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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5/08/09 (07:10) from 129.206.196.28' of 129.206.196.28' Article Number :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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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담론의 정체성 - 유토피아, 아토피아, 디스토피아






동양 담론의 정체성 - 유토피아, 아토피아, 디스토피아  




김진석 / 인하대 철학과 교수  



1. 東道西器論에 대하여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현재의 우리는 한국 사람이기는 하지만 동양인은 아니다. 이 경우 '한국인'은 정치적 규정이기에 일정한 현실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동양'은 그나마 그 정도의 현실성을 가지지도 못한다. 지리적 혹은 지정학적 규정으로서 나름대로 일정한 사용 가치를 가지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동양'이란 너무도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동양'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동양'이란 말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지리적 환경을 지칭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역사적으로 그 말이 사용된 구체적 맥락이 얼마나 현재의 맥락과 다른지를 살피는 일은 다른 기회로 미루더라도, 어쨌든 오늘날 近東에서 極東에 이르는 지역은 너무도 이질적인 정치적 문화적 환경과 배경을 가진다는 데 주의하자. 어떤 점에서 '근동'은 같은 '동양'인 '극동'에 가깝다기보다는 서양에 가깝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점은, 그렇게 이질적인 덩어리인 '동양' 자체가 서양에 의해 기획되어지고 또 서양에 대립된 것으로 기획되어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東'과 '西'라는 규정 자체가 매우 단순한 추상성에 머물 뿐 아니라, 솔직하지도 못한 개념으로 머문다. 中體西用중체서용이나 和魂洋才화혼양재 등의 이념에서는 중국이나 일본이라는 주체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반면, '東洋' 代案論이나 東道西器論에서 '東'과 '西'는 구체적인 내용도 없다.

물론 현실적인 실체로서 동아시아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정치경제학적 블록이고, 그 블록은 나름대로 문화적 동일성을 가진다고 여겨진다. 좋다. 정치 경제적 블록의 중요성은 나름대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고 그를 뒷받침할 문화적 블록의 이념도 필요할 것이다. 이 경우 동아시아란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북아시아일 것이다. 동양의 타 지역에 대하여 정치 경제적 힘을 축적했다고 자부하는 韓·中·日 세 나라가 다른 강력한 블록에 대항하기 위하여 덩어리로 뭉친 블록 말이다.

그러나 이때, 사람들은 아는가? 그 블록이 다른 아시아 지역, 예를 들자면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그 점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 동아시아는 정치 경제적 발전 가능성을 근거로 다른 동양 여러 나라와 지역에 대해서 매우 배타적인 블록으로 기획되곤 하는 것이다. 더구나 한·중·일 세 나라만으로 된 동북아시아가 어떻게 동양을 대변하거나 대표하는가? 과거 서양에 대해 '동양'이란 이름 아래 '極東' 못지 않게, 아니 때로는 그보다 오히려 '近東'이 지칭되지 않았는가? 여기에서 볼 때 동남아시아 및 근동과 스스로를 차별시키고, 그 차이 속에서 동일성을 생산하는 동북아시아가 동양을 대변하거나 대표한다고 하기는 어렵다.

또 다가올 미래에 동북아시아·동남아시아·근동을 포괄하는 동양이 정치 경제적으로 구성되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더 나아가, 그런 정치 경제적 블록이 생겨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선적으로 정치 경제적 블록이지 문화 공동체로서의 동양은 아닐 것이다. 유럽이 자신에게 역사적 동일성을 부여할 때, 거기에는 가상적이기는 하더라도 문화적이며 종교적인 동일성이 일정하게 전제되고 있다. 그러나 동양은 거기에도 훨씬 못 미칠 정도로 이질적인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아랍의 역사와 인도의 역사는 서로 얼마나 다르며 그들은 또 동북아시아의 역사와 얼마나 다른 맥락을 가지는가?

그런데 왜 거기에 철학적 혹은 인문학적 '동양' 개념을 투사시키는가? 동양 철학이라는 실체, 더구나 지금의 동아시아 삼국뿐 아니라 다른 동양 여러 나라와 지역 문화의 근저에 놓여있을 실체는 과거에도 그랬었지만 지금도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는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양 철학이라고 하지 말고 '동북아시아 철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동북아시아에서는 아직도 유교적·불가적·도가적 영향이 비교적 강하게 남아 있으며 따라서 일정하게 문화적 실체가 근거에 놓여있다고 여겨지기에.

