쪽의 금각만은 또 쇠사슬로 봉쇄되어 배가 지나갈 수 없었으므로 일시에 공략할 수 없었다. 마지막에 터어키 군대는 금각만 대안의 육지에다 널판지로 길을 깔고 그 위에 기름칠을 한 다음, 7, 8십 척의 배를 널판지위로 끌어 해만에 날라들였다. 터어키 군대는 즉시 수면에 부교를 놓았다. 성내의 주민들은 수륙 양면으로 들어오는 터어키군의 포화를 받으면서 7주일 남짓 용감하게 저항하였지만, 5월 29일에 도시는 끝내 함락되었다. 터어키 군대는 밀물처림 성내에 들어갔다. 술탄은 연 사흘 동안 병사들을 풀어놓아 마음대로 방화, 살인, 약탈을 하게 하였으므로, 수많은 화려한 건물들과 진귀한 문물들이 파괴되고 무수한 주민들이 포로가 되어 노예로 잡혀갔다. 오스만 터어키는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정하고 이름을 이스탐불(이스탐불이란 이름은 이때로부터 사용되었다. 193o년에 터어키 정부에서는 이름을 이스탐불로 고친다고 정식을 선포하였다.)로 고쳤다. 그리하여 서로마제국이 멸망된 후 근 천 년만에 동로마제국도 멸망하였다.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후에 오스만 터어키는 계속 대외로 팽창하였다. 17세기에 이르러 오스만 터어키의 판도는 이미 소아시아, 발칸 반도, 흑해 북안으로부터 양강 유역, 자깝까즈, 지중해 동안, 아라비아 반도서남쪽 연해, 이집트로부터 알제리에 이르는 아프리카 북부의 광대한 지역에까지 뻗어나갔다. 오스만 터어키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주에 걸친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오스만 터어키의 쇠퇴와 그의 정복 전쟁의 결과
오스만 터어키 제국의 통치자 술탄은 군사, 정치, 종교의 대권을 장악하였으며, 또 최고의 토지 소유자로 되었다. 그는 전국의 가장 좋은 땅을 점유하고 일부분의 토지를 봉건 귀족과 청진사(회교 사원)에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토지에서 일하는 농민들 중에서 이슬람교도들은 수확고의 10분의 1을 바치고, 비이슬람교도들은 수확고의 4분의 1이나 절반을 바쳐야 하였다. 농민들은 이밖에 또 여러 가지 노역을 부담해야 했다. 농민들은 토지에 얽매여 있었고, 봉건 영주들의 허가 없이는 토지에서 떠나지 못하였다. 오스만 터어키제국 경내에는 또 많은 포로 노예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농업과 채광업에 종사하였으며 일부는 배에서 노를 젓거나 궁정의 노복으로 있었는데, 그들의 처지는 극히 비참하였다. 오스만 터어키제국은 경내의 각 민족 인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였다. 해마다 일어난 전쟁으로 하여 나라의 지출은 날로 늘어났다. 그리하여 부세 명목이 더욱더 많아졌고, 관리들은 세금을 받아들이는 이 기회를 타서 온갖 수단을 다하여 사복을 채웠고, 봉건 귀족들은 또 농민들의 경작지와 목민들의 목장을 부단히 독점하였다. 그리하여 인민들은 더없이 가난해졌다. 15, 16세기에 소아시아 인민들은 가렴 잡세를 반대하고 빼앗긴 토지를 도로 찾기 위하여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16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각지의 인민들의 봉기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러한 봉기들은 모두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오스만 터어키제국의 통치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봉건 귀족들은 점차 역량을 확충하고 중앙의 관할 범위에서 벗어나 할거세력을 형성하였다. 궁정 내부에서는 늘 권력 쟁탈을 위한 유혈적인 투쟁이 벌어졌고, 정치가 부패하여 제국의 통치는 날로 곤경에 빠졌다. 17세기에 오스만 터어키는 날로 쇠퇴해졌다.
오스만 터어키의 통치는 대내외적으로 매우 큰 영향을 일으켰다. 봉건전제주의의 압박과 착취 아래 정복당한 각 민족 인민들은 장기간 민족적압박과 계급적 압박의 재난을 받았다. 대다수의 주민들은 학살되었거나 잡혀가 노예로 팔렸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 도시는 텅 비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른 곳에서 주민들을 이주시켜 인구를 보충하였다. 그리이스의 일부 섬들에서는 대다수 주민들이 수도에 이주하였고, 일부 주민은 노예로 팔렸다. 그리하여 노인들과 허약자, 병자들만 남아서 농사를 지었으므로 생산이 크게 파괴되었다. 과중한 가렴 잡세와 노역은 근로 인민들에게 막심한 재난을 들씌웠다. 인민들에 대한 봉건 지배 계급들의 압박과 예속 정책은 정복당한 지구의 경제, 정치, 문화의 발전을 지연시켰다.
오스만 터어키는 콘스탄티노플과 동부 지중해 지역을 점령한 후, 혹해와 동방으로 통하는 교통 요로를 통제하였다. 오스만 터어키는 경내에 세관을 설치하고 국경을 벗어나는 상인들에게서 높은 세금을 받아들인데다가, 또 빈번한 전쟁과 해적들의 교란까지 덮쳐서 상업 활동에 지장을 주었고 동방과 서방간의 무역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오스만 터어키는 언제 흥성하였는가? 또 어떻게 방대한 제국으로 발전하였는가?
2. 오스만 터어키제국은 무엇 때문에 쇠퇴하였는가?
3. 어떤 나라들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을 가로지르는 대제국을 건립하였는가?





제6장 고대 아프리카






아프리카 대륙은 역사가 오래되고 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최근 수십년 동안에 아프리카에서 아주 먼 옛날의 인류 화석, 인류 유적지와 식기들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이것은 먼 옛날부터 아프리카 대륙에 인류가 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북아프리카는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이집트는 고대 문명의 발원지의 하나이다. 후에 와서 북부 지중해 연안 지구는 전후로 로마제국과 아랍제국의 일부분으로 되었다. 오늘의 튀니지 서쪽 지방을 마그리브(마그리브는 아랍어로 ≪서방≫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11, 12세기에 이곳에 전후로 두개 왕조가 일어났다. 13세기에 와서 마그리브는 세 개 나라로 분열되었는데, 그들의 위치는 대체로 오늘의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지방이다. 16세기에 오스만 터어키는 또다시 북아프리카 대부분의 토지를 점유하였다. 예로부터 사하라 사막 이남의 광대한 지구에서 흑인의 여러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세계에서 비교적 일찍 철제련 기술을 장악하였으며, 기원전 1000년경부터 일부 지방의 흑인들이 철기를 사용하였다. 농업 생산도 발달하였다. 오랜 동안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 흑인의 여러 종족들은 30여 개의 국가를 창건하고, 부지런히 노동하여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15세기부터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잇달아 아프리카에 침입하였다. 이리하여 아프리카 인민들은 장기간 식민주의 예속의 쇠사슬에 얽매여 있었다.





동부 아프리카
누비아는 북쪽으로 이집트와 접하고 있었는데 장기간 이집트의 침략을 받았다. 기원전 1000년경에 누비아는 이집트의 지배에서 벗어나 노예제 국가를 세웠다. 누비아에서는 관개 농업이 발달하였으며, 목화, 황금과 철이 많이 산출되었다.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 3세기에 이르기까지 수도 메로에(오늘의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서 북으로 약 100키로미터 되는 곳에 있었다)는 경제가 아주 번영하였으며, 제련 기술도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메로에는 그 부근에 광물 자원과 삼림이 있었기 때문에 제철 중심지로 되었다. 이 옛도시의 유적지 옆에 오늘까지도 높이 십몇미터나 되는 광재와 폐철무지가 보존되어 있다. 누비아는 무역도 발달하여 아프리카 내륙, 서부 아시아, 인도와 왕래하였다.
기원 초기에 지금의 이디오피아 북부에서 아크숨 노예제 국가가 흥성하였다. 4세기에 아크숨은 인근 지구를 정복하여 국세가 강성하여졌다. 주민들은 주로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였다. 아크숨은 홍해 연안의 아두리스항을 통하여 이집트, 서부 아시아, 인도와 무역하였으며 경제가 번영하였다. 7세기에 아랍인들이 북부 아프리카를 정복하고 끊임없이 흥해연안으로부터 내지로 진격하였으므로 아크숨의 무역은 큰 방해를 받았으며 국가가 날로 쇠퇴하여졌다. 13세기에 이르러 이곳에는 또 이디오피아 봉건국가가 건립되었다.
아프리카 동부의 연해, 즉 오늘의 소말리아, 케냐, 탄자니아, 마다가스카르 일대에도 번영한 고대 도시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이런 고대 도시들은 아프리카 내륙, 이집트, 서부 아시아, 인도, 중국 등지와 모두 무역관계가 있었다.





서부 아프리카
서부 아프리카의 주요한 고대 국가로는 가나, 말리, 숭호이이다.
가나(가나의 건국 시기에 관하여서는 기원 2세기, 4세기, 7세기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는 세네갈강과 니제르강 상류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황금이 많이 났으며, 국왕이 모든 금광을 차지하고 있었다. 국왕의 모자와 옷은 모두 황금으로 장식하였으며, 그의 말안장, 말을 메는 말뚝, 개목걸이까지도 다 황금으로 만들었다. 아랍인들은 가나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기었다. 그들은 8세기의 한 가나 국왕을 ≪황금의 왕≫이라고 하였다. 아랍인들의 통상대는 소금과 천을 가지고 북부 아프리카로부터 사하라 사막을 지나 가나에 와서 황금, 노예, 상아와 교환하여갔다. 가나 국왕은 황금과 노예를 팔고, 또 소금세를 받아 거액의 재부를 긁어 모았다.
11세기 중엽에 가나는 부근의 여러 지방을 정복하여 전성기에 이르렀다. 1240년에 가나는 말리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말리는 원래 가나에 속해 있었다. 11세기 중엽에 말리는 가나의 통제에서 벗어나 국가를 건립하였다. 13세기에 말리는 가나를 멸망시킨 다음, 끊임없이 대외로 팽창하여 서쪽으로는 세네갈강까지 이르고 동으로는 가오까지 이르러 날로 강대하여졌다. 말리 인민들은 삼림 지대를 개간하여 경작지를 확대하고, 벼, 수수, 밭작물, 목화 등 작물을 재배하여 농업을 발전시켰다. 말리의 면직물은 국외에까지 팔렸으며, 대량의 황금을 북부아프리카에 수출되었다. 그리하여 14세기에 말리는 서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되었다.
말리 국왕은 노예와 근로 인민들의 피땀을 짜낼 대로 짜내었다. 한번은 말리 국왕이 메카에 가서 이슬람교의 성지를 참배하였는데, 그때에 90마리의 낙타에 싣고 간 사금을 몽땅 써버렸다. 그는 귀국한 후에 아랍건축사들을 초청하여다 도시에 왕궁과 청진사를 지었다. 어떤 청진사는 부근에 학교를 설치함으로써 이슬람교 문화 교육의 중심으로 되었다. 15세기에 말리는 지배 계급 내부에서 끊임없이 일어난 권력 쟁탈전과 숭호이 등 국가의 침공에 의하여 점차 쇠퇴하여졌다. 숭호이는 원래 말리의 동부에 있었다. 그의 중심 도시는 니제르강중류의  가오였다. 15세기부터 숭호이는 흥성하여 점차 대외로 팽창해서 강대한 국가를 건립하였다. 숭호이 인민들은 니제르강 상류에서 관개수로를 파고 경작법을 발전시켜 벼, 가장, 수수 등 농작물을 재배하였다. 방직업도 매우 발달하였다. 숭호이에서는 노예 제도가 성행하여 많은 노예들을 농업 노동에 사용하였다. 노예들은 그 처지가 아주 고통스러웠으므로 자주 반항하였다. 16세기 말엽에 숭호이는 노예 봉기와 북부 아프리카 모로코의 침략을 받아 와해되었다.
숭호이 문화는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숭호이 국왕은 학술을 장려하고, 아랍학자들을 초청하여 학술을 전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국내에 도서관과 대학을 건립하였다.
지금의 나이제리아경내의 기네만 연안 일대에도 고대 도시 이페이와 고대 국가 베닌이 있었다. 이곳은 서아프리카 예술의 중심지였다. 여기에서 발굴된 상아 조각품과 청동 제품들은 조각이 정밀하고 모양이 아름다와 아프리카 흑인들의 탁월한 창조적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중부 아프리카와 남부 아프리카
고대 중부 아프리카와 남부 아프리카에서도 국가가 발생하였다.
콩고강 하류에 위치하여 있는 콩고는 12세기경에 건립되었다. 15세기말엽, 포르투갈 식민주의자들이 콩고강 어구에 침입해 오기 전의 콩고는 강성한 국가의 하나였다.
콩고 인민들은 주로 농업 생산에 종사하였는데 야금업도 매우 발달하였다. 그들은 철광, 동광, 금광을 개발하고 여러 가지 도구와 그릇을 만들었다. 국왕의 금광과 동광에서 노동한 것은 거의 대부분이 노예들이었다. 콩고는 야금 기술을 아주 중요시하였다. 오랜 전통에 의하여 종족의 수장은 흔히 자기 종족의 야금 기술자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고대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남부 아프리카에 황금이 많이 나는 나라가 있었다. 또 그 경내에는 돌로 쌓은 성들이 많았다. 이를 그곳의 말로 짐바브웨라고 불렀으며, 그중 하나가 더 커서 이를 대 짐바브웨라고 불렀다. 이 지구에서는 금과 은이 많이 산출되었다. 기원 5세기 후에 채광없이 점차 발전되었는데 대량의 황금은 해외로 수출되었다.
대 짐바브웨는 남부 아프리카 고대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 고대성의 유적지에는 성벽, 왕궁, 사원, 탑, 그리고 여러 가지 주택, 우물, 땅굴들이 있는데, 그 주요한 건축물은 모두 반듯하게 다듬은 화강석을 쌓아서 만든 것이다. 이 건물은 웅장하고 아주 견고하다. 이런 건축물들은 남부아프리카 민족 문화의 전형이다. 오늘, 이미 민족 독립을 쟁취한 그곳의 인민들은 짐바브웨를 자기 조국의 이름으로 삼고 있다. (이 지구는 일찍 영국 식민주의자들에게 점령되어 백인 인종주의자들의 통치 시기에는 로데시아로 불리었다.)





중국과 아프리카간의 친선 교류
중국과 아프리카간에는 장기적인 경제 문화 교류가 있었다. 3세기의 중국 문헌에는 이집트의 알이스칸다리아(중국 고서에는 오지산성이라고 하였다)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고, 당조때의 문헌에는 케냐와 소말리아(중국 고서에 마린국이라고 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케냐와 마린디나이며, 또 중국 고서에 발발력국이라고한 것은 바로 오늘날의 소말리아의 베르베라로서 실제상 소말리아를 가리킨다.)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중국과 아프리카의 무역 관계도 매우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과 아프리카간의 무역은 최초에 다른 나라의 상인, 주로는 아랍 상인들을 통하여 진행되었다. 송조와 원조 이후에 중국에서 동부 아프리카로 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또 송조 때에 중국의 조선업과 항해술이 크게 발전하였으므로 그후부터는 중국 상선이 동부 아프리카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중국에서 아프리카에 수출한 주요한 상품은 자기와 비단이었으며, 아프리카에서 중국에 수출한 주요한 상품은 상아와 향료였다. 빈번한 무역 왕래 가운데서 대량의 중국 화폐도 아프리카에 흘러들어갔다. 몇년 전부터 동부 아프리카, 북부아프리카, 남부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서 중국의 자기와 옛날돈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중국 인민과 아프리카 인민들간의 유구한 친선 관계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물로 되고 있다.
중국과 아프리카의 일부 나라들간에는 정부의 사전들이 서로 왕래하였으며, 또 여행가들의 방문도 있었다. 11세기에 잔지바르의 사절이 두번이나 중국을 방문하였으며, 14세기에 중국의 대여행가 왕대연이 상선을 타고 서쪽으로 항해하여 잔지바르에 갔고, 모로코의 대여행가 이븐 바트타도 중국에 온 적이 있다. 이 두 사람은 여행 가운데서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책으로 썼다. 이 책들은 중국 인민과 아프리카 인민간의 왕래에 대한 진귀한 문헌으로 되고 있다. 명조 초년에 정화가 서양으로 항해할 때 몇 번 아프리카에 이르러 오늘의 케냐, 소말리아 등 여러 지방을 방문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동부 아프리카와 북부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들에서도 명조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중국 인민과 아프리카인민간의 친선적 왕래는 서방식 민주주의자들이 동부 아프리카 해안에 침입한 후부터 그들의 방해와 침략을 받아 중단되었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고대 아프리카에는 어떤 국가들이 있었는가? 그 나라들은 대체로 어느 지방에 위치하였는가?
2. 고대 중국과 고대 아프리카의 친선 왕래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제7장 고대 아메리카






아메리카-인디안인의 고향
대략 ? 5만 년 이전에 아메리카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최초의 이 아메리카 주민들의 생활 양식은 다종다양하였다. 어떤 주민들은 주로 고기잡이와 사냥에 의거하여 생활하였으며, 어떤 주민들은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농업 생산에 종사하고 가축도 사육하였다. 그들이 사용한 무기와 생산 도구는 마제 석기거나 동기였으며, 후에는 청동기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기타 각 대륙과 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철을 사용할 줄 몰랐다. 인디안들은 장기간 부지런히 노동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개발하고 생산을 발전시켰으며, 허다한 품종의 농작물을 재배하였다. 그 가운데서 주요한 농작물로는 옥수수, 감자였고 또 토마토, 담배, 해바라기를 재배하였는데, 후에 널리 전파되어 세계 인민들의 물질 생활을 아주 풍부하게 하였으며, 인류에 대하여 아주 큰 공헌을 하였다.
아메리카의 이 최초의 주민들은 16세기로부터 인디안인(15세기 말엽에 아메리카에로 항해한 콜롬부스는 자기가 ≪발견≫한 아메리카를 인도로 잘못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곳의 주민들을 ≪인디안인≫이라고 불렀다.)이라고 불리었다. 인디안인들은 오랜 동안 원시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사회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일부 지방에서는 토지에 대한 공동 소유가 와해되고 이미 사적 소유가 출현되어 초보적으로며, 따라서 사회는 원시공동체 사회로부터 노예 사회에로 이행하는 단계에 처하게 되었다.
유럽 식민주민자들이 침입하기 전에는 인디안들이 아메리카의 주인이었다. 그들 가운데의 마야인, 아즈텍인과 잉카인 등은 전후로 오늘의 미국 이남 지구에서 3개의 문화 중심을 건립하였다.





마야인의 문화
마야인들은 오늘날의 멕시코(이 장에서 말하는 멕시코는 모두 오늘날의 멕시코를 가리킨다)의 유카탄 반도와 오늘의 과테말라문화를 창조하는 면에서 마야인들은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000년경에 마야인들은 매우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옥수수, 토마토, 떡호박, 콩, 고구마, 담배 등 중요한 농작물들을 재배하였고, 개와 칠면조를 사육하고 꿀벌을 쳤다. 마야인들은 진흙을 구워 도기를 만들고 돌로 여러가지 도구와 무기를 만들었으며, 식물(면화와 용설란)의 섬유로 천을 짜서 옷을 지어 입었고, 쇠붙이로 여러가지 장식품들을 만들어냈다. 기원 전후에 마야인들이 거주하는 지구에 도시가 출현하였는데, 그후 700-800년 간에 모두 100여개의 도시가 일어섰다. 이런 도시들의 광장에서 마야인들은 늘 식료품과 일용품들을 서로 교환하였다.
마야인의 사회에는 또 발전 과정에서 이미 자유인과 노예의 구분이 생겼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전쟁 포로였으며, 그 나머지는 범죄자이거나 빚으로 인하여 전락된 채무 노예들이었다. 채무 노예는 그 친족들이 그가 진 빚을 갚아줄 때까지 노예로 있어야 했다.
노예들은 집을 짓고 물건을 운반하는 일을 하였으며, 귀족들의 시중을 들어야 하였고 기타 여러 가지 과중한 일들을 해야 했다. 귀족, 군사지도자와 승려들은 이미 통치자로 되었다. ≪나으리≫로 불리운 도시의 통치자들은 그 직무를 세습하였고, 매우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야인들은 아메리카에서 아주 수준이 높은 문화를 창조하였는데, 그 전성 시기는 기원 4세기부터 10세기까지였다.
마야인들은 건축, 조각과 회화에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석재로 화려하고 웅장한 사원, 능묘와 웅위로운 기념비들을 수없이 건축하였다. 마야인들의 고대 도시의 옛터에는 지금도 고대 건축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사원들에는 아름답고 생동한 조각들이 있을 뿐만아니라, 색채가 다양한 회화들도 보존되어 있다. l946년에 발견된 버나퍼크 사원이 바로 탁월한 예술 고적인데, 그 가운데서도 벽화는 세계에서 이름난 벽화 예술 작품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마야인들이 창조한 문자는 상형문자로서 뜻을 표시할 뿐 아니라, 소리도 표시하였다. 그들의 언어는 상당히 풍부하여 어휘가 3만 개나 되었다. 문자는 승려들이 독점하였는데, 시를 쓰고 신화를 쓰고 기도문과 편년사를 쓰는 일들은 전부 승려들이 하였다.
수학 방면에서 마야인들은 수를 적는 법을 제정하고, 손가락과 발가락수에 근거하여 20진법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수를 적을 때 ≪0≫을 사용할줄 알았다. 천문학 방면에서 그들은 아주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일식의 시간을 계산해 냈으며, 태양년을 1분도 차이나지 않게 정확히 계산해 내었다. 그들은 상당히 정확한 역법을 창조하였다. 즉 365일을 1년으로 정하였고, 또 1년을 18개월로 나누고 1개월을 20일로 하였으며 연말에 5일을 더 가하였다.
9세기 말엽과 10세기 초엽에 마야인의 문명은 심한 침략을 받았다. 오로지 유카탄 반도 북부에서만 마야인의 문명이 보존되어 줄곧 15세기까지 발전하여 왔다.





아즈텍 문화
아즈텍인들은 최초에 멕시코 서부의 한 섬에서 살았다. 대략 11세기 중엽부터 그들은 점차 멕시코 분지로 이동하였다. (12세기초엽부터 그들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는 설도 있다.)
1325년에 아즈텍인들은 자기 종족의 족장 테노크의 영도하에 테히카카호반에 이르러 호수 가운데의 작은 섬에 자리잡고 살면서 도시를 건립하였다. 그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대외에로 팽창하였으며, 그후의 한세기 동안에 일부 다른 인디안 종족들을 정복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영토가 동쪽으로는 멕시코만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태평양에 이르렀으며, 총 인구는 600여만 명이나 되었다.
15세기 상반기에 아즈텍인 사회는 번영하였으며 문화가 발전하였다. 그들의 주요한 생산 부문은 관개 농업이었고, 주요한 농작물로는 옥수수 이외에도 잠두, 고구마, 목화, 토마토가 있었다. 아즈텍인들은 호수가의 진펄을 개간하여 관개 수로가 가로 세로로 뻗어진 전원을 만들었다. 아즈텍인들은 천짜기와 수놓기에 아주 능란한 우수한 수공업자들이었다. 그들이 수놓아 만든․새털 자수품은 특히 유명하였다. 아즈텍인들은 또 걸출한 건축가들로서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사원, 보루와 인수교(引水橋)를 많이 건축하였다. 그들이 건축한 피라미드는 이집트에서 건축한 피라미드와 그 아름다움을 비길 수 있었고,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웅장한 사원을 지었다.
그때 아즈텍인들이 테히카카호에 건설해 놓은 테노치티트란(지금의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은 아주 번화한 도시였다. 이 도시에는 6만 호나 되는 건물이 있었고, 30만에 달하는 인구가. 있었다(같은 시기에 영국 런던의 인구는 대략 20만밖에 되지 않았다). 도시가 자리잡고 있는 여러 섬들 사이에는 섬과 섬을 연결시켜 주는 평탄하고 넓다란 뚝이 있었다. 도처에 일어선 거대한 공공 건축물들은 겉벽을 하얗게 회칠하여 눈부신데다 그 아름다움 또한 장관이었다. 도시에는 물을 공급하는 설비가 완전하였다. 사람들이 교역을 진행하는 장소인 시내 광장은 그야말로 흥성하였다. 이 테노치티트란은 당시 세계적으로 인구가 제일 많고 제일 번화한 도시의 하나였다.





잉카 문화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고원 일대에서 살고 있던 인디안인들은 기원전 1500년 이후부터 수준이 높은 문명을 창조하였다. 이 한갈래의 인디안인들이 재배한 주요 농작물은 감자였다. 그들은 능란한 솜씨로 도기를 만들고 천을 짰는데, 어떤 도기에는 생활과 투쟁을 반영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어떤 천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들이 오늘의 볼리비아의 티티카카호 남쪽에 건축한 태양문은 고대 아메리카의 가장 탁월한 건축물의 하나였다. 이 대문은 반듯하게 다듬은 하나의 큰 돌을 구멍뚫어 만든 것인데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이 일대의 돌로 세공한 건축물들은 정교하였고, 돌들은 칼로 벤 듯이 반듯하며 반들반들하게 갈아 유리처럼 빛났다.
이 인디안인의 한 갈래인 잉카인들은 13세기부터 쿠스코 분지를 중심으로 하여 점차 강대하여졌다. 15세기로부터 16세기 초에 와서 그들은 오늘의 콜롬비아 남부로부터 칠레 중부까지, 에쿠아도르, 페루와 볼리바아를 포괄한 광대한 지구를 정복하였는데, 잉카인들이 관할한 이 지구에 500만명 내지 1,000만 명의 인구가 있었다.
잉카인들의 토지는 잉카의 최고 통치자에게 속한다고 인정하였지만 실상은 기충 단위인 씨족 공동체가 토지를 지배하였다. 토지는 세 개부분으로 나뉘었다. 그 한 부분은 ≪태양≫에게 속하고(기실은 승려들이 차지하였다), 한 부분은 ≪왕≫에게 속하고, 한 부분은 공동체 성원들에게 속하였다. 이 세 개 부분의 토지는 모두 공동체 성원들에 의하여 경작되었다. 잉카인들은 안데스 산맥의 비탈에다 층층의 다락밭을 만들었다. 다락밭의 밭뚝들은 돌로 쌓아 수토 유실을 방지하였다. 그들은 많은 관개 수로를 파고 아주 먼 곳에까지 물을 끌어들였다. 또 산골물이 도랑을 통하여 층층의 다락밭에 흘러들게 하였다. 관개 시설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업이 발전하였다.
잉카인들의 실용적인 지식은 상당히 발달하였다. 그들은 쿠스코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 각지로 통하는 도로망을 건설하였다. 너비가 4, 5미터되는 평탄한 큰 길 양옆에는 푸른 가로수들이 우거져 있었으며, 협곡이나 강에는 다리가 놓였다. 강이 넓은 곳에서는 배다리나 나룻배를 이용하였다. 잉카인들은 건축 방면에서도 뛰어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건축한 쿠스코 태양사원은 규모가 굉장히 컸다. 황금을 아로새겨 장식한 정전(正殿)의 바람벽은 아주 정교하고 아름다왔다. 잉카인들은 여러 가지 약용 식물로 병을 치료할 줄 알았으며, 심지어 마취제를 사용할 줄도 알았다. 잉카인들은 마야인, 아즈텍인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높은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이런 문화의 성과를 향유한 것은 소수의 통치자들뿐이었다
광대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디안인들은 저들의 부지런한 노동과 지혜로 자기의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서유럽 식민주의자들의 침입으로하여 그들의 사회는 발전이 중단되고 문화는 유린당하였으며, 인민들은 학살과 예속을 당하게 되었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고대 아메리카 인디안인들의 생활 양식은 어떠하였는가? 그들은 농업 생산방면에서 인류 생활에 어떤 공헌을 하였는가?
2. 아메리카에서 인디안들은 전후로 몇 개의 문화 중심을 건설하였는가? 그들의 문화 성과를 종합하여 설명해 보자.






제8장 서유럽 봉건 제도의 해체와 자본주의의 흥성






이탈리아 자본주의 생산의 최초의 맹아
13세기 후반기에 이탈리아는 실제상에서 이미 독일황제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줄곧 봉건 할거 상태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통일된 중앙 집권적 봉건 국가로 형성되지 못하였다. 각 지구의 경제 발전이 매우 불균형하여 이탈리아 북부는 경제 발전이 아주 빨랐으나 중부와 남부는 경제가 낙후하였다.
북부에는 봉건 시기 유럽에서 가장 일찍 한 상공업 도시가 일어섰고, 그 뒤를 일부 도시 공화국들이 형성되었다. 여기에는 이름난 상업 도시공화국 즉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있었고, 또 이름난 공업 도시 즉 밀라노와 플로렌스가 있었다. 13세기로부터 15세기까지 이 도시 공화국과 공업도시들은 전성 시기에 들어섰다.
베네치아는 아드리아해의 서북쪽에 임하여 있었는데, 한때 ≪아드리아해 연안 각국의 수도≫라고 불리웠다. 베네치아는 2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던 도시로서 서아시아와 서유럽간의 무역의 중간역이었다. 경제발전의 전성 시기에 베네치아에는 3000척의 상선과 1만 7천 명의 선원을 가진 상선대가 있었기 때문에 지중해 동반부의 무역을 거의 독점하였으며, 늘 서유럽 여러 나라의 항구로 항해하였다. 베네치아인들은 상업을 경영하였을 뿐 아니라 공업도 경영하였다. 베네치아에서 생산된 모직품, 견직품, 유리그릇, 무기는 전 유럽에 수출되었고, 아시아에도 아주 큰 판로를 가지고 있었다.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상품에 대한 수요가 끊임없이 늘어났다. 도시의부유한 상인들은 생산 영역에서 도매상으로 되었다. 그들은 원료를 도매로 사다가 수공업자들에게 넘겨 주고, 또 수공업 제품을 도매로 사서는 외지에 가져다 팔았다 그들은 경제력이 약한 수공업자들에게 원료를 외상으로 팔거나 때로는 도구까지 제공하여 주고는 그 대신 그들의 수공업 제품을 도매로 샀다. 경제력이 약한 수공업자들은 경영의 독립성을 잃고 도매상의 지배를 받았는데, 실제상에서는 고용 노동자로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새로운 수공업 생산 형식인 공장제 수공업이 발생하였다. 14세기 중엽에 이탈리아 북부 플로렌스의 공장제 수공업은 그 규모가 매우 커서 약 200여 개소의 모직물 공장에서 생산하는. 나사천만 해도 매년 생산량이 몇만 필에 달하였다. 시내와 교외에서 모방직 기업주를 위하여 일하는 노동자만 하여도 그 총수가 3만 명에 달하였다. 이런 노동자들 중에는 공장에서 집중적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가정에서 분산적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 고용당한 노동자들로서 다같이 기업주의 착취를 받았다. 14세기와 15세기의 이탈리아 공장제수공업의 흥성과 발전은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에 희소하게나마 자본주의생산의 최초의 맹아가 이미 출현되었다는 것을 표징해 주고 있다. 공장제수공업을 경영한 그런 공장주들은 도시의 부유한 상인, 은행가 등과 함께 새로운 계급인 자산 계급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새 항로의 개척
서유럽에서는 매우 오래전부터 동방의 귀중한 상품을 수입하였다. 이탈리아의 도시 중에서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동서방간의 무역 가운데서 제일 먼저 지중해의 통상로를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례없이 번영하였다. 남양군도에서 산출되는 후추, 정향, 육계, 생강등의 향료는 유럽의 부유한 집들에서 즐겨하는 조미료로 되었으며, 중국의 비단, 인도의 목천, 아랍의 화장품, 아시아의 일부 지방에서 진주, 보석으로 만든 머리 장식품은 모두 유럽에서 대량으로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여행가들에 의하여 쓰여진 동방의 재부에 대한 신화와 같은 이야기들이 유럽에서 널리 유전되고 있었다. 13세기 말엽에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쓴 여행기에는 중국의 부유하고 번영한 정경이 묘사되어있었으며, 동방 각국에 황금, 진주, 보석이 아주 많다는 것이 서술되어있었다. 그가 쓴 이 여행기는 특히 동방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동경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서유럽 사람들은 중국과 인도 등 동방 국가를 마치 황금, 보석, 향료, 비단과 여러 가지 진귀한 물품들이 수없이 많은 신화 속의 나라처럼 상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나라로 통하는 통상로만 점하면 당장 벼락부자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15세기에 유럽 각국의 국왕, 귀족, 고급 승려, 상인들과 바야흐로 형성중인 자산 계급들은 모두 ≪황금꿈≫에 도취되어 어서 빨리 금은 보화를 약탈하러 동방으로 갈 것을 갈망하였다.
오스만 터어키제국이 건립된 후 그들은 동서방간의 교통 요로를 통제하고, 자기 나라의 국경을 넘나드는 상인들에게서 제 마음대로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물품을 빼앗아냈다. 또 끝없는 전쟁과 해적들의 약탈로하여 서유럽으로 운반되는 상품의 수량이 줄어들고, 상품간이 오르게되어 동서방간의 정상적인 무역은 방해를 받게 되었다. 특히 상업이 발달한 이탈리아 도시에 끼친 영향이 더하였다. 그리하여 서유럽 국가들은 온갖 방법을 다하여 동방으로 가는 새 항로를 탐색하였다. 그 당시조선 기술은 이미 원양 항해에 적응되는 선박을 만들 수 있었다. 중국의 나침반은 아랍인들에 의해 유럽에 전파되어, 이미 항해에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지리 지식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들은 지구가 등글다는 학설을 믿기 시작하였으며, 유럽으로부터 서쪽으로 항해하여도 동방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새 항로를 탐색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형성해 주었다. 바로 이와 같은 강렬한 요구와 가능성에 의하여 유럽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에서 제일 먼저 새 항로를 찾는 활동과 해외에서 식민지를 약탈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는 이베리아 반도에 건립된 국가였다. 아랍인들이 반도에 침입한 후에 당지 주민들은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는 운동을 벌이고 점차 아랍 통치 세력을 배제하였다. 이 반도에는 몇 개의 나라가 출현하였는데, 이런 나라들은 점차 팽창되고 합병되어 12세기 중엽에는 이베리아 반도 서부에 포르투갈 왕국이 형성되었고, 15세기 말엽에는 이 반도에 또 에스파니아 왕국이 형성되었다.
1415년에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의 서북 귀퉁이에 칩입하여 침략 거점을 세웠다. 그후 몇십 년간 포르투갈인들은 서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수차 탐색 항해를 하면서 연해에 많은 침략 거점을 세웠고 연해의 많은 섬들을 점령하였다. 그들은 또 서부 아프리카에서 사금, 노예와 상아를 약탈해 갔다. 1481년에 포르투갈인 디아스가 서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행하여 아프리카의 서남단에 이르렀다. 이것은 포르투칼인들이 새 항로를 찾음에 있어서의 한 차례의 돌파였다. 포르투갈 국왕은 아프리카 서남단을 발견한 그 중요성을 인식하였기 때문에 그곳을 희망봉이라 부르게 하였다.
1497년에 포르투갈인 다 가마가 4척의 배에 약 100명의 선원들을 태워가지고 디아스가 개척한 항로를 따라 계속 전진하여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해안을 지나 인도양에 진입하였다. 그는 아랍 항해가의 길안내로 그 이듬해에 인도에 도착하였다. 1499년에 그의 선대는 황금과 향료를 가득 싣고 돌아옴으로써 인도에로의 항행을 완성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이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새 항로를 찾고 있을 때, 이탈리아 제노바의 선원 콜롬부스는 다른 항로로 중국과 인도에 가려고 생각하였다. 콜롬부스는 지구가 등글다는 학설을 믿고 대서양으로부터 곧장 서쪽으로 항해하여도 동방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각국으로 돌아다니면서 설득하였고 각국에서 지지하여 줄 것을 희망하였다. 그의 원양 항해 계획은 에스파니아 국왕의 지지와 원조를 받게 되었다. 1492년 8월 3일에 콜롬부스는 세 척의 배로 조직된 자그마한 선대를 거느리고 출발하여 망망한 대서양을 건넜다. 10월 12일에 그의 선대는 바하마 군도의 한 작은 섬에 도착하였고, 그후에 또 쿠바와 아이티에 이르렀다. 1493년에 콜롬부스는 에스파니아에 돌아왔다. 1493년부터 1504년까지의 기간에 그는 또 세 차례나 서쪽으로 항행하여 전후로 남아메리카 대륙의 일부 해안들에 이르렀다.
그때 벌써 포르투갈인들은 진짜 인도에 이르러 아시아의 재물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콜롬부스의 몇 차례 원양 항해는 에스파니아왕실에 예기했던 바의 이익을 당장 가져다 주지 못하였다. 콜롬부스는 원래 황금 미치광이여서 황금은 ≪사람의 영혼을 천당에 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황금을 찾지 못하여 실망한 데다 또 에스파니아 사람들에게서 사기꾼이라는 욕설까지 듣게 되었다. 이런 냉대를 받은 그는 낙심끝에 죽고 말았다. 콜롬부스는 죽을 때까지도 자기가 도착했던 곳이 인도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자기가 본 원주민들을 인디아인--인도 주민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다른 한 항해가 아메리고베스풋치는 콜롬부스가 도착했던 곳이 인도가 아니라, 하나의 ≪새 대륙≫이라는 것을 실증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이 ≪새 대륙≫을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고 불렀다. 그러나 콜롬부스가 처음 도착했던 남북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있는 섬들은 지금도 그냥 서인도제도라고 부른다.
1519년에 에스파니아에 살던 포르투갈의 선원 마젤란은 에스파니아 국왕의 명령을 받고 선대를 거느리고 지구를 일주하는 시험 항해를 시작하였다. 그는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하여 아메리카 맨 남쪽 끝에 있는 해협, 즉 후에 마젤란 해협이라  불리운 해협을 지나 태평양을 곧바로 건너 필리핀 군도에 도착하였다. 마젤란은 필리핀 사람들과의 충돌 가운데서 전사하고 그의 동반자들은 인도양을 지나 희망봉을 돌아 1522년에 에스파니아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유럽으로부터 아프리카를 돌거나 남아메리카를 돌아 아시아에 이르는 항로가 개척되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의 식민지 팽창
포르투갈에서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에 이르는 새 항로를 개척하자 포르투갈 식민주의자들도 아프리카로부터 아시아에로 세력을 뻗쳤다.
16세기 초엽에 포르투갈 식민주의자들은 아프리카 동해안에서 아랍인들이 건립한 일부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그들은 또 인도에 이른 후, 인도인과 인도에 있는 아랍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약탈하였으며, 또 무력으로 인도 서해안의 일부 지방들을 강점하였다. 잇달아 그들은 말레이반도의 말라카(당시 향료 무역의 국제적 중심지였다)를 함락하고 태평양에 진입하여 유럽 사람들이 ≪향료의 나라≫로 동경하여 오던 몰루카 군도(지금의 인도네시아의 몰루카 군도이다)에 침입하였다.
1517년에 포르투갈 식민주의자들은 중국에 들어 왔으나, 중국 동남연해의 군민들에 의하여 쫓겨갔다. 후에 그들은 또 일본에 이르렀다. 1553년에 그들은 기만 수단으로 중국 오문에서의 거주권을 얻었다.
포르투갈 식민주의자들은 땅이 넓고 사람이 희소한 아메리카의 브라질에서 식민주의 활동을 전개하여 저들의 식민주의제국을 전체 브라질에까지 팽창하였다.
에스파니아의 식민지 팽창은 아메리카를 위주로 하여 진행되었다. 콜롬부스는 이르는 곳마다에서 에스파니아 국왕의 명의로 그곳에 대한 점령을 선포하였다. 카리브해의 수많은 섬들이 먼저 에스파니아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지리 탐사 사업이 진척됨에 따라 에스파니아 식민주의자들은 신속하게 아메리카 대륙의 광대한 지역을 강점하였다.
1519년에 에스파니아의 귀족이며 모험가인 페르난도 코르테스는 소부대를 거느리고 멕시코 동해안에 상륙하여 식민주의적 정복을 시작하였다. 그들의 침략은 인디안인들의 강력한 반격을 받았다. 1512년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비로소 멕시코를 거점으로 삼고 더 나아가 전체 중앙아메리카를 점령하였다. 다른 한 모험가 프란시스코 페사로는 1532년에 군대를 거느리고 페루에 침입하였다. 후에 에스파니아 식민주의자들은 페루를 중심으로 하고 브라질 이외의 전체 남아메리카를 침점하였다. 16세기 중엽에 에스파니아 식민주의 제국이 완전히 형성되었다. 아시아의 필리핀도 점차 에스파니아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유럽의 식민주의 제국은 식민지에서 피비린 약탈을 감행하여 거액의 재부를 유럽으로 실어다가 자본으로 삼았다. 유럽의 자본주의는 바로 이런 식민지 약탈에 의하여 발전된 것이다.





독일의 종교 개혁과 농민 전쟁
14, 15세기에 독일의 일부 지역은 경제가 발전하였다. 거기에서 생산된 비단과 아마와 같은 직물은 국외로 수출되었고, 채광업(특히 은광업)과 야금 공업이 특히 발달하였다. 16세기초엽에 독일에는 채광업과 제조업아 종사하는 사람이 10만 명이나 되었다. 채광, 제철과 방직 부문에서는 자본주의적 공장제 수공업이 나타났다. 독일은 정치상에서 그 명의로 볼 때 황제 한 사람이 통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상에서는 영내에 수많은 소국들이 병립하고있었다. 1,500만 인구밖에 안 되는 나라가 200~300개의 작은 나라들로 나뉘어져 있어 장기적으로 통일되지 못하였다. 이는 경제를 가일층 발전시키는 데 막대한 장애가 되었다.
16세기 초엽에 독일의 계급 모순은 아주 복잡하였다. 교회와 세속적인 봉건 영주(제후)의 권력은 제일 컸으며 그들의 영지는 여전히 독립 왕국이었다. 그들은 대외적으로 전쟁 포고를 내거나 강화조약을 맺거나 하는 일을 모두 마음대로 하였으며, 대내적으로는 소귀족과 도시를 극력 자기들에게 복종시켰다. 도시에서는 도시 귀족들이 정치 경제 대권을 틀어쥐었고, 권력에 없는 지위에 처해 있던 부유한 수공업자와 상인, 신흥수공업 공장주로 구성된 시민 계급(형성중에 있던 자산 계급)들은 애써 봉건 영주의 압박에서 벗어나려 하였으며, 또 대권을 독점한 도시 귀족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도시의 평민 대중, 이를테면 장인, 품팔이꾼, 무직업 유랑자 등을 놓고 볼 때 그들은 생활이 극히 곤란하여 불만이 더욱 강하였다. 광범한 농민들은 끝없이 늘어나는 지대와 부역으로 인하여 그 형편이 더없이 악화되었으며, 공동으로 쓰던 초원과 목장까지 빼앗겼다. 그들은 또 교회에 10분의 1세를 바쳐야 하였고, 고리대금업자의 여러 가지 착취를 받아야 하였기 때문에 그 처지가 제일 곤란하였다. 황제와 세속적 봉건 영주, 교회는 모두 반동 지배 계급이었다. 그러나 황제와 세속적 봉건 영주는 경제 이익면에서 교회와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이미 각 계층의 집중적인 반대를 받는 목표물로 되었다.
로마 법왕의 조종하에 있던 천주교회는 봉건 시대의 유럽에서 종교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상, 경제상으로도 모두 초국가적인 권력을 가지고있었다. 독일에서는 강력한 중앙 정권으로 천주교에 대항하지 못하였기때문에 천주교가 매우 높은 특권을 가진 지위에 있었다. 16세기 초엽에 허다한 대주교, 주교와 수도원 원장이 있었는데, 그들은 또한 봉건 제후들이기도 하였다. 천주 교회는 대량의 토지를 차지하고 농민들에게서 봉건적 지대를 착취하였으며, 법왕은 10분의 1세를 징수하고 교회의 직위를 팔거나 면죄부(이른바 면죄부란 천주 교화에서 찍어낸 일종의 증서였는데, 면죄부를 파는 사람들은 그것을 사게 되면 죄있는 사람도 교황이 주는 복을 받기 때문에 ≪하느님≫의 징벌을 면하게 된다고 하였으며, 또 면죄부를 사고 돈을 돈궤 안에 떨궈넣을 때, 그 돈이 궤 밑에 떨어지면서 딸랑하는 소리가 들리는 바로 그 시각에 구원을 받은 영혼이 ≪천당≫에 날라올라 간다고 하였으며, 가령 면죄부를 산 사람이 장래에 죄를 진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먼저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게 된다고 설교하였던 것이다.)를 파는 등의 방법으로 독일에서 거액의 돈을 긁어모았는데 심지어 황제의 재산을 훨씬 초월하였다.
독일에서는 종교 개혁을 진행하자는 원성이 날로 높아갔다. 천주교의 가혹한 착취와 압박을 받는 농민들은 천주교를 적대시하였고, 시민 계급들은 대량의 자금을 로마로 흘러들어가게 한 교회가 독일의 경제 발전에 손해를 준다고 간주하면서, 자기 계급의 수요에 적응되는 교회를 세워 봉건적 교회를 교체할 것을 요구하였다. 세속적인 봉건 제후들은 교회에서 많은 토지를 점한 데 대하여 질투하면서 그 토지를 탈취하려 하였다. 이런 형세하에서 자산 계급 종교 개혁의 대표 인물인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면죄부를 반대하여 일어나 종교를 개혁할 것을 제기하였는데, 광범한 인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나섰다. 그리하여 천주교회를 반대하는 운동은 앙앙되었다. 그후 독일의 허다한 지역들에서 천주교회의 권력을 폐지하였으며, 많은 제후들은 천주교회의 재부를 점하고 로마 법왕의 관할을 받지 않는 새로운 교회(마르틴 루터가 건립한 루터 교파는 후에 북유럽의 노르웨이, 스웨덴, 네델란드 등의 나라에 보급되었다. 이와 동시에 스위스에서 종교 개혁을 진행한 칼빈이 건립한 칼빈교파가 후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의 나라에 보급되었다. 이런 교파들을 오랜 천주교와 구별하여 신교라고 통칭한다.)를 건립하였다.
독일 종교 개혁 운동은 반봉건 투쟁의 첫시작이었으며, 잇달아 일어난 것이 바로 농민 전쟁의 대폭풍이었다.
1519년부터 시작하여 독일에서는 농민 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해라고는 한 해도 없었다. 각지의 봉기는 부단히 확대되어 마지막에는 1524년~1525년의 농민 전쟁을 초래하였다. 3분의 2의 독일 농민들이 이 투쟁에 뛰어들었다. 이 혁명 전쟁의 주요한 영도자는 뮨쩌였다. 토마스 뮨쩌(약1490~1525년)는 1517년 여름부터 독일의 일부 지방들에서 혁명을 선전하면서 농민 봉기를 호소하였다. 그는 봉건 영주들과 모든 착취자들은 하느님을 숭경하지 않는 자들이고, 인민에 대한 그들의 약탈은 인간에 대한 죄악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죄악을 깨끗이 쓸어버려야만 ≪천당≫이 인간 세상에 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천당≫이란 바로 ≪계급적 차이도 없고, 사유 재산도 없으며, 사회 성원들과 동떨어져 높이 있으면서 대립되는 그런 국가 정권도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사회≫(마르크스)였다. 그는 봉건 제도와 천주교회를 반대하여 단호히 투쟁할 것을 호소하였다.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 사람들은 그의 선전을 귀담아 들었다.
1524년 여름에 독일 남부 슈바벵 지역의 농민들은 귀족들을 위해 부역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뮨쩌와 그의 제자들은 많은 대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의 투쟁을 적극 선동 고무하였다. 이듬해 초에 봉기는 전 슈바벵 지역을 휩쓸었다. 전투 속에서 여섯 갈래의 봉기군이 형성되었는데, 그 인구가 도합 3, 4만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봉기군 내부에 의견 차이가 생기고 봉건 영주들이 각개 격파의 수단으로 봉기군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1525년 4월에 슈바벵 봉기군의 주력이 격파당하였다.
뮨쩌가 활동한 중심지는 삭소니아의 튜링겐 지구였다. 1525년 3월에 뮨쩌는 뮬하우젠에서 인민들을 영솔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인민들은 도시, 장원, 성새와 수도원들을 점령하고 봉건 영주의 토지와 재물을 분배하였다. 뮨쩌는 슈바벵 농민들이 실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중부의 봉기군들과 연합하여 봉건 제후들의 군대를 타도하라고 호소하였다. 바로 봉기 대오가 역량을 집중하고 있을 때 독일 중부의 제후들은 황급히 대군을 규합하여 가지고 봉기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5월중순에 프랑켄하우젠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제후들의 병력이 절대적 우세였지만 뮨쩌는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친히 봉기군 속에 들어가 봉기군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 성스러운 싸움에서 봉기군은 용감히 싸웠지만 역량의 현저한 차이로 말이암아 실패하였고, 5,000명이 전사하였으며, 뮨쩌는 불행히 포로되어 장렬하게 희생되었다.
1524~1525년의 농민 전쟁은 독일의 봉건 통치 질서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 두 해는 독일 역사에서 영웅적 연대가 되었다. 천주교회는 호된 타격을 받았다. 수많은 수도원들이 박살났고 교회의 재물이 청산되었다. 농민전쟁이 실패된 후 봉건 제후들은 미친 듯이 농민들을 박해하였고, 10만명 이상이나 되는 농민들을 살해하였다. 그들은 천주교회의 많은 토지를 점령하였으며, 각지에서 다시금 농민을 예속화하는 제도를 세웠다. 그리하여 독일은 여전히 봉건 할거 상태에 처해 있게 되었다.





영국 자본주의 발전의 개시
15세기에 영국은 봉건 관계가 계속 해체되고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는 과정에 처해 있었다. 새 항로가 개척된후 유럽의 주요한 통상 도로와 무역 중심이 지중해 구역으로부터 대서양연안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영국 상공업의 발전을 추진시켰다. 당시 모방직업은 영국의 주요한 공업 부문으로 되었으며, 모방직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영국 인구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였다. 모방직업은 대소도시들에만 국한되어 발전한 것이 아니라, 농촌에 이르기까지 광범히 보급되었다. 대규모적이고 업종이 집중된 모방직 수공업 공장들이 이미 출현하였고 또 점차 발전하고 있었다.
16세기 말엽에 한 모방직 공장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묘사한 민요 한 수가 유행되고 있었다.

직포기 2백 틀 직포공 2백 명, 넓다란 작업장애 줄지어 섰네‥‥‥커다란 옆칸에 여직포공 백 명, 그 곁방에도 처녀 2백 명‥‥‥재간 많은 처녀들 지쳐서 실을 뽑네, 바깥방엔 또 아동공 백 50명 줄지어 앉아서 가는 털 고른다네, 그들의 쓰라림 어디에 하소연하랴! 모두 다 가난뱅이 우마보다 못한 신세, 녹두새벽 일어나 한밤중에 잠들건만 하루에 받는 건 땡전 몇푼, 끼니마다 먹는 건 멀건 죽뿐, 저기 저 대청의 50명 절단공, 그 솜씨 흠잡을 데 있을손가! 또 80명의 노동자 천짜기에 바삐 도누나. 80명의 노동자 물감들이고 20명의 노동자 천을 접으니, 피륙은 쌓여서 태산 이루네.

모방직 수공업의 발전으로 하여 양털의 수요량이 부단히 늘어나고 그 가격도 끊임없이 올랐다. 귀족과 지주들은 양을 기르는 것이 곡식을 심는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일찌기 15세기말엽부터 폭력으로 농민들을 소작지에서 좇아내는 동시에 또 원래 농민들이 공용으로 쓰던 초지, 산림, 소택들을 강점하였다. 그들은 밭지경을 없애고, 원래의 농민들을 쫓아내고, 농민들의 오막살이집을 불사른 후, 넓은 땅에 울타리를 둘러막고 목장을 만들었다. 그들은 고용인을 두고 숱한 양을 기르기도 하였으며, 고율의 지대를 받고 목장을 남에게 빌려주기도 하였다. 땅을 잃은 농민들은 더는 살 길이 없어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 것들을 이끌고 정처없이 유랑하였다. 이것이 바로 영국 자본주의의 피어린 발전의 역사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영국의 유명한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1478-1535년)는 그의 명작 ≪유토피아≫에서 ≪엔크로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풍자하였다. ≪당신의 양은 유순하여 조금만 먹어도 흡족해하였는데 지금은 탐욕스러워지고 사나와져서 사람마저 잡아먹으려 덤비는구만‥‥≫)≪엔크로저(울치기) 운동≫이었다. 이렇게 ≪엔크로저≫로 성공한 귀족들은 자산 계급화한 신귀족으로 되었다.
≪울치기≫에 대한 농민들의 반대 투쟁이 연속 폭발하였지만, 모두 영국정부의 피비린 탄압을 당하였다. 파산당하여 유랑하는 농민들에 대하여 영국 정부에서는 일하기 싫어서 도피한 자들이라고 모독하였다. 정부에서는 일련의 피비린 법령을 발포하여 그들을 죄다 범죄자로 몰았다. 그리하여 어떤 자에게는 낙인을 찍거나 매질하는 등의 혹형을 가하였고, 어떤 자에 대해서는 종신 노예로 판결하였다. 심지어 어떤 자에 대해서는 사형까지 선고하였다. 1509년부터 1547년까지의 기간에 이렇게 비참히 죽은 사람이 7만 2천 명에 달하였다. 맨주먹밖에 없는, 농민들은 하는 수 없이 수공업 공장에 고용 노동자로 들어가 자본가의 착취를 받게되었다.
16세기부터 영국은 대서양 항로의 중심에 위치한 우월한 조건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대외 무역을 발전시켰으며, 식민주의적 활동을 진행하여 식민지 약탈을 감행하였다. 영국 자본주의는 발전되었다. 이런 발전은 농민들의 토지를 잔혹하게 빼앗고 식민지를 야만적으로 약탈하는 것을 통하여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은 머리끝으로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다≫(마르크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산 계급 문화의 흥성
서유럽은 봉건 사회에 들어선 후 문화의 저조기를 경과하였다. 봉건 제도의 주요한 기등으로 되어 있던 천주교회는 사회의 모든 지식, 교육을 독점했을 뿐만 아니라, 또 봉건 신학으로 사람들의 사상을 통치하였다. 당시 유일한 지식 계층이었던 승려들은 대다수가 우매하고 무지하였다. 이를테면 승려들은, 원판처럼 생긴 대지는 주위가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그 중심이 바로 자기들의 성지인 예루살렘이며, 큰 기등 넷에 떠받들려 있는 하늘은 아치형으로 된 것이라고 우겨댔다. 그때에 일반 인민들은 교육받을 권리를 완전히 박탈당하였고, 그들의 지혜와 창조력도 엄중한 속박을 받았다. 11세기 말엽부터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나라들에는 일부 대학들이 속속 건립되었다. 교회는 학교에 대한 영도권을 통제하려고 학교에서 교회의 신조를 선전하고 과학을 연구하는 것을 압제하였다.
유럽봉건 사회내에서 자본주의가 싹트고 발전함에 따라 신흥 자산계급에게는 원료의 성능을 이해하고 생산 도구를 혁신하며, 생산 기술의 이론과 실천에 통달할 것과 시장을 개척하고 운수를 개진할 것들이 요구되었다. 때문에 자연과학과 지리학에 많은 과제를 제기하였다. 동시에 그들에게는 공업, 상업, 은행을 경영하는 데 능숙한 일꾼들이 요구되었고, 저들을 위하여 복무할 의사, 교원, 법학가들이 요구되었다. 또 자기들의 현실 생활을 풍부히 하기 위하여 건축가, 화가, 조각가, 작가, 시인, 음악가들이 요구되었다. 이 모든 것을 실현하자면 무엇보다 먼저 의식형태 영역에서의 교회의 정신적 통치와 봉건적 신학을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할 것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조건하에서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기간에 자본주의가 가장 일찍 싹튼 이탈리아에서 자산 계급 문화의 새 조류가 먼저 나타났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배출되어 나와, 여러 면에서 봉건 교회의 속박을 돌파하고 자산 계급적인 인문주의 세계관을 세웠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신을 중심으로 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일체를 고찰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개성을 발전시킬 것을 강조하고, 신권을 반대한 것이다. 그들은 봉건적 신학을 반대하는 데 있어서 고대의 그리이스, 로마의 고전 문화를 준거로 삼았다. 당시의 사람들로 볼 때는 그런 신문화가 마치도 고전 문화, 특히는 그리이스 문화가 근 1,000년 동안 교회의 압박을 받은 후에 부흥한 것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새로 일어난 이 문화 운동을 ≪문예 부흥(르네상스)≫이라고 부당하게 불렀다. 기실 그것은 고전 문화의 부흥인 것이 아니라. 자산 계급 문화의 흥성인 것이다.
이러한 신문화는 자산 계급 개인주의를 출발점으로 하고, 자산 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복무하며, 자산 계급의 낙인을 깊이 찍어놓았다. 그러나 신문화는 봉건적 신학의 질곡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 사람들의 안목을 넓혀 주었고,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탐색하고 새 것을 창조하도록 고무하였다. 때문에 그것은 사상 문화영역에서의 한 차례의 위대한 변혁으로서 거대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문예 부흥≫운동 중에서 저명한 예술가, 문학가, 과학자, 사상가들이 수많이 나타났다.
플로렌스의 시인 단테 아리그리(1265~1321년)는 이탈리아 문예 부홍의 선구자였다. 그의 가장 저명한 작품 ≪신곡(神曲)≫은 ≪지옥≫, 연옥(煉獄), ≪천당≫ 등 세 편으로 되어 있다. 이 시편에서 작자는 교회의 표준에 의거하지 않고 자기의 애증에 근거하여 역사상의 일부 인물과 당시의 인물들을 각각 ≪지옥≫ 또는 ≪천당≫에 배치하였는데, 많은 주교와 승려들을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받고 있다고 썼는가 하면 심지어 ≪지옥≫에서는 당시의 교황을 태워 버릴 불구덩이에 자리를 하나 남겨놓고 있다고까지 하였다. 그는 또 그가 존경하는 일부 역사 인물들은 ≪천당≫에 가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리라고 상상하였다.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년)는 ≪문예 부흥≫시기의 또 하나의 저명한 인물이었다. 위대한 화가 다 빈치의 대표작으로는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가 있다. 그림≪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한 차례의 만찬을 하는 것이었는데, 음식상을 마주한 제자들은 ≪너희들 중에 나를 팔려는 사람이 있다≫고 한 예수의 말을 듣고 삽시에 저마다 마음의 움직임을 표면에 드러내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분개하고, 어떤 사람은 비탄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마음의 청백을 나타내느라고 애썼다. 오직 유다만이 깜짝 놀라 손에 전대를 쥔 채 얼굴색이 흙빛이 되어 반역자의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한 폭의 그림은 비록 종교 이야기에서 취재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물의 배치가 짜임새 있고, 색채가 조화된 생동한 인물들을 그려냈던 것이다.
≪모나리자≫는 플로렌스의 한 부유한 여시민의 화상인데 인물의 표정이 정숙하고 태연하고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청춘의 활력을 나타내고있었다. 그는 회화의 예술적 법칙을 더듬어내기 위하여 해부학, 광학과 역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자연을 정복하는 길을 부단히 탐색하여 생리학, 물리학, 수학, 지질학. 천문학 등을 통달함으로써 학식이 높은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 되었다. 그는 연구 사없을 실험에 기초하고 종교적인 무단과 억측을 버렸다. 그는 교회의 금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체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하여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였다. 다 빈치는 한평생을 부지런히 사업하였으며, 보존된 원고는 대략 6,000페이지나 되었다.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문예 부흥≫운동은 15세기 후반기에 유럽의 기타 일부 국가들에 확대되었으며, 16세기에 고조를 이루었다. 영국의 대극작가이며 시인인 셰익스피어(1564~1616년)는 걸출한 대표자이다.
그는 37편의 극본과 많은 시를 썼다. 극본에는 연극, 이를테면 ≪열두번째 밤≫등이 포괄되고, 비극으로는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율리우스 케사르≫등이 있으며, 역사극으로는 ≪헨리 5세≫(위의 두 사람은 로마독재자 케사르와 백년전쟁 시기의 영국왕 헨리 5세를 가리킨다) 등이 있다. 그의 작품 속에는 봉건적 분열에 대한 증오, 사람들의 재능과 지혜에 대한 찬미, 탐욕과 사리 사욕에 대한 저주가 충만되어 있으며, 현실 사회에서의 사람들의 사상과 감정이 진실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극본은 그 정절(플롯)들이 생동하고 언어들이 우미한 것으로 하여 세계의 진귀한 문학유산이 되었다.
인간의 사상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대에 새로운 생산력의 발전을 요구하고, 봉건 교회의 ≪우민 정책≫을 반대하여 투쟁하는 가운데서 근대의 자연과학이 탄생되었다.
폴란드의 과학자 니콜라이 코페르니쿠스(1473~1543년)는 천체에 대한 장기적인 관찰과 연구를 거쳐 지구가 자전하면서 다른 행성과 함께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가 제기한 태양중심설은 기독교회가 지지하는 지구중심설을 뒤엎어놓았다. 코페르니쿠스는 교회의 박해를 회피하기 위하여 태양계 학설을 자기의 죽음에 임박해서야 겨우 발표하였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사상가이며 과학자인 죠르다노 부르노(1548~1600년)는 코페르니쿠스 학설을 가일층 발전시켜 대자연은 한계가 없으므로 태양도 우주의 절대적인 중심이 아피라고 인정하였다. 부르노는 사람의 잠재력이 크다는 것을 믿고 사람의 ≪지능은 이미 인식한 진리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지 못한 진리를 향하여 영원히 전진한다≫고 제기하였다. 그의 관점이 교회의 주장과 충돌되었으므로 교회는 그를 체포하여 7년간 감금하였다.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최후에 교회는 로마에서 그를 불에 태워 죽였다. 후에 독일 천문학자 요한 케플러(1571~1630년)는 다년간의 관찰과 연구에 근거하여 행성은 타원형의 궤도를 따라 태양을 둘러싸고 운행하는데, 행성의 거리가 태양과 가까울수록 운동은 더욱 빨라진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1564~1642년)는 처음으로 천체 망원경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넓은 하늘의 별들을 관찰하였다. 그는 달표면에 산골짜기가 있으며, 금성은 태양을 둘러싸고 운행하며, 목성에는 4개의 위성이 있고, 은하는 무수한 항성계로 이루어졌다는 것 등등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새로운 발견은 최후에 새 천문학설의 정확성을 증명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자본주의 생산의 최초의 맹아는 어느 곳에서 출현되었는가? 그 징표는 무엇인가?
2. 본문의 내용과 지도에 근거하여 새 항로를 탐색한 인물들의 이름, 시간, 경과한 주요 지구, 도착한 지점 등을 도표로 말하라.
3. 새 항로가 개척된 후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는 각각 어떤 나라들을 침점하였는가?
4. 16세기 초엽에 독일 사회의 계급 모순은 어떠하였으며, 이런 모순은 어떤 개혁과 혁명을 초래했는가?
5. 16세기에 영국 자본주의는 어떻게 발전하였는가? 사실에 근거하여 피비린 영국 자본주의 발전의 성격을 말하라.
6. 유럽 문예 부흥 운동은 어떤 조건 하에서 일어났으며, 그 성격은 어떠한지에 대해 토론해 보자.
7. 문예 부흥 시기 저명한 문학가, 예술가들은 누구누구이며, 그들은 어떤 특출한 성과를 달성하였는가?
8. 16, 17세기의 과학자를 말하고 천문학에 대한 그들의 위대한 공헌을 말하라.






근대편







제1장 영국 자산 계급


스튜어트왕조의 전제와 사회 모순의 격화
1603년에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가 죽었으나 그를 계승할 직계 친척이 없었다. 그의 먼 친척인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가 영국의 왕으로 되었고, 제임스 1세 (1603~1625년)라고 칭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에서 스튜어트 왕조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줄곧 ≪임금의 권리는 신이 주었다≫고 믿어온 제임스 1세는 독단 독행하기를 좋아하였으며, 군권을 제한하는 그 어떤 일이든지 모두 오류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의회(영국 의회는 13세기에 출현하였는데, 상원, 하원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처음에 상원은 세습 귀족과 고급 승려들에게 장악되고, 하원의 의원들은 주로 지주들 가운데서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17세기 상반기에는 400~500여 명의 하원 의원들 중에서 절대 다수가 자산 계급과 신귀족의 대표들이었다.)는 오래전부터 저들의 동의가 없이는 법률을 제정할수도 폐지할 수도 없고, 세금을 징수할 수도 없다는 하나의 전통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제임스 1세와 의회 사이의 관계는 아주 긴장되었다. 스튜어트 왕조가 영국을 통치하기 시작할 때 영국은 아직 봉건적인 농업국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이 이미 비교적 크게 발전되고있었다. 모방직 공업은 전국적인 공업으로 되었다. 전국의 여러 도시, 심지어 제일 작은 농촌에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나사를 짜내는 업에 종사하였다. 이밖에 제철, 조선, 유리 제조, 화약 제조, 제지 등 공업도 빨리 발전하여 많은 수공업 공장이 일어섰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자산 계급의 역량이 성장하였다.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스튜어트 왕조의 전제 통치는 영국 자본주의의 가일층의 발전을 몹시 저해했다.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서 찰스 1세(1625~1649년 재위)가 국왕으로 되었는데, 그도 여전히 독단 독행하였다. 그는 자기가 마음대로 세금을 징수하는 데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 의회를 여러 차례나 해산시켰으며, 심지어 1629년부터 1640년 사이에는 의회도 열지 않고 의회가 없는 통치를 실시하였다. 왕실의 생활은 그지없이 호화로왔다. 국왕은 여러 가지 가렴잡세를 징수하고 근로 인민들을 압박하고 착취하였다. 또 비누, 소금, 술, 석탄, 철 등의 전매권을 독점하고, 그것을 팔아서 거액의 금전을 수탈하였다. 그리하여 생산과 무역이 혼란에 빠지고 상공업이 불경기에 처하게 되었으며, 대량의 노동자들이 실업당하고 광범한 근로 인민들이 살 길이 없게 되었다. 영국 사회의 각종 모순은 급속히 격화되었다. 농민들은 울치기 운동을 반대하고 봉건적 압박을 반대하면서 지대를 취소하고 토지를 달라는 요구를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농민 혁명 운동이 세차게 일어났다. 도시 평민들과 실직당한 수공업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늘 봉기를 일으켰다. 인민 혁명 운동의 추동하에서 자산 계급과 신귀족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서로 동맹을 맺고 봉건 통치를 반대하는 대열에 참가한 동시에 운동에 대한 영도권을 얻었다.





혁명 전쟁
자산 계급 혁명 형세가 성숙되어 가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 인민들이 먼저 봉기를 일으켜 찰스 1세의 전제 통치에 반항하였다. 봉기자들은 변경을 넘어 잉글랜드 북부에 들어갔다. 스코틀랜드 인민들의 봉기는 영국 자산 계급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찰스 1세는 군사비를 긁어 모으고 봉기를 탄압하기 위하여 1640년에 장기간 문을 닫았던 의회의 문을 할 수 없이 다시 열었다. 새 의회에서는 자산 계급과 신귀족들이 반대파를 모아가지고 봉건 세력을 대표한 국왕을 반대하여 투쟁하였으므로 인민 군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새 의회는 국왕과 대신들의 활동을 감독하며 국왕의 전매권을 취소하였고, 의회의 동의가 없이 마음대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불법행위라고 선포하는 것으로 왕권의 제한을 요구하였다. 자기의 전제 권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은 찰스 1세는 1642년에 의회의 반대파 대표 인물들을 체포하려고 군대를 거느리고 의회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반대파 대표 인물들이 벌써 런던 시민들의 엄호를 받아 피신하였기 때문에 그는 허탕을 치고 말았다. 런던 시민들의 이 행동은 국왕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반영하였으며, 런던 부근의 농민들도 반대파를 성원하였다. 수공업자(장인), 직인과 도제들로 조직된 민병들이 의회를 보호하였기 때문에 며칠이 지난 후 찰스 1세와 그의 추종자들은 런던에서 도망하여 봉건 세력이 비교적 강한 서부와 북부에 가서 반동 역량을 긁어모았다. 그해 8월에 그는 ≪의회에 대한 토벌≫을 선포하고 국내 전쟁을 도발하였다.
국내 전쟁 초기에 의회측의 지도자들이 국왕과 화의하려는 환상을 가지고 과단성 없이 망설인 탓으로 군사상 불리한 형세가 조성되었다. 의회군은 싸움에서 연속 패전하고, 국왕군이 런던에 바싹 죄어 들었다. 국왕군은 1643년 여름에 삼면으로부터 런던을 위협하였다. 런던의 수공업자와 빈민들은 일어나 수도를 보위하고 국왕군의 공세를 막아내었다. 이와 동시에 동부의 자작농들이 자율적으로 기병대를 조직하여 가지고 측면으로부터 국왕군을 공격하여 런던에 대한 그들의 압력을 경감시켰다. 1644년 7월에 마스톤 초원의 전역에서 크롬웰이 지휘한 기병들이 용감히 싸워 중대한 승리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싸우던 의회군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마스톤 초원에서 얻은 승리의 과실은 거와 다 없어지고 말았다. 인민 군중들의 강렬한 요구에 의회는 군대를 재편성하고 과단성 있는 장수를 선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645년 초에 의회는 군대를 재편성할 결의를 채택하였다. 새로 편성된 이 군대를 ≪신모범군(New Mudel Army)≫이라고 하였다.
≪신모범군≫은 한 갈래의 정규적인 통일된 군대로서 10개의 기병 연대, 12개의 보병 연대 도합 2만여 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병사는 자영농을 위주로 하구 그 외에 수공업자, 도제와 직인들을 포괄하였다. ≪신모범군≫은 규율이 엄격하고 싸움에 용감하고 지휘가 통일되어 건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신모범군≫의 영도권은 실제상 신귀족인 크롬웰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올리버 크롬웰(1599~1658년)은 신귀족 출신으로서 1640년에 신귀족을 대표하여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최초에 그는 혁명에 참가하려 하지않고 단지 국왕에게 일부 개혁을 진행할 것만 요구하였다. 1642년에 국내전쟁이 폭발된 후에야 자기가 모집한 자영농으로 구성된 60명의 기병부대를 거느리고 의회군의 작전에 참가하였다. 혁명 전쟁 가운데서 크롬웰은 영국 자산 계급과 신귀족의 지도자로 되었다.
크롬웰은 새로 편성된 군대를 거느리고 연속 국왕군을 격파하였는데, 1645년 6월에는 네스비 전투에서 국왕군의 주력을 격파하였다. 국왕은 1646년 5월에 스코틀랜드에 도망하였다가 후에 의회군에 의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리하여 제1차 국내 전쟁은 종말을 고하였다.
그러나 자산 계급은 인민들의 선혈로 탈취한 숭리의 결실을 독점하려고 시도하였다. 의회는 왕실의 토지를 경매하는 방법으로 대부분의 토지를 자산 계급과 신귀족들의 손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의회는 국왕에 대한 지주의 납세 의무를 폐지하였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지주에게 지대를 납부해야 했다. 인민들은 이런 조치에 큰 불만을 품고 일어나 반대하였다. 혁명 진영 내부에서 의회와 군대와의 투쟁이 벌어졌다. 찰스 1세는 이 기회를 타서 도망하여 졸개들을 긁어모아 가지고 다시 돌아와 제2차 국내 전쟁을 일으켰다. 대적 앞에서 혁명 역량은 연합하여 재빨리 국왕군을 쳐부수고 다시금 찰스 1세를 포로로 하고 내전을 종말지었다.
1649년 1월에 찰스 1세는 폭군, 반역자, 살인범, 인민의 공동의 원수라는 죄명으로 현장에 끌려나가 사형당하였다. 그해 5월에 영국은 공화국 즉 자산 계급과 신귀족들이 독재하는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찰스 1세를 사형에 처한 것은 전적으로 인민 대중들의 공로였다. 엥겔스가 말한 바와 같이 ≪만약 이러한 자영농과 도시 평민들이 없이 자산 계급만으로는 절대로 이 싸움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찰스 1세를 절대로 단두대에 올리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크롬웰의 독재 통치
공화국이 창건된 후 대권을 틀어쥔 크롬웰은 사실상 군사 독재자로 되었다. 그는 자산 계급과 신귀족들이 이미 얻은 이익만 극력 수호하고, 인민들의 생사에 대해서는 조금도 돌보지 않았다. 심지어 총끝을 돌려 인민들을 적으로 삼고 국내에서 디거스(땅파는 자)운동을 탄압하였으며, 또 군사를 풀어 아일랜드에 대한 ≪원정≫을 진행하였다.
디거스 운동은 가난한 인민들이 혁명을 계속 진행시키려 한 일종의 표현이었다. 이 운동은 1649년 봄에 런던 부근의 센트죠지산에서의 황무지 개간 문제를 발단으로 하여 가난한 농민들이 일으킨 운동으로서 신속히 많은 지방에 파급되었다. 디거스 운동은 왕권을 폐지한 후에도 인민들이 여전히 압박받고 있는 현실을 폭로하였으며, 토지 사유제를 폐지하여야 하며 사람마다 평등하여야 한다는 정치 주장을 제기하였다. 디거스운동에 대한 크롬웰의 탄압은 자산 계급의 반인민적인 일면을 충분히 폭로하였다.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의 통치와 압박을 받아왔다. 아일랜드 인민들은 영국 국내 전쟁이 폭발한 기회를 타서 민족 봉기를 일으켰다. 1649년 가을부터 이듬해 5월까지 크롬웰이 영솔한 영국 군대는 아일랜드에 가서 봉기를 탄압하고, 아일랜드 인민에 대하여 피비린 학살을 감행하였으며, 아일랜드의 3분의 2 이상의 토지를 강점하였다. 크롬웰과 그의 부하들인 고급 군관 및 많은 영국 상인들과 신귀족들은 모두 아일랜드의 대지주로 되었다. 이들은 아일랜드에서 영국의 통치를 수호하는 지주계층을 이루었다.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토지를 잃었으며 또한 학살당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핍박에 못 이겨 북아메리카에 가서 고역살이를 하였고, 다른 나라에 가서 유랑 생활을 하였다. 그리하여 1641년에 약 150만 명이었던 아일랜드의 인구가 1652년에 이르러서는 85만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1653년에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시키고 ≪호국경(護國卿)≫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육해군을 장악하고 재정과 사법을 통제하였으며, 외교를 주관함으로써 자산 계급과 신귀족들의 통치를 수호하는 ≪보검≫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권은 인민의 이익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인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보검≫도 날이 무디어 봉건적 복고 세력의 진공을 막아낼 수 없었다. 1658년에 크롬웰은 병으로 죽었다. 그후 고위군관들의 권력 다툼으로 하여 호국경 정부는 위급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울치기운동을 반대하는 동부 지구 농민들의 투쟁이 다시 앙양되었으며, 병사들 속에서도 새로운 봉기가 준비되고 있었다. 자산 계급과 신귀족들은 복고를 시도하는 스튜어트 왕조와 결탁하여 인민 대중들의 혁명운동에 대처할 협의를 달성하였다. 1660년 5월에 자산 계급과 신귀족들은 프랑스에 망명하였던 찰스 2세를 데려다 영국의 국왕으로 올려앉혔다. 이리하여 스튜어트 왕조는 복고되었다.





영국에서의 자산 계급과 신귀족 통치 지위의 확립
프랑스로 도망쳤던 찰스 2세는 영국으로 돌아오던 중에 네덜란드에서 성명을 발표하여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종교 자유를 실시하며 혁명 기간에 개혁된 재정 소유권을 그대로 두겠다고 표명하였다. 망명 생활 속에서 교훈을 섭취하게된 찰스 2세는 ≪다시는 지난날에 자기가 겪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표명하였다. 그러나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왕당파들은 백정의 칼을 휘둘러 혁명파들을 대량으로 학살하였다. 왕당파들은 찰스 1세를 사형하는 데 참가하였던 많은 사람들을 죄다 사형에 처하고 심지어는 크롬웰의 시체까지 무덤에서 파내어 교수대에 매달았다. 복고된 왕조는 자기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혁명 시기에 몰수했던 모든 토지와 아직 팔지 않은 봉건 지주들의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이미 판 것은 국가에서 원주인에게 경제적으로 배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에 필요한 거액의 금액은 전적으로 인민들에게서 긁어낸 세금으로 지불하였다. 그리하여 가렴 잡세가 한없이 많아졌다. 심지어 밥을 짓는데도 ≪부엌세≫ 또는 ≪가마세≫를 바쳐야만 되었다.
1685년에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 2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프랑스에 의지하고, 대내적으로는 봉건 제도를 복구하는 반동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는 인민들의 이익을 해쳤을 뿐더러 자산 계급과 신귀족들의 이익도 해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영국 자산 계급과신귀족들은 이미 인민을 이탈하였고 또 인민과 강대한 인민 혁명 운동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봉건 귀족과 타협하고 결합하여 1688년 6월에 궁정정변을 일으키고, 영국 국왕 제임스 2세의 사위이며 네덜란드의 집정자인 월리엄을 영국의 국왕으로 요청하였다. 그해 11월에 윌리엄이 거느린 군대가 영국에 상륙하자 고립 무원의 처지에 빠진 제임스 2세는 황급히 프랑스로 도망쳤다.
군주의 권리를 제한하기 위하여 영국 의회는 1689년에 ≪권리장전≫을 채택하였다. 이는 영국 정치사에서의 중요한 문헌의 하나였다. ≪권리장전≫은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국왕에게는 법률을 폐지하거나 법률의 집행을 정지시킬 권리가 없으며, 의회의 동의가 없이 국왕은 세금을 징수할 수 없고, 평화 시기에 상비군을 둘 수 없으며, 의회는 정기적으로 소집하며, 의회 의원의 선거는 국왕의 간섭을 받지 않고, 의회 의원들은 의회에서 활동할 자유가 있다는 것 등등이었다. ≪권리장전≫은 왕권을 제한하도록 헌법으로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근 반세기 동안의 반복적인 투쟁을 거쳐 영국에서 끝내 입헌군주제의 자산 계급 독재가 확립되었다.
영국 자산 계급 혁명은 인류 역사에서 봉건 제도에 대한 자본주의제도의 한 차례의 중대한 숭리이며 ≪봉건적 소유에 대한 자산 계급적소유의 승리이다.≫(엥겔스) 이 혁명은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위하여 길을 닦았으며 생산력의 발전을 크게 추진시켰다. 그리고 이 혁명에 의하여 건립된 자본주의 제도는 봉건 제도에 비해서 인류 역사에서의 또 한 차례의 중대한 진보였다. 그러나 이 혁명은 결국 한 착취 제도가 다른 한 착취 제도를 교체한 혁명이었다. 봉건 제도의 쇠사슬은 부숴졌으나 자본주의의 쇠사슬이 다시금 인민들의 머리 위에 들씌워졌다. 영국 자산 계급의 통치는 몇 차례의 반복을 거쳐서야 비로소 확립되었다. 그러나 겉보기에 강대한 듯한 봉건 세력으로서는 이 역사적 추세를 막아낼 수 없었다. 영국 자산 계급 혁명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성세 호대한 자산 계급 혁명 운동의 서막을 열어 놓았다. 그러므로 이 혁명은 세계적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 근대사의 시작을 표시하고 있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왜 제임스 1세와 의회와와 관계는 긴장되었는가?
2. 이 장에 관련되는 역사적 사실과 결합하여 크롬웰에 대한 견해를 말해보자.
3. ≪권리장전≫에는 어떤 중요한 내용들이 있는가? ≪입헌군주제≫란 무엇인가?
4. ≪신모범군≫, 디거스 운동을 설명해 보자.





제2장 17~18세기의 러시아






봉건 농노제 러시아의 흥성
근대의 러시아는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인근 국가들이 통합되어 점차 형성된 것이다. 15세기 중엽까지만하여도 러시아는 몽고 킵차크칸국(칭키스칸의 통치하에 있은 칸국으로서 중국 사서에서는 ≪친차칸국≫이라고 하였다)의 통치하에 있은 봉건속국의 하나로서 그 영토가 모스크바주와 그 주위의 지구를 포괄했을 뿐이었다. 1480년에 이르러서야 러시아는 몽고인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하였으며, 그후 반세기 남짓한 기간의 합병을 거쳐 영토를 부단히 확대하였고, 점차 통일된 중앙 집권적 봉건 국가로 되었다. 1547년에 모스크바대공 이반 4세는 자신을 짜르(짜르는 러시아 황제의 칭호이다)라 칭하였다.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기간에 서유럽에서 자본주의가 계속 발전하고 있을 때, 러시아는 여전히 농노제가 성행하고 있던 낙후한 봉건 국가였다. 농노들은 러시아 봉건 사회의 최하층으로서 가혹한 착취를 받았기 때문에 그 생활이 극히 곤란하였다. 그들은 황실, 귀족, 지주들에게 예속되어 농사를 지어 주고, 곡식을 거두어 주고, 연못을 깨끗이 해주고, 집을 지어 주는 등 고된 부역을 하였다. 농노들은 자기가 생산한 농산물을 짜르 정부에 바치는 외에도 막중한 가렴 잡세를 바쳐야 했다. 17세기부터 모스크바, 뚤라 등지에 제철, 유리 제조, 제지, 제혁 등 공장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런 공장들에서는 주로 농노 노동을 썼기 때문에 농노제의 낙인이 매우 깊이 찍혀 있었으며, 따라서 그 당시 러시아의 공장제 수공업은 서유럽의 일부 국가들보다 낙후하였으므로 화약, 무기와 같은 많은 중요한 군수품들은 모두 외국에서 수입하였다.
1682년에 나이어린 뾰뜨르가 왕위에 올랐는데 뾰뜨르 1세(1682~1725년, 뾰뜨르 대제라고도 부른다)라고 불렀다. 그는 1689년부터 자기가 직접 대권을 틀어쥐었다. 신체가 건장하고 아주 정력적인 뾰뜨르 1세는 성격이 난폭하여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에 대하여서는 잔혹하고 무자비하였다. 그러나 이상이 크고 일처리에 과단성 있는 그는 하루 속히 러시아의 낙후된 상태를 개변시키려 하였다. 서유럽의 기술을 흠모한 그는 직접변장하고 네덜란드와 영국에 가서 그곳의 공장과 조선 공장에 들어가 널리 시찰하였으며, 돌아올 때에는 많은 학자, 장인과 기사들을 데리고 왔다. 뾰뜨르 1세는 대외에 대찬 영토 팽창 야심을 실현하고 러시아를 군사적 강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통치를 강화하고 군사력을 확충하고 경제를 발전시킬 개혁 사업을 진행하였다. 뾰뜨르 1세는 서유럽의 본을 따서 해군을 건립 확대하고, 농호에 따라 징병하는 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서유럽에 사람을 파견하여 문화 기술을 학습하게 하는 한편, 군사 장비를 개진하였으며, 수공업 공장을 경영하는 것을 장려하고, 공장주가 전 장원의 농노를 사들이는 것을 허용하였기 때문에, 공장에서는 종신토록 일하는 노동력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가 낙후한 원인의 하나가 문화가 낙후하기 때문이라고 인정한 뾰뜨르 1세는 학교 교육을 보급하고, 10세부터 15세 사이의 귀족들의 자녀는 반드시 학습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심지어 생활 습관마저 서유럽처럼 하며 러시아 사람은 길다란 옷을 입지 말고 서유럽의 짧은 옷을 입으라고 요구하였다. 또 러시아 사람들이 길다랗게 기른 수염을 베어버리라고 강요하였다. 뾰뜨르 1세의 개혁은 경제의 발전을 추진하고, 군사력을 강화하고, 귀족 지주와 상인들의 국가를 공고히 함으로써 짜르 러시아의 가일층의 침략 팽창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창조하여 주었다.





짜르 러시아의 침략 팽창
짜르 러시아는 침략을 일삼은 국가였다. 역대의 짜르는 모두 끝없는 야심을 가지고 발광적으로 대외 침략과 팽창을 감행하여 방대한 러시아 제국을 건립하려고 시도하였다. 유럽에서 일찌기 16세기 중엽에 러시아는 벌써 볼가강 하류의 지구를 병합하고 볼가강 유역과 카스피해로 통하는 항로를 통제하였다. 17세기중엽에 러시아는 또 드네프르강 동쪽의 우크라이나를 병합하여 유럽에서 러시아의 판도를 급격히 확대하였다.
뾰뜨르 1세와 그의 계승자들은 한사코 ≪유럽으로 통하는 문≫을 열려고 계속 대외로 팽창하여 발틱해와 흑해 방면에서 바다로 나가는 항구를 점하려 했다.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짜르 러시아는 남방에서는 터어키와, 북방에서는 스웨덴과 간헐적인 전쟁을 오랫 동안 진행하였다.
그 당시 스웨덴은 북유럽의 강국으로서 발틱해의 광대한 지구를 통제하였다. 1700년에 뾰뜨르 1세는 발틱해 연안의 폴란드와 덴마아크 등의 국가도 연합하여 스웨덴에 대한 전쟁을 일으켰다. 이듬해에 스웨덴 군대들이 나르바에서 러시아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뾰뜨르 1세는 여전히 발틱해 방면에로의 팽창을 견지하였다.
1703년에 러시아는 스웨덴의 수중으로부터 네바강 어구의 땅을 빼앗음으로써 그들이 오랫동안 갈망해 오던 바다에로의 출구를 얻게 되었다.
≪유럽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놓기 위하여 뾰뜨르 1세는 네바강어구의 땅에 보루를 쌓고, 자기의 집 한채를 지었다. 뾰뜨르의 심복들도 이 집 옆에 자기들의 집을 지었다.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 뻬쩨르부르그는 바로 이렇게 그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10년간의 건설을 거쳐1712년에 이곳은 정식으로 러시아의 수도로 되었다. 수천 수만의 농노들은 새 수도를 건설하기 위하여 피땀을 흘렸으며 자기의 생명까지 바쳤던 것이다.
스웨덴에 대한 전쟁을 진행하면서부터 정세는 점차 러시아에 유리하게 변하였다. 1709년에 러시아 군대와 스웨덴 군대가 볼따바에서 싸움을 벌였는데, 러시아 군대가 결정적 승리를 달성하였다. 그후부터 스웨덴의 처지는 나날이 불리하여졌다. 1721년에 이르러 러시아와 스웨덴간의 전쟁이 종말될 때 러시아는 핀만의 일부 지방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발틱해 연안 지구를 빼앗았다.
러시아의 남방에서는 뾰뜨르 1세 때부터 터어키에 대한 전쟁을 거듭 일으키고 혹해로 통하는 문을 열어놓으려 하였다 뾰뜨르의 계승자들도 이 목적을 위하여 거듭되는 전쟁을 일으켰다. 18세기 중엽, 특히 에카테리나 2세 통치 시기(1752~1796년)에 러시아는 혹해 북안의 광대한 땅을 빼앗고, 흑해로 통하는 문을 열어 놓았다. 서부에서 에카테리나 2세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세 번 분할하여 폴란드의 넓은 영토를 강점하였다.
아시아에서 16세기 하반기에 짜르 정부는 사람을 파견하여 우랄산맥을 넘어 동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폭리에 눈이 어두운 피물상과 까자흐(≪까자흐≫란 어휘는 돌궐어에서 기원되었는데, 원래는 ≪자유인≫이라는 뜻이다. 15-17세기 때 러시아의 일부 농노들과 도시 빈민들이 봉건적 압박을 받지 않으려고 돈강 유역, 꾸반, 챠포로스 등의 지구로 도망쳤다. 그들을 까자흐라고 불렀다. 18세기로부터 까자흐는 러시아에서는 전문적으로 병역에 종사하는 계층으로 되었다. 짜르 정부에서는 늘 까자흐 부대를 이용하여 민족 해방 운동과 인민 혁명 투쟁을 탄압하였다.) 식민주의자들은 앞을 다투어 시베리아로 떠나갔으며, 짜르의 정규군들이 그 뒤를 따랐다. 짜르 러시아는 반세기 남짓한 동안에 오비강 유역, 예니쎄이강 유역과 레나강 유역에 침입하였다. 그들은 각 강 어구의 요충지에 보루를 쌓고 가일층 침략 팽창을 진행할 거점으로 삼았다. 1632년에 건설한 야꾸쯔크는 시베리아에서 침략팽창을 진행하는 중심지로 되었다. 그리하여 짜르 러시아는 광활하고 부유한 시베리아를 점령하였다. 17세기 중엽에 짜르 러시아 침략자들은 또 떼를 지어 야꾸쯔크로부터 중국의 내하인 혹룡강 유역에 침입하고 야크싸에 보루를 쌓았다. 그들은 심지어 송화강 유역에까지 기어들어 양식을 빼앗아갔다. 침범한 짜르 러시아 날강도들은 당지의 주민들과 청조 군대의 격렬한 반격을 받았다. 그들은 마땅한 징벌을 받고 중국의 영토에서 쫓겨났다.
흑룡강 유역은 예로부터 중국의 영토로서 8세기 전반기에 벌써 당조에서 이곳에 행정 기구를 설치하였다. 그후 역대의 왕조는 모두 이 지구를 줄곧 관할하여 왔다. 중국의 청조도 계속 이 지구에 대하여 주권을 행사하였다. 중국 군민은 완전히 자기의 영토를 보위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1685년에 청조 군대가 야크싸를 포위 공격하자 짜르 러시아 침략자들은 도망치고 투항하였다. 1689년에 중국과 러시아는 평등의 기초 위에서 중-러 ≪니부츠(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하여 중, 러 양국의 동쪽 경계는 외흥안령으로부터 바다까지, 고르비짜강과 어르군강을 경계로 한다고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흑룡강 유역 및 우수리강 유역과 고혈도(사할린섬)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은 다 중국의 영토라는 것을 법적으로 인정하였다. 두 세기 남짓한 동안의 침략 팽창을 거쳐 18세기 말기에 이르러서 러시아는 이미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대제국으로 되었다.





