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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0 (08:21) from 129.206.196.28' of 129.206.196.28' Article Number :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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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파그덴 <민족과 제국>



 200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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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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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파그덴 <민족과 제국>
문명의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이해



이정일  




넓어져 가는 지평선

이 책의 제목 《민족과 제국》이 말하는 것과 같이 민족과 제국帝國은 분명히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진화해왔다. 저자는 역사가답게 이런 개념들이 형성되어온 배경을 역사적인 사실(방법에 있어서는 통사적인 비교를 중심으로 구성하면서)에 충실하게 기술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기술에만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평가는 긍정적인 측면(세계화와 문명의 지평선 확장)과 동시에 부정적 측면(피지배자들의 억압과 야만성의 극치)이 있다는 양면적 입장을 취한다.

제국의 시대는 현재로서는 끝났지만 제국의 시대가 끝나기 위해 제국주의의 시대가 불가피했다는 저자의 주장은 분명히 아이러니irony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굳이 지식사회학의 입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모든 지식의 제약성은 저자로 하여금 다루는 관점의 한계를 분명하게 노정路程시킨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저자와 대화하면서 저자의 무의식을 밝히는 것은 일차적으로 한계를 지적하고(예를 들어 西歐중심적인 견해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점과 억압받은 피지배자들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결여되었다는 점 등), 보충하고(예를 들자면 균형 잡힌 시각의 제시), 그리고 완성하는(제국주의가 사라졌고 世界化가 도래했다면 그 세계가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통합의 가능성과 인간성의 보편성을 충족시키는가에 대한 객관적 검증) 과정을 제시하는 쪽으로 진행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분명히 토론할 충분한 가치를 역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헌팅톤Samuel P.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하랄트 뮐러Harald Mu?ler의 《문명의 공존》이라는 저서를 이끌어냈듯이, 저자의 견해와 다른 접근(피지배자와 식민지의 부당성에 대해 자발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의 중요성)에서 이 책은 다른 지평의 확장을 안내하고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접근을 인도한 관점 역시 하나의 역사를 이루듯이 주장에 대한 대안 역시 하나의 역사를 이루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논증이 지향하는 방향과 그 방향의 생산성으로 압축되게 된다.
저자는 서론에서 제국이라는 말을 정의하기가 어렵다고 토로한다. 이런 정의定義의 곤란성과 어려움은 계속해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15, 20, 21, 24쪽 등).

우리가 ‘제국’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건 간에 그 정의가 애매모호한 데 불과하겠지만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에는 예로부터 제국이 존재해 왔다.(11쪽)

현재까지 제국은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에 대한 정의는 확정적으로 내려지고 있지 않다. 中國은 탁월한 과학과 기술을 지닌 선진문명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창의성, 창조력, 개인성이 부족해서 다른 민족을 정복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물론 저자 자신은 유럽인들을 통해 이루어진 정복이 창의성, 창조력, 개인성에 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만(11쪽과 25쪽에서 저자는 제국이 야기한 고통과 피해에 대해서 언급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런 견해의 부당성에 대해서도 명백하게 반대하는 논거論據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저자가 아직은 유럽중심주의 내지는 아메리카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준다. 가해자가 가해자로서 양심의 고통을 뉘우치지 않는데 피해자에게 피해의식을 잊으며 살라는 것은 분명히 자가당착自家撞着적인 것이다. 지배와 피지배, 가해자와 피해자, 제국의 건설자들과 식민지의 피지배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런 역사적인 불균형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들로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과 같이 세계화는 이런 과제에 직면해서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만 한다.