그러나 그 경우에도 儒佛仙의 공통성 못지 않게 동북아시아 내부에서의 개별적 차이가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유교가 중국의 그것이나 일본의 그것과도 다르듯이 말이다. 그런 차이를 무시하고 동양적 혹은 동아시아적 동일성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거기에는 모종의 이데올로기가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에 중국적 근원성을 무조건 전제하고 담보하려는 中華主義 및 그것에 기생하는 事大主義가 거기 있거나, 또는 각 나라에서 새로이 발생한 현재적 이해관계 속에서 다시 그 전통을 이용하는 집단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양적 전통'을 철학적으로 실체화하려는 시도나 그것을 현재화하려는 시도는 선험적인 동아시아 중심주의에 기대고 있는 게 아닐까? 개념적으로 명확한 내용을 가지기는커녕 요란한 소리만 내는 과장이 아닐까? 이 점을 보여주는 예로 김용옥의 노자·공자 개그를 들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동양 사상,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국 고대 사상을 빙자하면서 그것에 기생하고, 동시에 대중과 방송에 기생하는 문화권력 복합체의 성격이 짙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런 문화권력이라는 점을 부인하고 동양사상의 면면한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허울을 강조한다.1)

우리는 여기서 동양 담론의 현재적 틀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서양에 대한 대안으로, 특히 서양문명이 초래한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동양을 생각한다. 극단적인 문화적 이질성 때문에 그런 동질적인 동양이란 문화적으로 존재하기 힘들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적이고 도가적인 전통이 질긴 동아줄 모양으로 우리를 붙들어매고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듯하다.

그 유구함을 근거로 삼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양 사상을 오늘날의 문명위기의 대안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잔존과 대안은 다른 것이 아닐까? 더구나 오늘의 위기를 뭉뚱그려 서양 문명의 위기로 삼고 그에 대해 가공의 동양사상을 대안으로 삼는 일이 과연 차분하고 성실한 지적 작업일까? 회의적이다.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노자와 공자 사상은 중국적 전통에 속한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배타적 민족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서양적 맥락과 비교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흔히 서양 문화가 그리스에서 태동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은폐와 왜곡이 있다. 그리스 문화는 많은 점에서 이집트를 본받았지만, 서양 문화는 이 점을 가린다. 그리스에서 시작하는 서양, 이것조차도 서양적 허구인 것이다. 그러나 문명사적으로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 그리스 문화가 계속 발전하지도 않았고 지배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서양 문화는 그리스라는 허구적인 근원에서 시작하여 로마를 거쳐 거의 모든 나라로 이동하면서 다른 모양으로 꽃이 피었다.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그리고 저 먼 가공의 서인도 미국까지. 그러나 동양에서는 거꾸로, 다행 중 불행인 것은, 중국 문화가 19세기까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헤게모니를 유지하였다는 점이다. 2천 년 가까이 소위 '동양'에서 지속된 문화적 패권주의, 이것을 되돌리고 회복하는 것이 그렇게 바람직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총체적인 '동양성'을 지나치게 실체화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중국적 전통을 오늘날 다시 동양적 전통으로 회복시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비판적인 이유는 내가 서양학자이기 때문인가? 그리고 암묵적으로 서양패권주의를 전제하기 때문인가? 역사적으로 서양중심주의가 알게 모르게 현재의 동아시아에 스며든 것이 사실이고, 그런 한에서 그의 발생학적 계보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서구 패권주의의 계보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서, 동양담론의 공허함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금지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두 작업은 배타적이라기보다는 보완적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한 쪽만이 강조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더구나 동양적 근원성의 가상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을 서양전공 학자는 무조건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좋은 논리가 아니다.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철학과 사상에 관해 우리는 동양철학자와 서양철학자라는 구분을 지나치게 경직되게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2) 처음에 서양적 주제로 학위를 받았든 동양적 주제로 학위를 받았든, 그것은 학문적 경력의 첫 걸음을 표시하는 궤적일 뿐이다.

또 동양이나 서양의 전통에 기대어 그것을 연구하는 인문적 활동이 일정하게 필요하기는 하지만, 인문학을 거기에만 제한시키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을 위축시키고 완고하게 만드는 일이다. 과거 역사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와 현재 및 미래에 대한 인문학적 작업은 서로 분리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동일한 것도 아니며 꼭 서로를 전제하는 것도 아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문학적 담론의 차원에서 무엇보다도 이 점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어쨌든 지금 필자는 과거의 전통 유산으로서의 동북아시아 사상을 통째로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그런 것을 가상적으로 설정한 후에 문명 위기의 대안으로 삼자는 일에 대해 회의적인 것이며, 그 회의는 어떤 서양패권주의에도 근거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동양'이란 총체적 이념 못지 않게, '서양'이란 총체적 이념도 이상적이며 허구적이다.