쁘가쵸브 봉기
뾰뜨르 1세의 개혁은 농노 제도를 건드리지 않고 도리어 농민들의 부담을 과중히 하였다. 뾰뜨르 1세의 계승자들은 농노제를 계속 강화하면서 대량의 토지를 농노와 함께 귀족과 충신들에게 하사하였으며, 또 농노를 예속시킬 수 있는 귀족 지주의 권리를 확인하고, 농노들은 지주가 마음대로 처벌을 하여도 제소하지 못한다는 법령을 발포하였다. 에카테리나 2세는 또 일련의 조서를 내려 지주들에게 이른바 ≪무례≫한 농민을 추방하여 사역을 시킬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그리하여 농노를 매매하는 것은 보편 현상으로 되었다. 심지어 농노를 파는 광고가 가축이나 잡물들을 파는 광고들과 함께 관변측 신문에 실리기까지 하였다. 쌀띠꼬와라는 여지주가 10년 동안에 농노를 학대하여 죽인 수는 약 140명에 달하기도 했다. 여왕 에카테리나 2세의 통치 시기에 토지가 비옥한 남방 지구에서는 지주가 농노들에게 매주 3일 이상씩 부역에 종사하도록 강요하였고, 토지가 척박한 북방 지구에서는 지주가 농노를 강제하여 받아들이는 대역세, 즉 부역 대신에 바치는 세금액을 이전보다 평균2배 이상 높였다.
가혹한 착취와 압박은 농노들의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기간에 농민 봉기가 연속 일어났다. 그중에서 가랑 규모가 큰 봉기는 1733년~1775년에 쁘가쵸브가 영도한 봉기였다. 예멜랴 쁘가쵸브는 돈강 유역의 치마비스크촌에서 성장하여 병역에 종사하였으며, 퇴역한 후 돈강과 볼가강 일대에서 유랑 생활을 하는 동안에 농민들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1773년 9월에 그는 농민대오를 집결시켜 가지고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군은 선언을 발포하여 농노제를 폐지하고, 귀족 지주를 처단하며,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인두세를 취소하여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볼가강과 우랄 지구의 여러 민족 근로 인민들은 이에 열렬히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봉기 대오는 부단히 성장하였다. 우랄 지구의 공장 노동자들은 봉기자들에게 대포와 기타 무기들을 공급하여 주었다. 연말에 이르러 봉기군들은 오렌부르그에서 짜르 군대를 격파하여 귀족 지주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1774년에 봉기군은 오렌부르그에서 북상하다가 서쪽으로 굽어들어 볼가강 유역의 요충지인 까잔을 점령하였다. 짜르 정부는 많은 군대를 이동시켜 봉기군을 막았다. 그들은 이 격전에서 중대한 댓가를 치르고서야 봉기군을 볼가강 하류의 짜리진 일대에로 물러나게 하였다. 그후 변절자의 고발로 쁘가쵸브는 짜르 정부에 체포되어 1775년 1월에 모스크바에서 사형당하였다. 그리하여 러시아 역사에서 규모가 가장 큰 이 농민 봉기는 실패하였다. 러시아 농노 제도는 여전히 광대한 농민을 예속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뾰뜨르 1세는 어떠한 군주인가? 그의 개혁의 주요한 내용은 무엇이며, 개혁의 목적은 무엇인가?
2. 쁘가쵸브 봉기의 발생 원인과 전개 과정을 토론해 보자.





제3장 식민지 패권 쟁탈을 위한 서유럽 식민주의 국가들의 투쟁






네덜란드의 흥성과 식민지 팽창
새 항로가 발견된 후의 한 세기 동안에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 광대한 식민지를 강점한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가장 부유한 식민주의 국가로 되었다. 16세기후반기에 이르러 그들의 식민주의 세력은 한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바로 이때 에스파니아의 속지인 네덜란드(네덜란드는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포괄하였는데, 16세기의 초엽에 에스파니아의 수중에 들어갔다)에서 독립 혁명이 폭발되어 그 북부에서 네덜란드가 독립국을 세웠다. 영국의 해적들은 해상에서 에스파니아가 식민지에서 약탈하여 오는 재물을 부단히 강탈하였다. 1588년에 에스파니아는 자기의 강대한 해군 ≪무적 함대≫를 파견하여 영국에 침입하려 하였다. 영국 해군은 이 함대를 소멸하였다. 이리하여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은 점차 식민주의 강국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새로 일어난 네덜란드는 17세기에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로 되었다. 네덜란드에는 선진적인 농업 기술과 젖소 목축업이 있었다.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모직업의 중요한 중심지였고, 견직업도 매우 발달하였다. 유럽에서 선박 건조업으로 이름난 네덜란드에서는 몇백 척의 배를 동시에 만들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먼 바다로 항해하는 수백 척의 상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선들을 ≪해상의 마차≫라고 불렀으며, 네덜란드인 역시 ≪해상의 마차부≫로 되었다. 네덜란드 상선들은 각국의 상품을 대리로운송하여 주고 그 속에서 어부지리를 보았다. 네덜란드 자본가들은 대량의 자본을 국외 무역에 투입하였다. 그리하여 네덜란드는 아주 빨리 식민지 약탈국의 대열에 들어섰다.
북아메리카에서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은 먼저 허드슨강 유역을 점령하고 이 강 어구에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하였다. 아프리카에서 그들은 남부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점령하였고, 또 서부 아프리카와 서인도 군도사이에서 흑인을 판매하는 죄악적 행위를 감행하였다. 아시아에서 그들은 포르투갈 식민주의자의 수중에서 향료가 많이 나는 몰루카군도를 빼앗았고, 쟈바도에 바다비아(지금의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이다)를 건설하였으며, 또 말라카와 스리랑카(쎄일론)를 점령하였다. 그자들은 또 중국의 영토 대만의 남부에 침입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중국 민족 영웅 정성공(鄭成功)에 의하여 쫓겨났다.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 팽창과 그들의 충돌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이 식민지를 강점하고 있을 때, 영국과 프랑스의 모험가들도 북아메리카에 가서 탐험하면서 식민지를 찾았다. 17세기부터 그들은 적극적으로 식민지 강탈 활동을 진행하여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광대한 지구를 점령하였다.
영국은 1607년부터 북아메리카에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4월에 3척의 영국 선박이 북아메리카에 도착하였다. 식민주의자들은 그곳에 정착하여 북아메리카에서 영국의 첫번째 식민지-버지니아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1620년에 한 무리의 영국인들이 본국의 정치박해를 도피하려고 ≪5월의 꽃(메이 플라워)≫호라는 배를 타고 북아메리카에 와서 보스톤을 중심으로 메사추세츠에 또 하나의 식민지를 건립하였다. 그후부터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 지구에 와서 속속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17세기 초엽에 프랑스 식민주의자들도 북아메리카의 땅에 들어섰다. 그들은 센트로렌스강 유역에 식민 거점을 세웠다. 그들은 인디안인들의 재부, 특히 피혁을 약탈하기 위하여서 남쪽으로 5대호 유역을 지나 오하이오강 유역에 진입하였다.
1682년에 프랑스 식민주의 탐험가들은 미시시피강을 따라 강 어구까지 남하하여 이 강의 유역을 프랑스 소유로 한다고 선포하고 루이지아나라고 칭하였다.
영국이 적극적으로 아시아 방면으로 팽창한 것은 1600년에 동인도회사를 세운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601년에 동인도회사의 선박들은 남양군도로부터 대량의 향료들을 실어다가 거액의 이윤을 얻었다. 영국은 아시아에 역량을 집중시켜 인도를 침략한 다음, 마두라스와 캘커타를 식민지 침략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동인도회사는 인도와 영국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거대한 재부와 권력을 탈취한 식민지 통치 기구로 되었다.
인도에 대한 영국 동인도회사의 침략이 극심화되고 있을 때, 프랑스 식민지주의자들도 인도와 와서 침략 거점을 세웠다. 18세기 중엽에 와서 프랑스는 인도의 남부를 거의 다 통제하였다.
서유럽 식민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확장은 그들간의 식민지 패권 쟁탈 전쟁을 초래하였다. 17세기 하반기에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는 세차례의 전쟁(1652-1654년, 1655~1667년, 1672~1674년)이 일어나 네덜란드의 식민주의 우세가 격파되었다. 북아메리카에서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뉴암스테르담을 탈취하여 뉴욕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뉴욕 식민지를 건립하였다. 18세기상반기에 이르러 영국은 북아메리카에서 이미 13개 식민지를 가지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식민지 팽창을 위한 충돌은 세계적 범위에서 일어났다. 북아메리카에서 영국의 식민주의 세력은 애팔래치아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팽창하려 하였고, 프랑스의 식민주의 세력은 캐나다를 근거지로 하여 남쪽으로 팽창하려 하였다. 인도에서도 영국과 프랑스는 다 자기의 침략 범위를 확대하려고 서로 날카롭게 맞섰기 때문에 충돌이 갈수록 치열하여졌다. 17세기 말엽부터 영국과 프랑스간에 유럽에서의 패권 지위와 세계에서의 식민지 패권을 쟁탈하기 위하여 시작된 전쟁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어 오다가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치열하여졌다. 여러 차례의 전쟁을 거쳐 영국은 캐나다와 미시시피강 동쪽의 광대한 지구를 탈취하였다. 인도에서 실패한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몇몇 작은 침략 거점을 보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인도에 대한 침략을 더욱 심화하였다. 그들은 먼저 방글라데시를 삼켜버렸다. 장기간의 식민주의 전쟁 중에서 영국은 해상 패권을 장악하고 광대한 식민지를 탈취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큰 식민주의 국가로 되었다.





식민주의의 죄악
고대의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인류 문명의 요람지로서 찬란한 문화와 발달한 생산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메리카의 고대주민 인디안인들도 자기의 문명을 창조하여 인류 사회의 발전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서유럽 식민주의자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 침입하여 당지 인민들에게 크나큰 재난을 가져다 주었으며, 빈곤과 낙후를 조성시켰다. 식민주의자들의 죄행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서유럽 식민주의자들은 허다한 지구에서 그곳의 원주민들에 대하여 야수적인 만행을 감행하였다. 예를 들면 아메리카에서 인디안인을 유린, 학살한 것과 같은 것이다. 서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처음 북아메리카에 나타났을 때, 그곳에는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인디안인이 살고 있었다. 식민주의자들은 인디안인들에게서 식량을 얻어먹었고, 또 옥수수 등 농작물의 재배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그들은 인디안인들의 이런 선의에 대하여 약탈과 학살로 대하였다.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인디안인을 참혹하게 소멸하였다. 라틴아메리카(미국 이남의 아메리카는 장기간 라틴어계의 국가인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의 통치를 받았는데, 라틴어계의 언어가 관변측 언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라틴아메리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에서 식민주의자들은 인종 소멸 정책을 실시하여 일부 지구의 인디안인들을 깡그리 소멸하였다. 그러나 광대한 지구의 인디안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어나 용감하게 반항하였다. 이를테면 페루, 볼리비아 등지에서는 규모가 굉장히 큰 무장 반항 투쟁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식민지에 대한 서유럽 식민주의자들의 야만적인 약탈은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예를 들면 1757년에 영국 식민군이 방글라데시의 수부(首府)를 침략할 때, 단번에 방글라데시 국고에서 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재부를 약탈하였다. 식민군 두목 클라이브 한 놈이 약탈한 것만 해도20만 파운드나 되었다. 후에 그는 영국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뻔뻔스럽게 말한다. ≪부유한 도시가 내 발 밑에 있었고, 강대한 국가가 내 손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내 앞에 금은 보화가 가득찬 보물고가 활짝 열려져있었는데, 나는 그 속에서 20만 파운드밖에 가지지 않았습니다. 여러 선생들, 지금까지 나는 자신을 의심합니다. 왜 그리도 사양하였던가를?≫ 라틴아메리카에서 300년 동안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은 10억 달러의 가치에 달하는 금은 보석을 약탈하였다.
서유럽 식민주의자들은 한 면으로는 인디안인들을 학살하고, 다른 한면으로는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붙잡아 아메리카에 실어다 노예로 팔았다. 16세기 초엽에 맨 첫패의 흑인들이 아프리카로부터 아이티에 실려갔다. 죄악적인 노예 무역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노예무역은 가장 창궐하였다.
서유럽에서 맨 처음 조직된 노예 장사꾼 조직인 ≪사냥대≫는 서아프리카의 세네갈강 어구로부터 니제르강 삼각주에 이르는 연해안에서 흑인을 사냥하였다. 번번이 흑인들의 반격을 받아 응당한 징벌을 받은 그들은 총, 화약, 담배, 술, 장식품 등을 당지의 종족 두목에게 뇌물로 주고 그들을 사주하여 내지를 습격하게 하고 종족간의 전쟁을 도발시킴으로써 흑인들을 붙잡으려는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붙잡은 흑인들을 연해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가 노예를 운반하는 배에 실어 아메리카에 가지고 가서 팔았다. 이렇게 붙잡고 파는 과정에서 수천수만의 흑인들은 머나먼 노정에서 더위를 먹어 죽었고, 비좁고 음침하고 고린내나는 배에 실은 식량과 음료수가 모자라 산 채로 바다에 버림받아 고기밥이 되었다. 추산에 의하면 이렇게 죽은 흑인수가 노예로 팔려간 수의 5배나 된다. 이렇게 되어 16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기간에 아프리카에서는 대략 1억에 달하는 건강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포르투갈인, 에스파니아인, 네덜란드, 프랑스인과 영국인들을 포괄한 유럽 노예 장사군들의 이득은 몇백 퍼센트의 고율에 달하였고, 수천수만의 흑인들의 백골더미는 그들의 손에 쥐어진 황금으로 변하였다. 영국의 리버풀 등지는 바로 이렇게 흑인을 실어다 노예로 파는 것으로 흥성하여졌던 것이다. 어느 측면으로 말하든지 식민주의란 모두 피비린 약탈을 의미한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몇 가지 실례를 들어 식민주의 죄악을 설명해 보자.






제4장 미국 독립 전쟁






독립 전쟁이 일어난 원인
1607년부터 1733년까지의 기간에 영국은 북아메리카 대서양 연안의 부유한 지구를 침략하고 전후하여 13개의 식민지를 건립하였다. 식민 조직자는 돈 있고 세도 있는 귀족들과 상인들이었다. 그들의 통치하에서 원래 북아메리카를 개척한 토착 주민들, 즉 인디안인들은 거의 모두가 소멸되었다. 유럽에서 이주하여 온 근로 인민들을 놓고 보면, 그 중 영국인이 대부분이고 그외에 아일랜드인, 독일인, 프랑스인, 네덜란드, 스웨덴인, 유태인 등이 있었다. 그들이 먼 바다를 건너 북아메리카에 온 것은 원래 봉건적 통치와 종교적 박해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는데, 도리어 영국의 식민주의 압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북아메리카는 그 무슨 ≪자유의 낙원≫인 것이 아니라, 계급적 착취와 인종적 압박이 심한 곳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온 혹인들은 혹심한 고통 속에 허덕이는 최하층에 처하여 있었다.
노동자, 농민, 흑인들이 100년간 개척한 결과, 북아메리카의 경제는 발전하였다. 북부의 식민지에서는 상공업이 발달하여 보스톤은 제일 큰 항구로 되었으며, 조선 공업이 흥성하여 1775년에 영국 국기를 달고 항해한 선박의 약 3분의 1이 보스톤에서 건조된 것이었으며, 어업, 방직업, 제철업, 목재 가공업 등 공업이 발전하여 그 생산품이 영국과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되었다. 중부의 식민지는 주요한 양식 산지였다. 남부에서 성행된 대농장 경제는 혹인 노예를 주요한 노동력으로 사용하였다. 생산한 담배, 인디고 등은 대량으로 영국에 실려갔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북아메리카에서 상당히 발전되어 자산 계급과 ≪혹인 노예의 노동에 의거하여 자기의 경제를 건립한 자본가≫(마르크스․엥겔스) 즉 농장주 계급이 형성되었다. 북아메리카 각 지방 사이에 경제적 교류가 빈번하여 초보적으로 통일적인 시장이 형성되었다. 1775년경에 주민은 약 250만(켐브리지근대사)에 달하였다 영어는 점차 통용어로 되었다. 통일된 아메리카 민족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영원히 자기의 원료 산지와 상품시장으로 만들기 위하여 북아메리카의 경제 발전을 애써 억제하였다. 영국 정부는 북아메리카에서의 일부 공업품 생산을 금지시켰으며, 광대한 지구를 독점하기 위하여 북아메리카 인민들의 애팔래치아산맥 서쪽에로의 이주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또 북아메리카 인민들에게서 계속 가렴잡세를 징수하였다.
18세기 60년대부터 북아메리카 인민들은 기세 드높이 일어나 영국의 압박 착취에 반항하였다. 격분한 군중들은 세금받는 영국 관리의 몸에다 콜타르칠을 하고 새털을 붙여가지고 거리로 끌고 다녔다. 도처에서 영국상품을 배척하고 또 영국으로부터 들어오는 허다한 상품의 예약을 취소하였다. 영국을 반대하는 ≪자유의 아들≫, ≪통신위원회≫와 같은 군중 조직들이 각지에 건립되었다. 각지의 통신위원회에서는 선전을 강화하여 북아메리카를 예속화하는 영국의 죄악을 폭로하는 동시에 민병들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갖추어 무장 투쟁을 벌일 준비를 하였다.
1773년에 동인도회사의 차(茶)를 북아메리카로 운반하여 가던 한 패의 영국 선박들이 보스톤 항구에 머물게 되었다. 그해 12월 중순에 50명의 변장한 보스톤 사람들이 차를 실은 배에 올라 300여 상자의 차를 바다에 처넣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보스톤의 차사건이다. 이 사건은 영국식민주의 통치에 반항하는 북아메리카 인민들의 투쟁이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영국 정부는 식민주의적 압박을 견지하면서 북아메리카에 증원병을 파견하고, 또 보스톤 항구를 봉쇄하여 대외 무역을 단절시켰다. 북아메리카 인민들에 대한 영국 정부의 계속되는 압박과 착취는 끝내 북아메리카의 독립 전쟁을 초래하였다.





독립 전쟁의 시작
보스톤 인민들은 영국 정부의 탄압에 굴하지 않았다. 북아메리카 각 식민지들에서는 봉쇄당한 보스톤 인민들에게 식량과 식료품을 보내 주었다. 공동으로 행동할 방법을 협상하기 위하여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대표들은 1774년 9월에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대륙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북아메리카 인민들에 대한 압제를 중지하라고 영국 국왕에게 호소하는 한편 영국과 경제적 내왕을 단절할 것을 결의하였다. 대회에서는 또 만약 영국 정부에서 대회의 호소를 거절한다면 재차 집회를 가지고 대책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영국 식민주의의 탄압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열기는 날로 높아졌지만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영국 정부에 환상을 품고 있었다. 한 자산 계급 민주파의 대표는 다음과 같이 대성 질호하였다. ≪사태는 더 완화할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들은 아직도 평화, 평화, 평화 하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그래 생명이 그처럼 고귀하고 평화가 그처럼 달콤하다 해서 예속당하고 쇠사슬에 얽매이는 것으로 그것을 바꿔와야 한단 말입니까?≫
1775년 봄에 보스톤에 주재하는 영국군 사령관은 보스톤 일대 민병들의 동향을 살폈고, 그곳 민병들도 영국 군대의 동정에 대하여 경각성을 높이고 있었다. 4월 18일 밤에 영국군 사령관은 약 800명의 영국 군대를 가만히 보스톤 서북 교외에 진출시켜 렉싱톤과 콩고드에 있는 민병의 비밀 화약고를 기습하려고 하였다. 영국 군대가 출발하자 영국 군대의 행동을 정찰하고 있던 한 민병이 즉시 보스톤 북쪽 교회당의 탑꼭대기에 초롱불을 걸었다. 민명이며 은세공 노동자인 폴 스웨빌은 초롱불을 보고즉시 말을 달려 연도의 민병들에게 알렸다. 민병들은 즉시 집합하여 대처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튿날 새벽에 영군은 렉싱톤에서 민병들과 조우하였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미국 독립 전쟁의 첫 포가 울렸다. 영군은 화약고를 파괴하였으나 숲속과 집 뒤에 매복하여 대기하고 있던 민병들의 맹공격을 받아 사상자 200여 명을 내고 뿔뿔이 도망쳤다. 렉싱톤 전투의 소식은 재빨리 전파되어 혁명의 불길이 곳곳에서 타올랐다. 그리하여 불과 몇 주일 동안에 북아메리카 식민지 정권은 봉기자들의 수중에 넘어왔다. 각지의 인민들은 앞을 다투어 무기를 들고 민병을 조직해 가지고 일어났다. 단시일내에 보스톤에는 2만 명에 달하는 민병들이 집결되었다. 각 식민지에서 모여든 대표들은 필라델피아에서 제2차 ≪대륙회의≫를 열었다. ≪대륙회의≫는 군대를 모집하고 외국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데 관한 명령을 내렸고, 보스톤에 모인 민병들을 대륙군으로 편성하는데 관한 결정을 내렸으며, 죠지 워싱톤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죠지 워싱톤(1732~1799년)은 버지니아주 대농장주의 가정출신으로서 대량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그곳 백만장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 북아메리카에서 영국이 프랑스와 진행한 식민지 쟁탈 전쟁에 참가한 것이 있어 약간의 군사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버지니아의 대표로 ≪대륙회의≫에 출석하였다.
대회에서는 그를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곧 북쪽에 있는 보스톤 부근의 진지에 가서 검을 들고 총사령관의 직무를 맡았다. 그는 굴함 없이 전투를 견지하였으므로 미국 독립 전쟁의 저명한 영도자로 되었다.
독립 전쟁의 총소리는 울렸으나 보수파들은 ≪대륙회의≫에서 영국과 타협하고 강화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농민, 노동자, 수공업자, 흑인, 병사 및 자산계급 민주파들은 독립하여 무력으로 영국 군대에 반격을 가할 것을 원하였다. 대륙군은 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1776년 3월에 대륙군은 영국 식민주의 군대를 보스톤에서 몰아내었다.





≪독립 선언≫의 발표와 독립 전쟁의 승리
1776년 초에 각 식민지는 급진적인 애국자들에 의하여 통제되었으며, 영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할것을 요구하는 소리는 날로 높아갔다. 제2차 ≪대륙회의≫에서는 제퍼슨, 프랭클린 등의 사람들에게 영국에서 이탈하는 선언을 기초하도록 하였고, 7월 4일에 자산 계급 민주파의 대표 인물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 선언≫(7월 4일은 후에 와서 미국의 건국일로 되었다)≫을 발포하였다. 선언은 영국국왕의 여러 가지 죄행들을 열거하고 나서 북아메리카 식민지는 ≪이로부터, 당연히 자유 독립의 합중국으로 되어야 하며 영국 국왕의 모든 예속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대브리튼 왕국과의 모든 정치적 관계를 이로부터 완전히 폐지한다≫고 장엄하게 선고하였다. 이것이 북아메리카 13개의식민지가 영국의 예속에서 벗어나 독립한 아메리카합중국을 정식으로 창건한다고 선포한 선언이다.
미국은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독립 전쟁의 승리를 달성하는 길은 아직도 멀고 힘들었다. 그때 미국은 인구가 300만도 못 되는 약소한 국가로서 인구가 많고 또 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영국을 대적하여야 하였다. 미국 군대는 제일 많을 때에도 2만~3만을 넘지 못했지만, 영국은 독립 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전후로 북아메리카에 9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파견하였다. 미국의 해군은 말할 여지조차 없었지만 영국은 세계에서 제일 강한 함대를 갖고 있었다. 미국 군대는 군용 물자가 부족하여 몇 사람이 총 한 자루를 같이 사용하였고, 겨울 행군시에는 신발조차 없어서 병사들이 꽁꽁 언 눈길을 맨발로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영국 침략군은 충분한 군수품을 갖고 있었다. 미국 인민들은 외적에 저항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내부에 숨어 있는 친영 분자들과도 투쟁하고 그들의 파괴 활동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민족 독립이라는 이 정의의 위업은 미국 인민들을 격려하였다. 그들은 고난을 박차고 약소한 역량으로 강대한 역량에 대항하면서 전투를 견지하여 끝내 실패를 승리로 발전시켰다.
영국 침략군은 처음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기세 등등해 하였다. 그들은 1775년 7월에 뉴욕을 점령하였고, 1776년 9월에 미국의 정치 중심지이며 대륙 회의의 소재지인 필라델피아를 점령하였다. 미국 군대는 뉴욕의 싸움에서 전군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되어 사태는 아주 험악하였다. 그러나 필라델피아가 함락된 후 한 달 동안에 그들은 허드슨강 협곡의 살라토카에서 북부 각지로부터 모여온 민병들과 합하여 남북으로 협공하여 5,000명의 영국 군대를 항복시키고 살라토카 전투의 대승리를 달성하였다.
살라토카 전투의 대승리는 미국 독립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미국 인민들은 필승의 신념을 더욱 굳게 다졌으며, 또한 프랑스, 네덜란드 등 나라의 군사적 원조를 받았다.
1778년부터 전쟁의 중심이 남부에 옮겨졌다 현지 민병들은 군대와 연합하여 성공적으로 유격전을 벌여 영국 침략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였다. 1781년에 미국과 프랑스의 연합군 1만 6천 명은 영국 군대를 버지니아의 요크에 몰아넣고 포위하였다. 프랑스 해군은 영국 군대의 해상퇴로를 차단하였다. 10월 19일에 당지의 영국군 사관령 컨왈리스가 자기의 보검을 워싱톤에게 바쳤고, 7,000명의 영국 군대가 무기를 놓고 투항하였다. 이때는 렉싱톤에서 첫 총소리가 울리고부터 실로 6년 6개월이란 시간이 지난 때였다. 1783년에 영-미 강화 조약을 맺고 영국은 아메리카합중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1775년~1783년에 미국 인민들은 혁명 전쟁을 거쳐 영국 식민주의 쇠사슬을 짓부수고 나라의 독립을 쟁취한 동시에 미국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의 길을 개척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혁명에 대하여 추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 이후 얼마 안 가서 프랑스에서 자산 계급 혁명이 일어났으며, 라틴아메리카에서도 기세 드높은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미국 연방 정부 건립
독립 전쟁을 거쳐 북아메리카에 있는 영국의 13개 식민지가 연합하여 독립한 아메리카합중국으로 되었고, 13개 식민지가 이 국가를 구성한 최초의 13개 주로 되었다. 독립한 후 미국은 식민주의의 쇠사슬에서 벗어나기는 하였지만 일련의 정치, 경제 문제에 부딪쳤고 사회도 불안정하였다. 이로 하여 지배 계층은 근심에 싸였다. 워싱톤은 일찍 ≪상부 구조가 곧 무너지게 되고‥‥‥우리를 그 폐허에 매몰할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부딪친 곤란을 극복하자면 미국 중앙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헌법제정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하였다.
1787년 5월에 로드아일랜드를 제외한 12개 주의 대표 56명이 필라델피아 독립청에 모여 헌법 초안 작성 문제를 토론하였다. 북부의 자산 계급대표나 남부의 농장 노예주나 모두 강력한 중앙 집권을 건립함으로써 저들의 통치 지반을 수호하고 공고히 하려 하였다. 회의에서는 큰 주와 작은 주 사이, 북방의 자산 계급과 남방의 농장 노예주 사이의 권력투쟁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목표가 일치하였으므로 곧 협의 달성하고 1787년에 미국 헌법을 채택하였다.
헌법 규정에 근거하여 국회는 입법 기구로서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되었다. 상원은 각 주에서 선거한 의원들로 구성되었는데, 큰 주나 작은 주를 물론하고 각각의 주에서 모두 2명씩 참가하였다. 상원의 임기는 6년이고 2년에 한번씩 총수의 3분의 1을 개선하였다. 하원은 각 주의 납세하는 인구 비례에 따라 정원을 확정한 다음, 각 주에서 선거하되 그 임기를 2년으로 하였다. 각 주에서는 인구를 계산할 때 인디안인을 계산하지 않았다. 그리고 혹인 노예에 대해서는 5분의 3을 인구로 환산하였다.
국가의 행정 대권은 대통령이 장악하였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며, 각 주에서 선거된 대통령 선거인단이 선거하였다. 대통령은 최고 행정장관이며, 무장 부대의 총사령관이었다. 대통령은 상원의 동의를 거쳐 장관, 외교 사절, 최고 법원 법관 및 정부의 기타 관리들을 임명할 권리가 있었다. 대통령은 또 의회에서 채택한 법안을 비준하거나 부결할 권리가 있었다.
사법권은 대법원에 집중되었다. 대법원 법관은 상원의 동의를 거친 후 대통령이 임명하며 독직자를 제외하고는 그 임기를 종신토록 하게 하였다. 대법원은 최고 재판권을 가졌고, 후에 와서 또 입법을 감독하고 헌법을 해석할 권력을 가졌다.
미국 헌법은 최초에 인민의 기본 권리를 규정하지 않았으나 후에 와서 보충해 넣었다. 미국 헌법은 초기에 인디안인이 납세하지 않는다는 구실아래 그들에게 공민권을 주지 않았고, 각 주에서는 인디안인을 인구에 넣어 계산하지 않았으며, 흑인 노예에 대해서는 5분의 3을 인구로 환산하였다. 이러한 것은 모두 그들에게 인종적 멸시의 낙인을 찍어놓은 것이다. 1787년 미국 헌법은 여러 번 보충하고 수정을 거쳤으며, 오늘도 계속 쓰이고 있다.
1787년 미국 헌법은 선후로 칵 주의 비준을 얻었다. 1789년 1월에 헌법에 근거하여 총선거를 진행하였는데, 워싱톤이 미국의 제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핸 4월에 워싱톤은 뉴욕(1777년에 뉴욕을 임시 수도로 정하였다. 연말에 수도를 필라델피아에 옮기고, 1801년에 수도를 정식으로 워싱톤에 옮겼다)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연방 정부를 조직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미국 독립 전쟁의 원인을 설명해 보자.
2. 미국에서 1787년 헌법을 제정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 보자. 1781년 헌법에는 어떤 중요한 내용들이 규정되어 있는가?





제5장 프랑스 자산 계급 혁명






제1절 자산 계급 혁명의 폭발

봉건 전제 제도의 위기
미국 독립 전쟁의 포소리가 멎자마자 프랑스에서 또 혁명 전쟁의 불길이 일어났다.
18세기 말엽에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의 자본주의 공업이 비교적 발달하였다. 리옹의 견직 공업은 6만여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어 유럽에서 첫번째로 꼽혔다. 로렌주의 한 야금 회사는 4개소의 용광로와 2개소의 주철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북부의 한 탄광 회사에서는 4,000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 고용 노동자가 50명 내지 100명이 되는 공장제 수공업도 적지 않았다. 대외 무역은 영국 다음으로 되었다. 주정, 포도주, 피륙, 복장, 가구 등을 유럽 각지에 수출되었다. 보르도, 마르세유, 르아브르 등은 이미 큰 통상 항구로 되었으며, 조선 공업이 비교적 발달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여전히 농업국이었다. 부르봉 왕조의 통치 아래서 봉건 제도가 여전히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봉건적동업조합은 공장제 수공업의 건립을 저해하였다. 각지에 수풀처럼 들어선 세관들이 그의 경계를 지나는 상품에 대하여 각종 세금을 징수하였고 국내 무역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전국의 도량형 제도도 혼란하였으며 관리들은 직권을 남용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쇠사슬마냥 자본주의의 가속화된 발전을 속박하였다.
봉건 신분제가 보존되어 있어 전국의 주민이 3개 신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승려가 제1 신분이고, 귀족이 제2신분이었으며, 그 밖의 사람들이 제3신분에 속하였다. 숭려와 귀족은 특권 계층으로서 광대한 토지를 점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납세의 의무도 부담하지 않았다. 교회가 매년 착취한 소득은 약 2억 4천만 리티움(리티움은 은전의 일종이다. 한 리티움의 무게는 5그람이었다)이나 되었는데, 그 대부분을 대주교, 주교, 수도원원장들이 점하였다. 대귀족들은 농민들을 압박 착취하는 외에도 국왕으로부터 대량의 상금을 받았다. 그들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군관으로 충당되어 남의 등을 쳐먹었다.
특권 계층의 상층 인물들은 베르사이유(베르사이유는 라리 서남쪽에 있는데, 화려한 궁전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국왕은 늘 이곳에서 살았다.)에 살면서 궁정에 드나들었다. 그들은 금은으로 장식을 한 화려한 비단옷 차림을 하고 화려한 꽃마차를 파고 다녔으며, 늘상 사냥을 하고 연회를 베풀었으며, 날마다 연극을 보고 춤을 추었다. 지배 계급은 저들의 호화스런 생활만 생각하고 인민들이 죽고 사는 문제는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죽은 후에 홍수가 밀려온들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제3 신분에는 혹심한 재난 속테 허덕이는 농민 이외에도 자산 계급, 공장 노동자, 수공업자와 도시 평민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자산 계급은 많은 재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보르도의 한 항해업자 자본가는 배 30척과 가치에 있어서 1,600만 리티움에 해당하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급은 정치적인 권리가 없었고 또 특권 계층의 멸시를 받았다. 때문에 그들은 봉건 제도를 뒤엎고 지배적 지위를 얻으려 하였다. 노동자, 수공업자 및 도시 평민들은 곤경에서 허덕였다. 노동자들은 매일 10시간의 일을 하였지만 소득은 1리티움을 넘지 못하였다. 전국 인구의 90%에 달하는 농민들이 점한 토지는 경작지 총면적의 30~40%밖에 되지않았다. 봉건 권력의 올가미가 천만 갈래로 그들을 속박하였다. 그들은 지주에게 지대와 기타 잡세를 바치고도 각종 봉건적인 착취를 받았다.
농민들은 지주집 비둘기가 밭에 있는 곡식을 쪼아먹어도 쫓지 못하였고, 지주가 사냥할 때 곡식을 짓밟아도 배상을 요구하지 못하였다. 그외에도 농민들은 국가에 재산세와 병역세를 바쳐야 하였고, 교회에 10분의 1세를 바쳐야 했다. 이렇게 농민들은 1년간의 노동 결실의 대부분을 착취당하였기에 풍년이 든 해에도 온 집 식구가 배불리 먹지 못하고 생활을 지탱하기 어려웠다. 제3신분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 봉건 제도를 저주하였으며 특권 계층과 대립적 지위에 처해 있었다.
1774년에 루이 16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통치하는 기간에 프랑스의 재정은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여 파산될 지경에 이르렀다. 1788년에 국가의 수입이 5억 3백만 리티움이었는데, 지출에 수요되는 금액은 6억 2천 9백만 리티움이나 되었다. 이렇게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고 있었지만 국왕은 돈을 물쓰듯 하며 극히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리하여 1789년에 프랑스 정부가 진 빚은 45억리티움에 달하였다. 이런 정황하에서 계속 빚을 지기 어렵게 되자 정부는 특권 계층에게서 세금을 징수하려 했으나 그들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때 농민 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고, 많은 도시의 평민들도 끊임없이 봉기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인민들을 계속 착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일로 되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루이 16세는 3부회(1302년에 프랑스 국왕은 봉건 지주, 고급 승려,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의 대표 회의를 열고, 인민들에게 어떤 세금을 과할 것인가 하는 것과 또 어떤 방법으로 인민들을 핍박하여 세금을 바치게 할 것인가를 토론시켰는데, 이것이 3부회의 시작이었다. 3부회에는 근로 인민들의 대표가 없었다. 1614년 이래로 프랑스 국왕은 3부회를 소집한일이 얼었던 것이다.)를 열고 정치, 경제 위기에서 벗어날 출로를 찾기로 결정하였다.
프랑스 인민들은 더는 이런 생활을 계속해 나가려 하지 않았고 지배계급은 이전대로 통치할 수가 없었다. 혁명의 시기는 이미 성숙되었다.





자산 계급 혁명의 폭발
프랑스 인민들의 혁명 정서가 날로 높아가고 있을 때 3부회 대표 선거가 진행되었다. 특권 계층 가운데서 승려와 귀족들이 각각 300명의 대표를 선출하였고, 제3 신분 중에서 600명의 대표를 선출하였다. 제3신분의 대표는 모두 자산 계급과 지식인들이었는데, 거기에는 로베스피에르를 망라한 허다한 변호사들이 있었으며, 개별적인 자유파 귀족과 고급 승려들도 있었다.
3부회는 1789년 5월 5일에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열렸다. 자산 계급은3부회에서 정치 개혁을 하면 자기들도 정치 권력을 좀 얻을 수 있게되리라 희망하였고, 농민, 노동자, 평민들은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게되리라고 희망하였다. 그런데 루이 16세는 연설에서 대표들에게 재정문제를 해결할 것만 요구하고 정치 개혁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도 언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혁신 사상에 경각성을 높여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경고하였다.
3부회는 전체 프랑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중심 문제였다. 빠리의 일부 광장과 그늘진 대로에서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혁신을 주장하는 선동가의 연설을 들었으며 베르사이유에 전해온 새 소식을 의논하였다. 빠리 시민들은 떼를 지어 베르사이유에서 가서 3부회의 회의장의 복도에 몰려서서 제3신분 대표들에게 열심히 싸우라고 고무하였다. 5월부터 7월 초까지 제3신분 대표들의 행동은 점점 더 격렬하였다. 그들은 7월 9일에 프랑스 헌법을 제정하기 위하여 이번 회의를 헌법제정회의로 고친다고 선포하였다.
루이 16세는 이미 비밀리에 군대를 집결시켜 가지고 헌법제정회의를 해산시키고 빠리를 피로 물들일 준비를 하였다. 격분한 빠리 인민들은 경각성을 더욱 높였다. 집회에 참가했던 군중들이 군대의 공격을 받을 때 빠리에서 경종이 울렸다. 노동자, 수공업자, 도시 평민들은 군인들의 무기를 빼앗아 들고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빠리에 있는 바스티유 감옥은 줄곧 정치범을 가두는 요새로서 오랫동안 인민들의 저주를 받아 왔다. 그때 바스티유의 몇몇 포대의 대포는 빠리의 노동자 구역을 겨누고 있었다. 7월 14일(7월 14일은 후에 프랑스의 국경일로 정하여진다)에 ≪바스티유로!≫라는 함성과 함께 봉기자들은 바스티유 감옥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피어린 싸움 끝에 전제 통치를 상징하는 이 요새를 부셔버렸다. 이리하여 혁명적 인민들은 혁명의 첫 승리를 달성하였다. 그날 밤에 빠리 시민들은 오색꽃 초롱을 들고 승리를 경축하였으며, 대자산 계급은 빠리시에서 정권을 취득하였다. 바이가 빠리시의 시장으로 당선되고 자유파의 귀족 라파예트가 국민 방위군 사령으로 임명되었다.
7월 14일의 승리에 고무되어 혁명의 물결은 재빨리 전국을 휩쓸었다. 빠리를 따라 기타 각 대도시들에서도 봉기를 일으켰다. 각지의 농민들은 큰 깃발을 휘날리며 낫과 쇠스랑이를 들고 지주들의 장원과 귀족들의 성채에 쳐들어가 봉건적 문서를 꺼내어 당장에서 불살라 버렸다. 그들은 일체의 봉건적 의무를 취소하고 토지를 농민에게 돌릴 것을 요구하였다. 프랑스 인민들은 천지를 진동하는 기세로 자산 계급 혁명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특권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은 저들의 말로가 닥쳐오고 있음을 보고 뿔뿔이 국외로 도망쳐 가서 반격할 시기를 노리고있었다.






제2절 혁명 전쟁과 왕위의 전복

대자산 계급의 집권
1789년 7월 14일 이후에 프랑스 대자산 계급, 즉 은행가 등 대재벌들은 인민들이 봉기를 일으킨 기회를 타서 프랑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왕권을 제한할 것을 주장한 자유파의 귀족들이 대자산 계급과 결탁하였다. 그들은 대자산 계급과 타협하기 위하여 국왕을 억류하여 두었다.
농민 봉기의 물결이 전국을 휩쓴 형세하에서 자산 계급 정권은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헌법제정회의는 8월 초에 농민의 부역과 기타 봉건적 의무를 취소하고, 10분의 1세를 취소한다는 결정을 짓는 것으로 농민들을 ≪안정≫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결정은 봉건적 지대를 폐지하지 않았으며, 농민들이 절박히 요구하는 토지 문제도 해결하지 않았다.
이어서 헌법제정위원회는 ≪인권 선언≫을 발포하여 인간은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자유와 안전도 하늘이 정하여 준 것이고, 압박에 반항하는 것도 하늘이 지어준 것으로서 모두 박탈할 수 없는 인권이라고 선포하였다. 법률은 인민들의 의지의 표현이며 법률 앞에서는 사람마다 평등하다고 ≪선언≫은 지적하였고, 또 사유 재산은 신성 불가침의 권리라고 선포하였다. 이 ≪인권 선언≫은  전제 군주제와 신분 제도의 폐지를 요구한 사상을 구현한 것으로서 진보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 ≪선언≫은 자산 계급들이 표방한 ≪자유≫, ≪평등≫의 원칙을 제시한 동시에 사유 재산은 신성 불가침이라고 선포하였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재산에 의한 불평등으로써 출신에 의한 불평등을 교체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른바 자유란 유산자가 무산자를 착취하는 자유에 불과한 것이었다.
자산 계급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자본주의 발전 노정의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헌법제정회의는 많은 법령들을 채택하였다. 이런 법령들에 근거하여 국내의 세관이 폐지되고 봉건적 동업 조합이 폐지되고, 교회의 토지가 몰수되고, 귀족의 작위에 대한 세습제가 취소되고, 행층 구역이새로 나뉘어졌다 헌법제정회의는 또 변호사 출신 대표의 한 사람인 르 샤쁠리에의 제의에 근거하여 ≪르샤쁠리에법≫을 채택하고, 노동자들의 집회, 결사와 파업을 금지시켰다. 이것은 헌법제정회의가 입법권을 이용하여 자산 계급의 이익을 수호하였다는 것을 뚜렷하게 반영한 것이다.





혁명 전쟁의 폭발과 황위의 전복
프랑스 자산 계급 혁명이 폭발되자 유럽의 봉건 군주들은 마치 전염병을 두려워하듯이 이 혁명을 두려워하면서 프랑스 자산 계급 혁명을 소멸하려고 결심하였다. 러시아의 짜르, 오스트리아(오스트리아는 원래 다뉴브강 유역에 건립된 공국이다. 오스트리아는 1414년에 대공국이라고 칭하였고 독일 연방 중에서 제일 큰 공국으로 되었다. 1438년부터 오스트리아를 통치한 합스부르그 가족의 사람들이 ≪신성로마황제≫의 자리를 계승하여 오다가 1806년에 와서는 일반적으로 ≪오스트리아 황제≫라고 부르게 되었다.)의 황제, 프로이센(프로이센은 독일경내에서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나라로서 17세기 중엽 이후부터 강대하여지기 시작하였으며, 15세기 초엽에 왕국이라 칭하였다.)의 국왕들은 루이 16세를 공개적으로 지지해나서서 ≪폭도들을 징벌하여야 한다≫고 떠벌이면서 간섭하려고 날뛰었다. 국외로 도망친 프랑스 망명자들은 독일경내의 코쁠렌쯔에 반혁명 소굴을 만들었다. 국내의 반동 세력들은 저들의 희망을 외국의 무장 간섭에 기탁하였다. 루이 16세의 아내는 자기의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어 ≪무력이 이미 모든 것을 짓부셨습니다. 지금은 무력만이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하고 노골적으로 말하였다.
루이 16세는 1791년 여름에 가족을 데리고 빠리에서 도망쳐 나갔다. 6월 20일 밤중에 ≪시중꾼≫ 차림을 한 몇몇 사람을 태운 특제 마차가 빠리에서 나와 동북 변경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북방 변경에 도망쳐 가서 반혁명 군대를 데리고 돌아와 빠리를 들이쳐서 잃어버린 자기의 천당을 되찾으려고 계산하였다. 그 이튿날 마차가 변경에 가까운한 마차역에 와서 말을 바꿔가지고 계속 달리려 하였다. 이때 마차의 창구멍으로 어떤 사람이 머리를 내밀고 사방을 살펴보고 있었다. 역장은 그가 바로 루이 16세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급히 경종을 울려 국왕이 도망친다는 소식을 알렸다. 부근의 군중들이 호미와 몽등이를 들고 쫓아와서 마차를 멈춰 세웠다. 검사한 결과, 마차에 탄 사람들은 러시아의 통행증을 가지고 도망치는 국왕, 왕후와 왕자라는 것이 확증되었다. 무장한 인민들은 길일에 그들을 빠리로 압송하였다.
국왕이 나라를 배반하고 도망치려 한 데 대하여 인민들은 몹시 격분해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대자산 계급들은 여전히 국왕을 비호하고 나섰다. 1791년 8월에 오스트리아 황제와 프로이센 국왕은 프랑스 국왕을 ≪원조≫하기 위하여 공동 행동을 하겠다는 위협적인 연합 선언을 발포하였다. 그 이듬해 봄에 프랑스 혁명에 대한 무장 간섭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 루이 16세는 군수품의 생산을 애써 파괴하고 저해하였다. 그의 해군 대신은 국외로 도망치도록 군인들을 선동하는 한편 그들에게 휴가를 주고 통행증을 발급하여 주었다. 왕후는 작전 계획을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보내 주었다. 귀족 출신의 많은 고급 장교들은 나라를 팔아먹고 적들과 내통하였다. 이리하여 프랑스 군대가 연속 패배하였는데, 프랑스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빠졌다. 이때 각지의 인민들은 의용군을 조직하여 가지고 동북 전선에로 내달렸다. 마르세이유 의용군들은 행진곡(이 행진곡을 후에 ≪마르세이유곡≫이라고 이름짓고 프랑스 국가로 정하였다)을 우렁차게 부르면서 빠리에 모여들었다. 이 가곡은 재빨리 널리 퍼져 조국을 보위하는 전투에 떨쳐나서도록 프랑스 인민들을 고무격려하는 전투가로 되었다.
전선에서의 패배에 격분한 프랑스 인민들은 그 패배의 원인이 궁정의 반역 활동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민들의 정서가 앙양된 정세하에서 자산 계급 민주파, 즉 자코뱅파(빠리의 자코뱅 수도원에서 늘 집회하였기 때문에 자코뱅파라고 불렀다)의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똥 등 지도자들은 인민들 속에서 선전 및 조직사업을 벌이고 궁정의 반혁명적 매국 행위를 폭로하고 국왕과 왕후를 감금할 것 것을 요구하였다. 빠리의 혁명적 군중들은 자코뱅파의 영도하에 국왕을 폐지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여 제2차 혁명 고조를 일으켰다.
1792년 8월 9일부터 10일 밤까지 빠리에서 경종이 오래 울렸다. 인민들은 또다시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군중들은 왕궁으로 돌진하여 들어가 국왕의 고용군과 교전하여 끝내 왕궁을 점령하였다. 국왕은 감금되고 군주 통치는 뒤엎어졌으며, 인민 군중들은 혁명을 앞으로 크게 추진시켰다. 그 당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이 프랑스 동북 변경에 쳐들어왔다. 얼마안 되어 그들은 베르덩을 점령하고 빠리로 통하는 대문을 열어놓았다.
방금 군주제를 뒤엎은 프랑스 인민들의 투지는 드높았다. 빠리의 의용군들은 종을 울리고 포를 쏘면서 연신 전선으로 내달렸다. 당통은 의회에서 ≪이제 곧 들려올 경종은 경보가 아니라, 나라의 적을 습격하는 호령이다. 그들을 격퇴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대담하고 또 대담하며 언제나 대담해야 한다. 이래야만 프랑스는 구원될 수 있다!≫고 언명하였다. 9월 20일에 베르덩 부근의 발미고지에서 프랑스의 무장 역량이 두 차례나 프로이센군의 진공을 물리치자 프로이센군은 하는 수 없이 퇴각하였다. 며칠 후에 프랑스 군대는 공세를 발동하여 프랑스영토에서 외래 간섭군들을 몰아냈다. 발미에서의 승리는 혁명적 프랑스 인민들이 자기의 힘으로 혁명을 만회하고 프랑스를 반대하는 유럽 연합군을 격파한 첫번째의 승리였다.






제3절 지롱드파의 통치와 자코뱅파의 독재

지롱드파의 통치
1792년 9월 21일, 즉 프랑스 군대가 발미에서 숭리를 달성한 그 이튿날 빠리에서는 일반 선거에 의하여 탄생된 국민 대회가 열렸다. 상공업 자산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 지롱드파(이 파의 대표 인물이 지롱드주에서 왔으므로 지롱드파라고 불렸다)가 프랑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국민 대회 제1차 회의에서는 국왕을 폐지할 문제를 토론하였다. 자코뱅파의 한 대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궁정은 죄악의 제작소이고 음탕의 발원지이며 폭군의 소굴입니다. 국왕의 역사는 바로 국민이 재난을 겪은 역사입니다.≫ 그날 밤, 국민 대회에서는 군주제를 폐지하는데 대한 의안을 채택하고 프랑스 공화국(역사에서는 프랑스 제1공화국이라 부른다)의 창건을 선포하였다.
빠리와 프랑스 각지의 인민들은 국왕을 심판하고 처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가 혁명을 추진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한 자코뱅파는 이 주장을 찬동하였다. 지롱드파는 백방으로 국왕을 비호하고 그에 대한 심판을 반대하면서 혁명을 중단시키려 시도하였다. 11월에 왕궁에서 루이 16세가 외국과 내통한 매국 문건을 감추어 둔 비밀 벽장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되자 지롱드파도 국왕을 더는 비호할 수 없었다. 12월에 국민 대회는 루이 16세를 심판하였다. 마라는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들이 조국을 구하려거든‥‥ 당신들이 인민들의 행복을 담보하려거든 반드시 폭군의 목을 잘라야 합니다.≫ 대다수의 대표들이 국왕을 즉시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여 투표하였다. 1793년 1월 21일에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올랐다.
지롱드파의 통치하에서 프랑스의 형세는 또다시 악화되었다. 상인들의 투기 활동으로 하여 물가는 폭등하고, 지주, 부농들의 양식에 대한 도매와 사재기로 인하여 식량난이 생기고, 근펄 인민들은 기아에 허덕였다. 1793년 봄에 영국은 프랑스를 반대하는 전쟁에 참가하였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에스파니아 및 기타 일부 국가들을 규합해 가지고 제1차 반프랑스 동맹을 조직하였다. 지롱드파와 밀접한 연계를 가지고 있는 한 고위 장교가 전선에서 나라를 배반하고 적에게 투항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군대는 부득불 벨기에와 라인 지구에서 퇴각하였다. 그리하여 전장은 다시 프랑스 국내로 옮겨졌다. 왕당파가 일으킨 폭동이 한창 확대되고 있었는데, 방데주에서 일어난 폭동이 특히 심하였다. 이러한 폭동들은 모두 영국의 대량적인 금전과 무기의 지원을 받았다.
프랑스 혁명을 만회하기 위하여 1793년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빠리 인민들은 제3차 봉기를 일으켜 지롱드파의 통치를 뒤엎었다. 혁명적 인민들은 혁명을 계속 앞으로 밀고 나아가는 또 한 차례 위대한 작용을 하였다.





자코뱅파의 독재
빠리 인민들이 일으킨 제3차 봉기는 자산 계급민주파인 자코뱅파를 통치 지위에 올려놓았다. 자코뱅파의 독재는 프랑스 자산 계급 혁명이 고조에 들어섰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자코뱅파 독재의 중요한 기구는 공안위원회였다.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 등이 공안 위원회의 영도권을 장악하였다.
막시밀리안 로베스피에르(1758~1794년)는 혁명 전에 변호사로 있었는데, 봉건 제도를 뒤엎을 것을 주장하였다. 1789년에 그는 3부회의의 대표로 당선되어 정치 활동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빠리 인민들의 편에 서서 과감히 투쟁한 그는 점차 자코뱅의 저명한 대표 인물로서 자산 계급 민주파의 영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타리 인민들의 몇 차례의 봉기 가운데서 호소자, 조직자의 역할을 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반봉건투쟁에 아주 투철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산 계급 혁명가였으므로 혁명 과정에서 자산 계급 혁명가로서의 한계와 양면성을 부단히 폭로하였다.
자코뱅파는 혁명의 위급하고도 결정적인 시각에 정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영국 군대와 네덜란드 군대는 서북 연해에서 프랑스를 진공하였고, 영국 군대는 또 남부의 뚤롱항을 점령하였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군대는 북부와 동북부에서 진공하였으며, 에스파니아군도 국경을 넘어 프랑스 국내에 진입하였다. 국내에는 반혁명 폭동이 만연되어 수많은 중요한 도시, 예를 들면 리옹, 마르세이유, 보르도 등이 폭도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투기 활동이 성행되고 물가가 폭등하여 인민들의 생활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때문에 오직 군중에 의거하고 혁명적 조치를 취해야만 국내외의 반혁명 세력을 타도할 수 있다는 것을 형세는 증명하였다. 자코뱅파는 우선 봉건 제도를 짓부시는 임무를 수행할 것을 결정지었다. 국민 대회는 모든 봉건적 의무를 무조건적으로 철폐한다는 법령을 발포하였다. 법령은, 몰수한 귀족 망명자들의 토지를 여러 뙈기로 나누어 농민들에게 팔고 땅간을 10년 동안에 나누어 갚도록 하며, 봉건 지주들에게 강점되었던 공유지는 일률적으로 농민들에게 돌리며, 일체 봉건적 의무를 무조건 폐지하며, 일체 봉건적 토지 문서와 기타 증거 물건들을 소각하되 감추어두고 내놓지 않는 자에 대하여서는 법률적 처분을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것은 ≪낡아빠진 봉건 제도에 대한 진정한 혁명적인 제재였다.≫(레닌)이 조치는 광범한 농민들을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그러나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할 것에 대할 농촌 빈민들의 요구는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반혁명 세력은 여전히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어떤 도시들에서는 반혁명 분자들이 파괴와 암살 활동을 하였다. 이해 7월에 빠리의 한 반혁명 분자는 마라의 주택에 뛰어들어 마라를 암살하였다. 빠리 인민들은 이런 반혁명 분자를 엄격히 징벌할 것을 한결같이 요구하였다. 자코뱅파는 혁명적 폭력으로 반혁명적 테러에 대처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국민대회에서 채택한 (혐의범에 대한 징벌 조례)에 근거하여 반혁명 분자를 많이 체포하고 그 가운데서 루이 16세의 아내를 망라한 일부 사람들을 처단하였다. 이렇게 반혁명 분자들을 과감하게 처단함으로써 혁명의 이익을 수호하였다.
경제적인 위기는 혁명적 조치를 통해 투기 모리배를 엄벌하도록 자코뱅파를 고무하였다. 자코뱅파는 국민 대회에서 채택한 법령에 근거하여 물건을 쌓아두고 팔지 않는 투기업자들을 사형에 처할 것과 사람을 각지에 파견하여 식량을 등록하게 하고 수도에 공급하는 물자를 보장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또 물가를 제한하는 법령을 발포하여 수십 종에 달하는 일용 상품의 최고 가격이 1790년 6월 시장 가격의 3분의 1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또 노동자들의 최고 임금을 정하여 놓았다. 가격 제한 법령이 투기 상인들을 타격하였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을 제한한 것은 또 이 정권의 자산 계급적 본질을 폭로한 것이다. 무장력을 강화하고 국내외 적들의 침공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민 의회는 공안위원회의 끼의 밑에 전인민들을 동원시키는 데 대한 법안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제1차 군대 모집에서만 해도 42만 명이 참군하였다. 군대 내부에서도 개혁을 실시하였다. 혁명에 충성하지 않는 귀족 출신의 그런 장교들을 대열에서 몰아내었다. 근로 인민 출신의 병사들 중에서 걸출한 군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1793년 말까지 반년 남짓한 싸움을 거쳐 프랑스 군민들은 국내에 침입한 외래 연합 간섭군들을 축출하였고 국내의 반란도 진압하였다.





자코뱅파의 분열과 테르미도르 정변
눈앞에 다가왔던 위기가 가셔지자 자코뱅파 내부에는 심한 분열이 생겨 투쟁이 치열해졌다. 공안위원회를 이탈한 당통을 둘러싸고 형성된 우파 집단은 혁명 시기에 ≪벼락부자≫로 된 투기 상인들을 대표하여 독재를 약화시키고 반혁명에 대한 진압을 관대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저명한 신문 기자 에베르를 필두로 구성된 좌파 집단은 적을 과감히 진압하고 물가 제한 정책을 엄격히 실시하며 토지를 무상으로 농촌 빈민들에게 분배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3, 4월간에 우파, 좌파 할 것 없이 죄다 진압하였다. 좌파를 탄압한 결과 자코뱅파는 군중을 잃고 그 독재의 기초를 약화시켰다. 우파의 잔여 분자들은 기회를 타서 로베스피에르를 반대하는 세력들을 긁어모아 가지고 1794년 7월 27일(프랑스 공화국 역서로 테르미도르 9일)에 ≪테르미도르 정변≫을 일으켰다. 그 이튿날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등이 단두대에 올랐다. 이리하여 자코뱅파의 독재는 전복되고, 프랑스자산 계급 혁명 열기는 식어버렸다.
18세기 프랑스 자산 계급 혁명은 자산 계급 혁명 시대에 가장 크고 가장 철저한 한 차례의 혁명이었다. 바로 엥겔스가 프랑스 혁명을 평가할때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은 또한 투쟁의 한 교전측인 귀족의 멸망과 다른 교전측인 자산 계급의 완전한 승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끝까지 진행된 최초의 투쟁이었다.≫ 인민 군중들이 적극적으로 혁명에 참가하였기 때문에 세 차례나 혁명을 만회하고 추동할 수 있었으며, 혁명을 철저히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혁명은 프랑스의 봉건 세력을 소탕하였을뿐 아니라 또 유럽 기타 나라의 봉건 제도의 기초까지 뒤흔들어 놓았으며, 자본주의 발전을 가속화시켰다. 그 당시 자산 계급은 상승기에 처하여있었고, 혁명에 대하여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바로 모택동 동지가 지적한 바와 같이 ≪구미 각국에 있어서 특히 프랑스에 있어서는 자산 계급이 혁명적 시대에 처하여 있을 때 이 나라들의 자산 계급 혁명은 철저하였던 것이다.≫






제4절 1794년~1814년의 프랑스

대외 전쟁과 나폴레옹의 등장
≪테르미도르 정변≫은 자코뱅파의 독재를 전복하였다. 대자산 계급, 은행가, 도시와 농촌의 유산자 계층을 대표한 ≪테르미도르파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통치 질서를 세을 것을 요구하여, 한면으로는 자코뱅파의 공포 정책과 급진적 조치를 제거하고, 다른 한면으로는 또 공화정체를 수호하고 자코뱅파 독재 시기의 토지법을 확보함으로써 일정한 범위내에서 자산 계급 혁명의 성과를 수호하였다. 1795년 11월에는 총재 정부를 구성하였다. 총재 정부가 통치하는 기간에 프랑스는 대외 전쟁을 계속하였으며, 프랑스의 정치 무대에는 나폴레옹이 출현하였다.
나폴레옹 보나빠르트(1779~la?1년)는 지중해의 코르시카섬에서 태어나, 일찌기 프랑스 포병학교에서 공부하였고, 후에는 포병군관으로 부대에서 복무하였다. 1793년에 그는 자코뱅파의 관점을 받아들였다. 그해 뚤롱을 수복하는 전투에서 자기의 군사적 재능을 현시하였다. 1795년 10월에 왕당파들이 빠리에서 무장 폭란을 일으키자 나폴레옹은 명령을 받고 한 갈래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 폭란을 평정하였다. 그 이듬해에 총재 정부에서는 또 나폴레옹에게 명령하여 프랑스 군대를 거느리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 쳐들어가게 하였다. 나폴레옹은 거기에서 ≪반 프랑스 동맹≫의 중요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격파하였다. 1798년 5월에 나폴레옹은 프랑스 자산 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지중해 동쪽에서의 영국의 이익에 타격을 주었고, 또 군대를 거느리고 이집트에 침입하였다. 이 기간에 왕당파들은 프랑스의 일부 지방에서 또 폭란을 일으켰다. 국외에서는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의 나라가 제2차 ≪반프랑스동맹≫을 결성하였다. 영국은 네덜란드에 상륙하여 북부로부터 프랑스를 위협하고, 러시아 군대는 이탈리아 북부에 진입하여 프랑스 남부어구에 이르렀으며, 오스트리아 군대는 독일 남부에서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때 프랑스의 대자산 계급들은 강력한 정권으로 저들이 이미 얻은 이익을 보호하려 하였으나 총재 정부의 자산 계급 정객들은 도리어 이에 대하여 속수 무책이었다.
멀리 이집트에서 프랑스 국내의 형세를 알게 된 나폴레옹은 정권을 탈취할 시기가 이미 성숙되었다고 생각하고 1799년 8월에 이집트에 가있는 프랑스 군대를 떠나 모험적으로 귀국하였다. 그는 지중해에 있는 영국 함대의 감시를 벗어나 끝내 프랑스 남부 해안에 올라 그해 10월에 빠리에 돌아왔다. 당시 프랑스의 군사 형세는 이미 호전되었지만 나폴레옹의 탈권은 이미 막을 수 없는 일로 되었다. 그는 빠리에 오자 즉시일부 정객들과 결탁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무기 상인과 금융 자본가들도 나폴레옹에게 수천 수만 프랑의 돈을 주었고, 빠리의 일부분군대를 그에게 귀속시켰다. 그해 11월 9일(프랑스 공화국 역서로 브뤼메르18일)에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정변≫을 일으키고 정권을 탈취하였다. 그후부터 10여 년간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통치하였다.





프랑스 제1제국의 흥성과 멸망
나폴레옹은 탁월한 군사가였고, 정치적으로 또 야심가였다. 군사로 출세한 그는 또 군사로 자기의 통치를 공고히 하였다. 브뤼메르 정변 후에 나폴레옹은 프랑스에 자산 계급군사 독재를 수립하였으며, 점차 자기의 독재 통치를 공고히 하였다. 1804년에 나폴레옹은 왕관을 쓰고 황제로 칭하고, 프랑스 공화국을 프랑스 제국(역사에서 ≪프랑스 제1제국≫이라 한다)으로 고쳤다. 자산 계급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나폴레옹 정권은 강력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 정권은 프랑스 자산 계급의 중앙 집권적 국가 기구를 완전히 갖추고 자산 계급의 국가 권력을 집중 강화하였다. 이 정권은 ≪법전≫을 제정하고 발포하여 봉건적 법규를 제거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입법규범을 확립하였다. 이 정권은 농민들의 요구에 맞추어 혁명기간에 농민들이 얻은 뙈기밭들을 보장하여 주었고, 자산 계급의 요구에 맞추어 국가에서 물건을 주문하고 정부에서 수당금을 주며 수출품을 장려하는 등의 방법을 취함으로써 자본주의 상공업의 발전을 고무 추동하였다. 이 정권은 왕당파의 복구 세력을 진압한 동시에 노동자, 농민들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였다.
나폴레옹의 정치 생명은 전쟁터에서의 그의 군사 활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프랑스 제1제국을 건립한 후 대외 전쟁을 더욱 끊임없이 진행하였다.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주요한 적수였다. 프랑스 군대는 전쟁터에서 일련의 승리를 달성하였으며, 유럽 대륙의 봉건 군주와 영국이 조직한 해상에서 ≪반 프랑스 동맹≫을 여러 번 때려 엎고 프랑스에서의 부르봉 왕조의 복고를 방지하였다. 영국과의 투쟁에 대해 말하면 프랑스는 세계 시장과 패권을 쟁탈하려는 본국의 자산 계급을 위하여 진행된 투쟁이었으며, 짜르 러시아와의 투쟁에서도 프랑스는 유럽에서 패권을 쟁탈하려는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군대의 거듭되는 승리로 하여 프랑스는 유럽에서 아주 많은 영토를 병합하였고, 많은 나라가 프랑스의 부속국으로 되었으며, 나폴레옹 친족들이 각각 그런 나라들을 통치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 제1 제국은 표면상 일시적이나마 번영한 나라로 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자산 계급의 정치적 대표 인물이었다. 그의 계급적 본질로 하여 그가 진행한 전쟁은 침략성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1798년에 이집트에 진군한 것은 바로 이집트에 대한 침략이었던 것이다. 1807년에 프랑스 군대는 피레네스 산맥을 넘어 또 포르투갈, 에스파니아를 침범하였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형성된 지 오래고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유럽의 많은 민족 국가들을 나폴레옹이 정복하여 프랑스 제국을 창건하였을 그때에는 프랑스의 민족 전쟁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되었고, 이 제국주의 전쟁은 또 나폴레옹의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민족 해방 전쟁을 낳았다.≫ 프랑스 군대는 이르는 곳마다에서 귀족을 몰아내고, 봉건적 의무를 폐지하고, 봉건 세력을 대대적으로 약화시킴으로써 객관적으로 진보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도 현지의 인민들을 예속하였다. 그는 점령 지구 인민들의 역량을 경시하고 민족적 각성의 위력을 경시하였으므로 광범한 유럽 인민들의 반항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프랑스 제1제국의 몰락의 위기를 초래하게 하였다.
1812년에 나폴레옹은 러시아로 진군하다가 실패하였다. 유럽의 ≪반프랑스 동맹≫에 가입한 국가들은 나폴레옹의 역량이 약화된 기회를 타서 수백만에 달하는 군대를 규합하여 가지고 1814년과 1815년에 두 차례나 나폴레옹을 격파하고 프랑스에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프랑스 제1제국은 붕괴하였다. 타도되었던 프랑스의 낡은 왕조는 외국 군대의 보호 밑에 다시 일어섰다. 그리하여 프랑스 인민들은 1830년의 ≪7월 혁명≫전까지 또다시 부르봉 왕조의 예속 아래 처하여 있었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프랑스 자산 계급 혁명 전야에 프랑스 사회의 계급 구성은 어떠하였는가?
2. 프랑스 자산 계급 혁명을 세 개 단계로 나누고, 각각의 단계의 중대한 사건들을 설명해 보자.
3. 자코뱅파의 독립 시기에 어떤 혁명적 조치가 있었는가? 그 의의를 말하라.
4. 몇 가지 사실을 들어 나폴레옹이 어떻게 군사로 정권을 장악하였는가를 설명해 보자.
5. 나폴레옹 정권의 성격을 말하라. 그는 자기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어떤 조치들을 취하였는가?






제6장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혁명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통치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전체 아메리카를 짓밟았다. 면적이 2,100여만 평방키로미터에 달하는 라틴아메리카는 주로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 식민주의자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은 라틴아메리카에 식민지 통치 기구를 건립하였다. 종주국에서 출생한 귀족들이 식민지에서 고위 관리로 되어 식민주의 통치를 실시하였다. 그들은 탐오하고 뇌물을 받아먹고 가렴 잡세를 받아들이면서 인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관리들은 그가 식민지에 거류한 시기를 자기의 일생에서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가장 행복한 시기로 간주하고 있다. 만약 이런 때에 재산을 모으지 못한다면 그것은 웃음거리로 될 것이다.≫ 그들은 재물을 수탈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식민지에서 마음대로 피비린 학살을 감행하였다 그들이 저지른 죄악은 실로 하늘에 사무친다.
식민주의자들은 라틴아메리카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인디안인을 멸종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여 수백만의 인디안인들을 학살하였다. 다행히 살아남았다 해도 예속당한 처지에서 금광과 은광을 개발하는 고역에 시달리다가 얼마 못 가서 죽었다. 광산에 징발되어 가는 인디안인들은 사형판결을 받은거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그들이 떠나가기 전에 친우들은 그들을 위하여 늘 장례 의식을 지내기까지 하였다. 라틴아메리카의 에스파니아령 식민지에서 학살된 인디안인만 해도 대략 1,000만으로 추산되고있다. 원래 서인도군도에서 살던 인디안인들은 거의 다 소멸되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귀중한 금속이 많이 난다. ≪황금은 백인들이 새로 발견된 해안에 오르자마자 요구한 첫번쩌 물건이었다.≫(마르크수 엥겔스) 300년 동안에 에스파니아 식민주의자들은 250만 키로그램의 금과 1억키로그램의 은을 약탈해 갔다. 18세기에 포르투갈 식민주의자들은 브라질로부터 가치가 약 10억 달러에 달하는 금과 금강석을 약탈해 갔다. 유럽식민주의자들은 또 미친듯이 인디안인들의 토지를 빼앗아 대장원을 세웠다. 멕시코를 강점한 식민주의자의 우두머리 코르테스는 2만 5천평방 마일의 토지를 강점하였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식민지 통치자들은 무역을 독점하고, 유럽 시장에 요구되는 인디고, 사탕, 목화, 코코아를 수탈하였다. 그들은 또 포도주, 올리브유, 비단과 아마천에 대한 종주국의 독점 지위를 보장하기 위하여 라틴아메리카에서 누에를 치고 포도, 올리브, 아마를 재배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야만적인 식민지 약탈은 라틴아메리카를 빈궁하고 낙후하게 만들었다. 잔혹한 식민지 통치는 피예속자들의 격렬한 반항을 부단히 촉발시켰다. 원래의 식민주의자와 이주민의 후대~현지 태생인 백인들도 식민지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할 것을 요구하였다.





아이티 혁명
18세기 말엽에 미국의 독립 전쟁과 프랑스의 자산계급 혁명은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통치를 짓부시도록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을 고무하였다. 아이티의 혁명은 라틴아메리카 독립 전쟁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아이티는 카리브해의 산도 도밍고섬 서부에 위치하고 있다. 아이티는 처음에 에스파니아 식민주의자들에게 점령되었다가 그후 17세기에 다시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게 점령되었다. 현지의 원주민인 인디안인들은 오래 전에 벌써 모조리 학살당하였고, 인구수의 90%를 차지하는 흑인노예들이 예속의 대상으로 되었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아이티에서 목화, 커피, 사탕수수 농장을 광범하게 경영하구 흑인 노예를 부려 대량의 물질 재부를 긁어모았다. 한줌도 못 되는 식민주의자들의 관리와 농장주들은 극도로 사치한 기생충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별장에서 살면서 금은으로 장식한 마차를 타고 다니며 사냥을 하거나 닭싸움을 시키거나 주색에 잠겨 세월을 보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18세기에 아이티의 프랑스 사람들보다 더 ≪호강≫스럽게 산 백인은 아마아메리카 대륙의 그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폭발전야의 화산처럼 머지않아 이 아이티에서 혁명의 열화가 하늘을 찌르고 타오르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1791년 8월의 어느날 밤, 아이티의 흑인 노예들은 전고를 울리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삽시에 1,200개소의 커피 농장과 200개소의 사탕수수농장에서 세찬 불길이 타올랐다. 농장의 건축물들은 잿더미로 되고, 수많은 극악한 농장 노예주와 식민주의자 관리들은 응당한 징벌을 받았다. 봉기를 일으킨 흑인들은 자기의 수령이며 노예 출신인 뚜싼 루베르뚜르(1743~1803년)의 영도 아래 혁명군대를 조직하였다.
이 대오는 규율이 엄하여 인민들의 옹호를 받았기 때문에 신속히 4,000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간고 분투하고 영용하게 싸워 식민주의 군대를 여지없이 족쳤다. 1802년 초에 나폴레옹이 파견한 2만 9천 명의 군대와 지척의 군함이 아이티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독립을 요구하며 일어선 아이티 인민들의 혁명 열화를 끌 순 없었다. 그들은 평화 담판을 하자고 기만해 가지고 뚜싼 루베르뚜르를 체포하여 프랑스로 압송하였다. 후에 뚜싼 루베르뚜르는 프랑스 감옥에서 희생되었다. 그의 전우들은 전투를 계속하여 약소한 역량으로 강대한 적에게 승리를 거두고 1803년 10월에 끝내 프랑스 군대를 투항시켰다.
1804년 1월 1일에 라틴아메리카의 첫번째 국가 아이티가 정식으로 독립을 선포하였다.





라틴아메리카 독립 운동의 시작과 그 실패
아이티의 독립은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의 빛나는 본보기로 되었다. 1810년에 에스파니아의 통치하에 있던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들에서 독립 전쟁이 폭발하였다. 4월에 베네수엘라에서 시작된 봉기는 반년 사이에 북쪽의 멕시코로부터 남쪽의 아르헨티나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구를 휩쓸었다.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전쟁은 16년 동안(1810~1826년) 지속되었다. 1810년부터 1815년까지는 제1단계로서, 이 시기에 각지에서는 독립하였지만 또 실패를 당하였다. 1816년부터 1826년까지는 제2단계로서 이 시기에 독립 전쟁은 날로 앙양발전하였으며 승리하였다. 독립 운동은 멕시코,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세 곳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독립 운동 초기에는 멕시코의 투쟁 규모가 가장 컸다. 1810년 9월 16일 새벽에, 독립 운동의 영도자 히달고는 돌로레스에서 교회당의 종을 울려 부근의 농민과 도시 빈민들을 집결시켰다. 그는 군중들에게 ≪300년 전에 저주스러운 에스파니아 사람들이 우리 선조의 땅을 몽땅 빼앗았는데 당신들은 왜 전력을 다해 되찾으려 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군중들은 ≪독립 만세!≫ ≪식민주의 날강도들을 교살하자!≫고 한결같이 소리 높여외쳤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돌로레스의 함성≫이라고 한다.
돌로레스의 함성은 멕시코에 울려퍼졌다. 수천 수만의 인디안인과 혼혈인들이 당당하게 봉기 대오에 뛰어들었다. 대오는 부단히 성장하여 얼마 안 가서 8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각지로 이동 작전하면서 식민주의자들을 타도하는 한편 정권을 조직하였다. 히달고는 법령을 반포하여 노예를 해방시키고 인디안인의 토지를 되돌린다고 선포하였다. 1811년에 히달고가 적들에게 체포되어 용감하게 희생되자 그의 전우 모렐로스가 봉기 대오를 영도하여 계속 투쟁하였다.
독립 운동의 역량은 파죽지세로 식민지 통치 기구들을 신속히 짓부셨다. 1811년까지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초보적으로 독립정권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독립 운동의 지도자는 인민의 이익에 부합되는 혁명적 강령을 제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군중을 충분히 발동시킬수 없었다. 그리하여 1815년에 에스파니아 군대의 반격을 받아 독립 운동은 참패를 당했다.





라틴아메리카 독립 전쟁의 승리
1816년에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운동은 다시 앙양되었다. 현지에서 태어난 수천 수만의 백인, 흑인, 혼혈인과 인디안인들이 모두 독립 전쟁에 뛰어들었다. 라틴아메리카의 남부 전장에서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은 독립군 전사들을 거느리고 북쪽과 남쪽에서 에스파니아의 식민주의 군대를 타격하였다.
베네수엘라 독립 운동의 지도자 시몬 볼리바르는 독립 운동에서 실패당한 후 해외로 망명하였다. 그는 아이티 공화국의 도움 아래 1816년에 베네수엘라로 돌아와 유격 전쟁을 견지하고 있는 대오와 결합하여 동부에 혁명 근거지를 창립하였다. 볼리바르가 혹인 노예의 해방을 선포하고 전쟁 후에 토지를 병사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응낙하였기 때문에 혁명대오는 신속히 성장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독립을 선포한 후 독립 운동의 중요한 지도자인 허싸 산 마르틴은 남아메리카 지구의 독립 투쟁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도와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군대를 훈련시킬 결심을 다지고 아르헨티나 서부에 가서 3년 동안 열심히 활동하여 4,000명의 군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이 무장 역량을 빌어 식민주의 세력을 쓸어버리기 시작하였다. 7, 8년간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은 서로 지지하면서 전선에서 일련의 승리를 달성하였다.
1817년에 산 마르틴이 영솔한 군대는 백설이 덮인 안데스산을 넘어 감쪽같이 칠레평원으로 쳐들어갔다. 산 마르틴 군대의 지원으로 칠레봉기군은 에스파니아 식민주의 군대를 격파하고 1818년에 칠레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어서 산 마르틴은 칠레의 역량과 회합하여 해상으로부터 페루로 진군하였고, 페루 인민들의 도움으로 페루의 수도 리마를 해방시켰다. 1821년에 페루는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페루 일대에서 아직 2만 명의 식민주의 군대가 자신의 멸망을 기다리고 있었다.
1819년에 볼리바르가 영솔한 대군은 안데스산맥을 가로넘었다. 이 행군은 극히 힘겨운 행군이었다. 그들은 적군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산 위의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선택하였다. 행군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볼리바르는 계속 전진하여 끝내 안데스산을 지났다. 그의 군대는 콜롬비아의 보야카에서 식민주의 군대를 격파하고 보고타에 들어가 대콜롬비아공화국을 건립하였다. 1821년에 볼리바르가 통솔한 군대는 돌아와서 베네수엘라를 해방시켰다. 이듬해에 그의 전우 수크레가 지휘한 군대는 에쿠아도르를 해방시켰다. 베네수엘라와 에쿠아도르는 당시 대콜롬비아 공화국의 일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1822년 7월에 산 마르틴과 볼리바르가 에쿠아도르의 과야낄에서 회견하고 에스파니아 식민주의 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협동 작전 계획을 토의하였다. 1824년 12월에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대콜롬비아 등 나라의 인민들로 조직된 군대는 수크레의 지휘 밑에 아야쿠쵸 전투에서 에스파니아 식민주의 군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그후 얼마 안 가서 볼리비아가 독립하였다. 1835년 1월에 남아메리카의 에스파니아 식민주의군대는 최후에 볼리바르 군대에 투항하였다.
이 이전에 멕시코는 장기적인 전쟁을 거쳐 독립하였고, 에스파니아령 중앙아메리카 여러 주들에서도 에스파니아의 예속에서 벗어나 독립한 연방 국가-중앙아메리카 연합주(1838년에 또 과테말라, 살바도르, 니카라과, 온두라스와 코스타리카로 나뉘어졌다)를 건립하였다.
1822년에 포르투갈의 예속하에 있던 브라질 인민들도 독립하였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에스파니아, 포르투갈의 식민주의적 쇠싸슬은 끊어졌다.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은 30여 년간의 독립 전쟁에서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적극 분투하고 상호 지원하면서 공동의 원수와 싸워 끝내 최후의 승리를 달성하였다. 이 승리로 하여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배치가 기본적으로 확립되었고, 아이티,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연합주, 대콜롬비아 공화국(1830년에 또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쿠아도르로 나뉘어졌다), 칠레, 페루,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우루과이, 브라질 등 일련의 새 독립 국가들이 건립되었다. 이 승리는 세계 역사상 하나의 커다란 사건으로서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침략 야심의 폭로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이 독립 전쟁을 진행하고 있을 때 독립한 지 오래지 않은 미국은 아직 강력하지 못하였으나 그때 벌써 아메리카를 독점하려는 자기의 야심을 드러내었다.
1819년에 미국 국무장관 죤 퀸시 아담스는 ≪북아메리카 대륙은 응당 우리의 영토로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1823년에 그는 자기의 편지에서 카리브해의 섬들에 대해 말할 때에도 ≪이 섬들은 그 위치를 놓고 말하면 북아메리카 대륙의 천연 부속물이다≫라고 하였다. 1822년부터 1823년까지 유럽 ≪신성동맹≫(1815년에 러시아의 짜르가 유럽의 반동 세력을 규합하여 반동적인 ≪신성동맹≫을 조직해 가지고 곳곳에서 침략과 간섭을 진행하여 혁명 운동을 탄압하였다)이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운동에 간섭하려고 할 때 그는 ≪아메리카의 일은 아메리카 사람들의 일≫이라는 정책을 적극 집행하였다. 1923년에 미국 대통령 몬로는 국회에 제출한 보고에서 ≪앞으로 유럽의 어떤 열강이든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이미 독립과 자유를 얻은 국가를 식민지의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선포하였다. 그는 또 미국은 유럽 열강내부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럽 열강이 아메리카주의 일에 간섭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선포하였다. 이 보고서가 바로 보통 말하는 ≪몬로 선언≫이며 이 ≪몬로 선언≫에 내포된 원칙이 바로 보통말하는 ≪몬로주의≫이다. ≪몬로주의≫가 유럽 열강의 아메리카에로의 팽창을 배척한 이것은 ≪아메리카는 미국 사람의 아메리카≫라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서 전반 아메리카를 통치하려는 미국의 야심을 반영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라틴아메리카에서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이 실시한 경제적 약탈에 대하여 설명해 보자.
2. 아이티 혁명의 경과와 의의에 대해 토론해 보자.
3. 돌로레스의 함성, 아야쿠쵸 전투, 몬로주의를 설명해 보자.
4. 에스파니아령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 전쟁은 몇 개 단계로 나뉘며, 몇 개 중심지가 있는가? 제2 단계의 전쟁 경과와 결과를 간단히 설명해보자.






제7장 영국의 산업 혁명






산업 혁명의 전제와 조건
영국에서의 자산 계급 통치의 확립은 자본주의의 공고화와 급속한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전제를 가져다 주었다. 영국 자산 계급 정권은 계속 울치기 운동과 식민주의 팽창 정책을 통하여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부단히 확대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많은 자본과 고용 노동자를 제공하였다.
자산 계급 정권의 통치하에서 울치기 운동은 공개적이고도 대규모적으로 진행되었다. 18세기에 영국 의회에서 채택한 2,000여 개 조항의 법령에 근거하여 자산 계급은 또 몇백만 에이커의 토지를 강점하였으며, 따라서 많은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값싼 고용 노동자로 되었다. 그리하여 자영농은 영국에서 소멸되었다. 대외적으로 영국은 전쟁을 통하여 아메리카 식민지에 혹인 노예를 수출하는 특허권을 에스파니아의 수중에서 빼앗아냄으로써 국제적으로 가장 큰 노예 장사꾼으로 되었다. 영국 상인들은 피비린 노예 무역에서 100%, 심지어는 1,000%의 이윤을 얻었다. 죄악적인 노예 무역을 영국을 벼락부자로 되게 하였다. 식민지에 대한 미친 듯한 약탈도 영국에 대량의 고린내나는 재부가 흘러들게 하였다. 예를 들면 1757년부터 1815년까지의 기간에 인도에서만 하여도 10억 파운드의 가치에 달하는 재부를 약탈하였다. 이밖에 공장제 수공업 시기에 대량의 생산 기술과 과학 지식도 쌓았다. 이러한 것은 다 산업 혁명을 할 수 있는 필요한 조건을 형성해 주었다.
18세기 중엽에 영국은 수년간의 전쟁을 거쳐 자기와 경쟁하고 있는 적수인 프랑스를 격파하고 가장 큰 자본주의적 식민주의 국가로 되었다. 국외 시장이 끊임없이 확대됨에 따라 공장제 수공업의 생산은 날로 증대되는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리하여 생산 기술을 개진하는 것으로 상품의 생산을 늘릴 것이 더욱 요구되었다.
이런 정황은 산업 혁명이 이미 일정에 올랐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산업혁명
산업 혁명은 자본주의 발전사에서 중요한 단계이며 공장제 수공업으로부터 대규모 기계제 생산에로 발전한 비약이었다. 산업혁명은 생산 영역에서와 사회 관계면에서 모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산업 혁명은 기계의 발명과 사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계를 발명한사람은 대부분이 실천 경험이 있는 노동자들과 기사들이었다.
1733년에 기사 케이가 자동북을 발명하여 직조 속도를 크게 높였다. 그리하여 한때 면사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여 방직 공업의 각 고리에 연쇄적 반응이 일어나게 되었다. 1765년에 방직공 하그리브스가 손으로 돌리는 ≪제니 방적기≫를 창조하였다. 이 방적기로 단번에 16오리 내지 18오리의 실을 뽑을 수 있었다. 그러나 뽑은 실이 가늘고 쉽게 끊어졌다. 그리하여 4년 후에 시계 수리공 아크라이트가 수력 방적기를 만들어냈다. 이 방적기로 뽑은 실은 질기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굵었다. 1771년에 그는 맨체스터에 영국에서 첫번째로 큰 면방적공장을 세우고 많은 방적기를 한 곳에 집중시켜 수력으로 돌리었다. 후에 노동자 크롬프톤이 상술한 두 가지 방적기의 장점을 따서 ≪뮬 방적기≫를 발명하였다. 이 방적기는 단번에 300~400개의 방추를 돌릴 수 있었으며, 뽑아낸 실도 가늘고 질겼다. 실을 뽑는 일에서 이런 중대한 돌파는 천을 짜는 일을 퍽 뒤떨어지게 하였다. 1785년에 카트라이트는 또 수력 방적기를 발명하여 천짜는 능률을 40배로 높였으며 따라서 대규모의 방직 공장이 출현하였다.
기계는 값싸고도 능률적인 동력을 요구하였다. 수력은 어느 곳에서나 다 있는 것이 아니기에 수력을 동력으로 이용하자면 제한성이 컸다. 견습공 출신인 기사 제임스 와트(1736~1819년)가 장기적으로 연구하고 선인들의 성과를 섭취하여 개량한 증기 터빈을 만들었다. 1785년에 그는 이 증기 터빈을 방직기의 동력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기타 공업 부문들에서도 증기 터빈을 널리 사용하였다.
방직 공업에서의 기술 혁신은 야금, 채광 등 일련의 공업 부문들에 대하여 새로운 요구를 제기하였고, 이런 부문들에서 새로운 기술을 신속히 도입하여 기계와 증기 동력을 대량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19세기 상반기에 이르러 영국에서는 산업 혁명을 완성하고 대규모 기계제 생산이 기본적으로 공장제 수공업을 교체하였다. 프랑스, 미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전후로 산업 혁명을 진행하였다.
대규모 기계제 생산은 많은 원료를 실어오고 산더미같이 쌓인 제품을 제때에 각지에 실어다 팔 것을 요구하였다. 인력, 축력과 간단한 운송도구로는 고속도로 발전하는 막중한 운송 임무를 담당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교통 운송 도구의 혁신 문제가 급선무로 나섰다. 이 혁신 문제는 미국에서 먼저 수행되었다.
1807년에 미국 사람 풀톤이 선인들의 연구 성과를 섭취하여 처음으로 기선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직접 그 기선을 몰고 미국의 허드슨강에서 시험 항해를 하여 32시간 내에 뉴욕으로부터 올바니까지의 248키로미터의 항로를 항행하였다. 1819년에는 기선으로 대서양을 가로 건너는 데 성공하였다. 그 이후로부터 기선은 내륙 수로와 연해의 항해에 광범히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점차적으로 원양 항해에도 사용되었다.
1814년에 영국 노동자 출신인 기사 스티븐슨이 기관차를 발명하였다. 1825년에 그는 말을 탄 사람이 앞에서 출발 신호를 하자 34개의 작은 차량을 연결시킨 기관차를 몰고 영국의 첫번째의 철길에서 시운전을 하였다. 1830년에 영국에서 리버풀로부터 맨체스터로 통하는 객차가 정식으로 개통되었다. 그후부터 철도 교통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1850년에 유럽과 아메리카의 철도 총길이는 3만 8천 키로미터에 달하였으며, 1870년에 전 세계 철도의 총길이는 21만키로미터로 늘어났다.





산업 혁명의 결과
산업 혁명은 생산 기술면에서 대변화를 일으켜 사회 생산력을 급속히 제고시켰다 ≪제니 방적기≫가 발명되기 전해에 영국에서 가공한 목화는 380만 파운드밖에 되지 않았으나, 1789년에는 3,240만 파운드에 달하였다. 1740년에 영국의 선철 생산량은 1만 7천여톤밖에 안 되었지만, 1800년에는 25만 톤으로 증대되었다. 1700년에 석탄생산량은 260만 톤이었으나, 1795년에는 1,000만 톤에 달하였다.
자본주의 국가는 산업 혁명을 통하여 크게 생산력을 발전시켰다. 영국, 프랑스 등 주요한 자본주의 국가의 자본가들은 세계 각지에 가서 상품시장을 탈취하고 원료 산지를 강점하였다. 그들은 식민지 인민들을 야만적으로 약탈하여 그곳의 빈곤과 낙후를 조성하고 동방을 서방에 종속시켰다.
산업 혁명은 또 사회 관계면에서의 혁명으로서 사람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의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산업 혁명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결과는 ≪전반 사회가 날로 더욱 적대적인 두 큰 진영, 즉 서로 직접 대립되는2대 계급, 즉 자산 계급(부르조아지)과 무산 계급(프롤레타리아)으로 분열된것이다.≫(마르크스)
자본주의 제도하에서 산업 혁명에 의하여 창조된 대량의 재부는 자본가들을 살찌웠지만 광범한 노동자 대중의 생활은 더욱더 고통스러워졌다. 자본가는 최대한의 이윤을 짜내기 위하여 노동자들에게 열악한 노동 조건하에서 매일 열몇 시간의 노동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공장 건물이 낮고 어둠침침한 데다가 통풍 설비마저 없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건강에 엄중한 손상을 받았다. 자본가들은 임금을 낮추기 위하여 성년 남성노동자 대신에 여성 노동자와 아동공을 대량으로 고용하였다. 수많은 아동공들은 공장과 갱내에서 매일 16~17시간의 노동을 하면서 1년 내내 햇빛을 보지 못하였다. 노동자들은 빈민굴에서 살았다. 거기에는 콜레라, 천연두 등 여러 가지 전염병이 떠날 새 없었다. 그러나 무산 계급은 착취와 압박을 받는 계급으로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제도를 매장할 사람으로서 전 인류를 해방할 위대한 역사적 사명을 짊어지었다. 무산 계급은 탄생한 그날부터 자산 계급과 투쟁하였다. 처음에는 기계와 공장 건물을 파괴하는 투쟁 형태로 자본가의 압박에 반항하였다. 그때의 노동 운동은 아직 자연 발생적 단계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투쟁의 발전에 따라 무산 계급은 성숙되고 끊임없이 각오가 제고되었다. 그리하여 다시는 투쟁의 예봉을 공장 건물과 기계에 돌리지 않고 자본주의 제도에 돌리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2대 계급-무산 계급과 자산 계급간의 대립과 투쟁은 날로 더욱 뚜렷해지고 첨예하여졌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산업 혁명≫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산업 혁명 과정에서 각 부문들이 서로 발전을 추진한 사실을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2. 생산 정황과 사회 관계면에서 산업 혁명의 결과에 대하여 분석해 보자.