몽고蒙古는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영토를 개척했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의 단순한 파괴자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은 도시문화에 이바지 할 어떠한 유산도 남기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비교는 접근에 있어서보다 공정한 접근과 역사적인 정밀성이 요구된다. 보편성의 과도한 강조는 역사적인 특수성과 우연성을 희석稀釋화 시키는 위험이 있다. 반대로 역사적인 특수성과 개별성에의 과도한 집착은 우리에게 역사적인 삶의 보편성을 차단하게 하는 위험을 보여주게 된다. 이런 극단을 회피하려면 역사적 사실을 사실에 충실하게 기술하면서 납득할 만한 근거를 도출해야만 한다. 저자의 균형 잡힌 시각이 과연 이런 요구를 충족하고 있는가를 검증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이런 평가는 다음 기회로 유보한 채,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세계제국의 변천과 그 명암

이 책은 총 11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초의 세계정복자, 로마 민족의 제국, 세계적인 제국, 대양의 정복, 복음의 전파, 이베리아 세계의 쇠퇴, 자유의 제국과 무역의 제국, 노예제도, 최후의 변방, 제국과 인종과 국가, 그리고 맺는 말이다. 열거된 제목이 암시하는 것과 같이 저자는 세계제국이 형성되어온 사실적인 지배관계를 통해 그 역사적 타당성을 설명하고 있다. 歷史의 승자는 그가 승리하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역사서술에 있어서도 승자 중심으로 역사가 기록되는 또 하나의 전리품을 챙기게 된다. 저자의 기술방식 역시 이런 현실을 반영할 따름이다.

알렉산더를 통한 세계최초의 제국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오늘날의 美國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제국의 역사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역사에 있어서 제국들은 나타나고 몰락하지만 제국이 남긴 유산은 역사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 알렉산더 제국이 영웅 알렉산더 개인의 야심에 의해서 건설되었는데도, 이 제국은 東·西 문화를 이어주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제국이 단지 부정적인 것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개인의 야심 뒤에는 그 역사적 개인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보다 커다란 섭리가 존재하고, 그것은 역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이런 역사적 위인의 열정을 이용해서 보다 커다란 목적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저자가 “이성의 간지奸智”라는 헤겔的 개념을 언급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개념은 이 책의 근본 취지와 부합한다고 보아야만 한다.

로마제국은 그리스 문명과는 다른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유럽문화의 중심에는 그리스 문화 못지 않게 로마 문명 역시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로마제국은 힘에 의한 정복, 기독교를 국교國敎로 선포하고 그것을 세계종교로 만들었으며, 法에 의해 모든 사람을 통치하는 새로운 유산을 남겼다. 라틴문명의 형성은 그리스 영향보다는 오히려 로마문명에 의해 더 많이 각인刻印이 되었다. 중세는 단적으로 로마유산과의 대결을 통해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神의 뜻이 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이기 때문에, 교황의 권위는 국가의 통치에 대한 세속적 지배를 굳힐 수가 있었다. 적어도 세속화가 본격화된 근대국가의 탄생 이전까지 종교는 영靈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의 신의 지배의 승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현실정치의 주역을 담당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스페인은 제국을 형성하는 기틀을 다지기도 전에 대영제국과의 전쟁에서 참패함으로써 식민지 개척에 대한 주도권을 영국에게 내주게 되었다. 저자는 大洋을 낀 반도나 섬나라들이 식민지 개척에 있어서 육지에 처한 민족들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식민지로부터 약탈한 많은 금은보화가 스페인에 유입되면서부터 스페인은 인플레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했다. 국가는, 역설적으로, 유입된 금을 관리하지 못했고 이것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면서 총체적인 국가부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과의 전투에서 진 것이 몰락의 원인을 제공했지만, 내부적인 차원에서의 몰락은 바로 이런 예상하지 못했던 인플레 때문이었다. 내부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급격한 국가기반의 몰락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스페인이 영국에게 제국개척에 있어서 붕괴되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 그 이후 스페인은 식민지 지배와 개척에 있어서 영국에게 주도권을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스페인에 의해 주도된 식민정책은 한정된 범위 안에서 아주 소극적으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영국에 의해 再편성된 식민지 정책은 대서양과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아프리카 흑인들의 인권을 고려하지 않고 사람을 인신매매人身賣買하는 일까지도 스페인의 식민정책은 감행했다. 비록 영국인들에 의해 노예의 매매가 금지되기는 했지만 노예매매는 부인할 수 없이 유럽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가장 잔혹한 짓에 속한다. 역사에 있어서 역설은 이런 노예매매를 통해서 흑인이 아프리카에 한정되지 않고 유럽, 미국, 南美에 분포되는 현상을 야기했다. 그 결과 흑인이 全세계에 골고루 분포하게 되는 역사적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연은 그 자체로서 질서를 이루지 못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질서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흑인매매가 역사에 끼친 영향은 바로 이런 것에 해당한다.

