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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5/08/10 (20:20) from 129.206.196.44' of 129.206.196.44' Article Number :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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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탈민족주의자가 한국의 민족주의를 옹호하다.




인터뷰/ “민족주의는 독” 주장해온 두아라








미국의 탈민족주의자가 한국의 민족주의를 옹호하다.

여기 한 미국 역사학자가 있다. 시카고대 역사학과의 프라센짓 두아라 교수. 국내에서는 ‘포스트식민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역사학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그가 쓴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삼인)가 지난 9월 국내에 번역·출간되기도 했다.

국내 한 대학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1급은 아니지만, 1.5급은 되는 학자”라고 한다. 이 말에 담긴 떨떠름함에는 이유가 있다.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탈민족’을 주장하는 일군의 국내 학자들이 인용하는 ‘1세계 학자’ 리스트에 두아라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가 품은 저항성·실천성을 거세하려는 의도가 ‘탈민족 기획’에 담겨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은 두아라를 피해가지 않는다.


그가 만주학회 초청으로 지난 1일, 한국에 왔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초청으로 두차례에 걸쳐 강연회도 열었다. 세번의 공식 행사 모두 민족문제에 초점을 둔 자리였다. 학계에선 그의 방한이 은근한 화제였다.

미국 역사학계를 ‘하버드 학파’와 ‘시카고 학파’로 나누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시카고대는 미국 역사학의 양대 축이다. 하버드 학파들이 구조에 관심을 둔다면, 시카고 학파는 문화론을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버드는 정통 역사학을 대표하고, 시카고는 새로운 트렌드를 대표하는 셈이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시카고 대학 안에선 ‘소수’에 불과한 이유도 이런 학풍 때문이다. 두아라는 탈근대와 문화주의로 대표되는 미국 역사학계의 한 코드였고, 국내 역사학계는 조용히, 그러나 의미심장하게 그를 주목했던 것이다.


<한겨레>는 부산 동아대에서 열린 만주학회 세미나 발표문을 검토하고, 서울에서 열린 두 강연회를 모두 현장 취재했으며, 지난 6일 저녁엔 그를 따로 만나 인터뷰했다. 최근 보수 언론 등을 통해 크게 ‘각광’받고 있는 탈민족주의의 ‘원형’을 직접 살필 기회라고 봤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탈민족의 기획은 무슨 관계냐고? 두아라의 표현을 빌리자.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 자본주의를 반영(reflect)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재연’(representation)이 경제 구조만큼이나 중요한 체제라고 본다. 재연은 주체 형성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영감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수주의의 반영이 아니라 매우 급진적인 것이다.”


학문적 엄밀함이 지루함으로 번지는 일을 막기 위해 거칠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근대는 정치·경제 구조에 대한 관심 아래 역사를 본다. 탈근대(포스트모던)의 기획은 그 구조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중심으로 역사를 본다. 여기에는 중대한 인식의 차이도 있다. 근대는 ‘자아-타자’의 이분법적 구분을 통해 주체를 형성했지만, 탈근대의 기획은 이런 이분법을 거부한다. 민족주의는 근대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등장한 대표적인 이분법적 논리라는 게 포스트모던 역사학자들의 비판이다.

90년대 이후 일상과 문화에 주목하는 서양의 역사책들이 쏟아져 들어온 것도 이런 맥락이다. ‘설탕의 역사’ ‘유방의 역사’ 등등 삼라만상이 모두 역사서술의 주제요 매개가 된다. 이 과정에서 왕조나 영웅, 노동계급 등이 아닌 이름없는 개인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두아라가 포스트모더니즘적 역사관을 “급진적”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제부터 본론이다. 그런데 인터뷰를 통해 두아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불완전한 프로젝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담론에 대한 분석을 정치·경제 체제에 대한 분석과 결합시키는 데 실패했다.” 정치·경제 구조에 대한 분석을 덧대지 않는 한, 탈근대의 기획이 완성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는 “이 때문에 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불리기 싫다”고까지 했다.