제8장 과학적 공산주의의 탄생






공상적 사회주의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영국, 프랑스 등의 나라에서 산업 혁명이 진행되고 있을 매 일부 사상가들은 생산이 발전하였는데 왜 생산을 발전시킨 근로자들이 도리어 더욱더 빈궁해지는가, 어떤 사회에서라야 착취와 빈궁의 현상을 소멸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였고 또 무진 애를 써서 방안을 작성하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상에 공상적 사회주의가 출현되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의 저명한 대표적 인물은 프랑스의 생시몽, 푸리에와 영국의 오웬이었다.
끌로드 앙리 생시옹(1760~1825년)은 귀족 가정 출신으로서 북아메리카 독립 전쟁에 참가하였었다. 그는 1802년 이후부터 자기의 생각을 연속 제기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계급적 대립의 현상을 통하여 자산 계급과 무산 계급은 서로 다른 두개의 계급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는 ≪시비가 전도된≫ 죄악의 세계이니 응당 ≪사람마다 평등하고 사람마다 행복≫한 새 사회로 바뀌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은 노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래의 사회는 근로자들에게 속해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생시몽은 혁명적인 수단으로 사회를 개조할 것을 반대하고 지배 계급들이 양심적으로 남을 사랑하고 동정하기만 한다면 스스로 자신의 주장이 실현될 것이라고 환상하였다.
샤를 르 푸리에 (1772~1837년)는 한 부유한 상인 가정의 출신으로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상업계에서 사업하였기에 자본주의의 각종 죄악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 제도에 대한 푸리에의 폭로는 아주 날카롭고 심각하였다. 그는 자본주의 제도 아래 사람들이 남을 해치는 것으로 자기 배를 채우는 행위에 대하여 남김없이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변호사들은 집집마다 소송할 것을 바라며, 유리창장사꾼들은 우박이 마구 쏟아져 모든 유리창이 박살날 것을 바란다고 풍자하였다. 푸리에가 상상한 이상적 사회조직을 ≪팔랑스테르≫라고 하였다. 그는 이런 사회 조직에서 사람마다 평등하며, 공동으로 노동하고 공동으로 노동성과를 향수하며, 무상 교육을 받게 하려고 상상하였다. 그는 자기의 이런 계획을 신문 광고판에 내고 매일 점심때면 돈을 내어 ≪팔랑스테르≫를 꾸리려는 부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푸리에는 일생을 이렇게 기다리었지만 그를 찾아오는 부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로버트 오웬(1771~1858년)은 가난한 수공업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상점의 견습공으로 있으면서 고된 생활의 단련을 받았기 때문에 영국의 가난한 노동자들을 몹시 동정하였다. 그는 한 방직 공장의 지배인으로 된 후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과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임금을 높이고 노동 시간을 줄이고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유치원을 세워 주는 등 여러 가지 조치들을 취하였다. 그는 사적 소유, 종교미신과 자산 계급 혼인 제도는 자본주의 사회의 죄악의 근원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는 공평 합리한 이상적 사회를 건립하려고 희망하였으며, 또 미국과 영국에서 일련의 시험을 해보았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제도를 심각하게 폭로하고 비판하였으며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죄악적 현상을 보고 가슴아파하였다 그리고 미래의 이상적 사회에 대하여 여러 가지 아름다운 천재적인 상상, 즉 통일적인 사회 생산으로 무정부적인 개인 생산을 교체하며, 도시와 농촌간의 차이를 소멸하며, 노동을 인간의 수요로 되게 하며, 교육을 생산 노동과 결합하며 여성을 해방하는 등등의 조치를 제기하였다. 이러한 천재적인 상상은 과학적 공산주의 이론을 창립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상적 사회주의는 성숙되지 못한 이론으로서 바로 성장 중에 있는 무산 계급의 최초의 염원, 아직 명확하지 못한 염원을 반영한 것이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과 발전 법칙을 천명할 수 없었고, 계급 투쟁을 알지 못하였으며, 무산 계급이 자본주의의 매장인이며 새 사회의 창건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론상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를 교체하게 된다는 이 객관적 법칙을 과학적으로 천명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회주의는 실현될 수 없는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 무산 계급이 날로 성장하여 독립적인 정치운동을 하기 시작할 때에 와서는 과학적인 기초 위에 건립된 완전한 혁명 이론으로 공상적 사회주의 이론을 교체할 것이 날로 요구되었다.





산업 무산 계급이 역사 발전의 가장 위대한 동력으로 되었다
자본주의생산 방식이 가일층 발전됨에 따라 자본주의 제도의 기본 모순도 갈수록 뚜렷해졌다. 1825년에 영국에서 주기적인 자본주의 경제 공황이 폭발하였다. 이것은 첫번째 자본주의 경제 공황이었다. 그후부터 대략 10년에 한번씩 경제 공황이 폭발하였으며, 공황의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그 정도도 갈수록 심해졌다. 이것은 자본주의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생산수단에 대한 점유의 사(私)자본주의적 형태간의 모순으로 하여 조성된 것이다. 자본주의 제도 자체로서는 이 기본 모순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 공황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19세기 30년~40년대에 자산 계급에 반대하는 무산 계급의 투쟁은 새로운 단계로 추진되었다. 노동 운동은 기계를 파괴하는 자연 발생적 투쟁 시기로부터 의식적이며 조직적인 경제 투쟁 및 정치 투쟁 시기에 들어섰다. 1831년과 1834년의 프랑스 리옹 노동자 봉기, 1836년에 시작된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과 1844년의 독일 실레지아 방직 노동자 봉기는 모두 무산 계급이 이미 독립적 정치 역량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하여 역사 발전의 가장 위대한 동력으로 되었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1830년 7월에 프랑스 빠리의 노동자, 수공업자, 병사와 학생들이 ≪7월혁명≫을 일으켜 복고되었던 부르봉 왕조를 뒤엎었다. 그러나 정권은 대자산 계급이 건립한 ≪7월 왕조≫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리하여 노동자와 광범한 근로 인민들의 생활에는 아무런 개선도 없었다. 프랑스 동남부에 있는 리옹은 견직물이 많이 산출되는 공업 도시였다. 그러나 견직물을 생산한 리옹 노동자들은 헐벗고 굶주렸다. 그들은 매일 15시간 내지 18시간의 노동을 하였지만 받는 임금으로는 1파운드의 빵밖에 살 수 없었다. 여성 노동자와 아동공의 처지는 더욱 비참하였다. 수많은 아동공들이 흔히 15세쯤 되면 지쳐 죽었다. 이렇듯 재난 속에서 허덕이던 리옹의 노동자들은 생존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일어나 투쟁하였다. 1831년 10월에 6,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시위 행진을 단행하여 임금 인상을 요구하였지만, 자산 계급 정부의 거절을 당하였다. 방직 노동자들은 분노하여 ≪악명높은 폭군을 몰아낸 우리는 도리어 백만장자들의 통치를 받고 있다≫고 하면서 ≪일하여도 살지 못할 바엔 싸우다 죽자!≫는 전투적 구호를 외쳤다. 11월 하순에 그들은 봉기를 일으켜 한때 리옹을 점령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즉시 빠리로부터 많은 반혁명 군대를 끌어왔다. 그리하여 12월 3일에 봉기는 피바다 속에서 탄압당하였다.
1834년 4월 9일에 리옹 노동자들은 다시 봉기를 일으켰다. 이번 봉기는 그 기세가 더욱 드높았으며, 부자들의 정권을 뒤엎고 민주 공화국을 건립하자는 정치 구호를 명확히 제시하였다. 대경 실색한 자산 계급정부는 황급히 군대를 끌어다 이 혁명의 세찬 불길을 꺼보려고 날뛰었다. 그들은 살기 등등하여 ≪거리에서 사람을 보는 족족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동시에 대포로 노동자 주택 구역을 포격하였다. 봉기를 일으킨 노동자들은 폭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로써 반동 정부의 피비린 학살에 대답하였다. 장비가 나쁘고 역량의 차가 현격한 정황하에서도 그들은 밤낮 며칠 동안 싸워 적으로 하여금 걸음마다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하였다. 4월 13일에 리옹 시내의 마지막 봉기자들은 한 교회당에서 전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두 차례의 리옹 봉기는 역사상 가장 이른 노동자들의 무장 봉기로서 무산 계급의 독립적 운동의 빛나는 본보기로 되었다. 리옹 봉기의 뒤를 이어 영국에서 규모가 아주 큰 차티스트 운동(1836~1848년)이 일어났다. 1871년에 영국 노동자들은 ≪인민 헌장≫이라는 정치 강령을 제정하였다. 그 중심 내용은 일반적 선거권을 얻어 노동자가 국가의 관리에 참여할 기회를 가지게 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어 운동은 런던에서 시작되어 신속히 전 영국에 파급되었다. 각지에서 성대한 집회를 가졌는데, 어떤 곳에는 수십만 명이 참가하였다. 수많은 도시 노동자들이 대파업을 단행하였고, 어떤 곳에서는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그런데 차티스트 운동의 지도자들이 평화적 청원 방식을 통하여 투쟁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이 차티스트 운동은 최후에 영국 정부의 탄압을 당하고 말았다 이것은 평화적 방식으로 혁명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 차티스트운동은 ≪범위가 넓고 진정으로 군중적이고 정치성을 띤, 세계 최초의 무산 계급 혁명 운동이었다.≫(레닌) la44년에 독일 실레지아에서도 봉건지주와 자본가의 압박, 착취를 반대하는 무장 봉기가 폭발하였다. 3,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무기를 들고 정부 군대와 용감하게 전투하였다. 노동자들은 이틀 동안 끈질기게 싸웠으나 끝내 탄압당하였다. 이 몇차례의 대규모적인 독립적 노동 운동의 흥성은 과학적 혁명 이론을 창시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독립적 노동 운동은 이런 이론의 지도 아래에서만 정확한 길로 나아갈 수 있고 투쟁의 최후 승리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혁명적 이론이 없이는 혁명적 운동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과학적 공산주의의 창시는 이미 시대의 절박한 요구로 되었다.





과학적 공산주의의 창시를 위해 투쟁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무산 계급혁명의 스승들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시대의 수요에 적응하여 과학적 공산주의를 창시하는 역사적 과업을 담당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들의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천재라는 조건도 있지만 주로 그들이 당시의 계급 투쟁과 과학적 실험의 실천에 직접 참가한데 있다.≫(모택동)
독일 서부의 라인주 모젤 강변에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옛도시 트리이르가 있다. 칼 마르크스(1818-1883년)가 바로 여기에서 탄생하였다. 그때 모젤 강 연안의 농민들은 가파르고 돌이 많은 산비탈에 포도를 재배하여 포도주를 만들면서 아주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현상은 나어린 마르크스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주었으며, 근로 인민들에 대한 그의 동점심을 불러일으켰다. 1835년 가을에 마르크스는 중학교 졸업 시험지에 자기는 인류를 위해 가장 많은 복리를 도모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할 위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다고 쓰고 나서, 자기의 행복은 천백만 사람들에게 속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 해에 마르크스는 본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1년 후에 베를린 대학에 진학하였다. 대학에서 마르크스가 배운 것은 법률이었지만, 철학과 역사를 학습하는 데 더욱 많은 시간을 들였다. 당시 베를린 대학은 사상투쟁의 중심이었다. 1818년부터 1831년까지 저명한 철학가 헤겔이 이곳에서 강의하였다. 그가 죽은 후 많은 강좌는 그와 제자들이 주관하였다. 베를린 대학에서 헤겔 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마르크스는 진보적인 ≪청년 헤겔파≫의 활동에 참가하여 헤겔의 변증법 사상을 섭취하였다. 1841년에 마르크스는 박사 논문에서 한 고대 철학가의 말을 인용하여 ≪신의 위엄도 번개도 천둥도 두렵지 않다≫고 하면서 자기의 충만된 투쟁 정신을 표출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마르크스는 또 다른 한 철학가 포이에르바하의 저작을 읽고 그의 유물론적 사상을 접수하였다. 마르크스는 사회정치 활동에 참가하였고, 쾰른의 ≪라인 신문≫에 투고하였으며, 그후 얼마안 가서 라인 신문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편집 사업은 마르크스에게 사회와 광범히 접촉할 수 있는 조건을 지어 주었고, 근로 인민들의 빈궁한 생활을 더욱 심도있게 이해하게 하였으며, 프로이센 사회의 추악한 면모를 더욱 투철히 보게 하였다.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귀족, 지주들이 국가 정권을 이용하여 원래 농민들이 사용하던 토지와 삼림을 강점한데 대하여 특히 분개하였다.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에 연속 글을 발표하여 농민들의 이익을 과감히 수호하였고 프로이센 국가 기관의 독단 독행에 대하여 규탄하였다. 이 신문은 마르크스의 주관 아래 정의를 주장하고 근로 인민들의 질곡을 하소연하고 프로이센 전제 정부의 죄행을 통책함으로써 혁명적인 민주주의 색채가 갈수록 더욱 선명하여졌다. 그러므로 그 정치적 영향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신문의 주문 부수는 800부로부터 3,000부로 증가되고 소매 부수도 대대적으로 증가되었다. 이런 상황은 프로이센 정부를 놀라게 하였고 격노하게 하였다. 그들은 횡포하게도 마르크스더러 태도를 고치라고 핍박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런 무리한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으나 할 수 없이 주필의 직무에서 사직하였다. 그후 얼마 안 가서 ≪라인 신문≫도 폐간되었다. 1843년 11월에 마르크스는 빠리에 갔다. 빠리에서의 생활은 마르크스의 일생에서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빠리에서 영국의 고전 정치경제학과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깊이 연구하였고, 각국의 혁명 역사, 특히 프랑스의 계급 투쟁사를 연구하였으며, 직접 여러 가지 노동 단체의 활동에 참가하여 그들과 밀접한 연계를 가졌다. 마르크스는 계급 투쟁의 실천 중에서 공산주의가 이미 추상적 이론인 것이 아니라, 무산 계급 투쟁의 구체적 목표로 되었다는 것을 똑똑히 보아내었다. 마르크스는 이 시기의 저작에서 사회주의혁명의 임무, 동력 및 방도에 대한 문제에 명확하고 과학적인 해답을 주었다. 그는 1844년에 발표한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비판≫ 서문에서 무산 계급은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하고 인류의 해방을 달성할 역량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명확히 지적하였다. 이때 마르크스는 이미 혁명적 민주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변화되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년)는 라인주의 바르멘시에서 탄생하였다. 엥겔스의 아버지는 공장주였다. 엥겔스는 아버지의 강요에 의하여 중학교를 중도에 퇴학하고 상업에 종사하였다. 엥겔스는 사업하는 이외의 시간을 모두 학습에 돌리고 깊이있게 연구하였으며, 한마음으로 매일밤 늦게까지 학습을 견지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책과 신문들에서 지식을 얻었기 때문에 학식이 아주 깊은 사람으로 되었다. 바르멘 일대는 독일에서 가장 발달한 공업 지구였다. 엥겔스는 거기에서 점차 노동자, 수공업자들을 깊이 이해하였고, 그들을 몹시 동정하였다. 엥겔스는 당시의 정부, 가정, 그리고 전체 자산 계급 상층 사회를 극도로 증오하고 적대시하면서 그 속에서 벗어나 자기의 앞길을 개척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혁명의 길을 선택하였다. 1839년에 그는 자기의 글에서 독일의 제왕과 제후들을 왕위에서 떨궈내야 하며 실천 속에서 폭력적으로 그들을 쫓아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하였다.
1842년에 엥겔스는 영국에 가서 아버지가 경영하는 맨체스터 영업소에서 사업하였다. 맨체스터는 영국의 방직 공업 중심지였다. 거기에서 엥겔스는 노동자들과 많이 접촉할 기회를 가졌었다. 그는 자산 계급의 사교활동과 연회를 다 버리고 여유 시간을 거의 모두 보통 노동자들과 사귀는데 썼다. 그는 시간을 짜내어 영국의 기타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노동자들의 생활 형편을 관찰하였다. 엥겔스는 차티스트 운동의 지도자들과 통상적인 관계를 가졌으며, 또 영국의 노동 운동을 엄밀히 주시하고 지지하였다. 엥겔스는 이 시기의 자기 저작에서 자본주의 제도의 심각한 모순과 무산 계급의 역사적 임무 등의 문제에 대하여 완벽하게 논술하였다. 그는 자기의 혁명 실천을 통하여 공산주의 세계관을 수립하고 공산주의자로 변신하였다. 1845년에 그는 자기의 직접적인 관찰과 정확한 재료에 근거하여 ≪영국 노동 계급의 상태≫라는 글을 썼다. 이 빛나는 노작은 논쟁할 여지가 없는 저술로써 자본주의 사회를 해부하여 노동 계급에게 사회주의의 빛나는 길을 가리켜 주었으며, 노동 운동은 반드시 사회주의와 결합하여야 한다는 중요한 원리를 제기하였다.
1842년 11월에 엥겔스는 영국으로 가는 길에 쾰른에 들렀는데, ≪라인 신문≫ 편집실에서 처음으로 마르크스를 만났다. 1844년 8월 말에 엥겔스는 빠리를 지나는 길에 두번째로 마르크스를 만났으며, 마르크스의 집에서 10일간 묵었다. 두 사람은 사상을 충분히 교환하였으며, 모든 이론 영역에서의 의견의 일치를 가져왔다. 위대한 무산 계급 혁명의 스승으로서의 이 두 사람은 이때로부터 공동의 전투적 노정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독일의 고전 철학, 영국의 고전 정치경제학,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등 19세기에 인류가 창조한 이런 우수한 성과에 대하여 혁명적으로 개조하고 섭취하여 공동으로 글을 샜고, 그것을 이론의 근거로 과학적 공산주의를 창시하였다. 마르크스주의 철학-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정치경제학, 과학적 사회주의는 과학적 공산주의의 세 개 구성 부분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함께 과학적 공산주의를 창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이 위대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종신토록 분투하였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첫번째의 전투 강령-≪공산당 선언≫
위대한 혁명의 스승들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과학적 혁명 이론을 창시한 동시에 또 무산 계급 정당을 창립하기 위하여 많은 사업을 하였다. 1846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브뤼셀에서 공산수의 통신 위원회를 창립하였다. 이 위원회는 각국의 사회주의 지부와 연계를 가지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선전과 창당 준비 방면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또 프랑스에 망명한 독일 노동자들의 비밀 단체인정의자 동맹(정의자 동맹은 프랑스에 망명한 독일 노동자들이 조직한 혁명단체로서 19세기 30년대에 건립하였다. 후에 네덜란드, 헝가리, 체코, 러시아, 스웨덴, 노르웨이 등 나라의 사람들이 참가함으로써 국제적 노동자 조직으로 되었으며, 활동 중심을 빠리에서 런던에 옮겼다. )과도 통상적으로 연계를 가지고 맹원들로 하여금 한때 유행된 가짜 사회주의와 경계선을 똑똑히 나누게 하기위하여 이론 수준과 사상 의식을 제고하도록 그들을 원조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원조하에서 동맹 내부의 사상은 점차적으로 정돈되었다.
대부분의 맹원들은 마르크슨 엥겔스가 자기의 조직에 참가할 것을 간절히 희망하였으며, 마르크스, 엥겔스의 의견에 따라 동맹을 재조직하려고 하였다.
1847년 6월에 정의자 동맹이 런던에서 대표 대회를 열었다. 엥겔스가 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대회는 마르크스, 엥겔스의 의견에 근거하여 정의자 동맹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재조직할 것을 결의하고 ≪전 세계 무산자여, 연합하라!≫는 전투 구호를 제기하였다. 대회는 또 새 규약을 제기하고 민주주의 중앙 집권제의 원칙을 규정하였다. 그해 11월에 공산주의자동맹은 제2차 대표 대회를 열고 제1차 대표 대회에서 제출한 새 규약을 수정하여 채택하였다. 새 규약의 제1조에는 ≪동맹은 자산 계급을 타도하고 무산 계급의 통치를 건립하며, 계급적 대립에 기초한 낡은 자산 계급사회를 소멸하고, 계급도 없고 사적 소유도 없는 새 사회를 창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확히 규정하였다. 대회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동맹의 강령을 기초할 것을 위탁하였다. 1848년 2월에 새 강령이 발표되었다. 이것이 바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첫번째 전투 강령-≪공산당 선언≫이었다.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계급 투쟁 학설을 천명하고, 계급투쟁은 계급 사회 역사 과정을 구성하는 기본 내용이며 사회의 발전을 추동하는 힘이라고 지적하였다. ≪선언≫은 자본주의 사회의 적대적인 2대계급-자산 계급파 무산 계급의 발생, 발전 및 투쟁 과정을 천명하면서 한편으로 ≪자산 계급은 역사상에서 일찍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긍정하고, 다른 한편으로 또 자산 계급은 ≪자기의 무덤을 파는 사람≫을 낳았다고 설명하였으며, ≪자산 계급의 멸망과 무산 계급의 승리는 다 같이 불가피하다≫라고 과학적으로 단언하였다.
≪선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무산 계급은 현존하는 일체 사회제도를 폭력으로 전복하여야만 자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노동자혁명에 있어서의 제1보는 무산 계급이 지배 계급으로 상승하며 민주를 전취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무산 계급은 자기의 정치적 통치를 이용하여 자산 계급의 자본 전체를 점차 탈취하며, 모든 생산 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생산력의 총량을 될수록 급속히 증대시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언≫에 집중적으로 논술된 무산 계급 독재 사상이다. 공산주의가 폐지하려는 제도는 소유 제도 일반인 것이 아니라 자산 계급의 소유 제도라고 ≪선언≫은 특히 지적하였다.
≪선언≫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동들의 악독한 공격을 반박하고 형형 색색의 자산 계급 및 소자산 계급 사회주의 유파들을 비판하고 나서 공산당은 무산 계급의 선봉대 조직이며 시종 운동의 전진을 추동하는 부분이라고 지적하였다. ≪선언≫은 또 무산 계급은 자기의 정당을 창립해야 하며 자기의 정당이 없이는 해방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명확히 지적하였다. ≪선언≫은 필승의 확고한 신념을 과시하고 다음과 같이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전율케 하라. 이 혁명에서 무산자가 잃을 것은 철쇄뿐이고, 그들이 얻을 것은 전 세계이다.≫
≪전 세계 무산자여, 연합하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선언≫으로 새로운 한 시대를 창조하였다. ≪선언≫은 마르크스의 학설에 대하여 ≪완전 무결하게,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서술은 지금까지도 가장 우수한 서술로 남아 있다.≫(레닌), ≪선언≫의 발표는 과학적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의 발생을 표시한다. 그후부터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생기 발랄하게 전개되어 항거할 수 없는 역사적 조류로 되었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공상적 사회주의자 생시몽, 푸리에, 오웬의 사상과 경향에 어떤 공통점들이 있는지 토론해 보자.
2. 자본주의 경제 공황, ≪7월 혁명≫, ≪인민 헌장≫, ≪공산주의자 동맹≫를 설명해 보자.
3. 연대 순으로 마르크스, 엥겔스의 사적을 도표로 표시하라.
4. ≪공산당 선언≫의 주요 내용과 ≪선언≫의 역사적 의의를 설명해 보자,





제9장 1848년 유럽 혁명






유럽 대륙을 휩쓴 혁명의 열화
≪공산당 선언≫이 세상에 나오기 전야인 1848년 초에 유럽 대륙에서 기세 드높은 혁명 운동이 폭발하였다. 이번 혁명은 심각한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원인으로 하여 발생하였다. 즉 경제면에서는 1845년~1846년에 있은 유럽의 농업 흉작이 근로 인민의 생활을 가일층 악화시켰고, 1847년에 유럽에 만연된 공업과 상업 위기가 광범한 노동자들의 실업을 초래하였다. 정치면에서는 자산 계급 자유파를 포괄한 각국 인민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권리를 확대할 것을 각국 통치자들에게 요구하였고, 다른 나라에 예속된 국가의 인민들이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였다. 처음 이탈리아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혁명의 불길은 그후 빠리로부터 비인에로, 베를린으로부터 부다페스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휩쓸었다.
혁명은 세찬 기세로 신속히 발전하여 낡은 통치 질서를 뒤흔들어 놓았다.
1848년 2월 22일에 프랑스 빠리의 노동자, 학생,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역사에서 말하는 ≪2월 혁명≫이다. ≪2월 혁명≫의 영향으로 독일 서남부의 바바리아 등의 지역에서는 인민 혁명 운동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3월 13일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인에서도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유럽의 악명높은 반동 인물이며 오스트리아 수상인 메테르니히는 여자 옷차림을 하고 황망히 도망쳤다. 3월 18일에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의 시위 군중들은 정부 군대와 육박전을 벌여 일주일의 격전 끝에 국왕 군대 1만여 명의 공격을 물리쳤다. 국왕은 할 수 없이 정부를 재조직할 것과 의회를 소집하고 헌법을 제정할 것을 선포하였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독일의 기타 작은 영방들에서의 혁명의 승리는 분열된 독일에 통일 조건을 형성해 주었다.
동남 유럽 피압박 민족들의 해방 운동도 세차게 일어났다. 오스트리아의 통치 아래 있던 헝가리 체코의 인민들과 짜르 러시아, 터어키, 오스트리아 등 나라의 통치 밑에 있던 루마니아인민들은 전후하여 기세 드높은 혁명 운동을 일으켰다. 그 중에서 영향력이 가장 컸던 것은 헝가리 봉기였다. 3월 15일에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혁명이 폭발하면서부터 봉기 대군은 오스트리아 군대의 여러 차례의 진공을 완강하게 물리치고 이듬해 4월 14일에 헝가리의 독립을 정식으로 선포하였다. 혁명의 세찬 물결은 봉건 군주들을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이 발전하면 저들의 이익에 손해될까봐 두려워하는 자산 계급도 놀라게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두 러시아의 간섭에 대하여 방금 각성하기 시작한 무산 계급을 대처하는 유일한 역량으로 인정하였다.





프랑스 혁명
≪7월 혁명≫ 이후 프랑스를 통치하고 있었던 것은 부패한 ≪7월 왕조≫였다. 자산 계급의 한 개 진단-금융 귀족의 이익을 대표한 7월 왕조는 사욕을 채우려고 나쁜 짓을 가리지 않았으며, 인민대중들에게서 가중한 세금을 받아들여 백성을 못 살게 굴었으므로 근로인민들의 강렬한 불만을 자아냈다. 신흥 산업 자산 계급은 통치권을 나누어 가질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의 형세를 잘 알고 있던 프랑스의 한사람은 ≪우리는 이 시각에 분화구에서 잠자고 있다≫고 하였다. 1848년 2월 22일에 빠리 노동자, 학생, 시민들은 대규모의 시위 행진을 단행하였으며, 거리마다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반동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24일에 봉기 대오는 모든 병영과 무기 창고를 점령하고 왕궁으로 쳐들어갔다. 국왕 루이 필립은 황급히 영국으로 도망쳤다. 인민들은 국왕의 옥좌를 광장에 끌어내다 대중들 앞에서 불살라 버렸다. 이렇게 7월 왕조는 전복되고 2월 혁명은 승리하였다. 2월 24일에 봉기대표자들은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혁명의 성과는 자산 계급에게 절취당하였고, 자산 계급의 대표가 임시정부의 모든 요직을 차지하였다. 임시 정부는 노동자들을 마비시키기 위하여 소자산 계급 사회주의자인 루이 블랑과 노동자인 알베르를 받아들였다. 루이 블랑은 사회 개혁을 주장하였으나, 자산 계급 국가에 기탁하여 개혁해 보려고 하였고 계급적 조화를 선양하였다. 거리의 바리케이드가 아직 제거되지 않았고, 강대한 무장이 노동자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으며, 게다가 자산 계급에게는 아직 무산 계급을 압제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이 없었기에 임시 정부는 또 노동자들이 제기한 일부 요구 즉 프랑스를 공화국(프랑스 제2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노동자들의 노동권리를 보장하며 노동 시간 (빠리에서는 매일 10시간, 지방에서는 11시간)을 단축시키는 데 관한 법령을 공포할 것과 보편 선거를 실시할 것을 거짓으로 응낙하였다. 후에 임시 정부는 딴 심보로 ≪국가 공장≫을 세워 실업노동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라고 하였으며, 또한 노동자들이 사회주의를 반대하도록 하기 위하여 고의 적으로 노동조건을 나쁘게 하고 노임을 아주 적게 주었다. 임시 정부는 또 농민과 수공업자들에게서 부가세를 더 받아들이는 원인은 바로 국가 공장의 노동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들과 노동자들간의 관계를 악독하게 도발함으로써 앞으로의 투쟁에서 빠리의 노동자들을 고립시키려 하였다. 이와 동시에 임시 정부는 또 룸펜 무산자들 가운데서 청년들을 긁어모아 별동대(청년유격대원)를 조직해 가지고 빠리 노동자들을 학살할 준비를 하였다. ≪ 이런 음모를 획책한 다음, 정권을 장악한 자산 계급은 흉악한 원형을 드러내 놓았다. 그자들은 루이 블랑과 알베르를 정부에서 쫓아내고, 6월 길일에는 공공연히 ≪국가 공장≫을 폐쇄하는데 관한 명령을 내렸다. 노동자들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싸워야 했다.
6월 22일에 분노에 찬 국가 공장의 노동자들은 시위 행진을 단행함으로써 6월 봉기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23일 아침부터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봉기자들의 바리케이드에는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제도를 타도하자!≫, ≪민주주의적 사회공화국 만세 !≫라고 쓴 붉은 기가 나부끼고있었다. 전투는 연속 나흘 동안 계속되었다. 4만여 명의 봉기 노동자들은 자기들보다 6배나 더 되는 정부군, 별동대와 싸웠다. 노동자 주택 구역인생 앙뜨완느 구역에서의 전투가 가장 치열하였다. 수많은 여성들과 아이들도 다 전투에 참가하였다. 봉기 노동자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혁명을 위하여 자기의 일체를 다 바쳐 용감히 싸웠다. 25일에 생 앙뜨완느 구역이 함락되고 봉기는 실패하였다.
자산 계급은 미친 듯이 무산 계급에 대하여 잔혹한 수단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1만 1, 000여 명의 봉기자들의 학살당하고 2만 7000여 명이 감금되었거나 유배, 또는 고역살이를 하였다.
6월 봉기는 ≪현대 사회에서 대립되고 있는 두 계급간에 벌어진 첫 번째의 위대한 전투였다. 그것은 자산 계급 제도를 보존하느냐 철폐하느냐하는 전투였다.≫ (마르크스)
봉기가 실패한 후 얼마 안 지나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보나빠르트가 프랑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후에 그는 정변을 일으켜 대권을 혼자서 좌지우지하였다. 1852년에 그는 황제로 자칭하고 프랑스를 제국으로 한다고 선포하였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제2제국-금융 자산 계급 및 대산업가의 제국이었다.





동남 유럽 민족 해방 운동을 탄압한 짜르 러시아
프랑스 2월 혁명의 소식이 러시아의 수도에 전해지자 황궁에서 한창 무도회를 열고 있던 짜르 니꼴라이 1세는 그 자리에서 ≪군관 여러분! 빠리에서 혁명이 일어났으니 즉시 전마에  오를 준비를 하시오!≫라고 명령하였다. 짜르 정부는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를 끊은 다음, 군사 총동원령을 내리고 프랑스혁명을 박멸하는 데 30만 대군을 보낼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형세의 급속한 발전으로 하여 프랑스에 출병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었다. 이렇게 되자 짜르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루마니아 혁명을 교살하였다. 짜르 정부는 돈을 내고 총을 내어 혁명을 박멸하도록 반동 정부를 도와주었으며, 또 오스트리아 반동 정부와 결탁하여 연합으로 헝가리에 출병하였다. 1849년 5월 27일에 러시아에서 파견한 14만 대군이 몇백문의 대포를 가지고 헝가리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헝가리 혁명군의 용감한 반격을 받아 러시아-오스트리아 군대는 여러 번 패배를 당하였다. 나중에 헝가리 혁명군은 역량이 너무 약한 데다가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비열한 수단으로 헝가리 혁명 대오 내부에 숨어 있는 간첩을 매수하고 이용하여 내외로 협공하는 바람에 끝내 혁명은 8월 13일에 교살당하였다. 헝가리 혁명을 교살한 짜르 러시아는 동남 유럽 민족 해방 운동을 탄압하는 유럽 헌병으로 되었다.
각국의 반동 세력들이 덮쳐드는 바람에 세차게 타오르던 유럽 혁명의 불길은 1849년 8월에 이르러 사실상 꺼졌다.





마르크스, 엥겔스와 1848년 혁명
1848년 혁명 가운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만강의 열정으로 이 불타는 투쟁 속에 뛰어들었다. 3월 초에 마르크스는 브뤼셀로부터 빠리에 왔다. 그는 형세의 수요에 근거하여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를 재조직하고 의장직을 담당하였다. 엥겔스는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었는데, 후에 그도 빠리에 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를 씀으로써 독일 혁명을 위한 강령, 즉 ≪전 독일을 통일된, 분할할 수 없는 공화국으로 선포하며≫, 일체의 봉건적 의무를 무상으로 폐지하며, 토지, 광산, 교통 시설을 회수하여 국가 소유로 하며, 통일적인 국가 은행을 세운다는 강령을 제정하였다. 그들은 300~400명의 독일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동맹의 성원들을 동원, 조직하여 가지고 독일에 돌아와 혁명에 참가하였다.
프로이센 3월 혁명이 폭발한 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에 돌아와 쾰른에서 전국성을 띤 ≪신라인신문≫을 준비했다. ≪신(新)라인신문≫은 맹원들과 혁명적 대중들에게 마르크스, 엥겔스가 제정한 방침, 정책을 선전하고 혁명 역량들을 연계시키고 조직하는 강건한 전투 보루로 되었다. ≪신라인신문≫은 열정적으로 혁명 위업을 찬양하였다. ≪신라인신문≫은 격정으로 충만된 전투적인 언어로 빠리 노동자들의 6월 봉기를 보도하고 수호하였다. 그리고 반혁명파들과 자산 계급 자유파들의 배반 행위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힐책하였다.
1849년 5월부터 6월까지 독일에서 혁명과 반혁명간에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마르크스는 ≪신라인신문≫의 전투 초소를 굳게 지켰다. 그는 이 신문이 프로이센 반동 정부에 의해 봉쇄당할 때까지 초소를 떠나지 않았다. 엥겔스는 직접 총을 들고 독일의 라인 지역과 남부에서 투쟁하였다. 혁명이 실패한 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할 수 없이 영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그들은 런던에 와서 혁명의 경험 교훈을 제때에 총화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1848년 유럽 혁명을 시간 순서로 설명해 보자.
2. 1848년 혁명에서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활동을 설명해 보자.









제10장 농노 제도의 폐지와 짜르 러시아의 침략 팽창






1861년 개혁
19세기 중엽에 자본주의 공업이 완만하게 발전한 러시아에서는 기계로 생산하는 공장이 수공업 공장을 교체하기 시작하였다. 면방직업은 러시아 공업에서 주요 부문으로 되고 있었는데, 그중 비교적 큰 기업소에는 150~200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대외 무역은 19세기 전반기에 와서 배나 늘어났다. 그러나 농노 제도에 의한 저해력은 갈수록 더욱 뚜렷해졌다. 예를 들면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근 40%가 농노여서 노동 생산 능률이 낮았고, 자본주의 공업에 수요되는 자유 노동력이 보장되지 못하였으며, 국내 시장이 제한을 받았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서유럽 국가들보다 낙후하였다. 19세기 50년대에 영국의 선철 생산량은 러시아의 15배였고, 프랑스의 선철 생산량은 러시아의 3배였다. 러시아공업의 기타 부문, 상업, 철도, 수상 운송도 모두 유럽 국가들보다 뒤떨어졌다. 러시아 공장들에서 사용하는 기계의 대부분은 외국으로부터 수입한 것이었다. 농노 제도는 곳곳에서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의 엄중한 장애로 되고 있었다.
귀족 - 지주들은 더욱 많은 양곡과 원료를 수탈하여 시장에 투입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착취를 강화하였다. 그러므로 농노들의 처지는 날로 더욱 악화되었다. 그들은 ≪멀건 죽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라고 여겼다. 흉년에는 농민들이 도토리, 겨, 푸성귀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혁명적 민주주의 자들은 농노 제도를 당시 러시아에서의 ≪모든 사악의 초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대표 인물은 ≪모든 토지는 농민들에게 돌리며 그 어떤 배상금도 물지 않는다. 지주들은 어서 썩 물러가라≫고 외쳤다. 따라서 농민들의 반항력이 강화되고 농민 운동은 세차게 발전하였다.
19세기의 첫 25년 동안에 러시아에서는 매년 평균 11차례의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1826년부터 1854년까지의 사이에는 매년 평균 24차례 일어났으며, 1855년부터 1861년까지의 사이에는 매년 평균 79차례나 일어났다. 농민 운동의 세찬 폭풍 앞에서 귀족 - 지주들의 통치는 풍전 등화마냥 흔들거렸다. 바로 당시의 어떤 사람이 ≪지금 발밑에는 그전처럼 움직이지 않는 튼튼한 땅이라곤 없다‥‥‥‥어느날 아침 깨어나 보니 자신은 이미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얼음덩이 위에 있었다≫라고 묘사한 것과 같은 형편이었다.
바로 이렇게 엄중한 위기를 겪고 있는 러시아 농노 제도는 오래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짜르 알렉산드르 2세는 인민 혁명이 두려워 ≪농민들이 아래로부터 일어나 자신을 해방하는 것을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위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더 낫겠다≫라고 귀족 - 지주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막다른 골목에 이른 정황하에서 짜르 정부는 농노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귀족-지주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조치였다. 바로 알렉산드르 2세가 국무회의에서 개혁 방안을 최후로 심사할 때, ≪지주의 이익을 수호할 수 있는 조치는 하나하나 다 취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와 같다. 1861년3월 3일(러시아 역서로 2월 19일)에 짜르는 농노 제도를 폐지하는 법령에서 명하였다.
법령은 농노들이 법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으로 되었으니 지주들이 다시는 농노를 매매할 수 없고 그들의 생활에도 간섭할 수 없다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실제상에서는 ≪자유≫를 얻은 농민들이 여전히 지방 귀족 - 지주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는 촌락 공동체의 관리를 받아야 하였기에 지주에 대한 농민들의 경제적 의존관계는 여전히 존재하였다.
법령은 농노들이 ≪해방≫을 받을 때 땅도 한몫 분배받아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농민들에게 땅을 분배할 때 지주들이 토지의 대소를 결정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이전에 농노들이 부치던 토지 면적보다 5분의 1 내지 5분의 2를 감소시켰다. 지주들은 또 이 기회에 농민들이 분배받은 땅 가운데서 가장 비옥한 부분을 빼앗아 가졌다. 농민들은 반드시 자기에게 분배된 땅을 값을 치르고 사야 했다. 값을 치르기 전에는 토지 소유권이 여전히 지주에게 있었으므로 농민들은 여전히 지주를 위해 부역을 하거나 지주에게 부역 대신에 소작료를 바쳐야 하였다. 땅값의 5분의 1 내지 4분의 1은 농민이 현금으로 지주에게 바치고, 그 나머지는 정부에서 이자를 붙인 채권으로 지불하였다. 대신 지불한 금액은 농민이 반드시 49년 동안에 해마다 이자를 붙여서 짜르 정부에 바쳐야만 하였다. 농민들이 산 땅의 값은 당시의 땅값보다 높았다. 농민들이 분배받은 땅은 당시의 싯가로 계산하면 도합 약 6억 5천만 루블이었지만 농민들이 내야 할 땅 값은 9억 루블이나 되었다. 그들이 후에 지주와 짜르에게 실제 갚은 금액은 도합 20억 루블이나 되었다.
한때 떠들썩했던 농노제 개혁은 기실 농민에 대한 파렴치한 약탈이었다. 이리하여 ≪농민들이 ≪자유≫를 얻었을 때는 알몸뚱이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농민은 ≪전부의 토지≫와 ≪전부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짜르 정부에 기만당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봉기로 대답했다. 1861년부터 1863년까지의 사이에만 하여도 2000여 차례의 봉기가 일어났다.
1861년 개혁은 농노주가 실행한 자산 계급적인 개혁이었다. 농노 제도의 철폐는 러시아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발전에 필요한 노동력, 자금과 시장을 얻게 하여 자본주의 발전의 길에 오르게 하였다. 그러나 개혁후의 러시아는 여전히 대량의 봉건적 잔재를 보유하고 있었다.





19세기 짜르 러시아의 침략 팽창
19세기에 짜르 러시아는 세계적 제국을 건립하려고 대외적으로 침략 팽창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무력팽창을 통하여, 터어키, 이란 등 나라에 대한 일련의 침략 전쟁을 통하여, 중국에 대한 잠식과 병합을 통하여 동, 서, 남, 북 사방으로 자기의 판도를 확장하였다.
북방에 있어서는 스웨덴으로부터 핀란드를 빼앗았으며, 서방에 있어서는 원래 나폴레옹의 통치하에 있던 바르샤바 대공국 대부분의 토지를 탈취한 동시에 루마니아의 몰다비아 공국으로부터 드네스트르강과 프루트강 사이의 베싸라비아를 빼앗았다. 짜르 러시아의 첫째가는 침략 목표는 남쪽으로 밀고 나가 터어키 제국을 병합하고, 발칸 반도와 중동 지역을 탈취하여 터어키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짜르그라드≫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1828년~1829년의 터어키에 대한 전쟁에서 짜르 러시아는 다뉴브강 어구와 그 부근의 도시 및 깜까즈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짜르 러시아는 또 이란으로부터 그루지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쟌의 일부분 지구를 탈취함으로써 자깝까즈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1853년~1856년 짜르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 사이에 발칸을 쟁탈하는 크림전쟁이 일어났다. 이번 전쟁에 즉 짜르 러시아는 전패하고, 할 수없이 베싸라비아의 일부분 지역에서 물러났다. 바로 이때 짜르 러시아는 또 중국에 대한 침략을 다그치고 있었다.
아편 전쟁 이후 짜르 러시아는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과 야합하여 영국, 프랑스가 제2차 아편 전쟁을 발동한 기회를 타서 청조 정부를 강요하여 불평등한 ≪중 - 로 아이 조약≫(1958년)과 ≪중 - 로 북경 조약≫(1860년)을 체결하고 중국 흑룡강 이북과 우수리강 동쪽의 100여만 평방키로미터의 영토를 강점하였으며, 또 중국 신강의 일부 지구를 침략할 준비를 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짜르 러시아는 까자흐의 서북부에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20년대로부터 짜르 러시아는 까자흐 초원에다 보루를 쌓고 까자흐인, 끼르끼즈인, 우즈베크인, 뚜르크메니아인들이 거주하는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지구를 점차적으로 침점하였다. 짜르의 군대는 당지 인민들의 저항을 받았기에 80년대에 이르러서야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자구를 병합하게 되었다.
짜르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침략이 심화됨에 따라 중국 신강지구에 대해서 침략을 다그쳤다. 짜르 러시아는 청정부를 강박하여 ≪중-로 서북 변계 측량 획정 조약 기요≫에 조인케 하고, 1881년에 또 청정부를 강박하여 ≪중-로 일리 조약≫ 등 일련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19세기 60년대로부터 80년대까지의 사이에 발하슈호 동쪽과 남쪽의 50만여 평방키로미터에 달하는 중국 영토를 강점하였다. 이 지방들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토였다. 기원전 중국 한조 때 벌써 발하슈호 지구를 포괄한 서역의 광대한 지구에 행정 기구를 설치하였다. 8세기에 중국 당조때의 대시인 이백은 바로 발하슈호 남쪽의 쇄엽하강변의 쇄엽에서 출생하였다. 이 지방들은 청조 때 짜르 러시아가 침입하기 전까지 줄곧 중국의 영토였다.
짜르 러시아는 일련의 불평등 조약을 통하여 도합 150여만 평방키로미터에 달하는 중국 영토를 떼어 갔다.
짜르 러시아는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선 이후, 영토 확장 야심이 갈수록 더욱 커졌다. 러시아 육군 대신 크로포트킨은 자기의 일기에다 ≪우리 황제의 머리 속에는 러시아를 위해 만주를 탈취하고 고려(조선)를 병합하려는 위대한 계획이 들어 있다. 그는 서장을 자기의 통치 밑에 넣으려고 꿈꾸고 있다≫고 저들의 침략 목표를 아주 노골적으로 쌨다. 19세기말에 짜르 러시아는 위협하고 뇌물을 먹이는 비루한 수단으로 청정부로부터 중국 동부에서 철도를 부설할 특권을 얻고 여순, 대련과 그 부근의 수역을 강제로 조차함으로써 중국의 동북 지구를 저들의 통치하에 있는≪황색 러시아≫로 만들고 나아가서 장성 이북의 광대한 중국 영토를 점령하려고 시도하였다.
짜르 러시아는 몇 세기간의 강탈에 의하여 20세기 초에는 이미 2000여만 평방키로미터의 땅을 가진 식민주의 대제국으로 되었으며, 러시아 여러 민족의 큰 감옥으로 되었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짜르 정부는 무엇 때문에 농노 제도를 폐지하였는가? 무엇 때문에 이번 농노 제도의 폐지가 러시아 농민들에 대한 한 차례의 약탈이라고 말하는지에 대해 토론해 보자.
2.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짜르 러시아의 침략 팽창에 대하여 도표를 만들어 설명해 보자.







제11장 미국 내전






미국의 확장
미국은 독립한 후에 자본가와 농장 노예주의 연합정권을 건립하였다. 자본가와 농장 노예주들은 저마다 자기의 타산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영토를 팽창하는 점에서는 그들의 이익이 일치하였다. 자본가들은 더욱 많은 공업 원료를 얻고 상품 판매 시장을 확대하여 자본주의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킬 것을 바랐으며, 노예주들은 더욱 많은 토지를 얻어 혹인 노예 노동력을 사용하여 경작하는 대농장 경제를 확대할 것을 원했다. 자본가와 노예주들의 이런 영토 팽창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방금 독립한 미국 정부는 재빨리 대외 팽창의 길에 들어섰다. 미국의 제2대 대통령 존 아담스는, 미국의 영토는 그 범위를 전체 북아메리카에로 넓혀야 한다는 것이 ≪미리 결정되었다≫고 욕심사납게 떠벌였다.
18세기 말엽, 19세기 초엽에 미국은 유럽 국가들이 프랑스와 싸우느라고 아메리카까지 돌볼 힘이 없었던 유리한 형세를 이용하여, 한편으로는 교전 국가와의 무역을 통하여 돈을 벌어 자기의 경제력을 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메리카에 있는 교전 국가의 땅을 빼앗았다. 1808년에 미국은 프랑스의 수중으로부터 200여만 평방키로미터에 달하는 루이지아나를 사서 미국의 영토를 멕시코만에까지 확대시켰다. 1810년~1819년에 미국은 군대를 파견하여 먼저 강점한 연후에 헐값으로 ≪사는≫ 수단을 취하여 에스파니아의 수중으로부터 플로리다 반도를 빼앗아냈다. 19세기 30년대에 미국은 텍사스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켜 멕시코로부터 이탈하여 이른바 ≪독립공화국≫으로 되게 하였고, 또 1845년에는 텍사스를 미국의 한개 주로 되게 하였다. 이어서 미국은 또 멕시코 침략 전쟁을 발동하여 멕시코의 리오그란데강 이북의 광활한 영토를 빼앗고, 곧장 태평양의 캘리포니아에까지 이르렀다. 1846년에 미국은 영국의 수중으로부터 오레곤을 병합하였다. 이리하여 미국․영토는 대서양으로부터 태평양에까지 팽창되어 북아메리카 대륙의 거의 절반을 점하게 되었다. 미국 인구는 1800년에 530만이던 것이 1960년에 이르러서는 3140만으로 증가되었다.
미국이 서부로 영토를 팽창하는 과정은 인디안인들을 학살, 구축하고 그들의 땅과 재산을 강점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거듭되는 피비린 대학살은 인디안인으로 하여금 원래 100여만 명이던 것이 19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24만 명으로 급격히 줄어들게 하였으며, 요행 살아남은 사람들은 황막한 서부 변경 지구에 쫓겨가 이른바 ≪거류지≫ 안에서 살면서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미국 통치 계급이 불어댄, 이른바 평화적이며 목가적인 ≪서부에로의 진출 운동≫은 실제상 인디안인에게 있어서의 피눈물의 역사였다.





두 가지 경제 제도간의 모순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자본주의 경제와 노예제의 농장 경제가 다 신속한 발전을 가져왔으며, 두 가지 경제 제도간의 모순도 점차 드러나고 끊임없이 격화되었다. 미시시피강 동쪽 미국 영토의 북부와 동북부에는 전국의 모든 중요한 공업이 거의 다 집중되었다. 19세기 전반기에 미국의 산업 혁명은 주로 이 지구에서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수많은 공장, 광산이 출현하였고, 강철, 야금, 연료, 농업 기계, 면방직 등 현대적 기업이 속속 일어섰다. 1860년에 이르러 미국 공업 총생산액은 일약 세계의 제4위로 뛰어올랐으며, 철도의 총 길이는 4만 8000키로미터에 달하여 세계 제1위를 차지하였다. 현대 공업의 신속한 발전은 대량의 노동력을 수요하였기에 유럽과 아시아로부터 많은 이민들이 미국으로 밀려들었다. 그리하여 1820년부터1860년까지의 40년 동안에 이민 인구가 500만 명을 넘었다. 유럽에서 온 이민들 중의 대부분은 숙련된 수공업 노동자, 농민들과 산업 노동자들이었다. 유럽으로부터 선진 기술을 가지고 온 그들은 미국의 생산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48년에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 금광을 경. 영하는 미국 자본가들은 대량의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하여 홍콩을 거점으로 삼고 중국인 노동자들을 유인하여 금광에 데려다가 ≪쿠리≫(쿠리란 외국 자본가들이 중국인 육체 노동자들을 욕되게 이르는 말)로 삼았다. 외국에서 온 근로 인민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는 미국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영국에서의 면방직업의 비약적인 발전은 대량의 목화를 필요로 하였다. 이것은 미국 남부의 목화 재배업에 광활한 시장을 열어 주었다. 그리하여 목화 농장을 확장하는 것이 이윤을 말이 얻을 수 있는 일로 되었다. 노예주들은 매년 20달라만 들이면 흑인 노예 한 사람을 먹여살릴 수 있었지만, 각각의 혹인 노예의 몸에서는 매년 80달라의 순이윤을 짜낼 수 있었다. 더욱 많은 돈을 벌기 위하여 노예주들은 한사코 불법적으로 노예를 사들여서 ≪노예주≫의 숫자를 증가시켰다. 그 존과 남부 혹인들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되어 l860년에는 400만 명에 달하였는데, 이는 남부총 인구의 45%를 점하였다. 혹인 노예들은 노예주와 감독의 채찍 밑에서 우마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하였고, 고역에 시달리다가죽기까지 하였다. 이런 노예 제도의 쇠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혹인노예들은 연속 부단히 투쟁을 전개하여 왔으며, 이것은 남부의 노예제도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남부의 농장 경제와 북방의 자본주의 상공업간의 모순은 날로 첨예하여졌다. 노예주들이 목화와 기타 공업 원료를 영국에 수출하고 영국으로부터 대량의 값싼 공업 제품을 수입하였기에 북방에서는 남부의 상품판매 시장과 원료 공급 시장을 거의 완전히 잃게 되었다. 동시에 남방의 농장주들은 노예제 방식을 취하여 많은 노동력을 차지하였고, 북방의 자본주의 의 발전은 도리어 염가의 ≪자유로운≫고용 노동력을 수요하였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북방과 남방간의 모순은 이미 흑인 노예 제도를 유지하는가 폐지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다. 농장 노예주들은 혹인 노예를 확충하려 하였고, 상공업 자산 계급과 광범한 미국 근로 인민들은 흑인 노예 제도를 폐지하려 하였다. 혹인 노예 제도를 폐지하는가 유지하는가 하는 이 문제는 끝내 전쟁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북방에서는 노예 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18세기 말부터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을 일으켰다. 19세기 30년대에 이르러 노예 제도폐지 운동 가운데서 급진파들은 북방의 많은 지구에서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단체를 조직해 가지고 이르는 곳마다 도와 줄 것을 호소함으로써 광범한 군중들을 단결시켰다. 그들은 역사상에서 ≪지하 철도≫라고 불리운 수많은 비밀 통신 연락망을 다급히 설치하고 흑인 노예들이 노예 제도가 폐지된 북방의 여러 주로 도망가는 것을 도와 주었다. 도망하는 노예들을 실어나르는 사람들을 ≪승무원≫이라고 하였는데, 이 승무원에는 백인종도 있고 흑인종도 있었다. 그들은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유명한 흑인 ≪승무원≫ 타브만은 여성으로서 1949년에 노예주의 불구덩이에서 벗어났다. 그는 ≪지하 철도≫사업에 참가한 후 병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노예주들이 4만 달러의 상금을 내걸고 그의 목을 잘라오게 하였지만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19주례나 남방에 들어가 300명의 혹인 노예를 데리고 나왔다. 집단적인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은 세차게 일어났다. 1859년 10월 16일에 일어난 죤 브라운(1800~1859년) 봉기는 노예제 폐지 운동을 절정에로 밀고 나갔다. 그는 열 몇 사람의 백인과 혹인을 영도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폭압도  두려워하지 않고 버지니아주의 하파스 나루터에서 적을 진공하여 무기고를 점령하고, 부근의 농장에 사람을 파견하여 그곳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역량의 현격한 차이로 하여 봉기는 노예주들에게 탄압 당하였고, 죤 브라운도 부상을 당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는 그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알았으며, 사형당하기 직전에 ≪오직 피로써만 이 악랄한 이 나라의 죄악을 깨끗이 씻을 수 있다≫고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혹인 노예 제도를 유지하는가 폐지하는가 하는 문제는 미국 영토가 팽창됨에 따라 더욱 첨예해졌다. 농장 노예주들은 노예제를 새로 확장한 영지에까지 널리 보급시키려 갖은 애를 다 썼고, 광범한 노동자, 농민들과 북부의 자산 계급은 그것을 견결히 반대해 나섰다. 이리하여 전쟁은 일촉 즉발의 형세에 처해 있었다.





미국 내전
1960년 11월에는 북방 자산 계급 민주파의 대표 인물이며 공화당원(공화당은 북방 산업 자산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 당으로서 1854년에 성립되었다. 공화당 선거 강령에다 노예제의 지구를 제한할 것과 광활한 서부의 토지를 이주한 인민에게 나누어 줄 것을 제시하였다.)인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근로 인민의 가정에서 태어난 링컨은 일찍 고농, 뱃사공, 점원으로 일하였다. 그는 흑인 노예들을 동정하였고 노예 제도를 반대하였다. 링컨은 진보적인 자산 계급 혁명가였다. 그러나 남북이 분열될까봐 두려워한 그는 노예제를 즉시 폐지하라는 요구를 감히 제출하지 못하고, 노예제를 제한하고 점차적으로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선거 결과가 공포된 후 정부에 반대하는 남방 노예주들의 감정이 격화되었다. 그들은 1861년 초에 미국 남부의 11개 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저들의 대통령을 선거해 가지고 리치몬드에 반란 정부를 세웠다. 4월에 남부의 군대가 국내 전쟁을 일으켰다. 역사에서 이를 미국 남북 전쟁이라고 한다.
쌍방의 역량으로 보나 인심이 쏠리는 면으로 보나 다 북방에 유리하였다. 북방은 식량이 많이 나고 2270만의 인구와 발달한 공업을 가지고있는 데다가 또 광범한 인민들의 지지와 동정을 받고 있었다. 남방은인구가 900만에 불과하였고 그중엔 수시로 노예주에 반항해 일어날 수 있는 400만의 혹인 노예들이 포괄되어 있었다. 그리고 노예 제도의 확장과 국가의 분열은 인심을 살 수 없었다.
남방 농장 노예주들은 오래전부터 반란을 일으킬 계책을 꾸미고 군사상에서 준비를 충분히 갖추었지만, 링컨 정부는 전쟁 초기에 타협하려고만 생각하면서 전쟁 준비를 늦추었다. 1861년 7월에 남방 군대가 워싱턴에 육박하면서 북방 군대를 경과하였기에 북방의 수도는 엄중한 위협을 받았다. 이듬해에 북방 군대는 리치몬드를 진공하다가 또 실패하였기에 수도 워싱톤이 다시금 위급하게 되었다. 전쟁의 실패에 대하여 더없이 불만스러웠던 광범한 인민 대중들은 시위 행진을 단행하며 정부에 혁명적 조치를 취하여 전세를 신속히 돌려세울 것을 요구하였다. 1862년에 링컨 정부는 인민들의 추동하에서 무릇 미국 공민으로서 10달라의 수속비만 내면 서부에서 1흠스테드, 즉 64헥타르에 해당하는 토지를 분여받을 수 있고 연속 5년 이상을 경작하면 그 땅이 개인의 사유 재산으로 된다고 규정한 유명한 ≪흠스테드 법령 (宅地法)≫을 채택하였다. 링컨은 또 l863년 1월 1일부터 반란을 일으킨 여러 주의 노예 제도를 폐지하며 노예들이 자유인으로 되어 연방의 군대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규정한 ≪혹인노예 해방 선언≫을 공포하였다. 이 두 가지 법령의 공포는 광범한 인민대중과 흑인 노예들의 혁명적 적극성을 불러일으켰으며 전세를 돌려세우게 하였다.
1863년에 북방 군대가 반격으로 나아갔다. 1864년 봄에 셔만 장군이 영솔한 군대는 남부에 돌입하여 파죽지세로 남방의 수많은 중요한 지역을 점령하고 반란 정부의 공급선을 끊어놓았다. 1865년 4월 3일에 반란군의 소굴인 리치몬드가 북방 군대에게 점령당하였고, 4월 9일에 반란군이 투항하였다. 이렇게 미국 남북 전쟁은 북방 군대의 승리로 끝났다. 국내전쟁이 중지되었을 때 실패를 달가와하지 않은 노예주들은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고 첩자(푸스, 배우)를 시켜 극장에서 총으로 링컨을 살해하였다. 링컨은 비록 죽었지만 그는 노예 해방 투쟁을 영도하였기에 미국인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국내 전쟁 가운데서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미국 인민이었다. 그들은 전선에서도 후방에서도 다 위대한 공헌을 하였다. 북방 군대의 주요한 성분은 노동자, 농민이었고 흑인도 매우 많았다. 1864년에 18만 6000명의 흑인들이 북방의 작전 부대에 참가하였고, 25만 명의 흑인들이 후방 부대에서 활약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남부 여러 주의 노예들도 앞을 다투어 일어나 노예주를 반대하여 싸웠다. 50만 명의 흑인 노예들이 농장에서 도망쳤다. 그중 어떤 혹인 노예들은 봉기를 일으켜 유격전을 진행하면서 남방의 경제를 파괴하고 노예주들의 역량을 견제하였다.
한편, 남북 전쟁은 미국 역사에서의 제2차 자산 계급 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혹인 노예 제도를 취소하고 자본주의의 가일층의 발전을 위해 장애를 제거함으로써 미국의 경제로 하여금 19세기 후반기에 영국, 프랑스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급속히 따라잡고 능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미국 자산 계급은 여전히 인종 차별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과 계급적 압박은 미국 사회의 엄중한 문제로 되고 있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이 장에 나오는 지도에 근거하여 미국의 영토 팽창 정황을 설명해 보자.
2. 링컨을 어떻게 보는지, 또 미국의 내전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서로 토론해 보자.








제12장 아시아의 혁명 폭풍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감행한 서방 식민주의자들
19세기 전반기에 영국은 산업 혁명을 완성하였고, 프랑스, 미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도 산업혁명에서 커다란 진전을 가져왔다.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은 군사 역량과 경제 역량에 의지하여 침략을 서둘렀으며, 더욱 많은 상품 판매 시장과 원료 산지를 강점하였다. 그들은 활개치며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을 다하였고, 군함과 대포 그리고 값싼 상품으로 일부 아시아 국가들의 대문을 열어제끼고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을 자본주의 식민지 체계에 끌어넣었다. 그리하여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은 가혹한 예속과 착취를 받게 되었다. 자본주의 가 가장 발달한 영국은 자기의 강대한 실력에 의 거하여 침략의 마수를 세계 각지에 뻗쳐 세계적 범위의 식민주의 대제국을 건립하였다. 아시아주에 있어서 영국은 중국을 침략하는 아편 전쟁(1840~1842년)을 발동하여 중국의 대문을 열어제끼고 청정부를 핍박하여 매국 배족적인 ≪남경 조약≫에 도장을 찍게 하였다. 후에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중국에 대한 제2차 아편 전쟁(1856~1860년)을 일으키고, 중국에서 더욱 많은 특권을 탈취하였다. 인도에 대해서도 영국은 계속 잠식하고 병합하는 정책을 취하는 한편, 식민 통치를 강화하였다. 1773년에 영국은 인도 총독을 설치하여 영국의 속지인 인도 영토를 관할하게 하였다. 그후에는 또 동인도회사의 권력까지 영국 정부에서 장악하게 되었다. 19세기 전반기에 영국은 인도를 완전히 점령한 동시에 인도를 영국의 원료 산지 및 판매 시장으로 만들고 마음대로 예속하고 착취하였다. 이밖에도 영국은 끊임없이 버어마, 아프가니스탄, 이란 등의 나라에 대하여 침략 전쟁을 일으키고 자기의 식민주의 세력을 확대하였다.
미국도 아편 전쟁 기간에 기회를 타서 청정부를 핍박하여 ≪망하 조약≫을 체결하고 중국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중국에 대하여 약탈을 감행한 외에도 베트남과 인도지나의 광대한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짜르 러시아는 전체 중앙아시아에 대한 병합을 서둘러 중국의 광대한 영토를 빼앗아간 동시에 영국, 프랑스와 결탁하여 터어키의 영토를 분할하였고, 또 이란을 반식민지로 만들었다. 아시아에 대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식민주의 국가들의 침략은 아시아 국가들의 영토 주권의 원리를 엄중히 손상시켰고, 아시아각국의 사회 경제의 발전을 파괴하였다. 인도 농촌에 대한 영국의 가혹한 약탈은 바로 그 전형적 실례의 하나이다. 영국 식민주의 자들의 가혹한 약탈로 하여 인도 농민들은 극도의 빈궁한 생활을 하였고, 많은 지방들에서 밭이 묵고 농업 생산량이 해마다 줄어들었다. 일단 재해를 입기만 하면 많은 농민들이 굶어 죽었다. 19세기 전반기에 인도에 일곱 번 기근이 들었는데, 굶어 죽은 사람이 150만 명에 달하였다. 동시에 대량의 영국 상품이 밀물처럼 인도 시장에 밀려들어 투매되는 바람에 인도의 수공업은 급격히 몰락하였고, 대다수의 수공업 노동자들이 실업당하여 떠돌아다니며 유리 걸식하였다. 그리하여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질병과 기근으로 하여 죽었고, 도시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방직 수공업중심으로 이름난 고장들이 황폐화되었다. 심지어 인도 주재 영국 총독 벤팅크마저 ≪비참한 정경이야말로 상업 역사에서 처음 보는 일이다. 면방직 노동자들의 백골이 인도 평원을 허옇게 만들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시아의 혁명 폭풍
식민주의 세력의 압박 하에 있던 아시아 각국인민들은 19세기 초기로부터 민족 해방 운동을 일으켰다. 식민주의 자들은 아시아 각국에서 봉건 세력과 결탁하여 그들을 식민 통치의 기둥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런 나라들의 계급 모순은 날로 첨예하여졌다. 그러므로 아시아 국가들에서의 민족 해방 운동은 모두 식민주의를 반대하고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성격을 띠었다. 그 중에는 1825년~1830년의 자바 인민들의 봉기, 1839년~1842년의 아프가니스탄 인민들의 반영 봉기, 1848년~1852년의 이란 바비드교도들의 봉기, 1851년~1864년의 중국 태평천국 봉기, l857년~1859년의 인도 민족 봉기들의 망라되어 있다. 뒤의 세 차례 봉기는 그때 아시아의 혁명 폭풍을 최고봉으로 끌어올렸다.
비록 이런 투쟁들은 최후에 다 실패하였지만 그래도 식민주의 와 봉건통치를 반대하는 아시아 각국 인민들의 굳은 결심과 거대한 역량을 훌륭히 과시하였고, 국내외의 반동 세력에 대하여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세계 민족 해방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남겼다.





인도 민족 봉기(1857~1859년)
인도 사회 각 계층 가운데서는 영국의 식민주의 통치에 반항하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앙양되었으며, 그 사상이 비상히 활기를 띠었다. 사회의 하층민인 농민과 수공업자들은 압박을 가장 혹심하게 받았고, 고난이 가장 막심하였기에 반항성이 가장 강하였다. 혁명 정신의 영향을 받아 인도 병사들의 영국에 반항하는 민족적 적개심도 날로 높아졌다. 이 병사들은 원래 인민 봉기를 탄압하며 인접국가를 침략하고 영토를 확장하려는 목적으로 영국 식민주의 자들이 인도에서 모집하고 훈련해 낸 군대였다. 그러나 이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민족적 압박과 민족적 차별을 당했다. 고급 군관과 중급 군관은 모두 영국 사람이었다. 이들은 제마음대로 인도인 하급 군관과 병사들의 종교신앙 및 민족적 존엄을 횡포무리하게 유린하였으며, 늘 구실을 만들어 그들의 봉급을 줄이고 그들의 최저한도의 권리마저 박탈하였다. 이 일로 극히 큰 불만을 가진 인도 관병들은 반항 역량의 핵심으로 되었다. 영국 식민주의 자들이 직접 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부분적 봉건 군주들의 영지에 대해 겸병 정책을 실행하였으므로 봉건 군주들 가운데 일부분도 봉기자들의 편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영국 식민주의 자들과 인도 사회 각 계층과의 민족 모순이 주도적 지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영국 식민주의 통치에 반항하는 민족 봉기가 전국에서 고취되었다.
1856년 봉기의 연락 신호로 삼은 엷게 구운 떡이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신속히 전해졌다. 엷게 구운 떡이 마을에 전해지면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먹음으로써 봉기에 참가하겠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다시 떡 하나를 구워 다른 마을에 전하였다. 그리하여 1857년 봄에 이르러서는 인도의 북부, 서북부와 중부의 수많은 지구들에 다 연결되었다. 봉기를 선전하고 준비하는 비밀 조직이 일부 지방들에서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일부 큰 도시들에서는 외국 침략자를 몰아내는 ≪성스러운 전쟁≫을 진행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이 나타났다. 민간 예술인들은 도처에서 인민들이 즐기는 예술 형식으로 선전을 하였다. 신전과 광장의 나무 그늘 밑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거기에서는 늘 힘있고 비장한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영국 식민주의 자들을 폭로하는 희극 ≪암남색의 거울≫은 델리, 아그라, 레크나우 등의 도시에서 공연되었다. 인도 병사들이 있는 대부분의 연대, 대대들에는 다른 한 가지 봉기 연락 신호인 붉은 연꽃이 비밀리에 전해졌으며, 어떤 연대, 대대들에서는 비밀 집회를 가지고 비밀 조직을 세웠다.
1857년 초에 영국 식민주의 자들은 병사들에게 돼지기름과 소기름을 바른 탄환을 발급하였다. 병사들은 대부분 힌두교나 이슬람교를 신앙하고 있었기에 이것을 저들의 종교 신앙에 대한 최대의 모욕으로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인도 교도들은 쇠고기를 먹지 않으며,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병사들을 격분케 하였다. 인도교를 신앙하는 병사들은 갠지스강 물을 떠다 손에 받쳐들고, 이슬람교를 신앙하는 병사들은 ≪코란경≫을 앞에 놓고 영국 식민주의 자들을 소멸할 것을 맹세하였다. 델리 부근의 미루트시에서 85명의 병사가 이런 탄환을 쓰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거절해 나섰다가 영국 식민주의 자들에게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 이 사건이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1857년 5월 10일에 미루트의 군민이 떨쳐 일어났다. 그들은 영국 군관들이 교회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기회를 타서 교회당을 포위하고 영국군관들을 죽인 다음, 병영과 식민주의 자들의 관청에 불을 질렀으며, 감옥을 부수고 감금된 인도 병사들과 인민들을 석방하였다. 봉기군은 승승장구로 밤새 델리를 향해 진군하였다. 11일 새벽에 봉기군이 델리에 도착하자 델리의 병사들과 인민들은 열정적으로 이에 호응하여 성내의 영국군관들을 처단하고 성문을 열고 봉기군을 환영하였다. 봉기군은 무굴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사흐를 인도 황제로 올려 앉히고 봉기의 영도 기구인 행정 회의를 성립하였다. 16일에 봉기군이 델리를 전부 통제하였다. 델리의 해방은 전국 각지의 봉기를 고무하였다. 불과 3개월 동안에 봉기의 거센 물결은 파죽지세로 아우드, 칸뿌르, 쟘시를 중심으로한 중부와 북부 지구를 휩쓸었다.
봉기의 세찬 불길은 영국 식민주의 자들을 공포와 울분에 싸이게 하였다. 그들은 이 세찬 불길을 끄려고 부랴부랴 이란으로부터 인도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중국에 보내는 침략군을 중도에서 인도로 돌려왔으며, 또 시크인과 구르카인들(구르카인은 네팔 중남부와 부분적으로 서부 지역에 살고있던 주민이었다. 그 소수는 인도, 부탄, 시킴에서도 살고 있었다.) 가운데서 군대를 모집해 왔다. 전투는 먼저 봉기의 중심지인 델리에서 시작되었다. 영국 군대는 6월 8일에 델리를 포위하였다. 델리에서 4만 명의 봉기군은 영용하게 싸우면서 부단히 출격하였다. 그리하여 7, 8, 9월, 이 3개월 동안에 영국 군대는 빈번이 참패를 당하고 여러 번 메 죽음을 당하는 바람에 감히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였다. 영국군은 대량의 증원 부대와 중포를 끌어온 후 9월 14일에 성벽을 들이쳐 허물고 성내에 밀려들어와 봉기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6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거쳐 영군은 5000명의 장병과 2명의 사령관을 희생시키는 거대한 대가를 내고서야 델리를 점령하였다. 영국군은 봉기군에 대하여 야만적인 보복을 감행하였다. 델리에서는 피비린 대학살이 진행되어 삽시간에 온 들판이 시체로 덮이고 선혈이 강을 이루었다. 바하두르 사흐를 수반으로 한 군주 귀족들이 변절하여 적에게 투항하였으므로 봉기군은 할 수 없이 델리에서 물러나왔다.
델리가 함락된 후, 영국 식민주의 자들은 9만 명의 군대와 100여 문의 대포를 집결시켜 가지고 1858년 3~4월에 아우드의 중싶지인 레크나우와 중부 인도의 중심지인 쟘시를 공략하였다. 쟘시 보위전에서 당지의 여왕 라크시미 바이는 말을 타고 전선에 나가 영용하게 싸웠다. 그후 2, 3개월 동안 그는 영웅적인 기개를 떨치면서 희생되었다. 봉기군은 유격전으로 넘어갔다. 15만 내지 30만에 달하는 봉기군이 인도 중부와 남부에서 이동작전하면서 도처에서 영국군을 물리쳤다. 유격전은 1859년 말까지 지속되었다. 최후에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무장으로 탄압하는 한편, 봉기군 내부의 반역자를 매수하여 봉기 대오를 와해시키는 양면 정책을 써서야 비로소 봉기를 탄압할 수 있었다.
1857년~1859년의 민족 봉기는 단결하여 적과 싸우며 식민주의 자들의 침략에 반항하여 민족적 독립을 쟁취하려는 인도 인민들의 굳은 결심과 영웅적 투쟁 정신을 남김없이 과시하였다. 영국 식민주의 체제는 이 봉기에서 심한 타격을 받았다. 영국은 인도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 위하여 인도에서의 동인도회사의 통치를 끝마친다고 선포하고 영국 국왕이 동인도회사를 대치하여 인도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이번 봉기는 아시아에서의 영국의 침략활동을 제어하였으며, 따라서 중국과 기타 아시아 국가들의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19세기 전반기에 자본주의 열강들이 아시아를 침략한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 보자.
2. 1857년~1859년 인도 민족 봉기의 배경은 어떠하였는가? 봉기의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제13장 일본의 메이지 유신






19세기 중기 일본의 사회 상황
19세기 중엽의 일본은 여전히 쇄국정책을 실행하고 있던 낙후한 봉건 국가였다. 명의 상에서는 천황이 최고통치자였지만, 실제로는 세습적인 장군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장군의 정무 기관을 바꾸후라고 불렀는데, 바꾸후는 에도(지금의 도꾜)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장군의 정무 기관은 전국에서의 최고 정권 기구였다. 장군은 최대의 봉건 영주로서 에도, 오사까, 나가사끼 등 중요한 지구들을 포괄한 전국의 4분의 1 안팎의 토지를 강점하고 있었다. 장군 아래의 봉신을 다이묘(제후)라 하였고, 다이묘의 영지를 ≪항≫이라 하였다. 다이묘들은 장군에게 종속되어 있었고 장군을 위하여 군사 및 기타 방면의 일정한 의무를 짊어져야 했지만, 자기의 항 내부에서 군사, 행정, 세금징수 등 대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아주 큰 독립성을 갖고 있었다. 장군과 다이묘들은 다 자기의 가신즉 사무라이들을 가지고 있었다. 사무라이들은 장군 또는 다이묘에게서 봉지와 녹미를 받았다. 이렇게 일본의 봉건 통치 계급은 천황, 장군, 다이묘, 사무라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의 농민들은 전국 인구의 80%를 점하고 있었다. 그들은 크고 작은 봉건 지주들의 압박과 착취의 주요한 대상이었다. 그들은 봉건 통치계급에게 소작료와 부가세를 바쳐야 했는데, 소작료만 해도 왕왕 수확고의 50~65%를 점하였다. 이밖에도 다리놓기, 길닦기 등 각종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일부 지방의 봉건주들은 저들의 음탕하고 부화한 생활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심지어 농민들에게서 1년 내지 2년의 소작료를 앞당겨 거둬들이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고리대의 착취까지 받은 농민들은 생활이 몹시 곤란하여 파산당하였으며 늘 기아선상에서 허덕였다. 농민들은 봉건적 압박과 착취를 반대하고 기아를 반대하고 투기 상인들의 쌀값인상을 반대하여 끊임없이 일어나 투쟁하였다. 1837년에 오시오 헤이하찌로가 오사까 빈민들을 영도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쌀값을 높이는 것을 반대하고 바꾸후 관리들의 탐오와 횡포를 반대하면서 바꾸후를 개혁하는 데 관한 정치적 요구를 제기하였다. 이번 봉기는 비록 하루만에 탄압되었지만 일본의 경제 중심인 오사까에서 일어났고, 전국의 인심이 앙양된 상태에서 발생하였으므로 바꾸후 통치의 위기를 보여 주었다.
일찍 18세기 후반기부터 일본 봉건 사회는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중엽에 자본주의 적 관계가 가일층 발전하였다. 상품 경제가 이미 농촌에 침투되어 봉건 영주의 토지 소유제가 파괴되었다. 일부 상인들과 고리대금업자들은 빛으로 저당잡혔다가 제 기한에 빛을 갚지 못한 농민들의 토지를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으며, 또 농민들을 모집하여 토지를 개간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점유한 토지를 가지고 농민을 착취하여 신흥지주로 되었다. 공장 수공업도 비교적 큰 발전을 가져왔다. 그중 견방직업과 면방직업의 발전이 더 빨랐다. 기리우의 견방직 수공업 공장은2백 6, 7십 호에 달하였고, 아시까나의 면방직 수공업 공장에서는 보통 집집마다 30~50대의 직포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많은 것은 심지어 100~200대에 달하였다. 기타 공업 부문들에서도 속속 수공업 공장이 출현하였다. 에도, 오사까, 교또 등 도시들은 상업 자본의 발전이 특히 빨라 상업 중심지로 되었으며, ≪3도≫로 불리었다. 큰 경제력을 갖고 있는 일부고리대 상인들 가운데서 미쓰이, 스미도모, 고노이께 등이 가장 이름이 났다.
상품 경제의 발전은 일본 사회에 심각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많은 다이묘들, 특히는 서남부의 사쯔마, 도사, 죠슈 등 여러 항의 다이묘들도 상공업을 경시하던 데로부터 점차 상업과 수공업 공장을 경영하였다. 그들은 상인, 자본가들과 결탁하였으며, 바꾸후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현상태를 개혁시킬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상인, 자본가, 신홍 지주들은 점차 정치적 역량으로 되었다. 그들은 장군, 다이묘들에게 돈을 대여하는 수단으로써 저들의 정치적 지위를 높였다. 그들은 일부 지방들에서 항의 정치에까지 직접 참여하였으며, 동시에 돈을 주고 사무라이의 신분을 샀다. 19세기 20년대 말에 오사까한 곳의 상인들이 다이묘들에게 대여한 돈만 해도 은 6000여만 냥에 달하였으며, 그 이자를 쌀값으로 환산하면 1년에 입쌀 300만 섬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오사까의 부자들이 성만 내면 천하의 제후(다이묘)들이 벌벌 떠는≫ 형편에까지 이르렀다. 경제적 역량이 커짐에 따라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 정치상에서 통치 지위를 얻으려 한 그들의 요구가 날마다 절박하여졌다.
물가가 올라가고 생활 비용이 증가된 데다가 또 장군, 다이묘들의 재정 정황이 악화되어 늘 하급의 봉록을 잘라먹었기에 중․하급 사무라이들은 계속 파산하고 몰락하였다. 그들은 왕왕 수입이 지출보다 적었고 생활이 곤란하였다. 현상태를 개혁하려는 그들의 요구도 갈수록 더욱 강렬해졌다. 그들은 봉건 사회의 기둥이었으나 점차 바꾸후를 반대하는 역량으로 변하였다.
19세기 중엽에 줄곧 ≪쇄국 정책≫을 집행해 오던 일본도 역시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1853년에 미국인 페리가 맨 먼저 함대를 거느리고 와서 일본의 대문을 열었다. 미국이 무력으로 위협하는 정황하에서 일본 바꾸후는 할 수 없이 1854년과 1858년에 미국과 두 차례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미국에 일련의 항구들을 개방하고 최혜국 대우를 주었다. 이어서 러시아, 영국, 프랑스들도 그와 유사한불평등 조약에 조인할 것을 일본에 강요하였다. 일본은 주권이 침범당하고 관세를 자주적으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쇄국 정책은 종말되고 엄중한 민족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본의 문호가 개방되자 외국의 값싼 상품이 일본 시장에 밀물처럼 밀려들어 일본의 상업과 수공업을 파탄시켰다. 서방 식민주의 자들은 부단히 일본에서 대량의 원료와 금, 은을 약탈해 감으로써 일본의 경제로 하여금 더욱 큰 파괴를 받게 하였으며, 일본 인민들에게 고난을 심화시켰다. 이렇게 내적 원인과 외적 원인이 결합되어 바꾸후 통치 위기의 총폭발을 가속화시켰다.





무력으로 타도되는 바꾸후
일본 인민들은 외국 침략자들을 원수로 보았고, 또 그들을 끌어들인 바꾸후를 몹시 미워하였다. 그들은 바꾸후를 전복하는 투쟁에 적극 뛰어들어 바꾸후를 타도하는 주요 역량으로 되었다. 농민과 빈민들의 봉기가 연속 폭발하였다. 1860년부터 l867년 사이에 농민 봉기가 93차례나 일어났다. 1866년 5월에는 규모가 전례없이 큰 시민 봉기가 폭발하였다. 효고(지금의 고베)로부터 시작된 시민 봉기가 연이어 오사까, 에도 등 광대한 지역을 휩쓸었다. 봉기는 부단히 앙양되었는바, 9월 말에 일어난 에도에서의 봉기가 가장 격렬하였다. 이번 봉기는 예봉을 직접 바꾸후에 돌렸다. 분노한 인민들은 ≪봉기가 일어나게 된 것은 바로 성안의 장군 때문≫이라고 외쳤다. 농민, 도시 빈민들의 기세 드높은 봉기로 하여 바꾸후의 통치가 밑뿌리채 뒤흔들치는 형세하에서 중 ․하급 사무라이, 상인, 자본가 및 신홍지주들을 주체로 하는 개혁파들도 적극적으로 바꾸후 타도 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인민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각지의 다이묘들이 연이어 돌아섰으므로, 바꾸후 타도파가 죠슈, 사쯔마 등 항의 정사를 좌지우지하게되었다. 그리하여 바꾸후는 고립 무원의 처지에 빠졌다.
1864년부터 바꾸후 타도파와 바꾸후간에 간헐적인 무장 충돌이 시작되었다. 1867년 10월에 바꾸후 파도파는 역량을 연합하여 나어린 메이지천황의 명의로 바꾸후를 타도하는 것에 대한 비밀 조서를 발포하는 동시에 군사적 행동을 취할 준비를 하였다 바꾸후 장군 도꾸가와  요시노부는 형세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반격하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서는 수단으로 천황에게 정권을 돌리겠노라고 거짓으로 표시하고서는 영지와 실권을 내놓지 않고 바꾸후 타도파와 승패를 가리는 싸움을 벌일 준비를 하였다.
1848년 1월에 바꾸후 군대는 교또를 진공하였다. 교또 교외의 후시미, 도바 전에서 바꾸후 군대는 참패를 당하였다. 5월에는 바꾸후 타도파의 무력이 에도를 점령하였으며, 또 1년간의 국내 전쟁을 거쳐 바꾸후의 나머지 무장 역량이 전부 소멸되었다. 그리하여 260여 년간 일본을 통치해 온 도꾸가와 바꾸후는 전복되었다. 1869년에 메이지 천황 정부는 교또에서 도꾜로 옮겨 왔다.





메이지 유신
바꾸후의 통치를 뒤엎은 후에 건립된 메이지 정부는 즉시 일련의 자산 계급 성격을 띤 개혁 조치를 취하여 천황을 수반으로한 새 정권을 공고히 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외래 세력의 압박에서 벗어난 독립 자주의 근대화한 국가를 건립하였다. 이것을 역사에서 ≪메이지 유신≫이라 한다.
메이지 정부는 중앙 정권을 공고히 하고 국내의 봉건 할거 세력을 숙청하기 위하여 점차적으로 항슈들의 특권을 취소하고, 그들로 하여금 중앙에서 임명한 항지사로 되게 하였으며, 다이묘가 토지와 인민을 통제하던 봉건적 할거 국면을 타개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또 187l년에 항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하는 조치를 취하여 전국을 3개 부와 72개 현으로 나누고 과거의 항슈들을 모두 도꾜(이전의 에도)에 집중시켜 살게 함으로써 각 항들의 경계선을 철저히 타파하고, 지방에 대한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의 통치권을 완전히 박탈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정치적으로 통일된 중앙 집권 국가로 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상공업을 신속히 발전시키기 위하여 국내에 있는 겹겹의 검문소들과 동업 조합 제도를 폐지하고, 철도를 부설하고, 우편국, 전보국, 전화국을 세우고, 화폐 제도를 정돈, 통일하고, 공장을 세우고, 개인의 기업을 지지하였으며, 통상사를 설치하여 무역을 장려하고, 서방의 선진 기술을 대량으로 도입함과 동시에 의무교육 제도를 실시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또 토지 매매 금지령을 폐지하고 토지의 사유권을 확정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신흥 지주들의 소유권을 법적으로 확인하였다. 그러나 농촌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 땅이 없거나 땅이 적은 농민들은 여전히 땅을 얻지 못하여 생활이 보장되지 못하였다. 메이지 유신시기에만 하여도 전국적으로 도합 170여 차례의 농민 폭동과 봉기가 일어났다. 그중 규모가 가장 큰 봉기는 그 수가 몇십만 명에 달하였다. 메이지 유신으로 하여 일본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으며, 점차적으로 불평등 조약을 폐지하고 국가의 권익을 회수하고 민족 위기에서 벗어나 아시아의 강국으로 되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을 진행하는 과정에 사무라이 출신들인 오꾸보도 시미쯔, 기도 다까요시등이 신관료 집단을 형성하고 영도권을 장악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봉건세력과 천만 갈래의 연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혁을 철저히 할 수 없었고 대량의 봉건 잔여 세력을 남겨 두었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일본 메이지 유신 전야의 정치적 위기는 어떤 방면에서 표현되었는가? 개괄적으로 분석하여 토론해 보자.
2. 메이지 유신은 어떤 중대한 내용들을 가지고 있는가? 일본에 대한 메이지유신의 영향은 어떠한가?





제14장 독일, 이탈리아의 통일






독일의 통일
19세기 중엽까지도 독일은 통일되지 못한 나라로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포함한 근 40개의 영방과 자유시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 오스트리아가 첫 자리를 차지하였고, 프로이센은 일정한 지역을 차지하고 독일의 지배권을 빼앗기 위하여 오스트리아와 싸웠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은 독일에서도 일어났다. 19세기 50년대~60년대에 독일의 자본주의 경제는 뚜렷이 발전하였고, 석탄과 철 등 중공업부문의 생산량은 급속히 늘어났다. 독일의 여러 영방 가운데서 프로이센은 지위가 갈수록 높아졌고 경제가 가장 발달한 영방으로 되었다. 프로이센의 관할하에 있던 실레지아, 라인주 같은 곳은 독일의 공업 중심으로 되었다. 50년대에 프로이센의 중공업은 전 독일 중공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프로이센에서 자산 계급화한 많은 귀족 지주들은 자본주의 방식으로 농업 생산을 경영하였으며, 양조, 제당, 제분, 목재 등 가공공업에도 종사하였다. 그들의 생산은 유럽의 시장과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독일의 경제 발전과 정치 정세 사이에는 큰 모순이 생겼고, 여러 영방의 분립 상태는 날이 갈수록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에 큰 장애물로 되어 허용되기 어려웠다. 경제의 발전은 통일 문제를 다시 의사 일정에 올려놓을 것을 요구하였고, 또 통일을 위한 객관적인 조건을 형성해 주었다. 1848년 혁명 후부터 독일의 통일 문제는 역사 일정에 오르게 되었다. 관건적인 것은 어떤 방식으로 누가 독일의 통일을 실현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장기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독일에 대한 지배권 쟁탈전을 벌였는데, 그 모순은 불상용적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성심 성의로 독일의 통일을 실현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통일의 기반은 프로이센의 수중에 장악되었다.
1862년에 프로이센의 국왕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년)를 프로이센의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대귀족 지주 가정에서 태어난 비스마르크는 일찍부터 완고한 보수파였다. 후에 그는 사상이 변화되어 독일의 통일은 막을 수 없는 것이며, 독일의 통일은 프로이센 세력의 연장이라고 생각하였다. 수상이 된 후 그는 강대한 군대를 창건하여 무력을 행사하여야만 독일의 통일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군사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일찍 프로이센 의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대의 큰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파의 결의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철과 피로써만이 해결할 수 있다.≫ 비스마르크는 ≪철혈 정책≫으로 독일의 통일을 실현하려 하였기 때문에 ≪철혈 재상≫이라 불리웠다. 비스마르크는 3차례의 왕조 전쟁을 진행하여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1864년에 덴마아크의 수중으로부터 슬레스비히와 홀시타인을 빼앗아내기 위하여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연합하여 덴마아크에 대한 제1차 왕조 전쟁을 발동하였다. 이 두 지구에서 사는 주민의 대부분은 독일사람이었지만 장기간 덴마아크 국왕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덴마아크 국왕이 이 두 지역을 병합하려 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덴마아크에 전쟁을 도발하였다.
1864년 1월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군대가 흘시타인을 점령하였고, 2월에는 슬레스비히를 점령하였다. 짧은 기한내에 덴마아크는 패배하였다. 강화 조약에 근거하여 덴마아크 국왕은 이 두 지구의 모든 권력을 포기하였다. 그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슬레스비히를 프로이센에 귀속사키고 흘시타인을 오스트리아에 귀속시키기로 결정지었다. 프로이센은 덴마아크와의 싸움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와 싸워 오스트리아를 독일에서 배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프로이센은 군사와 외교 면에서 모든 준비를 다 하였다. 준비가 끝나자 프로이센은 1866년 6월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왕조 전쟁을 일으켰다. 하노버, 작센 등과 같은 독일의 몇몇 작은 영방들이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싸웠다. 유럽에서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전쟁이 진척되는 정황을 주시하였다. 전반적으로 오스트리아측에 승리할 기회가 비교적 많다고 생각되었지만 사실은 이와 정반대였다. 프로이센 군대는 그 장비가 우수하고 진격이 빨라 아주 짧은 시간내에 작센과 하노버의 군대를 격파하고 북부 독일 전반을 통제하였다. 프로이센의 주력군은 남으로 밀고 나가 7월 3일에 사도바에서 오스트리아의 20여만 군대와 결전을 벌였다. 악전 고투를 거쳐 프로이센 군대가 결전에서 승리하였다. 프로이센 국왕과 총참모장은 모두 전쟁을 연장하여 비인에까지 쳐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군대와의 싸움에서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달성하였다고 인정한 비스마르크는 화의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후 강화 조약에 근거하여 프로이센은 흘시타인을 가졌고, 또 하노버 등 몇몇 작은 영방들을 프로이센의 판도에 넣었다.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전쟁을 통하여 오스트리아는 독일에서 배제되었다. 비스마르크의 계책에 따라 북독일 동맹이 결성되었다. 프로이센의 국왕이 동맹의 지배자를 겸하고 비스마르크가 동맹의 수상을 겸하였다. 그리하여 동맹은 완전히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북독일 동맹의 결성은 독일의 통일 사업이 기본상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며, 남독일의 4개 영방만이 아직 통일체에 들어가지 않았다. 남독일은 프랑스와 이웃하였다. 프랑스의 통치자들은 프랑스의 곁에 강대하고 통일된 독일이 나타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의 다음 보조는 프랑스와 싸우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남독일의 4개 영방을 강요하여 프로이센과 군사 협정을 체결하게 하고, 그들을 프로이센의 전쟁에 끌어들였으며, 외교상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점차 프랑스로 하여금 독일에 대하여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다. 비스마르크는 한 차례의 새로운 전쟁을 통하여 독일의 통일을 완성하려 하였다. 당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도 대외 전쟁을 빌어 자기의 통치를 공고히 하려 하였다. 1870년7월에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이 폭발하였다. 전쟁 마당에서 프랑스 군대는 곳곳에서 수세에 처하여 거듭 패전하였다. 9월 초에 두 나라 군대가 스당에서 결전을 벌였는데 프랑스 군대는 또 실패하였다. 스당에 있던 프랑스 황제 및 원수, 장군과 장병 도합 10만 4000명이 모두 전쟁 포로로 되었다. 프랑스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프로이센은 독일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1871년 1월에 프로이센의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의 황제로 되었고, 강대하고 통일된 독일 제국이 탄생하였다.