노예제도는 19세기까지 흥행하다가 비로소 1870년대가 되고 나서야 폐지되게 되었다. 역사에 있어서 노예가 사라지거나 폐지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노예매매가 명백하게 법으로 금지되어서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주체성, 양심의 자유, 인격의 존엄성, 인간권리가 단지 신으로부터 유래된다는 믿음을 통해 스스로를 계몽된 인간으로 자처한 바로 그 유럽인이 해서는 안 될 노예매매를 했던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에서 노예가 사람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는 이 점에서 유럽계몽의 역설逆說과 자가당착에 대해 더 이상 비판적인 접근을 하지는 않고 있지만 이것이 부당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흑인과 백인간의 인종싸움이 끝나지 않는 곳에서 이미 노예매매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부당성의 위험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기에 이르렀다.


제국의 해체로 등장한 민족국가의 자립성 요구

저자는 제국의 시대는 사라졌는가라는 물음제기를 통해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적어도 오늘날 물리적인 의미에서 더 이상 帝國主義는 없다. 그렇다면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민족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아야만 한다. 식민지시대의 종언은 분명히 민족의 부활과 맥을 같이 한다. 국가를 통한 국가의 억압으로서의 제국주의는 분명히 1948년에 제정된 세계인권선언에 위배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UN은 이런 이념에 충실하여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적 정책을 단죄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민족주의가 형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계기가 형성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대단한 통찰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민족은 반드시 자기동일성과 정체성正體性을 규정하도록 강요받고 있지 않다. 하지만 자기동일성과 정체성을 규정하도록 요구받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민족개념이 형성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자기동일성의 요구와 함께 타자를 배제하는 否定의 계기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민족주의가 제국주의로 팽창되는 과정에서 이런 양면성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언제나 같이 작용했다. 다만 식민지 피지배자들은 긍정적·적극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부정적·소극적·방어적인 의미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도록 요구받았다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국가를 넘나드는 자본의 지배는 아직도 세계화의 이름으로 분명히 이루어지고 있다. 제국주의는 시대에 뒤진 것으로 밀려났지만 지배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국가를 넘나드는 자본의 지배는 끝난 것이 아니라 지배관계를 결정하는 것으로 고정되고 있다. 따라서 제국주의가 사라졌다는 것은 지배 자체가 사라진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자본의 지배는 지배의 또다른 이름으로 全지구적으로 고착되고 있다. 지배와 피지배를 통한 억압의 메카니즘이 엄연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제국의 지배는 저자가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암시하는 것과 같이 이제 다른 양식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세계제국이 영토적인 의미에서의 정복이 아니라 금융과 세계경제의 문제로 진행되는 차이가 있을 뿐, 오늘날에도 여전히 제국주의는 변형된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世界化라는 오늘의 추세 역시 그 안에 세계표준화 및 세계지배라는 兩 측면을 숨기고 있음이 부인하기 힘든 역사적 삶으로 증명되었다.
이 책의 제10장과 결론부분에서는 제국, 인종, 그리고 국가에 대해 아주 포괄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저자는 종종 민족주의의 아버지로 잘못 오해되어 온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를 옹호하면서 민족주의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와 같은 것으로 곡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 점에서 “그는 한 민족Volk과 제국이라는 개념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154쪽) 독일은 민족주의를 세계패권주의와 같은 것으로 연결하려다 실패했다. 하지만 영국의 제국주의는 역설적이게도 민족주의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 저자가 잘 지적하는 것과 같이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는 연결은 되어 있지만, 이 둘이 같은 것으로 곡해되어서는 안 된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문제는 헤르더가 잘 지적한 것과 같이 그 상관관계를 정의定義하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왜냐하면 민족은 동질성의 바탕 위에서 정체성을 확정지을 것을 요구하지만 제국주의는 지배와 피지배를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민족은 자주권과 자결권을 극대화하기에 내부로는 독립을 그리고 외부로는 자주적인 외교를 목표로 한다. 이에 반해 제국주의는 영토확장을 통한 지배와 피지배를 고착하려고 한다.