2. 유토피아, 아토피아

동양이든 서양이든 이상적인 실체, 동일한 근원으로 설정될 때 그것은 유토피아적인 성격을 띤다. 실제로는 아무 데도 없으면서도 이상적인 관념으로는 어디에나 있는 이상한 것. 서양의 경우, 위에서 말했듯이 그리스라는 근원에서 시작하여 그 동일한 근원을 유지한 채 계속 확장되는 유럽 혹은 서양이 그런 모양일 것이다. 실제로는 그 근원 이전에 존재했던 이집트나 소아시아 등의 여러 이질적인 출발점에서 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리스적 근원을 사후적으로 실체화하였다.

철학과 종교의 차원에서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기독교와 결합하여 특이한 초월론적 복합체를 형성하였으며, 그것은 그보다 비슷하거나 덜 관념적인 다른 차원들과 결합하면서 특이한 복합체를 만들어내었다. 이 복합체가 이교도적인 요소들을 역사 속에서 배제하고 억압하면서 비로소 서양적인 어떤 것이 구성된 것이지 사상이나 문화가 그 자체의 동력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다.

동양의 경우도 비슷하다. 선진 시대라는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 생긴 철학적 종교적 이념과 제도들이 마치 형이상학적 근원에서 탄생한 후에 연속성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동양의 모든 지역으로 퍼져나갔다고 여기는 형이상학적 역사관에는 서양의 경우와 비슷하게 사후적인 조작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근원이란 많은 경우에 후대의 해석학적 제도와 권력들이 사후적으로 생산하고 조작하는 어떤 것이지 실재로 존재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형이상학적 근원으로 담보된 동양성은 현실적으로는 그것에 저항하거나 순응하지 않으려는 '야만적' 요소들에 대한 끊임없는 침략·수탈·왜곡의 과정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적인 오랜 전통이 있다면 그것 못지 않게 오랜 인도의 전통이 있으며, 그들보다는 오래되지 않았더라도 그 못지 않게 완강한 회교적 전통이 있다. 어느 것이 동양적 전통인가?

순수한 근원을 설정한 후에 그것이 길고 긴 확장과 우회를 걸쳐 목적에 이른다고 설정하는 형이상학적 역사는 알게 모르게 동일성을 설정하는 권력에 기대고 호소한다. 그 권력의 가치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취하든, 그 형이상학적 동일성이 그저 관념으로 그치지 않고 다양한 권력 장치, 곧 텍스트를 통제하는 해석학적 제도나 제도적 훈육, 그리고 정치 경제적 권력의 도움을 받는다는 점은 인정되어야 한다.

조금 거친 점은 있지만, 과거 거대담론으로서의 '동양'과 '서양'은 이런 형이상학적 관념과 현실적 권력의 복합체가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유토피아적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이 단순히 허구적이거나 이상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허구적이고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 권위와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경우 동양은 동양인 내부에 의해서 기획되어질 수도 있고, '서양이란 유토피아' 안에서 사는 서양인에 의해 투사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서양인이 투사한, 서양과 차이가 나는, 서양이 아닌 장소(a-topia)로서의 동양을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동양은 부정성을 띨 수도 있고 거꾸로 긍정성을 가질 수도 있다. 전자의 예.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중국과 인도는 모두 서구적 시민성을 획득하지 못한 미개한 상태로 평가되었고, 그 역사관은 마르크스에게도 이어졌다. 오늘날 우리는 서양이 만들어낸 그런 미개하고 우스꽝스럽고 근대적이지 못한 '동양'의 이미지를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다.

팔레스타인 계통의 미국인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그 이미지의 계통과 역사를 분석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유럽에 의해 "복잡하게 배치된 '동양적인' 관념의 복합체(동양적인 전제, 동양의 화려함, 잔인함, 관능성), 유럽인이 사용할 수 있도록 순화된 동양의 다양한 종파나 철학, 지혜" 같은 것들.3)