이탈리아의 통일
19세기 상반기에 이탈리아는 여전히 하나의 ≪지리명사≫였고 정치상 분열 상태에 처하여 있었다. 북부의 롬바르디와 베네치아 지역은 오스트리아가 점령하고 통치하였다. 반도의 기타 부분은 사르디니아 왕국과 파르마, 모데나, 토스카나 등 세 개의 작은 방 및 교황령,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나뉘었다.
나폴레옹 전쟁을 거쳐 이탈리아에서도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 의식이 활발하게 흥성하였다. 이탈리아 인민의 위대한 과거, 로마 제국의 위세와 명망, 단테의 시, 문예 부흥 시기의 예술 등은 모두이탈리아 사람들의 민족 자부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통일하려는 욕망을 갖게 하였다.
통일을 다그치기 위하여 이탈리아 사람들은 19세기 초기에 창건된 ≪카르보나리당≫과 그 뒤를 이어 창건된 ≪청년 이탈리아당≫과 같은 많은 비밀조직들이 나타났다. 이런 조직들은 모두 민족 해방 운동 가운데서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 사람이 이어나가는 혁명 정신을 고양시켰다.
19세기 50년대에 이탈리아의 경제는 뚜렷하게 자본주의 길로 나아갔고 산업 혁명도 일어났으며, 북부 지구에서는 일부 새로운 공업 부문이 흥성하였다. 경제의 발전은 통일된 국내 시장을 요구하였고, 이것은 또 국가의 통일을 위한 새로운 추동력으로 되었다. 사르디니아 왕국은 북이탈리아의 유리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탈리아에서 역량이 제일 강하고 경제가 가장 잘 발달한 나라였다. 사르디리아 왕국 정부는 당시 비교적 개명하였다. 그러므로 사르디니아 왕국은 자산 계급 자유파들이 쏠린 중심으로 되었고, 그들은 사르디니아 왕국의 영도 밑에 이탈리아가 통일되기를 바랐다.
185년에 자산 계급 자유파의 저명한 대표 인물인 카밀로 벤조 카부르(1810~1861년)가 사르디니아 왕국의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그후 그는 10년간 이 직무를 담임하고 있었다. 카부르는 실제적인 정치인이었다. 그는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군대를 재조직하고 강화하였으며, 공장을 건설하고 철도를 부설하였으며, 조선 공업을 꾸리게 하고 대외 무역을 발전. 시켰다. 그는 이탈리아 단독의 힘과 열정만으로는 통일을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이웃 나라들 가운데서 동맹국을 찾았으며 특히는 가까운 이웃 나라인 프랑스의 도움을 받으려 하였다. 1858년 7월에 카부르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만났다. 그들은 밀모 끝에 프랑스와 사르디니아 왕국이 연합하여 오스트리아와 싸워 승리하면 롬바르디와 베네치아를 사르디니아 왕국에 귀속시키고, 사르디니아 왕국은 니스와 사보이두 곳을 프랑스에 떼어 주기로 협의하였다.
1859년 4월 프랑스와 사르디니아 왕국은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 군대는 이탈리아 영내에 들어가서 사르디니아 왕국군대와 협동 작전하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정열이 넘쳐 북이탈리아 도처에서 자발적인 봉기가 일어났다. 애국자들로 조직된 비정규군 ≪알프스산의 사냥꾼≫은 영웅적 인물인 쥬제프 가리발디(l807~1882년)의 영솔하에 용감하고도, 지혜롭게 잘 싸워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모데나, 파르마, 토스카나의 인민 봉기군은 사르디니아 왕국과 연합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투쟁의 세찬 물결은 점차 교황령에까지 미쳤다. 6월에 프랑스와 사르디니아 왕국의 군대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두 차례의 결전을 벌여 오스트리아 군대를 전승하였다.
전쟁에서 아직 결정적인 승부가 확정되지 못하였을 때 나폴레옹 3세는 전쟁이 계속되면 국제적인 간섭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하고 이탈리아 인민들의 혁명 열기가 계속 앙양될까봐 두려워 신의를 저버리고 전쟁을 종말짓기로 결정하였다. 7월 초에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 황제를 만났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롬바르디를 사르디니아 왕국에 넘겨주는 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 지역은 여전히 오스트리아가 차지하였다. 프랑스에 의거하여 오스트리아를 몰아내려던 계획이 성사되지 못하였지만 카부르는 원래의 합의대로 니스와 사보이를 프랑스에 떼주지 않을 수 없었다.
1859년 전쟁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 사람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통일은 막을 수 없는 추세로 되었다. 파르마, 모테나, 토스카나와 교황령의 대부분 지구에서는 사르디니아 왕국과 합병하기로 결정하였다. 북방 정세에서 고무를 받은 양시칠리아 왕국의 인민들은 끊임없이 봉기를 발동하여 국왕의 포악한 통치를 반대하였다. 바로 이때 용감하고 정의롭고 전기적인 영웅 가리발디가 1, 000여 명의 노동자, 수공업자, 어민과 혁명적 지식인들로 구성된 지원군을 거느리고 사르디니아 왕국의 묵인 아래 5월 초에 제노바에서 배를 타고 먼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싸우러 떠났다. 이 지원군은 모두 붉은 적삼을 입었기에 역사에서 ≪홍삼군(紅衫軍)≫이라 불렀다.
시칠리아에 상륙한 그들은 당지 인민들의 지지 아래 강대한 방어군을 일거에 격파하였다. 가리발디는 승세를 타서 계속 군대를 거느리고 해협을 건너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로 진군하였다.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은 여지없이 고립되었다. 홍삼군은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으며 9월 초에 양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나폴리에 쳐들어갔다.
이탈리아 남부를 통제하기 위하여 사르디니아 왕국의 군대는 교황령을 지나 나폴리에 이르렀다. 가리발디는 싸움터의 용감한 장군이었고 슬기로운 통솔자였다. 그러나 정치 무대에서 그는 결정적인 시각에서 자산 계급 혁명가의 연약성을 드러내놓았다. 그는 대담하게 군중을 발동하여 나폴리에 공화국을 세우고 민주 정권을 수립하는 대신 전부의 권력을 사르디니아 왕국의 국왕에게 고스란히 바쳤다. 1861년 2월에 제1차 이탈리아 의회가 토리노에서 개막되었다. 3월에 의회에서는 사르디니아 왕국과 새로 합병된 영토를 합쳐 이탈리아 왕국으로 하고 원 사르디니아 왕국의 국왕 이마뉴엘 2세를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한다고 선포하였다.
1859년 이래 인민들의 투쟁은 이탈리아의 통일을 기본상 이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 지역은 여전히 오스트리아의 통치하에 있었고, 교황은 프랑스의 지지를 받으며 로마의 주위를 계속 통치하고 있었다. 1866년과 1870년에 이탈리아는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기회를 이용하여 상술한 지역을 병합하고 통일의 위업을 최종적으로 완수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독일,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전의 정치 경제 상태를 서로 비교해 보자?
2. 무엇 때문에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는 영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는가? 프로이센은 어떻게 통일의 목적을 달성하였는가?
3.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의 가리발디의 업적을 서술하고 가리발디에 대하여 간단히 평론하라.







제15장 제1인터내셔날과 빠리 꼼뮨






제1인터내셔날의 창립
1848년 혁명이 실패한 후에 유럽에는 또 반동적 정치 국면이 나타났다. 이리하여 공산주의 자 동맹은 해산되었다. 50~60년대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혁명 열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노동 계급의 국제적 조직을 재건할 준비 사업을 적극 진행하였다.
1857년에 한 차례의 세계적인 자본주의 경제 공황이 일어났다. 이 공황은 먼저 미국에서 일어난 다음, 영국과 유럽 대륙에 파급되었다. 미국에서는 l857년에 4,000호의 기업들이 파산되고, 각 부문의 공업 생산이 현격하게 하강되었다. 이 공황은 자본주의 사회의 각종 모순을 유례없이 격화시켰다. 60년대 초에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나라들에서는 노동운동이 부단히 앙양되었으며, 무산 계급의 국제적 단결을 강화하는데 대한 요구도 몹시 강렬하여졌다. l862년에 런던에서 국제 박람회가 열렸는데 프랑스와 노동자 300여 명과 독일 노동자 20여 명이 참관하였다. 그들은 영국 노동자들을 만나서 노동 계급의 상태를 토론하고 국제 노동계급은 반드시 연합해야 한다는 사상을 표방하였다. 1863년에 폴란드의 인민들은 짜르 러시아의 통치를 반대하는 민족 봉기(18세기 말엽에 폴란드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및 러시아에 의 하여 세 차례나 분할되었다. 짜르 러시아 판도에 소속된 폴란드 왕국에서 독립한 폴란드 국가를 회복하려고 싸운 폴란드인의 투쟁은 11863년에 이르러서 무장 봉기로 발전하였다. )를 일으켰다. 유럽노동자들은 폴란드 인민들을 열렬히 성원하였다.
1864년 9월 28일에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등 나라의 노동자들이 런던에 있는 성마르틴 회당에서 1863년 폴란드 봉기를 성원하는 집회를 가졌다. 이번 대회에서는 프랑스 노동자들이 주장한 국제노동자의 단결을 촉구하는 것에 관한 건의를 찬동하고 국제 노동자 조직을 건립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또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나라의 노동자 대표들을 선출하여 영도 기구를 구성하였다. 노동자들 가운데서 숭고한 위망을 가지고 있던 마르크스는 선거를 거쳐 협회의 영도 기구에 들어갔으며, 동시에 협회의 창립 선언과 잠정 규약을 기초할 위탁을 받았다. 10월에 이 조직을 ≪국제 노동자 협회≫라고 명명하였다. 역사상에서 이 협회를 제1인터내셔날이라고도 부른다.
≪창립 선언≫은, 자본주의 의 ≪번영≫과 사회 재부의 증진은 오직 유산계급의 재부와 실력을 증진시킬 수 있을 뿐이고, 생산 기술의 발전, 교통 도구의 개선, 시장의 확대 등등 그 어느 것이나 다 근로 대중의 빈곤을 제거할 수 없으며, 토지의 거두들과 자본의 거두들은 자기들의 경제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정치적 통치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므로 ≪정권을 탈취하는 것이 노동 계급의 위대한 사명으로 되었다≫는 것을 많은 자료를 들어가며 설명하였다. ≪선언≫은, 과거의 경험이 증명하는바, 각국 노동자들간의 단결을 홀시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선언≫은, ≪전 세계 무산자여, 연합하라!≫는 전투적 호소를 다시금 제기하였다.
≪잠정 규약≫에는 노동 계급의 전투 임무가 규정되어 있었다. 즉 ≪노동계급의 해방은 응당 노동 계급 자신이 쟁취해야 하고≫, 노동자들의 경제적 해방은 반드시 정치 투쟁을 통하여 실현하여야 하며, 노동 계급의 최종 목적은 ≪모든 계급적 통치를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지적되어 있다.
≪규약≫에는 민주 집중제의 조직 원칙이 규정되어 있다. 즉 인터내셔날의 기층 조직은 지부이고 최고 권력 기구는 대표 대회이며, 인터내셔날의 각급 회의에서는 일체의 문제를 자유로 토론할 수 있으나 일단 결정을 지은 다음에는 반드시 엄격히 집행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날의 활동을 직접 영도하고 제1인터내셔날의 영혼이 되는 인터내셔날의 중요한 문건들을 친히 작성하였다. 국제 노동자 협회는 국제 노동 운동과 마르크스주의 가 결합된 산물이며, 그 창립은 국제 노동 운동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상징하였다.





기회주의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투쟁
제1인터내셔날은 마르크스의 영도 하에서 많은 조직 사업을 진행하여 각국 무산 계급의 역량을 묶어세우고 각국에다 ≪인터내셔날≫의 지부를 건립하였다. 1865년 9월에는 각국에 이미 20여 개 지부가 건립되어 있었다. 이와 동시에 인터내셔날은 또 각국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적극 지지하였고 그들의 각성을 높이기에 주의를 돌렸다. 인터내셔날의 지지하에 1866년 영국 재봉 노동자들의 대파업, 1867년 빠리 동기 제조업 노동자들의 대파업, 1868년 제네바건축 노동자들의 대파업이 연이어 승리를 달성하였다. 그리하여 제1인터내셔날은 각국 노동자들 가운데서 갈수록 더욱 높은 신망을 갖게 되었으며 조직상 부단히 발전, 성장되었다.
제1인터내셔날의 이러한 성과는 인터내셔날 내부의 기회주의와 투쟁하는 가운데서 달성된 것이다. 제1인터내셔날이 활동한 전반기(前半期)에는 주로 프루동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진행하였다. (삐에르 죠제프 프루동(1809~1865년)은 프루동주의의 창시자이다. 그는 자본주의 적 소유제는 반대하였지만 소사유제를 보존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소자산 계급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개량의 방법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폐단을 제거할 것을 희망하였다. 그는 소생산자들을 연합시켜 소비 협동 조합을 조직하고 교환 은행을 세워 그들에게 무이자식 대부금을 내어주며 제품의 직접적 교환을 조직함으로써 상인들의 중간 착취를 피할 것을 주장하였다. 프루동은 또한 근대 무정부주의의 창시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정부가 없는 사회, 즉 이른바 ≪정권도 없고, 정부도 없는≫ ≪무정부 상태≫의 사회를 건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무산 계급 독재를 포괄한 그 어떠한 국가도 다 반대하였다.)
프루동은 소생산이 우세를 점하고 있는 일부 나라, 즉 프랑수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나라에서 적지 않은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1865년에 프루동이 죽은 후 그의 추종자들은 ≪인터내셔날≫내에서 프루동의 관점을 견지하면서 그의 관점으로 인터내셔날을  개조하려고 시도하였다.
1866년에 인터내셔날 제1차 대표 대회가 제네바에서 열렸다. 프루동주의자들은 모든 문제에서 다 저들의 관점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정치투쟁을 반대하고 파업을 반대하고 노동 조합의 조직을 반대하면서, 협동조합과 교환 은행을 조직하는 것이 무산 계급 해방의 근본적인 첩경이라고 역설하였다. 대회는 프루동주의자들의 그룻된 관점을 반박하고 마르크스주의 관점에 부합되는 일련의 결의를 채택하였다. 결의는 노동자가 반드시 정치 투쟁에 참가해야 하고, 노동 조합이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의 노동 계급의 유력한 도구로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결의는 협동 조합의 작용을 긍정한 동시에 협동 조합 자체로는 자본주의 제도를 소멸할 수 없으며, 그와 반대로 오직 무산 계급이 정권을 탈취한 후에라야만 협동 조합 제도가 비로소 발전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프루동주의 자들은 제1인터내셔날의 l867년 로잔 대회와 1868년 브뤼셀 대회에서 다시 일어나 마르크스주의를 연속 공격하였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사유제를 수호한다는 깃발을 들고 나서서 토지의 개인 소유제를 완고하게 견지하였다. 이 두 차례의 대회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격하였다. 브뤼셀 대회는 결의에서 광산, 토지와 교통수단을 모두 사회의 공유로 돌려야 한다고 명확히 지적하였다. 결의는 프루동주의의 핵심을 명중시켰으므로 프루동주의자들 내부의 분화를 야기시켰다. 바를렝을 대표로 하는 좌익은 그룻된 관점을 단호히 버리고 마르크스주의를 따르게 되었다. 바를렝 자신은 후에 빠리 꼼뮨의 지도부성원으로 되었다.
1869년에 인터내셔날 제4차 대표 대회가 바젤에서 열렸다. 이로부터 바쿠닌주의를 반대하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르 미하일 바쿠닌(1814~1816년)은 러시아 귀족 가정 출신으로서 일찍 투기적으로 혁명의 길에 나섰다. 1848년에 그는 독일 혁명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된 뒤 짜르 정부에 인도되었다. 그는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짜르 정부에 ≪회개≫하고 뻔뻔스러운 변절자로 되었다. l863년에 그는 다시 서유럽에 돌아온 후 변절한 과거를 속이고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 스위스의 부분적 지구들에서 적지 않은 추종자들을 긁어모았다. 바쿠닌은 무정부주의자였다. 그의 전부의 강령을 귀납하면 ≪무자비한 파괴≫의 수단을 이용하여 국가를 폐지하고 상속권을 취소하며, 정당을 묻지 말고 정치투쟁을 하지 말며, 사람마다 ≪충분한 자유≫를 향수하는 ≪무정부 상태≫의 사회를 건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바쿠닌 도당은 대표증을 위조하는 비루한 수단을 써서 대량의 졸개들을 대회에 들이밀어 바젤 대표 대회를 통제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은 대회에서 상속권은 사유제가 존재하는 기초이기 때문에 마땅히 ≪상속권의 폐지를 사회 혁명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떠벌임과 동시에 상속권의 폐지에 관한 결의를 채택할 것을 대회에 요구하였다. 대회에서 마르크스가 총위원회를 대표하여 쓴 상속권 폐지 문제에 관한 보고를 낭독하였는데, 상속권은 원인인 것이 아니라 결과이며 이는 현존 사회의 경제 조직 중에서 도출해 낸 법률적 결론이라고 지적하였다. 바쿠닌분자들의 주장은 실질적으로 노동 계급을 유인하여 근본적인 것을 버리고 지엽적인 것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현사회의 경제 제도를 소멸하는 투쟁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론상에서는 오류적인 것이었고, 실천상에서는 반동적인 것이었다.≫(마르크스) 바쿠닌의 그릇된 논점은 비판을 받았으며 권력을 찬탈하려던 바쿠닌 도당의 희망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867년에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1권이 출판되었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20년간 정력을 다해 연구한 성과이다. ≪자본론≫은 잉여가치학설을 과학적으로 천명하였다. 인터내셔날 브뤼셀 대표 대회에서는 ≪자본론≫ 1권의 출판에 즈음하여 마르크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결의를 채택한 동시에 각국 노동자들에게 이 위대한 노작을 진지하게 학습할 것을 호소하였다.
1870년에 이르러 제1인터내셔날은 유럽 각국에 거의 다 지부를 건립함으로써 광범한 노동자들을 단합시켰다. 인터내셔날 내부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프루동주의를 타도하고 바쿠닌주의를 청산하려 하였는데,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이 폭발되고 혁명 형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투쟁은 늦추어지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투쟁 중에서 불패적인 위력을 과시하였으며 대중 속에서 날로 더욱 광범하게 보급되었다.





빠리 꼼뮨의 창립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 군대는 거듭 실패하였다. 스당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빠리에 전해지자 인민들의 분노는 극도에 달하였다. 9월 4일에 빠리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광범한 노동자, 병사들이 거리에 달려나가 왕궁을 포위하고 의회의 사당에 뛰어들어 황제 제도의 폐지와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제2제국은 종이집처럼 무너지고 프랑스 제3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기회를 타서 정권을 절취한 자산 계급 공화파들은 ≪국방 정부≫를 성립하고 트로슈 장군(트로슈는 루이 보나라르뜨의 장군으로서 근로 인민들을 극도로 적대시한 왕당파 분자였으며, 9월 4일 혁명 전야에 마리 계엄 사령관을 맡았다.)을 ≪국방 정부≫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바로 이때 프로이센 군대가 빠리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대적을 앞에 둔 빠리 인민들은 ≪국방 정부≫의 존재를 승인하고 이 정부에 항전을 조직해 줄 것을 기대하였다. 빠리의 노동자, 학생들과 소자산 계급 분자들은 무장하여 기운차게 일어나서 국민 방위군(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초기 프랑스 군대가 전선에서 여러 번 실패한 후에 의회에서 국민 방위군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9월 4일 이전에 빠리에 국민 방위군이 60개 대대가 있었는데 후에 270개 대대로 확충되었다.)을 확충하였다. 국민 방위군은 원래 자산 계급분자를 주요 성원으로 한 것이었는데, 확충한 이후에는 노동자들을 위주로 한 무장 역량으로 되었다.
9월 19일에 프로이센 군대가 빠리를 포위하였다. ≪국방 정부≫의 계획은 빠리로 하여금 투항하게 할 작정이었다. 1871년 1월에 ≪국방 정부≫는 프로이센 군대와 빠리 투항 협정, 전선 정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협정에 의하면 24만 명의 군대가 프로이센 군대의 포로로 되고, 빠리 주위의 포대는 무장을 해제하며, 프랑스는 장차 의회 선거를 거쳐 정부를 세운 다음, 투항 조약에 조인하기로 되었다. 그러나 빠리의 국민 방위군은 의연히 무기를 장악하고 침입하는 적을 수시로 격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871년 2월에 프랑스에서 선거가 진행되었다. 선거에서 당선된 630명의 의원들 가운데에는 귀족과 왕당파들이 430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의회에서 비준하여 구성한 정부는 반동적 자산 계급 정객 띠에르에 의해 영도되었다. 띠에르는 ≪7월 왕조≫ 때 대신, 수상으로 있었고, 30년대 프랑스의 혁명 봉기를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그는 노동 계급과 사회주의의 원수였다. 띠에르 정부는 매국적 입장을 고수하는 한편, 프로이센에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며 알사스와 로렌을 할양할 것을 승낙하였고, 또 인민의 역량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선 빠리 국민 방위군의 무장을 해제하려고 하였다.
3월 18일 새벽 3시에 반동 정부의 군대가 몽마르트르 로지와 쇼몽고지에 있는 국민 방위군의 포진지에 가만히 기어들어 돌연 습격의 수단으로 국민 방위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정부군이 새벽에 두 개 고지를 다 점령하고 몽마르트르에서 대포를 끌어내릴 때에 먼저 그곳의 여성들에게 발각되었다. 빠리에서는 갑자기 경종이 오래 울렸다. 빠리 인민들은 분분히 거리에 나섰다. 국민 방위군은 즉시 무기를 들고 포진지에 달려가 적을 저격하였다. 여성과 아동들은 반동 정부의 군대를 에워싸고 야유하였다. 마음이 흩어진 정부군의 병사들은 인민들에게 총을 쏘라는 장교들의 명령을 듣지 않고 도리어 인민들과 고락을 같이하기 시작하였다. 점심 때에 국민 방위군이 쇼몽 고지와 몽마르트르 고지를 다시 점령하고 시구역 각지에서 공세를 벌이자 반동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띠에르는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보고 황망히 빠리에서 도망쳤다. 지난날 인민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온갖 행패를 다 부리던 고관 대작들과 헌병, 장교, 경찰들도 다 그의 꽁무니를 따라 베르사이유로 도망쳐 갔다. 저녁에 국민 방위군이 빠리시청을 점령하자 국민 방위군 중앙 위원회가 즉시 거기로 옮겨갔다. 기타 정부 기관의 건축물들도 죄다 국민 방위군에 의 해 통제되었다. 붉은 기는 빠리의 상공에서 휘날렸다. 187년 3월 18일에 빠리 무산 계급혁명은 승리를 달성하였다.
3월 19일 아침에 국민 방위군 중앙위원회는 빠리의 정관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국민 방위군은 선언을 발표하여 곧 선거를 통하여 노동자들로 꼼뮨을 성립하고 꼼뮨 위원을 선출한 후에는 정권을 꼼뮨에 넘긴다고 선포하였다.
빠리 꼼뮨의 선거는 3월 26일에 진행되었다. 그날 인민 대중은 환성을 올리면서 대열을 지어 선거장으로 갔다. 86명의 꼼뮨 위원이 선출되었다.
≪그중 대다수가 노동자거나 공인된 노동 계급 대표 인물들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마르크스) 바를렝, 프랑켈, 뒤발, 랑비에, 뽀지에 등 저명한 노동 운동 활동가들이 죄다 당선되었다. 꼼뮨 위원 중에는 또 블랑끼(루이 오귀스트 블랑끼(1805~1881년)는 프랑스 근대 무산 계급 혁명 운동의 저명한 활동가이며 공상적 사회주의자이다. 그는 여러 차례 비밀 단체를 조직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거듭 실패하였지만 굴하지 않고 영용히 싸웠다. 그는 여러차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혁명 활동에 종사한 50여 년간에 37년은 감옥에서 지냈다. 187l년 3월 18일 혁명 전에 그는 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블랑끼는 빠리 꼼뮨에서의 다수파였다. ), 들레끌뤼즈 등 노혁명가들도 있었다.
꼼뮨 위원들 중에는 블랑끼파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프루동파였으며, 또 일부 소자산 계급 민주주의 파들도 있었다. 블랑끼파와 소자산 계급민주주의 파를 합칭하여 다수파라 불렀고, 프루동파를 소수파라 불렀다. 3월 28일에 꼼뮨 위원들이 취임하였다. 전 빠리에서 이 성대한 명절날을 열렬하게 경축하였다. 빠리 인민들은 앞을 다투어 거리와 광장에 모여 환희로 들끓었다. 100개 진영의 국민 방위군이 실탄이 장전된 총을 메고 총창을 번쩍이면서 광장과 가로수 우거진 길에서 정연하게 대열을 지어 서 있었다. 시청 앞에 설치한 연단에 빽빽이 세운 붉은 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회장은 자못 굉장하면서도 엄숙하였다. 악대가 ≪마르세이유≫를 연주하였다. 낭랑한 나팔 소리와 함께 예포가 일제히 울렸다. 꼼뮨위원들의 명단과 꼼뮨의 성립을 선포할 때에 ≪꼼뮨 만세!≫를 부르는 환호 소리가 상공에 메아리치면서 오래도록 그칠 줄 몰랐다. 이렇게 역사상 첫무산 계급 정권의 창건이 장엄하게 선고되었다.





빠리 꼼뮨의 혁명적 조치
빠리 꼼뮨 위원회는 민주 선거에 의하여 나왔고 수시로 바꿀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혁명적 군중들과 호흡을 같이하였다. 때문에 빠리 꼼뮨은 무산 계급 독재를 건립하고 수호하는 과정에서 비범한 혁명적 창의 정신을 과시하였다. 꼼뮨의 최초의 조치는 자산 계급 국가 기구를 짓부시는 것이었다. 꼼뮨은 법령을 발표하여 낡은 군대를 폐지하고 국민 방위군으로 그를 대치하며, 국민방위군은 병역에 복무할 수 있는 모든 공민으로 구성한다고 규정하였으며, 낡은 경찰을 취소하고, 자산 계급 법정을 폐쇄하며, 교회와 국가를 분리시킨다고 선포하였다.
빠리 꼼뮨은 또 아주 과감한 수단을 취하여 노동자와 혁명적 지식인에의 거하여 새로운 국가 기구를 세웠으며, 모든 주요한 국가 부문의 관리사업을 적절하고도 효과적으로 잘 배치하였다. 꼼뮨은 정부의 각 부에 상당하는 10개의 위원회 즉 집행위원회, 군사위원회, 식량위원회, 재정위원회, 사법위원회, 공안위원회, 노동-공업-교환위원회, 사회복무위원회, 대외연락위원회, 교육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집행위원회는 꼼뮨을 대표하여 구체적으로 꼼뮨의 법령과 기타 위원회의 결정을 집행하였다. 사회 경제 방면에서도 빠리 꼼뮨은 일련의 혁명적 조치들을 실시하였다. 꼼뮨은 도망친 자본가의 공장을 몰수하여 노동자 협동 조합에 넘겨주어 관리하게 한 동시에 특별위원회를 성립하여 철도 운수와 군수품 생산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 두 가지 조치는 이미 자본주의 사적 소유제를 타격하였으며, 뚜렷한 무산 계급 성격을 띠었다. 꼼뮨은 꼼뮨 일꾼들의 최고 노임이 노동자들의 최고 노임 즉 1년에 6000프랑을 초과하지 못한다고 규정하였으며, 명령을 내려 1870년 10월부터 1871년 4월까지의 집세를 취소하였으며, 어떤 기구에서나 벌금을 받거나 마음대로 노동자들의 노임을 뜯어내는 것을 금지한다는 법령을 선포하여 무릇 3월 18일 후에 받아들인 벌금과 공제금을 일률적으로 본인에게 돌려주게 하였으며,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자금 대부소를 취소하고 제국 경찰국이 설치한 ≪직업소개소≫를 봉하였다. 꼼뮨은 또 전당포에서 기한이 지난 전당품을 파는 것을 금지하고, 무룻 20프랑 이하의 전당품은 일률적으로 무조건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꼼뮨은 빵작업소에서의 철야 노동을 폐지하고 빈민을 구제하는 전문적인 기구를 설립하였다. 꼼뮨은 무상 의무 교육의 원칙을 선포하고 직업 학교를 만들어 근로 인민의 이익을 수호함을 극히 중요한 자리에 놓았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 준다. 빠리 꼼뮨은 국제주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나폴레옹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방돔 광장의 전승탑을 짓부신 동시에 방돔 광장을 국제 광장으로 이름을 고쳤다. 빠리 꼼뮨은 또 많은 외국의 혁명가들과 단결하여 협동작전하였다.





꼼뮨 보위전
4월 2일, 띠에르 반동 정부의 군대가 빠리 서쪽으로부터 꼼뮨을 공격하였다. 그때로부터 시작하여 5월 20일까지 전투는 빠리의 서쪽과 남쪽 교외에서 벌어졌다. 빠리 인민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떨쳐나서서 자기의 정권을 보위하였다.
4월 6일에 띠에르는 일찌기 스당성에서 프로이센 군대에게 포로가 되었던 막마옹 원수를 총사령으로 임명하였다. 그때에 그에게는 몇만 명의 군대밖에 없었으므로 빠리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발동할 힘이 없었다. 반혁명 역량을 증강시키기 위하여 띠에르는 프랑스 포로를 돌려 줄 것을 프로이센에 구걸하였다. 그리하여 4월 말에 이르러서는 반동 정부의 군대가 11만 명으로 늘어났고, 5월 중순에는 또 13만 명으로 늘어났다. 반혁명 무장력이 확대됨에 따라 띠에르는 빠리에 대한 공격을 강화한 동시에, 시내 주민들의 생명 안전도 돌보지 않고 빠리에 포사격을 들이대었다. 꼼뮨 성원들은 용감히 반격하였지만 통일적인 지휘가 없었기에 군사상으로 갈수록 불리하여졌다. 일부 포대는 함락되었고, 빠리 서남쪽으로부터 반혁명 무장력이 더욱 시내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5월 10일에 베르사이유는 프로이센과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10만 명의 프랑스 전쟁 포로를 넘겨받고 암암리에 프로이센 군대의 지지 아래 자기의 반혁명 역량을 강화하였다. 5월 21일에 반동 정부의 군대가 간첩의 안내를 받아 서남쪽의 생끌루 성문으로부터 빠리 시내에 돌입하여 꼼뮨 전사들에 대하여 피비린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역사상 유명한 ≪5월 유혈주간≫이 시작되었다.
꼼뮨 전사들은 혁명의 승리 과실을 보위하기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않고 시내의 교통 요지마다 바리케이트를 쌓았다. 여성들과 아동들도 성년 남자들과 같이 어깨걸고 항전에 나서서 영용하게 싸웠다. 5월 23일에 한 갈래의 반동 군대가 프로이센 군대의 묵인하에 프로이센 군대의 방어선을 지나 갑자기 빠리 북쪽으로부터 몽마르트르 고지를 진공하였다. 그리하여 꼼뮨 전사들은 앞뒤로 협공을 받아 곤경에 빠졌다. 점심때에 몽마르트르 언덕이 함락되고 폴란드 혁명 지사이며 꼼뮨의 중요한 장군인 돔브롭스끼가 그곳에서 부상당하여 희생되었다. 이튿날 반동 군대가 빠리시의 중심에 있는 시청을 점령하였다. 잇달아 꼼뮨의 군사 수뇌인 들레끌뤼즈도 전투에서 희생되었다. 꼼뮨 위원이며 제1인터내셔날 회원인 유진 바를렝은 꼼뮨을 보위하는 시가전에서 포로가 되어 장렬하게 희생되었다.
5월 27일에 베르사이유 반동군 5000명이 레르라 셰즈 묘지를 포위 공격하였다 그곳을 지킨 꼼뮨 전사들은 200명도 안 되었다.
격렬한 전투는 밤중까지 계속되었다. 나중에 영웅적인 꼼뮨 전사들은 묘지의 담벽 앞에서 ≪꼼뮨 만세 !≫를 부르며 모두 장렬히 희생되었다. 역사적 증거물인 이 담벽은 지금까지도 그곳에 처연히 서 있다. 전 세계 혁명적 인민들은 이 담벽을 우러러보며 장렬하게 희생된 그들을 추모하고 있다.
5월 28일, 빠리 꼼뮨은 띠에르 반동 정부에 의해 피바다에 잠겼다. 빠리 꼼뮨은 획기적인 위대한 혁명이며, 무산 계급이 자산 계급의 통치를 뒤엎고 무산 계급 독재를 건립하는 첫 위대한 시험이었다. 빠리 무산 계급이 진행한 천지를 뒤엎은 이 위업은 획기적인 역사적 의 의를 갖고 있다. 빠리 꼼뮨의 경험과 교훈은 전 세계 혁명적 인민들의 귀중한 재산이다.





빠리 꼼뮨 후의 제1인터내셔날
3월 18일부터 제1인터내셔날은 빠리꼼뮨과 호흡을 같이 하고 환난을 같이하였다. 마르크스는 인터내셔날을 대표하여 빠리 노동자들의 혁명 사업을 지원할 것을 호소하는 몇백 통의 편지를 여러 나라 지부들에 보냈다. 마르크스는 바를렝과 프랑켈에게 내부의 단결을 강화하기에 주의를 돌리며 띠에르가 프로이센과 결탁해가지고 빠리 혁명을 탄압하려는 데 대해 경각성을 높이라는 편지를 써보냈다. 5월 11일에 마르크스는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강화 조약을 체결한 사실을 꼼뮨에 알리면서 피에르 반동 정부의 군대가 프로이센 군대의 방어선을 통과하여 불의에 습격함을 방지하기 위하여 빠리 북쪽의 방위사업을 잘하라고 꼼뮨에 건의 하였다. 빠리에서 반혁명적 대학살이 감행되고 있을 때, 마르크스는 방법을 써서 얻은 많은 통행증을 빠리에 보내어 꼼뮨 성원들이 프랑스에서 타져나을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또 1871년 프랑스 국내 전쟁에 관한 국제 노동자 협회 총위원회 선언(≪프랑스 국내전쟁≫이라 약칭함)을 써서 반혁명의 피비린 죄행을 폭로하고 꼼뮨의 사업을 위하여 변호하였다. 인터내셔날 프랑스 빠리 지부 성원의 대부분은 모두 꼼뮨 성원이었고, 바를렝, 프랑켈, 세라예 등은 또 꼼뮨의 지도사업에 참가하였다. 제1인터내셔날 총위원회와 인터내셔날 각 지부들에서는 마르크스, 엥겔스의 배치에 따라 영국, 미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 나라의 노동자들에게서 의 연금을 모아 망명한 꼼뮨 성원들을 구제한 동시에 그들에게 일자리를 얻어 주었다.
빠리 꼼뮨이 실패한 후, 반동 세력은 한때 기세등등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 인터내셔날 조직은 파괴되었고, 에스파니아 지부는 당국에 의해 활동을 금지당했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인터내셔날의 많은 성원들이 체포되었다. 빠리 꼼뮨을 눈에 가시처럼 여긴 각국의 자산 계급들도 제1인터내셔날과 마르크스를 몹시 미워하였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런던에서 그를 시기하여 당국의 박해를 받게 하려고 시도하였다. 각국 정부들에서는 또 담판하여 제1인터내셔날을 비합법적 조직으로 선포하려고 시도하였다. 바쿠닌 분자들은 또 내부에서 분열 활동을 대대적으로 진행하면서면서 인터내셔날의 영도권을 찬탈하려고 시도하였다. 제1인터내셔날은 이렇듯 매우 큰 곤경에 처해 있었지만 여전히 완강하게 전투를 견지하였다. 1872년에 인터내셔날이 헤이그에서 대표 대회를 소집하였는데, 마르크스는 친히 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대회는 빠리 꼼뮨의 경험에 근거하여 채택한 187l년 런던 대표 대회의 중요한 결의를 재차 제기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담보하고 이 혁명의 종국적 목적인 계급을 소멸하기 위하여 무산 계급은 반드시 조직되어 자기의 정당을 창건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지적하였다. 대회는 바쿠닌 및 그의 심복들을 인터내셔날에서 제명하여 몰아내기로 결정한 동시에 인터내셔날이 유럽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된 상황에 비추어 총위원회를 미국의 뉴욕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1876년에 제1인터내셔날은 해산을 선포하였다. 제1인터내셔날은 이미 자기의 위대한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였고, 전 세계 근로 인민들에게 마멸될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제1인터내셔날은 어떤 역사 조건에서 창립되었는가?
2. 제1인터내셔날의 창립 선언과 규약의 주요한 내용을 설명해 보자.
3. 프루동주의와 바쿠닌주의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일람표로 만들어 보자.
4. ≪국방 정부≫를 매국 정부라고 하는 이유를 사실을 들어 설명해 보자.
5. 1871년 3월 18일 혁명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혁명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6. 빠리 꼼뮨 정권의 성격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는가?
7. 빠리 꼼뮨의 경험, 교훈,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토론해 보자.








제16장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선 자본주의






제1절 과학 기술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추세

과학 기술의 발전
1870년 전후에 산업 혁명이 새로운 시기에 들어섰다. 자연 과학에서의 새로운 발견은 신속히 공업에 응용되어 경제의 발전을 크게 추진시켰다. 1870년 이후, 과학의 성과가 공업에 응용되면서부터 세 개 방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즉 새로운 에너지 원천의 발전과 이용, 새로운 기계와 새로운 생산물의 제작, 원거리에 소식을 신속히 전달하는 새로운 발명에 영향을 주었다.
산업 혁명은 일찍 매우 큰 정도로 증기기관에 의거하였다. 공업의 발전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늘 새롭고 더욱 좋은 에너지 원천을 찾게되었다. 19세기 70년대에 전기가 거대한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발전하였다.
오래 전부터 많은 과학자들은 모두 전기 문제를 탐색하였다. 영국의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년)는 이 점에서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연구를 통하여 전기 에너지가 자기력을 발생시킨다는 깃을 알고 자기력이 전기를 발생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를 연구하였다. 1831년에 그는 정성을 깃들인 한 차례의 실험 과정에서 강한 자성이 코일내에서 운동하면 전류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후에 다른 사람이 그의 발견에 근거하여 발전기를 제작하였다. 1877년에 실제로 쓸 수 있는 발전기가 생산되었다. 발전기는 증기나 물의 힘으로 돌아가면서 역학적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변화시켰다. 사람들은 전기 에너지를 사용하여 공장의 기계를 돌게 하였고, 또 다른 부문에도 발전기를 이용하였다. 전력을 이용하여 인류에 봉사하는 면에서 미국은 한걸음 앞섰다. 독학으로 훌륭한 인물이 된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1847~1931년)은 1879년에 오래 쓸 수 있는 전구를 만들어 냈다. 그후 얼마안 가서 전구가 등불을 대체하여 조명에 이용되었다. 에디슨은 매우 많은 것을 발명하였는데, 그 중에서 대다수는 전기 기계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약 1882년에 전차가 나타났다. 전력은 아주 좋고 값싼 에너지 자원이다. 전력의 광범한 사용은 사람들을 ≪증기 시대≫로부터 ≪전기 시대≫로 들어서게 하였다.
발동기를 제작하는 면에서 사람들은 효율이 높고 간편한 기계를 만들어내고 부단히 탐색하였다. 19세기 80년대에 독일의 발명가 칼 빈치 등이 소형 내연 발동기를 설계하였다. 이런 발동기는 액체 연료를 썼는데, 그것이 기통 내에서 연소되었다. 또 90년대에 독일의 기사 루돌프 디젤이 높은 효율을 가진 내연 발동기를 설계하였다. 이 발동기는 디젤유를 연료로 사용할 수 있기에 일명 디젤 기관이라고도 한다. 후에 이 디젤기관은 공업과 운수업에 광범히 사용되었다.
내연기의 발명으로 하여 석유 채굴업과 제련업이 추진되었다. 석유도 전력과 마찬가지로 극히 중요한 에너지 자원으로 되었다. 1870년에 전세계에서 채굴한 석유는 80만 톤밖에 안 되었는데, l900년에는 2000만톤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내연 기관은 육상 교통과 항공 교통에도 사용되었는데, 중요한 발명으로는 자동차와 비행기였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일부 사람들이 자동차를 실험 제작하였다. l896년에 미국 사람 헨리 포드가 처음으로 네 바퀴 자동차를 만들어냈다. 이로부터 자동차는 대량적으로 생산되었고, 육상의 중요한 교통 운송 도구로 되었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기계의 힘을 빌어 하늘로 날아보려고 꿈꾸었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기에 이러한 꿈은 현실로 되었다. 처음에는 공기보다 가벼운 비행선을 만들어냈다. 1900년에 독일 사람 쩨펠린이 제작한 비행선이 그 대표가 될 수 있다. 이어서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기가 나왔다. 1903년에 미국 사람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제작하고 비행시험에 성공하였다. 그들이 만든 비행기는 처음 비행 시험에서 비록 12초 동안밖에 날지 못했지만 교통 운송에서 새로운 기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예고하였다.
근대 전신 사업은 통신 소식을 신속히 전달하는 데 편리를 주었다. 1844년에 모르스가 미국 워싱톤으로부터 볼티모어로 통하는 유선 전신실험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근대 전신 사업에 기초를 닦아놓았다. 1876년에 미국 보스톤에 거주한 스코틀랜드 사람 벨은 유선 전화 시험에 성공하였다. 벨, 에디슨과 기타 일부 사람들이 끊임없이 개량하여 전화는 또 통신 소식을 신속히 전달하는 편리하고 민첩한 도구로 되었다. 80년대에 독일의 물리학자 헤르쯔가 전자파(혜르쯔파)를 발견하였다. 이탈리아 사람 마르코니가 영국 자본가의 자본 원조를 받아 헤르쯔의 발견을 이용하여 무선전통신 설비(즉 무선 전신)를 제작하였다. 1899년에 마르코니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전보를 치는 데 성공하였고, 1901년에는 대서양을 건너 전보를 치는 데 성공하였다.
19세기 말엽 과학 기술의 발전은 경제의 발전에 더욱 광범한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미 하강선에 들어섰다.





독점 조직의 형성
자본주의 제도하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과 생산의 발전은 부를 날로 더 소수 자본가의 수중에 집중되게 하였는데, 생산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집중되는 정도도 더욱더 높아졌다. 생산과 자본이 고도로 집중되어 독점이 생겼다. 19세기 말엽부터 주요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신디케이트, 카르텔, 트러스트 등 독점 조직이 앞을 다투어 나타났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여러 나라들에서 야금, 해상운송, 철도, 화학 공업, 전기 공업, 은행 등 대부분이 백여 개의 독점자본가의 수중에 집중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미국과 독일에서의 집중정도가 더욱 돌출하였다. 각국의 대독점 조직은 어느 한 부문을 통제할 수 있었으며, 어떤 대독점 조직은 또 국가 전반의 경제 명맥을 통제하고있었다. 미국의 대독점 조직인 스탠다드 석유 회사는 대재벌인 록펠러가 1870년에 세운 것이다. 9년 후에 ≪스탠다드≫에서 생산한 휘발유는 미국휘발유 총생산량의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1882년에 ≪스탠다드≫가 트러스트로 재조직되었는데, 14개의 석유 회사가 다 거기에 가입하였고, 26개회사의 대부분 주권도 그 수중에 장악되었다. 미국의 다른 한 대트러스트인 미국 강철 회사는 1901년에 대재벌 모르간에 의해 설립되었다. 미국강철회사는 설립 초기에 벌써 미국 강철 생산량의 약 10분의 6을 통제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1904년에 미국의 381개 트러스트가 5000여 개의 기업을 합병하여 70여 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장악하였다. 독일에서 라인-베스트팔리아 석탄 신디케이트는 1893년에 설립되었다. 그때에는 벌써 그 구역 석탄 총생산량의 86.7%가 이 신디케이트에 집중되었고, 1910년에는 그 구역 석탄 총생산량의 95.4%가 이 신디케이트에 집중되었다. 독일의 전기 공업은 기본상 전업 총회사와 지멘스 회사에 독점되었다. 항운업은 기본적으로 함부르크-아메리카 회사와 북독일 항운 회사에서 독점하였다.
각국의 독점 자본가들은 국가의 경제 명맥을 통제하던 데로부터 국가의 정권을 통제하는 데로 나아갔다. 그들은 정치 및 경제상에서의 특수한 지위에 의거하여 날로 더 증가되는 최대한도의 이윤을 얻었다. 스탠다드 석유 회사의 주식 이윤은 1882년에 5.2%였던 것이 1898년에는 30%로 뛰어올랐다. 1901년부터 1910년까지 미국 강철 회사의 매년 평균 이윤은 1억 1, 200만 달러에 달하였다.
독점 자본의 통치를 확보하기 위하며 주요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자산계급은 전면적으로 반동의 길로 나아갔다. 그들은 경찰-군사-관료 기구를 전례없이 강화하여 대내적으로는 인민들의 혁명 운동을 탄압하고, 대외적으로는 침략 전쟁을 발동하여 식민지 약탈을 강화하였다. 경제적으로 당시의 생산력이 크게 발전하였다 할지라도 생산력의 성장과 과학 기술이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간의 거리는 더욱더 멀어졌다. 노(老) 자본주의 국가, 예를 들면 영국에서 경제 발전이 완만해졌다. 자본이 대량으로 국외로 수출됨으로써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주식을 소유하고 주식의 배당금에만 의거하여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그러한 금리 생활자 계층의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흡혈귀, 특히 식민지국가 인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였다. 세계에서 ≪상업≫이 가장 발달한 국가인 영국에서 1899년의 금리 생활자 수입은 대외 무역의 수입보다 4배나 더 높았다. 이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의 기생성과 부패성을 말해준다.
독점은 제국주의의 기본 특징이라고 레닌은 지적하였다. 독점 조직이 형성됨에 따라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 주요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19세기 말엽과 30세기 초엽에 모두 제국주의 국가로 되었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19세기 말엽, 과학 기술의 새로운 발전은 어떤 방면에서 돌출하게 표현되었는가? 그 예를 하나씩 들어 설명해 보자.
2. 19세기 말엽에 자본주의 발전 추세는 어떠하였는가? 독점 자본가의 영향은 어떠한가?






제2절 주요한 제국주의 국가들

미국
미국 내전 중에 자본주의를 실시한 북부의 여러 주는 노예소유제를 실시한 남부의 여러 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미국 자본주의의 신속한 발전을 위한 길을 닦아 놓았다. 미국에는 풍부한 천연 자원이 있고 석탄, 철, 석유, 나아가서는 금의 매장량이 상당히 많았다. 서부에서는 광대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고 건설을 확대하여 광활한 국내 시장을 제공해 주었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이주민들이 밀려들었는데, 19세기의 마지막 25년간에는 이주민이 1,000만 명 이상에 달하였다. 그들은 필요한 노동력으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는 기술을 장악한 많은 숙련 노동자들도 있었다. 유럽의 ≪잉여 자본≫도 밀려들었다. 이모든 것들은 미국의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하였다. 1870년부터 1913년까지 미국의 강철 생산량은 4만 톤으로부터 3400만 톤으로 늘어났고, 공업 제품은 세계 총액의 23.3%로부터 35,8%로 늘어났다. 공업 생산량을 말하자면, 미국은 l894년에 이미 기타 자본주의 국가를 능가하여 세계 제1위를 차지하였다. 농업 생산, 특히 밀생산량의 증가 속도는 매우 빨랐다. 19세기 말엽에 미국의 밀이 유럽의 시장으로 끝없이 밀려들었다.
미국이 공업국으로 변하자 이에 동반하여 자본과 생산이 급격하게 집중되었다. 미국은 자본주의로부터 독점 자본주의로 변하였으며, 트러스트 제국주의로 불리었다.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에는 두 개 자산 계급 정당인 공화당과민주당이 형성되었다. 내전 이후 공화당이 장기간 집정하고 있었는데, 공화당은 점차 소자산 계급 민주주의 분자들을 배제하고 대공업가와 은행가의 정당으로 되었다. 민주당은 남부 여러 주들의 영향력을  계속 보존하면서 대농장주, 부농, 남부의 신흥 자산 계급과 북부의 일부 자산계급들에게 의 존하였다. 미국이 제국주의 단계로 이행하던 시기에 양당사이의 차별은 소실되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모두 독점 자산 계급의 이익을 대표하였다. 때문에 대외 정책면에서 침략 팽창의 경향이 늘어났다. l898년에 미국은 식민지 재분할을 위한 제국주의 전쟁 즉 미국-에스파니아 전쟁을 도발하고 에스파니아의 수중으로부터 필리핀, 푸에르토리코와 괌 섬을 탈취하였으며, 쿠바를 자기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1901년부터 1908년까지 공화당의 테오도르 루즈벨트(l858~1919년)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루즈벨트는 열광적인 팽창주의 자였다. 그는 무력을 외교의 배경으로 삼아야 한다고 떠벌이면서 ≪몽등이 정책≫을 실시하였다. 1903년에 그는 미국이 파나마 지역을 탈취하게 하였다. 미국은 또 중부와 납부아메리카 각국을 간섭하여 통제를 강화하고 경제를 침투시켰으며 서반구에서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19세기의 마지막 30년간에는 근로 인민들의 생활이 곤란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계급 투쟁은 늘 첨예하였다. 1877년에 미국 철도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전국적인 파업을 단행하였기에 주요한 철도선들이 마비 상태에 빠졌다. 파업 노동자들은 또 한때 몇 개 도시를 차지하고 군경들과 무장투쟁을 진행하였다. 80년대에 미국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 제도를 실시하기 위하여 기세 드높은 투쟁을 전개하였다. 1885년 5월 1일에 전국의 30만 노동자들이 시위 행진을 단행하였고 운동 중심인 시카고에서 4만명의 노동자들이 파업하였다. 5월 1일 시카고의 노동자들은 모스광장에 모여 군중 대회를 열다가 무장 경찰들의 탄압을 받아 노동자 몇 명이 피살되고 2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체포된 노동자들 가운데서 후에 4명이 무고하게 사형 판결을 받았다. 노동 운동이 앙양되던 시절에 미국노동당(후에 사회주의 노동당으로 개칭하였다)과 미국 노동 연합회가 차례로 창설되었다.





영국
19세기 중엽에 영국은 ≪세계 공업 지대≫의 위치에 처하여있었고, 석탄, 철, 방직품의 생산량은 모두 프랑스, 독일, 미국 세 나라의 총생산량을 능가하였다. 제국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영국은 경제 발전 속도가 완만해졌으며 후에 흥성한 미국과 독일이 영국을 따라잡았거나 능가하였다.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영국의 공업 생산액은 세계생산 총액의 31.8%로부터 14%로 하강되어 미국보다 퍽 뒤떨어졌고 독일보다도 낙후하였다. 그리고 영국은 경제 발전이 완만하였기 때문에 세계공업의 독점 지위를 상실하였다. 그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영국은 오랜 자본주의 국가로서 기업의 설비가 낡았기 때문이었다. 즉 자산 계급들은 대량의 자본을 외국에 수출하고 초과 이윤을 착취할지언정 생산 설비를 갱신하거나 선진적인 기술을 채용하려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인의 다른 하나는 영국은 광대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광대한 소비시장과 원료 산지 및 염가의 노동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기술수준이 비교적 낮은 정황에서도 영국의 자본가들은 거액의 이윤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지는 영국의 흥망에 대하여 극히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후반기엔 자유당과 보수당은 영국에서 서로 번갈아 집권하고있었다. 자유당은 산업 자산 계급의 이익을 대표하였고, 영국이 ≪세계공장≫의 지위에 처하여 있는 조건하에서 ≪자유 무역≫을 주장하였다. 보수당은 처음에 대지주, 은행가의 정당이었는데, 19세기 말엽에 많은 산업가들이 참가하면서부터 영국 자산 계급의 주요한 정당으로 되었다. 자유당의 월리엄 글래드스턴과 보수당의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모두 몇 차례수상을 담임하고 양당의 저명한 대표 인물로 되었다. 그들은 계급 모순을 완화하고 대중을 농락하기 위하여 집권 기간에 일부 사회 정치 개혁을 진행하였다. 대외적으로 보수당은 식민 팽창 정책을 적극 실시하였다. 1875년에 디즈레일리는 이집트 통치자들이 재정 곤란을 당하고 있는 시기를 이용하여 이집트으로부터 수에즈 운하 주식의 44%,즉 총 40만 주식가운데서 17만 6천 주식을 얻었다. 이로부터 점차 운하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였다. 이듬해 영국왕 빅토리아가 인도와 왕으로 선포되었다. 디즈레일리는 이 기회를 빌어 영국 인민들에게 영국의 대국 배타주의 와 제국주의 정서를 불어넣었다.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의 대외 정책을 계속 집행하면서 이집트에서의 영국의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하에 1882년에 군사를 동원하여 이집트의 민족 운동을 탄압하였다.
19세기 80년대로부터 시작하여 광범한 비숙련 노동자들이 노동 조합에 가입하고 파업 투쟁에 참가하였으므로 영국 노동 운동에 전투적인 정신이 흘러들었다. 그러나 80년대에 출현한 ≪사회 민주 동맹≫과 90년대에 창건된 독립 노동당은 모두 마르크스주의의 노동당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영국의 통치 계급은 매수하는 방법으로 노동 계급 가운데서 노동귀족 계층을 양성함으로써 노동 운동에 막대한 해를 끼쳤다. 20세기 초엽에 영국에 노동당이 창건되었지만 여전히 자산 계급이 이를 좌지우지하였다.





프랑스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의 패배는 프랑스에 거대한 손실을 끼쳤다. 비록 손실을 받기는 하였지만 프랑스의 공업 생산은 여전히 일정한 발전을 가져왔다. 1870년부터 1913년까지 프랑스의 강철생산량은 8만 톤으로부터 510만 톤으로 늘어났고, 석탄 생산량은 1,290만톤으로부터 4780만 톤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프랑스의 공업 발전 속도는 이 시기의 미국이나 독일보다 아주 뒤떨어졌다. 프랑스의 공업 생산은 19세기 중엽에 겨우 영국 다음으로 세계 제2위를 차지하였고, 19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세계 제4위로 하강하였다. 프랑스 농민들의 빈곤과 농업 경영의 낙후성은 농업 생산 기술의 낙후를 초래하였고 국내 시장을 협소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50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또 철매장량이 풍부한 알사스와  로렌을 떼주는 등 이 모든 젓들은 프랑스의 경제 발전을 매우 크게 방해하였다.
제국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에 프랑스의 공업 생산에도 집중되는 추세가 나타났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은 공업이 아니라 은행 신용 대부금이었다. 프랑스에서의 은행 자본의 집중은 아주 현저하였다. 1,900년에 이르러 ≪리옹 신용 대부 회사≫ 등 프랑스의 가장 큰 세개 은행은 23억 프랑의 자본을 끌어들였는데 거기에 그들의 고정자본까지 합치면 그 총자본은 근 30억 프랑에 달하였다. 프랑스 은행자본은 더욱더 산업 자본과 함께 엉키여 금융 자본으로 되었으며, 가장 큰 은행가는 또 공업 회사의 대자본가를 겸하고 금융 과두로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독점 자본가들은 대량의 자본을 신용 대부에 투자하고 생산 영역에 투자하지 않았으며, 외국에 투자한 것이 국내에 투자한 것 보다 훨씬 더 많았다. 프랑스는 유럽의 고리대금업자로 되어 해마다 거액의 이자 얻었다. 때문에 프랑스를 고리대금업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었다.
빠리 꼼뮨이 탄압된 후 살인 백정 띠에르가 정식으로 프랑스 공화국의 수상이 되었다. 국회에서 3분의 2의 의석을 차지한 왕당파는 공화국을 뒤엎고 군주제도를 복구하려고 애썼다. 띠에르의 정책이 극히 반동적이었지만 왕당파들은 여전히 띠에르에게 불만을 품고 1873년에 띠에르를 차버리고 막마옹을 대통령으로 내세웠다. 막마옹도 왕당파 사람이며, 왕당과 참패의 주범자이고 빠리 꼼뮨을 탄압한 살인 백정의 한 사람이었다. 왕당파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내세운 것은 군주제 복고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였으며, 그 자신도 군주 제도로의 복고를 위하여 적극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광범한 인민들은 공화제를 보위하였고 일부분의 자산 계급도 군주제를 반대하였다. 왕당파는 또 세 개 파로 나뉘었다. 정통파는 부르봉 왕조의 상속자를 옹호하였고, 오를레앙파는 루이 필립의 손자를 옹호하였고, 보나빠르뜨파는 나폴레옹 3세의 아들을 옹호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분열은 군주 제도를 복고하는 데 곤란을 조성하였다. 1875년에 자산 계급 공화파는 의회에서 처음으로 형세를 돌려세웠다. 그후부터 공화파는 몇 년 동안 의회 선거에서 또 다수를 차지하였다. 1879년 초에 막마옹은 할 수 없이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그리하여 군주제복고의 위험은 사라졌다. 프랑스의 정권은 자산 계급 공화파의 수중에 들어갔다. 많은 자산 계급당파들이 서로 권력 쟁탈을 하고 있었기에 정치 국세가 극히 불안하였고 내각이 빈번하게 바뀌었다. 통계에 의하면 1875년부터 1914년까지의 사이에 프랑스 정부는 50차례나 바뀌었고 사회를 진동시킨 정치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빠리 꼼뮨이 탄압된 후 프랑스에서는 반동 세력이 한때 창궐하였고 무산 계급의 혁명 운동은 압박을 받았다. 자산 계급 공화국의 확립은 무산 계급의 조건을 개선시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9세기 70년대 중엽으로부터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은 또 국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1879년에 프랑스 노동당을 창건하였다. 쥐례드와 쁠 라파르그의 영도 밑에서 노동당은 80년대에 몇 차례의 대파업을 일으켰고 제2인터내셔날의 창립에 대해서도 거대한 작용을 일으켰다.





독일
1871년 1월 18일에 프랑스 빠리 교외의 베르사이유 궁전의 거울궁에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의 황제로 선포되었다. 사분오열되었던 독일은 통일을 완성하고 유럽의 강국으로 되었다.
독일은 후에 흥성한 자본주의 국가로서 통일된 후 공업 생산이 줄곧 발전하여 왔다. 1870년부터 1913년까지의 사이에 강철 생산량은 14만톤으로부터 2050만 톤으로 늘어났고, 석탄 생산량은 29:30만 톤으로부터 1억 9,110만 톤으로 늘어났으며, 공업 생산액은 세계 총액의 13.2%로부터 15.7%로 늘어나 영국을 능가하여 미국의 다음으로 되었다. 독일의 통일은 통일된 국내 시장을 개척하였고, 50억 프랑의 프랑스 배상금은 독일의 경제 발전에 필요한 자본을 마련해 주었고, 알사스와 로렌의 광물 매장량은 또 공업 발전에 중요한 자원을 보충해 주었다. 게다가 독일은 후에 흥성한 자본주의 국가로서 최신 기술과 설비를 채용하는 데 비교적 편리하여 오랜 자본주의 국가보다 생산 효율을 쉽게 높일 수 있었다. 이모든 것은 독일의 경제가 앞장설 수 있는 요소로 되었다.
독일 경제의 발전은 산업 노동자들을 부단히 늘어나게 하였다. 독일은 마크스주의의 고향으로서 사회주의 사상 선전이 독일 노동자들 속에서 매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찌기 1869년에 독일 무산 계급은 처음으로 자기의 독립적 정당인 사회 민주 노동당을 창립하였다. 빠리  꼼뮨 이후유럽 노동 운동의 중심은 프랑스로부터 독일로 이전하였다. 당의 지도자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늘 마르크스, 엥겔스를 찾아가서 지도를 받았으며, 노동자들 속에서 당의 영향은 부단히 늘어났다. 국회 선거에서 사회 민주 노동당이 얻은 선거표는 끊임없이 늘어나 1877년에는 약 50만 표에 달하였고 12개의 의석을 얻었다. 통치 계급은 이런 정황에 공포를 느꼈다. 1878년 10월, 독일 수상 비스마르크는 독일 의 회에서 이른바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비상 법령≫을 채택하게 하였다. 이 반동적 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사회 민주 노동당은 불법적인 것으로 선포되었고 당의 조직이 붕괴되었으며, 노동자 신문 잡지가 금지당하였다. 베벨과 리프크네히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교시를 접수하고 합법적 인 연단을 이용하여 반동 통치자들과 투쟁하였으며, 오류를 극복하고 당의 조직을 건전히 하면서 지하 투쟁을 벌였다. 사회 민주당은 오랫 동안정치 박해를 받았지만 노동 계급 가운데서의 그 영향은 여전히 공고하였으며, l890년에 ≪비상 법령≫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승리를 달성하고 비스마르크의 반동 정책을 타격하였다.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은 지하 활동으로부터 공개 활동으로 넘어왔고, l870년의 대표 대회에서는 당의 명칭을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고쳤다. 독일 사회 민주당의 영향은 날로 커져 1893년의 독일 의회 선거에서 178만여 개의 선거표와  44개의 의석을 얻었다.
그후 독일 사회민주당의 선거표와 의석은 더 늘어났다. 이것은 독일사회 민주당의 성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선거표와 의석이 늘어나면서부터 또. 많은 지도자들은 합법적인 투쟁에 미혹되어 의 회 투쟁의 작용을 일면적으로 과장하였으며 그들에게 우경 기회주의 성향이 자라났다.
≪비상 법령≫이 실패한 데다가 1888년에 새로 즉위한 황제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 사이에 불화가 생겨 오랫 동안 대권을 장악하였던 비스마르크는 할 수 없이 사직하였다.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에 독일은 경제력이 늘어났고 그의 대외 팽창 야심도 강하여졌으며, 광대한 시장, 특히는 세계 각지에서 식민지를 얻으려고 하였다. 즉 독일 통치 계급의 한 집권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위하여 하늘 아래의 모든 땅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l861년 러시아 농노 제도의 철폐는 러시아가 봉건 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에로 이전하였음을 의미한다. 러시아 자본주의 는 신속히 발전하였다. 19세기 80년대에 러시아에서는 산업 혁명을 완수하였으며, 주요한 산업 부문에서는 대기계 생산이 차츰 소공업 노동을 대신하여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농업 경제도 점차 자본주의 의 길로 나아갔다. 농촌에서는 계급 분화가 심하여져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빈농들이 많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또 고용 노동을 사용하는 농업 자산계급이 나타났다. 그러나 유럽의 러시아 경내에서는 80%의 사유지 약 7300만 무(러시아 무)가 여전히 지주 - 귀족들에게 점유되었으며, 그중 3000만 무(러시아 무)는 1,000호의 대지주에게 속하였다. 여기에서 러시아 봉건 농노 제도의 잔재 세력이 여전히 매우 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을 엄중하게 방해하였으며, 러시아로 하여금 다른 자본주의 국가보다 뒤떨어지게 하였다. 자본주의 가 발전하고 봉건 농노제의 잔재 세력이 대량으로 존재하는 조건 하에서 러시아 근로 인민들은 봉건주의 와 자본주의 의 이중적 압박과 착취를 당하였으며, 또 짜르 독재 통치의 가혹한 압박을 받았다. 19세기 70년대 말기로부터 러시아 노동 혁명 운동이 또다시 앙양되었다. 당시 러시아 무산 계급은 인구가 대단히 늘어났고 또 독립적 정치 역량으로 되었다. 80년대에 마르크스주의 가 러시아에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첫 마르크스주의 그룹도 건립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던 쁠레하노프(1856~1918년)는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기 위하여 많은 저작을 썼다. 그는 사회주의의 길로 나가자면 반드시 노동 계급의 정치 투쟁을 거쳐야 한다고 강조하여 지적하였다. 마르크스주의를 러시아 노동 운동과 결합시키는 위대한 과업은 레닌에 의하여 완수되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11924년)은 1870년 4월 22일에 러시아 볼가강변의 씸비르스크(레닌의 원래의 성이 울리야노프였으므로 지금 이 도시의 이름이 울리야놉스크로 되었다)에서 탄생하였다. 레닌은 1887년에 까잔 대학에 입학할 때 이미 마르크스주의의 일부 노작들을 열독하였으며, 그후 오래지 않아 학생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추방당하였다. l888년 가을에 레닌은 까잔에 돌아와 그곳의 마르크스주의 그룹에 가입하였다. 까잔에서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시작하였다. 후에 그는 싸마라(현재의 꾸이비셰프)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당지의 첫 마르크스주의 그룹를 건립하고 과학적 공산주의를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l893년에 레닌은 러시아 혁명 운동의 중심지인 수도 뻬쩨르부르그로 왔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소모임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많은 공장의 마르크스주의 소모임을 영도하여 선전, 선동 사업을 널리 전개하였기에 얼마 안 가서 뻬쩨르부르그의 마르크스주의 소모임들에서 공인하는 지도. 자로 되었다. l895년에 레닌은 뻬쩨르부르그의 20여 개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소모임을 연합시켜 ≪노동 계급해방 투쟁 협회≫를 건립하였다. l895년 12월에 레닌은 체포되었고 후에 시베골아로 추방당하였다.
1898년 3월 레닌이 유형당한 기간에 러시아 각지의 투쟁 협회가 민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표 대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이 대회는 당의 강령과 규약을 제정하지 않았고 당을 진정하게 건립하지 못하였으며, 각지의 마르크스주의 소모임과 단체들은 여전히 분산적인 상태에 처해 있었다. 1900년에 유형지에서 돌아온 레닌은 또 외국에 가서 신문 ≪이스크라(불꽃)≫지를 창간하기로 결정하고 당의 창건을 위한 사상 및 조직상에서의 준비 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02년에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란 노작을 집필하여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적 정당을 건립하기 위한 튼튼한 사상 기초를 닦아놓았다. 동시에 ≪이스크라≫ 신문도 자기의 활동을 통하여 분산적이던 마르크스주의 소모임들을 초보적으로 단합시킴으로써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대표 대회의 소집을 위하여 필요한 조건들을 마련하였다.
1903년 7월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표 대회가 성공리에 열렸다. 레닌을 수반으로 하는 혁명파들은 기회주의자들과 열심히 투쟁하였다. 레닌의 주장으로 대회는 무산 계급 독재의 실현을 당의 강령에 명확히 써넣는 것에 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당 규약을 토론할 때 치열한 논쟁히 벌어졌다. 레닌은 당 규약 제1조에 당원은 당의 규율에 복종해야하며, 당의 어느 한 조직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명확히 규정해야 하며, 오직 이렇게 해야만 당 조직의 순결성을 담보할 수 있고 당으로 하여금 영원히 단결되고 조직이 엄밀한 당으로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마르또프를 대표로 하는 기회주의 분자들은 레닌의 정확한 의견을 완고하게 반대하면서,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가 입장을 선포하면 되고 당원은 당의 어느 한 조직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며 당의 규율에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당을 성분이 복잡하고 조직이 산만한 자산 계급적 그룹으로 만들려고 망상하였다. 기회주의자들의 이런 방해로 말미암아 레닌의 제의 는 채택되지 못하였다.
대회에서 당의 중앙 지도 기구를 내올 때 역량 변화로 하여 기회주의 분자들은 실패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레닌을 수반으로 하는 혁명파들은 다수를 차지하였기에 다수파(볼셰비끼)라고 불리웠고, 기회주의자들은 소수를 차지하였기에 소수파(멘셰비끼)라고 불리었다. 볼셰비끼가 견지한 이론과 노선은 마르크스의 이론과 노선이었다. 볼셰비끼주의는 가장 견고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기초에서 탄생된 것이다. 볼셰비끼주의의 형성은 레닌주의 의 탄생을 의미한다.
1905년에 러시아에서 자산 계급 민주주의 혁명이 폭발하였다. 1월 22일 14만여 명의 빼쩨르부르그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거리에 나가 짜르에게 청원서를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짜르는 그들을 접견하는 대신 미리 획책한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1,000여 명이 살해되고 200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이 대학살 사건은 러시아 노동자들을 각성시켜 짜르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짜르를 반대하는 투쟁에 뛰어들게 하였다. 이 대학살 사건은 1905년 혁명의 출발점으로 되었다. 1905년 10월에 혁명운동은 전 러시아적인 정치 총파업으로 발전하였고, 그와 동시에 파업지도 기구인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창립되었다. 12월 18일에 볼셰비끼의 건의 에 근거하여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정치 총파업을 단행하는 동시에 총파업을 무장 봉기로 전변시킬 것에 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소비에트도 파업을 지도하는 기관으로부터 무장 봉기를 지도하는 기구로 변화되었다. 전체 총파업은 20일에 시작되었고 22일에는 무장 봉기로 발전하였다. 무장한 노동자들은 자기들보다 몇 배나 더 많은 반동군대와 9일간의 투쟁을 진행하여 적들을 호되게 타격하였다. 나중에 짜르정부가 많은 군대를 이동시켜 증원한 정황하에서 봉기는 탄압당하고 1905년 혁명은 종결을 고하였다. 1905년 혁명은 레닌주의 가 탄생된 후의 첫 중대한 혁명 운동이며 10월 혁명의 ≪총연습≫이었다.





일본
메이지 유신은 봉건 할거 상태를 없애고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서방 국가의 실력이 공업 역량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에 공업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런데 개인 자본만으로는 부족하였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납세자의 소득을 착취하여 자본가에게 꾸어 주거나 보조해 줌으로써 공장, 광산, 기업을 꾸리는 것을 고무, 격려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또 서방의 설비와 기술 인원으로 조선 공장, 병기 공장, 광산 및 기타의 공장들을 세웠는데, 1880년에는 도합 50여 개소에 달하였다. 19세기 80년대에 일본경제는 큰 변화를 일으켰다. 즉 기계 생산이 공장제 수공업을 대체하였고, 정부에서 세운 기업 가운데서 병기 공장과 철도 교통을 제외한 기타기업들의 값을 할인하여 경매하고 기간을 나누어 그 값을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증정하는 방법으로 자본가에게 넘겨주어 경영하게 하였다. 고관들과 접근하고 또 늘 정부에서 돈을 꾸는 그러한 특권 회사들은 실제적인 혜택을 받았다. 이를테면 미쯔비시 회사에서는 조선 공장, 탄광, 금광 및. 은광을 얻었고, 미쯔이 회사에서는 탄광, 방직 공장, 제사 공장을 얻은 것 등등이다. 정부의 보호하에 일본에는 독점 조직이 탄생하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에 일본도 제국주의 단계에로 이행하였다. 일본 독점 자본의 대부분은 농후한 봉건성과 군사성을 띠었다. 독점자본가 가운데의 어떤 자는 바꾸후 시대의 금융업 상점으로부터 발전한 미쯔이 재벌처럼 구식 봉건 특권 상인이 남의 것을 모방하여 형식을 바꾼 것이며, 어떤 자는 일본에서 많은 토지를 차지한 가장 큰 지주의 하나인 미쯔비시 재벌처럼 본인이 최대의 지주를 겸한 것이었다. 그리고 독접 집단과 군벌 집단이 결탁하여 침략 팽창 정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미쯔이, 미쯔비시 등 재벌은 또 군수 공업을 기둥으로 삼아 일본의 침략 팽창에 물질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일본 제국주의 는 농후한 봉건 군사 성격을 띠었다.
19세기의 80년대에는 일본 국내 계급 모순이 몹시 첨예하였다. 통치계급은 모순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1889년에 헌법을 반포하였다. 일본은 형식상 군주 전제 정체로부터 입헌 군주 정체로 변하였지만 실제상에서는 천황 전제 통치가 강화되었다. 천황은 국가 원수이며 또 군대의 최고통수로서 전쟁을 선포하고, 조약을 체결하고, 고급 문무관원을 임명하고, 의회를 해산, 소집하는 권력을 가졌다. 내각 대신은 의회에 책임진 것이 아니라 천황에 대하여 책임졌다. 대지주, 대자산 계급을 대표한 천황전제 정권은 제국주의를 적극적으로 발전시켜, 대내적으로는 탄압하고 대외적으로는 침략 팽창하였다. 일본은 침략의 예봉을 조선과 중국에 돌렸다. 일찌기 70년대 중기에 일본은 조선을 협박하여 문호를 열고 자기의 침략 세력을 침투시켰다. 1894년에는 조선을 가일층 침략하기 위하여 중-일 갑오 전쟁을 도발하였다. 조선 및 중국의 동북 지역을 쟁탈하기 위하여 일본은 1904년에 짜르 러시아와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제국주의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이전에 서방 자본주의 국가와 체결한 불평등 조약들을 점차 폐지하고 서방에 예속되는 위험에서 벗어나는 한편, 무력이 강하고 침략성이 강한 제국주의 국가로 변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내전 후 미국의 경제가 발전한 조건을 분석해 보자. 당시 미국의 두개 정당을 어떻게 보는가? 이에 대해 토론해 보자.
2. 제국주의에로 이행할 때 영국의 경제 발전은 무엇 때문에 낙후하였는가?
3. 19세기 70년대 프랑스 공화파와 왕당파의 투쟁 및 그 결과에 대하여 설명해보자.
4. 독일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한 몇 개 요소를 들어 보자. 비스마르크가 실행한 ≪비상 법령≫의 목적과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5. 레닌의 초기 혁명 활동과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창립을 간단히 설명해보자.
6. 일본 정부는 자본주의 발전을 어떻게 부추겼는가? 일본 독점 자본의 봉건적 성격과 군사적 성격을 분석해 보자.






제3절 제국주의간의 모순

세계의 재분할 투쟁과 제국주의의 2대 군사 침략 집단의 형성
경제발전과 정치 발전의 불균형은 자본주의 의 필연적 법칙이다. 제국주의에로 이행함에 따라 이런 불균형성이 심화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먼저산업 혁명을 완성한 영국은 세계 시장을 독점하였다. 1870년에 영국의 공업. 생산이 세계에서 제1위를 차지하였는데, 영국에서 생산한 석탄과 철은 프랑스, 독일, 미국 3국의 총생산량을 휠씬 능가하였다. 19세기중엽에 프랑스의 공업 생산은 영국 다음으로 세계 제2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새로 일어난 미국이 영국을 능가하였고, 독일이 프랑스를 능가한 후 이어서 영국을 능가하였다. 이런 발전의 불균형은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역량 대비를 변화시켰고, 그들간에 새로운 모순을 조성시켰으며, 몇 개 제국주의 대국들이 패권 쟁탈을 다그쳐 세계를 재분할하는 형세를 이루게 하였다.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의 주요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모두세계 패권을 쟁탈하려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설정하였다.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의 자기의 실패를 달가와하지 않고 ≪원수를 갚고≫독일에 빼앗긴 알사스와 로렌을 되찾아내려고 애쓰는 동시에 나아가서 독일의 루르 광구까지 병합하려고 시도하였다. 독일의 목표는 계속 프랑스를 약화시키고 견제함으로써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한편, 프랑스의 일부 지구, 벨기에, 북유럽, 발칸 반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 그리고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를 탈취함으로써 방대한 ≪중유럽제국≫을 건립하려는 꿈을 실현해 보려는 데 있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식민 제국인 영국은 여전히 많은 식민지를 계속 강점하고 있었다. 짜르 러시아는 그가 한번도 수정하지도 홀시하지도 않은 세계 패권을 탈취하려는 일관된 목적 아래 중국 동북 지구와 서장을 탈취하려 하였고, 또 조선을 러시아에 합병시키려 하였다. 그는 또 페르시아를 탈취하고 터어키의 보스포러스와 다다넬스 해협 지구를 점령하려하였다. 짜르 러시아는 자신을 슬라브인의 ≪해방자≫로 분장하고, 동유럽과 발칸 반도에 침략의 마수를 뻗쳤다 이와 같이 복잡하게 얽힌 투쟁 중에서 프랑스와 독일간의 모순, 발칸에 대한 쟁탈, 영국과 독일간의 경쟁, 이 세개 중심 환절이 이루어졌다.
발칸 반도는 패권 쟁탈이 가장 민감한 지구였다. 19세기 70년대에 세르비아(지금의 유고슬라비아 경내에 있었다), 루마니아(1858년 8월 7일에 유럽열강들은 빠리에서 공약을 체결하고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연합공국≫으로 할 것을 루마니아 인민들에게 강요하였다. 두 공국은 여전히 대공, 입법 기관, 정부와 무장 역량을 보류하였으므로 실제상에서 계속 나누어 다스리는 상태에 있었다. 이듬해에 두 공국의 광범한 인민들은 공약의 규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의 염원에 따라 안 쿠짜를 두 공국의 통일 지도자로 선출하였는데, 이는 근대 루마니아 국가의 기초로 되었다. 1877년 5월에 루마니아는 독립하였다. )와 불가리아(당시 불가리아는 명의 상으로 여전히 터어키에 예속되어 있었다. 1908년에 완전히 독립하였다. )가 차례로 터어키의 통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족독립 국가를 세웠다. 짜르 러시아가 그 기화를 타서 발칸에로 세력을 확장하였기에 오스트리아, 영국과 모순이 발생하였다. 발칸을 쟁탈하는 투쟁에서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지지하였다. 1879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에 대처하기 위해 동맹 조약을 맺었는데, 조약에, 체약국 가운데 한 나라가 러시아의 공격을 받을 때 다른 한 체약국은 자기의 전부의 병력으로 원조할 의무가 있으며 만약 러시아 이외의 국가의 공격을 받을 때에는 다른 한 체약국은 선의 적인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1882년에 북아프리카의 튀니지를 놓고 프랑스와 쟁탈전을 하다가 실패한 이탈리아가 독일-오스트리아 집단에 가입하였기에 ≪3국 동맹≫이 형성되었다. 3국은 이탈리아가 프랑스의 공격을 받는다면 독일, 오스트리아가 전력을 다해 이탈리아를 원조할 것이며, 독일이 프랑스의 공격을 받는다면 이탈리아가 독일을 원조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이 ≪3국 동맹≫의 핵심은 독일이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공동의 적에 대처하기 위하여 점차 접근하였다. 그리하여 1892년에 군사 협정을 체결하였다. 협정에는 일단 프랑스가 독일, 혹은 독일이 지지하는 이탈리아의 진공을 받거나, 러시아가 독일, 혹은 독일이 지지하는 오스트리아의 진공을 받는다면, 체약국이 서로전부의 병력으로 원조한다고 규정되었다.
독일은 저들이 강점한 식민지가 제일 적다고 인정하고 세계를 재분할할 것을 요구하였다. 독일은 서남 아프리카, 토고, 카메룬 등 식민지를 강점하고, 중국의 교수만을 강제적으로 조차하였다. 독일의 이와 같은 침략 팽창 활동은 노식민주의 국가인 영국에 대한 가장 큰 위협으로 되었다. 그리하여 영국, 독일간의 충돌이 날로 더 치열해지고 돌출해졌다. 영국, 독일간의 모순은 제국주의간의 주요 모순으로 되었다.
이 모순의 발전은 영국으로 하여금 자신과 프랑스, 러시아와의 이해충돌을 조화시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904년과 1907년에 영국-프랑스협상과 영국-러시아 협상이 각각 체결되었으며, 이것이 나중에 ≪3국협상≫으로 성립되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로 구성된 3국 동맹 집단이나 영국, 프랑스, 러시아로 구성된 협상국 집단이나를 막론하고 다 ≪평화를 수호한다≫는 허울을 썼지만 실제상으로는 모두 군사 침략 집단이었다.





군비 경쟁과 전쟁 위기
동맹국과 협상국 이 두 적대적인 군사 집단은 저들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하여 미친 듯이 군비를 확장하고 전쟁을 준비하면서 세계의 많은 지구들에서 긴장 상태를 조성하였다. 대전이 폭발하기 전에 양대 제국주의 군사 집단의 군비 확충 경쟁은 매우 치열하였다. 1872년부터 1912년까지의 사이에 독일의 군비는 335%늘어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비는 155% 늘어났고, 영국의 군비는 180% 늘어났고, 프랑스의 군비는 133% 늘어났고, 러시아의 군비는 214%늘어났다. 1913년에 독일은 군비 확충 방안을 채택하고 상비군을 87만 명으로 늘렸다. 프랑스도 2년 병역제를 3년 병역제로 고치고, 육군 병력수를 50% 늘렸으며, 1913년 말에 프랑스의 상비군이 80만 명에 달하였다. 더우기 야심만만한 짜르 러시아는 상비군을 230만 명으로 확충할 준비를 하였다.
해군을 확충하는 면에서의 경쟁은 더욱 치열하였다. 영국과 독일은 상대방의 해군을 제한하려고 여러 차례 담판하였다. 그러나 해군 군비는 급격히 상승하여 군함수가 부단히 늘어났으며, 쌍방의 군함 건조 계획은 끝없이 늘어났다. 1905년부터 영국, 독일은 ≪무적함≫을 건조하는 경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까지 영국은 12척을 건조하고 독일은 9척을 건조하기로 예정하였다. 1908년에 독일은 새로운 해군 법안을 채택하여 1908년부터 1911년까지 매년 ≪무적함≫ 4척을 건조하기로 규정하였다. 영국은 즉시 2 : 1의 비례를 유지하기 위하여 매년 8척을 건조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성명하였다.
1908년부터 1914년까지 국제적 위기와 국부적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유럽에서의 발칸 반도는 형세가 특히 긴장되었다. 이 반도는 이미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쟁탈의 초점으로 되었고 유럽의 화약고로 되었다. 제국주의 전쟁은 날로 치열해졌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자본주의 발전의 불균형성과 제국주의 국가간의 모순을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2. 3국 동맹, 3국 협상을 설명해 보자.







제17장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민족 - 민주주의 운동






제1절 아시아의 각성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에로 이행할 때, 아시아가 받은 식민주의의 재해는 더욱 극심하였다. 서부 아시아에서는 터어키가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침략을 당하여 반식민지로 전락되었고, 이란에서는 이란의 북부가 러시아의 세력 범위에 들어갔고, 이란의 남부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중앙 아시아와 동남 아시아에서는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제하고 버마를 병합하였으며, 프랑스가 인도지나 반도를 침점하였다. 미국과 일본도 다 식민주의 국가의 행렬에 끼어들었다. 미국은 필리핀을 침점하고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였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시아의 국가들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각국의 봉건 세력들과 결탁함으로써 각국인민들의 고난을 심화시켰고, 아시아의 경제와 건설의 발전을 방해하였다. 철도를 예로 든다면, 1900년에 전 세계 철도의 길이가 79만여 키로미터에 달하였는데 아시아의 철도의 길이는 6만 키로미터밖에 안 되었다. 제국주의 침략이 강화되어 아시아 각국의 민족 위기가 심해졌기에 19세기 말엽과 70세기 초엽에 압박받고 있던 아시아의 수억에 달하는 인민들이 각성하였으며,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새로운 기운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서 중대한 사건으로는 조선 인민의 반일 투쟁, 중국의 의화단 운동과 신해 혁명, 1905년~1908년의 인도 민족 해방 운동, 이란, 터어키의 자산 계급 혁명이었다. 그리하여 아시아는 자산 계급민족 민주주의 혁명 시기, 다시 말하면 아시아의 각성 시기에 들어섰다.





조선 인민의 반일 투쟁
19세기 후반기에 조선은 여전히 이씨 왕조의 봉건 통치하에 있었다. 서방 침략자들은 조선의 문호를 돌파하려고 애를 썼다, 60년대와 70년대에 미국 침략자들은 해적의 방식으로 몇 차례 조선에 침입하였다가 빈번이 조선 인민에게 쫓겨났다. 1916년에 금방 자본주의 길에 오른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을 협박하여 강화도에서 조약을 체결하고, 강제로 통상 항구를 개방하게 하였고, 일본 사람이 거기에서 상공업을 경영할 수 있게 하였으며, 또 강제로 일본이 영사관을 세우고 영사재판권을 가지는 것을 인정하게 하였다. 그 뒤를 이어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도 조선을 강박하여 유사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렇게 조선의 문호가 열리자 외국의 공업품, 특히 일본의 공업품이 대량으로 밀려들었다. 일본은 또 조선에서 쌀, 콩과 원료를 약탈해 갔다. 제국주의와 본국 봉건 통치자들의 이중적 압박․착취 하에서 조선의 농민, 수공업자들은 파산되어 생활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1893년에 조선에 큰 흉년이 들었다. 그렇지만 농산물은 여전히 대량으로 약탈당하여 외국으로 수출되었다. 이것은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을 격화시켰다. 1894년에 조선 남부의 전라도 고부 일대에서 전봉준이 영도한 농민 봉기가 폭발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 역사에서의 유명한 갑오 농민 전쟁(1894년이 음력으로 갑오년이었으므로 갑오 농민 전쟁이라 한다)이다.
1894년 1월에 전봉준을 수반으로 한 몇천 명의 농민들이 고부에서 창고를 헤치고 식량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무기 창고의 무기를 빼앗아 가지고 대규모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전봉준은 ≪왜놈(일본 침략자를 가리킴)을 몰아내자≫ ≪양반을 없애 치우자≫는 반제․반봉건 정신을 체현한 구호를 제기하였다. 광범한 농민들이 열렬히 호응하였기에 봉기의 규모가 끊임없이 확대되었다. 봉기군은 초기의 몇 차례 전투에서 승전하자 승리의 기세로 서울을 향해 진군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에서 광범한 군중들의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 봉기한강대한 농민군들의 진격 앞에서 당황 망조난 조선 통치자들은 중국 청정부에 구원을 청하였다. 6월에 청 정부에서 파견한 군대가 조선에 상륙하였다. 침략을 확대할 시기를 노리고 있던 일본도 즉시 출병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정변을 일으켜 친일 매국 정부를 조직하였다. 청 정부의 세력을 조선에서 밀어내기 위하여 일본은 갑오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의 침략 세력이 조선을 통제하게 되었다. 1895년 3월에 전봉준이 희생되고 기세 드높던 농민 봉기는 일본 침략군과 조선 반동 군대에 의해 탄압 당하였다.
갑오 농민 전쟁 후 일본 제국주의 는 조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1905년에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의 지지까지 받아가면서 조선을 저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1910년에 일본은 조선의 매국 역적 이완용과 결탁하여 조선 정부를 핍박하여 ≪일-한 합병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을 정식으로 병합하였다.
일본이 조선을 점차 병합하는 과정에서 분노한 조선 인민들은 기운차게 일어나서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광범히 벌였다. 1907년에 일본이 조선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광범한 애국적 장병들은 이 결정을 거부하고 용감히 앞장서 반항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을 휩쓴 의병운동이 재빨리 형성되었다. 광범한 인민 대중들은 앞을 다투어 의병에 가입하였다. 각각의 의병 부대는 약 100~500명으로 조직되었다. 그들은 유격전을 벌여 이르는 곳마다에서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고 일본군의 전신 설비를 파괴하였으며, 소부대의 일본 주둔군을 소멸하구 매국 역적을 징벌하였다. 1908년에 조선의 240여 개 군들에서는 거의 다 의병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의병들은 감쪽같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적을 타격하였다. 조선 동북부의 함경도에서 사냥꾼 홍범도와 차도선이 영도한 유격대는 그 용감성으로 하여 이름을 떨쳤다. 일본 당국의 줄인 통계 수자에만 의하더라도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일본 침략군과 싸운 의병은 도합 14만 300여 명이었고 싸운 회수는 2900여 차례에 달하였다. 의병운동은 일본 침략자에 반항한 조선 인민의 대중적 무장 투쟁으로서 조선민족 해방 투쟁사에 빛나는 한 페이치를 남겨놓았다.