민족주의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국주의가 지배할 때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하게끔 강제 당한다. 민족주의는 분명히 유럽에서 가장 먼저 발달했다. 그리고 유럽은 민족주의를 세계 식민주의로 확장시켰다. 역설적이게도 유럽의 제국주의는 유럽 이외의 나라에서 민족주의가 태동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왜냐하면 제국주의에 맞서서 민족의 생존권을 지키는 것은 필연적으로 민족의 자주성과 독립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배타적인 쇼비니즘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영토확장을 둘러싼 제국들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英國은 16세기 이래로 군림해온 세계제국의 패권을 독일과의 두 번 전쟁으로 인해 그 영향력을 급격하게 상실했다. 독일은 새로 부활된 민족주의를 제국주의로 실현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舊질서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주의를 추구했던 유럽 내부에서 패권과 헤게모니를 둘러싼 전쟁이 서로의 국력을 약화시켰고, 이로써 유럽은 자기내부로부터 스스로 붕괴되었다. 영국의 급격한 쇠퇴와 독일의 분단은 분명히 유럽에서 제국주의가 종말을 고했다는 것을 알린다.

그리고 유럽의 변방에 있던 러시아의 공산화는 또다른 의미에서 미국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였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양분된 세계질서는 다른 형태의 세계제국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지배와 피지배로서가 아니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대결로 이어졌다.
역설적인 것은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한 바로 그 대륙에서 민족주의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를 통해 강요된 민족들은 제국의 몰락과 함께 꾸준히 민족자결주의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윌슨에 의해 주장된 민족자결주의는 민족이 자기를 지킬 힘이 없을 때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 소리에 불과했다. 힘이 없을 때 민족은 자기를 유지할 자주성도 발휘할 수가 없다. 역설적이게도 민족자결주의는 힘이 있는 유럽에서가 아니라, 힘이 없는 피지배 식민국가에서 제국주의에 맞서는 논리로서 선호되었다.

지배받기 싫으면 지배하라는 요구는 제국주의자들과 민족주의들 간에 하나의 수렴점을 가능하게 하였다. 비록 전자가 공격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후자가 방어적인 의미에서이기는 하지만, 힘이 없을 때 민족의 자기결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냉혹한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이 되었다.
그런데 중국문명에 대한 저자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분명히 유지될 수 없거나, 아니면 재평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상 유일하게 몇 세기간 지속된 제국으로서 정치적 안정성의 모범(18세기에는 중국적인 것이 전부 대유행이었다)이 되었던 중국 제국은 이제 더 이상 서구와 새로운 동구에 그런 역할을 못하게 되었다. 이제 중국은 ‘동방의 독재주의’로서 전통과 위계, 그리고 과거의 존중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정신에 가장 해를 끼치는 예가 되었다. 한때 강력했던 중국 제국이 끝장나면서 이 세계는 유럽의 주요 강대국과 러시아, 미국에게 넘어갔다.(179쪽)

저자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中國이 제국의 형태를 유지했지만 이는 침략과 아무 연관이 없었다는 점이다. 중국인의 관점에서 중국의 역사를 보지 않고 유럽과 미국의 관점에서 중국을 볼 때 우리가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이런 선입관의 위험이다. 중국은 화약을 세계최초로 만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들이 만든 화약에 의해 西歐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중국의 제국주의는 다른 민족에게 해를 끼칠 만큼 침략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부국강병의 논리에서 중국민족주의를 결속하는 계기를 가능하게 하였다.(특히 日本 제국주의와 맞서기 위해 국민군과 공산군이 연합한 것은 아주 좋은 사례다.)