그와 달리 동양은 서양 쪽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받기도 한다. 라이프니쯔는 《주역》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졌었으며, 푸코는 《말과 사물》을 시작하면서 보르헤스가 인용한 중국적 사고방식을 재인용한다. 또 《성의 역사1》에서도 서구적 性 담론과 다른 동양적 性 담론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러나 이 두 예에서 중국적인 것 혹은 동양적인 것은 기껏해야 에피소드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 구체성을 띠지는 못한 채 서구적 담론의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곳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들뢰즈에게서 비슷하면서도 더 긍정적인 예가 나타난다. 그는 서구 철학이 전통적으로 초월성에 집착했으며 그 집착이 상징적으로 나무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존재론적 나무뿐 아니라 인식론적 나무, 계통적이고 발생학적 나무, 계보학적 나무 등등의 형태들. 그 나무들이 근원-뿌리를 가지거나 지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비록 뿌리가 굵고 유일하지 않고 수염뿌리의 모양을 하더라도 그 자잘한 수염뿌리들도 결국 뿌리의 근원성으로 회귀한다고 여겨진다. 그와 대비하여 들뢰즈(및 가타리)가 발견하는 것이 줄기뿌리 혹은 덩이줄기(리좀rhizome)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무가 왜 그토록 서양의 현실과 모든 사유를 지배해왔는가? 식물학에서 생물학, 해부학, 그리고 인식 형이상학, 신학, 존재론, 모든 철학…에 이르기까지. 뿌리-기초, 바닥(Grund), 뿌리(roots) 및 토대(foundations). 서양은 숲과 벌채와 특권적 관계를 맺고 있다. 숲을 정복해서 생겨난 밭에는 종자식물을 심었다. 종을 기반으로 하며 나무 유형을 한 혈통재배의 대상을 말이다. 한편 휴경지에서는 목축을 했는데, 이 때도 혈통을 선별하여 동물 나무 형태를 만들었다.4)


이렇게 서양의 나무 신화를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들뢰즈는 '이상하게도' 동양을 이야기한다.


동양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동양은 숲과 밭보다는 스텝과 정원(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사막과 오아시스)과 관계되어 있다. 동양은 개체를 조각내면서 나아가는 덩이줄기 문화를 갖고 있다. (중략) 특히 오세아니아는 모든 점에서 서양의 나무 모델에 대립하는 리좀 모델 같은 것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오드리쿠르는 서양에 친숙한 초월성의 도덕이나 철학이 동양의 내재성의 도덕이나 철학과 대립하는 이유까지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씨를 뿌리고 낫으로 베는 神과 꽂아 놓고 땅을 파는 神 사이에 대립이 있는 것이다.5)


그러나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동양'은 동북아시아가 아니라, 사막 같은 유목성 문화를 가진 그런 '다른 동양'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저자들은 중국의 신비함을 말하는 헨리 밀러를 인용한다.


헨리 밀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중국은 인간이란 양배추 밭의 잡초이다. … 잡초는 인간의 노력을 헛되게 하는 복수의 여신이다. … 우리가 식물, 짐승, 별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존재 중에서 잡초가 가장 만족스런 삼을 영위해 간다. 그렇다. 잡초는 백합도 전함도 산상수훈도 낳지 않는다. … 결국 잡초가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결국 사물들은 중국과 같은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런 상태를 역사가들은 통상 암흑시대라고 불렀다. 풀은 유일한 출구이다. … 잡초는 일구지 않은 황폐한 공간에 있으며 그곳을 채울 뿐이다. 그것은 사이에서, 다른 것들 사이에서 자란다. 백합은 아름답고 양배추는 먹을거리이고 양귀비는 미치게 만든다. 그러나 잡초는 무성하게 자란다. … 이것이 교훈이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동양과 중국은 서양의 초월적 나무 문화에서 이탈하는 잡초의 모델을 제공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중국의 모습이 우리가 아는 그 중국인가? 저자들도 헷갈리는 듯하다. 앞의 인용문을 계속 읽자.


밀러는 어떤 중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옛날 중국, 아니면 현재 중국? 상상의 중국? 아니면 움직이는 지도의 한 부분을 이루는 또 다른 어떤 중국?


그런 중국은 단순히 옛날의 중국도 아니고 현재의 중국도 아니다. 아마도 상상 속의 중국에 가까울 터이다. 서양에서 보기에 서양과 다른 어떤 곳(a-topia)이지만, 그 곳은 구체적으로 사막이 있는 유목적 공간을 지칭할 수 있을 뿐이고 우리가 실제로 아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몽고의 유목성 문화조차 전통적인 중국에 흡수된 부분과 배제된 부분으로 갈리지 않는가.

이처럼 서양에서 서양을 비판적으로 보기 위해 투사된 동양이나 중국은,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우리가 실제로 역사 속에서 느끼는 현실과는 꽤 다르다. 그리고 어쩌면 지나치게 부정적인 이미지와 지나치게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주 동떨어진 게 아닐지 모른다. 어떤 점에서 후자는 전자를 거꾸로 재생산하고 있을 수도 있다. 다르게 말하면 서양은 동양을 착취하고 원시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신비화하는 것이다.

마치 가부장적 남성 문화에서 여성이 주변으로 내몰리면서도 동시에 신비화되듯이 말이다. 서구에서 이해된 《노자》 역시 지나치게 자연주의적으로 신비화되고 있다. 문명이 자연을 도구화하면서 신비화하듯이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앞에서 말한 오리엔탈리즘의 연장선 위에서 또다른 오리엔탈리즘, 곧 신비화된 동양이 만들어지는데, 후자는 전자와 다르면서도 동시에 전자의 짝패일 수 있다.