인도 민족 운동의 앙양(1905~1908년)
영국은 1857년~1859년의 인도민족 봉기를 탄압한 후 ≪인도의 자원을 개발≫한다는 미명하에 더욱 노골적으로 인도를 약탈하였다. 영국 자본은 인도의 은행, 해상 운송, 철도 교통을 조종하였고, 인도의 지방 무역의 대부분을 통제하였다. 영국 식민주의 자들은 인도의 매판 자본가를 통하여 목화, 황마 등의 원료를 사들인 동시에 인도 인민이야 죽건 살건 아랑곳하지 알고 인도로부터 많은 식량을 가져갔다. 19세기 후반기에 인도에는 24차례의 기근이 들었는데, 대체적인 짐작에 의 하더라도 굶어죽은 사람이 2850만 명에 달하였다.
1851년에 인도인이 투자하여 세운 첫 방적 공장이 봄베이에 섰다. 19세기 말, 인도에는 도합 193개소의 방적 공장이 있었는데, 고용 노동자가 16만 명 이상이었다. 민족 공업의 발전으로 하여 인도에서 민족 자산계급이 탄생하였다. 이 계급은 경제를 발전시키는 면에서 영국과 이해충돌이 있었지만, 또 일정한 정도로 영 제국주의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양면성을 결정하였다.
1885년 12월에 인도 자산 계급과 지주의 이익을 대표한 정당인 인도 국민대회당이 봄베이에서 성립되었다. 대표들 중의 절반은 자산 계급지식인들이었고, 절반은 지주, 상인, 고리대금업자들이었다. 대회 의장은 강화 가운데서, ≪영국은 인도의 행복을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국은 다 영국에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하였다. 국민대회당은 영국의 식민주의 통치에 대해 공손한 태도를 취하였다. 상당히 오랜 한 시기 동안에 국민대회당은 그저 영국의 식민주의 통치 체계 안에 인도의 몇 명의 대표를 받아들일 것만 요구하고 영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영국은 세계 공업에서의 저들의 독점 지위가 상실되자 인도에 대한약탈과 통제를 강화하였다. 1899년에 극단적인 제국주의 분자 키존이 인도 총독으로 취임되었다. 그는 인도를 영제국주의의 기초로 간주하고, ≪인도가 없이는 대영 제국도 있을 수 없다≫고 떠벌였다. 그의 고압 정책하에서 1905년에 인도 인민들은 새로운 반영 운동을 일으켰다.
전국에서 시윈 행진과 파업, 철시를 기세 드높이 단행하여 영국의 상품을 배격하였다. 인도 노동자들은 영국을 반대하는 집회와 시위 행진 가운데서 여러 차례 경찰들과 충돌하면서 날카롭게 맞서 싸웠다. 어떤 주의 농민들은 가렴 잡세의 납부를 거부하였는데, 일부 지방에서는 그것이 봉기로 발전하였다. 국민대회당은 처음에 영국의 상품을 배격하는 운동만을 지지하다가 민족 운동이 부단히 앙양되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1906년에 ≪자치≫ 등을 주장하였다. 국민대회당의 좌익, 즉 틸라크를 대표로 한 급진파는 투쟁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영국 식민주의 당국은 인도의 민족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틸라크를 체포하였다. 1908년 7월에 봄베이 노동자 10여만 명이 정치적 총파업을 단행하고 틸라크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파업 노동자들은 군경들과 무장 충돌을 일으켜 2주일간 계속 싸웠다. 이 총파업은 1905년~1908년 인도 인민 반영 투쟁에서 최고조를 이루었다. 이것은 인도 무산 계급이 이미 성장되어 정치 무대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 투쟁은 실패하였지만 그 영향력은 아주 심대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아시아의 각성, 조선 갑오 농민 전쟁, 의병, 운동을 설명해 보자.
2. 인도 국민 대회당은 창립된 초기에 영국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였고 무엇을 요구하였으며, 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제2절 아프리카 인민의 반제 투쟁

제국주의에 의한 아프리카의 분할
유럽 식민주의 자들이 침입하기 전에 인류 문명의 가장 오랜 발원지의 하나인 아프리카에서 여러 민족인민들은 자기 역사 발전의 연속성을 보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7, 18세기까지만 하여도 아프리카에는 여전히 북아프리카의 이집트, 튀니지, 알제리(당시 이집트, 튀니지, 알제리가 명의 상에서는 터어키 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실제상에서는 독립하였었다.), 모로코, 동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 등 많은 독립 국가들이 있었다.
새 항로가 개척되고 유럽 식민주의 자들이 침입함에 따라 아프리카는 큰 재난을 받았다. 유럽 식민주의 자들은 아프리카로부터 흑인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았다. 그리하여 300년간에 아프리카에서는 약 1억 이상의 인구가 상실되었다. 그러나 식민주의 자들은 오랫 동안 아프리카 연해지대의 일부 거점을 점령하고 있었을 뿐, 아프리카의 내지까지는 아직 들어가지 못하였다. 18세기 말엽에 영국인들이 니제르 강 유역을 탐험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유럽의 모험가들이 아프리카 내지를 탐험하는 열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4대 강-북아프리카의 나일 강, 서아프리카의 니제르 강, 중앙아프리카의 콩고 강, 남아프리카의 잠제지강의 발원지를 탐색하고 몇 개 큰 호수를 발견하였다. 이러한 탐험은 유럽 식민주의 국가들이 아프리카를 가일층 침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에서 알제리를 적극 침략하였고, 또 수에즈 운하를 개척하는 기회를 빌어 이집트를 침략하려고 시도하였다.
기회를 노리던 영국도 침략 세력을 이집트에 뻗쳤다. 19세기 말엽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이행하고 있을 때 유럽 식민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를 미친 듯이 분할하였다. 1876년 이전에 그들은 아프리카 토지 면적의 10분의 1을 침점하였고, 19세기의 마지막 25년간에는 전 아프리카를 거의 다 침점하였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를 침점하는 과정에서 서로 결탁도 하고 투쟁도 하였다. 쟁탈한 결과 영국은 이집트, 수단, 나이지리아 및 중남아프리카의 많은 국가와 지역들을 침점하였는데, 그 면적이 도합 880여만 평방키로미터였고 인구가 4000~5000만이었다. 프랑스는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기네, 말리, 마다가스카르(지금의 마다가스카르 민주 공화국)를 포괄한 광대한 지구를 침점하였는데, 그 면적이 1,090여만 평방키로미터였고 인구가 약 3000만이었다. 벨기에는 자이레를 침점하였는데, 그 면적이 230여만 평방키로미터였고 인구가 1,500여만 명이었다. 독일은 탄자니카(지금 탄자니하의 대륙 부분)와 서남 아프리카(지금의 나미비아)등지를 침점하였는데, 그 면적이 250여만 평방키로미터였고 인구가 1,000만이었다. 포르투갈은 모잠비크를 침점하였는데, 그 면적이 208만 평방키로미터였고 인구가 500만이었다. 이탈리아는 리베리아 등지를 침점하였는데, 그 면적이 225만 평방키로미터였고 인구가 100만이었다. 에스파리아도 서아프리카, 북아프리카에서 일부 지구들을 침점하였다. 19세 기말에 아프리카는 이렇게 거의 다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혹은 ≪보호국≫으로 전락되었다.





이집트와 수단에서의 항영 투쟁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를 침략하고 예속시키는 과정에서 아프리카 인민들의 용감한 반항을 끊임없이 받았다. 북아프리카의 알제리가 1830년부터 프랑스의 침범을 받기 시작하였다. 독립을 가장 진귀하게 여기는 알제리 인민들은 격분하여 여기 저기에서 프랑스의 침략에 반항하여 연속 봉기하였다. 때문에 전후 75년간을 거쳐서야 비로소 프랑스 침략군은 사하라 지구를 종국적으로 침탈하였으며 알제리를 몽땅 저들의 식민지로 전락시킬 수 있었다. 19세기 말엽에 제국주의 는 아프리카를 미친 듯이 분할하였다. 아프리카 각국과 각 지구의 인민들은 제국주의 침략자와의 싸움에서 모두 빛나는 투쟁사를 써놓았다. 영국 침략자와 싸운 이집트와 수단의 항쟁, 이탈리아침략자와 싸운 이디오피아 항쟁의 빛나는 승리는 가장 두드러진다. 아프리카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이집트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교통 중추이다. 수십 년간 영국과 프랑스는 이 전략적 요지를 끊임없이 쟁탈하였다. 19세기 중엽에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이집트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였다. 영국은 이집트에서 철도를 부설하고 전신 사업을 경영하는 특권을 장악하였다. 1859년에 프랑스는 이집트 통치자로부터 수에즈 운하를 팔 권리를 얻었다. l859년~1869년에 프랑스 식민 회사는 투자하고 이집트 인력을 이용하여 흥해와 지중해 사이의 수에즈 지협에 수에즈운하를 팠다. 운하를 파는 기간에 이집트 근로 인민들은 쨍쨍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굶주리면서 죽은 사람이 12만 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운하 양안의 모래와 자갈들에는 어디에나 다 이집트 부역민들의 백골이 섞여 있었다. 1869년에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 수에즈 운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교통을 소통시켰고, 유럽과 아시아간의 항해 노정을 단축시켰다. 운하가 개통된 후 영국은 백방으로 운하를 통제하려 하였다. 1875년에 영국은 이집트 정부가 재정 곤란에 빠진 시기를 타서 교묘한 수단으로 운하 회사의 44%의 주식을 구매하였다 이로부터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통제하고 이집트를 군사적으로 점령할 길을 닦아놓았다. 이리하여 80년대 초에 영국은 프랑스를 배제하고 단독적으로 이집트를 통제하게 되었다.
영국, 프랑스 제국주의 가 이집트를 반식민지로 전락시키는 과정에서 이집트 인민들은 ≪이집트는 이집트인의 이집트이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민족 독립을 수호할 것을 요구하였다. 1882년 7월에 영국 군함이 돌연히 이집트의 알이스칸다리아항에 함포 사격을 하고 군대를 이 항구에 상륙시켰다. 이집트 군민들은 농민 출신의 청년 군관 아 아라비의 영도 아래 영용히 항전하여 우선 알이스칸다리아항을 사수하였고 잇달아 또 카이로를 영용히 보위하였다. 하지만 관료 지주 집단의 동요, 배반으로 말미암아 기세 드높이 일어나던 이번 항영 전쟁은 실패하였다. 영국은 이집트에 침입한 후 침략의 예봉을 수단에 돌렸다 이집트남쪽에 위치하여 있는 수단은 아프리카에서 면적이 제일 큰 국가이다. 침략 세력을 아프리카의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관통시키기 위하여 일찌기 19세기 60년대부터 영국은 수단에 침투하여 현지의 봉건 세력과 결탁해 가지고 수단 인민들을 경제적으로 가혹하게 착취하고 정치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조건하에서 1881년에 수단에서 마흐디 반영 대봉기가 기세 드높이 일어났다. 이 봉기의 지도자 모하메드 하메트는 빈궁한 조선 노동자 가정 출신이었다. 그는 장기간 선교의 방식으로 선전하면서 부자, 아쿤(아쿤이란 이슬람교에서 교회 의식을 주관하고 경전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관리와 외국 침략자의 탐욕, 횡포를 질책하였다. 그는 구세주-마흐디에 관한 이슬람교의 전설을 이용하여 외국 침략자들을 몰아낼 것을 호소하였다.
식민주의 재해를 몹시 받은 수단 인민들은 떨쳐 일어나 봉기 대오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1881년부터1884년 초 겨울까지 영국 침략군을 여러 차례 소멸하였다. 1884년 10월 하순에 마흐디가 통솔한 봉기 대군은 수단의 서울 카르툼에 박두하였다. 카르툼을 가까스로 지키던 영국 식민주의 두목이며 일찌기 중국의 청정부를 도와 태평천국 혁명을 탄압한 살인 백정인 고든은 간담이 서늘하여 ≪이젠 끝장이로구나!≫하고 비명을 질렀다. 1885년 1월에 봉기 대군은 카르툼을 함락하였다. 고든은 응당 받아야 할 징벌을 받아 맞아죽었다. 그해 9월에 봉기 대군은 수단의 전국을 해방하였다. 그리하여 수단은 독립 국가의 웅위로운 자태로 나일강의 상류에 의연히 일어섰다. 실패를 달가와하지 않는 영제국주의는 그후 또 많은 침략군을 출동시켰다. 그리하여 1899년에 수단은 재차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전후 하여 근 20년 동안 지속된 이번 수단 인민의 대규모적인 반제 투쟁은 아프리카인민들의 반제 투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이탈리아의 침략에 반항하여 싸운 이디오피아 인민들의 위대한 승리
아프리카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홍해에 인접해 있는 이디오피아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봉건 국가였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후 흥해 연안 지구의 경제적, 전략적 의의가 날로 더 중요해졌다. 그리하여 그곳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쟁탈 목표로 되었다.
그때 이디오피아에서 귀족들이 봉건 할거를 실시하였기에 전국이 분열상태에 처하였고 빈궁한 농민들은 가혹한 봉건적 착취와 정치적 압박을 받았다. 19세기 80년대에 이탈리아는 애써 이디오피아를 침략하였다. 외적의 침략은 이디오피아의 민족적 의식을 점차 환기시켰다. 식민주의 자들의 침략을 물리치고 국가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디오피아 인민들은 내부 분쟁을 정지하고 봉건적 할거 상태를 종말지을 것을 요구하였다. 국왕 모니리크는 이 요구에 의하여 각지 봉건 영주들의 분열 활동을 평정하고 할거 상태를 종말지었으며 통일된 국가를 세웠다.
1890년에 이탈리아는 처음에 이디오피아와 체결한 조약을 뜯어고치고 이디오피아를 저들의 ≪보호≫국으로 선포하였다. 이에 몹시 분노한 이디오피아 인민들은 이탈리아의 기만 행위를 반대하였다. 그후 이탈리아는 공공연히 출병하여 이디오피아에 침입하였다. 이디오피아 인민들은 용감하게 일어나서 이탈리아의 침략을 물리치고 나라를 보위하였다. 그들은 용감히 참군하고 돈과 식량을 내어 적을 물리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국왕 모니리크는 여러 계층의 인민들을 단결시켜 11만 대군을 편셩하였다. 이디오피아 군대는 이탈리아의 침략군을 몇 차례 좌절시켰고, 1896년 3월에는 아두와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달성하였다. 이탈리아 침략군 1만 7, 000명 가운데서 1만 1,000명이 살상당하고 4, 000명이 포로가 되어 침략군은 거의 전부 섬멸되었다. 몇 달 후 전쟁에서 패배한 이탈리아는 할 수 없이 강화 조약에 조인하고 이디오피아의 독립을 무조건 승인하였으며, 침점한 이디오피아의 영토를 포기하고 이디오피아에 1,000만 리라(약 200만 달러)를 배상하였다.
이탈리아의 침략을 물리치는 전쟁에서 얻은 이디오피아의 빛나는 이 승리는 이디오피아의 독립을 보위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아프리카 인민들의 투지를 키웠다.






제3절 라틴아메리카 인민의 반제 ․ 반봉건 투쟁

독립 혁명 후의 라틴아메리카
18세기 말엽~19세기 초엽의 독립 혁명을 거쳐 라틴아메리카에는 일련의 독립 국가(1844년에 산또 도밍고 섬의 동부에 도미니카 공화국이 건립되었다. 차례로 1902년과 1903년에 쿠바와 파나마 공화국이 건립되었다.)들이 탄생되었다.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의 식민주의 쇠사슬은 분쇄되었지만 봉건 세력의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식민주의 가 통치하던 시기에 라틴아메리카의 대량의 토지는 한줌도 못 되는 대지주들에게 장악되어 대토지 사유제가 형성되었다. 독립 혁명 후 절대다수의 대지주들은 대량의 사유지를 원래의 그대로 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국가의 정권을 통제하였기에 그들의 사유지가 도리어 더 확대되었다. 예를 들면 아르헨티나의 독재자는 특히 인디안인의 토지를 아낌없이 대지주들에게 주었고, 19세기의 마지막 20년간에는 또 l억 5000만 에이커도 더 되는 사유지를 소유하였다. 대토지 사유제는 라틴아메리카각국에 해를 주는 병독성 종양마냥 근로 인민들에 대한 착취를 가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의 발전도 저해하였다. 라틴 아메리카 각국이 독립한 후 영국, 미국 등 식민주의 세력이 뒤를 따라왔다. 영국의 자본은 더욱더 라틴아메리카에 투입되었다. 19세기 후반기에 영국 자본은 라틴아메리카에 대량으로 투입되어 철도를 부설하고, 항구를 신설하고, 기선 항로를 개척하고, 토지를 사들이고, 당지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광산을 개발하는 등등에 쓰였다.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들의 경제는 거의 영국 자본의 부속물로 되었다. 1896년에 아르헨티나의 한 간행물에는 ≪오늘 우리의 국가는 이미 영국의 부속국으로 되었다≫고 씌여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야에 이르러 영국의 독점자본은 라틴아메리카에서 118개 선의 철도, 45개의 항구 용역 회사, 112개의 공용 사업 회사, 25개의 초석 회사, 23개의 석유 회사를 갖고 있은 동시에 전화, 전력과 수력 등 사업을 거의 다 통제하였다. 영국을 제외하고 미국도 성장하면서 점차 라틴아메리카 각국 인민들의 주요한 적으로 되었다. 19세기에 미국은 각종 구실을 만들어 가지고 여러 차례 무장 역량을 파견하여 라틴아메리카 일부 국가들의 내정을 간섭하고 그들의 주권을 침범하였다. 쿠바 인민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이미 여러 해 동안 투쟁하여 왔다. 1898년 쿠바 인민들이 에스파니아 식민주의자들을 최후로 전승하고 곧 독립을 쟁취하게 될 그때 미국은 쿠바 혁명의 동정자로 분장하고 나서 쿠바 ≪해방≫의 깃발을 들고 미국은 에스파니아 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에스파니아로부터 푸에르토리코를 빼앗고, 아시아에서 필리핀을 빼앗았으며, 또 사실상 쿠바를 저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미국은 자본을 대량으로 라틴아메리카에 투입시켜 현지의 인민들을 예속하고 착취하였다. 이것이 바로 ≪몽둥이≫와 ≪달러≫를 병용한 제국주의 정책이었다.
국내 봉건 세력의 저해 그리고 영국, 미국 및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나라의 경제적 또는 군사적 침략으로 하여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발전은 늦었고, 또 그 발전이 일면적이고 기형적이었다. 예를 들면 농공업방면에서 제국주의 의 수요를 위한 소수의 농작물, 야금 원료의 생산과 가공 공업이 발전하였을 뿐 진정한 중공업이라곤 없었다. 따라서 발전하였다는 그런 농공업마저 흔히 제국주의의 영향, 통제와 조종을 받았다. 때문에 반제 반봉건적 투쟁은 여전히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의 앞에 놓인 명백한 임무였다.





멕시코 자산 계급 혁명(1910년~1917년)
라틴아메리카의 각국 인민들은 반제 ․반봉건의 임무를 지니고 자산 계급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해야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끊임없이 봉기를 일으켰고 불요 불굴의 투쟁을 진행하여 왔다. 그 가운데서 국부적 승리를 달성한 투쟁으로는 1910년~1917년 멕시코 혁명이다.
독립한 후의 멕시코는 장기간 혼란에 빠져 정치가 동란 상태에 처해있었다. 독립 혁명에서 이룩한 승리의 과실은 완전히 대지주들에게 절취당하였고, 천주교회와 보수 세력이 아주 큰 권력을 갖고 있었으며, 반동정객 집단이 권세를 쟁탈하였다. 19세기 40년대에 영국 자본가들은 멕시코의 은광업과 부분적 방직업 심지어는 세관까지 통제하였으며, 미국은 침략전쟁을 발동하여 멕시코의 수중으로부터 200여만 평방키로미터의 토지를 빼앗아냈다. 60년대에 프랑스는 공공연히 출병하여 멕시코의 내정을 간섭하였으며, 한때 저들의 괴뢰를 멕시코의 통치자로 올려놓았다. 1876년부터 1911년까지 반동적인 독재자 디아스가 멕시코를 30여 년간(1동안 1880년~1884년에 프랑스의 한 괴뢰가 대통령으로 있었을 뿐이었다) 통치하였다.
디아스의 반동 정권은 봉건 지주, 천주교회와 국내의 각종 반동 세력의 이익을 대표하였으며, 또 제국주의에 달라붙어 고스란히 순종하였다. 그는 통치하는 기간에 자기를 옹호하는 한줌도 못 되는 자들에게 1억 3500만 에이커의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멕시코에는 외국의 자본, 특히는 미국 자본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미국 강철 회사≫, ≪스탠다드 석유회사≫는 멕시코에서 광산의 4분의 1과 유전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였다.
미국 기업들은 많은 사탕수수, 커피, 목화, 고무 등 농장을 갖고 있었고, 큰 목장도 갖고 있었다. 멕시코의 각 주들에는 모두 미국 자본가들의 많은 토지가 있었다. 디아스는 대지주, 천주교회와 외국 자본가들에 대해서는 더없이 통이 크고 공손하였지만 인민들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압박, 착취 및 탄압의 정책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반대하다가 살해되고 감옥에서 시달림을 당하다가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멕시코 인민들 가운데서는 혁명정신이 보편적으로 고양되고 있었다. 1910년에 농민, 노동자, 도시 소자산 계급, 민족 자산 계급, 심지어 부분적 군대들까지도 차례로 일어나 혁명에 뛰어들었다. 장기간 압박, 착취를 혹독하게 받아온 농민들의 투쟁은 특히 치열하였다. 그들의 대열 가운데서 걸출한 두 영웅 인물, 즉 멕시코 남부의 에미레노 사바타와 북부의 프란시스꼬 빌라가 나타났다. 그들이 영도한 농민 대오는 이르는 곳마다에서 대지주의 농장을 짓부시고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혁명은 급속히 발전하였다. 혁명적 무장 대오는 서울 멕시코시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1911년 5월에 디아스의 반동 독재 통치가 전복되었다. 그러나 국내의 반동파들은 미제국주의의 지지에 의거하여 1913년에 정변을 일으켜 반혁명 정권을 세웠다. 1914년엔 미제국주의는 또 멕시코에 출병하여 반혁명 정권을 지지하였다. 멕시코 인민들은 전국 각지에서 반혁명 정권과 미제국주의의 간섭을 반대하는 투쟁의 불길을 올렸다. 나이 젊은 멕시코 노동 계급은 계급적 역량으로 되어 ≪홍색 대대≫를 건립해 가지고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투쟁에 참가하였다. 노동자, 농민을 주체로 한 무장력은 1914년 8월에 재차 반혁명 정권을 전복한 동시에 미제국주의의 간섭을 좌절시켰다.
1916년 12월에 멕시코에서는 헌법제정회의를 소집하였으며, 1917년에 와서 최종적으로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헌법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국가는 모든 토지, 하천과 광물 자원의 소유자로서 사유 재산을 몰수하거나 제한할 권한을 가지며, 외국 독점 조직이 차지한 토지, 광산과 유전을 회수할 권한을 가진다. 교회는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하며, 경영 또는 저당잡지도 못한다. 국가는 적당한 방법을 취하여 대규모적인 토지 사유를 폐지하고 소토지   소유제를 발전시킨다. 헌법에는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파업을 단행하고 8시간 노동제를 실행할 것 등등과 같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전문적인 조항도 있었다. 노동자, 농민을 위하여 일정한 민주주의적 권리를 규정한 이 헌법은 자산 계급 민주주의 헌법이었다. 통치 계급이 이 헌법을 참되게 집행하지 않았고 심지어 집행하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멕시코 인민들은 이 헌법의 실현을 위하여 계속 투쟁해야 했다.
1910년~1917년 멕시코 자산 계급 혁명은 국내 봉건 세력과 제국주의의 주구를 타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제국주의의 침략 기도도 꺾어 놓았다. 멕시코 자산 계급 혁명은 같은 시기에 라틴아메리카의 기타 나라들에서 일어난 혁명보다 그 성과가 현저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19세기 초기 라틴아메리카 각국이 독립한 이후의 정치, 경제 정황은 어떠하였는가?
2. 1910년~1917년 멕시코 자산 계급 혁명의 경과와 결과에 대하여 토론해보자.








제18장 제2인터내셔날






제2인터내셔날의 창립
빠리 꼼뮨 이후의 30여년 간에 자본주의는 보다 ≪평화≫적인 조건에서 발전하였고 자본주의 경제는 가일층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때 각국의 노동 대오는 숫적으로 크게 늘어났다.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노작들을 번역 출판하였고, ≪공산당선언≫은 각종 문자로 번역되어 여러 나라들에서 널리 발행되었다. 그들은 또 여러 가지 신문 잡지를 만들어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와 노동 운동이 가일층 결합되게 하였다. 유럽과 아메리카 많은 나라들의 무산 계급 선진 분자들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교시를 좇아 적극적으로 당 창건 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70년대와 80년대에 사회주의 정당과 단체들이 많은 나라들에서 창건되기 시작하였다. 국제노동 운동은 역량을 모으고 혁명을 준비하는 시기에 들어섰다. 많은 국가들에서 기세 드높은 파업 운동이 일어났다. 1885년 5월 1일에 미국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열기를 일으켰다. 미국정부에서는 미친 듯이 노동자들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한 노동자가 분노하여 법관을 질책하면서 ≪이것은 지층으로부터 일어난 큰 불길로서 당신들은 그 불길을 끌 수 없다≫고 한 바와 같이 투쟁의 불길을 막을 수 없었다. 1889년에 영국 가스 공장 노동자 연합회에서 파업을 단행하여 끝내 가스 공장에서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는 승리를 달성하였다. 투쟁의 발전은 각국 노동 정당과 노동 조합 조직들에 보조를 일치하게 하고 무산 계급의 국제적 단결을 강화하며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할 것을 요구하였다.
제1인터내셔날이 해산된 후 마르크스, 엥겔스는 즉시 새로운 인터내셔날 창건 준비 사업을 시작한 동시에 제1인터내셔날보다 더욱 높은 요구와 더욱 간절한 희망을 제기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때에 너무 일찌기 새로운 인터내셔날을 조직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따라서 극히 큰 정력으로 견고하고 세밀한 준비 사업을 착실하게 하였다.
1883년 3월 14일에 위대한 과학적 공산주의의 창시자이며 세계 무산계급 혁명의 스승인 마르크스가 세상을 떴다. 마르크스는 필생의 정력을 무산 계급의 해방 사업에 바쳤다.
그의 서거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의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이었다.
3월 17일 런던 시외의 하이게이트 공동 묘지에서 마르크스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전 세계의 무산 계급은 다 마르크스의 서거로 인해 몹시 비통해 하였고 맡은 나라의 혁명자들이 분분히 전보를 쳐 애도의 뜻을 표시하였다. 바로 엥겔스가 말한 바와같이 마르크스는 비록 서거하였지만 시베리아 광산으로부터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과 아메리카의 천백만 혁명 지사들의 존경과 애도와 추모 속에서 그의 사업은 그의 이름과 함께 영생 불멸할 것이다.
마르크스가 서거한 후 엥겔스가 국제 노동 운동을 영도하는 중책을 맡았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2권, 제3권을 정리하여 출판하였다. 그는 제때에 그리고 세심하게 각국의 노동당을 도와 사업을 전개하였다 새로운 무산 계급 국제 조직을 건립하기 위한 조건이 날로 성숙되어 가고 있을 때 엥겔스의 지도와 배려로 프랑스 노동당이 빠리에서 국제 사회주의자 대표 대회를 열 것을 건의하였다. 대회의 성공을 위하여 68세의 고령인 엥겔스는 마치 청년과도 같이 전투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889년 7월 14일, 즉 프랑스 인민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 100주년 기념일에 빠리에서 국제 사회주의자 대표 대회가 열렸다. 회장에는 마르크스의 초상화가 걸리었고 ≪전 세계 무산자여, 연합하라 !≫고 쓴 거폭의 표어가 걸려 있었다. 대회에는 22개 나라들에서 온 393명의 대표가 참가하였다. 엥겔스는 ≪자본론≫ 제3권 정리에 바빠 대회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대회는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도자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베벨과 프랑스 노동 운동의 지도자 라파르그, 바이양 등이 주관하였다. 대회는 프랑스 대표단의 제의에 근거하여 ≪5․1≫절에 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결의에는 해마다 5월 1일, 즉 미국 시카고 노동자들이 1886년에 8시간노동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파업한 날에 국제적인 대규모의 시위 행진을 조직하는 동시에 이날을 ≪국제 시위 행진의 날≫로 정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로부터 5월 1일은 전 세계 근로 인민들의 단결, 전투의 명절로 되었다. 대회는 또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여 노동 계급이 경제 투쟁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므로 반드시 정치 투쟁에 참가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빠리 대표 대회는 제2인터내셔날의 창건을 정식으로 결의하지 않았고, 강령과 규약도 재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제1인터내셔날 총위원회와 같은 중앙 집행 기구도 선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회는 대표 대회를 정기적으로 소집하는 제도를 규정하였기에 제2인터내셔날의 성립 대회로 공인받게 되었다.
제2인터셔날의 성립은 국제 노동 운동의 앙양을 촉진시켰다. 1890년의 ≪5․1≫절은 이제까지 정치 투쟁에 참가해 보지 못했던 천백만 노동자들을 처음으로 일어서게 하였다. 그리하여 유럽의 대다수 국가들과 미국의 많은 도시들에서 강대한 시위 행진이 진행되었다. 이 해에 영국 노동자들의 시위 행진은 5월 4일까지 지속되었는데, 런던에서만 하여도 20만 명이 참가하였다. 엥겔스도 친히 대중들의 이 모임에 참가하였다. 그는 혁명적 격정을 드높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무산 계급은 처음으로 하나의 군대로, 하나의 기치아래 동원된 자체의 전투적 역량을 검열하고 있습니다.≫ ≪만일 마르크스가 지금 나와 나란히 서서 이 광경을 직접 보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기회주의를 반대하여 싸운 엥겔스의 투쟁
1890년에 독일당내의 소자산 계급 집단인 ≪청년파≫가 출현하였는데, 그 핵심은 이론가로 자처하는 대학생과 청년 문학가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합법적 투쟁을 반대하였고 ≪좌≫적 어구의 엄폐하에서 현실을 이탈하고 대중을 이탈한 모험적인 활동을 하라고 일부 사람들을 선동하는 동시에 엥겔스의 관점과 저들의 관점이 일치한다고 역설하였단 엥겔스는 마르크스주의를 함부로 왜곡하는 그들의 파렴치한 행위에 대해 몹시 분노하였으며, 혁명이라는 면사포로 엄폐한 그들의 기회주의 면모를 무자비하게 폭로하였다. 엥겔스의 엄숙한 비판과 도움을 얻어 ≪청년파≫들은 분화되었다. 그리하여 그 일부분은 오류를 시정하였고, 일부분은 완전히 무정부주의의 진흙 구덩이에 굴러떨어져 끝내 1891년에 당내에서 숙청당하였다.
엥겔스의 배려와 지도하에서 제2인터내셔날의 지도자들은 제2인터내셔날 초기에 무정부주의 를 반대하는 투쟁 가운데서 정확한 기본 입장을 취하여 빛나는 승리를 달성하였다. l896년 런던 대표 대회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을 제2인터내셔날으로부터 몰아내기로 결의함으로써 이 투쟁의 한 단락을 종말지었다.
90년대 초기에 계급 조화를 진행하고 의회의 길로 나아가려는 사상이 제2인터내셔날 일부 지도자들 가운데 만연해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본주의 국가 제도하에 무산 계급이 자기의 선거권을 이용하여 정권을 탈취할 수 있다고 맹신하였다 그리하여 우경 기회주의는 제2인터내셔날의 주요한 위험으로 되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엥겔스는 사람을 놀라게하는 의지력으로 제2인터내셔날 지도자들의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경 기회주의를 힘차게 공격하였다. 이를테면 엥겔스는 l891년에 마르크스의 ≪고타 강령 비판≫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였다. 이 빛나는 문헌은 마르크스가 생전에 라살 기회주의를 비판하기 위하여 1875년에 쓴 것이다. ≪고타 강령 비판≫은, 무산 계급은 자산 계급 국가에 대해 어떠한 환상도 가지지 말고 혁명 투쟁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였으며, 무산 계급 독재는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의 국가 형태이며, 이 시기에 무산 계급독재를 견지해야 할 뿐 다른 길로 나아가서는 절대 안 된다고 명확히 지적하였다. 마르크스의 이 빛나는 노작은 기회주의를 반대하는 예리한 무기이다. 엥겔스의 원칙적 입장으로하여 제2인터내셔날 초기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정확한 궤도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189년 8월 5일 밤에 엥겔스는 런던에서 세상을 떴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시체를 화장하고 뼈가루를 바다에 뿌렸다. 레닌은 시인 네크라쏘프의 시구를 인용하여 ≪그 얼마나 밝은 이성의 등불이 꺼졌으며, 그 얼마나 위대한 심장이 고동을 멈추었는가!≫라고 샜다. 마르크스가 서거한 후 엥겔스는 전반 문명 세계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학자였으며 현대 무산계급의 스승이었다. 엥겔스의 서거는 국제 노동 운동의 또 하나의 비할바 없는 손실이었다. 기회주의를 반대하는 전선은 이 때문에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수정주의의 범람
엥겔스가 서거한 후 국제 형세에는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서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이런 결정적인 시각에 국제 공산주의 운동 내부에 수정주의 역류가 나타나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칙을 부정하고 마르크스주의 의 보편적 진리를 부정하였다. 수정주의 의 출현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의 정치, 경제발전과 밀접한 연계를 갖고 있었다. 수정주의는 제국주의 정책의 산물이다.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와서 각국의 독점 자산 계급은 초과 이윤의 일부분을 이용하여 노동자들 가운데의 상층 분자들을 매수하여 노동 귀족으로 배양하였다. 이런 노동 귀족들은 일반 노동자들 가운데의 상층 분자들을 매수하여 노동 귀족으로 배양하였다. 이런 노동 귀족들은 일반 노동자들이 받고 있는 재난과 고통에서 벗어났기에 일반 노동자들로서 가져야할 혁명적 의지마저 상실하였다. 그들은 수정주의 의 주요한 사회적 기초로 되었다. 그와 동시에 독점 자본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소생산자들이 파산당하여 노동자 대오 속으로 많이 몰려들었고 소자산 계급의 사상의 식도 그들과 함께 노동 운동에 흘러들었다. 이것이 바로 수정주의 가 자라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었다.
19세기 90년대에 마르크스주의가 국제 노동 운동 가운데서 이미 기타의 모든 사상 체계를 전승하고 영도적 지위를 얻었기에 마르크스주의의 적들까지도 마르크스주의자로 가장하고 나서서 내부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뜯어고쳤다. 1893년에 독일 사회민주당은 선거에서 근 180만 장의 선거표와 44개의 의석을 얻었다. 기타 일부 나라들의 사회당의 입후보자들도 선거에서 일련의 승리를 달성하였다. 각국 당의 많은 지도자들은 의회투쟁의 작용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자산 계급 민주주의를 숭배하면서 개량주의 사상에 물들었기에 수정주의에 대한 식별, 배격의 능력을 상실하였다. 이상과 같은 가지가지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수정주의 는 나타나자마자 국제적 범위에서 매우 빨리 범람하기 시작하였다.
수정주의의 대표적 인물은 독일 사회민주당인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850년~1932년)이었다.
베른슈타인은 1872년에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아이제나흐파)에 가입하였다. 1878년 독일 정부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비상법≫을 발포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할 때 베른슈타인은 독일을 떠나 스위스의 쮜리히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다른 두 기회주의 분자와 함께 ≪독일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회고≫란 글을 발표하여 노동 계급은 자신의 역량에 의거하여 해방을 쟁취할 수 없기에 반드시 교양이 있고 재산이 있는 자산자의 영도에 복종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당의 무산 계급 성질을 개변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그들은 무산 계급과 자산 계급간의 계급투쟁을 애써 말살, 약화시키면서 독일 사회민주당이 자산 계급과 화해할 것을 요구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기회주의 관점을 엄격히 비판하면서 그들은 비록 노동 운동에 참가는 하였으나 무산 계급의 세계관을 접수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으며, 글의 머리에는 온통 자산 계급 및 소자산 계급의 관념이 가득차 있다고 하였다. 베른슈타인은 이 비판과 지적을 받은 다음, 잠시 여우의 꼬리를 감추었다. 엥겔스가 서거한 후 그는 즉시 연속 문장을 발표하여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하였다. 1899년에 그는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업≫이라는 책을 써냈다. 레닌은 그것을 노동 계급의 이익을 팔아먹고 노동 계급을 배반한 작품이라고 하였다. 베른슈타인은 각국 당의 기회주의자들과 결탁해 가지고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칙을 부정하였다.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완성≫한다는 허울 밑에서 마르크스주의, 특히는 무산 계급 혁명과 무산 계급 독재에 관한 학설을 뜯어고쳤다. 수정주의 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과학적 논술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농업에서 대생산이 소생산을 배제하는 과정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경제 공황이 더욱 적어졌고 더욱 미약해졌으며, 카르텔과 트러스트 등 독점 조직의 출현이 생산 과잉의 위기를 완전히 소멸할 수 있다고 역설하면서 이론상으로 자본주의가 바로 자기의 내부 모순을 제거하고있으니 자산 계급적 개량으로 무산 계급 혁명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망상하였다.
수정주의자들은 자산 계급 국가가 무산 계급을 압박하는 폭력적 기구라는 것을 부인하였다. 사회민주당이 각국에서 얻은 선거표수는 날로 증가되었는데, 이것이 자산 계급 민주주의와 의회 제도를 찬양하는 그들의 근거로 되었다. 그들은 노동자들 속에서 개량의 방법, 즉 평화적인 길을 거쳐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 이행하려는 환상을 애써 선전하였다.
1899년 5월에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미예랑(1859~1973년)이 자산 계급정부의 실천적인 베른슈타인주의의 훌륭한 견본으로 되었다. 미예랑이 내각 조직 성원으로 들어간 이 사건은 제2인터셔날 산하의 각국 당내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게 하였으며, 1900년 빠리 대표 대회에서의 중심 과제로도 되었다.
룩셈부르크를 대표로 한 좌파들은 사회당원들이 자산 계급 정부에 참가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룩셈부르크는 오직 자산 계급 국가의 폐허 위에서만이 무산 계급 정당이 ≪집권당으로 될 수 있다≫고 지적한 동시에 미예랑을 제재할 것을 대회에 요구하였다. 독일의 베른슈타인과 프랑스의 죠레스 등 우파들은 미예랑이 내각에 참가한 것은 사회주의 영향의 성장을 의미하며 무산 계급이 정권을 탈취하는 제1보로 된다고 주장하고 그에게 축하를 드렸다. 카우츠키는 ≪중간파≫의 입장에 서서 기회주의자에 대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국제적 통일을 수호한다는 명의로 절충적인 결의 초안을 제출하여 사회주의자가 자산 계급정부에 참가하는 것은 ≪전술 문제이고 원칙적 문제가 아니니 국제 대표대회는 이에 대하여 의견을 발표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대회에서 카우츠키의 결의안이 채택되었기에 미예랑의 배반 행위는 응당 받아야할 제재를 받지 못하였으며, 수정주의 자들의 모든 배반 활동에 편리한 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후 사람들은 카우츠키의 이 결의를 ≪고무줄≫결의 라고 불렀다.
빠리 대표 대회는 제2인터내셔날 내부에 좌, ≪중≫, 우 세 파가 출현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우파가 주요한 문제에서 우세를 차지하였다. 라리 대회는 벨기에의 서울 브뤼셀에 제2국제사회당 집행국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집행국은 매번 대표 대회의 결의를 책임지고 공포하며, 각국 당의 보고를 수집하며, 약간의 국제 활동에 관한 종합 보고를 작성하며, 대표 대회를 준비하며, 각각의 문제에 대하여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날의 상설 집행 기구로 되었다. 벨기에 노동당의 우파 지도자인 반데르벨드가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리하여 제2인터내셔날의 영도권이 차츰 수정주의자들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수정주의가 제2인터내셔날 내부에서 한때 범람하게 되었다.





제2인터내셔날 수정주의를 반대하여 진행한 레닌의 투쟁
레닌은 일찍이 시베리아 유형지에 가 있는 동안에 베른슈타인 수정주의 및 러시아에서의 그의 변종인 ≪경제주의 자들≫의 진공을 견결히 반격하였다. 경제주의 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면서 무산 계급의 정치 투쟁을 포기하고, 무산 계급 정당을 건립하는 사업을 포기하며, 노동자들이 자본가를 반대하는 경제 투쟁만 진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1899년에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자들의 임무≫를 집필하여 ≪경제주의자들≫의 기회주의 적 논점을 규탄하면서 노동 계급은 눈앞의 이익에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자산 계급의 통치를 전복하고 무산 계급 독재를 건립해야만 자신의 철저한 해방을 얻을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또 무산 계급정당을 건립해야 할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레닌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절정에 오른 기회주의라고 엄격히 견책하였다. 레닌의 영도하에서 러시아 볼셰비끼는 국제적으로 수정주의와 날카롭게 맞서 투쟁하였다. 1907년 8월에 제2인터셔날은  슈트트가르트에서 대표 대회를 소집하였다. 5대주의 20여 개 국가로부터 온 800여 명의 대표가 회의에 참가하였다. 레닌은 볼셰비끼 대표단을 영도하고 제2인터내셔날 대표 대회에 처음 참석하였다. 레닌은 대회에 참석한 좌파들을 단결하게 하고 정확한 투쟁전술로 수정주의 자들을 격파함으로써 대회에서 정확한 결의를 채택할 수 있게 하였다.
제국주의 전쟁의 위험이 날로 박두하였기에 전쟁을 대하는 무산 계급의 태도가 대회 토론의 주요한 문제로 되었다. 전쟁 문제에 관한 네가지 초안이 대회에 제출되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부정확한 것들이었다. 독일 대표단의 명의로 제출한 베벨의 초안에서는 근대 전쟁은 자본주의 의 산물이므로 오직 자본주의 가 소멸된 후에라야만 전쟁이 없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초안은 의회를 이용하여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을 방지할 것만을 제안하고 무산 계급의 절박한 과업, 특히 제국주의 전쟁에 의하여 일어나는 위기를 이용하여 자본주의 를 전복할 것은 제시하지 않았다. 이 초안은 또 전쟁을 마르크스주의 원칙에 따라 정의적인 것과 비정의적인 것으로구별한 것이 아니라 ≪방어적≫인 것과 ≪공격적≫인 것으로 잘못 나누었다. 레닌은 베벨의 초안이 수정을 거친다면 접수될 수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였기에 룩셈부르크와 함께 이 초안에 대한 수정안을 제기하였다. ≪이 수정안에는 (1) 군국주의는 계급적 압박의 주요한 수단이라는 것이 언급되었고, 2) 청년들 속에서 선동 사업을 할 과업이 지적되었고, (3)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하고 또 이미 시작된 전쟁을 가장 신속히 끝내기 위하여 투쟁할 뿐만 아니라 전쟁에 의하여 조성되는 위기를 자산 계급의 몰락을 촉진시키는 데 이용하기 위해서도 투쟁하여야 한다는 사회민주당의 과업이 강조되어 있었다. 수정을 거쳐 면모가 일신된 이 초안은 대회에서 채택되었으며,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국제 무산 계급의 중요한 문헌으로 되었다.
슈트트가르트 대회 후 레닌은 계속 수정주의와의 투쟁을 끝까지 진행하여 쟁취하고 단결하였다. 이미 레닌을 수반으로 한 볼셰비끼는 국제노동 운동 가운데서 실제로 영도적 지위에 있었으며 좌파 역량의 핵심으로 되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폭발하였다. 제2인터내셔날 각국당의 대다수 지도자들은 슈투트가르트 대회의 결의를 포기하고 공개적으로 자국 무산 계급에게 자산 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대전에 참가하며 서로 살륙하는 싸움터에 나가라고 요구하였다. 레닌의 영도 아래 러시아의 볼셰비끼는 이번 제국주의 전쟁을 국내 전쟁으로 돌리라는 구호를 제기한 동시에 이 구호를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제2인터내셔날 창건 이전 10여 년간의 국제 정세에 대하여 토론해 보자.
2. 1889년 빠리 대회에서는 어떤 중요한 결의와 규정들이 있었는가?
3. 베른슈타인 수정주의의 내용에 대하여 비판, 토론해 보자.
4. 조직 기구와 내부 투쟁의 주요한 대상으로부터 제1, 제2인터내셔날을 간단히 비교해 보자.







제19장 제1차 세계대전






대전의 폭발과 대전의 성격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여름에 먼저 유럽에서 폭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폭발은 제국주의의 2대 군사침략 집단이 상호 쟁탈전을 벌인 결과이며, 또 그들이 전쟁 준비를 위하여 미친 듯이 군비를 확충한 것과 갈라놓을 수 없다. 대전이 폭발되기 전야에 유럽의 발칸 반도는 수시로 폭발할 수 있는 화약통으로 되어 있었다. 발칸 반도는 장기간 터어키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19세기로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사이에 발칸 반도의 여러 민족인민들은 반복적인 투쟁을 거쳐 터어키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그리이스,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리아 등 나라들이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열강들은 모두 발칸 반도에 손을 내밀고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19세기로부터 20세기로 넘어오는 사이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발칸 반도에서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1908년에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와 헤르쩨고비나 두 곳을 병합하였다. 그러나 당시 인민들은 세르비아와 결합하여 대남부 슬라브 국가를 세우려 하였다.
1914년 6월에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의 태자가 오스트리아에 새로 병합된 보스니아에서 군사 연습을 검열하고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였다. 이번 연습은 세르비아를 적으로 가상하고 진행되었다. 이것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를 자아내었다. 6월 28일에 태자의 행렬이 사라예보 거리를 지날 때 세르비아의 비밀 민족주의 조직의 성원이 총을 쏘아 태자 부부를 죽였다. 이것이 역사에서 유명한 사라예보 암살사건이다. 이 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으로 되었다. 이 사건을 전쟁 도발의 좋은 기회로 간주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기회를 타서 제1차세계대전을 일으켰다.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후 일주일간에 독일,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이 연이어 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을 일방으로 한 동맹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다른 일방으로 한 협상국이 서로 싸웠다. 세계대전은 바로 이렇게 폭발되었다. 전쟁의 규모는 끊임없이 확대되어 유럽의 범위를 벗어났다. 갈수록 더욱 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감겨들었다. 이탈리아는 이해 관계가 있어 협상국편에 가담하여 싸웠다.
제1차 세계 대전은 한 차례의 제국주의의 약탈 전쟁이었으며, 교전쌍방에 대해 말한다면 모두 비정의적 전쟁이었다. 세르비아는 자기의 주권과 독립을 보위하기 위하여 싸웠다. 이 점에 대해서 말하면 전쟁은 정의적인 민족 해방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반 전쟁의 비정의성을 변경할 수 없었다.





전쟁의 과정
전쟁이 시작되자 유럽에는 세 갈래의 전선이 형성되었다. 벨기에, 프랑스 북부 및 독일 - 프랑스 접경 지대에 서부 전선이 형성되었는데, 그곳에선 영국, 프랑스가 독일과 싸웠다. 동부 전선은 발틱해의 남안으로부터 루라니아에까지 이르렀는데, 거기에선 러시아가 독일, 오스트리아와 싸웠다. 남부 전선은 발칸 전쟁이었는데, 그곳에선 오스트리아-헝가리아가 러시아, 세르비아와 싸웠다. 이밖에 쌍방은 또 아시아의 남카프카즈, 양강 유역과 팔레스티나에서도 싸웠다. 유럽의 서부 전선과 동부 전선은 이 전쟁에서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1914년 8월 4일에 벨기에에 침입한 독일 주력 부대는 프랑스 북부를 돌연 습격하려고 시도하였다. 8월 하순에 독일 군대는 벨기에 군대와 영국 - 프랑스 연합군의 저항을 짓부시고 벨기에를 거쳐 곧장 빠리에 다가들었다. 9월 초에 빠리 북부의 마르느 강 부근에서 영국 - 프랑스 연합군과 첫 대회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 참가한 쌍방의 군대는 150만 명을 초과하였다. 4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거친 다음 독일군은 할 수 없이 후퇴하였다. 쌍방은 방어 진지를 쌓고 장기적인 진지전으로 넘어갔다. 독일 참모부에서는 본래 여섯 주일 내에 프랑스를 격파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사실 이 계획은 파탄되었다. 전쟁은 지연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것은 독일 측으로 보면 불리하였던 것이다.
동부 전선에서는 8월 중․하순경에 러시아군이 동프로이센에 진입하였다. 그리하여 동, 서 두 개 전선에서 동시에 작전하지 않을 수 없게된 독일은 할 수 없이 서부 전선으로부터 병력을 메어 러시아군에 대항하게 하였다. 8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독일군은 마주르카 지역에서 잘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갈래의 러시아군을 섬멸하고 러시아 경내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같은 때에 러시아군은 오스르리아군을 격파하고 오스트리아의 동부 지구로 깊이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쌍방의 대치 상태가 형성되었다.
1915년에 독일군은 동부 전선에 병력을 집중시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동부 전선에서의 작전을 종말지으려고 생각하였다. 1월에 독일군은 연속 진격하여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고 전선을 리가만으로부퍼 드네스뜨르 강 일대까지 밀고 나갔지만 러시아를 압박하여 투항시키려던 주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고 동부 전선에서의 위협도 해제시키지 못하였다.
1916년에 전쟁의 중력 중심이 다시금 서부 전선으로 전이되어 2월과 7월에 베르덩과 쏨므강에서 두 차례의 큰 전투가 벌여졌다. 전쟁은 연말까지 지속되었다. 이 두 차례의 큰 전투에서 쌍방은 200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내었다. 그 결과 서부 전선에서 전세를 결정지으려고 서두르던 독일의 희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형세의 발전은 갈수록 더 협상국측에 유리해졌다. 해상에서의 전쟁 국세는 독일, 오스트리아에 대해 더욱 불리하였다. 독일, 오스트리아의 군함은 항구내에 장기간 포위 견제되어 있었다. 1916년 6월의 유트란드 대해전은 또 독일 해군의 실패로 끝났다. 그 결과 독일, 오스트리아의 해상 운송이 거의 전부 봉쇄되었다. 그리하여 이 두 나라는 물자가 날로 결핍하여져 궁지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10월 혁명의 승리와 대전의 종말
제국주의 전쟁이 폭발되어 2년 남짓한 동안에 교전 쌍방은 모두 대량의 인력과 물력을 소모하였기에 그 처지가 매우 곤란하였다. 독점 자본가들은 근로 인민들을 전선에 내몰아 피를 흘리게 하고 후방에서 굶주리게 하였지만, 저들은 도리어 전쟁가운데서 거액의 이윤을 얻었다. 예를 들면 독일 군수품 대왕 크루프회사의 이윤이 1913년에는 3300여만 마르크이던 것이 1914년에는 8600여만 마르크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교전국의 주민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일용품이 결핍되어 생활이 몹시 곤란하였다. 1916년 겨울에 독일의 도시주민들의 거의 다 제한된 순무를 먹으면서 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짜르 러시아는 제국주의 쇠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로서 특히 엄중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전선에서는 군수품이 매우 결핍하였으며 심지어 병사들의 보총까지도 부족되었다. 후방에서는 연료의 부족과 운송의 곤란으로 하여 공장의 생산량이 감소되었다. 국가의 경제는 붕괴될 지경에 이르렀다. 1917년 초에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 운동이 수도 레뜨로그라드에서 일어났다. 그 뒤를 이어 모스크바, 바꾸 및 기타 일부 큰 도시들에서도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1917년 3월 10일(러시아 역서로 2월 25일)에 레닌의 지시에 근거하여 볼셰비끼당 뻬뜨로그라드위원회는 봉기를 일으켜 짜르 전제 정권을 타도하라고 호소하는 삐라를 내었다. 이튿날 빼뜨로그라드의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는데, 짜르 황제가 봉기를 탄압하기 위하여 전선으로부터 끌어온 짜르 군대들도 봉기자들 편에 가담했다. 3월 12일에 빼뜨로그라드의 봉기가 승리하였다. 그날 밤에 봉기자들은 노동자 - 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건립하였다. 뻬뜨로그라드 봉기의 소식이 전해지자 각지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짜르의 독재 통치는 전복되었다.
2월 혁명의 승리는 ≪제국주의 전쟁을 국내 전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레닌 사상의 승리이다. 그것은 교전국 인민들의 반전 운동을 고조시켰고, 교전국 통치 계급의 공포를 자아냈다. 바로 이와 같은 정황하에서 미제국주의가 전쟁에 참가하였다.
미제국주의는 대전 초기에 ≪중립≫을 견지하여 교전국들과 장사를 하면서 전쟁에서 치부하였다. 대전이 종말되어 가고 교전 쌍방이 기진 맥진하였을 때 미국은 세계 패권을 쟁탈하고 전리품을 탈취할 시기가 닥쳐왔다고 판단하였으므로 ≪중립≫이란 가면을 벗어버리고, 1917년 2월부터 개시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전쟁≫을 반대한다는 구실로 1917년 4월에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2월 혁명 후에 러시아 자산 계급은 정권을 절취하고 임시 정부를 조직하여 제국주의 전쟁을 계속 진행하였다. 볼세비끼당은 노동자, 농민을 영도하여 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였다. 볼셰비끼당은 11월 7일(러시아 역서로 10월 25일)에 무장 봉기를 거쳐 사회주의 10월 혁명의 승리를 달성하고 소비에트 정권을 창건하였다. 신생한 이 소비에트 국가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단호히 퇴진하였다.
10월 혁명의 영향하에서 교전국들의 혁명 운동이 전례없이 앙양되자 동맹국은 밑뿌리째 뒤흔들렸다. 1918년 10월 하순에 오스트리아 - 헝가리제국이 와해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가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전선의 군대들은 더 싸우려 하지 않았다. 1918년 11월 3일에 독일 키일군항의 해군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그 뒤를 이어 봉기가 전국을 휩쓸었기에 독일 황제는 할 수 없이 퇴위하고 네델란드로 도망쳤다. 11월 11일에 독일은 투항을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은 동맹국의 실패로 종말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4년 남짓 동안 계속되었는데 30개 국가, 15억 인구가 전쟁에 휩쓸려 들었다. 교전 쌍방은 자기의 신식 무기를 모두 꺼내어 사용하였다. 비행기, 탱크, 독가스가 처음으로 전장에서 사용되었고, 원거리 대포도 교전 쌍방에 매우 큰 손해를 주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한줌도 못 되는 독점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하여 세계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 주었다. 대전 가운데서 사망된 수는 800여만 명에 달하였고 부상당한 수는 2000여만 명에 달하였으며, 참전한 모든 나라들의 직접적인 전쟁 비용이 3000여억 달라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 의 하여 가장 큰 다른 한 가지 결과가 나타났다. 즉, 러시아 노동 계급이 사회주의 10월 혁명의 위대한 승리를 전취하고 지구의 6분의 1의 땅 위에 첫 사회주의 국가를 창건하였던 것이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제16장 제3절의 내용에 결부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성격에 대해 토론해보자.
2. 사라예보 사건, 서부 전선, 동부 전선, 마르느 강 전투, 쏨므 강 전투를 설명해 보자.
3. 미국이 전쟁에 참가한 이유를 설명해 보자.







제20장 근대 유럽과 아메리카의 과학과 문학예술






≪문예 부흥≫은 유럽 역사에서의 한 차례의 사상 해방 운동으로서 자산계급 문화의 맹아와 흥성을 표시한다. 17세기부터 자본주의가 점차 확립됨에 따라 자산 계급 문화는 유럽에서 점차 사상적, 과학적 기초를 닦기 시작하였다. 당시 새로 흥성한 자산 계급들은 지식과 진리를 추구할 것을 절박하게 요구하였다. 17세기 영국의 철학가 프란시스 베이컨(1561~1636년)의 ≪지식은 곧 힘이다≫라는 명언은 그 시대 사람들의 보편적인 추구를 반영하였다. 자산 계급은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을 거쳐 이성주의를 핵심으로 한 근대 문화의 사상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소위 이성이란 곧 사람의 사고와 분석을 말한다. 프랑스의 철학가이며 수학가인 데카르트(1595~1650년)는 오직 이성적으로 보아 똑똑하고 명백한 지식만이 진실하고 믿을 수 있는 지식이며 진리라고 인정하였다. 데카르트는 사람의 이성으로서 신의 계시를 대체하였고, 이는 매우 큰 진보적 의의를 가지고있다. 봉건 신학의 미신과 대립되는 이성주의의 확립은 과학과 문학예술의 발전을 위하여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때로부터 과학 기술과 문학 예술은 모두 획기적인 성과를 취득하였다.





근대 자연 과학의 발전
문예 부흥 시기 이래 사람들은 점차 과학적 방법으로 세계를 관찰하였으며, 더욱 많은 학자들이 과학적 실험과 수학적 방법을 운용하여 자연 현상의 원인을 인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빈치는 일찌기 ≪실험은 정확성을 낳는다. 실험을 거치지 않고 생산과 과학은 열매를 맺지 못하며 오류로 충만된다≫라고 썼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근대 과학은 바로 수학적 방법과 과학적 실험의 기초 위에서 신속하게 발전된 것이다.
17세기 이전에 유럽의 수학은 줄곧 고대 그리이스 수학 성과의 기초 위에서 완만하게 발전하여 왔다. 고대 그리이스의 수학가 유클리드(약기원전 330~275년)가 쓴 ≪기하 원리≫는 유럽의 전통적 과학인 수학의 기초로서 그 영향력은 19세기까지 줄곧 지속되었다. ≪기하 원리≫는 또 서방세계에서 ≪성경≫ 버금으로 광범위하게 유포된 서적이다. 17세기 중기에 수학은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왔다. 이 영향 밑에 유럽의 과학도 17세기후부터 거족의 발전을 가져왔다. 획기적인 이 진전은 위대한 과학자 뉴톤의 뛰어난 성과와 갈라놓을 수 없다. 문화사에서 유클리드와 뉴톤의 과학 성과는 유럽 전통 과학관의 두 개의 큰 기초돌이라고 불리고 있다.
아이자크 뉴톤은 1642년에 영국 동남부의 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주위의 사물을 관찰하기 좋아하였다. 수공을 즐겼으며 간단한 기계도 만들기 좋아하였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 성적이 특출하였기 때문에 캠브리지 대학에 추천받아 갔다. 이 대학에서 그는 수학, 광학과 천문학 연구에 몰두하여 훗날의 학술 성과를 올릴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닦아놓았다. 26세때 벌써 캠브리지 대학의 수학 교수로 된 그는 한평생을 부지런히 연구 사업을 하여 많은 과학 성과를 따냈다. 수학면에서 뉴톤은 교원의 지도를 받아가며 미분학과 적분학(독일의 수학가 라이프니쯔와 뉴톤은 동시에 미적분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들은 제각기 독립적으로 미분학을 확립하였다. 지금 국제적으로 통용하고 있는 미적분의 부호는 바로 라이프니쯔가 발명한 것이다. )을 창립하였다. 미분학과 적분학의 창립은 수학 분야에서의 한차례의 혁명으로서 사람들이 능히 수학적 방법으로 물체의 운동, 특히 속도의 발생 변화 운동을 서술할 수 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뉴톤의 가장 중요한 과학 성과는 물리학과 천문학 연구에 있다. 물리학면에서 뉴톤은 선인들의 연구 성과들을 개괄하고 종합한 기초 위에서 자기의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저명한 운동의 3법칙 즉 관성의 법칙(한 물체가 다른 물체의 작용을 받지 않은 조건하에서 정지 또는 등속직선운동을 유지한다.), 비례법칙(물체의 가속도는 그 물체가 받는 작용력과 정비례되며, 물체의 질량과는 반비례된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두 물체 사이의 작용력과 반작용력의 동시에 존재할 때 그 크기는 같고 방향은 정반대가 된다.)을 제기하였다. 후에 뉴톤은 또 만유인력 법칙을 제기하였다. 만유인력법칙은 우주 공간에 있는 별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 원리로서 별들 사이에는 모두 서로 흡인력을 가지고 있고 이런 흡인력으로 하여 태양과 지구를 포함한 모든 행성들이 규칙적으로 일정한 거리와 속도로 운행하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만유인력 법칙은 또 물체가 땅에 떨어지는 원인에 대해서도 물체와 지구 사이에 흡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뉴톤의 만유인력에 대한 연구는 물체가 당에 떨어지는 데 대한 사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번은 뉴톤이 과학 문제를 연구하다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 일반적인 현상에 더욱 깊은 사색이 미쳤다고 하며, 이 현상에 계시를 받고 마침내 만유인력의 법칙을 내놓았다고 한다. 뉴톤이 제시한 운동의 3법칙과 만유인력 법칙은 획기적인 과학 성과로서 20세기 이전의 고전 물리학의 기초를 닦아놓았다. 과학연구면에서 이룩한 뉴톤의 거대한 공헌으로 하여 사람들은 뉴톤이 내놓은 운동의 3법칙을 보통 ≪뉴톤의 법칙≫이라고 부르며, 또 뉴톤의 운동의 3법칙과 만유인력 법칙을 ≪뉴톤의 역학≫이라고 부른다. 18세기에 자연과학은 빛나는 뉴톤의 시대와 비교하면 완만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18세기의 과학 발전은 주요하게 과학 자료에 대한 수집과 정리면에서 체현되었다. 17세기의 과학자들은 종교 미신과 부단히 투쟁하였으며 과학 영역에서 발걸음을 다그쳐 19세기 과학 기술의 거대한 진전을 위한 조건을 창조하였다. 18세기 중기에 화학 영역에서 중대한 진전을 가져왔다. 과학자들은 이산화탄소, 수소, 산소 및 염소 등 기체들을 연속 발견하였다. 프랑스 과학자 라브와지에(1743~1794년)는 염소의 과학적 원리를 제시하였으며, 염소는 공기 중에서 산소가 산화작용하는 것이라고 제기함으로써 염소는 가연성 물체내에서 플로기스톤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오랫 동안 인정하여 오던 유럽인들의 비과학적 관념을 타파하였다.
19세기 전기와 중기에 자연 과학은 중대한 진전을 가져왔다. 많은 과학분야에서는 자료를 수집, 정리하던 데로부터 사물의 발생, 발전 과정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돌려 점차 계통적인 과학 이론 체제를 이루었다. 에너지 보존 및 전화의 법칙과 세포학설, 진화론은 19세기 자연 과학에서의 3가지 중대한 발견이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세가지 중대한 발견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계의 주요한 과정이 설명될 수 있었고 그 원인이 자연에 귀결되게 되었다.≫
에너지 보존 및 전화의 법칙을 열역학 제1 법칙이라고도 한다. 과학자들은 열현상에 대한 연구로부터 출발하여 우선 열현상의 직접적 원인은 운동에 있으며 운동이 발생한 에너지는 소실되는 것이 아니라 열에너지로 전화된다고 지적하였다. 에너지 보존 및 전화의 법칙은 물질 운동사이의 변증 관계를 제시하였으며, 이후의 전기, 자기, 화학적 변화 등 물질 운동에 대한 연구에 기초를 닦아놓았다. 과학사에서 이 법칙이 가지는 의의를 볼 때 이 법칙은 18세기 과학 연구에서의 기계론을 타파하였으며 변증법적 유물론의 확립에 중대한 영향력을 주었다. 과학 원리란 때로는 아주 간단한 것이지만 과학 발전의 길은 도리어 아주 고생스럽고도 오랜 세월이 걸리는 것이다. 17세기에 광학은 뉴톤의 연구 성과에 기초하여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현미경의 탄생은 생물학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후에 과학자들은 현미경으로 세포의 구조를 발견하였다. 또 현미경으로 세균을 포함한 미생물을 볼 수 있었다. 19세기에 생물학면에서는 여러 세대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기초하여 끝내 중대한 돌파를 가져왔는데 세포학설의 탄생이 바로 그것이다. 과학자들은 그 어떤 생물체든지 모두 세포로 구성되었다고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19세기 과학적 진화론의 창립은 생물학 발전의 한 개 이정표였으며 인류 역사에서의 가장 중요한 과학 발견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진화론의 창립자는 영국의 과학자 찰스 다윈이다. 그는 l809년에 탄생하였다. 그는 어릴 때 식물과 곤충을 채집하여 표본 만들기를 즐겼고 19세 때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신학을 배웠다. 그러나 자연 과학에 대한 깊은 애호로 하여 그는 늘 동식물을 채집하여 표본을 만들었으며 다른 학원의 야외 조사에도 참가하였다. 1831년에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다윈은 목사가 되지 않고 병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박물학자의 신분으로 ≪비이글호≫의 해상 탐험에 참가하였다. 이 군함은 영국 정부에서 지구 일주항해용으로 내놓은 것인데, 항해의 중점은 남아메리카의 동해안과 서해안을 고찰하는 것이었다. 1831년 말부터 1835년 10월까지 근 5년간의 고찰에서 다윈은 대량의 생물 자료를 얻었으며 맡은 신기한 자연현상을 관찰하였다. 이것은 후에 그가 자기의 학설을 창립하는 데 튼튼한 기초를 닦아 주었다. 조국에 돌아온 후 그는 부단히 동물과 식물을 선별하고 육종하는 실천 가운데서 자료를 수집하고 일정한 법칙을 탐색하였다. 장시간의 관찰과 연구를 거쳐 다윈은 논리적 형식에 부합되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즉 맡은 동물들의 번식 추세는 모두 얻을 수 있는 음식물의 성장보다 빠르기 때문에 항상 생존 경쟁이 있게 된다 생존하게 된 그러한 것들은 소멸된 그러한 것들보다 반드시 많은 우수한 점이 있으며 자기를 생존 환경에 더욱 잘 적응되게 한다. 오직 환경에 적응된 것들만이 비로소 생존하게 되고 특질이 잘은 후대를 번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연 선택의 방법인데 다윈은 이것을 ≪자연 선택≫ 원리라고 불렀다. 생존 경쟁, 적자 생존, 자연 선택 이 세 가지 점은 다윈의 과학적 진화론의 기초가 되었다. 다윈은 또 장기적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자기의 논점을 검증하고 1859년에 마침내 그의 이름난 과학 저작 ≪종의 기원≫을 발표하였다. 다윈의 과학적 진화론은 하느님이 세계와 생물을 창조하였다는 기독교의 이론을 발가벗겨 놓았으며, 교회 봉건 세력과의 장기적인 투쟁가운데서 그는 엄격한 과학성으로 시종 불패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19세기에 자연 과학 분야에는 뭇별들이 찬란한 빛을 뿌려 중대한 과학적 발견들이 연속 부단히 나타났다. 19세기 중기에 화학과 물리학면에서 모두 중대한 진전이 이뤄졌다. 러시아의 화학가 멘델레예프(l834~1907년)는 화학 원소주기표를 창제하였다. 이 원소주기표에서 그는 그 당시 이미 알려져 있던 62개 종류의 화학 원소들을 동시에 원소주기표에 근거하여 당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일부 원소의 화학 성질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후에 발견된 원소들은 그의 예언이 정확하였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동시대의 영국 물리학자 막스웰(1831~1879년)은 전자학 연구에서 중대한성과를 얻었다. 그는 간단 명료한 수학 방정식으로 전체 전자학 이론을 종합하여 저명한 막스웰 방식을 만들어냈다. 막스웰의 연구 성과는 현대과학이 발전된 후에 고도의 중시와 평가를 받았다. 19세기 말엽에 와서 자연 과학의 발전으로 하여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이미 우주를 지배하는 모든 중요한 법칙을 발견하였다고 보편적으로 믿게 되었다. 그 당시의 한 학자는 ≪뉴톤의 역학과 막스웰의 전자학은 이미 모든 문제를 해결하였다. 금후 물리학자의 임무는 오직 실험을 더욱 정밀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실제에서 그 당시세계는 중대한 발견의 문전에 서 있었던 것이다.
l895년 독일 과학자 뢴트겐이 실험 가운데서 종이함과 널판지를 꿰뚫을 수 있는 일종의 방사선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 기묘하고도 보이지 않는 방사선을 x광이라고 이름붙였다. x광선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특히 강한 투과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당시 뢴크겐은 이렇게 썼다. ≪만약 손을 방전장치와 종이 병풍 사이에 놓는다면 비교적 검은 골격의 영상을 볼수 있다.≫ 뢴트겐은 x광선 발명으로 하여 세계에서 첫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과학자가 되었다.
x광선의 발견은 과학자들의 보편적인 중시를 받게 되었다. 얼마 안되어 과학자들은 우라늄 원소를 함유하고 있는 광물이 X광선과 비슷한 기묘한 방사선을 방사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유명한 큐리 부인(1867~1934년)이 방사성 원소를 연구하는 가운데 뛰어난 공헌을 하였다. 큐리 부인은 청년 시절에 빠리 대학에서 열심히 학습하여 뛰어난 성적으로 물리학과 수학의 석사 학위를 얻었다. 그는 같은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물리학자인 피에르 큐리(1859~1906년)와 사귀게 되었다. 과학에 헌신하려는 공동의 뜻은 그들로 하여금 끝내 하나로 결합되게 하였다. 갓 결혼한 큐리 부인이 박사 학위 연구 과제를 선택할 때 원소의 방사성 연구 문제가 그의 강한 흥미를 자아냈다. 폭넓은 실험을 거쳐 큐리 부인은 우선 방사성을 함유하고 있는 일부 원소들을 확정하여 놓았다. 그러나 방사성 원소인 우라늄을 함유하고 있는 역청우라늄광에서 우라늄 원소를 뽑아낸 후에도 여전히 극히 강한 방사성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큐리 부인은 역청우라늄광 중에는 또 방사성이 아주 강한 일종의 미지의 원소가 함유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문제는 아주 중대한 문제였기에 피에르 큐리는 자기가 하던 과학 연구마저 제쳐놓고 큐리 부인과 합작하였다. 그들은 극히 열악한 조건하에서 아주 간단한 실험 설비에 의거하여 날에 날을 이어가며 한 톤의 역청우라늄광 찌꺼기를 다 제련하였다. 45개월간의 성실한 노동을 거쳐 끝내 1904년에 10분의 1그람의 라듐을 제련해 냈다. 라듐의 발견은 과학 세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여 화학 연구에서의 획기적인 중대한 발견으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학에도 응용되어 인류에게 행복을 마련하여 주었다. 방사성 원소에 대한 연구는 과학자들로 하여금 원소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며 방사과정에 분열되어 다른 일종의 원소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였다. 이것은 근대 고전 물리학의 질량 보존, 에너지 보존 등의 기본법칙들에 충격을 주었으며,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할을 기초로 하는 현대 물리학의 탄생에 길을 개척하여 주었다.





유럽, 아메리카 근대 문학의 발전
문예 부흥 이후에 유럽의 문학은 고전주의 시기에 들어섰다. 17세기로부터 18세 초기에 이르기까지 고전주의는 유럽의 문단에서 주류적 지위에 처해 있었다. 고전주의는 문예부흥의 주장을 계승하였고, 창작 실천과 이론면에서 모두 고대 그리이스 로마의 문학 예술을 본보기로 대량의 고전 제재를 채용하였기 때문에 ≪고전주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고전주의 문학은 주로 영국, 특히 프랑스에서 발전하고 번영하였다.
프랑스의 고전주의 문학은 연극으로 그 성과가 크다. 그 중에서 가장 특출한 것은 고전주의 연극 대가인 몰리에르(1622~1673년)의 작품이다. 몰리에르는 어린 시절부터 연극을 즐겼는데, 중학교 때부터는 고대․로마의 연극 작품들과 접촉하였고, 청년 시기에는 한 유랑 극단을 따라 프랑스를 두루 돌아다니며 공연하였다. 이는 그의 창작 사업에 풍부한 소재를 쌓아 주었다. 몰리에르의 이름난 작품은 희극 ≪위선자≫이다. 그는 이 연극에서 위선자 달듀브의 형상을 부각하여 봉건 종교의 위선적인 본질을 신랄하게 풍자하였다. 희극 ≪위선자≫는 그 영향력이 아주 커서 사람들은 지금도 달듀브라는 어휘를 ≪위선자≫의 대명사로 삼고 있다. 몰리에르는 탁월한 극작가일 뿐만 아니라 출중한 연출가이며 또 성과가 아주 높은 표연 예술가였다. 그는 프랑스 연극 역사에 탁월한 공헌을 한 연극가이며 전체 유럽 연극 사업 발전의 추동자이기도 하였다. 전하는 바에의 하면 몰리에르가 사망한 후 루이 14세는 권위가 있는 한 프랑스 학원에서 자기의 통치 기간에 누가 문학면에서 나를 위하여 최대의 영광을 따냈는가 하고 물었을 때 그가 얻은 대답은 ≪폐하, 몰리에르이옵니다≫였다고 한다.
고전주의 문학은 비록 유럽의 문학사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지만 엄중한 귀족화, 봉건화의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고전주의 문학에 사용된 언어는 귀족 언어였고, 그 복무 대상은 봉건 궁정과 귀족 사회였다. 문헌 자료의 통계에 근거하여 루이 14세 시기에 고전주의 문학의 독자와 관중이 대략 3000여 명뿐이었다고 한다. 18세기부터 유럽의 고전주의 문학은 점차 쇠락되기 시작하였다. 계몽 운동에 따라 계몽 문학이 나타났는데 이 문학은 프랑스에서 고전주의를 대체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럽범위에서 주류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18세기에 각국의 계몽 문학은 직접 자산 계급 혁명을 위하여 여론을 일으키고 봉건 세력을 없애버리기 위하여 투쟁하였다. 계몽 문학은 역사에서 전형적인 자산 계급 문학으로서 계몽 문학은 이론상으로 왕과 귀족을 위하여 봉사하는 고전주의 문학의 원칙을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몽 문학은 창작에서도 고전주의 문학의 틀에 맞춘 규례를 타파하고 문학 영역에 참신한 기운을 끌어들였다. 영국에서 계몽 문학의 과업은 봉건 세력의 잔재를 반대하고 자산 계급 혁명의 성과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유명한 문학가 다니엘 데포우(1660~1731년)의 소설 ≪로빈슨 표류기≫는 영국 계몽 문학의 뛰어난 성과를 대표한 작품이다. 소설 ≪로빈슨 표류기≫는 자산 계급 상승 시기에 자산 계급의 ≪개성 해방≫에 대한 요구를 반영하고 과감히 모험하여 재부를 추구하는 진취 정신을 반영하였다. 프랑스에서 계몽 문학은 계몽 운동과 완전히 하나로 합쳐져 있어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문학가는 또 저명한 계몽주의자이기도 하였다. 이런 문학가들 가운데서 계몽 운동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 지도적 인물은 볼테르였다. 문학면에서의 볼테르의 성과는 주로 초기의 사시(史詩) 몇 부와 비극 몇 부가 있다. 그가 쓴 소설 ≪천진한 사나이≫와 ≪정직한 사람≫은 심각한 철리를 문학 형상과 언어 예술 속에 침투시킨 작품으로서 그 영향이 매우 컸다. 유럽 문학에 중대한 영향을 준 계몽주의 자로는 또 루소(1712~1778년)이다. 루소는 낭만적인 인물로서 그의 마음은 열정과 환상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그의 명작 ≪참회록≫은 그의 어린 시절의 생활경력을 묘사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그는 성실하고도 솔직한 태도로 자산 계급 지식인들의 생활과 행위의 준칙을 제시하였다. 그의 작품은 강렬한 개성과 짙은 낭만주의 색채가 풍부하여 루소는 늘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웠다. 괴테는 이렇게 말하였다. ≪볼테르에 의하여 한시대가 종말되고, 루소의 의하여 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계몽 운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18세기 후기에 계몽 문학은 더욱 적극적이고 건강한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 독일에서는 성세 호대한 광풍 돌진 운동이 나타났다. 광풍 돌진 운동은 독일에서의 계몽 문학의 새로운 발전으로서 봉건 속박을 벗어나며 개성 해방을 요구하는 자산계급의 강렬한 염원을 반영하였다. 광풍 돌진 운동은 성과면에서 계몽문학을 초월하였다. 뿐만 아니라 독일 문학은 이때로부터 세계 문학의 대열 속에 서게 되었다. 독일 광풍 돌진 운동의 가장 걸출한 대표 인물은 요한 볼프강 괴테(1749~1832년)였다. 괴테의 명작은 서신체로 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이 소설은 젊은 베르테르와 비속한 사회현실의 부단한 충돌, 그리고 희망 없는 사랑으로 하여 자살하게 되는 비극을 통하여 개성 해방과 자유에 대한 추구의 강렬한 염원을 토로하고 그 시대 청년들의 울적한 심정을 반영하였다. 이 소설이 발표된 후 유럽청년들 가운데서는 한바탕 ≪베르테르 열풍≫이 일어나 청년들은 저마다 베르테르의 옷차림, 언어, 행동을 모방하는 것으로 사회에 도전하였다. 괴테의 대표작은 ≪파우스트≫였다. 괴테는 이 작품을 창작하는데 근 60년이란 오랜 시간을 들였다. 소설 ≪파우스트≫는 독일의 민간 전설을 제재로하고 문예 부흥 이래의 독일 사회와 유럽 사회를 배경으로 하여 현실에 불만을 품고 애써 인생의 의의와 이상적 사회 생활의 길을 탐색하는 한 신흥 자산 계급의 선진적 지식인을 묘사한 것이다. 극 전체의 구성이 방대하고 복잡하여 소설의 서두와 끝이 서로 잘 연관되지 않는 이야기 정절(플롯)이 있기는 하지만 시종 파우스트의 사상 발전으로 일관된 이 작품을 철학적 시극(詩劇)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극은 파우스트가 일생동안 애써 탐색한 사실을 통하여 영원히 스스로 꾸준히 노력하려는 신흥자산 지식인의 진취 정신을 표현하였다. 괴테가 쓴 소설 ≪파우스트≫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단테의 ≪신곡≫등과 이름을 나란히 하여 세계 문학사에서의 위대한 역사시의 하나로 되었다.
18세기 말엽에 유럽에서는 낭만주의 문학 예술 운동이 일어났다. 낭만주의는 프랑스 대혁명과 유럽 민족․민주 운동의 산물로서 자산 계급상승 시기의 개성 해방에 대한 추구를 반영하였다. 낭만주의 문학의 출현은 계몽 문학의 가일층의 발전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현실과 문학현상에 불만을 느낀 새로운 사상의 반영이기도 하다. 사상면에서 낭만주의 문학은 계몽 사상을 계승하였으며, 또 독일 고전 철학과 영국, 프랑스 공상적 사회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았다. 때문에 낭만주의 문학은 봉건사회의 암흑 통치를 부정하였을 뿐더러 죄악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도 비판하고 희망을 미래에 기탁하였다. 창작면에서 낭만주의 작가들은 고전주의의 틀에 맞춘 관례를 타파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정이 진실한 중세기의 민간 문학을 더욱 숭상하였다. 시가는 그 격식과 규칙면에서 자유롭고 시원스러우며 음악성이 풍부한 것들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대담한 사상력, 기이한 정절, 선명하게 과장된 인물 현상, 신화적인 색채 및 특이한 정서로 낭만주의 고유의 특징이 구성되었다. 낭만주의 문학은 주로 서정시와 소설면에서 극히 큰 성과를 이룩하였고, 전체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찬란한 문학 거성들이 탄생되게 하였다. 이런 저명한 시인과 문학가들로 낭만주의 운동의 주류 즉 적극적 낭만주의 가 구성되었다. 적극적 낭만주의 는 그 진보적인 혁명적 민주 사상과 세계 문학에 대한공헌으로 하여 인류 문화 발전의 이정표가 되었다.
낭만주의는 최초에 영국에서 흥성하였다. 18세기 말에 영국에서 자본주의 도시 문명을 혐오하고 농촌 생활과 대자연의 경치를 열정적으로 묘사하는 시인들과 작품들이 나타났다. 1798년에 그들은 시집 ≪서정 가요집≫을 출판함으로써 적극적 낭만주의 시대를 열어놓았다. 영국에서 가장 걸출한 낭만주의 시인은 조지 고든 바이런(1788~1824년)과 베르키비시쉘리(1792~1822년)였다. 바이런은 시가를 무기로 정부의 반동 정책을 맹렬하게 규탄한 것으로 하여 일생에서 여러 차례 반동 세력의 박해를 받았다. 후에 그는 그리이스에서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는 그리이스 인민들의 투쟁을 도와 주다가 고질로 사망하였다. 그는 그리이스 인민들의 존경과 애정을 받는 시인이었다. 바이런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돈 주앙≫이다. 시가체로 된 이 장편 소설에서 바이런은 귀족 청년 돈 주앙이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겪은 경력을 통하여 유럽의 봉건적 반동 세력을 규탄하고 각국의 사회 폐단을 풍자하였다. 이 장편시에는 기세가 높고 정서가 명랑하며 세련된 어구들이 시인의 손에 의해 아주 자유스럽게 운용되었다. 쉘리는 귀족 계급의 또 하나의 배반자였다. 그의 서정 시극 ≪해방된 프로메티우스≫는 낭만주의 시가의 전범으로서 고리끼는 이 시극을 세계문학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의 하나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쉘리의 붓 끝에서 인류를 위하여 ≪불을 홈친≫ 프로메테우스는 견정 불이하게 싸워 최후에 대자연의 힘에 의 거하여 해방을 얻은 영웅으로 묘사되었다. 쉘리의 허다한 서정시들은 열정적이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동경으로 충만된 것이었다. 시인은 ≪서풍송≫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그대여 불어라
예언의 호각을,
깊이 잠든 인류를 깨우라!
불러일으키라!
서풍이여,
겨울이 왔거늘 이제 봄날이 얼마랴?

하인리히 하이네(1797년~1865년)는 19세기 독일의 가장 뛰어난 낭만주의 시인이었고 저명한 혁명적 민주주의 정론가였다. 그가 쓴 작품은 반동적 봉건 제도를 맹렬히 공격하였고 민주주의 혁명을 노래하였다. 그의 어떤 작품들은 또 자본주의 제동의 죄악을 폭로하였다. 초기의 그의 시작품들은 많이는 개인의 조우와 사랑의 고뇌를 주제로 하여 봉건 전제 제도하에서 억압당하고 출로를 차지 못하고 고민하는 개성들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 중의 적지 않은 시가들은 작곡가들에 의하여 악곡으로 되어 독일에서 광범하게 유전되었으며, 독일 서정시 중의 고상한 작품으로 되었다. 정치적 장편 서정시 ≪독일, 한 겨울날의 동화≫(1844년)는 한편의 시적 형식으로 된 유람기이다. 하이네는 조국의 대지를 한 차례 여행하고 그 여행정황을 서술함으로써 독일 사회의 풍모를 진실하게 반영하였다.  
프랑스의 낭만주의 문학은 특수한 역사적 원인으로 하여 19세기 2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흥성하였다. 나폴레옹은 자기의 통치 시기에 정치상의 수요로부터 민주를 압제하는 엄혹한 조치를 취하였다. 한 역사학자는 그 당시의 빠리를 오직 고전 송가만이 유행되고 ≪시인들은 억지로 텅 빈 무미 건조한 곡조를 부른다≫고 묘사하였다. 그러나 근대 역사에서 줄곧 유럽 문화 중심으로 되어 있던 프랑스에서 낭만주의가 흥성하자 즉시 기세 드높은 문학 운동이 일어났고 그 영향력이 매우 커졌다. 빅로르 유고(l802~1885년)는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걸출한 대표자였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유고는 자기의 기나긴 생애에서 숫적으로 사람을 놀라게 한 많은 시가와 극본, 소설, 문학 이론을 창작하였다. 그가 쓴 문학 이론 ≪크롬웰 선언≫은 낭만주의 운동의 선언으로 인정받고 있다. 1830년에 유고가 쓴 극본 ≪에르나니≫가 빠리에서 공연되었다. 이 극은 프랑스 낭만주의 운동으로 하여금 최고봉에 오르게 하였다. 이 연극이 공연된 첫날 극장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낭만주의자들과 낭만주의를 질책하는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한 차례 싸움이 벌어졌다. 그후 이 유명한 ≪에르나니의 싸움≫은 45일간 지속되었는데 마지막에 낭만주의자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달성하였다. 유고가 창작한 작품들은 인도주의 정신으로 충만되었다. 그의 장편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는 사상성과 예술성이 강한 낭만주의 걸작이다. 이 소설은 선량하고 순결한 집시 소녀 에스메랄다가 교회와 전제 제도의 박해와 시달림을 받다가 비참하게 죽게 되는 이야기를 통하여 중세기의 교회와 봉건전제 통치의 암흑성, 야만성과 잔혹성을 무자비하게 질책하였다. 이 소설은 전형적인 낭만주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남다른 정절, 과장된 인물성격으로 아름다운 것과 추악한 것, 선과 악, 광명과 암흑이 선명하고도 강렬한 대비를 이루게 하였다. 장편 소설 ≪레 미제라블≫은 유고의 또 하나의 대표작으로서 세계 문학의 뛰어난 명작이다. 이 작품은 빈틈없는 구성으로 19세기 전반기 프랑스 사회 정치생활의 화폭을 펼쳐놓았다. 근대에 들어와서 러시아 문학 예술은 상대적으로 유럽보다 줄곧 낙후한 지위에 놓여 있었다. 19세기에 귀족 사상을 대표한 감상주의 문학이 러시아 문단을 통치하고 있었다. 19세기부터 러시아 자본주의 의 발전, 농노 제도의 위기, 프랑스 대혁명의 격랑으로 하여 러시아 땅에서도 폭정을 반대하고 자유를 구가하는 혁명적 민주주의 사조가 나타나게 되었다. 19세기에 러시아 문화는 낭만주의 문학을 길잡이로 신속히 발전하여 유럽과 아메리카 문화의 격류와 합류되었다. 러시아 문학은 이때부터 우수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서유럽 문학과 함께 한 지평선 위에 서게되었다.
러시아에서 낭만주의 문학은 19세기 20년대에 흥성하였다. 뿌쉬낀(1799~1837년)은 러시아 낭만주의 문학의 걸출한 대표자로서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이며 러시아 문학 언어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모스크바의 한 귀족가정에서 태어난 뿌쉬낀은 8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뿌쉬긴은 참으로 인민 대중의 풍부한 언어들을 섭취하여 짧디짧은 자기의 인생에서 많은 서정시와 소설 및 극본들을 써냈다. 뿌쉬낀의 창작 생활은 폭정을 반대한 당시의 혁명 운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그의 시가들은 혁명 운동의 나팔 소리로 되었다. 시가체로 된 장편소설 ≪예프게니 오네긴≫은 뿌쉬긴의 대표작으로서 귀족 청년 오네긴의 생활 경력을 묘사함으로써 청년들의 사상을 질식시키는 러시아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였다. 소설 ≪예프게니 오네긴≫은 뿌쉬긴이 낭만주의자로부터 사실주의 자로 전변된 후의 창작 성과이기도 하다. 뿌쉬긴의 허다한 서정시들은 감정이 진실하여 사람들에게 따사로움을 안겨 주고 고무를 주어 사람마다 읊는 명작으로 되었다. 뿌쉬낀이 쓴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바로 저명한 서정시의 하나인 것이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대여 상심말라, 울지도 말라
그 불행의 나날에도 초조해 말라.
믿으라 그대여,
즐거운 그날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음을.

19세기 이전에 미국에서는 문학 예술이 오랫 동안 유럽에 예속당한 지위에 처해 있었다. 1820년에 영국의 한 비평가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미국 사람들에게는 그 무슨 문학이라는 것이 없다‥‥‥‥우리가 말하는 것은 미국 본토에서 생산된 문학은 없고 모두 수입해 들인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중기부터 유럽 낭만주의 운동의 영향 아래에서 미국 문학도 신속하게 성장되기 시작하였다. 시인 월트 휘트만(1819~1892년)은 기백 있고 폭넓은 필치로 미국 문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놓았다. 1855년에 그가 쓴 시집 ≪풀잎≫이 세상에 나왔다. 그후 이 책은 9차례나 중판되었는데 매번 중판할 때마다 모두 새로운 시가들을 증가하였다. 휘트만은 독특하고도 광범위한 서술 방식을 통하여, 즉 미국 정신과미국 성격의 결정체로 미국을 묘사하였으며, 강렬한 낭만주의 색채를 띤, 운을 달지 알고 운율도 추구하지 않은 시가로 미국의 노동 인민들을 노래하고 벌목공, 대도시의 노동자, 혹인, 인디안인들 및 남북 전쟁 가운데서의 북방 군대의 병사들을 노래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줄곧 휘트만을미국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인정하여 왔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미국의 현시대 시가들 가운데서는 여전히 휘트만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있다. 동유럽에서는 역사적 원인으로 하여 이족의 예속과 봉건적 전제 제도를 반대하고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 19세기 문학의 주제로 되었다. 폐퇴피 산도르(1823~1849년)는 헝가리 민족 문학의 창시자로서 동유럽에서 가장 걸출한 낭만주의 시인이었다. 그가 쓴 시 ≪자유와 사랑≫은 사람마다 전해가며 읊는 명시이다.

생명은 고귀하다
사랑은 더욱 고귀하다
만약 자유를 위해서라면
이 양자를 다 버리리!