중국은 인간의 도구와 과학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항상 보다 상위의 목적에 종속시킬 줄 아는 삶을 살았기에 화약을 만들면서도 이것을 침략의 도구로 연결시키지 않고, 보다 다른 삶의 목적을 위해 사용했다. 따라서 우리가 중국에 과학이 없다거나 기술이 부족해서 西歐의 지배를 받았다고 하면 큰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적어도 저자가 중국문명을 평가할 때 저자는 좀더 신중하게 결론을 내렸어야만 했다. 東아시아에서 삶의 이념적 지주역할을 한 중국이 안정성을 유지한 것은 그것이 제국주의(엄밀한 의미에서 중국을 제국주의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유교儒敎라고 하는 덕의 정치에 기초한다는 것이 망각되어서는 안 된다. 저자의 판단에서 이런 중국의 철학적 지반이 자주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다.


지배에서 자유로운 세계보편주의 부활은 가능한가?

저자는 역사가답게 역사적 사실로부터 성급하게 어떤 결론을 단정적으로 내리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을 평가하는 것은 분명히 이것이 진행형인 한에서 역사를 이루는 한 관점으로 등장한다. 진행형인 역사를 마감하는 것은 역사로부터 거부당하기 때문에 결론 역시 늘 잠정적이 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 역시 늘 새롭게 제기되고 심판 받는다는 점에서 未완성으로 남아 있게 된다.

저자는 제국의 시대는 사라졌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취한다. 적어도 제국주의가 극에 달했던 시점에서 지배와 피지배라는 이분법을 능가하는 다른 역사적 대안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제국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사라졌지만 민족들을 결속시키는 국제연합의 가능성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제 비로소 태동되고 정착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로 등장했다. 국가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국가를 보다 상위의 논리로 묶을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오늘날 과제로 남아 있다.

저자는 칸트를 인용하면서 아니러니하게도 전쟁이 지닌 보다 커다란 목적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칸트는 전쟁을 그 자체로서 옹호하지는 않는다. 전쟁은 전쟁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칸트의 예를 들면 박해와 고통을 피하려는 것이 사람들을 여러 지역으로 분포하게 하였다는 것과 그로 인해 개척되지 않은 자연이 개척되게 되는 것)를 초래함에 의해 그것이 꼭 파괴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칸트는 강조한다. 하지만 칸트는 국가간의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국제연합의 이론적 가능성을 마련하고 있다.

저자의 시야에서 칸트의 이런 의도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지적되어야만 한다. 영구평화永久平和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국가간의 자율적인 연합은 가능하다. 국제연합의 필요성은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보다 커다란 세계사의 목적에 일치하기 위해 반드시 제도적으로 확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로 하여금 理性을 실현하는 과제가 실현될 때만 억압과 지배구조를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손에 잘 잡히지는 않지만 영원한 희망인 ‘영속적인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인류가 현재 필요로 하는 것은 ‘시민사회에 뿌리 박은 민주주의와 평등의 원칙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데 기초하는 ‘세계시민주의’이다.(192쪽)

저자는 민족주의의 협소함과 배타성 그리고 제국주의가 함축한 지배와 피지배의 부당성을 제시하면서 이것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세계시민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미 세계시민주의는 스토아학파 이래로 꾸준하게 제기되었지만 이것이 제도화된 형태로 국가의 논리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히 최근의 일이다. 이것은 그만큼 역사적 성숙이 더디게 진행되어왔다는 것을 반증한다. 더욱더 넓어져 가는 지평선 상에서 우리는 이제 세계의 시민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시민이기를 바라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요구된 것과 이것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논리에 속한다.

저자는 조심스럽게 세계통합의 가능성과 필요성에는 공감을 하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런 대안제시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것의 확립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오늘날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것임을 주장한다. 그럴 경우 인간은 보다 깊은 의미에서 인간의 인간성을 확보하면서 스스로를 개별성의 고립에서 벗어나 보편화된 개별자로 도야시키는 데서 자신의 삶을 실현하게 된다.

삶 안에서 자유의 실현은 이런 점에서 개인의 목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국가 내지 국제연합이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개인에게 이익이 되고 국가에도 이익이 된다는 것이 가능한데 이런 가능성은 바로 인간이 인간의 인간성을 많이 확보하는 가운데 비로소 인간의 자기행복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저자가 민족주의를 열린 것으로 보는 것은 이런 점에서 아무 무리가 없다고 본다.

이정일 / 연세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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