3. 동양, 디스토피아

이런 오리엔탈리즘이 서구에서만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기획되고 투사된 이미지에 부응하여, '동양' 내부에서도 그런 이미지가 재생산된다. 이 이미지는 서양이 상상하는 신비화된 이미지에 걸맞기에, 다시 서양에 의해 기꺼이 소비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미지들은 역사적으로 과거에 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가적·도가적·불가적 이미지들이 그렇고, 근대적 서구의 일각에서도 긍정적으로 해석되었지만 포스트모던적 서구에 의해서, 그리고 해체론적 서구에 의해 더 열렬하게 해석된 《노자》가 사상의 차원에서 대표적인 예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서구의 근대 문명적 질서와 자본주의적 질서를 해체한다는 심오한 사상.

그러나 사람들은 왜 동양 사상의 寶庫라는 《노자》를 오늘날 바로 '동양적'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다시 서양의 관점을 빌려 해석하고 평가하는가? 그런 해석이야말로 오리엔탈리즘의 긴 그림자 안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재생산하는 일이 아닌가? 5천 자 남짓의 추상적인 상징을 빌려 사람들은 오늘의 복잡하고 두터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노자를 21세기에 되살릴 수는 없고 되살릴 필요도 없다. 다만 선진 시대의 한 굵은 사상적 궤적으로 이제는 죽은 시대에 속하는,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고 회상할 수 있는 사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禪 같은 불교적 방법 역시 비슷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그를 통해 관념적인 방식으로 존재론적인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답을 얻기 위해 시도할 수는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禪的 명상이 답을 주기는 힘들다. 불가적 사색은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사유의 심오한 궤적이기는 하지만, 세속적인 물음들에 대한 현재적인 대응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산 속 佛寺에서 이 혼탁한 삶의 와중에 대해 거리를 취할 수도 있고 그 거리 두기가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또 서양식으로 교육받은 서양인이 불가에 귀의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세속적인 '동양'의 복잡다단한 일들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기는 어렵다. 상상된 동양의 근원으로서의 도가나 불가에 회귀하는 그러한 접근은 '동양'의 이미지를 더욱 상상적인 것이나 가상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오리엔탈리즘의 고리를 겹겹으로 더욱 확대시키는 일이 아닐까.

이렇게 다소 혹독하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동양'의 모든 지역이 현실적으로 매우 복잡다단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으며, 상상의 혹은 가상적 이미지를 복고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일은 그 문제들과 대면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동양' 어디든지 간에 일그러짐과 뒤틀림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동양인'이 발붙이고 사는 땅은 어디든지 간에 기형적인 장소(dis-topia)이기 때문이다. 인정하자. 현재의 동양은, 동북아시아든 동남아시아든 근동이든, 왜곡된 정체성으로 신음하는 땅이라는 것을.

그 점은 동양학 하는 사람들도 흔히 말하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서구의 근대 문명에 의해 훼손되고 망가진 동양의 역사적 모습.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구적 근대성이 그저 근사한 이성적 합리주의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와 결탁하여 현실화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주의할 점이 있다. 제국주의적 침략을 비판하는 일과 '동양'의 이미지를 복고적이고도 상상적인 방식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일은 다른 일이다. 그런데 실제로 가상적 '동양'의 관점에서 서구적 근대성을 비판하는 경우, 사람들은 무조건 현대성과 脫현대성을 부정적으로 서술하면서 상상적 동양에 회귀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피할 일이다.

현대성과 탈현대성을 무조건 추종할 필요도 없지만 그저 부정하거나 비난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긍정적인 면도 가진 복잡한 역사적 과정이며, 어쨌든 긍정과 부정의 사이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서구적 연원을 가졌다고 해서 또 그것이 초래한 부정적 측면들이 끔찍하다고 해서, 그것의 긍정성 및 실제성이 무시되거나 간과될 수는 없다.

한반도는 과거 중국으로부터 더 오랜 간섭과 침략에 시달리지 않았는가? 그것은 문화적 동일성을 위한 기여이고, 근대 이후의 복합 문화는 순전히 문화적 동일성을 파괴하는 외래적 침탈인가? 사상적으로도 儒家와 道家, 그리고 佛家는 지난 과거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서로 이질적인 성격을 띠며 싸우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다른 한편 '동양'의 이름으로 그 모든 것들이 다 통합되고 있지 않은가? 근대 제국주의를 비판한다면서 근대 이후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얻은 실존을 쏟아버릴 필요는 전혀 없다.