19세기 30년대로부터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새로운 문학 조류 즉 비판적 사실주의 가 나타났고 또 점차 문학의 주요한 조류로 되었다. 그때는 이미 사회에 대한 낭만주의 문학의 추상적인 항의 와 미래에 대한낭만주의 문학의 텅 빈 이상으로는 근본적으로 시대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때문에 현실 생활을 진실하게 표현하고 전형적으로 사회풍모를 재현시키며 더욱 깊게는 사회상의 여러 가지 모순을 해부하고 폭로하기에 노력하는 사실주의 문학이 낭만주의 문학을 교체하기 시작하였다. 이 한 갈래의 문학 조류가 현존하는 질서를 강력히 비판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조류를 비판적 사실주의라고 하였다. 비판적 사실주와자들의 붓 끝에서 장편 소설의 창작 사업에는 전례없는 번영의 국면이 나타났다.
프랑스는 비판적 사실주의의 발생지이다. 프랑스의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은 처음부터 예리한 비판의 위력을 나타내었다.
스탕달은 프랑스의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그가 쓴 소설 ≪적과 흑≫(1830년)은 유럽에서의 첫 비판적 사실주의 의 걸작이다. 소설 ≪적과 혹≫은 야심 가득찬 줄리앙 쏘렐의 짧은 생애를 묘사한 것이다. 스탕달은 동정의 태도로 쏘렐 자신의 분투, 추구와 비극을 쌨으며, 자산 계급의 개성을 자유로 발전시키려는 사상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나폴레옹 시대를 긍정하고 왕정 복고를 부정하였으며, 특히 문벌과 출신으로 평민 계층의 청년들을 압제하고 그들의 자유 발전을 가로막는 봉건 복고 세력을 비판하였다. 봉건 귀족들의 정치상의 반동성, 생활상의 부패성, 정신상의 공허성을 소설 ≪적과 흑≫에서 여지없이 폭로하였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19세기 프랑스의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의 위대한 대표자이다. 그는 부지런했고 재산도 많았다. 그의 주요 작품 ≪인간 희극≫에는 모두 95부의 장편, 중편과 단편 소설이 망라되어 있다. 엥겔스는 ≪인간 희극≫을 ≪위대한 작품≫이라고 인정하였고, 또 프랑스 ≪사회≫ 특히는 빠리 ≪상류 사회≫의 사실주의 역사를 탁월한 기량으로 펼쳐 주었다고 발자크를 칭찬하였다. 소설 ≪인간 희극≫은 몰락쇠망하여 가는 귀족 계급과 상승 발전하는 자산 계급을 쓴 것으로 사회의 각개 영역에 아주 풍부하고 생동한 면면과 형상화한 역사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인류 문화의 귀중한 재부로 되었다.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의 프랑스의 중요한 작가로는 로망 로랑이었다. 그가 20여 년이란 시간을 들여 창작한 장편소설 ≪쟝 크리스토프≫의 마지막 한 권은 1912년에 완성되었다. 고리끼에의 하여 ≪증편 사사시≫로 불리운 10권으로 된 이 거작은 음악가 크리스토프의 전투적 일생을 서술하였고, 사회 생활 중의 수많은 중대한 문제들을 제기함으로써 봉건 신분 제도와 자본주의 제도를 반대한 작가 자신의 진보적인 입장과 인류의 진보적인 문화를 견지한 작가의 예술 관점을 표현하였다. 이 장편 소설은 일찍 1915년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세기 30년대로부터 영국에서는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이 흥성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비판적 사실주의 작가들은 자기의 작품들에서 소자산 계급의 염원과 요구들을 반영하였으며, 작품 속의 등장 인물들은 대부분이 고아, 소직원, 소상인, 소점원, 몰락된 귀족의 자녀, 빈곤한가정교사, 영락된 소농들이었다. 비판적 사실주의 작가들은 사회의 억눌림을 받는 이런 소인물들의 생활을 묘사함으로써 영국의 사회 전반을 폭넓게 폭로하였다. 찰스 디킨즈는 자기의 작품 ≪고난의 시대≫에서 콕스마을 노동자들의 투쟁을 배경으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묘사하였으며, 노동 계급의 육체와 심령을 파괴하는 자산 계급을 강력히 힐책하였다. 토마스 하디(1840~1928년)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영국의 중요한 사실주의 작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창작 생활은 두개 세기를 횡단하면서 진행되어 영국 문학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소설 ≪타이스≫는 하디의 가장 우수한 장편 소설이며 또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놓는 비극 작품이다. 하디는 세심한 필치로 자본주의 경제가 영국 농촌에 침투된 후에 일어난 거대한 변화와 인민들의 비참한 운명을 반영함으로써 허위적인 자산 계급의 도덕, 법률 관념에 도전하였다. 20세기 이래로 하디가 쓴 작품들은 더욱 중시를 받게 되었으며 그의 붓 끝에서 그의 작품은 우아하고 고요한 성경화된 경물 묘사로 하여 사실주의 문학의 전범으로 되었다.
러시아의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은 19세기 30년대에 형성되어 그 번영이 신속하였는데, 20세기 초엽에 와서야 비로소 흥성하게 되었다. 근 백년 동안에 러시아 문단에서는 인민의 고난을 묘사하는 작가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암흑한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이 부단히 나왔다. 그들은 비판의 예봉을 주로 봉건 농노 제도에 돌렸으며 후에 와서는 자본주의 제도도 건드렸다. 그들의 작품은 사상, 예술면에서 그 수준이 모두 상당히 높았다. 19세기 30년대에 뿌쉬긴은 창작면에서 낭만주의로부터 사실주의에로 전향하여 러시아의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의 기초를 닦아놓았다. 니꼴라이 바씰리예비치 고골리(1779~1852년)의 풍자적 작품은 러시아의 비판적사실주의 문학의 역량을 강화하였다. 고골리는 뛰어난,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의 예리한 필치로 부패한 농노 차도와 관료 통치자의 핵심을 여지없이 찔러 놓았다. 그가 쓴 소설 ≪죽은 넋≫은 농노주의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는 데 아주 강한 비판력을 가지고 있었다. 레프 똘스또이(1828~1910년)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문학가였으며 또 세계 문학사에서도 가장 걸출한 작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소설로는 러시아 사회의 대동란의 본질을 반영한 ≪안나 까레리나≫에는 안나가 추구하는 사랑의 자유와 레빈이 탐색하는 사회 출로 이 두 갈래의 평행으로 발전하는 정절의 선색이 서로 교차되어 있다. 자산 계급 개성 해방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귀족 여인 안나는 봉건적 혼인에 불만을 가지고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가 생활하는 그 허위적인 상류 사회는 도리어 안나가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그리하여 안나는 자살로 이 사회에 항의를 표시하였던 것이다. 레빈은 극력 종법제도의 경제 관계를 수호하려고 시도한 장원 지주로서 자본주의의 침습을 받아 러시아의 ≪낡은 토대≫가 신속히 붕괴되어 가는 것을 매우 불안해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애써 정책을 통하여 계급 모순을 조화시키고 사회적인 재난을 저지시키려 하였다. 그 결과 끝내 실패로 끝장을 보게 되었다. 소설 ≪전쟁과 평화≫에는 똘스또이의 애국주의 사상과 인도주의 사상이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이 소설도 세계 문학 중의 영원한 명작이다. 똘스또이의 창작은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이 사상, 예술영역에서 성숙되고 심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유럽에서 첸리크 센케비치(1846~1916년)는 폴란드의 가장 걸출한 사실주의 작가였다. 그의 장편 소설 ≪십자군≫은 15세기에 십자군 기사단의 침입에 반항하여 싸운 폴란드 인민들을 묘사하였으며, 또 외족의 침략과 예속에 반항하여 싸우려는 인민들의 결심을 고무하였다. 19세기 중기에 와서야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의 영향하에서 사실주의 문학이 성장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사실주의 문학은 유럽의 사실주의 문학과는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다 즉 개척 정신은 상대적으로 더욱 풍부하나 비판력은 상대적으로 약한 그것이다. 마크 트웨인은 왕왕 미국의 가장 위대한 유모어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풍자적 기질을 띠고 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시대의 민감한 기록자였고 우수한 소설가였다. 마크 트웨인의 유명한 작품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기≫이다. 이 소설은 표면상으로 소설 ≪톰소여의 모험기≫와 같이 사람들을 흡인하는 아동물이지만 실제상으로 남북 전쟁 이전의 썩어빠진 남방의 문명을 비판한 것이다. 미국 사람들로 놓고 말할 때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기≫는 처음으로 미국의 순수한 관습 용어로 쓴 중요한 작품이다. 미국의 대작가 헤밍웨이는 미국에서의 현대 문학은 이 책을 기점으로 해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서 자본주의가 독점 단계로 진입함에 따라 유럽과 아메리카의 문학에도 상응한 변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하나는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이 성숙된 사상과 풍격으로 이 시기 유럽과 아메리카 문학의 주요 무대를 차지한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부 새로운 문학 유파와 문학 경향이 자본주의 사회에 불만하면서도 반항할 힘이 없어 고민하는 정서를 반영하였다. 이 문학 유파와 문학 경향의 공통적 특점은 자본주의의 근대 문명을 의 심하고 혐오하며 자연을 갈망하거나 또는 예술 형식상의 탐색에 만족하는 그것이다. 이런 유파와 경향 가운데서 상징주의 문학이 유럽과 아케리카의 현대 문학의 발생과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보들레르(1821~1867년)는 상징주의 시가 유파 중의 가장 중요한 시인이며 또 유럽과 아메리카의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이다.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 가운데는 부패한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가지 추악성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시인 보들레르는 울적하며 자아적인 분개, 심지어 변태적인 심리로 이상과 광명을 추구하였다. 보들레르가 창작한 작품들은 자산 계급의 전통적인 도덕과 전통적인 미학 관념을 맹렬히 공격하여 아주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리끼는 보들레르를 ≪진리의 정의를 추구하려는 염원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라고 평가하면서 그를 ≪사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면서도 선량을 열애하였다≫고 하였다. 오늘날에도 보들레르는 19세기 프랑스의 유고와 그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는 대시인으로 인정받고있다. 보들레르를 대표자로 한 상징주의 문학은 자산 계급 전통적 문화에 대한 배반과 예술 수법상의 창신으로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자산 계급 근대 문학을 현대 문학에로 이행시키는 교량으로 되었다.





근대 음악과 회화의 발전
유럽과 아메리카의 근대 음악과 회화의 발전도 근대 문학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대체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실주의 단계를 거쳤다. 회화 중의 고전주의,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도그 예술 특징과 예술 풍격으로 보아 대체적으로 문학의 각종 유파들과 비슷하다.
17세기 이전에 유럽의 음악은 주로 기독교 음악이었다. 자본주의가 발전된 후 유럽 음악은 문예 부흥의 영향을 받아 세속적 성분이 점차 증가되었기에 일부 걸출한 음악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유럽 음악사에서 처음으로 시대를 구분시켜 놓은 중요한 작곡가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1685~1750년)이다. 그도 모든 순박한 독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전에 충실한 기독교 신도였으며, 근면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궁정 음악장이었다. 그러나 바하가 죽은 후 100년이 되어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가 남긴 500여 부의 음악 작품들 가운데서 그의 천재적 기능과 열정적인 사상, 음악사에서의 불후의 지위를 발견하게 되었다. 바하 음악의 힘은 음악의 선율과 곡조를 그처럼 화려하고 완미하게, 마치 채색 구름이 하늘 공중에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며 유동하는 것처럼 창조한데 있다. 바하는 그의 뛰어난 세속 음악과 음악 기교에 대한 공헌으로 유럽 고전 음악의 선구자로 되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1756~1791년)는 오스트리아의 천재적 작곡가이며 유럽 고전 음악 시기의 가장 걸출한 음악가의 한 사람이다. 모짜르트는 6세 때 벌써 음악 ≪신동≫이라는 성스러운 영예를 지니게 되었다. 35년이라는 짧고도 빛나는 생애에서 그는 인류를 위하여 600여 부의 아름답고 우아한 음악 작품을 내놓았다. 모짜르트가 쓴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가극 ≪피가로의 결혼≫ 등이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이름난 것은 절필명작 ≪진혼곡≫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모짜르트가 병중에 있을 때한 신비한 낯모를 사람이 그를 찾아와 장례에 쓸 ≪진혼곡≫을 창작하여 달라고 하였다 한다. 모짜르트는 필생의 힘을 다하여 이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다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를 방문왔던 사람들이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이 걸작의 완성된 부분을 노래로 부를 때 모짜르트는 총총히 인간 세상을 떠나갔다. 모짜르트의 작품은 참신하고 유창하며 반귀족적 경향과 이상을 추구하는 색채로 충만되어 있어 인류 예술 보물고에서 독특한 주목을 끄는 명곡으로 되었다. 18세기 말엽에 음악 세계에서는 진정한 위인이 나타났다. 그가 바로 근대사에서의 위대한 음악가 루드비히 베에토벤(1770~1827년)이다. 베에토벤은 어릴 때 계몽 운동의 영향과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깊이 받았기에 일생 동안 자유와 이상을 추구하였다. 그의 작품은 유럽 고전 음악의 최고봉으로서 감정이 풍부하고 곡조가 웅위롭고 기백이 있으며 선율이 아름답고 우아하며 유창하다. 베에토벤의 일생은 좌절로 충만되어 있다. 창작 사업이 성황을 이를 때 두 귀가 막혔고, 생활에서도 여러 차례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운명의 인후를 틀어쥐고≫ 운명에도 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창작한 유명한 작품 ≪운명 교향곡≫(≪제5교향곡≫), ≪전원 교향곡≫(≪제6교향곡≫)과 ≪합창교향곡≫(≪재9교향곡≫)은 일생 동안권력과 부귀를 멸시하고 인류를 열애한 그이 숭고한 이상을 표현한 것이다. 지금도 베에토벤의 이름은 조예가 절정에 오른 고전 음악을 대표할뿐만 아니라 일종 숭고한 이상과 그에 대한 추구의 상징으로 되고 있다. 그 어떤 의의에서 말하든지간에 베에토벤은 영원히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진실한 벗일 것이다.
음악사에서 베에토벤은 고전 음악 시대의 종말과 낭만주의 음악의 흥성을 대표한다. 낭만주의 음악은 소위 장엄하다고 일컫는 고전주의 음악의 규율을 타파하고 자유 분방하고 풍부한 환상의 색채를 띠는 면으로 기울어졌다. 낭만주의 음악은 19세기 유럽 음악의 주류로서 세계를 위하여 수많은 걸출한 음악가들을 배출하여 놓았다. 낭만주의 음악가들 가운데서 폴란드의 작곡가 쇼팽 (1810~1849년)은 첫손 꼽히는 천재적 인물이다. 쇼팽의 작품들은 섬세하고 단아하여 악곡 또한 우아하고 서정적이어서 시적 뜻으로 충만되어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빠리에 거주하고 있을 때 쇼팽이 조국 산천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민족 독립에 대한 절절한 희망을 자기의 음악 속에 깊이 침투시켜 놓음으로써 음악으로 하여금 특수한 감인력을 가지게 한 그것이다. 쇼팽의 피아노 연주와 피아노곡에 대한 공헌은 그후 서방 음악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허다한 피아노 주명곡과 협주곡, 원무곡 등은 이미 모두 세계의 명곡으로 되었다.
19세기 러시아 문화의 전례없는 발전으로 하여 러시아에서도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나타났다. 차이코프스끼(1840~l893년)는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서 그 명예가 10세기 후반기의 세계 악단을 떨쳤다. 차이코프스끼는 러시아 민족을 열애하고 광명과 자유를 열애하였으며, 일생동안에 무수한 뛰어난 음악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차이코프스끼의 작품은 낭만주의를 기초로 하여 풍부하고도 드넓은 민족 정신으로 충만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강한 예술적 감동을 주고 있다. 세계의 명곡으로된 무극 ≪백조의 호수≫와 ≪슬픔의 교향곡≫은 바로 차이코프스끼라는 이 불멸의 이름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19세기 말에 낭만주의 문학의 격류 가운데서 일종의 새로운 음악 경향이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이 경향의 대표적 음악가는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1861~1918년)이다. 그의 작품은 의 미적으로 상징주의 시가와 비슷한 부드럽고 환상적이고 몽롱한 것 등 시적 감정과 그림과 같은 뜻으로 충만된 경지와 효과를 추구하여 음악 세계 중에 큰 파도를 일으켜 놓았다. 드뷔시는 유럽 음악사에서 중요한 작곡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창작은 20세기 현대 음악에로 통하는 대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17세기에 유럽의 회화는 문예 부흥의 전통을 계승하여 고대 그리이스, 로마의 작품을 전범으로 고전주의 시기에 들어섰다. 그러나 17세기의 고전주의 회화는 왕왕 화려하고 들뜬 것에만 치우치고 궁정과 봉건 귀족의 취미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18세기 말에 와서야 프랑스 화가 쟈크루이 다비드(1748~1825년)가 고전주의 회화를 높은 봉우리로 끌어올렸다. 다비드는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에 한 시기 이름난 화가였다. 그의 작품은 화풍이 엄격하고 기법이 원만하였다. 그의 대표 작품 ≪암살된 마라≫는 세계의 명화이며 또한 프랑스 대혁명 폭풍을 반영한 거울이었다.
19세기 초에 일어난 낭만주의 운동은 낭만주의 회화를 발생시켰다. 프랑스화가 드라크르와(1798~1863년)는 낭만주의 회화의 걸출한 대표자로서 ≪낭만주의의 사자≫로 불리었다. 드라크르와는 감정이 풍부하고 지식이 넓으며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작품은 자유에 대한 갈망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충만되었고, 또 그 기세가 웅장하여 노호하는 바다와 같았다. 그의 명작 ≪인민을 인도하는 자유의 여신≫은 왕권 복고를 반대하는 프랑스 인민의 투쟁 장면을 그려냈다. 화폭에는 한 아름다운 자유의 여신이 공화 제도를 대표하는 삼색기를 높이 들고 인민을 인도하여 용감히 전진하는 장면이 나타나 있다.
19세기 중기에 사실주의 문학의 영향하에서 사실주의적 회화도 흥성하기 시작하였다. 1855년에 프랑스 화가 꾸르베(1819년~1877년)는 사실주의 회화의 큰 깃발을 추켜들었다. 당시 꾸르베의 작품을 정부에서 주최한 전람회에 보냈는데 거절당하였다. 화가 꾸르베는 전람회장 옆에 초막을 지어놓고 개인 창작 작품 전람회를 열었다. 초막 앞에 ≪사실주의자, ․꾸르베, 그는 40건의 작품을 전람시킨다≫고 써놓았다. 꾸르베는 자기의 작품에 뙤약볕 아래에서 남루한 의복을 걸친 노동자들을 그려놓고 노동의 아름다움과 그 힘을 찬송하였다. 187l년에 꾸르베는 타리 꼼뮨 봉기에 열정적으로 참가하여 꼼뮨 교육 위원, 예술 책임자로 되었다. 그의 혁명 열정과 예술 성과는 모두 세계 미술사에 찬란한 빛을 더해 주었다. 19세기 말에 과학의 진보로 하여 예술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근대 과학의 성과를 토대로 하여 인상파 회화가 프랑스에서 발생하였다. 1874년에 청년 화가들이 만든 회화 전시회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새로운 뜻이 풍부한 그들의 작품을 인상파라고 하였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기의 성실한 예술 실천을 통하여 회화의 기교법을 혁신하였다. 그들은 대자연의 풍부하고도 미묘한 광선과 색채의 변화를 진실하게 표현함으로써 순간적인 감상을 토로하였다. 인상파들의 회화는 근대 유럽 회화사에서의 한 봉우리로서 지금도 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9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더욱 새로운 화풍이 나타났는데 예술사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를 후기 인상파 회화라고 한다. 후기 인상파 회화는 대상 묘사에 충실한 유럽회화의 전통에만 그치지 않고 강렬한 주관적 색채로 사물을 표현함으로써 회화 영역에서 한 차례의 혁명을 일으켰다. 프랑스 화가 세잔(l839~1906년)은 후기 인상파의 가장 중요한 화가의 한 사람이다. 세잔의 주요한 작품으로는 약간의 정물화가 있는데 그림 속의 정물들은 그 결구가 명확하고 체와 면이 풍부한 운율과 주관적 정서로 충만되어 있었다. 세잔은 ≪현대 화가의 아버지≫로 불린다. 후기 인상파 회화는 유럽, 아메리카의 현대 회화에 기초를 닦아주었고 미술사에서 극히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있다.







현대편







제1장 위대한 사회주의 10월 혁명


제1절 위대한 사회주의 10월 혁명

사회주의 혁명 노선의 제정
제1차 세계 대전은 러시아 인민들에게 비할 바 없는 심한 재난을 갖다 주었고 국내의 계급 모순을 격화시켰다. 제국주의 전쟁은 수백만 명의 생명을 빼앗아가고 러시아의 국민 경제를 파괴한 동시에 전부의 자원을 거의 다 소모해 버렸다. 광대한 토지가 황폐해지고 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았으며 물가가 폭등하였다. 그리하여 광범한 근로 인민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게되었다. 전쟁은 인민들을 교양하였으며 전쟁은 혁명을 야기시켰다.
1917년 3월(러시아 역서로 2월)에 노동자와 병사들이 볼셰비끼당의 영도 밑에 무장 봉기를 일으켜 짜르 전제 제도를 전복하고 노동자 - 병사 대표소비에트를 건립하였다. 소비에트는 혁명적 신정권의 맹아였다. 그러나 그때 볼셰비끼의 대부분 지도자들이 아직 감옥이나 유형지에 있었고 광범한 노농 대중들도 정치적 경험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소비에트의 영도권은 멘셰비끼와 사회혁명당원들에게 장악되었다. 그들은 소비에트로 하여금 자산 계급 입시 정부의 건립을 지지하게 하였다. 자산 계급과 지주의 이익을 대표한 임시 정부는 인민들에게 평화와 빵 및 토지를 근본적으로 줄 수 없었다. 이 임시 정부는 죄악적인 제국주의 전쟁을 계속 진행하면서 광범한 근로 인민들을 노예처럼 부렸으며 백방으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소멸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런 정황에 직면한 볼셰비끼당은 새로운 혁명 노선을 제정할 것을 절박히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전 당과 전체 근로 인민들은 위대한 지도자 레닌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1917년 4월 16일에 레닌은 장기간의 망명 생활을 끝마치고 빼뜨로그라드로 돌아왔다. 수천만의 노동자, 병사 및 혁명적 대중들이 앞을 다투어 정거장으로 달려나가 자기들의 흠모하는 수령을 환영하였다. 레닌이 환영 군중들 앞에 나타나자 우뢰와 같은 환호 소리가 울려퍼졌다. 레닌은 장갑차 위에 올라서서 인민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쟁취할 것을 호소하는 간단하고도 힘있는 연설을 하였다.
이튿날 레닌은 볼셰비끼의 회의에서 ≪이번 혁명에서의 무산 계급의 제 과업에 대하여≫란 보고를 하였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4월 테제]였다. 레닌은 이 테제에서 당시의 러시아의 특징은 혁명의 제1단계로부터 제2단계에로의 이행, 즉 자산 계급 민주주의 혁명으로부터 무산 계급사회주의 혁명에로의 이행인 만큼 제1단계에서 자산 계급에게 장악되었던 정권을 제2단계에서는 무산 계급과 농민의 수중에 넘겨줘야 한다고 심각히 지적하였다. 레닌은 이 테제에서 또 자산 계급 임시 정부가 계속하는 전쟁은 여전히 약탈적인 제국주의 전쟁으로서 이 전쟁에서 벗어나려면 오직 사회주의 혁명을 진행하여 자산 계급의 통치를 전복해야만 한다고 지적하였다. [4월 테제]는 볼셰비끼당에 자산 계급 민주주의 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 혁명에로 이행하는 노선을 명확히 규정해 주었고 혁명 발전의 전도를 밝혀 주었다.
볼셰비끼당이 혁명을 한창 준비하고 있을 때 임시 정부는 7월 1일에 전선에서 독일, 오스트리아를 공격함으로써 전쟁으로 혁명을 소멸하려고 망상하였다. 이 모험적인 공격은 참패를 당하여 10일 동안에 러시아군 6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전선에서 공격을 시작했다는 소식과 그 공격에서 실패했다는 소식이 뻬뜨로그라드에 전해지자 노동자와 병사들은 치솟는 분노를 더는 억제할 수 없어 7월 16일에 거리로 뛰쳐나가 시위를 단행하여 모든 정권을 소비에트에 넘길 것을 요구하였다. 임시 정부가 군대를 풀어 시위 군중을 탄압하였기에 400여 명이 죽고 부상당하였다. 뻬뜨로그라드의 거리는 혁명적 대중들의 붉은 피로 물들었다. 이 학살을 통하여 인민들은 혁명적 폭력으로 반혁명적 폭력을 반대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더는 없다는 것을 가일층 인식하게 되었다.





볼셰비끼당의 무장 봉기를 위한 준비
7월 유혈 사건의 뒤를 이어 임시 정부는 전면적인 공격을 전개하여 볼셰비끼당의 지도 일꾼들을 대대적으로 수색, 체포한 동시에 레닌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볼셰비끼당은 지하로 잠입한 동시에 자기의 지도자 레닌을 수도로부터 격리시켰다. 레닌은 처음에 뻬뜨로그라드에서 멀지 알은 라즐리브 호수가의 초막에 있다가 9월 초에 또 핀란드로 피신하였다.
8월 8일부터 16일까지 볼셰비끼당은 비밀리에 제6차 대표 대회를 소집하였다 레닌은 임시 정부의 특무가 뒤를 따랐기 때문에 대회에 출석할 수 없었다. 스탈린(1879~1953년)이 레닌의 지시에 근거한 정치 보고를 하고 무장 봉기에 대한 방침을 제출하였다. 대회에서 채택한 결의에서는 당장의 무산 계급의 과업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자산 계급 독재를 소멸하고 국가의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당시 자산 계급 임시 정부는 나어린 소비에트를 없애 버리고 공개적으로 반혁명 정권을 건립하려고 시도하였다. 그자들은 러시아군 최고 총사령관인 코를니로프에게 희망을 걸었다. 9월 초순에 코를리로프는 반동군대를 전선으로부터 뻬뜨로그라드로 이동시킨 다음 혁명을 탄압하고 독재를 실시하려 준비하였다. 볼셰비끼당은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무장으로 저항할 것을 호소하였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수도로 통하는 각 교통요지를 차지하고 반동 군대를 성공적으로 와해시켰으며 코를니로프의 음모를 분쇄하였다. 이로부터 볼셰비끼당은 노동자, 농민 및 병사들 속에서 위망이 아주 높아졌고 각지의 소비에트 내에서의 영향도 신속히 커지게 되었다.
9월과 10월에 러시아 인민들은 드높은 혁명의 물결을 일으켰다. 여러 갈래의 혁명 역량은 볼셰비끼당의 영도 밑에 막아낼 수 없는 혁명의 세찬 물결을 이루었다. 봉기의 시기는 성숙되었다. 혁명을. 더 잘 영도하기 위하여 레닌은 10월에 비밀리에 뻬뜨로그라드로 돌아왔다. 10월 23일에 볼셰비끼당 중앙은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회의를 소집하고 레닌이 제출한 최근 기간에 무장 봉기를 일으키는 데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뻬뜨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 위원회는 당중앙의 결의에 근거하여 무장 봉기를 영도하는 공개적인 기구-군사 혁명 위원회를 건립하였다. 얼마 후에 당중앙 확대 회의에서 스탈린, 쓰베르들로프(1885~1919년), 체르닌스끼(1877~1926년) 등 5명으로 구성된 봉기를 영도할 당지도부를 선출하였다. 지노비예프(1883~1936년)와 까메네프(l883~1936년)는 두 차례의 회의에서 다 봉기를 반대하여 발언하였다. 그들은 반박을 당한 후 멘세비끼의 신문 ≪신생활≫(≪노바야쥐즈니≫지)에다 무장 봉기에관한 결의를 동의하지 않는다는 저들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것에 관한 당중앙의 비밀을 적들에게 누설한 것과 같았다. 레닌은 이자들의 변절 행위에 대하여 몹시 분개하면서 규탄하였다.





뻬뜨로그라드 무장 봉기의 승리
임시 정부는 무장 봉기를 일으킨다는 소식을 들은 후 즉시 반혁명 역량을 긁어모아 가지고 혁명을 탄압하였다. 11월 6일 임시 정부는 볼셰비끼당의 기관지 ≪노동자의 길≫(≪라보치뿌치≫지)을 폐간하고 당중앙 소재지 - 스몰늬 궁전을 점령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런 위기 일발의 시각에 레닌은 6일 밤에 중앙 위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강조하여 지적하였다. ≪정세는 극히 위급합니다. 더 말할 나위 없이 지금 봉기를 지체하는 것은 사멸과 같습니다.≫ 레닌의 이 지시에 근거하여 당중앙은 봉기를 앞당기기로 결정하였다.
11월 6일 밤에 레닌은 봉기 총지휘부 - 스몰늬 궁전에 와서 봉기를 직접 영도하였다. 그날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20만 명의 적위대, 혁명적 병사 및 수병들은 뻬뜨로그라드의 주요한 교량, 정거장, 체신국, 국가은행 및 정부기관 등 전략적 요지들을 신속히 점령하였다. 11월 7일 (러시아 역서로 10월 25일)오전에 군사 혁명 위원회는 레닌이 쓴 ≪러시아 공민들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발표하여 임시 정부가 이미 전복되고 정권이 소비에트의 수중으로 넘어왔다는 것을 선포하였다. 이날 오전에 임시정부의 우두머리 케렌스끼는 미국 대사관의 자동차를 타고 몰래 수도를 떠났다. 그는 시교구에 가서 반혁명 군대를 긁어모아 가지고 다시 덮쳐들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저녁 때까지 아직 함락되지 않고 남아 있은 것은 임시 정부의 소굴인 동궁뿐이었다. 군사 혁명 위원회는 이미 두번이나 임시 정부에 최후 통첩을 내어 즉시 무장을 풀고 투항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적들은 계속 완고하게 저항하였다. 9시 좀 넘어 네바강에 정박하고 있던 ≪아브로라≫호 순양함이 대포를 쏘아 공격의 신호를 울렸다. 대포 소리에 따라 노동자 적위대와 병사들은 우뢰와 같은 ≪우라(만세 !)≫의 함성 속에서 바리케이드를 하나하나 뛰어넘어 신속하고도 용맹스럽게 동궁으로 돌진하여 동궁 안의 이 칸 저 칸에서, 층층계에서 사관학교 학생(군사 학교 학생)들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여 밤중에 끝내 동궁을 함락하였다. 동궁에 숨어 있던 임시 정부의 성원들은 몽땅 붙잡혔다.
뻬뜨로그라드의 무장 봉기가 승리한 후 모스크바와 기타 일부 도시들에서도 연이어 봉기가 일어났다. 혁명의 세찬 불길은 재빨리 러시아의 각지를 휩쌌다. 이리하여 1918년 2월에 소비에트 정권이 전국적 범위에서 건립되었다.





무산 계급 독재 국가의 건립
혁명이 승리적으로 진척되고 있는 가운데서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표 대회가 11월 7일 밤에 개막되었다. 대회에서는 우선 레닌이 쓴 ≪노동자, 병사 및 농민들에게 고함!≫이란격문을 채택하고 각지의 모든 정권을 일률로 노동자-병사-농민 대표소비에트에 넘긴다는 것을 선포하였다. 이튿날 대회에서는 ≪평화법령≫과 ≪토지법령≫을 채택하였다. ≪평화법령≫은 제국주의 전쟁에 의하여 지칠대로 지치고 고통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광범한 근호 인민들의 절박한 염원을 반영하였으며 모든 교전 국가는 즉시 담판을 진행하여 땅을 떼어주지 않고 배상금을 바치지 않는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데 대하여 건의하였다. ≪토지법령≫은 즉시 지주 토지 소유제를 폐지하고 전부의 토지를 국유로 돌리며 토지를 근로 농민들에게 주어 사용하게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대표 대회예서 세계 첫 노-농 소비에트 정부 즉 인민 위원회가 건립되었다. 무산 계급의 위대한 스승인 레닌이 주석으로 당선되었다. 인민들은 나라의 영도권을 볼셰비끼당에 위탁하였다. 볼셰비끼는 10월 혁명이 승리한 후 가일층 자산 계급의 낡은 국가기구를 짓부시고 무산 계급의 새로운 국가 기구를 건립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임시 정부의 각 부문, 낡은 법원과 낡은 경찰들을 취소하고 인민 위원회의 각 부문, 인민 법원과 노동자 인민 경찰을 건립하였다. 반혁명 분자 및 태업 행위와 투쟁하기 위하여 전 러시아 반혁명 숙청위원회를 건립하였다. 군대는 국가 기구의 중요한 구성 부문이다. 낡은 군대는 복원하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노농 홍군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경제 방면에서 자본주의 경제 세력을 분쇄하고 새로운 사회주의의 인민 경제를 조직하기 위하여 소비에트 정권은 은행, 철도, 대공업을 국유로 하는 동시에 대외 무역을 독점하였다. 1918년 초에 소비에트 정권은 짜르와 임시 정부가 빌어 쓴 모든 외국의 채무를 취소하였다. 소비에트인민들은 다시는 외국 자본가들의 착취를 받지 않게 되었다.






제2절 제국주의 무장 간섭과 국내 반혁명 반란을 반대한 소비에트 인민의 투쟁

외국의 무장 간섭과 국내 전쟁의 시작
10월 혁명이 승리한 후 러시아에서 전복당한 지주와 자산 계급은 국제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소비에트정권을 발광적으로 진공하였다.
북방에서는 영국, 프랑스, 미국 간섭군이 무르만스크와 아르항겔스크를 선후하여 침점하였고, 원동 지구에서는 일본, 영국, 미국 간섭군이 연이어 해삽위(블라디보스톡)에 상륙하였으며, 남방에서는 영국이 자깜까즈와 중앙 아시아에 침입하였다.
제국주의의 원조를 받은 반혁명 무장력은 많은 지구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북 깝까즈와 돈강 일대에는 짜르 장군 데니긴과 끄라스노프의 반란이 있었고, 볼가강 중류와 시베리아 일대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이군단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에서 복무하던 체코인과 슬로베니아인으로 구성되었는데 대전 중 러시아의 포로가 되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그들이시베리아와 원동을 거쳐 유업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가던 도중 영국,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사주 밑에 반란을 일으켰다. )의 반란이 있었다. 이밖에 독일 제국주의 도 우크라이나, 백러시아와 발틱해 연안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후방에서는 반혁명 분자들의 활동이 매우 창궐하였다. 그들은 모스크바, 야로슬라브 등 많은 도시들에서 암살과 반란을 책동하였다. 1918년 8월에 시회혁명당 반혁명 분자들이 독약이 묻은 탄알로 근로 인민들의 경애하는 지도자 레닌을 쏘아 부상을 입혔다.
적들이 사면 팔방으로부터 덮쳐들었기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극히 곤란에 봉착하였다. 4분의 3의 국토가 적에게 점령되었고, 많은 공장들이 원료와 연료가 부족하여 할 수 없이 문을 닫았으며, 인민들은 굶주렸다. 뻬뜨로그라드의 노동자들은 가장 곤란할 때 빵을 매일 8분의 1파운밖에 먹지 못하였다. 그러나 노동 계급은 곤란에 굴하지 알았고 공산당(1918년3월에 소집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끼≫ 제7차 대표 대회에서는 당의 명칭을 ≪러시아 공산당≪볼셰비끼≫≫로 개칭할 결의를 채택하였다.)의 호소를 받들고 전선으로 나가 국내외의 원수들과 영용하게 싸웠다. 소비에트 정부는 극히 어려운 조건에서 적을 이겨내기 위하여 전시공산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국가에서는 규모가 큰 공업뿐만 아니라 중소형의 공업까지 국가소유로 하였으며, 여유 양곡 징수 제도를 실시하여 농민들의 여유 양곡을 모두 국가에서 수매하였으며, 자유 무역을 취소하고 일용 공업품과 식량을 국가에서 통일적으로 근로자들에게 공급하였다. 전시 공산주의 정책은 소비에트 러시아로 하여금 전국의 재력과 물력을 집중하여 적을 타파하는 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하였다. 1918년 하반기에 동부 전선의 붉은 군대는 적을 우랄 지역에까지 물리쳤고, 남부 전선의 붉은 군대는 짜리진(1925년부터 1961년까지는 스탈린그라드라 불리웠고 1961년에는 볼가그라드로 개칭되었다. )에 대한 끄라스노프의 두 차례의 공격을 물리치고 이 전략 거점을 보전하였다. 러시아 중부의 많은 도시들에서 적들이 일으킨 반란도 박멸되었다.





협상국의 세 차례의 진공과 그 실패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협상국 제국주의자들은 독일과 싸우던 많은 병력을 끌어다가 소비에트 국가를 반대하였다. 그들은 불과 2년(1919~1920년) 동안에 대규모적인 무장간섭을 연속 세 차례나 진행하였다.
1919년은 소비에트 인민들이 국내외에 반혁명 분자들과 생사를 가리는 싸움을 한 한 해였다. 이해 봄은 전 짜르의 해군 장군이었던 꼴차크가 협상국이 무장시킨 40여만의 백위군을 거느리고 길이 2000키로미터나 되는 동부 전선에서 공격하였으며, 그후 우랄 산맥을 넘어 볼가강 지구에 덮쳐들었다. 공산당은 ≪모든 것은 동부 전선을 위하여≫라는 전투적 구호를 제시하였다. 당, 단원과 광범한 근로 인민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앞을 다투어 전선으로 나갔다. 후방에서는 노동 계급이 자기 희생적인 노동으로 전선을 지원하였다. 1919년 4월에 모스크바-까잔 철도의 한 기관고 노동자들이 토요일의 의 무 노동을 발기하였다. 레닌은 공산주의 맹아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이 신생 사물을 ≪위대한 발기≫라고 하면서 열정적으로 찬양하였다. 1919년 4월에 붉은 군대가 반격으로 넘어갔다. 꼴차크의 군대는 궤멸당하였다. 1920년 초에 꼴차크 자신도 생포되어 총살당하였다.
그러나 협상국은 실패를 달가와하지 않고 1919년 하반기에 제2차 공격을 진행하였다. 그 주력은 남방의 데니낀 부대였다. 제국주의는 이번 공격으로 소비에트 정권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망상하면서 군사적으로 데니낀을 대대적으로 원조하였다. 데니낀 반동군은 남에서 북으로 진격하여 10월에 오롤을 점령하고 붉은 군대의 탄약, 무기의 공급지인 뚤라에 박두하고 있었으며 또 모스크바를 직접 위협하였다. 그러나 영용한 붉은 군대는 적의 진공을 막아냈을 뿐 아니라 또 신속히 반격에로 넘어가 데니낀 반동군을 격파하고 1920년 초에 우크라이나의 전부와 북 깝까즈를 수복하였다.
1920년에 협상국은 또 폴란드 자산 계급-지주 정부를 이용하고 데니낀의 패잔군과 크림에 등지를 튼 우랑겔 부대를 긁어모아 가지고 제3차공격을 발동하였다. 4월에 폴란드 군대가 우크라이나에 침입하였고 그 뒤를 따라 우랑겔이 크림 반도로부터 북으로 진격하였다. 전투의 시련을 거친 붉은 군대는 싸울수록 더 강해졌다. 붉은 군대는 폴란드의 공격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승승 장구로 폴란드에 쳐들어갔다. 10월에 소련, 폴란드 쌍방은 정전하였고, 이듬해 3월에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1920년 11월에 붉은 군대는 또 크림 반도로 밀고 나가 우랑겔의 군대를 분쇄하였다.
제국주의의 무장 간섭을 반대하고 국내의 반혁명 반란을 진압하는 가운데서 얻은 승리는 10월 혁명의 위대한 성과를 보위하였고, 세계에서의 첫 무산 계급 독재의 국가를 공고히 하였다. 소비에트 공화국이 국내외의 적들과 투쟁하는 간고한 나날에 각국의 무산 계급은 위대한 국제주의적 원조를 주었다. 무장 간섭에 참가한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등 국가의 진보적 노동자들은 ≪러시아에 간섭하지 말라!≫는 구호 밑에 행동위원회를 내걸고 기세 드높은 시위와 파업을 단행하였다. 그들은 군수품운송을 거절하였으며 또 러시아 반동들에게 무기를 운송하는 본국 정부의 선박들을 억류하였다. 중국 인민들도 일찍 러시아 무산 계급에게 형제적인 원조를 주었단 당시 러시아에 거주한 수많은 중국 노동자들은 러시아 인민들과 함께 10월 혁명에 참가하였다. 국내 전쟁 기간에 약4~5만 명의 중국 노동자들이 자원하여 붉은 군대에 참가하여 러시아노동자들과 어깨 걸고 자기들의 붉은 피로 10월 혁명의 승리의 성과를 보위하였다.





위대한 10월 혁명 승리의 역사적 의의
혁명의 위대한 스승인 레닌이 영도한 10월 혁명은 인류 역사에 새 기원을 열어놓았다.
10월 혁명은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사회주의 혁명이다. 과거의 모든 혁명은 한 착취 제도가 다른 착취 제도를 교체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10월 혁명은 근본적으로는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제도를 소멸시켰고 착취 계급을 소멸시켰다.
10월 혁명은 세계 제국주의 전선을 돌파하고 자본주의 대국 내부에서 자산 계급 통치를 뒤엎고 무산 계급 독재의 국가를 창건하였다. 10월 혁명은 국제 무산 계급의 빛나는 본보기로 되었으며, 국제 무산 계급의 혁명 투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10월 혁명은 세계 무산 계급 혁명의 새시대를 열어놓았다.
10원 혁명은 제국주의 통치의 중심을 타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의 후방을 뒤흔들어 놓았으며, 식민지, 반식민지 인민들의 혁명 투쟁을 고무하였으며, 피압박 민족 혁명의 새 시대를 열어놓았다. 10월 혁명의 승리는 무산 계급 혁명과 무산 계급 독재에 관한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설의 승리이다. 1917년 10월(러시아 역서)에 볼셰비끼당은 노동자와 병사들의 무장 봉기를 영도하여 정권을 탈취하였다. 잇달아 소비에트 국가는 또 3년 남짓한 혁명 전쟁에서 막대한 희생을 내면서 국내외 적들의 군사적 진공을 물리치고서야 비로소 혁명의 승리를 공고히 하였다. 그러므로 10월 혁명의 길은 무산 계급이 폭력적 혁명을 거쳐 정권을 탈취한 길이며 전 세계 무산 계급과 근로 인민들이 해방을 얻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향하여 승리적으로 전진하는 길이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4월 테제≫는 어떠한 역사적 조건 아래에서 제정되었는가? ≪4월 테제≫에는 어떤 중요한 내용들이 들어 있는가?
2. 볼셰비끼당 제6차 대표 대회에서 결정한 방침에 대하여 서술해 보자.
3. 소비에트 러시아의 무산 계급 독재 국가는 어떻게 창건되었는가?
4. 소비에트 인민들이 제국주의 무장 간섭을 반대한 경과를 간단히 서술해보자.
5. 10월 혁명의 길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제2장 제국주의의 베르사이유 - 워싱톤 체계






빠리 강화 회의
1918년 11월에 독일이 협상국의 정전 조건을 접수하였기에 제1차 제국주의 세계 대전이 종결되었다. 1919년 1월 18일, 전승한 협상국 집단은 빠리에서 강화 조약을 체결하는 회의를 열었다. 빠리 강화 회의에는 27개 국가가 참가하였는데, 소비에트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터어키, 불가리아 등 나라는 참가하지 않았다.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5대국은 모두 2명의 주요한 대표를 선출하여 최고 위원회를 구성하고 강화 회의 문제에 대하여 결정하였다. 그러나 실제 조종 작용을 한 것은 영국, 프랑스, 미국 세 개 제국주의 대국이었다. 3대국의 대표단은 각각 영국 수상 로이드 죠지(1863~1945년),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1841~1929년)와 미국 대통령 윌슨(1856~1924년)이 영도하였다.
타리 강화 회의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 세 제국주의 대국은 저마다 장물을 제일 많이 가지고 상대방을 극력 약화시키기 위하여 욕심사납게 자기의 의도에 따라 세계를 재분할하려고 시도하였다. 프랑스는 유럽대륙에서 자기의 패권자적 지위를 확립하기 위하여 경제, 정치, 군사면에서 독일을 약화시키려고 애썼다. 영국은 유럽에서의 ≪세력 균형≫을 보장하려는 자기의 전통적 정책에 따라 프랑스가 유럽에서 판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을 너무 지나치게 약화시키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또한 식민지를 계속 확대하고 자기의 해상 패권을 유지하려고 계산하였다. 미국은 전쟁 가운데서 380억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이윤을 얻어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미 제국주의 는 자기의 강대한 경제적 실력에 의지하여 전 세계를 통치하려는 야심을 실현하려 하였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빠리 강화 회의에서 이익 쟁탈을 위하여 서로 얼굴을 붉히며 아귀다툼을 하였으며 심지어 서로 회장에서 퇴장하는 것으로 상대방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5개월 남짓 치열한 아귀다툼을 한 끝에 빠리 강화 회의 는 1919년 6월 28일에야 비로소 빠리 근교에있는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대독 강화 조약, 즉 베르사이유 강화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조약은, 프랑스는 알사스, 로렌을 도로 찾으며, 자르탄광을 프랑스의 소유로 돌리고 15년간 채굴하게 하며, 자르 지역은 15년간 국제연맹의 관리에 넘겼다가 만기가 된 후 국민 투표에 의하여 그 소속을 결정한다고 규정하였다. (1935년 국민 투표의 압도적인 다수에 의하여 독일에 귀속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대전전 독일의 모든 해외 식민지는 영국, 프랑스, 일본, 벨기에 등 나라들에 ≪위임 통치≫의 형식으로 분할하였다. 조약은 중국이 전승국임에도 불구하고 산동성에서 독일이 원래 가졌던 모든 특권과 교주만 조차지를 전부 일본에 넘겨준다고 결정하였다. 중국 인민의 강렬한 반대가 있었고 또 반제․반봉건적인 5․4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북양 군벌 정부 대표단은 감히 강화조약에 서명하지 못하였다.
군사 문제에 대한 처리에서 협상국은 한 방면으로 독일의 군사력을 제한함으로써 그 위협에서 벗어나려 하였으며, 다른 한 면으로 독일국내의 혁명 역량을 탄압하기 위해서 독일에 상당한 병력을 남겨둘 것이 요구되었다. 때문에 강화 조약은 독일의 보편적 의무병역제 실시를 금지하였지만 독일에 10만 육군을 남겨 두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밖에 라인강 서안 지구는 협상국 군대가 15년간 점령하기로 하고 동안의 50키로미터 이내의 구역에 방어 시설을 구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배상금문제에 대하여 강화 조약은 배상금 위원회에서 1921년 5월 1일 전으로 확정하기로 하고 그전에 독일은 먼저 금화로 200억 마르크를 배상하여야한다고 규정하였다.
전승국은 독일과 베르사이유 강화 조약을 체결한 외에도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헝가리, 터어키와 각각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강화조약과 베르사이유 강화 조약을 1919년~1920년의 빠리 강화 조약이라고 통칭한다.
제국주의자들은 빠리 강화 회의에서 장물을 나누어 가진 외에 또 서로 결탁하여 공동으로 소련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유럽, 아메리카 각국의 무산 계급도 10월 혁명의 길로 나아갈까 봐 몹시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새로 탄생한 소비에트 정권을 압살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깼다. 협상국 제국주의 국가들은 서로 획책한 끝에 소련을 경제적으로 봉쇄할 것을 결정하고 무장 간섭 계획을 제정하였다. 그러므로 빠리 강화회의는 기실 반소 전쟁을 지휘하는 사령부였다.





대전 후에 새로 일어선 나라들
제1차 세계 대전에 의하여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터어키 4대 제국이 힘을 잃었고 일부 새로운 민족 국가들이 일어섰다.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핀란드, 에스토니아, 아트비아와 리투아니아가 러시아에서 이탈하여 독립을 선포하고, 18세기에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 해 분할되었던 폴란드도 이때부터 나라를 회복하였다.
빠리 강화 조약의 규정에 근거하여 대다수 유럽 국가의 영토가 기본상 민족을 기초로 하여 다시 확정되었다. 독일은 모든 비게르만인의 지구를 잃었고 단직(단찌히)(단직은 오늘의 그단스크이다)는 ≪자유시≫에서 벗어나 폴란드의 항구로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경내의 게르만인과 헝가리인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두 나라로 갈라지게 되었고, 체스꼬(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의 지구에는 새로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나타나게 되었고, 유고슬라비아인의 지구와 세르비아 왕국이 합하여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으로 되었다가 1929년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이라고 개칭하였다. 이탈리아의 영토는 아드리아해 북안으로 늘어났고 그리이스 영토도 에게해 방면으로 발전하였다. 터어키 제국이 와해된 후 유럽 방면의 이스탐불과 아시아 방면의 소아시아만이 단일한민족 국가로 되었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의 빠리 강화 조약은 1815년의 비인 조약에서 승인하지 못하였던 민족 자결의 권리를 많은 정도로 승인하였다.





국제 연맹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에 미국 대통령 월슨이 전쟁 후에 하나의 국제 기구를 건립할 것을 주장하면서 그 목적은 침략을 제재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14가지 평화 계획에는 국제 연맹을 건립하는 것에 관한 건의 가 들어 있었다. 국제 연맹 맹약은 빠리 강화회의에서 제정 채택하여 베르사이유 강화 조약의 제1부에 넣었다. 각국이 강화 조약에 서명한 후 1920년 1월에 제네바에서 국제 연맹이 정식으로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40여 개 나라가 가입하였는데 후에 점차 60여 개 나라로 늘어났다.
국제연맹 맹약에는 국제 연맹의 목적은 국제간의 합작을 촉진하고 세계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 것이며, 무릇 국제연맹 성원국의 어느 한나라에 대하여 전쟁을 진행한다면 국제 연맹의 모든 성원들에 대한 전쟁행위로 인정하고 국제 연맹에서는 경제적 제재와 심지어 군사적 제재를 가한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나 결의는 회의에 참가한 전체 성원국의 동의가 있어야만 성립될 수 있었으므로 침략을 제재한다는 것은 빈 말에 불과한 것이었다.
맹약에는 또 식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위임 통치 제도가 규정되었다. 이런 제도에 따라 국제 연맹은 독일의 식민지와 중동에 있는 터어키의 영토를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에 각각 위임시켜 통치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위임 통치 제도는 사실상에서 제국주의 가 식민지를 재분할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다른 한 방면에서 열강들은 이러한 식민지와 영토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위탁을 받고 관리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 연정을 건립하는 것에 관한 주장은 미국이 먼저 제출하였다. 미국은 ≪평화를 수호≫한다는 간판을 들고 민심을 농락하고 국제 연맹을 이용하여 다른 나라를 통제하는 것으로 세계를 쥐고 흔들려는 자기의 야심을 실현하려 하였다.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강렬한 반대로 하여 미 제국주의의 야심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미국은 후에 와서 국제 연맹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어 국제연맹은 건립되면서부터 영국과 프랑스에 의하여 조종되었다.





워싱톤 회의
빠리 강화 조약은 주로 서방에서의 제국주의 간의 관계를 잠시적으로 조절하였다. 극동과 태평양 지구에서 제국주의 열강간의 첨예한 모순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일본과 미국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 나라가 유럽과 근동 전쟁에 전념하고,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의 시장 점령에 전념하는 기회를 틈타 일본은 중국 및 태평양 지구에 대한침략을 강화하였다. 빠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은 중국에서의 많은 이익을 얻었으며 태평양에서 독일의 중요한 도서들에 대한 위임 통치권을 얻었다. 일본의 경제력과 정치력은 현저하게 늘어났으므로 미국 통치 집단은 불안을 느꼈다. 1920년에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시킨 파나마 운하가 정식으로 개통되자 미국의 중요한 항구와 중국 및 극동 지구간의 항해노정이 크게 단축되어 중국과 극동을 쟁탈하는 것이 미국의 대외 정책의 중요한 목표로 되었다.
전쟁 후 얼마 안 가서 미국, 일본, 영국은 패권을 쟁탈하기 위하여 군함 건조 경칭을 치열하게 벌였다. 1919년에 비준한 미국의 방대한 군함건조 계획에 의하면 1924년에 이르러 미국 함대를 세계에서 가장 큰 함대로 건설할 것이 예견되어 있었다. 물론 영국도 뒤지려 하지 않았다. 1921년 영국은 4척의 주력함 건조 계획을 채택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듬해에 거형의 전함 4척을 더 건조하기로 계획하였다. 일본도 11920년부터 11921년까지 국고 수입의 절반을 해군 군비로 지불하면서 미친 듯이 해군을 확장하였다. 이러한 정세 밑에서 미국은 해군 군비를 제한하고 극동과 태평양 지구에서의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익을 조절하는 문제를 토론하기 위하여 국제회의 소집을 제의하였다.
1921년 11월에 미국, 벨기에, 영국,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9개국 대표가 워싱톤에서 회의를 하였다. 회의에서는 미국이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워싱톤 회의의 의사 일정에는 비록 영국-일본 동맹 문제가 정식으로 들어 있지 않았지만 미국은 무엇보다도 영국-일본 동맹을 폐지하는 것을 우선적인 임무로 삼았다. 1902년에 일본과 영국이 동맹을 맺은 후 일본은 국제적으로 영국이 지지를 받아 점차 동부 아시아에서의 패권자로 되었고, 영국은 일본의 역량을 빌어 러시아와 독일을 견제하였다. 대전 후 국제 형세의 변화는 미국으로 하여금 영-일 두 나라의 동맹결성 정황을 급격히 변화시키게 하였다. 1921년 12월 13일에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4국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규정하기를 각 체약국은 태평양 도서 속지와 도서 영토에서의 권리를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또 조약의 유효를 비준한 이후부터 영-일 동맹의 무효를 선포한다고 하였다. 4국 조약은 보기 좋게 영-일 동맹을 매장해 버렸다.
워싱톤 회의는 3개월 동안이나 옥신각신 흥정을 한 끝에 1922년 2월6일에 (해군 군비 축소 조약)를 체결하여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5개국의 주력함(무릇 비항공모함의 군함으로서 그 배수량이 1만톤 이상이거나 포구의 직경이 8촌 이상인 대포를 실은 군함이면 주력함이라고 한다.)비례를 5 : 5 : 3 : 1.75 : 1.75로 규정하였다. 미국은 이때로부터 오랜 해군 강국인 영국과 동등한 해상 통제권을 가지게 되었다. 워싱톤 회의에서 극동에 대한 패권 쟁탈의 가장 중요한 대상은 중국이었다. 회의에서 중국 대표는 산동 문제에 관한 베르사이유 강화 조약의 조항들을 취소하며 일본으로 하여금 ≪21개 조≫를 포기하게 할 것 등의 요구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기정 사실이거나 개별적인 나라에 속하는 문제는 회의에서 토론하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를 제출하였으므로 워싱톤 회의에서는 중국 문제에서 일반적인 원칙 문제만 토론하고 구체적 문제는 중, 일 대표들이 회의 밖에서 ≪직접 교섭≫하도록 하며, 영, 미 대표가 ≪조정자≫의 신분으로 참가하게 하였다 미국과 영국도 일본의 세력 확장을 제지시키기 위하여 일본의 중국 독점 야심을 반대하였다. 미국과 영국의 압력으로 하여, 더욱 주요하게는 세차게 일어난 중국인민의 반일 투쟁으로 하여 1922년 2월 4일에 일본은 할 수 없이 중국과 협정을 체결하고 교주만을 중국에 돌릴 것과 교제 철도를 중국에서 돈을 내고 회수할 것을 규정하였다.
1922년 2월 6일, 회의에 참가한 9개국 대표들은 ≪중국의 사건에 적용하여야 할 각 항 원칙과 정책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9개국 공약≫이라고 부른다. 9개국 공약은 명의 상으로는 ≪중국의 주권과 독립 및 영토와 행정의 완성을 존중한다≫고 하였지만 기실은 중국을 분할하여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한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협의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저들이 일괄적으로 실시해 은 ≪문호개방≫과 중국에 있는 여러 가지 상공업에 대한 ≪기회 균등≫의 침략적 원칙을 들고 나와 일본제국주의 가 제1차 세계 대전 가운데서 중국을 잠시 독점하게 된 국세를 깨뜨리려 하였다. 바로 모택동 동지가 지적한 바와 같이 ≪1922년에 미국이 소집한 워싱톤 9개국 회의에서 체결된 공약에 의 하여 중국은 또다시 몇 개 제국주의 국가들이 공동으로 지배하는 국면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워싱톤 회의는 빠리 강회회의의 계속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대전 후 극동과 태평양 지구에서의 제국주의의 통치 질서를 확정하였으며, 따라서 대전 후 제국주의가 세계를 재분할하는 이른바 ≪베르사이유-워싱톤 체계≫를 완성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베르사이유 강화 조약의 주요한 규정들을 간단히 설명해 보자.
2.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어떤 나라들이 새로 나타났는가?
3. 워싱톤 회의는 어떤 역사적 조건에서 소집되었으며 또 어떤 조약들을 체결하였고 조약에는 어떤 규정들이 들어 있는가?
4. 무엇 때문에 9개국 공약은 몇몇 제국주의 국가들이 공동으로 중국을 지배하는 국면을 형성하였다고 말하는가?







제3장 전후 세계 혁명운동과 민족해방운동






제1절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혁명운동

10월 혁명의 영향하에서 여러 자본주의 국가의 무산 계급은 1918년~1923년에 혁명의 열기를 일으켰다. 1918~1919년에 핀란드, 헝가리, 독일 바바리아의 무산 계급은 차례로 정권을 탈취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립하였다. 1920년에 이탈리아의 무산 계급은 공장을 탈취하는 운동을 벌였으며 농민들도 일어나 지주의 토지를 탈취하였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나라의 무산 계급도 1919년~1920년에 자기들의 이익을 수호하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파업 운동을 단행하였다. 동방에서 일본은 1918년에 ≪쌀소동≫, 즉 굶주린 백성들이 쌀을 빼앗는 운동을 일으켰다.
10월 혁명 후 유럽 무산 계급들의 정권 탈취 투쟁은 모두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무산 계급은 학명 투쟁에서 단련되었다.





독일의 11월 혁명
제1차 제국주의 세계 대전은 독일 근로 인민들에게 막심한 재난을 가져다 주었고 인민들은 이로부터 ≪조국 보위≫라는 선진의 기만성을 깨닫게 되었다. 1918년에 10월 말에 독일 해군 통수부는 킬 항구에 정박해 있는 함대에게 바다에 나가 영국 해군을 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수병들이 명령을 거절한 탓으로 체포되었다. 이에 격분한 수병들은 11월 3일에 봉기를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독일의 11월 혁명이 폭발하였다. 혁명은 요원의 불길마냥 독일의 많은 도시들에 신속히 확대되었다. 11월 9일에 베를린의 노동자와 병사들은 스파르타쿠스단(스파르타쿠스단은 독일 사회민주당 좌파의 독일 공산당의 전신이다. 지도자는 칼 리프크네이트≪1871~1919년≫,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년≫ 등이다. 1918년 말에 독일 공산당으로 재조직되었다.)의 호소 밑에 봉기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빌헬름 2세는 황급히 네덜란드로 도망쳤고, 황제 제도는 전복되었다. 독일 사회민주당 우파 지도자 에베르트가 독립 사회 민주당원과(원래는 사회 민주당의 ≪중간파≫였는데 1917년 4월에 독립적인 당으로 되어 ≪독립 사회민주당≫이라 불렀다. ) 결탁하여 소위 ≪인민 전권 대표 위원회≫라는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는데 사회 민주당원들은 이 정부를 ≪사회주의적 정부≫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이 정부는 도리어 생산 수단에 대한 자본주의적 소유를 담보한다고 선포하였다. 이 정부는 사실상 자산 계급 정부였다. 독일의 노동자와 병사들은 사회주의를 지향하였지만 사회 민주당의 기회주의 노선의 해독을 장기간 받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수단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었으므로 혁명은 자산 계급에 유리한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12월에 전 독일 노농 소비에트 대표 대회에서 채택한 결의에서는 ≪모든 정권은 노동 소비에트로≫라는 각성한 소수 노동자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국민회의≫ 간판을 내건 자산 계급 의 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국민회의를 소집하기 전에는 정권을 에베르트의 임시 정부에 넘긴다고 하였다.
에베르트 정부는 처음부터 무력으로 혁명을 교살할 앙심을 품고 독일황족 군관들과 결탁하여 베를린에 군대를 집결시켜 놓고 1919년 1월에 노동자들로 하여금 봉기를 일으키도록 유인한 다음 피비린 탄압을 감행하였다. 1월 15일에 에베르트 정부는 비열한 수단으로 독일 노동 계급의 우수한 지도자 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하였다. 베를린 1월 봉기가 실패한 후 독일 무산 계급은 계속 굴함없이 영용하게 싸웠다. 1919년 4월 13일에 독일 남부의 뮨헨 노동자들은 공산당의 영도 밑에 봉기를 일으켜 바바리아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립하고 11월 혁명을 고조시켰다. 5월 1일에 반혁명 군대가 뮨헨을 공략하자 노동자들은 며칠 동안 시가전을 벌이고 영용하게 싸웠다. 바바리아 소비에트공화국은 피바다에 잠겼고 11월 혁명은 이렇게 종말되었다. 11월 혁명에서 독일 무산 계급은 군주 정체를 뒤엎고 자산 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부분적 임무를 실현하였다.
11월 혁명의 실패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설명해 준다. 즉 혁명에서 승리하자면 반드시 성숙긴 무산 계급 혁명 정당이 있어야 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을 정확하게 집행할 수 있는 무산 계급 혁명 정당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창건
1919년 1월 베를린 노동자 봉기가 탄압된 후 백색 테러의 분위기 속에서 국민회의의 선거가 진행되었다. 2월에 국민회의는 독일의 소도시인 바이마르에서 소집되었다. 국민회의에서는 사회민주당과 자산 계급 정당의 연합 정부를 조직하고 에베르트를 대통령으로 선거하였다. 8월에 연합 정부는 헌법을 채택하였다.
바이마르 헌법은 독일을 연방 공화국으로 선포하였다. 연방 공화국은18개 소국으로 구성되었다. 바이마르 헌법은 사유 재산에 대한 불가침을 선포하였다. 즉 국가에서 자산 계급과 지주의 이익을 보장해 준다고 선포하였다. 민주 선거에 의 하여 선출된 대통령은 그 임기를 7년으로 하였고, 입법권은 국회에 속하였으며, 국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나뉘었다. 상원을 연방 의원이라고 하였는데 연방 의원은 여러 소국들을 대표하였고, 하원을 국민회의라고 하였는데 국민회의 는 평등하고 직접적이고 무기명적인 방식으로 투표하여 만20세의 남녀 공민들을 국민회의 의원으로 선출하였다. 정부는 국민회의 에 대하여 책임진다고 하였다. 정부는 국민회의에 대하여 책임진다고 하였다. 헌법은 또 자산 계급적 자유 즉 언론, 통신, 집회, 결사 등 자유에 대하여 규정하고 법률 앞에서는 모든 독일사람이 다 평등하다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헌법 제48조에 근거하면 대통령에게는 비상 사태를 선포할 권리가 있고 잠시 이런 자유를 취소할 권리가 있었다. 히틀러 독재 정치가 실시되기 이전에 바이마르 헌법이 독일 공화국의 기본 조직법으로 되었다. 때문에 1919년부터 독일을 바이마르 공화국이라고 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정치 경향면에서 중간 노선을 실시하였다. 그는 노동자들의 혁명 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하는 한편 황제 제도를 복고하려고 시도하는 부분적인 지주 자본가들의 세력과 투쟁하였다. 1933년에 독일 파쇼가 정권을 탈취한 이후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은 소실되었다.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1918년 11월에 헝가리에 공화국이 창건되었으나 까롤리 미하이를 수반으로 하는 자산 계급과 사회민주당의 연합정부로서는 근로 인민들의 어려운 상태를 극복할 능력이 없었다. 노동자들의 실업, 통화 팽창. 투기의 창궐로 하여 인민들의 불만은 날로 늘어났고 사회주의 혁명은 일정에 올랐다.
동년 11월 20일에 헝가리에서는 꾼빼라를 수반으로 한 공산당이 창립되었다. 공산당은 ≪소비에트 정권을 건립≫하고 ≪무장 봉기≫를 진행할 사회주의 혁명 구호를 제출하고 정권 탈취를 위해 필요한 투쟁을 진행하였다. 당은 자산 계급의 각 부대와 무장 조직에 들어가 사업을 전개하면서 자기의 조직을 건립하였다. 당의 제의 에 근거하여 각 공장들에서는 또 적위대를 건립하였다. 장비가 우수한 2만 명의 부다페스트의 위수 부대도 공산당편에 섰다. 혁명적 병사들과 노동자들은 정부의 무장 부대 특히는 경찰들과 유혈적인 충돌을 일으키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날로 앙양되는 혁명 운동에 질겁한 까롤리 정부는 1919년 2월 20일 공산당의 대부분 중앙위원들과 많은 적극 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당은 할 수 없이 지하에 잠입하여 혁명 운동을 계속 영도하였다. 공산당에 대한 박해는 전국 인민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전국적인 집회, 시위 행진, 파업을 야기시켰다. 3월 중순에 이르러 혁명 형세는 성숙되었다.
중유럽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헝가리에서 곧 혁명이 폭발되리라는 것을 간과한 협상국 제국주의는 급히 1919년 3월 20일에 헝가리 정부에 최후 통첩을 내어 3분의 2의 헝가리 영토를 그의 이웃 나라들에 메어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것을 빌어 헝가리 혁명을 교살하려고 시도하였다. 제국주의 의 최후 통첩은 헝가리로 하여금 분할당하고 심지어 멸망의 위험에까지 처하게 하였으며, 붕괴 국면에 처한 까롤리 정부를 막다른골목에 밀어넣었다. 까롤리 정부는 정권을 사회민주당에 넘겨 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대중 속에서 이미 고립되었고, 또 공산당을 탄압할 수 있는 무장 역량도 장악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회민주당은 할 수 없이 3월 21일에 감옥 안에 헝가리 공산당의 지도자 꾼뻬라등과 담판을 진행하였고 또 두 당을 합병할 것과 소비에트 정권을 건립하고 무산 계급 독재를 실시할 것에 대한 협의를 달성하였다. 이리하여 공산당의 지도자들과 열성자들은 모두 석방되었고 무장한 노동자와 병사들은 부다페스트의 전략적인 각 거점들을 점령하고 자산 계급의 무장반항을 수시로 진압할 수 있는 준비를 하였다. 21일 저녁에 대회를 열고 헝가리를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선포하였다.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은 이렇게 창건되었다.
특정한 역사적 조건하에서 ≪혁명은 평화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 레닌의 예언과 같이 헝가리 혁명은 바로 폭력의 기초 위에서 무산계급이 평화적으로 정권을 탈취한 혁명이었다.
국제 제국주의자들은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립을 눈에 든 가시처럼 증오하였다. 1919년 4월에 협상국은 공개적으로 무장 간섭을 진행하였다. 헝가리 공산당은 노동 대중에게 일어나 소비에트 공화국을 보위하고 적을 반격하라고 호소하였다. 노동 대중들은 짧디 짧은 며칠 동안에 10여만 명의 붉은 군대를 조직하고 강대한 적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혁명이 엄중한 위협을 받고 있을 때 사회민주당 우파들은 죄악적인 배반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제국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방어 조직 사업을 애써 파괴하였으며 심지어 작전 계획까지 적에게 누설하였다. 헝가리소비에트 공화국은 국내외의 반혁명 세력과 133일간 영용하게 싸우다가 드디어 1919년 8월 1일에 전복되었다. 1990년에 제국주의의 주구인 호르찌가 헝가리에 파쇼 독재를 건립하였다. 이로부터 파쇼독재는 헝가리 인민들을 25년간이나 노예처럼 사역하였다.






제2절 아시아, 아프리카에서의 민족해방 운동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영향과 10월 혁명의 추동 밑에 아시아, 아프리카의 많은 지구에서 민족 독립과 민족 자결을 쟁취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운동은 제국주의 의 식민 통치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고 세계 무산 계급 혁명 투쟁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민족 해방 운동으로는 중국 공산당이 영도한 민주주의 혁명을 제외하고도 터어키, 인도, 조선, 이집트 등 나라들의 민족 부흥 운동을 들 수 있으며, 이러한 운동은 규모가 가장 크고 투쟁도 가장 치열하였다.





조선의 ≪3․1≫운동
1910년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점한 후 극히 야만적이고도 가혹한 방법으로 조선 인민을 통치하고 압박 착취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정치적으로 조선 인민의 반일 투쟁을 탄압하기 위하여 헌병 경찰 제도를 강화하고 테러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경제적으로 대량의 비옥한 토지를 강점하고 지대와 가렴 잡세를 더 증가하여 받아들인 동시에 조선 민족 공업의 발전을 억제하였으며, 문화면에서 조선의 고적들을 파괴하고 조선문 서적들을 불살라 버림으로써 조선의 유구한 민족문화를 압살하고 우민 동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승리는 조선 인민의 일본 통치를 반대하는 투쟁과 민족 독립을 쟁취하는 투쟁을 고무하였다. 1919년 1월에 일본 침략자에의 하여 폐위당하고 오랫동안 엄금당했던 조선의 국왕 이희가 갑자기 죽었고 일본 식민 정부에서 그를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희가 독살당했다는 소식은 반일 민족 대봉기의 도화선으로 되었다.
조선의 자산 계급 민족주의자들은 일본 당국과 빠리 강화회의 에 조선독립을 요구하는 평화 청원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독립 선언≫을 기초하고 1919년 3월 1일 군중 집회에서 선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날 그들은 일본 침략자들과 감히 대결하지 못하고 비밀리에 모여 ≪독립선언≫을 대강 선포하고 말았다.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수천 명의 청년 학생들과 각지에서 온 수만 명의 군중들이 집회를 가지고 ≪조선독립 만세!≫, ≪일본 사람과 일본 군대는 물러가라!≫는 등 구호를 높이 외쳤다. 대회 이후 군중들은 성세 호대한 시위 행진을 단행하였는데 3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참가하였다. 이번 시위 행진은 일본 당국의 피비린 탄압으로 하여 재빨리 봉기로 발전하였다. 분노한 군중들은 일본침략자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서울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인민들이 앞을 다투어 호응하였으며 반일 민족 봉기의 세찬 불길이 조선 각지에 신속히 타올랐다. 1919년 3월 초부터 5월 말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218개부, 군 가운데서 283개 부, 군에서 200만 이상에 달하는 군중들이 시위와 폭동을 일으켰다. 1919년 말에 와서야 비로소 일본 제국주의는 이번 봉기를 진압하게 되었다.
≪3 . 1≫ 운동 이후 조선은 무산 계급이 영도하는 반제 반봉건적인 민주주의 혁명의 새로운 시기에 들어섰다.





인도 민족 해방 운동의 앙양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영국 정부는 인도 인민들이 들고일어난 독립 요구를 가라앉히기 위하여 인도 정부를 개혁하는 것에 대하여 응낙하고 주정부내의 위생, 국민 교육 등과 같은 일부 부차적인 부문을 인도인의 관리에 넘기며 동시에 인도의 자치를 점차 실현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영국의 개혁 방안에는 인도 총독의 권한이 조금도 삭감되지 않았고 자치의 정도는 아직 거리가 멀었으므로 인도인민들을 몹시 실망케 하였다.
대전이 종말된 이후 인도의 민족 해방운동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영국 정부는 고압 수단으로 어루만지는 정책을 대체하고 1919년에 식민 당국은 인도인민을 마음대로 체포할 권리를 가진다고 한 로라트(로라트는 당시 영국기 고등법원 법관이었다)법안을 통과시켰다. 로라트 법안은 전 인도 인민들의 강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인민 투쟁의 추동 밑에 인도 민족 자산 계급의 대표 인물인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1869~1948년)는 인도 인민들에게 전국적 총파업을 단행하며 단식하고 기도를 드리면서 비폭력적인 저항을 하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비폭력 저항의 속박에서 벗어나 거리에 떨쳐나가 기세 드높은 시위 행진과 집회를 가졌으며 심지어 경찰들과 충돌까지 하였다. 투쟁 가운데서 서로 다른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이 전례없이 단결되었다.
영국 식민주의 자들은 테러적 수단을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4월 13일에 펀잡주의 암리트라즈에서 약 2만 명에 달하는 군중들이 광장에 모여 항의 집회를 가졌다. 영국 식민 군대는 빈 주먹밖에 없는 군중들을 사격하여 당장에서 279명을 학살하고 약 1,200명(이 숫자는 관방측에서 축소한 통계이며 실제 자료에 의하면 피살자 1000명, 부상자 2000명에 달하였다. )을 부상 입혔다. 암리트라즈의 학살 사건은 세계의 인사들을 놀라게 하였다.
인도 인민들은 영제국주의자들의 피비린 탄압에 꺼꾸러지지 않았다. 반영 투쟁의 불길은 결국 각지에서 타올랐으며 강렬한 분노의 정서는 전국을 뒤덮었다. 1920년에 간디가 제출한 ≪비폭력적 불합작 계획≫을 국대당에서 채택하였다.
간디가 규정한 불합작 운동 강령에는 아래의 요점들이 들어 있다. 인도인은 영국인이 위임한 관직을 버리고 영국인이 주관하는 인도 정부에 참가하지 않으며, 말썽이 생기면 영국인이 세운 법원에 가서 소송하지 않고 인도인 자신이 운영하는 학교에 보내며, 인도인은 영국인의 은행에 돈을 저축하지 않으며, 군대에 나가지 않고, 세금을 바치지 않으며, 영국상품을 사지 않고 인도인 자신이 만든 물품을 사용하며, 물레 운동을 일으키고 목천옷 입는 것을 제창하였다. 얼마 후 불합작 운동은 전 인도에서 벌어졌는데 그 기세가 매우 높았다. 관리들은 사직하였고, 아동들은 학교에서 나왔고, 노동자들은 파업하였고, 농민들은 지대를 바치거나 납세하는 것을 거절하였고, 사람들은 영국 상품을 사지 않았고, 어떤 지방에서는 심지어 이 영국 상품을 공개적으로 태워 버리기까지 하였다. 불합작 운동은 영국 정부의 수입세를 감소시켰고 그 경제에 엄중한 타격을 주었으며, 또 인도 인민의 민족 자존심과 자신심을 증강시켰다. 이리하여 간디는 재빨리 높은 명망을 가지게 되었고 인도 인민들은 그를 ≪마흐트마(위대한 혼)≫라고 불렀다.
군중 운동은 발전하여 불합작 운동의 지도자가 규정한 비폭력적 범위를 벗어났다. 어떤 지방에서는 봉기를 일으켜 영국 식민주의 군대와 충돌하였다. 1922년 2월에 연합주 초리초라촌의 농민들은 시위 군중들에게 총을 쏜 경찰들의 만행에 항의하여 그 촌의 경찰국을 짓부시고 태워버렸으며 22명의 경찰을 때려 죽였거나 태워 죽였다. 간디는 군중들의 폭력적 행동을 제지시키지 못하는 것을 자기 ≪가장 큰 치욕≫이라고 생각하였다. 얼마 후 국대당은 전국 각지에서 불합작 운동을 중지한 것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인도의 민족 반제 운동은 사양길로 들어갔다.





터어키 자산 계급 혁명
제1차 세계 대전 전의 터어키는. 날로 쇠락하는 봉건 제국-오스만 제국이었다. 대전 가운데서 터어키는 독일-오스트리아 제국주의 집단 측에 가담하여 싸웠고, 대전이 끝난 후에는 누구나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패전국으로 되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오스만 제국의 모든 속국들을 뜯어 가지려 하였을 뿐만 아니라 터어키마저 뜯어 가지려 하였다. 이와 같이 나라의 운명이 위급한 시각에 터어키 인민들은 일어나 자기의 민족 독립을 수호하기 위하여 투쟁하였다.
1919년 5월에 영 제국주의의 사주 밑에 그리이스 군대가 소아시아에서의 터어키의 천연 항구인 이즈미르를 점령하였다. 외국의 강점을 반대하는 터어키의 유격 전쟁은 신속히 전개되었고, 각지에서는 ≪민족 권리보호 협회≫란 이름을 가진 자산 계급 민족주의 조직이 성립되었다. 그해 가을에 터어키 인민 민족 투쟁의 지도자인 무스타바 케말(1881~1938년)이 아나토리아 지역에서 대회를 소집하고 민족주의 조직을 통일한 동시에 민족 독립을 요구하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대회에서는 케말을 위시한 대표 위원회를 선거하였다. 그때 케말당원들은 영국의 괴뢰인 술탄(터어키에서는 임금을 술탄이라고 불렀다)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못하고 술탄에게 터어키 의회를 소집해 줄 것만 요구하였다. 술탄 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접수하고 1920년 1월에 이스탄불에서 터어키 의회를 소집하였다. 케말당원들은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였고, 의회에서 ≪국민 공약≫을 채택하였다. ≪국민 공약≫은 터어키 독립 선언의 형식으로 민족 독립의 원칙을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국민 공약≫은 민족 투쟁의 기치로 되었다. ≪국민 공약≫이 채택되자 영국과 술탄 정부는 불안을 느꼈다. 3월 16일에 영국은 군사를 파견하여 이스탐불을 점령하였다. 술탄 정부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케말당원들을 반역자로 선포하였다. 얼마 후에 케말당원들은 이스탐불의 술탄 정부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정식으로 선포한 다음 앙카라에서 대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케말을 수반으로 한 국민 정부를 세웠다.  1920년 6월에 영국의 돈과 무기를 공급받은 그리이스 군대가 이즈미르에서 출발하여 아니토리아 지역을 공격하였다. 협상국 제국주의자들은 케말당원들의 저항이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술탄 정부와 세브르 조약을 체결하였다. 유럽에서의 터어키 영토는 이스탐불과 그 인근의 크지 않은 한 지구를 제외하고 모두 열강들에게 분할되었다. 서부 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의 터어키의 모든 속국들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전부 분할되었다. 터어키는 독립과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반식민지로 전락되었다. 세브르 조약의 체결은 터어키 인민들의 반제 노도를 일으켰다.
터어키에서의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민족 투쟁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동정과 원조를 받았다. 1921년 3월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케말의 앙카라정부와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 앙카라 정부에 대량의 무기와 금전을 원조하였다. 앙카라 정부의 터어키 국민군은 인민 대중들의 지지 밑에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원조 밑에 전패하던 것에서부터 신속히 승리로 나아가게 되었으며, 1922년 가을에는 그리이스 군대를 터어키에서 몰아내었다. 11월 1일에 대국민회의는 술탄 제도 즉 세속적인 오스만 군주 정권을 철폐하였다.
터어키 인민들의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에서의 승리는 터어키를 과분하려던 협상국의 세브르 조약을 분쇄하였다. 1923년 7월에 협상국과 터어키는 스위스의 로잔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터어키는 잃었던 많은 땅을 회수하고 배상금을 취소하였으며, 외국의 재정 감독과 영사 재판권을 폐지하였다.
1923년 10월에 터어키는 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하고 케말을 제1대 대통령으로 선거하였다. 터어키 공화국은 창건 후 자산 계급 성격을 띤 일부 개혁들을 실시하였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 민족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 국가를 통제하는 이슬람교의 교주(≪칼리프≫)의 특권을 폐지하고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실시한 것, 자산 계급 민법과 형법으로 이슬람교의 규례를 대체한 것, 세속적 교육을 확대한 것, 여성들에게 선거, 교육, 취업면에서 일정한 평등 권리를 준 것, 여러 가지 나쁜 관습을 폐지한 것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리하여 터어키의 국세는 날로 향상되기 시작하였다.





이집트의 독립 운동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집트는 터어키의 속국이었으나 실제로는 영국의 통제를 받았다. 대전이 일어난 후 영국은 공개적으로 이집트를 자기의 ≪보호국≫으로 선포하였다. 대전이 종결되었어도 영국이 이집트에 대한 ≪보호≫를 취소하지 않았으므로 이집트 인민들의 반대를 받게 되었다.
그때 이집트의 자산 계급 활동가 잘루르 등이 대표단을 조직하여 가지고 런던에 가서 보호제도를 취소하고 이집트의 독립을 허락하는 것에 관하여 영국 정부와 담판하였다. 이 대표단을 아랍어로 ≪워부트≫라고 하였다. 영국 정부는 워부트파들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이집트에서는 전국적인 항의 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월에 영국 당국에서는 잘루르 등 4명의 워부트파 지도자를 체포하였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등 도시에서 규모가 더욱 큰 항의 운동, 즉 파업, 동맹 휴학, 철시, 시위 행진이 있었고 또 그것이 무장 봉기로 넘어갔다. 농민들도 민족 해방 투쟁에 뛰어들었다. 거의 한 달 동안이나 영국 식민주의 통치는 마비 상태에 빠졌다. 후에 봉기는 비록 탄압되었지만 영국 당국에서도 잘루르 등 사람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21년 말에 이집트에서는 또다시 인민 봉기가 일어났다. 1922년 2월에 영국은 할 수 없이 이집트를 ≪독립 국가≫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일부 권리를 여전히 유보한다고 선포하였다. 예를 들면 이집트에 군사를 계속 주둔시키며, 수에즈 운하를 통제하며, 이집트에서의 외국 자본가들의 특권을 보장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므로 사실상에서 여전히 영제국주의의 통제 밑에 있었다.






제3절 국제 공산당

국제 공산당의 창건
제1차 세계대전이 폭발한 후, 제2인터내셔날 산하의 대다수 사회민주당은 뻔뻔스럽게도 무산 계급의 혁명 위업을 배반하고 공공연히 자산 계급 편에 서서 제국주의 전쟁을 옹호하였다. 그리하여 제2인터내셔날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대전 후 혁명 운동 가운데서 탄생한 많은 나라의 공산당과 좌파 조직들은 아직 연약하였기 때문에 기회주의자들의 반역 활동을 강력하게 물리치지 못하였으며 노동 계급의 투쟁을 영도할 수 없었다. 이런 역사적 조건에서 무산 계급 세계 혁명을 추진시키기 위하여 제2인터내셔날 기회주의와 철저히 결별한 새로운 혁명적 국제 조직을 건립할 것이 요구되었다.
1919년 3월 2일부터 6일까지의 30개 국가의 무산 계급 대표들은 모스크바에서 국제공산당(제3인터내셔날) 제1차 대표 대회를 열었다. 무산 계급의 위대한 스승인 레닌이 친히 이 대회를 사회하였으며 대회 의정의 주요한 문제, 즉 자산 계급 민주와 무산 계급 독재에 관한 문제를 보고하였다.
레닌은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민주와 독재는 자고로 일정한 계급의 민주이며 일정한 계급의 독재이다. 어떠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나 ≪일반적 민주≫란 없으며 자산 계급 민주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산 계급 민주가 바로 자산 계급 독재이므로 ≪가장 민주적인 자산 계급, 공화국도 자산 계급이 노동 계급을 탄압하기 위한 기구에 불과하다≫ 레닌은 또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투쟁이 상당히 첨예화될 때 자산 계급 독재나 무산 계급 독재를 제외하고 그 어떤 중간 도로는 있을 수 없다. ≪지주 또는 자산 계급의 독재는 폭력으로써 절대 다수 근로 인민의 반항을 탄압하는 것이고, 이와는 반대로 무산 계급 독재는 착취자인 극소수 지주, 자본가의 반항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것이다≫라고 무산 계급 독재와 자산 계급 독재의 근본적 구별을 밝혔다. 소비에트는 무산 계급 독재 즉 무산 계급 민주의 형식이다. 무산 계급 독재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학설을 계승하고 발전시켰으며 무산 계급 독재의 사상으로 각국의 젊은 공산당을 무장시킨 레닌의 이보고는 국제 공산당의 중요한 강령적 문헌이다. 대회에서는 또 세계 무산자들에게는 보내는 선언을 채택하였다. 선언은 그들에게 정권을 탈취하며 무산 계급 독재를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하라고 호소하였다. 끝으로 대회는 국제 공산당 집행 위원회를 선출하고 국제 공산당의 활동을 영도하게 하였다. 국제 공산당은 각국 공산당의 국제 연합 조직으로서 각국의 당은 모두 국제 공산당의 지부로 되어 직접 국제 공산당의 영도를 받았다.





국제 공산당의 초기 활동
제1차 대표 대회 이후, 국제 노동 운동에는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각국의 우수한 혁명적 노동자들이 앞을 다투어 공산주의로 돌아서서 무산 계급 독재를 옹호하였으며 또 일부 나라에서는 공산당을 창건하였다.
1920년 7월 19일부터 8월 7일까지 국제 공산당 제2차 대표 대회가 뻬뜨로그라드(후에 모스크바로 옮겼다)에서 열렸다. 대표 대회의 과업은 각국공산당의 역량이 급속히 성장되고 혁명 투쟁이 가일충 강화된 정황에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 가운데서 우경 및 좌경 기회주의의 위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조직 원칙과 행동 강령 및 전략 전술을 확정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대회에서 국제 ≪국제 형세와 국제 공산당의 기본 과업에 관한 보고≫를 하였다. 레닌은 기회주의를 반대하는 사업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천명하였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기회주의는 우리의 주된 적이다.≫ 기회주의자들이 노동자를 영도하지 않았다면 자산 계급은 지탱해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각국 당내에서 기회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끝까지 진행하는 것은 바로 국제 공산당의 가장 주요한 과업이다. 레닌은 보고에서 또 공산주의 운동 가운데서 ≪좌≫파의 오류를 시정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당시 어린 각국 공산주의자들 가운데서 ≪좌익≫ 소아병이 나타났다. 그들은 제2인터내셔날의 기회주의를 증오하고 혁명하려 하였지만 무산 계급 혁명 정당의 영도와 전략 전술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각종 투쟁 형식을 통하여 대중을 전취하고 대중을 교육하는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각국공산주의 자들의 이러한 병폐를 고쳐 주고 혁명 준비를 더 잘하기 위하여 레닌은 ≪공산주의 운동 중의 ≪좌익≫ 소아병≫이라는 책을 써서 국제 공산당 제2차 대표 대회 전야에 출판하였다. 이 빛나는 저작은 어린 각국공산당의 볼셰비끼화에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제2차 대표 대회에서는 국제 공산당에 가입하는 21개 조건을 채택하였다. 21개 조건의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상적인 선전이 진정으로 공산주의 성격을 띠게 함으로써 노농병 대중으로 하여금 무산 계급 독재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해야 하며, 모든 기회주의 정책과 결별하고 기회주의자를 모든 영도적 직위에서 깨끗이 몰아내야 하며, 공개적 사업을 비밀 사업과 결합시켜야 하며, 민주 집중제의 원칙에 좇아 당을 건설해야한다는 것 등등이다. 21개 조건은 레닌의 건당 원칙을 체현하였고 국제공산당의 순결성을 보장하였다.
국제 공산당 제2차 대표 대회 후 국제 정세에는 변화가 생겼다. 자본주의 국가의 혁명 운동은 탄압당하고 자산 계급의 통치가 유지되었으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새로운 혁명 고조를 수용하기 위하여 역량을 축적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1921년 소집된 국제 공산당 제3차 대표 대회에서는 ≪대중 속으로 들어가라≫는 구호를 제기하였다. 1922년에 소집된 국제 공산당 제4차 대표대회에서는 각국 공산당은 노동자 통일 전선의 책략에 따라 사상, 정치, 조직 면에서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자본주의 와 투쟁할 것을 원하는 모든 노동자들과 단결하며 심지어 사회민주당원들과 담판할 준비를 함으로써 광범한 대중들의 절실한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투쟁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국제 공산당 제4차 대표 대회에서는 식민지, 반식민지의 동방 국가에 대하여 반제 통일 전선의 구호를 제기하였다. 국제 공산당 제4차 대표 대회 후 국제 공산당은 통일 전선 책략을 관철하기 위하여 각국 공산당을 영도하여 대중의 대다수를 쟁취하고 굳세게 투쟁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독일 11월 혁명의 경과와 혁명이 실패한 교훈을 설명해 보자.
2. 1919년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창건의 경과를 설명해 보자.
3. 조선 ≪3. 1≫운동이 일어난 역사 배경과 운동의 의의에 대하여 말하라.
4 1919년~1922년 인도 민족 해방 운동의 경과를 간단히 서술하고 ≪비폭력적 불합작 운동≫에 대하여 평가해 보자.
5.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터어키 자산 계급 혁명의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6. 제3 인터내션날(국제 공산당)이 창건된 역사적 조건에 대하여 서술해 보자.
7. 레닌은 자산 계급 민주와 무산 계급 독재에 다여 어떻게 논술하였는가?








제4장 대전 후의 주요한 자본주의 국가






제1절 대전 후 초기의 주요한 자본주의 국가

대전 후 초기의 영국과 프랑스
대전 이전에 영국은 본래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제국이었다. 대전 시기에 영국 경내가 비록 전쟁터로 되지는 않았지만 영국이 받은 경제 손실은 아주 막대하였다. 대전은 영국에서 정예한 장정 노동력 300만 명과 거액의 자금을 빼앗아 갔다. 대전은 영국의 채무를 대전 전보다 10배나 늘어나게 하였다. 영국 인민들은 이 빛 때문에 부담이 크게 늘어났다. 게다가 전후 각국의 구매력이 감소되었고, 미국과 일본의 상업 경쟁이 또 영국으로 하여금 많은 수입 원천을 잃게 하였다. 영국의 상공업에는 쇠퇴 현상이 나타나 실업자가 늘 300만명 가량 되었다. 영국 정부는 관세 보호, 실업 보험, 해외 이민 대책을 취하였지만 줄곧 전쟁 전의 상패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대전 후 영국의 경제 곤란은 영국의 정당으로 하여금 정치상의 변화를 가지게 하였다. 대전 이전에는 영국의 보수당과 자유당이 번갈아 가며 집권하였고 노동당의 세력은 보잘 것 없었다. 대전 후에 자유당의 세력은 점차 쇠약해졌다. 이것은 대전 후 독점 조직의 통치가 강화된 조건하에서 자유당이 고수하던 자유 무역과 자본가의 사업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국가의 원칙이 이미 전날의 의의를 상실하였다는 것을 표명한다. 동시에 노동당은 또 경제적 곤란, 실업자의 증가로 하여 그 세력이 크게 늘어났으며 1924년 이후에는 노동당의 당수가 두 차례나 내각을 조직하였다.
영국은 세계 대식민제국으로서 대전 이전에 영국의 식민지는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유럽에 널리 있었다. 영 제국의 각 구성 부분과 영국 본토간의 법률 관계는 같지 않았다. 이를 크게 세 개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직할 식민지로서 전적으로 영국정부의 관할을 받았고, 다른 하나는 보호국으로서 군주를 보유하나 영국국왕이 파견한 총독의 감독을 받았으며, 세번째는 자치령(자치 식민지)으로서 자국의 의회와 책임 정부가 있어 비교적 큰 자주권을 향유하고있었다. 대전 이후에 식민지의 독립 운동말고도 아일랜드와 영제국의 자치령의 분열 운동도 크게 강화되었다. 1921년에 영국은 아일랜드 남부의 26개 군이 영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일랜드는 자유주(1937년에 아일랜드 자유주는 독립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여전히 영 제국내에 남하 있었고, 197년에 와서야 영제국에서 이탈한다고 선포하였다)를 세우고 자치권을 향유하였다. 영국의 국명도 ≪대 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라고 부르던 것을 ≪대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이라고 고쳤다. 영국의 자치령으로 있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남아프리카 연방 등 나라들이 대전 후 영국에서 갈라져 나가려는 요구가 날로 강력해졌다. 1931년에 영국제국은 할 수 없이 웨스트민스터법을 채택하고 제국내의 자치령은 내정과 외교면에서 모두 독립 자주하며 자치령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제국내에서 지위가 평등하다는 것을 승인하였으며, 그들은 모두 영국 국왕에게 공동으로 충성하여 통일체를 이룬다고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영국 제국내에서 영국 본국은 자기의 자치령에 대한 정치적 통제력이 점차 약화되었지만 도리어 내부의 경제적 결합이 성공적으로 강화되어 1932년에 오타와에서 소집된 영국 제국 경제회의 에서는, 영국 제국내에서는 호혜 관세를 실시하고 대외에 대해서는 관세를 높인다고 결정하였다. 프랑스는 대전의 전승 국가의 하나였지만 프랑스의 재정과 경제는 전쟁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았다. 프랑스는 대전 전의 채권국으로부터 대전 후의 채무국으로 변하였으며, 또 프랑스는 대전 이전에 투자하였던 러시아, 오스트리아, 터어키 등 나라들이 와해되는 바람에 빛도 받아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전 이후에 프랑스는 엄중한 재정 위기에 빠졌다. 프랑스의 경제 상태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의 동북 변경 지대는 원래 공업과 농업이 발달한 지구였는데 4년 동안 전쟁판이 되는 바람에 거의 기와 조각밭으로 변하였다. 게다가 전쟁에서 죽은 자가 140만에 달하고 폐인으로 된 자가 부지기수여서 그 손실이 막대하였다. 1926년에 와서 프랑스 정부에서는 재정 개혁을 실시하여 과세를 증가시키고 비용을 줄이는 등 방법을 취하였으므로 재정 상태가 비로소 호전되기 시작하였고 산업 금융도 번영되기 시작하였다.
빠리 강화회의 에서 프랑스는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독일을 처리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독일로 하여금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하여 하였다. 그리고 발틱해 연안의 여러 소국들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 유럽 각 민족들이 나라를 세우도록 힘써 원조함으로써 독일을 포위하는 동시에 소비에트 러시아 세력이 서쪽으로 뻗치지 못하게 하려하였다. 빠리 강화회의 후 프랑스는 독일을 엄격히 제한한 베르사이유 강화 조약의 수호자로 되었다. 베르사이유 강화 조약의 안전 보증을 위하여 프랑스는 차례로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 나라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한때 그 세력이 동유럽일대에 넘쳤다. 프랑스는 자기가 결성한 동맹에 영국도 가입할 것을 희망하였으나 영국은 유럽 대륙에 대하여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정책을 봉행하면서 프랑스의 결맹 제의를 거절하였다.