뭔가 심상찮다. 정치·경제 구조에 대해 발언해야 된다고? 여튼 그 말많은 ‘민족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민족국가 일반에 대한 두아라의 비판은 아래의 인터뷰 전문을 참고하시라. 중요한 건,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세계체제에서 민족주의는 유용한 생존전략이지만, 내·외부의 적을 향한 독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만약 한국인들이 성찰적 민족주의(reflective nationalism)를 갖고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민족의 영광을 위해 위대하고 강력한 국가를 세우려는 게 아니라면, 성찰적 민족주의는 매우 많은 긍정적인 면을 갖는다.”


그가 말하는 ‘성찰’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한국의 대중적 민족주의는 통일과 사회적 평등성 강화를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나름의 의제를 갖고 있고, 이는 보수적 민족주의와는 대단히 다르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대중적 민족주의가 언젠가 국가 민족주의와 만나게 될 날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 이를 고려해서라도, 대중적 민족주의가 성찰적일 필요가 있다.”


그는 국가의 동원이념으로서의 ‘국가 민족주의’와 ‘대중적 민족주의’를 구분해 사용했다. 국내의 진보적 역사학자들이 ‘민중적 민족주의’라고 부르는 개념과 비교될 수 있을 터이다. 조금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좀더 노골적으로.


“당신은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에 ‘자아-타자 구분’이라는 독이 있다고 했다. 거기엔 아마도 우리가 저항적 민족주의, 또는 반제민족주의라고 부르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그렇다면 제3세계의 반제민족주의에서 그런 독을 제거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두아라는 예상보다 훨씬 신선한 대답을 돌려줬다.

“만약 우리가 연대(solidarity)를 제도화한 민족국가를 생각한다면 어떻겠는가. 우리는 이를 현실에 구현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여기서 민주화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또한 이런 민족적 연대(national solidarity)는 내부 뿐만이 아니라, 외부를 향해야 한다.”

두아라는 마치 한국의 ‘성찰적 민족주의’가 민주주의 이행의 과제와 긴밀히 연계돼 있으며, 그것이 표방하는 민족통일의 이상이 세계평화의 기획과 잇닿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민족주의에 독특하고도 중요한 ‘임무’를 기대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 두가지(대내외적 연대를 지향하는 민족국가)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현재의 세계체제 아래서는 대단히 복잡한 문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의 민족주의가 그렇게(내부와 외부를 향해 열린 연대로서의 민족국가의 기획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이 이를 현실에 옮길 수 있다면, 아마도 한국은 새로운 근대적 실천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미국과 일본, 중국 등 주변 열강의 패권적 접근에 저항하면서, 그들을 다시 연대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일의 고단함을 충고한 셈이다. 한국의 성찰적 민족주의가 구현할 ‘새로운 근대적 실천’이라 할 때, 그것은 탈민족주의의 전범처럼 등장하는 유럽연합과도 구분되는 대단히 독특한 모델이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의 탈민족주의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두아라는 왜 정작 한국의 탈민족주의자들과 ‘다른 뉘앙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그는 민족주의 전체를 싸잡아 폐기하는 게 아니라, 한국적 상황에서 발생한 ‘성찰적 민족주의’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했다. 국내의 탈민족주의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들먹이는 유럽연합의 사례와는 다른 방식의 ‘미래’를 한국의 민족주의에 기대했다.


의문은 비교적 쉽게 풀렸다. 그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에 뿌리를 둔 비판적 실천과 관련한 것이었다. 이 때의 현실이란 대단히 복잡한 ‘결’을 갖고 있는 것이다. 정치·경제 구조에 대한 그의 관심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상의 구름’위에 그럴듯한 이론의 집을 지어올리는 일을 피하려는 노력이 그에겐 학문의 핵심적 요소인 셈이다.

예컨대 그는 미국의 내셔널리즘에 대해 높은 목소리로 비판했다. “이라크인을 수없이 죽이고도 미국인들은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내셔널리즘은 미국인 개인의 차원에서조차 절대화됐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열린 토론회에서는 “미국의 내셔널리즘은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를 무시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의 헤게모니가 주도하는 지구화 시대의 ‘저항’에 대해서도 그는 무게를 실었다. “가난한 자들(the poor)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그들의 권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그들이 (가진 자들과) 협상(bargain)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어떻게 가난한 자들을 돕고, 협상할 힘을 줄 수 있는지가 나의 고민이다.”