이질적이고 파괴적으로 보이는 요소라도 얼마든지 自生的인 문화 영역으로 흡수할 수 있다. 외부적인 요소가 파괴적이고 부정적이냐, 아니면 긍정적이고 생산적이냐는 판단은 그 자체로만 논의되어서는 관념적 추상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물음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물음, 곧 그 문화 안의 거주자들이 얼마나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으로 외부적 위험을 제 것으로 만들고 극복할 힘이 있느냐에 딸린 이차적인 물음일 것이다.

또 현재 한국의 기괴한 상황에서 서구적 근대화와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탓이 크지만, 그것만을 탓할 수는 없다. 우리 스스로가 뼈아프게 직면하지 못한 우리 자신의 문제도 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을 문제삼지만 정작 한국인은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서술하고 치부를 바로 보았는가? 적극적 친일을 한 사람들이 해방 후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사회적 부와 권력을 유지한 것이 아직도 제대로 성찰되지 못하는 현실 아닌가? 또 그로 인한 부정부패가 현재 한국 상황에서 엄청나게 확대되고 재생산되는 꼴 아닌가? 스스로가 감당할 부분에 대해 정당하기만 하더라도 우리는 서양과 세계화 부분에서 좀 더 유연하고 솔직하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러니 왜곡된 현실의 땅 동양을 그대로 인정하고 바로 보자. 동양의 문제를 서양 탓으로 돌리면서 가상적이고 이상적인 '동양'에 집착한다면 더 큰 문제가 생겨난다. 순수한 동양, 순수한 동아시아에 기대지 말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섞인 문화 공간을 인정하자. 그리고 더 나아가 과거의 한국적 혹은 '동양적' 공간조차도 단순히 사상의 차원에서 서양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거나 서양에 대립되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때로는 사상적으로 유사성을 가진 채 복잡한 지배와 권력의 톱니바퀴들 속에서 굴러가고 있었음에 주의하자.
이러한 성찰 자체는 그리 어려운 게 아닐지 모른다.

현실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다지 요령부득의 말이 아닐 터이니.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성찰은 철학사의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며 철학사 중심의 역사 서술에 대해 심각한 이의를 제기한다. 관념적 이념과 사상 중심의 철학사 서술은 역사적 과정에 대해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고 맹목적인 이해를 제공하기 십상인데, 한국의 동양철학계는 아직도 철학 사상 중심의 관점에서 역사 과정을 이해하곤 하기 때문이다. 혹은 사회사상으로 이해하더라도 사회적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전통적인 차원에 머무는 한, 사회철학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동양과 서양의 차이 혹은 갈등이 무엇보다도 그들의 상이한 사상 체계에서 기인한다고 믿는다면, 사람들은 이념의 역사를 아직 관념적으로 혹은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유교적 사고와 기독교적 사고 사이의 차이와 대립, 혹은 인본주의적 사고와 唯一神的 사고 사이의 차이와 대립이 동양과 서양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설명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는 이 점을 한국에서의 기독교 문화의 유별난 팽창과 발전이라는 예에서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서양 문화의 전래 과정에서 처음에는 동양적 유교 전통과 서양의 초월주의적 문화 사이에, 곧 조상을 숭배하는 유가적 전통과 유일신을 숭배하는 기독교 문화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다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의 근대 문명과 더불어 기독교적 사고와 믿음이 점차 혹은 급격히 유가적 전통을 누르고 번성한 것으로 생각되곤 한다. 이런 이해의 저변에는 동양과 서양이 사상과 믿음의 차원에서 선험적 동일성을 가진 개체일 뿐 아니라 독립적 계통을 따라 존재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유토피아적이고 아토피아적인 설정이 이미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유가적 조상숭배와 기독교적 신앙이 그렇게 순수하게 서로 대립하였는가? 그것들은, 바로 그것들이 따로 동양과 서양에 속한다는 이유 때문에, 서로에 대립하고 서로를 밀어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가? 오히려 그 둘은 일정하게 친화력을 가질 정도로 서로 이념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던 게 아닐까? 그러면서 일정하게, 곧 사상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서로 결탁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 점을 한 동양철학자의 입을 빌려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듯이 한형조 역시 유학과 근대의 不和를 설정한다. "'근대적' 사고는 유학의 원리의 반대편에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을 도덕감이 아니라 사적 욕망으로 보며, 사회를 자기 절제와 배려를 통한 공동체적 유대라기보다는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물질을 소비하고 타자와 경쟁하는 공간으로 이해한다."6) 그런 다음에 흔히 예상되듯이 그는 그 근대의 영향으로 나타나는 20세기의 방종과 소외를 질타한다.