이탈리아의 혁명 사건과 파쇼의 대두
이탈리아는 대전의 전승 국가였지만 대전으로 하여 경제상의 큰 손실을 보았고, 전쟁에서 진 빚으로하여 부담이 심한 데다가 생활 비용도 높아졌다. 제대하여 복원한 군인들은 일자리 찾기가 힘들었고 정부 또한 그들을 구제할 힘이 없었다. 경제상의 혼란과 생활상의 압박 때문에 인민들의 원성이 높아갔다.
1919년에 파업 운동이 이탈리아를 휩쓸었다. 많은 도시들에서 군중들이 양식점을 짓부시는 사건 경찰들과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탈리아의 농민들도 혁명 투쟁에 뛰어 들었다. 러시아와 독일 혁명의 영향 밑에 이탈리아의 노동자들은 공장을 탈취하고 농민들은 지주의 토지를 나누어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0년 가을에 와서 이탈리아 북부의 공장들은 거의 다 노동자들에게 점령되었다. 그때 이탈리아의 통치 기구는 불안 상태에 처하였고 중앙 정부는 마비 상태에 처하여 인민 혁명 운동을 탄압할 힘이 없었다.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이탈리아의 자산 계급들은 권력 정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3월에 베니토 뭇솔리니(1883~1945년)가 파쇼당(파쇼는 본래 고대 로마 집정관이 시찰을 떠날 때 휴대하는 의관의 명칭으로서 막대의 다발 속에 전부≪전시에 쓰는 도끼≫한 자루를 꽂았다. 이것은 군중 역량이 가지는 위력을 상징하고 있었다. 지금은 대내적으로 테러통치를 실시하고 대외적으로 침략 팽창을 실시하는 독점 자산 계급의 독재 정권을 파쇼 독재라고 한다.)을 조직하고 점차 대자본가의 자금 원조를 받았으며 또 지주, 부농, 자본가의 많은 자제들과 실업한 제대 군인을 흡수하여 세력을 증강하고 테러적 행동을 감행하였다. 파쇼 무리들은 검은 적삼을 입고 곤봉과 권총으로 노동자들의 집회와 시위 행진에 맞서서 혁명적 인사들을 학살하였다. 노동자들이 반격을 함으로써 이탈리아는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 1922년 가을에 파쇼 분자들은 투쟁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의 많은 지구를 통제하였다. 의기 양양하여 오만해진 파쇼 도당들은 ≪로마로 진군하자!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할 준비를 하자≫고 미친 듯이 외쳤다. 이탈리아의 국왕은 전보로 뭇솔리니에게 로마에 와서 내각을 조직하라고 하였다. 10월 30일에 뭇솔리니는 파쇼 도당들을 거느리고 승승 장구로 로마에 들어가 이탈리아에 극히 반동적인 파쇼 독재를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하루 아침에 대권을 장악한 뭇솔리니는 모든 반대당을 즉시에 해산시키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모든 자유를 취소하였다. 얼마 후에 그는 또 의회를 해산시키고 명령으로 법률을 대체하였으며, 전 이탈리아를 자기의 의지에 복종케 하였다. 대외 관계에서 뭇솔리니는 영토를 빼앗을 욕심 밑에 고대 로마의 영광을 회복할 꿈을 꾸면서 도처에서 침략하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전후 초기의 미국과 일본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의 독점 자산계급들은 크게 횡재하였다. 미국은 유럽과 각 교전 쌍방에 무기와 식량을 공급한 한편 유럽 열강들을 대신하여 낙후한 국가에 대한 공업품의 공급자로 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공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대외 무역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로부터 미국은 많은 자본을 축적하였으며 황금보유량이 세계에서 제일 많았다. 전쟁 후 미국은 전쟁 전의 채무국으로부터 전쟁 후의 채권국으로 되었다. 미국은 유럽 나라들을 대체하여 세계경제 패권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세계 금융 중심이 영국 런던으로부터 미국 뉴욕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대전 후 미국은 날로 증강되는 경제력에 의지하여 도처에서 달러를 써가면서 세계 각국을 지배하려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미국의 달러외교였다. 미국은 달러 외교의 중점을 먼저 라틴아메리카에 두었고 다음으로 동부 아시아에 두었으며 그 다음으로 유럽에 두었다. 미국은 대외투자액의 절반을 라틴아메리카에 투자함으로써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을 미국 달러 세력의 지배를 받게 하였다. 달러 세력의 팽창은 동부아시아에서 영웅으로 자처하던 일본과 심각한 모순을 일으켰다. 전쟁후 유럽에서 만약 미국의 경제적 원조를 받지 않았다면 유럽의 경제부흥과 배상금 문제가 모두 해결될 수 없었으므로 미국의 달러 세력은 지배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전 기간에 유럽의 공업 대국들은 전장에서 바삐 돌고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시기를 이용하여 상공업을 애써 발전시켰다. 일본은 비단 동부아시아 시장을 독점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심지어 유럽 각지에까지 상업 사업을 벌여놓았다. 이리하여 전쟁 후에 일본은 채무국으로부터 채권국으로 도약하였고, 그의 경제력과 구미 열강의 경제력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외교면에서 일본도 열강들이 동부 아시아를 돌볼 여가가 없는 기회를 타서 국외로 크게 확장하였다. 1914년에 일본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고 이것을 이용하여 중국 산동성을 점령하고 이듬해에는 또 중국에 ≪21개조≫요구를 제시하였으며, 나아가서 중국 전부의 영토를 저들의 보호 밑에 두려 하였다. 그리고 태평양에서 독일의 속지인 마리아나 군도, 카롤린군도, 마샬 군도도 일본에 장악되었다. 동부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확장은 미국이 제기한 문호 개방, 기회 균등의 원칙을 파괴하였으므로 미국의 불만을 자아냈으며 결국 1921년 말에 워싱톤 회의를 소집케 하였다.






제2절 20년대의 국제관계

배상금 문제
배상금 문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해결되지 못한 가장 복잡한 국제 문제의 하나였다. 베르사이유 강화 조약의 규정에 근거하여 배상금 위원회가 성립되었다. 1921년에 배상금 위원회 런던회의에서는 독일의 배상금 총액을 금화 1,320억 마르크로 하고 42년간에 다물도록 결정하였다. 1921년에 독일은 제1기 배상금을 지불한 후 정부수입이 급격하게 감소되고 경제가 혼란 상태에 빠졌으므로 배상금 지불기한을 연기해 줄 것을 제기하였다. 독일의 요구에 대하여 영국과 미국에서는 동의하였으나 프랑스가 끈질기게 반대하는 바람에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독일 정부에서는 공개적으로 배상금 지불에 항거해 나섰다.
1923년 1월에 프랑스와 벨기에는 독일이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출병하여 루르를 점령하였다. 루르에 대한 점령은 독일의 상공업을 정지시켰고 마르크의 가치를 떨구었으며, 물가를 팽창시켰고 재정을 파산시켰으며, 경제를 혼란 속에 빠뜨렸고 혁명이 일어날 위기를 조성시켰다. 10월 중순에 작센과 튜링겐에서는 노동자 정부가 성립되었다. 10월말에 함부르크 노동자들이 단행한 총파업은 무장 봉기로 발전하였다. 프랑스는 루르를 점령한 후, 그가 약탈하려던 대량의 석탄 자원을 얻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거액의 군사 점령비를 지불하였다. 특히 독일 혁명의 세찬 물결은 독일, 프랑스 두 나라 통치 집단을 엄중히 위협하였다. 이런 정황에서 미국과 영국은 기회를 이용하여 독일 배상금문제를 해결하는 주동권을 저들의 손에 틀어쥐었다.
1924년 8월 협상국은 런던에서 회의를 열고 미국 은행가 도오즈를 우두머리로 하는 전문가 위원회에서 제기한 배상 계획, 즉 ≪도오즈 계획≫을 채택하였다. 이 계획은 독일의 배상금 총액을 확정하지 않고 다만 1924년~1925년의 배상금액을 금화 10억 마르크로 하며 금후 해마다 증가하여 1928~1929년의 배상금액을 금화 25억 마르크를 한다고 규정하였다. 도오즈 계획에 규정하기를 국가는 일용 필수품의 간접세를 높이는 것으로 늘어난 예산 수입은 배상금을 바치는 주요한 재원으로 하고, 독일의 공업 기업과 철도의 이윤으로는 일부분의 배상금만 지불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배상금을 지불하는 무거운 부담은 독일 노동 인민들이 짊어지게 되었다.
도오즈 계획이 실행된 후 프랑스, 벨기에는 루르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도오즈 계획은 독일에 금화 8억 마르크의 차관을 주어 독일의 통화를 안정시키고 예산을 평형시키기로 규정하였다. 그후 외국 자본, 주로는 미국 자본이 대량으로 독일에 흘러들어 갔다. 1924년부터 1929년까지 독일은 금화로 약 11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물었지만 같은 시기에 독일에 대한 외국 독점 자본의 차관과 투자도 금화로 근 250억 마르크나 되었다. 독일의 경제는 외국의 거액의 차관과 투자에 의거하여 신속히 복구되었다.
1828년에 독일은 도오즈 계획에 대한 수정 요구를 제기하였다 이듬해에 협상국은 다시 전문가 위원회를 조직하고 미국 은행가 영을 우두머리로하여 영 계획을 기초하고 각국의 비준을 거친 다음 그해부터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이 계획에는 독일의 배상금 총액을 1139얼 마르크로 하고 59년내에 다 지불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영 계획이 체결된 얼마 후에 세계 경제 공황이 발생하였으므로 독일은 배상금 지불 기한을 연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독일의 요구에 동의하고 배상금과 전쟁의 빛을 모두 1년 연기하여 지불하게 하였다. 얼마 후 독일은 또 배상금을 지불할 힘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협상국은 로잔에서 회의를 열고 배상금 총액을 대대적으로 삭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나라들이 ≪신사 협정≫(신사 협정은 문자적 근거가 없는 협정을 가리킨다)을 체결하였는데 미국에 진 전쟁의 빛이 원만히 해결되기 전에는 로잔 협정을 잠시 비준하지 않는다고 서로 협상하였다. 그리하여 전쟁 후의 배상금 문제와 전쟁빚 문제는 해결을 못 보고 끝났다.





로카르노 공약
도오즈 계획은 독일의 실력을 증강시키는 데 편리하게 문을 열어놓았다. 안전 보장을 도모하기 위하여 1925년 10월에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는 스위스의 로카르노에서 회의를 열고 최후 의정서와 7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로카르노 공약≫이라고 총칭하였다. 공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포괄되었다. (1) 독일, 벨기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는 서로 베르사이유 강화 조약에 규정된 독일과 프랑스간, 독일과 벨기에간에 영토의 현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보증하며, (2) 독일은 벨기에, 프랑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각각 중재 전문 조약을 체결하고 무릇 외교상에서 해결할 수 없는 분쟁 문제를 협상하여 중재 법정이거나 국제 법원에 넘겨 해결하며, (3) 프랑스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각각 독일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에 관한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였다.
로카르노 공약이 체결된 후, 독일은 1926년 9월에 국제 연맹에 가입한 동시에 국제 연맹 행정원 상임 이사의 직위를 얻었다. 로카르노 공약은 독일의 정치적 지위를 높여 주었으며 독일 군국주의의 부활을 가속화시켰다.





불가침 협정과 국제 군비 축소 대회
프랑스와 미국의 발의 하에 1928년 8월에 미국, 프랑스, 영국, 일본, 이탈리아, 독일 등 15개 나라의 대표들이 빠리에서 불가침 협정을 체결하였다. 1933년에 와서 불가침협정에 가입한 나라는 7개국이었다. 협정에는 각국이 전쟁으로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한마디 말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고 협정을 위반하는 나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유효한 제재조치를 규정하지 않았다.
대전 후 얼마 안 가서 제국주의 각국은 다시 군비 경쟁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광범한 인민들에게 불안을 가져다 주었다. 열강들은 세계 여론을 덮어 감추기 위하여 국제 연맹에서 시간만 보내면서 군비 축소 문제를 진지하게 토론하지 알았다. 1925년에 국제 연맹은 군비 축소 대회 준비위원회를 성립하였다. 5년이 지난 후 1830년에 와서 준비 위원회에서는 내용이 텅 빈, 그리고 많은 의견들을 보유한 군비 축소 공약 초안을 정하고 이것을 국제 연맹에 바쳐 세계 군비 축소 대회 토론의 기초로 삼았다.
1932년 2월에 세계 군비 축소 대회가 제네바에서 열렸다. 그때 국제정세는 이미 날마다 긴장이 더해졌고 제국주의간의 모순이 첩첩 쌓여져 대회에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독일 대표는 독일의 군비 평등권 향유를 승인해 줄 것을 대회에 요구하였으나 거절을 당하고 대회에 퇴장하였다. 12월에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미국 등 5개국이 협정을 맺고 원칙상 독일의 군비 평등권을 승인하였다. 1933년에 군비 축소 대회가 다시 열렸는데 독일이 또다시 회의에 참가하였다. 당시 독일의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태도가 강경하였다. 그는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금지당한 무기를 보유할 것을 요구하다가 영국과 프랑스의 거절을 당하였다. 10월에 독일은 군비 축소 대회에서 탈퇴한다고 선포하고 국제 연맹에서 나왔다. 군비 축소 대회는 유명 무실하게 정지되어 있다가 1934년에 마지막으로 결과도 없이 해산되었다. 이로부터 각국의 군비 경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이탈리아 파쇼가 대두한 경과를 간단히 설명해 보자.
2.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배상금 문제가 발전한 경과를 간단히 설명해 보자
3. 파쇼, 로카르노 공약을 설명해 보자.







제5장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신경제정책의 실시
10월 혁명 후 외국의 무장 간섭과 국내 전쟁으로 하여 소비에트 국가의 경제 건설 사업은 할 수 없이 중단되었다. 1921년에 와서야 러시아 공산당(볼셰비끼) 제10차 대표 대회가 열렸다. 레닌의 제의 에 근거하여 대회에서는 신경제정책을 실시하는 것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신경제정책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1) 고정적인 식량세로 여유 양곡 징수제를 대체하며 세금을 바친 다음 나머지 식량은 농민들이 처분하게 한다. (2) 사유 자본을 전면적으로 몰수하던 데로부터 국가자본주의를 실시하는 데로 방향을 돌리고 조양제와 조차제 두 가지 형식을 취한다. (조양제는 국가 소유의 일부 기업, 공장과 광산, 자원은 일정한 조건에 따라 외국 자본가에게 넘겨 경영하게 하며, 조차제는 일부 국가 소유의 기업을 국내 자본가거나 합작사에 임차하여 경영하게 하는 것이다.) 또 부분적으로 소형의 사유 기업을 회복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3) 실물 분배제도를 폐지하고 상품 매매를 실시하였다. 신경제정책의 실시는 농민들의 경영상의 흥취를 촉진시켜 농업 생산을 신속히 앙양시킨 동시에 사회주의 공업과 농민 경제의 교환을 실시하여 노동 계급과 근로 농민들의 동맹을 공고히 하였다. 신경제정책은 모든 경제 명맥을 무산 계급 국가가장악한 조건에서 채취한 하나의 정책으로서 신경제정책의 목적은 일정한 한도내에서 자본주의를 회복시키는 것으로 상품 생산을 발전시키고 농업을 회복시키는 것으로부터 전체 국민 경제를 회복시키며, 생산이 발전된 기초에서 사회주의 성분이 자본주의 성분을 전승하게 함으로써 사회주의적 경제 토대를 건립하는 것이다.
신경제정책을 실시한 덕택으로 국민 경제는 현저하게 복구되었다. 1925년에 농업 생산 총액은 이미 대전 전 생산 총액의 87%에 달하였으며 공업 생산 총액은 대전 전 생산 총액의 75%에 달하였다.





소련의 창건
국내외의 반혁명 진공을 분쇄하고 소비에트 정권을 공고화하기 위한 투쟁 가운데서 소비에트 국가와 여러 민족들의 단결은 공고히 되고 강화되었다. 여러 민족 인민들의 단결된 힘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조국을 보위하기 위하여 1922년 12월에 제1차 전국 소비에트대표 대회가 열렸다. 레닌의 제의 에 근거하여 소비에트 여러 민족 인민들은 자원과 평등의 기초에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소련이라 약칭한다)을 창건하였다. 당시 가맹 공화국에는 러시아, 자깝까즈,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가 있었다.





레닌의 서거
전 세계 무산 계급, 근로 인민과 피압박 민족의 혁명의 위대한 스승인 레닌은 1924년 1월 21일에 불행히 서거하였다. 레닌은 자기의 일생을 무산 계급과 근로 인민들의 해방 위업에 바쳤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를 계승, 수호하고 발전시켜 마르크스주의를 새로운 단계, 즉 레닌주의 단계에로 제고시켰다. 레닌은 자본주의 최고 단계인 제국주의 의 발전 법칙을 천명함으로써 무산 계급 혁명이 제국주의 진영에서 가장 박약한 고리인 한 나라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위대한 이론을 창립하였다. 레닌은 볼셰비끼당의 창건자이며 세계 첫번째 사회주의 국가의 창건자이며 마르크스, 엥겔스 이후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이다. 레닌의 서거는 소련 인민과 전 세계 근로 인민의 중대한 손실이다. 레닌의 장례식을 거행하는 날에 각국 무산 계급은 소련 인민과 함께 5분간 사업을 정지하고 자기의 위대한 수령이며 스승인 레닌 동지를 침통한 심정으로 애도하였다.





레닌주의를 수호하고 트로츠키주의를 반대하여 싸운 스탈린의 투쟁
레닌이 서거한 때는 소련이 아직 낙후한 공업 국가였으며 자본주의가 아직 일정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농촌에서 개인 경제가 여전히 절대적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다. 국제적으로 소련은 계속 제국주의에 포위되고있었다. 그리하여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과 사회주의 혁명의 전도 문제가 볼셰비끼당 앞에 첨예하게 제기되었다.
레닌이 서거한 후에 볼셰비끼당내에서는 격렬한 투쟁이 벌여졌다. 1924년 여름과 가을에 트로츠키는 문장을 발표하여 트로츠키주의로써 레닌주의를 대체하려 시도하였다. 트로츠키는 낙후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비판할 때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이론을 천명하였다. 스탈린은,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이론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이것은 당과 인민이 소련에서의 사회주의 전도에 패하여 믿음을 가지는가 못 가지는가에 관계되는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때문에 1925년 4월에 러시아 공산당 제14차 대표 회의를 열고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를 토론하였다. 회의에서는 트로츠키의 투항주의설을 비판하였으며 사회주의가 한 나라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데 관한 이론을 결의에 써넣어 당의 모든 활동의 근본 방침으로 삼았다.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위대한 승리
1925년 12월에 소련공산당(제14차 대표 대회로부터 러시아 공산당을 소련공산당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제14차 대표 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는 스탈린의 보고에 근거하여 사회주의 공업화의 총노선을 채택하고 소련을 농업국으로부터 공업국으로, 기계 설비를 수입하던 나라로부터 기계 설비를 생산하는 나라로 전환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1927년 12월에 소련 공산당 제15차 대표 대회에서는 또 점차적으로 농업 집단화 운동을 벌일 것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여 ≪빈농에 의거하고 중농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며 부농을 명확히 반대≫하는 방침을 제정하였다. 대회에서는 또 자본주의 성분을 소멸하는 것에 관한 정책을 제출하였다. 이후부터 신경제정책은 점차적으로 취소되었다.
1928년부터 소련에서는 공업화의 실현을 가속화하고 집단 농장을 크게 발전시켰다. 소련 인민은 스탈린을 수반으로 한 당 중앙의 영도 아래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위대한 성과를 달성하였다. 1928년~1941년 기간에 소련은 세 차례의 5개년 계획 건설을 진행하였다. 제1차 5개년 계획 제2차 5개년 계획은 모두 앞당겨 4년 3개월에 완수하였다. 1928년~1937년 두 차례의 5개년 계획 기간에 도합 6000여 개소의 대형 공업기업을 신설하였고, 1937년의 공업 생산량은 전쟁 전의 1913년에 비하여 거의 5배 늘어났다. 또 제1차 5개년 계획을 완수한 1932년에 소련의 공업생산 가치가 국민 경제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이미 70%에 달하여 소련은 농업국으로부터 공업국으로 전환하였다. 제1차 5개년 계획을 완수하자 소련은 기계 설비를 수입하던 나라로부터 기계 설비를 생산하는 나라로 되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트랙터, 자동차, 항공, 화학 및 기계제조 등 공업 부문을 확립하고 독립적 국민 경제 체제를 건설하였다. 동시에 공업의 사회주의 적 성분이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제2차 5개년 계획을 완수한 다음 소련의 공업 총생산 가치는 비약하여 유럽의 제1위, 세계의 제2위를 차지하였다. 전체 국민 경제에서 사회주의 성분은 이미 철저히 승리하였고 국가 소유제와 집단 소유제가 소련 사회의 경제토대로 되었다.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달성한 소련 인민들의 위대한 성과를 법률적 형식으로 고정시키기 위하여 l936년에 제8차 소비에트 대표 대회를 소집하였다. 대회에서는 스탈린은 ≪소련 헌법 초안에 관한≫ 보고를 하였다. 대회에서는 새로운 소련 헌법을 채택하였다. 새로운 헌법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은 노동자, 농민의 사회주의 국가≫라고 선포하였으며, 정권의 전부를 도시와 농촌의 근로자에게 돌리고 근로자 대표 소비에트가 그를 실현한다고 하였다. 새로운 헌법은, 소련의 경제 토대는 생산 자료에 대한 사회주의적 소유제 - 전 인민적 소유제와 집단적 소유제이고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주의 원칙을 실시한다고 규정하였다 새로운 헌법은 무릇 소련 공민은 민족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일률적으로 평등하며, 노동권, 휴식권, 교육 받을 권리를 가지며, 언론, 집회, 출판 등 자유를 향유하며, 인신적 침범을 받지 않는다고 선포하였다.
스탈린은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1924년부터 소련의 사회생활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고 소련의 계급 구조에도 상응하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지주 계급, 도시와 농촌의 자산 계급은 이미 모두 소멸되고, 노동 계급, 농민 계급과 근로 지식인만이 남았다. 소련의 새로운 헌법은 이런 중대한 변화를 반영하였고 소련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표현하고 있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신경제정책에는 어떤 주요한 내용들이 들어 있는가? 이 정책을 실시한 목적은 무엇이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2. 소련은 사회주의 혁명과 어떤 성과를 얻었는가?








제6장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공황과 정치위기






1929년~11933년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 공황
1929년 10월 24일에 미국뉴욕의 증권 거래소가 갑자기 주식 투매의 세찬 물결에 휘감겨 들었다. 주식 가격이 폭락되어 하루 사인에 1,300만의 주식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이어서 주식 가격이 계속 내려가는 바람에 미국 각지의 자본가들로부터 뉴욕에 있는 중개자들에게 주식을 팔아버리라는 소식이 전해왔다. 역사상 전례 없이 심각한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 공황이 일어난 것이다. 이 경제 공황은 자본주의 제도의 모순이 발전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경제가 붕괴되기 전의 10년간은 미국의 경제가 극도로 번영한 시대였다. 노동자들의 생활은 비록 일정하게 개선되었지만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률은 근본적으로 상공업 이윤의 증가율을 따르지 못하였고 노동자들의 소비력이 낮아서 부단히 증가하는 상품을 소화시킬 수 없었다. 사간의 흐름에 따라 생산과 판매간의 모순 충돌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공황은 전체 자본주의 세계를 휩쌌다. 이번 공황은 그 파괴성이 극히 강하여 자본주의 세계의 공업 생산이 3분의 1이상 감소되고 국제 무역이 3분의 2나 축소되었다. 이번 공황은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줄곧 지속되었는 바 시간상으로도 매우 오래였다.
공황은 광범한 근로 인민들에게 막심한 재난을 들씌웠다. 주식의 폭락 속도가 빨라 자동 전보기로도 미처 그 실정을 알리지 못하여 거래소내외에는 안달이 난 사람들로 차넘쳤고 주식 가격의 한심한 폭락 앞에서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투자를 적게 한 많은 자산자들이 태산처럼 믿어오던 재부가 하루 사이에 없어지고 말았다. 많은 노동자들이 거리에 쫓겨나게 되어 1933년까지 가장 ≪부유≫하다던 미국에서 실업 노동자가 1,700만 명에 달하였고, 전체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실업 노동자가 3000만 이상에 달하였다. 취업 노동자들의 임금 수입도 대대적으로 감소되었다. 광범한 근로 인민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정처없이 떠다녔지만 독점 자본가들은 상품의 가격을 회복하고 저들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하여 대량의 상품을 없애버렸다. 커피와 우유를 바다에 처넣고 밀과 옥수수로 불을 땠으며, 천백만 마리의 가축을 죽여버리면서도 사람들이 먹지 못하게 하였고, 솜을 땅 속에 묻어버리면서도 그것으로 실을 뽑아 천을 짜지 못하게 하였다. 자본주의 제도의 부패성은 이번 공황가운데서 아주 확연히 드러났다.
경제 공황은 정치 위기를 초래시켰고 각국의 독점 자산 계급은 심연에 빠져 출로를 찾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뉴딜(NewDeal)≫ 정책을 실시하여 국가로부터 경제를 관리하였고, 독일, 일본에서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파쇼 정권을 건립하고 미친 듯이 군비를 늘이고 전쟁을 준비하면서 세계 재분할을 위하여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이리하여 두 개 전쟁책원지가 유럽과 아시아에서 형성되었다.





루스벨트 뉴딜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 민주당 후보 프랭클린 루즈벨트(1882~1945년)가 절대적인 우세로 공화당 후보를 격파하고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이 되었다. 1933년 3월에 루스벨트가 백악관의 주인으로 될 때 미국은 심각한 경제 공황에 처하여 있었다. 그는 ≪뉴딜≫을 실시할 것을 선포하고 국가에서 경제를 관리하는 방법으로 경제 공황을 제거하였다. 그것의 특징은 될수록 국유화의 형식을 피하고 자본주의적 ≪자유 기업 제도≫를 유지하며, 또 노동자와 소생산자에게 다소 유리한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써 국내의 계급 모순을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할 때 전국의 5분의 4의 은행이 이미 문을 닫았다. 대통령은 취임한 이튿날 전국 은행에 4일간 휴업할 것을 명령하였다. 사정이 비교적 좋은 은행은 다시 개업하게 하였고 정황이 나쁜 은행은 폐업하도록 강요하였다. 저금한 사람들의 저금은 새로 성립된 연방 저금 보험 회사의 보증을 받았다. 그리하여 은행의 신용은 회복되었고 저금되지 않았던 현금은 은행에 돌아와 다시 유통되었다. 농업 방면에서 뉴딜이 취한 조치는 주로 정부에서 농민들로 하여금 대량의 경작지 면적을 축소하게 하고 많은 가축들로 죽여 버리게 한 다음 정부에서 돈을 내 배상하는 것이었다.
뉴딜에서 취한 중심 조치는 국가에서 공업을 조절하는 것이었다. 1933년 6월에 국가 공업 부흥법이 국회에서 채택되었다. 이 법안에 근거하여 각 업종의 공업 기업에서 전 업종이 준수해야 할 공평한 경영 규약을 제정하였는데, 주로 기업의 생산 규모, 생산물 판매 범위, 가격 수준, 임금 수준 등을 규정하였다. 규정을 준수한 기업은 푸른 휘장 깃발을 높이 걸어 주고 기업주는 애국적 공민 혹은 훌륭한 공민으로 인정되었다. 이 법안은 노동자들 자신이 조직하여 일어나 자기 대표를 선거하고 고용주와 담판하여 ≪집단적 합동≫을 체결할 수 있으며, 최고 노동 시간수와 최저 노임 수준을 확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보장하였다. 이 법안에 근거하여 전문적 기구를 설립하고 길닦기, 다리놓기, 집짓기, 고층 건설 등 사람을 많이 수요하는 공공 건설 공사를 벌임으로써 인민들에게 취업할 기회를 주었다. 따라서 소비 능력을 제고시켰고 공업 활동을 자극하였다.
≪뉴딜≫은 경제 공황을 근본적으로부터 억제하지는 못하였지만 일정한 효과를 보았다. 그리하여 미국의 경제는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였고 생산이 오르기 시작하였으며, 인민 생활이 다소 개선되고 사회는 안정되는 추세로 나갔다.





유럽에서의 전쟁 진원지의 형성
세계 경제 공황은 독일을 심각하게 타격하였다. 1932년 독일의 공업 생산은 1929년보다 40. 2%하강되어 19세기 말엽, 20세기 초엽의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실업자는 600여만 명에 달하였다. 중소 농민들도 나날이 파산하여 많은 토지를 팔지 않으면 안되었다.
심각한 경제 공황은 계급 투쟁을 매우 첨예화시켰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 독일에서 1, 000여 차례의 파업 투쟁이 일어났다. 이 기간에 히틀러 (1889~1945년)를 두목으로 한 파쇼 조직-나치스 당(나치스당은 1919년에 성립되었다. 군중을 기만하기 위하여 이 극단적인 반동적 파쇼 조직은 ≪민족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나치스당이라 약칭함. ≪나치스≫란 독일어의 ≪민족적≫이고 ≪사회주의 ≫라는 두 어휘를 축약하여 쓴 것이다-이라 자칭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이라고 번역하였다. 이것은 적절하지 못하다)이 특히 창궐하였다. 나치스당은 당시에 유행된 민족주의 와 사회주의 두 간판을 내걸고 독일 민족은 우수한 민족이고 유태족과 슬라브족 등 민족은 열등 민족이라고 주장하였다. 독일 민족은 반드시 토지와 생존공간을 탈취하는 가운데서 출로를 찾아야 한다고 히틀러는 강조하고 나서 독일 민족의 게르만 제국 즉 제3제국(962~1806년 신성로마제국을 제1로마제국이라 하고 1871~1918년의 독일 제국을 제2제국이라 한다)을 건립할 것을 선포하였다. 나치스당은 허위적으로 노동 대중과 소자산 계급들에게 여러 가지 듣기 좋은 말로 언약을 하는 한편 베르사이유 조약을 저주하는 군중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복수주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광범한 군중들의 지지를 얼었다. 파쇼주의 의 위협에 직면하여 독일 공산당은 대중 속에서 많은 사업을 하면서 반파쇼 통일 전선을 결성하기 위하여 투쟁하였다.
국내에서 날로 앙양되는 혁명적 군중 운동에 겁을 집어먹은 독점 자산계급은 부랴부랴 나치스당의 우두머리 히틀러를 올려놓고 독점 자산 계급의 공개적인 테러 독재를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33년 1월 30일에 독일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정부를 조직할 권력을 주었다. 1934년에 힌덴부르크가 병사하자 히틀러가 대통령 및 총리 대권을 틀어쥐고 국가 원수로 되었다.
나치스당은 정치 무대에 오르자마자 그 흉악한 원형을 드러내었다. 1933년 2월에 히틀러의 악당이며 파쇼 두목인 괴링 도당은 졸개들을 시켜 국회의사당에 불을 지른 다음, 그 죄를 독일 공산당에 들씌우고 이것을 구실로 공산당을 금지시킬 것을 명령하고, 전국 각지에서 공산당원과 진보적 인사들을 체포하였다. 인신 안전을 보장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 관한 바이마르 헌법의 모든 조목들은 폐지되었다. 독일 공산당 중앙의장(1886~1944년)과 국제 노동 운동의 활동가이며 불가리아 공산당원인 디미트로프(1882~1949년)는.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얼마 후에 독일 파쇼 정부는 라이프찌히 법정에서 디미트로프등을 심문하였다. 디미트로프는 법정에서 파쇼 반동 통치와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세계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독일 파쇼정부는 할 수 없이 디미트로프를 무죄로 선포하였다.
1933년 3월에 파쇼분자들의 통제하에 있던 국회는 입법권과 외국과 체결하는 조약 비준권을 히틀러 정부에 넘겨주는 것에 관한 법안을 채택하였다. 그후부터 국회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얼마 후에 나치스당은 모든 노동자 협회를 해산시키고 국내의 일체 다른 정당을 취소한다고 명령한 다음 나치스당을 독일의 유일한 정당이라고 선포하였다. 1933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폭발될 때까지 22만 5000명의 독일인이 징역과 노역의 판결을 받았는데, 합산한 해수는 60만 년에 달하였으며 100만 명의 파쇼 감옥에 갇히었다. 나치스당은 또 유태인을 잔혹하게 박해하고 유태인의 기업을 취소한다고 명령하였으며, 유태인 변호사와 의사들의 개업을 엄금하였다. 그리하여 유태인은 일체 공민권을 박탈당하였고 많은 유태인들이 독일을 떠났다. 히틀러 정부는 국내의 근로 인민을 탄압한 동시에 미친 듯이 군비를 확장하고 전쟁을 준비하였다. 히틀러 정부는 ≪버터를 요구하지 않고 대포를 요구한다≫는 반동적 구호를 내놓고 백성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메라고 하였다.
파쇼 독일의 군사 역량은 신속히 증강되었다. 1935년에 독일은 베르사이유 강화 조약을 찢어버리고 보편적인 의무 병역제를 실시하였으며, 독일의 육군은 10만 명을 초과하지 못한다고 제한한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의 규정을 크게 위배하고 육군을 60만 명으로 늘였다. 1936년에 독일군대가 비무장지대인 라인 지구에 들어간 동시에 로카르노 공약을 폐지한다고 선포하였다. 독일의 이런 행동은 영국, 프랑스의 반격을 받지 않았으며, 히틀러의 모험은 또 한 차례 성공하였다. 1936년 11월에 독일과 일본은 ≪국제 공산당을 반대하는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1년 후에 이탈리아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독일, 이탈리아, 일본 3국 파쇼동맹(독일 이탈리아, 일본 세 파쇼 국가가 ≪세계를 개조하는 추축≫이라고 자칭하였기에 그 이름을 추축국이라고 하였으며 이 3국 동맹을 또 베를린-로마-도꾜 추축이라고도 하였다. )이 결성되었다. 세계대전의 한 진원지가 유럽에 형성되었다.





아시아주에서의 전쟁 진원지의 형성
1929년에 폭발한 세계 경제 공황은 신속히 일본에 파급되었다. 특히 국내 시장이 좁아서 수출에 의존하던 일본은 경제 공황의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1929년부터 1931년까지 공업생산 총액은 32.5% 감소되었고, 농업 생산 총액은 40% 감소되었으며, 수출은 절반 이상 하강되었다. 독점 자본가들은 중소 기업을 배제하는 광풍을 일으켜 임금을 낮추고 노동자를 해고시켰다. 그리하여 1931년에 근 300만의 노동자가 실업 당하였다. 지주들이 지대를 높이는 바람에 많은 농민들이 연속 파산당하였다. 공황은 계급 투쟁을 전례 없이 첨예화시켰다.
일본 통치 집단은 강력한 정권을 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파쇼 세력이 시기를 틈타서 대두하였는데 그 주력은 군부였다. 군부는 당시 일본의 방대한 군사 관료 기구를 가리키는데, 군부에는 육군성, 해군성, 육군 최고 지휘부 참모 본부, 해군 최고 지휘부 군사령부 등이 망라되었다. 일본 헌법 규정에 근거하여 일본 천황은 최대의 권력을 소유하였다. 입법, 행정, 사법 및 통수권이 천황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에 군부는 천황의 직속으로 되었고 정부는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 군부는 천황의 명의로 군부 독재 정권을 건립하고 대외에 강경한 정책을 실시하며 무장 간섭을 진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군부 전쟁 세력의 주도하에 1931년 9월 18일에 일본은 오랫 동안 획책해 온 중국 침략 전쟁을 발동하여 중국의 동북을 전부 강점하였다. 그리하여 아시아주에서 세계 대전의 진원지가 형성되었다. 1932년 3월에 일본은 중국의 동북 영토를 침략한 저들의 죄행을 덮어 감추기 위하여 괴뢰인 부의를 올려놓고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이 중국 동북을 침점한 데 대하여 당시의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는 영국, 프랑스가 통제하는 국제 연맹에 제소하였다. 국제 연맹에서 파견한 영국 사람 리튼을 우두머리로 한 ≪조사단≫이 중국에 와서 조사하고 보고서를 써냈다. 국제 연맹에서는 리튼의 보고서에 근거하여 결의를 내렸는데 일본의 ≪만주≫를 점령한 것은 불법적이라고 선포하기는 하였지만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그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1933년 3월에 일본은 국제 연맹이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구실로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고 전 중국을 정복하려는 침략 전쟁을 도발하려고 적극 준비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본 국내의 군국주의 세력도 날로 기세가 사나와졌다. 1936년 2월 26일에 한 무리의 ≪젊은 장교≫들이 군벌 파쇼 정부를 건립하려고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이 정변은 군벌집단 내부의 분쟁으로 하여 성사되지는 못하였으나 군부는 이 정변을 이용하여 정치 국세를 좌지우지하는 저들의 세력을 가일층 강화하였다. ≪2. 26 사건≫ 후에 올라앉은 히로다고오끼 내각은 전면적 군국주의화를 다그쳐 실시하고 나아가서 군사 파쇼 독재를 건립하였다.
히로다고오끼 내각은 대내로는 근로 인민을 미친 듯이 탄압하면서 근로 인민의 5, 1절 활동을 금지시키고 군수 공장의 노동자 협회를 해산시켰으며 대외로는 ≪동북 아시아 대륙에서의 제국의 지위를 확보하는 동시에 남쪽 해양으로 발진하는≫ 국책을 실시하여 중국을 전면적으로 침략하는 것 외에 동남아를 책략하고 나아가서 태평양 전쟁을 진행하려는 일본의 계획을 처음 구체적으로 밝혔다. 1937년 6월에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 전쟁을 공공연히 발동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1929년~1933년 자본주의 경제 공황 상태를 설명해 보자.
2. 무엇 때문에 독일 파쇼의 대두는 전쟁을 의미한다고 말하는가?
3. 30년대 일본 제국주의 는 중국에 대한 침략을 어떻게 점차 확대하였는가?
4. 뉴딜, 국회 의사당 방화 사건을 설명해 보자.






제7장 30년대의 민족해방 운동과 반파쇼투쟁






국제 공산당 제7차 대표 대회
전 세계가 파쇼의 침략과 전쟁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1935년 7, 8월간에 모스크바에서 국제 공산당 제7차대표 대회가 소집되었다. 대회에서는 65개 공산당의 510명 대표가 참석하였다.
대회에서는 주로 파쇼 침략에 대하여 투쟁하는 문제를 토론하였다. 국제 공산당 지도자 디미트로프가 ≪파쇼의 진공과 국제 공산당의 과업≫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그는 파쇼주의의 계급적 본질을 분석하고 파쇼주의 는 금융 자본의 극단적인 반동이며 극단적인 배타주의이며 극단적인 제국주의 분자들의 공개적인 테러 독재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또 파쇼독재는 회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제지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파쇼를 타도하기 위하여 디미트로프는 노동 계급 반파쇼 통일 전선을 건립하는 것에 관한 정책과 전술을 제출하였다. 노동 계급의 단결을 실현하기 위하여 대표 대회에서는 좌경 관문주의 적 오류를 비판하고 공산당원들에게 사회민주당원 및 노동조합주의자(노동 운동 중의 자산 계급 개량주의 사조)들과도 연합할 것을 요구하였다. 대표 대회는 노동 계급의 단결을 실현하는 기초에서 노동자, 농민, 소자산 계급과 지식인들을 망라한 반파쇼 인민 전선을 건립하고, 인민전선의 투쟁 강령을 제기하여 조건이 구비된 나라에서는 인민 전선 정부를 건립할 것을 호소하였다.
디미트로프는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 통일 전선 책략을 운용하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중국 공산당의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의 정책을 칭찬하였다.
국제 공산당 제7차 대표 대회에서 제기한 반파쇼 투쟁 문제의 정책과 전술은 각국 공산당의 활동을 지도하였고, 세계 인민의 반파쇼 투쟁을 추동하였다.





중국의 항일 민족 혁명 전쟁
1937년 7월 7일에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에 대하여 전면적인 침략 전쟁을 발동하였고, 중국 인민은 신성한 항일민족 해방 전쟁을 전개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발기 아래 항일 민족 통일전선이 정식으로 결성되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2차 합작이 실현되었으며, 통일된 전민족적 항전이 시작되었다. 중국 인민은 항일 민족 통일전선의 기치 아래 8년간의 피어린 항전을 거쳐 일본 파쇼의 야만적 침략을 물리쳤다. 중국의 전장에서 일본 침략자의 대부분 병력을 견제하였다. 중국 인민의 항일 전쟁은 세계 인민 반파쇼 투쟁의 중요한 구성 부분으로서 전 세계 반파쇼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공헌하였다.





조선 인민들의 항일 무장 투쟁
1929년에 세계 자본주의 경제 공황이 일어난 후 일보 제국주의 는 공황의 심각한 결과를 조선 인민에게 넘겨씌우려고 애썼다. 일본 식민주의 자는 조선의 농산물 가격을 대폭적으로 낮추고 일본에서 수입하는 공업품 가격을 높였다. 그리하여 많은 농민들이 파산되고 공장이 문을 닫았다.
1981년에 일본 제국주의 는 중국의 동북을 침략한 후, 조선을 중국을 침략하고 소련을 반대하는 전쟁 기지로 만들었다. 일본은 침략 전쟁의 수요에 의하여 쌀, 목화, 금, 철, 석탄 등 조선의 각종 자원을 대량으로 약탈하였다. 일본은 또 피비린 파쇼 통치를 강화하고 온 조선에다 경찰과 밀정망을 거미줄처럼 늘어놓았다.
영광스러운 혁명 투쟁 전통을 갖고 있는 조선 인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1932년 4월에 조선 인민의 첫 혁명적 무장 역량인 항일 유격대가 탄생되었다. 이 항일 유격대는 중-조 국경 지대에서 유격전을 널리 벌였고, 얼마 후에 또 유격 근거지를 세웠다. 1934년에 3월에 항일 유격대는 조선 인민 혁명군으로 정식 재편성되었다.
조선의 모든 항일 역량을 단결시키기 위하여 1936년 5월에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영도하는 항일 민족 통일 전선 조직 즉 ≪조국 광복회≫가 건립되었다. 김일성이 회장으로 선거되었다. ≪조국 광복회≫가 건립된 후 짧디짧은 몇 달 동안에 20여만 명의 군중들이 이 조직에 참가하였다. 광복회는 조선 각 계층 애국 인사들의 항일 투쟁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1937년 6월 초에 조선 인민 혁명군의 한 갈래 부대가 압록강의 천험을 돌파하고 보천보를 기습하였다. 보천보는 조선 북부의 압록강 강변에 있는데 그 당시 일본 제국주의 가 ≪국경을 경비≫하는 주요한 거점의 하나였다. 조선 인민 혁명군은 이번 기습에서 일본주둔군을 전멸시키고 승리하여 근거지에 돌아왔다. 보천보 전투의 승리는 조선 인민들에게 조국 광복에 대한 승리의 신념을 북돋워 주었다





이탈리아의 침략을 반대하여 싸운 이디오피아의 민족 해방 전쟁
아프리카 동북부에 위치한 이디오피아는 홍해를 지키는 남대문으로서 전략상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풍부한 자연자원도 갖고있다. 이탈리아 파쇼들은 지중해의 패권을 쟁탈하고 동아프리카와 북아프리카에 있는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를 재분할하기 위하여 이디오피아에 대하여 오래 전부터 군침을 홀렸다. 1935년 1월에 이탈리아는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이디오피아에 침입하였다.
이탈리아 침략군은 자기의 우세한 병력을 믿고 이디오피아를 일거에 격멸하려고 망상하였다. 이디오피아는 비록 노예제의 잔재를 보유한 봉건 국가였지만 이디오피아 인민들은 적의 강포도 두려워하지 않고 영용하게 저항하였다. 그들은 낙후한 무기를 가지고 비행기, 대포, 탱크 등 무기로 장비된 이탈리아 침략군과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이탈리아의 전격전을 파탄시켰다.
영국, 프랑스, 미국 제국주의는 이탈리아의 침략 전쟁에 대하여 방임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국제 연맹은 비록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이탈리아를 침략국이라고 선포하고 이탈리아에다 경제적 제재를 가하기는 하였으나 석유 등 중요한 전략적 물자는 수출 금지의 범위에 넣지 않았다. 영국이 장악하고 있은 수에즈 운하도 이탈리아 군대가 계속 사용하게 하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이러한 입장은 파쇼 이탈리아의 침략 야욕을 조장시켰다. 이탈이아 군대는 평화적 주민을 폭격하였고 심지어 독가스까지 뿌렸다. 그때 이디오피아 군대의 지휘자는 무능하고 또 자기의 영지에만 관심을 갖은 공작이었다. 그는 전쟁을 영도하는 면에서 착오적이어서 이탈리아 군대를 이디오피아 내륙에까지 들어오게 하였다. 1936년 5월에 이탈리아 군대는 이디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함락하고 이디오피아를 병합하였다. 그러나 이디오피아 인민들은 굴복하지 않고 많은 지구에서 계속 유격 전쟁을 벌였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이디오피아 유격대는 영국 군대와 협동 작전하여 이탈리아 침략군을 몰아내고 자기의 조국을 해방하였다.





에스파니아의 반파쇼 민족 해방 전쟁
에스파니아는 서유럽의 비교적 낙후한 국가로서 세계 자본주의 경제 공황의 타격을 받아 나라의 경제가 곤경에 빠졌고 계급 모순이 날로 첨예해졌으며 노동 운동이 부단이 앙양되었다. 1931년 4월에 에스파니아에서는 자산 계급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 군주 제도를 뒤엎고 공화국을 세웠다. 공화국 정부에서는 자산 계급성격을 띤 일부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노동자, 농민들의 생활이 현저하게 개선되지 못하였으므로 노동자들의 파업과 지주의 토지를 탈취하는 농민들의 투쟁이 계속 앙양되었다. 대지주와 금융 과두 등 반동세력들은 저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혁명을 탄압하고 파쇼 독재를 건립하려 하였다. 히틀러 파쇼가 독일의 정권을 탈취한 후 에스파디아의 반동 세력들도 망령되게 행동하면서 떠들어댔다. 얼마 후 새로운 파쇼정부를 건립한 그들은 일부 자산 계급적 민주와 자유마저 취소하였다. 이 중요한 시각에 호세 디아스(1894~1972년)를 우두머리로 한 에스파니아 공산당은 인민을 영도하여 영용하게 투쟁하였으며, 공산당, 사회당, 좌익 공화당 등으로 구성된 반파쇼 인민 전선을 건립하였다. 1936년 2월에 인민 전선은 에스파니아 국회 선거에서 승리하였고, 이어서 좌익 공화당원들을 중심으로 한 공화국 정부를 세웠다. 새 정부는 진보적 의의가 있는 일부 조치들을 취하였다.
1936년 7월에 한 무리의 반동 군인들이 에스파니아 남부와 북부, 에스파니아 속지인 모로코 북부의 많은 도시들에서 공화국 정부를 반대하는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에스파니아 인민들은 자기의 정권을 강력히 수호하였으며 정부 군대를 지지하여 여기저기에 분산된 반란군과 싸운 동시에 또 국내의 정세를 다시 통제하였다.
그러나 반동 프랑코가 영도한 이른바 국민군은 독일, 이탈리아 파쇼의 원조 아래 세력을 크게 늘렸다. 독일, 이탈리아 파쇼는 비행기를 보내 반란군을 날라주고 그들에게 무기와 돈을 공급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또 공개적으로 무장 간섭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에스파니아 내전은 파쇼 침략을 반대하는 에스파니아 인민들의 민족 혁명 전쟁으로 변하였다.
독일, 이탈리아 파쇼가 무장 간섭을 감행한 목적은 에스파니아를 통제하고 영국, 프랑스와 아시아, 아프리카에 있는 그들의 광대한 식민지간의 교통 요지를 차단함으로써 세계 대전을 발동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였다. 영국, 프랑스 제국주의 의 이익은 비록 독일, 이탈리아 파쇼의 위협을 받기는 하였지만, 영국, 프랑스는 독일, 이탈리아 파쇼의 총부리를 당시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에 돌리기 위하여, 에스파니아 인민 전선을 압살하고 자기 나라의 민주 역량을 타격하기 위하여 그들의 침략을 방임하는 ≪불간섭≫ 정책을 취했다. 영국, 프랑스의 조종 아래 1936년 9월에 런던에서 에스파니아에 대한 ≪불간섭≫위원회가 건립되었다. 이 위원회는 겉으로 각국이 에스파니아 교전 쌍방에 무기 수송을 금지한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에스파니아 공화국 정부에 대해서만 봉쇄를 실시하였고, 독일, 이탈리아가 프랑코 반란군에 무기를 제공하는 데 대해서는 묵과해 버렸다.
미국은 비록 ≪불간섭≫위원회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불간섭≫ 정책을 취하였다. 1937년 5월의 중립법에 근거하여 미국은 내전이 일어난 나라에 무기를 팔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에스파니아 공화국 정부는 미국의 무기를 살 수 없게 되었으며, 독일, 이탈리아 파쇼는 도리어 ≪중립국≫의 명의를 가진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사들인 다음 그 무기를 프랑코 반란군에 공급하였다.
소련은 에스파니아 공화국 정부에 식량, 의약품, 군수품 등 약 4억 5,000만 달러의 가치에 달하는 거대한 원조를 주었다.
1936년 11월에 반란군은 독일, 이탈리아 파쇼의 지지 아래 수도 마드리드에 들어갔다. 에스파니아 군민은 격렬히 저항하여 침범한 적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에스파니아 인민의 혁명 전쟁은 국제적으로 정의로운 지원을 받았다. 소련,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미국, 카나다, 헝가리 등 나라의 공산당원과 진보적 인사들은 에스파니아에 와서 세계적으로 이름난 국제 종대를 조직하여 1936년 11월에 공화국 정부의 상황이 위급할 때 전투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드높은 국제주의 정신을 발양하여 에스파니아 인민과 어깨걸고 영용하게 싸웠으며 피로써 마드리드를 수호하였다.
적군이 강하고 아군이 약한 형세에서도 에스파니아 인민들은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를 견실히 수호하였으며, 독일, 이탈리아 간섭군 및 프랑코 반란군과 맞서서 2년 남짓한 동안 영용하게 싸웠다. 그러나 혁명 진영 내에 침입한 간첩 - 제5 종대(1936년 반란군 장군 모라가 기자와의 회견을 가졌었는데 그때 기자가 모라의 4개 종대 가운데서 어느 종대가 마드리드를 점령하게 될 것인가고 묻자 모라는 ≪제5종대≫라고 대답하였다. ≪제5종대≫란 마드리드 시내에 숨어 있는 내부 간첩을 말한다. 그후 ≪제5종대≫는 다른 나라에서 전복 활동을 하는 제국주의의 간첩 특무의 동의어로 되었다.)가 내부에서 전복활동을 감행하였다. 1939년 3월 마드리드가 함락되고 공화국 정부는 전복되었다. 그리하여 에스파니아에서는 프랑코 통치 시기가 시작되었다. 에스파니아 인민의 민족 혁명 전쟁은 위대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그것은 다른 나라들에 대한 독일, 이탈리아 파쇼의 침략 행동을 견제하였고, 전 세계 인민들의 반파쇼 침략 투쟁을 위하여 공헌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국제 공산당 제7차 대표 대회에서 제출한 정책과 전술은 무엇인가?
2. 에스파니아 인민들의 반파쇼 투쟁의 경과를 서술하고 투쟁이 실패한 원인을 분석해 보자.







제8장 제2차 세계대전






제1절 제2차 세계대전 전야의 유럽

뮨헨 음모
1938년에 파쇼 침략 전쟁의 검은 구름이 유럽을 휩쌌다. 3월에 파쇼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후 이어서 침략의 마수를 체코슬로바키아에 뻗쳤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다민족 국가이다. 경내에는 300여만의 독일인 소수 민족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서북 변계에 있는 쑤데트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이 지구는 독일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천연적인 병풍으로서 히틀러는 일찍부터 이 병풍을 제거하려하였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독일인 소수 민족의 대우 문제를 들고 나와 들쑤셨다. 쑤데트 지역의 독일인 당은 히틀러의 파쇼당에 천명을 맡기고 히틀러의 명령을 받들어 쑤데트 지역 독일인의 ≪자치≫를 비준할 것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제출하였다. 대통령 베네스를 수반으로 한 정부에서는 독일인당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5월에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변경지대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쑤데트의 자치≫요구를 지지한다고 성명을 냈다. 이로부터 정세는 긴장되었다.
파쇼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분할하는 전체 과정에서 영국, 프랑스제국주의 자들은 그전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침략에 방임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들은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키는 방법으로 독일을 충동하여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진공하게 하려고 시도하였었다. 때문에 그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직접 압력을 가하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쑤데트 지역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였다. 베네스 대통령은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에 못이겨 독일인당과 담판할 것에 동의하고 쑤데트 지역에 자치를 실시할 것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타협자들은 한걸음 뒤졌다. 히틀러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쑤데트 지역을 독일에 넘길 것을 요구하면서 이것을 유럽에서의 자기의 마지막 영토 요구라고 떠들어댔다. 히틀러의 요구에 호응하여 독일인당의 같은 무리들은 쑤데트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다가 정부에 의 하여 진압되었다. 독일은 변경 부대를 향해 전쟁 준비 상태에 들어갈 것을 선포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협하였다. 1938년 9월 15일과 22일에 영국 수상 쳄벌린(1869~1940년)은 두 차례나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가서 히틀러와 담판하고 히틀러의 요구를 만족시키라고 베네스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 인민들은 굴복하려 하지 않았다. 소련과 기타 나라의 근로 인민들은 원수와의 결전을 다짐한 그들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소련정부에서는 독일 파쇼 침략에 저항해 나선 체코슬로바키아를 원조할 것이며 수시로 군사적 원조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여러 번 성명을 냈다. 이런 상황에서 베네스 대통령은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을 물리치고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영국, 프랑스 통치자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더욱더 압력을 가하면서 만약 베네스가 영국, 프랑스의 건의를 거절한 것으로 인하여 독일-체코슬로바키아 전쟁이 벌어진다면, 영국, 프랑스 정부는 그 어떤 원조도주지 않을 것이며, 만약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소련의 원조를 접수하고 소련-체코슬로바키아 연맹이 독일과 싸울 때 독일이 반 볼셰비끼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다면 영국, 프랑스는 독일을 지지할 것이라고 베네스에게 경고하였다. 이런 압력에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굴복하고 말았다.
9월 29일에 세번째로 독일에 간 쳄벌린은 프랑스 총리인 달라디에 및 히틀러, 뭇솔리니와 함께 뮨헨에서 회의를 가졌다. 그들은 횡포 무도하게도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를 회의에 참석시키지 않고 저희들끼리 쑤데트 지역을 독일에 떼어 주는 것에 관한 뮨헨 협정을 체결한 다음 쑤데트 지역을 독일에 떼어 줄 것을 체코슬로바키아에 강요하였다. 뮨헨 회의 후 파쇼 독일은 점점 더 탐욕스러워졌다. 독일은 1939년 3월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전부 병합하였다. 그리하여 파쇼 독일은 자기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일층 증강시켰으며, 전략상으로도 더욱 유리한 지위에 처하게되었다: 이렇게 되자 독일은 즉시 침략의 예봉을 폴란드에 돌렸다.





양보 정책의 파산
뮨헨 회의 후에 영국, 프랑스 제국주의는 계속양보 정책을 실시하면서 파쇼 독일을 부추겨 소련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세계 여론을 막기 위하여 소련과 담판하는 수법으로 마치 독일침략 세력의 팽창을 제지시키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영국, 프랑스, 소련 세 나라의 담판은 1939년 4월부터 시작되어 4개월 이상 진행되었다. 소련은 세계대전의 폭발을 제지시키기 위하여 소련, 영국, 프랑스 3국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자는 건의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는 자기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것만을 소련에 요구하고 소련의 안전은 보장하려 하지 않았으며, 소련의 서북 인근의 발틱해 연안 여러 나라들의 안전도 보장하려 하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과 담판한 동시에 6, 7월간에 영국은 또 런던에서 독일과 비밀리에 회담을 진행하였다. 영국은 파쇼 독일을 부추겨 소련을 침공하게 하려고 동 유럽과 중남 유럽에서 히틀러가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에 동의하였으며, 심지어 히틀러에게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폴란드 5개국 회의를 열고 단찌히를 독일에 귀속시키는 문제를 토론하게 함으로써 히틀러의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영국, 프랑스, 소련 3국 담판에 아무런 성의도 없었다. 그리하여 3국 담판은 끝내 무산되었다.
그때 파쇼 독일은 조속히 세계 대전을 일으키려고 하였지만 강대한 소련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 정부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할 것을 건의하였다. 스탈린을 수반으로 한 소련 정부에서는 영국, 프랑스, 미국이 독일을 충동하여 소련을 침공하게 하려는 음모를 파탄시키기 위하여 소-독 전쟁의 폭발을 지연시킴으로써 전쟁 준비를 강화할 시간을 얻기 위하여 1939년 8월 23일에 독일과 소-독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에는, 쌍방은 서로 침범하지 않으며, 어느 한 나라가 다른 나라와 싸울 때 다른 한 나라는 중립을 지키며, 조약의 유효 기간을 10년으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영국, 프랑스, 미국 제국주의자가 오랫 동안 집행하여 오던, 침략 전쟁을 방임하는 양보 정책은 드디어 파산되었다. 얼마 후에 영국, 프랑스는 제 손으로 제 눈을 찌른 격이 되어 우선적으로 독일의 침공을 받았다.






제2절 대전의 폭발과 그 첫 단계

폴란드에 대한 파쇼 독일의 불의의 습격
일찌기 1939년 4월에 히틀러는 ≪폴란드를 영원히 소멸≫할 작전 방안을 하달하고 독일 군대에 9월1일 이내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고 명령하였다. 9월 1일에 독일은 50여개 사단, 2천여 량의 탱크와 2천여 대의 비행기로 폴란드를 불의에 습격하였다. 히틀러의 전격전은 폴란드로 하여금 미처 손 쏠 사이도 없게 하였다. 폴란드 군대는 집중할 새도 없이 독일 군대에 각기 포위되었고, 폴란드의 대부분 비행기는 하늘에 오르지도 못하고 격파되었다. 폴란드인들은 비록 영용하게 싸우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서투른 지휘와 낙후한 무기는 저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의 동맹국이었다. 그들은 독일이 돌연 폴란드를 습격한 상황하에서 또 국내의 여론의 압력에 못이겨 9월 3일에 할 수 없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독일 강적이 변경에 다가든 정황하에서도 폴란드 지주 자산 계급 정부는 여전히 영국, 프랑스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 서부 전선에서 공세를 일으켜 폴란드 군대의 부담을 덜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원조의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폴란드는 독일의 ≪전격전≫의 타격을 받아 두 주일 남짓한 사이에 멸망의 재난을 받았다.
독일 파쇼는 폴란드를 점령한 후 곧 저들의 인종주의 여론을 퍼뜨렸다. 그들은 많은 폴란드인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살해하였으며, 더욱 많은 사람들을 독일에 압송하여 고역을 시켰으며, 수천 수만의 폴란드인들을 열등 민족으로 취급하여 빈민구에 이주시켰다. 전쟁 중에 독일 파쇼는 600만 이상의 폴란드인을 살해하였다.





프랑스의 패배
영국과 프랑스는 비록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지만 여전히 독일을 부추겨 폴란드를 멸망시킨 다음, 한걸음 더 나아가서 소련을 침공하게 하려고까지 꾀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이른바 ≪괴상한 전쟁≫, 또는 ≪정좌 전쟁≫ 상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독일군이 폴란드를 대거 침공하고 있을 때 서부 전선에는 독일 군대가 23개 사단 밖에 없어 그 역량이 약하였다. 그러나 110개 사단이나 되는 방대한 병력을 가진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도리어 철근 콘크리트 방어 시설 안에 들어앉아 폴란드가 멸망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싸우지 않았다.
영국, 프랑스 군대가 가만히 앉아서 시기를 놓치고 있을 때, 파쇼독일은 서진할 준비를 끝마쳤다. 덴마아크와 노르웨이는 북해와 발틱해를 통제하는 전쟁 쟁탈지로서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또 스웨덴 철광석을 독일로 수송하는 교통 요지이기도 하였다. 1940년 4월 9일 새벽에 독일 군대는 돌연 덴마아크와 노르웨이를 습격하여 4시간 내에 덴마아크를 점령하고 저녁에는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를 점령하였다. 노르웨이 군대는 내지로 후퇴하여 계속 싸웠다.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는 노르웨이 연안에 상륙하여 노르웨이를 원조하였지만 독일 군대가 포화로 공격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퇴각하였다. 6월 10일에 독일군이  노르웨이를 점령하였다.
1940년 5월 10일에 독일 군대는 서부 전선에서 공격을 발동하였다. 히틀러는 먼저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네덜란드를 점령한 다음, 다시 프랑스를 핍박하여 투항시키려고 계획하였는데, 룩셈부르크는 나라가 작고역량이 약하여 싸우지도 않고 멸망하였다. 네덜란드는 4일간 저항하다가 투항하였다. 벨기에는 영용하게 싸우다가 5월 28일에 비로소 투항하였다. 그때 벨기에 경내에 있던 약 40만 명의 영국-프랑스 동맹군은 할 수없이 프랑스 북부의 덩궤르크항으로 철수하였는데 독일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애써 노력해서야 약 34만 명의 군대가 영국 해안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중형 무기와 장비는 전부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벨기에를 공격할 때 독일군의 주력은 이미 벨기에로부터 마지노 방어선(마지노 방어선은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독일 변경에 구축한 방어선인데 그 길이가 약 750 킬로미터이다. 2차 대전 전에 프랑스 정부는 이 방어선에 의거하면 태평 무사하리라고만 생각하고 소극적으로 방어하는 군사 방침을 취하고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독일군이 벨기에 남부를 거쳐 프랑스에 쳐들어갔기에 마지노 방어선은 위력을 잃게 되었다. ) 배후에 돌입하여 5월 14일에 프랑스요새인 스당을 돌파하고 승승 장구로 남하하였다. 6월 5일에 독일군은 프랑스에 향해 총공세를 일으켰다. 프랑스가 곧 패배하게 될 상황을 본 이탈리아는 기회를 놓칠세라 6월 10일에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고 출병하여 프랑스 남부를 침공하였다. 6월 14일에 독일군은 총 한방 쏘지않고 빠리를 점령하였고 잇달아 계속 프랑스 내지에 들어갔다. 22일에 프랑스는 항복 조약에 서명하였다. 독일이 프랑스 북부를 점령하였고 매국 역적 뻬땅 도당이 프랑스 남부 지역에 괴뢰 정권을 세우고 정부기구를 비쉬에 두었다. 제국주의 강국의 하나라고 자처하던 프랑스는 한 달 남짓한 싸움에서 벌써 패배하고 말았다. 프랑스 통치 계급이 오랫동안 실시하여 온 양보 정책은 결국 프랑스를 히틀러의 철퇴 밑에 매장해 버렸다.





브리튼 전장
유럽에서의 히틀러의 군사적 승리와 동맹군의 연속적인 패배는 영국 국내에서 쳄벌린의 양보 정책에 대하여 커다란 불만을 자아냈다 노르웨이가 곧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5월 10일에 쳄벌린은 할 수 없이 사직하고 처칠이 영국의 수상을 계승하였다. 프랑스가 패배한 후 히틀러는 평화 담판할 것을 영국에 권고하다가 영국 수상 처칠에게 거절당하였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브리튼으로 쳐들어갈 준비를 하라고 독일군에 명령하였다.
1940년 7월 10일에 ≪브리튼 전장≫이라고 부르는 대공중전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 독일 공군은 영국의 항구와 해상 운송선을 집중적으로 폭격하였고, 이어서 영국의 해군 기지, 전파 탐지소(레이다 기지)와 비행장을 밤낮으로 폭격하였다. 9월부터 독일 공군은 런던과 영국의 기타공업 도시들을 대규모로 폭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습은 영국 인민들의 투지를 꺾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반파쇼투쟁의 결의를 다져 주었다. 영국 본토를 침략하려던 히틀러의 계획은 무기한으로 내버려졌고, 파쇼 독일은 처음으로 중대한 패배를 당하였다.





북아프리카 전선의 개척과 독일군의 동남 유럽 점령
이탈리아는 대전에 참가한 후 아프리카에서 영토를 확장하는 데 노력하였다. 1940년 8월에 이탈리아 군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방어 시설이 없는 소말리아(영국의 속지)를 점령하였고 그 뒤를 이어 또 수단과 케냐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동부아프리카에서의 이탈리아의 지위는 공고치 못하였다. 1941년4월에 이디오피아 유격대의 협조 아래 영국 군대가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였다.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놓여 있는 이집트는 영국과 석유 산지를 잇는 교통 요지였다. 때문에 뭇솔리니는 17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이집트를 침공하였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군대는 이집트를 보위하고 있는 3만여명의 영국군 혼합 부대와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탈리아군의 공세는 매우 약하였다. 1941년 초에 이탈리아 군대는 영국 군대의 반격에 의하여 이집트에서 물러났고, 영국 군대가 리비아의 토브루크를 점령하였다. 브리튼 전장에서 승전하지 못한 히틀러는 침략의 목표를 발칸 반도와 지중해에 돌리고 영국의 극동 항로를 차단시키려 하였다. 1940년 9월 27일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 3국은 베를린에서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정식으로 3국 추축 군사 동맹을 결성한 다음, 이로써 ≪유럽 신질서≫와 ≪대동아 신질서≫를 건립하려고 망상하였다. 독일 파쇼의 협박 아래,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가 뒤를 이어 추축국 연맹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유고슬로비아에서는 정변이 일어나 친독 정부가 전복되었다. 194l년 4월 6일에 독일 군대가 유고슬라비아에 침입하였고, 공군이 유고슬라비아 수도 베오그라드를 폭격하여 잿더미로 만들었다. 17일에 유고슬라비아는 투항하였다. 그러나 티토의 영도 아래 유고슬라비아 유격대는 계속 독일, 이탈리아 침략군에 저항하였다.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를 진공함과 동시에 그리이스에 침입하여 5월 말에 그리이스를 점령하였다.






제3절 제2차 세계대전의 새로운 단계

소련 조국 보위 전쟁의 개시
1941년 여름에 이르러 독일은 이미 유럽의 많은 국가를 점령하고 많은 인력과 물리력을 지배함으로써 소련을 침략할 준비를 다하여 놓았다.
1941년 6월 22일에 파쇼 독일은 소-독 상호불가침조약을 찢어 버리고 190개 사단(점령국 군대 37개 사단을 포함하였음), 3700여 대의 탱크, 5000대의 비행기를 가진 방대한 병력으로 소련을 불의에 습격하였다. 그 규모는 전례없이 방대하였다.
소련 인민들은 일어나 위대한 조국 보위 전쟁을 시작하였다. 8월 8일에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의하여 소련 무장 역량 최고통수의 직무를 직접 담당하였다. 스탈린을 수반으로 한 소련 공산당의 영도하에서 소련 군민들은 불타는 적개심을 안고 영용 완강하게 파쇼침략자를 타격하였다.
서부 전선에서 승리한 히틀러는 승리에 도취되어 여전히 ≪전격전≫의 방법으로 한 두 달 동안에 소련을 격파하려고 망상하였다. 그러므로 독일 침략군은 북쪽 무르만스크로부터 남쪽 크림 반도에 이르기까지의 긴 전선에서 소련에 대한 전면적 공격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세 개 방향으로 공격하였다. 북로의 독일군은 발틱해의 여러 나라를 거쳐 레닌그라드를 침공하였고, 중로의 독일군은 민스크, 스몰렌스크를 침공하여 곧바로 모스크바에 덮쳐들었고, 남로의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에 진입하여 끼예프, 깜까즈 유전을 침공하였다. 히틀러 독일은 침소 전쟁을 획책한지 오래였고 첫 세 주일 간에는 소련 붉은 군대가 신속히 격퇴당하고 독일 군대가 승승장구로 소련의 광활한 지역을 침탈하였다. 9월에 와서 중로의 독일군은 스몰렌스크를 점령한 후 모스크바를 향해 돌진하였고, 북로의 독일군은 레닌그라드 근교에 이르렀으며, 남로의 독일군은 끼예프를 점령하고 크림 반도로 밀려들었다.
10월 초에 독일 군대는 모스크바를 탈취하는 전투를 개시하였다. 소련군민들은 한결같이 뭉쳐 조국의 심장을 사수하였다. 몇십만의 모스크바주민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도 주위에 방어 시설을 구축하였다. 12월 초에 독일군은 모스크바에서 약 40리 떨어진 곳에까지 들어왔으나 독일군은 거기에서 된서리 맞은 구렁이 격으로 되어 버렸다. 몹시 심한 추위와 날로 견고해 가는 수비군들로 하여 독일군은 한걸음도 내디디지 못하였다. 12월 6일에 소련 군대는 갑자기 반격으로 넘어가 독일군을 호되게 격퇴시켰다. 독일군의 손실은 비참하였다. 소련군은 계속 독일군방어선을 돌파하였다. 1942년 1월에 소련 군대는 모스크바 부근에 들어온50만 독일군을 섬멸하였고, 적의 탱크 1, 500대를 노획하고 격파하였다. 독일 군대는 할 수 없이 150~300킬로미터 밖으로 후퇴하였다. 모스크바를 보위하는 전투에서 소련군의 승리는 독일 파쇼 군대들이 ≪천하 무적≫이라고 자랑하던 신화를 짓부셔버렸고, 전세계 인민들을 크게 고무하였다.





태평양 전쟁의 폭발
유럽에서 독일의 전격전이 성공하자 일본은 이 기회를 타서 동남 아시아에서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지를 얻었고, 이런 지방의 풍부한 석유, 고무 등 중요한 전략적 물자들을 탈취하였다. 1940년 7월에 일본은 군인을 위주로 한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고 동남 아시아를 탈취하는 기본 방침을 세운 다음, 중국, 인도지나,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지아, 버마, 필리핀 등지를 소위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에 넣으려고 획책하였다.
1940년 9월에 일본은 프랑스 비쉬 정부를 압박하여 일본이 인도지나북부를 점령하는 데 동의하게 하였고, 1941년 7월에는 인도지나 남부를 점령하였다. 동남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침략은 태평양에서 미 제국주의의 이익을 직접 위협하였다. 이에 미국 정부에서도 즉시 반응이 생겼다. 우선 일본에 대한 부분적 운송을 금지하고, 항공 연료, 강철과 선철을 더는 일본에 팔지 않았으며, 이어서 미국내의 일본의 모든 재산을 동결하였다. 영국과 네덜란드도 미국에 호응하여 일본에 대한 무역 운송을 금지하였다. 외국 물자 수입에 의하여 살아가던 일본은 무역 약탈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해군을 섬멸하고 정부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일본은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최대의 해군 기지인 하와이군도의 오아후도에 있는 진주만을 돌연 습격하기로 했다.
그때 일본은 미국과 담판하면서 미국이 양보하여 협의를 달성할 것을 희망하는 한편 진주만을 불의에 습격할 준비를 다그쳤다. 미국을 미혹시키기 위하여 일본은 싸움을 시작하는 시각까지 줄곧 담판을 계속하였다. 1941년 12월 7일에 일본 해군과 공군은 진주만을 불의 에 습격하여 아주 가벼운 대가를 치루고서 미국의 주력함 4척을 격침시키고 1척을 격파하고 3척을 손상시킨 것 외에 또 순양함, 구축함 등 각종 보조 함정 10여척을 격침, 손상시켰으며, 미국 비행기 188대를 짓부셨다. 그리하여 미국의 태평양 함대는 커다란 손실을 보았다. 12월 8일에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은 더욱더 확대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폭발된 후 반년도 못 되는 기간에 일본 제국주의는 홍콩, 말레이지아, 필리핀, 괌도, 싱가포르, 버마, 인도네시아 등지를 점령하여 잠시 군사적으로 우세를 차지하였다.





세계 반파쇼 동맹의 형성
파쇼 국가들의 침략 확장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 파쇼에 대한 세계 인민들의 원한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등 나라와 파쇼 국가간의 모순도 심화시켰다.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도 점차 반파쇼 투쟁에 휩쓸려들었다. 1939년말에 루즈벨트 대통령의 노력으로 미국 의 회에서는 1937년에 채택한 ≪중립 법안≫을 개정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현금을 내고 자기들 자체로 운반하는 것을 조건으로 무기를 사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1941년 3월에 미국은 또 ≪조차 법안≫을 채택함으로써 영국과 추축국 세력의 침략을 당하는 모든 나라에 대하여 전시 원조를 줄 것을 보증하였다. 소-독 전쟁이 일어난 후 영국, 미국 등은 소련과 연합하여 파쇼를 반대해야만이 자기들의 이익을 수호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처칠과루즈벨트는 차례로 힘을 다해 소련을 원조하겠다고 성명을 냈다. 1941년 8월에 루즈벨트와 처칠은 대서양의 한 군함에서 회담을 가지고 ≪대서양헌장≫을 발표함으로써 공동으로 ≪나치스 폭정≫을 반대하고 다시 평화관계를 건립할 결심을 표현하였다. 회담 기간에 두 나라는 또 소련에 대하여 군사적으로 원조하는 문제를 토론하였다. 11월에 미국은 소련에 대하여 조차 법안을 실시하겠다고 통지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 얼마 안 가서 1942년 1월에 소련, 중국, 미국, 영국 등 26개 나라는 워싱톤에서 공동 선언을 발표하여 ≪대서양 헌장≫에 규정된 의지와 원칙에 찬성을 표시하고, 자기의 군사 및 경제 자원을 전부 동원하여 독일, 이탈리아, 일본 파쇼 국가를 반대할 것을 보장하는 동시에 파쇼 국가들과 단독으로 정전 협정이나 강화 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것을 약정하였다. 소-독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폭발은 끝내 세계 반파쇼 통일 전선의 건립을 촉진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의 초기에는 영국-프랑스 집단이나 독일-이탈리아-일본 집단이나 할 것 없이 싸우는 목적이 모두 식민지와 세력 범위를 쟁탈하는 데 있었으므로 전쟁의 성격은 모두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러 나라 인민들이 민족 해방 전쟁을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또 반파쇼적히고 해방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소련이 전쟁에 참가하면서부터 반파쇼적이고 해방적인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로부터 소련 인민의 조국 보위 전쟁, 중국 인민의 항일 민족혁명 전쟁과 전세계 여러 나라 인민들의 반파쇼 투쟁은 서로 연합하고 서로 지지하며 강대한 국제 반파쇼 통일전선으로 결성되었다. 미국, 영국 등도 독일, 이탈리아, 일본 파쇼를 타도하기 위하여 부득이 이 진영에 가담하여 공헌하였다. 이리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은 세계 반파쇼 전쟁으로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방어전 -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
모스크바 전투 후막대한 사상자를 낸 독일은 전면적인 공세를 발동할 힘이 없었다. 히틀러는 역량을 집중하여 공격 방향을 남쪽 전선에 돌려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함으로써 동남 방향으로부터 모스크바를 포위하려고 결정하였다. 스탈린그라드는 소련의 중요한 공업 도시이며 또 남북 교통의 중추로서 모스크바와 식량, 석유가 많이 나는 바꾸, 깝까즈를 연결하는 교통 요지였다. 그러므로 스탈린그라드를 얻는가 잃는가 하는 문제는 소-독 쌍방의 전체전쟁 형세의 운명에 관계되는 것이었다.
독일 군대는 스탈린그라드 방면에 50개 사단의 정예 부대를 집결시켰다. 그 주력은 1942년 7월에 돈강으로 진격하였다. 독일 군대는 붉은 군대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8월 23일에야 비로소 군대 전체가 강을 건너 스탈린그라드에 대하여 맹렬한 진공을 가하였다. 처음에는 공습과 포격으로 시 중심을 폐허로 만들어 놓았다. 9월 중순에 독일군이 시중심으로 들어왔다. 소련 군민들은 한치의 땅도 놓칠세라 영용하게 스탈린그라드를 지켜 싸웠다. 골목마다 집집마다 모두 적을 소멸하는 싸움터로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독일군은 처음으로 이처럼 가열찬 시가전에 부딪쳤던 것이다. 폐허 속에서 육박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탱크나 비행기는 쓸모없이 되었다. 독일군이 제아무리 흉악스럽게 달려들었어도 소련 붉은 군대는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여전히 볼가강 오른쪽 기슭에서 있었다.
붉은 군대가 스탈린그라드를 고수하고 있을 때 소련 최고 통수부에서는 대량의 예비 부대를 집결시켜 대반격을 준비하였다. 1942년 11월 19일에 붉은 군대는 스탈린그라드의 서북쪽과 남쪽으로부터 반격을 시작하여 ≪집게형의 공세≫를 구성해 가지고 스탈린그라드를 침공하고 있는 독일군을 포위하였다. 1943년 2월 2일에 포위당한 33만 명의 독일 군대는 몽땅 섬멸되었다. 그리하여 6개월간 진행된 스탈린그라드 대격전은 붉은 군대의 완전 승리로 끝났다.
스탈린그라드 방어전에서의 승리는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그것은 소-독전쟁의 전화점일 뿐만 아니라 세계 반파쇼 전쟁의 전환점으로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후 독일 파쇼 군대는 전략적 방어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결국 멸망하였다.






제4절 세계 인민의 반파쇼 전쟁의 위대한 승리

각국 인민들의 영웅적 반파쇼 투쟁
일본 파쇼를 반대하여 진행한 아시아 각국 인민들의 민족 해방 투쟁은 세계 반파쇼 전쟁의 중요 구성부분이었고, 중국은 아시아 대륙에서 일본 침략자를 반대하여 싸운 주요국가였다 중국 공산당과 모택동 동지의 영도 아래 중국 인민은 영용하게 항전을 진행하여 세계 인민의 반파쇼 전쟁을 유력하게 지원하였다.
조선 인민은 일본 파쇼와 장기간 영용하게 싸웠다. 1937년~1939년간에만 하여도 조선 인민 혁명군은 3900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하였다. 1942년 이후 조선 인민 혁명군은 또 여러 차례 적의 경계선을 돌파하고 적 후방에 깊이 쳐들어가 적을 습격하고 철도, 교량 및 군수품 창고를 파괴하였다. 조선 인민의 항일 무장 투쟁은 조선 인민 해방 투쟁의 승리를 위해 기초를 닦아 놓았으며, 중국 인민의 항일 전쟁에 대해서도 유력하게 지원하였다. 중조 인민들은 일본 파쇼에 반항하는 투쟁 속에서 어깨 걸고 싸웠으며, 피로써 깨뜨릴 수 없는 전투적 친선을 맺었다.
베트남, 버마, 필리핀,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등의 인민들도 각기 자기 나라 공산당의 영도하에서 힘겨운 항일 전쟁을 진행하였다. 유럽 여러 나라 인민들의 민족 해방투쟁은 독일 파쇼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세계 반파쇼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독일 파쇼가 유고슬라비아에 침입한 후 티토 동지와 그를 수반으로 한 유고슬라비아공산당은 즉시 유고슬라비아 여러 민족 인민들을 영도하여 침략자에 저항하였다. 1941년 7월에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중앙은 전국적 무장 봉기를 단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부터 그들은 4년간 반파쇼 민족 해방 전쟁을 계속하여 1945년 5월에 유고슬라비아 전국을 해방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170만 명이나 되는 유고슬라비아 인민들의 우수한 아들딸들은 세계 반파쇼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침으로써 크게 공헌을 하였다.
1943년에 루마니아공산당은 무장 봉기를 조직하는 정치 노선을 제정하였다. 1944년 8월 23일에 루마니아 인민들은 루마니아 공산당의 영도아래 무장 봉기를 단행하여 본국의 파쇼 통치를 뒤엎고 독일파쇼를 반대하는 전쟁에 참가하였다.
프랑스가 패배당한 후 프랑스 인민들은 프랑스 공산당의 영도하에서 독일 강점자 및 뻬당 매국 정부와 백절 불굴의 투쟁을 진행하였다. 1944년 5월에 프랑스 공산당이 영도하는 유격대와 기타 저항 역량들이 ≪프랑스 저항(레지스땅스)군≫으로 통일되어 약 50만의 전사를 가지게 되었다. 드골(1890~1970년) 장군은 런던에서 파쇼 침략을 반대하고 민족 독립을 수호하는 ≪자유 프랑스≫ 운동을 조직하였다. 1943년 6월에 드골 장군은 ≪프랑스 민족해방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듬해 6월에는 이 위원회를 프랑스 임시 정부로 재조직하였다.
이탈리아, 알바니아, 그리이스 등의 인민들도 각기 자기 나라 공산당의 영도하에서 독일 파쇼와 영용한 투쟁을 벌였다.





파쇼 침략 집단의 와해
1943년에 전쟁의 형세에는 전반적으로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다. 소련의 전시 생산은 점차 상승의 길로 들어섰다. 공장에서는 밤낮으로 일하면서 많은 탱크, 대포와 전투기를 생산하였다. 그리고 군인의 공급이 독일의 3배로 확대되었다. 소련 붉은 군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뒤를 이어 1943년 여름에 진행한 꿀스크 전투에서도 독일군의 반격을 물리치고 연말에 와서는 3분의 2의 국토를 해방하였다.
북아프리카 전장에서는 형세가 미국-영국 동맹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1941년 4월에 히틀러는 독일 군대를 북아프리카에 보내 영국군대를 리비아로부터 이집트로 쫓아버렸다. 영국 군대와 독일-이탈리아군대는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승부를 가리기 어려운 지구전을 벌였다. 1942년 가을에 영국 군대는 알렉산드리아항에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엘알라메인에서 독일, 이탈리아 군대를 격파하고 그들을 리비아로 쫓아버리고 또 튀니지까지 몰아내었다. 1942년 11월에 미-영 동맹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여 동진하면서 이집트로부터 서진하는 영국 군대와 함께 공동으로 튀니지를 포위하였다. 1943년 4, 5월간에 동맹군은 공세를 발동하여 각로에서 병진하면서 독일, 이탈리아 군대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5월 12일에 독일, 이탈리아 군대가 투항하고 북아프리카 전장은 미-영동맹군의 승리로 끝났다.
1943년 7월에 미-영 동맹군은 시칠이아 섬에 상륙한 다음 이어서 이탈리아 남부를 점령하였다. 7월 25일에 이탈리아에서 정변이 일어나 뭇솔리니 정부가 나가떨어졌다. 그리하여 9월 3일에 새로운 정부가 정전 협정에 조인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이 이탈리아군을 협박해서 방어선을 탈취할까봐 두려워한 미-영 동맹국 측에서는 정전 협정을 제때에 공개하자 못하고 질질 끌다가 9월 3일에 와서야 공개하였다. 이탈리아의 투항은 파쇼침략 집단이 와해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정변에 몹시 놀란 히틀러는 즉시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독일군에 이탈리아군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동시에 군사를 파견하여 이탈리아 북부 각로의 험준한 대목들을 차지하고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독일군은 험한 지세와 열악한 일기 조건을 이용하여 이탈리아의 중부와 북부에서 1945년 5월까지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반파쇼 전쟁이 근본적으로 전환된 상황 아래에서 1943년 11월 말에 소련, 영국 수뇌자들인 스탈린, 루즈벨트, 처칠이 이란의 테헤란에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테혜란 회의에서 3국은 대독 작전에서 공동으로 행동할 것과 대전 후에 합작하는 것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였다. 이번 회의는 소련 대표단의 강력한 주장에 의하여 1944년 5월 1일 전에 유럽에서 제2전장을 개척하는 것에 관한 결의도 채택하였다.
테혜란 회의 전야에 중, 미, 영 세 나라는 카이로에서 회의를 열고 선언을 채택하였다. 1943년 12월 1일에 발표한 카이로 선언은 일본에 빼앗겼던 동북, 대만, 팽호열도 등 중국의 영토를 중국에 돌려준다고 명확히 규정하였다.





유럽 제2전장의 개척
소련 군대가 끊임없이 서진 하면서 승리를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의 통치자들은 승리의 과실을 탈취하기 위하여 급급히 서둘러 유럽에 제2전장을 개척하였다. 테혜란 회의 이후,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이 동맹군 총사령이 되어 프랑스 북부 노르만디반도에 상륙하는 대전투를 지휘하였다.
동맹군은 성공적으로 상륙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준비하였다. 영국 남부는 전체 대병영으로 변하였다. 1944년 6월 초에 약 300만 명의 육해공군과 몇천 대의 탱크, 몇천 문의 대포가 출격 준비를 다하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맹군은 1만 1,000여 대의 비행기의 엄호 아래 6000여척의 운송함과 상륙정을 출동시켰다.
6월 6일 새벽, 동맹군 상륙 부대는 영국 해협을 가로건너 노르만디반도로 출발하였다. 그날 저녁에 미국, 영국 군대는 이미 독일군이 점령한 유럽에 근거지를 세우고 몇 주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거쳐 수십만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쳤다. 동맹군은 점차 독일 국경선으로 들어갔다.
유럽 제2전장이 개척되면서부터 독일군은 소련 군대와 미-영 동맹군의 동서 협공을 받았으며, 독일 파쇼의 멸망은 가속화되었다.





파쇼 독일의 궤멸
1944년은 소련 군대가 결정적인 승리를 달성한 한 해였다. 이 해 하반기에 유럽 제2전장이 개척되었으므로 소련군의 전진 속도가 빨라졌고 연말에 와서 소련의 전영토가 해방되었다. 서부전선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던 독일군도 미-영 동맹군에 의해 분쇄되었다. 1944년 8월 하순, 동맹군이 빠리에 육박하고 있을 때 빠리 시민들은 독일점령군에 반항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동맹군에 와하여 빠리는 해방되었다. 1945년초에 소련 군대는 동쪽으로부터 독일 경내에 쳐들어갔고, 미국, 영국, 프랑스 군대는 서쪽으로부터 독일 경내에 쳐들어갔다. 동남 유럽 각국 인민들은 공산당의 영도 아래 차례로 무장 봉기를 일으켜 소련 군대와 협동 작전하여 독일 침략자를 타도하였다.
1945년 초에 파쇼 독일의 멸망은 이미 눈앞에 다가왔다. 반파쇼 전쟁의 최후 승리를 달성하는 문제와 대전 후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소, 미, 영 세 나라 수뇌자들인 스탈린, 루즈벨트, 처칠은 2월에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의를 가졌다. 얄타 회의에서는 독일을 철저히 격파할 것, 독일 군국주의와 파쇼주의를 소멸할 것, 전쟁범을 징벌할 것, 대전후의 독일을 민주화할 것 등에 관한 중요한 결의들을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대전 후에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 국제 조직인 유엔을 건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번 회의에서 소련은 유럽 전쟁이 끝난 후 3개월 이내에 대일 작전에 참가하겠다고 응낙하였다.
얄타 회의 기간에 미-영 동맹군은 독일의 루르 공업 구역을 탈취할 목적으로 서부 전선에서 대공세를 발동하였다. 4월에 루르 구역의 독일군이 포위 섬멸되었다. 이와 동시에 소련군도 강대한 공세를. 발동하여 신속히 서쪽으로 쳐들어갔다. 1945년 4월에 베를린 공격전이 시작되었다. 베를린 시에 돌진한 소련 군대는 가열찬 육박전을 거쳐 4월 30일에 승리의 붉은 기를 독일 국회 중앙청사 꼭대기에 꽂았다. 바로 이날 죄악에 찬 파쇼 우두머리 히틀러는 절망에 빠져 자살하였다. 5월 2일에 소련군대는 베를린을 함락하였다. 5월 8일에 독일은 무조건 항복 문서에 조인하였다. 그리하여 5월 9일은 유럽의 승리의 날로 선포되고 유럽 전쟁에 전장에서 종결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항복
태평양 전장에서 일본의 점령지는 비록 넓기는 하였지만 무기와 물자의 소모가 컸고 미약한 생산력으로 그것을 보충할 수 얼었기 때문에 전쟁 형세가 전환됨에 따라 실력이 하강하였다. 미국은 국력이 강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물자 소모를 신속히 보충할 수 있었다. 1942년 6월에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이로부터 해상에서 주도권을 얻은 미국은 방어로부터 공격으로 넘어갔다. 미국군대는 방대한 인력과 물리력으로 3년 동안의 어려운 전투를 거쳐 태평양에서 일본이 점령한 여러 섬들을 하나하나 탈취하였다.
아시아 대륙에서 중국 공산당의 영도 아래 중국 인민은 1944년부터 일본 군대에 대하여 국부적인 반격을 발동하여 적 후방 해방구를 확대하고 일본군을 일부 도시와 좁은 교통선 부근에 몰아넣음으로써 전면적인 반격을 시작할 조건을 만들어 놓았다.
파쇼 독일이 붕괴된 후, 파쇼 독일을 격파한 성과를 공고히 하고 대일전쟁의 종말을 가속화하기 위하여 1945년 7월 중순부터 8월 초까지 소, 미, 영 세 나라 수뇌자들인 스탈린, 트루만, 처칠(7월 28일 후에는 새로운 수상 애틀리)은 포츠담에서 회의를 가졌다. 회의는 얄타 회의 정신을 재언명하였다. 세 나라 수뇌자들은 독일 군국주의와 파쇼주의를 근절시킬 것, 독일 독점 조직과 군사적 잠재력을 소멸할 것, 민주주의의 기초에서 독일의 정치 생활을 재조직할 것에 한결같이 찬동하였다.
1945년 7월 26일에 중, 미, 영 세 나라는 포츠담 공고를 발표하여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독촉하였다. ≪공고≫는 카이로 선언의 조건을 꼭 실시해야 한다고 재언명하였다. 그러나 일본 파쇼는 투항하지 않고 그냥 완고하게 대항하였다.
8월 8일에 소련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중국 동북에 출병하여 동북에 등지를 틀고 있던 70만 명의 일본 관동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8월 9일 모택동 동지는 중국 인민에게 ≪일본 침략자에 대한 최후의 싸움≫을 벌일 것을 호소하였다. 동북, 화북, 화중, 화남 등 여러 해방구의 무장 부대는 즉시 일본 침략군에 대하여 총공세를 발동하였다. 미국은 8월 6일과 9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차례로 원자탄을 떨구었다. 도시는 잿더미로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었다. 궁지에 빠진 일본 파쇼는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선포하였고 9월 2일에 무조건 항복서에 조인하였다.





세계 반파쇼 전쟁 승리의 위대한 역사적 의의
세계 반파쇼 전쟁의 승리는 위대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으며, 전 세계 노동 계급과 피압박민족의 해방 사업에 길을 개척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 독일, 이탈리아, 일본 세 개 제국주의 강국은 타도되고 영국, 프랑스 두 개 제국주의 대국은 약화되었으며, 사회주의 역량은 전례없이 성장되었다. 대전 후 유럽과 아시아에는 일련의 인민 민주주의 국가들이 탄생하였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민족 민주 운동도 전례없이 앙양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제국주의 통치에 타격을 가하였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뮨헨 음모≫가 획책된 경과와 결과를 간단히 설명해 보자.
2. 무엇 때문에 ≪괴상한 전쟁≫이 나타났는가? 프랑스는 어떻게 패배하였는가?
3. 소련 조국 보위 전쟁의 개시와 모스크바 전투의 결과를 설명해 보자.
4 태평양 전쟁의 폭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5. 세계 반파쇼 동맹의 형성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해 보자.
6.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성격과 후에 와서 전쟁 성격이 변화된 문제를 분석해 보자.
7. 몇 개 실례를 들어 각국 인민들이 파쇼를 반대하여 영용하게 투쟁한 사실을 설명해 보자.
8. 테헤란 회의, 카이로 회의 , 얄타 회의 및 포츠담 회의는 어느 때 소집되었으며, 이런 회의들에서는 어떤 중대한 결정을 지었는가?
9. 세계 반파쇼 전쟁이 승리한 위대한 의의를 서술해 보자.