두아라 교수는 지난 8일 출국했다. 그는 “통일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망을 존중한다. 냉소가 팽배한 세상에서 여러분은 자신의 열정을 스스로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앞으로는 늘 한국 역사에 귀기울이겠다”는 말을 남겼다.

한국에서 그가 남긴 여러 발언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식민주의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는 더 많은 토론과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 대한 두아라의 말은 ‘영토’에 기대 민족의 영광을 고민하는 일부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와 각성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한국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는지도 불분명하고, 한국에 소개된 그의 저서와 한국에 와서 내놓은 그의 발언 사이의 ‘거리’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역사학계의 명망있는 학자라는 ‘권위’를 빌린 탈민족의 기획이 정작 한국의 독특하고도 풍부한 현실과 제대로 만나지 못할 때, 어떤 위험으로 등장하는 것인지에 대한 교훈만은 분명해 보인다. 민족주의 일반에 대해 강력한 배척을 표방한 것으로 보였던 그의 이론은 불과 며칠에 그친 한국 체류 기간 동안 의미있는 ‘변주’를 거쳤다.


90년대 ‘수입’된 포스트모더니즘이 2004년 한 해, ‘탈민족’의 이름으로 한국사회를 휘몰아친 것은 ‘권위있는 세계학계의 최신 흐름이자 대세’가 아니라 분명 ‘한국적 맥락’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노무현 정부의 등장과 과거사 청산, 한·미 동맹의 균열과 중국의 부상 등이 맞물려 있다.

이 때문에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팽창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보수 언론이 한쪽에선 ‘시대착오적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탈민족주의자들을 추켜세운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대대적인 지면을 할애해주는 보수 언론의 팽창적 민족주의와 미국의 강력한 내셔널리즘에 대해, 초민족·탈민족주의자들은 침묵하거나 방조하는 듯 보인다. 관련 기사( ‘팽창적 민족주의 활개’ ), ‘저항적 민족주의 위기에 처했다’ )


탈민족의 기획이 관성에 젖어있던 기존 역사학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점은 분명하다. 큰 맥락에서 보면 한국의 민족주의는 덕분에 새로운 성숙의 기회를 맞은 측면도 있다.

그러나 탈민족이라는 거대하고도 심오한 학술적 화두가 너무도 간편하게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상황은 ‘언론과 지식의 조화로운 만남’이 아니라, 또다른 방식의 ‘언론과 지식의 괴리’를 예고한다. 언론이 설정한 의제를 향해 학문세계가 빨려들어가면, 그 결과는 진지하고 깊이있는 학문세계의 실종으로 나타난다. 1세계의 권위있는 유명 학자를 인용하는 국내 유력대학의 학자들을 국내 유력 신문이 불러모으는 ‘언론-지식-정치’의 메카니즘 앞에서 대중은 ‘비판적 역사인식’을 마비당한다. 지금 한국의 탈민족 기획은 ‘잘못 호명’되고 있다. 탈민족의 기획과 성찰적 민족주의의 실천적 만남이 절실한 지금, 학계는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 문화생활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두아라는 누구인가

시카고대학 중국사 교수
포스트식민주의자로 평가

프라센짓 두아라는 인도에서 태어나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시카고대학 역사학과에서 중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민족을 중심으로 국민국가를 수립한 중국 근현대사의 ‘해체’를 시도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근대 중국에 대한 민족주의적 해석을 비판하는 그의 방법론때문에 포스트모더니스트 또는 포스트식민주의자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9월에는 그의 저서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삼인)가 번역·출간돼 주목을 받았다.


<용어설명>

포스트모더니즘은 1960년대 이후 근대의 이성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일어난 이념적 흐름이자 문화운동을 말한다. 이성주의의 억압성을 드러내면서 주체와 이성의 해체를 시도했다. 데리다·푸코·라캉·료타르 등 프랑스 학자들이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

포스트식민주의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이래, 가야트리 스피박, 호미 바바 등 제3세계 출신의 서구 지식인들이 “누구나 타자화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문제의식 아래, 권력과 지배의 문제틀을 탐구하면서 이론 체계를 갖췄다.



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4/12/00900000020041209163402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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