"20세기는 신이 보장하던 삶의 의미와 공동체적 유대를 잃어버리고 '자기 속에서' '자기를 정립하려는' 시지프스의 도달될 수 없는 허무한 노력을 연상시킨다. 근대는 '관계'의 선험적 지평을 잃어버렸다. 신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사물과의 관계를 모두 잃어버리고 광야에 내몰렸다. 그 소외와 물화 가운데 인격이 빠져 있고, 모든 것을 투쟁과 갈등으로 보는 비인간화가 있다."7) 근대적 인간이 광야에 내몰리고 疏外와 物化에 빠져 있다는 식의 비판은 동양철학자들에게서 종종 듣는 이야기인데, 종교적 도덕주의자들의 비난이 그렇듯이, 다소 상투적이다.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희망과 기대가 어처구니없는 맹목성을 유발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그저 부정적인 사건으로만 매도할 수는 없다. '관계'의 선험성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관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까다롭고 복잡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사회적 실천이 다양하게 요구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일단 유학과 근대 사이에 설정된 불화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선험적 관계에 근거할 것이고, 그러한 선험적 차이를 전제하는 일이 보편성을 가지는 듯하다.

그러나 그 역사적 모델의 보편성은 자세히 보면 다소 공허함과 맹목성을 가지고 있다. 유교와 기독교의 만남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에 주의를 기울여 보면 이 점이 드러난다. '유교의 종교성'에 대해 앞의 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초월적 실재에 대한 관념이 없었던가. 유보 없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과정이거나 편향이다. 전근대 사회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광범위한 믿음으로 특징 지어진다.

동아시아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대표적 사상인 유교와 도교, 그리고 불교 모두가 유신론적 신학적 바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간과한다. … 사람들은 유교에서 도덕적 설교나 에티켓의 지침을 읽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유교를 지탱해온 것은 인간의 초월적 본질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었다. … 주희는 공맹의 프로토proto 유학이 풍부하게 지니고 있었던 유신론적 종교적 함의를 무신론적 형이상학으로 변모시켰다. 명말 청초의 선교사들은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송대 유학이 탈색시킨 공맹의 유학을 되짚어 기독교와 접목시키고자 하였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마테오 리치의 《天主實義천주실의》이다.

이 취지에 조선 후기 일급의 유학적 교양을 가진 사람들이 공감했다. 그들은 기독교를 독자적 사유체계로서가 아니라 주자학이 묻어버린 유교의 신학적 전통을 회복하고 그 결점을 보완할 補儒보유로서 읽었다."8) 유교의 '동양적' 이해 자체가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이미 변화하고 굴절하였음이 드러나지 않는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선험적으로 유교의 본질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총체적으로 기독교와 대립시킬 수 있는가. 유교는 기독교와 근본적인 점에서 일치할 뿐 아니라, 현실적인 지형에서도 서로 연대하고 결탁하지 않는가.

이 점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커다란 사건 중의 하나인 기독교의 팽창에 이르면 더욱 날카롭게 드러난다. 인용을 계속해 보자. "사람들은 그 시기 지식층과 일반인의 뜨거운 기독교열을 봉건적 압제와 불평등으로부터의 반동이라고 본다. 나는 그것을 오히려 유교적 교조의 래디컬리즘으로 읽는다. 세계 선교 사상 유래가 없는 그 순교의 역사도 기독교적 복음의 승리가 아니라 한국인의 심성을 규율해 온 유교의 신학적 르네상스로 읽는다. 유교와 기독교의 유사성은 생각보다 깊고 본질적이다. 그것이 또한 해방 이후 기독교의 폭발적 신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믿는다."9)

의외가 아닌가. 한편으로는 유교와 근대 사이의 일반적인 대립 모델이 설정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와 기독교 사이의 근본적인 유사성이 인정된다는 것이. 벌써 여기서 유교와 기독교, 유교와 근대 사이의 단순한 대립은 가상이라는 점이 드러나지 않는가. 기독교와 근대는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고 어느 점에서는 그 점도 타당하지만, 우리는 한국 역사에서 기독교의 팽창과 근대의 발전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곧 독립된 추상적 관념의 체계로서가 아니라 역사 과정 속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련의 실천들로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구체적인 역사의 복합적 상황과 직면한다. 인용문의 필자의 태도 역시 애매한 듯하다. "유교적 교조의 래디컬리즘"을 말하는 인용문의 필자는 "한국인의 심성을 규율해 온 유교의 신학적 르네상스"를 환영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유교와 기독교의 조화로운 합일을 기대하는 것인가. 인용문을 계속 읽으면 이렇다. "그런데도 한국의 기독교는 그 뿌리를 자각하지 못하고 아버지인 유교적 관행과 의식을 내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고도 서글픈 일이다."