제9장 인민 민주 역량의 확대, 미국의 패권 정책






인민 민주 역량의 확대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 형세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파쇼가 궤멸되고 영국, 등이 쇠퇴하여졌으므로 제국주의 역량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유럽과 아시아 여러 나라의 인민 민주 역량이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일련의 국가들이 사회주의 길로 나아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 아시아 일부 국가의 인민 민주 역량은 반파쇼투쟁 가운데서 급속히 확대되어 끝내 자기의 국토에서 파쇼 군대를 몰아냈고, 다른 일부 국가의 인민 민주 역량은 소련군의 반파쇼 전쟁과 연합하여 자기의 국토를 해방하였다. 이러한 국가의 인민들은 반파쇼적 민족해방 투쟁을 인민 민주주의 혁명으로 발전시켜 인민 민주 정권을 수립하였다. 전쟁 말기와 전후 초기 동유럽에 수립된 인민 민주주의 국가들로는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독일민주주의 공화국(동독)이고, 아시아에 건립된 인민 민주주의 국가들로는 중국, 조선, 베트남이 있다.
유고슬라비아는 티토를 비롯한 공산당원들이 반파쇼 투쟁 가운데서 군대를 건립하였는데, 전쟁이 종말될 때에는 30만 명에 달하였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공산당원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1943년 11월에는 임시정부가 건립되었다. 그리고 2년 후에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공화국이 창립되었다.
알바니아 공산당원들은 파쇼를 반대하는 무장 투쟁을 영도하였다. 1944년 11월에 전 알바니아가 해방되었다. 1946년에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이 창건되었다.
대전 기간에 불가리아에서는 국왕을 수반으로 한 반동 통치 집단이 독일, 이탈리아, 일본 파쇼 국가 집단에 가담하였고, 불가리아 공산당은 인민을 영도하여 유격 전쟁을 벌였다. 1944년 9월에 소련 군대가 불가리아로 진출하였을 때, 불가리아 공산당은 인민을 영도하여 무장 봉기를 일으켰고, 파쇼 통치를 뒤엎고 조국 진선 정부를 조직하였다. 1946년 9월에 불가리아에서는 군주 정부가 폐지되고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창건되었다. 공산당의 지도자 디미트로프가 부장회의 주석으로 당선되었다. 루마니아의 안또네스꾸 정권은 전쟁 기간에도 파쇼 국가 집단에 가담하였다. 이 정권은 1944년 8월에 루마니아 공산당이 영도한 무장 봉기에의 하여 무너졌다. 19455년 루마니아에는 민주 정부가 생겼고, 1947년에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이 창건되었다.
헝가리도 전쟁 기간에 파쇼 국가 집단에 가담하였다. 1945년 4월에 소련 군대의 승리에 찬 진격에 의해 헝가리가 전부 해방되었다. 1945년11월 의회 선거에서 소농당이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였고, 소농당의 지도자 나지 페렌츠가 정부의 총리로 당선되었으며, 소노당원이 반수의 부장직무를 차지하였다. 1946년 2월에 의회는 군중들의 압력에 못이겨 헝가리를 인민공화국으로 선포하였다. 3월에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등으로 결성된 좌익 연맹이 건립되었다. 3월 7일에는 40만 군중들이 수도 부다페스트 거리에서 시위 행진을 단행하여 좌익 연맹을 지지하고 소농당의 반동적인 영도에 반대하였다. 1947년 초에 폭력으로 민주주의 제도를 뒤엎으려 한 음모가 폭로되자 나지 페렌츠를 우두머리 한 반동적 지도자들은 미국으로 도망하였고, 소농당의 정치적 영향은 곤두박질 쳤다. 8월에 헝가리의 정권은 노동자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대전 전에 히틀러 독일에 점령되어 있었다. 대전말기인 1945년 5월 초에 프라하 인민들이 무장 봉기를 단행하고 소련군대와 연합하여 5월 9일에 프라하를 해방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전영토를 해방하였다. 1946년 국민의회 선거를 거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수령 코트왈트를 우두머리로 한 연합 정부를 건립하였다. 1948년 2월에 정부내의 국가사회당, 천주교 인민당, 슬로바키아 민족당의 반동 분자들은 서방 국가의 사주로 반혁명 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들의 복고 음모는 분쇄되었고, 인민 민주 정권은 공고해졌다.
폴란드는 대전 초기에 독일에 점령되고 있었다. 1939년 9월 말에 폴란드 자산 계급은 국외에서 망명 정부를 조직하였다. 폴란드 노동당은 국내에서 인민을 영도하여 유격 전쟁을 진행하였다. 1944년 7월에 소련군대가 폴란드 국토에 진입하였다. 대전이 종결된 후 1945년 5월에는 임시 민족 통일 정부를 조직하였는데, 거기에는 전시 망명 정부의 대표도 들어 있었다. 1947년 초에 입법의 회 선거가 진행되었는데, 폴란드 노동당을 위시한 민주당파 연맹이 선거에서 승리하였고, 노동당 당수 베루트가 수상으로 당선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크림의 정서≫와 포츠담 협정에 근거하여 독일과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 구역별로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네 나라에 각기 점령되었다. 1947년부터 1949년 사이에 소련 점령구의 독일 인민들은 베를린에서 차례로 세 차례의 대표 대회를 소집하고 임시 인민 의원을 수립하였으며 헌법을 채택하였다. 1949년 10월 7일에 헌법이 효과를 발생하였고 독일민주주의 공화국이 창건되었다. 10월 10일에 소련군 정부는 행정권을 임시 정부에 넘겼다. 그리고 빌헬름 피크가 수상으로 당선되었다.
1945년 8월에 일본이 항복을 선포한 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조선남부와 북부에 소련 군대와 미국 군대가 각기 주둔하였다. 미국은 조선남부에서 지주, 자산 계급 친미 세력을 부추겨 1948년 8월에 ≪대한민국≫의 창건을 선포하였다. 조선은 이때로부터 분단 상태에 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베트남 북부는 일본군에 점령되어 있었다. 인도지나 공산당의 영도 아래 베트남 인민들은 프랑스 식민주의 자와 일본파쇼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45년에 베트남 인민들은 8월 혁명을 단행하여 승리를 달성하였다. 9월에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창건되고 호지명이 공화국 주석을 담임하였다. 그후 얼마 안 가서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침략하였다. 베트남 인민들은 9년 항전을 벌여 1954년 5월에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를 달성하였다. 프랑스는 할 수 없이 인도지나의 평화를 회복하는 데 관한 제네바 협정에 조인하였다. 협정에는 ≪캄푸치아, 라오스, 베트남은 이제부터 완전히 독립 자주적으로 국제적 평화 대가정 속에서 그들의 활동을 발휘할 수 있다≫고 규정되었으며, 따라서 이 세나라는 최종적으로 독립을 얻게 되었다. 월남은 잠시 북위 17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여 프랑스 군대는 분계선 이남에 집결하였고 베트남 북방은 해방되었다.
유럽과 아시아 각국에서는 인민 민주 정권을 수립한 이후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진행하였다. 소기업을 배제하고 대기업에 대해서는 국유화를 실시하였는데 그 특징은 자산 계급에 대하여 ≪속매(보상 매입)≫ 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각국은 모두 토지 개혁을 실시하였으며, 50년대 말, 60년대 초에 절대 다수의 국가들에서는 농업 생산 합작사를 만들었다. 혁명이 심화 발전 됨에 따라 지주, 자산 계급 반동 세력들의 반항이 심해졌다. 각국의 노동 계급은 서로 다른 상황에 근거하여 평화적이거나 비평화적인 투쟁 방식으로 인민 민주 독재를 공고히 하였으며, 혁명과 건설의 순조로운 발전을 꾀하였다.





미국의 패권 지위의 확립과 미국의 ≪냉전≫정책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경제 능력과 군사 능력을 크게 팽창시켰다. 미국 본토는 유럽과 아시아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국은 전쟁에서 군수 물자를 팔아 횡재하였다. 전후 초기에 미국의 공업 생산 총액이 자본주의 세계의 3분의 1을 차지하였고, l948년에 와서는 자본주의 세계의 2분의 1을 차지하였다. 미국의 황금 보유량(미국의 황금 보유량은 1949년에 246억 달러에 달하여 자본주의 세계 황금 보유량의 73.4%를 차지한다)은 크게 늘어났고, 미국은 여전히 당시 세계에서 핵무기를 장악한 유일한 국가였다. 미국은 정치면에서 각국의 반동 세력들을 증식하여 인민 혁명운동을 탄압하였고, 군사면에서 총칼을 휘두르고 위세를 부리면서 세계대제국을 건립하려고 꿈꾸었다. 미국은 또 여러 가지 수단으로 ≪공산주의를 내리누르고≫ 자본주의를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직접 전쟁을 감행하지 않았다 하여 ≪냉전≫ 정책을 취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1946년 3월에 처칠은 트루만의 안내로 함께 미국 미주리주의 프르톤에 가서 ≪철의 장막≫에 관한 연설을 발표하여 ≪냉전≫을 선전하였다. 1947년 3월 12일에 미국 대통령 트루만은 국회에서 ≪미국의 정책은 정복을 시도하는 소수의 무장 분자나 외부의 압력에 저항해 나서는 자유 국가 인민들을 지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트루만주의≫의 정책이다. 이것은 미국이 공공연히 세계 각국의 내정에 간섭한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국회에서는 트루만주의의 정책을 지지하고 먼저 그리이스와 터어키에 경제, 군사 원조로 4억 달러를 제공할 것을 허락하였다.
대전 기간에 그리이스는 독일, 이탈리아에 점령되어 있었고 국왕과 정부는 외국에 망명하였다. 그리이스 공산당은 전국이 해방될 때까지 줄곧 국내 인민을 영도하여 무장 투쟁을 진행하였다. 대전이 끝난 얼마 후 그리이스에서는 내전이 일어났고, 반동 정권은 진보적 역량의 공격을 받아 무너져갔다. 그리이스 공산당이 영도한 유격 전쟁은 미국의 간섭으로 인하여 1040년에 실패하였다. 트루만주의의 영향으로 서유럽에서는 한 갈래의 반공 역류가 흘러 많은 국가의 공산당원들이 정부에서 배제되었다.
≪억제≫ 정책을 실시한 또 하나의 중요한 절차로는 ≪마샬 계획≫을 실시한 그것이었다. 당시 전쟁에 짓밟힌 유럽의 나라들은 몹시 어려운 처지에 있었고 사회는 불안하였다. 미국 정부의 지도자들은 유럽 자본주의 제도의 안정을 미국의 이익 원천으로 판단하였다. 미국 국무장관 마샬은 유럽을 전쟁 후의 폐허 속에서 일으켜 세우고 급진적 사회 변혁을 제지시키기 위하여 1947년 6월 하버드 대학에서 연설을 발표하여 유럽을 부흥의 길로 나아가게 하겠다고 하면서 ≪유럽 부흥 계획≫을 제기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마샬 계획≫이었다. 1948년 4월에 트루만은 ≪대외 원조법≫에 서명하였다. ≪대외 원조법≫에는 마샬 계획에 참가하여 원조를 받는 여러 나라들은 미국의 원조 조건에 따라 쌍무 협정을 체결해야 하며, 미국은 상품 수출, 대여금 지불, 예물 증정 등 몇 가지 방법으로 원조한다고 규정하였다. 소련과 동유럽 여러 나라들도 마샬 계획내에 들어있었지만 이들은 마샬 계획에 참가하지 않았다. 1948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은 마샬 계획에 따라 120억 달러를 지불함으로써 서유럽의 경제 복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이슬란드로부터 터어키에 이르기까지의 16개 국가(오스트리아, 벨기에, 영국, 덴마아크, 아일랜드, 프랑스, 그리이스,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델란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스웨덴, 스위스, 터어키이다)는 3년도 못 되는 사이에 공업 생산량이 전쟁 전보다 25% 증가하였고, 농업 생산물은 전쟁 전보다 40% 증가하였다.
유럽 부흥 과정에 미국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유럽에서 군사, 정치 집단을 긁어모았다. 1949년 4월에는 미국을 수반으로 한 서방의 12개 국가(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룩셈부르그, 카나다, 노르웨이 벨기에, 아이슬란드, 포르투갈, 이탈리아와 덴마아크를 말한다)의 대표들이 워싱톤에서 ≪북대서양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에는 ≪집단적 방어를 진행하여≫, 한 나라가 ≪무장 공격≫을 받을 때 기타 조약국은 반드시 ≪무력 사용을 포함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조약에 근거하여 ≪북대서양 동맹≫ 혹은 ≪북대서양 집단≫으로 불리우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나왔다. 이 기구에는 통일적인 군대가 있었으며, 아이젠하워가 이 기구의 최고 사령관을 담당하였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나온 후 연방 독일이 솟아나기 시작하였다. 전쟁 후 미국, 영국, 프랑스 3국이 점령하였던 독일의 점령구에서 1948년 6월에 합병하여 점령구 화폐 개혁을 실시하였다. 1949년 5월에 독일연방공화국이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1954년 10월에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은 연방 독일과 ≪빠리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연방 독일의 피점령 상태를 종결지었고, 연방 독일을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받아들였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대응하여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1955년 5월에 바르샤바에서 ≪우호합작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을 ≪바르샤바 조약≫이라고 통칭한다. 조약에는 만약 한 나라가 ≪무장 공격≫을 받게 되면 모든 조약국은 일체 ≪무장 부대의 사용을 포함한 필요한 방식≫으로 ≪원조해야 한다≫고 규정되었다. 이 조약에 근거하여 바르샤바조약 기구가 나왔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건립은 2대 군사 정치집단의 대치 국면의 형성을 의미한다.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침략
유럽은 미국 대외 팽창에서의 세계적 전략 중점이었지만 미국은 아시아에 대해서도 ≪방기≫하지 않았다. 미국은 ≪식민주의를 반대≫ 한다는 구호를 들고 극동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배제하기 위하여 힘썼다.
항일 전쟁이 끝날 무렵에 중국 공산당이 영도한 인민 무장 역량은 전례없이 확대되었다. 미국은 장개석 정부를 증강하여 인민 무장을 섬멸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중국 인민을 내전의 심연 속에 몰아넣었다. 당시 장개석의 대부분 병력이 중국의 서남, 서북 지구에 멀리 떨어져있어 전면적인 대전을 발동하는 데 곤란이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연출 아래 장개석은 ≪평화≫ 음모를 꾸미고 국공 양당의 담판을 진행하여 ≪쌍10협정≫을 체결하였다. 동시에 미국과 장개석 정부와 결탁하여 전쟁할 준비를 갖추었다. 미국은 해군과 공군을 이용하여 국민 정부 군대 54만명을 화북, 동북 전선으로 날라왔으며, 해방구를 침공할 준비를 갖추었다. 미국은 돈과 총을 대서 국민 정부 군대 45개 사단을 무장시켰고, 또 그들을 위하여 15만 군대와 경찰, 특무대를 훈련시켰다. 1946년 6월 말에 미국과 장개석 정부는 인민 혁명 역량을 섬멸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해방구에 대하여 전면적인 침공을 발동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인민을 영도하여 위대한 해방 전쟁을 진행하였다. 3년 남짓한 동안의 피어린 투쟁을 거쳐 국민 정부 군대 800만 명을 섬멸하고 중국 대륙을 전부 해방하였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은 10월 혁명이 승리한 이후 인류 역사에서의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서 세계 사회주의 역량을 크게 강화시켰다. 중국 혁명의 승리는 전쟁 후 미국의 아시아에 대한 정책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세계 민족 해방 운동의 발전을 유리하게 추동하였다.
미국은 중국을 잃었기 때문에 극동 지구에 대한 포위권을 강화하였다. 미국은 필리핀 군도의 군사 기지를 이용하고 알류산 군도와 알라스카를 거쳐 중국과 소련에 대하여 포위권을 이루어놓았다. 조선 반도는 바로 이 전략선에 놓여 있었다.
1950년 6월 25일에 조선 전쟁이 폭발하였다. 트루만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 해군과 공군을 파견하여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칠것을 공공연히 명령하였으며, 동시에 무력으로 중국 인민의 자기의 신성한 영토 대만에 대한 해방을 저해하며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할 것을 선포하였다. 미국은 또 유엔(유엔은 1945년에 건립되었다. 51개 창설회원국이 조인한 ≪연합국 헌장≫에 국제 평화와 안전을 수호하며 국제 친선 합작을 촉진한다는 연합국의 목적을 규정하였다. 연합국에는 총회, 안전보장이사회 등 6개의 주요한 기구가 있으며 본부는 뉴욕에 설치하였다. 연합국은 창립 초기 미국에 의하여 조종되었다. 후에 제3세계가 흥성하였기 때문에 연합국은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들이 정의를 선전하는 연단으로 되었다.) 안전보장이사회를 조종하여 조선 문제에 관한 제안을 채택하고 15개 국가의 군대를 긁어모아 미군을 위주로 한 ≪유엔군≫을 조직하여 조선 북부를 침공하였다. 9월에 미국 군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북침하였으며 전쟁의 불길은 중국 동북변경에까지 뻗쳤다. 중국 인민은 항미 원조, 보가위국을 위하여 중국인민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중국 인민 지원군은 1950년 10월 25일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 인민군과 어깨 걸고 싸웠다. 중조 두 나라 인민들은 미국 침략군을 38선 부근까지 몰아내었다. 1953년 여름에 미국은 할 수없이 ≪조선정전협정≫에 조인하였다.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서의 연속적인 실패를 달가와하지 않고 또 침략의 총부리를 인도지나에 돌렸다. 1954년 제네바 협정이 체결된 후 미국은 프랑스를 대신하여 베트남 남부에서 식민주의 통치를 실시하였다. 1960년에 베트남 남부 민족해방전선이 창건되어 해방을 쟁취하고 조국 통일을 쟁취하는 베트남 인민들의 혁명 투쟁을 탄압하기 위하여 미국은 장기간 베트남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1961년에 미국 군사 고문이 직접 지휘한 ≪특수 전쟁≫을 발동하였다. 1964년 8월에 미국은 베트남 북부를 폭격하기 시작하였다. 1965년 3월에 미국이 베트남 남부에 지상군 부대를 보내 직접 전쟁에 참가하였으므로 ≪특수 전쟁≫은 ≪국부 전쟁≫으로 승급하였다. 미국의 베트남 침략군은 급속히 늘어나 50여만 명에 달하였다. 미국은 ≪남부를 치고 북부를 폭격≫하는 이런 전쟁을 통하여 베트남을 굴복시키려하였다. 베트남 남부와 북부 인민들은 한 사람같이 뭉쳐 억세게 싸우는 가운데 항미 구국 전쟁에서 승리를 달성하였다. 1973년 1월에 미국은 끝내 ≪베트남에서 전쟁을 끝마치고 평화를 회복하는 것에 관한 협정≫에 조인하고 할 수 없이 베트남 남부에서 전부 철수하였다. 2년 후에 남부베트남 정권이 전복되고 베트남 남부가 해방되었다. 베트남 인민들이 14년간 견지한 항미 구국 전쟁은 이렇게 승리로 끝났다. 1976년에 베트남의 남북은 통일되었고, 국명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라고 하였다.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침략 팽창은 또 좌절당하였다. 특히 조선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실패한 후 미국의 국력은 전쟁 초기보다 크게 약화되었다. 미국은 저들의 전략적 중점인 유럽에서의 안전과 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아시아에 있는 부분적 병력을 유럽으로 옮겼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2차 세계대전 후 유럽과 아시아의 일련의 나라들이 사회주의 길로 나가게된 것에 대해 토론해 보자.
2. 무엇을 ≪냉전≫ 정책이라고 하는가?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실시한 ≪냉전≫정책의 표현은 무엇인가?
3. 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침략을 간단히 설명해 보자.
4. 트루만주의, 유엔을 설명해 보자.





제10장 3개 세계의 형성과 발전 변화






제3세계의 흥성
제3세계(1974년 2월에 모택동은 3개 세계를 획분하는 전략 사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미, 소, 두 초강대국은 제1세계이며,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는 제3세계이며, 이 두 세계 사이의 발달한 나라는 제2세계이다. 이 전략 사상은 국제 투쟁의 대방향을 지적하였다.)란 아시아(일본을 제외하고),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와 지구를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형세에서와 현저한 변화의 하나는 제3세계가 흥성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수십개 나라들이 잇달아 식민지 쇠사슬에서 벗어나 민족독립을 쟁취한 점이다.
발전도상에 있는 광범한 나라들은 많은 토지와 인구,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압박과 착취를 받아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제국주의 세력이 약화되었고, 식민지 반식민지국가 인민들이 반파쇼 전쟁에서 단련되고 각오가 제고되고 민족 의식이 높아졌으므로 민족 해방 운동이 활발하게 발전하였으며, 제국주의 식민체계는 급속히 붕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 해방 운동의 발전은 대체로 세개 시기를 거쳤다. 제1시기는 1945년부터 50년대 중기까지이다. 이 시기 민족 해방운동의 열기는 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났다. 인도 인민들의 반영투쟁의 강력한 압력으로 1947년 6월에 영국은 인도를 인도와 파키스탄두 개 자치령으로 나누는 것에 관한 ≪마운트배튼 방안≫을 공포하였다. 동년 8월에 인도와 파키스탄이 갈라져 각각 독립을 실현하였으며, 인도에서의 영국의 장기적인 통치는 종식되었다. 인도는 1950년에 공화국을 선포하였고, 네루가 내각 총리를 담당하였다. 파키스탄은 1956년에 자치령을 공화국으로 고쳤다. 그러나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는 여전히 영연방 성원국이었다. 버마 인민들의 독립 운동이 앙양됨에 따라 영국은할 수 없이 1947년 10월에 버마 독립 법안을 공포하였다. 1948년 1월에 버마는 영연방에서 나와 독립을 선포하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일본이 투항한 후 자산 계급 민주주의 성격을 띤 8월 혁명이 폭발하였고, 1945년 8월 17일에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창설하고 수카르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47년과 1948년에 네덜란드는 영국과 미국의 지지 아래 인도네시아에 대한 두 차례의 식민 전쟁을 발동하였다. 인도네시아 인민들은 영용하게 저항하였다. 1949년 12월에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 왕국 사이에 달성한 ≪원탁 회의 협정≫에 근거하여 인도네시아는 연방공화국을 창설하고 네덜란드 왕을 수반으로 한 네덜란드-인도네시아연방에 참가하였다. 50년대 중기에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인도네시아연방 관계의 취소를 선포하고 원탁 회의 협정을 폐지하였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의 식민지에서 벗어났다.
북아프리카에서 이집트 인민들은 반제 반봉건 투쟁에서 새로운 중대한 승리를 달성하였다. 영국은 핍박에 의해 1922년에 이집트를 독립국으로 선포한 후 이집트의 지주 귀족들에 의 지하여 계속 이집트를 통치하고있었다. 1952년 7월에 낫세르를 우두머리로 한 ≪자유장교단≫이 프로크 왕조를 뒤엎고, 1953년 6월에 이집트 공화국의 창립을 선포하였다. 1956년 7월에 낫세르는 수에즈 운하를 회수하여 국유화한다고 선포하였다. 이 해 10월에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규합하여 이집트 침략 전쟁을 발동하고 다시 수에즈 운하를 탈취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제1시기 민족 해방 운동의 가장 뚜렷한 성과는 중국 인민 혁명의 위대한 승리와 중조 인민 항미 구국 전쟁의 승리로서 이는 세계 패권을 시도한 미 제국주의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제2시기는 50년대 중기로부터 60년대 말까지이다. 이 시기에 민족해방 운동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광범하게 일어났다. 1954년 11월에 알제리 인민들의 반프랑스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알제리는 7년 남짓한 무장 투쟁을 거쳐 프랑스로 하여금 1962년에 ≪에비앙 협정≫에 조인하고 알제리의 자결과 독립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알제리 반프랑스 무장 투쟁의 승리는 알제리에서 132년간의 프랑스 식민주의 통치를 종결지었고, 아프리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에 아프리카에서는 37개의 국가가 독립하였는데, 전후 아프리카에서 새로 독립한 나라의 80%를 차지하였다. 그중 1966년 한 해에 17개 나라가 독립하였다. 서부 아프리카, 중부 아프리카, 동부 아프리카의 광활한 지구들이 잇달아 제국주의 기반에서 벗어나 민족 독립의 길로 나아갔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953년부터 무장 투쟁을 진행한 쿠바가 1959년에 미국이 지지한 독재 정권을 뒤엎고 승리를 달성하였고, 60년대에 카리브지역의 자메이카 등 4개 나라가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 시기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에서 제국주의, 식민주의, 패권주의를 반대하여 연합 투쟁의 새로운 국면이 나타났다. 1955년 4월에 인도네시아의 반등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것은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들이 서방식 민주주의 국가가 참가하지 않은 조건에서 자체로 소집한 첫 회의로서 아시아, 아프리카 인민들이 단결하여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공동의 염원을 반영하였다. 1961년에 베오그라드에서 제1차 동맹 국가 원수와 정부 수뇌자 회의가 소집되었고, 동맹 불가담(비동맹) 운동이 정식으로 형성되었다. 독립 자주, 집단 불가담(비동맹) 정책을 실시한 동맹불가담(비동맹) 운동은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3시기는 7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이다. 이 시기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민족 해방 운동은 막바지로 발전하였다. 베트남 인민들의 항미 구국 전쟁에서의 승리는 또 한차례 미국의 팽창 정책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70, 80년대에 아프리카에서는 또 9개 국가가 독립하였다. 그리하여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남부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서남 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에서 아직 백인종의 인종주의 통치를 받고 있는 지방을 제외하고 이미 50여 개의 독립 국가가 나타났으며, 새로운 아프리카 정치지도가 세계에 나타났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970년 11월에 사회당과 공산당을 위주로 한 인민 동맹이 칠레의 대선거에서 승리하였고, 사회당당수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아옌데 정부는 대내에서 동광 등 기본적인 재부에 대하여 국유화를 실시하고, 장원을 몰수하여 토지개혁을 진행하였으며, 대외적으로 반제 입장을 견지하였다. 1973년 9월에 미국은 칠레 군인들을 지지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아옌데는 전투에서 희생되고 인민 동맹 정부는 전복되었다. 이즈음에 카리브 지역에서 또 8개 식민지가 독립하였다.
70년대에 들어와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패권주의 를 반대한 투쟁은 가일층 발전하였다. 동맹 불가담 운동에 참가한 나라는 부단히 늘어나 지금은 100여 개에 달하였으며 그들의 투쟁의 예봉을 점차 패권주의를 실시하는 초강대국에 돌리고 있다. 사회주의 중국은 제3세계에 속한다. 제3세계는 1971년에 미국의 방해를 물리치고 유엔에서 중국의 합법적 지위를 회복시켰다.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유엔에 참가하면서부터 초강대국이 마음대로 통제하던 국면은 점차 변화되고, 제국주의, 식민주의, 패권주의 는 유엔에서 늘 정의의 견책을 받았다. 70, 80년대에 와서 제3세계는 국제 무대에서 날로 더 큰 역할을 발휘하고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독립한 후 경제면에서 아직 자본주의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기적인 식민주의 통치로 하여 그들의 경제 발전 수준은 낮다. 공업화를 실현하자면 농업 생산물, 원료 등 초급 생산물을 수출하여 자금을 축적하고 외국으로부터 공업 설비와 기술을 들여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국제 시장 가격을 조종하여 초급 생산물 가격을 낮추고 공업 생산품 가격을 높이는 바람에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들의 대외무역 조건이 악화되고 있다. 제3세계는 불평등 기초 위에 건립된 낡은 국제 경제 질서가 그들의 빈곤과 낙후의 근원임을 알고 있다. 60년대 중기로부터 시작하여 제3세계는 ≪77국 집단≫(1964년에 제네바에서 소집된 제1차 유엔 무역 발전 회의에서 77개의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들이 ≪77국 연합선언≫을 발표하여 제국주의의 착취와 약탈에서 벗어나 자체의 경제 발전을 가속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77국 집단≫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70년대에 와서 그 성원국은 100여 개로 늘어났지만 집단의 명칭은 그대로 쓰이고 있다)을 조직하고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를 건립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다. 70년대 중기로부터 남북간의 대화(남북간의 대화란 발전 도상에 이는 나라와 공업국가간의 ≪대화≫를 말한다. 왜냐 하면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의 대다수는 남반구에 있고, 공업국의 대다수는 북반구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도상의 나라를 ≪남방≫이라고 하고 공업 국가를 ≪북방≫이라고 한다.)가 시작되었다. 남북간의 담판이 장기간 대치 상태에 처하여 있어 남과 남의 합작이 추진되었다. 현세계에 있어서 남북 문제, 즉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를 건립하는 것으로 제3 세계 경제 발전을 추진시키는 문제는 이미 세계각국이 몹시 관심을 갖는 문제로 되었다.





전후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 정황
자본주의 세계의 국민 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많이 파괴되었다. 1946년에 미국의 공업 생산량이 1937년의 수준을 50% 초과한 것 외에 기타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는 전쟁 전의 수준보다 퍽 뒤떨어졌다. 예를 들어 1946년도의 공업 생산량을 1937년도의 공업 생산량에 비교한다면 영국은 94%, 프랑스는 73%, 연방 독일은 34%, 일본은 20%밖에 안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부터 50년대 초까지는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 복구 시기였다. 서방의 여러 나라들은 미국 자본의 원조에 의거하여 생산 수준이 점차 전쟁 전 수준에 이르렀거나 보다 제고되었다. 미국은 정부의 ≪원조≫와 개인들의 투자를 이용하여 서유럽과 일본에 대한 자본침투를 강화하였다.
50년대 초부터 70년대 초까지 주요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보편적으로 한 계단의 경제 고속도 발전 시기를 경과하였으며, 경제 성장 속도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보기 드물었다. 비록 이러한 국가들의 경제 발전이 때때로 경제 공황에 의하여 단절되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국민 생산총액의 평균 성장 속도는 일반적으로 모두 5~6% 이상에 달하였고 심지어 일본은 16~l7%까지 달하였다. 이 20년간에 그들이 생산한 제품은 지난 200여 년간에 생산한 제품의 총량을 능가하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 시기를 자본주의 발전사에서의 ≪황금 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의 자본 수출은 2차 세계대전 종결 시기의 500여억 달러로부터 7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5000억 달러로 급격히 올라 약 9배나 성장하였다. 이 기간에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취업률이 높아지고 실업률이 보다 낮아지고 물가 등귀 속도가 보다 완만하고 근로 인민들의 물질 생활 사정도 상당히 개선되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과학 기술 혁명은 근대, 현대 역사에서의 제3차 과학 기술 혁명으로서 그 규모와 심도, 영향면에서의 제1차와 제2차 과학 기술 혁명을 훨씬 초과하였다.
제3차 과학 기술 혁명은 현대 생산력의 발전을 크게 가속화시켰고, 전후 한 시기내에 자본주의 경제의 신속한 발전을 추진한 가장 유력한 요인의 하나였다. 과학 기술은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생산력이다. 과학 성과가 생산에 응용되어 경제의 발전을 추진시키자면 과정이 소요된다. 지금은 이 과정이 날로 단축되어가고 있다. 때문에 과학 기술의 노동 생산률의 제고와 경제 성장에 대한공헌도 갈수록 커가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전후 30년 동안에 발달한 국가에서의 노동 생산율이 급속히 제고되었는데, 80%는 새로운 과학기술 성과를 도입하여 얻은 성과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국가 독점 자본주의 는 서방 여러 나라들에서 전대미문의 광도와 심도로 발전하였다. 국가 독점 자본주의란 개인 독점조직과 자산 계급 국가가 서로 결합된 자본주의를 말한다. 이 시기의 자산 계급 국가는 자본주의 사적 소유의 수호자일 뿐만 아니라 ≪총자본가≫의 신분으로 자본주의 의 재생산 과정에 직접 참가하고 있으며, 여러가지 형식으로 경제 생활에 참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국유화를 실시하였거나 국가에서 투자하여 공장을 세움으로써 국영 기업을 확대하며, 국가와 개인이 합작 경영하는 기업을 발전시키며, 재정, 세금 징수, 신용대부 등 공간으로 재생산 과정에 영향을 주며, 일정한 정도로 경제 계획을 실시하며, 국민 경제의 조절을 강화하는 등등이다. 국가 독점 자본주의 는 독점 조직을 도와 국내 시장을 확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점조직을 도와 대외 팽창을 하고 있다. 국가독점자본주의 는 일정한 시기, 일정한 정도에서 자본주의 생산의 급속도 성장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작용은 결국 국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넓은 견지에서 볼 때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을 더욱 격화시키고 있다. 70년대 후기에 들어서서 여러 주요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상황이 이 점을 실증하였다.
70년대부터 시작하여 서방 국가에서는 두 차례의 심각한 세계적 경제공황이 일어났고(1973년~1975년, 1979년~1982년), 자본주의 경제는 생산 정체와 통화 팽창이 서로 교착된 ≪정체 팽창≫ 상태에 빠졌다. 그리하여 생산 발전이 정체되었거나 완만하여졌고 실업자 수가 크게 늘어났으며, 통화 팽창이 심각해졌고 물가가 급격히 올랐다. 생산 정체와 통화팽창의 교착은 자본주의 국가로 하여금 융통성 있게 경제를 조절할 수 있는 여지를 크게 축소시켰다. 경제 성각을 자극하는 정책과 통화 팽창을 억제하는 정책은 서로 모순되고 있어 경제 활동에 참여한 자산 계급정부는 서로 상반되는 이 두 정책 사이에서 우왕좌왕 해야만 하였다. 경제 정책의 불안정은 생산에 대한 국가 독점 자본주의의 촉진 작용이날로 약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표명한다.





사회주의 국가 개혁 오류의 흥성
제2차 세계대전 후 중국을 포함한 일련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탄생하였다. 전후 초기에 이러한 나라들은 실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모두 소련 사회주의 건설의 경험을 답습하여 보편적으로 중공업 발전에 편중하는 경제 구조와 중앙집권적 경제 체제를 건립하였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사정이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그들이 건립한 전통적인 경제 체제는 일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국가는 모든 경제 활동의 조직자이고 지도자이며, 국가의 지도 계획은 모든 경제 활동을 지도하는 주요한 도구이며, 기본건설 투자권이 모두 국가에 장악되어 있고 기업에는 재생산 확대권이 없으며, 국가 재정을 통일적으로 수입, 지출하고 기업의 이윤을 전부상납하고 결손을 국가에서 보태며, 생산 수단을 국가에서 통일적으로 조달하고 제품의 가격을 국가에서 통일적으로 규정하며, 사무원, 노동자들의 노임 급별과 액수를 국가에서 통일적으로 규정하고 노동 보수와 노동 성과를 직접 연계시키지 않으며, 대외 무역을 국가에서 독점하는 등등이다.
전통적인 체제는 당시 여러 나라의 국민 경제 발전에 대하여 적극적인 작용을 하였다. 왜냐 하면 그것은 국민 경제의 발전을 계획적 발전의 궤도에 진입시켜 전국의 인력, 물력을 집중할 수 있었고, 중점 항목의 건설을 보장하고, 국가 공업화의 발걸음을 가속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50년대에 동유럽 여러 나라들의 경제 성장률은 매우 뚜렷하였다. 1950년부터 연평균 성장률은 80% 이상이었고, 공업 생산액의 연평균성장률은 100%이상을 보존하였다. 그후 몇 차례 5개년 계획 기간에 동유럽 여러 나라의 경제 성장률은 여전히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전반적으로 말하면 동유럽 여러 나라의 경제 성장률은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 성장률보다 퍽 높았다.
소련의 전통적인 사회주의 건설에도 발전 과정에서 여러 가지 폐단들이 하나하나 드러났으며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을 발휘하는데 대하여 좋지 않은 영향을 많이 주었다. 예를 들면 일률적으로 먼저 중공업을 발전시킨데서 농업의 발전을 저해하고 경공업의 심각한 낙후를 조성시켜 인민 생활의 개선에 불리하였으며, 고도로 집중된 관리 체제로 하여 기업은 권한이 매우 작아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지위에 처하여 창의 성과적극성을 발휘할 수 없었으며, 경제에 대한 시장기제(市場機制)의 조절작용을 배척하여 인민들의 수요가 시장을 통해서 민활하게 반영될 수 없고 생산과 수요가 맞지 않게 되며, 분배면에서 평균주의가 존재하여 사무원, 노동자들의 적극성을 발휘하는 데 방해되는 등등이다. 이러한 폐단은 국민 경제의 장기적인 급속한 발전에 영향을 주게 된다. 동유럽 여러 나라들은 70년대 중기로부터 시작하여 경제 성장률이 하강되는 추세가 나타났다. 동유럽 각국의 경제학계에서는 이렇게 생산의 고속도 발전을 보존하고 경제 효율을 높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여러 차례의 광범한 토론을 벌였다. 전통적인 경제 체제를 개혁하는 문제는 점차 여러 나라들의 의사 일정에 올랐다.
동유럽 나라들 가운데서 유고슬라비아는 제일 먼저 전통적인 경제 체제에 대하여 개혁을 실시한 나라이다. 소유제에 있어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적 소유를 주도로 한 여러 가지 소유제 형식을 취하였다. 1950년에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국가 행정이 경제를 관리하는 체제를 고쳐, 기업노동자들의 자치와 시장 조절을 위주로 하는 관리 체제를 실시하고 또 근로자 자신이 노동성과에 대한 분배를 결정하는 분배 원칙을 실시하였다. 최근에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개혁을 가일층 밀고 나가면서 지나친 분산으로 하여 조성된 일부 소극적인 결과를 시정하고 있다. 50년대 중기와 후기로부터, 특히는 60년대 중기와 후기로부터 동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차례로 전통적인 경제 체제를 개혁하였으며 한결같은 개혁의 조류가 나타났다.
헝가리는 1956년 헝가리 사건이 (1956년 10월 23일에 헝가리 국내외의 계급적 원수들이 헝가리 노동인민당내의 격차와 인민 내부의 모순을 이용하여 사회주의 제도에 대한 불만을 일으키면서 반혁명 무장 반란을 발동하였다. 11월 4일에 반혁명 무장 반란이 분쇄되고 노동 혁명 정부가 창건되었다.) 있은 후부터 경제 개혁이 시작되었다. 소유제에 있어 헝가리는 전민 소유제를 견지하여 왔지만 그 작용을 지나치게 과대하지 않았고, 중소기업에서 일반적으로 집단 소유제를 보존하였다. 헝가리에서는 자유지 경제, 보조 경제의 소량의 사적 소유 경제의 존재를 지지하였다. 또한 인민들의 생활 수요에서 출발하여 농업, 경공업, 중공업의 비례 관계를 다시 배치하고 생산구조를 보다 합리적이게 하였다. 헝가리에서는 또 계획적인 조절과 시장조절이 서로 결합된 경제 관리 체제를 실시하였다. 사무원, 노동자들의 임금은 기업의 경영 성과와 사무원, 노동자 자신의 노동에 의하여 결정되고 국가에서는 노임 성장의 고저 폭만 규정하였다. 국가에서는 제품의 가격 규정 권리를 보존하면서 비교적 탄력성 있는 가격 제도를 내오기에 노력하였다.
이 기간에 동유럽 기타 국가들의 전통적인 경제 체제내에서도 다소 심각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각기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1985년에 고르바쵸브가 소련 공산당 총서기로 당선된 후 소련에서도 경제 체제 개혁의 발걸음을 다그치고 있다.





미국과 소련의 패권 쟁탈
19세기 60년대에 세계의 정치 구조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전쟁 후 스탈린 시기에 소련에서는 국내 경제 복구에 힘썼고, 대외 정책면에서 주로 그 승리의 성과를 공고히 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1953년 스탈린이 서거한 후 후르시쵸프, 브레즈네프가 그 뒤를 이어 소련공산당과 국가의 최고 영도권을 장악하였다. 대외정책면에서 그들은 점차 패권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1960년에 소련정부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소련 전문가들을 일방적으로 전부 철수하고 수백 개의 협의서와 계약서를 찢어 버렸다. 소련의 지도자들은 또 변방에 군사를 늘리고 중국의 안전을 위협하였다. 이 모든 것이 중소 관계의 악화를 조성하였다.
60년대에 미국과 소련이 세계 패권을 쟁탈하는 국면이 나타났다. 후르시쵸프 시기에 소련의 경제, 군사 역량과 미국의 경제, 군사 역량의 차이는 점차 축소되었다. 1950년에 소련의 공업 총생산액은 미국의 30%이던 것에서 1965년에는 65%로 상승하였다. 군사면에서도 소련과 미국의 차이가 축소되었다. 1957년에 소련의 인공 위성이 하늘에 올랐는데, 이는 대륙간 탄도 로케트 운반 도구의 연구, 제작면에서 미국을 능가하였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소련의 경제, 근사 실력이 증강됨에 따라 후르시쵸프는 미국과 함께 세계를 지배하려고 시도하면서 미국과의 쟁탈을 강화하였다. 1962년 10월에 일어난 쿠바 유도탄 사건(흐루시쵸프가 모험적인 정책으로 유도탄을 쿠바에 운송하여 미국 남대문에 유도탄 발사장을 세우려고 시도하였는데, 미국 U-2 비행기의 경찰에 의하여 그 시도가 파탄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실시한 전쟁 공간 정책의 압력으로 소련은 쿠바에 있는 공격용 무기를 거둬들였다. 그리하여 유도탄의 위기는 가라앉았다. )은 당시의 전략상의 우세가 미국측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60년대 중기 브레즈네프가 등장한 후, 특히는 70년대에 들어선 후부터 소련에서는 대내 소비를 압박하는 것으로 축적을 확대하였고 대외적으로 경제 약탈을 다그치면서 경제, 군사 실력을 증강하였다. 소련과 미국의 군사 역량 대비에서 소련에 유리한 변화가 일어났다. 소련의 팽창 야심은 경제, 군사 실력이 증강됨에 따라 부단히 커져갔다. 이 시기에 미국의 경제는 위기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 성장 속도가 늦어졌고 또 미국은 베트남 침략 전쟁에서 극심한 좌절을 당하였기 때문에 군사 실력면에서 소련이 미국을 따라잡게 되었다. 때문에 미국은 소련의 기세 사나운 공세에 대한 반응에 무력해졌다. 1969년에 닉슨이 대통령직을 맡은 후부터 미국의 세계 전략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즉 전략적 공격으로부터 전략적 방어로 들어갔다. 1972년 2월에 닉슨이 중국에 와서 중-미 회담을 가지고 상해에서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국은, 중국은 하나이며 대만은 중국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승인하고 결국 대만에서 무장 역량과 군사 시설 전체를 철수할 것을 확인하였다. 상해 공동 성명의 발표는 20여 년간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적대 관계가 종식되고 두 나라의 관계가 개선되었다는 것을 표명한다. 상해 공동성명의 기초에서 미국은 1978년에 대만 문제에서 ≪국교를 끊고 군사를 철수하고 조약을 폐지≫하는 세 가지 원칙에 동의하고 중미간의 국교건립에 관한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미국은 하나의 중국을 승인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적 정부라는 것을 승인하였다. 1979년 초에 미국과 중국은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닉슨 정부는 아시아, 태평양 지구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를 대량으로 축소하였고, 1973년에 미국의 베트남 침략군 50만 명을 베트남 남부에서 속속 철수하였다. 닉슨 정부는 소련과의 관계에서 쟁탈을 하는 한편, 회담으로 적대관계를 대치할 것을 강조하였다. 포드와 카터가 미국 대통령직을 맡은 기간에 그들은 기본적으로 닉슨의 정책을 계승하였고, 소련에 대한 정책은 연약성을 특징으로 하였으며 전략상 방어적 지위에 처하였다. 소, 미 두 초강대국은 모두 전 세계적 쟁탈 전략의 우위를 시도하면서 쟁탈의 중점을 유럽에 두었고, 동시에 제3세계 여러 지구에서도 쟁탈전을 강화하고 있다. 세계 전략을 실현하기 위하여 쌍방의 군비 경쟁은 부단히 증가하여 정규 무기와 공격용 핵무기 계통을 적극 발전시키고있는 외에 또 전략적 방어 역량을 힘써 발전시키고 있다.
미, 소 두 나라가 쟁탈의 중점을 유럽에 둔 것은 유럽을 통제하는 나라는 상대발의 경제, 군사적 우세를 압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미국과 소련은 모두 유럽에 많은 병력을 집중시켰고, 양군은 기본적으로 대치상태에 처하고 있다. 70년대에 소련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일련의 침략 팽창 활동을 진행하였다. 1979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의 아민 정부가 소련에 잘 순종치 않으며 항소 무장 역량에 대한 탄압에 힘쓰지 않는다고 느끼고 12월에 군대를 파견하여 아프가니스탄에 대하여 직접적인 군사 점령을 실시하였다. 동남 아시아에서 소련은 베트남을 아시아, 태평양 지구로 진출하는 도구로 삼았다. 베트남은 소련에 캄란만 등 해군기지를 제공하고, 소련은 베트남에 대량의 원조를 주는 젓으로 베트남의 지역내 팽창(베트남은 1978년에 10여만 명의 군대를 출동시켜 캄푸치아에 침입하였고 이듬해에 프놈펜을 점령한 다음, 헹삼린 괴뢰 정권을 세워놓았다. 캄푸치아의 애국 군민들은 베트남 침략을 반대하여 항전을 일으켰고 국가의 독립과 주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투쟁하였다. )을 지지하였다.
소련 정부의 세계적 팽창 정책은 소련 인민들에게 부담을 들씌우면서 아프가니스탄, 베트남 등에 해마다 최저 10여억 달라를 지출하였다. 소련의 국민 경제는 발전 속도가 떨어진 데다가 농업, 경공업, 중공업의 비례가 맞지 않아 곤란이 매우 많아졌다. 80년대 초에 소련은 대외 팽창에서 맹렬한 기세를 잃었다.
1981년에 레이건은 미국의 대통령으로 된 후 국내 경제 문제를 집중적으로 틀어쥔 동시에 대외 정책에서 소련과의 쟁탈을 강화하면서 소련에 대하여 다시 강경한 정책을 취하였다. 레이건 정부는 소련에 대하여 반격하고 제어하는 두 가지 전술을 썼다. 하나는 핵군비 경쟁을 벌여 ≪별세계 전쟁≫을 계획하고 소련을 핍박하여 군비 경쟁을 하게 함으로써 소련의 경제를 약화시키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위 ≪레이건주의≫, 즉 국부적이고 정규적인 전쟁보다 낮은 ≪저강도전쟁≫ 방식을 취하여 제3세계의 친소 정권을 타격하였다.
미, 소간의 패권 쟁탈에서 서로 공격, 수비하고 각기 득실하는 대치국면이 형성되었다.
미, 소간의 패권 쟁탈은 세계 평화에 심각한 위협을 주었다. 추측에의 하면 미, 소 두 나라가 저장한 핵무기로는 전 세계 인구를 수십차 궤멸하고도 남음이 있다. 세계적 전쟁의 위험은 미 소간의 군비 경쟁과 지역 쟁탈에서 온다. 지구상의 평화를 쟁취하는 것은 이미 현재 세계에서 으뜸가는 중대한 정치적 문제로 되고 있다.
현재 세계에는 세계적 대전을 제지시키고 평화를 수호하는 유리한 요인들이 매우 많이 존재하고 있다. 발전도상의 신흥 세력 나라들도 구성된 제3 세계가 일어선 것으로 하여 과거 소수 제국주의 강국들이 세계의 운명을 조종하던 국면이 변화되었다. 세계 인민들이 한결같이 단결하고 패권주의, 팽창주의의 모든 표현에 대하여 결연히 투쟁한다면 초강대국의 전략적 구도를 헝클어뜨리고 새로운 세계 대전을 방지하는 것은 완전히 가능하다.


* 함께 토론해 봅시다.
1.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 해방 운동 발전의 시기를 대략적으로 구분하고 그 주요한 특징을 간단히 설명해 보자.
2.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게 된 주요한 원인은 무엇인가?
3. 국가 독점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을 더욱 격화시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4. 전통적인 경제 체제의 주요한 장점과 결함을 분석하면서 사회주의 국가에서 개혁의 조류가 흥성하게 되는 그 필연성을 분석해 보자.
5. 19세기 60년대로부터 세계 정치 구조에는 어떤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는가?
6. 지구상의 평화를 쟁취하는 것을 왜 현재 세계에서 으뜸가는 중대한 정치적 문제라고 하는가?
7. 헝가리 사건, ≪별세계전쟁≫(별들의 전쟁)을 간단해 설명해 보자.







제11장 현대 과학과 문학 예술의 발전






20세기 춘기에 과학 기술면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한편으로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기초로 하는 현대 과학이 확립되어 인류의 과학 연구가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에서 모두 혁명적인 돌파를 가져왔으며, 인류가 자연을 가일층 정복하는 데 있어서 유력한 과학적 준거를 제공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초부터 과학 기술과 보통 사람들간의 관계가 날로 더 밀접해지게 되었다. 수천만의 사람들은 과학 혁명의 충격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전대 미문의 속도로 자기들의 일상 생활을 개진시키고 있는 과학 기술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금세기초엽에 발명된 자동차는 이미 예사로운 것으로 되었으며, 자동차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기계 성능도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 이전에는 비행기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나 전쟁 영웅들만이 탈 수 있었던 비행기도 이제는 이미 민간 항공 운송에 사용되고 있다. 무선 방송은 금세기 초에 성공한 것이지만 20년대에는 무선 라디오가 이미 많은 가정들의 오락도구로 되었고, 50년대에 와서는 수천만 사람들의 흥미가 텔레비전을 감산하는 데로 이전되었다. 과학은 마치 만능인 듯 인류 생활의 모든 영역에 이용되고 있다.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
20세기 초에 과학에는 획기적인 변혁이 일어났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창립은 20세기의 중요한 과학의 대사건이었다.
1905년에 독일에서 출판한 물리 잡지에 ≪운동 물체의 전동역학에 대하여≫라는 9000자밖에 안 되는 아주 짧은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은 겨우 26세된 아인슈타인이 1년 사이에 이 잡지에 발표한 세 편의 논문 가운데의 한 편이다. 이 짧은 논문은 20세기 전반에 눈부신 빛발을 뿌렸다. 그것은 이 논문에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 이론인 상대성 이론이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년)은 독일의 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년 시절에 스위스에서 수학과 물리학 학습에 매우 열중하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어려운 사업 환경 속에서도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이용하여 이론물리학을 연군하였다.
1905년 이전에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질량≫과 ≪에너지≫는 관계가 없는 두 개의 물리적 양이라고 생각하였다.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은 물체의 질량과 에너지는 서로 관련된 것인바, 물체의 에너지는 그 물체의 질량과 정비례한다고 밝혔다. 만약 물체의 에너지가 E만큼 증가되면 물체의 질량도 그에 따라 m만큼 증가되고 질량이 증가되면 에너지도 역시 그에 따라 증가된다. E와 m간의 관계를 아인슈타인은 간단 명료한 수학 방정식 E=mc²로 귀납하였다. 여기에서 c는 빛의 속도이다. 세계에서 유명한 이 질량 에너지 방정식은 사람들이 만약 원자핵 질량의 변화를 알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예리한 검을 장악한 것과 같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질량 에너지 방정식으로 보아 만약 물체의 원자핵 질량이 감소되면 물체에서 방출하는 에네르기는 감소된 질량과 빛의 속도(30만㎞/초)의 제곱을 곱한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하면 감소된 원자핵의 총질량이 감자알만큼 크면 그것이 방출하는 에너지는 하나의 중형 탄광에 매장되어 있는 에너지와 같다. 40년 후에 뉴저지 주에서 있은 인류의 첫 원자탄 시험 폭발에서 이 점이 똑똑히 증명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겸손하고 성미가 조용하였으며 또 과학의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20세기를 위하여 중요한 과학 사상을 내놓았으며 현대 물리학과 현대 우주학을 창립하였다.
20세기 초의 다른 한 위대한 과학성과는 양자역학의 창립이다. 양자역학 이론의 선구자는 독일의 과학자 플랑크(l858~1947년)이다. 그는 1900년에 양자론을 내놓았다. 그는 에너지의 복사는 물 흐르듯 균형적이거나 연속적인 흐름이 아니라 독립적인 개개의 물체들의 흐름이라고 인정하면서 개개의 물체들을 그는 양자(≪양자≫란 라틴어에서 왔는데 ≪한몫≫이란 뜻이다)라고 하였다. 플랑크 이론의 기초 위에서 아인슈타인은 가일층 광양자학설을 제기하고 빛은 연속적인 파동성을 가지고 있으며 연속적이 아닌 입자 성격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였다. 후에 국적이 다르고 민족이 다른 많은 과학자들의 공동의 노력으로 하여 1927년에 양자역학이론이 엄밀한 이론 체계를 이루고 끝내 확립되었다. 양자역학의 창립은 미시물질 세계의 기본 법칙을 성공적으로 제시하였으며, 그후의 과학 연구에서 아주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양자역학은 과학과 기술 부문에 대하여 혁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초기의 과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할 때 사용한 도구는 보통 가정에서 손수 제작한 것이었으며 사용하는 기교면에서도 비교적 간단하였다. 연구 사업이 복잡하여짐에 따라 과학 기재의 설계와 제조도 점차 중요하여졌다. 기재를 제조하는 과학 기술은 대부분 30년대에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에 전자 현미경 제조에 성공하였다. 처음에는 몇백 배로만 확대할 수 있던 현미경을 몇년 동안의 개량을 거쳐 끝내 십만여 4배로 확대할 수 있는 현미경으로 만들었다. 300년 전에 현대 과학의 맹아를 조장하였던 망원경도 30년대에 와서는 크게 진보되고 개량되었다.
20, 30년대에 화학 영역에서 이미 공업에 중대한 의의를 띠고 있는 합성 고무, 각종 비닐, 인조 섬유 등의 새로운 물질을 인공적으로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생물학과 의학면에서도 거대한 진전이 있었다. 생물학영역에서 과학자들은 세포의 섬세한 구조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가졌다. 의학과 약물학 면에서 사람들은 이미 화학적 방법으로 비타민 B, C, D, A를 만들어냈다. 1928년에 영국의 과학자 플레밍(1881~1955년)이 신기한 약물 페니실린을 발견하였다. 이때로부터 세균의 감염으로 인하여 생기는 질병의 치료 방법을 찾으려고 오랫 동안 생각해 오던 사람들의 염원이 현실로 되었다. 페니실린 자체도 일종의 세균이지만 이 세균은 인체에 해로운 병균을 유효하게 박멸할 수 있어 폐렴, 성홍열, 디프테리아, 뇌막염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질병 치료에 모두 탁월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1940년에 와서 과학자들은 이미 순수한 페니실린을 분리하며내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페니실린은 수천만 부상자들의 생명을 구원하였다. 페니실린의 성공은 전반 세계에서의 현대적 약물치료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과학 기술은 더욱 큰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전자계산기(컴퓨터)의 탄생은 전후 과학 기술에서의 거대한 성과의 하나이다. 1946년에 미국의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전자 숫자 적분 계산기≫라고 하는 전부 전자화한 인류의 첫 계산기 한 대가 탄생하였다. 이 계산기는 체적이 크고 무게가 30톤이며 차지하는 면적이 500제곱미터였다. 이 계산기로는 한 공정사가 100년 동안에야 계산해 낼 수 있는 일을 두시간 동안에 완수할 수 있었다. 1950년부터 계산기 기술은 가일층 제고되었고 과학자들은 계산기내의 전자 숫자와 계산 방법을 개선하여 전자계산기의 체적을 날로 축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효율을 날로 강화시켰다. 지금 가장 작은 계산기는 한 장의 우표만하다. 그리고 성능이 ≪전자숫자적분 계산기≫에 상당하는 계산기도 그 체적이 타자기만하고 조작이 매우 편리하다. 기계가 인류의 손과 팔의 과학적 연장인 것과 마찬가지로 전자계산기는 인류의 지혜의 과학적 연장이다. 전자계산기 기술의 진보는 당대 과학 기술 발전의 중요한 기초이다. 오늘 세계에 대한 전자계산기의 공헌은 이미 얻은 중대한 진전 외에도 우리들의 상상력이 절정에 이를 때까지 여전히 거대한 발전 전망을 가지고 있다. 자고 이래로 인류는 우주 공간에 들어가 망망한 우주 속에 인류의 자취를 남기려고 환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당대 과학 기술 발전의 최고 수준을 대표하는 우주 비행 사업의 신속한 발전은 인류가 ≪우주시대≫에 들어섰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1957년 10월 4일에 소련은 첫 인공 위성을 발사하여 인류의 우주 비행사업을 개척하였다. ≪별동반자 1호≫로 불리운 이 인공 위성은 무게 83.6킬로그램 직경 58센치미터로서 매 96분에 지구 한 바퀴를 돌았다. 이때로부터 우주 비행 사업은 신속히 발전하여 60년대에 이르러 미국과 소련에서는 모두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우주 비행선이 나왔다. 1970년에 중국은 첫 인공 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하였다.
금세기 우주 비행 사업의 열기는 세계 과학 기술 역사에 빛나는 한페이지를 남겼다. 1969년 4월 21일에 미국의 ≪아폴로 11호≫우주 비행선이 달에 내렸다. 이날 전 세계의 수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이 역사적인 장면을 구경하였다. 4월 21일 그리니치 표준시 4시 7분에 미국의 우주 비행사 암스트롱이 우주 비행선에서 내려 제일 처음으로 왼발로 달 표면의 부드러운 토양을 디뎠다.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나 한 사람의 작은 발자국이지만 인류의 큰 발자국이다.≫ 달에 인류의 첫 발자국을 찍기 위하여 10년 동안 미국에서는 ≪아폴로착륙 계획≫에 250억 달러를 썼고, 400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1981년에 미국에서는 첫 우주 비행기 시험 항행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우주 비행 사업의 또 하나의 큰 진보를 의미한다. 우주 비행기의 출현은 우주에서의 인류 교통 수단의 진보를 의미한다. 우주 비행기는 용량이 크고 성능이 좋아 보통 사람들이 우주 공간으로 날 수 있는 가능성도 주고 있다.
우주 비행 사업의 발전은 인류가 물질 세계를 완전히 정복하는 전제로 되며 인류를 위하여 금후 우주 공간에서의 아름다운 발전 전경에 선결조건을 제공한 것으로도 된다. 과학자들은 이미 인류가 우주 공간으로 이주하는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우주 공업을 발전시키며 우주공간에 병원을 세우는 등 사업의 가능성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세계에서 당대 인류의 과학적 환상은 미래에 가서 실현될 가능성이 있으며 사람들은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소련, 동유럽의 문학과 예술
20세기 세계 문화 발전에서의 거대한 변화는 무산 계급 문화가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또 위대한 성과를 달성한 점이다.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고리끼(l868~1936년)는 소련 무산 계급 문화의 창시자이다. 그는 10월 혁명 이전에 이미 문학 창작 활동을 개시하였다. 1901년에 고리끼는 산문시 ≪해연의 노래≫에서 날로 다가오는 혁명을 환영하면서 ≪폭풍우여, 더욱더 세차게 터져라!≫고 외쳤다. 그의 소설 ≪어머니≫는 무산 계급 혁명 투쟁의 폭풍을 반영한 것으로서 레닌의 찬양을 받았다. 10월 혁명 후 고리끼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문화 건설 사업에 적극 참가하였다.
국내 전쟁 기간에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노래하고 국내 전쟁의 폭풍을 반영하는 문학 창작이 매우 활발히 전개되었다. 마야꼬프스끼(l893~1930년)는 이 시기의 가장 걸출한 무산 계급의 시인이었으며 세계 문학사에서의 재능있는 시인이었다. 마이꼬프스끼는 내용이 풍만하고 기백이 넘치는 싯구로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의 새로운 사물을 열정적으로 노래하였다. 그는 10월 혁명을 ≪나의 혁명≫이라고 하고 ≪좌익 행진곡≫을 부르면서 제국주의의 무장 간섭을 반대하여 일어날 것을 인민들에게 호소하였으며 혁명 사업에 대한 자기의 필승의 신념을 표현하였다. 마야꼬프스끼의 장편시 ≪레닌≫(1924년)과 ≪좋다!≫(1927년)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의 본보기였다. 그의 장편시 ≪레닌≫은 레닌과 당, 레닌과 인민의 일치성의 주체사상을 생동하게 체현시킨 작품이었다. 10월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노래한 장편시 ≪좋다!≫는 가식없는 문장 서술과 강렬한 서정을. 하나로 결합시켰다. 이것은 시인 마야꼬프스끼의 창작이 성숙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내전이 끝난 후 소비에트 국가는 경제 복구 사업을 진행하였고 잇달아 사회주의 건설을 진행하였다. 이 새로운 역사시기에 들어와서 사회주의 문학 창작 방법 문제를 둘러싸고 열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고리끼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 방법 문제에 대하여 완벽한 견해를 많이 제기하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가들에게 현실의 혁명 발전으로부터 현실을 진실하게,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역사 그대로 현실을 반영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또 자각적으로 인민들을 공산주의 정신으로 교양할 것을 예술가들에게 요구하였다.
이 시기에 일부 작가들은 여전히 국내 전쟁의 전투 생활을 제재로 삼아 심원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 좋은 작품들을 써냈다. 부르마노프는 저명한 차라예프 사단의 전위였는데 내전 시기 전선에서의 투쟁 경력이 그가 장편 소설 ≪챠빠예프≫(1923년)를 창작하는 데 풍부한 재료를 제공하여 주었다. 소설은 혁명에서 각성한 인민 영웅의 위대한 현상을 부각하였으며 20년대의 사회주의의 리얼리즘의 우수 작품의 하나로 되었다. 이 시기 국민 경제의 복구와 농공업 건설에서 얻은 거대한 성과는 소련 문학의 번영을 위한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샘물처럼 끝없이 솟아나는 영웅적 업적은 작가들의 창작 소재로 되었고 우수한 소절도 많이 나왔다. 니 아 오스트로프스끼의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1934년)는 이 시기 문학의 탁월한 성과였다.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한 보통 노동자의 아들인 빠벨 꼴챠낀이 공산주의 전사, 러시아무산 계급 영웅으로 성장한 과정을 묘사하였다. ≪사람에게서 가장 고귀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단 한 번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나보낸 세월이 의미없는 생활 속에 흘러갔다고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야 하며 지나간 생활이 비열과 소인적 행동에만 부침했다고 양심에 거리끼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임종시에 ≪나의 온 생애와 모든 정력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업-인류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바쳤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빠벨 꼴챠낀의 명언으로서 이 소설의 중심 사상이며 빠벨이 일생 동안 소중히 지켜온 원칙이다. 이 소설은 처음으로 무산 계급 혁명 사업의 계승자가 성장하는 과정을 중심 내용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또 무산 계급의 사업과 문학 사업의 발전에 심원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 시기에 숄로호프(1905~ )의 장편 소설 ≪고요한 돈강≫(총 4부, 1928~1940년)이 비교적 큰 영향을 주었다. ≪고요한 돈강≫은 한 까자끄의 중농의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국내 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의 경력으로 돈강 지역 까자끄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였고 생활의 모순과 충돌 속에서 새 세계가 탄생한 복잡하고도 고난스런 과정을 보여 주었다. ≪고요한 돈강≫은 고도의 예술 수준을 보여 주었으며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위대한 조국 보위 전쟁이 시작된 후 수많은 작가들이 전선으로 달려나가 직접 전투에 뛰어들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아동문학가인 가이다르 등 적지 않은 작가들이 독일 파쇼와의 피어린 싸움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었다. 수많은 작가들이 싸우는 한편 생활을 체험하면서 많은 작품을 써냈다. 1945년에 조국 보위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전후 초기의 문학작품 중에는 전쟁에서의 소련 인민들의 영웅적 업적이 계속 주요한 소재로 되어 있었다. 소련의 저명한 작가 파제예프(1901~1956년)가 창작한 우수한 장편 소설 ≪청년 근위대≫(1945년, 1946년에 스탈린 상금을 탔다)는 소비에트 정권 밑에 성장한 청년 일대의 우수한 대표들의 전형적인 형상을 부각하였으며, 인민 대중들의 격동적이고 감격적인 투쟁을 생동하게 표현함으로써 예술적 감화력으로 공산당의 영도와 사회주의 제도가 ≪청년 근위대≫의 힘의 원천이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증명하였다.
스탈린의 서거와 1956년도 소련공산당 제20차 당 대표대회의 소집으로 인하여 소련의 사회 생활에는 심한 동요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소련 문예계에는 치열한 논쟁과 긴장된 탐구가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소련문학에는 사회 현실을 진실하게 반영한 일부 작품들이 나타나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과 충돌을 폭로하였다. 동시에 또 일부 작가들은 소침한 경향을 드러낸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 중에서 돌출한 것은 소련의 저명한 서정 시인이며 작가인 빠스테르나크(1890~1960년)의 소설 ≪의사 지바고≫(1957년)이다. ≪의사 지바고≫는 한 지식인이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 참가한 후의 사상 경력을 묘사하고 일면적으로 개성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한 작가의 사상을 반영하였다. 이 소설은 출판된 후 서방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고, 1958년의 노벨문학상이 빠스테르나크에게 수상되었다.
60년대 초에 청년 시인들이 성장하여 소련 문학계에서 활약하는 역량으로 되었다. 이 시인들은 맹목적으로 문학 전통을 계승하는 것을 반대하고 문학 영역에서 ≪대담하게 혁신≫할 것을 주장하였다. 예브뚜쎈코(1933년~ )는 이런 시인들 중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예브뚜쎈꼬의 시가 풍격은 마야꼬프스끼와 비슷하여 솔직하고 활달하였으며 대담하게 생활에 참여하였고 창작이 풍부하였다. 바로 그가 말한 것처럼 ≪굽은 시댁에 나의 굽은 목구멍으로 소리쳤다.≫ 그의 시가는 60년대 이후의 복잡한 소련 사회 현실을 반영하였다. 1984년에 예브뚜쎈꼬는 핵전쟁을 반대하는 장편시 ≪어머니와 중성자탄≫을 써서 국가문예상금을 받았다.
60, 70년대에도 조국 보위 전쟁이 여전히 문예 창작에서의 중요한 제재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제재의 사상 내용이 심화되고 성숙되었다. 바실리예프(1924년~ )의 ≪여기의 여명은 고요하여라...≫는 전쟁을 제재로 한 우수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후에 또 영화로 개편하여 소련과 여러 나라 인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지금 소련에서는 사회주의 개혁의 기운이 일어나고 있고 사회주의 개혁과 인민 생활을 반영하는 일련의 문학 작품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훌륭한 성과를 얻을 것이다.
소련의 예술도 10월 혁명 이후에 신속히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20년대부터 연극은 소비에트 정권 초기의 선전화 상태에서 벗어나 사상 예술과 무대 예술면에서 모두 크게 제고되었다. 쓰따니슬라브스끼는 자기의 무대 공연 창작 이론을 발전시키고 완벽화시켰으며, 체험한 리얼리즘 공연예술을 강조하면서 완전한 쓰따니슬라브스끼 연극 예술 체계를 이룩하였다. 그는 세계 연극 예술사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대가의 한 사람이다. 소련에서는 영화 예술도 신속한 발전을 가져왔다. 1925년에 새 아이젠스타인이 연출한 무성 영화 ≪전함 ≪포템킨≫≫이 촬영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전 세계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1927년에 열린 빠리 예술전람회에서 금메달을 받았고, 1958년에 열린 브뤼셀 국제전람회에서 세계영화 중의 가장 우수한 작품의 하나로 평가받았다. 1926년에 고리끼의 유명한 소설 ≪어머니≫를 영화로 개편하여 호평을 받았다. 30년대부터 소련에서는 유성 영화를 촬영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1934년에 ≪차빠예프≫가 상연되었다. 이 영화는 지금도 여전히 세계 영화 걸작의 하나로 되고있다. 이 시기 소련의 우수한 영화들로는 또 ≪10월의 레닌≫, ≪1918년의 레닌≫ 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가 상대적으로 큰 성과를 올렸다. 60년대에 소련 군인들의 애정 생활을 반영한 영화 ≪맑게 개인 하늘≫은 국내에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 영화는1961년의 제2차 모스크바 제국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70년대에 영향력이 가장 컸던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을 대폭 반영한 대형 역사 문헌 천연색 예술 영화 ≪해방≫이었다. 이 영화는 1975년 말에 이르기까지 116개 나라에서 상연되었는데, 광범한 인민들의 호평을 받았다.
소련의 작곡가들도 음악 사업의 번영을 위하여 창조적으로 노동하였다. 쇼스타코비치(1906~1975년)는 소련의 위대한 음악가였다. 20년대에 그가 창작한 제1교향곡은 매우 빨리 세계에 명성을 떨쳤다. 조국 보위 전쟁이 폭발한 후 그는 레닌그라드 보위전에 탄원하여 참가하였다. 전장의 포연 속에서 그가 창작한 ≪제7교항곡≫은 홍군 전사들의 영용한 전투를 고무하는 나팔로 되었다. 그의 이름난 작품으로는 또 서정적이고 우아한 ≪엘바강≫과 삼림의 노래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에서 탄생한 일련의 사회주의 국가들도 문학예술에서 매우 큰 성과를 거두었다. 작가들은 리얼리즘과 무산 계급문학 전통을 견지하고 형식주의 등 폐단을 극복하였다. 그들의 작품은 당대의 사회 생활을 반영하고 현시대의 사람들을 묘사하였다. 어떤 작가들은 사람들의 정신 도덕면과 생산 활동의 상호 관계를 치중하여 썼고, 어떤 작가들은 새로운 역사 시기에 나타난 문제들에 치중하여 촉구하고 탐색하였으며, 또 어떤 작가들은 사회의 소극적인 현상을 폭로하고 비판하였으며, 어떤 작가들은 사회주의 개혁을 지지하는 인민들의 염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였다. 다양한 창작 풍격으로 하여 여러 가지 문학유파들이 나타났고 많은 저명한 작가들이 탄생하였다. 예를 들면 민주독일(동독)의 작가 벨크  부로은(1939년~ )은 시인일 뿐만 아니라 희곡 작가이며 소설가이다. 그의 저명한 극본 ≪신체와 궁체≫(1973년)는 새로운 역사 조건하에서의 개성 발전 문제를 반영하였다. 저명한 혁명 작가 푸제크(≪교수대 아래에서의 보고≫의 작자이다. 1943년 9월에 독일 파쇼 비도들에 의하여 베를린의 한 감옥에서 살해되었다)의 조국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시인 싸이프르트(1901년~ )는 반세기 남짓한 창작 생애를 거쳐 독립을 쟁취하고 철저한 해방을 쟁취하려는 인민들의 뜻을 반영하였고 사회주의 적 인도주의 의 정신을 찬양하였다. 폴란드 시인 체스노브 미노스(1911년~ )는 자기의 작품에서 치열한 모순으로 충만된 세계에서 닥치게되는 위험을 예리한 통찰력으로 폭로하였다. 그의 시가는 ≪인도주의적 태도와 예술의 특징≫을 표현하여 198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현대 문학 예술의 발전
현대에 들어와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광대한 지역의 민족 해방 운동은 문학예술의 발전에 새로운 영역을 열어 주었다. 장기적으로 봉건 의식과 제국주의 노예 교육의 속박을 받아온 인민 군중들은 10월 혁명의 포성 속에서 각성하였다. 과학과 민주, 독립 자유와 사회주의와 새로운 환경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과 눈이 밝아졌다. 문학 예술은 혁명적 인민들의 마음의 노래로 되었고 서로 고무하는 도구로 되었다. ≪신문학≫, ≪신문화≫운동의 조류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활발하게 발전하였다.
저명한 인도의 작가이며 시인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년)는 인도주의 정신, 진지한 감정, 아름다운 언어로 충만된 작품으로 인도문학을 전례 없는 높이로 추진시켜 전 세계의 찬양을 받았다. 타고르의 시 ≪비조집≫과 ≪원정집≫은 모두 불후의 명작들이다. 타고르는 또 작곡가이며 화가로서 2000여 수의 아름다운 가곡을 썼으며, 1,500여 폭의 그림을 그려 세계 각지에서 전람하였다.
K. J. 지브란(1883~1931년)은 레바논의 저명한 시인이며 산문 작가이며 화가이다. 그의 산문시집 ≪선지(先知)≫(1923년)는 슬기로운 사람들이 헤어질 때 남기는 말 형식으로 사랑과 아름다움, 생과 죽음, 혼인과 가정, 노동과 안락, 이지와 열정, 선악과 종교 등 일련의 인생 문제와 사회문제를 논술하였는데 비유와 철학으로 동방의 색체를 가지고 있다.
10월 혁명 후, 일본 문학사에는 무산 계급 문학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에 참가한 무산 계급 작가로는 고바야시 다끼지 등이다. 고바야시 다끼지의 소설 ≪게가공선≫(1929년)은 저명한 무산 계급 문학 작품이다.
데고 리빌라(1886~1957년)는 저명한 멕시코 화가이며 걸출한 혁명 예술가였다. 리빌라가 창작한 거폭의 벽화는 부자와 승려를 힐책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노래하였으며, 사회주의 미래의 빛나는 전경을 선전하였다. 그는 자각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였다. 그는 붓을 무기로 삼고 전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1904~1973년)는 세계 현대 문학사에서의 걸출한 시인의 한 사람이며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자랑이기도 하다. 네루다가 20세 때에 출판한 시집 ≪20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대뜸 이름을 날렸다. 1937년에 에스파니아 인민의 반파쇼 투쟁에 참가한 그는 시가를 통하여 파쇼의 죄악을 폭로하고 인민들에게 불요 불굴의 투쟁을 진행하라고 호소하였다.

너희들 면전에서 나는 보나니
솟구치는 에스파니아의 끓는 피를
긍지와 합류된 날카로운 파도에
너희들이 삼켜짐을

가르시아 마르께스(1928년~ )는 당대 라틴아메리카의 중요한 문학가이며 또 그의 조국인 콜롬비아의 자랑이다. 마르께스의 장편 소설 ≪100년 동안의 고독≫(1967년)은 당대 세계 문학의 명작이다. 이 작품은 라틴아메리카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특징과 고질을 반영하였는데 상징적이고 은유적이고 불가사의 적인 환상적 색채로 충만되었다.
70년대부터 아프리카의 문학은 세계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다. 세네갈의 시인 상고르(1906년~ )는 당대 아프리카 문학의 걸출한 대표자이다. 상고르는 세네갈 대통령으로 있었지만 그는 시인으로서 더 이름났다. 그의 시는 아프리카의 오랜 문화 전통을 계승하여 철학성이 풍부하였으며, 아프리카의 순박한 인정 풍속을 많이 묘사하였으며, 아프리카의 역사 전통과 영웅 인물들을 노래하였으며, 조국을 열애하고 식민주의 제도를 폭로 비판하였으며, 아프리카 인민들에게 민족 독립을 쟁취하고 수호하기 위하여 투쟁할 것을 호소하였다. 1986년에 아프리카의 작가 월 쏘잉카(1934년~ )가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쏘잉카는 나이지리아의 걸출한 소설가이며 극작가이다. 쏘잉카의 작품은 그의 높은 시작 기교와 뛰어난 상상력을 보여 주고 있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나이지리아 사회 생활을 전시한 큰 폭의 그림≫이라고 평가한다. 쏘잉카는 또 현실 투쟁에 적극 뛰어들었으며 오늘도 여전히 인종 차별을 반대하고 인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게으름 없이 노력하고 있다.





유럽과 아메리카 현대 문학 예술의 발전
현대 유럽과 아메리카의 문학예술은 복잡한 발전 과정을 거쳤다. 제1차 세계대전은 서방 인민들에게 막심한 재난을 가져다주었다. 이는 의식 형태 영역에 반영되어 사회현실에 대해서와 인류의 운명에 대한 의 혹과 불안을 보편적으로 야기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비판적 리얼리즘 문학이 계속 발전되었으며 국제적으로 명망이 높은 일부 작가들이 우수한 리얼리즘 작품들을 써냈다. 동시에 모더니즘 문학 예술도 신속히 발전되어 점차 유럽과 아메리카문학 예술의 주류로 되었다. 모더니즘 문학 예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한 정신적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 특징은 문학 예술의 전통을 부인하고 신기하고 기괴한 형식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의 고민과 불안을 표현하는 데 있었다.
독일에 있어서의 주요한 모더니즘 문예 유파를 표현주의라고 부른다. 표현주의는 강렬한 주관적 색채로 내심의 모순을 토로하며 형상의 전형성과 정확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프란쯔 카프카(1883~1924년)는 중요한 표현주의 문학가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인정되고 있는 소설 ≪변신≫(1912년)에서 그는 한 하급 사무원이 밤잠에서 깨어나자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황당한 이야기를 묘사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활하는 인간들의 고독과 불행을 폭로하였다.
유럽의 예술 중심인 프랑스에서도 모더니즘 문학 예술 운동은 연속 부단히 발전하였다. 이 예술 운동 중에서도 초현실주의 는 영향력이 보다 큰 유파이다. 초현실주의 는 꿈과 아동식의 상상으로 소위 ≪마음 속 진실≫을 표현하였다. 루이 아라공(1897~1982년)은 중요한 초현실주의 시인이다. 아라공의 초기의 시는 열정과 환상으로 충만되어 있으며 비교적 높은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 그후에 아라공은 초현실주의 와 결별하고 혁명과 진보측으로 기울어졌다. 따라서 그의 예술적 수준도 한걸음 더 제고되었다. 그는 ≪시인은 당을 따르네≫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아이들조차 어렵잖은 일 감감 잊은 나에게
내 가슴 속에 사무치는 선혈 오직 프랑스에 바쳤건만
침침하고 캄캄한 밤밖에 모르던 나
당은 나에게 시력과 기억을 되찾아 주었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라공은 프랑스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탁월한 리얼리즘 작품들을 수많이 세상에 내놓았다.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즈 조이스는 ≪의식의 흐름≫ 문학을 창시하였다. ≪의식의 흐름≫은 일종의 창작 기교로서 주요하게는 소설에 대량의 내심 독백을 받아들여 의식으로 하여금 흐르는 물처럼 작품의 글귀에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1922년)는 서방 세계의 문학명작으로서 이 소설에 ≪의식의 흐름≫소설의 예술 풍격이 집중적으로 체현되어 있다.
동시에 모더니즘 시가도 영국과 미국에서 활발하게 발전되어 많은 새로운 시가의 유파와 유명한 시인들이 배출되었다. 모더니즘 시가는 낭만주의 시가에서의 풍월과 화초를 노래하는 주제를 반대하고 언어의 간명성을 강조하며 상징과 은유의 수법으로 시가의 주제를 표현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이 유파는 시가 예술의 발전에 거대한 영향을 주게되었다. 영국의 T. S. 엘리어트(1888~1965년)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시기 유럽과 아메리카에서의 중요한 시인으로 인정받은 시인이다. 그는 1922년에 장시 ≪황무지≫를 발표하였다. 그는 이 시에서 현대 서방 세계를 쓸쓸한 황무지로 묘사하면서 이 세계에는 물의 자양과 생명이 요구되지만 현실에는 통속적이고 저급한 욕망으로 충만되어 있으며, 자양분은 생기지 않고 욕망은 죽지 않는다고 썼다. ≪황무지≫는 구조가 방대하고 자료들이 널리 인용되었으며 전고와 은유로 가득차 있다.
20년대에 이르러 제1차 세계 대전을 강력히 비판하는 문학 작품들이 나타났는데 문학사에서 일반적으로 ≪잃어버린 세대(ㅣost generation, beat generation)≫ 문학이라고 한다. ≪잃어버린 세대≫ 문학은 리얼리즘 수법으로 창작된 소설을 위주로 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은 미국의 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1899~1961년)이다. 1926년에 헤밍웨이가 창작한 장편 소설 ≪해는 다시 떠오른다≫가 출판되었는데, 속 표지에 ≪당신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입니다≫라는 부제가 있다. ≪잃어버린 세대≫ 문학이란 이로부터 온 것이다. 헤밍웨이의 소설은 풍격이 독특하고 문체가 간결하고 주제 인물은 운명과의 투쟁에서 영원히 패할 줄 모르는 불요 불굴의 강인한 인간이다. 그의 대표작은 ≪노인과 바다≫(1952년)이다. 헤밍웨이는 20세기 서방 세계에서 영향력이 큰 문학가이다.
30년대에 이르러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 공황의 영향과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로 인하여 생산된 거대한 영향을 받아 전반 서방의 문학과 예술은 모두 진보와 혁명,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어졌다. 이 시기에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분분히 각국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작품을 통하여 민주주의와 진보를 열망하는 주제가 표현되었다. 많은 예술 단체는 소련과 연계를 가졌으며 사회주의를 동정하고 사회주의적 경향성을 가졌다. 1936년에 에스파니아 내전이 일어나자 진보적 작가와 예술가들은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파쇼 세력의 폭행을 질책하였으며, 심지어 어떤 작가와 예술가들은 국제 종대에 참가하여 마드리드로 달려가 에스파니아 인민과 함께 피흘려 싸웠다. 서방 문화에서의 이 진보적인 시기를 역사에서는 ≪붉은 30년대≫라고 부른다.
마르크스주의는 30년대에 거대한 영향을 일으켰다. 이 시기에 또 일부작가들은 자각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접수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였으며 거대한 예술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독일의 브레히트(1898~1956년)는 그들 중의 걸출한 대표자이다. 브레히트는 평생에 많은 극본을 써냈다. 그 대부분의 작품들은 마르크스주의 학설로 자본주의 사회를 해부한 걸작들이다. ≪갈릴레오전≫(1947년)과 ≪꼼뮨의 나팔≫(1948~1949년) 등은 그의 대표작이다. 이런 작품들에서 브레히트는 대담한 예술적 시도를 하여 점차 일련의 예술 이론을 창립하였다. 이것을 브레히트 연극 예술 체계라고 부른디 브레히트는 20세기가 낳은 연극 귀재이며 또한 충실한 공산주의 전사이다. 그의 연극은 세계 연극 예술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거대한 영향을 받아 모더니즘 문학 예술은 재차 열기를 일으켰다. 전후의 모더니즘 문학 예술은 가일층 유럽과 아메리카의 문화 전통을 부인하고 현실 사회를 부인하고 심지어 사람자체까지도 부인하였다. 동시에 모더니즘이 심입되고 발전됨에 따라 모더니즘 문학 예술 중의 형식주의 색채와 허무주의 색채도 더욱 강렬해져 각종 유파가 분분히 나타났지만 그 대부분이 잠시 나타났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모더니즘 문학 예술은 끝끝내 사회적 의의와 미학적 가치를 상실한 막다른 길에 들어섰다.
전후 초기에 모더니즘 문학은 먼저 프랑스에서 선풍을 일으켰고, 실존주의 문학은 유럽과 아메리카에 거대한 영향을 마쳤다. 실존주의 문학은잔혹한 전쟁 후의 인간들의 비관 실망의 심리를 반영하였다. 쟝 뽈 사르트르(1905~1980년)는 철학가이며 또한 실존주의 문학의 저명한 대표자이다. 사르트르는 평생에 철학 저작 외에도 많은 소설과 극본을 창작하여 문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르트르의 문학 작품은 한 사람의 운명과 세계에서의 사람의 지위 등 문제에 대한 사고를 반영하였는데, 그의 수법은 리얼리즘적이고 태도는 현실 사회에 낯을 돌리는 것이었다. 사르트르의 일생은 그래도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일생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저항 운동(레지스땅스)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장기간공산당과 사회주의 위업의 지지자로 자칭했었다. 1980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중국의 신문 잡지에 발표된 문장들은 그를 ≪인류 진보의 벗≫이라고 하였고 ≪사르트르는 세계 무산 계급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인정하였다.
50년대와 60년대에 와서 프랑스와 기타 국가들에 보통 ≪안티 떼아트르≫연극이라고 칭하는 일종의 연극 형식이 나타났다. 프랑스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1906년~ )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두 유랑하는 사나이가 고도라고 하는 영문 모를 한 사람을 기다리는 이야기로서 이치에도 닿지 않는 허무 맹랑한 이야기 장면이 표시되어 세상에서의 사람들의 소외감을 표현하였다. 안티 떼아트르의 연극은, 사회와 인간은 모두. 구원될 수 없다고 황당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구원될 수 없는 가소로운 상태를 표현하려 하는 것이다.
60년대에 와서 미국에 ≪흑색 유모아(Blark comedy)≫ 문학이 출현되었고, ≪흑색 유모아≫ 문학도 안티 떼아트르 연극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희망없고 비참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흑색 유모아≫ 문학이 쓴 수법은 도리어 조롱식의 유모아로서 독자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하면서도 그 웃음 속에서 운명의 비참함을 감수하게 하자는 데 있다. 미국작가 요셉 하이레의 소설 ≪스물 두 번째 군함≫(1961년)은 유명한 ≪혹색유모아≫ 작품이다. 이 소설은 미국 공군에 복역하는 한 비행사의 황당한 경력을 통하여 군대내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추악한 현상을 폭로한 반전경향이 아주 농후한 작품이다.
현대 이래 모더니즘 예술도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주류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에스파니아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년)는 가장 중요한 모더니즘 예술가이다. 그는 장수한 일생 동안 유명한 작품들을 수많이 창작하였는데, 작품의 풍격이 다양하였고 그 영향력이 거대하였다. 1937년 에스파니아 내전 시기에 파쇼 분자들이 에스파니아의 한 도시 게르니카에 3시간에 달하는 맹폭격을 가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피카소는 거폭의 유화 ≪게르니카≫를 창작하여 변형적이고 중첩된 일련의 형상을 통하여 파쇼의 폭행을 힘있게 세상에 폭로하였다. 20세기 서방의 걸출한 화가인 피카소는 1949년에 세계평화대회의 요구에 응하여 세계에 이름을 날린 소묘 작품 ≪평화의 비둘기≫를 그렸다. 이 작품은 세계 인민의 평화 보위의 상징으로 되었다.
독일에서 표현주의 화가들의 영향은 비교적 크다. 표현주의 문학과 마찬가지로 표현주의 회화도 주관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통하여 인간의 고독과 마음 속의 불안을 반영하였다. 노르웨이 화가 에드워드. 뭉크(1863~1944년)는 중요한 표현주의 화가이다. 그의 대표작 ≪외침≫은 변형적인 한 사람이 공포에 질려 고함지르는 것을 묘사하였다. 이 그림은 표현주의 미술의 특징을 충분히 반영하였다.
20년대부터는 추상 미술이 발전하였다. 추상 미술의 탄생은 세계에 대한 예술가들의 일종의 도피인바, 그들은 형식주의의 추구에 만족하였던 것이다.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년)는 추상 미술의 중요한 화가이며 이론가이다. 칸딘스키는 화가의 목적은 정신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서 추상적 도형 - 예를 들면 삼각형과 원형 - 은 정신을 더욱 유력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칸딘스키의 회화와 이론은 모두 그 자신의 형식주의 에 대한 추구를 반영하였으며 회화 형식에 대하여 일정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20세기 서방의 중요한 추상적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방의 예술 중심은 프랑스로부터 미국으로 옮겨졌다. 그리하여 모더니즘 예술이 미국에서도 고조를 일으키게 되었다. 50년대에 추상 미술은 서방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추상적 예술가는 미국의 잭슨 폴록(1912~1956년)이다. 폴록의 그림은 추상적 예술의 일종 극단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늘 화포(캔버스)를 땅바닥에 못으로 고정시켜 놓고 직접 물감통을 들고 물감을 화포에 뚝뚝 떨어뜨리거나 뿌렸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 회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말한다면 졸작이라 할 수 있다.
70년대에 들어서서 모더니즘 문학 예술은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기본적으로 종말을 선고하였다. 형형 색색의 유파들이 왁작거리던 부르짖음은 점차 고요해졌고 문학 예술은 차차 전통적인 것으로 돌아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인민들이 진정으로 감상하는 것은 그래도 전통적 형식을 갖춘 문학 예술 작품인 것이다.
20세기로부터 시작하여 음악과 무용 등 영역에도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 현대 음악과 현대 무용의 단계에 들어섰다. 러시아 예술가 스트라빈스키(1882~1971년)는 20세기 중요한 현대 작곡가이다. 1953년에 그의 작품 ≪봄의 제전≫이 빠리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는데 그때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이국 정서와 신화 색채 등 수단을 통하여 음악 작품에 음악가의 주관적 의지와 내심의 물결을 표현하려 하였다. 그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또 발레 무곡 ≪불새≫ 등이 있다. 미국의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1878~1927년)은 현대 무용 예술의 발전에 대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덩컨의 무용은 고전 무용의 까다롭고 불합리한 규정들을 버리고 극본과 음악의 제한을 받지 않으면서 음악에 대한 무도자의 이해에 따라 자기 뜻대로 자유롭게 동작함으로써 음악의 심각한 함의를 전달하였다. 덩컨은 일찍 모스크바에서 자신의 무도 방식으로 무산 계급의 가장 강한 목소리 - ≪국제가≫를 공연하여 레닌과 기타 소련 지도자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영화는 20세기의 예술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영화의 주요생산국이 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교외에 있는 헐리우드는 영화 촬영소의 집중지이다. 그곳의 영화 제품은 미국의 경제와 국가 수출품 가운데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20년대는 무성 영화가 있었고 30년대에는 유성 영화가 있었는데, 이 시기의 영화는 주로 강호의 영웅편, 감상편과 희극편이었다. 찰스 채플린(1889~1977년)은 이시기의 가장 유명한 영화 예술가이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 대가이기도 하다. 채플린은 헐렁한 큰 바지와 중절모, 그리고 가짜 수염, 헌신과 지팡이를 갖고 유명한 방랑객의 형상을 창조하였다. 그의 희극영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웃음 속에서도 가난한 인간들에 대한 심심한 동정을 남겨놓았으며 또한 자본주의와 파쇼주의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그의 풍자를 감상하게 하였다. 그의 유명한 영화 ≪모던 시대(Modem Times)≫, ≪독재자≫ 등은 모두 세계 영화 예술에 있어서의 불후의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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