기독교의 뿌리이며 아버지인 유교적 관행과 의식? 갑자기 서양의 핵심 종교이자 사상의 뿌리와 아버지는 동양적인 사고가 된다. 기독교까지 흡수하고 통합하려는 오리엔탈리스트의 대담한 욕망인가. 좋다. 그런데 그렇게 기독교의 뿌리를 유교에서 찾고 유교의 뿌리를 고대적 종교적 초월성에서 찾는 대담함이 왜 근대는 단칼에 내치는가? 근대의 성립에 기독교가 일정하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라면, 근대의 뿌리도 한번 넓고 깊게 찾아봄직 하지 않은가? 근대를 무조건 신봉할 필요가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거꾸로 그것을 백안시하는 것도 피해야 할 일 터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근대'든 관념 덩어리로 박제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동양 담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은 우선 거기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저 단순하게 '동양'과 '서양' 사이에 대립을 설정할 일도 아니고 서양중심주의를 받아들일 일도 아니다. 또 서양중심주의를 비판한다면서 다시 '서양'으로부터 투사된 '동양' 이미지, 예를 들자면 노자의 '無爲自然'이나 '해체론적 노자'를 숭배할 일도 아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동양'이나 '서양'의 이미지의 가상성을 비판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공허한 상상이나 가상에 불과하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념이나 담론을 추상적 해석학이나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다루는 대신 현실적 지배 관계의 다양한 맥락 속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 여기서 다시 사이드의 말을 들어보자. "관념이나 문화, 그리고 역사를 진지하게 이해하거나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의 강제력,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권력의 편성형태configurations를 함께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이란 날조된―또는 나는 그것을 '동양화되었다orientalized'라고 부른다―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그것은 오직 상상력이 그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비로소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허위이다. 서양과 동양 사이의 관계는 권력관계, 지배관계, 그리고 여러 가지 복잡한 헤게모니에 관련된 것이다."10) 우리가 '담론'이란 말을 굳이 사용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담론들의 구조주의적 편성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권력 관계와 지배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변형되는 담론을 지칭해야 할 것이다.

하, 그러나, 권력관계라니. 그렇다면 다시 흔히 동양학자들이 하듯 서양의 팽창주의를 비난하는 일로 돌아가야 하는가. 발생학적으로 그것의 비판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동양 담론은 서양만을 타자로 삼아선 안 된다. '동양'은 스스로에 대해서도 타자임을 알아야 한다. '동양' 내부에도 여러 갈래의 끈질긴, 얼기설기 꼬인 지배관계가 있으니 말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동양 내부에서 중국 담론의 지배는 서양에서 그리스의 경우보다 훨씬 강력하고 장기적이었다.

사람들이 동양의 영원한 유산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儒佛道를 꼽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러나 유불도의 '자연스럽고 영원한' 동양성은 그저 당연한 일이 아니다. 동양적 '마음'에 근거한 것도 아니다. 서로 갈등하고 싸웠던 이질적인 행위와 관습들이 그런 영원한 자연스러움으로 굳어지기까지는 얼마나 험하고 잔인한 과정이 있었겠는가. 또 그렇게 영원한 동양성을 설정하자면, 마찬가지로 서양의 근원에는 기독교적 초월성이 영원히 자리잡고 있을 게 아닌가. 그런 선험적 독립성, 그리고 그것에 근거한 대립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는 이 글의 처음에 던져진 뚱딴지 같은 말로 다시 되돌려진다. 우리는 동양인이 아니라고. 동양인이면서도 동양인이 아니라고. 저주인가? 그런 듯하지만 그렇다고 그저 그런 것만도 아니다. 그것을 저주라고만 말하는 동양 담론도 경계하자. 비극적인 상황이기는 하지만 넘어설 수 있고 지나갈 수 있기에, 그저 비극적인 것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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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대해서 필자는 다른 글에서 분석을 했다. "철학의 광신적 대중화―김용옥의 경우", 《사회비평》, 2001년, 봄호.

2) 앞에서 인용된 글과 함께, "동양 대안론의 비판적 고찰"을 참조할 것(《오늘의 동양사상》, 2001년 후반기號).

3)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박홍규 역), 교보문고, 1999, 20쪽.

4)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 2》,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41쪽.

5) 같은 책, 41∼42쪽.

6) 한형조, 《왜 동양철학인가》, 문학동네, 2000, 72쪽.

7) 같은 책, 72∼73쪽.

8) 같은 책, 59∼61쪽.

9) 같은 책, 61쪽.

10) 에드워드 사이드, 같은 책, 23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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